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10권
  • 외편(外篇)○제6편 선행(善行)○실경신(實敬身)
  • 사마광(司馬光)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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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司馬光) 4


溫온公공이 曰왈 吾오家가ㅣ 本본寒한族죡이라 世셰以이淸쳥白相샹承승고 吾오性셩이 不블喜희華화靡미라 自爲위乳유兒時시로 長댱者쟈ㅣ 加가以이金금銀은華화美미之

번역소학 권10:34ㄱ

지服복이어든 輒뎝羞슈赧난야 棄기去거之지다니 年년二이十십에 忝텸科과名명야 聞문喜희宴연에 獨독不블戴花화다니 同동年년이 曰왈 君군賜ㅣ라 不블可가違위也야ㅣ라 乃내簪一일花화호니 衣의取蔽폐寒한고 食식取充츙腹복며 亦역不블敢감服복垢구弊폐야 以이矯교俗쇽干간名명이오 但단順슌吾오性셩而已이로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溫온公공 주001)
사마온공(司馬溫公):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사학자. 자 군실(君實). 호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 문정(文正). 산시성[山西省:夏縣 涑水鄕] 출생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함.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이라고도 한다.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해서 사직했다. ≪자치통감≫을 완성했고 철종이 즉위한 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구법으로 대체, 구법당의 수령으로 구실을 수행했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신종 원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것도 잠시.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사직하고,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살면서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을 하자, 신법을 싫어했던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 정치에 복귀하였다. 당시의 연호를 따다가 원우(元祐)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으로 바꾸었다. 구법 정당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는가 하였으나, 곧 죽었다. 그 뒤로 신법당(新法黨)이 세력을 얻자,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는 명신으로 추존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음.
이 니샤 우리 지비 본 가난

번역소학 권10:34ㄴ

가문이라 부조로 쳥호믈 니오고 주002)
쳥호믈 니오고:
청백함을 이어오고. ‘니오고’의 기본형은 ‘닛다’인데 유성음화를 거치면서 ‘-’ 으로 불규칙 변화를 하였다. 단모음화를 거쳐 ‘쳥〉청백’으로 단모음이 되었다.
내 셩이 호화코 빗난 이 즐기디 아니호모로 아 시졀브터 얼우니 금은이어나 빗난 오슬 모매 니펴든 믄득 븟려 내여 리다니 나히 스믈힌 제 급뎨야 나라셔 이바디 여 머기실 제 내 혼자 고 아니 고즈니 주003)
고아니 고즈니:
꽃을 아니 꽂으니. ‘고’의 단독형은 ‘곶’이고 경음화와 격음화를 거치면서 ‘곶〉꽃’으로 굳어졌다. 장산곶의 ‘곶[串]’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을 이름에서 비롯하였다.
同동年년 벋히 닐오 님그미 주신 거시라 마디 몯 리라  곳  나 고조라 평애 오 치옴 리올 만며 바블 브 만호  부러 더러오며 헌

번역소학 권10:35ㄱ

옷 니버 시쇽을 고텨 일홈 어두 아나 고 다믄 내 셩에 마즐 만노라 시더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우리 집안은 본래 가난한 집안이라 대대로 청백함을 이어왔다. 나는 본래 호화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 때부터 어른들이 금은박으로 꾸민 화려한 옷을 입혀주면 바로 부끄러워하며 벗어버리곤 했다. 나이 스무 살 때 과거에 합격해 잔치가 베풀어졌다. 나 혼자 머리에 꽃을 꽂지 않았다. 동년배가 말하기를 임금이 내리신 것이니 어길 수 없다. 비로소 꽃 한 송이를 꽂았다. 옷이란 추위만 막으면 된다. 먹는 것은 배를 채우면 되었다. 그렇다고 때 묻고 떨어진 옷을 입어 세상 풍속을 고쳐 이름을 얻으려 함은 아니다. 다만 내 본성을 따랐을 뿐이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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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사마온공(司馬溫公):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사학자. 자 군실(君實). 호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 문정(文正). 산시성[山西省:夏縣 涑水鄕] 출생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함.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이라고도 한다.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해서 사직했다. ≪자치통감≫을 완성했고 철종이 즉위한 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구법으로 대체, 구법당의 수령으로 구실을 수행했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신종 원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것도 잠시.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사직하고,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살면서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을 하자, 신법을 싫어했던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 정치에 복귀하였다. 당시의 연호를 따다가 원우(元祐)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으로 바꾸었다. 구법 정당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는가 하였으나, 곧 죽었다. 그 뒤로 신법당(新法黨)이 세력을 얻자,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는 명신으로 추존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음.
주002)
쳥호믈 니오고:청백함을 이어오고. ‘니오고’의 기본형은 ‘닛다’인데 유성음화를 거치면서 ‘-’ 으로 불규칙 변화를 하였다. 단모음화를 거쳐 ‘쳥〉청백’으로 단모음이 되었다.
주003)
고아니 고즈니:꽃을 아니 꽂으니. ‘고’의 단독형은 ‘곶’이고 경음화와 격음화를 거치면서 ‘곶〉꽃’으로 굳어졌다. 장산곶의 ‘곶[串]’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을 이름에서 비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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