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7권
  • 외편(外篇)○제5편 가언(嘉言)○광명륜(廣明倫)
  • 사마광(司馬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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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司馬光)


司馬마溫온公ㅣ 曰왈 凡범爲위家가長 必필謹근守슈禮례法법야 以이御어群군子弟뎨及급家가衆이니 分분之지以이職직며 授슈之지以이事而責其기成功공며 制졔財用之지節졀야 量入입以이爲위出츌며 稱家가之지有유無무야 以이給급

번역소학 권7:50ㄱ

上下하之지衣의食식과 及급吉길凶之지費비호 皆有유品품節졀而莫막不블均균一일 며 裁省冗費비며 禁금止지奢샤華화야 常須슈稍쵸存존瀛餘여야 以이備비不블虞우ㅣ니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司사馬마溫온公공 주001)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사학자. 자 군실(君實). 호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 문정(文正). 산시성[山西省:夏縣 涑水鄕] 출생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해 사퇴했다. ≪자치통감≫을 완성했고 철종이 즉위한 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구법으로 대체, 구법당의 수령으로 수완을 크게 드러냈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1067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 이어서 어사중승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개형지향이 강한 신법(新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이 되자, 신법을 싫어하는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에 복귀, 정권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연호를 따서 ‘원우(元祐)의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어졌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舊法)으로 대체하여, 보수파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는가 하였으나, 몇 달 안 되어 죽었다. 그 뒤 개혁파가 세력을 얻자, ‘원우의 당적’에 올라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는 명신으로 존숭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이 니샤 믈읫 집 얼우 반시 례법을 삼가 가져셔 모 뎨며 집 사 졔어홀디니 주002)
졔어홀디니:
다스릴 것이니. 기본형은 ‘제어다’이고 관형형 어미와 의존명사 ‘디’가 통합된 형임. 단모음화에 따라서 ‘졔어〉제어’로 소리가 변동되었다.
소을 호며 이 맛뎌 을 일우게 며 쳔  이 존졀야 드 거

번역소학 권7:50ㄴ

 혜아려 내여 며 지븨 이신 것 업슨 거세 맛게 야 우와 아랫 사 옷과 밥과 길와 애  거 죡게 호 다 전즈려 주003)
다 전즈려:
다 짐작하여. 기본형은 ‘전즈리다’인데 부사형 어미 ‘-어’가 통합된 형임.
고게 고 쇽졀업슨 허비 이 짐쟉야 덜며 샤치고 빈난 이 금지야 모로매 져기 나 거슬 두어 너기디 아니턴 일 나거든  예비홀디니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사마온공이 말하였다. 무릇 집 어른은 반드시 예법을 삼가 갖추어 모든 아들이며 집안 사람들을 다스려야 한다. 책임을 나누어 맡겨 공을 이루게 하며 재물을 쓸 일을 절약하여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 내어 쓰며 집에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맞추어 위아래 사람의 옷과 밥과 길흉사에 쓸 것을 족하게 하되 다 절제하여 고르게 하고 까닭 없이 낭비함을 줄이며 사치하는 일을 금지한다. 반드시 조금이라도 남은 것을 두어 생각지 않던 일이 생길 때를 미리 준비할 것이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右우 廣明倫륜이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이 우 일륜 규믈 너비 주004)
너비:
널리. 기본형은 ‘넙다’이고 부사화 어미 ‘-이’가 통합된 형임.
니니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이상은 사람의 인륜을 밝힘을 널리 말한 것이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飜번譯역小쇼學 卷권之지七칠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번역소학 7권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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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 1019~1086).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사학자. 자 군실(君實). 호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 문정(文正). 산시성[山西省:夏縣 涑水鄕] 출생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해 사퇴했다. ≪자치통감≫을 완성했고 철종이 즉위한 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구법으로 대체, 구법당의 수령으로 수완을 크게 드러냈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1067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 이어서 어사중승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개형지향이 강한 신법(新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洛陽]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이 되자, 신법을 싫어하는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에 복귀, 정권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연호를 따서 ‘원우(元祐)의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어졌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舊法)으로 대체하여, 보수파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는가 하였으나, 몇 달 안 되어 죽었다. 그 뒤 개혁파가 세력을 얻자, ‘원우의 당적’에 올라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는 명신으로 존숭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주002)
졔어홀디니:다스릴 것이니. 기본형은 ‘제어다’이고 관형형 어미와 의존명사 ‘디’가 통합된 형임. 단모음화에 따라서 ‘졔어〉제어’로 소리가 변동되었다.
주003)
다 전즈려:다 짐작하여. 기본형은 ‘전즈리다’인데 부사형 어미 ‘-어’가 통합된 형임.
주004)
너비:널리. 기본형은 ‘넙다’이고 부사화 어미 ‘-이’가 통합된 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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