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8권
  • 외편(外篇)○제5편 가언(嘉言)○광경신(廣敬身)
  • 주돈이(周敦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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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돈이(周敦頤) 1


濂렴溪계周쥬先션生이 曰왈 聖셩希희天텬이오 賢현希희聖셩이오 士希희賢현이니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濂렴溪계 周쥬先션生 주001)
염계 주선생(濂溪周先生):
주염계 선생. 염계는 주돈이(周敦頤)의 호임. 주돈이(1017~1073)는 중국 송나라의 사상가로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무숙(茂叔), 시호(諡號)는 원공(元公)이다. 도주 영도(道州營道) 출신이다. 주돈이 본명은 돈실(敦實)이라고 하였으나 그 때의 황제 영종과 동명이었으므로 고쳐서 돈이라고 하였다. 부친인 보성(輔成)은 하주(賀州) 계령현(桂嶺縣)의 지사를 하고 있었다. 모친은 정씨(鄭氏)이다. 염계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모친의 일가인 용도각(龍圖閣) 대학사 정향(鄭向)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1036년에 그는 젊은 나이로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가 되었으며, 이어서 남안(南安)에 사법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주로 각 현의 지사를 역임하여 지남강군(知南康軍)을 최후로 57세에 타계했다. 그가 남안에 있을 때에 정향이라는 사람이 같은 관리로서 부임했다. 정향은 염계의 인품과 학문에 경의를 품고 친하게 교제함과 동시에 자기의 두 아들을 염계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그것이 정명도, 정이천의 두 형제였다. 송대의 형이상적 사유는 주자에 의하여 열렸다고 한다. 저 유명한 염계의〈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후의 2정자(二程子), 장횡거(張橫渠)로 계속하는 송대 도학(道學)의 단서였다. ≪주자전서(周子全書)≫ 7권은 순전히 염계의 저술을 모은 것이다.
이 니샤 성은 하 주002)
하:
하늘을. 하(ㅎ종성 체언)+-(목적격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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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염계 주선생이 말하였다. 거룩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고 현명한 사람은 성인을 바라고 선비는 현인을 바란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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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염계 주선생(濂溪周先生):주염계 선생. 염계는 주돈이(周敦頤)의 호임. 주돈이(1017~1073)는 중국 송나라의 사상가로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무숙(茂叔), 시호(諡號)는 원공(元公)이다. 도주 영도(道州營道) 출신이다. 주돈이 본명은 돈실(敦實)이라고 하였으나 그 때의 황제 영종과 동명이었으므로 고쳐서 돈이라고 하였다. 부친인 보성(輔成)은 하주(賀州) 계령현(桂嶺縣)의 지사를 하고 있었다. 모친은 정씨(鄭氏)이다. 염계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모친의 일가인 용도각(龍圖閣) 대학사 정향(鄭向)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1036년에 그는 젊은 나이로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가 되었으며, 이어서 남안(南安)에 사법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주로 각 현의 지사를 역임하여 지남강군(知南康軍)을 최후로 57세에 타계했다. 그가 남안에 있을 때에 정향이라는 사람이 같은 관리로서 부임했다. 정향은 염계의 인품과 학문에 경의를 품고 친하게 교제함과 동시에 자기의 두 아들을 염계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그것이 정명도, 정이천의 두 형제였다. 송대의 형이상적 사유는 주자에 의하여 열렸다고 한다. 저 유명한 염계의〈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후의 2정자(二程子), 장횡거(張橫渠)로 계속하는 송대 도학(道學)의 단서였다. ≪주자전서(周子全書)≫ 7권은 순전히 염계의 저술을 모은 것이다.
주002)
하:하늘을. 하(ㅎ종성 체언)+-(목적격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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