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8권
  • 외편(外篇)○제5편 가언(嘉言)○광경신(廣敬身)
  • 정호(程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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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程顥) 1


明명道도先션生이 曰왈 君군子ㅣ 敎교人有유序셔니 先션傳뎐以이小쇼者쟈近근者쟈而後후에 敎교以이大대者쟈遠원者쟈ㅣ라 非비是시先션傳뎐以이近근小쇼而後후에 不블敎교以이遠원大대也야ㅣ니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明명道도先션生 주001)
명도 선생(明道先生):
정명도 선생. 정호(程顥, 1032~1085)는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 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程頤)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周敦頤)를 한번 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鄠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에 입각하여 혼일적(渾一的)으로 천지의 생의(生意)를 체험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제자(諸子)·노장(老莊)·불교도 공부하였으나, 결국 유학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저서에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시에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
이 니샤 君군子ㅣ 사 츄미 례 잇니 주002)
츄미 례 잇니:
가르침이 차례가 있나니. ‘츄미’의 기본형은 ‘치다’이고 의도법 선어말 어미와 명사형 어미가 통합된 형임.
몬져 쟈그며 갓가온 이를 치고 후에 크며 먼 이를 칠 거

번역소학 권8:40ㄴ

시니 몬져 갓가으며 져그니 치고 후에 멀며 크니 치디 아니 거시 아니니라 주003)
아니 거시 아니니라:
아니할 것이 없다. 한문 표현에는 이중 부정이 비교적 많다.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군자가 사람을 가르침에 차례가 있다. 먼저 작고 가까운 이를 가르치고 뒤에 크며 먼 이를 가르칠 것이다. 먼저 가까우며 적은 이를 가르쳐라. 후에 멀고 큰 이를 가르칠 것이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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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명도 선생(明道先生):정명도 선생. 정호(程顥, 1032~1085)는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 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程頤)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周敦頤)를 한번 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鄠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에 입각하여 혼일적(渾一的)으로 천지의 생의(生意)를 체험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제자(諸子)·노장(老莊)·불교도 공부하였으나, 결국 유학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저서에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시에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
주002)
츄미 례 잇니:가르침이 차례가 있나니. ‘츄미’의 기본형은 ‘치다’이고 의도법 선어말 어미와 명사형 어미가 통합된 형임.
주003)
아니 거시 아니니라:아니할 것이 없다. 한문 표현에는 이중 부정이 비교적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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