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이륜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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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이륜행실도
역주 이륜행실도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는 조선 중종 때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조신(曺伸)에게 편찬시켜 중종 13년(1518)에 간행한 수신서이다. 내용은 삼강(三綱)과 더불어 유교의 기본적인 인륜(人倫)인 이륜(二倫)을 보통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삼강행실도≫에 의하여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유별로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각 개인의 행실을 먼저 그림을 그리고 한문으로 설명한 다음에 시찬(詩讚)을 붙였으며, 또 난(欄) 위에 언해를 하였는데, 형제도(兄弟圖)에 25인, 종족도(宗族圖)에 7인, 붕우도(朋友圖)에 11인, 사생도(師生圖)에 5인, 모두 48인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원간본은 옥산서원(玉山書院)과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원간본이나 중간본들은 우리말 연구사 자료로 이용되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그림(삽화)은 판화나 풍속화의 사적인 연구에도 가여되는 자료이다. 그리고 이 책의 원간본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 9월 25일 영인 발간한 바 있는데, 이번에 우리 회에서 역주하여 간행하는 ≪역주 이륜행실도≫는 단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축소 영인한 책을 대본으로 하고, 이본들을 참고하여 역주한 것이다.

김문웅(金文雄)

∙1940년 경상남도 울주군 출생
∙경북대학교 학사, 석사
∙계명대학교 박사
∙한글학회 대구지회장 역임
∙국어사학회장 역임
∙한국어문학회장 역임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저서 및 논문〉

≪편입 대학국어≫(1977)
≪15세기 언해서의 구결 연구≫(1986)
≪역주 구급방언해 하≫(2004)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3≫(2008)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6≫(2008)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7≫(2009)
≪역주 신선태을자금단 간이벽온방 벽온신방≫(2009)
“접두사화고”(1977)
“불완전명사의 어미화”(1979)
“「ᅙ」의 범주와 그 기능”(1981)
“‘-다가’류의 문법적 범주(1982)
“근대 국어의 표기와 음운”(1984)
“근대 국어의 형태와 통사”(1987)
“옛 부정법의 형태에 대하여”(1991)
“한글 구결의 변천에 관한 연구”(1993)
“활자본 ≪능업경 언해≫의 국어학적 고찰”(1999)
“설총의 국어사적 고찰”(2001)
“구결 ‘’의 교체 현상에 대하여”(2003)
“방송 보도 문장의 오류 분석”(2004)

전자 우편 mukim@dnue.ac.kr

역주위원

  • 이륜행실도 : 김문웅

  • 교열·윤문·색인위원

  • 이륜행실도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영배 나일성
  • 노원복 박병천 오명준
  • 이창림 이해철 전상운
  • 정태섭 차재경 최기호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이륜행실도를 내면서

우리 회는 1990년 6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로,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으니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 수는 ≪석보상절≫ 2책, ≪월인석보≫ 11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등 모두 63책이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동안 못한 ≪월인석보≫ 원간본들을 집중적으로 역주코자 권4, 권13, 권14, 권15, 권21(상), 권21(하)를 간행할 예정이며, 아울러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속언해‧경민편≫을 함께 펴 낼 계획이다. 또한 ≪영험약초≫와 ≪상원사어첩≫을 묶어 1책으로 펴내면, 연초에 이미 펴낸 ≪월인석보≫ 권25(하)와 ≪언해태산집요≫를 포함하여 올해 나올 책은 모두 12책이다.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는 조선 중종 때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조신(曺伸)에게 편찬시켜 중종 13년(1518)에 간행한 수신서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김안국이 승지(承旨)로 있을 때 중종에게 개간(開刊)을 청하여 편찬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종의 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3월 경상도 관찰사로 가게 되자 전 사역원 정(司譯院正) 조신에게 편찬을 부탁하여 이 편찬이 완성됨에 중종 13년 금산군(金山郡)에서 간행한 책이다.

이 책 편찬 동기는 풍속을 권려(勸勵)함에 있었으니, 내용은 삼강(三綱)과 더불어 유교의 기본적인 인륜(人倫)인 이륜(二倫)을 보통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삼강행실도≫에 의하여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유별로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각 개인의 행실을 먼저 그림을 그리고 한문으로 설명한 다음에 시찬(詩讚)을 붙였으며, 또 난(欄) 위에 언해를 하였는데, 형제도(兄弟圖)에 25인, 종족도(宗族圖)에 7인, 붕우도(朋友圖)에 11인, 사생도(師生圖)에 5인, 모두 48인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원간본은 옥산서원(玉山書院)과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에 옥산서원 소장본은 중종 34년(1539) 성리학자 이언적(李彦迪)에게 내사(內賜)된 책인데, 금산군(金山郡)에서 인출(印出)하여 반사한 것이다. 이밖에 복각본과 개간본이 전한다. 이 원간본이나 중간본들은 우리말 연구사 자료로 이용되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그림(삽화)은 판화나 풍속화의 사적인 연구에도 가여되는 자료이다. 그리고 이 책의 원간본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 9월 25일 영인 발간한 바 있는데, 이번에 우리 회에서 역주하여 간행하는 ≪역주 이륜행실도≫는 단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축소 영인한 책을 대본으로 하고, 이본들을 참고하여 역주한 것이다.

이 귀중한 수신서를 우리 회에서 역주 간행함에 있어, 서문을 번역하여 주신 우리 회 조명근 전문위원님과 역주해 주신 대구교육대학교 김문웅 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과학기술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0년 10월 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 16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미어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이륜행실도≫ 역주의 저본은 옥산서원본(초간본)을 참고하였으며 이를 영인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자 원문·언해 원문(띄어쓰기함)·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찾아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아긔 입안해 2ㄱ조티 아닌 거시 잇다가

제2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딘이 되니 2ㄴ신장은 비록 증이 업스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5) 원문 내용(한자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은 편의상 글씨 크기만 줄여 이었고, 한자 원문의 띄어쓰기는 원문대로 하였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ᄝ ㅂ ㅲ ㅳ ㅃ ㅄ ᄢ ᄣ ᄩ ㅸ ㅅ ㅺ ᄮ ㅼ ㅽ ㅆ ㅾ ㅿ ㅇ ᅇ ㆁ ᅙ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ᇇ ᆬ ᆭ ㄷ ㄹ ᆰ ᇎ ᆱ ᆲ ᆳ ᆶ ㅁ ᇚ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이륜행실도≫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Ⅰ. 편찬 및 간행

1. 간행 배경 -≪삼강행실도≫의 간행과 관련하여-

조선 왕조는 유교를 국시로 삼고 숭유억불의 정책을 펴면서 유교 도덕의 정착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적인 배려를 도모하였다. 그 중의 하나로서 윤리도덕의 기본 강령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실천하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에 관한 교화서(敎化書)를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삼강행실도≫(1481)를 비롯하여 ≪속 삼강행실도≫(1514), ≪이륜행실도≫(1518), ≪동국신속 삼강행실도≫(1617), ≪오륜행실도≫(1797) 등의 행실도류(行實圖類)가 연이어 간행되었다. 다시 책에 따라서는 시대를 달리 하여 여러 번 간행이 이루어짐으로써 한 책에 대해 여러 종류의 이본(異本)이 전하기도 한다. 이 5가지 행실도는 그 체제에 있어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이 특징이다. 먼저 각 제목마다 그 내용을 압축해서 보이는 삽화(揷畵)가 앞에 제시되고, 그 다음에 한문으로 된 본문이 나오며 그에 대한 언해문도 함께 싣고 있다는 방식이 곧 공통점이다.

행실도 중에서 최초로 간행된 ≪삼강행실도≫의 초간본은 한문본으로서 세종 16년(1434)에 간행된 3권 3책의 목판본이다. 물론 이 책의 간행 목적은 유교의 윤리 강령을 실천하고 확립하는 데에 있을 테지만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세종 때 있었던 패륜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세종 10년(1428) 9월, 진주에 살고 있는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기의 친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형조(刑曹)에서 그를 엄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되었다. 이 상소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세종은 이 사건에 대하여 그 해 10월의 경연(經筵)에서 신하들과 논의하였다. 여기서 당시 판부사(判府事)였던 변계량(卞季良)은 풍속을 교화하기 위한 ≪효행록≫과 같은 책을 널리 펴서 백성들이 많이 읽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이 취지를 세종이 받아들여 ≪효행록≫의 간행을 명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중국은 물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모든 인물 중에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그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새로운 책을 편찬할 것을 명하였는데 주001)

세종실록, 10년 10월 3일(辛巳) : 御經筵 上嘗聞晋州人金禾弑父之事 矍然失色 乃至自責 遂召群臣 議所以敦孝悌 厚風俗之方 判府事卞季良曰 請廣布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尋常讀誦 使之駸駸然入於孝悌禮義之場 至是 上謂直提學偰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 孝行特異者 亦皆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 循對曰 孝乃百行之原 今撰此書 使人人皆知之 甚善
이것이 ≪삼강행실도≫의 간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삼강행실도≫는 세종 16년(1434)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三綱)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세종 때 편찬한 이 책에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쓴 권채(權採)의 서문이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에 집현전 부제학 신 설순에게 명하여 이 책의 편집을 맡게 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을 비롯해서 우리 동방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실린 것을 전부 수집하여 열람한 결과 효자, 충신, 열녀 중에서 행실이 뛰어나 이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이 각각 110명이 되었다. 앞면에는 내용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이고 뒷면에는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찬양하는 시를 붙였다. 이 시는 효자의 경우 태종 문황제께서 하사하신 효순의 사실을 시를 겸해 기록하고, 또 신의 고조가 되시는 신 보가 지은 효행록 중에 명유 이제현의 찬도 실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보신들에게 분담시켜 글을 지으라 하고, 충신, 열녀에 대한 시도 역시 문신에게 분담시켜 지으라 하였다. 편집을 마치자 ≪삼강행실도≫란 이름을 하사하고 주자소에 명하여 판각을 새겨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다.

(乃命集賢殿副提學臣偰循 掌編摩之事 於是自中國 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得 孝子忠臣烈女之卓然可述者各百有十人 圖形於前 紀實於後 而幷系以詩孝子則謹錄 太宗文皇帝所賜孝順事實之詩 兼取臣高祖臣溥所撰孝行錄中 名儒李齊賢之贊 其餘則令輔臣分撰 忠臣烈女之詩 亦令文臣分製 編訖 賜名三綱行實圖 令鑄字所 鋟榟永傳)

이상에서 ≪삼강행실도≫의 편찬은 집현전에서 맡아 완성해 낸 것을 알 수 있다. 설순이 세종의 명을 받고 국내외의 여러 서적을 통해 행적이 뛰어난 효자, 충신, 열녀 각기 110명씩을 뽑은 다음, 이들에 대한 그림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행적 기사에다 시와 찬(贊)을 붙여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의 3권 3책으로 1434년(세종 16)에 편찬 간행하였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간행된 한문본 ≪삼강행실도≫이다.

이와 같이 ≪삼강행실도≫는 고금의 효자, 충신, 열녀를 집대성한다는 의도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책의 규모가 방대해짐으로써 인출과 배포에는 많은 제한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국민교화서로 활용하려던 애초의 취지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문본의 분량도 줄이고 언해문도 붙인 ≪삼강행실도≫의 간행이 요구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1481년(성종 12)에 나온 언해본 ≪삼강행실도≫이다. 이 책은 한문본 3책의 인물 각 110명을 각각 35명으로 대폭 줄이고 한문 본문에 대한 언해문도 난상(欄上) 여백에 실어 3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언해본은 다른 유교 경전의 언해와는 달리 원문에 일치하지 않은 언해를 제법 볼 수 있는데, 이는 내용에 나타난 행적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백성들이 많이 읽음으로써 충(忠)·효(孝)·열(烈)의 삼강(三綱)이 조선시대 사회 전반의 정신적 기반이 되게 하고자 하였다. 이후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시대를 달리 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그 중에서도 1514년(중종 9)에는 ≪삼강행실도≫에서 누락된 충신, 효자, 열녀를 보충하여 ≪속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2. ≪이륜행실도≫의 간행 경위

≪이륜행실도≫는 1518년(중종 13)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편찬한 책이다. 물론 이 책도 ≪삼강행실도≫와 마찬가지로 윤리 도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목적에서 간행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안국이 ≪이륜행실도≫를 간행할 당시에는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여러 면으로 백성들을 위한 교화 활동을 펴고 있었다. 양민을 위하여 ≪농서(農書)≫, ≪잠서(蠶書)≫, ≪벽온방(辟瘟方)≫, ≪창진방(瘡疹方)≫ 등과 같은 농업서와 의서를 언해하여 보급할 뿐만 아니라, ≪동몽수지(童蒙須知)≫, ≪여씨향약(呂氏鄕約)≫, ≪정속(正俗)≫ 등을 언해 보급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소학(小學)≫의 습득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볼 때 국민 교화서로서의 ≪이륜행실도≫의 편찬은 그에게 있어 필수적인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에는 시대적 배경도 한몫하였다. ≪이륜행실도≫가 간행된 해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이어서 나라 사정은 조광조 중심의 신진 사류들이 개혁을 주도하던 때였다. 그들은 문란해진 정치와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고, 향당(鄕黨)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향약의 시행을 추진하며 백성들의 생활에서 도덕 규범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안국도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려 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백성의 교화를 위한 ≪이륜행실도≫의 간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륜행실도≫의 간행 의지는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정덕 무인년(正德戊寅年, 1518, 중종 13)에 쓴 강혼(姜渾)의 서(序)에 나타난다.

본조의 〈삼강행실〉이란 책은 중앙과 지방에 이미 널리 반포되어 사람마다 알고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우러러보고 감격하고 권장하며 힘써 착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제 경상도관찰사 김공 안국이 일찍이 정원에 있을 때 경연에 입시하여 임금께 청하기를 “〈이륜행실〉을 지어 〈삼강행실〉에 첨부함으로 백성들의 보고 느끼는 자료를 구비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도 그 말이 옳다 하고 예조에 명하여 찬집국을 설치케 하고 〈이륜행실〉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미처 이행되기 전에 공이 남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에 부탁을 받은 전 사역원정 조신이 찬집에 대한 책임을 맡아서 역대의 여러 현인들의 장유, 붕우의 교제하고 행한 사실에서 모범될 만한 것을 약간 뽑아 형제도에는 종족도를 붙이고 붕우도에는 사생도를 붙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형용하며 시로 찬양하고 국문으로 번역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삼강행실〉을 모방한 것이다.

(本朝三綱行實之書 旣廣布中外 人人皆知忠臣孝子烈婦之行 爲可仰也 莫不感激奮礪 以興起其善心 獨於長幼朋友二倫 未之見焉 今慶尙道觀察使 金公諱安國 嘗在政院 入侍 經幄 請撰二倫行實 添續三綱 以備觀感 上可之 下禮曹 令設局 撰進 命未及行而 公 出按于南首 囑前司譯院正 曺伸 撰集歷代諸賢 處長幼交朋友 其行蹟 可爲師法者得若干人 於兄弟圖 附宗族於朋友圖 附師生 紀事圖贊諺譯 悉倣三綱行實)

이 서문에 의하면, ≪이륜행실도≫의 간행을 처음으로 건의한 사람은 당시 승정원의 승지로 있던 김안국으로, 경연의 자리에서 중종에게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마침내 왕명으로 편찬을 시행하게 되었으며 해당 부서인 예조(禮曹)에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편찬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김안국이 건의한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그의 행장(行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 의하면 중종 11년(1516)에 상계(上啓)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건의한 내용은 ≪삼강행실도≫의 인간(印刊)이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큰 성과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나서, 그렇지만 ≪삼강행실도≫는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두 가지 윤리가 빠지는 바람에 교화서로서 충분한 것이 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장유유서의 규범은 종족(宗族) 사회에, 붕우유신의 규범은 향당(鄕黨) 사회와 관료들 사이의 관계에 각각 적용되기 때문에 두 규범은 삼강과 함께 오륜이 되므로 제외할 수 없는 인륜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안국은 장유와 붕우의 윤리 내용을 ≪삼강행실도≫에 보충하여 ≪오륜행실도≫를 편찬 반포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널리 활용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주002)

≪慕齋集≫ 권15. 〈先生行狀〉
今上十一年 丙子 公啓曰 祖宗朝 撰三綱行實 形諸圖畵 播之歌詠 頒諸中外 使民勸習 甚盛意也 然長幼朋友 與三綱兼爲五倫 以長幼推之敦睦宗族 以朋友推之鄕黨僚吏 亦人道所重不可闕也 以臣迂濶之見 當以此二者 補爲五倫行實 擇古人善行 爲圖畵詩章 頒諸中外 敦勵而獎勵之 上深然之

이로써 보면, 김안국은 ≪이륜행실도≫를 별도로 간행하기보다는 ≪삼강행실도≫에다 누락된 이륜의 내용을 첨가하여 ≪오륜행실도≫를 펴내는 것이 당초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안국의 이러한 생각은 중종의 윤허를 얻게 되고 마침내 중종은 예조에 명하여 ‘設局撰進’(설국찬진)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시행되기 전에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어 그 이후 ≪오륜행실도≫나 ≪이륜행실도≫의 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이 없다. 이렇게 해서 국가적인 차원의 〈행실도〉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고, 그 대신 김안국 개인적 차원의 ≪이륜행실도≫ 간행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이 책의 편찬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앞에서 인용한 강혼의 서문에 의하면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갔기 때문에 전 사역원정 조신(曹伸)이 편찬의 책임을 맡아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서문의 뒷부분에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가 공경하며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지로 날마다 어진 사대부와 더불어 경서와 사기를 강론하고 정치하는 도를 토의하여 교화시키는 것을 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삼았다. 공도 능히 임금의 뜻을 본받아서 정치를 시작하는 시초에 부지런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편집 간행하여 고을과 마을에 떳떳한 윤리를 심어줌으로써 백성을 변화시키는 근본을 삼았다.

(恭惟我主上殿下 聖智天縱 日與賢士大夫 討論經史講劘治道 莫不以敎化爲致治之先務 公 能上體聖意 賦政之初 汲汲焉編輯是書 刊行州里 以扶植彝倫 爲化民之本)

위의 기사에는 김안국이 ≪이륜행실도≫를 편집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앞에서의 언급처럼 조신 혼자서 편찬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안국이 승지로 있을 때 어떤 형식이든 이륜의 내용이 포함된 행실도가 필요함을 임금에게 건의한 바 있다. 이로 보아 김안국으로서는 이미 ≪이륜행실도≫의 편찬에 관한 구상과 계획이 거의 다 되어 있는 상태에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임해서는 당시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지금의 경북 김천)에 은거하고 있던 조신에게 편찬의 책임을 맡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편찬의 주역은 책에 대한 구상이 서 있었던 김안국이고, 실무적인 차원을 조신이 맡았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간행은 1518년(중종 13) 조신이 거처하고 있는 금산에서 이루어졌다.

3. ≪이륜행실도≫의 체재와 내용

≪이륜행실도≫는 목판본 1책으로서 권차(卷次)가 없다. 책 첫머리에는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강혼(姜渾)의 〈二倫行實圖序〉(이륜행실도서)가 한문으로 3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장부터는 〈二倫行實圖目錄〉(이륜행실도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목록은 兄弟(형제), 宗族(종족), 朋友(붕우), 師生(사생) 별로 행적 기사(行蹟記事)의 제목들이 각각 제시되어 있다. 그 제목들은 주인공의 행적 내용을 핵심적으로 나타내는 4자의 한자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제목이 형제편에 〈伋壽同死〉(급수동사)외 24편, 종족편에 〈君良斥妻〉(군량척처)외 6편, 붕우편에 〈范張死友〉(범장사우)외 10편, 사생편에 〈云敞自劾〉(운창자핵)외 4편 등 모두 48편의 제목들이 차례대로 나열되고 있다. 이 목록 제시는 3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목록이 끝나면 다음 장부터 본문이 시작되는데, 본문은 목록의 순서에 따라 〈二倫行實兄第圖〉(이륜행실형제도. 1ㄱ~25ㄴ), 〈二倫行實宗族圖〉(이륜행실종족도. 26ㄱ~32ㄴ), 〈二倫行實朋友圖〉(이륜행실붕우도. 33ㄱ~43ㄴ), 〈二倫行實師生圖〉(이륜행실사생도. 44ㄱ~48ㄴ)의 차례로 실려 있다. 본문에 수록된 48편의 행적 기사는 일관되게 각 1장(張)으로 되어 있는데 각장의 앞면에는 주인공의 행적 내용을 압축한 그림이 있고, 그림 위의 난상(欄上) 여백에 언해문이 실려 있다. 제목에 따라 어떤 것은 언해문이 뒷면의 난상에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된 행적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거기에다 그 행적을 찬양하는 7언율시를 덧붙여 놓고 있다. 4자로 된 기사의 제목마다에는 주인공의 나라 이름이 병기(倂記)되어 있다. 이러한 체재는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그대로 본 뜬 것이다. 단, 목록 제시에서 ≪이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강행실도≫는 전체 목록을 서문 다음에 일괄해서 제시하지 않고 효자, 충신, 열녀별로 목록을 분리하여 각각 효자도, 충신도, 열녀도의 본문이 시작되는 맨 첫장마다 수록하고 있는데 비해, ≪이륜행실도≫는 형제, 종족, 붕우, 사생별로 되어 있는 제목들을 따로따로 분리하지 않고 서문 다음에 있는 〈이륜행실도 목록〉에서 일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륜행실도≫의 내용은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가르치기 위해서 중국의 역대 명현(名賢) 중에서 장유와 붕우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 48명을 골라 그 행적을 실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장유와 붕우의 개념을 확대하여 장유유서에는 〈형제도〉에 〈종족도〉를 더하였고, 붕우유신에는 〈붕우도〉에 〈사생도〉를 더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장유(長幼)의 개념을 형제라는 혈연적인 가족 관계에서 동기(同氣) 관계가 아닌 동원분파(同原分派)의 겨레붙이까지 확대한 것이고, 붕우(朋友)의 개념은 상하, 귀천, 존비의 차별을 배제하고 도(道)나 덕(德)을 매개로 맺어진 비혈연적인 대등한 인간관계이지만, 도와 덕 이외에 학문과 교육으로 맺어진 사제(師弟) 관계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오륜에서 형제유서라 하지 않고 장유유서라 한 것도 가족만 아니라 종족이나 향당(鄕黨)의 구성원까지를 고려한 결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붕우유신이라는 규범은 장유유서와 달리 가족주의 윤리와는 거리가 있고 신분 계급적인 이데올로기의 성격에서도 멀어져 있으므로 혈연이나 신분 계급을 벗어난 인간관계를 폭넓게 다루고자 했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륜행실도≫에 등장하는 주인공 48명을 나라별로 보면, 한(漢)나라가 12명으로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당(唐), 송(宋)나라로서 각각 10명, 원(元)나라가 5명, 진(晉)나라가 4명, 그 밖에 1명만 되는 나라는 주(周), 촉(蜀), 수(隋)나라 등 모두 일곱 나라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없다. 이는 ≪삼강행실도≫에 우리나라 사람도 등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제 ≪이륜행실도≫의 〈형제도〉, 〈종족도〉, 〈붕우도〉, 〈사생도〉 별로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형제도〉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란 동기(同氣)간에는 어떤 도덕 규범이 요구되는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25편의 사례들은 한 마디로 형제간에 상부상조하는 우애를 보여 준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형제는 친형제간이지만 그 중에는 이복 형제간도 5편이나 되고 4촌 형제도 1편이 있다. 우애의 유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형제간의 희생적인 사랑이다. 납치나 죽을 죄, 모략 등으로 인하여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아우를 구하기 위해 형이 대신 죽으려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도적에게 붙잡혀 죽게 된 아우를 구하기 위해 형이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 동생과 바꿔 주기를 애원하는 사례도 있다. 주003)

〈형제도〉 ⑫ 王密易弟
이처럼 형제 사이에 최대의 우애는 서로 간에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으로 형제간에 서로 베푸는 사랑을 나타내는 사례가 많다. 재산 분배에서 형이 아우에게 양보하는 예를 비롯해서 형제들의 빚을 갚아 준다든가, 어려운 형제를 끌어들여 한데 살게 한다든지 하는 경우들을 보여 준다. 이 밖에도 아우가 형을 부모처럼 섬기는 예, 병든 형을 끝까지 지키는 예, 이복형제간에서도 돈독한 우애를 보여 주는 예 등,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형제간에 실천되어야 할 도덕 규범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종족도〉는 한 조상으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태어난 자손들이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종족은 동일한 조상을 근거로 한 확대된 형제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숙부는 내 부친과 함께 같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숙부·숙모는 결국 내 부모와 같은 존재이고, 조카·질녀도 모두 나의 형제한테서 난 자녀들이므로 나의 친자녀와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비록 7·8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대(代)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한 사람의 자손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종족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장유유서의 유교적 규범에 형제와 종족을 나란히 놓게 된 것이다. 〈종족도〉에는 모두 7편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7편의 공통된 특징이 여러 대가 한 집에서 10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집안에 따라 4대, 9대, 10대, 13대가 한데 살아온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대가족을 이루어 살면서도 분란이 나지 않고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의 구성원 모두가 똑같이 규율과 예절을 엄격히 지키고, 어느 누구도 가산이나 가재를 사유화하지 않았던 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당나라 장공예(張公藝)의 집은 9대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나라에서는 표창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임금이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임금이 장공예를 불러 집안사람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장공예는 붓과 종이를 달라 해서 종이에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써서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주004)

〈종족도〉 ② 公藝書忍
그리고 송나라 진긍(陳兢)의 집은 13대에 70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한데 살면서도 화목하게 지내며 식사 때는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했다. 그래서 이 집의 개도 100여 마리나 되지만 밥 먹을 때 한 마리라도 오지 않으면 모든 개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주005)
〈종족도〉 ③ 陳氏群食
이로써 볼 때 종족 집단도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것을 권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족 내에 장유유서의 규범이 엄격히 준수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붕우도〉는 형제나 종족과 같은 혈연관계가 아닌 벗과의 관계에서 지녀야 할 윤리도덕을 11편의 구체적인 사례로써 보이고 있다. 사례들을 보면 붕우관계에서도 형제간에서 요구되는 이상의 신의와 상부상조의 덕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례의 내용은 친구와의 약속은 꼭 지키며 친구를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난하고 어려운 친구나 그의 가족은 끝까지 돕고 돌봐 주어야 함이 친구의 도리라는 것, 친구가 죽으면 장례를 잘 치러 주는 것 등이 마땅히 할 일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붕우관계에서는 자기가 연장자라는 것, 자기의 신분이 높다는 것, 자기 집안이 힘 있는 집이라는 것 등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행위 규범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끝으로 〈사생도〉는 제자가 스승을 섬기는 태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제관계도 붕우관계와 마찬가지로 비혈연적인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붕우유신의 실천 강령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설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5편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교훈하는 바도 〈붕우도〉에서와 거의 같다. 즉 제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승을 배신하지 말 것과, 스승이 죽으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 사제관계는 학문과 교육 활동을 통하여 맺어지는 인간관계이므로 연령이나 신분에 상관됨이 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일 때 성립한다. 그런 관계가 아닐 때는 사제관계가 될 수 없다. 〈사생도〉에 이런 사례가 있다. 송나라 사람 채원정(蔡元定)은 아버지에게서 많은 학문을 배우고 또 스스로 공부하여 공자 맹자의 학문에 정통하게 되었다. 산에 올라서도 나물로 요기하면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주희(朱熹)의 이름을 듣고 그를 찾아가 스승을 삼고자 하니, 주희가 원정에게 공부한 것을 물어 보고는 놀라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의 늙은 벗이고, 제자의 부류에는 둘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한 평상에 앉아 글의 깊은 뜻을 토론하며 밤중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주006)

〈사생도〉 ⑤元定對榻
이는 사제관계가 가르침과 배움을 매개로 하여 맺어지는 인간관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륜행실도≫는 형제, 종족, 붕우, 사생 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여 준 주인공들의 모범된 행실을 통해서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도덕 규범을 널리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김훈식(1985)에 의하면, ≪이륜행실도≫의 〈붕우도〉에 편성되어 있는 11편은 영종(英宗) 정통(正統) 12년(1447) 명나라에서 간행한 ≪오륜서(五倫書)≫ 권61에 수록되어 있는 35명의 행적 가운데 11명의 사례를 거의 원문 그대로 전재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오륜서≫는 모두 62권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24권만 소장되어 있어 〈붕우도〉 이외의 것은 ≪오륜서≫와의 대조가 불가능하지만, 나머지 〈형제도〉, 〈종족도〉, 〈사생도〉 역시 그 대부분을 ≪오륜서≫의 것에서 전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이륜행실도≫의 간행에 관여한 사람

이에는 먼저 편찬을 임금에게 건의하고 편찬 간행을 주도했던 김안국(金安國)을 들 수 있고, 다음으로는 직접 실무를 맡아 관여했던 조신(曹伸)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책의 서문을 쓴 강혼(姜渾)이 있다. 여기서는 이 세 사람에 대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3)과 ≪한국인명대사전≫(1986. 신구문화사)에 의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성종 9~중종 38)은 문신, 학자이며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다.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 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연산군 9)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장령, 예조참의,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중종 12) 4월에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음 해 3월까지 있으면서 ≪이륜행실도≫를 편찬 간행하였을 뿐 아니라 ≪농서(農書)≫·≪잠서(蠶書)≫·≪여씨향약(呂氏鄕約)≫·≪정속(正俗)≫·≪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언해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1518년(중종 13) 4월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다시 중앙 관리로 왔으나 그 다음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중종 27)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찬성, 판중추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 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그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중종실록 10년 6월 8일(癸亥)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이조 판서 안당이 아뢰기를, “… 승문원 판교 김안국(金安國)과 같은 자는 본래 부지런하고 삼가는 것으로써 봉직(奉職)하여 있는 곳마다 자기의 직책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이와 같은 사람은 차례를 따지지 않고 탁용(擢用)한다면 거의 인심을 진작시키고 선비의 습속을 격려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마땅히 승지를 임명해야 하는데 의망할 만한 자가 적습니다. 바라건대 김안국도 아울러 의망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김안국은 한갓 승지뿐만 아니라 탁용하기에 가장 합당하다.” 하였다.

(吏曹判書安瑭啓曰 … 如承文院判校金安國 本以勤謹奉公 所在無不盡其職任 如此之人 不易多得 … 如此之人 擢用不次 則庶可以振起人心 而激勵士習也 今日當除承旨 而其可擬望者少 請以金安國幷擬 傳曰 金安國 非徒承旨而已 最合於擢用)

안당(安瑭)은 이렇게 말하면서 승지를 발탁함에 있어 이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다. 서열을 따지지 않고 김안국 같은 인물을 뽑는다면 백성들의 인심이 진작되고 선비들의 습속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종실록 11년 11월 7일(甲申)의 기사에도 김안국의 사람됨을 서술하고 있다.

김안국은 사람됨이 성격과 법도가 상명(詳明)하고 간절하여 나라일 하기를 크나 작으나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충성과 정성에 감복했다. 그러나 더러는 그의 까다롭게 살핌을 흠으로 여겼다.

(安國之爲人 性度詳明懇切 爲國家事 無巨細 一出於至誠 時人服其忠懇 而或病其苛察焉)

이로써 김안국은 자기의 할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수행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천거의 대상이나 물망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도 후에 다시 등용된 것은 그의 책임감과 성실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신(曹伸)은 조선 성종 때의 문인이지만 그의 생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는 숙분(叔奮)이고 호는 적안(適庵)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현감 조계문(曹季文)의 아들이며 위(偉)의 서형(庶兄)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어학에도 능통하여 1479년(성종 10)에 통신사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돌아와서 그를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시험하고 시를 짓게 하였더니 그 글이 매우 훌륭하여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채되었다. 외국어에도 뛰어나 역관(譯官)으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安南國)의 사신과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어 그 이름을 날렸다. 만년에는 은퇴하여 금산(金山)에서 지내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륜행실도≫는 이때에 맡아서 간행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적암시고(適庵詩稿)≫·≪유문쇄록(諛聞瑣錄)≫·≪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실록에는 그에 관한 기사가 모두 성종실록에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식은 조계문의 서자였지만 조선시대에 특별한 배려를 받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벼슬이 정삼품인 사역원정에까지 올랐던 것이라 하였다.

강혼(姜渾, 1464~1519. 세조 9~중종 14)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木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강인범(姜仁範)의 아들로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486년(성종 17)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함으로써 문명을 떨쳤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 뒤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되었다. 1506년 중종 반정을 주도하던 박원종(朴元宗) 등이 죽이려 하였으나 영의정 유순(柳洵)의 주선으로 반정군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대제학, 공조판서를 거쳐 1512년(중종 7)에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어 숭록대부에 올라 우찬성, 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명리(名利)를 지나치게 탐낸 데다 특히 연산군 말년에 애희(愛姬)의 죽음을 슬퍼한 임금을 대신하여 궁인애사(宮人哀詞)와 제문을 지은 뒤 사람들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었고, 반정 후에도 이윤(李胤)으로부터 폐조의 행신(倖臣)이라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저술로 ≪목계집(木溪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륜행실도≫의 서문 끝에 있는 ‘正德戊寅 三月日 晉川 姜渾書 于晉之東皐村舍’(정덕무인 삼월일 진천 강혼서 우진지동고촌사)라는 기록을 통해 서문은 강혼이 1518년(중종 13)에 그의 본관인 진주에 낙향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Ⅱ. ≪이륜행실도≫의 판본

현재까지 전하는 판본에는 원간본으로 알려진 옥산서원본(1518, 중종 13)을 비롯해서 학봉(鶴峯) 내사본(1579, 선조 13)이 전하고 있고, 이후 1727년(영조 3)에 중간된 기영본(箕營本)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기영본을 판하(版下)로 하여 1730년(영조 6)에 각 감영에서 간행된 복각본인 강원감영판, 영영판(嶺營版), 해영판(海營版) 등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순천대, 전남대, 충남대 등의 도서관에도 ≪이륜행실도≫의 이본(異本)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간행 연대를 알 수 없는 서울대의 가람문고본은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강원감영판(1730)과 함께 홍문각에서 1990년 영인한 바 있고, 순천대본에 대해서는 정연정(2008)의 조사 보고가 있다.

1.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의 소장본이다. 옥산서원은 1572년(선조 6)에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李齊閔)이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독락당(獨樂堂) 아래에 서원을 세웠으며,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1574년(선조 8)에 ‘玉山’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이 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거처하던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이 책은 독락당 소장본으로서 목판본 1책인데 책의 크기는 세로 39cm, 가로 22cm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4.2cm, 가로 15.9cm이다. 순서는 서문 3장, 목록 3장, 본문 48장, 열함(列銜) 1장 순으로 모두 55장이며, 강혼의 서문은 유계(有界) 10행, 매행(每行) 18자이고, 목록, 본문, 열함 부분은 모두 유계 13행에 본문의 한문 기사는 매행 22자로 되어 있다. 언해문은 도판(圖版)이나 한문 본문의 광곽(匡廓) 밖의 난상(欄上) 여백에 있으므로 계선(界線)이나 변(邊)은 없이 한 면이 17행, 매행 10자로 되어 있는 가운데 더러는 한 행이 9자~13자로 된 장(張)이 제법 있다. 실제로 본문의 첫 장 〈급수동사(伋壽同死)〉와 둘쨋 장 〈복식분축(卜式分畜)〉의 경우에 언해문의 한 행이 10자인 경우는 없고 9자가 한 행 있으며 그 밖에는 모두 11~13자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흑구(黑口), 어미(魚尾)는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며 어미 사이에 판심제 〈二倫圖(이륜도)〉와 장차(張次)가 있다.

그러면 이제 옥산서원본의 간행 연대는 언제이며, 이 책이 실제로 ≪이륜행실도≫의 초간본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언해문에 방점이 있다든지 ㅿ이 쓰였다든지 하는 국어학적인 검토는 장을 달리 하여 논의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서지적인 검토에 한하려 한다. 먼저, 권두(卷頭)에는 정덕무인년(正德戊寅年, 1518. 중종 13) 3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강혼의 서문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연대가 권말(卷末)에 있는 간기(刊記) ‘正德戊寅春刊板’(정덕무인춘간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간행 연대는 1518년(중종 13)이고 따라서 초간본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거기에다 서문에 나오는 김안국, 조신의 이름이 권말에 있는 열함에도 명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강혼의 서문에 있는 “이것을 금산군에서 간행함에 있어서 나에게 서문을 쓰라 하기에 내가 이 책을 받아 읽었다.”(刊于金山郡 請余爲序 余受而讀之)라는 기록으로 책이 금산군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권말의 간행자 명단에 금산군수 박거린(朴巨鱗)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초간본임을 말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옥산서원본은 이언적의 수택본(手澤本)으로서 맨 앞 장에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내사본이다. ‘宣賜之記’(선사지기)라는 내사인(內賜印)이 있고, “嘉靖十八年八月日 內賜全州府尹李彦迪二倫行實一件 命除[謝恩] 同副承旨臣崔”(가정십팔년팔월일 내사전주부윤이언적이륜행실일건 명제[사은] 동부승지신최)라고 기록된 내사기가 있다. [ ] 부분은 글자가 지워져 있지만 그 글자가 ‘謝恩’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 나타난 내사 연대가 가정(嘉靖) 18년(1539. 중종 34)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간행 연대인 1518년과는 21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간년(刊年)보다 21년 늦게 내사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실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예를 보면, 책의 인출이나 간행이 완료되는 날 대개 임금에게 진상하였고, 이어 그 날로 바로 반사(頒賜)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내사기에 표시된 일자는 통상적으로 그 책의 인출·간행이 완료된 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옥산서원본은 1518년에 갼행된 초간본이 아니고 내사기에 나타난 대로 1539년(중종 34)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옥산서원본을 논의한 보고서가 송종숙(1989)이다.

송종숙(1989)에 의하면, 중종 33년 7월 7일의 실록에는 예조판서로 중용된 김안국이 다시금 ≪이륜행실도≫를 간행하여 반포할 것을 건의하매 중종이 이를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주007)

중종실록 33년 7월 7일(戊寅) : 禮曹判書金安國啓曰 三綱行實則旣已刊行矣 五倫之中 長幼朋友二事 別無擧行 故臣爲慶尙道觀察使時 撰集二倫書 兄弟之類 附親戚 朋友之類 附師生 書成印布 使一道之人 無不知之 臣意以此二倫書 廣印頒布至當 傳曰如啓
, 그 이듬해인 중종 34년(1539) 8월24일의 실록에는 ≪이륜행실도≫를 백관(百官)에게 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주008)
중종실록 34년 8월 24일(戊子) : 命頒賜二倫書于百官
을 볼 때, 옥산서원본의 내사 연대는 실록에 나오는 반사 연대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사 연대인 1539년(중종 34)이 바로 옥산서원본의 간행 연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옥산서원본은 초간본이 아님을 내사기에 의해 알 수 있지만 이때가 초간본 간행 후 불과 20여 년 정도 지났을 때라 초간본의 책판(冊板)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초간본의 서문과 간기가 옥산서원본에도 그대로 실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내사기에 쓴 날짜와 책의 인출·간행 일자가 언제나 일치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서 내사가 뒤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더러 있는 일이다. 그 한 예로 ≪어정인서록(御定人瑞錄)≫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은 1794년(정조 18) 9월 24일에 그 편찬이 끝나고 바로 그 해에 생생자(生生字)라는 목활자로 찍어서 반포한 책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70년 뒤인 1860년(철종11) 4월의 내사기가 있는 책이 고려대 도서관 신암문고(薪菴文庫)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794년에 인출된 책과 내사본을 비교해 본 결과 똑같이 생생자(生生字)로 찍은 동일한 책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이 간년(刊年)과 내사 연대 사이에 많은 차이가 나는 예외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륜행실도≫의 경우도 바로 이 예외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김안국의 주도로 1518년(중종 13)에 간행하였으나 그 이듬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김안국은 파직되고 책판은 사장되는 등의 돌발 사태로 내사가 간년(刊年)보다 20년 이상 뒤늦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옥산서원본은 내사기에도 불구하고 서문과 간기에 명기된 정덕무인(正德戊寅. 1518)에 간행된 초간본이라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고 본다.

이상의 옥산서원본은 안병희 교수의 자세한 해제를 붙여 규장각본과 함께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에 영인하여 냄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와 동일한 판본이 이화여대 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안 교수는 일본 동경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이륜행실도≫를 소개하면서 이 책에는 권말의 간기장(刊記張)이 없고 전체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방점이 사용되었고 표기법이나 언어 현상이 옥산서원본과 일치하므로 초간본으로 다루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번에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이 옥산서원본이다.

2. 학봉(鶴峯) 내사본(內賜本)

이 판본은 교서관(校書館)에서 개간한 것으로 1579년(선조 13)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 내사된 책이며 현재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다른 판본과 마찬가지로 서문 3장, 목록 3장, 본문 48장의 체재이다. 권말 간기는 없고 권두에 “萬曆七年五月日 內賜吏曹正郞金誠一二倫行實圖一件 命除謝恩 右承旨臣申”(만력칠년오월일 내사이조정랑김성일이륜행실도일건 명제사은 우승지신신)이라고 쓴 내사기가 있어 이 책이 만력(萬曆) 7년, 즉 1579년에 간행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언해문은 초간본과는 달리 반엽(半葉)이 18행 11자로 되어 있으며 어미는 상하대흑구 어미 외에 2엽화문 어미와 3엽화문 어미가 섞여 있다. 방점이 전혀 없고 ㅿ도 볼 수가 없으나 ㆁ은 종성에 한해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번역이나 표기, 어휘 사용 등에서 초간본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ㆍ’와 관련한 표기례를 한 가지 들어 본다면, 초간본에는 ‘사’[人]으로 표기한 예가 8회인 반면에 ‘사름’으로 표기한 예가 21회 등장한다. 그러나 학봉 내사본에는 ‘사’이 29회, ‘사름’이 7회로 나타나 ‘사’의 형태를 많이 회복하고 있다. 동사 ‘호-’[分]의 형태도 초간본에는 1회만 쓰였고 ‘논호-’가 11회로 주류를 이루었으나, 학봉 내사본에서는 ‘논호-’가 자취를 감추고 ‘호-’만 11회 나타나고 있다.

3. 규장각본

이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을 말한다. 규장각본에는 기영(箕營)에서 간행된 지방판과 강원도감영판(江原道監營版)이 있다. 기영판(箕營版)은 권말(卷末)에 “丁未四月日 箕營開刊”(정미사월일 기영개간)이라는 간기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영(箕營)은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던 평안도 감영을 말하므로 이 책은 평안도에서 간행된 것이다. 간행 연대가 정미(丁未)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그 연대를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간기를 갖고 있는 판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사기가 있는 책이 발견되어 연대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擁正八年三月二十一日 內賜同知義禁府事梁聖揆 二倫行實一件 命除謝恩 行都承旨趙”(옹정팔년삼월이십일일 내사동지의금부사양성규 이륜행실일건 명제사은 행도승지조)라는 기록에서 내사 연대 옹정(擁正) 8년은 1730년(영조 6)이므로 기영판의 정미년은 1727년(영조 3)임을 알 수 있다. 기영판은 평안도에서 1727년에 간행한 것을 중앙으로 보내어 3년 뒤 인출·내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안병희(1978)에 의하면, 이 책의 크기가 세로 38.3cm, 가로 23cm이며, 판식(板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가 세로 24.6cm 가로 16.5cm으로 되어 있다. 책의 체재는 초간본인 옥산서원본과 거의 같아서 맨 첫 장부터 서문 3장, 목록 3장, 본문 48장 순으로 모두 54장이고, 열함이 없는 것이 초간본과 다른 점이다. 강혼의 서문은 초간본과 동일하게 유계(有界) 10행, 매행(每行) 18자이고, 목록과 본문 부분도 똑같이 모두 유계 13행에 본문의 한문 기사는 매행 22자로 되어 있다. 언해문은 이 책에서도 도판(圖版)이나 한문 본문의 광곽(匡廓) 밖의 난상(欄上) 여백에 있으므로 계선(界線)이나 변(邊)은 없이 한 면이 17행으로 되어 있지만, 매행은 초간본과 달리 11자를 일관되게 쓰고 있다. 판심(版心)은 백구(白口)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되어 있고 판심제인 〈二倫圖(이륜도)〉와 장차(張次)가 어미 사이에 있다. 초간본의 흑구 흑어미가 이 판본에서는 백구 화문어미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기영판에는 초간본에 쓰였던 방점, ㅿ, ㆁ이 모두 폐기되었고 표기법에서 중철(重綴)이 많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번역에서도 초간본과는 달리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으며, 이는 학봉 내사본의 번역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규장각본의 또다른 판본으로서 강원감영판(江原監營版)이 있다. 맨 끝의 간기에 “庚戌仲夏上旬日 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臣李衡佐奉 敎刊布”(경술중하상순일 통정대부수강원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신이형좌봉 교간포)라고 되어 있어 1730년(경술, 영조 6)에 강원도감영에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판본과 마찬가지로 강혼의 서문, 목록, 본문 순으로 편찬되어 있지만 목록이 다른 판본에서는 3장에 걸쳐 제시되어 있는 것을 강원감영판에는 1장에 모아서 제시한 점이 다르다. 그러나 목록의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기영판은 전체가 54장인 반면에 이 판본은 52장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다른 판본이 모두 사주쌍변인데 비해 이 판본은 사주단변인 점이 약간 다를 뿐 그 밖의 사항은 기영판과 동일하다.

영조실록 6년 8월 6일 임인(壬寅)조를 보면 “≪삼강행실≫과 ≪이륜행실≫을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한원(翰院)에 내려 주라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주009)

영조실록 6년 8월 6일(壬寅) : 命賜三綱行實二倫行實于政院玉堂翰苑
이보다 앞서 영조 5년 8월 27일 기사(己巳)조에는 “교서관에 명하여 ≪삼강행실≫을 인출하여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감영(監營)에서 각인(刻印)하여 널리 배포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주010)
영조실록 5년 8월 27일(己巳) : 命校書館, 印出三綱行實 分送諸道 使監營 刻印廣布
이처럼 영조 5년의 실록에는 교서관에서 ≪삼강행실도≫를 인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륜행실도≫의 인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영조 6년의 실록에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동시에 반사(頒賜)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이륜행실도≫의 경우에 이미 3년 전인 1727년(영조 3)에 간행된 기영판이 있기 때문에 다시 교서관에서 개판(開板)할 필요 없이 각도(各道)에서 기영판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730년에 인출하도록 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1730년(영조 6)에 간행된 ≪이륜행실도≫의 각도 감영판들이 현존하고 있는 것을 보아 ≪삼강행실도≫와 함께 ≪이륜행실도≫의 인출·반사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강원감영판 외에 “庚戌六月 嶺營開刊”(경술유월 영영개간)의 간기가 있는 경상감영판(慶尙監營版)과 “庚戌八月 海營開刊”(경술팔월 해영개간)의 간기를 가진 황해감영판(黃海監營版)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규장각에 소장된 강원감영판은 아래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영판의 복각본(覆刻本)이라 할 정도로 기영판과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경상도·황해도의 감영판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이후로는 1797년(정조 21)에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개정 ·합편하여 ≪오륜행실도≫를 간행함으로써 ≪이륜행실도≫를 단독으로 간행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합편된 ≪오륜행실도≫ 중의 〈이륜〉 부분에는 합편되기 전의 ≪이륜행실도≫보다 1편이 줄어 모두 47편이 실려 있다. 제외된 1편은 형제편의 〈盧操策驢(노조책려)〉이다. 그 밖에 제목이 바뀐 것이 1편, 제목의 배치가 달라진 곳이 2곳 등이 있다.

이제 이상에서 소개한 4종의 판본, 즉 옥산서원본(1518), 학봉내사본(1579), 규장각본 중의 기영판(1727), 규장각본 중의 강원감영판(1730)들 사이에는 그 차이가 어느 정도로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동일한 원문 구절에 대한 언해문의 예를 4종의 판본에서 몇 개 제시해 보인다. 각 예문의 출전 표시는 네 판본명의 첫 글자를 따서 각각 〈옥〉·〈학〉·〈기〉·〈강〉 등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옥 1ㄱ’은 옥산서원본 1장(張)의 앞면을 말하고, ‘학 21ㄴ’은 학봉내사본 21장의 뒷면을 가리킨다.

⑴ 衛 公子壽者 宣公之子

ㄱ. 윗나랏  슈 션의 아리니(옥 1ㄱ)

ㄴ. 윗나라  슈 션이란 님금의 아리니(학 1ㄱ)

ㄷ. 윗나라 공 슈 션공이란 님금의 아리니(기 1ㄱ)

ㄹ. 윗나라 공 슈 션공이란 님금의 아리니(강 1ㄱ)

⑵ 諸婦 遂求分異

ㄱ. 모 며느리들히 논화 닫티 사져 고(옥 7ㄱ)

ㄴ. 모 겨집들히 화 닫 사져 고(학 7ㄱ)

ㄷ. 모 겨집들히 화다가 사져 고(기 7ㄱ)

ㄹ. 모 겨집들히 화다가 사져 고(강 7ㄱ)

⑶ 李光進 事親有至性

ㄱ. 니진니 어버 잘 셤기더니(옥 18ㄱ)

ㄴ. 니진이 어버이 셤교 장 지오로 호미 잇니(학 18ㄱ)

ㄷ. 니광진이 어버이 셤기 장 지셩으로 호미 잇니(기 18ㄱ)

ㄹ. 니광진이 어버이 셤기 장 지셩으로 호미 잇니(강 18ㄱ)

⑷ 逋負 以已儲錢償之

ㄱ. 빋 낸 것도 내 뎌튝 거로 가포려 대(옥 21ㄴ)

ㄴ. 빋 낸 것도 내 톄튝 쳘오로 가푸려 노라 대(학 21ㄴ)

ㄷ. 빗 낸 것도 내 톄튝 쳘량으로 가프려 노라 대(기 21ㄴ)

ㄹ. 빗 낸 것도 내 톄튝 쳘량으로 가프려 노라 대(강 21ㄴ)

⑸ 次年彦霄 一擧登第 鄕人大敬服之

ㄱ. 버근 예 언 급뎨니라(옥 21ㄴ)

ㄴ.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미 크게 고마고 복더라(학 21ㄴ)

ㄷ.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이 크게 공경고 항복더라(기 21ㄴ)

ㄹ.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이 크게 공경고 항복더라(강 21ㄴ)

⑹ 恨不見吾死友范巨卿

ㄱ. 내 죽쟈 사졋 벋 범거을 몯보애라(옥 33ㄱ)

ㄴ. 내 죽쟈 사쟈 사괴 벋 범식을 몯 보애라 고(학 33ㄱ)

ㄷ. 내 죽쟈 사쟈 사괴 벗 범식을 못 보애라 고(기 33ㄱ)

ㄹ. 내 죽쟈 사쟈 사괴 벗 범식을 못 보애라 고(강 33ㄱ)

예문 (1)~(6)을 통해서 각 판본별로 나타난 몇 가지 언어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표기 문자에 있어서 ㅿ과 ㆁ의 사용은 초간본인 옥산서원본에 한해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학봉내사본에서는 ㅿ은 소멸되었지만 ㆁ은 아직 종성에서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후 규장각본에서는 ㅿ, ㆁ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리고 규장각본의 시기는 이미 7종성의 시대이므로 규장각본 이전의 판본에서 쓰였던 ㄷ종성은 규장각본에 와서 모두 ㅅ으로 교체되었다. 무엇보다 옥산서원본 이후에 나타난 뚜렷한 특징은 번역 양식(樣式)의 차이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학봉내사본부터는 한문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예문 (3), (5)가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예문 (5)에서는 옥산서원본의 번역문이 원문의 한 구절을 빼놓고 있다. 그러나 학봉내사본부터는 빼놓은 구절까지 충실히 번역해 놓았다. 이로써 볼 때 옥산서원본 이후의 판본들은 모두 학봉내사본의 번역 태도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5)의 학봉내사본에 쓰인 낱말 ‘고마’는 16세기까지만 존재했다가 그 이후는 ‘공경’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Ⅲ. 국어학적 고찰

1. 표기와 음운

1) 표기 문자

15세기 후반에 이미 ㆆ과 ㅸ은 국어에서 쓰이지 않고 소멸되었기 때문에 16세기 초의 문헌인 ≪이륜행실도≫에는 물론 찾아볼 수 없다. 이 문헌은 언해문에서 한자어도 순 한글로만 표기하고 있어 한자음 표기와 관련해서 간혹 ㆆ이나 ㅸ이 사용될 경우도 여기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반면에 ㆁ과 ㅿ은 이 문헌에서 15세기 국어에서와 같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ㆁ은 종성으로만 쓰였고 초성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상대 높임법의 ‘--’의 경우에만 초성에 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제시하는 모든 문례(文例)는 초간본인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의 것이므로 출전 표시에서 문헌 약호 〈옥〉은 생략하되 특별히 중간본의 예가 필요할 경우에는 규장각본의 기영판을 이용하며 그 약호는 〈기〉로 표시한다.)

(7) ㄱ. 내틸 거시다(8ㄱ)

ㄴ. 그리 거시가(39ㄱ)

ㄷ. 니를 듸 업세라 더다(42ㄴ)

ㄹ. 그듸 어마님 뵈오다(33ㄱ)

cf. 셔 주이다(42ㄴ)

이 문헌에 쓰인 상대 높임법의 문례(文例)는 (7)의 것이 그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셔 주이다’에서는 상대 높임법의 ‘--’가 ‘-이-’로 대체되고 있음을 볼 때 초성에서는 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ㅿ의 사용 실태는 15세기 국어에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일일이 예를 다 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그 일부만 보이기로 한다.

(8) 손(1ㄱ)아(2ㄱ)녀름지(2ㄱ)머리 조(7ㄱ)(8ㄱ)

이제(11ㄴ)마라(17ㄱ)처(18ㄱ)두(19ㄱ)(20ㄱ)

거(21ㄱ)니(22ㄱ)구(28ㄱ)지(30ㄱ)이고(33ㄱ-ㄴ)

이로써 볼 때 ㅿ은 이때(16세기 초)가 되어서도 위축되거나 동요됨이 없이 그 존재가 확고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극히 일부에서 ㅿ이 소실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9) (15ㄱ, 28ㄱ) - 이(8ㄱ, 15ㄱ)

어버(11ㄱ, 15ㄱ, 18ㄱ) - 어버이(3ㄱ)

위에서 보듯이 ㅿ의 소실은 ‘’와 ‘어버’의 두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16세기에 들어서 ㅿ의 소실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실이 일정한 환경에서 시도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유독 i 모음 앞에서 ㅿ 탈락이 먼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ㅿ이 소실되기 시작한 16세기 초의 문헌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일이다. 이들 문헌에서 ㅿ 탈락의 예로 나타나는 낱말들이 주로 ‘이’ ‘어버이’ ‘녀름지이’ 등에 한하고 있음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속삼강행실도≫(1514)에는 ‘어버’는 없고 그 많은 경우에 오직 ‘어버이’로만 나타나는데, 이 낱말에서도 i 모음 앞이 아닐 때는 ㅿ이 엄연히 유지되었던 것을 ‘어버’(효자도 27ㄱ, 35ㄱ)의 예가 보여 주고 있다. ≪속삼강행실도≫에 ‘이’는 사용되지 않아 그 예를 볼 수 없지만, ‘녀름지이’(효자도 1ㄱ)가 또한 ㅿ 탈락의 예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15세기 국어에서 ‘녀름지’였는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ㅿ 탈락의 첫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이로써 ≪이륜행실도≫(1518)는 국어의 경우에 ㅿ이 일정한 환경에서 일부 소실이 나타난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 ㅿ이 15세기와 다름없이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이륜행실도≫(1518)에 ‘이’ 이외에 ‘시’로도 쓰인 예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10) 家人百餘口 無間言

ㄱ. 지븻 사미 일기 나모 싯마리 업더니라(32ㄱ)

ㄴ. 집 사이 일이 나모 이예 말이 업더라(기 32ㄱ)

물론 ㅿ이 ㅅ으로 대체되어 쓰인 예는 ‘시’ 외에도 ‘’[心] ‘우솜’[笑] ‘그슴’[限] 등을 더 들 수 있고, 이들은 대개 16세기 후반의 문헌에서 주로 발견되는 예들이다. ‘시’[間]의 등장도 ≪칠대만법≫(1569)에서가 최초인 것으로 지금까지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10ㄱ)의 예문에 등장하고 있는 ‘싯마리’[間言]를 근거로 ‘시’의 최초 등장 시기는 종전보다 50년 앞당겨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초간본 ≪이륜행실도≫에서는 ‘’ ‘이’ ‘시’의 세 형태가 다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ㅿ은 중세국어에서 유성음 사이에 국한되어 분포하였다. 간혹 어두(語頭)에도 나타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의성어나 중국어 차용어에서였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한자어도 아닌 고유어의 표기에서 어두에 ㅿ이 사용된 예가 아래와 같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표기의 혼란으로 보인다.

(11) ㄱ. 모다 닐우 다샤 이 며(咸曰異哉此子) (11ㄱ-ㄴ)

ㄴ. 그 미 집븨 와 어미 조쳐 구거(致人踵門詬及其母) (17ㄱ)

ㄷ. 아과 희 아  크나 쟈나 다 려록야(錄親戚及閭里知舊自大及小) (29ㄴ)

ㄹ. 쥬희의 일후믈 듣고 가 스 니(聞朱熹名往師之) (48ㄱ)

‘사’[人]을 ‘’으로, ‘삼다’[爲]를 ‘다’로 표기한 것은 ‘’가 ‘시’로 표기된 예와 관련하여 ㅅ과 ㅿ 사이에 서로 역표기가 일어난 결과로 보인다.

15세기 말의 현실 한자음에서 ㅿ 초성을 갖는 한자로 二(), 日(), 人(), 如(), 而(), 任(), 然(), 兒(), 染(), 讓() 등이 있다. 그런데 15세기 문헌은 언해문에 한자어가 나오면 으레 한자로 적고 거기에 한자음을 달고 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오면 한자어라도 한자로 적지 않고 순 한글로만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더라도 한자어는 15세기 말의 현실 한자음에 부합되게 적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열거한 한자들이 포함된 낱말일 경우는 ㅿ이 초성에 나타나는 표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초의 ≪이륜행실도≫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것은 ㅿ 초성의 한자가 쓰인 낱말임에도 한글 표기에 ㅿ이 나타나는 예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유어 표기에서는 ㅿ의 사용이 15세기와 거의 다름이 없지만 한자어 표기에서는 ㅿ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있다.

(12) ㄱ. 두 아 야(4ㄱ) 의게 고(16ㄱ)

cf. 成佛호미 녜  아니 련마(법화경 언해 5:179ㄱ)

ㄴ. 네 몸 닷가 인늬 일 호려 호(7ㄱ)

cf. 현은 을 라고(번역소학 8:2ㄴ)

ㄷ.  일 어든(31ㄱ)

cf.  밥 머글  니르런(육조법보단경 상:40ㄱ)

ㄹ. 인이 다 식글 컨마(12ㄱ)

cf.  마 가(번역박통사 상:67ㄱ)

ㅁ. 이제 모딘 도 뎐염티 몯 줄 알와라(11ㄴ)

cf. 긔 서르 뎐야(분문 온역이해방 1ㄴ)

ㅂ. 지븻 이리 연히 화동리라(27ㄱ-ㄴ)

cf. 긔우니 초 기드리면 히 살리니(구급간이방 1:66ㄱ)

ㅅ. 그 나래 과연히 와 어믜게 절고(33ㄱ)

cf. 그 주구매 미처 과히 그 말와 니(번역소학 8:20ㄴ)

ㅇ. 모도아 이 마 나 러니(31ㄱ)

cf.  번을 고 프리예 리라(구급간이방 6:85ㄴ)

위의 (12) 예문에 등장하는 한자어 ‘(辭讓), 인(聖人), (每常), 인(人情), 뎐염(傳染), 연(自然), 과연(果然), 이(二百)’ 등에서 ‘’과 ‘’을 제외하고는 ≪이륜행실도≫와 거의 같은 시대거나 조금 앞선 문헌에서 모두 ㅿ이 유지된 표기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륜행실도≫에서는 이들 한자어의 한글 표기에서 모두 ㅿ이 소실된 표기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문헌에서는 ㅿ의 소실과 관련하여 고유어와 한자어 사이에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고유어처럼 인식하여 한글 ‘’으로 표기되다가 15세기 말에 이미 ‘’으로 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 종성에 있어서의 ㅅ과 ㄷ의 구별 표기는 혼란됨이 없이 15세기 중엽의 질서대로 잘 지켜지고 있다.

(12) 몯여(1ㄱ) 듣고(7ㄱ) 엳와(14ㄱ) (19ㄱ) 고(20ㄱ)

빋낸(21ㄱ) 이받더니(29ㄱ) 곧 더라(31ㄱ) 묻고(33ㄴ) 벋(34ㄱ)

(37ㄱ) 니고(46ㄱ)

(13) 엇디(7ㄱ) 옷밥(8ㄱ) 닷쇄(12ㄴ) 뉘읏브료(14ㄱ) 다(21ㄱ)

거즛(22ㄱ) 삿기(26ㄱ) 갓가이(29ㄱ) 믈읫(30ㄱ) 밧고(脫. 37ㄱ)

주검곳 잇거든(36ㄴ)  것(43ㄴ)

이제 초성에 쓰인 자음의 병서자(並書字)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각자병서(各自並書)는 ≪원각경 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 자취를 감추어 버려 이 문헌에서도 각자병서는 전혀 볼 수 없다. 한 예로, 이 문헌에 나오는 아래 (14)의 ‘글 서’와 ‘몯’가 각자병서의 폐지 전에는 모두 ‘글 써’와 ‘몯’로 표기되던 낱말들이지만 이때는 각자병서가 없어졌으므로 ‘글 서’와 ‘몯’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4) 글 서 주고(19ㄱ) 아비 위여 글 서(31ㄴ) 벼슬 몯(4ㄱ)

cf. 妃子ㅅ金像 샤 婦德을 쓰시니다(월인천강지곡 상:14ㄱ)

제 몸 닷  고  濟渡 몯(석보상절 13:36ㄱ)

그리고 초성의 합용병서(合用並書)는 15세기 국어의 체계대로 ㅅ계, ㅂ계, ㅄ계의 병서자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15세기의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그동안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ㅅ계의 ㅺ, ㅼ, ㅽ은 경음(硬音)을 나타내기 때문에 경음 체계에 별 변동이 없었던 당시에 ㅅ계의 합용병서는 아무 변동 없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ㅺ : 러(8ㄱ) 돗 라(17ㄱ) 즈름(22ㄱ) 여(22ㄴ)

ㅼ : (1ㄱ) 밤만(22ㄱ) 해(33ㄴ) (40ㄱ)

ㅽ : (22ㄴ) 삼쳔 필 잇거(29ㄴ)

그러나 ㅂ계와 ㅄ계의 병서에서는 약간의 변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ㅴ을 대체한 ㅲ이 새로 등장한 점이다. 그러면 이 문헌에 실제로 등장하는 ㅂ계와 ㅄ계의 병서를 열거해 본다.

ㅲ : 일 어든(31ㄱ)

ㅳ : 러디(11ㄱ) 와(22ㄱ) (26ㄱ) (48ㄱ)

ㅄ : (6ㄱ) 러리니라(10ㄴ) 더라(13ㄱ)

ㅶ : 거슬 도니(27ㄱ)

ㅴ : 아모(33ㄴ)

자료의 제약으로 15세기 국어에서 사용했던 ㅷ과 ㅵ의 예는 이 문헌에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한편으로 ㅂ계나 ㅄ계의 자음군이 자음 아래 연결되었을 때 이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15) ㄱ. 니 죄 니브면 죽도록 몹스리라 대(5ㄱ)

cf. 부텨 供養기 外예 년 듸 몯 리니(석보상절 23:3ㄴ)

ㄴ. 갑시 업서 힘서 질 여(37ㄱ)

cf. 生死 버술 이 힘  求야 리라(월인석보 10:14ㄴ)

ㄷ.  셔울 동가셔 나닐 제(41ㄱ)

cf.  소리내야 (석보상절 9:39ㄴ)

(15ㄱ)에 쓰인 ‘몹스리라’는 원래 ‘몯 리라’였는데, ‘몯 리라’가 한 낱말로 의식되면서 두 자음만이 허용되는 모음 사이에서 세 자음(ㄷ, ㅂ. ㅅ)이 개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ㄷ이 탈락되고 그 자리에 자음군 ㅄ의 ㅂ이 이동함으로써 ‘몹스리라’가 되었다. 이 말은 오늘날의 ‘몹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5ㄴ)에서 볼 수 있는 ‘힘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원래는 ‘힘 ’이므로 모음 사이의 세 자음(ㅁ, ㅂ, ㅅ)이 역시 문제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양순음이 거듭된 상태여서 양순음 ㅁ 아래의 ㅂ이 탈락하여 ‘힘서’로 변하게 된 것이다. 또한 (15ㄷ)의 ‘’도 ‘’[一時]에서 같은 원리로 변한 것이다. 15세기의 ‘’가 16세기에 들어서 ‘’로 변한 것은 ㅴ의 ㅂ이 그 앞의 ㄴ을 ㅁ으로 순음화시키고 자신은 탈락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ㅴ의 나머지 ㅺ은 경음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음군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의 ㄴ, ㅂ, ㅺ 세 자음이 ㅁ, ㅺ의 두 자음으로 바뀐 결과가 ‘’로 된 것이다. ‘힘서’와 ‘’는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어형이 되었다.

ㅂ계의 합용병서를 논의하는 첫머리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ㅲ에 대해서 약간 덧붙이고자 한다. ㅲ은 본래 15세기에는 없었던 병서자이다. 17세기에 오면서 3자 병서인 ㅴ, ㅵ이 소멸의 길로 들어서자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같은 ㅂ계의 2자 병서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ㅵ은 기존의 ㅳ이 있어 대체가 가능하였지만 ㅴ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ㅴ의 대체자로 ㅲ이 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ㅲ이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 등장한 것이다. 이 문헌에는 ‘’를 제외하고는 ㅴ이 아직 쓰이고 있어 ㅲ의 등장은 시기상조로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 전하는 문헌으로는 초간본 ≪이륜행실도≫가 ㅲ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음절말의 자음군으로는 ㄺ과 ㄻ이 쓰였다. 자음이나 휴지(休止) 앞에서도 음절말의 ㄺ과 ㄻ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6) 늙고(34ㄱ)  지여(45ㄱ) 겨지라(6ㄱ)

국어의 모음 표기에 있어서는 특기할 사항이 없다. 이 문헌에서는 언해문에 한자를 전혀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자음 표기에서 사용되던 희귀한 모음들을 이 문헌에서는 일체 볼 수 없다. ‘ㆍ’ 관련 모음 이외에 현대 국어에 없는 모음이 사용되었다면 ㆉ, ㆌ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말음이 ㅛ, ㅠ인 인명(人名)에 주격 조사 ‘-ㅣ’가 연결되어 형성된 ㆉ, ㆌ가 대부분이다.

(17) 언(彦宵ㅣ)(21ㄱ) 됴(趙孝ㅣ)(6ㄱ) 여(15ㄱ) 덕(德珪ㅣ)(22ㄱ)

언해문의 한 군데에서 한자말이 아닌 고유어에 ᆆ 모음이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18) 그 어미 마니 약 프러 일 머기 커(10ㄱ)

위 (18)의 예문에 등장하는 ‘머기’[食]는 원칙적으로 ‘머교려’로 표기해야 할 어형이다. 그런데 ‘머교려’의 모음 ㅛ는 문법적으로 사동 접미사 ‘-이-’와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가 통합한 것인데 이 ㅛ를 후속되는 의도법 어미 ‘-려’에 변칙적으로 통합하여 ‘’라는 기형적인 표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ᆆ 모음은 당시에 표기 문자로 통용되던 모음은 아니다.

2) 표기법

국어 표기법의 첫 출발은 분철(分綴)하느냐 연철(連綴)하느냐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末音)이 자음일 때, 그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가 오면 그 말음의 자음을 받침으로 올려 적느냐, 아니면 조사나 어미의 두음(頭音)으로 내려 적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옷+이’를 ‘옷이’로 분철하여 적느냐, ‘오시’로 연철하여 적느냐 하는 것을 말한다.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했던 15세기 국어는 연철 방식을 표기의 원칙으로 삼았고,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15세기 문헌 자료에서 연철법은 천하통일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한 대세는 16세기에 들어서도 대체로 이어지는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편에선 분철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분철 표기가 제법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16세기 초기 문헌인 초간본 ≪이륜행실도≫의 표기 실태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기의 다른 문헌과는 달리 분철은 하나도 볼 수 없고 연철과 중철(重綴) 표기만을 보여 주고 있다. 체언의 경우가 되겠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중철 표기가 우세하다. 중철이란 분철할 때처럼 받침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적어 놓고는 또한 연철할 때처럼 그 받침을 다음 음절의 두음에도 다시 적는, 말하자면 받침의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표기 방식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연철과 분철의 두 방식을 절충한 표기이므로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철 표기는 연철에서 벗어나 분철로 지향해 가는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분철의 표기 중간 중간에 가끔씩 등장하는 표기 형태이다. 그 중에는 중철의 예가 상당수 등장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그 문헌에 나타난 분철보다는 훨씬 낮은 비율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초간본 ≪이륜행실도≫는 매우 예외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 문헌은 중철을 그렇게 많이 보이면서도 분철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대신 연철은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언의 경우에 한해서이다. 용언의 활용에서는 여전히 연철 일변도라 할 수 있다. 용언에서도 중철의 예가 전체를 통해 몇 군데서 발견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용언에까지 중철이 확산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용언에서의 중철은 오히려 착오에 의한 돌출로 보이는 것이다. 용언의 활용에서 중철한 예를 전부 보이면 다음의 (19)와 같다.

(19) 죽그시거(12ㄱ) 졈므도록(15ㄱ) 잡바(17ㄱ) 남모(28ㄱ) 흗터(29ㄴ)

심므고(33ㄴ)

cf. 주근(1ㄱ, 18ㄱ) 주그니라(1ㄱ) 주글가(10ㄱ) 주글(14ㄱ, 22ㄱ, 38ㄱ)

주그리라(22ㄱ) 주그라 가(22ㄱ) 주것다가(22ㄴ) 주그니(33ㄴ, 37ㄱ)

주거(33ㄴ, 43ㄱ) 주거셔(37ㄱ, 40ㄱ) 져므도록(15ㄴ) 자바(31ㄱ, 33ㄴ)

나모(32ㄱ)

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용언의 활용에서 중철한 표기는 모두 6개 정도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동사 ‘죽-’[死]의 경우에 전체를 통해 20회 가까이 등장하지만 1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연철 표기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때 중철은 체언의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용언이라도 파생의 경우에는 중철 표기가 꽤 퍼져 있다는 느낌이다. 이는 용언 어근에 부사 접미사 ‘-이’가 통합되어 파생 부사를 형성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래 (20)의 예를 보면 중철과 연철이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 만니(8ㄱ) 지극기(14ㄱ) 각별리(13ㄱ, 28ㄱ) 셤죡(贍足)키(29ㄱ)

티(13ㄱ, 35ㄱ) 어딜리(46ㄱ) 놉피(19ㄱ) 깁피(48ㄱ)

cf. 마니(10ㄱ, 22ㄱ) 머리셔(14ㄱ) 브즈러니(17ㄱ) 노피(29ㄱ) 어디리(44ㄱ)

특히 유기음을 포함한 8종성 이외의 자음을 어근의 말음으로 가진 경우는 8종성 제한 규칙으로 그들 자음을 받침의 자리에 쓸 수 없기 때문에 각각 ‘ㅍ→ㅂ, ㅋ→ㄱ, ㅌ→ㄷ, ㅈ/ㅊ→ㅅ’ 등으로 교체하여 받침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후속하는 초성 자리에는 어근의 원래 말자음(末子音)을 그대로 내려적는다. 그리하여 ‘높+이’ ‘깊+이’를 각각 ‘놉피’ ‘깁피’와 같이 중철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중철 표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체언의 경우를 검토하기로 한다. 체언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된 형태에서 나타난 중철을 살펴보되 체언의 말자음 별로 나누어 표기례를 전부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일한 말자음을 연철한 표기례도 함께 제시한다. 8종성 중에 ㆁ 자음을 제외한 7종성 중심으로 예를 제시한다.

(21) 체언 말음이 ㄱ인 경우

삭(朔)긔(1ㄱ) 삭(朔)기(1ㄱ) 도(盜賊)기(1ㄱ, 3ㄱ, 6ㄱ, 9ㄱ, 23ㄱ, 46ㄱ)

복식(卜式)근(2ㄱ) 복식(卜式)기(2ㄱ) 도(盜賊)(3ㄱ) 도긔게(3ㄱ, 6ㄱ, 12ㄱ)

쇽(風俗)글(7ㄱ) 도글(9ㄱ) 식(糧食)기(12ㄱ) 식(子息)글(12ㄱ)

채확(蔡廓)기(13ㄱ) 손극(孫棘)기(14ㄱ) 극(棘)긔게(14ㄱ) 극(棘)긔(14ㄱ)

목[分]긔(14ㄱ) 음식(飮食)기(15ㄱ) 옥(獄)개(22ㄱ) 그 적[時]긔(23ㄱ)

식(子息)기(23ㄱ, 35ㄱ) 목[頸]글(23ㄱ) 일(一百)기(28ㄱ, 32ㄱ)

원(王元伯)기(32ㄱ) 식(子息)긴 줄(32ㄱ) 원(元伯)기(32ㄱ, 33ㄱ)

션(宣伯)기(32ㄱ) 식기라(32ㄴ) 범식(范式)기(33ㄱ) 범식(范式)긔(33ㄱ)

곽(槨)기(33ㄴ) 곽(槨)글(33ㄴ) 원(元伯)가(33ㄴ) 쳐식(妻子息)기(34ㄱ)

쳐식(妻子息)글(34ㄱ) 덕(德)게(37ㄱ) 니약곡(李若谷)기(41ㄱ) 약곡(若谷)기(41ㄱ)

한억(韓億)기(41ㄱ) 뉵(六百)기(41ㄱ) 한억(韓億)기도(41ㄱ) 일(一百)기나(45ㄱ)

도(道學)글(47ㄱ) 유작(游酢)기와(47ㄱ) 줄(脈)기라(48ㄱ)

cf. 모[分]긔(1ㄱ) 저[時]긔(3ㄱ, 36ㄱ, 39ㄱ) 므스[何]기(14ㄱ) 모[分](23ㄱ)

녀[便]로(31ㄱ) 녀[便]긔(36ㄱ) 과[槨](46ㄱ)

(22) 체언 말음이 ㄴ인 경우

셰간[家財](2ㄱ, 4ㄱ, 21ㄱ, 21ㄴ, 25ㄱ) 여나[十餘]닌(3ㄱ)

원[太守]니(4ㄱ, 14ㄱ-ㄴ, 35ㄱ) 균(鄭均)(5ㄱ) 균(鄭均)니(5ㄱ)

셰간[家財]내(7ㄱ, 16ㄱ, 21ㄱ) 인(聖人)늬(7ㄱ) 문(門)늬(8ㄱ, 14ㄴ)

두 분[人]니(9ㄱ) 유곤(庾袞)니(11ㄱ) 서너  만내(11ㄱ) 진(津)니(15ㄱ)

츈(椿)니(15ㄴ) 얼운[長]늬게(17ㄱ-ㄴ) 니진(李光進)니(18ㄱ) 안(光顔)니(18ㄱ)

안(光顔)늬(18ㄱ) 두연(杜衍)니(19ㄱ) 두연(杜衍)늬(19ㄱ) 존(張存)니(20ㄱ)

언운(彦雲)니(21ㄱ) 셰간[家財]니(21ㄱ) 삼쳔(三千)니(21ㄱ) 효문(孝子門)넷(23ㄴ)

곽젼(郭全)니(24ㄱ) 얼운[長]니(27ㄱ, 30ㄱ) 손(子孫)니(31ㄴ) 오보안(吳保安)는(37ㄱ)

보안(保安)늬(37ㄴ) 니면(李勉)니(38ㄱ) 쥬인(主人)네(38ㄱ) 은(銀)늘(38ㄱ, 43ㄱ)

니면(李勉)닐(38ㄱ) 원[太守]늘(39ㄱ, 43ㄱ) 니이간(李夷簡)니(39ㄱ) 이간(夷簡)니(39ㄱ)

삼만(三萬)(40ㄱ) 돈[錢](40ㄱ) 돈[錢]니(41ㄱ) 반(半)(41ㄱ) 혼인(婚姻)(41ㄱ)

범슌인(范純仁)는(42ㄱ) 슌인(純仁)니(42ㄱ) 신안(申顔)니(43ㄱ) 손[手]로(43ㄱ)

의원(醫員)늬게(43ㄴ) 다닐[他人](44ㄱ) 슌(王舜)니(44ㄱ) 여나믄[十餘]네(46ㄱ)

악은(樂隱)늬게(46ㄱ) 악은(樂隱)니(46ㄱ) 악은(樂隱)늬(46ㄱ) 이쳔(伊川)니(47ㄱ)

셔산(西山)늬(48ㄱ)

cf. 워[太守]니(5ㄱ) 츄(椿)니(15ㄱ) 다  마내(21ㄱ) 도[錢](43ㄴ) 나[餘]닐(2ㄱ)

[病]니도(11ㄱ) 쟈그닐[小事](13ㄱ) 어디니[賢者](29ㄱ) 가난닐[貧者](29ㄱ)

셰니[白頭](31ㄱ)

(23) 체언 말음이 ㄷ인 경우

붇[筆]들(27ㄱ) 벋[友]디오(48ㄱ)

cf. [意]들(26ㄱ, 48ㄱ) [意]덴(27ㄱ) 버[友]디니(34ㄱ)

(24) 체언 말음이 ㄹ인 경우

믈[水]레(1ㄱ) 믈(財物)(2ㄱ) 시졀(時節)리(3ㄱ, 6ㄱ, 26ㄱ) 니블[衾]레(9ㄱ)

수을[酒]를(10ㄴ) 밀(王密)리(12ㄱ) 아[子](12ㄱ) 살(薩)리(14ㄱ)

손발[手足]를(20ㄱ) 시졀(時節)레(21ㄴ) 긔믈(器物)를(24ㄱ) 오달(吳思達)릐(25)

달(思達)리(25ㄱ) 례졀(禮節)리(27ㄱ) 잡말[雜言]리(28ㄱ) 허믈[過]리(30ㄱ)

여궐(余闕)리랏(31ㄴ) 아[子]게(32ㄱ) 아[子]리(32ㄴ) 그 날[日]리(33ㄱ)

믈[水]리(36ㄱ) [女息](40ㄱ) 두 [二個月]리어다(42ㄱ) 오늘[今日]리(47ㄱ)

채발(蔡發)리(48ㄱ)

cf. 아[子]리니(1ㄱ) 주근 주를(1ㄱ) 세 [三倍]리나(4ㄴ) 마[言](5ㄱ)

마[言]리(7ㄱ) 잡마[雜言]리(15ㄴ) 아[子]리(19ㄱ) 섯나[元旦]래(21ㄱ)

브[火]레(21ㄴ) 니브[衾]레(22ㄱ) 이[事](23ㄱ) 이[事]리(27ㄱ) 그[文]를(30ㄱ)

[馬](31ㄴ) [馬]리(31ㄴ) 그 나[日]래(33ㄱ) 므[水]리(36ㄴ) 벼스[官]를(37ㄴ)

아[子]리라(42ㄱ)

(25) 체언 말음이 ㅁ인 경우

주검[屍]믈(1ㄱ) 사름[人]미라(2ㄱ, 5ㄱ) 림(王琳)믜(3ㄱ) 림(王琳)미(3ㄱ)

사름[人]미(6ㄱ, 13ㄱ, 25ㄱ, 26ㄱ, 27ㄱ, 36ㄱ, 38ㄱ, 41ㄱ) 님굼[君]미(6ㄱ, 27ㄱ)

사름미니(9ㄱ) 사[人]미어(9ㄱ) 람(王覽)미(10ㄱ) 도[盜賊]미(17ㄱ)

엄[母]믜게(19ㄱ) [心]로(20ㄱ) 사[人]미니(20ㄱ) 사름[人]믈(20ㄱ)

아[親族]믈(20ㄱ) [心]미(21ㄱ, 36ㄱ) 처[初]믜(21ㄱ) 밤[夜]미면(22ㄱ)

효도홈[孝道]로(23ㄱ) 사름[人]미여(26ㄱ) 아[親族]믜(27ㄱ, 29ㄱ)

범엄(范仲淹)미(29ㄱ) [夢]메(33ㄴ) 짐(負)메(43ㄴ) 사름[人]믜게(47ㄱ)

쇠[鍵](18ㄱ)

cf. 사[人]미(4ㄱ, 32ㄱ) [他](5ㄱ, 11ㄴ, 45ㄱ) 호려 호(7ㄱ)

사로[生]미(8ㄱ, 21ㄱ) 모디로[凶](10ㄱ) 우루[泣](11ㄱ) 머고[食](12ㄴ)

셤교[奉](14ㄱ) 셤교[奉]미(15ㄱ) 아[朝]미어든(15ㄱ) 무례(無禮)호미(17ㄴ)

[愛]호(17ㄴ) [他]게(22ㄱ) 어디[賢]로미(25ㄱ) 사오나오[劣]미(25ㄱ)

호로(27ㄱ) 사[人]미라(33ㄱ) [他]믜(36ㄱ) 사르[人]미라(37ㄱ)

[他]게(39ㄱ) 일후[名]믈(48ㄱ)

(26) 체언 말음이 ㅂ인 경우

급(伋)비(1ㄱ) 급(伋)블(1ㄱ) 옷밥[衣食]블(8ㄱ, 27ㄱ) 겨집[女]블(10ㄱ, 26ㄱ)

겨집[女]비(8ㄱ, 13ㄱ, 15ㄴ, 18ㄱ, 26ㄱ, 34ㄱ) 집[家]블(14ㄱ, 35ㄱ)

겨집[女]비며(14ㄱ, 32ㄱ) 집[家]븨(15ㄱ, 17ㄱ, 21ㄱ, 27ㄱ, 31ㄱ, 40ㄱ)

밥[飯]배(15ㄴ) 집[家]븻(18ㄱ, 21ㄱ, 26ㄱ, 31ㄱ, 45ㄱ) 쳐쳡(妻妾)븐(20ㄱ)

집[家]비며(24ㄱ) 깁[帛]블(26ㄱ, 29ㄴ) 집(家)비(30ㄱ, 31ㄱ) 겨집[女]븨(31ㄴ, 41ㄱ)

집[家]븨셔(38ㄱ, 43ㄱ)

cf. 그(伋)블(1ㄱ) 그(伋)븨(1ㄱ) 지[家]비(8ㄱ) 지[家]븨(11ㄱ, 25ㄱ, 42ㄱ)

지[家]븻(11ㄱ, 13ㄱ, 23ㄱ, 25ㄱ, 27ㄱ, 30ㄱ, 32ㄱ) 지[家]븨다가(20ㄱ)

겨지[女]비(26ㄱ) 지[家]블(43ㄴ)

(27) 체언 말음이 ㅅ인 경우

앗[弟](3ㄱ, 6ㄱ) 앗[弟]라와(3ㄱ) 여슷[六]시(8ㄱ)

cf. 아[弟]오(1ㄱ) 아[弟](2ㄱ, 17ㄱ) 아[弟](2ㄱ, 23ㄱ) ~거시라(4ㄱ, 32ㄴ)

~거슬(4ㄱ) 아[弟](4ㄱ, 17ㄴ, 23ㄱ) ~거시어니와(5ㄱ, 36ㄱ) ~거시니(13ㄱ)

아[弟]게(14ㄱ) ~거로(21ㄴ) 아[弟](22ㄱ) 여스[六]시(25ㄱ)

~거스로(25ㄱ) ~거시가(39ㄴ) ~거시(43ㄴ) ~거슬(48ㄱ)

(28) 그 밖의 경우

받[田]티(16ㄱ)

cf. 기[分]제(4ㄱ) 바[田](16ㄱ) 바[田]티며(24ㄱ) 겨[側]틧(38ㄱ)

지금까지 체언 말음의 자음별로 중철의 예와 연철의 예를 장황하게 열거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는 중철 표기와 관련해서 다른 문헌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 그 실태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중철 표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연철 표기도 그 세력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체언에 동일한 조사(助詞)가 연결된 형태에서 중철과 연철 표기가 공존하고 있음은 지금까지의 연철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는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해 있는 연철법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이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21)~(28)의 예를 통해서 볼 때 말음의 자음에 따라서는 중철과 연철의 비율이 대등하거나 오히려 연철이 우세한 경우도 있다. 먼저, 말음 ㄷ의 경우에는 등장하는 어휘가 ‘붇[筆], 벋[友], [意]’ 정도여서 양 표기법의 실태를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중철 표기는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ㅁ 말음의 경우를 보자. 여기서도 중철의 빈도가 여전히 높다. 그러면서도 연철의 예가 많은 수를 보이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명사형 어미 ‘-옴/움’이 있었던 것이다. 용언의 동명사형 다음에 모음의 조사가 올 때는 일관되게 연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 곳에서 ‘효도홈[孝道]로’와 같은 중철을 볼 수 있을 뿐 그 밖에는 연철로 통일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호려 호, 머고[食], 셤교[奉]미, 어디[賢]로미 … ’ 등. 말음 ㅂ의 경우에는 연철의 예가 ‘집’[家]이라는 낱말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더라도 ‘집’의 경우에 중철과 연철의 비율은 18 : 13으로 중철이 앞서고 있다. ‘겨집’의 경우에도 중철과 연철을 다 보이지만 그 비율은 12 : 1로 일방적이다. 그러나 말음 ㅅ의 경우에는 중철에 적극적이었던 앞에서와는 달리 중철 표기가 활발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이 문헌에서 볼 수 있는 ㅅ 말음의 예라고 해야 ‘여슷, 아, 것’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순수한 중철의 예는 ‘여슷[六]시’가 유일하다. 이는 또 ‘여스시’로 연철한 표기도 나온다. 그리고 ㅅ 말음의 예로서 가장 많이 쓰인 의존 명사 ‘것’은 그 빈번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중철로 나타나는 예는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연철로만 표기되고 있어 중철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제 ㅅ 말음에서 중철 표기한 예로 ‘앗’가 있는데, 이는 좀 특이한 예에 속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예이다. 원래 ‘앗’의 명사 단독형은 중세 국어에서 ‘아’[弟]였다. 중세 국어에서 명사의 끝음절이 ‘/’인 ‘아’[弟], ‘여’[狐] 등은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에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으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가 각각 ‘’ ‘’으로 교체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에 조사 ‘-이, -, -게, -, -’ 등을 연결하면 각각 ‘이, , 게, , ’ 등의 분철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 이들은 연철되어 ‘아, 아, 아게, 아, 아’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문헌에서 ‘아’의 연철 형태가 쓰인 것을 (27)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연철 형태는 다시 중철로 이어져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 중철의 모습은 ㅿ을 이중으로 적은 ‘’ ‘’과 같은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나 ‘’나 ‘’로 되면 8종성 제한 규칙에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8종성법에 따라 종성으로 쓰일 수 없는 ㅿ이 종성의 자리에 오게 되어 허용될 수 없는 표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8종성 이외의 자음을 말음으로 가진 경우는 8종성의 자음으로 교체하여 종성으로 표기하던 원칙에 따라 ㅿ 말음을 ㅅ으로 교체하여 표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 ‘’을 ‘앗’ ‘앗’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5세기 국어의 ‘이’이던 것이 16세기의 중철 표기로는 ‘앗’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27)의 예에는 ‘앗’ ‘앗라와’와 같은 중철 표기보다는 ‘아, 아, 아, 아, 아게, 아오’와 같은 연철 표기가 훨씬 우세하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앗’와 같은 부자연한 표기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졌던 것 같다. 심지어 이 문헌에는 15세기의 분철 표기인 ‘이’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 의도로 보이는 ‘앗이’(2ㄱ)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이 문헌에는 ‘아’ ‘앗이’ ‘앗’의 세 가지 표기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에는 중철과 연철 표기만 있고 분철 표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논의해 왔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도 분철 표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특수한 조건이나 환경에 한해서이다. 연철법이 가장 철저했던 15세기 중엽 때도 분철했던 경우들이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도 분철 표기가 이루어졌던 경우로서는 주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이 ㄹ일 때인데, 예를 들면, ㄹ 아래에서 ㄱ이 탈락한 경우, 어간 말음 ㄹ 다음에 사동 접미사 ‘-오/우-, -이-’ 등이 연결될 때, 끝음절이 ‘/르’인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접사가 연결되어 체언이나 용언 어간이 ㄹ말음을 가진 형태로 교체되었을 때의 모든 경우에 말음 ㄹ이 그 다음의 모음 음절로 연철되지 않고 종성의 자리에 ㄹ을 그대로 두는 분철의 형태를 고수한다. 이러한 15세기 표기법의 전통이 이 문헌에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어 이 경우에는 분철의 형태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그 일부의 예를 제시한다.

(29) 말이디[止](1ㄱ) 오[白](8ㄱ) 얼운[長](10ㄱ) 알오[知](10ㄴ)

얼이더라[婚](19ㄴ) 울어[泣](22ㄴ) 닐어[謂](30ㄴ) 머물워[停](33ㄴ)

쟐읫[袋](40ㄱ) 게을이[倦](45ㄱ) 알외니라[告](47ㄱ)

3) 중철 표기에 대한 이후의 표기법

옥산서원본의 ≪이륜행실도≫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중철 표기의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특이한 점은 중철 표기가 본래 연철에서 분철로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표기 방식임에도 분철은 그 싹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더라도 후대에 가면 이러한 중철 표기는 분철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사라질 운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옥산서원본보다 200여 년 뒤에 간행된 규장각본의 기영판(箕營版. 1727)에서는 앞에서 보인 많은 중철 표기들이 모두 어떤 표기로 바뀌었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쉽게 예상이 되는 것은 절대 다수가 기영판에서 분철로 바뀌었으리란 점이다. 그래서 분철로 바뀐 예들은 생략하고, 중철 표기가 기영판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과, 중철 표기가 기영판에서 역(逆)으로 연철 표기로 바뀐 것, 그리고 옥산서원본에서는 연철 표기이던 것이 기영판에 가서 중철로 바뀐 사례들을 차례로 모두 제시해 본다. (각쌍의 앞엣것은 옥산서원본, 뒤엣것은 기영판의 표기례이다. 두 판본의 장차(張次)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낱말마다 일일이 표시하지 않고 뒤쪽에 판본 표시 없이 한 번만 표시한다. 그러나 양자간에 장차가 다를 때는 각각 밝혀 적는다. 그럴 때는 기영판에만 ‘기’를 표시한다.)

(30) 중철(옥산서원본) → 중철(규장각본의 기영판)

복식(卜式)기 - 복식기(2ㄱ) 도(盜賊)긔게 - 도긔게(6ㄱ)

지극(至極)기 - 지극기(14ㄱ) 목[分]긔 - 목긔(14ㄱ) 음식(飮食)기 - 음식기(15ㄱ)

식(子息)기 - 식기(23ㄱ) 목[頸]글 - 목글(23ㄱ) (이상은 ㄱ말음의 체언)

셰간[家財] - 셰간(2ㄱ, 4ㄱ, 21ㄱ, 21ㄴ) 셰간내 - 셰간(7ㄱ)

인(聖人)늬 - 셩인늬(7ㄱ) 만[密]니 - 만니(8ㄱ)

얼운[長]늬게(17ㄱ-ㄴ) - 얼운늬게(기 17ㄱ) 안(光顔)늬 - 광안(18ㄱ)

삼만(三萬) - 삼만(40ㄱ) (이상은 ㄴ말음의 체언)

(心)미 - 디(21ㄱ) (이상은 ㄷ말음의 체언)

믈(財物)를 - 믈를(2ㄱ) 시졀(時節)리 - 시졀리(3ㄱ) 니블[衾]레 - 니블레(9ㄱ)

아[自] - 아(12ㄱ) 각별[特]리 - 각별리(13ㄱ) 례졀(禮節)리 - 례졀리(27ㄱ)

(이상은 ㄹ말음의 체언)

사름(人)미니 - 사미라(9ㄱ) 람(王覽)미 - 왕람미(10ㄱ)

쇠[鍵] - 쇠(18ㄱ) [心]로 - 로(20ㄱ)

아[親族]믈 - 아믈(20ㄱ) 처[初]믜 - 처엄믜(21ㄴ) (이상은 ㅁ말음의 체언)

급(伋)비 - 급비(1ㄱ) 겨집[女]비 -겨집비(8ㄱ, 13ㄱ, 15ㄴ) 겨집블 - 겨집블(10ㄱ)

깁[帛]블 - 깁블(26ㄱ) 옷밥(衣食)블 - 옷밥블(27ㄱ) 겨집븨 - 겨집븨(31ㄴ)

(이상은 ㅂ말음의 체언)

받[田]티 - 밧티(16ㄱ) 놉피 - 놉피(18ㄱ) 깁피[深] - 깁피(48ㄱ) 티 - 티(35ㄱ)

(이상은 유기음 말음의 체언 및 용언 어간)

앞서 열거하였던 (21)~(28)의 중철 표기들이 규장각본의 기영판(1727)에 와서는 많은 부분에서 분철로 바뀌었지만 또한 위의 (30)에서 볼 수 있듯이 옥산서원본(1518)의 중철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표기들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 전부가 (30)의 예이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옥산서원본에서 보였던 ㄷ, ㅅ 말음 체언의 중철 표기는 기영판에 와서 모두 연철 표기로 바뀌는 바람에 ㄷ, ㅅ 말음의 중철 표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21)~(28)의 중철 표기들 중에서 기영판에 와서 연철로 돌아간 예들도 상당 수 있어 전부 들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연철에서 분철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중철이므로 중철은 그 다음 시대에 분철로 바뀌는 것이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중철 표기가 오히려 연철로 돌아간 경우이다.

(31) 중철(옥산서원본) → 연철(규장각본의 기영판)

도(盜賊)기 - 도기(3ㄱ, 6ㄱ, 23ㄱ) 옥(獄)개 - 오개(22ㄱ)

그 적[時]긔 - 그 저긔(23ㄱ)

문(門) - 무(8ㄱ) 서너  만내 - 서너  마내(11ㄱ) 손[手]로 - 소노로(43ㄱ)

다 닐[他人] - 다 니를(44ㄱ)

붇[筆]들 - 브들(27ㄱ)

믈[水]레 - 므레(1ㄱ) 손발[手足] - 손바(20ㄱ) 아[子]리(32ㄴ) - 아리(기 32ㄱ)

아게 - 아게(32ㄱ) [女息] - (40ㄱ) 어딜리 - 어디리(46ㄱ)

주검[屍]믈(1ㄱ-ㄴ) - 주거믈(기 1ㄴ) 사름[人]미라 - 사미라(2ㄱ)

사름미 - 사미(6ㄱ, 26ㄱ) 사[人]미어 - 사미어(9ㄱ)

도미 - 도노미(17ㄱ) 엄[母]믜게 - 어믜게(19ㄱ) 밤[夜]미면 - 바미면(22ㄱ)

효도(孝道)홈로 - 효도호로(23ㄱ) 남[餘]모 - 나모(28ㄱ)

심[植]므고 - 시므고(33ㄴ)

옷밥[衣食]블 - 옷바블(8ㄱ) 집[家]븨 - 지븨(15ㄱ, 17ㄱ, 27ㄱ) 밥[飯]배 - 바배(15ㄴ)

잡[執]바 - 자바(17ㄱ) 집[家]비며 - 지비며(24ㄱ) 집븻 - 지븻(26ㄱ)

겨집[女]비 - 겨지비(26ㄱ) 겨집블 - 겨지블(26ㄱ)

여슷[六]시 - 여스시(8ㄱ)

티 - 티(13ㄱ) 흗[散]터 - 흐터(29ㄴ)

(31)의 예에서 보듯이 중철 표기가 연철로 되돌아간 것도 제법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옥산서원본의 중철 표기는 그 이후의 중간본에 가서는 분철로, 연철로, 중철 그대로의 세 가지 표기 형태로 변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분철로 바뀌어 간 것이 전체적인 대세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일부가 중철 그대로 또는 연철로 표기되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에는 어떤 원칙이나 질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한 예로 ‘겨집’[女]에 모음의 조사가 붙어 중철 표기된 옥산서원본의 형태가 중간본(기영판)에서는 어떤 형태로 표기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각쌍의 앞엣것은 옥산서원본, 뒤엣것은 기영판의 것임)

(32)

겨집비 - 겨집비(8ㄱ. 13ㄱ. 15ㄴ)

겨집비 - 겨집이(18ㄱ)

겨집비 - 겨지비(26ㄱ)

겨집블 - 겨집블(10ㄴ)

겨집블 - 겨지블(26ㄱ)

겨집븨 - 겨집븨(31ㄴ)

겨집븨 - 겨집의(41ㄱ)

겨집비며 - 겨집이며(14ㄱ. 32ㄱ)

(32)의 예를 보면 ‘겨집비’가 중간본에서 ‘겨집비’ ‘겨집이’ ‘겨지비’의 세 가지로 다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 중간본의 표기법은 혼용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옥산서원본에서 연철로 표기되었던 형태가 중간본(기영판)에서 중철로 나타난 예가 일부 있어서 그것을 제시한다. 이는 중철의 불씨가 중간본에서도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3) 연철(옥산서원본) → 중철(규장각본의 기영판)

고 워(員)니 - 고올 원니(5ㄱ) 밥 머글 제 - 밥 먹글 제(15ㄴ)

벼스[官]를 - 벼(15ㄱ) 브[火]레 - 블레(21ㄴ) 그[文]를 - 글(30ㄱ)

[馬] - (31ㄴ) 웃녀[上]로 - 웃녁크로(31ㄱ) 버[友]디니 - 벗디니(34ㄱ)

녀[便]긔 - 녁킈(36ㄱ) 제브터 - 제븟터(43ㄱ) 도[錢] - 돈(43ㄴ)

4) 모음 ‘ㆍ’의 동요(動搖)

우리의 국어사 연구는 어찌 보면 모음 ‘ㆍ’의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만큼 ‘ㆍ’ 모음의 연구는 일찍부터 관심 분야가 되었고 또 오랫동안 국어사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다. 주로 ‘ㆍ’의 음가(音價) 문제를 비롯해서 ‘ㆍ’와 관련한 모음 체계 문제, ‘ㆍ’의 비음운화와 변천사 문제, 그 밖의 관련 문제 등을 중심으로 많은 노력들이 집중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제 거의 결론이 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생각했는데, 근래에 와서 ‘ㆍ’ 모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한 연구 보고가 나와 다시금 ‘ㆍ’의 논의에 불씨를 지피고 있다. 주011)

김동소 (2009).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16세기에 들어와서 ‘ㆍ’ 모음의 음절별 사용 실태는 어떤지, 15세기에 비해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에 대해서 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ㆍ’ 모음의 소실(消失)에 대해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1단계는 제2 음절 이하에서의 소실이고 2단계는 제1 음절에서의 소실이다. 1단계 소실은 제2 음절 이하에서 ‘ㆍ’의 동요가 먼저 일어났는데 이때는 ‘ㆍ’ 모음이 주로 ㅡ 모음으로 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1단계 ‘ㆍ’ 모음의 동요는 15세기에 이미 보이기 시작해서 16세기 후반에는 ‘ㆍ〉ㅡ’의 변화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2단계 ‘ㆍ’ 모음 소실은 1단계에서 제외되었던 어두(語頭) 음절의 ‘ㆍ’ 모음이 주로 ㅏ 모음으로 변한 것이다. 어두 음절에서 ‘ㆍ’ 모음이 동요하는 현상은 17세기 초에 일부 보이나 대체로는 18세기 후반에 와서 ‘ㆍ〉ㅏ’가 완성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이륜행실도≫에 보이는 ‘ㆍ’ 모음의 실태는 어떠한가? 위에서 소개한 결론과는 조금 다르게 2단계에서 일어나는 ‘ㆍ’ 모음의 동요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낱말의 어두 음절에서 ‘ㆍ’ 모음이 유지되고 있는 어형과, ‘ㆍ’ 모음이 다른 모음으로 교체된 어형이 이 문헌 안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4개 낱말의 제1음절에서 ‘ㆍ’의 동요를 볼 수 있는데, 그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제로 나타난 예를 모두 열거하기로 한다.

(34) ㄱ. 마니(10ㄱ. 22ㄱ)/만니(8ㄱ) - 가마니(38ㄱ)

ㄴ. 화(24ㄱ) - 논화(2ㄱ. 4ㄱ. 4ㄱ. 4ㄱ. 7ㄱ. 25ㄱ. 30ㄱ. 35ㄱ)/논호아(21ㄱ)/논호련(21ㄱ), 논혼(21ㄴ)

ㄷ. 올(44ㄱ. 46ㄱ) - 고(5ㄱ. 14ㄱ. 29ㄱ. 41ㄱ)/고올(4ㄱ. 42ㄱ)/고을(16ㄱ)

ㄹ. 외여(38ㄱ. 46ㄱ)/외요(15ㄱ)/외더라(41ㄱ) - 도여(11ㄱ)/도여셔(5ㄱ. 29ㄱ. 30ㄱ)/도어(2ㄱ)/도니(27ㄱ)/도엿니(12ㄱ)/도엿다가(5ㄱ. 25ㄱ)/도연(10ㄱ. 19ㄱ. 29ㄱ)/도니라(5ㄱ. 7ㄱ)/도의여셔(35ㄱ) - 되여셔(33ㄱ)

위에 열거한 예를 보면, 제1음절의 ‘ㆍ’ 모음이 ‘마니’에서는 ㅏ로, ‘호-, 올, 외-’에서는 ㅗ로 각각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제1 음절에서 ‘ㆍ’가 원칙대로 ‘ㆍ〉ㅏ’로 변하지 않고 ㅗ로 바뀐 것은 그 다음의 ㅗ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용 빈도에서 ‘마니’는 ㅏ로 교체된 ‘가마니’가 한 번 나타나지만 ‘호-, 올, 외-’에서는 ‘ㆍ〉ㅗ’의 변화를 입은 어형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등장하고 있다. ‘호-와 논호-’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1:11로 나타나 ‘논호-’의 사용이 절대적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17세기에 나타난다고 하는 2단계 ‘ㆍ’ 모음의 소실이 이 문헌에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ㆍ’ 모음 유지형과 소실형이 빈도의 차이는 있지만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ㆍ’ 모음의 동요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호온자’(11ㄱ. 12ㄱ. 36ㄱ. 39ㄱ. 42ㄱ)는 ‘ㆍ’를 유지한 공존형이 없이 단독으로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낱말이 15세기의 ‘오’에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도 첫째 음절의 ‘ㆍ’ 모음이 ㅗ로 변한 2단계의 ‘ㆍ’ 모음 소실에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제2 음절 이하에서 일어난 ‘ㆍ’ 모음의 1단계 동요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단계로 일어난 ‘ㆍ’ 모음의 동요는 주로 ‘ㆍ〉ㅡ’의 변화였으며 간혹 특수한 환경에서는 ‘ㆍ〉ㅗ’ 또는 ‘ㆍ〉ㅏ’의 변화도 일어났다. 동요의 발단은 이미 15세기 국어에서였으며,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제2 음절 이하의 ‘ㆍ’ 모음은 모두 소실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이륜행실도≫에는 비어두(非語頭) 음절에서의 ‘ㆍ’ 모음 동요가 어느 정도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첫째는, 15세기 국어에서 ‘ㆍ’ 모음으로 표기되던 말이 16세기에 와서는 ‘ㆍ’가 소실된 표기만이 나타나는 예들을 들 수 있다. 이 문헌에서는 다음의 예들이 해당한다.

(35) ㄱ. 아름뎌 아니더라(26ㄱ. 31ㄱ) 아름뎌 간 아니터라(32ㄱ)

cf. 各各 아뎌 受니가(능엄경 언해 8:66ㄱ)

ㄴ. 션뵈와  쥬인네 잇더니  션뵈 여 주글 제(38ㄱ)

cf. 늘근 션 보시고(용비어천가 82장)

太微宮은 션 그레 하 皇帝ㅅ 南녁 宮 일후미라(월인석보 2:48ㄴ-49ㄱ)

ㄷ. 믓결 가온대셔(36ㄱ)

cf. 路中은 긼 가온라(월인석보 1:4ㄱ)

ㄹ. 긔 보야호로 퍼디여(11ㄱ) 뵈야호로 치온 제 하옷옷 닙고(43ㄱ)

cf. 慧學이 보야로 盛고(능엄경언해 1:20ㄱ)

뵈야로 甘露 펴시며(석보상절 23:44ㄴ)

ㅁ. 라도록(4ㄱ) 죽도록(5ㄱ. 34ㄱ) 져므도록(15ㄴ)

cf. 世人이 져므록 이베 般若 念호(육조법보단경 상:49ㄱ)

≪이륜행실도≫에 쓰인 ‘아름뎌’[私]와 ‘션뵈’[士] 그리고 ‘가온대’[中], ‘보/뵈야호로’[方] 는 15세기 문헌에서 제2 음절과 제3 음절에 ‘ㆍ’가 쓰인 ‘아뎌’와 ‘션’ 그리고 ‘가온’, ‘보/뵈야로’였다. 그러나 ‘ㆍ’가 쓰인 형태는 이 문헌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ㆍ’ 자리에 각각 ㅡ와 ㅗ, 그리고 ㅏ가 쓰인 ‘아름뎌’와 ‘션뵈’ 그리고 ‘가온대’, ‘보/뵈야호로’의 형태만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활용 어미 ‘-록’의 ‘ㆍ’는 ㅗ로 고정되다시피 하였다. 특히 ‘-록’은 첫째 음절에 ‘ㆍ’가 있으나 이는 어미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사용되는 일은 없으므로 제2 음절 이하의 ‘ㆍ’에 해당하는 것이다. ‘-록〉-도록’의 변화는 이미 15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여 16세기 문헌에는 ‘-도록’만 쓰이고 ‘-록’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이와 같이 ‘아름뎌’ ‘션뵈’ ‘가온대’ ‘보/뵈야호로’ ‘-도록’의 형태만 이 문헌에서 볼 수 있고 ‘ㆍ’ 모음이 쓰인 15세기의 어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ㆍ’의 동요가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제2음절 이하에서 ‘ㆍ’와 ㅡ 사이에서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형태들이다. 즉 ‘ㆍ’ 모음의 유지형과 ㅡ 모음으로의 교체형이 함께 쓰이고 있는 경우이다. 두 형태 사이의 사용빈도는 낱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주로 많이 사용하는 낱말에서 ‘ㆍ’와 ㅡ의 혼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낱말별로 ‘ㆍ’가 쓰인 어형과 ㅡ가 쓰인 어형을 있는 대로 열거한다.

(36) ㄱ. 사[人](4ㄱ. 9ㄱ. 13ㄱ. 20ㄱ. 32ㄱ. 33ㄱ. 37ㄱ. 42ㄱ. 43ㄱ) - 사름(1ㄱ. 2ㄱ. 5ㄱ. 6ㄱ. 9ㄱ. 11ㄱ. 13ㄱ. 14ㄱ. 20ㄱ. 25ㄱ. 26ㄱ. 26ㄱ. 27ㄱ. 31ㄱ. 36ㄱ. 38ㄱ. 41ㄱ. 47ㄱ. 48ㄴ)

ㄴ. 닐우[謂](4ㄱ. 4ㄱ. 5ㄱ. 6ㄱ. 6ㄱ. 7ㄱ. 8ㄱ. 9ㄱ. 11ㄱ. 11ㄱ. 12ㄱ. 12ㄱ. 17ㄱ. 20ㄱ. 21ㄱ. 21ㄱ. 22ㄱ. 23ㄱ. 23ㄱ. 23ㄴ. 25ㄱ. 25ㄱ. 26ㄱ. 29ㄱ. 32ㄱ. 39ㄱ) - 닐우듸(18ㄱ. 26ㄱ. 33ㄱ. 33ㄱ. 33ㄱ. 33ㄱ. 33ㄱ. 33ㄴ. 33ㄴ. 33ㄴ. 34ㄱ. 36ㄱ. 36ㄱ. 37ㄱ. 38ㄱ. 39ㄱ. 39ㄱ. 41ㄱ. 42ㄱ. 42ㄱ. 42ㄱ. 42ㄴ. 43ㄱ. 43ㄴ. 47ㄱ. 48ㄱ. 48ㄱ) - 닐오듸(36ㄱ)

ㄷ. 아[親族](15ㄴ. 20ㄱ. 27ㄱ. 29ㄱ. 29ㄱ. 29ㄱ. 39ㄱ. 40ㄱ) - 아(4ㄱ. 8ㄱ. 25ㄱ. 29ㄱ)

ㄹ. [同時](25ㄱ. 25ㄱ. 26ㄱ. 26ㄱ. 26ㄱ. 27ㄱ. 28ㄱ. 31ㄱ. 32ㄱ) - 듸(30ㄱ. 34ㄱ. 34ㄱ. 47ㄱ)

ㅁ. (다) [處](19ㄱ) - (다른) 듸(15ㄱ)/(갈) 듸(34ㄱ)/() 듸(13ㄱ)/(니를) 듸(42ㄱ. 42ㄴ)/(먼) 듸(16ㄱ)

ㅂ. 다-[異](1ㄱ. 11ㄱ. 19ㄱ. 33ㄴ. 44ㄱ) - 다르-(10ㄱ. 15ㄱ)

ㅅ. 모-[不知](32ㄱ. 32ㄱ) - 모르-(38ㄱ)

ㅇ. 모[諸](7ㄱ. 28ㄱ. 29ㄱ. 30ㄱ. 30ㄱ. 31ㄱ. 32ㄱ. 32ㄱ) - 모든(32ㄱ)

ㅈ. 여나[十餘](3ㄱ. 25ㄱ) - 여나믄(2ㄱ. 46ㄱ)

ㅊ. 도[-等](23ㄱ)/(11ㄱ)/아(7ㄱ. 11ㄱ)/며리(7ㄱ)/(29ㄴ)/션뵈(38ㄱ)/아(15ㄴ. 40ㄱ)/아(8ㄱ) - 도들(12ㄱ)/들(17ㄱ)/며느리들(32ㄱ)/며리들(31ㄴ)/아들(4ㄱ)/아들(27ㄱ)/자딜들(15ㄴ)

위의 (36ㄱ~ㅊ)에서 든 낱말들은 15세기에 제2 내지 제3 음절에서 모두 ‘ㆍ’ 모음을 가진 어형들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로 오면서 동요가 일어나 ‘ㆍ’에서 ㅡ로 바뀐 어형들이 낱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당수 등장하게 되었다. ‘ㆍ’ 모음의 1단계 소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6ㅁ)의 ‘’는 의존 명사이므로 단독으로 어두에 쓰일 수는 없고, 또한 (36ㅊ)의 ‘-ㅎ’도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므로 이것 역시 어두로 쓰이는 일은 없다. 따라서 ‘’나 ‘-ㅎ’은 제2 음절 이하에서만 나타나는 형태이므로 1단계 ‘ㆍ’ 소실의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36ㄴ)의 ‘닐우’에 쓰인 어미 ‘-’의 ‘ㆍ’도 마찬가지로 제2 음절 이하에 쓰인 ‘ㆍ’에 포함된다.

1단계 ‘ㆍ’ 소실의 대표적인 예가 ‘사’이다. 둘째 음절의 ‘ㆍ’가 ㅡ로 변한 ‘사름’이 더욱 생산적이다. 전부 28개가 등장하는데 그 중의 9개가 ‘사’이고 19개가 ‘사름’이다. ‘사름’이 훨씬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초간본(1518)인 이 문헌에서는 ‘사름’의 형태가 지배적이다시피 되어 있으나 중간본에 가서는 ‘사름’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다시 ‘사’의 형태로 완전히 돌아간 것을 볼 수 있다.

(37) ㄱ. 지븻 사름도 드러오며(11ㄱ) - 지븻 사도 드러오며(기 11ㄱ)

ㄴ. 며 사름미여(26ㄱ) - 며 사름이여(기 26ㄱ)

초간본에서 19회나 등장하는 ‘사름’[人]이 중간본인 기영판(1727)에는 (37ㄴ)에서 보이고 있는 한 군데서만 쓰였고, 그 외에는 (37ㄱ)에서 보이듯이 모두 ‘사’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사람’으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앞 (36ㄴ)의 ‘닐우’에서도 설명법 어미 ‘-’와 ‘-듸’의 형태가 함께 쓰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형태는 동일해도 문법 범주는 서로 다른, 설명법 어미 ‘-’와 의존 명사 ‘’[處]가 ‘ㆍ’ 모음 소실 이후는 서로 다른 형태로 변해 간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미 ‘-’는 ‘-되’로, 의존 명사 ‘’는 ‘듸’를 거쳐 ‘데’로 각각 변천 과정을 경험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어미 ‘-’가 ‘-되’로 되지 않고 ‘ㆍ〉ㅡ’에 따라 ‘-듸’로 변함으로써 (36ㅁ)의 의존 명사 ‘’가 ‘듸’로 변한 것과 결과적으로 같아지게 되었다. 어미 ‘-’가 ‘-듸’의 형태로 변하여 사용된 경우는 16세기에도 다른 문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15세기부터 널리 쓰인 화법동사 ‘닐오’는 관용어처럼 굳어져 근대 국어에까지 변함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닐오’가 이 문헌에서는 ‘닐우듸’로 변하여 빈도상으로도 본래 형태인 ‘닐우’와 동일한 분포를 보일 정도로 ‘닐우듸’는 적극적이 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닐우’와 ‘닐우듸’의 분포 상태이다. (36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닐우’는 문헌 본문의 전체 48장 가운데 처음부터 39장까지만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도 30장 넘어서는 2회밖에 되지 않으므로 총 26회 중 24회는 모두 30장 이전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반면에 ‘닐우듸’는 총 27회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30장 이전에 등장한 것은 2회뿐이고 나머지 25회가 모두 33장~48장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문헌 본문에서 전반부는 ‘닐우’가 쓰였고 후반부는 ‘닐우듸’가 집중적으로 쓰인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편찬할 때 전반부와 후반부의 기사자(記寫者)가 서로 달랐던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설명법 어미 ‘-〉-듸’의 변화는 기이하게도 이 문헌에서 화법동사 ‘니르-’에 한하고 있다. 같은 문헌 안에서도 ‘니르-’를 제외한 모든 동사에 대해서는 설명법 어미로 ‘-듸’를 쓴 예가 하나도 없다. 다음과 같이 모두 ‘-’를 연결해 쓰고 있다.

(38) 오(8ㄱ) 유무호(13ㄱ) 섬교(13ㄱ. 24ㄱ. 35ㄱ) 부쵹호(14ㄱ)

외요(15ㄱ) 사로(15ㄴ. 24ㄱ) 이쇼(19ㄱ) 답호(27ㄱ)

너교(27ㄱ) 쵸(30ㄱ) 마로(31ㄱ) 호(45ㄱ)

이것으로 보아 ‘닐우듸’의 ‘-듸’는 아무리 제2 음절 이하에서 일어난 ‘ㆍ’ 모음의 동요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 문헌에서 ‘-듸’의 채택에 아무리 적극적이었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하여 중간본인 기영판 ≪이륜행실도≫에서는 ‘닐우듸’를 모두 ‘닐오’로 환원시켜 놓고 있다. 한두 예만 들어 본다.

(39) ㄱ. 어미 닐우듸 이 거이로다 거이 와 예 두드리며 닐우듸 니거라(33ㄴ) - 어미 닐오 이 반시 거경이로다 거경이 와 상여 두드리며 닐오 니거라(기 33ㄴ)

ㄴ. 닐우듸 고 사름미 올가 저헤라(41ㄱ) - 닐오 고올 사이 올가 저페라(기 41ㄱ)

(36ㄹ)의 ‘’[同]도 제2 음절의 ‘ㆍ’ 모음 동요로 ‘듸’와 혼용되고 있다. ‘’의 ‘’는 기원적으로 의존 명사 ‘’[處]에 해당하므로 의존 명사 ‘’가 (36ㅁ)에서 ‘듸’로 변하듯이 ‘’도 ‘듸’로 변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 밖에 ‘다-’ ‘모-’ ‘모’ ‘여나’ ‘-ㅎ’ 등도 비어두 음절의 ‘ㆍ’ 모음이 동요를 일으켜 ㅡ로 교체된 형태들과 함께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단계 ‘ㆍ’ 모음의 동요가 이 문헌에서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16세기 문헌에서 ‘ㆍ’ 모음의 1단계 소실이 진행되면서 비어두 음절에서 ‘ㆍ’와 ㅡ 모음 사이에 (36)에서와 같은 혼용이 일어나게 되자 역으로 ‘ㆍ’ 모음과는 관련이 없던 낱말에서도 ‘ㆍ’와 ㅡ 사이에 혼용이 일어나고 있는 예를 이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36)에서와는 달리 비어두 음절의 ㅡ 모음이 도리어 ‘ㆍ’ 모음으로 교체되는 현상이다.

(40) 며느리(7ㄱ. 32ㄱ. 32ㄱ) - 며리(7ㄱ. 31ㄴ)

cf. 夫人이 며느리 어드샤(석보상절 6:7ㄱ) 며느리 부:婦(훈몽자회 상:31ㄴ)

15세기에 ‘며느리’로 표기되었던 낱말이 16세기의 이 문헌에서는 역으로 ‘며리’로 된 것이다. 그리하여 ‘며느리’와 혼용되고 있다. 이러한 역표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2 음절 이하에서 ‘ㆍ’ 음이 거의 소멸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5) 어두의 ㄹ 표기

15세기에는 현대 국어와 달리 어두에 ‘냐, 녀, 뇨, 뉴, 니, 녜’가 올 수 있었고 ㄹ은 어두에 그대로 쓰기도 하고 ㄴ으로 교체하여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에 ㄹ로 시작하는 한자어는 모두 한자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한글 표기에서 어두의 ㄹ을 찾기는 쉽지 않다. 15세기 중엽의 한글 표기에서 어두 ㄹ의 예를 들어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41) ㄱ. 약대어나 라귀어나 외야(석보상절 9:15)

ㄴ. 一切 라온 거시 그 中에 야(법화경언해 5:202)

ㄷ. 鬼神 이바며 즐겨 락닥더라(월인석보 23:73)

ㄹ. 러爲獺(훈민정음 용자례)

ㅁ. 쇠 로새 티오니(월인석보 21:81)

ㅂ. 太子ㅣ 닐오 내 담다라(석보상절 6:24)

(41)에서 보인 ‘라귀’[驢], ‘라온’[樂], ‘락닥’[樂], ‘러’[獺], ‘로새’[騾], ‘담’[弄] 등이 15세기에 쓰인 어두 ㄹ의 낱말들이다. 모두 ㅏ, ㅓ, ㅗ 모음 앞에 쓰인 ㄹ이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나온 이 문헌의 언해문에는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ㄹ로 시작하는 한자어의 한글 표기를 정확히 볼 수 있다. 언해문에 한자를 전혀 쓰지 않은 앞선 문헌으로 ≪구급간이방≫(1489)이 있다. 여기서는 초간본 ≪이륜행실도≫에 나타난, 한글로만 적은 한자어 표기를 통해서 당시의 어두에 ㄹ 사용이 어디까지 이루어졌던가 하는 문제를 밝히고자 한다. 어두음 ㄹ의 실태를 알기 위해 문헌 자료에 등장하는 예를 전부 들어 본다.

(42) 라도(羅道琮, 인명)(36ㄱ) 람(南)녀긔(36ㄱ) (郞廳)(46ㄱ) 식(糧食)(12ㄱ)

려(呂公)(34ㄱ) 려(呂翁)(40ㄱ) 려록[錄](29ㄴ) (令公)(39ㄱ)

례대(禮待)(19ㄱ) 례졀(禮節)(27ㄱ) 로조(盧操, 인명)(17ㄱ) 록(祿)(13ㄱ)

루호(樓護, 인명)(34ㄱ) 류군(劉君良, 인명)(26ㄱ) 륙구쇼(陸九韶, 인명)(30ㄱ)

륙촌(六寸)(16ㄱ. 26ㄱ) 림해(臨賀, 지명)(39ㄱ)

≪이륜행실도≫에 나타난 어두음 ㄹ은 ㅏ, ㅗ, ㅜ, ㅑ, ㅕ, ㅠ, ㅣ 등의 모음 앞에 두루 쓰인 것으로 보아 모음에 따른 제한은 없어 보인다. 현대어에서와 같은 ㄹ 탈락도 없고 ㄴ으로의 교체도 없이 ㄹ이 어두에 자유로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ㄹ 자음이 아닌 한자어 ‘南’에 대해서까지 ‘람’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철저한 어두의 ㄹ 표기에 걸맞게 어두에서 ㄹ음이 실제로 실현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다음의 예가 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43) 짐메 다 돈니 뉵기 잇거(箱中只有錢六百)(41ㄱ)

비록 초간본에서 유일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16세기에 ‘六’의 발음이 ‘뉵’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간본인 기영판 ≪이륜행실도≫(1727)에 가면 현실 발음을 반영하여 (42)의 예들에 쓰인 어두의 ㄹ을 거의 ㄴ으로 바꾼 것을 볼 수 있다.

(44) ㄱ. 라도(36ㄱ) → 나도종(기 36ㄱ) ㄴ. 람녀긔(36ㄱ) → 남녁킈(기 36ㄱ)

ㄷ. (46ㄱ) → 낭텽(기 46ㄱ) ㄹ. 식(12ㄱ) → 냥식(기 12ㄱ)

ㅁ. 려(34ㄱ) → 녀공(기 34ㄱ) ㅂ. 려(40ㄱ) → 녀옹(기 40ㄱ)

ㅅ. 로조(17ㄱ) → 노조(기 17ㄱ) ㅇ. 륙구쇼(30ㄱ) → 뉵구쇼(기 30ㄱ)

ㅈ. 륙촌(16ㄱ) → 뉵촌(기 16ㄱ) cf. 륙촌(26ㄱ) → 륙촌(기 26ㄱ)

ㅊ. 림해(39ㄱ) → 님해(기 39ㄱ)

위에서 보듯이 중간본에 와서는 어두의 ㄹ이 거의 ㄴ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이미 현실적으로 어두에서 사라진 ㄹ음을 ㄴ으로 표기에 반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표기법은 보수적이어서 중간본에서도 ‘록’(祿), ‘려록’[錄], ‘루호’(樓護), ‘류군량’(劉君良) ‘례대’(禮待), ‘례절’(禮節) 등의 한자어는 어두의 ㄹ을 그대로 표기하고 있으며 ‘륙촌’(六寸)의 경우에는 중간본에서 ‘륙촌’과 ‘뉵촌’이 혼용되고 있기도 하다.

6) 한자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륜행실도≫에는 언해문에 한자 표기가 하나도 없다. 한자어가 언해문에 많이 등장하지만 모두가 한자는 없이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다. 물론 이때는 15세기에 철저히 지켜졌던 동국정운의 개신(改新) 한자음이 폐기된 시기여서 당시의 현실 한자음에 바탕하여 한자어를 적고 있다. 그런데 한자어의 표기 중에는 당시 현실 한자음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훈몽자회≫(1527)나 ≪신증 유합≫(1576)에 나타난 한자음과 차이를 보이는 예가 보인다. 이제 그런 항목들을 모두 열거하면서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에서 보이고 있는 새김과 음을 함께 제시하여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45) ㄱ. 비졉(避接)(11ㄱ) cf. 避 피 피(신증유합 하:16ㄱ)

ㄴ. 녜(長利)(21ㄱ) cf. 利 니 니(신증유합 하:57ㄴ)

ㄷ. 예(喪輿)(33ㄴ) cf. 輿 술위 여(훈몽자회 중:13ㄱ)

ㄹ. 나(乃終)(30ㄴ. 32ㄴ) cf. 乃 야사 내(신증유합 상:16ㄴ)

ㅁ. 가솬(家産)(35ㄱ) cf. 産 나 산(훈몽자회 17ㄴ)(신증유합 상:12ㄴ)

ㅂ. 차도(査道, 인명)(40ㄱ) cf. 査 들궐 사(신증유합 하:37ㄱ)

ㅅ. 마(牽馬)(41ㄱ) cf. 牽 잇글 견(신증유합 하:46ㄱ)

ㅇ. 소(殯所)(42ㄱ) cf. 殯 솟 빈(훈몽자회 중:17ㄱ)

ㅈ. 쇽군(蜀郡)(20ㄱ) cf. 蜀國 : 쵹나랏(35ㄱ)

(45ㄱ~ㅈ)에 나타난 한자어의 한글 표기는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의 한자음과 조금씩 차이가 난다. (45ㄱ)만 하더라도 한자어 ‘避接’을 초간본 ≪이륜행실도≫에서는 ‘비졉’으로 적고 있으나 ≪신증 유합≫에서는 ‘避’의 음을 ‘피’라 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졉’이라 하지 않고 ‘비졉’이라 한 것은 당시의 속음(俗音)을 반영한 표기가 아닌가 한다. 초간본이 지방에서 간행된 것임을 감안하면 방언이나 속음이 개입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45ㄱ)의 ‘비졉’이 중간본의 기영판에는 ‘피졉’으로 나타난다. (45)의 다른 예들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45ㄹ)의 ‘나’에 대해서는 같은 문헌에서 ‘내’(36ㄱ. 43ㄱ)으로도 나타나고 있어 두 가지가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45ㅈ)에서는 ‘蜀’을 ‘쇽’으로 적고 있는데 이 한자는 전자의 두 교본에 나와 있지 않아 당시의 정확한 음이 무엇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蜀國’을 같은 문헌의 언해문에서 ‘쵹나랏’으로 표기한 곳이 있어 ‘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45ㄱ~ㅈ)의 예들이 중간본의 기영판에 가서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46) ㄱ. 피졉(避接)(기 11ㄱ)

ㄴ. 댱니(長利)(기 21ㄱ)

ㄷ. 상여(喪輿)(기 33ㄴ)

ㄹ. 내죵(乃終)(기 30ㄱ. 32ㄴ)

ㅁ. 셰간(기 35ㄱ)

ㅂ. 사도(査道)(기 40ㄱ)

ㅅ. 경마(牽馬)(41ㄱ)

ㅇ. 빙소(殯所)(기 42ㄱ)

ㅈ. 쵹이란 고올(蜀郡)(20ㄱ)

이상이 중간본 기영판(1727)의 한자어 표기이다. (46ㄱ~ㅈ)의 표기를 보면 초간본에서와는 달리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의 한자음으로 대부분 돌아간 것을 알 수 있다. 단, (45ㅁ)의 ‘가솬’이 (46ㅁ)에서는 ‘셰간’이란 낱말로 교체가 되는 바람에 ‘家産’ 자체의 중간본 음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중간본에 가서도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의 한자음과 상관없이 초간본의 음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46ㅅ, ㅇ)의 ‘경마’(牽馬)와 ‘빙소’(殯所)이다. 아마도 ‘牽馬’나 ‘殯所’의 당시 현실음이 ‘경마’와 ‘빙소’로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훈몽자회≫에서 ‘殯’의 새김과 음을 달면서 ‘솟 빈’이라 하여 한자 교본에서조차 ‘빙소’라 한 것을 보면 ‘빈’은 한낱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음이요, 현실음은 ‘빙’일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의 ‘蜀’에 대해서는 이미 초간본에서도 ‘쵹’이라고 한 곳이 있었고 중간본에서도 ‘쵹’이란 말을 쓰고 있어 ‘蜀’의 당시 음은 ‘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자가 연결되면서 동화 현상이나 탈락 등의 음운 현상이 일어나 이를 표기에 반영함으로써 한자의 본래 음과는 다른 표기를 하고 있는 예들을 모두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47) ㄱ. 불로(忿怒)(7ㄱ)

cf. 忿 노 분(신증유합 하:35ㄱ) 怒 로 로(신증유합 하:3ㄱ)

ㄴ. 쳘리(千里)(43ㄱ)

cf. 千 즈믄 쳔(훈몽자회 하:14ㄴ) 里 마 리(훈몽자회 중:5ㄱ)

(48) ㄱ. 모(繆肜, 인명)(7ㄱ) cf. 목이  불로여(7ㄱ)

ㄴ. (行幸)(27ㄱ) cf. 行 녈 (훈몽자회 하:11ㄴ) (번역박통사 상53ㄴ)

ㄷ. 브듸이(不得已)(21ㄴ)

cf. 不 아닐 블(신증유합 하:13ㄱ) 得 어들 득(신증유합 하:57ㄴ)

(49) ㄱ. 하람(河南)(2ㄱ) cf. 南 앏 남(훈몽자회 중:2ㄴ)

ㄴ. 뉴(風流)(21ㄱ) cf. 流 흐를 류(훈몽자회 하:1ㄱ) 류(석보상절 9:21ㄱ)

위에서 든 (47)~(49)의 한자어 표기들은 모두 음운 현상에 따른 한글 표기이다. (47)에서는 ‘-ㄴㄹ-’이 ‘-ㄹㄹ-’로 동화가 일어난 그대로 적고 있다. 그리하여 ‘분로, 쳔리’를 ‘불로, 쳘리’로 표기한 것이다. (48)은 한자의 연결 과정에서 자음 탈락이 일어난 경우이다. (48ㄱ)의 ‘繆肜’이라는 인명을 ‘목’이라 표기해 놓고 한편에선 ㄱ탈락이 일어난 ‘모’을 같은 장(張)에서 쓰고 있다. 또한 임금의 행차를 뜻하는 ‘’에서 동음생략이 일어난 ‘’이 (48ㄴ)이다. 그리고 (48ㄷ)의 ‘브듸이’는 ‘브득이’(不得已)에서 ‘득’의 말음 ㄱ이 탈락하고 다음의 ㅣ 모음에 영향을 받아 ‘듸’로 된 것으로 보인다. (49ㄱ)은 모음 사이에서 ‘ㄴ〉ㄹ’ 현상이 일어난 것이고, (49ㄴ)은 ㆁ 아래에서 ‘ㄹ〉ㄴ’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나타낸 것이다.

7) ㅎ 탈락

현대 국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ㅎ종성 체언이란 것이 15세기 국어에 있다. 이들 체언의 ㅎ말음은 휴지(休止)나 사이시옷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그 이외 연결되는 형태소에는 그 두음에 ㅎ이 첨가된다. ㅎ종성 체언에는 비록 체언은 아니지만 복수 접미사 ‘-ㅎ’도 ㅎ말음을 갖고 있어 이에 포함해서 다룬다. ㅎ말음은 이미 15세기에서 몇 낱말에 한해 ㅎ탈락형과 ㅎ유지형이 함께 쓰이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은 16세기에도 ㅎ말음이 거의 유지되고 있다. 초간본 ≪이륜행실도≫에도 ㅎ종성 체언의 ㅎ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서 ㅎ탈락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부분이 접속 조사 앞에 집중되고 있음이 특징이다.

(50) 아들와(27ㄱ) 션뵈와(38ㄱ) 며느리들로(32ㄱ) 와(8ㄱ)

cf. 사콰(석보상절 서:2ㄱ) 너희로(육조법보단경 중:23ㄱ)

하콰(월인석보 1:17ㄱ)

위에서 든 ㅎ탈락 예들을 보면 복수 접미사 ‘-ㅎ’과 명사 ‘ㅎ’이 모두 접속 조사 ‘-과’와 조격 조사 ‘-()로’ 앞에서 ㅎ이 탈락하고 있다. 15세기 국어의 용례를 보면 ㅎ종성 체언 아래에서 접속 조사는 ‘-콰’, 조격 조사는 ‘-로’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문헌에서는 ㅎ이 탈락된 ‘-와’와 ‘-로’의 형태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헌에서도 ‘-ㅎ’과 ‘ㅎ’이 다른 조사 앞에서는 ㅎ이 나타난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51) 아히(40ㄱ) 며느리들흘(31ㄴ) 며느리들히(7ㄱ) 히(29ㄴ)

희(12ㄱ. 29ㄴ) 셔(23ㄱ)

이 밖에, 이 문헌에는 ‘후(後)에’가 축약되어 ‘훼’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자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이 문헌에서도 역시 주된 형태는 ‘후에’임을 (53)에서 알 수 있다.

(52) ㄱ. 그 훼 허뮈 아들 모도고(武乃會宗族)(4ㄱ)

ㄴ. 밀리 훼 죽거(密後亡)(12ㄴ)

ㄷ. 츈니 온 훼  먹더라(椿還然後共食)(15ㄴ)

(53) ㄱ. 후에(11ㄴ. 20ㄱ. 27ㄱ. 32ㄴ. 37ㄱ. 38ㄱ. 47ㄱ)

ㄴ. 후에(11ㄴ. 15ㄴ)

중간본의 기영판에는 (52)의 ‘훼’가 모두 ‘후에’로 바뀌어 나타난다.

2. 형태

1) 문법 형태소의 모음 변동

15세기 국어에 등장하는 용언의 어미 중에는 말음이 ㅑ나 ㅕ로 된 어미가 여러 종류 있다. 대표적인 것이 ‘-’ 용언 어간에 붙는 연결어미 ‘-야’이고, 다음으로 종결 어미인 청유법의 ‘-져’가 있으며, 또한 의도법 연결 어미 ‘-고져’도 있다. 그리고 감탄법의 어미 ‘-ㄹ셔’도 들 수 있고, 이 밖에 의문법의 ‘-녀’ ‘-려’도 자주 볼 수 있는 어미이다. 이들 어미는 ‘-’에 붙는 ‘-야’ 어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ㅕ 말음의 형태가 쓰였다. 그러던 것이 초간본의 ≪이륜행실도≫에서는 이들 어미의 모음에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음이 ㅑ이던 어미는 ㅕ로 바뀌는 반면, ㅕ이던 어미는 ㅑ로 변하는 일련의 변동 현상이다. 이에 따라 모음이 바뀐 형태도 쓰였지만 한편으로 바뀌기 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아직까지 모음의 교체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신형과 구형의 공존 상태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어간 ‘-’에 붙는 연결 어미의 경우만은 ‘-야’에서 ‘-여’로 대세를 석권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여’의 사용이 일방적이다. ‘여’가 거의 통일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 그 많은 사용 빈도 중에 ‘야’는 다음의 (54)가 그 전부이다.

(54) 야(4ㄱ) 부쵹야(14ㄱ) 원(員)야 갈 제(41ㄱ) 금고(禁錮)야(44ㄱ)

입관(入棺)야(44ㄱ)

‘야〉여’의 변화는 시대적으로 16세기에 해당하는 현상은 아니다. 물론 16세기에 오면 일부에서 ‘여’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는 하나 아직은 ‘야’의 시대이다. 이 문헌보다는 훨씬 후대에 가서야 ‘여’가 정착한다. 그런데도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서 ‘여’가 집중적으로 쓰이게 된 점이 특이하다. 그 후 중간본의 기영판(1727)에 가면 초간본의 ‘여’가 대부분 ‘야’로 다시 돌아간 것을 보아 초간본의 ‘여’는 이 문헌에 국한하여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무엇에 기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높임법의 ‘-시-’에 연결 어미 ‘-아/어’가 연결되면 예외 없이 ‘-샤’의 형태로 쓰인다. 그런데 이때의 ‘-샤’가 이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셔’로 나타난 예가 보인다. 이를 제외하고는 ‘-셔’가 쓰인 예를 볼 수 없다.

(55) 예 블려보셔 그 아들와 화 일 무르신대(召見公藝 問其所以能睦族之道)(27ㄱ)

cf. 그 집븨 샤(27ㄱ)

다음으로 청유법의 ‘-져’가 이 문헌에서 ‘-쟈’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의 경우와는 달리 모음 ㅕ가 ㅑ로 변하는 것이다. 이는 문례가 많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ㅑ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56) ㄱ. 닫티 사져 고(7ㄱ) 이리셔 여희져(33ㄴ)

ㄴ. 다티 사쟈 커(24ㄱ)

위의 (56ㄱ)에 쓰인 ‘여희져’는 중간본에서 ‘여쟈’로 바뀌었다. 청유법 ‘-져’와 형태상으로 비슷한 의도법 어미 ‘-고져’에 있어서는 ‘-고쟈’로의 변화를 보여 주지 않고 ‘-고져’의 형태만 나타난다.

(57) 일훔 내오져 여(4ㄱ) 나 해코져 니(22ㄱ) 사 내오져 호(37ㄱ)

의도법 어미도 중간본에서는 ‘일홈 내오쟈 야’(기 4ㄱ)와 ‘나 해코쟈 니’(기 22ㄱ)로 되어 ‘-고져〉-고쟈’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감탄법 어미 ‘-ㄹ셔’에 있어서도 모음 ‘ㅕ〉ㅑ’의 변화를 볼 수 있다.

(58) ㄱ. 이런 어딘 을 둘셔(17ㄱ)

ㄴ. 모다 닐우 다샤(11ㄱ)

‘-ㄹ셔’와 ‘-ㄹ샤’가 함께 쓰이고 있다. 그런데 (58)의 경우에 중간본에서는 서로 반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59) ㄱ. 이런 어딘 형을 둘샤(기 17ㄱ)

ㄴ. 모다 닐오 긔특셔(기 11ㄱ)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음이 ㅑ나 ㅕ인 어미에 있어서 이 문헌은 ‘ㅑ〉ㅕ’ ‘ㅕ〉ㅑ’의 모음 변동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야’는 ‘여’로의 일방적인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밖에 청유법 ‘-져’는 ‘-쟈’로, 감탄법 ‘-ㄹ셔’도 ‘-ㄹ샤’로 각각 변화된 형태들이 이전 형태와 함께 쓰이고 있다. 다만 의도법 어미 ‘-고져’는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어미들이 중간본에서도 ‘야’와 ‘여’, ‘-져’와 ‘-쟈’, ‘-ㄹ셔’와 ‘-ㄹ샤’, 심지어 ‘-고져’와 ‘-고쟈’까지 모두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ㅕ 형태와 ㅑ 형태의 혼용 상태는 오래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대등적 연결 어미 ‘-고’가 ‘-구’로 변이된 형태가 ‘-고’와 함께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구’ 어미가 예외 없이 동사 ‘울-’[泣]에 국한해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서는 ‘-구’의 어미 사용을 볼 수 없다.

(60) ㄱ. 주근 주를 슬허 셜워 울우(1ㄱ) cf. 주근 주 슬허 울고(기 1ㄴ)

ㄴ. 보고 믄득 울우 가 븓안더라(10ㄱ) cf. 보고 믄득 울고 가 븟안더니(기 10ㄱ)

ㄷ. 아도  울우 닐우(23ㄱ) cf. 아도  울고 닐오(기 23ㄱ)

ㄹ. 아 모도아 울우 어미려 닐우(25ㄱ) cf. 아 모도와 울고 어미려 닐오(기 25ㄱ)

(61) ㄱ. 로죄 울오 절여 말오라 대(17ㄱ)

ㄴ. 여 주글 제 울오 닐오듸(36ㄱ)

ㄷ. 서르 잡고  울오 가니(41ㄱ)

ㄹ. 견 울오 말오라 대(46ㄱ)

ㅁ. 션이 죽닷 말 듣고 신위 라 노코 울오(47ㄱ)

위의 (60)과 (61)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울우’와 ‘울오’는 이 문헌에서 비등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울우’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중간본에 가서는 모두 ‘울고’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5세기 국어에서 보조사로 쓰인 ‘-(/으)란’이 이 문헌에서는 모음이 교체된 ‘-(/으)런’으로만 나타난다. 다른 문헌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변이형이다.

(62) ㄱ. 두 아런 사오나온 거슬 주니(4ㄱ) cf. 두 아란 사오나온 거슬 주니(기 4ㄱ)

ㄴ. 아와 아런 두고(12ㄱ) cf. 아와 아을란 두고(기 12ㄱ)

ㄷ. 져믄 아런 각별리 돗 라 안치더라(28ㄱ) cf. 져믄 아흴난 각별이 돗 라 안치더라(기 28ㄱ)

초간본에서 불쑥 나타난 ‘-런’ 보조사는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여 중간본에서는 ‘-런’이 자취를 감추고 다시 ‘-란’으로 복귀한 것을 볼 수 있다.

2) 삽입모음의 동요

이른바 의도법의 선어말 어미라고 하는 삽입모음 ‘-오/우-’는 15세기 국어에서만 볼 수 있는 문법적인 특징이다. 이는 어말 어미에 따라 ‘-오/우-’를 반드시 그 앞에 수반하는 어미와, 때로는 수반하기도 하고 수반하지 않기도 하는 어미로 나뉜다. 이 중에서 명사형 어미 ‘-ㅁ’, 설명법 어미 ‘-’ 의도법의 어말 어미 ‘-려’ 등은 언제나 삽입모음을 그 앞에 수반하고 있다.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는 삽입모음의 첨가가 대체로 15세기에서와 같다. 그런 가운데 전체를 통해 ‘-ㅁ’ 앞에 삽입모음이 수반되지 않고 있는 예를 몇 군데에서 발견하게 된다.

(63) ㄱ. 치운 후에 소남긔 후에 러디 알리라 니(11ㄴ)

ㄴ. 덕 아 거즛 니브 어엿비 너겨(22ㄱ)

ㄷ. 이미 라난 여 리 더욱 히 여(48ㄱ)

15세기 문헌이라면 (63)의 ‘러디, 니브, 리’은 각각 ‘러듀, 니부, 료’ 등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헌에서 일부이지만 이처럼 삽입모음의 수반이 필수적인 환경에서 삽입모음의 소멸을 보인 것은 16세기에 들어서 삽입모음이 동요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3) 변칙적인 문법형태

이 문헌에 나타나는 모든 조사나 어미는 15,6세기 국어에서 쓰이는 형태들이다. 그러면서도 이 문헌에는 다른 어떤 문헌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변칙적인 문법형태의 사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첫째는 감탄법 어미라고 하는 ‘-로다’이다. ‘-로다’는 ‘-도다’가 서술격 조사 ‘-이-’나 미래시상 선어말어미 ‘-리-’ 다음에 연결될 때 쓰이는 교체형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이외에는 ‘-도다’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와 같은 어간에 ‘-도다’가 아닌 ‘-로다’를 직접 연결한 예를 세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도다’나 ‘리로다’를 써야 할 자리에 ‘로다’를 쓰고 있다.

(64) ㄱ. 편안티 몯여 닫티 사라 로다(8ㄱ)

cf. 편안티 몯니 닷티 사라야 리로다(기 8ㄱ)

ㄴ. 뎨의 류에 두디 몯로다(48ㄱ)

cf. 뎨의 뉴에 두디 못리로다(기 48ㄱ)

ㄷ. 내 지블 라도 몯 라로다(43ㄴ)

cf. 내 집을 라도 못 라리로다(기 43ㄴ)

위의 변칙적인 ‘로다’와 ‘몯로다’ ‘라로다’[足]는 중간본에서 모두 ‘리로다’와 ‘못리로다’, ‘라리로다’로 문법적이 되었다.

이기문(2006:182~183)에는 “또 하나 비교를 나타낸 특수조사로 ‘라와’가 있었는데 기원은 확실치 않다. … 이 ‘라와’는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라고 하여 조사 ‘-(이)라와’는 15세기에만 존재했던 문법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 ‘-이라와’가 등장함으로써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65) 비로 내 몬져 앗라와 죽거지라 대(3ㄱ)

이로써 보조사 ‘-(이)라와’의 소멸은 16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사이ㅅ으로 인한 자음 탈락

15세기 국어에서 말음이 ㄹ인 명사에 사이ㅅ이 붙게 되면 명사 말음 ㄹ이 수의적으로 탈락하는 현상이 있었다. ‘믈’[水]을 예로 들어 사이ㅅ이 붙었을 때의 15세기 어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66) ㄱ. 믌결이 갈아디거늘(월인천강지곡 상:39ㄱ)

ㄴ. 여러 가짓 믌고기 먹고(구급방언해 하:57ㄴ)

(67) ㄱ. 미 그처도 믓겨리 오히려 솟고(목우자수심결언해 24ㄴ)

ㄴ. 믓고기 먹고 毒 마자(구급방언해 하:57ㄱ)

위의 15세기 자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동일한 문헌의 같은 어휘 항목에서도 사이ㅅ 앞의 명사 말음 ㄹ의 유지형과 탈락형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사이ㅅ 앞의 ㄹ 탈락은 수의적인 현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ㅅ 앞의 ㄹ 탈락 현상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68) ㄱ. 아 믓 머굼도 아니 머고 닷쇄 고(12ㄴ)

cf. 아이 믈 머곰도 아니 머고 닷쇄 고(기 12ㄴ)

ㄴ. 믓결 가온대셔 봄노 거(36ㄱ)

cf. 믈결 가온대셔 노손 거(기 36ㄱ)

ㄷ. 언 아 섯나래 과 아미 여(21ㄱ)

cf. 언 아츤 선날의 형과 아미 쳥야(기 21ㄱ)

cf. 섨날 朝會 마샤매 갠 비치 도다(초간두시언해 20:17ㄱ)

위의 (68ㄱ~ㄷ)에 쓰인 ‘믓, 믓결, 섯나래’는 모두 ‘믌, 믌결, 섨나래’에서 ㅅ 앞의 ㄹ이 탈락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68ㄱ)의 ‘믓’은 휴지(休止) 앞이어서 사이ㅅ이 필요치 않은 ‘믈’이 쓰여야 함에도 ‘믓’이 쓰였다. ‘믓’의 경우에는 중간본에서 모두 본래의 ‘믈’로 돌아갔으나 ‘섯나래’는 중간본에서 ‘설날’로 돌아가지 않고 초간본을 답습하면서 현실 발음을 따라 ‘선날’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사이ㅅ은 ㅂ 받침 명사에 붙어 쓰이기도 하였는데 그 대상은 ‘집’[家]이라는 명사가 유일한 것이었다. ‘집’에 사이ㅅ이 붙으면 ‘짒’이 되어야겠지만 ‘짒’으로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고 ㅂ이 탈락된 ‘짓’으로 15세기부터 꾸준히 쓰이고 있다. 이 문헌에서도 ‘짓’은 여러 군데서 등장한다.

(69) ㄱ.  짓 안해 남진 겨집비 일 귀나 여(15ㄴ)

cf.  집 안해 남진 겨집비 일 귀나야(기 15ㄴ)

ㄴ.  짓  셰간내 사더라(16ㄱ)

cf.  집  셰간의 사더라(기 16ㄱ)

ㄷ. 뎨 손발 고 쳐쳡븐 밧 짓 사미니(20ㄱ)

cf. 형뎨 손과 발 고 안해와 쳡은  집 사이니(기 20ㄱ)

ㄹ. 네 내 짓일 여리더니라(26ㄱ)

cf. 네 내 짓일 여리더니라(기 26ㄱ)

ㅁ.  짓이를 긔걸더라(30ㄱ)

cf.  집이 긔걸야 더라(기 30ㄱ)

중간본에서는 ‘짓’을 거의 청산하고 ‘집’의 형태를 회복하고 있다. 그리고 초간본에서도 ‘짓’ 대신 ‘집’을 선택한 예가 다음처럼 많이 나타난다.

(70) ㄱ. 됴 집 됴 받 됴 을(4ㄱ)

ㄴ. 집 안해  말   잣 깁블(26ㄱ)

ㄷ. 집 안히 싁싁여(31ㄱ)

ㄹ. 집 뎐디 가솬 사 주어(35ㄱ)

3. 어휘

1) 동일어의 상이한 어형

동일한 어휘가 이 문헌 안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등장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말하자면 동일 문헌에서 신형과 종전의 구형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15세기부터 두 형태가 공존해 왔기 때문에 신형과 구형의 구분이 적절치 않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다음의 5개 어휘가 서로 다른 어형으로 함께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71) 졈-[幼少] : 졂-

ㄱ. 져믄 아 잇더니(2ㄱ) 목이 져머셔 아비 업고(27ㄱ)

ㄴ. 세 아 나하 다 졀머든(24ㄱ) 슌인니 나히 졀멋더니(42ㄱ)

(72) 흐러[散] : 흗터

ㄱ. 흐러 도커늘(3ㄱ)

ㄴ. 그 깁블 흗터 죄 주라(29ㄴ)

(73) 구[叱] : 

ㄱ. 어미 조쳐 구거(17ㄱ)

ㄴ. 여 문늬 나가라 대(8ㄱ)

(74) 수을[酒] : 술

ㄱ. 람미 알오 라 가 그 수을를 아대(10ㄱ-ㄴ) 수을 즐겨 먹고(17ㄱ)

ㄴ. 그러면 술 비조리라 … 어믜게 절고 술 머그니(33ㄱ)

(75) -[設] : -

ㄱ. 각별리 돗 라 안치더라(28ㄱ)

ㄴ. 아 위여 돗 라 여든(17ㄱ)

(76) 니르-[讀] : 닑-

ㄱ. 셔산늬 올아 주으려셔  먹고 글 니르더니(48ㄱ)

ㄴ. 세 아 글 닐기라 보낼 제(17ㄱ)

(71)의 ‘졈다’와 ‘졂다’에 있어서는 중세 국어의 ‘어리다’가 ‘愚’(우)의 뜻을 담당하는 이상 ‘幼少’(유소)의 뜻은 ‘졈다’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간 ‘졈-’의 종성에 현대어처럼 ㄹ이 첨가된 ‘졂-’의 형태가 초간본 ≪이륜행실도≫에 등장하여 ‘졈-’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은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때에 ㄹ이 현실적으로는 종성에서 실현되었을 것이나 표기상으로는 아직 ‘졈-’의 형태가 버티고 있는 형국에 ‘졂-’의 표기가 등장한 것은 퍽 이례적이다. 초간본에 등장한 (71ㄴ)의 ‘졀머든’과 ‘졀멋더니’가 중간본인 기영판에서 도로 ‘져머 잇늘’과 ‘져멋니’로 되어 이전 형태인 ‘졈-’으로 환원한 것을 볼 때 초간본의 ‘졂-’은 대담한 채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72)의 ‘흗-’과 ‘흩-’은 ‘散’(산)의 뜻으로 쓰이는 동일어이다. 단, ㄷ 말음의 ‘흗다’는 15세기에 ㄷ불규칙 동사로서 어간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연결되면 어간이 ‘흘-’로 교체되는 점이 ‘흩다’와는 다르다. (72ㄴ)의 ‘흗터’는 ‘흐터’의 중철 표기이다. 중세 국어에서 ‘흗-’과 ‘흩-’이 자음 앞에서는 둘다 ‘흗-’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분이 불가능한 대신 모음 어미 앞에서는 ‘흐ㄹ-’과 ‘흐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분이 뚜렷해진다. 그런데 이 두 어형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나란히 쓰여 경합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이 문헌에까지 이어지며 결국은 ‘흩-’으로 단일화하여 현대어에 이른다. (73)은 15세기의 ‘구’[叱]이 16세기에 와서 경음화로 ‘’이 된 것인데 구형인 ‘구’과 신형인 ‘’이 한 문헌에서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같은 계열의 ‘구짖다’도 15세기에는 경음화하지 않았으나 16세기에는 경음화한 ‘짖다’가 등장하여 함께 쓰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74)의 ‘수을’과 ‘술’도 함께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사용된 어휘이다. 어형으로 보아서는 ‘수을〉술’의 변천 과정이 예상되나 한글 문헌에 등장하는 시대 배경으로는 동시대의 어형들이다. 그 공존은 이 문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75)는 ‘돗자리를 깔다’ 할 때의 동사가 이 문헌에서 ‘-’로도 나타나고 ‘-’로도 쓰인 것을 말한다. 얼핏 보면 두 어형은 경음화 이전 형과 이후 형이 마치 (73)에서처럼 공존하는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는 훈민정음 이래로 ‘다’[設]란 어형이 이 곳 이외에는 쓰인 용례가 없어 경음화에 의한 ‘다〉다’의 변화를 상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의 동사 ‘-’은 유일례이거나 아니면 동사 ‘-’의 오기 내지 오각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좀더 자세한 검토와 검색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76)에서는 ‘讀書’(독서)를 뜻하는 동사로 ‘닑-’ 외에 특이하게 ‘니르-’가 쓰였다. 이 ‘니르-’[讀]를 두고 안병희(1978)에서는 경상도 방언의 노두(露頭)로 보고 있다. 그것은 이 문헌과 함께 김안국에 의하여 경상도에서 간행된 ≪여씨향약언해≫와 ≪정속언해≫에도 ‘니르/니-’[讀]가 보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간행된 문헌 자료 중에는 이처럼 그 지방의 방언형을 언해문에 섞어 쓴 경우가 있어 ‘니르-’도 방언형으로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닑-’과 함께 ‘니르-’가 쓰였다는 것은 한 문헌 안에 공통 어형과 방언형이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니르-’는 중간본에서 공통 어형인 ‘닑-’으로 교체되었다.

2) 유의어(類義語)

낱말 사이의 유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의미의 세계는 그 경계가 모호하고 분명히 잡히지도 않는 추상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어 직관력이 미치지 않는 중세 국어를 대상으로 낱말 간의 유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초간본에 해당하는 옥산서원본과, 중간본 중의 하나인 규장각본의 기영판을 서로 대조함으로써 양 문헌 사이에 나타난 낱말의 교체 현상을 통해 유의 관계를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는 초간본에서 쓰인 낱말이 중간본에서 그대로 쓰이기도 하고 다른 낱말로 교체되기도 하는 경우와, 반대로 초간본에서는 서로 다른 낱말이던 것이 중간본에 가서는 같은 낱말로 일치를 이루는 경우가 있어 이 두 경우를 통해 유의 관계를 파악하려 한다.

(77) 아/아 : 권당

ㄱ. 허뮈 아들 모도고(4ㄱ) - 허뮈 아음들 모도고(기 4ㄱ)

ㄴ. 아믈 어엿비 너겨(20ㄱ) - 아믈 어엿 너겨(기 20ㄱ)

ㄷ. 아들와 화 일 무르신대(27ㄱ) - 아와 화동 이 무르신대(기 27ㄱ)

ㄹ. 먼 아 다  밥배 먹고(15ㄴ) - 먼 권당히 다  바배 먹고(기 15ㄴ)

ㅁ. 아히 돈 삼만 모도와 주니(40ㄱ) - 권당히 돈 삼만 모도와 주니(기 40ㄱ)

(78) 의식 : 반시

ㄱ. 람미 의식 몬져 맛보니(10ㄴ) - 왕람이 의식 몬져 맛더니(기 10ㄴ)

ㄴ. 의식 쥬가례다히로 더니(31ㄴ) - 의식 쥬가례대로 더니(기 31ㄴ)

ㄷ. 의식 몬져 원의게 조차 질졍이더라(48ㄴ) - 반시 몬져 원뎡의게 조차 질졍더라(기 48ㄱ-ㄴ)

(79) 부쵹- : 려-/쵹-/맛-

ㄱ. 져믄 아 살리 극긔게 부쵹고(14ㄱ) - 져믄 아 손극의게 려시라 고(기 14ㄱ)

ㄴ. 허시도 머리셔 극긔게 부쵹호(14ㄱ) - 허시도 멀니 이셔 극의게 쵹야 닐너 보내요(기 14ㄱ)

ㄷ. 어미 주글 제 그딧게 부쵹야(14ㄱ) - 엄이 죽을 제 그게 맛든(기14ㄱ)

위의 (77)~(79)에서 제시한 초간본의 낱말들은 모두 중간본에서 한 가지 이상의 다른 낱말로 교체되고 있다. (77)의 ‘아/아’은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쓰이는 한편, 일부에서는 한자어인 ‘권당’(眷黨)으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아/아’과 ‘권당’은 유의 관계의 낱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78)의 ‘의식’도 (77)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식’과 ‘반시’도 다같이 ‘必’(필)의 뜻으로 쓰이는 유의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79)의 동사 ‘부쵹-’는 중간본에서 모두 초간본과는 다른 ‘리-’[率], ‘쵹-’[囑], ‘맛-’[委] 등으로 교체되어 있다. 한문 원문을 보면 ‘리-’, ‘쵹-’, ‘맛-’에 대응하는 한자가 모두 똑같은 ‘屬’(속/촉)으로 되어 있어 여기서는 이 세 동사가 ‘부쵹-’와 함께 유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예를 보자.

(80) 값 : 삯

ㄱ. 글 서 주고 갑 바다 먹고 사더라(19ㄱ) - 글 서 주고 갑 바다 먹고 사더라(기 19ㄱ)

ㄴ. 갑시 업서 힘서 질 여(37ㄱ) - 갑시 업서 힘써 흥졍질 여(기 37ㄱ)

ㄷ.  일 고 갑 바다   나니(5ㄱ) -  일 고 삭 바다   나니(기 5ㄱ)

(80)의 ‘값’과 ‘삯’도 유의 관계로 보인다. 초간본의 ‘값’이 중간본에서는 ‘값’으로도 나타나고 ‘삯’으로 교체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 초간본에서는 금전(金錢) 내지 가격이란 뜻과 임금(賃金) 내지 요금이라는 뜻의 의미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값’으로 둘 다를 의미하였지만 중간본에 이르러서는 의미가 분화되어 임금 내지 요금은 ‘값’에서 분화된 ‘삯’이란 말로 나타내게 됨에 따라 품삯에 해당하는 (80ㄷ)의 ‘값’은 중간본에서 ‘삯’으로 교체된 것이다.

이제는 지금까지와 반대로 초간본에서는 서로 다른 낱말로 표현된 항목이 중간본에 가서 그 중의 한 낱말로 통일된 경우이다. 이를 통해서 초간본의 서로 다른 낱말은 유의 관계에 있었던 낱말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81) 말-[掌] : 맛디-

ㄱ. 어미 집븻 이를 맛디니(18ㄱ) - 엄이 집읫 이 다 맛더니(기 18ㄱ)

ㄴ.  여 집븨 이를 말라 시니(18ㄱ) -  어마님이 집의 이 맛 라 시니(기 18ㄱ)

ㄷ. 만 사게 여 더라(13ㄱ) - 맛던 사게 쳥야 더라(기 13ㄱ)

ㄹ. 나 여 마라 (29ㄱ) - 나 야 아라(기 29ㄱ)

(82) 아니완-[惡] : 사오납-

ㄱ. 두 아런 사오나온 거슬 주니(4ㄱ) - 두 아란 사오나온 거슬 주니(기 4ㄱ)

ㄴ. 내 사오나오 벼슬 고(4ㄱ) - 내 사오나오 벼슬 고(기 4ㄱ)

ㄷ. 두 이 아니완히 졉여(19ㄱ) - 두 형이 사오나이 졉야(기 19ㄱ)

(83) 삽지지-[鬪] : 사호-

ㄱ. 세 아 수을 즐겨 먹고 과 사화(17ㄱ) - 세 아이 술 즐겨 먹고 과 싸화(기 17ㄱ)

ㄴ. 새 삿길 자리 밧고아 노하 사화 우지지거(26ㄱ) - 가마괴 삿기 자리 밧고아 노하 사화 우지지거 (기 26ㄱ)

ㄷ. 조 삽지지 마리 잇거(7ㄱ) - 조 사홈 마리 잇(기 7ㄱ)

초간본의 ‘맛디-’와 ‘말-’이 중간본에서는 모두 ‘맛디-’로 통일되어 있다. 물론 ‘알-’을 중간본에서 그대로 답습한 경우도 보이지만 ‘맛디-’와 ‘알-’이 유의 관계임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마찬가지로 (82)의 ‘아니완-’이나 ‘사오납-’도 중간본에서 모두 ‘사오납-’으로 일원화됨으로써 두 낱말 역시 유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3)의 ‘삽지지-’는 중세국어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동사이어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았는데 중간본에서 ‘사홈-’로 교체된 예가 있어 ‘삽지지다’는 ‘사호다’와 유의 관계에 있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3) 미등재 어휘

이 문헌의 언해문에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옛말 사전 주012)

<풀이>옛말 사전은 ≪이조어 사전≫(1964. 연세대 출판부), ≪우리말 큰사전 4 -옛말과 이두-≫(1992. 한글학회), ≪교학 고어 사전≫(교학사. 1997)을 대상으로 하였다.
에 실려 있지 않은 낱말을 여기에 제시하고 그 뜻도 함께 밝혀 보고자 한다.

(84) 자-[炊]

ㄱ. 로조 마라 자여(17ㄱ) - 노조 샹시예 밥 지으라 야(기 17ㄱ)

ㄴ. 네  다티 자여 먹디 아니여(32ㄱ) - 네  다티 밥 지여 먹디 아니야(기 32ㄱ)

(85) (拜封)

후에 님굼미  나 겨시다가(27ㄱ) - 후에 님굼이 봉 나 겨시다가(기 27ㄱ)

(86) [畝]

ㄱ. 받티   나니 잇더니 라 드리고(16ㄱ) - 제 밧 라 드리고(기 16ㄱ)

ㄴ. 됴 받 이삼  사 의을 라(29ㄱ) - 됴 밧 이삼  사 의장을 라(기 29ㄱ)

(87) 즈우리-[趨]

웃녀로 즈우려 나오니(31ㄱ-ㄴ) - 웃녀크로 라나오니(기 31ㄱ)

먼저 (84)의 동사 ‘자-’는 중간본에서 ‘밥 짓-’으로 교체되었고, 또한 한문 원문에서도 대응되는 한자가 ‘炊’(취) 로 되어 있어 이 낱말은 밥을 짓는다는 뜻의 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옛말 사전에 ‘자다’란 동사는 한 군데도 실려 있지 않고 다만 ≪이조어 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에 합성어 형태인 ‘잣어미’가 실려 있으며 이를 ‘부엌의 여자’로 풀이해 놓았다. 다음으로 (85)의 ‘’은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옛말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한문 원문의 ‘封泰山’(봉태산)을 초·중간본에는 모두 ‘ 나 겨시다가’로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런데 ≪오륜행실도≫(1797)에는 ‘封泰山’을 ‘태산에 봉션시고 오시다가’로 번역한 다음, ‘봉션’에 대하여 ‘님군의 공덕을 사겨 명산에 감초는 일이라’고 협주를 달아 놓았다. 이로써 ‘’은 ‘봉션’의 의미인 왕의 공덕을 새겨 명산(名山)에 보존한다는 뜻의 말임을 알 수 있다. (86)의 ‘’도 현재의 옛말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 말이다. 이 낱말은 2회 등장하는데 두 번 다 밭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로 쓰였다. ‘’은 오늘날의 ‘마지기’에 해당하는 말이다. 1마지기라 하면,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대개는 논이 200평, 밭은 300평으로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넓이를 가리킨다. 한문 원문을 보면, ‘무’(畝)를 써서 ‘  → 十畝’로, ‘이삼  → 數千 畝’로 나타내고 있다. 1무(畝)는 30평으로 약 99.17㎡에 해당하는데 ‘ ’을 10무라 하였으니 ‘ ’은 곧 300평의 면적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이는 오늘날의 밭 1마지기에 해당하는 면적이 된다. 따라서 ‘’은 마지기를 뜻하는 옛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7)의 동사 ‘즈우리-’는 안병희(1978:393)에서 중간본에 등장하는 ‘라나오-’의 경상도 방언형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 큰사전≫에만 실려 있고 다른 두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다. ≪우리말 큰사전≫에는 ‘달음질치다’로 풀이해 놓았다.

끝으로 한자어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한어에서는 원칙적으로 한자 하나가 한 낱말이 되지만 국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국어에서도 ‘산(山), 옥(玉), 창(窓), 문(門), 강(江) …’ 등과 같이 한자 하나가 한 낱말이 되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한자는 ‘교(校), 고(高), 석(石), 목(木), 이(耳), 가(家) …’ 등에서처럼 한자 하나로써는 국어의 낱말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혼자서는 낱말이 될 수 없는 한자임에도 엄연히 한 낱말로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이는 현대국어와 많이 다른 점이다.

(88) ㄱ. 두연늬 음(蔭) 니버 벼슬니 여러히리니(19ㄱ)

ㄴ. 갓다가   나마 샤(赦) 나거 올 제(36ㄱ)

ㄷ. 이 죄 지어 폄(貶) 마자 림햇 원늘 가거(39ㄱ)

위의 예문에 쓰인 ‘음(蔭), 샤(赦), 폄(貶)’은 혼자서는 낱말이 될 수 없지만 여기서는 혼자서 낱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옛말 사전에 어휘 항목으로 등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음’(蔭)은 ≪우리말 큰사전≫에 어휘 항목으로 등재되어 ‘음덕’(蔭德)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음’(蔭)에 대해서는 중간본에서도 “두연의 음덕 니버 벼슬니 여러히러라”(기 19ㄱ-ㄴ)와 같이 ‘음’을 자립형식의 ‘음덕’으로 교체하여 안정적인 낱말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샤’(赦)와 ‘폄’(貶)도 자립적인 낱말의 기능을 다하도록 각각 ‘赦免’(사면), ‘貶下’(폄하) 등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4. 번역 양상

≪이륜행실도≫는 다른 언해서와 같이 한문 원문에 언해문을 붙여 간행한 언해서이다. 조선 시대의 불경 언해를 비롯한 각종 언해서들은 대부분 대역(對譯) 체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문장이나 문단 단위로 분절한 한문 원문을 먼저 제시한 다음, 이어서 원문과 같은 방식으로 그에 대한 언해문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륜행실도≫는 이와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48편의 행적 기사는 각편이 일관되게 1장(張)씩으로 되어 있는데 각장의 앞면에는 사주쌍변의 광곽(匡郭) 안에 주인공의 행적 내용을 압축한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한문 원문이 역시 광곽 안에 유계 13행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언해문은 다른 언해서에서처럼 광곽 안에 배열하지 않고, 그림이 있는 앞면과 한문이 있는 뒷면의 난상(欄上) 여백에 배치해 놓았다. 이런 체재는 이미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서 채택했던 방식이다.

그렇다면 번역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를 위해 ≪이륜행실도≫의 언해문을 한문 원문과 대조해 본 결과 양자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흔히 의역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의역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것은 한문 원문을 적게는 한 문장, 많게는 몇 문장을 번역에서 제외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축자적(逐字的)으로 보면 의역의 결과로 인해 양자간에 달라져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런 세밀한 부분은 생략하고, 한문을 번역하면서 제외하였거나 번역이 좀 특이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만 예문을 들어 살펴보려고 한다.

1) 번역의 누락

한문 원문의 일부를 번역하지 않고 건너뛴 번역이 문헌 전체를 통해서 그리 많지는 않으나 다음과 같이 몇 군데에서 발견된다. 누락된 정도는 한 낱말에서부터 한 문장, 나아가 한 문단에 가까울 정도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간본의 기영판에서는 대체로 누락됨이 없이 한문 원문대로 번역하고 있어 해당 부분에 대한 중간본의 언해문을 참고로 덧붙여 두었다. (번역이 누락된 부분을 초간본의 언해문에서는 괄호(……)로 표시하였고, 한문 원문과 중간본의 언해문에서는 밑줄로 표시하였음)

(89) ㄱ.  졧나라해 태 급블 보내오 도 여 길헤 가 태의 긔 가거든 보고 주기라 대 … 공   조차 가다가 … 태 그븨 긔 아 알 셰오 가거 도기 태라 너겨 주기니라(1ㄱ) - 又使伋之齊 將使盜 見載旌 要而殺之 壽止伋 伋曰棄父之命 非子道也 不可 壽又與之偕行 其母不能止 乃戒之 曰壽 無爲前也 壽又竊伋旌 以先行 盜見而殺之(1ㄴ)

cf.  졧나라 태 보내고 도적야 길헤 가 태의 긔 가거 보고 주기라 대  가디 말라 야 태 닐오 아 명을 더디면 식의 되 아니라 대   조차 가더니 그 어미 말리디 몯야 경계야 닐오 앏셔디 말나 더니   태의 긔 아사 알 셰고 가거 도적이 태라 너겨 주기니라(기 1ㄱ-ㄴ)

(89) ㄴ. 이 계과 들헤 나갓다가 도글 맛나 주교려 커 뎨 서르 내 죽거지라 토온대 … 도기 갈 간슈고 닐우 두 분니 어딘 사미어 우리 간대로와 외놋다 고 다 리고 가니라(9ㄱ) - 嘗與季江 適野 遇盜欲殺之 兄弟爭死 肱曰弟年幼 父母所憐愍 又未騁娶 願自殺身濟弟 季江 言兄 年德在前 家之珍寶 國之英俊 乞自受戮以代兄命 盜戢刃 曰二君 賢人 五等不良 妄相侵犯 乃兩釋之(9ㄴ)

cf. 강굉이 계강과 드르헤 나갓가 도을 맛나 주기려 거 형뎨 서르 내 죽거지라 토아 강굉 닐오 아이 졈고 어버이 랑고  댱가를 못 드러시니 내 죽고 아을 살아지라 니 계강 닐오 형이 나토 만코 덕도 만야 나라희 호걸의 사미니 형의 갑새 내 죽거지라 대 도기 칼 간슈고 닐오 두 븐이 어딘 사미어 우리 사오나와 간대로 외놋 고 다 리고 가니라(기 9ㄱ-ㄴ)

(89) ㄷ. 얼운 도연  어미를 간니 그 어미 져기 모디로 그치니라 그 어미 조 … 몯 일로 의 겨집블 브리거든 람믜 겨집도 조차 가 니 그 어미 어려이 너겨 아니더라(10ㄱ) - 至於成童 每諫其母 其母少止凶虐 朱 屢以非理使祥 覽輒與祥俱 又虐使祥妻 覽妻亦趍而共之 朱患之乃止(10ㄴ)

cf. 얼운 되야 양 어미 말니니 그 어미 져기 모디로미 그츠니라 그 어미 조 못 일로 왕샹이 브리거든 왕람이 조차 가 며  못 일로 왕샹의 겨집블 브리거든 왕람믜 겨집도 조차 가 니 그 어미 어려이 너겨셔 아니더라(기 10ㄱ)

(89) ㄹ. 밀리 훼 죽거 아 믓 머굼도 아니 머고 닷쇄 고 …  니브니라(12ㄴ) - 密後亡 儁勺水不入口者五日 雖服喪期年 而心喪六載(12ㄴ)

cf. 왕밀이 후에 죽거 아이 믈 머곰도 아니 머고 닷쇄 고 심상을 여 희 니브니라(기 12ㄱ-ㄴ)

cf. 그 후에 밀이 죽으매 쥰이 닷 몰도 아니 먹고 비록 긔년복을 닙으나 뉵년을 심상니라(오륜행실도 4:22ㄱ)

(89) ㅁ. 버근 예 언 급뎨니라 …(21ㄴ) - 次年彦宵 一擧登第 鄕人大敬服之(21ㄴ)

cf.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이 크게 공경고 항복더라(기 21ㄴ)

ㅂ. 신안니 식 업서  몯여 … 옷 람 슈 주어 내내 니라(43ㄱ) - 顔 無子不克葬 可 辛勤百營 鬻衣相役 卒葬之(43ㄴ)

cf. 신안이 식 업서 송장 못여 거 후개 슈고며 옷 라 슈공 주어 내죵내 영장니라(기 43ㄱ)

(89) ㅅ. 긔 보야호로 퍼디여 … 아히 다 비졉 나거(11ㄱ) - 癘氣方熾 父母諸弟 皆出次于外 (11ㄴ)

cf. 병이 보야호로 퍼디여 어버이며 아히 다 피졉 나거(기 11ㄱ)

ㅇ. 우리 … 간대로와 외놋다 고(9ㄱ) - 吾等不良 妄相侵犯(9ㄴ)

cf. 우리 사오나와 간대로 외놋다 고(기 9ㄴ)

(89ㄹ)에는 초간본의 언해문에서 번역이 누락된 한 구절을 중간본의 언해문에서도 그대로 생략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을 생략하지 않고 번역한 ≪오륜행실도≫(1797)의 언해문을 추가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볼 때 초간본보다는 중간본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 어순이 도치(倒置)된 번역

낱말이나 구절을 한문의 어순대로 번역하지 않고 어순을 바꾸어 번역한 경우를 들어 본다.

(90) ㄱ.  어믜 난 이 됴며 사오나오미 고디 아니려 코(25ㄱ) - 以一母所生 可使兄弟苦樂不均耶(25ㄴ)

cf.  어믜 난 동이 사오나오며 됴호미 고디 아니타 고(기 25ㄱ)

ㄴ. 버드나모 느릅남기  브터 니 나거(25ㄱ) - 宅後楡柳爲之連理(25ㄴ)

cf. 집 뒤헤 느릅나모와 버드남기  브터 니어 나거(기 25ㄱ)

ㄷ.  삭기 어미와 모여(1ㄱ) - 其母 與朔謀(1ㄴ)

cf. 그 어미 삭이와 야(기 1ㄱ)

ㄹ. 두연니 나히 열 다여신 제 어미 하의 잇 젼시를 어러 가고 할미도 죽고(19ㄱ) - 其母改適河陽錢氏 祖母卒 衍年十五六(19ㄴ)

cf. 제 어미 하양의 잇 젼시를 어러 가고 할미도 죽고 두연이 나히 열 다여신 제(기 19ㄱ)

언해문의 밑줄 친 부분과 한문의 밑줄 친 부분을 서로 대조해 보면 초간본의 언해문은 한문의 어순과 반대로 되어 있다. (90ㄱ)의 예만 하더라도 한문의 ‘苦樂’(고락)을 초간본에서는 ‘됴며 사아나오미’로 번역하여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러나 중간본에서는 ‘사오나오며 됴호미’로 고쳐 한문 ‘苦樂’의 구성 순서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90ㄷ,ㄹ)은 언해문의 통사적 구성이 한문의 배열 순서와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여기서도 초간본에서는 양자간에 불일치를 보이는가 하면 중간본의 언해문에서는 한문과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중간본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유동적인 번역

동일한 한자에 대해서 그때 그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번역한 예를 초간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數’(수)자를 예로 들어 그 번역 실태를 살펴보려 한다.

(91) ㄱ. 均 數諫止不聽(5ㄴ) - 간여 말라 여두 듣디 아니커(5ㄱ)

cf. 아이 조 간야 말라 야도 듣디 아니커(기 5ㄱ)

ㄴ. 覽 年數歲(10ㄴ) - 람미 너덧 설 머근 제(10ㄱ)

cf. 왕람미 두어 설 머근 제(기 10ㄱ)

ㄷ. 不數年(25ㄴ) - 두  후에(25ㄱ)

cf. 두어  못야셔(기 25ㄱ)

ㄹ. 徒衆數百人(45ㄴ) - 뎨 일기나 더라(45ㄱ)

cf. 뎨 이이나 더라(기 45ㄱ)

위의 (91)에 쓰인 한문의 ‘數’에 대해서 초간본의 언해문에는 모두 다르게 번역되었다. (91ㄱ)에서는 번역을 하지 않았고, (91ㄴ)에서는 ‘數’를 ‘너덧’[四~五]으로 번역하였으며, (91ㄷ)에서는 ‘두’[二], (91ㄹ)에서는 ‘일’(一)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일관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유동적인 번역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중간본에서는 초간본을 답습하지 않고 ‘조, 두어, 두어, 이(二)’ 등으로 비교적 일관성 있게 번역하고 있어 대조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이 밖에 수를 가리키는 ‘千’(천)의 번역이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끈다.

(92) 公私逋負 尙千餘緡(21ㄴ) - 환자 녜 삼쳔니 남더니(21ㄱ)

cf. 환자 댱니 먹은 거시 장 만터라(기 21ㄱ)

중간본에서는 ‘千’을 수치로 나타내지 않고 정도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의역을 하고 있는 반면에 초간본에서는 ‘삼쳔’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로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삼쳔’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는 ‘烏’(오)자의 번역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까마귀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런데 이 글자에 대한 번역도 일정하지가 않다.

(93) ㄱ. 乃易置庭樹烏雛(26ㄴ) - 헷 남긧 새 삿길 자리 밧고아 노하(26ㄱ)

cf. 헷 남긔 가마괴 삿기 자리 밧고아 노하(기 26ㄱ)

ㄴ. 烏鵲皆翔集不去(22ㄴ) - 새 가마괴 라와 가디 아니더라(22ㄴ)

cf. 가막가치히 라와 가디 아니더라(기 22ㄴ)

(93ㄱ,ㄴ)의 예문을 보면 초간본에서 ‘烏’를 한 번은 ‘새’로 번역하였고 한 번은 ‘가마괴’로 번역하였다. (93ㄴ)에서 ‘烏鵲’(오작)을 ‘새 가마괴’로 번역한 것은 ‘烏’를 ‘가마괴’로, ‘鵲’을 ‘새’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니 ‘烏’는 번역에서 ‘새’가 되었다가 ‘가마괴’가 되었다가, 그리고 ‘새’라 하면 ‘烏’도 되고 ‘鵲’도 되고 하는 등의 유동적인 번역을 초간본은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중간본은 역시 한자의 본뜻대로 ‘烏’는 ‘가마괴’, ‘鵲’은 ‘가치’로만 고정되게 번역하였다.

4) 인용구문의 대동사(代動詞)

중세 국어에서도 인용구문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쓰였던 인용구문의 문형은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많이 쓰였던 인용구문의 한 형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94)  帝釋이 여듧 王 닐오 “우리 諸天토 舍利 더러 주쇼셔 아니 주시면 싸호미 나리다” 고(석보상절 23:55ㄱ)

위에서 든 인용구문의 구성요소를 보면, 먼저 상위문의 주체-帝釋-와 객체-여듧 王-가 있고 그 다음으로 상위문의 서술어라 할 수 있는 화법 동사-닐오-가 있다. 화법 동사에 이어 인용문이 나오고 그 뒤에 문장을 연결하거나 종결해 주는 대동사 ‘-’가 쓰였다. 대동사 ‘-’는 인용문에 연결되는, 화법 동사 ‘니-’와 의미상으로 동일한 말이지만, 한 문장에서 ‘니-’를 반복해서 사용하기는 어려우므로 ‘니-’를 대신하여 ‘-’가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대동사 ‘-’에는 인용구문 전체에 해당하는 서법과 시제, 높임법 등의 문법 요소가 ‘-’에 통합되어 나타나며, 그러므로 대동사 ‘-’의 존재는 인용구문에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초간본 ≪이륜행실도≫에 등장하는 인용구문에서도 인용문 뒤의 ‘-’ 대동사는 대부분 쓰이고 있지만, 반면에 생략되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상당수 발견된다. 그만큼 중세 국어의 인용구문에서 대동사 ‘-’의 생략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륜행실도≫의 다음 예문에서는 대동사 ‘-’가 어김없이 쓰이고 있다.

(95) ㄱ. 도 듣고 이여 도긔게 가 닐우 “내 아 오래 여 누엇더니 날만 지디 몯니라” 대(6ㄱ)

ㄴ. 도들히 서르 닐우 “아로 아 밧고니  어디도다” 고 다 주어 보내니라(12ㄱ-ㄴ)

ㄷ. 사름미 닐우 “어디로미 감홰라” 더라(25ㄱ)

그러나 다음과 같이 대동사 ‘-’가 생략된 인용구문도 적지 않다. 다음은 한 대문을 옮겨 온 것이다.

(96) 어미 닐우듸 “두  여희여 머리셔 닐운 마 엇디 미드리오” 닐우듸 “거은 유신 사미라 그릇디 아니리라” 어미 닐우듸 “그러면 술 비조리라” 그 나래 과연히 와 어믜게 절고 술 머그니 거은 범식긔 라 후에 원기  되여셔 닐우듸 “내 죽쟈 사졋 벋 범거을 몯 보애라” 이고 주그니 범식기 메 원기 블러 닐우듸 “거아 내 아모 날 주거 아모  니 날 닛디 아니커든 미처 오나라” 범식기 여가니 마 발인여 무들 해 가쇼듸 곽기 아니 가거 그 어미 디퍼 곽글 머믈워 두고 보니   고 우르고 오거 어미 닐우듸 “이 거이로다” 거이 와 예 두드리며 닐우듸 “니거라 원가 길히 다니 이리셔 여희져” 범식기 곽글 자바 니 나 니거늘 이셔 묻고 나모 심므고 가니라(33ㄱ-ㄴ)

cf. 어미 닐오 “두  여희여 멀니셔 닐은 말을 엇디 미드료” 대 원이 닐오 “거경은 유신 사이라 그릇디 아니링이다” 야 어미 닐오 “그러면 술 비즈리라” 그 날애 과연히 와 어믜게 절고 술 머그니 거경은 범식의 라 후에 원이 병 디터셔 닐오 “내 죽쟈 사쟈 사괴 벗 범식을 못 보애라” 고 이윽고 죽으니 범식이 에 원이 블러 닐오 “거경아 내 아모 날 죽어 아몹  송장니 날 닛 아니커든 미처 오나라” 범식이 려가니 셔 발인야 무들 해 가쇼 곽이 아니 가거 그 어미 곽을 지며 머믈러 두고 보니 흰 게 울고 오거 어미 닐오 “이 반시 거경이로다” 거경이 와 상여 두드리며 닐오 “니거라 원아 길히 다니 이리셔 여쟈” 범식이 곽을 자바 의니 곽이 나아 니거 거긔 이셔 뭇고 나무 시므고 가니라(기 33ㄱ-ㄴ)

위에서 보듯이 (96)의 예문에는 직접 인용문이 7회나 나오지만 초간본에서 그 인용문을 문법적으로 담당해 주는 대동사 ‘-’가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중간본에서는 초간본의 생략된 대동사를 세 군데서 복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후대로 내려올수록 대동사 ‘-’의 사용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륜행실도≫에서도 중간본에서 대동사가 복원된 예를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97) ㄱ. 겨집비 만니 니이려 닐우 “가난히 사로미 이러니 편안티 몯여 닫티 사라 로다” 니이 거즛 답호 “수울 비라 와 아 모도고 호리라” 몯거(8ㄱ)

cf. 겨집비 만니 니츙이려 닐오 “가난히 사로미 이러니 편안티 몯니 닷티 사라야 리로다” 대 니츙이 거즛 답호 “술 비즈라 과 아 모도고 호리라” 고 못거(기 8ㄱ)

ㄴ. 존니 … 닐우 "뎨 손발 고 쳐쳡븐 밧 짓 사미니 엇디 밧 사름믈 몬져 코 손발를 후에 리오" 아믈 어엿비 너겨 남진 겨집 얼여 나토 실소 아니케 더라(20ㄱ)

cf. 댱존이 … 닐오 "형뎨 손과 발 고 안해와 쳡은  집 사이니 엇  집 사믈 몬져 고 손바 후에 료" 더라 아믈 어엿 너겨 남진 겨집 얼여 나토 그릇되게 아니더라(기 20ㄱ)

ㄷ. 벋 곽이 와 닐우듸 “내 아비 여 의원늬게 고티라 니 도 만히 달라 니 내 지블 라도 몯 라로다” 후개 어엿비 너겨(43ㄴ)

cf. 벗 곽이 와 닐오 “내 아비 병여 의원의게 고티라 니 돈 만히 달라 니 내 집을 라도 못 라리로다” 대 후개 어엿비 너겨(기 43ㄴ)

그러나 중간본에서도 초간본의 대동사 생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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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01)
세종실록, 10년 10월 3일(辛巳) : 御經筵 上嘗聞晋州人金禾弑父之事 矍然失色 乃至自責 遂召群臣 議所以敦孝悌 厚風俗之方 判府事卞季良曰 請廣布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尋常讀誦 使之駸駸然入於孝悌禮義之場 至是 上謂直提學偰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 孝行特異者 亦皆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 循對曰 孝乃百行之原 今撰此書 使人人皆知之 甚善
주002)
≪慕齋集≫ 권15. 〈先生行狀〉
今上十一年 丙子 公啓曰 祖宗朝 撰三綱行實 形諸圖畵 播之歌詠 頒諸中外 使民勸習 甚盛意也 然長幼朋友 與三綱兼爲五倫 以長幼推之敦睦宗族 以朋友推之鄕黨僚吏 亦人道所重不可闕也 以臣迂濶之見 當以此二者 補爲五倫行實 擇古人善行 爲圖畵詩章 頒諸中外 敦勵而獎勵之 上深然之
주003)
〈형제도〉 ⑫ 王密易弟
주004)
〈종족도〉 ② 公藝書忍
주005)
〈종족도〉 ③ 陳氏群食
주006)
〈사생도〉 ⑤元定對榻
주007)
중종실록 33년 7월 7일(戊寅) : 禮曹判書金安國啓曰 三綱行實則旣已刊行矣 五倫之中 長幼朋友二事 別無擧行 故臣爲慶尙道觀察使時 撰集二倫書 兄弟之類 附親戚 朋友之類 附師生 書成印布 使一道之人 無不知之 臣意以此二倫書 廣印頒布至當 傳曰如啓
주008)
중종실록 34년 8월 24일(戊子) : 命頒賜二倫書于百官
주009)
영조실록 6년 8월 6일(壬寅) : 命賜三綱行實二倫行實于政院玉堂翰苑
주010)
영조실록 5년 8월 27일(己巳) : 命校書館, 印出三綱行實 分送諸道 使監營 刻印廣布
주011)
김동소 (2009).
주012)
<풀이>옛말 사전은 ≪이조어 사전≫(1964. 연세대 출판부), ≪우리말 큰사전 4 -옛말과 이두-≫(1992. 한글학회), ≪교학 고어 사전≫(교학사. 1997)을 대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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