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여훈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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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여훈언해
역주 여훈언해

중국 명나라에서 처음 지어진 「여훈」은 명나라 세종의 어머니 장성자인황태후가 1508년에 지었는데, 그 후 세종이 황제가 되어 1530년에 다시 「여훈」을 간행하면서 어제서문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번역한 「여훈언해」는 1532년(중종 27) 최세진이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하였음이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전하지 않고, 고려대학교 도서관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언해」가 있는데 163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김문웅(金文雄)

∙ 경북대학교 학사, 석사
∙ 계명대학교 박사
∙ 한글학회 대구지회장 역임
∙ 국어사학회장 역임
∙ 한국어문학회장 역임
∙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저서 및 논문〉

『편입 대학국어』(1977)
『15세기 언해서의 구결 연구』(1986)
『역주 구급방언해 하』(2004)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3』(2008)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6』(2008)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7』(2009)
『역주 신선태을자금단 간이벽온방 벽온신방』(2009)
『역주 정속언해 경민편』(2011)
『역주 이륜행실도』(2011)
“접두사화고”(1977)
“불완전명사의 어미화”(1979)
“「ㆆ」의 범주와 그 기능”(1981)
“‘-다가’류의 문법적 범주(1982)
“근대 국어의 표기와 음운”(1984)
“근대 국어의 형태와 통사”(1987)
“옛 부정법의 형태에 대하여”(1991)
“한글 구결의 변천에 관한 연구”(1993)
“활자본 『능업경 언해』의 국어학적 고찰”(1999)
“설총의 국어사적 고찰”(2001)
“구결 ‘’의 교체 현상에 대하여”(2003)
“방송 보도 문장의 오류 분석”(2004)

전자 우편 mukim@dnue.ac.kr

역주위원

  • 여훈언해 :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 교열·윤문·색인위원

  • 여훈언해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리의도 박병천
  • 성낙수 오명준 이창림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 정태섭 조오현 차재경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여훈언해』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전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ㆍ9ㆍ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4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ㆍ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회가 2013년 말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정음 문헌과 책 수는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ㆍ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14) 3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ㆍ7ㆍ8ㆍ9ㆍ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 3책, 『연병지남』 1책, 『병학지남』 1책,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 1책,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1책, 『사리영응기』 1책, 『백련초해』 1책, 『칠대만법ㆍ권념요록』 1책 등 모두 99책에 달한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 가운데 『여사서언해』 등 지난해에 이어 16세기 ~18세기 문헌을 역주할 예정이다. 특히 선조들의 여성을 위한 교훈서를 중점적으로 발간할 것이다.

『여훈언해(女訓諺解)』는 중국 명나라에서 찬술(撰述)된 한문본 『여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처음 『여훈』은 명나라 세종의 어머니 장성자인 황태후가 지었다. 그 시기는 명나라 10대 황제 무종(武宗) 때인 1508년으로 밝혀졌는데, 그것은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의 말미에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후 세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1530년에 다시 『여훈』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세종의 「어제 여훈서」를 싣게 된다. 이러한 명나라 『여훈』을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여훈 언해』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이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임이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현재 실책이 전하는 언해본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 언해』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저본(底本)인 명나라 『여훈』의 원문에 구결을 달고 번역만 하였을 뿐, 간행 연대나 간행처 등에 관련한 기록이 따로 없어 더 이상 간행에 대하여 언급할 내용이 없다. 다만 17세기 우리말을 잘 보여주고 있어 163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번에 우리 회에서 펴내는 이 역주본의 저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을 사용하였으며, 연구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이 책 뒤에 부록으로 실었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ㆍ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맡아주신 대구교육대학교 김문웅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주신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2014년 10월 20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된 것은 한글을 깨우침은 물론, 당시 오로지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수많은 문헌과 학습서를 백성들이 쉽게 배워 익힐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또한 그 문해 효과는 이미 조선시대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마다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는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하게 변천한 우리말을, 전문가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여훈언해』의 저본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본으로 하였고 뒤에 영인을 실었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구결원문·언해문, 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권(卷), 장(張), 앞쪽[ㄱ]·뒤쪽[ㄴ]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여훈언해 상권 9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寬관和화야 大대상9ㄱ孝효의 귿

여훈언해 하권 9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自하9ㄴ昔셕之지待外외戚쳑이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띄어쓰기는, 한자에 독음과 토를 붙인 구결원문은 토를 붙인 데만 띄었고, 언해문은 현대문법에 따라 띄어 썼다.

(5) 이 책의 한자말은 모두 독음을 한자 옆에 적었는데 한자의 한글 표기가 당시의 발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원문대로 살려 표기하였다. 다만 이에 대한 현대문 주석의 올림말은 현대 발음대로 하였고, 말밑 한자를 괄호에 넣었다.

(6) 이 책의 저본으로 한 『여훈언해』 만송문고본의 체재가 다른 문헌과는 특이하게 한문 원문 전체를 먼저 실었는데, 이는 입겿 원문과 똑같기 때문에 별권(別卷)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고, 이를 맨 뒤로 옮겨 실어 편집하였다.

(7) 한자 입겿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문 풀이·주석과 구별하였고, 원문이나 언해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의 협주는 편의상 【 】 표시로 묶어 나타내었으며, 이에 대한 현대문도 같게 하였다.

(8) 찾아보기는 언해문의 낱말을 전수 조사 방식으로 모두 찾을 수 있도록 하였고, 한자 독음을 표기한 낱말과 순 옛말 표기 낱말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아울러 한자 용어 주석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배열 순서는 맞춤법에 따랐다.

『여훈언해』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여훈(女訓)』과 『여훈 언해(女訓諺解)』의 간행

『여훈 언해』는 중국 명나라에서 찬술(撰述)된 한문본 『여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그러면 한문본 『여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찬술된 책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훈 언해』의 맨 앞에 나오는 「어제 여훈서(御製女訓序)」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제 여훈서」는 명나라 11대 황제인 세종(世宗)이 1530년에 쓴 글이다. 아래 「어제 여훈서」의 시작 부분을 보자.

짐(朕)의 어머니인 장성자인 황태후께서 옛날 제후왕의 집에 계실 때 일찍이 한 편의 글을 지으시니, 그 서명(書名)이 이른바 『여훈(女訓)』이다.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 공예연인관목순성헌황제(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께서 친히 쓰신 글을 내리셔서 책의 앞머리에 올려놓으시고, 어머니께서 또한 스스로 그 다음에 서문을 쓰셨다.
(朕聖母章聖慈仁皇太后 昔在藩邸 嘗著一書 名曰女訓 朕皇考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親灑奎章 冠諸卷首 聖母亦自序於其次)〈여훈서:1ㄱ〉

위의 기록에서 『여훈』은 명나라 세종의 어머니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가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시기는 명나라 10대 황제 무종(武宗) 때인 1508년으로 밝혀졌는데, 그것은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 말미에 ‘大明正德戊辰春王正月上浣日書’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후 세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1530년에 다시 『여훈』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세종의 「어제 여훈서」를 싣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여훈』을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기록은 다음의 『중종 실록』에서 발견된다.

오위장 최세진이 여훈을 번역하여 올리니 전교하기를,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五衛將崔世珍 進飜譯女訓 傳曰令校書館印出)〈중종실록 27년, 9월 12일〉

위의 기록을 통해서 『여훈 언해』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이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위의 기록에 나타난 것 이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재 실책이 전하는 언해본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 언해』 주001)

이 책은 1990년 1월 15일, 홍문각에서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한 바 있다. 이 책도 서명(書名)은 『女訓』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여훈』이라 함은 모두 명나라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번역 간행한 책은 『여훈 언해』라 해서 한문본 『여훈』과 구별하고자 한다.
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저본(底本)인 명나라 『여훈』의 원문에 구결을 달고 번역만 하였을 뿐, 간행 연대나 간행처 등에 관련한 기록이 따로 없어 더 이상 간행에 대하여 언급할 내용이 없다. 이런 가운데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추정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만송문고 소장본이 인조(仁祖) 연간, 특히 1620~164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도 동의하는 바인데, 그것은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에 나타난 언어 현상이 17세기 국어의 특징에 매우 부합되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다음에서 보듯이 『인조 실록』에 여훈을 언급한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임금이 국장 도감에 하교하기를, “대행 왕후는 부드럽고 온순하고 정결하고 조용한 자품을 타고났으며, 인자하고 후덕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잠저에 있을 때부터 시부모님을 잘 섬기어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했으며, 나를 동기간처럼 대하여 사친(私親)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잘하였다. 그리고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서 훌륭히 여훈(女訓)을 준행하였다.”라고 하였다.
(上下敎于國葬都監曰 大行王后 稟柔順貞靜之資 有仁厚恭儉之德 自在邸時 善事舅姑 誠孝篤至 待予同氣 有踰私親 治家有法 克遵女訓)〈인조실록 14년, 2월 3일〉

위의 기록에서 『여훈 언해』의 간행 연대를 직접 언급한 것은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여성의 범절과 법도를 강조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가 이때(인조 14년(1636)) 이미 보급된 것으로 볼 때, 그렇다면 1620~1630년대에 간행되었던 책이 아닌가 한다.

중종 때 간행된 최세진의 『여훈 언해』는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만송문고본의 『여훈 언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를 대상으로, 어떻게 언해가 이루어졌으며 언해본의 서지적 사항과 언어 현상은 어떤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책에는 어제서(御製序)부터 맨 끝의 후서(後序)까지 서문(序文)이 모두 네 개나 있다. 맨 앞에 「어제 여훈서(御製女訓序)」(1530년)가 있고, 그 다음에 순일도인(純一道人)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여훈서(女訓序)」(1508년) 가 붙어 있다. 이어서 같은 시기에 쓴 것이지만 쓴 사람이 나타나 있지 않은 「여훈서(女訓序)」(1508년)가 또 있다. 그런 다음에 본문이 다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여훈 후서(女訓後序)」(1530)가 있다. 여기서도 쓴 시기는 밝혀 놓았으나 쓴 사람은 역시 명기(明記)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네 가지 서문의 끝에 각각 나타나 있는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그 연대를 ( ) 안에 부기해 둔다.

(1) 御製女訓序 嘉靖庚寅季餘十有九日 (1530)
(2) 女訓序 正德戊辰十有一月長至之吉 大明興國純一道人書于中正齋 (1508)
(3) 女訓序 大明正德戊辰春王正月上浣日書 (1508)
(4) 女訓後序 嘉靖九年十二月二十六日 (1530)

위의 네 가지 서문의 끝에 있는 기록에는 한결같이 서문을 쓴 사람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2)의 서문 끝에는 순일도인(純一道人)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순일도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어 (2)의 서문도 쓴 사람을 모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모두 쓴 사람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서문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위의 서문들이 누구의 글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가 있다.

맨 먼저 (1)의 「어제 여훈서」는 어느 임금이 썼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끝의 기록에 나타난 연호가 바로 말해 주고 있다. 가정(嘉靖)은 명나라의 11대 황제 세종(世宗) 주후총(朱厚摠)의 연호로서 1522~1566년의 45년간 사용되었던 이름이다. 이것으로 (1)의 서문은 명나라 세종이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2)와 (3)의 「여훈서」를 쓴 사람에 대해서도 (1)의 「어제 여훈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명나라 세종은 「어제 여훈서」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보필하는 신하인 소(少)와 스승인 총(璁) 등이 이르기를, 짐이 마땅히 서문을 써야 할 것이라 하고, 이제 와서 예관들이 또 이르기를 짐이 마땅히 서문을 써서 어머님의 은덕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다함이 없이 자세하게 보이라 하지만, 짐이 가볍게 거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짐의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이미 앞머리에 서문을 쓰셨고, 또 어머님께서 그 다음에 서문을 쓰셨으니 이제 남아있는 쓸 자리가 없는지라, 그래서 짐이 다시 덧붙여 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 때문에 그 날 어머님 앞에 나아가 글을 쓸 것인지를 여쭈매 곧 어머님의 명을 받게 되니 이르시기를, 네가 그 서문을 써서 모두 마땅히 전하게 하라고 하셨다.
(先該輔臣少傅璁等 謂朕宜爲之序 至是 禮官時等 又謂朕宜序之 闡揚聖母恩德 于以昭示無窮 朕未之輕擧 以爲朕 皇考 旣序諸首 聖母又序諸次 已無餘蘊矣 又不待朕復贅之矣 是日因詣聖母前 奏陳書完 卽蒙慈命曰 汝其序之 庶 可爲傳)〈여훈서:1ㄴ~2ㄱ〉

위의 글을 보면, 『여훈』의 앞머리에는 명나라 세종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쓴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이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두 서문 중의 앞엣것인 (2)의 「여훈서」는 세종의 아버지가 쓴 글이고, 그 다음 것인 (3)의 「여훈서」는 세종의 어머니가 쓴 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2)의 「여훈서」를 쓴 사람으로 되어 있는 순일도인(純一道人)의 실체는 다름 아닌 세종의 생부(生父)인 흥원왕임이 밝혀졌다. 흥원왕은 명나라 8대 황제인 헌종(憲宗)의 아들이며, 9대 황제 효종(孝宗)의 이복 동생으로 원래는 지방 국가의 제후였으나 그의 친자인 세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제 예종(睿宗)으로 추존된 사람이다. 그의 생몰 연대(1476~1519)에서 알 수 있듯이 (2)의 서문을 쓸 때(1508)는 그가 생존하였으나 세종이 (1)의 어제 서문을 쓸 당시(1530)는 친부(親父) 예종의 사후(死後)이기 때문에 서문에서 예종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3)의 「여훈서」를 쓴 세종의 생모도 원래 흥원왕의 번비(藩妃)였으나 아들 세종이 황제가 되자 아버지 흥원왕이 예종이 되면서 어머니는 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가 되었으며, 이어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로 존숭받게 된 것이다. 장성자인 황태후는 『여훈』을 편찬하고 부군(夫君)의 서문과 함께 자신의 서문도 차례로 싣고 있다.

끝으로, (4)의 「여훈 후서」는 명나라 세종 황제의 황후가 쓴 서문이다. 후서는 『여훈』을 편찬하게 된 경위와 여성 교화서의 유래를 들면서, 『여훈』에서 가르치는 바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편찬자인 세종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세종의 비(妃)에게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서에서 필자인 세종의 황후는 자신을 1인칭 대명사인 ‘첩(妾)’으로 지칭하였고 시어머니인 세종의 모후(母后)에 대해서는 성모(聖母)로 칭하고 있다. 「여훈 후서」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비로소 내가 예전에 만든 『여훈』을 네게 주노니 네가 마땅히 힘을 부지런히 다하고 힘써 닦아 거의 나의 글로 책을 만들어 그것으로 장래를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오직 본받으며 공경하여 무심하고 소홀히 하지 말며 잊지 마라.”고 하셨다. 부족한 제가 명(命)을 정중히 받고 물러나 두 번 머리를 조아리고 일러 말하기를, “오호라, 지극하도다. 우리 성모의 왕성하신 마음이여.” … 우리 임금님의 완전하신 효와 깊으신 어짐이 천성에 바탕하여 계시므로 비록 깊은 궁궐에 계시지만 조회(朝會)에 나오실 때와 다름이 없이 지극히 공경하신 교화(敎化)가 나타나서, 부족한 제가 비박(菲薄)한 덕으로 위로 임금님께 상대가 됨을 얻었사오니, 항상 두려워서 능히 여섯 궁(宮)의 어른이 되지 못할까 염려되는 바이다. 매일 오직 이 편찬한 것을 외워서 음미하고 이를 생각하며 이를 공경함으로써 빛난 교훈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구하도다.
(自今伊始以吾昔著女訓 授爾 爾宜勤力勉脩 庶不負吾著書以望於將來之意 爾惟體之敬之 勿忽勿忘 妾拜命而退 再稽首而言曰 嗚呼至矣 我聖母之盛心也 … 仰惟我皇上 純孝深仁 本於天性 雖處深宮 無異臨朝而至敬之化 刑焉 妾以菲德 乃獲上配至尊 恒惕惕然懼弗能爲 六宮之長 日惟誦味是編 念玆敬玆 以求無忝於光訓云)〈여훈 후서:21ㄴ~23ㄴ〉

위에 인용한 후서(後序)의 글 맨 앞부분에 있는 구절 “내가 예전에 만든 『여훈』을 네게 주노니”에서 ‘내’는 『여훈』을 지은 장성자인 황태후를 말하고, 『여훈』을 받은 ‘네’는 황태후의 며느리가 되는 세종의 황후를 가리킨다. 이 밖에 윗글의 뒷부분에 있는 구절 “부족한 제가 … 여섯 궁(宮)의 어른이 되지 못할까 염려되는 바이다.”에서 ‘여섯 궁’은 중국의 궁중에 있었던 황후의 궁전과 부인 이하의 다섯 궁실을 말하므로, 여섯 궁의 어른은 바로 황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황후 자신이 여섯 궁의 어른으로서 그 본분과 그에 따른 제구실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4)의 「여훈 후서」는 세종의 황후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훈 언해』에 있는 네 가지 서문을 검토하면서 쓴 시기와 쓴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 결과 명나라에서 간행된 『여훈』은 11대 황제 세종의 모후(母后)인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에 의해 편찬되었고, 명나라 10대 무종(武宗) 때인 1508년과 세종 때인 1530년의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된 사실이 파악되었다. 그런데 『세조 실록』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여훈』이 또 등장한다.

우승지 이극감과 세자 필선 홍응에게 명하여 전대(前代)의 여훈(女訓)을 찬술(撰述)하여 바치게 하였다.
(命右承旨李克堪 世子弼善洪應 撰前代女訓以進)〈세조실록 5년, 8월 21일〉

위의 기록에 의하면 세조 5년(1459)에 전대(前代)의 『여훈』을 찬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대(前代)의 『여훈』은 앞에서 살펴본 1508년과 1530년에 각각 간행된 『여훈』과는 또 다른 책인 듯하다. 어찌 보면 전대(前代)의 『여훈』은 언해된 책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훈』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간행된 세 가지 책이 있음을 일단 알게 되었지만 그 책들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 이제 세 가지의 한문본 『여훈』 중에서 우리의 언해본은 어느 책을 대상으로 하여 언해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1532년에 간행된 최세진의 번역본은 1459년 판, 1508년 판, 1530년 판의 세 『여훈』 중에 어느 책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인지, 그리고 17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또 세 책 중의 어느 것을 언해한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후자의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에는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 서문 가운데 1530년에 쓴 「어제 여훈서」와 「여훈 후서」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송문고본은 1530년에 간행된 한문본 『여훈』을 언해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전자인 1532년에 찬술한 최세진의 번역본이다. 간행 연대로만 본다면 한문본 세 책이 모두 최세진의 번역본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세 책이 다 번역본의 저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1530년에 간행된 한문본 『여훈』은 최세진의 번역본(1532)보다 불과 2년밖에 앞서지 않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촉급하다고 보고, 홍윤표 교수가 언급한 대로 주002)

홍윤표(1990). 『여훈언해』 해제. 『여훈언해ㆍ규합총서』 영인본. <현대말>홍문각.
최세진이 1530년 판 『여훈』을 가지고 번역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게 볼 때 최세진의 번역본은 전대(前代)의 『여훈』이나 1508년 판 『여훈』 중 어느 하나를 두고 번역한 책으로 보인다.

2. 『여훈 언해』의 체재와 내용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2권 2책의 목판본이다. 이 책은 다른 언해본과는 달리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첫째 부분은 한문본의 원문을 전부 그대로 전사(轉寫)해 놓은 것이다. 한문본 부분에 나타나 있는 목차를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여훈서(女訓序)
-여훈서(女訓序)
-여훈목록(女訓目錄)
-여훈(女訓)
규훈 제일(閨訓第一), 수덕 제이(脩德第二), 수명 제삼(受命第三), 부부 제사(夫婦第四), 효구고 제오(孝舅姑第五) 경부 제육(敬夫第六) 애첩 제칠(愛妾第七) 자유 제팔(慈幼第八) 임자 제구(姙子第九) 교자 제십(敎子第十) 신정 제십일(愼靜第十一) 절검 제십이(節儉第十二)
-여훈후서(女訓後序)

이렇게 해서 한문본 부분이 끝나면 뒤이어 둘째 부분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이 언해본이다. 언해본 부분은 「어제 여훈서」부터 「여훈 후서」까지 목차별로 먼저 한문 원문에 한글로 된 구결(口訣)을 첨가한 구결문을 앞에 제시하고, 이어서 국한 혼용의 언해문을 게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언해본에서 볼 수 있는 대역(對譯) 형식의 체재이다. 그런데 언해본 부분에서는 언해문에 있는 한자뿐만 아니라 구결이 달려 있는 한문 원문에도 일일이 한자음을 달아 놓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 책의 독자층인 부녀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면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의 2책은 각각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건(乾)ㆍ곤(坤)의 2책 중에 건책(乾冊)에는 먼저, 원본인 한문본의 전문이 그대로 실려 있고, 그 다음의 언해본 부분은 다시 「어제 여훈서」부터 본문에 해당하는 「여훈」의 네 번째 목차인 ‘부부 제4’까지 구결문과 함께 언해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그리고 「여훈」의 다섯째 목차인 ‘효구고 제5’에서부터 「여훈 후서」까지의 언해본 부분은 모두 곤책(坤冊)에 실려 있다. 건ㆍ곤 2책 중에서 두 번째 책인 곤책은 처음부터 맨 끝의 「여훈 후서」까지 판심제(版心題)는 모두 ‘女訓’으로, 권차(卷次)는 모두 ‘하(下)’로 되어 있으며, 장차(張次)는 1~48장까지로 표시하고 있어 그 체재가 일원화되어 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책인 건책은 판심제, 권차, 장차 등에 있어서 일률적이지 않다. 한문본 부분의 「어제 여훈서」에서 「여훈 목록」까지는 판심제를 ‘女訓序’로, 본문에 해당하는 「여훈」부분은 ‘女訓’으로, 그리고 마지막의 「여훈 후서」 부분은 ‘女訓後序’로 각각 표시하고 있어 조금씩 다르다. 권차(卷次)는 한문본 부분 전체에 표시되지 않았고, 장차(張次)만 한문본 부분을 1~23장까지 일련번호로 매겨 놓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언해본 부분은 다시 「어제 여훈서」부터 차례로 구결을 단 구결문이 먼저 나오고 언해문이 뒤이어 제시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언해본 부분부터는 판심제가 ‘女訓’으로, 권차는 ‘상’으로, 장차는 새로 1장부터 시작하여 42장까지로 각각 기재되어 있어, 같은 건책에 실려 있지만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 사이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구분되어 있어 2권 1책같이 편찬되어 있다. 그러면 건ㆍ곤 2책의 판심에 기재된 사항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차(張次)에서 각 장(張)의 앞면 뒷면을 각각 ㄱ, ㄴ으로 표시하여 덧붙인다.

◇ 건책(乾冊)
〈한문본 부분〉
(목차) (판심제) (권차) (장차)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女訓序 ― 1ㄱ~3ㄴ
-여훈서(女訓序) 女訓序 ― 4ㄱ~6ㄴ
-여훈서(女訓序) 女訓序 ― 7ㄱ~8ㄴ
-여훈목록(女訓目錄) 女訓序 ― 9ㄱ~9ㄴ
-여훈(女訓) 女訓 ― 10ㄱ~20ㄴ
-여훈후서(女訓後序) 女訓後序 ― 21ㄱ~23ㄱ
〈언해본 부분〉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女訓 上 1ㄱ~11ㄱ
-여훈서(女訓序) 女訓 上 12ㄱ~21ㄴ
-여훈서(女訓序) 女訓 上 22ㄱ~29ㄴ
-여훈목록(女訓目錄) 女訓 上 30ㄱ~30ㄴ
-여훈(女訓) 제1~제4 女訓 上 31ㄱ~47ㄱ
◇ 곤책(坤冊)
〈언해본 부분 계속〉
-여훈(女訓) 제5~제12 女訓 下 1ㄱ~40ㄴ
-여훈후서(女訓後序) 女訓 下 41ㄱ~48ㄴ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여훈 언해』라는 한 책으로 편찬해 놓았어도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은 별개의 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동일한 건책(乾冊) 속에 하나로 묶어 편찬하고 있으면서도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 사이에는 판심제도 서로 다르고 권차와 장차도 서로 달리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전체적인 판식(版式)에 대해서는 홍윤표 교수의 해제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기대어 소개한다. 책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22.3cm, 34.5cm이고, 사주 쌍변(四周雙邊)에 반엽(半葉)의 광곽(匡郭)은 가로 세로 각각 16.5cm, 24.2cm이다. 행수(行數)는 10행이고 1행의 글자수는 18자이나 언해문은 모두 1자씩 낮추어 쓰고 있어서 매행(每行) 17자로 되어 있다. 원문에 한글로 달아 놓은 구결과 주(注)는 소자(小字) 쌍행이다. 판심의 어미(魚尾)는 상하 삼엽화문어미(三葉花紋魚尾)이며 판심의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 권차, 장차가 기재되어 있다. 판심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바로 앞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여훈 언해』의 내용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문 네 개를 제외하면 「여훈 목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12개 주제에 관한 것이 전부다. 12개 주제별로 하나하나 교훈의 내용을 서술한 부분이 목차 중의 하나인 「여훈」이다. 「여훈」 부분에 있는 12개 주제를 들고, 주제별로 교훈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규훈(閨訓) : 여자가 집안에서 할 일, 여자로서 몸가짐과 생활 태도 등에 관한 교훈.
② 수덕(脩德) : 올바른 부덕(婦德)에 관한 교훈.
③ 수명(受命) : 결혼하는 딸이 시집에 가서 행할 도리를 부모가 가르침.
④ 부부(夫婦) : 부부 각자가 자기의 도리를 지키고 화목할 것을 교훈함.
⑤ 효구고(孝舅姑) :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섬기며 효도할 것을 교훈함.
⑥ 경부(敬夫) :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는 도리에 관한 교훈.
⑦ 애첩(愛妾) : 아내는 첩을 사랑하고 첩은 아내를 정성껏 공경할 것을 교훈함.
⑧ 자유(慈幼) : 아이나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줄 것을 교훈함.
⑨ 임자(姙子) : 임신한 여자가 조심할 일을 교훈함.
⑩ 교자(敎子) : 자녀의 성장 단계에 따라 어머니가 가르쳐야 할 내용에 관한 교훈.
⑪ 신정(愼靜) : 조용하면서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여자의 덕에 관한 교훈.
⑫ 절검(節儉) : 여자로서 씀씀이를 아끼고 검소할 것을 교훈함.

이상과 같이 내용은 12가지 주제별로 교훈한 것이지만, 그 중심은 「여훈 후서」에 언급된 대로 공경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집안에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삼가고 조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여훈 언해』의 핵심으로 되어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와 음운

가. 표기 문자

『여훈 언해』는 이에 나타난 표기 문자만 보아도 17세기 전반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한글 표기에서 ㅸ, ㆆ은 말할 것도 없고, ㅿ과 ㆁ도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소실 문자 중에 남아 있는 문자가 있다면 ‘ㆍ’가 유일하다. 그리하여 『여훈 언해』에 나타난 문자 체계는 25자 체계로서 사실상 17세기 국어의 25자 체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한편 초성으로 쓰인 병서자(並書字)는 중세 국어의 전통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각자병서와 ㅅ계, ㅂ계, ㅄ계의 합용병서가 중세 국어에서처럼 표기에 사용되었다. 자료의 제약으로 합용병서에서 ㅷ, ㅵ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 외에는 모두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각자병서는 『원각경 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로 한글 표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는데, 『여훈 언해』에 와서 ㅆ이 등장하여 일부의 표기에서 쓰인 것이 발견된다. ㅆ을 제외한 그 밖의 각자병서는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음에 병서자가 쓰인 예를 들어 본다.

ㅺ : 며(상:10ㄱ) 죵여(상:11ㄱ) 며(상:37ㄴ) 걷러디(상:46ㄱ) 러(하:9ㄱ) 君子(하:12ㄴ) 티고(하:33ㄴ) 이 며(하:33ㄴ-34ㄱ)
ㅼ : (상:17ㄱ) 이라(상:17ㄴ) 희(상:32ㄴ) 님이(하:8ㄴ) 돈이라(하29ㄱ)
ㅽ : 리샤(상:6ㄴ) 딘(상:18ㄱ) 이(상:27ㄴ) 들  이쇼(상:26ㄴ) 리(하:28ㄱ)
ㅳ : 이라(상:8ㄱ) 여(상:18ㄱ) 을(상:27ㄱ)  지거든(하:3ㄴ) 러리며(하:29ㄱ)
ㅄ : 공경으로((상:41ㄱ) 힘(하:27ㄴ) 곰(하:40ㄱ)
ㅶ : 샤(상:9ㄱ) 기(상:33ㄱ) 거슬이(하:23ㄴ)
ㅴ : (상:18ㄱ)

이 밖에 『여훈 언해』에는 다른 데서 전혀 볼 수 없는 ᄳᅠ, ᄪᅠ과 같은 특이한 합용병서가 나타나는데, 이는 각각 ㅴ, ㅍ의 오각으로 보아야 할 표기들이다.

ᄳᅠ : 그 몸을 려(衛其身)(하:23ㄴ) (보기) 大瞿曇이 슬허 리여 棺애 녀고(월인석보 1:7ㄴ).
ᄪᅠ : 모 리(庶草)(하:19ㄱ) (보기) 믈읫 프리 처 나 닐오 苗ㅣ라(원각경 언해 하 2-1:33ㄱ).

그리고 각자병서 ㅆ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ㅆ이 사용되었던 일부 낱말에 한해 나타나고 있다.

ㅆ : 머리예 씌오시고(冠首)(상:6ㄴ) 싸힌(積)(상:6ㄴ) 쓰기예(戴)(상:34ㄱ) 싸호믈(鬪)(상:46ㄴ) 싸미(割)(하:22ㄴ) 싸믄(積)(하:24ㄱ)

위에서처럼 각자병서 ㅆ으로 표기해야 할 낱말임에도 아래처럼 그냥 ㅅ으로 표기된 예가 『여훈 언해』에 제법 등장하고 있다.

말이며(상:10ㄴ) 말을(하:9ㄱ) 中正齋예셔 스노라(싱:21ㄴ) 글 스며(하:28ㄴ) 갇 싀우믄(하:28ㄴ) 綜理(상:28ㄱ) 夫의게 주실(상:40ㄴ)

이 시기에 오면, 합용(合用)이든 각자(各自)든 모든 병서자들은 일률적으로 된소리를 나타내는 표기 수단이 된다. 그리하여 동일한 된소리의 표기에 합용병서의 ㅅ계가 채택되기도 하고 ㅂ계가 채택되기도 하는 한편, 각자병서까지도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어 표기에 심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여훈 언해』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ㅄ과 ㅆ의 혼동을 보여주는 예로서 ‘힘-/힘쓰-’가 있으며, 15세기에 ‘활 쏘-’[射]로 표기되던 말이 『여훈 언해』에서 ‘활 -’로 나타나기도 한다.

힘(하:27ㄴ) / 힘써(하:45ㄴ) 힘디(하:45ㄴ)
활 며(하:28ㄴ)

그런데 ‘활 -’는 원래 ‘활 쏘-’였다. “활 쏘리 하건마”(용비어천가 45장)과 “소다爲覆物而쏘다爲射之之類”(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ㅆ이 표기되던 자리에 ㅄ으로 대체된 것은 ㅂ계 합용병서도 된소리 표기로 변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활-’의 등장은 이미 16세기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음절말의 겹받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겹받침 다음에 모음이 왔을 때는 연철 표기의 방법으로 겹받침의 두 자음이 그대로 유지되지만 자음이나 휴지(休止) 앞에서의 겹받침은 두 자음 중 제2자음이 탈락한다.

[外] : 밧긔(상:29ㄱ) 밧기며(하:35ㄱ) / 밧 마리 드디 아니고(하:33ㄴ) 밧 政 돕고(하:45ㄴ)
없-[無] : 업디라(상:8ㄱ) 업니(하:12ㄴ) / 업고(상16ㄴ) 업다 니나(하:33ㄱ)
-[修] : 닷그며(상:19ㄱ) 닷가(하:45ㄴ) / 닷디 아니즉(상:36ㄴ)

그러나 ㄹ로 시작되는 ㄺ, ㄻ, ㄼ과 같은 겹받침의 경우는 모음 앞에서와 같이 자음이나 휴지 앞에서도 두 자음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원래 모음과 모음 사이에 두 자음만 올 수 있는데, ㄹ이 맨 앞에 올 경우에는 세 자음도 허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ㄺ : 그시미라(상:9ㄱ) 기 처음으로 울으매(하:3ㄴ) 글그며 안자 겨시거든(하:3ㄴ) 근 의(하:23ㄱ) 고 근 거시(하23ㄴ) 디 몯고(하:27ㄴ) 고 소담면(하:39ㄱ)
ㄻ : 올마(하:27ㄴ)  거(하:22ㄴ)
ㄼ : 몸소 오신 이리라(상:10ㄱ) 여듧 어든(하:28ㄱ) 이 며(하:33ㄴ-34ㄱ)

위의 예 가운데 ‘’[熟]은 연철 표기의 ‘’과 분철 표기의 ‘’이 혼합된 중철(重綴) 표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신’은 어간 ‘-’[蹈] 의 말음 ㅂ이 모음 어미 앞에서 w로 교체된 형태이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이라면 ‘오신’은 ‘신’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초성의 병서자와 겹받침을 살펴보았는데, 『여훈 언해』에서 보이고 있는 표기들은 중세 국어와 별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표기법

표기법이라 함은 그 시대의 문자 체계로써 그 언어를 어떤 형태로 적느냐 하는 규칙, 즉 정서법을 말한다. 이 표기법에는 여러 규칙들이 포함되지만 여기서는 연속된 언어를 적을 때 각 음절을 어떻게 적느냐 하는 문제에 국한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이 자음일 때 후속되는 모음의 조사나 어미 앞에서 그 자음을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 내려 적을 것인가 아니면 말음의 자리에 그대로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즉, ‘글을 읽으니’로 적을 것인가 ‘그를 일그니’로 적을 것인가 하는, 이른바 분철(分綴)로 표기할 것이냐 연철(連綴)로 표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15세기 국어의 표기법은 연철 표기로 출발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문헌에서 연철법은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졌었다. 그러다가 15세기말에 이르면 그렇게 철저하던 연철법에도 틈이 생겨 여기저기서 분철 표기가 조금씩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분철의 추세가 더욱 세력을 얻어 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6세기에는 연철법과 분철법의 혼합형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중철(重綴) 표기까지 새로 등장하여 마치 16세기는 연철, 분철, 중철 표기의 각축장이 된 듯한 느낌이다. 17세기 문헌에 드러난 표기법도 16세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가운데 분철은 꾸준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체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17세기에는 같은 시기의 문헌이라도 문헌마다 표기법의 실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불균형이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용언의 경우는 연철 표기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철 표기도 문헌마다 그 빈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여훈 언해』도 이와 같은 17세기 문헌의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는 표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주003)

『여훈 언해』에는 아래와 같이 동일한 낱말을 두고 서로 다른 5가지의 표기가 등장할 정도로 표기의 혼란이 나타나기도 한다.
믈읫(상:37ㄴ), 므(상:19ㄴ), 므(상:34ㄴ), 믈읟(하:27ㄴ), 므릇(하:47ㄴ).
체언의 경우는 ㄷ, ㅅ 말음일 때를 제외하고는 분철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용언의 경우에는 전반에 걸쳐 연철이 절대적인 우세를 나타내고 있다. 중철 표기는 전체적으로 몇 예를 보일 뿐이다. 그런 중에서도 『여훈 언해』의 표기 실태를 보면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으로 쓰인 자음에 따라 그 사정이 조금씩 다름을 볼 수 있어 여기서는 말음의 자음 ㄴ, ㅁ, ㄹ, ㄱ, ㅂ, ㄷ, ㅅ 별로 그 실태를 보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ㄴ

a. 손이라(상:17ㄱ) 눈에(상:27ㄴ) 슈건을(상:33ㄱ) 긔운이(상:46ㄴ) 녀편이라(하:24ㄱ) 아이 아니라(하:29ㄱ) 잔을(하:34ㄱ) 차반이며(하:39ㄱ) 겨집어룬에게(하:45ㄴ) 손으로(상:34ㄱ) 손을(상:41ㄱ) 손애(하:34ㄱ)
b. 소로(하:28ㄱ) 소니(하:34ㄴ) 열 누니(하:34ㄴ)
c. 크니 업고(상:16ㄴ) 노프니과 니(상:45ㄴ) 어디니(하:27ㄴ) 重니 업니(하:33ㄱ) 크니며 쟈그니며(하:35ㄴ)
d. 人女ㅣ 되얀 이(상:16ㄴ) 婦ㅣ 되얀 이(상:16ㄴ) 貞婦 되연 이(상:41ㄴ)
(비교) 婦 되얀니(상:29ㄱ)

위에서 보다시피 ㄴ말음의 경우, 체언에서는 분철이 절대적이다. 연철의 예는 전체를 통해 b의 예가 전부이다. 반면에 c에서처럼 용언의 관형사형 ㄴ 어미 다음에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된 형태에서는 어김없이 연철이 되고 있다. 하나의 예외도 허락지 않을 정도이다. 단, d와 같이 완료형의 관형사형에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되었을 경우는 분철과 연철이 다 나타난다.

그리고 용언의 경우는 어간 말음이 ㄴ인 낱말의 예가 없어 언급을 생략한다.

(2) ㅁ

a. 버금에(상:8ㄱ) 몸으로(상:8ㄴ) 말이며(상:10ㄴ) 어마님이라(상:10ㄴ) 가슴에(싱:27ㄴ) 이라(상:34ㄴ) 님이(하:8ㄴ) 이(하:14ㄱ) 밤이어든(하:23ㄱ) 일홈으로(하:24ㄱ) 처엄은(하:46ㄱ)
b. 버그매(상:6ㄴ) 일호미(하:5ㄴ) 목수미(하:20ㄱ) 모(하:30ㄱ) 미(하:38ㄱ)
c. 남은(상:8ㄱ) 담은(상:9ㄱ) 삼으니(상:25ㄴ) 품어시면(하:15ㄱ)
d. 져믄(상:10ㄱ) 말믜아마(상:10ㄱ) 너므리오(상:29ㄱ) 사므며(상:41ㄱ) 여너머(하:47ㄱ)

ㅁ말음의 경우는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체언이나 용언 모두에서 분철과 연철 표기를 다 보여 주고 있다. 그 분포로 보면, 분철의 경우에 체언에서 훨씬 우세하고, 연철의 경우에는 용언에서 우세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명사 ‘사’을 선정하여 여기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었을 때, 분철ㆍ연철의 사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전부 보임으로써 분철의 추세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게 하고자 한다.

e. 사을(상:10ㄱ, 상:41ㄱ, 상:45ㄴ) 사의게(상:10ㄱ, 하:23ㄴ) 사이(상:16ㄴ, 상:17ㄱ, 상:26ㄱ, 하:13ㄱ, 하:15ㄱ, 하:18ㄱ, 하:40ㄴ) 사의(상:28ㄱ, 상:33ㄱ, 상:33ㄴ, 상:34ㄴ, 하:3ㄱ, 하:13ㄱ, 하:24ㄱ, 하:46ㄱ) 사은(상:34ㄴ)
f. 사미(하:27ㄴ, 하:28ㄴ, 하:40ㄱ) 사(하:29ㄴ)

위의 e, f를 보면, 체언에서의 분철은 일방적이다. 그러나 용언에서는 그 용례가 많지 않아 위와 같은 조사는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ㅁ말음의 경우에 연철이 전체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동명사(動名詞)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었을 때, 연철이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분철 표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연철에 비하면 철저히 약세에 놓여 있음이 현실이다.

g. 침을(상:8ㄴ) 動홈애(상:10ㄴ) 업이니(상:21ㄱ) 싁싁홈으로(상:41ㄱ) 和睦홈으로(상:41ㄱ) 안앤(하:23ㄱ) 居욤애(하:33ㄴ) 샹密홈은(하:47ㄱ)
h. 셰호미(상:8ㄴ) 어디르믈(상:11ㄱ) 믈(상:11ㄱ) 아다오믈(상:17ㄱ) 업시녀기미(상:20ㄴ) 閑暇미(상:28ㄱ) 키미라(상:33ㄱ) 치믈(상:34ㄱ) 不孝호미라(상:41ㄴ) 親호미(하:3ㄱ) 공敬요미(하:9ㄴ) 업스믈(하:13ㄱ) 안맨(하:22ㄴ) 너므미 업스미오(하:24ㄱ) 居요매(하:33ㄴ) 사므미오(하:38ㄴ)

(3) ㄹ

a. 글을(상:6ㄴ) 겨를에(상:6ㄴ) 실을(상:10ㄴ) 말(상:11ㄱ) 孝 줄을(상:28ㄴ) 얼굴의(상:33ㄱ) 허믈이(상:37ㄴ) 믈결이(상:46ㄱ) 믈을(하:4ㄱ) 받올 일을(하:4ㄱ) 配필이(하:8ㄴ) 닐온 말이라(하:12ㄴ) 발을(하:22ㄴ) 거울의(하:23ㄱ) 禮졀을(하:24ㄱ) 날을(하:45ㄱ)
b. 리(상:17ㄱ) 닐온 마리라(상:17ㄴ) 겨집 사의 이리(상:33ㄴ) 리(하:8ㄴ) 허므리(하:9ㄱ) 못 므리(하:18ㄱ) 아리라(하:19ㄱ) 얼고리(하:23ㄴ)  주 아라(하:28ㄱ) 벼(하:29ㄱ)
c. 오(상:7ㄱ) 닐오(상:7ㄴ) 울얼어(상:10ㄱ) 들어 좃(상:33ㄱ) 일오디라(상:41ㄴ) 울으매(하:3ㄴ) 말아(하:4ㄱ) 알미오(하:8ㄴ) 들으믈(하:28ㄱ)
d. 마롤디니라(상:11ㄱ) 아로(상:29ㄱ) 드러야(상:34ㄴ) 어디러(상:46ㄱ) 져므러(상:46ㄴ) 병드러(하:3ㄴ) 비러 호매(하:18ㄱ) 댱가 드리믄(하:28ㄴ) 받드러(하;34ㄱ) 도라(하:34ㄱ) 프러(하:35ㄱ) 그라(하:45ㄴ) 더브러(하:46ㄱ) 여시며(하:47ㄱ) 맛드려(하:48ㄱ)

ㄹ말음의 경우는 체언 용언 할 것 없이 분철과 연철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체언에 있어서는 분철 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나고, 용언에서는 연철 표기가 우세하다는 17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에 일치하는 양상이다.

(4) ㄱ

a. 을(상:6ㄴ) 아젹의(상:46ㄴ) 복이(하:4ㄴ) 음식을(하:8ㄴ) 豊쇽이(하:47ㄱ) 암이(상:17ㄱ) 암이(하:9ㄱ)
b. 소개(상:11ㄱ) 기(하:3ㄴ)  바기(하:18ㄴ)

ㄱ말음(ㄺ 말음 포함. 이하 마찬가지임)을 가진 체언의 경우도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때는 분철 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도 자주 등장하는 ‘식(子息)’이란 명사를 전부 들고 그 아래에 모음의 조사가 왔을 때 실제로 분철과 연철이 어떤 비율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자.

c. 식이라(상:11ㄱ) 子식을(상:28ㄴ, 하:30ㄱ) 식이(상:37ㄴ, 하:23ㄴ) 식을(하:22ㄴ, 하:23ㄴ) 子식이(하:29ㄴ)
d. 시기(하:13ㄴ, 하:13ㄴ, 하:13ㄴ) 시글(하:13ㄴ)

‘식’ 하나를 놓고 봤을 때 분철은 연철의 2배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ㄱ말음을 가진 체언의 경우에 전체적으로 분철의 비율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짐작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언의 경우로 오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ㄱ말음일 때 분철의 예는 하나도 없고 연철의 예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e. 소긴 거시(상:10ㄱ) 니기고(상:19ㄱ) 늘그샤(하:3ㄴ) 글그며(하:3ㄴ) 근(하:23ㄱ) 근(하:23ㄱ) 쟈근 것(하:33ㄱ) 마가(하:34ㄱ)

용언의 어근에 부사 접미사 ‘-이’가 통합되어 파생 부사를 형성하는 경우에는 분철이 더 적극적이다.

f. 싁싁이(하:8ㄱ, 하:23ㄱ, 하:33ㄱ) 至극이(하:34ㄴ, 하:48ㄱ) 닉이(하:47ㄱ)
g. 기(상:11ㄱ)

(5) ㅂ

a. 법을(상:10ㄱ) 입에(상:11ㄱ) 基업이(하:4ㄴ) 눈섭의(하:8ㄱ) 깁이(하:38ㄱ) 밥의(하:39ㄱ)
b. 바블(하:14ㄱ) 바비(하:38ㄱ)

말음이 ㅂ인 경우도 바로 앞의 ㄱ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체언에서는 분철이 우세한 반면, 용언에서는 연철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ㅂ말음의 체언은 모음의 조사 앞에서 분철이 압도하는 분위기이다. ㅂ말음의 명사로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집’과 ‘겨집’을 대상으로 분철ㆍ연철 실태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c. 집의(상:17ㄱ, 하:14ㄴ) 집을(상:42ㄱ, 하:30ㄱ) 집이(상:42ㄱ) 집이라(하:44ㄴ)
d. 지븨(상:40ㄴ) 지비(하:20ㄱ) 지블(하:28ㄴ)
e. 겨집은(상:32ㄴ) 겨집의(상:28ㄱ, 상:34ㄱ, 상:37ㄴ, 하:38ㄱ, 하:46ㄱ) 겨집이(상:33ㄱ, 하:9ㄱ, 하:19ㄱ, 하:45ㄴ) 겨집을(하:46ㄴ)

‘집’의 경우에는 연철이 분철의 절반 정도라도 나타났지만, ‘겨집’의 경우는 그렇게 많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연철 표기는 하나도 없이 분철 일색이다.

반면에 용언의 경우는 아래에서 보듯이 체언의 경우와는 딴판이다. 용언 어간에 모음의 어미가 연결된 형태에서 분철은 하나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f. 니버(상:10ㄱ) 니브며(상:17ㄱ) 구븐(상:19ㄴ, 하:18ㄴ) 자바(상:33ㄱ) 자브며(상:33ㄴ, 하:24ㄱ)

(6) ㄷ

ㄷ말음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양상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체언 용언 할 것 없이 모두 15세기의 연철 시대를 회복한 것처럼 거의 연철 표기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분철 표기가 있다면 아래에서 보듯이 체언에서 ‘이, 을’의 예가 있고, 파생부사로서 ‘덛덛이’가 있을 뿐이다. 어간 말음이 ㄷ인 용언에서 분철된 예는 하나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연철 표기는 ㄷ말음에서도 철저하다. 아래에 ㄷ말음을 가진 체언 용언의 예들을 전부 나열해 본다. 전체적으로 그 예가 많지 않다.

a. 을(상:27ㄱ, 하:45ㄴ) 이(하:40ㄱ) 덛덛이(하:33ㄴ)
b. (상:8ㄴ) 디(상:11ㄱ, 상:19ㄴ, 상:21ㄱ, 하:14ㄴ) 들(상:37ㄴ, 하:4ㄴ, 하:13ㄱ, 하:30ㄱ) (하:13ㄱ, 하:14ㄴ) 버디(하:29ㄱ) 그윽 고디나(하:34ㄴ)
c. 어더(상:6ㄴ, 상:42ㄱ, 하:29ㄱ) 미더(상:11ㄱ) 바다든(상:45ㄱ) 구드니(하:4ㄴ) 바다(하:13ㄴ) 어랴(하:14ㄴ) 어덧노라(하:47ㄴ) 모닷(하:47ㄴ)

(7) ㅅ

말음ㅅ의 경우도 앞의 ㄷ말음에서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즉, 연철 위주로 모든 표기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체언의 경우에 ‘옷의, 못애’의 두 예를 제외하고는 분철 표기를 볼 수 없고, 용언에는 ㅅ을 어간 말음으로 하는 낱말이 전체를 통해 하나도 사용된 예가 없어 더 이상 언급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없-’[無]의 경우에 모음 어미와의 연결에서 분철된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으므로 어간 말음이 ㅅ인 용언에서도 분철은 없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는 바이다. 특히 의존 명사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모음 조사와의 연결에서 분철된 표기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a. 옷의(하:3ㄴ) 못애(하:19ㄱ)
b. 열다새(상:34ㄱ) 그르(하:4ㄱ) 오(하:8ㄴ, 하:14ㄱ, 하:29ㄱ) 오스로(하:18ㄴ) 마(하:22ㄴ) 그르슬(하:28ㄱ) 마시(하:39ㄱ)
c. 序 거시라(상:7ㄴ) 소긴 거시(상:10ㄱ) 몯 거시며(상:46ㄱ)  거슬(하:3ㄴ) 니블 거(하:8ㄴ) 근 거시(하:23ㄴ)  거싀(하:39ㄱ)
d. 업디라(상:8ㄱ) 업니(상:16ㄴ) 업서(상:20ㄴ) 업며(하:4ㄱ) 업스믈(하:13ㄱ) 업스미오(하:23ㄴ) 업스며(하:34ㄱ)

이로써 ㅅ말음의 경우도 ㄷ말음과 함께 체언 용언을 막론하고 아직 연철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ㄷ, ㅅ이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t]으로 중화되었으나, 초성의 자리에서는 두 자음이 중화되지 않고 ㄷ[t], ㅅ[s]의 본 음가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본 음가를 의식했기 때문에 ㄷ과 ㅅ말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접사(接辭)가 오면 연철하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와 ‘이’처럼 ㄷ, ㅅ이 말음의 위치에 있을 때는 두 자음이 [t]으로 중화되어 실제로 말음에서 혼기(混記)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디’와 ‘시’처럼 연철하여 ㄷ, ㅅ이 초성의 위치에 왔을 때는 각각 [t], [s]의 본 음가대로 실현되므로 ㄷ, ㅅ 사이에 혼기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제 표기법의 마지막으로 중철(重綴) 표기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중철 표기는 자음을 말음으로 가진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그 자음을 말음의 자리에도 적고 그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도 적음으로써 같은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방식이다. 연철법과 분철법이 혼합된 양상이기도 하고 또한 양자의 절충안이라 할 수도 있다.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16세기 문헌 자료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시기의 문헌 사이에도 중철의 사용 비율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17세기도 16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17세기 문헌 중에도 중철 표기가 활발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여훈 언해』에는 중철 표기가 얼마 되지 않은 편이다. 전체를 통해 아래의 예가 전부이다.

a. 글월(하:28ㄴ) 니로(하:28ㄴ) 알리(하:33ㄱ) 기우러딜 시(하:34ㄱ) 딜 시(하:34ㄱ) (하:22ㄴ)
b. 압픠(상:8ㄱ) 밋처(상:10ㄱ, 상:20ㄱ, 상:28ㄴ) 긋테(상:20ㄴ) 빗(하:39ㄴ)

위에서 a는 8종성에 속하는 말음이 중철 표기된 예이고, b는 유기음을 말음으로 하는 체언 용언의 중철 표기이다. a에서 ‘글월’은 명사 ‘글월’에 조사 ‘-’이 연결되면서 ㄹ을 이중으로 적었고, ‘니로’와 ‘알리’는 용언의 관형사형과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되면서 관형사형 어미 ㄴ과 ㄹ을 각각 이중으로 표기한 예이며, 그 다음의 ‘시’도 의존 명사 ‘’에 부사 접미사 ‘-이’를 더하면서 ㅅ을 이중으로 표기한 것이다. 끝의 ‘’은 어간말에 붙은 겹받침 중의 제2자음이 이중으로 표기된 경우이다.

다음으로 b는 유기음을 말음으로 하고 있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경우에 중철 표기는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이때는 8종성 제한 규칙으로 유기음을 말음의 자리에 표기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유기음 말음 다음에 모음의 접사가 연결되면 연철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기음 말음의 경우에도 중철의 방식이 적용되어 말음 표기를 해야 했지만 받침에 유기음을 그대로 적을 수는 없었고, 유기음을 8종성으로 교체하여 받침으로 적었으니 곧 ㅊ→ㅅ /ㄷ, ㅌ→ㄷ /ㅅ, ㅍ→ㅂ, ㅋ→ㄱ 등으로 교체하여 적었다. 이러한 교체는 유기음 말음 다음에 휴지(休止)나 자음이 올 때도 적용되었다. 그러고 나서 후속하는 음절의 초성에 또한 말음의 유기음을 그대로 옮겨 적음으로써 중철 표기의 형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유기음 말음의 경우는 일반적인 중철의 표기처럼 동일한 자음을 이중으로 표기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훈 언해』에서는 유기음 말음의 경우에도 중철보다는 아래와 같은 연철 표기가 훨씬 우세하게 나타난다.

c. 미츤(상:9ㄴ) (상:11ㄱ) 뉘오(상:19ㄴ) 겨틔(상:28ㄱ) (상:33ㄴ) 노프니(상:45ㄴ) 조며(상:45ㄴ) 로(하:9ㄴ) 기픈(하:19ㄱ) 비(하:23ㄱ) 그츠미오(하:38ㄴ)

다. 말음 ㅅ, ㄷ의 혼용

말음으로 쓰인 ㅅ과 ㄷ 사이에 혼용이 많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말음의 위치에서 ㅅ과 ㄷ이 중화되어 발음에서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할 것이다. ㅅ과 ㄷ의 중화는 아래의 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a. 망녕도이 니디 말고(상:33ㄴ)
귀예 닉이 든 배라(하:47ㄱ)
b. 근原이 果연히 어 인뇨(상:18ㄱ)
父母ㅣ 되연 사이(하:15ㄱ)

위의 예에서 a의 ‘니디’와 ‘든’은 원래 ‘니디’와 ‘듣’의 ㄷ말음이 ㄴ 앞에서 비음화(鼻音化)한 형태이고, b의 ‘인뇨’와 ‘되연’은 ‘잇뇨’와 ‘되엿’의 ㅅ말음이 ㄴ 앞에서 비음화한 형태이다. ㅅ과 ㄷ이 다같이 ㄴ 앞에서 ㄴ으로 비음화한 것은 결과적으로 말음ㅅ과 ㄷ이 동일한 음가로 실현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원래 15세기 국어에서는 이러한 ㅅ과 ㄷ이 말음에서도 혼란이 없이 엄격히 구별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서 서서히 혼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혼란은 자의대로가 아니고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ㄷ말음이 ㅅ으로 교체됨으로써 ㄷ말음이 점차 축소되어 가는 양상이었다. 『여훈 언해』에는 ㄷ → ㅅ의 말음 교체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오히려 ㅅ → ㄷ의 교체가 더 우세할 정도로 활발하다. 물론 『여훈 언해』에도 원래의 말음대로 ㅅ이나 ㄷ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에 대한 예는 생략하고, ㄷ → ㅅ과 ㅅ → ㄷ으로의 교체가 일어난 예만 보기로 한다. 그러면서 원래의 말음으로 표기된 어형도 함께 예시해 둔다.

c. ㄷ → ㅅ
밧고(상:7ㄱ) 밋브샤(상:10ㄱ) 긋테(상:20ㄴ) 덧덧이(상:26ㄴ) 듯고(상:28ㄱ) 곳 能히(상:38ㄱ) 엇디 몯 거시온(하:5ㄱ) 져근덧(하:9ㄴ)  밧디(하:13ㄱ) 못가(하:48ㄱ)
(참고) 받고(상:8ㄱ) 미더(상:11ㄱ) 덛덛이(하:33ㄴ) 듣디 몯(하:34ㄴ) 곧 능히(하:9ㄴ) 어덧노라(하:47ㄴ) 치믈 받디(상:46ㄱ) 몯가(상;27ㄱ)
d. ㅅ → ㄷ
믿(상:19ㄱ) 구븐 걷(상:19ㄴ) 비(하:3ㄴ) 藥을 맏보와(하:9ㄱ) 맏당히(하:13ㄴ) 이러면(하:14ㄱ) 욷사(하:18ㄱ) 훋손(하:19ㄱ) 닏디 말라(하:20ㄱ) 후엗 사(하:24ㄱ-ㄴ) 여 (하:28ㄱ) 열다 (하:28ㄴ) 졷디 몯(하:29ㄴ) 갇(하:23ㄴ) 빋나고(하:39ㄱ)
(참고) 밋(상:27ㄴ) 린 것(하:23ㄱ) 로(하:9ㄴ) 맛드려(하:48ㄱ) 맛당히(상:7ㄴ) 이러면(하:35ㄱ) 웃사(하:18ㄱ) 닛디 말라(하:45ㄴ) 內則읫 말과(상:27ㄱ) 다 비치(하:39ㄱ) 좃 아다온 德을(상:33ㄱ) 갓(상:26ㄴ) 빗나고(하:30ㄱ)

이상과 같은 ㅅ과 ㄷ의 상호 교체는 두 자음이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 발음의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음의 위치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음 앞에서 ㅅ, ㄷ은 여전히 [s]이고 [t]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음 앞에서는 연철의 방법으로 ㅅ, ㄷ 말음을 그 아래 초성의 자리로 옮겨 적음으로써 원래의 음가가 실현되므로 ㅅ과 ㄷ의 교체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모음 앞이라도 분철의 방법으로 자음을 말음의 위치에 고정해 놓으면 ㅅ과 ㄷ의 교체도 가능하였던 것이다.

을(상:27ㄱ, 하:45ㄴ) --- 을(하:45ㄱ)

위의 예에서 보듯이 모음 앞에서도 말음 ㅅ과 ㄷ의 교체가 일어난 것을 보면 ㅅ과 ㄷ이 말음의 위치에서 [t]으로 중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훈 언해』에는 ‘옷의’[衣] ‘못애’[池]와 같이 ㅅ말음을 모음 조사 앞에서 분철 표기한 예도 있다. 그러면 이 경우에도 ㅅ이 [t]으로 중화된 상태로 보아야 하는가? 이 경우는 [t]이 아니고 본래의 [s]음으로 실현되는 표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옫의’ ‘몯애’와 같은 교체형이 쓰인 일이 없고, 연철형에서도 ‘오, 오스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중화 상태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을’의 경우에 연철형은 『여훈 언해』에서 ‘들’로만 나타난다는 점이 ‘옷의’ 경우와 다르다. 이러한 표기는 17세기 후반에 더욱 확산되면서 모음 앞의 ㅅ말음도 [t]음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라. 비음화(鼻音化)의 표기

폐쇄음이 비음을 만나게 되면 비음으로 변한다. 이른바 비음화 현상이다. 이런 비음화는 15세기 국어에서도 실현되었던 현상일 테지만 그 비음화를 표기에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있다면 ‘니-’를 ‘니-’로, ‘걷너-’를 ‘건너-’로, ‘아닏니라’를 ‘아닌니라’로 표기한 정도가 15세기 문헌에 보일 뿐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비음화를 반영한 표기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가 되었다. 『여훈 언해』에는 비음화를 반영한 표기가 상당수 등장하고 있는데, 주로 ㅅ말음이 ㄴ 앞에서 ㄴ으로 비음화한 것을 표기한 예가 대부분이며 그것도 몇 낱말에 집중되어 있다. ㄷ이나 ㅂ의 비음화를 표기한 예는 아래의 b, c에서 보듯이 한두 낱말에 불과하다. 이제 비음화의 예를 나타난 대로 다 열거하고자 한다. 물론 비음화를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만 그 예는 생략한다.

a. 인 집(상:6ㄱ) 라미 인노라(상:11ㄱ) 어 인뇨(상:18ㄱ) 인디라(상:21ㄱ, 상:25ㄴ, 상:26ㄴ, 하:40ㄱ) 우희 인 사(하:19ㄴ) 아래 인 사(하:19ㄴ) 인 거시며(하:24ㄱ) 혼자 인(하:33ㄱ) 限量이 인니(하:40ㄱ) 人女ㅣ 되얀 이(상:16ㄴ) 婦ㅣ 되얀 이(상:16ㄴ) 婦 되얀니(상:29ㄱ) 婦이 되얀 者(상:36ㄴ) 貞婦 되연 이(상:41ㄴ) 양진믈(하:3ㄴ) 며 만난 것 야(하:4ㄱ) 婦ㅣ 도연 者(하:5ㄱ) 겨집이 되연 者(하:9ㄱ) 妻ㅣ 되연 者(하:12ㄴ) 父母ㅣ 되연 사(하:15ㄱ) 어미 되연 쟤(하:29ㄴ) 載얀 바(상:16ㄱ) 터연 故로(상:16ㄴ) 臨연 (하:33ㄴ) 서 니언디라(상:18ㄴ) 後 닌(상:28ㄴ-29ㄱ) 後世 닌디라(상:45ㄱ) 며 만[味]난 것(하:4ㄱ)  둔 쟈(하:29ㄱ) 소기디 아닌냐(하:33ㄱ) 아 나한 者(하:27ㄴ)
b. 밤의 니기(상:33ㄴ) 니디 말고(상:33ㄴ) 니시거든(하:3ㄴ) 니맨(하:22ㄴ) 귀예 닉이 든 배라(하:47ㄱ)
c. 能히 밤 먹거든(하:28ㄱ)

마. 구개음화 및 원순모음화

ㄷ, ㅌ이 i, j 앞에서 ㅈ, ㅊ으로 변하는 구개음화와, ㅁ, ㅂ, ㅍ 아래의 ㅡ모음이 ㅜ모음으로 변하는 원순모음화를 『여훈 언해』에서는 볼 수가 없다. 대체로 두 음운 변화는 17세기 말엽에 가서야 문헌에서 확인되는 현상인 것으로 보아, 두 가지 변화를 전혀 볼 수 없는 『여훈 언해』는 17세기 말엽 이전의 문헌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래에 구개음화(a)와 원순모음화(b)에 해당하는 예 중의 일부를 보이지만, 음운 변화가 일어난 예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a. 엇디(상:8ㄴ) 어딘(상:8ㄴ) 뎌튝 거시(하:4ㄱ) 쳐티기(하:5ㄱ) 고티디(하:18ㄱ) 디키디(하:30ㄱ) 皇황帝뎨(상6ㄴ) 朕딤(상:6ㄴ) 張댱氏시(상:7ㄱ) 治티化화(상17:ㄱ) 天텬地디(하:3ㄱ)
b. 믈결이(상:46ㄱ) 져므러(상:46ㄴ) 븓들며(하:3ㄴ) 믈을(하:4ㄱ) 브즈러니(하;4ㄴ) 허므리(하:9ㄱ) 브르고져(하:18ㄴ) 믈 리고(하:28ㄱ) 스믈 어(하:28ㄴ) 더브러(하:46ㄱ) 御어物믈(상:27ㄴ)

2. 문법

가. 용언 활용에서의 ㄱ 회복

중세 국어에서 용언의 어간 말음이 ㄹ이거나 j일 때, 그 아래에 ㄱ으로 시작되는 ‘-거-, -고, -게/긔’ 등의 어미가 연결되면 어미는 두음 ㄱ이 탈락한 ‘-어-, -오, -에/의’ 등으로 교체된다. 이른바 ㄱ탈락 현상이라는 것인데, 『여훈 언해』에서는 ㄱ탈락 현상이 폐지되고 ㄱ이 회복되었다. 어간 말음 ㄹ, j 아래에서도 ‘-거-, -고, -게/긔’ 등의 어미가 교체됨이 없이 그대로 연결되었다.

a. 기 알고(상:11ㄱ) 그 디 멀고(상:19ㄴ) 니디 말고(상:33ㄴ) 貞女ㅣ 되고(상:37ㄱ) 병들게 면(상:37ㄴ) 舅姑 닐외고(하:8ㄱ) 恩養을 뵈고(하:14ㄴ) 어딘 안해 되고져 (하:14ㄴ) 癆증이 일고(하:29ㄴ) 나 길게 리라(하:39ㄴ) 直解 고(하:45ㄱ) 날을 고(하:45ㄱ) 티(하:9ㄱ)
b. 德을 삼디 말오(하:18ㄴ)

위의 a에서는 ㄹ이나 j 아래에서도 ‘-고, -게, -고져’ 등과 같은 ㄱ을 유지한 어미가 그대로 쓰였다. ‘티’는 용언의 활용형은 아니나 15세기에 두 낱말이 합성하는 과정에서 ㄹ 다음의 ㄱ이 탈락하여 ‘티’(능엄경 언해 2:14ㄱ)로 쓰이다가 ㄱ이 회복된 것이어서 여기에 포함시킨다. 이로써 중세 국어에서 볼 수 있었던 어미의 교체 현상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어미가 단일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문헌 전체를 통해 ㄹ 아래에서 어미 ‘-고’가 ‘-오’로 교체되어 쓰인 유일한 예를 b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전체의 흐름에서 낙오된 사례처럼 보인다.

중세 국어의 이러한 교체 현상은 ㄹ, j 외에 i모음 아래에서도 일어났는데, 이때의 i모음은 체언에 연결되는 서술격 조사이다. 서술격 조사 i에 한해서는 ㄹ, j 아래에서처럼 ㄱ이 탈락한 어미로 교체되어 쓰였다. 이러한 중세 국어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여훈 언해』에서도 서술격 조사 i 아래에서는 ㄹ, j의 경우와 달리 ‘-거-, -고’가 여전히 ‘-어-, -오’로 교체되어 쓰이고 있다.

c. 聖은 어디르시미오(상:9ㄱ) 몯 거시오(상:16ㄴ) 이 가지오(하:14ㄱ) 열다 어(하:28ㄴ) 靜 德이오(하:34ㄴ) 害로오미 모 배오(하:34ㄴ) 열둘히어니와(하:47ㄴ)

이와 관련해서 체언에 조사가 연결될 때도 체언의 음운 조건에 따라 교체가 실현되는 조사 중에 접속 조사 ‘-과/와’가 있다. 이는 체언의 말음이 모음일 경우에 ‘-와’, 자음일 경우에는 ‘-과’가 통합된다는 점에서 중세 국어와 현대 국어가 동일하지만, 중세 국어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ㄹ일 경우에도 앞의 용언에서처럼 ㄱ이 탈락한 ‘-와’를 선택한다는 점이 다르다.

d. 곳과 果實와(석보상절 6:40ㄱ) 입시울와 혀와 엄과 니왜 다 됴며(석보상절 19:7ㄴ)

그러나 『여훈 언해』에 와서는 체언이 ㄹ말음일 때도 ‘-과’가 연결되었다. 이는 이미 16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현상이다.

e. 하과 희(상:45ㄴ) 녜節과 禮 되며(하:28ㄴ)

접속 조사와 관련해서 16세기 후반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이탈을 『여훈 언해』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말음이 모음인 체언임에도 ‘-와’가 아니고 ‘-과’를 연결해 쓰고 있는 현상이다. 마치 모든 환경에 걸쳐 ‘-과’로 단일화하려는 시도처럼 보이나 그 세력은 부분에 그친다. 등장하는 예를 전부 제시한다.

f. 돕 신하과 믿 日로 講 禮官 等(상:6ㄴ) 노프니과 니(상:45ㄴ) 夫婦의 이과 妻妾의 서 이시믄(상:46ㄴ) 父母과 가지시고(하:3ㄱ) 天地과 시니(하:3ㄱ) 신하과 妾이(하:12ㄴ) 驕오과 홈을(하:33ㄴ)

나. ㅎ말음 체언

중세 국어에는 ㅎ말음 체언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그 뒤에 조사가 연결되면 조사의 두음에 ㅎ이 나타나는 체언을 말한다. 체언 단독으로 쓰이거나 사이ㅅ 앞에서는 ㅎ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체언은 아니지만 복수 접미사 ‘-ㅎ’도 ㅎ말음을 갖고 있어 ㅎ말음 체언에 포함하여 함께 다루고자 한다. 이들 체언의 ㅎ말음은 이미 15세기에서부터 일부 낱말에서 소실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훈 언해』에도 ‘하ㅎ’과 복수 접미사 ‘-ㅎ’을 제외하고는 말음ㅎ에 별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특히 ‘하ㅎ’은 15세기 국어에서부터 ㅎ이 소멸된 ‘하리, 하, 하래, 하와’와 같은 표기가 일반화하다시피 되었다. 『여훈 언해』에서도 ‘하ㅎ’과 ‘하’이 비등한 수준으로 등장한다.

a. 하히니(상:9ㄱ) 하희(상:45ㄴ) 하히오(하:7ㄴ) 하(하:8ㄱ) 하히(하:20ㄱ) 하(하:40ㄱ)
b. 하이(상:9ㄱ) 하과(상:45ㄴ) 하은(하:7ㄴ) 하애(하:33ㄱ) 하의(하:38ㄴ)

이 밖에 복수 접미사 ‘-ㅎ’에서 ㅎ이 소실된 표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암’[雌]도 ㅎ말음을 현대어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여훈 언해』에서는 ㅎ 소실형과 유지형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c. 모 아리(하:19ㄱ) 모 아(하:35ㄱ)
d. 암(하:9ㄱ) / 암(상:17ㄱ)

그 외에는 ㅎ말음이 아무 변동 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

e. 히라(상:9ㄴ) 둘히(상:10ㄴ) 나토(상:19ㄱ) 안흐로(상:21ㄱ) 나라(상:27ㄴ) 스믈히어든(하:28ㄴ) 나(하:39ㄴ) 터(하:46ㄴ) 열둘히어니와(하:47ㄴ)

다. 주격 조사

중세 국어의 주격 조사는 음운 조건에 따라 체언 말음이 자음일 때는 ‘-이’가 쓰이고, 모음일 때는 ‘-ㅣ’가 연결되어 체언의 모음과 결합함으로써 하향 이중 모음을 형성하였다. 체언 말음이 모음이라도 ‘i, j’ 모음일 때는 주격 조사가 표면적으로는 생략되는 이른바 zero 주격 조사의 형태가 된다. 이 변동 규칙은 당시에 철저히 지켜졌다. 그러나 15세기에 i, j로 끝난 경우라도 한자어 아래에는 주격 조사 ‘-ㅣ’가 연결되는 일이 많았다. 이는 주어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a. 理ㅣ 衆生 미니(능엄경 언해 2:23ㄴ) 機ㅣ 져글(법화경 언해 2:94ㄱ) 如來ㅣ 녜 이셔(법화경 언해 5:146ㄴ) 如來ㅣ 方便으로(법화경 언해 5:147ㄱ)

『여훈 언해』에서는 전체적으로 중세 국어의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서 벗어나는 예들이 가끔 언해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체언의 말음이 자음임에도 ‘-ㅣ’가 연결되거나 반대로 모음으로 끝난 체언 뒤에 ‘-이’가 연결되는 등의 이탈 현상을 말한다.

b. 恩澤ㅣ(상:10ㄱ) 人臣ㅣ(상:25ㄴ) 婦人ㅣ(하:4ㄴ, 하:22ㄴ) 禎祥ㅣ(하:14ㄴ) 人婦이 되얀 이(상:16ㄴ) 婦이 되얀 者(상:36ㄴ) 保이 臨연 (하33ㄴ)

위와 같은 이탈 현상은, 번역을 위해 한문 원문에 달아 놓은 한글 구결에서 더욱 심한 혼란을 드러낸다. 『여훈 언해』의 내용 중에서 첫 부분인 〈어제 여훈서〉와 바로 다음의 〈여훈서〉(純一道人이 씀)의 구결문에는 중세 국어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으나 그 뒤의 본문에서는 구결문에 사용된 주격 조사나 서술격 조사에서 ‘이, ㅣ, Ø'의 구별은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 형태가 주격이나 서술격에서 거의 배제되고, 체언 말음이 자음이든 모음이든 상관없이 주격이나 서술격에서 모두 ‘ㅣ’ 형태 일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의 형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전체를 통해 예외의 수준이라 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서술격 조사에서는 ‘ㅣ’를 표기해야 할 부분에서 ‘ㅣ’를 생략한 예도 많이 나타난다. 아래에 그 예들을 보이되, 자음 다음에도 ‘ㅣ’ 구결을 쓴 예(c)와, 서술격에서 ‘ㅣ’를 생략한 예(d)는 그 일부만 제시한다.

c. 朕ㅣ 幾務之暇애(상:1ㄴ) 子孫臣民ㅣ(상:5ㄱ) 婦人之職ㅣ(상:25ㄱ) 庶可爲傳ㅣ라(상:2ㄴ) 不可不學ㅣ니(상:22ㄱ) 割不正ㅣ어든(하:21ㄱ) 不惟正其身ㅣ라(하:21ㄴ) 皇考이 日躋聖敬之功시며(상:3ㄴ) (보기) 一粒之食이(하:36ㄱ) 耳所熟聞이라(하:43ㄴ)
d. 受命出府러니(상:14ㄱ) 婦道를 奚修리오(상:22ㄴ) 旣受어든(상:43ㄱ) 冠帶垢어든(하:1ㄴ) 貞女之幽行也니라(하:32ㄱ)

또한 구결에서 처격 조사 ‘-예’를 사용해야 할 곳에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래 예에서는 말음 j 밑에서도 ‘-예’가 아니고 ‘-애/에’가 구결로 사용되었다.

e. 越明年辛亥애(상:14ㄱ) 如夫尊鴈之際에(상:39ㄱ) 事有巨世애(하:6ㄴ)
(다른 보기)七歲에 男女ㅣ 不同席며 十歲예 閨門不出閾고(상:31ㄱ)

라. 삽입모음 ‘-오/우-’

중세 국어 문법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우-’가 있다. 이 의도법 어미는 아무 곳이나 삽입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어미에 한해서 그 앞에 삽입된다. 필수적으로 ‘-오/우-’가 삽입되는 어미로는 명사형 어미 ‘-ㅁ’이 있고 이 밖에 연결어미로 ‘-’와 ‘-려’가 있다. 반면에 이러한 삽입모음을 취하기도 하고 취하지 않기도 하는 부류도 있는데, 이에 속하는 어미로는 관형사형 어미 ‘-ㄴ, -ㄹ’이 있고 연결어미 ‘-니, -니, -리니’와 종결어미 ‘-리라’가 있다. 이 삽입모음은 15세기 후반에 동요되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소멸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표기상으로는 더 후대에까지 존속한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17세기의 『여훈 언해』에는 삽입모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를 위해서 삽입모음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어미의 경우에 삽입모음의 개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앞에서 삽입모음을 항상 수반하는 어미에는 ‘-ㅁ, -, -려’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중에서 ‘-려’는 『여훈 언해』에 한 번도 쓰인 일이 없고, ‘-’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삽입모음이 모두 개재되고 있다. 그러므로 ‘-려, -’ 어미의 경우에는 삽입모음의 동요를 확인할 수가 없다. 반면에 명사형 어미 ‘-ㅁ’의 경우에는 용례도 많지만 삽입모음의 사용에 있어서도 소실형과 개재형이 비등하게 나타나고 있어, 여기서는 명사형 어미 ‘-ㅁ’의 경우를 대상으로 하여 그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명사형 어미 ‘-ㅁ’ 앞에 삽입모음 ‘-오/우-’를 취한 표기는 ‘다’ 및 ‘-다’류 용언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도 ‘다’ 및 ‘-다’류 용언의 경우에는 삽입모음이 건재함을 보여 주는 듯하다.

a. 셰호미(상:8ㄴ) 動홈애(상:10ㄴ) 徵험호미(상:19ㄴ) 剛紀되디 몯홈을(상:21ㄱ) 공경홈을(상:28ㄴ) 싁싁홈으로(상:41ㄱ) 공敬요미(하:9ㄴ) 하티 호미라(하:8ㄱ) 막게 호(하:8ㄴ) 아디 몯호미(하:14ㄱ) 블러 홈을(하:18ㄴ) 平호믈 樂호믄(하:23ㄴ) 居욤애(하:33ㄴ)

이처럼 삽입모음의 사용례가 문헌 전체를 통해 많이 나타나지만 ‘-다’류가 아닌 용언으로서 명사형에 삽입모음이 사용된 예는 거의 모습을 감춘 상태이다. 아래의 예가 전부이다.

b. 어버이를 섬교매(상:25ㄴ) 婦ㅣ 되요매(상:38ㄱ) 어디로믈(하:8ㄱ) 나며 믈로미(하:30ㄱ)

위에 제시한 b의 예를 제외하고는 ‘-다’류가 아닌 용언의 명사형에서 삽입모음의 표기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아래의 c가 확실한 추세를 보여 준다.

c. 어디르믈(상:11ㄱ) 업시녀기미(상:20ㄴ) 디 업이니(상:21ㄱ) 키미라(상:33ㄱ) 치믈(상:34ㄱ) 게으르믈(하:4ㄱ) 안앤(하:23ㄱ) 너므미 업스미오(하:23ㄱ) 어딘 일을 싸믄(하:24ㄱ) 치미(하:27ㄴ) 나타나믈 표며(하:28ㄴ) 댱가 드리믄(하:28ㄴ) 덕을 사므미(하:38ㄴ) 셤기믈(하:39ㄴ)

위의 a에서 보았듯이 명사형에서 삽입모음의 존재를 확고히 보여 주는 표기는 ‘다’ 및 ‘-다’류 용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서 ‘-다’ 용언류에서도 삽입모음의 소멸이 진행되고 있음을 또한 아래의 d가 보여 준다. 그러나 아직은 ‘-다’ 용언에서 삽입모음의 표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d. 植立과 齊治과(상:16ㄴ) 求 코져 미(상:17ㄱ) 徵험미(상:20ㄴ) 身의 立믄(상:29ㄱ) 쟝만미오(상:33ㄴ) 공경로(하:8ㄱ) 공경믈(하:9ㄴ) 가지로 아니믈(하:28ㄱ) 덛덛미(하:34ㄱ)

마. 그 밖에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 문법 형태에서 주목되는 현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먼저, 존칭 여격 조사 ‘-’의 표기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기원적으로 ‘-’는 15세기에 존칭 관형격 조사였던 ㅅ과 대명사 ‘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조사로 보는 것이다. 이는 15세기 문헌들에 나타난 표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처럼 합용병서로 적기도 하였지만 ‘-ㅅ긔’와 같이 ㅅ을 분리해서도 많이 적고 있기 때문이다.

a. 아긔(용비어천가 25장) 부텻긔(월인천강지곡 기74) 如來ㅅ긔(월인석보 14:15ㄴ)
b. 하(월인석보 21:21ㄴ) 부텨(석보상절 6:9ㄴ) 世尊(월인석보 7:3ㄴ)

『여훈 언해』에도 존칭 여격 ‘-’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처럼 ㅅ을 분리해서 적은 예는 없고 하나로 굳어진 ‘-’로만 쓰이고 있다.

c. 聖母(상:7ㄱ) 鳥考(상:10ㄱ) 父母(상:41ㄴ) 舅姑(하:3ㄱ) 大舜(하:8ㄴ) 님금(하:29ㄱ)

이와 같이 관형격 ㅅ은 ‘긔’에 흡수되어 ‘-’로 일원화되었는데 『여훈 언해』에서는 이러한 ‘-’에 다시 ㅅ을 더한 ‘-ㅅ’가 등장하기도 한다.

d. 皇后ㅅ(상:7ㄱ) 舅곳(상:28ㄴ) 夫子ㅅ(상:29ㄱ) 父母ㅅ(상:33ㄴ)

다음으로, 객체높임의 문법 형태인 ‘-//-’ 대신에 ‘-솝/좁/옵-’의 변이된 형태가 쓰인 것을 일부에서 볼 수 있다.

e. 머리 굽솝고(하:46ㄱ) 글의 인 주 엿조오매(상:8ㄱ) 곳 慈命을 닙소오니(상:8ㄱ) 敎令을 밧조와(상:27ㄴ) 그 후에 조차 뫼오와(상:27ㄴ)

또 한 가지는 파생 부사의 형태이다. 부사 접미사 ‘-이’를 ‘-다’류 용언에 붙여 파생 부사를 만드는 경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어근에 접미사 ‘-이’를 바로 붙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어간 ‘~-’에 접미사 ‘-이’를 붙이는 방법이다. 후자의 경우 ‘~-’에 ‘-이’가 결합될 때는 ‘’의 ‘ㆍ’가 탈락하여 ‘-히’가 된다. 그런데 『여훈 언해』에는 동일한 ‘-다’ 용언에 대해 두 가지 방법으로 각각 만들어진 부사가 공존하고 있는 예를 볼 수 있다.

f. 至극이(하:34ㄴ) / 至극히(하:34ㄱ) 맛당이(하:46ㄱ) / 맛당히(하:45ㄴ)

이와는 달리 부사에 부사 접미사 ‘-히’를 붙인 예도 발견된다.

g. 근原이 果연히 어 인뇨(상:18ㄱ) 너모히 디 몯 거시오(하:40ㄱ)

‘果연’과 ‘너모’는 그 자체로서 엄연히 부사로 쓰이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다시 부사 접미사 ‘-히’를 붙여 쓰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ㆁ의 소멸로 나타난 현상이다. 15세기에 상대 높임법의 선어말 어미로 --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평서법으로 ‘-다, -니다, -리다’, 의문법에 ‘-니고, -리가’ 등의 형태가 상대 높임법으로 쓰이던 어미들이다. 이러한 높임법의 ‘--’ ‘--’은 17세기에 들어서 ㆁ의 소실로 ‘-이-’, ‘-잇-’이 되었다. 『여훈 언해』에는 15세기에 청원형(請願形) 높임법으로 쓰였던 ‘-지다’가 ㆁ이 소실되면서 ‘-지이다’가 아닌 ‘-징이다’로 바뀌어 나타난 예가 있다.

h.  지거든  무텨 시서징이다(하:3ㄴ)
i.  지거든  무텨 셰답야징이다.(하:3ㄴ~4ㄱ)

이는 상대 높임법 ‘--’의 ㆁ이 소실된 상태에서도 그 음가 [ŋ]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징이다’와 같이 ㅇ을 말음에 적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3. 어휘 및 한문

가. 어형의 교체

17세기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여훈 언해』에는 중세 국어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근대 국어의 새로운 형태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중세 국어의 편린들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낱말에 따라서는 중세 국어에서 사용되었던 구형과 이를 개신한 신형이 함께 나타나는 것도 있는데, 이 경우 아직은 신형이 구형을 능가하지 못한 가운데 구형이 버티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몇 낱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다

15세기의 동사 ‘다’가 16세기에 오면 어형이 바뀐 ‘다’로 등장한다. 이 ‘다’가 『여훈 언해』에 그대로 이어져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가 구형인 ‘글다’보다는 열세에 있다. 15세기의 잔영인 ‘글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a. 句 버혀 直解 고(하:45ㄱ)
b. 女訓 拾貳篇을 그노니(상:28ㄱ)
내 녜 근 女訓으로(하:45ㄴ)
내의 글 그라(하:45ㄴ)

15세기의 ‘다가’와 ‘반기’ 및 ‘초다’가 16세기에 와서 ‘만일’과 ‘반시’ 그리고 ‘초다’로 바뀌고 ‘초다’는 다시 ‘초다’로 변하여 모두 17세기로 넘어온 것은 ‘-’의 경우와 같지만, ‘다가’, ‘반기’, ‘초다’의 형태는 『여훈 언해』에서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만일’, ‘반시’, ‘초다’ 일색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다’의 경우에는 ‘다’와 이전의 ‘글다’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2) [地]

중세 국어에서 ㅎ말음 명사이던 ‘ㅎ’[地]이 ‘ㅎ’으로 발달한 유일한 예가 발견된다. 『여훈 언해』에서 ‘ㅎ’의 출현은 하나의 돌발 사태로 보일 정도로 아직은 ‘ㅎ’의 천하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ㅎ’이 등장하였다는 것은 현대 국어의 형태가 이미 싹트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c. 頓首 머리 해 두드리다(상:9ㄱ)

(3) 처음

중세 국어의 ‘처’이 16세기에 ㅿ의 소실로 ‘처엄’이 되었다가 17세기에 ‘처음’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훈 언해』에서도 ‘처엄’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 ‘처음’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도 역시 현대 국어로의 진입을 보여 주는 어형이다. 이로써 『여훈 언해』가 ‘처음’이 등장하는 앞선 문헌이 아닌가 한다.

d. 기 처음으로 울으매(하:3ㄴ)
e. 처엄의 두 姓의 됴흐믈 合며(상:44ㄴ)
洪武 처엄은 女戒 잇고(하:46ㄱ)

(4) 앞

15세기의 ‘앒’에서 ㄹ의 탈락으로 ‘앞’이 된 것은 16세기 문헌에서이다. 앞의 어휘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신구형이 모두 등장한다.

f. 聖母 압픠 나아가(상:8ㄱ)
g. 羅列여 알 게 며(상:34ㄴ)
알로 唐과 虞ㅅ나라로(하:46ㄴ)

(5) 일즙

위에서는 17세기에 등장한 개신된 형태의 낱말이 아직은 중세 국어에서 사용되던 옛 형태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에 등장한 ‘일즙’의 경우는 다르다. 15세기의 ‘일즉’[早]이 17세기에 등장한 ‘일즙’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h. 일즉 睿主ㅅ겨틔 뫼오와(상:28ㄱ)
i. 녜 藩邸에 겨실제 일즙  글을 지으시니(상:6ㄴ)
일즙 受 바 書와 傳의 말로 編輯여(상:19ㄴ)
일즙 女訓  集을 지으샤(하:45ㄱ)

나. 한자어의 표기

16ㆍ7세기의 언해서 중에는 언해문을 국한 혼용 하지 않고 고유어나 한자어 모두를 한글로만 표기한 문헌들이 있다. 그러나 『여훈 언해』는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고 거기에다 한자음을 병기하는 체재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낱말 단위로 하지 않고 음절별로 국한 혼용의 표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표기 방식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여훈 언해』에는 일반화하다시피 되어 있다. 그 예를 몇 개 들어 본다.

i. 사侈(하:38ㄱ) - 奢치와(하:38ㄱ) - 奢侈(하:39ㄱ), 화麗(하:39ㄴ) - 華려며(하:30ㄱ), 녜節과(하:28ㄴ) - 禮졀을(하:24ㄱ), 공敬미라(하:9ㄴ) - 恭경야(상:19ㄴ), 궁究면(하:47ㄴ) - 窮구며(하:28ㄴ), 존節며(하:38ㄱ) - 撙節며(하:40ㄱ), 風쇽을(하:39ㄴ) - 風俗이(상:29ㄴ), 端졍고(하:9ㄱ) - 端正야(하:23ㄴ)

주로 2음절로 된 한자어에서 제1음절이나 제2음절 중의 어느 한 음절만 한자 표기를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두 음절 중 어느 음절을 한자로 표기하느냐 하는 것에 어떤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사치’란 낱말을 표기하면서 ‘사侈’로도 적고 ‘奢치’로도 적은 것을 보면 자의적인 표기였음이 드러난다. 심지어 ‘奢侈’로도 적었으니 원칙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다. 한문 원문과 구결문의 검토

앞서 서지적 고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훈 언해』는 원본인 한문본을 먼저 실어 놓고 그 다음에 이를 번역한 언해본을 실어 놓았다. 그러므로 한 책 속에 한문 원문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앞 부분에 있는 한문본에 순 한문으로 된 원문이 있고, 또 한 번은 한문본에 뒤이어 있는 언해본 부분에서 한글 구결이 달려 있는 구결문 체재의 한문 원문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원문을 비교해 본 결과 한자의 누락이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언해본 부분의 구결문과 언해문에는 한자마다 한자음을 일일이 병기해 놓고 있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로 보인다. 이 한자음 병기(倂記)가 누락된 곳도 몇 군데 된다. 이렇게 한자마다 한자음을 달면서 동일한 한자에 서로 다르게 한자음을 달아 놓은 경우도 나타난다. 이제 이러한 용례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1) 원 한문과 구결문의 비교

한문본의 원문과 언해본의 구결문을 비교하여 양자간에 차이나는 부분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예문으로 인용한 구결문의 한글 구결은 생략한다.(이하 모두 같음)

a. 嘉靖庚寅季餘十有九日(여훈서:3ㄴ)

위의 구절은 한문본 부분에 있는 「어제 여훈서」의 맨 끝구절로서 서문을 쓴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구절이 한문본의 원문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언해본의 구결문에는 빠져 있다.

b. 嚴周而密則未有如我(하:43ㄱ-7,8행)

b는 『여훈 언해』의 언해본 부분에 있는 「여훈 후서」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이 언해본의 구결문에는 있으나 한문본 부분의 원문에는 지워져 있다. 그리하여 한문본의 ‘여훈후서:22ㄱ-5행’은 공란으로 비어 있다.

이하 c~g는 한문본의 원문과 언해본의 구결문을 비교한 결과 어느 한 쪽에서 한 글자가 빠져 있는 구절들을 제시한 것이다. 아래 예문의 각 항에서 앞쪽의 것은 한문본의 원문 구절이고, 뒤쪽의 것은 같은 구절의 언해본 구결문이다. 양쪽을 비교해 보면 한문본에서 한 자가 빠진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c. 事業莫大於脩齊治平(여훈서:4ㄱ) — 事莫大於脩齊治平(상:12ㄱ)
d. 抑豈婦人儀哉(여훈서:5ㄴ) — 抑豈婦人之儀哉(상:15ㄴ)
e. 不可以不敬夫(여훈서:8ㄱ) — 不可以不知敬夫(상:24ㄴ)
f. 齊家俗(여훈서:8ㄴ) — 齊家範俗(상:25ㄴ)
g. 亦由不賢之婦之所致也(여훈:12ㄱ) — 亦由不賢婦之所致也(상:40ㄱ)

이뿐만 아니라 동일한 구절에서 원 한문과 구결문 사이에 서로 다른 글자를 쓰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번역을 위해 구결문을 작성하면서 원문의 글자를 바꾼 것이지만, 글자는 서로 달라도 뜻은 같은 자끼리 교체한 것이다. 각 항의 앞엣것이 한문본의 원문이다.

h. 玆觀妃所編女訓(여훈서:5ㄴ) — 慈觀妃所編女訓(상16ㄱ)
i. 自然淳龐(여훈서:8ㄴ) — 自然淳厖(상:25ㄱ)
j. 上浣日(여훈서:8ㄴ) — 上澣日(상:25ㄴ)
k. 始仕而陳任事之謀(여훈서:18ㄱ) — 始任而陳任事之謀(하:26ㄱ)

끝으로, 한문본의 ‘國家’를 구결문에서 ‘家國’으로 앞뒤 바꿔 놓은 곳이 있다.

l. 夫國家之興(여훈후서:22ㄱ) — 夫家國之興(하:42ㄴ)

(2) 한자음 병기의 누락

언해본 부분의 구결문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원 한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한자 하나하나에 모두 한자음을 병기해 놓고 있다. 그런 중에 한자음 병기를 빠뜨린 곳이 아래와 같이 몇 군데 발견된다. 밑줄을 표시한 글자에는 한자음 표기가 빠져 있다.

a. 誠能능以이傳뎐訓훈之지書셔(상:5ㄱ)
b. 士庶셔人(상:10ㄴ)
c. 所소以이合합體톄而이同동尊卑비也야(상:43ㄴ)
d. 則無무以이御어婦부(상:43ㄴ)
e. 有유大대事(하:2ㄴ)
f. 或因안奉봉承승乏핍人인而이他타卜복(하:10ㄴ)
g. 婦부愛其기妾(하:11ㄴ)
h. 五오味미昏智디(하:37ㄱ)

언해문에 등장하는 한자에도 한자음을 병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한자음 병기를 누락한 곳이 있다.

i. 春츈王왕正月월上샹澣한日일에 스노라(상:29ㄴ)
j. 尹윤吉길甫의 아리라(하:19ㄱ)

(3) 한자음의 혼기(混記)

동일한 한자에 대한 음(音)을 조금씩 다르게 표기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본래 말음이 ㅕ인 한자음에 j를 덧붙여 ㅖ의 한자음을 쓰기도 하였다.

a. 邸 : 뎌/뎨
昔셕在藩번邸뎌샤(상:1ㄱ) — 皇황太태后후ㅣ 藩번邸뎨에 겨실 제(상:6ㄱ-ㄴ)
b. 妻 : 쳐/쳬
士庶셔人인妻쳐ㅣ(상:5ㄴ) — 士庶셔人의 妻쳬ㅣ(상:10ㄴ)
c. 書 : 셔/셰
女녀敎교ㅅ書셔ㅣ 이시니(상:26ㄴ) — 小쇼學之지書셰ㅣ(상:22ㄴ)
d. 勢 : 셔/셰
勢셔ㅣ로 핍박기 어렵고(하:12ㄴ) — 難난以이勢셰逼핍ㅣ오(하:10ㄴ)

둘째, 모음 i, j 앞에서 ㄹ과 ㄴ을 혼용한 예들이 많이 나온다. 어두 어중 상관없이 혼용되고 있다.

e. 麗 : 려/녀
錦금繡슈華화麗려ㅣ(하:36ㄴ) — 絶졀侈치麗녀之지費비야(하:37ㄱ)
f. 令 : 령/녕
不불特특三삼宮궁敎교令령ㅣ(상:23ㄴ) — 皇황太태妃비睿예母모之지敎교令녕야(상:23ㄴ)
g. 列 : 렬/녈
祖조考고列렬聖셩聖셩母모고(상:2ㄱ) — 祖조考고列녈聖셩聖셩母모(상:7ㄱ)
h. 寧 : 령/녕
居거安안寧령也야애(하:31ㄴ) — 身신不블康강寧녕야(하:17ㄴ-18ㄱ)
i. 禮 : 례/녜
禮례官관이 裝장䌙황여 드리와(상:7ㄴ) — 禮녜官관 時시等등이  닐오(상:7ㄴ)
j. 隆 : 륭/늉
家가道도의 隆륭셩믈 닐위며(상:46ㄴ) — 明명可가以이致티家가道도之지隆늉며(상:44ㄴ)
k. 理 : 리/니
但단文문理리奧오妙묘야(23ㄱ) — 敎교以이窮궁理니正졍心심之지道도와(하:25ㄴ-26ㄱ)
l. 臨 : 림/님
如여臨림師保보야(하:31ㄴ) — 스승이며 保보이 臨님연 (하:33ㄴ)

셋째, 한자 자체가 두 가지 음을 갖고 있는 경우, 두 가지가 다 나타난다.

m. 揖 : 읍/즙
婿셔ㅣ 婦부 揖읍고(상:45ㄱ) — 壻셔ㅣ 揖즙婦부以이入입야(상:43ㄴ)
n. 則 : 즉/측 주004)

‘則’ 자에 대해서 『광주 천자문』에서는 ‘법즉 즉’으로 석(釋)과 음(音)을 달아 놓았고, 『석봉 천자문』에서는 ‘법측 측’으로 석ㆍ음이 표기되어 있다. 두 문헌은 모두 16세기 후반의 자료들이다.

則즉敬경抑억搔소之지며(하:1ㄴ)—有유所소謂위女녀憲헌女녀則측이나(상:23ㄱ)

넷째, 말음에서 비음(鼻音) 간의 혼용이 일어나고 있다. 주005)

이와 같은 현상은 『천자문』의 이본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稱, 賓’자에 대해서 『광주 천자문』에서는 ‘친, 빙’으로 각각 자음(字音)을 표시하였고, 이와 달리 『석봉 천자문』에서는 ‘칭, 빈’으로 표시하고 있다.

o. 親 : 친/칭
愛親친之지意의如여此노니(상:5ㄴ) — 人인有유親칭踈소며(하16ㄱ)
p. 貧 : 빈/빙
不블以이宣션貧빈而이不블畏외니라 — 居거貧빙賤쳔也야애(하:31ㄴ)

다섯째, ㅈ 아래 쓰인 이중모음이 단모음으로 교체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q. 節 : 졀/절
비로소 節졀儉검 德덕을 일우리라(상:34ㄴ)— 方방成셩節절儉검之지德덕也야ㅣ니라(상:32ㄴ)
r. 坐 : 좌/자 주006)

‘坐, 佐’자에 대해서도 『광주 천자문』에서는 각각 ‘자, 좌’로 그 음을 표기하였고, 『석봉 천자문』에서는 정반대로 ‘좌, 자’로 표기해 놓았다.

坐좌則즉不블偏편其기身신며(하:21ㄱ)—坐자則즉敬경侍시立닙之지고(하:1ㄴ)

그리고 위의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혼용이 있다. 한자음 초성의 ㅎ으로 인한 차이이다.

s. 育 : 육/휵 주007)

<풀이>‘育’ 자의 음도 두 천자문에서 서로 달리 나타내고 있다. 즉 『광주 천자문』에는 ‘휵’, 『석봉 천자문』에는 ‘육’으로 각각 음을 달아 놓았다.

考고와 母모의 敎교育육이(상:8ㄴ) — 考고母모之지敎교育휵이(상:3ㄱ)

Ⅲ. 마무리

『여훈 언해(女訓諺解)』는 명나라에서 찬술(撰述)된 한문본 『여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여훈』은 명나라 11대 황제인 세종(世宗)의 어머니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에 편찬하였고, 그 후 아들인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 1530년에 다시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을 최세진이 처음으로 중종 27년(1532년)에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하였으나 이는 현재까지 전하지 않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책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 언해』이다.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한문본 『여훈』의 원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한 책이지만, 이 책은 다른 언해본과는 달리 앞부분에 한문본의 원문을 전부 그대로 옮겨 실은 다음 구결문과 언해문으로 구성된 언해본을 싣고 있다. 한문본과 언해본을 같은 책에 묶어 편찬한 셈이다. 그러나 번역자나 간행 연대 및 간행처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언해문에 나타난 언어적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대략 언제쯤 간행된 책인지를 추정할 뿐이다.

먼저, 『여훈 언해』의 문자 체계는 17세기 국어의 25자 체계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방점, ㅿ, ㆁ 등은 자취를 완전히 감춘 상태이다. 표기법에 있어서는 분철과 연철이 교차하는 가운데 적어도 체언에서는 분철 표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중철 표기는 일부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받침에서 ㅅ과 ㄷ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든지, 중세 국어에서 용언의 어간 말음이 ㄹ이거나 j일 때, 그 아래에서 ㄱ이 탈락하던 규칙이 폐지되었다든지, 아직 구개음화나 원순모음화 같은 음운 현상을 보여 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 등은 『여훈 언해』가 17세기 전반기쯤의 문헌 자료임을 추정케 한다.

그 밖에 중세 국어 문법의 특징인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우-’가 전반적으로 쇠퇴했음에도 ‘-다’류 용언에선 ‘-오/우-’의 표기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고, ㅎ말음 명사도 대부분 중세 국어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어휘에 있어서도 『여훈 언해』에는 16세기 및 17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개신된 낱말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신형의 낱말들은 중세 국어에서 사용된 옛 형태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개신된 형태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되는 초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다, , 처음, 앞’과 같은 개신형들이 ‘글다, , 처엄, 앒’ 등의 구형에 비해 열세에 있다. 반면에 17세기에 처음 등장한 ‘일즙’은 중세 국어의 ‘일즉’을 제압한 느낌이다.

구결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일일이 자음(字音)을 달면서도 동일한 한자에 대해서 한자음을 조금씩 다르게 병기(倂記)한 곳이 발견된다. 이는 같은 시대의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어서 단순한 오기(誤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김동소(2007), 『한국어의 역사』, 정림사.
김영일(2009), 『한국 단어족 사전』, 박문사.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 지성사.
이기문(1978), 『16세기 국어의 연구』, 탑출판사.
이기문(2006), 『신정판 국어사 개설』, 태학사.
이익섭(1992), 『국어 표기법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허웅(1989), 『16세기 우리 옛말본』, 샘문화사.
홍윤표(1993), 『국어사 문헌자료 연구』, 태학사.
홍윤표 외(1995), 『17세기 국어사전』, 태학사.

주001)
이 책은 1990년 1월 15일, 홍문각에서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한 바 있다. 이 책도 서명(書名)은 『女訓』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여훈』이라 함은 모두 명나라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번역 간행한 책은 『여훈 언해』라 해서 한문본 『여훈』과 구별하고자 한다.
주002)
홍윤표(1990). 『여훈언해』 해제. 『여훈언해ㆍ규합총서』 영인본. <현대말>홍문각.
주003)
『여훈 언해』에는 아래와 같이 동일한 낱말을 두고 서로 다른 5가지의 표기가 등장할 정도로 표기의 혼란이 나타나기도 한다.
믈읫(상:37ㄴ), 므(상:19ㄴ), 므(상:34ㄴ), 믈읟(하:27ㄴ), 므릇(하:47ㄴ).
주004)
‘則’ 자에 대해서 『광주 천자문』에서는 ‘법즉 즉’으로 석(釋)과 음(音)을 달아 놓았고, 『석봉 천자문』에서는 ‘법측 측’으로 석ㆍ음이 표기되어 있다. 두 문헌은 모두 16세기 후반의 자료들이다.
주005)
이와 같은 현상은 『천자문』의 이본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稱, 賓’자에 대해서 『광주 천자문』에서는 ‘친, 빙’으로 각각 자음(字音)을 표시하였고, 이와 달리 『석봉 천자문』에서는 ‘칭, 빈’으로 표시하고 있다.
주006)
‘坐, 佐’자에 대해서도 『광주 천자문』에서는 각각 ‘자, 좌’로 그 음을 표기하였고, 『석봉 천자문』에서는 정반대로 ‘좌, 자’로 표기해 놓았다.
주007)
<풀이>‘育’ 자의 음도 두 천자문에서 서로 달리 나타내고 있다. 즉 『광주 천자문』에는 ‘휵’, 『석봉 천자문』에는 ‘육’으로 각각 음을 달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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