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여사서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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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여사서언해
역주 여사서언해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는 청나라 초 왕상(王相)이 간행한 『여사서(女四書)』를, 조선 영조 10년(1734) 12월 영조의 명에 따라 제조 이덕수(李德壽)가 언해하여 영조 13년(1737)에 간행한 책이다. 그 내용은 부녀자의 교훈서인 중국 후한(後漢) 조태고(曹大家)의 『여계(女誡)』, 당(唐)나라 송약소(宋若昭)의 『여논어(女論語)』, 명(明)나라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의 『내훈(內訓)』, 명나라 왕절부(王節婦) 유씨(劉氏)가 지은 『여범첩록(女範捷錄)』 등인데, 왕절부는 왕상(왕진승)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여사서언해』는 모두 4권 3책(제1·2권, 제3권, 제4권)으로 된 갑인자본이다. 이 책은 『어제 여사서언해(御製女四書諺解)』라고도 한다. 『여사서언해』는 국어사적인 방면으로 그 당시의 말에 대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됨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풍습이나, 특히 윤리관에 대한 고찰에도 좋은 자료가 되며, 현대 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교훈서가 될 것이다. 이번에 우리 회에서 펴내는 이 역주본의 저본은 원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사용하였다.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953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대학 대학원을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언조사연구원 및 울산대학교 조교수
제7대 국립국어원장 역임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도쿄대학교 대학원 객원 연구교수
중국해양대학교 고문교수
남북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동 이사.

〈저서〉

『훈민정음통사』(주해)
『한국어방언학』
『경북방언사전』(학술원우수도서)
『언어지도의 미래』(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
『한글고문서연구』(학술원우수도서)
『조선어학회 33인 열전』 등.

〈논문〉

「『훈민정음』 영인 이본의 권점 분석」(2009)
「디지털 시대에 한글의 미래」(2009)
「잔본 상주본 『훈민정음』(2012)
「Hangeul, The Greatest Letters」(2007) 등.

〈수상〉

일석학술장려상(1986)
외솔학술상(2011)
봉운학술상(2012)
대통령표창(2004).

역주위원

  • 여사서언해 권1·2·3·4 :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 교열·윤문·색인위원

  • 여사서언해 권1·2·3·4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리의도 박병천
  • 성낙수 오명준 이창림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 정태섭 조오현 차재경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여사서언해』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전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ㆍ9ㆍ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4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ㆍ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정음 문헌과 책 수는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ㆍ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14) 3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ㆍ7ㆍ8ㆍ9ㆍ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 3책, 『연병지남』 1책, 『병학지남』 1책,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 1책,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1책, 『사리영응기』 1책, 『백련초해』 1책, 『칠대만법ㆍ권념요록』 1책 등 모두 99책에 달한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 가운데 『여사서언해』 등 지난해에 이어 16세기~18세기 문헌을 역주할 예정이다. 특히 선조들의 여성을 위한 교훈서를 중점적으로 발간할 것이다.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는 청나라 초 왕상(王相)이 간행한 『여사서(女四書)』를, 조선 영조 10년(1734) 12월 영조의 명에 따라 제조 이덕수(李德壽)가 언해하여 영조 13년(1737)에 간행한 책이다. 그 내용은 부녀자의 교훈서인 중국 후한(後漢) 조태고(曹大家)의 『여계(女誡)』, 당(唐)나라 송약소(宋若昭)의 『여논어(女論語)』, 명(明)나라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의 『내훈(內訓)』, 명나라 왕절부(王節婦) 유씨(劉氏)가 지은 『여범첩록(女範捷錄)』 등인데, 왕절부는 왕상(왕진승)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여사서언해』는 모두 4권 3책(제1·2권, 제3권, 제4권)으로 된 갑인자본이다. 이 책은 『어제 여사서언해(御製女四書諺解)』라고도 한다. 이 판본 이외에 융희 원년(1907)에 박만환(朴晩煥)이 언해한 판본이 있다.

『여사서언해』는 국어사적인 방면으로 그 당시의 말에 대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됨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풍습이나, 특히 윤리관에 대한 고찰에도 좋은 자료가 되며, 현대 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교훈서가 될 것이다.

이번에 우리 회에서 펴내는 이 역주본의 저본은 원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사용하였으며, 연구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이 책 뒤에 부록으로 실었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ㆍ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맡아주신 경북대학교 이상규 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주신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2014년 1월 1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된 것은 한글을 깨우침은 물론, 당시 오로지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수많은 문헌과 학습서를 백성들이 쉽게 배워 익힐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또한 그 문해 효과는 이미 조선시대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마다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는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하게 변천한 우리말을, 전문가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여사서언해』의 저본으로는 원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으로 하였고 뒤에 영인을 실었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구결원문·언해문, 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권(卷), 장(張), 앞쪽[ㄱ]·뒤쪽[ㄴ]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여사서 3권 79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寬관和화야 大대여사3:79ㄱ孝효의 귿

여사서 3권 79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自여사3:79ㄴ昔셕之지待外외戚쳑이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띄어쓰기는, 한자에 독음과 토를 붙인 구결원문은 토를 붙인 데만 띄었고, 언해문은 현대문법에 따라 띄어 썼다.

(5) 이 책의 한자말은 모두 독음을 한자 옆에 적었는데 한자의 한글 표기가 당시의 발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원문대로 살려 표기하였다. 다만 이에 대한 현대문 주석의 올림말은 현대 발음대로 하였고, 말밑 한자를 괄호에 넣었다.

(6) 한자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문 풀이·주석과 구별하였고, 원문이나 언해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의 협주는 편의상 【 】 표시로 묶어 나타내었으며, 협주 속의 주석은 다시 ≪ ≫ 표시로 묶었다. 이에 대한 현대문도 같게 하였다.

(7) 찾아보기는 언해문의 낱말을 전수 조사 방식으로 모두 찾을 수 있도록 하였고, 한자 독음을 표기한 낱말과 순 옛말 표기 낱말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아울러 한자 용어 주석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배열순서는 맞춤법에 따랐다.

통제와 절제의 미학, 여성 교훈서 『여사서언해』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여사서언해』의 문헌적 가치

조선은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이상을 구현하고, 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가적 치국방략으로 중화사대주의를 국가 통치의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민풍 교화의 일환으로서, 특히 여성 교육을 위해 유향의 『열녀전』, 반소의 『여계』와 『송사열녀전』, 『원사열녀전』, 채옹의 『여훈』과 『여효경』, 『내훈』, 『안씨가훈』, 『시경』, 『서전』, 『예기』, 『주역』과 같은 중국 서적을 전범적인 교화서로 채택하였다. 이들 중국 원전에서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언해서로 만들어 일반백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민풍 교화서로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효·충·열의 수범적인 사례를 널리 수집하여 보충한 민풍 교화서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에서의 여성 수신 교훈서로는 성종 6년(1475)에 소혜왕후가 『열녀전』, 『소학』, 『여교』, 『명감』에서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편찬한 『내훈』과, 중종 27년(1532)에 최세진이 조태고의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에 이어, 영조 12년(1736)에 중국의 4대 여훈서를 언해한 『여사서언해』 및 융희 원년(1907) 이를 개간한 개간본 『여사서언해』와, 영조 대 『어제내훈』 등이 있다.

여성들을 위한 수신 교훈서와 백성들을 위한 교화서는 내용상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내용상 상호 출입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면밀한 대조를 통해 여성 교육의 흐름뿐만 아니라 국어사 변천을 연구하는 데 이 『여사서언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중국의 원전인 『여사서』가 일찍 세종 시대에 인간된 『삼강행실도』나 성종 6년(1475)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쓴 『내훈』에 삽입된 효충열의 수범적인 중국의 사례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여사서언해』는 소혜왕후의 『소학언해』 등 여타 민풍 교화서의 내용에서 따온 부분이 많기 때문에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폭넓은 시기에 걸쳐 국어사적 변화를 조망하는 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간본 『여사서언해』(1907) 주001)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4권 2책의 『여사서언해』를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한자음은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문 원문과 순한글로 된 언해문을 구분하였고, 언해 방식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중간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개간본’으로 명명할 것이다.
와의 대교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과정의 국어사적 변화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문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여사서언해』의 영향을 받은 궁실 여성의 교훈서로서도 필사된 『곤범』과 『곤의』 등은 각종 경서와 성리서, 모도문 등의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조선 궁중 여성 교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주002)

황문환 외, 『역주곤범』, 장서각소장총서 3, 역락, 200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한글자료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참조. 박재연, 『한글 필사문헌과 사전 편찬』, 역락, 49~97쪽, 2012.
『여사서언해』의 보급은 궁실이나 사대부가의 여성에서부터 여항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한글의 보급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실과 기능을 하였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전형화한 내용인 『여사서언해』는 조선의 주체의식을 이끌어내어 국가적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가문과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회집단의 가정교육 체계를 구현해 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여성들의 한글 학습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근거로는 18세기 이후 영남 사대부들의 여성들에게 ‘내방가사’라는 조선 후기 집단 여성문학으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 교훈서의 내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체험을 덧붙여 낭송하기에 편하도록 3.4조 2음보 격의 ‘내방가사’라는 교술 문학 장르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는 『규곤의측』, 『규의』, 『여자초학』, 『천금록』, 『여교』, 『일심공덕』 주003)
권영철, 〈일신공덕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1집, 1971. 참조. 『일신공덕』은 경북 봉화에 권상용(1851~1933)이 1912년에 지은 필사본이다.
, 『태교신기』 주004)
권영철, 〈태교신기 연구〉, 『여성문제연구』 제2집, 1972. 참조. 유희의 모부인 숙인 이씨 사주당(1739~1821)이 쓰고 유희가 1801년에 언해한 책이다.
, 『규방필독』 주005)
권영철, 〈규방필독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9집, 1980. 참조. 『규방필독』은 경북 성주 초전면 고산정 송홍설 씨 소장본인데 송인건(1892~1954)이 1930년대에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기녀서』, 『여훈』, 『규범』 주006)
권영철, 〈규방문헌을 통해 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동 용궁 전씨 녹문대 고씨부인 소장본이다.
, 『여자계행편』 등 필사본 여성 교훈서 주007)
권영철, 〈규방문학을 통해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가 사대부가의 여성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면서 개인의 체험과 상상력이 결합한 교술적 내방가사인 〈계녀〉, 〈계녀가〉, 〈계녀사〉, 〈여 드러보아라〉 등의 계녀가류의 내방가사 문학의 장을 여는 촉매적인 구실을 하였다. 주008)
이정옥, 『내방가사의 향유자 연구』, 박이정출판사, 1999.
이 『여사서언해』는 여성층을 통해 한글을 확산시키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계녀〉류의 내방가사와 비교를 통해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사회 집단이나 가문을 중심으로 한 여성 교훈서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규범』,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규범선영』 주009)

이을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 해제〉, 『정신문화연구』 제7집, 1980. 28~37쪽. 이 책의 내용은 “1. 수신, 2. 독서, 3. 효친, 4. 충군, 5. 우애, 6. 돈목, 7. 제가, 8. 교자, 9. 신교, 10. 휼린, 11. 제기, 12. 분묘, 13. 간복, 14. 잡술, 15. 안분, 16. 징분, 17. 숭검, 18. 적선, 19. 거향잡의, 20 검속신심지례”로 구성되어 있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부의』 주010)
김지용, 『내훈』, 명문당, 2011. 해제 참조.
, 이승희(1847~1916)의 『가범(家範)』, 『여범(女範)』, 『규의(閨儀)』와, 왕성순(王性淳, 1868~1923)의 『규문궤범』(1915) 주011)
한국국학진흥원, 『규범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2, 한국국학진흥원, 2005.
, 이만규의 『가정독본(家庭讀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문 교훈서와 함께 이를 언해한 한글본 『규범』, 『한씨부훈』, 『여사수지』, 『부의』 등의 다양한 교훈서가 활발하게 간행됨으로써 여성 중심의 수신 교육과 한글 교육의 확산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여사서언해』의 내용 가운데 조선과 중국의 민속이 차이를 보이는 내용들도 나타난다.

“古고者쟈女녀生 三삼日일애 臥와之지床상下하야 弄농之지瓦와塼젼고”

“남아를 낳으면 침상 위에 뉘이고 화려한 옷을 입혀 구슬을 쥐어 주고 여아를 낳으면 침상 아래 뉘이고 수수한 옷을 입혀 실패를 쥐어준다.(詩云, 乃生男子, 載寢之狀, 載衣之裳, 戱弄之障....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裼, 載弄之瓦)”

여자의 직임인 직조와 방적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고대 신화에서 여성신이 직조 신으로 상징되는 것은 동서양이 동일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올림푸스 신들 가운데 직조의 여신인 아테나(미네르바)가 만든 성의를 입는다는 고대 서양의 신화와 이집트의 직조의 여신인 네이트와 같은 이야기이다. 여성이 새벽 일찍 일어나 장만하는 음식 가운데 “쟝 구으며”에서 ‘짱깨’라는 음식의 차이를 확인할 수도 있다.

『여사서언해』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시대 변천에 따른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사회에 들어서면서 유교 중심적 사회 조직이 느슨해지면서 여성들의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도리를 교술하는 문학적 텍스트를 대량 산출해 내는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중국과 조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 여성교육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여사서언해』의 원전이 중국 하은주 시대로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시기까지 광범위한 시대를 거치면서 ‘하늘[天]-남(男)’, ‘땅[地]-여(女)’를 상징하는 두 순환적 주체가 평등적 관점에서 송나라 이후 성리학과 결속되면서 ‘상(上)-하(下)’, ‘존(尊)-비(卑)’의 관계로 변화되는 남성 중심의 윤리관이 고착되는 과정을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국어학 사료로서, 그리고 여성교육의 변화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경서를 포함한 교화서들 간의 정밀한 텍스트의 상호 교섭에 대한 비교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곧 중국의 후덕한 황후나 효열녀의 고사 중심에서 우리나라의 효열녀의 고사들이 삽입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역시 『여사서』의 텍스트의 내용이 이곳저곳으로 부분적인 발췌를 하여 옮겨 씀으로써 그 자체의 전이가 된 자료를 정밀하게 대조할 경우 국어사 서술의 진폭 또한 매우 넓은 자료이다.

성종 6년(1475) 소혜왕후 심씨의 『내훈』과 더불어 『여사서언해』는 관찬서로서 그 이후 다양한 여성 교훈서들의 남본이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조선조 여성들 글쓰기와 글읽기가 대량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글의 확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문헌임이 분명하다. 주012)

이상규, 『한글고문서연구』, 경진, 2011.

『여사서언해』는 18세기 국어사적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데 매우 유리한 문헌이다. 특히 후기 국어의 변화는 ‘’의 비음운화 완성, ‘원순모음화’의 완성, ‘-오/우-’의 변화와 동요, ‘-/으-’의 잔류와 탈락, ‘-어+잇[有]-’의 축약과 함께 과거시제의 형성과 과거진행상의 분화, 명사형어미 ‘-음〉-기’의 교체와, ‘-ㄴ+것-’의 활성화에 따른 진행상(process)의 문화법, ‘-ㅁ-+-애’의 문법화에 따른 ‘-매’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여사서언해』의 초간본과 약 120년의 차이를 보이는 개간본 『여사서언해』와의 비교를 통한 후기 국어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강행실도』, 『내훈』 등의 중복되는 부분의 언해 자료의 비교를 통해 16세기까지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후기 근세국어 연구 자료 가운데 핵심적인 문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여사서언해』의 서지

한문본 『여사서(女四書)』는 중국의 여성 교육서로 청나라 시대에 왕상(王相, 1662~1722)이 간행한 책이다. 후한시대에서 청나라에 이르는 폭넓은 시간 대 속에서 여성 교육의 지향점과 목표는 상당한 변화와 굴절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중국에서 여성교화서의 변천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여사서』로 통합되기 이전에 명나라 신종 8년(1580)에 『여계』와 『내훈』 두 권을 묶고 신종의 서문을 올려 여성 교육서로 널리 인간하였으며, 청나라 때 왕상이 다시 이것에다가 『여논어』와 『여범첩록』을 덧붙이고 주석을 달아 『여사서』로 통합되어 인간되었다. 왕상은 『여사서집주』본과 『장원각여사서(壯元閣女四書)』로 여러 차례 인간하여 여성 교육서로 보급하였다. 현재 중국 소재 『여사서』의 이본 연구는 정밀하게 연구된 바가 없지만 중국 내에서도 대표적인 여성 교화서로 『여사서』가 여러 차례 인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유교사회의 글로벌 여성 교육서였다.

『여사서』가 조선에 어느 시기 어떠한 경로로 유입되었는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지은 『내훈』에 이미 명나라 인효문황후가 지은 『내훈』의 내용이 중간에 삽입된 것으로 보아 『여사서』 이전에 여성 교육서가 조선 초기부터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에 『여범첩록(女範捷錄)』을 지은 저자는 명나라 사람 집경공(集敬公) 왕씨에게 시집가서 평생 수절한 왕절부 유씨(劉氏) 여인이며, 그의 아들 왕상(王相)이 청나라 초기에 와서야 『여사서』를 간행한 것이다. 즉 왕상이 앞의 세 가지 책과 함께 합본하여 『여사서』를 간행한 시기는 조선 숙종 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왕상의 자는 진승(晉升)이고, 그의 어머니가 유씨이니, 남편 왕씨가 죽은 후 60년 동안 절개를 지키고, 90세 때 조정의 표창을 받았으므로, 그를 ‘왕절부(王節婦)’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 왕상이 흩어져 있던 여성 교육서를 한데 모아 『여사서』로 집대성함으로써, 조선에는 영조 때에 처음으로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나타난다. 『영조실록』 영조 10년(1734) 갑인 12월 20일조에,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비로소 『정관정요』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판(唐板)인 『여사서』는 『내훈』과 다름이 없다. 옛날 성왕의 정치는 반드시 가문을 바로잡는 일로써 근본으로 삼았으니, 규문(閨門)의 법은 곧 왕화(王化)의 근원이 된다. 이 서적을 만약 간행하여 반포한다면 반드시 규범(閨範)에 도움이 있을 것이나, 다만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후에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제조(提調) 이덕수(李德壽)로 하여금 언문으로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영조 10년(1734) 12월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에게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명하여 영조 12년(1736) 8월에 영조가 직접 서문을 내려 인간토록 명령을 내렸다. 『영조실록』 영조 12년(1736) 병진 8월 27일조에는,

“임금이 『여사서』의 서문을 친히 지어서 내리고 나서 홍문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내사기에는, ‘乾隆 二年 三月 十九日 內賜 洛川君 縕 女四書 一件 命除謝恩 行都承旨 臣 李’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천군 이온은 숙종의 6남 연령군의 양자로서, 숙종 46년(1720)에 태어나 영조 13년(1737) 9월에 죽었다. 그러므로 명을 받고 언해하여 영조 13년(1737)에 인쇄를 마치어 반사(頒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에서의 『여사서언해』 편찬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에 여성에 관한 책을 관찬본으로 발행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다가 이 책은 특히 영조의 왕명에 의하여 갑인자체 금속활자로 한문과 한글을 섞어 찍어낸 귀중한 책이다. 이 『여사서』에 사용한 한글은 놋쇠 활자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다만 중국의 『여사서』의 순차 배열과는 달리 저술의 시대 순에 따라 한·당 시대의 『여계』와 『여논어』 두 권을 묶어 상책(上冊)으로 하고, 명·청 시대의 『내훈』과 『여범첩록』두 권을 중·하책으로 총 4권 3책으로 언해하여 인간하였다.

2.1. 『여사서언해』의 초간본

1737년에 영조의 명에 의해 발행된 갑인자체 『여사서언해』외에도 1907년(융희 1)에 송병순이 서문을 쓰고 박만환이 한글로 번역 간행한 목판본 책도 있다. 이 책은 갑인자본인 어제 여사서 본과는 그 배열과 번역에 모두 차이가 있고, 오히려 중국의 『여사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국회도서관 『한국고서종합목록』에 의하면 갑인자체 4권 3책 완질을 갖추고 있는 곳은 서울대 규장각, 장서각, 간송미술관, 파리의 동양문고, 미국의 하버드대학, 범우사 자료실 등이며, 서울대 고도서본은 ‘건륭 2년(1737) 삼월 십구일’의 내사기가 있는 교정본이다. 한글 표기에는 교정하지 않고 한자음 표기에만 교정을 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인 1737년에 발행된 금속활자본은 영조의 서문이 들어 있으며,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 있는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왕명에 따라 영조 12년(1736)에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명을 받고 300질을 인간하여 발포하였다. 이 책은 사주단변으로 반곽은 24.6cm×16.6cm이고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내사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초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 각권에 따라 언해자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말자음 ‘ㅅ’, ‘ㄷ’의 표기 성향의 차이와, ㄷ-구개음화의 실례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ㄷ-구개음화가 4권의 본문에는 간혹 나타나는 데 비하여 서문에는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서문도 〈신종어제여계 서〉, 〈어제여사서 서〉, 〈여계 원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어제여사서 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여사서언해』가 어명에 의해 출판된 서적이지만 조선 초기에 엄격한 출판 방식에서 벗어나 여기저기에 오류가 나타나며 언해 방식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스이’(여범, 73ㄴ)의 오각이 보이며, 〈여논어〉 제12장과 〈여내훈〉 제1장~제5장까지 언해 방식에서 있어서 그 전후와 달리 한자어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한문 현토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4권 〈여범첩록〉은 원문에 다양한 고사들을 삽입하고 있어 1~3권까지와 체재가 완전히 다르다. 아마도 언해한 사람이 여러 명이었거나 한 사람이 했더라도 시차를 두고 그 일관성을 잃은 탓으로 보인다.

2.2. 『여사서언해』의 개간본

영조 13년(1737)에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를 초간본이라 하고,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목판본 4권 2책을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나 주013)

이근용, 〈중간본 여사서 언해 해제〉, 『중간본 여사서 언해』(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6. 홍윤표, 〈여사서 해제〉, 『여사서』(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8. 특히 홍윤표 교수는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하여 4권 2책의 목판본을 중간본이라고 규정하고 영남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남부방언 가운데 전라도 방언 지역에서 인간된 것이기는 하지만 방언 자료라고 할만큼 뚜렷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판본 자체가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영조 13년(1737)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는 어명에 의해 간행한 관찬본이지만, 1907년 간행본은 민간에서 목판본으로 인출한 것이어서 초간-중간으로 이어지는 계기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개간본이라고 해야 옳다.

개간본인 목판본 4권 2책은 서울대, 전북대를 비롯한 10여 곳의 대학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범우사의 자료실에는 목판본 두 질이 있다. 1907년 발행된 목판본은 4권 2책 상하로 되어 있고, 사주단변이며 반곽은 21.0cm×16.2cm 크기로 유계 10행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崇禎二百八十年丁未遯月日恩津宋秉珣”으로 되어 있으며, 발문은 “丁未季夏上澣潭陽田愚敬序”로 되어 있고 간기는 “瀛洲精舍丁未刊板”으로 되어 있다. 이 개간본 『여사서언해』는 1907년 전남 고흥에서 박만환이 언해했으며 송병순의 서문과 전우경의 발문을 달아 간행한 사간본으로 목판본 4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홍윤표(1989:1)는 이 판본을 중간본으로 규정하고, “영남방언을 반영한 자료로 생각된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판본을 중간본이라 하지 않고 개간본이라고 한 이유는 영조 13년(1737)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와는 달리, 편찬 체제나 내용의 배열순서가 다르며 판형이나 언해 방식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전면 새로 언해하고 판각을 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자음은 전혀 없고 한문 원문을 싣고 그 뒤에 언해를 붙였으며, 언해의 문체적 양식도 의역체인 점이 크게 다르다. 1907년 발행된 목판본은 4권 2책으로 된 개간본인데, 이 『여사서』의 영인본은 홍문관(1996) 자료와 해오름한글서예학회 편 영인본(2004) 자료가 있다.

2.3. 『여사서언해』의 필사본

『여사서언해』 필사본으로는 장서각 소장 필사본이 있다. 필사 연대가 19세기 말 20세기 초로 추정되는 3권 1책, 무계 10행 글자 수는 부정하며 반곽 22cm×17.8cm 크기로 제검은 『國文女四書』이며 〈신종황뎨어졔계셔〉 “만녁팔년(1580) 셰 경진 츈삼월 어졔서”가 있으며 장서각인이 찍힌 순한글본이 있다.

이 필사본 『여사서언해』는 한글 서체연구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계』, 『여논어』는 정자체로 『내훈』은 반흘림이 섞인 흘림체로 되어 있다. 아직 필사본 『여사서언해』의 문헌적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완전 궁체 한글로 쓴 것으로 보아 궁정 여성들 사이에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또 표기 양식도 일부 차이를 보여주지만 대체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자료로 보이기 때문에 영조 13(1737)에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에서 필사본 『여사서언해』까지의 비교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의 국어사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3. 『여사서언해』의 내용과 갈래

초간 『여사서언해』는 본문으로 한문을 싣고 이어서 언해를 하였는데 한문 원문에는 그 당시의 한자음을 달고 한글 구결토를 달았으며, 언해문에도 한자어는 대다수 한자음을 한자 다음에 부기하였다. 당시 여성 교훈용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자음과 한글 학습 양면에 걸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여사서언해』의 서(序)와 범례에 의하면 중국의 『여사서』와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내훈』을 각각 언해하여 널리 펴도록 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국에서 『여사서』의 순서(여계-내훈-여논어-여범첩록)와는 달리 시대의 앞뒤를 따라 『여계』를 권1, 『여논어』를 권2, 『내훈』을 권3, 『여범첩록』을 권4로 하고 권1·2를 한 책으로 묶어 전체 3책으로 엮었다.

각 권의 내용을 보면, 『여계』는 여자가 자라서 출가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고, 시가와의 화목을 위하여 여자로서 하여야 할 일체의 몸가짐 등을 서술한 것으로, ‘비약(卑弱), 부부(夫婦), 경순(敬順), 부행(婦行), 전심(專心), 곡종(曲從), 화숙매(和叔妹)’ 등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논어』는 여성들에게 가사, 대인관계, 윗사람 섬기는 일, 순종, 정조 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입신(立身), 학작(學作), 학례(學禮), 조기(早起), 사부모(事父母), 사구고(事舅姑), 사부(事夫), 훈남녀(訓男女), 영가(營家), 대객(待客), 화유(和柔), 수절(守節)’ 등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훈』은 명나라 성조 황제의 비 인효문황후의 저술인데 황녀와 궁인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조태고의 『여계』가 너무 간략하고, 『여헌』, 『여칙』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여성들을 교육하는 책이 마땅치 않아, 과거 어느 것보다 탁월하고 만세에 수범이 될 만한 것을 가려뽑아 저술하였다고 그 동기를 기술하고 있다. 『여사서』 중 『내훈』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고사를 인용하면서 잘못된 품행과 풍속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의 차례는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 부신(夫娠),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 적선(積善), 천선(遷善), 숭성(崇聖), 경현범(景賢範), 사부모(事父母), 사군(事君), 사아고(事兒姑), 봉제사(奉祭祀), 모의(母儀), 목친(睦親), 자공(慈功), 체하(逮下), 대외척(待外戚)’ 등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범』은 『여범첩록(女範捷錄)』이 본래의 이름인데 보통 줄여서 『여범』으로 통칭하고 있다. 『여범첩록』의 차례는 ‘통론(通論), 후덕(后德), 모의(母儀), 효행(孝行), 정열(貞烈), 충의(忠義), 자애(慈愛), 병례(秉禮), 지혜(智慧), 근검(勤儉), 재덕(才德)’ 등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용』을 비롯하여 『대학』, 『시경』, 『서경』, 『서전』, 『사기』, 『춘추좌씨전』, 『백호통』, 『전국책』, 『통감』과 역대 사서 등 방대한 서적에서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황실에서부터 여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열효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 『여사서』는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을 비롯한 한국, 일본 등 한문 생활권 여성들의 규범서로 큰 영향을 미쳐 왔으며, 여성 생활 규범을 살피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어 왔다. 주014)

아라시로(荒域孝信), 『열녀전』, 明德出版社, 1969. 야마자키 준이치(山峙純一), 『열녀전』(상중하), 明治書院, 1996. 시모미 다카오(下見隆雄), 『유향의 열녀전 연구』, 東海大學校出版會, 1989. 이사 라팔스(Lisa Raphlas), 『Sharing the Light : Representation of Women and Virture in Early Chaina』, State University od New Yprk Press, 1998.

여성 교훈서는 한문으로 된 것과 한글로 언해가 된 자료로 그 갈래를 세울 수 있다. 먼저 한문으로 된 여성 교훈서로는 단연 중국에서 전파된 『여사서』 계열과 소혜왕후의 『내훈』계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여사서』 계열의 최초의 언해된 자료로는 중종 27(1532)에 최세진(崔世珍)이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를 교서관에서 2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전하는 책은 인조 연간(1620~1640)에 2권 2책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여훈언해』는 명나라 무종(武宗) 때 성모 장성자인황태후(聖母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 편찬한 『여훈』을 언해한 것이다.

『내훈』은, 성종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가 성종 6년(1475)에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책으로서 원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선조 6년(1573) 3권 4책 내사기가 있는 호사문고 소장본이 전한다. 주015)

김지홍, 『내훈』, 영인본, 명문당, 2011.
광해군 2년(1610) 훈련도감자로 효종 7년(1656) 목판본 3권 3책 판본,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3권 3책에는 ‘어제내훈소지가’가 서문 뒤에 붙어 있는 『어제내훈』 주016)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어제내훈』은 현재 장서각(No. 3-69) 소장본이 있다.
이 있다. 이 내훈은 이본 간에 연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들의 상호 비교를 통한 국어사적 변화를 조망하는데 매우 긴요한 자료인 동시에 『여사서언해』와 내용의 출입 특히 한문 원전의 인용 부분이 동일한 것이 많기 때문에 『여사서언해』와 『내훈』과의 정밀한 비교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에는 대다수 남성이 편찬한 여성 교훈서들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우암 송시열의 『계여서(戒女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閨範選英)』 주017)

권영철, 『병와 이형상연구』, 한국문화연구원, 이화여대.
, 한원진(1682~1751)이 편찬한 『한씨부훈(韓氏婦訓)』, 영가 김복한의 『규범(閨範)』(국립도서관소장본), 이덕무(1741~1793)가 편찬한 『사소절(士小節)』, 경암 왕성순이 1915년 연활자본으로 간행한 『규문궤범(閨門軌範)』 주018)
한국국학진흥원, 『경암 왕성순의 규문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 2, 2005.
등이 있다.

이러한 한문본을 한글로 언해한 자료는 대개 필사본으로 전해오기 때문에 자료 접근이 어려워 문헌 자료 간의 상호 관계를 추적하기는 만만찮다. 15~18세기에는 유교 이념을 보급하고 내재화하기 위해 규훈서를 작성한 반면, 19~20세기 초 작자는 유교 이념을 회복하여 무너지는 국가와 윤리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규훈서를 작성하였다. 특히 18세기 이후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고 여성 교육 담론이 활성화되었으며, 교육 텍스트가 양산되는 등 특기할 만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이 시기 여성 교육과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가운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계녀서』는 여성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덕행을 바탕으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닦아서 가정을 잘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이에 필요한 올바른 도리를 순수한 국문으로 적어 간곡하게 훈계한 것이다.

우암 『계녀서』 계열은 매우 다양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를 들어보면 (1) 삼희제 손진번본 주019)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의 맏딸을 공주 탄방(炭坊)에 사는 탄옹 권사의 둘째 아들인 권유(權惟)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딸에게 언문으로 지은 계녀의 글을 『우암선생계녀서』라고 한다. 물론 이 이름은 후대에 널리 유포되는 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유가에서 시집을 가는 딸에 대한 교육서로서 이본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 가운데 고종 28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원계리에 거주하던 우암의 9대손인 송병준 씨댁에서 이 계녀서의 사본 1종이 발견되었으며, 동년에 경주군 강동면 금호댁 가인 삼희제 손진번 씨댁에서, 원계서원에서 등사한 필사본과 고종 32년에 다시 등사한 필사본이, 맏자부인 여강 이씨에게 전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재욱, 우암선생계녀서, 대동인쇄소. 소화14년 9월), (2) 이기준본 여훈계(女訓誡) 주020)
여훈계(女訓誡) 한글 친필 원본이 충청도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족보박물관에 1929년에 충남 공주군 우성면 옥성리에서 부친 이기준(李基俊)씨가 무남독녀 외동딸 이종석(李鍾錫)을 위해 친필로 쓴 ‘여훈계(女訓誡)’가 기증됐다. 이 여훈계는 옥성리(‘개전이’라는 금강 가 마을)에서 단양 이씨 대종가의 부친 이기준씨와 모친 오귀순씨의 외동딸로 1930년에 태어난 이종석씨가 1945년 시집갈 때 친정에서 받아 소지하고 평생 읽은 책자이다.
. (3) 우암유잠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권씨 가문에 출가하는 딸을 경계하는 글인 〈계녀서〉를 회덕군청 용지에 순한글 묵서로 잘 쓴 〈우암유잠〉 단책(單冊)으로 계축(1913년) 납월일 외천 정사에서 썼다는 필서기(筆書記)가 있다. (4) ‘우암션계녀셔’는 한글 필사본 1책으로 26cm×17.8cm의 크기이다. 필사 연대는 무오원월으로 되어 있으며 25장으로 장책되어 있다. (5) 남한당 김한구 이본 우암 송선생 계녀서, (6) 국립중앙도서관 우암션[생]계녀셔, (7) 경북대본, (8) 계명대본 등 매우 다양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규훈서의 구성과 서술 방식이 달라지면서 서간과 유서의 형식도 존재한다. 항목화 되고 간략화 되는 특성과 하강의 구조를 갖고 있는 규훈서도 보인다. 규훈서에서 효와 열, 남녀의 분별 등의 가치가 여전히 중요시되며 강조되고 있으나 보수적인 유교 이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의 책임과 구실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순종을 요구하던 모습과는 다른 점을 보이는 것이다. 교육 주체자로서의 어머니의 구실을 강조하고, 금기 조항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규훈서를 통해 여성의 일상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고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양상을 추적할 수 있어, 규훈서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규훈서 자료의 적극적인 발굴과 가훈서, 수신서, 전통 윤리교육서, 계녀서, 여성 작가 규훈서 등과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4. 『여사서언해』의 교훈서와의 출입 관계

『여사서언해』(1737)는, 먼저 여성 교훈서의 남상(濫觴)이라고 할 수 있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崔世珍)이, 명나라 무종(武宗) 성모 장성자인황태후(聖母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 편찬한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가 있으나 현전하지 않고, 성종의 어머님인 소혜왕후 한씨가 선조 6년(1573)에 지은 『내훈』과는 150년 정도 차이가 있으며, 개간본 『여사서언해』(1907)와는 170여 년의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여사서언해』의 텍스트 간의 출입 관계를 면밀하게 대조한다면 16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국어사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원전이 중국의 한문본 판본이기 때문에 번역의 양식적 차이도 현저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4.1. 『내훈』과 『여사서언해』의 관계

먼저 『내훈』 〈언행장 제일〉과 『여사서언해』 〈여계〉 ‘부행’ 제4에 내용을 비교해 보자.

女:녕敎・・애 닐・오・ ・겨지・비 ・네 ・・뎌기 잇・니 나・ :겨지・븨 德・득 ・이・오 :둘흔 :겨지・븨 :마리・오 :세흔 :겨지・븨 양・・오 :네흔 :겨지・븨 功공・이・니 :겨지・븨 德・득・은 구・틔・여 ・조・와 聰총明・이 ・ 달・미 아・니・오 :겨지・븨 :마 구・틔・여 ・이・비 ・나・며 :말・미 ・・카오・미 아・니・오 :겨지・븨 양・ ・ 구・틔여 顔안色・・이 :됴・며 :고오・미 아・니・오 :겨지・븨 功공・ 구・틔여 工巧:・호미 :사・게 너・무・미 아・니・라 ・조・며 ・며 正・・며 安靜:・・야 節・介・갱・ 자・바 整:齊쪵・며 ・몸 行・요・매 붓・그・러우・믈 두・며 뮈・욤・과 마니 이:쇼・매 法・법 이・쇼・미 닐・온 :겨지・븨 德・득・이・라 :말・ ・・야 닐・어 :모딘 :마・ 니・디 아・니・며 시・졀・인 後:에・ 닐・어 :사・게 아・쳗브・디 아・니・호미 ・이 닐・온 :겨지・븨 :마리・라 :더러・운 거・슬 시 ・서 ・옷과 ・무・미 ・조・며 沐・목浴・욕・을 시・졀로 ・야 ・모 :더럽・게 아・니・호미 ・이 닐・온 :겨지・븨 양・라 ・질삼・애 ・・ 專一・ ・야 노・・과 우・믈 ・즐기・디 아・니・며 술・와 ・밥과・ ・조히 ・야 손・ 이:바・도・미 ・이 닐・온 겨지・븨 功・이・라 ・이 :네・히 :겨지・븨 ・큰 德・득・이・라 :업수・미 :몯・리・니 그・러・나 ・요・미 甚씸히 :쉬우・니 오・직  :두・매 이실 ・미라 :녯:사・미 닐・오・ 仁・이 :머・녀 ・내 仁・을 ・코져 ・면 仁・이 니・를리・라 ・니 ・이・ 니・니・라

부 뎨

계집이 네 가지 실이 이시니 나흔 니론 계집의 德덕이오 둘흔 니론 계집의 말이오 세흔 니론 계집의 얼골이오 네흔 니론 계집의 功공이니 그 니론 계집의 德덕은 반시 조와 그미 졀등며 탁이홈이 아니며 계집의 말은 반시 辯변 입과 利니 말이 아니며 계집의 얼굴은 반시 얼굴 비치 아롬답고 빗나미 아니며 계집의 功공은 반시 조 공교홈이 사의게 디나미 아니라 幽유며 閒한며 貞뎡며 靜졍고 節졀을 딕희여 整졍齊졔 며 몸을 홈애 붓그림을 두고 움즈기며 고요이 법되 이시미이 니론 계집의 德덕이오 말을 야 닐너 사오나온 말을 니디 말며  후에 말야 사의게 슬여 아니케 홈이 이 니론 계집의 말이오 틔글과 더러온 거 시서 服복飾식을 션명이 며 졍결이 고 沐목浴욕을 로 야 몸이 더러워 욕되디 아니케 홈이 이 니론 계집의 얼굴이오 을 紡방績젹기예 오로디 야 희롱며 우음을 됴히 너기디 말고 酒쥬食식을 潔결齊졔 히 야 賓빈客을 공궤홈이 이 니론 계집의 功공이니 이 네 가지 계집의 큰 졀이오 가히 업디 몯 거시라 그러나 옴이 甚심히 쉬오니 오직  두기에 잇 디라 녯사이 말을 두되 仁인이 멀랴 내 仁인코져 면 仁인이 이예 니른다니 이 니이니라

앞의 『내훈』과 뒤의 『여사서언해』를 비교해 보면 성조의 소멸과 함께 한자음의 표기의 변화, ‘ㅿ’의 소실, 분철표기의 확대, ‘며 〉 閒한며’, ‘專一 〉 오로디’와 같이 고유어와 한자 어휘의 드나듬을 비롯한 ‘〉얼골’의 어휘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여사서언해』는 『내훈』과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언어 변화를 확인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4.2. 『삼강행실도와』와 『여사서언해』의 관계

『여사서언해』와 『삼강행실도』와의 관계는 원문이 완전 일치하는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효행, 충의, 열녀의 중국 사실이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아마 한문본 『삼강행실도』를 만들 때 이미 중국에서 만들어진 『내훈』과 『여범첩록』이 참고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ㄱ) 故고로 楊양香향이 범을 搤외야 아비 잇 줄만 알고 몸 잇 줄을 모로고〈여사서언해 효행편〉.

ㄴ) 양향액호(楊香搤虎) : 楊香이라 홀 리 열 네힌 저긔 아비 조차 가아 조 뷔다가 버미 아비 믈러늘 라드러 버믜 모 즈르든대 아비 사라나니라 원이 곡식이며 비단 주고 그 집 문에 홍문 셰니라〈삼강행실도 3ㄱ〉.

ㄱ)의 『여사서언해』 효행편의 양향(楊香)의 내용이 ㄴ)의 『삼강행실도』에서는 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아래 ㄱ)의 『여사서언해』의 〈여범〉에 실린 황보규 부인의 고사는 ㄴ) 『삼강행실도』의 내용보다 더 상세하게 실려 있기도 하다.

ㄱ) 皇황甫보規규의 夫부人인이 글을 능히 잘 더니 規 죽으매 董동卓탁이 그 고음을 듯고 娶고져 거 夫부人인이 免면티 몯 줄을 알고 이에 卓탁의 門문의 가 어 義의로 다래되 卓탁이 듯디 아니거 이에 責야 지저  나 大대臣신의 妻쳐라 義의로 辱욕을 밧디 아닐 거시오 너 姜강胡호 雜잡種죵이라 일이 내 지아븨 帳댱下하의 엿더니 이제 감히 네 君군夫부人인의게 禮례 업시 굴니오 卓탁이 노여 그 머리 수 우 고 어즈러이 티니 짓기 입에 긋치디 아니 고 죽으니라〈여범 21ㄴ〉.

ㄴ) 禮宗罵卓 : 皇甫規 죽거늘 겨지비 졈고 곱더니 相國 董卓이  一百과  스므 匹로 聘니 奴婢와 쳔괘 길헤 더니 그 각시 더른 리 고 董卓 집 門 의 가 러 마 니 甚히 어엿브더니〈삼강행실도 3ㄱ〉.

앞으로 『여사서언해』에 실린 각종 고사와 『삼강행실도』의 내용과 정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사서언해』에 실린 각종 고사는 여훈교화서 뿐만 아니라 〈내방가사〉에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어 이들의 흐름 관계는 앞으로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4.3. 초간본 『여사서언해』와 개간본 『여사서언해』의 관계

1907년에 인간된 개간본 『여사서언해』를 비교해 보자. 초간본 『여사서언해』의 〈부 뎨〉가 1907년에 인간된 개간본 『여사서언해』에는 다음과 같다.

신언쟝 뎨삼

부인의 가라침이 네가지 잇니니 말이 그 하나에 거지라 마음이 만를 응니 말이 아니면 엇지 베풀리오 말이 례졀에 마지면 가히써 뉘쳐을 면고 말이 리치에 당치 못면 앙이 반다시 좃니라 샹말에 오 화열 안과 슌졍 말은 사이 돍이 아니라가히 궁글리며 훼담고 말이 만면 렬 불이 어덕을 불름 갓다고  오 입이 문갓게 면 말이 덧덧이 잇고 입이 물쏘듬 갓게 면 말이 징거업다 니 심다 말을 가히 삼가지 아니치 못지니라 하말며 부인의 덕셩이 짒ㄱ고 한가야 말을 슝샹  아니라 말이 만면 과실이 만지니 말 져금만 갓지 못지라 고로 셔경…

ㄱ) 孝효와 敬경은 어버이 셤기 근본이니 공양홈이 어려온 줄이 아니라 공경홈이 어려올 飮음食식 供공奉봉으로 孝효 삼으면 이 末말이니라 孔공子ㅣ 샤 孝효 人인道도의 지극 德덕이라 시니 神신明명애 通통며 四海에 감동은 孝효의 지극홈이라〈초간본 『여사서언해』 부모쟝 뎨십이〉.

ㄴ) 효도와 공경은 어버이 셤기 근본이라 공양이 어려운 데 아니라 공경이 어려우니 음식 공봉으로써 효도를 삼으면 이거시 치니라 공ㅣ 샤 효 인도의 지극 덕이라 시니 신명에 통고 예 감동홈이 효도의 지극이라〈개간본 『여사서언해』 부모쟝 뎨십이〉.

ㄱ)은 초간본이고 ㄴ)은 개간본 『여사서언해』이다. 개간본의 언해에는 한자와 한자음 병기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 한글로 되어 있다. ‘공양홈이 〉 공양이’, ‘공경홈이 〉 공경이’로 ‘+옴’이 생략되는 등의 차이가 나타난다. 또 이유나 원인을 나타내는 ‘-ㄹ’가 ‘-니’로 바뀌었으며, ‘末말이니라’와 같은 한문 번역체가 ‘치니라’로 바뀌는 등,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국어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초간본과 개간본 사이에는 언해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인간된 『여사서언해』를 중간본이라고 불렀으나 이것은 전혀 새롭게 언해한 것으로 언해 형식이나 세주 작성 방식, 한자음 병기, 한글 구두가 없는 점으로 보면 전혀 다른 개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간본 『여사서언해』와 비교 연구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국어 변천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사서언해』와 다른 교화서와 내방가사 등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국어사적 변화뿐만 아니라 문헌간의 상호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여사서언해』의 국어학적 특징

『여사서언해』의 표기 방식은 당대에 표준화되고 고정된 표기법이 아니라 표기자의 개인적 의식과 방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한두 가지의 문헌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마치 그 시대의 공인된 표기방식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는 18세기 전기 문헌자료의 하나인 『여사서언해』의 일부 내용이 성종 6년(1475)에 인간된 『내훈』에서부터 1907년에 인간된 『여사서언해』의 개간본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한문 원문을 언해한 자료를 비교할 수 있는, 곧 통시적 연구를 위해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이어지는 『여사서언해』의 두 이본(소위 초간과 중간)의 비교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표기법의 혼란 양상과 초간에서의 보여주는 한문 대문의 한자 어휘를 직역 방식이 중간에서 고유어로 대치한 의역의 번역 방식 차이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 후기 국어사 흐름을 읽어내는 데 『여사서언해』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5.1. 표기 양식

5.1.1. 표기 양식의 특징

초성은 14자(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와 ㅅ계 합용병서 4자(ㅺ, ㅼ, ㅽ, ㅾ)와 ㅂ계 합용병서 3자(ㅲ, ㅳ, ㅄ)와 각자병서 3자(ㄸ, ㅆ, ㅃ)가 있다. 중세어에서 ㅂ계 합용병서가 대체로 ㅅ계 합용병서로 통합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ㅅ계 합용병서가 ㅂ계 합용병서로 통합되는 모습도 보여주기 때문에 병서 표기의 혼란상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합용병서가 현실음의 표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음과 구별을 위한 표기 의식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성은 ‘ㆍ, ㅏ, ㅑ, ㅓ, ㅗ, ㅛ, ㅜ, ㅠ, ㅡ , ㅐ, ㅒ, ㅔ, ㅖ, ㅚ, ㅘ, ㅝ, ㅙ, ㅞ’ 등이 나타나며,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적인 음소가 아닌 ‘ᅟᆐ(帚(여계원서 1ㄱ), 萃(내훈 32ㄴ)), ㆌ(醜(여논어 34ㄴ), 取(어제여계서 1ㄴ))’가 쓰이고 있다.

종성 표기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의 8종성과 겹받침으로 ‘ㄺ, ㄻ, ㄼ’의 예가 있다. 특히 어말 ‘ㅅ:ㄷ’의 표기는 ‘빋(여계 3)’과 ‘빋치(여계 16)’처럼 ‘ㅅ’과 ‘ㄷ’이 교체표기가 공존하고 있다. ‘을(2:38)’과 같이 ‘ 〉 ’으로 기본형 어간이 재구조화된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음절말 자음군의 표기도 기본형 어간의 표기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나 어간말 자음이 단순화한 예가 보이며(옴기다(3:53, 4:28), 읇프며(2:25))의 경우 재분석한 이중표기로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체언의 경우 분철표기가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에 기본형의 어간을 고정시키려는 표기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사서언해』보다 앞선 『노걸대언해』(1670)에 이미 어말 ‘ㄷ’이 ‘ㅅ’으로 대거로 교체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사서언해』에서는 오히려 ‘ㄷ, ㅅ’이 교체표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한 특징이다. 다시 말하자면 표기자가 기본형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5.1.2. 분철 표기의 확산과 표기상의 특징

18세기 초기 자료에서 이미 체언의 분철표기는 표기자의 의식에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어는 물론이거니와 고유어의 표기에서도 체언의 어간과 격조사는 분철 표기로 고정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분철표기는 한자어와 격조사 간의 분리 의식이 고유어나 의존명사 혹은 동명사로 확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의존명사 ‘ㅣ’의 경우 ‘어리니(어린+이), 더니(더+이)’의 경우나 동명사형에서 ‘피미, 도오미, 興感믈, 붇러믈, 사오나오미’와 같은 예에서는 문법경계 의식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에 연철표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의존명사 ‘것’의 경우는 아직 연철표기로 나타나고 있다.

5.1.3. 부사화 파생접사 ‘-이, -히’의 표기

남광우(1977)교수는 부사화 접사 ‘-이, -히’의 실현 환경을 2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주021)

남광우, 〈여사서〉 『이숭녕 선생 고희기념 국어국문학론총』, 탑출판사, 1977.
곧,

① 어근 말음이 모음인 경우 부사화 접사는 완전히 ‘-히’다.

② 어근 말음이 ‘ㅁ, ㅂ’인 경우는 부사화 접사는 ‘-히’가 주로 나타나고 ‘ㄱ, ㄴ, ㄷ ,ㄹ, ㅇ’의 경우는 ‘-히, -이’가 교체되고 있다.

ㄱ) 能히, 諄諄히, 죡히, 可히, 젹히, 졍졔히, 潔齊히, 귀히, 가히, 甚히, 박히, 구챠히, 젼일히, 샤특히, 맛당히, 맏당히, 과도히, 整齊히, 감히, 자셰히, 強梁히, 親히, 周全히, 欵曲히, 荒忙히, 졀졀히, 朦朧히, 공슌히, 싁싁히, 重히, 嚴히, 위히, 判然히, 湛然히, 지극히, 부즈런히, 디완히, 심히, 庶히, 順히, 洽히, 貴히, 薄히

ㄴ) 부즈런이, 우연이, 션명이, 졍결이, 헙슈록이, 맛당이, 젼일이, 이, 일즉이, 맏당히, 諄諄이, 殷勤이, 從容이, 切實이, 샤특이, 젼쳔이, 당졍이, 극진이, 씍씍이, 지극이

(1) “샤특히/샤특이, 싁싁히/씍씍이, 지극히/지극이, 諄諄히/諄諄이, 부즈런히/부즈런이, 젼일히/젼일이, 맛당히/맏당히/맛당히/맏당이”에서 ‘-히’, ‘-이’ 교체표기형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근에 대한 의식이 아직 고정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어말의 ‘ㅌ’이 ‘ㅣ’ 이외의 모음 앞에서도 ‘받 갈고(여논어 29ㄱ)’에서처럼 주로 목적격과 결합하는 경우에 ‘ㅊ’으로 변한 예가 보인다.

(3) 어말자음군 중 ㄼ의 ‘ㅂ’이 탈락한 “軌 뎌 자최 와 단 말이라”(여내훈 47ㄱ)의 예가 보인다.

(4) 어말 ㅺ이 ㄲ으로 나타난다. ‘입시울을’(여논어 2ㄱ)과 ‘입시욹의’(여논어 8ㄱ)에서처럼 혼용되고 있다.

(5) 한자음의 경우 어두 ‘ㄹ’이 ‘ㄹ, ㄴ’ 간에 교체표기로 주로 나타나며, 어두에서도 ‘ㄹ, ㄴ’이 탈락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ㄴ’의 경우에도 어두의 환경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ㄱ) 禮녜, 례, 理리, 厲녁, 論논, 閭녀, 倫뉸, 利니, 隣린, 冷, 聯년, 路로, 累누, 量량, 里니, 良냥, 殮념, 狼낭, 令령

ㄴ) 女녀, 념녀

ㄷ) 니버, 닉여, 니어, 니론, (너)기디, 넷사, 니러, 닙고

다른 18세기의 자료에서처럼 어중의 ‘ㄹ+ㄹ〉ㄹ+ㄴ’의 표기도 강하게 나타난다(실노, 진실노, 홀노).

5.1.4. 어말 /ㅅ/:/ㄷ/표기

말음 ㅅ과 ㄷ의 표기는 18세기 국어의 일반적인 경향과 같으나 ㄷ의 표기도 매우 강한 양상을 보인다(붇그림, 맏보며, 거든, 긷거고). 어간과 어미의 구별 표기의식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파생접미사에 의한 용언의 어간도 그러한 구별을 잘 나타낸다. 어말 /ㅅ/:/ㄷ/표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5.1.5. ‘’의 변화

18세기 중반에는 ‘’의 비음운화가 마무리된 상태이다. 다만 비어두음절에서 ‘〉아’로 회귀되는 예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보인다.

ㄱ) 람[壁](여논어 2), 람[風](여논어 4), 가온대(여범 60)

ㄴ) 아 〉 아희(여범 13), 나 〉 나희(여논어 2), 소 〉 서릐(여논어 18)

비어두음절에서 ‘’의 변화는 거의 대부분 ‘ 〉 으’의 변화가 완료된 시점인데 그 역으로 ‘〉아’로 표기된 “[壁] 〉 바람,  〉 바람[風], 가온 〉 가온대[中]”과 같은 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5.1.6. 유성음 사이에서의 ‘ㅎ’, ‘ㄱ’의 탈락

ㅎ종성 체언의 경우도 ㄱ)의 예에서처럼 아직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ㅎ’이 탈락한 ㄴ)의 예들을 통해 18세기 초에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ㄱ) 흔(여계 1), 터히라(여계 24), 터(여내훈 42), 흘(여논어 26), 세흘 네흘(여논어 8), 뫼(여내훈 38), 길히(여내훈 19), 길흘(여내훈 22), 나히나(여내훈 8), 나라(여논어 16), 나라흘(여내훈 57), 나라히(여범 21), 우흐로(여내훈 8), 안흐로(여내훈 30), 안(여논어 16), 흘(여내훈 26), 나흘(여내훈 30), (여내훈 34), 하히(여내훈 37), 열헤(여내훈 46), 나둘히로(여내훈 46), 칼흘(여범 18), 코흘(여범 20), (여범 28), 노흐로(여범 22), 뫼흘(여범 25), 히(여범 2)

ㄴ) 하은(여계 1), 저으샤(녀계서 3), 하의(여논어 21), 돌이니(여논어 17), 칼이니(여내훈 26), 하을(여내훈 38), 칼을(여범 21), 칼에(여범 33), 이(여범 22), 아희들을(여논어 35)

‘저으샤’(녀계서 3)의 경우 ‘저허더(녀계원서 3)’의 예에서처럼 ‘칼을/칼흘, 코/코흘, 칼이니/, 하은/하히’와 같은 교체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서히 퇴화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ㄱ종성 체언의 경우도 “남게(여범 29), 남기(여내훈 75), 굼그로(여범 60), 솟긔(여범 30), 밧긔셔(여범 3)”처럼 일부 잔존하고 있으나 ㅎ종성 체언보다는 탈락한 빈도가 훨씬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5.2. 음운 현상

5.2.1. 구개음화

ㄱ, ㄴ의 예에서처럼 한자음 표기는 거의 ㄷ-구개음화를 외면하고 있으며, 부사형어미 ‘-디’ 역시 매우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구개음화에 적용된 예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가 한자어나 고유어표기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아래의 ㄱ), ㄴ)의 예에서처럼 한자음에서나 형태소 경계 환경에서 아주 드물게 ㄷ-구개음화형들이 발견되며 어휘부 내에서는 훨씬 적은 예들이 나타난다.

ㄱ) 帝뎨, 天텬, 聽텽, 治티, 朕딤, 沖튱, 迪뎍, 中듕, 朝됴, 展뎐, 調됴, 重듕, 竉툥, 典뎐, 知디, 適뎍

ㄴ) 仲즁, 廚쥬, 名稱팅(여계 2)/名稱칭(여계 4), 酒物쥬(여논어 28)/酒脯듀(여논어 25), 處텨(여논어 17)/處쳐(여계 25), 全뎐(여논어 34)/全젼(여논어 35), 치디(여계 6ㄴ)

ㄷ) 고됴히, 엇디, 침, 귿칠(여계 6ㄴ), 지람을(여논어 22ㄴ), 엇지, 잇지(어제서 6ㄱ)

ㄹ) 어긔룯지(예계 15ㄱ), 품어져(여논 33ㄴ), 지라(여내훈 10ㄴ), 리디, 어디니, 디, 말을어디, 敏티, 디니라, 갈디어다, 기우러디며, 지리오, 下치, 다지, 닑지(어제서 6ㄱ), 호지(여사 5ㄱ), 重치(여사서 4ㄴ), 어긔룯지(1:13), 지, 푸러져

한자음에서 ㄷ-구개음화는 매우 보수적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ㄷ-구개음화가 사회계층적 차이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였기 때문에 대체로 사대부 층에서는 의식적으로 이 현상을 기피하였다. 특히 한자음의 경우가 고유어에 비해 보수적 표기가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구개음화는 구어적 자료와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ㄷ-구개음화는 표기방식을 전제로 하여 관찰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계층적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ㄴ)의 예를 살펴보면 한자음에서도 교체적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확산된 음운 변화였음을 알 수 있다. ㄷ)은 어휘 내부에서의 구개음화가 실현된 예이고 ㄹ)은 연결어미 ‘-디’가 구개음화로 적용된 예들이다. ㄷ-구개음화가 형태소 경계 환경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5.2.2. 원순모음화

순자음 아래에서 원순모음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원순모음화는 문헌상으로는 17세기 말기인 1690년에 간행된 『역어유해』에서 확인된다. 원순모음화 현상은 ‘’의 비음운화 이후 모음체계의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음운 현상인데 17세기 말 『역어유해』(1690)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들어서서 『경신록언해』(1796), 『동문류해』(1748), 『한청문감』(영조 말년)에서와 함께 생산적인 음운현상이었다.

ㄱ) 푸러져(어제서 5ㄴ), 문(여계 10ㄱ), 이뮈(여논어 11ㄴ), 물러(여논어 18ㄴ), 므롯(여논어 2ㄱ)/무릇(여논어 4ㄴ), 믄득(여내훈 3ㄴ)/문득(여논어 2ㄱ), 무롭플(여논어 1ㄴ), 브즈런고(여내훈 25ㄱ)/부즈런케(여논어 26ㄱ), 려(여논어 18ㄴ), 푸른(여논어 37ㄴ), 어여서부터(여논어 5ㄴ), 블이(여내훈 72ㄴ)/불을(여논어 14ㄴ), 물(여논어 32ㄱ), 물리매(여논어 8ㄱ), 머무러(여논어 8ㄱ), 밋부디(여범 7ㄴ), 머무러(여논어 32ㄱ), 머무로면(여논어 33ㄱ), 물(여논어 18ㄱ)/믈(여논어 18ㄴ), 王公으로부터(여사서 5ㄱ), 더부러(여사서 6ㄱ), 부즈런이(여계서 3ㄱ), 문(여계 10ㄴ).

ㄴ) 아롬답고(여계 12ㄱ), 우솜(여논어 9ㄱ).

ㄷ) 나가물(여범 66ㄱ).

ㄱ)와 같이 ‘므롯/무릇’, ‘믄득/문득’, ‘브즈런/부즈런’, ‘블/불’, ‘믈/물’과 같은 교체형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진행 중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원순모음화는 직접순행동화였지만 ㄴ)의 예에서처럼 역행 순행동화의 예들이 보이며, ㄷ)에서처럼 형태소 경계의 환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5.2.3. 경음화와 유기음화

어두된소리에 각자병서 ㄸ, ㅃ, ㅆ이 쓰이었고 합용병서에 ㅾ, ㅺ, ㅼ가 쓰이고 있다. 어두합용병서의 표기는 ㅂ계와 ㅅ계가 다 쓰이고 있으며, 각자병서의 경우는 ‘빠여’, ‘따흔’, ‘쓰미’ 등이 나타나며 어중의 된소리표기는 매우 생산적이다.

ㄱ) 後漢(여계 1:1), (여사서 1:3), 허(여사 2:11), 힘(여사 2:10), 지람(여사 2:22), 며(여논어 4ㄴ), 뵈(여논어 4ㄱ), 썩어(여범 15ㄴ), 빠여(여내훈 78ㄴ), 빠디니(여범 17ㄱ), 빼히고(여내훈 57ㄱ)

ㄴ) 싸하(여사 2:5), 씍씍이(여사 4:17), 따흔(여내훈 57ㄴ), 씻단 말(여논어 10), 쓰미(여계 6ㄱ)

어두 환경에서와 형태소 경계 환경에서 경음화한 예들이 모두 다타나고 있다. 그러나 남부방언의 영향으로 ‘덤덤홈’(여훈원서 3), ‘싁싁히(3:14)’와 ‘氏’는 ‘씨’아닌 ‘시’로 ‘班반氏시’(여계 1:1)와 같이 경음화에 적용되지 않은 표기도 나타난다. 어중의 된소리화가 다음과 같이 표기되고 있다.

붇러오믈(여계원서 2ㄴ), 업디니라(3:72ㄱ)

유기음화현상도 ‘칼(여범 18), 코(여범 20), (여범 28)’은 이미 17세기 후반에 나타나는데 어휘별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구급간이방』과 『훈몽자회』에 ‘양지’이던 것이 ‘양치질’(여논어 10)로 나타나고 있다. ‘켜다[引], 두로혀디(여논어 2), 니르혀(여논어 8), 뒤혀(여논어 10)’가 보이며 ‘실켜 수오(여논어 4)’와 ‘燭을 켜며(여논어 32)’의 예들도 보인다.

5.2.4. 자음동화

자음동화는 ‘ㅅ+ㄱㄱ+ㄱ, ㅅ+ㄴㄴ+ㄴ, ㅂ+ㄴㅁ+ㄴ’의 예들이 보인다. ‘묵금(여논어 24), 석거(여범 19), 닥(여논어 16)’와 같은 ‘ㅅ+ㄱㄱ+ㄱ’의 동화는 『두시언해』 중간에서 이미 보이는데 ‘읻니라(여논어 29ㄱ), 만나며(여논어 53ㄱ)’와 ‘ㅂ+ㄴㅁ+ㄴ’의 동화의 예인 ‘영화롬니라’(여논어 2ㄴ)의 예도 나타난다.

6. 형태·문법적 특징

6.1. 격조사

6.1.1. 주격조사는 수의적으로 생략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분명한 조건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여사서언해』에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행음절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중세어와 달리 한자어나 ㅣ-모음 아래에서도 혼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주격조사 ‘-가’가 이미 필사본에서는 16세기 초반에 나타나지만 문헌자료에서는 17세기 『벽온신방』에 “그 내가 병 긔운을 헤티니”(벽온 15ㄴ)에 예가 나타나는데 『여사서언해』에서 “疏蛙 니가 성긔고 버레 먹단 말이라”(여논어 17)의 유일한 용례를 보인다.

6.1.2. 목적격 조사로는 『여사서언해』에서는 ‘, 을’이 나타나는데 선행 체언이 개음절인 경우 음양 조화표기와 관계없이 ㄱ)의 예에서처럼 ‘’로 실현되고 있다. ‘’의 비음운화가 완료된 상황에서 비어두음절의 ‘’가 음성 실현형으로는 ‘아’였던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보인다.

ㄱ) 陽道, 外治, 內治, 位, 緒, 졍, 머리, 理, 닐욀바, 一書, 坤維, 末世, 禮, 용의, 垢, 夙夜, 무리, 쇠, 누에

ㄴ) 陰德을, 訓迪, 샤믈, 조종을, 힘씀을, 근노심을, 글을, 本을, 俗을, 臣을, 訓을, 을, 兔홈을, 辱을, 줄을, 一通을, 몸을, 사을, 일을, 아을, 람을

선행 체언이 폐음절인 경우 역시 모음조화 상관없이 ㄴ)에서처럼 거의 대부분 ‘을’로 나타나고 있다. ‘모시를(여논어 4), 百事를(여논어 5), 빗(여계 5), 빋(여계 16), 돌(여논어 15), 거(여논어 15), 받(여논어 29)’과 예외적인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의 비음화 이후 형태소 경계에서 모음체계의 불완전함을 반영하는 개인적 표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ㄱ) 館관閣각에 臣신을 명야(어제서 6ㄱ)

받들어 훋사을 勸권노니(여논어 34ㄱ)

女녀子들을 권노니(여논어 36ㄱ)

ㄴ) 강을 허  와(여논어 10ㄴ)

ㄱ)의 예에서 목적격조사가 부사격으로 사용된 예들이 많이 나타난다. 수로 수여동사에서 목적어가 생략된 관계로 목적격조사가 이동한 결과이다. “館관閣각에 臣신(에게) [ ]obj을 명야”의 구성에서 목적격 표지가 수여표지로 이동한 결과로 해석할 수있다. ㄴ)의 예는 시간 부사격의 위치에 목적격 조사가 실현된 것이다. 자동사구문에서 실현되는 이유도 문형구조의 역사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뿐만 아니라 도구격을 지배하는 ‘만들다’와 같은 서술어에 ‘로’와 ‘를’이 교체되는 이유도 동일한 현상으로 보인다. 목적격조사가 타동사 구문 이외에 나타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1.3. 주제격조사는 선행음절이 개음절인 체언에서는 ‘’이 폐음절 체언에는 ‘은’이 실현되고 있어 목적격 조사와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ㄱ) 天子 后 諸女 나 道 이  지아비 叔妹

ㄴ) 坤은 근본은 興은 아은 뉘임은 陽은 陰은 계집은 敬은 順은 말은 얼굴은 功은 하은 허믈은 법은

주제격 조사나 목적격 조사에서 이러한 경향은 ‘’의비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18세기 전반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증수무원록언해』나 『경신록언석』(1796)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6.1.4. 처격조사로는 ‘애, 에, 의, 예, ’가 나타난다. 음양 조화표기와 무관하다.

ㄱ) 禮애, 朝夕애, 易애, 夫婦애, 三百篇애, 昔年애, 사흘만애, 鄙諺애, 기림애, 中外애, 몸애

ㄴ) 階序에, 位에, 外에, 이에, 胎教에, 古者에, 후에, 鄉村에, 지게에, 朝暮에, 귀에, 기에

ㄷ) 가의, 床下의, 집의, 庭戶의, 道路의, 몸의

ㄹ) 이예, 지게예, 바회예, 兩儀예, 魏예

ㅁ) 밧, 안

처격조사로는 ‘애, 에’는 음양조화표기와 무관하게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ㅣ모음 아래에서 실현되던 ‘예’는 ‘에’와 교체표기로도 나타나며, ㅎ곡용어에서는 ‘’가 실현되고 있다. 여격을 표시하는 처격조사 가운데 ‘의게’와 ‘의’는 선행 체언이 유정물의 유무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된다.

6.1.5. 속격조사는 ‘의’, ‘’과 사잇소리 ‘ㅅ’, ‘ㄷ’이 실현된다. 내포문이나 접속문의 주어가 속격을 수반하는 현상이 18세기 초반에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어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었지만 18세기 국어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홍빈(2011:56)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소의 “주어적 속격”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웃 사 파 가”에서 ‘파 -’의 주어인 ‘사’가 속격과 결합하는데 ‘파 -’의 동작의 주제 곧 행동주라고 할 수 있다. 『여사서언해』에서는 내포문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되거나 혹은 접속절의 선행문의 주어가 속격으로도 실현될 뿐만 아니라 대격으로도 실현되고 있다.

ㄱ) 내포문에서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

현은 모의 어려서 치매 말암으며(어제서 4ㄴ)

너희 무리의 이  줄을 넘녀야(여계 3ㄴ)

기피 훗사의 능히 와 것지 못을 앗셔 야(어논어 1ㄱ)

이 글은 송시의 지은 배어(어논어 1ㄱ)

갓 쳐부의 가히 어티 아니티 못며(여계 6ㄱ)

ㄴ) 접속절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

쳐 유야 은 서 인니라(여논어 21ㄱ)

집의 늉며 톄홈과 나라 폐면(여논어 16ㄱ)

셔애 암의 사볘 쳑엳고(여논어 19ㄱ)

시애 녀계의 긔롱미(여논어 19ㄱ)

셩쥬의 흥제 문왕의(여논어 45ㄱ)

ㄷ) 접속절의 주어가 대격으로 실현

공뎡을 그륻되미 읻게 말올 니라(여논어 29ㄴ)

ㄱ)에서는 동명사로 구성되는 내포문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ㄴ)에서는 접속적의 주어가 역시 소격으로 실현되는 예이지만 ㄷ)은 접속절의 주어가 대격으로 실현되는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격조사의 배합의 혼란이 아니라 통사론적으로 주어 거듭나기를 회피하려는 데서 생겨난 현상으로 20세기 국어에 까지 이어진 현상이다.

속격이 주격이나 목적격과 교차가 되는 예도 나타난다.

ㄱ) 엇디 德덕의 닥지 몯며 집의 바로디 몯홈을 근심리오(여범 3ㄴ)

ㄱ)의 예에서 ‘德덕의’는 후행하는 ‘닦다’의 대상 곧 목적격으로 ‘집의’는 ‘바로디 몯홈을’의 주어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격이나 주격 위치에 속격이 실현되고 있다.

6.1.6. 접속격조사는 ‘와, 과’는 역시 선행음절의 환경과 관계없이 다만 “內訓와(여계서 4), 父母과(여논어 18), 束脩과(여논어 25), 是과(여논어 36)”와 같이 음양 조화 표기와 무관한 예들이 보인다. 실현되며 선행음절의 말음이 ㄹ인 체언에도 ‘신발과(여논어 11), 실과(여논어 22), 과(여내훈 78)’와 같이 주로 ‘과로 실현된다. ㅎ곡용어에 나타던 ‘콰’는 보이지 않는다.

ㄱ) 투부와 음녀과로 한 쳐(여범 71ㄴ)

ㄴ) 이  사람은 개와 쥐 이 이실(여논어 9ㄱ)

부모 셤김과 님군을 셤김과 구고 셤김에 니고(여논어 8ㄱ)

례와 의와 념과 티 나라 네 벼리니(여범 50ㄱ)

기름과 소고모가 호쵸와 몌조 항아리와 독에(여논어 30ㄱ)

ㄱ)의 예처럼 공동격조사가 여럿 이어날 때 마지막 체언에 복합격으로 실현되는 중세어의 잔류 형태도 보이지만 이미 ㄴ)의 예에서처럼 마지막 체언의 공동격은 생략되고 있다. 중세어에서 접속격이 연이어 나타날 때 ‘[N1]과/와+[N2]과/와+.....[Nn]과/와+C’와 같은 구성에서 마지막의 ‘[Nn]과/와+C’가 접속격이 생략되고 ‘[Nn]+C’로 바뀐 결과이다.

6.2. 용언의 활용

6.2.1. ‘-’ 용언의 축약과 탈락이 대량으로 나타난다. ‘부즈른()을’, ‘오롣(-)’, ‘아니-’ 등이 ‘부즈런을’, ‘오롣다’, ‘아닐’과 같이 실현되어 ‘-’의 축약과 함께 어간내부를 재조정하는 일련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ㄱ) 통티(여계 2ㄴ)

ㄴ) 부즈런을(여계 6ㄴ), 오롣다(여계 13ㄴ), 아닐(여계 13ㄴ), 아니미(여논어 25ㄱ), 부즈런의(여논어 28ㄱ), 삼갈만(내훈 7ㄱ), 삼가기로(내훈 7ㄱ), 비로소믈(여논어 16ㄱ), 삼가미(여논어 19ㄴ), 삼가디(여논어 22ㄱ), 졀검애(여논어 29ㄱ), 부즈런으로(여논어 30ㄴ), 니만(여논어 29ㄴ), 아니미냐(여논어 33ㄱ), 비로매(여논어 45ㄱ), 삼가니(여논어 81ㄱ)

이와 같은 현상은 아직 ‘-ㄴ(관형사형)/-ㄹ(관형사형)’이 동명사어미로 사용되는 특징이 남아 있기 때문이 것로 보인다.

6.2.2. 중세어 문헌에서 보이는 ‘잇다[有]’가 ‘이셔, 이실, 이신, 이셔도, 이쇼, 잇고, 잇디, 이시며’와 같은 활용을 보이다가 ‘이스매, 이스믈, 이슬지라도, 이스리니, 이스면, 이슬시, 이시믈, 이거시어든’과 활용됨으로써, ‘ㅣ’가 ‘ㅡ’로 변하였다.

6.2.3. 중세어에서는 ㄹ변칙 용언을 ‘ㄷ’이 ‘ㄷ, ㄴ, ㄹ, --’ 아래에서는 탈락되고 있다. ‘여듸(여계 18), 디(여범 28), 아디(여범 70)’와 같이 실현된다. ‘끌다, 베풀다’의 예에서도 ㄹ 불규칙으로 활용되고 있다.

‘웃다’는 규칙활용을 하는 것이지만 중세어나 근세어에서 변칙활용을 하던 것으로 중세어에서 ‘우, 우며’ 활용을, 근세어에서는 ㄱ)과 같이 활용한다.

우음(여계 13, 여범 33), 우서(여범 61), 우솜(여논어 9), 우솝도소니(여논어 26)

6.3. 과거시상 선어말어미의 정착

과거시상 선어말어미는 ‘-어(연결어미)/아+잇(이시)-’의 구성으로 서술어의 행위가 현재 시점 이전에 이루어진 상황을 나타낸다. 그러나 ‘-어(연결어미)/아+잇(이시)-’의 구성의 서술어가 순간성을 지닌 경우 과거의 상태나 행위의 지속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미기능이 차츰 분화됨으로써 16세기부터 ‘-어(연결어미)/아+잇(이시)-〉-앳/-엣’으로나 ‘-+-어(연결어미)/아+잇(이시)-〉-얏/-엿’으로 축약된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이미 완료상의 과거시상과 진행상의 과거시상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동사 구성에서는 ‘-아/어 잇-’구성이 성립되지 않지만 자동사의 경우에도 결과를 감각이나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ㄱ) 구녈삼뎡은 첫편의 사겻니라(여논어 37ㄴ)

뎐긔 모도아 얃디라(여내훈 6ㄴ)

내 귀에 닉고 애 감초왓더니(여내훈 7ㄱ)

현홈과 부홈애 엿나니라(여내훈 81ㄱ)

집공의 원 되얏더니(여범 1ㄱ)

과거시상 선어말어미 ‘-더-’는 서술격조사 ‘이-’나 미래선어말 어미 ‘-리-’ 다음에 ‘-러-’로 교체되고,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 다음에서는 ‘-다-’로 교체되었는데 서술격조사의 환경에서 ‘-러-’가 다시 ‘-더-’로 회귀하였다.

6.4. 현재시상 선어말어미 ‘--’ 탈락

현재시상 선어말어미 ‘--’는 종결형 ‘-다’ 앞에서는 ‘-ㄴ(는)다’로 감탄종경어미 ‘-구나’ 앞에서는 ‘-는구나’로 관형형 앞에서는 ‘-느-’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가 탈락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ㄱ) 다(여논어48ㄴ), 돈목다(여논어72ㄴ), 인의다(여논어72ㄴ)

ㄴ) 니라(여범1ㄱ)

현재시상어미의 분포 배합이 재배열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 탈락 환경을 보다 더 정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6.5. 동명사형어미 ‘음〉기’의 교체

18세기에 들어와 동명사형어미가 ‘-(으)ㅁ’에서 대폭 ‘-기’로 교체되는 동시에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 형식으로 바뀌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국어에서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가 탈락되면서 동명사형어미와 명사화접사 간의 형태적 차이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5세기 국어에서는 ‘-음’이 명사화를 할 수 있는 기제였으나 일부 ‘-기’형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국어에서는 ‘-기’가 ‘-음’보다 더 능동적인 기제인 동시에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의 형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18세기에 들어와서 ‘-음’이 대량으로 ‘-기’로 교체되는 조건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다. 주022)

<풀이>‘-음’에서 ‘-기’로 교체가 시작된 시기는 17세기 『박통사언해』와 같은 구어체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음’의 ‘-기’로의 교체시기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당시 여항에 널리 배포된 『삼강행실도』(16세기)에서 본 『여사서언해』가 주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ㄱ)의 예는 ‘-옴/움-〉-(/으)+ㅁ’으로 교체된 동명사 형들의 예들이다. 16세기 의도법선어말어미 ‘-오/우’와 결합된 형태에서 ‘-오/우’의 탈락과 함께 매개모음이 삽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ㄴ)의 예는 아직 ‘-옴/움-’의 형태로 실현되는 예들이다. 중세어에서 의도법 선어말어미가 문법적 기능은 소실하였지만 그 잔류 형태가 형태소 배합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쩌면 매개모음의 조음소적 기능으로 잔류된 형태들이다. ㄷ)의 예는 이른바 ‘-음〉-기’가 교체된 예들이다.

ㄱ) 주시믈(여계 1ㄱ), 바듬(여계 2ㄱ), 뉘임은(여계 1ㄱ), 잡으미오(여계 3ㄱ), 어딜미(여계 3ㄱ), 다림이(여계 3ㄱ), 니음이니(여계 3ㄴ), 쓰미(여계 6ㄱ), 나매(여계 6ㄴ), 가지믈(여계 6ㄴ), 니이니(여계 6ㄴ), 가지다은(여계 6ㄴ), 나매(여계 9ㄱ), 가지믈(여계 9ㄱ), 문(여계 10ㄴ), 디나미(여계 10ㄴ), 이시미이(여계 10ㄴ), 붓그림을(여계 10ㄴ), 드미(여계 16ㄱ), 나매(여계 16ㄱ), 가심이오(여계 19ㄱ), 기림애(여계 19ㄱ), 아니을(여계 22ㄴ), 붇그림을(여계 23ㄴ), 니미니라(여논 1ㄱ), 되오매(여논 1ㄴ), 셰오믈(여논 1ㄴ), 애(여논 1ㄴ), 안매(여논 1ㄴ), 뎍즁을(여논 4ㄱ), 게어름믈(여논 4ㄱ), 궁믈(여논 4ㄱ), 파매(여논 8ㄱ), 이심을(여논 8ㄴ), 매(여논 10ㄴ), 자매(여논 11ㄴ), 봄애(여논 29ㄱ), 다리믈(여논 33ㄱ), 아니을(여논 33ㄱ), 오매(여논 33ㄱ), 이매(내훈 4ㄴ), 침을(내훈 6ㄱ), 움김을(내훈 11ㄱ), 싸힘은(내훈 12ㄱ), 너기미니(내훈 16ㄱ), 홈만(내훈 33ㄱ), 막음은(내훈 34ㄴ), 이심을(내훈 34ㄴ), 도으시미(내훈 37ㄴ), 업시을(내훈 42ㄱ), 셩장(내훈 49ㄱ), 감동은(내훈 51ㄴ), 닐음을(내훈 51ㄴ), 거듬은(내훈 53ㄱ), 셤김을(내훈 53ㄴ), 파은(내훈 58ㄴ), 아님이(내훈 62ㄴ), 도음을(내훈 66ㄱ), 니이니라(내훈 70ㄱ), 베품을(내훈 73ㄱ), 이심애(여범 12ㄱ), 가침은(여범 12ㄴ), 기림을(여범 13ㄴ), 우귀매(여범 19ㄱ), 무냥을(여범 50ㄴ), 크믈(여범 60ㄴ).

ㄴ) 교도홈이(여계 2ㄱ), 근심홈을(여계 3ㄴ), 몯홈을(여계 6ㄱ), 피홈은(여계 6ㄴ), 부부되옴은(여계 9ㄴ), 슌홈은(여계 10ㄴ), 이쇼매(여논 1ㄴ), 금이(여논 1ㄴ), 기모홈이(여논 8ㄱ), 홈을(여논 21ㄱ), 틔호미(여논 28ㄴ), 맏당홈을(여논 33ㄱ), 물오며(여논 35ㄱ), 치샤믈(내훈 4ㄴ), 졀당홈이(내훈 7ㄱ), 완만홈을(내훈 48ㄱ), 홈이(내훈 69ㄴ), 경복홈을(내훈 82ㄴ), 편피홈으로(내훈 82ㄴ), 부롬은(내훈 82ㄴ).

ㄷ) 리기(여계 2ㄴ), 살기(여논 21ㄴ), 들레기을(여논 21ㄴ), 오기(여논 32ㄱ), 마시기(여논 33ㄴ), 먹기(여논 33ㄴ), 졉기로(내훈 8ㄱ), 젹기로(내훈 12ㄱ), 갑기(내훈 22ㄱ), 기예(내훈 22ㄱ), 젹누기에(내훈 22ㄱ), 슌젼기(내훈 22ㄱ), 받갈기에(내훈 25ㄴ), 누젹기(내훈 26ㄱ), 슈고롭기로(내훈 29ㄴ), 뢰기(내훈 29ㄴ), 쓰기(내훈 29ㄴ),  브기만(내훈 30ㄱ), 셤기기(내훈 31ㄴ), 가지기(내훈 34ㄱ), 기(내훈 37ㄴ), 어디기(내훈 39ㄱ), 기(내훈 42ㄱ), 젹기로(내훈 42ㄴ), 죵기에(내훈 49ㄱ), 셤기기(내훈 51ㄴ), 깁기(내훈 53ㄱ), 혹기(내훈 57ㄴ), 겸억기(내훈 57ㄴ), 교만기(내훈 57ㄴ), 들기(내훈 60ㄱ), 막기에셔(내훈 60ㄱ), 크기여(내훈 64ㄱ), 들기(내훈 66ㄴ), 샹기(내훈 69ㄴ), 어렵기로(내훈 81ㄱ), 교기로(내훈 81ㄴ), 구로기(여범 18ㄱ), 움기매(여범 50ㄴ), 죽기에(여범 50ㄴ).

‘-기’가 대량으로 교체되는 시기와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화의 시기가 서로 엇물려 있다. 주023)

<풀이>채완(1979 : 99), 〈명사화소 ‘-기’에 대하여〉, 『국어학』 8. 채완 교수는 ‘-는 것’과 ‘-기’는 일산용어, 서민어로부터 그 세력을 넓혀 나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음’에서 ‘-기’로의 교체조건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국어에서도 ‘-음’에서 ‘-기’의 분포상의 제약을 후행 서술어의 제약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18세기 이들의 교체기의 교체조건으로 설명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채완(1979:101) 교수는 후행 서술어와의 공기 조건에서 ‘보다, 듣다, 알다, 개닫다’ 드으이 지각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기’와 호응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하였으나 ‘-음〉-기’의 교체조건으로서 설명력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장석진(1966) 교수는 ‘-음’이 문어적이고 추상적, 개념적 질적인데 비해 ‘-기’는 ‘구체적, 사실적, 양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임홍빈(1974) 교수는 ‘-음’은 [+존재][+대상성]의 자질을 ‘-기’는 [-존재][-대상성] 자질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일찍 정인승(1956)은 ‘기정’과 ‘미정’의 차이로 임홍빈(1974)은 ‘대상화’ 자질로 설명해 왔다.

18세기 ‘-음’이 ‘-기’의 발달과정에서 그 기능이 축소되면서 점차 ‘-기’가 확산되는 동시에 ‘-느 것’ 형식의 명사문으로 확장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형태소 배합에서 ‘-우/우’ 의도법 선어말어미의 탈락과 함께 ‘-음’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 동사계열은 18세기 당시에도 ‘’, ‘홈’, ‘기’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들 부류가 대체적으로 ‘-ㄴ(관형사형) 것’의 형식으로 발전한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옴/움’이 ‘ㄱ’로 교체되는 발단은 ‘오/우’이 탈락과 함께 단순한 [사실성(factive)]의 경우에서 [과정성(process)]의 의미가 분화되면서 점진적으로 ‘옴/움〉기’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과거시상이 완료와 과정성(진행성)의 분화로 ‘-아+잇-〉-엣/앳-〉-었/았-’의 통합과 함께 ‘-고+있-’이라는 문법기제가 발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6. 삽입모음 ‘-오/우-’의 동요

중세어에서 화자의 의도를 나타내는 의도법이라고 하는 ‘-오/우-’는 관형사형어미와 결합하면 그 뒤에 오는 피수식어가 관형사형으로 쓰인 동사의 목적어임을 나태내고 그 밖의 어미와 결합하면 1인칭 주어와 호응되는 문법범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명상형어미 ‘-ㅁ’과 설명법어미 ‘-’와 의도법 ‘-려’는 ‘-오/우-’의 문법적 기능이 소멸된 이후에도 반드시 이 삽입모음과 결합하였는데 16세기에 들어서서 이 삽입모음이 탈락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명사형과 결합에서 동요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18세기 국어에서도 삽입모음 ‘-오/우-’의 동요는 그대로 이어지면서 특히 처격과의 결합 환경에서,

‘-매’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

6.7. 곡용 ‘ㅁ+ㅐ’와 연결어미 ‘-매’의 혼란

ㄱ)의 예와 같이 명사형과 처격 ‘애’의 결합형이 ‘ㅁ-+-애’의 결합이냐 혹은 ‘-매’의 결합이냐는 연분철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곡용환경이 활용환경으로 문법화를 거친 결과로 볼 수 있다. 16세기 단계에서 “여희여 오매 날리 더니 도라오니 홀연히 비치로다”(두시 10)에서 ‘오매’는 ‘오[來]-+-오(의도법선어말어미)-+-ㅁ(명사형어미)-+-애(처격조사)’의 구성으로 ‘-오-’의 양태요소가 상성이기 때문에 ‘-ㅁ-’이 명사형이다. 따라서 ‘-매’는 아직 어미로 재구조화를 거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국어에서는 곡용형이 활용형으로 문법적 변화를 반영하는 교체형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ㄱ) 이 글을 닑그매도 오히려 닑지 아닌 젼과 흐면(어제서 6ㄱ)

야용을 말며 들매 의식을 폐티 말며(여계 6ㄱ)

얼굴을 헙슈록이 고 나매 료됴히 도 짓고(여계 16ㄱ)

 번 자매 바로 하빗 나기지(여논어 11ㄴ)

녀ㅣ 츌가매 부쥬ㅣ 친이 되나니(여논어 21ㄱ)

존친에 믿며 부모의게 졈미(여논어 26ㄴ)

손이 오매 탕이 업서(여논어 33ㄱ)

조차오매 가난 가히 받긔 들리디 몯  니라(여논어 35ㄴ)

왕매 움즉여 물오며(여논어 35ㄴ)

졔애 이매 나라히 편안니(여논어 20ㄱ)

홈이 이시면 움기매 반시 허믈이 업고(여논어 34ㄱ)

인을 베프매 반시 친을 목을 몬져고(여논어 72ㄴ)

싀어미 졋 먹이매 산남의 귀 윤을 육고(여범 18ㄱ)

야흐로 우귀매 지아비 슈자리에 가 죽거(여범 18ㄱ)

 익글매 손을 버혀(여범 28ㄱ)

다 움기매 반시 의에 합며(여범 51ㄱ)

『여사서언해』에서는 ㄱ)의 예가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매’는 ‘-ㅁ+-ㅐ’의 곡용의 환경에서 처소나 시간의 의미가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로 전환되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국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문법범주의 재편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8. 부사화접사 ‘이/히’의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

부사화 접사 ‘이/히’의 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근대후기 국어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뒤에 ‘-’가 연결될 때 부사화접사 ‘이/히’가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를 보이고 있다.

ㄱ) 아답게, 닉게(여논어 18ㄴ), 길게(여논어 22ㄴ), 교티케(여논어 26ㄱ), 이즈러디게(여논어 34ㄱ), 들케(여논어 36ㄱ), 맏걷게(여논어 12ㄴ), 늗게야(여논어 26ㄱ), 넉넉게(여논어 67ㄴ)

ㄱ)의 예들처럼 부사화접사 ‘이/히’의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되는 환경 조건이 대체로 ‘-’와 통합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사동법이라는 문법 범주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7. 번역어와 어휘

7.1. 번역어

7.1.1. 한문 원문의 ‘以’는 일찍 한자 차용 어휘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것인데, 이것에 대응되는 번역어는 ‘’이다. 그런데 ‘’의 통합 분포는 아래와 같이 매우 넓다.

ㄱ) 으로 라(여범 24ㄴ)

ㄴ) 數수年년(여계 3ㄴ), 대개(여계 4ㄱ), 힘(어제서 6ㄴ), 막음은(내훈 34ㄴ), 나라히(여논어 20ㄱ), 足죡히(여계 24ㄴ)

ㄷ) 야(여계 13ㄴ), 야(여범 8ㄴ)

ㄹ) 로(여범 8ㄴ), 로(여범 8ㄴ) 義의로(여범 21ㄴ), 로(여범 8ㄴ), 이실로(여계, 4ㄱ)

ㅁ) 시러곰(여계 4ㄴ), 더으며(여계원서 2ㄴ), 一일通통을(여계원서 4ㄱ), 면(여계 6ㄱ)

ㅂ) 일워곰(여계서 4ㄴ)

ㄱ)의 예에서 ‘’가 단독 성분으로 사용되는가 하면, ㄴ)의 예처럼 명사나 부사 아래 통합되는 보조사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ㄷ)에서 ㅁ)까지는 부사형어미나 격조사와도 통합되는 보조사적 기능을 하고 있다. ㅂ)은 ‘시러곰’(여계 4ㄴ)와 ‘일워곰’(여계서 4ㄴ)에서처럼 강세 첨사와 통합 서열이 달라지기도 한다. ‘’의 통합 분포는 ‘으로’와의 통합이 제일 높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국어의 자격을 나타내는 ‘로서’와 재료나 수단, 도구의 의미를 갖는 ‘로써’와 구분되듯이 ‘로써’로 점차 이행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7.1.2. ‘與’의 번역어인 ‘다’, ‘다’과 같은 이형태와 함께 ‘다만’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ㄱ) 다(여계 70ㄴ), 다(여계 18ㄱ), 다몯(여내훈 6ㄴ), 다(여내훈 46ㄴ), 다(여내훈 46ㄴ)

ㄴ) 다만(여계 6ㄴ), 다만(여내훈 8ㄴ)

중세어에서도 ‘다’, ‘다몯’, ‘다몯’, ‘다믓’, ‘다믇’ 등의 있듯이 이 문헌에서도 ‘다, 다몯, 다’과 같은 이형태와 함께 이미 ‘다만’으로 굳어진 예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은 선행 명사구가 공동격과 호응관계를 같는 경우 현대국어의 ‘함께’, ‘더불어’로 어형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다’이 자음동화에 의한 ‘다’, ‘다만’으로 바뀐 어휘는 전혀 다른 제한의 의미를 갖는 어휘로 분화되었다. 근대국어에서 ‘다’과 ‘다만’의 분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7.1.3. ‘使’의 번역어인 부사어 ‘야/여’, ‘야곰’, ‘여’, ‘여곰’와 ‘부리-’와 같은 어휘들이 나타난다.

ㄱ) 사오나온 말을 니디 말며  후에 말야 사의게 슬여(여계 2ㄴ)

ㄴ) 儒유臣신으로 여곰 註주解야(여계서 3ㄴ)

保보와 傅부와 姆무로 여곰 朝됴夕셕애 宮궁闈위에 進진講강야(여계서 4ㄱ)

芸운閣각으로 여곰 刊간印인야 廣광布포게 노니(어제서 6ㄱ)

賢현婦부ㅣ 될 디라 젼 사으로 여곰 홀노 千쳔古고애 아답게 아니  니라(여논어서 1ㄴ)

ㄷ) 淫음樂악과 慝특禮례를 心심志지예 부리디 말라 니(여사서 72ㄱ)

중세어에서는 아래ㄱ), ㄴ) 예에서처럼 ‘부리-’, ‘시키-’가 ‘使’의 번역어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ㄱ) 使者 브리신 사미라.(석보 6:2ㄱ)

四天太子 곧 那吒類니 能히 鬼神 브리니라.(능언 6:14ㄴ)

吏 다리 거시오. 民은 브리 거시오.(법언, 2:196ㄴ)

ㄴ) 彩色로 佛像 그리 제 거나  시겨 야도 다 마 佛道 일우며(석보 13:52ㄴ)

만이레 어버 시기 일로 외니라 야 내 들 바 면(번소 7:2ㄴ)

마라 애라 너 시기노라 개더긔 공도 바다 네게 두다가 보내고랴(순천김씨 언간)

그러나 『여사서언해』에서는 ‘부리-’가 단 한 차례 나오는 이외에 거의 대부분 ‘야/여’, ‘야곰’, ‘여’, ‘여곰’이 실현되고 있다.

7.1.4. ‘及’의 번역어로는 ‘밋’, ‘믿’이 나타나고 있다.

8. 어휘의 변화

8.1. 한자 번역어

다음으로 특이한 희귀한 고유어가 나타나는 사례를 살펴보자.

ㄱ) 아을 나 매일 희여도 오히려 그 尫왕가(여계 9ㄱ)

귀로 길말을 듯디 말며 눈으로 샤특히 보디 말며 (예계 15ㄴ)

檢검은 허믈 뎜검단 말이라 强강良냥은 에딜긘 거동이니(여논어 13ㄴ)

‘희여도, 길말, 에딜긘, 이긔여, 들네여, 장를, 며, 야, 밧람을, 벙어리다. 어긔룯지’ 등의 희귀한 어휘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번역문이기 때문에 한자어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8.2. ‘-()-’의 탈락과 축약에 의한 조어

어근에 ‘-’가 결합하는 많은 어휘들이 ‘-’를 생략하는 경향이 많이 보이고 있다. ‘부즈런을’(여계 6ㄴ)의 예에서처럼 ‘부즈런(홈/)을’의 구성에서 ‘홈/’이 생략된다. 이것은 근대국어 단계에서 축약에 의한 새로운 조어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8.3. ‘-/쓰-’의 혼용

현대어에서는 ‘쓰-’가 ‘(글을) 쓰다’, ‘사용하다’, ‘(맛이) 쓰다’ 등을 의미하는 동음어이지만, 15세에는 ‘쓰[書]-’는 ‘(글을) 쓰다’를 의미했으며, ‘[用]-’는 ‘사용하다’, ‘(맛이) 쓰다’ 등을 의미하여 서로 구별되었다. 이 ‘쓰다’가 15세기와 16세기 문헌에서는 ‘스다’로 나타나기도 근대국어 단계에 들어서서 이들의 의미가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다.

8.4. 방언적 요소

『여사서언해』는 남부 방언화자인 이덕수(1673~1744)가 1734년 왕명을 받아 당나라의 『여사서』를 한글로 풀이해 민간에 반포한 것이다. 따라서 방언적 요소가 발견되는데 ‘애/에’애/에 혼기를 보여주는 “가네(여논어 66ㄱ)”나 비어두음절의 ‘’가 그대로 나타나는 ‘아알(여논어 66ㄱ)’의 예들은 남부 방언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있다. 특히 ‘氏 시’의 표기는 예외 없이 ‘시’로 표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 마무리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사서언해』는 조선조 여성 교육을 위해 활용된 교화서 가운데 하나이다. 영조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여사서언해』와 소혜왕후가 쓴 『내훈』을 함께 부녀자 교육서로 활용하기를 바라는 바와 같이 여성 기초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서언해』는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지만 유교적 국치를 기본으로 하였던 조선의 여성교화서로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중국과 조선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위치의 변화나 민속적인 유사성과 차이 등을 밝혀내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반 교훈서들과 문장의 첨입과 효충열의 고사들이 이 책 저 책 사이에 삽입된 예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한 18세기 국어사 자료가 아닌 16세기에서 20세기에까지 이르는 국어사 발달을 조명할 수 있는 근대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간본 『여사서언해』와는 약 1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향후 초간본과의 정밀한 비교 연구를 통해 근대어에서 현대어로 넘어오는 과정에 국어사적 연구를 위한 핵심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여사서언해』(1737)는 이보다 앞선 문헌인 『노걸대언해』(1670)와 이 보다 뒤에 나온 『경신록언해』(1796)와의 중간에 위치한 문헌 자료로서 국어사 연구뿐만 아니라 여성교육사, 여성사 등 전반에 걸쳐 활용도가 매우 높은 자료임이 분명하다. 본 주해서를 만드는 데 일일이 주석을 달지는 않았으나 이숙인 교수의 『여사서』 연구 성과는 많은 지침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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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 『근대국어연구』(근대편1), 태학사, 1994.

황문환 외, 『역주곤범』, 장서각소장총서 3, 역락, 2008.

아라시로(荒域孝信), 『열녀전』, 明德出版社, 1969.

야마자키 준이치(山峙純一), 『열녀전』(상중하), 明治書院, 1996.

시모미 다카오(下見隆雄), 『유향의 열녀전 연구』, 東海大學校出版會, 1989.

이사 라팔스(Lisa Raphlas), 『Sharing the Light : Representation of Women and Virture in Early Chaina』, State University od New York Press, 1998.

주001)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4권 2책의 『여사서언해』를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한자음은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문 원문과 순한글로 된 언해문을 구분하였고, 언해 방식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중간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개간본’으로 명명할 것이다.
주002)
황문환 외, 『역주곤범』, 장서각소장총서 3, 역락, 200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한글자료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참조. 박재연, 『한글 필사문헌과 사전 편찬』, 역락, 49~97쪽, 2012.
주003)
권영철, 〈일신공덕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1집, 1971. 참조. 『일신공덕』은 경북 봉화에 권상용(1851~1933)이 1912년에 지은 필사본이다.
주004)
권영철, 〈태교신기 연구〉, 『여성문제연구』 제2집, 1972. 참조. 유희의 모부인 숙인 이씨 사주당(1739~1821)이 쓰고 유희가 1801년에 언해한 책이다.
주005)
권영철, 〈규방필독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9집, 1980. 참조. 『규방필독』은 경북 성주 초전면 고산정 송홍설 씨 소장본인데 송인건(1892~1954)이 1930년대에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006)
권영철, 〈규방문헌을 통해 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동 용궁 전씨 녹문대 고씨부인 소장본이다.
주007)
권영철, 〈규방문학을 통해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주008)
이정옥, 『내방가사의 향유자 연구』, 박이정출판사, 1999.
주009)
이을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 해제〉, 『정신문화연구』 제7집, 1980. 28~37쪽. 이 책의 내용은 “1. 수신, 2. 독서, 3. 효친, 4. 충군, 5. 우애, 6. 돈목, 7. 제가, 8. 교자, 9. 신교, 10. 휼린, 11. 제기, 12. 분묘, 13. 간복, 14. 잡술, 15. 안분, 16. 징분, 17. 숭검, 18. 적선, 19. 거향잡의, 20 검속신심지례”로 구성되어 있다.
주010)
김지용, 『내훈』, 명문당, 2011. 해제 참조.
주011)
한국국학진흥원, 『규범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2, 한국국학진흥원, 2005.
주012)
이상규, 『한글고문서연구』, 경진, 2011.
주013)
이근용, 〈중간본 여사서 언해 해제〉, 『중간본 여사서 언해』(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6. 홍윤표, 〈여사서 해제〉, 『여사서』(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8. 특히 홍윤표 교수는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하여 4권 2책의 목판본을 중간본이라고 규정하고 영남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남부방언 가운데 전라도 방언 지역에서 인간된 것이기는 하지만 방언 자료라고 할만큼 뚜렷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주014)
아라시로(荒域孝信), 『열녀전』, 明德出版社, 1969. 야마자키 준이치(山峙純一), 『열녀전』(상중하), 明治書院, 1996. 시모미 다카오(下見隆雄), 『유향의 열녀전 연구』, 東海大學校出版會, 1989. 이사 라팔스(Lisa Raphlas), 『Sharing the Light : Representation of Women and Virture in Early Chaina』, State University od New Yprk Press, 1998.
주015)
김지홍, 『내훈』, 영인본, 명문당, 2011.
주016)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어제내훈』은 현재 장서각(No. 3-69) 소장본이 있다.
주017)
권영철, 『병와 이형상연구』, 한국문화연구원, 이화여대.
주018)
한국국학진흥원, 『경암 왕성순의 규문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 2, 2005.
주019)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의 맏딸을 공주 탄방(炭坊)에 사는 탄옹 권사의 둘째 아들인 권유(權惟)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딸에게 언문으로 지은 계녀의 글을 『우암선생계녀서』라고 한다. 물론 이 이름은 후대에 널리 유포되는 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유가에서 시집을 가는 딸에 대한 교육서로서 이본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 가운데 고종 28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원계리에 거주하던 우암의 9대손인 송병준 씨댁에서 이 계녀서의 사본 1종이 발견되었으며, 동년에 경주군 강동면 금호댁 가인 삼희제 손진번 씨댁에서, 원계서원에서 등사한 필사본과 고종 32년에 다시 등사한 필사본이, 맏자부인 여강 이씨에게 전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주020)
여훈계(女訓誡) 한글 친필 원본이 충청도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족보박물관에 1929년에 충남 공주군 우성면 옥성리에서 부친 이기준(李基俊)씨가 무남독녀 외동딸 이종석(李鍾錫)을 위해 친필로 쓴 ‘여훈계(女訓誡)’가 기증됐다. 이 여훈계는 옥성리(‘개전이’라는 금강 가 마을)에서 단양 이씨 대종가의 부친 이기준씨와 모친 오귀순씨의 외동딸로 1930년에 태어난 이종석씨가 1945년 시집갈 때 친정에서 받아 소지하고 평생 읽은 책자이다.
주021)
남광우, 〈여사서〉 『이숭녕 선생 고희기념 국어국문학론총』, 탑출판사, 1977.
주022)
<풀이>‘-음’에서 ‘-기’로 교체가 시작된 시기는 17세기 『박통사언해』와 같은 구어체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023)
<풀이>채완(1979 : 99), 〈명사화소 ‘-기’에 대하여〉, 『국어학』 8. 채완 교수는 ‘-는 것’과 ‘-기’는 일산용어, 서민어로부터 그 세력을 넓혀 나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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