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정속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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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정속언해
역주 정속언해

정속언해는 1518년(중종 13) 간행된 책으로 중국의 왕일암이 지은 ‘정속편’ 본문에 이두로 구결을 달고 한글번역을 붙인 책이다. 내용은 효부모·우형제·화실가·훈자손 등 18항목으로 되었다. 소학언해와 삼강행실, 오륜행실, 이륜행실과 함께 일련의 윤리교육도서로서 국어학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서이다.

김문웅(金文雄)

∙1940년 경상남도 울주군 출생
∙경북대학교 학사, 석사
∙계명대학교 박사
∙한글학회 대구지회장 역임
∙국어사학회장 역임
∙한국어문학회장 역임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저서 및 논문〉

≪편입 대학국어≫(1977)
≪15세기 언해서의 구결 연구≫(1986)
≪역주 구급방언해 하≫(2004)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3≫(2008)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6≫(2008)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권7≫(2009)
≪역주 신선태을자금단 간이벽온방 벽온신방≫(2009)
“접두사화고”(1977)
“불완전명사의 어미화”(1979)
“「ᅙ」의 범주와 그 기능”(1981)
“‘-다가’류의 문법적 범주(1982)
“근대 국어의 표기와 음운”(1984)
“근대 국어의 형태와 통사”(1987)
“옛 부정법의 형태에 대하여”(1991)
“한글 구결의 변천에 관한 연구”(1993)
“활자본 ≪능업경 언해≫의 국어학적 고찰”(1999)
“설총의 국어사적 고찰”(2001)
“구결 ‘’의 교체 현상에 대하여”(2003)
“방송 보도 문장의 오류 분석”(2004)

전자 우편 mukim@dnue.ac.kr

역주위원

  • 정속언해·경민편 : 김문웅

  • 교열·윤문·색인위원

  • 정속언해·경민편 : 박종국·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영배 나일성
  • 노원복 박병천 오명준
  • 이창림 이해철 전상운
  • 정태섭 차재경 최기호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정속언해·경민편을 내면서

우리 회는 1990년 6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로,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으니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 수는 ≪석보상절≫ 2책, ≪월인석보≫ 11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등 모두 63책이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동안 못한 ≪월인석보≫ 원간본들을 집중적으로 역주코자 권4, 권13, 권14, 권15, 권21(상), 권21(하)를 간행할 예정이며, 아울러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속언해·경민편≫을 함께 펴 낼 계획이다. 또한 ≪영험약초≫와 ≪상원사중창권선문≫을 묶어 1책으로 펴내면, 연초에 이미 펴낸 ≪월인석보≫ 권25(하)와 ≪언해태산집요≫를 포함하여 올해 나올 책은 모두 12책이다.

이번에 역주한 ≪정속언해(正俗諺解)≫는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향속(鄕俗)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국 원(元)나라 왕일암(王逸菴)이 쓴 정속편(正俗篇)을 언해하여 조선 중종 13년(1518)에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와 함께 간행한 교화서(敎化書)이고, ≪경민편언해(警民編諺解)≫는 김정국(金正國)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우민(愚民)에게 인륜(人倫)과 법제(法制)에 관한 지식을 계발하기 위하여 편찬 간행한 수신서(修身書)이다.

이 책은 ≪경민편≫이라고도 하는데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임진왜란 직전의 중간본 등이 전한다.

이 두 책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해 주신 대구교육대학교 김문웅 명예교수님과 이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과학기술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0년 12월 1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 16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미어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정속언해≫ 역주의 저본은 이원주(李源周) 교수 소장본과 규장각 소장본을 참고하였으며 이 두 가지를 아울러 영인하여 부록으로 실었고, ≪경민편≫ 역주의 저본은 일본 동경교육대학(쓰쿠바대학) 소장본과 규장각 소장본을 참고하였으며 이와 함께 두 가지를 아울러 영인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자 원문·언해 원문(띄어쓰기함)·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찾아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아긔 입안해 2ㄱ조티 아닌 거시 잇다가

제2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딘이 되니 2ㄴ신장은 비록 증이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5) 원문 내용(구결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언해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은 편의상 부호【 】로 묶어 보였고, 한자 원문의 띄어쓰기는 원문대로 하였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ᄝ ㅂ ㅲ ㅳ ㅃ ㅄ ᄢ ᄣ ᄩ ㅸ ㅅ ㅺ ᄮ ㅼ ㅽ ㅆ ㅾ ㅿ ㅇ ᅇ ㆁ ᅙ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ᇇ ㄴㅈ ㄴㅎ ㄷ ㄹ ᆰ ᇎ ᆱ ᆲ ᆳ ᆶ ㅁ ᇚ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정속언해≫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Ⅰ. 편찬 및 간행

1. 간행 배경

≪정속언해(正俗諺解)≫가 간행된 1518년(중종 13)은 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로서 이 시기의 나라 사정은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신진 사류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주도하던 때였다. 그들은 문란해진 정치와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유교 이념으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고, 특히 향당(鄕黨)의 상부상조를 위한 향약(鄕約)의 시행을 추진하며 미풍양속의 확립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김안국(金安國)도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려 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교화서(敎化書)의 간행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김안국이 풍속을 교화할 서책과 의약에 관한 서책을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기를 국왕에게 건의한 내용이 ≪중종실록≫ 권32, 중종 13년(1518, 戊寅) 4월 1일(己巳) 자 기록에 나타나 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그 도의 인심과 풍속을 보니 퇴폐하기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풍속을 변화시킴에 뜻을 두시므로, 신이 그 지극하신 의도를 본받아 완악한 풍속을 변혁하고자 하는데, 가만히 그 방법을 생각해보니 옛 사람의 책 중에서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을 택하여 거기에 언해(諺解)를 붙여 도내에 반포하여 가르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 책들을 수찬하기로 마음먹고 있으나 사무가 번다하여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착오가 필시 많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 별도로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문적(文籍)을 인출하고 있으니, 이 책들을 다시 교정하여 팔도에 반포하게 하면 풍화(風化)를 고취시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이나 ≪정속(正俗)≫ 같은 책은 곧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 책입니다. ≪여씨향약≫이 비록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실려 있으나 주해(註解)가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곧 그 언해를 상세하게 만들어 사람마다 보는 즉시 이해하게 하고, ≪정속≫ 역시 언자(諺字)로 번역하였습니다. 농서(農書)와 잠서(蠶書) 등도 의식(衣食)에 대한 좋은 자료이기 때문에 세종조(世宗朝)에 이어(俚語)로 번역하고 팔도에서 개간(開刊)하였습니다. 지금 역시 농업을 힘쓰는 일에 뜻을 두기 때문에 신 또한 언해를 붙이게 되었고, ≪이륜행실(二倫行實)≫은 신이 전에 승지(承旨)로 있을 때 개간을 청하였습니다. 삼강(三綱)이 중요함은 비록 어리석은 사람들도 모두 알거니와, 붕우 형제(朋友兄弟)의 윤리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신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의하여 유별로 뽑아 엮어서 개간하였습니다. ≪벽온방(辟瘟方)≫ 같은 것은, 온역질(瘟疫疾)은 전염되기 쉽고 사람이 많이들 그로 인해 죽기 때문에, 세종조에서는 생명을 중히 여기고 아끼는 뜻에서 이를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경향에 인포(印布)하였는데, 지금은 희귀해졌기로 신이 또한 언해를 붙여 개간하였습니다. ≪창진방(瘡疹方)≫에 대해서는, 이미 번역하여 개간하였으나 경향에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요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병으로 죽기 때문에 신이 경상도로 갈 적에 이를 싸 가지고 가서 본도에서 간행하여 반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구급에 간편한 비방을 널리 반포하던 성종조의 전례를 따라 많이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그 도에 있으면서 학교와 풍속을 변화시키는 일에 전심한다는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또 아울러 이러한 책들을 엮어 가르친다 하는데, 이 책은 모두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이라 찬집청에 보내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同知中樞府事金安國啓曰 “臣爲慶尙道觀察使, 觀其道人心、風俗, 頹弊乃極。今者上方有志於轉移風俗, 故臣欲體至意, 變革頑風, 而竊思其要, 取古人之書, 可以善俗者, 詳加諺解, 頒道內以敎之。此等書冊, 臣有志修撰, 而第緣事務煩劇, 未遑詳悉, 錯誤必多。今方別設撰集廳, 印出文籍, 此等書, 使之更加讎校, 印頒八道, 則於淬勵風化, 庶有小益也。如≪呂氏鄕約≫、≪正俗≫等書, 乃敦厚風俗之書也。≪鄕約≫雖載於≪性理大全≫, 而無註解, 遐方之人, 未易通曉, 故臣乃詳其諺解, 使人接目便解, ≪正俗≫亦飜以諺字。 如農書、蠶書, 乃衣食之大政, 故世宗朝翻以俚語, 開刊八道。今亦頗致意務本之事, 故臣亦加諺解, 如≪二倫行實≫, 臣前爲承旨時, 請開刊。 如三綱之重, 雖愚夫愚婦, 皆知之, 至於朋友、兄弟之倫, 凡常之人, 或有不知, 故臣依≪三綱行實≫, 撰類以刊之。 如≪辟瘟方≫, 則瘟疫之疾, 易於傳染, 人多死傷, 故在世宗朝, 重惜人命, 飜以俚語, 印頒中外, 今則稀罕, 故臣亦加諺解以刊。至如≪瘡疹方≫, 曾已翻譯開刊, 而不頒布于中外, 人之夭札者, 多以此疾, 故臣往慶尙道時賫去, 刊印於本道, 已頒布矣。 願依成宗朝廣頒≪救急簡易方≫例, 多印廣布” 傳曰 “卿在其道, 盡心於學校、轉移風俗之事, 予聞之嘉美。又復撰此等書以敎之。此書皆有關於風敎, 其下撰集廳, 開刊廣布”)

이로써 볼 때,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직접 ≪여씨향약≫과 함께 ≪정속언해≫를 언해하여 반포하였고, 그 후 1518년(중종 13) 4월에 그 언해본을 교정하여 간행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한 결과 이것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향약의 전국적 시행과 풍속의 교화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김안국은 국왕의 통치 이념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와 관련 있는 책이면 무엇이든 간행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1518년 3월, 강혼(姜渾)이 쓴 ≪이륜행실도≫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허여한 성스러움과 지혜로 날마다 현명한 사대부와 더불어 경전과 사기(史記)를 토의하고 논란하며 다스리는 방도를 강습하고 연마하여 교화를, 태평한 정치를 이룩하는 급선무로 삼지 않음이 없으셨다. 공(公)은 위로 성상의 뜻을 잘 체득하여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처음에 서둘러 이 책을 편집하여 주리(州里)에서 간행하게 하여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도리를 도와서 심는 것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을 삼았다. 몸소 솔선하여 스승과 생도를 격려하여 그 덕행과 사업을 상고하게 하고, 곁으로 효행과 정렬(貞烈)이 일반 사람보다 뛰어난 이들을 찾아 임금에게 아뢰어 선행(善行)을 표창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경주·안동 등 다섯 고을에 영(令)을 내려 서적 가운데 다스리는 방도와 관련이 있는 것을 간행한 것이 열한 가지나 되었다. 그것을 열거하면, ≪동몽수지(童蒙須知)≫는 어린이 교육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구결소학(口訣小學)≫은 근본을 북돋우는 것이며, ≪삼강행실(三綱行實)≫과 ≪이륜행실(二倫行實)≫은 인륜을 밝히는 책이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은 정학(正學)을 숭상하는 것이며, ≪언해정속(諺解正俗)≫과 ≪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은 향촌(鄕村)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고, ≪언해농서(諺解農書)≫와 ≪언해잠서(諺解蠶書)≫는 본업(本業)을 돈독히 하는 것이며, ≪언해창진방(諺解瘡疹方)≫과 ≪언해벽온방(諺解辟瘟方)≫은 일찍 죽는 것을 구제하는 책이다. 이것으로 공(公)의 훌륭함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이로 인하여 공의 학문과 포부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恭惟我主上殿下 聖智天縱 日與賢士大夫 討論經史講劘治道 莫不以敎化爲致治之先務 公 能上體聖意 賦政之初 汲汲焉編輯是書 刊行州里 以扶植彝倫 爲化民之本 而躬率 礪師生 以考其德業 旁搜孝行貞烈之卓異者 聞于上而旌表之 又令 慶州 安東 等五邑 刊書籍之有關於治道者 凡十一 其曰 童蒙須知 正蒙養也 曰 口訣小學 培根本也 曰 三綱二倫行實 明人倫也 曰 性理大全 崇正學也 曰 諺解正俗 諺解呂氏鄕約 正鄕俗也 曰 諺解農書 蚕書 敦本業也 曰 諺解瘡疹方 辟瘟方 救夭札也 此雖未足以盡公之善 而然 因此可以見公之學問抱負大有以異於人也)

위의 두 글을 통해서 ≪정속언해≫는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고 순후(淳厚)한 풍속을 정착시키려는 목적에서 간행된 책임을 알 수 있고, 이 교화서(敎化書)의 보급으로 유교적인 향당 윤리(鄕黨倫理)를 촌락 사회에 확산하려는 김안국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2. ≪정속언해≫의 판본 및 체재

앞에서 본 ≪중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정속언해≫는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간행한 판본이 있고, 그 후 그 언해본을 교정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다시 간행·반포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여 간행된 판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의 판본은 고 이원주(李源周) 교수가 소장한 책이고, 후자의 교정본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밖에 간년(刊年)을 알 수 없는 이본(異本)이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이본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판본들이다. 두 종류의 이본에 대해서는 각각 대표되는 소장처를 따라 규장각(奎章閣) 소장본과 일사문고(一蓑文庫) 소장본으로 명명하고 이원주 교수본과 함께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 첫째로,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이원주 교수 소장본을 들 수 있는데, 1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으로서 이 책에는 서문이나 간기(刊記)가 전혀 없어서 간행에 관련한 사항을 직접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앞에서 본 실록 기사나 ≪이륜행실도≫에 있는 강혼(姜渾)의 서문을 통해서 이 간본(刊本)은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간행된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안국의 재직 기간이 1517년(중종 12) 2월에서 그 이듬해(1518) 3월까지이므로 이원주 교수본은 이 기간에 간행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간년(刊年)을 1518년으로 잡는다. 이 판본은 1984년에 홍윤표(洪允杓) 교수의 해제를 더하여 두 이본과 함께 홍문각에서 영인한 바 있다.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이 판본이 상하 흑어미(上下黑魚尾)의 간격이 고르지 못하다든지 한 행(行)의 글자 수가 일정치 않다든지 각자(刻字)가 조잡하다든지 하는 점들로 미루어 지방에서 개간(開刊)된 판본으로 판단하고, 그 지역도 존경각본(尊經閣本) ≪여씨향약언해≫와 함께 간행했을 경북 선산(善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의해 이 판본은 찬집청에서 교정하여 다시 간행한 책 이전의 원간본으로 보는 것이다. 이번 역주에서 대상으로 삼은 판본도 이원주 교수본으로 하였다. 이제 홍윤표 교수의 조사를 토대로 이 판본의 형태적인 특징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되어 있고 한 면의 광곽 크기가 가로 19.5cm, 세로 28cm이며 한 면은 유계(有界) 10행(十行)이다. 한 행의 글자 수는 한문 원문의 경우에 21자로 매행(每行) 균일하지만 한글의 경우에는 21~26자로서 행에 따라 들쑥날쑥함을 보이고 있다. 주(注)는 소자(小字) 쌍행(雙行)으로 되어 있고 한문 본문의 구절마다 달아놓은 차용 한자(借用漢字)의 구결(口訣)도 소자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에는 흑구상하내향 흑어미(黑口上下內向黑魚尾)에 판심제 〈正俗〉과 장차(張次)가 있다. 이 판본에는 다른 두 이본에 있는 왕지화(王至和)의 서문과, 18개 항목을 나열하고 있는 목록이 없고, 바로 첫 장의 첫 행에 서명(書名) 〈正俗諺解〉를 표기한 다음 둘째 행에서부터 첫 제목 〈孝父母〉가 제시되면서 본문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모두 3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책의 우측 상단을 비롯해서 몇 군데에 글자가 마멸된 부분이 있어 한자나 한글을 붓으로 보사(補寫)한 것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그 중에는 오기(誤記)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2ㄱ의 2행에 필사된 ‘시삿다’와 14ㄴ의 6행에 필사된 ‘힌도’이다. 이는 규장각 소장본과의 대조를 통해서 각각 ‘시니’와 ‘인도’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15ㄴ에는 8행의 첫 글자 위에 ‘’ 자를 첨기(添記)하였는데 이것도 필요 없는 글자를 써넣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는, 17세기 후반쯤 중간한 것으로 보이는 규장각 소장본(홍문각 영인)이 있는데, 이 판본은 규장각 이외에도 서울대의 일사문고와 가람문고, 고려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도 간기가 따로 없고, 서문은 있으나 원전인 ≪正俗篇≫에 있는 왕지화(王至和)의 서문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어서 ≪정속언해≫에 관련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 판본에 나타난 표기법의 특징을 통해서 간행 시기를 추정하고자 한다. 이원주 교수본에 있던 방점(傍點)이 사라지고, ㅿ과 ㆁ이 대부분 ㅇ으로 교체된 점, 드물기는 하나 전에 볼 수 없었던 각자병서(各自並書) ㅃ, ㅆ이 어두에 나타난 점, 받침에서 ㅅ과 ㄷ이 혼기(混記)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홍윤표 교수는 17세기 후반에 간행된 책으로 보고 있다. 이 판본은 1984년 홍문각의 영인본이 나오기 전인 1978년에 고 박병채(朴炳采) 교수의 해제를 붙여 ≪여씨향약 언해≫와 한 책으로 묶어 태학사에서 영인한 일이 있고, 이때 영인의 저본(底本)이 되었던 판본은 전 부산대 류탁일(柳鐸一) 교수의 소장본임을 밝히고 있다. 이 판본은 위에서 지적한 표기법의 변화 말고는 체재나 구성에 있어 이원주 교수본과 조금 달라진 것이 없다. 한문 원문과 구결은 물론 언해문의 문장까지 두 판본이 거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다만 글자체가 다르고 행의 글자 수에서 이원주 교수본과 비교하여 한두 자 내지 그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곳이 제법 있다. 그렇다 보니 본문의 마지막 장차(張次)인 30ㄱ에서 이원주 교수본은 5행에서 본문이 끝나고 있는데 비해 규장각 소장본은 7행에서 끝이 나 있다. 따라서 ‘正俗諺解 終’이라는 권말(卷末) 표시가 이원주 교수본은 8행에 있으나 규장각 소장본은 맨 끝 10행에 위치하고 있음이 다르다. 규장각 소장본에는 왕지화의 서문 1장, 목록 1장이 앞에 있어 본문 30장까지 합치면 모두 32장이 된다. 다만 서문의 첫머리에 붙여야 할 〈正俗序〉라는 제목도 없이 첫 행부터 서문의 본문이 시작된 점과, 또한 본문 첫 장 첫 행의 서명(書名) 다음에 둘째 행에서 제시되어야 할 첫 제목 〈孝父母〉도 누락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착오인 듯하다.

끝으로, 나머지 한 판본은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이다. 역시 이 판본에도 왕지화의 서문만 있을 뿐 간기가 없다. 따라서 정확한 간년은 알 수 없다.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정속 서(正俗序)의 첫 장 우측 아래쪽에 있는 묵서(墨書) ‘위원향교상(渭原鄕校上)’과 배지(褙紙)에 적혀 있는 묵서 중 대자(大字)로 쓴 ‘임자 십이월 일(壬子十二月日)’과 ‘송안사인송(宋安使印送)’ 그리고 두 묵서의 중간에 소자(小字)로 쓴 ‘구랍흑우송상부선우본각자정속편(舊臘黑牛宋相付選于本覺者졍쇽편)’의 기록들을 놓고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 판본은 임자년(壬子年) 12월에 흑우(黑牛)라는 호를 가진 송(宋) 관찰사가 원향교(渭原鄕校)에 보낸 책이라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위원(渭原)은 평안북도 위안군이고 임자년(壬子年)은 1792년(정조 16)임을 밝히면서 일사문고 소장본은 18세기 말에 평안도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결론지었다. 이 판본은 앞의 두 판본과는 판식(版式)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을 보여 주고 있는 이본(異本)이다. 제목, 주제문, 한문 본문과 여기에 삽입된 구결에 있어서만은 앞의 두 판본에 일치하고 있으나 특히 번역에서는 전자의 두 판본과 전혀 다른 언해문을 보이고 있다. 한 행의 글자 수도 앞의 판본들과는 달리 한문 본문과 언해문이 다같이 16자로 배자(排字)되어 있다. 그리하여 서문 2장, 목록 1장, 본문 51장 해서 모두 54장으로 되어 있다. 판심의 어미(魚尾)도 없는 데가 있고, 있어도 서로 다른 모양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 판본에는 앞서 규장각 소장본에 빠져 있던 서문 첫머리의 〈正俗序〉도 기재되어 있고, 본문 첫머리에서도 누락되어 있던 제목 〈孝父母〉가 제자리에 표기되어 있다. 한글 표기에 있어서는 이 시기의 문헌이 대개 그렇듯이 이 판본에서도 심한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분철 표기를 어근에까지 과도하게 적용한 표기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몇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1) 알읫 사(下人, 26ㄱ)며(乾, 31ㄱ)흘(流, 31ㄴ)암(望, 31ㄴ)

덜어이믄(汚, 33ㄱ)부즐어니(勤, 39ㄴ)간안야(貧, 47ㄱ)열어 가지(多, 46ㄱ)

≪정속언해≫는 모두 18개의 항목별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 각 항목은 먼저 3자로 된 한문 제목을 제시하고는, 그 다음 행에서 그 제목에 대한 취지를 밝히는 주제문 성격의 한문 문장을 써 놓고 있다. 이 주제문을 제목보다 한 글자 낮추어 한두 줄로 나타낸 다음 한문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한문 본문은 세 판본 모두 차용 한자로 된 구결(口訣)을 구절마다 달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문의 한문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원주 교수본이나 규장각 소장본은 다 같이 제목과 주제문에 대해서 바로 그 아래에 각각 협주 양식의 소자 쌍행(小字雙行)으로 언해를 붙여 놓았다. 그러나 유독 첫 장에 나오는 첫 항목 〈孝父母〉의 주제문에 붙은 언해문만은 두 판본 모두 소자 쌍행이 아니고 본문과 같은 큰 글자로 표기하면서 이원주 교수본은 한 행으로, 규장각 소장본은 두 행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한문과 언해문으로 된 제목과 주제문 다음에서부터 한문 본문이 이어지고 그 뒤에 한문 본문에 대한 언해가 뒤따르고 있다. 이상이 두 판본의 대략적인 체재이다. 그러나 일사문고 소장본은 이 체재를 따르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한문으로 된 제목과 주제문을 제시하고 바로 그 다음에 한문 본문이 이어진다. 본문이 끝나면 비로소 한글로 된 제목이 나오고 그 다음 행부터 주제문의 언해가 제시되며 그 이후에 본문의 언해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한문 부분이 다 끝나고 나서 한글 표기 부분이 이어지는 체재로 되어 있다.

그러면 제목과 주제문, 그리고 본문, 언해문 등이 세 판본 사이에 실제로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의 (2) 예문은 18개 항목 중 열일곱째의 제목인 〈賑飢荒(진기황)〉 부분을 예로 들어 세 판본에 나타난 체재를 보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원주 교수본, 규장각 소장본, 일사문고 소장본을 각각 ‘이, 규, 일’로 약칭해서 쓰기로 한다.

(2) ㄱ. 賑飢荒 주으려 니 진졔홈

處己待人之道旣備又當力行方便以積其德故以賑飢荒次之 내 몸 가지며  졉홈 다고도  모로미 힘서 됴히 믜게 덕글 만히 지 거실 주으려 니 진졔홈 버거 노라

先儒曰天生五殼<구결자> 正救百姓<구결자> 飢厄<구결자> 天福富家<구결자> 正欲貧富相資<구결자>(본문 이하 생략)

녜 사름미 닐우듸 하히 곡식글 내요 히 의 주우리믈 구호려 코 하히 가면 집블 복 주샤미 히 가난니 가며니 서르 뢰케 시 디니(언해문 이하 생략) 〈이, 26ㄴ~27ㄴ〉

ㄴ. 賑飢荒 주으려 니 진졔홈

處己待人之道旣備又當力行方便以積其德故以賑飢荒次之 내 몸 가지며  뎝홈 다고도  모로미 힘서 됴히  됴히 덕글 만히 지을 배실 주으려 니 진졔홈 버거 노라

先儒曰天生五殼<구결자> 正救百姓<구결자> 飢厄<구결자> 天福富家<구결자> 正欲貧富相資<구결자>(본문 이하 생략)

녜 사름미 닐우듸 하히 곡식글 내요 졍히 셩의 주우리믈 구호려 코 하히 가면 집블 복 주샤미 졍히 가난니 가며니 서르 뢰케 시 디니(언해문 이하 생략) 〈규, 26ㄴ~27ㄴ〉

ㄷ. 賑飢荒

處己待人之道旣備又當力行方便以積其德故以賑飢荒次之

先儒曰天生五殼<구결자> 正救百姓<구결자> 飢厄<구결자> 天福富家<구결자> 正欲貧富相資<구결자>(본문 이하 생략)

진긔황

제몸을 잘 들어 사 졉 되 임의 면  맛당히 열어 가지로 됴 일을 힘 야 그 어딘 덕을 싸흘니 이러모로 주려 흉황을 진휼 일로 버거를 삼노라(주제문의 번역)

녯적 어딘 션옛 사이 닐오되 하히 오곡을 내기 졍히 셩의 줄인 을 구완고 하히 가음연 집을 복 주기 졍히 간안며 가음연 이 서 도아 살게 콰댜 홈이니(본문의 언해문 이하 생략) 〈일, 45ㄴ~46ㄴ〉

위에 나타난 것을 보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원주 교수본과 규장각본은 언해문의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방식이나 언해문의 문장, 그리고 장차(張次)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일사문고본은 제시 방식부터 시작해서 언해문 문장, 표기, 장차에 이르기까지 앞의 두 판본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사문고본은 한문은 한문끼리, 한글은 한글끼리 모아놓고 있다. 그리고 이 판본에서는 제목에 대해 한글로 표기만 했을 뿐 제목에 대한 풀이가 따로 없는데, 이는 주제문 속에 제목이 들어 있어 주제문의 언해 안에 나타나 있으므로 중복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언해문에서 협주를 제시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원주 교수본이나 규장각본 모두 전형적 방식인 소자 쌍행으로 협주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사문고본은 전체를 통해 이러한 방식의 협주문을 전혀 볼 수 없다. 그것은 협주의 내용을 언해문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ㄱ. 녜 후산 션이 글 지 니르샤<원주>【후산 션이 견시 위여 뎡긔를 지니라】 분묘앳 남글 보고 목 삼고져 너기며 섭블 보고 뷔여 딛고져 너기며 무덤믈 보고 겟 거슬 내오져 너기다 니 〈이, 19ㄱ〉

ㄴ. 녜 후산 션이 글 지어 니르샤<원주>【후산 션이 견시 위여 뎡긔를 지으니라】 분묘앳 남글 보고 목 삼고져 너기며 섭블 보고 뷔여 딛고져 너기며 무덤믈 보고 겟 겨슬 내오져 너기다 니 〈규, 19ㄱ〉

ㄷ. 녯 제 후산 션이라 리 견시라  사을 위야 뎡이라  집의 글을 지어 경계야 오되 분묘 남글 보고  목 삼기을 각며 거싀를 아고  블 딧기를 각며 무덤 우희 올나 그 소게 녀흔 보뵈 파 내기를 각리라 니 〈일, 31ㄴ〉

이 교수본과 규장각본에 나타나 있는 협주문 【……】 부분이 일사문고본에서는 (3ㄷ)의 밑줄친 부분과 같이 언해문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 앞의 두 판본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3. ≪정속언해≫의 내용

≪정속언해≫는 위에서 밝힌 대로 1518년(중종 13)에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중국의 ≪正俗篇≫(정속편)을 가져다 언해한 일종의 교화서이다. 원래 ≪정속편≫은 원(元)나라 왕일암(王逸庵)의 저술인데, 1345년 중국 송강부(松江府)에서 지방관으로 있던 왕지화(王至和)가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서문을 더하여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효부모(孝父母)〉, 〈우형제(友兄弟)〉, 〈화실가(和室家)〉, 〈훈자손(訓子孫)〉, 〈목종족(睦宗族)〉, 〈후친의(厚親誼)〉, 〈휼인리(恤隣里)〉, 〈신교우(愼交友)〉, 〈대간복(待幹僕)〉, 〈근상제(謹喪祭)〉, 〈중분묘(重墳墓)〉, 〈원음사(遠淫祀)〉, 〈무본업(務本業)〉, 〈수전조(收田租)〉, 〈숭검박(崇儉朴)〉, 〈징분노(懲忿怒)〉, 〈진기황(賑飢荒)〉, 〈적음덕(積陰德)〉 등 18항목에 걸쳐 서술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내용상의 특징은 가족이나 친족 내부의 인간관계에 대한 행위 규범 및 윤리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혈연관계를 넘어서 촌락 사회의 인간관계에까지 적용되는 행위 규범, 즉 향당 윤리(鄕黨倫理)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518년 3월, 강혼(姜渾)이 쓴 ≪이륜행실도≫의 서문에서도 ≪언해정속(諺解正俗)≫과 ≪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은 향촌(鄕村)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라 한 사실이 ≪정속언해≫도 바로 향당 윤리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정속의 18개 항목 중에서 향당 윤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항목은 대개 다음의 것들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휼인리〉는 촌락 사회에서 이웃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부상조를 강조하였고, 〈수전조〉는 농경 사회의 대표적 인간관계인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에서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진기황〉에서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을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도록 독려하고 있으며, 〈적음덕〉은 음덕과 선행을 쌓음으로써 아름다운 사회를 이룩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 밖에 사회를 살아가는 데 요구되는 윤리 규범도 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친구 사귐에 신중할 것을 가르치는 〈신교우〉가 있고, 또한 생업에 힘써야 한다는 〈무본업〉, 검박(儉朴)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숭검박〉, 분노를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징분노〉 등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윤리 규범으로서 제시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정속언해≫에 제시되고 있는 18개 항목을 순서대로 간략히 그 내용을 소개한다.

1) ‘효부모(孝父母)’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이다. 18개 항목 중에서 〈효부모〉가 가장 먼저 할 일이고 나머지 17개 항목은 그 다음으로 할 일이라고 주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만큼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큰 일이라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우선 의식주(衣食住)를 잘 돌보아 드리며, 질병이 있을 때 잘 구원해 드리며, 만일 어버이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어버이에게 효도하게 되면 그 결과로 다시 자식으로부터 그 효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하늘과 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하늘이 내리는 주살(誅殺)과 사람이 내리는 재화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다섯 가지 형벌에 해당하는 범죄가 삼천 가지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불효(不孝)라고 하였다.

2) ‘우형제(友兄弟)’는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이다. 형제는 같은 어버이로부터 태어났으므로 형제는 몸만 다르고 그 기(氣)는 같은 것이어서 그 의리의 관계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형제간의 우애를 저버린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손발을 끊어버리는 것과도 같고 스스로 담장을 헐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 가정에서 형은 형답게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아우답게 형을 공경한 후에야 백성의 교화도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 ‘화실가(和室家)’는 부부가 화목하는 것이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라 부부가 있음으로써 부자(父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화목은 다만 부부만의 행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가정이 바르게 되고, 가정이 바르게 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부모의 마음도 기쁘게 된다. 세상에서 비첩(婢妾)을 사랑하여 정처(正妻)를 소박하는 수가 있는데 정처는 죽을 때까지 달고 쓰고 가난하고 여유 있고 죽고 사는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4) ‘훈자손(訓子孫)’은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손을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엇이 옳은 일이며 무엇이 옳지 못한 일인지를 분별케 하여 옳은 일은 행하고 옳지 못한 일은 행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재산과 권세가 있는 집에서 그 자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아니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교만과 사치와 방종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는 사례가 있고, 그 결과는 몸을 망하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자손을 가르치는 도리를 잘 알지 못하는 까닭임을 강조하고 있다.

5) ‘목종족(睦宗族)’은 친척과 화목하는 것이다. 친척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내려 온 것이며 조상을 높이면 종가(宗家)를 공경하게 되고 종가를 공경하게 되면 친척을 공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친척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어진 친척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차라리 종[奴婢]들에게는 호의호식케 하면서 자기의 가까운 친척은 굶고 헐벗게 내버려 두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은 모두 천리(天理)에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이처럼 천리에 용납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사람은 조상들께서도 노여워하여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6) ‘후친의(厚親誼)’는 어머니편의 친척과 아내편의 친척을 잘 사귀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아내편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기 쉬우나 어머니편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대체로 어머니편의 친척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인친(姻親)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옛날의 성군(聖君)은 동성(同姓)의 친척과 이성(異姓)의 친척을 다 사랑하도록 가르치셨다고 하였다.

7) ‘휼인리(恤隣里)’ 이웃과 마을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나무가 많이 모여 숲을 이루면 비바람을 가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이웃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웃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사귐으로써 화목해지는 풍속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웃이나 마을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나에게도 그들로부터 사랑이 되돌아오게 되고, 그들에게 증오를 베풀게 되면 나에게도 그들로부터 증오가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8) ‘신교우(愼交友)’는 벗 사귀기를 신중하게 하는 것이다. 벗을 사귀는 것은 오륜(五倫)의 하나에 속하는 중요한 것이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벗을 사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벗에는 어진 벗도 있고 어질지 못한 벗도 있으니, 어진 벗은 보고 배운 대로 선한 일을 하고 어질지 못한 벗은 보고 배운 대로 그릇된 일만 하니, 이 벗을 사귈 때는 삼가 사귀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진 사람을 가려서 따르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9) ‘대간복(待幹僕)’은 노복(奴僕)들을 잘 대접하여 부리는 것이다. 이것은 노복을 다루는 하나의 요령에 속하는 것으로 노복이 간사한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할 것과 용서할 만한 일은 너그럽게 처리함으로써 상호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복이 간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주인의 사사로운 일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고 공적 업무를 그르치게 되고 그 결과는 많은 백성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 ‘근상제(謹喪祭)’는 상사(喪事)와 제사(祭祀)를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다. 상사와 제전은 예로부터 성현들이 제정한 의례에 따라 삼년간의 몽상(蒙喪)과 그 밖에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 등으로 행해진다. 세상의 풍속이 장사지냄에 있어 진짜 할 일은 힘써 하지 않고, 겉으로 물자만 풍부하게 쓰고 사치스럽게 하면서 형식적인 절차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번당(幡幢)이 펄렁거리고 징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한 것과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모두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근본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11) ‘중분묘(重墳墓)’는 분묘를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분묘는 어버이와 조상이 묻혀 있는 곳이다. 사람이 살아서는 편안한 집에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죽은 후에도 편안한 무덤에 묻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며 보호하지 않고서 후손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의 근원을 마르게 해 놓고서 길게 흐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자손이 늘 무덤을 보살피기로 마음을 먹으면 조상이 저승에서 편안하게 되어 자손은 이승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12) ‘원음사(遠滛祀)’는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 지내지 말라는 것이다. 제사하는 예법에는 각각 차등(差等)이 있어 서로 혼란됨이 없이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특히 도교(道敎)의 방사(方士)들이나 무교(巫敎)의 무당 등에 의해 정당하지 못한 제사를 행하는 일이 있는데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하면 제사를 지내도 귀신이 흠향(歆饗)하지 아니할 것이고, 진실로 사리에 맞게 하면 빌지 않아도 귀신이 복을 줄 것이라 하였다.

13) ‘무본업(務本業)’은 생업에 힘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생업이라는 것은 학문에 힘쓰는 일과, 농사에 힘쓰는 일과, 공업에 힘쓰는 일과, 장사에 힘쓰는 일을 가리킨다.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그것이다. 사농공상은 예로부터 나라에 필요한 근본적인 직업이고 이러한 근본적인 직업이 없으면 백성이 살기가 어렵고 나라가 부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놓고 즐겨 노는 사람은 처자식 봉양하는 일도 돌아보지 아니하며, 살아갈 일을 잊고 욕심을 따라 차(茶)를 파는 집에 가서 장기와 바둑을 하며, 술집에 가서 놀다가 송사(訟事)를 일으켜 재물을 빼앗기니, 이런 사람은 본업에 힘쓰지 않는 사람으로서 뿌리 없는 나무와 근원이 없는 물과 같다고 하였다.

14) ‘수전조(收田租)’는 공세(貢稅)를 합리적으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주(地主)와 소작인 사이에 공세(貢稅)를 주고받는 일에 관한 것으로 지주가 소작인으로부터 공세를 받지 않으면 지주는 나라에 부역(賦役)을 바칠 수 없고, 지주가 나라에 부역을 바치지 않으면 나라에서는 재정(財政)을 충당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주가 부담하는 부역이 과중하면 소작인이 부담하는 공세도 필연적으로 과중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작인은 수확을 올리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지주도 소작인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도와줌과 동시에 수확의 감소가 예상되면 공세를 경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5) ‘숭검박(崇儉朴)’은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는 것이다. 검박이라는 것은 사치함과 빛나고 고운 것을 삼가는 것이다. 검박한 생활은 모든 소비를 절감하게 되고 모든 소비를 절감하다 보면 자연히 남에게 빚을 지지 않게 되고 차츰 물질적으로 여유 있게 되는 까닭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부자는 넉넉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임금 중에는 궁전이나 의복이나 침실이나 그릇 등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처럼 검소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처럼 검박하게 지낸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여유 있는 사람이라도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16) ‘징분노(懲忿怒)’는 노여운 일을 참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분노하고 또 그 분노를 참지 못하여 남을 비방하거나 말다툼을 벌이거나 심지어는 주먹질을 벌인 탓에 남에게 고소당하여 감옥에 갇히거나 아니면 자신이 남을 고소하여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는 상상하지 못하였던 중대한 결과를 빚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패가망신(敗家亡身)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분노를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17) ‘진기황(賑飢荒)’은 굶주린 사람을 돕는 것이다. 곡식이라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하늘이 낸 것이고 부자(富者)도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이 복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가 굶주리는 사람을 진휼하는 것은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것이며 천리에 순응하면 하늘이 도와서 자손이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18) ‘적음덕(積陰德)’은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을 더욱 훌륭해지도록 도와주고, 어려운 일이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며, 목마른 사람이 목을 축일 수 있게 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편하게 왕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타인과 물질을 거래할 때에 정직하고 공평하게 하는 일, 그리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들이 모두 음덕(陰德)을 쌓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음덕을 쌓으면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되고, 반대로 사람이 음덕을 쌓지 않으면 그 자손이 앙화(殃禍)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18개 항목에 대한 서술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내용 서술에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18개 항목마다 말미에는 빠짐없이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같은 옛 문헌에 있거나 성현이 표현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마무리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문 본문의 맨 마지막 문장의 구결이 2개 항목을 제외하고 대부분 ‘伊羅 爲豆多’(이라 하도다)와 같은 인용 구문의 구결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 간행자 - 김안국(金安國)

여기서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3,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인명대사전≫(1986, 신구문화사)에 의지하여 김안국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하고자 한다.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은 문신, 학자이며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다.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 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연산군 9)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장령, 예조참의,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중종 12) 2월에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3월까지 있으면서 ≪이륜행실도≫를 편찬 간행하였을 뿐 아니라 ≪농서(農書)≫, ≪잠서(蠶書)≫, ≪여씨향약(呂氏鄕約)≫, ≪정속(正俗)≫, ≪벽온방(辟瘟方)≫, ≪창진방(瘡疹方)≫ 등을 언해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1518년(중종 13) 4월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다시 중앙 관리로 왔으나 그 다음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중종 27)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찬성, 판중추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 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그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그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중종실록 10년 6월 8일(癸亥)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이조판서 안당이 아뢰기를, “… 승문원 판교(判校) 김안국(金安國)과 같은 자는 본래 부지런하고 삼가는 것으로써 봉직(奉職)하여 있는 곳마다 자기의 직책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이와 같은 사람은 차례를 따지지 않고 탁용(擢用)한다면 거의 인심을 진작시키고 선비의 습속을 격려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마땅히 승지를 임명해야 하는데 의망할 만한 자가 적습니다. 바라건대 김안국도 아울러 의망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김안국은 한갓 승지뿐만 아니라 탁용하기에 가장 합당하다.”

(吏曹判書安瑭啓曰 … 如承文院判校金安國 本以勤謹奉公 所在無不盡其職任 如此之人 不易多得 … 如此之人 擢用不次 則庶可以振起人心 而激勵士習也 今日當除承旨 而其可擬望者少 請以金安國幷擬 傳曰 金安國 非徒承旨而已 最合於擢用)

위에서 보면, 안당(安瑭)은 승지(承旨)를 발탁함에 있어 이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다. 서열을 따지지 않고 김안국 같은 인물을 뽑는다면 백성들의 인심이 진작되고 선비들의 습속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종실록 11년 11월 7일(甲申)의 기사에도 김안국의 사람됨을 서술하고 있다.

안국은 사람됨이 성격과 법도가 상명(詳明)하고 간절하여 나라일 하기를 크나 작으나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충성과 정성에 감복했다. 그러나 더러는 그의 까다롭게 살핌을 흠으로 여겼다.

(安國之爲人 性度詳明懇切 爲國家事 無巨細 一出於至誠 時人服其忠懇 而或病其苛察焉)

위의 기사를 통해서 김안국은 자기의 할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수행했음을 알 수 있고 그럼으로 해서 천거의 대상이나 물망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도 후에 다시 등용된 것은 그의 책임감과 성실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성품상의 흠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 문자

≪정속언해≫는 16세기 문헌이므로 ㅸ과 ㆆ은 이미 소실되어 나타나지 않고 ㅿ과 ㆁ은 이때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ㆁ을 초성에서는 볼 수 없고 종성에서만 사용되고 있음을 보는데 주001)

<풀이>홍윤표 교수의 ≪정속언해≫ 해제(1984)에서는 “사미 린 나”(4ㄱ)의 문례를 들어 ㆁ이 초성에 쓰인 용례로 보고 있으나 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이 부분은 “사 일린 나”로 판독되는 구절이다.
, 종성에서도 ㆁ이 ㅇ으로 교체된 곳이 있다. 어떤 부분은 판각(板刻)이 정밀하지 못하여 종성에서 ㆁ과 ㅇ의 판별이 어려운 곳도 있지만 종성에서 ㆁ과 ㅇ의 혼기(混記)가 몇 군데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ㅿ에 있어서도 일부 낱말에서 ㅿ 탈락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15세기에 사용되었던 ㅿ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형별로 그 용례를 제시한다.

(1) ㄱ. 명사

겨 : 겨렌(2ㄱ)

 : (11ㄴ), (27ㄴ)

 : 미(3ㄴ), (6ㄱ), 미(13ㄱ, 17ㄱ), (15ㄴ)

아 : 아(4ㄱ, 8ㄱ), 앗(4ㄱ)

아 : 아미라(4ㄱ), 아(8ㄴ, 9ㄴ), 아들희게(8ㄴ), 아(10ㄴ), 아곳(27ㄴ)

어버 : 어버(1ㄱ, 2ㄱ, 2ㄴ, 4ㄴ, 5ㄱ, 6ㄱ, 6ㄴ, 18ㄴ, 23ㄴ), 어버(4ㄱ), 어버(6ㄱ, 9ㄴ, 22ㄱ), 어버게(18ㄴ, 26ㄱ), 한어버도(10ㄱ), 하나버(18ㄴ), 하나버(19ㄱ)

어름 : 어름메(2ㄱ)

처 : 처믜(4ㄱ), 처믜(4ㄱ), 처믠(9ㄴ), 처미(26ㄴ)

ㄴ. 파생명사

피조(2ㄴ), 녀름지(20ㄴ)

ㄷ. 동사 · 형용사

가멸- : 가며나(6ㄱ), 가멸어나(7ㄴ), 가멸에(8ㄱ), 가면(8ㄱ, 27ㄴ), 가멸오(13ㄱ), 가며닌(25ㄴ), 가며롬(25ㄴ)

나가- : 나가려(13ㄴ), 나갈딘댄(14ㄱ)

ㄹ. 활용형

-[繼] : 니(9ㄴ) cf. 가며니 닛디 말라(不繼富, 28ㄱ)

-[愛] : (17ㄱ)

-[結] : 무(20ㄱ, 20ㄴ)

-[作] : 지(11ㄱ), 지(19ㄴ, 26ㄴ), 지니라(19ㄴ), 지(27ㄱ), 녀름지(23ㄴ), 녀름지리(21ㄴ)

ㅁ. 객체 높임법

-- :  재고(2ㄱ), 뵈오며(2ㄱ)

ㅂ. 부사

몸(11ㄴ), 그기션(27ㄴ)

ㅅ. 강세 보조사

- : 후에(1ㄴ, 8ㄴ), 훼(4ㄴ, 5ㄴ, 8ㄴ), 뎨(3ㄴ), 슬허호미(17ㄴ),

화여(6ㄱ), 도의여(12ㄴ), 야(24ㄱ)

ㅇ. 한자어

네(常人, 14ㄱ), 가(室家, 4ㄴ)

ㅈ. 역표기

므 일를(6ㄴ) cf. 므스 거슬(2ㄱ)

이상은 문헌 내에 사용된 ㅿ 표기를 거의 망라한 셈이다. 그 중에서도 (2)ㅈ에 쓰인 ‘므’는 15세기에 ‘므스’로 표기되던 낱말이어서 ㅿ과는 상관없는 말인데도 ‘므’로 역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많은 용례 가운데 대부분은 여러 번의 등장에도 ㅿ의 표기에 아무런 혼란이 없으나 일부의 경우에 한해서 ㅿ유지형과 ㅿ탈락형이 한 문헌 안에서 공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1) ㄱ~ㅇ의 용례 중에서 ㅿ이 탈락된 어형은 다음과 같다.

(2) ㄱ. 어버이(2ㄱ, 3ㄱ, 8ㄱ, 8ㄴ, 18ㄴ, 21ㄴ), 어버일(17ㄱ)

ㄴ. 녀름지이(20ㄴ), 녀름지이고(8ㄱ)

ㄷ. 처엄믜(26ㄴ)

ㄹ. 연(自然, 2ㄴ), 인니(聖人, 9ㄴ, 17ㄱ), 현인니신(賢人, 12ㄴ), 소임믈(所任, 16ㄱ), 실개(室家ㅣ, 6ㄴ)

(3) 이 : 이예(2ㄴ, 3ㄴ), 이옛(16ㄱ)

위에서 ‘어버이’는 ‘어버’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어버’에서 ㅿ탈락이 가장 적극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예가 많지는 않으나 ‘녀름지이’와 ‘처엄’에서도 ㅿ탈락을 보여 주고 있다. 한자어에서는 ㅿ유지형으로 ‘’이 유일하다 할 정도로 한자어에서의 ㅿ탈락은 거의 완료된 듯한 상태이다. (2)ㄹ에서 보듯이 15세기에 ㅿ을 보이던 낱말들이 이 문헌에서는 모두 ㅿ이 탈락한 표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자어에서 ㅿ 소실이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속언해≫에서 한자어를 한자 없이 한글로만 표기한 데 따른 상승효과가 아닌가 한다. 이런 현상은 역시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기한 ≪이륜행실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다만 (1)ㅇ에서 ‘室家’를 ‘가’로 적은 것은 잘못된 표기라는 것을 (2)ㄷ의 ‘실개’가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3)의 ‘이’는 15세기에 ‘’였으나 ≪정속언해≫에서는 ㅿ이 탈락된 형태만 사용되었다. 특히 ‘이’만은 이미 15세기 국어에서 ㅿ 탈락형을 선보인 일이 있다. 그리하여 이기문(1978:45)은 “음운 ㅿ의 소멸은 15세기 성종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가 그 선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정속언해≫에서도 ‘’가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2), (3)의 ㅿ 탈락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ㅿ 탈락이 일정한 환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2)ㄷ의 ‘처엄’을 제외하고는 고유어 한자어를 막론하고 모두 i, j 앞에서 ㅿ 탈락이 일어나고 있음이다. 이로써 ㅿ의 탈락은 특정한 환경에서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시대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제 초성에 쓰인 자음의 병서자(並書字)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각자병서(各自並書)는 ≪원각경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로 자취를 감추어 버려 이 문헌에서도 각자병서는 전혀 볼 수 없다. 한 예로, ≪정속언해≫에 자주 등장하는 활용 어미로서 ‘-ㄹ’가 있는데, 이는 ≪원각경언해≫ 이전까지는 ‘-ㄹ’로 표기되던 형태이나 각자병서의 폐지로 ≪정속언해≫에서도 ‘-ㄹ’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초성의 합용병서(合用並書)는 15세기 국어의 체계대로 ㅅ계, ㅂ계, ㅄ계의 병서자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15세기의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그동안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ㅅ계의 합용병서는 된소리를 나타내는 표기로서 15세기와 다름없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ㅺ : 리(16ㄱ), 이고(23ㄴ)

ㅼ : (2ㄱ, 8ㄱ, 5ㄴ, 11ㄴ, 16ㄴ), (1ㄴ, 2ㄴ, 5ㄴ, 8ㄱ, 22ㄱ)

ㅽ : (6ㄱ, 8ㄱ, 17ㄴ)

이뿐만 아니라 ㅅ병서자는 어근끼리 결합하면서 개입된 사이시옷을 후행어의 어두에 내려적음으로써 형성된 것도 있다.

ㅅ+ㄱ : 잠(13ㄱ), (15ㄴ), 믈(20ㄱ)

ㅅ+ㄷ : 미쳔커나 에(7ㄴ), 휘로디(16ㄱ)

ㅅ+ㅂ : 별리(星之火, 26ㄴ)

이 밖에 폐쇄음 아래에서 경음화된 자음을 ㅅ병서자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ㅺ : 앗(25ㄱ)

ㅼ : 모로놋(6ㄱ)

그러나 ㅂ계의 합용병서에서는 약간의 변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15세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ㅲ이 새로 등장한 점이다. 그러면 ≪정속 언해≫에 실제로 등장하는 ㅂ계의 합용병서자를 열거해 본다.

ㅲ : 이면(27ㄴ)

ㅳ : 나니(1ㄴ), 들(4ㄱ)

ㅄ : 기오(10ㄱ),  것(16ㄱ, 21ㄴ), (22ㄱ), 며(22ㄱ)

ㅶ : 거슯도(4ㄱ)

ㅴ : 일(9ㄴ) 주002)

<풀이>이원주 교수본 ≪정속언해≫에 어두자음군 ㅴ이 쓰인 용례로서 9ㄴ의 ‘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영인본에는 그 부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일’라고 본 것은 이 판본의 표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후대의 규장각본에서 ‘명일’로 되어 있는 데에 근거하였다.

이 문헌에 와서 위에서 보인 ㅂ병서자의 ㅂ이 [p]음이냐 아니면 된소리를 표기한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예가 있다.

(4) ㄱ. 곡식글 이고(貸穀)(23ㄴ)

ㄴ. 나믄 곡식로 가난 사믈 이면(有餘之粟 貸濟貧之之民)(27ㄴ)

위의 예문에 등장하는 ‘이-’와 ‘이-’는 둘다 ‘貸(대)’의 뜻으로 쓰인 동일한 동사이다. 이는 동일한 낱말의 이표기(異表記)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표기는 다르더라도 발음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ㅺ이나 ㅲ이 똑같이 ㄱ의 된소리 표기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예는 ㅂ병서자가 된소리 표기라는 결론을 망설이게 한다.

(5) ㄱ. 힘(17ㄴ), 힘디(21ㄴ, 22ㄱ)

ㄴ. 힘스면(16ㄱ), 힘스믈(20ㄴ), 힘서(21ㄴ, 22ㄴ, 27ㄱ)

위의 (5)에서도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동일한 낱말, 동일한 발음임에도 표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원래 ‘힘 -’[努力]는 두 낱말의 구성이었는데 이것이 차츰 한 낱말로 의식되면서 ‘힘-’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ㅄ이 ㅆ과 같은 된소리 표기였다면 ‘힘-’ 그대로 써도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ㅄ이 된소리가 아니고 [ps]의 자음군을 나타내는 병서자이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두 자음만이 허용되는 모음 사이에 m, p, s의 세 자음이 개재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 자음 중 하나를 탈락시켜야 하는데, 마침 m, p이 모두 양순음(兩脣音)이어서 동음 생략으로 [p]이 탈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힘-’가 ‘힘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ㅄ이 자음군 [ps]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힘스-’라는 표기가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동사가 ‘힘’과 결합하지 않고 단독으로 쓰인 경우도 여러 번 있는데, 이 경우에는 어느 하나도 ‘스-’로 교체된 예가 없다는 점이 또한 ㅄ의 ㅂ이 [p]임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이상에서 볼 때 ㅂ병서자는 자음군에서 된소리로 바뀌는 과도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나 ≪정속언해≫에서는 ‘’[意]과 ‘’의 혼기 현상 같은 ㅅ병서자와 ㅂ병서자의 혼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ㅂ병서자는 아직 자음군의 표기 글자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2. 표기법

여기서 표기법이라 함은 체언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거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어미가 연결되거나 할 때,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받침 글자를 그 아래의 조사나 어미의 두음으로 내려적느냐 내려적지 않느냐 하는 이른바 연철(連綴)이냐 분철(分綴)이냐 하는 문제를 말한다.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되었던 15세기 국어의 표기는 처음부터 연철 방식을 표기의 원칙으로 삼았고,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15세기 한글 문헌에서 연철법은 천하통일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한 대세는 16세기에 들어서도 대체로 이어지는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편에선 분철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분철 표기가 제법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16세기 초기 문헌인 이원주 교수본 ≪정속언해≫의 표기 실태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연철 표기와 중철(重綴) 표기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물론 체언의 경우에 해당하는 현상이고 용언의 경우는 아직도 연철의 대세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연철도 분철도 아닌 중철이란 무엇인가? 이는 분철할 때처럼 받침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적어 놓고는 한편으로 연철할 때처럼 받침 자음을 그 다음 음절의 두음에 다시 적는, 말하자면 받침의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표기 방식이다. 예를 들면 ‘사+’을 ‘사’로 적는 방식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연철과 분철의 두 방식을 절충한 표기이므로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철 표기는 연철에서 벗어나 분철로 지향해 가는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분철의 표기 중간 중간에 가끔씩 등장하는 표기 형태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교수본≪정속언해≫는 매우 이례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 문헌은 연철과 중철을 그렇게 많이 보이면서도 분철은 가뭄에 콩 나듯 전체를 통해 몇 개의 용례가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의 문헌에서 중철의 대량 등장은 공통된 현상이지만 문헌에 따라 연철 중철의 비율은 조금씩 다르고 분철 표기는 대부분 극소수로 나타나지만 어떤 문헌에서는 분철 표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문헌도 있다. 이제 그 표기례를 체언의 받침별로 나누어 제시한 다음 연철의 예도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같은 용례라도 다른 장에 나타나면 그 출전을 각각 밝히지만 한 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경우는 한 번만 나타내기로 한다.

(6) 체언 말음이 ㄱ인 경우

셕긔(1ㄴ), 식긔(2ㄱ, 8ㄴ), 약글(2ㄱ), 골육긔(3ㄴ), 골육글(4ㄴ), 대개(4ㄴ), 쥬역게(5ㄴ), 식기(1ㄴ, 5ㄴ, 29ㄴ), 쥬역근(5ㄴ), 셕착기(7ㄴ), 셕글(7ㄴ), 쳐식긔(8ㄴ), 녁근(10ㄴ), 족그로(12ㄴ), 쳐셕긔(13ㄱ), 덕기(13ㄴ), 덕글(14ㄱ, 27ㄱ), 셕기며(14ㄴ), 덕게(15ㄱ), 음식글(15ㄴ), 셰쇽기(17ㄴ), 복글(19ㄱ, 20ㄱ, 30ㄱ), 쳐식글(23ㄴ), 곡식글(23ㄴ, 27ㄴ), 옥개(26ㄴ, 29ㄴ), 곡식로(27ㄴ), 원억겟(29ㄴ), 쟉긔(29ㄴ)

cf. 저긔(3ㄴ, 28ㄱ, 29ㄱ), 셔기며(8ㄱ), 셔글(8ㄴ), 시글(9ㄴ), 골유글(9ㄴ), 저긘(9ㄴ), 쇼기(10ㄱ), 어믜녀글(11ㄴ), 셰쇼개(20ㄱ), 글(20ㄱ), 곡셔글(21ㄴ), 도기(22ㄱ)

(7) 체언 말음이 ㄴ인 경우

인니신(1ㄴ), 덕분늘(2ㄱ), 직분네(2ㄱ), 손니(2ㄴ, 7ㄴ, 18ㄴ, 19ㄱ, 30ㄱ), 긔운니(3ㄴ, 13ㄱ, 23ㄴ), 근원니니(5ㄴ), 편로(5ㄴ), 남진니(6ㄴ), 손(8ㄱ, 17ㄴ, 18ㄴ), 근원노로셔(9ㄴ), 인니(9ㄴ, 17ㄱ), 사돈(11ㄴ), 현인니신(12ㄴ), 인륜니(14ㄴ), 남진니며(14ㄴ), 얼운니며(14ㄴ), 졔뎐(16ㄴ), 삼 년(17ㄱ), 니 아니라(17ㄴ), 셰간(17ㄴ), 근원(19ㄱ), 귀신니며(20ㄱ), 신션(20ㄱ), 근본(22ㄱ, 22ㄴ), 근본니오(24ㄱ), 근본닐(24ㄱ), 니오(25ㄱ), 가난(25ㄴ)

cf. 소니(5ㄴ), 니(8ㄱ), 사도게(11ㄱ), 혼이(11ㄴ), 바니(20ㄴ), 근보(21ㄴ), 니니(23ㄴ), 셰가니(25ㄱ), 니오(25ㄱ), 민가니(28ㄱ), 소니(28ㄱ, 30ㄱ)

(8) 체언 말음이 ㄷ인 경우

벋디란(14ㄱ), 벋들(14ㄱ), 벋디(14ㄱ, 14ㄴ), 벋듸게(15ㄱ), 벋디오(27ㄴ)

cf. 들(4ㄱ), 고디(8ㄴ), 버들(13ㄴ, 14ㄴ), 버듸게(13ㄴ), 버디(14ㄱ), 버든(14ㄴ)

(9) 체언 말음이 ㄹ인 경우

허믈리(2ㄱ), 벌(2ㄴ), 벌리라(2ㄴ), 손발(4ㄴ), 긔결리란(5ㄴ), 벼슬를(6ㄱ), 일를(6ㄴ, 14ㄱ, 14ㄴ, 26ㄴ), 왼 일레(7ㄴ), 긔질리(7ㄴ), 벌를(11ㄴ), 시졀리(14ㄴ), 일리라(14ㄴ, 29ㄴ), 말리(20ㄱ), 일(21ㄴ), 시절를(24ㄱ), 줄리(27ㄴ), 일리오(28ㄱ), 믈블레(29ㄴ), 믈레(29ㄴ), 옥구슬를(29ㄴ), 얼리(30ㄱ)

cf. 이리라(2ㄱ, 21ㄴ), 이리(2ㄴ, 16ㄱ, 20ㄴ, 25ㄴ), 이를(8ㄴ, 14ㄴ, 17ㄴ, 20ㄴ, 22ㄱ), 글워레(8ㄴ, 12ㄴ), 허므리(10ㄱ), 수프리(12ㄴ), 주를(13ㄱ), 마레(16ㄱ), 므리(22ㄱ, 26ㄴ), 시저리(22ㄱ), 귀시리(23ㄱ), 이른(28ㄱ), 므레(29ㄴ)

(10) 체언 말음이 ㅁ인 경우

품믈(1ㄴ), 일홈미라(2ㄱ, 5ㄴ, 10ㄱ), 녀름멘(2ㄱ), 사미(2ㄴ, 4ㄱ, 8ㄱ, 11ㄱ, 15ㄴ, 22ㄱ, 26ㄴ), 사름믜(1ㄱ, 2ㄴ, 5ㄴ, 16ㄴ, 29ㄱ, 29ㄴ, 30ㄱ), 몸매(2ㄴ), 몸(3ㄴ), 미(3ㄴ), 사(4ㄱ), 처믜(4ㄱ, 26ㄴ), 아미라(4ㄱ), 아믜(4ㄴ), 사름믜게(4ㄴ, 17ㄴ), 사름미(4ㄴ, 23ㄴ, 26ㄴ, 27ㄴ, 28ㄴ, 29ㄴ), 몸미(5ㄴ), (6ㄱ, 27ㄴ), 가춈(6ㄴ), 사름미라(7ㄴ), 아미오(10ㄴ), 아미니(10ㄴ), 홈믈(10ㄴ), 홈(11ㄴ, 19ㄴ, 24ㄱ, 27ㄱ), 사괴욤(13ㄴ), 님굼므로(14ㄱ), 그러홈모로(14ㄴ), 사름(14ㄴ, 30ㄱ), 모로(16ㄱ), 사름믈(16ㄱ, 28ㄱ), 소임믈(16ㄱ), 아니홈로(30ㄱ), 시름믈(17ㄴ, 23ㄴ), 무덤믈(19ㄱ), 사(22ㄱ), 모도옴미(23ㄴ), 사(25ㄱ), 사게(25ㄴ), (25ㄴ), 아(26ㄱ), 몸(26ㄱ), 처미(26ㄴ), (26ㄴ), 처엄믜(26ㄴ), 히믈(27ㄴ), 사믈(27ㄴ), 사름믄(28ㄱ), 메(28ㄱ)

cf. 호미(2ㄴ, 3ㄴ, 4ㄱ, 4ㄴ, 6ㄱ, 17ㄴ, 18ㄱ, 22ㄱ, 23ㄱ, 26ㄱ, 29ㄱ), 셤교(2ㄱ), 이쇼(2ㄴ, 16ㄱ, 18ㄴ), 사괴요(3ㄱ, 11ㄴ), 호(4ㄱ, 24ㄴ), 처믜(4ㄱ, 26ㄴ), 호(4ㄴ, 17ㄴ, 18ㄱ, 28ㄱ, 29ㄴ), 일후미라(4ㄱ), 사(4ㄴ), 닷고모로(5ㄴ), 사미(6ㄱ, 10ㄱ, 11ㄱ, 17ㄴ, 20ㄱ, 28ㄱ), 호모로브터(8ㄱ), 모매(8ㄴ), 모미(8ㄴ, 17ㄱ), 아(8ㄴ, 9ㄴ, 11ㄱ), 처믠(9ㄴ), 모미라(9ㄴ), 사(9ㄴ, 23ㄱ), 녀교미(9ㄴ), 녀교미라(9ㄴ), 아미(10ㄱ), 아미여(10ㄱ), 아(10ㄱ), 님구미(11ㄴ, 24ㄴ-25ㄱ), 이쇼로(11ㄴ), 님고미(11ㄴ), 이쇼미(12ㄴ), 보(12ㄴ, 17ㄴ), 힐호모로(13ㄱ), 님구미시며(14ㄴ), 업스모로(14ㄴ), 호매(16ㄱ, 29ㄴ), 미(17ㄱ), 외요(17ㄴ), 샤미라(17ㄴ), 호론(17ㄴ), 호미(17ㄴ), 호모로(19ㄱ, 25ㄴ), 미츄미(20ㄱ), 모(20ㄴ, 22ㄱ), 주그믈(21ㄴ), (22ㄱ), 욕시믈(22ㄱ), 사(22ㄱ), 사로미(23ㄴ), 호믈(24ㄱ), 호미오(24ㄴ), 귀호미 님구미시며(25ㄱ), 가며로미(25ㄱ), 게(25ㄱ-ㄴ), 몰(25ㄴ), 믜게(27ㄱ), 믜(27ㄴ), 사미라(28ㄱ), 호미라(29ㄴ), 주미(29ㄴ), 가포미라(30ㄱ)

(11) 체언 말음이 ㅂ인 경우

집븨셔(3ㄴ, 4ㄱ), 집븨(4ㄴ, 6ㄱ), 겨집븨(4ㄴ, 5ㄴ, 6ㄱ), 겨집븐(5ㄴ, 6ㄱ), 겨집비(5ㄴ), 집블(5ㄴ, 15ㄴ, 27ㄴ), 쳡블(6ㄱ), 집비(6ㄴ), 법블(9ㄴ), 겨집비며(14ㄴ), 집븻(15ㄱ, 16ㄱ), 례법로(16ㄱ), 섭블(19ㄱ), 거붑블(29ㄴ), 거붑비러라(30ㄱ), 집븐(30ㄱ)

cf. 겨지븨게(6ㄴ), 지븨셔(8ㄱ), 지블(8ㄴ), 지븨셔(8ㄴ), 겨지븨(11ㄱ), 지브로(12ㄴ), 지븨(16ㄱ, 22ㄱ, 25ㄴ), 바(21ㄴ), 지비(24ㄱ, 25ㄱ), 지블(25ㄱ), 바비(25ㄱ)

(12) 체언 말음이 ㅅ인 경우

것시(15ㄴ), 것(16ㄱ)

cf. 거슬(2ㄱ, 13ㄱ, 21ㄴ, 29ㄴ), 거시로다(4ㄱ), 거시라(4ㄴ, 6ㄱ, 7ㄴ, 15ㄱ, 20ㄱ, 25ㄴ), 거슨(8ㄱ), 그르세(8ㄴ), 거싀게(15ㄴ), 거시(16ㄱ), 거슨(16ㄱ), 거싀(16ㄱ), 거로(16ㄱ), 귓거시라(20ㄱ), 타시라(21ㄴ, 22ㄱ), 거실(22ㄴ, 27ㄱ), 거시니(23ㄱ), 오(25ㄱ), 그르슬(25ㄱ), 딜어스로(25ㄱ), 거시(25ㄱ)

지금까지 체언 말음의 자음별로 중철의 예와 연철의 예를 망라하여 열거하였다. 전체적으로 중철 표기가 적극적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연철 표기 또한 그 세력이 유지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체언에 동일한 조사(助詞)가 연결된 형태에서 중철과 연철 표기가 공존하고 있음은 지금까지의 연철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는 움직임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해 있는 연철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음을 드러내 주는 이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6)~(12)의 예를 통해서 볼 때, 체언의 말음에 따라 중철과 연철의 비중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음을 보여 준다. 말음이 ㄱ, ㄴ, ㄹ, ㅂ인 경우처럼 중철 표기가 우세한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ㅁ, ㅅ의 경우처럼 연철 표기가 우세한 쪽이 있고, ㄷ의 경우처럼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운 곳도 있다. ㄷ말음의 경우는 ‘벋’[友]이라는 하나의 낱말에 국한되다시피 되어 있고 연철과 중철 표기의 분포에서도 ‘벋’은 거의 같이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ㅁ말음의 경우를 보자. 여기서는 연철의 빈도가 높게 나타났다. 그 배경에는 명사형 어미 ‘-옴/움’이 있었던 것이다. 용언의 명사형 다음에 모음의 조사가 올 때는 대부분 연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ㅁ말음의 경우에는 연철 표기가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말음 ㅂ의 경우에는 ‘집’[家]과 ‘겨집’[女]이라는 낱말에 집중되어 있다. ‘집’의 경우에는 중철과 연철의 비율이 거의 대등하나 ‘겨집’의 경우에는 중철 표기가 단연 앞선다. 끝으로 말음 ㅅ의 경우는 지금까지와는 그 사정이 판이하다. 여기서는 중철 표기가 단 2개만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마치 착오에 의한 돌출로 생각될 정도로 ㅅ말음에서 중철 표기는 불모지나 다름없어 보인다. 중철 표기로 ‘것시’와 ‘것’만이 등장하는데 ‘것’의 경우에도 연철 표기가 훨씬 많다. 그리고 ㅅ 말음의 예로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낱말이 의존 명사 ‘것’인데, 그 빈번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중철로 나타나는 예는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연철로만 표기되고 있어 중철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 밖에 중철 표기는 파생부사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13) 서늘리(2ㄱ), 지극기(3ㄴ), 급피(20ㄱ)

cf. 머리(遠, 14ㄴ-15ㄱ), 브즈러니(20ㄴ)

그리고 관형사형 어미 ‘-ㄴ, -ㄹ’ 다음에 의존 명사 ‘이’가 연결되는 경우에도 중철 표기가 나타나지만 연철 표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14) 잇 니(6ㄱ), 어딘 니(10ㄱ), 신 니(14ㄴ), 어딘 니란(14ㄴ), 내 닌(19ㄱ),  니(25ㄱ)

cf. 더 리(4ㄱ), 소박 리(6ㄱ),  니도(7ㄴ), 친 니 머 니(9ㄴ, 17ㄴ), 어디디 아니 니란(14ㄴ), 고디식 니 유신 니(15ㄱ),  리도(25ㄱ), 지 리도(25ㄱ), 시 리(25ㄱ), 가난 니(25ㄴ), 되 리(25ㄴ), 가난 니 가며 니(27ㄴ), 가난 (27ㄴ), 가며 니(28ㄱ),  니(29ㄴ)

유기음을 말음으로 갖고 있는 체언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때도 연철과 함께 중철 표기가 나타난다. 이 경우에는 용언 어간에 어미가 연결될 때도 중철 표기가 등장한다. 이때의 중철 표기는 유기음 자체를 두 번 반복해서 표기할 수는 없으므로 받침의 위치에는 8종성 중의 자음으로 교체하여 적고 있다.

(15) 받(22ㄴ, 24ㄱ), 받(23ㄴ), 갑포려(2ㄱ), 티(2ㄱ), 니(3ㄴ, 12ㄴ, 18ㄴ, 19ㄱ), 갑리오(17ㄱ), 여(22ㄱ)

cf. 바(12ㄴ, 24ㄱ), 무틔(29ㄴ), 니(1ㄴ), 티(5ㄴ), 가포미라(30ㄱ)

중철의 범주에 포함되는 표기로 다음의 예를 더 들 수 있다.

(16) 앗(弟, 4ㄱ), 빗(飾, 22ㄱ)

cf. 아(4ㄱ, 8ㄱ), 앗의(4ㄴ)

중철 표기의 예라 할 수 있는 ‘앗’는 좀 특이한 예에 속한다. 이 문헌과 같은 시대인 ≪이륜행실도≫에서도 볼 수 있는 예이다. 원래 ‘앗’의 명사 단독형은 중세 국어에서 ‘아’[弟]였다. 중세 국어에서 명사의 끝음절이 ‘/’인 ‘아’[弟], ‘여’[狐] 등은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에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으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가 각각 ‘’ ‘’으로 교체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에 조사 ‘-이, -, -,’ 등을 연결하면 각각 ‘이, , ,’ 등의 분철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 이들은 연철되어 ‘아, 아, 아’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16)에서도 ‘아’의 연철 형태인 ‘아’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이들 연철 형태는 다시 중철로 이어져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 중철의 모습은 ㅿ을 이중으로 적은 ‘’ ‘’과 같은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되면, 8종성법에 따라 종성으로 쓰일 수 없는 ㅿ이 받침의 자리에 오게 되어 8종성법의 제한을 어기는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ㅿ말음을 8종성 중의 ㅅ으로 교체하여 표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즉 ‘’ ‘’을 ‘앗’ ‘앗’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5세기 국어에 ‘이’이던 것이 16세기의 중철 표기로는 ‘앗’가 된 것이다. 한편 15세기의 분철 표기인 ‘의’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 의도로 보이는 ‘앗의’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문헌에는 ‘아’ ‘앗이’ ‘앗’의 세 가지 표기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 밖에 동사의 활용형 ‘빗’도 위와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문헌에 분철 표기는 없는가? 같은 시대 문헌인 ≪이륜행실도≫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일반적인 표기에서 중철과 연철 표기만 나타날 뿐, 분철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교수본≪정속 언해≫에는 분철이 등장하고 있다. 중철, 연철에는 미치지 못하나 분철은 분명하게 그 존재를 보여 주고 있다. 전체의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17) 긔의(氣脈, 4ㄱ), 사의(7ㄴ), 금을(金, 8ㄴ), 사애(10ㄱ), 밥을(10ㄱ), 깁을(絹, 10ㄱ), 식을(10ㄱ), 족을(族, 12ㄴ), 을(19ㄱ), 쥬역에(周易, 20ㄴ, 30ㄱ), 음덕으로(28ㄱ), 사름이(29ㄴ)

분철의 예로 든 낱말의 절반 이상이 이미 앞에서 보인 중철과 연철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사/사름’의 경우는 전체를 통해 수십 번 등장하는 낱말이다. 그 빈번한 사용은 모두 중철과 연철로 일관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17)에서 보듯이 세 번이나 분철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철 시대의 예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종성에서의 ㅅ과 ㄷ은 혼기(混記)함이 없이 잘 구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훈민정음 때의 질서가 이 문헌에서도 잘 지켜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意]을 ‘’으로 적거나 ‘옷’[衣]을 ‘옫’으로 적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예가 한 군데서 나타나고 있다.

(18) 벋디란 거슨 그 덕글 벗 삼니(友也者 友其德也)(14ㄱ)

위의 예문을 보면 한 문장 안에서 ‘벋’[友]을 ‘벗’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연한 질서를 허무는 표기임은 분명하나 이것이 착오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혼기의 발단을 보이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직 같은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종성의 ㄷ, ㅅ이 혼기되는 현상은 잘 볼 수 없다.

3. 모음 ‘ㆍ’의 혼란

‘ㆍ’ 모음의 소실(消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1단계는 제2음절 이하에서의 소실이고 2단계는 제1음절에서의 소실이다. 1단계 소실은 비어두(非語頭) 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일어난 것인데 이때는 ‘ㆍ’ 모음이 주로 ㅡ 모음으로 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1단계 ‘ㆍ’ 모음의 동요는 15세기에 이미 보이기 시작해서 16세기 후반에는 ‘ㆍ〉ㅡ’의 변화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2단계 ‘ㆍ’ 모음 소실은 1단계에서 제외되었던 어두(語頭) 음절의 ‘ㆍ’ 모음이 주로 ㅏ 모음으로 변한 것이다. 어두 음절에서 ‘ㆍ’ 모음이 동요하는 현상은 17세기 초에 일부 보이나 대체로는 18세기 후반에 와서 ‘ㆍ〉ㅏ’가 완성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정속 언해≫의 실태는 어떠한가? 위에서 소개한 결론에 의하면, 2단계인 어두에서의 ‘ㆍ’ 모음의 변화는 시기적으로 ≪정속 언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실제로 어두에서 ‘ㆍ’ 모음이 소실되었다는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5세기 국어에서 어두에 ‘ㆍ’ 모음을 갖고 있던 낱말이 이 문헌에 와서 ㅗ 모음으로 바뀐 사례가 발견된다.

(19) ㄱ. 논회여(9ㄴ), 논화(16ㄱ, 29ㄴ), cf. 호아(석보상절 19:6ㄱ)

ㄴ. 고(27ㄴ), cf. 올(법화경 언해 2:236ㄴ)

ㄷ. 호온자(13ㄴ), cf. 오(능엄경 언해 7:10ㄴ)

ㄹ. 도외면(6ㄴ), 도의여(8ㄱ), 도(18ㄴ), 되 리(25ㄴ), cf. 외리라(29ㄴ)

위의 4가지 경우는 어두에 쓰였던 ‘ㆍ’ 모음이 모두 ㅗ 모음으로 바뀐 형태만을 보여 주고 있으나 (19)ㄹ에서만은 ‘ㆍ’를 유지하고 있는 15세기의 형태가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19)의 사례만을 가지고 ‘ㆍ’가 어두에서 소실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것도 어두에서는 ‘ㆍ〉ㅏ’의 변화가 보편적인 현상인데 이에 해당하는 예는 하나도 없고 특이하게 ‘ㆍ〉ㅗ’의 변화만을 보여 주고 있는 상태에서 ‘ㆍ’ 모음의 소실을 언급하기는 어렵다. ‘ㆍ〉ㅗ’의 변화는 ‘ㆍ’ 다음의 ㅗ 모음에 동화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비어두 음절에서의 ‘ㆍ’ 모음은 ㅡ 모음으로의 변화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15세기에 제2음절 이하에서 ‘ㆍ’ 모음을 가지고 있던 낱말 중에 ‘ㆍ〉ㅡ’의 변화를 보여 주는 낱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낱말에서 ‘ㆍ’ 모음 유지형과 ㅡ 모음으로의 교체형이 대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일부에 국한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그것도 ‘사’[人]이라는 낱말에 집중되고 있다. 여기서 제2음절 이하에서의 ‘ㆍ’와 ㅡ의 혼란이라 하더라도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붙는 문법 형태에 개입된 매개 모음 ‘-/으-’는 제외한다. 한 예로 ‘녀름지리’(21ㄴ)와 ‘녀름지리’(21ㄴ)와 같은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20) ㄱ. 사(20ㄱ), 사미(2ㄴ, 4ㄱ, 8ㄱ, 11ㄱ, 15ㄴ, 15ㄴ, 22ㄱ, 26ㄴ), 사(4ㄱ), 사(22ㄱ), 사게(25ㄴ), 사(27ㄴ), 사(4ㄴ), 사미(6ㄱ, 10ㄱ, 11ㄱ, 17ㄴ, 20ㄱ, 27ㄴ, 28ㄱ), 사(9ㄴ, 23ㄱ), 사(22ㄱ), 사미라(28ㄱ), 사의(7ㄴ), 사애(10ㄱ)

cf. 사름(14ㄴ, 14ㄴ, 14ㄴ, 14ㄴ, 14ㄴ, 14ㄴ, 29ㄴ), 사름믜(1ㄱ, 2ㄴ, 5ㄴ, 16ㄴ, 29ㄱ, 29ㄱ, 29ㄴ, 29ㄴ, 29ㄴ, 29ㄴ, 29ㄴ), 사름미(4ㄴ, 23ㄴ, 26ㄴ, 27ㄴ, 28ㄴ, 29ㄱ, 29ㄱ, 29ㄱ, 29ㄴ, 29ㄴ), 사름믜게(4ㄴ, 17ㄴ), 사름미라(7ㄴ), 사름(14ㄴ, 30ㄱ), 사름믈(16ㄱ, 28ㄱ), 사름믄(28ㄱ)

ㄴ. 아와(8ㄴ), 이웃히(13ㄱ), 이웃히니(27ㄴ)

cf. 실들히(2ㄴ), 쳡들흔(6ㄱ), 손들(6ㄴ), 일들흘(8ㄱ), 들히(8ㄱ), 아들희게(8ㄴ), 들(15ㄱ), 손들히(28ㄱ)

ㄷ. 모(2ㄴ), 모라(8ㄴ), 모니(13ㄱ), 모(17ㄴ)

cf. 모로놋(6ㄱ), 모롤(28ㄱ)

위에서 보다시피 제2음절 이하에서 ‘ㆍ’가 동요를 일으킨 예는 ‘사/사름’과 복수 접미사 ‘-ㅎ/들ㅎ’ 그리고 동사 ‘모-/모로-’에 한한다. 모두 15세기에는 비어두에서 ‘ㆍ’ 모음으로만 쓰이던 말이 이때에 와서 ‘ㆍ’가 ㅡ나 ㅗ로 교체되는 동요 현상이 부쩍 늘게 되었다. 이 밖에 ‘니샤’(1ㄴ)와 ‘니르샤’(2ㄴ)가 혼용되고 있으나 이는 최초 한글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부터 쌍형으로 공존하였기에 ‘ㆍ〉ㅡ’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문법 범주는 서로 다르지만 양자 모두 ‘〉듸’의 변화를 보이고 있어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

(21) ㄱ. 닐오(3ㄴ, 4ㄱ, 6ㄴ, 7ㄴ, 8ㄴ, 13ㄱ-ㄴ, 15ㄱ, 19ㄱ, 30ㄱ), 닐우(8ㄴ, 10ㄱ, 11ㄴ, 20ㄱ, 20ㄴ, 29ㄴ)

cf. 닐우듸(4ㄴ, 27ㄴ, 28ㄱ)

ㄴ.  셔(3ㄱ)  (4ㄱ)

cf. 난 듸(3ㄱ) 긴 듸(14ㄴ) 됴 듸(18ㄱ) 가 듸(18ㄴ) 무들 듸(19ㄴ)

(21)ㄱ은 설명법 어미로서 15세기에는 ‘-’로만 나타났는데 이때에 와서 ‘-듸’로 교체된 형태가 등장하면서 두 형태가 함께 쓰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형태는 동일해도 문법 범주는 서로 다른, (21)ㄴ은 의존 명사 ‘’[處]인데 이것 역시 ‘듸’로 교체된 형태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어두에서 ‘ㆍ’ 모음 소실 이후로 설명법 어미 ‘-’는 ‘-되’로, 의존 명사 ‘’는 ‘듸’를 거쳐 ‘데’로 각각 변천 과정을 경험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어미 ‘-’가 ‘-되’로 되지 않고 ‘ㆍ〉ㅡ’에 따라 ‘-듸’로 변함으로써 의존 명사 ‘’가 ‘듸’로 변한 것과 결과적으로 같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미 ‘-’가 ‘-듸’의 형태로 교체되어 사용된 경우는 화법동사 ‘닐우듸’에 한하고 있음이 또한 특이한 점이다. 이 문헌에 ‘니샤/니르샤’가 무려 10회 이상 등장함에도 여기에는 ‘-〉듸’의 교체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동사에서도 어미 ‘-〉듸’의 교체는 볼 수 없다.

4. ㅎ종성의 소실

현대 국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ㅎ종성 체언이란 형태가 15세기 국어에 있다. 이들 체언은 ㅎ종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뒤에 조사가 연결되면 그 조사에 ㅎ이 첨가된다. 단, 휴지(休止)나 사이시옷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ㅎ종성 체언에는 비록 체언은 아니지만 복수 접미사 ‘-ㅎ’도 ㅎ말음을 갖고 있어 이에 포함해서 다룬다. ㅎ종성은 이미 15세기에 일부 낱말에서 탈락형이 등장하여 유지형과 함께 쓰인 일이 있으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은 16세기에도 ㅎ종성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 ≪정속 언해≫에도 ㅎ종성 체언의 ㅎ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15세기에 이미 ㅎ탈락을 보였던 ‘하ㅎ’에서 ㅎ탈락형이 ㅎ유지형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22) 하와(1ㄴ), 하래(4ㄱ), 하리(20ㄴ, 27ㄴ), 하와 로(5ㄴ), 아와(8ㄴ)

cf. 하히(2ㄴ, 10ㄱ, 27ㄴ), 하희(4ㄱ), 하해(26ㄱ), (8ㄱ), 쳡들흔(6ㄱ), 이웃히니(27ㄴ), 일들흘(8ㄱ), 들히(8ㄱ), 손들히(28ㄱ), 안히(5ㄴ), 들헤(12ㄴ), (27ㄴ), 한나해(14ㄴ), 님자(22ㄴ), 나라히(19ㄱ), 우흐로(23ㄴ), 모밀히(28ㄱ)

위에서 든 ㅎ탈락의 예 중에 ‘하와 로’는 ‘하’과 ‘’ 모두 ㅎ종성 체언인데도 둘 다 ㅎ이 탈락된 표기를 하고 있다. ㅎ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하와 로’는 ‘하콰 로’와 같이 표기되었을 것이다.

5. 자음 동화의 표기

자음이 연접될 때 일어나는 동화 현상은 일반적으로 표기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몇 군데에서 자음 동화가 일어난 대로 표기한 예들이 발견된다.

(23) ㄱ. 니기를 브즈러니 면(21ㄴ),

cf. 거즛 괴이 말리 만히 나니며(20ㄱ)

ㄴ. 벼슬 로픈 지븨셔(8ㄴ), cf. 손들히 노픈 급뎨 호미라(28ㄱ)

ㄷ. 쳐셕긔 입힐호모로 불로여(因妻子脣吻而至忿爭)(13ㄱ)

아 불로호매(一朝之忿)(26ㄱ)

불로의 니러나미(忿爭之起)(26ㄱ-ㄴ)

즉재 불로 내며(卽生忿恨)(26ㄴ)

cf. 忿 노 분(신증 유합 하:35ㄱ), 怒 로 로(신증 유합 하:3ㄱ)

ㄹ. 실들히 돕디 아니여(神明所不祐)(2ㄴ)

cf. 靈 : 신(神靈) (훈몽자회, 중:17ㄱ)

ㅁ. 어버이 빗 내요미 다 글 호모로브터 터 잠 거시니(以顯父母 皆由學以基之也)(8ㄱ)

(23)ㄱ에 나타난 ‘니-’는 ‘니-’의 ㄷ받침이 ㄴ 앞에서 ㄴ으로 동화된 것을 표기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화 작용을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니-’의 예도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니-’의 표기는 이미 15세기 문헌에서 ‘니-’와 함께 혼용되었고, 이와 같이 15세기에 혼용된 예로 ‘걷너-’와 ‘건너-’가 또 있다. (23)ㄴ의 경우는 ‘노픈’[高]의 두음 ㄴ이 ‘벼슬’의 말음 ㄹ에 동화되어 ㄹ로 소리 나는 것을 그대로 나타낸 표기가 ‘벼슬 로픈’이다. (23)ㄷ의 ‘불로’도 ‘ㄴ〉ㄹ’의 동화 작용을 반영한 표기이다. ≪정속 언해≫의 언해문에는 한자어라도 한자를 전연 병기(倂記)하지 않고 한글로만 기록하고 있는데 ‘불로’는 ‘忿怒’의 표기로 보인다. ≪신증 유합≫(1576)에 의하면 ‘忿怒’의 독음은 ‘분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헌에 ‘분로’로 표기된 곳은 하나도 없고, 모두 ‘ㄴ〉ㄹ’의 동화 현상을 반영한 ‘불로’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불로’도 앞의 ‘벼슬 노픈’에서와 같이 ㄹ의 영향으로 ㄴ이 ㄹ로 동화된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지만 ‘벼슬 로픈’ 의 동화 현상은 순행동화이고 ‘불로’에 나타난 동화는 역행동화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3)ㄹ의 ‘실’도 ‘불로’에서와 마찬가지다. 한자어 ‘神靈’을 ≪훈몽자회≫(1527)에 나타난 대로 ‘신’으로 적지 않고, ㄴ이 바로 뒤의 ㄹ에 동화되어 ‘ㄴ〉ㄹ’로 된 것을 그대로 반영하여 ‘실’으로 표기한 것이다. 끝으로 (23)ㅁ의 ‘잠’도 ‘잡’의 동화 작용에 의한 표기이다. ㅂ이 ㄴ 앞에서 ㅁ으로 비음화한 현상을 이처럼 표기에 나타낸 예는 좀처럼 볼 수 없는데 여기서 드물게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홍윤표 교수는 ‘삼’의 오기(誤記)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주003)

홍윤표. ≪정속언해≫ 해제(1984) 7쪽. 홍문각.

6. 그 밖의 혼용 현상

이 교수본 ≪정속 언해≫에는 같은 낱말이면서도 어형이 서로 다른 것이 공존하는 경우들을 제법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신구(新舊)형이 함께 쓰임으로써 그렇게 된 것도 있고, 더러는 음운 규칙의 수의적인 적용에 따라 이표기(異表記)가 형성된 것도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예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로, 신구형이 공존하는 예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24) ㄱ.  집븨셔 칼 가지고 사화(4ㄱ-ㄴ), cf. 갈  갓고로 자밧고(16ㄱ)

ㄴ. 어엿비 녀겨 리 져그니라(11ㄱ)

지븨 편안히 이쇼 됴히 녀기면(16ㄱ)

cf. 새 아므런 히 너겨 호(11ㄱ)

어엿비 너긴  가져셔(27ㄴ)

어두 자음의 유기음화가 낱말에 따라서는 15세기에 일어난 것도 있고 16세기에 들어서 경험하는 낱말도 있다. (24)ㄱ을 보면 유기음화한 ‘칼’이 등장하는가 하면 유기음화 이전의 ‘갈’도 함께 쓰이고 있다. 유기음화한 신형과 함께 유기음화 이전의 구형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하여 동일한 낱말이 한 문헌 안에서 상이한 표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기음화에 관련된 낱말을 이 문헌에서 더 찾아보면 ‘고’[鼻](2ㄴ)가 유기음화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고, 15세기의 ‘닷’[由]은 2회 등장하는데 모두 유기음화한 ‘탓’(21ㄴ, 22ㄱ)으로만 나타난다. 다음으로 (24)ㄴ의 동사 ‘녀기-’도 15세기에는 ‘너기-’로만 등장한다. ‘너기-’는 16세기 이후 선행 음절의 모음 ə에 반모음 j가 첨가되어 이중 모음 jə가 됨으로써 ‘녀기-’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녀기-’로 쓰이다가 두음 규칙에 따라 현대 국어의 ‘여기-’가 되었다. 그런데 (24)ㄴ에는 j가 첨가된 신형 ‘녀기-’도 쓰였지만 j 첨가 이전의 ‘너기-’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어 신구 공존으로 인한 혼용이 드러나고 있다. 이 문헌에는 신형 ‘녀기-’보다 구형인 ‘너기-’가 더 우세한 편이다.

둘째는 동일한 낱말임에도 음운 규칙을 적용하고 안 하고에 따라 상이한 어형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25) ㄱ. 올 훼 나랏 사 칠 거시니(4ㄴ)

남진겨집비 이신 훼 어버 식기 이시리니(5ㄴ)

처믜 면 디난 훼  환니라(26ㄴ)

cf. 세  후에 어버 품물 나니(1ㄴ)

지블 업게  후에 말며(8ㄴ)

ㄴ. 어버이 편안티 아니면 손니 사오내 도(18ㄴ)

cf. 오 사오나이 리도 겨시며(25ㄱ)

ㄷ. 버들 삼가아 사괴라(13ㄴ),

 예 어든 거시 수이 라아(25ㄱ)

cf. 이 버들 삼가 사괼 일리라(14ㄴ)

모 삼가 존졀야  부모 효양호미(22ㄱ)

ㄹ. 제 짓 울흘(4ㄴ)

 짓 안히(5ㄴ)

 짓 홀 이리(25ㄱ)

cf. 집 아븨게(6ㄴ)

ㅁ. 에 서르 에엿비 너기며(4ㄱ)

cf. 어믜녁 아란 어엿비 녀겨(11ㄱ)

어엿비 너긴  가져셔(27ㄴ)

위의 (25)ㄱ에서는 ‘후에’를 축약하여 ‘훼’로 나타내기도 하고 축약하지 않은 ‘후에’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축약을 적용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함에 따라 ‘훼’와 ‘후에’로 달라진 것이다. 그 다음에 있는 (25)ㄴ의 ‘사오내’도 ‘훼’와 똑같은 경우이다. ‘사오납-’의 파생 부사인 ‘사오나이’의 축약형이 ‘사오내’이기 때문이다. 축약하면 ‘사오내’의 형태가 되고 축약하지 않으면 ‘사오나이’인 것이다. 축약 여부에 따라 ‘사오내’가 되었다가 ‘사오나이’로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사오내’의 형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어형이다. (25)ㄷ은 용언의 어간 말음이 ㅏ/ㅓ 모음일 경우에 연결 어미 ‘-아/어’가 연결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때는 연결 어미 ‘-아/어’가 생략된다. 그럼에도 (25)ㄷ의 용언 ‘삼가-’와 ‘라-’는 어간 말음이 ㅏ 모음임에도 그 뒤에 연결 어미 ‘-아’를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연결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어미 ‘-아’가 생략된 형태도 함께 사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동일한 용언의 활용형이 ‘삼가아’와 ‘삼가’의 두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사이ㅅ은 ㅂ 받침 명사에 붙어 쓰이기도 하였는데 그 대상은 ‘집’[家]이라는 명사가 유일한 것이었다. ‘집’ 다음에 명사가 연결되어 사이ㅅ이 붙으면 ‘짒’이 되어야겠지만 ‘짒’으로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고 ㅂ이 탈락된 ‘짓’으로 15세기부터 꾸준히 쓰이고 있다. 이 문헌에서도 ‘짓’은 (25)ㄹ에서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집 아븨게’와 같이 사이ㅅ으로 인한 ㅂ탈락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어 ‘집’과 ‘짓’의 서로 다른 형태가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25)ㅁ의 ‘어엿비’는 15세기부터 사용되던 형태이다. 그러다가 둘째 음절의 모음 jə에 영향을 입어 첫 음절의 모음 ə가 əj로 동화됨으로 인해 ‘에엿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어엿비’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 (25)에서 논의한 것 중에 ‘훼’와 ‘후에’, ‘짓’과 ‘집’, ‘에엿비’와 ‘어엿비’ 등에서 전자의 변이형들은 이 교수본 ≪정속언해≫와 같은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예들이다.

셋째는 음운 현상과는 별 관계 없어 보이는 이형(異形)들이 이 문헌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경우들이다.

(26) ㄱ. 질박니런 녀름지이고 혬 잘리런 이고 교 잇니런 을 욜디니(8ㄱ)

그위런 여위우고 아름뎌런 지우미(16ㄱ)

cf. 겨지븨 녁 새 아므런 히 너겨 호 어믜 녁 아란 어엿비 너겨(11ㄱ)

ㄴ. 시혹 보로 서르 섯거셔 사화 그위며(13ㄱ)

내애 그위여 옥개 드러 셰간 배아고(26ㄴ)

cf. 술지븨 가 노녀 구의 닐와다 믈 후려(22ㄱ)

ㄷ. 셕긔(1ㄴ), 셕글(7ㄴ), 셔기며(8ㄱ), 셔글(8ㄴ), 셕기며(14ㄴ)

쳐셕긔(13ㄱ)

cf. 식기(1ㄴ, 5ㄴ, 29ㄴ), 식긔(2ㄱ, 8ㄴ), 식(6ㄴ), 시글(9ㄴ), 쳐식긔(8ㄴ), 쳐식 (22ㄱ), 쳐식글(23ㄴ)

ㄹ. 곡셔글(21ㄴ)

cf. 곡식글(23ㄴ, 27ㄴ), 곡식로(27ㄴ)

ㅁ. 굴애 업드러 잇니(顚擠溝壑者)(29ㄴ)

cf. 굴에 구으럼 죽니(轉死於溝壑)(22ㄱ)

ㅂ. 올 슈귀(今年之苦)(23ㄴ)

어우리의 슈구 혜여(亦當佃之勤勞)(23ㄴ)

  슈구여 뷔욘 벼로(終歲之勤勞刈穫之稻禾)(23ㄴ)

cf. 됴 이려 슈고로온 이려(甘苦)(6ㄱ)

ㅅ. 거쳔여 태웃 벼슬를 이니라(擧於下軍大夫)(6ㄱ)

cf. 내 두로 닐어 쳔거호미(我則揄揚而薦擧之)(29ㄱ)

15세기 국어에서 보조사로 쓰인 ‘-()란’이 (26)ㄱ에서는 모음이 교체된 ‘-(으)런’으로 나타난다. ‘-런’은 15세기 때 ≪두시 언해≫에 한 번 나올 정도로 드물게 쓰이는 것이나 16세기 초 문헌에선 제법 등장하는 형태인데 이 문헌에서도 (26)ㄱ에서와 같이 쓰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의 ‘-()란’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 (26)ㄴ의 ‘그위’은 송사(訟事)를 뜻하는 말인데, 이와는 좀 다른 ‘구의’의 형태가 같은 문헌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위’와 ‘구의’는 ㅡ모음과 ㅜ모음 사이에 음운도치가 일어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6)ㄷ,ㄹ에 나오는 ‘셕’과 ‘곡셕’은 ‘식’과 ‘곡식’의 변이형들이다. 이 변이형들이 어떻게 해서 쓰이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셕, 곡셕’은 짐작건대 경상도 지역의 방언형이 간섭하게 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셕’은 위에 나타난 대로 ‘식’과 거의 대등하게 쓰이고 있다. (26)ㅁ은 15세기에 쓰인 ‘굴’형이 이 문헌에 존속하면서 한 쪽에선 ‘굴’의 변이형이 등장하였다. ㅏ ㅓ의 대립 모음 사이에 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예가 (26)ㅂ의 ‘슈구’와 ‘슈고’이다. 이것 역시 ㅗ와 ㅜ의 대립 모음 사이에 교체가 일어난 경우이다. 이는 15세기에 ‘受苦’로 표기되다가 주004)

15세기에도 한글로 ‘슈고’라고 표기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슬픈  머거셔 슈고로이 뇨 니노라”(含悽話苦辛)(초간 두시언해, 20:27ㄴ)
16세기에 한글 표기가 되면서 ‘슈고’와 ‘슈구’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에선 ‘슈구’형이 우세하다. (26)ㅅ의 예는 좀 특이하다. 한자어에서 나타난 음절도치의 예이다. 옛글에서도 우리에게 익어 있는 낱말은 ‘쳔거’(薦擧)이다. 그런데 ‘쳔거’와 함께 도치형인 ‘거쳔’(擧薦)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 형태 사이에 뜻이나 용법의 차이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7. 삽입 모음 ‘-오/우-’의 동요

근대 국어나 현대 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중세 국어의 특징으로서 어말 어미 앞에 첨가되는 삽입 모음 ‘-오/우-’가 있다. 문법적으로는 의도법의 선어말 어미라고 하는데 그 기능은 화자의 강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삽입 모음이 관형사형 어미와 결합하면 그 뒤에 오는 낱말이 관형사형으로 쓰인 동사의 목적어임을 나타내고, 그 밖의 어미와 결합하면 1인칭 주어에 호응됨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어말 어미 중에는 이 삽입 모음을 반드시 그 앞에 수반하는 어미가 있고, 때로는 수반하기도 하고 수반하지 않기도 하는 어미가 있다. 어미 중에서 명사형 어미 ‘-ㅁ’, 설명법 어미 ‘-’ 의도법의 어미 ‘-려’ 등은 언제나 삽입모음을 그 앞에 수반하고 있으며 이 밖의 어미들은 삽입 모음의 첨가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삽입 모음은 근대 국어에까지 그 자취가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동요의 시작은 이미 15세기부터였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는 삽입모음의 실태가 어떤가 하는 것을 삽입 모음 첨가가 필수적인 설명법 어미 ‘-’와 명사형 어미 ‘-ㅁ’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체적으로는 삽입 모음의 첨가에 큰 변동은 없어 보인다. 다만 몇 군데에서 삽입 모음이 삭제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전체를 통해 설명법 어미에서는 한 곳이지만 명사형 어미에서는 열 곳에서 삽입 모음이 첨가되지 않고 있다.

(27) ㄱ. 그믈 앗 아니 지리도 겨시며(25ㄱ)

ㄴ. 뎨예 올면 어버 깃거밀(4ㄴ)

갓 치모로 좃디 아니가 샤(11ㄴ)

다 귀신들 아여 손 이바 간댄 거시라(19ㄴ)

사오나온 예도 주그믈 면니(21ㄴ)

사미 어버 치 좃디 아니고(22ㄱ)

쳐식 치 도라보디 아니여(22ㄱ)

조려  몸 가죨 근본닐(24ㄱ)

노호 이를 (25ㄴ)

노 몰 버거 노라(25ㄴ)

의 주우리믈 구호려 코(27ㄴ)

cf. 식 손들 춈(6ㄴ)

엇뎨 처엄믜 져근덛 몸만 리오(26ㄴ)

위에서 볼 때 설명법 어미에서보다는 명사형 어미에서 동요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7)ㄱ,ㄴ에 쓰인 명사형 어미에 삽입 모음이 첨가되었다면 다음의 오른쪽에 있는 어형이 되었을 것이다.

(28) ㄱ. 앗 → 앗

ㄴ. 깃거밀 → 깃거호밀

치모로 → 쵸모로

이바 → 이바도

주그믈 → 주구믈

치 → 쵸

치 → 쵸

 → 

 → 몸

몰 → 모몰

주우리믈 → 주우류믈

8. 구결(口訣)

≪정속언해≫에는 한문 원문의 구절마다 차자 표기(借字表記)로 된 구결을 달아놓았다. 차자 표기라 함은 한문 구절마다 기입해 넣은 우리말의 토(吐), 즉 구결(입겾)을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한자의 음(音)과 석(釋)을 차용해다가 표기하던 방식이다. 한 예로 ‘爲古’로 표기된 구결이 있는데, 이는 우리말의 ‘고’를 표기한 것이다. 그것은 ‘爲’를 이 한자의 석(釋)으로 읽어 ‘’가 된 것이고, ‘古’는 이 한자의 음(音)으로 읽어 ‘고’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爲’는 석독자(釋讀字)로 차용된 한자이고 ‘古’는 음독자(音讀字)로 차용된 한자이다. 이 문헌에서는 구결로 쓰인 한자를 모두 정자(正字)로 표기하였지만 과거 한글 창제 이전의 문헌에 기입된 구결은 모두 약체자(略體字)로 표기하였다. ‘爲古’를 과거의 약체자로 쓰면 ‘’와 같이 표기하였다. 그러나 이 차자 방식은 한글 창제 이후로는 한글로 구결을 다는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선 이 차자 표기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한글 문헌에서도 차자 표기로 된 구결을 달고 있는 문헌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문헌으로 ≪여씨향약 언해≫(1518), ≪정속 언해≫, ≪경민편≫(151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문헌에는 한문의 구절마다 차자 표기의 구결이 달려 있다. 이제 ≪정속 언해≫에 나타난 구결의 차자 표기를 제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29) 古 : 고/인고 隱 : 은/는 巨伊爲時尼 : 게 시니 尼 : 니/이니

尼羅 :니라/이니라 羅 : 라/이라 羅爲古 : 라 고 羅沙 : 라/이라

奴 : 로/으로 奴隱 : 론/로는 奴多 : 로다/이로다 奴代 : 로/이로

里五 : 리오/이리오 里奴多 : 리로다 面 : 면/이면 里尼 : 리니/이리니

舍叱多 : 셔터 阿 : 아 阿爲時尼 : 아 시니 於乙 : 어늘

於尼臥 : 어니와 厓 : 에 於時等 : 어시든 厓隱 : 에는

厓沙 : 에 余伊 : 예 五 : 오/이오 臥/果 : 와/과

乙 : 을/를 乙奴 : 으로 乙可爲舍 : ㄹ 샤 矣 : 의

亦 : 이 伊 : 이 伊羅 : 이라 伊羅豆 : 이라도

伊溫 : 이온 伊隱大 : 인대 伊於等 : 이어든 伊於時等: 이어시든

伊舍豆 : 이샤도 伊那 : 이나 伊面 : 이면 伊㫆 : 이며

伊里羅 : 이리라 伊尼 : 이니 伊羅爲時古 : 이라 시고

伊羅爲古 : 이라 고 伊羅爲尼 : 이라 니 伊羅爲豆多 : 이라 도다

伊羅爲時尼羅 : 이라 시니라 伊羅爲時多 : 이라 시다 伊羅爲多 : 이라 다

伊五 : 이오 伊於尼臥 : 이어니와 伊五隱 : 이온 伊舍多爲尼 : 이샷다 니

底爲時尼 : 져 시니 爲時古 : 시고 爲古 : 고 爲尼 : 니 爲時尼 : 시니

爲㫆 : 며 爲時旀 : 시며 爲面 : 면 爲也 : 야

爲尼羅 : 니라 爲里尼: 리니 爲里羅 : 리라 爲時飛尼: 시나니

爲飛尼 : 나니 爲舍 : 샤 爲隱地 : 디 乎尼 : 호니

乎里尼 : 호리니 乎大 : 호 乎隱代 : 혼대 乎未 : 호미

위에서 석독자로 쓰인 한자는 爲[], 飛[나]의 두 자뿐이고 그 외에는 모두 음독자로 쓰였다.

그리고 이 문헌에는 언해문에 방점이 일일이 붙어 있다. 그러나 영인본을 가지고는 방점의 실태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제한이 있어 방점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9. 어휘

이원주 교수본 ≪정속 언해≫에는 현재까지 간행된 옛말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어휘가 제법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런 어휘를 제시하려 한다. 그 의미도 함께 제시하려 하지만 이들 어휘에 대한 다른 용례가 없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서 한문 원문과 문맥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한 그 의미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헌의 언해문에는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생소한 한자어도 그대로 한글로만 표기함으로써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문헌 20ㄱ에 ‘식니’라는 낱말이 등장하지만 옛말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고 하여 의미 파악이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한문 원문과 중간본을 바탕으로 검토한 결과 ‘識理’를 표기한 낱말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15ㄴ에 ‘간쇄’라는 낱말이 나타나는데 이 낱말도 ‘奸邪’의 한글 표기임을 중간본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자어기 많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비록 옛말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더라도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단, 본래의 한자음과 현저히 달라져 있다고 판단되는 한자어는 대상에 넣어 다룰 것이다.

ㄱ. 그치왇-

아미 어딘니 잇거든 그치와다 믜여며(族有善良則摧抑而疾瘧之)(10ㄱ)

cf. 권당이 착고 어딘 일 이신즉 것디러 눌오며 무이 녀겨 보채고(族有善良則摧抑而疾瘧之)(일사본, 16ㄴ)

‘그치왇-’은 ‘그치-’[斷]라는 동사 어간에, 강세 접미사 ‘--’에 기원하는 ‘-왇-’이 연결된 동사이다. 한문 원문에 ‘摧抑’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치왇-’의 뜻은 상대편의 힘을 꺾어서 누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사본〉의 언해문을 보면 ‘摧抑’의 뜻 그대로 번역을 하고 있다

ㄴ. 기리

기리 쟈기 바며(貸穀以輕其息)(23ㄴ)

cf. 그 니식을 젹게 고(貸穀以輕其息)(일사본, 39ㄱ-ㄴ)

여기서 ‘기리’는 한문 원문과 〈일사본〉의 언해문을 통해서 이식(利息)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ㄷ. 날독

바 셰 날독 바돔(收田租)(22ㄱ)

받 셰 바도(收田租)(22ㄴ)

cf. 밧 소츌 거도기(收田租)(일사본, 38ㄴ)

受田租(수전조)를 “바 셰 날독 바돔”으로 번역하여 ‘날독’이란 낱말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주제 설명 중에 쓰인 收田租에 대해서는 “받 셰 바돔”으로 번역하여 ‘날독’이 빠져 있다. 그리고 〈일사본〉에서는 收田租를 두고 번역하기를 “밧 소츌 거도기”라고 하여 역시 ‘날독’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날독’에 특별한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나 ‘날독’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밝혀 둔다.

ㄹ. 납-

 지븨 부히 도외요미 일로 니러나리니 엇디 납디 아니료(一家之泰由此而興矣)(25ㄴ)

cf.  집 편안코 크기 일로븟터 니러나리니 엇디 즐겁디 아니리오(一家之泰由此而興矣)(일사본, 43ㄱ)

그 의미는 한문 원문에 ‘樂’(낙)으로 되어 있는데다 〈일사본〉에서 ‘즐겁디’로 번역하고 있어 이에 근거하여 ‘즐겁-’으로 풀이하였다. 혹시 ‘낙-’[樂]의 오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ㅁ. 녁셔-

뎨 집븨셔 사호고도 밧긔 간 녁셔니라(兄弟䦧于墻 外禦其侮)(3ㄴ)

cf. 형과 아이 담 안셔 화 사오나이 구나 밧그로 그 환을 동심야 막다 야시니(兄弟䦧于墻 外禦其侮)(일사본, 3ㄴ)

‘녁셔-’는 ‘녁’[便]이라는 명사에 동사 ‘셔-’[立]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그 뜻도 ‘한 쪽 편에 서다’란 뜻이 될 것이다. 후대의 것이긴 하지마는 ‘녁셔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녁들다’가 있어 참고가 된다. “뎌를 녁드다, 向他”(역어유해 하:43).

ㅂ. 님신

쇽졀업슨 님신 이바디 말라(遠滛祀)(19ㄱ)

님신 이받노라(迎神)(20ㄴ)

cf. 귀신을 맛노라(迎神)(일사본, 35ㄴ)

〈이 교수본〉에서는 ‘神’을 ‘님신’이라 하였고, 〈일사본〉에서는 ‘귀신’으로 번역하였다. 이로써 ‘님신’은 ‘귀신’과 같은 뜻의 말임을 알 수 있으나 ‘님신’의 ‘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ㅅ. 마되

볘 닉거든 마되 히 여(禾旣熟也 平斛)(23ㄴ)

cf. 나디 임의 니그매 말을 공평히 되야(禾旣熟也 平斛)(일사본, 39ㄴ)

이는 말[斗]과 되[升]의 합성어이다. 합성어가 되면서 ‘말’의 받침 ㄹ이 ㄷ 앞에서 탈락하는 규칙에 따라 ‘말되’가 ‘마되’로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로 ‘날’[日]과 ‘’[月]이 결합하여 된 합성어 ‘나’을 들 수 있다. “나리 길어다”(日月長) (초간 두시 언해 15:23ㄱ)

ㅇ. -

도 무(結會社)(20ㄱ)

도 무(結社)(20ㄴ)

cf. 모히 샤단을 글아(結會社)(일사본, 33ㄴ)

샤단을 자(結社)(일사본, 35ㄴ)

동사 ‘-’은 ‘結’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일사본〉에서 ‘글-’과 ‘-’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은 ‘조직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임이 분명하다.

ㅈ. 브리-

하리 도오시니 됴코 브리 이리 업도다(自天佑之 吉無不利)(20ㄴ)

cf. 하로붓터 돕디라 길야 니티 아님이 업다 도다(自天佑之 吉無不利)(일사본, 34ㄱ)

그 죄 브효만 크니 업스니라(而罪莫大於不孝也)(2ㄴ)

그 어미를 브효디오(不孝其母)(11ㄴ)

‘브리’는 한자어 ‘不利’를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不’은 당시의 음이 ‘블’인데도 한자어에서는 ‘브’로 나타내고 있다.≪이륜행실도≫에서는 ‘不得已’를 ‘브듸이’(21ㄴ)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때는 ‘블’의 ㄹ을 탈락시킨 표기가 맞다. 그러나 ≪정속 언해≫에는 음운적으로 ㄹ탈락이 일어날 경우가 아님에도 ‘브’로 표기한 예로서 ‘브리’ 외에도 ‘브효’(不孝)를 더 들 수 있다.

ㅊ. 빈잔히

사름 손니 오래 빈잔히 도요미(人家子孫 所以長受貧賤者)(30ㄱ)

cf. 사의 집 손이  기리 간난고 쳔기 맛 밧 쟈(人家子孫 所以長受貧賤者)(일사본, 51ㄱ)

한자어 ‘貧賤’의 한글 표기가 ‘빈쳔’이 아니고 ‘빈잔’으로 나타나 있다. 혹시 ‘賤’자를 ‘殘’자로 잘못 보고 ‘빈잔’으로 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ㅋ. 슈반

제 겨집비 슈반 머교(其妻饁之)(5ㄴ)

cf. 제 지어미 가 밥 먹이되(其妻饁之)(일사본, 9ㄱ)

〈이 교수본〉은 5ㄴ의 10행 상단 부분이 분명치 않아 이 구절을 판독하기가 어려웠으나 이 판본과 거의 같은 류탁일(柳鐸一) 교수의 소장본(태학사 영인본)을 참고하여 이 구절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면 ‘슈반’은 무슨 뜻인가? ‘슈반’을 나타내는 한자가 원문에 ‘饁’(엽 : 들점심 먹이다)자로 되어 있는 데다 〈일사본〉에서는 ‘슈반’ 대신 ‘밥’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식사에 해당하는 말로 보인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남편이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데 점심 때가 되므로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해서 남편에게 가져 간 장면이다. 그러므로 ‘슈반’은 들에서 먹는 점심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쇼반’(小盤)하고 관련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ㅌ. 엿굽-

미 가 엿구워(以致情意乖離)(13ㄱ)

cf.  디 의여 벙을며(以致情意乖離)(일사본, 21ㄴ-22ㄱ)

한문 원문에는 ‘엿구워’를 ‘乖離’(괴리)로 나타내고 있고, 일사본에서는 “어긔여 벙을며”로 번역하고 있어 ‘엿구워’의 뜻이 어그러져서 동떨어짐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ㅍ. 지여

지여  집븨셔 칼 가지고 사화 골육글 소박니(至有同室操戈 疎薄骨肉)(4ㄱ~ㄴ)

cf.  집안 장기를 잡고 서 화 골육이 성긔여 사오나오미 잇기예 니리니(至有同室操戈 疎薄骨肉)(일사본, 6ㄴ)

한문 원문의 ‘至’를 ‘지여’로 번역한 데 비해 〈일사본〉에서는 ‘니리니’로 번역하였다. ‘지여’는 한자어 ‘至於’를 말하는데 이는 ‘甚至於’(심지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지여’는 ‘심지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ㅎ. 히

셰가니 그츨 주리 잇곤 히 샤치야 흣이를 혜디 아니려(財産有窮盡而可以僭肆侈靡 不顧其後也哉)(25ㄱ)

cf. 믈과 셰 궁진홈이 잇거든 가히  남히 샤치와 곱기를 지 야 그 후일을 두러보디 아니야(財産有窮盡而可以僭肆侈靡 不顧其後也哉)(일사본, 42ㄱ)

한문 원문의 ‘僭’(참)을 ‘히’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면 ‘히’는 무슨 뜻으로 쓰인 말인가? 이는 〈일사본〉의 번역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일사본〉에는 ‘남히’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현대어의 ‘참람(僭濫)히’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참람히’는 ‘참람하다’의 파생 부사로서,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게’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ㅏ. 도

도 무(結會社)(20ㄱ)

도 무(結社)(20ㄴ)

cf. 모히 샤단을 글아(結會社)(일사본, 33ㄴ)

샤단을 자(結社)(일사본, 35ㄴ)

한문 원문에 나오는 “結會社”와 “結社”를 모두 “도 무”로 언해하고 있는데 여기에 쓰인 동사 ‘-’에 대해서는 앞의 ㅇ항에서 이미 다룬 바 있기에 이제 그 앞의 명사 ‘도’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일사본〉에는 “結會社”와 “結社”를 각각 “모히 샤단을 글아”와 “샤단을 자”로 번역하여 이전 판본의 ‘도’를 모두 ‘샤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나 ‘샤단’ 모두 社(사)를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結社(결사)라 하면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말하므로 ‘도’도 무리들로 이루어진 조직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참고 문헌〉

김동소(2007). ≪한국어의 역사≫. 정림사.

김훈식(1985). 16세기 「이륜행실도」보급의 사회사적 고찰. ≪역사학보≫107집. 역사학회.

서재극(1976). ≪정속언해≫의 어휘. ≪한국어문논총≫(우촌 강복수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형설출판사.

송순미(2000). ≪정속언해≫의 조어법 연구.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 석사 논문.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지성사.

이기문(1978). ≪16세기 국어의 연구≫. 탑출판사.

홍윤표(1984). ≪정속언해≫ 해제. ≪정속언해≫(영인본). 홍문각.

주001)
<풀이>홍윤표 교수의 ≪정속언해≫ 해제(1984)에서는 “사미 린 나”(4ㄱ)의 문례를 들어 ㆁ이 초성에 쓰인 용례로 보고 있으나 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이 부분은 “사 일린 나”로 판독되는 구절이다.
주002)
<풀이>이원주 교수본 ≪정속언해≫에 어두자음군 ㅴ이 쓰인 용례로서 9ㄴ의 ‘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영인본에는 그 부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일’라고 본 것은 이 판본의 표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후대의 규장각본에서 ‘명일’로 되어 있는 데에 근거하였다.
주003)
홍윤표. ≪정속언해≫ 해제(1984) 7쪽. 홍문각.
주004)
15세기에도 한글로 ‘슈고’라고 표기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슬픈  머거셔 슈고로이 뇨 니노라”(含悽話苦辛)(초간 두시언해, 20:27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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