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효경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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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효경언해
역주 효경언해

『효경언해(孝經諺解)』는 조선 선조 때 임금의 명을 받아 홍문관에서 『효경대의(孝經大義)』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경진자본 1책으로 간기가 없으나 내사기에 따라 선조 23년(1590)에, 당시 교정청에서 추진한 사서 언해 사업의 일환으로 간행된 것으로 본다. 발문은 유성룡이 선조 22년(1589) 6월에 썼다. 『효경대의』의 원문에 한자 독음을 달고 한글 구결을 매긴 뒤, 한 자 내려 언해문을 이어붙였는데, 언해문에 나오는 한자에도 한글 독음을 달았다.

정호완

문학박사 시조인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삼국유사사업위원회 대표
삼성현연구소 대표
삼국유사문인협회대표
한국문인협회
민조시 천료
문학세계 신인상
시조문학 작가상
경상북도 문화상

『우리말의 상상력』 외 40여 권.

누리주소 hwjeong@daegu.ac.kr

역주위원

  • 효경언해 :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 교열·윤문·색인위원

  • 효경언해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리의도 박병천
  • 성낙수 오명준 이창림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 정태섭 조오현 차재경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효경언해』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전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4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회가 2013년 말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정음 문헌과 책 수는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14) 3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7・8・9・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 3책, 『연병지남』 1책, 『병학지남』 1책,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 1책,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1책, 『사리영응기』 1책, 『백련초해』 1책, 『칠대만법・권념요록』 1책 등 모두 99책에 달한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 가운데 『효경언해』 등 지난해에 이어 16세기 ~18세기 문헌을 역주할 예정이다. 특히 선조들의 여성을 위한 교훈서를 중점적으로 발간할 것이다.

『효경언해(孝經諺解)』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효경대의(孝經大義)』를 선조 22년(1589)에 언해한 책이다. 발간은 내사기 연대로 보아 선조 23년(1590)으로 추정되는데, 원간본은 일본 동경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에 있다. 후대의 목판본들도 대체로 초간본의 언해와 비슷하다. 이 후대본은 규장각, 청주고인쇄박물관, 세종대왕기념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효경언해』는 국어사적인 방면으로 그 당시의 말에 대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됨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풍습이나, 특히 윤리관에 대한 고찰에도 좋은 자료가 되며, 현대 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교훈서가 될 것이다.

이번에 우리 회에서 펴내는 이 역주본의 저본은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을 사용하였으며, 연구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이 책 뒤에 부록으로 실었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효경대의』(청구기호 古朝08-5)를 영인하여 함께 실었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간행함에 있어, 역주를 맡아주신 대구대학교 정호완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주신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2014년 3월 1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된 것은 한글을 깨우침은 물론, 당시 오로지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수많은 문헌과 학습서를 백성들이 쉽게 배워 익힐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또한 그 문해 효과는 이미 조선시대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마다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는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하게 변천한 우리말을, 전문가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효경언해』의 저본으로는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인 목판본으로 하였고 뒤에 영인을 실었다. 또한 부록으로 실은 한문본 무이웅화(武夷熊禾)의 서문(1305)과, 서관(徐貫)의 지문(1486), 유성룡의 발문(1589)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효경대의』(청구기호 古朝08-5)의 앞뒤 부분을 영인한 것이다. 이 책에는 예문관검열 이종적(李宗迪)의 내사기가 있는데 영조 13년(건륭 2, 1737)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울러 번역한 공안국(孔安國)의 전(傳)이 붙은 『고문효경』도 영인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구결원문·언해문, 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권(卷), 장(張), 앞쪽[ㄱ]·뒤쪽[ㄴ]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효경언해 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2ㄱ子ㅣ 曰왈 夫부孝효

효경언해 2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終죵於2ㄴ어立립身신이니라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띄어쓰기는, 한자에 독음과 토를 붙인 구결원문은 토를 붙인 데만 띄었고, 언해문은 현대문법에 따라 띄어 썼다.

(5) 이 책의 한자말은 모두 독음을 한자 옆에 적었는데 한자의 한글 표기가 당시의 발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원문대로 살려 표기하였다. 다만 이에 대한 현대문 주석의 올림말은 현대 발음대로 하였고, 말밑 한자를 괄호에 넣었다.

(6) 한자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문 풀이·주석과 구별하였고, 원문이나 언해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의 협주는 편의상 【 】 표시로 묶어 나타내었으며, 협주 속의 주석은 다시 ≪ ≫ 표시로 묶었다. 이에 대한 현대문도 같게 하였다.

(7) 찾아보기는 언해문의 낱말을 전수 조사 방식으로 모두 찾을 수 있도록 하였고, 한자 독음을 표기한 낱말과 순 옛말 표기 낱말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아울러 한자 용어 주석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배열순서는 맞춤법에 따랐다.

『효경언해』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들머리

어버이는 생명의 숲이요 흙이다. 그 숲 속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이 흘러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그 흙에서 씨알이 움터 자라 더러는 작은 새들이 노래하는 나무숲을 이루거나 아니면 덩치 큰 짐승들이 깃드는 원시림이 되기도 한다. 잎이 지면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무수한 나뭇가지마다 철따라 잎이 나면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다시 땅에 떨어져 생명의 보금자리를 튼다. 흔히 까마귀 새끼들이 자라면 늙고 병든 어미 까마귀를 먹여 살린다 하여 이를 반포(反哺)의 효라고 이른다. 그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이 숲과 흙의 향으로 가득차고, 그 향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길러준다.

효행을 힘쓰는 이 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마지막 부분에 효선편이 마련된 것도 우연한 배열은 아닐 것이다. 우리 겨레를 한마디로 드러내 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고맙다’라고 생각한다. 더러 문화기호론이라 하여 말속에는 그 말을 쓰는 겨레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이 정신세계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를 일러 언어의 문화기호라고 한다. 그러면 ‘고맙다’에는 우리들의 어떤 문화와 역사며 정신세계가 깃들여 있을까.

‘고맙다’의 ‘고마(용가 3:15)’는 곰의 옛말이며, 이는 ‘경건하게 흠모해야 할 대상(신증유합)’임을 이르고 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공주(公州)를 ‘고마’라고 하였다. 고마를 곰 곧 웅(熊)이라 하였다. 거기에 ‘같다’는 뜻의 ‘-ㅂ다’가 붙었으니 이는 ‘당신의 은혜가 나의 어머니와 같고, 나의 조상신의 은혜와 같고, 나의 하느님의 은혜와 같다’는 문화기호론적인 풀이를 할 수 있다. ‘고맙다’의 뜻을 우리의 역사와 함께 고려하면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熊女)로 나오니 그렇게 상정한 것이다. 당시는 모계사회 중심이었음을 떠올리면 어머니-고마(곰)는 어버이의 얼굴이라고 보아야 한다.

백두산을 달리 웅신산(熊神山)으로도 부른다. 백두산의 백(白)은 곰(고마)을 뜻하는 맥(貊)으로도 읽는다. 하나의 한자를 몇 개의 소리로 읽는 것을 복성모라 한다. 예맥의 맥이 바로 곰의 다른 형태다. 일본의 자료를 보면 고구려나 고려를 모두 고마라 이른다. 흔히 백제(百濟)라 하지만 복성모 이론으로 보면 이 또한 맥제라 읽어야 옳다고 본다. 말하자면 ‘백제-맥제-고마의 나라’란 말이 된다.

이러한 고마 곧 어머니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우리 겨레의 민족 정서 가운데 하나의 샘이 되고 숲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어머니라 함도 단군시대의 어머니였던 고마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러하다. ‘고물고물-호물호물-오물오물’에서처럼 기역이 약화 탈락하면 ‘ㄱ-ㅎ-ㅇ’의 과정을 거쳐 소리값이 달라진다. 그럼 ‘고마(곰)-호마(홈)-오마(옴)’가 된다. ‘오마’는 방언으로 어머니를 뜻한다. 모음의 소리가 조금씩 다르게 쓰이면서 오늘날의 어머니(엄마)로 굳어져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전래해 오던 우리의 효행에 뿌리 깊은 문화소에 불교가, 유교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질서로, 다시 유교적인 질서로 재구성된다. 『삼국사기』의 효녀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 효선편에 나오는 ‘빈녀양모’를 비롯한 몇몇의 효행 사례를 통하여 그 절절한 효심의 속내를 체험할 수 있다. 적어도 4세기 이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전래해 오던 우리의 효행 설화들은 불교적인 통섭 과정을 통하여 불교적인 질서의 옷을 입게 된다. 그 얼굴에 값하는 설화가 ‘심청’의 이야기다. 효녀 하면 심청이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효도 하면 심청을 떠올린다. 심청 하면 곧 효행의 거울이고 상징처럼 각인되어 있다. 효행으로 하여금 심청이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여 왕후가 되고 맹인잔치를 통하여 아버지를 찾고 심 봉사는 깜깜했던 눈을 뜨게 된다. 왕궁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기쁨과 환희에 찬 대축제를 올린다. 효행의 승리며 예찬이 아닐 수 없다.

차츰 이야기는 다듬어져 〈심청전〉이라는 방각본들이 판을 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밤잠을 설쳐 가며 돌려 읽고 하는 가운데 효행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힘을 입어 효심이 부처님을 감동시키고 하늘이 움직인 결과였다. 효행의 열매란 끝이 없어 가는 곳마다 효행의 숲속에는 효자와 효녀, 효부와 열녀 충신의 정려들이 생겨나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화가 이루어졌다. 임금으로써 효행을 말하자면 조선 왕조 때 정조 대왕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비운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수원화성을 쌓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린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세계문화유산이 된 당시의 세종시라 할 화성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효행의 열매이고 문화의 얼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능묘를 융릉이라 하여 자신의 능침인 건릉 못지않게 좋은 자리에 모시고 장조(莊祖)라는 시호도 바치게 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불교에서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가경(假經)이라고도 함)이라 하여 하늘같은 어버이의 은공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이러다가 점차로 효행 곧 효도란 정치의 지배이념으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국가 수준의 효치(孝治)로서 통치 수단시 된다. 효치는 나아가 충치(忠治)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그러다 나라의 지배이념으로 표방된 효치는 삼국시대와 고려는 물론, 조선 왕조로 들어오면서 더욱 강화된다. 마침내 인재등용의 길목이라 할 과거시험의 과목으로도 특정된다. 흔히 군사부 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한다. 효행에서 어버이를 섬김은 스승이나 임금을 섬김과 같은 등가 행위로 본다. 어버이 모시는 효행이 자연발생적인 자연스러운 삶의 길이라면, 스승이나 군왕을 섬기는 것은 극히 인위적이요, 사회적인 틀에 버금하는 것이다. 일종의 효치의 한 갈래에 든다고 할 것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수로서 『효경』을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과거시험을 보아야 한다. 청운에 뜻을 품은 이는 모름지기 다른 과목과 함께 이 잡듯이 『효경』을 학습하게 되었다. 임금에서부터 글 모르는 촌부에 이르기까지 효도 하면 더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효도 지상주의를 심어 이로써 통치 이념의 바탕을 삼았다.

이제 이 『효경언해』 글에서는 먼저 이러한 효행문화가 나라의 통치이념이 되기까지 떠오른 과정에서 『효경』 관련 판본들에 대한 이해와 시대적인 흐름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에서는 『효경언해』의 원전이라 할 『고문효경』을 바탕으로 하여 『효경언해』를 역주하기로 하였다. 물론 『효경대의』를 번역한 것이 『효경언해』이고 『효경언해』는 주희의 『효경간오』를 저본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나 모두가 『고문효경』에 기반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한 강문식(2012)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아울러 판본들의 서지형태적인 옥영정(2012)의 연구를 참고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토대로 한 『효경언해』에 나타난 국어학적인 주석을 통하여 음운과 형태와 어휘에 대한 두드러진 점을 주목하고자 하였다.

Ⅱ. 효 사상의 변천

효(孝)란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뜻하는 유교의 가장 큰 덕목 가운데 하나다. 은나라 때 복사(卜辭)나 금문(金文) 등을 보면 『시경』·『서경』 등의 자료에도 효에 관한 속내들이 상당 부분 나온다. 주나라 자료에 나타난 효의 내용은 살아 있는 어버이에 대한 봉양·존경·복종과 돌아가신 어버이나 조상에 대한 추모로 나누어진다. 특히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조상숭배의 새로운 형식으로 정립되었다. 산 어버이를 모시는 일이나 돌아간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같다고 보기에 그러하다.

효에 대한 논리적 담론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을 인(仁)이라고 하였다. 인의 주된 내용으로 제(悌)와 효를 들었다. 그리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효의 실천 방안도 내놓았다. 이후 맹자는 요순의 도를 효제(孝悌)로 인식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제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알맹이라고 했다.

공자와 맹자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심이 효의 디딤돌이지만 애틋함과 도덕적 의무를 명확히 구별하여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역설했다. 물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적 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에 보이는 오륜(五倫)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했고, 이는 『논어』의 부부자자(父父子子), 『예기』의 부자자효(父慈子孝)와 함께 어버이와 자식 상호간에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맹자의 시대부터 이미 유교의 부자 윤리에서는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거의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자식의 효도는 어버이의 자애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의 효도와 어버이의 자애가 동일한 가치 또는 중요성을 갖는 도덕적 의무는 결코 아니었다.

유교사상에서 강조하는 효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어버이를 모시는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그 가운데 어버이에 대한 물질적 이바지보다는 공손한 정신적 자세를 중시했다. 어버이를 섬긴다는 것은 어버이의 명을 받들어 어버이를 위해 힘쓴다는 것을, 또는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경과 예의를 다해 모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어버이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효의 표현으로 보고 특수한 유교적 상례로서 어버이의 3년상을 제안했다. 거의 사회적 관계 설정의 성격이 강했다.

효에 관한 이러한 유교적 설명은 한(漢) 대에 이르러 『효경』으로 동아리 되었다. 『효경』은 효에 관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효경』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다른 모든 덕행을 효에 버금가는 가치로 설정한다. 공자와 맹자는 인의 근본으로 또는 요순의 도로써 효와 함께 제를 들었으나, 『효경』에서는 효만을 덕의 근본으로 강조했고 사람의 모든 덕행은 궁극적으로 효에서 비롯한다고 풀이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족제도가 무너지고 가부장제가 사회 구성의 기본단위로 확립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효경』에 보이는 효의 또 다른 특징은 정치적 지위에 따른 신분적 차이에 의해 실천하는 효의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효의 가치도 다르다고 본 것이다. 천자(天子)·제후(諸侯)·경대부(卿大夫)·사(士)·서(庶)와 같은 신분적 차이에 따라 효를 차별화하고 있다. 따라서 천자가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효를 행할 수 있으며, 천자의 효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즉 천자는 자신이 효를 실천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며, 동시에 천하가 효를 행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효란 통치 이념이다. 또 『효경』은 사람의 도리인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천지의 이법에 따른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와 같이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도리로 파악하는 것은 효를 존중하여 효를 움직일 수 없고 어길 수 없는 도덕률로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효 사상을 담고 있는 『효경』은 한대 이후에 중국 역대 왕조의 교육제도에서 가장 기초적인 필수과목으로 정함으로써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인 것은 『효경』이 과거시험의 과목이 되면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경전해석학을 통하여 사라졌던 경전들의 복원과정에서 엄청난 토론과정을 통하여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이라는 웃지 못할 쌍곡선을 그리면서 끝없는 논쟁의 불씨를 지핀다.

조선조에서 효치의 경전으로서 채택된 것은 〈금문효경〉으로 보이며, 이에 주석을 붙인 동정의 『효경대의』를 언해한 것으로 정본을 삼았다. 그러나 기원적으로 보다 원전에 가깝게 보이는 공안국의 전(傳)이 붙은 〈고문효경〉을 저본으로 하여 같고 다름을 함께 섭렵할 수 있는 고찰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효 사상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효의 규범을 광범한 계층에까지 가르치기 위한 방법인 효행 설화의 유통과 불교적 효 사상을 보여주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유통을 들 수 있다. 『효경』이 효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위주로 한 것이라면 효행 설화는 뛰어난 효행을 보여준 인물들의 행실을 거울삼아 이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효 윤리를 널리 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서(晉書)』의 효우편(孝友篇) 이래 사서(史書)에 실린 효자들의 전기도 효행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별단의 효행 설화로 엮은 가장 대표적인 책은 남송대 조맹견(趙孟堅)의 『조자고이십사효서화합벽(趙子固二十四孝書畵合壁)』이다. 이 책은 대표적인 24명의 효행을 조맹견이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엮은 것이다. 이와 같이 『효경』이나 효행 설화에 따라 효 윤리가 퍼지고, 또 나라는 제도나 형률을 통해 효 윤리의 실천을 권장하거나 강제하고 보호함으로써 효는 중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도덕규범으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중국 사회에서 효 윤리가 갖는 영향력은 불교적 효 사상을 성립시킨 사실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효치(孝治)의 기반은 날이 갈수록 굳어졌다. 그럼 불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원래 불교는 세간과 초세간(超世間)을 구별하여 초세간을 참된 세계로 보며, 그러한 출세간(出世間)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출세간의 종교적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를 비롯한 세간의 윤리도덕은 불교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효 윤리가 지배하는 중국사회에 불교를 펴고, 나아가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효 윤리를 불교의 관점에서 풀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부모은중경』이라는 경전의 필요를 낳았다. 이 경전은 유교의 세속적인 효행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효행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더욱 가치 있는 효행은 불교적 신앙생활을 통해 어버이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유교의 효 윤리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불교적인 신앙생활 속에 품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불교적 효 윤리의 실천은 주로 불교식 상-제례를 통해 어버이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송(宋) 시대의 성리학은 이전의 유교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명확히 했다. 성리학이 불교적 효행을 부정하고 유교적 효행을 강조하기 위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유교적 가례의 정비와 실천이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주자가례(朱子家禮)』로 불리는 예서의 편찬이다. 『주자가례』에서 관혼상제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家廟)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의도는 바로 불교적 효행을 유교적 효행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한국은 삼국시대에 국학이 세워지고 유학교육이 이루어질 무렵 이미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이 제시한 세속 5계 가운데 둘째 항목이 사친이효(事親以孝)였다. 이것은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도덕적 의무를 효라는 덕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국학에서는 『논어』와 함께 『효경』을 인재 교육의 필수적 교과목으로 설정함으로써 유교적 효 사상은 지식인들의 기본교양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가족제도는 중국의 가족제도와 다르고, 전통적인 조상숭배 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윤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지식이 곧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시대까지 가족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특히 고려는 유교교육을 강화하고, 효자의 정문을 세우는 정표정책(旌表政策)을 통해 효자들을 표창함으로써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권장했다. 서민들은 물론이고 지배층에서도 일반적으로 불교식 상-제례를 행했다. 그러나 고려 성종 무렵에 유교 정치사상이 지배적 정치이념으로 확립되고 그 정치이념에 『효경』의 사상이 그대로 채택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유교적 효 사상은 정치이념의 성격을 갖는 것이고, 불교적 효 사상은 가족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 말기부터 성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식인들은 유교적 효 사상을 정치이념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에서도 실천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유교적 효 사상을 담은 효행 설화를 엮고 『주자가례』를 소통했다. 즉 고려 말엽 권부(權溥)가 『효행록』을 엮었으며, 조선시대에도 『효행록』이 몇 차례 간행되고, 수정 간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효행 설화를 그림과 함께 동아리하여 엮은 것이 세종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가운데 〈효자도〉였다. 그리고 효행 설화의 엮음과 『주자가례』의 유통을 통해 불교적 상-제례가 유교적 상-제례로 바뀌었다. 이는 유교적 효 사상이 가정생활에까지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효자도〉에는 한국과 중국 사람을 합해 모두 110명에 달하는 효자들의 효행 사례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크게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과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효행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각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의 효행으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버이를 극진히 이바지한 사례, 어버이가 병이 났을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한 사례, 어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어버이를 구한 사례들을 들고 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효행으로는 어버이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거나 항거하는 사례, 어버이의 유해를 마치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스럽게 모신 사례,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애틋하게 사모하거나 행동을 근신하는 사례들이다. 〈효자도〉 가운데는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태도로써 원각경부(元覺警父)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원각이 아버지의 잘못을 깨우쳐 올바른 행실로 이끈 이야기다. 이와 같은 효행 사례들을 통해 조선시대의 효 사상을 살펴보면, 효 윤리는 자식이 항상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어버이를 섬겨야 하고, 어버이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하며, 또 어버이를 위해서라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행은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뿐만 아니라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며, 이 경우 효행은 상-제례, 특히 『주자가례』에 따른 예제의 실천이 가장 으뜸 내용이었다.

Ⅲ. 효행 관련 자료

1. 『삼국유사』 효선편

왕력(王曆)으로 시작하여 효선(孝善)으로 끝나는 『삼국유사』는 매우 인상적이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 빈녀양모(貧女養母), 향득할고(向得割股), 손순매아(孫順埋兒)’의 다섯 가지 실례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90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 이씨 부인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2. 『고문효경』

신라 신문왕 2년(682)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할 목적으로 세웠던 설총이 중심에 섰던 국학(國學)의 교과서로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 등이 있었다. 이를 석독 구결을 활용하여 학습의 새로운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교육 효과를 올림은 물론, 귀족 자제들만의 인습적인 등용을 차단하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이른바 서라벌 중심의 이두를 교육의 도구로 삼았으니 아주 획기적인 교육 혁신이었다.

한당 유학과 함께 새로운 교육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귀족 중심의 정국 운영을 왕권 중심으로 새판을 짜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중국의 큰 학자라도 신라의 이두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이두로써 효경을 학습하자면 얼마나 힘겹게 공부를 하며 정력을 쏟았을까. 효치의 질서는 곧바로 충치로 이어지니까 왕권의 강화가 지상의 과제였던 신문왕 이후 군왕들로서는 교육을 통한 효치를 강조하고 유교 경전을 통한 충치의 질서를 강조함은 아주 자연스러운 통치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시험과목 가운데 오경, 삼사,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 및 제자백가서 등을 주교재로 하여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실려 전한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어떠했던가.

고려 광종 10년(959)에는 주나라에 사신을 보내 ‘별서효경(別序孝經) 1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8권, 황령효경(皇靈孝經) 1권,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3권’ 등을 구해 왔다. 고려 문종 10년(1056)에는 비각 소장의 구경(九經), 한서(漢書), 진서(晉書), 당서(唐書), 논어(論語), 효경(孝經), 자사제가문집(子史諸家文集), 의(醫), 복(卜), 지리(地理), 율산(律算) 등의 여러 서적을 여러 학원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유사에 명하여 각각 1본을 간행하여 왕실에 보내게 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으로는 기록상의 제약으로 그 당시의 효경이 어떻게 유통과 교육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 나온 효경으로 국내에 알려진 판본은 홍무 6년(1373)의 발문이 있는 목판본 효경이었다. 이 판본은 이재영이 처음 소개하였다. 현전하는 판본 가운데 간행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원본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재영의 서지적 분석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책의 글머리는 『효경』, 글꼬리는 효경찬주(孝經纂註)로 되어 있다. 찬주를 한 이는 임화보(林華甫)이고, 앞부분에는 연우 3년(1216) 임화보의 자서(自序)와 연우 4년(1217)의 조씨진덕재(曹氏進德齋)의 서문이 있다. 그 뒤 당 현종의 서문이 확인된다. 이어 공자에서 현종에 이르는 효경류 저자의 계보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다음에는 금문효경을 바탕으로 한 여러 주석서의 지은이와 수결을 적고 있으며,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의 구성 차이를 비교하고 있다. 이어서 본문이 시작되는데 각 장의 단락별 글제 다음에 그 장에 해당하는 효경정의(孝經正義)의 내용을 짧게 풀이하고 있다. 『효경』의 각 구절을 쓴 뒤 작은 글자로 두 줄씩 두주를 달아 두었다. 뒷부분에 이천선생장설병도(伊川先生葬說幷圖)와 한위공참용고금가제식(韓魏公參用古今家祭式)이 함께 엮여 있다. 책 끝에는 공민왕 22년(1373)에 쓴 영해군수 한충호의 발문이 있다. 발문에 간행 경과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백소란 사람이 효경을 13장까지만 갖고 있었다. 전부령이었던 김거기에게 나머지 5장을 마련하여 합쳐 좌랑 남영신의 제식을 부록으로 붙여 간행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이 책의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간기가 보인다. 책판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고 이지러진 부분이 많은 후쇄본이긴 하나 고려 말엽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이후 사라졌던 경서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고문효경이냐 금문효경이냐 서로가 위서라고 할 만큼 뜨거운 감자였고 마침내 당나라의 현종이 이 둘을 통합하는 『어주효경』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전효경(孔傳孝經)으로 알려진 『고문효경』은 당나라 말엽에 사라졌다가 다행하게도 일본에 고판본이 남아 전해오므로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최고본은 『인치본 고문효경(仁治本古文孝經)』(1241)이다. 일본의 국보로 소장, 보존되고 있다. 김용옥(2009)이 인치본을 역주의 텍스트로 활용한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 1981)와 쿠리하라 케이스케(栗原圭介)(2004)의 『효경』을 참고로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공안국전 『고문효경』이 정본에 가장 가깝다. 인치본을 옮긴 고본이다.

이 글에서 『효경언해』의 원전으로 함께 올린 것은 인치본의 『고문효경』임을 밝혀 둔다. 글의 서문을 보면 『고문효경』이 왜 원전인가에 대한 답을 줄 것이다.

3. 『효경언해(孝經諺解)』

『효경언해』는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孝經大義)』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 소장본으로서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 가르침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董鼎)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 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崔世珍)이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董鼎)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德興)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요‚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黃榦)과 동주(董銖)를 비롯하여 개헌(介軒)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胡一桂)와 동진경(董眞卿)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와 함께 『고문효경』을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삼강행실도』류

먼저 『삼강행실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이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효자·충신·열녀의 효행과 충절이 남다른 사람을 뽑아 앞면에 그림을 그려 넣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설명 및 시(詩)와 찬(贊)을 붙인 뒤, 그림의 각 장 머리에 한글로 번역을 달아 펴낸 책이다. 세종 16년(1434)에 처음 간행되었는바, 한글 번역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 언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종 12년(1481)에야 언해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김화(金禾)가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많은 이들의 교육 학습용으로 효치와 충치를 하려는 국가사업으로 만든 인성 관련 서책이다. 조선은 성리학적 이념에 기초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시기에 걸쳐 『삼강행실도』가 매우 여러 차례 간행이 되었으며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의 문헌이 간행되었다. 따라서 매우 많은 이본이 남아 있으나 세종 때 간행된 책은 매우 드물며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이 대부분이다.

『삼강행실도』는 15세기의 언어 사용을 보여 주는 매우 귀한 자료의 하나로서 그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 연구, 판화 및 회화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 『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성종 때 언해본)에서 빠진 이들을 더 기워서 낸 자료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에 따라서 유근(柳根) 등이 편찬한, 충신과 효자와 열녀에 대한 행실을 그림과 함께 적어놓은 책이다. 주로 임진왜란 때 일어났던 효행과 열행, 그리고 충신에 대한 사적들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광해군 6년(1614)에 유근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신속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의 성격으로 간행되었는바, 충신, 효자, 열녀 등 충효열의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무려 1,587인(신속 1,515인, 속부 72인)이나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행실도류의 얼굴인 『삼강행실도』의 언해는 비교적 원문에 기대지 않고 원문 내용의 의역과 우리 말글의 표현미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간본의 경우 다소 원문에 가까워지려는 흐름이지만 원문이 줄거나 원문에 없는 사연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원문에 가까운 직역으로 역어체의 문체적인 보람을 보이고 있다. 축자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직역체의 언해가 이루어진 것은 직역체의 거울인 경서언해 작업을 하였던 역자들이 언해를 함으로써 기왕의 행실도류들과는 다른 번역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주로 장유와 붕우에 대한 도리를 그림과 함께 그 사례를 중심으로 펴낸 자료다. 이와 함께 『오륜행실도』는 정조 21년(1797)에 심상규 등이 왕의 명을 따라서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합하고 손을 보아 간행한 책이다. 5권 4책의 활자본으로,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새긴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한다. 중간에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역대 자료에서 오륜의 행실이 남달라 본이 될 만한 이들을 가려 뽑아 그네들의 사적을 시(詩)나 찬(贊)으로 엮은 일종의 도덕 교본이다. 한국에서 17사례, 중국에서 133사례 모두 150사례를 통하여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갈래로 5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시각적인 효과를 위하여 사례마다 해당 사연을 간추린 판화 같은 그림을 앞에 실었다. 해서 책의 이름에 ‘-도(圖)’가 들어갔다. 이 같은 행실도류 자료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다른 어느 자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생활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이다.

5.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 전하는 것은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인 것도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해졌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삽화를 두었는데,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佛岬寺)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441)에다가 후대에 필서(筆書)로 기입된 차자(借字)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이 언해본은 김영배(2011)의 해제에 따르면, 국어사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〇 ‘이 문헌’은 언해본이면서도 한자 표기는 전혀 없이 정음으로만 이루어진 문장인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현재까지는 최초의 정음체 문장은 『이륜행실도(1518)』로 보고 있는데, ‘이 문헌’은 그보다는 뒤지지만 그나름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〇 16세기 중엽의 전주・완주 지역의 언어사실을 그런대로(방언 포함)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정음 창제 후 100년이 지났으면서도, 중세국어 문법의 전통적인 용법을, 음운적인 변천을 고려해도 그런대로 계승해온 것도 무시할 수 없다.

〇 ‘방점 표기’에 대해서는 ‘이 문헌’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나타나며, 고유어는 대체로 한 어절에 한 음절에만 표기되나, 한자어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곡용과 활용형에서는 어간에만 표기되고, 말음절에는 표기하지 않은 것이 대세이며, 전체적으로 표기는 매우 불규칙하며, 거성과 상성의 혼란, 15·16세기 중앙의 관판 문헌과 일치하지 않음이 많다.

〇 어휘 면에 있어도 약 30단어 정도가 ‘이 문헌’에 새롭게 나타난다.

6. 심청전(沈淸傳)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의 하나가 바로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人身供犧說話)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배어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Ⅳ. 『효경』의 위상과 서지

1. 『효경』의 형태 서지

『효경』은 고유한 책의 이름이면서 『효경간오』와 『효경언해』, 그리고 『효경대의』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공자가 증자와 함께 묻고 답한 것 가운데 효도에 관한 이른바 〈송본효경〉이라고 불리는 사마광의 〈고문효경지해(古文孝經指解)〉를 저본으로 하여, 송나라 주희(朱熹)가 바르게 잡은 것이 『효경간오(孝經刊誤)』다. 사마광은 〈고문효경지해〉를 고문에 따라서 지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금문인 정주(鄭注)와 어주(御注)의 본문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기에 확고하게 고문을 중심으로 했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욱이 주희의 『효경간오』를 원나라 동정(董鼎)이 주석하였는데, 이것을 명나라 서관(徐貫)이 간행한 판본을 『효경대의』라 일컫는다.

처음 『효경』은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이 있었다. 고문은 22장으로 구성되었으며 노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 벽에서 찾아낸 것이다. 한편 금문은 18장으로 구성되었고 안지(顔芝)가 보관하다가, 그의 아들 안정(顔貞)이 나라에 바친 것이다. 주희는 『고문효경』 22장을 경문(經文) 1장과 전문(傳文) 14장으로 구성하면서 223자를 없애고 『효경간오』를 지었다. 주자는 공자와 증자의 문답 내용을 여러 책에서 인용된 것이 뒤섞여 있음에도 인용된 부분까지 공자의 말이라고 믿는 당시 상황을 비판하고, 『효경』이 다 성인의 말씀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경 1장과 전 14장의 체제로 다시 구성하였다.

이제까지 간행된 몇 가지 판본을 대상으로 한 형태서지학적 특징을 동아리 하기로 한다(옥영정(2012) 참조).

조선시대 들어와서 원나라 웅화(熊禾)의 서(序)와, 명나라 서관(徐貫)의 발(跋)이 있는 판본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말하자면 동정의 『효경대의』가 유통되었다. 효경 하면 곧 『효경대의』를 가리킴이 그 동안 효경에 대한 서지적인 통념이었다. 사실상 『효경대의』에도 판본이 여럿이 남아 전하는데, 특히 한글자료로 남은 왕실 교육용 서책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서지 사항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이 해제에서는 『효경』과 그 언해본의 국내 간본과 계통에 관하여 서지학적인 내용을 갈래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효경간오』와 『효경대의』의 간행본

(1) 전주본 『효경간오』 계통과 간본

조선시대에 들어와 『효경』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세종 5년(1423)에 서책의 수가 적어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직접 베껴 쓰므로 주자소에 『노걸대』나 『박통사』, 『직해효경』 등을 박게 하였다. 세종 11년(1429)에는 『효경』의 판본이 많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경연에서 『구해효경(句解孝經)』을 내매 주자소에 250질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안타깝게도 『직해효경』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요즘 중국에서 발간된 〈원대한어자료집〉에 『직해효경』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유일한 원나라 간본으로 알려진 것이 일본의 개인소장본으로 남아 있다. 『직해효경』은 주로 사역원의 교수-학습용 교재로 쓰였을 것이다.

『효경』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경우, 『효경간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조선 후기에 오면 『효경대의』가 효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간행은 세종 11년(1429) 3월 판부사 허조(許稠)의 계청으로 주자소로 하여금 250질을 인쇄, 반포하도록 하여 5월에 보급한 기록이 있으나 그 현전하는 판본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효경』의 현존하는 판본으로 가장 이른 것은 성종 6년(1475) 전주부윤 윤효손(尹孝孫)이 전주에서 간행한 것이 있다. 책 마지막 장에 “성화십일년을미오월일전주부개간(成化十一年乙未五月日全州府開刊)”이라는 간기가 보인다. 윤효손이 간행한 전주 간본은 이후 다시 남원부에서 중간되었다. 남원 간본에는 “세재경인십이월일남원부중간(歲在庚寅十二月日南原府重刊)”이라는 간기와 함께 저본이 되었던 전주 간본에 수록된 윤효손의 발문과 간기가 판각되어 있다. 경인년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책의 판식은 사주단변, 반곽 24.8×15.5cm, 유계, 4행 8자, 상하 내향 2엽 또는 3엽 화문 어미로 구성된다.

한편, 경상도 흥해에서 간행되어 개인 소장으로 전하는 선조 36년(1603)의 간본도 있다. 아울러 성종 8년(1477) 경상도 선산에서 간행된바, 김종직의 발문이 있는데, 현전하는 판본이 없고 전주판과 큰 차이 없는 판식과 내용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순조 1년(1801)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도 판각이 이루어졌다. 저본의 윤효손, 김종직의 발문과 이헌경의 발문이 실려 전한다. 이번엔 경주에서 권종락 등이 이를 간행하고자 하여 발문을 부탁받았음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효경』의 권수제 아래에 ‘회암선생간오(晦菴先生刊誤)’라는 일종의 부제를 붙이고 있다. 이는 동일한 판각으로 보아 기존의 『효경』이 『효경간오』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다른 판본으로 『효경』에 한문 구결이 함께 판각된 것도 있다.

조선 후기로 오면 책 목록에 주로 원나라 동정이 주석을 더한 『효경대의』라는 서명으로 실려 있다. 이는 주희의 『효경간오』가 16세기 말엽 『효경대의』 간행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효경대의』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2) 『효경대의』 판본 계열의 갈래

조선시대 들어와서 주자의 『효경간오』와 함께 동정이 주를 덧붙인 『효경대의』가 함께 활용되었다. 간본의 형태로 보면 『효경대의』의 본문 글자가 대자인 것과 중자인 경우의 두 갈래가 있다. 이름하여 효경대자본과 훈련도감자본, 정유자본 등으로 가를 수 있다. 내용은 비슷하나 판식이 각 활자마다 달라서 중자로 인쇄한 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1) 효경대자본(孝經大字本) 계열

『효경대의』는 동정이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원의 학사 웅화의 서와 명의 학사 서관의 발, 그리고 선조 때 유성룡의 발이 있는 판본이다. 선조 23년(1590) 효경대자(孝經大字)와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로 이를 다시 판각한 목판본이 이어서 간행되었다. 효경대자는 윤병태에 의해서 처음 이름 붙여진 목활자로 『효경대의』의 권수제와 경의 본문에만 쓰인 것이다. 함께 쓰인 을해자체 경서자는 선조 이후 국역 경서의 교정을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경서 언해를 찍는 데 활용한 금속활자다.

선조 23년(1590)의 『효경언해』와 합하여 사헌부 장령 장운익에게 하사하였다. 한문본과 한글본을 동시에 1책으로 간행하였다. 일본 존경각문고에 한 부 남아 있다. 국내에는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본이 있는데 그 글눈은 다음과 같다.

孝經大義(1256)
朱熹(宋)訂,董鼎(元) 註. 中字再鑄甲寅字版. 宣祖 23(1590) 刊.
1冊(56장) 四周雙邊,半郭 24.7×17.1cm. 有界. 半葉 10行 19字. 註雙行.
內向3葉花紋魚尾. 36.1×23.1cm. 線裝.
序: 歲在乙已(1305) 陽復之月前進士武夷熊禾序時大德之九年也.
跋: 成化二十二年(1486) 歲次丙午秋九月甲子 […] 淳安徐貫謹識.
印記: 宣賜之記.
內陽記: 萬曆十八(1590) 九月日 內賜行副護軍朴世賢孝經大義諺解合部一件命除謝恩.
紙質: 楮紙.
備考: 朱文公作孝經刊誤以古文定為經一章,傳十四章,合一千七百八十字內刪去
二百二十三字.

이상 목록에서 판본사항 가운데 중자 재주 갑인자판(中字再鑄甲寅字版)이라 적혀 있지만 실은 을해자체 경서자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75년 9월 발행한 이 목록을 작성할 때는 경서자의 명칭이 확정되지 않았고, 당시 이 활자인본을 재주갑인자 인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에 그러하다. 임금이 부호군에 내린 날짜와 내사기의 형식이 장운익에게 내린 기록과 같고 서책의 형태적 특징도 거의 같다. 목록 가운데 형태 부분에 있어 행자수 10행 19자가 나온다. 이는 존경각문고본 10행 18자와 다른데, 이는 존경각문고본 목록 작성 시의 단순한 오기로 볼 수 있다. 존경각문고본 영인 자료에는 모두 10행 19자임이 확인된다. 동시에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본이 1책 56장만 남아 있고 이는 한문본만 남아 있어서 실물 확인을 해야 한다. 이 책은 이후에도 이어서 간행, 동일한 계통으로 영조 13년(1737)에 시강원에 내려준 것과, 순조 3년(1803) 태인에서 전이채(田以采) 등이 판각된 것이 대표적이다. 태인본은 민간에 판매용으로 찍은 방각본으로 널리 보급된 판본이다. 권말에는 ‘숭정 기원후 계해 십월일 태인 전이채 박치유재(崇禎紀元後癸亥十月日泰仁田以采朴致維梓)’의 간기가 있다.

2) 훈련도감자본 계열

훈련도감자본 계열의 『효경대의』는 경문이 대자본과는 달리 중자로 간행되었으며 행자수가 10행 16자다. 가장 오래된 것은 17세기 초엽 경오자체 훈련도감자로도 간행된 것이다. 그 이후 이를 바탕으로 번각본도 나왔다. 번각본 제작 당시의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이 내린 승정원의 답으로 나라에서 쓸 『효경대의』 2백 건은 전국에 나누어 보냈으며 4백 건은 이를 펴주라고 전교한 글을 볼 수 있다. 이 때 나누어준 책으로 현전하는 것이 인조 9년(1631) 10월에 태백산과 오대산 사고, 강화 등에 내린 책으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남아 있고 이는 모두 경오자체 훈련도감자를 번각한 목판본이다.

한편 중자본 계열 판본 가운데 개인이 소장한 목활자 본으로 남은 것도 있다. 전체적으로 덧칠되어 있으므로 판본 확인이 어렵다. 판식은 사주 쌍변, 반곽 23.5*157.2cm, 유계, 10행 17자, 주쌍행, 상하내향흑어미로 훈련도감자본과는 다르다. 선조 37년(1604)에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의 15건을 활자로 간행한 기록이 있는바, 이 책이 그 간본일 가능성이 있다.

3) 정유자본(丁酉字本) 계열

중자로 인쇄한 세 가지 가운데 정유자본 『효경대의』는 정조 무렵 제작된 금속활자인 정유자로 간행되었다. 이를 밑글로 고종 11년(1874) 원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보양청(輔養廳)에서, 다시 고종 16년(1879)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시강원(侍講院)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10행 18자의 판식을 보이고 있다.

언해를 필사하여 덧붙인 『효경대의』는 이 판본을 밑글로 하고 있다. 책의 아래 부분에 언해를 필사해서 덧붙인 자료는 규장각 소장본과 국립도서관 일산문고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산문고본은 일산 김두종의 문고로 구한말 이후 궁인 출신으로 유명한 서화수집가였던 이병직의 소장인이 찍혀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본문 속에 약체구결을 필사하고 더하여 경의 정문(正文)에 필사한 언해를 덧붙여놓은 것이다.

특히 나이 어린 세자에게는 기초 언어 교육과 함께 『효경』과 같은 가치 교육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경종·진종·장조·익종·헌종은 열 살 미만에 세자로 책봉되었기에 『효경』과 같은 경문을 학습용으로 쓰였다.

춘방장 판본은 편식으로 보아 정유자본과 같은 10행 18자본이다. ‘기묘신간 춘방장판(己卯新刊春坊藏板)’이란 간기를 새겼는데, 고종 17년(1880) 7월 10일 시강원책역소일기(侍講院冊役所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 所用되는 初·再·三紙와 千字文, 童蒙先習, 通鑑, 史略, 續史畧, 七書, 孝經, 小學, 禮記, 春秋, 綱目, 全韻玉篇 합쳐 5,125冊의 冊面張 세 곳에 官印을 찍을 때에 所用되는 印靑, 唐靑花墨 등의 物力을 정히 헤아려서 마련하여 급히 輸送해 오는 것이 마땅히 할 일이다. …”

이 기록으로 세자궁에 들일 책자와 그 장수, 그리고 목판의 보존을 위하여 소금물에 찌는 과정 및 관인을 날인한 내용까지 살필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8월 15일에도 하교하기를, “세자가 볼 새로 만든 효경과 구건(舊件) 효경을 모두 들이라. 신건(新件) 효경 1책과 구건 효경 10책을 안으로 들이라.” 하고 또, “신건 효경 대주(大註)가 토(吐)가 없으니 속히 토를 달아 들이라.”고 하여 토를 달지 않은 새로 편찬한 효경에 토를 달게 하여 세자의 학습용으로 썼음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효경언해』 1종, 『효경대의』 2종의 책판 실물이 소장되어 있다. 『효경언해』는 간지 미상이나 1879년의 춘방장 판본의 책판으로 추정된다. 『효경대의』는 1874년 보양청, 1879년 시강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4) 대구방각본 및 그 밖

일제 강점기 대구의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에서 간행한 『효경대의』와 『효경언해』, 또한 서울의 천일서관 간본이 전통 인쇄방식으로는 거의 끝 무렵에 인쇄된 책으로 보인다. 재전당본은 태인 방각본을 가져다가 다시 간행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 판각한 것도 드러난다. 재전당서포 외에도 방각본으로 『효경대의』 등을 유통한 출판사로는 박문서관(1917), 천일서관(1919) 등을 들 수 있다.

5) 목판본 반사본(頒賜本)

조선 현종 7년(1666) 10월 23일에 임금이 내려 편 목판본으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가운데는 정태화, 송준길에게 반사한 책이 남아 있다. 사주 쌍변, 10행 19자, 상하 내향 혼입화문어미의 판식을 가진 이 책은 같은 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에게 반사한 책도 전해진다(계명대 소장).

현재 국내에 소장된 『효경언해』들은 활자본의 저본으로 방점 표기는 물론 ‘△’이나 ‘ㆁ’의 표기가 상당 부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언해문의 순수국어뿐만 아니라 한자의 주음(註音)의 경우도 같다. 따라서 이들은 근대국어 시기에 간행된 것이라 하겠다.

3. 『효경간오』와 『효경대의』의 구성과 체재

『효경간오』의 구성체재가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앞선 연구에서 상당 부분이 밝혀졌다. 현전하는 간본으로서 후대에 지속적으로 간행된 전주판 『효경간오』를 들 수 있다. 초기 인본의 구성은 경(經)과 전(傳)으로 엮여졌고 『고문효경』의 19장은 규문장(閨門章)으로, 효경정의에 없었던 글이다. 『효경간오』의 전 12장은 『효경대의』의 전 12장과 같다.

전주판 『효경간오』는 『금문효경』에 비하여 몇 개의 한자가 더하기는 하였으나, 『금문효경』에 있던 『시경』, 『서경』에서 인용된 구절을 줄이고 그 양의 차이가 큰 편이다. 전주판 『효경간오』의 본문은 『효경대의』의 본문이나 『주자대전』가운데 있는 『효경간오』와 이렇다 할 차이가 없다.

판본상으로 보면 경서자본 『효경대의』 이후로는 동정의 주로 주석본이 쓰였다. 그 이전에는 주자의 『효경간오』가 활용되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전주판 『효경간오』, 주자대전 가운데 『효경간오』, 『효경대의』 등 세 가지 간본의 본문 내용을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글자가 다름의 경우, 전주판 『효경간오』 제1장에 ‘女’가 『주자대전』 안의 『효경간오』나 『효경대의』에서는 ‘汝’로 드러난다. 『효경대의』의 ‘辟’은 다른 간본에서 ‘避’로 나타난다. 문장의 종결조사인 ‘也’가 주자대전의 『효경간오』나 『효경대의』에는 보이나, 전주판 『효경간오』본에는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다른 글에서도 비슷한 실례가 많다. 또한 전주판 『효경간오』의 ‘言’이 다른 판본에서는 ‘道’로 드러나고 전주판 『효경간오』의 ‘以下’가 다른 판본에서는 ‘已下’로, ‘於’가 ‘于’로 나타난다. 한문 표기의 표준화가 필요하였다. 전의 머릿장과 전 2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의 ‘弟’가 다른 판본에서는 ‘悌’로 나타난다. 전 4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의 ‘侮’가 다른 판본에서는 ‘失’로 글자가 바뀌어 실렸다. 전 6장은 『고문효경』에서 부모생속장(父母生續章), 효우열장(孝優劣章)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한 장으로 합친 문장이다. 이 때 전주판 『효경간오』는 접속부사로 ‘故’를, 『주자대전』은 ‘子曰’을 사용하였다. 『효경대의』는 접속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 7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와 『주자대전』에 쓰여진 ‘此’가 『효경간오』에서는 빠졌다. 전 9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에 쓰인 ‘也’가 다른 판본에는 없어지기도 하고 전주판 『효경간오』의 ‘云’이 다른 판본에서는 ‘曰’로 기재되었다. 전 10장에서는 『주자대전』의 ‘至’가 다른 판본에서는 ‘致’로, 전주판 『효경간오』의 ‘親’이 다른 책에서는 ‘先’으로, ‘弟’가 ‘悌’로, ‘於’가 ‘于’로 바뀌어 나타난다. 전 11장에서는 전 2장과 마찬가지로 전주판 『효경간오』의 ‘弟’가 다른 책에서는 ‘悌’로 나타난다. 전주판 『효경간오』와 『주자대전』의 ‘是故’가 『효경간오』에서 ‘是以’로 나타난다. 전 12장 전주판 『효경간오』의 ‘已乎’가 다른 판본에서는 ‘矣乎’로 나타난다. 전 13장 전주판 『효경간오』에는 다른 판본에서 나타나지 않는 ‘言之不通也’의 5글자가 더 실려 있다. 또한 전주판 『효경간오』와 『주자대전』의 ‘弗’이 『효경간오』에는 ‘不’로 바뀌어 있고 전주판 『효경간오』에는 ‘又’가 빠져 있으나, 『주자대전』과 『효경간오』에는 실려 있다.

전 5장, 전 8장, 전 14장에는 달리 실린 글자가 없다. 『주자대전』 가운데 『효경간오』에서 밑줄로 표시한 것은 『주자대전』의 주석에서도 보이듯 문맥에 맞지 않아 없이 하려던 부분이다. 마침내 『효경간오』에서는 이를 고려해 빼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을해자체 경서자 한문본 『효경대의』와 한글본 『효경언해』는 합본하여 간행되었지만 별도의 책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이는 이 책이 처음 소개될 때, 한글자료를 중심으로 영인하면서 사기, 서문, 지문(識文), 언해본문, 발문 등의 내용만 소개하였고, 이후에도 이 영인 자료가 다시 영인 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효경언해』 판본상의 특징

체재는 먼저 원문을 썼는데 한자는 각 자마다 주음을 하고 구결을 달았으며 언해는 한 자씩 낮추어 쓰고 인명이나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작은 글자를 두 줄 종서로 하여 협주(夾註)를 달았다.

목판본 중에는 난외(欄外)에 ‘宗祀之宗從註疏釋(14ㄱ), 親生之親從註疏釋(14ㄴ), 遐不謂 矣從詩傳釋(19ㄱ)’과 같이 언해 상 참고해야 할 부분에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각각의 장구 끝에 ‘右() 經一章이라’와 같은 후렴으로 밝혀 놓고 ‘右(올() 겨티니 웃 그를 닐은 말이라)() 經 () 章이라’와 같이 협주와 언해를 붙였다.

원간본인 활자본과 중간본인 목판본에서 보이는 언어상 차이로는 먼저 구결에서의 차이다. ‘刑于四海니/리니(3ㄱ), 右 ··· 釋至德以順天下하니라/다(8ㄱ)’ 등이다. 또한 목판본은 번역체로 보아 활자본보다 직역체에 가깝다. 활자본에서의 고유어가 목판본에서는 한자어로 바뀌거나, 활자본에서의 동사적 표현은 목판본에서는 명사적 표현으로 바뀐다. ‘어딘 침이/德敎ㅣ(3ㄱ), 홀아비와 홀어미/鰥이며 寡(11ㄴ), 병잠개예 해이니/兵니(17ㄱ)’ 등.

다음으로 어휘의 변화다. 말하자면, ‘아븨 令(〉긔걸, 22ㄴ), 벼슬의(〉구위예, 21ㄴ), 伯과 子과 男가(〉에여, 11ㄱ)’ 등의 보기를 들 수 있다.

『효경언해』 원간본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가 소장하고 있다. 후대의 목판본들도 대체로 초간본의 언어와 비슷하다. 간년이 확실한 목판본으로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현종 7년(1666)의 내사기를 가진 책이 가장 오래다.

5. 시대별 『효경』의 위상

춘추전국의 말엽, 전한(前漢) 초에 지은 『효경』은 유교 윤리 사상의 알맹이라 할 효(孝)의 원칙과 규범을 실은 책이라는 점에서 유자들의 전범이 되었다. 황제 같은 통치자들에게 『효경』은 효치가 곧 충치로 이어지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구실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정 윤리에도 부합하는 절묘한 길이었다. 『효경』이야말로 엄청난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전이었다.

이 같은 효치란 한당대(漢唐代) 정치·사회를 이끌어감에 있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주희(朱熹)는 생각이 달랐다. 본디 『효경』이 갖고 있던 존엄성과 『효경』의 정치이념인 효치론(孝治論)을 단호히 부정하고, 이를 쇄신하고자 『효경간오』를 재구성했으며, 『효경간오』는 그 뒤 동정(董鼎)의 주석을 통하여 『효경대의』로 그 명맥을 더욱 튼실하게 다져 갔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설총이 앞장서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도입한 『효경』을,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은 물론 그 뒤로 조선시대까지 유학 교육의 주요 경서 중 하나로서 중시되었다. 특히 왕세자들의 교육의 디딤돌이 되었으니 교육적인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별 유학의 주류적 흐름은 한당 유학에서 북송 유학으로, 다시 주자의 성리학 등으로 계속 그 성격이 바뀌면서 영향관계가 달라졌다.

사대부들의 필수 경전이었던 『효경』은 삼국시대 처음으로 도입된 이래로 조선 전기까지 계속 변화하다가, 16세기 후반에 들어서 실용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효경대의』가 들어온 뒤로는 『효경대의』로 정착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시기에 따라서 유학의 성격 규정과 경전의 변모는 당대인들이 『효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관점에 상당한 변모를 가져왔다. 따라서 각 시기별로 『효경』을 이해하는 양상이나 경전이 갖는 학문과 사회적인 자리매김도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 글에서는 『효경』 텍스트가 『효경대의』로 고쳐지는 16~17세기 초엽까지로 한정하여 조선 전기의 『효경』의 자리매김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의 『효경』에 대한 인식론적인 면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대와 고려의 『효경』 학습에 이어 조선 전기의 『효경』 학습을 대조해 가면서 각 시기별 『효경』의 자리매김의 차이와 그 배경을 동아리하였다. 이어서 조선 전기에 『효경』 텍스트에 대한 변화 과정과 그에 따른 조선조 학자들의 『효경』에 대한 인식의 면모를 살펴보고, 이어 조선시대 『효경』 교육의 한 보기로써 세자 교육에 『효경』 교육과 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한다(강문식(2012) 참조).

5.1. 고대-조선 전기 『효경』의 영향

(1) 국학(國學)의 필수 교과

고대 시기의 『효경』에 관련한 기록은 거의 영성하다. 해서 당시의 『효경』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백제의 석학이었던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이 『논어』와 『효경』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태자를 가르쳤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이른 시기에 『효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효경』의 사회 교육적인 비중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다. 경덕왕 2년(743) 당나라 현종이 주석을 한 『어주효경(御注孝經)』 한 부가 당으로부터 들어왔다. 이어 경덕왕 6년(747)에는 국학 교육과정에 세 가지를 강좌를 설치하여 국학의 학생들을 교육했는데, 이때 『효경』이 『논어』와 함께 교육의 대들보라 할 필수 과목으로 교습되었다.

다시 원성왕 4년(788)에 설립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서도 『효경』은 상·중·하품의 모든 과거시험 과정에서 변함없는 필수 과목으로 학습을 요구하였다. 국학과 독서삼품과의 운영 내용을 볼 때, 『효경』은 통일신라의 국정 교육 과정과 인재 등용 과정에서 『논어』와 함께 가장 근간이 되는 필수교재였고, 따라서 통일신라 유학의 중심 경전 중 하나였다.

국학의 중심 교과인 『효경』의 자리매김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고려 초엽 『효경』 교육의 실상을 보여주는 실증 자료가 없다. 그런데 문종 10년(1056) 서경 유수가 진사과나 명경과를 준비하기 위하여 서경 안에 자리한 여러 학교에 마련해 주기를 요구한 서책에 『효경』이 들어 있다. 『효경』이 국자감 교육과 인재 등용의 주요 과목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또 고려 인종 무렵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는 국학을 동아리하여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3학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은 학식을 제정 공포하였다.

경전은 주역(周易)과 상서(尙書), 주례(周禮)와 예기(禮記), 모시(毛詩)와 춘추(春秋)의 좌씨전(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을 각각 1경(經)으로 삼았으며 『효경』과 『논어』는 반드시 배우도록 하였다. 학생들의 수업 연한은, 『효경』과 『논어』 두 교과는 1년을 기한으로 한다. 많은 교과가 있으나 모든 학생은 먼저 『효경』과 『논어』를 읽고, 다음에 다른 경서와 함께 산(算)을 읽고 시무책(時務策)을 배운다. 여가가 있으면 반드시 서(書)를 겸하여 익히는데 하루에 한 장씩 하도록 한다.

마침내 『효경』은 3학 모두에서 『논어』와 함께 국학의 생도들이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하는 기초 필수 과목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한편 『고려사절요』의 고종 때 기록을 살피면, 국자감에서 매 4계월(季月)에 학습생들에게 『논어』와 『효경』의 시험으로 인재를 뽑아 이부에 보고하면, 이부에서는 이들에게 공직을 주었다. 이는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여 약식으로 보는 시험인바, 이 경우에서도 『논어』와 『효경』이 취재 시험 과목으로 특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조에서도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효경』이 『논어』와 함께 국학 교육과 인재 선발의 저울이 되었다. 해서 고려의 학자들은 『효경』을 여러 경서 중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할 교과로 인정했으며, 이는 고려 후기까지도 이어졌다. 이규보가 자제들에게, “백가와 천사를 모두 연구해야 하지만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을 깊이 알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충목왕에게 『효경』과 사서(四書), 그리고 오경(五經)의 순서로 학문의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을 촉구한 것으로 보아 『효경』을 학문 수련의 첫 번째 길목으로 인식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곡·이색으로 대표되는 고려 후기 학자들이 『효경』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효경』은 당시 학자들의 학습의 터전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효경』이 국학 교육과 인재 등용의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중시되었던 근본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일신라와 고려 모두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왕 중심의 관료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던 시기와 국학에서 『효경』 교육이 강화된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통일신라에서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후반까지의 신문왕대를 거치면서 국학 설치와 유교 교육 강화, 지방행정체제 확립, 중앙관제 및 군제 개혁, 관료전 지급과 동시에 녹읍 폐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귀족을 억제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또 고려에서도 예종·인종 대에 왕권의 회복과 정치기강의 확립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학제와 과거제 개혁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들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한당대의 『효경』은 가정을 천하의 기본으로 보는 가천하적(家天下的) 정치론과 효치론(孝治論)을 통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황권 강화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에서 주로 읽혔던 『효경』 교과는 대부분 한당대에 유행했던 『금문효경』이었다. 말하자면 통일신라 및 고려의 『효경』의 자리매김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당대 『효경』 이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의 학자들은 중국 왕조와의 학술 교류를 통해 한당대에 유행했던 『효경』을 받아들였고, 『효경』을 통해 황권 강화라는 지상의 가치를 이끌어 내려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효치론은 곧 충치론이라는 이론적인 틀을 신라와 고려의 정치 개혁에 적용하기 위해 국학 교육과 인재 등용에서 『효경』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2) 아동의 기초 학습 교과, 『효경』

여말선초의 성리학자 권근(權近)은 『효행록후서(孝行錄後序)』에서 『효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 부여를 하였다.

“예전에 공자가 『효경』에서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에 털끝 하나 살 한 점 상하지 않음에서 시작, 마지막 산소에 편안히 안장하는 데까지 빠뜨리지 않고 모두 말하여 만세를 훈계했으니,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권근은 이 글에서 『효경』이 공자의 저술이며, 『효경』안에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확연히 하였다. 또 권근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첨(李詹)도, “『효경』의 전질을 익힌 뒤라야 어버이를 섬기는 처음과 끝이 갖추어졌다.”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효경』 학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여말 선초의 학자들은 『효경』을 ‘어버이 섬김의 도리가 담긴 경서’로 인식하였다. 마침내 『효경』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 내내 이어졌다.

『효경』이 학습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익혀야 할 필수 교재로 인식된 것은 외형적으로는 고려와 조선 전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효경』의 자리매김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제까지 선비들이 공직에 나아가려면 『효경』을 반드시 학습해야 했다. 조선 전기로 오면 『효경』은 공직 진출을 위한 학습이 아니고 이제 막 글을 익히기 시작한 아동이나 초학자들이었다. 즉, 조선에 들어서면서 『효경』을 공부해야 하는 목적에 변모가 나타난다. 김종직(金宗直)도 여섯 살 때부터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배울 때, 먼저 동몽수지(童蒙須知)와 유학자설(幼學字說), 그리고 정속편(正俗篇)을 공부하고 이어서 소학(小學)과 『효경』을 익혔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16세기의 문집을 보면 당시 학자들은 대체로 어릴 때 학습을 처음 시작할 무렵 거의 대부분이 『효경』을 배웠다. 15세기 무렵에 지어진 묘지명을 보면,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효경』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왕왕 나타난다. 또한 집에서 아이들에게 『효경』을 가르친 주체가 주로 어머니였음을 알 수가 있다. 『효경』은 여성들에게도 필수 학습 교재였다. 조선 전기에 들어와서 『효경』은 아동의 학습의 필수 교과라는 자리매김을 갖게 되었다.

조선 중기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퇴계선생언행록』에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자손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효경』과 『소학』 등을 먼저 가르쳤고, 어느 정도 문리가 통한 다음 사서를 가르쳤으며 단계를 뛰어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효경』을 깊이 연구해야 할 경전은 아니고,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문리를 얻게 하기 위해 가르치는 기초 교재 정도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은 조선 전기 『효경』의 위상은 신라-고려시대에 비교해볼 때 크게 낮아졌다. 조선 전기에 『효경』의 위상이 낮아진 직접원인은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사회 운영의 사상적 기반으로 대학을 중요한 경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그에 따라 한당대의 정치론을 대변하던 『효경』이 조선에서 국정 운영 방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여지는 『대학』에 비해 훨씬 좁아졌다. 마침내 『효경』은 국학의 필수 교과에서 초학자나 아동의 학습의 교과로 남게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효경』의 자리매김이 인재 등용의 과거 과목에서 빠짐으로써 그런 변화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세종 때 판부사였던 허조는 『효경』이 중시되지 못하는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판부사 허조가 장계를 올렸다.

“『효경』과 『소학』은 모두 처음 배우는 자가 마땅히 먼저 탐독할 서책입니다. 하지만 『소학』은 과거를 볼 때 필요하기 때문에 선비들이 열성으로 『소학』을 읽지만, 『효경』은 세상의 초학자들이 전혀 읽지 않습니다. 청컨대, 경연에서 자구를 풀이한 『효경』을 간행하여 초학들을 가르치게 하소서.”

여기에서 허조는 『효경』의 자리매김이 낮아진 중요한 연유로 『효경』이 과거의 시험과목에서 제외된 점을 들고 있다. 다만 유학의 기초 학습서라는 점에서 『효경』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소학』은 과거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학자들이 좋든 싫든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조도 그의 장계에서 『효경』 경시에 대한 대책으로 『효경』의 간행과 보급 및 교육의 강화를 주장했을 뿐이다. 허조의 장계 이후에도 『효경』의 자리매김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이러한 『효경』의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 본질적인 비판을 한 사람은 백운동서원을 세운 학자 주세붕(周世鵬)이었다. 주세붕은 송인수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당시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효경』을 가장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소-대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마침내 『효경』을 소아지서(小兒之書)라 하여 소홀히 하게 되었고 심지어 경연에서도 『효경』을 중시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시 주세붕은 공자가 엮고 정리한 6경 가운데,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책은 『효경』이 유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효경』이 공자의 저작이며 6경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서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현실의 『효경』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6경이나 사서와 나란히 서지 못함으로써 『효경』의 지덕(至德)·요도(要道)는 사대부들이 존숭하는 바가 되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이상과 같은 주세붕의 비판은 당시 사람들의 『효경』 인식에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세붕은 『효경』의 핵심어를 효제(孝悌)로 규정하였다. 효제는 화목의 근본이 되며 이 도의를 실천한다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듦은 손쉬운 일임을 강변하였다. 주세붕이 제기했던 『효경』에 대한 인식 전환의 방향은 『효경』을 나라 다스림의 경서로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세붕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효경』의 위상은 더 이상 이전 시대와 같은 정치사회적 중요성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5.2. 『효경』의 교육 기능

(1) 『효경』 판본의 변화

경서의 학습에서 『효경』은 어떤 텍스트로 사용되었을까. 텍스트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따라 학습과 연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유행했던 『효경』 판본은 한당 대를 휩쓸었던 『금문효경』에 기반한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통일신라의 국학에서 『효경』 교육이 강화되기 이전에 벌써 당으로부터 『어주효경』이 들어왔었다. 이 책은 『금문효경』을 바탕으로 하면서 『고문효경』의 미덕을 부분적으로 기워 엮은 판본이다. 고려의 경우, 광종 10년(959)에 고려에서 사신을 통해 후주(後周)에 별서효경(別序孝經),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황령효경(皇靈孝經),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등을 보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정현은 『금문효경』을 탐구한 대표적인 학자이고, 『효경정의』 역시 금문 계열인 『어주효경』에 기반하고 있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적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고려 말엽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들어와 학습과 연구에 활용되었다. 『효경』의 성리학적 텍스트로는 주희가 『고문효경』의 장점만을 골라 엮은 『효경간오』와 원나라의 동정이 『효경간오』를 바탕으로 주석을 덧붙인 『효경대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경서들의 성리학적 텍스트들이 고려 말부터 들어와 간행되어 유통되었던 것과는 달리, 『효경간오』와 『효경대의』의 도입과 간행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효경』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면, 김인후의 『효경간오발』(1546) 이전에는 『효경간오』나 『효경대의』에 대한 의견이 보이지 않는다. 또 앞에서 검토했던 주세붕의 『여송참판미수(與宋參判眉叟)』 가운데에는, “내가 『효경』 18장을 보니 그 말이 다함이 없다.”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18장은 『금문효경』을 뜻한다.

고려 말엽과 조선 전기에 간행된 『효경』 텍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는 첫번째 자료는 여말선초의 학자 이첨이 지은 『신간효경발』이다. 이 글에 따르면, 이첨은 당초 남굴보의 『상제도식(喪祭圖式)』을 간행하고자 했다. 『신간효경발』에서 이첨은 김거두가 보내온 『효경』을 보았다. “과연 삼산이 주석한 바다.[果三山所註也]”라고 설파한다.

『신간효경발』에는 이 삼산 임씨가 누구인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최근 이재영(2007)이 처음으로 밝힌 고려본 『효경』에서 삼산 임씨에 대한 실마리를 알아냈다. 고려본 『효경』은 현재 나라 안에 남아 있는 『효경』 판본 가운데 간행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머리에 충숙왕 3년(1316) 임화보(林華甫)가 지은 자서(自序)가 실려 있고, 본문 첫머리에도 ‘삼산 후학 임화보 찬주(三山後學林華甫纂註)’라고 주석한 이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이는 이 첨이 확보한 『효경』의 서문과 주석을 지은 이가 삼산 임씨라는 점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첨이 기술한 삼산 임씨는 임화보임을 가늠할 수 있다. 다만 임화보는 원의 학자라는 것만 확인될 뿐, 그 밖의 이력은 알 수가 없다.

고려본 『효경』에는 이첨의 발문이 없다. 달리 공민왕 22년(1373) 영해군수 한충호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이첨이 간행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삼산 임씨의 주석을 저본으로 한 점, 상례·제례에 관한 그림이 부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본 『효경』과 이첨의 간행본은 다르지 않다. 특히 한충호의 발문을 보면, 고려본 『효경』의 저본도 처음부터 완질이 아니고 세 집에서 나온 낙질을 모아 완질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이첨의 발문에서 다룬바, 『효경』 완질본의 형성 과정과 같다. 또한 낙질이 나온 세 집의 성씨나 각각의 낙질에 실린 범위도 이첨의 발문 내용과 같다. 마침내 이첨이 간행한 『효경』과 현전하는 고려본 『효경』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첨은 여러 경로를 통해 마련한 『효경』 완질을 저본으로 하여 『효경』을 새로 간행하였다. 그는 또 『신간효경발』의 마무리에 당시 『효경』 간행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아, 하나의 책이 세 집에서 뒤섞여 나왔으매 이제 다시 합해져 하나가 되었다. 물(物)은 끝내 헤어지지 않으니,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학자들이 (이 책을) 쉽게 배우기만 한다면 이 책을 간행하는 데 이와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에 그 일의 처음과 끝을 갖추어 새로 간행한 서책의 뒤에 실어놓는다.”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첨 조차도 『효경』 완질을 구하기 어려웠다면, 다른 학자들은 『효경』의 완본을 구함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효경』 판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계기는 주희의 『효경간오』가 들어온 뒤라고 볼 수 있다. 『효경간오』에서 주희는 이른바 효치론(孝治論)으로 일컬어지는 한당의 『효경』을 비판하고 나서 『효경』의 원문을 빼고 정리하여 경 1장 전 14장 체재로 재구성하였다. 성리학 성격의 『효경』 인식의 중심에 서는 판본이다. 김인후는 명종 1년(1546) 『효경간오』를 간행하면서 그 발문을 지었다. 발문에 따르면, 김인후는 옥과(玉果) 현감으로 있을 무렵 『효경』을 간행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언관에서 물러나 낙향하던 유희춘이 옥과에 들렀다가 『효경간오』 진강본(進講本) 한 질을 줌으로써 이를 저본으로 간행했다.

특히 유희춘이 김인후에게 준 『효경간오』는 진강본, 즉 경연이나 서연에서 진강되던 책이었다. 이로 보면 명종 원년 이전에 벌써 『효경간오』가 들어와서 왕실교육용으로 활용되었음을 알겠다. 이 판본은 왕실은 물론 사대부가와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효경간오』 발문에서 김인후는 우선 『효경』이 공자 문중에서 전해온 책이며, 선비들이 초학을 가르칠 때 『논어』와 함께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던 경서였다는 것, 한대 이후 본의가 흐려지고 체재가 흐트러진 『효경』을 주희가 손을 보아 『효경간오』를 엮은 사실 등을 책의 발문에서 밝혔다.

“송나라 주자에 이르러 비로소 그 잘못된 것을 줄이거나 다시 정리하였다. 또 주자가 일찍이 그에 대한 외전(外傳)을 지으려 했다가 결국에는 전을 세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뜻이 있는 듯하다. (중략) 경신(敬身)은 어버이를 공경함이니 『효경』에서 말하는 ‘효지시(孝之始)’가 이것이다.”

여기에서 김인후는 『소학』의 글 차례가 『효경』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 『효경』의 중심 내용들이 『소학』에서 원용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말하자면 김인후는 주희가 『소학』을 엮을 때 『효경』을 머리에 두고 그 본의를 좀더 밝히는 흐름으로 『소학』을 엮었다고 본 것이다. 해서 주희가 『효경간오』를 엮은 뒤 별도의 외전을 지어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김인후는 『효경』을 읽는 사람은 모름지기 『소학』을 언덕 삼아 하늘 섬김의 지극한 공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효경』은 『소학』과의 관련 속에서 『효경』의 참된 뜻을 탐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효경』의 의미를 『소학』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함은 김인후 혼자만의 견해는 아니다.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이(李珥)의 『성학집요』다. 『성학집요』는 통설(通說) · 수기(修己) · 정가(正家) · 위정(爲政) · 성현도통(聖賢道統)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정가 제2장에 『효경』이 많이 인용된다. 『성학집요』의 『효경』의 인용 사례를 들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우리 몸의 살과 터럭은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이매 감히 상하게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효도의 비롯됨이다. 세상에 나아가 출세를 하고 사람의 도리를 행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김으로써 그 어버이를 드러냄은 효도의 마침이 된다. 무릇 효라 함은 어버이 섬김에서 시작하고 임금을 섬김을 가운데로 하며 도덕적인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완성함을 마침으로 한다. -효경(하)와 같다. 오씨가 말하였다. 사람이 되어 어버이가 낳아주신 몸을 스스로 아끼매 감히 일그러지게 하랴. 이는 효도의 비롯됨이 되기에 때문이다. 능히 출세를 하고 도리를 행하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야 한다. 이는 효도의 마침이 되기에 그러하다.[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孝經』同 吳氏曰 人子之身 父母之所遺 自愛而不敢虧 所以爲孝之始也 能立身行道則己之名揚於後世 而父母之名 亦顯矣 所以爲孝之終也]”

보기에서와 같이 율곡은 『효경』의 원문을 먼저 기록하고 끝에 세주로 ‘효경’이라고 써서 인용의 출전을 밝혔다. 그 다음에 줄을 바꾸어 해당 구절에 대한 주석을 함께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위 인용문 가운데 나오는 오씨(吳氏) 주석이 『효경』 관련 주석서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다. 『소학집주』에 실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성학집요』에 원용된 모든 『효경』 구절에서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는 율곡이 『효경』의 속내를 『소학』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앞서 본 김인후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이렇게 볼 때, 비록 두 가지 사례만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김인후와 율곡이 16세기 조선 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학자들이었음을 고려하면, 『효경』을 『소학』과의 연계 속에서 접근하려는 관점은 상당 부분 보편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효경』 판본은 『효경대의』가 들어옴으로써 그 자리매김에 변화가 왔다. 『효경대의』는 원대의 학자 동정이 주희의 『효경간오』에 바탕을 두고 주석을 덧붙인 책이다. 『효경대의』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보급된 『효경』 판본이라 하여 지나침이 없다.

〈효경대의 발〉에서 서애 유성룡은 공자가 6경을 풀이한 뒤 다시 『효경』을 지어 6경 모두를 아우르게 함으로써 6경의 뿌리가 효에 있음을 밝혔다고 한 『수서』 경적지(經籍志)의 내용을 인용하고, 이를 인정한 뒤 효에 마음을 다하면 6경의 도(道)는 그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주희의 『효경간오』와 동정의 『효경대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부여하였다.

“진(秦)나라가 전적을 불사른 뒤 남은 경전이 더러 세상에 알려져 고문인 벽서(壁書)와 금문(今文)이 뒤섞여 유통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어 경전의 굴욕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데 송대에 와서 주자가 비로소 간오(刊誤)를 지어 경전의 차례를 정함으로써 공자의 옛글이 회복되었고, 그 뒤를 이어 파양(鄱陽)의 동정이 주석을 지어 그 귀취를 간절하게 서술한 뒤에야 한 경서의 조리가 환하게 밝아졌으니, 성문(聖門)에 끼친 공이 매우 크다.”

여기에서 유성룡은 송대 이전의 『효경』, 곧 한당 시대에 유통된 고문·금문의 『효경』 판본은 공자가 지은 『효경』의 원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마침내 주희가 『효경간오』를 엮음으로써 공자가 지은 『효경』의 본래 모습이 회복되었고, 『효경간오』에 따라서 주석을 붙인 동정의 『효경대의』는 『효경』의 원의를 가장 잘 풀이한 주석서로 인식되었다.

김인후와 유성룡은 모두 주희가 『효경』의 잘못된 것을 첨삭함으로써 『효경』의 참모습을 밝혔다고 하여 『효경간오』의 경전으로서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주희는 한당대의 ‘효치론’에 기초한 『효경』에 대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독자적인 정치론을 기반으로 『효경』을 줄이거나 새로이 엮어서 『효경간오』를 엮었다. 안타깝게도 김인후와 유성룡의 발문에는 주희가 가졌던 문제의식, 곧 한당대의 효치론에 대한 비판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김인후·유성룡 등이 주희의 『효경간오』를 『효경』의 원형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정작 주희가 지녔던 『효경』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조선 전기의 『효경』은 학자들이 깊이 있게 살펴볼 경학의 대상이 아니고 초학자나 아동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기초 학습의 교재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리 하건대, 조선 전기의 『효경』 판본은 『금문효경』에서 『효경간오』로 다시 『효경대의』로 성리학적인 교본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위와 같은 『효경』 교본의 변화가 본질적인 『효경』 파악에는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2) 왕실 교재로서 『효경』

『효경』에 대한 소극적인 인식의 상황에서 부분으로나마 조선 전기 『효경』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왕실에서의 『효경』 학습 기록이다. 이에 이 절에서는 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왕실 교육에서의 『효경』 인식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효경』이 아동들의 기초 학습서로 사용되기는 왕실 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부터 왕실 교육의 중요한 교본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왕실에서 『효경』 교육은 주로 세자를 비롯한 대군이나 공주 등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더러 국왕을 대상으로 하는 경연에서 『효경』이 강론되기도 하였다.

서연에서 원자나 세자에게 『효경』을 강론해야 한다는 제의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태종 2년(1402) 6월 사간원에서는 당시의 시무(時務)를 정리해서 태종에게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자의 입학에 관한 안이었다. 사간원에서는 원자가 제2의 임금이므로 어릴 때부터 학문을 통해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학덕이 높은 학자를 가려서 시학(侍學)의 책무를 맡기고 날마다 서연을 열어 『효경』을 강습할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세조 3년(1457) 9월에 왕세자가 돌아가자, 의정부는 같은 해 11월에 뒤에 예종이 되는 해양대군(海陽大君)의 왕세자 책봉을 청원하는 사신을 명나라 에 보낸 다음 해양대군에게 본격적인 왕세자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그때 우선하여 학습한 교본이 바로 『효경』이었다. 그 밖에도 성종이나 명종 대의 원자나 세자 교육에 『효경』을 통하여 왕실의 효도에 관한 학습을 시켰음을 알 수가 있다.

Ⅴ. 『효경언해』의 국어학적 특징

『효경언해』의 구성은 먼저 원문에 정음 구결이 있고 그 뒤로 언해문이 자리한다. 동시에 구결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읽기를 위한 독음이 달려 있다. 선조 23년(1590)에 간행된바, 그 영인본으로 존경각문고본이 있고, 철종 무렵에 다시 중간하여 유통된 홍문각의 영인본이 있다. 이 두 판본을 살펴보면 번역문으로서의 특징은 물론이고 같은 원문인데도 쓰인 어휘나 한자의 표기, 어미나 조사, 덧붙여진 구결, 동사 표지로서 ‘-다’류 구결이나 명사 표지로서 ‘-이다’류 구결의 이본간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여찬영(2003) 참조).

1. 표기상의 특징

존경각문고본(이후 ‘존경’)과 홍문각본(이후 ‘홍문’)에서 드러난 음운 표기상의 차이는 반치음(ㅿ)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1) ㅿ의 표기

가.(존경) 汝(1ㄱ) 日(7ㄱ) 二(9ㄴ) 人(3ㄱ, 3ㄴ, 6ㄴ, 7ㄱ, 9ㄱ, 12ㄱ, 13ㄱ, 14ㄱ) 而(3ㄱ, 3ㄴ, 5ㄴ) -에(3ㄴ, 4ㄱ, 5ㄱ, 6ㄱ, 16ㄴ)

나.(존경) 聖셩人之지德덕이(13ㄱ)

셩인이 신 글월을 經경이라 니라(1ㄱ)

보기에서와 같이 한자음 표기에 ㅿ이 8번 나타나며 언해문에서는 조사에 쓰일 뿐 그 밖에는 쓰이지 않았다. 가장 많은 빈도가 보이는 것은 ‘而’인데 홍문각의 중간본에는 모두 반치음이 이응으로 표기되었다. 보기 (1나)에서 한자음의 독음 표기는 구결문에서 ‘聖셩人’으로 반치음이 보이나 언해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홍문각의 중간본에서는 반치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한자를 나란히 독음을 달아주는 병기(존경)의 경우는 어떠한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2) 한자의 병기

가. 民민用용和화睦목야(1ㄱ)

加가於어百姓셩의게더어(3ㄱ)

나. 셩이화동며친야(1ㄱ)

셩의게더어(3ㄱ)

보기 (2가-나)에서 구결문의 경우, ‘百姓셩’이 ‘셩’이나 ‘民민’의 경우가 ‘百姓셩’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언해류에서도 보이는 바, 언해하는 이에 따라서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는 없고 이표기처럼 적힌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구결문과 언해문의 한자음을 적을 때 서로간의 차이가 보이기도 함은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다.

(3) 언해본에서의 한자음(존경)

가. 卿경大대夫부之지孝효也ㅣ라(4ㄴ)

나. 卿경大태夫우之지孝효也ㅣ라(5ㄱ)

구결문에서는 ‘대부’인데 언해문에서는 ‘태우’로 적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언해하는 이들이 원어인 중국어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적는다고 한 결과로 보인다. 추정하건대 당시의 발음으로는 ‘태우’에 가까운 소리로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홍문각의 중간본에서는 오탈자의 보기들이 눈에 뜨인다.

(4) 중간본의 오탈자

가. 禮예란 거슨 고경 이라 고로 그 아비 공경면(홍문 9ㄱ)

나. 於어臣신妾쳠이니 : 臣신과 妾쳡의게도(홍문 11ㄴ)

다. 移이於어官광이니 : 벼슬의 옴기니(홍문 21ㄱ)

위와 같이 잘못된 글자나 한자의 병기음이 달려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중간본의 오탈자들은 이본으로서의 무게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아래 괄호의 번호는 본 역주본의 것임).

이와 함께 표기상의 특징으로 분철표기를 들 수 있다(아님이 孝효의 비로솜이오(2ㄴ), 兄형셤김이(21ㄴ), 귀신으로 享향며(26ㄱ)). ‘ㅂ’계 합용병서로는 ‘ 라(3ㄱ), 내디 아니(4ㄱ), 나디 아니고(24ㄱ)’, ‘ㅅ’계 합용병서로는 ‘이라(9ㄱ), 희(10ㄱ), 디디(24ㄴ)’ 등이 보인다. 각자병서로는 ‘욕까(20ㄴ)’가 유일 예로 보인다. 어말 ㄷ 받침을 보이는 예로는 ‘니라(2ㄴ), 잗뎌(22ㄱ), 벋을 두면(24ㄱ), 몯거시라(24ㄱ), 이니라(6ㄱ)’ 등이 있다. 언해문에는 ‘근본이라(2ㄱ), 예법이 되리니(3ㄱ), 법도 삼가면(23ㄴ), 실이(2ㄴ) 등에서처럼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도 많이 보인다.

2. 어휘와 문법

『효경언해』의 언해문에서 존경각본과 홍문각본의 사이에서 보이는 어휘의 상이함을 알 수가 있다. 같은 원문에 대하여 언해하는 이들의 자의적이고 자신들이 즐겨 쓰는 낱말을 골라서 썼던 것으로 보인다.

(5) 어휘상의 차이

가.(존경) 민달티몯니(1ㄴ),아쳐기(3ㄱ),어딘이(3ㄱ),법다온오시(4ㄴ), 요니(8ㄴ)

나.(홍문) 敏민티못거니와, 惡오티아니고, 德덕敎교, 法법의오시ㅣ, 善션니

이상의 보기를 통하여 존경각본에서는 언해문의 경우, 모두가 정음으로 적었다. 그러나 홍문각본에서는 원문을 중심으로 한자를 병기하고 있다. 홍문각본에서는 한자어 뒤에 ‘다’류의 동사화 접사가 붙어서 동작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와 함께 원문의 언해에서 존경각본과 홍문각본의 용언류의 어미 부분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주로 어말어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분포를 보인다.

(6) 어미의 분포

가. (존경) 근본이니(2ㄱ), 나배라(2ㄱ), 이라(2ㄴ), 되니(3ㄱ), 딕회니(5ㄱ)

나. (홍문) 근본이라, 나배라, 이니, 되니, 딕회리니

어미의 분포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구결문의 구결에 좌우되기에 그러하다. 언해하는 이의 해석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언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사의 경우는 어떠한가. 같은 원문인데 두 이본 사이의 다름은 언해자들의 해석의 차이일 뿐 아니라 문체의 차이에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보기를 들어보도록 한다.

(7) 조사의 분포

가. (존경) 天텬하(1ㄴ), (2ㄴ), 어버이(3ㄱ), 웃그(7ㄱ), 孝효에셔(8ㄴ)

나. (홍문) 天텬하를, 은, 어버이를, 웃그를, 孝효만

주로 목적격 조사의 경우인데 ‘-/를’의 아래아(ㆍ)가 홍문각본으로 올수록 줄어드는데 이는 철종 때의 아래아에 대한 음운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아래아의 쓰임이 상당한 혼란상을 보이고 그 소리도 없어져 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명사형의 선어말어미로 ‘-오/우-’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음’ 명사형이 쓰인다(아님(21ㄴ), 셤김(21ㄴ)). 하지만 선어말어미 ‘-오/우-’가 드러난 형태도 작은 분포로 보인다. ‘공슌홈(26ㄱ), 親요미(14ㄴ), 이숌(25ㄱ)’과 같은 보기들이 소수 보인다.

더러 ‘셤기기(5ㄴ), 밧고기(8ㄴ), 랑기(22ㄴ)’에서처럼 습관을 드러내는 명사형 선어말어미 ‘-기’도 보인다. 객체존대 선어말어미 ‘--, --’은 여전히 보인다. 선어말어미가 ‘밧온거시라(2ㄴ), 묻좁노니(22ㄴ), 듣왓거니와(22ㄴ)’에서 보인다. 이러한 표기들은 16세기 중세어 자료를 중간하였기 때문이다.

3. 구결문의 상이

두 이본 사이에 다르게 드러나는 경우는 주로 구결문의 외현류와 조사류, 그리고 다류와 이다류로 갈래지을 수 있다. 먼저 외현류 구결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한다. 존경각본에는 드러나지 않은 구결이 홍문각본에서는 드러나는 경우를 이른다. 홍문각본에만 드러나는 구결의 분포는 21군데인데 반하여 존경각본에는 한 군데 정도가 있을 뿐이다.

홍문각본의 경우, 구결문이 더 많다는 것은 그만큼 언해하는 이가 원문을 좀 더 서술하여 알기 쉽게 풀어 썼다는 풀이 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언해자의 언어가 훨씬 더 많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례를 들어 알아보도록 한다.

(8) 외현류 구결

가. (존경) 敬其父則子悅(9ㄱ) : (홍문)敬其父면 則子悅

나. (존경) 當不義則子(23ㄴ) : (홍문)當不義얀 則子

다. (존경) 事父ㅣ孝고로(19ㄴ) : (홍문)事父ㅣ孝ㅣ라 故로

라. (존경) 敬一人而 ( 9ㄱ) : (홍문)敬一人에而

마. (존경) 嚴父嚴兄(22ㄱ) : (홍문)嚴父와 嚴兄

바. (존경) 昔者에 明王(10ㄴ) : (홍문)昔者明王

원문을 우리말의 어순과 정서에 맞도록 표현하려면 그만큼 어미나 조사가 덧붙음으로써 국어 문장에 가깝게 된다. 홍문각본의 경우는 원문에 있는 내용들을 외현화시킨 것이다. 반대로 원문에 가까운 존경각본의 문장들은 내현화된 문장의 구성체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8바)의 경우는 위와는 반대로 존경각본에만 정음구결이 붙어있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위의 보기에서 ‘-’가 붙어 용언화된 것과, ‘이-’가 붙어 체언을 서술어로 만드는 연금술 같은 형태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체언류에는 ‘이다’와 그의 활용형들이, 용언의 어간 혹은 명사에 동작성을 드러내는 ‘다’가 붙어서 우리말의 화행적인 특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었다. (8라-마)에서 체언구에 주격조사와 접속조사가 붙은 경우다. 그런데 존경각본에서는 이들 표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내현 주어요, 서술어이다.

존경각본과 홍문각본의 구결문 조사에 값하는 조사가 서로 달리 나는 곳이 18군데나 된다. 이제 조사류 구결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본다.

(9) 조사류 구결

가. (존경) 富貴(3ㄴ) : (홍문) 富貴를

나. (존경) 愛他人者를(15ㄴ) : (홍문) 愛他人者

다. (존경) 閨門之內예(22ㄱ) : (홍문) 閨門之內에

라. (존경) 子男子여(11ㄱ) : (홍문) 子男子아

마. (존경) 兼之者(5ㄴ) : (홍문) 兼之者ㅣ

바. (존경) 然後에(4ㄴ) : (홍문) 然後에사

원문을 언해하는 이가 같은 체언이라도 주어인가, 주제어인가로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격조사로 구결을 붙일 수가 있다. 모음조화가 일률적이지 않고 조사의 형태를 자신의 습관과 입맛에 맞게 조사를 붙여 쓴 보기들이다.

이어서 한자 혹은 한문의 용언화 표지라 할 ‘-’가 붙는 경우와 ‘이-’가 붙어 용언화하는 표지를 붙이는 경우로 갈라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다와 이다류는 용언화소다. 언해하는 이가 같은 한자라도 동작상이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를 가려서 쓰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느 쪽이 더 선호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다’류가 붙어 용언화되는 보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10) 다류의 분포

가. (존경) 不敏니(1ㄴ) : (홍문) 不敏이어니

나. (존경) 如此니(12ㄱ) : (홍문) 여차ㅣ라

다. (존경) 不陷於不義니(23ㄴ) : (홍문) 不陷不義니

라. (존경) 不敢行니(23ㄴ) : (홍문) 不敢行이니

마. (존경) 有爭臣七人면(23ㄱ) : (홍문)有爭臣七人이면

위의 보기들을 보자면 같은 원문을 언해한 것인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류와 ‘이-’류가 결정되는가에 대한 흐름을 단언하기가 어렵다. 같은 뜻이면서도 언해하는 이의 원문에 대한 의미망이 다를 수 있기에 그러하다.

우리말의 문법소들이 원문에는 외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문이 응집성이 강하고 우리말로 하면 훨씬 더 길어지면서 응집성은 약하나 서술성이 강해지기에 언해자의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언해문에서 아주 높다고 본다. 용언화 표지로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가 ‘-’류와 함께 ‘이-’류가 있다. 이제 그 보기를 들어가면서 살펴보도록 한다. 홍문각본에서는 문장이 종결어미로 끝을 마감한 것이다.

(11) 용언화 표지 ‘이-’류의 분포

가. (존경) 無怨惡ㅣ니(4ㄴ) : (홍문) 無怨惡니

나. (존경) 德之本也ㅣ니(2ㄱ) : (홍문) 德之本也ㅣ라

다. (존경) 神明이彰矣니라(20ㄱ) : (홍문) 神明이彰矣라

라. (존경) 雖無道ㅣ라도(23ㄱ) : (홍문) 雖無道ㅣ나

존경각문고본과 홍문각본의 구결에서 같은 ‘이-’류의 서술조사가 통합되긴 했어도 존경각문고본과 홍문각본이 어말어미가 서로 다르다. 이는 언해하는 이들의 선호하는 문체가 조금씩 다르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덕지본야ㅣ니(존경 2ㄱ)’의 연결어미가 홍문각본에서는 종결어미인 ‘-ㅣ라’로 끝이 난다. 말하자면 존경각문고본의 언해자의 문체는 연결어미에 따른 접속을 선호하였으나 홍문각본의 언해한 이는 종결어미를 선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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