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경대의 발문
성인이 6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악기)을 지어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을 가르쳤으니, 그로써 도덕과 천성과 명운에 대한 풀이가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효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좀 더 상세하게 하여, 따로 하나의 경전(효경)을 삼음에 이르렀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무릇 백 가지의 행실은 효가 아니면 만 가지의 선함이 바로 설 수가 없고, 효가 아니면 행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의 경이고, 땅의 의로움이며, 백성의 반듯한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하루라도 익혀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수서(隨書)』 「경적지(經籍志)」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지으셨으나 6경의 제목은 같지 않고 가리키는 뜻도 다르니, 유도(儒道)가 흩어질까 염려스럽다. 그러므로 효경을 하나로 모아 묶어서 그 갈래를 밝힌다. 비록 나누어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효에서 움터 나온 것이다.’ 하시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이에 마음을 다하면 6경의 도리는 모두 다 이에 귀속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로 살아남은 경전들이 더러 나왔으나 비록 유가들의 담론을 거쳐서 보완되기도 하다가도 번번이 다시 없어졌고, 벽서와 금문이 다 섞여서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 주자(朱子)에 이르러 비로소 틀린 것을 바로잡았으며, 또 그 경(經)과 전(傳)의 차례를 공씨(孔氏; 孔安國)의 옛 글로 되살렸고, 이어서 파양(鄱陽)의 동씨(董氏; 董鼎. 董季亨)가 그것을 저본으로 주석(註釋)하여 그 귀취(歸趣; 歸趨)를 극진하게 한 뒤에야 한 경전으로서 모습이 분명해졌으니, 성문(聖門; 孔門)에 미친 공이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효경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감추어짐이 실로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주자의 간오와 동정의 주석이 나오기를 기다린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