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분문온역이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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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은 조선 중종 37년 함경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김안국(金安國)이 왕명을 받아 호군(護軍) 박세거(朴世擧), 사맹(司猛) 홍침솔(洪沉率), 내의원 정(正) 문세련(文世璉), 직장(直長) 유지번(柳之蕃), 전의감 전 첨정(僉正) 이척(李倜), 직장(直長) 정추(鄭樞), 혜민서 전 직장(直長) 홍세하(洪世河) 등과 함께 전염성 열병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시행하기 쉬운 처방과 구비하기 쉬운 약을 취하되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 60여 방에 다시 40여 방을 첨가하여 이것을 진양(鎭禳), 불상전염(不相傳染), 복약방술(服藥方術), 노복(勞復) 등 4부문으로 나누고, 약에는 우리말 향명(鄕名)을 부기하고 필요한 곳에는 채취하는 법을 덧붙여, 중종 37년(1542)에 언해 간행한 것이다.

임홍빈(任洪彬)

194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아호 학여(學如)

송도국민학교

용강국민학교

숭문중학교

숭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사과정)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박사과정)

문학박사(1987)

해군사관학교 국어교관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시간강사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현)

한국언어학회 회장

〈저서와 논문〉

《국어문법론(공저)》(1983)

《국어의 재귀사 연구》(1987)

《뉘앙스풀이를 겸한 우리말 사전》(1993)

《국어 문법론 I (공저)》(1995)

《북한의 문법론 연구》(1997)

《국어 문법의 심층》(1998)

《우리말에 대한 성찰》(2005)

《한국어의 주제와 통사 분석》(2007) 외 10여편

"국어의 주제화 연구"

"On the Real Nature of Scrambling in Korean" 외 100여편

역주위원

  •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 임홍빈

  • 교열·윤문·색인위원

  •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석득
  • 나일성 노원복 박병천
  • 오명준 이창림 이해철
  • 전상운 정태섭 차재경
  • 최기호 최홍식 한무희
  • 홍민표

역주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을 내면서

우리 회는 1990년 6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로,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스무 해가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으니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수는 ≪석보상절≫ 2책, ≪월인석보≫ 8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4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를 묶어 1책 등 모두 53책이다.

그동안 정부의 지원에 굴곡이 심하여 애태울 때도 있었으나 우리 회의 굽히지 않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역주자의 노력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원동력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가장 깊은 정신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이다. 그것은 세종의 철저한 애민정신과 자주정신이며 그 마음을 이어간 선각자들의 헌신적 노력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월인석보≫ 권23·25, ≪구급간이방언해≫ 권7, ≪반야심경언해≫,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언해 두창집요≫ 등 8책을 역주하여 간행할 계획이다.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은 조선 중종 37년 함경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김안국(金安國)이 왕명을 받아 호군(護軍) 박세거(朴世擧) 등과 함께 전염병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시행하기 쉬운 처방과 구비하기 쉬운 약을 취하여 이것을 진양(鎭禳), 불상전염(不相傳染), 복약방술(服藥方術), 노복(勞復) 등 4부문으로 나누고, 약에는 우리말 향명(鄕名)을 부기하고 필요한 곳에는 채취하는 법을 덧붙여, 중종 37년(1542)에 언해 간행한 것이다.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은 중종 36(1541)년 봄 평안도에 소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다른 지방에까지 번져 피해를 입게 되자, 가축전염병에 관한 의서를 편찬하라는 왕명에 의하여 그해 11월에 간행한 것이다.

이번에 우리 회에서 역주하여 출판하는 ≪역주 분문온역이해방≫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목판본 1책을 저본으로 한 것이며, ≪역주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은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으로 생각되는 여강출판사에서 1988년에 영인한 책을 저본으로 삼았다.

끝으로 이 한의서를 우리 회에서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해 주신 서울대학교 임홍빈 명예교수와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과학기술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09년 11월 2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 16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미어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의 저본으로 ≪분문온역이해방≫은 서울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소장의 목판본 1책을 참고하였고(해제 [35] 참조),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은 선조 11년(만력 6, 1578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강 출판사 영인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자 원문·언해 원문(방점은 없애고, 띄어쓰기함)·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또 원전과 비교하여 찾아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아긔 입안해 2ㄱ조티 아닌 거시 잇다가

제2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딘이 되니 2ㄴ신장은 비록 증이 업스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안에 넣었다.

(5) 원문 내용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은 편의상 글씨 크기만 줄여 보이었고, 한자 원문의 띄어쓰기는 원문대로 하였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ᄔ ㄷ ㄸ ㄹ ㅁ ᄝ ㅂ ㅲ ㅳ ㅃ ㅄ ᄢ ᄣ ᄩ ㅸ ㅅ ㅺ ᄮ ㅼ ㅽ ㅆ ㅾ ㅿ ㅇ ᅇ ㆁ ᅙ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ᄚ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3. 역주자 일러두기

(1) 역주는 가능한 한, 자세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처음에 나온 것도 뒤에 나오면 다시 역주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나치게 앞의 부분을 참조하게 하면, 역주의 보람이 반감되는 것이란 생각에 의한다.

(2) ‘이다’ 즉 ‘이-’를 학교 문법에서는 ‘서술격 조사’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정 형용사’란 이름으로 ‘이-’를 가리키기로 한다. ‘이-’는 형용사임이 분명한데, 종래에는 이를 형용사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의 활용이 형용사와 동일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이-’는 ‘-로세, -로구나, -ㄹ세, -로소이다, -러라’ 등과 같이 ‘이-’의 어원형이 ‘*일-’이었다는 데서 오는 특이한 활용형을 가질 뿐이다. ‘이-’를 지정사라는 독립적인 품사로 파악한 것이 최현배 문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형용사 중 ‘이-’만을 특정하게 가리키기 위한 이름으로 ‘지정’이란 이름을 쓴다. 따라서 형용사 중에서 ‘이-’만을 따로 가리키는 이름은 ‘지정 형용사’라는 것이 된다.

(3) 어미 ‘-으니, -으려, -으면, -은, -을’ 등과 같이 흔히 ‘으’를 앞에 가지는 어미를 일반적으로 하나의 어미로 취급하나, 여기서는 ‘으’와 후행하는 ‘-니, -려, -면, -ㄴ, -ㄹ’ 등을 구별하여 ‘으’를 조음소로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가령 동사 ‘가-’의 관형사형인 ‘갈’과 같으면 그것을 ‘가-+-을(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하지 않고, ‘가-+-ㄹ(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한다. 또 가령 ‘가-’의 관형사형 ‘간’과 같으면 ‘가-+-은(관형사형 어미)’으로 분석하지 않고, ‘가-+-ㄴ(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한다. 즉 어미의 기본형을 ‘-을, -은’으로 보아 어미의 일부인 ‘으’가 탈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으’를 가지지 않은 형식을 기본형으로 분석한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가령 ‘먹-’의 미래 관형사형 ‘먹을’과 같으면 어미 ‘-을’을 가지는 형식으로 분석하지 않고, ‘먹-+-으(조음소)-+-ㄹ(관형사형 어미)’와 같이 조음소 ‘으’를 가지는 형식으로 분석한다. 이는 분간 어미가 본래 ‘으’를 가지는 것으로 보면, ‘불그[붉으]죽죽하다’와 같은 예의 ‘으’ 및 ‘가니(갈[摩]+니(연결 어미)’와 같은 예에서 ‘ㄹ’이 떨어지는 현상이나, ‘좋으니? 좋니? 싫으니? 싫니?’와 같이 어떤 말은 두 형식을 모두 허용하게 되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이다.

(4) 중세어의 ‘-오, -우, -옴, -움’에 대해서 필자는 이들이 ‘-오-+-, -우-+-, -오-+-ㅁ. -우-+ㅁ’과 같이 분석되어야 한다고 믿는 바이지만, 형식적으로는 허웅설을 좇아 ‘-오, -우, -옴, -움’과 같이 이들이 각각 전체적으로 하나의 어미가 되는 것으로 분석한다. 때로는 이들 분석 뒤에 ‘-오/우-’를 선어말 어미로 분석하기도 한다는 견해를 덧붙여 놓았다. 이는 일종의 절충안으로, 역주가 일반적인 견해를 완전히 돌보지 않을 수 없어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이다.

(5) ‘처격 조사’는 비교적 그 범위를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에’나 ‘의’ 중 방향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만을 ‘방향격 조사’로 분석하고, 대체로 장소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처격 조사’로 분석하였다. ‘~에 섞다’와 같은 예의 ‘~에’에 대해서도 방향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예들은 ‘처격 조사’로 분류되었다.

(6) 장차(張次)에서 상첨자 1ㄱ은 제1장 앞면을 가리키고, 1ㄴ은 제1장 뒷면을 가리킨다. 이하 같다.

(7) 형태소 분석에서 ‘+’ 기호는 어기와 어이 사이, 용언과 어미 사이, 체언과 조사 사이 및 어미와 어미, 조사와 조사 사이에 쓰고, ‘#’ 기호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용언의 어간, 어미, 선어말 어미, 접미사 등에는 관례에 따라 관련 대상이 오는 선후행 위치에 ‘-’을 표시하기로 한다.

(8) ‘ㅎ’ 종성 체언은 가령 ‘[地]’와 같으면, ‘’와 같이 표시하는 방법도 있으나, 여기서는 ‘ㅎ’과 같이 ‘ㅎ’을 선행 음절에서 따로 분리하여 표시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15세기 어형이 현대어형과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다.

(9) 약초, 식물명 및 의서, 방서 등에 대해서는 국립국어연구원 편(1999)의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편(1996)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을 많이 참조하였고, 인터넷 홈페이지의 ‘동의보감’ 및 ‘고졸(古拙), 춘보(春甫)의 집입니다’를 여러 번 검색하였고, 기타 동인당한의원 등의 한의원 홈페이지 및 한의원 블로그를 많이 참조하였다. 약이름이나 의서나 방서들에 대하여 이들에 힘입은 바 큼을 밝혀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기타 김동소(2003) 교수의 ≪역주 구급방언해 상≫, 김문웅(2004) 교수의 ≪역주 구급방언해 하≫, 김동소(2007) 교수의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1≫, 남성우(2008) 교수의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2≫, 김문웅(2008) 교수의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3≫,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6≫ 등의 부록도 참고하였다.

(10) 중세어 해석에 있어서는 유창돈(1964)의 ≪이조어 사전≫(연세대학교출판부) 및 남광우(1960/1971 증정)의 ≪고어사전≫을 참조하였고, 한글학회 편(1992)의 ≪우리말 큰사전≫ 및 홍윤표 외(1995)의 ≪17세기국어사전≫ 등을 참조하였음을 밝혀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기타 김동소(2003) 교수의 ≪역주 구급방언해 상≫, 김문웅(2004) 교수의 ≪역주 구급방언해 하≫, 김동소(2007) 교수의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1≫, 남성우(2008) 교수의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2≫, 김문웅(2008) 교수의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3≫, ≪역주 구급간이방언해 6≫ 등의 풀이나 부록도 참고하였음을 밝혀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11) 풀이에 참고한 문헌은 때로 주해 중이나 뒤에 표시하기도 하였으나, 전체 역주의 끝(202쪽)에 보인 ‘〈역주 참고문헌〉’의 문헌 번호를 대괄호 속에 나타내는 방식으로 주석을 달아 그 출처를 다소라도 밝히고자 하였다. 그 전거를 일일이 다 밝히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선학, 동학 및 한의학 블로그 관계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혜량을 바라 마지 않는다.

≪분문온역이해방≫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책의 간행 및 그 배경과 경과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은 조선 중종 37년 함경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김안국(金安國)이 왕명을 받아 호군(護軍) 박세거(朴世擧), 사맹(司猛) 홍침솔(洪沉率), 내의원 정(正) 문세련(文世璉), 직장(直長) 유지번(柳之蕃), 전의감 전 첨정(僉正) 이척(李倜), 직장(直長) 정추(鄭樞), 혜민서 전 직장(直長) 홍세하(洪世河) 등과 함께 전염성 열병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시행하기 쉬운 처방과 구비하기 쉬운 약을 취하되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 60여 방에 다시 40여 방을 첨가하여 이것을 진양(鎭禳), 불상전염(不相傳染), 복약방술(服藥方術), 노복(勞復) 등 4부문으로 나누고, 약에는 우리말 향명(鄕名)을 부기하고 필요한 곳에는 채취하는 법을 덧붙여, 중종 37년(1542)에 언해 간행한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기로 한다.

(1)가. ≪분문온역이해방≫의 편찬은 김안국이 주도한 것이다.

나. ≪분문온역이해방≫이 간행된 것은 중종 37(1542)년이다.

다. 약이름에는, 우리말 이름을 더하고 그 채취하는 법을 덧붙인 것도 있다. 모든 약이름에 우리말 이름을 덧붙인 것은 아니다.

중종실록 37년 6월 13일(임진)의 기록에는 함경도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慶源), 부령(富寧), 경성(鏡城), 경흥(慶興), 회령(會寧) 등의 읍에 전염병이 치성(熾盛)하므로 ≪온역이해(瘟疫易解)≫를 하송(下送)하여 구료(救療)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나타난 ≪온역이해(瘟疫易解)≫는 ≪분문온역이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 보이기로 한다.

(2)가. 중종 37년에는 함경도 지역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나. 중앙에서는 ≪온역이해≫를 하송하여 구료케 하였다고 한다. 이에서 ≪온역이해≫는 ≪분문온역이해방≫을 말한다.

중종 1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온역질(瘟疫疾)은 전염되기 쉽고 사람이 많이들 그로 인해 죽기 때문에, 세종조에는 생명을 중히 여기고 아끼는 뜻에서 ≪벽온방(辟瘟方)≫ 같은 것을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경향에 인포(印布)하였는데, 지금은 희귀해졌기로 신이 또한 언해를 붙여 개간하였습니다. 또 ≪창진방(瘡疹方)≫에 대해서는, 이미 번역하여 개간하였으나 경향에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요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병으로 죽기 때문에 신이 경상도로 갈 적에 이를 싸 가지고 가서 거기서 간행하여 반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구급에 간편한 비방을 널리 반포하던 성종조의 전례를 따라 많이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소서.” 하고 주청한 것이 실록에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이전에도 ≪벽온방≫을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경향에 인포(印布)하였는데, 희귀해져서 김안국 자신이 또한 언해를 붙여 개간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로 보면, ≪분문온역이해방≫의 김안국 서문에 나타나는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는 아마도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또한 이해에 편하도록 한다.

(3)가. 김안국은 이전에도 ≪벽온방≫과 ≪창진방(瘡疹方)≫을 번역, 개간한 일이 있다.

나. 김안국 서문에 나타나는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는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중종 때에는 전염병이 크게 번지는 것은 실록 기사에서 알 수 있다([21] 참조).

중종 20년 2월 4일(계사)에는 평안도 관찰사 김극성(金克成)이 치계하기(馳啓, 보고하여 올리기)를, ‘전일에 치계한 뒤에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도내(道內)의 백성들은 벽동(碧潼) 14명, 위원(渭原) 5명, 가산(嘉山) 18명, 삭주(朔州) 15명, 영원(寧遠) 4명, 선천(宣川) 44명, 평양(平壤) 28명, 영변(寧邊) 34명, 정주(定州) 58명, 의주(義州) 47명, 운산(雲山) 25명, 숙천(肅川) 22명, 창성(昌城) 27명, 덕천(德川) 102명, 용천(龍川) 30명, 은산(殷山) 59명, 강동 18명, 자산(慈山) 30명[이상 6백 명. 총계는 7천 7백 24명이다.]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에 대한 중종의 전교는 ‘이 장계(狀啓)를 보건대, 전염병이 이미 전일에 환자가 없던 고을에도 퍼졌으니 두어 달 뒤에는 다른 도(道)에도 파급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지극히 염려스럽다. 여러모로 빠짐없이 치제(致祭)하며 비손(손을 비비면서 소원을 말하는 것)했는데도 전염병이 이렇게 퍼지니 내가 재변을 해소할 방도를 모르겠다. 시종(侍從)들은 매양 자주 사(赦)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모두 나쁜 기운의 소치인데, 나쁜 기운은 허다히 형옥(刑獄) 사이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소방(疏放)하는 한 가지 일이 재변을 해소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에 만일 어느 죄 이상을 소방하여 인심이 화열(和悅)해지게 한다면 혹 나쁜 기운이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니, 시행 여부를 삼공(三公)에게 의논하라’는 것이었다.

중종 21년 2월 14일(계묘)에는 다시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평안도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고, 앓아 누운 사람도 많아 이들도 구료(救療)하지 못하여 죽게 될 것인데, 계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관찰사는 역시 한 도(道)의 주인이니 그런 일을 목격(目擊)하고서 어찌 처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만, 나의 진념(軫念)하는 뜻을 들어 본도(本道)의 관찰사에게 하서(下書)하여 처치해 가는 계책을 치계(馳啓)하도록 하고, 아울러 그런 뜻으로 민간을 방문(訪問)해 보고 아뢰도록 해야 한다.’ 하고, 또 정부의 낭관(郞官)을 불러 전교하기를 “재변이 이러한데 내가 무슨 계책을 써야 멈추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내가 길이 염려스러운 것은 수령(守令)들이 마음을 다해 처치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매장하지도 않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救恤)하지도 않으므로 그렇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번에 익숙한 조관(朝官)을 경차관(敬差官)이란 이름으로 내보내어, 무릇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는 일과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모두 단속하게 하도록 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또 사당(祠堂)을 세워 여귀(癘鬼)에게 제사하는 일을 전일에 정원(政院)에 물으니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과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의논하기 바랍니다.’ 했는데 내가 그때, 의논할 것이 없다고 답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백성들이 이렇게 죽어가게 되고 조종조(祖宗朝)에서도 극성(棘城, 삼국시대 만주의 금주에 있던 성. 선비족의 모용씨가 294년 북부여의 세력을 몰아내고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24] 참조)에 사당을 세워 지금도 제사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여역을 멈추게 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되, 뒷날에도 그대로 하고 폐하지 않음이 어떻겠는가? 또 소방(疏放)하는 일에 대해 전일에 대신들의 뜻이, 사(赦)는 소인(小人)들의 요행이므로 자주 내림이 합당하지 못하고, 단지 장 1백(杖一百) 이하의 죄인만 사면(赦免)함은 하늘의 시변에 응답하는 일이 못 된다고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건대 과연 1백 이하만 소방함은 진실로 경(輕)하다. 만일 서울과 외방(外方)의 도 1년(徒一年) 이하의 죄인들을 아울러 소방한다면 인심이 거의 기뻐하게 되어 재변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니, 정부와 의논하라.”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의 수가 정확하게 보고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하는 일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게 하는 것,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게 하는 것, 치제(致祭, 죽은 사람이 있을 때 제물과 제문을 주어 제사지내게 하는 것)하는 것, 비손하는 것, 원통하고 억울한 죄인들을 소방하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4)가. 당시에도 전영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는 중앙에 정확하게 보고 되고 있었다.

나. 전염병은 나쁜 기운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았고,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죽은 사람 매장, 굶주린 사람 구제나 제사지내는 것, 비손하는 것, 죄인 석방으로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 등과 같은 방법이었다. 의학적으로 전염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4나)는 ≪분문온역이해방≫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판본

≪분문온역이해방≫의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은 지금 전하지 않고,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생각되는 목판본만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완본이 아닌 낙장본으로, 29장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김안국 서 2장, 진양문((鎭禳門) 16장 7행, 불상전염문(不相傳染門) 4장 10행은 전부 남아 있으나, 복약방술문(服藥方術門)은 5장 13행만이 남아 있고, 노복문(勞復門)은 전하지 않는다.

목판본 1책으로 세부 판식은 다음과 같다. 1-7장: 사주 쌍변(四周雙邊), 6-29장: 사주 단변(四周單邊), 반엽 광곽(半葉匡郭): 20.9×17.5cm, 유계(有界), 반엽 10행 18자, 판심: 상하 세화문 어미(上下細花紋魚尾), 판심제: 이해방(易解方). 책 크기: 30.5×22cm.([35] 참조)

영인본으로는 1982년 홍문각에서 이 책과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벽온신방(辟瘟新方)≫ 등을 합본하여 낸 것이 있고, 1992년에는 김신근 편으로 여강출판사에서 ≪한국의학대계≫를 낸 것이 있는데, 그 38권에 포함된 것이 이 책이다.

3. 표기상의 특징

이 책의 표기법상의 특징을 홍문각 영인본의 홍윤표(1982)[26]의 해제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부분적으로 언어상의 특징도 포함시켜 지적하기로 한다.

(5)가. ≪분문온역이해방≫에는 언해문 한글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책보다 먼저 출간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에 방점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이 책에 방점이 찍힌 것은 이 책에 상당히 정성을 들였음을 의미한다. 크기가 매우 작아지고, 그 위치나 형태가 다소 일정하지 않게 찍히고 있다.

나. 언해문 한글 받침의 옛이응(ㆁ)은 철저하게 ‘ㆁ’ 자가 쓰이고 있으나 극히 예외적으로 유모(ㅇ) 형태의 이응이 쓰이는 일이 있다. 예. 쉬궁을 (2ㄱ), 밤만 (12ㄱ), 붕(鯽魚)를 (19ㄴ),  병니 잇 (19ㄴ).

‘쉬궁(시궁창)’의 ‘궁’은 ‘구’ 아래에 ‘ㆁ’이 쓰인 것이기 때문에, ‘구’ 아래에 ‘ㆁ’이 쓰인 것인지, ‘구’ 아래에 ‘ㅇ’이 쓰인 것인지를 구별하기 어렵다. ‘ㅇ’과 ‘ㆁ’의 구별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면, ‘ㆁ’을 구별하기 쉽게 두드러지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편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ㅇ’과 ‘ㆁ’ 글자의 구별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붕’는 15세기와 같으면, ‘부’와 같이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붕’와 같이 쓴 것은 후행 음절의 ‘ㆁ’이 차츰 종성으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병하니’는 ‘병’이 받침이 ‘ㅇ’으로 쓰인 예이다. ‘’은 거의 예외 없이 옛이응 받침으로 쓰였던 것이다.

다. 언해문의 된소리 표기에는 ‘ㅅ’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ㅂ’은 특이한 예에만 쓰이고 있다.

보기) 귿 롣고(7ㄱ), 나못 불휘 손락(7ㄴ), 싸라(9ㄱ, 24ㄴ), 라(8ㄱ, 16ㄴ), 교(15ㄱ), 가가(10ㄴ), 밤만(12ㄴ), 과(14ㄴ), 허(20ㄴ), 올손온가락으로(21ㄴ), 하휘와(25ㄴ); 열(4ㄱ), 지지(25ㄱ), 헤(6ㄱ), 좁 (27ㄱ),  약이라 (16ㄱ).

위의 예에서 보면, ‘[種], [米], [庭], -[用]’ 등에서 ‘ㅂ’계 된소리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ㅂ’이 중철된 것이다. ‘좁’과 같은 표기는 이 시대에 어두(語頭)의 ‘ㅂ’이 발음되었다기보다는 된소리로 발음되었음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ㅂ’계 된소리는 과거의 발음을 보이는 전통적인 표기의 성격을 가진다.

라.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어말 ‘ㄷ’과 ‘ㅅ’이 구별되어 표기되고 있다.

  보기) 귀시니 븓디 몯니(8ㄴ), 술 몯 먹니어든(13ㄴ).

여기서는 ‘몯’의 받침이 ‘ㄷ’이 15세기에서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이 주목되는 것이다.

마.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사이시옷이 후행어의 두음과 함께 쓰이기도 하였다. 보기) 나못 불휘 손락(7ㄴ), 밤만(12ㄴ), 올손 온가락으로(21ㄴ).

이들 예는 위의 (다)의 된소리 표기의 예로도 보인 것이다. 사이시옷이 된소리로 발음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ㅅ’이 사이시옷 표기인지 된소리 표기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기 어렵다.

바.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구개음화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보기) 흘리디(2ㄱ), 덥단 모딘 을(12ㄱ), 탄티(14ㄴ).

사.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경음화 현상이 비경음화 현상과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다. 보기) 싸라(9ㄱ, 21ㄴ, 23ㄴ, 24ㄴ, 26ㄴ, 27ㄱ), 사라(10ㄴ, 16ㄴ, 17ㄱ); 허(15ㄴ, 25ㄴ), 디허(16ㄴ);  너삼 휘(22ㄱ), 가리 불휘(24ㄴ), 묏미나리 불휘(24ㄴ).

아.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어말 유기음은 선행어의 받침을 내파화하고 후행어의 두음을 외파화하는 것으로 표기된다.

  보기)  닙플 야(9ㄴ).

자.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체언의 겹받침이나 용언의 겹받침이 모두 연철되어 쓰이고 있다.

  보기) (24ㄴ), 믿(10ㄴ), 글혀(10ㄴ).

이는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에서의 표기와 대조된다. 후자에서는 용언의 겹받침만 연철되고 체언의 겹받침은 연철되지 않았다.

차.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자음 동화에 의한 표기가 나타난다. 보기) 인니(7ㄴ), 난만(10ㄴ), 됸니라(7ㄴ, 10ㄱ, 11ㄱ).

카.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에는 보조사 ‘곰’도 쓰이고 ‘식’도 쓰이고 있다. 보기) 세 번곰 머그면(9ㄱ),  환곰 라(12ㄴ), 세 닐굽곰(15ㄱ), 여슷 환식 라(14ㄴ),  달힌 므레 스므낫식 라(16ㄴ).

타.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에는 15세기 중세어에서는 특수교체를 보이던 명사가 교체를 하지 않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 보기) 시예 면(21ㄱ).

‘시’는 15세기 중세어에서는 처격 조사가 올 때, ‘실의(‘시루에’의 의미)’와 같은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4. 해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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