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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편≫에 대하여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1. 간행 배경

≪경민편(警民編)≫은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황해 관찰사로 있을 때 황해도민의 교화를 위해 중종 14년(1519)에 편찬한 책이다. 인륜과 법제에 관한 지식을 수록하여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의 여건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계도할 목적에서 이 책을 만든 것이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에 김정국이 쓴 서문 주001)
안병희 교수의 해제(1978)에는 김정국이 쓴 글이 서(序)가 아니고 발(跋)이라 하고 있다. 허엽(許曄)의 서(序)가 맨 앞에 있는 중간본(1579)에는 김정국의 글에 아무런 제목도 붙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규장각 소장본(1658)에는 김정국의 글에 ‘警民編序’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여기서는 일단 이를 따르기로 한다.
에 이러한 목적이 자세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외람되게 고을의 근심을 나누어 맡기신 때부터 맡은 땅을 순찰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피매 매번 죄인을 판단할 때 일찍이 이에 대하여 깊이 애달파하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인륜(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오륜을 말함)의 중함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법제의 자세함을 알겠는가? 미련하기가 눈멀고 귀먹은 사람 같으며, 무지하게 오직 옷과 밥에만 매달려 스스로 그 법을 범하는 줄을 깨닫지 못하여 죄에 빠져 들어가면 관원이 이에 대하여 법을 집행하여 다스리게 되니 이렇게 되면 그물로 새를 잡으며 함정으로 짐승을 잡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백성으로 하여금 어질도록 하여 죄에서 멀어질 수 있게 하겠는가? 내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사람의 도리에 가장 관련되면서 백성이 범하기 쉬운 것을 들어 열세 개[十三個] 항목으로 만들고 그 이름을 백성을 경계하는 책이라 하였으니 이를 나무에 새기고 널리 베풀어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귀와 눈에 익숙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나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을 따르기에 만(萬)에 하나라도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余自叨分陜之憂 按所部 察民風 每當斷獄 未嘗不深喟於斯 蠢愚之民 不知人倫之重 焉知制法之詳 蚕蚕然有同乎辜聵 貿貿焉唯衣食之趣 自不覺其觸犯科條 流陷於罪辜 有司 於是 按律繩之 如骨羅捕雀 機檻取獸 烏在其使民遷善而遠辜耶 余爲之憫然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三條 編曰警民 刊行廣布 俾諸蠢氓 靡不習於耳目 以冀其去惡從善之萬一)
김정국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해도의 각 지방 수령, 즉 목민관(牧民官)들에게 이 책을 가지고 ‘도민화속(導民化俗)’의 자료로 적극 활용할 것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가지고 하나의 문구로 돌려 버리며, 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치부하고 앉아 나라의 녹(祿)만 받아먹으면서 세월을 하는 일 없이 보내기만 할 뿐, 그 백성을 계도(啓導)하여 풍속을 교화(敎化)케 할 도리에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못 이 책을 만든 뜻이 아니니 무릇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거의가 또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將是編, 歸之文具, 付之迂遠, 坐食公廩, 玩愒歲月, 其於導民化俗之道, 若不盡心而致誠焉, 則殊非編者之意, 凡我牧民者, 尙亦念哉)
이뿐만 아니라, 허엽(許曄 1517~1580)도 선조 13년(1579)에 간행한 중간본(동경교육대학 소장본) 권두(卷頭)에 있는 자신의 ‘중간경민편서’에서 이 책을 널리 펴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에 이 책에 군상 1조를 더하여 4장관(경주, 상주, 진주, 청송)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속히 인쇄에 붙여 예하 고을에 반포하고, 예하 고을에서는 각기 이를 인쇄하며 또 민간의 사사로운 인간(印刊)도 허락하여 집집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 사람마다 이 책을 봄으로써 각기 선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경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전 도민들이 서로 힘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玆以此編添補君上一條 付之四長官慶州尙州晉州靑松 亟上於榟 印頒屬邑 屬邑各來印出 兼許民間私印 期於家家有之 人人見之 各有以興起而戒勅也 凡此一道之人 盖相與勉之)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 ≪경민편≫은 백성 교화의 목적과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던 기묘 사림(己卯士林)의 이상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판본의 검토

1519년(중종 14)에 김정국이 간행한 원간본은 현재까지 전하지 않는다. 현존본으로는 일본 동경교육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주002)
동경교육대학이 현재는 쓰쿠바대학(筑波大學)으로 바뀌었으므로 동경대학 소장본을 쓰쿠바대학 소장본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 영인본을 간행하면서 ‘동경교육대학본’이라 명명하여 이 명칭이 통용되고 있기에 편의상 이를 따르기로 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간행이 이루어져 이은규 교수의 자세한 보고(2005)에 의하면, 모두 11종의 이본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에 의거하여 11종을 모두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1579년 진주판 중간본(동경교육대학 소장본. 단국대 영인본)
(2) 1579년 상주판 중간본(텐리대학 소장본)
(3) 임진란 전후 구결본(개인 소장본)
(4) 1658년 개간(改刊)본(규장각 소장본. 단국대 영인본)
(5) 1658년 이후 번각본(경북대 소장본)
(6) 1658년 이후 번각본(영남대 소장본)
(7) 1731년 초계 개간(開刊)본(홍문각 영인본)
(8) 1745년 완영 개간(開刊)본
(9) 1748년 용성 개간(開刊)본
(10) 1748년 완영 중간본
(11) 19세기 목판본(상문각 영인본)
위에 제시된 11종의 이본 사이에 어떤 특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여기서는 언급할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이은규(2005)에 예시된 언해문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파악하고자 한다. 위에서 소개한 이본 차례 번호를 따라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3)과 (6) 판본의 예문은 빠져 있다.
원문 : 夫妻和樂 永保厥家 乖戾不和 終致禍亂
(1) 남진 겨지비 화며 즐거오면 기리 그 집을 안부고 거저 화티 아니면 내애 홰며 난을 닐위니
(2) 남진 겨지비 화며 즐거오면 기리 그 집을 안보고 거슯저 화티 아니면 내애 홰며 난 닐위니
(4) 夫부妻쳐ㅣ 和화樂낙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어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5) 夫부妻쳐ㅣ 和화樂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7) 夫부妻쳐ㅣ 和화樂낙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어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느니라
(8)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9)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10)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11) 夫부妻쳐ㅣ 和화樂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위에 나타난 (1)~(11)의 언해문을 보면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문두(文頭)의 주어가 ‘남진 겨지비’로 되어 있는 부류와 ‘부쳐(夫妻)ㅣ’로 되어 있는 부류의 두 계열이다. 두 계열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각각 여러 종류의 이본들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실책(實冊)을 접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여기서는 영인본이 간행된 판본으로서 전자의 계열에 속하는 〈동경교육대학본〉과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규장각본〉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제 〈동경교육대학본〉과 〈규장각본〉에 대한 서지적 검토를 통해 그 차이를 좀 더 이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희 교수의 해제(1978)를 참고하였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동경교육대학본〉은 단국대학교에서 〈규장각본〉과 함께 안병희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진 책이다. 1권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판본은 허엽의 ‘중간경민편서(重刊警民編序)’ 1장, 김정국의 ‘경민편서(警民編序)’ 1장, 본문 19장으로 된,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책이다. 그런데 김정국의 서문은 ‘경민편서(警民編序)’라는 제목도 없이 첫 행에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마침 〈규장각본〉에는 ‘경민편서(警民編序)’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이를 인용해 붙인 것이다. 허엽의 서문 끝에 있는 ‘萬曆己卯觀察使陽川許曄序’라는 간기에 의해 〈동경교육대학본〉이 만력 7년(己卯年), 즉 1579년(선조 12)에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김정국 서문에는 끝의 간기가 ‘正德己卯冬十月觀察使聞韶金正國謹識’로 되어 있어 원간본은 정덕 14년(己卯), 즉 1519년(중종 1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허엽의 중간본인 〈동경교육대학본〉은 김정국의 원간본이 나온 지 60년 만에 재간행된 셈이다.
〈동경교육대학본〉에 실려 있는 두 서문을 검토해 보면, 허엽의 서문에는 “玆以此編添補君上一條”라는 기사가 있고 김정국의 서문에는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三條 編曰警民”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이를 통해 김정국의 원간본은 내용이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는데 허엽이 중간하면서 ‘君上’이란 한 항목을 새로 만들어 제일 첫 항목으로 첨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허엽이 간행한 중간본은 다른 판본과는 달리 한 항목이 많아져 모두 14개 항목이 된 것이다.
이 책의 내제(內題)와 판심제는 모두 ‘警民編’이다. 권말(卷末)에는 ‘重刊警民編終’이라 하여 ‘중간경민편(重刊警民編)’이라는 서명을 사용하고 있다. 판식(版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19.3cm, 28cm이고, 유계(有界) 11행으로서 한문 원문은 매행(每行) 17자, 언해문은 한문 원문보다 1자 낮추어 썼으므로 16자이며, 김정국의 한문 서문도 1자 낮추어 16자로 되어 있다.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은 쌍행(雙行)이며 차용 문자로 표기하였다. 판심은 백구(白口)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로 되고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인 ‘警民編’과 장차(張次)가 표기되어 있다. 권두의 ‘중간경민편서(重刊警民編序)’라는 제목이 표기된 행의 하단에 ‘晋州印’이라고 적힌 글씨와, ‘중간경민편서’에 있는 “付之四長官慶州尙州晉州靑松 亟上於榟 印頒屬邑 屬邑各來印出”의 기록을 관련지어 볼 때 이 중간본은 진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체재는 같은 시기에 형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언해하여 간행한 ≪여씨향약언해≫ ≪정소언해≫와 일치되는 점이 많은데, 이는 김정국이 형의 이들 책을 참고한 결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한문 원문에 첨가된 차자 표기의 구결이 일치하고, 언해문에는 한자의 표기나 병기가 전혀 없다는 점이 또한 일치한다.
이 책의 언해문에 나타난 표기법과 언어적 특징은 간행 시기인 16세기 말의 언어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방점은 없고 ㆁ은 종성 표기에 남아 있으며 ㅿ은 거의 소멸된 상태에서 몇 예가 발견된다.( 2ㄱ, 아 가지며 6ㄴ, 아 19ㄱ)
다음은 〈규장각본〉인데, 이 판본의 간행 경위에 대해서는 권말에 있는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의 ‘청간경민편광포제로차(請刊警民編廣布諸路箚)’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차자(箚子)에서 간행에 관련된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다만 그 원본을 두루 구해도 얻지 못하다가 오래 뒤에야 해서(海西)에서 얻었는데, 언해(諺解)가 없으면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그 원본을 사용하여 교열하고 번역하는 한편, 진고령(陳古靈)과 진서산(眞西山)이 세속을 교화시킨 여러 편(篇)을 그 아래에 붙이되 간간이 요약 정리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선묘조의 상신(相臣) 정철(鄭澈)이 지은 훈민가(訓民歌)를 첨부해 기록된 것을 얻어, 시골 부녀자들로 하여금 이를 늘상 암송하게 함으로써 감발(感發)되고 징계되는 바가 있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而第其原本 遍求不得 久乃得之於海西 而無諺解 窮鄕氓隷 難於通曉 故遂用其本 校證翻譯 且取陳古靈眞西山諭俗諸篇 附於其下 而間有節略者 欲民之易曉也 偶得宣祖朝相臣鄭澈所作訓民歌添錄者 欲使村閭婦孺 尋常誦習 有所感發而懲創也)

위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이후원이 이 책을 간행할 때 원간본은 구하지 못하고 한문만으로 된 사본(寫本)을 구하여 이를 교열해서 번역한 점이고, 둘째는 기존의 책에 없던 부록을 많이 첨부하였다는 점이다. 그 부록은 13세기 중국에서 이용되던 자료와 16세기말 조선의 시가 등 모두 5편으로서, 송나라 진양(陳襄)이 선거(仙居)의 지방 장관으로 있을 때 쓴 〈고령진선생선거권유문(古靈陳先生仙居勸諭文)〉, 그리고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담주와 천주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쓴 〈서산진선생담주유속문(西山陳先生潭州諭俗文)〉, 〈천주권유문(泉州勸諭文)〉, 천주권효문(泉州勸孝文)〉, 이 밖에 조선시대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16편의 〈훈민가(訓民歌)〉 등이다. 이후원은 ≪경민편≫의 간행을 국왕에게 상주하여 마침내 윤허를 얻게 됨으로써 개간(改刊)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원이 상주한 날과 윤허를 얻은 ≪효종실록≫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후원이 또 아뢰기를, “경민편(警民篇)은 바로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김정국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편집한 것입니다. 본도 백성들의 습속이 미련하고 무식하므로 정국(正國)이 이 책을 지어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것도 간행하여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厚源又曰 警民篇 乃己卯名賢金正國爲黃海監司時所編也 本道民俗 頑蠢無知 正國作是書以敎之 請亦令刊布 從之) 주003)
효종실록 7년(1656) 7월 28일(甲戌).
“경의 차사(箚辭)를 보건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서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해당하는 부서로 하여금 차사대로 시행하게 하겠는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도에 보탬이 되리라 기대된다.” 하고, 그 차자(箚子)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곧바로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省卿箚辭, 意非偶然 予用嘉悅 當令該曹 依箚辭施行 庶有補於化民成俗之道爾 下其箚於禮曹 禮曹請趁卽鋟梓 廣布中外 從之) 주004)
효종실록 9년(1658) 12월 25일(丁亥).

위에 있는 두 가지 실록 기사를 통해서, 이후원이 이 책의 간행을 처음 상주한 때는 1656년(효종 7)이고 간행을 윤허 받아 착수한 때는 1658년(효종 9)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책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가 될 것이 예상되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실록의 기록대로 이후원의 개간본인 〈규장각본〉의 간행 시기를 1658년으로 잡는다.
앞에서 본 이후원의 차사(箚辭)에 의하면, 1658년의 ≪경민편≫은 이후원이 독자적으로 번역하였으므로 김정국의 원간본이나 허엽의 중간본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도 허엽의 간행본과는 다른데다 표기도 차자 표기가 아니라 한글 표기로 되어 있다. 언해도 물론 차이가 있다. 국어적인 특징도 대체로 17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판식은 사주쌍변에, 반곽의 크기가 가로 세로 각각 15.5cm, 21.cm이고, 유계 10행에 매행 20자이며 언해문은 1자 낮춰 매행 19자이다. 한글 구결과 주(註)는 쌍행이다. 판심은 백구 상하내향삼문어미로 되어 있으며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인 ‘警民編’과 장차(張次)가 있다. 이 책의 편성은 맨 먼저 김정국의 ‘경민편서(警民編序)’와 그 언해문이 3장, ‘경민편목록(警民編目錄)’이 1장, 본문과 부록을 합쳐 42장, ‘청간경민편광포제로차(請刊警民編廣布諸路箚)’가 2장으로 모두 48장으로 되어 있다.

3. 내용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동경교육대학본〉의 내용은 모두 1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규장각본〉은 13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판본의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동경교육대학본〉
(1)君上 (2)父母 (3)夫妻 (4)兄弟姉妹 (5)族親 (6)鄰里 (7)鬪歐 (8)勤業 (9)儲積 (10)詐僞 (11)犯奸 (12)盜賊 (13)殺人 (14)奴主
〈규장각본〉
(1)父母 (2)夫妻 (3)兄弟姉妹 (4)族親 (5)奴主 (6)鄰里 (7)鬪歐 (8)勤業 (9)儲積 (10)詐僞 (11)犯奸 (12)盜賊 (13)殺人
〈동경교육대학본〉은 〈규장각본〉에 없는 ‘군상(君上)’이 첫 항목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노주(奴主)’ 항목의 배치가 두 판본 사이에 달라져 있다. 〈동경교육대학본〉이 맨 끝 항목인 열네 번째로 되어 있으나 〈규장각본〉에서는 다섯 번째에 배치하여 놓았다.
위에 열거된 목록을 보아 대강 짐작할 수 있겠지만 ≪경민편≫의 내용은 향촌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와 윤리를 권장하면서 흔히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다. 그러고는 범죄를 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인 이유와, 범죄할 경우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처벌 등을 언급하고 있다. ‘군상’을 제외한 13개의 항목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가족과 친족에 관련된 문제로서 이에는 ‘부모(父母)’, ‘부처(夫妻)’, ‘형제자매(兄弟姉妹)’, ‘족친(族親)’ 등이 속한다. 여기서는 한 마디로 가족 윤리를 내세우고 있다. 부모와 그 이상의 어른들에 대해서 언제나 공경하는 마음과 효도하는 법을 강조하고 있다. 부부간에는 화락할 것이며 형제자매 사이에서는 조그만 이해 관계로 대립하여 원수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족친’으로서는 숙부모(叔父母)를 들고, 숙부모도 부모와 똑같이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어기고 가족 구성원 사이에 살해를 비롯해서 구타, 책망, 배반 등의 범법 행위를 하면 상당한 중벌에 처하게 된다는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는 향촌이라는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인리(鄰里)’, ‘투구(鬪歐)’, ‘범간(犯奸)’, ‘도적(盜賊)’, ‘살인(殺人)’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이 중에서 ‘인리’를 제외한 다른 항목은 모두 일상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이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 정욕을 참지 못하고 간통하는 것, 춥고 배고픔 때문에 도적질하는 것, 재물을 탐하거나 원수가 져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 등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이므로 누구든지 이를 범했을 때 심하면 사형에까지 처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인리’는 공동체 속에서 강자와 노약자 간에 질서와 윤리를 확립하여 화목한 사회를 만들도록 교훈하는 것이므로 ‘인리’도 향촌의 공동생활에 관계되는 내용이나 범죄적인 내용과는 구별된다.
셋째는 경제적인 문제를 다룬 부분이다. ‘근업(勤業)’과 ‘저적(儲積)’이 이에 해당한다. ‘근업’은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여 가을에 많이 거두도록 하라는 내용이고, ‘저적’은 가을걷이 한 뒤에 식량의 낭비를 막고 절약하여 다음 해 농사지을 양식까지 준비하라는 내용이다. ‘근업’과 ‘저적’은 주로 농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생산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소비에서 낭비를 없앰으로써 경제적인 윤택을 달성하여 굶주림과 군색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범죄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업’과 ‘저적’에서는 처벌 조항도 형식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넷째는 ‘사위(詐僞)’로서, 이는 거짓 일을 꾸미는 것이다. ‘사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거짓 일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문서 위조, 문기(文記)의 위조, 인장 위조, 관원 사칭, 현직 관원의 자제 사칭 등이다. 이에 대한 형벌도 위조에 따라 다양하게 부과하고 있다. ‘사위’ 조항에서는 위와 같은 거짓 일을 도모하지 말고 모든 일에 성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주(奴主)’가 있다. 이 항목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군신(君臣) 관계에 비하여 주인에 대한 종의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법을 어겼을 때는 중벌에 처하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동경교육대학본〉에서 보이고 있는 ‘군상(君上)’ 조항은 ≪경민편≫의 전체적인 서술 방식에 맞지 않는다. 일반적인 서술 방식은 각 조항의 주제에 대해서 실천적인 윤리를 제시한 다음 법을 어겼을 경우의 처벌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군상’에서는 주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백성이 할 일이나 도리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언급할 뿐 구체적인 처벌 내용에 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경민편≫ 본래의 서술 방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4. 간행자

≪경민편≫의 원간본을 편찬한 김정국, 중간본을 간행한 허엽, 그리고 다시 개간본(改刊本)을 간행한 이후원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자(字)가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이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 사간, 승지 등을 거쳐 151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경민편≫을 간행하고 학령(學令) 24조를 만들어 도민과 학자를 권면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양에 내려가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쓰므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되어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토록 하였으며, 다시 그 이듬해 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540년 병으로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 병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성품이 순정(純正)하고 공평하며 무리함이 없었다. 정사(政事)를 잘하여 방백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고 한다. 사화로 은거할 때는 매우 가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가 편찬한 저술로는 ≪사재집(思齋集)≫,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입도(歷代授受承統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척언(思齋摭言)≫, ≪경민편≫ 등이 있다.
허엽(許曄, 1517~158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며 군자감 부봉사 허한(許瀚)의 아들이고 서경덕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혐의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재기용되어 이듬해 대사성에 오르고 1562년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경연에 참석,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구수담(具壽聃), 허자(許磁)의 무죄를 논하다가 또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과격한 언사 때문에 또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어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말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의 ≪경민편≫을 보충하여 중간하였다. 벼슬을 30년간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으로 군수 이욱(李郁)의 아들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어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출전하였다. 그 뒤 단양군수,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나서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637년 승지(承旨)에 이어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1642년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48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성,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65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分藏)케 하였으며 이어 한성부 판윤, 형조, 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때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을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여 능변으로 악을 질시하였고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 문헌〉

김해정(1993). 경민편언해 연구.≪한국언어문학≫ 31집. 한국언어문학회.
안병희(1978). 해제 ≪이륜행실도·경민편≫(영인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윤석민 외(2006). ≪쉽게 읽는 경민편언해≫. 박이정출판사.
이은규(2005). ≪경민편(언해)≫의 어휘 연구. ≪언어과학연구≫ 35집. 언어과학회.
이은규(2007). ≪경민편(언해)≫이본의 번역 내용 비교. ≪언어과학연구≫ 43집. 언어과학회.
정호운(2006). 16ㆍ7세기 ≪경민편≫ 간행의 추이와 그 성격. ≪한국사상사학≫ 제26집. 한국사상사학회.
『구급간이방』 해제 주001)
* 이 해제는 김남경(2005):≪구급방류 언해서의 국어학적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박사 학위 논문)을 원저자의 허락을 받아 상당 부분 수정하여 옮긴 것이다.
김동소

1. 형태 서지적 고찰

≪구급 간이방≫은 조선조 성종 20년(1489년) 왕명에 의해 윤호(尹壕) 등이 편찬한 의서(醫書)이다. 이 문헌에는 허종(許琮)의 서문이 실려져 있는데, 이 서문에 의하면 이보다 먼저 편찬된 ≪의방 유취(醫方類聚)≫, ≪향약 제생방(鄕藥制生方)≫, ≪구급방(救急方)≫ 등이 모두 백성들이 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민생 의병지 용(民生醫病之用)’에 편하게 하도록 윤호, 임원준(任元濬), 박안성(朴安性), 권건(權健) 및 허종 등에게 명하여 책을 완성하니, 모두 8권 주002)
≪구급 간이방≫의 권수에 대해서는 실록과 허종의 서문에서 기록의 차이를 보인다.
“內醫院提調領敦寧尹壕等 進新撰救急簡易方九卷”(≪성종 실록≫(성종20년 5월조))
“搜括古方病 取其要而以急爲先藥 收其寡而以易爲務 其所裁定實禀 神規擇之 必精簡而不略 又飜以方言 使人易曉 書成凡爲卷八爲門一百二十七 命曰救急簡易方”(허종의「서문」성종20년 9월 上澣)
이 책의 편찬 연대가 실록에서는 성종 20년 5월이고 허종이 쓴 서문에는 성종20년 9월 상한(上澣)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9권으로 만들었으나 후에 8권으로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서문과 목록을 별권으로 한 것일 수도 있겠다.(김신근 1987: 123-9 참조.) 그러나 짧은 시기에 다시 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서문과 목록에 모두 8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8권일 가능성이 크다.(전광현 1982: 521 참조)
127문(門)이며, 이름을 ≪구급 간이방≫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의 간행에 대해, ≪성종 실록≫(성종 20년 5월 30일조)에 “모든 고을에 두루 반포되기는 어려우니, 모든 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도에서 개간하여 계수관이 찍어 내도록 청하였다.(諸邑難以遍頒 請令道監司開刊于本道界首官印行)”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구급 간이방≫(이 아래에서는 ≪간이방≫으로 줄여 부름)은 중앙 관청에서 간행한 것을 다시 지방에서도 개간하여 반포하도록 한 뒤 여러 차례 번각(飜刻)되었는데, 현전하는 ≪간이방≫ 자료에는 그러한 흔적이 권별 혹은 한 책 안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이 문헌은 여러 시기에 걸쳐 번각되었으므로, 한 책 안에서도 원간본을 번각한 것, 번각본(飜刻本)을 다시 번각한 것, 판의 마모나 소실에 따라 새로 판을 만들어 넣은 것(보각(補刻)한 것) 등이 뒤섞여 있다.
≪간이방≫은 1489년 간행된 이후 원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한 책 안에서 여러 차례 번각된 것들이 함께 묶어져 전해지기 때문에 현전하는 번각본의 번각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번각 과정을 추정해 보면 1489년에 원간본인 을해자본(乙亥字本)이 간행되었고, 판목의 노후로 인한 번각은 대체로 5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므로, 1550년 이후의 번각본의 번각판과 1600년 이후의 보각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그 대략의 시기를 아래 도표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표 1] ≪간이방≫의 번각 과정

1489년원간본(을해자본)
1490-1500년대번각본번각본(목판본)번각본보급을 위한 번각
※지역별 차이
1550년 이후번각본의 번각판마모·결락에 의한 번각
※각수(刻手)별 · 지역별 차이
1600년 이후보각판마모·결락에 의한 번각
※각수별 · 지역별 차이

≪간이방≫은 권1, 권2, 권3, 권6, 권7의 5권만 전해지는데, 그 권별 소장처를 살펴보면, 권1은 일사 문고(一簑文庫)가, 권2는 김영탁(金永倬) 씨가, 권3은 동국대 도서관이, 권6은 1996년 1월 19일 보물 제1236호로 지정되어 충북 음성군 대소면 한독 의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주003)
문화관광부 문화재 관리국 (1998: 75) 참조.
또 다른 책을 통문관(通文館) 사장 이겸로(李謙魯) 씨가 소장하고 있다. 권7은 대구의 한 개인과, 영남대, 만송 문고(晩松文庫), 고 김완섭(金完燮) 씨 등 주004)
三木榮 (1976: 60-1)에 의하면 황의돈 씨가 〈권3, 4, 6, 7〉을, 이인영 씨가 〈권6〉을 소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 소장하고 있다. 주005)
전광현 (1982: 518)에 의함.
그 중 권1, 권2는 단국대에서, 권3, 권6, 권7은 홍문각에서 각각 영인한 바 있다.
책의 표지에 ‘救急簡易方 全’이라고 씌어 있는데 후대에 써 붙인 것으로 보인다. 권1의 책 크기는 29.5cm×19.1cm이고, 반광(半匡)의 크기는 21cm×15.2cm이다. 주006)
〈권2〉, 〈권3〉, 〈권6〉은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책의 크기를 알 수 없으나, 〈권2〉는 전광현(1982: 518)에 의하면, 26.1cm×18.5cm, 반광(半匡)의 크기는 21cm×15.2cm이다.
책머리에 ‘救急簡易方 序’라는 허종의 서문이 3장 있고, 그 다음에 ‘救急簡易方 目錄’이 127항목에 걸쳐 나열되어 있다. 목록 다음 장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대체로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지만 면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007)
〈권3〉의 42장에는 임란 전후로 추정하는 대흑구 상하 내향 흑어미(大黑口上下內向黑魚尾)가 나타난다. 이 장에는 계선과 방점이 없다(또한 3장, 9장 전면에 걸쳐서도 방점이 보이지 않는다.).
판심제(版心題)는 ‘簡易方’ 주008)
〈권2〉의 90, 91장은 판심제는 ‘簡易’로 보인다.
이다. 원문은 8행 17자(언해는 16자)이며 계선이 있다. 5자째와 9자째 사이에 판심제와 권차(卷次)가 있고 10자째와 12자째 사이에는 장차(張次)가 있다. 〈권1〉은 모두 116장, 〈권6〉은 95장, 주009)
문화관광부 문화재 관리국 (1998: 75)에서는 “前部 5張 後尾 1張이 缺落되어 복사하여 보수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권6〉의 앞부분 5장, 뒷부분 1장이 떨어져 나간 것을 〈권6〉의 또 다른 책인 통문관 이겸로 씨 소장본을 복사하여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7〉은 85장으로 낙장이 없고, 〈권2〉는 51장이 낙장, 〈권3〉은 22장 뒷면과 23장 앞면이 낙장되었다.
〈권1〉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원본을 확인한 결과,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에서 간행된 영인본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영인본에서는 장차가 모두 바르게 되어 있었으나 원본에는 11장이 15장과 16장 사이에 있고, 10장 다음에 12, 13장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은 〈권7〉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41장과 44장이 바뀌어 있고 83장의 뒷면에 84장의 뒷면이, 84장의 앞면과 85장의 앞면의 자리가 서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여러 판이 뒤섞인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권1〉의 원본의 글자와 방점 부분들을 확인한 결과, 영인본에서 ‘듯’으로 보이는 부분이 원본에서는 ‘둣(一012ㄴ1)’, ‘의’로 보이는 부분은 ‘위(一036ㄱ1)’, ‘시’로 보이는 부분은 ‘(一058ㄱ1)’, ‘’로 보이는 부분은 ‘미(一066ㄱ4)’임이 확인되었다. 방점의 경우는 권1의 지질(紙質)이 잡티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어서 원문에는 점이 아닌데도 영인본에는 방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매우 많았다. 또한 〈권7〉의 원본에서는 탈획이나 오각이 많이 나타난다.

[표 2] ≪간이방≫의 형태 서지

소장처〈권1〉 일사문고 〈권2〉 김영탁
〈권3〉 동국대 〈권6〉 한독 의약 박물관, 이겸노
〈권7〉 대구 개인 소장, 김완섭, 영남대, 만송문고
표지 서명〈권1〉에 ‘救急簡易方全’ 개장.
〈권2·3·6·7〉 표지 없음
서문〈권1〉에 “救急簡易方序”라는 허종의 서문이 3張 있다.
목록서문 다음에 卷之一에서 卷之八까지의 127항목이 있다.
권수제救急簡易方卷之一
책크기(㎝)29.5×19.1
판종목판본
판식반엽광곽(㎝)21×15.2
사 주단변
계 선있음
행수 및 자수8행 17자
판심魚尾대체로 상하 내향 흑어미이지만 매우 혼란되어 나타남.
판심제簡易方
낙장〈권2〉의 51장, 〈권3〉의 22장 뒷면과 23장 앞면

≪간이방≫은 특이하게도 글자의 모양이나 크기, 굵기가 일정하지 않을 뿐더러 반광의 크기와 어미(魚尾)의 모양이 다른 장들이 많이 뒤섞여 있다. 주010)
≪간이방≫의 모든 책에서 이와 같은 현상들이 발견된다.
≪간이방≫의 〈권1, 2, 3, 6, 7〉에 나타나는 어미들을 비교해 본 결과,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고 같은 책 내에서도 여러 가지가 나타났다. 현전하는 ≪간이방≫에 나타나는 어미는 모두 전권을 통틀어 14종류이다.

[표 3] ≪간이방≫ 권별 어미의 형태

번호유형어미의 형태권수
12367
1A
2
3
4
5
6
7
8
9B
10
11
12C
13
14
54864
* ◎는 많이 나타남, ○은 나타남의 뜻임.

각 권의 주된 어미 유형을 살펴보면 〈권1, 2, 3〉에는 2의 형태가, 〈권6, 7〉에는 1의 형태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권별로는 〈권3〉(8가지)과 〈권6〉(6가지)에 가장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권6〉에 나타나는 ‘대흑구 상하 세화문 어미(大黑口上下細花紋魚尾)’(표의 13번)는 중종부터 임란 직후까지의 문헌에 자주 보이는 것이다. 주011)
안춘근 (1991: 182) 참조.
그러나 어미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각 장(張) 별로 몇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간이방≫ 을해자의 번각본

≪간이방≫번각본의 번각판

≪간이방≫ 보각판

판본은 각 장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마모의 정도, 글자의 모양ㆍ크기ㆍ굵기를 기준으로 ① 을해자의 번각본, 주012)
여기에서는 을해자본을 번각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간의 일차 번각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원간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② 번각본의 번각판, ③ 보각판 주013)
≪간이방≫의 판종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원간본 : 성종 20년(1489)의 원판 또는 초판본을 말한다.
② 번각본 : 원본을 따라 새로 판본을 새긴 것이다.
③ 보각본 : 판목의 일부분이 마모 또는 분실되어 뒤에 그 부분만을 보각(補刻)하여 만들어 낸 책. ≪간이방≫의 보각판은 괘선이 없고 방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들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현전하는 을해자의 번각본은 번각 후 시간이 많이 경과하고 인출되었으므로 마모가 심하고 글자의 굵기가 굵으면서도 크다. ② 번각본의 번각판은 마모는 심하지 않으나 탈획이나 오각이 많다. ③ 보각판은 글자의 모양이 날카롭고 크기가 작고 굵기도 가늘다. 보각판 중 좀더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판은 계선도 없고 방점도 거의 생략되었다.
앞서 제시한 ≪간이방≫의 번각본을 번각 정도 및 판의 특성에 따라 판종을 3가지로 분류한 것을 장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4] ≪간이방≫의 판종별 분류

을해자의 번각본번각본의 번각판보각판
17세기 이전 보각판17세기 보각판
권1나타나지 않음(001-025)
(027~036)
(042)(044~049)
(052~057)(059~077)
(081~088)
(089~097)(106~116)
(026)
(037~041)
(043)(050)
(051)(058)
(078~080)
(098~105)
나타나지 않음
권2나타나지 않음(001~010)(013~023)(027~029)
(031)(034) (043~050)(053~055)
(058~081)(082~089)(092~101)
(102~108)(109~121)
(024~026)
(030)(032)(033)
(035~038)
(039ㄴ~042)
(052)(056)
(057)(090)(091)
나타나지 않음
권3(058ㄱ)
(077ㄴ)
(087)
(095)
(106)
(001~002)(004~041)
(043~057)
(059~076)(078~086)
(088~092)
(096~105)(107~120)
(093)(094)(003)(042)
권6(027ㄴ)
(028)
(001~004)(011~014)
(015~026)
(029~032)(035~060)
(007~010)
(034)
(061~095)
(005)(006)
(033)
권7(002)(025)
(026)(036)
(040)(041)
(053ㄴ)
(001)(003~011)
(013ㄱ)(014~015)(016~022)(024)
(027)(029)(030)(033)(034~035)
(042~046)(048~053)(055~085)
(012)(023)
(028)(031)
(032)(047)
나타나지 않음
을해자 형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권은 〈권7〉이며 〈권1〉과 〈권2〉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권1〉과 〈권2〉의 경우 〈권7〉에 비해 보각판이 훨씬 많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권1〉과 〈권2〉를 비교해 보면, 〈권2〉의 보각판에는 방점이 없는 부분이 많다. 〈권3〉과 〈권6〉은 을해자의 비율 주014)
김남경 (2000: 19)에서 각 판종별 비율을 제시하였는데, 을해자 형태는 2.53%, 번각판은 76.86%, 보각판은 17.83%, 기타(한 장 안에 보각되어 분류하기 어려움) 2.13%이다.
이 매우 낮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임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흑구가 나타난다. 또 〈권6〉에서는 〈권3〉보다 많은 보각판이 보이며, 이 〈권6〉의 보각판에서는 대흑구가 많이 발견된다. 대체로 〈권7〉이 을해자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고, 〈권6〉이 원래의 모습을 가장 적게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이방≫에서 권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판각한 지역의 다름 때문으로 추정된다. 아래에서 각 판본별 표기상의 특징을 한두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을해자의 번각본

〈권6〉에 ‘오조매(六027ㄴ1)’라는 어형이 나오는데, 연철 표기되어 있다. 번각판에서는 ‘오·좀애(六037ㄴ3)’로 3회 나타난다. 〈권7〉의 을해자본에서는 자음 동화된 ‘난·니(七025ㄴ8)’가 1회, ‘난니와(七25ㄴ8)’가 2회로 자음 동화 표기가 반영되어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낟니와(七25ㄴ8)’로, 보각판에서 ‘낟니(七47ㄴ5)’로 나타난다.

2) 번각본의 번각판

(1) 혜다(七014ㄱ4) 볼근(七014ㄱ8) 리허(七073ㄴ2)
솔(七078ㄱ1) 맏(七071ㄱ4) (七014ㄱ3) 날굽(七080ㄱ5)
(2) 시로니와(七014ㄴ6) 느르게(七016ㄱ5) 닐급(七016ㄱ6)
ㄴ(七018ㄱ1) 을(七019ㄱ5) 글허(七019ㄱ8) 셕둑화(七019ㄴ7)
아(七021ㄱ8) 돈금(七024ㄱ4) 디(七048ㄴ2) 셜다(七065ㄱ7)
슷블(七068ㄱ5) 골니(七070ㄱ6) 아흑(七070ㄴ4) 흐ㄹ(七085ㄱ5)
위에 제시한 (1)은 오각의 예이고, (2)는 탈획으로 보이는 예들이다. 주015)
≪간이방≫ 〈권7〉의 원본을 확인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제시되는 오각과 탈각의 예는 주로 〈권7〉을 대상으로 하였다.
(1)의 ‘혜다(七014ㄱ4)’는 ‘혜[디]’, ‘볼근(七014ㄱ8)’은 ‘블근’, ‘리허’는 ‘디허(七073ㄴ2)’, ‘솔(七078ㄱ1)’은 ‘술’을 오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점을 획으로 잘못 인식하여 판각한 것으로 보이는 ‘(七014ㄱ3)’은 ‘’의 오각이고, ‘날굽(七080ㄱ5)’은 ‘닐굽’의 오각이다. (2)는 판의 마모나 소실 등으로 탈획된 예들이다. 번각판에서 이러한 예가 많이 보인다. 위에 탈획된 예를 어휘 및 문맥에 맞게 재구해 보면 ‘시[사]로니와(七014ㄴ6), 느[누]르게(七016ㄱ5), 닐급[굽](七016ㄱ6), [](七018ㄱ1), []을(七019ㄱ5), 글허[혀](七019ㄱ8), 셕둑[듁]화(七019ㄴ7), 아[](七021ㄱ8), 돈금[곰](七024ㄱ4), ,디[게](七048ㄴ2), 셜[졀]다(七065ㄱ7), 슷[숫]블(七068ㄱ5), 골[곪]니(七070ㄱ6), 아흑[혹](七070ㄴ4), 흐ㄹ[르](七085ㄱ5)’와 같다.
(3) 븨여, 주016)
이 예는 번각판으로 분류된 장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븨여’가 보이는 부분만은 보각된 것으로 판단된다. ‘븨-’는 〈권2〉의 이 부분과 〈권6〉의 보각판에서 4회 나타나는 것이다.
사바래, 어
(3)의 예 ‘븨여’는 〈권2〉의 번각판에 1회 나타나는 것으로, 〈권2〉의 번각판에서는 ‘비·븨여(二028ㄱ7)’로 5회, 보각판에서는 ‘비븨여(二037ㄱ4)’로 1회 나타난다. 연철 표기된 ‘사·바래(二014ㄱ8)’는 번각판에서 단 1회 나타나는 것으로, 〈권2〉의 다른 번각판에서는 분철 표기된 ‘사발애(二006ㄱ7)’로 4회 나타나고, 보각판에서도 분철 표기되어 1회 나타난다. 또 〈권7〉의 번각판에서는 ‘어(七019ㄱ6)’의 표기가 단 1회 나타나는데, 또 다른 번각판에서는 ‘어믜(七035ㄴ3)’로 5회, 보각판에서도 ‘어믜’로 2회 나타난다.

3) 보각판

(4) 몰[믈](七015ㄱ7), []야(七054ㄱ4)
(5) 긱[각](七028ㄱ4), 미[머]기라(七047ㄴ4) []으로(七028ㄱ7)
보각판에서는 (4)와 같이 오각된 예와, (5)와 같이 탈획된 예가 보이는데, 보각판은 글자가 가늘지만 선명하게 나타나 탈획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4)의 ‘몰(七015ㄱ7)’은 ‘믈’을 오각한 것으로, ‘야(七054ㄱ4)’는 ‘야’를 오각한 것이다. (5)의 ‘긱(七028ㄱ4)’은 ‘각’, ‘미기라(七047ㄴ4)’는 ‘머기라’, ‘으로’는 ‘으로’가 탈획된 것으로 보인다.
(6) 벌집
중철의 ‘벌집(三003ㄱ6)’은 ≪간이방≫에서 1회 나타나는 것으로 보각판에 보이는데, 연철 표기된 ‘버집(三003ㄱ3)’도 보각판에서 함께 나타난다.
(7) 라여
(8) 시
≪간이방≫ 전체를 통틀어 구개음화된 ‘먹지(三003ㄴ5)’가 1회 나타나는데, 이 판은 계선도 없고 방점도 없다. 후대에 보각한 것으로 파악된다. ‘하나져그내(三003ㄴ3)’도 ‘먹지’가 나타나는 판에서 보이는 것으로 단 1회 나타난다. 이것은 번각판에서 ‘하나져그나(三034ㄴ4)’로 5회 나타나는 것이다. ‘멀기셔(六80ㄱ3)’와 같이 각자 병서 ‘ㅉ’이 보이는 예가 있는데, ‘ㅉ’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는 표기로 보각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예이다. 또한 을해자본과 번각판에서 ‘라’로 나타나는 예가 보각판에서는 ‘라여(三003ㄱ8)’로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이 문헌에서 유일하다. 또 번각판의 ‘시’가 보각판에서는 ‘시(三094ㄴ4)’로 나타난다.
그 외 이 문헌에서는 방점의 표기가 분류된 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예들이 많은데, 김남경(2000)에서 논의된 것을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5] ≪간이방≫의 판본별 방점 표기 비교

방점을해자의 번각본번각본의 번각판 보각판17세기 보각판
··리··리
(七036ㄱ3)
···리
(七024ㄱ7)
3
1
··리(七003ㄴ2)
·:리(七011ㄱ8)
·리(七077ㄴ5)
:·리(七042ㄱ2)
·리(七074ㄱ7)
23
1
1
2
2
·리(七031ㄱ7)5없음
··에··에
(三077ㄴ7)
1··에(三121ㄱ3)
·에(三007ㄱ6)
36
6
에(三042ㄴ7)
·에(三042ㄴ8)
1
1
없음
달·혀달·혀
(三087ㄴ5)
3·달혀(三086ㄱ5)
달:혀(三053ㄴ7)
달혀(三077ㄱ7)
달·혀(三006ㄴ2)
:달·혀(三097ㄱ2)
1
2
6
44
1
달혀(三093ㄴ4)3없음
머·그면머·그면
(七026ㄴ6)
4·머·그면(七078ㄴ1)
머·그·면(七007ㄴ8)
머·그면(七016ㄱ6)
머그·면(七006ㄱ6)
머:그면(七035ㄱ1)
머그면(七006ㄴ3)
1
2
28
1
1
2
머·그면(七028ㄴ3)
머그면(七031ㄴ1)
3
1
없음
·므레·므레
(六027ㄱ3)
3·므레(六002ㄱ2)
므레(六013ㄱ2)
므·레(六052ㄴ2)
17
12
1
·므레(六069ㄴ8)
·므·레(六078ㄱ4)
므레(六008ㄱ8)
12
1
7
므레
(六005ㄱ7)
4
·라·라
(六028ㄱ2)
2·라(六002ㄴ6)
라(六013ㄱ1)
7
3
·라(六069ㄱ1)
··라(六083ㄴ4)
라(六008ㄱ1)
8
1
7
라
(六006ㄱ3)
2
·라·라
(六027ㄴ6)
2·라(六036ㄴ4)
라(六043ㄱ1)
·:라(六027ㄱ7)
5
2
1
··라(六062ㄱ1)
··라(六075ㄱ6)
:라(六063ㄴ4)
라(六063ㄴ8)
·라(六062ㄴ6)
2
1
1
4
20
라
(六033ㄱ6)
2
·론·론
(三106ㄴ3)
8·론(三013ㄱ6)
론(三030ㄴ8)
:론(三053ㄴ4)
19
2
1
론(三094ㄱ6)1
아·니커·든아·니커·든
(六028ㄴ3)
3아·니커든(六060ㄱ1)
아·니커·든(六001ㄴ7)
아니커든(六026ㄴ5)
1
4
2
아·니커·든(六087ㄴ1)2아니·커든
(六005ㄴ7)
아니커든
(六005ㄴ3)
1
1
≪간이방≫의 방점 표기 주017)
맨 앞에 제시한 방점의 표기는 ≪간이방≫의 을해자본을 중심으로 ≪석보 상절≫과 ≪월인 석보≫의 방점을 참조하여 제시하였고, 뒤의 숫자는 빈도를 표시한 것이다.
를 분류된 판에 따라 비교한 것이다. ≪간이방≫은 현전하는 책이 모두 다섯 권이고, 지역별 차이와 시기적 차이가 혼재되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권마다 방점의 양상을 따로 비교하였는데, 한 권 안에서도 판종에 따라 방점의 양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을해자본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쓰이고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매우 혼란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머그면’을 예로 들면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을해자본에서는 4회 모두 일정하게 방점이 찍혀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무려 6가지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 때 을해자본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표기가 대체로 빈도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각판에서는 방점이 없는 표기가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 보각판의 방점 표기의 혼란 정도는 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권7〉, 〈권3〉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나타나지만, 〈권6〉의 경우, 한 장 안에서도 혼란되어 나타난다. 또한 빈도를 고려해 보면, 번각판에서는 혼란되는 방점 표기 중 을해자본의 방점 표기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높은 빈도를 보였으나, 보각판에서는 을해자본에서 적힌 형태의 방점 표기의 빈도가 높지 않다.

2. 표기의 검토

≪간이방≫에는 전반적으로 방점이 나타나나 장에 따라 한 장 전체에 방점이 없거나, 일부분에서만 방점이 나타나는 장도 있다, ‘ㅿ’은 나타나나, ‘ㅸ’은 나타나지 않는다. 종성 위치에서는 ‘ㆁ’을 표기하고 있는데, 탈획되어 ‘ㅇ’만 남기도 하였다. 또한 ‘ㅆ’, ‘ㅉ’의 각자병서가 보이며 합용 병서도 물론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표기에서의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간이방≫에 표기된 문자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6] ≪간이방≫에 표기된 문자

초성자ㄱㄷㅂㅅㅈ
ㅋㅌㅍ ㅊㅎ
ㄲㄸㅃㅆㅉ
ㄴㅁㅿ ㅇㄹ
ㅺㅼㅽ
ㅳ ㅄㅶᄩ
ᄢᄣ
중성자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
ㅢ ㅚㅐㅟㅔㅐㅖ
ㅘㅝㅙㅞᆐᆒ 
종성자ㄱㄷㅂㅅㅈㅌㅍ
ㆁㄴㅁㅿㅇㄹ
 
 
    ᄜ 

(1) 댓무(三033ㄱ4), 마(三047ㄴ7), 브(三033ㄱ6), 브면(二016ㄱ8), 오니와(二001ㄴ8), 히(六014ㄴ2), (六005ㄴ2)
(2) ㅆ - 써(七031ㄱ3), 쓰고(七044ㄱ8)
(3) ㅉ - 범호 (六045ㄴ3), 귀 (一049ㄱ1), 직가 (七032ㄴ7), 날츌 (七032ㄴ7), 멀기셔(六080ㄱ3)
(4) 아비부 와 들입 와 스고  앤 아 와 날츌  써(七39ㄱ2-3)
≪간이방≫에서 ‘ㅿ’은 (1)의 ‘댓무, 마, 브, 브면, 오니와, 히, ’와 같이 두루 쓰이고 있다. 주018)
≪간이방≫에서는 ‘아(下83ㄱ5)’와 ‘아(上19ㄱ3)’, ‘어디며(下27ㄴ1)’와 ‘븟어딘(下01ㄴ2)’이 함께 쓰였는데, 그 중 ‘아’는 11회, ‘아’는 6회의 빈도를 보인다.
≪간이방≫에서 각자 병서의 표기로 ‘ㅆ’과 ‘ㅉ’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ㅉ’이 쓰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각자 병서 글자는 세조 시대≪원각경 (언해)(1465년)≫이후부터 16세기 말까지 쓰이지 않았고, ‘ㅆ’은 15세기 말부터 다시 쓰이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널리 쓰였고, ‘ㅉ’은 17세기가 되어야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주019)
김동소 (2003ㄱ: 85~86, 2007: 186) 참조.
≪간이방≫의 ‘써’는 보각된 판에서 보이는 것이며, ‘쓰고’는 번각본에 나타나는 것이다. ‘ㅉ’은 한자 ‘글자 자(字)’의 음을 적은 ‘’로 표기된 것이 대부분인데, ‘범호 (六045ㄴ3)’, ‘귀 (一049ㄱ1)’ ‘직가 (七032ㄴ7)’, ‘날츌 (七032ㄴ7)’, ‘즈믄쳔 (七40ㄱ8)’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표기는 된소리 표기이기도 한데, 예문 (4)의 ‘아비부 와 들입 와 스고  앤 아 와 날츌  써(七39ㄱ2-3)’처럼 같은 문장 안에서 된소리 ‘’이 합용 병서인 ‘ㅶ’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 각자 병서인 ‘ㅉ’로 나타나는 점은, 한자 ‘字’의 ≪동국 정운≫식 한자음 표기가 ‘’ 주020)
≪간이방≫에서는 모두 ‘字(구上05ㄱ4)’로 9회 나타난다.
였으므로 이 표기에 이끌려 각자 병서인 ‘’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멀기셔(六079ㄱ3)’ 주021)
‘멀기셔’와 관련된 것으로 ≪노걸대 언해≫〈상 34〉에 ‘멀즈시 라(遠些兒絟)’가 있다.
는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각된 판에 나타나는 것이다.

(5) ㅂ류
ㅳ - (三034ㄴ4), 깃 불휘(六012ㄱ7), 디거든(三003ㄴ8), 고(七003ㄱ1), 혀(二045ㄱ6), (六086ㄴ4), 고(二013ㄴ1), 얌기(一108ㄱ7)
ㅄ - 라(三039ㄴ4), (一008ㄴ4), (一056ㄱ5), 게(三029ㄴ7), 초(三055ㄴ6), (三059ㄴ3)
ㅶ - (三012ㄴ8), 오(六072ㄱ5), 머리(二008ㄱ5), (一073ㄴ4), (三013ㄱ8), 면(一077ㄱ3), 뵈이(三079ㄱ7)
ㅷ - 디여(三060ㄴ4)
(6) ㅅ류
ㅺ - 리(六004ㄴ6), 아(三024ㄱ3), 오(六010ㄴ3), 리나모(三082ㄴ3), 모롭(一001ㄴ4), 어든(一069ㄴ1), 라(一044ㄴ8), 오(一069ㄱ6), 리라(一035ㄴ3)
ㅼ - 해(一065ㄴ2), (一003ㄱ1), (三063ㄴ5), (三006ㄱ4)
ㅽ - (七057ㄴ5)
(7) ㅄ류
ㅴ - 닙(六054ㄱ8), 리고(七067ㄱ7), (七040ㄴ4), 04ㄱ6), (六016ㄴ8), 니(六078ㄱ1)
ㅵ - 어(二047ㄱ8), 려(六051ㄴ1)
병서 표기로는 각자 병서 글자와 합용 병서 글자가 모두 보인다. 각자 병서 글자로는 위에서 말한 대로 ‘ㅉ’과 ‘ㅆ’이 쓰였고, 합용 병서 글자로는 ‘ㅂ’류의 ‘ㅳ, ㅄ, ㅶ, ᄩ’이, ‘ㅅ’류의 ‘ㅺ’, ‘ㅼ’, ‘ㅽ’이, ‘ㅄ’류의 ‘ᄢ’와 ‘ᄣ’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 오각으로 보이나 ‘해(三9ㄴ01), 두 개(左右翮)(六5ㄱ6)’와 같은 표기가 보인다.

3. 어휘의 검토

1)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휘
≪간이방≫의 어휘 중 사전에 실리지 않은 어휘는 다음과 같다.

(1) 욘히[溫冷]
≪간이방≫〈권1〉에만 단 1회 나타난다.
去滓溫冷服
즈 앗고 욘히 야 머그라(一004ㄴ5)
지금까지 알려진 중세어 문헌에서 볼 수 없는 유일례이다. ‘溫冷’을 번역한 말이므로 ‘-’은 ‘따스하다’의 뜻이겠지만 ‘욘히’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뜨뜻미지근히’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듯하다.

(2) 림·질(淋)
≪간이방≫〈권3〉에 3회 주022)
어휘의 출현 횟수는 협주(夾註)의 것까지 포함한 것이다.
나타난다.
諸淋(여러 가·짓 림·질)(三101ㄱ3)
이 어휘는 한자 ‘淋’을 번역한 것으로 현대의 ‘임질(淋疾)’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 주023)
여기에서는 남광우 (1997) :≪고어 사전≫(이하 ‘고어’), 유창돈 (1994) :≪이조어 사전≫(이하 ‘이조’), 한글 학회 (1992) :≪우리말 큰사전≫의 〈옛말과 이두편〉 (이하 ‘우리말’)을 참조하였다. 그 외에도 김영황 (1994) :≪중세어 사전≫, 리서행 (1991) :≪조선어 고어 해석≫, 이상춘 (1949) :≪조선 옛말 사전≫, 이영철 (1955) :≪옛말 사전≫, 정희준 (1949) :≪조선 고어 사전≫, 홍윤표 (1995) :≪17세기 국어 사전≫등을 참조하였다.
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신속孝3≫와 ≪譯上62≫에서는 ‘님질(痳疾)’이 보인다. 이 용례는 글자 크기가 작은 보각판에 나타난다.

(3) 므그니[重]
이 낱말은≪간이방≫에만 두어 번 나타난다.
用白礬二錢重生硏末
번 두 돈을 므그니 라 라(一010ㄴ7)
의미가 확실하지 않지만 한자 ‘重’을 번역한 듯하므로 ‘묵직이’ 정도로 해석된다. 권3에 “조협 론  므근  돈과(皁莢末一大錢)”이라는 용례가 있다.

(4) 부목/브목[竈突]
≪간이방≫〈권7〉에 2회 나타난다.
竈突墨(브[][목]읫 거믜)(七041ㄴ7)
부목·읫 거믜·과· (七042ㄱ1)
이 어휘는 한자 ‘竈突’에 대응되는데, ‘竈突’은 ‘부뚜막에 딸린 굴뚝’의 의미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41장의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히 판독하기가 힘들지만 ‘브목’으로 보이며 마모가 심하지 않은 42장의 앞면은 ‘부목’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어휘로는≪박통사 (언해) 十四19≫에서 ‘브섭’, ≪박통사≫, ≪간이방≫, ≪훈몽 자회≫에서 ‘브’, ≪박통사≫, ≪구급방≫에서 ‘브’을 찾을 수 있다. 이 용례는 을해자본에 나타난다.

(5) 슈마(水馬)
≪간이방≫〈권7〉에 1회 나타난다. .

水馬手中持之則易産
·슈:마 소·내 주·여시·면 :수·이 나·리라(七028ㄴ6)

‘슈마’는 한자 ‘水馬’를 한글로 표기한 어휘로 현대의 ‘해마(海馬)’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용례는 글자가 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6) 옴옴거든[悸]
현재까지 알려진 중세어 문헌 전체에서≪간이방≫〈권1〉에만 다음과 같이 단 한 번 나타나는 유일례이다.

頭風驚悸
머리예  드러 놀라 옴옴거든(一013ㄴ1)

‘옴옴’은 ‘悸(두근거릴 계)’를 번역한 말인데, ‘가슴이 옴직옴직하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는 뜻인 듯하다.

(7) 진[麪]
≪간이방≫〈권1〉에만 다음과 같이 2회 나온다.

用浸烏頭酒打麪糊爲丸
바곳 맛던 수레 진으로 플 수어 환 로 (一009ㄱ1)
好醋麪糊爲丸如桐子大
됴 초애 진으로 플 수어 머귓 여름마곰 환 라 (一010ㄱ6)

위의 예문에 나오는 ‘진으로’는 ‘진 + -으로’의 변형인데, ‘진’는 ‘밀가루’라는 뜻일 듯하다. 그러나 ‘진’은 접두사인 듯하지만 그 어원은 알 수 없다. 이 문헌 여기에만 나온다.

(8) 투(妬乳)
≪간이방≫〈권7〉에 1회 나타난다.

婦人乳癰汁不出稸積內結因成膿腫一名 妬乳
겨지비 져제 긔 나 져지 나디 아·니·야 안해 얼의여 브 골[곪] 주024)
이 글의 자료로 이용한 대구 개인 소장 ≪간이방≫〈권7〉에서는 이 장(張)이 번각판에 부분적으로 보각되었는데 ‘골’의 자리가 바로 부분적으로 보각된 부분이 다. ‘곪’의 ‘ㅁ’을 써야할 자리가 비어 있어 오각이나 탈획으로 보인다. 영대본 ≪간이방≫〈권7〉에서는 ‘곪’이라고 되어 있다.
니 일후미 투라(七070ㄱ6)

이 어휘는 한자 ‘妬乳의 음을 적은 것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장(張)은 번각판을 부분적으로 보각한 장이어서 앞의 분류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이 어휘가 나오는 부분은 번각판이다.

(9) 두위여디다[脫]
≪간이방≫〈목록〉에 단 1회 나타난다.

脫肛 문 두위여딘 :병〈목록〉

이 어휘는 한자 ‘脫’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는 ‘뒤집어지다’라는 뜻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중세 한국어의 ‘두위혀다, 두위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옛말 사전≫에는 ‘두위어져 소리 더욱 怒야 다(反側聲愈嗔)≪杜≫’가 실려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드위다’의 예를 살펴보면, ‘리 黃金 구레 너흐려든 모 드위며≪두시 (언해) 중간본 十一 16≫’, ‘믌겨리 드위 부치니 거믄 龍ㅣ 봄놀오(濤飜黑蛟躍)≪두시 (언해) 중간본 一 49≫’, ‘셜 드위텨디게 고≪월인 석보 一 29≫’, ‘네 이 드위혀니≪내훈 三 27≫’, ‘無明을 드위 야 료 表니라≪법화경 一 58≫’ 등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0) ·펴··갇[天公]
≪간이방≫〈권1〉에 2회 나타난다.

又敗天公(· ·펴··갇)燒酒服
· · ·펴량··가 ·라 수레 ·프러 머·그며(一098ㄴ3)

이 어휘는 한자 ‘敗天公’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는 ‘패랭이’이라는 뜻이다.≪이조≫,≪고어≫,≪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동의 보감≫〈탕액〉에서 한자어 ‘敗天公’을 ‘펴랑이’로 언해하였고,≪물보≫〈의복〉에서는 한자어 ‘平凉子’를 ‘펴랑이’로 대역하였다. 이 문헌에서의 ‘·펴··갇’은 ‘·펴·’[패랭이]와 ‘·갇’[갓(笠)]이 결합한 형태이다. 보각판에서 나타나는데, 이 판은 글자가 고딕체 모양이다.

2) 용례가 가장 앞선 시기인 어휘

(1) 고쵸(胡椒)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11회, 〈권6〉에 1회 나타난다.

胡椒(고쵸)硏酒服之
고쵸· ·라 수·레 머·그라(一032ㄴ1)

이 어휘는 한자 ‘胡椒’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의 ‘후추’를 의미한다. ‘고쵸’는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후대 문헌인≪자회 상12≫, ≪한378ㄱ≫, ≪물보≫〈蔬菜〉에도 나타난다. 또한 ≪유물≫에는 ‘고초’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보인다.

(2) 구블[腿]
≪간이방≫〈권1〉에 1회 나타난다.

仍摩捋臂腿屈伸之
· ·와 구·브를 ·츠며 굽힐·훠 보·라(一060ㄴ)

이 어휘는 한자 ‘腿’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의 ‘다리살, 다리’를 의미하며,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모두 합쳐 부르는 말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후대 문헌인 ≪痘≫에 ‘구블이 며 (尻冷)’가 나타나는데 이 때의 ‘尻’는 ‘꽁무니, 즉 등마루뼈의 끝진 곳’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글 학회 사전에는 ≪간이방≫과 ≪痘≫의 예 모두를 ‘엉덩이’로 풀이하였고 ≪고어≫에는 ≪간이방≫의 표제어를 ‘구블’이라 하여 ‘정강이’로 풀이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漢)≫에서는 ‘구블’가 나타나고, ≪역 하28≫에는 ‘구블쟈할’이 보인다. 리서행 (1991: 62)에는 ‘구블쟈할’을 ‘궁둥이가 얼룩무늬인 말’로 풀이하고 있다.
≪옛말 사전≫에는 ‘오직 평상 증은 귀과 구브리 면 슌고 만일 검어 디고 귀과 구브리 더우면 역니라≪두 상≫’에서 ‘구블’을 ‘귀뿌리’로 풀이하고 있고, ≪간이방≫의 예인 ‘구블’을 표제어로 하여 ‘정강이’로 풀이하였으며, ≪17세기 국어 사전≫에는 ≪痘창 상11ㄴ, 35ㄱ, 52ㄱ, 하25ㄴ≫의 예를 들고 ‘귀뿌리’로 풀이하고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3) ·이[蝸牛]
≪간이방≫〈권3〉에 2회, 〈권6〉에 2회 나타난다.

蝸牛(·이)飛麪( 밀)硏勻貼痛處
팡이와 가 밄와 라 고게 야 알  브티라(三009ㄱ)

이 어휘는 한자 ‘蝸牛’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 ‘달팽이’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사해31≫, ≪자회21≫, ≪동의≫〈탕액2 蟲部〉, ≪왜 하26≫, ≪물보≫〈介虫〉에도 나타난다. ≪옛말 사전≫에 ‘판이 주025)
조항범 (1998: 203-204)에서는 ‘파니’를 가장 오래된 어형으로 추정하고, ‘판(달린 판) + -이’로 분석하였다.
(유합 상16)’, ‘파니≪구방≫ 하77’, ‘蝸牛 月乙板伊≪향약집성방83≫’의 예들이 실려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4) 도·랏[拮梗]
≪간이방≫〈권3〉에 2회, 〈권6〉에 2회 나타난다.

拮梗(도·랏 二兩)甘草(灸 一兩)
도·랏 ·니 두 ·과 감초 ·브레 :·니  ·과 사·라(二065ㄱ7)

이 어휘는 한자 ‘拮梗’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도라지’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 초, 상7≫, ≪역 하12ㄱ≫, ≪방약2≫, ≪향약 월령 이월≫, ≪동문 하4≫, ≪물보≫〈약초〉, ≪동의2:31ㄱ≫ 등에도 나타난다. ≪신구황 촬요 8≫에는 ‘도랒’이 보인다. ≪중세어 사전≫에는 ≪제중편≫의 ‘桔梗 도랏’, ≪촌구≫의 ‘桔梗 道乙阿叱’이 실려 있고, ≪옛말 사전≫에는 ≪향약 구급방≫의 ‘桔梗 道羅叱’, ≪향약 채취 월령≫의 ‘桔梗 鄕名 都乙羅叱’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5) 도와리[霍亂]
≪간이방≫〈권2〉에만 19회 나타난다.

乾霍亂不吐不瀉
:도·와:리 ·야 ·토:티 아·니 ·며 즈츼도 아·니·코(二053ㄱ2)

이 어휘는 한자 ‘霍亂’에 대응하는 어휘로 ‘여름철에 급격한 토사를 일으키는 급성 질환’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字會 초, 중4≫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6) 마좀[當]
≪간이방≫〈권1〉에 1회, 〈권2〉에 1회 나타난다.

癲癎用艾於陰囊下穀道正門當中間隨年歲灸之
뎐·:에 ··으로 음 아·래  마좀 가·온· 제 ·나 마초 ·라(一098ㄴ8)

이 어휘는 한자 ‘當’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바로 맞음, 마침’을 의미한다. ≪신속 열 86≫에 예가 등재되어 있다. 중세 한국어의 ‘마, 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국어 사전≫에는 ≪첩 八26ㄱ≫의 ‘마즘’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7) 막딜·이다[閉]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3회, 〈권3〉에 1회 나타난다.

卒暴中風涎潮氣閉牙關緊急眼目上視
믄·득  마·자 ·추미 올·아 ·긔운·이 막딜·이며 어·귀 굳·고 ·누눌 ·티·고(一007ㄴ)

이 어휘는 한자 ‘閉’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막히다, 질리다’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번소8≫, ≪선조판 소언서제2≫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국어 사전≫에 ‘막히다’의 의미로 ‘막디르다≪마경 하21ㄱ≫’와 ‘막디다≪어록 초4ㄱ, 중5ㄴ≫’가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8) 벽돌[磚石]
≪간이방≫〈권2〉에 2회 나타난다.

蠶沙(누·에)燒磚石(·벽:돌)蒸熨
누에도 봇그며 벽돌도 더이며 울호(二039ㄱ)

이 어휘는 한자 ‘磚石’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도 ‘벽돌’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유물≫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9) ·수유[(酥]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9회, 〈권3〉에 2회, 〈권6〉에 4회, 〈권7〉에 1회 나타난다.

甘草(生用三兩)同爲末用酥(수유)少許和句徵有酥氣
감·초  :석 과·  ·디 ·라 ·수유 :져기 섯·거 :·간 ·수윳 ·긔운·이 잇·게 ·야(三035ㄴ4)

이 어휘는 한자 ‘酥’에 대응하는 어휘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동의≫〈탕액편〉에서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0) 슴슴다[淡]
≪간이방≫〈권3〉에 1회 나타난다.

淡豆豉(젼국二十粒)鹽(소곰一捻)
슴슴 젼국 ·스믈  :낫·과 소곰  져·봄과(三064ㄴ6)

이 어휘는 한자 ‘淡’에 대응하는 어휘로 ‘맛이 심심하다’를 의미한다. ≪두 하28≫에도 나타나며 ≪두 하29≫에서는 ‘ 술의 플러 머기라(담주조 하)’가 보인다. 중세 한국어에서 비슷한 뜻으로는 ‘슴겁다, 승겁다’ 등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1) 시·욱[氈襪]
≪간이방≫〈권2〉에 2회 나타난다.

氈襪後跟(시·욱 뒤측)一對男用女者女用男者燒灰酒調服
시욱 뒤측 둘흘 남진은 겨집의 하 겨집은 남진의 하 라  수레 프러 머그라(二033ㄴ)

이 어휘는 한자 ‘氈襪’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전버선’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박초 상26≫에도 나타난다. ≪두중 十九47≫에는 ‘시옥’, ≪박중 상24≫에는 ‘시옭청’, ≪박중 상27≫에는 ‘시욹쳥’이 보인다.≪17세기 국어 사전≫에는 ‘동물의 털로 만든 버선’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12) 어르·러지[癜風]
≪간이방≫〈권6〉에만 모두 16회 나타난다.

白癜風紫癜風( 어르·러지 블근 어르러지)(三084ㄱ·ㄴ)

이 어휘는 한자 ‘癜風’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어르러기, 어루러기’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 중33≫에도 나타난다. ≪역 상62≫에는 ‘어루러기’가 보이고 ≪두 하78≫에는 ‘어루록지’가 보인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3) [胡麻]
≪간이방≫〈권6〉에 4회 나타난다.

胡麻今香同擣細羅爲散
 고게 봇가   디허 리 처  라(二088ㄱ5)

이 어휘는 한자 ‘胡麻’에 대응하는 어휘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牛方≫, ≪사해중 상30≫에도 나타난다. ≪법화≫, ≪자회≫, ≪역(譯)≫, ≪한(漢)≫ 등에서는 ‘’가 보인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4) ·[床]
≪간이방≫〈권1〉에 3회, 〈권2〉에 1회 의미한다.

槐花(회홧곳)瓦上妙令香夜到三更仰上床
회홧 고· 디새 우·희 고·게 봇·가 · ·만커·든 · 우·희 졋·바 누·워셔(二088ㄱ6)

이 어휘는 한자 ‘床’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평상’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초 중6≫, ≪분온≫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국어 사전≫의 ≪신속효 7:45ㄴ≫, ≪역 하18ㄴ≫, ≪태요 66ㄴ≫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5) ·딥지·즑[薦]
≪간이방≫〈권1〉에 단 1회 나타난다.

常用薦帝卷之就平地上帝轉
·녜 · ·딥지·즑에 ·라  ·해다·가 그우·료(一067ㄱ6)

이 어휘는 한자 ‘薦’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로는 ‘짚으로 짠 거적’을 나타낸다. ≪중세어 사전≫에서는 ‘집기직, 짚자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간이방≫의 용례가 빠져 있고 뒤 문헌인 ≪자회 중11≫와 ≪노 상23≫의 예들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6) 머·릿곡뒤ㅎ[腦]
≪간이방≫〈목록〉에 1회 나타난다.

腦後有核 머·릿곡뒤헤 도· 것(목록)

이 어휘는 한자 ‘腦後’에 대응하며 현대어로는 ‘머리쪽지, 정수리’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분온22≫, ≪역 상32≫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7) 미긔치[烏賤魚骨]
≪간이방≫〈권2〉에 4회, 〈권3〉에 2회, 〈권7〉에 2회 나타난다.

烏賊魚骨(·미·긔치)搗細羅
·미·긔·치 디·허 ··리 ·처 (二112ㄴ)

이 어휘는 한자 ‘烏賊魚骨’에 대응하며 ‘오징어뼈’인데,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동의≫〈탕액〉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8) 티다[拔]
≪간이방≫〈권2〉에 단 1회 나타난다.

頂心取方寸許急捉痛拔之少頃
머·릿 ·뎡바·기·옛 터럭·을  지·봄·만 ·리 자·바 ·이 ··티라(二071ㄴ8)

이 어휘는 한자 ‘拔’에 대응하며 현대어로는 ‘빼다, 뽑다’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유합≫에도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어휘로 ‘히다, 다, 혀다, 다, 치다’ 등이 있다.
≪17세기 국어 사전≫에 의하면 ≪신속 열4:8ㄴ, 4:25ㄴ, 4:53ㄴ, 5:85ㄴ, 6:11ㄴ, 6:49ㄴ, 효6:87ㄴ, 7:9ㄱ, 8:37ㄴ, 충1:49ㄴ≫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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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방(언해)》 해제
김동소

《구급방(救急方)(언해)》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세조실록》 권39, 12년 병술 6월 임자 조의 “팔도에 《구급방》 각 2건을 내리다.(賜八道救急方各二件)”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체로 세조 12년(1466) 6월 이전에 책이 편찬·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은 상하 2권 2책으로 간행된 것인데, 현재 국내에는 규장각(奎章閣)에 낙장본인 상권만 있고, 일본 나고야[名古屋] 호사 문고[蓬左文庫]에만 상하 2책 1질이 전해지는 책으로서, 15세기 중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훈민정음 문헌이다.
세조 연간에 간행된 훈민정음 문헌들이 거의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나온 불경 언해류인데 반하여, 이 《구급방(언해)》는 불교와 관계가 없는 책이고, 또 최초의 의약서 언해라는 점에서 이 문헌의 특징이 있다. 이 문헌의 언해 부분에 들어 있는 표기법·음운·어휘 등 언어 현상은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 언해류와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점이 있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구급방(언해)》의 국어학적 연구로는 지금까지 김지용(1971), 김영신(1976), 김영신(1978), 원순옥(1996) 등이 있다. 이들 앞선 연구에 바탕하여 이 문헌의 국어학적 특징을 간략히 밝혀 보기로 한다.

병의 치료 및 예방을 목적으로 출판된 책의 이름에 ‘구급(救急)’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것들에 《향약 구급방(鄕藥救急方)》(13세기), 《구급방(언해)》(15세기), 《구급 간이방(救急簡易方)(언해)》(1489년), 《구급 이해방(救急易解方)》(1499), 《촌가 구급방(村家救急方)》(1538), 《언해 구급방(諺解救急方)》(1608) 등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언해된 것으로는 세조대에 간행된 이 《구급방(언해)》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일본 호사[蓬左] 문고에 있는 《구급방》상하권 2책은 을해자본(乙亥字本)의 복각본으로 복각 시기는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상권이 92장(목록 3장, 본문 89장), 하권이 96장 주001)
일부 문헌에서 하권이 97장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이 있는데, 국내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한글학회의 영인본(1972년, 1975년, 1996년 영인)과 대제각의 영인본(1978년 영인)에서 하권 91장 뒷면과 92장 앞면을 중복 인쇄하였기에 일어난 착오이다. 하권은 모두 96장의 분량이다.
, 책의 크기는 세로 30.4cm, 가로 19cm이며, 다섯 끈매기[五結絲綴]로 제본되어 있다. 판광(版匡)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며 반엽 광곽(半葉匡郭)은 21cm×15cm, 계선(界線)이 있고 각 8행 17자(언해문은 쌍행[雙行]으로 한 줄에 16자씩)로 되어 있으며, 판심(版心)에는 위아래에 백구(白口) 주002)
그러나 하권 55장만은 흑구(黑口)로 되어 있다.
와 내향 무문 주003)
그러나 가끔 유문 어미(有紋魚尾)로 되어 있는 곳이 있다.
흑어미(內向無紋黑魚尾)가 있고 서명[救急方]·권차(卷次)·장차(張次)가 들어 있다. 《救急方 上》과 《救急方 下》라는 책 이름이 검푸른 표지에 백지로 씌어져 있고, 상권 표지 안쪽에는 “總持寺 什物”이라는 나무도장[矩形木印]이 찍혀 있으며, 상권 뒤표지 안쪽에는 “當山拾八世 眞空和尙 寄進” “ㅇㅇ書軒”이라 붓글씨로 쓴 것이 있고, 하권 뒤표지 안쪽에는 “當山拾八世 眞空和尙 寄進”이라고 역시 붓으로 쓴 글씨가 있다. 주004)
김지용(1971) 및 원순옥(1996: 12-15)을 참조한 것임.
규장각에 있는 낙장본 《구급방》 상권은 위의 호사 문고본과 동일 계통의 것으로, 책의 모양은 완전히 같다. 표지 뒤에 ‘梅畫屋 珍玩’이라는 가로로 된 네모 난 도장이 찍혀 있고, 권두 5장 앞면까지와 79장 이하가 낙장으로 되어 있으며, 71장은 붓으로 씌어져 있다. 주005)
서울대학교 규장각(2001ㄱ: 26)에 의함.
책의 구성은 상권이 ‘一 中風’에서 ‘十九 金瘡’까지 19조항, 하권이 ‘二十 箭鏃金刃入肉及骨不出竹木刺附’에서 ‘三十六 血暈’까지 17조항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조항에서 ‘直指方, 經驗秘方, 千金方, 衛生易簡方’ 등 중국의 수십 가지 의서(醫書)에 있는 방문(方文)을 한문 그대로 인용한 후, 이를 언해하여 두 줄로 수록하고 있다. 가끔 한문에 들어 있지 않은 주석이 별도 표시 없이 언해문 뒤에 한글로만 나오는 곳이 있다.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牙噤者中指點南星細辛末幷烏梅肉頻擦自開 (상 : 1ㄴ)
니 마고므니란 가라개 南남星과 細솅辛신ㅅ  무텨 烏梅肉 조쳐 조 븨면 절로 열리라 厥은 손발 고 脉 그츤 病이라 (상 : 2ㄱ)

이 문헌은 비록 16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15세기 중반에 간행된 초간본을 복각한 것이기 때문에 15세기의 언어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표기법과 어휘를 중심으로 이 문헌의 국어학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표기법은 세조대 문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방점이 찍혀 있고, 언해문 속의 모든 한자에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각 한자 바로 뒤에 붙어져 있는데, 거의 모든 복각본 문헌과 마찬가지로 탈획이 심해 이용할 때에는 주의를 요한다. 또 복각할 때의 각수(刻手)의 실수로 잘못 새겨진 글자들도 상당수 있다. 예. 雄黃→ 雄黃[하:55ㄱ], 믈ᄉᆞᅟᅢᆷ(如湧泉) → 믈[상:59ㄴ], 혹(或) → 혹[상:65ㄴ], 머구 → 머구[상:66ㄱ]. ‘과이(暴)[상:60ㄴ], 로(自)[상:73ㄴ]’ 등의 경우는 ‘, 절’ 자가 좌우 거꾸로 새겨져 있다.
각자병서 글자를 쓰고 있지 않음은《원각경(언해)》이후 모든 세조대 문헌이 그러함과 같다. 다만 이 문헌에서는 예외로 ‘쐬먼(熏)’(상:52ㄱ)과 ‘믈까(嚙)’(상:79ㄴ)에서처럼 ‘ㅆ’과 ‘ㄲ’이 각각 1회씩 나타난다. 이것 이외에는 초기 훈민정음 문헌의 ‘-’ 음절의 ‘’을 비롯한 모든 각자병서 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초기 훈민정음 문헌에서는 종성 위치에서 ‘ㄷ’과 ‘ㅅ’이 대체로 혼란되지 않고 표기되었다. 이러한 표기 사실과 함께《훈민 정음(해례)》의 8종성법 규정으로 인해 15세기에는 음절말 위치에서 ‘ㄷ’과 ‘ㅅ’이 중화(中和)되지 않았다는 생각들이 과거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헌을 철저히 보지 않은 데서 잘못 내려진 결과이다. 예컨대 15세기 문헌에는 ‘’과 ‘젼’(恣), ‘졷’와 ‘좃’(從), ‘맏’와 ‘맛란, 맞더니’(迎), ‘ 낟’과 ‘ 낫’(箇), ‘빗오니’와 ‘빋니’(散) 등과 같은 혼기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혼기들은, 종성 표기에서 혓소리 계열의 자음(ㄷ, ㅌ, ㄸ)은 ‘ㄷ’ 대표 글자로, 잇소리 계열의 자음(ㅅ, ㅆ, ㅈ, ㅊ, ㅉ, )은 ‘ㅅ’ 대표 글자로 적어도 좋다는 표기 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위치에서 ‘ㄷ’과 ‘ㅅ’이 변별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주006)
자세한 것은 김동소(2002: 98-101, 2003: 177-9) 참조.
초기 문헌에서 이렇게 대체로 잘 지켜지던 종성의 ‘ㄷ’과 ‘ㅅ’ 표기는 16세기에 들어서면 아주 혼란스러워지고, 16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초기 문헌의 규범적인 표기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자의 자의적인 선택인 것처럼 한 문장 안에서의 동일한 낱말의 종성이 ‘ㄷ’ 또는 ‘ㅅ’으로 표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구급방(언해)》에서는 초기 문헌의 규범에 따라 종성의 ‘ㄷ’과 ‘ㅅ’이 잘 구분되어 표기되고 있지만, ‘믿(底)’을 ‘밋’[상: 40ㄱ]으로 표기한 예가 하나 있다.
언해문에서 가끔 비문법적 문장이 보인다. 한문을 번역하면서 주의를 덜 기울인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눈에 띈다.
 雄黃 오 甘감草 各각  兩과 白礬뻔 라 두 兩과 라 細솅末야 藥약  兩 더운 믈 닷 되예 글혀 브  시수 良久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 雄黃<원주>硏甘草<원주>各一兩礬石<원주>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상:58ㄴ]

이 언해문을 직역하면 “또 웅황을 갈고 감초 각 한 냥과, 백반 갈아 두 냥과, 갈아 세말(細末)하여, 약 한 냥을 더운 물 닷 되에 끓여 부은 데 씻되, 양구(良久)커든 다시 데워 씻으라.”처럼 되어 의미 파악이 힘들어진다. 이 문장은 “또 간 웅황과 감초 각 한 냥과, 백반 간 것 두 냥과를 함께 갈아 가늘게 가루 내어 만든 약 한 냥에, 더운 물 닷 되를 넣어 끓여, 부은 상처를 씻되, 오래 되거든 다시 데워 씻으라.”의 의미이다.
이 문헌에서 빈번히 나오는 구문 중에 ‘~면 됴니라’와 ‘~면 됻니라’가 있는데, 이 둘의 구문상의 차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됴니라, 됴니, 됴며, 됴나, 됴리라, 됴리니’ 등 ‘됴-’는 모두 118회, ‘됻니라, 됻니’는 모두 80회 나타난다.
이 문헌의 상권과 하권을 비교해 보면 낱말 선택이나 표현법에서 현저히 이질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구체적인 몇몇 예를 들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주007)
원순옥(1996: 70)에서 인용.
상권하권
고툐(治)
고튜(治)
61회
0회
85회
90회
둪-(蓋,覆)
덮-(蓋,覆)
13회
0회
1회
6회
디허(擣)
허(擣)
33회
0회
49회
5회
복화(桃花)
복화(桃花)
3회
1회
0회
6회
쇠-(燻)
쐬-(燻)
0회
1회
8회
0회
아니한덛[-에, -을, --](湏臾)
아니한[-예, -](湏臾)
1회
10회
8회
2회
藥
藥을
7회
4회
11회
0회
兩
兩을
25회
9회
32회
0회
(漢字語)-
(漢字語)-은
6회
28회
21회
4회
정리해 보면 이 문헌 상권과 하권의 언어 현상은 다음과 같이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상권에는 ‘고튜, 덮-, 허, 쇠-’라는 어형이 전혀 안 나오고, 하권에서는 ‘복화, 쐬-’라는 어형이 전혀 안 나온다. 둘째, 상권에는 ‘복화, 아니한덛’이라는 어형이 거의 안 나오고, 하권에는 ‘둪-, 아니한’라는 어형이 거의 안 나온다. 셋째, 상권에는 ‘藥, 兩’이라는 한자어 뒤에서 목적격 조사 ‘-, -을’이 모두 사용되나, 하권에는 ‘-을’은 쓰이지 않고 ‘-’만 사용된다. 넷째, 양성 모음으로 끝나는 한자어 뒤의 주제격 조사 ‘-, -은’의 경우, 상권은 주로 ‘-은’이, 하권은 주로 ‘-’이 선택된다. 셋째, 넷째 경우만 두고 말한다면 상권보다 하권이 모음 조화 표기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첫째의 ‘고툐, 고튜’의 경우는 오히려 하권이 이 규칙을 덜 따르는 것 같다. 결국 이 문헌의 상권과 하권 언해자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복화, 쇠-, 쐬-, 아니한덛-’ 등은 이 문헌에만 나타나는 어형이고, ‘덮-, 복화’는 이 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낱말로 기록될 말들이다.

《구급방(언해)》의 가장 두드러진 국어학적 특징은 그 어휘에 있다. 이 문헌에만 나오는 어휘, 이 문헌에서 최초로 나오며 드물게 쓰이는 어휘 등 희귀어 목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008)
주로 원순옥(1996)을 참고한 것임.
검프르러, 검프르고(暗靑, 靑黑):검푸르러, 검푸르고. 3회 출현. “피 얼의여 大便이 通티 아니야 장 브 검프르러 알파 어즐코 답답며(瘀血大便不通洪腫暗靑疼痛昏悶)”[하:32ㄴ], “과 입과 검프르고 발와 손괘 왜트러 차 주거 가거든(面口靑黑四肢逆冷命在須臾)”[하:49ㄴ]. “ 비치 검프르고  안히 브르고 氣分이 긋추려 닐 고튜(面色靑黑腹內脹滿氣息欲絶)[하:96ㄱ].
거흘에(?):거칠게(?). 유일례. “枳殼 기우레 봇기 져기 누르게 코 솝 아니와 木香과 各 세 分을 디허 거흘에 처 散을 지(枳殼麩炒微黃去穰木香各三分右擣麤羅爲散)”[하: 41ㄱ].
격발며(激):격렬히 움직여 일어나며. 1회 출현. “氣中 證은 해 豪貴 사미 이 因야 격발며 것기여 忿怒야 氣分이 盛호 펴 몯야(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挫忿怒盛氣不得宣泄)”[상: 12ㄱ].
곰(鬱):곰팡이 뜬. 유일례. “ 곰 고기와 저즌 脯肉괏 毒 고튜(又方治鬱肉濕脯毒)”[하: 61ㄴ].
곳골회(釵環):비녀와 가락지(?). 유일례. “ 金銀 곳골회 그르 닐 고툐 水銀 半 兩을 머그라(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상: 53ㄴ].
글희혀(幹開):끌어 당겨, 풀어 당겨. 유일례. “水銀 탄 킈만야 이블 글희혀 븟고(水銀如彈子大幹開口灌之)”[하:82ㄴ].
금굼히(滛滛):이따금. 유일례. “ 얌 손 사 헌 마 됴코 나 毒氣  예 이셔 금굼히 알고 랍거든 고툐(又方治蛇螫人瘡已愈餘毒在肉中滛滛痛痒)”[하:80ㄱ].
긔-(輾, 轢):치이-. 2회 출현(유일례). “ 노 서 디니와 타 디니와 술위예 긔니와 一切ㅅ 傷며 것근  고티며(又方治從高墮下落馬車一切傷折)”[하:27ㄱ], “ 지즐이며 와 술위예 긔며 게 이며 게 여(又方療被壓迮舟舡車力的切車所踐也馬踏牛觸)”[하:29ㄱ].
기름긴(脂):기름 낀. 유일례. “ 飮食과 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로 그치고(令乾食與肥之物以止其渴)”[상:80ㄱ].
금(橫文):가로된 금. 1회 출현. “惡風이 안히 답답야 죽닐 고툐 리 밠 엄지가락 아랫 그믈  나 마초면 즉재 됻니라(治惡風心悶欲死急灸足大趾下橫文隨年壯立愈)”[상: 2ㄴ].
노압, 노올압(煻灰):재불[熱灰], 뜨거운 재. 각 1회 출현. “炮 믈 저즌 죠예  노압예 무더 구을시라.”[상:14ㄱ], “  욘 파 노올압 브레 녀허 구어(又方取葱新摘者入煻灰火內煨之)”[하:35ㄴ].
눅눅면(惡):느글느글하면, 메스꺼우면. 1회 출현. “다가 精神이 어즐코 안 눅눅면 곧 이 中毒이니(如稍覺精神恍惚心卽是誤中諸毒)”[하: 47ㄱ].
벼록(眼前生花):눈에서 일어나는 불꽃, 현기증. 유일례. “피 氣分 조차 올아  어즐케  벼로기 나니  甚닌 닶가와 사 모고 이비 좃고 精神이 아고 氣分이 니(血隨氣上迷亂心神故眼前生花極甚者令人悶絶不知人口噤神昏氣冷)”[하:94ㄱ].
니르리(永):오래, 길이. 유일례. “열 네 붓글 면 즉재 됴하 니르리 發티 아니니라(灸十四炷卽愈不發).”[하:73ㄴ].
다아닫고(合住):꽉 닫고. 유일례. “ 黃連과 黃栢과 輕粉 티 호고 朴硝 져기 조쳐 細末야 麻油에 녀허 合 다아닫고 밥 우희  라 라(又方 黃連 黃栢 輕粉各等分朴硝少許右爲細末入麻油用合子合住上飯蒸調塗)”[하:13ㄴ].
다운(暖):따뜻한. 유일례. “므레 딘 사 다운 예 무두(埋溺人灰中)”[상: 72ㄱ].
단기고(定):당기고(?). 유일례. “몬져  고텨  단기고 술 머겨 醉케 라(先整骨了夾飮之令醉)”[상: 88ㄱ].
쉿믈(白湯):흰쌀을 끓여 만든 맨국. 1회 출현. “ 그르 골희 닐 고툐 거유 랫 짓 두흘 라 細末야 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니라(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상: 53ㄴ].
더우며닐, 더위몌여(熱暍):더위 먹은 이, 더위 먹어. 각 1회 출현. “더우며닐 고툐 길헷 더운 로 가매 고 져기 식거든 오 氣分이 通커든 말라(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상:9ㄴ], “ 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과 굴근 마와 等分야 로니 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 머기면 즉재 사니라(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상: 11ㄱ].
뎨며(削):저며. 유일례. “ 湯火傷 고튜  뎨며 브티면 므르디 아니며 알디 아니며 수 됻니라.(又方治湯火傷用梨貼不爛止痛而瘥)”[하: 15ㄱ].
도렫고(圓):둥글고. 1회 출현. “도렫고  天南星을 저즌 죠예  구으니와(白天南星濕紙裏煨)”[상: 1ㄴ].
두것:2개, 두 가지 것. 유일례. “미친 가 毒 고툐 머리터럭과 고솜도 가 게 호아 두것 론  므레 프러  잔 머규 이비 마구므니란 니 것고 藥 녀흐라(治猘犬毒 頭髮猬皮各等分右燒灰水和飮一杯口噤者折齒內藥)”[하: 66ㄱ].
두위드듸여(蹉跌):(발을) 뒤집어 디디어. 유일례. “ 밧목 것그며 四肢  아디며 히미 傷며 두위드듸여 알프거든(又...踠折四肢骨碎及筋傷蹉跌疼痛)”[하:27ㄴ].
디저겨(刺):찔러(?). 유일례. “ 胃脘애 痰이 담겨 胃脘 가미라 冷 氣分이 디저겨 알닐 고티니(兼治胃脘停痰冷氣痛)”[상: 6ㄱ].
며(堅):딱딱하며. 유일례. “가 고기 먹고 삭디 아니야  가온 며(食狗肉不消心中)”[하: 61ㄱ].
멈게(去):없게(?). 유일례. “도 기르믈 아 힘과 과 멈게 고 므레 녀허 달효(取猪脂筋膜於水中煮)”[하: 38ㄴ].
물니(鬱):물뜨니(열과 습기로 말미암아 떠서 상하니). 유일례. “고기  器具ㅅ 안해 자자 이셔 밤 디난 거슨 물니(肉閉在密器中經宿者鬱)”[하:61ㄴ].
거든(淸):맑게 가라앉거든. 유일례. “엄지가락톱 져기 가 더운 므레  녀허 거든(大母指爪甲刮少許同泡湯候)”[하:41ㄴ].
목브(馬喉閉):말목부음(병명, 馬喉痺). 유일례. “모기 막고  브 매 닛고 氣分을 吐호미 면 일후미 목브미니(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상: 43ㄴ].
챗변쵸(馬鞭梢), 채변쵸(馬鞭鞘):말초리풀(약초 이름). 각 1회씩 출현. “ 너흘며 와 허러 브 덥다라 알닐 고튜 챗변쵸 두 寸ㅅ 기릐와 쥐 두닐굽 나  라 細末야 도 기르메 라 면 즉재 됻니라(治馬囓人及踰作瘡毒腫熱痛 馬鞭梢二寸長鼠屎二七枚右二味合燒爲末以猪脂和塗之立愈)”[하:15ㄴ], “리 사 므러 헌  고튜 채변쵸 五寸 론 와 도 기름 두 兩과 수쥐  두닐굽 낫과 白殭蚕 半兩과 세 가짓 거슬 디허 처 散 오 도 기르로 라 믄 해 로(治馬咬人損馬鞭鞘五寸燒灰猪脂二兩雄鼠糞二七枚白殭蠶半兩右件三味擣羅爲散以猪脂調塗咬處)”[하:16ㄱ].
밥(飯時):밥 먹을 만한 시간, 식경(食頃). 유일례. “이티  밥만 면 곧 氣分을 어더 숨쉬니라(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상: 77ㄴ].
밧목(踠):발목. 2회 출현(유일례). “밧목 것그며 모미 다 알프거든(折徧身疼痛)”[하:26ㄱ], “밧목 것그며 四肢  아디며(折四肢骨碎)”[하:27ㄴ].
복화(桃):복숭아. 3회 출현(상권 21ㄴ, 22ㄱ, 28ㄱ). ‘복화’라는 표기도 이 문헌에 7회(상: 16ㄱ, 하: 44ㄱ, 44ㄴ, 67ㄴ, 69ㄱ, 73ㄴ, 73ㄴ) 나오지만, ‘복화’는 다른 문헌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본(本):본래. 1회 출현. “블 현  이셔 오누르이닌 본   이실 블 혀미 므던니라(人有於燈光前魘者在明處是以不忌火也)”[상: 22ㄴ].
뵈디(下):(대소변을) 보게 되지. 1회 출현. “大小便이 다 구더 뵈디 아니커든 火麻 로 氣分 잇게 야 沒藥ㅅ 와 차 져고매 조쳐  수레 프러 머그면 그 毒氣 혀 즉재 리니라(大小便俱澁不却用火麻燒灰存性同沒藥末茶少許用溫酒調服引導其毒卽下)”[하: 71ㄴ].
빗가치(顔色):(좋은) 빛깔 있는 피부(?). 유일례. “血氣 우흐로 소아 어믜  빗가치 업서 氣分 긋고져 릴(血氣上搶母面無顔色氣欲絶者)”[하: 87ㄱ].
라기(屑):부스러기. 유일례. “ 五靈脂 몰애와 돌콰 쇳 라기  거슬 야 리고(又方用五靈脂揀去沙石及鐵之類)”[하: 89ㄱ].
레(苞):꾸러미. 유일례. “파 서 斤과 소곰  斤을 섯거 므르디허 보 덥게 야 기브로 료 두 레에 화 서르 臍下 熨면 小便이 즉재 나니라.(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裏分作二更互熨臍下小便立出)”[상: 68ㄱ].
삿기밠가락(小趾):새끼발가락. 유일례. “올 허튓 삿기밠가락 로 그틀 세 붓글 리니(灸右脚小趾尖頭三壯)”[하:87ㄴ].
섯알고(攪痛):번갈아 아프고. 유일례. “과 왜 섯알고 머리 어즐야(心腹攪痛頭旋)”[하: 49ㄴ].
솝드리(透骨):속속 들이. 유일례. “  호 봇고 솝드리 누러 검거든(糯米一合右炒令透骨焦黑)”[하: 11ㄴ].
러워(澁):껄끄러워. 유일례. “누네 가 드러 러워 알하(眯目痛)”[하: 37ㄱ].
리(酸漿):꽈리. 1회 출현. “小便에 下血이 긋디 아니커든 酸漿草 드려 自然汁을  머그라. 酸漿은 리라.(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상:63ㄱ].
:까끄러운. 유일례. “穀賊은 穀食에 몯내  이사기 굳고  거시니 몰라 리라 머그면 목 안히 브 通티 아니니 일후믈 목 안해 穀賊 나다 니라”[상: 46ㄱ].
블(慢火):여린 불. 유일례. “솓 안해 밀 녀허 브레 달효(於鐺內入蠟慢火熬)”[하: 10ㄱ].
옷(汗衣):땀이 밴 옷. 2회 출현. “ 오시나 시혹 觸衣어나(오 모매 오래 니버 오래  니 됴코 觸衣 오래 니븐 솝오시라)…. 라(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燒灰)”[상: 16ㄱ].
혀면(拔):뽑으면. 유일례. “삸 미티 에 드러…라와 디 몯리어든 즉재 살미틀 이어 혀면 믄득 나니(箭鏃入骨…痒不可忍卽撼箭鏃之立出)”[하: 3ㄱ].
아니고오(惡):아니꼬움을. 1회 출현. “ 藥毒이 發커든 플와 돌와 몰라셔 아니고오 아닐 고튜(又方解一切藥發不問草石始覺)”[하: 53ㄱ].
아즐며(昏):어질어질하며. 1회 출현. “ 마자 아즐며 氣厥야 림 몯고 痰이 마켜 소리 몯 닐 고티니(治風氣厥不省痰塞失音)”[상: 2ㄴ].
어돝(母猪):어미 돼지. 1회 출현. “ 야미 사 입과 닐굽 굼긔 들어든 고튜 어도 릿 그틀 버혀 츳듣 피 이베 녀면 즉재 나니라(又方治蛇入人口幷七孔中割母猪尾頭瀝血着口中卽出)”[하:79ㄱ].
어우(雙仁):쌍으로 들어 있는 열매 씨. 1회 출현. “桃仁 셜흔 나 것과 부리와 어우 앗고 라(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상:70ㄱ]. ‘어우러’라는 어형은 이 문헌에 5회 나오고, 표기가 약간 다르기는 하나 《구급 간이방 언해》(어우이, 어우)와 18세기의 《동문 유해》(어우렁이) 등에 나온다.
왜지그라(角弓反張):한쪽으로 찌그러져. 유일례. “마자 왜지그라 네 활개 거두디 몯야 어즈러워 죽닐(中風角弓反張四肢不收煩亂欲死者)”[상: 5ㄱ].
왜틀-(痙角弓反張, 逆):외틀어지다. 2회 출현(유일례). “ 金瘡 마자 왜트닐 고툐(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상: 88ㄱ], “발와 손괘 왜트러 차 주거 가거든(四肢冷命在須臾)”[하: 49ㄴ].
움주쥐여(縮):움츠러져. 유일례. “그 膓이 예 뷔트러 움주쥐여 잇니(其腸絞在腹)”[상: 32ㄴ].
이사(三二日), 잇사래(三兩日), 잇사나(數日):2,3일, 2,3,4일. 1회씩만 출현. “大便이 이사 通티 아니 後에(大便三二日不通然後)”[하: 23ㄱ], “믄득 오누르여 림 몯거든 皂莢   대로 두 곳 굼긔 불면 즉재 니니 잇사래도 어루 불리라(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상: 23ㄱ], “ 프른 뵈 라  라 瘡의 고 리면 잇사나 後에 됻니라(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상: 83ㄴ].
자해(窠, 臼, 元端):(정해진) 자리(에) (?). 3회 출현. “傷하야  제 자해 가디 아니닐 고툐(治損傷骨節不歸者)”[하: 31ㄴ], “ 아디며  것그며 자해 나니란(諸骨碎骨折出者)”[하: 32ㄱ], “ 내와니란 소로  고텨 제 자해 가 正커든(骨鋒者以手整頓骨節歸元端正)”[하: 32ㄱ].
자자(閉):가두어. 유일례. “고기  器具ㅅ 안해 자자 이셔 밤 디난 거슨 물니(肉在密器中經宿者)”[하: 61ㄴ].
졋가락(筯):젓가락. 유일례. “細末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라(爲末以頭點小許在懸壅上)”[상:42ㄴ].
죠젼(紙錢):종이돈. 2회 출현(유일례). “酒壜  나로 죠젼  주믈 라 壜 안해 녀코 時急히 壜 이브로 므레 딘 사 치나 시혹 복 우희 두퍼 거든 다시 죠젼을 라 壜 안해 녀허  두퍼 므를 아면 즉재 사라. 壜은 술 녇 딜어시라.(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상:74ㄴ].
주므르며(揉):주무르며. 1회 출현. “모 허므를 주므르며 모 지고 고해 불며(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상: 78ㄱ].
즈즐우러커든(濕):질척질척하거든. 유일례. “ 湯火애 데닐 고튜 大黃과 當歸 티 화 細末야  기르메 라 브튜 즈즐우러커든 닐 흐라(又方治湯火所傷用大黃當歸各等分爲末以淸油調傅之則乾摻)”[하: 14ㄴ].
지즐머그라(壓):눌러 먹으라, 약 기운이 내려가게 다른 음식을 먹으라. 유일례. “生薑 自然汁을 수레 프러 머고  세 번곰 머구 스므 나 면 나니 머근 後에 生薑 두세 片로 지즐머그라(生姜自然汁酒調下日三服二十日出服後以薑數片之)”[하:2ㄴ].
찻술(茶匙):찻숟가락. 유일례. “괴 머리  나 오로 론   라  적 머구매 세 찻술옴 야  수레 먹고(猫頭一枚全燒灰爲末每服三茶匙用溫酒下)”[하:64ㄴ].
툽투비(濃):툽툽하게. 1회 출현. “凍瘡을 고툐 가짓 불휘 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髓로 면 즉재 됻니라(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상: 8ㄱ].
티쉬여(上喘):치받아 쉬어. 유일례. “産後에 아니환 피 매 다딜어 가미 차 수믈 티쉬여 목수미 아니한 예 잇거든(産後敗血衝心胸滿上喘命在湏臾)”[하: 89ㄴ].
헐헐-(吃吃, 喘):헐헐하다, 헐떡거리다. 2회 출현. “오래 사 업슨  房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 툐 아라 오직 그 사미 헐헐 소릴 듣고 곧 사로 브르게 홀디니 블로 디 아니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 救티 아니면 죽니(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須臾不救則死)”[상: 21ㄴ], “그르 겨집괴 사괴면 그 證이  기슬기  알고 外腎이 움치들오 치 검고 氣分이 헐헐고  미 흐르니  이 脫陽ㅅ證이니(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冷汗自出亦是脫陽證)”[상: 54ㄴ].
두-(絞):휘정거리다. 2회 출현. “地漿 해 져근 굳 고 믈 브 니기 두 므리라.”[상: 9ㄴ], “ 해  져고맛 구들 고 믈로 구데 기 븟고 니기 두 汁을 取야 마시라.(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取汁飮之)”[상: 28ㄴ].
닐굽(一七):한 일곱. 1회 출현. “두 밠 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 부닙 만  各各 닐굽 븟글 면 곧 사니라(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상:22ㄱ].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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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해제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서명과 서지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의 해설서이다. 곧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금강경언해』에서 경 본문에 단 구결 부분과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에서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著語)·송(頌)과,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에 대한 편저자의 설의(說誼)를 언해하여 세조 비(世祖妃)인 자성대비(慈聖大妃)가 성종 13년(1482) 내수사(內需司)에서 5권 5책으로 간행한 활자본이다 주001)
『금강경』은 『반야심경』과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조계선종(曹溪禪宗)의 기본 경전이다.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서가에 가서 『금강경』에 관련된 서적을 찾는다면 20여 가지 이상을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는 그만큼 독자들이 이 경전을 많이 찾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대한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찬요(纂要), 육조 혜능(六祖惠能)의 구결, 양(梁)나라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의 송(頌), 송(宋)나라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著語)·송(頌), 예장 종경(豫章宗鏡)의 제강(提綱) 등 다섯 가지 주석을 합친 책이다.
.
‘이 문헌’(이하에서는 『금강경삼가해』를 ‘이 문헌’으로 나타내기로 함.)의 제1권이 낙장본이나마 1975년에 새로 세상에 알려져 주002)
『금강경삼가해』전질 5권 5책 중, 당시까지는 서울대 규장각의 가람문고본 권2~5만이 알려져서, 이를 저본으로 한글학회에서 권2,3(1960)과 권4,5(1961)를 각각 간행하였으나, 권1은 미전(未傳)이었다. 권1에 관한 언급으로는 고 이병기 선생의 조선일보(1939.2.14. 5면) 글에서 “三百本이나 되던 이 冊이 지금 와서는 달리 얻어 볼 수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 冊의 第一卷은 京都等地 어느 절집에 … 奉安이 되었다 한다.”(맞춤법 고침. 필자)고 한 것이 있는데 당시도 풍문만이고 공개는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 권1의 낙장본은 위에 언급한 대로이며, 같은 무렵 심재완 교수(1976)도 동국대본과 같은 판인 권1의 이본(낙장본)을 발굴 소개하였고, 10여 년 후 심재완(1981)의 『금강경삼가해』(전)이 간행되었다. 이는 기존의 가람본 권2~5와, 심재완교수 소장(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의 권1에 동국대본의 ‘함허 서’13장(4장 결락)을 보완하여 불완전하나마 전질이 영인된 것이다.
그 뒤 2002년 8월, 전남 장흥군 보림사 소장의 권1(완본)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제대로 전질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된 후에, 필자는 ‘이 문헌’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쓴 바 있었으나, 당시에는 『금강경오가해』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한일 불교 학술 세미나(금강경 연구)’가 있은 후에 그때의 발표 논문이 불교학보(佛敎學報) 12호(1976)에 실려, 주003)
3) 발표문 중 이 글과 관련된 논문은 주로 다음의 세 편이다.
이종익(李鍾益) : 한국불교 조계종과 금강경오가해.
고익진(高翊晋) : 함허(涵虛)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하여.
이지관(李智冠) : 금강경 주해 및 사기에 대한 고찰.
, 이후 학계에서도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국어국문학계에서는 심재완(1981)에 의한 『금강경삼가해』 전(全)의 해제에서 자세한 소개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금강경오가해』만을 언급했을 뿐,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김주필(1993)의 「금강경삼가해」에서야 비로소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인용하여 국어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서지적 성격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는데, 필자(1998, 2000)의 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불교 서적류에서 『금강경오가해』와 『금강경오가해설의』가 구별되지 않고 쓰이는데, 주004)
다음에 소개하는 책들은 내용이 ‘금강경오가해설의’의 번역이면서도 서명은 그대로 『금강경오가해』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대 번역본으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한정섭(1980) 금강경오가해(총 572면), 법륜사.
김운학(1980) 신역 금강경오가해(총 431면(258+173)), 현암사.
전야옹(1996) 금강경오가해역강(총 835면), 승룡사.
청봉(2005)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총 753면), 경서원.
김재영(2005) 금강경오가해(총 733면), (출)하늘아래.
이 밖에 우백암(禹栢巖) 편역(1994) 『금강경삼가해』(총 556면, 한국불교출판부)가 있으나, 서명은 글에서 다루는 1482년(성종 13)판 『금강경삼가해』와 같아도 내용은 꼭 같지 않고, ‘삼가’에 대한 견해도 다르며, ‘설의’ 부분이 다 실려 있으면서도 그 필자인 함허당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문본으로는 인조 10년(1482)에 용복사(龍腹寺)에서 간행한 『금강경오가해』(내용은 ‘금강경오가해설의’)를 동국대학교에서 1958년 8월 축소 영인(총 494면)한 바 있고, 이를 저본으로 다시 1972년 보련각에서 재영인한 판본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동은 아마도 『금강경오가해설의』에 『금강경오가해』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에 함허당의 설의(說誼)까지 베풀어져 있어서, 이를 보면 구태여 『금강경오가해』를 보지 않아도 되게끔 된 데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은 ‘이 문헌’의 서명(書名)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학계에서 통용되는 『금강경언해』는 그 수제(首題)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고 판심제(版心題)가 ‘금강경(金剛經)’이어서 한문본과 구별이 되지 않아 ‘언해’를 추가해서 쓰고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 문헌도 수제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어서 수제만으로는 『금강경언해』인지 『금강경삼가해』인지를 알 수 없다. 다행히 판심제가 ‘금강경삼가해’여서 국어학계에서는 이 판심제를 서명으로 삼고 있다.
‘이 문헌’의 간행 배경은 권5에 실린 한계희(韓繼禧)와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세종은 ‘금강경오가해’ 주005)
필자는 이 책이 『금강경오가해설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의 야보(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득통(得通)의 설의(說誼)와 남명천(南明泉)의 계송(繼頌)을 번역해서 『석보상절』 끝에 편입시키려고 세자[후의 문종]와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였다. 삼가해(三家解)의 초고는 이미 이루어졌으나 교정을 보지 못했고, 남명천 계송은 30여 수밖에 번역하지 못하고 나머지를 수양대군에게 완역(完譯)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것이 되기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세종 32년, 1450) 문종도 재위 3년(1452)에 돌아갔다. 이에 세조가 그 뜻을 이어 먼저 석보(『월인석보』라고 봄)를 간행하고, 능엄경, 법화경, 육조해, 금강경, 원각경, 심경, 영가집 등의 언해를 간행했으나, ‘남명천계송언해’의 상재를 보지 못하고 세조도 돌아갔다(세조 14년, 1468). 이에 세조 비 자성대비가 역대의 홍원(弘願)을 추념(追念)해서 그 유업을 이루려고 학조(學祖)에게 명하여 ‘금강삼해역’(‘금강경삼가해’)의 초고(草稿)를 다시 교정하게 하고, ‘남명천계송’을 번역시켜 전자를 300본(本), 후자를 500본(本) 간행하였다(성종13년, 1482). ‘이 문헌’은 중간본이 간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서지 사항과 소장처 및 영인 관계를 차례로 보인다.

(1) 『금강경삼가해』의 서지 사항
분량 : 5권 5책
1권 57장 추정(함서 17장, 종서 5장, 본문 35장) 주006)
심재완(1981:9)은 ‘함허 서’가 13장으로 중단된 채 낙장되었으므로(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금강경오가해』에서 이 부분의 나머지 한문의 원문(原文)을 찾아 이것의 언해된 분량을 대략 5장 정도로 추정하여 권1의 장수(張數)를 58장으로 보았었으나, 보림사의 권1 완본은 ‘함허 서’의 낙장된 부분이 5장이 아니라 4장으로 끝남에 따라서 권1의 장수는 총 57장으로 확정되었다. 이 ‘함허 서’의 끝장인 17장 9행에는 ‘永樂乙未(1415)六月 日涵虛堂衲守伊盥手焚香謹序’라고 서문의 일자가 있는데, 이는 한문본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문화재청의 ‘국가기록유산’ 참조.)
2권 73장
3권 64장
4권 64장
5권 60장(본문 57장, 발 3장)
계 318장
표제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수제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판심제 : 서문 금강경삼가해함서(金剛經三家解涵序)
서문 금강경삼가해종서(金剛經三家解宗序)
본문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판본 : 경 본문 한자 큰 글자[大字]는 정축자(丁丑字)
그 밖의 ‘오가해’에서 인용한 한자 중 글자[中字]는 을해자(乙亥字)
언해에 사용된 한글은 모두 작은 글자[小字]로 을해자(乙亥字)
책크기 : 38.5㎝ × 25㎝ (보림사본 39,2×25,6cm)
판식 : 4주(周) 단변(單邊)
반광(半匡) 27㎝ × 19.8㎝ (보림사본 27,2×20,1cm)
유계(有界), 큰 글자(경 본문만일 때) 9행 14자
큰 글자(경 본문이 2행 이상일 때) 10행 21자
중 글자 11행 20자
작은 글자 두 줄[雙行] 21자
판심 : 상하 백구(白口), 어미(魚尾)는 상하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상하의 어미 사이에, ‘금강경삼가해’의 서명, 한수자(漢數字)의 권차(卷次) 표시, 그 아래에 한수자로 장차(張次)가 표시되어 있음.
권말제 : 金剛般若波羅蜜經
발문 : 성화(成化) 十八年(1482) 七月 日 ·························한계희(韓繼禧)
시대세임인(時大歲壬寅)(1482) 맹추중완(孟秋仲浣)·········강희맹(姜希孟)

이 문헌의 편찬 양식은 다음과 같다.
책 첫머리에 있는 함허당의 ‘서(序)’는 행의 처음에서 한 글자 내려서 쓰고 이 구절 끝에는 ○표를 하고 두 줄로 언해했으며, 이것이 끝나면 행을 바꾸어 자신의 ‘서’에 대한 ‘설의’를 두 글자 내려서 구결을 단 한문과 이의 언해를 작은 글자 두 줄로 계속해 나갔다. 권1, 16장 후면부터 시작되는 금강경의 본문은 행(行)의 첫 글자 자리부터 한자(漢字) 대자(大字)로 쓰고, 야보(冶父)의 착어(著語)·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은 행의 처음에서 한 글자 내려서 중자(中字)로 썼으며, 이에 대한 함허당의 설의는 두 글자 내려 한문에 구결을 달고, 언해문은 ○표를 하고 두 줄[雙行]로 소자(小字)를 썼으며, 여기 한자에는 동국정음식 한자음을 달았다.
(2) 현전하는 원간본과 그 소장처
권1 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 772호), 보림사(보물 772-3호), 동국대 도서관.
권2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보물 772-2호), 계명대(보물 772-4호).
권3, 성암문고.
권4, 성암문고.
권5, 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 772호). 동국대 도서관.
(3) 영인 현황
한글학회(1960) 금강경삼가해 제2, 제3. 축소 영인 합본(총 146면)(저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람본).
한글학회(1961) 금강경삼가해 제4, 제5. 축소 영인 합본(총 272면)(저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람본).
한국불교학2(1976) 금강경삼가해 동국대도서관 소장 권1(잔권만) 영인(해제 고익진).
영남대출판부(1981) 금강경삼가해(전) (동국대 도서관본 권1의 ‘함허 서’와 권1(심재완 교수 소장본,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 합본,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 권2~권5(해제 심재완).
한글학회(1982) 금강경삼가해 제1(총 105면) (저본 - 영남대출판부(1981) 금강경삼가해(전)에서 권1만을 재영인).
한글학회(1994) 금강경삼가해 권1~권5 합본(한글학회 1982, 1960, 1961 합본, 총 625면).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3) 금강경삼가해 권1(잔권)과 권5(구 심재완교수 소장본), 불설아미타경언해와 합본 영인.

2. 어학적인 고찰

필자는 30여 년 전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문헌의 권1 잔권(殘卷)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이 수장하게 되어 이를 소개하는 짧은 글(1975)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 문헌의 간행 경위와 낙장본의 현황과 새로 나타난 희귀어 10여 개를 고찰한 것이었다.
당시 참고할 수 있었던 고어사전은 고 유창돈 교수의 『이조어사전』(1964)과 고 남광우 교수의 『고어사전』(1971, 보정판, 일조각)이었는데, 이 두 사전에는 이미 알려졌던 이 문헌의 권2~5의 자료가 수록되었을 뿐, 권1의 자료는 소개될 수가 없었다. 『우리말 큰사전』 4(옛말과 이두)(어문각, 1992)이나 『교학 고어사전』(교학사, 1997)은 ‘이 문헌’의 권1의 영인이 1981년에 나온 뒤였으나, 새로운 자료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필자의 부족했던 구고(舊稿)를 검토 보충하여 고어사전에 수록할 자료로 거듭 제시하고자 한다.
그 동안 ‘이 문헌’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로서 필자가 아는 것은 정우영(1990)과 김주필(1993), 이경화(2005)의 세 편뿐이다.
정우영(1990)에서는 ‘이 문헌’과 『남명집언해』에 대한 표기법을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이 문헌’에 관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표기상의 특징으로, 첫째, ㆆ과 각자병서를 일체 찾아 볼 수 없고, 둘째, 전대(前代)의 문헌에 비해 분철 표기가 점증하는바, 체언 말음이 ‘ㆁ, ㄴ, ㄹ, ㅁ’ 등 불청불탁음일 경우 비교적 많은 분철 표기가 보이고, ‘ㄱ, ㅅ, ㄷ, ’일 때 소수이기는 하나 분철 표기가 발견된다. 이 분철표기의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하였으니, 하나는 첨가어인 우리말의 체언이 곡용할 때 체언과 조사의 분리성이 표기자들에게 쉽게 인식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국문 한자 병용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비록 기억의 부담은 늘더라도 표의성을 띤 한자와 같은 어휘형태소의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려는 표기자의 의식이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분철표기의 횟수를 통계표로 보였다.
표기를 통해서 드러난 음운현상의 하나로, 피동화음이 후행 i(또는 j)의 영향으로 하강이중모음으로 실현된 보기(고기~괴기〈2:36ㄱ〉, 버히-[割]~베혀도〈2:7ㄴ〉, 張개여 李개여〈2:33ㄱ〉) 등이 있는데, 이를 움라우트 현상의 제1단계(15C~18C 말엽)로 보고, 제2단계(18C~19C 초엽)는 피동화음이 전설단모음으로 되는 시기로 나누어 볼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언해문의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채택했음에도 개중에는 당시의 현실 한자음으로 보이는 것이 총 56자가 있다 하여 그 보기를 들어 놓았다.
김주필(1993)에서는 ‘이 문헌’의 표기, 음운과 형태, 통사와 어휘 등의 부문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고찰하였다. 표기는 15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표기방법으로서, 『원각경언해』 이후 사라진 각자병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에 따라 ‘ㅆ’도 쓰이지 않았으며, 합용병서는 ㅅ계, ㅂ계, ㅄ계가 모두 씌었으나 ㅂ계 합용의 ㅂ은 이미 탈락된 예( 타 가다가 4:28ㄱ)도 있음을 들었다(이 대목은 착각인 것으로 보인다. ‘-[乘]’는 ‘다’가 아닌 ‘다’이므로 ‘ㅂ’탈락이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종성에 ㆆ이 쓰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나(동국정운식 한자음 제외), 기타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ㅿ 등은 쓰였는데,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지정사 ‘이’가 통합될 때, 분철표기가 상당히 확산되어 나타난다 하였다.
음운현상 가운데서 원순성 동화를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형태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후행하는 원순모음에 약모음 ‘·’가 원순성의 동화를 입어 일어나는 역행동화 현상이고(외로 1:11ㄱ, 밧고로셔 3:32ㄱ), 둘은 형태소 경계에서 원순 반모음 ‘w’를 삽입하여 ‘w’계 이중모음을 형성하는 순행동화 현상인데, 후자를 특징적인 것으로 지적했다(①모도와 1:5ㄱ, 3:43ㄱ, 4:26, ②픠우워 1:7ㄱ, ③보왐직며 1:17ㄴ ; 보왐직호미 2:18ㄱ, ④마초오미 2:29ㄴ).
의미와 관련되는 것으로, 현대국어의 관형사 ‘온’(전부의. 모든)이 중세어 ‘온’에서 의미가 전이된 것이라는 종래의 논의를 검토하고, ‘백(百)을 뜻하는 ‘온’은 거성인데, ‘모든’을 뜻하는 현대어 ‘온’은 장음이어서 서로 관련지을 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고, 중세어 ‘온’은 ‘오다’에 관형형 어미 ‘-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오’에 소급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대명사에 관련되는 것으로, ‘①눌려 2:45ㄱ, ②일로 : 함서 10ㄴ, 2:20ㄱ, ③일로브터 : 종서 5ㄴ, ④절로 : 종서 3ㄱ, 5:16ㄴ, ⑤날려 : 1:7ㄱ’ 등의 형태소 분석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대명사 ‘누, 이, 저, 나’에 조사 ‘ㄹ려, ㄹ로, ㄹ로브터, ㄹ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하고, 두 형태소 사이에 있는 ‘ㄹ’이 왜 1음절로 된 대명사 다음에 특정 조사가 올 때만 개재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밖에 어휘에 관하여는 필자(1975)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있는바, 그러한 사실은 해당 어휘와 관련되는 항목에서 언급하기로 하며, 이경화(2005)도 여기에 참고했다.
(1) :감‧다 : (형) 검은 듯이 붉다.
¶ 복홰 블그며 오야지 며 薔薇 :감·고 東君려 무르니 제 아디 몯다 = 桃紅李白薔薇紫問著東君自不知(금삼 1:23ㄴ)
이는 애초에 ‘감[柿]+다’의 합성어로 보았으나, ‘감다 : 검푸르다’ 식의 상대어를 고려하여, ‘감 : 검[黑]’과 ‘- : 븕-[紅]’의 관계로 보아, 위와 같이 풀이한다. 여기에는 김주필(1993)도 참고했다. 한글학회(1992)나 남광우(1997)에 표제어로 실리지 않았다.
(2) 겨·르롭다(〈겨를+롭다) : (형) 한가롭다.
¶ 엇뎨 聲色 밧긔 걸위여 뷔여 겨르롭거니=豈拘聲色外虛閑(금삼 1:22ㄴ)
이 어휘와 같은 계통의 파생어로 ‘겨르다, 겨르다’가 있고, 다시 후자에서 파생된 ‘겨르이’(겨르이 오 거르니=閑獨步, 금삼2:55)가 있으며, 한편 ‘겨르로’(菩薩이 이 외야 오 겨르로 이셔, 석상13:20)와, 이의 변화형인 ‘겨르로이’(거든 겨르로이 올오=困卽閑眠, 남명 상:59)가 있으므로 의당 이 부사를 파생시킨 본항의 ‘겨르롭다’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 예문으로 해서 문증(文證)된 셈이다. 이 어휘도 앞의 두 고어사전에 실리지 않았다.
(3) 그그 : (첩어)(부사) 더욱 그윽이.
¶ 보며 드를 예 그그 니라=隱隱於視聽之際(금삼 함서:3ㄴ) 주007)
필자(1975)에는 ‘함허당 서’만 있어서 출전 표시에 (금삼 서:~)로 표기했었다. 후에 이본에 ‘종경 서’가 추가되어 오늘날 영인본에는 ‘함허당 서’와 ‘종경 서’의 두 가지 ‘서’가 있으므로 전자를 ‘함서’ 후자를 ‘종서’로 구별해서 적기로 한다.
형용사 ‘그다’(그락 나락 고(隱見)(두초 9:40))가 있음으로 보아, ‘그그’은 이 형용사의 어근이 반복되어서 이루어진 첩어 부사이다. 혹 ‘그그다’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IC 분석상 ‘출현의 자유(freedom of occurrence)와 치환가능성(substitutability)(H. A. Gleason, 1965: 135~137)으로 보아서 ‘그그다’로 보는 것보다는 ‘그그 다’로 하는 것이 낫겠다. 이 단어도 앞의 두 고어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와 유사한 단어 형성인 다음과 같은 어사들이 참고된다.
가. 반다 : 能과 所왜 반니와=能所歷然(금삼 2:13)
나. 반반 (다) : 諸法이 반반 (월석 8:29)
다. 다 : 兪 맛모미  시라(내훈 3:2)
라.  (다) : 나며 머므로미  며=進止從容(금삼 5:9)
마. 아다 : 은애 머리 여희여 어즐코 아야(석보 6:3)
바. 아아 (다) : 末學이 예 니르러 다 아아 니라=末學至此皆冥冥然也(능엄 2:26)
(4) 락 : (명) 바스라기[屑].
¶  가온 락 두미며=眼中著屑【屑 녯사미 닐오 금 락이 비록 져그나 누늘 리디 아니려 니라】(금삼 1:20ㄱ)
이 어휘는 동사 어간 ‘-’에 어미 ‘-락/으락’이 결합한 것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한 파생명사 ‘라기’로 쓰였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 2회 나타난 ‘락’은 모두 명사이다. 사전에는 ‘라기’의 발달형임이 분명한 ‘라기’(구급 하:89)가 수록되어 있다.
(5) 바지외다 : (형) 공교(工巧)스럽다.
¶ 다가 바지왼 소니 아니면(若非匠手)(금삼 함서:13ㄱ)
이 어휘는 명사 ‘바지[工]’에 형용사 파생 접미사 ‘-외-’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이다. 이미 ‘바지로이’라는 부사가 있으므로(詞賦ㅣ 바지로이 야도=詞賦工, 두초 15:8), 이를 파생시킨 ‘바지롭다’는 있었을 것이다. 접미사 ‘-다~-롭다~-다(〉-외다)’는 다음 용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표기(異表記)에 불과하다.
가. 受苦다 보니(월석 14:80)
나. 수고며 즐거며(월석 1:35)
다. 病야 受苦외야도(원각 하 3지1:19)
라. 슈고로이 뇨 니노라=話苦辛(두초 20:27)
(6) 수·늙[嶺] : (명) 재. 고개.
¶ 나 수늙 우희셔 울오=猿啼嶺上(금삼 1:21ㄱ)
이는 이미 『남명천계송언해(南明泉繼頌諺解)』(하:19),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初 상:5)에 보이는 것으로 사전에도 나와 있으나, 많지 않은 용례이기에 보기를 들어 둔다.
(7) ‧스릐 : (글) 쓰는 이의. (글) 쓰는 사람의.
¶ 이런 로 그르 외요미 傳야 스릐 그르호 브틀 미니라=所以舛訛盖緣傳寫之誤耳(금삼 함서:13ㄴ)
‘스릐’는 필자(1975)에서 ‘스-[書/寫]+ㄹ(동명사형)+의(관형격조사)’의 구조로 설명했었는데, 김주필(1993:199)에 따라 ‘스-+ㄹ(관형사형)+이(의존명사)+의(관형격조사)’에서 의존명사 ‘이’가 생략된 것으로 수정해 둔다.
(8) (어‧리) 미‧혹‧‧다 : (형) 미욱하다.
¶ 다가 내 업다 닐어도  어리 미혹니(若言無我更愚癡) (금삼 1:20ㄱ)
이 어휘는 ‘우리히 어리 迷惑야(월석 17:17)’에도 보이는데, 본항은 ‘미혹(迷惑)’이 한글로 표기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迷惑-’는 대체로 원문 ‘迷惑, 迷’와 대응되며, ‘미혹-’는 원문이 ‘愚癡(못나고 어리석음), 愚魯(어리석은 사람), 迷’ 등과 대응된다. 남광우(1971)에서는 한자로 표기된 ‘迷惑다’와 한글로 표기된 ‘미혹다’ 모두 동사로 등재하였고, 필자(1975)도 동일하게 해석하였다. 그런데 남광우(1997)에서는 한자 표기의 ‘迷惑다’는 동사로서 불교용어로 간주하고, 한글로 표기된 ‘미혹다’는 ‘미욱다’로 분화 발달한 형용사로 간주하였다. 원문이 없는 언해문을 바탕으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에 따르기로 하나, 앞으로 더 고구(考究)할 여지는 있다.
동원어(同源語)이면서도 표기 문자가 한자냐 한글이냐에 따라 의미적으로 달리 쓰인 것으로는, 알려져 있는 것이나, ‘衆生’과 ‘즁’이 있다(이기문2004: 57~60).
迷惑다
가. 다가 내 衆生 맛나 佛道 다 치던댄 智慧 업슨 사미 섯거 어즐야 迷惑야 쵸 받디 아니리러니라=若我遇衆生 盡敎以佛道 無智者錯亂 迷惑不受敎(법화 1:208ㄱ)
나. 大衆은 迷惑야 定과 慧왜 다다 니디 말라(육조 중:1)
다. 그러나 迷惑야 아디 몯니=然且迷之不覺(원각 서:29ㄱ협주)

미혹다
가. 나 어리고 미혹 사미라=我是愚魯之人(번박 상:9)
나. 다가 닐오 나 업다 야도  어리 미혹리라=若言無我更愚癡(남명 상:45ㄴ)
다. 醉야 오샛 보 모니 어리며 미혹 디 어루 어엿브도다=醉迷衣寶 癡迷情可愍(금삼 4:22ㄱ)
라. 그 무른 녜 새나 그 氣運은 미 돌티 미혹디 아니니라=其流則凡鳥 其氣心匪石(두초 17:14)
(9) :외(外) : (명) 밖.
¶ 更無人이라 호 저 외예  업닷 마리라(금삼 1:24ㄱ)
이 예문은 협주문이다. 본항의 ‘외’는 접두사로 쓰인 ‘외삼촌 구 舅’(유합 상:20), ‘외삼촌 母舅’(동문 상:11)과는 다른 한자음의 한글 표기로 완전명사인 보기이다. 그런데 이 보기의 방점은 상성인 데 반해서 동국정운에는 ‘‧’로 거성인 점이 다르다.
이 단어를 여기 굳이 언급하는 것은 필자(1975)가 쓰던 당시만 하더라도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리지 못했었고, 현재도 ‘교학 고어사전’에만 실려 있기는 하나, 그 보기가 ‘그 외예’(번노 상:14)를 제외하면 다음과 같이 한글 표기가 아닌 한자음이기 때문이다.
가. 補處菩薩 外예(석보 9:28)
나. 供養기 外예(석보 23:3)
다. 그 外옛(석보 24:47)
라. 내 몸 外예(월석 7:28)
(10) ‧례다 : (동) 차례로 엮다. 차례를 정하다.
¶ 編 ‧례‧시‧오 집 모돌 시라(금삼 함서 12ㄱ 주)
‘례’는 한자어 ‘次第’이다. 명사로서의 ‘례’는 보기가 있었으나, 이에서 파생된 ‘례다’는 여기서 처음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원문에 따라 ‘編’의 새김임을 알 수 있다. ‘--’가 중세국어에서 생산성이 높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어떻든 이 어휘도 사전의 표제어로 올려야 할 것이다.
(11) ‧하야 : (부) 하얗게.
¶ ‧하야 적적 고대  寥寥도다(白的的處亦寥寥)(금삼 1:18ㄴ)
이 문헌 외에도 ‘하야 반반야’(남명 상:23)가 있으나, 종래의 고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하야다’는 ‘하야’에 ‘다’가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하야히’와는 동의어로 본다.
¶ 하야히 비취옛더라=白映(두초 20:45)
[白]을 뜻하는 형용사로 ‘다’도 있었으므로 ‘하야’는 ‘-’에 어미 ‘-아’가 결합한 형태의 이표기(異表記)로(?) 보이나, 모음의 변화가 문제점이다.
(12) (長常) : (부) 늘. 항상.
¶  과  리 애 서르 좃니라=淸風明月鎭相隨(금삼 1:23ㄴ)
이 어형은 사전에는 한자 ‘長常’과 본항과 같은 한글 표기가 아울러 실려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보기에서처럼 ‘+애’로서 명사적으로 쓰인 것이 색다른 점이어서 소개해 둔다.
(13) -는 : -는(관형사형).
¶ 바미 괴외  虛空애 녀는 그려긔 소리  소릿 소리 보내야 치운  알외다=夜靜秋空征雁響 一聲送報天寒(금삼 1:21ㄴ)
관형사형 어미 ‘-’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행어미 ‘’에 어말어미 ‘-ㄴ’이 통합된 것으로 당시의 표기로는 ‘-’이 더 바른 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진작 다음에 보이는 보기처럼 15세기 문헌에서도 간혹 ‘-는’으로 쓰인 것이 보이는데, 본항도 그러한 보기이다.
가. 술윗 소리 우는 소리(석보 19:14ㄴ)
나. 簫 효 대 엿거 부는 거시라(석보 13:53ㄱ 주)
다. 乎 아모그 논 겨체 는 字ㅣ라(훈언 1ㄱ 주)
라. 어울면 모 버는 거시니(월석 2:15ㄴ)
마.  八千里옴 녀는 象이라(월석 7:52ㄴ 주)
이상과 같이 ‘-’ 아닌 ‘-는’이 쓰인 어간의 모음은 모두 음성모음으로서 아마도 체언 아래서 모음조화에 따라 구별되어 쓰이는 조사 ‘-/는’에 유추된 것이 아닌가 한다.
(14) ‘-()’과 ‘-(아/어)’
¶ 峨峨 뫼히 노 오 洋洋 므리 너븐 니 伯牙 녯 琴 잘  사미오 子期 소리 아던 사미니 伯牙ㅣ  뫼해 두고  子期 닐오 峨峨乎ㅣ라 先生 디여 고 므레 두고  洋洋乎ㅣ라 先生 디여 니 이 峨峨 그르 드러 洋洋 삼닷 마리라(금삼1 함서:12ㄴ 주)
위 예문은 ‘지음(知音)’에 대한 고사의 설명으로, 한문 원문이 없는 협주문이다. 여기 밑줄 친 ‘, , ’에서 첫 번째 ‘’이 문제인데, 이 대목의 설명을 필자(1975)에서 “‘-’은 선행어미 ‘-거-, -아/어-, -나-, -더-, -시-’ 등과 연결된 복합어미로 쓰이는바, ‘’은 그 다음에 나오는 용례와 같이 ‘(〈-+-아)’이 정철(正綴)이므로 전자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했다.
이번 역주 작업에서 이 대목을 현대문으로 옮기면서 지난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전의 글에서는 깊이 생각지 못하고 첫째의 ‘’을 나머지 두 형태와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은 ‘-던’의 오기로 보인다. ‘…伯牙 녯 琴 잘  사미오 子期 소리 아던 사미니…’의 앞 절과 뒷 절이 대칭적인 글로서, 그 어미의 형태가 같아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은 오자이거나, 식자공(植字工)의 잘못이라고 보아 현대문 ‘타던’으로 풀이했다. ‘ㆍ’와 ‘ㅓ’의 혼기가 동시대의 다른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예가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이렇게 정리해 둘 수밖에 없다. 주008)
김주필(1993:191)은 ‘’에 대한 필자(1975:154)의 설명에 동의하였으나, 이번의 수정으로 재고의 여지가 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보인다.
¶ 소곰 성이라 여 이시니 그 소곰으로 가(팔세아:8)
(15) ㅣ종성 체언 아래 주격 표기
¶ 가. 智(딩)ㅣ 거즛 緣 뷔취면 萬法이 다 며 體톙ㅣ 眞常이 나다나면 五蘊이 다 뷔리라=智照妄緣면 萬法이 俱沉며 體露眞常면 五蘊이 皆空리라(금삼 1:14ㄴ)
¶ 나. 오 機(긩)ㅣ  업스니 機긩ㅣ  업서=全機ㅣ 無垢니 機無垢야(금삼 1:18ㄴ-19ㄱ)
¶ 다. 智(딩)ㅣ 諸佛와 가지라=智同諸佛야(금삼 5:21ㄱ)
¶ 라. 大地 가지로 보미며=大地ㅣ 同春이며(금삼 함서:6ㄴ)
체언의 끝모음이 ‘i’이거나, ‘y’로 끝나는 하강적 이중모음 ‘ㅐ, ㅔ, ㅚ, ㅟ, ㅢ’일 때에 주격표기는 영형태(零形態)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인데, 15세기 중엽에 간행된 『능엄경언해』(1462), 『법화경언해』(1463) 등에서는 주로 한자어 아래에서 영형태가 아닌 ‘ㅣ’ 표기를 한 것이 있다. 이 현상은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과 언해문에 다 나타난다(필자 1963:165~166). 이 문헌은 위의 문헌들보다 20년이 더 늦은 문헌인데, 동일한 현상을 보여 준다. 이보다 한 해 앞서 간행된 『두시언해』 초간본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확인된다(필자 1963:157~169). 그러므로 ‘이 문헌’의 다음 보기들은 영형태와 ‘ㅣ’로 동요된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같은 문장의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서도 달리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상으로 필자(1975)의 재검토를 마치고, 다음은 어휘 부분으로 위에서 언급하지 못한 것을 다루기로 한다.
(16) 니를히 : (부) 이르도록.
¶ 가. 東 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시매 니를히=以東說西說橫說竪說히(금삼 1:33ㄱ)
¶ 나. 거믄고 노로 이제 니르히 帝子 슬노니=鼓瑟至今悲帝子(두초 11:7)
¶ 다. 이제 니르히 것군 난함이 갓 노팻도다=至今折檻空嶙峋(두중 4:30)
¶ 라. 아브터 나죄 니히(번소 9:102)
¶ 마. 어린 제븓터 늘곰애 니히 슬흐여 디 아니며=自幼至老不厭(선소 5:9)
¶ 바. 팔만사천 다라니문에 니르리=至八萬四千多羅尼門이(금삼 5:24ㄱ)
¶ 바'. 뭀새 이제 니르리 위야 삿기 머기놋다=群鳥至今爲哺雛(두초 17:4ㄴ)
¶ 사. 니샤 니논 밧 法相이 곧 法相 아니라 호매 니르르시니=乃至云所言法相者ㅣ卽非法相이라 시니(금삼 5:13ㄴ)
¶ 아. 이 고대 니르런=倒這裏얀(금삼 5:31ㄴ)
¶ 자. 우흐로 諸佛에 니를며=上至諸佛며(금삼 5:36ㄱ)
(가)의 ‘니를히’는 ‘니를-[至]’에 ‘-히’가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만을 보면 원문에 단 한글 구결이 ‘-히’로 되어 있어서 이에 유추(類推)되어 ‘니를히’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나, 다)의 ‘니르히’와 (라, 마)의 ‘니히’는 그러한 추측을 어렵게 한다.
(바-자)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였던 어간 형태 ‘니를-’이 확인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어휘의 어간 형태가 본래는 ‘니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니를히’는 고형(古形)이 유지된 것이고, ‘니르히/니히’는 ‘ㄹ’ 탈락형이며, ‘니르리’는 ‘ㅎ’ 탈락형이 되는 셈이다. 더 많은 예가 확보되어야 하겠으나, 일단 이러한 견해를 제시해 둔다. 이 예도 고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17) ·몃다 : (부) 바로. 곧(믿건대. 아마. 마침.)
¶ ·몃다 톳긔  도다 비록 이신 어느 고 向야 着리오 큰 블 소밴 物 머므로미 어려우니라=賴同兎角이로다 說有 向什麽處著이리오 大烘焰裏옌 難停物이니라(금삼 2:66ㄴ)
이는 심재완(1981:27) 난해어(難解語)의 주석에 ‘믿건데. 아마’ 풀이한바, 그 후 사전에 실리지도 않은 채 내려오다가, 이경화(2005:44~45)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곧, 심재완(1981)의 간단한 뜻풀이만으로 부족하므로, 원문의 ‘뢰(賴)’에 대응되는 풀이이므로 이의 자석(字釋)을 검토하고 문장의 구조상 ‘마침’ 정도의 부사로 보고, 이로써도 적격한 풀이로 보기 어렵다면서 ‘賴’자가 쓰인 한문 문장을 재검토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필자도 문맥으로 보아서 부사로 보는 데 동의하지만, ‘마침’이 위에 대입되었을 때는 어색한 느낌을 면할 수가 없다. 참고로 『금강경오가해(설의)』번역본에서 이 대목을 찾아본바, 무비(1992), 우백암(1994) 두 책 모두 ‘賴’자는 번역하지 않았다. 다른 기댈 만한 것이 없어서, 이종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께 자문을 받아 ‘바로, 곧’으로 해 두고 다른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8) ·블무·디 : (명) 불덩이.
¶ · 온 ·블무·디 四面이 어루 드디 몯홈 니라=亦如猛火聚四面이 不可人이니라(금삼 5:29ㄱ)
이는 종래의 사전에 실리지 않은 것이나, 『교학 고어사전』에는 이의 파생 모체로 생각되는 ‘블묻-’를 동사로 싣고, 그 뜻은 ‘불씨를 묻다’로 해 놓았다. 위의 예문과 뜻으로 보아서는 잘 맞지 않으나 ‘블[火]+묻-[埋]+이’로 볼 수도 있다. 이경화(2005)는 이를‘블[火]+무디[堆,聚]’의 합성어로 보고, 뜻은 한문의 ‘화취(火聚)를 따라서 ‘불덩이’로 했는데 별 이의를 달 것이 없다. 사전에 새로 실어야 할 것이다.
(19) :셰 : (부) 세로로.
¶ 東 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샤매 니를히=以東說西說橫說竪說히(금삼 1:33ㄱ)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에는 다음 보기가 실려 있다.
¶  고 셰 다=橫跳竪跳(역해보 60)
이 ‘셰’를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명사와 부사로 두루 쓰이는 것으로 보았고,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에서는 명사로 보았다. 이 예문에서 ‘다’를 한정하는 것으로 보아 부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셔-’에 접미사 ‘-ㅣ’가 결합한 것이다. 이 『역어류해(譯語類解) 보(補)』는 영조 15년(1775)간이므로 방점도 없는 어형이어서, 연대도 앞서고 방점이 있는 어형을 보기의 첫 번째로 수록하는 것이 낫겠다.
(20) 솝[裏]과 속
¶ 敎海ㅅ :소· 向샤=向敎海裏샤(금삼 1:16ㄱ)
이미 잘 알려진바, ‘솝’이 더 고형이고 ‘속’은 개신형으로서, 주009)
‘솝’의 자료는 『석보상절』을 비롯해서 『월인석보』,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원각경언해』 등 여러 문헌에 나오므로 보기는 줄인다.
두 어형은 중세국어 당시에도 쌍형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어사전에서는 이 개신형의 제일 이른 시대의 것으로 ‘骨髓는  소개 잇 기르미라’(월인석보 1:13. 주)를 수록하였고, 다음으로는 이 문헌과 같은 무렵의 초간 『두시언해』의 자료를 실었다.
‘이 문헌’에서는 권 1, 2를 통틀어서 ‘속’이 한 번 쓰였고 ‘솝’은 15회 나타난다. 3, 4, 5권에서는 개신형 ‘속’은 보이지 않고 ‘솝’만 나타난다.
(21) 슬·히 : (명) 창[戈].
¶ 戈 슬·히라(금삼 1:33ㄴ 주)
이는 ‘이 문헌’의 권1에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필자(1975)가 쓸 당시 이용했던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낙장본에는 없었고, 심재완(1981:12)에서 희귀어휘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간행된 고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 보기의 형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문제인데, ‘슳+이(서술격)+라’로 하여 ㅎ종성체언으로 해 두지만, 또 다른 보기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22) ·:곶·다 : (동) 팔짱끼다.
¶ 世間ㅅ 사미 病이 업스면 醫王이 ·:곳·니 衆生이 허믈 업스면 부톄 걔 홀 일 업스시니라=世人이 無病면 醫王이 拱手니 衆生이 無垢면 佛自無爲시니라(금삼 4:24ㄴ)
※ 九重에 :고·잿거·든 四海朝宗놋다=端拱九重이어든 四海朝宗이로다(금삼 3:4ㄱ)
이 ‘곶-’은 유일한 예문으로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문의 ‘공수(拱手)’에 대응되어 뜻은 위와 같이 풀이되었다. 이의 형태 분석은 ‘[袖]+ㅅ++곶-[拱/揷]’로 보는바, 문제는 ‘’에 있다.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기의 ‘곶-’이 있는데, 이도 『우리말 큰사전』에는 동사 ‘팔짱끼다. 깍지끼다.’로 했고, 『교학 고어사전』에는 명사 ‘[팔짱]’과 동사는 ‘곶-’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결국 뜻은 앞의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은 후에 ‘뎡→(졍)→팔짱’으로 바뀌었다 할 것인데, 문제의 ‘뎡’은 위에서 아무 뜻이 없는 것으로 되어서 미진한 느낌이 남는다. 이와 관련되는 16세기 자료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 잔 자바 헌슈고 여 매디르고 웃 녀그로 즈우려 나오니=奉觴上壽畢 皆肅容拱手 自右趨出(이륜 초:31)

관심 있는 분들의 교시를 기다린다.

(23) 오··다 (동) 우비어 파내다. 천착(穿鑿)하다.
¶ 後世예 반기 거즛 일 니며 왼 고 와 오··포· 거츠리 내야 그 마 모로매 通호 求리 이시리니(後世예 必有承訛踵誤야 妄生穿鑿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니)(금삼 함허서:17ㄱ)
이 ‘오포’은 ‘이 문헌’에서 처음 보인다. ‘포’은 ‘-[掘]+옴/움+’의 구조임이 분명하나, 문제는 ‘오·-’인바, 일찍이 이기문(1971:122)에서 ‘외  刻’(훈몽 상:1ㄱ)의 설명에,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의 ‘穿鑿은 :욀·씨·라’(28ㄴ주)와 관련지어 ‘외-’의 뜻을 ‘어떤 물건을 뚫어(또는 뚫둣이) 파는 동작[穿掘]을 의미’함으로 풀이했다. 이 대목을 현대역한 김무봉(2002:37)에는 ‘오비는 것이다’로 옮겼다. 따라서 ‘이 문헌’의 ‘오-’는 원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천착(穿鑿)’의 옮김으로써, 이 어형만으로 본다면 위의 ‘외-’나, ‘:외-’보다 앞선 시대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곽충구(1996:49-50)에서는 위의 ‘외-’와 ‘우·의-(석보 11:21, 두시 초 16:37), 함경남도 북청방언의 ‘오배(LH)’, 현대국어 ‘오비-, 우비-’를 바탕으로 ‘*오-, *우-’를 재구하고, 15세기 이전에 ‘*오·->*오·외->:외-’와 같은 변화가 있었고, ‘외·-’는 ‘우비어 파내다’라는 뜻의 복합동사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 문헌’의 ‘오-’는 위의 변화에서, ‘*오·외-’와 ‘:외-’ 사이에 자리하게 되며, ‘*오·외-’에서 겹쳐지는 원순모음은 이런 경우 이화작용으로 원순성이 소실되어 ‘오·-(+-)’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 아닌가 한다. 이는 최전승(1975)을 곽충구(1996:50-51주)에서 재인용, 적용한 것이다.
(24) 울: : (명) 등나무의 열매.
¶ 葛 츨기오 藤 울:·니 다 너추는 거시니(금삼 1:3ㄴ 주)
이 자료도 필자(1975)에는 소개되지 못한 것이고, 고어사전에도 수록되지 못했다. 다른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울니’는 ‘울+Ø+니’로 본 것이다. 어원과 관련될 만한 것으로는 ‘울[籬]’과 ‘열[實]’의 ‘’ 정도인데, 전자는 ‘·울 爲 籬’(훈해 용자)로 거성이며, 후자는 ‘열 실[實]’(왜해 하:6, 18세기 초엽 자료?)로 성조도 미상이다. 혹시 방언 등에 쓰이는 데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다음은 고어사전의 예문이 유일한 것, 곧 이 문헌의 예문만으로 된 것을 모아서 살피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1~23)에서 다룬 것과 아울러 보면, 이 문헌의 어휘사적 중요성을 한층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시될 차례는 위에서처럼 단어, 품사, 뜻, 예문과 출전의 순서로 한다.
(25) 외다 : (형) 완전하다. 만족스럽다.
¶ 文과 質왜 골아 비르서 어루 일후믈 왼 莊嚴이라 홀디니라=文質이 彬彬야 始可名爲十成莊嚴이니라(금삼 4:22ㄴ)
(26) 그만·뎌만·다 : (형) 그만저만하다.
¶ 간 마다  것 슬히 너기고 더운 것  머구믈 그만·뎌만·야뇨마=到處에 嫌冷愛熱야 喫却多少了也오마(금삼 3:52ㄱ)
(27) 덕[棚] : (명) 사다리.
¶ 棚 더기라(금삼 2:25ㄴ 주)
(28) :돌·블 : (명) 별똥별. 유성(流星).
¶ :돌·브른 流星이라(금삼 4:63ㄱ 주)
(29) ·다 : (형) 습습(習習)하다. 바람이 산들산들하다.
¶ 보현행문 노피 오니 덥듯 미 ·야 프르며 누르니 해 도다=高踏普賢之門니 薰風이 習習야 靑黃이 滿地로다(금삼 4:18ㄱ)
(30) 머믓다 : (동) 머뭇거리다.
¶ 逡巡 머믓 오(금삼 4:10ㄴ 주)
(31) 믓다 : (동) 무너지다. 부서지다.
¶ 고대 어름 노며 디새 믓· ·샷다 니=當下애 冰消瓦解샷다 니(금삼 2:1ㄴ)
(32) 믿얼굴 : (명) 본바탕. 본질(本質).
¶ 質은 묨 업슨 믿얼구·리라(금삼 2:61ㄱ 주)
(33) 벼·다 : (동) 겉을 꾸미다. 가장(假裝)하다. 거짓 꾸미다.
¶ 有僞 비록 거츠나 리면 功行이 이디 몯고 無爲 비록 眞나 벼면 聖果 證호미 어려우니  니라 벼디 아니며 리디 아니  어늬 이 성제 제일 고=有爲雖僞나 棄之則功行이 不成고 無爲雖眞이나 擬之則聖果 難證이니 且道不擬不棄時 如何是聖諦第一義오(금삼 4:31ㄴ~32ㄱ)
(34) :뷔듣·다 : (동) 비척거리다. 비틀거리다.
¶ 窮子ㅣ :뷔드·러 외로이 나가 녀 나리 마 오라더니=窮子ㅣ 竛竮孤露야 爲日이 已久ㅣ러라(금삼 3:25ㄱ)
(35) ·븘나·올 : (명) 불꽃.
¶ 靈 ·븘나·오리 빗나 부러도 어루 디 몯리니=靈焰이 烜赫야 吹之不可滅이니(금삼3:29ㄴ)
(36) :빌·다 : (동) 빌어 꾸다.
¶ 안로 이운 남기 호 威儀 :빌·워 나토니=內同枯木호 假現威儀니(금삼 4:18ㄴ)
¶ 이 일후미 :빌· 일후미며=是名爲假名이며(금삼 5:37ㄱ)
(37) ·룯·다 : (형) 뿌루퉁하다.
¶ 盧都 ·룯·다 논 마리니 말 몯시라(금삼 3:12ㄴ 주)
(38) 서느서늘··다 : (형) 선득선득하다. 몹시 서늘하다.
¶ 이 이 서늘야 싁싁며 冷호미 서느서늘·야 처딘 므리 처딘다마다 어러=此事 寒威威冷湫湫야 滴水滴凍야(금삼 4:42ㄴ)
(39)  : (부) 아른아른. 아물아물.
¶ 陽燄 陽氣  노 거시니(금삼 5:27ㄱ 주)
(40) ·앛 : (명) 까닭. 소이(所以).
¶ 이 爲頭며 읏듬 외논 勢론 ·아·치니·라=此ㅣ 所以爲王爲主之勢也ㅣ니라(금삼 함서:3)
¶ 善現 奇特혼 아 그 聲敎 기드리디 아니야 信야 疑心 아니호 오 慈尊이 希有샨 아 그 聲敎 나토디 아니샤 人天 여러 알외샤 니라=善現之所以奇哉者 以其不待聲敎야 而信無疑也ㅣ오 慈尊之所以希有者 以其不現聲敎샤 而開覺人天也ㅣ니라(금삼 2:8ㄴ)
※ 이 문헌에서 ‘젼’는 주로 한자 ‘고(故)’의 풀이로 씌었다.
¶ 靑色 能히 災厄 더논 젼라=靑色 能除災厄故也ㅣ라(금삼 종서 3ㄱ)
(41) 주엽·쇠 : (명) 풍경(風磬).
¶ 닐오 山僧이 座애 오디 아니얫거 맷 주엽·쇠 마 혀 흐느다 호 모로매 미둘디니라=須信道山僧이 未陞座ㅣ어늘 風鐸이 已搖舌이니라(금삼 4:43ㄴ)
다음은 드문 문법 형태를 소개하는 것이다.
(42) -엣고
¶ 이 늘그늬 이 마 사미 劫外 向야 알엣고 니=此老의 此說 只要人이 向劫外承當케 니(금삼 2:1ㄴ)
여기 ‘알엣고’의 ‘-엣고’는 ‘-겟고’에서 /ㄱ/이 약화된 것이다. ‘-겟고’는 ‘-긧고’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학 고어사전』에는 ‘-긧고’만 표제어로 되어 있고 ‘-엣고’는 실려 있지 않으며, 『우리말 큰사전』에는 표제어 ‘-긧고’ 아래 다음 두 보기를 들고, 참고로 ‘⇒-겟고’ 표시를 한바, ‘-겟고’ 항목에는 ‘-게 하고자’라는 뜻풀이와, [=-괫고/-긧고/-엣고〕로 끝나고 보기는 없다. 그러므로 위의 보기는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가. 庶幾 그러긧고 라노라 논 디라(월석 1, 석보서:6ㄱ. 주)
나. 三寶애 나가 븓긧고 라노라=而歸依三寶焉이니라(월석1, 석보서:6ㄴ)
다음은 재미있는 한글 활자의 모양이다.
(43) (中) : {}
가. 에 城 남아 出家샤=子夜애 踰城出家샤(금삼 1:1ㄴ)
나. 여러 部ㅅ 中()에 오직 이  부=於諸部中에 獨此一部(금삼 1:2ㄴ)
다. 山埜 이 저 니논 마리라(금삼 1:13ㄴ. 주)
라. 늘근 을 심겨 주고=授與老僧고(금삼 1:7ㄱ)
여기서 밑줄 친 부분을 보면, (가)는 언해문에서 한자어를 한글로 적은 것인데 모음 ‘ㅠ’자의 모양이 좀 다른데, 이를 (나)의 동국정운식 한자음 활자와 비교하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ㅠ’자에 ‘ㆁ’ 받침을 쓰면 글자가 잘 드러나지 않음을 의식해서 활자 모양을 달리한 것이다. ‘ㅠ’의 두 수직선이 八(여덟 팔) 자 모양을 하고 있다. (다)는 한자음은 아니나 ‘ㆁ’받침을 단 ‘ㅠ’자가 (가)의 모양과 같고, (라)는 (다)와 같은 글자임에도 보통 쓰이는 글자를 보인 것이다. (가, 나)가 한자음이라면 (다, 라)는 고유어로 쓰인 것이다.
(가)와 같은 활자 1:12ㄴ, 1:17ㄱ(2), 1:17ㄴ, 2:9ㄱ, 2:35ㄴ, 2:55ㄱ, 2:64ㄴ···8회
(나)와 같은 활자 1:17ㄴ(2), 2:16ㄴ, 2:20ㄱ, 2:21ㄱ, 2:22ㄱ, 2:42·············7회
(다)와 같은 활자 2:26ㄱ························································1회
(라)와 같은 활자 2:23ㄱ주, 2:27ㄱ·············································2회
3, 4, 5권에도 이런 활자가 씌었으니, 그 경향은 통틀어 다음과 같다. 주010)
두 개의 수직선이 여덟 팔(八) 자와 유사한 ‘ㅠ’를 ‘ㅡ八’로 나타내기로 한다.
가. (中) : 36회 {듕} : 16회
나. (衆) : 5회 {즁} : 23회
다. [僧] : 없음 {즁} : 11회
마지막으로 한자어의 새김 중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를 보이고자 한다.
(44) 한자어의 새김
가. 어루 錦ㅅ 우희 고 더으다 니리로다=可謂錦上添華ㅣ로다(금삼1 함서:10ㄴ)
나. 東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시니=東說西說橫說竪說시니(금삼1:32ㄴ)
다. 奧旨 돌햇 블와 번겟 비치 야=奧旨 石火電光야(금삼1 종서:5ㄱ)
라. 몃맛 人天이 말 아래 갈  알며=多少人天이 言下애 知歸며(금삼1:25ㄱ)
마. 여슷 여스시 녜브터 오로 셜흔여스시니라=六六이 從來로 三十六이니라(금삼4:45ㄴ)
(가, 나)는 오늘날 한자어 그대로 쓰이는 말이고, (다)는 앞뒤가 바뀌었지만 역시 한자어가 그대로 쓰이며, (라)의 ‘언하(言下)’는 거의 대중의 말로는 듣기 어려운 말이다. 이러한 한자어 또는 숙어에 대한 새김의 노력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가)는 직역을 하더라도 뜻이 통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직역으로든 의역으로든 ‘조리가 없이 되는 대로 말을 지껄임’이라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는 ‘돌에서 일어나는 불과 번갯불’이라고 옮겼을 때 (나)의 경우보다는 좀더 알아듣기 쉬운 느낌이 들지만, 이 말이 역사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라)는 이 말이 ‘일언지하(一言之下)’의 준말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말씀 아래’로 적었을 때, ‘말하는 바로 그 자리’ 또는 ‘말이 떨어지자 그 즉시’ 라는 뜻이 얼마만큼 전달될지 의문이다. (마)는 산술적 표현으로서, 오늘날의 ‘구구단’과 관련된 것이다. ‘여섯여섯’ 식의 표현이 당시에 실제로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이 문헌’이 나온 시기가 우리 고유어를 살려 쓰자는 커다란 사회적인 기운이 조성된 그런 때는 아니었겠으나, 오랫동안 굳어져 쓰여 오던 말을 새로운 고유어로 고쳐 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현대역 『금강경오가해』(무비 역해, 1992)에서는 (가, 나, 라)는 원문 그대로, (다)는 ‘전광석화’로 옮겼다.
45)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불교 인명, 용어는 『동국정운』(1448)의 이른바,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주음한 것이다.
가. 般반 若:(금삼 1:2ㄱ)
나. 解:갱 脫·(금삼 1:3ㄴ)
다. 阿 難난(금삼 1:34ㄴ)
라. 阿耨·녹多당羅랑三삼藐·막三삼菩뽕提똉(금삼 3:56ㄱ)
이러한 한자음의 사용은 ‘이 문헌’의 간행연대(1482)로 보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곧,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불경언해에 쓰이면서 중간에 1차의 수정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니, 1463년 간행의 『법화경언해』에는 위의 음이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가’ 般 ·若 :(법화 5:188ㄴ)
나’ 解 :脫 ·(법화 3:140ㄴ)
다’ 阿 ·難 난(법화 1:30ㄴ)
라’ 阿耨·녹多당羅랑三삼藐·먁三삼菩봉提뗑(법화 1:37ㄱ)
이와 같이 수정된 이유는, 이 한자음은 본디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음역어(音譯語)로서 그 원음에 가깝게 적으려는 데 있었다고 본다(정우영 1996 : 92~99, 이경화 2005 : 28~29). 이런 한자음은 1467년 간행의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목우자수심결』, 『사법어』까지 쓰이다가, ‘이 문헌’과 같은 해에 간행되는 『남명집언해』에 이르러서는 정음 창제 초기 한자음 표기로 돌아가고 만 것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정우영(1996)으로 미룬다. 이러한 한자음의 수정에 관한 언급은 일찍이 안병희(1987)에서도 언급된 것이 있다.

3. 마무리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오가해설의』에서 금강경 본문·야보(冶父)의 착어(著語)와 송(頌)·종경(宗鏡)의 제강(提綱)과 함허당(涵虛堂)의 서(序)에 대한 설의(說誼)를 언해하여 1482년에 간행한 5권 5책의 금강경 해설서이다.
‘이 문헌’은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에 전하던 권2~5를 한글학회에서 축소 영인하여(1960, 1961) 널리 알려졌으며, 1975년 동국대 도서관에 권1의 낙장본이 수장되고, 그 무렵 심재완 교수(1976)도 같은 판본의 권1 이본(낙장본)을 발굴 소개했다. 그 후 심재완(1981)은 자신의 이본에 결락된 부분을 동국대본에서 보전(補塡)하여 가람문고본과 합하여 전 5권을 1책으로 영인 간행했으나, 권1의 ‘함허 서’ 몇 장은 낙장인 채 완본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 8월 전남 장흥군 보림사 소장 권1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공개되어 비로소 5권 5책 전질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헌’의 표기, 음운, 문법 등은 정우영(1990)과 김주필(1993)에서 요약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어휘 부분은 필자의 구고(1975)를 일부 수정 보충한 바, 새로 고어사전에 수록돼야 할 것으로 19개어, 이미 사전에 수록된 것이나 그 예문이 이 문헌의 것만으로 된 것 16개를 확인함으로써 어휘부문에서 차지하는 이 문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밖에 색다른 활자 모양을 시도한 ‘’[{듕}]를 찾아 보였고,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긴 몇 개의 보기를 통해서 당시 번역자의 고심의 일단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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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집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 교수. 국어학)

1. 머리말

우리가 흔히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 부르는 이 책의 원 이름은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의 명칭이 같지만, 학계에서는 우리말·글로 번역한 언해본을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원 이름 끝에 ‘언해(諺解)’를 덧붙여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언해(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諺解)」라 일컬으며, 이를 보통 「남명집언해」라고 줄여 부른다.
상·하 2권으로 된 『남명집언해』의 번역 저본은 한문본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인데, 책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중국 당나라 고종·중종 때의 스님인 영가대사(永嘉大師) 현각(玄覺. ?~713)이 지은 『증도가(證道歌)』를 송나라 남명천선사(南明泉禪師)가 구(句)마다 나누어 계송(繼頌)한 총 320수로 구성된 책이다.
이 자료를 학계에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남풍현(1972, 1973)에서인데, 남풍현(1972)에서 「하권」을, 남풍현(1973)에서 「상권」을 각각 영인하고 해제를 제공하였다. 그 후 안병희(1979)에서 간명하게 자료가 소개되었고, 김영신(1988:165~241)에서는 상·하권에 대한 국어학적 연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상·하권」을 국어 어휘와 한자어로 나누어 어휘 색인을 작성하였으며, 어휘론에서는 어휘 통계, 희귀어, 빈도 높은 어휘, 오각된 어휘 등을 소개하였고, 그 밖에 음운론, 굴곡론, 조어론의 측면에서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정리함으로써 개별 문헌으로서는 상당히 정치한 연구를 이룩하였다. 박종국(1988)에서는 해제와 함께 「하권」을 영인하였으며, 정우영(1990)에서는 동시대에 간행된 『남명집언해』와 『금강경삼가해』의 표기법의 특징을 병서 표기, ㅣ모음역행동화, 연분철 표기, 현실한자음 표기 항목으로 나누어 비교 조사하였다. 김영배(2000)에서는 이 문헌의 가치와 서지를 알기 쉽게 정리하였다. 직접적인 관련은 적으나 박희숙(1978)에서는 한문본의 구결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해제」라는 글의 성격을 감안하여 4장으로 나누어 이 문헌을 소개한다. 제2장에서는 서지·편찬 경위 등 문헌을 개관하고, 제3장에서는 이 책에 나타난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공시적 특징을 정음 창제 초기문헌과 대비하면서 역사적 위상을 밝히며, 제4장에서는 앞선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 어휘들을 정리·소개하였다. 문법적인 특징은 김영신(1988)에서 소상히 다루어졌으므로 선행연구로 미루며, 좀더 구체적인 사실은 『남명집언해 상』을 역주한 김동소 교수님과, 하권을 맡은 이유기 박사의 역주 본문 해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이 점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한다.

2. 문헌 개관

2.1. 서지 사항

『남명집언해』는, 세종 때부터 기획과 번역이 시작된 것을 학조(學祖. 1432~?)가 완성하여 성종 13년(1482)에 주자본인 을해자본(乙亥字本) 상·하 2권 2책으로 간행된 언해서이다. 원간본인 가람문고본(상권)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하권)을 토대로 하여 서지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01)
좀더 자세한 정보는 남풍현(1972, 1973), 박종국(1988:81~85), 김영배(2000) 참조.
책 전체의 크기는, 상권은 33.4㎝ × 21.5㎝, 하권은 33.4㎝ × 21.6㎝이다. 각면의 네 둘레에는 굵은 줄로 테두리가 있으며[四周單邊], 테두리 안쪽 한 면의 너비[半葉匡郭]가 24.8㎝ × 17.7㎝이다. 그 안에 세로로 칸이 나뉘어져 있는데[有界] 9칸이다. 1칸 당 본문의 경우[구결문]는 큰글자로 19자, 이것의 번역문은 작은자 2줄로 19자를 쓸 수 있으며, 주해문은 1칸에 작은자 2줄로 가지런히 1자씩 비워 놓아 18자를 쓸 수 있게 돼 있다. 각면의 가운데[판심]는 상하 흰색[백구]에 상하 안쪽으로 향한 검은 지느러미 모양[상하내향흑어미]이고, 위쪽에는 책 이름 ‘南明’과 권 표시(上·下), 아래쪽에는 쪽수가 표시돼 있다. 발문의 경우는 칸의 수와 글자수가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판본(원간본)의 소장은, 가람문고(상하), 통문관 이겸로 선생(상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만송문고(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전 김석하님 소장)(하), 통문관 이겸로 선생(하) 등에게 소장되어 있으며, 중간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안병희 1979).
원간본의 영인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편집하여 단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축소 영인해낸 바 있는데, 하권이 1972년 12월, 상권이 1973년 4월에 이루어졌으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1988년 12월 『세종학연구』 3에 하권을 박종국 선생의 해제와 함께 영인·소개한 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1) 남명 상 : 합쳐 83장
가. 서문: 1077년 7월 오용(吳庸)의 서(序)와 언해문 [1-3장]
나. 본문: 한문송(漢文頌)과 언해문(1~80장) [80장]
(2) 남명 하 : 합쳐 80장
가. 본문: 한문송(漢文頌)과 언해문(1~75장) [75장]
나. 후서: 1076년 7월 축황(祝況)의 후서(後序)(75~77장)[2장]
다. 발문: 1482년 7월 한계희 발문(1~2장)
1482년 7월 강희맹 발문(2~3장)
이 책의 분량은 상권(83장)과 하권(80장)을 합쳐 모두 163장이며, 책의 중심을 이루는 한문송(漢文頌)은 상권에 156수, 하권에 164수가 실려 모두 320수가 언해되어 있다. 이 책을 15세기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서와 비교해 보면, 시기적으로도 늦게 이루어지고 분량도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역주는 물론이고 까다로운 구절이나 어휘가 여러 개 나타나 독해하기가 만만치 않으며,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어’도 여러 개 나타난다(§4 참조). 그 원인은 언해의 대상이 「증도가(證道歌)」라는 선시(禪詩)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언해 문헌과는 달리 계송(繼頌)에 대한 주해가 한문 원문이 제공되지 않은 채 그대로 우리말글로 표현돼 있기 때문에 독해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파격은 전후 문헌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데, 처음 기획과 함께 30여 수를 번역한 세종에게서 마련되어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이 한문 원문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2. 편찬 경위

이 책의 편찬 경위는 다소 복잡하다. 『남명집언해』에 실린 한계희(韓繼禧)·강희맹(姜希孟)의 발문(1482년 7월)에서 간추려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주002)
이외에 남풍현(1972, 1973), 박종국(1988:81~85), 김영배(2000:272~276)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세종 28년 3월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번역코자 하였다. 세종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중에서 「야부 송(冶父頌)」·「종경 제강(宗鏡提綱)」·득통 설의(得通說誼)」 및 『증도가남명계송(證道謌南明繼頌)』을 국어로 번역하여 「석보(釋譜)」에 편입시키려고 동궁(후에 ‘문종’)과 수양대군(후에 ‘세조’)에게 함께 찬술하라고 명한다. 「야부 송」 등 삼가해(三家解)는 초고가 끝났으나 교정(校定)은 보지 못하였고, 「남명계송(南明繼頌)」의 경우는 세종 자신이 겨우 30여 수만을 번역, 두 사람에게 그 일을 마치도록 유촉하고 1450년에 승하한다. 그 뒤를 이은 문종 또한 재위 3년만에 승하함으로써 이 사업은 수양대군에게 이어진다. 나중에 세조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석보(釋譜)』(‘월인석보’일 듯)를 간행하였으나 유촉(遺囑)이 중대하여 초초(草草)히 할 수는 없으므로 먼저 『능엄경』·『법화경』·『육조해금강경(六祖解金剛經)』·『원각경』·『심경』·『영가집』 등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였으나 「금강경제해(金剛經諸解)」와 「증도가계송(證道謌繼頌)」 등은 번역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불조(佛祖)의 무상요의(無上了義)를 중히 여겨 즉취(卽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예종 즉위년(1468)에 세조마저 승하하였고, 그 15년 뒤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의 비(妃) 자성대비(慈聖大妃) 윤씨가 세종·문종·세조 등 열성(列聖)의 홍원(弘願)을 추념하고 유업(遺業)을 끝마치기 위해, 선덕(禪德) 학조대사(學祖大師)에게 명하였으니, 『금강경삼가해』는 중교(重校)하게 하고, 『남명집언해』는 이미 세종께서 번역하신 바 있는 ‘어역남명(御譯南明)’(30여 수)을 이어서 번역·완성토록 하여, 전자는 300본, 후자는 500본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을해자로 간행, 여러 사찰에 널리 베풀도록 한다.

3.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특징

훈민정음 창제 초기 문헌들에 실현된 「훈민정음 표기법」과 1482년 『남명집언해』에 적용된 문자와 표기법을 비교해보면 30여 년 사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초기 문헌에 실현된 문자와 표기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에 나온 『훈민정음』 한문본과, 『훈민정음』 언해본 등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 구체화된 실제 표기법으로써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 장에서는 『남명집언해』 상·하권에 나타난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공시적인 특징을, 국어표기법의 역사적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살펴 이 책의 역사적 위상을 짚어보고자 한다.
가장 큰 특징으로, 『남명집언해』에는 국어 표기와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법이 서로 다른 표기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어 표기에 필요한 문자·표기법으로는 순경음 비읍(ㅸ)과 ‘ㄲㄸㅃㅉㅆㆅ{ㅇㅇ}ㅥ’ 등 각자병서, 그리고 ‘ㆆ’을 거론할 수 있겠고, 한자음 표기법에서는 각자병서와 ‘ㆆ’, 종성의 ‘ㅭ, ㅱ’을 거론할 수 있겠다. 항목별로 나누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1. 〈ㅸ〉의 표기

국어 표기에 쓰인 ‘ㅸ’은,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라면 (3나)처럼 ‘ㅸ’으로 활발히 나타날 예들인데, 이 문헌에서는 (3가)처럼 완전히 폐지되어 ‘오/우’ 또는 후음 ‘◦’로 교체되었다. 용례에서 ‘ㄱ·ㄴ’은 앞면·뒷면을 가리키며, 약호는 쓰지 않고 출처만 밝힌다. 이하 모두 같다.
(3) 가. 가온(하 16ㄱ), 어드운(하 77ㄴ), 놉가이(하 42ㄱ)
나. 가(월 14:80), 어드(용 30장), 놉가(월 2:40)
‘ㅸ’은 『훈민정음』의 본문 17초성 체계에 들어 있지 않고, 본문의 표기 규정과 「정음해례」 제자해에 표기 및 조음 방법에 대해 설명되었으며 그 예는 용자례에 올라 있다. 이 문자는 세조 7년(1461)에 간행된 활자본 『능엄경언해』에서부터 폐지되고, 이듬해인 1462년 목판본 『능엄경언해』를 비롯한 후대 문헌에서 그대로 계승되어 우리말 표기에서 자취를 감춘다. 주003)
총 10권인 『능엄경언해』에서 두어 예밖에 없다. (礫. 능엄 5:72ㄱ)(모두 3회), 구결문에서 객체높임 선어말어미 ‘--’(無上悲誨. 능엄 7:7ㄴ) 정도가 고작이다. 그 후 『구급방언해』(1466), 『목우자수심결』(1467), 『속삼강행실도』(1514) 등에 극소수의 예가 불규칙하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사에서 연서법(連書法) 폐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제1차 표기법 개정으로 해석된다. 세종과 정음학자들이 ‘ㅸ’자를 제정·사용한 것은, 당시 ‘오/우/◦’ 등으로 실현되던 중앙어형―한양말을 비롯한 중·남부 일부, 그리고 서북방언―과 ‘ㅂ’으로 실현되던 방언형―동남 및 동북방언―을 절충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으로서, 세종의 ‘正音’ 사상을 구체화하는 문자·표기체계의 한 구성요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正音’이란 용어의 정확한 정의는 『홍무정운』 범례와 『훈민정음언해』, 그리고 「석보상절서」에 나타나 있는데, 이들을 종합하면 ‘동일 언어공동체 안에서 지역적(방언적) 차이를 초월하여 통해(通解)할 수 있는 正한 소리이자 그렇게 발음하도록 제정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ㅸ’은 이상적인 표준음으로 국어를 통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절충적 표준음 표기이며, 주004)
이에 대하여는 남광우(1959), 서정범(1982), 김동소(1998:112), 조규태(1998:122-3), 정우영(2002)을 참조할 것.
실제로는 당시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적 음소로 규정된다.
이 문자를 제정한 의도와 목적은 순수하고 이상적이었지만 비현실적·가상적 존재를 다수 언중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게 된 것이고, 결국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한양말의 현실발음을 토대로 세조(世祖)의 주도 아래 ‘ㅸ’을 폐지, 『능엄경언해』(전10권) 활자본과 목판본을 통해 언중에게 개정 공표하게 된다. ‘ㅸ’이 『남명집언해』에서 ‘오/우/◦’로 완전히 교체된 표기로 통일되게 실현된 것은 제1차 표기법 개정안을 적용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3.2. 〈ㆆ〉과 각자병서

국어 표기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4) 가. 아롤디니라(상 8ㄴ), 몯 사(상 17ㄴ), 볼 저기(하 42ㄱ).
가’. 아디니라(석19:10ㄴ), 이 사(석6:2ㄴ), 나 저긔(석3:26ㄴ)
나. 디날 길(하37ㄱ), 아롤디니라(상8ㄴ), 일홀배(所事)(서1ㄱ), 딜제(상62ㄴ), 그럴(상17ㄴ). 사호거늘(상69ㄴ), 스고(冠.상30ㄴ), 혀(引. 상8ㄴ), 도혀(하67ㄱ), 얽이디(상6ㄱ)
나’. 오실 낄(월7:9), 홀띠니라(영가,서3), 몯홀빼라(법화1:160ㄱ), 니실쩨(금강,서6), 그럴(석9:14ㄱ). 싸호미(석23:55ㄱ), 쓰고(월10:95), (引.정음해례:합자), 도(석6:5), 얽다(월13:9ㄴ)
다. 둘짯(상3ㄱ)(총77회), 세짯(상4ㄱ)(총50회), 네짯(상5ㄱ)(총77회) 모두 204회.
다’. 둘찻 (금삼 4:28ㄴ), 세찻(금삼 2:33ㄱ), 네찻(금삼 2:33ㄱ)
(4가나다)는 『남명집언해』에 적용된 표기법이요, (4가’나’)는 정음 초기문헌부터 1464년에 간행된 한글문헌에 적용된 예들이고, (4다’)는 1482년 『금강경삼가해』에 나타난 예들이다.
항목별 대비로써 『남명집언해』에는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것의 공식적인 폐지는 『원각경언해』(1465년. 전 10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가’)와 같이 ‘ㆆ’이 있는 표기에서 (4가)처럼 ‘ㆆ’을 없앤 표기가 신미(信眉)가 번역한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경)의 구결문 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편, (4나’)와 같이 각자병서로 적었던 표기를 (4나’)처럼 단일자로 적기 시작한 것은 『능엄경언해』 활자본(1461) 구결문에서부터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조 10년(1464) 『선종영가집언해』를 비롯한 불경언해의 구결문에 오면 ‘ㆆ’이든 각자병서든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 원칙은 세조 11년(1465) 『원각경언해』에 와서, 구결문은 물론 언해문(한자음 표기는 제외)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학계에서는 이런 표기법의 개정을 “급격한 변화, 극적인 변화, 과잉조처…” 등으로 기술해오고 있다(지춘수 1986, 이익섭 1992).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는 1450년대 말 구결문에서부터 시험 운용되어 적어도 5, 6년간의 시험기를 거쳐 혼란과 불편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문자·표기체계면에서 볼 때, 1465년 『원각경언해』에서 행해진 ‘ㆆ’과 각자병서[전탁] 폐지는 간소화되기는 하였으나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는 손대지 못한 상태이므로 미완(未完)의 개정(改定)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정우영 1996, 2002). (4가나)와 같은 국어 표기에서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은 것은 원천적으로 1465년 『원각경언해』에서 규범화된 원칙에 따른 결과이다.
그런데 문헌의 기획·착수와, 간행 연대가 같은 『금강경삼가해』와는 달리 (4다)처럼 일부 어휘에서 각자병서 ‘ㅉ’이 쓰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책의 편찬 경위(§2.2)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야부 송」 등 삼가해(三家解)는 초고가 끝났으나 교정(校定)은 보지 못하였고, 「남명계송(南明繼頌)」의 경우는 세종 자신이 겨우 30여 수만을 번역하였고,…(중략)…어역남명(御譯南明)을 이어서 번역·완성토록…”하였다는 사실을 정리하면, 『금강경삼가해』는 초고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고, 『남명집언해』는 세종이 번역한 30여 수만을 물려받았으므로, 이 일을 위임 받은 학조(學祖)로서는, 전자는 당시 표기법에 준하여 교정하고 간행하면 그만이지만, 후자는 ‘세종이 남긴 일부 번역된 원고’에 체재를 맞추어 속역(續譯)하고 간행해야 하므로 ‘어역남명’의 중압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지 않았을까? (4다)에 제시한 ‘둘짯, 세짯, 네짯’ 등 서수사는 세종이 쓴 번역어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005)
세종 재위시에 나온 문헌에서 ‘둘찻’ 같은 예가 일반적으로 쓰이긴 하나, 『석보상절』에서 ‘닐웻자히(석24:28ㄱ)~닐웨짜히’(석24:15ㄱ) 같은 예도 출현하므로 ‘둘짯, 세짯, 네짯’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다 『원각경언해』(1465년)에서 행해진 각자병서의 일괄 폐지가 현실 언어음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학조 개인의 문자·표기관이 이들 어휘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런 추측은 1485년 학조에 의해 언해된 것으로 보이는 『관음경언해』와 『영험약초』에 “써(書. 관음,상4ㄴ. 영험14ㄱ), 눈(睛. 관음,상4ㄱ. 영험4ㄱ), 연와(관음,하13ㄴ)” 등과 같은 각자병서 표기가 예외적으로 출현하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되는 일이다.

3.3. 한자음 표기

동국정운 한자음을 표기하려면 국어 표기법(§3.2)과는 달리 더 많은 문자가 필요하고, 따라서 표기법도 달리 운용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반영된 구체적인 용례를 (5가-다)에 제시한다. 편의상 방점은 줄인다.
(5) 가. 一定(하 18ㄴ), 王孫손(하 7ㄴ)
나. 權꿘(하36ㄱ)/定(하18ㄴ)/菩뽕(하14ㄴ)/字(하18ㄴ)/實(하19ㄴ)/和(하19ㄴ)
다. 吉(하 14ㄴ), 句궁(하 19ㄴ), 草(하 15ㄱ)
(5가나)에 든 초성의 표기에서, (5가)는 ‘ㆆ, (옛이응)’이 쓰인 것이고, (5나)에는 전탁음에 해당하는 각자병서 ‘ㄲㄸㅃㅉㅆㆅ’이 쓰인 것이며, (5다)에는 종성 표기로서 이영보래(以影補來)의 ‘ㅭ’과 후음 ‘◦’ 그리고 ‘ㅱ’이 쓰인 것이다. 국어 표기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ㆆ, ㅭ’, 각자병서, 그리고 연서법(連書法)으로 만들어진 순경음(ㅱ)이 동국정운음에 쓰인 것이다. 이것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특성이기도 한데, 정음 창제 초기문헌에 적용된 원칙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훈민정음 표기법」이 몇 차례에 걸쳐 개정 작업이 있어 왔지만 한자음 표기법만은 아직 근본적인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명집언해』에 나타난 것처럼, 국어 표기와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법이 서로 다른 체계로 운용되는 것은 독자와 표기자 모두에게 편안한 문자생활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부담이 된다. 국어표기법의 역사에서, 이런 불편함은 1496년 『육조법보단경언해』(3권)와 『시식권공언해』에 이르러 해소되는데, (5가-다)에 쓰인 동국정운 한자음은 조선 전통한자음[東音]으로 완전히 교체·개정됨으로써 명실공히 “편어일용(便於日用)”할 수 있는 표기법으로 정착된다. 『남명집언해』는 현실음으로의 간소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대세와 세종대에 시작되어 문종·세조를 거쳐 이어진 유업을 마치기 위해 진행된 번역 사업이라는 특수한 내부 사정이 개입된 문헌이므로 국어 표기는 개정된 표기법을, 한자음 표기법은 의고적인 표기법을 유지하여 이원적인 문자·표기체계로 운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15세기 한글문헌 중에서 『남명집언해』 한자음 표기의 특징으로 꼽을 것은, 한자에 독음을 달지 않고 빈칸으로 처리한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6) 가. 巍巍 놉고 클시라(하 37ㄱ) cf. 巍巍(곡 1장). 巍巍(월1:1)
나. {毛+瑟}{毛+瑟} 金터리   時節에(하 35ㄴ)
{憨+鳥}{憨+鳥} 고기 자바 먹 새라(하 60ㄱㄴ)
15세기 관판의 한글문헌에서 한자음 표기는 국한혼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동국정운 한자음을 한자 바로 아래에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책에서도 그 원칙은 철저히 지켜진다. 단적인 예로 (6가) ‘巍’자에 대한 독음 표기에서 확인된다. ‘巍’의 동국정운 한자음은 巍[](정운5:37ㄱ)이고 동국정운 한자음 그대로 주음되어 있다. 그런데 초기문헌인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에서는 어떤가? 巍[/]로 주음되어 있다. 동국정운음이 정확할 것으로 예측은 되지만 평성 []음에 소속된 한자를 『동국정운』에서 찾아보면 예상과는 다르다. [/]음에 소속된 한자는 모두 6자인데 ‘巍’자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에 주음된 한자음이 잘못된 것임이 확인된다(정우영 1996:88). 이것은 『동국정운』의 원고 완성과 해당 문헌들의 간행 시기가 맞물려 있었던 데 원인이 있는데, 한자음 적용 초기에 발견되는 오류의 하나로 지적된다.
(6나)는 동국정운음을 독음으로 표기한 15세기 한글문헌 중 유일하게 한자에 독음을 달지 않은 예이다. 한자가 없는 것을 필자가 중괄호({ })로 묶어 제시하였는데, {毛+瑟}과 {憨+鳥}로 짜인 한자이다. 이들은 모두 형성자로 파악되며, 털이 나부끼는 모양을 표현한 {毛+瑟}자의 동국정운 한자음은 *[·]일 가능성이 크고, {憨+鳥}자는 새의 한 종류로서 음은 *[: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는 성부(聲部)에 해당하는 ‘瑟’의 동국정운음이 [·](정운2:19ㄱ)이고, 후자의 성부 ‘敢’은 [:감]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憨+鳥}에 연결된 보조사가 ‘’이므로 이 조건에 맞으려면 모음조화에 맞고 받침이 있는 소리여야 하는데 [:감]이면 이 조건에 부합된다. (6나)에서 한자음 부분을 빈칸으로 처리한 것은, 근본적으로 한자음 사전인 『동국정운』의 양적인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僻字)이므로 정확한 한자음을 알지 못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동국정운』에는 총 18,775자의 한자가 실려 있는데 15세기 한글문헌에 나타난 한자를 모두 수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문헌에도 빈칸으로 처리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만에서 간행된 10권 분량의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도 이들 한자는 실려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주006)
중문대사전 편찬위원회(1974)의 『中文大辭典』(1-10권)에도 이 글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표기자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한자의 형성 원리로써 이 한자음들을 짐작할 수는 있었겠지만 정확한 동국정운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빈칸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한자 독음 가운데 특히 불교 용어 및 인명 표기에 적용된 한자음에 대하여 살펴보자. 15세기에 간행된 관판의 불경언해서에 적용된 한자음은 동국정운음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7가-라)와 같은 용어는 몇 차례 수정된 적이 있다(정우영 1996:92~99). 제1차 수정은 1463년 『법화경언해』에서 이루어졌는데, (7)의 왼쪽음―1447년 『석보상절』부터 1462년 『능엄경언해』까지의 한자음―이 모두 오른쪽 음으로 수정되었다.
(7) 가. 解脫 [:갱·] 〉 [:·] (법화 3:140)
나. 般若 [반:] 〉 [·:] (법화 5:188)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녹당랑삼·막삼뽕똉] 〉 藐[·먁] (법화 1:37)
라. 阿難 [난] 〉 [·난] (법화 1:30)
제1차 수정 한자음은 『법화경언해』 이후 불경언해서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이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 이 한자음으로 어떤 문헌의 간행연도를 추정하는 단서를 삼기도 한다. 불교용어 한자음에 대하여 불교계의 오랜 독법을 근거로 삼거나, 범어의 원음에 가깝게 적기 위해 고친 점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 음역어를 원음에 가까운 한자로 바꾸는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기존 용어는 그대로 두고 한자의 독음만 원음에 가깝게 바꿈으로써, 한자어는 동국정운 한자음을 독음으로 표시한다는 관판문헌의 한자음 표기원칙에서 크게 일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2차 수정안은, 세조가 승하하고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후 1480년대 중반까지 나온 불경언해에 적용되었는데, 그 내용은 (8)처럼 『법화경언해』 이전의 한자음으로 회귀하였다.
(8) 가. 解脫 [:·] > [:갱·] (남명,상 35ㄱ)(금삼 1:3)
나. 般若[·:] > [반:] (남명, 상 61ㄱ)(금삼 1:13)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녹당랑삼·먁삼뽕똉] >藐 [·막](남명집.없음)(금삼 3:56)
라. 阿難 [·난] > [난] (남명, 하 4ㄴ)(금삼 1:34)
(8)에 보이듯이, 『남명집언해』와 『금강경삼가해』는 1463년 이전 한자음으로 주음되어 있다. 회귀의 주된 원인은, 제1차 한자음 수정안에 대한 부정적 시각, 즉 한자 음역어는 그대로 놓아둔 채 한자음만 범어 원음에 가깝도록 바꿈으로써, 결국 관판문헌의 한자음 표기원칙을 어기게 되고 끝내는 새 한자음이 실린 운서가 없다는 부정적 견해가 작용한 듯하다. 여기에 세조의 승하(1468년)와 간경도감의 폐지(1471년) 등 불경언해 사업의 중심 세력이 와해됨으로써 불교 용어 등 한자음 수정 작업이 더 이상 추진될 수 없게 되자 초기문헌에서 적용했던 대원칙으로 환원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한자음 표기와 관련하여, 어원상 한자어임이 분명한 경우라도 동국정운음으로 적지 않은 예들이 (9)처럼 나타나는 문제이다. (어원 한자는 다른 문헌에서 찾은 것이다.)
(9) 곡식(穀食, 하30ㄴ), 긔운(氣運. 상25ㄱ), (長常. 상54ㄴ)
미혹(迷惑. 상48ㄴ), 시혹(時或. 상69ㄴ), 화로(火爐. 하69ㄱ) 등.
(9)에 든 한자음을 한자와 일대일로 맞세워 낱개로 나눈 다음 해당 한자음을 조사하면, 동국정운음이나 홍무정운역훈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1476년경의 『수구영험』과 1496년 『육조법보단경언해』·『시식권공언해』, 그리고 1527년 『훈몽자회』에 실린 한자음과 일치한다. 이 문헌들은 공통적으로 조선 전통한자음[東音〕문헌이므로 『남명집언해』에 한글로만 표기된 한자어의 독음은 국어에 동화된 대로의 현실한자음임이 분명하다. 이 같은 현상은 『석보상절』 등 초기 문헌부터 나타나며 이 문헌에만 해당되는 특징은 아니다. 한자어를 한자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독해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표기자와 독자 모두에게 공통된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판의 한글문헌에서 동국정운 한자음을 철저히 주음하면서도, 이에 대립되는 (9) 같은 표기가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국가 기관에서 목표하던 바와는 달리 실제 언어사회에서는 조선 전통한자음이 널리 통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로써 당시 한자음 체계는 동국정운음과 현실한자음의 이원적 체계로 운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3.4. 방점 표기

『남명집언해』에도 방점은 0점(평성)·1점(거성)·2점(상성)의 세 종류가 표시되어 있으나, 정음 창제 초기문헌들의 표기와 비교하여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10)(11)을 보자.
(10) 가. ·첫소·리· 어·울·워 ··디·면 · ·쓰·라(훈언12ㄴ)
나. 부:톄 :나· :어엿·비 너·기·샤 :나· ·보·게 ·쇼·셔(석6:40ㄴ)
(11)가. :모딘 :마 :보 ·다·가 :말 :업슨· :알면 理ㅣ 기·우디 아·니·리라(상ㄴ)
나. 어·루 無心로 救·티 :몯·리라 ·시라(하29ㄱ)
(10)은 초기문헌인 『훈민정음언해』와 『석보상절』에서 뽑은 예이고, (11)은 이 책에 쓰인 예이다. (10가나)에서 보듯이,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활용어미가 통합하여 하나의 어절을 형성할 때 어절의 마지막 음절이 모두 1점(거성)으로 실현되었다. 오늘날 어절 단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11)에는 창제 초기문헌에서라면 어말에서 1점이 찍혀야 할 곳에 0점으로 나타난 예가 여럿 발견된다. (11가)를 모두 10어절로 파악할 때 ‘말, 理ㅣ’를 제외한 8개 어절에 1점이 찍혀야 하는데 기껏 2개만 찍혀 있으며, (11나)에서는 5개 어절 중에서 2개만 제대로 찍혀 있다. 좀더 자세한 사정은 문헌별 조사가 완료된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11)만으로도 어절말에서 1점으로 표시되던 것이 0점으로 변화해 가는 추세에 있는 대체적인 경향은 파악할 수 있다. 이 현상을 ‘어말 평성화’라고 보아 언중의 발음 현실에 나타난 성조 변화의 반영으로 이해해야 할지, 단순하게 표기법의 변화로만 이해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 어려우나, 어떤 경우라도 방점 표기법을 고안해낸 정음 창제자의 의도와 「훈민정음 표기법」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고, 국어사적인 안목으로 방언 현상까지 고려한 포괄적인 해석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1464년 『선종영가집언해』의 방점 표기에 나타났던 ‘어절말 거성의 평성화’ 경향이 점차 확산되어, 1482년 『남명집언해』에 이르러서는 그 경향이 확대 일로에 있고 점차 체언이나 용언의 의미부(어휘부)에다 방점을 찍어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5. 연·분철 표기

이 책에는 여전히 연철표기가 주조를 이루고는 있지만 분철 표기가 활발히 쓰인다는 점에서 앞선 문헌들과 차이가 있다. 이를 종성별로 구분하여 몇 예만 들어본다(정우영 1990).
(11) 〈-ㄱ〉: 밠가락(상50ㄱ), 北녁의(하45ㄴ). 〈-ㄴ〉: 소진이(상67ㄱ), 눈으로(하38ㄱ)
〈-ㄷ〉: 으로(상1ㄴ). 〈-ㄹ〉: 믌결(상72ㄱ), 얼굴이라(하21ㄱ). 〈-ㅁ〉: 구룸의(상3ㄱ), 로(하63ㄱ). 〈-ㅂ〉: 집(하20ㄱ). 〈-〉: 굴에(상60ㄱ), 스을(하46ㄴ). 〈-ㄺ〉: (상35ㄴ), 두듥엣(하30ㄴ). 〈-ㄼ〉: 여듧에(하65ㄱ)
(11)은 종성이 ‘ㄱㄴㄷㄹㅁㅂ’인 체언 뒤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가 오더라도 연철하지 않고 분철한 예들이다. 예가 적기는 하지만 종성이 ‘-ㄺ, -ㄼ’인 경우도 발견된다. 체언과 조사의 통합에서만 나타나며, 『월인천강지곡』에서처럼 용언의 활용에까지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분철표기는 의미부를 일정한 시각적 형태로 고정시켜 적음으로써 독해를 좀더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런 경향은 한문에 구결을 달아 쓰는 문자생활에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1)에서 ‘-’ 종성의 예는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는 ‘’을 초성으로 연철하는 경향이 뚜렷하던 어휘인데, 주007)
굴허  디내샤(용가48장), 스스 자(능엄경언해,발6)
이 책에는 종성으로만 적었다. 정음 초기 문헌부터 예외 없이 초성 표기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이긔, 다’ 정도였다.

4. 어휘

『남명집언해』에 나타난 어휘는 모두 3,356 단어라고 한다. 그 중 고유어는 1,268개, 한자로 표기된 한자어휘는 1,747개, 한자 어근에 ‘-, -롭-’ 등 고유어 접미사가 결합된 어휘는 336개, 한자어와 고유어로 합성된 어휘는 5개로 조사되었다(김영신 1988:201~2).
이 중 고어사전과 각종 국어사 자료들을 검색하여 출현 빈도가 드문 어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각 어휘 항목은 표제어-현대어 풀이-해당 문장-출처(장수) 순서로 제시하며, 표제어와 표제어가 들어 있는 어절에는 방점을 표시한다. (가나다 순서임.)
(1) ·곡·식:곡식(穀食). ¶飢 ·곡·식 업슬시오 饉  업슬시라(하30ㄴ) cf. 穀·곡食·씩(석24:7ㄴ)
(2) :깁·옷:비단옷[絹衣]. ¶天人이  적 려와 :깁·옷 닙고 뎌 돌 러(상61ㄱ)
(3) ··히:겹겹이[疊疊]. ¶여러 터럭 師子ㅣ  터럭의 다 드러 ··히 서르 비취여 나콰 여러쾌 룜 업서 두 面ㅅ 거우룻 像이 ··히 섯거 비취니(상75ㄴ, 상76ㄱ)
(4) 나모·신:나막신[木履]. ¶天台 寒山子…(중략)… 곳갈 고 나모·신 ·고(하8ㄱ)
(5) 도랑:옴. 개선(疥癬). ¶도 머근 가히와  무든 도(疥狗泥豬)(상4ㄴ)
(6) 도·태:도롱태[鷂.요]. 새매.¶머리 두르혀면 도롱·태 新羅 디나리라(󰜇子ㅣ過新羅리라)(상5ㄴ)
(7) :뒤좇-: 뒤좇다.¶衆이 :뒤좃·니 엄과 톱과 갈모미 어려워(衆隨後니 牙爪 難藏이라)(하36ㄴ)
(8) -:뚫다[穿.천] ¶·귀 온 :되:즁이 그기 彈指다(彈耳胡僧이 暗彈指다)(하11ㄱ)
(9) 멱:멱[吭.항]. 목의 앞쪽. ¶臨濟ㅣ 禪床애 려 멱 잡고 니샤(하16ㄴ)
(10) 묏부·우리:멧부리[岑.잠]. ¶구루미 묏부·우리·예 나 東西예  업스며(상3ㄱ)
(11) 밑·드리:철저(徹底)히. ¶三四句 믿·드리 ·조·야 凡情과 聖解왜 다 업서 죠고맛 것도 다 바사 릴시라(상31ㄴ)
(12) ·봇곳·갈:벚나무 껍질로 만든 고깔[樺皮帽]. ¶原憲이 ·봇곳·갈 스고 헌옷 닙고 나거늘(상30ㄴ)
(13) 봇닳-:볶고 달이다.¶三途諸子ㅣ 날로 봇달커·늘(三途諸子ㅣ日焚燒커늘)(하47ㄴ)
(14) 브르돋-:부르돋다[剛]. ¶ 여위여시들오  브르도·다(貌顇骨剛야)(상30ㄱ)
(15) 비·릇:비롯됨[始初]. ¶녯  비·릇 :업시 오로 곡도 며 거츤 몸과 괘니(상75ㄱ)
(16) 사만:사뭇. 늘. ¶어믜 나혼 헌 뵈젹삼 니브니 劫火 몃마 디내야뇨마 사만 이··도다(著簡孃生破布衫니 幾經劫火야뇨마 長如此도다)(상31ㄱ)
(17) :고·개:소의 고개[牛項]. ¶頑皮靼 :고·갯 장 둗거운 가치니(하58ㄱ)
(18) 수·늙:고개[嶺]. ¶東녁 수·늘게 구루미 나니 西ㅅ녁 수·늘기 ·하야·고(東嶺에 雲生니 西嶺이 白고)(하19ㄱ)
(19) 싀·서늘·-:시도록 싸늘하다[酸寒]. ¶알피 티며 싀·서늘·호미 百萬 가지니(痛楚酸寒이 百萬般이니)(하32ㄱ)
(20) ·:떨기[朶]. ¶이  · 고 불휘 沙界예 서리오 니피 須彌 둡 젼니(하55ㄱ)
(21) :애-:애달프다[憤]. ¶憤 미 :애올·시오(하43ㄴ)
(22) :어둑:많이[多]. ¶中下 만히 듣록 :어둑 信티 아니니(中下 多聞록 多不信니)(상36ㄴ)
(23) 여·위시·들-:여위고 힘이 없다[悴.췌]. ¶天台寒山子  여·위시·들오 뵈오시 다 러디고(하8ㄴ) cf.  여·위여시·들오(貌顇)(상30ㄱ)
(24) 움·지혀-:움츠리다[縮]. ¶혓그틀 움·지혀· 비르서 能히 펴리라(縮却舌頭야 始解宣리라)(하18ㄱ)
(25) 이셔지:비슷이. 방불(髣髴)히. ¶눈 이시·면 이셔지 :옴·도 能히 몯려니와(有眼면 不能窺髣髴이어니와)(상65ㄱ)
(26) 일·이-:가려지다. 일어지다[淘].¶眞化애 일·이디 몯 나 도혀 혜아룐(翻想未淘眞化日혼)(하63ㄱ)
(27) 자·치-:잦아들게 하다. ¶우·룸 자·친 누·른 ·니피 거즛거신 알리라(止啼黃葉이 知虛妄이리라)(상44ㄴ)
(28) 자·히-:재다[候].¶쇽졀업시 것근 솔옷 자바 녀트며 기푸 자·히·다(徒把折錐야候淺深다)(하20ㄴ)
(29) 저·욼가:돈:저울의 가늠쇠[分銅]. ¶定盤星 저·욼가:도니·라(하43ㄴ)
(30) 저·치-:걸리다[累]. ¶뎨 엇뎨 말와 데 저·쳐 ·호미 아니시리오(彼豈累於言意爲哉리오)(서2ㄴ)
(31) ·샇-:차곡이 쌓다(?) ¶그 해 金을 게 혀 ·사·하 주고 사실 뎌 金田이라 니라(하59ㄴ)
(32) ·하·야반반·-:하얗게 반짝반짝하다. ¶三四句 가 寥寥며 ·하·야반반·야 조 디니 구슬 어든 고 니시니라(상23ㄴ)
(33) ·귀:햇귀[暉.휘] ¶녀르멘 더·운 ·귀 잇고 겨렌 누니 잇니라(夏有炎暉코 冬有雪니라)(하57ㄱ)
(34) 헌·:야단스럽게 떠듦(?). ¶寒山이 니샤 豊干 헌·라 ·시·니 그러면 이티 論量홈도  헌·라 ·시라(하8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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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신, 「동국신속삼강행실의 국어학적 연구」 『부산여자대학논문집』 9, 1980
신성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규범성, 국어문학회, 국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 2009
이병도, 『동국신속삼강행실』-해제-국립중앙도서관, 1995
이숭녕, 「동국신속삼강행실에 대한 어휘론적 고찰」 『국어국문학』 55·57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97
전재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색인」 『동양문화연구』 2, 경북대학교동양문화연구소, 1997
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진단학회, 진단학보 8, 1998, 185-227.
정복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건)의 조어법」 『수련어문논집』, 부산여자대학, 1997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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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역주 해제
1) 원간본의 ‘’은 모두 ‘ㅂ’으로 바뀌었다. ‘’의 일반적인 변화는 ‘〉오/우,ㅇ’인데 여기에서는 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한자음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폐지로 현실 한자음 주음으로 바뀌었으나 뚜렷한 표기 준칙이 없었기 때문인 듯 표기가 혼란하다. 일모(日母)//자는 대체로 유모(喩母)/ㅇ/화하였다.
3) ‘ᅙ’ 은 현실 한자음 주음으로 한자음 표기에서 폐지되었고, ‘- ’은 모두 ‘-ㄹ’로 바뀌었다. 다만 사이글자의 예는 남아 있는데 이는 원간본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4) 초성병서 중 각자병서는 한두 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일자형(單一字形)으로 바뀌었다. 합용병서는 그대로 씌었다.
5) 사이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는데 ‘ᅙ’이 쓰인 예도 있다.(無ᅙ字).
6) ‘,’표기는 원간본의 모습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7) 한자어와 고유어에서 ‘ㅁ’중철 표기의 예가 나타난다.
8) 구개음화는 고유어에서는 하나의 예만이 발견되나 한자어는 상당히 두드러진다. 한자어의 구개음화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현실 한자음 초기 문헌인 〈진권〉(1496)과 〈육조〉(1496) 그리고 예산문고본 〈훈몽〉(1527) 등과 비교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런가 하면 ‘ㅈ’을 ‘ㄷ’으로 교정한 hyperurbanism의 예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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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에 관하여
김정수(한양대학교 교수)

1. 서언

세종이 명을 내려 간행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 당시의 백성의 교육을 위해 일련의 조선시대 윤리 도덕 교과서 중 가장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많이 읽힌 책으로서 기념비적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효(孝)·충(忠)·정(貞)의 삼강(三綱)이 조선시대의 사회, 나아가서 나라 존립의 정신적 기반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 서지학적으로도 〈삼강행실도〉는 조선 삽화(揷畵)의 대표적인 예로서 그 간본의 변천은 곧 조선 삽화의 변천이 될 수 있어 문화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2. 삼강행실도의 편찬과 간행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한문본과 언해본이 있다.
조선 세종 10년(1428)에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서 대신들과 의논하게 되었는데, 세종은 직제학 설순(偰循)이 책임자가 되어 집현전에서 백성을 교화(敎化)시킬 수 있는 새로운 책을 편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세종은 특히 효(孝)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중국의 ≪이십사효(二十四孝)≫(원나라 곽거경 편찬)에 새로 중국의 이름난 효자 20여 명을 증보하고, 또 우리나라 삼국(三國)과 고려(高麗) 시대의 효자로서 특출한 자들도 함께 모아 엮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 책은 세종 14년(1432) 6월에 초고가 완결되어 임금에게 올려졌는데, 이듬해에 각판이 완료되자 정초(鄭招)에게 발문을 작성케 하여 16년(1434) 11월 25일 인출(印出)함으로써 종친과 신료들, 그리고 각도(各道)에 반포하게 되었다. 권채(權採)의 서문에 따르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가운데 참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속에서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새겨놓고, 그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讚詩)를 한 수씩 붙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문본 ≪삼강행실도≫’이다.
이 책은 이후 후대에서 여러 번 간행되었으며, 성종 12년에는 열녀도만을 언해하여 ≪언문 삼강행실 열녀도≫를 찍어 간행한 적도 있지만, 이른바 ‘언해본 ≪삼강행실도≫’가 나온 것은 성종 21년의 일이다.
성종 20년(1489) 6월,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세종조에는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해서 민심을 선도하였는데, 이제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비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일반이 읽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축소하되 목판인쇄는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성종이 즉석에서 이를 받아들여 내용을 추려 1책으로 산정본(刪定本)을 간행케 명하였다. 이 언해본은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는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산정본을 그대로 중종 5년(1506)에 재간행하였으니 이것이 지금 남아 전한다. 이후 중중, 명종, 선조, 영조 때에 계속해서 간행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명씩 뽑아 모두 105명, 즉 원래 3권 3책인 것을 1책으로 대폭 축소하여 펴내게 된 것이다.

3. 세종의 〈삼강행실도〉 간행 기록

원고 검토가 끝난 원고본 〈삼강행실도〉는 권채의 서문에 의하면 곧 주자소에 넘겨져서 판각에 들어간 모양이며, 이 목판 작성은 원고본 완료부터 8개월 뒤인 세종 15년(1433) 2월에 완료되고 있다. 주자소는 이름 그대로 활자로 정부의 간행물을 간행하는 인쇄소였지만 목판 인쇄도 하였으며 세종 초간본의 글자체가 태종조의 계미자도 아니고 바로 그해에 새로 주조한 갑인자(甲寅字)와도 다르며, 명나라 초기의 관간(官刊)본에서 볼 수 있는 위부인체(衛夫人體)의 소위 한림체일 뿐 아니라 중국 명초 판본처럼 구두점까지 찍혀 있어서 이 특별본 출판을 위해서는 명체(明體)에 능한 문신이나 사자원(寫字員)을 시켜서 원고를 고치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해서 1433년 2월에 판각이 완료되자 세종은 예문 대제학 정초에게 발문을 작성케 하였고, 다시 1년 2개월 뒤인 1434년 4월에는 중추원사 윤회에게 삼강행실도 간행 반포의 뜻을 국민에게 알리는 임금의 교서를 쓰게 하였으며, 이 교서를 붙여서 인출하여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삼강행실도〉 간행본이 종친과 신료들, 그리고 각도로 반포된 것이다.
이상의 〈삼강행실도〉 초간본 간행 경위를 연대별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 10년(1428) 10월 〈삼강행실도〉 편찬 하명.
세종 14년(1432) 6월 원고본 완료 진상.
세종 15년(1433) 2월 주자소 판각 완료. 발문 작성.
세종 16년(1434) 4월 교지 작성.
세종 16년(1434) 11월 내외 반포.
이상과 같은 진행 경위를 볼 때 언제 인쇄하였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1433년 2월 판각 완료와 함께 발문이 만들어졌고, 그 발문이 추각된 단계에서 인쇄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초인본(初印本)이 임금에게 진상되어 그것을 검토한 후 반포의 교지가 1434년 4월에 작성되고, 그 교지가 또 추각되어 드디어 완성본으로서 인쇄되고 제본 완료된 것이 1434년 11월인 것이다. 따라서 1433년 2월에서 1434년 4월까지의 14개월 동안은 ‘진삼강행실도(進三綱行實圖)’에서 발문에 이르는 중심부의 인쇄와 세종의 재검토 기간이었고, 그 뒤 교지를 추각 제본하는 데 1434년 4월부터 11월까지 약 7개월이 걸린 셈이다. 옴ᄌᆞ렴텬도쥬ᇰᄉᆡᇰ죠ᇰ결파훼 마ᄌᆞ렴슈라도듀ᇰᄉᆡᇰ죠ᇰ결파훼 니ᄌᆞ렴인도듀ᇰᄉᆡᇰ죠ᇰ결파훼 반ᄌᆞ렴튝ᄉᆡᇰ도ᄉᆡᇰ죠ᇰ결파훼 몌ᄌᆞ렴아귀도ᄉᆡᇰ죠ᇰ결파훼 훔ᄌᆞ렴디옥도ᄉᆡᇰ죠ᇰ결파훼 唵字念天道衆生種決破壞 26ㄴ嘛字念脩羅道中生種決破壞 呢字念人道中生種決破壞 叭字念畜生道生種決破壞 𡁠字念餓鬼道生種決破壞 27ㄱ吘字念地獄道生種決破壞 옴 렴면 텬도애 날  일히 업시며 맏 렴면 슈라도 에 날  일히 업시며 닏 렴면 인도 에 날  일히 업시며 반 렴면 튝도애 날  일히 업시27ㄴ며 몓 렴면 아귀도애 날  일히 업시며 훔 렴면 디옥도애 날 ᄅᆞᆯ 일히 업시리라 티베트어: ཨོཾ་མ་ཎི་པ་དྨེ་ཧཱུྃ་ Om Ma Ni Pe Me Hung [또는 Hum] 산스크리트어: ॐ मणि पद्मे हूँ Oṃ Maṇi-Padme Hūṃ 중국어: 唵嘛呢叭咪吽, 병음: Ǎn Má Ní Bā Mī Hōng 한국어: 옴 마니 파드메 훔/옴 마니 반메 훔 일본어: オンマニハツメイウン On Mani Hatsu Mei Un[*] 몽골어: Ум маани бадми хум Um maani badmi khum 베트남어: Úm ma ni bát ni hồng or 베트남어: Án ma ni bát mê hồng
석보상절 제20 해제* 주001)
* 이 역주 작업은 주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뒤의 논의에서 다시 밝히겠지만, 『석보상절』 권 20의 내용이 『월인석보』(1459년 간행) 권 18 및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 권 6, 7에도 번역되어 실려 있기 때문에, 비교가 가능하도록 역주 대상 문헌인 『석보상절』은 물론,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 등 각각 다른 시기에 간행된 두 책에서 대응되는 부분도 함께 실어 놓았다. 『석보상절』 권 20은 원본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복사본으로 작업을 했으나, 원본과의 대교(對校)를 통한 확인의 과정은 거치지 못했다. 대신 현전하는 다른 『석보상절』이나 대응되는 두 책의 내용을 참고했다. 하지만 원본을 처음 소개했던 천혜봉교수의 지적대로 원본에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아서 해독에 어려움이 따랐다. 이런 일련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김성주교수와 박대범군이 입력과 교정 작업을 진행해 주었다. 그리고 서정호군과 전기량양은 역주의 교정을 보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여기에 적어서 사의를 표한다.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Ⅰ. 책의 전래 경위

『석보상절』(1447년 간행)은 애초에 24권으로 간행되었다. 주002)
『석보상절』 초간본의 간행 권수(卷數)가 24권이라는 사실은 이동림(1959), 이병주(1967), 김영배(1986) 등에 의해 일찍이 밝혀진 바 있다. 곧 국립도서관 소장본 4책의 원 소유자였던 세종 때의 황해도 해주 목사(권 9의 마지막장에 쓴 職銜은 ‘嘉善大夫黃海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兼判海州牧事’이다.) 신자근(申自謹)이 정통(正統) 14년(세종 31년, 1449년) 9월에 손수 쓴 것으로 보이는 ‘共廿四’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共廿四’라는 글자는 권 6과 권 13의 표지 아래쪽 마구리에 적혀 있다고 한다. 이병주(1967), 김영배(1986)에서는 권 23과 권 24의 내용으로도 확인한 바 있다.
이 초간본 중에 8권만이 현전한다. 권 6, 9, 13, 19 등 4책이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주003)
국립도서관 소장의 4책에는 주묵(朱墨)으로 교정을 한 흔적이 있다. 이른바 교정본(校正本)인 것이다. 『석보상절』의 교정에 대해서는 안병희(1974)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호권(2001)에는 교정 및 교정에 따른 정정(訂正) 내용이 논의 곳곳에 나오고, 부록에는 4책의 교정일람표가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권 23, 24 등 2책이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권 20, 21 등 2책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들이 발굴·공개된 경위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보고가 있었으므로 여기서 따로 다루지는 않는다. 주004)
국립도서관 소장의 4책에 대해서는 에타 도시오(江田俊雄:1936),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2책에 대해서는 이병주(1967), 리움미술관 소장의 2책에 대해서는 천혜봉(1990)에 소상한 소개가 있다. 중간본인 권 3에 대해서는 천병식(1985), 권 11에 대해서는 심재완(1959)에 간행 연도 추정 등 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초간본은 아니지만 그 복각본(覆刻本) 2책도 현전한다. 권 3과 권 11이다. 권 11은 심재완교수에 의해 영인·공개(1959)된 바 있다. 이 책은 1560년 경 전라도 순창(淳昌)의 무량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005)
중간 복각본인 권 11의 간행 연도에 대해서는 안병희(1974:20~21)에서 무량사판 『월인석보』 권 23(명종 14년, 1559년 간행) 및 같은 무량사판인 『월인석보』 권 21(명종 17년, 1562년 간행)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권 3은 천병식교수에 의해 영인·공개(1985)되었다. 간기(刊記)는 없지만, 책의 맨 뒷면 안쪽에 붙어 있는 후세(後世)의 부전(附箋)으로 간행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곧 부전에 적힌 “嘉靖四拾辛酉年中月龜岳山無量寺開板”을 근거로 하여 1561년(명종 16)에 역시 순창의 무량사에서 중간(重刊)된 책으로 보았다. 이로써 『석보상절』은 전체 24권의 책 중 초간본 8권, 중간본 2권 등 모두 10권의 책이 오늘에 전하고 있는 셈이다. 주006)
현전하는 10권의 문화재 지정 여부는 다음과 같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검색사이트에 의하면 국립도서관 소장의 ‘권 6, 9, 13, 19’ 등 4책은 보물 523-1호,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권 23, 24’ 등 2책은 보물 523-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애초 심재완교수 소장이었다가 지금은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소장처가 바뀐 ‘권 11’ 역시 보물 5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천병식교수 소장의 ‘권 3’ 및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권 20, 21’에 대한 정보는 없다.
초간본 권 20은 1990년 2월 24일 무렵의 언론 보도로 처음 존재 사실이 공개되었고, 그해 3월에는 서지학자 천혜봉교수가 미술관련 잡지 『가나아트』 3·4월호(통권 12호)에 소개하여 전모가 밝혀졌다. 당시의 소장자가 자신의 고전적(古典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진가(眞價)를 알고,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앞에서 밝힌 대로 현재는 ‘초간본 권 21’과 함께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007)
초간본인 권 21 역시 천혜봉교수에 의해 1989년 11월 16일 경 언론에 공개되었다. 권 20이 공개되기 이전의 일이다. 이 책은 고서(古書) 수집가 우찬규(禹燦奎)님 소장이었는데, 천혜봉(千惠鳳)교수가 발굴하여 공개한 것이다. 권 21은 모두 65장 130쪽 정도의 분량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끝의 두 장인 64, 65장이 낙장이고, 60~63까지는 훼손이 심해서 해독이 어렵다. 이 책 역시 복사본으로 연구자들에게 유통되고 있다.
위의 천혜봉(1990:98~99)에 의하면 두 책은 납탑본(納塔本)이었다고 한다. 두 권이 한 책으로 묶여서 탑장(塔藏)되어 있다가 빛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원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오래 전에 입수한 사본을 대상으로 이 역주 작업을 진행했다. 이 책은 53장 106쪽으로 되어 있으나, 애초 천혜봉교수가 소개한 대로 권수(卷首) 쪽의 첫 장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2장부터 15장까지의 좌하귀 부분이 침윤(浸潤)과 마멸(磨滅)로 심하게 훼손되어 이 부분에 대한 해독이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역주(譯註) 작업 및 연구(硏究)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책의 형태서지 및 구성, 그리고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월인석보』 및 『법화경언해』와의 대응 관계, 어학적 특성 등을 살펴서 내용에 대한 확인은 물론,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밝혀보고자 한다. 역주에 원본의 서영(書影)을 실을 수가 없어서 원본에 있는 내용을 모두 입력한 후, 그 입력된 내용을 원문 대신 제시하려고 한다. 원문에 있는 내용이라면 방점은 물론 동국정운(東國正韻) 한자음까지 그대로 옮겨서 원문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아울러 비교·연구가 가능하도록 간행 연대가 조금씩 다른 『월인석보』(1459년 간행)와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의 대응 부분도 함께 제시할 것이다.

Ⅱ. 형태 서지

앞에서 밝힌 것처럼 필자는 역주 대상의 책인 『석보상절』 권 20을 직접 살피지 못했다. 현 소장처의 방침으로 열람(閱覽) 및 실사(實査)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용하고 있는 책은 공개 당시의 첫 번째 소장처에서 나온 복사본을 다시 복사한 것이다. 이 재복사본은 『석보상절』 권 20이 세상에 공개된 1990년 이후, 수년이 지나 연구자들 사이에 유통되었던 사본(寫本)으로 필자도 그 무렵에 입수한 것이다.
이 책의 전반적인 형태서지(形態書誌)는 현전(現傳)하는 다른 초간본 책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뒤의 역주(譯註)에 원본의 서영(書影)을 함께 싣지 못하므로 책의 판식(板式) 등 서지 사항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본에 의해 알 수 있는 내용만 살피면 다음과 같다. 복사본이어서 책 전체의 크기는 알 수가 없고, 판광(版匡)의 반곽(半廓)은 세로〔縱〕 21.45cm, 가로〔橫〕 15.9cm이다. 이를 국립도서관 소장의 책인 권 6, 9, 13, 19의 반곽 22~22.3cm x 15.7~15.9cm 및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책인 권 23, 24의 반곽 22.2cm x 15.8cm 등과 비교해 보면 원척(原尺)대로 복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변란(邊欄)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다. 첫 장(張)이 낙장(落張)이어서 정확한 권두서명(卷頭書名)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초간의 책들처럼 1장의 첫 행(行)에 세로로 ‘釋·셕譜:봉詳節·第·똉二·十·씹’이라고 썼을 것으로 판단한다. 본문의 끝장인 53장의 뒷면을 보면, 쌍행(雙行)으로 되어 있는 첫 행(行) 다섯 번째 글자에서 내용이 마무리되는데, 주008)
권 20의 맨 뒷장에 실려 있는 마지막 문장, 곧 협주문을 가리킨다. 『법화경』의 24번째 품(品)인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이 종료되었음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협주에 쓰인 “·잇·자· 妙·/音菩뽕薩·品:픔·이·라” 중 ‘/’ 뒤쪽에 있는 ‘音菩뽕薩·品:픔·이·라’를 이른다. 이 10자를 5자씩 두 줄로 배열한 것이다.
이 책의 편집 관행대로 품(品)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의 글이다. 주009)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의 저경(底經)은 『법화경』이다. 그러니까 권 13에서 시작하여 권 21까지에 걸쳐 『법화경』 7권 전체를 언해한 것이다. 본문에 경(經)의 원문이나 구결문(口訣文)은 두지 않고, 경(經) 원문의 국어역인 번역문만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협주를 두어 이해를 도왔다. 이런 이유로 협주에는 『법화경』의 계환(戒環) 요해(要解)를 옮긴 것이 많다. 제1품(品)인 서품(序品)부터 마지막 품(品)인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를 번역해서 실은 것인데, 각 품(品)의 끝에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쌍행으로 “잇자 ~ 品이라”고 하여 품(品)의 마무리임을 알리고 있다. 이 책 권 20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 행(行)인 2행부터 6행까지는 원래 공란(空欄)이었다. 주010)
이 53장 뒷면은 원래 품(品)의 종료임을 알리는 1행의 일부와 권말서명이 있는 7행을 제외한 그 나머지 지면이 공란(空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 전하는 책에는 나중에 누군가가 붓으로 쓴 낙서(落書)가 있다. 2행부터 6행까지와 권말 서명의 아래쪽, 그리고 8행에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을 토로한 필서(筆書)가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권말 서명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7행(行)에 대자(大字)로 ‘釋·셕譜:봉詳節·第·똉二·十·씹’이라고 권말서명(卷末書名)을 두었다. 판심(版心)은 상하(上下) 공히 대흑구(大黑口)이고,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위쪽 흑어미 바로 밑에 판심서명(版心書名)인 ‘釋譜’를 두고, 바로 이어서 권차(卷次)인 ‘二十’을 썼다. 그리고는 중간에 두어자 정도의 사이를 띈 후 아래쪽 흑어미 바로 위에 장차(張次)를 썼다. 매엽(每葉)은 무계(無界) 8행(行)이고, 주011)
이미 알려진 대로 『석보상절』의 초간본은 동활자본(銅活字本)이고, 중간본은 복각(覆刻)의 목판본(木版本)이다. 이렇게 판본(版本) 자체가 달라졌으므로 판식(版式) 등에서도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두드러진 차이점 중 하나는 초간본에는 행(行)과 행(行) 사이에 계선(界線)이 없는데 비해, 중간본 중 권 3에는 계선을 두었다는 점이다. 같은 중간본임에도 권 11에는 없다. 그 외 방점(傍點)의 모양이 초간본은 원점(圓點)인 데 비해 중간본은 점획(點劃)으로 한 것도 그렇고, 활자의 자양(字樣) 등에서도 차이가 난다.
매행(每行)의 글자 수는 15자(字)이다. 협주(夾註)가 필요한 곳에는 작은 글자 쌍행(雙行)으로 설명을 하였으나 따로 흑어미 등의 표지는 두지 않았다. 협주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법화경(法華經)』의 계환(戒環) 요해(要解)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논의 할 것이다. 활자(活字)는 한자와 정음자 모두 동활자(銅活字)가 사용되었다. 주012)
이호권(2001:27)에 의하면 동활자(銅活字)가 없는 경우에는 목활자(木活字)로 보충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자는 갑인자(甲寅字)로 대자(大字)와 소자(小字)의 두 종류이다. 대자(大字)는 본문에 쓰였고, 소자(小字)는 협주에 쓰였다. 정음(正音)의 경우에는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가 쓰였다. 대자(大字)는 본문에 쓰였고, 중자(中字)는 협주에 쓰였다. 소자(小字)는 본문과 협주의 한자 독음(讀音)에 쓰였다. 주013)
『석보상절』에 쓰인 정음(正音) 글자의 명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이호권(2001:27)의 각주 14)에서는 이를 정리하고, ‘갑인자 병용 한글자’라는 명칭이 비교적 온당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석보상절』 권 20의 보존 상태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의 탑장(塔藏)과 그 이후 보존 과정에서의 침습(浸濕) 및 마멸(磨滅)로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 곳곳에 있다. 훼손에 의해 해독이 불가능한 부분을 정리하고, 그 부분에 대한 원본의 내용을 추정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오른쪽 ( ) 안에 쓴 것은 필자가 같은 책의 전후(前後) 맥락(脈絡)은 물론,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의 같은 곳을 참고하여 복원(復原)한 내용이다. ‘ * ’ 표시는 1행 15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1, 2자 정도가 많거나 적음을 표시한 것이다. 『석보상절』 권 20의 1행(行)당 글자 수가 예외를 두지 않고, 15자씩인 점으로 미루어 이 부분은 원본 부합(符合)의 정확도가 떨어짐을 함의하고 있다.
1장 : 낙장(落張)
2ㄱ : (1행) 주014)
‘ㄱ’은 장(張)의 앞면을 가리키고, ‘ㄴ’은 장(張)의 뒷면을 가리킨다. ( ) 안의 숫자는 장(張)의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행차(行次)를 표시한 것이다.
아래쪽 5자 안 보임 (뽕提똉法·법)
(7행) 위쪽 2자, 아래쪽 5자 안 보임 (·펴·아), 주015)
이 부분은 사본에 첫 번째 글자가 뭉개져 있고, 두 번째 글자는 희미하게라도 보이는데, ‘아’인지 ‘어’인지 모호하여 분간이 되지 않는다. 같은 행에 있는 다른 글자의 ‘ㅏ’ 및 ‘ㅓ’와의 비교도 쉽지 않다. 순수히 ‘ㅏ,ㅓ’로 된 모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말의 앞에는 ‘대자비(大慈悲)’이라는 목적어가 있으므로 타동사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 이 부분의 경(經)의 원문은 ‘有大慈悲’이다. 이를 『월인석보』에서는 ‘큰 慈悲 잇고’로 옮겼고, 『법화경언해』에서는 ‘有大慈悲고’로 옮겼다. 따라서 앞뒤의 문맥과 희미하게 보이는 두 번째 글자에서 유추하여 ‘펴아’가 쓰였던 것으로 추정했다.
(:업서 能)
(8행) 위쪽 1자, 아래쪽 7자 안 보임 (·히), (佛·智·딩慧· 如)
2ㄴ : (1행) 아래쪽 7자 안 보임 (·然智·딩慧·)
3ㄱ : (7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恩)
(8행) 아래쪽 7자 안 보임 (라 그저·긔 菩뽕薩)
3ㄴ : (1행) 아래쪽 8자 안 보임 (·히 부텻 ·이 :마· 듣) * 1자 많음
(2행) 위쪽 2자 안 보임 (깃·부)
(2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恭)
4ㄱ : (7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은)
(8행) 아래쪽 6자 안 보임 (·호· 조·시·며) * 1자 적음
4ㄴ : (1행) 아래쪽 5자 안 보임 (·도 도로 :녜 ·) * 2자 적음
(2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에)
5ㄱ : (7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엇·뎨)
(8행) 위쪽 2자 안 보임 (시·니)
(8행) 아래쪽 9자 안 보임 (世·솅尊존·하 ·이 藥·약王)
5ㄴ : (1행) 아래쪽 13자 안 보임 (뽕薩··이 百·千쳔萬·먼億· 那)
6ㄱ : (8행) 아래쪽 4자 안 보임 (師 佛)
6ㄴ : (1행) 아래쪽 4자 안 보임 (:톄 八·十)
7ㄱ : (8행) 아래쪽 4자 안 보임 (러·니 一·) * 1자 많음
7ㄴ : (1행) 중간 4자 안 보임 (二·), (), (·라)
(1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이 寶:)
8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득)
8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一)
9ㄱ : (8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내 비·록)
9ㄴ : (1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
10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界·갱)
10ㄴ : (1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히 )
11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
11ㄴ : (1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供養)
12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妙·)
12ㄴ : (1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을 여)
13ㄱ : (8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菩)
13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
14ㄱ : (8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몸)
14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陁)
15ㄱ : (8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
15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하)
위의 일별(一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좌하귀 부분의 마멸로 인해 2장부터 15장까지 각 장(張) 앞면의 끝 행인 제8행 아래쪽과 뒷면의 첫 행인 제1행 아래쪽에 해독(解讀)이 어려운 글자가 상당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뒷장으로 갈수록 나아져서 점점 해독 불가능한 글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16장부터 마지막 장인 53장까지는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대로 복원(復原) 작업은 책의 앞뒤 내용을 통해 그 맥락을 살피고,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를 참고하는 한편, 글자 수를 고려하여 확정했다. 한자어의 독음(讀音)은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 가져왔다.

Ⅲ. 내용의 구성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에는 『법화경』의 경(經) 본문이 정음(正音)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법화경』 첫 번째 품(品) 주016)
‘품(品)’은 범어로 ‘verga’라고 한다. 같은 종류의 것을 모아서 한 뭉치로 만드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품류(品類), 또는 품별(品別)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법화경』에서는 편(篇)과 장(章)을 나누어서 뜻과 이치(理致)를 차별화한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인 ‘서품(序品)’부터 마지막 품(品)인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를 번역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중 권 20에는 『법화경』 권 6에 실려 있는 제22품 ‘촉루품(囑累品)’,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권 7에 실려 있는 제24품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등 세 개의 품(品)이 있다. 이 『법화경』의 내용은 나중에 『월인석보』(1459년 간행) 주017)
『법화경』이 번역되어 실려 있는 『월인석보』는 권 11부터 권 19까지이다. 따라서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와 대응되는 『월인석보』는 권 11부터 권 19까지임을 알 수 있다.
와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에 다시 번역되어서 국어사 연구 자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주018)
물론 세 차례의 번역(飜譯)이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두루 알고 있는 대로 『월인석보』(1459년 간행)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삽입하여 재편찬한 결과 모두 25권으로 확대된 것이고,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는 경(經)의 원문(原文)은 물론, 계환(戒環)의 요해(要解)까지에도 정음(正音)으로 구결을 달아서 번역을 한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에는 품(品)이 종료되는 마지막 부분에 “·잇·자· ~ 品:픔·이·라(여기까지는 ~ 품(品)이다.)”라는 쌍행(雙行)의 협주(夾註)를 두어 앞선 품(品)의 종료와 새로운 품(品)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주019)
이 점은 『월인석보』의 설명이 보다 친절한 편이다. ‘【~~잇 ~品 고 아래 ~品이라】〔여기까지 ~품(品)을 마치고 아래는 ~품(品)이다.〕’라 하여 다음 품(品)의 내용까지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행의 끝까지를 여백으로 두었다. 다음 행은 ‘그’, 또는 ‘그저긔’로 시작하여 내용이 전환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에는 『석보상절』 다른 책에서 내용이 바뀔 때 흔히 사용하던 권원(圓圈) 표시〔〇〕를 두지 않았다. 권 21도 마찬가지다. 권 20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석보상절』 20 : 1ㄱ2 ~ 5ㄱ4 ← 『법화경』 권 6 촉루품(囑累品) 제22
‘촉루(囑累)’는 후일(後日)에 할 일을 미리 말하여 맡겨 두고, 부탁한다는 뜻을 가진 불교 용어이다. 따라서 이 ‘촉루품(囑累品)’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많은 보살(菩薩), 마하살(摩訶薩)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중(大衆)들에게 『법화경』의 가르침을 닦고 익혀서 널리 펼 것을 부탁한다는 설법(說法)이다. 곧, 무량(無量)의 보살(菩薩)들에게 미래세(未來世)에 할 일을 미리 부촉(付囑)하고, 그 일을 하도록 여러 분신화불(分身化佛)과 다보불(多寶佛)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다.
2. 『석보상절』 20 : 5ㄱ5 ~ 32ㄴ3 ← 『법화경』 권 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3
‘본사품(本事品)’은 ‘본사설(本事說)’이라고도 한다. 12부경의 하나로, 경전(經典) 가운데 불제자들이 지난 세상에 이룬 행업(行業)이나 사실(事實) 등을 설(說)한 부분이다. 따라서 『법화경』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지난날의 행적(行蹟)과 이러한 행업(行業)을 생각하여 이 내용이 들어 있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부촉하는 내용이다.
이 품(品)은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쪽에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인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의 소신(燒身) 법공양(法供養)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다. 그 다음에는 『법화경』을 수지(受持)해서 얻는 공덕이 소신에 의한 법공양보다 크다는 부처님의 설법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는 『법화경』이 모든 경전 중에서도 으뜸임을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뒤에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듣고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의 큼과 신비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 부처님이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부촉하는 내용으로 끝냈다.
3. 『석보상절』 20 : 32ㄴ4 ~ 53ㄴ1 ← 『법화경』 권 7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제24
지난 세상에서 10만 종류의 음악을 운뢰음왕불(雲雷音王佛)에게 공양하고 정화수왕지불(淨華宿王智佛)의 국토에 태어났다는 묘음보살(妙音菩薩)의 행적(行蹟)을 설명한 품(品)이다. 묘음보살(妙音菩薩)은 여러 부처님을 친근(親近)하여 깊은 지혜를 성취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三昧)를 얻었으며, 신통력(神通力)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앞쪽에는 묘음보살이 정화수왕지불의 국토에서 삼매(三昧)와 신통력(神通力)의 힘으로 8만 4천의 보살들에게 둘러싸여 사바세계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왔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사바세계에 온 이유는 석가모니불을 공양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화덕보살(華德菩薩)이 부처님께 묻고, 부처님이 답하는 형식을 빌려서 묘음보살이 신통력(神通力)을 갖게 된 전생(前生)의 인연(因緣)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부처님이 설법하는 형식을 통해 묘음보살이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 화현(化現) 등의 다양한 방편(方便)을 써서 중생들을 도탈(度脫)케 하고, 궁극적으로는 중생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는 내용이 있다. 끝에는 묘음보살이 부처님과 다보불(多寶佛)에게 공양하고 8만 4천의 보살에 둘러 싸여 정화수왕지불의 국토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위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20)
이 내용은 김기종(2010:64~65)에서 가져 왔다. 일부의 내용은 필자가 바로 잡고 다시 정리했다. 이 외에도 저경(低經)에 관한 상세한 논의가 있어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석보상절』 권 20의 본문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법화경』 권 6 촉루품(囑累品) 제22,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3, 권 7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제24 등 경(經)의 본문을 정음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경 본문 속에는 쌍행으로 배열된 협주가 나온다. 두루 아는 대로 협주는 번역자나 번안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가(加)한 주석(註釋)에 해당된다. 당연히 고유의 말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로 국어사 연구자들에게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협주의 대부분은 『법화경』을 요해(要解)한 송(宋)나라 계환(戒環)의 요해 부분을 정음으로 옮긴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협주 고유의 기능을 가진 것도 있다.
권차
(卷次)
경의 내용장차(張次)저경(底經)해당
월곡(月曲)
  권  20•석가모니불이 무량보살(無量菩薩)에게 미래세에 법화경을 널리 설법할 것을 부촉함 2ㄱ1~4ㄱ4妙法蓮華經囑累品 第22 其321
•석가모니불이 분신화불(分身化佛)과 다보불(多寶佛) 등을 본국으로 돌려보냄 4ㄱ4~5ㄱ4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前身)인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 몸과 팔을 태워 법공양(法供養)을 한 인연 5ㄱ5~20ㄱ2     妙法蓮華經藥王菩薩本事品 第23
•법화경을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이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의 법공양보다 크다는 석존의 설법 20ㄱ2~26ㄱ7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듣고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 26ㄱ7~30ㄱ2
•석가모니불이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부촉함 30ㄱ2~32ㄴ3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석존을 공양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해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옴 32ㄴ4~45ㄱ6妙法蓮華經 妙音菩薩品 第24 其322  ~324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신통력(神通力)을 갖게 된 전생의 인연에 대한 설명 45ㄱ6~47ㄱ3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신통력과 지혜에 대한 석가모니불의 설법 47ㄱ3~51ㄴ7
•묘음보살이 석가모니불과 다보불(多寶佛)에게 공양하고 돌아감 51ㄴ7~53ㄴ1
협주(夾註)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법화경』 계환(戒環)의 요해(要解) 부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서 확인이 된다. 『석보상절』에서는 요해(要解) 중 일부를 협주로 하였고, 『월인석보』에서는 요해(要解) 전체를 협주로 하고 있다.
(1) ㄱ.【·녀나· 深심妙· 法·법·은 權꿘敎· 漸:쪔敎·· 니르·시·니 深심妙·ㅣ·라 ·샨 ··든 ·이 法·법·이 :다  佛·乘·이·론 젼··라】〈석상20:3ㄱ, 협주문〉
ㄴ.【如來ㅅ 智慧 信타 샤 能히 種智 信야 一乘 向 사미니 이 經을 爲야 닐어 佛慧 得게 야 二乘에 걸이디 아니케  디니라 녀나 深妙法은 權漸敎 니시니  深妙타 니샤 이 法이 다 一佛乘 爲논 젼라】〈월석18:18ㄱ~18ㄴ, 협주문〉
ㄷ. 信如來ㅅ 智慧 謂能信種智야 趣向一乘者시니 當爲說是經샤 令得佛慧야 而不滯二乘ㅣ샷다 餘深妙法은 指權漸教 也시니 亦曰深妙者 是法이 皆爲一佛乘故ㅣ시니라 〈법언6:124ㄱ, 계환 요해 정음 구결문〉
ㄹ. 如來ㅅ 智慧 信호 能히 種智 信야 一乘에 가 向 사 니시니 반기 이 經을 爲야 니샤 佛慧를 得야 二乘에 거디 아니케 샬 띠로다 녀나 深妙法은 權엣 漸敎 치시니  深妙ㅣ라 니샤 이 法이 다 一佛乘 爲샨 젼시니라 〈법언6:124ㄱ~124ㄴ, 계환 요해 언해문〉
협주 중에는 어려운 용어에 대한 해설이나 품(品)의 종료임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2) ㄱ. 容顔·이 甚·씸·히 奇긩妙··시·며【容· :즈·오 顔· ·모·야히·라】〈15ㄱ〉
ㄴ. 【·잇·자· 藥·약王菩뽕薩·本:본事·品:픔·이·라】〈32ㄴ〉
(2ㄱ)은 어휘 ‘용안(容顔)’에 대한 설명이다. 협주에서 명사류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법인 ‘~/는//은 ~이라’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2ㄴ)은 23품(品)의 종료임을 나타내는 협주문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법화경』을 저경(低經)으로 하고 있는 『석보상절』 권13부터 권21까지의 책 중 현전하는 권13, 권19, 권21 모두에서 품(品)을 마치는 자리에는 ‘·잇·자· ~品:픔·이·라’라는 협주를 두어 종료를 표시했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앞뒤에 다른 내용이 덧붙는 경우도 있다. 주021)
·잇·자· 囑·죡累:品:픔·이·니 :말··로 브·틸 ·씨 囑·죡·이·오 法·법·으·로 니· ·씨 累:·라】〈석보20:5ㄱ〉,【~~·이 如來ㅅ · 노·신 德·득·이·라 ·잇·자· 觀관世·솅音菩뽕薩·普:퐁門몬品:픔·이·니 옷 소·리· 聲·이·라 ·고~~】〈석보21:19ㄴ〉.
역주(譯註)에서는 맨 앞에 『석보상절』 권 20의 본문을 두고, 그 밑에 그에 대응하는 『월인석보』 권 18의 해당 부분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 역시 그에 대응하는 『법화경언해』의 해당 부분 정음 구결문, 언해문, 계환의 요해 구결문, 요해 언해문 등의 순(順)으로 배열해서 실어 놓았다. 그런 다음에 『석보상절』의 현대어역과 주석을 두었다. 『석보상절』, 『월인석보』, 『법화경언해』 등 세 책의 서로 대응되는 부분을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 권20월인석보 권18법화경언해 권6, 권7
〔협주〕 촉루품 제22에 대한 설명 : 12ㄴ7 ~ 14ㄴ16 : 116ㄱ1 ~ 119ㄱ5계환(戒環)의 요해(要解) 정음 구결문 및 언해문
〈월곡〉기 321 : 14ㄴ2 ~ 15ㄱ1
석가모니불이 무량보살(無量菩薩)에게 미래세에 법화경을 널리 설법할 것을 부촉함(1ㄱ2 ~ 4ㄱ4)왼편과 같음 : 15ㄱ2 ~ 19ㄴ26 : 119ㄱ6 ~ 125ㄴ9
석가모니불이 분신화불(分身化佛)과 다보불(多寶佛) 등을 본국으로 돌려보냄(4ㄱ4 ~ 5ㄱ4)왼편과 같음 : 19ㄴ2 ~ 20ㄴ76 : 126ㄱ2 ~127ㄴ3
     〔협주〕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 대한 설명 : 20ㄴ7 ~ 22ㄴ76 : 128ㄱ1 ~ 132ㄱ2계환(戒環)의 요해(要解) 정음 구결문 및 언해문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前身)인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 몸과 팔을 태워 법공양(法供養)을 한 인연(5ㄱ5 ~ 20ㄱ2)왼편과 같음 : 22ㄴ7 ~ 44ㄱ46 : 132ㄱ3 ~ 159ㄱ9
법화경을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이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의 법공양보다 크다는 석가모니불의 설법(20ㄱ2 ~ 26ㄱ7)왼편과 같음 : 44ㄱ4 ~ 53ㄱ46 : 159ㄴ2 ~ 172ㄴ4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듣고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26ㄱ7 ~ 30ㄱ2)왼편과 같음 : 53ㄱ4 ~ 58ㄴ26 : 172ㄴ5 ~ 180ㄱ7     
석가모니불이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부촉함(30ㄱ2 ~ 32ㄴ3) 왼편과 같음 : 58ㄴ2 ~ 62ㄱ6               6 : 180ㄱ9 ~ 184ㄴ8
     〔협주〕 묘음보살품 제24에 대한 설명 : 62ㄱ6 ~ 63ㄱ67 : 1ㄱ5 ~ 3ㄱ3계환(戒環)의 요해(要解) 정음 구결문 및 언해문
     〈월곡〉기 322 ~ 324(3) : 63ㄱ7 ~ 64ㄴ6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석가모니불을 공양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해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옴(32ㄴ4 ~ 45ㄱ6)왼편과 같음 : 64ㄴ7~81ㄴ57 : 4ㄱ6 ~ 23ㄱ8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신통력(神通力)을 갖게 된 전생의 인연에 대한 설명(45ㄱ6 ~ 47ㄱ3)왼편과 같음 : 81ㄴ5 ~ 84ㄴ2          7 : 23ㄴ2 ~ 26ㄱ3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신통력과 지혜에 대한 석가모니불의 설법(47ㄱ3 ~ 51ㄴ7)왼편과 같음 : 84ㄴ2 ~ 87ㄱ7 이하는 낙장(落張)으로 인해 비교 불가능7 : 26ㄱ3 ~ 34ㄱ1
묘음보살이 석가모니불과 다보불(多寶佛)에게 공양하고 돌아감(51ㄴ7 ~ 53ㄴ1)낙장(落張)으로 인해 비교 불가능7 : 34ㄱ2 ~ 36ㄱ3

Ⅳ. 어학적 고찰

두루 알고 있는 대로 『석보상절』은 우리 문자인 ‘훈민정음’을 사용해서 찬술(撰述)한 최초의 산문(散文) 문헌이다. 이 책은 ‘훈민정음’ 반포(頒布) 이듬해인 1447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어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아 왔다. 책에 실려 있는 내용도 그러하지만, 우리 문자가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산문 자료라는 점에서도 연구 대상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표기(表記)는 물론, 형태, 통사, 어휘 등 책 전체가 국어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전해지는 책이 적어서 공개되는 순간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권 20이 학계에 소개된 지 2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원본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어서 그런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표기와 어휘 등을 중심으로 살펴서 이 책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성을 간단하게나마 밝히고자 한다.
1) 이 책의 표기에서 두드러진 점은 방점(傍點)과 모음 ‘ㆍ’ 및 ‘ㆎ’의 ‘ㆍ’ 표기에 둥근 점인 이른바 원점(圓點)을 썼다는 것이다. 정음이 일부라도 들어있는 문헌에서 ‘ㆍ’가 들어가는 모음 및 방점 표기에 전면적으로 원점(圓點)이 쓰인 책은 『훈민정음(해례본)』(1446년 간행)과 『동국정운』(1447년 편찬) 주022)
여기서 ‘간행’이라 하지 않고 ‘편찬’이라고 한 것은 이 책의 실제 간행이 이루어진 해는 이보다 1년 늦은 세종 30년(正統 13년, 1448년)이라고 본 견해(안병희:1979 등)를 따른 것이다.
정도를 들 수 있다. 이렇듯 초기 문헌에서는 두 형태에 원점(圓點)을 썼으나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행)부터는 비스듬히 찍는 점인 점획(點劃)으로 바뀌었다. 『훈민정음(해례본)』과 『동국정운』에서는 방점도 그렇지만 모음의 단체자(單體字)와 합체자(合體字) 모두에서 ‘ㆍ’를 원점(圓點)으로 했고, 『용비어천가』(1447년 간행),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사리영응기』(1449년 간행) 등에서는 방점 및 ‘ㆍ’와 ‘ㆎ’의 ‘ㆍ’ 표기에만 원점으로 표기하였다. ‘ㆎ’ 이외의 합체자(合體字)에 쓰이던 원점의 ‘ㆍ’는 고딕체인 막대형의 방획(方劃)으로 자양(字樣)이 바뀐 것이다. 『홍무정운역훈』부터는 방점은 물론, 단체자 ‘ㆍ’와 합체자 ‘ㆎ’에서의 ‘ㆍ’까지 점획(點劃)으로 바뀌고, 그 외의 합체자들은 앞의 문헌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획(方劃)을 썼다. 이후에 간행된 책인 『월인석보』나 간경도감 간행의 정음 문헌에서는 방점 및 ‘ㆍ’와 ‘ㆎ’의 ‘ㆍ’는 점획으로 표기하였고, 그 외 모든 합체자 모음에 쓰이던 ‘ㆍ’는 방획으로 표기하였다.
2) 모음조화의 경우에는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023)
〔外〕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석보상절』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이 단어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처소부사격조사와의 통합에서 ‘의’를 취한다. 밧긔〈11ㄴ, 21ㄴ〉, 밧긧것니오〈12ㄱ〉, 안팟글〈11ㄴ〉.
대체로 잘 지켜지고 있다. 다만, 〔i〕, 〔j〕 다음에서는 체언에 조사가 통합되는 경우와 용언 어간에 어미가 통합되는 경우가 서로 다르다. 체언에 조사가 통합되는 경우는 양성모음 다음에는 물론이거니와, 〔i〕, 〔j〕 다음에도 양성모음 계열 조사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고유어와 한자어 모두에서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석보상절』은 한문 불경(佛經)의 번역이어서 고유어에 비해 한자어 어휘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용례도 한자어가 많을 수밖에 없다. 용언 어간에 어미가 통합되는 경우에는 대체로 어간의 계열에 따라 모음조화가 이루어졌으나, 〔i〕와 〔j〕 다음에서 음성모음 계열의 어미 및 선어말어미의 통합이 우세하다. 다만 〔i〕, 〔j〕 다음에 ‘-오/우’로 시작되는 어미가 통합되는 경우에는 〔i〕, 〔j〕 앞에 오는 음절주음이 양성모음인 경우에 ‘-오’를 취하는 경향이 높다. 그 외에 모음조화의 원칙을 벗어난 수의적(隨意的)인 형태도 더러 보인다. 다음은 조사통합의 경우에 나타나는 모음조화의 예이다. 주024)
『석보상절』의 모음조화에 대해서는 이호권(2001:64~86)에 상세한 분석이 있어서 이 논의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3) ㄱ. 사〈13ㄱ〉, 든〈3ㄱ〉, 마〈3ㄴ〉, 부텨를〈7ㄴ〉, 모〈11ㄴ〉, 주를〈7ㄴ〉,
모매〈3ㄴ〉, 데〈24ㄴ〉, 고로〈7ㄱ〉, 거스로〈10ㄴ〉
ㄴ. 이〔是〕〈27ㄴ〉, 〔歲〕〈27ㄱ〉, 이〔是〕〈10ㄴ〉, 홰〔炬〕〈25ㄱ〉
ㄷ. 여래(如來)〈2ㄴ〉, 해(解)〈14ㄱ〉, 칙(勅)〈3ㄴ〉, 투쟁(鬪諍)〈27ㄴ〉, 대자비(大慈悲)〈2ㄱ〉, 법화삼매(法華三昧)〈53ㄱ〉, 무생법인(無生法忍)〈28ㄱ, 53ㄱ〉, 일체중생(一切衆生)〈24ㄱ〉
(3ㄱ)은 고유어 어휘에 보조사 ‘/은’, 목적격조사 ‘/를//을’, 처소부사격조사 ‘애/에’, 도구부사격 조사 ‘로/으로’가 통합된 예이다. 모음조화가 철저하게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 (3ㄴ)은 고유어 〔i〕와 〔j〕 다음에서 양성모음 계열의 조사가 통합된 예이고, (3ㄷ)은 〔i〕와 〔j〕로 끝나는 한자어 체언 다음에서 양성모음 계열의 조사가 통합된 예이다. 〔i〕와 〔j〕로 끝나는 고유어와 한자어 체언 뒤에서는 양성모음 계열의 조사 통합이 우세함을 보여준다. 다음은 어간과 어미의 통합에서 보이는 모음조화의 예이다.
(4) ㄱ. 다라〈52ㄱ〉, 나토아〈50ㄴ〉, 나아〈46ㄱ〉 / 불러〈2ㄴ〉, 드러〈2ㄴ〉, 수머〈41ㄱ〉
ㄴ. 노니〈10ㄴ〉, 업스니〈49ㄱ〉, 안며〈7ㄴ〉, 드르며〈45ㄱ〉
ㄷ. 시니〈50ㄴ〉~시므며〈45ㄴ〉, 비니〔散〕〈9ㄱ〉~비흐며〈52ㄱ〉
ㄹ. 조쳐〈27ㄴ, 46ㄱ〉, 거리〈35ㄱ〉, 려〈42ㄴ〉, 가져〈42ㄴ〉, 거리쳐〈48ㄴ〉, 이셔〈49ㄱ〉
ㅁ. 버로미〈7ㄱ, 42ㄱ〉, 앗교미〈2ㄱ〉, 앗굠과〈43ㄱ〉, 니교〈8ㄱ〉, 룜〈12ㄴ〉, 얽〈25ㄴ〉 / 너교〈8ㄴ, 17ㄴ〉, 이쇼〈21ㄴ〉 cf. 즐규믈〈12ㄱ〉
ㅂ. 펴아〈2ㄱ, 11ㄴ, 30ㄱ〉, 내야〈3ㄴ〉, 내야〈31ㄴ〉
(4ㄱ)은 어간 끝음절 모음의 계열에 따른 모음조화의 예이고, (4ㄴ)은 받침이 있는 어간 끝음절 모음의 계열에 따른 ‘/으’ 선접형 어미의 모음조화 예이다. (4ㄷ)은 〔i〕로 끝난 어간에 받침이 이어진 경우, 매개모음 ‘/으’가 혼용(混用)된 예이다. ‘빟-’의 경우는 혼용의 예가 흔한 편이지만 ‘시-/시므-’의 경우에는 ‘시므-’가 절대적으로 우세한데, 이 책에는 이 정도의 예만 보인다. (4ㄹ)은 〔i〕로 끝나는 어간 다음에 연결어미로 ‘-어’가 통합된 예이다. 이 책에서 어간이 〔i〕로 끝난 경우에는 이처럼 연결어미로 ‘-아/어’ 중에 ‘-어’가 왔다. (4ㅁ)은 어간이 〔ㄹ〕로 끝난 경우와 〔i〕로 끝난 경우에 명사형어미 ‘-옴/움’중 ‘-옴’이, 설명형어미 ‘-오/우’ 중 ‘-오’가 온 예이다. (4ㅂ)은 어미 통합에서 모음조화 원칙에서 벗어난 이른바 수의적인 통합형이다. 음성모음 다음과 〔j〕 다음에서 각각 양성모음 계열의 어미가 통합된 예이다. ‘펴아’는 『월인석보』 권 18에서 ‘펴’(2회)로 바뀌기도 하고 ‘發샤’(1회)로 바뀌기도 했다.
이렇듯 어미 통합의 경우에도 대체로 모음조화가 지켜졌으나, 조사 통합에서와는 달리 어간의 끝음절 〔i〕 다음에서는 음성모음 계열의 어미 통합이 우세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어간 끝음절 모음이 비록 음성모음이라고 하더라도 받침이 〔ㄹ〕인 경우와 〔i〕로 끝난 경우에는 명사형어미 ‘-옴/움’중 ‘-옴’이, 설명형어미 ‘-오/우’ 중 ‘-오’가 와서 모음조화에 어긋나기도 했다.
3) 이 책에서 종성 ‘ㆁ’은 모음 앞에서 연철 표기하였다. 다른 『석보상절』에서는 분철한 예가 없지 않으나 이 책에서는 ‘ㆁ’이 어간 말음인 경우에 예외 없이 연철했다. 주025)
현전하는 초간본 여덟 권의 ‘ㆁ’ 연철과 분철에 대해서는 이호권(2001:97~103) 참조. 그에 따르면 권 9와 권 13도 ‘ㆁ’의 경우 예외 없이 연철되었다고 한다.
(5) ㄱ. 잇자〈5ㄱ, 32ㄴ, 53ㄱ〉
ㄴ. 쳔랴니〈11ㄴ〉, 쳔랴〈11ㄴ〉
ㄷ. 야로〈27ㄱ〉, 야〈50ㄱ〉
ㄹ. 기자〈9ㄱ〉, 바〈17ㄴ〉, 스스샤〈19ㄱ〉, 당다〈31ㄱ〉
이 책에 종성에 ‘ㆁ’이 쓰인 명사는 위에 보이는 정도인데,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의 통합에서는 모두 연철했다. (5ㄱ)은 각 품(品)의 종료에 나오는 협주문에서의 예이다. ‘’은 여기서 ‘끝’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5ㄴ)은 ‘살림살이에 드는 돈과 양식(糧食)’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천(錢糧)’에서 온 말인데, 이 책이 원전을 함께 싣지 않고 번역한 데에다 당시에 이미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던 듯 정음으로 적혀서 연철되었다. (5ㄷ)의 ‘:’도 ‘모양(模樣/貌樣)’을 가리키는 한자어 ‘:(樣)’에서 온 말로 보이는데, 이 어휘도 초기 문헌부터 이렇게 정음으로 적혀서 연철되었다. (5ㄹ)의 경우도 각각 이 책에 한두 용례씩 보인다. ‘기’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4) 이 책에는 같은 뜻을 가졌지만 표기에서는 다르게 실현된 형태들이 더러 보인다. 『석보상절』이 정음 초기에 간행된 문헌이어서 당시까지 표기 형태를 확정 짓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고, 편찬자의 개인적인 언어 습관일 수도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형태에 대해서는 현전하는 『석보상절』 다른 책이나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용비어천가』 및 『월인천강지곡』 등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같은 내용을 싣고 있는 『월인석보』 등과의 면밀한 비교·검토를 통해 그러한 표기의 전반에 대한 이해에 이를 것으로 본다. 몇몇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6) ㄱ. 부텻긔〈5ㄱ, 39ㄱ〉 / 부텨〈9ㄴ, 15ㄱ, 45ㄱ, 50ㄴ〉, 부텨며〈21ㄱ〉
ㄴ. 가아〈36ㄱ, 37ㄴ, 52ㄴ〉, 나아〈13ㄴ, 46ㄱ〉 / 가〈15ㄱ, 27ㄱ〉
ㄷ. 업긔〈11ㄴ〉, 조킈〈11ㄴ〉, 펴디긔〈16ㄴ〉, 표현(表現)킈〈17ㄴ〉, 버서나긔〈25ㄴ〉, 이익(利益)긔〈32ㄴ〉, 요익(饒益)긔〈51ㄱ〉, 득(得)긔〈53ㄱ〉 / 알에〈2ㄴ〉, 맛게〈35ㄴ〉, 보게〈40ㄴ〉, 에〈42ㄱ〉, 보게〈44ㄴ〉, 득(得)게〈49ㄴ〉
ㄹ. 즉자히〈18ㄱ〉 등
(6ㄱ)은 통합형조사인 ‘ㅅ+긔’와 단일형 조사인 ‘’가 함께 쓰인 예이다. 이호권(2001:106)에서는 이를 ‘ㅅ+긔’의 문법화 진행 정도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표기자의 언어 취향인 것으로 정리하였다. ‘’의 문법화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판단의 결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책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다른 『석보상절』에서도 ‘’가 많이 쓰였다는 점은 어원에 대한 인식이 엷어져서 ‘’의 형태로 정착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 책보다 『월인석보』 권 18에 ‘부텻긔’ 형태가 더 많은 것은 원고 작성자의 언어 소양이 반영된 것이거나 ‘ㅅ’에 대한 표기 원칙의 변화에 따른 것일 수 있다. (6ㄴ)은 어간의 모음과 동일한 형태를 가진 모음 어미와의 통합에서 어미를 쓰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여 두 가지 형태로 표기된 예이다. 이렇게 어간과 같은 형태의 모음 어미를 겹쳐서 쓴 예는 『월인석보』에도 더러 보인다. 이는 문법 의식과 표기 편의의 상충에 기인한 것으로 아직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거나 표기자의 언어 습관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6ㄷ)은 보조적 연결어미 ‘-긔’와 ‘-게’의 사용례이다. 책 전체로 보면 ‘-게’ 사용례가 더 많다. 나중에 나온 책들에서 ‘-게’의 사용이 점점 많아지는 점으로 보아 ‘-긔’가 고형(古形)이고 ‘-게’가 신형(新形)임을 알 수 있다. (6ㄹ)은 한자어 ‘즉(卽)’과 ‘즉시(卽時)’의 옮김인데, 이 책에 많은 용례가 보인다. 그리고 모두 이 형태로만 쓰였다. 『석보상절』 권 20에 쓰인 ‘·즉자·히’는 『월인석보』 권 18에서 표현이 달라진 1개를 제외하고 모두 ‘·즉재’로 바뀌었다. 주026)
『석보상절』 권 20에는 ‘·즉자·히’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월인석보』 권 18에서 대부분 ‘·즉재’로 바뀌었다. 다만 하나만이 달라져서 ‘곧’으로 옮겨졌다. 즉자히 아바긔 〈석상20:13ㄴ〉 → 아비 爲야 偈 닐오〈월석:4ㄱ〉.
5) 이 책에는 동명사어미 ‘-ㄹ’과 ‘-ㅭ’의 혼용 예가 상당 수 보인다. 두 형태 중 ‘-ㅭ’의 쓰임이 훨씬 우세하다. ‘-ㄹ’은 후행하는 체언의 두음이 각자병서인 경우, 또는 유성자음으로 시작하는 명사 및 의존명사의 앞이나, ‘ㅅ’ 계열 합용병서가 두음인 의존명사 및 ‘’에 의해 구조화된 어미 앞에 온다. ‘-ㅭ’은 후행하는 체언의 두음이 무성자음인 고유어 및 한자어 앞에 오고, ‘ㅂ’계 합용병서를 두음에 가진 일반명사와 의존명사 ‘’에 의해 구조화된 어미 앞에 온다.
(7) ㄱ. 聲聞 求 사콰〈18ㄴ〉,  사미〈20ㄴ〉, 受持 사〈31ㄱ〉
ㄴ. 니르 時節에〈4ㄴ〉, 涅槃 時節이〈15ㄴ〉, 成道 時節에〈31ㄱ〉
ㄷ. 주 주리〈31ㄱ〉, 니〔說〕 저긔〈32ㄱ〉, 니르〔說〕 저긔〈51ㄴ, 53ㄱ〉 / 니르실〔起〕 쩌긔〈44ㄴ〉 / 濟渡욜 야〈50ㄱ〉 / 봀 분〈47ㄱ〉,  미니라〈44ㄴ〉,  미리라〈12ㄴ〉
ㄹ. 너 들〈36ㄴ〉, 너 〈37ㄴ〉
ㅁ. 디니〈2ㄴ〉, 아니딘댄〈19ㄴ〉
ㅂ.  〈35ㄴ〉, 입힐훔 씨라〈27ㄴ〉, 이실 씨니〈17ㄴ〉, 니즐〈12ㄱ〉, 아니니라〈13ㄱ〉
ㅅ. 求따〈13ㄱ〉
(7ㄱ)은 무성자음으로 시작되는 명사 앞에 ‘-ㅭ’이 온 예이다. 이 책에는 고유어가 많지 않아서 후행하는 체언이 일반명사인 예는 ‘사’이 유일하다. ‘-ㄹ+각자병서’의 예는 없다. (7ㄴ)은 후행하는 한자어 체언의 두음이 무성자음 ‘ㅅ’인 경우의 예이다. (7ㄷ)은 후행하는 체언이 의존명사인 경우이다. 의존명사의 두음이 무성자음이면 ‘-ㅭ+전청자’형과 ‘-ㄹ+각자병서’형이 모두 쓰였으나 ‘-ㅭ’의 예가 더 많다. 후행 체언이 유성자음으로 시작되는 명사나 의존명사 앞에서는 ‘-ㄹ’이 쓰였다. 후행하는 의존명사가 ‘ㅅ’계 합용병서인 경우에는 ‘-ㄹ’이 왔다. ‘-ㄽ’으로 표기된 것은 후행하는 의존명사의 초성 ‘ㅅ’이 위치 이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7ㄹ)은 후행하는 체언이 ‘ㅂ’계 합용병서인 일반명사 앞에 ‘-ㅭ’이 표기된 예이다. (7ㅁ)과 (7ㅂ)은 같은 의존명사에 의해 문법화한 어미라고 하더라도 ‘’계열의 어미와 ‘’계열의 어미 앞에 오는 동명사가 서로 다름을 보여주는 예이다. ‘’계열의 어미 앞에는 ‘-ㅭ’이오고, ‘’계열어미 앞에는 ‘-ㄹ’이 온 것이다. (7ㅅ)은 의문형인데, 이 책에 ‘-ㅭ다’형은 없고 이 형태만이 유일하다.
6) 『석보상절』 권 20에는 사용례가 적어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이 책에 처음 나오는 어휘가 있다. 이른바 희귀어(稀貴語)와 고어사전 미수록(未收錄) 어휘들이다. 그런가 하면 기원적으로는 한자어인데, 고유어처럼 일관되게 정음(正音)으로만 적힌 어휘들도 있다. 먼저 희귀어 및 미수록 어휘를 밝히고, 이어서 한자어이지만 정음으로 적힌 어휘의 순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기 : 명사. 아주 적은 무게의 단위를 나타내는 도량형 명사이다.
(1수(銖)의 100분의 1이고, 1냥(兩)의 2,400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가볍거나 적은 양을 이른다.)
〔一·百· 기자·  銖쓩ㅣ·오 여·슷 銖쓩ㅣ 分분·이·오 :네 分분·이  兩:·이·라〈9ㄱ〉〕
‘기’은 사용례가 흔하지 않은 어휘이다. 이 책에도 단 한 차례만 쓰였다. 무게의 단위로 1수(銖)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양을 가리킨다. 1수(銖)는 1냥(兩)의 24분의 1에 해당하므로, 1기장은 1냥(兩)의 2,400분의 1이다. 애초에는 기장쌀〔黍〕 한 알의 무게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점점 일반화하여 가벼운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따라서 ‘기’은 매우 가벼운 무게 단위를 가리키는 이른바 도량형 명사 중 하나이다. 이 어휘를 『고어사전』(교학사)에서는 잡곡 ‘기〔黍〕’으로 풀었고, 『이조어사전』(연세대 출판부)에서는 ‘기장쌀 한 알의 무게’ 또는 ‘1수(銖)의 10분지 1’이라고 하였으나, 1기장은 ‘1수(銖)의 100분의 1’이므로 잘못이다. 또 『우리말큰사전』(어문각)에서는 ‘①기장〔黍〕, ②기장 한 알의 너비, 곧 1푼, ③기장 한 알의 무게, 곧 2400냥 분의 1 등’으로 풀었다. 한자 자전에서는 1서(黍)에 대해 1척(尺)의 100분의 1의 길이, 1홉〔合〕의 1,200분의 1의 용량(容量), 1수(銖)의 100분의 1의 중량(重量)이라고 정리하였다. 따라서 ‘기’은 원래 곡식 ‘기〔黍〕’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변하여 ‘기’처럼 매우 가벼운 무게〔量〕나, ‘기’ 정도의 길이, 또는 너비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뜻에서 무게 단위나 길이, 또는 너비를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용례 :  기 너븨 分이오 돈 나히 文이라〈영가 상:38ㄴ〉, 열 기이 絫ㅣ오 열 絫ㅣ 銖ㅣ라〈능엄3:24ㄱ〉.
〔2〕 데엋 : 명사. 밖. 외부(外部).
〔神씬力·륵·으·로 ·신 供養··이 데어·쳇 :쳔랴··니 :쳔랴· 法·법·만 :몯·〈11ㄴ〉〕,
‘데엋’은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용례가 드물다. 다만 이 책에는 세 번에 걸쳐 쓰였다. 그 외에는 『법화경언해』에 한 용례가 있을 뿐이다. “한 마 너비 더드머 幾 窮究며【幾 져글 씨니 멀터운 데어치 아니라】조외닐 자바(博探衆說야 硏幾摭要야)”〈법화경언해 서:21ㄴ〉. 이에 대해 『우리말큰사전』(어문각)에서는 ‘데면데면한 거죽’이라 풀었다.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월인석보』〈18:31ㄱ〉에는 ‘데어쳇’이 ‘’이라 되어 있다. 또 『법화경언해』〈6:142ㄱ〉 계환(戒環) 요해(要解)에 대한 정음 구결문에는 ‘外(외)’이고, 언해문에는 ‘’이라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데엋’은 ‘거죽’, 또는 ‘밖’이나 ‘외부’의 의미를 가진 말로 본다. 神力으로 샨 거시 밧 쳔애 넘디 아니하니〈월석18:31ㄱ〉. 神力의 化샨 거슨 밧 쳔애 남디 못하니(神力所化 不過外財니)〈법화경언해6:142ㄱ~144ㄱ〉.
용례 : 得·득道:·면 :다 얼구·를 데어·체 :혜·여 죽사·리· 니·즐·〈12ㄱ〉, 迹·젹·은 자·최·니 데어·쳇 ·보논 :이· 迹·젹·이·라 ··니·라〈38ㄴ〉
〔3〕 ·-〔耀〕 : 형용사. 눈이 부시다.
〔光明·이 ··에 비·취시·며 믈읫 相··이 :다 ·샤〈42ㄱ〉〕
사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이른바 미수록 어휘이다. 이 부분에 대한 『월인석보』의 내용은 ‘光明이 와에 비취시며〈월석18:77ㄴ〉’이고, 『법화경언해』의 정음 구결문은 ‘光明이 照曜시며(光明이 비취시며)〈법화7:18ㄴ〉’이다. 이 형태는 『월인석보』에 몇몇 용례가 있고, 『법화경언해』에도 쓰였다. 이로 미루어 ‘와·-’는 『월인석보』 간행 무렵 ‘ㅸ〉ㅗ/ㅜ’의 변화가 반영된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와·-(브와·-)’의 직전 형태인 ‘·-’는 이 책에 처음 나오고, ‘ㅸ〉ㅗ/ㅜ’의 변화에 의해 이후에는 ‘와·-(브와·-)’로 표기된 것이다. 『번역박통사』(1510년대 간행)에는 ‘브와·-〈70ㄴ〉’의 형태가 보인다.
〔4〕 :게여· : 부사. 너그럽게. 큼직하게. :게-〔雄〕+·이(부사파생접미사)→:게여·(부사).
〔· 端돤正··고 ··과 ·힘·괘 :게여· 勇:猛:·니·라〈42ㄱ〉〕
사전에 없는 미수록 어휘이다. 형용사 ‘:게-〔雄〕’에서 접미사에 의해 파생된 부사이다. 부사의 형태는 이 책에 처음 보인다.
〔5〕 『석보상절』에는 기원적으로 한자어지만 정음으로 표기된 어휘들이 더러 보인다. 이 책 권 20에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석보상절』의 편찬이 원문을 싣지 않고 번역문만을 실은 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이 어휘들이 대부분 불경과 밀접히 관련된 불교용어인 점으로 미루어 불교가 곧 생활이었던 고려시대에 우리말처럼 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 · : 명사. 모습. 모양. 한자어 ‘樣子/樣姿’에서 온 말이다.
〔諸졍菩뽕薩·摩망訶항薩· 衆··이 ·잇 ··로 :세 번 · 소·리 :내·야 ··〈4ㄱ〉〕
이 책에는 정음으로 적혀서 ‘얼굴 생김새’ 외에 ‘모습/모양’의 뜻으로 쓰였다. 이 책에 사용례가 많은데 모두 ‘·’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월인석보』에서는 그대로 받은 예는 하나에 지나지 않고, 그 외는 주로 한자 ‘相’, 또는 ‘形’으로 받거나, 앞에 오는 ‘잇’과 함께 ‘(·이) ·티’로 옮겼다. 주027)
菩뽕薩·衆··· ··도 :젹거·늘〈석상20:37ㄱ〉 → 菩뽕薩·衆··도 · · :젹거·든〈월석18:71ㄱ〉, ·이럴· 種:種: · ·나·토시·며〈석상20:38ㄱ〉 → ·이럴· 種:種: 形·을 나·토·아〈월석18:72ㄴ〉, 너희 :위··야 그 ·· :뵈·시리·라〈석상20:40ㄴ〉 → 너희 爲·윙··야 相·· 나·토·시리·라〈월석18:76ㄱ〉, ·잇 ··로〔如是〕 :세 번 · 소·리 :내·야〈석상20:4ㄱ〉 → ·이 ·티 :세 번 · 소·리 :내·야〈월석18:19ㄱ〉.
『월인석보』에서 ‘相’이나 ‘形’으로 옮긴 말은 원문인 『법화경』에 그렇게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는 이때 이미 고유어처럼 인식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2). : : 명사. 모양. 모습. 한자어 ‘樣’에서 온 말로 보인다.
〔濟·졩渡·똥·욜 :야· 조·차 ·· 現···야〈50ㄱ〉〕
‘·’와 비슷하게 쓰인 말로 ‘:’이 있다. 이 말 역시 한자 ‘樣’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는 ‘:’으로 표기되었다. 용례가 드문 편이다. 정음으로 적혀서 ‘:’의 말자음 ‘ㆁ’이 연철 표기되었다.
3). ·녜 : 부사. 늘. 항상. 언제나. 한자어 ‘常例’에서 온 말이다.
〔이 :사·미 現· :뉘·예 이·베·셔 ·녜 靑蓮련華 香·내 나·며〈29ㄴ〉〕
한자어 ‘상례(常例)’에서 온 말인데, 훈민정음 초기 문헌부터 자음 동화가 반영된 표기인 ‘·녜’로 적었다. 이 책의 용례에서는 모두 ‘·녜’이다. 『월인석보』 권 18에도 그대로 실현되었다. ‘녜’는 명사로도 쓰였으나 이 책에 명사의 용례는 없다. 이 말은 『법화경』 원문의 ‘常’을 옮긴 것이다.
4). 침노·- : 동사. 쳐들어가다. 한자어 ‘侵勞/侵擄·-’에서 온 말이다. 주028)
‘침노·-’의 ‘침노’는 한자어 ‘侵勞’ 및 ‘侵擄’로 쓸 수 있으나, 당시에는 한자로 적을 경우 모두 ‘侵勞’만을 썼다.
〔침노··야 害··논 ·고·로 니· 賊·쯕·이·라 ·고 〈29ㄱ〉〕
‘침노·-’는 불법적(不法的)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자어 ‘침노(侵勞/侵擄)·-’에서 온 말인데, 이 책에는 ‘침노·-’라 적혀 있다. 이후에 간행된 다른 문헌의 경우, 대부분 한자로 ‘侵勞·-’라 썼다. 드물지만 ‘침로·-’라 쓴 예도 있다. ‘침노·-’는 『법화경』 계환(戒環) 요해(要解)의 ‘侵’을 옮긴 말이다. 衆生이 常住를 侵勞야 損커나〈월석21:39ㄴ〉. 魍魎 鬼神이 서르 침로야〈불정:32ㄴ〉. 사을 侵勞며〈육조 중: 63ㄱ〉.
5). 류·- : 동사. 연주하다. 한자어 ‘風流·-’에서 온 말이다.
〔諸졍天텬·이 하· 류··야 놀·애·로 부텨·를 讚·잔嘆·탄··〈7ㄴ〉〕
‘풍류(風流)를 즐기다’, 또는 ‘악기를 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 책에 다른 용례는 없다. 이 말은 『법화경』의 ‘伎樂’을 옮긴 것인데, 『월인석보』 권 18에는 ‘류·’로 옮기거나 ‘伎樂’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6). 미·혹·- : 동사. 마음이 어리석어 헤매다. 한자어 ‘迷惑·-’에서 온 말이다.
〔· 외·야 嗔친心심·과 미·혹·호· ·어·즈류·미 아·니 외·며〈27ㄴ〉〕
‘미혹(迷惑)’은 불교에서 말하는 3독(毒)의 하나이다. ‘우치(愚痴)’를 이르는 것으로 현상(現象)과 도리(道理)에 대하여 마음이 어두운 것을 말한다. 곧 고통 받는 근원과 모든 번뇌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미·혹·-’은 한자어 ‘迷惑·-’에서 온 말인데, 정음 초기 문헌부터 이렇게 정음으로 적혔다.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화경』 원문의 ‘愚痴’나 ‘痴暗’을 옮긴 말이다.
7). :·뎍 : 명사. 행한 일의 실적. 한자어 ‘行蹟’에서 온 말이다.
〔貴·귕 :·뎍 ·히·로 智·딩慧·ㅅ ·브·리 곡도 因緣·을 노·겨 :업·긔 ·고〈11ㄴ〉〕
한자어 ‘行蹟’에서 온 말인데, 이후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도 주로 정음으로 적었다. 정음으로 적혀서 아래의 『월인석보』 권 1에서는 ‘:·뎍’의 어간 말자음 ‘ㄱ’이 연철 표기되었다. 『법화경』 계환(戒環) 요해(要解)의 ‘妙德 妙行’을 옮긴 말이다. 梵은 조 뎌기라 혼 디니〈월석1:20ㄱ〉, 維那離國은싸홈 즐기고 조 뎍 업스며〈월석2:11ㄱ〉, 觀照로 뎍 닷그면〈남명 상:15ㄱ〉
8). :위·- : 동사. 위하-. 한자어 ‘爲·-’에서 온 말이다.
〔한 聲聞문衆· :위··야 法·법華經·을 니르·더시·니〈7ㄴ〉〕
『석보상절』에는 이 말을 전부 정음으로 적었다. 그만큼 당시에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9). :쳔 : 명사. 재물(財物). 한자어 ‘錢糧’에서 온 말이다.
〔供養··이 데어·쳇 :쳔랴··니 :쳔랴· 法·법·만 :몯·〈11ㄴ〉〕
‘돈〔錢〕’과 ‘양식〔糧〕’의 합성어인데, 당시 문헌에서 대부분 정음으로 적혔다. 『법화경』 계환(戒環) 요해(要解)의 ‘財’를 옮긴 말이다. 정음으로 적혀서 ‘:쳔·’의 어간 말자음 ‘ㆁ’이 연철 표기되었다.
이 외에 한자어 ‘分別’에서 온 말인 ‘분·별’도 두 차례 주029)
世·솅尊존·하 분·별 :마·쇼:셔〈3ㄴ, 4ㄱ〉.
보인다. ‘分別’의 원 뜻인 ‘가름’의 의미가 아니라, ‘근심/걱정’의 의미로 쓰였다. 우리말에 오랫동안 쓰이면서 의미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곧 유연성(有緣性) 상실로 인해 한자어 기원의 어휘라는 인식이 엷어져 정음으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 『법화경』 원문(原文)의 ‘慮’를 옮긴 말인데, 『월인석보』에는 ‘分別’로, 『법화경언해』에는 ‘분·별’로 표기되었다. 또 한자어 ‘盜賊’에서 온 ‘도’〈28ㄴ〉도 쓰였다.
현전 『석보상절』의 다른 책에 ‘’으로 적힌 바 있는 ‘衆生’은 이 책에서 전부 한자 ‘衆·生’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석보상절』 권 20에서 이 어휘의 출현이 대부분 ‘일체(一切) 중생(衆生)’의 형태로 ‘일체(一切)’와 짝을 이루어 나타나거나 한자 어휘 속에 포함되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단독으로 쓰인 예도 있고, 그런 경우에도 한자로 적었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석보상절』 권 20의 공개 경위, 형태서지, 책의 상태 및 훼손된 부분에 대한 원문 복원, 수록된 내용, 같은 내용이 번역되어 있는 『월인석보』 및 『법화경언해』와의 대응 관계, 그리고 표기 및 형태의 특징, 희귀어 및 사전 미수록 어휘 등에 대해 살폈다. 이를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석보상절』은 처음 24권으로 간행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책은 모두 10권이고, 이 중 6, 9, 13, 19, 20, 21, 23, 24 권 등 여덟 책만이 초간본(初刊本)이다. 권 3과 권 6의 두 권은 16세기 중엽 무렵에 간행된 복각본(覆刻本)이다. 우리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권 20은 초간본 중 가장 늦게 발굴·공개된 책이다. 소장처의 입장으로 원본 실사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그 동안 다른 책들에 비해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편이었다. 모두 53장 106쪽의 분량이지만 첫 장이 낙장(落張)이고, 15장까지는 좌하귀 부분이 훼손되어 각 장의 앞면 8행 아래쪽과 뒷면 1행 아래쪽의 해독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를 같은 내용이 번역되어 실려 있는 『월인석보』, 『법화경언해』 등을 참고로 하여 복원해서 제시했다.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는 『법화경』 제1품인 서품(序品)부터 마지막 품(品)인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를 번역해서 실어 놓았다. 권 21에는 『법화경』 권 6의 제22품 촉루품(囑累品),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권 7의 제24품 묘음보살(妙音菩薩品) 등이 번역되어 실려 있다. 한편 『월인석보』는 모두 25권 중 권 11부터 권 19까지 아홉 권이 『법화경』을 번역해서 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석보상절』 권 20의 내용은 『월인석보』 권 18과 『법화경언해』 권 6 및 권 7에도 들어 있다. 이러한 관계를 감안해서 세 책에서 서로 대응하는 부분을 정리·제시해서 비교 연구가 가능하도록 했다. 역주에서는 세 책의 내용을 모두 차례대로 입력해서 실어 두었다. 세 책은 간행 연도에 따라, 그리고 편찬 방법 빛 편찬자의 언어 습관에 따라 얼마간 차이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석보상절』의 특성을 찾고자 했다.
2) 『석보상절』은 한글 반포 다음해인 1447년에 간행되었다. 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산문 자료이다. 거기에다 다른 불경언해서들과는 달리 원문이나 정음 구결문 없이 번역문만으로 된 책이다. 그만큼 원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에서 찬술되었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그런 때문인지 번역도 비교적 자유역(自由譯)에 가깝고, 어휘도 비록 한자어에서 온 말이라고 하더라도 정음으로 적은 예가 많은 등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문헌이다. 특히 표기 형태가 매우 정연할 뿐만 아니라, 동주자(銅鑄字)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양(字樣) 등도 이 책의 특징 중 하나이다. 번역에서는 경(經)의 본문은 본문 그대로 당시의 우리말로 옮겼고, 계환(戒環)의 요해(要解) 부분은 협주로 옮겨서 가독성(可讀性)을 높이면서도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도록 했다.
문자 표기에서는 방점 및 모음 ‘ㆍ’와 ‘ㆎ’의 아래 아〔ㆍ〕 글자는 원점(圓點)으로 하고, 그 외의 모음 표기는 고딕체의 방획(方劃)을 써서 『훈민정음(해례본)』(1446년 간행) 및 『동국정운』(1447년 편찬)보다는 후대(後代)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표기 방법은 『용비어천가』(1447년 간행),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 및 『사리영응기』(1449년 간행)와 일치한다. 이렇게 단체자 ‘ㆍ’ 및 합체자 ‘ㆎ’의 아래 아〔ㆍ〕와 방점을 원점(圓點)으로 표기한 방법은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행)을 거치면서 바뀌었다. 『홍무정운역훈』을 시작으로 『월인석보』(1459년 간행)는 물론, 그 이후에 간행된 간경도감본들은 방점 및 모음의 표기에 점획(點劃) 및 방획(方劃)만을 사용하였다.
3) 어학적 고찰로는 이 책의 언어 성격을 알 수 있는 몇몇 형태를 대상으로 했다. 모음조화와 ‘ㆁ’의 연철표기, 그리고 ‘부텻긔/부텨’, ‘가아/가’처럼 같은 뜻을 가진 말의 두 가지 형태 표기 등에 대해 살폈다. 특히 보조적 연결어미 ‘-긔’와 ‘-게’의 표기 경향, 동명사어미 ‘-ㄹ’ 및 ‘-ㅭ’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러한 표기 특성은 이 책이 정음 창제 직후에 간행되어 아직 우리말 표기에서 어떤 원칙 같은 것이 확립되기 이전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라고 봤다. 이 책에는 다른 문헌에 쓰인 적인 없는 희귀어 및 고어사전 미수록 어휘가 몇몇 보인다. 이에 대해 살피고 그 뜻을 밝혔다. 대표적인 어휘로는 곡식의 이름에서 무게 단위를 가리키는 어휘로 바뀐 ‘기’, ‘외부(外部)나 외면(外面)’을 뜻하는 ‘데엋’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눈부시다’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耀〕’와 ‘너그럽게, 큼직하게’의 뜻을 가진 ‘:게-〔雄〕’의 파생부사 ‘:게여·’도 처음 나오는 어휘이다. 그리고 기원적으로는 한자어지만 이 책에서 정음으로 적힌 어휘의 특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樣子/樣姿), :/樣, ·녜/常例, 침노/侵勞/侵擄·-, 류/風流·-, 미혹/迷惑·-, :·뎍/行蹟, :위/爲·-, :쳔/錢糧’ 등이다. 이들은 모두 정음으로 적혔다. 이 책에 정음으로 적힌 한자어 기원의 어휘가 많은 이유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석보상절』의 편찬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책의 편찬에서 원문 없이 정음만으로 번역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는 정음으로 적힌 어휘의 대부분이 불교 관련 어휘이거나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일 수 있는 어휘인 점으로 미루어 불교가 곧 생활의 일부분이었던 고려시대에 이들 어휘가 우리말처럼 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어져서 우리말처럼 사용되었고, 문자 창제 이후에는 표기도 정음으로 하게 된 것으로 본다.
이 글은 뒤의 역주를 위한 해제 성격의 논의이므로 여기에서 다 살피지 못한 내용은 향후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논의의 장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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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상절 제21에 대하여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책의 전래

『석보상절』 초간본 제21(1권)은 1989. 11. 15. 중앙일보 사회 1면, 문화면 기사로 알려진바, 이는 고서(古書) 수집가 우찬규(禹燦奎)님 소장인데, 천혜봉(千惠鳳) 교수가 발굴하여 공개되었다.
이 책은 65장 130페이지로 끝 64, 65 등 2장이 파손되어 지편(紙片)의 일부부만 있었던 것으로 원본은 실사하지 못하였고, 원본의 복사본은 끝의 60ㄱ~63ㄴ이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을 보여준다. 이 복사본은 구 소장자가 새 주인에게 넘기기 전에 복사된 것으로 2001~2002년 경에 학계에 웬만큼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귀중본은 현재 ‘초간본 제20’과 함께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Ⅱ. 형태 서지

『석보상절』 제21(이하 ‘이 문헌’으로 줄임)의 원본을 실사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서 못내 유감이다. 이는 ‘호암미술관’ 에 의해 열람, 실사를 허락받지 못한 데 말미암은 것임을 밝혀 둔다.
현재 필자가 이용하고 있는 복사본은 발견 당시 소장하였던 곳에서 나온 복사본을 재복사한 것이다. 이 재복사본은 『석보상절』 제21이 세상에 공개된 1989년 이후, 수년이 지나 국어학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진 재복사본을 필자도 그 무렵에(2001~2년 이후) 입수한 것이다.
이 책은 현전하는 『석보상절』의 다른 책의 경우와 대체로 같음을 알 수 있다.
판광(版匡) :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복사본은, 세로〔縱〕 22.2~22.3cm, 가로〔橫〕 16.2~ 16.5cm로서 이 값〔數値〕을 국립도서관 소장 『석보상절』 제6, 9, 13, 19의 판광(22~22.3 ×15.7~15.9cm)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석보상절』 제23, 24의 판광(22.2×15.8cm)에 비추어 보면(김영배 2000:26), 실물 크기로 복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판심(版心) : 이미 전해지는 『석보상절』의 그것과도 마찬가지로 ‘대흑구(大黑口), 하향(下向) 흑어미(黑魚尾)에, 줄인 책명 ‘석보(釋譜) 권차(卷次) 이십일(廾一)’과 두 글자 정도 사이를 두고 장차(張次)인 한자 숫자와 상향(上向) 어미(魚尾)와 대흑구(大黑口) 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판심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ㄱ~59ㄱ(이후 63ㄴ까지는 훼손된 것)에서 판심의 앞뒤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단 두 장(5ㄱ~ㄴ, 15ㄱ~ㄴ)이고, 앞쪽만을 비교적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세 쪽(24ㄱ, 46ㄱ, 52ㄱ)이며, 그밖에 앞쪽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7ㄱ, 8ㄱ, 10ㄱ, 16ㄱ, 19ㄱ, 22ㄱ, 25ㄱ, 32ㄱ, 37ㄴ, 40ㄱ, 43ㄱ, 45ㄴ, 53ㄱ) 등이 있다. 이렇게 번거롭게 적어두는 것은 복사본의 실상을 밝히기 위함이다.
표지는 떨어져 나간 것으로 공개되었으나, 필자의 짐작으로는 본시 『석보상절』 제20과 『석보상절』 제21 두 권은 합본(合本)되어 있던 것이, 발견 후 공개되는 과정에서 각권으로 나누어져서 표지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상정(想定)해 본다.
필자가 이용하는 복사본에서, 언급이 중복되겠지만, 제20(1~53쪽)은 1(ㄱㄴ)쪽이 낙장이고, 끝의 ‘53ㄴ’은 1행이 소자(小字) 쌍행으로 ‘音菩뽕薩/品픔이라’로 끝나고 2, 3, 4, 5, 6행은 공란이며, 다음 7행은 대자(大字) ‘釋셕譜봉詳節第뎽二十씹’으로 ‘석보상절’의 다른 책의 끝 장(張)과 같이 되어 있다.
『석보상절』 제21의 첫 장의 상태는 다음과 같으며, 그 이후의 훼손된 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장 : 1행 釋셕譜봉詳節第뗑廾一일
2행 그無盡意菩薩이즉자 (동국정음 표기는 생략함) (계속)
2ㄱ : 〔요해〕 줄임 끝의 7, 8행 훼손, 곧 7행 끝 2자 미상, 8행 첫줄 끝 2자 훼손, 8행 둘째 줄 위 5자 빼고 10자 훼손 불명. 주001)
*
관례에 따라 장차(張次) 표시를 ‘2ㄱ1’(2쪽 앞면 1행)으로 나타냄.
2ㄴ : 〔요해〕 쌍행 두 줄, 끝 훼손 4자는 전후 참고 복원 가능. 주002)
*
이는 관련되는 『월인석보』 제19와 『법화경언해』 7권을 참고.
3장에서 55장까지는 거의 제대로 보임.
56ㄴ: 3행 끝자 보이지 않음.
57ㄴ: 3행 끝 협주, 2자 훼손 전후 참고 복원 가능.
58ㄱ: 6행 끝 2자 훼손 부분은 전후 참고 복원 가능.
58ㄴ: 3행 중간 3자 훼손, 복원 가능, 끝 3자도 복원 가능.
4행 끝 3자 훼손, 복원 가능.
59ㄱ: 5, 6행 끝 2자 전후 복원 가능, 7행 중간 2자 복원 가능.
59ㄴ: 2, 3, 4행 훼손 부분 정후 참고 복원 가능.
60ㄱ: 5행 끝 2자, 『월인석보』 제19 115장 이하와 『법화경언해』 7권 179장 이하를 참고로 복원 가능.
6행 끝 2자 복원 가능.
7행 2,3,4,5,6,7,8자
8행 1,2,3,4,5,6,7,8자 훼손.
60ㄴ: 1, 2, 3행 완전 훼손.
4행 끝 3자 훼손.
61ㄱ: 4, 5, 6, 7, 8행 각 4, 5, 9, 8, 8자 훼손.
61ㄴ: 1, 2, 3행 전부 훼손.
4행 위 5자, 아래 5자 훼손.
5행 4자 훼손.
62ㄱ: 4행 4자, 5행 13자, 6행 14자, 7-8행 전부 훼손.
62ㄴ: 1행 전부, 2-3행 각각 12자 훼손, 4행 14자, 8행 1자 훼손.
63ㄱ: 1행 5자, 2-3행 각각 7자, 4행 14자, 5-8행 전부 훼손.
63ㄴ: 1-2행 전부, 3행 14자, 4행 8자, 5-6행 각각 7자, 7-8행 전부 훼손.
64, 65장 : ‘겉 표지와 끝 두장은 파손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고 발표(중앙일보 1989. 11. 15. 사회 1면, 문화면).
여기서 이 책의 장차에 대해서 언급해 둘 것이 있다. 공개 발표 당시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의 장수(張數)는 65장으로 되었다고 본바, 이는 Ⅲ의 대비 표에서 보면 내용이 『법화경언해』의 후반부를 저경으로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 낙장된 부분을 공개 발표 당시 두 장으로 보았는데, 이호권(2001:45)에서 “… 법화경 권7 끝부분인데 내용으로 보아 4~5장 정도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했다.
이 글에서는 훼손 부분과 낙장된 장수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석상 21:63ㄴ〉의 훼손된 끝장에 남아 있는 6행 중에 “…□□病을 어드며(白癩 모…)”가 보이며, 다음 7, 8행은 훼손된 것으로 돼 있다. 여기 ‘□□’ 안은 전혀 안 보이는 것이나, 그 아래에 나오는 협주를 근거로 ‘〔白癩〕’로 추정할 수 있고, 이를 저경인 『법화경』과 대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법언 7:184ㄴ〉 “… 이 사미 現世예 白癩病을 得고 다가 업시워 우 사…”는(한문 현토 : 此人이 現世예 得白癩病고 若輕笑之者 ….)
또한 이 대목을 〈월석 19:120ㄴ〉에서는 “… 이 사미 現世예 白癩病을 얻고<협주>【癩 모미 다 허러 히미며 며 다 야디 病이라】 다가 업시워 우 사 …”과 같이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참고로 『석보상절』의 낙장된 나머지도 추정할 수 있다.
곧, 『월인석보』 제19는 ‘120ㄴ~125ㄱ’으로 끝나므로 약 5장 부분인데 대해서 『법화경언해』의 경우 권7은 184ㄴ~ 191ㄴ으로 여기에는 한문 원문과 그 요해 부분의 한문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를 제외하고 그 언해문만을 계산해 보면, 언해문은 한 행에 작은 글자로 두 줄씩 되어 있으므로, 이를 『월인석보』 식으로 판을 짰다면 약 6장 정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참고로 이 책의 낙장 부분을 추정한다면, 『월인석보』의 해당 분량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아서 대략 4~5장 정도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책의 공개 당시의 기사 중(1989.11.15. 중앙일보 문화면)에 고 안병희(安秉禧)교수의 “『석보상절』 제21권이 법화경의 마지막 부분일 것으로 막연히 추측해온 것을 확인하게 됐다.”는 말과, 이어 “『석보상절』이 다른 책과 달리 내용에 중복이 없고 간결하게 요약된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 또한 “이번 발견의 가장 큰 의의는 법화경의 일부인 다라니의 음역(音譯)이 독특한 점 … 한 가지 독특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성 표기의 차이점”이라 했다. 그 후에 쓴 안병희(1998)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의 서지(書誌)’ 〈서지학보〉 22호(12~13)에 다라니 음역에 관한 논의가 있으나, 그때는 『월인석보』 제19가 공개되기 전이어서, 필자는 이 대목을 안병희(2009:320~321)에 보충 수정해서 논의(소개)할 것임을 밝혀 둔다. 다라니에 대해서는 ‘Ⅳ. 어학적 고찰’에 언급될 것이다.

Ⅲ. 내용의 개요

편집 내용 차례는 해당 품(品)이 끝나는 곳에는 쌍행 협주로, ‘… 잇자 … 품(品)이라’ 하고, 글줄이 바뀌면서 그 다음 내용이 이어져 그 품의 끝과 다음 품의 시작임을 나타냈다.
1. 석상 21:1ㄱ2~21:20ㄴ8 -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제25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은 무슨 까닭으로 ‘관세음’이라고 하는가를 여쭌 데 대하여,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이 어떤 곳에서, 어떤 고난을 받는 중생이든 다 구제하여 주는 보살이며, 또 설법하는 데 있어서도 그때마다 그 형편에 알맞게 온갖 몸〔화신〕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셨다.
2. 석상 21: 21ㄱ1~ 21:33ㄱ3 - 법화경 다라니품(陀羅尼品) 제26
여기서는 약왕(藥王)보살, 용시(勇施)보살 등이, 부처님께 선남·선녀들이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거나 베껴 쓰면 얼마만큼의 복덕을 받을 것인가 여쭌 데 대하여, 이 경에서 4구게 하나라도 수지 독송하고 수행하면 공덕이 많을 것이라고 하니, 약왕이 ‘이 경전을 설하는 사람들에게 ‘다라니주’를 설하여 그들을 수호하겠다.’고 하고서 보살, 천왕, 나찰녀 등에게도 주문을 설하여 이 경전 수지하는 법사를 지키겠다고 서원했다.
3. 석상 21: 33ㄱ4~ 21:49ㄱ4 - 법화경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제27
아득한 과거세 운뢰음숙왕화지불(雲雷音宿王華智佛) 시절, 묘장엄왕(妙莊嚴王)의 두 아들, 정장(淨藏), 정안(淨眼)의 인도로 성불의 수기(授記)을 받고, 왕은 화덕보살(華德菩薩), 두 아들은 약왕(藥王), 약상(藥上)보살이 된다는 등의 여러 방편을 통하여 법화경 신앙으로 중생을 이끌어 들이는 갖가지 실례를 설하였다.
4. 석상 21: 49ㄱ5~ 21:63ㄴ이하 64, 65장 낙장? -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 제28
동방의 보위덕상왕불국(寶威德上王佛國)에서 보현보살이 나타나, 세존께 불멸(佛滅) 후에 어떻게 해야 법화경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은 데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 네 가지 법을 성취해야 가능하다고 하며서, 첫째 부처님에 의하여 호념하심이 되는 일, 둘째 덕본(德本)을 심는 일, 세째 정정취(正定聚)에 드는 일과 넷째 온갖 중생을 구하려는 뜻을 내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으로 마쳤다.
이상을 다시, 『석보상절』을 주로 하고, 여기에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의 대응되는 내용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김기종 2010:65-91 참고) 주003)
*
대체적인 차례는 아래 표와 같이 제시하지만 〈석상〉에서는 〈월석〉과 〈법화〉의 차례가 세부적으로는 조금 바뀐 것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주석으로 언급하였음.
석보상절 제21월인석보 제19법화경언해 권제7
월곡 기 325~339 : 1ㄱ~8ㄱ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수지하여 복덕(福德)과 지혜 : 1ㄱ~9ㄴ4 왼편과 같음 : 8ㄱ2~31ㄴ3      법언 7:37~70ㄱ1     
제외됨            〈협주〉 손경덕(손경덕)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워 죽음에서 벗어남  : 20ㄱ4~21ㄴ1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 : 9ㄴ4~16ㄴ4
관세음보살이 다보불에게 영락을 공양함 : 16ㄴ4~20ㄴ8
왼편과 같음 : 31ㄴ3~39ㄱ6
                    : 39ㄱ6~41ㄴ4
법언 7:70ㄱ~81ㄱ
법언 7:81ㄴ~84ㄴ
제외됨      석존의 게송 :41ㄴ4~49ㄴ7 이하 결락      법언 7:84ㄴ~104ㄴ     
약왕보살, 용수보살 등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중생을 호지하는 다라니를 말함 : 21ㄱ1~33ㄱ3왼편과 같음 : 56ㄴ1~70ㄱ1           법언 7:105~122          
제외됨     〈협주〉 묘장엄왕본사품 제27 해설  :70ㄱ1~71ㄴ7          
화덕보살의 전신인 묘장엄왕이 법화경을수지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인연 : 33ㄱ4~49ㄱ4               왼편과 같음 : 71ㄴ7~93ㄱ4
〈협주〉 보현보살권발품 제28 해설 :93ㄱ4~97ㄴ7
월곡 기 340(1) :98ㄱ1~98ㄴ1
법언 7:123~152
보현보살이 무량보살과 함께 법화경을 듣기 위해 기사굴산에 옴 : 49ㄱ5~51ㄴ3왼편과 같음 : 98ㄴ2~103ㄱ4     법언 7:153~191
보현보살이 법확경 호지하여 여래 멸도 후에 널리 유통시킬 것을 맹세함 : 51ㄴ3~59ㄴ2      왼편과 같음 : 103ㄱ5~114ㄴ5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이익과 비방하는 죄보에 대한 설법 : 59ㄴ3~63ㄴ8 이하 낙장     왼편과 같음:114ㄴ5~125ㄱ2     

Ⅳ. 어학적 고찰

1. 어휘

이 문헌이 세상에 알려진 지도 10여 년이 흘러서, 기존의 고어사전에는 표제어로 실리지 않은 것은 거의 없으며, 혹 희귀어로 볼 수 있는 것도 이 문헌보다 간행 연대가 늦은 것이어서 여기 별로 언급할 것이 없으나, 대체로 그 표기나 쓰임이 좀 다른 것을 ‘이 문헌’에 쓰인 순서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도 (평-평-거, 부사) : 동강 동강 된 모양.
…다가  사미 주규려  時節을 當야도 觀世音菩薩ㅅ 일후믈 일면 뎌의 자본 갈과 막다히왜 도 버허디여 버서나리어며…〈석상 21:4ㄱ5〉.
…다가  사미 害 니브 當야셔 觀世音菩薩ㅅ 일훔 일면 뎌 자본 갈 막대 미조차 귿그티 야디여 解脫을 得며…〈법언 7:53ㄴ〉.
(…若復有人이 臨當被害야셔 稱觀世音菩薩名者ㅣ면 彼所執刀杖이 尋段段壞야 而得解脫며…〈법언 7:52ㄴ).
…다가  사미 被害/ 當야셔 觀世音菩薩ㅅ 일후믈 일면 뎌 자본 갈콰 막다히 미조차 귿그티 야디여 버서나 得리라〈월석 19:23ㄴ~24ㄱ
✻能히 衆生로 害 니부메 當야 갈히 귿그티 야디여 그 兵戈로 믈 버히며 〈능엄 6:27ㄱ〉.
✻뎌 觀音 念혼 히므로 갈히 미조차 귿그티 야디며〈법언 7:89ㄱ〉.
이 ‘도’는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 저경인 『법화경』과 이 문헌을 증보한 『월인석보』에서 그 문장을 옮김에 달리 표현한 것으로 유일한 희귀어라 할 수 있으니, 현전 사전류에 표제어로 소개된 것이 없다.
이 구성은 ‘(어근)+이(부사형성접미사)’(버허디여)로 된 것인데, 〈월석〉과 〈법언〉에서 대응되는 단어는 두 문헌 모두 ‘귿그티 (야디여)’로 나타난다. 이를 참고하여 ‘도’의 뜻을 ‘(막대기 같은 것이) 동강 동강으로 잘린 모양’으로 보고, ‘귿그티’는 ‘귿〔末〕+그티’의 구성이나, ‘그티’도 다시 ‘긑+이’로 볼 수 있겠으나, ‘귿’은 ‘긑’의 이형태로 볼 수 있어, 문헌에서의 용례가 『번역소학』에 보이긴 한다.
✻디 아니호믄 다 귿텟 사오나온 道ㅣ 해니 〈번소8:41ㄱ〉
‘귿그티’의 뜻은 본시 ‘끝 끝마다’일 것이나 여기서는 ‘도장(刀杖, 칼과 마대)’에 대한 표현이기에 ‘토막 토막으로’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한편, ‘귿그티’를 고어사전에서 찾았더니,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uniconc 등에 사용하는 입력 자료에서는 위에 보인 〈능엄 6:27ㄱ〉의 예까지 단 3회 예문이 고작이다. 그래도 엄연히 중세국어로 쓰인 어휘가 사전류에서 빠진 것을 아무도 언급한 적이 없이 오늘날까지 온 것은 연구자 모두의 잘못이다. 명사 ‘귿〔末/端〕’은 〈교학고어사전〉과 〈큰사전〉에 표제어로 실렸으나, ‘그티’도 사전에서 볼 수가 없다. 이번 기회에 이 ‘귿그티’도 새로운 어휘로서 표제어로 실리기를 기대한다.
.
② (:못・):니(상성) : ‘-니’는 조건, 가정, 이유를 나타내는 연결어미.
아뫼나 이 觀世音菩薩ㅅ 일후믈 디니 사 큰 브레 드러도 브리  :못・:니 이 菩薩ㅅ 위신력 전라〈석상 21:2ㄴ6〉.
여기 ‘못니’는 앞뒤를 참고해도 서술어의 연결어미일 수밖에 없는데, ‘-니’의 방점이 거성이 아닌 상성인 것이 문제이다. 역주에서는 ‘:니’의 위 방점이 이상하다고 보아서 ‘-니’도 수정한 것이다. 결국 이는 표기의 잘못으로 본다.
③ 믿 (평성, 명사) : 밑〔底〕. 아래〔下〕. 근본(根本).
觀音을 염혼 히로 믿 사게 도라디리어며〈석상 21:5ㄴ〉.
淨三昧 淨藏 淨眼 믿 삼논 배오〈석상 21:35ㄱ〉.
믿나라 向니〈월석 13:7ㄱ〉.
✻ 하로  삼고 德으로 믿 삼고〈법언 1:14ㄱ〉.
이 명사는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현전 사전에 표제어로 다 올라 있으나, 그 예문이 위에 든 〈월석〉이나 〈법언〉의 것으로 돼 있으므로, 이에 앞서 〈석상〉의 이 예문을 앞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다.
④ 듣다며 : 듣닥으며, 들어가지고. ‘들어서 받아들이고서’ 정도로 본다. 듣-〔聞〕+닥-+며. 여기 ‘닥-’은 기본형 ‘다다’의 활용형으로 합성동사 ‘듣다다’의 중세국어의 유일한 용례로 풀이한다. 「우리말큰사전4」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실렸으며, 「이조어사전」에는 표제어가 없고 「교학고어사전」에는 기본형은 아니나 활용형 ‘다가’를 표제어로 하여 뜻은 ‘다그어, 가져, 가져서’로 하고 예문은 모두 ‘월석’의 예를 처음으로 들었다.
네 바리 어듸 가 어든다 도로 다가 두어라 야 〈월석 7:8ㄱ〉
⑤ 옷(평-평, 명사) : 홑〔單〕.
옷소리 聲이라 고 雜 한 소리 음이라 니〈석상 21:19ㄴ~20ㄱ〉.
옷 發니 聲이오 雜 모니 音이니〈법화 7:41ㄱ〉.
※옺(평-거, 명사): 홑〔單〕.
單 오지오 複 겨비라〈능엄8:15ㄴ〉.
各各 오로 表시니라〈법언1:45ㄱ〉.
위에 보인 것처럼 이 ‘옷/옺’은 당시에 쌍형으로 쓰인 것으로 보고자 하며 이와 관련된 어형으로 ‘옻’이 17세기 초엽에 쓰였다.
※옻(명사): 홑〔單〕
내 眞實로 옷고외 오치로다(我眞衣裳單)〈두언중1:19ㄱ〉.
歲暮애 옷외 오치로다(歲暮衣裳單)〈두언중4:9ㄴ〉.
⑥ 뎌른(평-평-거, 합성명사) : 단점(短點). 결점〔缺點〕.
鳩槃茶ㅣ어나 餓鬼히 뎌른 求야도 便을 得디 몯리다 시고〔뎌른라 샤 사나라〕〈석상 21:25ㄴ주〉.
✻〔若鳩槃茶ㅣ며 若餓鬼等이 伺求其短야도 無能得便리다〕〈법언 7:112ㄴ〉.
鳩槃茶ㅣ며 餓鬼等이 그 뎌른 여 求야도 능히 便安 得디 몯리다…〈월석 19:60ㄱ〉.
‘뎌르-’와 ‘뎌-’는 일찍부터 쌍형으로 쓰여서 다 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그 예문은 〈법언〉의 것이 첫 예문으로 돼 있으므로 〈석상〉의 ‘뎌른-’을 첫 예문으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⑦ 위사(상-거-거, 구) : ‘위샤’의 잘못.
그 뎌 부톄 王 위사 說法샤 利益외며〈석상 21:42ㄱ〉.
여기 ‘위사’는 바로 이은 ‘說法샤’의 ‘-샤’자나, 다음 면의 ‘부텻 모미 쉽디 몯샤 端正며 싁싁샤미 로 奇特샤…’ 등과 대비해 보아도 그 글자 모양이 이상하니, 이는 ‘샤’의 ‘ㅑ’에서 오른쪽 윗 획이 하나 떨어져서 그리 된 것으로 보려는 것이다. 역주에서는 ‘샤’로 교정하였다.

2. 다라니의 한자음 표기

『석보상절』에서 정음으로 된 한자음 표기는 흔히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 돼 있다고 한다. 다른 것이라면, 이미 많이 언급된 모음으로 된 한자음에도 종성 ‘ㅇ’이 쓰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쓰는 ‘다라니’(陀羅尼)의 한자음 표기에는 순음(脣音)에 순중음(脣重音)과 순경음(脣輕音), 치음(齒音)에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整齒音)으로 구별하여 썼다. 곧,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설명이 없으나, 『훈민정음 언해본』 끝 부분에,
“中國 소리옛 니쏘리 齒頭와 正齒왜 요미 잇니 ᅎ ᅔ ᅏ ᄼ ᄽ 字 齒頭ㅅ 소리예 고 ᅐ ᅕ ᅑ ᄾ ᄿ 字 正齒ㅅ 소리예 니….”
처음으로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나고, 이어 그 각각의 조음방식을 협주로 다음과 같이 풀이해 두었다.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열니 혓그티 웃닛머리예 다니라”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두터니 혓그티 아랫 닛므유메 다니라”
이 글자들은 빗줄〔斜線〕의 한 쪽 획이 다른 한 쪽의 획보다 더 길게 그어져야 구별되니, 이는 쓰기나 보기에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종은 중국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정리함에 있어서 『홍무정운(洪武正韻)』(1375)을 참고로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1449)에 이 글자를 썼으니, 참고 삼아 7음과 청탁(淸濁)의 그 자모표를 다음에 옮긴다.
〈홍무정운역훈〉
청탁 7음아음설두음순중음순경음치두음정치음후 음반설음반치음
(牙音)(舌頭音)(脣重音)(脣輕音)(齒頭音)(正齒音)(喉音)(半舌音)(半齒音)
전청(全淸)見 ㄱ端 ㄷ幇 ㅂ非 ㅸ精 ᅎ照 ᅐ影 ㆆ----
차청(次淸)溪 ㅋ透 ㅌ滂 ㅍ--淸 ᅔ穿 ᅕ曉 ㅎ----
전탁(全濁)群 ㄲ定 ㄸ並 ㅃ奉 ㅹ從 ᅏ牀 ᅑ厘 ㆅ----
불청불탁疑 ㆁ泥 ㄴ明 ㅁ微 ㅱ----喩 ㅇ來 ㄹ日 ㅿ
전청(全淸)--------心 ᄼ審ᄾ------
전탁(全濁)--------邪 ᄽ禪 ᄿ------
이 책에 실린 ‘다라니’는 그 저경(底經)인 『법화경언해』 권7의 ‘제26품 다라니품’에 있는 5편과 ‘제28 보현보살권발품’에 실린 1편을 합하여 모두 6편으로, 이에 대응되는 〈석상 21〉, 〈월석 19〉, 〈법언 7〉에서의 출처를 아울러 다음에 보인다.
Ⅰ편 43구 〈석상 21:23ㄱ~24ㄱ〉〈월석 19:57ㄴ~59ㄴ〉 〈법언 7:110ㄴ~111ㄱ〉
Ⅱ편 13구 〈석상 21:25ㄴ~26ㄱ〉〈월석 19:61ㄱ~ㄴ〉 〈법언 7:113ㄱ〉
Ⅲ편 6구 〈석상 21:26ㄴ〉 〈월석 19:62ㄴ〉 〈법언 7:114ㄴ〉
Ⅳ편 9구 〈석상 21:27ㄴ〉 〈월석 19:63ㄴ~64ㄱ〉 〈법언 7:115ㄴ〉
Ⅴ편 19구 〈석상 21:29ㄱ~ㄴ〉 〈월석 19:65ㄴ~66ㄱ〉 〈법언 7:117ㄴ〉
Ⅵ편 20구 〈석상 21:55ㄴ~56ㄴ〉〈월석 19:109ㄱ~110ㄴ〉〈법언 7:173ㄴ~174ㄱ〉
다음에는 여기에 쓰인 다라니의 한자음 표기를 정리함에 있어서, 이미 역주 부분에 각각 전문이 실려 있으므로 그 원문을 되풀이하거나, 그것을 어구별로 옮기는 번거로움을 덜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라니에 쓰인 자음(字音)을 한자씩 나오는 대로 뽑아 이를 앞 표에 보인 7음과 청탁음 별, 출처 별로 아래에 정리해 보인다. 여기 덧붙여 둘 것은, 이 ‘다라니’음은 저경인 『법화경』과 『법화경언해』에는 다라니의 음을 한자를 빌어서 나타난 표기만이고, 여기 보이는 ‘다라니’는 그 한자음 표기와 그에 대응되는 부분을 훈민정음을 빌어서 나타낸 것으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에서만이므로 그 출처도 두 문헌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보이는 것은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한 글자가 아래 위 같으며, 위 것이 〈석상〉, 아래 것이〈월석〉인데, 한수자(漢數字) 표기는 문헌의 장차 표기 글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앞이 위에 보인 편수를 로마자 Ⅰ~Ⅵ로, 뒤 것은 해당 편의 어구의 순서를 나타낸 것이다. 이 어구의 순서는 『법화경』의 순서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이 편수와 어구 수도 같을 수밖에 없다.
〈다라니에 쓰인 자모(字母)의 일람〉
견모(見母) 〔ㄱ〕 : 5자
〈釋〉Ⅰ:<세주>三十 〈1〉
(이 표기는 〈석상21〉의 다라니 Ⅰ편 30구 〈1회 쓰임〉을 나타낸 것임)
〈月〉Ⅰ:<세주>三十 〈1〉
〈釋〉Ⅰ:<세주>三十九, Ⅵ:<세주>十九 〈2〉
〈月〉Ⅰ:<세주>三十九, Ⅵ:<세주>十九 〈2〉
·긷〈釋〉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2〉
·〈月〉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2〉
·〈釋〉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2〉
·〈月〉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2〉
〈釋〉Ⅵ:<세주>四 〈1〉
〈月〉Ⅵ:<세주>四 〈1〉
군모(群母) 〔ㄲ〕 : 7자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2), Ⅵ:<세주>十五(2),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2), Ⅵ:<세주>十九 〈13〉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2), Ⅵ:<세주>十五(2),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2), Ⅵ:<세주>十九 〈13〉
〈釋〉Ⅳ:<세주>四 〈1〉
〈月〉Ⅳ:<세주>四 〈1〉
·뀽〈釋〉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三 〈2〉
〈月〉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三 〈2〉
〈釋〉Ⅲ:<세주>六 〈1〉
〈月〉Ⅲ:<세주>六 〈1〉
〈釋〉Ⅳ:<세주>七 〈1〉
〈月〉Ⅳ:<세주>七 〈1〉
〈釋〉Ⅰ:<세주>十八, Ⅳ:<세주>六 〈2〉
〈月〉Ⅰ:<세주>十八, Ⅳ:<세주>六 〈2〉
주004)
*
〈석상21:56ㄱ〉에서 이 글자의 왼쪽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데, 이 글자의 표기된 곳 〈석상19:26ㄴ〉에는 ‘阿僧祇낑劫·겁:디:내·야’에서 확인할 수 있음.
〈釋〉Ⅵ:<세주>十四 〈1〉
〈月〉Ⅵ:<세주>十四 〈1〉
단모(端母) 〔ㄷ〕 : 7자
〈釋〉Ⅰ:<세주>八,Ⅰ:<세주>十一,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一, Ⅰ:<세주>四十三, Ⅱ:<세주>八, Ⅴ:<세주>十五, Ⅴ:<세주>十六, Ⅴ:<세주>十七, Ⅵ:<세주>九,Ⅵ:<세주>十, Ⅵ:<세주>十一 〈12〉
〈月〉Ⅰ:<세주>八,Ⅰ:<세주>十一,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一, Ⅰ:<세주>四十三, Ⅱ:<세주>八, Ⅴ:<세주>十五, Ⅴ:<세주>十六, Ⅴ:<세주>十七, 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13〉
:던〈釋〉Ⅰ:<세주>二十五 〈1〉
:단〈月〉Ⅰ:<세주>二十五 〈1〉
·뎽〈釋〉Ⅰ:<세주>九, Ⅰ:<세주>十, Ⅰ:<세주>十九,Ⅰ:<세주>三十二,Ⅰ:<세주>三十三, Ⅵ:<세주>三, Ⅵ:<세주>十六,(3) Ⅵ:<세주>十八, Ⅵ:<세주>二十, 〈11〉
·디〈月〉Ⅰ:<세주>九,Ⅰ:<세주>十,Ⅰ:<세주>十九,Ⅰ:<세주>三十二,Ⅰ:<세주>三十三, Ⅵ:<세주>三, Ⅵ:<세주>十六(3),Ⅵ:<세주>十八,Ⅵ:<세주>二十〈11〉
·뒁〈釋〉Ⅰ:<세주>二十四,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6〉
:더〈月〉Ⅰ:<세주>二十四,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多-더) 〈6〉
:뒁〈釋〉Ⅵ:<세주>十九 〈1〉
:더〈月〉Ⅵ:<세주>十九 〈1〉
〈釋〉Ⅴ:<세주>十八, Ⅵ:<세주>十六 〈2〉
〈月〉Ⅴ:<세주>十八, Ⅵ:<세주>十六 〈2〉
:딩〈釋〉Ⅱ:<세주>十三, Ⅳ:<세주>九, Ⅵ:<세주>七 〈3〉
:디〈月〉Ⅱ:<세주>十三, Ⅳ:<세주>九, Ⅵ:<세주>七 〈3〉
투모(透母) 〔ㅌ〕 : 1자
·톙〈釋〉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2〉
·티〈月〉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2〉
정모(定母) 〔ㄸ〕 : 10자
·딷〈釋〉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2〉
·〈月〉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2〉
·똉〈釋〉Ⅰ:<세주>六, Ⅱ:<세주>六, Ⅱ:<세주>七, Ⅱ:<세주>八 〈4〉
·띠〈月〉Ⅰ:<세주>六, Ⅱ:<세주>六, Ⅱ:<세주>七, Ⅱ:<세주>八 〈4〉
〈釋〉Ⅴ:<세주>一 주005)
*
‘똉’의 종성 ‘ㅇ’ 왼쪽에 〔:〕 상성의 방점이 찍혔고 나머지에는 ‘똉’에 방점이 없음.
,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5〉
〈月〉Ⅴ:<세주>一,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5〉
〈釋〉Ⅵ:<세주>八, Ⅵ:<세주>十九 〈2〉
〈月〉Ⅵ:<세주>八, Ⅵ:<세주>十九 〈2〉
〈釋〉Ⅵ:<세주>一,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 〈5〉
〈月〉Ⅵ:<세주>一,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 〈5〉
·뛍〈釋〉Ⅵ:<세주>十六 〈1〉 주006)
*
〈법언7:173ㄴ〉에는 ‘惰’로 돼 있는데, 〈석상21:56ㄱ〉만 ‘墯’로 표기됨.
·떠〈月〉Ⅵ:<세주>十六 〈1〉
·띄ᇰ〈釋〉Ⅳ:<세주>六 〈1〉
·〈月〉Ⅳ:<세주>六 〈1〉
〈釋〉Ⅰ:<세주>二十一, Ⅰ:<세주>三十二, Ⅳ:<세주>四, Ⅳ:<세주>五,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2),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三 〈13〉
〈月〉Ⅰ:<세주>二十一, Ⅰ:<세주>三十二, Ⅳ:<세주>四, Ⅳ:<세주>五,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2),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三 〈13〉
·띵〈釋〉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Ⅵ:<세주>一, Ⅵ:<세주>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3), Ⅵ:<세주>十九,Ⅵ:<세주>二十 〈10〉
·띠〈月〉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Ⅵ:<세주>一 주007)
*
여기만 ‘:’이고 나머지는 ‘·띠’로 같음. 결국 한 글자가 두 가지 음으로 쓰인 것임.
, Ⅵ:<세주>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3),Ⅵ:<세주>十九,Ⅵ:<세주>二十 〈10〉
·뗟〈釋〉Ⅰ:<세주>三十二 〈1〉
·찌ᇹ〈月〉Ⅰ:<세주>三十二 〈1〉
니모(泥母) 〔ㄴ〕 : 9자
〈釋〉Ⅰ:<세주>四十三, Ⅲ:<세주>二, Ⅲ:<세주>三, Ⅲ:<세주>四, Ⅲ:<세주>五, Ⅲ:<세주>六 〈6〉
〈月〉Ⅰ:<세주>四十三, Ⅲ:<세주>二, Ⅲ:<세주>三, Ⅲ:<세주>四, Ⅲ:<세주>五, Ⅲ:<세주>六 〈6〉
·녇〈釋〉Ⅰ:<세주>三十四,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Ⅵ:<세주>十三 〈6〉
·〈月〉Ⅰ:<세주>三十四,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Ⅵ:<세주>十三 〈6〉
〈釋〉Ⅰ:<세주>二十一,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7〉
〈月〉Ⅰ:<세주>二十一,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7〉
〈釋〉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5〉
〈月〉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5〉
:녱〈釋〉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Ⅱ:<세주>十二, Ⅳ:<세주>八 〈5〉 주008)
*
‘抳’와 ‘柅’로 각각 표기됨.
:니〈月〉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Ⅱ:<세주>十二, Ⅳ:八 〈5〉
:녱〈釋〉Ⅰ:<세주>三, Ⅰ:<세주>四,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八 〈8〉
:니〈月〉Ⅰ:<세주>三, Ⅰ:<세주>四,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八 〈8〉
·녱〈釋〉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2〉
·니〈月〉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2〉
느ᇢ〈釋〉Ⅲ:<세주>三, Ⅴ:<세주>十九 주009)
*
Ⅴ:十九는 ‘䨲’자임.
<세주/>, Ⅵ:<세주>十九 〈3〉
느ᇢ〈月〉Ⅲ:<세주>三, Ⅴ:<세주>十九, Ⅵ:<세주>十九 〈3〉
방모(幇母) 〔ㅂ〕 : 2자
·붱〈釋〉Ⅰ:<세주>二十二 〈1〉
·붜〈月〉Ⅰ:<세주>二十二 〈1〉
〈釋〉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九,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八, Ⅵ:<세주>十六, Ⅵ:<세주>十八 〈6〉
〈月〉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九,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八, Ⅵ:<세주>十六, Ⅵ:<세주>十八 〈6〉
병모(並母) 〔ㅃ〕 : 3자
便·뼌〈釋〉Ⅰ:<세주>二十四 〈1〉
便·뼌〈月〉Ⅰ:<세주>二十四 〈1〉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四十二, Ⅱ:<세주>六, Ⅱ:<세주>八, Ⅱ:<세주>十三,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七,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3)<세주/>,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 〈21〉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四十二, Ⅱ:<세주>六, Ⅱ:<세주>八, Ⅱ:<세주>十三,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七,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3)<세주/>,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 〈21〉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4〉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4〉
봉모(奉母) 〔ㅹ〕 : 2자
·ᄬᅮᆮ〈釋〉Ⅰ:<세주>三十二, Ⅵ:<세주>八 〈2〉
·〈月〉Ⅰ:<세주>三十二, Ⅵ:<세주>八 〈2〉
〈釋〉Ⅳ:<세주>八 〈1〉
〈月〉Ⅳ:<세주>八 〈1〉
명모(明母) 〔ㅁ〕 : 6자
·명〈釋〉Ⅰ:<세주>七 〈1〉
·며〈月〉Ⅰ:<세주>七 〈1〉
·묵〈釋〉Ⅰ:<세주>十, Ⅰ:<세주>十一, Ⅱ:<세주>四 〈3〉
·〈月〉Ⅰ:<세주>十, Ⅰ:<세주>十一, Ⅱ:<세주>四 〈3〉
〈釋〉Ⅰ:<세주>三, Ⅰ:<세주>四(2)<세주/>,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二, Ⅳ:<세주>六, Ⅵ:<세주>十七 〈7〉
〈月〉Ⅰ:<세주>三, Ⅰ:<세주>四(2)<세주/>,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二, Ⅳ:<세주>六, Ⅵ:<세주>十七 〈7〉
〈釋〉Ⅰ:<세주>三十一,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3〉
〈月〉Ⅰ:<세주>三十一,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3〉
〈釋〉Ⅰ:<세주>二十七 〈1〉
〈月〉Ⅰ:<세주>二十七 〈1〉
:민〈釋〉Ⅴ:<세주>二 〈1〉
:민〈月〉Ⅴ:<세주>二 〈1〉
미모(微母) 〔ㅱ〕 : 1자
·〈釋〉Ⅰ:<세주>二,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3〉
〈月〉Ⅰ:<세주>二,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3〉
종모(從母) 〔ᅏ〕 : 1자
ᅏᅯᆼ〈釋〉Ⅱ:<세주>一, Ⅱ:<세주>二 〈2〉
ᄿᅥ〈月〉Ⅱ:<세주>一, Ⅱ:<세주>二 〈2〉
심모(心母) 〔ᄼ〕 : 9자
ᄼᅡᆷ〈釋〉Ⅰ:<세주>三十一(2), Ⅵ:<세주>十七 〈3〉
ᄼᅡᆷ〈月〉Ⅰ:<세주>三十一(2), Ⅵ:<세주>十七 〈3〉
〈釋〉Ⅰ:<세주>十四 〈1〉
〈月〉Ⅰ:<세주>十四 〈1〉
ᄼᅥᆼ〈釋〉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 〈2〉
〈月〉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 〈2〉
ᄼᅥᆼ〈釋〉Ⅳ:<세주>八 〈1〉
〈月〉Ⅳ:<세주>八 〈1〉
ᄼᅥᆼ〈釋〉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五 〈3〉 주010)
*
여기서 한 글자 ‘娑’가 두 가지 음으로 쓰임.
〈月〉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五 〈3〉
·ᄼᅫᆼ〈釋〉Ⅰ:<세주>二十二 〈1〉
·〈月〉Ⅰ:<세주>二十二 〈1〉
ᄼᅴᇰ〈釋〉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Ⅵ:<세주>十四, Ⅵ:<세주>十五,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 〈7〉
ᄼᅳᇰ〈月〉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Ⅵ:<세주>十四, Ⅵ:<세주>十五,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 〈7〉
ᄼᅵᆫ〈釋〉Ⅵ:<세주>二十 〈1〉
ᄼᅵᆫ〈月〉Ⅵ:<세주>二十 〈1〉
시ᇢ〈釋〉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八 〈5〉
시ᇢ〈月〉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八 〈5〉
·ᄼᅡᆮ〈釋〉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2) 〈6〉
·ᄼᅡᇹ〈月〉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2) 〈6〉
조모(照母) 〔ᅐ〕 : 4자
:ᅐᅵᆼ〈釋〉Ⅰ:<세주>五, Ⅱ:<세주>十一 〈2〉
:〈月〉Ⅰ:<세주>五, Ⅱ:<세주>十一 〈2〉
·ᅐᅧᆼ〈釋〉Ⅰ:<세주>二十二 〈1〉
·〈月〉Ⅰ:<세주>二十二 〈1〉
〈釋〉Ⅰ:<세주>六 〈1〉
〈月〉Ⅰ:<세주>六 〈1〉
:ᅐᅵᆼ〈釋〉Ⅱ:<세주>三, Ⅱ:<세주>四 〈2〉
:〈月〉Ⅱ:<세주>三, Ⅱ:<세주>四 〈2〉
천모(穿母) 〔ᅕ〕 : 3자
ᅕᅡᆼ〈釋〉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Ⅵ:<세주>十二 〈7〉
〈月〉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Ⅵ:<세주>十二 〈7〉
:ᅕᅨᆼ〈釋〉Ⅰ:<세주>三十 〈1〉 주011)
*
여기서 한 글자 ‘差’가 두 가지 음으로 쓰임.
:〈月〉Ⅰ:<세주>三十 〈1〉
ᅕᅵᆼ〈釋〉Ⅰ:<세주>三十三 〈1〉
〈月〉Ⅰ:<세주>三十三 〈1〉
·ᅕᅡᆮ〈釋〉Ⅵ:<세주>十八 〈1〉
·〈月〉Ⅵ:<세주>十八 〈1〉
상모(牀母) 〔ᅑ〕 : 4자
·ᅑᅨᆼ〈釋〉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3〉
:〈月〉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3〉
ᅑᅵᆼ〈釋〉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2〉
〈月〉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2〉
〈釋〉Ⅳ:<세주>五 〈1〉
〈月〉Ⅳ:<세주>五 〈1〉
〈釋〉Ⅳ:<세주>七 〈1〉
〈月〉Ⅳ:<세주>七 〈1〉
심모(審母) 〔ᄾ〕 : 5자
ᄾᅧᆼ〈釋〉Ⅰ:<세주>七, Ⅰ:<세주>八, Ⅰ:<세주>二十 〈3〉
〈月〉Ⅰ:<세주>七, Ⅰ:<세주>八, Ⅰ:<세주>二十 〈3〉
〈釋〉Ⅰ:<세주>九, Ⅰ:<세주>十九, Ⅵ:<세주>八 〈3〉
〈月〉Ⅰ:<세주>九, Ⅰ:<세주>十九, Ⅵ:<세주>八 〈3〉
ᄾᅲᆼ〈釋〉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2〉
〈月〉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2〉
:〈釋〉Ⅰ:<세주>三十 〈1〉
:〈月〉Ⅰ:<세주>三十 〈1〉
·ᄾᅧᆼ〈釋〉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三十九, Ⅵ:<세주>四, Ⅵ:<세주>十九 〈5〉
·〈月〉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三十九, Ⅵ:<세주>四, Ⅵ:<세주>十九 〈5〉
영모(影母) 〔ㆆ〕 : 8자
·〈釋〉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2〉
·〈月〉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2〉
·〈釋〉Ⅰ:<세주>一 〈1〉
(훼손) 주012)
*
글자의 왼쪽만 조금 보임.
〈月〉Ⅰ:<세주>一 〈1〉
·ᅙᅥᆮ〈釋〉Ⅳ:<세주>九 〈1〉
·ᅙᅥᇹ〈月〉Ⅳ:<세주>九 〈1〉
〈釋〉Ⅰ:<세주>十三, Ⅰ:<세주>十七, 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四,Ⅰ:<세주>二十五,Ⅰ:<세주>二十八, Ⅰ:<세주>三十一, Ⅰ:<세주>四十二,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五, Ⅱ:<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四, Ⅳ:<세주>一, Ⅴ:<세주>四, Ⅵ:<세주>一, 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四, Ⅵ:<세주>十六(2)<세주/>, Ⅵ:<세주>十九, Ⅵ:<세주>二十 〈25〉
〈月〉Ⅰ:<세주>十三, Ⅰ:<세주>十七, 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四,Ⅰ:<세주>二十五,Ⅰ:<세주>二十八, Ⅰ:<세주>三十一,Ⅰ:四<세주>十二,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五, Ⅱ:<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四, Ⅳ:<세주>一, Ⅴ:<세주>四, Ⅵ:<세주>一, 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四, Ⅵ:<세주>十六(2)<세주/>, Ⅵ:<세주>十九, Ⅵ:<세주>二十 〈25〉
:〈釋〉Ⅰ:<세주>八, Ⅰ:<세주>十三 〈2〉
:〈月〉Ⅰ:<세주>八, Ⅰ:<세주>十三 〈2〉
·ᅙᅲᆨ〈釋〉Ⅱ:<세주>三 〈1〉
·〈月〉Ⅱ:<세주>三 〈1〉
·〈釋〉Ⅰ:<세주>二十六 〈1〉
〔漚〕 주013)
*
〈월석19:58ㄱ〉 한자 두 글자는 보이지 않아 〈법화7:110ㄴ〉 ‘漚究隷’에서 복원함.
〈月〉Ⅰ:<세주>二十六 〈1〉
〈釋〉Ⅱ:<세주>九, Ⅴ:<세주>一,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五 〈5〉
〈月〉Ⅱ:<세주>九, Ⅴ:<세주>一,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五 〈5〉
효모(曉母) 〔ㅎ〕 : 2자
〈釋〉Ⅱ:<세주>二 〈1〉
〈月〉Ⅱ:<세주>二 〈1〉
〈釋〉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Ⅴ:<세주>十五,Ⅴ:<세주>十六,Ⅴ:<세주>十七,Ⅴ:<세주>十八, Ⅴ:<세주>十九 〈9〉
〈月〉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Ⅴ:<세주>十五,Ⅴ:<세주>十六,Ⅴ:<세주>十七,Ⅴ:<세주>十八, Ⅴ:<세주>十九 〈9〉
유모(喩母) 〔ㅇ〕 : 5자
:영〈釋〉Ⅰ:<세주>四十一(2) 〈2〉
:여〈月〉Ⅰ:<세주>四十一(2) 〈2〉
·영〈釋〉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三 〈2〉
·여〈月〉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三 〈2〉
〈釋〉Ⅱ:<세주>十 〈1〉
(훼손) 주014)
*
이 글자는 오른쪽 위 부분만 조금 보임. 〈월석〉에 쓰인 예를 못 찾았음.
〈月〉Ⅱ:<세주>十 〈1〉
〈釋〉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2〉
〈月〉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2〉
·잉〈釋〉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2〉
·이〈月〉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2〉
래모(來母) 〔ㄹ〕 : 11자
〈釋〉Ⅵ:<세주>十七 〈1〉
〈月〉Ⅵ:<세주>十七 〈1〉
〈釋〉Ⅰ:<세주>三十九,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九 〈3〉
〈月〉Ⅰ:<세주>三十九 〈1〉 󰌿
〈月〉Ⅵ:<세주>十六 〈1〉 󰍕 〈3〉 주015)
*
한 글자가 〈월석〉에서 ‘랴, 려, ·랴ᇦ’ 세 가지 음으로 쓰임.
·랴ᇦ〈月〉Ⅵ:<세주>十九 〈1〉 󰍅
·렁〈釋〉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4〉
·러〈月〉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4〉
〈釋〉Ⅰ:<세주>二十一, Ⅰ:<세주>二十八, Ⅰ:<세주>二十九, Ⅱ:<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六(2) 〈8〉
〈月〉Ⅰ:<세주>二十一, Ⅰ:<세주>二十八, Ⅰ:<세주>二十九, Ⅱ:<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六(2) 〈8〉
·롕〈釋〉Ⅰ:<세주>五,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Ⅰ:<세주>二十八, Ⅰ:<세주>二十九, Ⅱ:<세주>一, Ⅱ:<세주>二, Ⅱ:<세주>五,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Ⅵ:<세주>四, 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十六 〈16〉
·리〈月〉Ⅰ:<세주>五,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Ⅰ:<세주>二十八,Ⅰ:<세주>二十九, Ⅱ:<세주>一, Ⅱ:<세주>二, Ⅱ:<세주>五,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Ⅵ:<세주>四, 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十六 〈16〉
:롕〈釋〉Ⅰ:<세주>八, Ⅰ:<세주>十一, 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四,Ⅰ:<세주>十五,Ⅰ:<세주>二十,Ⅰ:<세주>二十四,Ⅰ:<세주>三十一, Ⅲ:<세주>五, Ⅲ:<세주>六, Ⅴ:<세주>一,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Ⅵ:<세주>十二 〈21〉
:리〈月〉Ⅰ:<세주>八, Ⅰ:<세주>十一, 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四,Ⅰ:<세주>十五,Ⅰ:<세주>二十,Ⅰ:<세주>二十四,Ⅰ:<세주>三十一, Ⅲ:<세주>五, Ⅲ:<세주>六, Ⅴ:<세주>一,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Ⅵ:<세주>十二 〈21〉
·롕〈釋〉Ⅰ:<세주>三十二, Ⅰ:<세주>三十三, Ⅳ:<세주>三, Ⅳ:<세주>四, Ⅳ:<세주>五, Ⅳ:<세주>七, Ⅵ:<세주>十八, Ⅵ:<세주>二十 〈8〉
·리〈月〉Ⅰ:<세주>三十二, Ⅰ:<세주>三十三, Ⅳ:<세주>三, Ⅳ:<세주>四, Ⅳ:<세주>五, Ⅳ:<세주>七, Ⅵ:<세주>十八, Ⅵ:<세주>二十 〈8〉
〈釋〉Ⅰ:<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二, Ⅲ:<세주>三 〈4〉
〈月〉Ⅰ:<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二, Ⅲ:<세주>三 〈4〉
〈釋〉Ⅱ:<세주>十三 〈1〉
〈月〉Ⅱ:<세주>十三 〈1〉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四十二, Ⅲ:<세주>四 〈3〉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四十二, Ⅲ:<세주>四 〈3〉
〈釋〉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Ⅳ:<세주>八, 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Ⅵ:<세주>十九 〈8〉
〈月〉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Ⅳ:<세주>八, 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Ⅵ:<세주>十九 〈8〉
일모(日母) 〔ㅿ〕 : 2자
:〈釋〉Ⅰ:<세주>一, Ⅰ:<세주>二 〈2〉
〔:〕 주016)
*
이 글자는 왼쪽만 조금 보이나 다음 어구에 ‘爾’가 쓰이고 그 음이 표기됨으로 복원한 것임.
〈月〉Ⅰ:<세주>一, Ⅰ:<세주>二 〈2〉
:〈釋〉Ⅰ:<세주>四十三 〈1〉
〔:〕 주017)
*
이 글자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한자어구 ‘阿摩若那多夜’에서 ‘若’ 음을 표시한 ‘(荏蔗)’ 두 자가 반절(反切)을 나타낸 것이므로 남광우(1995)에서 두 글자를 찾아서 ‘荏:, 蔗:쟝’ 두 글자의 반절(反切)로 ‘若’의 음을 ‘:’로 복원했다. 남광우(1995:428)에서 荏 :〈동국정운3:37ㄱ〉, 남광우(1995:434)에서 蔗 :쟝〈동국정운6:25ㄱ〉 인용함.
〈月〉Ⅰ:<세주>四十三 〈1〉
i) 위에 보인 한자를 자모별로 합계하면 ‘이 문헌’의 다라니에 쓰인 한자수는 다음과 같다.
견모(見母) 〔ㄱ〕 : 5자
군모(群母) 〔ㄲ〕 : 7자
단모(端母) 〔ㄷ〕 : 7자
투모(透母) 〔ㅌ〕 : 1자
정모(定母) 〔ㄸ〕 : 10자
니모(泥母) 〔ㄴ〕 : 9자
방모(幇母) 〔ㅂ〕 : 2자
병모(並母) 〔ㅃ〕 : 3자
봉모(奉母) 〔ㅹ〕 : 2자
명모(明母) 〔ㅁ〕 : 6자
미모(微母) 〔ㅱ〕 : 1자
종모(從母) 〔ᅏ〕 : 1자
심모(心母) 〔ᄼ〕 : 9자
조모(照母) 〔ᅐ〕 : 4자
천모(穿母) 〔ᅕ〕 : 3자
상모(牀母) 〔ᅑ〕 : 4자
심모(審母) 〔ᄾ〕 : 5자
영모(影母) 〔ㆆ〕 : 8자
효모(曉母) 〔ㅎ〕 : 2자
유모(喩母) 〔ㅇ〕 : 5자
래모(來母) 〔ㄹ〕 : 11자
일모(日母) 〔ㅿ〕 : 2자
합계 : 109자
ii) 〈석상〉과 〈월석〉의 한자음 정음 표기는 널리 알려진 유모(喩母)의 종성 ‘ㅇ’이 전자엔 씌었는데 후자에 일률적으로 다 쓰이지 않았다.
iii) 〈석상〉에 쓰인 종성 ‘ㄱ, ㄷ’에 대하여 〈월석〉에서는 종성 ‘ㆆ’만을 쓴 것이 다르고, 〈석상〉 ‘ㅱ, ㄴ, ㅇ, ㅁ’에 〈월석〉 ‘ㅱ, ㄴ, ㅿ, ㅁ’을 썼으니, ‘ㅇ, ㅿ’ 제외하고 나머지는 같이 쓰였다.
iv) ▴정모(定母)의 ‘地’ 자는 ‘·띵(·띠), :’와 같이 1자 2음으로 쓰임.
▴심모(心母)의 ‘娑’ 자도 ‘ᄼᅥᆼ()’와 ‘·ᄼᅫᆼ(·)’와 같이 1자 2음으로 쓰임.
▴천모(穿母)의 ‘差’ 자는 ‘:ᅕᅨᆼ(:)’와 ‘ᅕᅵᆼ()’와 같이 1자 2음으로 쓰임.
▴래모(來母)의 ‘略’ 자는 ‘량(랴/려/·랴ᇦ)’와 같이 1자 3음으로 쓰임.
v) 같은 음을 나타내는데 ‘黎·梨·犂’의 세 글자가 쓰임.
vi) 한 글자가 1회만 쓰인 것.
견모(見母)의 ‘迦, 鳩’ 2자
군모(群母)의 ‘乾, 拘, 求, 祇’ 4자
단모(端母)의 ‘亶, 埵’ 2자
투모(透母) -------------------
정모(定母)의 ‘墯, 蹬, 袠’ 3자
니모(泥母) -------------------
방모(幇母)의 ‘簸’ 1자
병모(並母)의 ‘便’ 1자
봉모(奉母)의 ‘浮’ 1자
명모(明母)의 ‘咩, 牟, 泯’ 3자
미모(微母) -------------------
종모(從母) -------------------
심모(心母)의 ‘桑, 莎, 辛’ 3자
조모(照母)의 ‘蔗, 遮’ 2자
천모(穿母)의 ‘刹’ 1자
상모(牀母)의 ‘旃, 常’ 2자
심모(審母)의 ‘首’ 1자
영모(影母)의 ‘安, 頞, 郁, 歐’ 4자
효모(曉母)의 ‘訶’ 1자
유모(喩母)의 ‘韋’ 1자
래모(來母)의 ‘蘭’ 1자
일모(日母)의 ‘若’ 1자
vii) 한 글자가 10회 이상 쓰임.
병모(並母)의 ‘婆〔뿽〕’ 21회
영모(影母)의 ‘阿〔〕’ 25회
래모(來母)의 ‘隷〔·롕〕’ 16회, ‘履〔:롕〕’ 21회
viii) ‘다니’ 자모의 모음
앞의 자모 일람에서 모음(사성 제외)에 대하여 〈석상〉과 〈월석〉의 같음과 다름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ㄱ) 두 문헌에 쓰인 자모의 모음이 같은 것
ㅏ:ㅏ, ㅑ:ㅑ, ㅓ:ㅓ, ㅕ:ㅕ, ㅜ:ㅜ, ㅝ:ㅝ, ㅟ:ㅟ
(ㄴ) 두 문헌에 쓰인 자모의 모음이 다른 것.
ㅕ:ㅑ 憍 : Ⅰ:<세주>三十九 / 略 량:려 Ⅵ:<세주>十六ㅡ
ㅓ:ㅏ 亶 던:단 Ⅰ:<세주>二十五 / 沙 ᄼᅥᆼ: Ⅰ:<세주>三十四 / 阿 : Ⅰ:<세주>十三
ㅖ:ㅣ 帝 뎽:디 Ⅰ:<세주>九 / 剃 톙:티 Ⅰ:<세주>二十三 / 第 똉:띠 Ⅰ:<세주>六 / 尼 녱:니 Ⅰ:<세주>二十一 / 泥 녱:니 Ⅴ:<세주>六 / 抳 녱:니 Ⅱ:<세주>九 / 禰 녱:니 Ⅰ:<세주>三 / 膩 녱:니 Ⅰ:<세주>十八 / 差 ᅕᅨᆼ: Ⅰ:<세주>三十 /緻 ᅑᅨᆼ: Ⅱ:<세주>九 / 隷 롕:리 Ⅰ:<세주>五 / 履 롕:리 Ⅰ:<세주>八 / 利 롕:리 Ⅰ:<세주>三十二 / 黎 롕:리 Ⅰ:<세주>六ㅡ
ㅝ:ㅓ 埵 뒁:더 Ⅵ:<세주>十九 / 墯 뛍:떠 Ⅵ:<세주>十六 / 痤 ᅏᅯᆼ:ᄿᅥ Ⅱ:<세주>一
ㅢ:ㅡ 蹬 띄ᇰ: Ⅳ:<세주>六 / 僧 ᄼᅴᇰ:ᄼᅳᇰ Ⅰ:<세주>三十四ㅡ
ㅣ:ㅐ 地 띵: Ⅵ:<세주>一
ㅕ:ㅣ 袠 뗟:ᅑᅵᇹ Ⅰ:<세주>三十二
ㅘ:ㅓ 曼 :먼 Ⅰ:<세주>二
ㅙ:ㅐ 娑 ᄼᅫᆼ: Ⅰ:<세주>二十二ㅡ
ㅣ:ㅡ 旨 ᅐᅵᆼ: Ⅰ:<세주>五 / 枳 ᅐᅵᆼ: Ⅱ:<세주>三 / 爾 : Ⅰ:<세주>一
(ㄷ) 위 (ㄱ)은 〈석상〉과 〈월석〉에 쓰인 다라니 음의 모음이 같은 경우이고, (ㄴ)은 두 문헌에 쓰인 다라니 음의 모음이 달라진 것이다. 문제는 (ㄴ)의 경우로 그 중 제일 많은 것이 ‘ㅖ→ㅣ’인데, 이는 선행 초성의 자음이 설음(舌音) ‘ㄴ, ㄸ’과 정치음(正齒音) ‘ᅐ, ᅑ’의 음운환경이 원인인 것으로 보이며, 그밖에 그 예가 1, 2, 3회 정도로 적은 것은 주로 상대 모음과의 관계 ‘양성모음→음성모음’, ‘반모음 오/우〔w〕+단모음→단모음’, ‘전설모음→중설모음’으로 바뀐 것으로 본다.

Ⅴ. 맺음말

현전하는 『석보상절』 열 권(권제3, 6, 9, 11, 13, 19, 20, 21, 23, 24) 중에서 가장 늦게 알려진 ‘이 문헌’에 대하여 위에서 논한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서지학적으로는 〈석상〉 제13에서 시작된 『법화경언해』 권제1~7의 내용이 ‘이 문헌’에서 끝나니, 〈석상〉 권제14, 15, 16, 17, 18 등 다섯 권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이로써 『법화경』의 내용은 『석보상절』의 권제13에서 권제21까지 총 9권에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화경』의 동일 원문에 대해 『석보상절』 권제13~21, 『월인석보』 권제11~19, 『법화경언해』 권제1~7 등 세 번에 걸쳐서 언해가 되었으므로 동일 원문의 언해 양상을 용이하게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이 문헌’은 『법화경』 권7의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 다라니품 제26, 묘장엄왕본사품 제27, 보현보살권발품 제28을 언해한 것이다.
둘째, ‘이 문헌’에는 6편의 다라니가 실려 있는데, 그 저경인 『법화경언해』 권7에는 한자음은 표기되지 않은 채 한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이 문헌’과 『월인석보』 권19에 실린 다라니가 다라니의 한자음 표기 연구의 자료가 된다. 여기서는 6편에 쓰인 한자음은 모두 107자로 이를 자모(字母) 별로 정리하고, 그것이 ‘이 문헌’과 『월인석보』 권19에서 자모별로 어떻게 다른가를 정리하였다.
셋째, 어휘면에서 희귀어로는 ‘도(평-평-거, 부사)’가 기존 고어사전의 표제어로 등재되지 않은 것이며, 그밖의 몇몇 단어는 가장 빠른 예를 보여주므로 고어사전에서 표제어를 대표하는 첫 예문으로 실을 것을 제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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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절제의 미학, 여성 교훈서 『여사서언해』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여사서언해』의 문헌적 가치

조선은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이상을 구현하고, 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가적 치국방략으로 중화사대주의를 국가 통치의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민풍 교화의 일환으로서, 특히 여성 교육을 위해 유향의 『열녀전』, 반소의 『여계』와 『송사열녀전』, 『원사열녀전』, 채옹의 『여훈』과 『여효경』, 『내훈』, 『안씨가훈』, 『시경』, 『서전』, 『예기』, 『주역』과 같은 중국 서적을 전범적인 교화서로 채택하였다. 이들 중국 원전에서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언해서로 만들어 일반백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민풍 교화서로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효·충·열의 수범적인 사례를 널리 수집하여 보충한 민풍 교화서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에서의 여성 수신 교훈서로는 성종 6년(1475)에 소혜왕후가 『열녀전』, 『소학』, 『여교』, 『명감』에서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편찬한 『내훈』과, 중종 27년(1532)에 최세진이 조태고의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에 이어, 영조 12년(1736)에 중국의 4대 여훈서를 언해한 『여사서언해』 및 융희 원년(1907) 이를 개간한 개간본 『여사서언해』와, 영조 대 『어제내훈』 등이 있다.
여성들을 위한 수신 교훈서와 백성들을 위한 교화서는 내용상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내용상 상호 출입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면밀한 대조를 통해 여성 교육의 흐름뿐만 아니라 국어사 변천을 연구하는 데 이 『여사서언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중국의 원전인 『여사서』가 일찍 세종 시대에 인간된 『삼강행실도』나 성종 6년(1475)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쓴 『내훈』에 삽입된 효충열의 수범적인 중국의 사례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여사서언해』는 소혜왕후의 『소학언해』 등 여타 민풍 교화서의 내용에서 따온 부분이 많기 때문에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폭넓은 시기에 걸쳐 국어사적 변화를 조망하는 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간본 『여사서언해』(1907) 주001)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4권 2책의 『여사서언해』를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한자음은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문 원문과 순한글로 된 언해문을 구분하였고, 언해 방식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중간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개간본’으로 명명할 것이다.
와의 대교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과정의 국어사적 변화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문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여사서언해』의 영향을 받은 궁실 여성의 교훈서로서도 필사된 『곤범』과 『곤의』 등은 각종 경서와 성리서, 모도문 등의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조선 궁중 여성 교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주002)
황문환 외, 『역주곤범』, 장서각소장총서 3, 역락, 200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한글자료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참조. 박재연, 『한글 필사문헌과 사전 편찬』, 역락, 49~97쪽, 2012.
『여사서언해』의 보급은 궁실이나 사대부가의 여성에서부터 여항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한글의 보급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실과 기능을 하였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전형화한 내용인 『여사서언해』는 조선의 주체의식을 이끌어내어 국가적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가문과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회집단의 가정교육 체계를 구현해 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여성들의 한글 학습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근거로는 18세기 이후 영남 사대부들의 여성들에게 ‘내방가사’라는 조선 후기 집단 여성문학으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 교훈서의 내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체험을 덧붙여 낭송하기에 편하도록 3.4조 2음보 격의 ‘내방가사’라는 교술 문학 장르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는 『규곤의측』, 『규의』, 『여자초학』, 『천금록』, 『여교』, 『일심공덕』 주003)
권영철, 〈일신공덕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1집, 1971. 참조. 『일신공덕』은 경북 봉화에 권상용(1851~1933)이 1912년에 지은 필사본이다.
, 『태교신기』 주004)
권영철, 〈태교신기 연구〉, 『여성문제연구』 제2집, 1972. 참조. 유희의 모부인 숙인 이씨 사주당(1739~1821)이 쓰고 유희가 1801년에 언해한 책이다.
, 『규방필독』 주005)
권영철, 〈규방필독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9집, 1980. 참조. 『규방필독』은 경북 성주 초전면 고산정 송홍설 씨 소장본인데 송인건(1892~1954)이 1930년대에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기녀서』, 『여훈』, 『규범』 주006)
권영철, 〈규방문헌을 통해 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동 용궁 전씨 녹문대 고씨부인 소장본이다.
, 『여자계행편』 등 필사본 여성 교훈서 주007)
권영철, 〈규방문학을 통해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가 사대부가의 여성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면서 개인의 체험과 상상력이 결합한 교술적 내방가사인 〈계녀〉, 〈계녀가〉, 〈계녀사〉, 〈여 드러보아라〉 등의 계녀가류의 내방가사 문학의 장을 여는 촉매적인 구실을 하였다. 주008)
이정옥, 『내방가사의 향유자 연구』, 박이정출판사, 1999.
이 『여사서언해』는 여성층을 통해 한글을 확산시키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계녀〉류의 내방가사와 비교를 통해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사회 집단이나 가문을 중심으로 한 여성 교훈서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규범』,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규범선영』 주009)
이을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 해제〉, 『정신문화연구』 제7집, 1980. 28~37쪽. 이 책의 내용은 “1. 수신, 2. 독서, 3. 효친, 4. 충군, 5. 우애, 6. 돈목, 7. 제가, 8. 교자, 9. 신교, 10. 휼린, 11. 제기, 12. 분묘, 13. 간복, 14. 잡술, 15. 안분, 16. 징분, 17. 숭검, 18. 적선, 19. 거향잡의, 20 검속신심지례”로 구성되어 있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부의』 주010)
김지용, 『내훈』, 명문당, 2011. 해제 참조.
, 이승희(1847~1916)의 『가범(家範)』, 『여범(女範)』, 『규의(閨儀)』와, 왕성순(王性淳, 1868~1923)의 『규문궤범』(1915) 주011)
한국국학진흥원, 『규범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2, 한국국학진흥원, 2005.
, 이만규의 『가정독본(家庭讀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문 교훈서와 함께 이를 언해한 한글본 『규범』, 『한씨부훈』, 『여사수지』, 『부의』 등의 다양한 교훈서가 활발하게 간행됨으로써 여성 중심의 수신 교육과 한글 교육의 확산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여사서언해』의 내용 가운데 조선과 중국의 민속이 차이를 보이는 내용들도 나타난다.
“古고者쟈女녀生 三삼日일애 臥와之지床상下하야 弄농之지瓦와塼젼고”
“남아를 낳으면 침상 위에 뉘이고 화려한 옷을 입혀 구슬을 쥐어 주고 여아를 낳으면 침상 아래 뉘이고 수수한 옷을 입혀 실패를 쥐어준다.(詩云, 乃生男子, 載寢之狀, 載衣之裳, 戱弄之障....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裼, 載弄之瓦)”
여자의 직임인 직조와 방적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고대 신화에서 여성신이 직조 신으로 상징되는 것은 동서양이 동일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올림푸스 신들 가운데 직조의 여신인 아테나(미네르바)가 만든 성의를 입는다는 고대 서양의 신화와 이집트의 직조의 여신인 네이트와 같은 이야기이다. 여성이 새벽 일찍 일어나 장만하는 음식 가운데 “쟝 구으며”에서 ‘짱깨’라는 음식의 차이를 확인할 수도 있다.
『여사서언해』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시대 변천에 따른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사회에 들어서면서 유교 중심적 사회 조직이 느슨해지면서 여성들의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도리를 교술하는 문학적 텍스트를 대량 산출해 내는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중국과 조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 여성교육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여사서언해』의 원전이 중국 하은주 시대로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시기까지 광범위한 시대를 거치면서 ‘하늘[天]-남(男)’, ‘땅[地]-여(女)’를 상징하는 두 순환적 주체가 평등적 관점에서 송나라 이후 성리학과 결속되면서 ‘상(上)-하(下)’, ‘존(尊)-비(卑)’의 관계로 변화되는 남성 중심의 윤리관이 고착되는 과정을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국어학 사료로서, 그리고 여성교육의 변화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경서를 포함한 교화서들 간의 정밀한 텍스트의 상호 교섭에 대한 비교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곧 중국의 후덕한 황후나 효열녀의 고사 중심에서 우리나라의 효열녀의 고사들이 삽입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역시 『여사서』의 텍스트의 내용이 이곳저곳으로 부분적인 발췌를 하여 옮겨 씀으로써 그 자체의 전이가 된 자료를 정밀하게 대조할 경우 국어사 서술의 진폭 또한 매우 넓은 자료이다.
성종 6년(1475) 소혜왕후 심씨의 『내훈』과 더불어 『여사서언해』는 관찬서로서 그 이후 다양한 여성 교훈서들의 남본이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조선조 여성들 글쓰기와 글읽기가 대량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글의 확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문헌임이 분명하다. 주012)
이상규, 『한글고문서연구』, 경진, 2011.
『여사서언해』는 18세기 국어사적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데 매우 유리한 문헌이다. 특히 후기 국어의 변화는 ‘’의 비음운화 완성, ‘원순모음화’의 완성, ‘-오/우-’의 변화와 동요, ‘-/으-’의 잔류와 탈락, ‘-어+잇[有]-’의 축약과 함께 과거시제의 형성과 과거진행상의 분화, 명사형어미 ‘-음〉-기’의 교체와, ‘-ㄴ+것-’의 활성화에 따른 진행상(process)의 문화법, ‘-ㅁ-+-애’의 문법화에 따른 ‘-매’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여사서언해』의 초간본과 약 120년의 차이를 보이는 개간본 『여사서언해』와의 비교를 통한 후기 국어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강행실도』, 『내훈』 등의 중복되는 부분의 언해 자료의 비교를 통해 16세기까지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후기 근세국어 연구 자료 가운데 핵심적인 문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여사서언해』의 서지

한문본 『여사서(女四書)』는 중국의 여성 교육서로 청나라 시대에 왕상(王相, 1662~ 1722)이 간행한 책이다. 후한시대에서 청나라에 이르는 폭넓은 시간 대 속에서 여성 교육의 지향점과 목표는 상당한 변화와 굴절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중국에서 여성교화서의 변천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여사서』로 통합되기 이전에 명나라 신종 8년(1580)에 『여계』와 『내훈』 두 권을 묶고 신종의 서문을 올려 여성 교육서로 널리 인간하였으며, 청나라 때 왕상이 다시 이것에다가 『여논어』와 『여범첩록』을 덧붙이고 주석을 달아 『여사서』로 통합되어 인간되었다. 왕상은 『여사서집주』본과 『장원각여사서(壯元閣女四書)』로 여러 차례 인간하여 여성 교육서로 보급하였다. 현재 중국 소재 『여사서』의 이본 연구는 정밀하게 연구된 바가 없지만 중국 내에서도 대표적인 여성 교화서로 『여사서』가 여러 차례 인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유교사회의 글로벌 여성 교육서였다.
『여사서』가 조선에 어느 시기 어떠한 경로로 유입되었는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지은 『내훈』에 이미 명나라 인효문황후가 지은 『내훈』의 내용이 중간에 삽입된 것으로 보아 『여사서』 이전에 여성 교육서가 조선 초기부터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에 『여범첩록(女範捷錄)』을 지은 저자는 명나라 사람 집경공(集敬公) 왕씨에게 시집가서 평생 수절한 왕절부 유씨(劉氏) 여인이며, 그의 아들 왕상(王相)이 청나라 초기에 와서야 『여사서』를 간행한 것이다. 즉 왕상이 앞의 세 가지 책과 함께 합본하여 『여사서』를 간행한 시기는 조선 숙종 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왕상의 자는 진승(晉升)이고, 그의 어머니가 유씨이니, 남편 왕씨가 죽은 후 60년 동안 절개를 지키고, 90세 때 조정의 표창을 받았으므로, 그를 ‘왕절부(王節婦)’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 왕상이 흩어져 있던 여성 교육서를 한데 모아 『여사서』로 집대성함으로써, 조선에는 영조 때에 처음으로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나타난다. 『영조실록』 영조 10년(1734) 갑인 12월 20일조에,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비로소 『정관정요』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판(唐板)인 『여사서』는 『내훈』과 다름이 없다. 옛날 성왕의 정치는 반드시 가문을 바로잡는 일로써 근본으로 삼았으니, 규문(閨門)의 법은 곧 왕화(王化)의 근원이 된다. 이 서적을 만약 간행하여 반포한다면 반드시 규범(閨範)에 도움이 있을 것이나, 다만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후에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제조(提調) 이덕수(李德壽)로 하여금 언문으로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영조 10년(1734) 12월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에게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명하여 영조 12년(1736) 8월에 영조가 직접 서문을 내려 인간토록 명령을 내렸다. 『영조실록』 영조 12년(1736) 병진 8월 27일조에는,
“임금이 『여사서』의 서문을 친히 지어서 내리고 나서 홍문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내사기에는, ‘乾隆 二年 三月 十九日 內賜 洛川君 縕 女四書 一件 命除謝恩 行都承旨 臣 李’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천군 이온은 숙종의 6남 연령군의 양자로서, 숙종 46년(1720)에 태어나 영조 13년(1737) 9월에 죽었다. 그러므로 명을 받고 언해하여 영조 13년(1737)에 인쇄를 마치어 반사(頒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에서의 『여사서언해』 편찬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에 여성에 관한 책을 관찬본으로 발행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다가 이 책은 특히 영조의 왕명에 의하여 갑인자체 금속활자로 한문과 한글을 섞어 찍어낸 귀중한 책이다. 이 『여사서』에 사용한 한글은 놋쇠 활자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다만 중국의 『여사서』의 순차 배열과는 달리 저술의 시대 순에 따라 한·당 시대의 『여계』와 『여논어』 두 권을 묶어 상책(上冊)으로 하고, 명·청 시대의 『내훈』과 『여범첩록』두 권을 중·하책으로 총 4권 3책으로 언해하여 인간하였다.

2.1. 『여사서언해』의 초간본

1737년에 영조의 명에 의해 발행된 갑인자체 『여사서언해』외에도 1907년(융희 1)에 송병순이 서문을 쓰고 박만환이 한글로 번역 간행한 목판본 책도 있다. 이 책은 갑인자본인 어제 여사서 본과는 그 배열과 번역에 모두 차이가 있고, 오히려 중국의 『여사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국회도서관 『한국고서종합목록』에 의하면 갑인자체 4권 3책 완질을 갖추고 있는 곳은 서울대 규장각, 장서각, 간송미술관, 파리의 동양문고, 미국의 하버드대학, 범우사 자료실 등이며, 서울대 고도서본은 ‘건륭 2년(1737) 삼월 십구일’의 내사기가 있는 교정본이다. 한글 표기에는 교정하지 않고 한자음 표기에만 교정을 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인 1737년에 발행된 금속활자본은 영조의 서문이 들어 있으며,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 있는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왕명에 따라 영조 12년(1736)에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명을 받고 300질을 인간하여 발포하였다. 이 책은 사주단변으로 반곽은 24.6cm×16.6cm이고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내사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초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 각권에 따라 언해자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말자음 ‘ㅅ’, ‘ㄷ’의 표기 성향의 차이와, ㄷ-구개음화의 실례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ㄷ-구개음화가 4권의 본문에는 간혹 나타나는 데 비하여 서문에는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서문도 〈신종어제여계 서〉, 〈어제여사서 서〉, 〈여계 원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어제여사서 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여사서언해』가 어명에 의해 출판된 서적이지만 조선 초기에 엄격한 출판 방식에서 벗어나 여기저기에 오류가 나타나며 언해 방식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스이’(여범, 73ㄴ)의 오각이 보이며, 〈여논어〉 제12장과 〈여내훈〉 제1장~제5장까지 언해 방식에서 있어서 그 전후와 달리 한자어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한문 현토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4권 〈여범첩록〉은 원문에 다양한 고사들을 삽입하고 있어 1~3권까지와 체재가 완전히 다르다. 아마도 언해한 사람이 여러 명이었거나 한 사람이 했더라도 시차를 두고 그 일관성을 잃은 탓으로 보인다.

2.2. 『여사서언해』의 개간본

영조 13년(1737)에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를 초간본이라 하고,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목판본 4권 2책을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나 주013)
이근용, 〈중간본 여사서 언해 해제〉, 『중간본 여사서 언해』(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6. 홍윤표, 〈여사서 해제〉, 『여사서』(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8. 특히 홍윤표 교수는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하여 4권 2책의 목판본을 중간본이라고 규정하고 영남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남부방언 가운데 전라도 방언 지역에서 인간된 것이기는 하지만 방언 자료라고 할만큼 뚜렷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판본 자체가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영조 13년(1737)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는 어명에 의해 간행한 관찬본이지만, 1907년 간행본은 민간에서 목판본으로 인출한 것이어서 초간-중간으로 이어지는 계기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개간본이라고 해야 옳다.
개간본인 목판본 4권 2책은 서울대, 전북대를 비롯한 10여 곳의 대학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범우사의 자료실에는 목판본 두 질이 있다. 1907년 발행된 목판본은 4권 2책 상하로 되어 있고, 사주단변이며 반곽은 21.0cm×16.2cm 크기로 유계 10행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崇禎二百八十年丁未遯月日恩津宋秉珣”으로 되어 있으며, 발문은 “丁未季夏上澣潭陽田愚敬序”로 되어 있고 간기는 “瀛洲精舍丁未刊板”으로 되어 있다. 이 개간본 『여사서언해』는 1907년 전남 고흥에서 박만환이 언해했으며 송병순의 서문과 전우경의 발문을 달아 간행한 사간본으로 목판본 4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홍윤표(1989:1)는 이 판본을 중간본으로 규정하고, “영남방언을 반영한 자료로 생각된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판본을 중간본이라 하지 않고 개간본이라고 한 이유는 영조 13년(1737)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와는 달리, 편찬 체제나 내용의 배열순서가 다르며 판형이나 언해 방식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전면 새로 언해하고 판각을 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자음은 전혀 없고 한문 원문을 싣고 그 뒤에 언해를 붙였으며, 언해의 문체적 양식도 의역체인 점이 크게 다르다. 1907년 발행된 목판본은 4권 2책으로 된 개간본인데, 이 『여사서』의 영인본은 홍문관(1996) 자료와 해오름한글서예학회 편 영인본(2004) 자료가 있다.

2.3. 『여사서언해』의 필사본

『여사서언해』 필사본으로는 장서각 소장 필사본이 있다. 필사 연대가 19세기 말 20세기 초로 추정되는 3권 1책, 무계 10행 글자 수는 부정하며 반곽 22cm×17.8cm 크기로 제검은 『國文女四書』이며 〈신종황뎨어졔계셔〉 “만녁팔년(1580) 셰 경진 츈삼월 어졔서”가 있으며 장서각인이 찍힌 순한글본이 있다.
이 필사본 『여사서언해』는 한글 서체연구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계』, 『여논어』는 정자체로 『내훈』은 반흘림이 섞인 흘림체로 되어 있다. 아직 필사본 『여사서언해』의 문헌적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완전 궁체 한글로 쓴 것으로 보아 궁정 여성들 사이에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또 표기 양식도 일부 차이를 보여주지만 대체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자료로 보이기 때문에 영조 13(1737)에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에서 필사본 『여사서언해』까지의 비교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의 국어사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3. 『여사서언해』의 내용과 갈래

초간 『여사서언해』는 본문으로 한문을 싣고 이어서 언해를 하였는데 한문 원문에는 그 당시의 한자음을 달고 한글 구결토를 달았으며, 언해문에도 한자어는 대다수 한자음을 한자 다음에 부기하였다. 당시 여성 교훈용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자음과 한글 학습 양면에 걸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여사서언해』의 서(序)와 범례에 의하면 중국의 『여사서』와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내훈』을 각각 언해하여 널리 펴도록 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국에서 『여사서』의 순서(여계-내훈-여논어-여범첩록)와는 달리 시대의 앞뒤를 따라 『여계』를 권1, 『여논어』를 권2, 『내훈』을 권3, 『여범첩록』을 권4로 하고 권1·2를 한 책으로 묶어 전체 3책으로 엮었다.
각 권의 내용을 보면, 『여계』는 여자가 자라서 출가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고, 시가와의 화목을 위하여 여자로서 하여야 할 일체의 몸가짐 등을 서술한 것으로, ‘비약(卑弱), 부부(夫婦), 경순(敬順), 부행(婦行), 전심(專心), 곡종(曲從), 화숙매(和叔妹)’ 등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논어』는 여성들에게 가사, 대인관계, 윗사람 섬기는 일, 순종, 정조 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입신(立身), 학작(學作), 학례(學禮), 조기(早起), 사부모(事父母), 사구고(事舅姑), 사부(事夫), 훈남녀(訓男女), 영가(營家), 대객(待客), 화유(和柔), 수절(守節)’ 등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훈』은 명나라 성조 황제의 비 인효문황후의 저술인데 황녀와 궁인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조태고의 『여계』가 너무 간략하고, 『여헌』, 『여칙』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여성들을 교육하는 책이 마땅치 않아, 과거 어느 것보다 탁월하고 만세에 수범이 될 만한 것을 가려뽑아 저술하였다고 그 동기를 기술하고 있다. 『여사서』 중 『내훈』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고사를 인용하면서 잘못된 품행과 풍속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의 차례는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 부신(夫娠),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 적선(積善), 천선(遷善), 숭성(崇聖), 경현범(景賢範), 사부모(事父母), 사군(事君), 사아고(事兒姑), 봉제사(奉祭祀), 모의(母儀), 목친(睦親), 자공(慈功), 체하(逮下), 대외척(待外戚)’ 등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범』은 『여범첩록(女範捷錄)』이 본래의 이름인데 보통 줄여서 『여범』으로 통칭하고 있다. 『여범첩록』의 차례는 ‘통론(通論), 후덕(后德), 모의(母儀), 효행(孝行), 정열(貞烈), 충의(忠義), 자애(慈愛), 병례(秉禮), 지혜(智慧), 근검(勤儉), 재덕(才德)’ 등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용』을 비롯하여 『대학』, 『시경』, 『서경』, 『서전』, 『사기』, 『춘추좌씨전』, 『백호통』, 『전국책』, 『통감』과 역대 사서 등 방대한 서적에서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황실에서부터 여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열효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 『여사서』는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을 비롯한 한국, 일본 등 한문 생활권 여성들의 규범서로 큰 영향을 미쳐 왔으며, 여성 생활 규범을 살피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어 왔다. 주014)
아라시로(荒域孝信), 『열녀전』, 明德出版社, 1969. 야마자키 준이치(山峙純一), 『열녀전』(상중하), 明治書院, 1996. 시모미 다카오(下見隆雄), 『유향의 열녀전 연구』, 東海大學校出版會, 1989. 이사 라팔스(Lisa Raphlas), 『Sharing the Light : Representation of Women and Virture in Early Chaina』, State University od New Yprk Press, 1998.
여성 교훈서는 한문으로 된 것과 한글로 언해가 된 자료로 그 갈래를 세울 수 있다. 먼저 한문으로 된 여성 교훈서로는 단연 중국에서 전파된 『여사서』 계열과 소혜왕후의 『내훈』계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여사서』 계열의 최초의 언해된 자료로는 중종 27(1532)에 최세진(崔世珍)이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를 교서관에서 2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전하는 책은 인조 연간(1620~1640)에 2권 2책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여훈언해』는 명나라 무종(武宗) 때 성모 장성자인황태후(聖母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 편찬한 『여훈』을 언해한 것이다.
『내훈』은, 성종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가 성종 6년(1475)에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책으로서 원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선조 6년(1573) 3권 4책 내사기가 있는 호사문고 소장본이 전한다. 주015)
김지홍, 『내훈』, 영인본, 명문당, 2011.
광해군 2년(1610) 훈련도감자로 효종 7년(1656) 목판본 3권 3책 판본,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3권 3책에는 ‘어제내훈소지가’가 서문 뒤에 붙어 있는 『어제내훈』 주016)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어제내훈』은 현재 장서각(No. 3-69) 소장본이 있다.
이 있다. 이 내훈은 이본 간에 연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들의 상호 비교를 통한 국어사적 변화를 조망하는데 매우 긴요한 자료인 동시에 『여사서언해』와 내용의 출입 특히 한문 원전의 인용 부분이 동일한 것이 많기 때문에 『여사서언해』와 『내훈』과의 정밀한 비교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에는 대다수 남성이 편찬한 여성 교훈서들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우암 송시열의 『계여서(戒女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閨範選英)』 주017)
권영철, 『병와 이형상연구』, 한국문화연구원, 이화여대.
, 한원진(1682~1751)이 편찬한 『한씨부훈(韓氏婦訓)』, 영가 김복한의 『규범(閨範)』(국립도서관소장본), 이덕무(1741~1793)가 편찬한 『사소절(士小節)』, 경암 왕성순이 1915년 연활자본으로 간행한 『규문궤범(閨門軌範)』 주018)
한국국학진흥원, 『경암 왕성순의 규문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 2, 2005.
등이 있다.
이러한 한문본을 한글로 언해한 자료는 대개 필사본으로 전해오기 때문에 자료 접근이 어려워 문헌 자료 간의 상호 관계를 추적하기는 만만찮다. 15~18세기에는 유교 이념을 보급하고 내재화하기 위해 규훈서를 작성한 반면, 19~20세기 초 작자는 유교 이념을 회복하여 무너지는 국가와 윤리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규훈서를 작성하였다. 특히 18세기 이후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고 여성 교육 담론이 활성화되었으며, 교육 텍스트가 양산되는 등 특기할 만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이 시기 여성 교육과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가운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계녀서』는 여성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덕행을 바탕으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닦아서 가정을 잘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이에 필요한 올바른 도리를 순수한 국문으로 적어 간곡하게 훈계한 것이다.
우암 『계녀서』 계열은 매우 다양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를 들어보면 (1) 삼희제 손진번본 주019)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의 맏딸을 공주 탄방(炭坊)에 사는 탄옹 권사의 둘째 아들인 권유(權惟)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딸에게 언문으로 지은 계녀의 글을 『우암선생계녀서』라고 한다. 물론 이 이름은 후대에 널리 유포되는 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유가에서 시집을 가는 딸에 대한 교육서로서 이본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 가운데 고종 28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원계리에 거주하던 우암의 9대손인 송병준 씨댁에서 이 계녀서의 사본 1종이 발견되었으며, 동년에 경주군 강동면 금호댁 가인 삼희제 손진번 씨댁에서, 원계서원에서 등사한 필사본과 고종 32년에 다시 등사한 필사본이, 맏자부인 여강 이씨에게 전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재욱, 우암선생계녀서, 대동인쇄소. 소화14년 9월), (2) 이기준본 여훈계(女訓誡) 주020)
여훈계(女訓誡) 한글 친필 원본이 충청도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족보박물관에 1929년에 충남 공주군 우성면 옥성리에서 부친 이기준(李基俊)씨가 무남독녀 외동딸 이종석(李鍾錫)을 위해 친필로 쓴 ‘여훈계(女訓誡)’가 기증됐다. 이 여훈계는 옥성리(‘개전이’라는 금강 가 마을)에서 단양 이씨 대종가의 부친 이기준씨와 모친 오귀순씨의 외동딸로 1930년에 태어난 이종석씨가 1945년 시집갈 때 친정에서 받아 소지하고 평생 읽은 책자이다.
. (3) 우암유잠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권씨 가문에 출가하는 딸을 경계하는 글인 〈계녀서〉를 회덕군청 용지에 순한글 묵서로 잘 쓴 〈우암유잠〉 단책(單冊)으로 계축(1913년) 납월일 외천 정사에서 썼다는 필서기(筆書記)가 있다. (4) ‘우암션계녀셔’는 한글 필사본 1책으로 26cm×17.8cm의 크기이다. 필사 연대는 무오원월으로 되어 있으며 25장으로 장책되어 있다. (5) 남한당 김한구 이본 우암 송선생 계녀서, (6) 국립중앙도서관 우암션[생]계녀셔, (7) 경북대본, (8) 계명대본 등 매우 다양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규훈서의 구성과 서술 방식이 달라지면서 서간과 유서의 형식도 존재한다. 항목화 되고 간략화 되는 특성과 하강의 구조를 갖고 있는 규훈서도 보인다. 규훈서에서 효와 열, 남녀의 분별 등의 가치가 여전히 중요시되며 강조되고 있으나 보수적인 유교 이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의 책임과 구실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순종을 요구하던 모습과는 다른 점을 보이는 것이다. 교육 주체자로서의 어머니의 구실을 강조하고, 금기 조항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규훈서를 통해 여성의 일상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고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양상을 추적할 수 있어, 규훈서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규훈서 자료의 적극적인 발굴과 가훈서, 수신서, 전통 윤리교육서, 계녀서, 여성 작가 규훈서 등과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4. 『여사서언해』의 교훈서와의 출입 관계

『여사서언해』(1737)는, 먼저 여성 교훈서의 남상(濫觴)이라고 할 수 있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崔世珍)이, 명나라 무종(武宗) 성모 장성자인황태후(聖母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 편찬한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가 있으나 현전하지 않고, 성종의 어머님인 소혜왕후 한씨가 선조 6년(1573)에 지은 『내훈』과는 150년 정도 차이가 있으며, 개간본 『여사서언해』(1907)와는 170여 년의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여사서언해』의 텍스트 간의 출입 관계를 면밀하게 대조한다면 16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국어사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원전이 중국의 한문본 판본이기 때문에 번역의 양식적 차이도 현저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4.1. 『내훈』과 『여사서언해』의 관계

먼저 『내훈』 〈언행장 제일〉과 『여사서언해』 〈여계〉 ‘부행’ 제4에 내용을 비교해 보자.
女:녕敎・・애 닐・오・ ・겨지・비 ・네 ・・뎌기 잇・니 나・ :겨지・븨 德・득 ・이・오 :둘흔 :겨지・븨 :마리・오 :세흔 :겨지・븨 양・・오 :네흔 :겨지・븨 功공・이・니 :겨지・븨 德・득・은 구・틔・여 ・조・와 聰총明・이 ・ 달・미 아・니・오 :겨지・븨 :마 구・틔・여 ・이・비 ・나・며 :말・미 ・・카오・미 아・니・오 :겨지・븨 양・ ・ 구・틔여 顔안色・・이 :됴・며 :고오・미 아・니・오 :겨지・븨 功공・ 구・틔여 工巧:・호미 :사・게 너・무・미 아・니・라 ・조・며 ・며 正・・며 安靜:・・야 節・介・갱・ 자・바 整:齊쪵・며 ・몸 行・요・매 붓・그・러우・믈 두・며 뮈・욤・과 마니 이:쇼・매 法・법 이・쇼・미 닐・온 :겨지・븨 德・득・이・라 :말・ ・・야 닐・어 :모딘 :마・ 니・디 아・니・며 시・졀・인 後:에・ 닐・어 :사・게 아・쳗브・디 아・니・호미 ・이 닐・온 :겨지・븨 :마리・라 :더러・운 거・슬 시 ・서 ・옷과 ・무・미 ・조・며 沐・목浴・욕・을 시・졀로 ・야 ・모 :더럽・게 아・니・호미 ・이 닐・온 :겨지・븨 양・라 ・질삼・애 ・・ 專一・ ・야 노・・과 우・믈 ・즐기・디 아・니・며 술・와 ・밥과・ ・조히 ・야 손・ 이:바・도・미 ・이 닐・온 겨지・븨 功・이・라 ・이 :네・히 :겨지・븨 ・큰 德・득・이・라 :업수・미 :몯・리・니 그・러・나 ・요・미 甚씸히 :쉬우・니 오・직  :두・매 이실 ・미라 :녯:사・미 닐・오・ 仁・이 :머・녀 ・내 仁・을 ・코져 ・면 仁・이 니・를리・라 ・니 ・이・ 니・니・라
부 뎨
계집이 네 가지 실이 이시니 나흔 니론 계집의 德덕이오 둘흔 니론 계집의 말이오 세흔 니론 계집의 얼골이오 네흔 니론 계집의 功공이니 그 니론 계집의 德덕은 반시 조와 그미 졀등며 탁이홈이 아니며 계집의 말은 반시 辯변 입과 利니 말이 아니며 계집의 얼굴은 반시 얼굴 비치 아롬답고 빗나미 아니며 계집의 功공은 반시 조 공교홈이 사의게 디나미 아니라 幽유며 閒한며 貞뎡며 靜졍고 節졀을 딕희여 整졍齊졔 며 몸을 홈애 붓그림을 두고 움즈기며 고요이 법되 이시미이 니론 계집의 德덕이오 말을 야 닐너 사오나온 말을 니디 말며  후에 말야 사의게 슬여 아니케 홈이 이 니론 계집의 말이오 틔글과 더러온 거 시서 服복飾식을 션명이 며 졍결이 고 沐목浴욕을 로 야 몸이 더러워 욕되디 아니케 홈이 이 니론 계집의 얼굴이오 을 紡방績젹기예 오로디 야 희롱며 우음을 됴히 너기디 말고 酒쥬食식을 潔결齊졔 히 야 賓빈客을 공궤홈이 이 니론 계집의 功공이니 이 네 가지 계집의 큰 졀이오 가히 업디 몯 거시라 그러나 옴이 甚심히 쉬오니 오직  두기에 잇 디라 녯사이 말을 두되 仁인이 멀랴 내 仁인코져 면 仁인이 이예 니른다니 이 니이니라
앞의 『내훈』과 뒤의 『여사서언해』를 비교해 보면 성조의 소멸과 함께 한자음의 표기의 변화, ‘ㅿ’의 소실, 분철표기의 확대, ‘며 〉 閒한며’, ‘專一 〉 오로디’와 같이 고유어와 한자 어휘의 드나듬을 비롯한 ‘〉얼골’의 어휘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여사서언해』는 『내훈』과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언어 변화를 확인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4.2. 『삼강행실도와』와 『여사서언해』의 관계

『여사서언해』와 『삼강행실도』와의 관계는 원문이 완전 일치하는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효행, 충의, 열녀의 중국 사실이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아마 한문본 『삼강행실도』를 만들 때 이미 중국에서 만들어진 『내훈』과 『여범첩록』이 참고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ㄱ) 故고로 楊양香향이 범을 搤외야 아비 잇 줄만 알고 몸 잇 줄을 모로고〈여사서언해 효행편〉.
ㄴ) 양향액호(楊香搤虎) : 楊香이라 홀 리 열 네힌 저긔 아비 조차 가아 조 뷔다가 버미 아비 믈러늘 라드러 버믜 모 즈르든대 아비 사라나니라 원이 곡식이며 비단 주고 그 집 문에 홍문 셰니라〈삼강행실도 3ㄱ〉.
ㄱ)의 『여사서언해』 효행편의 양향(楊香)의 내용이 ㄴ)의 『삼강행실도』에서는 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아래 ㄱ)의 『여사서언해』의 〈여범〉에 실린 황보규 부인의 고사는 ㄴ) 『삼강행실도』의 내용보다 더 상세하게 실려 있기도 하다.
ㄱ) 皇황甫보規규의 夫부人인이 글을 능히 잘 더니 規 죽으매 董동卓탁이 그 고음을 듯고 娶고져 거 夫부人인이 免면티 몯 줄을 알고 이에 卓탁의 門문의 가 어 義의로 다래되 卓탁이 듯디 아니거 이에 責야 지저  나 大대臣신의 妻쳐라 義의로 辱욕을 밧디 아닐 거시오 너 姜강胡호 雜잡種죵이라 일이 내 지아븨 帳댱下하의 엿더니 이제 감히 네 君군夫부人인의게 禮례 업시 굴니오 卓탁이 노여 그 머리 수 우 고 어즈러이 티니 짓기 입에 긋치디 아니 고 죽으니라〈여범 21ㄴ〉.
ㄴ) 禮宗罵卓 : 皇甫規 죽거늘 겨지비 졈고 곱더니 相國 董卓이  一百과  스므 匹로 聘니 奴婢와 쳔괘 길헤 더니 그 각시 더른 리 고 董卓 집 門 의 가 러 마 니 甚히 어엿브더니〈삼강행실도 3ㄱ〉.
앞으로 『여사서언해』에 실린 각종 고사와 『삼강행실도』의 내용과 정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사서언해』에 실린 각종 고사는 여훈교화서 뿐만 아니라 〈내방가사〉에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어 이들의 흐름 관계는 앞으로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4.3. 초간본 『여사서언해』와 개간본 『여사서언해』의 관계

1907년에 인간된 개간본 『여사서언해』를 비교해 보자. 초간본 『여사서언해』의 〈부 뎨〉가 1907년에 인간된 개간본 『여사서언해』에는 다음과 같다.
신언쟝 뎨삼
부인의 가라침이 네가지 잇니니 말이 그 하나에 거지라 마음이 만를 응니 말이 아니면 엇지 베풀리오 말이 례졀에 마지면 가히써 뉘쳐을 면고 말이 리치에 당치 못면 앙이 반다시 좃니라 샹말에 오 화열 안과 슌졍 말은 사이 돍이 아니라가히 궁글리며 훼담고 말이 만면 렬 불이 어덕을 불름 갓다고  오 입이 문갓게 면 말이 덧덧이 잇고 입이 물쏘듬 갓게 면 말이 징거업다 니 심다 말을 가히 삼가지 아니치 못지니라 하말며 부인의 덕셩이 짒ㄱ고 한가야 말을 슝샹  아니라 말이 만면 과실이 만지니 말 져금만 갓지 못지라 고로 셔경…
ㄱ) 孝효와 敬경은 어버이 셤기 근본이니 공양홈이 어려온 줄이 아니라 공경홈이 어려올 飮음食식 供공奉봉으로 孝효 삼으면 이 末말이니라 孔공子ㅣ 샤 孝효 人인道도의 지극 德덕이라 시니 神신明명애 通통며 四海에 감동은 孝효의 지극홈이라〈초간본 『여사서언해』 부모쟝 뎨십이〉.
ㄴ) 효도와 공경은 어버이 셤기 근본이라 공양이 어려운 데 아니라 공경이 어려우니 음식 공봉으로써 효도를 삼으면 이거시 치니라 공ㅣ 샤 효 인도의 지극 덕이라 시니 신명에 통고 예 감동홈이 효도의 지극이라〈개간본 『여사서언해』 부모쟝 뎨십이〉.
ㄱ)은 초간본이고 ㄴ)은 개간본 『여사서언해』이다. 개간본의 언해에는 한자와 한자음 병기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 한글로 되어 있다. ‘공양홈이 〉 공양이’, ‘공경홈이 〉 공경이’로 ‘+옴’이 생략되는 등의 차이가 나타난다. 또 이유나 원인을 나타내는 ‘-ㄹ’가 ‘-니’로 바뀌었으며, ‘末말이니라’와 같은 한문 번역체가 ‘치니라’로 바뀌는 등,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국어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초간본과 개간본 사이에는 언해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인간된 『여사서언해』를 중간본이라고 불렀으나 이것은 전혀 새롭게 언해한 것으로 언해 형식이나 세주 작성 방식, 한자음 병기, 한글 구두가 없는 점으로 보면 전혀 다른 개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간본 『여사서언해』와 비교 연구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국어 변천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사서언해』와 다른 교화서와 내방가사 등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국어사적 변화뿐만 아니라 문헌간의 상호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여사서언해』의 국어학적 특징

『여사서언해』의 표기 방식은 당대에 표준화되고 고정된 표기법이 아니라 표기자의 개인적 의식과 방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한두 가지의 문헌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마치 그 시대의 공인된 표기방식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는 18세기 전기 문헌자료의 하나인 『여사서언해』의 일부 내용이 성종 6년(1475)에 인간된 『내훈』에서부터 1907년에 인간된 『여사서언해』의 개간본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한문 원문을 언해한 자료를 비교할 수 있는, 곧 통시적 연구를 위해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이어지는 『여사서언해』의 두 이본(소위 초간과 중간)의 비교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표기법의 혼란 양상과 초간에서의 보여주는 한문 대문의 한자 어휘를 직역 방식이 중간에서 고유어로 대치한 의역의 번역 방식 차이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 후기 국어사 흐름을 읽어내는 데 『여사서언해』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5.1. 표기 양식

5.1.1. 표기 양식의 특징

초성은 14자(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와 ㅅ계 합용병서 4자(ㅺ, ㅼ, ㅽ, ㅾ)와 ㅂ계 합용병서 3자(ㅲ, ㅳ, ㅄ)와 각자병서 3자(ㄸ, ㅆ, ㅃ)가 있다. 중세어에서 ㅂ계 합용병서가 대체로 ㅅ계 합용병서로 통합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ㅅ계 합용병서가 ㅂ계 합용병서로 통합되는 모습도 보여주기 때문에 병서 표기의 혼란상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합용병서가 현실음의 표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음과 구별을 위한 표기 의식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성은 ‘ㆍ, ㅏ, ㅑ, ㅓ, ㅗ, ㅛ, ㅜ, ㅠ, ㅡ , ㅐ, ㅒ, ㅔ, ㅖ, ㅚ, ㅘ, ㅝ, ㅙ, ㅞ’ 등이 나타나며,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적인 음소가 아닌 ‘ᅟᆐ(帚(여계원서 1ㄱ), 萃(내훈 32ㄴ)), ㆌ(醜(여논어 34ㄴ), 取(어제여계서 1ㄴ))’가 쓰이고 있다.
종성 표기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의 8종성과 겹받침으로 ‘ㄺ, ㄻ, ㄼ’의 예가 있다. 특히 어말 ‘ㅅ:ㄷ’의 표기는 ‘빋(여계 3)’과 ‘빋치(여계 16)’처럼 ‘ㅅ’과 ‘ㄷ’이 교체표기가 공존하고 있다. ‘을(2:38)’과 같이 ‘ 〉 ’으로 기본형 어간이 재구조화된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음절말 자음군의 표기도 기본형 어간의 표기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나 어간말 자음이 단순화한 예가 보이며(옴기다(3:53, 4:28), 읇프며(2:25))의 경우 재분석한 이중표기로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체언의 경우 분철표기가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에 기본형의 어간을 고정시키려는 표기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사서언해』보다 앞선 『노걸대언해』(1670)에 이미 어말 ‘ㄷ’이 ‘ㅅ’으로 대거로 교체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사서언해』에서는 오히려 ‘ㄷ, ㅅ’이 교체표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한 특징이다. 다시 말하자면 표기자가 기본형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5.1.2. 분철 표기의 확산과 표기상의 특징

18세기 초기 자료에서 이미 체언의 분철표기는 표기자의 의식에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어는 물론이거니와 고유어의 표기에서도 체언의 어간과 격조사는 분철 표기로 고정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분철표기는 한자어와 격조사 간의 분리 의식이 고유어나 의존명사 혹은 동명사로 확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의존명사 ‘ㅣ’의 경우 ‘어리니(어린+이), 더니(더+이)’의 경우나 동명사형에서 ‘피미, 도오미, 興感믈, 붇러믈, 사오나오미’와 같은 예에서는 문법경계 의식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에 연철표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의존명사 ‘것’의 경우는 아직 연철표기로 나타나고 있다.

5.1.3. 부사화 파생접사 ‘-이, -히’의 표기

남광우(1977)교수는 부사화 접사 ‘-이, -히’의 실현 환경을 2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주021)
남광우, 〈여사서〉 『이숭녕 선생 고희기념 국어국문학론총』, 탑출판사, 1977.
곧,
① 어근 말음이 모음인 경우 부사화 접사는 완전히 ‘-히’다.
② 어근 말음이 ‘ㅁ, ㅂ’인 경우는 부사화 접사는 ‘-히’가 주로 나타나고 ‘ㄱ, ㄴ, ㄷ ,ㄹ, ㅇ’의 경우는 ‘-히, -이’가 교체되고 있다.
ㄱ) 能히, 諄諄히, 죡히, 可히, 젹히, 졍졔히, 潔齊히, 귀히, 가히, 甚히, 박히, 구챠히, 젼일히, 샤특히, 맛당히, 맏당히, 과도히, 整齊히, 감히, 자셰히, 強梁히, 親히, 周全히, 欵曲히, 荒忙히, 졀졀히, 朦朧히, 공슌히, 싁싁히, 重히, 嚴히, 위히, 判然히, 湛然히, 지극히, 부즈런히, 디완히, 심히, 庶히, 順히, 洽히, 貴히, 薄히
ㄴ) 부즈런이, 우연이, 션명이, 졍결이, 헙슈록이, 맛당이, 젼일이, 이, 일즉이, 맏당히, 諄諄이, 殷勤이, 從容이, 切實이, 샤특이, 젼쳔이, 당졍이, 극진이, 씍씍이, 지극이
(1) “샤특히/샤특이, 싁싁히/씍씍이, 지극히/지극이, 諄諄히/諄諄이, 부즈런히/부즈런이, 젼일히/젼일이, 맛당히/맏당히/맛당히/맏당이”에서 ‘-히’, ‘-이’ 교체표기형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근에 대한 의식이 아직 고정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어말의 ‘ㅌ’이 ‘ㅣ’ 이외의 모음 앞에서도 ‘받 갈고(여논어 29ㄱ)’에서처럼 주로 목적격과 결합하는 경우에 ‘ㅊ’으로 변한 예가 보인다.
(3) 어말자음군 중 ㄼ의 ‘ㅂ’이 탈락한 “軌 뎌 자최 와 단 말이라”(여내훈 47ㄱ)의 예가 보인다.
(4) 어말 ㅺ이 ㄲ으로 나타난다. ‘입시울을’(여논어 2ㄱ)과 ‘입시욹의’(여논어 8ㄱ)에서처럼 혼용되고 있다.
(5) 한자음의 경우 어두 ‘ㄹ’이 ‘ㄹ, ㄴ’ 간에 교체표기로 주로 나타나며, 어두에서도 ‘ㄹ, ㄴ’이 탈락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ㄴ’의 경우에도 어두의 환경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ㄱ) 禮녜, 례, 理리, 厲녁, 論논, 閭녀, 倫뉸, 利니, 隣린, 冷, 聯년, 路로, 累누, 量량, 里니, 良냥, 殮념, 狼낭, 令령
ㄴ) 女녀, 념녀
ㄷ) 니버, 닉여, 니어, 니론, (너)기디, 넷사, 니러, 닙고
다른 18세기의 자료에서처럼 어중의 ‘ㄹ+ㄹ〉ㄹ+ㄴ’의 표기도 강하게 나타난다(실노, 진실노, 홀노).

5.1.4. 어말 /ㅅ/:/ㄷ/표기

말음 ㅅ과 ㄷ의 표기는 18세기 국어의 일반적인 경향과 같으나 ㄷ의 표기도 매우 강한 양상을 보인다(붇그림, 맏보며, 거든, 긷거고). 어간과 어미의 구별 표기의식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파생접미사에 의한 용언의 어간도 그러한 구별을 잘 나타낸다. 어말 /ㅅ/:/ㄷ/표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5.1.5. ‘’의 변화

18세기 중반에는 ‘’의 비음운화가 마무리된 상태이다. 다만 비어두음절에서 ‘〉아’로 회귀되는 예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보인다.
ㄱ) 람[壁](여논어 2), 람[風](여논어 4), 가온대(여범 60)
ㄴ) 아 〉 아희(여범 13), 나 〉 나희(여논어 2), 소 〉 서릐(여논어 18)
비어두음절에서 ‘’의 변화는 거의 대부분 ‘ 〉 으’의 변화가 완료된 시점인데 그 역으로 ‘〉아’로 표기된 “[壁] 〉 바람,  〉 바람[風], 가온 〉 가온대[中]”과 같은 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5.1.6. 유성음 사이에서의 ‘ㅎ’, ‘ㄱ’의 탈락

ㅎ종성 체언의 경우도 ㄱ)의 예에서처럼 아직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ㅎ’이 탈락한 ㄴ)의 예들을 통해 18세기 초에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ㄱ) 흔(여계 1), 터히라(여계 24), 터(여내훈 42), 흘(여논어 26), 세흘 네흘(여논어 8), 뫼(여내훈 38), 길히(여내훈 19), 길흘(여내훈 22), 나히나(여내훈 8), 나라(여논어 16), 나라흘(여내훈 57), 나라히(여범 21), 우흐로(여내훈 8), 안흐로(여내훈 30), 안(여논어 16), 흘(여내훈 26), 나흘(여내훈 30), (여내훈 34), 하히(여내훈 37), 열헤(여내훈 46), 나둘히로(여내훈 46), 칼흘(여범 18), 코흘(여범 20), (여범 28), 노흐로(여범 22), 뫼흘(여범 25), 히(여범 2)
ㄴ) 하은(여계 1), 저으샤(녀계서 3), 하의(여논어 21), 돌이니(여논어 17), 칼이니(여내훈 26), 하을(여내훈 38), 칼을(여범 21), 칼에(여범 33), 이(여범 22), 아희들을(여논어 35)
‘저으샤’(녀계서 3)의 경우 ‘저허더(녀계원서 3)’의 예에서처럼 ‘칼을/칼흘, 코/코흘, 칼이니/, 하은/하히’와 같은 교체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서히 퇴화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ㄱ종성 체언의 경우도 “남게(여범 29), 남기(여내훈 75), 굼그로(여범 60), 솟긔(여범 30), 밧긔셔(여범 3)”처럼 일부 잔존하고 있으나 ㅎ종성 체언보다는 탈락한 빈도가 훨씬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5.2. 음운 현상

5.2.1. 구개음화

ㄱ, ㄴ의 예에서처럼 한자음 표기는 거의 ㄷ-구개음화를 외면하고 있으며, 부사형어미 ‘-디’ 역시 매우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구개음화에 적용된 예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가 한자어나 고유어표기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아래의 ㄱ), ㄴ)의 예에서처럼 한자음에서나 형태소 경계 환경에서 아주 드물게 ㄷ-구개음화형들이 발견되며 어휘부 내에서는 훨씬 적은 예들이 나타난다.
ㄱ) 帝뎨, 天텬, 聽텽, 治티, 朕딤, 沖튱, 迪뎍, 中듕, 朝됴, 展뎐, 調됴, 重듕, 竉툥, 典뎐, 知디, 適뎍
ㄴ) 仲즁, 廚쥬, 名稱팅(여계 2)/名稱칭(여계 4), 酒物쥬(여논어 28)/酒脯듀(여논어 25), 處텨(여논어 17)/處쳐(여계 25), 全뎐(여논어 34)/全젼(여논어 35), 치디(여계 6ㄴ)
ㄷ) 고됴히, 엇디, 침, 귿칠(여계 6ㄴ), 지람을(여논어 22ㄴ), 엇지, 잇지(어제서 6ㄱ)
ㄹ) 어긔룯지(예계 15ㄱ), 품어져(여논 33ㄴ), 지라(여내훈 10ㄴ), 리디, 어디니, 디, 말을어디, 敏티, 디니라, 갈디어다, 기우러디며, 지리오, 下치, 다지, 닑지(어제서 6ㄱ), 호지(여사 5ㄱ), 重치(여사서 4ㄴ), 어긔룯지(1:13), 지, 푸러져
한자음에서 ㄷ-구개음화는 매우 보수적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ㄷ-구개음화가 사회계층적 차이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였기 때문에 대체로 사대부 층에서는 의식적으로 이 현상을 기피하였다. 특히 한자음의 경우가 고유어에 비해 보수적 표기가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구개음화는 구어적 자료와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ㄷ-구개음화는 표기방식을 전제로 하여 관찰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계층적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ㄴ)의 예를 살펴보면 한자음에서도 교체적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확산된 음운 변화였음을 알 수 있다. ㄷ)은 어휘 내부에서의 구개음화가 실현된 예이고 ㄹ)은 연결어미 ‘-디’가 구개음화로 적용된 예들이다. ㄷ-구개음화가 형태소 경계 환경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5.2.2. 원순모음화

순자음 아래에서 원순모음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원순모음화는 문헌상으로는 17세기 말기인 1690년에 간행된 『역어유해』에서 확인된다. 원순모음화 현상은 ‘’의 비음운화 이후 모음체계의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음운 현상인데 17세기 말 『역어유해』(1690)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들어서서 『경신록언해』(1796), 『동문류해』(1748), 『한청문감』(영조 말년)에서와 함께 생산적인 음운현상이었다.
ㄱ) 푸러져(어제서 5ㄴ), 문(여계 10ㄱ), 이뮈(여논어 11ㄴ), 물러(여논어 18ㄴ), 므롯(여논어 2ㄱ)/무릇(여논어 4ㄴ), 믄득(여내훈 3ㄴ)/문득(여논어 2ㄱ), 무롭플(여논어 1ㄴ), 브즈런고(여내훈 25ㄱ)/부즈런케(여논어 26ㄱ), 려(여논어 18ㄴ), 푸른(여논어 37ㄴ), 어여서부터(여논어 5ㄴ), 블이(여내훈 72ㄴ)/불을(여논어 14ㄴ), 물(여논어 32ㄱ), 물리매(여논어 8ㄱ), 머무러(여논어 8ㄱ), 밋부디(여범 7ㄴ), 머무러(여논어 32ㄱ), 머무로면(여논어 33ㄱ), 물(여논어 18ㄱ)/믈(여논어 18ㄴ), 王公으로부터(여사서 5ㄱ), 더부러(여사서 6ㄱ), 부즈런이(여계서 3ㄱ), 문(여계 10ㄴ).
ㄴ) 아롬답고(여계 12ㄱ), 우솜(여논어 9ㄱ).
ㄷ) 나가물(여범 66ㄱ).
ㄱ)와 같이 ‘므롯/무릇’, ‘믄득/문득’, ‘브즈런/부즈런’, ‘블/불’, ‘믈/물’과 같은 교체형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진행 중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원순모음화는 직접순행동화였지만 ㄴ)의 예에서처럼 역행 순행동화의 예들이 보이며, ㄷ)에서처럼 형태소 경계의 환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5.2.3. 경음화와 유기음화

어두된소리에 각자병서 ㄸ, ㅃ, ㅆ이 쓰이었고 합용병서에 ㅾ, ㅺ, ㅼ가 쓰이고 있다. 어두합용병서의 표기는 ㅂ계와 ㅅ계가 다 쓰이고 있으며, 각자병서의 경우는 ‘빠여’, ‘따흔’, ‘쓰미’ 등이 나타나며 어중의 된소리표기는 매우 생산적이다.
ㄱ) 後漢(여계 1:1), (여사서 1:3), 허(여사 2:11), 힘(여사 2:10), 지람(여사 2:22), 며(여논어 4ㄴ), 뵈(여논어 4ㄱ), 썩어(여범 15ㄴ), 빠여(여내훈 78ㄴ), 빠디니(여범 17ㄱ), 빼히고(여내훈 57ㄱ)
ㄴ) 싸하(여사 2:5), 씍씍이(여사 4:17), 따흔(여내훈 57ㄴ), 씻단 말(여논어 10), 쓰미(여계 6ㄱ)
어두 환경에서와 형태소 경계 환경에서 경음화한 예들이 모두 다타나고 있다. 그러나 남부방언의 영향으로 ‘덤덤홈’(여훈원서 3), ‘싁싁히(3:14)’와 ‘氏’는 ‘씨’아닌 ‘시’로 ‘班반氏시’(여계 1:1)와 같이 경음화에 적용되지 않은 표기도 나타난다. 어중의 된소리화가 다음과 같이 표기되고 있다.
붇러오믈(여계원서 2ㄴ), 업디니라(3:72ㄱ)
유기음화현상도 ‘칼(여범 18), 코(여범 20), (여범 28)’은 이미 17세기 후반에 나타나는데 어휘별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구급간이방』과 『훈몽자회』에 ‘양지’이던 것이 ‘양치질’(여논어 10)로 나타나고 있다. ‘켜다[引], 두로혀디(여논어 2), 니르혀(여논어 8), 뒤혀(여논어 10)’가 보이며 ‘실켜 수오(여논어 4)’와 ‘燭을 켜며(여논어 32)’의 예들도 보인다.

5.2.4. 자음동화

자음동화는 ‘ㅅ+ㄱㄱ+ㄱ, ㅅ+ㄴㄴ+ㄴ, ㅂ+ㄴㅁ+ㄴ’의 예들이 보인다. ‘묵금(여논어 24), 석거(여범 19), 닥(여논어 16)’와 같은 ‘ㅅ+ㄱㄱ+ㄱ’의 동화는 『두시언해』 중간에서 이미 보이는데 ‘읻니라(여논어 29ㄱ), 만나며(여논어 53ㄱ)’와 ‘ㅂ+ㄴㅁ+ㄴ’의 동화의 예인 ‘영화롬니라’(여논어 2ㄴ)의 예도 나타난다.

6. 형태·문법적 특징

6.1. 격조사

6.1.1. 주격조사는 수의적으로 생략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분명한 조건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여사서언해』에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행음절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중세어와 달리 한자어나 ㅣ-모음 아래에서도 혼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주격조사 ‘-가’가 이미 필사본에서는 16세기 초반에 나타나지만 문헌자료에서는 17세기 『벽온신방』에 “그 내가 병 긔운을 헤티니”(벽온 15ㄴ)에 예가 나타나는데 『여사서언해』에서 “疏蛙 니가 성긔고 버레 먹단 말이라”(여논어 17)의 유일한 용례를 보인다.
6.1.2. 목적격 조사로는 『여사서언해』에서는 ‘, 을’이 나타나는데 선행 체언이 개음절인 경우 음양 조화표기와 관계없이 ㄱ)의 예에서처럼 ‘’로 실현되고 있다. ‘’의 비음운화가 완료된 상황에서 비어두음절의 ‘’가 음성 실현형으로는 ‘아’였던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보인다.
ㄱ) 陽道, 外治, 內治, 位, 緒, 졍, 머리, 理, 닐욀바, 一書, 坤維, 末世, 禮, 용의, 垢, 夙夜, 무리, 쇠, 누에
ㄴ) 陰德을, 訓迪, 샤믈, 조종을, 힘씀을, 근노심을, 글을, 本을, 俗을, 臣을, 訓을, 을, 兔홈을, 辱을, 줄을, 一通을, 몸을, 사을, 일을, 아을, 람을
선행 체언이 폐음절인 경우 역시 모음조화 상관없이 ㄴ)에서처럼 거의 대부분 ‘을’로 나타나고 있다. ‘모시를(여논어 4), 百事를(여논어 5), 빗(여계 5), 빋(여계 16), 돌(여논어 15), 거(여논어 15), 받(여논어 29)’과 예외적인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의 비음화 이후 형태소 경계에서 모음체계의 불완전함을 반영하는 개인적 표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ㄱ) 館관閣각에 臣신을 명야(어제서 6ㄱ)
받들어 훋사을 勸권노니(여논어 34ㄱ)
女녀子들을 권노니(여논어 36ㄱ)
ㄴ) 강을 허  와(여논어 10ㄴ)
ㄱ)의 예에서 목적격조사가 부사격으로 사용된 예들이 많이 나타난다. 수로 수여동사에서 목적어가 생략된 관계로 목적격조사가 이동한 결과이다. “館관閣각에 臣신(에게) [ ]obj을 명야”의 구성에서 목적격 표지가 수여표지로 이동한 결과로 해석할 수있다. ㄴ)의 예는 시간 부사격의 위치에 목적격 조사가 실현된 것이다. 자동사구문에서 실현되는 이유도 문형구조의 역사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뿐만 아니라 도구격을 지배하는 ‘만들다’와 같은 서술어에 ‘로’와 ‘를’이 교체되는 이유도 동일한 현상으로 보인다. 목적격조사가 타동사 구문 이외에 나타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1.3. 주제격조사는 선행음절이 개음절인 체언에서는 ‘’이 폐음절 체언에는 ‘은’이 실현되고 있어 목적격 조사와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ㄱ) 天子 后 諸女 나 道 이  지아비 叔妹
ㄴ) 坤은 근본은 興은 아은 뉘임은 陽은 陰은 계집은 敬은 順은 말은 얼굴은 功은 하은 허믈은 법은
주제격 조사나 목적격 조사에서 이러한 경향은 ‘’의비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18세기 전반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증수무원록언해』나 『경신록언석』(1796)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6.1.4. 처격조사로는 ‘애, 에, 의, 예, ’가 나타난다. 음양 조화표기와 무관하다.
ㄱ) 禮애, 朝夕애, 易애, 夫婦애, 三百篇애, 昔年애, 사흘만애, 鄙諺애, 기림애, 中外애, 몸애
ㄴ) 階序에, 位에, 外에, 이에, 胎教에, 古者에, 후에, 鄉村에, 지게에, 朝暮에, 귀에, 기에
ㄷ) 가의, 床下의, 집의, 庭戶의, 道路의, 몸의
ㄹ) 이예, 지게예, 바회예, 兩儀예, 魏예
ㅁ) 밧, 안
처격조사로는 ‘애, 에’는 음양조화표기와 무관하게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ㅣ모음 아래에서 실현되던 ‘예’는 ‘에’와 교체표기로도 나타나며, ㅎ곡용어에서는 ‘’가 실현되고 있다. 여격을 표시하는 처격조사 가운데 ‘의게’와 ‘의’는 선행 체언이 유정물의 유무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된다.

6.1.5. 속격조사는 ‘의’, ‘’과 사잇소리 ‘ㅅ’, ‘ㄷ’이 실현된다. 내포문이나 접속문의 주어가 속격을 수반하는 현상이 18세기 초반에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어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었지만 18세기 국어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홍빈(2011:56)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소의 “주어적 속격”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웃 사 파 가”에서 ‘파 -’의 주어인 ‘사’가 속격과 결합하는데 ‘파 -’의 동작의 주제 곧 행동주라고 할 수 있다. 『여사서언해』에서는 내포문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되거나 혹은 접속절의 선행문의 주어가 속격으로도 실현될 뿐만 아니라 대격으로도 실현되고 있다.
ㄱ) 내포문에서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
현은 모의 어려서 치매 말암으며(어제서 4ㄴ)
너희 무리의 이  줄을 넘녀야(여계 3ㄴ)
기피 훗사의 능히 와 것지 못을 앗셔 야(어논어 1ㄱ)
이 글은 송시의 지은 배어(어논어 1ㄱ)
갓 쳐부의 가히 어티 아니티 못며(여계 6ㄱ)
ㄴ) 접속절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
쳐 유야 은 서 인니라(여논어 21ㄱ)
집의 늉며 톄홈과 나라 폐면(여논어 16ㄱ)
셔애 암의 사볘 쳑엳고(여논어 19ㄱ)
시애 녀계의 긔롱미(여논어 19ㄱ)
셩쥬의 흥제 문왕의(여논어 45ㄱ)
ㄷ) 접속절의 주어가 대격으로 실현
공뎡을 그륻되미 읻게 말올 니라(여논어 29ㄴ)
ㄱ)에서는 동명사로 구성되는 내포문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ㄴ)에서는 접속적의 주어가 역시 소격으로 실현되는 예이지만 ㄷ)은 접속절의 주어가 대격으로 실현되는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격조사의 배합의 혼란이 아니라 통사론적으로 주어 거듭나기를 회피하려는 데서 생겨난 현상으로 20세기 국어에 까지 이어진 현상이다.
속격이 주격이나 목적격과 교차가 되는 예도 나타난다.
ㄱ) 엇디 德덕의 닥지 몯며 집의 바로디 몯홈을 근심리오(여범 3ㄴ)
ㄱ)의 예에서 ‘德덕의’는 후행하는 ‘닦다’의 대상 곧 목적격으로 ‘집의’는 ‘바로디 몯홈을’의 주어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격이나 주격 위치에 속격이 실현되고 있다.
6.1.6. 접속격조사는 ‘와, 과’는 역시 선행음절의 환경과 관계없이 다만 “內訓와(여계서 4), 父母과(여논어 18), 束脩과(여논어 25), 是과(여논어 36)”와 같이 음양 조화 표기와 무관한 예들이 보인다. 실현되며 선행음절의 말음이 ㄹ인 체언에도 ‘신발과(여논어 11), 실과(여논어 22), 과(여내훈 78)’와 같이 주로 ‘과로 실현된다. ㅎ곡용어에 나타던 ‘콰’는 보이지 않는다.
ㄱ) 투부와 음녀과로 한 쳐(여범 71ㄴ)
ㄴ) 이  사람은 개와 쥐 이 이실(여논어 9ㄱ)
부모 셤김과 님군을 셤김과 구고 셤김에 니고(여논어 8ㄱ)
례와 의와 념과 티 나라 네 벼리니(여범 50ㄱ)
기름과 소고모가 호쵸와 몌조 항아리와 독에(여논어 30ㄱ)
ㄱ)의 예처럼 공동격조사가 여럿 이어날 때 마지막 체언에 복합격으로 실현되는 중세어의 잔류 형태도 보이지만 이미 ㄴ)의 예에서처럼 마지막 체언의 공동격은 생략되고 있다. 중세어에서 접속격이 연이어 나타날 때 ‘[N1]과/와+[N2]과/와+.....[Nn]과/와+C’와 같은 구성에서 마지막의 ‘[Nn]과/와+C’가 접속격이 생략되고 ‘[Nn]+C’로 바뀐 결과이다.

6.2. 용언의 활용

6.2.1. ‘-’ 용언의 축약과 탈락이 대량으로 나타난다. ‘부즈른()을’, ‘오롣(-)’, ‘아니-’ 등이 ‘부즈런을’, ‘오롣다’, ‘아닐’과 같이 실현되어 ‘-’의 축약과 함께 어간내부를 재조정하는 일련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ㄱ) 통티(여계 2ㄴ)
ㄴ) 부즈런을(여계 6ㄴ), 오롣다(여계 13ㄴ), 아닐(여계 13ㄴ), 아니미(여논어 25ㄱ), 부즈런의(여논어 28ㄱ), 삼갈만(내훈 7ㄱ), 삼가기로(내훈 7ㄱ), 비로소믈(여논어 16ㄱ), 삼가미(여논어 19ㄴ), 삼가디(여논어 22ㄱ), 졀검애(여논어 29ㄱ), 부즈런으로(여논어 30ㄴ), 니만(여논어 29ㄴ), 아니미냐(여논어 33ㄱ), 비로매(여논어 45ㄱ), 삼가니(여논어 81ㄱ)
이와 같은 현상은 아직 ‘-ㄴ(관형사형)/-ㄹ(관형사형)’이 동명사어미로 사용되는 특징이 남아 있기 때문이 것로 보인다.

6.2.2. 중세어 문헌에서 보이는 ‘잇다[有]’가 ‘이셔, 이실, 이신, 이셔도, 이쇼, 잇고, 잇디, 이시며’와 같은 활용을 보이다가 ‘이스매, 이스믈, 이슬지라도, 이스리니, 이스면, 이슬시, 이시믈, 이거시어든’과 활용됨으로써, ‘ㅣ’가 ‘ㅡ’로 변하였다.
6.2.3. 중세어에서는 ㄹ변칙 용언을 ‘ㄷ’이 ‘ㄷ, ㄴ, ㄹ, --’ 아래에서는 탈락되고 있다. ‘여듸(여계 18), 디(여범 28), 아디(여범 70)’와 같이 실현된다. ‘끌다, 베풀다’의 예에서도 ㄹ 불규칙으로 활용되고 있다.
‘웃다’는 규칙활용을 하는 것이지만 중세어나 근세어에서 변칙활용을 하던 것으로 중세어에서 ‘우, 우며’ 활용을, 근세어에서는 ㄱ)과 같이 활용한다.
우음(여계 13, 여범 33), 우서(여범 61), 우솜(여논어 9), 우솝도소니(여논어 26)

6.3. 과거시상 선어말어미의 정착

과거시상 선어말어미는 ‘-어(연결어미)/아+잇(이시)-’의 구성으로 서술어의 행위가 현재 시점 이전에 이루어진 상황을 나타낸다. 그러나 ‘-어(연결어미)/아+잇(이시)-’의 구성의 서술어가 순간성을 지닌 경우 과거의 상태나 행위의 지속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미기능이 차츰 분화됨으로써 16세기부터 ‘-어(연결어미)/아+잇(이시)-〉-앳/-엣’으로나 ‘-+-어(연결어미)/아+잇(이시)-〉-얏/-엿’으로 축약된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이미 완료상의 과거시상과 진행상의 과거시상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동사 구성에서는 ‘-아/어 잇-’구성이 성립되지 않지만 자동사의 경우에도 결과를 감각이나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ㄱ) 구녈삼뎡은 첫편의 사겻니라(여논어 37ㄴ)
뎐긔 모도아 얃디라(여내훈 6ㄴ)
내 귀에 닉고 애 감초왓더니(여내훈 7ㄱ)
현홈과 부홈애 엿나니라(여내훈 81ㄱ)
집공의 원 되얏더니(여범 1ㄱ)
과거시상 선어말어미 ‘-더-’는 서술격조사 ‘이-’나 미래선어말 어미 ‘-리-’ 다음에 ‘-러-’로 교체되고,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 다음에서는 ‘-다-’로 교체되었는데 서술격조사의 환경에서 ‘-러-’가 다시 ‘-더-’로 회귀하였다.

6.4. 현재시상 선어말어미 ‘--’ 탈락

현재시상 선어말어미 ‘--’는 종결형 ‘-다’ 앞에서는 ‘-ㄴ(는)다’로 감탄종경어미 ‘-구나’ 앞에서는 ‘-는구나’로 관형형 앞에서는 ‘-느-’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가 탈락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ㄱ) 다(여논어48ㄴ), 돈목다(여논어72ㄴ), 인의다(여논어72ㄴ)
ㄴ) 니라(여범1ㄱ)
현재시상어미의 분포 배합이 재배열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 탈락 환경을 보다 더 정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6.5. 동명사형어미 ‘음〉기’의 교체

18세기에 들어와 동명사형어미가 ‘-(으)ㅁ’에서 대폭 ‘-기’로 교체되는 동시에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 형식으로 바뀌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국어에서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가 탈락되면서 동명사형어미와 명사화접사 간의 형태적 차이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5세기 국어에서는 ‘-음’이 명사화를 할 수 있는 기제였으나 일부 ‘-기’형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국어에서는 ‘-기’가 ‘-음’보다 더 능동적인 기제인 동시에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의 형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18세기에 들어와서 ‘-음’이 대량으로 ‘-기’로 교체되는 조건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다. 주022)
‘-음’에서 ‘-기’로 교체가 시작된 시기는 17세기 『박통사언해』와 같은 구어체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음’의 ‘-기’로의 교체시기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당시 여항에 널리 배포된 『삼강행실도』(16세기)에서 본 『여사서언해』가 주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ㄱ)의 예는 ‘-옴/움-〉-(/으)+ㅁ’으로 교체된 동명사 형들의 예들이다. 16세기 의도법선어말어미 ‘-오/우’와 결합된 형태에서 ‘-오/우’의 탈락과 함께 매개모음이 삽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ㄴ)의 예는 아직 ‘-옴/움-’의 형태로 실현되는 예들이다. 중세어에서 의도법 선어말어미가 문법적 기능은 소실하였지만 그 잔류 형태가 형태소 배합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쩌면 매개모음의 조음소적 기능으로 잔류된 형태들이다. ㄷ)의 예는 이른바 ‘-음〉-기’가 교체된 예들이다.
ㄱ) 주시믈(여계 1ㄱ), 바듬(여계 2ㄱ), 뉘임은(여계 1ㄱ), 잡으미오(여계 3ㄱ), 어딜미(여계 3ㄱ), 다림이(여계 3ㄱ), 니음이니(여계 3ㄴ), 쓰미(여계 6ㄱ), 나매(여계 6ㄴ), 가지믈(여계 6ㄴ), 니이니(여계 6ㄴ), 가지다은(여계 6ㄴ), 나매(여계 9ㄱ), 가지믈(여계 9ㄱ), 문(여계 10ㄴ), 디나미(여계 10ㄴ), 이시미이(여계 10ㄴ), 붓그림을(여계 10ㄴ), 드미(여계 16ㄱ), 나매(여계 16ㄱ), 가심이오(여계 19ㄱ), 기림애(여계 19ㄱ), 아니을(여계 22ㄴ), 붇그림을(여계 23ㄴ), 니미니라(여논 1ㄱ), 되오매(여논 1ㄴ), 셰오믈(여논 1ㄴ), 애(여논 1ㄴ), 안매(여논 1ㄴ), 뎍즁을(여논 4ㄱ), 게어름믈(여논 4ㄱ), 궁믈(여논 4ㄱ), 파매(여논 8ㄱ), 이심을(여논 8ㄴ), 매(여논 10ㄴ), 자매(여논 11ㄴ), 봄애(여논 29ㄱ), 다리믈(여논 33ㄱ), 아니을(여논 33ㄱ), 오매(여논 33ㄱ), 이매(내훈 4ㄴ), 침을(내훈 6ㄱ), 움김을(내훈 11ㄱ), 싸힘은(내훈 12ㄱ), 너기미니(내훈 16ㄱ), 홈만(내훈 33ㄱ), 막음은(내훈 34ㄴ), 이심을(내훈 34ㄴ), 도으시미(내훈 37ㄴ), 업시을(내훈 42ㄱ), 셩장(내훈 49ㄱ), 감동은(내훈 51ㄴ), 닐음을(내훈 51ㄴ), 거듬은(내훈 53ㄱ), 셤김을(내훈 53ㄴ), 파은(내훈 58ㄴ), 아님이(내훈 62ㄴ), 도음을(내훈 66ㄱ), 니이니라(내훈 70ㄱ), 베품을(내훈 73ㄱ), 이심애(여범 12ㄱ), 가침은(여범 12ㄴ), 기림을(여범 13ㄴ), 우귀매(여범 19ㄱ), 무냥을(여범 50ㄴ), 크믈(여범 60ㄴ).
ㄴ) 교도홈이(여계 2ㄱ), 근심홈을(여계 3ㄴ), 몯홈을(여계 6ㄱ), 피홈은(여계 6ㄴ), 부부되옴은(여계 9ㄴ), 슌홈은(여계 10ㄴ), 이쇼매(여논 1ㄴ), 금이(여논 1ㄴ), 기모홈이(여논 8ㄱ), 홈을(여논 21ㄱ), 틔호미(여논 28ㄴ), 맏당홈을(여논 33ㄱ), 물오며(여논 35ㄱ), 치샤믈(내훈 4ㄴ), 졀당홈이(내훈 7ㄱ), 완만홈을(내훈 48ㄱ), 홈이(내훈 69ㄴ), 경복홈을(내훈 82ㄴ), 편피홈으로(내훈 82ㄴ), 부롬은(내훈 82ㄴ).
ㄷ) 리기(여계 2ㄴ), 살기(여논 21ㄴ), 들레기을(여논 21ㄴ), 오기(여논 32ㄱ), 마시기(여논 33ㄴ), 먹기(여논 33ㄴ), 졉기로(내훈 8ㄱ), 젹기로(내훈 12ㄱ), 갑기(내훈 22ㄱ), 기예(내훈 22ㄱ), 젹누기에(내훈 22ㄱ), 슌젼기(내훈 22ㄱ), 받갈기에(내훈 25ㄴ), 누젹기(내훈 26ㄱ), 슈고롭기로(내훈 29ㄴ), 뢰기(내훈 29ㄴ), 쓰기(내훈 29ㄴ),  브기만(내훈 30ㄱ), 셤기기(내훈 31ㄴ), 가지기(내훈 34ㄱ), 기(내훈 37ㄴ), 어디기(내훈 39ㄱ), 기(내훈 42ㄱ), 젹기로(내훈 42ㄴ), 죵기에(내훈 49ㄱ), 셤기기(내훈 51ㄴ), 깁기(내훈 53ㄱ), 혹기(내훈 57ㄴ), 겸억기(내훈 57ㄴ), 교만기(내훈 57ㄴ), 들기(내훈 60ㄱ), 막기에셔(내훈 60ㄱ), 크기여(내훈 64ㄱ), 들기(내훈 66ㄴ), 샹기(내훈 69ㄴ), 어렵기로(내훈 81ㄱ), 교기로(내훈 81ㄴ), 구로기(여범 18ㄱ), 움기매(여범 50ㄴ), 죽기에(여범 50ㄴ).
‘-기’가 대량으로 교체되는 시기와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화의 시기가 서로 엇물려 있다. 주023)
채완(1979 : 99), 〈명사화소 ‘-기’에 대하여〉, 『국어학』 8. 채완 교수는 ‘-는 것’과 ‘-기’는 일산용어, 서민어로부터 그 세력을 넓혀 나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음’에서 ‘-기’로의 교체조건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국어에서도 ‘-음’에서 ‘-기’의 분포상의 제약을 후행 서술어의 제약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18세기 이들의 교체기의 교체조건으로 설명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채완(1979:101) 교수는 후행 서술어와의 공기 조건에서 ‘보다, 듣다, 알다, 개닫다’ 드으이 지각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기’와 호응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하였으나 ‘-음〉-기’의 교체조건으로서 설명력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장석진(1966) 교수는 ‘-음’이 문어적이고 추상적, 개념적 질적인데 비해 ‘-기’는 ‘구체적, 사실적, 양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임홍빈(1974) 교수는 ‘-음’은 [+존재][+대상성]의 자질을 ‘-기’는 [-존재][-대상성] 자질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일찍 정인승(1956)은 ‘기정’과 ‘미정’의 차이로 임홍빈(1974)은 ‘대상화’ 자질로 설명해 왔다.
18세기 ‘-음’이 ‘-기’의 발달과정에서 그 기능이 축소되면서 점차 ‘-기’가 확산되는 동시에 ‘-느 것’ 형식의 명사문으로 확장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형태소 배합에서 ‘-우/우’ 의도법 선어말어미의 탈락과 함께 ‘-음’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 동사계열은 18세기 당시에도 ‘’, ‘홈’, ‘기’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들 부류가 대체적으로 ‘-ㄴ(관형사형) 것’의 형식으로 발전한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옴/움’이 ‘ㄱ’로 교체되는 발단은 ‘오/우’이 탈락과 함께 단순한 [사실성(factive)]의 경우에서 [과정성(process)]의 의미가 분화되면서 점진적으로 ‘옴/움〉기’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과거시상이 완료와 과정성(진행성)의 분화로 ‘-아+잇-〉-엣/앳-〉-었/았-’의 통합과 함께 ‘-고+있-’이라는 문법기제가 발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6. 삽입모음 ‘-오/우-’의 동요

중세어에서 화자의 의도를 나타내는 의도법이라고 하는 ‘-오/우-’는 관형사형어미와 결합하면 그 뒤에 오는 피수식어가 관형사형으로 쓰인 동사의 목적어임을 나태내고 그 밖의 어미와 결합하면 1인칭 주어와 호응되는 문법범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명상형어미 ‘-ㅁ’과 설명법어미 ‘-’와 의도법 ‘-려’는 ‘-오/우-’의 문법적 기능이 소멸된 이후에도 반드시 이 삽입모음과 결합하였는데 16세기에 들어서서 이 삽입모음이 탈락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명사형과 결합에서 동요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18세기 국어에서도 삽입모음 ‘-오/우-’의 동요는 그대로 이어지면서 특히 처격과의 결합 환경에서,
‘-매’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

6.7. 곡용 ‘ㅁ+ㅐ’와 연결어미 ‘-매’의 혼란

ㄱ)의 예와 같이 명사형과 처격 ‘애’의 결합형이 ‘ㅁ-+-애’의 결합이냐 혹은 ‘-매’의 결합이냐는 연분철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곡용환경이 활용환경으로 문법화를 거친 결과로 볼 수 있다. 16세기 단계에서 “여희여 오매 날리 더니 도라오니 홀연히 비치로다”(두시 10)에서 ‘오매’는 ‘오[來]-+-오(의도법선어말어미)-+-ㅁ(명사형어미)-+-애(처격조사)’의 구성으로 ‘-오-’의 양태요소가 상성이기 때문에 ‘-ㅁ-’이 명사형이다. 따라서 ‘-매’는 아직 어미로 재구조화를 거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국어에서는 곡용형이 활용형으로 문법적 변화를 반영하는 교체형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ㄱ) 이 글을 닑그매도 오히려 닑지 아닌 젼과 흐면(어제서 6ㄱ)
야용을 말며 들매 의식을 폐티 말며(여계 6ㄱ)
얼굴을 헙슈록이 고 나매 료됴히 도 짓고(여계 16ㄱ)
 번 자매 바로 하빗 나기지(여논어 11ㄴ)
녀ㅣ 츌가매 부쥬ㅣ 친이 되나니(여논어 21ㄱ)
존친에 믿며 부모의게 졈미(여논어 26ㄴ)
손이 오매 탕이 업서(여논어 33ㄱ)
조차오매 가난 가히 받긔 들리디 몯  니라(여논어 35ㄴ)
왕매 움즉여 물오며(여논어 35ㄴ)
졔애 이매 나라히 편안니(여논어 20ㄱ)
홈이 이시면 움기매 반시 허믈이 업고(여논어 34ㄱ)
인을 베프매 반시 친을 목을 몬져고(여논어 72ㄴ)
싀어미 졋 먹이매 산남의 귀 윤을 육고(여범 18ㄱ)
야흐로 우귀매 지아비 슈자리에 가 죽거(여범 18ㄱ)
 익글매 손을 버혀(여범 28ㄱ)
다 움기매 반시 의에 합며(여범 51ㄱ)
『여사서언해』에서는 ㄱ)의 예가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매’는 ‘-ㅁ+-ㅐ’의 곡용의 환경에서 처소나 시간의 의미가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로 전환되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국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문법범주의 재편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8. 부사화접사 ‘이/히’의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
부사화 접사 ‘이/히’의 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근대후기 국어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뒤에 ‘-’가 연결될 때 부사화접사 ‘이/히’가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를 보이고 있다.
ㄱ) 아답게, 닉게(여논어 18ㄴ), 길게(여논어 22ㄴ), 교티케(여논어 26ㄱ), 이즈러디게(여논어 34ㄱ), 들케(여논어 36ㄱ), 맏걷게(여논어 12ㄴ), 늗게야(여논어 26ㄱ), 넉넉게(여논어 67ㄴ)
ㄱ)의 예들처럼 부사화접사 ‘이/히’의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되는 환경 조건이 대체로 ‘-’와 통합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사동법이라는 문법 범주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7. 번역어와 어휘

7.1. 번역어

7.1.1. 한문 원문의 ‘以’는 일찍 한자 차용 어휘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것인데, 이것에 대응되는 번역어는 ‘’이다. 그런데 ‘’의 통합 분포는 아래와 같이 매우 넓다.
ㄱ) 으로 라(여범 24ㄴ)
ㄴ) 數수年년(여계 3ㄴ), 대개(여계 4ㄱ), 힘(어제서 6ㄴ), 막음은(내훈 34ㄴ), 나라히(여논어 20ㄱ), 足죡히(여계 24ㄴ)
ㄷ) 야(여계 13ㄴ), 야(여범 8ㄴ)
ㄹ) 로(여범 8ㄴ), 로(여범 8ㄴ) 義의로(여범 21ㄴ), 로(여범 8ㄴ), 이실로(여계, 4ㄱ)
ㅁ) 시러곰(여계 4ㄴ), 더으며(여계원서 2ㄴ), 一일通통을(여계원서 4ㄱ), 면(여계 6ㄱ)
ㅂ) 일워곰(여계서 4ㄴ)
ㄱ)의 예에서 ‘’가 단독 성분으로 사용되는가 하면, ㄴ)의 예처럼 명사나 부사 아래 통합되는 보조사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ㄷ)에서 ㅁ)까지는 부사형어미나 격조사와도 통합되는 보조사적 기능을 하고 있다. ㅂ)은 ‘시러곰’(여계 4ㄴ)와 ‘일워곰’(여계서 4ㄴ)에서처럼 강세 첨사와 통합 서열이 달라지기도 한다. ‘’의 통합 분포는 ‘으로’와의 통합이 제일 높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국어의 자격을 나타내는 ‘로서’와 재료나 수단, 도구의 의미를 갖는 ‘로써’와 구분되듯이 ‘로써’로 점차 이행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7.1.2. ‘與’의 번역어인 ‘다’, ‘다’과 같은 이형태와 함께 ‘다만’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ㄱ) 다(여계 70ㄴ), 다(여계 18ㄱ), 다몯(여내훈 6ㄴ), 다(여내훈 46ㄴ), 다(여내훈 46ㄴ)
ㄴ) 다만(여계 6ㄴ), 다만(여내훈 8ㄴ)
중세어에서도 ‘다’, ‘다몯’, ‘다몯’, ‘다믓’, ‘다믇’ 등의 있듯이 이 문헌에서도 ‘다, 다몯, 다’과 같은 이형태와 함께 이미 ‘다만’으로 굳어진 예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은 선행 명사구가 공동격과 호응관계를 같는 경우 현대국어의 ‘함께’, ‘더불어’로 어형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다’이 자음동화에 의한 ‘다’, ‘다만’으로 바뀐 어휘는 전혀 다른 제한의 의미를 갖는 어휘로 분화되었다. 근대국어에서 ‘다’과 ‘다만’의 분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7.1.3. ‘使’의 번역어인 부사어 ‘야/여’, ‘야곰’, ‘여’, ‘여곰’와 ‘부리-’와 같은 어휘들이 나타난다.
ㄱ) 사오나온 말을 니디 말며  후에 말야 사의게 슬여(여계 2ㄴ)
ㄴ) 儒유臣신으로 여곰 註주解야(여계서 3ㄴ)
保보와 傅부와 姆무로 여곰 朝됴夕셕애 宮궁闈위에 進진講강야(여계서 4ㄱ)
芸운閣각으로 여곰 刊간印인야 廣광布포게 노니(어제서 6ㄱ)
賢현婦부ㅣ 될 디라 젼 사으로 여곰 홀노 千쳔古고애 아답게 아니  니라(여논어서 1ㄴ)
ㄷ) 淫음樂악과 慝특禮례를 心심志지예 부리디 말라 니(여사서 72ㄱ)
중세어에서는 아래ㄱ), ㄴ) 예에서처럼 ‘부리-’, ‘시키-’가 ‘使’의 번역어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ㄱ) 使者 브리신 사미라.(석보 6:2ㄱ)
四天太子 곧 那吒類니 能히 鬼神 브리니라.(능언 6:14ㄴ)
吏 다리 거시오. 民은 브리 거시오.(법언, 2:196ㄴ)
ㄴ) 彩色로 佛像 그리 제 거나  시겨 야도 다 마 佛道 일우며(석보 13:52ㄴ)
만이레 어버 시기 일로 외니라 야 내 들 바 면(번소 7:2ㄴ)
마라 애라 너 시기노라 개더긔 공도 바다 네게 두다가 보내고랴(순천김씨 언간)
그러나 『여사서언해』에서는 ‘부리-’가 단 한 차례 나오는 이외에 거의 대부분 ‘야/여’, ‘야곰’, ‘여’, ‘여곰’이 실현되고 있다.

7.1.4. ‘及’의 번역어로는 ‘밋’, ‘믿’이 나타나고 있다.

8. 어휘의 변화

8.1. 한자 번역어

다음으로 특이한 희귀한 고유어가 나타나는 사례를 살펴보자.
ㄱ) 아을 나 매일 희여도 오히려 그 尫왕가(여계 9ㄱ)
귀로 길말을 듯디 말며 눈으로 샤특히 보디 말며 (예계 15ㄴ)
檢검은 허믈 뎜검단 말이라 强강良냥은 에딜긘 거동이니(여논어 13ㄴ)
‘희여도, 길말, 에딜긘, 이긔여, 들네여, 장를, 며, 야, 밧람을, 벙어리다. 어긔룯지’ 등의 희귀한 어휘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번역문이기 때문에 한자어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8.2. ‘-()-’의 탈락과 축약에 의한 조어

어근에 ‘-’가 결합하는 많은 어휘들이 ‘-’를 생략하는 경향이 많이 보이고 있다. ‘부즈런을’(여계 6ㄴ)의 예에서처럼 ‘부즈런(홈/)을’의 구성에서 ‘홈/’이 생략된다. 이것은 근대국어 단계에서 축약에 의한 새로운 조어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8.3. ‘-/쓰-’의 혼용

현대어에서는 ‘쓰-’가 ‘(글을) 쓰다’, ‘사용하다’, ‘(맛이) 쓰다’ 등을 의미하는 동음어이지만, 15세에는 ‘쓰[書]-’는 ‘(글을) 쓰다’를 의미했으며, ‘[用]-’는 ‘사용하다’, ‘(맛이) 쓰다’ 등을 의미하여 서로 구별되었다. 이 ‘쓰다’가 15세기와 16세기 문헌에서는 ‘스다’로 나타나기도 근대국어 단계에 들어서서 이들의 의미가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다.

8.4. 방언적 요소

『여사서언해』는 남부 방언화자인 이덕수(1673~1744)가 1734년 왕명을 받아 당나라의 『여사서』를 한글로 풀이해 민간에 반포한 것이다. 따라서 방언적 요소가 발견되는데 ‘애/에’애/에 혼기를 보여주는 “가네(여논어 66ㄱ)”나 비어두음절의 ‘’가 그대로 나타나는 ‘아알(여논어 66ㄱ)’의 예들은 남부 방언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있다. 특히 ‘氏 시’의 표기는 예외 없이 ‘시’로 표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 마무리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사서언해』는 조선조 여성 교육을 위해 활용된 교화서 가운데 하나이다. 영조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여사서언해』와 소혜왕후가 쓴 『내훈』을 함께 부녀자 교육서로 활용하기를 바라는 바와 같이 여성 기초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서언해』는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지만 유교적 국치를 기본으로 하였던 조선의 여성교화서로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중국과 조선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위치의 변화나 민속적인 유사성과 차이 등을 밝혀내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반 교훈서들과 문장의 첨입과 효충열의 고사들이 이 책 저 책 사이에 삽입된 예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한 18세기 국어사 자료가 아닌 16세기에서 20세기에까지 이르는 국어사 발달을 조명할 수 있는 근대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간본 『여사서언해』와는 약 1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향후 초간본과의 정밀한 비교 연구를 통해 근대어에서 현대어로 넘어오는 과정에 국어사적 연구를 위한 핵심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여사서언해』(1737)는 이보다 앞선 문헌인 『노걸대언해』(1670)와 이 보다 뒤에 나온 『경신록언해』(1796)와의 중간에 위치한 문헌 자료로서 국어사 연구뿐만 아니라 여성교육사, 여성사 등 전반에 걸쳐 활용도가 매우 높은 자료임이 분명하다. 본 주해서를 만드는 데 일일이 주석을 달지는 않았으나 이숙인 교수의 『여사서』 연구 성과는 많은 지침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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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학언해』 해제
이상규 (경북대학교 교수)

1. 『여소학』 문헌 해제

『여소학』은 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다. 이본은 3종류로 알려져 있는데 원필사본과 두 가지 이본이 있다. 현재 원필사본은 소실되었고(그 을 즈니 화예 와더라) 등초본 2종은 학계에 알려져 있다.
먼저 원필사본은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주001)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1846~1918)는 조선 말기 경학자이면서 문인이다. 본관은 영해이고, 자는 경모(景模), 호는 호산(壺山) 또는 풍산(楓山)이다. 주요 저술로 경전 주석서인 『칠서상설』과 『여소학언해』가 있다. 특히 그가 지은 『논어집주상설((論語集注詳說)』은 널리 알려져 있다.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 눌곡리에 풍림정사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가 고종 19년(1882)에 부녀자들에게 필요한 글을 모아 언해한 6권 6책의 필사본 부녀자용 교육서이다. 호산은 헌종 12년(1846) 3월 1일에 충북 회인군(懷仁郡) 눌곡리(訥谷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다닌 적은 있지만 주로 눌곡리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문집인 『호산집(壺山集)』의 부록 권1에 나오는 연보에 임오년(37세 때) 4월 조에 ‘여소학성(女小學成)’이라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책이 188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002)
홍윤표, 『여소학(女小學)』, 해제, 홍문각 영인본.
호산이 이 책을 쓴 동기에 대해,
“집 뎨 칠팔셰예 언문을 강 통야 익히넌 거시 허탄 쇼셜이라 움과 괴이 닐이 규문에 하관이냐 고 이젼 셩현의 말심얼 뫼와 조고마치 얼 만드러 리치고 출가할 졔롱의 너허 보더니 근친 시에 그 을 즈니 화예 와더라”
라고 하여, 자기 집 매제가 7, 8세에 언문을 익힌 후 허탄한 소설이나 읽고 있으니 새롭게 성현의 말씀을 모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기록했던 책을 매제의 혼사 때 농에 넣어 보냈는데, 근친 왔을 때 물어보니 화재로 타버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이 책을 언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 에 언문이 잇스니 그 글 지으시니 셩인이라 부인과 어린 희도 울만 니 로 침에도 가히 통할 거시라 그 글로 경셔를 번역야 부인덜노 우게 엿더니 셰샹이 리고 시쇽이 무너저셔 이젼 법이  어둡더라 부귀가 부인덜언 너머 편야 샤치 풍쇽만 날노 셩고 간난니 치산에 골몰야 언문얼 겨를치 못더라”
언문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한글 소설 따위가 아닌 경서와 사서를 번역하여 부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함으로써 시속의 풍화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그 말과 그 닐이 경서에 잇고 긔예 잇넌지라 두루 외와셔 이 얼 만드러 녀의게 주노라”라고 하여 책을 만든 과정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은, 한문 대문을 한자 한 글자마다 훈과 음을 밝히고, 구두점을 붉은색으로 찍은 다음, 난상에 한글 구결을 표시하고 있다. 그 다음 단락별 언해문을 제시하고 있어 다른 판본류 언해 방식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이본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호산의 1차 친필본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의 후손이 필사한 등사본으로 두 이본만이 남아 있다. 하나는 198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한 『호산집』의 제4책에 영인되어 있다. 이 자료는 『여소학』을 저본으로 하여 등사한 것으로 호산의 후손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
또 하나는 홍윤표 교수의 소장본으로 홍문각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것이 있다. 홍윤표 교수는 이 두 이본이 거의 차이가 없으며, 필체까지도 동일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홍윤표 소장본은 한문 원문에 주서(朱書)로 점을 찍어 놓고, 그 난상에 한글로 구결을 써 놓았는데 비하여, 아세아문화사 영인본은 그러한 좌점(左點)과 구결이 없다는 점일 뿐이다.
책을 언제 누가 썼는가? 두 가지 등사본은 그 필사 연대가 각각 다르다. 아세아문화사 영인본은 1915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이고, 홍윤표 소장본은 1906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홍윤표 교수 소장본의 〈여소학 끝에 쓰는 글〉에는, “병오 모츈 길일에 긔록노라(병오년(1906) 3월 길일에 기록하노라.)”라고 하고, 〈발문〉에는, “무신년(1908) 맹하(4월) 망조에 또 기록하노라.”라고 하였다. 〈글자의 훈이 같은 동음이의어 한자 고찰〉에서는 “임신년(1932) 7월 로봉 64세 늙은이가 옮겨 씀”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그 후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등사의 기록이 『여소학』 본문의 등사는, “병오년(1906) 모춘(3월)”에 이루어졌고, 발문은 2년 뒤인 “무신년(1908) 맹하(4월)에 또 기록하노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 뒤편에 〈자훈방언동이고(字訓方言同異考)〉에서는, “임신년(1932) 7월 로봉 64세 늙은이가 옮겨 씀”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글을 쓴 ‘노봉’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호산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나 그 후손으로 보인다. 이 책의 최종 등사 시기는 “임신년(1932) 7월”이나 『여소학』 본문의 등사는 “병오년(1906) 모춘(3월)”에 이루어졌으며, 발문은 본문을 등사한 2년 뒤인 “무신(1908)년 맹하(4월)”이라고 할 수 있다. 곧 호산 박문호의 초고 필사 연대는 임오년(1882)이고, 이를 다시 재서한 것은 병오년(1906)이며, 후발을 쓴 것은 무신년(1908)이다. 그 후 노봉(魯峯)이라는 이가 발문을 덧붙여 정서한 것은 임신년(1932)이다.
홍윤표 소장본은 책 크기가 30.4cm×20.8cm이고, 반엽 광곽은 25cm× 16.5cm, 판심 어미는 없고 장차만 판심의 하단에 쓰여 있다. 무계 10행 22자. 모두 6책 328장으로 되어 있다. 제1책의 앞에 ‘제사(題辭), 목록’이 있고, 권1의 본문이 이어진다. 제6책의 뒷부분에 ‘여소학발(女小學跋)’과 ‘후발(後跋)’, 그리고 ‘자훈방언동이고(字訓方言同異考)’가 들어 있다.
그 편찬 형식은 매우 특이하여 앞에 원문인 한자를 쓰고, 그 한자 하나하나의 아래에 일일이 모두 한글로 훈과 음을 달고, 그 원문의 다음에 한글로 언해를 하였다. 원문에는 한자와 그 훈음을 달았지만, 언해문은 순수하게 한글로만 썼다. 이와 같은 형식은 동경대학본 『백련초해』와 거의 동일한 형식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언해 방식은 대개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문헌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한자음만을 달아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예컨대 『여훈언해』 등), 이 책은 한자 하나하나에 모두 석음을 달고 있어서 매우 특징적이다. 그런데 그 석음도 규범적인 석음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맥에 따라 다르게 달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이 책에 인용된 문헌은 ‘『주역(周易)』,『좌전(左傳)』,『국어(國語)』,『사기(史記)』,『내훈(內訓)』,『예기(禮記)』,『여계(女誡)』,『소학집해(小學集解)』,『모시(毛詩)』,『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소학언해(小學諺解)』,『오륜행실(五倫行實)』,『안씨가훈(安氏家訓)』,『논어(論語)』’ 등 고거제서(考據諸書)가 대단히 많다.
본고는 홍윤표 교수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등사본인 관계로 오자나 오서가 엄청나게 많이 나타나 어학서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여성 교육서로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다.

2. 어문학적 특징

『여소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교체기에 등사된 것이지만 실재로는 19세기 후반 고종 19년(1882)에 호산의 표기법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충청 방언의 화자가 쓴 관계로 충청 방언의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 쓰인 한글 표기는 19세기 말의 충청도 회인 지역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한글로 표기되어 있는 한자의 석음과 언해문은 19세기 말의 충북 방언을 반영하고 있어서, 국어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1 표기법상의 특징

첫째, 표기법이 분철표기로 정착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과도분철표기 현상과 더불어 문법의식의 확대로 형태소 재분석 표기법이 많이 나타난다.
일음을/이름을(제사1ㄱ)(2:33ㄱ), 올은/옳은(1:14ㄴ)(2:8ㄴ), 은/빠른(1:22ㄱ), 안즐안/앉으란(2:15ㄴ), 할우넌/하루는(2:38ㄴ).
형태소 경계 곧 곡용이나 굴절의 환경에서 과도 분철 표기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어간의 기본형을 유지하려는 의도의 재분석 표기도 많이 나타난다.
직히여(2:7ㄱ), 식히면(2:19ㄴ), 족하를(2:20ㄱ), 끗희(4:24ㄴ), 것치(4:6ㄱ), 식혀(4:26ㄱ), 닷코(4:41ㄱ), 엽헐(4:41ㄱ), 맛흔(5:14ㄱ), 겻희(5:20ㄱ), 직힐세(5:43ㄴ)
분철의식과 함께 문법적 표기 의식의 발로로 재분석 표기형이 다량으로 나타나고 있는 표기법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둘째, 어말 ‘ㅅ’과 ‘ㄷ’은 거의 ‘ㅅ’ 표기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밧지/받지(1:15ㄱ), 낫슬/낯을(1:18ㄴ), 뻣고/뻗고(1:20ㄴ), 듯도/듣도(1:23ㄱ), 겻희서/곁에서(1:40ㄱ), 돗설/돝을(2:13ㄱ), 갓게/같게(3:2ㄴ), 밧세/밭에(5:24ㄱ)
위의 예에서처럼 어말 ‘ㄷ’과 ‘ㅅ’은 대부분 ‘ㅅ’으로 통일되었으며 ‘밧세[田]’처럼 어간 말음이 ‘ㅅ’으로 재구조화된 충청도 방언의 특징도 드러난다.
셋째, 자음동화 표기가 표기법에 반영되어 있다.
빅기(1:20ㄱ), 옹겨(1:27ㄱ), 낭겨(1:27ㄱ), 익게(1:29ㄴ), 성기고(1:39ㄴ), 빅기지(2:31ㄱ), 쪽껴서(5:35ㄴ)
어말 정지음은 ‘t+k 〉 k+k’, ‘m+k 〉 ŋ+k’와 같은 연구개 자음화 현상이 뚜렷하다. 그리고 [+obstruent] 자음은 [+sonorant]자음으로 동화하는 위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음동화를 그대로 음소론적 표기를 하면서 변자음화가 보인다.(‘쪽겨서, 씩기고, 코’ 따위)
넷째, 어말자음군의 단순화 현상은 현재의 충청도 방언의 현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익되/읽되(1:12ㄴ), 밥지/밟지(1:20ㄴ)(2:32ㄱ), 발끼를/밟기를(1:23ㄱ), 극지/긁지(1:28ㄱ), 말꼬/맑고(2:7ㄱ), 담께/닮게(2:15ㄱ), 박지/밝지(3:4ㄴ), 측이/칡이(4:26ㄴ), 북히며/붉히며(5:42ㄴ), 말근/맑은(5:42ㄴ)
‘ㄺ’은 ‘ㄱ’과 ‘ㄹ’로 실현되고 있다. 중부 방언과 남부 방언이 교체하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ㄼ’은 ‘ㅂ’으로 ‘ㄻ’은 ‘ㅁ’으로 실현되고 있다.
다섯째, o〉u 표기가 널리 확산되어 있다. 현재 중부 방언에서도 o〉u 표기는 확산 중에 있는 것인데, 19세기 말 이미 이러한 현상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루(2:8ㄱ), 계우(2:15ㄴ), 한부루(4:58ㄱ), 함부루(4:32ㄴ) 루(5:12ㄴ), 도적랴구(5:14ㄱ), 루넌(3:22ㄴ), 일굽(5:20ㄱ)

2.2 음운 체계와 음운 현상

먼저 음운 체계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모음 체계에서 ‘으:어’의 대립이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은/는’과 ‘을/를’이 ‘언/넌’과 ‘얼/럴’로 표기된 예들이 매우 많이 보인다.
‘어:’은 예외 없이 ‘으:’로 표기되는데 장모음 ‘어’가 고모음 ‘으’로 상승되는 충청도 방언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중세어에서 상성조의 ‘어:’는 ‘으:’로 상승되었으며, 이를 표기법에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계집〉기집’과 같은 ‘에〉이’ 현상과 ‘오〉우’ 현상이 통합적으로 모음 체계의 재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원순모음화 현상이 나타나며 표기법상 의고적인, 곧 원순모음화에 이탈하는 예들도 나타난다.
어둡더라(제사:2ㄱ), 알움온(1:29ㄴ), 압푸더니(1:38ㄴ), 시푼(1:26ㄴ), 시푼(2:2ㄱ), 무면(1:40ㄴ), 베푸니(2:16ㄴ), 물(2:25ㄴ), 절문이(2:29ㄱ), 우룸으로(3:42ㄴ), 노푸니(4:14ㄱ), 분(4:44ㄱ), 무룹에(4:44ㄱ), 시무고(5:11ㄱ), 가풀(5:28ㄱ), 구술(5:29ㄱ), 푸지(5:32ㄴ)
원순모음화 현상은 어휘부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곡용이나 활용의 환경인 형태소 경계에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움라우트 현상도 보이며, ㅣ-모음 순행동화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듸리여(1:8ㄴ),(2:2ㄴ), 듸리되(2:44ㄴ), 지픵이(1:27ㄱ), 길(1:30ㄴ), 기지(1:30ㄴ), 기니라(1:37ㄴ), 기럴(1:37ㄴ), 기씩(2:9ㄴ), 든(2:15ㄱ), 겨떠니(2:22ㄱ), 듸럽히니(2:34ㄱ), 끼리요(2:37ㄴ), 두루이(4:42ㄴ), 키니(5:19ㄴ), 오비(5:21ㄱ), 뵈일만치(5:33ㄴ), 듸럽피지(5:39ㄱ)
움라우트 현상은 개재자음 [+coronal]자음인 ‘ㄹ’이 있어도 이 현상이 적용되고 있다. 음운 환경에 별 구애를 받지 않고 확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전설모음화 현상도 나타나며 아울러 과도 교정형이 많이 나타난다. 곧 전설모음화 현상은 치찰음 ‘ㅅ’, ‘ㅈ’, ‘ㅊ’과 모음 ‘으’가 직접 결합하면, 모음 ‘으’가 전부화 모음 ‘이’로 교체되는데, 그 역으로 ‘이’가 아닌 원래대로 ‘으’로 되돌리는 과도 교정형이 대량으로 나타난다. 19세기 후반부터 생겨난 이 현상은 음운 현상의 단순한 정착 과정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말심(1:7ㄴ)(2:3ㄴ), 반찜(1:21ㄴ), 거만시럽고(1:21ㄴ), 덕시럽고(1:22ㄴ), 기치기럴(1:29ㄴ), 거시리지(1:32ㄴ), 변덕시럽기도(1:37ㄱ), 침도(2:6ㄱ), 시린(2:31ㄴ), 시린(2:35ㄱ), 질기던(4:2ㄴ), 못하여씨면(4:3ㄴ), 시리넌(5:4ㄱ), 시려도(5:32ㄴ), 질기니(5:22ㄴ), 심얼(5:30ㄴ), 씨러지니(5:35ㄱ)
위의 예처럼 전부모음화는 어휘 내부뿐만 아니라 곡용이나 활용과 접사와 같은 문법 형태와 그 경계의 환경에까지 확대된 음운현상이다.
발즈고(1:2ㄱ), 리츠니(1:2ㄴ), 넘츠게(1:20ㄱ), 즈기럴(1:24ㄴ), 스려지(1:24ㄴ), 슬어고 (1:36ㄱ), 즈지(1:37ㄱ), 츠지(1:38ㄴ), 곤츠지(2:5ㄴ), 츠거던(2:14ㄴ), 츠며(2:19ㄱ), 즈게(2:28ㄴ), 미츠지(2:30ㄱ), 떠러즈면(4:3ㄴ), 측이(4:26ㄴ), 즌(4:30ㄴ), 이즈게(4:34ㄱ), 해츠랴(5:17ㄴ), 즈니(5:20ㄴ)
위의 예처럼 ㄷ-구개음화 결과 ‘디-〉지-’가 과도 교정에 의해 ‘디-〉지-〉즈-’로 바뀐 예들을 비롯한, 전부모음화에 역행하는 과도 교정형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사회언어학적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대부 층에서는 ㄷ-, ㄱ-구개음화형이나 전설모음화형을 소위 ‘뭇찌다’라고 하여 ‘상스러운 말씨’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 교정형이 많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ㄷ’ 구개음화가 보이며(‘갓치, 그치지’ 등), ‘ㄱ’과 ‘ㅎ’ 구개음화도 보인다.
치(1:19ㄴ), 쥐즙고(2:3ㄴ), 끗철(4:42ㄱ)
집흔(1:31ㄱ), 지로(4:14ㄱ), 짓듸리여(5:34ㄴ)
심얼(1:35ㄱ), 심써(2:36ㄴ), 세려써(2:39ㄱ), 심이(5:20ㄱ)
길겁게(1:36ㄱ), 김성과(4:59ㄱ), 산김성에(4:5ㄴ), 기니고(5:3ㄴ), 기럼길노(1:34ㄴ)
위의 예에서처럼 ㄷ-구개음화와 ㄱ-구개음화, ㅎ-구개음화형이 보인다. 그와 더불어 ㄱ-구개음화의 과도 교정형이 많이 나타나는 것 역시 전설모음화와 같은 사회언어학적 요인의 결과가 아닌가 판단한다.

2.3 문법적 특징

근대 국어에서 문장의 종류와 구성 성분은 현대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몇 가지 구성 성분의 형태나 기능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가령 주격조사 ‘가’가 중세국어 말에 등장하여 근대국어를 지나며 점차 세력을 넓혀 갔으며, 관형격 ‘ㅅ’은 관형어적 기능이 축소되면서 오늘날 합성어 형성에서 사이시옷 역할 정도로 남게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격조사가 대단히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격조사의 기능이 흩으러져 있는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인덜로(제사 2ㄱ), 혼일노(3:1ㄴ)”의 예에서처럼, ‘-로’가 여격의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금슈에 갓갑기로(1:2ㄴ)”, “늑 터도”에서 처격 ‘-에’가 공동격 ‘-와’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처격은 ‘-에’와 ‘-의’가 혼용되고 있다.
례의를 둘 이 잇니라(1:1ㄱ)
럴 주도 말며(1:21ㄱ)
적장얼(5:36ㄴ)
위의 예처럼 대격 ‘-를’이 주격이나 여격 등의 기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보조사 ‘-꺼지’, ‘-도’ 등이 실현되고 있어 현대 충청 방언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접속어미 가운데 의도를 나타내는 ‘-려면’에 대응되는 ‘-면’이 실현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꼽을 수 있다.
문장의 종결형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평서문 어미가 ‘-니라’에서 ‘-니다’로 바뀌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의문문 어미 가운데 ‘-다’는 축소되고, ‘-ㄴ가’와 ‘-냐’가 활발해졌다. 부정문은 아직도 ‘NP+아니-’의 구조를 보이는 다양한 표현이 나타나며, 부정문에서만 쓰이게 된 ‘-디’는 점차 구개음화한 ‘-지’로 바뀌어 갔다.
명사화 어미로 ‘-음’은 줄어들고, ‘-기’가 늘어나는데, 특히 ‘-음’ 명사화 표현 대신에 ‘~것’ 보문화 구문의 사용이 크게 늘었다. 인용의 보문소라고 할 ‘-고’는 근대국어 후기에 형성되었다.
사동법과 피동법을 각각 담당하는 사동사와 피동사는 그 생산성이 줄고, 간접 사동의 ‘-게 다’와 간접 피동의 ‘어지다’ 형은 사용을 확대해 나갔다. 시제는 새로운 체계를 이루었다. 즉 근대국어 초부터 현재형의 ‘--’가 ‘--’으로 바뀌고 과거형 ‘-엇-’의 쓰임이 늘며, 근대국어 후기에 미래 시제 ‘-겟-’이 형성되어, 새로운 형태의 시제 형태소를 갖추었다. 이들로 인하여 서법과의 관련성이 줄고 시제 중심적 성격의 문법 범주를 형성하게 되었다. 높임법에서는, 객체 높임은 특수한 몇 개의 단어 표현으로 축소되고, ‘--’이 객체 높임의 경계를 넘어 높임법의 모든 하위 범주로 기능을 넓혀 가는 변화를 겪어 현재에 이른다. 선어말 어미 ‘-오/우-’는 기능 부담이 약화되어 점차 소멸해 갔다.
마지막으로, 부정법이나 사동 및 피동 그리고 명사화 구절의 형성 등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접미사 등에 의해 개별화된 형태론적 표현에서 점차 통사적 복문 구조를 가진 장형 구조로 발달해 나가는 방향성을 지적할 수 있다.
“덜에 우지 못”에서 ‘덜에’은 ‘못하다’의 주어이나 관형격으로 실현된 의사주격형이다. 이와 같이 다음은 관형절 주어의 실현 양상을 보이기 위해 먼저 그 실례를 살펴 보자.
[거쳐의 편기럴] 구지 말고(1:24ㄱ)
[식과 며느리의 효고 공경넌] 니(1:28ㄴ)
[효의 집흔 사랑하넌] 맘이 잇넌 니난(1:31ㄱ)
[효의 부모 섬기](1:36ㄱ)
[남의 만무이 보는] 거슬 막으며(2:16ㄱ)
[부모의 식 랑기럴](2:18ㄱ)
[샹의 만넌] 거슬 보면 울고(2:19ㄴ)
[의 능] 걸로 능치 못니계(2:31ㄴ)
[범민의 덕을 일넌] 거슨(2:35ㄴ)
[남의 탈복] 곳을 동쳔의 려 노코(3:48ㄴ)
위의 예처럼 관형절의 주어가 관형격 ‘-의’를 취하고 있다. 중세어에서는 관형절의 주어가 높임의 자질을 갖는 경우 관형격 ‘ㅅ’을 취하기도 하였다.
현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중세 한국어의 관형절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거쳐의 편기럴] 구지 말고(1:24ㄱ)”에서 관형절에는 목적어가 결여되어 있는데,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목적어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곧 ‘구하다’의 목적어는 ‘거쳐’가 된다. 이처럼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성분과 동일한 관형절을 ‘관계 관형절’이라고 부른다.
“[샹의 만넌] 거슬 보면 울고(2:19ㄴ)”에서처럼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주어와 동일하지 않다. 이처럼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성분과 동일하지 않거나, 관형절에 결여된 성분이 없는 관형절을 ‘동격 관형절’이라고 부른다.
[널을 무거워] 운동지 못하(5:30ㄴ)
또한 관형절의 목적어가 주어인 위의 예문이 있다. “널이 무거워 운동(움직이지) 못하므로”와 같은 뜻인데 이는 단순한 오류인지 불확실하다.

2.4 어휘적 특징

어휘는 대체로 ‘쟝은(4:43ㄴ)(길이는)’과 같은 한자어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점이 하나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충청도 특유의 방언적 현상도 나타난다.
‘잘은 적우리와(4:34ㄱ)(짧은 저고리와)’, ‘반편이(1:18ㄱ)(반푼수)’, ‘노주어(4:26ㄱ)(나누어 주어)’, ‘여(4:45ㄴ)(뽀개어)’, ‘적겨(4:49ㄱ)(젖히어)’, ‘남저지와(4:58ㄱ)(나머지와)’, ‘뭇되 어지(5:27ㄱ)(묻되 어찌)’와 같은 충청도 방언어휘가 반영되어 있다.
궁중어인 ‘수되(1:26ㄴ)(놓아)’, ‘수고(2:2ㄱ)(놓고, 올리고)’도 나타난다. 그리고 ‘어실미넌(1:30ㄱ)’, ‘허여즈미(5:16ㄱ)’와 같이 의미가 불확실한 예도 나타나며 ‘좀람한틔도(제사 1ㄱ), 일를(1:4ㄴ)’과 같이 희귀한 어휘도 보인다.
조어법에서 ‘-’가 생략되어 ‘닌(3:50ㄴ)(니{}ㄴ)’과 같은 어형이나 부사형의 축양형인 ‘너서(4:31ㄱ)(넣[入]-+-{어}서)’, ‘써(4:26ㄱ)(씻[洗]-+-어)’와 같은 축양형의 어휘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삽입모음을 넣어 음절을 늘인 ‘트되(4:16ㄴ)([如]-+-{으}-+-되), 이부되(입[着]-+-{으}-+-되)’와 같은 어형도 나타난다.
대명사 ‘어느’가 관형형어미 없이 그대로 관형어로도 사용되는데 ‘어는(4:59ㄱ)’과 같이 관형형어미 ‘-ㄴ’이 첨가된 예도 나타난다.
본문 대문의 한자에 대한 석과 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 6권 뒤 〈발문〉에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얼 츰으로 졍셔 예 음과 톄에만 살피고 글 뜻선 시쇽얼 조서리 졍지 니 엿더니 이제 두 번 졍셔면서 샹고 즉 시 샹량 꺼시 읍지 못지라 메뎌 아국에 글 뜻설 젼혜 쇽담 방언얼 쓰고 혹 문도 써서 아담 것과 쇽된 거시 서로 석끼고 참과 그짓설 분간 쑤 업써서 닐과 물명언 르되 글 뜻선 튼 거시 허다 고로 이졔야 그 튼 거설 인야 조곰 르게 니 길도 긴영 질쟝와 일을실 이를지 일늘위 거튼류 그러허고 또 혹 억지로 르게 것도 잇쓰니 쓸뎨 써용 씰고와 날일난 날 늘샹 거튼류 그러허고 그 즁에 억지로 랴 여도 못넌 것도 또 잇쓰니”
위의 설명처럼 한자의 석(새김)은 시속을 쫓았으나, 동의적인 뜻을 가진 경우에는 임의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한자의 음도 시속을 따랐기 때문에, 현재의 음과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매우 많이 있다.
者적쟈(1:4ㄱ), 義글쯧의(1:6ㄱ), 曉알호(1:7ㄱ), 數조삭(1:8ㄱ), 后화후(1:8ㄱ), 諺시쇽말언(1:9ㄱ), 諺언문언(1:11ㄱ), 烈울렬(1:11ㄴ), 品픔수픔(1:13ㄱ), 季말계(1:16ㄴ), 論의론론(1:22ㄴ), 庭당뎡(1:24ㄴ)
위의 예에서처럼 글자의 자석이 시속을 쫓은 관계로 현대어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解풀(1:4ㄱ), 曉알호(1:7ㄱ), 昭발글죠(1:8ㄱ), 召불을죠(1:8ㄱ), 便문듯변(1:12ㄴ), 革죽격(1:14ㄱ)
위의 예에서처럼 글자의 자음도 시속을 쫓은 관계로 현대어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k/h의 대응은 당시 자서의 영향인지 실제 현실음의 반영인지는 불확실하다.
諺언무언(1:11ㄴ), 不안향불(1:16ㄱ)/不안햘불(1:16ㄱ), 陰그늘은(1:17ㄴ)
이 책은 필사본인 관계로 위의 예와 같은 오자가 매우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료를 이용하는데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참고 문헌〉

안자추/김종완옮김, 『안씨가훈』, 푸른역사, 2008.
유향지음/이숙인 옮김, 『열녀전』, 글항아리, 2013.
이상규, 『여사서언해』 해제, 세종기념사업회, 2014.
이선영/이승희, 『내훈』, 채륜, 2011.
홍윤표, 『여소학』 해제, 홍문각 영인본, 1989.
『여훈언해』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여훈(女訓)』과 『여훈 언해(女訓諺解)』의 간행

『여훈 언해』는 중국 명나라에서 찬술(撰述)된 한문본 『여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그러면 한문본 『여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찬술된 책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훈 언해』의 맨 앞에 나오는 「어제 여훈서(御製女訓序)」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제 여훈서」는 명나라 11대 황제인 세종(世宗)이 1530년에 쓴 글이다. 아래 「어제 여훈서」의 시작 부분을 보자.
짐(朕)의 어머니인 장성자인 황태후께서 옛날 제후왕의 집에 계실 때 일찍이 한 편의 글을 지으시니, 그 서명(書名)이 이른바 『여훈(女訓)』이다.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 공예연인관목순성헌황제(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께서 친히 쓰신 글을 내리셔서 책의 앞머리에 올려놓으시고, 어머니께서 또한 스스로 그 다음에 서문을 쓰셨다.
(朕聖母章聖慈仁皇太后 昔在藩邸 嘗著一書 名曰女訓 朕皇考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親灑奎章 冠諸卷首 聖母亦自序於其次)〈여훈서:1ㄱ〉
위의 기록에서 『여훈』은 명나라 세종의 어머니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가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시기는 명나라 10대 황제 무종(武宗) 때인 1508년으로 밝혀졌는데, 그것은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 말미에 ‘大明正德戊辰春王正月上浣日書’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후 세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1530년에 다시 『여훈』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세종의 「어제 여훈서」를 싣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여훈』을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기록은 다음의 『중종 실록』에서 발견된다.
오위장 최세진이 여훈을 번역하여 올리니 전교하기를,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五衛將崔世珍 進飜譯女訓 傳曰令校書館印出)〈중종실록 27년, 9월 12일〉
위의 기록을 통해서 『여훈 언해』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이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위의 기록에 나타난 것 이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재 실책이 전하는 언해본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 언해』 주001)
이 책은 1990년 1월 15일, 홍문각에서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한 바 있다. 이 책도 서명(書名)은 『女訓』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여훈』이라 함은 모두 명나라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번역 간행한 책은 『여훈 언해』라 해서 한문본 『여훈』과 구별하고자 한다.
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저본(底本)인 명나라 『여훈』의 원문에 구결을 달고 번역만 하였을 뿐, 간행 연대나 간행처 등에 관련한 기록이 따로 없어 더 이상 간행에 대하여 언급할 내용이 없다. 이런 가운데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추정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만송문고 소장본이 인조(仁祖) 연간, 특히 1620~164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도 동의하는 바인데, 그것은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에 나타난 언어 현상이 17세기 국어의 특징에 매우 부합되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다음에서 보듯이 『인조 실록』에 여훈을 언급한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임금이 국장 도감에 하교하기를, “대행 왕후는 부드럽고 온순하고 정결하고 조용한 자품을 타고났으며, 인자하고 후덕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잠저에 있을 때부터 시부모님을 잘 섬기어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했으며, 나를 동기간처럼 대하여 사친(私親)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잘하였다. 그리고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서 훌륭히 여훈(女訓)을 준행하였다.”라고 하였다.
(上下敎于國葬都監曰 大行王后 稟柔順貞靜之資 有仁厚恭儉之德 自在邸時 善事舅姑 誠孝篤至 待予同氣 有踰私親 治家有法 克遵女訓)〈인조실록 14년, 2월 3일〉
위의 기록에서 『여훈 언해』의 간행 연대를 직접 언급한 것은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여성의 범절과 법도를 강조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가 이때(인조 14년(1636)) 이미 보급된 것으로 볼 때, 그렇다면 1620~1630년대에 간행되었던 책이 아닌가 한다.
중종 때 간행된 최세진의 『여훈 언해』는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만송문고본의 『여훈 언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를 대상으로, 어떻게 언해가 이루어졌으며 언해본의 서지적 사항과 언어 현상은 어떤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책에는 어제서(御製序)부터 맨 끝의 후서(後序)까지 서문(序文)이 모두 네 개나 있다. 맨 앞에 「어제 여훈서(御製女訓序)」(1530년)가 있고, 그 다음에 순일도인(純一道人)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여훈서(女訓序)」(1508년) 가 붙어 있다. 이어서 같은 시기에 쓴 것이지만 쓴 사람이 나타나 있지 않은 「여훈서(女訓序)」(1508년)가 또 있다. 그런 다음에 본문이 다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여훈 후서(女訓後序)」(1530)가 있다. 여기서도 쓴 시기는 밝혀 놓았으나 쓴 사람은 역시 명기(明記)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네 가지 서문의 끝에 각각 나타나 있는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그 연대를 ( ) 안에 부기해 둔다.
(1) 御製女訓序 嘉靖庚寅季餘十有九日 (1530)
(2) 女訓序 正德戊辰十有一月長至之吉 大明興國純一道人書于中正齋 (1508)
(3) 女訓序 大明正德戊辰春王正月上浣日書 (1508)
(4) 女訓後序 嘉靖九年十二月二十六日 (1530)
위의 네 가지 서문의 끝에 있는 기록에는 한결같이 서문을 쓴 사람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2)의 서문 끝에는 순일도인(純一道人)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순일도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어 (2)의 서문도 쓴 사람을 모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모두 쓴 사람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서문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위의 서문들이 누구의 글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가 있다.
맨 먼저 (1)의 「어제 여훈서」는 어느 임금이 썼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끝의 기록에 나타난 연호가 바로 말해 주고 있다. 가정(嘉靖)은 명나라의 11대 황제 세종(世宗) 주후총(朱厚摠)의 연호로서 1522~1566년의 45년간 사용되었던 이름이다. 이것으로 (1)의 서문은 명나라 세종이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2)와 (3)의 「여훈서」를 쓴 사람에 대해서도 (1)의 「어제 여훈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명나라 세종은 「어제 여훈서」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보필하는 신하인 소(少)와 스승인 총(璁) 등이 이르기를, 짐이 마땅히 서문을 써야 할 것이라 하고, 이제 와서 예관들이 또 이르기를 짐이 마땅히 서문을 써서 어머님의 은덕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다함이 없이 자세하게 보이라 하지만, 짐이 가볍게 거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짐의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이미 앞머리에 서문을 쓰셨고, 또 어머님께서 그 다음에 서문을 쓰셨으니 이제 남아있는 쓸 자리가 없는지라, 그래서 짐이 다시 덧붙여 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 때문에 그 날 어머님 앞에 나아가 글을 쓸 것인지를 여쭈매 곧 어머님의 명을 받게 되니 이르시기를, 네가 그 서문을 써서 모두 마땅히 전하게 하라고 하셨다.
(先該輔臣少傅璁等 謂朕宜爲之序 至是 禮官時等 又謂朕宜序之 闡揚聖母恩德 于以昭示無窮 朕未之輕擧 以爲朕 皇考 旣序諸首 聖母又序諸次 已無餘蘊矣 又不待朕復贅之矣 是日因詣聖母前 奏陳書完 卽蒙慈命曰 汝其序之 庶 可爲傳)〈여훈서:1ㄴ~2ㄱ〉
위의 글을 보면, 『여훈』의 앞머리에는 명나라 세종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쓴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이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두 서문 중의 앞엣것인 (2)의 「여훈서」는 세종의 아버지가 쓴 글이고, 그 다음 것인 (3)의 「여훈서」는 세종의 어머니가 쓴 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2)의 「여훈서」를 쓴 사람으로 되어 있는 순일도인(純一道人)의 실체는 다름 아닌 세종의 생부(生父)인 흥원왕임이 밝혀졌다. 흥원왕은 명나라 8대 황제인 헌종(憲宗)의 아들이며, 9대 황제 효종(孝宗)의 이복 동생으로 원래는 지방 국가의 제후였으나 그의 친자인 세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제 예종(睿宗)으로 추존된 사람이다. 그의 생몰 연대(1476~1519)에서 알 수 있듯이 (2)의 서문을 쓸 때(1508)는 그가 생존하였으나 세종이 (1)의 어제 서문을 쓸 당시(1530)는 친부(親父) 예종의 사후(死後)이기 때문에 서문에서 예종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3)의 「여훈서」를 쓴 세종의 생모도 원래 흥원왕의 번비(藩妃)였으나 아들 세종이 황제가 되자 아버지 흥원왕이 예종이 되면서 어머니는 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가 되었으며, 이어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로 존숭받게 된 것이다. 장성자인 황태후는 『여훈』을 편찬하고 부군(夫君)의 서문과 함께 자신의 서문도 차례로 싣고 있다.
끝으로, (4)의 「여훈 후서」는 명나라 세종 황제의 황후가 쓴 서문이다. 후서는 『여훈』을 편찬하게 된 경위와 여성 교화서의 유래를 들면서, 『여훈』에서 가르치는 바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편찬자인 세종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세종의 비(妃)에게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서에서 필자인 세종의 황후는 자신을 1인칭 대명사인 ‘첩(妾)’으로 지칭하였고 시어머니인 세종의 모후(母后)에 대해서는 성모(聖母)로 칭하고 있다. 「여훈 후서」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비로소 내가 예전에 만든 『여훈』을 네게 주노니 네가 마땅히 힘을 부지런히 다하고 힘써 닦아 거의 나의 글로 책을 만들어 그것으로 장래를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오직 본받으며 공경하여 무심하고 소홀히 하지 말며 잊지 마라.”고 하셨다. 부족한 제가 명(命)을 정중히 받고 물러나 두 번 머리를 조아리고 일러 말하기를, “오호라, 지극하도다. 우리 성모의 왕성하신 마음이여.” … 우리 임금님의 완전하신 효와 깊으신 어짐이 천성에 바탕하여 계시므로 비록 깊은 궁궐에 계시지만 조회(朝會)에 나오실 때와 다름이 없이 지극히 공경하신 교화(敎化)가 나타나서, 부족한 제가 비박(菲薄)한 덕으로 위로 임금님께 상대가 됨을 얻었사오니, 항상 두려워서 능히 여섯 궁(宮)의 어른이 되지 못할까 염려되는 바이다. 매일 오직 이 편찬한 것을 외워서 음미하고 이를 생각하며 이를 공경함으로써 빛난 교훈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구하도다.
(自今伊始以吾昔著女訓 授爾 爾宜勤力勉脩 庶不負吾著書以望於將來之意 爾惟體之敬之 勿忽勿忘 妾拜命而退 再稽首而言曰 嗚呼至矣 我聖母之盛心也 … 仰惟我皇上 純孝深仁 本於天性 雖處深宮 無異臨朝而至敬之化 刑焉 妾以菲德 乃獲上配至尊 恒惕惕然懼弗能爲 六宮之長 日惟誦味是編 念玆敬玆 以求無忝於光訓云)〈여훈 후서:21ㄴ~23ㄴ〉
위에 인용한 후서(後序)의 글 맨 앞부분에 있는 구절 “내가 예전에 만든 『여훈』을 네게 주노니”에서 ‘내’는 『여훈』을 지은 장성자인 황태후를 말하고, 『여훈』을 받은 ‘네’는 황태후의 며느리가 되는 세종의 황후를 가리킨다. 이 밖에 윗글의 뒷부분에 있는 구절 “부족한 제가 … 여섯 궁(宮)의 어른이 되지 못할까 염려되는 바이다.”에서 ‘여섯 궁’은 중국의 궁중에 있었던 황후의 궁전과 부인 이하의 다섯 궁실을 말하므로, 여섯 궁의 어른은 바로 황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황후 자신이 여섯 궁의 어른으로서 그 본분과 그에 따른 제구실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4)의 「여훈 후서」는 세종의 황후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훈 언해』에 있는 네 가지 서문을 검토하면서 쓴 시기와 쓴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 결과 명나라에서 간행된 『여훈』은 11대 황제 세종의 모후(母后)인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에 의해 편찬되었고, 명나라 10대 무종(武宗) 때인 1508년과 세종 때인 1530년의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된 사실이 파악되었다. 그런데 『세조 실록』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여훈』이 또 등장한다.
우승지 이극감과 세자 필선 홍응에게 명하여 전대(前代)의 여훈(女訓)을 찬술(撰述)하여 바치게 하였다.
(命右承旨李克堪 世子弼善洪應 撰前代女訓以進)〈세조실록 5년, 8월 21일〉
위의 기록에 의하면 세조 5년(1459)에 전대(前代)의 『여훈』을 찬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대(前代)의 『여훈』은 앞에서 살펴본 1508년과 1530년에 각각 간행된 『여훈』과는 또 다른 책인 듯하다. 어찌 보면 전대(前代)의 『여훈』은 언해된 책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훈』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간행된 세 가지 책이 있음을 일단 알게 되었지만 그 책들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 이제 세 가지의 한문본 『여훈』 중에서 우리의 언해본은 어느 책을 대상으로 하여 언해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1532년에 간행된 최세진의 번역본은 1459년 판, 1508년 판, 1530년 판의 세 『여훈』 중에 어느 책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인지, 그리고 17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또 세 책 중의 어느 것을 언해한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후자의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에는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 서문 가운데 1530년에 쓴 「어제 여훈서」와 「여훈 후서」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송문고본은 1530년에 간행된 한문본 『여훈』을 언해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전자인 1532년에 찬술한 최세진의 번역본이다. 간행 연대로만 본다면 한문본 세 책이 모두 최세진의 번역본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세 책이 다 번역본의 저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1530년에 간행된 한문본 『여훈』은 최세진의 번역본(1532)보다 불과 2년밖에 앞서지 않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촉급하다고 보고, 홍윤표 교수가 언급한 대로 주002)
홍윤표(1990). 『여훈언해』 해제. 『여훈언해ㆍ규합총서』 영인본. 홍문각.
최세진이 1530년 판 『여훈』을 가지고 번역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게 볼 때 최세진의 번역본은 전대(前代)의 『여훈』이나 1508년 판 『여훈』 중 어느 하나를 두고 번역한 책으로 보인다.

2. 『여훈 언해』의 체재와 내용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2권 2책의 목판본이다. 이 책은 다른 언해본과는 달리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첫째 부분은 한문본의 원문을 전부 그대로 전사(轉寫)해 놓은 것이다. 한문본 부분에 나타나 있는 목차를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여훈서(女訓序)
-여훈서(女訓序)
-여훈목록(女訓目錄)
-여훈(女訓)
규훈 제일(閨訓第一), 수덕 제이(脩德第二), 수명 제삼(受命第三), 부부 제사(夫婦第四), 효구고 제오(孝舅姑第五) 경부 제육(敬夫第六) 애첩 제칠(愛妾第七) 자유 제팔(慈幼第八) 임자 제구(姙子第九) 교자 제십(敎子第十) 신정 제십일(愼靜第十一) 절검 제십이(節儉第十二)
-여훈후서(女訓後序)
이렇게 해서 한문본 부분이 끝나면 뒤이어 둘째 부분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이 언해본이다. 언해본 부분은 「어제 여훈서」부터 「여훈 후서」까지 목차별로 먼저 한문 원문에 한글로 된 구결(口訣)을 첨가한 구결문을 앞에 제시하고, 이어서 국한 혼용의 언해문을 게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언해본에서 볼 수 있는 대역(對譯) 형식의 체재이다. 그런데 언해본 부분에서는 언해문에 있는 한자뿐만 아니라 구결이 달려 있는 한문 원문에도 일일이 한자음을 달아 놓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 책의 독자층인 부녀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면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의 2책은 각각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건(乾)ㆍ곤(坤)의 2책 중에 건책(乾冊)에는 먼저, 원본인 한문본의 전문이 그대로 실려 있고, 그 다음의 언해본 부분은 다시 「어제 여훈서」부터 본문에 해당하는 「여훈」의 네 번째 목차인 ‘부부 제4’까지 구결문과 함께 언해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그리고 「여훈」의 다섯째 목차인 ‘효구고 제5’에서부터 「여훈 후서」까지의 언해본 부분은 모두 곤책(坤冊)에 실려 있다. 건ㆍ곤 2책 중에서 두 번째 책인 곤책은 처음부터 맨 끝의 「여훈 후서」까지 판심제(版心題)는 모두 ‘女訓’으로, 권차(卷次)는 모두 ‘하(下)’로 되어 있으며, 장차(張次)는 1~48장까지로 표시하고 있어 그 체재가 일원화되어 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책인 건책은 판심제, 권차, 장차 등에 있어서 일률적이지 않다. 한문본 부분의 「어제 여훈서」에서 「여훈 목록」까지는 판심제를 ‘女訓序’로, 본문에 해당하는 「여훈」부분은 ‘女訓’으로, 그리고 마지막의 「여훈 후서」 부분은 ‘女訓後序’로 각각 표시하고 있어 조금씩 다르다. 권차(卷次)는 한문본 부분 전체에 표시되지 않았고, 장차(張次)만 한문본 부분을 1~23장까지 일련번호로 매겨 놓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언해본 부분은 다시 「어제 여훈서」부터 차례로 구결을 단 구결문이 먼저 나오고 언해문이 뒤이어 제시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언해본 부분부터는 판심제가 ‘女訓’으로, 권차는 ‘상’으로, 장차는 새로 1장부터 시작하여 42장까지로 각각 기재되어 있어, 같은 건책에 실려 있지만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 사이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구분되어 있어 2권 1책같이 편찬되어 있다. 그러면 건ㆍ곤 2책의 판심에 기재된 사항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차(張次)에서 각 장(張)의 앞면 뒷면을 각각 ㄱ, ㄴ으로 표시하여 덧붙인다.
◇ 건책(乾冊)
〈한문본 부분〉
(목차) (판심제) (권차) (장차)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女訓序 ― 1ㄱ~3ㄴ
-여훈서(女訓序) 女訓序 ― 4ㄱ~6ㄴ
-여훈서(女訓序) 女訓序 ― 7ㄱ~8ㄴ
-여훈목록(女訓目錄) 女訓序 ― 9ㄱ~9ㄴ
-여훈(女訓) 女訓 ― 10ㄱ~20ㄴ
-여훈후서(女訓後序) 女訓後序 ― 21ㄱ~23ㄱ
〈언해본 부분〉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女訓 上 1ㄱ~11ㄱ
-여훈서(女訓序) 女訓 上 12ㄱ~21ㄴ
-여훈서(女訓序) 女訓 上 22ㄱ~29ㄴ
-여훈목록(女訓目錄) 女訓 上 30ㄱ~30ㄴ
-여훈(女訓) 제1~제4 女訓 上 31ㄱ~47ㄱ
◇ 곤책(坤冊)
〈언해본 부분 계속〉
-여훈(女訓) 제5~제12 女訓 下 1ㄱ~40ㄴ
-여훈후서(女訓後序) 女訓 下 41ㄱ~48ㄴ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여훈 언해』라는 한 책으로 편찬해 놓았어도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은 별개의 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동일한 건책(乾冊) 속에 하나로 묶어 편찬하고 있으면서도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 사이에는 판심제도 서로 다르고 권차와 장차도 서로 달리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전체적인 판식(版式)에 대해서는 홍윤표 교수의 해제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기대어 소개한다. 책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22.3cm, 34.5cm이고, 사주 쌍변(四周雙邊)에 반엽(半葉)의 광곽(匡郭)은 가로 세로 각각 16.5cm, 24.2cm이다. 행수(行數)는 10행이고 1행의 글자수는 18자이나 언해문은 모두 1자씩 낮추어 쓰고 있어서 매행(每行) 17자로 되어 있다. 원문에 한글로 달아 놓은 구결과 주(注)는 소자(小字) 쌍행이다. 판심의 어미(魚尾)는 상하 삼엽화문어미(三葉花紋魚尾)이며 판심의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 권차, 장차가 기재되어 있다. 판심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바로 앞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여훈 언해』의 내용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문 네 개를 제외하면 「여훈 목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12개 주제에 관한 것이 전부다. 12개 주제별로 하나하나 교훈의 내용을 서술한 부분이 목차 중의 하나인 「여훈」이다. 「여훈」 부분에 있는 12개 주제를 들고, 주제별로 교훈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규훈(閨訓) : 여자가 집안에서 할 일, 여자로서 몸가짐과 생활 태도 등에 관한 교훈.
② 수덕(脩德) : 올바른 부덕(婦德)에 관한 교훈.
③ 수명(受命) : 결혼하는 딸이 시집에 가서 행할 도리를 부모가 가르침.
④ 부부(夫婦) : 부부 각자가 자기의 도리를 지키고 화목할 것을 교훈함.
⑤ 효구고(孝舅姑) :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섬기며 효도할 것을 교훈함.
⑥ 경부(敬夫) :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는 도리에 관한 교훈.
⑦ 애첩(愛妾) : 아내는 첩을 사랑하고 첩은 아내를 정성껏 공경할 것을 교훈함.
⑧ 자유(慈幼) : 아이나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줄 것을 교훈함.
⑨ 임자(姙子) : 임신한 여자가 조심할 일을 교훈함.
⑩ 교자(敎子) : 자녀의 성장 단계에 따라 어머니가 가르쳐야 할 내용에 관한 교훈.
⑪ 신정(愼靜) : 조용하면서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여자의 덕에 관한 교훈.
⑫ 절검(節儉) : 여자로서 씀씀이를 아끼고 검소할 것을 교훈함.
이상과 같이 내용은 12가지 주제별로 교훈한 것이지만, 그 중심은 「여훈 후서」에 언급된 대로 공경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집안에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삼가고 조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여훈 언해』의 핵심으로 되어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와 음운

가. 표기 문자

『여훈 언해』는 이에 나타난 표기 문자만 보아도 17세기 전반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한글 표기에서 ㅸ, ㆆ은 말할 것도 없고, ㅿ과 ㆁ도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소실 문자 중에 남아 있는 문자가 있다면 ‘ㆍ’가 유일하다. 그리하여 『여훈 언해』에 나타난 문자 체계는 25자 체계로서 사실상 17세기 국어의 25자 체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한편 초성으로 쓰인 병서자(並書字)는 중세 국어의 전통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각자병서와 ㅅ계, ㅂ계, ㅄ계의 합용병서가 중세 국어에서처럼 표기에 사용되었다. 자료의 제약으로 합용병서에서 ㅷ, ㅵ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 외에는 모두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각자병서는 『원각경 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로 한글 표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는데, 『여훈 언해』에 와서 ㅆ이 등장하여 일부의 표기에서 쓰인 것이 발견된다. ㅆ을 제외한 그 밖의 각자병서는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음에 병서자가 쓰인 예를 들어 본다.
ㅺ : 며(상:10ㄱ) 죵여(상:11ㄱ) 며(상:37ㄴ) 걷러디(상:46ㄱ) 러(하:9ㄱ) 君子(하:12ㄴ) 티고(하:33ㄴ) 이 며(하:33ㄴ-34ㄱ)
ㅼ : (상:17ㄱ) 이라(상:17ㄴ) 희(상:32ㄴ) 님이(하:8ㄴ) 돈이라(하29ㄱ)
ㅽ : 리샤(상:6ㄴ) 딘(상:18ㄱ) 이(상:27ㄴ) 들  이쇼(상:26ㄴ) 리(하:28ㄱ)
ㅳ : 이라(상:8ㄱ) 여(상:18ㄱ) 을(상:27ㄱ)  지거든(하:3ㄴ) 러리며(하:29ㄱ)
ㅄ : 공경으로((상:41ㄱ) 힘(하:27ㄴ) 곰(하:40ㄱ)
ㅶ : 샤(상:9ㄱ) 기(상:33ㄱ) 거슬이(하:23ㄴ)
ㅴ : (상:18ㄱ)
이 밖에 『여훈 언해』에는 다른 데서 전혀 볼 수 없는 ᄳᅠ, ᄪᅠ과 같은 특이한 합용병서가 나타나는데, 이는 각각 ㅴ, ㅍ의 오각으로 보아야 할 표기들이다.
ᄳᅠ : 그 몸을 려(衛其身)(하:23ㄴ) (보기) 大瞿曇이 슬허 리여 棺애 녀고(월인석보 1:7ㄴ).
ᄪᅠ : 모 리(庶草)(하:19ㄱ) (보기) 믈읫 프리 처 나 닐오 苗ㅣ라(원각경 언해 하 2-1:33ㄱ).
그리고 각자병서 ㅆ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ㅆ이 사용되었던 일부 낱말에 한해 나타나고 있다.
ㅆ : 머리예 씌오시고(冠首)(상:6ㄴ) 싸힌(積)(상:6ㄴ) 쓰기예(戴)(상:34ㄱ) 싸호믈(鬪)(상:46ㄴ) 싸미(割)(하:22ㄴ) 싸믄(積)(하:24ㄱ)
위에서처럼 각자병서 ㅆ으로 표기해야 할 낱말임에도 아래처럼 그냥 ㅅ으로 표기된 예가 『여훈 언해』에 제법 등장하고 있다.
말이며(상:10ㄴ) 말을(하:9ㄱ) 中正齋예셔 스노라(싱:21ㄴ) 글 스며(하:28ㄴ) 갇 싀우믄(하:28ㄴ) 綜理(상:28ㄱ) 夫의게 주실(상:40ㄴ)
이 시기에 오면, 합용(合用)이든 각자(各自)든 모든 병서자들은 일률적으로 된소리를 나타내는 표기 수단이 된다. 그리하여 동일한 된소리의 표기에 합용병서의 ㅅ계가 채택되기도 하고 ㅂ계가 채택되기도 하는 한편, 각자병서까지도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어 표기에 심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여훈 언해』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ㅄ과 ㅆ의 혼동을 보여주는 예로서 ‘힘-/힘쓰-’가 있으며, 15세기에 ‘활 쏘-’[射]로 표기되던 말이 『여훈 언해』에서 ‘활 -’로 나타나기도 한다.
힘(하:27ㄴ) / 힘써(하:45ㄴ) 힘디(하:45ㄴ)
활 며(하:28ㄴ)
그런데 ‘활 -’는 원래 ‘활 쏘-’였다. “활 쏘리 하건마”(용비어천가 45장)과 “소다爲覆物而쏘다爲射之之類”(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ㅆ이 표기되던 자리에 ㅄ으로 대체된 것은 ㅂ계 합용병서도 된소리 표기로 변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활-’의 등장은 이미 16세기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음절말의 겹받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겹받침 다음에 모음이 왔을 때는 연철 표기의 방법으로 겹받침의 두 자음이 그대로 유지되지만 자음이나 휴지(休止) 앞에서의 겹받침은 두 자음 중 제2자음이 탈락한다.
[外] : 밧긔(상:29ㄱ) 밧기며(하:35ㄱ) / 밧 마리 드디 아니고(하:33ㄴ) 밧 政 돕고(하:45ㄴ)
없-[無] : 업디라(상:8ㄱ) 업니(하:12ㄴ) / 업고(상16ㄴ) 업다 니나(하:33ㄱ)
-[修] : 닷그며(상:19ㄱ) 닷가(하:45ㄴ) / 닷디 아니즉(상:36ㄴ)
그러나 ㄹ로 시작되는 ㄺ, ㄻ, ㄼ과 같은 겹받침의 경우는 모음 앞에서와 같이 자음이나 휴지 앞에서도 두 자음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원래 모음과 모음 사이에 두 자음만 올 수 있는데, ㄹ이 맨 앞에 올 경우에는 세 자음도 허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ㄺ : 그시미라(상:9ㄱ) 기 처음으로 울으매(하:3ㄴ) 글그며 안자 겨시거든(하:3ㄴ) 근 의(하:23ㄱ) 고 근 거시(하23ㄴ) 디 몯고(하:27ㄴ) 고 소담면(하:39ㄱ)
ㄻ : 올마(하:27ㄴ)  거(하:22ㄴ)
ㄼ : 몸소 오신 이리라(상:10ㄱ) 여듧 어든(하:28ㄱ) 이 며(하:33ㄴ-34ㄱ)
위의 예 가운데 ‘’[熟]은 연철 표기의 ‘’과 분철 표기의 ‘’이 혼합된 중철(重綴) 표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신’은 어간 ‘-’[蹈] 의 말음 ㅂ이 모음 어미 앞에서 w로 교체된 형태이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이라면 ‘오신’은 ‘신’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초성의 병서자와 겹받침을 살펴보았는데, 『여훈 언해』에서 보이고 있는 표기들은 중세 국어와 별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표기법

표기법이라 함은 그 시대의 문자 체계로써 그 언어를 어떤 형태로 적느냐 하는 규칙, 즉 정서법을 말한다. 이 표기법에는 여러 규칙들이 포함되지만 여기서는 연속된 언어를 적을 때 각 음절을 어떻게 적느냐 하는 문제에 국한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이 자음일 때 후속되는 모음의 조사나 어미 앞에서 그 자음을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 내려 적을 것인가 아니면 말음의 자리에 그대로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즉, ‘글을 읽으니’로 적을 것인가 ‘그를 일그니’로 적을 것인가 하는, 이른바 분철(分綴)로 표기할 것이냐 연철(連綴)로 표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15세기 국어의 표기법은 연철 표기로 출발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문헌에서 연철법은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졌었다. 그러다가 15세기말에 이르면 그렇게 철저하던 연철법에도 틈이 생겨 여기저기서 분철 표기가 조금씩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분철의 추세가 더욱 세력을 얻어 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6세기에는 연철법과 분철법의 혼합형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중철(重綴) 표기까지 새로 등장하여 마치 16세기는 연철, 분철, 중철 표기의 각축장이 된 듯한 느낌이다. 17세기 문헌에 드러난 표기법도 16세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가운데 분철은 꾸준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체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17세기에는 같은 시기의 문헌이라도 문헌마다 표기법의 실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불균형이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용언의 경우는 연철 표기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철 표기도 문헌마다 그 빈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여훈 언해』도 이와 같은 17세기 문헌의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는 표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주003)
『여훈 언해』에는 아래와 같이 동일한 낱말을 두고 서로 다른 5가지의 표기가 등장할 정도로 표기의 혼란이 나타나기도 한다.
믈읫(상:37ㄴ), 므(상:19ㄴ), 므(상:34ㄴ), 믈읟(하:27ㄴ), 므릇(하:47ㄴ).
체언의 경우는 ㄷ, ㅅ 말음일 때를 제외하고는 분철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용언의 경우에는 전반에 걸쳐 연철이 절대적인 우세를 나타내고 있다. 중철 표기는 전체적으로 몇 예를 보일 뿐이다. 그런 중에서도 『여훈 언해』의 표기 실태를 보면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으로 쓰인 자음에 따라 그 사정이 조금씩 다름을 볼 수 있어 여기서는 말음의 자음 ㄴ, ㅁ, ㄹ, ㄱ, ㅂ, ㄷ, ㅅ 별로 그 실태를 보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ㄴ

a. 손이라(상:17ㄱ) 눈에(상:27ㄴ) 슈건을(상:33ㄱ) 긔운이(상:46ㄴ) 녀편이라(하:24ㄱ) 아이 아니라(하:29ㄱ) 잔을(하:34ㄱ) 차반이며(하:39ㄱ) 겨집어룬에게(하:45ㄴ) 손으로(상:34ㄱ) 손을(상:41ㄱ) 손애(하:34ㄱ)
b. 소로(하:28ㄱ) 소니(하:34ㄴ) 열 누니(하:34ㄴ)
c. 크니 업고(상:16ㄴ) 노프니과 니(상:45ㄴ) 어디니(하:27ㄴ) 重니 업니(하:33ㄱ) 크니며 쟈그니며(하:35ㄴ)
d. 人女ㅣ 되얀 이(상:16ㄴ) 婦ㅣ 되얀 이(상:16ㄴ) 貞婦 되연 이(상:41ㄴ)
(비교) 婦 되얀니(상:29ㄱ)
위에서 보다시피 ㄴ말음의 경우, 체언에서는 분철이 절대적이다. 연철의 예는 전체를 통해 b의 예가 전부이다. 반면에 c에서처럼 용언의 관형사형 ㄴ 어미 다음에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된 형태에서는 어김없이 연철이 되고 있다. 하나의 예외도 허락지 않을 정도이다. 단, d와 같이 완료형의 관형사형에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되었을 경우는 분철과 연철이 다 나타난다.
그리고 용언의 경우는 어간 말음이 ㄴ인 낱말의 예가 없어 언급을 생략한다.

(2) ㅁ

a. 버금에(상:8ㄱ) 몸으로(상:8ㄴ) 말이며(상:10ㄴ) 어마님이라(상:10ㄴ) 가슴에(싱:27ㄴ) 이라(상:34ㄴ) 님이(하:8ㄴ) 이(하:14ㄱ) 밤이어든(하:23ㄱ) 일홈으로(하:24ㄱ) 처엄은(하:46ㄱ)
b. 버그매(상:6ㄴ) 일호미(하:5ㄴ) 목수미(하:20ㄱ) 모(하:30ㄱ) 미(하:38ㄱ)
c. 남은(상:8ㄱ) 담은(상:9ㄱ) 삼으니(상:25ㄴ) 품어시면(하:15ㄱ)
d. 져믄(상:10ㄱ) 말믜아마(상:10ㄱ) 너므리오(상:29ㄱ) 사므며(상:41ㄱ) 여너머(하:47ㄱ)
ㅁ말음의 경우는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체언이나 용언 모두에서 분철과 연철 표기를 다 보여 주고 있다. 그 분포로 보면, 분철의 경우에 체언에서 훨씬 우세하고, 연철의 경우에는 용언에서 우세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명사 ‘사’을 선정하여 여기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었을 때, 분철ㆍ연철의 사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전부 보임으로써 분철의 추세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게 하고자 한다.
e. 사을(상:10ㄱ, 상:41ㄱ, 상:45ㄴ) 사의게(상:10ㄱ, 하:23ㄴ) 사이(상:16ㄴ, 상:17ㄱ, 상:26ㄱ, 하:13ㄱ, 하:15ㄱ, 하:18ㄱ, 하:40ㄴ) 사의(상:28ㄱ, 상:33ㄱ, 상:33ㄴ, 상:34ㄴ, 하:3ㄱ, 하:13ㄱ, 하:24ㄱ, 하:46ㄱ) 사은(상:34ㄴ)
f. 사미(하:27ㄴ, 하:28ㄴ, 하:40ㄱ) 사(하:29ㄴ)
위의 e, f를 보면, 체언에서의 분철은 일방적이다. 그러나 용언에서는 그 용례가 많지 않아 위와 같은 조사는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ㅁ말음의 경우에 연철이 전체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동명사(動名詞)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었을 때, 연철이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분철 표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연철에 비하면 철저히 약세에 놓여 있음이 현실이다.
g. 침을(상:8ㄴ) 動홈애(상:10ㄴ) 업이니(상:21ㄱ) 싁싁홈으로(상:41ㄱ) 和睦홈으로(상:41ㄱ) 안앤(하:23ㄱ) 居욤애(하:33ㄴ) 샹密홈은(하:47ㄱ)
h. 셰호미(상:8ㄴ) 어디르믈(상:11ㄱ) 믈(상:11ㄱ) 아다오믈(상:17ㄱ) 업시녀기미(상:20ㄴ) 閑暇미(상:28ㄱ) 키미라(상:33ㄱ) 치믈(상:34ㄱ) 不孝호미라(상:41ㄴ) 親호미(하:3ㄱ) 공敬요미(하:9ㄴ) 업스믈(하:13ㄱ) 안맨(하:22ㄴ) 너므미 업스미오(하:24ㄱ) 居요매(하:33ㄴ) 사므미오(하:38ㄴ)

(3) ㄹ

a. 글을(상:6ㄴ) 겨를에(상:6ㄴ) 실을(상:10ㄴ) 말(상:11ㄱ) 孝 줄을(상:28ㄴ) 얼굴의(상:33ㄱ) 허믈이(상:37ㄴ) 믈결이(상:46ㄱ) 믈을(하:4ㄱ) 받올 일을(하:4ㄱ) 配필이(하:8ㄴ) 닐온 말이라(하:12ㄴ) 발을(하:22ㄴ) 거울의(하:23ㄱ) 禮졀을(하:24ㄱ) 날을(하:45ㄱ)
b. 리(상:17ㄱ) 닐온 마리라(상:17ㄴ) 겨집 사의 이리(상:33ㄴ) 리(하:8ㄴ) 허므리(하:9ㄱ) 못 므리(하:18ㄱ) 아리라(하:19ㄱ) 얼고리(하:23ㄴ)  주 아라(하:28ㄱ) 벼(하:29ㄱ)
c. 오(상:7ㄱ) 닐오(상:7ㄴ) 울얼어(상:10ㄱ) 들어 좃(상:33ㄱ) 일오디라(상:41ㄴ) 울으매(하:3ㄴ) 말아(하:4ㄱ) 알미오(하:8ㄴ) 들으믈(하:28ㄱ)
d. 마롤디니라(상:11ㄱ) 아로(상:29ㄱ) 드러야(상:34ㄴ) 어디러(상:46ㄱ) 져므러(상:46ㄴ) 병드러(하:3ㄴ) 비러 호매(하:18ㄱ) 댱가 드리믄(하:28ㄴ) 받드러(하;34ㄱ) 도라(하:34ㄱ) 프러(하:35ㄱ) 그라(하:45ㄴ) 더브러(하:46ㄱ) 여시며(하:47ㄱ) 맛드려(하:48ㄱ)

ㄹ말음의 경우는 체언 용언 할 것 없이 분철과 연철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체언에 있어서는 분철 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나고, 용언에서는 연철 표기가 우세하다는 17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에 일치하는 양상이다.

(4) ㄱ

a. 을(상:6ㄴ) 아젹의(상:46ㄴ) 복이(하:4ㄴ) 음식을(하:8ㄴ) 豊쇽이(하:47ㄱ) 암이(상:17ㄱ) 암이(하:9ㄱ)
b. 소개(상:11ㄱ) 기(하:3ㄴ)  바기(하:18ㄴ)
ㄱ말음(ㄺ 말음 포함. 이하 마찬가지임)을 가진 체언의 경우도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때는 분철 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도 자주 등장하는 ‘식(子息)’이란 명사를 전부 들고 그 아래에 모음의 조사가 왔을 때 실제로 분철과 연철이 어떤 비율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자.
c. 식이라(상:11ㄱ) 子식을(상:28ㄴ, 하:30ㄱ) 식이(상:37ㄴ, 하:23ㄴ) 식을(하:22ㄴ, 하:23ㄴ) 子식이(하:29ㄴ)
d. 시기(하:13ㄴ, 하:13ㄴ, 하:13ㄴ) 시글(하:13ㄴ)
‘식’ 하나를 놓고 봤을 때 분철은 연철의 2배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ㄱ말음을 가진 체언의 경우에 전체적으로 분철의 비율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짐작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언의 경우로 오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ㄱ말음일 때 분철의 예는 하나도 없고 연철의 예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e. 소긴 거시(상:10ㄱ) 니기고(상:19ㄱ) 늘그샤(하:3ㄴ) 글그며(하:3ㄴ) 근(하:23ㄱ) 근(하:23ㄱ) 쟈근 것(하:33ㄱ) 마가(하:34ㄱ)
용언의 어근에 부사 접미사 ‘-이’가 통합되어 파생 부사를 형성하는 경우에는 분철이 더 적극적이다.
f. 싁싁이(하:8ㄱ, 하:23ㄱ, 하:33ㄱ) 至극이(하:34ㄴ, 하:48ㄱ) 닉이(하:47ㄱ)
g. 기(상:11ㄱ)

(5) ㅂ

a. 법을(상:10ㄱ) 입에(상:11ㄱ) 基업이(하:4ㄴ) 눈섭의(하:8ㄱ) 깁이(하:38ㄱ) 밥의(하:39ㄱ)
b. 바블(하:14ㄱ) 바비(하:38ㄱ)
말음이 ㅂ인 경우도 바로 앞의 ㄱ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체언에서는 분철이 우세한 반면, 용언에서는 연철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ㅂ말음의 체언은 모음의 조사 앞에서 분철이 압도하는 분위기이다. ㅂ말음의 명사로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집’과 ‘겨집’을 대상으로 분철ㆍ연철 실태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c. 집의(상:17ㄱ, 하:14ㄴ) 집을(상:42ㄱ, 하:30ㄱ) 집이(상:42ㄱ) 집이라(하:44ㄴ)
d. 지븨(상:40ㄴ) 지비(하:20ㄱ) 지블(하:28ㄴ)
e. 겨집은(상:32ㄴ) 겨집의(상:28ㄱ, 상:34ㄱ, 상:37ㄴ, 하:38ㄱ, 하:46ㄱ) 겨집이(상:33ㄱ, 하:9ㄱ, 하:19ㄱ, 하:45ㄴ) 겨집을(하:46ㄴ)
‘집’의 경우에는 연철이 분철의 절반 정도라도 나타났지만, ‘겨집’의 경우는 그렇게 많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연철 표기는 하나도 없이 분철 일색이다.
반면에 용언의 경우는 아래에서 보듯이 체언의 경우와는 딴판이다. 용언 어간에 모음의 어미가 연결된 형태에서 분철은 하나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f. 니버(상:10ㄱ) 니브며(상:17ㄱ) 구븐(상:19ㄴ, 하:18ㄴ) 자바(상:33ㄱ) 자브며(상:33ㄴ, 하:24ㄱ)

(6) ㄷ

ㄷ말음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양상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체언 용언 할 것 없이 모두 15세기의 연철 시대를 회복한 것처럼 거의 연철 표기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분철 표기가 있다면 아래에서 보듯이 체언에서 ‘이, 을’의 예가 있고, 파생부사로서 ‘덛덛이’가 있을 뿐이다. 어간 말음이 ㄷ인 용언에서 분철된 예는 하나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연철 표기는 ㄷ말음에서도 철저하다. 아래에 ㄷ말음을 가진 체언 용언의 예들을 전부 나열해 본다. 전체적으로 그 예가 많지 않다.
a. 을(상:27ㄱ, 하:45ㄴ) 이(하:40ㄱ) 덛덛이(하:33ㄴ)
b. (상:8ㄴ) 디(상:11ㄱ, 상:19ㄴ, 상:21ㄱ, 하:14ㄴ) 들(상:37ㄴ, 하:4ㄴ, 하:13ㄱ, 하:30ㄱ) (하:13ㄱ, 하:14ㄴ) 버디(하:29ㄱ) 그윽 고디나(하:34ㄴ)
c. 어더(상:6ㄴ, 상:42ㄱ, 하:29ㄱ) 미더(상:11ㄱ) 바다든(상:45ㄱ) 구드니(하:4ㄴ) 바다(하:13ㄴ) 어랴(하:14ㄴ) 어덧노라(하:47ㄴ) 모닷(하:47ㄴ)

(7) ㅅ

말음ㅅ의 경우도 앞의 ㄷ말음에서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즉, 연철 위주로 모든 표기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체언의 경우에 ‘옷의, 못애’의 두 예를 제외하고는 분철 표기를 볼 수 없고, 용언에는 ㅅ을 어간 말음으로 하는 낱말이 전체를 통해 하나도 사용된 예가 없어 더 이상 언급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없-’[無]의 경우에 모음 어미와의 연결에서 분철된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으므로 어간 말음이 ㅅ인 용언에서도 분철은 없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는 바이다. 특히 의존 명사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모음 조사와의 연결에서 분철된 표기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a. 옷의(하:3ㄴ) 못애(하:19ㄱ)
b. 열다새(상:34ㄱ) 그르(하:4ㄱ) 오(하:8ㄴ, 하:14ㄱ, 하:29ㄱ) 오스로(하:18ㄴ) 마(하:22ㄴ) 그르슬(하:28ㄱ) 마시(하:39ㄱ)
c. 序 거시라(상:7ㄴ) 소긴 거시(상:10ㄱ) 몯 거시며(상:46ㄱ)  거슬(하:3ㄴ) 니블 거(하:8ㄴ) 근 거시(하:23ㄴ)  거싀(하:39ㄱ)
d. 업디라(상:8ㄱ) 업니(상:16ㄴ) 업서(상:20ㄴ) 업며(하:4ㄱ) 업스믈(하:13ㄱ) 업스미오(하:23ㄴ) 업스며(하:34ㄱ)
이로써 ㅅ말음의 경우도 ㄷ말음과 함께 체언 용언을 막론하고 아직 연철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ㄷ, ㅅ이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t]으로 중화되었으나, 초성의 자리에서는 두 자음이 중화되지 않고 ㄷ[t], ㅅ[s]의 본 음가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본 음가를 의식했기 때문에 ㄷ과 ㅅ말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접사(接辭)가 오면 연철하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와 ‘이’처럼 ㄷ, ㅅ이 말음의 위치에 있을 때는 두 자음이 [t]으로 중화되어 실제로 말음에서 혼기(混記)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디’와 ‘시’처럼 연철하여 ㄷ, ㅅ이 초성의 위치에 왔을 때는 각각 [t], [s]의 본 음가대로 실현되므로 ㄷ, ㅅ 사이에 혼기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제 표기법의 마지막으로 중철(重綴) 표기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중철 표기는 자음을 말음으로 가진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그 자음을 말음의 자리에도 적고 그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도 적음으로써 같은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방식이다. 연철법과 분철법이 혼합된 양상이기도 하고 또한 양자의 절충안이라 할 수도 있다.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16세기 문헌 자료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시기의 문헌 사이에도 중철의 사용 비율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17세기도 16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17세기 문헌 중에도 중철 표기가 활발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여훈 언해』에는 중철 표기가 얼마 되지 않은 편이다. 전체를 통해 아래의 예가 전부이다.
a. 글월(하:28ㄴ) 니로(하:28ㄴ) 알리(하:33ㄱ) 기우러딜 시(하:34ㄱ) 딜 시(하:34ㄱ) (하:22ㄴ)
b. 압픠(상:8ㄱ) 밋처(상:10ㄱ, 상:20ㄱ, 상:28ㄴ) 긋테(상:20ㄴ) 빗(하:39ㄴ)
위에서 a는 8종성에 속하는 말음이 중철 표기된 예이고, b는 유기음을 말음으로 하는 체언 용언의 중철 표기이다. a에서 ‘글월’은 명사 ‘글월’에 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