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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벽온방≫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간행 경위

≪간이 벽온방(簡易辟瘟方)≫은 1525년(중종 20) 왕명에 의해 간행된 1권 1책의 의서(醫書)로서 표지를 제외하고 전체가 50쪽으로 되어 있다. 간행 배경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맨 앞에 실려 있는 김희수(金希壽)의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조선 중종 19년(1524) 가을, 관서지방(평안도)에 전염병인 역질(疫疾)이 크게 퍼져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게 되었고, 그 전염병은 이듬해 봄까지도 그칠 줄 모르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에 왕은 크게 걱정하여 약과 함께 의관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면서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행 부호군(行副護軍) 김순몽(金順蒙),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유영정(劉永貞), 전 내의원 정(前內醫院正) 박세거(朴世擧) 등에게 명하여 여러 의서에서 그 병에 대한 치료법과 대처하는 예방법을 가려 뽑아 한 책으로 편찬케 하였다. 그런 다음 한문 원문에 한글 번역을 붙여 중종 20년(1525)에 인출하여 반포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간이 벽온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525년에 간행된 초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중간본으로 보이는 1578년(선조 11)의 을해자본(乙亥字本)과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훈련도감자본(訓練都監字本)의 두 종류가 지금까지 전한다. 을해자본(1578)에는 내사기(內賜記)가 없는 고려대 도서관 소장본과, 내사기가 있는 고(故) 김완섭(金完燮) 소장본(현재는 고려대 만송김완섭문고에 소장)의 두 가지가 전하는데, 이 둘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 다만 전자의 고려대 도서관 소장본은 비록 내사기가 떨어져 없지만 첫 장에 「선사지기(宣賜之記)」란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도 후자와 동일한 내사본이라 할 수 있다. 내사기는 “萬曆六年 正月 日 內賜行副護軍李仲梁簡易辟瘟方一件 云云”으로 되어 있어 을해자본의 간행 연대가 1578년(萬曆 六年)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훈련도감자본은 을해자본의 중간(重刊)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도 1613년의 내사기와 함께 「선사지기」의 도장이 있고, 1525년에 쓴 김희수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을해자본과 비교해 볼 때 훈련도감자본은 표기법에서 약간의 혼란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것은 몇 군데에 있는 ㅿ의 혼란(‘브’와 ‘브어’) 과 ㆁ의 혼란(‘’과 ‘병’)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 밖에 ‘’의 소실 예로서 ‘고올’( 〉올)이 나타난다. 이 판본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고려대 도서관 소장의 을해자본으로 하였다. 이 판본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민족문화연구≫ 7호(1973)에 고 박병채 교수의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는데다, 다시 1982년에 홍문각에서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한 바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어서이다.
여기서 잠시 ≪벽온방≫에 관련한 계통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4월조에 보면,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언해한 ≪벽온방≫과 ≪창진방(瘡疹方)≫을 간행하기를 주청하는 기사에서 “≪벽온방≫은 세종조에 이미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없어져서 신(臣)이 언해를 붙이어 간행하였으며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로써 조선 시대에 간행하였던 전염병 방역서(防疫書)의 계통은, 먼저 세종조에 간행하였다는 ≪벽온방≫에서부터 김안국이 언해한 ≪벽온방≫이 있었고, 그리고 중종 때 간행된 ≪간이 벽온방≫과 ≪분문 온역 이해방≫(1542)이 있다. 다음에 허준의≪신찬 벽온방≫(1613, 광해군5)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훈련도감자본의 ≪간이 벽온방≫이 인출된 시기에 새로운 벽온방서의 간행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이후에 안경창(安景昌) 등이 편찬한 ≪벽온신방≫(1653, 효종4) 이 있다.
2. 체재 및 형태
이 책은 단권으로서 서명(書名)은 ≪간이 벽온방(簡易辟瘟方)≫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김희수의 서문으로서 언해문을 포함하여 3장(張)에 걸쳐 있다. 서문 부분의 제목은 「簡易辟瘟方序」라 달고 있는데 비해 판심제는 「辟瘟方序」라 하고 있다. 서문이 끝난 다음부터 본문이 시작되는데, 이는 모두 22장이며 제목은 「簡易辟瘟方」으로 붙여 놓았고 여기도 판심제는 「辟瘟方」으로 되어 있다. 장차(張次)는 서문과 본문을 구분하여 서문이 1~3장, 본문은 1~22장으로 각각 차례를 붙여 놓았다. 책의 크기는 세로가 32cm, 가로가 20cm이고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가 22.2cm, 가로가 15.2cm로서 계선(界線)이 있으며 9행 17자씩이다. 주(註) 쌍행(雙行)이며 판심은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이다. 본문에서 한문은 매행 첫 간부터 쓰는 17자 배자(排字)를 하였고 언해문은 첫 간을 띄어 매행 16자를 배자하였다.
3. 내용
서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의 간행 동기와 경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실제로 필요한 내용으로서 역병(疫病, 전염성 열병)의 원인을 기술하고 이에 대처하는 처방법과 처방에 필요한 약의 제조와 복용 및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역병의 치료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약의 효능과 제조, 복용 또는 사용법에 관한 설명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약명을 차례로 들면, 소합향원(蘇合香元), 향소산(香蘇散), 십신탕(十神湯),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 도소주(屠蘇酒), 형화환(螢火丸), 호두살귀원(虎頭殺鬼元), 신명산(神明散), 핍온단(逼瘟丹) 등이다. 이 중에서 소합향원, 향소산, 십신탕, 승마갈근탕, 도소주 등은 먹는 약이고, 형화환, 호두살귀원, 신명산 등은 몸에 메어달거나 차는 약이며, 핍온단은 불로 피우는 약이라 하였다. 그 밖에 석웅황(石雄黃), 솔잎, 고삼(苦蔘), 마늘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단일한 약재들의 효능과 복용법, 사용법에 대해서도 후반부에 설명하고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 및 음운

(1) 연철·분철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앞의 자음 곧 종성을 그 뒤의 조사나 어미의 초성으로 내려 적는 이른바 연철(連綴) 표기법이 중세 국어의 정서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서법이 ≪간이 벽온방≫에서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지만 그것은 용언의 경우에만 해당되었다.
니러나(서 2ㄱ), 머그며(1ㄴ), 마라(1ㄴ), 주근(2ㄴ), 다마(4ㄱ), 시슨(5ㄱ),
디그라(5ㄱ), 마면(5ㄱ), 어더(12ㄴ), 디허(16ㄱ), 라(17ㄱ)
그러나 체언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체언과 조사를 각각 본래의 형태대로 적는 이른바 분철(分綴) 표기가 상당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체언의 종성에 따라 분철이 우세한 경우와 연철이 우세한 경우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먼저 분철이 우세한 경우는 체언의 종성이 ㄱ, ㄴ, ㅁ, ㅂ일 때이다.(ㄷ 종성은 전체를 통해 예가 하나뿐이어서 제외하였다.)
 복애(6ㄱ), 가락으로(13ㄱ), 東녁으로(15ㄱ), 으로(15ㄴ), 잡약을(16ㄴ).
cf. 잘 저긔(5ㄱ), 팀 구글(15ㄴ), 올녀긔(21ㄱ).
긔운이(1ㄱ), 가문이(1ㄴ), 네 환(4ㄱ), 문을(6ㄴ), 닐굽 분이어든(6ㄴ), 세닐굽 번을(13ㄴ), 얼운이며(15ㄴ),  돈을(20ㄴ), 남진(21ㄱ).
cf. 남지(11ㄴ-12ㄱ), 얼우니며(18ㄴ).
밤이야(서 2ㄱ), 사이(1ㄴ), 기름을(5ㄱ), 죠 심으로(15ㄱ-ㄴ).
cf. 모매(11ㄱ), 일후믈(13ㄴ), 바(19ㄱ).
법은(2ㄴ), 서 홉을(16ㄴ), 겨집은(21ㄱ), 즙을(22ㄴ).
cf. 지븨(4ㄱ), 겨지븐(12ㄱ).
단, ㅁ종성이라도 동명사의 ㅁ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면 용언의 경우에서처럼 연철 표기만을 보여 주고 있다.
주구믈(서 2ㄱ), 니러나(2ㄴ), 泄호미(3ㄱ), 답답호(20ㄴ), 져구믈(21ㄱ), 로(22ㄱ).
종성에 쓰인 합용병서로는 사이ㅅ을 제외하고 ㄺ, ㄼ 만 나타난다. 그리고 ㄺ을 종성으로 하는 명사의 경우에도 모음의 조사 앞에서 분철을 보여 주고 있다.
굵게(6ㄱ),  울 예(13ㄴ), 여듧 돈(9ㄴ), 앏(19ㄱ), (9ㄴ), 수의(10ㄴ).
cf. 알(10ㄴ).
다음으로, 체언의 경우에도 연철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경우는 종성이 ㄹ, ㅅ일 때이다. 특히 ㅅ종성의 경우에는 단 하나의 분철 예도 찾아볼 수 없다.
이스리(1ㄴ), 므레(5ㄱ), 수우레(9ㄴ), 를(15ㄴ), 레(18ㄴ), 冬至ㅅ나래(19ㄱ), 프레(20ㄱ), 므레(21ㄱ), 눈므른(22ㄱ).
cf. 두 말을(4ㄱ), 시졀에(8ㄱ), 사발이어든(16ㄱ).
귓거싀(1ㄴ), 모딘 거시(2ㄴ), 귓거슬(10ㄴ), 오(13ㄱ), 블근 거스로(14ㄱ), 왼 거슬(17ㄱ).
그 밖에 ㆁ종성의 경우에는 이미 15세기부터 아랫 음절의 초성으로는 쓰이지 않고 종성의 위치에서만 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체언의 종성이 유기음인 경우에는 전적으로 연철 표기만을 보여 준다. 그것은 8종성 제한 규칙으로 유기음을 종성의 자리에 그대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4ㄱ), 벼츼(10ㄴ), (11ㄱ), 니플(14ㄴ), (14ㄴ), 나(18ㄴ), 로(19ㄱ).
이와 같이 유기음 종성인 경우에도 분철 표기를 시도하기 위한 전 단계로 보이는 체언의 종성을 체언과 조사에 이중으로 표기하는 이른바 중철(重綴) 표기가 등장하고 있다.
닙플(15ㄱ), 앏(19ㄱ).
(2) 자음동화의 표기
‘폐쇄음+비음’이 ‘비음+비음’으로 동화되는 규칙이 있었지만 표기에는 이러한 자음동화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는 용언의 활용형에서 자음동화를 반영한 표기가 등장한다.
인(3ㄱ), 됸니라(19ㄴ). cf. 업니(9ㄴ), 돕니라(19ㄴ), 잇(21ㄴ).
(3) 유기음화
유기음화가 일어난 낱말로 ‘ㅎ〉ㅎ’을 들 수 있다. 반면에 ‘고ㅎ(鼻)’는 아직 유기음화하지 않았다.
왼 해(12ㄱ), 올 해(12ㄱ). cf.  구필 예(석보상절 6:2ㄱ).
고해(5ㄱ), 곳굼긔(5ㄱ).
(4) 병서자(並書字)
합용병서는 ㅅ계, ㅂ계, ㅄ계가 다 사용되고 있으나 ㅄ계의 ㅴ이 ㅺ으로 교체된 예가 있어 ㅴ은 폐지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각자병서는 ㅆ만이 나타난다.
와(11ㄴ), 레(18ㄴ). cf.  半 되(능엄경 언해 7:16ㄴ).
次字 써(13ㄱ), 블근 거스로 써(14ㄱ).
(5) ㅿ의 유지
ㅿ의 표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단 한자음 표기에서 ㅿ이 소멸된 예가 있고, ㅅ과 ㅿ을 혼동한 표기가 하나씩 발견된다.
二이十십(서 3ㄱ), 十십二이月월(9ㄴ). cf. 二: 두 (훈몽자회 하:33ㄴ).
소 리예(17ㄴ).
가면 사(富人, 6ㄴ).
위의 예에서 ‘리’는 ‘서리(間)’의 오기(誤記)로 보이고, ‘가면’은 ‘가면’의 방언형 표기로 보인다.
(6) 사이ㅅ
사이ㅅ의 표기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종성에, 둘째는 초성에, 셋째는 중간에 각각 ㅅ이 위치하게 하는 표기 방식이다.
 가온(12ㄱ), 가온 가락(13ㄱ), 수릿날(16ㄴ).
밤(12ㄱ), 臘享 (22ㄱ).
疫癘ㅅ(1ㄴ), 시긔ㅅ(8ㄱ), 冬至ㅅ나래(19ㄱ), 甘草ㅅ(20ㄴ).
사이ㅅ과 관련하여 ‘關西ㅅ 다해’(1ㄴ-2ㄱ)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이는 명사 ‘ㅎ[地]’의 어두에 쓰인 ㅅ을 사이ㅅ으로 잘못 분석한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다.
(7) 방점
방점이 모두 폐기되었다.
2. 문법
(1) 처격 조사 ‘-예’
중세 국어에서 처격을 나타내는 조사로는 ‘-애/에, -/의, -예’가 쓰였는데, 이 중에서 ‘-예’는 선행 체언의 말음이 i j 인 경우에 한해서 연결되었다. 물론 이 문헌에서도 이들 처격 조사가 그대로 사용되었지만 ‘-예’의 경우에는 정해진 환경이 아닌 데서 사용된 예가 나타난다.
와 밀와예(11ㄴ), 시예(13ㄱ).
(2) 접속 조사 ‘-와/과’
접속 조사는 체언의 음운 조건에 따라 체언의 끝소리가 모음인 경우에는 ‘-와’, 자음인 경우에는 ‘-과’가 쓰이지만, 체언의 끝소리가 ㄹ일 경우에는 현재와 달리 ‘-와’가 쓰인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모음인 경우에도 ‘-과’가 쓰인 예가 있다.
누른 과(10ㄴ).
(3) 선어말 어미 ‘-오/우-’
중세 국어의 독특한 문법 체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우-’의 사용이 이 문헌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오/우-’는 뒤에 연결되는 어말 어미에 따라 사용이 필수적인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예로 어말 어미 중에 명사형 어미 ‘-ㅁ’, 설명법 어미 ‘-’, 의도법 어미 ‘-려’가 쓰일 경우에는 반드시 선어말 어미 ‘-오/우-’를 앞세움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 와서는 이 경우에 ‘-오/우-’의 첨가가 동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미 ‘-ㅁ’과 ‘-’ 앞에서도 ‘-오/우-’의 첨가가 실현되지 않은 예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3ㄱ), 되(15ㄴ), 져그믈(16ㄴ).
cf. 머고(4ㄱ), 업게 호(20ㄴ), 져구믈(21ㄱ).
(4) 보조사 ‘-식’
15세기 국어에서 수사나 수와 관련된 체언에 연결되어 ‘-씩’의 의미를 가지는 보조사로 ‘-곰/옴’이 시용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오면 ‘-곰/옴’이 쓰일 자리에 ‘-식’이 대신 등장하기 시작한다. ‘-식’은 ≪대명률 직해≫에 ‘-式’이 쓰인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문법 형태이나 국어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이 문헌에서도 ‘-식’의 사용이 활발한 가운데 ‘-곰/옴’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양상이다.
서 돈식(6ㄱ), 세 번식(6ㄴ), 너 돈식(8ㄴ),  술식(15ㄱ), 스므 낫식(15ㄱ),  붓식(15ㄴ).
 잔곰(4ㄴ),  환곰(12ㄱ), 세닐굽곰(18ㄴ).
(5) 세 : 서
수량을 나타내는 수사의 쓰임에서 ‘하나, 둘, 셋, 넷’과 같은 수사가 단위 명사 앞에 쓰일 때는 ‘한, 두, 세, 네’와 같이 형태 변이가 되면서 관형사가 된다. 이럴 경우에 특히 ‘셋’과 ‘넷’은 뒤에 오는 단위 명사에 따라 ‘세/서/석’과 ‘네/너/넉’으로 각각 분화되어 어느 한 가지 형태하고만 결합한다는 제약이 있다. 이러한 선택 제약 현상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 사(6ㄴ), 세 번식(6ㄴ, 15ㄱ), 세 (11ㄱ).
서 되(3ㄱ), 서 홉(16ㄴ, 20ㄴ).
석 자(3ㄱ), 석 셤(3ㄱ), 석 (20ㄱ).
네 환(4ㄱ), 네 모해(12ㄱ), 네 (14ㄱ), 네 를(15ㄴ).
너 돈식(8ㄴ).
넉 (7ㄴ, 12ㄴ).
그리고 ‘셋’이 다른 수와 복합해서 쓸 경우에는 ‘세’의 형태하고만 어울린다.
두세 번식(8ㄴ), 두세 소솜(9ㄴ), 세 닐굽 번(13ㄴ), 세 닐굽 나(18ㄴ).
이상과 같은 ‘세/서/석’ ‘네/너/넉’의 선택 제약 현상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지금도 한편에선 ‘서 돈, 너 돈’을 ‘세 돈, 네 돈’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에서도 이러한 제약 현상이 엄격하지는 않았음을 보여 주는 예가 발견된다.
서 돈식(6ㄱ), 세 돈식(16ㄱ).
동일한 단위 명사 ‘돈’ 앞에서 ‘서’와 ‘세’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3. 어휘
(1) 소[松]
아래 예문에서 松間(송간)을 ‘소 리’로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솔[松]’이 ‘소’의 형태로 쓰인 것이다.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野人乾은 소 리예 치 됴니라(野人乾松間者佳, 17ㄱ~ㄴ).
(2) 벗기다
중세 국어에서 ‘脫(탈)’의 뜻으로 쓰인 동사에 ‘밧다’와 ‘벗다’가 유의어로 공존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쓰인 용례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면 양자간에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밧다’는 “오란 밧고”(월인석보 1:5ㄴ)에서처럼 주로 구체적인 대상에 대하여 사용되었고, 더러는 “猜嫌을 바니라”(초간 두시언해 21:37ㄴ)에서와 같이 추상적인 대상일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벗다’는 “輪廻 벗디 몯”(월인석보 1:12ㄱ)에서 보듯이 추상적인 대상에 대해서만 쓰임으로써 ‘밧다’와 ‘벗다’사이에는 그 사용 영역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 대상이 ‘껍질[皮]’인 경우에 선택되는 동사는 ‘밧다’일까 ‘벗다’일까? 이를 위해 의서(醫書)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먼저, ≪구급방 언해≫(1466)에는 ‘밧다’가 사용되었다.
것 밧기고(去皮, 상:6ㄴ), 겁질 밧기니와(去皮, 하:2ㄱ).
다음으로, ≪구급 간이방≫(1489)에서도 역시 ‘밧다’로 쓰였다.
거플 밧기고(去皮, 2:2ㄱ), 거플 밧기니와(去皮, 2:7ㄴ), 거플 밧겨(去皮, 3:58ㄱ), 거플 밧겨(去殼, 6:46ㄱ).
위에서처럼 ≪구급 간이방≫에서도 ‘밧다’의 사용이 지배적인 가운데 ‘벗다’를 쓴 예도
나타난다.
거플 벗긴 닥나모(楮骨, 6:4ㄴ).
이는 ‘밧다’와 ‘벗다’ 사이에 사용 영역의 구분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후 이 문헌에 와서는 ‘去皮’가 2회 나타나는데 모두 ‘벗다’가 쓰였다. 이로 보아 이때는 ‘벗다’의 범위가 ‘밧다’의 의미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밧다’는 서서히 소멸의 운명에 접어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겁질 벗겨(去皮, 간이 벽온방 12ㄴ).
(3) 주머니 : 
‘’에 대한 고어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주머니’로 풀이하기도 하고 ‘자루’ 또는 ‘부대’로 풀이해 놓은 사전도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문헌의 한문 원문에 나타난 대응 한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블근 (絳囊, 11ㄱ, 12ㄴ), 블근 깁(絳囊, 11ㄴ), 블근 (絳囊帶, 21ㄱ).
위의 용례에서 ‘’은 ‘囊’에 해당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囊’은 바로 오늘날의 주머니를 가리키는 한자이므로 그렇다면 ‘’은 곧 주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는 ‘주머니’도 동시에 쓰이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깁 주머니예(緋絹袋, 4ㄱ), 새 뵈 주머니(新布袋, 14ㄴ). cf. 깁 쟐(絳袋, 9ㄴ).
여기서 볼 때 당시의 ‘주머니’는 ‘囊’이 아니고 ‘袋’의 의미로 쓰였다. ‘袋’는 오늘날의 자루나 부대(負袋)를 뜻하는 한자이며, 더구나 ‘袋’를 ‘쟈’로 번역한 용례도 이 문헌에 나오므로 ‘袋’가 자루나 부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당시의 ‘주머니’는 오늘날의 주머니와는 달리 자루나 부대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주머니에 해당하는 말은 ‘’이었던 듯하다.
(4) 사
15세기에 三日을 뜻하는 명사는 ‘사’이었는데 이 문헌에는 ‘사’로 나타난다. ‘사〉사’은 15세기의 ‘아래, 열흘’ 등에 견인된 유추 현상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사 후에(9ㄴ). cf. 오 사리 디나니(월인석보 21:28ㄴ).
(5) 한설날 : 한섯날
元日을 뜻하는 낱말이 ‘한설날’로도 나타나고 ‘한섯날’로도 나타난다. 이는 15세기 국어에서 ‘이틀+날’이 ‘이틄날’(이틄나래, 월인석보 1:6ㄴ)로도 나타나고 ‘이틋날’(이틋나래, 석보상절 6:27ㄱ)로도 나타났던 것처럼 ‘설+날’이 ‘섯날’로도 쓰인 것이다.
한설날 기예(18ㄴ), 한섯날 아(15ㄴ).

〈참고 문헌〉

박병채(1973). ≪간이벽온방≫ 해제. 『민족문화연구』 7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서울대 도서관(2001). 『규장각소장 어문학자료 - 어학편 해설』. 홍문각.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지성사.
홍윤표(1982). ≪간이벽온방≫ 해제. 간이 벽온방 영인본. 홍문각.
≪경민편≫에 대하여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1. 간행 배경

≪경민편(警民編)≫은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황해 관찰사로 있을 때 황해도민의 교화를 위해 중종 14년(1519)에 편찬한 책이다. 인륜과 법제에 관한 지식을 수록하여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의 여건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계도할 목적에서 이 책을 만든 것이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에 김정국이 쓴 서문 주001)
안병희 교수의 해제(1978)에는 김정국이 쓴 글이 서(序)가 아니고 발(跋)이라 하고 있다. 허엽(許曄)의 서(序)가 맨 앞에 있는 중간본(1579)에는 김정국의 글에 아무런 제목도 붙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규장각 소장본(1658)에는 김정국의 글에 ‘警民編序’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여기서는 일단 이를 따르기로 한다.
에 이러한 목적이 자세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외람되게 고을의 근심을 나누어 맡기신 때부터 맡은 땅을 순찰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피매 매번 죄인을 판단할 때 일찍이 이에 대하여 깊이 애달파하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인륜(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오륜을 말함)의 중함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법제의 자세함을 알겠는가? 미련하기가 눈멀고 귀먹은 사람 같으며, 무지하게 오직 옷과 밥에만 매달려 스스로 그 법을 범하는 줄을 깨닫지 못하여 죄에 빠져 들어가면 관원이 이에 대하여 법을 집행하여 다스리게 되니 이렇게 되면 그물로 새를 잡으며 함정으로 짐승을 잡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백성으로 하여금 어질도록 하여 죄에서 멀어질 수 있게 하겠는가? 내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사람의 도리에 가장 관련되면서 백성이 범하기 쉬운 것을 들어 열세 개[十三個] 항목으로 만들고 그 이름을 백성을 경계하는 책이라 하였으니 이를 나무에 새기고 널리 베풀어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귀와 눈에 익숙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나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을 따르기에 만(萬)에 하나라도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余自叨分陜之憂 按所部 察民風 每當斷獄 未嘗不深喟於斯 蠢愚之民 不知人倫之重 焉知制法之詳 蚕蚕然有同乎辜聵 貿貿焉唯衣食之趣 自不覺其觸犯科條 流陷於罪辜 有司 於是 按律繩之 如骨羅捕雀 機檻取獸 烏在其使民遷善而遠辜耶 余爲之憫然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三條 編曰警民 刊行廣布 俾諸蠢氓 靡不習於耳目 以冀其去惡從善之萬一)
김정국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해도의 각 지방 수령, 즉 목민관(牧民官)들에게 이 책을 가지고 ‘도민화속(導民化俗)’의 자료로 적극 활용할 것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가지고 하나의 문구로 돌려 버리며, 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치부하고 앉아 나라의 녹(祿)만 받아먹으면서 세월을 하는 일 없이 보내기만 할 뿐, 그 백성을 계도(啓導)하여 풍속을 교화(敎化)케 할 도리에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못 이 책을 만든 뜻이 아니니 무릇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거의가 또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將是編, 歸之文具, 付之迂遠, 坐食公廩, 玩愒歲月, 其於導民化俗之道, 若不盡心而致誠焉, 則殊非編者之意, 凡我牧民者, 尙亦念哉)
이뿐만 아니라, 허엽(許曄 1517~1580)도 선조 13년(1579)에 간행한 중간본(동경교육대학 소장본) 권두(卷頭)에 있는 자신의 ‘중간경민편서’에서 이 책을 널리 펴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에 이 책에 군상 1조를 더하여 4장관(경주, 상주, 진주, 청송)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속히 인쇄에 붙여 예하 고을에 반포하고, 예하 고을에서는 각기 이를 인쇄하며 또 민간의 사사로운 인간(印刊)도 허락하여 집집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 사람마다 이 책을 봄으로써 각기 선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경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전 도민들이 서로 힘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玆以此編添補君上一條 付之四長官慶州尙州晉州靑松 亟上於榟 印頒屬邑 屬邑各來印出 兼許民間私印 期於家家有之 人人見之 各有以興起而戒勅也 凡此一道之人 盖相與勉之)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 ≪경민편≫은 백성 교화의 목적과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던 기묘 사림(己卯士林)의 이상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판본의 검토

1519년(중종 14)에 김정국이 간행한 원간본은 현재까지 전하지 않는다. 현존본으로는 일본 동경교육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주002)
동경교육대학이 현재는 쓰쿠바대학(筑波大學)으로 바뀌었으므로 동경대학 소장본을 쓰쿠바대학 소장본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 영인본을 간행하면서 ‘동경교육대학본’이라 명명하여 이 명칭이 통용되고 있기에 편의상 이를 따르기로 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간행이 이루어져 이은규 교수의 자세한 보고(2005)에 의하면, 모두 11종의 이본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에 의거하여 11종을 모두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1579년 진주판 중간본(동경교육대학 소장본. 단국대 영인본)
(2) 1579년 상주판 중간본(텐리대학 소장본)
(3) 임진란 전후 구결본(개인 소장본)
(4) 1658년 개간(改刊)본(규장각 소장본. 단국대 영인본)
(5) 1658년 이후 번각본(경북대 소장본)
(6) 1658년 이후 번각본(영남대 소장본)
(7) 1731년 초계 개간(開刊)본(홍문각 영인본)
(8) 1745년 완영 개간(開刊)본
(9) 1748년 용성 개간(開刊)본
(10) 1748년 완영 중간본
(11) 19세기 목판본(상문각 영인본)
위에 제시된 11종의 이본 사이에 어떤 특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여기서는 언급할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이은규(2005)에 예시된 언해문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파악하고자 한다. 위에서 소개한 이본 차례 번호를 따라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3)과 (6) 판본의 예문은 빠져 있다.
원문 : 夫妻和樂 永保厥家 乖戾不和 終致禍亂
(1) 남진 겨지비 화며 즐거오면 기리 그 집을 안부고 거저 화티 아니면 내애 홰며 난을 닐위니
(2) 남진 겨지비 화며 즐거오면 기리 그 집을 안보고 거슯저 화티 아니면 내애 홰며 난 닐위니
(4) 夫부妻쳐ㅣ 和화樂낙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어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5) 夫부妻쳐ㅣ 和화樂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7) 夫부妻쳐ㅣ 和화樂낙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어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느니라
(8)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9)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10)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11) 夫부妻쳐ㅣ 和화樂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위에 나타난 (1)~(11)의 언해문을 보면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문두(文頭)의 주어가 ‘남진 겨지비’로 되어 있는 부류와 ‘부쳐(夫妻)ㅣ’로 되어 있는 부류의 두 계열이다. 두 계열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각각 여러 종류의 이본들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실책(實冊)을 접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여기서는 영인본이 간행된 판본으로서 전자의 계열에 속하는 〈동경교육대학본〉과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규장각본〉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제 〈동경교육대학본〉과 〈규장각본〉에 대한 서지적 검토를 통해 그 차이를 좀 더 이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희 교수의 해제(1978)를 참고하였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동경교육대학본〉은 단국대학교에서 〈규장각본〉과 함께 안병희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진 책이다. 1권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판본은 허엽의 ‘중간경민편서(重刊警民編序)’ 1장, 김정국의 ‘경민편서(警民編序)’ 1장, 본문 19장으로 된,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책이다. 그런데 김정국의 서문은 ‘경민편서(警民編序)’라는 제목도 없이 첫 행에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마침 〈규장각본〉에는 ‘경민편서(警民編序)’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이를 인용해 붙인 것이다. 허엽의 서문 끝에 있는 ‘萬曆己卯觀察使陽川許曄序’라는 간기에 의해 〈동경교육대학본〉이 만력 7년(己卯年), 즉 1579년(선조 12)에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김정국 서문에는 끝의 간기가 ‘正德己卯冬十月觀察使聞韶金正國謹識’로 되어 있어 원간본은 정덕 14년(己卯), 즉 1519년(중종 1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허엽의 중간본인 〈동경교육대학본〉은 김정국의 원간본이 나온 지 60년 만에 재간행된 셈이다.
〈동경교육대학본〉에 실려 있는 두 서문을 검토해 보면, 허엽의 서문에는 “玆以此編添補君上一條”라는 기사가 있고 김정국의 서문에는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三條 編曰警民”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이를 통해 김정국의 원간본은 내용이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는데 허엽이 중간하면서 ‘君上’이란 한 항목을 새로 만들어 제일 첫 항목으로 첨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허엽이 간행한 중간본은 다른 판본과는 달리 한 항목이 많아져 모두 14개 항목이 된 것이다.
이 책의 내제(內題)와 판심제는 모두 ‘警民編’이다. 권말(卷末)에는 ‘重刊警民編終’이라 하여 ‘중간경민편(重刊警民編)’이라는 서명을 사용하고 있다. 판식(版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19.3cm, 28cm이고, 유계(有界) 11행으로서 한문 원문은 매행(每行) 17자, 언해문은 한문 원문보다 1자 낮추어 썼으므로 16자이며, 김정국의 한문 서문도 1자 낮추어 16자로 되어 있다.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은 쌍행(雙行)이며 차용 문자로 표기하였다. 판심은 백구(白口)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로 되고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인 ‘警民編’과 장차(張次)가 표기되어 있다. 권두의 ‘중간경민편서(重刊警民編序)’라는 제목이 표기된 행의 하단에 ‘晋州印’이라고 적힌 글씨와, ‘중간경민편서’에 있는 “付之四長官慶州尙州晉州靑松 亟上於榟 印頒屬邑 屬邑各來印出”의 기록을 관련지어 볼 때 이 중간본은 진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체재는 같은 시기에 형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언해하여 간행한 ≪여씨향약언해≫ ≪정소언해≫와 일치되는 점이 많은데, 이는 김정국이 형의 이들 책을 참고한 결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한문 원문에 첨가된 차자 표기의 구결이 일치하고, 언해문에는 한자의 표기나 병기가 전혀 없다는 점이 또한 일치한다.
이 책의 언해문에 나타난 표기법과 언어적 특징은 간행 시기인 16세기 말의 언어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방점은 없고 ㆁ은 종성 표기에 남아 있으며 ㅿ은 거의 소멸된 상태에서 몇 예가 발견된다.( 2ㄱ, 아 가지며 6ㄴ, 아 19ㄱ)
다음은 〈규장각본〉인데, 이 판본의 간행 경위에 대해서는 권말에 있는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의 ‘청간경민편광포제로차(請刊警民編廣布諸路箚)’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차자(箚子)에서 간행에 관련된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다만 그 원본을 두루 구해도 얻지 못하다가 오래 뒤에야 해서(海西)에서 얻었는데, 언해(諺解)가 없으면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그 원본을 사용하여 교열하고 번역하는 한편, 진고령(陳古靈)과 진서산(眞西山)이 세속을 교화시킨 여러 편(篇)을 그 아래에 붙이되 간간이 요약 정리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선묘조의 상신(相臣) 정철(鄭澈)이 지은 훈민가(訓民歌)를 첨부해 기록된 것을 얻어, 시골 부녀자들로 하여금 이를 늘상 암송하게 함으로써 감발(感發)되고 징계되는 바가 있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而第其原本 遍求不得 久乃得之於海西 而無諺解 窮鄕氓隷 難於通曉 故遂用其本 校證翻譯 且取陳古靈眞西山諭俗諸篇 附於其下 而間有節略者 欲民之易曉也 偶得宣祖朝相臣鄭澈所作訓民歌添錄者 欲使村閭婦孺 尋常誦習 有所感發而懲創也)

위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이후원이 이 책을 간행할 때 원간본은 구하지 못하고 한문만으로 된 사본(寫本)을 구하여 이를 교열해서 번역한 점이고, 둘째는 기존의 책에 없던 부록을 많이 첨부하였다는 점이다. 그 부록은 13세기 중국에서 이용되던 자료와 16세기말 조선의 시가 등 모두 5편으로서, 송나라 진양(陳襄)이 선거(仙居)의 지방 장관으로 있을 때 쓴 〈고령진선생선거권유문(古靈陳先生仙居勸諭文)〉, 그리고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담주와 천주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쓴 〈서산진선생담주유속문(西山陳先生潭州諭俗文)〉, 〈천주권유문(泉州勸諭文)〉, 천주권효문(泉州勸孝文)〉, 이 밖에 조선시대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16편의 〈훈민가(訓民歌)〉 등이다. 이후원은 ≪경민편≫의 간행을 국왕에게 상주하여 마침내 윤허를 얻게 됨으로써 개간(改刊)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원이 상주한 날과 윤허를 얻은 ≪효종실록≫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후원이 또 아뢰기를, “경민편(警民篇)은 바로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김정국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편집한 것입니다. 본도 백성들의 습속이 미련하고 무식하므로 정국(正國)이 이 책을 지어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것도 간행하여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厚源又曰 警民篇 乃己卯名賢金正國爲黃海監司時所編也 本道民俗 頑蠢無知 正國作是書以敎之 請亦令刊布 從之) 주003)
효종실록 7년(1656) 7월 28일(甲戌).
“경의 차사(箚辭)를 보건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서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해당하는 부서로 하여금 차사대로 시행하게 하겠는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도에 보탬이 되리라 기대된다.” 하고, 그 차자(箚子)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곧바로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省卿箚辭, 意非偶然 予用嘉悅 當令該曹 依箚辭施行 庶有補於化民成俗之道爾 下其箚於禮曹 禮曹請趁卽鋟梓 廣布中外 從之) 주004)
효종실록 9년(1658) 12월 25일(丁亥).

위에 있는 두 가지 실록 기사를 통해서, 이후원이 이 책의 간행을 처음 상주한 때는 1656년(효종 7)이고 간행을 윤허 받아 착수한 때는 1658년(효종 9)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책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가 될 것이 예상되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실록의 기록대로 이후원의 개간본인 〈규장각본〉의 간행 시기를 1658년으로 잡는다.
앞에서 본 이후원의 차사(箚辭)에 의하면, 1658년의 ≪경민편≫은 이후원이 독자적으로 번역하였으므로 김정국의 원간본이나 허엽의 중간본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도 허엽의 간행본과는 다른데다 표기도 차자 표기가 아니라 한글 표기로 되어 있다. 언해도 물론 차이가 있다. 국어적인 특징도 대체로 17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판식은 사주쌍변에, 반곽의 크기가 가로 세로 각각 15.5cm, 21.cm이고, 유계 10행에 매행 20자이며 언해문은 1자 낮춰 매행 19자이다. 한글 구결과 주(註)는 쌍행이다. 판심은 백구 상하내향삼문어미로 되어 있으며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인 ‘警民編’과 장차(張次)가 있다. 이 책의 편성은 맨 먼저 김정국의 ‘경민편서(警民編序)’와 그 언해문이 3장, ‘경민편목록(警民編目錄)’이 1장, 본문과 부록을 합쳐 42장, ‘청간경민편광포제로차(請刊警民編廣布諸路箚)’가 2장으로 모두 48장으로 되어 있다.

3. 내용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동경교육대학본〉의 내용은 모두 1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규장각본〉은 13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판본의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동경교육대학본〉
(1)君上 (2)父母 (3)夫妻 (4)兄弟姉妹 (5)族親 (6)鄰里 (7)鬪歐 (8)勤業 (9)儲積 (10)詐僞 (11)犯奸 (12)盜賊 (13)殺人 (14)奴主
〈규장각본〉
(1)父母 (2)夫妻 (3)兄弟姉妹 (4)族親 (5)奴主 (6)鄰里 (7)鬪歐 (8)勤業 (9)儲積 (10)詐僞 (11)犯奸 (12)盜賊 (13)殺人
〈동경교육대학본〉은 〈규장각본〉에 없는 ‘군상(君上)’이 첫 항목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노주(奴主)’ 항목의 배치가 두 판본 사이에 달라져 있다. 〈동경교육대학본〉이 맨 끝 항목인 열네 번째로 되어 있으나 〈규장각본〉에서는 다섯 번째에 배치하여 놓았다.
위에 열거된 목록을 보아 대강 짐작할 수 있겠지만 ≪경민편≫의 내용은 향촌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와 윤리를 권장하면서 흔히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다. 그러고는 범죄를 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인 이유와, 범죄할 경우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처벌 등을 언급하고 있다. ‘군상’을 제외한 13개의 항목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가족과 친족에 관련된 문제로서 이에는 ‘부모(父母)’, ‘부처(夫妻)’, ‘형제자매(兄弟姉妹)’, ‘족친(族親)’ 등이 속한다. 여기서는 한 마디로 가족 윤리를 내세우고 있다. 부모와 그 이상의 어른들에 대해서 언제나 공경하는 마음과 효도하는 법을 강조하고 있다. 부부간에는 화락할 것이며 형제자매 사이에서는 조그만 이해 관계로 대립하여 원수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족친’으로서는 숙부모(叔父母)를 들고, 숙부모도 부모와 똑같이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어기고 가족 구성원 사이에 살해를 비롯해서 구타, 책망, 배반 등의 범법 행위를 하면 상당한 중벌에 처하게 된다는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는 향촌이라는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인리(鄰里)’, ‘투구(鬪歐)’, ‘범간(犯奸)’, ‘도적(盜賊)’, ‘살인(殺人)’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이 중에서 ‘인리’를 제외한 다른 항목은 모두 일상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이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 정욕을 참지 못하고 간통하는 것, 춥고 배고픔 때문에 도적질하는 것, 재물을 탐하거나 원수가 져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 등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이므로 누구든지 이를 범했을 때 심하면 사형에까지 처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인리’는 공동체 속에서 강자와 노약자 간에 질서와 윤리를 확립하여 화목한 사회를 만들도록 교훈하는 것이므로 ‘인리’도 향촌의 공동생활에 관계되는 내용이나 범죄적인 내용과는 구별된다.
셋째는 경제적인 문제를 다룬 부분이다. ‘근업(勤業)’과 ‘저적(儲積)’이 이에 해당한다. ‘근업’은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여 가을에 많이 거두도록 하라는 내용이고, ‘저적’은 가을걷이 한 뒤에 식량의 낭비를 막고 절약하여 다음 해 농사지을 양식까지 준비하라는 내용이다. ‘근업’과 ‘저적’은 주로 농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생산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소비에서 낭비를 없앰으로써 경제적인 윤택을 달성하여 굶주림과 군색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범죄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업’과 ‘저적’에서는 처벌 조항도 형식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넷째는 ‘사위(詐僞)’로서, 이는 거짓 일을 꾸미는 것이다. ‘사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거짓 일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문서 위조, 문기(文記)의 위조, 인장 위조, 관원 사칭, 현직 관원의 자제 사칭 등이다. 이에 대한 형벌도 위조에 따라 다양하게 부과하고 있다. ‘사위’ 조항에서는 위와 같은 거짓 일을 도모하지 말고 모든 일에 성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주(奴主)’가 있다. 이 항목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군신(君臣) 관계에 비하여 주인에 대한 종의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법을 어겼을 때는 중벌에 처하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동경교육대학본〉에서 보이고 있는 ‘군상(君上)’ 조항은 ≪경민편≫의 전체적인 서술 방식에 맞지 않는다. 일반적인 서술 방식은 각 조항의 주제에 대해서 실천적인 윤리를 제시한 다음 법을 어겼을 경우의 처벌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군상’에서는 주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백성이 할 일이나 도리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언급할 뿐 구체적인 처벌 내용에 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경민편≫ 본래의 서술 방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4. 간행자

≪경민편≫의 원간본을 편찬한 김정국, 중간본을 간행한 허엽, 그리고 다시 개간본(改刊本)을 간행한 이후원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자(字)가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이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 사간, 승지 등을 거쳐 151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경민편≫을 간행하고 학령(學令) 24조를 만들어 도민과 학자를 권면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양에 내려가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쓰므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되어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토록 하였으며, 다시 그 이듬해 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540년 병으로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 병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성품이 순정(純正)하고 공평하며 무리함이 없었다. 정사(政事)를 잘하여 방백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고 한다. 사화로 은거할 때는 매우 가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가 편찬한 저술로는 ≪사재집(思齋集)≫,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입도(歷代授受承統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척언(思齋摭言)≫, ≪경민편≫ 등이 있다.
허엽(許曄, 1517~158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며 군자감 부봉사 허한(許瀚)의 아들이고 서경덕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혐의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재기용되어 이듬해 대사성에 오르고 1562년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경연에 참석,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구수담(具壽聃), 허자(許磁)의 무죄를 논하다가 또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과격한 언사 때문에 또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어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말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의 ≪경민편≫을 보충하여 중간하였다. 벼슬을 30년간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으로 군수 이욱(李郁)의 아들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어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출전하였다. 그 뒤 단양군수,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나서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637년 승지(承旨)에 이어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1642년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48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성,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65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分藏)케 하였으며 이어 한성부 판윤, 형조, 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때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을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여 능변으로 악을 질시하였고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 문헌〉

김해정(1993). 경민편언해 연구.≪한국언어문학≫ 31집. 한국언어문학회.
안병희(1978). 해제 ≪이륜행실도·경민편≫(영인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윤석민 외(2006). ≪쉽게 읽는 경민편언해≫. 박이정출판사.
이은규(2005). ≪경민편(언해)≫의 어휘 연구. ≪언어과학연구≫ 35집. 언어과학회.
이은규(2007). ≪경민편(언해)≫이본의 번역 내용 비교. ≪언어과학연구≫ 43집. 언어과학회.
정호운(2006). 16ㆍ7세기 ≪경민편≫ 간행의 추이와 그 성격. ≪한국사상사학≫ 제26집. 한국사상사학회.
『구급간이방』 해제 주001)
* 이 해제는 김남경(2005):≪구급방류 언해서의 국어학적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박사 학위 논문)을 원저자의 허락을 받아 상당 부분 수정하여 옮긴 것이다.
김동소

1. 형태 서지적 고찰

≪구급 간이방≫은 조선조 성종 20년(1489년) 왕명에 의해 윤호(尹壕) 등이 편찬한 의서(醫書)이다. 이 문헌에는 허종(許琮)의 서문이 실려져 있는데, 이 서문에 의하면 이보다 먼저 편찬된 ≪의방 유취(醫方類聚)≫, ≪향약 제생방(鄕藥制生方)≫, ≪구급방(救急方)≫ 등이 모두 백성들이 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민생 의병지 용(民生醫病之用)’에 편하게 하도록 윤호, 임원준(任元濬), 박안성(朴安性), 권건(權健) 및 허종 등에게 명하여 책을 완성하니, 모두 8권 주002)
≪구급 간이방≫의 권수에 대해서는 실록과 허종의 서문에서 기록의 차이를 보인다.
“內醫院提調領敦寧尹壕等 進新撰救急簡易方九卷”(≪성종 실록≫(성종20년 5월조))
“搜括古方病 取其要而以急爲先藥 收其寡而以易爲務 其所裁定實禀 神規擇之 必精簡而不略 又飜以方言 使人易曉 書成凡爲卷八爲門一百二十七 命曰救急簡易方”(허종의「서문」성종20년 9월 上澣)
이 책의 편찬 연대가 실록에서는 성종 20년 5월이고 허종이 쓴 서문에는 성종20년 9월 상한(上澣)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9권으로 만들었으나 후에 8권으로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서문과 목록을 별권으로 한 것일 수도 있겠다.(김신근 1987: 123-9 참조.) 그러나 짧은 시기에 다시 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서문과 목록에 모두 8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8권일 가능성이 크다.(전광현 1982: 521 참조)
127문(門)이며, 이름을 ≪구급 간이방≫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의 간행에 대해, ≪성종 실록≫(성종 20년 5월 30일조)에 “모든 고을에 두루 반포되기는 어려우니, 모든 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도에서 개간하여 계수관이 찍어 내도록 청하였다.(諸邑難以遍頒 請令道監司開刊于本道界首官印行)”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구급 간이방≫(이 아래에서는 ≪간이방≫으로 줄여 부름)은 중앙 관청에서 간행한 것을 다시 지방에서도 개간하여 반포하도록 한 뒤 여러 차례 번각(飜刻)되었는데, 현전하는 ≪간이방≫ 자료에는 그러한 흔적이 권별 혹은 한 책 안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이 문헌은 여러 시기에 걸쳐 번각되었으므로, 한 책 안에서도 원간본을 번각한 것, 번각본(飜刻本)을 다시 번각한 것, 판의 마모나 소실에 따라 새로 판을 만들어 넣은 것(보각(補刻)한 것) 등이 뒤섞여 있다.
≪간이방≫은 1489년 간행된 이후 원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한 책 안에서 여러 차례 번각된 것들이 함께 묶어져 전해지기 때문에 현전하는 번각본의 번각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번각 과정을 추정해 보면 1489년에 원간본인 을해자본(乙亥字本)이 간행되었고, 판목의 노후로 인한 번각은 대체로 5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므로, 1550년 이후의 번각본의 번각판과 1600년 이후의 보각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그 대략의 시기를 아래 도표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표 1] ≪간이방≫의 번각 과정

1489년원간본(을해자본)
1490-1500년대번각본번각본(목판본)번각본보급을 위한 번각
※지역별 차이
1550년 이후번각본의 번각판마모·결락에 의한 번각
※각수(刻手)별 · 지역별 차이
1600년 이후보각판마모·결락에 의한 번각
※각수별 · 지역별 차이

≪간이방≫은 권1, 권2, 권3, 권6, 권7의 5권만 전해지는데, 그 권별 소장처를 살펴보면, 권1은 일사 문고(一簑文庫)가, 권2는 김영탁(金永倬) 씨가, 권3은 동국대 도서관이, 권6은 1996년 1월 19일 보물 제1236호로 지정되어 충북 음성군 대소면 한독 의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주003)
문화관광부 문화재 관리국 (1998: 75) 참조.
또 다른 책을 통문관(通文館) 사장 이겸로(李謙魯) 씨가 소장하고 있다. 권7은 대구의 한 개인과, 영남대, 만송 문고(晩松文庫), 고 김완섭(金完燮) 씨 등 주004)
三木榮 (1976: 60-1)에 의하면 황의돈 씨가 〈권3, 4, 6, 7〉을, 이인영 씨가 〈권6〉을 소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 소장하고 있다. 주005)
전광현 (1982: 518)에 의함.
그 중 권1, 권2는 단국대에서, 권3, 권6, 권7은 홍문각에서 각각 영인한 바 있다.
책의 표지에 ‘救急簡易方 全’이라고 씌어 있는데 후대에 써 붙인 것으로 보인다. 권1의 책 크기는 29.5cm×19.1cm이고, 반광(半匡)의 크기는 21cm×15.2cm이다. 주006)
〈권2〉, 〈권3〉, 〈권6〉은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책의 크기를 알 수 없으나, 〈권2〉는 전광현(1982: 518)에 의하면, 26.1cm×18.5cm, 반광(半匡)의 크기는 21cm×15.2cm이다.
책머리에 ‘救急簡易方 序’라는 허종의 서문이 3장 있고, 그 다음에 ‘救急簡易方 目錄’이 127항목에 걸쳐 나열되어 있다. 목록 다음 장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대체로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지만 면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007)
〈권3〉의 42장에는 임란 전후로 추정하는 대흑구 상하 내향 흑어미(大黑口上下內向黑魚尾)가 나타난다. 이 장에는 계선과 방점이 없다(또한 3장, 9장 전면에 걸쳐서도 방점이 보이지 않는다.).
판심제(版心題)는 ‘簡易方’ 주008)
〈권2〉의 90, 91장은 판심제는 ‘簡易’로 보인다.
이다. 원문은 8행 17자(언해는 16자)이며 계선이 있다. 5자째와 9자째 사이에 판심제와 권차(卷次)가 있고 10자째와 12자째 사이에는 장차(張次)가 있다. 〈권1〉은 모두 116장, 〈권6〉은 95장, 주009)
문화관광부 문화재 관리국 (1998: 75)에서는 “前部 5張 後尾 1張이 缺落되어 복사하여 보수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권6〉의 앞부분 5장, 뒷부분 1장이 떨어져 나간 것을 〈권6〉의 또 다른 책인 통문관 이겸로 씨 소장본을 복사하여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7〉은 85장으로 낙장이 없고, 〈권2〉는 51장이 낙장, 〈권3〉은 22장 뒷면과 23장 앞면이 낙장되었다.
〈권1〉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원본을 확인한 결과,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에서 간행된 영인본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영인본에서는 장차가 모두 바르게 되어 있었으나 원본에는 11장이 15장과 16장 사이에 있고, 10장 다음에 12, 13장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은 〈권7〉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41장과 44장이 바뀌어 있고 83장의 뒷면에 84장의 뒷면이, 84장의 앞면과 85장의 앞면의 자리가 서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여러 판이 뒤섞인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권1〉의 원본의 글자와 방점 부분들을 확인한 결과, 영인본에서 ‘듯’으로 보이는 부분이 원본에서는 ‘둣(一012ㄴ1)’, ‘의’로 보이는 부분은 ‘위(一036ㄱ1)’, ‘시’로 보이는 부분은 ‘(一058ㄱ1)’, ‘’로 보이는 부분은 ‘미(一066ㄱ4)’임이 확인되었다. 방점의 경우는 권1의 지질(紙質)이 잡티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어서 원문에는 점이 아닌데도 영인본에는 방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매우 많았다. 또한 〈권7〉의 원본에서는 탈획이나 오각이 많이 나타난다.

[표 2] ≪간이방≫의 형태 서지

소장처〈권1〉 일사문고 〈권2〉 김영탁
〈권3〉 동국대 〈권6〉 한독 의약 박물관, 이겸노
〈권7〉 대구 개인 소장, 김완섭, 영남대, 만송문고
표지 서명〈권1〉에 ‘救急簡易方全’ 개장.
〈권2·3·6·7〉 표지 없음
서문〈권1〉에 “救急簡易方序”라는 허종의 서문이 3張 있다.
목록서문 다음에 卷之一에서 卷之八까지의 127항목이 있다.
권수제救急簡易方卷之一
책크기(㎝)29.5×19.1
판종목판본
판식반엽광곽(㎝)21×15.2
사 주단변
계 선있음
행수 및 자수8행 17자
판심魚尾대체로 상하 내향 흑어미이지만 매우 혼란되어 나타남.
판심제簡易方
낙장〈권2〉의 51장, 〈권3〉의 22장 뒷면과 23장 앞면

≪간이방≫은 특이하게도 글자의 모양이나 크기, 굵기가 일정하지 않을 뿐더러 반광의 크기와 어미(魚尾)의 모양이 다른 장들이 많이 뒤섞여 있다. 주010)
≪간이방≫의 모든 책에서 이와 같은 현상들이 발견된다.
≪간이방≫의 〈권1, 2, 3, 6, 7〉에 나타나는 어미들을 비교해 본 결과,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고 같은 책 내에서도 여러 가지가 나타났다. 현전하는 ≪간이방≫에 나타나는 어미는 모두 전권을 통틀어 14종류이다.

[표 3] ≪간이방≫ 권별 어미의 형태

번호유형어미의 형태권수
12367
1A
2
3
4
5
6
7
8
9B
10
11
12C
13
14
54864
* ◎는 많이 나타남, ○은 나타남의 뜻임.

각 권의 주된 어미 유형을 살펴보면 〈권1, 2, 3〉에는 2의 형태가, 〈권6, 7〉에는 1의 형태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권별로는 〈권3〉(8가지)과 〈권6〉(6가지)에 가장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권6〉에 나타나는 ‘대흑구 상하 세화문 어미(大黑口上下細花紋魚尾)’(표의 13번)는 중종부터 임란 직후까지의 문헌에 자주 보이는 것이다. 주011)
안춘근 (1991: 182) 참조.
그러나 어미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각 장(張) 별로 몇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간이방≫ 을해자의 번각본

≪간이방≫번각본의 번각판

≪간이방≫ 보각판

판본은 각 장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마모의 정도, 글자의 모양ㆍ크기ㆍ굵기를 기준으로 ① 을해자의 번각본, 주012)
여기에서는 을해자본을 번각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간의 일차 번각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원간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② 번각본의 번각판, ③ 보각판 주013)
≪간이방≫의 판종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원간본 : 성종 20년(1489)의 원판 또는 초판본을 말한다.
② 번각본 : 원본을 따라 새로 판본을 새긴 것이다.
③ 보각본 : 판목의 일부분이 마모 또는 분실되어 뒤에 그 부분만을 보각(補刻)하여 만들어 낸 책. ≪간이방≫의 보각판은 괘선이 없고 방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들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현전하는 을해자의 번각본은 번각 후 시간이 많이 경과하고 인출되었으므로 마모가 심하고 글자의 굵기가 굵으면서도 크다. ② 번각본의 번각판은 마모는 심하지 않으나 탈획이나 오각이 많다. ③ 보각판은 글자의 모양이 날카롭고 크기가 작고 굵기도 가늘다. 보각판 중 좀더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판은 계선도 없고 방점도 거의 생략되었다.
앞서 제시한 ≪간이방≫의 번각본을 번각 정도 및 판의 특성에 따라 판종을 3가지로 분류한 것을 장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4] ≪간이방≫의 판종별 분류

을해자의 번각본번각본의 번각판보각판
17세기 이전 보각판17세기 보각판
권1나타나지 않음(001-025)
(027~036)
(042)(044~049)
(052~057)(059~077)
(081~088)
(089~097)(106~116)
(026)
(037~041)
(043)(050)
(051)(058)
(078~080)
(098~105)
나타나지 않음
권2나타나지 않음(001~010)(013~023)(027~029)
(031)(034) (043~050)(053~055)
(058~081)(082~089)(092~101)
(102~108)(109~121)
(024~026)
(030)(032)(033)
(035~038)
(039ㄴ~042)
(052)(056)
(057)(090)(091)
나타나지 않음
권3(058ㄱ)
(077ㄴ)
(087)
(095)
(106)
(001~002)(004~041)
(043~057)
(059~076)(078~086)
(088~092)
(096~105)(107~120)
(093)(094)(003)(042)
권6(027ㄴ)
(028)
(001~004)(011~014)
(015~026)
(029~032)(035~060)
(007~010)
(034)
(061~095)
(005)(006)
(033)
권7(002)(025)
(026)(036)
(040)(041)
(053ㄴ)
(001)(003~011)
(013ㄱ)(014~015)(016~022)(024)
(027)(029)(030)(033)(034~035)
(042~046)(048~053)(055~085)
(012)(023)
(028)(031)
(032)(047)
나타나지 않음
을해자 형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권은 〈권7〉이며 〈권1〉과 〈권2〉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권1〉과 〈권2〉의 경우 〈권7〉에 비해 보각판이 훨씬 많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권1〉과 〈권2〉를 비교해 보면, 〈권2〉의 보각판에는 방점이 없는 부분이 많다. 〈권3〉과 〈권6〉은 을해자의 비율 주014)
김남경 (2000: 19)에서 각 판종별 비율을 제시하였는데, 을해자 형태는 2.53%, 번각판은 76.86%, 보각판은 17.83%, 기타(한 장 안에 보각되어 분류하기 어려움) 2.13%이다.
이 매우 낮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임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흑구가 나타난다. 또 〈권6〉에서는 〈권3〉보다 많은 보각판이 보이며, 이 〈권6〉의 보각판에서는 대흑구가 많이 발견된다. 대체로 〈권7〉이 을해자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고, 〈권6〉이 원래의 모습을 가장 적게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이방≫에서 권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판각한 지역의 다름 때문으로 추정된다. 아래에서 각 판본별 표기상의 특징을 한두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을해자의 번각본

〈권6〉에 ‘오조매(六027ㄴ1)’라는 어형이 나오는데, 연철 표기되어 있다. 번각판에서는 ‘오·좀애(六037ㄴ3)’로 3회 나타난다. 〈권7〉의 을해자본에서는 자음 동화된 ‘난·니(七025ㄴ8)’가 1회, ‘난니와(七25ㄴ8)’가 2회로 자음 동화 표기가 반영되어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낟니와(七25ㄴ8)’로, 보각판에서 ‘낟니(七47ㄴ5)’로 나타난다.

2) 번각본의 번각판

(1) 혜다(七014ㄱ4) 볼근(七014ㄱ8) 리허(七073ㄴ2)
솔(七078ㄱ1) 맏(七071ㄱ4) (七014ㄱ3) 날굽(七080ㄱ5)
(2) 시로니와(七014ㄴ6) 느르게(七016ㄱ5) 닐급(七016ㄱ6)
ㄴ(七018ㄱ1) 을(七019ㄱ5) 글허(七019ㄱ8) 셕둑화(七019ㄴ7)
아(七021ㄱ8) 돈금(七024ㄱ4) 디(七048ㄴ2) 셜다(七065ㄱ7)
슷블(七068ㄱ5) 골니(七070ㄱ6) 아흑(七070ㄴ4) 흐ㄹ(七085ㄱ5)
위에 제시한 (1)은 오각의 예이고, (2)는 탈획으로 보이는 예들이다. 주015)
≪간이방≫ 〈권7〉의 원본을 확인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제시되는 오각과 탈각의 예는 주로 〈권7〉을 대상으로 하였다.
(1)의 ‘혜다(七014ㄱ4)’는 ‘혜[디]’, ‘볼근(七014ㄱ8)’은 ‘블근’, ‘리허’는 ‘디허(七073ㄴ2)’, ‘솔(七078ㄱ1)’은 ‘술’을 오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점을 획으로 잘못 인식하여 판각한 것으로 보이는 ‘(七014ㄱ3)’은 ‘’의 오각이고, ‘날굽(七080ㄱ5)’은 ‘닐굽’의 오각이다. (2)는 판의 마모나 소실 등으로 탈획된 예들이다. 번각판에서 이러한 예가 많이 보인다. 위에 탈획된 예를 어휘 및 문맥에 맞게 재구해 보면 ‘시[사]로니와(七014ㄴ6), 느[누]르게(七016ㄱ5), 닐급[굽](七016ㄱ6), [](七018ㄱ1), []을(七019ㄱ5), 글허[혀](七019ㄱ8), 셕둑[듁]화(七019ㄴ7), 아[](七021ㄱ8), 돈금[곰](七024ㄱ4), ,디[게](七048ㄴ2), 셜[졀]다(七065ㄱ7), 슷[숫]블(七068ㄱ5), 골[곪]니(七070ㄱ6), 아흑[혹](七070ㄴ4), 흐ㄹ[르](七085ㄱ5)’와 같다.
(3) 븨여, 주016)
이 예는 번각판으로 분류된 장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븨여’가 보이는 부분만은 보각된 것으로 판단된다. ‘븨-’는 〈권2〉의 이 부분과 〈권6〉의 보각판에서 4회 나타나는 것이다.
사바래, 어
(3)의 예 ‘븨여’는 〈권2〉의 번각판에 1회 나타나는 것으로, 〈권2〉의 번각판에서는 ‘비·븨여(二028ㄱ7)’로 5회, 보각판에서는 ‘비븨여(二037ㄱ4)’로 1회 나타난다. 연철 표기된 ‘사·바래(二014ㄱ8)’는 번각판에서 단 1회 나타나는 것으로, 〈권2〉의 다른 번각판에서는 분철 표기된 ‘사발애(二006ㄱ7)’로 4회 나타나고, 보각판에서도 분철 표기되어 1회 나타난다. 또 〈권7〉의 번각판에서는 ‘어(七019ㄱ6)’의 표기가 단 1회 나타나는데, 또 다른 번각판에서는 ‘어믜(七035ㄴ3)’로 5회, 보각판에서도 ‘어믜’로 2회 나타난다.

3) 보각판

(4) 몰[믈](七015ㄱ7), []야(七054ㄱ4)
(5) 긱[각](七028ㄱ4), 미[머]기라(七047ㄴ4) []으로(七028ㄱ7)
보각판에서는 (4)와 같이 오각된 예와, (5)와 같이 탈획된 예가 보이는데, 보각판은 글자가 가늘지만 선명하게 나타나 탈획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4)의 ‘몰(七015ㄱ7)’은 ‘믈’을 오각한 것으로, ‘야(七054ㄱ4)’는 ‘야’를 오각한 것이다. (5)의 ‘긱(七028ㄱ4)’은 ‘각’, ‘미기라(七047ㄴ4)’는 ‘머기라’, ‘으로’는 ‘으로’가 탈획된 것으로 보인다.
(6) 벌집
중철의 ‘벌집(三003ㄱ6)’은 ≪간이방≫에서 1회 나타나는 것으로 보각판에 보이는데, 연철 표기된 ‘버집(三003ㄱ3)’도 보각판에서 함께 나타난다.
(7) 라여
(8) 시
≪간이방≫ 전체를 통틀어 구개음화된 ‘먹지(三003ㄴ5)’가 1회 나타나는데, 이 판은 계선도 없고 방점도 없다. 후대에 보각한 것으로 파악된다. ‘하나져그내(三003ㄴ3)’도 ‘먹지’가 나타나는 판에서 보이는 것으로 단 1회 나타난다. 이것은 번각판에서 ‘하나져그나(三034ㄴ4)’로 5회 나타나는 것이다. ‘멀기셔(六80ㄱ3)’와 같이 각자 병서 ‘ㅉ’이 보이는 예가 있는데, ‘ㅉ’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는 표기로 보각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예이다. 또한 을해자본과 번각판에서 ‘라’로 나타나는 예가 보각판에서는 ‘라여(三003ㄱ8)’로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이 문헌에서 유일하다. 또 번각판의 ‘시’가 보각판에서는 ‘시(三094ㄴ4)’로 나타난다.
그 외 이 문헌에서는 방점의 표기가 분류된 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예들이 많은데, 김남경(2000)에서 논의된 것을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5] ≪간이방≫의 판본별 방점 표기 비교

방점을해자의 번각본번각본의 번각판 보각판17세기 보각판
··리··리
(七036ㄱ3)
···리
(七024ㄱ7)
3
1
··리(七003ㄴ2)
·:리(七011ㄱ8)
·리(七077ㄴ5)
:·리(七042ㄱ2)
·리(七074ㄱ7)
23
1
1
2
2
·리(七031ㄱ7)5없음
··에··에
(三077ㄴ7)
1··에(三121ㄱ3)
·에(三007ㄱ6)
36
6
에(三042ㄴ7)
·에(三042ㄴ8)
1
1
없음
달·혀달·혀
(三087ㄴ5)
3·달혀(三086ㄱ5)
달:혀(三053ㄴ7)
달혀(三077ㄱ7)
달·혀(三006ㄴ2)
:달·혀(三097ㄱ2)
1
2
6
44
1
달혀(三093ㄴ4)3없음
머·그면머·그면
(七026ㄴ6)
4·머·그면(七078ㄴ1)
머·그·면(七007ㄴ8)
머·그면(七016ㄱ6)
머그·면(七006ㄱ6)
머:그면(七035ㄱ1)
머그면(七006ㄴ3)
1
2
28
1
1
2
머·그면(七028ㄴ3)
머그면(七031ㄴ1)
3
1
없음
·므레·므레
(六027ㄱ3)
3·므레(六002ㄱ2)
므레(六013ㄱ2)
므·레(六052ㄴ2)
17
12
1
·므레(六069ㄴ8)
·므·레(六078ㄱ4)
므레(六008ㄱ8)
12
1
7
므레
(六005ㄱ7)
4
·라·라
(六028ㄱ2)
2·라(六002ㄴ6)
라(六013ㄱ1)
7
3
·라(六069ㄱ1)
··라(六083ㄴ4)
라(六008ㄱ1)
8
1
7
라
(六006ㄱ3)
2
·라·라
(六027ㄴ6)
2·라(六036ㄴ4)
라(六043ㄱ1)
·:라(六027ㄱ7)
5
2
1
··라(六062ㄱ1)
··라(六075ㄱ6)
:라(六063ㄴ4)
라(六063ㄴ8)
·라(六062ㄴ6)
2
1
1
4
20
라
(六033ㄱ6)
2
·론·론
(三106ㄴ3)
8·론(三013ㄱ6)
론(三030ㄴ8)
:론(三053ㄴ4)
19
2
1
론(三094ㄱ6)1
아·니커·든아·니커·든
(六028ㄴ3)
3아·니커든(六060ㄱ1)
아·니커·든(六001ㄴ7)
아니커든(六026ㄴ5)
1
4
2
아·니커·든(六087ㄴ1)2아니·커든
(六005ㄴ7)
아니커든
(六005ㄴ3)
1
1
≪간이방≫의 방점 표기 주017)
맨 앞에 제시한 방점의 표기는 ≪간이방≫의 을해자본을 중심으로 ≪석보 상절≫과 ≪월인 석보≫의 방점을 참조하여 제시하였고, 뒤의 숫자는 빈도를 표시한 것이다.
를 분류된 판에 따라 비교한 것이다. ≪간이방≫은 현전하는 책이 모두 다섯 권이고, 지역별 차이와 시기적 차이가 혼재되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권마다 방점의 양상을 따로 비교하였는데, 한 권 안에서도 판종에 따라 방점의 양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을해자본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쓰이고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매우 혼란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머그면’을 예로 들면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을해자본에서는 4회 모두 일정하게 방점이 찍혀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무려 6가지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 때 을해자본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표기가 대체로 빈도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각판에서는 방점이 없는 표기가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 보각판의 방점 표기의 혼란 정도는 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권7〉, 〈권3〉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나타나지만, 〈권6〉의 경우, 한 장 안에서도 혼란되어 나타난다. 또한 빈도를 고려해 보면, 번각판에서는 혼란되는 방점 표기 중 을해자본의 방점 표기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높은 빈도를 보였으나, 보각판에서는 을해자본에서 적힌 형태의 방점 표기의 빈도가 높지 않다.

2. 표기의 검토

≪간이방≫에는 전반적으로 방점이 나타나나 장에 따라 한 장 전체에 방점이 없거나, 일부분에서만 방점이 나타나는 장도 있다, ‘ㅿ’은 나타나나, ‘ㅸ’은 나타나지 않는다. 종성 위치에서는 ‘ㆁ’을 표기하고 있는데, 탈획되어 ‘ㅇ’만 남기도 하였다. 또한 ‘ㅆ’, ‘ㅉ’의 각자병서가 보이며 합용 병서도 물론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표기에서의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간이방≫에 표기된 문자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6] ≪간이방≫에 표기된 문자

초성자ㄱㄷㅂㅅㅈ
ㅋㅌㅍ ㅊㅎ
ㄲㄸㅃㅆㅉ
ㄴㅁㅿ ㅇㄹ
ㅺㅼㅽ
ㅳ ㅄㅶᄩ
ᄢᄣ
중성자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
ㅢ ㅚㅐㅟㅔㅐㅖ
ㅘㅝㅙㅞᆐᆒ 
종성자ㄱㄷㅂㅅㅈㅌㅍ
ㆁㄴㅁㅿㅇㄹ
 
 
    ᄜ 

(1) 댓무(三033ㄱ4), 마(三047ㄴ7), 브(三033ㄱ6), 브면(二016ㄱ8), 오니와(二001ㄴ8), 히(六014ㄴ2), (六005ㄴ2)
(2) ㅆ - 써(七031ㄱ3), 쓰고(七044ㄱ8)
(3) ㅉ - 범호 (六045ㄴ3), 귀 (一049ㄱ1), 직가 (七032ㄴ7), 날츌 (七032ㄴ7), 멀기셔(六080ㄱ3)
(4) 아비부 와 들입 와 스고  앤 아 와 날츌  써(七39ㄱ2-3)
≪간이방≫에서 ‘ㅿ’은 (1)의 ‘댓무, 마, 브, 브면, 오니와, 히, ’와 같이 두루 쓰이고 있다. 주018)
≪간이방≫에서는 ‘아(下83ㄱ5)’와 ‘아(上19ㄱ3)’, ‘어디며(下27ㄴ1)’와 ‘븟어딘(下01ㄴ2)’이 함께 쓰였는데, 그 중 ‘아’는 11회, ‘아’는 6회의 빈도를 보인다.
≪간이방≫에서 각자 병서의 표기로 ‘ㅆ’과 ‘ㅉ’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ㅉ’이 쓰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각자 병서 글자는 세조 시대≪원각경 (언해)(1465년)≫이후부터 16세기 말까지 쓰이지 않았고, ‘ㅆ’은 15세기 말부터 다시 쓰이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널리 쓰였고, ‘ㅉ’은 17세기가 되어야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주019)
김동소 (2003ㄱ: 85~86, 2007: 186) 참조.
≪간이방≫의 ‘써’는 보각된 판에서 보이는 것이며, ‘쓰고’는 번각본에 나타나는 것이다. ‘ㅉ’은 한자 ‘글자 자(字)’의 음을 적은 ‘’로 표기된 것이 대부분인데, ‘범호 (六045ㄴ3)’, ‘귀 (一049ㄱ1)’ ‘직가 (七032ㄴ7)’, ‘날츌 (七032ㄴ7)’, ‘즈믄쳔 (七40ㄱ8)’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표기는 된소리 표기이기도 한데, 예문 (4)의 ‘아비부 와 들입 와 스고  앤 아 와 날츌  써(七39ㄱ2-3)’처럼 같은 문장 안에서 된소리 ‘’이 합용 병서인 ‘ㅶ’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 각자 병서인 ‘ㅉ’로 나타나는 점은, 한자 ‘字’의 ≪동국 정운≫식 한자음 표기가 ‘’ 주020)
≪간이방≫에서는 모두 ‘字(구上05ㄱ4)’로 9회 나타난다.
였으므로 이 표기에 이끌려 각자 병서인 ‘’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멀기셔(六079ㄱ3)’ 주021)
‘멀기셔’와 관련된 것으로 ≪노걸대 언해≫〈상 34〉에 ‘멀즈시 라(遠些兒絟)’가 있다.
는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각된 판에 나타나는 것이다.

(5) ㅂ류
ㅳ - (三034ㄴ4), 깃 불휘(六012ㄱ7), 디거든(三003ㄴ8), 고(七003ㄱ1), 혀(二045ㄱ6), (六086ㄴ4), 고(二013ㄴ1), 얌기(一108ㄱ7)
ㅄ - 라(三039ㄴ4), (一008ㄴ4), (一056ㄱ5), 게(三029ㄴ7), 초(三055ㄴ6), (三059ㄴ3)
ㅶ - (三012ㄴ8), 오(六072ㄱ5), 머리(二008ㄱ5), (一073ㄴ4), (三013ㄱ8), 면(一077ㄱ3), 뵈이(三079ㄱ7)
ㅷ - 디여(三060ㄴ4)
(6) ㅅ류
ㅺ - 리(六004ㄴ6), 아(三024ㄱ3), 오(六010ㄴ3), 리나모(三082ㄴ3), 모롭(一001ㄴ4), 어든(一069ㄴ1), 라(一044ㄴ8), 오(一069ㄱ6), 리라(一035ㄴ3)
ㅼ - 해(一065ㄴ2), (一003ㄱ1), (三063ㄴ5), (三006ㄱ4)
ㅽ - (七057ㄴ5)
(7) ㅄ류
ㅴ - 닙(六054ㄱ8), 리고(七067ㄱ7), (七040ㄴ4), 04ㄱ6), (六016ㄴ8), 니(六078ㄱ1)
ㅵ - 어(二047ㄱ8), 려(六051ㄴ1)
병서 표기로는 각자 병서 글자와 합용 병서 글자가 모두 보인다. 각자 병서 글자로는 위에서 말한 대로 ‘ㅉ’과 ‘ㅆ’이 쓰였고, 합용 병서 글자로는 ‘ㅂ’류의 ‘ㅳ, ㅄ, ㅶ, ᄩ’이, ‘ㅅ’류의 ‘ㅺ’, ‘ㅼ’, ‘ㅽ’이, ‘ㅄ’류의 ‘ᄢ’와 ‘ᄣ’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 오각으로 보이나 ‘해(三9ㄴ01), 두 개(左右翮)(六5ㄱ6)’와 같은 표기가 보인다.

3. 어휘의 검토

1)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휘
≪간이방≫의 어휘 중 사전에 실리지 않은 어휘는 다음과 같다.

(1) 욘히[溫冷]
≪간이방≫〈권1〉에만 단 1회 나타난다.
去滓溫冷服
즈 앗고 욘히 야 머그라(一004ㄴ5)
지금까지 알려진 중세어 문헌에서 볼 수 없는 유일례이다. ‘溫冷’을 번역한 말이므로 ‘-’은 ‘따스하다’의 뜻이겠지만 ‘욘히’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뜨뜻미지근히’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듯하다.

(2) 림·질(淋)
≪간이방≫〈권3〉에 3회 주022)
어휘의 출현 횟수는 협주(夾註)의 것까지 포함한 것이다.
나타난다.
諸淋(여러 가·짓 림·질)(三101ㄱ3)
이 어휘는 한자 ‘淋’을 번역한 것으로 현대의 ‘임질(淋疾)’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 주023)
여기에서는 남광우 (1997) :≪고어 사전≫(이하 ‘고어’), 유창돈 (1994) :≪이조어 사전≫(이하 ‘이조’), 한글 학회 (1992) :≪우리말 큰사전≫의 〈옛말과 이두편〉 (이하 ‘우리말’)을 참조하였다. 그 외에도 김영황 (1994) :≪중세어 사전≫, 리서행 (1991) :≪조선어 고어 해석≫, 이상춘 (1949) :≪조선 옛말 사전≫, 이영철 (1955) :≪옛말 사전≫, 정희준 (1949) :≪조선 고어 사전≫, 홍윤표 (1995) :≪17세기 국어 사전≫등을 참조하였다.
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신속孝3≫와 ≪譯上62≫에서는 ‘님질(痳疾)’이 보인다. 이 용례는 글자 크기가 작은 보각판에 나타난다.

(3) 므그니[重]
이 낱말은≪간이방≫에만 두어 번 나타난다.
用白礬二錢重生硏末
번 두 돈을 므그니 라 라(一010ㄴ7)
의미가 확실하지 않지만 한자 ‘重’을 번역한 듯하므로 ‘묵직이’ 정도로 해석된다. 권3에 “조협 론  므근  돈과(皁莢末一大錢)”이라는 용례가 있다.

(4) 부목/브목[竈突]
≪간이방≫〈권7〉에 2회 나타난다.
竈突墨(브[][목]읫 거믜)(七041ㄴ7)
부목·읫 거믜·과· (七042ㄱ1)
이 어휘는 한자 ‘竈突’에 대응되는데, ‘竈突’은 ‘부뚜막에 딸린 굴뚝’의 의미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41장의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히 판독하기가 힘들지만 ‘브목’으로 보이며 마모가 심하지 않은 42장의 앞면은 ‘부목’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어휘로는≪박통사 (언해) 十四19≫에서 ‘브섭’, ≪박통사≫, ≪간이방≫, ≪훈몽 자회≫에서 ‘브’, ≪박통사≫, ≪구급방≫에서 ‘브’을 찾을 수 있다. 이 용례는 을해자본에 나타난다.

(5) 슈마(水馬)
≪간이방≫〈권7〉에 1회 나타난다. .

水馬手中持之則易産
·슈:마 소·내 주·여시·면 :수·이 나·리라(七028ㄴ6)

‘슈마’는 한자 ‘水馬’를 한글로 표기한 어휘로 현대의 ‘해마(海馬)’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용례는 글자가 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6) 옴옴거든[悸]
현재까지 알려진 중세어 문헌 전체에서≪간이방≫〈권1〉에만 다음과 같이 단 한 번 나타나는 유일례이다.

頭風驚悸
머리예  드러 놀라 옴옴거든(一013ㄴ1)

‘옴옴’은 ‘悸(두근거릴 계)’를 번역한 말인데, ‘가슴이 옴직옴직하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는 뜻인 듯하다.

(7) 진[麪]
≪간이방≫〈권1〉에만 다음과 같이 2회 나온다.

用浸烏頭酒打麪糊爲丸
바곳 맛던 수레 진으로 플 수어 환 로 (一009ㄱ1)
好醋麪糊爲丸如桐子大
됴 초애 진으로 플 수어 머귓 여름마곰 환 라 (一010ㄱ6)

위의 예문에 나오는 ‘진으로’는 ‘진 + -으로’의 변형인데, ‘진’는 ‘밀가루’라는 뜻일 듯하다. 그러나 ‘진’은 접두사인 듯하지만 그 어원은 알 수 없다. 이 문헌 여기에만 나온다.

(8) 투(妬乳)
≪간이방≫〈권7〉에 1회 나타난다.

婦人乳癰汁不出稸積內結因成膿腫一名 妬乳
겨지비 져제 긔 나 져지 나디 아·니·야 안해 얼의여 브 골[곪] 주024)
이 글의 자료로 이용한 대구 개인 소장 ≪간이방≫〈권7〉에서는 이 장(張)이 번각판에 부분적으로 보각되었는데 ‘골’의 자리가 바로 부분적으로 보각된 부분이 다. ‘곪’의 ‘ㅁ’을 써야할 자리가 비어 있어 오각이나 탈획으로 보인다. 영대본 ≪간이방≫〈권7〉에서는 ‘곪’이라고 되어 있다.
니 일후미 투라(七070ㄱ6)

이 어휘는 한자 ‘妬乳의 음을 적은 것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장(張)은 번각판을 부분적으로 보각한 장이어서 앞의 분류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이 어휘가 나오는 부분은 번각판이다.

(9) 두위여디다[脫]
≪간이방≫〈목록〉에 단 1회 나타난다.

脫肛 문 두위여딘 :병〈목록〉

이 어휘는 한자 ‘脫’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는 ‘뒤집어지다’라는 뜻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중세 한국어의 ‘두위혀다, 두위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옛말 사전≫에는 ‘두위어져 소리 더욱 怒야 다(反側聲愈嗔)≪杜≫’가 실려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드위다’의 예를 살펴보면, ‘리 黃金 구레 너흐려든 모 드위며≪두시 (언해) 중간본 十一 16≫’, ‘믌겨리 드위 부치니 거믄 龍ㅣ 봄놀오(濤飜黑蛟躍)≪두시 (언해) 중간본 一 49≫’, ‘셜 드위텨디게 고≪월인 석보 一 29≫’, ‘네 이 드위혀니≪내훈 三 27≫’, ‘無明을 드위 야 료 表니라≪법화경 一 58≫’ 등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0) ·펴··갇[天公]
≪간이방≫〈권1〉에 2회 나타난다.

又敗天公(· ·펴··갇)燒酒服
· · ·펴량··가 ·라 수레 ·프러 머·그며(一098ㄴ3)

이 어휘는 한자 ‘敗天公’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는 ‘패랭이’이라는 뜻이다.≪이조≫,≪고어≫,≪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동의 보감≫〈탕액〉에서 한자어 ‘敗天公’을 ‘펴랑이’로 언해하였고,≪물보≫〈의복〉에서는 한자어 ‘平凉子’를 ‘펴랑이’로 대역하였다. 이 문헌에서의 ‘·펴··갇’은 ‘·펴·’[패랭이]와 ‘·갇’[갓(笠)]이 결합한 형태이다. 보각판에서 나타나는데, 이 판은 글자가 고딕체 모양이다.

2) 용례가 가장 앞선 시기인 어휘

(1) 고쵸(胡椒)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11회, 〈권6〉에 1회 나타난다.

胡椒(고쵸)硏酒服之
고쵸· ·라 수·레 머·그라(一032ㄴ1)

이 어휘는 한자 ‘胡椒’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의 ‘후추’를 의미한다. ‘고쵸’는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후대 문헌인≪자회 상12≫, ≪한378ㄱ≫, ≪물보≫〈蔬菜〉에도 나타난다. 또한 ≪유물≫에는 ‘고초’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보인다.

(2) 구블[腿]
≪간이방≫〈권1〉에 1회 나타난다.

仍摩捋臂腿屈伸之
· ·와 구·브를 ·츠며 굽힐·훠 보·라(一060ㄴ)

이 어휘는 한자 ‘腿’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의 ‘다리살, 다리’를 의미하며,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모두 합쳐 부르는 말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후대 문헌인 ≪痘≫에 ‘구블이 며 (尻冷)’가 나타나는데 이 때의 ‘尻’는 ‘꽁무니, 즉 등마루뼈의 끝진 곳’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글 학회 사전에는 ≪간이방≫과 ≪痘≫의 예 모두를 ‘엉덩이’로 풀이하였고 ≪고어≫에는 ≪간이방≫의 표제어를 ‘구블’이라 하여 ‘정강이’로 풀이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漢)≫에서는 ‘구블’가 나타나고, ≪역 하28≫에는 ‘구블쟈할’이 보인다. 리서행 (1991: 62)에는 ‘구블쟈할’을 ‘궁둥이가 얼룩무늬인 말’로 풀이하고 있다.
≪옛말 사전≫에는 ‘오직 평상 증은 귀과 구브리 면 슌고 만일 검어 디고 귀과 구브리 더우면 역니라≪두 상≫’에서 ‘구블’을 ‘귀뿌리’로 풀이하고 있고, ≪간이방≫의 예인 ‘구블’을 표제어로 하여 ‘정강이’로 풀이하였으며, ≪17세기 국어 사전≫에는 ≪痘창 상11ㄴ, 35ㄱ, 52ㄱ, 하25ㄴ≫의 예를 들고 ‘귀뿌리’로 풀이하고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3) ·이[蝸牛]
≪간이방≫〈권3〉에 2회, 〈권6〉에 2회 나타난다.

蝸牛(·이)飛麪( 밀)硏勻貼痛處
팡이와 가 밄와 라 고게 야 알  브티라(三009ㄱ)

이 어휘는 한자 ‘蝸牛’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 ‘달팽이’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사해31≫, ≪자회21≫, ≪동의≫〈탕액2 蟲部〉, ≪왜 하26≫, ≪물보≫〈介虫〉에도 나타난다. ≪옛말 사전≫에 ‘판이 주025)
조항범 (1998: 203-204)에서는 ‘파니’를 가장 오래된 어형으로 추정하고, ‘판(달린 판) + -이’로 분석하였다.
(유합 상16)’, ‘파니≪구방≫ 하77’, ‘蝸牛 月乙板伊≪향약집성방83≫’의 예들이 실려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4) 도·랏[拮梗]
≪간이방≫〈권3〉에 2회, 〈권6〉에 2회 나타난다.

拮梗(도·랏 二兩)甘草(灸 一兩)
도·랏 ·니 두 ·과 감초 ·브레 :·니  ·과 사·라(二065ㄱ7)

이 어휘는 한자 ‘拮梗’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도라지’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 초, 상7≫, ≪역 하12ㄱ≫, ≪방약2≫, ≪향약 월령 이월≫, ≪동문 하4≫, ≪물보≫〈약초〉, ≪동의2:31ㄱ≫ 등에도 나타난다. ≪신구황 촬요 8≫에는 ‘도랒’이 보인다. ≪중세어 사전≫에는 ≪제중편≫의 ‘桔梗 도랏’, ≪촌구≫의 ‘桔梗 道乙阿叱’이 실려 있고, ≪옛말 사전≫에는 ≪향약 구급방≫의 ‘桔梗 道羅叱’, ≪향약 채취 월령≫의 ‘桔梗 鄕名 都乙羅叱’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5) 도와리[霍亂]
≪간이방≫〈권2〉에만 19회 나타난다.

乾霍亂不吐不瀉
:도·와:리 ·야 ·토:티 아·니 ·며 즈츼도 아·니·코(二053ㄱ2)

이 어휘는 한자 ‘霍亂’에 대응하는 어휘로 ‘여름철에 급격한 토사를 일으키는 급성 질환’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字會 초, 중4≫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6) 마좀[當]
≪간이방≫〈권1〉에 1회, 〈권2〉에 1회 나타난다.

癲癎用艾於陰囊下穀道正門當中間隨年歲灸之
뎐·:에 ··으로 음 아·래  마좀 가·온· 제 ·나 마초 ·라(一098ㄴ8)

이 어휘는 한자 ‘當’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바로 맞음, 마침’을 의미한다. ≪신속 열 86≫에 예가 등재되어 있다. 중세 한국어의 ‘마, 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국어 사전≫에는 ≪첩 八26ㄱ≫의 ‘마즘’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7) 막딜·이다[閉]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3회, 〈권3〉에 1회 나타난다.

卒暴中風涎潮氣閉牙關緊急眼目上視
믄·득  마·자 ·추미 올·아 ·긔운·이 막딜·이며 어·귀 굳·고 ·누눌 ·티·고(一007ㄴ)

이 어휘는 한자 ‘閉’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막히다, 질리다’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번소8≫, ≪선조판 소언서제2≫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국어 사전≫에 ‘막히다’의 의미로 ‘막디르다≪마경 하21ㄱ≫’와 ‘막디다≪어록 초4ㄱ, 중5ㄴ≫’가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8) 벽돌[磚石]
≪간이방≫〈권2〉에 2회 나타난다.

蠶沙(누·에)燒磚石(·벽:돌)蒸熨
누에도 봇그며 벽돌도 더이며 울호(二039ㄱ)

이 어휘는 한자 ‘磚石’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도 ‘벽돌’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유물≫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9) ·수유[(酥]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9회, 〈권3〉에 2회, 〈권6〉에 4회, 〈권7〉에 1회 나타난다.

甘草(生用三兩)同爲末用酥(수유)少許和句徵有酥氣
감·초  :석 과·  ·디 ·라 ·수유 :져기 섯·거 :·간 ·수윳 ·긔운·이 잇·게 ·야(三035ㄴ4)

이 어휘는 한자 ‘酥’에 대응하는 어휘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동의≫〈탕액편〉에서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0) 슴슴다[淡]
≪간이방≫〈권3〉에 1회 나타난다.

淡豆豉(젼국二十粒)鹽(소곰一捻)
슴슴 젼국 ·스믈  :낫·과 소곰  져·봄과(三064ㄴ6)

이 어휘는 한자 ‘淡’에 대응하는 어휘로 ‘맛이 심심하다’를 의미한다. ≪두 하28≫에도 나타나며 ≪두 하29≫에서는 ‘ 술의 플러 머기라(담주조 하)’가 보인다. 중세 한국어에서 비슷한 뜻으로는 ‘슴겁다, 승겁다’ 등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1) 시·욱[氈襪]
≪간이방≫〈권2〉에 2회 나타난다.

氈襪後跟(시·욱 뒤측)一對男用女者女用男者燒灰酒調服
시욱 뒤측 둘흘 남진은 겨집의 하 겨집은 남진의 하 라  수레 프러 머그라(二033ㄴ)

이 어휘는 한자 ‘氈襪’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전버선’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박초 상26≫에도 나타난다. ≪두중 十九47≫에는 ‘시옥’, ≪박중 상24≫에는 ‘시옭청’, ≪박중 상27≫에는 ‘시욹쳥’이 보인다.≪17세기 국어 사전≫에는 ‘동물의 털로 만든 버선’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12) 어르·러지[癜風]
≪간이방≫〈권6〉에만 모두 16회 나타난다.

白癜風紫癜風( 어르·러지 블근 어르러지)(三084ㄱ·ㄴ)

이 어휘는 한자 ‘癜風’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어르러기, 어루러기’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 중33≫에도 나타난다. ≪역 상62≫에는 ‘어루러기’가 보이고 ≪두 하78≫에는 ‘어루록지’가 보인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3) [胡麻]
≪간이방≫〈권6〉에 4회 나타난다.

胡麻今香同擣細羅爲散
 고게 봇가   디허 리 처  라(二088ㄱ5)

이 어휘는 한자 ‘胡麻’에 대응하는 어휘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牛方≫, ≪사해중 상30≫에도 나타난다. ≪법화≫, ≪자회≫, ≪역(譯)≫, ≪한(漢)≫ 등에서는 ‘’가 보인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4) ·[床]
≪간이방≫〈권1〉에 3회, 〈권2〉에 1회 의미한다.

槐花(회홧곳)瓦上妙令香夜到三更仰上床
회홧 고· 디새 우·희 고·게 봇·가 · ·만커·든 · 우·희 졋·바 누·워셔(二088ㄱ6)

이 어휘는 한자 ‘床’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평상’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초 중6≫, ≪분온≫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국어 사전≫의 ≪신속효 7:45ㄴ≫, ≪역 하18ㄴ≫, ≪태요 66ㄴ≫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5) ·딥지·즑[薦]
≪간이방≫〈권1〉에 단 1회 나타난다.

常用薦帝卷之就平地上帝轉
·녜 · ·딥지·즑에 ·라  ·해다·가 그우·료(一067ㄱ6)

이 어휘는 한자 ‘薦’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로는 ‘짚으로 짠 거적’을 나타낸다. ≪중세어 사전≫에서는 ‘집기직, 짚자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간이방≫의 용례가 빠져 있고 뒤 문헌인 ≪자회 중11≫와 ≪노 상23≫의 예들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6) 머·릿곡뒤ㅎ[腦]
≪간이방≫〈목록〉에 1회 나타난다.

腦後有核 머·릿곡뒤헤 도· 것(목록)

이 어휘는 한자 ‘腦後’에 대응하며 현대어로는 ‘머리쪽지, 정수리’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분온22≫, ≪역 상32≫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7) 미긔치[烏賤魚骨]
≪간이방≫〈권2〉에 4회, 〈권3〉에 2회, 〈권7〉에 2회 나타난다.

烏賊魚骨(·미·긔치)搗細羅
·미·긔·치 디·허 ··리 ·처 (二112ㄴ)

이 어휘는 한자 ‘烏賊魚骨’에 대응하며 ‘오징어뼈’인데,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동의≫〈탕액〉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8) 티다[拔]
≪간이방≫〈권2〉에 단 1회 나타난다.

頂心取方寸許急捉痛拔之少頃
머·릿 ·뎡바·기·옛 터럭·을  지·봄·만 ·리 자·바 ·이 ··티라(二071ㄴ8)

이 어휘는 한자 ‘拔’에 대응하며 현대어로는 ‘빼다, 뽑다’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유합≫에도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어휘로 ‘히다, 다, 혀다, 다, 치다’ 등이 있다.
≪17세기 국어 사전≫에 의하면 ≪신속 열4:8ㄴ, 4:25ㄴ, 4:53ㄴ, 5:85ㄴ, 6:11ㄴ, 6:49ㄴ, 효6:87ㄴ, 7:9ㄱ, 8:37ㄴ, 충1:49ㄴ≫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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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방(언해)》 해제
김동소

《구급방(救急方)(언해)》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세조실록》 권39, 12년 병술 6월 임자 조의 “팔도에 《구급방》 각 2건을 내리다.(賜八道救急方各二件)”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체로 세조 12년(1466) 6월 이전에 책이 편찬·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은 상하 2권 2책으로 간행된 것인데, 현재 국내에는 규장각(奎章閣)에 낙장본인 상권만 있고, 일본 나고야[名古屋] 호사 문고[蓬左文庫]에만 상하 2책 1질이 전해지는 책으로서, 15세기 중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훈민정음 문헌이다.
세조 연간에 간행된 훈민정음 문헌들이 거의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나온 불경 언해류인데 반하여, 이 《구급방(언해)》는 불교와 관계가 없는 책이고, 또 최초의 의약서 언해라는 점에서 이 문헌의 특징이 있다. 이 문헌의 언해 부분에 들어 있는 표기법·음운·어휘 등 언어 현상은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 언해류와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점이 있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구급방(언해)》의 국어학적 연구로는 지금까지 김지용(1971), 김영신(1976), 김영신(1978), 원순옥(1996) 등이 있다. 이들 앞선 연구에 바탕하여 이 문헌의 국어학적 특징을 간략히 밝혀 보기로 한다.

병의 치료 및 예방을 목적으로 출판된 책의 이름에 ‘구급(救急)’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것들에 《향약 구급방(鄕藥救急方)》(13세기), 《구급방(언해)》(15세기), 《구급 간이방(救急簡易方)(언해)》(1489년), 《구급 이해방(救急易解方)》(1499), 《촌가 구급방(村家救急方)》(1538), 《언해 구급방(諺解救急方)》(1608) 등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언해된 것으로는 세조대에 간행된 이 《구급방(언해)》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일본 호사[蓬左] 문고에 있는 《구급방》상하권 2책은 을해자본(乙亥字本)의 복각본으로 복각 시기는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상권이 92장(목록 3장, 본문 89장), 하권이 96장 주001)
일부 문헌에서 하권이 97장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이 있는데, 국내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한글학회의 영인본(1972년, 1975년, 1996년 영인)과 대제각의 영인본(1978년 영인)에서 하권 91장 뒷면과 92장 앞면을 중복 인쇄하였기에 일어난 착오이다. 하권은 모두 96장의 분량이다.
, 책의 크기는 세로 30.4cm, 가로 19cm이며, 다섯 끈매기[五結絲綴]로 제본되어 있다. 판광(版匡)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며 반엽 광곽(半葉匡郭)은 21cm×15cm, 계선(界線)이 있고 각 8행 17자(언해문은 쌍행[雙行]으로 한 줄에 16자씩)로 되어 있으며, 판심(版心)에는 위아래에 백구(白口) 주002)
그러나 하권 55장만은 흑구(黑口)로 되어 있다.
와 내향 무문 주003)
그러나 가끔 유문 어미(有紋魚尾)로 되어 있는 곳이 있다.
흑어미(內向無紋黑魚尾)가 있고 서명[救急方]·권차(卷次)·장차(張次)가 들어 있다. 《救急方 上》과 《救急方 下》라는 책 이름이 검푸른 표지에 백지로 씌어져 있고, 상권 표지 안쪽에는 “總持寺 什物”이라는 나무도장[矩形木印]이 찍혀 있으며, 상권 뒤표지 안쪽에는 “當山拾八世 眞空和尙 寄進” “ㅇㅇ書軒”이라 붓글씨로 쓴 것이 있고, 하권 뒤표지 안쪽에는 “當山拾八世 眞空和尙 寄進”이라고 역시 붓으로 쓴 글씨가 있다. 주004)
김지용(1971) 및 원순옥(1996: 12-15)을 참조한 것임.
규장각에 있는 낙장본 《구급방》 상권은 위의 호사 문고본과 동일 계통의 것으로, 책의 모양은 완전히 같다. 표지 뒤에 ‘梅畫屋 珍玩’이라는 가로로 된 네모 난 도장이 찍혀 있고, 권두 5장 앞면까지와 79장 이하가 낙장으로 되어 있으며, 71장은 붓으로 씌어져 있다. 주005)
서울대학교 규장각(2001ㄱ: 26)에 의함.
책의 구성은 상권이 ‘一 中風’에서 ‘十九 金瘡’까지 19조항, 하권이 ‘二十 箭鏃金刃入肉及骨不出竹木刺附’에서 ‘三十六 血暈’까지 17조항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조항에서 ‘直指方, 經驗秘方, 千金方, 衛生易簡方’ 등 중국의 수십 가지 의서(醫書)에 있는 방문(方文)을 한문 그대로 인용한 후, 이를 언해하여 두 줄로 수록하고 있다. 가끔 한문에 들어 있지 않은 주석이 별도 표시 없이 언해문 뒤에 한글로만 나오는 곳이 있다.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牙噤者中指點南星細辛末幷烏梅肉頻擦自開 (상 : 1ㄴ)
니 마고므니란 가라개 南남星과 細솅辛신ㅅ  무텨 烏梅肉 조쳐 조 븨면 절로 열리라 厥은 손발 고 脉 그츤 病이라 (상 : 2ㄱ)

이 문헌은 비록 16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15세기 중반에 간행된 초간본을 복각한 것이기 때문에 15세기의 언어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표기법과 어휘를 중심으로 이 문헌의 국어학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표기법은 세조대 문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방점이 찍혀 있고, 언해문 속의 모든 한자에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각 한자 바로 뒤에 붙어져 있는데, 거의 모든 복각본 문헌과 마찬가지로 탈획이 심해 이용할 때에는 주의를 요한다. 또 복각할 때의 각수(刻手)의 실수로 잘못 새겨진 글자들도 상당수 있다. 예. 雄黃→ 雄黃[하:55ㄱ], 믈ᄉᆞᅟᅢᆷ(如湧泉) → 믈[상:59ㄴ], 혹(或) → 혹[상:65ㄴ], 머구 → 머구[상:66ㄱ]. ‘과이(暴)[상:60ㄴ], 로(自)[상:73ㄴ]’ 등의 경우는 ‘, 절’ 자가 좌우 거꾸로 새겨져 있다.
각자병서 글자를 쓰고 있지 않음은《원각경(언해)》이후 모든 세조대 문헌이 그러함과 같다. 다만 이 문헌에서는 예외로 ‘쐬먼(熏)’(상:52ㄱ)과 ‘믈까(嚙)’(상:79ㄴ)에서처럼 ‘ㅆ’과 ‘ㄲ’이 각각 1회씩 나타난다. 이것 이외에는 초기 훈민정음 문헌의 ‘-’ 음절의 ‘’을 비롯한 모든 각자병서 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초기 훈민정음 문헌에서는 종성 위치에서 ‘ㄷ’과 ‘ㅅ’이 대체로 혼란되지 않고 표기되었다. 이러한 표기 사실과 함께《훈민 정음(해례)》의 8종성법 규정으로 인해 15세기에는 음절말 위치에서 ‘ㄷ’과 ‘ㅅ’이 중화(中和)되지 않았다는 생각들이 과거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헌을 철저히 보지 않은 데서 잘못 내려진 결과이다. 예컨대 15세기 문헌에는 ‘’과 ‘젼’(恣), ‘졷’와 ‘좃’(從), ‘맏’와 ‘맛란, 맞더니’(迎), ‘ 낟’과 ‘ 낫’(箇), ‘빗오니’와 ‘빋니’(散) 등과 같은 혼기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혼기들은, 종성 표기에서 혓소리 계열의 자음(ㄷ, ㅌ, ㄸ)은 ‘ㄷ’ 대표 글자로, 잇소리 계열의 자음(ㅅ, ㅆ, ㅈ, ㅊ, ㅉ, )은 ‘ㅅ’ 대표 글자로 적어도 좋다는 표기 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위치에서 ‘ㄷ’과 ‘ㅅ’이 변별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주006)
자세한 것은 김동소(2002: 98-101, 2003: 177-9) 참조.
초기 문헌에서 이렇게 대체로 잘 지켜지던 종성의 ‘ㄷ’과 ‘ㅅ’ 표기는 16세기에 들어서면 아주 혼란스러워지고, 16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초기 문헌의 규범적인 표기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자의 자의적인 선택인 것처럼 한 문장 안에서의 동일한 낱말의 종성이 ‘ㄷ’ 또는 ‘ㅅ’으로 표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구급방(언해)》에서는 초기 문헌의 규범에 따라 종성의 ‘ㄷ’과 ‘ㅅ’이 잘 구분되어 표기되고 있지만, ‘믿(底)’을 ‘밋’[상: 40ㄱ]으로 표기한 예가 하나 있다.
언해문에서 가끔 비문법적 문장이 보인다. 한문을 번역하면서 주의를 덜 기울인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눈에 띈다.
 雄黃 오 甘감草 各각  兩과 白礬뻔 라 두 兩과 라 細솅末야 藥약  兩 더운 믈 닷 되예 글혀 브  시수 良久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 雄黃<원주>硏甘草<원주>各一兩礬石<원주>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상:58ㄴ]

이 언해문을 직역하면 “또 웅황을 갈고 감초 각 한 냥과, 백반 갈아 두 냥과, 갈아 세말(細末)하여, 약 한 냥을 더운 물 닷 되에 끓여 부은 데 씻되, 양구(良久)커든 다시 데워 씻으라.”처럼 되어 의미 파악이 힘들어진다. 이 문장은 “또 간 웅황과 감초 각 한 냥과, 백반 간 것 두 냥과를 함께 갈아 가늘게 가루 내어 만든 약 한 냥에, 더운 물 닷 되를 넣어 끓여, 부은 상처를 씻되, 오래 되거든 다시 데워 씻으라.”의 의미이다.
이 문헌에서 빈번히 나오는 구문 중에 ‘~면 됴니라’와 ‘~면 됻니라’가 있는데, 이 둘의 구문상의 차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됴니라, 됴니, 됴며, 됴나, 됴리라, 됴리니’ 등 ‘됴-’는 모두 118회, ‘됻니라, 됻니’는 모두 80회 나타난다.
이 문헌의 상권과 하권을 비교해 보면 낱말 선택이나 표현법에서 현저히 이질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구체적인 몇몇 예를 들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주007)
원순옥(1996: 70)에서 인용.
상권하권
고툐(治)
고튜(治)
61회
0회
85회
90회
둪-(蓋,覆)
덮-(蓋,覆)
13회
0회
1회
6회
디허(擣)
허(擣)
33회
0회
49회
5회
복화(桃花)
복화(桃花)
3회
1회
0회
6회
쇠-(燻)
쐬-(燻)
0회
1회
8회
0회
아니한덛[-에, -을, --](湏臾)
아니한[-예, -](湏臾)
1회
10회
8회
2회
藥
藥을
7회
4회
11회
0회
兩
兩을
25회
9회
32회
0회
(漢字語)-
(漢字語)-은
6회
28회
21회
4회
정리해 보면 이 문헌 상권과 하권의 언어 현상은 다음과 같이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상권에는 ‘고튜, 덮-, 허, 쇠-’라는 어형이 전혀 안 나오고, 하권에서는 ‘복화, 쐬-’라는 어형이 전혀 안 나온다. 둘째, 상권에는 ‘복화, 아니한덛’이라는 어형이 거의 안 나오고, 하권에는 ‘둪-, 아니한’라는 어형이 거의 안 나온다. 셋째, 상권에는 ‘藥, 兩’이라는 한자어 뒤에서 목적격 조사 ‘-, -을’이 모두 사용되나, 하권에는 ‘-을’은 쓰이지 않고 ‘-’만 사용된다. 넷째, 양성 모음으로 끝나는 한자어 뒤의 주제격 조사 ‘-, -은’의 경우, 상권은 주로 ‘-은’이, 하권은 주로 ‘-’이 선택된다. 셋째, 넷째 경우만 두고 말한다면 상권보다 하권이 모음 조화 표기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첫째의 ‘고툐, 고튜’의 경우는 오히려 하권이 이 규칙을 덜 따르는 것 같다. 결국 이 문헌의 상권과 하권 언해자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복화, 쇠-, 쐬-, 아니한덛-’ 등은 이 문헌에만 나타나는 어형이고, ‘덮-, 복화’는 이 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낱말로 기록될 말들이다.

《구급방(언해)》의 가장 두드러진 국어학적 특징은 그 어휘에 있다. 이 문헌에만 나오는 어휘, 이 문헌에서 최초로 나오며 드물게 쓰이는 어휘 등 희귀어 목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008)
주로 원순옥(1996)을 참고한 것임.
검프르러, 검프르고(暗靑, 靑黑):검푸르러, 검푸르고. 3회 출현. “피 얼의여 大便이 通티 아니야 장 브 검프르러 알파 어즐코 답답며(瘀血大便不通洪腫暗靑疼痛昏悶)”[하:32ㄴ], “과 입과 검프르고 발와 손괘 왜트러 차 주거 가거든(面口靑黑四肢逆冷命在須臾)”[하:49ㄴ]. “ 비치 검프르고  안히 브르고 氣分이 긋추려 닐 고튜(面色靑黑腹內脹滿氣息欲絶)[하:96ㄱ].
거흘에(?):거칠게(?). 유일례. “枳殼 기우레 봇기 져기 누르게 코 솝 아니와 木香과 各 세 分을 디허 거흘에 처 散을 지(枳殼麩炒微黃去穰木香各三分右擣麤羅爲散)”[하: 41ㄱ].
격발며(激):격렬히 움직여 일어나며. 1회 출현. “氣中 證은 해 豪貴 사미 이 因야 격발며 것기여 忿怒야 氣分이 盛호 펴 몯야(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挫忿怒盛氣不得宣泄)”[상: 12ㄱ].
곰(鬱):곰팡이 뜬. 유일례. “ 곰 고기와 저즌 脯肉괏 毒 고튜(又方治鬱肉濕脯毒)”[하: 61ㄴ].
곳골회(釵環):비녀와 가락지(?). 유일례. “ 金銀 곳골회 그르 닐 고툐 水銀 半 兩을 머그라(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상: 53ㄴ].
글희혀(幹開):끌어 당겨, 풀어 당겨. 유일례. “水銀 탄 킈만야 이블 글희혀 븟고(水銀如彈子大幹開口灌之)”[하:82ㄴ].
금굼히(滛滛):이따금. 유일례. “ 얌 손 사 헌 마 됴코 나 毒氣  예 이셔 금굼히 알고 랍거든 고툐(又方治蛇螫人瘡已愈餘毒在肉中滛滛痛痒)”[하:80ㄱ].
긔-(輾, 轢):치이-. 2회 출현(유일례). “ 노 서 디니와 타 디니와 술위예 긔니와 一切ㅅ 傷며 것근  고티며(又方治從高墮下落馬車一切傷折)”[하:27ㄱ], “ 지즐이며 와 술위예 긔며 게 이며 게 여(又方療被壓迮舟舡車力的切車所踐也馬踏牛觸)”[하:29ㄱ].
기름긴(脂):기름 낀. 유일례. “ 飮食과 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로 그치고(令乾食與肥之物以止其渴)”[상:80ㄱ].
금(橫文):가로된 금. 1회 출현. “惡風이 안히 답답야 죽닐 고툐 리 밠 엄지가락 아랫 그믈  나 마초면 즉재 됻니라(治惡風心悶欲死急灸足大趾下橫文隨年壯立愈)”[상: 2ㄴ].
노압, 노올압(煻灰):재불[熱灰], 뜨거운 재. 각 1회 출현. “炮 믈 저즌 죠예  노압예 무더 구을시라.”[상:14ㄱ], “  욘 파 노올압 브레 녀허 구어(又方取葱新摘者入煻灰火內煨之)”[하:35ㄴ].
눅눅면(惡):느글느글하면, 메스꺼우면. 1회 출현. “다가 精神이 어즐코 안 눅눅면 곧 이 中毒이니(如稍覺精神恍惚心卽是誤中諸毒)”[하: 47ㄱ].
벼록(眼前生花):눈에서 일어나는 불꽃, 현기증. 유일례. “피 氣分 조차 올아  어즐케  벼로기 나니  甚닌 닶가와 사 모고 이비 좃고 精神이 아고 氣分이 니(血隨氣上迷亂心神故眼前生花極甚者令人悶絶不知人口噤神昏氣冷)”[하:94ㄱ].
니르리(永):오래, 길이. 유일례. “열 네 붓글 면 즉재 됴하 니르리 發티 아니니라(灸十四炷卽愈不發).”[하:73ㄴ].
다아닫고(合住):꽉 닫고. 유일례. “ 黃連과 黃栢과 輕粉 티 호고 朴硝 져기 조쳐 細末야 麻油에 녀허 合 다아닫고 밥 우희  라 라(又方 黃連 黃栢 輕粉各等分朴硝少許右爲細末入麻油用合子合住上飯蒸調塗)”[하:13ㄴ].
다운(暖):따뜻한. 유일례. “므레 딘 사 다운 예 무두(埋溺人灰中)”[상: 72ㄱ].
단기고(定):당기고(?). 유일례. “몬져  고텨  단기고 술 머겨 醉케 라(先整骨了夾飮之令醉)”[상: 88ㄱ].
쉿믈(白湯):흰쌀을 끓여 만든 맨국. 1회 출현. “ 그르 골희 닐 고툐 거유 랫 짓 두흘 라 細末야 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니라(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상: 53ㄴ].
더우며닐, 더위몌여(熱暍):더위 먹은 이, 더위 먹어. 각 1회 출현. “더우며닐 고툐 길헷 더운 로 가매 고 져기 식거든 오 氣分이 通커든 말라(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상:9ㄴ], “ 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과 굴근 마와 等分야 로니 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 머기면 즉재 사니라(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상: 11ㄱ].
뎨며(削):저며. 유일례. “ 湯火傷 고튜  뎨며 브티면 므르디 아니며 알디 아니며 수 됻니라.(又方治湯火傷用梨貼不爛止痛而瘥)”[하: 15ㄱ].
도렫고(圓):둥글고. 1회 출현. “도렫고  天南星을 저즌 죠예  구으니와(白天南星濕紙裏煨)”[상: 1ㄴ].
두것:2개, 두 가지 것. 유일례. “미친 가 毒 고툐 머리터럭과 고솜도 가 게 호아 두것 론  므레 프러  잔 머규 이비 마구므니란 니 것고 藥 녀흐라(治猘犬毒 頭髮猬皮各等分右燒灰水和飮一杯口噤者折齒內藥)”[하: 66ㄱ].
두위드듸여(蹉跌):(발을) 뒤집어 디디어. 유일례. “ 밧목 것그며 四肢  아디며 히미 傷며 두위드듸여 알프거든(又...踠折四肢骨碎及筋傷蹉跌疼痛)”[하:27ㄴ].
디저겨(刺):찔러(?). 유일례. “ 胃脘애 痰이 담겨 胃脘 가미라 冷 氣分이 디저겨 알닐 고티니(兼治胃脘停痰冷氣痛)”[상: 6ㄱ].
며(堅):딱딱하며. 유일례. “가 고기 먹고 삭디 아니야  가온 며(食狗肉不消心中)”[하: 61ㄱ].
멈게(去):없게(?). 유일례. “도 기르믈 아 힘과 과 멈게 고 므레 녀허 달효(取猪脂筋膜於水中煮)”[하: 38ㄴ].
물니(鬱):물뜨니(열과 습기로 말미암아 떠서 상하니). 유일례. “고기  器具ㅅ 안해 자자 이셔 밤 디난 거슨 물니(肉閉在密器中經宿者鬱)”[하:61ㄴ].
거든(淸):맑게 가라앉거든. 유일례. “엄지가락톱 져기 가 더운 므레  녀허 거든(大母指爪甲刮少許同泡湯候)”[하:41ㄴ].
목브(馬喉閉):말목부음(병명, 馬喉痺). 유일례. “모기 막고  브 매 닛고 氣分을 吐호미 면 일후미 목브미니(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상: 43ㄴ].
챗변쵸(馬鞭梢), 채변쵸(馬鞭鞘):말초리풀(약초 이름). 각 1회씩 출현. “ 너흘며 와 허러 브 덥다라 알닐 고튜 챗변쵸 두 寸ㅅ 기릐와 쥐 두닐굽 나  라 細末야 도 기르메 라 면 즉재 됻니라(治馬囓人及踰作瘡毒腫熱痛 馬鞭梢二寸長鼠屎二七枚右二味合燒爲末以猪脂和塗之立愈)”[하:15ㄴ], “리 사 므러 헌  고튜 채변쵸 五寸 론 와 도 기름 두 兩과 수쥐  두닐굽 낫과 白殭蚕 半兩과 세 가짓 거슬 디허 처 散 오 도 기르로 라 믄 해 로(治馬咬人損馬鞭鞘五寸燒灰猪脂二兩雄鼠糞二七枚白殭蠶半兩右件三味擣羅爲散以猪脂調塗咬處)”[하:16ㄱ].
밥(飯時):밥 먹을 만한 시간, 식경(食頃). 유일례. “이티  밥만 면 곧 氣分을 어더 숨쉬니라(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상: 77ㄴ].
밧목(踠):발목. 2회 출현(유일례). “밧목 것그며 모미 다 알프거든(折徧身疼痛)”[하:26ㄱ], “밧목 것그며 四肢  아디며(折四肢骨碎)”[하:27ㄴ].
복화(桃):복숭아. 3회 출현(상권 21ㄴ, 22ㄱ, 28ㄱ). ‘복화’라는 표기도 이 문헌에 7회(상: 16ㄱ, 하: 44ㄱ, 44ㄴ, 67ㄴ, 69ㄱ, 73ㄴ, 73ㄴ) 나오지만, ‘복화’는 다른 문헌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본(本):본래. 1회 출현. “블 현  이셔 오누르이닌 본   이실 블 혀미 므던니라(人有於燈光前魘者在明處是以不忌火也)”[상: 22ㄴ].
뵈디(下):(대소변을) 보게 되지. 1회 출현. “大小便이 다 구더 뵈디 아니커든 火麻 로 氣分 잇게 야 沒藥ㅅ 와 차 져고매 조쳐  수레 프러 머그면 그 毒氣 혀 즉재 리니라(大小便俱澁不却用火麻燒灰存性同沒藥末茶少許用溫酒調服引導其毒卽下)”[하: 71ㄴ].
빗가치(顔色):(좋은) 빛깔 있는 피부(?). 유일례. “血氣 우흐로 소아 어믜  빗가치 업서 氣分 긋고져 릴(血氣上搶母面無顔色氣欲絶者)”[하: 87ㄱ].
라기(屑):부스러기. 유일례. “ 五靈脂 몰애와 돌콰 쇳 라기  거슬 야 리고(又方用五靈脂揀去沙石及鐵之類)”[하: 89ㄱ].
레(苞):꾸러미. 유일례. “파 서 斤과 소곰  斤을 섯거 므르디허 보 덥게 야 기브로 료 두 레에 화 서르 臍下 熨면 小便이 즉재 나니라.(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裏分作二更互熨臍下小便立出)”[상: 68ㄱ].
삿기밠가락(小趾):새끼발가락. 유일례. “올 허튓 삿기밠가락 로 그틀 세 붓글 리니(灸右脚小趾尖頭三壯)”[하:87ㄴ].
섯알고(攪痛):번갈아 아프고. 유일례. “과 왜 섯알고 머리 어즐야(心腹攪痛頭旋)”[하: 49ㄴ].
솝드리(透骨):속속 들이. 유일례. “  호 봇고 솝드리 누러 검거든(糯米一合右炒令透骨焦黑)”[하: 11ㄴ].
러워(澁):껄끄러워. 유일례. “누네 가 드러 러워 알하(眯目痛)”[하: 37ㄱ].
리(酸漿):꽈리. 1회 출현. “小便에 下血이 긋디 아니커든 酸漿草 드려 自然汁을  머그라. 酸漿은 리라.(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상:63ㄱ].
:까끄러운. 유일례. “穀賊은 穀食에 몯내  이사기 굳고  거시니 몰라 리라 머그면 목 안히 브 通티 아니니 일후믈 목 안해 穀賊 나다 니라”[상: 46ㄱ].
블(慢火):여린 불. 유일례. “솓 안해 밀 녀허 브레 달효(於鐺內入蠟慢火熬)”[하: 10ㄱ].
옷(汗衣):땀이 밴 옷. 2회 출현. “ 오시나 시혹 觸衣어나(오 모매 오래 니버 오래  니 됴코 觸衣 오래 니븐 솝오시라)…. 라(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燒灰)”[상: 16ㄱ].
혀면(拔):뽑으면. 유일례. “삸 미티 에 드러…라와 디 몯리어든 즉재 살미틀 이어 혀면 믄득 나니(箭鏃入骨…痒不可忍卽撼箭鏃之立出)”[하: 3ㄱ].
아니고오(惡):아니꼬움을. 1회 출현. “ 藥毒이 發커든 플와 돌와 몰라셔 아니고오 아닐 고튜(又方解一切藥發不問草石始覺)”[하: 53ㄱ].
아즐며(昏):어질어질하며. 1회 출현. “ 마자 아즐며 氣厥야 림 몯고 痰이 마켜 소리 몯 닐 고티니(治風氣厥不省痰塞失音)”[상: 2ㄴ].
어돝(母猪):어미 돼지. 1회 출현. “ 야미 사 입과 닐굽 굼긔 들어든 고튜 어도 릿 그틀 버혀 츳듣 피 이베 녀면 즉재 나니라(又方治蛇入人口幷七孔中割母猪尾頭瀝血着口中卽出)”[하:79ㄱ].
어우(雙仁):쌍으로 들어 있는 열매 씨. 1회 출현. “桃仁 셜흔 나 것과 부리와 어우 앗고 라(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상:70ㄱ]. ‘어우러’라는 어형은 이 문헌에 5회 나오고, 표기가 약간 다르기는 하나 《구급 간이방 언해》(어우이, 어우)와 18세기의 《동문 유해》(어우렁이) 등에 나온다.
왜지그라(角弓反張):한쪽으로 찌그러져. 유일례. “마자 왜지그라 네 활개 거두디 몯야 어즈러워 죽닐(中風角弓反張四肢不收煩亂欲死者)”[상: 5ㄱ].
왜틀-(痙角弓反張, 逆):외틀어지다. 2회 출현(유일례). “ 金瘡 마자 왜트닐 고툐(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상: 88ㄱ], “발와 손괘 왜트러 차 주거 가거든(四肢冷命在須臾)”[하: 49ㄴ].
움주쥐여(縮):움츠러져. 유일례. “그 膓이 예 뷔트러 움주쥐여 잇니(其腸絞在腹)”[상: 32ㄴ].
이사(三二日), 잇사래(三兩日), 잇사나(數日):2,3일, 2,3,4일. 1회씩만 출현. “大便이 이사 通티 아니 後에(大便三二日不通然後)”[하: 23ㄱ], “믄득 오누르여 림 몯거든 皂莢   대로 두 곳 굼긔 불면 즉재 니니 잇사래도 어루 불리라(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상: 23ㄱ], “ 프른 뵈 라  라 瘡의 고 리면 잇사나 後에 됻니라(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상: 83ㄴ].
자해(窠, 臼, 元端):(정해진) 자리(에) (?). 3회 출현. “傷하야  제 자해 가디 아니닐 고툐(治損傷骨節不歸者)”[하: 31ㄴ], “ 아디며  것그며 자해 나니란(諸骨碎骨折出者)”[하: 32ㄱ], “ 내와니란 소로  고텨 제 자해 가 正커든(骨鋒者以手整頓骨節歸元端正)”[하: 32ㄱ].
자자(閉):가두어. 유일례. “고기  器具ㅅ 안해 자자 이셔 밤 디난 거슨 물니(肉在密器中經宿者)”[하: 61ㄴ].
졋가락(筯):젓가락. 유일례. “細末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라(爲末以頭點小許在懸壅上)”[상:42ㄴ].
죠젼(紙錢):종이돈. 2회 출현(유일례). “酒壜  나로 죠젼  주믈 라 壜 안해 녀코 時急히 壜 이브로 므레 딘 사 치나 시혹 복 우희 두퍼 거든 다시 죠젼을 라 壜 안해 녀허  두퍼 므를 아면 즉재 사라. 壜은 술 녇 딜어시라.(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상:74ㄴ].
주므르며(揉):주무르며. 1회 출현. “모 허므를 주므르며 모 지고 고해 불며(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상: 78ㄱ].
즈즐우러커든(濕):질척질척하거든. 유일례. “ 湯火애 데닐 고튜 大黃과 當歸 티 화 細末야  기르메 라 브튜 즈즐우러커든 닐 흐라(又方治湯火所傷用大黃當歸各等分爲末以淸油調傅之則乾摻)”[하: 14ㄴ].
지즐머그라(壓):눌러 먹으라, 약 기운이 내려가게 다른 음식을 먹으라. 유일례. “生薑 自然汁을 수레 프러 머고  세 번곰 머구 스므 나 면 나니 머근 後에 生薑 두세 片로 지즐머그라(生姜自然汁酒調下日三服二十日出服後以薑數片之)”[하:2ㄴ].
찻술(茶匙):찻숟가락. 유일례. “괴 머리  나 오로 론   라  적 머구매 세 찻술옴 야  수레 먹고(猫頭一枚全燒灰爲末每服三茶匙用溫酒下)”[하:64ㄴ].
툽투비(濃):툽툽하게. 1회 출현. “凍瘡을 고툐 가짓 불휘 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髓로 면 즉재 됻니라(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상: 8ㄱ].
티쉬여(上喘):치받아 쉬어. 유일례. “産後에 아니환 피 매 다딜어 가미 차 수믈 티쉬여 목수미 아니한 예 잇거든(産後敗血衝心胸滿上喘命在湏臾)”[하: 89ㄴ].
헐헐-(吃吃, 喘):헐헐하다, 헐떡거리다. 2회 출현. “오래 사 업슨  房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 툐 아라 오직 그 사미 헐헐 소릴 듣고 곧 사로 브르게 홀디니 블로 디 아니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 救티 아니면 죽니(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須臾不救則死)”[상: 21ㄴ], “그르 겨집괴 사괴면 그 證이  기슬기  알고 外腎이 움치들오 치 검고 氣分이 헐헐고  미 흐르니  이 脫陽ㅅ證이니(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冷汗自出亦是脫陽證)”[상: 54ㄴ].
두-(絞):휘정거리다. 2회 출현. “地漿 해 져근 굳 고 믈 브 니기 두 므리라.”[상: 9ㄴ], “ 해  져고맛 구들 고 믈로 구데 기 븟고 니기 두 汁을 取야 마시라.(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取汁飮之)”[상: 28ㄴ].
닐굽(一七):한 일곱. 1회 출현. “두 밠 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 부닙 만  各各 닐굽 븟글 면 곧 사니라(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상:22ㄱ].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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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념요록』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권념요록(勸念要錄)』은 불교 설화 11편이 수록되어 있는 언해본(諺解本)이다. 정토(淨土) 신앙에 기반을 둔 중요하면서도 요약된 글이라는 뜻에서 요록(要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위해 마음에 새겨 두고 염불, 기도하기를 권장하는 내용의 설화(說話)들이 수록되어 있다. 왕생(往生) 영험담(靈驗譚)에 해당하는 불교 설화들이다. 불교 신앙을 배경으로 한 설화를 수록한 책이어서 그 동안 관련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1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이다.
현재 전하는 판본은 인조 15년(1637)에 구례의 화엄사(華嚴寺)에서 펴낸 책이다. 한문 원문에 단락을 지어 한글로 구결을 달아 구결문을 만들고, 이를 한글로 옮긴 언해본(諺解本)이다. 번역에 해당하는 언해문에는 한자 없이 한글만을 썼다. 또한 구결문의 한자에 독음(讀音)을 달지 않았다. 이는 독자층이 한자보다는 한글에 익숙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책의 맨 뒷장에 음각(陰刻)으로 새긴 간기(刊記)가 있어서 간행과 관련된 사실을 전해 준다. 주001)
이러한 사실은 책의 맨 뒷장 끝 부분에 있는 간기(刊記)를 통해 알 수 있다. ‘崇德二年 秋七月 初吉日 求禮地 華嚴寺 開刊’.
책의 구성은 서문 2장 본문 35장 등 모두 37장이다. 서문에 의하면 책을 편찬한 이는 조선 중종~명종 연간에 활동했던 승려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미상~1565)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주(譯註)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은 화엄사에서 찍어 펴낸 것으로서, 17세기(1637년)의 국어가 반영되어 있어서 보우가 지었다는 그 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우 저술의 책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傳)하지 않거나 아니면 처음에는 한문본으로 찬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책은 불교 설화적 요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국어가 반영되어 있어서 국어학, 국문학, 불교학 연구 자료로서 이용 가치가 크다. 다만, 이 역주를 진행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은 조선 후기 문헌에서 흔히 드러나는 모습인 표기상의 혼란이다. 같은 장(張)임에도 구개음화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표기도 있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연철, 중철, 혼철 등 형태소 경계의 통합 관계 표기에서도 복잡한 양상을 띤다. 역주에서는 화살표(→)를 써서 이를 바로잡았다. 주002)
화살표의 방향 (→) 오른쪽이 정정(訂正)한 내용이다. 누락된 형태에 대한 추가 삽입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 )에 넣어 따로 표시해 두었다.
책의 형태 서지와 간단한 어학적 특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Ⅱ. 형태 서지 및 수록 내용

앞에서 밝힌 대로 『권념요록』의 현전 이본(異本)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두 화엄사(華嚴寺) 보관의 판목(板木)에서 쇄출(刷出)된 이른바 후쇄본(後刷本)들이다. 책의 형태 서지 등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 역주(譯註)와 해제(解題)는 홍문각에서 영인·배포(1984)한 책을 대상으로 했다.
이 책은 서울대 일사문고 소장의 책으로 도서번호는 ‘일사 고 294.34 G995y’이다. 영인본의 앞에 있는 홍윤표(1984)의 해제에 의하면 일사 문고본에는 ‘서(序)’가 없어서 화엄사 보관의 판목에서 쇄출·보완했다고 한다. 모두 37장인데, 서문은 2장, 본문은 35장이다. 책의 크기 중 반엽(半葉)의 광곽(廣廓)은 가로 16.3㎝ × 세로 20.5㎝, 매면(每面)은 유계(有界) 9행, 매행(每行)은 16~19자로 일정하지 않다. 글자는 중간 크기의 글자를 1행에 한 줄씩 두었으나, 한글 구결과 협주문은 작은 글자 두 줄로 했다. 판심(版心)은 상하내향(上下內向) 삼엽화문어미(三葉花紋魚尾)이다. 판심 서명은 ‘권념록(勸念錄)’이고, 아래 쪽 어미(魚尾) 바로 위에 장차(張次)를 두었다. 서문 2장 중 뒷장은 훼손이 심하여 일부의 내용은 알기가 어렵다. 이에 대해 한태식(2009:99~135)에서는 서문의 내용 출전이 왕자성(王子成)의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임을 밝히고, 부분적으로 보완을 했다. 이 책은 중국에서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된 바 있다. 해독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역주 맨 앞에 이를 번역해서 실었다.
서문의 판심서명 등은 잘 보이지 않는다. 1장의 1행에 서명(書名)인 ‘勸念要錄’을 써 놓았고, 다음 행의 아래 쪽에 ‘懶庵 撰’이라고 찬자(撰者)인 보우(普雨)스님의 호(號)가 명기되어 있어서 그가 편찬한 책임을 알게 해 준다.
본문의 맨 앞 1장 1행에는 서문에서와 같이 권두서명인 ‘勸念要錄’이 한자로 쓰여 있고, 행을 바꾸어 11편의 왕생(往生) 영험담(靈驗譚)을 차례로 두었다. 책의 맨 뒷장에는 앞면의 6행부터 다시 후기(後記) 성격의 권문(勸文)을 두었다. 끝에는 권말서명 격인 ‘勸念要錄終’과 간기(刊記)로 마무리를 했다. 각 이야기의 앞쪽에 한글로 구결을 단 구결문을 두고, 단락이 끝나면 위로부터 한 글자 내려서 언해를 했다. 구결문의 한자에 한자 독음은 달지 않았다. 그런 점으로 인해 설화의 한자 제목을 한글로 옮길 때 일부 연구에서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언해문에 한자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풀이가 필요한 어휘에 대해서는 한 행에 두 줄씩 협주(夾註)를 둔 점이다. 협주는 상하에 흑어미 표시인 【 】를 두어 구분하였다.
11편의 왕생(往生) 영험담(靈驗譚)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편장(編張)되어 있다. 11편의 설화는 「왕랑반혼전(王郎返魂傳)」, 「원공결사전(遠公結社傳)」, 「궐공측현보전(闕公則現報傳)」, 「오장왕견불전(烏長王見佛傳)」, 「정목경집번전(鄭牧卿執幡傳)」, 「방저권타왕생전(房翥勸他往生傳)」, 「수문황후전(隋文皇后傳)」, 「형왕부인입화전(荊王夫人立化傳)」, 「양씨자명전(梁氏自明傳)」, 「동녀권모전(童女勸母傳)」, 「도우선화십념전(屠牛善和十念傳)」 등이다.
(1) 「왕랑반혼전(王郎返魂傳)」 : 1장 앞면 2행 ~ 12장 앞면 9행
(2) 「원공결사전(遠公結社傳)」 : 13장 앞면 1행 ~ 15장 뒷면 9행
(3) 「궐공측현보전(闕公則現報傳)」 : 16장 앞면 1행 ~ 16장 뒷면 4행
(4) 「오장왕견불전(烏長王見佛傳)」 : 17장 앞면 1행 ~18장 앞면 8행
(5) 「정목경집번전(鄭牧卿執幡傳)」 : 18장 앞면 9행 ~ 20장 앞면 7행
(6) 「방저권타왕생전(房翥勸他往生傳)」 : 20장 앞면 8행 ~ 21장 뒷면 3행
(7) 「수문황후전(隋文皇后傳)」 : 21장 뒷면 4행 ~ 22장 뒷면 1행
(8) 「형왕부인입화전(荊王夫人立化傳)」 : 22장 뒷면 2행 ~ 26장 뒷면 5행
(9) 「양씨자명전(梁氏自明傳)」 : 26장 뒷면 6행 ~ 27장 뒷면 5행
(10) 「동녀권모전(童女勸母傳)」 : 27장 뒷면 6행 ~ 28장 뒷면 4행
(11) 「도우선화십념전(屠牛善和十念傳)」 28장 뒷면 5행 ~ 29장 뒷면 9행
관법(觀法) : 30장 앞면 1행 ~ 33장 뒷면 8행
인증(引證) : 33장 뒷면 9행 ~ 35장 뒷면 5행
후기(後記) : 35장 앞면 6행 ~ 35장 뒷면 4행
이상의 왕생 영험담 11편 중 (1)의 「왕랑반혼전(王郎返魂傳)」은 유일하게 우리나라가 배경이 되어 있는 설화이고, 그 외 10편의 설화는 모두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에 실려 있는 중국의 설화들이다. 주003)
한태식(2009:99-135) 참조. 그 논의에 의하면 중국에서 유래한 영험담은 모두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권4의 「왕생전록(往生傳錄)」에 소개되고 있는 34편의 왕생담에서 선별한 것이라고 한다.
또 위의 설화들 중 일부는 『염불보권문』 중 예천 용문사본(1704년 간행), 동화사본(1764년 간행), 흥률사본(1765년 간행), 묘향산 용문사본(1765년 간행), 해인사본(일사문고 소장, 1776년 간행), 해인사본(경북대 영인·반포, 1776년 간행), 선운사본(가람문고 소장, 1787년 간행) 등의 책에도 각각 다른 번역으로 실려 있다. 『권념요록』과 체제에서 달라진 것은 구결문 없이 한문 원문과 언해문만을 차례로 둔 점이다.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김영배 외, 1996)에는 이 설화들이 수록되어 있는 각 책들의 수록 부분을 비교하여 일람표로 제시하고 있어서 방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러한 내용은 홍윤표(1984)의 해제에서도 부분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특히 용문사본에는 위의 설화들 중 7편이 수록되어 있다. (1), (4), (5), (6), (7), (10), (11) 등이다. (1)과 (11)은 한문 원문 없이 한글만으로 되어 있다. 그 외 (4), (5), (6), (7), (10) 등은 경북대 영인·배포의 책 외에 모든 책에 들어 있다. 수록 순서도 『염불보권문』의 11번에서 16번 등에 배치하여 동일하다. 경북대 영인·배포의 해인사본 책에는 이 중 (4)와 (10)이 들어 있지 않다.
책의 내용 구성은 서문에 염불하여 극락왕생할 것을 권하는 내용을 두고, 본문에는 왕생 영험담 11편을 차례로 두었다. 책에 수록된 11개의 불교설화들은 모두 아미타불을 염하여 왕생극락하였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책 끝에는 ‘관법(觀法)’이 있는데, ‘관법’에서는 「십육관경수지법문략(十六觀經修持法門略)」과 「칭찬미타경소(稱讚彌陀經疏)」, 「칭찬소(稱讃䟽)」 등을 인용하여 염불수행법을 안내하였다. 맨 뒤의 인증(引證)에서는 『약사경(藥師經)』과 『다라니경(陁羅尼經)』 등을 들어서 불공을 닦은 사람이 누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Ⅲ. 어학적 특성

이 책은 17세기 문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기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ㄷ’ 구개음화가 반영된 표기이다. 그런데 같은 장에서도 ‘부텨’와 ‘부쳐’가 함께 쓰이는 등 혼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는 ‘ㄴ’의 표기를 많은 부분에서 ‘ㄹ’로 하고 있는 점이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 앞에서 연철, 분철, 중철 표기 등 일관되지 않은 표기 양상을 보여서 혼란하다. 앞 시대에 ‘ㅿ’이 쓰였던 어휘 중에는 ‘ㅅ’으로 바뀐 예가 상당하다. 관형격조사는 모두 ‘의’를 쓰고 있고, 처소 부사격을 써야 할 자리에 관형격을 쓴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아래 ‘ㆍ’가 비어두음절에서 ‘ㅡ’로 바뀐 예가 더러 있는 등 동요를 반영한 표기를 볼 수 있다. 명사형어미 ‘옴/움’은 일부에서는 그대로 쓰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소멸을 보이는 등 역시 변화의 과정에 있음을 나타낸다. 종성 표기에서는 ‘ㄷ’과 ‘ㅅ’이 함께 나타나지만 ‘ㅅ’을 써야 할 곳에 ‘ㄷ’을 쓴 예도 종종 볼 수 있다. 또 ‘ㅁ’을 써야 할 자리에 ‘ㅇ’을 쓰는 등 정밀하지 않은 표기도 상당히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중 모음을 써야 하는데 단모음을 쓰는 등 전체적으로 표기는 정밀하지 않다. 연결어미는 문장의 내용 중 설화자(說話者)에 의한 설명이 많은 편이어서 설명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적 연결어미의 쓰임이 빈번한 편이다. 종결어미는 ‘라’체의 평서형 종결어미 ‘-니라’의 쓰임이 많고, 중세국어 문헌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뇌다, -쇠다, -데다, -뢰다, -니다’ 등의 종결 형태를 볼 수 있다. 의문형 어미 중 ‘라’체의 판정의문형어미 ‘-냐’를 ‘-ㄴ야’로 표기한 경우도 보인다. 대화체에서는 상대에 대한 존대가 많아서 ‘쇼셔’체의 쓰임이 빈번한 편이다. 특히 2인칭 높임의 대명사 ‘그’는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 중 하나이다. 어휘 중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쓰임이 가장 빈번하다. 그 외에 명부(冥府), 귀사(鬼使) 등 일반적이지 않은 어휘들도 상당 수 보인다. 내용 전체가 정토(淨土)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Ⅳ. 맺음말

『권념요록』은 17세기 초기의 국어사 자료이면서 국문학 및 불교학 자료이기도 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영험담(靈驗譚) 등의 설화는 불교의 정토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역시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내용들이다. 그런 이유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18세기에 간행된 책인 『염불보권문』에 많은 내용이 다시 번역되어 실린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의 변천을 반영하는 표기 등으로 인해 내용의 정밀한 전달에 어려움이 따른 것도 있다.
국어사와 관련된 내용 등 미진한 부분은 차후에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영배(1996), 「염불보권문 해제」,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 동악어문학회, 93~117쪽.
안병희(1979),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고찰」, 『규장각』 3, 서울대 도서관, 143 ~144쪽. 『국어사 자료 연구』(1992)에 재수록, 문학과지성사, 497~556쪽.
한태식(2009), 「허응당 보우선사의 권념요록 연구」, 『한국불교학』 53, 한국불교학회, 99~135쪽.
홍윤표(1984), 「권념요록 해제」, 『칠대만법·영험약초·권념요록』(영인본), 홍문각, 4~5쪽.

〈영인본〉

홍문각(1984), 『칠대만법·영험약초·권념요록』(영인본), 93~168쪽.
금강경삼가해 해제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서명과 서지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의 해설서이다. 곧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금강경언해』에서 경 본문에 단 구결 부분과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에서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著語)·송(頌)과,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에 대한 편저자의 설의(說誼)를 언해하여 세조 비(世祖妃)인 자성대비(慈聖大妃)가 성종 13년(1482) 내수사(內需司)에서 5권 5책으로 간행한 활자본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과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조계선종(曹溪禪宗)의 기본 경전이다.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서가에 가서 『금강경』에 관련된 서적을 찾는다면 20여 가지 이상을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는 그만큼 독자들이 이 경전을 많이 찾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대한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찬요(纂要), 육조 혜능(六祖惠能)의 구결, 양(梁)나라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의 송(頌), 송(宋)나라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著語)·송(頌), 예장 종경(豫章宗鏡)의 제강(提綱) 등 다섯 가지 주석을 합친 책이다.
.
‘이 문헌’(이하에서는 『금강경삼가해』를 ‘이 문헌’으로 나타내기로 함.)의 제1권이 낙장본이나마 1975년에 새로 세상에 알려져
『금강경삼가해』전질 5권 5책 중, 당시까지는 서울대 규장각의 가람문고본 권2~5만이 알려져서, 이를 저본으로 한글학회에서 권2,3(1960)과 권4,5(1961)를 각각 간행하였으나, 권1은 미전(未傳)이었다. 권1에 관한 언급으로는 고 이병기 선생의 조선일보(1939.2.14. 5면) 글에서 “三百本이나 되던 이 冊이 지금 와서는 달리 얻어 볼 수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 冊의 第一卷은 京都等地 어느 절집에 … 奉安이 되었다 한다.”(맞춤법 고침. 필자)고 한 것이 있는데 당시도 풍문만이고 공개는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 권1의 낙장본은 위에 언급한 대로이며, 같은 무렵 심재완 교수(1976)도 동국대본과 같은 판인 권1의 이본(낙장본)을 발굴 소개하였고, 10여 년 후 심재완(1981)의 『금강경삼가해』(전)이 간행되었다. 이는 기존의 가람본 권2~5와, 심재완교수 소장(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의 권1에 동국대본의 ‘함허 서’13장(4장 결락)을 보완하여 불완전하나마 전질이 영인된 것이다.
그 뒤 2002년 8월, 전남 장흥군 보림사 소장의 권1(완본)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제대로 전질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된 후에, 필자는 ‘이 문헌’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쓴 바 있었으나, 당시에는 『금강경오가해』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한일 불교 학술 세미나(금강경 연구)’가 있은 후에 그때의 발표 논문이 불교학보(佛敎學報) 12호(1976)에 실려,
3) 발표문 중 이 글과 관련된 논문은 주로 다음의 세 편이다.
이종익(李鍾益) : 한국불교 조계종과 금강경오가해.
고익진(高翊晋) : 함허(涵虛)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하여.
이지관(李智冠) : 금강경 주해 및 사기에 대한 고찰.
, 이후 학계에서도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국어국문학계에서는 심재완(1981)에 의한 『금강경삼가해』 전(全)의 해제에서 자세한 소개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금강경오가해』만을 언급했을 뿐,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김주필(1993)의 「금강경삼가해」에서야 비로소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인용하여 국어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서지적 성격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는데, 필자(1998, 2000)의 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불교 서적류에서 『금강경오가해』와 『금강경오가해설의』가 구별되지 않고 쓰이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책들은 내용이 ‘금강경오가해설의’의 번역이면서도 서명은 그대로 『금강경오가해』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대 번역본으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한정섭(1980) 금강경오가해(총 572면), 법륜사.
김운학(1980) 신역 금강경오가해(총 431면(258+173)), 현암사.
전야옹(1996) 금강경오가해역강(총 835면), 승룡사.
청봉(2005)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총 753면), 경서원.
김재영(2005) 금강경오가해(총 733면), (출)하늘아래.
이 밖에 우백암(禹栢巖) 편역(1994) 『금강경삼가해』(총 556면, 한국불교출판부)가 있으나, 서명은 글에서 다루는 1482년(성종 13)판 『금강경삼가해』와 같아도 내용은 꼭 같지 않고, ‘삼가’에 대한 견해도 다르며, ‘설의’ 부분이 다 실려 있으면서도 그 필자인 함허당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문본으로는 인조 10년(1482)에 용복사(龍腹寺)에서 간행한 『금강경오가해』(내용은 ‘금강경오가해설의’)를 동국대학교에서 1958년 8월 축소 영인(총 494면)한 바 있고, 이를 저본으로 다시 1972년 보련각에서 재영인한 판본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동은 아마도 『금강경오가해설의』에 『금강경오가해』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에 함허당의 설의(說誼)까지 베풀어져 있어서, 이를 보면 구태여 『금강경오가해』를 보지 않아도 되게끔 된 데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은 ‘이 문헌’의 서명(書名)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학계에서 통용되는 『금강경언해』는 그 수제(首題)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고 판심제(版心題)가 ‘금강경(金剛經)’이어서 한문본과 구별이 되지 않아 ‘언해’를 추가해서 쓰고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 문헌도 수제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어서 수제만으로는 『금강경언해』인지 『금강경삼가해』인지를 알 수 없다. 다행히 판심제가 ‘금강경삼가해’여서 국어학계에서는 이 판심제를 서명으로 삼고 있다.
‘이 문헌’의 간행 배경은 권5에 실린 한계희(韓繼禧)와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세종은 ‘금강경오가해’ 주005)
필자는 이 책이 『금강경오가해설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의 야보(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득통(得通)의 설의(說誼)와 남명천(南明泉)의 계송(繼頌)을 번역해서 『석보상절』 끝에 편입시키려고 세자[후의 문종]와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였다. 삼가해(三家解)의 초고는 이미 이루어졌으나 교정을 보지 못했고, 남명천 계송은 30여 수밖에 번역하지 못하고 나머지를 수양대군에게 완역(完譯)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것이 되기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세종 32년, 1450) 문종도 재위 3년(1452)에 돌아갔다. 이에 세조가 그 뜻을 이어 먼저 석보(『월인석보』라고 봄)를 간행하고, 능엄경, 법화경, 육조해, 금강경, 원각경, 심경, 영가집 등의 언해를 간행했으나, ‘남명천계송언해’의 상재를 보지 못하고 세조도 돌아갔다(세조 14년, 1468). 이에 세조 비 자성대비가 역대의 홍원(弘願)을 추념(追念)해서 그 유업을 이루려고 학조(學祖)에게 명하여 ‘금강삼해역’(‘금강경삼가해’)의 초고(草稿)를 다시 교정하게 하고, ‘남명천계송’을 번역시켜 전자를 300본(本), 후자를 500본(本) 간행하였다(성종13년, 1482). ‘이 문헌’은 중간본이 간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서지 사항과 소장처 및 영인 관계를 차례로 보인다.
(1) 『금강경삼가해』의 서지 사항
분량 : 5권 5책
1권 57장 추정(함서 17장, 종서 5장, 본문 35장) 주006)
심재완(1981:9)은 ‘함허 서’가 13장으로 중단된 채 낙장되었으므로(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금강경오가해』에서 이 부분의 나머지 한문의 원문(原文)을 찾아 이것의 언해된 분량을 대략 5장 정도로 추정하여 권1의 장수(張數)를 58장으로 보았었으나, 보림사의 권1 완본은 ‘함허 서’의 낙장된 부분이 5장이 아니라 4장으로 끝남에 따라서 권1의 장수는 총 57장으로 확정되었다. 이 ‘함허 서’의 끝장인 17장 9행에는 ‘永樂乙未(1415)六月 日涵虛堂衲守伊盥手焚香謹序’라고 서문의 일자가 있는데, 이는 한문본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문화재청의 ‘국가기록유산’ 참조.)
2권 73장
3권 64장
4권 64장
5권 60장(본문 57장, 발 3장)
계 318장
표제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수제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판심제 : 서문 금강경삼가해함서(金剛經三家解涵序)
서문 금강경삼가해종서(金剛經三家解宗序)
본문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판본 : 경 본문 한자 큰 글자[大字]는 정축자(丁丑字)
그 밖의 ‘오가해’에서 인용한 한자 중 글자[中字]는 을해자(乙亥字)
언해에 사용된 한글은 모두 작은 글자[小字]로 을해자(乙亥字)
책크기 : 38.5㎝ × 25㎝ (보림사본 39,2×25,6cm)
판식 : 4주(周) 단변(單邊)
반광(半匡) 27㎝ × 19.8㎝ (보림사본 27,2×20,1cm)
유계(有界), 큰 글자(경 본문만일 때) 9행 14자
큰 글자(경 본문이 2행 이상일 때) 10행 21자
중 글자 11행 20자
작은 글자 두 줄[雙行] 21자
판심 : 상하 백구(白口), 어미(魚尾)는 상하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상하의 어미 사이에, ‘금강경삼가해’의 서명, 한수자(漢數字)의 권차(卷次) 표시, 그 아래에 한수자로 장차(張次)가 표시되어 있음.
권말제 : 金剛般若波羅蜜經
발문 : 성화(成化) 十八年(1482) 七月 日 ·························한계희(韓繼禧)
시대세임인(時大歲壬寅)(1482) 맹추중완(孟秋仲浣)·········강희맹(姜希孟)
이 문헌의 편찬 양식은 다음과 같다.
책 첫머리에 있는 함허당의 ‘서(序)’는 행의 처음에서 한 글자 내려서 쓰고 이 구절 끝에는 ○표를 하고 두 줄로 언해했으며, 이것이 끝나면 행을 바꾸어 자신의 ‘서’에 대한 ‘설의’를 두 글자 내려서 구결을 단 한문과 이의 언해를 작은 글자 두 줄로 계속해 나갔다. 권1, 16장 후면부터 시작되는 금강경의 본문은 행(行)의 첫 글자 자리부터 한자(漢字) 대자(大字)로 쓰고, 야보(冶父)의 착어(著語)·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은 행의 처음에서 한 글자 내려서 중자(中字)로 썼으며, 이에 대한 함허당의 설의는 두 글자 내려 한문에 구결을 달고, 언해문은 ○표를 하고 두 줄[雙行]로 소자(小字)를 썼으며, 여기 한자에는 동국정음식 한자음을 달았다.
(2) 현전하는 원간본과 그 소장처
권1 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 772호), 보림사(보물 772-3호), 동국대 도서관.
권2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보물 772-2호), 계명대(보물 772-4호).
권3, 성암문고.
권4, 성암문고.
권5, 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 772호). 동국대 도서관.
(3) 영인 현황
한글학회(1960) 금강경삼가해 제2, 제3. 축소 영인 합본(총 146면)(저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람본).
한글학회(1961) 금강경삼가해 제4, 제5. 축소 영인 합본(총 272면)(저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람본).
한국불교학2(1976) 금강경삼가해 동국대도서관 소장 권1(잔권만) 영인(해제 고익진).
영남대출판부(1981) 금강경삼가해(전) (동국대 도서관본 권1의 ‘함허 서’와 권1(심재완 교수 소장본,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 합본,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 권2~권5(해제 심재완).
한글학회(1982) 금강경삼가해 제1(총 105면) (저본 - 영남대출판부(1981) 금강경삼가해(전)에서 권1만을 재영인).
한글학회(1994) 금강경삼가해 권1~권5 합본(한글학회 1982, 1960, 1961 합본, 총 625면).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3) 금강경삼가해 권1(잔권)과 권5(구 심재완교수 소장본), 불설아미타경언해와 합본 영인.

2. 어학적인 고찰

필자는 30여 년 전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문헌의 권1 잔권(殘卷)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이 수장하게 되어 이를 소개하는 짧은 글(1975)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 문헌의 간행 경위와 낙장본의 현황과 새로 나타난 희귀어 10여 개를 고찰한 것이었다.
당시 참고할 수 있었던 고어사전은 고 유창돈 교수의 『이조어사전』(1964)과 고 남광우 교수의 『고어사전』(1971, 보정판, 일조각)이었는데, 이 두 사전에는 이미 알려졌던 이 문헌의 권2~5의 자료가 수록되었을 뿐, 권1의 자료는 소개될 수가 없었다. 『우리말 큰사전』 4(옛말과 이두)(어문각, 1992)이나 『교학 고어사전』(교학사, 1997)은 ‘이 문헌’의 권1의 영인이 1981년에 나온 뒤였으나, 새로운 자료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필자의 부족했던 구고(舊稿)를 검토 보충하여 고어사전에 수록할 자료로 거듭 제시하고자 한다.
그 동안 ‘이 문헌’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로서 필자가 아는 것은 정우영(1990)과 김주필(1993), 이경화(2005)의 세 편뿐이다.
정우영(1990)에서는 ‘이 문헌’과 『남명집언해』에 대한 표기법을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이 문헌’에 관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표기상의 특징으로, 첫째, ㆆ과 각자병서를 일체 찾아 볼 수 없고, 둘째, 전대(前代)의 문헌에 비해 분철 표기가 점증하는바, 체언 말음이 ‘ㆁ, ㄴ, ㄹ, ㅁ’ 등 불청불탁음일 경우 비교적 많은 분철 표기가 보이고, ‘ㄱ, ㅅ, ㄷ, ’일 때 소수이기는 하나 분철 표기가 발견된다. 이 분철표기의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하였으니, 하나는 첨가어인 우리말의 체언이 곡용할 때 체언과 조사의 분리성이 표기자들에게 쉽게 인식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국문 한자 병용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비록 기억의 부담은 늘더라도 표의성을 띤 한자와 같은 어휘형태소의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려는 표기자의 의식이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분철표기의 횟수를 통계표로 보였다.
표기를 통해서 드러난 음운현상의 하나로, 피동화음이 후행 i(또는 j)의 영향으로 하강이중모음으로 실현된 보기(고기~괴기〈2:36ㄱ〉, 버히-[割]~베혀도〈2:7ㄴ〉, 張개여 李개여〈2:33ㄱ〉) 등이 있는데, 이를 움라우트 현상의 제1단계(15C~18C 말엽)로 보고, 제2단계(18C~19C 초엽)는 피동화음이 전설단모음으로 되는 시기로 나누어 볼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언해문의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채택했음에도 개중에는 당시의 현실 한자음으로 보이는 것이 총 56자가 있다 하여 그 보기를 들어 놓았다.
김주필(1993)에서는 ‘이 문헌’의 표기, 음운과 형태, 통사와 어휘 등의 부문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고찰하였다. 표기는 15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표기방법으로서, 『원각경언해』 이후 사라진 각자병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에 따라 ‘ㅆ’도 쓰이지 않았으며, 합용병서는 ㅅ계, ㅂ계, ㅄ계가 모두 씌었으나 ㅂ계 합용의 ㅂ은 이미 탈락된 예( 타 가다가 4:28ㄱ)도 있음을 들었다(이 대목은 착각인 것으로 보인다. ‘-[乘]’는 ‘다’가 아닌 ‘다’이므로 ‘ㅂ’탈락이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종성에 ㆆ이 쓰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나(동국정운식 한자음 제외), 기타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ㅿ 등은 쓰였는데,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지정사 ‘이’가 통합될 때, 분철표기가 상당히 확산되어 나타난다 하였다.
음운현상 가운데서 원순성 동화를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형태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후행하는 원순모음에 약모음 ‘·’가 원순성의 동화를 입어 일어나는 역행동화 현상이고(외로 1:11ㄱ, 밧고로셔 3:32ㄱ), 둘은 형태소 경계에서 원순 반모음 ‘w’를 삽입하여 ‘w’계 이중모음을 형성하는 순행동화 현상인데, 후자를 특징적인 것으로 지적했다(①모도와 1:5ㄱ, 3:43ㄱ, 4:26, ②픠우워 1:7ㄱ, ③보왐직며 1:17ㄴ ; 보왐직호미 2:18ㄱ, ④마초오미 2:29ㄴ).
의미와 관련되는 것으로, 현대국어의 관형사 ‘온’(전부의. 모든)이 중세어 ‘온’에서 의미가 전이된 것이라는 종래의 논의를 검토하고, ‘백(百)을 뜻하는 ‘온’은 거성인데, ‘모든’을 뜻하는 현대어 ‘온’은 장음이어서 서로 관련지을 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고, 중세어 ‘온’은 ‘오다’에 관형형 어미 ‘-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오’에 소급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대명사에 관련되는 것으로, ‘①눌려 2:45ㄱ, ②일로 : 함서 10ㄴ, 2:20ㄱ, ③일로브터 : 종서 5ㄴ, ④절로 : 종서 3ㄱ, 5:16ㄴ, ⑤날려 : 1:7ㄱ’ 등의 형태소 분석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대명사 ‘누, 이, 저, 나’에 조사 ‘ㄹ려, ㄹ로, ㄹ로브터, ㄹ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하고, 두 형태소 사이에 있는 ‘ㄹ’이 왜 1음절로 된 대명사 다음에 특정 조사가 올 때만 개재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밖에 어휘에 관하여는 필자(1975)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있는바, 그러한 사실은 해당 어휘와 관련되는 항목에서 언급하기로 하며, 이경화(2005)도 여기에 참고했다.
(1) :감‧다 : (형) 검은 듯이 붉다.
¶ 복홰 블그며 오야지 며 薔薇 :감·고 東君려 무르니 제 아디 몯다 = 桃紅李白薔薇紫問著東君自不知(금삼 1:23ㄴ)
이는 애초에 ‘감[柿]+다’의 합성어로 보았으나, ‘감다 : 검푸르다’ 식의 상대어를 고려하여, ‘감 : 검[黑]’과 ‘- : 븕-[紅]’의 관계로 보아, 위와 같이 풀이한다. 여기에는 김주필(1993)도 참고했다. 한글학회(1992)나 남광우(1997)에 표제어로 실리지 않았다.
(2) 겨·르롭다(〈겨를+롭다) : (형) 한가롭다.
¶ 엇뎨 聲色 밧긔 걸위여 뷔여 겨르롭거니=豈拘聲色外虛閑(금삼 1:22ㄴ)
이 어휘와 같은 계통의 파생어로 ‘겨르다, 겨르다’가 있고, 다시 후자에서 파생된 ‘겨르이’(겨르이 오 거르니=閑獨步, 금삼2:55)가 있으며, 한편 ‘겨르로’(菩薩이 이 외야 오 겨르로 이셔, 석상13:20)와, 이의 변화형인 ‘겨르로이’(거든 겨르로이 올오=困卽閑眠, 남명 상:59)가 있으므로 의당 이 부사를 파생시킨 본항의 ‘겨르롭다’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 예문으로 해서 문증(文證)된 셈이다. 이 어휘도 앞의 두 고어사전에 실리지 않았다.
(3) 그그 : (첩어)(부사) 더욱 그윽이.
¶ 보며 드를 예 그그 니라=隱隱於視聽之際(금삼 함서:3ㄴ) 주007)
필자(1975)에는 ‘함허당 서’만 있어서 출전 표시에 (금삼 서:~)로 표기했었다. 후에 이본에 ‘종경 서’가 추가되어 오늘날 영인본에는 ‘함허당 서’와 ‘종경 서’의 두 가지 ‘서’가 있으므로 전자를 ‘함서’ 후자를 ‘종서’로 구별해서 적기로 한다.
형용사 ‘그다’(그락 나락 고(隱見)(두초 9:40))가 있음으로 보아, ‘그그’은 이 형용사의 어근이 반복되어서 이루어진 첩어 부사이다. 혹 ‘그그다’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IC 분석상 ‘출현의 자유(freedom of occurrence)와 치환가능성(substitutability)(H. A. Gleason, 1965: 135~137)으로 보아서 ‘그그다’로 보는 것보다는 ‘그그 다’로 하는 것이 낫겠다. 이 단어도 앞의 두 고어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와 유사한 단어 형성인 다음과 같은 어사들이 참고된다.
가. 반다 : 能과 所왜 반니와=能所歷然(금삼 2:13)
나. 반반 (다) : 諸法이 반반 (월석 8:29)
다. 다 : 兪 맛모미  시라(내훈 3:2)
라.  (다) : 나며 머므로미  며=進止從容(금삼 5:9)
마. 아다 : 은애 머리 여희여 어즐코 아야(석보 6:3)
바. 아아 (다) : 末學이 예 니르러 다 아아 니라=末學至此皆冥冥然也(능엄 2:26)
(4) 락 : (명) 바스라기[屑].
¶  가온 락 두미며=眼中著屑【屑 녯사미 닐오 금 락이 비록 져그나 누늘 리디 아니려 니라】(금삼 1:20ㄱ)
이 어휘는 동사 어간 ‘-’에 어미 ‘-락/으락’이 결합한 것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한 파생명사 ‘라기’로 쓰였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 2회 나타난 ‘락’은 모두 명사이다. 사전에는 ‘라기’의 발달형임이 분명한 ‘라기’(구급 하:89)가 수록되어 있다.
(5) 바지외다 : (형) 공교(工巧)스럽다.
¶ 다가 바지왼 소니 아니면(若非匠手)(금삼 함서:13ㄱ)
이 어휘는 명사 ‘바지[工]’에 형용사 파생 접미사 ‘-외-’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이다. 이미 ‘바지로이’라는 부사가 있으므로(詞賦ㅣ 바지로이 야도=詞賦工, 두초 15:8), 이를 파생시킨 ‘바지롭다’는 있었을 것이다. 접미사 ‘-다~-롭다~-다(〉-외다)’는 다음 용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표기(異表記)에 불과하다.
가. 受苦다 보니(월석 14:80)
나. 수고며 즐거며(월석 1:35)
다. 病야 受苦외야도(원각 하 3지1:19)
라. 슈고로이 뇨 니노라=話苦辛(두초 20:27)
(6) 수·늙[嶺] : (명) 재. 고개.
¶ 나 수늙 우희셔 울오=猿啼嶺上(금삼 1:21ㄱ)
이는 이미 『남명천계송언해(南明泉繼頌諺解)』(하:19),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初 상:5)에 보이는 것으로 사전에도 나와 있으나, 많지 않은 용례이기에 보기를 들어 둔다.
(7) ‧스릐 : (글) 쓰는 이의. (글) 쓰는 사람의.
¶ 이런 로 그르 외요미 傳야 스릐 그르호 브틀 미니라=所以舛訛盖緣傳寫之誤耳(금삼 함서:13ㄴ)
‘스릐’는 필자(1975)에서 ‘스-[書/寫]+ㄹ(동명사형)+의(관형격조사)’의 구조로 설명했었는데, 김주필(1993:199)에 따라 ‘스-+ㄹ(관형사형)+이(의존명사)+의(관형격조사)’에서 의존명사 ‘이’가 생략된 것으로 수정해 둔다.
(8) (어‧리) 미‧혹‧‧다 : (형) 미욱하다.
¶ 다가 내 업다 닐어도  어리 미혹니(若言無我更愚癡) (금삼 1:20ㄱ)
이 어휘는 ‘우리히 어리 迷惑야(월석 17:17)’에도 보이는데, 본항은 ‘미혹(迷惑)’이 한글로 표기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迷惑-’는 대체로 원문 ‘迷惑, 迷’와 대응되며, ‘미혹-’는 원문이 ‘愚癡(못나고 어리석음), 愚魯(어리석은 사람), 迷’ 등과 대응된다. 남광우(1971)에서는 한자로 표기된 ‘迷惑다’와 한글로 표기된 ‘미혹다’ 모두 동사로 등재하였고, 필자(1975)도 동일하게 해석하였다. 그런데 남광우(1997)에서는 한자 표기의 ‘迷惑다’는 동사로서 불교용어로 간주하고, 한글로 표기된 ‘미혹다’는 ‘미욱다’로 분화 발달한 형용사로 간주하였다. 원문이 없는 언해문을 바탕으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에 따르기로 하나, 앞으로 더 고구(考究)할 여지는 있다.
동원어(同源語)이면서도 표기 문자가 한자냐 한글이냐에 따라 의미적으로 달리 쓰인 것으로는, 알려져 있는 것이나, ‘衆生’과 ‘즁’이 있다(이기문2004: 57~60).
迷惑다
가. 다가 내 衆生 맛나 佛道 다 치던댄 智慧 업슨 사미 섯거 어즐야 迷惑야 쵸 받디 아니리러니라=若我遇衆生 盡敎以佛道 無智者錯亂 迷惑不受敎(법화 1:208ㄱ)
나. 大衆은 迷惑야 定과 慧왜 다다 니디 말라(육조 중:1)
다. 그러나 迷惑야 아디 몯니=然且迷之不覺(원각 서:29ㄱ협주)

미혹다
가. 나 어리고 미혹 사미라=我是愚魯之人(번박 상:9)
나. 다가 닐오 나 업다 야도  어리 미혹리라=若言無我更愚癡(남명 상:45ㄴ)
다. 醉야 오샛 보 모니 어리며 미혹 디 어루 어엿브도다=醉迷衣寶 癡迷情可愍(금삼 4:22ㄱ)
라. 그 무른 녜 새나 그 氣運은 미 돌티 미혹디 아니니라=其流則凡鳥 其氣心匪石(두초 17:14)
(9) :외(外) : (명) 밖.
¶ 更無人이라 호 저 외예  업닷 마리라(금삼 1:24ㄱ)
이 예문은 협주문이다. 본항의 ‘외’는 접두사로 쓰인 ‘외삼촌 구 舅’(유합 상:20), ‘외삼촌 母舅’(동문 상:11)과는 다른 한자음의 한글 표기로 완전명사인 보기이다. 그런데 이 보기의 방점은 상성인 데 반해서 동국정운에는 ‘‧’로 거성인 점이 다르다.
이 단어를 여기 굳이 언급하는 것은 필자(1975)가 쓰던 당시만 하더라도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리지 못했었고, 현재도 ‘교학 고어사전’에만 실려 있기는 하나, 그 보기가 ‘그 외예’(번노 상:14)를 제외하면 다음과 같이 한글 표기가 아닌 한자음이기 때문이다.
가. 補處菩薩 外예(석보 9:28)
나. 供養기 外예(석보 23:3)
다. 그 外옛(석보 24:47)
라. 내 몸 外예(월석 7:28)
(10) ‧례다 : (동) 차례로 엮다. 차례를 정하다.
¶ 編 ‧례‧시‧오 집 모돌 시라(금삼 함서 12ㄱ 주)
‘례’는 한자어 ‘次第’이다. 명사로서의 ‘례’는 보기가 있었으나, 이에서 파생된 ‘례다’는 여기서 처음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원문에 따라 ‘編’의 새김임을 알 수 있다. ‘--’가 중세국어에서 생산성이 높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어떻든 이 어휘도 사전의 표제어로 올려야 할 것이다.
(11) ‧하야 : (부) 하얗게.
¶ ‧하야 적적 고대  寥寥도다(白的的處亦寥寥)(금삼 1:18ㄴ)
이 문헌 외에도 ‘하야 반반야’(남명 상:23)가 있으나, 종래의 고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하야다’는 ‘하야’에 ‘다’가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하야히’와는 동의어로 본다.
¶ 하야히 비취옛더라=白映(두초 20:45)
[白]을 뜻하는 형용사로 ‘다’도 있었으므로 ‘하야’는 ‘-’에 어미 ‘-아’가 결합한 형태의 이표기(異表記)로(?) 보이나, 모음의 변화가 문제점이다.
(12) (長常) : (부) 늘. 항상.
¶  과  리 애 서르 좃니라=淸風明月鎭相隨(금삼 1:23ㄴ)
이 어형은 사전에는 한자 ‘長常’과 본항과 같은 한글 표기가 아울러 실려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보기에서처럼 ‘+애’로서 명사적으로 쓰인 것이 색다른 점이어서 소개해 둔다.
(13) -는 : -는(관형사형).
¶ 바미 괴외  虛空애 녀는 그려긔 소리  소릿 소리 보내야 치운  알외다=夜靜秋空征雁響 一聲送報天寒(금삼 1:21ㄴ)
관형사형 어미 ‘-’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행어미 ‘’에 어말어미 ‘-ㄴ’이 통합된 것으로 당시의 표기로는 ‘-’이 더 바른 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진작 다음에 보이는 보기처럼 15세기 문헌에서도 간혹 ‘-는’으로 쓰인 것이 보이는데, 본항도 그러한 보기이다.
가. 술윗 소리 우는 소리(석보 19:14ㄴ)
나. 簫 효 대 엿거 부는 거시라(석보 13:53ㄱ 주)
다. 乎 아모그 논 겨체 는 字ㅣ라(훈언 1ㄱ 주)
라. 어울면 모 버는 거시니(월석 2:15ㄴ)
마.  八千里옴 녀는 象이라(월석 7:52ㄴ 주)
이상과 같이 ‘-’ 아닌 ‘-는’이 쓰인 어간의 모음은 모두 음성모음으로서 아마도 체언 아래서 모음조화에 따라 구별되어 쓰이는 조사 ‘-/는’에 유추된 것이 아닌가 한다.
(14) ‘-()’과 ‘-(아/어)’
¶ 峨峨 뫼히 노 오 洋洋 므리 너븐 니 伯牙 녯 琴 잘  사미오 子期 소리 아던 사미니 伯牙ㅣ  뫼해 두고  子期 닐오 峨峨乎ㅣ라 先生 디여 고 므레 두고  洋洋乎ㅣ라 先生 디여 니 이 峨峨 그르 드러 洋洋 삼닷 마리라(금삼1 함서:12ㄴ 주)
위 예문은 ‘지음(知音)’에 대한 고사의 설명으로, 한문 원문이 없는 협주문이다. 여기 밑줄 친 ‘, , ’에서 첫 번째 ‘’이 문제인데, 이 대목의 설명을 필자(1975)에서 “‘-’은 선행어미 ‘-거-, -아/어-, -나-, -더-, -시-’ 등과 연결된 복합어미로 쓰이는바, ‘’은 그 다음에 나오는 용례와 같이 ‘(〈-+-아)’이 정철(正綴)이므로 전자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했다.
이번 역주 작업에서 이 대목을 현대문으로 옮기면서 지난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전의 글에서는 깊이 생각지 못하고 첫째의 ‘’을 나머지 두 형태와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은 ‘-던’의 오기로 보인다. ‘…伯牙 녯 琴 잘  사미오 子期 소리 아던 사미니…’의 앞 절과 뒷 절이 대칭적인 글로서, 그 어미의 형태가 같아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은 오자이거나, 식자공(植字工)의 잘못이라고 보아 현대문 ‘타던’으로 풀이했다. ‘ㆍ’와 ‘ㅓ’의 혼기가 동시대의 다른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예가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이렇게 정리해 둘 수밖에 없다. 주008)
김주필(1993:191)은 ‘’에 대한 필자(1975:154)의 설명에 동의하였으나, 이번의 수정으로 재고의 여지가 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보인다.
¶ 소곰 성이라 여 이시니 그 소곰으로 가(팔세아:8)
(15) ㅣ종성 체언 아래 주격 표기
¶ 가. 智(딩)ㅣ 거즛 緣 뷔취면 萬法이 다 며 體톙ㅣ 眞常이 나다나면 五蘊이 다 뷔리라=智照妄緣면 萬法이 俱沉며 體露眞常면 五蘊이 皆空리라(금삼 1:14ㄴ)
¶ 나. 오 機(긩)ㅣ  업스니 機긩ㅣ  업서=全機ㅣ 無垢니 機無垢야(금삼 1:18ㄴ-19ㄱ)
¶ 다. 智(딩)ㅣ 諸佛와 가지라=智同諸佛야(금삼 5:21ㄱ)
¶ 라. 大地 가지로 보미며=大地ㅣ 同春이며(금삼 함서:6ㄴ)
체언의 끝모음이 ‘i’이거나, ‘y’로 끝나는 하강적 이중모음 ‘ㅐ, ㅔ, ㅚ, ㅟ, ㅢ’일 때에 주격표기는 영형태(零形態)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인데, 15세기 중엽에 간행된 『능엄경언해』(1462), 『법화경언해』(1463) 등에서는 주로 한자어 아래에서 영형태가 아닌 ‘ㅣ’ 표기를 한 것이 있다. 이 현상은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과 언해문에 다 나타난다(필자 1963:165~166). 이 문헌은 위의 문헌들보다 20년이 더 늦은 문헌인데, 동일한 현상을 보여 준다. 이보다 한 해 앞서 간행된 『두시언해』 초간본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확인된다(필자 1963:157~169). 그러므로 ‘이 문헌’의 다음 보기들은 영형태와 ‘ㅣ’로 동요된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같은 문장의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서도 달리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상으로 필자(1975)의 재검토를 마치고, 다음은 어휘 부분으로 위에서 언급하지 못한 것을 다루기로 한다.
(16) 니를히 : (부) 이르도록.
¶ 가. 東 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시매 니를히=以東說西說橫說竪說히(금삼 1:33ㄱ)
¶ 나. 거믄고 노로 이제 니르히 帝子 슬노니=鼓瑟至今悲帝子(두초 11:7)
¶ 다. 이제 니르히 것군 난함이 갓 노팻도다=至今折檻空嶙峋(두중 4:30)
¶ 라. 아브터 나죄 니히(번소 9:102)
¶ 마. 어린 제븓터 늘곰애 니히 슬흐여 디 아니며=自幼至老不厭(선소 5:9)
¶ 바. 팔만사천 다라니문에 니르리=至八萬四千多羅尼門이(금삼 5:24ㄱ)
¶ 바'. 뭀새 이제 니르리 위야 삿기 머기놋다=群鳥至今爲哺雛(두초 17:4ㄴ)
¶ 사. 니샤 니논 밧 法相이 곧 法相 아니라 호매 니르르시니=乃至云所言法相者ㅣ卽非法相이라 시니(금삼 5:13ㄴ)
¶ 아. 이 고대 니르런=倒這裏얀(금삼 5:31ㄴ)
¶ 자. 우흐로 諸佛에 니를며=上至諸佛며(금삼 5:36ㄱ)
(가)의 ‘니를히’는 ‘니를-[至]’에 ‘-히’가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만을 보면 원문에 단 한글 구결이 ‘-히’로 되어 있어서 이에 유추(類推)되어 ‘니를히’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나, 다)의 ‘니르히’와 (라, 마)의 ‘니히’는 그러한 추측을 어렵게 한다.
(바-자)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였던 어간 형태 ‘니를-’이 확인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어휘의 어간 형태가 본래는 ‘니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니를히’는 고형(古形)이 유지된 것이고, ‘니르히/니히’는 ‘ㄹ’ 탈락형이며, ‘니르리’는 ‘ㅎ’ 탈락형이 되는 셈이다. 더 많은 예가 확보되어야 하겠으나, 일단 이러한 견해를 제시해 둔다. 이 예도 고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17) ·몃다 : (부) 바로. 곧(믿건대. 아마. 마침.)
¶ ·몃다 톳긔  도다 비록 이신 어느 고 向야 着리오 큰 블 소밴 物 머므로미 어려우니라=賴同兎角이로다 說有 向什麽處著이리오 大烘焰裏옌 難停物이니라(금삼 2:66ㄴ)
이는 심재완(1981:27) 난해어(難解語)의 주석에 ‘믿건데. 아마’ 풀이한바, 그 후 사전에 실리지도 않은 채 내려오다가, 이경화(2005:44~45)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곧, 심재완(1981)의 간단한 뜻풀이만으로 부족하므로, 원문의 ‘뢰(賴)’에 대응되는 풀이이므로 이의 자석(字釋)을 검토하고 문장의 구조상 ‘마침’ 정도의 부사로 보고, 이로써도 적격한 풀이로 보기 어렵다면서 ‘賴’자가 쓰인 한문 문장을 재검토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필자도 문맥으로 보아서 부사로 보는 데 동의하지만, ‘마침’이 위에 대입되었을 때는 어색한 느낌을 면할 수가 없다. 참고로 『금강경오가해(설의)』번역본에서 이 대목을 찾아본바, 무비(1992), 우백암(1994) 두 책 모두 ‘賴’자는 번역하지 않았다. 다른 기댈 만한 것이 없어서, 이종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께 자문을 받아 ‘바로, 곧’으로 해 두고 다른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8) ·블무·디 : (명) 불덩이.
¶ · 온 ·블무·디 四面이 어루 드디 몯홈 니라=亦如猛火聚四面이 不可人이니라(금삼 5:29ㄱ)
이는 종래의 사전에 실리지 않은 것이나, 『교학 고어사전』에는 이의 파생 모체로 생각되는 ‘블묻-’를 동사로 싣고, 그 뜻은 ‘불씨를 묻다’로 해 놓았다. 위의 예문과 뜻으로 보아서는 잘 맞지 않으나 ‘블[火]+묻-[埋]+이’로 볼 수도 있다. 이경화(2005)는 이를‘블[火]+무디[堆,聚]’의 합성어로 보고, 뜻은 한문의 ‘화취(火聚)를 따라서 ‘불덩이’로 했는데 별 이의를 달 것이 없다. 사전에 새로 실어야 할 것이다.
(19) :셰 : (부) 세로로.
¶ 東 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샤매 니를히=以東說西說橫說竪說히(금삼 1:33ㄱ)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에는 다음 보기가 실려 있다.
¶  고 셰 다=橫跳竪跳(역해보 60)
이 ‘셰’를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명사와 부사로 두루 쓰이는 것으로 보았고,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에서는 명사로 보았다. 이 예문에서 ‘다’를 한정하는 것으로 보아 부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셔-’에 접미사 ‘-ㅣ’가 결합한 것이다. 이 『역어류해(譯語類解) 보(補)』는 영조 15년(1775)간이므로 방점도 없는 어형이어서, 연대도 앞서고 방점이 있는 어형을 보기의 첫 번째로 수록하는 것이 낫겠다.
(20) 솝[裏]과 속
¶ 敎海ㅅ :소· 向샤=向敎海裏샤(금삼 1:16ㄱ)
이미 잘 알려진바, ‘솝’이 더 고형이고 ‘속’은 개신형으로서, 주009)
‘솝’의 자료는 『석보상절』을 비롯해서 『월인석보』,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원각경언해』 등 여러 문헌에 나오므로 보기는 줄인다.
두 어형은 중세국어 당시에도 쌍형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어사전에서는 이 개신형의 제일 이른 시대의 것으로 ‘骨髓는  소개 잇 기르미라’(월인석보 1:13. 주)를 수록하였고, 다음으로는 이 문헌과 같은 무렵의 초간 『두시언해』의 자료를 실었다.
‘이 문헌’에서는 권 1, 2를 통틀어서 ‘속’이 한 번 쓰였고 ‘솝’은 15회 나타난다. 3, 4, 5권에서는 개신형 ‘속’은 보이지 않고 ‘솝’만 나타난다.
(21) 슬·히 : (명) 창[戈].
¶ 戈 슬·히라(금삼 1:33ㄴ 주)
이는 ‘이 문헌’의 권1에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필자(1975)가 쓸 당시 이용했던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낙장본에는 없었고, 심재완(1981:12)에서 희귀어휘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간행된 고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 보기의 형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문제인데, ‘슳+이(서술격)+라’로 하여 ㅎ종성체언으로 해 두지만, 또 다른 보기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22) ·:곶·다 : (동) 팔짱끼다.
¶ 世間ㅅ 사미 病이 업스면 醫王이 ·:곳·니 衆生이 허믈 업스면 부톄 걔 홀 일 업스시니라=世人이 無病면 醫王이 拱手니 衆生이 無垢면 佛自無爲시니라(금삼 4:24ㄴ)
※ 九重에 :고·잿거·든 四海朝宗놋다=端拱九重이어든 四海朝宗이로다(금삼 3:4ㄱ)
이 ‘곶-’은 유일한 예문으로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문의 ‘공수(拱手)’에 대응되어 뜻은 위와 같이 풀이되었다. 이의 형태 분석은 ‘[袖]+ㅅ++곶-[拱/揷]’로 보는바, 문제는 ‘’에 있다.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기의 ‘곶-’이 있는데, 이도 『우리말 큰사전』에는 동사 ‘팔짱끼다. 깍지끼다.’로 했고, 『교학 고어사전』에는 명사 ‘[팔짱]’과 동사는 ‘곶-’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결국 뜻은 앞의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은 후에 ‘뎡→(졍)→팔짱’으로 바뀌었다 할 것인데, 문제의 ‘뎡’은 위에서 아무 뜻이 없는 것으로 되어서 미진한 느낌이 남는다. 이와 관련되는 16세기 자료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 잔 자바 헌슈고 여 매디르고 웃 녀그로 즈우려 나오니=奉觴上壽畢 皆肅容拱手 自右趨出(이륜 초:31)

관심 있는 분들의 교시를 기다린다.

(23) 오··다 (동) 우비어 파내다. 천착(穿鑿)하다.
¶ 後世예 반기 거즛 일 니며 왼 고 와 오··포· 거츠리 내야 그 마 모로매 通호 求리 이시리니(後世예 必有承訛踵誤야 妄生穿鑿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니)(금삼 함허서:17ㄱ)
이 ‘오포’은 ‘이 문헌’에서 처음 보인다. ‘포’은 ‘-[掘]+옴/움+’의 구조임이 분명하나, 문제는 ‘오·-’인바, 일찍이 이기문(1971:122)에서 ‘외  刻’(훈몽 상:1ㄱ)의 설명에,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의 ‘穿鑿은 :욀·씨·라’(28ㄴ주)와 관련지어 ‘외-’의 뜻을 ‘어떤 물건을 뚫어(또는 뚫둣이) 파는 동작[穿掘]을 의미’함으로 풀이했다. 이 대목을 현대역한 김무봉(2002:37)에는 ‘오비는 것이다’로 옮겼다. 따라서 ‘이 문헌’의 ‘오-’는 원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천착(穿鑿)’의 옮김으로써, 이 어형만으로 본다면 위의 ‘외-’나, ‘:외-’보다 앞선 시대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곽충구(1996:49-50)에서는 위의 ‘외-’와 ‘우·의-(석보 11:21, 두시 초 16:37), 함경남도 북청방언의 ‘오배(LH)’, 현대국어 ‘오비-, 우비-’를 바탕으로 ‘*오-, *우-’를 재구하고, 15세기 이전에 ‘*오·->*오·외->:외-’와 같은 변화가 있었고, ‘외·-’는 ‘우비어 파내다’라는 뜻의 복합동사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 문헌’의 ‘오-’는 위의 변화에서, ‘*오·외-’와 ‘:외-’ 사이에 자리하게 되며, ‘*오·외-’에서 겹쳐지는 원순모음은 이런 경우 이화작용으로 원순성이 소실되어 ‘오·-(+-)’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 아닌가 한다. 이는 최전승(1975)을 곽충구(1996:50-51주)에서 재인용, 적용한 것이다.
(24) 울: : (명) 등나무의 열매.
¶ 葛 츨기오 藤 울:·니 다 너추는 거시니(금삼 1:3ㄴ 주)
이 자료도 필자(1975)에는 소개되지 못한 것이고, 고어사전에도 수록되지 못했다. 다른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울니’는 ‘울+Ø+니’로 본 것이다. 어원과 관련될 만한 것으로는 ‘울[籬]’과 ‘열[實]’의 ‘’ 정도인데, 전자는 ‘·울 爲 籬’(훈해 용자)로 거성이며, 후자는 ‘열 실[實]’(왜해 하:6, 18세기 초엽 자료?)로 성조도 미상이다. 혹시 방언 등에 쓰이는 데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다음은 고어사전의 예문이 유일한 것, 곧 이 문헌의 예문만으로 된 것을 모아서 살피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1~23)에서 다룬 것과 아울러 보면, 이 문헌의 어휘사적 중요성을 한층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시될 차례는 위에서처럼 단어, 품사, 뜻, 예문과 출전의 순서로 한다.
(25) 외다 : (형) 완전하다. 만족스럽다.
¶ 文과 質왜 골아 비르서 어루 일후믈 왼 莊嚴이라 홀디니라=文質이 彬彬야 始可名爲十成莊嚴이니라(금삼 4:22ㄴ)
(26) 그만·뎌만·다 : (형) 그만저만하다.
¶ 간 마다  것 슬히 너기고 더운 것  머구믈 그만·뎌만·야뇨마=到處에 嫌冷愛熱야 喫却多少了也오마(금삼 3:52ㄱ)
(27) 덕[棚] : (명) 사다리.
¶ 棚 더기라(금삼 2:25ㄴ 주)
(28) :돌·블 : (명) 별똥별. 유성(流星).
¶ :돌·브른 流星이라(금삼 4:63ㄱ 주)
(29) ·다 : (형) 습습(習習)하다. 바람이 산들산들하다.
¶ 보현행문 노피 오니 덥듯 미 ·야 프르며 누르니 해 도다=高踏普賢之門니 薰風이 習習야 靑黃이 滿地로다(금삼 4:18ㄱ)
(30) 머믓다 : (동) 머뭇거리다.
¶ 逡巡 머믓 오(금삼 4:10ㄴ 주)
(31) 믓다 : (동) 무너지다. 부서지다.
¶ 고대 어름 노며 디새 믓· ·샷다 니=當下애 冰消瓦解샷다 니(금삼 2:1ㄴ)
(32) 믿얼굴 : (명) 본바탕. 본질(本質).
¶ 質은 묨 업슨 믿얼구·리라(금삼 2:61ㄱ 주)
(33) 벼·다 : (동) 겉을 꾸미다. 가장(假裝)하다. 거짓 꾸미다.
¶ 有僞 비록 거츠나 리면 功行이 이디 몯고 無爲 비록 眞나 벼면 聖果 證호미 어려우니  니라 벼디 아니며 리디 아니  어늬 이 성제 제일 고=有爲雖僞나 棄之則功行이 不成고 無爲雖眞이나 擬之則聖果 難證이니 且道不擬不棄時 如何是聖諦第一義오(금삼 4:31ㄴ~32ㄱ)
(34) :뷔듣·다 : (동) 비척거리다. 비틀거리다.
¶ 窮子ㅣ :뷔드·러 외로이 나가 녀 나리 마 오라더니=窮子ㅣ 竛竮孤露야 爲日이 已久ㅣ러라(금삼 3:25ㄱ)
(35) ·븘나·올 : (명) 불꽃.
¶ 靈 ·븘나·오리 빗나 부러도 어루 디 몯리니=靈焰이 烜赫야 吹之不可滅이니(금삼3:29ㄴ)
(36) :빌·다 : (동) 빌어 꾸다.
¶ 안로 이운 남기 호 威儀 :빌·워 나토니=內同枯木호 假現威儀니(금삼 4:18ㄴ)
¶ 이 일후미 :빌· 일후미며=是名爲假名이며(금삼 5:37ㄱ)
(37) ·룯·다 : (형) 뿌루퉁하다.
¶ 盧都 ·룯·다 논 마리니 말 몯시라(금삼 3:12ㄴ 주)
(38) 서느서늘··다 : (형) 선득선득하다. 몹시 서늘하다.
¶ 이 이 서늘야 싁싁며 冷호미 서느서늘·야 처딘 므리 처딘다마다 어러=此事 寒威威冷湫湫야 滴水滴凍야(금삼 4:42ㄴ)
(39)  : (부) 아른아른. 아물아물.
¶ 陽燄 陽氣  노 거시니(금삼 5:27ㄱ 주)
(40) ·앛 : (명) 까닭. 소이(所以).
¶ 이 爲頭며 읏듬 외논 勢론 ·아·치니·라=此ㅣ 所以爲王爲主之勢也ㅣ니라(금삼 함서:3)
¶ 善現 奇特혼 아 그 聲敎 기드리디 아니야 信야 疑心 아니호 오 慈尊이 希有샨 아 그 聲敎 나토디 아니샤 人天 여러 알외샤 니라=善現之所以奇哉者 以其不待聲敎야 而信無疑也ㅣ오 慈尊之所以希有者 以其不現聲敎샤 而開覺人天也ㅣ니라(금삼 2:8ㄴ)
※ 이 문헌에서 ‘젼’는 주로 한자 ‘고(故)’의 풀이로 씌었다.
¶ 靑色 能히 災厄 더논 젼라=靑色 能除災厄故也ㅣ라(금삼 종서 3ㄱ)
(41) 주엽·쇠 : (명) 풍경(風磬).
¶ 닐오 山僧이 座애 오디 아니얫거 맷 주엽·쇠 마 혀 흐느다 호 모로매 미둘디니라=須信道山僧이 未陞座ㅣ어늘 風鐸이 已搖舌이니라(금삼 4:43ㄴ)
다음은 드문 문법 형태를 소개하는 것이다.
(42) -엣고
¶ 이 늘그늬 이 마 사미 劫外 向야 알엣고 니=此老의 此說 只要人이 向劫外承當케 니(금삼 2:1ㄴ)
여기 ‘알엣고’의 ‘-엣고’는 ‘-겟고’에서 /ㄱ/이 약화된 것이다. ‘-겟고’는 ‘-긧고’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학 고어사전』에는 ‘-긧고’만 표제어로 되어 있고 ‘-엣고’는 실려 있지 않으며, 『우리말 큰사전』에는 표제어 ‘-긧고’ 아래 다음 두 보기를 들고, 참고로 ‘⇒-겟고’ 표시를 한바, ‘-겟고’ 항목에는 ‘-게 하고자’라는 뜻풀이와, [=-괫고/-긧고/-엣고]로 끝나고 보기는 없다. 그러므로 위의 보기는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가. 庶幾 그러긧고 라노라 논 디라(월석 1, 석보서:6ㄱ. 주)
나. 三寶애 나가 븓긧고 라노라=而歸依三寶焉이니라(월석1, 석보서:6ㄴ)
다음은 재미있는 한글 활자의 모양이다.
(43) (中) : {}
가. 에 城 남아 出家샤=子夜애 踰城出家샤(금삼 1:1ㄴ)
나. 여러 部ㅅ 中()에 오직 이  부=於諸部中에 獨此一部(금삼 1:2ㄴ)
다. 山埜 이 저 니논 마리라(금삼 1:13ㄴ. 주)
라. 늘근 을 심겨 주고=授與老僧고(금삼 1:7ㄱ)
여기서 밑줄 친 부분을 보면, (가)는 언해문에서 한자어를 한글로 적은 것인데 모음 ‘ㅠ’자의 모양이 좀 다른데, 이를 (나)의 동국정운식 한자음 활자와 비교하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ㅠ’자에 ‘ㆁ’ 받침을 쓰면 글자가 잘 드러나지 않음을 의식해서 활자 모양을 달리한 것이다. ‘ㅠ’의 두 수직선이 八(여덟 팔) 자 모양을 하고 있다. (다)는 한자음은 아니나 ‘ㆁ’받침을 단 ‘ㅠ’자가 (가)의 모양과 같고, (라)는 (다)와 같은 글자임에도 보통 쓰이는 글자를 보인 것이다. (가, 나)가 한자음이라면 (다, 라)는 고유어로 쓰인 것이다.
(가)와 같은 활자 1:12ㄴ, 1:17ㄱ(2), 1:17ㄴ, 2:9ㄱ, 2:35ㄴ, 2:55ㄱ, 2:64ㄴ···8회
(나)와 같은 활자 1:17ㄴ(2), 2:16ㄴ, 2:20ㄱ, 2:21ㄱ, 2:22ㄱ, 2:42·············7회
(다)와 같은 활자 2:26ㄱ························································1회
(라)와 같은 활자 2:23ㄱ주, 2:27ㄱ·············································2회
3, 4, 5권에도 이런 활자가 씌었으니, 그 경향은 통틀어 다음과 같다. 주010)
두 개의 수직선이 여덟 팔(八) 자와 유사한 ‘ㅠ’를 ‘ㅡ八’로 나타내기로 한다.
가. (中) : 36회 {듕} : 16회
나. (衆) : 5회 {즁} : 23회
다. [僧] : 없음 {즁} : 11회
마지막으로 한자어의 새김 중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를 보이고자 한다.
(44) 한자어의 새김
가. 어루 錦ㅅ 우희 고 더으다 니리로다=可謂錦上添華ㅣ로다(금삼1 함서:10ㄴ)
나. 東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시니=東說西說橫說竪說시니(금삼1:32ㄴ)
다. 奧旨 돌햇 블와 번겟 비치 야=奧旨 石火電光야(금삼1 종서:5ㄱ)
라. 몃맛 人天이 말 아래 갈  알며=多少人天이 言下애 知歸며(금삼1:25ㄱ)
마. 여슷 여스시 녜브터 오로 셜흔여스시니라=六六이 從來로 三十六이니라(금삼4:45ㄴ)
(가, 나)는 오늘날 한자어 그대로 쓰이는 말이고, (다)는 앞뒤가 바뀌었지만 역시 한자어가 그대로 쓰이며, (라)의 ‘언하(言下)’는 거의 대중의 말로는 듣기 어려운 말이다. 이러한 한자어 또는 숙어에 대한 새김의 노력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가)는 직역을 하더라도 뜻이 통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직역으로든 의역으로든 ‘조리가 없이 되는 대로 말을 지껄임’이라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는 ‘돌에서 일어나는 불과 번갯불’이라고 옮겼을 때 (나)의 경우보다는 좀더 알아듣기 쉬운 느낌이 들지만, 이 말이 역사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라)는 이 말이 ‘일언지하(一言之下)’의 준말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말씀 아래’로 적었을 때, ‘말하는 바로 그 자리’ 또는 ‘말이 떨어지자 그 즉시’ 라는 뜻이 얼마만큼 전달될지 의문이다. (마)는 산술적 표현으로서, 오늘날의 ‘구구단’과 관련된 것이다. ‘여섯여섯’ 식의 표현이 당시에 실제로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이 문헌’이 나온 시기가 우리 고유어를 살려 쓰자는 커다란 사회적인 기운이 조성된 그런 때는 아니었겠으나, 오랫동안 굳어져 쓰여 오던 말을 새로운 고유어로 고쳐 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현대역 『금강경오가해』(무비 역해, 1992)에서는 (가, 나, 라)는 원문 그대로, (다)는 ‘전광석화’로 옮겼다.
45)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불교 인명, 용어는 『동국정운』(1448)의 이른바,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주음한 것이다.
가. 般반 若:(금삼 1:2ㄱ)
나. 解:갱 脫·(금삼 1:3ㄴ)
다. 阿 難난(금삼 1:34ㄴ)
라. 阿耨·녹多당羅랑三삼藐·막三삼菩뽕提똉(금삼 3:56ㄱ)
이러한 한자음의 사용은 ‘이 문헌’의 간행연대(1482)로 보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곧,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불경언해에 쓰이면서 중간에 1차의 수정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니, 1463년 간행의 『법화경언해』에는 위의 음이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가’ 般 ·若 :(법화 5:188ㄴ)
나’ 解 :脫 ·(법화 3:140ㄴ)
다’ 阿 ·難 난(법화 1:30ㄴ)
라’ 阿耨·녹多당羅랑三삼藐·먁三삼菩봉提뗑(법화 1:37ㄱ)
이와 같이 수정된 이유는, 이 한자음은 본디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음역어(音譯語)로서 그 원음에 가깝게 적으려는 데 있었다고 본다(정우영 1996 : 92~99, 이경화 2005 : 28~29). 이런 한자음은 1467년 간행의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목우자수심결』, 『사법어』까지 쓰이다가, ‘이 문헌’과 같은 해에 간행되는 『남명집언해』에 이르러서는 정음 창제 초기 한자음 표기로 돌아가고 만 것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정우영(1996)으로 미룬다. 이러한 한자음의 수정에 관한 언급은 일찍이 안병희(1987)에서도 언급된 것이 있다.

3. 마무리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오가해설의』에서 금강경 본문·야보(冶父)의 착어(著語)와 송(頌)·종경(宗鏡)의 제강(提綱)과 함허당(涵虛堂)의 서(序)에 대한 설의(說誼)를 언해하여 1482년에 간행한 5권 5책의 금강경 해설서이다.
‘이 문헌’은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에 전하던 권2~5를 한글학회에서 축소 영인하여(1960, 1961) 널리 알려졌으며, 1975년 동국대 도서관에 권1의 낙장본이 수장되고, 그 무렵 심재완 교수(1976)도 같은 판본의 권1 이본(낙장본)을 발굴 소개했다. 그 후 심재완(1981)은 자신의 이본에 결락된 부분을 동국대본에서 보전(補塡)하여 가람문고본과 합하여 전 5권을 1책으로 영인 간행했으나, 권1의 ‘함허 서’ 몇 장은 낙장인 채 완본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 8월 전남 장흥군 보림사 소장 권1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공개되어 비로소 5권 5책 전질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헌’의 표기, 음운, 문법 등은 정우영(1990)과 김주필(1993)에서 요약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어휘 부분은 필자의 구고(1975)를 일부 수정 보충한 바, 새로 고어사전에 수록돼야 할 것으로 19개어, 이미 사전에 수록된 것이나 그 예문이 이 문헌의 것만으로 된 것 16개를 확인함으로써 어휘부문에서 차지하는 이 문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밖에 색다른 활자 모양을 시도한 ‘’[{듕}]를 찾아 보였고,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긴 몇 개의 보기를 통해서 당시 번역자의 고심의 일단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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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동국대 교수. 국어학)

1. 머리말

우리가 흔히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 부르는 이 책의 원 이름은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의 명칭이 같지만, 학계에서는 우리말·글로 번역한 언해본을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원 이름 끝에 ‘언해(諺解)’를 덧붙여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언해(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諺解)」라 일컬으며, 이를 보통 「남명집언해」라고 줄여 부른다.
상·하 2권으로 된 『남명집언해』의 번역 저본은 한문본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인데, 책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중국 당나라 고종·중종 때의 스님인 영가대사(永嘉大師) 현각(玄覺. ?~713)이 지은 『증도가(證道歌)』를 송나라 남명천선사(南明泉禪師)가 구(句)마다 나누어 계송(繼頌)한 총 320수로 구성된 책이다.
이 자료를 학계에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남풍현(1972, 1973)에서인데, 남풍현(1972)에서 「하권」을, 남풍현(1973)에서 「상권」을 각각 영인하고 해제를 제공하였다. 그 후 안병희(1979)에서 간명하게 자료가 소개되었고, 김영신(1988:165~241)에서는 상·하권에 대한 국어학적 연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상·하권」을 국어 어휘와 한자어로 나누어 어휘 색인을 작성하였으며, 어휘론에서는 어휘 통계, 희귀어, 빈도 높은 어휘, 오각된 어휘 등을 소개하였고, 그 밖에 음운론, 굴곡론, 조어론의 측면에서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정리함으로써 개별 문헌으로서는 상당히 정치한 연구를 이룩하였다. 박종국(1988)에서는 해제와 함께 「하권」을 영인하였으며, 정우영(1990)에서는 동시대에 간행된 『남명집언해』와 『금강경삼가해』의 표기법의 특징을 병서 표기, ㅣ모음역행동화, 연분철 표기, 현실한자음 표기 항목으로 나누어 비교 조사하였다. 김영배(2000)에서는 이 문헌의 가치와 서지를 알기 쉽게 정리하였다. 직접적인 관련은 적으나 박희숙(1978)에서는 한문본의 구결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해제」라는 글의 성격을 감안하여 4장으로 나누어 이 문헌을 소개한다. 제2장에서는 서지·편찬 경위 등 문헌을 개관하고, 제3장에서는 이 책에 나타난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공시적 특징을 정음 창제 초기문헌과 대비하면서 역사적 위상을 밝히며, 제4장에서는 앞선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 어휘들을 정리·소개하였다. 문법적인 특징은 김영신(1988)에서 소상히 다루어졌으므로 선행연구로 미루며, 좀더 구체적인 사실은 『남명집언해 상』을 역주한 김동소 교수님과, 하권을 맡은 이유기 박사의 역주 본문 해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이 점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한다.

2. 문헌 개관

2.1. 서지 사항

『남명집언해』는, 세종 때부터 기획과 번역이 시작된 것을 학조(學祖. 1432~?)가 완성하여 성종 13년(1482)에 주자본인 을해자본(乙亥字本) 상·하 2권 2책으로 간행된 언해서이다. 원간본인 가람문고본(상권)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하권)을 토대로 하여 서지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01)
좀더 자세한 정보는 남풍현(1972, 1973), 박종국(1988:81~85), 김영배(2000) 참조.
책 전체의 크기는, 상권은 33.4㎝ × 21.5㎝, 하권은 33.4㎝ × 21.6㎝이다. 각면의 네 둘레에는 굵은 줄로 테두리가 있으며[四周單邊], 테두리 안쪽 한 면의 너비[半葉匡郭]가 24.8㎝ × 17.7㎝이다. 그 안에 세로로 칸이 나뉘어져 있는데[有界] 9칸이다. 1칸 당 본문의 경우[구결문]는 큰글자로 19자, 이것의 번역문은 작은자 2줄로 19자를 쓸 수 있으며, 주해문은 1칸에 작은자 2줄로 가지런히 1자씩 비워 놓아 18자를 쓸 수 있게 돼 있다. 각면의 가운데[판심]는 상하 흰색[백구]에 상하 안쪽으로 향한 검은 지느러미 모양[상하내향흑어미]이고, 위쪽에는 책 이름 ‘南明’과 권 표시(上·下), 아래쪽에는 쪽수가 표시돼 있다. 발문의 경우는 칸의 수와 글자수가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판본(원간본)의 소장은, 가람문고(상하), 통문관 이겸로 선생(상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만송문고(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전 김석하님 소장)(하), 통문관 이겸로 선생(하) 등에게 소장되어 있으며, 중간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안병희 1979).
원간본의 영인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편집하여 단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축소 영인해낸 바 있는데, 하권이 1972년 12월, 상권이 1973년 4월에 이루어졌으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1988년 12월 『세종학연구』 3에 하권을 박종국 선생의 해제와 함께 영인·소개한 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1) 남명 상 : 합쳐 83장
가. 서문: 1077년 7월 오용(吳庸)의 서(序)와 언해문 [1-3장]
나. 본문: 한문송(漢文頌)과 언해문(1~80장) [80장]
(2) 남명 하 : 합쳐 80장
가. 본문: 한문송(漢文頌)과 언해문(1~75장) [75장]
나. 후서: 1076년 7월 축황(祝況)의 후서(後序)(75~77장)[2장]
다. 발문: 1482년 7월 한계희 발문(1~2장)
1482년 7월 강희맹 발문(2~3장)
이 책의 분량은 상권(83장)과 하권(80장)을 합쳐 모두 163장이며, 책의 중심을 이루는 한문송(漢文頌)은 상권에 156수, 하권에 164수가 실려 모두 320수가 언해되어 있다. 이 책을 15세기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서와 비교해 보면, 시기적으로도 늦게 이루어지고 분량도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역주는 물론이고 까다로운 구절이나 어휘가 여러 개 나타나 독해하기가 만만치 않으며,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어’도 여러 개 나타난다(§4 참조). 그 원인은 언해의 대상이 「증도가(證道歌)」라는 선시(禪詩)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언해 문헌과는 달리 계송(繼頌)에 대한 주해가 한문 원문이 제공되지 않은 채 그대로 우리말글로 표현돼 있기 때문에 독해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파격은 전후 문헌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데, 처음 기획과 함께 30여 수를 번역한 세종에게서 마련되어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이 한문 원문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2. 편찬 경위

이 책의 편찬 경위는 다소 복잡하다. 『남명집언해』에 실린 한계희(韓繼禧)·강희맹(姜希孟)의 발문(1482년 7월)에서 간추려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주002)
이외에 남풍현(1972, 1973), 박종국(1988:81~85), 김영배(2000:272~276)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세종 28년 3월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번역코자 하였다. 세종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중에서 「야부 송(冶父頌)」·「종경 제강(宗鏡提綱)」·득통 설의(得通說誼)」 및 『증도가남명계송(證道謌南明繼頌)』을 국어로 번역하여 「석보(釋譜)」에 편입시키려고 동궁(후에 ‘문종’)과 수양대군(후에 ‘세조’)에게 함께 찬술하라고 명한다. 「야부 송」 등 삼가해(三家解)는 초고가 끝났으나 교정(校定)은 보지 못하였고, 「남명계송(南明繼頌)」의 경우는 세종 자신이 겨우 30여 수만을 번역, 두 사람에게 그 일을 마치도록 유촉하고 1450년에 승하한다. 그 뒤를 이은 문종 또한 재위 3년만에 승하함으로써 이 사업은 수양대군에게 이어진다. 나중에 세조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석보(釋譜)』(‘월인석보’일 듯)를 간행하였으나 유촉(遺囑)이 중대하여 초초(草草)히 할 수는 없으므로 먼저 『능엄경』·『법화경』·『육조해금강경(六祖解金剛經)』·『원각경』·『심경』·『영가집』 등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였으나 「금강경제해(金剛經諸解)」와 「증도가계송(證道謌繼頌)」 등은 번역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불조(佛祖)의 무상요의(無上了義)를 중히 여겨 즉취(卽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예종 즉위년(1468)에 세조마저 승하하였고, 그 15년 뒤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의 비(妃) 자성대비(慈聖大妃) 윤씨가 세종·문종·세조 등 열성(列聖)의 홍원(弘願)을 추념하고 유업(遺業)을 끝마치기 위해, 선덕(禪德) 학조대사(學祖大師)에게 명하였으니, 『금강경삼가해』는 중교(重校)하게 하고, 『남명집언해』는 이미 세종께서 번역하신 바 있는 ‘어역남명(御譯南明)’(30여 수)을 이어서 번역·완성토록 하여, 전자는 300본, 후자는 500본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을해자로 간행, 여러 사찰에 널리 베풀도록 한다.

3.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특징

훈민정음 창제 초기 문헌들에 실현된 「훈민정음 표기법」과 1482년 『남명집언해』에 적용된 문자와 표기법을 비교해보면 30여 년 사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초기 문헌에 실현된 문자와 표기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에 나온 『훈민정음』 한문본과, 『훈민정음』 언해본 등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 구체화된 실제 표기법으로써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 장에서는 『남명집언해』 상·하권에 나타난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공시적인 특징을, 국어표기법의 역사적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살펴 이 책의 역사적 위상을 짚어보고자 한다.
가장 큰 특징으로, 『남명집언해』에는 국어 표기와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법이 서로 다른 표기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어 표기에 필요한 문자·표기법으로는 순경음 비읍(ㅸ)과 ‘ㄲㄸㅃㅉㅆㆅ{ㅇㅇ}ㅥ’ 등 각자병서, 그리고 ‘ㆆ’을 거론할 수 있겠고, 한자음 표기법에서는 각자병서와 ‘ㆆ’, 종성의 ‘ㅭ, ㅱ’을 거론할 수 있겠다. 항목별로 나누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1. 〈ㅸ〉의 표기

국어 표기에 쓰인 ‘ㅸ’은,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라면 (3나)처럼 ‘ㅸ’으로 활발히 나타날 예들인데, 이 문헌에서는 (3가)처럼 완전히 폐지되어 ‘오/우’ 또는 후음 ‘◦’로 교체되었다. 용례에서 ‘ㄱ·ㄴ’은 앞면·뒷면을 가리키며, 약호는 쓰지 않고 출처만 밝힌다. 이하 모두 같다.
(3) 가. 가온(하 16ㄱ), 어드운(하 77ㄴ), 놉가이(하 42ㄱ)
나. 가(월 14:80), 어드(용 30장), 놉가(월 2:40)
‘ㅸ’은 『훈민정음』의 본문 17초성 체계에 들어 있지 않고, 본문의 표기 규정과 「정음해례」 제자해에 표기 및 조음 방법에 대해 설명되었으며 그 예는 용자례에 올라 있다. 이 문자는 세조 7년(1461)에 간행된 활자본 『능엄경언해』에서부터 폐지되고, 이듬해인 1462년 목판본 『능엄경언해』를 비롯한 후대 문헌에서 그대로 계승되어 우리말 표기에서 자취를 감춘다. 주003)
총 10권인 『능엄경언해』에서 두어 예밖에 없다. (礫. 능엄 5:72ㄱ)(모두 3회), 구결문에서 객체높임 선어말어미 ‘--’(無上悲誨. 능엄 7:7ㄴ) 정도가 고작이다. 그 후 『구급방언해』(1466), 『목우자수심결』(1467), 『속삼강행실도』(1514) 등에 극소수의 예가 불규칙하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사에서 연서법(連書法) 폐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제1차 표기법 개정으로 해석된다. 세종과 정음학자들이 ‘ㅸ’자를 제정·사용한 것은, 당시 ‘오/우/◦’ 등으로 실현되던 중앙어형―한양말을 비롯한 중·남부 일부, 그리고 서북방언―과 ‘ㅂ’으로 실현되던 방언형―동남 및 동북방언―을 절충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으로서, 세종의 ‘正音’ 사상을 구체화하는 문자·표기체계의 한 구성요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正音’이란 용어의 정확한 정의는 『홍무정운』 범례와 『훈민정음언해』, 그리고 「석보상절서」에 나타나 있는데, 이들을 종합하면 ‘동일 언어공동체 안에서 지역적(방언적) 차이를 초월하여 통해(通解)할 수 있는 正한 소리이자 그렇게 발음하도록 제정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ㅸ’은 이상적인 표준음으로 국어를 통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절충적 표준음 표기이며, 주004)
이에 대하여는 남광우(1959), 서정범(1982), 김동소(1998:112), 조규태(1998:122-3), 정우영(2002)을 참조할 것.
실제로는 당시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적 음소로 규정된다.
이 문자를 제정한 의도와 목적은 순수하고 이상적이었지만 비현실적·가상적 존재를 다수 언중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게 된 것이고, 결국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한양말의 현실발음을 토대로 세조(世祖)의 주도 아래 ‘ㅸ’을 폐지, 『능엄경언해』(전10권) 활자본과 목판본을 통해 언중에게 개정 공표하게 된다. ‘ㅸ’이 『남명집언해』에서 ‘오/우/◦’로 완전히 교체된 표기로 통일되게 실현된 것은 제1차 표기법 개정안을 적용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3.2. 〈ㆆ〉과 각자병서

국어 표기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4) 가. 아롤디니라(상 8ㄴ), 몯 사(상 17ㄴ), 볼 저기(하 42ㄱ).
가’. 아디니라(석19:10ㄴ), 이 사(석6:2ㄴ), 나 저긔(석3:26ㄴ)
나. 디날 길(하37ㄱ), 아롤디니라(상8ㄴ), 일홀배(所事)(서1ㄱ), 딜제(상62ㄴ), 그럴(상17ㄴ). 사호거늘(상69ㄴ), 스고(冠.상30ㄴ), 혀(引. 상8ㄴ), 도혀(하67ㄱ), 얽이디(상6ㄱ)
나’. 오실 낄(월7:9), 홀띠니라(영가,서3), 몯홀빼라(법화1:160ㄱ), 니실쩨(금강,서6), 그럴(석9:14ㄱ). 싸호미(석23:55ㄱ), 쓰고(월10:95), (引.정음해례:합자), 도(석6:5), 얽다(월13:9ㄴ)
다. 둘짯(상3ㄱ)(총77회), 세짯(상4ㄱ)(총50회), 네짯(상5ㄱ)(총77회) 모두 204회.
다’. 둘찻 (금삼 4:28ㄴ), 세찻(금삼 2:33ㄱ), 네찻(금삼 2:33ㄱ)
(4가나다)는 『남명집언해』에 적용된 표기법이요, (4가’나’)는 정음 초기문헌부터 1464년에 간행된 한글문헌에 적용된 예들이고, (4다’)는 1482년 『금강경삼가해』에 나타난 예들이다.
항목별 대비로써 『남명집언해』에는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것의 공식적인 폐지는 『원각경언해』(1465년. 전 10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가’)와 같이 ‘ㆆ’이 있는 표기에서 (4가)처럼 ‘ㆆ’을 없앤 표기가 신미(信眉)가 번역한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경)의 구결문 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편, (4나’)와 같이 각자병서로 적었던 표기를 (4나’)처럼 단일자로 적기 시작한 것은 『능엄경언해』 활자본(1461) 구결문에서부터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조 10년(1464) 『선종영가집언해』를 비롯한 불경언해의 구결문에 오면 ‘ㆆ’이든 각자병서든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 원칙은 세조 11년(1465) 『원각경언해』에 와서, 구결문은 물론 언해문(한자음 표기는 제외)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학계에서는 이런 표기법의 개정을 “급격한 변화, 극적인 변화, 과잉조처…” 등으로 기술해오고 있다(지춘수 1986, 이익섭 1992).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는 1450년대 말 구결문에서부터 시험 운용되어 적어도 5, 6년간의 시험기를 거쳐 혼란과 불편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문자·표기체계면에서 볼 때, 1465년 『원각경언해』에서 행해진 ‘ㆆ’과 각자병서[전탁] 폐지는 간소화되기는 하였으나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는 손대지 못한 상태이므로 미완(未完)의 개정(改定)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정우영 1996, 2002). (4가나)와 같은 국어 표기에서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은 것은 원천적으로 1465년 『원각경언해』에서 규범화된 원칙에 따른 결과이다.
그런데 문헌의 기획·착수와, 간행 연대가 같은 『금강경삼가해』와는 달리 (4다)처럼 일부 어휘에서 각자병서 ‘ㅉ’이 쓰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책의 편찬 경위(§2.2)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야부 송」 등 삼가해(三家解)는 초고가 끝났으나 교정(校定)은 보지 못하였고, 「남명계송(南明繼頌)」의 경우는 세종 자신이 겨우 30여 수만을 번역하였고,…(중략)…어역남명(御譯南明)을 이어서 번역·완성토록…”하였다는 사실을 정리하면, 『금강경삼가해』는 초고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고, 『남명집언해』는 세종이 번역한 30여 수만을 물려받았으므로, 이 일을 위임 받은 학조(學祖)로서는, 전자는 당시 표기법에 준하여 교정하고 간행하면 그만이지만, 후자는 ‘세종이 남긴 일부 번역된 원고’에 체재를 맞추어 속역(續譯)하고 간행해야 하므로 ‘어역남명’의 중압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지 않았을까? (4다)에 제시한 ‘둘짯, 세짯, 네짯’ 등 서수사는 세종이 쓴 번역어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005)
세종 재위시에 나온 문헌에서 ‘둘찻’ 같은 예가 일반적으로 쓰이긴 하나, 『석보상절』에서 ‘닐웻자히(석24:28ㄱ)~닐웨짜히’(석24:15ㄱ) 같은 예도 출현하므로 ‘둘짯, 세짯, 네짯’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다 『원각경언해』(1465년)에서 행해진 각자병서의 일괄 폐지가 현실 언어음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학조 개인의 문자·표기관이 이들 어휘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런 추측은 1485년 학조에 의해 언해된 것으로 보이는 『관음경언해』와 『영험약초』에 “써(書. 관음,상4ㄴ. 영험14ㄱ), 눈(睛. 관음,상4ㄱ. 영험4ㄱ), 연와(관음,하13ㄴ)” 등과 같은 각자병서 표기가 예외적으로 출현하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되는 일이다.

3.3. 한자음 표기

동국정운 한자음을 표기하려면 국어 표기법(§3.2)과는 달리 더 많은 문자가 필요하고, 따라서 표기법도 달리 운용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반영된 구체적인 용례를 (5가-다)에 제시한다. 편의상 방점은 줄인다.
(5) 가. 一定(하 18ㄴ), 王孫손(하 7ㄴ)
나. 權꿘(하36ㄱ)/定(하18ㄴ)/菩뽕(하14ㄴ)/字(하18ㄴ)/實(하19ㄴ)/和(하19ㄴ)
다. 吉(하 14ㄴ), 句궁(하 19ㄴ), 草(하 15ㄱ)
(5가나)에 든 초성의 표기에서, (5가)는 ‘ㆆ, (옛이응)’이 쓰인 것이고, (5나)에는 전탁음에 해당하는 각자병서 ‘ㄲㄸㅃㅉㅆㆅ’이 쓰인 것이며, (5다)에는 종성 표기로서 이영보래(以影補來)의 ‘ㅭ’과 후음 ‘◦’ 그리고 ‘ㅱ’이 쓰인 것이다. 국어 표기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ㆆ, ㅭ’, 각자병서, 그리고 연서법(連書法)으로 만들어진 순경음(ㅱ)이 동국정운음에 쓰인 것이다. 이것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특성이기도 한데, 정음 창제 초기문헌에 적용된 원칙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훈민정음 표기법」이 몇 차례에 걸쳐 개정 작업이 있어 왔지만 한자음 표기법만은 아직 근본적인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명집언해』에 나타난 것처럼, 국어 표기와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법이 서로 다른 체계로 운용되는 것은 독자와 표기자 모두에게 편안한 문자생활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부담이 된다. 국어표기법의 역사에서, 이런 불편함은 1496년 『육조법보단경언해』(3권)와 『시식권공언해』에 이르러 해소되는데, (5가-다)에 쓰인 동국정운 한자음은 조선 전통한자음[東音]으로 완전히 교체·개정됨으로써 명실공히 “편어일용(便於日用)”할 수 있는 표기법으로 정착된다. 『남명집언해』는 현실음으로의 간소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대세와 세종대에 시작되어 문종·세조를 거쳐 이어진 유업을 마치기 위해 진행된 번역 사업이라는 특수한 내부 사정이 개입된 문헌이므로 국어 표기는 개정된 표기법을, 한자음 표기법은 의고적인 표기법을 유지하여 이원적인 문자·표기체계로 운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15세기 한글문헌 중에서 『남명집언해』 한자음 표기의 특징으로 꼽을 것은, 한자에 독음을 달지 않고 빈칸으로 처리한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6) 가. 巍巍 놉고 클시라(하 37ㄱ) cf. 巍巍(곡 1장). 巍巍(월1:1)
나. {毛+瑟}{毛+瑟} 金터리   時節에(하 35ㄴ)
{憨+鳥}{憨+鳥} 고기 자바 먹 새라(하 60ㄱㄴ)
15세기 관판의 한글문헌에서 한자음 표기는 국한혼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동국정운 한자음을 한자 바로 아래에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책에서도 그 원칙은 철저히 지켜진다. 단적인 예로 (6가) ‘巍’자에 대한 독음 표기에서 확인된다. ‘巍’의 동국정운 한자음은 巍[](정운5:37ㄱ)이고 동국정운 한자음 그대로 주음되어 있다. 그런데 초기문헌인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에서는 어떤가? 巍[/]로 주음되어 있다. 동국정운음이 정확할 것으로 예측은 되지만 평성 []음에 소속된 한자를 『동국정운』에서 찾아보면 예상과는 다르다. [/]음에 소속된 한자는 모두 6자인데 ‘巍’자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에 주음된 한자음이 잘못된 것임이 확인된다(정우영 1996:88). 이것은 『동국정운』의 원고 완성과 해당 문헌들의 간행 시기가 맞물려 있었던 데 원인이 있는데, 한자음 적용 초기에 발견되는 오류의 하나로 지적된다.
(6나)는 동국정운음을 독음으로 표기한 15세기 한글문헌 중 유일하게 한자에 독음을 달지 않은 예이다. 한자가 없는 것을 필자가 중괄호({ })로 묶어 제시하였는데, {毛+瑟}과 {憨+鳥}로 짜인 한자이다. 이들은 모두 형성자로 파악되며, 털이 나부끼는 모양을 표현한 {毛+瑟}자의 동국정운 한자음은 *[·]일 가능성이 크고, {憨+鳥}자는 새의 한 종류로서 음은 *[: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는 성부(聲部)에 해당하는 ‘瑟’의 동국정운음이 [·](정운2:19ㄱ)이고, 후자의 성부 ‘敢’은 [:감]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憨+鳥}에 연결된 보조사가 ‘’이므로 이 조건에 맞으려면 모음조화에 맞고 받침이 있는 소리여야 하는데 [:감]이면 이 조건에 부합된다. (6나)에서 한자음 부분을 빈칸으로 처리한 것은, 근본적으로 한자음 사전인 『동국정운』의 양적인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僻字)이므로 정확한 한자음을 알지 못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동국정운』에는 총 18,775자의 한자가 실려 있는데 15세기 한글문헌에 나타난 한자를 모두 수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문헌에도 빈칸으로 처리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만에서 간행된 10권 분량의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도 이들 한자는 실려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주006)
중문대사전 편찬위원회(1974)의 『中文大辭典』(1-10권)에도 이 글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표기자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한자의 형성 원리로써 이 한자음들을 짐작할 수는 있었겠지만 정확한 동국정운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빈칸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한자 독음 가운데 특히 불교 용어 및 인명 표기에 적용된 한자음에 대하여 살펴보자. 15세기에 간행된 관판의 불경언해서에 적용된 한자음은 동국정운음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7가-라)와 같은 용어는 몇 차례 수정된 적이 있다(정우영 1996:92~99). 제1차 수정은 1463년 『법화경언해』에서 이루어졌는데, (7)의 왼쪽음―1447년 『석보상절』부터 1462년 『능엄경언해』까지의 한자음―이 모두 오른쪽 음으로 수정되었다.
(7) 가. 解脫 [:갱·] 〉 [:·] (법화 3:140)
나. 般若 [반:] 〉 [·:] (법화 5:188)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녹당랑삼·막삼뽕똉] 〉 藐[·먁] (법화 1:37)
라. 阿難 [난] 〉 [·난] (법화 1:30)
제1차 수정 한자음은 『법화경언해』 이후 불경언해서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이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 이 한자음으로 어떤 문헌의 간행연도를 추정하는 단서를 삼기도 한다. 불교용어 한자음에 대하여 불교계의 오랜 독법을 근거로 삼거나, 범어의 원음에 가깝게 적기 위해 고친 점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 음역어를 원음에 가까운 한자로 바꾸는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기존 용어는 그대로 두고 한자의 독음만 원음에 가깝게 바꿈으로써, 한자어는 동국정운 한자음을 독음으로 표시한다는 관판문헌의 한자음 표기원칙에서 크게 일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2차 수정안은, 세조가 승하하고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후 1480년대 중반까지 나온 불경언해에 적용되었는데, 그 내용은 (8)처럼 『법화경언해』 이전의 한자음으로 회귀하였다.
(8) 가. 解脫 [:·] > [:갱·] (남명,상 35ㄱ)(금삼 1:3)
나. 般若[·:] > [반:] (남명, 상 61ㄱ)(금삼 1:13)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녹당랑삼·먁삼뽕똉] >藐 [·막](남명집.없음)(금삼 3:56)
라. 阿難 [·난] > [난] (남명, 하 4ㄴ)(금삼 1:34)
(8)에 보이듯이, 『남명집언해』와 『금강경삼가해』는 1463년 이전 한자음으로 주음되어 있다. 회귀의 주된 원인은, 제1차 한자음 수정안에 대한 부정적 시각, 즉 한자 음역어는 그대로 놓아둔 채 한자음만 범어 원음에 가깝도록 바꿈으로써, 결국 관판문헌의 한자음 표기원칙을 어기게 되고 끝내는 새 한자음이 실린 운서가 없다는 부정적 견해가 작용한 듯하다. 여기에 세조의 승하(1468년)와 간경도감의 폐지(1471년) 등 불경언해 사업의 중심 세력이 와해됨으로써 불교 용어 등 한자음 수정 작업이 더 이상 추진될 수 없게 되자 초기문헌에서 적용했던 대원칙으로 환원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한자음 표기와 관련하여, 어원상 한자어임이 분명한 경우라도 동국정운음으로 적지 않은 예들이 (9)처럼 나타나는 문제이다. (어원 한자는 다른 문헌에서 찾은 것이다.)
(9) 곡식(穀食, 하30ㄴ), 긔운(氣運. 상25ㄱ), (長常. 상54ㄴ)
미혹(迷惑. 상48ㄴ), 시혹(時或. 상69ㄴ), 화로(火爐. 하69ㄱ) 등.
(9)에 든 한자음을 한자와 일대일로 맞세워 낱개로 나눈 다음 해당 한자음을 조사하면, 동국정운음이나 홍무정운역훈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1476년경의 『수구영험』과 1496년 『육조법보단경언해』·『시식권공언해』, 그리고 1527년 『훈몽자회』에 실린 한자음과 일치한다. 이 문헌들은 공통적으로 조선 전통한자음[東音〕문헌이므로 『남명집언해』에 한글로만 표기된 한자어의 독음은 국어에 동화된 대로의 현실한자음임이 분명하다. 이 같은 현상은 『석보상절』 등 초기 문헌부터 나타나며 이 문헌에만 해당되는 특징은 아니다. 한자어를 한자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독해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표기자와 독자 모두에게 공통된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판의 한글문헌에서 동국정운 한자음을 철저히 주음하면서도, 이에 대립되는 (9) 같은 표기가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국가 기관에서 목표하던 바와는 달리 실제 언어사회에서는 조선 전통한자음이 널리 통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로써 당시 한자음 체계는 동국정운음과 현실한자음의 이원적 체계로 운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3.4. 방점 표기

『남명집언해』에도 방점은 0점(평성)·1점(거성)·2점(상성)의 세 종류가 표시되어 있으나, 정음 창제 초기문헌들의 표기와 비교하여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10)(11)을 보자.
(10) 가. ·첫소·리· 어·울·워 ··디·면 · ·쓰·라(훈언12ㄴ)
나. 부:톄 :나· :어엿·비 너·기·샤 :나· ·보·게 ·쇼·셔(석6:40ㄴ)
(11)가. :모딘 :마 :보 ·다·가 :말 :업슨· :알면 理ㅣ 기·우디 아·니·리라(상ㄴ)
나. 어·루 無心로 救·티 :몯·리라 ·시라(하29ㄱ)
(10)은 초기문헌인 『훈민정음언해』와 『석보상절』에서 뽑은 예이고, (11)은 이 책에 쓰인 예이다. (10가나)에서 보듯이,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활용어미가 통합하여 하나의 어절을 형성할 때 어절의 마지막 음절이 모두 1점(거성)으로 실현되었다. 오늘날 어절 단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11)에는 창제 초기문헌에서라면 어말에서 1점이 찍혀야 할 곳에 0점으로 나타난 예가 여럿 발견된다. (11가)를 모두 10어절로 파악할 때 ‘말, 理ㅣ’를 제외한 8개 어절에 1점이 찍혀야 하는데 기껏 2개만 찍혀 있으며, (11나)에서는 5개 어절 중에서 2개만 제대로 찍혀 있다. 좀더 자세한 사정은 문헌별 조사가 완료된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11)만으로도 어절말에서 1점으로 표시되던 것이 0점으로 변화해 가는 추세에 있는 대체적인 경향은 파악할 수 있다. 이 현상을 ‘어말 평성화’라고 보아 언중의 발음 현실에 나타난 성조 변화의 반영으로 이해해야 할지, 단순하게 표기법의 변화로만 이해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 어려우나, 어떤 경우라도 방점 표기법을 고안해낸 정음 창제자의 의도와 「훈민정음 표기법」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고, 국어사적인 안목으로 방언 현상까지 고려한 포괄적인 해석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1464년 『선종영가집언해』의 방점 표기에 나타났던 ‘어절말 거성의 평성화’ 경향이 점차 확산되어, 1482년 『남명집언해』에 이르러서는 그 경향이 확대 일로에 있고 점차 체언이나 용언의 의미부(어휘부)에다 방점을 찍어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5. 연·분철 표기

이 책에는 여전히 연철표기가 주조를 이루고는 있지만 분철 표기가 활발히 쓰인다는 점에서 앞선 문헌들과 차이가 있다. 이를 종성별로 구분하여 몇 예만 들어본다(정우영 1990).
(11) 〈-ㄱ〉: 밠가락(상50ㄱ), 北녁의(하45ㄴ). 〈-ㄴ〉: 소진이(상67ㄱ), 눈으로(하38ㄱ)
〈-ㄷ〉: 으로(상1ㄴ). 〈-ㄹ〉: 믌결(상72ㄱ), 얼굴이라(하21ㄱ). 〈-ㅁ〉: 구룸의(상3ㄱ), 로(하63ㄱ). 〈-ㅂ〉: 집(하20ㄱ). 〈-〉: 굴에(상60ㄱ), 스을(하46ㄴ). 〈-ㄺ〉: (상35ㄴ), 두듥엣(하30ㄴ). 〈-ㄼ〉: 여듧에(하65ㄱ)
(11)은 종성이 ‘ㄱㄴㄷㄹㅁㅂ’인 체언 뒤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가 오더라도 연철하지 않고 분철한 예들이다. 예가 적기는 하지만 종성이 ‘-ㄺ, -ㄼ’인 경우도 발견된다. 체언과 조사의 통합에서만 나타나며, 『월인천강지곡』에서처럼 용언의 활용에까지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분철표기는 의미부를 일정한 시각적 형태로 고정시켜 적음으로써 독해를 좀더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런 경향은 한문에 구결을 달아 쓰는 문자생활에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1)에서 ‘-’ 종성의 예는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는 ‘’을 초성으로 연철하는 경향이 뚜렷하던 어휘인데, 주007)
굴허  디내샤(용가48장), 스스 자(능엄경언해,발6)
이 책에는 종성으로만 적었다. 정음 초기 문헌부터 예외 없이 초성 표기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이긔, 다’ 정도였다.

4. 어휘

『남명집언해』에 나타난 어휘는 모두 3,356 단어라고 한다. 그 중 고유어는 1,268개, 한자로 표기된 한자어휘는 1,747개, 한자 어근에 ‘-, -롭-’ 등 고유어 접미사가 결합된 어휘는 336개, 한자어와 고유어로 합성된 어휘는 5개로 조사되었다(김영신 1988:201~2).
이 중 고어사전과 각종 국어사 자료들을 검색하여 출현 빈도가 드문 어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각 어휘 항목은 표제어-현대어 풀이-해당 문장-출처(장수) 순서로 제시하며, 표제어와 표제어가 들어 있는 어절에는 방점을 표시한다. (가나다 순서임.)
(1) ·곡·식:곡식(穀食). ¶飢 ·곡·식 업슬시오 饉  업슬시라(하30ㄴ) cf. 穀·곡食·씩(석24:7ㄴ)
(2) :깁·옷:비단옷[絹衣]. ¶天人이  적 려와 :깁·옷 닙고 뎌 돌 러(상61ㄱ)
(3) ··히:겹겹이[疊疊]. ¶여러 터럭 師子ㅣ  터럭의 다 드러 ··히 서르 비취여 나콰 여러쾌 룜 업서 두 面ㅅ 거우룻 像이 ··히 섯거 비취니(상75ㄴ, 상76ㄱ)
(4) 나모·신:나막신[木履]. ¶天台 寒山子…(중략)… 곳갈 고 나모·신 ·고(하8ㄱ)
(5) 도랑:옴. 개선(疥癬). ¶도 머근 가히와  무든 도(疥狗泥豬)(상4ㄴ)
(6) 도·태:도롱태[鷂.요]. 새매.¶머리 두르혀면 도롱·태 新羅 디나리라(󰜇子ㅣ過新羅리라)(상5ㄴ)
(7) :뒤좇-: 뒤좇다.¶衆이 :뒤좃·니 엄과 톱과 갈모미 어려워(衆隨後니 牙爪 難藏이라)(하36ㄴ)
(8) -:뚫다[穿.천] ¶·귀 온 :되:즁이 그기 彈指다(彈耳胡僧이 暗彈指다)(하11ㄱ)
(9) 멱:멱[吭.항]. 목의 앞쪽. ¶臨濟ㅣ 禪床애 려 멱 잡고 니샤(하16ㄴ)
(10) 묏부·우리:멧부리[岑.잠]. ¶구루미 묏부·우리·예 나 東西예  업스며(상3ㄱ)
(11) 밑·드리:철저(徹底)히. ¶三四句 믿·드리 ·조·야 凡情과 聖解왜 다 업서 죠고맛 것도 다 바사 릴시라(상31ㄴ)
(12) ·봇곳·갈:벚나무 껍질로 만든 고깔[樺皮帽]. ¶原憲이 ·봇곳·갈 스고 헌옷 닙고 나거늘(상30ㄴ)
(13) 봇닳-:볶고 달이다.¶三途諸子ㅣ 날로 봇달커·늘(三途諸子ㅣ日焚燒커늘)(하47ㄴ)
(14) 브르돋-:부르돋다[剛]. ¶ 여위여시들오  브르도·다(貌顇骨剛야)(상30ㄱ)
(15) 비·릇:비롯됨[始初]. ¶녯  비·릇 :업시 오로 곡도 며 거츤 몸과 괘니(상75ㄱ)
(16) 사만:사뭇. 늘. ¶어믜 나혼 헌 뵈젹삼 니브니 劫火 몃마 디내야뇨마 사만 이··도다(著簡孃生破布衫니 幾經劫火야뇨마 長如此도다)(상31ㄱ)
(17) :고·개:소의 고개[牛項]. ¶頑皮靼 :고·갯 장 둗거운 가치니(하58ㄱ)
(18) 수·늙:고개[嶺]. ¶東녁 수·늘게 구루미 나니 西ㅅ녁 수·늘기 ·하야·고(東嶺에 雲生니 西嶺이 白고)(하19ㄱ)
(19) 싀·서늘·-:시도록 싸늘하다[酸寒]. ¶알피 티며 싀·서늘·호미 百萬 가지니(痛楚酸寒이 百萬般이니)(하32ㄱ)
(20) ·:떨기[朶]. ¶이  · 고 불휘 沙界예 서리오 니피 須彌 둡 젼니(하55ㄱ)
(21) :애-:애달프다[憤]. ¶憤 미 :애올·시오(하43ㄴ)
(22) :어둑:많이[多]. ¶中下 만히 듣록 :어둑 信티 아니니(中下 多聞록 多不信니)(상36ㄴ)
(23) 여·위시·들-:여위고 힘이 없다[悴.췌]. ¶天台寒山子  여·위시·들오 뵈오시 다 러디고(하8ㄴ) cf.  여·위여시·들오(貌顇)(상30ㄱ)
(24) 움·지혀-:움츠리다[縮]. ¶혓그틀 움·지혀· 비르서 能히 펴리라(縮却舌頭야 始解宣리라)(하18ㄱ)
(25) 이셔지:비슷이. 방불(髣髴)히. ¶눈 이시·면 이셔지 :옴·도 能히 몯려니와(有眼면 不能窺髣髴이어니와)(상65ㄱ)
(26) 일·이-:가려지다. 일어지다[淘].¶眞化애 일·이디 몯 나 도혀 혜아룐(翻想未淘眞化日혼)(하63ㄱ)
(27) 자·치-:잦아들게 하다. ¶우·룸 자·친 누·른 ·니피 거즛거신 알리라(止啼黃葉이 知虛妄이리라)(상44ㄴ)
(28) 자·히-:재다[候].¶쇽졀업시 것근 솔옷 자바 녀트며 기푸 자·히·다(徒把折錐야候淺深다)(하20ㄴ)
(29) 저·욼가:돈:저울의 가늠쇠[分銅]. ¶定盤星 저·욼가:도니·라(하43ㄴ)
(30) 저·치-:걸리다[累]. ¶뎨 엇뎨 말와 데 저·쳐 ·호미 아니시리오(彼豈累於言意爲哉리오)(서2ㄴ)
(31) ·샇-:차곡이 쌓다(?) ¶그 해 金을 게 혀 ·사·하 주고 사실 뎌 金田이라 니라(하59ㄴ)
(32) ·하·야반반·-:하얗게 반짝반짝하다. ¶三四句 가 寥寥며 ·하·야반반·야 조 디니 구슬 어든 고 니시니라(상23ㄴ)
(33) ·귀:햇귀[暉.휘] ¶녀르멘 더·운 ·귀 잇고 겨렌 누니 잇니라(夏有炎暉코 冬有雪니라)(하57ㄱ)
(34) 헌·:야단스럽게 떠듦(?). ¶寒山이 니샤 豊干 헌·라 ·시·니 그러면 이티 論量홈도  헌·라 ·시라(하8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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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신, 「동국신속삼강행실의 국어학적 연구」 『부산여자대학논문집』 9, 1980
신성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규범성, 국어문학회, 국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 2009
이병도, 『동국신속삼강행실』-해제-국립중앙도서관, 1995
이숭녕, 「동국신속삼강행실에 대한 어휘론적 고찰」 『국어국문학』 55·57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97
전재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색인」 『동양문화연구』 2, 경북대학교동양문화연구소, 1997
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진단학회, 진단학보 8, 1998, 185-227.
정복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건)의 조어법」 『수련어문논집』, 부산여자대학, 1997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신, 「동국신속삼강행실의 국어학적 연구」 『부산여자대학논문집』 9, 1980
신성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규범성, 국어문학회, 국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 2009
이병도, 『동국신속삼강행실』-해제-국립중앙도서관, 1995
이숭녕, 「동국신속삼강행실에 대한 어휘론적 고찰」 『국어국문학』 55·57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97
전재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색인」 『동양문화연구』 2, 경북대학교동양문화연구소, 1997
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진단학회, 진단학보 8, 1998, 185-227.
정복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건)의 조어법」 『수련어문논집』, 부산여자대학, 1997
『목우자수심결언해·사법어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학교 교수)

1. 서론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지은 한문본 『수심결(修心訣)』을 조선 세조 때 신미(信眉)가 우리말로 언해하여 1467년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책이다.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의 서두에서 삼계(三界)의 고뇌를 ‘화택<세주>(火宅=불난 집)’에 비유해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부처[佛]를 이루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心]이 참 부처이고 자기 성품[自性]이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해 밖에서만 찾는다고 하고, 마음[心]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을 9문 9답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지눌은 이 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체계화하였는데, 분량이 적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선수행(禪修行) 지침서이자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의 이름은 작자인 지눌의 호(號) ‘목우자(牧牛子)’를 앞에 붙여 ‘목우자수심결’이라 부르나,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일반적으로 『목우자수심결언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글의 예문 설명에서는 판심제에 따라 ‘수심결’로 줄여 부르기로 한다.)
한편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晥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등 4편의 법어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당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권수제는 ‘法語’이나 후대에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된 책에서 권말서명이 ‘四法語’로 나타나므로 학계에서는 흔히 ‘사법어(四法語)’라 부른다.
이 두 책은 1467년(세조 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합철되어 있어서 판식(板式)이나 체재 등에서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인다. 그러한 형태적 유사성은 국어학적 특성의 유사성으로까지 이어진다. 『목우자수심결언해』와 『사법어언해』는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표기법이나 문법, 어휘 면에서 흥미로운 양상을 많이 보여준다.
이 책들보다 먼저 간행된 책에서는 이미 사라진 ‘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든가, 다른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는 문법적 특성이 보인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사법어언해』는 총 9장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헌에 없는 희귀어가 여러 개 사용되어 어휘 면에서도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서지 사항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내제(內題) 다음에 2행에 걸쳐 ‘丕顯閤訣 慧覺尊者譯’이라고 되어 있어서 동궁(東宮)의 편당(便堂)인 비현합(丕顯閤)에서 구결을 달고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언해본은 번역자의 이름을 책에 밝히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목우자수심결언해』는 번역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특이하다. 이는 뒤에서 살필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도 마찬가지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원간본에는 그 앞에 『사법어언해』가 합철되어 있다. 이 책의 끝에는 “成化三年丁亥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 … 安惠柳睆朴耕書”라는 간기가 있으므로 1467년(세조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되었다는 것과 판하본(板下本)의 글씨를 안혜(安惠)·유환(柳睆)·박경(朴耕)이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복각되기도 하였는데, 1500년(연산군 6년)에 간행된 중간본은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후 간기를 따로 붙인 것이다. 원간본인 간경도감판에 비해 판식과 판각, 인쇄가 매우 엉성하다. 봉서사 중간본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가 합철된 것과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이 합철된 것 두 가지가 있다. 두 책 모두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권말에 나오는 간기가 ‘弘治十二年’으로 되어 있으나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과 합철된 책의 권말에 ‘弘治十三年’이라는 간기가 뚜렷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十三’에서 탈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서사에서 간행된 중간본은 후쇄본까지 있어 꽤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경도감판인 원간본은 목판본으로서, 불분권(不分卷) 1책(冊)이며 크기는 23.1×17cm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8×12.8㎝이며 유계(有界)에 9행 17자이다. 판심(版心)은 상하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다. 권수제(卷首題), 권말제는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고 판심제(版心題)는 ‘수심결(修心訣)’이다.
현재 원간본은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一簑 古貴 294.315-J563ma, 보물 770호)와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목우자수심결 도서번호 : L174361)에 소장되어 있고, 봉서사에서 간행된 중간본과 그 후쇄본이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에는 일사문고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한편,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10장 내외의 적은 분량이어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것은 『목우자수심결언해』와 합철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문고본이다. 소창문고본(사법어 도서번호 : L174529)도 일사문고본과 같은 책이지만 후대에 『사법어언해』 부분만 따로 제책한 것이다.
그런데 『사법어언해』는 간기가 따로 제시되어 있지 않아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법어언해』의 간기로 그 간행 연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일사문고본 『목우자수심결언해』 권말의 “成化三年丁亥歲 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라는 기록을 통해 『사법어언해』의 원간본도 1467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책은 각 법어(法語)에 구결을 달아 원문을 먼저 싣고 우리말 번역을 보이는 체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후에 지방의 사찰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500년(연산군6년)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후 간기를 따로 붙여 간행하였고, 1517년(중종 12년)에 충청도 연산(連山) 고운사(孤雲寺)에서 체제를 바꾸어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하여 중간하였다. 고운사판은 합철된 『몽산법어언해』의 체재와 같이 법어를 대문으로 나누어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간경도감 판본과 차이가 있다. 이후 1525년(중종20년) 황해도 황주(黃州) 심원사(深源寺), 1577년(선조 10) 전라도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1605년(선조38년)에 원적사(圓寂寺) 등에서 다시 간행된 『사법어언해』는 고운사판의 체재와 동일하다.
『사법어언해』 원간본의 판식(板式)은 『목우자수심결언해』 원간본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총 9장으로 크기는 23.1×17cm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8×12.8㎝이며 유계(有界)에 9행 17자이다. 한글 구결과 언해는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대부분의 간경도감본과 마찬가지로 상하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며, 권수제와 판심제는 ‘法語’로 되어 있다. 고운사 계통의 중간본은 총 13장이며, 사주단변(四周單邊)인 것이 많고 7행 18자이다. 그러나 송광사본은 총 27장에 7행 15자이다.
현재 원간본은 규장각 일사문고에 2부,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에 1부가 전하며 중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을 비롯한 공사립 도서관과 개인소장으로 다수가 전한다. 1973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일사문고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합철)과 고운사판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이 출판되었다. 또한 1979년에는 홍문각에서 『오대진언(五大眞言)』과 합본된 송광사판 영인본이 출판되었다.

3. 표기법 및 음운 주001)

여기에 제시하는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국어학적 특징은 이현희 외(1997)의 내용을 많이 참조하였다. 형태나 통사, 어휘의 특징 등은 이현희 외(2007)의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 많다. 출처의 약호는 『목우자수심결언해』는 ‘수심결’로, 『사법어언해』는 ‘법어’로 하며, 해당 장의 앞·뒷면은 각각 ‘ㄱ·ㄴ’으로 구별 표기한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의 원간본인 간경도감판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언해본의 표기법 및 음운의 특성은 거의 유사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 등도 쓰였는데 ‘ㅿ’의 쓰임에는 혼란이 없다. ‘ 업순’〈수심결19ㄴ〉과 ‘이’〈수심결45ㄱ〉, ‘에’〈법어8ㄴ〉에서처럼 ‘ㅿ’이 종성에만 적히는 것과 ‘저’〈법어2ㄱ〉, ‘디녀’〈법어2ㄱ〉, ‘지’〈법어2ㄱ〉, ‘나믈릴’〈법어5ㄴ〉, ‘매’〈법어6ㄱ〉, ‘오’〈법어6ㄴ〉에서처럼 초성에 적힌 것이 모두 보인다. 한편, ‘ㆁ’은 ‘이’〈수심결19ㄱ〉〈법어2ㄱ,7ㄴ〉, ‘디니노다’〈법어2ㄱ〉, ‘스스’〈법어6ㄴ〉, ‘스이’〈수심결15ㄱ〉〈법어9ㄴ〉, ‘’〈법어6ㄱ〉, ‘’〈수심결19ㄴ〉에서처럼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였다. ‘ㆁ’의 연철 표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가장 철저히 지켜졌는데 대개 『두시언해(杜詩諺解)』(1481)를 기점으로 ‘ㆁ’ 종성화 표기가 점차 증가하다가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에서는 정착 단계에 이른다.
국어 표기법에서 다소 특이한 것은 ‘ㅸ’인데, ‘ㅸ’은 부사 파생접미사 ‘-이’와 결합할 때에만 쓰였다. ‘수’〈법어2ㄱ〉, ‘가야’〈수심결9ㄱ〉, ‘어즈러’〈수심결7ㄱ〉〈법어5ㄱ〉, ‘조’〈수심결11ㄱ〉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관판 문헌에 반영된 표기법을 보면 ‘ㅸ’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부터 전격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수’〈석상20:30ㄴ〉~‘쉬’〈월석13:12ㄴ〉와 같이 표기되던 것이 ‘수이’〈능엄1:34ㄴ〉~‘쉬이’〈능엄6:89ㄱ〉로 일사불란하게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국어 표기법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특이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책의 원고는 1461년 이전에 언해되어 그 후 부분적으로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책에서 ‘ㅸ’이 제한적 분포를 보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15세기에 실제 음소로서 존재했던 ‘ㅸ’이 당시에 이미 ‘ㅸ’이 음소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ㅸ’은 실제로 존재했던 음소가 아니었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수이/쉬이’ 방언형과 ‘수비/쉬비’ 방언형을 절충적으로 표기하기 위한 문자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ㅸ’의 음가를 [β]이었다고 볼 때 동남방언 등에서 ‘ㅸ〉ㅂ’으로 변화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실과 정음 초기문헌부터 1461년 이전 문헌에서 활발히 쓰이던 90여개 이상의 어휘에서 어느 문헌을 기점으로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음운사적, 음성학적 관점으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 이전 문헌들, 특히 방언이나 차자표기 자료들에서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을 제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ㆆ’의 실현 양상은 두 문헌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것만 볼 수 있는데, 『사법어언해』에서는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것 외에 사이시옷으로 쓰인 예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차이가 이들 문헌의 표기법이 달랐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료의 양이나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나타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예로는 ‘어루 마촤 디라’〈수심결45ㄱ〉, ‘求 사미’〈수심결45ㄴ〉, ‘디언뎡’〈법어2ㄴ〉, ‘마디니’〈법어5ㄴ〉, ‘니 時節’〈법어5ㄱ〉 등이 있으며, ‘ㆆ’이 사이시옷으로 쓰인 예로는 ‘無ㆆ字’〈법어2ㄴ〉가 있다. 이때 ‘ㆆ’이 사이시옷으로 쓰인 ‘無ㆆ字’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60년경) 등 훈민정음 창제 초기문헌의 표기법과 동일하다.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예는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 언급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볼디언’〈법어5ㄴ〉, ‘마롤디니라’〈법어5ㄱ〉, ‘드률 時節’〈법어5ㄴ〉 등과 같이 ‘ㆆ’이 폐지된 채 관형사형 어미 ‘ㄹ’만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고유어의 각자병서 표기는 더 드문 편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ㅆ’만 쓰였는데, ‘말’〈36ㄱ〉, ‘아니’〈2ㄴ〉와 같은 예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이 ‘말로’〈19ㄴ〉, ‘아니’〈12ㄴ〉 등으로 쓰였다. 『사법어언해』에서는 ‘말’〈6ㄱ〉, ‘믜’〈2ㄴ〉 등 극소수에서 ‘ㅆ’과 ‘ㆀ’을 발견할 수 있을 뿐 대체로 폐지되었다. 이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의 역사로 볼 때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1465)에서부터 ‘ㆆ’과 각자병서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어 ‘ㅭ→ㄹ’로, ‘각자병서→전청자(후음은 차청자)’로 적는 원칙을 따른 결과이다. 이들 문헌에 쓰인 ‘ㅆ’, ‘ㆀ’에 대해서는 문자의 보수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이들 문헌이 각자병서가 사용되던 시기에 언해되었으나 그 원고를 후대에 간행하면서(1467년) 제대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ㆀ’는 『법화경언해』(1463)부터 폐지되었는데 『사법어언해』에 보이는 것이어서 이 책의 원고 작성 시기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 문헌에 사용된 합용병서는 정음창제 초기문헌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로’〈수심결5ㄴ〉, ‘리오’〈수심결42ㄴ〉, ‘두’〈수심결25ㄱ〉, ‘’〈수심결10ㄱ〉와 ‘-’〈수심결2ㄴ〉, ‘’〈수심결3ㄱ〉, ‘’〈수심결2ㄴ〉, ‘’〈법어2ㄱ〉, ‘든’〈법어2ㄴ〉, ‘며’〈법어5ㄴ〉, ‘힘미’〈법어6ㄱ〉 ‘’〈법어2ㄴ,5ㄴ〉, ‘며’〈법어9ㄴ〉, ‘리고’〈법어6ㄱ〉, ‘해’〈법어5ㄴ〉, ‘븨니’〈법어6ㄴ〉, ‘리’〈법어9ㄴ〉 등이 그것이다.
자음동화(비음화)가 반영되지 않은 형태와 반영된 형태가 모두 보이기도 한다. ‘듣노라’〈수심결19ㄱ〉와 ‘든논’〈수심결19ㄱ〉의 공존, ‘니다가’〈수심결12ㄴ〉·‘뇨리니’〈법어5ㄴ〉에 대한 ‘녀’〈수심결24ㄴ〉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 ‘믌결’〈수심결30ㄱ〉에 대한 ‘믓겨리’〈수심결24ㄴ〉처럼 사이시옷 앞에서 ‘ㄹ’이 탈락된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가 모두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런 것은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한편 이들 문헌에는 ‘ㅈ’ 구개음화로 해석될 수 있는 예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는 ‘몬져’〈24ㄴ,29ㄱ〉에 대한 ‘몬저’〈10ㄱㄴ,25ㄱ,30ㄴ,35ㄱㄴ,37ㄱㄴ〉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는 ‘이제’〈6ㄱ〉에 대한 ‘이졔’〈6ㄴ〉 등이 보인다. 이 중 『목우자수심결언해』에는 ‘몬저’가 13회나 출현한 데 반해 ‘몬져’는 2회밖에 출현하지 않아 ‘몬저’를 단순한 오기로 처리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후자 ‘이졔’를 ‘이제’의 과잉교정 표기로 본다면 ‘ㅈ’ 구개음화에 대한 역표기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몬져’라는 단어에서 ‘ㅈ’구개음화가 시작되었는지, 또 왜 이 단어에서만 혼기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주002)
안대현(2007)에서는 이들 문헌에 나타나는 예를 가지고 이 시기에 이미 ‘ㅈ’구개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 문헌에 보이는 제한된 예를 가지고 15세기에 ‘ㅈ’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이와 같은 점은 이현희 외(2007: 36~37)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ㆍ’의 비음운화 현상도 보인다. 『사법어언해』에서 ‘사’〈5ㄱ〉이 ‘사름’[人]〈5ㄴ〉으로 표기된 예는 비어두 위치에서 ‘ㆍ〉ㅡ’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져’[將·持]〈수심결11ㄱ〉, ‘져셔’〈수심결35ㄴ〉와 같이 어간의 제1음절에서 ‘ㅏ’를 가지고 있던 단어(가지다)가 ‘ㆍ’로 표기된 것은 ‘ㅏ〉ㆍ’로의 변화를 보여 일반적 변화 유형 ‘ㆍ〉ㅏ’와는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자인 신미(信眉)의 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색다르긴 하지만 어두 위치뿐 아니라 비어두 위치에서의 ‘ㆍ’의 변화와 관련 있는 사실이라 지적해둔다.
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예들도 여럿 발견된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보, 보믈’〈13ㄴ〉 등처럼 같이 형태소 경계에서 모음조화에 맞거나 맞지 않은 예가 정음 초기문헌에 비해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증가했다. ‘부텨’〈수심결12ㄴ〉, ‘더라’[←덜-+아]〈수심결24ㄴ〉, ‘어료’〈수심결2ㄴ〉 등은 음성모음 어간이 양성모음의 어미나 조사를 취한 예로, 같은 문헌에서 모음조화에 맞는 ‘부텨를’〈수심결2ㄴ〉, ‘더러’〈수심결24ㄴ〉, ‘어드리니’〈수심결3ㄱ, 25ㄱ〉 등과 대조적이다.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는 ‘오’ 모음동화 현상이 발견된다. ‘알포로’〈6ㄱ〉, ‘니로모로 브터’〈5ㄱ〉가 그것인데, 이들은 보통 ‘알로’〈석상3:19ㄴ〉, ‘니로로〈원각,하3-1:20ㄴ〉 브터’와 같이 표기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부사격 조사 ‘로/으로’가 제2음절 ‘로’의 원순모음 ‘ㅗ’의 영향으로 제1음절 ‘/으’가 ‘오’로 역행동화되어 ‘오로’로 표기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수의적인 것으로 15세기의 문헌에는 보이기는 하지만 드문 편에 속한다. ‘밧고로’〈석상24:2ㄱ〉, ‘녀고로’〈월석8:93ㄱ〉 등.
지금까지 살펴본 표기법 및 음운 현상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본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의 중간본은 앞의 원간본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우선 『목우자수심결언해』과 『사법어언해』의 경우, 봉서사판은 간경도감판의 복각본이므로 내용이나 체재에 있어 원간본인 간경도감판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봉서사판 『목우자수심결언해』는 ‘드라가며’〈2ㄴ〉[cf. 도라가며], ‘브틀디니’〈3ㄴ〉[cf. 브툴디니]처럼 간경도감판과 다른 예가 보이는데 이는 복각 과정에서 오각(탈획)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법어언해』의 경우, 『목우자수심결언해』에 비해 중간본이 많은 편이라 좀 더 다양한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 봉서사판의 경우 탈자로 보이는 예가 몇 개 있으며, ‘彌勒’의 ‘彌’가 약자인 ‘弥勒’〈5ㄴ〉로 나타난다는 차이를 보인다. 고운사판, 심원사판, 원적사판은 원간본과 표기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세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원간본의 ‘디녀’〈2ㄱ〉, ‘힐후미’〈2ㄴ〉, ‘잇거시니’〈2ㄴ〉로 쓰인 형태가 이 책들에서는 ‘디녀’〈1ㄱ〉, ‘힐호미’〈2ㄴ〉, ‘잇커시니’〈2ㄴ〉로 나타난다.
일부 예에서는 한자음 표기에서도 동국정운식을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표기 형태는 송광사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송광사판은 체재나 표기에서 고운사판과 비슷하지만 한자음 표기가 동국정운음을 지양하고 현실한자음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구개음화를 반영한 표기도 ‘오직’〈3ㄱ〉, ‘오딕’〈13ㄴ〉, ‘中’〈7ㄱ〉, ‘中’〈15ㄱ〉, ‘兄셩弟뎨’〈15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간본의 ‘ㅸ’은 ‘수비’〈2ㄱ〉, ‘어즈러비’〈10ㄱ〉처럼 ‘ㅂ’으로 되어 있으며 ‘ᅙ’, ‘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ㅿ’과 관련해서는 간경도감판이나 다른 중간본에서는 ‘ㅅ’으로 쓰인 것이 이 책에서는 ‘ㅿ’으로 쓰였다는 것이 특이하다.

4. 형태 및 통사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형태적 특성은 크게 단어 형성과 굴절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단어 형성과 관련해서는 ‘ㅎ’과 ‘나-’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 ‘나-’가 있다. 15세기에 ‘나-’는 “날카롭다”와 “날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날카롭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往往애 根機 난 사미 한 히믈 虛費 아니야’〈24ㄴ〉에서 ‘나-’는 ‘根機’의 속성을 형용하고 있어 “예리하다”, “뛰어나다” 정도의 문맥 의미를 갖는다. ‘나-’는 비슷한 유형의 합성어인 ‘맛들다’, ‘맛보다’와는 달리 항상 형용사로만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굴절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가치’[鵲]의 속격형 ‘가’, 보조사 ‘곳’, 동사 ‘니-’ 등이 있다. ‘가치’의 속격형 ‘가’는 유정 체언인 ‘가치’ 뒤에 속격 조사 ‘-’가 결합하면서 어간의 말음 ‘이’가 탈락된 어형이다. ‘네  가마괴 울며 가 우룸 소릴 듣다’〈수심결19ㄱ〉. 마찬가지로 ‘아비’, ‘곳고리’, ‘가야미’, ‘져비’, ‘고기’, ‘아기’, ‘가히’ 뒤에 관형격 조사 ‘-/의’가 결합하면 어간의 말음 ‘이’가 탈락된다. ‘아 지븨’〈월석13:11ㄱ〉, ‘어믜 누니’〈월석11:96ㄱ〉, ‘곳고 놀애’〈두초8:46ㄴ〉, ‘져븨 삿기’〈두초10:7ㄴ〉, ‘가 머리’〈월석4:7ㄴ〉 등. 15~16세기 자료에서 ‘가’의 예는 드물기는 하지만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보다 앞선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기록할 만하다.
보조사 ‘-곳/옷’의 결합 양상도 특이하다. ‘곳’이 모음으로 끝난 용언의 활용형 뒤에서 ‘ㄱ’ 약화 현상을 겪어 ‘옷’으로 실현된 예가 보인다. ‘이제 다가 닷디옷 아니면 萬劫을 어긔리니’〈수심결44ㄴ〉. 15세기에는 곡용의 경우 모음 또는 ‘ㄹ’로 끝나는 환경 뒤에서, 활용의 경우 반모음 ‘j’ 또는 ‘ㄹ’로 끝나는 환경 뒤에서 ‘ㄱ’ 약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예는 예외가 되는 셈이다.
동사 ‘니-’의 경우 자음 어미와 결합할 때는 ‘니-’로, 모음 어미와 결합할 때는 ‘닐ㅇ-’으로 어간형의 교체를 보인다. 그런데 ‘-거-’가 통합된 어미와 결합하는 경우엔 ‘닐어늘’이 아닌 ‘니거늘’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선어말 어미 ‘-거/어/나-’가 자동사 뒤에서는 ‘-거-’로, 타동사 뒤에서는 ‘-어-’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 문헌에는 ‘니-’의 일반적 교체가 나타나는 예와 그렇지 않은 예가 모두 발견된다. ‘漸漸 닷논 들 알 마 초 닐어’〈수심결24ㄱ〉, ‘믄득 니 實로 니건댄 …’〈수심결10ㄱ〉.
형태적 특성과 관련하여 ‘니르-’[至], ‘니를-’[至]의 활용도 주목된다. 이들은 상보적 분포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쌍형어의 어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일한 환경에서 두 가지 어형이 다 나타난다. 그러한 점은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도 마찬가지다. ‘妄念이 믄득 니로매 다 좃디 아니야 덜오  더라’〈24ㄴ〉, ‘아브터 나죄 니르며 十二時中에 시혹 드르며’〈18ㄴ〉, ‘漸漸 熏修야 와 今生애 니르러 듣고 곧 아라’〈10ㄱ〉, ‘이제 마 보 잇  니를란 손 뷔워 도라오미 몯리니’〈45ㄴ〉.
통사적 특성과 관련해서는 추측 표현의 ‘다’, ‘V홈 -’와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중 ‘다’는 ‘如’ 또는 ‘似’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는 추측 표현이다. 현대국어의 ‘듯하-’ 구문과 마찬가지로 ‘-’이 어미로 사용되는 경우와 ‘-’가 일종의 보조용언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확인된다. ‘마치 가얍고 편안 리니’[恰似輕安리니]〈수심결37ㄴ〉, ‘머리옛 블 救 야 표 닛디 말라’[如救頭然야 不忘照顧라]〈수심결43ㄴ〉. 그 외에 ‘如’가 ‘V홈 -’로 언해된 예도 보인다. ‘돌히 플 지즈룸 티 야  닷고 삼니’[如石壓草야 以爲修心니]〈수심결25ㄴ〉.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의 예로는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 다 如來ㅅ 圓覺妙心에 나니라 시니 이 아롤 디니라’[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 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시니 是知]〈3ㄱ〉, ‘이 法 正히 랑야 어돈 功德 디 몯다 샴 니 이런  아로리라’[正思此法야 所獲功德니 是知]〈44ㄴ〉가 있다. 이 중 ‘이 아롤 디니라’는 한문 원문 ‘是知’에 대응되며 ‘이#알-+-오-+-ㄹ#+이-+-니라’로 분석되는데 ‘-ㄹ#+이-+-니라’ 부분이 당위의 의미를 나타낸다. ‘아로리라’ 역시 ‘是知’에 대한 언해로, ‘알-+-오-+-ㄹ#이+-이-+라’로 분석된다. 표면상으로는 선어말 어미 ‘-리-’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의 명사구 보문 구성인 셈이다. 이러한 당위의 의미는 명령형 어미를 통해 실현되기도 한다. ‘명령’의 언표내적 효력이 당위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반기 알라 마 無量佛所애 한 善根을 시므니라 시며’[當知 己於無量無邊所애 種諸善根이라 시며]〈수심결45ㄱㄴ〉.
한문 원문 번역과 관련해서는 ‘是’, ‘此’, 부정 부사 ‘아니’의 쓰임의 주목된다. 한문의 ‘是’는 원래 지시어로 사용되었으나 白話文에서 점차 계사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是’에서는 지시어 및 계사의 기능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다가 부텨 求코져 홀 딘댄 부톄 곧 이 미니’[若欲求佛인댄 佛卽是心이니]〈2ㄴ〉, ‘모매 여희디 아니니 色身 이 거즛 거시라’[不離身中니 色身은 是假ㅣ라], 〈2ㄴ〉에서는 두 가지 기능이 모두 나타나 언해문에서도 지시어 ‘이’와 계사 ‘-이-’로 이중 번역된 듯하다.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 다 如來ㅅ 圓覺妙心에 나니라 시니 이 아롤 디니라[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 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시니 是知]’〈수심결3ㄱ〉에서는 지시어로만 사용되어 언해문에서도 ‘이’로만 번역되었다.
반면 ‘此’의 경우는 지시어로만 사용되었으며 언해문에서도 지시어 ‘이’로만 번역되었다. ‘이  여희오 밧긔 부텨 외요미 업순 디라’[離此心外예 無佛可成이라]〈수심결3ㄱ〉. 그런데 ‘是’와 ‘此’가 같이 나타날 경우는 이를 모두 언해에 반영하거나 둘 중 하나만 반영한 것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하나는 지시어로, 하나는 서술격조사로 번역하였다. ‘達摩門下애 올마 서르 傳 거시 이 이 禪이니’[達摩門下애 轉展相傳者ㅣ 是此禪也ㅣ니]〈수심결2ㄱ〉, ‘이 觀音ㅅ 理예 드르샨 門이시니’[此ㅣ 是觀音ㅅ 入理之門이시니]〈수심결19ㄴ〉.
부정 부사 ‘아니’의 위치가 특이한 경우도 있다. ‘이런  當야 아니 이 虛空가’[當伊麽時야 莫是虛空麽아]〈19ㄴ〉는 “이런 때를 만나니 이것이 虛空이 아닌가” 정도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莫是虛空麽’의 ‘莫’은 ‘是虛空’을 부정하는 의미로 쓰였다. 한문(백화문) 원문을 축자역하면서 ‘아니 이 虛空가’로 언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녯 聖人ㅅ 道애 드르샨 因緣이 明白며 젹고 쉬워 힘 져고매 막디 아니니’[古聖入道因緣이 明白簡易야 不妨省力니]〈수심결7ㄴ〉에서 ‘不妨省力’의 언해 양상도 특이하다. 이는 “옛 성인이 道에 들어가신 因緣이 明白하고 簡易하여 노력이 적은 것에 막히지 아니하니(노력이 적어도 무방하니)” 정도로 해석된다. ‘省力’은 술목 구성으로 ‘힘 더롬(노력을 덞)’과 같이 목적어-서술어 구성으로 번역되어야 하지만 ‘힘 져곰’처럼 주술 구성으로 번역됐다. 이때 ‘不妨’은 현대국어의 ‘無妨’과 같은 뜻인데 ‘막디 아니-’로 언해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와 『사법어언해』에 공통적으로 많이 쓰인 구문도 있다. ‘-오미 몯-’와 같은 형식의 구문으로, 이는 이지영(2008: 171-177)에서 “합당함 혹은 마땅함에 미치지 못함”, “불급(不及)”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논의된 바 있다. 이 구문은 『목우자수심결언해』에 6회, 『사법어언해』에 3회 보인다. ‘對答호 네 미친 마 가야 發야 邪正分揀 아니호미 몯리니 이 어린 갓 사미라’〈수심결9ㄴ〉, ‘이제 마 보 잇  니를란 손 뷔워 도라오미 몯리니  번 사 모 일흐면 萬劫에 다시 도라오미 어려우리니 請 모로매 삼갈디니라’〈수심결45ㄴ〉, ‘디 몯  반기 늘근 쥐 곽 글굼티 디언 옮기힐후미 몯리라’〈법어2ㄴ〉, ‘낫 세 와 밤 세  뎌와 볼디언뎡 일 업슨 匣 소배 안조미 몯리며 보단 우희 주거 안조 구틔디 마롤디니’〈법어5ㄴ〉, ‘大凡 디 行脚홀뎬 모로매 이 道로 져 뇨리니 現成 供養을 먹고 쇽졀업시 날 디내요미 몯리라’〈법어4ㄴ~5ㄱ〉.
‘-오미 몯-’ 구문에 대응되는 한자는 대개 ‘不, 未, 不可, 不得’이며 이는 ‘몯’의 의미와 연결된다. 또한 ‘몯-’ 뒤에는 항상 ‘-ㄹ(관형사형어미)#이(의존명사)+-이-(계사)’로 분석되는 ‘리’가 결합된다. 이 구문은 16세기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데, 동일 원문을 달리 언해한 예를 보면 해당 부분이 ‘-디 몯-’와 같은 장형 부정문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傲慢 어루 길오미 몯리며 私慾 어루 노노하 호미 몯리며 든 어루 호미 몯리며 라온 이 어루 장호미 몯리라’〈내훈1:7ㄴ〉, ‘오만홈을 可히 길오디 못 거시며 욕심을 可히 방죵히 못 거시며 을 可히 게 못 거시며 즐기믈 可히 극히 못 거시니라’〈어내1:6ㄱ〉.

5. 어휘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어휘는 크게 특이하다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 다른 문헌에서도 볼 수 있는 어휘인데 이 문헌에 쓰인 용법이 다소 특이하거나, 다양한 의미 가운데 일부 의미만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자어 중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行’, ‘一切’, ‘種種’, ‘後’, ‘비-’, ‘애’, ‘셜웝’, ‘불웝’, ‘태우’, ‘自己’ 등이 있다.
‘行’은 동사적 용법을 보일 때는 평성을, 명사적 용법을 보일 때는 거성의 성조를 보이는데 이 문헌에서도 그와 같은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 중에 명사적 용법의 경우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 거성이 아닌 상성으로 실현되는 예조차 이 문헌에서는 거성으로만 실현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行’이 명사적 용법을 보이는 예로는 ‘苦行’〈RHH, 3ㄱ〉, ‘功行이’〈LHH, 26ㄱ,44ㄴ〉, ‘萬行’〈HHH, 25ㄱ〉, ‘行’〈H, 29ㄴ〉, ‘行이’〈HH, 24ㄴ,44ㄴ〉가 있으며, 동사적 용법을 보이는 예로는 ‘修行이’〈LLH, 24ㄴ〉, ‘修行호’〈LLHL, 29ㄴ〉, ‘行이라’〈LLH, 35ㄱ〉, ‘行’〈LH, 36ㄱ〉, ‘行커나’〈LLH, 30ㄱ〉, ‘行호미나’〈LHLH, 30ㄴ,38ㄱ〉, ‘行호미라’〈LHLH, 29ㄴ,35ㄱ〉, ‘行논’〈LHL, 36ㄱ〉, ‘行리오’〈LLHH, 35ㄴ〉가 있다.
‘一切’와 ‘種種’은 15세기에 명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체로 후행 명사구를 수식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특성은 이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一切’과 ‘種種’의 명사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一切ㅅ 소리와’〈44ㄱ〉, ‘種種엣 일며 뇨미’〈18ㄴ〉, ‘種種앳 相皃와 種種앳 일훔 지허’〈20ㄱ〉가 있으며, 관형사적 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一切 소리와 一切 分別’〈19ㄴ〉, ‘一切 衆生’〈44ㄱ〉,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3ㄱ〉, ‘種種 苦 受호미’〈43ㄱ〉가 있다.
또한 15세기의 ‘後’는 공간적 개념으로의 ‘뒤’라는 의미를 가지지 않고 시간적 개념으로만 ‘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와 같은 점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實로 니건댄 이  몬져 알오 後에 닷논 根機니’〈10ㄱ〉, ‘그럴 圭峯이 몬저 알오 後에 낫논 들 기피 기샤’〈10ㄴ〉, ‘마 이 理 알면 다시 階級 업도소니 엇뎨 後에 닷고 브터 漸漸 熏修야 漸漸 일리오’〈23ㄴ-24ㄱ〉, ‘그러면 엇뎨  번 아로로 곧 後에 닷고 러 리리오〈24ㄴ〉’ 등에서 그러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자어에 기원을 두는 어휘들이 한글로 적힌 예도 있다. ‘ 비야[亦乃謗讟야]’〈42ㄴ〉, ‘노 앳 想 지[作懸崖之想야]’〈11ㄱ〉에서의 ‘비-’, ‘애’가 그것이다. 그와 같은 쓰임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셜웝[說法]’〈번박.상:75ㄱ〉, ‘불웝[佛法]’〈번박.상:74ㄴ〉, ‘태우[大夫]’〈소언4:39ㄴ〉 등.
‘自己’의 경우 15세기에 “本人”, “자기의 몸”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이 문헌에 보이는 ‘自己’는 모두 “本人”의 의미로 쓰였다. ‘四大로 몸 삼고 妄想으로  사마 自性이 이 眞實ㅅ 法身인  아디 몯며 自己 靈知ㅣ 이 眞實ㅅ 부톈  아디 몯야’〈수심결12ㄴ〉, ‘다시 보믈 求홀  업거니 엇뎨 몯 보논 디 이시리오 自己 靈知도  이러니 마 이 내 인댄 엇뎨 다시 아로 求며…’〈13ㄴ〉, ‘丈夫 디 자 無上 菩提 求린 이 리고 어딀 리오 모 文字 잡디 말오 바 모로매 들 아라 一一히 自己예 나가 本宗애 마면〈42ㄴ〉’.
고유어 어휘 중에는 ‘모’, ‘-’, ‘맛들-’, ‘맛보-’, ‘날혹기’ 등이 주목된다. ‘모’의 경우는 15세기에 동일 음상과 성조를 가지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든”의 의미를 가지는 관형사만 보인다(“모든”의 의미를 가지는 관형사, “모인”의 의미를 가지는 ‘몯-’의 활용형, “모인 사람(것)”의 의미를 가지는 ‘몯-’의 동명사형). ‘제 性이 이 眞實ㅅ 法인  아디 몯야 法을 求코져 호 머리 모 聖人 밀오 부텨를 求코져 호’〈2ㄴ〉, ‘過去엣 諸 如來도 오직 이  긴 사미시며 現在옛 모 賢聖도  이  닷신 사미시며 未來옛 學 닷 사도 반기 이런 法을 브툴 디니’〈3ㄱㄴ〉, ‘願 모 道 닷 사미 이 마 자 맛보아 다시 孤疑야 제 믈루믈 내디 마롤 디어다’〈42ㄱㄴ〉.
“製(제)”의 의미를 갖는 ‘-’은 15세기의 ‘-’과 16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의 혼효형이다. ‘마 無量劫中에 한 聖人을 셤기와 한 善根 심거 般若 正 因을 기피   上根性이니’〈45ㄱ〉의 예가 보인다. ‘-’은 대개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나 보이는 것인데 15세기의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 발견되는 것이어서 다소 특이하다.
“好(호)”의 의미를 가지는 ‘맛들-’은 [[맛+-이]+들-]과 같은 주어-서술어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이 문헌에는 ‘맛들-’이 타동사적 용법을 가지는 예가 존재한다. ‘다가 殊勝 고 信티 아니코 사오나 외요 맛드러 어려 너교 내야’〈45ㄴ〉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맛들-’은 ‘사오나 외요’을 목적어로 취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맛보-’의 경우 [[맛+-]+보-]와 같이 목적어-서술어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자동사적 용법을 갖지 않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疑心논 디 믄득 그처 丈夫 들 내야 眞實 正 보와 아로 發야 親히 그 마 맛보아 제 제 즐기논 해 니르면’〈21ㄱ〉에서 ‘그 마’을 목적어로 취해 타동사적 용법을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느리고 느직하게”의 의미를 갖는 어휘 ‘날혹기’도 있다. ‘시혹  디위 컨댄 不覺애 한 디흐리로소니 노하 날혹기 야 아 殃孽 다시 受야려’〈43ㄱ〉. 이는 “조심조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날혹-’에서 온 부사인데 주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두시언해(杜詩諺解)』 등의 문헌에 나타난다. ‘날혹기’는 “천천히 한다”는 의미의 ‘날회-’(‘날호-’로도 나타남)와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는 지금까지 살핀 것 외에 ‘가야’, ‘구여’, ‘외야’, ‘도’, ‘비르서’, ‘버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의 어휘화한 부사도 나타난다. 이 중 ‘가야’, ‘구여’, ‘외야’, ‘도’, ‘비르서’, ‘버거’ 등은 용언 어간에 어미가 결합한 형태가 어휘화한 것이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은 명사에 조사가 결합한 형태가 어휘화한 것이다. ‘이 모 今生 向야 濟度티 몯면 가야 어느 生 기드려 이 모 濟度리오’〈44ㄴ〉, ‘내 이제 다가 믈루믈 내어니 시혹 게을우믈 내야 恒常애 後 라다가 … 비록  句ㅅ 佛法을 드러 信解受持야 셜우믈 免코져  엇뎨 외야 得료’〈43ㄴ〉, ‘엇뎨 智慧왼 사미 보 잇  알오 도 求티 아니야 艱難호 기리 怨歎리오’〈45ㄴ〉, ‘다가 昏沉이 더욱 하거든 버거 慧門으로 法 야 …’〈30ㄴ〉, ‘…  닷가 비르서 일 업슨 사미 외리니 다가 이러면 眞實로 이로 닐오 定慧 平等히 디녀 佛性 기 본 사미리라’〈30ㄴ-31ㄱ〉, ‘往往애 根機 난 사미 한 히믈 虛費 아니야 …’〈24ㄴ〉
『사법어언해』는 매우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어휘들이 많다. 이 문헌에만 보이는 것도 있고, 다른 문헌에도 보이지만 예가 매우 드문 것도 있다. 먼저 한자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보단(蒲團)’, ‘공부(工夫)’ 등이다. ‘보단(蒲團)’은 여름에 부들의 잎을 채취해 말렸다가 틀어 만든, 스님이 앉는 방석이다. ‘蒲團’의 음역어인데 현대국어로 오면서는 ‘포단’으로 굳어졌다. ‘ 가짓 道 일울 사미…  보단애 올아 곧 오다가’[有一般辨道之人이…才上蒲團야 便打瞌睡다가]〈5ㄱ〉. 18세기 자료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에는 한글로 ‘포단’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안희 포단을 둣거이 라 아 올녀 안치고’〈을병3:27〉.
‘공부(工夫)’는 총 7회 등장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것과 의미 차이를 보인다. 불가(佛家)에서의 ‘공부’는 대개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 일, 참선(參禪)에 진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여러 모로 생각한다.”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것은 “정신의 수양과 의지의 단련을 위하여 힘쓰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상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의미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고유어 중에서는 ‘다다’, ‘너운너우니’, ‘올’, ‘옮기힐호-’, ‘재’, ‘노구’, ‘쟈’, ‘ㅎ’, ‘’, ‘븨-’, ‘나믈리’ 등이 주목된다. 이 중 ‘다다’, ‘너운너우니’, ‘올’, ‘옮기힐호-’는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만 보이는 것들이다. 먼저 ‘다다’은 “다만”[單]의 의미를 지니는 어휘이다. 15세기엔 “다만”의 의미를 가진 어휘로는 ‘다’이 두루 쓰였고 간혹 ‘다믄’이나 ‘다’도 쓰였다. ‘다’이 중복된 형태의 ‘다다’은 이 문헌에만 보인다. ‘오직 다다 無ㆆ字 드러 十二時中 四威儀內예 모로매 야’〈법어2ㄱ〉. ‘내 다  아 甚히 거니’〈월석22:28ㄱ〉. ‘王이 다 돈 나로 供養대’〈석상24:39ㄴ〉. ‘이 高麗ㅅ 말소믄 다믄 高麗ㅅ 해만  거시오’〈번노.상:5〉.
‘너운너우니’는 “너울너울, 유유히”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관련 어형으로 『남명집(南明集)』에 ‘너운너운’, 『두시언해(杜詩諺解)』에 ‘너운너운’과 ‘너운너운히’가 있다. ‘보단 우희 주거 안조 구틔디 마롤디니 모로매 너운너우니 뇨리니’[又不可執在蒲團上死坐ㅣ니 須要活弄호리니]〈법어5ㄴ〉. ‘소내   갓신 잡고 너운너운 오 가시거늘’〈남명.상:52ㄱ〉. ‘너운너운 오 구 氣運이 둗겁고’〈두시9:37ㄴ〉, ‘너운너운히 새 니 길로 드러가 업드롤 厄 거 免호리라’〈두시19:30ㄱ〉.
‘올’는 “올가미”를 의미하는 희귀어이다. ‘모 부텨와 祖師와의 사게 믜 고 올 자보리니’〈2ㄴ〉. 한글학회 사전에서는 ‘올’를 ‘올가미’로 풀이하였으나 다른 고어사전류에서는 합성어 ‘올잡-’으로 파악하여 “옭아잡다”로 풀이하기도 했다. ‘올’는 한문 “要捉敗佛祖의 得人憎處호리니”의 ‘捉敗’에 대한 번역 ‘올 잡-’의 일부로서, 신미(信眉)가 언해한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1460년경)에서는 이 구절을 ‘올긔 잡-’으로 번역하였다. ‘ 난 사 바 드위텨 趙州의 올긔 자바 내 마 도로 가져 오라’〈몽법12ㄱ〉. 이를 고려할 때 ‘올’는 ‘올잡-’의 일부가 아닌, “올가미”를 뜻하는 독립된 어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옮기힐호-’는 “함부로 옮기다”의 뜻을 지닌 어휘이다. ‘디 몯  반기 늘근 쥐 곽 글굼티 디언뎡 옮기힐호미 몯리라’[未得透徹時옌 當如老鼠ㅣ 咬棺材相似ㅣ언 不可改移니라]〈법어2ㄴ〉. 여기에서는 ‘不可改移’에서 ‘改移’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다. ‘옮기힐호-’는 ‘옮기-’와 ‘힐호-’가 결합한 어휘인데 ‘힐호-’의 실사적 의미가 약해 합성어가 아닌 파생어로 볼 가능성도 있다. ‘힐호-’는 단독으로 쓰인 예가 없고, ‘누위힐호-’〈두시19:25ㄱ〉, ‘두위힐호-’〈두시25:10ㄱ〉, ‘입힐호-’〈정속13ㄱ〉와 같이 합성어의 후행 어근으로 쓰인 예만 발견된다. 그에 반해 ‘힐후-’는 “힘들이다”, “다투다”의 의미를 지니고 독립적으로 쓰일 뿐 아니라, 합성어의 후행 어근으로 쓰인 예도 ‘힐호-’에 비해 훨씬 많다. ‘難은 힐훌 씨라’〈법화1:32〉, ‘世間과 힐후디 아니디 아니 씨라’〈월석7:5〉, ‘가도힐후-’〈두시14:2〉, ‘갑힐후-’〈정속26〉, ‘고티힐후-’〈번소10:25〉, ‘두르힐후-’〈능엄3:67〉, ‘밀힐후-’[推激]〈두초16:2〉, ‘입힐후-’〈노번.상:65〉 등. 그와 같은 합성어 중에 일부는 ‘힐호-’형과 ‘힐후-’형이 모두 보이는 것도 있다. ‘두위힐호-’〈두시25:10ㄱ〉, ‘드위힐후다’〈능엄7:82〉 등. ‘옮기힐호-’의 경우도 ‘옮기-’ 뒤에 ‘힐후-’가 결합된 ‘옴기힐후-’형이 16세기의 『소학언해(小學諺解)』에 나타난다. ‘옷과 니블와 삳과 돗과 벼개와 几 옴기힐후디 아니며[衣衾簞席枕几 不傳며]’〈소언2:6ㄱ〉.
‘재’는 “가장”, “극도로”의 의미를 가지는데, 15세기에 빈번하게 쓰였던 ‘’과 의미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15세기에는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와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만 보인다. ‘昏沈과 散亂애 재 힘 더야 장 며 장 다면 더욱 더욱 새외오’〈법어8ㄴ〉, ‘이 淸淨 空寂 미 이 三世 諸佛ㅅ 재 조  미시며’〈수심결20ㄱ〉, ‘다가 妄念이 재 盛커든 몬저 定門으로 理예 마초 흐로 자바’〈수심결30ㄴ〉, ‘極 재 극’〈훈몽-초.하:15〉.
‘노구’와 ‘쟈’는 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 ‘… 곧 淸凉호 아로미  노굿 더운 므레  쟛 믈  브 니라’[便覺淸凉호미 如一鍋湯애 才下一杓冷水相似ㅣ니라]〈5ㄴ~6ㄱ〉. 이들은 각각 ‘鍋’, ‘杓’에 대한 번역어로서 여기에서는 단위성 의존명사로 쓰였다. ‘노구’는 이후에 『훈몽자회(訓蒙字會)』와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 『왜어유해(倭語類解)』 등의 문헌에서 ‘노고’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鏊 노고 오’〈훈몽초,중:6〉〈왜어.하:14〉, ‘우리 손조 바 지 머그면 가마와 노곳 자리와 사발와 뎝시왜 다 잇녀’〈노번.상:68〉.
한자 ‘杓’에 대응하는 ‘쟈’는 16세기의 『훈몽자회(訓蒙字會)』(1527)를 비롯하여 근대국어 문헌에서 몇 예를 찾을 수 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의 ‘杓 나므쥭 쟉’〈훈몽.중:9ㄴ〉을 제외하면 다른 문헌에서는 모두 ‘쟈’로 나타난다. ‘漏杓 섯쟈’〈역어.하:13ㄴ〉, ‘처음브터 나죵지 시러곰  쟈 흐린 믈을 디 못고 처음 달힐 ’〈자초17ㄴ〉. ‘쟈’의 한자 대응어 ‘杓’은 『역어유해(譯語類解)』(1690)에서 현대국어의 ‘주걱’에 해당하는 ‘주게’로 언해되기도 한다. ‘榪杓 나모쥬게. 銅杓 놋쥬게’〈역어.하:13ㄴ〉. 이들 용례를 종합할 때 ‘쟈’는 “주걱, 국자, 그릇” 정도에 해당하는 단위명사로 볼 수 있다. 한편 ‘杓’ 자는 중세국어에는 [쟉]이었는데현재음은 [표]가 되었다. 변화의 원인이나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국한회어』(1895)와 『경향신문』(1906) 등을 보면 19세기 말 이후 ‘杓[표]’로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원(根源)”의 의미를 갖는 ‘ㅎ’는 15세기에 드물게 나타나는 어휘인데 이 문헌에 보인다. ‘어린 구루미 다 흐르면 萬里靑天에 보옛 리  해 리니’〈법어9ㄱ〉, ‘모 會中을 爲샤 기픈  펴 뵈신대’[宣示深奧신대]〈능엄1:29ㄴ〉, ‘堂 오리 次第 어둠 야 반기 그 해 다리라’〈법화1:16ㄴ〉, ‘源 믈불휘 원’〈신유,하50ㄱ〉, ‘奧 기픈 오’〈신유,하38ㄱ〉. “여아(女兒)”의 의미를 갖는 ‘’과는 기저형의 종성 ‘ㅎ(/h/)’의 유무로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한 부분만 음상의 차이를 보이는 ‘ㅎ’과 ‘’은 최소대립쌍을 이루는 최소대립어라 할 수 있다.
‘’의 예도 흥미롭다. ‘두 주머귈 쥐며  니르와다’[捍双拳며 竪起脊梁야], 〈5ㄴ〉. ‘등’는 ‘+’의 합성어로, “등마루” 즉 “척추(脊椎)”를 의미한다. ‘’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통합하면 어간의 끝음절 모음 ‘ㆍ’가 탈락 ‘’형으로 바뀌지만 그 명사 뒤에 휴지나 공동격 ‘와’, 그리고 자음 조사가 오면 ‘’형을 유지하는 특수한 곡용을 한다.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 『구급방언해(救急方諺解)』,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일부 문헌에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로셔 各 寸 百 壯 ’[去脊各一寸灸之百壯]〈구방.상:36〉, ‘와 보콰 셔와 긷괘 기 소리 나’〈법화2:124ㄴ〉, ‘몬져  둘챗  아랫 오목 로’〈구간3:48ㄱ〉, ‘脊  쳑’〈자회.상:14ㄱ〉.
‘븨-’는 현대국어의 ‘비비-’[擦]에 해당하는 어휘이다. ‘百年을 녯 죠 븨니 어느 나래 머리 내와료’〈법어6ㄴ〉. 15세기에 ‘비븨-’는 비교적 빈번하게 쓰였지만 ‘븨-’와 ‘비-’는 드물게 보인다. ‘븨-’는 『사법어언해』를 비롯하여 『능엄경언해』와 『구급방언해』, 『구급간이방언해』에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둘찻 리 實로  體어늘 눈 비븨유믈 因야 달이 외니’〈능엄2:27ㄴ〉, ‘모 智慧 잇닌 븨논 根源이 이 얼굴와 얼굴 아니왜며 봄과 봄 아뇸과 여희요 닐오미 몯리라’〈능엄2:83ㄱ〉, ‘지네와 蝎의 헐인  胡椒와 마와 生薑과 다 라 아 븨라’〈구방.하:80ㄴ〉, ‘마리어나 이어나 라  븨요미 다 됴니라’〈구간6:63ㄱ〉, ‘모롭 불휘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라 만 케 비야 곳굼긔 부러 들에 라’〈구간1:41ㄴ〉. 그 중 『능엄경언해』에서는 ‘비븨-’와 ‘븨-’가 모두 발견되고 『구급간이방언해』에서는 ‘비-’와 ‘븨-’가 모두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나믈릴’이다. 『사법어언해』에 보이는 ‘나믈릴’은 예가 드물 뿐 아니라 분석하기도 쉽지 않다. ‘해 사미 이 이셔 나믈릴 아디 몯야’[多有人이 在這裏야 不識進退야 解免不下야]〈5ㄴ〉에서 ‘나믈릴’은 구결문 “不識進退야”에서 ‘進退’에 대한 번역으로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나믈리’라는 명사가 있다면 뒤에 목적격 조사 ‘ㄹ’이 결합된 것으로 보면 되지만, 15세기 다른 문헌에서 ‘나믈리’라는 명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오히려 합성동사인 ‘나믈리-’와 합성명사인 ‘나믈림’은 발견된다. ‘阿難아 내 이제 너 爲야 이 두 일로 나믈려 마초아 교리라’〈능엄2:87ㄴ〉, ‘두 이 別業엣 眚 봄과 모 分엣 祥瑞 아니라 法과 가뵤 서르 나토실 니샤 나믈려 마초아 교리라 시니라’〈능엄2:88ㄱ〉, ‘權은 저욼 림쇠니  고대 固執디 아니야 나믈림 야 맛긔 씨오’〈석상13:38ㄱ〉.
따라서 이때의 ‘나믈릴’은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나믈리’를 부사로 보는 것이다. ‘나’와 ‘믈리’를 각각 어간 ‘-+-오(접미사)’, ‘므르-+-이(접미사)’가 결합한 파생부사로 보면 합성부사 ‘나믈리’가 체언 자격으로 목적격조사 ‘ㄹ’을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둘째, 합성동사 ‘나믈리-’ 뒤에 동명사형 어미 ‘-ㄹ’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아디 몯야’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나믈릴’에는 목적격조사가 결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석보상절에서 ‘進退’에 대한 ‘나믈림’과 사법어의 ‘나믈릴’에서 대비되는 동명사 어미 ‘-ㅁ’과 ‘-ㄹ’이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다르지만, 기원적으로는 동일한 기능을 가졌으며, 형태 결합도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후자를 수용한다. 비록 후기 중세국어에서 동명사형 어미 ‘-ㄹ’이 생산적이지 않은 점은 있지만, 그런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크게 문제라 할 것은 아니다. 고립적인 용례이므로 앞으로 더 숙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6. 결론

이 글에서는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과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의 특성을 크게 서지 사항, 표기법 및 음운, 형태 및 통사, 어휘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결론은 앞서 살펴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두 책은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번역하였다는 점과 1467년(세조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합철되어 간행되었기 때문에 판식이나 체제에서 유사할 뿐 아니라 어학적 특성까지도 거의 유사하다. 또한 원간본 『사법어언해』는 간기가 따로 없어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간기를 통해 그 간행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합철되어 간행된 이후 지방의 사찰에서도 간행되었는데, 특히 『사법어언해』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수차례 간행되었다. 『사법어언해』는 경상도 합천 봉서사, 충청도 연산 고운사, 황해도 황주 심원사, 전라도 순천 송광사, 원적사에서 중간본이 간행되었는데 책의 분량이 너무 적어 『목우자수심결언해』,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 『오대진언(五大眞言)』과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표기법 및 음운과 관련해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이 쓰였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ㅸ’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부터 대체로 폐지되었는데 더 후대 자료인 이 문헌에 쓰인 점이 특이하다. 이를 볼 때 이 책의 원고는 1461년 이전에 언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1467년에 간행될 때 부분적으로만 수정되어 간행됨으로써 이전 시기의 표기의 흔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들 문헌에는 고유어 표기에서 합용병서의 예가 정음 창제 초기문헌과 다를 바 없이 발견되지만, 각자병서는 ‘ㅆ’, ‘ㆀ’의 경우에 극소수의 예만 발견된다.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1465)의 고유어 표기에서 일괄 폐지된 각자병서와 ‘ㆆ’의 예가 일부 남아 있는 것도 이 문헌이 그보다는 이른 시기에 언해되었다가 부분 수정되어 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들 문헌에는 ‘ㅈ’구개음화로 볼 수 있는 ‘몬저’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중 『목우자수심결언해』에 보이는 ‘몬저’는 ‘몬져’에 비해 출현 빈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오기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15세기에 유독 ‘몬저’와 같은 예에서만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당시에 ‘ㅈ’구개음화 현상이 존재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이들 문헌에서는 ‘ㆍ’의 비음운화, 모음조화의 혼란, ‘오’ 모음동화와 자음동화 등을 반영한 표기도 발견된다.
형태 및 통사, 어휘와 관련해서는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있는 특성도 있었지만 드물게 보이는 특성도 있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가치’의 관형격형 ‘가’가 발견되고, 보조사 ‘-곳/옷’의 실현 양상이 다른 문헌과 차이를 보인다. 대개 16세기 이후에 보이는 ‘-’[製]이 이 문헌에 보인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 외에 15세기에 드물게 보이는 ‘날혹기’[徐]가 이 문헌에 발견되기도 한다.
통사적 특성과 관련해서는 추측 표현의 ‘다’, ‘V홈 -’와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가 다른 문헌에 비해 자주 보인다. 이때 ‘V호리라’는 계사 구문에 쓰인 것이어서 선어말 어미 ‘-리-’가 아닌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 구성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 한문 번역과 관련해서는 ‘是’, ‘此’가 문맥에 따라 지시어와 계사 둘 중 하나로 번역되기도 하고 둘 다로 번역되기도 했다. 부정 부사 ‘아니’가 한문 원문을 축자역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언해문과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된 경우도 있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과 『사법어언해』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보이는 구문도 있었다. “불급(不及)”의 의미를 지니는 ‘-오미 몯-’와 같은 형식을 포함한 구문이다. 이 구문에서는 ‘몯-’ 뒤에 항상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계사’로 분석되는 ‘리’가 결합되는 특성이 있다. ‘-오미 몯-’ 구문은 후대에 ‘-디 몯-’와 같은 장형 부정문으로 바뀌면서 사라진다.
한편 『사법어언해』에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헌에는 없거나 드물게 보이는 어휘가 여러 개 발견된다. 한자어 중에서는 ‘보단(蒲團)’, ‘공부(工夫)’, 고유어 중에서는 ‘다다’[單], ‘너운너우니’[弄/蹁], ‘올’[陷穽], ‘옮기힐호-’[改移], ‘재’[極], ‘노구’[鍋], ‘에’[連], ‘쟈’[杓], ‘ㅎ[根源]’, ‘’[脊椎], ‘븨-’[擦], ‘나믈릴’[進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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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역주 해제
1) 원간본의 ‘’은 모두 ‘ㅂ’으로 바뀌었다. ‘’의 일반적인 변화는 ‘〉오/우,ㅇ’인데 여기에서는 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한자음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폐지로 현실 한자음 주음으로 바뀌었으나 뚜렷한 표기 준칙이 없었기 때문인 듯 표기가 혼란하다. 일모(日母)//자는 대체로 유모(喩母)/ㅇ/화하였다.
3) ‘ᅙ’ 은 현실 한자음 주음으로 한자음 표기에서 폐지되었고, ‘- ’은 모두 ‘-ㄹ’로 바뀌었다. 다만 사이글자의 예는 남아 있는데 이는 원간본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4) 초성병서 중 각자병서는 한두 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일자형(單一字形)으로 바뀌었다. 합용병서는 그대로 씌었다.
5) 사이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는데 ‘ᅙ’이 쓰인 예도 있다.(無ᅙ字).
6) ‘,’표기는 원간본의 모습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7) 한자어와 고유어에서 ‘ㅁ’중철 표기의 예가 나타난다.
8) 구개음화는 고유어에서는 하나의 예만이 발견되나 한자어는 상당히 두드러진다. 한자어의 구개음화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현실 한자음 초기 문헌인 〈진권〉(1496)과 〈육조〉(1496) 그리고 예산문고본 〈훈몽〉(1527) 등과 비교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런가 하면 ‘ㅈ’을 ‘ㄷ’으로 교정한 hyperurbanism의 예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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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학교 교수)

1. 개요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蒙山和尙六道普說諺解)』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책의 원저자와 원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저자는 원나라 세조(1271~1394) 때의 고승(高僧) 몽산(蒙山) 덕이(德異)이다. 이 스님이 찬술(撰述)한 책의 원래 서명(書名)은 『육도보설(六道普說)』이며, 이를 후대에 간행하면서 책의 제목(내제)을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이라고 하였다. 이 책이 조선 선조 원년(1567) 가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을 학계에서는 관례적으로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은 『몽산화상육도보설』로 되어 있어 한문본이든 언해본이든 책의 제목은 동일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경우에 따라 편의상 한문본과 언해본을 구분·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언해본(우리말 번역본)은 원전에 구결(口訣)을 달고 ‘언해(諺解)’라는 특수한 가공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한문본의 제목 ‘몽산화상육도보설’ 말미에 ‘언해’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고 있다. ‘언해’는 “언문(諺文, 우리나라 고유의 글자 및 우리말이라는 뜻까지 포함함)으로 독자들이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므로, 한문 원전에 한국어와 한국문자 ‘훈민정음’을 이용해 특수한 가공을 한 문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산화상 덕이의 『육도보설(六道普說)』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입장에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 등의 육범(六凡)과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불(佛) 등의 사성(四聖), 곧 육범사성(六凡四聖; 10界)을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범부(凡夫)의 자리를 벗어나 성인(聖人)의 지위에 들어가기를 권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조선 선조 때 지방 사찰에서 독자적으로 간행된 목판본으로서, 현재 2본(本)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수원 용주사 구장본으로 1980년대 이후 동국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91년도에 남권희 교수에 의해 소개된 판본이다.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간기(刊記)가 있는 42장이 낙장(落張)이어서, 한동안 간행연도와 간행지(刊行地)가 ‘미상(未詳)’이었다. 그러다가 간기가 온전히 남아 있는 판본이 남권희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됨으로써 “융경(隆慶) 원년(1567) 전라도(全羅道) 순창(淳昌) 취암사(鷲岩寺)”에서 ‘秋日’[가을]에 간행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이 책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2. 문헌의 서지 사항

이 문헌의 서지(書誌)를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명 :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저자 : 몽산(蒙山)(중국 1230년경~1300년대 초반)
언해자 : 미상(未詳)
서지 : 목판본(木板本)
발행 사항 : 전라도 순창(淳昌) 취암사(鷲岩寺). 융경 원년(隆慶元年)(1567) 정묘 추일(丁卯秋日) 간(刊)
형태 : 1권(卷)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2×17.5㎝,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2~15자(子)[1~6장-12자, 7장-13자, 8장 이후-15자], 대체로 상하 백구(上下白口), 내향 흑어미(內向黑魚尾)[1장-상하 대흑구(上下大黑口), 6장-상하 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사변 화문흑어미(內向四辨花紋黑魚尾)] ; 31.4×22.3cm
표제(表題) :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권두제(卷頭題) :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판심제(版心題) : 보설(普說)(1,2장), 보(普)(3장 이후)
지질(紙質) : 저지(楮紙)
소장처 :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219.7-덕69ㅁ4)
이 문헌의 서지학적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문헌에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다. 권두(卷頭) 제목인 『몽산화상육도보설』에 이어 다음 행부터 한문 본문이 제시되고, 한문에 이어서 원권(○)을 표시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문을 실었는데, 국한혼용체로 되어 있다. 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연산군 시대에 간행된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1496)와 유사하다. 언해의 간행 동기 및 경위 등에 관련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제42장을 통해서 발행 사항 및 이 책의 간행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80여 명의 시주질(施主秩), 그리고 사경자(寫經者)로 “현옥(玄玉)·현종(玄宗)·보언(寶彦)” 등과, 각수(刻手)로 “일훈(一訓)·인화(印花)”, 화사(化士)로 “현즙(玄楫)·천문(天文)”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시주의 이름에 나타나는 최수장(崔守長), 채중석(蔡仲石) 등은 명종 14년(1559) 전라도 순창 무량굴(無量堀)에서 중간(重刊)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3과 『월인석보』 권21에서도 볼 수 있다. 화사 ‘현즙(玄楫)’은 중간된 『월인석보』 권23의 화주란(化主欄)에는 ‘현집(玄緝)’으로, 다른 한자로 되어 있다. 각수인 ‘일훈’과 ‘인화’는 같은 시기에 전라도에서 간행된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진언집(眞言集)』(1569. 安心寺) 등 여러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이 자료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지는 못한 편이다. 침식된 곳이 여러 군데이며, 판심(版心)이 마멸(磨滅)되어 판독(判讀)이 어려운 부분도 나타난다. 지방 사찰판으로서의 미흡한 점들이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1행의 글자 수 및 어미(魚尾) 모양, 판심제(版心題) 등 서지학적 사실이 엄정하지 않고 장(張)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 정제되어 있지 않다. 그런 특징 중에서 동국대본 41장은 일부가 상당히 훼손되어 있고, 42장은 낙장(落張)까지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판각(板刻)이 거칠고 목륜(木輪)이나 완결(刓缺)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서는 초쇄본(初刷本)이 아닌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동국대본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간행하는 『국어국문학논문집(國語國文學論文集)』 제16집(1993년)에 김무봉(1993)의 해제를 붙여 영인되었다. 이 영인 자료의 저본은 동국대본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 책 끝 부분의 일부 훼손·낙장된 부분은 남권희 교수에 의해 소개된 다른 판본의 사본으로 보완하였다.

3. 저자 및 발행 사항

몽산(蒙山)은 원나라 세조(世祖) 때 활동했던 선승(禪僧)으로, 생몰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속성(俗姓)은 려씨(廬氏)이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의 시양(時陽) 고안현(高安懸)에서 태어났다. 지원(至元) 27년(1290)에 쓴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檀經)』의 서문에 따르면, 그가 어릴 때 그 책을 한 번 보고 30여년이 지난 1290년에 통상인(通上人)으로부터 전문(全文)을 구하게 되어 오중(吳中) 휴휴선암(休休禪庵)에서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적어도 그의 출생연도는 1230년대와 1240년대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298년에 상인을 통해 고려 승려 만항(萬恒, 1249~1319)에게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추정해 볼 때, 입적은 그 이후인 1300년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가 이후 ‘조주무자(趙州無字)’의 화두(話頭)로 입참(入叅)하여 환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 등 여러 고승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에 정응(正凝)의 뒤를 이어 선종(禪宗) 5가(家)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이었다. 그는 거처를 여러 번 옮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본명(本名)은 ‘덕이(德異)’이며, 여릉도(廬陵道)의 몽산(蒙山)에 기거하였으므로 그곳 지명을 따서 주로 ‘몽산’이라고 불렸다. 그의 고향 시양(時陽)이 당나라 때는 균주(筠州)였으므로 ‘고균(古筠)’이라 불리기도 했고, 득도 후에는 강소성(江蘇省)의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머물었으므로 ‘전산화상(殿山和尙)’, 평강현(平江縣)의 휴휴암(休休庵)에 거처하였으므로 ‘휴휴암주(休休庵主)’, 또는 ‘절목수(絶牧叟)’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몽산의 찬술 중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편찬 연대 미상의 『육도보설(六道普說)』을 비롯하여 『직주도덕경(直註道德經)』(지원(至元) 24년, 1287), 재편한 『육조단경(六祖檀經)』(지원 27년, 1290), 『몽산법어(蒙山法語)』·『몽산화상수심결(蒙山和尙修心訣)』·『증수선교시식의문(增修禪敎施食儀文)』 등이 있다. 또 그가 쓴 글로는 『불설사십이장경 서(佛說四十二章經序)』(지원 23년, 1286), 『육조대사법보단경 서(六祖大師法寶檀經序)』(지원 27년, 1290), 『몽산화상시식의문(蒙山和尙施食儀文)』 등이 있다.
위의 찬술 중 『몽산법어(蒙山法語)』(『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는 나옹(懶翁)이 초록한 것을 조선 세조 때(1459~60년 추정)에 신미(信眉)가 언해하였고,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檀經)』 서(序)는 연산군 2년(1496)에 간행된 『육조법보단경언해』의 권두에 실려 있다. 몽산은 당대의 이름 높은 선승(禪僧)으로, 선(禪)과 관련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고려 승려들과는 직·간접적으로 교류가 빈번하였다. 『익재난고(益齋亂藁)』와 『나옹화상 행장(懶翁和尙行狀)』에는 몽산이 고려 승려 혼구(混丘, 1249~1319), 만항(萬恒, 1249~1319), 나옹(懶翁, 1320~1376) 등과 교류한 내용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 이후 국내 불교계에 꾸준히 영향을 미친 몽산의 저술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간경도감(刊經都監)이나 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16세기에는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된 문헌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의 한문본은 15세기부터 간행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와서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간행되어 유통되었다. 그에 따라 언해본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전라도 순창 취암사에서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가 간행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신미(信眉) 대사가 언해한 몽산의 또 다른 저술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가 널리 유통되고 있었던 것도,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의 간행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국어학적 특징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국어 표기법과 음운, 어휘 면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16세기 후반의 국어사 자료로서, ‘ㅸ’과 ‘ㆆ’은 전혀 쓰이지 않았으며 방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언해문의 한자 독음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으로 제시되었다. 특히 한양에서 간행된 16세기 전반기 한자음과는 다른 한자음이 나타나는데, 이 지역에서 전해지는 한자음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불교 용어 한자어의 경우도 현실음을 따랐으나 어떤 것은 불교계의 전통적인 독법에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테면 ‘解脫’의 ‘解’는 ‘하’로 주음 표시된 것과 같은 것이다. ‘人인道도者쟈’〈12ㄱ〉, ‘菩보提뎨心심’〈11ㄴ〉 등에서 ‘人인, 提뎨’는 당시의 현실한자음을, ‘解하脫탈’〈5ㄴ〉은 불교계의 전통 독음으로 보인다.
‘ㅿ’ 문자의 경우는 고유어와 한자어 표기에 모두 쓰였다. ‘아디거든’[碎]〈7ㄴ〉, ‘我아人’〈23ㄱ〉 등. 그러나 점차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고유어에서 15세기 한글 문헌에서라면 ‘ㅿ’으로 나타났을 환경에서 ‘ㅇ’로 나타나거나 ‘ㅅ’으로 대체된 경우가 있고(‘지어니’[造]〈23ㄴ〉, ‘지스며’〈10ㄴ〉, ‘오사’[獨]〈18ㄱ〉 등), 한자어에서는 같은 뜻의 구성요소가 ‘ㅿ’과 ‘ㅇ’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기도 하였다. ‘聖人’〈3ㄴ〉, ‘賤쳔人인’〈12ㄱ〉 등. 즉, ‘ㅿ’ 문자의 경우에 15세기~16세기 초기문헌에서였다면 이것이 반영되었을 만한 환경에서 ‘ㅿ’이 탈락되거나 ‘ㅅ’으로 바뀐 예가 보인다. 또한 이전 문헌에서 ‘ㅿ’이 사용되지 않았던 어휘나 문법 형태소에 ‘ㅿ’이 사용된 예도 나타나는데, 목적격 조사 ‘’이 ‘’로 표기된 경우가 있고(‘福’〈10ㄴ〉), ‘오-’[全]가 ‘오-’〈19ㄱ〉로, ‘므슥’이 ‘므글’〈23ㄱ〉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오-’의 경우는 〈악학궤범 5:12 처용가〉에 딱 하나의 예가 보였다.
목적격 조사가 ‘’이 아닌 ‘’로 나타난 것은 음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이지만, 그 외의 다른 예에 대해서는 당시 ‘ㅿ’의 음가와 관련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15세기에 실제 음소였던 ‘ㅿ’이 15세기 후반 이후 ‘ㅅ’, 혹은 ‘ㅇ’으로 변화하면서 소멸하였다고 설명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ㅿ’은 실제 음소가 아니었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ㅅ’유지 방언과 ‘ㅅ’ 탈락 방언(후음 ‘ㅇ’형)에서 이를 절충하여 표기할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였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전자는 ‘ㅿ’의 음가를 [z]이었다고 볼 때 ‘ㅿ〉ㅇ, ㅅ’으로의 통시적 변화를 음성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한편, 후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15세기 문헌 전반에서 발견되는 ‘ㅿ’을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따른다.
이 책에서 아음 불청불탁음 ‘P47_MS_e01_v001_013_001.png’[ŋ]은 받침으로는 쓰였지만 초성에 사용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종성이 ‘’ 으로 끝난 명사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올 경우에는 항상 분철하였고, 훈민정음 창제 초기문헌 이래 ‘에’와 결합하여 ‘이’ 표기로만 쓰이던 지시대명사가 이 책에서는 ‘에’〈39ㄴ〉로 나타난다. 이 밖에도 ‘연’〈5ㄴ〉, ‘衆즁生’〈3ㄴ〉 등처럼 자형 ‘’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편, 각자병서가 쓰일 만한 환경에서는 각자병서가 아닌 평음형의 표기가 발견된다. ‘말매’〈32ㄴ〉, ‘말솜’〈40ㄱ〉, ‘몯’〈31ㄴ〉, ‘홀디니라’〈33ㄱ〉 등. 이들은 15세기 중기 국어 표기에서는 ‘말, -ㄹ, -ㄹ띠-~-ㅭ디-’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렇게 각자병서와 ‘ㅭ’이 ‘ㄹ’만 쓰여 ‘ㆆ’을 쓰지 않는 표기법은 1465년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로부터 개정된 국어 표기법의 결과로 해석된다.
한편, 합용병서는 15세기 문헌에서 쓰이던 “ㅺ, ㅼ, ㅽ, ㅻ; ㅳ, ㅄ, ㅶ, ㅷ; ㅴ, ㅵ” 등 10가지 중에서 ‘ㅻ, ㅷ, ㅵ’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만 보인다. ‘’〈23ㄱ〉, ‘나모지’〈4ㄱ〉;‘’〈23ㄱ〉, ‘’〈39ㄴ〉;‘리’〈34ㄱ〉;‘디’〈11ㄴ〉, ‘건내여’〈38ㄱ〉; ‘리오’〈21ㄴ〉, ‘거슬’〈10ㄴ〉, ‘妙道로’〈26ㄴ〉;‘싀니’[苦]〈35ㄱ〉;‘’[孵]〈9ㄴ〉, ‘리며’〈31ㄴ〉, ‘그 ’[時]〈40ㄴ〉 등. 이 중에서 ‘거슬’은 15세기 문헌에서는 ‘거슬’형으로 나타나던 것인 점이 특이하다. 이 책에는 15세기 말 정도에 정착·사용되던 초성 합용병서 중에서 ‘ㅴ’가 ‘ㅺ’로 바뀐 예도 나타난다. ‘’〈40ㄱ〉~‘’〈26ㄴ〉. 이와 함께 ‘ㅂ’계통의 합용병서 ‘ㅷ’과 ‘ㅄ’계통의 ‘ㅵ’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합용병서 ‘ㅷ’ 또는 ‘ㅵ’을 포함한 단어 - ‘① 다, , 다, 다, 다 등. ② 리[疱.수두], 다[溢.넘치다], 르다[刺], 리다[破] 등’이 이 문헌에 사용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을 뿐 이와 같은 표기방법이나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헌보다 후대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는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성 합용병서 중에서 특이한 사실로는, ‘ㅂㅍ’과 ‘ㅅㅋ’이 쓰인 용례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너비 ᄪᅧ’〈14ㄴ〉, ‘뫼  데’〈6ㄴ〉와 같은 예는 훈민정음(해례본)의 규정 어디에서도 예시된 적이 없는 표기로서,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종성 표기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종성해’에 제시된 팔종성가족용(八終聲可足用)의 규정, 그리고 훈몽자회(1527) 범례의 ‘언문자모’에 나오는 초성종성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의 규정대로 적용하였으며, 그 외의 다른 받침 표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곳’[花]〈41ㄴ〉, ‘낫밤’〈15ㄱ〉,‘디’[具]〈41ㄱ〉 등. 이와 함께 사이시옷도 ‘ㅅ’으로 통일되어 나타난다. ¶‘바랏므레’〈10ㄱ〉, ‘ 光明’〈11ㄱ〉;‘손’〈11ㄱ〉, ‘믈긔’[水穴]〈10ㄴ〉 등.
형태소의 통합 표기에서 실질 형태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가 이어질 때는 대체로 연철(連綴)이 지켜졌으나, 분철(分綴)과 중철(重綴)도 나타난다. 분철은 한자어 뒤에 이어질 때에 한정되었으며, 중철은 한자에 한자음을 병기할 때 한자음의 말음이 ‘ㄱ, ㄴ, ㄹ, ㅁ, ㅂ’ 뒤에서, 고유어의 경우에는 ‘ㄹ, ㅁ, ㅂ’ 뒤에서 사용되었다. ¶‘神通力력글’〈30ㄴ〉, ‘帝釋셕기’〈39ㄴ〉, ‘人身신’〈25ㄴ〉, ‘四王天텬니오’〈14ㄱ〉, ‘얼굴’〈12ㄱ〉, ‘萬物믈’〈3ㄱ〉, ‘몸’〈15ㄴ〉, ‘正念념’〈25ㄴ〉, ‘비’〈5ㄴ〉, ‘業업블’〈8ㄱ〉 등.
이 책에 나타난 모음체계를 살펴볼 수 있는 증거 자료 중에서 모음 ‘’가 변화한 예도 드물기는 하지만 나타난다. ‘라미’〈15ㄱ〉는 ‘[風]〈〉람’으로 변화한 사실을 보여주는 예로, 국어의 역사상 비어두 음절에서 ‘’가 ‘아’로 변한 것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예가 아닌가 한다. 16세기 후기는 ‘’의 1단계 변화가 거의 완성되었던 시기로, 모음 체계의 대립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모음조화의 질서가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는데 이 자료에서도 그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산승’〈34ㄱ〉(cf. ‘산승은’〈29ㄴ〉), ‘인연’〈18ㄱ〉, ‘그 天텬’〈10ㄴ〉, ‘어리라’[得]〈36ㄴ〉, ‘道도를’〈17ㄱ〉 등.
이 문헌에 반영된 가장 특징적인 음운현상은 ‘ㄷ’구개음화의 최초 출현 예가 다수 나타난다는 것이다(백두현 1991, 김무봉 1993). 지금까지의 국어사 연구에서 구개음화가 나타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은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1571~1572)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자료의 출현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부쳐’〈30ㄴ〉와 ‘부톄’〈30ㄴ〉, ‘弟졔子’〈40ㄱ〉(cf. 弟 아뎨〈훈몽자회, 상:16ㄴ〉) 등과 ‘帝졔釋셕기’〈39ㄴ〉와 ‘帝뎨釋셕기’〈40ㄱ〉, ‘天텬帝졔釋셕기’〈40ㄴ〉와 ‘天텬帝뎨釋셕’〈40ㄴ〉과 같은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기~16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부텨, 弟뎨, 帝뎨’ 등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자와 같이 변화한 예에서 ‘ㄷ’ 구개음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문헌에서는 과도교정의 예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 가디’[三般]〈39ㄴ〉, ‘닐굽 가디’〈39ㄴ〉, ‘오딕’[唯]〈39ㄴ〉, ‘正法법’〈34ㄴ〉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가디, 오딕, 正’은 16세기 전반까지의 문헌에서 각각 ‘가지, 오직, 正’으로 초성이 ‘ㄷ’이 아닌 ‘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ㄷ’으로 교정한 것이니, 과도교정(hyperforeignism)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구개음화 경향이 확산·심화됨으로써 ‘ㅈ,ㅊ’과 같은 치음이 ‘i/j’ 앞에 올 경우에 본음 ‘ㄷ,ㅌ’에서 변화한 음으로 착각해 이와 같은 과도 교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구개음화와 과도교정의 사례를 통해 1570년대 전라도 순창 지역에서는 ‘ㄷ’ 구개음화가 확산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추가할 것은 ‘셧그티라’[舌頭]〈38ㄱ〉와 같은 예이다. 이것은 전라도 순창 지역에서 보여주는 구개음화의 범위가 ‘ㄷ’구개음화만이 아니라 ‘ㅎ’구개음화도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셔[舌]+ㅅ+긑[端/頭]+이+라’로 분석되며, 이 ‘셧긑’은 바로 ‘혓긑’의 구개음화형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국어 표기법 중에서 한자와 우리말을 섞어 쓸 경우에 한자음에 따라서 중성이나 종성을 보완해 쓰는 방식이 훈민정음 해례의 ‘합자해’에 다음과 같이 예시되어 있다. ‘孔子ㅣ魯ㅅ사’〈훈민정음해례: 합자해〉. 이 문헌에 쓰인 주격 표기는 16세기의 다른 문헌과 대체로 같아 모음으로 끝난(개음절) 한자어 뒤에 주격조사가 올 때 ‘ㅣ’는 선행 체언과 분리해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한자음에 붙여 쓴 경우가 나타난다. 즉 모음으로 끝난 고유어나 한자어 뒤에서 ‘ㅣ’가 쓰였으나 ‘이’로 분리해 표기한 경우도 있고(‘부텨이 니샤’〈40ㄱ〉, ‘業업報보이’〈7ㄱ〉), 한자음에 합용하여 쓴 경우도 발견된다(‘두 가짓 道되 업스니라’〈38ㄱ〉). 이것은 언해본의 역자(=표기자)가 훈민정음(해례본)의 ‘합자해’ 표기방식을 정확히 알지 못한 결과로도 볼 수 있고, 주격 ‘ㅣ(i)’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중모음에서 ‘ㅣ’하향중모음에 대한 발음이 뚜렷하게 인식됨으로써 표기 형태도 독립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자음(폐음절) 뒤에서는 주격 표지를 ‘이’로 표기하는 것이 정상인데 ‘ㅣ’가 쓰인 예도 나타난다. ¶‘萬만德덕ㅣ라 호’〈3ㄴ〉 등.
한편, 이 문헌은 어휘에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다른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휘가 여러 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일부는 다른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거나 전라도 간행 문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어형으로 나타나므로 당시의 전라도 순창 지역어를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지방 사찰판이 갖는 특성 중에서 이 책의 배포 범위와 지역 독자층을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명사의 경우에, ‘거슬다, 구령이, 굼더기, 안녁, 가모티, 멸오; 숟하다, 싀다’ 등이 그것이다. 다른 문헌에서는 ‘거슬다, 구렁이’로 나타나는 것이 이 책에서는 ‘거슬’〈10ㄴ〉, ‘구령이’〈10ㄱ〉로 나타난다. ‘굼더기’〈10ㄱ〉는 ‘귀더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아내, 부인”을 뜻하는 ‘안녁’[內便]〈11ㄱ〉, ‘일반 여자’를 뜻하는 ‘녀편’〈39ㄴ〉이 보인다. 오늘날 “가물치”를 뜻하는 ‘가모티’〈10ㄱ〉가 쓰였고, ‘멸오’(멸외 10ㄱ)는 ‘멸오’에 조사 ‘ㅣ’가 연결된 것으로 분석되므로 ‘멸구’의 방언형인 ‘멸고, 멸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숟하다’는 오늘날의 ‘숱하다’와 같은 의미로, ‘싀니’의 어간 ‘싀-’는 ‘싀-’(시고 짜다)의 이 지역 방언형으로 추정된다.
한편,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어휘가 발견되는데, ‘개옺, 곱다, 로다, 로이’ 등을 들 수 있다. ‘개옺’은 ‘개[浦]+곶[串]’의 합성어이며, ‘곱다’는 ‘다’[溜. 고이다]와 쌍형어로서 ‘고온’〈6ㄴ〉처럼 활용하는 ‘ㅂ’불규칙용언이었다. ‘로다’〈27ㄱ〉는 ‘[謀]+-로-’로, ‘로이’〈8ㄱ〉는 ‘+롭+이’로 분석되며 “교활하다, 꾀를 부리다”와 관련 있는 단어들로 파악된다. 그리고 한자어 ‘喝’이 특수한 의미로 굳어져 쓰인 ‘핵다’〈7ㄴ〉·‘액다’〈25ㄱ〉 등이 있다. ‘{핵/액}다’는 감탄사 ‘핵, 액’에 접미사 ‘-다’가 결합한 파생어이다. 또한 복합동사 ‘봇닷겨’〈8ㄱ〉는 ‘-+-+-이-’로 분석할 수 있다. 그 밖에 ‘어긔-’[差]의 영변화 파생어로 부사 ‘어긔’〈8ㄱ〉가 보이고, ‘헤부러’〈15ㄱ〉, ‘믜리부러’〈15ㄱ〉, ‘첫’[最始]〈26ㄴ〉, ‘퍼기’〈10ㄴ〉, ‘아쇠라’〈39ㄴ〉 등과 같이 이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어휘들도 사용되었다. 이들 어휘의 의미는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것도 있다. 반드시 본문의 주해 부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 방언사 기술과 관련하여 국어학 연구자들의 관심이 기대된다.

5. 문헌적 가치와 특기 사항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1567년 전라도 순창 지역어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문헌에는 15세기 말기에 정착된 국어 표기법 및 국어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16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어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현재까지 발굴·소개된 국어사 문헌자료 중에서 구개음화(口蓋音化)가 폭넓게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언해본은 전라도 순창 취암사라는 지방의 한 사찰에서 독자적으로 간행된 문헌이다. 시주질을 살펴볼 때 대개는 이 지역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보시(法布施)의 차원에서 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문헌에는 한양에서 간행된 관판문헌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언어현상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 시간적, 공간적 범위는 16세기 후반 전라도 순창 지역어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이 음운·형태 및 어휘 면에서 폭넓게 확인된다.
국어학적 측면의 특징 몇 가지만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자료에서는 ‘ㄷ’ 구개음화와 ‘ㅎ’ 구개음화가 발견되는 최초의 자료로서, 그러한 예를 통해 1570년대를 전후로 전라도 북부 지역에서 구개음화가 확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5세기 중후반의 관판문헌에서였다면 ‘ㅿ’으로 표기되었을 만한 환경에서 ‘ㅅ’ 또는 ‘ㅇ’ 등으로 반영된 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5세기 훈민정음의 국어 표기에서 ‘ㅿ’의 음가와 표기 의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문헌이 16세기 후반 전라도의 지역 방언과 그 변화하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이전 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ㅿ’의 의도와 관련하여 근원적인 문제를 재고할 만하다. 또한 이 문헌을 통해 16세기 후반 전라도 순창 지역어로 추정되는 형태·어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일부 어휘에 불과하지만, 이 지역 방언의 통시적 변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방언사 분야는 연구 업적이 영성한 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방언사를 정밀하게 기술할 정도로 자료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에서만 원인을 찾기 전에 과연 연구자들이 해당 지역 방언사 자료를 적극적으로 찾아 면밀하고 철저히 분석해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자료 부족의 탓으로만 돌리고 수수방관한다면 학문적 발전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문헌을 역주하면서 면밀히 살펴본 관점에서 말한다면, 사실 이 해제는 이 문헌이 담고 있는 여러 문제를 모두 거론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즉 음운·형태·어휘의 측면에서 더 분석되어야 할 여러 가지 국어사적 사실이 이 문헌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해제는 그중에서 아주 일부만 거론했을 뿐이며, 따라서 이 문헌은 여전히 전라도 방언 연구를 위한 원석(原石)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문헌을 포함하여 전라도 지역과 관련이 깊은 여러 문헌자료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사 자료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16세기 전라 방언사 자료만 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전라도 고산 화암사 간행의 『법집별행록절요언해』(1522), 전주 완산 간행의 『부모은중경언해』(1545), 광주판 『천자문』(1575), 『백련초해』(1576), 전남 순천 송광사 간행의 『초발심자경문언해』(1577)와 개찬본 『몽산화상법어약록』(1577) 등이 있다.
미문이지만, 이 자료들에 나타난 국어와 16세기 당시 관판문헌에 나타난 국어, 그리고 현대국어 전라(서남) 방언을 다각도로 대조해 연구하였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하였다. 이 연구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것을 기초로 세밀한 역주 작업이 우선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어사 ‘자료의 성격과 해당 자료에 나오는 글자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연구’ 과정을 거친다면, 16세기 중·후반기 전라 방언의 실상을 적잖이 발견해 국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방언사를 아우르는 한국어 역사 기술을 위해 전라(서남) 방언 연구자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기대한다. 이 문헌의 역주는 그런 연구를 위한 아주 작은 노력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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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봉(1993),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본〉 해제”, 『국어국문학논문집』 16,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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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1. 머리말

1.1.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은 당(唐)나라의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이 번역한 한역(漢譯 : 唐 貞觀 23년, 649 A.D.) 불전(佛典)이다. * 이 해제의 작성에는 김영배 외(1995)의 도움이 컸다. 문법 항목은 그 책에 실려 있는 필자의 집필 부분을 그대로 가져 왔다. 주001)
물론 한역(漢譯) 『반야바라밀다심경』이 이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명(題名)을 달리하고 내용이 조금씩 다른 책 수종(數種)이 현전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5세기 초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등의 책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뒤의 본론에서 다룰 것이다.
이 책은 인도(印度)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승불교의 독특한 사상을 담고 있는 중요한 경전(經典) 중 하나이다. 현장은 육백 부(部)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대반야경』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그리고 육백 부의 경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뽑아 간결하게 요약해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 한 권의 책이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14행(行) 54구(句) 260자(字)에 주002)
현장법사 한역(漢譯)의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모두 260자(字)로 되어 있다. 제명(題名)은 첫 머리에 ‘마하(摩訶)’를 포함시킨 경우가 있는가 하면, 빼기도 하여 열 자(字), 또는 여덟 자(字)로 서로 다르다. 우리가 연구 및 역주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인 1464년 간행의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에는 어디에도 ‘마하(摩訶)’를 쓰고 있지 않으므로, 이 논의에서의 제명은 갖추어 부를 경우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하고, 줄여서 부를 때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또는 『심경(心經)』이라 하기로 한다.
『대반야경』 육백 부의 정요(精要)를 모두 담은 것이다. 이 경전(經典)은 대부분의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독송(讀誦)되고 있으므로,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해도 웬만큼은 알고 있을 정도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의 심오함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漢譯)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402~413 A.D.) 이후 이본(異本) 여러 책이 찬술되었다. 위에서 말한 현장(玄奘)의 책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한역 이본들이 조성된 것은 물론, 주석서(註釋書)의 저술도 잇달았다. 인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이나 일본,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주석서들이 나왔다. 주003)
특히 중국에는 수십 종의 주석서가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고승(高僧) 원측(圓測)에 의해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가 만들어진 이후에 동일한 제명(題名)으로 원효(元曉)가 풀이한 주석서 등 몇몇 책이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주004)
김영배(1995 : 93~94)에 의하면 원효의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는 현재 전하지 않고, 원측의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는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지은이가 당(唐)나라의 원측(圓測)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원측(圓測)’이 입당(入唐)해서 활동하였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중 일부만이 오늘에 전한다. 주005)
한역 이본 및 주석서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배(1995), 한정섭(1995), 혜담(1997) 등 참조.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일찍이 한문 경전의 국어역이 시도되었고, 그 최초의 번역본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인 것이다.
1.2. 한문본 『반야심경』을 우리 문자로 번역한 최초의 책인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는 조선 세조 10년(天順 8년, 1464 A.D.)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이 언해본의 저본(底本)은 엄밀하게 말해 현장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아니고, 송(宋)나라의 사문(沙門) 중희(仲希)의 주해본(註解本)인 『반야심경약소현정기(般若心經略疏顯正記)』이다. 이 책은 당나라 현장(玄奘)법사의 한역(漢譯)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에 역시 같은 당나라의 법장(法藏) 현수(賢首)대사가 약소(略疏)를 붙여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唐 長安 2년, 702 A.D.)를 짓고, 여기에다 다시 송(宋)나라의 중희가 주해를 더하여 『반야심경약소현정기(般若心經略疏顯正記)』(송 경력 4년, 1044 A.D.)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주해본인 『반야심경소현정기』 주006)
『반야심경소현정기』라고 한 이 명칭은 언해본 책의 본문 첫머리에 있는 제명(題名)이다. 제명 바로 다음에 중희가 술(述)한 병서(幷序)가 나온다.
에 세조가 직접 정음으로 구결을 달고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황수신(黃守身),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을 하여, 목판본 1권 1책으로 간행을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주(譯註)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반야심경언해』의 저본은 중희의 『반야심경약소현정기』인 것이다. 그런데 언해가 이루어진 부분은 현장(玄奘)의 경 본문과 법장(法藏)의 약소이고, 중희의 주석(註釋)인 ‘현정기(顯正記)’ 부분은 제외되었다. 중희의 주석은 해당하는 경 본문의 언해문 다음이나, 약소 구결문과 약소 언해문 사이에 협주(夾註) 형식으로 실려 있을 뿐 언해하지는 않았다.
1.3. 언해본의 간행 및 번역에 관련된 사항은 『반야심경언해』와 같은 시기에, 같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책인 『금강경언해』의 책머리에 동일하게 실려 있는 간경도감 도제조(都提調) 황수신(黃守身)의 ‘진금강경심경전(進金剛經心經箋)’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반야심경언해』의 끝에 실려 있는 한계희(韓繼禧)의 발문(跋文)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주007)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의 간행일은 ‘진전문(進箋文)’과 ‘심경발(心經跋)’이 서로 다르다. 이는 간행일이라기보다 각각 원고를 쓴 날이 될 것이다. 황수신(黃守身)의 ‘진전문’에는 ‘天順 八年 四月 初七日’로 되어 있고, 한계희(韓繼禧)의 ‘심경발’에는 ‘天順 八年 二月 仲澣’으로 되어 있다. 두 달 가까이 차이가 난다. 판밑 원고 작성은 2월 중한(仲澣)에 마무리 되었고, 간행은 4월에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는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이후 그 후쇄본의 쇄출(刷出) 및 복각 간행이 몇 차례 이루어진 듯하다. 현재 원간 초쇄본으로 보이는 책 2본을 비롯하여 후쇄본 1종 및 복각본 2종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책들 중 1994년에 공개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된 바 있는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소장본을 연구 및 역주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008)
소중한 책을 발굴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필자 등으로 하여금 국어사적 연구와 역주(譯註)를 할 수 있게 해 준 당시 소요산 자재암(自在庵) 주지 법타(法陀)스님(현재 동국대 정각원장)께 여기에 적어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 책이 공개된 당시에 동악어문학회 연구진에 의해 역주 및 국어학적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주009)
김영배·장영길 편저(1995), 『반야심경언해의 국어학적 연구』, 동악어문학회 학술총서 3, 대흥기획.
그러나 이제 십여 년이 지나 다시 그때의 내용을 깁고 보태어 이 해제 및 역주를 하게 되었다.
이 논의의 제2장에서는 한문 경전의 성격 및 언해의 저본(底本)에 대해 살피고, 제3장에서는 판본 및 언해 체제 등에 대해 살필 것이다. 제4장에서는 표기법과 문법 등을 주로 논의할 것이다.

2. 한문본 『반야심경』의 성격 및 언해의 저본

2.1. 한역 『반야심경』으로는 아래 예문 (1)의 책들이 알려져 있다. 물론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도 ‘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릿다야 수우트라)’라는 이름으로 전한다고 한다. 한역본 『반야심경』은 대체로 7~9종이 전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중 8종을 가려 간행 연대순으로 그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10)
현전하는 한문본 『반야심경』의 목록 작성은 김영배(1995), 한정섭(1995), 혜담(1997) 등을 참고로 하였다. 하지만 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겹치는 부분만 종합해서 싣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다른 자료들을 참고해서 정리했다.
(1) ㄱ.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구마라집 역 402~413년
ㄴ.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현장(玄奘) 역 649년
ㄷ.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佛說般若波羅蜜多心經) 의정(義淨) 역 당대(唐代)
ㄹ.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普遍地藏般若波羅蜜多心經) 법월(法月) 역 738년
ㅁ.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般若)·이언(利言) 역 790년
ㅂ.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지혜륜(智慧輪) 역 859년
ㅅ.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법성(法成) 역 847~859년 (敦煌出土)
ㅇ.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佛說聖佛母般若波羅蜜多經) 시호(施護) 역 982년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이 책들 중 『반야심경언해』 경(經) 본문의 저본이 되는 책은 (1ㄴ)의 현장(玄奘) 한역본(漢譯本)이다.
2.2. 위에서 밝힌 대로 우리가 연구 및 역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반야심경언해』 본문(本文)의 원전인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당(唐) 현장(玄奘)이 한역한 책이다. 그런데 현장의 『반야심경』은 구성 형식이 다른 불교 경전들과 얼마간 차이가 있다. 곧 경전의 일반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경전의 체제는 대체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서분(序分)과 유통분(流通分)은 빠져 있다. 본문이라고 할 정종분(正宗分)만 있다. 그래서 내용도 입의분(入義分), 파사분(破邪分), 공능분(功能分), 총결분(總結分) 등 본문만 있는 구성이다. 이는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의 두 종류 『반야심경』 중 약본(略本)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주011)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의 성격이나 경전의 형식 등에 대해서는 혜담(1997) 참조. 이 책에 의하면 위 예문 (1)에 있는 한문본 중 구마라집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과 현장의 『반야바라밀다심경』만이 약본(略本)이고 나머지는 광본(廣本)이라고 한다. 혜담(1997:17).
또 불교 의식(儀式)이나 법회(法會) 등의 독송(讀誦)에 쓰고 있는 『반야심경』의 제명(題銘)에 ‘마하(摩訶)’가 들어가 있는 점은 현장(玄奘)의 책과도 다른 점이다. 이는 현장본보다 먼저 한역된 구마라집 한역(漢譯)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에서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주01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혜담(1997:22) 참조.
이 경전의 명칭은 산스크리트본에 의하면 ‘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릿다야 수우트라)’라 되어 있고, 이를 한역(漢譯)한 이름이 ‘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산스크리트어 명칭과 한역 명칭을 종합하여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최상의 지혜를 완성하기 위한 핵심을 설한 경전’이란 뜻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주013)
김영배(1995:91~92), 혜담(1997:21~32) 참조. 그 외 경전의 내용에 관련된 사항은 무비(2005), 성법(2006), 성열(1990) 등 참조.
이에 대한 법장(法藏)의 견해는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 병서(倂序)에 잘 드러나 있다. 법장이 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의 일단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약소 구결문, 언해문, 현대어역의 순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 ㄱ. [구결문]
般若心經者 實謂曜昏衢之高炬ㅣ며 濟苦海之迅航이라 拯物導迷옌 莫斯ㅣ 爲最니라 然則般若 以神鑑으로 爲體오 波羅蜜多 以到彼岸으로 爲功이오 心 顯要妙所歸오 經은 乃貫穿言敎ㅣ니 從法就喩며 詮㫖爲目 故로 云호 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시니라 〈6ㄱ:5~7ㄴ:3〉
ㄴ. [언해문]
般若心經은 眞實로 닐오 어드운 길흘 비취 노 홰며 受苦ㅅ 바 건네  라 物을 거리며 迷惑 引導호맨 이 더으니 업스니라 그러면 般若 神奇히 비취요로 體 삼고 波羅蜜多 뎌  가로 功 삼고 心 조외며 微妙호 간 고 나토고 經은 言敎 씨니 法을 브터 가뵤매 나가며  닐오로 일훔 이런로 니샤 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시니라 〈8ㄱ:8~8ㄴ:5〉
ㄷ. [현대어역]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진실(眞實)로 이르되, “어두운 길을 비추는 높은 횃불이며, 수고(受苦)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빠른 배이다.”(라고 하니) 물(物)을 건지며 미혹(迷惑)을 인도(引導)함에는 이에서 더한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 반야(般若)는 신기(神奇)하게 비춤으로 체(體)를 삼고, 바라밀(波羅蜜多)은 저 가(언덕)에 감으로 공(功)을 삼고, 심(心)은 종요로우며 미묘(微妙)함이 간 곳을 나타내고, 경(經)은 언교(言敎)를 꿰는 것이니, 법(法)을 따라 견줌에 나아가며, 뜻을 이르는 것으로 이름을 지어 이르시되,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고 하신 것이다. 〈김무봉 역〉
2.3. 그러면 수십 종에 달하는 주해서들 중 법장의 ‘약소’와 중희의 ‘현정기’가 언해의 저본으로 선택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한계희(韓繼禧) 작성의 ‘심경발(心經跋)’에서 찾을 수 있다. 곧 법장의 ‘약소’가 ‘홀로 종지(宗旨)를 터득했음’과 중희의 ‘현정기’를 이용하여 ‘장소(藏疏)를 나누는 등 분절(分節)의 편의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3) ㄱ. [심경발 원문]
自譯此經逮唐 迄今造䟽著 觧代各有人, 法藏之註 獨得其宗. 上命孝寧大君臣補 率臣繼禧 就爲宣譯, 又得大宋沙門仲希所述顯正記 科分藏䟽 逐句□ 주014)
이 연구 및 주해의 대상인 자재암본 『반야심경언해』에는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판독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공란으로 처리한 것이다.
釋 極爲明備 據䟽分莭 釐入各文之下, 但希䟽據 本非今所行, 時有不同.
ㄴ. [심경발 번역문]
이 경전이 번역된 당나라에서 지금까지 주소(注疏)를 짓고 의해(義解)를 저술한 사람이 시대마다 있었지만, 법장(法藏)의 주소(註疏)가 홀로 그 종지(宗旨)를 터득하였다. 임금께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에게 명하셔서, 신(臣) 계희(繼禧)와 더불어 곧 번역 반포하게 하시고, 또 대송(大宋) 사문(沙門) 중희(仲希)가 저술한 현정기(顯正記)를 구하여 장소(藏疏)를 나누어 글귀마다 해석하니, 극히 소상하게 갖추어져 소(疏)에 따라 절을 나누고, 각기 본문(本文) 밑에 바로잡아 넣었으나, 중희가 저본으로 한 책이 지금에는 통행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이종찬 교수 번역]
또 ‘심경발(心經跋)’에는 『반야심경언해』의 간행 동기를 알 수 있는 언급이 있다. 이 발문을 통해 언해의 동기 등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승려들이 일상으로 대하면서도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왕이 민망히 여김’이라고 하였다.
(4) ㄱ. [심경발 원문]
惟. 我 主上殿下 以此經緇素常習 故特今敷譯, 盖忄悶 晨昏致誦 而不知其所以誦 即釋迦如來 哀此衆生 終日游相 而不知其相之意也. 其開覺人天 入佛知見之 㫖聖聖同揆. 鳴呼, 至哉.
ㄴ. [심경발 언해문]
아! 우리 주상전하께서 이 경이 승려들이 평소 늘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펴서 번역하게 하셨으니, 대저 새벽 저녁으로 외우면서도 외워야 하는 까닭을 모름을 민망히 여기심이니, 곧 석가여래께서 이 중생들이 종일토록 상(相)에 노닐면서도 그 상(相)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애석히 여김이다. 인천(人天)을 깨우쳐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게 하고자 하시는 뜻은 성인(聖人) 성인(聖人)이 같은 생각이시니, 아! 지극하시도다. [이종찬 교수 번역]

3. 판본 및 언해 체제

3.1. 현전하는 『반야심경언해』는 모두 네 종류이다. 크게는 원간본(原刊本)과 중간본(重刊本)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원간본을 다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원간 초쇄본(初刷本)으로 구분되는 이른바 초간본(初刊本)이고, 다른 하나는 학조(學祖)의 발문이 첨부된 원간 후쇄본(後刷本)이다. 이 두 종류의 책은 원간본 및 원간본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의 간행 연대는 1464년(세조 10년)이고, 후자(後者)는 1495년(연산군 1년)이다.
중간본(重刊本) 역시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 복각본(覆刻本)이다. 하나는 명종(明宗) 8년(1553 A.D.)에 황해도 황주(黃州)의 토자비산(土慈悲山) 심원사(深源寺)에서 간행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명종(明宗) 20년(1565 A.D.)에 전남 순창(淳昌)의 구악산(龜岳山) 무량사(無量寺)에서 간행한 책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원간본 및 원간본 계통의 책은 중앙에서 간행되어 관판(官板)의 성격을 띠고, 중간본은 지방의 사찰판(寺刹板)이다.
네 종류의 판본에 대해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주015)
이 목록의 작성에 김영배(1995)를 토대로 하고, 그 외의 사항은 필자가 관련 자료를 실사한 결과이다.
1) 원간 초쇄본
(가) 일사본(一簑本)
 간행연대 : 세조 10년(天順 8년, 1464 A.D.)
 간행처 : 간경도감(刊經都監)
 책크기 : 28㎝ ×19㎝, 반곽 21.2㎝×15.5㎝
 소장처 :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一簑文庫)[고 1730-44] 소장
 편차 : 언해 본문 1~67장, 심경발 1~2장 등 합 69장
 기타 : 보물 771호, 일지사 영인 소개(1973)
(나) 소요산(逍遙山) 자재암본(自在庵本)
 간행연대 : 세조 10년(天順 8년, 1464 A.D.)
 간행처 : 간경도감(刊經都監)
 책크기 : 32.5㎝ ×19㎝, 반곽 21.8㎝×15.8㎝
 소장처 : 동두천시 소요산 자재암(自在庵) 소장
 편차 : 금강심경전 1~3장, 주016)
‘자재암본’에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진전문(進箋文)’이 있다. 이 ‘진전문’은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금강경언해』에도 실려 있다. 뒤에 있는 역주의 첫 머리에 이를 싣고, 이종찬 교수의 번역문을 함께 싣는다. 아울러 이 역주서의 뒤에 발문(跋文)도 번역해서 실었다. 이 번역은 김영배 외(1995)에도 실린 바 있다. 역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게 어려운 번역의 일을 흔쾌히 수락해 주신 이종찬 교수께 여기에 적어서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진전문’이 『금강경언해』에도 실리고, 또 두 책이 함께 간행되었음은 다음의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 臣黃守身等謹將新雕印翻譯金剛經一卷心經一卷糚潢投 ... (...신 황수신 등은 삼가 새로 만든 인자(印字)로 금강경(金剛經) 한 권, 심경(心經) 한 권을 번역하고 표구 장식하여 바치오니...)”.
조조관 1~2장, 언해 본문 1~67장, 심경발 1~2장 등 합 74장
 기타 : 보물 1211호, 동악어문학회 학술총서3(1995), 역주 및 영인 공개
2) 원간 후쇄본
(가) 홍치판본(弘治板本) 주017)
이 책의 간행과 관련된 사항은 책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학조의 발문(跋文)에 상세하다. 같은 해에 원간본의 판목에서 다시 인출 ·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금강경언해』 등의 책에도 동일한 발문이 매행(每行)의 글자 수만 달리한 채 수록되어 있다. 이 발문을 통해 당시에 간행된 책과 간행 부수 등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於是 擇經律論中 開人眼目者 印出飜譯 法華經楞嚴經各五十件 金剛經六祖解心經永嘉集各六十件 釋譜詳節二十件 又印漢字金剛經五家解五十件 六經合部三百件...). 김영배 · 김무봉(1998) 참조. 역주서의 맨 뒤에 역시 원문과 함께 이종찬 교수님의 번역문을 싣는다.
 간행연대 : 연산군 1년(弘治 8년, 1495 A.D.)
 간행처 : 왕실(王室)
 책크기 : 25.5㎝ ×19㎝, 반곽 21.4㎝×14.8㎝
 소장자 : 고(故) 최범술(崔凡述) → 김민영(金敏榮) 주018)
필자는 홍치판 『반야심경경언해』를 김민영(金敏榮)님의 장서를 열람하던 중에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고(故) 최범술(崔凡述)님 구장본이었으나, 지금은 김민영님 소장으로 소장자의 이동이 있었다.
 편차 : 언해 본문 1~67장, 학조발 1~3장 등 합 70장
 기타 : 불서보급사 영인 소개(1972년)
3) 복각본 1
(가) 심원사판(深源寺板)
 간행연대 : 명종 8년(嘉靖 32년, 1553 A.D.)
 간행처 : 황해도 황주군 토자비산(土慈悲山) 심원사(深源寺)
 책크기 : 30.3㎝ ×18.8㎝, 반곽 21.5㎝×15.8㎝
 소장처 : 서울대 규장각(奎章閣) 소장
 편차 : 언해 본문 1~67장, 간기 1장 등 합 68장
4) 복각본 2
(가) 무량사판(無量寺板)
 간행연대 : 명종 20년(嘉靖 44년, 1565 A.D.)
 간행처 : 전남 순창군 구악산(龜岳山) 무량사(無量寺)
 책크기 : 28.5㎝ ×14.9㎝, 반곽 20.5㎝×14.9㎝
 소장처 : 고(故) 조명기(趙明基) → 모(某) 미술관(美術館) 소장
 편차 : 미상(공개하지 않음)
3.2. 이 네 종류의 책 중 우리가 연구 및 역주(譯註)의 대상으로 한 책은 초간본인 소요산 자재암본(自在庵本)이다. 자재암본의 자세한 형태서지는 다음과 같다.
 내제: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
 판심제: 진전문-金剛心經箋, 조조관 열함-雕造官, 본문-心經, 발-心經跋
 책크기: 32.5㎝×19㎝
 반곽: 21.8㎝×15.8㎝
 판식: 4주 쌍변
 판심: 상하 대흑구 내향 흑어미
 행관: 유계 8행, 본문은 큰 글자 매행 19자, 약소는 중간 글자 18자, 주해는 작은 글자 쌍행 18자, 언해는 작은 글자 쌍행 18·19자, 정음 구결은 작은 글자 쌍행.
이 책의 편찬 양식은 좀 독특한 편이다. 이는 중희의 현정기(顯定記)에 의해 장소(藏疏)를 나눈 후 글귀마다 해석하고, 소(疏)에 따라 분절(分節)해서 각각 본문(本文) 밑에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 원문인 본문(本文)은 큰 글자, 약소(略疏)는 중간 글자, 중희의 주해는 본문 구결문 및 약소(略疏) 구결문과 언해문 사이에 쌍행의 작은 글자로 썼다. 물론 주해는 번역하지 않고, 한자 작은 글자로 적었다. 원문은 행(行)의 첫머리에서 시작하고, 약소는 한 글자 내려서 썼는데, 언해는 경 원문의 것과 약소의 것 모두 쌍행으로 현토된 정음 구결문 다음에 한자로 된 주해를 두고, 그 밑에 쌍행의 작은 글자로 적어 내려갔다. 언해문의 맨 앞부분에는 큰 ○표를 하여 구분하고, 한자 쌍행으로 된 주해의 맨 앞에는 작은 ○표를 두어 구분했다.
구성은 대체로 경 원문에 정음으로 구결을 단 구결문을 앞에 놓고, 그 뒤에 한문으로 된 쌍행의 주해를 둔 후, 주해 다음에 언해문을 배치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해당 원문에 딸린 약소 구결문을 두고, 약소 구결문 다음에 다시 한문 주해를 배치한 후 언해를 하였다. 경(經)에 대한 약소(略疏)가 아니고, 형식에 대한 설명의 방법으로 약소를 단 경우에는 주소(註疏)를 한 이가 설화자의 자격으로 개입(해설)을 하는데, 이 구절의 앞에는 △표를 하여 구분하는 등 자못 복잡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불교 용어나 한자어에 대한 풀이는 협주(夾註)의 형식을 취해서 이해를 도왔다. 협주의 시작과 끝에는 ‘【흑어미】’ 표시를 하여 구분했다. 다른 간경도감본들과 마찬가지로 협주가 끝나는 곳이 언해문의 마지막이면 마감하는 ‘ 】’ 표시를 생략했다.
이 책은 모두 74장으로 되어 있다. 맨 앞부터 진금강심경전(進金剛心經箋) 3장, 조조관(雕造官) 열함(列銜) 2장,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 병서(幷序) 1~14까지 14장, 언해 본문 15~67까지 53장, 심경발(心經跋) 2장 등이다. 판심서명도 부문마다 다르게 되어 있어서 ‘金剛心經箋 - 雕造官 - 心經 - 心經跋’ 등이다. 언해문은 다른 언해서들과 마찬가지로 한자와 정음을 함께 썼다.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병기(倂記)되어 있다. 한자음을 포함하여 언해문에 방점이 있는데, 구결문의 쌍행으로 된 정음 구결에는 방점이 없다. 이는 정음 초기 문헌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후대의 것으로 분류되는 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4. 어학적 고찰

4.1. 표기법
『반야심경언해』는 같은 해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책인 『선종영가집언해』,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등에 견주어 볼 때 어떤 부분은 유사한 표기 양상을 보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변화된 표기 형태를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앞의 다른 세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대의 표기법에 가깝다.
이 책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을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방점표기
언해문에는 정음과 한자가 함께 쓰였는데, 한자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 한자음을 병기(倂記)했다. 방점은 언해문의 정음과 동국정운 한자음에만 표기하고, 본문과 약소 구결문의 쌍행(雙行)으로 된 정음구결에는 표기하지 않았다. 정음 구결에 방점을 찍지 않은 문헌은 『활자본 능엄경언해』(1461년 간행) 이후에 간행된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간경도감본 전부는 방점이 없는 구결이 쌍행으로 되어 있다.
2) 한자음 표기
언해문의 한자에만 정음으로 독음(讀音)을 달았다. 동국정운 한자음이다. 하지만 구결이 달린 경(經)의 원문과 약소의 한자에는 한자음 독음이 없다. 한자음 독음이 언해문에만 달린 문헌은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 『활자본 능엄경언해』(1461년 간행) 이후에 간행된 책들이다. 간경도감 간행의 언해본들은 전부 여기에 해당된다.
3) ‘ㅸ’
‘ㅸ’은 쓰이지 않았다. 이 책에는 겸양법 선어말어미의 쓰임이 없어서 ‘ㅸ’이 분포할 만한 환경이 드물기는 하지만, 어휘 내부에서는 물론 용언 활용형에서도 쓰임이 없다. 아래의 예에서와 같이 ‘ㅸ’은 이 문헌에서 ‘오, 우’로 바뀌어 실현되었다.
(1) ㄱ. 어드운〈8ㄱ〉, 즐거운〈24ㄴ〉, 더러운〈41ㄱ〉, 두려우며〈56ㄴ〉, 조외며〈8ㄱ〉 등
ㄴ. 외〈40ㄴ〉/ 외야〈67ㄱ〉, 오리〈62ㄴ〉
ㄷ. 셔욼〈66ㄴ〉, 글워리니〈67ㄱ〉
4) ‘ㆆ’
‘ㆆ’은 주로 한자음 표기에 사용되었다. 고유어 표기에서는 아래 (2ㄱ)과 같이 사이글자로 쓰인 예가 있을 뿐이다.『반야심경언해』보다 앞선 시기의 문헌에 보이던 관형사형어미와 명사 통합형 ‘-ㅭ+전청자형’ 표기는 이 책에서 ‘-ㄹ+전탁자형’ 표기로 바뀌었다.
(2) ㄱ. 다  사교미라〈11ㄴ〉 /  사교 이 마 心經일〈19ㄱ〉
ㄴ. 아롤 꼬디 아닐〈65ㄴ〉
ㄷ. 홀띠니〈30ㄴ〉, 아니홀띠니라〈65ㄴ〉
5) ‘ㅿ’
‘ㅿ’은 대부분의 출현 환경에서 그대로 쓰였다. 어휘 내부에서는 물론, 체언의 곡용과 용언의 활용 등 형태소 경계에서도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 문헌에는 (3ㄹ)과 같이 강세 보조사 ‘’의 쓰임이 빈번한 편이다.
(3) ㄱ. 처믄〈19ㄴ〉, 〈55ㄱ〉, 두번〈67ㄱ〉, 오〈62ㄱ〉
ㄴ. 〈34ㄴ〉 / 〈66ㄱ〉 / 〈57ㄱ〉
ㄷ. 니〈25ㄴ〉, 아〈34ㄴ〉, 지미니〈44ㄱ〉, 나가〈19ㄴ〉
ㄹ. -야〈28ㄱ〉, 브터〈34ㄱ〉
6) 각자병서(各自竝書)
이 문헌에 각자병서는 ‘ㄲ, ㄸ, ㅆ, ㆅ’이 보인다. ‘ㅃ, ㆀ, ㅥ’은 쓰이지 않았다. (4ㄱ), (4ㄴ)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 흔히 보이던 각자병서 표기이고, (4ㄷ) ~ (4ㅁ)은 동명사어미 ‘-ㄹ’ 다음에서 실현된 각자병서 표기이다.
(4) ㄱ. 말미〈8ㄱ〉
ㄴ. 두르-[廻]〈11ㄴ〉, 드위-[飜]〈17ㄴ〉, -[引]〈41ㄱ〉
ㄷ. 아롤 꼬디〈65ㄴ〉
ㄹ. 홀띠니〈30ㄴ〉
ㅁ. 갈씨라〈66ㄱ〉, 뫼홀씨니〈23ㄱ〉, 두플씨니〈23ㄱ〉
7) 합용병서(合用竝書)
합용병서는 ‘ㅼ ㅽ ; ㅳ ㅄ ; ㅴ’ 등이 쓰였으나 ‘ㅺ, ㅻ, ㅶ, ㅷ, ㅵ’은 보이지 않는다. ‘ㅻ’은 다른 간경도감본에서도 그 예가 없으니 ‘ㅻ’을 제외한 그 외는 해당하는 어휘가 없는 공백이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5) ㄱ. [ㅼ] 〈20ㄱ〉, ㅎ〈36ㄱ〉, 〈62ㄱ〉
ㄴ. [ㅽ] -[速]〈8ㄴ〉 / 리〈66ㄱ〉, 〈51ㄴ〉
ㄷ. [ㅳ] 건내-[速]〈62ㄱ〉, [義]〈29ㄴ〉
ㄹ. [ㅄ] -[用]〈21ㄴ〉
ㅁ. [ㅴ] -[貫穿]〈8ㄴ〉, [俱]〈36ㄴ〉
8) 종성표기
이 문헌의 종성표기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 규정에 충실하다. 8종성 이외의 다른 예는 없다. 『금강경언해』 등 다른 간경도감본 문헌에 흔히 보이는 ‘ㅿ’이 여기서는 쓰이지 않았다.
(6) ㄱ. 긋-(〈긏-[斷]) : 긋니〈51ㄱ〉
 닛-(〈닞-[忘]) : 닛고〈63ㄴ〉
 -(〈-[愛]) : 오니〈63ㄴ〉
ㄴ. 낟-(〈낱-[現]) : 낟고〈34ㄱ〉
ㄷ. 깁-(〈깊-[深]) : 깁고〈12ㄱ〉
ㄹ. 숫(〈[炭]) : 숫 외〈40ㄴ〉
 닷-(〈-[修]) : 닷니〈51ㄱ〉
 업-(〈없-[無]) : 업디〈11ㄴ〉
이 책에는 공손법 선어말어미 ‘--’의 쓰임이 없어서 초성에 쓰인 ‘ㆁ’의 예는 드물다. 하지만 종성에 ‘ㆁ’이 올 경우에 분철하기도 하고 연철하기도 했다. 각각 하나씩의 예가 있다.
(7) ㄱ. 이 지츠로〈67ㄱ〉, 관(管) 대로니〈67ㄴ〉
9) 사이글자 표기
사이글자 표기는 대부분 ‘ㅅ’으로 단일화하였다. 그러나 아래 (8ㄴ)의 경우처럼 예외적으로 ‘ㅭ’이 쓰인 경우가 있다.
(8) ㄱ. 呪ㅅ 말(呪詞)〈64ㄱ〉, 經文ㅅ 〈33ㄴ〉, 菩提ㅅ 果德〈14ㄴ〉, 後ㅅ 卽說〈19ㄴ〉
ㄴ.  사교미라〈11ㄴ〉 /  사교〈19ㄱ〉
10) 한자음 표기 주019)
자세한 내용은 정우영(1995: 108 ~ 111) 참조.
『반야심경언해』에는 한자어를 정음만으로 표기한 예가 상당수 보인다. 이 어휘들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부터 정음으로 많이 적혔던 예들인데, 당시에 이미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녜’는 초기 문헌부터 자음동화(子音同化)된 형태로 적혔다.
(9) 녜(常例)〈7ㄴ〉, 간(暫間)〈8ㄱ〉, (將次)〈11ㄱ〉, (衆生,禽)〈65ㄴ〉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는 정음으로 적혔으나, 이 책에서 한자로 적힌 예도 있다.
(10) 미혹(迷惑, 미혹)〈8ㄴ〉, 수고(受苦, 슈고)〈8ㄴ〉, 위-(爲-, 위-)〈19ㄴ〉, 중생(衆生, )〈21ㄴ〉, 지극(至極, 지극)〈17ㄴ〉, 진실(眞實, 진실)〈7ㄴ〉

4.2. 문법

1) 문법의 특성 요약
대부분의 초기(初期)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가 그러하듯 『반야심경언해』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 이른바 직역 위주 번역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책의 경 본문 언해는 설화자가 독자에게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고, 약소(略疏) 언해는 설화자가 독자에게 해설을 하거나 화자가 청자에게 경 본문의 대강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문법 형태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같은 형태의 곡용어미나 활용어미가 반복해서 출현하는가 하면, 종결어미는 주로 평서형의 ‘-니라’ 주020)
고영근(1987)은 평서형 종결어미의 설명에서 ‘-니라’를 ‘-다’보다 보수성을 띤 어미로 다루었다.
로 끝맺고 있다. 또 불교 용어 등의 한자 어휘에는 낯선 낱말들이 더러 보이나, 고유어에서는 이른바 희귀어나 난해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경어법 선어말어미 중 존경법의 ‘-으시/으샤-’ 이외에 겸양법 선어말어미 ‘-/-, -/-, -/-’이나 공손법 선어말어미 ‘--, --’의 쓰임이 없고,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도-’만 쓰이는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종결어미는 평서형 중심으로 되어 있으나, 의문형, 명령형, 감탄형 구성도 간혹 볼 수 있다. 연결어미는 나열의 ‘-고/오’, 병렬의 ‘-며’ 등이 주류를 이룬다. 약소(略疏) 언해는 항목 나열식 구성이 많아서 수사(數詞)의 쓰임이 활발한 편이고,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파생어의 산출은 매우 생산적이다. 여기에서는 단어의 형성, 품사, 체언의 곡용, 용언의 활용, 종결어미, 연결어미 등 『심경』의 문법적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문법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주021)
중세국어의 전반적인 문법 현상은 허웅(1975), 고영근(1987), 안병희 · 이광호(1990)를 참고하였다.
2) 단어의 형성
단일어는 제외하고 복합법과 파생법에 의해 이루어진 단어들의 구성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가) 복합어
합성어 중 복합어의 용례는 드문 편이다. 다만 동사 주022)
본고에서의 동사는 동작 동사(active verbs)는 물론이고 상태동사(qualitive verbs)까지를 포괄하는 술어이다.
의 경우에는 몇몇 예에서 다양한 합성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1) ㄱ. 나가-[就]〈8ㄴ, 17ㄱ, 17ㄴ, 19ㄴ, 21ㄱ, 28ㄱ, 40ㄱ, 42ㄱ…〉, 흘러가-[流]〈12ㄱ〉, 내-[引出]〈41ㄱ〉, 건내-[超]〈62ㄱ〉
ㄴ. 몯얫-〈40ㄴ〉, 尙얫-〈66ㄴ〉, 두쇼〈29ㄱ〉
ㄷ. 모도잡-[統]〈17ㄴ〉, 니-[游]〈67ㄱ〉
ㄹ. 일훔짛-[爲号]〈25ㄴ〉
(1ㄱ)은 ‘동사어간 + 부동사어미 -아/어 + 동사어간’형의 복합동사인데, 약소문(略疏文)의 성격상 ‘就~釋’의 구문이 많아서 ‘나가-’의 출현이 빈번하다. (1ㄴ)은 파생동사어간 ‘몯-’와 ‘尙-’에 부동사어미 ‘-야’가 오고 여기에 존재사 ‘잇-[有]’이 합성된 것으로 완료상태를 표시한다. 주023)
복합동사 구성은 아니지만 ‘이시-’에서 ‘이’가 탈락한 ‘외야 실〈25ㄴ〉’ 구성도 보인다.
‘두쇼-’는 특이하게도 동사어간 ‘두-[置]’와 존재사 ‘이시-’의 ‘시-’가 합성한 것이다 주024)
‘두-’와 ‘잇-’이 합성한 용례로 ‘뒷 『석 9:11』, 뒷관 『월석21:118』, 뒷다 『법3:97』’ 등이 보이고, ‘두-’와 ‘시-’이 합성한 것으로는 ‘둣거니 『남명하:48』, 둣니 『박초상:65』’ 등이 보인다. 이기문(1972:146) 참조.
(1ㄷ)은 ‘동사어간 + 동사어간’형 복합동사이고 주025)
‘니-’와 같은 유형의 합성어로는 ‘걷니-[步]’, ‘니-[飛]’, ‘노니-[遊]’, ‘사니-[生]’ 등이 있는데, 이 책에 다른 용례는 없다. ‘니-’는 같은 시기에 동화되지 않은 ‘니-’로도 쓰였다.
(1ㄹ)은 ‘체언 + 동사어간’형 복합동사이다.
(2) ㄱ. 간[乍]〈8ㄱ〉
ㄴ. 두[再三]〈67ㄱ〉
ㄷ. 녀나[餘]〈62ㄱ〉
(2ㄱ)은 한자어에서 왔으나 한자어라는 의식이 엷어져 정음문자(正音文字)로 표기된 복합명사이고, (2ㄴ)은 수관형사끼리 결합하여 부정 수관형사가 된 것이다. (2ㄷ)은 좀 특이한 경우이다. 체언 ‘녀느[他]’와 ‘남다’의 관형사형 ‘나’이 결합하여 합성관형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주026)
여기에서 ‘녀나’은 ‘十餘’의 의미가 아니고 ‘다른[他餘]’의 의미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추정한 것이다. ‘十餘’의 의미로 쓰인 합성관형사는 ‘여라/여라믄’이었다(여라 『구급하:62』 / 여라믄 『박초상:2』). 허웅(1975:105, 115) 참조.
나) 파생어
파생어는 접두사에 의한 것은 드물고 주로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에 의한 동사형성이 활발하다.
(1) 둘찻〈12ㄴ, 40ㄴ〉, 세찻〈14ㄱ, 40ㄴ〉, 네찻〈14ㄴ〉, 다찻〈19ㄱ〉
기수사(基數詞)에 접미사 ‘-찻’이 붙어 관형사적인 용법에 쓰인 서수사(序數詞)이다. ‘나찻’은 중세국어 문헌에서 문증(文證)되지 않고 이 책에서는 이 경우에 ‘처’이 쓰였다.
(2) ㄱ. 글월〈67ㄱ〉
ㄴ. 처〈11ㄴ, 14ㄴ, 17ㄱ, 19ㄴ, 40ㄱ, 41ㄱ
접미사 ‘-월(〈-)’과 ‘-엄’에 의한 명사 파생어이다. (2ㄱ)은 명사 ‘글’에 접미사 ‘-’이 결합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글왈’로도 쓰였다. 이런 유형의 파생어에는 ‘빗발, 발, 긧발’ 등이 있다. (2ㄴ)은 관형사 ‘첫’에 접미사 ‘-엄’이 결합한 것인데, 동사어기에 ‘-암/엄’이 결합한 파생어는 ‘무덤, 주검’ 등에서 볼 수 있으나 관형사에 의한 것은 희소하다.
(3) 체언 어기에 ‘--’가 붙은 파생동사는 그 예가 상당수 보이나 한자어에 기울었다. 이는 『심경』이 직역 위주의 언해서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나타나는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27)
중출(重出)인 경우에는 먼저 나오는 것 하나만을 제시한다. 나머지는 색인을 참조.
 引導-〈8ㄴ〉, 微妙-〈8ㄴ〉, 일훔-〈8ㄴ〉, 重-〈12ㄱ〉, 觀-〈14ㄴ〉, 至極-〈17ㄴ〉, 玄微-〈17ㄴ〉, 證-〈17ㄴ〉, 滅-〈19ㄴ〉, 爲-〈19ㄴ〉, 通達-〈20ㄴ〉, 自在-〈20ㄴ〉, 求-〈21ㄴ〉, 空-〈22ㄱ〉, 得度-〈22ㄴ〉, 現-〈22ㄴ〉, 麤-〈24ㄴ〉, 變-〈24ㄴ〉, 細-〈24ㄴ〉, 究竟-〈24ㄴ〉, 果證-〈24ㄴ〉, 得-〈24ㄴ〉, 노-〈25ㄴ〉, 因-〈25ㄴ〉, 疑心-〈27ㄴ〉, 取-〈29ㄴ〉, 斷滅-〈29ㄴ〉, 害-〈33ㄴ〉, 斷-〈33ㄴ〉, 實-〈33ㄴ〉, 顯-〈34ㄱ〉, 卽-〈34ㄴ〉, -〈34ㄴ〉, 住-〈36ㄴ〉, 平等-〈37ㄱ〉, 生-〈38ㄴ〉, 果得-〈41ㄱ〉, 減-〈44ㄱ〉, 增-〈44ㄱ〉, 緣-〈44ㄴ〉, 對答-〈53ㄱ〉, 正-〈59ㄱ〉, 等-〈59ㄱ〉, 能-〈59ㄱ〉, 結-〈59ㄱ〉, 讚歎-〈59ㄱ〉, 牒-〈59ㄴ〉, 神奇-〈59ㄴ〉, 虛-〈61ㄴ〉, 盛-〈63ㄴ〉, 一定-〈63ㄴ〉, 眞實-〈63ㄴ〉, 秘密-〈65ㄴ〉, 尙-〈66ㄴ〉, 靑白-〈66ㄴ〉, 簡略-〈66ㄴ〉
(4) 부사에 ‘--’가 붙는 파생동사의 예도 산견된다. 상태동사 어간형성일 경우가 많다.
 -〈11ㄴ〉, 몯-〈17ㄴ〉, 아니-〈14ㄴ, 28ㄱ〉,
 덛덛-[常]〈57ㄱ〉, -[齊]〈62ㄱ〉
‘’은 『용가』, 『월곡』 등에서 부사로 쓰인 예가 있다. ‘아니’는 같은 시기에 명사로도 쓰였는데, 이 책에도 용례(아니〈38ㄱ〉)가 보인다. ‘덛덛’과 ‘’은 어근이 불확실하지만 이 범주에 포함시킨다. 다만 ‘덛덛’은 체언으로 쓰인 한 예가 있다(덛더든 거슬 『능엄1:85』).
(5) 사동어간 형성은 동사어기에 접미사 ‘-기-, -이-, -ㅣ-, -오-, -우-, -호-’가 결합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ㄱ.  숨기고 (隱他고)〈34ㄴ〉
ㄴ. 秘密般若 기시니 (明秘密般若시니)〈19ㄴ〉
ㄷ. 일후믈 셰시니라 (立名시니라)〈17ㄱ〉
 等 正覺 뵈샤 나토시논 젼라 (示現等正覺故ㅣ라)〈62ㄴ〉
ㄹ. 닐오 般若 이 나토샨 法이오 (般若等은 是所顯之法이오)〈17ㄱ〉
ㅁ. 나 리고  일우 디니 (廢己고 成他義니)〈34ㄱ〉
ㅂ. 이 마초건댄 (准此컨댄)〈33ㄴ〉
사동어간 형성의 접미사 ‘-기-’는 선행동사의 어간 말음이 ‘ㅁ, ㅅ’일 때 나타나고, ‘-이-’는 어간 말음이 ‘ㅊ, ㅸ ; ㅿ, ㄹ’일 때 나타난다. 어간 말음이 ‘ㅿ’이면 반드시 분철하고 ‘ㄹ’이면 대부분 분철한다. 또 어간 말음이 모음일 때는 ‘-ㅣ-’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셰-’와 ‘기-’의 쓰임이 흔하다.
(6) 피동어간 형성은 동사어기에 접미사 ‘-히-’가 결합한 ‘자피-(〈잡+히-)’가 있을 뿐이다. ‘-히-’는 선행동사의 말음이 ‘ㅂ, ㄷ, ㄱ, ㅈ’일 때 나타나서 유기음화 된다.
 둘흔 藏애 자표미오 (二 藏攝이오)〈11ㄴ〉
(7) 상태동사 어간 형성은 체언어기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와 동사어기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로 나뉘는데, 이 책에는 각각 하나씩의 용례가 있다.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는 동사어기에 접미사 ‘-브-’가 결합한 ‘저프-(〈젛+브-)’ 한 예(例)만이 눈에 띈다.
 밧긔 魔怨 저푸미 업스니 (外無魔怨之怖니)〈55ㄴ〉
상태동사 어간 형성 중 체언에서 파생한 것에는 체언어기에 ‘-외(〈-)’가 결합한 ‘조외-’가 보인다. 중세국어에서 ‘조[要] 『능엄2:95』’은 명사로 쓰였다. 어기의 끝 ‘ㄹ’은 ‘-’ 위에서 탈락되었다.
 要 조욀씨라〈8ㄱ〉
(8) 파생부사도 체언어기에 접미사가 결합한 형태와 용언어기에 접미사가 결합한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매우 생산적이어서 다양한 용례를 보인다.
ㄱ. 명사에 접사화한 조사 ‘-로’가 붙어서 파생된 것.
 實로〈8ㄱ〉, 眞實로〈8ㄱ〉, 젼로〈19ㄴ〉
ㄴ. 지시대명사 ‘이, 그, 뎌’에 연격(沿格)조사 ‘-리’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그리〈66ㄱ〉
ㄷ. 파생동사어간 ‘-’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결합시에 ‘ㆍ’ 는 탈락된다. 이 책에는 한자어의 예만 보인다.
 神奇히〈8ㄴ〉, 微妙히〈17ㄴ〉, 秘密히〈19ㄴ〉, 正히〈27ㄴ〉, 純히〈41ㄱ〉, 永히〈57ㄱ〉, 究竟히〈57ㄱ〉, 能히〈62ㄱ〉
ㄹ. 용언어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두려이[두렵-, 圓]〈8ㄱ〉, 져기[젹-, 少]〈12ㄱ〉, 기[-, 明]〈19ㄴ〉, 너비[넙-, 廣]〈19ㄴ〉, 티[-, 同]〈22ㄴ〉/히[-, 如]〈59ㄱ〉, 머리[멀-, 遠]〈24ㄱ〉, 니르리[니를-, 至]〈67ㄱ〉
 체언어기 ‘브즈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부사로 파생된 특이한 용례도 있다.
 브즈러니[브즈런-, 殷勤]〈67ㄱ〉
ㅁ. 동사어기에 접미사 ‘-오’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오로[올-, 全]〈34ㄴ〉, 도로[돌-, 還]〈49ㄴ〉
부사 ‘오로’는 같은 시기에 ‘올-’의 변이형 ‘오-’에서 파생된 ‘오로’가 쓰이기도 했다.
ㅂ. 동사어기에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아/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버거[벅-, 次]〈20ㄱ〉, :다[다-, 皆]〈23ㄱ〉, 비르서[비릇-, 方] 주028)
비르서[비릇-, 方]:
‘비릇-’은 체언 ‘비릇’에서 영변화(零變化)에 의해 파생된 용언이지만 체언에 ‘-아/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부사가 없으므로 용언어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34ㄱ〉
이 책에 그 용례가 많은 ‘:다’는 ‘다-’에 ‘-아’가 붙은 것인데 활용형과 형태상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주029)
허웅(1975:81), 고영근(1987:159) 참조. 허웅(1975:81)에서는 활용형과 파생부사가 구분되는 것으로 ‘滅와 生괘 다 다아(滅生俱盡) 『능엄4:69』’를 제시한 바 있다.
이 외에 동사어기가 그대로 부사로 파생된 이른바 어간형 부사 ‘초[초-, 具]〈12ㄱ〉, [-, 達]〈23ㄴ〉’도 보인다.
(9)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어’에 의한 파생어로 조사 ‘-브터’도 있는데, ‘-브터’는 동사 ‘븥-[附]’에 ‘-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이다. ‘-브터’는 흔히 대격조사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미 문법화한 (9ㄱ)과 아직 실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9ㄴ)으로 나눌 수 있다.
ㄱ. 舍利子 色不異空브터 아랜 (從舍利子 色不異空下)〈19ㄴ〉
 이브터 아랜 (自下)〈24ㄴ, 63ㄴ〉
ㄴ. 義를브터 (依義야)〈17ㄱ〉, 브터 (於依他)〈44ㄱ〉
3) 체언
가) 명사
이 책에는 명사가 곡용할 때 명사어간이 자동적으로 교체하는 이른바 ‘ㅎ말음체언’들이 보이는데, 이 책의 ‘ㅎ말음체언’은 주로 ‘ㄹ’받침을 가진 명사와 모음으로 끝난 명사에서 두드러진다. 또 음절말 자음의 제약에 의해 자동적 교체를 하는 명사들도 보인다. 여기서는 곡용에 의해 어형이 바뀌는 명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ㄱ. ‘ㅎ’말음체언의 예
 둘[二]〈7ㄴ〉, 길[道]〈8ㄴ〉, 나[一]〈11ㄴ〉, 세[三]〈14ㄴ〉, 네[四]〈11ㄴ〉, [等]〈34ㄱ〉, 우[上]〈48ㄱ〉, 안[內]〈56ㄱ〉
ㄴ. 자동적 교체를 하는 명사의 예
 [外]〈29ㄱ, 55ㄴ〉, 앒[前]〈17ㄴ, 53ㄱ〉, [邊]〈17ㄴ, 34ㄴ〉, 곶[花]〈67ㄱ〉, 짗[羽]〈67ㄱ〉
비자동적 교체를 하는 명사류는 ‘나모〈40ㄴ〉’가 쓰였을 뿐이다.
(2) 특이한 곡용을 하는 체언이 있다. 명사어간 말음이 모음 ‘이’인 경우인데, 속격조사 ‘의’를 만나면 어간 말음 ‘이’를 탈락시킨다.
ㄱ. 蹄 톳긔 그므리니〈7ㄴ〉
ㄴ. 아 어믜 일후믈 니니라〈25ㄴ〉
이러한 곡용을 하는 체언에는 ‘아비[父], 늘그니[老人]’ 등이 있다. 주030)
‘어미, 아비’는 소급형이 ‘엄, 압’이어서 속격형이 위 (2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겠으나, 공시적으로는 다른 어휘와 마찬가지로 ‘이’가 탈락한 형태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가 탈락하지 않은 채 속격조사와 결합한 예도 중세국어 문헌에 보이고(아비의 『법화2:138』), ‘톳기’의 속격형은 ‘톳 『두초24:25』, 『금삼 4:36』’로 나타나기도 한다.
(3) 의존명사는 보편성 의존명사의 예로 ‘곧〈8ㄴ〉’, ‘젼〈11ㄴ〉’, ‘이(믜우니〈63ㄴ〉, 오리〈62ㄱ〉)’, ‘〈51ㄴ〉’ 등이 있고, 서술성 의존명사로는 ‘〈62ㄱ〉’, 단위성 의존명사로 ‘번〈57ㄱ〉’ 등이 보인다. 부사성 의존명사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4) 의존명사 ‘, ’는 계사나 조사와 결합하여 통사적 기능을 나타낸다.
ㄱ. ‘’는 동명사어미 ‘-ㄹ’에 후행하는데 계사나 주격조사 앞에서는 모음 ‘ㆍ’를 탈락시킨다. 이 책에는 주격조사와의 통합은 보이지 않는다. ‘, 시’가 ‘-ㅭ’의 영향으로 된소리가 되어 구결문의 ‘-ㄹ/ㄹ시’가 언해문에서는 모두 ‘-ㄹ/ㄹ씨’로 바뀐다.
 몯〈19ㄴ〉, 기실〈27ㄴ〉
 외실씨라〈24ㄴ〉, 브틀씨오〈54ㄱ〉
ㄴ. ‘’는 동명사어미 ‘-ㄴ, -ㄹ’에 후행하는데 ‘’와 마찬가지로 계사나 주격조사 앞에서는 모음 ‘ㆍ’를 탈락시킨다. ‘로’는 의존명사 ‘’와 구격조사 ‘-로’의 통합형이다.
 空혼디 아니니〈27ㄴ〉, 空〈23ㄱ〉
 브튼 업수미〈34ㄴ〉, 브툰디라〈44ㄱ〉
 이런로〈8ㄴ, 19ㄱ〉,
 홀띠니〈33ㄴ〉, 아롤띠니라〈59ㄴ〉
나) 대명사
이 책에서 인칭대명사는 단수에서 1인칭의 ‘나’, 2인칭의 ‘너’, 재귀대명사 ‘저’, 복수에서 1인칭 ‘우리’ 등이 보인다.
(1) ㄱ. ·내 숨고〈34ㄴ〉 / 나와〈34ㄴ〉
ㄴ. 네 宗〈27ㄴ〉
ㄷ. :제 空혼디 아니니〈27ㄴ〉
ㄹ. 우리 小乘 中에〈27ㄴ〉
중세국어 인칭대명사의 주격형과 속격형은 성조로 구별되었다. 1인칭의 주격형과 속격형은 모두 ‘내’인데 성조는 주격형이 거성, 속격형이 평성이었으며, 2인칭은 ‘네’인데 주격형은 상성, 속격형은 평성이었다. 재귀대명사는 ‘제’인데 곡용은 2인칭 ‘네’와 같았다. 따라서 (1ㄱ), (1ㄷ)은 주격형이고, (1ㄴ)은 속격형이다.『심경』에서는 위에 든 예 이외에 다른 형태의 인칭대명사 및 의문대명사의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2) ㄱ. 기픈 디 이 니신뎌〈8ㄱ〉, 이와 엇뎨 다료〈27ㄴ〉
ㄴ. 뎌의 疑心을 그츠시며〈29ㄴ〉, 뎌와 이왜〈62ㄱ〉
중세국어에서는 ‘이, 그, 뎌’가 그대로 지시대명사로 기능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가 대명사로 쓰인 예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지시대명사로 ‘예〈56ㄴ, 57ㄴ, 58ㄴ〉’, ‘이〈8ㄴ, 40ㄱ, 53ㄱ〉’, ‘뎌〈40ㄱ〉’ 등이 보인다.
다) 수사
서두에서 밝힌 대로 『심경』에는 항목 나열식의 설명이 많아서 수사의 쓰임이 활발한 편이다. 그 목록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ㄱ. 기수사(基數詞)
 나ㅎ〈11ㄴ〉, 둘ㅎ〈11ㄴ〉, 세ㅎ〈11ㄴ〉, 네ㅎ〈11ㄴ〉, 다〈12ㄱ〉, 여슷〈12ㄱ〉, 닐굽〈12ㄱ〉, 여듧〈12ㄱ〉, 아홉〈12ㄱ〉, 열ㅎ〈12ㄱ〉
ㄴ. 서수사(序數詞)
이 책에서 서수사는 한자로 적혔다. 다음에서 앞의 두 예(例)는 언해문, 뒤의 세 예(例)는 구결문의 예이나 주로 구결문에서 보인다.
第一〈25ㄴ〉, 第二〈24ㄴ〉, 第三〈13ㄱ〉, 第四〈14ㄴ〉, 第五〈18ㄱ〉
ㄷ. 기수사의 관형어적 용법
 〈17ㄱ〉, 두〈34ㄴ〉, 세〈29ㄱ〉, 네〈27ㄴ〉, 다〈47ㄱ〉
ㄹ. 서수사의 관형어적 용법 주031)
2절 나)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찻’은 중세국어 문헌에서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이 경우에 ‘처’이 쓰였다.
 둘찻〈12ㄴ〉, 세찻〈14ㄱ〉, 네찻〈14ㄴ〉, 다찻〈19ㄱ〉
ㅁ. 합성수사
 두〈67ㄱ〉
ㅂ. 한자어계 기수사
이 책에서 한자어계 기수사는 주로 관형어적 용법에 쓰였다.
二十萬〈8ㄱ〉, 一十四〈8ㄱ〉, 十二〈47ㄱ〉, 十八〈48ㄱ〉, 三〈48ㄱ〉, 十〈62ㄱ〉, 數千萬〈67ㄱ〉
4) 수식어
가) 관형사
관형사는 다시 성상관형사, 지시관형사, 수량관형사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 목록만 제시한다.
(1) ㄱ. 성상관형사
 거즛〈8ㄱ, 33ㄴ, 44ㄴ〉, 엇던〈62ㄱ, 66ㄱ〉
ㄴ. 지시관형사
 이〈53ㄱ〉, 그〈24ㄴ, 25ㄴ〉, 뎌〈22ㄴ, 25ㄴ〉
 녀나 주032)
녀나:
합성관형사 ‘녀나’의 형성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주 26) 참조.
〈62ㄱ〉
ㄷ. 수량관형사
수량관형사는 수사와 같은 형태가 많은데, 전술한 수사 중 (1ㄷ), (1ㄹ), (1ㅁ)은 그대로 수량관형사로 기능하였다. 그 외의 것으로는 ‘첫〈49ㄱ〉’, ‘여러〈27ㄴ〉’ 등이 보인다.
나) 부사
부사는 성분의 의미를 제한하는 성분부사와 문장 전체의 의미를 제한하는 문장부사로 나눌 수 있다.
(1) 성분부사
성분부사는 후행 성분과의 의미 관계를 중심으로 다시 성상, 지시, 부정부사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책에 부정부사의 용례는 없다. 여기서는 몇몇 예만 제시한다.
ㄱ. 성상부사
 다〈8ㄱ〉, 믄득〈19ㄴ〉, 져기〈19ㄴ〉, 곧〈28ㄱ〉, 오로 주033)
오로:
같은 시기에 ‘오로’와 수의변이형 ‘오로’가 함께 쓰였는데, ‘오로’는 형용사 ‘올-[全]’에서, ‘오로’는 ‘오-[全]’에서 각각 접미사 ‘오’에 의해 부사로 파생된 것이다. 후대 문헌에는 ‘오로’보다 ‘오로’가 더 많이 나타난다. 이 책에서 형용사는 ‘오-’이 쓰였고, 부사는 ‘오로’만 한 번 보일 뿐이다.
〈34ㄴ〉, 모다〈34ㄴ〉, 비르서〈36ㄴ〉, 마〈40ㄴ〉, 오직〈41ㄱ〉, 비록〈42ㄱ〉, 두루〈44ㄱ〉, 어루〈44ㄱ〉, 도로〈49ㄱ〉, 몬져〈51ㄱ〉, 일즉〈53ㄱ〉, 티〈22ㄴ, 53ㄱ〉 / 히〈59ㄱ〉, 너비〈66ㄱ〉
ㄴ. 지시부사
 엇뎨〈27ㄴ〉, 그리〈66ㄱ〉
ㄷ. 부정부사
 용례 없음.
(2) 문장부사
문장부사는 문장 전체의 의미를 한정하여 주는 기능을 가진 성상의 문장부사와, 의미와 관계없이 두 문장을 연결해 주는 접속의 문장부사로 나뉜다.
ㄱ. 성상문장부사
 實로〈8ㄱ〉, 眞實로〈8ㄱ〉, 반기〈24ㄴ, 33ㄴ〉
ㄴ. 접속문장부사
 이런로〈8ㄴ〉, 그러면〈8ㄴ〉, 〈28ㄱ〉, 다가〈33ㄴ〉, 비록〈42ㄱ〉, 그러나〈42ㄱ〉
5) 격조사
가) 주격조사
주격표지는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선행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이, ㅣ, ∅’로 실현되었다. 다만 구결문에서는 주격조사 ‘∅’가 실현된 환경에서 ‘ㅣ’가 나타나는데, 이런 표기는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구결문에만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독서의 편의를 위한 배려로 생각된다. 당시의 언해 관여자는 ‘∅’임을 인식하였으면서도 독서 능률 향상을 위한 표기상의 배려로 ‘ㅣ’표기를 취한 것으로 추정한다.
(1) ㄱ. 체언의 끝소리가 자음일 때 : ‘이’
 구결문 : 色이〈25ㄴ, 36ㄱ〉, 空이〈36ㄱ〉
 언해문 : 사미〈21ㄴ〉, 미〈67ㄱ〉
ㄴ.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 이외의 모음일 때 : ‘ㅣ’
 구결문 : 空假ㅣ〈36ㄱ〉, 忠孝ㅣ〈66ㄱ〉
 언해문 : ·내〈34ㄴ〉, :제〈29ㄴ〉
ㄷ.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일 때, 구결문 : ‘ㅣ’, 언해문 : ‘∅’
 구결문 : 二諦ㅣ〈3ㄱ〉, 是二ㅣ〈37ㄴ〉
 언해문 : 二諦 녜 이시며〈7ㄴ〉 (二諦ㅣ 恒存며〈3ㄱ〉) 이 둘히 둘 아니 일후미 空相이라 시니라 (是二ㅣ 不二 名爲空相이라 시니라〈38ㄱ〉)
(1ㄴ) 언해문의 ‘:제(〈저+·ㅣ)’는 체언의 말음절 평성이 조사 ‘ㅣ’와 결합하여 상성으로 성조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경우 체언의 말음절이 거성이거나 상성이면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1ㄷ)의 언해문에서도 고유어인 경우에는 체언의 말음절이 평성이면 앞에서와 같은 성조의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 책에는 그러한 용례가 없다. 주034)
인칭대명사의 곡용에 따른 성조의 차이와 주격조사의 생략과 관계된 성조의 변동에 대해서는 안병희·이광호(1990:153~154, 162~164)를 참조할 것. 참고로 중세국어에서 주격조사의 생략으로 성조변동(평성→상성)이 일어난 명사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節], :[梨], :리[橋], 너:희[汝等], 고:래[鯨], 누:위[妹], 그:듸[2인칭 대명사 子, 公]
그런가 하면 (1ㄷ)의 환경에서 구결문은 ‘∅’인데 언해문에서는 ‘ㅣ’가 실현된 예외적인 표기(2ㄱ)도 눈에 띈다. 협주에서는 (1ㄷ)의 환경에서 ‘ㅣ’가 실현되었는데(2ㄴ), 체언과 용언을 구별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기로 생각된다.
(2) ㄱ. 오 體ㅣ 空 아닌댄〈34ㄱ〉 (擧體非空인댄〈30ㄴ〉)
ㄴ. 知ㅣ 滅니〈28ㄱ : 협주〉
(1ㄷ)의 환경에서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주격조사가 생략된 것도 있다. 이는 구결 작성 단계부터 ‘ㅣ’를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 理 一十四行애 다니〈8ㄱ〉 (理盡一十四行니〈5ㄱ〉)
표기상의 주격조사 생략 외에 이른바 부정격(不定格) 조사(infinitive case)에 해당하는 예가 이 책에도 보인다. 특히 ‘없다[無]’ 앞에서 두드러진다. 주035)
이 책에는 ‘없-[無]’ 앞에서 주격조사가 생략된 구문이 많이 보이는데, (4ㄴ)의 경우는 주격조사가 생략된 구문으로 다루어도 문제가 없겠으나, ‘道업스며 果업숨히라〈34ㄱ〉, 得업다〈53ㄱ〉’와 같은 구문은 ‘없-’이 접사로서 앞의 명사와 결합한 파생어 구성이거나 ‘체언’과 ‘없-’이 복합한 복합어 구성이라고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4) ㄱ. 因緣 젹디 아니야〈11ㄴ〉
ㄴ. 룜 업스실〈20ㄴ〉, 生滅 업스니라〈44ㄱ〉
보격조사가 생략된 구문도 보인다. 보격조사는 주격조사와 동일한 곡용을 하므로 이 논의에서 따로 다루지 않고 생략된 구문만을 제시하는데 그친다.
(5) ㄱ. 空 아니면〈34ㄱ〉
ㄴ. 숫 외 니라〈40ㄴ〉
나) 서술격조사
주격조사와 비슷한 곡용을 하는 것으로 서술격조사(계사)가 있다.
(1) ㄱ. 체언의 끝소리가 자음일 때 : ‘이-’
 구결문 : 是大神呪等이니라〈59ㄴ〉
 언해문 : 知覺이라〈59ㄱ〉
ㄴ.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 이외의 모음일 때 : ‘ㅣ-’
 구결문 : 非幻色故ㅣ라〈30ㄴ〉
 언해문 : 오리 업슨 呪ㅣ라〈60ㄱ〉
ㄷ.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일 때 : ‘∅’
 구결문 : 敎義 一對니〈13ㄴ〉, 敎義 分二니〈15ㄱ〉
 언해문 : 二諦 眞諦와 俗諦라〈7ㄴ〉 / 般若 이 體니〈17ㄴ〉
서술격조사 경우는 주격조사와는 달리 (1ㄷ)의 환경에서 모두 ‘∅’이다.
(2) ㄱ. 宗 간 고 닐오 趣ㅣ니 (宗之所歸曰趣ㅣ니)〈14ㄱ〉
ㄴ. 예서 닐오매 知ㅣ라 (此云知라)〈58ㄱ〉
(2ㄱ)은 ‘∅’로 실현될 환경에서 ‘ㅣ’가 되었는데, 이는 ‘趣’의 동국정운 한자음 ‘·츙’에서 기인한다. (2ㄴ)은 표기상의 오류로 생각된다.
다) 대격조사
대격조사 ‘ㄹ’은 이형태로 ‘/을, /를’을 가진다. ‘/을’은 체언의 말음이 자음일 경우이고, ‘/를’은 체언의 말음이 모음일 때 나타나는데 ‘/을’, ‘/를’의 교체는 모음조화에 의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자음을 가진 음성모음 뒤에서 ‘’이 나타나고 ‘i, j’나 음성모음 뒤에서도 주로 ‘’이 쓰였다. ‘를’이 실현될 곳에는 대부분 ‘’이 나타나서 ‘를’은 (1ㄹ)의 두 용례뿐이다.
(1) ㄱ. 德〈12ㄱ〉, 障〈12ㄱ〉, 모〈24ㄴ〉
ㄴ. 悲願力을〈24ㄴ〉, 목수믈〈24ㄴ〉
ㄷ. 나〈34ㄱ〉, 어미〈25ㄴ〉, 後〈54ㄴ〉, 蹄〈7ㄴ〉
ㄹ. 義를〈17ㄱ〉, 有를〈29ㄴ〉
ㅁ. 고길〈7ㄴ〉, 톳길〈7ㄴ〉, 아랠〈46ㄱ〉
대격조사의 생략도 흔히 보인다.
(2) ㄱ.  이 經 사교매〈11ㄴ〉
ㄴ. 나 敎 니와샤미오〈11ㄴ〉
라) 속격조사
속격조사는 무정물(無情物)이나 유정물(有情物) 지칭의 존칭체언 뒤에 ‘ㅅ’으로 나타나고, 유정물 지칭의 평칭체언 뒤에는 ‘/의’와 ‘ㅣ’로 나타난다.
(1) ㄱ. 부텻 됴 德〈12ㄱ〉 / 菩薩ㅅ 깁고 너븐 行〈12ㄱ〉
ㄴ. 그믌 벼리라〈19ㄴ〉 / 세 가짓 般若로〈14ㄱ〉
ㄷ. 그 사 어미 노며 로미〈25ㄱ〉
ㄹ. 이 뎌의 아리라〈25ㄴ〉
ㅁ. 제 性이 本來 空야〈27ㄴ〉
속격조사도 생략된 예가 있는데, 이는 선행 체언 뒤에 속격조사가 나타나지 않는 명사구 구성의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ㅁ)의 ‘제’는 주격과 속격의 형태가 동일하나 성조는 서로 달라서 주격이면 상성, 속격이면 평성이 된다. (2)는 ‘이’나 ‘ㅣ’로 끝난 체언 뒤에서 속격조사가 생략된 예이다.
(2) ㄱ. 뎌 새 눈 〈25ㄴ〉
(2)ㄴ. 우리 小乘 有餘位 中에도〈27ㄴ〉 주036)
이 책에서 속격조사가 생략된 예는 위의 (2ㄱ), (2ㄴ)과 같이 ‘이’나 ‘ㅣ’로 끝난 체언 뒤에서만 보인다. 따라서 이는 부정격이라기보다는 표기상의 격조사 생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5세기 국어에서 종속절의 주어는 속격형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명사를 가진 내포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병희 · 이광호(1990:175)에서는 이러한 기능을 갖는 속격조사를 주어적 속격이라고 하였다.
(3) ㄱ. 마 나토온 고 닐오 宗이오〈14ㄱ〉
ㄴ. 宗 간 고 닐오 趣ㅣ니〈14ㄱ〉
이 책에는 속격의 자리에 주격을 쓴 것이 있다.
羽儀  이 지츠로 威儀 사씨라〈67ㄱ〉
마) 처격조사
이 책에서 처격조사 ‘애/에/예, /의’는 서로 상보적 분포를 이루고 있다. ‘애/에’는 선행 체언 말음절 모음의 종류에 따라서 나눠진다. ‘예’는 선행 체언 말음절 모음이 ‘이(i)’나 ‘ㅣ(j)’인 경우에 실현되었다. ‘/의’는 특수한 처격조사로 이를 취하는 명사는 대체로 정해져 있으나 동일한 명사가 ‘’와 ‘애’를 다 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런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1) ㄱ. 뎌 〈17ㄴ〉, 生死애〈36ㄴ〉
ㄴ. 세 性에〈44ㄱ〉,  念에〈36ㄴ〉
ㄷ. 位예〈62ㄱ〉, 智예〈20ㄴ〉
ㄹ. 알〈42ㄴ〉, 밧긔〈55ㄴ〉
중세국어의 처격조사는 처소, 지향점, 시간, 원인, 비교 등의 기능을 보인다.
(2) ㄱ. 처소 : 그 中에〈24ㄴ〉
ㄴ. 지향점 : 有에 나가〈8ㄱ〉
ㄷ. 시간 : 長安 二年에〈66ㄴ〉
ㄹ. 원인 : 나매 性은 增減 업스니라〈44ㄱ〉
ㅁ. 비교 : 空애 다니〈27ㄴ〉 주037)
중세국어에서 ‘다-[異]’는 주로 격조사 ‘애/에, 에셔, 게’와 보조사 ‘두고’를 지배하는 용언이었다. 용언의 특수한 지배에 대해서는 안병희 · 이광호(1990:324~326) 참조.
/ 凡夫에 디날씨오〈62ㄱ〉
처격의 하위부류라고 할 수 있는 여격은 이 책에 용례가 없다. 이 책에서 처격조사가 생략된 예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처격이 가지는 처소의 기능이 문법적 기능보다 앞서므로 생략될 경우 그 문장 성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038)
안병희·이광호(1990:181)에서는 처격조사가 생략되면 그 문장이나 말이 적격성(適格性) (well-formedness)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바) 구격조사
구격조사는 체언의 말음이 자음이면 ‘로/으로’, ‘모음’이나 ‘ㄹ’이면 ‘로’로 나타난다. 구격조사가 생략된 예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서술어와의 관계가 긴밀하여 생략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1) ㄱ. 菩薩의 因行로〈14ㄴ〉,  닐오로〈8ㄴ〉
ㄴ. 眞空境으로 宗삼고〈14ㄴ〉, 이() 지츠로〈67ㄱ〉
ㄷ. 두 義로〈14ㄴ〉, 아래로〈21ㄴ〉, 令小菩薩로〈9ㄴ : 구결문〉
구격조사는 ‘도구격, 원인격, 향격, 자격격, 변위격’ 등으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 ‘변위격’이라고 할 만한 예는 없다. 나머지를 순서대로 보인다.
(2) ㄱ. 도구격 : 管으로 하 보다 니〈67ㄴ〉
ㄴ. 원인격 : 聲聞身으로 得度얌 직니란〈22ㄴ〉
ㄷ. 향격 : 아래로 衆生 救샤 브트니〈21ㄴ〉
ㄹ. 자격격 : 두 義로 趣 사니라〈14ㄴ〉
사) 공동격조사
‘과/와’로 나타난다. 체언의 끝음절이 자음이면 ‘과’, ‘모음’이나 ‘ㄹ’이면 ‘와’이다. 서술어의 성격에 따라 ‘공동, 나열, 비교’의 기능을 갖는다.
(1) ㄱ. 공동 : 처믄 敎와 義와  對니〈14ㄴ〉
ㄴ. 나열 : 苦와 集과 滅와 道왜 업스며〈50ㄱ〉
ㄷ. 비교 : 色이 空과 다디 아니호〈34ㄴ〉 주039)
앞의 주 37)에서 ‘다-’는 격조사 ‘애/에, 에셔, 게’와 보조사 ‘두고’를 지배한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는 ‘이와 엇데 다료〈27ㄴ, 28ㄱ〉’형 구문과 ‘空이 色과 다-, 色이 空과 다-〈29ㄱ, ㄴ〉’형 구문이 많아서 ‘다-’가 주로 공동격 ‘과/와’를 지배한다.
나열의 공동격조사는 대체로 집단 곡용을 하지만 예외도 있다. (2ㄱ)은 집단곡용의 예이고, (2ㄴ)은 그렇지 않은 경우다.
(2) ㄱ. 나와 괘 다 잇 디니〈34ㄱ〉
ㄴ. 수뭄과 顯홈과 둘 업수미〈34ㄱ〉
비교의 공동격조사는 ‘-’ 앞에서 생략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주040)
중세국어에서 ‘-[如]’는 주로 주격조사 ‘이’를 지배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공동격 ‘과/와〈27ㄴ, 28ㄱ, 41ㄱ〉’를 지배하거나 조사가 생략된 ‘이 -〈11ㄴ, 26ㄱ, 51ㄱ, 53ㄱ〉’ 구문을 이룬다.
(3) ㄱ. 든 알 사굠 니라〈54ㄴ〉
ㄴ. 이 三科 사교미 조 對法等論 니라〈48ㄱ〉
아) 호격조사
호격조사 ‘하, 아’ 중 이 책에는 ‘아’가 단 한 차례 나올 뿐이다.
(1) 舍利子아〈25ㄱ〉
6) 보조사
이 책에서 보조사의 쓰임은 극히 한정적이다. 대조의 의미를 가진 보조사를 비롯한 몇몇 용례가 있을 뿐이다.
(1) 대조 : ㄴ (/은, /는)
가장 많은 용례를 보인다. 대격조사의 경우처럼 ‘는’이 실현될 환경에서 모두 ‘’이 나타나 언해문에는 ‘는’이 보이지 않고 구결문에만 단 한 번의 쓰임이 있다.
ㄱ. 아랜〈24ㄴ〉, 어민〈25ㄴ〉 / 아호〈12ㄱ〉, 摠〈14ㄱ〉 / 둘흔〈11ㄴ〉, 여들븐〈12ㄱ〉 / 이〈27ㄴ〉, 道〈7ㄴ〉 / 般若深邃는〈65ㄱ : 구결문〉
『심경』에서 대조보조사는 주로 ‘수사(數詞)’에 후행하여 설명 항목을 나누는 역할이거나 처격조사와 함께하여 처소 및 순서의 다름을 표현하는 기능을 한다.
ㄴ. 나 ~ 둘흔 ~ 세 ~ 네흔 ~ 다〈11ㄴ〉
  二藏內옌〈2ㄴ〉, 空中엔〈48ㄱ〉
(2) 역시 : 도
‘역시’의 의미를 나타내나 때에 따라서는 ‘강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현대국어에서의 ‘도’와 형태, 용법이 같다.
ㄱ. 간도 空 아뇸 아닐〈8ㄱ〉
ㄴ. 곧 이 아논 空理도  得디 몯릴〈53ㄱ〉
ㄷ. 우리 小乘有餘位中에도〈27ㄴ〉
보조사 ‘도’는 (2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격의 위치에서 실현되면 대격조사가 생략되지만, (2ㄷ)처럼 처격조사를 지배할 때는 생략되지 않는다.
(3) 시발(始發) : 브터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어’가 동사 ‘븥-[附]’에 후행하여 문법화(文法化)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에서도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서처럼 대격조사가 선행한 ‘브터’의 출현이 훨씬 많다.
ㄱ. 舍利子色不異空브터〈19ㄴ〉, 이브터〈24ㄴ, 63ㄴ〉, 假브터〈37ㄱ〉, 空브터〈37ㄱ〉 / 法을브터〈54ㄴ〉
(4) 강세 : 
현대국어의 ‘야’에 해당되는 조사로서 당시엔 광범위하게 쓰였으나 『심경』에는 부동사어미에 후행하는 예들만 보인다.
滅야〈28ㄱ〉, 滅코〈28ㄱ, 29ㄴ〉, 空인브터〈34ㄱ〉
(5) 양보 : (이)ㄴ
보조사 ‘ㄴ’은 계사의 활용형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영근(1987:88)에서는 ‘비특수’ 보조사로 주어의 자리에 놓인다고 하였다.
空인〈36ㄴ〉, 色인〈36ㄴ〉, 呪힌〈59ㄴ〉
(6) 의문 : 고
해답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의문문의 서술어로 체언이 나타날 경우 바로 체언에 연결되는 조사이다. 의문사에 호응하여 설명의문문을 만드는데, 이런 조사에는 ‘고’ 외에도 ‘가/아/오’ 등이 있다. 이 책에는 아래의 한 예(例)만이 보인다.
菩提 엇던 뎌  감고〈66ㄱ〉
(7) 같음 : 다히
체언이나 동명사에 연결된다. 같은 기능을 하는 보조사로 ‘다(다이)’가 있다.
理다히 아로미 일후미 如理知니〈59ㄱ〉
(8) 위치 : 셔
보조사 ‘셔’는 ‘위치, 출발점, 비교’의 뜻을 가지나 이 책에서의 용례 〈17ㄴ, 21ㄱ, 25ㄴ, 57ㄴ〉는 모두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예셔 닐오매 等이라〈58ㄱ〉
7) 용언의 교체
가. 자동적 교체
용언어간의 교체는 대체로 곡용어간의 교체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용언어간의 자동적 교체에 해당하는 예를 나타나는 순서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번 출현하는 경우는 처음 나오는 것만 보인다.
 [자음]
깊-[深]〈7ㄴ〉, 긏-[隔, 斷]〈7ㄴ〉, 닞-[忘]〈7ㄴ〉, 없-[無]〈7ㄴ〉, 낱-[顯]〈8ㄱ〉, -[進]〈8ㄱ〉, -[奪]〈8ㄱ〉, -[備]〈8ㄱ〉, 좇-[隨]〈8ㄱ〉, 두-[圓]〈8ㄱ〉, -[通]〈8ㄱ〉, 어-[昏衢]〈8ㄴ〉, 높-[高]〈8ㄴ〉, 븥-[依]〈11ㄴ〉, -[修]〈12ㄱ〉, 녈-[淺]〈22ㄱ〉, 둪-[覆]〈23ㄱ〉, -[連]〈25ㄴ〉, -[作]〈33ㄴ〉, 더-[垢]〈38ㄴ〉, -[欣]〈51ㄱ〉, 즐-[樂]〈63ㄱ〉, -[愛]〈63ㄴ〉, [憎]〈63ㄴ〉, 맞-[逢]〈63ㄴ〉, -[竟]〈63ㄴ〉
 [모음]
니-[謂]〈8ㄱ〉, -[速]〈8ㄴ〉, 흐르-[流]〈12ㄱ〉, 다-[異]〈22ㄱ〉
나. 비자동적 교체
자음어간의 비자동적 교체에 해당하는 ‘아쳗-[厭]〈51ㄱ〉’, ‘묻-[問]〈53ㄱ〉’ 등이 보이고, 모음 어간의 비자동적 교체인 ‘잇-/이시-’도 산견된다.
  二諦 녜 이시며〈7ㄴ〉
세히 잇니〈14ㄴ, 17ㄱ, 22ㄱ〉
‘두-[置]’와 ‘이시-’의 축약형이 ‘두쇼’로 나타난다.
  疑心을 두쇼〈29ㄱ〉
8) 종결어미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심경』의 본문 언해는 설화자가 독자에게 해설하는 형식이다. 약소(略疏) 언해의 지문은 설화자가 독자에게 설명을 가하는 형식이고, 인용절은 경 본문의 대강을 밝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장은 (니샤 “~ -다/라”, -니라)형 구성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용문의 종결어미는 ‘-다/라’인 경우가 많고 모문의 종결어미는 ‘-니라’형이 주류를 이룬다.『심경』에 보이는 종결어미는 평서형, 의문형, 명령형, 감탄형의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평서형
ㄱ. 이런로 니샤 ‘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시니라〈8ㄴ〉
ㄴ. 갓 空中에 알 諸法 업슬  아니라 뎌 空 아 智도  得디 몯릴 니샤 ‘知 업다’ 시니라〈51ㄴ〉
ㄷ. 니샤 ‘得 업다’ 시니라〈53ㄱ〉
ㄹ. 中論애 니샤 空ㅅ 義 잇 젼로 一切法이 이니라〈34ㄱ〉
ㅁ. 비르서 究竟이 외리라〈36ㄴ〉
평서형 종결어미 ‘-다’는 서술격조사 어간 ‘이-’나 선어말어미 ‘-오/우-, -과-, -니-, -리-, -더-’의 뒤에서 ‘-라’로 교체되었다. 이 책에서 대부분의 종결어미는 서법 형태소와 결합하여 ‘라’체의 부정법이나 직설원칙법을 표시하고 드물게 추측법을 보이기도 한다. 또 약소 언해 모문의 종결어미는 경 본문이나 경을 설한 주체에 대한 존대의 표시로 대부분 존경법의 선어말어미 ‘-시-’를 가지고 있다. 약소 언해의 인용절은 화자가 청자에게 일방적으로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며 주로 부정법을 보인다. 이 책에는 겸양법이나 공손법의 선어말어미는 보이지 않는다.
(2) 의문형
ㄱ. 이와 엇뎨 다료 〈27ㄴ, 28ㄱ〉
ㄴ. 엇뎨 이 그레 一切 다 업다 시뇨〈53ㄱ〉
ㄷ. 엇뎨 이 空이 이 色 滅티 아니료〈53ㄱ〉
ㄹ. 엇던 젼로 오직 無等  니디 아니시뇨〈62ㄱ〉
ㅁ. 엇뎨 노며 기프닐 혜아리리오〈67ㄴ〉
ㅂ. 菩提 엇던 뎌  감고〈66ㄱ〉
(2ㄱ)-(2ㅂ)은 『심경』에 나오는 의문문 전부이다. 모두 의문사와 호응하는 1, 3인칭의 설명의문문인데, 경의 난해한 부분에 대해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 자문(自問)하여 독백하는 형식이 많다. (2ㄱ)-(2ㅁ)은 선어말어미 ‘-니/리-’와 설명의 의문형어미 ‘-오’의 결합에 의한 의문문이고, (2ㅂ)은 체언 뒤에 의문 보조사 ‘고’가 결합한 의문문이다.
(3) 명령형
ㄱ. 다 업슨 디니 다 알 마초아 랑라〈34ㄴ〉
ㄴ. 두 번 브즈러니 야 略疏 내라 니〈67ㄴ〉
이 책에서 명령형은 그 용례가 적다. 모두 ‘라’체이다. 주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앞뒤의 문맥에 의지하면, (3ㄱ)은 불특정의 청자이고 (3ㄴ)은 약소(略疏)를 한 법장(法藏)이다.
(4) 감탄형
ㄱ. 般若 기픈 디 이 니신뎌〈8ㄱ〉
ㄴ. 理 一十四行애 다니 이 알리로다〈8ㄱ〉
ㄷ. 이럴 알리로다 니샤〈59ㄴ〉
중세국어의 감탄형은 감탄법어미에 의한 것과 감동법 선어말어미에 의한 것이 있는데, 이 책에는 두 유형이 다 보인다. (4ㄱ)은 감탄법어미 ‘-ㄴ뎌’에 의한 감탄문이다. ‘-ㄴ뎌’는 동명사어미 ‘-ㄴ’과 의존명사 ‘’의 활용형이 화석화한 것이고, (4ㄴ), (4ㄷ)은 감동법 선어말어미 ‘-도-’에 의한 감탄형이다.
9) 연결어미
중세국어의 연결어미는 그 종류가 매우 많다. 이 책에도 여러 종류의 연결어미들이 눈에 띈다. 여기서는 『심경』에 보이는 연결어미들을 유형별로 제시하고 그 용례를 들어 본다. 주041)
연결어미의 패러다임은 안병희 · 이광호(1990)에서 가져 왔다.
(1) 나열의 어미 : -고/오
항목 나열식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어미 중의 하나이다. ‘나열’의 의미를 가진다. ‘-고셔, -곤, -곡, -곰’ 등은 보이지 않는다.
ㄱ. 眞性 니고 ~ 敎 니니〈14ㄴ〉
ㄴ. 한 邪見을 헐오져 샨 젼오 ~ 空 迷티 아니케 샨 젼오〈11ㄴ〉
(2) 병행의 어미 : -며
선어말어미 ‘-리-’에 후행한 ‘-리며’나 보조사 ‘셔’에 선행한 ‘-며셔’, ‘-’ 등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동작의 거듭됨을 나타낸다. 전항의 ‘-고’와 비슷한 빈도로 보인다.
ㄱ. 生티 아니며 滅티 아니며 더럽디 아니며 조티 아니며〈38ㄴ〉
ㄴ. 사 心藏이 읏드미며 외야〈17ㄴ〉
(3) 양태의 어미 : -아/어
주동사(主動詞)보다 선행한 동작의 양태를 나타낸다. ‘-악/억’이나 ‘-암/엄’은 이 책에 쓰이지 않았다.
ㄱ. 顯了로 기 니샤 智慧 아로 내야 煩惱障 滅케 시고〈19ㄴ〉
ㄴ. 뎌 들 거두어 敎 니와샤 알게 노라〈12ㄱ〉
(4) 원인의 어미 : -니, -ㄹ
뒷말에 대한 원인, 이유, 조건, 상황, 설명의 계속 등을 나타낸다. ‘-매, -/늘, -관’는 이 책에 쓰이지 않았다.
ㄱ. 舍利 이 새 일후미니〈25ㄴ〉 / 色과 과 다 펴시니〈48ㄱ〉
ㄴ. 二乘의 疑心이 이 둘헤 나디 아니 나가 사기시니라〈28ㄱ〉
(5) 조건의 어미 : -면, -ㄴ댄
조건이나 가정을 나타낸다. ‘-거/거든, -란’는 쓰이지 않았다.
ㄱ. 우흘 마초면 어루 알리라〈48ㄱ〉
ㄴ. 이 마초건댄 반기 닐오 色中엔 空이 업다 홀띠니〈33ㄴ〉
(6) 양보의 어미 : -나, -오/우, -ㄴ, -거니와, -니언
양보나 앞을 긍정하고 뒤를 부정하는 등의 의미를 가진다. ‘-ㄹ, -ㄹ션’은 쓰이지 않았다.
ㄱ. 緣 조차시나 말에 건난 宗 性이 두려이 차 다 나니라〈8ㄱ〉
ㄴ.  流 조초 더럽디 아니며〈42ㄱ〉
ㄷ. 見思惑을 그추〈40ㄴ〉
ㄹ. 五蘊이 다 空 비취여 보샤〈23ㄱ〉
ㅁ. 緣브터 닐어니와, 緣을브터 업거니와〈42ㄱ〉
ㅂ. 福 더을니언 구틔여 사기디 아니홀띠니라〈65ㄴ〉
ㅅ.  障이 다아도 더디 아니며 德이 차도 더으디 아니니라〈42ㄱ〉 둘히 잇디 아니야도〈44ㄱ〉
(7) 의도의 어미 : -려
의지나 의향을 나타낸다.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를 수반한다.
ㄱ. 큰 菩提心 發케 호려 샨 젼오〈12ㄱ〉
(8) 원망(願望)의 어미 : -고져, -과뎌
원망이나 희구를 나타낸다. 이 책에는 스스로 동작이나 행동을 바랄 경우에 사용되는 ‘-고져’와 제3자의 동작이나 행동을 바랄 경우에 쓰는 ‘-과뎌’만 보이고 ‘-아져, -과여, -긧고’는 쓰이지 않았다.
ㄱ. 邪見을 헐오져 샨 젼오〈11ㄴ〉
ㄴ. 眞宗애 맛과뎌 노라〈66ㄱ〉
(9) 도달의 어미 : -게/에
어떤 동작이나 상태에 도달함을 나타낸다. 사역의 뜻도 가진다. ‘-긔/’는 쓰이지 않았다.
ㄱ. 一切 한 重 障 긋게 샨 젼오〈12ㄱ〉
ㄴ. 正見 내에 샨 젼오〈11ㄴ〉
(10) 부정 대상의 어미 : -디
부정의 대상임을 나타낸다. 현대국어 ‘-지’의 소급형이다. ‘-, -ㄴ동, -드란’은 쓰이지 않았다.
ㄱ. 因緣 젹디 아니야〈11ㄴ〉
ㄴ. 義 믄득 나토디 몯〈19ㄴ〉
(11) 긍정 대상의 어미 : -디위
긍정의 대상임을 강조하고 그 반대의 사태를 부정한다. ‘-디’가 ‘-디위, -디외, -디웨’ 등으로 바뀌었으나, 이 책에는 ‘-디위’만 쓰였다.
ㄱ. 宗 蘊中에 人 업수 일후미 蘊空이디위 蘊이 제 空혼디 아니니〈27ㄴ〉
이 책에 목적의 어미 ‘-라’, 한도의 어미 ‘-록’, 더해감의 어미 ‘-디옷, -ㄹ록’, 연속의 어미 ‘-라, -락, -ㄴ다마다’ 등은 쓰이지 않았다.
이 논의에서 선어말어미와 보조적 연결어미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10) 어휘
『심경』에는 희귀어라고 할 만한 고유어는 별로 없다. 다만 아래의 두 어휘는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이기에 따로 밝혀 둔다.
(1) ㄱ. 그 사 어미 : ·노며 로미(~聰悟~호미)〈25ㄴ〉
 : 영·노-(지혜- / 슬기-)
ㄴ. 蠡 죡·바기오〈67ㄴ〉
 죡박(쪽박)
이 책에도 다른 불경언해서와 같이 한자어가 한자어라는 의식이 엷어져 정음 문자로 표기된 것들이 있다.
(2) 녜[常例]〈7ㄴ〉, 간[暫間]〈8ㄱ〉, [將次]〈11ㄴ〉, 부텨[佛體]〈12ㄱ〉, [衆生]〈67ㄱ〉

5. 맺음말

5.1. 지금까지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전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책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한문본 『반야심경』을 우리 문자로 번역한 언해본이다. 저본(底本)인 한문본의 성격은 물론, 현전하는 언해본의 특성과 형태서지, 언해체제, 그리고 표기법과 문법 등 『반야심경언해』의 서지사항과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밝혔다.
『반야심경언해』는 조선조 세조 10년(1464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언해본의 저본(底本)은 송나라의 중희(仲希)의 주해본이다. 이 책은, 당나라 현장(玄奘)의 한역(漢譯) 『반야바라밀다심경』에 역시 같은 당나라의 법장(法藏)이 약소(略疏)를 붙여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702 A.D.)를 짓고, 여기에다 송나라의 중희가 주해를 더하여 『반야심경약소현정기』(1044 A.D.)가 이루어 진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주해본인 『반야심경소현정기』에 세조가 정음으로 구결을 달고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황수신(黃守身),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을 하여, 목판본 1권 1책으로 간행을 하였다.
언해가 이루어진 부분은 현장(玄奘)의 경 본문과 법장(法藏)의 약소이고, 중희의 주석(註釋)인 ‘현정기(顯正記)’ 부분은 제외하였다. 중희의 주석은 해당하는 경 본문의 언해문 다음이나, 약소 구결문과 약소 언해문 사이에 협주(夾註) 형식으로 실려 있다.
5.2. 언해본의 간행 및 번역에 관련된 제반 사항, 곧 저본(底本)을 중희의 ‘현정기’로 한 이유와 언해의 목적, 그리고 간행 경위 등 전반적인 내용은 책 권두에 실려 있는 진전문을 통해 살필 수 있었다. 또한 『반야심경언해』의 끝에 실려 있는 한계희(韓繼禧)의 발문(跋文)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법장의 ‘약소’가 홀로 종지(宗旨)를 터득했음과 중희의 ‘현정기’를 이용하여 장소(藏疏)를 나누는 등 분절(分節)의 편의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반야심경언해』는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이후 그 후쇄본의 쇄출(刷出) 및 복각 간행이 두어 차례 이루어졌다. 현재 원간 초쇄본 2본을 비롯하여 후쇄본 1종, 복각본 2종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들 중 연구 및 역주의 대상이 된 책은 1994년에 공개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된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소장본이다. 현전하는 이본들 각각에 대해 형태서지를 밝히고 그 성격을 정리했다. 아울러 이 책은 경 본문, 약소, 현정기 등이 함께 배치(排置)되어 있어서 다른 언해본들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띠는데 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는 중희의 현정기(顯定記)에 의해 장소(藏疏)를 나눈 후 글귀마다 해석하고, 소(疏)에 따라 분절(分節)해서 각각 본문(本文) 밑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언해 체제가 다른 언해본들보다 다소 복잡하게 보인다.
5.3.『반야심경언해』는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불전으로 훈민정음 창제 초기 정음 표기의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표기법과 문법을 분리해서 정리했다. 방점 표기와 한자음 표기 등을 보면 이 책이 다른 간경도감본들과 같은 체제와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ㅸ, ㆆ’ 등이 쓰이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쓰인 점으로 보면, 간경도감본 초기의 문헌보다는 상대적으로 후기의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팔종성 표기는 훈민정음 해례 종성해의 규정에 충실하여 다른 문헌에서 팔종성 외에 흔히 쓰이는 ‘ㅿ’이 전혀 쓰이지 않은 점 등,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 또 ‘ㆆ’이 고유어 표기에 쓰이지 않았으면서도 사이글자에 용례가 있는 점도 이 문헌에서 특별한 점이다.
문법 항목에서는 이 책이 가지는 문체 및 언해상의 특성에 기인한 종결어미의 편중성을 밝히고, 경어법 선어말어미가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원인 등을 구명하였다. 이 책에는 경어법 선어말어미 중 존경법의 ‘-으시/으샤-’ 이외에 겸양법 선어말어미 ‘-/-, -/-, -/-’이나 공손법 선어말어미 ‘--, --’의 쓰임이 없고,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도-’만 쓰이는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책의 구성이 설화자인 약소를 주소(註疏)한 이가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는 문장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 이 책의 전반적인 문법 사항은 같은 해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등과 대체로 일치하며 상원사 ‘어첩’ 및 ‘권선문’과도 부합한다. 불경언해서가 대부분 그러하듯 이 책도 경 본문과 약소에 대한 풀이의 성격을 띠므로 체언과 보조사의 쓰임은 단조롭고, 이에 비해 용언, 특히 연결어미의 쓰임은 활발한 편이다.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파생용언의 형성은 매우 생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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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학 권3·4 해제
이유기(동국대학교 교수)

1. 소학

1.1. 소학의 간행
『소학(小學)』은 남송(南宋) 광종(光宗) 14년(1187)에 간행된 책이다. 편찬자는 주자(朱子, 1130~1200)와 그의 제자인 유청지(劉淸之, 1134~1190)이다. 주001)
유청지(劉淸之)의 자(字)는 자징(子澄)이다. 송(宋)나라 영종(寧宗)~이종(理宗) 때의 학자이다. 예양현위(澧陽縣尉)와 통판(通判) 등을 역임하였다. 주자의 제자였는데, 나이는 주자보다 네 살 아래였다.
* 이 역주서에 수록된 주석의 번역은 성백효(1993)과 이충구(1986a), 이충구 외(2019a)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역주의 체재에 관한 조언을 해 준 동국대학교 김일환 교수와, 주석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 준 동국대학교 양승목 박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이 책에 관한 많은 논의들 중에서 이 책의 편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검토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흔히 주자의 지시에 따라 유청지가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지만, 대개는 자세한 사정을 살펴보지 않은 채 옛 기록을 답습한 것이었다. 주자(朱子)는 ‘소학서제(小學書題)’에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교육 기관인 소학<세주>(小學: 초급 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재가 온전하게 전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주002)
삼대(三代)의 교재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때문이다.
자신이 이를 상당히 수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주003)
주자가 『소학』의 서제(書題)를 쓴 때가 ‘淳熙 丁未 三月朔旦’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소학언해』(1권 소학언해 서제: 3ㄱ)에 ‘旦(=아침)’의 독음이 ‘됴’로 적혀 있다. 그것은 조선 태조(太祖)의 왕이 된 후의 이름이 ‘旦’이어서, ‘旦’을 뜻이 같은 ‘朝’의 독음 ‘됴’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백효(1993:16) 참조. 율곡의 『소학집주』에는 ‘朝’로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소학서제’에서 유청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소학서제’뿐 아니라 ‘소학제사(小學題辭)’도 주자가 쓴 것인데, 이 글에서도 유청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004)
‘제사(題辭)’에는 필자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소학집성(小學集成)』의 별책(別冊)에서는 ‘제사’를 붙이면서 이를 ‘주씨제사(朱氏題辭)’라 이름붙이고, 주자가 이 ‘제사’를 쓴 사실이 『주자문집(朱子文集)』에 적혀 있음을 밝혔다. 『소학』에서 ‘제사’의 필자를 밝히지 않은 것은 주자 자신이 『소학』의 실제적 편찬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율곡의 『소학집주』에 실린 숙종(肅宗)의 ‘어제소학서(御製小學序)’에서도 주자가 옛날에 들은 것을 모았다고 밝혔을 뿐이다. 단지 책의 권위를 위해서 주자를 내세운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두 사람의 역할은 주자가 유청지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 편지에는 유청지가 작업한 내용과, 그에 대한 주자의 평가와 요청 및 수정 사실이 소상하게 드러나 있다. 주005)
이 편지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이충구 외(2019a:8-14)에 소개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에 의거한다면, 두 사람의 역할 비중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유청지가 기획을 하고 실제 작업을 하였지만, 전체적인 틀과 세부적인 내용에 걸쳐서 주자가 아주 철저하게 지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 각자가 구상한 편집 체재와 세부적인 내용을 서로 조율한 사정도 편지 속에서 드러난다. 이충구 외(2019a:14)에서 주자가 주편자(主編者)이고, 유청지는 주자를 도와 ‘기획과 원고 정리’를 한 것으로 본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 책을 두 사람의 공동 저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소학』의 개요에 대해서는 일찍이 원대(元代)의 허형(許衡, 1279~1368)이 정리한 바가 있다. 주006)
이 글은 허형(許衡)의 『소학대의(小學大義)』를 율곡이 요약한 것인데, 성백효(1993: 30-31)과 이충구 외(2019a:48)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1) 그 강목(綱目)이 세 가지가 있으니,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이요, 다음 계고(稽古)는 삼대(三代)에 성현이 이미 행한 자취들을 기록하여, 전편의 입교·명륜·경신의 말을 실증하였으며, 그 외편(外篇)인 가언(嘉言)·선행(善行)은 한대(漢代) 이래 현인(賢人)들이 말한 바의 아름다운 말과 행한 바의 선(善)한 행실을 실었으니, 그 강목은 또한 입교·명륜·경신에 지나지 않는다. 내편의 말을 부연하여 외편과 합해 보면 외편은 『소학』의 지류(枝流)임을 알 것이요, 외편의 말을 요약하여 내편과 합해 보면 내편은 『소학』의 본원(本源)임을 알 것이니, 내와 외를 합하여 양면으로 살펴보면 『소학』의 규모와 절목이 갖추어 있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다.(其綱目有三 立敎明倫敬身 次稽古所以載三代聖賢已行之迹 以實前篇立敎明倫敬身之言 其外篇嘉言善行 載漢以來賢者所言之嘉言 所行之善行 其綱目 亦不過立敎明倫敬身也 衍內篇之言 以合外篇 則知外篇者小學之枝流 約外篇之言 以合內篇 則知內篇者小學之本源 合內外而兩觀之 則小學之規模節目 無所不備矣)
이보다 더 자세한 개요는 율곡 이이(李珥)의 『소학집주』에 실린 「소학집주 총목」에 나온다.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 등 각 편의 개요를 정리한 것인데, 성백효(1993:31-38)과 이충구 외(2019a: 49-57)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주007)
‘입교편(立敎篇)’의 내용은 태교(台敎), 성장 단계별 교육 내용과 교육 지침, 「주례(周禮)」의 교육 내용과 형벌, 『왕제(王制)』에 기록된 교육 내용, 『제자직(弟子職)』에 기록된 학생의 바람직한 태도, 『논어』와 「악기(樂記)」에 기록된 학생의 본분과 교육의 지표 등이다. 그렇다면 ‘입교편(立敎篇)’은 학동(學童)이 아니라 스승과 부모에게 읽히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소학의 주석서와 번역서
명대(明代)에 들어 『소학』에 대한 많은 주석서가 출현하게 된다. 하사신(何士信)의 『소학집성(小學集成)』(1423), 오눌(吳訥)의 『소학집해(小學集解)』(1433), 진선(陳選)의 『소학증주(小學增註)』(1473), 주008)
진선(陳選)의 『소학증주(小學增註)』는 『소학구두(小學句讀)』 또는 『소학집주(小學集註)』로도 불린다.
정유(程愈)의 『소학집설(小學集說)』(1486)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주009)
진원(陳媛, 2012:100-18)에 이 주석서들의 간행 연대가 정리되어 있는데, 『소학집성』의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학집성』의 연대는 김주원(2002:36)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학집성(小學集成)』과 『소학집설(小學集說)』 및 율곡(栗谷)의 『소학집주(小學集註)』가 많이 이용되었다. 세종 때 『소학집성(小學集成)』의 목판본(1427년, 세종 9)과 활자본(1429년, 세종 11)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조선 초기에는 『소학집성(小學集成)』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후에는 주석이 더 간명하고 대중적인 『소학집설(小學集說)』이 많이 이용되었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은 김일손(金馹孫)이 1491년(성종 22)에 편자인 정유(程愈)로부터 직접 책을 받아 와서 곧바로 간행 보급하였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이 많이 읽히게 된 데에는 김안국(金安國, 1478년, 성종 9~1543년, 중종 38)의 공이 매우 컸다. 그는 경상 감사 시절에 『소학집설(小學集說)』을 판각하기도 하고, 경상도 유생들에게 『소학』 공부를 권장하여 『소학』 학습의 분위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주010)
『소학』 학습의 전통은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수수(授受) 관계를 통해서 이어졌고, 이이(李珥)의 『소학집주(小學集註)』 간행을 통해서 정점에 이르렀다.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다. 『소학』 학습의 전통은 박연호(2017)에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이러한 소학 열풍의 흐름 위에서 『번역소학』(1518)과 『소학언해』(1587)가 간행되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따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학』 학습 열풍에서 큰 분수령이 된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의 『소학집주(小學集註)』이다. 이 책은 1579년에 이미 편집이 이루어졌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612년(광해군 4)에야 6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17세기 말 이후에 와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1694년(숙종 20)에 이 책에 숙종의 ‘어제소학서’를 붙인 『소학집주(小學集註)』가 간행되고, 세자 교육에까지 활용되었다. 주011)
‘어제소학서’를 실제로 집필한 이는 이덕성(李德成)이다. 앞서 나온 여러 책에서 이미 언급된 사실이지만, 이 서문에서는 옛 삼대(三代)에는 8살이 되면 이 책을 읽혔다고 하였다(古之人 生甫八歲 必受是書 卽三代敎人之法也). 그리고 이 해에 세자가 8살이 되었으므로, 책의 간행이 세자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자가 나중에 경종(景宗)이 된다.
『소학』에 대한 숙종의 관심은 아들인 영조(英祖)에게 계승되었다. 1744년(영조 20)에 『어제소학언해(御製小學諺解)』가 간행되었고, 1766년(영조 42)에는 영조의 주석서 『어제소학지남(御製小學指南)』 2권 1책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주012)
우리나라 『소학』 주석서의 성립과 유통 상황은 정호훈(2009)에서 자세하게 밝혀졌다.
그 밖에도 『소학』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책이 여럿 있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1475년, 성종 6)에는 『소학』의 내용을 발췌 번역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013)
『내훈』의 내용 중 『번역소학』이나 『소학언해』와 중복되는 부분은 이현희(1988: 208-209)에 〈표〉로 정리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에는 박문호(朴文鎬)가 쓴 6권 6책의 필사본 『여소학(女小學)』이 나왔는데, 이 책에도 『소학언해』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 말기 고종 때에는 박재형(朴在馨)이 편찬한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이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저술은 1884년에 끝났으나, 책이 간행된 것은 1912년이다. 『소학』의 내용을 발췌하고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첨가하여, 6권 2책의 목판본으로 만들었다.
한문본 『소학』에 대한 현대의 역주서로는 성백효(1993)과 이충구 외(2019a, b)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율곡 이이의 『소학집주』에 대한 역주서인데, 원문과 주석을 번역하고 필요에 따라 그 밖의 주석을 가하였다.

2. 번역소학

2.1. 번역소학의 편찬 시기와 편찬자
『번역소학』은 1518년(중종 13, 무인년)에 찬집청(撰集廳)에서 1,300질이 간행되었다. 주014)
“『소학』 1천 3백 부를 찍어 조관(朝官)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또 배울 만한 종친을 골라서 아울러 나누어 주었다.(印小學 一千三百件 遍賜朝官 而又擇可學宗親 幷賜之)”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 무인), 7월 2일. 홍문관(弘文館)에서 중종에게 이 책의 간행을 건의한 것이 중종 12년 6월 27일이었으니, 그로부터 1년만에 책을 완성한 것이다(남곤의 발문에 따르면 9개월이 걸렸다고 하는데, 번역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중략)… 성상께서는 심학(心學)에 침잠하고 인륜을 후하게 하기를 힘쓰시어, 이미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을 명찬(命撰)하시고 또 『소학(小學)』을 인행(印行)토록 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코자 하시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삼강행실』에 실려 있는 것은, 거의가 변고와 위급한 때를 당했을 때의 특수한 몇 사람의 격월(激越)한 행실이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 행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소학』은 곧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인데도 일반 서민과 글 모르는 부녀들은 독습(讀習)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용(日用)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여계(女誡)』·『여측(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인반(印頒)하게 하소서. …(중략)…’ 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홍문관에서 아뢴 뜻이 지당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라.’”(弘文館啓曰 …(중략)… 聖上沈潛心學 懋厚人倫 旣命撰 續三綱行實 又命印小學 欲廣頒中外 意甚盛也 然三綱行實所載 率皆遭變 故艱危之際 孤特激越之行 非日用動靜常行之道 固不可人人而責之 小學之書 廼切於日用 而閭巷庶民及婦人之目不知書者 難以讀習矣 乞於群書內 最切日用者 如小學如列女傳如女誡女則之類 譯以諺字 仍令印頒中外 …(중략)… 傳于政院曰 弘文館所啓之意至當 其令該曹 磨鍊施行)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정축), 7월 2일.
이 책 제 10권의 맨 끝, 즉 남곤(南袞)의 발문(跋文) 뒤에 번역에 참여한 17명 중 16명의 열함(列銜)이 보인다. 책에 적힌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주015)
김정국(金正國)은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이다. 종래에는 참여자가 16명으로 알려졌으나, 열함의 첫 줄은 비어 있다. 본래는 17명이었는데, 한 명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2) 번역소학 편찬자 열함
김전(金詮), 남곤(南袞), 최숙생(崔淑生), 김안로(金安老), 윤탁(尹倬), 조광조(趙光祖), 김정국(金正國), 김희수(金希壽), 공서린(孔瑞麟), 정순명(鄭順明), 김영(金瑛),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 채소권(蔡紹權), 유인숙(柳仁淑), 정응(鄭譍)
이 명단에 조광조(趙光祖)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광조는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한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며, 『소학』 교육 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기묘사림(己卯士林)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번역소학』의 간행에 조광조의 역할이 아주 컸으리라 짐작된다. 주016)
이 책을 소개한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이 책의 편찬자를 ‘김전(金詮), 남곤(南袞), 최숙생(崔淑生) 등’이라고 적고 있다. 당연한 처사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조광조의 참여 사실이 가려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2.2. 번역소학의 체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소학집성』과 같은 10권으로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제 10권이 마지막 권이다. 그런데 이 책이 10책으로 이루어졌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아마 1책으로 묶인 제 6·7권이 발견되기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주017)
『번역소학』의 저본인 『소학집성(小學集成)』은 10권 5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세종대에는 1427년(세종 9)과 1429년(세종 11)에 각각 목판본과 활자본으로 된 『소학집성(小學集成)』을 간행하였는데, 이 역시 10권 5책이다. 제 1권은 본문의 첫 부분인 ‘立敎’로 시작한다. ‘서제(書題), 목록(目錄), 강령(綱領), 제사(題辭) …’ 등은 모두 별책(別冊)에 담았다. 이 별책은 책수(冊數)에는 포함되지만 권수(卷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즉 책수는 별책을 포함하여 5책이고, 권수는 별책을 제외하고 10권이다. 한편 세종대 활자본 『소학집성』의 간행 연대가 1428년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는 『세종실록』의 세종 10년 9월 8일 기사를 오해한 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판부사(判府事) 허조(許稠)가 아뢰었다. ‘… 청컨대 신(臣)이 일찍이 올린 『집성소학(集成小學)』을 주자소(鑄字所)에 내려보내서 인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判府事許稠啓 …請下臣所曾進集成小學于鑄字所印之 從之)”가 그것인데, 이를 간행 기사로 해석한 듯하다. 정인지(鄭麟趾)의 발문(跋文)에는 선덕(宣德) 4년 8월로 적혀 있다. 선덕 4년은 1429년(세종 11)이다.
홍윤표(1984b)에서는 제 6·7권(1책)의 영인본에 붙인 해제에서 이 책이 10권 8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 후에 발견된 제 3·4권도 6·7권처럼 1책으로 묶여져 있으므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제 1·2·5권 중 제1·2권이 각 권 1책이라면 홍윤표(1984b)의 추정대로 10권 8책이 되는 셈이다. 주018)
홍윤표(1984a)는 제 8·9·10권의 해제이고 홍윤표(1984b)는 제 6·7권의 해제인데, 같은 날짜에 발행된 두 영인본에 붙어 있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는 이 책이 10권 10책이라고 하였고, 뒤의 글에서는 이 책이 10권 8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뒤의 글이 나중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학언해』는 제 1권이 15장(張)이고 제 2권이 78장(張)이다. 이 사실만으로 추정한다면, 『번역소학』에서 제 1·2권을 1책으로 묶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제 1·2권을 1책으로 묶으면 『소학언해』 기준으로는 제 1책이 93장이 되는 셈이어서 분량이 많아 보이지만, 주019)
두 책의 각 면당 분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번역소학』은 각 면 19자 9행이고 『소학언해』는 각 면 19자 10행이다.
『번역소학』 제 9권은 이보다 훨씬 많은 108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번역소학』이 저본으로 삼은 『소학집성(小學集成)』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1429년(세종 11)에 간행된 『소학집성』 제 1권의 권수(卷首)에는 ‘서제(書題), 강령(綱領), 제사(題辭), 도목(圖目), 도설(圖說), 목록(目錄)’이 실려 있는데, 이 중 ‘도설(圖說)’의 분량이 무려 34장(張)에 이른다. 주020)
이 ‘도(圖)’를 이충구 외(2019a, b)에서는 각각 본문의 해당 내용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제시하였다.
만약 『번역소학』 제 1권에 붙어 있을 권수(卷首)에 도목(圖目)과 도설(圖說)이 포함되어 있다면, 제 1권만으로 1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렇다면 홍윤표(1984b)의 추정대로 이 책은 10권 8책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주021)
『소학언해』는 6권 4책으로 만들어졌다. 제 1·2권, 제 3·4권, 제 5권, 제 6권을 각각 한 책으로 묶었다. 『소학언해』를 6권으로 만든 것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을 따른 것이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卷首)는 ‘편목(篇目),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서(小學集說序), 범례(凡例), 총론(總論), 제사(題辭), 서제(書題)’로 구성되어 있고, 『소학언해』의 권수(卷首)는 ‘범례, 서제, 제사’의 한문과 언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이 책의 제1·2·5권이 전해지지 않지만, 10권 모두의 체재는 알 수 있다. 한문본이나 『소학언해』를 참고하면, 제 1권의 앞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다 알 수 있다. 전해지지 않는 제 5권의 내용은 『소학언해』 제 4권과 일치한다. 아래에 10권 전체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되, 구체적인 내용이 실린 장차(張次)는 제 3·4권에서만 밝히기로 한다. 〈표〉를 제시하기 전에 제 3·4권의 낙장 부분의 내용과 분량을 먼저 밝히기로 한다. 제 3권의 앞 부분과 제 4권의 뒷 부분에 낙장이 있지만, 그 내용과 분량은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의 제 3권은 앞의 두 장(1ㄱ~2ㄴ)이 떨어져 나가고, 3ㄱ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첫 면은 제 2편의 제 2장인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첫 부분으로 시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체재는 『소학집성』을 따르고 있는데, 『소학집성』 제 3권이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로 시작되고, 『번역소학』 제 3권의 3ㄴ은 『소학집성』 제 3권의 2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학집성』(3:1ㄱ)의 권수제(卷首題) 바로 뒤에는 ‘明倫第二之下’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바로 “禮記曰 將適公所 …”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제 3권의 첫 면은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첫 부분으로 시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소학언해』와의 대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번역소학』(3:3ㄴ)의 제 1행은 『소학언해』(2:38ㄱ)의 마지막 행(行)과 내용이 같은데, 『소학언해』 제 2권에서는 36ㄱ의 제 9행에서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가 시작된다.
둘째, 제 4권의 뒤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지만, 제 4권은 제 3편 ‘경신(敬身)’의 ‘음식지절(飮食之節)’의 마지막에서 끝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 4권의 남아 있는 부분 중 마지막 장차(張次)가 28ㄴ인데, 이 부분은 『소학집성』 제 4권의 30ㄱ에 해당하고, 『소학집성』 제 4권은 32ㄱ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소학집성』은 제 4권에서 ‘음식지절(飮食之節)’이 완전히 끝나고, 제 5권에서는 새로운 내용인 ‘계고(稽古)’로 시작된다.
그리고 제 4권의 낙장 부분은 세 장임이 거의 분명하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번역소학』 제 4권과 『소학언해』 제 3권은 모두 ‘경신(敬身)’으로 시작된다. 둘째, 『번역소학』 제 4권의 남은 부분 중 마지막 면(28ㄴ)의 내용은 『소학언해』(3:25ㄴ)의 제 8행에 해당한다. 넷째, 『소학언해』 제 3권의 남은 부분이 총 47행(3:25ㄴ 제 9행~28ㄱ 제 5행)이다. 이것은 권미제(卷尾題)와, 권미제 앞의 비어 있는 3행을 포함한 것이다. 다섯째, 『번역소학』은 각 면 19자 9행이고 『소학언해』는 각 면 19자 10행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여 추산하면, 『번역소학』 제 4권은 31ㄴ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표〉는 『번역소학』의 분권(分卷) 체재를 정리하고, 『소학언해』의 분권 체재와 비교하여 보인 것이다. 주022)
1587년(선조 20)에 간행된 도산서원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소학언해』 제 1권의 내용은 ‘입교(立敎)’인데, ‘입교’ 앞에 ‘범례(凡例), 서제(書題), 제사(題辭)’로 구성된 권수(卷首)가 붙어 있다. 이 권수와 ‘입교(立敎)’를 합한 것이 총 16장(張)이다.
〈표〉 『번역소학』과 『소학언해』의 분권 체재
내외편권차내용장수(張數)소학언해
내편1권〈추정〉
제 1편 입교(立敎) 주023)
제 1권의 ‘입교(立敎)’ 앞에는 권수(卷首)가 붙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권수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소학집성』과 『소학언해』의 권수이다. 1429년(세종 11)에 간행된 『소학집성(小學集成)』의 권수에는 ‘서제(書題), 강령(綱領), 제사(題辭), 도목(圖目), 도설(圖說), 목록(目錄)’이 들어 있고, 『소학언해』의 권수에는 ‘범례(凡例), 서제(書題), 제사(題辭)’가 들어 있다. 『소학집성』에 실린 도목(圖目)의 분량이 1장(張)이고 도설(圖說)의 분량이 34장(張)인데, 이 두 부분은 『소학언해』에는 없다. 『소학언해』에 이 부분이 없는 것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小學集說)』의 체재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학언해』의 권수가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에는 ‘편목(篇目), 정유의 집설서(集說序), 범례(凡例), 총론(總論), 제사(題辭), 서제(書題)’가 실려 있다.
〈참고〉
『소학언해』 제 1권은 16장 분량
1권(16장)
2권〈추정〉
제 2편 명륜(明倫)
(1) 명부자지친(明父子之親)
〈참고〉
『소학언해』에서는 제 2권 중 35장 분량
2권(78장)
3권(2)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1ㄱ~11ㄱ
(3) 명부부지별(明夫婦之別) 11ㄱ~23ㄴ
(4) 명장유지서(明長幼之序) 23ㄴ~33ㄴ
(5) 명붕우지교(明朋友之交) 33ㄴ~39ㄱ
(6) 통론(通論) 39ㄱ~47ㄴ
총 47장(추정)
4권제 3편 경신(敬身)
(1) 명심술지요(明心術之要) 1ㄱ~9ㄱ
(2) 명위의지칙(明威儀之則) 9ㄱ~21ㄴ
(3) 명의복지제(明衣服之制) 21ㄴ~25ㄴ
(4) 명음식지절(明飮食之節) 25ㄴ~31ㄴ
총 31장(추정)3권(28장)
5권〈추정〉
제 4편 계고(稽古)
(1) 입교(立敎)
(2) 명륜(明倫)
(3) 경신(敬身)
(4) 통론(通論)
〈참고〉
『소학언해』 제 4권 55장
4권(55장)
외편6권제 5편 가언(嘉言)
(1) 광입교(廣立敎) 2ㄱ~37ㄴ
총 37장 주024)
‘가언(嘉言)’이 시작되기 전에 한 장 반에 걸쳐서 외편(外篇)을 만든 동기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5권(121장)
7권(2) 광명륜(廣明倫) 1ㄱ~50ㄴ총 50장
8권(3) 광경신(廣敬身) 1ㄱ~43ㄴ총 43장
9권제 6편 선행(善行)
(1) 실입교(實立敎) 1ㄱ~19ㄴ
(2) 실명륜(實明倫) 19ㄴ~108ㄴ
총 108장6권(123장) 주025)
제 6권 123ㄴ에서 ‘경신(敬身)’이 끝나고, 이어서 만력(萬曆) 15년 4월에 쓴 이산해(李山海)의 발문(跋文)과, 간행에 관여한 32명의 열함(列銜)이 나온다. 만력 15년은 1587년(선조 20)이다. 32명의 열함(列銜) 중 한 사람이 삭제되었는데, 삭제된 이는 정여립(鄭汝立)이다. 이현희(1993:237)과 민병준(1990:37) 참조.
10권(3) 실경신(實敬身) 1ㄱ~35ㄴ총 35장 주026)
제 10권은 35ㄴ에서 끝나고, 이어서 두 장 반(1ㄱ~3ㄱ)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고, 그 뒤에 한 장에 걸쳐서 번역에 참여한 16명의 열함(列銜)이 나온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본래는 17명이었는데 한 명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두 책의 분권 방식을 비교해 보면, 『번역소학』은 편목(篇目)과 분량을 다 고려하였고, 『소학언해』는 편목(篇目)에 따라 분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책이 각각 체재 면의 저본으로 삼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소학집설(小學集說)』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분권 방식 면에서 『번역소학』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같고, 『소학언해』는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다.
2.3. 『번역소학』의 현전본과 영인 상황
이 책은 1518년(중종 13)에 찬집청(撰集廳)에서 간행하였다. 원간본은 을해자 목판본으로 추정되는데, 이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16세기 이후에 복각(覆刻)된 목판본만이 전하고 있다. 주027)
원간본이 을해자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의 복각본에 근거한 것이다.
이 중간본의 간행 시기는 알 수 없다. 교정청(校正廳)에서 간행한 『소학언해』(1587년)보다 앞선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이 책은 저본인 『소학집성』의 체재와 같은 10권으로 만들어졌는데, 주028)
『번역소학』이 10권으로 이루어진 것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같지만, 다른 면에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소학』은 인용문의 출처에 따라 장(章)이 바뀌는데,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의 표시 방법 면에서 이 책은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다. 즉 새로운 장(章)이 시작될 때 『소학집성(小學集成)』에서는 ‘一, 二, 三 …’과 같은 일련 번호를 붙였고, 『소학집설(小學集說)』에서는 ○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이 ○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 새로운 편(篇)이 시작되는 위치에서는 ○ 표시가 없다.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첫 장(章)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소학언해』도 이 책과 같은 방식을 취하였다.
그 중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제 3·4권(국립한글박물관), 제 6·7권(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제 8권(고려대학교 도서관) 제 9권(서울대학교 가람문고), 제 10권(국립중앙도서관)이다. 총 10권 중 제 1·2·5권을 제외한 총 7권이 전해지는 셈이다. 영인은 제 3권을 제외하고 다 이루어졌다. 홍문각에서 제 8·9·10권(1982년)과 제 6·7권(1984)을 영인하였고, 『서지학보』(24집)에서 제 4권(2000년)을 영인하였다. 역주서로는 다섯 권에 대한 역주를 한 권으로 묶은 『역주 번역소학 권 6·7·8·9·10』(정호완 2011)이 있다.
2.4. 국어학적 특징
이 책의 간행 배경, 서지 정보, 국어학적 특징 등은 이미 여러 국어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 책의 국어학적 의의와 특징은 이기문(1960), 이숭녕(1973), 안병희(1979), 홍윤표(1984a), 홍윤표(1984b), 이현희(1988), 정재영(2000)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혀졌고, 서지 사항은 제 8·9·10권의 해제인 홍윤표(1984a)와 제 6·7권의 해제인 홍윤표(1984b), 제3·4권의 해제인 정재영(2000)에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밝혀진 내용의 반복은 가능한 한 지양하고, 제 3·4권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029)
이 책에서는 ‘ㅸ, ㆆ’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ㅿ’은 쓰이기는 하나 ‘ㅇ’으로 바뀐 예도 있다. ‘ㆁ’은 원칙적으로 종성에서만 사용하였데, 예외적으로 초성이라 하더라도 높임의 선어말 어미 ‘-ᅌᅵ-’에서는 사용하였다. 그러나 종성에서도 ‘ㆁ’이 ‘ㅇ’으로 변한 것이 많다. 방점은 구결 달린 원문과 언해문에 다 찍혔다.
이 책의 번역 방식이 의역(意譯)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지적된 사실이다. 이러한 지적은 『소학언해』의 ‘범례(凡例)’에서도 나타난다.
(3) 무인년(戊寅年) 책은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고자 하여 글자의 뜻 밖의 주석에 있는 말을 아울러 집어넣어서 새겼으므로 번거롭고 불필요한 곳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戊寅本 欲人易曉 字義之外 幷入註語爲解 故未免有繁冗處 今卽刪去枝辭 一依大文 逐字作解 有解不通處則分註解之)
무인년(戊寅年) 책, 즉 『번역소학』이 주석의 내용을 언해에 반영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번역소학』에서는 협주를 전혀 쓰지 않는 대신 주석의 내용을 번역에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문과 주석에 없는 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소학언해』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서, 필요에 따라 주석의 내용을 협주에 넣었다. 단 협주에 어미(魚尾)는 표시하지 않았는데, 이 글에서는 대비를 위해 『소학언해』의 내용을 제시할 경우에 편의상 협주를 어미로 묶어서 표시하기로 한다.
(4)가. 계야 조 신 고며(齊戒以告鬼神고)〈3:11ㄴ〉
나. ᄌᆡ계ᄒᆞ여 ᄡᅥ 鬼神<원주>【조샹을 닐옴이라】 ᄭᅴ 告ᄒᆞ며〈소언 2:45ㄴ〉
(5)가. 님금이 라 시며 니브라 신 命이 잇디 아니커시든 간도 즉재 며 닙디 마롤 디니라(君이 未有命이어시든 弗敢卽乘服也ㅣ니라)〈3:5ㄴ〉
나. 님금이 命이 잇디 아니커시든 敢히 즉제 ᄐᆞ며 닙디 몯ᄒᆞᄂᆞ니라〈소언 2:40ㄱ-ㄴ〉 주030)
이 책에서는 원문의 ‘敢’을 ‘잠ᄭᅡᆫ도’로 번역하고 있다. 『소학언해』에서는 ‘敢히’로 바뀌었다.
(6)가. 제 가질 모긔셔 해 가죠ᄆᆞᆯ 구티 마롤 디니라(分毋求多ㅣ니라)〈4:4ㄱ〉
나. ᄂᆞᆫ홈애 함을 求티 말올 디니라〈소언 3:3ㄴ〉
이 책에서는 ‘ㅿ’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으나, ‘ㅇ’으로 변화한 것도 보인다. ‘어버ᅀᅵ’(3:16ㄱ, 3:24ㄱ, 3:41ㄴ, 3:42ㄱ, 4:1ㄴ, 4:23ㄴ)도 있고, ‘어버이’(3:22ㄴ, 3:39ㄴ)도 있다. 다른 권(卷)에서도 ‘어버ᅀᅵ(9:8ㄱ), ᄉᆞᅀᅵ(6:24ㄴ)’와 ‘어버이(9:8ㄴ), ᄉᆞ이(8:11ㄴ, 10:9ㄴ)’가 다 보인다.
15세기의 일반적인 언해서에서는 언해문에만 한자음을 달고, 원문에는 한자음이 없이 한글 구결만 달았는데, 이 책에는 언해문뿐 아니라 원문에도 한자음이 달려 있다. 원문에 한자음을 단 것은 아동이나 부녀자의 학습을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031)
이 책을 부녀자들에게도 읽히고자 하는 의도는 남곤(南袞)의 발문(跋文) 중 “우리말로 번역하여 널리 인쇄하여 배포하면 비록 어린이와 부녀자라 하더라도 책을 펴자마자 금방 깨달을 것이니, 백성을 순치(順治)하는 방법으로는 마땅히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如以方言 飜而譯之 廣印流布 則雖兒童婦女 開卷便曉 籲民之方 宜無急於此者)”란 말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소학』은 결코 아동이나 부녀자를 위한 책만은 아니었다. 남곤의 발문에는 중종(中宗)이 이전에 경연(經筵)에서 한 다음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에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일찍이 이 책을 읽었지만 그때에는 오직 입으로 읽기를 일삼았을 뿐이어서 그 뜻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때를 놓쳐 학문을 그르친 것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에 경연에서 옛날에 읽은 것을 다시 연마하려 하노니, 아마 보탬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를 위하여 강론해 달라.(予幼嘗讀此 然惟口讀是事耳 未嘗究極其旨意 今而思之 頗有後時失學之悔 玆欲於經筵 重理舊讀 庶幾有所補益 爾其爲予講之)”
이 책의 한자음 표기 중 몇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毋’이다. 이 글자는 본문에서만 보이는데, 모두 ‘모’로 나타난다(3:27ㄴ, 3:28ㄱ, 4:2ㄴ, 4:3ㄴ, 4:4ㄱ, 4:10ㄱ, 4:11ㄴ …). 그런데 『소학언해』에서는 예외 없이 ‘무’로 바뀌었다(2:59ㄴ, 2:60ㄱ, 3:2ㄴ, 3:3ㄴ, 3:3ㄴ, 3:9ㄴ, 3:11ㄱ …). 예가 아주 풍부하다.
‘男람子ᄌᆞ’(3:15ㄱ)는 원문의 예인데, 언해문에서는 ‘男남子ᄌᆞ’로 나타난다. 『소학언해』(2:48ㄱ-ㄴ)의 원문과 언해문에는 모두 ‘男남子ᄌᆞ’로 적혀 있다. 다른 문헌에 ‘男’의 독음이 ‘람’으로 적힌 예가 없으므로 오각일 가능성이 있으나, ‘ㄴ’이 ‘ㄹ’로 적히는 근대국어의 일반적인 현상이 여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언해문에 ‘親친迎연’이 나오는데(3:15ㄱ), 원문에는 ‘親친迎여ᇰ’으로 적혀 있고, 『소학언해』(2:48ㄴ)에서는 ‘친히 마자’로 나타난다. 이 책(3:12ㄴ)의 언해문에도 ‘친연’이 나오지만, 이는 원문에 없는 말을 보충한 것이다. 원문에서는 이 대목 바로 뒤에 ‘迎’이 나오지만, 그 경우에는 독음이 ‘여ᇰ’으로 적혀 있고, 언해문에서는 ‘마자’로 번역되어 있다. 다른 문헌에 ‘迎’의 독음이 ‘연’으로 표기된 예가 또 있기는 하다. ¶諸졔聖셔ᇰ을 迎연逢보ᇰ와 오시게 코져 린댄〈진언권공 24ㄱ〉. 그러나 모두 오각으로 보인다.
‘告’의 독음은 ‘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래 예문의 ‘가’의 화살표 왼쪽에 적힌 것은 원문의 것이고 오른쪽에 적힌 것은 언해문의 것이다. ‘나’는 해당 예문을 제시한 것이다.
(7)가. 告:고 → :고〈3:11ㄴ〉
나. 혼인ᄒᆞᆯ 날와 ᄃᆞᆯ로 님금ᄭᅴ 고ᄒᆞ며
다. 告:고 → 告:고〈소언 2:45ㄱ-ㄴ〉
(8)가. 告:고 → :고〈3:14ㄱ-ㄴ〉
나. 혼인ᄒᆞᄂᆞᆫ 례ᄂᆞᆫ 萬世의 비르소미니 … 말ᄉᆞᄆᆞᆯ … 고호ᄃᆡ 주032)
‘고호ᄃᆡ’의 객체는 사돈(査頓)이다.
다. 告:고 → 告:고〈소언 2:47ㄴ-48ㄱ〉
(9)가. 告:고 → 엳ᄌᆞ올〈3:29ㄴ〉
나. 君子ᄅᆞᆯ 뫼셔 안자셔 말ᄉᆞᆷ 엳ᄌᆞ올 사ᄅᆞ미
다. 告:고 → 告고〈소언 2:61ㄴ〉 주033)
이 예의 언해문에서 평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이다.
(10)가. 告·곡 → 告:고〈3:34ㄴ〉
나. 子貢이 버들 묻ᄌᆞ온대 孔子ㅣ ᄀᆞᄅᆞ샤ᄃᆡ 져ᇰ셔ᇰ으로 告ᄒᆞ고 어딘 일로 니ᄅᆞ다가
다. 告·곡 → :고〈소언 2:66ㄱ〉
성조 표시가 다른 것이 있지만, 그 혼란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이한 것은 (10다)의 ‘·곡’이다. 『훈몽자회』(훈몽자회 比叡 하 12ㄴ)와 『유합』(하 39ㄴ)에 ‘고할 고’로 나타나고, 『자전석요』(상 15ㄴ)에 ‘청할 곡, 뵈일 곡’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의 ‘고’와 ‘곡’이 의미에 따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10)의 경우는 ‘告’의 객체가 주체와 신분이 대등한 벗(友)이어서 나머지 경우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出·츌必·필告·곡ᄒᆞ며 反:반必·필面:면ᄒᆞ며’(소언 2:8ㄴ)에서는 ‘告’의 객체가 주체보다 상위자인 부모이다. ‘告’의 독음에는 ‘알리다’를 뜻할 때의 ‘고(거성, 號韻), 곡(입성, 沃韻)’과 ‘심문하다, 국문하다’를 뜻할 때의 ‘귝/국(입성, 屋韻)’ 세 가지가 있다. ‘고’는 『광운(廣韻)』의 ‘古到切’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곡’은 『광운』의 ‘古沃切’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出必告ᄒᆞ며 反必面ᄒᆞ며’(소언 2:8ㄴ)의 ‘告’는 『소학집성』(2:10ㄱ)에 ‘工毒反’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오늘날 경전의 ‘告’에 대해 『석문(釋文)』과 주자(朱子)의 주석에서는 모두 ‘谷’으로 읽고 있다.(今經傳告字 釋文朱註皆讀谷)”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고’로 읽힐 때와 ‘곡’으로 읽힐 때의 의미 차이는 없는 듯하다. 『송자대전(宋子大全)』(권 103, 書, 答尹爾和, 丁巳 10월 26일)에는 이에 대한 윤이화(尹爾和)의 질문과 송시열(宋時烈)의 답이 기록되어 있다. “‘告’ 자의 음은 ‘古’라고도 하고 ‘谷’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구별합니까?(告字音或古或谷 何以爲別)”라는 윤이화의 질문에 송시열은 “‘告’의 음이 ‘工毒反’이라고 하는 것이 『가례(家禮)』에 보이지만, 그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告音之工毒反者 見於家禮 然其義 則未見其有異也)”라고 답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의미에 따라 ‘고’와 ‘곡’을 구별할 근거가 없는 듯하다.
이제 이 책의 어휘 중 특이한 몇 가지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모로매’는 『소학언해』에서 예외 없이 ‘반ᄃᆞ시’로 바뀌었다. 이 현상은 ‘모로매’의 소멸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11) 모로매(3:6ㄴ, 3:7ㄴ, 3:25ㄴ, 4:24ㄱ)
→ 반ᄃᆞ시(소언 2:41ㄱ, 2:42ㄱ, 2:58ㄱ, 3:21ㄴ)
이 책과 『소학언해』에서는 ‘삼가ᄒᆞ다’가 많이 보인다.
(12)가. 삼가호매(3:16ㄴ) → 삼가매(소언 2:50ㄱ)
나. 삼가호ᄃᆡ(3:46ㄴ) → 삼가기(소언 2:76ㄴ)
다. 삼가ᄒᆞ야(4:8ㄴ) → 삼가ᄒᆞ고(소언 3:7ㄴ)
라. 삼가ᄒᆞ면(4:22ㄴ) → 삼가ᄒᆞ면(소언 3:20ㄱ)
cf. 음식을 모로매 삼가고 존졀며〈번역소학 8:16ㄱ〉
중세 국어 시기와 근대 국어 시기 여러 문헌에서 ‘삼가다’가 더 일반적이었지만, ‘삼가ᄒᆞ다’의 예도 적지 않다.
(13)가. 모로매 모다 삼가라〈석보상절 23:13ㄱ〉
나. 압흘 딩계고 뒤흘 삼가니 황왕의 뎐측이 기리 드리웟도다〈천의소감언해 진쳔의쇼감전 7ㄱ〉
(14)가. 너의 籌畵 參預호 삼가라〈두시언해 초간본 23:30ㄱ〉
나. 禮로  삼가더니〈속삼강행실도 효 34ㄱ〉
‘삼가ᄒᆞ다’는 동사 어간 ‘삼가-’에 연결 어미 ‘-아’가 붙은 ‘삼가’와 ‘ᄒᆞ다’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아 ᄒᆞ다’는 형용사를 동사화하는 장치인데, 심리 동사인 ‘삼가다’가 [동작성]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삼가하다’를 비표준어로 간주하고 있는데, ‘삼가하다’가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이와 관련된 규정을 재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의 ‘-ㄹ 저긔, -ㄹ 제’는 예외 없이 『소학언해』에서 연결 어미 ‘-ㄹᄉᆡ’로 바뀌었다.
(15)가. 드르실 저긔(3:4ㄱ) → 들으실ᄉᆡ(소언 2:38ㄴ)
나. 들 저긔(4:12ㄱ) → 들ᄉᆡ(소언 3:10ㄴ)
다. 의론ᄒᆞᆯ 제(3:25ㄴ) → 의논ᄒᆞᆯᄉᆡ(소언 2:58ㄱ)
『소학언해』에서 ‘-ㄹᄉᆡ, -ㄹᄊᆡ’가 인과 관계를 나타내지 않고 시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현희(1988:212-214)에서 이 변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
(16) 리 이브로 후려먹디 말며(毋嚃羹며)〈4:26ㄴ〉
‘ᄀᆡᇰᄭᅥ리’는 ‘국의 건더기’인데, 『소학언해』(3:23ㄴ)에서는 ‘국거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거리’의 의미가 특이하다. 현대 국어의 ‘국거리’는 ‘국을 끓이는 데 넣는 고기, 생선, 채소 따위의 재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즉 오늘날의 ‘거리’는 ‘조리하기 전의 재료’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ᄀᆡᇰᄭᅥ리’의 ‘거리’는 ‘조리가 다 된 국에서 국물을 제외한 건더기 부분’을 뜻하고 있다.
(17) 내 마리 올여도 구틔여 올 디레 두디 마롤 디니라(直而勿有ㅣ니라)〈4:4ㄱ〉
이 번역은 원문에 없는 말을 아주 많이 보충한 것이다. 번역문을 현대 국어로 옮기면, “내 말이 옳아도 굳이 옳다고 미리 단정하여 말하지 말지니라.” 정도가 될 것이다. 『소학집해』에는 주자의 주석 “직이물유(直而勿有)는 나의 소견을 개진(開陳)하여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해야지, 장악하고 선입견을 두어 오로지 강변(强辯)을 힘써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直而勿有 謂陳我所見 聽彼決擇 不可據而有之 專務强辨)”란 내용이 실려 있다. 문제는 ‘디레’이다. 여기의 ‘디레’는 ‘선입견’ 정도에 해당하는 명사이다. 종래의 고어사전에서는 표제어 ‘디레’를 들기는 하였지만, 뜻풀이를 하지 않은 예도 있고, 아예 표제어로 싣지 않은 경우도 있다.
타동사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목적어 없이 쓰이면서 부사어와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소학언해』에서도 많은 예가 보인다.
(18)가. 님금 뫼셔〈3:6ㄱ〉 → 님금ᄭᅴ 뫼와셔〈소언 2:40ㄴ〉
나. 님금 뫼셔〈3:7ㄱ〉 → 님금ᄭᅴ 뫼셔〈소언 2:41ㄴ〉
다. 先生ᄭᅴ 뫼셔〈3:28ㄴ〉 → 先生ᄭᅴ 뫼셔〈소언 2:60ㄴ〉
라. 얼우신ᄭᅴ 뫼셔〈3:30ㄴ〉 → 얼운의게 뫼셔〈소언 2:62ㄱ〉
마. 얼우신ᄭᅴ 뫼셔〈3:31ㄱ〉 → 얼운의게 뫼셔〈소언 2:62ㄴ〉
(19)가. 君子ᄅᆞᆯ 뫼셔〈3:29ㄴ, 30ㄱ, 31ㄴ〉 → 君子ᄭᅴ 뫼셔〈소언 2:61ㄴ, 61ㄴ, 63ㄱ〉
나. 君子ᄅᆞᆯ 뫼ᅀᆞ와〈3:29ㄱ〉 → 君子ᄭᅴ 뫼셔〈소언 2:61ㄱ〉
(20) 君 뫼셔 食실 제 君이 祭시거든〈논어언해 2:60〉
(21) 님금 뫼셔 밥 머그실 저긔〈내훈 1:9ㄱ〉
(18가-마)는 이 책과 『소학언해』가 같은 양상을 보인 예들이고, (19가, 나)는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이 책에서는 목적어와 호응하고 『소학언해』에서는 부사어와 호응하는 예이다. (20)은 『논어언해』의 예인데, 원문은 (18가)의 원문과 같다. 제시된 예 중 『내훈』의 예인 (21)이 시기적으로는 가장 앞선다. 원문은 역시 (18가)의 원문과 같다.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타동사로 쓰인 예들을 더 보도록 하자.
(22)가. 부텻 舍利 뫼셔다가 供養리라 야〈석보상절 23:46ㄱ〉
나. 리 사 마자 馬廏에 드러 오나 聖宗 뫼셔 九泉에 가려 시니〈용비어천가 109〉
다. 群臣이 武皇을 뫼도다〈두시언해 초간본 14:10ㄴ〉
이로 보아 이 동사가 타동사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목적어 없이 부사격 조사 ‘ᄭᅴ’로 이루어진 부사어와 호응하는 예가 결코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목적어 없이 부사어와 호응하는 ‘뫼다, 뫼시다’ 앞에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일 가능성이고, 둘째는 ‘뫼다, 뫼시다’가 타동사 외에 자동사로 쓰인 것일 가능성이다. 결정적인 근거가 보이지 않아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하기 어렵다.
(23) 昭陽殿 안햇 第一엣 사미 輦에 同야 님그믈 졷와 님 겨틔 뫼더니라(=昭陽殿裏第一人 同輦隨君侍君側)〈두시언해 초간본 11:16ㄱ〉
위 예문에서는 ‘隨君’은 ‘님그믈 졷ᄌᆞ와’로 언해하고 ‘侍君’은 ‘님그ᇝ 겨틔 뫼ᅀᆞᆸ더니라’로 언해하였다. ‘님그믈 겨틔’를 택하지 않고 ‘님그ᇝ 겨틔’를 택한 원인을 알기 어렵다. 반복을 피한 선택일 수도 있고, ‘側’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뫼ᅀᆞᆸ다’가 부사어 ‘겨틔’와 호응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겨틔’와 ‘의게, ᄭᅴ’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처소와 관련된 명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의게’의 기원적 구조는 ‘의(안 높임의 관형격 조사)+긍(처소 지시 의존명사)+에(부사격 조사)’이고, ‘ᄭᅴ’의 기원적 구조는 ‘ㅅ(높임의 관형격 조사)+그ᇰ(처소 지시 의존명사)+의(특수 처소 부사격 조사)’이다. 주034)
내부에 처소 명사를 지니고 있는 ‘의게, ᄭᅴ’는 애초에는 [도달점]을 뜻하는 부사격 조사로 쓰이다가, 분포가 확대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 책의 ‘비록 됫 다ᄒᆡ 가도(雖之夷狄이라두)’(4:5ㄱ)가 『소학언해』(3:4ㄴ)에서 ‘비록 되게 가도’로 바뀐 것은 ‘게’의 형태적 기원을 잘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만약 목적어 없이 부사어와 호응하는 ‘뫼다, 뫼시다’가 자동사라면, ‘존자(尊者)의 곁에서 존자와 함께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주035)
한편 ‘뫼ᅀᆞᆸ다’에서 어간 ‘뫼-’가 도출되는데, ‘뫼시-’에서는 어간 ‘뫼-’를 도출하기가 어렵다. ‘뫼시-’에 ‘-ᅀᆞᇦ-’이 쓰인 예도 있다. ¶大神히 뫼시니〈월인천강지곡 기 23〉. 그렇다면 두 어간 ‘뫼-’와 ‘뫼시-’가 공존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뫼시-’의 ‘시’를 ‘이시-’의 이형태 ‘시-’로 추정할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두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뫼-’ 뒤에 연결 어미 ‘-어’가 외현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일반적으로 ‘동사 어간+어+이시-’는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데, ‘뫼시-’는 그렇지 않은 까닭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두드리디’(4:25ㄴ)는 ‘(밥을) 뭉치지’를 뜻한다. 이 낱말은 종래의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다른 문헌의 용례도 없다. ‘다디르다/다디ᄅᆞ다(=들이받다, 내지르다)’의 ‘디르다/디ᄅᆞ다’가 [打]를 뜻하는 동사이므로 ‘다’는 이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 동사의 어간이거나 활용형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물체를 둔탁한 것으로 치는 행위’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현대 국어 ‘다듬다’의 ‘다’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학언해』(3:23ㄱ)에서는 ‘무ᇰ킈디’로 바뀌었다.
‘벱디’(4:5ㄱ)는 ‘베풀지’를 뜻한다. 『소학언해』(3:4ㄴ)에서는 ‘베프디’로 바뀌었다. 어간은 ‘벺-’으로 보이는데, 예가 아주 드물다. ‘烏鳥含情을 벱고야 말녓노라’(노계선생문집: 사제곡)에 보인다. 『번역소학』의 ‘벱’의 우하(右下) 위치에 권점(圈點)이 보이는데, 소장자가 그려 넣은 듯하다.
‘쟉쟉’(4:27ㄴ)은 ‘조금씩’을 뜻하는데, 어간 ‘쟉-[少]’이 중첩된 비통사적 합성어가 부사로 영파생된 것이다. 합성어이면서 파생어인 셈이다. 다른 문헌에서 ‘젹젹’이 보인다. ¶三年 무근  各 닷 홉과 섯거 라 生 뵈로 汁을  時節 븓들이디 마오 젹젹 주어 머기면 오라면 반기 말리라〈구급방언해 상 3ㄱ〉. 이 낱말은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게 적당히’를 뜻하는 현대어 ‘작작’으로 발달하였다.
보조사 ‘이라도’가 ‘이라두’로 변한 예가 있는데, 방언의 반영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과 언해문 및 『소학언해』의 순서로 제시한다.
(24)가. 雖婢妾이라두 → 비록  고매라도〈3:17ㄴ〉
→비록 죠ᇰ과 妾이라도〈소언 2:51ㄱ〉
나. 雖之夷狄이라두 → 비록 됫다ᄒᆡ 가도〈4:5ㄱ〉
→ 비록 되게 가도〈소언 3:4ㄴ〉
다. 雖蠻貊之邦이라두 → 비록 되나라히라도〈4:5ㄱ〉
→ 비록 되나라히라도〈소언 3:5ㄱ〉
라. 雖夜ㅣ나 → 비록 바미라두〈4:18ㄱ〉
→ 비록 밤이나〈소언 3:16ㄱ〉
‘ㅗ’가 ‘ㅜ’로 변한 것은 오늘날의 경기 방언 현상과 부합하는데, 다른 문헌에서도 보인다.
(25)가. 비록  긔약 사이 아니라두〈여씨향약언해 화산문고본 36ㄴ〉
나. 덥고 비올 제라두〈소학언해 6:2ㄱ〉
다. 홈을 디라두〈효경언해 17ㄴ〉
이 책의 사동 접미사 ‘-이-’가 『소학언해』에서 ‘-히-’로 바뀐 예가 있다. 이 책의 ‘ᄇᆞᆯ기다’가 예외 없이 『소학언해』에서 ‘-히-’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는 ‘ᄇᆞᆯ기다, 니기다’ 두 낱말에서만 이 현상이 보인다.
(26)가. ᄇᆞᆯ기노래니라(3:16ㄱ) → ᄇᆞᆯ킴이니(소언 2:49ㄴ) 주036)
‘ᄇᆞᆯ기노라’와 ‘ㅣ니라’ 사이에서 ‘ᄒᆞ야’가 생략된 것이다. 한편 『번역소학』에서는 종결 형식을 쓰고 『소학언해』에서는 연결 형식을 쓴 것도 중요한 차이이다.
나. ᄇᆞᆯ기니라(3:23ㄴ, 3:39ㄱ, 4:9ㄱ, 4:21ㄴ, 4:25ㄴ)
→ ᄇᆞᆯ키니라(소언 2:56ㄱ, 2:70ㄱ, 3:8ㄴ, 3:19ㄱ, 3:22ㄴ)
다. 니겨(熟, 3:6ㄴ) →닉켜셔(소언 2:41ㄱ)
동사 어간에 ‘-어 -’가 붙은 ‘두어홈’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다른 문헌의 관련 용례도 함께 제시한다.
(27)가. ᄢᅵᆫ  두어호미 올티 아니니라(不可以有挾也ㅣ니라)〈3:36ㄱ〉 주037)
‘ᄡᅦᆫ ᄆᆞᅀᆞᆷ 두어홈’은 ‘有挾’의 번역인데, ‘挾’은 ‘(힘 있는 측근을) 믿고 뽐냄’을 뜻한다. 『소학언해』(2:67ㄱ)에서는 ‘ᄢᅵᆷ을 두디 몯ᄒᆞᆯ 거시니라’로 바뀌었다.
나. 뫼셔 안자셔 시기디 아니커시든 믈을 자바디 말며(侍坐애 弗使ㅣ어든 不執琴瑟며)〈3:32ㄱ〉 주038)
‘자바ᄒᆞ디’는 『소학언해』(2:63ㄴ)에서 ‘잡디’로 바뀌었다.
다. 東州 밤 계오 새와 北寬亭의 올나니 三角山 第一峯이 마면 뵈리로다〈송강가사 성주본, 관동별곡〉
라. 내 보아니 이 도라가디 못홈이로다〈오륜전비언해6:33ㄱ〉
여기의 ‘두어ᄒᆞ다, 자바ᄒᆞ다’가 단어인지 구(句)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처럼 동사 어간에 ‘-어(아) ᄒᆞ-’가 붙는 현상은 가사 문학 작품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오륜전비언해』의 ‘보아ᄒᆞ니’는 현대 국어 ‘보아하니’로 이어지고 있다. 운율을 위해 만든 형식이 분포를 넓힌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주039)
현대 국어 ‘보아하니’는 국어사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이다.
활용형 ‘ᄀᆞᄅᆞ샤ᄃᆡ’는 이 책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이전의 문헌에서는 ‘ᄀᆞ로ᄃᆡ’는 쓰였지만, ‘ᄀᆞᄅᆞ샤ᄃᆡ’는 쓰인 적이 없다. 이 책 중에서도 3·4·6권에서만 나타난다(3:8ㄱ, 3:9ㄱ,…, 4:1ㄴ, 4:4ㄴ…, 6:1ㄴ, 6:2ㄴ). ‘ᄀᆞᆯᄋᆞ샤ᄃᆡ’는 『소학언해』에서 처음 나타난다(2:17ㄴ, 2:18ㄱ,…).
(28) 曲禮예 로 믈읫 보   우희 오면 조너고  아래 리오면 시르믈 뒷 거시오 기우리면 간샤  뒷 거시라(曲禮예 曰 凡視를 上於面則敖고 下於帶則憂ㅣ오 傾則姦이니라〈4:15ㄱ〉
‘조너ᄅᆞ고’는 ‘敖’의 번역인대, 이 책에서만 보인다. 부사형 ‘조널이(=함부로)’는 『내훈』에서 보인다.
(29) 기춤며 하외욤며 기지게 며 녁 발이 쳐 드듸며 지여며 빗기 보 말며 조널이 춤 바며 고 프디 말며〈내훈 1:45ㄱ〉
이 책의 ‘조너ᄅᆞ-’는 ‘조널이’가 ‘조너ᄅᆞ-(형용사 어간)+이(부사형 어미)’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책의 ‘조너ᄅᆞ고’가 『소학언해』(3:13ㄴ)에서는 ‘오만이오’로 바뀌었는데, ‘오만’은 ‘傲慢’일 것이다. 이렇게 바뀐 것은 ‘조너ᄅᆞ다’가 널리 알려진 낱말이 아니었거나 쓰이지 않는 낱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어 중 몇 가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션ᄉᆡᇰ(=先生)’(3:26ㄱ, 3:27ㄴ, 3:29ㄱ)은 15세기 불경언해류 문헌에서 볼 수 없던 낱말이다. 한자로 표기된 ‘先生’도 마찬가지이다. 한글로 표기된 ‘션ᄉᆡᇰ’은 『번역소학』과 비슷한 시기의 문헌인 『번역노걸대』(1517)에서 처음 보인다.
(30)가. 濂溪 周先生이 니샤〈내훈 1:19ㄴ〉
나. 션려 무로되〈번역노걸대 하 70ㄴ-71ㄱ〉
다음의 ‘비변도이’는 용례가 드물다.
(31) 보화의 다라셔 비변도이 가쥬려 말며 환란의 다라셔 구챠히 버서나려 말며 토와 사호매 이긔요 구티 말며 제 가질 모긔셔 해 가죠 구티 마롤 디니라(臨財야 毋苟得며 臨難야 毋苟免며 狠毋求勝며 分毋求多ㅣ니라)〈4:3ㄴ-4ㄱ〉
‘비변도이’는 ‘구차하게’를 뜻한다. ‘도이’는 ‘-ᄃᆞᇦ-’에 ‘-이’가 붙은 ‘ᄃᆞᄫᅵ’가 변한 것이다. 이 예문에서는 ‘苟’를 ‘비변도이’로도 번역하고 ‘구챠히’로도 변역하였다. 『소학언해』(3:3ㄴ)에서는 원문의 두 ‘苟’ 모두 ‘구챠히’로 번역하였다. ‘비변’의 다른 용례가 보이지 않는데, ‘鄙褊’인 듯하다. ‘褊’은 ‘옷의 품이나 땅이나 도량이 좁음’을 뜻하는데, ‘변’ 또는 ‘편’으로 읽혔다. ¶①:변〈동국정운 3:16ㄴ〉 ②편, 변〈자류주석 상 87ㄴ〉. ③편, 변〈자전석요하 62ㄴ〉.
‘大夫’는 원문이나 언해문에서 한자와 한글이 병기될 경우에는 ‘태부’로 표기되고, 한글로만 적힌 언해문일 경우에는 ‘태우’로 표기되었다.
(32)가. 大태夫부 → 大태夫부〈3:35ㄱ, 3:40ㄴ〉
나. 大태夫부 → 태웃(관형사형)〈4:15ㄴ-16ㄱ〉
다. 大태夫부 → 벼슬 노ᄑᆞ니〈3:38ㄴ〉
다음은 다른 문헌에 한글만 적힌 예이다.
(33)가. 광록태우〈삼강행실도 동경대본 충신 8ㄱ〉
나. 대광보국슝녹태우녕듕츄부〈천의소감언해 진쳔의쇼감차 1ㄱ〉
다. 태우려 닐어 샤〈맹자언해 4:13ㄱ〉
『소학언해』(2:66ㄱ-ㄴ, 2:70ㄴ-71ㄱ)에서는 원문의 경우는 ‘大대夫부’로 나타나고, 언해문의 경우는 한자 표기 없이 ‘태우’로 나타난다. 한문 원문에서 ‘대부’로 표기하면서 언해문에서 ‘태우’로 표기하는 것은 다음 자료에서도 볼 수 있다. (34가)는 ‘手提擲還崔大夫’의 독음을 적은 것이고, (34나)는 언해문이다.
(34) 슈뎨텩환최대부 → 손으로 자바 더뎌 최태우의게 도라보내도다〈고문진보 희쟉화경(戲作花卿) 두ᄌᆞ미(杜子美)〉
‘大夫, 士大夫’의 표기는 권(卷)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이현희 1988:218), 번역자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쟈ᇰᄎᆞᆺ ᄂᆞᄆᆡ 지븨 쥬연ᄒᆞ야 갈 저긔(將適舍)’의 ‘쥬연ᄒᆞ야’(4:11ㄱ)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말이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3:10ㄱ)에서는 ‘쟈ᇰᄎᆞᆺ 쥬인ᄒᆞᆫ 집의 갈ᄉᆡ’로 바뀌었는데, ‘쥬인ᄒᆞᆫ’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원문의 ‘舍’를 『소학집해』에서는 ‘館’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성백효(1993:181)에서는 “장차 관사에 갈 때에”로 번역하였고, 이충구 외(2019a:218)에서는 “객사에 가려할 때에는”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쥬연’이나 ‘쥬인’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이 책에는 오각이 많다. 옳은 표기를 괄호 속 화살표 뒤에 제시한다.
(35) 고ᇰᄉᆞㅣ(3:39ㄴ→고ᇰᄌᆞㅣ), 雖無道이나(3:40ㄱ→雖無道ㅣ나),
신해(3:40ㄴ→신하), 나ᅀᅵ가(3:26ㄱ→나ᅀᅡ가), 옯ᄂᆞ니라(4:3ㄴ→옮ᄂᆞ니라)
처ᅀᅡᆷ(4:22ㄱ→처ᅀᅥᆷ)
이 중 ‘雖無道이나’(3:40ㄱ)의 경우에는 같은 면의 바로 뒤에 ‘雖無道ㅣ나’가 두 번이나 나오므로 단순한 실수임이 틀림 없다. ‘처ᅀᅡᆷ’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줄 바로 아래에 옳게 새겨진 ‘처ᅀᅥᆷ’이 나온다. ‘옯ᄂᆞ니라’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소학언해』(3:3ㄱ)에도 ‘옯’으로 적혀 있다.
같은 글자가 중복되는 경우의 실수도 보인다.
(36)가. 얼우니 묻거시든  아니코 즉재 답호미 례져리 아니라(長者ㅣ 問이어든 不辭讓而對ㅣ 非禮也ㅣ니라〈3:25ㄴ〉
나. 君子 뫼셔 이쇼매 도라 라디 아니코 간대로 답호미 禮 아니라(侍於君子 不顧望而對ㅣ 非禮也ㅣ니라)〈3:31ㄴ〉
(36가, 나)의 ‘아니라’는 모두 ‘아니니라’의 실수로 보인다. 원문 구결에는 명제에 대한 청자(독자)의 인지(認知)를 요구하는 선어말 어미 ‘-니-’가 있는데 언해문에서는 빠져 있다. 둘 다 『소학언해』(2:58ㄱ, 2:63ㄱ)에서 ‘아니니라’로 바뀌었다.
‘례모(禮貌)’를 ‘례도’로 잘못 새긴 예가 보인다. 『소학언해』(3:15ㄴ)에서는 ‘녜모’로 나타난다.
(37) 비록 아도이 겨신 히라도 례도시며(雖褻이나 必以貌시며=비록 사사로운 자리라 하더라도 예모를 차리셨으며)〈4:17ㄴ〉
그 밖에도 많은 오자가 보인다. 언해문의 ‘主쥬人신’(3:38ㄱ)은 ‘쥬ᅀᅵᆫ’의 오각이다. 원문에서는 옳게 나타난다. ‘고져(=鼓子, 3:17ㄱ)’는 ‘고쟈’의 잘못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50ㄱ)에는 ‘고쟈’로 나타난다. 『훈몽자회』(중 1ㄴ)에서 ‘閹 고쟈 엄 宦 고쟈 환 閽 고쟈 혼 䦙 고쟈 시’가 보인다. ‘돗 ᄀᆞ로ᄆᆞᆯ(=布席, 3:37ㄱ)’은 ‘돗 ᄭᆞ로ᄆᆞᆯ’의 잘못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68ㄱ)에서는 ‘돗ᄀᆞᆯ ᄭᆞ라지라’로 나타난다. ‘ᄭᆞᆯ-’이 ‘ᄀᆞᆯ-’로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인데,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대ᄀᅿᆯ믄(=대궐문, 3:4ㄱ)’의 ‘ᄀᅿᆯ’은 이 책에서도 같은 예가 더 보이지 않으므로 오각임이 분명하다. 이 책에는 ‘蹶(3:27ㄱ), 厥(4:23ㄱ)’이 보이는데, 독음이 모두 ‘궐’로 적혀 있다. 한편 ‘門’의 독음이 원문에서는 ‘문’으로 적혀 있고 언해문에서는 ‘믄’으로 적혀 있는데, ‘믄’은 오각이거나 자획이 마멸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면(面)에서 ‘무ᇇ, 문(2개)’이 나온다. ‘門’의 독음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몬’으로 나타난다(법화경언해 7:20ㄴ, 법화경언해 7:189ㄴ, 원각경언해 하 1-1 : 5ㄴ, 선종영가집언해 상 2ㄴ). 그런데 이 책이 간행될 무렵인 16세기 초 문헌에서부터 ‘문’으로 적힌 예가 보인다(훈몽자회 중 4ㄱ, 법집별행록 3ㄴ, 유합 상 23ㄴ, 왜어유해 상 32ㄱ). 그러므로 여기에 적힌 ‘믄’은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몬〉문’의 변화는 오늘날 경기 방언의 특징과 부합한다.
‘그로’(3:44ㄱ)는 ‘그릇되게(違)’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형용사 ‘그르다’에서 영파생된 부사 ‘그르’가 쓰였다. 이 ‘그로’는 ‘서르〉서로’와 같은 유추의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부사격 조사 ‘-로’ 때문에 ‘-로’로 끝나는 부사어가 많아짐에 따라, 이에 유추되어 ‘그르’가 ‘그로’로 변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용례가 보이지 않아서 오각일 가능성이 크다. 『소학언해』(2:74ㄴ)에서는 ‘어글웃게’로 나타나는데, ‘어글웃게’도 드문 예이다. 대개는 ‘어글읏-’으로 나타난다. ‘어글읏(어글웃)-’은 ‘어글읓(어글웇)-’을 8종성 표기 규칙에 따라 표기한 것이다.
‘엄시’(3:14ㄴ)는 ‘없이’의 오각이다. 이 책(3:16ㄱ)의 ‘업소며, 업소믄’으로 보아, 방언형의 반영은 아닌 듯하다. 『소학언해』(2:48ㄱ)에는 ‘업시’로 적혀 있다. ‘和화悅얼’(3:44ㄴ)은 언해문의 예인데, ‘열’을 ‘얼’로 잘못 새겼다. ‘슬윗’(4:14ㄴ)은 ‘술윗(=수레의)’의 오각이다. 『소학언해』(3:13ㄱ)에서는 ‘술윗’으로 나타나고, 이 책에서도 ‘술윗’이 보인다(4:18ㄱ). ‘마년’(4:22ㄴ)은 ‘만년(=萬年)’을 뜻하는데, 오각인 듯하다. 『소학언해』(3:20ㄱ)에서는 한자 표기 ‘萬年’으로 바뀌었다.
다음 예문의 ‘져ᇰ다이’는 오각인지 오역인지 분명치 않다.
(38) 朝廷에 아랫태웃 벼슬  사려 말샤 딕히 시며 웃태웃 벼슬  사려 말샤 온화코 다이 더시다(朝與下大夫로 言에 侃侃如也시며 與上大夫로 言에 誾誾如也ㅣ러시다〈4:15ㄴ-16ㄱ〉
여기서는 ‘誾誾如也’를 ‘온화코 져ᇰ다이 ᄒᆞ더시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소학언해』의 번역이나 주석의 내용과 아주 다르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3:14ㄱ)에서는 ‘誾誾<원주>【화열호ᄃᆡ ᄌᆡᇰ홈이라】 ᄐᆞᆺᄒᆞ시다’로 나타난다. 이 협주는 『소학집설』에서 주자(朱子)가 인용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해설〉 “은은(誾誾)은 화열(和悅)하면서도 간쟁(諫諍)하는 것(誾誾和悅而諍也)”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져ᇰ’은 ‘간쟁(諫諍)’을 뜻하는 ‘ᄌᆡᇰ(諍)’의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다음 예문의 ‘븟 살가 야’가 그것이다.
(39) 뫼셔 활 솔딘댄 사 모도 잡고 뫼셔 投투壺호홀딘댄 사 모도아 놀 디니 제 이긔여든 잔 시서 븟 살가 야 홀 디니라(侍射則約矢고 侍投則擁矢니 勝則洗而以請이니라)〈3:32ㄴ〉
‘븟 살가 ᄒᆞ야’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소학언해』(2:64ㄱ)에서도 이 부분이 없이 ‘잔 시서 ᄡᅥ 請홀 디니라’로 적혀 있다. 실수인 듯하다.
이 책에는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번역이 꽤 있다.
(40) 士昏禮예 로 아비라셔 아리 친연라 갈 제 술  잔 머기고 로 가 너 도 사 마자 와 내 졔홀 이 니 힘 오로  거느려 업스신 어마님 일 니 네 티 라 아리 로 그리 호리다 오직 이를 이긔디 몯가 젓솝거니와 잠도 命을 닛디 아니호리다(士昏禮예 曰 父ㅣ 醮子애 命之曰 往迎爾相야 承我宗事야 勖帥以敬야 先妣之嗣를 若則有常라 子曰 諾다 唯恐不堪이언 不敢忘命호리다)〈3:12ㄱ-ㄴ〉
여기의 ‘업스신 어마님’은 ‘先妣’의 오역이다. 『소학집설』에서 “어머니를 선비라 하는 것은 대개 옛날의 명칭이다.(母曰先妣 盖古稱也)”라 하였는데, 예문에서는 ‘선비’를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잘못 알고 오역을 하였다. ‘업스신 어마님 일 니ᅀᅮᄆᆞᆯ’을 『소학언해』(2:46ㄱ)에서는 ‘어미를 니을이니(=어머니를 이으리니)’로 바로잡았다.
(41) 이 우 남진과 계집이 별히 호 기니라(右 明夫婦之別이라)〈3:23ㄴ〉
‘명부부지별’은 편목(篇目)의 제목인데, 이 언해에서는 그것을 문장으로 간주하고 번역하였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남진과 계집’은 주어가 아니라 관형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별히 호ᄆᆞᆯ’이란 번역도 좋지 않다. ‘분별하여 행동함을’이란 의미를 ‘별히 호ᄆᆞᆯ’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이 『소학언해』(2:56ㄱ)에서는 ‘이 우ᄒᆞᆫ 남진과 겨집의 ᄀᆞᆯᄒᆡ옴ᄋᆞᆯ ᄇᆞᆯ키니라(右ᄂᆞᆫ 明夫婦之別ᄒᆞ니라)’로 바뀌었다. 주040)
‘이라’와 ‘ᄒᆞ니라’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右 明夫婦之別이라’에서는 ‘明夫婦之別’이 편목의 제목이 되고, 『소학언해』의 ‘右ᄂᆞᆫ 明夫婦之別ᄒᆞ니라’에서는 ‘夫婦之別’이 편목의 제목이 된다.
(42) 벼 던 사 늘그니 거러 니디 아니며 庶人 늘그니 고기 업슨 밥 먹디 아니니라(君子ㅣ 耆老애 不徒行며 庶人이 耆老애 不徒食이니라)〈3:33ㄱ-ㄴ〉
‘벼슬 ᄒᆞ던 사ᄅᆞᆷ 늘그니’와 ‘庶人 늘그니’는 명사구가 다른 요소의 개입이 없이 연결된 것인데 아주 부자연스럽다. ‘기(耆)’는 60세를 뜻하고 ‘로(老)’는 70세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耆’와 ‘老’는 ‘君子’의 서술어이다. 『소학언해』(2:64ㄴ)에서는 ‘君子<원주>【이 군 벼슬 인 사이라】 ㅣ 늘금애 …(중략)… 샤ᇰ인이 늘금애’로 바로잡았다.
(43) 믈읫 손과로 들 제 문마다 손 야 소니 안 문에 니르거든(凡與客으로 入者ㅣ 每門에 讓於客야 客至寢門이어든)〈3:36ㄴ-37ㄱ〉
여기서는 구결 달린 원문 ‘入者ㅣ’와 언해문 ‘들 제’가 부합하지 않는다. 『소학언해』(2:68ㄱ)에서는 ‘들어가ᄂᆞᆫ 이’로 바로잡았다.
(44) 欒共子ㅣ 로 이 세 가지예 셤교  티 홀 디니 아비 나시고 스이 치시고 님그미 머기시니 아비 아니시면 나디 몯며 머기디 아니면 라디 몯며 치디 아니면 아디 몯니 나신 은혜와 가지니 그런 로  으로 셤겨 다 마다 주구믈 닐외욜 디니라(欒共子ㅣ 曰 民生於三애 事之如一이니 父ㅣ 生之고 師ㅣ 敎之고 君이 食之니 非父ㅣ면 不生이오 非食ㅣ면 不長이오 非敎ㅣ면 不知니 生之族也 故로 一事之야 唯其所在則致死焉이니라)〈3:42ㄴ-43ㄱ〉
여기서는 ‘民生於三애’를 ‘ᄇᆡᆨ셔ᇰ이 세 가지예’로 번역한 것이 문제이다. 『소학언해』(2:73ㄱ-ㄴ)에서도 똑 같이 나타난다. 두 책 다 ‘民生’을 ‘ᄇᆡᆨ셔ᇰ’으로 번역한 것이다. 동일한 원문의 번역이 『삼강행실도언해』에서도 보이는데, 그 책에서는 ‘生’이 ‘사ᄂᆞ니’로 번역되어 있다. 즉 ‘란공 닐오 사미 세 고대 사니’(삼강행실도언해 동경대본 충신 2ㄱ)로 나타난다. ‘民生於三애’의 의미는 진선(陳選)의 『소학증주』에 나타나 있다.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모두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 사람에 의해서 산다고 말한 것이다.(君父師 皆人之所由生也 故曰民生於三)”란 것이다.
(45) 晏子ㅣ 로 님그믄 시기시거든 臣下 조심야며 아비 어엿비 너기거든 식은 효도며 兄은 커든 아 며 남진 和悅커든 계집 유화며 싀어미 어엿비 너기거든 며느리 좃와호미 禮니라(晏子ㅣ 曰 君令臣共며 父慈子孝며 兄愛弟敬며 夫和妻柔며 姑慈婦聽이 禮也ㅣ니라)〈3:43ㄴ-44ㄱ〉
여기서는 ‘-거든’이 5번 쓰였는데, 비록 당시의 연결 어미 ‘-거든’의 의미역이 현대 국어 연결 어미 ‘-거든’에 비해 훨씬 넓기는 하였지만 모두 오역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74ㄱ)에서는 모두 ‘-고’로 바뀌었다.
(46) 曾子ㅣ 샤 아미 깃디 몯얏거든 간도 밧긧 사 사괴디 말며 갓가오니 親티 몯얫거든 간도 먼  가 求티 말며 혀근 이 피디 몯얏거든 간도 큰 이 니디 마롤 디니라(曾子ㅣ 曰 親戚이 不說이어든 不敢外交며 近者를 不親이어든 不敢求遠며 小者를 不審이어든 不敢言大니라)〈3:44ㄴ-45ㄱ〉 주041)
『소학집설』에서 ‘친척(親戚)’은 ‘부형(父兄)’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백효(1993:165)와 이충구 외(2019a:201)에 수록되어 있다. ‘아ᅀᆞ미’는 『소학언해』(2:75ㄱ)에서 ‘어버이와 권다ᇰ이’로 바뀌었다.
‘아ᅀᆞ미 깃디 몯얏거든’은 자동사 구문이고, 이어지는 ‘갓가오니 親티 몯얫거든’과 ‘혀근 이 피디 몯얏거든’은 타동사 구문이어서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문 원문의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소학언해』(2:75ㄱ)에서는 ‘어버이와 권다ᇰ이 깃거티 아니커든 … 갓가온 이 親티 아니커든 … 쟉은 이ᄅᆞᆯ ᄉᆞᆯ피디 몯ᄒᆞ얏거든 …’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서도 사정이 변하지 않았다.
(47) 論語에 로 슬윗 가온셔 돌보디 말며 말 리 말며 손 치디 마롤 디니라(論語에 曰 車中에 不內顧며 不疾言며 不親指니라)〈4:14ㄴ〉
이 예문에서는 수레를 탈 때의 세 가지 품위 없는 행동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소학언해』(3:13ㄱ)에서는 이 대목이 ‘親히 ᄀᆞᄅᆞ치디 아니ᄒᆞ더시다’로 끝난다. 높임의 선어말 어미 ‘-시-’를 쓴 것은 이 대목에 나타난 세 가지 행위를 수레를 탈 때의 공자(孔子)의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오류를 『소학언해』에서 바로잡은 것이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서는 이 내용의 바로 앞에 ‘수레를 타시면 반드시 바로 서서 고삐를 잡으셨다(升車 必正立 執綏)’란 내용이 실려 있다.
(48) 曲禮예 로 믈읫 보   우희 오면 조너고  아래 리오면 시르믈 뒷 거시오 기우리면 간샤  뒷 거시라(曲禮예 曰 凡視를 上於面則敖고 下於帶則憂ㅣ오 傾則姦이니라)〈4:15ㄱ〉
이 예문에서 자동사 ‘오ᄅᆞ면’을 쓴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타동사 ‘올이-’를 쓰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믈읫 보ᄆᆞᆯ ᄂᆞᄆᆡ ᄂᆞᆺ 우희 오ᄅᆞ면’이 『소학언해』(3:13ㄴ)에서는 ‘믈읫 봄이 ᄂᆞᆺᄎᆡ 올이면’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어 ‘봄이’와 서술어 타동사 ‘올이면’의 불일치가 흥미롭다. 두 책 모두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ᄂᆞ리오면’은 타동사여서 앞의 ‘오ᄅᆞ면’과 일치하지 않는다. 『소학언해』(3:13ㄴ)에서는 ‘믈읫 봄이 ᄂᆞᆺᄎᆡ 올이면 오만이오 ᄯᅴ예 ᄂᆞ리오면 근심홈이오’으로 되어 있다. 타동사를 쓴 점에서 일관성은 있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어 ‘봄이’와 호응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49) 네 아 들 리고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 슈 셰 이셔(棄爾幼志고 順爾成德이면 壽考維祺야)〈4:22ㄱ〉
여기서는 원문의 ‘順爾成德’을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부분이 『소학언해』(3:19ㄴ)에서는 ‘네 인 德을 順ᄒᆞ면’으로 바뀌었다. 두 책 모두 ‘네’가 평성이므로 주어가 아니라 관형어임을 알 수 있다. ‘어딘’은 원문에 없는 낱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소학언해』의 번역은 ‘덕이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전제한 것이어서, 부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이 책의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은 그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불필요한 ‘어딘’을 보충하였고, 원문의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성백효(1993:195)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너의 덕 이룸을 순히 하면’으로 번역하였다.
(50) 어버 업슨 시기 지븨 읏듬얫니 곳갈와 옷과 빗난 거로 편 도디 아니홀 디니라(孤子ㅣ 當室야 冠衣를 不純采니라)〈4:23ㄱ-ㄴ〉
이 예문은 “어버이 없는 자식이(어버이를 잃고) 집안의 가장(家長)이 된 이는 관(冠)과 옷을 빛나는 것으로 선(縇)을 두르지 말지니라.”란 뜻이다. ‘당실(當室)’은 아버지의 뒤를 물려받은 자를 말한다. ‘純’은 관(冠)이나 옷깃에 장식용 헝겊을 덧대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의 독음은 ‘준’이다. 여기서 주목할 낱말은 ‘편ᄌᆞ(編子)’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의 표제어 ‘편자’와 ‘망건편자’에서는 ‘편자’의 한자를 표기하지 않았다. ‘편ᄌᆞ’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망건의 아랫부분으로서, 망건을 졸라매기 위해 말총으로 띠처럼 굵게 짠 부분을 가리킨다. ¶邊巾 망건 편〈광재물보 의복 3ㄴ〉. 둘째는 ‘선(縇)’을 가리킨다. ‘선(縇)’은 옷이나 방석 따위의 가장자리에 덧대는 좁은 헝겊이다. 이 글 속에서의 ‘편ᄌᆞ’는 관(冠)이나 옷깃에 덧대는 장식용 헝겊이다. 동음이의어로서 ‘마철(馬鐵), 제철(蹄鐵)’을 뜻하는 ‘편ᄌᆞ’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유입된 차용어로 보인다. ¶편 馬鐵〈국한회어 329〉. 한편 ‘편ᄌᆞ’가 『소학언해』(3:21ㄱ)에서는 ‘단’으로 바뀌었다. ‘단’은 ‘옷단’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의 표제어 ‘단’에는 한자가 병기되지 않았는데, ‘緞’ 또는 ‘段’으로 보인다. 한편 ‘純’의 독음이 모두 ‘:슌’으로 적혀 있는데, 『소학언해』(3:20ㄴ)에서는 모두 ‘:쥰’으로 바뀌었다. ‘純’이 ‘縇’을 뜻할 때의 오늘날의 독음은 ‘준’이다. ¶①쥰(평성), :쥰(상성)〈동국정운 3:6ㄴ〉 ②·쥰(거성)〈동국정운 3:7ㄱ〉 ③쓘(평성)〈동국정운 3:8ㄱ〉 ④衣緣 선두를 준〈자전석요 하 29ㄱ〉.
(51) 세 번재 爵弁을 스이고 로 의 됴 저기며  됴 저고로 네거긔 슬 거 다 스이노니(三加 曰 以歲之正과 以月之令에 咸加爾服노니)〈4:22ㄴ-23ㄱ〉
여기서는 ‘져고로’가 문제이다. ‘저고로’는 ‘적[時]’에 부사격 조사 ‘오로(=ᄋᆞ로)’가 붙은 것이다. 이 ‘오로(ᄋᆞ로)’는 원문의 ‘以’의 일반적인 훈(訓)에 이끌린 번역이다. ‘以歲之正 以月之令’의 ‘以’는 ‘於’와 같으므로 ‘의 됴 저기며  됴 저고로’가 아니라 ‘의 됴 저기며  됴 저긔’가 더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소학언해』(3:20ㄴ)에서는 ‘ᄒᆡ의 됴홈과 ᄡᅥ ᄃᆞᆯᄋᆡ 됴ᄒᆞᆫ 제’로 바뀌었는데, 앞의 ‘以’는 ‘ᄡᅥ’로 번역하고 뒤의 ‘以’는 부사격 조사 ‘에’로 번역하였다.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결함이다. ‘제’는 의존 명사 ‘제’ 뒤에서 부사격 조사 ‘에’가 외현되지 않은 것이다. ‘以’가 ‘於’와 같은 의미로 쓰인 예는 ‘孟嘗君以五月五日生’(사기, 맹상군열전)에서 볼 수 있다.
(52) 君子 아뎌 뫼셔 밥 머글 저기어든 몬져 먹고  젠 후에 홀 디니(侍燕於君子 則先飯而後已니)〈4:27ㄱ-ㄴ〉
여기서는 ‘侍燕於君子’의 번역이 문제이다. 『소학언해』(3:24ㄴ)에서는 ‘君子ᄅᆞᆯ 아ᄅᆞᆷ뎌 뫼셔실 적이어든’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보다 앞선 시기의 『내훈』(1475)에서는 같은 원문을 ‘君子 아뎌 뫼셔 밥 머글 저기어든’(내훈 1:7ㄴ)으로 번역하였다. ‘君子ᄅᆞᆯ’ 대신 ‘君子ᄭᅴ’가 쓰인 것을 제외하면 『번역소학』의 번역과 같다. 세 책에 공통적으로 쓰인 ‘아ᄅᆞᆷ뎌(=사사로이)’는 ‘燕’이 지닌 ‘편안함, 한가함’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두 책에서 ‘밥 머글’이라고 한 것은 ‘燕’에 들어있는 ‘잔치’의 의미까지 고려한 결과로 짐작되는데, 이 역시 ‘燕’의 의미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한 글자를 서로 다른 의미로 두 번 번역한 셈이 되고 만다. 아주 문제가 많은 번역이다. 결국 이것은 저경(底本)의 문제로 보인다. 율곡의 『소학집주』에는 원문이 ‘侍食於君子’로 적혀 있으므로,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다. 주042)
성백효(1993:202)를 참조할 것.
문제가 있는 원문을 억지스럽게 번역한 셈이다.
(53) 曲禮예 로 님 앏셔 실과 주어시든 그  잇 거스란  푸물 디니라(曲禮예 曰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3:6ㄱ〉
여기서는 ‘님그ᇝ 앏ᄑᆡ셔’의 피수식어가 없고, ‘주어시든’의 주어가 없다. 『소학언해』(2:40ㄴ)에서는 ‘曲禮예 오 님금 앏셔 실과 주어시든 그  인 이란 그  품을 디니라(曲禮예 曰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문제의 근원은 한문 원문에 있는 듯도 하다. 이 대목의 원문을 성백효(1993:120)에서는 ‘「곡례」에 말하였다. 임금의 앞에서 과일을 하사하시거든 씨가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에 간직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언해문에도 ‘하사하시거든’의 주어가 없다. 원문의 구두(句讀)에 잘못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두를 달리하여, ‘曲禮예 曰 賜果ᄒᆞ야시ᄃᆞᆫ 於君前에셔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로 고쳐 보면, ‘「곡례」에서 이르기를, (임금이) 과일을 하사하시면 (먹은 다음) 임금의 앞에서 씨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을지니라.’란 뜻이 되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경우의 원문도 의심스럽다. ‘君賜果 其有核者 於君前 懷其核’이 상식에 부합하는 문장일 것이다. 이충구 외(2019a:149)에서는 ‘賜’를 ‘하사받다’로 번역하였는데, “임금의 앞에서 과일을 하사받다(賜果於君前)”가 적절한 표현인지는 필자가 판단하기 어렵다. 어떻든 『번역소학』과 『소학언해』에서는 ‘賜’의 의미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54) 論語예 로 鄕黨앳 사 술 머고매 막대 디픈 사미 나거든 날 디니라(論語의 曰 鄕人飮酒에 杖者ㅣ 出이어든 斯出矣니라)〈3:33ㄴ〉
이 대목의 주체는 공자(孔子)인데, 번역자는 독자에게 훈계하는 내용으로 오해하였다. 『소학언해』(2:65ㄱ)에서는 ‘論語의 ᄀᆞᆯ오ᄃᆡ 햐ᇰ다ᇰ앳 사ᄅᆞᆷ 술 먹이예 막대 딥프니 나거든 이예 나가더시다’로 바뀌었다.
(55) 얼우신 뫼셔  이실 저기어든 비록 여러 가짓 차반이라도 마다디 아니며 마조 안조 마다디 아니홀 디니라(御同於長者 雖貳나 不辭며 偶坐不辭ㅣ니라)〈3:31ㄱ〉
‘마조 안조ᄆᆞᆯ 마다ᄒᆞ디 아니홀 디니라’는 ‘偶坐不辭’를 오역한 것이다. 『소학언해』(2:63ㄱ)에서는 ‘ᄀᆞᆯ와 안자셔ᄂᆞᆫ ᄉᆞ야ᇰ티 아니홀 디니라’로 바뀌었다. 성백효(1993:150)에서는 ‘남과 짝하여 앉았으면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고, 이충구 외(2019:184)에서는 ‘손님과 배석하였을 때에도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다. ‘사양’의 대상은 ‘음식’이다.
(56) 그 벼슬 득디 몯야셔 得디 몯가 알하고 마 득얀 일흘가 야 알하니라(其未得之也앤 患得之고 旣得之얀 患失之니라〈3:9ㄱ-ㄴ〉 주043)
‘得’을 한자로 쓰기도 하고 한글로 쓰기도 하였다.
‘其未得之也’의 ‘其’는 허사(虛辭) 같기도 하고 ‘未得之’한 상황 전체를 지시하는 글자 같기도 하다. ‘未得之’를 ‘득디 몯ᄒᆞ야셔ᄂᆞᆫ’과 같이 서술어구로 번역할 경우에는 ‘其’를 관형사 ‘그’로 번역할 수가 없다. 위의 번역에서는 ‘其’를 관형사 ‘그’로 번역하고 원문에 없는 목적어 ‘벼슬’을 끼워 넣은 결과, 마치 ‘그’가 ‘벼슬’을 수식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벼슬’ 뒤에 목적격 조사를 쓰지 않은 것은 ‘그’가 ‘벼슬’을 수식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 같기도 하다. ‘벼슬 득디 못ᄒᆞ야셔’라는 상황 자체를 ‘그’가 지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벼슬’ 뒤에 목적격 조사 ‘을’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떻든 이 번역은 국어다운 번역이 아니다. 『소학언해』(2:43ㄴ)에서는 원문 ‘其未得之也’를 ‘그 얻디 몯ᄒᆞ야셔ᄂᆞᆫ’으로 번역하였다. 원문에 없는 목적어 ‘벼슬’을 보충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인데, 이 역시 국어의 구조에는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다.
(57) 말 졍외오 믿비 며 뎍을 두터이 고 공경면 비록 되나라히라도 니려니와 말 졍셩도며 믿비 아니고 뎍을 둗거이 며 공경히 아니면 비록 내 올와 힌 니리아(言忠信며 行篤敬이면 雖蠻貊之邦이라두 行矣어니와 言不忠信며 行不篤敬이면 雖州里나 行乎哉아〈4:5ㄴ〉
‘ᄃᆞᆫ니려니와’는 ‘行’을 번역한 것이다. 『소학언해』(3:5ㄱ)에도 ‘ᄃᆞᆫ니려니와’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의 ‘行’은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의 원문의 첫머리가 ‘言忠信’으로 시작하지만, 원전인 『논어』에는 이 앞에 본래 ‘子張問行 子曰’이 적혀 있다. ‘子張問行’은 ‘자장이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여쭈었다.’란 의미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달(達)함을 묻는 뜻과 같다. 자장(子張)의 뜻은 바깥에서 (도가) 행해짐을 얻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니, …(猶問達之意也 子張意在得行於外 故夫子反於身而言之 …)” 여기서 ‘行’을 ‘達’과 같은 것으로 본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行’은 ‘다님’이 아니라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짐(다스려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行’의 번역이 오역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번역자가 ‘行’의 뜻을 알면서도 ‘行’의 대표훈(代表訓)을 번역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8) 소니 믈러니거든 모로매 命을 도로 엳와 로 소니 도라보디 아니다 더시다(賓이 退어든 必復命曰 賓不顧矣라 더시다)〈3:3ㄴ〉
여기서는 시제와 관련된 오역이 보인다. ‘소니 도라보디 아니다’는 인용문인데, 문맥으로는 “손이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습니다.”란 뜻이다. ‘아니ᄒᆞᄂᆞᅌᅵ다’는 ‘아니ᄒᆞ니ᅌᅵ다’의 잘못이다. 둘은 시제가 다르다, ‘ᄒᆞᄂᆞᅌᅵ다’는 현재 시제이고 ‘ᄒᆞ니ᅌᅵ다’는 동사에 쓰일 경우 과거 시제이다. 오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ᄒᆞᄂᆞᅌᅵ다’를 『소학언해』(2:38ㄴ)에서는 간접 인용의 ‘아니타’로 바로잡았다. 동사의 보조 용언으로 쓰인 ‘아니타’는 과거 시제가 된다.
(59) 얼우니 니시 말 몯 차 다 마 몯 미처야 계시거든(長者ㅣ 不及이어든)〈3:28ㄱ〉
여기서는 원문에 없는 말을 상당히 많이 보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2:60ㄱ)에서는 ‘얼운이 미처 몯ᄒᆞ여 겨시거든’으로 바뀌었다. 이 책의 번역에서는 ‘몯 ᄆᆞ차’와 ‘몯 미처ᄒᆞ야’가 중복적인데, 두 가지 번역 구상이 뒤섞인 결과로 보인다. 즉 ‘얼우니 니시 말 몯 차 계시거든’이나 ‘얼우니 니시 마 몯 미처야 계시거든’ 둘 중 하나로 번역하려다가 교정이 누락되어 두 가지 번역이 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미처ᄒᆞ다’는 동사의 연결형에서 영파생된 부사 ‘미처’와 ‘ᄒᆞ다’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그러면 ‘몯 미처ᄒᆞ다’는 짧은 부정의 일반적인 형식이 된다. 만약 ‘미처ᄒᆞ다’가 ‘미처 ᄒᆞ다’ 즉 구(句)라면, ‘몯 미처 ᄒᆞ다’는 ‘부정 부사+부사+ᄒᆞ다’ 구조가 되는데, 이런 구조는 일반적이지 않다.
(60) 小儀예 로  그 이 엿보디 말며 과 갓가이야 서르 므더니 너기게 말며 녯 사괴던 사 왼 이 니디 말며 희앳 비 마롤 디니라(少儀曰 不窺密며 不旁狎며 不道舊故며 不戱色며)〈4:13ㄴ-14ㄱ〉
‘ᄂᆞᆷ과 갓가이ᄒᆞ야 서르 므더니 너기게 말며’는 ‘不旁狎며’의 번역인데, 『소학언해』(3:12ㄱ)에서는 ‘셜압ᄒᆞᆫ ᄃᆡ 갓가이 아니ᄒᆞ며’로 바뀌었다. ‘셜압’은 ‘설압(褻狎: 행동이 무례함)’이다. 두 책 모두 ‘旁’을 ‘가까이하다’로 번역하였지만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는 ‘旁’과 ‘狎’이 대등하게 접속된 것으로 보았는데, 『소학언해』에서는 ‘旁狎’을 ‘서술어-부사어’의 관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소학집해』의 주석에서는 ‘방은 널리 미침이다.(旁泛及也)’라 하였다. 그렇다면 두 책의 해석 모두 『소학집해』의 주석과는 다른 셈이다.
(61) 丹書에 로 논 미 게을은  이긔니 길고 게을오미 을 이긔닌 멸고(丹書에 曰 敬勝怠者 吉고 怠勝敬者 滅고)〈4:2ㄱ-ㄴ〉
이 내용은 『용비어천가』 제 7장의 주석에도 나온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관련된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의 ‘怠’에 대하여 『용비어천가』(1:12ㄱ)에서는 ‘怠惰慢也’라고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소학집해』의 주석과 부합한다. ‘怠’와 ‘惰慢’ 모두 ‘게으르다’ 외에 ‘소홀하다, 함부로 하다’를 뜻하기도 한다. 1895년에 간행된 『국한회어』(131)에서는 표제어 ‘반말하다’를 ‘怠慢半辭’로 풀이하였는데, 여기서 ‘怠慢’이 ‘소홀함, 사람을 함부로 대함’이란 뜻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오만(傲慢)’의 ‘慢’도 마찬가지이다. 이 예문의 ‘게을은, 게을옴’은 ‘怠’의 정확한 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대표훈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62)가. 益者ㅣ 三友ㅣ오 損者ㅣ 三友ㅣ니 友直며 友諒며 友多聞이면 益矣오 友便辟며 友善柔며 友便佞이면 損矣니라〈3:35ㄱ-ㄴ〉〈소학언해 2:66ㄴ〉
 나. 유익 버디 세히오 해왼 버디 세히니 直니 벋 사며 信實니 벋 사며 드론 일 하니 벋 사면 유익고 便便 고 不直니 벋 사며 부드러움 교로이 니 벋 사며 말 재오 아외니 벋 사면 유해니라〈3:35ㄴ〉
 다. 유익ᄒᆞᆫ 이 세 가짓 벋이오 해로온 이 세 가짓 벋이니 直ᄒ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신실ᄒ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들은 것 한 이 벋ᄒᆞ면 유익고 거도ᇰ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며 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말ᄉᆞᆷ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면 해로온이라〈소언 2:66ㄴ-67ㄱ〉
(62나, 다)는 원문 구결에는 차이가 없는데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뽑아서 번호로 구분한다.
(63)가. ①友便辟며 ②友善柔며 ③友便佞이면
 나. ①便便 고 不直니 벋 사며
  ②부드러움 교로이 니 벋 사며
  ③말 재오 아외니 벋 사면
 다. ①거도ᇰ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며
  ②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③말ᄉᆞᆷ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면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이 『소학집해』에 실려 있는데, 그것을 본 다음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주044)
성백효(1993:156)과 이충구 외(2019a:191)에 수록되었다.
해당 부분만 발췌한다.
(64) ①편(便)은 익숙함이다. 편벽(便僻)은 위의(威儀)에만 익숙하고 바르지 않음이고,
  ②선유(善柔)는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만 잘할 뿐 성실하지 않음이고,
  ③편녕(便佞)은 말에만 익숙할 뿐 문견(聞見)의 실속이 없으니,
   (便習熟也 便辟 謂習於威儀而不直 善柔 謂工於媚悅而不諒 便佞 謂習於口語而無聞見之實)
여기서 ②와 ③의 번역 차이에만 주목해 보자. 주자의 주석에서는 ‘善柔’를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을 잘함(工於媚悅)’이라고 하였다. 『소학언해』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善柔’를 ‘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번역소학』에서는 주자의 주석과 달리, ‘便佞’을 ‘말 재오 아다ᇰᄃᆞ외니’로 번역하고 ‘善柔’는 ‘부드러움 고ᇰ교로이 ᄒᆞᄂᆞ니’로 번역하였다. ‘善柔’의 번역은 지나친 직역이어서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만약 ‘부드러움’이 ‘아다ᇰᄃᆞ외욤’을 뜻한다면, ‘善柔’와 ‘便佞’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 셈이 될 것이다.
(65) 曲곡禮례예 로 어딘 사 사미 날 야 깃븐 이를  과뎌 아니미 사미 날 야 도이 호  과뎌 아니니  사괴요 오올에 니라(曲禮예 曰 君子 不盡人之歡며 不竭人之忠니 以全交也ㅣ니라)〈3:36ㄱ-ㄴ〉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이다. 이 번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학집해』의 다음 주석을 보아야 한다.
(66) 여씨(呂氏)가 이르되, “남이 기쁘게 해 주기를 다 바라고 남이 충성스럽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남에게 바라기를 후하게 하는 것이니, 남에게 바라기를 후하게 하는데 남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이는 사귐이 온전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된다. 환(歡)은 나에게 좋게 해 주는 것이고 충(忠)은 나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나에게 좋게 해 주기를 바람이 깊지 않고 나에게 마음을 다해 주기를 꼭 바라지 않는다면 잇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呂氏曰 盡人之歡 竭人之忠 皆責人厚者也 責人厚而莫之應 此 交所以難全也 歡 謂好於我也 忠 謂盡心於我也 好於我者 望之不深 盡心於我者 不要其必盡 則不至於難繼也) 주045)
성백효(1993:157)과 이충구 외(2019a:192)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소학』의 번역이 주석의 내용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현대 국어로 옮기면, “「곡례」에서 이르되, 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기쁜 일을 한껏 베풀기를 바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정성스럽게 행함을 한껏 베풀기를 바라지 않나니, 그럼으로써 사귐을 온전하게 하느니라.”가 될 것이다. 언해문 중 ‘-과뎌’는 화자와 청자 외의 제 3의 인물의 행위를 소망할 때에 쓰이는 종결 형식이다. 이 언해문은 ‘-과뎌’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정확한 언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이 『소학언해』(2:67ㄴ)에서는 ‘曲禮예 오 君子 사 즐겨홈을 다디 아니며 사 졍셩을 다디 아니야  사괴욤을 오게 니라’로 바뀌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 즐겨홈을 다디 아니며 사 졍셩을 다디 아니야’이다. 한문 원문 ‘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만 놓고 보면 『소학언해』의 번역은 원문의 구조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주석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67) 主人은 문의 드로 올녀그로 고 손 문의 드로 왼녀그로 며 主人은 東階예 나가고 손 西階예 나갈 디니 소니 主人의게셔 갑거든 主人의 오 계졀에 나갈 디니 主人이 구틔여  후에 소니 다시 西階로 나갈 디니라(主人은 入門而右고 客은 入門而左며 主人은 就東階고 客은 就西階니 客若降等則就主人之階니 主人이 固辭然後에 客이 復就西階니라)〈3:37ㄱ-ㄴ〉
이 예문의 ‘드로ᄃᆡ’는 『소학언해』(2:68ㄴ)에서 ‘들어’로 바뀌었다. 이 책의 번역은 ‘문에 들어갈 때 문의 오른쪽 또는 왼쪽에 치우쳐 들어감’을 뜻하고, 『소학언해』의 번역은 ‘문에 들어간 뒤,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향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책의 번역이 『소학집해』의 주석과 부합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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