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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벽온방≫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간행 경위

≪간이 벽온방(簡易辟瘟方)≫은 1525년(중종 20) 왕명에 의해 간행된 1권 1책의 의서(醫書)로서 표지를 제외하고 전체가 50쪽으로 되어 있다. 간행 배경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맨 앞에 실려 있는 김희수(金希壽)의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조선 중종 19년(1524) 가을, 관서지방(평안도)에 전염병인 역질(疫疾)이 크게 퍼져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게 되었고, 그 전염병은 이듬해 봄까지도 그칠 줄 모르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에 왕은 크게 걱정하여 약과 함께 의관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면서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행 부호군(行副護軍) 김순몽(金順蒙),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유영정(劉永貞), 전 내의원 정(前內醫院正) 박세거(朴世擧) 등에게 명하여 여러 의서에서 그 병에 대한 치료법과 대처하는 예방법을 가려 뽑아 한 책으로 편찬케 하였다. 그런 다음 한문 원문에 한글 번역을 붙여 중종 20년(1525)에 인출하여 반포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간이 벽온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525년에 간행된 초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중간본으로 보이는 1578년(선조 11)의 을해자본(乙亥字本)과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훈련도감자본(訓練都監字本)의 두 종류가 지금까지 전한다. 을해자본(1578)에는 내사기(內賜記)가 없는 고려대 도서관 소장본과, 내사기가 있는 고(故) 김완섭(金完燮) 소장본(현재는 고려대 만송김완섭문고에 소장)의 두 가지가 전하는데, 이 둘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 다만 전자의 고려대 도서관 소장본은 비록 내사기가 떨어져 없지만 첫 장에 「선사지기(宣賜之記)」란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도 후자와 동일한 내사본이라 할 수 있다. 내사기는 “萬曆六年 正月 日 內賜行副護軍李仲梁簡易辟瘟方一件 云云”으로 되어 있어 을해자본의 간행 연대가 1578년(萬曆 六年)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훈련도감자본은 을해자본의 중간(重刊)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도 1613년의 내사기와 함께 「선사지기」의 도장이 있고, 1525년에 쓴 김희수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을해자본과 비교해 볼 때 훈련도감자본은 표기법에서 약간의 혼란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것은 몇 군데에 있는 ㅿ의 혼란(‘브’와 ‘브어’) 과 ㆁ의 혼란(‘’과 ‘병’)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 밖에 ‘’의 소실 예로서 ‘고올’( 〉올)이 나타난다. 이 판본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고려대 도서관 소장의 을해자본으로 하였다. 이 판본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민족문화연구≫ 7호(1973)에 고 박병채 교수의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는데다, 다시 1982년에 홍문각에서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한 바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어서이다.

여기서 잠시 ≪벽온방≫에 관련한 계통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4월조에 보면,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언해한 ≪벽온방≫과 ≪창진방(瘡疹方)≫을 간행하기를 주청하는 기사에서 “≪벽온방≫은 세종조에 이미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없어져서 신(臣)이 언해를 붙이어 간행하였으며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로써 조선 시대에 간행하였던 전염병 방역서(防疫書)의 계통은, 먼저 세종조에 간행하였다는 ≪벽온방≫에서부터 김안국이 언해한 ≪벽온방≫이 있었고, 그리고 중종 때 간행된 ≪간이 벽온방≫과 ≪분문 온역 이해방≫(1542)이 있다. 다음에 허준의≪신찬 벽온방≫(1613, 광해군5)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훈련도감자본의 ≪간이 벽온방≫이 인출된 시기에 새로운 벽온방서의 간행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이후에 안경창(安景昌) 등이 편찬한 ≪벽온신방≫(1653, 효종4) 이 있다.

2. 체재 및 형태

이 책은 단권으로서 서명(書名)은 ≪간이 벽온방(簡易辟瘟方)≫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김희수의 서문으로서 언해문을 포함하여 3장(張)에 걸쳐 있다. 서문 부분의 제목은 「簡易辟瘟方序」라 달고 있는데 비해 판심제는 「辟瘟方序」라 하고 있다. 서문이 끝난 다음부터 본문이 시작되는데, 이는 모두 22장이며 제목은 「簡易辟瘟方」으로 붙여 놓았고 여기도 판심제는 「辟瘟方」으로 되어 있다. 장차(張次)는 서문과 본문을 구분하여 서문이 1~3장, 본문은 1~22장으로 각각 차례를 붙여 놓았다. 책의 크기는 세로가 32cm, 가로가 20cm이고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가 22.2cm, 가로가 15.2cm로서 계선(界線)이 있으며 9행 17자씩이다. 주(註) 쌍행(雙行)이며 판심은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이다. 본문에서 한문은 매행 첫 간부터 쓰는 17자 배자(排字)를 하였고 언해문은 첫 간을 띄어 매행 16자를 배자하였다.

3. 내용

서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의 간행 동기와 경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실제로 필요한 내용으로서 역병(疫病, 전염성 열병)의 원인을 기술하고 이에 대처하는 처방법과 처방에 필요한 약의 제조와 복용 및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역병의 치료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약의 효능과 제조, 복용 또는 사용법에 관한 설명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약명을 차례로 들면, 소합향원(蘇合香元), 향소산(香蘇散), 십신탕(十神湯),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 도소주(屠蘇酒), 형화환(螢火丸), 호두살귀원(虎頭殺鬼元), 신명산(神明散), 핍온단(逼瘟丹) 등이다. 이 중에서 소합향원, 향소산, 십신탕, 승마갈근탕, 도소주 등은 먹는 약이고, 형화환, 호두살귀원, 신명산 등은 몸에 메어달거나 차는 약이며, 핍온단은 불로 피우는 약이라 하였다. 그 밖에 석웅황(石雄黃), 솔잎, 고삼(苦蔘), 마늘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단일한 약재들의 효능과 복용법, 사용법에 대해서도 후반부에 설명하고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 및 음운

(1) 연철·분철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앞의 자음 곧 종성을 그 뒤의 조사나 어미의 초성으로 내려 적는 이른바 연철(連綴) 표기법이 중세 국어의 정서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서법이 ≪간이 벽온방≫에서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지만 그것은 용언의 경우에만 해당되었다.

니러나(서 2ㄱ), 머그며(1ㄴ), 마라(1ㄴ), 주근(2ㄴ), 다마(4ㄱ), 시슨(5ㄱ),

디그라(5ㄱ), 마면(5ㄱ), 어더(12ㄴ), 디허(16ㄱ), 라(17ㄱ)

그러나 체언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체언과 조사를 각각 본래의 형태대로 적는 이른바 분철(分綴) 표기가 상당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체언의 종성에 따라 분철이 우세한 경우와 연철이 우세한 경우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먼저 분철이 우세한 경우는 체언의 종성이 ㄱ, ㄴ, ㅁ, ㅂ일 때이다.(ㄷ 종성은 전체를 통해 예가 하나뿐이어서 제외하였다.)

 복애(6ㄱ), 가락으로(13ㄱ), 東녁으로(15ㄱ), 으로(15ㄴ), 잡약을(16ㄴ).

cf. 잘 저긔(5ㄱ), 팀 구글(15ㄴ), 올녀긔(21ㄱ).

긔운이(1ㄱ), 가문이(1ㄴ), 네 환(4ㄱ), 문을(6ㄴ), 닐굽 분이어든(6ㄴ), 세닐굽 번을(13ㄴ), 얼운이며(15ㄴ),  돈을(20ㄴ), 남진(21ㄱ).

cf. 남지(11ㄴ-12ㄱ), 얼우니며(18ㄴ).

밤이야(서 2ㄱ), 사이(1ㄴ), 기름을(5ㄱ), 죠 심으로(15ㄱ-ㄴ).

cf. 모매(11ㄱ), 일후믈(13ㄴ), 바(19ㄱ).

법은(2ㄴ), 서 홉을(16ㄴ), 겨집은(21ㄱ), 즙을(22ㄴ).

cf. 지븨(4ㄱ), 겨지븐(12ㄱ).

단, ㅁ종성이라도 동명사의 ㅁ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면 용언의 경우에서처럼 연철 표기만을 보여 주고 있다.

주구믈(서 2ㄱ), 니러나(2ㄴ), 泄호미(3ㄱ), 답답호(20ㄴ), 져구믈(21ㄱ), 로(22ㄱ).

종성에 쓰인 합용병서로는 사이ㅅ을 제외하고 ㄺ, ㄼ 만 나타난다. 그리고 ㄺ을 종성으로 하는 명사의 경우에도 모음의 조사 앞에서 분철을 보여 주고 있다.

굵게(6ㄱ),  울 예(13ㄴ), 여듧 돈(9ㄴ), 앏(19ㄱ), (9ㄴ), 수의(10ㄴ).

cf. 알(10ㄴ).

다음으로, 체언의 경우에도 연철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경우는 종성이 ㄹ, ㅅ일 때이다. 특히 ㅅ종성의 경우에는 단 하나의 분철 예도 찾아볼 수 없다.

이스리(1ㄴ), 므레(5ㄱ), 수우레(9ㄴ), 를(15ㄴ), 레(18ㄴ), 冬至ㅅ나래(19ㄱ), 프레(20ㄱ), 므레(21ㄱ), 눈므른(22ㄱ).

cf. 두 말을(4ㄱ), 시졀에(8ㄱ), 사발이어든(16ㄱ).

귓거싀(1ㄴ), 모딘 거시(2ㄴ), 귓거슬(10ㄴ), 오(13ㄱ), 블근 거스로(14ㄱ), 왼 거슬(17ㄱ).

그 밖에 ㆁ종성의 경우에는 이미 15세기부터 아랫 음절의 초성으로는 쓰이지 않고 종성의 위치에서만 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체언의 종성이 유기음인 경우에는 전적으로 연철 표기만을 보여 준다. 그것은 8종성 제한 규칙으로 유기음을 종성의 자리에 그대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4ㄱ), 벼츼(10ㄴ), (11ㄱ), 니플(14ㄴ), (14ㄴ), 나(18ㄴ), 로(19ㄱ).

이와 같이 유기음 종성인 경우에도 분철 표기를 시도하기 위한 전 단계로 보이는 체언의 종성을 체언과 조사에 이중으로 표기하는 이른바 중철(重綴) 표기가 등장하고 있다.

닙플(15ㄱ), 앏(19ㄱ).

(2) 자음동화의 표기

‘폐쇄음+비음’이 ‘비음+비음’으로 동화되는 규칙이 있었지만 표기에는 이러한 자음동화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는 용언의 활용형에서 자음동화를 반영한 표기가 등장한다.

인(3ㄱ), 됸니라(19ㄴ). cf. 업니(9ㄴ), 돕니라(19ㄴ), 잇(21ㄴ).

(3) 유기음화

유기음화가 일어난 낱말로 ‘ㅎ〉ㅎ’을 들 수 있다. 반면에 ‘고ㅎ(鼻)’는 아직 유기음화하지 않았다.

왼 해(12ㄱ), 올 해(12ㄱ). cf.  구필 예(석보상절 6:2ㄱ).

고해(5ㄱ), 곳굼긔(5ㄱ).

(4) 병서자(並書字)

합용병서는 ㅅ계, ㅂ계, ㅄ계가 다 사용되고 있으나 ㅄ계의 ㅴ이 ㅺ으로 교체된 예가 있어 ㅴ은 폐지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각자병서는 ㅆ만이 나타난다.

와(11ㄴ), 레(18ㄴ). cf.  半 되(능엄경 언해 7:16ㄴ).

次字 써(13ㄱ), 블근 거스로 써(14ㄱ).

(5) ㅿ의 유지

ㅿ의 표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단 한자음 표기에서 ㅿ이 소멸된 예가 있고, ㅅ과 ㅿ을 혼동한 표기가 하나씩 발견된다.

二이十십(서 3ㄱ), 十십二이月월(9ㄴ). cf. 二: 두 (훈몽자회 하:33ㄴ).

소 리예(17ㄴ).

가면 사(富人, 6ㄴ).

위의 예에서 ‘리’는 ‘서리(間)’의 오기(誤記)로 보이고, ‘가면’은 ‘가면’의 방언형 표기로 보인다.

(6) 사이ㅅ

사이ㅅ의 표기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종성에, 둘째는 초성에, 셋째는 중간에 각각 ㅅ이 위치하게 하는 표기 방식이다.

 가온(12ㄱ), 가온 가락(13ㄱ), 수릿날(16ㄴ).

밤(12ㄱ), 臘享 (22ㄱ).

疫癘ㅅ(1ㄴ), 시긔ㅅ(8ㄱ), 冬至ㅅ나래(19ㄱ), 甘草ㅅ(20ㄴ).

사이ㅅ과 관련하여 ‘關西ㅅ 다해’(1ㄴ-2ㄱ)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이는 명사 ‘ㅎ[地]’의 어두에 쓰인 ㅅ을 사이ㅅ으로 잘못 분석한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다.

(7) 방점

방점이 모두 폐기되었다.

2. 문법

(1) 처격 조사 ‘-예’

중세 국어에서 처격을 나타내는 조사로는 ‘-애/에, -/의, -예’가 쓰였는데, 이 중에서 ‘-예’는 선행 체언의 말음이 i j 인 경우에 한해서 연결되었다. 물론 이 문헌에서도 이들 처격 조사가 그대로 사용되었지만 ‘-예’의 경우에는 정해진 환경이 아닌 데서 사용된 예가 나타난다.

와 밀와예(11ㄴ), 시예(13ㄱ).

(2) 접속 조사 ‘-와/과’

접속 조사는 체언의 음운 조건에 따라 체언의 끝소리가 모음인 경우에는 ‘-와’, 자음인 경우에는 ‘-과’가 쓰이지만, 체언의 끝소리가 ㄹ일 경우에는 현재와 달리 ‘-와’가 쓰인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모음인 경우에도 ‘-과’가 쓰인 예가 있다.

누른 과(10ㄴ).

(3) 선어말 어미 ‘-오/우-’

중세 국어의 독특한 문법 체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우-’의 사용이 이 문헌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오/우-’는 뒤에 연결되는 어말 어미에 따라 사용이 필수적인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예로 어말 어미 중에 명사형 어미 ‘-ㅁ’, 설명법 어미 ‘-’, 의도법 어미 ‘-려’가 쓰일 경우에는 반드시 선어말 어미 ‘-오/우-’를 앞세움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 와서는 이 경우에 ‘-오/우-’의 첨가가 동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미 ‘-ㅁ’과 ‘-’ 앞에서도 ‘-오/우-’의 첨가가 실현되지 않은 예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3ㄱ), 되(15ㄴ), 져그믈(16ㄴ).

cf. 머고(4ㄱ), 업게 호(20ㄴ), 져구믈(21ㄱ).

(4) 보조사 ‘-식’

15세기 국어에서 수사나 수와 관련된 체언에 연결되어 ‘-씩’의 의미를 가지는 보조사로 ‘-곰/옴’이 시용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오면 ‘-곰/옴’이 쓰일 자리에 ‘-식’이 대신 등장하기 시작한다. ‘-식’은 ≪대명률 직해≫에 ‘-式’이 쓰인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문법 형태이나 국어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이 문헌에서도 ‘-식’의 사용이 활발한 가운데 ‘-곰/옴’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양상이다.

서 돈식(6ㄱ), 세 번식(6ㄴ), 너 돈식(8ㄴ),  술식(15ㄱ), 스므 낫식(15ㄱ),  붓식(15ㄴ).

 잔곰(4ㄴ),  환곰(12ㄱ), 세닐굽곰(18ㄴ).

(5) 세 : 서

수량을 나타내는 수사의 쓰임에서 ‘하나, 둘, 셋, 넷’과 같은 수사가 단위 명사 앞에 쓰일 때는 ‘한, 두, 세, 네’와 같이 형태 변이가 되면서 관형사가 된다. 이럴 경우에 특히 ‘셋’과 ‘넷’은 뒤에 오는 단위 명사에 따라 ‘세/서/석’과 ‘네/너/넉’으로 각각 분화되어 어느 한 가지 형태하고만 결합한다는 제약이 있다. 이러한 선택 제약 현상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 사(6ㄴ), 세 번식(6ㄴ, 15ㄱ), 세 (11ㄱ).

서 되(3ㄱ), 서 홉(16ㄴ, 20ㄴ).

석 자(3ㄱ), 석 셤(3ㄱ), 석 (20ㄱ).

네 환(4ㄱ), 네 모해(12ㄱ), 네 (14ㄱ), 네 를(15ㄴ).

너 돈식(8ㄴ).

넉 (7ㄴ, 12ㄴ).

그리고 ‘셋’이 다른 수와 복합해서 쓸 경우에는 ‘세’의 형태하고만 어울린다.

두세 번식(8ㄴ), 두세 소솜(9ㄴ), 세 닐굽 번(13ㄴ), 세 닐굽 나(18ㄴ).

이상과 같은 ‘세/서/석’ ‘네/너/넉’의 선택 제약 현상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지금도 한편에선 ‘서 돈, 너 돈’을 ‘세 돈, 네 돈’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에서도 이러한 제약 현상이 엄격하지는 않았음을 보여 주는 예가 발견된다.

서 돈식(6ㄱ), 세 돈식(16ㄱ).

동일한 단위 명사 ‘돈’ 앞에서 ‘서’와 ‘세’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3. 어휘

(1) 소[松]

아래 예문에서 松間(송간)을 ‘소 리’로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솔[松]’이 ‘소’의 형태로 쓰인 것이다.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野人乾은 소 리예 치 됴니라(野人乾松間者佳, 17ㄱ~ㄴ).

(2) 벗기다

중세 국어에서 ‘脫(탈)’의 뜻으로 쓰인 동사에 ‘밧다’와 ‘벗다’가 유의어로 공존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쓰인 용례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면 양자간에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밧다’는 “오란 밧고”(월인석보 1:5ㄴ)에서처럼 주로 구체적인 대상에 대하여 사용되었고, 더러는 “猜嫌을 바니라”(초간 두시언해 21:37ㄴ)에서와 같이 추상적인 대상일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벗다’는 “輪廻 벗디 몯”(월인석보 1:12ㄱ)에서 보듯이 추상적인 대상에 대해서만 쓰임으로써 ‘밧다’와 ‘벗다’사이에는 그 사용 영역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 대상이 ‘껍질[皮]’인 경우에 선택되는 동사는 ‘밧다’일까 ‘벗다’일까? 이를 위해 의서(醫書)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먼저, ≪구급방 언해≫(1466)에는 ‘밧다’가 사용되었다.

것 밧기고(去皮, 상:6ㄴ), 겁질 밧기니와(去皮, 하:2ㄱ).

다음으로, ≪구급 간이방≫(1489)에서도 역시 ‘밧다’로 쓰였다.

거플 밧기고(去皮, 2:2ㄱ), 거플 밧기니와(去皮, 2:7ㄴ), 거플 밧겨(去皮, 3:58ㄱ), 거플 밧겨(去殼, 6:46ㄱ).

위에서처럼 ≪구급 간이방≫에서도 ‘밧다’의 사용이 지배적인 가운데 ‘벗다’를 쓴 예도

나타난다.

거플 벗긴 닥나모(楮骨, 6:4ㄴ).

이는 ‘밧다’와 ‘벗다’ 사이에 사용 영역의 구분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후 이 문헌에 와서는 ‘去皮’가 2회 나타나는데 모두 ‘벗다’가 쓰였다. 이로 보아 이때는 ‘벗다’의 범위가 ‘밧다’의 의미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밧다’는 서서히 소멸의 운명에 접어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겁질 벗겨(去皮, 간이 벽온방 12ㄴ).

(3) 주머니 : 

‘’에 대한 고어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주머니’로 풀이하기도 하고 ‘자루’ 또는 ‘부대’로 풀이해 놓은 사전도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문헌의 한문 원문에 나타난 대응 한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블근 (絳囊, 11ㄱ, 12ㄴ), 블근 깁(絳囊, 11ㄴ), 블근 (絳囊帶, 21ㄱ).

위의 용례에서 ‘’은 ‘囊’에 해당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囊’은 바로 오늘날의 주머니를 가리키는 한자이므로 그렇다면 ‘’은 곧 주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는 ‘주머니’도 동시에 쓰이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깁 주머니예(緋絹袋, 4ㄱ), 새 뵈 주머니(新布袋, 14ㄴ). cf. 깁 쟐(絳袋, 9ㄴ).

여기서 볼 때 당시의 ‘주머니’는 ‘囊’이 아니고 ‘袋’의 의미로 쓰였다. ‘袋’는 오늘날의 자루나 부대(負袋)를 뜻하는 한자이며, 더구나 ‘袋’를 ‘쟈’로 번역한 용례도 이 문헌에 나오므로 ‘袋’가 자루나 부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당시의 ‘주머니’는 오늘날의 주머니와는 달리 자루나 부대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주머니에 해당하는 말은 ‘’이었던 듯하다.

(4) 사

15세기에 三日을 뜻하는 명사는 ‘사’이었는데 이 문헌에는 ‘사’로 나타난다. ‘사〉사’은 15세기의 ‘아래, 열흘’ 등에 견인된 유추 현상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사 후에(9ㄴ). cf. 오 사리 디나니(월인석보 21:28ㄴ).

(5) 한설날 : 한섯날

元日을 뜻하는 낱말이 ‘한설날’로도 나타나고 ‘한섯날’로도 나타난다. 이는 15세기 국어에서 ‘이틀+날’이 ‘이틄날’(이틄나래, 월인석보 1:6ㄴ)로도 나타나고 ‘이틋날’(이틋나래, 석보상절 6:27ㄱ)로도 나타났던 것처럼 ‘설+날’이 ‘섯날’로도 쓰인 것이다.

한설날 기예(18ㄴ), 한섯날 아(15ㄴ).

〈참고 문헌〉

박병채(1973). ≪간이벽온방≫ 해제. 『민족문화연구』 7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서울대 도서관(2001). 『규장각소장 어문학자료 - 어학편 해설』. 홍문각.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지성사.

홍윤표(1982). ≪간이벽온방≫ 해제. 간이 벽온방 영인본. 홍문각.

≪경민편≫에 대하여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1. 간행 배경

≪경민편(警民編)≫은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황해 관찰사로 있을 때 황해도민의 교화를 위해 중종 14년(1519)에 편찬한 책이다. 인륜과 법제에 관한 지식을 수록하여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의 여건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계도할 목적에서 이 책을 만든 것이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에 김정국이 쓴 서문 주001)

<정의>안병희 교수의 해제(1978)에는 김정국이 쓴 글이 서(序)가 아니고 발(跋)이라 하고 있다. 허엽(許曄)의 서(序)가 맨 앞에 있는 중간본(1579)에는 김정국의 글에 아무런 제목도 붙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규장각 소장본(1658)에는 김정국의 글에 ‘警民編序’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여기서는 일단 이를 따르기로 한다.
에 이러한 목적이 자세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외람되게 고을의 근심을 나누어 맡기신 때부터 맡은 땅을 순찰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피매 매번 죄인을 판단할 때 일찍이 이에 대하여 깊이 애달파하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인륜(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오륜을 말함)의 중함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법제의 자세함을 알겠는가? 미련하기가 눈멀고 귀먹은 사람 같으며, 무지하게 오직 옷과 밥에만 매달려 스스로 그 법을 범하는 줄을 깨닫지 못하여 죄에 빠져 들어가면 관원이 이에 대하여 법을 집행하여 다스리게 되니 이렇게 되면 그물로 새를 잡으며 함정으로 짐승을 잡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백성으로 하여금 어질도록 하여 죄에서 멀어질 수 있게 하겠는가? 내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사람의 도리에 가장 관련되면서 백성이 범하기 쉬운 것을 들어 열세 개[十三個] 항목으로 만들고 그 이름을 백성을 경계하는 책이라 하였으니 이를 나무에 새기고 널리 베풀어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귀와 눈에 익숙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나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을 따르기에 만(萬)에 하나라도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余自叨分陜之憂 按所部 察民風 每當斷獄 未嘗不深喟於斯 蠢愚之民 不知人倫之重 焉知制法之詳 蚕蚕然有同乎辜聵 貿貿焉唯衣食之趣 自不覺其觸犯科條 流陷於罪辜 有司 於是 按律繩之 如骨羅捕雀 機檻取獸 烏在其使民遷善而遠辜耶 余爲之憫然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三條 編曰警民 刊行廣布 俾諸蠢氓 靡不習於耳目 以冀其去惡從善之萬一)

김정국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해도의 각 지방 수령, 즉 목민관(牧民官)들에게 이 책을 가지고 ‘도민화속(導民化俗)’의 자료로 적극 활용할 것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가지고 하나의 문구로 돌려 버리며, 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치부하고 앉아 나라의 녹(祿)만 받아먹으면서 세월을 하는 일 없이 보내기만 할 뿐, 그 백성을 계도(啓導)하여 풍속을 교화(敎化)케 할 도리에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못 이 책을 만든 뜻이 아니니 무릇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거의가 또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將是編, 歸之文具, 付之迂遠, 坐食公廩, 玩愒歲月, 其於導民化俗之道, 若不盡心而致誠焉, 則殊非編者之意, 凡我牧民者, 尙亦念哉)

이뿐만 아니라, 허엽(許曄 1517~1580)도 선조 13년(1579)에 간행한 중간본(동경교육대학 소장본) 권두(卷頭)에 있는 자신의 ‘중간경민편서’에서 이 책을 널리 펴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에 이 책에 군상 1조를 더하여 4장관(경주, 상주, 진주, 청송)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속히 인쇄에 붙여 예하 고을에 반포하고, 예하 고을에서는 각기 이를 인쇄하며 또 민간의 사사로운 인간(印刊)도 허락하여 집집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 사람마다 이 책을 봄으로써 각기 선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경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전 도민들이 서로 힘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玆以此編添補君上一條 付之四長官慶州尙州晉州靑松 亟上於榟 印頒屬邑 屬邑各來印出 兼許民間私印 期於家家有之 人人見之 各有以興起而戒勅也 凡此一道之人 盖相與勉之)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 ≪경민편≫은 백성 교화의 목적과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던 기묘 사림(己卯士林)의 이상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판본의 검토

1519년(중종 14)에 김정국이 간행한 원간본은 현재까지 전하지 않는다. 현존본으로는 일본 동경교육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주002)

<정의>동경교육대학이 현재는 쓰쿠바대학(筑波大學)으로 바뀌었으므로 동경대학 소장본을 쓰쿠바대학 소장본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 영인본을 간행하면서 ‘동경교육대학본’이라 명명하여 이 명칭이 통용되고 있기에 편의상 이를 따르기로 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간행이 이루어져 이은규 교수의 자세한 보고(2005)에 의하면, 모두 11종의 이본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에 의거하여 11종을 모두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1579년 진주판 중간본(동경교육대학 소장본. 단국대 영인본)

(2) 1579년 상주판 중간본(텐리대학 소장본)

(3) 임진란 전후 구결본(개인 소장본)

(4) 1658년 개간(改刊)본(규장각 소장본. 단국대 영인본)

(5) 1658년 이후 번각본(경북대 소장본)

(6) 1658년 이후 번각본(영남대 소장본)

(7) 1731년 초계 개간(開刊)본(홍문각 영인본)

(8) 1745년 완영 개간(開刊)본

(9) 1748년 용성 개간(開刊)본

(10) 1748년 완영 중간본

(11) 19세기 목판본(상문각 영인본)

위에 제시된 11종의 이본 사이에 어떤 특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여기서는 언급할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이은규(2005)에 예시된 언해문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파악하고자 한다. 위에서 소개한 이본 차례 번호를 따라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3)과 (6) 판본의 예문은 빠져 있다.

원문 : 夫妻和樂 永保厥家 乖戾不和 終致禍亂

(1) 남진 겨지비 화며 즐거오면 기리 그 집을 안부고 거저 화티 아니면 내애 홰며 난을 닐위니

(2) 남진 겨지비 화며 즐거오면 기리 그 집을 안보고 거슯저 화티 아니면 내애 홰며 난 닐위니

(4) 夫부妻쳐ㅣ 和화樂낙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어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5) 夫부妻쳐ㅣ 和화樂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7) 夫부妻쳐ㅣ 和화樂낙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어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느니라

(8)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9)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10) 부쳐ㅣ 화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화티 못면 내 화과 난을 닐위니라

(11) 夫부妻쳐ㅣ 和화樂락면 기리 그 집을 보젼고 버긔여뎌 和화티 못면 내 禍화과 亂난을 닐위니라

위에 나타난 (1)~(11)의 언해문을 보면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문두(文頭)의 주어가 ‘남진 겨지비’로 되어 있는 부류와 ‘부쳐(夫妻)ㅣ’로 되어 있는 부류의 두 계열이다. 두 계열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각각 여러 종류의 이본들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실책(實冊)을 접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여기서는 영인본이 간행된 판본으로서 전자의 계열에 속하는 〈동경교육대학본〉과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규장각본〉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제 〈동경교육대학본〉과 〈규장각본〉에 대한 서지적 검토를 통해 그 차이를 좀 더 이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희 교수의 해제(1978)를 참고하였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동경교육대학본〉은 단국대학교에서 〈규장각본〉과 함께 안병희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진 책이다. 1권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판본은 허엽의 ‘중간경민편서(重刊警民編序)’ 1장, 김정국의 ‘경민편서(警民編序)’ 1장, 본문 19장으로 된,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책이다. 그런데 김정국의 서문은 ‘경민편서(警民編序)’라는 제목도 없이 첫 행에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마침 〈규장각본〉에는 ‘경민편서(警民編序)’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이를 인용해 붙인 것이다. 허엽의 서문 끝에 있는 ‘萬曆己卯觀察使陽川許曄序’라는 간기에 의해 〈동경교육대학본〉이 만력 7년(己卯年), 즉 1579년(선조 12)에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김정국 서문에는 끝의 간기가 ‘正德己卯冬十月觀察使聞韶金正國謹識’로 되어 있어 원간본은 정덕 14년(己卯), 즉 1519년(중종 1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허엽의 중간본인 〈동경교육대학본〉은 김정국의 원간본이 나온 지 60년 만에 재간행된 셈이다.

〈동경교육대학본〉에 실려 있는 두 서문을 검토해 보면, 허엽의 서문에는 “玆以此編添補君上一條”라는 기사가 있고 김정국의 서문에는 “擧其最關於人道而民之所易犯者爲十三條 編曰警民”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이를 통해 김정국의 원간본은 내용이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는데 허엽이 중간하면서 ‘君上’이란 한 항목을 새로 만들어 제일 첫 항목으로 첨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허엽이 간행한 중간본은 다른 판본과는 달리 한 항목이 많아져 모두 14개 항목이 된 것이다.

이 책의 내제(內題)와 판심제는 모두 ‘警民編’이다. 권말(卷末)에는 ‘重刊警民編終’이라 하여 ‘중간경민편(重刊警民編)’이라는 서명을 사용하고 있다. 판식(版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19.3cm, 28cm이고, 유계(有界) 11행으로서 한문 원문은 매행(每行) 17자, 언해문은 한문 원문보다 1자 낮추어 썼으므로 16자이며, 김정국의 한문 서문도 1자 낮추어 16자로 되어 있다.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은 쌍행(雙行)이며 차용 문자로 표기하였다. 판심은 백구(白口)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로 되고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인 ‘警民編’과 장차(張次)가 표기되어 있다. 권두의 ‘중간경민편서(重刊警民編序)’라는 제목이 표기된 행의 하단에 ‘晋州印’이라고 적힌 글씨와, ‘중간경민편서’에 있는 “付之四長官慶州尙州晉州靑松 亟上於榟 印頒屬邑 屬邑各來印出”의 기록을 관련지어 볼 때 이 중간본은 진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체재는 같은 시기에 형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언해하여 간행한 ≪여씨향약언해≫ ≪정소언해≫와 일치되는 점이 많은데, 이는 김정국이 형의 이들 책을 참고한 결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한문 원문에 첨가된 차자 표기의 구결이 일치하고, 언해문에는 한자의 표기나 병기가 전혀 없다는 점이 또한 일치한다.

이 책의 언해문에 나타난 표기법과 언어적 특징은 간행 시기인 16세기 말의 언어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방점은 없고 ㆁ은 종성 표기에 남아 있으며 ㅿ은 거의 소멸된 상태에서 몇 예가 발견된다.( 2ㄱ, 아 가지며 6ㄴ, 아 19ㄱ)

다음은 〈규장각본〉인데, 이 판본의 간행 경위에 대해서는 권말에 있는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의 ‘청간경민편광포제로차(請刊警民編廣布諸路箚)’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차자(箚子)에서 간행에 관련된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다만 그 원본을 두루 구해도 얻지 못하다가 오래 뒤에야 해서(海西)에서 얻었는데, 언해(諺解)가 없으면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그 원본을 사용하여 교열하고 번역하는 한편, 진고령(陳古靈)과 진서산(眞西山)이 세속을 교화시킨 여러 편(篇)을 그 아래에 붙이되 간간이 요약 정리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선묘조의 상신(相臣) 정철(鄭澈)이 지은 훈민가(訓民歌)를 첨부해 기록된 것을 얻어, 시골 부녀자들로 하여금 이를 늘상 암송하게 함으로써 감발(感發)되고 징계되는 바가 있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而第其原本 遍求不得 久乃得之於海西 而無諺解 窮鄕氓隷 難於通曉 故遂用其本 校證翻譯 且取陳古靈眞西山諭俗諸篇 附於其下 而間有節略者 欲民之易曉也 偶得宣祖朝相臣鄭澈所作訓民歌添錄者 欲使村閭婦孺 尋常誦習 有所感發而懲創也)

위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이후원이 이 책을 간행할 때 원간본은 구하지 못하고 한문만으로 된 사본(寫本)을 구하여 이를 교열해서 번역한 점이고, 둘째는 기존의 책에 없던 부록을 많이 첨부하였다는 점이다. 그 부록은 13세기 중국에서 이용되던 자료와 16세기말 조선의 시가 등 모두 5편으로서, 송나라 진양(陳襄)이 선거(仙居)의 지방 장관으로 있을 때 쓴 〈고령진선생선거권유문(古靈陳先生仙居勸諭文)〉, 그리고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담주와 천주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쓴 〈서산진선생담주유속문(西山陳先生潭州諭俗文)〉, 〈천주권유문(泉州勸諭文)〉, 천주권효문(泉州勸孝文)〉, 이 밖에 조선시대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16편의 〈훈민가(訓民歌)〉 등이다. 이후원은 ≪경민편≫의 간행을 국왕에게 상주하여 마침내 윤허를 얻게 됨으로써 개간(改刊)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원이 상주한 날과 윤허를 얻은 ≪효종실록≫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후원이 또 아뢰기를, “경민편(警民篇)은 바로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김정국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편집한 것입니다. 본도 백성들의 습속이 미련하고 무식하므로 정국(正國)이 이 책을 지어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것도 간행하여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厚源又曰 警民篇 乃己卯名賢金正國爲黃海監司時所編也 本道民俗 頑蠢無知 正國作是書以敎之 請亦令刊布 從之) 주003)

효종실록 7년(1656) 7월 28일(甲戌).

“경의 차사(箚辭)를 보건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서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해당하는 부서로 하여금 차사대로 시행하게 하겠는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도에 보탬이 되리라 기대된다.” 하고, 그 차자(箚子)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곧바로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省卿箚辭, 意非偶然 予用嘉悅 當令該曹 依箚辭施行 庶有補於化民成俗之道爾 下其箚於禮曹 禮曹請趁卽鋟梓 廣布中外 從之) 주004)

효종실록 9년(1658) 12월 25일(丁亥).

위에 있는 두 가지 실록 기사를 통해서, 이후원이 이 책의 간행을 처음 상주한 때는 1656년(효종 7)이고 간행을 윤허 받아 착수한 때는 1658년(효종 9)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책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가 될 것이 예상되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실록의 기록대로 이후원의 개간본인 〈규장각본〉의 간행 시기를 1658년으로 잡는다.

앞에서 본 이후원의 차사(箚辭)에 의하면, 1658년의 ≪경민편≫은 이후원이 독자적으로 번역하였으므로 김정국의 원간본이나 허엽의 중간본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도 허엽의 간행본과는 다른데다 표기도 차자 표기가 아니라 한글 표기로 되어 있다. 언해도 물론 차이가 있다. 국어적인 특징도 대체로 17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판식은 사주쌍변에, 반곽의 크기가 가로 세로 각각 15.5cm, 21.cm이고, 유계 10행에 매행 20자이며 언해문은 1자 낮춰 매행 19자이다. 한글 구결과 주(註)는 쌍행이다. 판심은 백구 상하내향삼문어미로 되어 있으며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인 ‘警民編’과 장차(張次)가 있다. 이 책의 편성은 맨 먼저 김정국의 ‘경민편서(警民編序)’와 그 언해문이 3장, ‘경민편목록(警民編目錄)’이 1장, 본문과 부록을 합쳐 42장, ‘청간경민편광포제로차(請刊警民編廣布諸路箚)’가 2장으로 모두 48장으로 되어 있다.

3. 내용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동경교육대학본〉의 내용은 모두 1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규장각본〉은 13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판본의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동경교육대학본〉

(1)君上 (2)父母 (3)夫妻 (4)兄弟姉妹 (5)族親 (6)鄰里 (7)鬪歐 (8)勤業 (9)儲積 (10)詐僞 (11)犯奸 (12)盜賊 (13)殺人 (14)奴主

〈규장각본〉

(1)父母 (2)夫妻 (3)兄弟姉妹 (4)族親 (5)奴主 (6)鄰里 (7)鬪歐 (8)勤業 (9)儲積 (10)詐僞 (11)犯奸 (12)盜賊 (13)殺人

〈동경교육대학본〉은 〈규장각본〉에 없는 ‘군상(君上)’이 첫 항목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노주(奴主)’ 항목의 배치가 두 판본 사이에 달라져 있다. 〈동경교육대학본〉이 맨 끝 항목인 열네 번째로 되어 있으나 〈규장각본〉에서는 다섯 번째에 배치하여 놓았다.

위에 열거된 목록을 보아 대강 짐작할 수 있겠지만 ≪경민편≫의 내용은 향촌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와 윤리를 권장하면서 흔히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다. 그러고는 범죄를 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인 이유와, 범죄할 경우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처벌 등을 언급하고 있다. ‘군상’을 제외한 13개의 항목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가족과 친족에 관련된 문제로서 이에는 ‘부모(父母)’, ‘부처(夫妻)’, ‘형제자매(兄弟姉妹)’, ‘족친(族親)’ 등이 속한다. 여기서는 한 마디로 가족 윤리를 내세우고 있다. 부모와 그 이상의 어른들에 대해서 언제나 공경하는 마음과 효도하는 법을 강조하고 있다. 부부간에는 화락할 것이며 형제자매 사이에서는 조그만 이해 관계로 대립하여 원수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족친’으로서는 숙부모(叔父母)를 들고, 숙부모도 부모와 똑같이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어기고 가족 구성원 사이에 살해를 비롯해서 구타, 책망, 배반 등의 범법 행위를 하면 상당한 중벌에 처하게 된다는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는 향촌이라는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인리(鄰里)’, ‘투구(鬪歐)’, ‘범간(犯奸)’, ‘도적(盜賊)’, ‘살인(殺人)’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이 중에서 ‘인리’를 제외한 다른 항목은 모두 일상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이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 정욕을 참지 못하고 간통하는 것, 춥고 배고픔 때문에 도적질하는 것, 재물을 탐하거나 원수가 져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 등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이므로 누구든지 이를 범했을 때 심하면 사형에까지 처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인리’는 공동체 속에서 강자와 노약자 간에 질서와 윤리를 확립하여 화목한 사회를 만들도록 교훈하는 것이므로 ‘인리’도 향촌의 공동생활에 관계되는 내용이나 범죄적인 내용과는 구별된다.

셋째는 경제적인 문제를 다룬 부분이다. ‘근업(勤業)’과 ‘저적(儲積)’이 이에 해당한다. ‘근업’은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여 가을에 많이 거두도록 하라는 내용이고, ‘저적’은 가을걷이 한 뒤에 식량의 낭비를 막고 절약하여 다음 해 농사지을 양식까지 준비하라는 내용이다. ‘근업’과 ‘저적’은 주로 농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생산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소비에서 낭비를 없앰으로써 경제적인 윤택을 달성하여 굶주림과 군색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범죄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업’과 ‘저적’에서는 처벌 조항도 형식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넷째는 ‘사위(詐僞)’로서, 이는 거짓 일을 꾸미는 것이다. ‘사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거짓 일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문서 위조, 문기(文記)의 위조, 인장 위조, 관원 사칭, 현직 관원의 자제 사칭 등이다. 이에 대한 형벌도 위조에 따라 다양하게 부과하고 있다. ‘사위’ 조항에서는 위와 같은 거짓 일을 도모하지 말고 모든 일에 성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주(奴主)’가 있다. 이 항목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군신(君臣) 관계에 비하여 주인에 대한 종의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법을 어겼을 때는 중벌에 처하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동경교육대학본〉에서 보이고 있는 ‘군상(君上)’ 조항은 ≪경민편≫의 전체적인 서술 방식에 맞지 않는다. 일반적인 서술 방식은 각 조항의 주제에 대해서 실천적인 윤리를 제시한 다음 법을 어겼을 경우의 처벌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군상’에서는 주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백성이 할 일이나 도리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언급할 뿐 구체적인 처벌 내용에 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경민편≫ 본래의 서술 방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4. 간행자

≪경민편≫의 원간본을 편찬한 김정국, 중간본을 간행한 허엽, 그리고 다시 개간본(改刊本)을 간행한 이후원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자(字)가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이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 사간, 승지 등을 거쳐 151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경민편≫을 간행하고 학령(學令) 24조를 만들어 도민과 학자를 권면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양에 내려가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쓰므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되어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토록 하였으며, 다시 그 이듬해 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540년 병으로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 병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성품이 순정(純正)하고 공평하며 무리함이 없었다. 정사(政事)를 잘하여 방백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고 한다. 사화로 은거할 때는 매우 가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가 편찬한 저술로는 ≪사재집(思齋集)≫,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입도(歷代授受承統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척언(思齋摭言)≫, ≪경민편≫ 등이 있다.

허엽(許曄, 1517~158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며 군자감 부봉사 허한(許瀚)의 아들이고 서경덕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혐의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재기용되어 이듬해 대사성에 오르고 1562년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경연에 참석,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구수담(具壽聃), 허자(許磁)의 무죄를 논하다가 또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과격한 언사 때문에 또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어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말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의 ≪경민편≫을 보충하여 중간하였다. 벼슬을 30년간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으로 군수 이욱(李郁)의 아들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어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출전하였다. 그 뒤 단양군수,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나서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637년 승지(承旨)에 이어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1642년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48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성,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65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分藏)케 하였으며 이어 한성부 판윤, 형조, 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때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을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여 능변으로 악을 질시하였고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 문헌〉

김해정(1993). 경민편언해 연구.≪한국언어문학≫ 31집. 한국언어문학회.

안병희(1978). 해제 ≪이륜행실도·경민편≫(영인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윤석민 외(2006). ≪쉽게 읽는 경민편언해≫. 박이정출판사.

이은규(2005). ≪경민편(언해)≫의 어휘 연구. ≪언어과학연구≫ 35집. 언어과학회.

이은규(2007). ≪경민편(언해)≫이본의 번역 내용 비교. ≪언어과학연구≫ 43집. 언어과학회.

정호운(2006). 16ㆍ7세기 ≪경민편≫ 간행의 추이와 그 성격. ≪한국사상사학≫ 제26집. 한국사상사학회.

『구급간이방』 해제 주001)
* 이 해제는 김남경(2005):≪구급방류 언해서의 국어학적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박사 학위 논문)을 원저자의 허락을 받아 상당 부분 수정하여 옮긴 것이다.

김동소

1. 형태 서지적 고찰

≪구급간이방≫은 조선조 성종 20년(1489년) 왕명에 의해 윤호(尹壕) 등이 편찬한 의서(醫書)이다. 이 문헌에는 허종(許琮)의 서문이 실려져 있는데, 이 서문에 의하면 이보다 먼저 편찬된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제생방(鄕藥制生方)≫, ≪구급방(救急方)≫ 등이 모두 백성들이 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민생 의병지 용(民生醫病之用)’에 편하게 하도록 윤호, 임원준(任元濬), 박안성(朴安性), 권건(權健) 및 허종 등에게 명하여 책을 완성하니, 모두 8권 주002)

≪구급간이방≫의 권수에 대해서는 실록과 허종의 서문에서 기록의 차이를 보인다.
“內醫院提調領敦寧尹壕等 進新撰救急簡易方九卷”(≪성종실록≫(성종20년 5월조))
“搜括古方病 取其要而以急爲先藥 收其寡而以易爲務 其所裁定實禀 神規擇之 必精簡而不略 又飜以方言 使人易曉 書成凡爲卷八爲門一百二十七 命曰救急簡易方”(허종의 「서문」 성종20년 9월 上澣)
이 책의 편찬 연대가 실록에서는 성종 20년 5월이고 허종이 쓴 서문에는 성종20년 9월 상한(上澣)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9권으로 만들었으나 후에 8권으로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서문과 목록을 별권으로 한 것일 수도 있겠다.(김신근 1987: 123-9 참조.) 그러나 짧은 시기에 다시 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서문과 목록에 모두 8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8권일 가능성이 크다.(전광현 1982: 521 참조)
127문(門)이며, 이름을 ≪구급 간이방≫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의 간행에 대해, ≪성종실록≫(성종 20년 5월 30일조)에 “모든 고을에 두루 반포되기는 어려우니, 모든 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도에서 개간하여 계수관이 찍어 내도록 청하였다.(諸邑難以遍頒 請令道監司開刊于本道界首官印行)”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구급간이방≫(이 아래에서는 ≪간이방≫으로 줄여 부름)은 중앙 관청에서 간행한 것을 다시 지방에서도 개간하여 반포하도록 한 뒤 여러 차례 번각(飜刻)되었는데, 현전하는 ≪간이방≫ 자료에는 그러한 흔적이 권별 혹은 한 책 안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이 문헌은 여러 시기에 걸쳐 번각되었으므로, 한 책 안에서도 원간본을 번각한 것, 번각본(飜刻本)을 다시 번각한 것, 판의 마모나 소실에 따라 새로 판을 만들어 넣은 것(보각(補刻)한 것) 등이 뒤섞여 있다.

≪간이방≫은 1489년 간행된 이후 원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한 책 안에서 여러 차례 번각된 것들이 함께 묶어져 전해지기 때문에 현전하는 번각본의 번각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번각 과정을 추정해 보면 1489년에 원간본인 을해자본(乙亥字本)이 간행되었고, 판목의 노후로 인한 번각은 대체로 5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므로, 1550년 이후의 번각본의 번각판과 1600년 이후의 보각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그 대략의 시기를 아래 도표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표 1] ≪간이방≫의 번각 과정

1489년원간본(을해자본)
1490-1500년대번각본번각본(목판본)번각본보급을 위한 번각
※지역별 차이
1550년 이후번각본의 번각판마모·결락에 의한 번각
※각수(刻手)별 · 지역별 차이
1600년 이후보각판마모·결락에 의한 번각
※각수별 · 지역별 차이

≪간이방≫은 권1, 권2, 권3, 권6, 권7의 5권만 전해지는데, 그 권별 소장처를 살펴보면, 권1은 일사문고(一簑文庫)가, 권2는 김영탁(金永倬) 씨가, 권3은 동국대 도서관이, 권6은 1996년 1월 19일 보물 제1236호로 지정되어 충북 음성군 대소면 한독 의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주003)

문화관광부 문화재 관리국 (1998: 75) 참조.
또 다른 책을 통문관(通文館) 사장 이겸로(李謙魯) 씨가 소장하고 있다. 권7은 대구의 한 개인과, 영남대, 만송문고(晩松文庫), 고 김완섭(金完燮) 씨 등 주004)
三木榮 (1976: 60-1)에 의하면 황의돈 씨가 〈권3, 4, 6, 7〉을, 이인영 씨가 〈권6〉을 소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 소장하고 있다. 주005)
전광현 (1982: 518)에 의함.
그 중 권1, 권2는 단국대에서, 권3, 권6, 권7은 홍문각에서 각각 영인한 바 있다.

책의 표지에 ‘救急簡易方 全’이라고 씌어 있는데 후대에 써 붙인 것으로 보인다. 권1의 책 크기는 29.5cm×19.1cm이고, 반광(半匡)의 크기는 21cm×15.2cm이다. 주006)

〈권2〉, 〈권3〉, 〈권6〉은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책의 크기를 알 수 없으나, 〈권2〉는 전광현(1982: 518)에 의하면, 26.1cm×18.5cm, 반광(半匡)의 크기는 21cm×15.2cm이다.
책머리에 ‘救急簡易方 序’라는 허종의 서문이 3장 있고, 그 다음에 ‘救急簡易方 目錄’이 127항목에 걸쳐 나열되어 있다. 목록 다음 장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판심(版心)의 어미(魚尾)는 대체로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지만 면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007)
〈권3〉의 42장에는 임란 전후로 추정하는 대흑구 상하 내향 흑어미(大黑口上下內向黑魚尾)가 나타난다. 이 장에는 계선과 방점이 없다(또한 3장, 9장 전면에 걸쳐서도 방점이 보이지 않는다.).
판심제(版心題)는 ‘簡易方’ 주008)
〈권2〉의 90, 91장은 판심제는 ‘簡易’로 보인다.
이다. 원문은 8행 17자(언해는 16자)이며 계선이 있다. 5자째와 9자째 사이에 판심제와 권차(卷次)가 있고 10자째와 12자째 사이에는 장차(張次)가 있다. 〈권1〉은 모두 116장, 〈권6〉은 95장, 주009)
문화관광부 문화재 관리국 (1998: 75)에서는 “前部 5張 後尾 1張이 缺落되어 복사하여 보수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권6〉의 앞부분 5장, 뒷부분 1장이 떨어져 나간 것을 〈권6〉의 또 다른 책인 통문관 이겸로 씨 소장본을 복사하여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7〉은 85장으로 낙장이 없고, 〈권2〉는 51장이 낙장, 〈권3〉은 22장 뒷면과 23장 앞면이 낙장되었다.

〈권1〉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원본을 확인한 결과,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간행된 영인본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영인본에서는 장차가 모두 바르게 되어 있었으나 원본에는 11장이 15장과 16장 사이에 있고, 10장 다음에 12, 13장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은 〈권7〉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41장과 44장이 바뀌어 있고 83장의 뒷면에 84장의 뒷면이, 84장의 앞면과 85장의 앞면의 자리가 서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여러 판이 뒤섞인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권1〉의 원본의 글자와 방점 부분들을 확인한 결과, 영인본에서 ‘듯’으로 보이는 부분이 원본에서는 ‘둣(一012ㄴ1)’, ‘의’로 보이는 부분은 ‘위(一036ㄱ1)’, ‘시’로 보이는 부분은 ‘(一058ㄱ1)’, ‘’로 보이는 부분은 ‘미(一066ㄱ4)’임이 확인되었다. 방점의 경우는 권1의 지질(紙質)이 잡티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어서 원문에는 점이 아닌데도 영인본에는 방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매우 많았다. 또한 〈권7〉의 원본에서는 탈획이나 오각이 많이 나타난다.

[표 2] ≪간이방≫의 형태 서지

소장처〈권1〉 일사문고 〈권2〉 김영탁
〈권3〉 동국대 〈권6〉 한독 의약 박물관, 이겸노
〈권7〉 대구 개인 소장, 김완섭, 영남대, 만송문고
표지 서명〈권1〉에 ‘救急簡易方全’ 개장.
〈권2·3·6·7〉 표지 없음
서문〈권1〉에 “救急簡易方序”라는 허종의 서문이 3張 있다.
목록서문 다음에 卷之一에서 卷之八까지의 127항목이 있다.
권수제救急簡易方卷之一
책크기(㎝)29.5×19.1
판종목판본
판식반엽광곽(㎝)21×15.2
사주단변
계선있음
행수 및 자수8행 17자
판심魚尾대체로 상하 내향 흑어미이지만 매우 혼란되어 나타남.
판심제簡易方
낙장〈권2〉의 51장, 〈권3〉의 22장 뒷면과 23장 앞면

≪간이방≫은 특이하게도 글자의 모양이나 크기, 굵기가 일정하지 않을 뿐더러 반광의 크기와 어미(魚尾)의 모양이 다른 장들이 많이 뒤섞여 있다. 주010)

≪간이방≫의 모든 책에서 이와 같은 현상들이 발견된다.
≪간이방≫의 〈권1, 2, 3, 6, 7〉에 나타나는 어미들을 비교해 본 결과,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고 같은 책 내에서도 여러 가지가 나타났다. 현전하는 ≪간이방≫에 나타나는 어미는 모두 전권을 통틀어 14종류이다.

[표 3] ≪간이방≫ 권별 어미의 형태

번호유형어미의 형태권수
12367
1A
2
3
4
5
6
7
8
9B
10
11
12C
13
14
54864

* ◎는 많이 나타남, ○은 나타남의 뜻임.

각 권의 주된 어미 유형을 살펴보면 〈권1, 2, 3〉에는 2의 형태가, 〈권6, 7〉에는 1의 형태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권별로는 〈권3〉(8가지)과 〈권6〉(6가지)에 가장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권6〉에 나타나는 ‘대흑구 상하 세화문 어미(大黑口上下細花紋魚尾)’(표의 13번)는 중종부터 임란 직후까지의 문헌에 자주 보이는 것이다. 주011)

안춘근 (1991: 182) 참조.
그러나 어미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각 장(張) 별로 몇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간이방≫ 을해자의 번각본

≪간이방≫번각본의 번각판

≪간이방≫ 보각판

판본은 각 장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마모의 정도, 글자의 모양ㆍ크기ㆍ굵기를 기준으로 ① 을해자의 번각본, 주012)

여기에서는 을해자본을 번각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간의 일차 번각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원간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② 번각본의 번각판, ③ 보각판 주013)
≪간이방≫의 판종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원간본 : 성종 20년(1489)의 원판 또는 초판본을 말한다.
② 번각본 : 원본을 따라 새로 판본을 새긴 것이다.
③ 보각본 : 판목의 일부분이 마모 또는 분실되어 뒤에 그 부분만을 보각(補刻)하여 만들어 낸 책. ≪간이방≫의 보각판은 괘선이 없고 방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들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현전하는 을해자의 번각본은 번각 후 시간이 많이 경과하고 인출되었으므로 마모가 심하고 글자의 굵기가 굵으면서도 크다. ② 번각본의 번각판은 마모는 심하지 않으나 탈획이나 오각이 많다. ③ 보각판은 글자의 모양이 날카롭고 크기가 작고 굵기도 가늘다. 보각판 중 좀더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판은 계선도 없고 방점도 거의 생략되었다.

앞서 제시한 ≪간이방≫의 번각본을 번각 정도 및 판의 특성에 따라 판종을 3가지로 분류한 것을 장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4] ≪간이방≫의 판종별 분류

을해자의 번각본번각본의 번각판보각판
17세기 이전 보각판17세기 보각판
권1나타나지 않음(001-025)
(027~036)
(042)(044~049)
(052~057)(059~077)
(081~088)
(089~097)(106~116)
(026)
(037~041)
(043)(050)
(051)(058)
(078~080)
(098~105)
나타나지 않음
권2나타나지 않음(001~010)(013~023)(027~029)
(031)(034) (043~050)(053~055)
(058~081)(082~089)(092~101)
(102~108)(109~121)
(024~026)
(030)(032)(033)
(035~038)
(039ㄴ~042)
(052)(056)
(057)(090)(091)
나타나지 않음
권3(058ㄱ)
(077ㄴ)
(087)
(095)
(106)
(001~002)(004~041)
(043~057)
(059~076)(078~086)
(088~092)
(096~105)(107~120)
(093)(094)(003)(042)
권6(027ㄴ)
(028)
(001~004)(011~014)
(015~026)
(029~032)(035~060)
(007~010)
(034)
(061~095)
(005)(006)
(033)
권7(002)(025)
(026)(036)
(040)(041)
(053ㄴ)
(001)(003~011)
(013ㄱ)(014~015)(016~022)(024)
(027)(029)(030)(033)(034~035)
(042~046)(048~053)(055~085)
(012)(023)
(028)(031)
(032)(047)
나타나지 않음

을해자 형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권은 〈권7〉이며 〈권1〉과 〈권2〉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권1〉과 〈권2〉의 경우 〈권7〉에 비해 보각판이 훨씬 많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권1〉과 〈권2〉를 비교해 보면, 〈권2〉의 보각판에는 방점이 없는 부분이 많다. 〈권3〉과 〈권6〉은 을해자의 비율 주014)

김남경 (2000: 19)에서 각 판종별 비율을 제시하였는데, 을해자 형태는 2.53%, 번각판은 76.86%, 보각판은 17.83%, 기타(한 장 안에 보각되어 분류하기 어려움) 2.13%이다.
이 매우 낮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임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흑구가 나타난다. 또 〈권6〉에서는 〈권3〉보다 많은 보각판이 보이며, 이 〈권6〉의 보각판에서는 대흑구가 많이 발견된다. 대체로 〈권7〉이 을해자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고, 〈권6〉이 원래의 모습을 가장 적게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이방≫에서 권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판각한 지역의 다름 때문으로 추정된다. 아래에서 각 판본별 표기상의 특징을 한두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을해자의 번각본

〈권6〉에 ‘오조매(六027ㄴ1)’라는 어형이 나오는데, 연철 표기되어 있다. 번각판에서는 ‘오·좀애(六037ㄴ3)’로 3회 나타난다. 〈권7〉의 을해자본에서는 자음 동화된 ‘난·니(七025ㄴ8)’가 1회, ‘난니와(七25ㄴ8)’가 2회로 자음 동화 표기가 반영되어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낟니와(七25ㄴ8)’로, 보각판에서 ‘낟니(七47ㄴ5)’로 나타난다.

2) 번각본의 번각판

(1) 혜다(七014ㄱ4) 볼근(七014ㄱ8) 리허(七073ㄴ2)

솔(七078ㄱ1) 맏(七071ㄱ4) (七014ㄱ3) 날굽(七080ㄱ5)

(2) 시로니와(七014ㄴ6) 느르게(七016ㄱ5) 닐급(七016ㄱ6)

ㄴ(七018ㄱ1) 을(七019ㄱ5) 글허(七019ㄱ8) 셕둑화(七019ㄴ7)

아(七021ㄱ8) 돈금(七024ㄱ4) 디(七048ㄴ2) 셜다(七065ㄱ7)

슷블(七068ㄱ5) 골니(七070ㄱ6) 아흑(七070ㄴ4) 흐ㄹ(七085ㄱ5)

위에 제시한 (1)은 오각의 예이고, (2)는 탈획으로 보이는 예들이다. 주015)

≪간이방≫ 〈권7〉의 원본을 확인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제시되는 오각과 탈각의 예는 주로 〈권7〉을 대상으로 하였다.
(1)의 ‘혜다(七014ㄱ4)’는 ‘혜[디]’, ‘볼근(七014ㄱ8)’은 ‘블근’, ‘리허’는 ‘디허(七073ㄴ2)’, ‘솔(七078ㄱ1)’은 ‘술’을 오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점을 획으로 잘못 인식하여 판각한 것으로 보이는 ‘(七014ㄱ3)’은 ‘’의 오각이고, ‘날굽(七080ㄱ5)’은 ‘닐굽’의 오각이다. (2)는 판의 마모나 소실 등으로 탈획된 예들이다. 번각판에서 이러한 예가 많이 보인다. 위에 탈획된 예를 어휘 및 문맥에 맞게 재구해 보면 ‘시[사]로니와(七014ㄴ6), 느[누]르게(七016ㄱ5), 닐급[굽](七016ㄱ6), [](七018ㄱ1), []을(七019ㄱ5), 글허[혀](七019ㄱ8), 셕둑[듁]화(七019ㄴ7), 아[](七021ㄱ8), 돈금[곰](七024ㄱ4), ,디[게](七048ㄴ2), 셜[졀]다(七065ㄱ7), 슷[숫]블(七068ㄱ5), 골[곪]니(七070ㄱ6), 아흑[혹](七070ㄴ4), 흐ㄹ[르](七085ㄱ5)’와 같다.

(3) 븨여, 주016)

이 예는 번각판으로 분류된 장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븨여’가 보이는 부분만은 보각된 것으로 판단된다. ‘븨-’는 〈권2〉의 이 부분과 〈권6〉의 보각판에서 4회 나타나는 것이다.
사바래, 어

(3)의 예 ‘븨여’는 〈권2〉의 번각판에 1회 나타나는 것으로, 〈권2〉의 번각판에서는 ‘비·븨여(二028ㄱ7)’로 5회, 보각판에서는 ‘비븨여(二037ㄱ4)’로 1회 나타난다. 연철 표기된 ‘사·바래(二014ㄱ8)’는 번각판에서 단 1회 나타나는 것으로, 〈권2〉의 다른 번각판에서는 분철 표기된 ‘사발애(二006ㄱ7)’로 4회 나타나고, 보각판에서도 분철 표기되어 1회 나타난다. 또 〈권7〉의 번각판에서는 ‘어(七019ㄱ6)’의 표기가 단 1회 나타나는데, 또 다른 번각판에서는 ‘어믜(七035ㄴ3)’로 5회, 보각판에서도 ‘어믜’로 2회 나타난다.

3) 보각판

(4) 몰[믈](七015ㄱ7), []야(七054ㄱ4)

(5) 긱[각](七028ㄱ4), 미[머]기라(七047ㄴ4) []으로(七028ㄱ7)

보각판에서는 (4)와 같이 오각된 예와, (5)와 같이 탈획된 예가 보이는데, 보각판은 글자가 가늘지만 선명하게 나타나 탈획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4)의 ‘몰(七015ㄱ7)’은 ‘믈’을 오각한 것으로, ‘야(七054ㄱ4)’는 ‘야’를 오각한 것이다. (5)의 ‘긱(七028ㄱ4)’은 ‘각’, ‘미기라(七047ㄴ4)’는 ‘머기라’, ‘으로’는 ‘으로’가 탈획된 것으로 보인다.

(6) 벌집

중철의 ‘벌집(三003ㄱ6)’은 ≪간이방≫에서 1회 나타나는 것으로 보각판에 보이는데, 연철 표기된 ‘버집(三003ㄱ3)’도 보각판에서 함께 나타난다.

(7) 라여

(8) 시

≪간이방≫ 전체를 통틀어 구개음화된 ‘먹지(三003ㄴ5)’가 1회 나타나는데, 이 판은 계선도 없고 방점도 없다. 후대에 보각한 것으로 파악된다. ‘하나져그내(三003ㄴ3)’도 ‘먹지’가 나타나는 판에서 보이는 것으로 단 1회 나타난다. 이것은 번각판에서 ‘하나져그나(三034ㄴ4)’로 5회 나타나는 것이다. ‘멀기셔(六80ㄱ3)’와 같이 각자 병서 ‘ㅉ’이 보이는 예가 있는데, ‘ㅉ’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는 표기로 보각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예이다. 또한 을해자본과 번각판에서 ‘라’로 나타나는 예가 보각판에서는 ‘라여(三003ㄱ8)’로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이 문헌에서 유일하다. 또 번각판의 ‘시’가 보각판에서는 ‘시(三094ㄴ4)’로 나타난다.

그 외 이 문헌에서는 방점의 표기가 분류된 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예들이 많은데, 김남경(2000)에서 논의된 것을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5] ≪간이방≫의 판본별 방점 표기 비교

방점을해자의 번각본번각본의 번각판 보각판17세기 보각판
··리··리
(七036ㄱ3)
···리
(七024ㄱ7)
3
1
··리(七003ㄴ2)
·:리(七011ㄱ8)
·리(七077ㄴ5)
:·리(七042ㄱ2)
·리(七074ㄱ7)
23
1
1
2
2
·리(七031ㄱ7)5없음
··에··에
(三077ㄴ7)
1··에(三121ㄱ3)
·에(三007ㄱ6)
36
6
에(三042ㄴ7)
·에(三042ㄴ8)
1
1
없음
달·혀달·혀
(三087ㄴ5)
3·달혀(三086ㄱ5)
달:혀(三053ㄴ7)
달혀(三077ㄱ7)
달·혀(三006ㄴ2)
:달·혀(三097ㄱ2)
1
2
6
44
1
달혀(三093ㄴ4)3없음
머·그면머·그면
(七026ㄴ6)
4·머·그면(七078ㄴ1)
머·그·면(七007ㄴ8)
머·그면(七016ㄱ6)
머그·면(七006ㄱ6)
머:그면(七035ㄱ1)
머그면(七006ㄴ3)
1
2
28
1
1
2
머·그면(七028ㄴ3)
머그면(七031ㄴ1)
3
1
없음
·므레·므레
(六027ㄱ3)
3·므레(六002ㄱ2)
므레(六013ㄱ2)
므·레(六052ㄴ2)
17
12
1
·므레(六069ㄴ8)
·므·레(六078ㄱ4)
므레(六008ㄱ8)
12
1
7
므레
(六005ㄱ7)
4
·라·라
(六028ㄱ2)
2·라(六002ㄴ6)
라(六013ㄱ1)
7
3
·라(六069ㄱ1)
··라(六083ㄴ4)
라(六008ㄱ1)
8
1
7
라
(六006ㄱ3)
2
·라·라
(六027ㄴ6)
2·라(六036ㄴ4)
라(六043ㄱ1)
·:라(六027ㄱ7)
5
2
1
··라(六062ㄱ1)
··라(六075ㄱ6)
:라(六063ㄴ4)
라(六063ㄴ8)
·라(六062ㄴ6)
2
1
1
4
20
라
(六033ㄱ6)
2
·론·론
(三106ㄴ3)
8·론(三013ㄱ6)
론(三030ㄴ8)
:론(三053ㄴ4)
19
2
1
론(三094ㄱ6)1
아·니커·든아·니커·든
(六028ㄴ3)
3아·니커든(六060ㄱ1)
아·니커·든(六001ㄴ7)
아니커든(六026ㄴ5)
1
4
2
아·니커·든(六087ㄴ1)2아니·커든
(六005ㄴ7)
아니커든
(六005ㄴ3)
1
1

≪간이방≫의 방점 표기 주017)

맨 앞에 제시한 방점의 표기는 ≪간이방≫의 을해자본을 중심으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방점을 참조하여 제시하였고, 뒤의 숫자는 빈도를 표시한 것이다.
를 분류된 판에 따라 비교한 것이다. ≪간이방≫은 현전하는 책이 모두 다섯 권이고, 지역별 차이와 시기적 차이가 혼재되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권마다 방점의 양상을 따로 비교하였는데, 한 권 안에서도 판종에 따라 방점의 양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을해자본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쓰이고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매우 혼란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머그면’을 예로 들면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을해자본에서는 4회 모두 일정하게 방점이 찍혀 있으나, 번각판에서는 무려 6가지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 때 을해자본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표기가 대체로 빈도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각판에서는 방점이 없는 표기가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 보각판의 방점 표기의 혼란 정도는 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권7〉, 〈권3〉에서는 비교적 일정하게 나타나지만, 〈권6〉의 경우, 한 장 안에서도 혼란되어 나타난다. 또한 빈도를 고려해 보면, 번각판에서는 혼란되는 방점 표기 중 을해자본의 방점 표기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높은 빈도를 보였으나, 보각판에서는 을해자본에서 적힌 형태의 방점 표기의 빈도가 높지 않다.

2. 표기의 검토

≪간이방≫에는 전반적으로 방점이 나타나나 장에 따라 한 장 전체에 방점이 없거나, 일부분에서만 방점이 나타나는 장도 있다, ‘ㅿ’은 나타나나, ‘ㅸ’은 나타나지 않는다. 종성 위치에서는 ‘ㆁ’을 표기하고 있는데, 탈획되어 ‘ㅇ’만 남기도 하였다. 또한 ‘ㅆ’, ‘ㅉ’의 각자병서가 보이며 합용 병서도 물론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표기에서의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간이방≫에 표기된 문자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6] ≪간이방≫에 표기된 문자

초성자ㄱㄷㅂㅅㅈ
ㅋㅌㅍ ㅊㅎ
ㄲㄸㅃㅆㅉ
ㄴㅁㅿ ㅇㄹ
ㅺㅼㅽ
ㅳ ㅄㅶᄩ
ᄢᄣ
중성자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
ㅢ ㅚㅐㅟㅔㅐㅖ
ㅘㅝㅙㅞᆐᆒ 
종성자ㄱㄷㅂㅅㅈㅌㅍ
ㆁㄴㅁㅿㅇㄹ
 
 
    ᄜ 


(1) 댓무(三033ㄱ4), 마(三047ㄴ7), 브(三033ㄱ6), 브면(二016ㄱ8), 오니와(二001ㄴ8), 히(六014ㄴ2), (六005ㄴ2)

(2) ㅆ - 써(七031ㄱ3), 쓰고(七044ㄱ8)

(3) ㅉ - 범호 (六045ㄴ3), 귀 (一049ㄱ1), 직가 (七032ㄴ7), 날츌 (七032ㄴ7), 멀기셔(六080ㄱ3)

(4) 아비부 와 들입 와 스고  앤 아 와 날츌  써(七39ㄱ2-3)

≪간이방≫에서 ‘ㅿ’은 (1)의 ‘댓무, 마, 브, 브면, 오니와, 히, ’와 같이 두루 쓰이고 있다. 주018)

≪간이방≫에서는 ‘아(下83ㄱ5)’와 ‘아(上19ㄱ3)’, ‘어디며(下27ㄴ1)’와 ‘븟어딘(下01ㄴ2)’이 함께 쓰였는데, 그 중 ‘아’는 11회, ‘아’는 6회의 빈도를 보인다.

≪간이방≫에서 각자 병서의 표기로 ‘ㅆ’과 ‘ㅉ’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ㅉ’이 쓰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각자 병서 글자는 세조 시대≪원각경 (언해)(1465년)≫이후부터 16세기 말까지 쓰이지 않았고, ‘ㅆ’은 15세기 말부터 다시 쓰이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널리 쓰였고, ‘ㅉ’은 17세기가 되어야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주019)

김동소 (2003ㄱ: 85~86, 2007: 186) 참조.
≪간이방≫의 ‘써’는 보각된 판에서 보이는 것이며, ‘쓰고’는 번각본에 나타나는 것이다. ‘ㅉ’은 한자 ‘글자 자(字)’의 음을 적은 ‘’로 표기된 것이 대부분인데, ‘범호 (六045ㄴ3)’, ‘귀 (一049ㄱ1)’ ‘직가 (七032ㄴ7)’, ‘날츌 (七032ㄴ7)’, ‘즈믄쳔 (七40ㄱ8)’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표기는 된소리 표기이기도 한데, 예문 (4)의 ‘아비부 와 들입 와 스고  앤 아 와 날츌  써(七39ㄱ2-3)’처럼 같은 문장 안에서 된소리 ‘’이 합용 병서인 ‘ㅶ’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 각자 병서인 ‘ㅉ’로 나타나는 점은, 한자 ‘字’의 ≪동국 정운≫식 한자음 표기가 ‘’ 주020)
≪간이방≫에서는 모두 ‘字(구上05ㄱ4)’로 9회 나타난다.
였으므로 이 표기에 이끌려 각자 병서인 ‘’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멀기셔(六079ㄱ3)’ 주021)
‘멀기셔’와 관련된 것으로 ≪노걸대 언해≫〈상 34〉에 ‘멀즈시 라(遠些兒絟)’가 있다.
는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각된 판에 나타나는 것이다.


(5) ㅂ류

ㅳ - (三034ㄴ4), 깃 불휘(六012ㄱ7), 디거든(三003ㄴ8), 고(七003ㄱ1), 혀(二045ㄱ6), (六086ㄴ4), 고(二013ㄴ1), 얌기(一108ㄱ7)

ㅄ - 라(三039ㄴ4), (一008ㄴ4), (一056ㄱ5), 게(三029ㄴ7), 초(三055ㄴ6), (三059ㄴ3)

ㅶ - (三012ㄴ8), 오(六072ㄱ5), 머리(二008ㄱ5), (一073ㄴ4), (三013ㄱ8), 면(一077ㄱ3), 뵈이(三079ㄱ7)

ㅷ - 디여(三060ㄴ4)

(6) ㅅ류

ㅺ - 리(六004ㄴ6), 아(三024ㄱ3), 오(六010ㄴ3), 리나모(三082ㄴ3), 모롭(一001ㄴ4), 어든(一069ㄴ1), 라(一044ㄴ8), 오(一069ㄱ6), 리라(一035ㄴ3)

ㅼ - 해(一065ㄴ2), (一003ㄱ1), (三063ㄴ5), (三006ㄱ4)

ㅽ - (七057ㄴ5)

(7) ㅄ류

ㅴ - 닙(六054ㄱ8), 리고(七067ㄱ7), (七040ㄴ4), 04ㄱ6), (六016ㄴ8), 니(六078ㄱ1)

ㅵ - 어(二047ㄱ8), 려(六051ㄴ1)

병서 표기로는 각자 병서 글자와 합용 병서 글자가 모두 보인다. 각자 병서 글자로는 위에서 말한 대로 ‘ㅉ’과 ‘ㅆ’이 쓰였고, 합용 병서 글자로는 ‘ㅂ’류의 ‘ㅳ, ㅄ, ㅶ, ᄩ’이, ‘ㅅ’류의 ‘ㅺ’, ‘ㅼ’, ‘ㅽ’이, ‘ㅄ’류의 ‘ᄢ’와 ‘ᄣ’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 오각으로 보이나 ‘해(三9ㄴ01), 두 개(左右翮)(六5ㄱ6)’와 같은 표기가 보인다.

3. 어휘의 검토

1)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휘

≪간이방≫의 어휘 중 사전에 실리지 않은 어휘는 다음과 같다.

(1) 욘히[溫冷]

≪간이방≫〈권1〉에만 단 1회 나타난다.

去滓溫冷服
즈 앗고 욘히 야 머그라(一004ㄴ5)

지금까지 알려진 중세어 문헌에서 볼 수 없는 유일례이다. ‘溫冷’을 번역한 말이므로 ‘-’은 ‘따스하다’의 뜻이겠지만 ‘욘히’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뜨뜻미지근히’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듯하다.

(2) 림·질(淋)

≪간이방≫〈권3〉에 3회 주022)

어휘의 출현 횟수는 협주(夾註)의 것까지 포함한 것이다.
나타난다.

諸淋(여러 가·짓 림·질)(三101ㄱ3)

이 어휘는 한자 ‘淋’을 번역한 것으로 현대의 ‘임질(淋疾)’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 주023)

여기에서는 남광우 (1997) :≪고어 사전≫(이하 ‘고어’), 유창돈 (1994) :≪이조어 사전≫(이하 ‘이조’), 한글 학회 (1992) :≪우리말 큰사전≫의 〈옛말과 이두편〉 (이하 ‘우리말’)을 참조하였다. 그 외에도 김영황 (1994) :≪중세어 사전≫, 리서행 (1991) :≪조선어 고어 해석≫, 이상춘 (1949) :≪조선 옛말 사전≫, 이영철 (1955) :≪옛말 사전≫, 정희준 (1949) :≪조선 고어 사전≫, 홍윤표 (1995) :≪17세기 국어 사전≫등을 참조하였다.
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신속孝3≫와 ≪譯上62≫에서는 ‘님질(痳疾)’이 보인다. 이 용례는 글자 크기가 작은 보각판에 나타난다.

(3) 므그니[重]

이 낱말은≪간이방≫에만 두어 번 나타난다.

用白礬二錢重生硏末
번 두 돈을 므그니 라 라(一010ㄴ7)

의미가 확실하지 않지만 한자 ‘重’을 번역한 듯하므로 ‘묵직이’ 정도로 해석된다. 권3에 “조협 론  므근  돈과(皁莢末一大錢)”이라는 용례가 있다.

(4) 부목/브목[竈突]

≪간이방≫〈권7〉에 2회 나타난다.

竈突墨(브[][목]읫 거믜)(七041ㄴ7)
부목·읫 거믜·과· (七042ㄱ1)

이 어휘는 한자 ‘竈突’에 대응되는데, ‘竈突’은 ‘부뚜막에 딸린 굴뚝’의 의미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41장의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히 판독하기가 힘들지만 ‘브목’으로 보이며 마모가 심하지 않은 42장의 앞면은 ‘부목’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어휘로는≪박통사 (언해) 十四19≫에서 ‘브섭’, ≪박통사≫, ≪간이방≫, ≪훈몽 자회≫에서 ‘브’, ≪박통사≫, ≪구급방≫에서 ‘브’을 찾을 수 있다. 이 용례는 을해자본에 나타난다.

(5) 슈마(水馬)

≪간이방≫〈권7〉에 1회 나타난다. .

水馬手中持之則易産
·슈:마 소·내 주·여시·면 :수·이 나·리라(七028ㄴ6)

‘슈마’는 한자 ‘水馬’를 한글로 표기한 어휘로 현대의 ‘해마(海馬)’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용례는 글자가 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6) 옴옴거든[悸]

현재까지 알려진 중세어 문헌 전체에서≪간이방≫〈권1〉에만 다음과 같이 단 한 번 나타나는 유일례이다.

頭風驚悸
머리예  드러 놀라 옴옴거든(一013ㄴ1)

‘옴옴’은 ‘悸(두근거릴 계)’를 번역한 말인데, ‘가슴이 옴직옴직하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는 뜻인 듯하다.

(7) 진[麪]

≪간이방≫〈권1〉에만 다음과 같이 2회 나온다.

用浸烏頭酒打麪糊爲丸
바곳 맛던 수레 진으로 플 수어 환 로 (一009ㄱ1)

好醋麪糊爲丸如桐子大
됴 초애 진으로 플 수어 머귓 여름마곰 환 라 (一010ㄱ6)

위의 예문에 나오는 ‘진으로’는 ‘진 + -으로’의 변형인데, ‘진’는 ‘밀가루’라는 뜻일 듯하다. 그러나 ‘진’은 접두사인 듯하지만 그 어원은 알 수 없다. 이 문헌 여기에만 나온다.

(8) 투(妬乳)

≪간이방≫〈권7〉에 1회 나타난다.

婦人乳癰汁不出稸積內結因成膿腫一名 妬乳
겨지비 져제 긔 나 져지 나디 아·니·야 안해 얼의여 브 골[곪] 주024)

이 글의 자료로 이용한 대구 개인 소장 ≪간이방≫〈권7〉에서는 이 장(張)이 번각판에 부분적으로 보각되었는데 ‘골’의 자리가 바로 부분적으로 보각된 부분이 다. ‘곪’의 ‘ㅁ’을 써야할 자리가 비어 있어 오각이나 탈획으로 보인다. 영대본 ≪간이방≫〈권7〉에서는 ‘곪’이라고 되어 있다.
니 일후미 투라(七070ㄱ6)

이 어휘는 한자 ‘妬乳의 음을 적은 것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장(張)은 번각판을 부분적으로 보각한 장이어서 앞의 분류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이 어휘가 나오는 부분은 번각판이다.

(9) 두위여디다[脫]

≪간이방≫〈목록〉에 단 1회 나타난다.

脫肛 문 두위여딘 :병〈목록〉

이 어휘는 한자 ‘脫’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는 ‘뒤집어지다’라는 뜻이다. ≪이조≫, ≪고어≫, ≪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중세 한국어의 ‘두위혀다, 두위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옛말 사전≫에는 ‘두위어져 소리 더욱 怒야 다(反側聲愈嗔)≪杜≫’가 실려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드위다’의 예를 살펴보면, ‘리 黃金 구레 너흐려든 모 드위며≪두시 (언해) 중간본 十一 16≫’, ‘믌겨리 드위 부치니 거믄 龍ㅣ 봄놀오(濤飜黑蛟躍)≪두시 (언해) 중간본 一 49≫’, ‘셜 드위텨디게 고≪월인 석보 一 29≫’, ‘네 이 드위혀니≪내훈 三 27≫’, ‘無明을 드위 야 료 表니라≪법화경 一 58≫’ 등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0) ·펴··갇[天公]

≪간이방≫〈권1〉에 2회 나타난다.

又敗天公(· ·펴··갇)燒酒服
· · ·펴량··가 ·라 수레 ·프러 머·그며(一098ㄴ3)

이 어휘는 한자 ‘敗天公’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는 ‘패랭이’이라는 뜻이다.≪이조≫,≪고어≫,≪우리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동의 보감≫〈탕액〉에서 한자어 ‘敗天公’을 ‘펴랑이’로 언해하였고,≪물보≫〈의복〉에서는 한자어 ‘平凉子’를 ‘펴랑이’로 대역하였다. 이 문헌에서의 ‘·펴··갇’은 ‘·펴·’[패랭이]와 ‘·갇’[갓(笠)]이 결합한 형태이다. 보각판에서 나타나는데, 이 판은 글자가 고딕체 모양이다.

2) 용례가 가장 앞선 시기인 어휘

(1) 고쵸(胡椒)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11회, 〈권6〉에 1회 나타난다.

胡椒(고쵸)硏酒服之
고쵸· ·라 수·레 머·그라(一032ㄴ1)

이 어휘는 한자 ‘胡椒’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의 ‘후추’를 의미한다. ‘고쵸’는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후대 문헌인≪자회 상12≫, ≪한378ㄱ≫, ≪물보≫〈蔬菜〉에도 나타난다. 또한 ≪유물≫에는 ‘고초’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보인다.

(2) 구블[腿]

≪간이방≫〈권1〉에 1회 나타난다.

仍摩捋臂腿屈伸之
· ·와 구·브를 ·츠며 굽힐·훠 보·라(一060ㄴ)

이 어휘는 한자 ‘腿’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의 ‘다리살, 다리’를 의미하며,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모두 합쳐 부르는 말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후대 문헌인 ≪痘≫에 ‘구블이 며 (尻冷)’가 나타나는데 이 때의 ‘尻’는 ‘꽁무니, 즉 등마루뼈의 끝진 곳’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글 학회 사전에는 ≪간이방≫과 ≪痘≫의 예 모두를 ‘엉덩이’로 풀이하였고 ≪고어≫에는 ≪간이방≫의 표제어를 ‘구블’이라 하여 ‘정강이’로 풀이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漢)≫에서는 ‘구블’가 나타나고, ≪역 하28≫에는 ‘구블쟈할’이 보인다. 리서행 (1991: 62)에는 ‘구블쟈할’을 ‘궁둥이가 얼룩무늬인 말’로 풀이하고 있다.

≪옛말 사전≫에는 ‘오직 평상 증은 귀과 구브리 면 슌고 만일 검어 디고 귀과 구브리 더우면 역니라≪두 상≫’에서 ‘구블’을 ‘귀뿌리’로 풀이하고 있고, ≪간이방≫의 예인 ‘구블’을 표제어로 하여 ‘정강이’로 풀이하였으며, ≪17세기 국어 사전≫에는 ≪痘창 상11ㄴ, 35ㄱ, 52ㄱ, 하25ㄴ≫의 예를 들고 ‘귀뿌리’로 풀이하고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3) ·이[蝸牛]

≪간이방≫〈권3〉에 2회, 〈권6〉에 2회 나타난다.

蝸牛(·이)飛麪( 밀)硏勻貼痛處
팡이와 가 밄와 라 고게 야 알  브티라(三009ㄱ)

이 어휘는 한자 ‘蝸牛’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 ‘달팽이’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사해31≫, ≪자회21≫, ≪동의≫〈탕액2 蟲部〉, ≪왜 하26≫, ≪물보≫〈介虫〉에도 나타난다. ≪옛말 사전≫에 ‘판이 주025)

<분석>조항범 (1998: 203-204)에서는 ‘파니’를 가장 오래된 어형으로 추정하고, ‘판(달린 판) + -이’로 분석하였다.
(유합 상16)’, ‘파니≪구방≫ 하77’, ‘蝸牛 月乙板伊≪향약집성방83≫’의 예들이 실려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4) 도·랏[拮梗]

≪간이방≫〈권3〉에 2회, 〈권6〉에 2회 나타난다.

拮梗(도·랏 二兩)甘草(灸 一兩)

도·랏 ·니 두 ·과 감초 ·브레 :·니  ·과 사·라(二065ㄱ7)

이 어휘는 한자 ‘拮梗’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도라지’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 초, 상7≫, ≪역 하12ㄱ≫, ≪방약2≫, ≪향약 월령 이월≫, ≪동문 하4≫, ≪물보≫〈약초〉, ≪동의2:31ㄱ≫ 등에도 나타난다. ≪신구황 촬요 8≫에는 ‘도랒’이 보인다. ≪중세어 사전≫에는 ≪제중편≫의 ‘桔梗 도랏’, ≪촌구≫의 ‘桔梗 道乙阿叱’이 실려 있고, ≪옛말 사전≫에는 ≪향약 구급방≫의 ‘桔梗 道羅叱’, ≪향약 채취 월령≫의 ‘桔梗 鄕名 都乙羅叱’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5) 도와리[霍亂]

≪간이방≫〈권2〉에만 19회 나타난다.

乾霍亂不吐不瀉
:도·와:리 ·야 ·토:티 아·니 ·며 즈츼도 아·니·코(二053ㄱ2)

이 어휘는 한자 ‘霍亂’에 대응하는 어휘로 ‘여름철에 급격한 토사를 일으키는 급성 질환’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字會 초, 중4≫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6) 마좀[當]

≪간이방≫〈권1〉에 1회, 〈권2〉에 1회 나타난다.

癲癎用艾於陰囊下穀道正門當中間隨年歲灸之
뎐·:에 ··으로 음 아·래  마좀 가·온· 제 ·나 마초 ·라(一098ㄴ8)

이 어휘는 한자 ‘當’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바로 맞음, 마침’을 의미한다. ≪신속 열 86≫에 예가 등재되어 있다. 중세 한국어의 ‘마, 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국어 사전≫에는 ≪첩 八26ㄱ≫의 ‘마즘’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7) 막딜·이다[閉]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3회, 〈권3〉에 1회 나타난다.

卒暴中風涎潮氣閉牙關緊急眼目上視
믄·득  마·자 ·추미 올·아 ·긔운·이 막딜·이며 어·귀 굳·고 ·누눌 ·티·고(一007ㄴ)

이 어휘는 한자 ‘閉’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막히다, 질리다’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번소8≫, ≪선조판 소언서제2≫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국어 사전≫에 ‘막히다’의 의미로 ‘막디르다≪마경 하21ㄱ≫’와 ‘막디다≪어록 초4ㄱ, 중5ㄴ≫’가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8) 벽돌[磚石]

≪간이방≫〈권2〉에 2회 나타난다.

蠶沙(누·에)燒磚石(·벽:돌)蒸熨
누에도 봇그며 벽돌도 더이며 울호(二039ㄱ)

이 어휘는 한자 ‘磚石’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도 ‘벽돌’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유물≫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9) ·수유[(酥]

≪간이방≫〈권1〉에 2회, 〈권2〉에 9회, 〈권3〉에 2회, 〈권6〉에 4회, 〈권7〉에 1회 나타난다.

甘草(生用三兩)同爲末用酥(수유)少許和句徵有酥氣
감·초  :석 과·  ·디 ·라 ·수유 :져기 섯·거 :·간 ·수윳 ·긔운·이 잇·게 ·야(三035ㄴ4)

이 어휘는 한자 ‘酥’에 대응하는 어휘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동의≫〈탕액편〉에서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0) 슴슴다[淡]

≪간이방≫〈권3〉에 1회 나타난다.

淡豆豉(젼국二十粒)鹽(소곰一捻)
슴슴 젼국 ·스믈  :낫·과 소곰  져·봄과(三064ㄴ6)

이 어휘는 한자 ‘淡’에 대응하는 어휘로 ‘맛이 심심하다’를 의미한다. ≪두 하28≫에도 나타나며 ≪두 하29≫에서는 ‘ 술의 플러 머기라(담주조 하)’가 보인다. 중세 한국어에서 비슷한 뜻으로는 ‘슴겁다, 승겁다’ 등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1) 시·욱[氈襪]

≪간이방≫〈권2〉에 2회 나타난다.

氈襪後跟(시·욱 뒤측)一對男用女者女用男者燒灰酒調服
시욱 뒤측 둘흘 남진은 겨집의 하 겨집은 남진의 하 라  수레 프러 머그라(二033ㄴ)

이 어휘는 한자 ‘氈襪’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전버선’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박초 상26≫에도 나타난다. ≪두중 十九47≫에는 ‘시옥’, ≪박중 상24≫에는 ‘시옭청’, ≪박중 상27≫에는 ‘시욹쳥’이 보인다.≪17세기 국어 사전≫에는 ‘동물의 털로 만든 버선’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용례는 보각판에 나타난다.

(12) 어르·러지[癜風]

≪간이방≫〈권6〉에만 모두 16회 나타난다.

白癜風紫癜風( 어르·러지 블근 어르러지)(三084ㄱ·ㄴ)

이 어휘는 한자 ‘癜風’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어르러기, 어루러기’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 중33≫에도 나타난다. ≪역 상62≫에는 ‘어루러기’가 보이고 ≪두 하78≫에는 ‘어루록지’가 보인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3) [胡麻]

≪간이방≫〈권6〉에 4회 나타난다.

胡麻今香同擣細羅爲散
 고게 봇가   디허 리 처  라(二088ㄱ5)

이 어휘는 한자 ‘胡麻’에 대응하는 어휘이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牛方≫, ≪사해중 상30≫에도 나타난다. ≪법화≫, ≪자회≫, ≪역(譯)≫, ≪한(漢)≫ 등에서는 ‘’가 보인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4) ·[床]

≪간이방≫〈권1〉에 3회, 〈권2〉에 1회 의미한다.

槐花(회홧곳)瓦上妙令香夜到三更仰上床
회홧 고· 디새 우·희 고·게 봇·가 · ·만커·든 · 우·희 졋·바 누·워셔(二088ㄱ6)

이 어휘는 한자 ‘床’에 대응하는 어휘로 현대어로는 ‘평상’을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자회초 중6≫, ≪분온≫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국어 사전≫의 ≪신속효 7:45ㄴ≫, ≪역 하18ㄴ≫, ≪태요 66ㄴ≫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5) ·딥지·즑[薦]

≪간이방≫〈권1〉에 단 1회 나타난다.

常用薦帝卷之就平地上帝轉
·녜 · ·딥지·즑에 ·라  ·해다·가 그우·료(一067ㄱ6)

이 어휘는 한자 ‘薦’에 대응하는 것으로 현대어로는 ‘짚으로 짠 거적’을 나타낸다. ≪중세어 사전≫에서는 ‘집기직, 짚자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간이방≫의 용례가 빠져 있고 뒤 문헌인 ≪자회 중11≫와 ≪노 상23≫의 예들이 등재되어 있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6) 머·릿곡뒤ㅎ[腦]

≪간이방≫〈목록〉에 1회 나타난다.

腦後有核 머·릿곡뒤헤 도· 것(목록)

이 어휘는 한자 ‘腦後’에 대응하며 현대어로는 ‘머리쪽지, 정수리’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분온22≫, ≪역 상32≫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7) 미긔치[烏賤魚骨]

≪간이방≫〈권2〉에 4회, 〈권3〉에 2회, 〈권7〉에 2회 나타난다.

烏賊魚骨(·미·긔치)搗細羅
·미·긔·치 디·허 ··리 ·처 (二112ㄴ)

이 어휘는 한자 ‘烏賊魚骨’에 대응하며 ‘오징어뼈’인데,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동의≫〈탕액〉에도 나타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18) 티다[拔]

≪간이방≫〈권2〉에 단 1회 나타난다.

頂心取方寸許急捉痛拔之少頃
머·릿 ·뎡바·기·옛 터럭·을  지·봄·만 ·리 자·바 ·이 ··티라(二071ㄴ8)

이 어휘는 한자 ‘拔’에 대응하며 현대어로는 ‘빼다, 뽑다’를 의미한다. ≪간이방≫의 용례가 가장 앞서고 뒤 문헌인 ≪유합≫에도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어휘로 ‘히다, 다, 혀다, 다, 치다’ 등이 있다.

≪17세기 국어 사전≫에 의하면 ≪신속 열4:8ㄴ, 4:25ㄴ, 4:53ㄴ, 5:85ㄴ, 6:11ㄴ, 6:49ㄴ, 효6:87ㄴ, 7:9ㄱ, 8:37ㄴ, 충1:49ㄴ≫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 용례는 번각판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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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방(언해)》 해제

김동소

《구급방(救急方)(언해)》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세조실록》 권39, 12년 병술 6월 임자 조의 “팔도에 《구급방》 각 2건을 내리다.(賜八道救急方各二件)”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체로 세조 12년(1466) 6월 이전에 책이 편찬·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은 상하 2권 2책으로 간행된 것인데, 현재 국내에는 규장각(奎章閣)에 낙장본인 상권만 있고, 일본 나고야[名古屋] 호사 문고[蓬左文庫]에만 상하 2책 1질이 전해지는 책으로서, 15세기 중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훈민정음 문헌이다.

세조 연간에 간행된 훈민정음 문헌들이 거의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나온 불경 언해류인데 반하여, 이 《구급방(언해)》는 불교와 관계가 없는 책이고, 또 최초의 의약서 언해라는 점에서 이 문헌의 특징이 있다. 이 문헌의 언해 부분에 들어 있는 표기법·음운·어휘 등 언어 현상은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 언해류와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점이 있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구급방(언해)》의 국어학적 연구로는 지금까지 김지용(1971), 김영신(1976), 김영신(1978), 원순옥(1996) 등이 있다. 이들 앞선 연구에 바탕하여 이 문헌의 국어학적 특징을 간략히 밝혀 보기로 한다.

병의 치료 및 예방을 목적으로 출판된 책의 이름에 ‘구급(救急)’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것들에 《향약 구급방(鄕藥救急方)》(13세기), 《구급방(언해)》(15세기), 《구급 간이방(救急簡易方)(언해)》(1489년), 《구급 이해방(救急易解方)》(1499), 《촌가 구급방(村家救急方)》(1538), 《언해 구급방(諺解救急方)》(1608) 등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언해된 것으로는 세조대에 간행된 이 《구급방(언해)》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일본 호사[蓬左] 문고에 있는 《구급방》상하권 2책은 을해자본(乙亥字本)의 복각본으로 복각 시기는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상권이 92장(목록 3장, 본문 89장), 하권이 96장 주001)

<풀이>일부 문헌에서 하권이 97장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이 있는데, 국내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한글학회의 영인본(1972년, 1975년, 1996년 영인)과 대제각의 영인본(1978년 영인)에서 하권 91장 뒷면과 92장 앞면을 중복 인쇄하였기에 일어난 착오이다. 하권은 모두 96장의 분량이다.
, 책의 크기는 세로 30.4cm, 가로 19cm이며, 다섯 끈매기[五結絲綴]로 제본되어 있다. 판광(版匡)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며 반엽 광곽(半葉匡郭)은 21cm×15cm, 계선(界線)이 있고 각 8행 17자(언해문은 쌍행[雙行]으로 한 줄에 16자씩)로 되어 있으며, 판심(版心)에는 위아래에 백구(白口) 주002)
<풀이>그러나 하권 55장만은 흑구(黑口)로 되어 있다.
와 내향 무문 주003)
<풀이>그러나 가끔 유문 어미(有紋魚尾)로 되어 있는 곳이 있다.
흑어미(內向無紋黑魚尾)가 있고 서명[救急方]·권차(卷次)·장차(張次)가 들어 있다. 《救急方 上》과 《救急方 下》라는 책 이름이 검푸른 표지에 백지로 씌어져 있고, 상권 표지 안쪽에는 “總持寺 什物”이라는 나무도장[矩形木印]이 찍혀 있으며, 상권 뒤표지 안쪽에는 “當山拾八世 眞空和尙 寄進” “ㅇㅇ書軒”이라 붓글씨로 쓴 것이 있고, 하권 뒤표지 안쪽에는 “當山拾八世 眞空和尙 寄進”이라고 역시 붓으로 쓴 글씨가 있다. 주004)
<풀이>김지용(1971) 및 원순옥(1996: 12-15)을 참조한 것임.

규장각에 있는 낙장본 《구급방》 상권은 위의 호사 문고본과 동일 계통의 것으로, 책의 모양은 완전히 같다. 표지 뒤에 ‘梅畫屋 珍玩’이라는 가로로 된 네모 난 도장이 찍혀 있고, 권두 5장 앞면까지와 79장 이하가 낙장으로 되어 있으며, 71장은 붓으로 씌어져 있다. 주005)

<풀이>서울대학교 규장각(2001ㄱ: 26)에 의함.

책의 구성은 상권이 ‘一 中風’에서 ‘十九 金瘡’까지 19조항, 하권이 ‘二十 箭鏃金刃入肉及骨不出竹木刺附’에서 ‘三十六 血暈’까지 17조항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조항에서 ‘直指方, 經驗秘方, 千金方, 衛生易簡方’ 등 중국의 수십 가지 의서(醫書)에 있는 방문(方文)을 한문 그대로 인용한 후, 이를 언해하여 두 줄로 수록하고 있다. 가끔 한문에 들어 있지 않은 주석이 별도 표시 없이 언해문 뒤에 한글로만 나오는 곳이 있다.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牙噤者中指點南星細辛末幷烏梅肉頻擦自開 (상 : 1ㄴ)

니 마고므니란 가라개 南남星과 細솅辛신ㅅ  무텨 烏梅肉 조쳐 조 븨면 절로 열리라 厥은 손발 고 脉 그츤 病이라 (상 : 2ㄱ)

이 문헌은 비록 16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15세기 중반에 간행된 초간본을 복각한 것이기 때문에 15세기의 언어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표기법과 어휘를 중심으로 이 문헌의 국어학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표기법은 세조대 문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방점이 찍혀 있고, 언해문 속의 모든 한자에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각 한자 바로 뒤에 붙어져 있는데, 거의 모든 복각본 문헌과 마찬가지로 탈획이 심해 이용할 때에는 주의를 요한다. 또 복각할 때의 각수(刻手)의 실수로 잘못 새겨진 글자들도 상당수 있다. 예. 雄黃→ 雄黃[하:55ㄱ], 믈ᄉᆞᅟᅢᆷ

(如湧泉) → 믈[상:59ㄴ], 혹(或) → 혹[상:65ㄴ], 머구 → 머구[상:66ㄱ]. ‘과이(暴)[상:60ㄴ], 로(自)[상:73ㄴ]’ 등의 경우는 ‘, 절’ 자가 좌우 거꾸로 새겨져 있다.

각자병서 글자를 쓰고 있지 않음은《원각경(언해)》이후 모든 세조대 문헌이 그러함과 같다. 다만 이 문헌에서는 예외로 ‘쐬먼(熏)’(상:52ㄱ)과 ‘믈까(嚙)’(상:79ㄴ)에서처럼 ‘ㅆ’과 ‘ㄲ’이 각각 1회씩 나타난다. 이것 이외에는 초기 훈민정음 문헌의 ‘-’ 음절의 ‘’을 비롯한 모든 각자병서 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초기 훈민정음 문헌에서는 종성 위치에서 ‘ㄷ’과 ‘ㅅ’이 대체로 혼란되지 않고 표기되었다. 이러한 표기 사실과 함께《훈민 정음(해례)》의 8종성법 규정으로 인해 15세기에는 음절말 위치에서 ‘ㄷ’과 ‘ㅅ’이 중화(中和)되지 않았다는 생각들이 과거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헌을 철저히 보지 않은 데서 잘못 내려진 결과이다. 예컨대 15세기 문헌에는 ‘’과 ‘젼’(恣), ‘졷’와 ‘좃’(從), ‘맏’와 ‘맛란, 맞더니’(迎), ‘ 낟’과 ‘ 낫’(箇), ‘빗오니’와 ‘빋니’(散) 등과 같은 혼기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혼기들은, 종성 표기에서 혓소리 계열의 자음(ㄷ, ㅌ, ㄸ)은 ‘ㄷ’ 대표 글자로, 잇소리 계열의 자음(ㅅ, ㅆ, ㅈ, ㅊ, ㅉ, )은 ‘ㅅ’ 대표 글자로 적어도 좋다는 표기 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위치에서 ‘ㄷ’과 ‘ㅅ’이 변별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주006)

<풀이>자세한 것은 김동소(2002: 98-101, 2003: 177-9) 참조.
초기 문헌에서 이렇게 대체로 잘 지켜지던 종성의 ‘ㄷ’과 ‘ㅅ’ 표기는 16세기에 들어서면 아주 혼란스러워지고, 16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초기 문헌의 규범적인 표기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자의 자의적인 선택인 것처럼 한 문장 안에서의 동일한 낱말의 종성이 ‘ㄷ’ 또는 ‘ㅅ’으로 표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구급방(언해)》에서는 초기 문헌의 규범에 따라 종성의 ‘ㄷ’과 ‘ㅅ’이 잘 구분되어 표기되고 있지만, ‘믿(底)’을 ‘밋’[상: 40ㄱ]으로 표기한 예가 하나 있다.

언해문에서 가끔 비문법적 문장이 보인다. 한문을 번역하면서 주의를 덜 기울인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눈에 띈다.

 雄黃 오 甘감草 各각  兩과 白礬뻔 라 두 兩과 라 細솅末야 藥약  兩 더운 믈 닷 되예 글혀 브  시수 良久커든 다시 데여 시스라 (又方 雄黃<원주>硏甘草<원주>各一兩礬石<원주>硏二兩右擣硏爲末每用藥一兩熱湯五升通手洗腫處良久再煖洗) [상:58ㄴ]


이 언해문을 직역하면 “또 웅황을 갈고 감초 각 한 냥과, 백반 갈아 두 냥과, 갈아 세말(細末)하여, 약 한 냥을 더운 물 닷 되에 끓여 부은 데 씻되, 양구(良久)커든 다시 데워 씻으라.”처럼 되어 의미 파악이 힘들어진다. 이 문장은 “또 간 웅황과 감초 각 한 냥과, 백반 간 것 두 냥과를 함께 갈아 가늘게 가루 내어 만든 약 한 냥에, 더운 물 닷 되를 넣어 끓여, 부은 상처를 씻되, 오래 되거든 다시 데워 씻으라.”의 의미이다.

이 문헌에서 빈번히 나오는 구문 중에 ‘~면 됴니라’와 ‘~면 됻니라’가 있는데, 이 둘의 구문상의 차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됴니라, 됴니, 됴며, 됴나, 됴리라, 됴리니’ 등 ‘됴-’는 모두 118회, ‘됻니라, 됻니’는 모두 80회 나타난다.

이 문헌의 상권과 하권을 비교해 보면 낱말 선택이나 표현법에서 현저히 이질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구체적인 몇몇 예를 들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주007)

<풀이>원순옥(1996: 70)에서 인용.

상권하권
고툐(治)
고튜(治)
61회
0회
85회
90회
둪-(蓋,覆)
덮-(蓋,覆)
13회
0회
1회
6회
디허(擣)
허(擣)
33회
0회
49회
5회
복화(桃花)
복화(桃花)
3회
1회
0회
6회
쇠-(燻)
쐬-(燻)
0회
1회
8회
0회
아니한덛[-에, -을, --](湏臾)
아니한[-예, -](湏臾)
1회
10회
8회
2회
藥
藥을
7회
4회
11회
0회
兩
兩을
25회
9회
32회
0회
(漢字語)-
(漢字語)-은
6회
28회
21회
4회

정리해 보면 이 문헌 상권과 하권의 언어 현상은 다음과 같이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상권에는 ‘고튜, 덮-, 허, 쇠-’라는 어형이 전혀 안 나오고, 하권에서는 ‘복화, 쐬-’라는 어형이 전혀 안 나온다. 둘째, 상권에는 ‘복화, 아니한덛’이라는 어형이 거의 안 나오고, 하권에는 ‘둪-, 아니한’라는 어형이 거의 안 나온다. 셋째, 상권에는 ‘藥, 兩’이라는 한자어 뒤에서 목적격 조사 ‘-, -을’이 모두 사용되나, 하권에는 ‘-을’은 쓰이지 않고 ‘-’만 사용된다. 넷째, 양성 모음으로 끝나는 한자어 뒤의 주제격 조사 ‘-, -은’의 경우, 상권은 주로 ‘-은’이, 하권은 주로 ‘-’이 선택된다. 셋째, 넷째 경우만 두고 말한다면 상권보다 하권이 모음 조화 표기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첫째의 ‘고툐, 고튜’의 경우는 오히려 하권이 이 규칙을 덜 따르는 것 같다. 결국 이 문헌의 상권과 하권 언해자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복화, 쇠-, 쐬-, 아니한덛-’ 등은 이 문헌에만 나타나는 어형이고, ‘덮-, 복화’는 이 문헌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낱말로 기록될 말들이다.

《구급방(언해)》의 가장 두드러진 국어학적 특징은 그 어휘에 있다. 이 문헌에만 나오는 어휘, 이 문헌에서 최초로 나오며 드물게 쓰이는 어휘 등 희귀어 목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008)

<풀이>주로 원순옥(1996)을 참고한 것임.

검프르러, 검프르고(暗靑, 靑黑):검푸르러, 검푸르고. 3회 출현. “피 얼의여 大便이 通티 아니야 장 브 검프르러 알파 어즐코 답답며(瘀血大便不通洪腫暗靑疼痛昏悶)”[하:32ㄴ], “과 입과 검프르고 발와 손괘 왜트러 차 주거 가거든(面口靑黑四肢逆冷命在須臾)”[하:49ㄴ]. “ 비치 검프르고  안히 브르고 氣分이 긋추려 닐 고튜(面色靑黑腹內脹滿氣息欲絶)[하:96ㄱ].

거흘에(?):거칠게(?). 유일례. “枳殼 기우레 봇기 져기 누르게 코 솝 아니와 木香과 各 세 分을 디허 거흘에 처 散을 지(枳殼麩炒微黃去穰木香各三分右擣麤羅爲散)”[하: 41ㄱ].

격발며(激):격렬히 움직여 일어나며. 1회 출현. “氣中 證은 해 豪貴 사미 이 因야 격발며 것기여 忿怒야 氣分이 盛호 펴 몯야(氣中證候者多生於驕貴之人因事挫忿怒盛氣不得宣泄)”[상: 12ㄱ].

곰(鬱):곰팡이 뜬. 유일례. “ 곰 고기와 저즌 脯肉괏 毒 고튜(又方治鬱肉濕脯毒)”[하: 61ㄴ].

곳골회(釵環):비녀와 가락지(?). 유일례. “ 金銀 곳골회 그르 닐 고툐 水銀 半 兩을 머그라(又方治誤呑金銀釵環以水銀半兩服之)”[상: 53ㄴ].

글희혀(幹開):끌어 당겨, 풀어 당겨. 유일례. “水銀 탄 킈만야 이블 글희혀 븟고(水銀如彈子大幹開口灌之)”[하:82ㄴ].

금굼히(滛滛):이따금. 유일례. “ 얌 손 사 헌 마 됴코 나 毒氣  예 이셔 금굼히 알고 랍거든 고툐(又方治蛇螫人瘡已愈餘毒在肉中滛滛痛痒)”[하:80ㄱ].

긔-(輾, 轢):치이-. 2회 출현(유일례). “ 노 서 디니와 타 디니와 술위예 긔니와 一切ㅅ 傷며 것근  고티며(又方治從高墮下落馬車一切傷折)”[하:27ㄱ], “ 지즐이며 와 술위예 긔며 게 이며 게 여(又方療被壓迮舟舡車力的切車所踐也馬踏牛觸)”[하:29ㄱ].

기름긴(脂):기름 낀. 유일례. “ 飮食과 진 기름긴 거슬 머겨 목로 그치고(令乾食與肥之物以止其渴)”[상:80ㄱ].

금(橫文):가로된 금. 1회 출현. “惡風이 안히 답답야 죽닐 고툐 리 밠 엄지가락 아랫 그믈  나 마초면 즉재 됻니라(治惡風心悶欲死急灸足大趾下橫文隨年壯立愈)”[상: 2ㄴ].

노압, 노올압(煻灰):재불[熱灰], 뜨거운 재. 각 1회 출현. “炮 믈 저즌 죠예  노압예 무더 구을시라.”[상:14ㄱ], “  욘 파 노올압 브레 녀허 구어(又方取葱新摘者入煻灰火內煨之)”[하:35ㄴ].

눅눅면(惡):느글느글하면, 메스꺼우면. 1회 출현. “다가 精神이 어즐코 안 눅눅면 곧 이 中毒이니(如稍覺精神恍惚心卽是誤中諸毒)”[하: 47ㄱ].

벼록(眼前生花):눈에서 일어나는 불꽃, 현기증. 유일례. “피 氣分 조차 올아  어즐케  벼로기 나니  甚닌 닶가와 사 모고 이비 좃고 精神이 아고 氣分이 니(血隨氣上迷亂心神故眼前生花極甚者令人悶絶不知人口噤神昏氣冷)”[하:94ㄱ].

니르리(永):오래, 길이. 유일례. “열 네 붓글 면 즉재 됴하 니르리 發티 아니니라(灸十四炷卽愈不發).”[하:73ㄴ].

다아닫고(合住):꽉 닫고. 유일례. “ 黃連과 黃栢과 輕粉 티 호고 朴硝 져기 조쳐 細末야 麻油에 녀허 合 다아닫고 밥 우희  라 라(又方 黃連 黃栢 輕粉各等分朴硝少許右爲細末入麻油用合子合住上飯蒸調塗)”[하:13ㄴ].

다운(暖):따뜻한. 유일례. “므레 딘 사 다운 예 무두(埋溺人灰中)”[상: 72ㄱ].

단기고(定):당기고(?). 유일례. “몬져  고텨  단기고 술 머겨 醉케 라(先整骨了夾飮之令醉)”[상: 88ㄱ].

쉿믈(白湯):흰쌀을 끓여 만든 맨국. 1회 출현. “ 그르 골희 닐 고툐 거유 랫 짓 두흘 라 細末야 쉿므레 프러 머구미 됴니라(又方治誤呑鐶燒鵝翎數根末白湯調服妙)”[상: 53ㄴ].

더우며닐, 더위몌여(熱暍):더위 먹은 이, 더위 먹어. 각 1회 출현. “더우며닐 고툐 길헷 더운 로 가매 고 져기 식거든 오 氣分이 通커든 말라(治熱暍取道上熱塵土以壅心上少冷則易氣通止)”[상:9ㄴ], “ 더위몌여 죽거든 길헷 더운 과 굴근 마와 等分야 로니 라 므레 프러 즛의 앗고 머기면 즉재 사니라(又方中熱暍死用路上熱土大蒜等分爛硏水調去粗飮之卽活)”[상: 11ㄱ].

뎨며(削):저며. 유일례. “ 湯火傷 고튜  뎨며 브티면 므르디 아니며 알디 아니며 수 됻니라.(又方治湯火傷用梨貼不爛止痛而瘥)”[하: 15ㄱ].

도렫고(圓):둥글고. 1회 출현. “도렫고  天南星을 저즌 죠예  구으니와(白天南星濕紙裏煨)”[상: 1ㄴ].

두것:2개, 두 가지 것. 유일례. “미친 가 毒 고툐 머리터럭과 고솜도 가 게 호아 두것 론  므레 프러  잔 머규 이비 마구므니란 니 것고 藥 녀흐라(治猘犬毒 頭髮猬皮各等分右燒灰水和飮一杯口噤者折齒內藥)”[하: 66ㄱ].

두위드듸여(蹉跌):(발을) 뒤집어 디디어. 유일례. “ 밧목 것그며 四肢  아디며 히미 傷며 두위드듸여 알프거든(又...踠折四肢骨碎及筋傷蹉跌疼痛)”[하:27ㄴ].

디저겨(刺):찔러(?). 유일례. “ 胃脘애 痰이 담겨 胃脘 가미라 冷 氣分이 디저겨 알닐 고티니(兼治胃脘停痰冷氣痛)”[상: 6ㄱ].

며(堅):딱딱하며. 유일례. “가 고기 먹고 삭디 아니야  가온 며(食狗肉不消心中)”[하: 61ㄱ].

멈게(去):없게(?). 유일례. “도 기르믈 아 힘과 과 멈게 고 므레 녀허 달효(取猪脂筋膜於水中煮)”[하: 38ㄴ].

물니(鬱):물뜨니(열과 습기로 말미암아 떠서 상하니). 유일례. “고기  器具ㅅ 안해 자자 이셔 밤 디난 거슨 물니(肉閉在密器中經宿者鬱)”[하:61ㄴ].

거든(淸):맑게 가라앉거든. 유일례. “엄지가락톱 져기 가 더운 므레  녀허 거든(大母指爪甲刮少許同泡湯候)”[하:41ㄴ].

목브(馬喉閉):말목부음(병명, 馬喉痺). 유일례. “모기 막고  브 매 닛고 氣分을 吐호미 면 일후미 목브미니(喉閉深腫連頰吐氣數名馬喉閉)”[상: 43ㄴ].

챗변쵸(馬鞭梢), 채변쵸(馬鞭鞘):말초리풀(약초 이름). 각 1회씩 출현. “ 너흘며 와 허러 브 덥다라 알닐 고튜 챗변쵸 두 寸ㅅ 기릐와 쥐 두닐굽 나  라 細末야 도 기르메 라 면 즉재 됻니라(治馬囓人及踰作瘡毒腫熱痛 馬鞭梢二寸長鼠屎二七枚右二味合燒爲末以猪脂和塗之立愈)”[하:15ㄴ], “리 사 므러 헌  고튜 채변쵸 五寸 론 와 도 기름 두 兩과 수쥐  두닐굽 낫과 白殭蚕 半兩과 세 가짓 거슬 디허 처 散 오 도 기르로 라 믄 해 로(治馬咬人損馬鞭鞘五寸燒灰猪脂二兩雄鼠糞二七枚白殭蠶半兩右件三味擣羅爲散以猪脂調塗咬處)”[하:16ㄱ].

밥(飯時):밥 먹을 만한 시간, 식경(食頃). 유일례. “이티  밥만 면 곧 氣分을 어더 숨쉬니라(如此一飯時卽得氣呼吸矣)”[상: 77ㄴ].

밧목(踠):발목. 2회 출현(유일례). “밧목 것그며 모미 다 알프거든(折徧身疼痛)”[하:26ㄱ], “밧목 것그며 四肢  아디며(折四肢骨碎)”[하:27ㄴ].

복화(桃):복숭아. 3회 출현(상권 21ㄴ, 22ㄱ, 28ㄱ). ‘복화’라는 표기도 이 문헌에 7회(상: 16ㄱ, 하: 44ㄱ, 44ㄴ, 67ㄴ, 69ㄱ, 73ㄴ, 73ㄴ) 나오지만, ‘복화’는 다른 문헌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본(本):본래. 1회 출현. “블 현  이셔 오누르이닌 본   이실 블 혀미 므던니라(人有於燈光前魘者在明處是以不忌火也)”[상: 22ㄴ].

뵈디(下):(대소변을) 보게 되지. 1회 출현. “大小便이 다 구더 뵈디 아니커든 火麻 로 氣分 잇게 야 沒藥ㅅ 와 차 져고매 조쳐  수레 프러 머그면 그 毒氣 혀 즉재 리니라(大小便俱澁不却用火麻燒灰存性同沒藥末茶少許用溫酒調服引導其毒卽下)”[하: 71ㄴ].

빗가치(顔色):(좋은) 빛깔 있는 피부(?). 유일례. “血氣 우흐로 소아 어믜  빗가치 업서 氣分 긋고져 릴(血氣上搶母面無顔色氣欲絶者)”[하: 87ㄱ].

라기(屑):부스러기. 유일례. “ 五靈脂 몰애와 돌콰 쇳 라기  거슬 야 리고(又方用五靈脂揀去沙石及鐵之類)”[하: 89ㄱ].

레(苞):꾸러미. 유일례. “파 서 斤과 소곰  斤을 섯거 므르디허 보 덥게 야 기브로 료 두 레에 화 서르 臍下 熨면 小便이 즉재 나니라.(葱白三斤塩一斤右相和爛硏炒令熱以帛子裏分作二更互熨臍下小便立出)”[상: 68ㄱ].

삿기밠가락(小趾):새끼발가락. 유일례. “올 허튓 삿기밠가락 로 그틀 세 붓글 리니(灸右脚小趾尖頭三壯)”[하:87ㄴ].

섯알고(攪痛):번갈아 아프고. 유일례. “과 왜 섯알고 머리 어즐야(心腹攪痛頭旋)”[하: 49ㄴ].

솝드리(透骨):속속 들이. 유일례. “  호 봇고 솝드리 누러 검거든(糯米一合右炒令透骨焦黑)”[하: 11ㄴ].

러워(澁):껄끄러워. 유일례. “누네 가 드러 러워 알하(眯目痛)”[하: 37ㄱ].

리(酸漿):꽈리. 1회 출현. “小便에 下血이 긋디 아니커든 酸漿草 드려 自然汁을  머그라. 酸漿은 리라.(小便下血不止酸漿草絞取自然汁服之)”[상:63ㄱ].

:까끄러운. 유일례. “穀賊은 穀食에 몯내  이사기 굳고  거시니 몰라 리라 머그면 목 안히 브 通티 아니니 일후믈 목 안해 穀賊 나다 니라”[상: 46ㄱ].

블(慢火):여린 불. 유일례. “솓 안해 밀 녀허 브레 달효(於鐺內入蠟慢火熬)”[하: 10ㄱ].

옷(汗衣):땀이 밴 옷. 2회 출현. “ 오시나 시혹 觸衣어나(오 모매 오래 니버 오래  니 됴코 觸衣 오래 니븐 솝오시라)…. 라(故汗衣或觸衣汗衣者着在身上多時久遭汗者佳觸衣者久着內衣襯衣也…燒灰)”[상: 16ㄱ].

혀면(拔):뽑으면. 유일례. “삸 미티 에 드러…라와 디 몯리어든 즉재 살미틀 이어 혀면 믄득 나니(箭鏃入骨…痒不可忍卽撼箭鏃之立出)”[하: 3ㄱ].

아니고오(惡):아니꼬움을. 1회 출현. “ 藥毒이 發커든 플와 돌와 몰라셔 아니고오 아닐 고튜(又方解一切藥發不問草石始覺)”[하: 53ㄱ].

아즐며(昏):어질어질하며. 1회 출현. “ 마자 아즐며 氣厥야 림 몯고 痰이 마켜 소리 몯 닐 고티니(治風氣厥不省痰塞失音)”[상: 2ㄴ].

어돝(母猪):어미 돼지. 1회 출현. “ 야미 사 입과 닐굽 굼긔 들어든 고튜 어도 릿 그틀 버혀 츳듣 피 이베 녀면 즉재 나니라(又方治蛇入人口幷七孔中割母猪尾頭瀝血着口中卽出)”[하:79ㄱ].

어우(雙仁):쌍으로 들어 있는 열매 씨. 1회 출현. “桃仁 셜흔 나 것과 부리와 어우 앗고 라(桃仁三十枚去皮尖雙仁硏)”[상:70ㄱ]. ‘어우러’라는 어형은 이 문헌에 5회 나오고, 표기가 약간 다르기는 하나 《구급 간이방 언해》(어우이, 어우)와 18세기의 《동문 유해》(어우렁이) 등에 나온다.

왜지그라(角弓反張):한쪽으로 찌그러져. 유일례. “마자 왜지그라 네 활개 거두디 몯야 어즈러워 죽닐(中風角弓反張四肢不收煩亂欲死者)”[상: 5ㄱ].

왜틀-(痙角弓反張, 逆):외틀어지다. 2회 출현(유일례). “ 金瘡 마자 왜트닐 고툐(又方治金瘡中風痙角弓反張)”[상: 88ㄱ], “발와 손괘 왜트러 차 주거 가거든(四肢冷命在須臾)”[하: 49ㄴ].

움주쥐여(縮):움츠러져. 유일례. “그 膓이 예 뷔트러 움주쥐여 잇니(其腸絞在腹)”[상: 32ㄴ].

이사(三二日), 잇사래(三兩日), 잇사나(數日):2,3일, 2,3,4일. 1회씩만 출현. “大便이 이사 通티 아니 後에(大便三二日不通然後)”[하: 23ㄱ], “믄득 오누르여 림 몯거든 皂莢   대로 두 곳 굼긔 불면 즉재 니니 잇사래도 어루 불리라(治卒魘昏昧不覺方右以皂莢末用細竹管吹兩鼻中卽起三兩日猶可吹之)”[상: 23ㄱ], “ 프른 뵈 라  라 瘡의 고 리면 잇사나 後에 됻니라(又方燒靑布作灰傅瘡上裹傅之數日後差矣)”[상: 83ㄴ].

자해(窠, 臼, 元端):(정해진) 자리(에) (?). 3회 출현. “傷하야  제 자해 가디 아니닐 고툐(治損傷骨節不歸者)”[하: 31ㄴ], “ 아디며  것그며 자해 나니란(諸骨碎骨折出者)”[하: 32ㄱ], “ 내와니란 소로  고텨 제 자해 가 正커든(骨鋒者以手整頓骨節歸元端正)”[하: 32ㄱ].

자자(閉):가두어. 유일례. “고기  器具ㅅ 안해 자자 이셔 밤 디난 거슨 물니(肉在密器中經宿者)”[하: 61ㄴ].

졋가락(筯):젓가락. 유일례. “細末야 졋가락 그테 져기 무텨 목졋 우희 라(爲末以頭點小許在懸壅上)”[상:42ㄴ].

죠젼(紙錢):종이돈. 2회 출현(유일례). “酒壜  나로 죠젼  주믈 라 壜 안해 녀코 時急히 壜 이브로 므레 딘 사 치나 시혹 복 우희 두퍼 거든 다시 죠젼을 라 壜 안해 녀허  두퍼 므를 아면 즉재 사라. 壜은 술 녇 딜어시라.(以酒壜一介以紙錢一把燒放壜中急以壜口覆溺水人面上或臍上冷則再燒紙錢於壜內覆面上去水卽活)”[상:74ㄴ].

주므르며(揉):주무르며. 1회 출현. “모 허므를 주므르며 모 지고 고해 불며(其項痕撚正喉搐鼻及吹)”[상: 78ㄱ].

즈즐우러커든(濕):질척질척하거든. 유일례. “ 湯火애 데닐 고튜 大黃과 當歸 티 화 細末야  기르메 라 브튜 즈즐우러커든 닐 흐라(又方治湯火所傷用大黃當歸各等分爲末以淸油調傅之則乾摻)”[하: 14ㄴ].

지즐머그라(壓):눌러 먹으라, 약 기운이 내려가게 다른 음식을 먹으라. 유일례. “生薑 自然汁을 수레 프러 머고  세 번곰 머구 스므 나 면 나니 머근 後에 生薑 두세 片로 지즐머그라(生姜自然汁酒調下日三服二十日出服後以薑數片之)”[하:2ㄴ].

찻술(茶匙):찻숟가락. 유일례. “괴 머리  나 오로 론   라  적 머구매 세 찻술옴 야  수레 먹고(猫頭一枚全燒灰爲末每服三茶匙用溫酒下)”[하:64ㄴ].

툽투비(濃):툽툽하게. 1회 출현. “凍瘡을 고툐 가짓 불휘 툽투비 글혀 싯고 새 머릿 骨髓로 면 즉재 됻니라(治凍瘡 落蘇根卽茄子也煎湯洗了以雀兒腦髓塗之立効)”[상: 8ㄱ].

티쉬여(上喘):치받아 쉬어. 유일례. “産後에 아니환 피 매 다딜어 가미 차 수믈 티쉬여 목수미 아니한 예 잇거든(産後敗血衝心胸滿上喘命在湏臾)”[하: 89ㄴ].

헐헐-(吃吃, 喘):헐헐하다, 헐떡거리다. 2회 출현. “오래 사 업슨  房의 자다가 귓거시 누르며 툐 아라 오직 그 사미 헐헐 소릴 듣고 곧 사로 브르게 홀디니 블로 디 아니면 이 귓거시 눌로미니 아니한  救티 아니면 죽니(及久無人居冷房睡中覺鬼物魘打但聞其人吃吃作聲便令人呌喚如呌不醒此乃鬼魘也須臾不救則死)”[상: 21ㄴ], “그르 겨집괴 사괴면 그 證이  기슬기  알고 外腎이 움치들오 치 검고 氣分이 헐헐고  미 흐르니  이 脫陽ㅅ證이니(誤與婦人交其證小腹緊痛外腎搐縮面黑氣冷汗自出亦是脫陽證)”[상: 54ㄴ].

두-(絞):휘정거리다. 2회 출현. “地漿 해 져근 굳 고 믈 브 니기 두 므리라.”[상: 9ㄴ], “ 해  져고맛 구들 고 믈로 구데 기 븟고 니기 두 汁을 取야 마시라.(又方掘地上作一小坑以水滿坑中熟取汁飮之)”[상: 28ㄴ].

닐굽(一七):한 일곱. 1회 출현. “두 밠 엄지가락 안해 밠토브로  부닙 만  各各 닐굽 븟글 면 곧 사니라(兩脚大拇指內離甲一薤葉許各灸一七壯卽活)”[상:22ㄱ].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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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념요록』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권념요록(勸念要錄)』은 불교 설화 11편이 수록되어 있는 언해본(諺解本)이다. 정토(淨土) 신앙에 기반을 둔 중요하면서도 요약된 글이라는 뜻에서 요록(要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위해 마음에 새겨 두고 염불, 기도하기를 권장하는 내용의 설화(說話)들이 수록되어 있다. 왕생(往生) 영험담(靈驗譚)에 해당하는 불교 설화들이다. 불교 신앙을 배경으로 한 설화를 수록한 책이어서 그 동안 관련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1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이다.

현재 전하는 판본은 인조 15년(1637)에 구례의 화엄사(華嚴寺)에서 펴낸 책이다. 한문 원문에 단락을 지어 한글로 구결을 달아 구결문을 만들고, 이를 한글로 옮긴 언해본(諺解本)이다. 번역에 해당하는 언해문에는 한자 없이 한글만을 썼다. 또한 구결문의 한자에 독음(讀音)을 달지 않았다. 이는 독자층이 한자보다는 한글에 익숙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책의 맨 뒷장에 음각(陰刻)으로 새긴 간기(刊記)가 있어서 간행과 관련된 사실을 전해 준다.

화살표의 방향 (→) 오른쪽이 정정(訂正)한 내용이다. 누락된 형태에 대한 추가 삽입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 )에 넣어 따로 표시해 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책의 맨 뒷장 끝 부분에 있는 간기(刊記)를 통해 알 수 있다. ‘崇德二年 秋七月 初吉日 求禮地 華嚴寺 開刊’.

책의 구성은 서문 2장 본문 35장 등 모두 37장이다. 서문에 의하면 책을 편찬한 이는 조선 중종~명종 연간에 활동했던 승려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미상~1565)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주(譯註)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은 화엄사에서 찍어 펴낸 것으로서, 17세기(1637년)의 국어가 반영되어 있어서 보우가 지었다는 그 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우 저술의 책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傳)하지 않거나 아니면 처음에는 한문본으로 찬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책은 불교 설화적 요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국어가 반영되어 있어서 국어학, 국문학, 불교학 연구 자료로서 이용 가치가 크다. 다만, 이 역주를 진행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은 조선 후기 문헌에서 흔히 드러나는 모습인 표기상의 혼란이다. 같은 장(張)임에도 구개음화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표기도 있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연철, 중철, 혼철 등 형태소 경계의 통합 관계 표기에서도 복잡한 양상을 띤다. 역주에서는 화살표(→)를 써서 이를 바로잡았다. 주002)

책의 형태 서지와 간단한 어학적 특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Ⅱ. 형태 서지 및 수록 내용

앞에서 밝힌 대로 『권념요록』의 현전 이본(異本)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두 화엄사(華嚴寺) 보관의 판목(板木)에서 쇄출(刷出)된 이른바 후쇄본(後刷本)들이다. 책의 형태 서지 등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 역주(譯註)와 해제(解題)는 홍문각에서 영인·배포(1984)한 책을 대상으로 했다.

이 책은 서울대 일사문고 소장의 책으로 도서번호는 ‘일사 고 294.34 G995y’이다. 영인본의 앞에 있는 홍윤표(1984)의 해제에 의하면 일사 문고본에는 ‘서(序)’가 없어서 화엄사 보관의 판목에서 쇄출·보완했다고 한다. 모두 37장인데, 서문은 2장, 본문은 35장이다. 책의 크기 중 반엽(半葉)의 광곽(廣廓)은 가로 16.3㎝ × 세로 20.5㎝, 매면(每面)은 유계(有界) 9행, 매행(每行)은 16~19자로 일정하지 않다. 글자는 중간 크기의 글자를 1행에 한 줄씩 두었으나, 한글 구결과 협주문은 작은 글자 두 줄로 했다. 판심(版心)은 상하내향(上下內向) 삼엽화문어미(三葉花紋魚尾)이다. 판심 서명은 ‘권념록(勸念錄)’이고, 아래 쪽 어미(魚尾) 바로 위에 장차(張次)를 두었다. 서문 2장 중 뒷장은 훼손이 심하여 일부의 내용은 알기가 어렵다. 이에 대해 한태식(2009:99~135)에서는 서문의 내용 출전이 왕자성(王子成)의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임을 밝히고, 부분적으로 보완을 했다. 이 책은 중국에서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된 바 있다. 해독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역주 맨 앞에 이를 번역해서 실었다.

서문의 판심서명 등은 잘 보이지 않는다. 1장의 1행에 서명(書名)인 ‘勸念要錄’을 써 놓았고, 다음 행의 아래 쪽에 ‘懶庵 撰’이라고 찬자(撰者)인 보우(普雨)스님의 호(號)가 명기되어 있어서 그가 편찬한 책임을 알게 해 준다.

본문의 맨 앞 1장 1행에는 서문에서와 같이 권두서명인 ‘勸念要錄’이 한자로 쓰여 있고, 행을 바꾸어 11편의 왕생(往生) 영험담(靈驗譚)을 차례로 두었다. 책의 맨 뒷장에는 앞면의 6행부터 다시 후기(後記) 성격의 권문(勸文)을 두었다. 끝에는 권말서명 격인 ‘勸念要錄終’과 간기(刊記)로 마무리를 했다. 각 이야기의 앞쪽에 한글로 구결을 단 구결문을 두고, 단락이 끝나면 위로부터 한 글자 내려서 언해를 했다. 구결문의 한자에 한자 독음은 달지 않았다. 그런 점으로 인해 설화의 한자 제목을 한글로 옮길 때 일부 연구에서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언해문에 한자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풀이가 필요한 어휘에 대해서는 한 행에 두 줄씩 협주(夾註)를 둔 점이다. 협주는 상하에 흑어미 표시인 【 】를 두어 구분하였다.

11편의 왕생(往生) 영험담(靈驗譚)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편장(編張)되어 있다. 11편의 설화는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 「원공결사전(遠公結社傳)」, 「궐공측현보전(闕公則現報傳)」, 「오장왕견불전(烏長王見佛傳)」, 「정목경집번전(鄭牧卿執幡傳)」, 「방저권타왕생전(房翥勸他往生傳)」, 「수문황후전(隋文皇后傳)」, 「형왕부인입화전(荊王夫人立化傳)」, 「양씨자명전(梁氏自明傳)」, 「동녀권모전(童女勸母傳)」, 「도우선화십념전(屠牛善和十念傳)」 등이다.

(1)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 : 1장 앞면 2행 ~12장 앞면 9행

(2) 「원공결사전(遠公結社傳)」 : 13장 앞면 1행 ~15장 뒷면 9행

(3) 「궐공측현보전(闕公則現報傳)」 : 16장 앞면 1행 ~16장 뒷면 4행

(4) 「오장왕견불전(烏長王見佛傳)」 : 17장 앞면 1행 ~18장 앞면 8행

(5) 「정목경집번전(鄭牧卿執幡傳)」 : 18장 앞면 9행 ~20장 앞면 7행

(6) 「방저권타왕생전(房翥勸他往生傳)」 : 20장 앞면 8행 ~21장 뒷면 3행

(7) 「수문황후전(隋文皇后傳)」 : 21장 뒷면 4행 ~22장 뒷면 1행

(8) 「형왕부인입화전(荊王夫人立化傳)」 : 22장 뒷면 2행 ~26장 뒷면 5행

(9) 「양씨자명전(梁氏自明傳)」 : 26장 뒷면 6행 ~27장 뒷면 5행

(10) 「동녀권모전(童女勸母傳)」 : 27장 뒷면 6행 ~28장 뒷면 4행

(11) 「도우선화십념전(屠牛善和十念傳)」 28장 뒷면 5행 ~29장 뒷면 9행

관법(觀法) : 30장 앞면 1행 ~33장 뒷면 8행

인증(引證) : 33장 뒷면 9행 ~35장 뒷면 5행

후기(後記) : 35장 앞면 6행 ~35장 뒷면 4행

이상의 왕생 영험담 11편 중 (1)의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은 유일하게 우리나라가 배경이 되어 있는 설화이고, 그 외 10편의 설화는 모두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에 실려 있는 중국의 설화들이다. 주003) 한태식(2009:99-135) 참조. 그 논의에 의하면 중국에서 유래한 영험담은 모두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권4의 「왕생전록(往生傳錄)」에 소개되고 있는 34편의 왕생담에서 선별한 것이라고 한다.

또 위의 설화들 중 일부는 『염불보권문』 중 예천 용문사본(1704년 간행), 동화사본(1764년 간행), 흥률사본(1765년 간행), 묘향산 용문사본(1765년 간행), 해인사본(일사문고 소장, 1776년 간행), 해인사본(경북대 영인·반포, 1776년 간행), 선운사본(가람문고 소장, 1787년 간행) 등의 책에도 각각 다른 번역으로 실려 있다. 『권념요록』과 체제에서 달라진 것은 구결문 없이 한문 원문과 언해문만을 차례로 둔 점이다.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김영배 외, 1996)에는 이 설화들이 수록되어 있는 각 책들의 수록 부분을 비교하여 일람표로 제시하고 있어서 방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러한 내용은 홍윤표(1984)의 해제에서도 부분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특히 용문사본에는 위의 설화들 중 7편이 수록되어 있다. (1), (4), (5), (6), (7), (10), (11) 등이다. (1)과 (11)은 한문 원문 없이 한글만으로 되어 있다. 그 외 (4), (5), (6), (7), (10) 등은 경북대 영인·배포의 책 외에 모든 책에 들어 있다. 수록 순서도 『염불보권문』의 11번에서 16번 등에 배치하여 동일하다. 경북대 영인·배포의 해인사본 책에는 이 중 (4)와 (10)이 들어 있지 않다.

책의 내용 구성은 서문에 염불하여 극락왕생할 것을 권하는 내용을 두고, 본문에는 왕생 영험담 11편을 차례로 두었다. 책에 수록된 11개의 불교설화들은 모두 아미타불을 염하여 왕생극락하였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책 끝에는 ‘관법(觀法)’이 있는데, ‘관법’에서는 「십육관경수지법문략(十六觀經修持法門略)」과 「칭찬미타경소(稱讚彌陀經疏)」, 「칭찬소(稱讃䟽)」 등을 인용하여 염불수행법을 안내하였다. 맨 뒤의 인증(引證)에서는 『약사경(藥師經)』과 『다라니경(陁羅尼經)』 등을 들어서 불공을 닦은 사람이 누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Ⅲ. 어학적 특성

이 책은 17세기 문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기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ㄷ’ 구개음화가 반영된 표기이다. 그런데 같은 장에서도 ‘부텨’와 ‘부쳐’가 함께 쓰이는 등 혼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는 ‘ㄴ’의 표기를 많은 부분에서 ‘ㄹ’로 하고 있는 점이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 앞에서 연철, 분철, 중철 표기 등 일관되지 않은 표기 양상을 보여서 혼란하다. 앞 시대에 ‘ㅿ’이 쓰였던 어휘 중에는 ‘ㅅ’으로 바뀐 예가 상당하다. 관형격조사는 모두 ‘의’를 쓰고 있고, 처소 부사격을 써야 할 자리에 관형격을 쓴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아래 ‘ㆍ’가 비어두음절에서 ‘ㅡ’로 바뀐 예가 더러 있는 등 동요를 반영한 표기를 볼 수 있다. 명사형어미 ‘옴/움’은 일부에서는 그대로 쓰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소멸을 보이는 등 역시 변화의 과정에 있음을 나타낸다. 종성 표기에서는 ‘ㄷ’과 ‘ㅅ’이 함께 나타나지만 ‘ㅅ’을 써야 할 곳에 ‘ㄷ’을 쓴 예도 종종 볼 수 있다. 또 ‘ㅁ’을 써야 할 자리에 ‘ㅇ’을 쓰는 등 정밀하지 않은 표기도 상당히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중 모음을 써야 하는데 단모음을 쓰는 등 전체적으로 표기는 정밀하지 않다. 연결어미는 문장의 내용 중 설화자(說話者)에 의한 설명이 많은 편이어서 설명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적 연결어미의 쓰임이 빈번한 편이다. 종결어미는 ‘라’체의 평서형 종결어미 ‘-니라’의 쓰임이 많고, 중세국어 문헌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뇌다, -쇠다, -데다, -뢰다, -니다’ 등의 종결 형태를 볼 수 있다. 의문형 어미 중 ‘라’체의 판정의문형어미 ‘-냐’를 ‘-ㄴ야’로 표기한 경우도 보인다. 대화체에서는 상대에 대한 존대가 많아서 ‘쇼셔’체의 쓰임이 빈번한 편이다. 특히 2인칭 높임의 대명사 ‘그’는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 중 하나이다. 어휘 중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쓰임이 가장 빈번하다. 그 외에 명부(冥府), 귀사(鬼使) 등 일반적이지 않은 어휘들도 상당 수 보인다. 내용 전체가 정토(淨土)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Ⅳ. 맺음말

『권념요록』은 17세기 초기의 국어사 자료이면서 국문학 및 불교학 자료이기도 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영험담(靈驗譚) 등의 설화는 불교의 정토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역시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내용들이다. 그런 이유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18세기에 간행된 책인 『염불보권문』에 많은 내용이 다시 번역되어 실린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의 변천을 반영하는 표기 등으로 인해 내용의 정밀한 전달에 어려움이 따른 것도 있다.

국어사와 관련된 내용 등 미진한 부분은 차후에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영배(1996), 「염불보권문 해제」,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 동악어문학회, 93~117쪽.

안병희(1979),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고찰」, 『규장각』 3, 서울대 도서관, 143 ~144쪽. 『국어사 자료 연구』(1992)에 재수록, 문학과지성사, 497~556쪽.

한태식(2009), 「허응당 보우선사의 권념요록 연구」, 『한국불교학』 53, 한국불교학회, 99~135쪽.

홍윤표(1984), 「권념요록 해제」, 『칠대만법·영험약초·권념요록』(영인본), 홍문각, 4~5쪽.

〈영인본〉

홍문각(1984), 『칠대만법·영험약초·권념요록』(영인본), 93~168쪽.

금강경삼가해 해제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서명과 서지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의 해설서이다. 곧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금강경언해』에서 경 본문에 단 구결 부분과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에서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著語)·송(頌)과,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에 대한 편저자의 설의(說誼)를 언해하여 세조 비(世祖妃)인 자성대비(慈聖大妃)가 성종 13년(1482) 내수사(內需司)에서 5권 5책으로 간행한 활자본이다 주001)

<정의>『금강경』은 『반야심경』과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조계선종(曹溪禪宗)의 기본 경전이다.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서가에 가서 『금강경』에 관련된 서적을 찾는다면 20여 가지 이상을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는 그만큼 독자들이 이 경전을 많이 찾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대한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찬요(纂要), 육조 혜능(六祖惠能)의 구결, 양(梁)나라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의 송(頌), 송(宋)나라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著語)·송(頌), 예장 종경(豫章宗鏡)의 제강(提綱) 등 다섯 가지 주석을 합친 책이다.
.

‘이 문헌’(이하에서는 『금강경삼가해』를 ‘이 문헌’으로 나타내기로 함.)의 제1권이 낙장본이나마 1975년에 새로 세상에 알려져 주002)

<정의>『금강경삼가해』전질 5권 5책 중, 당시까지는 서울대 규장각의 가람문고본 권2~5만이 알려져서, 이를 저본으로 한글학회에서 권2,3(1960)과 권4,5(1961)를 각각 간행하였으나, 권1은 미전(未傳)이었다. 권1에 관한 언급으로는 고 이병기 선생의 조선일보(1939.2.14. 5면) 글에서 “三百本이나 되던 이 冊이 지금 와서는 달리 얻어 볼 수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 冊의 第一卷은 京都等地 어느 절집에 … 奉安이 되었다 한다.”(맞춤법 고침. 필자)고 한 것이 있는데 당시도 풍문만이고 공개는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 권1의 낙장본은 위에 언급한 대로이며, 같은 무렵 심재완 교수(1976)도 동국대본과 같은 판인 권1의 이본(낙장본)을 발굴 소개하였고, 10여 년 후 심재완(1981)의 『금강경삼가해』(전)이 간행되었다. 이는 기존의 가람본 권2~5와, 심재완교수 소장(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의 권1에 동국대본의 ‘함허 서’13장(4장 결락)을 보완하여 불완전하나마 전질이 영인된 것이다.
그 뒤 2002년 8월, 전남 장흥군 보림사 소장의 권1(완본)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제대로 전질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된 후에, 필자는 ‘이 문헌’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쓴 바 있었으나, 당시에는 『금강경오가해』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한일 불교 학술 세미나(금강경 연구)’가 있은 후에 그때의 발표 논문이 불교학보(佛敎學報) 12호(1976)에 실려, 주003)
3) 발표문 중 이 글과 관련된 논문은 주로 다음의 세 편이다.
이종익(李鍾益) : 한국불교 조계종과 금강경오가해.
고익진(高翊晋) : 함허(涵虛)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하여.
이지관(李智冠) : 금강경 주해 및 사기에 대한 고찰.
, 이후 학계에서도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국어국문학계에서는 심재완(1981)에 의한 『금강경삼가해』 전(全)의 해제에서 자세한 소개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금강경오가해』만을 언급했을 뿐,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김주필(1993)의 「금강경삼가해」에서야 비로소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인용하여 국어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서지적 성격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는데, 필자(1998, 2000)의 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불교 서적류에서 『금강경오가해』와 『금강경오가해설의』가 구별되지 않고 쓰이는데, 주004)

다음에 소개하는 책들은 내용이 ‘금강경오가해설의’의 번역이면서도 서명은 그대로 『금강경오가해』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대 번역본으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한정섭(1980) 금강경오가해(총 572면), 법륜사.
김운학(1980) 신역 금강경오가해(총 431면(258+173)), 현암사.
전야옹(1996) 금강경오가해역강(총 835면), 승룡사.
청봉(2005)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총 753면), 경서원.
김재영(2005) 금강경오가해(총 733면), (출)하늘아래.
이 밖에 우백암(禹栢巖) 편역(1994) 『금강경삼가해』(총 556면, 한국불교출판부)가 있으나, 서명은 글에서 다루는 1482년(성종 13)판 『금강경삼가해』와 같아도 내용은 꼭 같지 않고, ‘삼가’에 대한 견해도 다르며, ‘설의’ 부분이 다 실려 있으면서도 그 필자인 함허당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문본으로는 인조 10년(1482)에 용복사(龍腹寺)에서 간행한 『금강경오가해』(내용은 ‘금강경오가해설의’)를 동국대학교에서 1958년 8월 축소 영인(총 494면)한 바 있고, 이를 저본으로 다시 1972년 보련각에서 재영인한 판본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동은 아마도 『금강경오가해설의』에 『금강경오가해』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에 함허당의 설의(說誼)까지 베풀어져 있어서, 이를 보면 구태여 『금강경오가해』를 보지 않아도 되게끔 된 데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은 ‘이 문헌’의 서명(書名)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학계에서 통용되는 『금강경언해』는 그 수제(首題)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고 판심제(版心題)가 ‘금강경(金剛經)’이어서 한문본과 구별이 되지 않아 ‘언해’를 추가해서 쓰고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 문헌도 수제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어서 수제만으로는 『금강경언해』인지 『금강경삼가해』인지를 알 수 없다. 다행히 판심제가 ‘금강경삼가해’여서 국어학계에서는 이 판심제를 서명으로 삼고 있다.

‘이 문헌’의 간행 배경은 권5에 실린 한계희(韓繼禧)와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세종은 ‘금강경오가해’ 주005)

필자는 이 책이 『금강경오가해설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의 야보(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득통(得通)의 설의(說誼)와 남명천(南明泉)의 계송(繼頌)을 번역해서 『석보상절』 끝에 편입시키려고 세자[후의 문종]와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였다. 삼가해(三家解)의 초고는 이미 이루어졌으나 교정을 보지 못했고, 남명천 계송은 30여 수밖에 번역하지 못하고 나머지를 수양대군에게 완역(完譯)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것이 되기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세종 32년, 1450) 문종도 재위 3년(1452)에 돌아갔다. 이에 세조가 그 뜻을 이어 먼저 석보(『월인석보』라고 봄)를 간행하고, 능엄경, 법화경, 육조해, 금강경, 원각경, 심경, 영가집 등의 언해를 간행했으나, ‘남명천계송언해’의 상재를 보지 못하고 세조도 돌아갔다(세조 14년, 1468). 이에 세조 비 자성대비가 역대의 홍원(弘願)을 추념(追念)해서 그 유업을 이루려고 학조(學祖)에게 명하여 ‘금강삼해역’(‘금강경삼가해’)의 초고(草稿)를 다시 교정하게 하고, ‘남명천계송’을 번역시켜 전자를 300본(本), 후자를 500본(本) 간행하였다(성종13년, 1482). ‘이 문헌’은 중간본이 간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서지 사항과 소장처 및 영인 관계를 차례로 보인다.


(1) 『금강경삼가해』의 서지 사항

분량 : 5권 5책

1권 57장 추정(함서 17장, 종서 5장, 본문 35장) 주006)

심재완(1981:9)은 ‘함허 서’가 13장으로 중단된 채 낙장되었으므로(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금강경오가해』에서 이 부분의 나머지 한문의 원문(原文)을 찾아 이것의 언해된 분량을 대략 5장 정도로 추정하여 권1의 장수(張數)를 58장으로 보았었으나, 보림사의 권1 완본은 ‘함허 서’의 낙장된 부분이 5장이 아니라 4장으로 끝남에 따라서 권1의 장수는 총 57장으로 확정되었다. 이 ‘함허 서’의 끝장인 17장 9행에는 ‘永樂乙未(1415)六月 日涵虛堂衲守伊盥手焚香謹序’라고 서문의 일자가 있는데, 이는 한문본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문화재청의 ‘국가기록유산’ 참조.)

2권 73장

3권 64장

4권 64장

5권 60장(본문 57장, 발 3장)

계 318장

표제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수제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판심제 : 서문 금강경삼가해함서(金剛經三家解涵序)

서문 금강경삼가해종서(金剛經三家解宗序)

본문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판본 : 경 본문 한자 큰 글자[大字]는 정축자(丁丑字)

그 밖의 ‘오가해’에서 인용한 한자 중 글자[中字]는 을해자(乙亥字)

언해에 사용된 한글은 모두 작은 글자[小字]로 을해자(乙亥字)

책크기 : 38.5㎝ × 25㎝ (보림사본 39,2×25,6cm)

판식 : 4주(周) 단변(單邊)

반광(半匡) 27㎝ × 19.8㎝ (보림사본 27,2×20,1cm)

유계(有界), 큰 글자(경 본문만일 때) 9행 14자

큰 글자(경 본문이 2행 이상일 때) 10행 21자

중 글자 11행 20자

작은 글자 두 줄[雙行] 21자

판심 : 상하 백구(白口), 어미(魚尾)는 상하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상하의 어미 사이에, ‘금강경삼가해’의 서명, 한수자(漢數字)의 권차(卷次) 표시, 그 아래에 한수자로 장차(張次)가 표시되어 있음.

권말제 : 金剛般若波羅蜜經

발문 : 성화(成化) 十八年(1482) 七月 日 ·························한계희(韓繼禧)

시대세임인(時大歲壬寅)(1482) 맹추중완(孟秋仲浣)·········강희맹(姜希孟)


이 문헌의 편찬 양식은 다음과 같다.

책 첫머리에 있는 함허당의 ‘서(序)’는 행의 처음에서 한 글자 내려서 쓰고 이 구절 끝에는 ○표를 하고 두 줄로 언해했으며, 이것이 끝나면 행을 바꾸어 자신의 ‘서’에 대한 ‘설의’를 두 글자 내려서 구결을 단 한문과 이의 언해를 작은 글자 두 줄로 계속해 나갔다. 권1, 16장 후면부터 시작되는 금강경의 본문은 행(行)의 첫 글자 자리부터 한자(漢字) 대자(大字)로 쓰고, 야보(冶父)의 착어(著語)·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은 행의 처음에서 한 글자 내려서 중자(中字)로 썼으며, 이에 대한 함허당의 설의는 두 글자 내려 한문에 구결을 달고, 언해문은 ○표를 하고 두 줄[雙行]로 소자(小字)를 썼으며, 여기 한자에는 동국정음식 한자음을 달았다.

(2) 현전하는 원간본과 그 소장처

권1 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 772호), 보림사(보물 772-3호), 동국대 도서관.

권2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보물 772-2호), 계명대(보물 772-4호).

권3, 성암문고.

권4, 성암문고.

권5, 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 772호). 동국대 도서관.

(3) 영인 현황

한글학회(1960) 금강경삼가해 제2, 제3. 축소 영인 합본(총 146면)(저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람본).

한글학회(1961) 금강경삼가해 제4, 제5. 축소 영인 합본(총 272면)(저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가람본).

한국불교학2(1976) 금강경삼가해 동국대도서관 소장 권1(잔권만) 영인(해제 고익진).

영남대출판부(1981) 금강경삼가해(전) (동국대 도서관본 권1의 ‘함허 서’와 권1(심재완 교수 소장본,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 합본,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 권2~권5(해제 심재완).

한글학회(1982) 금강경삼가해 제1(총 105면) (저본 - 영남대출판부(1981) 금강경삼가해(전)에서 권1만을 재영인).

한글학회(1994) 금강경삼가해 권1~권5 합본(한글학회 1982, 1960, 1961 합본, 총 625면).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3) 금강경삼가해 권1(잔권)과 권5(구 심재완교수 소장본), 불설아미타경언해와 합본 영인.

2. 어학적인 고찰

필자는 30여 년 전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문헌의 권1 잔권(殘卷)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이 수장하게 되어 이를 소개하는 짧은 글(1975)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 문헌의 간행 경위와 낙장본의 현황과 새로 나타난 희귀어 10여 개를 고찰한 것이었다.

당시 참고할 수 있었던 고어사전은 고 유창돈 교수의 『이조어사전』(1964)과 고 남광우 교수의 『고어사전』(1971, 보정판, 일조각)이었는데, 이 두 사전에는 이미 알려졌던 이 문헌의 권2~5의 자료가 수록되었을 뿐, 권1의 자료는 소개될 수가 없었다. 『우리말 큰사전』 4(옛말과 이두)(어문각, 1992)이나 『교학 고어사전』(교학사, 1997)은 ‘이 문헌’의 권1의 영인이 1981년에 나온 뒤였으나, 새로운 자료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필자의 부족했던 구고(舊稿)를 검토 보충하여 고어사전에 수록할 자료로 거듭 제시하고자 한다.

그 동안 ‘이 문헌’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로서 필자가 아는 것은 정우영(1990)과 김주필(1993), 이경화(2005)의 세 편뿐이다.

정우영(1990)에서는 ‘이 문헌’과 『남명집언해』에 대한 표기법을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이 문헌’에 관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표기상의 특징으로, 첫째, ㆆ과 각자병서를 일체 찾아 볼 수 없고, 둘째, 전대(前代)의 문헌에 비해 분철 표기가 점증하는바, 체언 말음이 ‘ㆁ, ㄴ, ㄹ, ㅁ’ 등 불청불탁음일 경우 비교적 많은 분철 표기가 보이고, ‘ㄱ, ㅅ, ㄷ, ’일 때 소수이기는 하나 분철 표기가 발견된다. 이 분철표기의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하였으니, 하나는 첨가어인 우리말의 체언이 곡용할 때 체언과 조사의 분리성이 표기자들에게 쉽게 인식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국문 한자 병용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비록 기억의 부담은 늘더라도 표의성을 띤 한자와 같은 어휘형태소의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려는 표기자의 의식이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분철표기의 횟수를 통계표로 보였다.

표기를 통해서 드러난 음운현상의 하나로, 피동화음이 후행 i(또는 j)의 영향으로 하강이중모음으로 실현된 보기(고기~괴기〈2:36ㄱ〉, 버히-[割]~베혀도〈2:7ㄴ〉, 張개여 李개여〈2:33ㄱ〉) 등이 있는데, 이를 움라우트 현상의 제1단계(15C~18C 말엽)로 보고, 제2단계(18C~19C 초엽)는 피동화음이 전설단모음으로 되는 시기로 나누어 볼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언해문의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채택했음에도 개중에는 당시의 현실 한자음으로 보이는 것이 총 56자가 있다 하여 그 보기를 들어 놓았다.

김주필(1993)에서는 ‘이 문헌’의 표기, 음운과 형태, 통사와 어휘 등의 부문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고찰하였다. 표기는 15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표기방법으로서, 『원각경언해』 이후 사라진 각자병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에 따라 ‘ㅆ’도 쓰이지 않았으며, 합용병서는 ㅅ계, ㅂ계, ㅄ계가 모두 씌었으나 ㅂ계 합용의 ㅂ은 이미 탈락된 예( 타 가다가 4:28ㄱ)도 있음을 들었다(이 대목은 착각인 것으로 보인다. ‘-[乘]’는 ‘다’가 아닌 ‘다’이므로 ‘ㅂ’탈락이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종성에 ㆆ이 쓰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나(동국정운식 한자음 제외), 기타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ㅿ 등은 쓰였는데,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지정사 ‘이’가 통합될 때, 분철표기가 상당히 확산되어 나타난다 하였다.

음운현상 가운데서 원순성 동화를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형태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후행하는 원순모음에 약모음 ‘·’가 원순성의 동화를 입어 일어나는 역행동화 현상이고(외로 1:11ㄱ, 밧고로셔 3:32ㄱ), 둘은 형태소 경계에서 원순 반모음 ‘w’를 삽입하여 ‘w’계 이중모음을 형성하는 순행동화 현상인데, 후자를 특징적인 것으로 지적했다(①모도와 1:5ㄱ, 3:43ㄱ, 4:26, ②픠우워 1:7ㄱ, ③보왐직며 1:17ㄴ ; 보왐직호미 2:18ㄱ, ④마초오미 2:29ㄴ).

의미와 관련되는 것으로, 현대국어의 관형사 ‘온’(전부의. 모든)이 중세어 ‘온’에서 의미가 전이된 것이라는 종래의 논의를 검토하고, ‘백(百)을 뜻하는 ‘온’은 거성인데, ‘모든’을 뜻하는 현대어 ‘온’은 장음이어서 서로 관련지을 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고, 중세어 ‘온’은 ‘오다’에 관형형 어미 ‘-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오’에 소급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대명사에 관련되는 것으로, ‘①눌려 2:45ㄱ, ②일로 : 함서 10ㄴ, 2:20ㄱ, ③일로브터 : 종서 5ㄴ, ④절로 : 종서 3ㄱ, 5:16ㄴ, ⑤날려 : 1:7ㄱ’ 등의 형태소 분석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대명사 ‘누, 이, 저, 나’에 조사 ‘ㄹ려, ㄹ로, ㄹ로브터, ㄹ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하고, 두 형태소 사이에 있는 ‘ㄹ’이 왜 1음절로 된 대명사 다음에 특정 조사가 올 때만 개재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밖에 어휘에 관하여는 필자(1975)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있는바, 그러한 사실은 해당 어휘와 관련되는 항목에서 언급하기로 하며, 이경화(2005)도 여기에 참고했다.

(1) :감‧다 : (형) 검은 듯이 붉다.

¶ 복홰 블그며 오야지 며 薔薇 :감·고 東君려 무르니 제 아디 몯다 = 桃紅李白薔薇紫問著東君自不知(금삼 1:23ㄴ)

이는 애초에 ‘감[柿]+다’의 합성어로 보았으나, ‘감다 : 검푸르다’ 식의 상대어를 고려하여, ‘감 : 검[黑]’과 ‘- : 븕-[紅]’의 관계로 보아, 위와 같이 풀이한다. 여기에는 김주필(1993)도 참고했다. 한글학회(1992)나 남광우(1997)에 표제어로 실리지 않았다.

(2) 겨·르롭다(〈겨를+롭다) : (형) 한가롭다.

¶ 엇뎨 聲色 밧긔 걸위여 뷔여 겨르롭거니=豈拘聲色外虛閑(금삼 1:22ㄴ)

이 어휘와 같은 계통의 파생어로 ‘겨르다, 겨르다’가 있고, 다시 후자에서 파생된 ‘겨르이’(겨르이 오 거르니=閑獨步, 금삼2:55)가 있으며, 한편 ‘겨르로’(菩薩이 이 외야 오 겨르로 이셔, 석상13:20)와, 이의 변화형인 ‘겨르로이’(거든 겨르로이 올오=困卽閑眠, 남명 상:59)가 있으므로 의당 이 부사를 파생시킨 본항의 ‘겨르롭다’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 예문으로 해서 문증(文證)된 셈이다. 이 어휘도 앞의 두 고어사전에 실리지 않았다.

(3) 그그 : (첩어)(부사) 더욱 그윽이.

¶ 보며 드를 예 그그 니라=隱隱於視聽之際(금삼 함서:3ㄴ) 주007)

필자(1975)에는 ‘함허당 서’만 있어서 출전 표시에 (금삼 서:~)로 표기했었다. 후에 이본에 ‘종경 서’가 추가되어 오늘날 영인본에는 ‘함허당 서’와 ‘종경 서’의 두 가지 ‘서’가 있으므로 전자를 ‘함서’ 후자를 ‘종서’로 구별해서 적기로 한다.

형용사 ‘그다’(그락 나락 고(隱見)(두초 9:40))가 있음으로 보아, ‘그그’은 이 형용사의 어근이 반복되어서 이루어진 첩어 부사이다. 혹 ‘그그다’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IC 분석상 ‘출현의 자유(freedom of occurrence)와 치환가능성(substitutability)(H. A. Gleason, 1965: 135~137)으로 보아서 ‘그그다’로 보는 것보다는 ‘그그 다’로 하는 것이 낫겠다. 이 단어도 앞의 두 고어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와 유사한 단어 형성인 다음과 같은 어사들이 참고된다.

가. 반다 : 能과 所왜 반니와=能所歷然(금삼 2:13)

나. 반반 (다) : 諸法이 반반 (월석 8:29)

다. 다 : 兪 맛모미  시라(내훈 3:2)

라.  (다) : 나며 머므로미  며=進止從容(금삼 5:9)

마. 아다 : 은애 머리 여희여 어즐코 아야(석보 6:3)

바. 아아 (다) : 末學이 예 니르러 다 아아 니라=末學至此皆冥冥然也(능엄 2:26)

(4) 락 : (명) 바스라기[屑].

¶  가온 락 두미며=眼中著屑【屑 녯사미 닐오 금 락이 비록 져그나 누늘 리디 아니려 니라】(금삼 1:20ㄱ)

이 어휘는 동사 어간 ‘-’에 어미 ‘-락/으락’이 결합한 것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한 파생명사 ‘라기’로 쓰였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 2회 나타난 ‘락’은 모두 명사이다. 사전에는 ‘라기’의 발달형임이 분명한 ‘라기’(구급 하:89)가 수록되어 있다.

(5) 바지외다 : (형) 공교(工巧)스럽다.

¶ 다가 바지왼 소니 아니면(若非匠手)(금삼 함서:13ㄱ)

이 어휘는 명사 ‘바지[工]’에 형용사 파생 접미사 ‘-외-’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이다. 이미 ‘바지로이’라는 부사가 있으므로(詞賦ㅣ 바지로이 야도=詞賦工, 두초 15:8), 이를 파생시킨 ‘바지롭다’는 있었을 것이다. 접미사 ‘-다~-롭다~-다(〉-외다)’는 다음 용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표기(異表記)에 불과하다.

가. 受苦다 보니(월석 14:80)

나. 수고며 즐거며(월석 1:35)

다. 病야 受苦외야도(원각 하 3지1:19)

라. 슈고로이 뇨 니노라=話苦辛(두초 20:27)

(6) 수·늙[嶺] : (명) 재. 고개.

¶ 나 수늙 우희셔 울오=猿啼嶺上(금삼 1:21ㄱ)

이는 이미 『남명천계송언해(南明泉繼頌諺解)』(하:19),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初 상:5)에 보이는 것으로 사전에도 나와 있으나, 많지 않은 용례이기에 보기를 들어 둔다.

(7) ‧스릐 : (글) 쓰는 이의. (글) 쓰는 사람의.

¶ 이런 로 그르 외요미 傳야 스릐 그르호 브틀 미니라=所以舛訛盖緣傳寫之誤耳(금삼 함서:13ㄴ)

‘스릐’는 필자(1975)에서 ‘스-[書/寫]+ㄹ(동명사형)+의(관형격조사)’의 구조로 설명했었는데, 김주필(1993:199)에 따라 ‘스-+ㄹ(관형사형)+이(의존명사)+의(관형격조사)’에서 의존명사 ‘이’가 생략된 것으로 수정해 둔다.

(8) (어‧리) 미‧혹‧‧다 : (형) 미욱하다.

¶ 다가 내 업다 닐어도  어리 미혹니(若言無我更愚癡) (금삼 1:20ㄱ)

이 어휘는 ‘우리히 어리 迷惑야(월석 17:17)’에도 보이는데, 본항은 ‘미혹(迷惑)’이 한글로 표기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迷惑-’는 대체로 원문 ‘迷惑, 迷’와 대응되며, ‘미혹-’는 원문이 ‘愚癡(못나고 어리석음), 愚魯(어리석은 사람), 迷’ 등과 대응된다. 남광우(1971)에서는 한자로 표기된 ‘迷惑다’와 한글로 표기된 ‘미혹다’ 모두 동사로 등재하였고, 필자(1975)도 동일하게 해석하였다. 그런데 남광우(1997)에서는 한자 표기의 ‘迷惑다’는 동사로서 불교용어로 간주하고, 한글로 표기된 ‘미혹다’는 ‘미욱다’로 분화 발달한 형용사로 간주하였다. 원문이 없는 언해문을 바탕으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에 따르기로 하나, 앞으로 더 고구(考究)할 여지는 있다.

동원어(同源語)이면서도 표기 문자가 한자냐 한글이냐에 따라 의미적으로 달리 쓰인 것으로는, 알려져 있는 것이나, ‘衆生’과 ‘즁’이 있다(이기문2004: 57~60).

迷惑다

가. 다가 내 衆生 맛나 佛道 다 치던댄 智慧 업슨 사미 섯거 어즐야 迷惑야 쵸 받디 아니리러니라=若我遇衆生 盡敎以佛道 無智者錯亂 迷惑不受敎(법화 1:208ㄱ)

나. 大衆은 迷惑야 定과 慧왜 다다 니디 말라(육조 중:1)

다. 그러나 迷惑야 아디 몯니=然且迷之不覺(원각 서:29ㄱ협주)

미혹다

가. 나 어리고 미혹 사미라=我是愚魯之人(번박 상:9)

나. 다가 닐오 나 업다 야도  어리 미혹리라=若言無我更愚癡(남명 상:45ㄴ)

다. 醉야 오샛 보 모니 어리며 미혹 디 어루 어엿브도다=醉迷衣寶 癡迷情可愍(금삼 4:22ㄱ)

라. 그 무른 녜 새나 그 氣運은 미 돌티 미혹디 아니니라=其流則凡鳥 其氣心匪石(두초 17:14)

(9) :외(外) : (명) 밖.

¶ 更無人이라 호 저 외예  업닷 마리라(금삼 1:24ㄱ)

이 예문은 협주문이다. 본항의 ‘외’는 접두사로 쓰인 ‘외삼촌 구 舅’(유합 상:20), ‘외삼촌 母舅’(동문 상:11)과는 다른 한자음의 한글 표기로 완전명사인 보기이다. 그런데 이 보기의 방점은 상성인 데 반해서 동국정운에는 ‘‧’로 거성인 점이 다르다.

이 단어를 여기 굳이 언급하는 것은 필자(1975)가 쓰던 당시만 하더라도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리지 못했었고, 현재도 ‘교학 고어사전’에만 실려 있기는 하나, 그 보기가 ‘그 외예’(번노 상:14)를 제외하면 다음과 같이 한글 표기가 아닌 한자음이기 때문이다.

가. 補處菩薩 外예(석보 9:28)

나. 供養기 外예(석보 23:3)

다. 그 外옛(석보 24:47)

라. 내 몸 外예(월석 7:28)

(10) ‧례다 : (동) 차례로 엮다. 차례를 정하다.

¶ 編 ‧례‧시‧오 집 모돌 시라(금삼 함서 12ㄱ 주)

‘례’는 한자어 ‘次第’이다. 명사로서의 ‘례’는 보기가 있었으나, 이에서 파생된 ‘례다’는 여기서 처음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원문에 따라 ‘編’의 새김임을 알 수 있다. ‘--’가 중세국어에서 생산성이 높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어떻든 이 어휘도 사전의 표제어로 올려야 할 것이다.

(11) ‧하야 : (부) 하얗게.

¶ ‧하야 적적 고대  寥寥도다(白的的處亦寥寥)(금삼 1:18ㄴ)

이 문헌 외에도 ‘하야 반반야’(남명 상:23)가 있으나, 종래의 고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하야다’는 ‘하야’에 ‘다’가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하야히’와는 동의어로 본다.

¶ 하야히 비취옛더라=白映(두초 20:45)

[白]을 뜻하는 형용사로 ‘다’도 있었으므로 ‘하야’는 ‘-’에 어미 ‘-아’가 결합한 형태의 이표기(異表記)로(?) 보이나, 모음의 변화가 문제점이다.

(12) (長常) : (부) 늘. 항상.

¶  과  리 애 서르 좃니라=淸風明月鎭相隨(금삼 1:23ㄴ)

이 어형은 사전에는 한자 ‘長常’과 본항과 같은 한글 표기가 아울러 실려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보기에서처럼 ‘+애’로서 명사적으로 쓰인 것이 색다른 점이어서 소개해 둔다.

(13) -는 : -는(관형사형).

¶ 바미 괴외  虛空애 녀는 그려긔 소리  소릿 소리 보내야 치운  알외다=夜靜秋空征雁響 一聲送報天寒(금삼 1:21ㄴ)

관형사형 어미 ‘-’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행어미 ‘’에 어말어미 ‘-ㄴ’이 통합된 것으로 당시의 표기로는 ‘-’이 더 바른 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진작 다음에 보이는 보기처럼 15세기 문헌에서도 간혹 ‘-는’으로 쓰인 것이 보이는데, 본항도 그러한 보기이다.

가. 술윗 소리 우는 소리(석보 19:14ㄴ)

나. 簫 효 대 엿거 부는 거시라(석보 13:53ㄱ 주)

다. 乎 아모그 논 겨체 는 字ㅣ라(훈언 1ㄱ 주)

라. 어울면 모 버는 거시니(월석 2:15ㄴ)

마.  八千里옴 녀는 象이라(월석 7:52ㄴ 주)

이상과 같이 ‘-’ 아닌 ‘-는’이 쓰인 어간의 모음은 모두 음성모음으로서 아마도 체언 아래서 모음조화에 따라 구별되어 쓰이는 조사 ‘-/는’에 유추된 것이 아닌가 한다.

(14) ‘-()’과 ‘-(아/어)’

¶ 峨峨 뫼히 노 오 洋洋 므리 너븐 니 伯牙 녯 琴 잘  사미오 子期 소리 아던 사미니 伯牙ㅣ  뫼해 두고  子期 닐오 峨峨乎ㅣ라 先生 디여 고 므레 두고  洋洋乎ㅣ라 先生 디여 니 이 峨峨 그르 드러 洋洋 삼닷 마리라(금삼1 함서:12ㄴ 주)

위 예문은 ‘지음(知音)’에 대한 고사의 설명으로, 한문 원문이 없는 협주문이다. 여기 밑줄 친 ‘, , ’에서 첫 번째 ‘’이 문제인데, 이 대목의 설명을 필자(1975)에서 “‘-’은 선행어미 ‘-거-, -아/어-, -나-, -더-, -시-’ 등과 연결된 복합어미로 쓰이는바, ‘’은 그 다음에 나오는 용례와 같이 ‘(〈-+-아)’이 정철(正綴)이므로 전자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했다.

이번 역주 작업에서 이 대목을 현대문으로 옮기면서 지난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전의 글에서는 깊이 생각지 못하고 첫째의 ‘’을 나머지 두 형태와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은 ‘-던’의 오기로 보인다. ‘…伯牙 녯 琴 잘  사미오 子期 소리 아던 사미니…’의 앞 절과 뒷 절이 대칭적인 글로서, 그 어미의 형태가 같아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은 오자이거나, 식자공(植字工)의 잘못이라고 보아 현대문 ‘타던’으로 풀이했다. ‘ㆍ’와 ‘ㅓ’의 혼기가 동시대의 다른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예가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이렇게 정리해 둘 수밖에 없다. 주008)

김주필(1993:191)은 ‘’에 대한 필자(1975:154)의 설명에 동의하였으나, 이번의 수정으로 재고의 여지가 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보인다.

¶ 소곰 성이라 여 이시니 그 소곰으로 가(팔세아:8)

(15) ㅣ종성 체언 아래 주격 표기

¶ 가. 智(딩)ㅣ 거즛 緣 뷔취면 萬法이 다 며 體톙ㅣ 眞常이 나다나면 五蘊이 다 뷔리라=智照妄緣면 萬法이 俱沉며 體露眞常면 五蘊이 皆空리라(금삼 1:14ㄴ)

¶ 나. 오 機(긩)ㅣ  업스니 機긩ㅣ  업서=全機ㅣ 無垢니 機無垢야(금삼 1:18ㄴ-19ㄱ)

¶ 다. 智(딩)ㅣ 諸佛와 가지라=智同諸佛야(금삼 5:21ㄱ)

¶ 라. 大地 가지로 보미며=大地ㅣ 同春이며(금삼 함서:6ㄴ)

체언의 끝모음이 ‘i’이거나, ‘y’로 끝나는 하강적 이중모음 ‘ㅐ, ㅔ, ㅚ, ㅟ, ㅢ’일 때에 주격표기는 영형태(零形態)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인데, 15세기 중엽에 간행된 『능엄경언해』(1462), 『법화경언해』(1463) 등에서는 주로 한자어 아래에서 영형태가 아닌 ‘ㅣ’ 표기를 한 것이 있다. 이 현상은 한문 원문에 달린 구결과 언해문에 다 나타난다(필자 1963:165~166). 이 문헌은 위의 문헌들보다 20년이 더 늦은 문헌인데, 동일한 현상을 보여 준다. 이보다 한 해 앞서 간행된 『두시언해』 초간본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확인된다(필자 1963:157~169). 그러므로 ‘이 문헌’의 다음 보기들은 영형태와 ‘ㅣ’로 동요된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같은 문장의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서도 달리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상으로 필자(1975)의 재검토를 마치고, 다음은 어휘 부분으로 위에서 언급하지 못한 것을 다루기로 한다.

(16) 니를히 : (부) 이르도록.

¶ 가. 東 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시매 니를히=以東說西說橫說竪說히(금삼 1:33ㄱ)

¶ 나. 거믄고 노로 이제 니르히 帝子 슬노니=鼓瑟至今悲帝子(두초 11:7)

¶ 다. 이제 니르히 것군 난함이 갓 노팻도다=至今折檻空嶙峋(두중 4:30)

¶ 라. 아브터 나죄 니히(번소 9:102)

¶ 마. 어린 제븓터 늘곰애 니히 슬흐여 디 아니며=自幼至老不厭(선소 5:9)

¶ 바. 팔만사천 다라니문에 니르리=至八萬四千多羅尼門이(금삼 5:24ㄱ)

¶ 바'. 뭀새 이제 니르리 위야 삿기 머기놋다=群鳥至今爲哺雛(두초 17:4ㄴ)

¶ 사. 니샤 니논 밧 法相이 곧 法相 아니라 호매 니르르시니=乃至云所言法相者ㅣ卽非法相이라 시니(금삼 5:13ㄴ)

¶ 아. 이 고대 니르런=倒這裏얀(금삼 5:31ㄴ)

¶ 자. 우흐로 諸佛에 니를며=上至諸佛며(금삼 5:36ㄱ)

(가)의 ‘니를히’는 ‘니를-[至]’에 ‘-히’가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만을 보면 원문에 단 한글 구결이 ‘-히’로 되어 있어서 이에 유추(類推)되어 ‘니를히’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나, 다)의 ‘니르히’와 (라, 마)의 ‘니히’는 그러한 추측을 어렵게 한다.

(바-자)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였던 어간 형태 ‘니를-’이 확인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어휘의 어간 형태가 본래는 ‘니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니를히’는 고형(古形)이 유지된 것이고, ‘니르히/니히’는 ‘ㄹ’ 탈락형이며, ‘니르리’는 ‘ㅎ’ 탈락형이 되는 셈이다. 더 많은 예가 확보되어야 하겠으나, 일단 이러한 견해를 제시해 둔다. 이 예도 고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17) ·몃다 : (부) 바로. 곧(믿건대. 아마. 마침.)

¶ ·몃다 톳긔  도다 비록 이신 어느 고 向야 着리오 큰 블 소밴 物 머므로미 어려우니라=賴同兎角이로다 說有 向什麽處著이리오 大烘焰裏옌 難停物이니라(금삼 2:66ㄴ)

이는 심재완(1981:27) 난해어(難解語)의 주석에 ‘믿건데. 아마’ 풀이한바, 그 후 사전에 실리지도 않은 채 내려오다가, 이경화(2005:44~45)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곧, 심재완(1981)의 간단한 뜻풀이만으로 부족하므로, 원문의 ‘뢰(賴)’에 대응되는 풀이이므로 이의 자석(字釋)을 검토하고 문장의 구조상 ‘마침’ 정도의 부사로 보고, 이로써도 적격한 풀이로 보기 어렵다면서 ‘賴’자가 쓰인 한문 문장을 재검토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필자도 문맥으로 보아서 부사로 보는 데 동의하지만, ‘마침’이 위에 대입되었을 때는 어색한 느낌을 면할 수가 없다. 참고로 『금강경오가해(설의)』번역본에서 이 대목을 찾아본바, 무비(1992), 우백암(1994) 두 책 모두 ‘賴’자는 번역하지 않았다. 다른 기댈 만한 것이 없어서, 이종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께 자문을 받아 ‘바로, 곧’으로 해 두고 다른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8) ·블무·디 : (명) 불덩이.

¶ · 온 ·블무·디 四面이 어루 드디 몯홈 니라=亦如猛火聚四面이 不可人이니라(금삼 5:29ㄱ)

이는 종래의 사전에 실리지 않은 것이나, 『교학 고어사전』에는 이의 파생 모체로 생각되는 ‘블묻-’를 동사로 싣고, 그 뜻은 ‘불씨를 묻다’로 해 놓았다. 위의 예문과 뜻으로 보아서는 잘 맞지 않으나 ‘블[火]+묻-[埋]+이’로 볼 수도 있다. 이경화(2005)는 이를‘블[火]+무디[堆,聚]’의 합성어로 보고, 뜻은 한문의 ‘화취(火聚)를 따라서 ‘불덩이’로 했는데 별 이의를 달 것이 없다. 사전에 새로 실어야 할 것이다.

(19) :셰 : (부) 세로로.

¶ 東 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샤매 니를히=以東說西說橫說竪說히(금삼 1:33ㄱ)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에는 다음 보기가 실려 있다.

¶  고 셰 다=橫跳竪跳(역해보 60)

이 ‘셰’를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명사와 부사로 두루 쓰이는 것으로 보았고,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에서는 명사로 보았다. 이 예문에서 ‘다’를 한정하는 것으로 보아 부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셔-’에 접미사 ‘-ㅣ’가 결합한 것이다. 이 『역어류해(譯語類解) 보(補)』는 영조 15년(1775)간이므로 방점도 없는 어형이어서, 연대도 앞서고 방점이 있는 어형을 보기의 첫 번째로 수록하는 것이 낫겠다.

(20) 솝[裏]과 속

¶ 敎海ㅅ :소· 向샤=向敎海裏샤(금삼 1:16ㄱ)

이미 잘 알려진바, ‘솝’이 더 고형이고 ‘속’은 개신형으로서, 주009)

‘솝’의 자료는 『석보상절』을 비롯해서 『월인석보』,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원각경언해』 등 여러 문헌에 나오므로 보기는 줄인다.
두 어형은 중세국어 당시에도 쌍형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어사전에서는 이 개신형의 제일 이른 시대의 것으로 ‘骨髓는  소개 잇 기르미라’(월인석보 1:13. 주)를 수록하였고, 다음으로는 이 문헌과 같은 무렵의 초간 『두시언해』의 자료를 실었다.

‘이 문헌’에서는 권 1, 2를 통틀어서 ‘속’이 한 번 쓰였고 ‘솝’은 15회 나타난다. 3, 4, 5권에서는 개신형 ‘속’은 보이지 않고 ‘솝’만 나타난다.

(21) 슬·히 : (명) 창[戈].

¶ 戈 슬·히라(금삼 1:33ㄴ 주)

이는 ‘이 문헌’의 권1에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필자(1975)가 쓸 당시 이용했던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낙장본에는 없었고, 심재완(1981:12)에서 희귀어휘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간행된 고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 보기의 형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문제인데, ‘슳+이(서술격)+라’로 하여 ㅎ종성체언으로 해 두지만, 또 다른 보기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22) ·:곶·다 : (동) 팔짱끼다.

¶ 世間ㅅ 사미 病이 업스면 醫王이 ·:곳·니 衆生이 허믈 업스면 부톄 걔 홀 일 업스시니라=世人이 無病면 醫王이 拱手니 衆生이 無垢면 佛自無爲시니라(금삼 4:24ㄴ)

※ 九重에 :고·잿거·든 四海朝宗놋다=端拱九重이어든 四海朝宗이로다(금삼 3:4ㄱ)

이 ‘곶-’은 유일한 예문으로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문의 ‘공수(拱手)’에 대응되어 뜻은 위와 같이 풀이되었다. 이의 형태 분석은 ‘[袖]+ㅅ++곶-[拱/揷]’로 보는바, 문제는 ‘’에 있다.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기의 ‘곶-’이 있는데, 이도 『우리말 큰사전』에는 동사 ‘팔짱끼다. 깍지끼다.’로 했고, 『교학 고어사전』에는 명사 ‘[팔짱]’과 동사는 ‘곶-’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결국 뜻은 앞의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은 후에 ‘뎡→(졍)→팔짱’으로 바뀌었다 할 것인데, 문제의 ‘뎡’은 위에서 아무 뜻이 없는 것으로 되어서 미진한 느낌이 남는다. 이와 관련되는 16세기 자료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 잔 자바 헌슈고 여 매디르고 웃 녀그로 즈우려 나오니=奉觴上壽畢 皆肅容拱手 自右趨出(이륜 초:31)

관심 있는 분들의 교시를 기다린다.

(23) 오··다 (동) 우비어 파내다. 천착(穿鑿)하다.

¶ 後世예 반기 거즛 일 니며 왼 고 와 오··포· 거츠리 내야 그 마 모로매 通호 求리 이시리니(後世예 必有承訛踵誤야 妄生穿鑿야 以求其說之必通者矣리니)(금삼 함허서:17ㄱ)

이 ‘오포’은 ‘이 문헌’에서 처음 보인다. ‘포’은 ‘-[掘]+옴/움+’의 구조임이 분명하나, 문제는 ‘오·-’인바, 일찍이 이기문(1971:122)에서 ‘외  刻’(훈몽 상:1ㄱ)의 설명에,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의 ‘穿鑿은 :욀·씨·라’(28ㄴ주)와 관련지어 ‘외-’의 뜻을 ‘어떤 물건을 뚫어(또는 뚫둣이) 파는 동작[穿掘]을 의미’함으로 풀이했다. 이 대목을 현대역한 김무봉(2002:37)에는 ‘오비는 것이다’로 옮겼다. 따라서 ‘이 문헌’의 ‘오-’는 원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천착(穿鑿)’의 옮김으로써, 이 어형만으로 본다면 위의 ‘외-’나, ‘:외-’보다 앞선 시대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곽충구(1996:49-50)에서는 위의 ‘외-’와 ‘우·의-(석보 11:21, 두시 초 16:37), 함경남도 북청방언의 ‘오배(LH)’, 현대국어 ‘오비-, 우비-’를 바탕으로 ‘*오-, *우-’를 재구하고, 15세기 이전에 ‘*오·->*오·외->:외-’와 같은 변화가 있었고, ‘외·-’는 ‘우비어 파내다’라는 뜻의 복합동사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 문헌’의 ‘오-’는 위의 변화에서, ‘*오·외-’와 ‘:외-’ 사이에 자리하게 되며, ‘*오·외-’에서 겹쳐지는 원순모음은 이런 경우 이화작용으로 원순성이 소실되어 ‘오·-(+-)’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 아닌가 한다. 이는 최전승(1975)을 곽충구(1996:50-51주)에서 재인용, 적용한 것이다.

(24) 울: : (명) 등나무의 열매.

¶ 葛 츨기오 藤 울:·니 다 너추는 거시니(금삼 1:3ㄴ 주)

이 자료도 필자(1975)에는 소개되지 못한 것이고, 고어사전에도 수록되지 못했다. 다른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울니’는 ‘울+Ø+니’로 본 것이다. 어원과 관련될 만한 것으로는 ‘울[籬]’과 ‘열[實]’의 ‘’ 정도인데, 전자는 ‘·울 爲 籬’(훈해 용자)로 거성이며, 후자는 ‘열 실[實]’(왜해 하:6, 18세기 초엽 자료?)로 성조도 미상이다. 혹시 방언 등에 쓰이는 데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다음은 고어사전의 예문이 유일한 것, 곧 이 문헌의 예문만으로 된 것을 모아서 살피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1~23)에서 다룬 것과 아울러 보면, 이 문헌의 어휘사적 중요성을 한층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시될 차례는 위에서처럼 단어, 품사, 뜻, 예문과 출전의 순서로 한다.

(25) 외다 : (형) 완전하다. 만족스럽다.

¶ 文과 質왜 골아 비르서 어루 일후믈 왼 莊嚴이라 홀디니라=文質이 彬彬야 始可名爲十成莊嚴이니라(금삼 4:22ㄴ)

(26) 그만·뎌만·다 : (형) 그만저만하다.

¶ 간 마다  것 슬히 너기고 더운 것  머구믈 그만·뎌만·야뇨마=到處에 嫌冷愛熱야 喫却多少了也오마(금삼 3:52ㄱ)

(27) 덕[棚] : (명) 사다리.

¶ 棚 더기라(금삼 2:25ㄴ 주)

(28) :돌·블 : (명) 별똥별. 유성(流星).

¶ :돌·브른 流星이라(금삼 4:63ㄱ 주)

(29) ·다 : (형) 습습(習習)하다. 바람이 산들산들하다.

¶ 보현행문 노피 오니 덥듯 미 ·야 프르며 누르니 해 도다=高踏普賢之門니 薰風이 習習야 靑黃이 滿地로다(금삼 4:18ㄱ)

(30) 머믓다 : (동) 머뭇거리다.

¶ 逡巡 머믓 오(금삼 4:10ㄴ 주)

(31) 믓다 : (동) 무너지다. 부서지다.

¶ 고대 어름 노며 디새 믓· ·샷다 니=當下애 冰消瓦解샷다 니(금삼 2:1ㄴ)

(32) 믿얼굴 : (명) 본바탕. 본질(本質).

¶ 質은 묨 업슨 믿얼구·리라(금삼 2:61ㄱ 주)

(33) 벼·다 : (동) 겉을 꾸미다. 가장(假裝)하다. 거짓 꾸미다.

¶ 有僞 비록 거츠나 리면 功行이 이디 몯고 無爲 비록 眞나 벼면 聖果 證호미 어려우니  니라 벼디 아니며 리디 아니  어늬 이 성제 제일 고=有爲雖僞나 棄之則功行이 不成고 無爲雖眞이나 擬之則聖果 難證이니 且道不擬不棄時 如何是聖諦第一義오(금삼 4:31ㄴ~32ㄱ)

(34) :뷔듣·다 : (동) 비척거리다. 비틀거리다.

¶ 窮子ㅣ :뷔드·러 외로이 나가 녀 나리 마 오라더니=窮子ㅣ 竛竮孤露야 爲日이 已久ㅣ러라(금삼 3:25ㄱ)

(35) ·븘나·올 : (명) 불꽃.

¶ 靈 ·븘나·오리 빗나 부러도 어루 디 몯리니=靈焰이 烜赫야 吹之不可滅이니(금삼3:29ㄴ)

(36) :빌·다 : (동) 빌어 꾸다.

¶ 안로 이운 남기 호 威儀 :빌·워 나토니=內同枯木호 假現威儀니(금삼 4:18ㄴ)

¶ 이 일후미 :빌· 일후미며=是名爲假名이며(금삼 5:37ㄱ)

(37) ·룯·다 : (형) 뿌루퉁하다.

¶ 盧都 ·룯·다 논 마리니 말 몯시라(금삼 3:12ㄴ 주)

(38) 서느서늘··다 : (형) 선득선득하다. 몹시 서늘하다.

¶ 이 이 서늘야 싁싁며 冷호미 서느서늘·야 처딘 므리 처딘다마다 어러=此事 寒威威冷湫湫야 滴水滴凍야(금삼 4:42ㄴ)

(39)  : (부) 아른아른. 아물아물.

¶ 陽燄 陽氣  노 거시니(금삼 5:27ㄱ 주)

(40) ·앛 : (명) 까닭. 소이(所以).

¶ 이 爲頭며 읏듬 외논 勢론 ·아·치니·라=此ㅣ 所以爲王爲主之勢也ㅣ니라(금삼 함서:3)

¶ 善現 奇特혼 아 그 聲敎 기드리디 아니야 信야 疑心 아니호 오 慈尊이 希有샨 아 그 聲敎 나토디 아니샤 人天 여러 알외샤 니라=善現之所以奇哉者 以其不待聲敎야 而信無疑也ㅣ오 慈尊之所以希有者 以其不現聲敎샤 而開覺人天也ㅣ니라(금삼 2:8ㄴ)

※ 이 문헌에서 ‘젼’는 주로 한자 ‘고(故)’의 풀이로 씌었다.

¶ 靑色 能히 災厄 더논 젼라=靑色 能除災厄故也ㅣ라(금삼 종서 3ㄱ)

(41) 주엽·쇠 : (명) 풍경(風磬).

¶ 닐오 山僧이 座애 오디 아니얫거 맷 주엽·쇠 마 혀 흐느다 호 모로매 미둘디니라=須信道山僧이 未陞座ㅣ어늘 風鐸이 已搖舌이니라(금삼 4:43ㄴ)

다음은 드문 문법 형태를 소개하는 것이다.

(42) -엣고

¶ 이 늘그늬 이 마 사미 劫外 向야 알엣고 니=此老의 此說 只要人이 向劫外承當케 니(금삼 2:1ㄴ)

여기 ‘알엣고’의 ‘-엣고’는 ‘-겟고’에서 /ㄱ/이 약화된 것이다. ‘-겟고’는 ‘-긧고’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학 고어사전』에는 ‘-긧고’만 표제어로 되어 있고 ‘-엣고’는 실려 있지 않으며, 『우리말 큰사전』에는 표제어 ‘-긧고’ 아래 다음 두 보기를 들고, 참고로 ‘⇒-겟고’ 표시를 한바, ‘-겟고’ 항목에는 ‘-게 하고자’라는 뜻풀이와, [=-괫고/-긧고/-엣고〕로 끝나고 보기는 없다. 그러므로 위의 보기는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가. 庶幾 그러긧고 라노라 논 디라(월석 1, 석보서:6ㄱ. 주)

나. 三寶애 나가 븓긧고 라노라=而歸依三寶焉이니라(월석1, 석보서:6ㄴ)

다음은 재미있는 한글 활자의 모양이다.

(43) (中) : {}

가. 에 城 남아 出家샤=子夜애 踰城出家샤(금삼 1:1ㄴ)

나. 여러 部ㅅ 中()에 오직 이  부=於諸部中에 獨此一部(금삼 1:2ㄴ)

다. 山埜 이 저 니논 마리라(금삼 1:13ㄴ. 주)

라. 늘근 을 심겨 주고=授與老僧고(금삼 1:7ㄱ)

여기서 밑줄 친 부분을 보면, (가)는 언해문에서 한자어를 한글로 적은 것인데 모음 ‘ㅠ’자의 모양이 좀 다른데, 이를 (나)의 동국정운식 한자음 활자와 비교하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ㅠ’자에 ‘ㆁ’ 받침을 쓰면 글자가 잘 드러나지 않음을 의식해서 활자 모양을 달리한 것이다. ‘ㅠ’의 두 수직선이 八(여덟 팔) 자 모양을 하고 있다. (다)는 한자음은 아니나 ‘ㆁ’받침을 단 ‘ㅠ’자가 (가)의 모양과 같고, (라)는 (다)와 같은 글자임에도 보통 쓰이는 글자를 보인 것이다. (가, 나)가 한자음이라면 (다, 라)는 고유어로 쓰인 것이다.

(가)와 같은 활자 1:12ㄴ, 1:17ㄱ(2), 1:17ㄴ, 2:9ㄱ, 2:35ㄴ, 2:55ㄱ, 2:64ㄴ···8회

(나)와 같은 활자 1:17ㄴ(2), 2:16ㄴ, 2:20ㄱ, 2:21ㄱ, 2:22ㄱ, 2:42·············7회

(다)와 같은 활자 2:26ㄱ························································1회

(라)와 같은 활자 2:23ㄱ주, 2:27ㄱ·············································2회

3, 4, 5권에도 이런 활자가 씌었으니, 그 경향은 통틀어 다음과 같다. 주010)

두 개의 수직선이 여덟 팔(八) 자와 유사한 ‘ㅠ’를 ‘ㅡ八’로 나타내기로 한다.

가. (中) : 36회 {듕} : 16회

나. (衆) : 5회 {즁} : 23회

다. [僧] : 없음 {즁} : 11회

마지막으로 한자어의 새김 중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를 보이고자 한다.

(44) 한자어의 새김

가. 어루 錦ㅅ 우희 고 더으다 니리로다=可謂錦上添華ㅣ로다(금삼1 함서:10ㄴ)

나. 東녀그로 니시며 西ㅅ 녀그로 니시며 빗기 니시며 셰 니시니=東說西說橫說竪說시니(금삼1:32ㄴ)

다. 奧旨 돌햇 블와 번겟 비치 야=奧旨 石火電光야(금삼1 종서:5ㄱ)

라. 몃맛 人天이 말 아래 갈  알며=多少人天이 言下애 知歸며(금삼1:25ㄱ)

마. 여슷 여스시 녜브터 오로 셜흔여스시니라=六六이 從來로 三十六이니라(금삼4:45ㄴ)

(가, 나)는 오늘날 한자어 그대로 쓰이는 말이고, (다)는 앞뒤가 바뀌었지만 역시 한자어가 그대로 쓰이며, (라)의 ‘언하(言下)’는 거의 대중의 말로는 듣기 어려운 말이다. 이러한 한자어 또는 숙어에 대한 새김의 노력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가)는 직역을 하더라도 뜻이 통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직역으로든 의역으로든 ‘조리가 없이 되는 대로 말을 지껄임’이라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는 ‘돌에서 일어나는 불과 번갯불’이라고 옮겼을 때 (나)의 경우보다는 좀더 알아듣기 쉬운 느낌이 들지만, 이 말이 역사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라)는 이 말이 ‘일언지하(一言之下)’의 준말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말씀 아래’로 적었을 때, ‘말하는 바로 그 자리’ 또는 ‘말이 떨어지자 그 즉시’ 라는 뜻이 얼마만큼 전달될지 의문이다. (마)는 산술적 표현으로서, 오늘날의 ‘구구단’과 관련된 것이다. ‘여섯여섯’ 식의 표현이 당시에 실제로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이 문헌’이 나온 시기가 우리 고유어를 살려 쓰자는 커다란 사회적인 기운이 조성된 그런 때는 아니었겠으나, 오랫동안 굳어져 쓰여 오던 말을 새로운 고유어로 고쳐 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현대역 『금강경오가해』(무비 역해, 1992)에서는 (가, 나, 라)는 원문 그대로, (다)는 ‘전광석화’로 옮겼다.

45)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불교 인명, 용어는 『동국정운』(1448)의 이른바,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주음한 것이다.

가. 般반 若:(금삼 1:2ㄱ)

나. 解:갱 脫·(금삼 1:3ㄴ)

다. 阿 難난(금삼 1:34ㄴ)

라. 阿耨·녹多당羅랑三삼藐·막三삼菩뽕提똉(금삼 3:56ㄱ)

이러한 한자음의 사용은 ‘이 문헌’의 간행연대(1482)로 보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곧,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불경언해에 쓰이면서 중간에 1차의 수정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니, 1463년 간행의 『법화경언해』에는 위의 음이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가. 般 ·若 :(법화 5:188ㄴ)

나. 解 :脫 ·(법화 3:140ㄴ)

다. 阿 ·難 난(법화 1:30ㄴ)

라. 阿耨·녹多당羅랑三삼藐·먁三삼菩봉提뗑(법화 1:37ㄱ)

이와 같이 수정된 이유는, 이 한자음은 본디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음역어(音譯語)로서 그 원음에 가깝게 적으려는 데 있었다고 본다(정우영 1996 : 92~99, 이경화 2005 : 28~29). 이런 한자음은 1467년 간행의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목우자수심결』, 『사법어』까지 쓰이다가, ‘이 문헌’과 같은 해에 간행되는 『남명집언해』에 이르러서는 정음 창제 초기 한자음 표기로 돌아가고 만 것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정우영(1996)으로 미룬다. 이러한 한자음의 수정에 관한 언급은 일찍이 안병희(1987)에서도 언급된 것이 있다.

3. 마무리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오가해설의』에서 금강경 본문·야보(冶父)의 착어(著語)와 송(頌)·종경(宗鏡)의 제강(提綱)과 함허당(涵虛堂)의 서(序)에 대한 설의(說誼)를 언해하여 1482년에 간행한 5권 5책의 금강경 해설서이다.

‘이 문헌’은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에 전하던 권2~5를 한글학회에서 축소 영인하여(1960, 1961) 널리 알려졌으며, 1975년 동국대 도서관에 권1의 낙장본이 수장되고, 그 무렵 심재완 교수(1976)도 같은 판본의 권1 이본(낙장본)을 발굴 소개했다. 그 후 심재완(1981)은 자신의 이본에 결락된 부분을 동국대본에서 보전(補塡)하여 가람문고본과 합하여 전 5권을 1책으로 영인 간행했으나, 권1의 ‘함허 서’ 몇 장은 낙장인 채 완본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 8월 전남 장흥군 보림사 소장 권1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공개되어 비로소 5권 5책 전질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헌’의 표기, 음운, 문법 등은 정우영(1990)과 김주필(1993)에서 요약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어휘 부분은 필자의 구고(1975)를 일부 수정 보충한 바, 새로 고어사전에 수록돼야 할 것으로 19개어, 이미 사전에 수록된 것이나 그 예문이 이 문헌의 것만으로 된 것 16개를 확인함으로써 어휘부문에서 차지하는 이 문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밖에 색다른 활자 모양을 시도한 ‘’[{듕}]를 찾아 보였고,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긴 몇 개의 보기를 통해서 당시 번역자의 고심의 일단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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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관(1998~), 『가산 불교대사림』(1~8 미완), 가산불교문화연구원.

『남명집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 교수. 국어학)

1. 머리말

우리가 흔히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 부르는 이 책의 원 이름은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의 명칭이 같지만, 학계에서는 우리말·글로 번역한 언해본을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원 이름 끝에 ‘언해(諺解)’를 덧붙여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언해(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諺解)」라 일컬으며, 이를 보통 「남명집언해」라고 줄여 부른다.

상·하 2권으로 된 『남명집언해』의 번역 저본은 한문본 『영가대사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인데, 책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중국 당나라 고종·중종 때의 스님인 영가대사(永嘉大師) 현각(玄覺. ?~713)이 지은 『증도가(證道歌)』를 송나라 남명천선사(南明泉禪師)가 구(句)마다 나누어 계송(繼頌)한 총 320수로 구성된 책이다.

이 자료를 학계에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남풍현(1972, 1973)에서인데, 남풍현(1972)에서 「하권」을, 남풍현(1973)에서 「상권」을 각각 영인하고 해제를 제공하였다. 그 후 안병희(1979)에서 간명하게 자료가 소개되었고, 김영신(1988:165~241)에서는 상·하권에 대한 국어학적 연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상·하권」을 국어 어휘와 한자어로 나누어 어휘 색인을 작성하였으며, 어휘론에서는 어휘 통계, 희귀어, 빈도 높은 어휘, 오각된 어휘 등을 소개하였고, 그 밖에 음운론, 굴곡론, 조어론의 측면에서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정리함으로써 개별 문헌으로서는 상당히 정치한 연구를 이룩하였다. 박종국(1988)에서는 해제와 함께 「하권」을 영인하였으며, 정우영(1990)에서는 동시대에 간행된 『남명집언해』와 『금강경삼가해』의 표기법의 특징을 병서 표기, ㅣ모음역행동화, 연분철 표기, 현실한자음 표기 항목으로 나누어 비교 조사하였다. 김영배(2000)에서는 이 문헌의 가치와 서지를 알기 쉽게 정리하였다. 직접적인 관련은 적으나 박희숙(1978)에서는 한문본의 구결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해제」라는 글의 성격을 감안하여 4장으로 나누어 이 문헌을 소개한다. 제2장에서는 서지·편찬 경위 등 문헌을 개관하고, 제3장에서는 이 책에 나타난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공시적 특징을 정음 창제 초기문헌과 대비하면서 역사적 위상을 밝히며, 제4장에서는 앞선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 어휘들을 정리·소개하였다. 문법적인 특징은 김영신(1988)에서 소상히 다루어졌으므로 선행연구로 미루며, 좀더 구체적인 사실은 『남명집언해 상』을 역주한 김동소 교수님과, 하권을 맡은 이유기 박사의 역주 본문 해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이 점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한다.

2. 문헌 개관

2.1. 서지 사항

『남명집언해』는, 세종 때부터 기획과 번역이 시작된 것을 학조(學祖. 1432~?)가 완성하여 성종 13년(1482)에 주자본인 을해자본(乙亥字本) 상·하 2권 2책으로 간행된 언해서이다. 원간본인 가람문고본(상권)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하권)을 토대로 하여 서지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01)

<정의>좀더 자세한 정보는 남풍현(1972, 1973), 박종국(1988:81~85), 김영배(2000) 참조.

책 전체의 크기는, 상권은 33.4㎝ × 21.5㎝, 하권은 33.4㎝ × 21.6㎝이다. 각면의 네 둘레에는 굵은 줄로 테두리가 있으며[四周單邊], 테두리 안쪽 한 면의 너비[半葉匡郭]가 24.8㎝ × 17.7㎝이다. 그 안에 세로로 칸이 나뉘어져 있는데[有界] 9칸이다. 1칸 당 본문의 경우[구결문]는 큰글자로 19자, 이것의 번역문은 작은자 2줄로 19자를 쓸 수 있으며, 주해문은 1칸에 작은자 2줄로 가지런히 1자씩 비워 놓아 18자를 쓸 수 있게 돼 있다. 각면의 가운데[판심]는 상하 흰색[백구]에 상하 안쪽으로 향한 검은 지느러미 모양[상하내향흑어미]이고, 위쪽에는 책 이름 ‘南明’과 권 표시(上·下), 아래쪽에는 쪽수가 표시돼 있다. 발문의 경우는 칸의 수와 글자수가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판본(원간본)의 소장은, 가람문고(상하), 통문관 이겸로 선생(상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만송문고(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전 김석하님 소장)(하), 통문관 이겸로 선생(하) 등에게 소장되어 있으며, 중간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안병희 1979).

원간본의 영인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편집하여 단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축소 영인해낸 바 있는데, 하권이 1972년 12월, 상권이 1973년 4월에 이루어졌으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1988년 12월 『세종학연구』 3에 하권을 박종국 선생의 해제와 함께 영인·소개한 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1) 남명 상 : 합쳐 83장

가. 서문: 1077년 7월 오용(吳庸)의 서(序)와 언해문 [1-3장]

나. 본문: 한문송(漢文頌)과 언해문(1~80장) [80장]

(2) 남명 하 : 합쳐 80장

가. 본문: 한문송(漢文頌)과 언해문(1~75장) [75장]

나. 후서: 1076년 7월 축황(祝況)의 후서(後序)(75~77장)[2장]

다. 발문: 1482년 7월 한계희 발문(1~2장)

1482년 7월 강희맹 발문(2~3장)

이 책의 분량은 상권(83장)과 하권(80장)을 합쳐 모두 163장이며, 책의 중심을 이루는 한문송(漢文頌)은 상권에 156수, 하권에 164수가 실려 모두 320수가 언해되어 있다. 이 책을 15세기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서와 비교해 보면, 시기적으로도 늦게 이루어지고 분량도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역주는 물론이고 까다로운 구절이나 어휘가 여러 개 나타나 독해하기가 만만치 않으며,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어’도 여러 개 나타난다(§4 참조). 그 원인은 언해의 대상이 「증도가(證道歌)」라는 선시(禪詩)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언해 문헌과는 달리 계송(繼頌)에 대한 주해가 한문 원문이 제공되지 않은 채 그대로 우리말글로 표현돼 있기 때문에 독해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파격은 전후 문헌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데, 처음 기획과 함께 30여 수를 번역한 세종에게서 마련되어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이 한문 원문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2. 편찬 경위

이 책의 편찬 경위는 다소 복잡하다. 『남명집언해』에 실린 한계희(韓繼禧)·강희맹(姜希孟)의 발문(1482년 7월)에서 간추려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주002)

<정의>이외에 남풍현(1972, 1973), 박종국(1988:81~85), 김영배(2000:272~276)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세종 28년 3월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번역코자 하였다. 세종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중에서 「야부 송(冶父頌)」·「종경 제강(宗鏡提綱)」·득통 설의(得通說誼)」 및 『증도가남명계송(證道謌南明繼頌)』을 국어로 번역하여 「석보(釋譜)」에 편입시키려고 동궁(후에 ‘문종’)과 수양대군(후에 ‘세조’)에게 함께 찬술하라고 명한다. 「야부 송」 등 삼가해(三家解)는 초고가 끝났으나 교정(校定)은 보지 못하였고, 「남명계송(南明繼頌)」의 경우는 세종 자신이 겨우 30여 수만을 번역, 두 사람에게 그 일을 마치도록 유촉하고 1450년에 승하한다. 그 뒤를 이은 문종 또한 재위 3년만에 승하함으로써 이 사업은 수양대군에게 이어진다. 나중에 세조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석보(釋譜)』(‘월인석보’일 듯)를 간행하였으나 유촉(遺囑)이 중대하여 초초(草草)히 할 수는 없으므로 먼저 『능엄경』·『법화경』·『육조해금강경(六祖解金剛經)』·『원각경』·『심경』·『영가집』 등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였으나 「금강경제해(金剛經諸解)」와 「증도가계송(證道謌繼頌)」 등은 번역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불조(佛祖)의 무상요의(無上了義)를 중히 여겨 즉취(卽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예종 즉위년(1468)에 세조마저 승하하였고, 그 15년 뒤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의 비(妃) 자성대비(慈聖大妃) 윤씨가 세종·문종·세조 등 열성(列聖)의 홍원(弘願)을 추념하고 유업(遺業)을 끝마치기 위해, 선덕(禪德) 학조대사(學祖大師)에게 명하였으니, 『금강경삼가해』는 중교(重校)하게 하고, 『남명집언해』는 이미 세종께서 번역하신 바 있는 ‘어역남명(御譯南明)’(30여 수)을 이어서 번역·완성토록 하여, 전자는 300본, 후자는 500본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을해자로 간행, 여러 사찰에 널리 베풀도록 한다.

3.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특징

훈민정음 창제 초기 문헌들에 실현된 「훈민정음 표기법」과 1482년 『남명집언해』에 적용된 문자와 표기법을 비교해보면 30여 년 사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초기 문헌에 실현된 문자와 표기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에 나온 『훈민정음』 한문본과, 『훈민정음』 언해본 등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 구체화된 실제 표기법으로써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 장에서는 『남명집언해』 상·하권에 나타난 문자·표기법과 음운의 공시적인 특징을, 국어표기법의 역사적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살펴 이 책의 역사적 위상을 짚어보고자 한다.

가장 큰 특징으로, 『남명집언해』에는 국어 표기와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법이 서로 다른 표기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어 표기에 필요한 문자·표기법으로는 순경음 비읍(ㅸ)과 ‘ㄲㄸㅃㅉㅆㆅ{ㅇㅇ}ㅥ’ 등 각자병서, 그리고 ‘ㆆ’을 거론할 수 있겠고, 한자음 표기법에서는 각자병서와 ‘ㆆ’, 종성의 ‘ㅭ, ㅱ’을 거론할 수 있겠다. 항목별로 나누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1. 〈ㅸ〉의 표기

국어 표기에 쓰인 ‘ㅸ’은,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라면 (3나)처럼 ‘ㅸ’으로 활발히 나타날 예들인데, 이 문헌에서는 (3가)처럼 완전히 폐지되어 ‘오/우’ 또는 후음 ‘◦’로 교체되었다. 용례에서 ‘ㄱ·ㄴ’은 앞면·뒷면을 가리키며, 약호는 쓰지 않고 출처만 밝힌다. 이하 모두 같다.

(3) 가. 가온(하 16ㄱ), 어드운(하 77ㄴ), 놉가이(하 42ㄱ)

나. 가(월 14:80), 어드(용 30장), 놉가(월 2:40)

‘ㅸ’은 『훈민정음』의 본문 17초성 체계에 들어 있지 않고, 본문의 표기 규정과 「정음해례」 제자해에 표기 및 조음 방법에 대해 설명되었으며 그 예는 용자례에 올라 있다. 이 문자는 세조 7년(1461)에 간행된 활자본 『능엄경언해』에서부터 폐지되고, 이듬해인 1462년 목판본 『능엄경언해』를 비롯한 후대 문헌에서 그대로 계승되어 우리말 표기에서 자취를 감춘다. 주003)

<정의>총 10권인 『능엄경언해』에서 두어 예밖에 없다. (礫. 능엄 5:72ㄱ)(모두 3회), 구결문에서 객체높임 선어말어미 ‘--’(無上悲誨. 능엄 7:7ㄴ) 정도가 고작이다. 그 후 『구급방언해』(1466), 『목우자수심결』(1467), 『속삼강행실도』(1514) 등에 극소수의 예가 불규칙하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사에서 연서법(連書法) 폐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제1차 표기법 개정으로 해석된다. 세종과 정음학자들이 ‘ㅸ’자를 제정·사용한 것은, 당시 ‘오/우/◦’ 등으로 실현되던 중앙어형―한양말을 비롯한 중·남부 일부, 그리고 서북방언―과 ‘ㅂ’으로 실현되던 방언형―동남 및 동북방언―을 절충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으로서, 세종의 ‘正音’ 사상을 구체화하는 문자·표기체계의 한 구성요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正音’이란 용어의 정확한 정의는 『홍무정운』 범례와 『훈민정음언해』, 그리고 「석보상절서」에 나타나 있는데, 이들을 종합하면 ‘동일 언어공동체 안에서 지역적(방언적) 차이를 초월하여 통해(通解)할 수 있는 正한 소리이자 그렇게 발음하도록 제정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ㅸ’은 이상적인 표준음으로 국어를 통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절충적 표준음 표기이며, 주004)
<정의>이에 대하여는 남광우(1959), 서정범(1982), 김동소(1998:112), 조규태(1998:122-3), 정우영(2002)을 참조할 것.
실제로는 당시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적 음소로 규정된다.

이 문자를 제정한 의도와 목적은 순수하고 이상적이었지만 비현실적·가상적 존재를 다수 언중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게 된 것이고, 결국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한양말의 현실발음을 토대로 세조(世祖)의 주도 아래 ‘ㅸ’을 폐지, 『능엄경언해』(전10권) 활자본과 목판본을 통해 언중에게 개정 공표하게 된다. ‘ㅸ’이 『남명집언해』에서 ‘오/우/◦’로 완전히 교체된 표기로 통일되게 실현된 것은 제1차 표기법 개정안을 적용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3.2. 〈ㆆ〉과 각자병서

국어 표기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4) 가. 아롤디니라(상 8ㄴ), 몯 사(상 17ㄴ), 볼 저기(하 42ㄱ).

가’. 아디니라(석19:10ㄴ), 이 사(석6:2ㄴ), 나 저긔(석3:26ㄴ)

나. 디날 길(하37ㄱ), 아롤디니라(상8ㄴ), 일홀배(所事)(서1ㄱ), 딜제(상62ㄴ), 그럴(상17ㄴ). 사호거늘(상69ㄴ), 스고(冠.상30ㄴ), 혀(引. 상8ㄴ), 도혀(하67ㄱ), 얽이디(상6ㄱ)

나’. 오실 낄(월7:9), 홀띠니라(영가,서3), 몯홀빼라(법화1:160ㄱ), 니실쩨(금강,서6), 그럴(석9:14ㄱ). 싸호미(석23:55ㄱ), 쓰고(월10:95), (引.정음해례:합자), 도(석6:5), 얽다(월13:9ㄴ)

다. 둘짯(상3ㄱ)(총77회), 세짯(상4ㄱ)(총50회), 네짯(상5ㄱ)(총77회) 모두 204회.

다’. 둘찻 (금삼 4:28ㄴ), 세찻(금삼 2:33ㄱ), 네찻(금삼 2:33ㄱ)

(4가나다)는 『남명집언해』에 적용된 표기법이요, (4가’나’)는 정음 초기문헌부터 1464년에 간행된 한글문헌에 적용된 예들이고, (4다’)는 1482년 『금강경삼가해』에 나타난 예들이다.

항목별 대비로써 『남명집언해』에는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것의 공식적인 폐지는 『원각경언해』(1465년. 전 10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가’)와 같이 ‘ㆆ’이 있는 표기에서 (4가)처럼 ‘ㆆ’을 없앤 표기가 신미(信眉)가 번역한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경)의 구결문 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편, (4나’)와 같이 각자병서로 적었던 표기를 (4나’)처럼 단일자로 적기 시작한 것은 『능엄경언해』 활자본(1461) 구결문에서부터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조 10년(1464) 『선종영가집언해』를 비롯한 불경언해의 구결문에 오면 ‘ㆆ’이든 각자병서든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 원칙은 세조 11년(1465) 『원각경언해』에 와서, 구결문은 물론 언해문(한자음 표기는 제외)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학계에서는 이런 표기법의 개정을 “급격한 변화, 극적인 변화, 과잉조처…” 등으로 기술해오고 있다(지춘수 1986, 이익섭 1992).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는 1450년대 말 구결문에서부터 시험 운용되어 적어도 5, 6년간의 시험기를 거쳐 혼란과 불편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문자·표기체계면에서 볼 때, 1465년 『원각경언해』에서 행해진 ‘ㆆ’과 각자병서[전탁] 폐지는 간소화되기는 하였으나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는 손대지 못한 상태이므로 미완(未完)의 개정(改定)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정우영 1996, 2002). (4가나)와 같은 국어 표기에서 ‘ㆆ’과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은 것은 원천적으로 1465년 『원각경언해』에서 규범화된 원칙에 따른 결과이다.

그런데 문헌의 기획·착수와, 간행 연대가 같은 『금강경삼가해』와는 달리 (4다)처럼 일부 어휘에서 각자병서 ‘ㅉ’이 쓰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책의 편찬 경위(§2.2)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야부 송」 등 삼가해(三家解)는 초고가 끝났으나 교정(校定)은 보지 못하였고, 「남명계송(南明繼頌)」의 경우는 세종 자신이 겨우 30여 수만을 번역하였고,…(중략)…어역남명(御譯南明)을 이어서 번역·완성토록…”하였다는 사실을 정리하면, 『금강경삼가해』는 초고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고, 『남명집언해』는 세종이 번역한 30여 수만을 물려받았으므로, 이 일을 위임 받은 학조(學祖)로서는, 전자는 당시 표기법에 준하여 교정하고 간행하면 그만이지만, 후자는 ‘세종이 남긴 일부 번역된 원고’에 체재를 맞추어 속역(續譯)하고 간행해야 하므로 ‘어역남명’의 중압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지 않았을까? (4다)에 제시한 ‘둘짯, 세짯, 네짯’ 등 서수사는 세종이 쓴 번역어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005)

<정의>세종 재위시에 나온 문헌에서 ‘둘찻’ 같은 예가 일반적으로 쓰이긴 하나, 『석보상절』에서 ‘닐웻자히(석24:28ㄱ)~닐웨짜히’(석24:15ㄱ) 같은 예도 출현하므로 ‘둘짯, 세짯, 네짯’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다 『원각경언해』(1465년)에서 행해진 각자병서의 일괄 폐지가 현실 언어음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학조 개인의 문자·표기관이 이들 어휘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런 추측은 1485년 학조에 의해 언해된 것으로 보이는 『관음경언해』와 『영험약초』에 “써(書. 관음,상4ㄴ. 영험14ㄱ), 눈(睛. 관음,상4ㄱ. 영험4ㄱ), 연와(관음,하13ㄴ)” 등과 같은 각자병서 표기가 예외적으로 출현하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되는 일이다.

3.3. 한자음 표기

동국정운 한자음을 표기하려면 국어 표기법(§3.2)과는 달리 더 많은 문자가 필요하고, 따라서 표기법도 달리 운용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반영된 구체적인 용례를 (5가-다)에 제시한다. 편의상 방점은 줄인다.

(5) 가. 一定(하 18ㄴ), 王孫손(하 7ㄴ)

나. 權꿘(하36ㄱ)/定(하18ㄴ)/菩뽕(하14ㄴ)/字(하18ㄴ)/實(하19ㄴ)/和(하19ㄴ)

다. 吉(하 14ㄴ), 句궁(하 19ㄴ), 草(하 15ㄱ)

(5가나)에 든 초성의 표기에서, (5가)는 ‘ㆆ, (옛이응)’이 쓰인 것이고, (5나)에는 전탁음에 해당하는 각자병서 ‘ㄲㄸㅃㅉㅆㆅ’이 쓰인 것이며, (5다)에는 종성 표기로서 이영보래(以影補來)의 ‘ㅭ’과 후음 ‘◦’ 그리고 ‘ㅱ’이 쓰인 것이다. 국어 표기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ㆆ, ㅭ’, 각자병서, 그리고 연서법(連書法)으로 만들어진 순경음(ㅱ)이 동국정운음에 쓰인 것이다. 이것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특성이기도 한데, 정음 창제 초기문헌에 적용된 원칙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훈민정음 표기법」이 몇 차례에 걸쳐 개정 작업이 있어 왔지만 한자음 표기법만은 아직 근본적인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명집언해』에 나타난 것처럼, 국어 표기와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법이 서로 다른 체계로 운용되는 것은 독자와 표기자 모두에게 편안한 문자생활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부담이 된다. 국어표기법의 역사에서, 이런 불편함은 1496년 『육조법보단경언해』(3권)와 『시식권공언해』에 이르러 해소되는데, (5가-다)에 쓰인 동국정운 한자음은 조선 전통한자음[東音]으로 완전히 교체·개정됨으로써 명실공히 “편어일용(便於日用)”할 수 있는 표기법으로 정착된다. 『남명집언해』는 현실음으로의 간소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대세와 세종대에 시작되어 문종·세조를 거쳐 이어진 유업을 마치기 위해 진행된 번역 사업이라는 특수한 내부 사정이 개입된 문헌이므로 국어 표기는 개정된 표기법을, 한자음 표기법은 의고적인 표기법을 유지하여 이원적인 문자·표기체계로 운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15세기 한글문헌 중에서 『남명집언해』 한자음 표기의 특징으로 꼽을 것은, 한자에 독음을 달지 않고 빈칸으로 처리한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6) 가. 巍巍 놉고 클시라(하 37ㄱ) cf. 巍巍(곡 1장). 巍巍(월1:1)

나. {毛+瑟}{毛+瑟} 金터리   時節에(하 35ㄴ)

{憨+鳥}{憨+鳥} 고기 자바 먹 새라(하 60ㄱㄴ)

15세기 관판의 한글문헌에서 한자음 표기는 국한혼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동국정운 한자음을 한자 바로 아래에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책에서도 그 원칙은 철저히 지켜진다. 단적인 예로 (6가) ‘巍’자에 대한 독음 표기에서 확인된다. ‘巍’의 동국정운 한자음은 巍[](정운5:37ㄱ)이고 동국정운 한자음 그대로 주음되어 있다. 그런데 초기문헌인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에서는 어떤가? 巍[/]로 주음되어 있다. 동국정운음이 정확할 것으로 예측은 되지만 평성 []음에 소속된 한자를 『동국정운』에서 찾아보면 예상과는 다르다. [/]음에 소속된 한자는 모두 6자인데 ‘巍’자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월인천강지곡』과 『월인석보』에 주음된 한자음이 잘못된 것임이 확인된다(정우영 1996:88). 이것은 『동국정운』의 원고 완성과 해당 문헌들의 간행 시기가 맞물려 있었던 데 원인이 있는데, 한자음 적용 초기에 발견되는 오류의 하나로 지적된다.

(6나)는 동국정운음을 독음으로 표기한 15세기 한글문헌 중 유일하게 한자에 독음을 달지 않은 예이다. 한자가 없는 것을 필자가 중괄호({ })로 묶어 제시하였는데, {毛+瑟}과 {憨+鳥}로 짜인 한자이다. 이들은 모두 형성자로 파악되며, 털이 나부끼는 모양을 표현한 {毛+瑟}자의 동국정운 한자음은 *[·]일 가능성이 크고, {憨+鳥}자는 새의 한 종류로서 음은 *[: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는 성부(聲部)에 해당하는 ‘瑟’의 동국정운음이 [·](정운2:19ㄱ)이고, 후자의 성부 ‘敢’은 [:감]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憨+鳥}에 연결된 보조사가 ‘’이므로 이 조건에 맞으려면 모음조화에 맞고 받침이 있는 소리여야 하는데 [:감]이면 이 조건에 부합된다. (6나)에서 한자음 부분을 빈칸으로 처리한 것은, 근본적으로 한자음 사전인 『동국정운』의 양적인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僻字)이므로 정확한 한자음을 알지 못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동국정운』에는 총 18,775자의 한자가 실려 있는데 15세기 한글문헌에 나타난 한자를 모두 수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문헌에도 빈칸으로 처리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만에서 간행된 10권 분량의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도 이들 한자는 실려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주006)

<정의>중문대사전 편찬위원회(1974)의 『中文大辭典』(1-10권)에도 이 글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표기자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한자의 형성 원리로써 이 한자음들을 짐작할 수는 있었겠지만 정확한 동국정운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빈칸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한자 독음 가운데 특히 불교 용어 및 인명 표기에 적용된 한자음에 대하여 살펴보자. 15세기에 간행된 관판의 불경언해서에 적용된 한자음은 동국정운음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7가-라)와 같은 용어는 몇 차례 수정된 적이 있다(정우영 1996:92~99). 제1차 수정은 1463년 『법화경언해』에서 이루어졌는데, (7)의 왼쪽음―1447년 『석보상절』부터 1462년 『능엄경언해』까지의 한자음―이 모두 오른쪽 음으로 수정되었다.

(7) 가. 解脫 [:갱·] 〉 [:·] (법화 3:140)

나. 般若 [반:] 〉 [·:] (법화 5:188)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녹당랑삼·막삼뽕똉] 〉 藐[·먁] (법화 1:37)

라. 阿難 [난] 〉 [·난] (법화 1:30)

제1차 수정 한자음은 『법화경언해』 이후 불경언해서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이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 이 한자음으로 어떤 문헌의 간행연도를 추정하는 단서를 삼기도 한다. 불교용어 한자음에 대하여 불교계의 오랜 독법을 근거로 삼거나, 범어의 원음에 가깝게 적기 위해 고친 점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 음역어를 원음에 가까운 한자로 바꾸는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기존 용어는 그대로 두고 한자의 독음만 원음에 가깝게 바꿈으로써, 한자어는 동국정운 한자음을 독음으로 표시한다는 관판문헌의 한자음 표기원칙에서 크게 일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2차 수정안은, 세조가 승하하고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후 1480년대 중반까지 나온 불경언해에 적용되었는데, 그 내용은 (8)처럼 『법화경언해』 이전의 한자음으로 회귀하였다.

(8) 가. 解脫 [:·] > [:갱·] (남명,상 35ㄱ)(금삼 1:3)

나. 般若[·:] > [반:] (남명, 상 61ㄱ)(금삼 1:13)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녹당랑삼·먁삼뽕똉] >藐 [·막](남명집.없음)(금삼 3:56)

라. 阿難 [·난] > [난] (남명, 하 4ㄴ)(금삼 1:34)

(8)에 보이듯이, 『남명집언해』와 『금강경삼가해』는 1463년 이전 한자음으로 주음되어 있다. 회귀의 주된 원인은, 제1차 한자음 수정안에 대한 부정적 시각, 즉 한자 음역어는 그대로 놓아둔 채 한자음만 범어 원음에 가깝도록 바꿈으로써, 결국 관판문헌의 한자음 표기원칙을 어기게 되고 끝내는 새 한자음이 실린 운서가 없다는 부정적 견해가 작용한 듯하다. 여기에 세조의 승하(1468년)와 간경도감의 폐지(1471년) 등 불경언해 사업의 중심 세력이 와해됨으로써 불교 용어 등 한자음 수정 작업이 더 이상 추진될 수 없게 되자 초기문헌에서 적용했던 대원칙으로 환원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한자음 표기와 관련하여, 어원상 한자어임이 분명한 경우라도 동국정운음으로 적지 않은 예들이 (9)처럼 나타나는 문제이다. (어원 한자는 다른 문헌에서 찾은 것이다.)

(9) 곡식(穀食, 하30ㄴ), 긔운(氣運. 상25ㄱ), (長常. 상54ㄴ)

미혹(迷惑. 상48ㄴ), 시혹(時或. 상69ㄴ), 화로(火爐. 하69ㄱ) 등.

(9)에 든 한자음을 한자와 일대일로 맞세워 낱개로 나눈 다음 해당 한자음을 조사하면, 동국정운음이나 홍무정운역훈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1476년경의 『수구영험』과 1496년 『육조법보단경언해』·『시식권공언해』, 그리고 1527년 『훈몽자회』에 실린 한자음과 일치한다. 이 문헌들은 공통적으로 조선 전통한자음[東音〕문헌이므로 『남명집언해』에 한글로만 표기된 한자어의 독음은 국어에 동화된 대로의 현실한자음임이 분명하다. 이 같은 현상은 『석보상절』 등 초기 문헌부터 나타나며 이 문헌에만 해당되는 특징은 아니다. 한자어를 한자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독해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표기자와 독자 모두에게 공통된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판의 한글문헌에서 동국정운 한자음을 철저히 주음하면서도, 이에 대립되는 (9) 같은 표기가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국가 기관에서 목표하던 바와는 달리 실제 언어사회에서는 조선 전통한자음이 널리 통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로써 당시 한자음 체계는 동국정운음과 현실한자음의 이원적 체계로 운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3.4. 방점 표기

『남명집언해』에도 방점은 0점(평성)·1점(거성)·2점(상성)의 세 종류가 표시되어 있으나, 정음 창제 초기문헌들의 표기와 비교하여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10)(11)을 보자.

(10) 가. ·첫소·리· 어·울·워 ··디·면 · ·쓰·라(훈언12ㄴ)

나. 부:톄 :나· :어엿·비 너·기·샤 :나· ·보·게 ·쇼·셔(석6:40ㄴ)

(11)가. :모딘 :마 :보 ·다·가 :말 :업슨· :알면 理ㅣ 기·우디 아·니·리라(상ㄴ)

나. 어·루 無心로 救·티 :몯·리라 ·시라(하29ㄱ)

(10)은 초기문헌인 『훈민정음언해』와 『석보상절』에서 뽑은 예이고, (11)은 이 책에 쓰인 예이다. (10가나)에서 보듯이,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활용어미가 통합하여 하나의 어절을 형성할 때 어절의 마지막 음절이 모두 1점(거성)으로 실현되었다. 오늘날 어절 단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11)에는 창제 초기문헌에서라면 어말에서 1점이 찍혀야 할 곳에 0점으로 나타난 예가 여럿 발견된다. (11가)를 모두 10어절로 파악할 때 ‘말, 理ㅣ’를 제외한 8개 어절에 1점이 찍혀야 하는데 기껏 2개만 찍혀 있으며, (11나)에서는 5개 어절 중에서 2개만 제대로 찍혀 있다. 좀더 자세한 사정은 문헌별 조사가 완료된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11)만으로도 어절말에서 1점으로 표시되던 것이 0점으로 변화해 가는 추세에 있는 대체적인 경향은 파악할 수 있다. 이 현상을 ‘어말 평성화’라고 보아 언중의 발음 현실에 나타난 성조 변화의 반영으로 이해해야 할지, 단순하게 표기법의 변화로만 이해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 어려우나, 어떤 경우라도 방점 표기법을 고안해낸 정음 창제자의 의도와 「훈민정음 표기법」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고, 국어사적인 안목으로 방언 현상까지 고려한 포괄적인 해석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1464년 『선종영가집언해』의 방점 표기에 나타났던 ‘어절말 거성의 평성화’ 경향이 점차 확산되어, 1482년 『남명집언해』에 이르러서는 그 경향이 확대 일로에 있고 점차 체언이나 용언의 의미부(어휘부)에다 방점을 찍어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5. 연·분철 표기

이 책에는 여전히 연철표기가 주조를 이루고는 있지만 분철 표기가 활발히 쓰인다는 점에서 앞선 문헌들과 차이가 있다. 이를 종성별로 구분하여 몇 예만 들어본다(정우영 1990).

(11) 〈-ㄱ〉: 밠가락(상50ㄱ), 北녁의(하45ㄴ). 〈-ㄴ〉: 소진이(상67ㄱ), 눈으로(하38ㄱ)

〈-ㄷ〉: 으로(상1ㄴ). 〈-ㄹ〉: 믌결(상72ㄱ), 얼굴이라(하21ㄱ). 〈-ㅁ〉: 구룸의(상3ㄱ), 로(하63ㄱ). 〈-ㅂ〉: 집(하20ㄱ). 〈-〉: 굴에(상60ㄱ), 스을(하46ㄴ). 〈-ㄺ〉: (상35ㄴ), 두듥엣(하30ㄴ). 〈-ㄼ〉: 여듧에(하65ㄱ)

(11)은 종성이 ‘ㄱㄴㄷㄹㅁㅂ’인 체언 뒤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가 오더라도 연철하지 않고 분철한 예들이다. 예가 적기는 하지만 종성이 ‘-ㄺ, -ㄼ’인 경우도 발견된다. 체언과 조사의 통합에서만 나타나며, 『월인천강지곡』에서처럼 용언의 활용에까지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분철표기는 의미부를 일정한 시각적 형태로 고정시켜 적음으로써 독해를 좀더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런 경향은 한문에 구결을 달아 쓰는 문자생활에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1)에서 ‘-’ 종성의 예는 정음 창제 초기 문헌에서는 ‘’을 초성으로 연철하는 경향이 뚜렷하던 어휘인데, 주007)

<용례>¶굴허  디내샤(용가48장), 스스 자(능엄경언해,발6).
이 책에는 종성으로만 적었다. 정음 초기 문헌부터 예외 없이 초성 표기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이긔, 다’ 정도였다.

4. 어휘

『남명집언해』에 나타난 어휘는 모두 3,356 단어라고 한다. 그 중 고유어는 1,268개, 한자로 표기된 한자어휘는 1,747개, 한자 어근에 ‘-, -롭-’ 등 고유어 접미사가 결합된 어휘는 336개, 한자어와 고유어로 합성된 어휘는 5개로 조사되었다(김영신 1988:201~2).

이 중 고어사전과 각종 국어사 자료들을 검색하여 출현 빈도가 드문 어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각 어휘 항목은 표제어-현대어 풀이-해당 문장-출처(장수) 순서로 제시하며, 표제어와 표제어가 들어 있는 어절에는 방점을 표시한다. (가나다 순서임.)

(1) ·곡·식:곡식(穀食). ¶飢 ·곡·식 업슬시오 饉  업슬시라(하30ㄴ) cf. 穀·곡食·씩(석24:7ㄴ)

(2) :깁·옷:비단옷[絹衣]. ¶天人이  적 려와 :깁·옷 닙고 뎌 돌 러(상61ㄱ)

(3) ··히:겹겹이[疊疊]. ¶여러 터럭 師子ㅣ  터럭의 다 드러 ··히 서르 비취여 나콰 여러쾌 룜 업서 두 面ㅅ 거우룻 像이 ··히 섯거 비취니(상75ㄴ, 상76ㄱ)

(4) 나모·신:나막신[木履]. ¶天台 寒山子…(중략)… 곳갈 고 나모·신 ·고(하8ㄱ)

(5) 도랑:옴. 개선(疥癬). ¶도 머근 가히와  무든 도(疥狗泥豬)(상4ㄴ)

(6) 도·태:도롱태[鷂.요]. 새매.¶머리 두르혀면 도롱·태 新羅 디나리라(󰜇子ㅣ過新羅리라)(상5ㄴ)

(7) :뒤좇-: 뒤좇다.¶衆이 :뒤좃·니 엄과 톱과 갈모미 어려워(衆隨後니 牙爪 難藏이라)(하36ㄴ)

(8) -:뚫다[穿.천] ¶·귀 온 :되:즁이 그기 彈指다(彈耳胡僧이 暗彈指다)(하11ㄱ)

(9) 멱:멱[吭.항]. 목의 앞쪽. ¶臨濟ㅣ 禪床애 려 멱 잡고 니샤(하16ㄴ)

(10) 묏부·우리:멧부리[岑.잠]. ¶구루미 묏부·우리·예 나 東西예  업스며(상3ㄱ)

(11) 밑·드리:철저(徹底)히. ¶三四句 믿·드리 ·조·야 凡情과 聖解왜 다 업서 죠고맛 것도 다 바사 릴시라(상31ㄴ)

(12) ·봇곳·갈:벚나무 껍질로 만든 고깔[樺皮帽]. ¶原憲이 ·봇곳·갈 스고 헌옷 닙고 나거늘(상30ㄴ)

(13) 봇닳-:볶고 달이다.¶三途諸子ㅣ 날로 봇달커·늘(三途諸子ㅣ日焚燒커늘)(하47ㄴ)

(14) 브르돋-:부르돋다[剛]. ¶ 여위여시들오  브르도·다(貌顇骨剛야)(상30ㄱ)

(15) 비·릇:비롯됨[始初]. ¶녯  비·릇 :업시 오로 곡도 며 거츤 몸과 괘니(상75ㄱ)

(16) 사만:사뭇. 늘. ¶어믜 나혼 헌 뵈젹삼 니브니 劫火 몃마 디내야뇨마 사만 이··도다(著簡孃生破布衫니 幾經劫火야뇨마 長如此도다)(상31ㄱ)

(17) :고·개:소의 고개[牛項]. ¶頑皮靼 :고·갯 장 둗거운 가치니(하58ㄱ)

(18) 수·늙:고개[嶺]. ¶東녁 수·늘게 구루미 나니 西ㅅ녁 수·늘기 ·하야·고(東嶺에 雲生니 西嶺이 白고)(하19ㄱ)

(19) 싀·서늘·-:시도록 싸늘하다[酸寒]. ¶알피 티며 싀·서늘·호미 百萬 가지니(痛楚酸寒이 百萬般이니)(하32ㄱ)

(20) ·:떨기[朶]. ¶이  · 고 불휘 沙界예 서리오 니피 須彌 둡 젼니(하55ㄱ)

(21) :애-:애달프다[憤]. ¶憤 미 :애올·시오(하43ㄴ)

(22) :어둑:많이[多]. ¶中下 만히 듣록 :어둑 信티 아니니(中下 多聞록 多不信니)(상36ㄴ)

(23) 여·위시·들-:여위고 힘이 없다[悴.췌]. ¶天台寒山子  여·위시·들오 뵈오시 다 러디고(하8ㄴ) cf.  여·위여시·들오(貌顇)(상30ㄱ)

(24) 움·지혀-:움츠리다[縮]. ¶혓그틀 움·지혀· 비르서 能히 펴리라(縮却舌頭야 始解宣리라)(하18ㄱ)

(25) 이셔지:비슷이. 방불(髣髴)히. ¶눈 이시·면 이셔지 :옴·도 能히 몯려니와(有眼면 不能窺髣髴이어니와)(상65ㄱ)

(26) 일·이-:가려지다. 일어지다[淘].¶眞化애 일·이디 몯 나 도혀 혜아룐(翻想未淘眞化日혼)(하63ㄱ)

(27) 자·치-:잦아들게 하다. ¶우·룸 자·친 누·른 ·니피 거즛거신 알리라(止啼黃葉이 知虛妄이리라)(상44ㄴ)

(28) 자·히-:재다[候].¶쇽졀업시 것근 솔옷 자바 녀트며 기푸 자·히·다(徒把折錐야候淺深다)(하20ㄴ)

(29) 저·욼가:돈:저울의 가늠쇠[分銅]. ¶定盤星 저·욼가:도니·라(하43ㄴ)

(30) 저·치-:걸리다[累]. ¶뎨 엇뎨 말와 데 저·쳐 ·호미 아니시리오(彼豈累於言意爲哉리오)(서2ㄴ)

(31) ·샇-:차곡이 쌓다(?) ¶그 해 金을 게 혀 ·사·하 주고 사실 뎌 金田이라 니라(하59ㄴ)

(32) ·하·야반반·-:하얗게 반짝반짝하다. ¶三四句 가 寥寥며 ·하·야반반·야 조 디니 구슬 어든 고 니시니라(상23ㄴ)

(33) ·귀:햇귀[暉.휘] ¶녀르멘 더·운 ·귀 잇고 겨렌 누니 잇니라(夏有炎暉코 冬有雪니라)(하57ㄱ)

(34) 헌·:야단스럽게 떠듦(?). ¶寒山이 니샤 豊干 헌·라 ·시·니 그러면 이티 論量홈도  헌·라 ·시라(하8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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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신, 「동국신속삼강행실의 국어학적 연구」 『부산여자대학논문집』 9, 1980

신성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규범성, 국어문학회, 국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 2009

이병도, 『동국신속삼강행실』-해제-국립중앙도서관, 1995

이숭녕, 「동국신속삼강행실에 대한 어휘론적 고찰」 『국어국문학』 55·57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97

전재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색인」 『동양문화연구』 2, 경북대학교동양문화연구소, 1997

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진단학회, 진단학보 8, 1998, 185-227.

정복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건)의 조어법」 『수련어문논집』, 부산여자대학, 1997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신, 「동국신속삼강행실의 국어학적 연구」 『부산여자대학논문집』 9, 1980

신성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규범성, 국어문학회, 국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 2009

이병도, 『동국신속삼강행실』-해제-국립중앙도서관, 1995

이숭녕, 「동국신속삼강행실에 대한 어휘론적 고찰」 『국어국문학』 55·57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97

전재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색인」 『동양문화연구』 2, 경북대학교동양문화연구소, 1997

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진단학회, 진단학보 8, 1998, 185-227.

정복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건)의 조어법」 『수련어문논집』, 부산여자대학, 1997

『목우자수심결언해·사법어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학교 교수)

1. 서론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지은 한문본 『수심결(修心訣)』을 조선 세조 때 신미(信眉)가 우리말로 언해하여 1467년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책이다.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의 서두에서 삼계(三界)의 고뇌를 ‘화택<세주>(火宅=불난 집)’에 비유해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부처[佛]를 이루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心]이 참 부처이고 자기 성품[自性]이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해 밖에서만 찾는다고 하고, 마음[心]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을 9문 9답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지눌은 이 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체계화하였는데, 분량이 적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선수행(禪修行) 지침서이자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의 이름은 작자인 지눌의 호(號) ‘목우자(牧牛子)’를 앞에 붙여 ‘목우자수심결’이라 부르나,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일반적으로 『목우자수심결언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글의 예문 설명에서는 판심제에 따라 ‘수심결’로 줄여 부르기로 한다.)

한편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晥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등 4편의 법어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당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권수제는 ‘法語’이나 후대에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된 책에서 권말서명이 ‘四法語’로 나타나므로 학계에서는 흔히 ‘사법어(四法語)’라 부른다.

이 두 책은 1467년(세조 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합철되어 있어서 판식(板式)이나 체재 등에서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인다. 그러한 형태적 유사성은 국어학적 특성의 유사성으로까지 이어진다. 『목우자수심결언해』와 『사법어언해』는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표기법이나 문법, 어휘 면에서 흥미로운 양상을 많이 보여준다.

이 책들보다 먼저 간행된 책에서는 이미 사라진 ‘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든가, 다른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는 문법적 특성이 보인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사법어언해』는 총 9장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헌에 없는 희귀어가 여러 개 사용되어 어휘 면에서도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서지 사항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내제(內題) 다음에 2행에 걸쳐 ‘丕顯閤訣 慧覺尊者譯’이라고 되어 있어서 동궁(東宮)의 편당(便堂)인 비현합(丕顯閤)에서 구결을 달고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언해본은 번역자의 이름을 책에 밝히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목우자수심결언해』는 번역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특이하다. 이는 뒤에서 살필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도 마찬가지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원간본에는 그 앞에 『사법어언해』가 합철되어 있다. 이 책의 끝에는 “成化三年丁亥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 … 安惠柳睆朴耕書”라는 간기가 있으므로 1467년(세조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되었다는 것과 판하본(板下本)의 글씨를 안혜(安惠)·유환(柳睆)·박경(朴耕)이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복각되기도 하였는데, 1500년(연산군 6년)에 간행된 중간본은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후 간기를 따로 붙인 것이다. 원간본인 간경도감판에 비해 판식과 판각, 인쇄가 매우 엉성하다. 봉서사 중간본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가 합철된 것과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이 합철된 것 두 가지가 있다. 두 책 모두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권말에 나오는 간기가 ‘弘治十二年’으로 되어 있으나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과 합철된 책의 권말에 ‘弘治十三年’이라는 간기가 뚜렷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十三’에서 탈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서사에서 간행된 중간본은 후쇄본까지 있어 꽤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경도감판인 원간본은 목판본으로서, 불분권(不分卷) 1책(冊)이며 크기는 23.1×17cm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8×12.8㎝이며 유계(有界)에 9행 17자이다. 판심(版心)은 상하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다. 권수제(卷首題), 권말제는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고 판심제(版心題)는 ‘수심결(修心訣)’이다.

현재 원간본은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一簑 古貴 294.315-J563ma, 보물 770호)와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목우자수심결 도서번호 : L174361)에 소장되어 있고, 봉서사에서 간행된 중간본과 그 후쇄본이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에는 일사문고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한편,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10장 내외의 적은 분량이어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것은 『목우자수심결언해』와 합철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문고본이다. 소창문고본(사법어 도서번호 : L174529)도 일사문고본과 같은 책이지만 후대에 『사법어언해』 부분만 따로 제책한 것이다.

그런데 『사법어언해』는 간기가 따로 제시되어 있지 않아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법어언해』의 간기로 그 간행 연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일사문고본 『목우자수심결언해』 권말의 “成化三年丁亥歲 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라는 기록을 통해 『사법어언해』의 원간본도 1467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책은 각 법어(法語)에 구결을 달아 원문을 먼저 싣고 우리말 번역을 보이는 체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후에 지방의 사찰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500년(연산군6년)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후 간기를 따로 붙여 간행하였고, 1517년(중종 12년)에 충청도 연산(連山) 고운사(孤雲寺)에서 체제를 바꾸어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하여 중간하였다. 고운사판은 합철된 『몽산법어언해』의 체재와 같이 법어를 대문으로 나누어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간경도감 판본과 차이가 있다. 이후 1525년(중종20년) 황해도 황주(黃州) 심원사(深源寺), 1577년(선조 10) 전라도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1605년(선조38년)에 원적사(圓寂寺) 등에서 다시 간행된 『사법어언해』는 고운사판의 체재와 동일하다.

『사법어언해』 원간본의 판식(板式)은 『목우자수심결언해』 원간본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총 9장으로 크기는 23.1×17cm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8×12.8㎝이며 유계(有界)에 9행 17자이다. 한글 구결과 언해는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대부분의 간경도감본과 마찬가지로 상하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며, 권수제와 판심제는 ‘法語’로 되어 있다. 고운사 계통의 중간본은 총 13장이며, 사주단변(四周單邊)인 것이 많고 7행 18자이다. 그러나 송광사본은 총 27장에 7행 15자이다.

현재 원간본은 규장각 일사문고에 2부,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에 1부가 전하며 중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을 비롯한 공사립 도서관과 개인소장으로 다수가 전한다. 1973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일사문고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합철)과 고운사판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이 출판되었다. 또한 1979년에는 홍문각에서 『오대진언(五大眞言)』과 합본된 송광사판 영인본이 출판되었다.

3. 표기법 및 음운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의 원간본인 간경도감판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주001)

여기에 제시하는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국어학적 특징은 이현희 외(1997)의 내용을 많이 참조하였다. 형태나 통사, 어휘의 특징 등은 이현희 외(2007)의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 많다. 출처의 약호는 『목우자수심결언해』는 ‘수심결’로, 『사법어언해』는 ‘법어’로 하며, 해당 장의 앞·뒷면은 각각 ‘ㄱ·ㄴ’으로 구별 표기한다.

이 두 언해본의 표기법 및 음운의 특성은 거의 유사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 등도 쓰였는데 ‘ㅿ’의 쓰임에는 혼란이 없다. ‘ 업순’〈수심결19ㄴ〉과 ‘이’〈수심결45ㄱ〉, ‘에’〈법어8ㄴ〉에서처럼 ‘ㅿ’이 종성에만 적히는 것과 ‘저’〈법어2ㄱ〉, ‘디녀’〈법어2ㄱ〉, ‘지’〈법어2ㄱ〉, ‘나믈릴’〈법어5ㄴ〉, ‘매’〈법어6ㄱ〉, ‘오’〈법어6ㄴ〉에서처럼 초성에 적힌 것이 모두 보인다. 한편, ‘ㆁ’은 ‘이’〈수심결19ㄱ〉〈법어2ㄱ,7ㄴ〉, ‘디니노다’〈법어2ㄱ〉, ‘스스’〈법어6ㄴ〉, ‘스이’〈수심결15ㄱ〉〈법어9ㄴ〉, ‘’〈법어6ㄱ〉, ‘’〈수심결19ㄴ〉에서처럼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였다. ‘ㆁ’의 연철 표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가장 철저히 지켜졌는데 대개 『두시언해(杜詩諺解)』(1481)를 기점으로 ‘ㆁ’ 종성화 표기가 점차 증가하다가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에서는 정착 단계에 이른다.

국어 표기법에서 다소 특이한 것은 ‘ㅸ’인데, ‘ㅸ’은 부사 파생접미사 ‘-이’와 결합할 때에만 쓰였다. ‘수’〈법어2ㄱ〉, ‘가야’〈수심결9ㄱ〉, ‘어즈러’〈수심결7ㄱ〉〈법어5ㄱ〉, ‘조’〈수심결11ㄱ〉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관판 문헌에 반영된 표기법을 보면 ‘ㅸ’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부터 전격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수’〈석상20:30ㄴ〉~‘쉬’〈월석13:12ㄴ〉와 같이 표기되던 것이 ‘수이’〈능엄1:34ㄴ〉~‘쉬이’〈능엄6:89ㄱ〉로 일사불란하게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국어 표기법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특이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책의 원고는 1461년 이전에 언해되어 그 후 부분적으로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책에서 ‘ㅸ’이 제한적 분포를 보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15세기에 실제 음소로서 존재했던 ‘ㅸ’이 당시에 이미 ‘ㅸ’이 음소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ㅸ’은 실제로 존재했던 음소가 아니었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수이/쉬이’ 방언형과 ‘수비/쉬비’ 방언형을 절충적으로 표기하기 위한 문자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ㅸ’의 음가를 [β]이었다고 볼 때 동남방언 등에서 ‘ㅸ〉ㅂ’으로 변화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실과 정음 초기문헌부터 1461년 이전 문헌에서 활발히 쓰이던 90여개 이상의 어휘에서 어느 문헌을 기점으로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음운사적, 음성학적 관점으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 이전 문헌들, 특히 방언이나 차자표기 자료들에서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을 제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ㆆ’의 실현 양상은 두 문헌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것만 볼 수 있는데, 『사법어언해』에서는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것 외에 사이시옷으로 쓰인 예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차이가 이들 문헌의 표기법이 달랐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료의 양이나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나타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예로는 ‘어루 마촤 디라’〈수심결45ㄱ〉, ‘求 사미’〈수심결45ㄴ〉, ‘디언뎡’〈법어2ㄴ〉, ‘마디니’〈법어5ㄴ〉, ‘니 時節’〈법어5ㄱ〉 등이 있으며, ‘ㆆ’이 사이시옷으로 쓰인 예로는 ‘無ㆆ字’〈법어2ㄴ〉가 있다. 이때 ‘ㆆ’이 사이시옷으로 쓰인 ‘無ㆆ字’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60년경) 등 훈민정음 창제 초기문헌의 표기법과 동일하다.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예는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 언급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볼디언’〈법어5ㄴ〉, ‘마롤디니라’〈법어5ㄱ〉, ‘드률 時節’〈법어5ㄴ〉 등과 같이 ‘ㆆ’이 폐지된 채 관형사형 어미 ‘ㄹ’만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고유어의 각자병서 표기는 더 드문 편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ㅆ’만 쓰였는데, ‘말’〈36ㄱ〉, ‘아니’〈2ㄴ〉와 같은 예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이 ‘말로’〈19ㄴ〉, ‘아니’〈12ㄴ〉 등으로 쓰였다. 『사법어언해』에서는 ‘말’〈6ㄱ〉, ‘믜’〈2ㄴ〉 등 극소수에서 ‘ㅆ’과 ‘ㆀ’을 발견할 수 있을 뿐 대체로 폐지되었다. 이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의 역사로 볼 때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1465)에서부터 ‘ㆆ’과 각자병서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어 ‘ㅭ→ㄹ’로, ‘각자병서→전청자(후음은 차청자)’로 적는 원칙을 따른 결과이다. 이들 문헌에 쓰인 ‘ㅆ’, ‘ㆀ’에 대해서는 문자의 보수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이들 문헌이 각자병서가 사용되던 시기에 언해되었으나 그 원고를 후대에 간행하면서(1467년) 제대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ㆀ’는 『법화경언해』(1463)부터 폐지되었는데 『사법어언해』에 보이는 것이어서 이 책의 원고 작성 시기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 문헌에 사용된 합용병서는 정음창제 초기문헌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로’〈수심결5ㄴ〉, ‘리오’〈수심결42ㄴ〉, ‘두’〈수심결25ㄱ〉, ‘’〈수심결10ㄱ〉와 ‘-’〈수심결2ㄴ〉, ‘’〈수심결3ㄱ〉, ‘’〈수심결2ㄴ〉, ‘’〈법어2ㄱ〉, ‘든’〈법어2ㄴ〉, ‘며’〈법어5ㄴ〉, ‘힘미’〈법어6ㄱ〉 ‘’〈법어2ㄴ,5ㄴ〉, ‘며’〈법어9ㄴ〉, ‘리고’〈법어6ㄱ〉, ‘해’〈법어5ㄴ〉, ‘븨니’〈법어6ㄴ〉, ‘리’〈법어9ㄴ〉 등이 그것이다.

자음동화(비음화)가 반영되지 않은 형태와 반영된 형태가 모두 보이기도 한다. ‘듣노라’〈수심결19ㄱ〉와 ‘든논’〈수심결19ㄱ〉의 공존, ‘니다가’〈수심결12ㄴ〉·‘뇨리니’〈법어5ㄴ〉에 대한 ‘녀’〈수심결24ㄴ〉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 ‘믌결’〈수심결30ㄱ〉에 대한 ‘믓겨리’〈수심결24ㄴ〉처럼 사이시옷 앞에서 ‘ㄹ’이 탈락된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가 모두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런 것은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한편 이들 문헌에는 ‘ㅈ’ 구개음화로 해석될 수 있는 예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는 ‘몬져’〈24ㄴ,29ㄱ〉에 대한 ‘몬저’〈10ㄱㄴ,25ㄱ,30ㄴ,35ㄱㄴ,37ㄱㄴ〉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는 ‘이제’〈6ㄱ〉에 대한 ‘이졔’〈6ㄴ〉 등이 보인다. 이 중 『목우자수심결언해』에는 ‘몬저’가 13회나 출현한 데 반해 ‘몬져’는 2회밖에 출현하지 않아 ‘몬저’를 단순한 오기로 처리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후자 ‘이졔’를 ‘이제’의 과잉교정 표기로 본다면 ‘ㅈ’ 구개음화에 대한 역표기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몬져’라는 단어에서 ‘ㅈ’구개음화가 시작되었는지, 또 왜 이 단어에서만 혼기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주002)

안대현(2007)에서는 이들 문헌에 나타나는 예를 가지고 이 시기에 이미 ‘ㅈ’구개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 문헌에 보이는 제한된 예를 가지고 15세기에 ‘ㅈ’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이와 같은 점은 이현희 외(2007: 36~37)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ㆍ’의 비음운화 현상도 보인다. 『사법어언해』에서 ‘사’〈5ㄱ〉이 ‘사름’[人]〈5ㄴ〉으로 표기된 예는 비어두 위치에서 ‘ㆍ〉ㅡ’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져’[將·持]〈수심결11ㄱ〉, ‘져셔’〈수심결35ㄴ〉와 같이 어간의 제1음절에서 ‘ㅏ’를 가지고 있던 단어(가지다)가 ‘ㆍ’로 표기된 것은 ‘ㅏ〉ㆍ’로의 변화를 보여 일반적 변화 유형 ‘ㆍ〉ㅏ’와는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자인 신미(信眉)의 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색다르긴 하지만 어두 위치뿐 아니라 비어두 위치에서의 ‘ㆍ’의 변화와 관련 있는 사실이라 지적해둔다.

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예들도 여럿 발견된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보, 보믈’〈13ㄴ〉 등처럼 같이 형태소 경계에서 모음조화에 맞거나 맞지 않은 예가 정음 초기문헌에 비해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증가했다. ‘부텨’〈수심결12ㄴ〉, ‘더라’[←덜-+아]〈수심결24ㄴ〉, ‘어료’〈수심결2ㄴ〉 등은 음성모음 어간이 양성모음의 어미나 조사를 취한 예로, 같은 문헌에서 모음조화에 맞는 ‘부텨를’〈수심결2ㄴ〉, ‘더러’〈수심결24ㄴ〉, ‘어드리니’〈수심결3ㄱ, 25ㄱ〉 등과 대조적이다.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는 ‘오’ 모음동화 현상이 발견된다. ‘알포로’〈6ㄱ〉, ‘니로모로 브터’〈5ㄱ〉가 그것인데, 이들은 보통 ‘알로’〈석상3:19ㄴ〉, ‘니로로〈원각,하3-1:20ㄴ〉 브터’와 같이 표기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부사격 조사 ‘로/으로’가 제2음절 ‘로’의 원순모음 ‘ㅗ’의 영향으로 제1음절 ‘/으’가 ‘오’로 역행동화되어 ‘오로’로 표기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수의적인 것으로 15세기의 문헌에는 보이기는 하지만 드문 편에 속한다. ‘밧고로’〈석상24:2ㄱ〉, ‘녀고로’〈월석8:93ㄱ〉 등.

지금까지 살펴본 표기법 및 음운 현상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본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의 중간본은 앞의 원간본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우선 『목우자수심결언해』과 『사법어언해』의 경우, 봉서사판은 간경도감판의 복각본이므로 내용이나 체재에 있어 원간본인 간경도감판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봉서사판 『목우자수심결언해』는 ‘드라가며’〈2ㄴ〉[cf. 도라가며], ‘브틀디니’〈3ㄴ〉[cf. 브툴디니]처럼 간경도감판과 다른 예가 보이는데 이는 복각 과정에서 오각(탈획)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법어언해』의 경우, 『목우자수심결언해』에 비해 중간본이 많은 편이라 좀 더 다양한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 봉서사판의 경우 탈자로 보이는 예가 몇 개 있으며, ‘彌勒’의 ‘彌’가 약자인 ‘弥勒’〈5ㄴ〉로 나타난다는 차이를 보인다. 고운사판, 심원사판, 원적사판은 원간본과 표기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세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원간본의 ‘디녀’〈2ㄱ〉, ‘힐후미’〈2ㄴ〉, ‘잇거시니’〈2ㄴ〉로 쓰인 형태가 이 책들에서는 ‘디녀’〈1ㄱ〉, ‘힐호미’〈2ㄴ〉, ‘잇커시니’〈2ㄴ〉로 나타난다.

일부 예에서는 한자음 표기에서도 동국정운식을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표기 형태는 송광사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송광사판은 체재나 표기에서 고운사판과 비슷하지만 한자음 표기가 동국정운음을 지양하고 현실한자음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구개음화를 반영한 표기도 ‘오직’〈3ㄱ〉, ‘오딕’〈13ㄴ〉, ‘中’〈7ㄱ〉, ‘中’〈15ㄱ〉, ‘兄셩弟뎨’〈15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간본의 ‘ㅸ’은 ‘수비’〈2ㄱ〉, ‘어즈러비’〈10ㄱ〉처럼 ‘ㅂ’으로 되어 있으며 ‘ᅙ’, ‘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ㅿ’과 관련해서는 간경도감판이나 다른 중간본에서는 ‘ㅅ’으로 쓰인 것이 이 책에서는 ‘ㅿ’으로 쓰였다는 것이 특이하다.

4. 형태 및 통사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형태적 특성은 크게 단어 형성과 굴절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단어 형성과 관련해서는 ‘ㅎ’과 ‘나-’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 ‘나-’가 있다. 15세기에 ‘나-’는 “날카롭다”와 “날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날카롭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往往애 根機 난 사미 한 히믈 虛費 아니야’〈24ㄴ〉에서 ‘나-’는 ‘根機’의 속성을 형용하고 있어 “예리하다”, “뛰어나다” 정도의 문맥 의미를 갖는다. ‘나-’는 비슷한 유형의 합성어인 ‘맛들다’, ‘맛보다’와는 달리 항상 형용사로만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굴절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가치’[鵲]의 속격형 ‘가’, 보조사 ‘곳’, 동사 ‘니-’ 등이 있다. ‘가치’의 속격형 ‘가’는 유정 체언인 ‘가치’ 뒤에 속격 조사 ‘-’가 결합하면서 어간의 말음 ‘이’가 탈락된 어형이다. ‘네  가마괴 울며 가 우룸 소릴 듣다’〈수심결19ㄱ〉. 마찬가지로 ‘아비’, ‘곳고리’, ‘가야미’, ‘져비’, ‘고기’, ‘아기’, ‘가히’ 뒤에 관형격 조사 ‘-/의’가 결합하면 어간의 말음 ‘이’가 탈락된다. ‘아 지븨’〈월석13:11ㄱ〉, ‘어믜 누니’〈월석11:96ㄱ〉, ‘곳고 놀애’〈두초8:46ㄴ〉, ‘져븨 삿기’〈두초10:7ㄴ〉, ‘가 머리’〈월석4:7ㄴ〉 등. 15~16세기 자료에서 ‘가’의 예는 드물기는 하지만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보다 앞선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기록할 만하다.

보조사 ‘-곳/옷’의 결합 양상도 특이하다. ‘곳’이 모음으로 끝난 용언의 활용형 뒤에서 ‘ㄱ’ 약화 현상을 겪어 ‘옷’으로 실현된 예가 보인다. ‘이제 다가 닷디옷 아니면 萬劫을 어긔리니’〈수심결44ㄴ〉. 15세기에는 곡용의 경우 모음 또는 ‘ㄹ’로 끝나는 환경 뒤에서, 활용의 경우 반모음 ‘j’ 또는 ‘ㄹ’로 끝나는 환경 뒤에서 ‘ㄱ’ 약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예는 예외가 되는 셈이다.

동사 ‘니-’의 경우 자음 어미와 결합할 때는 ‘니-’로, 모음 어미와 결합할 때는 ‘닐ㅇ-’으로 어간형의 교체를 보인다. 그런데 ‘-거-’가 통합된 어미와 결합하는 경우엔 ‘닐어늘’이 아닌 ‘니거늘’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선어말 어미 ‘-거/어/나-’가 자동사 뒤에서는 ‘-거-’로, 타동사 뒤에서는 ‘-어-’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 문헌에는 ‘니-’의 일반적 교체가 나타나는 예와 그렇지 않은 예가 모두 발견된다. ‘漸漸 닷논 들 알 마 초 닐어’〈수심결24ㄱ〉, ‘믄득 니 實로 니건댄 …’〈수심결10ㄱ〉.

형태적 특성과 관련하여 ‘니르-’[至], ‘니를-’[至]의 활용도 주목된다. 이들은 상보적 분포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쌍형어의 어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일한 환경에서 두 가지 어형이 다 나타난다. 그러한 점은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도 마찬가지다. ‘妄念이 믄득 니로매 다 좃디 아니야 덜오  더라’〈24ㄴ〉, ‘아브터 나죄 니르며 十二時中에 시혹 드르며’〈18ㄴ〉, ‘漸漸 熏修야 와 今生애 니르러 듣고 곧 아라’〈10ㄱ〉, ‘이제 마 보 잇  니를란 손 뷔워 도라오미 몯리니’〈45ㄴ〉.

통사적 특성과 관련해서는 추측 표현의 ‘다’, ‘V홈 -’와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중 ‘다’는 ‘如’ 또는 ‘似’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는 추측 표현이다. 현대국어의 ‘듯하-’ 구문과 마찬가지로 ‘-’이 어미로 사용되는 경우와 ‘-’가 일종의 보조용언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확인된다. ‘마치 가얍고 편안 리니’[恰似輕安리니]〈수심결37ㄴ〉, ‘머리옛 블 救 야 표 닛디 말라’[如救頭然야 不忘照顧라]〈수심결43ㄴ〉. 그 외에 ‘如’가 ‘V홈 -’로 언해된 예도 보인다. ‘돌히 플 지즈룸 티 야  닷고 삼니’[如石壓草야 以爲修心니]〈수심결25ㄴ〉.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의 예로는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 다 如來ㅅ 圓覺妙心에 나니라 시니 이 아롤 디니라’[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 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시니 是知]〈3ㄱ〉, ‘이 法 正히 랑야 어돈 功德 디 몯다 샴 니 이런  아로리라’[正思此法야 所獲功德니 是知]〈44ㄴ〉가 있다. 이 중 ‘이 아롤 디니라’는 한문 원문 ‘是知’에 대응되며 ‘이#알-+-오-+-ㄹ#+이-+-니라’로 분석되는데 ‘-ㄹ#+이-+-니라’ 부분이 당위의 의미를 나타낸다. ‘아로리라’ 역시 ‘是知’에 대한 언해로, ‘알-+-오-+-ㄹ#이+-이-+라’로 분석된다. 표면상으로는 선어말 어미 ‘-리-’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의 명사구 보문 구성인 셈이다. 이러한 당위의 의미는 명령형 어미를 통해 실현되기도 한다. ‘명령’의 언표내적 효력이 당위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반기 알라 마 無量佛所애 한 善根을 시므니라 시며’[當知 己於無量無邊所애 種諸善根이라 시며]〈수심결45ㄱㄴ〉.

한문 원문 번역과 관련해서는 ‘是’, ‘此’, 부정 부사 ‘아니’의 쓰임의 주목된다. 한문의 ‘是’는 원래 지시어로 사용되었으나 白話文에서 점차 계사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是’에서는 지시어 및 계사의 기능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다가 부텨 求코져 홀 딘댄 부톄 곧 이 미니’[若欲求佛인댄 佛卽是心이니]〈2ㄴ〉, ‘모매 여희디 아니니 色身 이 거즛 거시라’[不離身中니 色身은 是假ㅣ라], 〈2ㄴ〉에서는 두 가지 기능이 모두 나타나 언해문에서도 지시어 ‘이’와 계사 ‘-이-’로 이중 번역된 듯하다.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 다 如來ㅅ 圓覺妙心에 나니라 시니 이 아롤 디니라[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 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시니 是知]’〈수심결3ㄱ〉에서는 지시어로만 사용되어 언해문에서도 ‘이’로만 번역되었다.

반면 ‘此’의 경우는 지시어로만 사용되었으며 언해문에서도 지시어 ‘이’로만 번역되었다. ‘이  여희오 밧긔 부텨 외요미 업순 디라’[離此心外예 無佛可成이라]〈수심결3ㄱ〉. 그런데 ‘是’와 ‘此’가 같이 나타날 경우는 이를 모두 언해에 반영하거나 둘 중 하나만 반영한 것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하나는 지시어로, 하나는 서술격조사로 번역하였다. ‘達摩門下애 올마 서르 傳 거시 이 이 禪이니’[達摩門下애 轉展相傳者ㅣ 是此禪也ㅣ니]〈수심결2ㄱ〉, ‘이 觀音ㅅ 理예 드르샨 門이시니’[此ㅣ 是觀音ㅅ 入理之門이시니]〈수심결19ㄴ〉.

부정 부사 ‘아니’의 위치가 특이한 경우도 있다. ‘이런  當야 아니 이 虛空가’[當伊麽時야 莫是虛空麽아]〈19ㄴ〉는 “이런 때를 만나니 이것이 虛空이 아닌가” 정도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莫是虛空麽’의 ‘莫’은 ‘是虛空’을 부정하는 의미로 쓰였다. 한문(백화문) 원문을 축자역하면서 ‘아니 이 虛空가’로 언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녯 聖人ㅅ 道애 드르샨 因緣이 明白며 젹고 쉬워 힘 져고매 막디 아니니’[古聖入道因緣이 明白簡易야 不妨省力니]〈수심결7ㄴ〉에서 ‘不妨省力’의 언해 양상도 특이하다. 이는 “옛 성인이 道에 들어가신 因緣이 明白하고 簡易하여 노력이 적은 것에 막히지 아니하니(노력이 적어도 무방하니)” 정도로 해석된다. ‘省力’은 술목 구성으로 ‘힘 더롬(노력을 덞)’과 같이 목적어-서술어 구성으로 번역되어야 하지만 ‘힘 져곰’처럼 주술 구성으로 번역됐다. 이때 ‘不妨’은 현대국어의 ‘無妨’과 같은 뜻인데 ‘막디 아니-’로 언해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와 『사법어언해』에 공통적으로 많이 쓰인 구문도 있다. ‘-오미 몯-’와 같은 형식의 구문으로, 이는 이지영(2008: 171-177)에서 “합당함 혹은 마땅함에 미치지 못함”, “불급(不及)”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논의된 바 있다. 이 구문은 『목우자수심결언해』에 6회, 『사법어언해』에 3회 보인다. ‘對答호 네 미친 마 가야 發야 邪正分揀 아니호미 몯리니 이 어린 갓 사미라’〈수심결9ㄴ〉, ‘이제 마 보 잇  니를란 손 뷔워 도라오미 몯리니  번 사 모 일흐면 萬劫에 다시 도라오미 어려우리니 請 모로매 삼갈디니라’〈수심결45ㄴ〉, ‘디 몯  반기 늘근 쥐 곽 글굼티 디언 옮기힐후미 몯리라’〈법어2ㄴ〉, ‘낫 세 와 밤 세  뎌와 볼디언뎡 일 업슨 匣 소배 안조미 몯리며 보단 우희 주거 안조 구틔디 마롤디니’〈법어5ㄴ〉, ‘大凡 디 行脚홀뎬 모로매 이 道로 져 뇨리니 現成 供養을 먹고 쇽졀업시 날 디내요미 몯리라’〈법어4ㄴ~5ㄱ〉.

‘-오미 몯-’ 구문에 대응되는 한자는 대개 ‘不, 未, 不可, 不得’이며 이는 ‘몯’의 의미와 연결된다. 또한 ‘몯-’ 뒤에는 항상 ‘-ㄹ(관형사형어미)#이(의존명사)+-이-(계사)’로 분석되는 ‘리’가 결합된다. 이 구문은 16세기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데, 동일 원문을 달리 언해한 예를 보면 해당 부분이 ‘-디 몯-’와 같은 장형 부정문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傲慢 어루 길오미 몯리며 私慾 어루 노노하 호미 몯리며 든 어루 호미 몯리며 라온 이 어루 장호미 몯리라’〈내훈1:7ㄴ〉, ‘오만홈을 可히 길오디 못 거시며 욕심을 可히 방죵히 못 거시며 을 可히 게 못 거시며 즐기믈 可히 극히 못 거시니라’〈어내1:6ㄱ〉.

5. 어휘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어휘는 크게 특이하다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 다른 문헌에서도 볼 수 있는 어휘인데 이 문헌에 쓰인 용법이 다소 특이하거나, 다양한 의미 가운데 일부 의미만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자어 중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行’, ‘一切’, ‘種種’, ‘後’, ‘비-’, ‘애’, ‘셜웝’, ‘불웝’, ‘태우’, ‘自己’ 등이 있다.

‘行’은 동사적 용법을 보일 때는 평성을, 명사적 용법을 보일 때는 거성의 성조를 보이는데 이 문헌에서도 그와 같은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 중에 명사적 용법의 경우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 거성이 아닌 상성으로 실현되는 예조차 이 문헌에서는 거성으로만 실현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行’이 명사적 용법을 보이는 예로는 ‘苦行’〈RHH, 3ㄱ〉, ‘功行이’〈LHH, 26ㄱ,44ㄴ〉, ‘萬行’〈HHH, 25ㄱ〉, ‘行’〈H, 29ㄴ〉, ‘行이’〈HH, 24ㄴ,44ㄴ〉가 있으며, 동사적 용법을 보이는 예로는 ‘修行이’〈LLH, 24ㄴ〉, ‘修行호’〈LLHL, 29ㄴ〉, ‘行이라’〈LLH, 35ㄱ〉, ‘行’〈LH, 36ㄱ〉, ‘行커나’〈LLH, 30ㄱ〉, ‘行호미나’〈LHLH, 30ㄴ,38ㄱ〉, ‘行호미라’〈LHLH, 29ㄴ,35ㄱ〉, ‘行논’〈LHL, 36ㄱ〉, ‘行리오’〈LLHH, 35ㄴ〉가 있다.

‘一切’와 ‘種種’은 15세기에 명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체로 후행 명사구를 수식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특성은 이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一切’과 ‘種種’의 명사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一切ㅅ 소리와’〈44ㄱ〉, ‘種種엣 일며 뇨미’〈18ㄴ〉, ‘種種앳 相皃와 種種앳 일훔 지허’〈20ㄱ〉가 있으며, 관형사적 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一切 소리와 一切 分別’〈19ㄴ〉, ‘一切 衆生’〈44ㄱ〉,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3ㄱ〉, ‘種種 苦 受호미’〈43ㄱ〉가 있다.

또한 15세기의 ‘後’는 공간적 개념으로의 ‘뒤’라는 의미를 가지지 않고 시간적 개념으로만 ‘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와 같은 점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實로 니건댄 이  몬져 알오 後에 닷논 根機니’〈10ㄱ〉, ‘그럴 圭峯이 몬저 알오 後에 낫논 들 기피 기샤’〈10ㄴ〉, ‘마 이 理 알면 다시 階級 업도소니 엇뎨 後에 닷고 브터 漸漸 熏修야 漸漸 일리오’〈23ㄴ-24ㄱ〉, ‘그러면 엇뎨  번 아로로 곧 後에 닷고 러 리리오〈24ㄴ〉’ 등에서 그러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자어에 기원을 두는 어휘들이 한글로 적힌 예도 있다. ‘ 비야[亦乃謗讟야]’〈42ㄴ〉, ‘노 앳 想 지[作懸崖之想야]’〈11ㄱ〉에서의 ‘비-’, ‘애’가 그것이다. 그와 같은 쓰임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셜웝[說法]’〈번박.상:75ㄱ〉, ‘불웝[佛法]’〈번박.상:74ㄴ〉, ‘태우[大夫]’〈소언4:39ㄴ〉 등.

‘自己’의 경우 15세기에 “本人”, “자기의 몸”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이 문헌에 보이는 ‘自己’는 모두 “本人”의 의미로 쓰였다. ‘四大로 몸 삼고 妄想으로  사마 自性이 이 眞實ㅅ 法身인  아디 몯며 自己 靈知ㅣ 이 眞實ㅅ 부톈  아디 몯야’〈수심결12ㄴ〉, ‘다시 보믈 求홀  업거니 엇뎨 몯 보논 디 이시리오 自己 靈知도  이러니 마 이 내 인댄 엇뎨 다시 아로 求며…’〈13ㄴ〉, ‘丈夫 디 자 無上 菩提 求린 이 리고 어딀 리오 모 文字 잡디 말오 바 모로매 들 아라 一一히 自己예 나가 本宗애 마면〈42ㄴ〉’.

고유어 어휘 중에는 ‘모’, ‘-’, ‘맛들-’, ‘맛보-’, ‘날혹기’ 등이 주목된다. ‘모’의 경우는 15세기에 동일 음상과 성조를 가지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든”의 의미를 가지는 관형사만 보인다(“모든”의 의미를 가지는 관형사, “모인”의 의미를 가지는 ‘몯-’의 활용형, “모인 사람(것)”의 의미를 가지는 ‘몯-’의 동명사형). ‘제 性이 이 眞實ㅅ 法인  아디 몯야 法을 求코져 호 머리 모 聖人 밀오 부텨를 求코져 호’〈2ㄴ〉, ‘過去엣 諸 如來도 오직 이  긴 사미시며 現在옛 모 賢聖도  이  닷신 사미시며 未來옛 學 닷 사도 반기 이런 法을 브툴 디니’〈3ㄱㄴ〉, ‘願 모 道 닷 사미 이 마 자 맛보아 다시 孤疑야 제 믈루믈 내디 마롤 디어다’〈42ㄱㄴ〉.

“製(제)”의 의미를 갖는 ‘-’은 15세기의 ‘-’과 16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의 혼효형이다. ‘마 無量劫中에 한 聖人을 셤기와 한 善根 심거 般若 正 因을 기피   上根性이니’〈45ㄱ〉의 예가 보인다. ‘-’은 대개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나 보이는 것인데 15세기의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 발견되는 것이어서 다소 특이하다.

“好(호)”의 의미를 가지는 ‘맛들-’은 [[맛+-이]+들-]과 같은 주어-서술어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이 문헌에는 ‘맛들-’이 타동사적 용법을 가지는 예가 존재한다. ‘다가 殊勝 고 信티 아니코 사오나 외요 맛드러 어려 너교 내야’〈45ㄴ〉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맛들-’은 ‘사오나 외요’을 목적어로 취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맛보-’의 경우 [[맛+-]+보-]와 같이 목적어-서술어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자동사적 용법을 갖지 않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疑心논 디 믄득 그처 丈夫 들 내야 眞實 正 보와 아로 發야 親히 그 마 맛보아 제 제 즐기논 해 니르면’〈21ㄱ〉에서 ‘그 마’을 목적어로 취해 타동사적 용법을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느리고 느직하게”의 의미를 갖는 어휘 ‘날혹기’도 있다. ‘시혹  디위 컨댄 不覺애 한 디흐리로소니 노하 날혹기 야 아 殃孽 다시 受야려’〈43ㄱ〉. 이는 “조심조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날혹-’에서 온 부사인데 주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두시언해(杜詩諺解)』 등의 문헌에 나타난다. ‘날혹기’는 “천천히 한다”는 의미의 ‘날회-’(‘날호-’로도 나타남)와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는 지금까지 살핀 것 외에 ‘가야’, ‘구여’, ‘외야’, ‘도’, ‘비르서’, ‘버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의 어휘화한 부사도 나타난다. 이 중 ‘가야’, ‘구여’, ‘외야’, ‘도’, ‘비르서’, ‘버거’ 등은 용언 어간에 어미가 결합한 형태가 어휘화한 것이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은 명사에 조사가 결합한 형태가 어휘화한 것이다. ‘이 모 今生 向야 濟度티 몯면 가야 어느 生 기드려 이 모 濟度리오’〈44ㄴ〉, ‘내 이제 다가 믈루믈 내어니 시혹 게을우믈 내야 恒常애 後 라다가 … 비록  句ㅅ 佛法을 드러 信解受持야 셜우믈 免코져  엇뎨 외야 得료’〈43ㄴ〉, ‘엇뎨 智慧왼 사미 보 잇  알오 도 求티 아니야 艱難호 기리 怨歎리오’〈45ㄴ〉, ‘다가 昏沉이 더욱 하거든 버거 慧門으로 法 야 …’〈30ㄴ〉, ‘…  닷가 비르서 일 업슨 사미 외리니 다가 이러면 眞實로 이로 닐오 定慧 平等히 디녀 佛性 기 본 사미리라’〈30ㄴ-31ㄱ〉, ‘往往애 根機 난 사미 한 히믈 虛費 아니야 …’〈24ㄴ〉

『사법어언해』는 매우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어휘들이 많다. 이 문헌에만 보이는 것도 있고, 다른 문헌에도 보이지만 예가 매우 드문 것도 있다. 먼저 한자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보단(蒲團)’, ‘공부(工夫)’ 등이다. ‘보단(蒲團)’은 여름에 부들의 잎을 채취해 말렸다가 틀어 만든, 스님이 앉는 방석이다. ‘蒲團’의 음역어인데 현대국어로 오면서는 ‘포단’으로 굳어졌다. ‘ 가짓 道 일울 사미…  보단애 올아 곧 오다가’[有一般辨道之人이…才上蒲團야 便打瞌睡다가]〈5ㄱ〉. 18세기 자료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에는 한글로 ‘포단’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안희 포단을 둣거이 라 아 올녀 안치고’〈을병3:27〉.

‘공부(工夫)’는 총 7회 등장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것과 의미 차이를 보인다. 불가(佛家)에서의 ‘공부’는 대개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 일, 참선(參禪)에 진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여러 모로 생각한다.”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것은 “정신의 수양과 의지의 단련을 위하여 힘쓰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상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의미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고유어 중에서는 ‘다다’, ‘너운너우니’, ‘올’, ‘옮기힐호-’, ‘재’, ‘노구’, ‘쟈’, ‘ㅎ’, ‘’, ‘븨-’, ‘나믈리’ 등이 주목된다. 이 중 ‘다다’, ‘너운너우니’, ‘올’, ‘옮기힐호-’는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만 보이는 것들이다. 먼저 ‘다다’은 “다만”[單]의 의미를 지니는 어휘이다. 15세기엔 “다만”의 의미를 가진 어휘로는 ‘다’이 두루 쓰였고 간혹 ‘다믄’이나 ‘다’도 쓰였다. ‘다’이 중복된 형태의 ‘다다’은 이 문헌에만 보인다. ‘오직 다다 無ㆆ字 드러 十二時中 四威儀內예 모로매 야’〈법어2ㄱ〉. ‘내 다  아 甚히 거니’〈월석22:28ㄱ〉. ‘王이 다 돈 나로 供養대’〈석상24:39ㄴ〉. ‘이 高麗ㅅ 말소믄 다믄 高麗ㅅ 해만  거시오’〈번노.상:5〉.

‘너운너우니’는 “너울너울, 유유히”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관련 어형으로 『남명집(南明集)』에 ‘너운너운’, 『두시언해(杜詩諺解)』에 ‘너운너운’과 ‘너운너운히’가 있다. ‘보단 우희 주거 안조 구틔디 마롤디니 모로매 너운너우니 뇨리니’[又不可執在蒲團上死坐ㅣ니 須要活弄호리니]〈법어5ㄴ〉. ‘소내   갓신 잡고 너운너운 오 가시거늘’〈남명.상:52ㄱ〉. ‘너운너운 오 구 氣運이 둗겁고’〈두시9:37ㄴ〉, ‘너운너운히 새 니 길로 드러가 업드롤 厄 거 免호리라’〈두시19:30ㄱ〉.

‘올’는 “올가미”를 의미하는 희귀어이다. ‘모 부텨와 祖師와의 사게 믜 고 올 자보리니’〈2ㄴ〉. 한글학회 사전에서는 ‘올’를 ‘올가미’로 풀이하였으나 다른 고어사전류에서는 합성어 ‘올잡-’으로 파악하여 “옭아잡다”로 풀이하기도 했다. ‘올’는 한문 “要捉敗佛祖의 得人憎處호리니”의 ‘捉敗’에 대한 번역 ‘올 잡-’의 일부로서, 신미(信眉)가 언해한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1460년경)에서는 이 구절을 ‘올긔 잡-’으로 번역하였다. ‘ 난 사 바 드위텨 趙州의 올긔 자바 내 마 도로 가져 오라’〈몽법12ㄱ〉. 이를 고려할 때 ‘올’는 ‘올잡-’의 일부가 아닌, “올가미”를 뜻하는 독립된 어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옮기힐호-’는 “함부로 옮기다”의 뜻을 지닌 어휘이다. ‘디 몯  반기 늘근 쥐 곽 글굼티 디언뎡 옮기힐호미 몯리라’[未得透徹時옌 當如老鼠ㅣ 咬棺材相似ㅣ언 不可改移니라]〈법어2ㄴ〉. 여기에서는 ‘不可改移’에서 ‘改移’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다. ‘옮기힐호-’는 ‘옮기-’와 ‘힐호-’가 결합한 어휘인데 ‘힐호-’의 실사적 의미가 약해 합성어가 아닌 파생어로 볼 가능성도 있다. ‘힐호-’는 단독으로 쓰인 예가 없고, ‘누위힐호-’〈두시19:25ㄱ〉, ‘두위힐호-’〈두시25:10ㄱ〉, ‘입힐호-’〈정속13ㄱ〉와 같이 합성어의 후행 어근으로 쓰인 예만 발견된다. 그에 반해 ‘힐후-’는 “힘들이다”, “다투다”의 의미를 지니고 독립적으로 쓰일 뿐 아니라, 합성어의 후행 어근으로 쓰인 예도 ‘힐호-’에 비해 훨씬 많다. ‘難은 힐훌 씨라’〈법화1:32〉, ‘世間과 힐후디 아니디 아니 씨라’〈월석7:5〉, ‘가도힐후-’〈두시14:2〉, ‘갑힐후-’〈정속26〉, ‘고티힐후-’〈번소10:25〉, ‘두르힐후-’〈능엄3:67〉, ‘밀힐후-’[推激]〈두초16:2〉, ‘입힐후-’〈노번.상:65〉 등. 그와 같은 합성어 중에 일부는 ‘힐호-’형과 ‘힐후-’형이 모두 보이는 것도 있다. ‘두위힐호-’〈두시25:10ㄱ〉, ‘드위힐후다’〈능엄7:82〉 등. ‘옮기힐호-’의 경우도 ‘옮기-’ 뒤에 ‘힐후-’가 결합된 ‘옴기힐후-’형이 16세기의 『소학언해(小學諺解)』에 나타난다. ‘옷과 니블와 삳과 돗과 벼개와 几 옴기힐후디 아니며[衣衾簞席枕几 不傳며]’〈소언2:6ㄱ〉.

‘재’는 “가장”, “극도로”의 의미를 가지는데, 15세기에 빈번하게 쓰였던 ‘’과 의미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15세기에는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와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만 보인다. ‘昏沈과 散亂애 재 힘 더야 장 며 장 다면 더욱 더욱 새외오’〈법어8ㄴ〉, ‘이 淸淨 空寂 미 이 三世 諸佛ㅅ 재 조  미시며’〈수심결20ㄱ〉, ‘다가 妄念이 재 盛커든 몬저 定門으로 理예 마초 흐로 자바’〈수심결30ㄴ〉, ‘極 재 극’〈훈몽-초.하:15〉.

‘노구’와 ‘쟈’는 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 ‘… 곧 淸凉호 아로미  노굿 더운 므레  쟛 믈  브 니라’[便覺淸凉호미 如一鍋湯애 才下一杓冷水相似ㅣ니라]〈5ㄴ~6ㄱ〉. 이들은 각각 ‘鍋’, ‘杓’에 대한 번역어로서 여기에서는 단위성 의존명사로 쓰였다. ‘노구’는 이후에 『훈몽자회(訓蒙字會)』와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 『왜어유해(倭語類解)』 등의 문헌에서 ‘노고’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鏊 노고 오’〈훈몽초,중:6〉〈왜어.하:14〉, ‘우리 손조 바 지 머그면 가마와 노곳 자리와 사발와 뎝시왜 다 잇녀’〈노번.상:68〉.

한자 ‘杓’에 대응하는 ‘쟈’는 16세기의 『훈몽자회(訓蒙字會)』(1527)를 비롯하여 근대국어 문헌에서 몇 예를 찾을 수 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의 ‘杓 나므쥭 쟉’〈훈몽.중:9ㄴ〉을 제외하면 다른 문헌에서는 모두 ‘쟈’로 나타난다. ‘漏杓 섯쟈’〈역어.하:13ㄴ〉, ‘처음브터 나죵지 시러곰  쟈 흐린 믈을 디 못고 처음 달힐 ’〈자초17ㄴ〉. ‘쟈’의 한자 대응어 ‘杓’은 『역어유해(譯語類解)』(1690)에서 현대국어의 ‘주걱’에 해당하는 ‘주게’로 언해되기도 한다. ‘榪杓 나모쥬게. 銅杓 놋쥬게’〈역어.하:13ㄴ〉. 이들 용례를 종합할 때 ‘쟈’는 “주걱, 국자, 그릇” 정도에 해당하는 단위명사로 볼 수 있다. 한편 ‘杓’ 자는 중세국어에는 [쟉]이었는데현재음은 [표]가 되었다. 변화의 원인이나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국한회어』(1895)와 『경향신문』(1906) 등을 보면 19세기 말 이후 ‘杓[표]’로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원(根源)”의 의미를 갖는 ‘ㅎ’는 15세기에 드물게 나타나는 어휘인데 이 문헌에 보인다. ‘어린 구루미 다 흐르면 萬里靑天에 보옛 리  해 리니’〈법어9ㄱ〉, ‘모 會中을 爲샤 기픈  펴 뵈신대’[宣示深奧신대]〈능엄1:29ㄴ〉, ‘堂 오리 次第 어둠 야 반기 그 해 다리라’〈법화1:16ㄴ〉, ‘源 믈불휘 원’〈신유,하50ㄱ〉, ‘奧 기픈 오’〈신유,하38ㄱ〉. “여아(女兒)”의 의미를 갖는 ‘’과는 기저형의 종성 ‘ㅎ(/h/)’의 유무로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한 부분만 음상의 차이를 보이는 ‘ㅎ’과 ‘’은 최소대립쌍을 이루는 최소대립어라 할 수 있다.

‘’의 예도 흥미롭다. ‘두 주머귈 쥐며  니르와다’[捍双拳며 竪起脊梁야], 〈5ㄴ〉. ‘등’는 ‘+’의 합성어로, “등마루” 즉 “척추(脊椎)”를 의미한다. ‘’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통합하면 어간의 끝음절 모음 ‘ㆍ’가 탈락 ‘’형으로 바뀌지만 그 명사 뒤에 휴지나 공동격 ‘와’, 그리고 자음 조사가 오면 ‘’형을 유지하는 특수한 곡용을 한다.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 『구급방언해(救急方諺解)』,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일부 문헌에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로셔 各 寸 百 壯 ’[去脊各一寸灸之百壯]〈구방.상:36〉, ‘와 보콰 셔와 긷괘 기 소리 나’〈법화2:124ㄴ〉, ‘몬져  둘챗  아랫 오목 로’〈구간3:48ㄱ〉, ‘脊  쳑’〈자회.상:14ㄱ〉.

‘븨-’는 현대국어의 ‘비비-’[擦]에 해당하는 어휘이다. ‘百年을 녯 죠 븨니 어느 나래 머리 내와료’〈법어6ㄴ〉. 15세기에 ‘비븨-’는 비교적 빈번하게 쓰였지만 ‘븨-’와 ‘비-’는 드물게 보인다. ‘븨-’는 『사법어언해』를 비롯하여 『능엄경언해』와 『구급방언해』, 『구급간이방언해』에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둘찻 리 實로  體어늘 눈 비븨유믈 因야 달이 외니’〈능엄2:27ㄴ〉, ‘모 智慧 잇닌 븨논 根源이 이 얼굴와 얼굴 아니왜며 봄과 봄 아뇸과 여희요 닐오미 몯리라’〈능엄2:83ㄱ〉, ‘지네와 蝎의 헐인  胡椒와 마와 生薑과 다 라 아 븨라’〈구방.하:80ㄴ〉, ‘마리어나 이어나 라  븨요미 다 됴니라’〈구간6:63ㄱ〉, ‘모롭 불휘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라 만 케 비야 곳굼긔 부러 들에 라’〈구간1:41ㄴ〉. 그 중 『능엄경언해』에서는 ‘비븨-’와 ‘븨-’가 모두 발견되고 『구급간이방언해』에서는 ‘비-’와 ‘븨-’가 모두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나믈릴’이다. 『사법어언해』에 보이는 ‘나믈릴’은 예가 드물 뿐 아니라 분석하기도 쉽지 않다. ‘해 사미 이 이셔 나믈릴 아디 몯야’[多有人이 在這裏야 不識進退야 解免不下야]〈5ㄴ〉에서 ‘나믈릴’은 구결문 “不識進退야”에서 ‘進退’에 대한 번역으로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나믈리’라는 명사가 있다면 뒤에 목적격 조사 ‘ㄹ’이 결합된 것으로 보면 되지만, 15세기 다른 문헌에서 ‘나믈리’라는 명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오히려 합성동사인 ‘나믈리-’와 합성명사인 ‘나믈림’은 발견된다. ‘阿難아 내 이제 너 爲야 이 두 일로 나믈려 마초아 교리라’〈능엄2:87ㄴ〉, ‘두 이 別業엣 眚 봄과 모 分엣 祥瑞 아니라 法과 가뵤 서르 나토실 니샤 나믈려 마초아 교리라 시니라’〈능엄2:88ㄱ〉, ‘權은 저욼 림쇠니  고대 固執디 아니야 나믈림 야 맛긔 씨오’〈석상13:38ㄱ〉.

따라서 이때의 ‘나믈릴’은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나믈리’를 부사로 보는 것이다. ‘나’와 ‘믈리’를 각각 어간 ‘-+-오(접미사)’, ‘므르-+-이(접미사)’가 결합한 파생부사로 보면 합성부사 ‘나믈리’가 체언 자격으로 목적격조사 ‘ㄹ’을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둘째, 합성동사 ‘나믈리-’ 뒤에 동명사형 어미 ‘-ㄹ’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아디 몯야’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나믈릴’에는 목적격조사가 결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석보상절에서 ‘進退’에 대한 ‘나믈림’과 사법어의 ‘나믈릴’에서 대비되는 동명사 어미 ‘-ㅁ’과 ‘-ㄹ’이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다르지만, 기원적으로는 동일한 기능을 가졌으며, 형태 결합도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후자를 수용한다. 비록 후기 중세국어에서 동명사형 어미 ‘-ㄹ’이 생산적이지 않은 점은 있지만, 그런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크게 문제라 할 것은 아니다. 고립적인 용례이므로 앞으로 더 숙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6. 결론

이 글에서는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과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의 특성을 크게 서지 사항, 표기법 및 음운, 형태 및 통사, 어휘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결론은 앞서 살펴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두 책은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번역하였다는 점과 1467년(세조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합철되어 간행되었기 때문에 판식이나 체제에서 유사할 뿐 아니라 어학적 특성까지도 거의 유사하다. 또한 원간본 『사법어언해』는 간기가 따로 없어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간기를 통해 그 간행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합철되어 간행된 이후 지방의 사찰에서도 간행되었는데, 특히 『사법어언해』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수차례 간행되었다. 『사법어언해』는 경상도 합천 봉서사, 충청도 연산 고운사, 황해도 황주 심원사, 전라도 순천 송광사, 원적사에서 중간본이 간행되었는데 책의 분량이 너무 적어 『목우자수심결언해』,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 『오대진언(五大眞言)』과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표기법 및 음운과 관련해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이 쓰였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ㅸ’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부터 대체로 폐지되었는데 더 후대 자료인 이 문헌에 쓰인 점이 특이하다. 이를 볼 때 이 책의 원고는 1461년 이전에 언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1467년에 간행될 때 부분적으로만 수정되어 간행됨으로써 이전 시기의 표기의 흔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들 문헌에는 고유어 표기에서 합용병서의 예가 정음 창제 초기문헌과 다를 바 없이 발견되지만, 각자병서는 ‘ㅆ’, ‘ㆀ’의 경우에 극소수의 예만 발견된다.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1465)의 고유어 표기에서 일괄 폐지된 각자병서와 ‘ㆆ’의 예가 일부 남아 있는 것도 이 문헌이 그보다는 이른 시기에 언해되었다가 부분 수정되어 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들 문헌에는 ‘ㅈ’구개음화로 볼 수 있는 ‘몬저’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중 『목우자수심결언해』에 보이는 ‘몬저’는 ‘몬져’에 비해 출현 빈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오기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15세기에 유독 ‘몬저’와 같은 예에서만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당시에 ‘ㅈ’구개음화 현상이 존재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이들 문헌에서는 ‘ㆍ’의 비음운화, 모음조화의 혼란, ‘오’ 모음동화와 자음동화 등을 반영한 표기도 발견된다.

형태 및 통사, 어휘와 관련해서는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있는 특성도 있었지만 드물게 보이는 특성도 있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가치’의 관형격형 ‘가’가 발견되고, 보조사 ‘-곳/옷’의 실현 양상이 다른 문헌과 차이를 보인다. 대개 16세기 이후에 보이는 ‘-’[製]이 이 문헌에 보인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 외에 15세기에 드물게 보이는 ‘날혹기’[徐]가 이 문헌에 발견되기도 한다.

통사적 특성과 관련해서는 추측 표현의 ‘다’, ‘V홈 -’와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가 다른 문헌에 비해 자주 보인다. 이때 ‘V호리라’는 계사 구문에 쓰인 것이어서 선어말 어미 ‘-리-’가 아닌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 구성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 한문 번역과 관련해서는 ‘是’, ‘此’가 문맥에 따라 지시어와 계사 둘 중 하나로 번역되기도 하고 둘 다로 번역되기도 했다. 부정 부사 ‘아니’가 한문 원문을 축자역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언해문과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된 경우도 있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과 『사법어언해』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보이는 구문도 있었다. “불급(不及)”의 의미를 지니는 ‘-오미 몯-’와 같은 형식을 포함한 구문이다. 이 구문에서는 ‘몯-’ 뒤에 항상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계사’로 분석되는 ‘리’가 결합되는 특성이 있다. ‘-오미 몯-’ 구문은 후대에 ‘-디 몯-’와 같은 장형 부정문으로 바뀌면서 사라진다.

한편 『사법어언해』에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헌에는 없거나 드물게 보이는 어휘가 여러 개 발견된다. 한자어 중에서는 ‘보단(蒲團)’, ‘공부(工夫)’, 고유어 중에서는 ‘다다’[單], ‘너운너우니’[弄/蹁], ‘올’[陷穽], ‘옮기힐호-’[改移], ‘재’[極], ‘노구’[鍋], ‘에’[連], ‘쟈’[杓], ‘ㅎ[根源]’, ‘’[脊椎], ‘븨-’[擦], ‘나믈릴’[進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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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역주 해제

김무봉(金武峰)

목 차

Ⅰ. 서언
Ⅱ. 간행 연도 추정
Ⅲ. 현전본 및 원간본 비정
Ⅳ. 어학적 고찰
Ⅴ. 원간본과 중간본(송광사본)의 비교
Ⅵ. 결어

I. 서언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풀이>이하 〈몽법〉이라 약칭한다.
는 원(元)나라 승려 몽산 덕이(蒙山德異) 몽산 덕이(蒙山德異):
蒙山 德異의 生沒 年代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의 저서 등을 통해 「?1231-?1310 A.D」로 추정할 따름이다.
의 법어(法語)를 추려서 한글로 구결을 단 후, 번역·간행된 목판본의 불경언해서이다. 권두·권말 서명은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이고 판심제는 「법어(法語)」이다. 초록(抄錄) 작성자(作成者)는 고려 말의 스님 나옹(懶翁)이고, 주003)
초록 작성자에 대해서는 나옹이 아니고 역해자인 신미가 직접 작성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이승녕:1986), 오늘날 기록이 없어 그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신미가 나옹의 법맥을 잇고 있다는 점과 나옹이 元나라에 머물던 중(1347-1358), 몽산이 거처했던 休休庵을 찾았다(1350)는 기록(懶翁和尙行狀)으로 보아 귀국 후 나옹이 초록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나옹의 법어인 「示覺悟禪人法語」 1편만은 역해자인 신미가 언해 과정에서 첨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에서 나옹이 몽산을 친견하고 문답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몽산의 생존 연대(?1231-?1310)와 나옹의 생존 연대(1320-1376)는 서로 달라서 신빙성이 없다. 南權熙(1991)참조.
역해자(譯解者)는 세종~세조 때의 승려로 불경 언해 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이다.

〈몽법〉은 선(禪) 수행자(修行者)의 자세를 설(說)한 불가(佛家)의 선(禪) 수행 지침서인데, 이 책 속에는 몽산화상의 법어 6편(示古原上人, 示覺圓上人, 示惟正上人, 示聰上人, 無字十節目, 休休庵主坐禪文)과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의 법어 1편(示覺悟禪人法語) 등 모두 7편의 법어가 실려 있다. 이 외에 중간본 중 일부에서 〈사법어(四法語)〉 사법어(四法語):

〈사법어〉는 권두·권말 서명 및 판심제가 「法語」로만 되어 있으나 이 책에 수록된 법어의 篇數가 송광사본 〈몽법〉에 합철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4편이어서 「사법어」로 통용되고 있다. 〈사법어〉는 單刊된 것은 보이지 않고 〈牧牛子修心訣〉이나 〈몽법〉 등에 합철되어 전하는데 후술할 송광사본은 〈몽법〉에 있던 나옹의 법어가 〈사법어〉에 옮겨져서 「오법어」인 셈이다.
와 합철된 책이 있으나 원간본의 경우에는 합철된 것을 볼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원간본의 〈몽법〉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책은 원간본 계통의 판본 중 어느 것에서도 초인(初印)의 간기(刊記)를 볼 수 없어서 그 정확한 간행 연도는 미상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언어 사실로 간행연도를 추정하기도 하고, 〈몽법〉 중간본에 합철된 〈사법어〉의 원간본 간행 연도인 1467년을 〈몽법〉 간년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주005)

일부에서 〈몽법〉의 간년을 1467년, 간행처를 간경도감으로 추정한 것은 원간본 〈사법어〉와 합철된 〈牧牛子修心訣〉의 간년이 「成化 三年(1467)」이고 간행처가 간경도감이어서, 〈목우자수심결〉·〈사법어〉·〈몽법〉이 모두 같은 해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것으로 본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본 〈사법어〉와 중간본 중 일부의 〈몽법〉이 합철된 것은 주로 ‘蒙山과 관계가 있는 스님들의 법어 언해’라는 공통성 때문이지 간년이나 간행처와는 연관이 없는 듯하다. 〈사법어〉의 판심제가 〈몽법〉과 같이 ‘法語’로 되어 있는 점은 같으나 언해 양식은 원간본 계통의 것과 중간본의 것이 서로 달라서 원간본 계통은 함께 실린 〈목우자수심결〉의 그것과 같고, 중간본 역시 합철된 〈몽법〉의 그것과 같다. 따라서 원간본 〈사법어〉의 간행처 및 간행 연도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언어 사실에만 비중을 두어 간행 연도를 추정한다면 언해 연대의 간행 연대가 서로 다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사법어〉와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의 간기에 보이는 「성화 3년(成化三年, 1467)」과 〈사법어〉 뒤에 누군가 붓으로 써놓은 간기(최현배:1942, 1961 고친판 참조)의 「성화 3년(成化三年, 1467)」만을 근거하여 〈몽법〉의 간년을 1467년으로 삼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이런 이유로 그 동안 행해진 간행 연도의 추정이나 원간본의 비정(比定), 그리고 언어 사실의 해명에 대해 새로운 논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국어사 연구는 문헌에 수록된 언어뿐만 아니라 그 문헌의 판식 및 언해 체재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올바른 해명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몽법〉이 가지는 국어사 자료로서의 위치와 가치를 구명하고자 한다. 제Ⅱ장에서는 체재 및 불교 용어의 한자음 표기에 근거한 간행 연도의 추정, 제Ⅲ장에서는 각 간본의 비교를 통한 원간본의 비정, 제Ⅳ장에서는 언어 사실에 대한 고찰로 〈몽법〉의 국어사적 가치 구명, 제Ⅴ장에서는 Ⅲ장에서의 논의로 밝혀진 원간본과 전면 개찬 중간본인 송광사본(1577년 간)과의 비교 연구 등의 방법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Ⅱ. 간행 연도 추정

〈몽법〉의 체재가 간경도감 판본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하여 〈몽법〉을 간경도감본으로 단정한 경우가 많았으나, 우리는 몇 가지 점에서 이에 동의할 수 없다. 판식 및 체재만을 놓고 볼 때 〈몽법〉은 간경도감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훈민정음언해〉나 〈월인석보〉 권두에 실린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서문 주006)

여기서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가 아니고 그 「서문」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비교 조건 符合의 문제 때문이다. 〈석보상절〉은 원문인 〈釋迦譜〉등이 없이 언해문만 있고 〈월인석보〉는 「월인부」와 「상절부」로 나뉘어져, 〈몽법〉의 구결이 달린 원문 다음에 언해문을 둔 것과는 비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교 조건이 동등한 「서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에 가깝고,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와는 부분적으로 일치하며 활자본 〈능엄경언해〉(1461)나 간경도감본에는 앞선다.(활자본 〈능엄경언해〉는 체재가 간경도감본의 그것과 일치하므로 이하 체재를 논의할 때는 간경도감본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를 몇 가지 사실로 나누어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1) 〈몽법〉의 판심은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고 행관(行款)은 유계(有界) 팔행(八行), 주(注) 쌍행(雙行)인데, 대자(大字)인 법어(法語)의 본문(本文)은 1행(行)이 17자(字)로 되어 있다. 법어의 본분에 한글 소자(小字)로 구결을 단 후, 행을 달리하여 1자(字) 공격(空格)을 두고 한자와 한글 중자(中字)로 언해를 하였다. 주목할 점은 한글로 된 구결에도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점 표시 방식은 〈훈민정음언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서문,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 주007)

활자본 〈아미타경 언해〉 및 그 간행 연도에 대해서는 안병희(1980)를 참조할 것.
에서 그 예를 찾을 수가 있다. 또 방점이 표시된 한글 구결이 쌍행인 것은 〈월인석보〉 서문,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와 같다. 언해문에 한글 중자(中字)를 사용한 점은 〈훈민정음언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서문,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와 일치한다.

간경도감본은 쌍행인 한글 구결에 방점을 찍지 않았고, 언해문은 한자·한글 모두 소자(小字)로 되어 있다.

2) 한자는 법어 본문이나 언해문을 막론하고 글자마다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되어 있다. 이러한 주음 방식을 취한 정음 초기 문헌은 〈훈민정음언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서문 등이 있고, 활자본 〈아미타경언해〉나 간경도감본은 언해문의 한자에만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되어 있다.

3) 협주에 아무런 표시가 없다. 간경도감본은 대체로 협주의 시작과 끝에 흑어미(黑魚尾)가 놓인다. 협주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문헌은 〈훈민정음언해〉·〈석보상절〉·〈월인석보〉·활자본 〈아미타경언해〉 등이 있다.

4) 〈몽법〉은 본문이 끝나면 행을 달리하여 언해문이 시작된다. 그러나 간경도감본은 본문 바로 밑에 언해문이 이어지고 본문과 언해문 사이에는 O표시를 두었다. 〈몽법〉과 같은 형식을 취한 문헌은 〈훈민정음언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서문, 활자본 〈아미타경언해〉 등이 있다. 또 전(前) 이자(二者)는 본문 다음에 협주가 올 경우에도 본문과 협주 사이에 아무런 표시가 없으나 〈월인석보〉 서문의 경우에는 O표시가 있다. 주008)

안병희(1979:110, 1980:378 주5, 1990)에서 〈훈민정음언해〉와 〈석보상절〉이 같은 연대에 간행되었을 것이라는 논의가 있었는데, 본문과 협주 사이의 O표시 유무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5) 초기 불서 언해에서 간년 추정의 유력한 근거가 되는 불교 용어(안병희:1974, 1980 참조) 「阿難, 解脫, 藐, 般若」 중 〈몽법〉에는 「解脫」 한 단어만이 한 번(48ㄴ) 눈에 띈다. 「解脫」에서 「解」의 동국정운음은 몇 차례 변개가 있었다. 주009)

몇몇 불교 용어 한자음 표기의 변개 이유에 대해서 필자는 졸고(1993:16)에서 간경도감 설치와 관련지어 설명한 바 있는데, 산스크리트語로 된 陀羅尼의 유입도 불교 용어의 한자 음역에 대한 새로운 조명에 상당 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요인들로 해서 梵語나 巴里語에서 한자로 音借된 불교 용어나 중국에서 한자로 조어된 후 우리나라에 유입된 불교 용어에 대한 새로운 주음이 시도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몇몇 불교 용어의 한자음 주음에 변개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① ·〈석보 23:16ㄱ〉

② :갱〈월석 서:8ㄱ〉, 활자본〈아미타경언해:13ㄱ〉, 활자본〈능엄6:64ㄱ〉, 목판본〈능엄6:24ㄴ〉 cf.〈몽법:48ㄴ〉

③ :〈법화 6:17ㄴ〉 〈금강:25ㄱ〉

〈몽법〉 「28ㄱ, 49ㄴ, 57ㄱ」에서 다른 어휘를 구성하는 데 쓰인 「解」자의 동국정운음은 모두 「:」이다. 이는 「解脫」에서 「解」의 음이 의도적인 변개를 입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몽법〉의 간년 추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몽법〉 1장 앞면 3행 역기(譯記)의 「譯解」에서 「解」의 주음이 다른 예와는 달리 「:갱」로 되어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解脫」에서 영향을 입은 듯하다.

위 1)-4)항을 살펴보면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문헌에서도 오늘날과 같이 독자들의 독서 능률 제고를 위한 여러 방면에서의 시도가 눈에 띈다. 이러한 독서 능력의 고려는 판식 및 체재의 변개를 가져왔고, 이러한 변개가 간년 추정에 근거가 됨을 배제할 수 없다. 후술할 언어 사실 외에 체재만을 통해 〈몽법〉의 간년을 추정한다면 목판본인 〈몽법〉의 간행이 〈월인석보〉(1459)와는 비슷한 시기,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나 간경도감본(1461이후)보다는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010)

〈몽법〉의 간행 연도를 간경도감본보다 이른 시기로 다룬 논의로는 南廣祐(1959), 이기문(1963), 中村完(1963), 志部昭平(1983), 안병희(1992) 등이 있다. 南廣祐(1959)는 譯者와 철자법에 근거하여 〈월인석보〉와 同時代라 하였고, 이기문(1963)은 언어 사실과 표기법에 근거하여 세종代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하였다. 中村完(1963)은 언어 양식에 비추어 〈월인석보〉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았고, 志部昭平(1983)에서는 표기법과 언해 양식에 비중을 실어 〈몽법〉과 활자본 〈아미타경언해〉를 〈월인석보〉와 활자본 〈능엄경언해〉 사이로 추정하였다. 안병희(1992)에서는 〈몽법〉과 〈사법어〉의 간년을 모두 ?1459로 적어 놓았다.
이제 〈몽법〉은 1467년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책으로 다루어져서는 안되고, 1459년경에 간행된 국어사 자료로서 그 제대로의 자리매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간행처는 다음 장에서 논의 할 것이다.

Ⅲ. 현전본 및 원간본 비정(比定)

현재 전해지는 〈몽법〉의 간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11)

판본 중 필자가 실사하지 못한 것은 최현배(1960), 이조전기국역불서전관목록(1964), 심재완(1969),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1976), 안병희(1979), 박병채(1980) 등을 참고하였다. 현재는 소장자 및 소장처가 바뀐 판본도 있으나 그 소재가 불분명한 것은 원소장자만 밝혔다.

[갑류] 원간본이나 그 후쇄본으로 보이는 일군(一群).

[을류] 원간본의 복각본 일군(一群).

[병류] 원간본과 언어 사실은 같으나 체재를 달리한 개간(축쇄)본 일군(一群).

[정류] 체재는 [병류]와 비슷하나 언어 사실이 달라진 전면 개찬본 일군(一群).

[갑류] 원간본이나 원간본 계통 (〈사법어〉) 없음).

1)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 (보물 767호. 역기 있음. 간기 없음)

2) 조명기·이겸로(보물768호)·세종대왕기념사업회(보물769호)·심재완 소장본(김수온 발 있음. 刊記: 成化 八年 「1472. 성종 3년」. 역기 없음)

3) 고려대 만송문고 소장본 (역기 중 ‘역해’ 삭제. 간기 없음)

4) 성암문고·천리대 도서관 소장본.

[갑류] 중 2)항의 책들은 끝에 갑인자(甲寅字)로 된 김수온의 발문이 있다. 그 내용 중에 「…板本所在模印…法語二百件…以經計者凡二十九秩…」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초쇄본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1954년 통문관에서 이겸로씨 소장의 이 책을 영인 배포할 때, 발문 1장(간기가 있는 부분)이 낙장인 원본 그대로 간행하여, 간기가 있는 같은 판본의 다른 책이 출현하기까지 초간본으로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수온 발문을 가지고 간행된 〈몽법〉에는 역기(譯記)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된다(안병희:1979 주 14, 박병채:1980 참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을 영인한 책(세종학연구2:1987)에는 역기가 뚜렷한데 이는 다른 판본의 것으로 보완한 때문이다. 주012)

박종국(1987:114) 참조.
또 심재완(1969)에서는 자신 소유의 책 주013)
이숭녕(1986:35)은 이 책의 소장자가 바뀌었다고 하였으나 현재의 소재를 밝히지 않아 그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을 원간 완본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역기와 김수온 발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모순이다. 착오가 있었던가 후에 합철된 것이던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3)은 박병채(1980)에서 간경도감본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1장 앞면의 지각 변란에 변개가 보이고 방점도 원간본 계통의 다른 판본과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곳이 있다. 주014)
이 책 1장 앞면의 지각 변란은 글자 1자가 들어갈 정도의 여백을 두고 밑으로 내린 흔적이 있다. 방점이 달라진 몇몇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甲類의 다른 판본〉〈만송문고본〉
(30ㄴ) :이이
(69ㄱ) 當··야當·야
(70ㄴ) 아·니·면아니·면
(70ㄴ) :일리·라:일리라.
또 역기 중 ‘역해(譯解)’라는 글자가 삭제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언해문의 주격조사 ‘ㅣ’가 1), 3)항에서는 행(行)의 오른쪽에 있으나 2)항에서는 중간에 오는 약간의 변개가 있는 [工夫ㅣ(4ㄱ)] 점이다. 주015)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후행하는 주격이나 서술격조사의 표기가 구결에서는 行의 오른쪽에 가는 글씨로 적히고 언해문에서는 行의 중간에 굵은 글씨로 적혔는데, 1), 3)항의 [4ㄱ:工夫ㅣ]에서 주격조사 ‘ㅣ’는 언해문인데도 行의 오른쪽에 가는 글씨로 적혀 있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판본에서는 모두 行의 중간에 제대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원간 후쇄본 이후 교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4)항의 것은 필자가 실사하지 못해서 그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었다. 중촌완(中村完)(1963)에 의하면 금서룡(今西龍) 소장본도 있었던 것 같으나 이것이 천리대(天理大) 도서관으로 소장처가 바뀐 것인지 알 수 없다.

[을류] 원간본의 복각본(간기 있음)

1) 유점사본(중종16, 1521년 간), 〈사법어〉 없음, 역기 있음.

동국대 도서관. 성균관대 도서관. 송석하 소장본.

2) 석륜암본(중종18, 1523년 간), 〈사법어〉 없음.

간송박물관 소장본.

3) 심원사본(중종20, 1525년 간) 〈사법어〉 있음, 역기 없음.

고려대 만송문고 소장본.

4) 중대사본(중종38, 1543년 간), 〈사법어〉있음.

연세대 도서관 소장본.

위 [을류]는 모두 지방 사찰에서 간행된 중간본인데 판본(板本)의 밑바탕을 어느 것으로 했느냐에 따라 역기 유무가 드러난다. 3), 4)항의 〈사법어〉는 〈목우자수심결〉에 합철된 것과는 달리 언해 체재가 바뀌어 있다. 〈목우〉의 것은 각편의 법어를 대문(大文)으로 나눈 후 언해하여 〈몽법〉과 체재를 같이 하였다. 다만 〈몽법〉과 달리 원문의 한자에는 한자음 주음이 없다.

[병류] 개각(축쇄)본 (판식 및 체재 바뀜)

1) 고운사본(중종12, 1517년 간), 성종조판(1472)의 중간(重刊), 역기란 없앰, 〈사법어〉 있음.

서울대 가람문고·고려대 화산문고·이병주 교수 소장본.

2) 빙발암본(중종30, 1535년 간), 역기란 없앰.

〈몽법〉 앞에 〈사법어〉가 있음. 1)항의 고운사본을 저본으로 한 복각본임.

고려대 만송문고 소장본.

위의 [병류]는 [갑류]·[을류]의 유계(有界) 팔행(8行)이 유계(有界) 7행으로 바뀌고 1장 앞면의 역기란은 없어졌다. 언해문은 소자(小字) 쌍행(雙行)으로 변개되면서 〈몽법〉 전71장(全71張)이 54장으로 줄어들었다.

[정류] 전면 개찬본

1) 송광사본(선조10년, 1577년 간), 현실한자음 주음, 체재는 [병류]와 유사하나 언어 사실은 바뀜, [〈사법어〉. 시각오선인법어. 〈몽법〉] 순으로 구성됨.

동국대 도서관·서울대 일사문고·국립도서관·고려대 도서관 소장본.

위 [정류]에 대해서는 Ⅴ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이상에서 〈몽법〉의 여러 간본을 고찰한 결과 어떤 판본에서도 원간본의 간기는 볼 수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활자본 〈아미타경언해〉나 활자본〈능엄경언해〉도 역시 간기가 없는데, 이는 간행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책들이 간행될 당시에는 불서(佛書) 인행(印行)을 담당했던 출판 기관인 책방(冊房)이나 정음청(正音廳)이 폐지되어 불서 인행을 담당할 기관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주016)

조선 초기 불서 언해의 印行에 대해서는 이숭녕(1970), 이봉춘(1978), 강신항(1987)을 참조할 것.
결국 불서는 활자의 주조와 일반 도서의 인행을 담당했던 주자소나 경적의 인행을 주관했던 교서관(校書館)에서 은밀히 간행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불서 인행을 반대하던 유신(儒臣)들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간기를 두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활자본 〈아미타경언해〉나 활자본 〈능엄경언해〉는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불경 언해가 교서관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인 세조가 언해를 주관했기 때문이었고(안병희:1980), 〈몽법〉은 역해자 신미가 세조의 사례(師禮)를 받던 혜각존자(慧覺尊子)였기에 전 이자(前二者)보다 앞서 〈교서관〉에서의 간행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비록 간기는 없다고 하더라도 역기와 김수온의 발문 유무(有無), 〈사법어〉와의 합철 여부 등을 검토하면 원간본의 체재를 갖추고 있는 유일본은 [갑류] 1)항의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貴.214.2-덕69ㅁ2)이다. 또한 [을류] 1)항은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인 [갑류] 1)항의 복각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갑류] 1)항의 〈몽법〉은 원간 초쇄본이거나 적어도 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 이 책은 방점 표시, 변란, 체재, 장정 등 모든 면에서 원간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제 우리는 [갑류] 1)항의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을 〈몽법〉의 원간 완본으로 다루고자 한다.

Ⅳ. 어학적 고찰(考察)

중세국어의 언해서가 대부분 그러하듯 〈몽법〉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 이른바 축어역(逐語譯)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법어의 언해라는 특성, 본문과 언해문에 일일이 동국정운음을 주음해야 되는 번거로움, 독서의 편의 주017)

중세국어 문헌에서 독자를 의식한 배려의 예로는 〈월인석보〉 권두의 「훈민정음언해」, 〈훈몽자회〉 권두의 「諺文字母表」와 「平上去入定位之圖」가 있다.
등을 고려한 듯 가능한 한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꼭 필요한 불교 용어나 고유어로 바꾸기가 마땅치 않은 말은 원문을 그대로 쓰고, 때로는 협주를 두기도 했다.

1) 境界及身心이 皆不同先已며 (4ㄴ) 주018)

방점 생략. 이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원문의 방점을 생략한다.

境界와  몸과 괘 다 녜 디 아니며

2) 捉敗佛祖 得人憎處야 (44ㄱ)

부텨와 祖師왜 사게 믜이샨 고 기자바

중세국어 자료 중 불경언해류는 소재언어(素材言語, source Language)가 불경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당시 언어 생활의 모습을 폭넓게 보여 주지는 못한다. 특히 〈몽법〉은 법어(法語)가 가지는 성격상 어미의 활용(活用)이 단조롭다. 대부분의 종결어미는 직설법이나 추측법 선어말어미와 결합한 평서형이고 간혹 의문형이 보일 뿐이다. 또 부정문은 일관되게 긴 부정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어휘가 몇몇 눈에 띄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역해자가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려고 노력한 데서 결과된 것으로 보인다. 〈몽법〉의 표기법은 정음 창제 초기의 문헌, 특히 〈월인석보〉의 그것과 근사하다. 우선 그 표기법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 

‘’은 훈민정음의 17자 초성체계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해례(解例)〉 제자해(制字解)에서 순경음(脣輕音)으로 규정된 이후 〈해례〉·〈용가〉 주019)

〈해례〉는 〈훈민정음해례〉의 약칭이다. 이 외에도 출전은 주로 약칭을 사용한다. 〈능엄〉은 목판본 〈능엄경언해〉를 이른다.
등에서 가장 고형(古形)으로 적히고, 〈석보〉·〈월곡〉·〈훈언〉·〈월석〉 등에서는 변화된 양상을 보이다가 〈능엄〉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그런데 〈몽법〉에는 상당히 많은 예가 보인다.

1) 벽으로[礫](10ㄱ)

2) 조요미(23ㄴ), 비니[吐](31ㄱ) cf. 비와(능엄3:110ㄱ)

3) 갓가리라(4ㄴ,43ㄴ), 더러(5ㄴ), 누며(15ㄱ)

4) 두[眼皮](2ㄴ), 수(7ㄱ,24ㄱ), 더러디(46ㄴ)

5) 法(21ㄴ,33ㄴ) cf. 외-(27ㄴ,48ㄱ)

6) 가온(43ㄴ,64ㄴ) cf. 가(월석14:80ㄱ)/가온(석보6:31ㄱ)

니르와다(3ㄴ) cf. 니르다(석보23:54ㄴ)/니르와다(석보9:23ㄱ)

‘’의 쓰임은 체언, 용언 어간, 용언 활용형, 파생어 등에 두루 나타난다. 정음 초기 문헌 〈용가:98장, -〉에서 한 차례 용례가 보일 뿐 그 이후 단독으로 쓰임이 없는 ‘-’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외-’ 또는 접미사로 ‘-’가 쓰였을 뿐이다. 6)의 ‘니르-/니르왇-’은 정음 초기 문헌부터 혼기되던 예인데 〈몽법〉에서는 ‘니르왇-’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는 위의 용례 이외에는 모두 ‘가온’로 표기되었다.

2. ᅙ

‘ᅙ’은 훈민정음 초성체계에서는 후음(喉音)의 전청자(全淸字)로 영모(影母)에 해당하지만, 〈해례〉 용자례(用字例)에는 빠져 있다. 고유어 표기에서는 초성 뿐만 아니라 종성에서도 단독으로 쓰인 일이 없다. 주로 동국정운 한자음과 사이글자의 표기에 사용되었고, 고유어 표기에서는 동명사 어미 ‘-ㄹ’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 ’에 사용되었다.

1) 그 갈히며(53ㄱ), 마디니라(58ㄱ),  제 보며(15ㄴ),

 사(31ㄴ), 허 히미(5ㄴ)

2)  時節이니(10ㄱ),  三昧王(48ㄴ)

3) 起 (26ㄴ),  히니(10ㄴ)

4) 사롤 이(19ㄴ), 드롤 이(30ㄴ)

5) 이럴(2ㄱ), 從(6ㄴ)

6) 便論工夫홀디니라(33ㄱ), cf. 곧 工夫 닐옳디니라.

1)은 ‘동명사어미 + 아·설·순·치음의 전청자형’으로 표기된 것이다. 다만 후음만은 초성에 ‘ᅙ’이 쓰인 적이 없어 차청으로 대신했다. 이러한 표기는 〈법화〉, 〈금강〉 등에서 ‘ㄹ+아·설·순·치음의 전탁자형’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원각〉 이후에는 각자병서가 폐지되면서 ‘ㄹ+전청자형’형태로 통일을 이루었다.

2)는 ‘ ’의 후행요소가 한자인 경우이다.

3)에서 후행요소가 병서이면 ‘ㄹ’과 ‘ ’이 다 쓰였음을 알 수 있다.

4)는 후행요소가 불청불탁자인 경우 ‘ㄹ’이 쓰인 예이다.

5)는 동명사 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 어미인데, ‘ ’같은 대당형이 없이 정음 초기 문헌부터 ‘-ㄹ’로만 표기되었다. 주020)

‘-ㄹ’형은 언해문의 경우 예외(능엄1:72ㄱ)가 없는 것은 아니나, 〈용가〉(1447)에서 〈금강〉(1464)까지 일관되게 쓰이다가 〈원각〉(1465) 이루 각자병서가 폐지되면서 ‘-ㄹ’로 바뀐다.

6)은 정음구결에서의 ‘ㄹ+전청자형’과 언해서에서의 ‘ +전청자형’으로 서로 다르게 표기된 예이다.

3. 초성병서

〈몽법〉은 ‘ +전청자형’ 표기가 일반화되어 각자병서는 제한적으로 쓰였을 뿐이다. 정음 초기 문헌에 쓰인 8가지(ㄲ ㄸ ㅃ ㅉ ㅆ  ᅇ ᄔ) 중에서 3가지(ㅆ  ᅇ)만 나타난다. 합용병서는 10가지(   ᄮ :    ᄩ : ᄢ ᄣ) 중 3가지(ᄮ  ᄣ)가 나타나지 않는다.

3.1. 각자병서

1) ·[引](57ㄱ), 두르·[廻](22ㄴ), 도·[還](62ㄱ)

2) 믜··고·[憎處](19ㄴ) cf. 믜·이샨·고·(44ㄱ)

3) :말·(47ㄴ); 이럴·(6ㄴ), 從(6ㄴ)

4) 녯 廟:쏘뱃 香爐ㅣ(41ㄱ)

정음 초기 문헌에서 어두음 표기에 사용되었던 ‘ ㅆ’ 중 어두음에서의 ‘ㅆ’의 용례는 여기서 발견되지 않는다. 2)는 피동의 파생접미사와 결합된 것인데 같은 책에서 혼기되어 나타난다. 3)의 ‘이럴, 從’는 동명사 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인데, 전술한 대로 정음 초기 문헌부터 ‘-ㄹ’로만 표기되었다.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은 활자본 〈능엄〉 이후 정음 구결에서 동명사어미 ‘ㄹ+전청자형’으로 먼저 시행되어 ‘ㄹ+전탁자형’인 언해문과 불일치(不一致)를 보이다가 [佛問圓通실~부톄 圓通 무르실(활자본, 능엄 5:68ㄴ-69ㄱ) / 取正果실시~正果 取실씨 (활자본, 능엄 6:7ㄱ-7ㄴ)], 〈원각〉(1465) 이후에는 ‘ㄹ+전청자형’ 표기로 완전히 바뀌었다. 구결과 언해에서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 통합형 표기의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4)는 사이글자를 내려 쓴 표기이다.

3.2. 합용병서

다음은 〈몽법〉의 합용병서 목록이다. 한 어사에 곡용형이나 활용형이 여럿 있을 경우에는 대표적인 용례 하나만을 제시한다.

〈〉 ·메[夢](4ㄴ), [悟](10ㄱ), 馬祖·(31ㄱ)

··며[寤](42ㄴ), ··야[甦](59ㄱ).

〈〉 ·[又](3ㄴ), ·히·라[地](10ㄴ)

〈〉 ·디[急](8ㄴ)

〈ᄮ〉 없음.

〈ㅳ〉 ·드·로[意], ·러·펴[抖擻](24ㄱ)

·리·니, ·러디[開](24ㄱ)·긔[落](31ㄴ)

〈〉 ··디[用](14ㄴ), ··러·리런·댄[撥無](47ㄴ), -로·[以](48ㄴ).

〈〉 없음.

〈ᄩ〉 :(44ㄱ), ·딜·씨·니[拆](44ㄱ).

〈ᄢ〉 ··라[時](15ㄱ), ·디·며[沈](37ㄱ), ·리·고[包](67ㄴ).

〈ᄣ〉 없음.

합용병서 10가지 중 ‘ᄮ ’이 쓰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출현할 만한 어사가 없었기 때문이고, ‘ᄣ’이 올 수 있는 환경에서 ‘ᄢ’이 쓰인 것은 역해자의 개인적인 취향에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4. 종성표기

4.1. 〈몽법〉의 종성 표기는 〈해례〉의 종성규정에 충실했다. ‘ㄱㄷㄴㅂㅁㅅㄹ’의 8종성 외에 어떤 받침도 쓰인 예가 없다. 간경도감본에서 ‘ㅅ’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이 여기서는 쓰이지 않았다. 주021)

‘ㅅ’과 ‘’의교체에 대한 논의로는 이기문(1962:129, 1963:83-83)가 있다.
이는 〈석보〉, 〈월석〉과 궤를 같이 한다.

1) 桃花ㅅ곳 보고(10ㄱ), 늣도 아니며(7ㄱ); 디 몯며(12ㄱ)

긋디 아니면(1ㄱ); 흗디 아니며(43ㄱ) 터럭 귿매나 이시면(12ㄴ)

2) 짓와 괴요매(1ㄴ)

4.2. ‘’을 받침으로 가진 명사는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와 만나면 반드시 분철했다. 주022)

이에 대해서 이익섭(1991:34-35)는 일반 분철 현상의 일환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을 애초부터 초성으로 발음되지 않은 음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1) 양로(3ㄱ,62ㄱ,70ㄴ). cf. 양로(월석1:18ㄴ), 양로(월석7:2ㄱ).

양로(능엄4:90ㄴ).

2) 즁이(11ㄴ). cf.즁이라(월석1:18ㄴ), 즁이(능엄1:29ㄱ)

3) 죵이라(20ㄴ), 죵이어뇨(22ㄴ). cf.죠이(월석9:33ㄴ), 죵이(능엄9:100ㄱ)

이익섭(1991:34-35)에 의하면 모음 조사 앞에서의 분철은 〈석보〉에 등장하여 〈능엄〉에서 활발해지고 〈두언〉에서 정착 단계에 이른다고 하였다.

5. 사이글자

사이글자는 체언이 결합할 때 음성적 환경에 따라 체언 사이에 끼어드는 자음 글자인데 〈용가〉에서는 ‘ㄱㄷㅂㅅᅙ’의 6가지, 〈훈언〉에서는 〈용가〉의 ‘’대신 ‘’이 쓰여서 ‘ㄱㄷㅂㅅᅙ’의 6가지가 쓰였고, 〈석보〉에서는 ‘ㅅ’으로 통일되었으나, 〈용가〉·〈훈언〉의 잔형인 ‘ㄱ,ㄷ’, 〈월석〉에서는 ‘ㅅ’과 잔형인 ‘ㄱㄷㅂᅙ’ 등이 나타난다(정우영:1992),(고영근:1993).

〈몽법〉의 사이글자는 주로 ‘ㅅ’이 쓰였으나 ‘ᅙ’이나 ‘ㄷ’이 나타나기도 한다. ‘ᅙ’은 무종성자(無終聲字)인 ‘무(無)’자와 ‘자(字)’의 사이에만 나타나고 ‘ㄷ’은 동일한 환경에서 ‘ㅅ’과 혼기되었다.

1) 믌겨리리라(27ㄴ), 祖師ㅅ關(10ㄴ) 後ㅅ일(10ㄱ)

2) 無ᅙ字(11ㄴ, 13ㄴ, 15ㄱ, 54ㄱ)

3) 두(2ㄴ), 光明(53ㄴ)/ 시우(24ㄴ), (25ㄱ)

6. 주격과 서술격 표기

6.1. 주격조사의 쓰임은 언해문에서는 ‘이,ㅣ,∅’로 실현되나 구결문에서는 ‘이,ㅣ’만 실현된다. 체언의 발음이 /i, j/일 때도 ‘ㅣ’를 거듭 적었다.

1) 이: 各各 일후미 잇니(39ㄱ)/ 身心이 輕淸야(39ㄱ)

2) ㅣ: :제(⇐저+ㅣ) :보리·라(15ㄴ), :녜(⇐너+ㅣ) 어·듸이·셔(53ㄴ)/ 工夫ㅣ(38ㄱ)

3) ∅/ㅣ:  리   이 第一 니(40ㄴ), 그 害 나히 아니니라(45ㄱ)/ 澄秋野水ㅣ(27ㄴ), 一切疑碍ㅣ(29ㄴ), 如秋天相似時ㅣ(40ㄴ), 正眼開ㅣ(43ㄴ)

2)의 ‘제’와 ‘네’는 체언 말음이 /i, j/이외의 모음일 때 주격조사 ‘-ㅣ’와 결합하여 하강이중모음을 이룬 예이다. 체언 말음절이 평성(무점)이면 주격조사와 결합시 상성(2점)으로 성조가 바뀐다. 그러나 체언 말음절이 거성이거나 상성이면 성조에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6.2. 서술격 조사도 음운론적 조건에 따른 교체형이 대체로 주격조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다만 위 3)의 뒷부분과 같은 환경(체언의 음절말음이 /i, j/로 끝날 때)에서 서술격조사는 주격조사와는 달리 ‘ㅣ-’가 생략되었다.

1) 이-: 三昧ㅅ일후미라(48ㄴ)/ 常光現前이 謂之禪이오(63ㄴ)

2) ㅣ-: 有ㅣ라 無ㅣ라(14ㄴ)/ 不搖ㅣ 謂之坐ㅣ오(64ㄱ)

3) ∅ -: 가지라(42ㄴ)/ 非眞心 發疑라(1ㄴ), 大悟ㅣ 近矣리니(27ㄴ),

極爲大害니라(47ㄱ), 骨髓시며(51ㄴ)

3) 에서 주격의 경우와는 달리 ‘ㅣ-’가 생략되어 나타난다. 이는 주격의 경우 ‘-ㅣ’가 생략되어 구절 표시가 없어지면 문맥 파악이 늦어지고 가독성이 낮아지는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서술격의 경우는 ‘ㅣ-’가 생략되더라도 활용어미가 있기 때문에 능히 구절 표시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수(髓)’에 서술격어간 ‘ㅣ-’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동국정운음의 반영을 엿볼 수 있다.

7. 희귀어

〈몽법〉에는 다른 문헌에서 용례를 찾을 수 없는 희귀어가 더러 눈에 띈다. 이는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려는 노력에서 결과된 것으로 역해자의 언어 수행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대부분 고어 사전에 수록되어 있으나 미진한 부분에 설명을 보탠다.

1) ·하·다〈동사〉급박하다. 급하다.

다가  미 가면(若用心이 急면)〈7ㄴ〉

〈구급방: 상24, 하79〉에 부사 ‘가기[卒](갑자기)’가 보이고 신간 증보(新刊增補)〈삼략직해: 상 31〉에 ‘급박며 가고[急刻고]’가 보인다. 또 〈정속언해:3〉에 ‘가[顚沛之頃]’이 쓰인 점으로 보아 용례는 드물지만 ‘급하다’의 의미를 가진 말임을 알 수 있다. 어기(語基)는 ‘가’으로 생각된다.

2) ·대·수〈명사〉대숲

벽으로 대수 툔 소리예(10ㄱ)

〈월인 8: 99)와 〈법화1:155〉 등에 보이는 ‘대숲’과 역시 앞의 〈월석〉과 같은 장에 보이는 ‘대수ㅎ’의 변이형으로 생각된다.

3) :비·다〈동사〉뱉다

곧 혀 비니 (便吐舌니)〈31ㄱ〉

‘:비왙·다’의 고형(古形)이나 다른 용례는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4) 살·기잡·다〈동사〉옭아매다. 옭아 잡다

사게 믜이샨 고 기자바 (捉敗得人憎處야)〈44ㄱ〉

〈몽법〉이외의 다른 용례는 없으나 〈법어:2〉에서 같은 원문에 대한 풀이로 ‘사게 믜 고 올자보리니’가 있는 것으로 봐서 위의 풀이가 타당할 것 같다.

5) ·서의·히〈부사〉성기게. 엉성하게

서의히  디위 야 [淡一上야]〈38ㄴ〉

〈몽법:16ㄴ〉에 ‘서의호’이 있고 ‘서의-’의 활용형이 산견되는 점으로 보아 파생어임을 알 수 있다.

6) ·쇠·뷔〈명사〉쇠비

쇠뷔라 야 디 몯리며 (不得作鐵掃箒야 用이며)〈14ㄴ〉

·쇠(鐵)와 ·뷔(箒)의 합성어이다. 이러한 유(類)의 합성어로는 쇠붑[鍾]〈석보6:38〉, 쇠(鐵船)〈금삼2:2〉가 있다.

7) 〈부사〉설설(절절)

活潑潑  흐르는 믌겨레 비췬 비츨 닐온 마리니(43ㄱ)

‘’은 위 문장에서의 쓰임으로 미루어 힘차게 흐르는 물결을 표현한 의태어로 생각되는데 다른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8) 올긔〈명사〉올가미

趙州의 올긔 자바 (捉敗趙州야)〈12ㄱ〉

〈법어:2〉에 보이는 ‘올잡-’의 어기 ‘올’의 변이형으로 생각된다.

9) 저·즈리·다〈동사〉점쳐 헤아리다(짐작하다. 재다)

혜아리며 저즈리디 말며 (不要思量卜度며)〈28ㄴ〉

10) 족〈명사〉조각. 쪽

 조기 뮈여 (則動肉團心야)〈7ㄴ〉

‘’의 변이형으로 보이는데 유일한 용례이다.

11) ·저·즐·다〈동사〉저지레하다.

저즈로미 俗子ㅣ 야 〈作爲似俗子야〉(47ㄴ〉

〈고어사전〉·〈이조어사전〉에는 ‘저즈르다’를 기본형으로 하였으나 〈66ㄱ〉의 ‘저즈로’로 보나 ‘저즐다’와의 관련성으로 보나 ‘저즐다’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큰사전〉에는 ‘저즐다’이다.

12) 흐워기〈부사〉흡족히. 두텁게

흐워기  디위 고(濃一上)〈38ㄴ〉

‘흐웍-’에서 온 파생부사이다.

13) ···다〈형용사〉한결같다

話頭ㅣ 면 〈話頭ㅣ 純一면)〈69ㄴ〉

‘다’〈소언5:97〉의 고형(古形)인데 〈고어사전〉·〈이조어사전〉·〈우리말큰사전〉에는 기본형을 모두 ‘다’로 하였다. 그러나 파생부사 ‘티’가 널리 쓰인 점으로 보아 ‘다’로 해야 될 것 같다.

8. 기타

〈몽법〉은 인출 과정에서 고도의 정확성을 기한 듯 위에서 본 대로 표기법은 대체로 일관된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 또 전(全) 71장 중 뚜렷하게 오류로 보이는 부분은 (59ㄴ)의 두 곳뿐으로 주023)

(59ㄴ)의 오류는 6행 하단의 ‘体:톙·라’ 앞에 ‘大機’가 빠져있는 것과 8행 맨앞의 ‘三玄’과 다음에 ‘体:톙’가 잘못 삽입된 것을 이른다.
인행(印行)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은 종성과 사이글자를 제외하고는 출현할 수 있는 대부분의 환경에 나타난다.

모음조화는 대체로 지켜졌으나 언해문의 조사에서 양성모음의 출현이 우세하다. 특히 ‘   ’이 그러하고 한자어 어간 뒤에서 두드러진다.

1) 衲僧(62ㄴ: 구결문 衲僧은); 뎌(29ㄱ), 境界(5ㄴ);

定(25ㄴ); 어듸(13ㄴ), 話頭(2ㄴ)

어간 ‘-’와 어미의 결합에서 어미의 초성이 ‘ㄱ, ㄷ’으로 시작되면 반드시 축약형으로 실현되었다.

2) 녯 聖人냇 보라 보미 맛당컨뎡(20ㄱ)

定 貪코(25ㄴ:구결문 貪定고)

아티 아니호리라(26ㄱ)

話頭 擧티 아니야도(4ㄱ)

장형사동을 만드는 보조적 연결어미의 사용례는 얼마 되지 않으나 수의적 교체형 ‘-긔’와 ‘-게’가 함께 실현되었다. 주024)

〈석보상절〉23·24권에서 ‘긔/게’의 교체에 대한 논의는 김영배(1972:251-252) 참조.

3) 護持야 샹녜 닛게 야(9ㄱ)

러디긔 우리틸씨라(31ㄴ)

여격 표시어 ‘/의그’의 쓰임은 보이지 않고 모두 ‘/의게’로 나타난다. 주025)

보조적 연결어미 ‘긔/게’, 여격표시어 ‘/의그에’와 ‘/의게’ 등의 언어 사실로 국어사 자료의 번역 연대를 추정한 논의로는 고영근(1991)이 있다.

4) 모 게 穿鑿히 求티 말며(28ㄴ)

곧 常 무릐게 디리라(47ㄱ)

명사 ‘막다·히/막:대’ 중에서 ‘막다·히(51ㄴ,62ㄴ)’만 쓰였고, 부사 ‘반·기/반·시’ 중 ‘반기(4ㄱ,34ㄱ)’만 쓰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또 진리의 문답에 쓰이는 꾸짖는 소리 「엑!」[喝](31ㄴ,55ㄱ)과 얼결에 저절로 내는 소리 「화!」(18ㄴ,29ㄴ) 등의 감탄사도 보인다.

5) 喝고 니샤(55ㄱ)

문득 화논  소리예(18ㄴ)

Ⅴ. 원간본과 중간본(송광사본)의 비교

Ⅱ장에서 추정(推定)한 바와 같이 〈몽법〉 원간본의 간년을 1459년(?)이라고 하면 중간본(重刊本)인 송광사본(1577년 간)과는 약 110여 년 차이가 난다. 송광사본(松廣寺本)은 원간본(原刊本)과는 체재와 언어사실이 다른 전면 개찬본이다. 이 책은 임진란 직전 지방 사찰에서 간행된 국어사 자료 주026)

임진란 직전의 국어사 자료에 대해서는 안병희(1972) 참조.
로서의 가치로 해서 같은 해에 같은 장소에서 간행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주027)
〈誡初心學人文〉에는 이 외에도 〈發心修行章〉·〈野雲自警序〉 등이 권을 달리하여 합철되어 있으나 張次가 일련 번호이므로 〈誡初〉로써 책명을 삼는다.
과 함께 국어사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어 왔다.

5.1. 송광사본 〈몽법〉은 앞 부분에 〈사법어〉와 나옹화상의 「시각오선인법어(示覺悟禪人法語)」가 있고, 그 뒤에 〈몽법〉이 합철되어 있다. 〈몽법〉 중 유일하게 나옹화상의 법어가 〈사법어〉 뒤에 옮겨져 장철된 것이다. 판심제는 다른 판본들과는 달리 〈사법어〉 부분은 「법(法)」, 〈몽법〉부분은 「육(六)」이라 되어 있다. 장차도 각각이다. 어미(魚尾)는 세화문어미(細花紋魚尾)가 주로 이용되었으나 간혹 흑어미도 보인다. 주028) 이러한 현상은 지방 사찰본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誡初〉에서도 같은 예가 나타난다. 역기(譯記)란은 없어졌고 56장 앞면에 간기(萬曆五年丁丑季夏日順天地曺溪山松廣寺留板)가 있다. 체재는 Ⅲ장의 [병류]와 비슷한 매면(每面) 유계(有界) 7행(行), 매행(每行)은 본문(本文)과 언해문(諺解文) 모두 15자 씩이나 언해문은 1자 공격(空格)을 두었다. 본문은 대자(大字)이고 언해문은 소자(小字) 쌍행(雙行)이다. 원간본과는 달리 구결에는 방점을 표시하지 않았다. 한자음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으로 주음되어 있는데, 본문과 언해문 모두 글자마다 주음이 있으나 다만 본문 한자음 중 앞에서 나온 글자의 주음인 경우 생략한 것이 많다. 본문과 언해문 사이에는 O표시를 했는데 본문이 행을 다 채우고 끝나면 O표시 없이 행을 바꾸어서 언해에 들어갔다. 협주에는 흑어미를 두었다. 本文은 원간본의 두 대문을 한 대문으로 합한 것이 많다. 이렇듯 송광사본 〈몽법〉은 체재에서는 원간본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5.2. 그러면 송광사본 〈몽법〉의 언어 사실은 어떠한가. 원간본이 정음 초기의 표기법에 충실한 자료인데 비해 송광사본은 임진란 직전, 곧 16세기 후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지방 사찰 간본으로서 간행지역의 방언형까지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두 판본의 언어 사실 비교는 15세기 중엽 국어에서 16세기 후기 국어로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송광사본을 다룰 때에는 원간본의 언어가 그대로 옮겨진 점, 탈각이나 오각이 적지 않다는 점 등에 유의를 요한다. 원간본과 송광사본과의 차이를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이 두 판본에서 언어 사실의 차이는 주로 표기법과 음운 변화에 국한되어 있고, 형태·어휘면에서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중간본은 대체로 원간본에서 많은 영향을 입기 때문이다.

1. 

원간본의 ‘’은 송광사본에서는 예외 없이 ‘ㅂ’으로 바뀌었다. ‘’의 일반적인 변화는 ‘〉오/우,ㅇ’인데, 후자에서의 이러한 표기는 방언형의 반영으로 보인다. (이하 앞쪽은 원간본, 뒤쪽은 송광사본의 용례임.)

1) 으로(10ㄱ)벽으로(7ㄴ)

2) 조요미(23ㄴ)조요미(18ㄱ)

3) 도(17ㄱ)도보(13ㄱ)

4) 수(24ㄱ)수비(18ㄴ)

5) 法다(33ㄴ)法다비(25ㄴ)

2. ᅙ

동명사어미 ‘-ㅭ’은 모두 ‘-ㄹ’로 바뀌었으며, 동국정운 한자음의 폐지로 한자음에서의 용례도 사라졌다. 다만 ‘무(無)’와 ‘자(字)’ 사이의 사이글자 ‘ᅙ’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는 원간본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1) 잡드디니(17ㄱ)잡드롤디니(13ㄱ),

 時節이니(10ㄱ) 時節이니(7ㄴ),

 히니(10ㄴ)갈 히니(8ㄱ)

2) (1ㄴ)일(1ㄱ)

3) 無ᅙ字(11ㄴ)無ᅙ字(9ㄱ)

3. 초성병서

각자병서는 모두 단일자형(單一字形)으로 바뀌었으나 합용병서는 그대로 표기되었다. 각자병서 중 ‘ㅆ’은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 ‘-ㄹ씨니’가 그대로 쓰인 예와 사이글자 ‘ㅅ’을 내려 쓴 예가 각각 한 차례 보인다.

1) 두르(22ㄴ)두르혀(17ㄴ),

말(47ㄴ)말(37ㄴ),

믜(19ㄴ)믜인(15ㄱ)

2) 들씨니(30ㄴ)들씨니(23ㄴ)cf.씨니(31ㄴ) 시니(24ㄱ)

녯 廟쏘뱃(41ㄱ)녯 廟쏘뱃(32ㄱ)cf.氣韻이 소배 드러(44ㄱ→34ㄴ)

3) 며[寤](42ㄴ→33ㄱ), 히라[地](10ㄴ→8ㄱ),

디[急](8ㄴ→6ㄴ), 러디긔[落](31ㄴ→24ㄱ),

디[用](14ㄴ→11ㄴ), (44ㄱ→34ㄴ),

디며[沈](37ㄱ→28ㄴ).

4. 사이글자

원간본에 쓰였던 ‘ㄷㅅᅙ’중 ‘ㅅᅙ’은 그대로 쓰였으나 ‘ㄷ’은 쓰이지 않았다.

1) 眞實ㅅ疑心(1ㄱ→1ㄱ), 桃花ㅅ곳(10ㄱ→7ㄴ), 비치(43ㄱ→33ㄴ)

2) 無ᅙ字(15ㄱ→12ㄱ)

3) 시우(24ㄴ), 눈시우(19ㄱ)

그러나 구 구성의 속격 ‘ㅅ’중에는 쓰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4)  햇(27ㄴ) 햇(21ㄱ)

5. ‘’, ‘’ 표기는 원간본의 모습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6. 한자음 표기

1) 원간본의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 한자음 표기로 바뀐 송광사본에서는 일모(日母)//자는 유모(喩母)/ㅇ/화하였으나, //이 그대로 쓰이기도 하고 혼기(混記)의 예도 곳곳에 보인다.

ㄱ. 若(1ㄴ)약(1ㄱ),汝(32ㄴ)여(25ㄱ)

ㄴ. 而(36ㄴ)(28ㄱ),日(51ㄱ)(40ㄴ)

각 법어 제목의 ‘인(人)’음이 ‘’ 또는 ‘인’으로 주음되고, (12ㄴ)의 ‘연(然)’자도 본문에서는 ‘’이고 언해문에서는 ‘연’으로 주음되었다. 이러한 혼기(混記)현상은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된 다른 판본에 비해 처음 시행된 현실 한자음 표기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실 한자음 표기에서 통일된 표기 준칙이 마련되지 않은 때문으로 생각된다.

2) 전술(前述)한 Ⅳ장 6.2.에서 동국정운음에 의해 서술격 어간 ‘ㅣ-’가 생략된 용례가 있었는데 송광사본에서는 현실음의 반영으로 ‘ㅣ-’가 실현되었다.

ㄱ. 骨髓시며(51ㄴ)骨髓ㅣ시며(41ㄱ)

3) 간년 추정의 근거가 되었던 ‘解脫(38ㄱ)’이 ‘·하·탈’로 주음되어 있다. ‘해탈(解脫)’에서 ‘해(解)’의 현실음은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음이 실현된 초기의 문헌인 〈六祖 상:73ㄱ〉(1496년)과 〈眞言勸供:11ㄱ〉(1496) 이후 ‘:하’로 주음되어 왔다. 송광사본 〈몽법〉의 ‘·하’와 방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다른 어휘를 구성하는 데 쓰인 ‘解’의 音은 모두 ‘·’로 실현되었다. 여기서도 불교 용어의 한자음에 변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ㄱ. 學解··〈몽법:46ㄱ〉涅槃解·녈반:〈육조 중:93ㄱ〉

7. 중철표기

중철표기의 예는 ‘ㅁ’에서 고유어와 한자어 각각 1회씩 나타난다.

1) 열 거르믈 거러(3ㄴ)열 거름믈 거러(2ㄴ)

2) 信心(7ㄴ)信心(6ㄱ)

1)의 예는 송광사본에 앞서 고운사본(1517)과 빙발암본(1535)에도 보인다.

8. 구개음화

지금까지 t구개음화가 반영된 이른 시기의 문헌으로 중간본(重刊本)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1571-1572)과 〈계초(誡初)〉(1577)가 주029) 〈村家〉와 〈誡初〉의 구개음화에 대해서는 각각 안병희(1978,1972)참조. 거론되었고, 백두현(1991)에 의해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1567)이 제시된 바 있다. 송광사본 〈몽법〉에도 구개음화된 예가 나타난다. 주030) t구개음화 현상을 16세기 후반 남부와 북부 방언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근거는 〈村家〉가 함흥, 〈蒙六〉이 순창, 〈誡初〉와 〈蒙法〉이 순천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전하지 않는 〈村家〉의 원간본이 1538년 전라도 남원에서 金正國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는 사실(안병희:1978 참조)로 보아, 만일 중간본의 언어 사실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t구개음화가 반영된 초기 문헌이 주로 남부 방언권에서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t구개음화의 발생은 남부 방언에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구개음화의 발생과 지리적 분화에 대한 논의는 곽충구(1991)이 있다. 특히 한자 어휘에서의 예가 많다. 그런가 하면 원래의 ‘ㅈ’을 ‘ㄷ’으로 교정한 hyperurbanism의 예도 보인다. 한자 어휘의 구개음화 예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현실 한자음이 반영된 초기 문헌인 〈진언권공(眞言勸供)〉(1496), 〈육조(六祖)〉(1496), 예산문고본(叡山文庫本)〈훈몽(訓蒙)〉 (1527) 등과 비교하는 방법을 취했다. 같은 한자에 대한 주음의 경우 구개음화 이전의 모습과 구개음화가 반영된 모습의 혼기례가 곳곳에 보인다. 이는 6항에서의 언급 대로 당시에 뚜렷한 표기 준칙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몇몇 예만을 제시한다.(‘/’표시 앞뒤의 예는 모두 송광사본 내에서 표기된 것임.)

1) 고유어 구개음화

ㄱ. 發논디〈원간본 몽법:1ㄴ〉 發논지〈송광사본 몽법:1ㄴ〉

2) 한자어 구개음화

ㄱ. 護持〈진권:19ㄱ〉호디〈몽법:20ㄴ〉호디/〈몽법:14ㄱ〉호지

ㄴ. 直〈훈몽 하:29ㄱ〉딕〈육조 중:4ㄱ〉딕

〈몽법:16ㄱ〉 딕/〈몽법:9ㄱ〉직

ㄷ. 昏沈〈몽법:14ㄱ〉 혼팀/ 〈몽법:1ㄴ〉혼침

3) hyperurbanism의 예

ㄱ. 가지라(원간본 몽법:18ㄴ)가디라(송광사본 몽법:14ㄱ)

ㄴ. 正〈진권:10ㄱ〉 〈몽법:30ㄱ〉/

ㄷ. 靜〈진권:20ㄱ〉 〈몽법:33ㄱ〉 / 〈몽법:31ㄱ〉

Ⅵ. 결어

〈몽법〉은 그 언어 사실과 추정된 간행 연도가 서로 달라서 국어사 연구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몇 가지 과제를 남긴 중세 국어 자료의 하나다. 이런 과제가 상당 기간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원간본으로 보이는 간본에 간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부 중간본 〈몽법〉에 합철되어 있는 중간본 〈사법어〉와의 관련성을 확대 해석하여, 또 다른 〈사법어〉와 함께 묶인 원간본 〈목우자수심결〉의 간행 연도인 1467년을 원간본 〈몽법〉의 간행 연도로 추정하고, 〈목우〉의 간기에 명기된 간경도감을 〈몽법〉의 간행처로 단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단정의 결과 〈몽법〉의 언어 사실이 간경도감본의 그것에 앞서서 자료 이용에 문제가 생기고, 국어사 자료로서 〈몽법〉의 위치 설정에 새로운 논의가 요구되어 왔다. 우리는 언어 사실은 물론 언해 체재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간행 연도는 1459년경으로 추정하고, 여러 판본의 비교를 거쳐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을 원간본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원간본과 중간본인 송광사본(1577)을 비교하여 언어 사실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1] 〈몽법〉의 언해 체재는 〈훈언〉, 〈석보〉와 〈월석〉 서문의 그것과 근사하고 활자본 〈아미〉와는 부분적으로 일치하며, 활자본 〈능엄〉이나 간경도감본에 앞선다. 그 근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결문의 한글로 된 구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방식을 취한 정음초기 문헌에는 〈훈언〉, 〈석보〉와 〈월석〉의 서문, 활자본 〈아미〉가 있고 간경도감본은 쌍형인 구결에 방점을 찍지 않았다. 또 방점이 찍혀 있는 한글 구결이 쌍행인 점은 〈월석〉 서문, 활자본 〈아미〉와 같다.

2) 한자는 법어 본문이나 언해문을 막론하고 글자마다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되어 있다. 이러한 주음 방식을 취한 정음 초기 문헌은 〈훈언〉, 〈석보〉와 〈월석〉의 서문이 있고, 활자본 〈아미〉와 간경도감본은 언해문의 한자에만 주음되어 있다.

3) 협주의 시작과 끝에 아무런 표시가 없다. 간경도감본은 협주의 시작과 끝에 흑어미(黑魚尾)가 놓인다. 협주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문헌에는 〈훈언〉, 〈석보〉, 〈월석〉,활자본 〈아미〉가 있다.

4) 언해문에 한글 중자(中字)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문헌에는 〈훈언〉, 〈석보〉와 〈월석〉의 서문, 활자본 〈아미〉가 있고, 간경도감본은 모두 소자(小字)로 되어 있다.

5) 본문이 끝나면 행을 달리하여 언해문이 시작된다. 간경도감본은 본문 바로 밑에 언해문이 이어지고 본문과 언해문 사이에 O표시가 있다. 〈몽법〉과 같은 형식의 문헌에는 앞의 네 책이 있다.

6) 초기 불경 언해에서 간년 추정의 유력한 근거가 되는 불교 용어 중 〈몽법〉에는 「해탈(解脫)」만이 씌였는데 ‘해(解)’의 동국정운음이 ‘:갱’로 되어 있다. 〈석보〉의 ‘·’나 〈법화〉·〈금강〉의 ‘:’와도 다르고 같은 책의 다른 어휘구성에 쓰인 ‘:’와도 다르게 주음된 것이다. 〈몽법〉과 같이 ‘:갱’로 주음된 문헌은 〈월석〉, 활자본〈아미〉, 활자본〈능엄〉, 목판본〈능엄〉 등이 있다.

위의 언해 체재에 근거하여 우리는 〈몽법〉이 〈월석〉(1459년)과는 비슷한 시기, 활자본 〈아미〉(?1461), 활자본 〈능엄〉(1461)이나 간경도감본(1461이후)보다는 이른 시기에 간행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2] 현전하는 각 판본을 비교하여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몽법〉(貴 214. 2-덕 69ㅁ 2)이 원간본이거나 적어도 그에 손색 없는 자료임을 확인하였다. 간행처는 교서관이며 간기가 없는 이유는 간행처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몽법〉 여러 판본 중 간기가 있는 복각본, 언해 체재를 달리한 개간본, 체재와 언어 사실을 달리한 전면 개찬본을 제외하면 원간본 계통만 남는다. 이번에는 원간본 계통의 책들을 역기(譯記) 유무(有無), 김수온(金守溫)의 발문(跋文)(1472년 간) 유무(有無) 등에 비추어 원간본과 그 후쇄본으로 나누고, 다시 장정, 변란, 표기 사실의 변화 유무, 방점의 정밀성 등을 고찰한 결과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이 원간본이거나 적어도 원간본에 가장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기가 없는 점으로 하여 확인할 길이 없는데, 이런 사정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활자본〈아미〉(?1461년)와 활자본〈능엄〉(1461)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착목하여 간기가 없는 이유를 위의 책들이 간행될 당시의 간행처와 관련시켜 해명해 보았다. 그 무렵에는 불서(佛書) 인행(印行)을 담당했던 책방(冊房)이나 정음청(正音廳) 같은 왕실(王室)의 출판기관이 폐지되어 간행처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결국 국가 기관인 교서관(校書館)에서의 인행이 불가피하여 왕의 사례(師禮)를 받던 혜각존자(慧覺尊者)의 의지나 세조의 권위에 힘입어 인행(印行)을 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儒臣)들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간기는 두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세 책의 간행 연도는 언해 체재나 언어 사실로 미루어 먼저 〈몽법〉(?1459)이 간행되고 이어서 활자본 〈아미〉, 활자본 〈능엄〉의 순으로 보인다.

[3] 〈몽법〉의 언해는 축어역에 충실하였으나 가능한 한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언어 사실은 대체로 〈월석〉과 가깝다.

1) ‘’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나타난다. 다만 〈용가:98장〉 이외에는 용례가 보이지 않는 ‘-’는 ‘외-’로 쓰였거나 접미사 ‘’가 보일 뿐이다. ‘’의 사용은 〈능엄〉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2) ‘ᅙ’은 동국정운 한자음과 사이글자의 표기에 사용되었고 고유어에서는 동명사어미 ‘-ㄹ’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 ’에 사용되었다. ‘- ’은 ‘아·설·순·치음의 전청자형(全淸字形)’ 앞에서는 예외 없이 실현되고 후음에서는 초성에 ‘ᅙ’ 쓰인 적이 없어 차청인 ‘ㅎ’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후행하는 초성이 합용병서일 경우는 ‘-ㄹ’과 ‘- ’이 모두 나타나고 불청불탁자인 경우는 ‘-ㄹ’로만 실현된다. ‘- +전청자형’ 표기는 이후 문헌에서 ‘-ㄹ+전탁자형’, ‘-ㄹ+전청자형’ 표기로 혼기되다가 〈원각〉(1465) 이후 ‘-ㄹ+전청자형’표기로 통일된다. 또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은 ‘- ’같은 대당형이 없이 정음 초기 문헌부터 ‘-ㄹ’로만 표기되었는데, 여기서도 ‘-ㄹ’로 나타난다. 그러나 ‘-ㄹ’ 등의 통합형은 활자본 〈능엄〉(1461) 이후 정음 구결에서 ‘ㄹ+전청자형’으로 바뀌어 ‘ㄹ+전탁자형’인 언해문과 불일치를 보이다가 〈원각〉(1465)부터는 ‘ㄹ+전청자형’ 표기로 통합형 표기의 통일을 이루었다.

3) 초성병서는 ‘ +전청형’ 표기의 일반화로 각자병서에서는 그 쓰임이 한정적이다. 정음 초기 문헌에 쓰인 8가지 중 3가지 (ㅆ  ᅇ)만 보이고, 합용병서는 10가지 중 7가지(  ;   ᄩ: ᄦ)가 쓰였다. ‘ᄮ ’이 쓰이지 않은 것은 출현할 만한 어사가 없었기 때문이고 ‘ᄣ’이 쓰이지 않은 것은 역해자 개인의 취향 때문으로 생각된다.

4) 종성표기는 〈해례〉의 종성 규정에 충실하여 8종성만이 쓰였고 ‘ㅅ’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은 출현 환경이 있음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5) ‘’을 받침으로 가진 가진 명사는 모음 조사와 만나면 반드시 분철했고, ‘’은 종성과 사이글자를 제외한 모든 출현 환경에 나타난다.

6) 사이글자는 ‘ㄷㅅᅙ’이 나타나나 주로 ‘ㅅ’이 쓰였다.

7) 주격조사는 언해문에서는 ‘이, ㅣ, ∅’로 실현되나 구결문에서는 ‘이, ㅣ’만 실현되었다. 구결문의 주격조사 표기에서 ‘i, j'로 끝나는 모음 뒤에도 ’-ㅣ‘가 실현된 것은 주격의 경우 ’-ㅣ‘가 생략되더라도 활용어미가 있기 때문에 능히 구절 표시 기능을 가지므로 굳이 ’ㅣ-‘를 적을 필요가 없어 이를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8) 서술격 조사는 구결문이나 언해문 모두 ‘이, ㅣ, ∅’로 실현되었다.

9) 모음조화는 대체로 지켜졌으나 언해문의 조사에서 양성모음의 출현이 우세하고, 어간 ‘-’와 어미의 결합에서 어미의 초성이 ‘ㄱ,ㄷ’으로 시작되면 반드시 축약형으로 실현되었다.

10) 장형사동을 만드는 보조적 연결어미는 ‘긔’와 ‘게’가 함께 쓰였고 여격표시는 모두 ‘/의게’가 쓰였다.

11) 특히 〈몽법〉에만 나타나는 희귀어가 상당히 보인다.

12) 명사 ‘막다히/막대’ 중 ‘막다히’만 쓰였고, 부사 ‘반기/반시’ 중 ‘반기’만 쓰였다.

[4] 중간본인 〈송광사본〉(1577)은 원간본과 110여 년의 차이를 두고 간행된 책인데, 체재는 원간본과 완전히 달라졌으나 언어 사실은 원간본의 언어가 그대로 옮겨진 것이 많고 탈각이나 오각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임진란 직전인 16세기 후반 국어의 모습은 간직하고 있고, 간행 지역의 방언형까지 제시하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 원간본의 ‘’은 모두 ‘ㅂ’으로 바뀌었다. ‘’의 일반적인 변화는 ‘〉오/우,ㅇ’인데 여기에서는 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한자음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폐지로 현실 한자음 주음으로 바뀌었으나 뚜렷한 표기 준칙이 없었기 때문인 듯 표기가 혼란하다. 일모(日母)//자는 대체로 유모(喩母)/ㅇ/화하였다.

3) ‘ᅙ’ 은 현실 한자음 주음으로 한자음 표기에서 폐지되었고, ‘- ’은 모두 ‘-ㄹ’로 바뀌었다. 다만 사이글자의 예는 남아 있는데 이는 원간본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4) 초성병서 중 각자병서는 한두 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일자형(單一字形)으로 바뀌었다. 합용병서는 그대로 씌었다.

5) 사이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는데 ‘ᅙ’이 쓰인 예도 있다.(無ᅙ字).

6) ‘,’표기는 원간본의 모습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7) 한자어와 고유어에서 ‘ㅁ’중철 표기의 예가 나타난다.

8) 구개음화는 고유어에서는 하나의 예만이 발견되나 한자어는 상당히 두드러진다. 한자어의 구개음화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현실 한자음 초기 문헌인 〈진권〉(1496)과 〈육조〉(1496) 그리고 예산문고본 〈훈몽〉(1527) 등과 비교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런가 하면 ‘ㅈ’을 ‘ㄷ’으로 교정한 hyperurbanism의 예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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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학교 교수)

1. 개요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蒙山和尙六道普說諺解)』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책의 원저자와 원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저자는 원나라 세조(1271~1394) 때의 고승(高僧) 몽산(蒙山) 덕이(德異)이다. 이 스님이 찬술(撰述)한 책의 원래 서명(書名)은 『육도보설(六道普說)』이며, 이를 후대에 간행하면서 책의 제목(내제)을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이라고 하였다. 이 책이 조선 선조 원년(1567) 가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을 학계에서는 관례적으로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은 『몽산화상육도보설』로 되어 있어 한문본이든 언해본이든 책의 제목은 동일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경우에 따라 편의상 한문본과 언해본을 구분·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언해본(우리말 번역본)은 원전에 구결(口訣)을 달고 ‘언해(諺解)’라는 특수한 가공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한문본의 제목 ‘몽산화상육도보설’ 말미에 ‘언해’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고 있다. ‘언해’는 “언문(諺文, 우리나라 고유의 글자 및 우리말이라는 뜻까지 포함함)으로 독자들이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므로, 한문 원전에 한국어와 한국문자 ‘훈민정음’을 이용해 특수한 가공을 한 문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산화상 덕이의 『육도보설(六道普說)』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입장에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 등의 육범(六凡)과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불(佛) 등의 사성(四聖), 곧 육범사성(六凡四聖; 10界)을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범부(凡夫)의 자리를 벗어나 성인(聖人)의 지위에 들어가기를 권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조선 선조 때 지방 사찰에서 독자적으로 간행된 목판본으로서, 현재 2본(本)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수원 용주사 구장본으로 1980년대 이후 동국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91년도에 남권희 교수에 의해 소개된 판본이다.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간기(刊記)가 있는 42장이 낙장(落張)이어서, 한동안 간행연도와 간행지(刊行地)가 ‘미상(未詳)’이었다. 그러다가 간기가 온전히 남아 있는 판본이 남권희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됨으로써 “융경(隆慶) 원년(1567) 전라도(全羅道) 순창(淳昌) 취암사(鷲岩寺)”에서 ‘秋日’[가을]에 간행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이 책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2. 문헌의 서지 사항

이 문헌의 서지(書誌)를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명 :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저자 : 몽산(蒙山)(중국 1230년경~1300년대 초반)

언해자 : 미상(未詳)

서지 : 목판본(木板本)

발행 사항 : 전라도 순창(淳昌) 취암사(鷲岩寺). 융경 원년(隆慶元年)(1567) 정묘 추일(丁卯秋日) 간(刊)

형태 : 1권(卷) 1책(冊),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2×17.5㎝,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12~15자(子)[1~6장-12자, 7장-13자, 8장 이후-15자], 대체로 상하 백구(上下白口), 내향 흑어미(內向黑魚尾)[1장-상하 대흑구(上下大黑口), 6장-상하 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사변 화문흑어미(內向四辨花紋黑魚尾)] ; 31.4×22.3cm

표제(表題) :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권두제(卷頭題) :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판심제(版心題) : 보설(普說)(1,2장), 보(普)(3장 이후)

지질(紙質) : 저지(楮紙)

소장처 :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219.7-덕69ㅁ4)

이 문헌의 서지학적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문헌에는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다. 권두(卷頭) 제목인 『몽산화상육도보설』에 이어 다음 행부터 한문 본문이 제시되고, 한문에 이어서 원권(○)을 표시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문을 실었는데, 국한혼용체로 되어 있다. 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연산군 시대에 간행된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1496)와 유사하다. 언해의 간행 동기 및 경위 등에 관련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제42장을 통해서 발행 사항 및 이 책의 간행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80여 명의 시주질(施主秩), 그리고 사경자(寫經者)로 “현옥(玄玉)·현종(玄宗)·보언(寶彦)” 등과, 각수(刻手)로 “일훈(一訓)·인화(印花)”, 화사(化士)로 “현즙(玄楫)·천문(天文)”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시주의 이름에 나타나는 최수장(崔守長), 채중석(蔡仲石) 등은 명종 14년(1559) 전라도 순창 무량굴(無量堀)에서 중간(重刊)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3과 『월인석보』 권21에서도 볼 수 있다. 화사 ‘현즙(玄楫)’은 중간된 『월인석보』 권23의 화주란(化主欄)에는 ‘현집(玄緝)’으로, 다른 한자로 되어 있다. 각수인 ‘일훈’과 ‘인화’는 같은 시기에 전라도에서 간행된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진언집(眞言集)』(1569. 安心寺) 등 여러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이 자료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지는 못한 편이다. 침식된 곳이 여러 군데이며, 판심(版心)이 마멸(磨滅)되어 판독(判讀)이 어려운 부분도 나타난다. 지방 사찰판으로서의 미흡한 점들이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1행의 글자 수 및 어미(魚尾) 모양, 판심제(版心題) 등 서지학적 사실이 엄정하지 않고 장(張)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 정제되어 있지 않다. 그런 특징 중에서 동국대본 41장은 일부가 상당히 훼손되어 있고, 42장은 낙장(落張)까지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판각(板刻)이 거칠고 목륜(木輪)이나 완결(刓缺)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서는 초쇄본(初刷本)이 아닌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동국대본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간행하는 『국어국문학논문집(國語國文學論文集)』 제16집(1993년)에 김무봉(1993)의 해제를 붙여 영인되었다. 이 영인 자료의 저본은 동국대본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 책 끝 부분의 일부 훼손·낙장된 부분은 남권희 교수에 의해 소개된 다른 판본의 사본으로 보완하였다.

3. 저자 및 발행 사항

몽산(蒙山)은 원나라 세조(世祖) 때 활동했던 선승(禪僧)으로, 생몰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속성(俗姓)은 려씨(廬氏)이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의 시양(時陽) 고안현(高安懸)에서 태어났다. 지원(至元) 27년(1290)에 쓴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檀經)』의 서문에 따르면, 그가 어릴 때 그 책을 한 번 보고 30여년이 지난 1290년에 통상인(通上人)으로부터 전문(全文)을 구하게 되어 오중(吳中) 휴휴선암(休休禪庵)에서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적어도 그의 출생연도는 1230년대와 1240년대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298년에 상인을 통해 고려 승려 만항(萬恒, 1249~1319)에게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추정해 볼 때, 입적은 그 이후인 1300년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가 이후 ‘조주무자(趙州無字)’의 화두(話頭)로 입참(入叅)하여 환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 등 여러 고승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에 정응(正凝)의 뒤를 이어 선종(禪宗) 5가(家)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이었다. 그는 거처를 여러 번 옮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본명(本名)은 ‘덕이(德異)’이며, 여릉도(廬陵道)의 몽산(蒙山)에 기거하였으므로 그곳 지명을 따서 주로 ‘몽산’이라고 불렸다. 그의 고향 시양(時陽)이 당나라 때는 균주(筠州)였으므로 ‘고균(古筠)’이라 불리기도 했고, 득도 후에는 강소성(江蘇省)의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머물었으므로 ‘전산화상(殿山和尙)’, 평강현(平江縣)의 휴휴암(休休庵)에 거처하였으므로 ‘휴휴암주(休休庵主)’, 또는 ‘절목수(絶牧叟)’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몽산의 찬술 중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편찬 연대 미상의 『육도보설(六道普說)』을 비롯하여 『직주도덕경(直註道德經)』(지원(至元) 24년, 1287), 재편한 『육조단경(六祖檀經)』(지원 27년, 1290), 『몽산법어(蒙山法語)』·『몽산화상수심결(蒙山和尙修心訣)』·『증수선교시식의문(增修禪敎施食儀文)』 등이 있다. 또 그가 쓴 글로는 『불설사십이장경 서(佛說四十二章經序)』(지원 23년, 1286), 『육조대사법보단경 서(六祖大師法寶檀經序)』(지원 27년, 1290), 『몽산화상시식의문(蒙山和尙施食儀文)』 등이 있다.

위의 찬술 중 『몽산법어(蒙山法語)』(『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는 나옹(懶翁)이 초록한 것을 조선 세조 때(1459~60년 추정)에 신미(信眉)가 언해하였고,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檀經)』 서(序)는 연산군 2년(1496)에 간행된 『육조법보단경언해』의 권두에 실려 있다. 몽산은 당대의 이름 높은 선승(禪僧)으로, 선(禪)과 관련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고려 승려들과는 직·간접적으로 교류가 빈번하였다. 『익재난고(益齋亂藁)』와 『나옹화상 행장(懶翁和尙行狀)』에는 몽산이 고려 승려 혼구(混丘, 1249~1319), 만항(萬恒, 1249~1319), 나옹(懶翁, 1320~1376) 등과 교류한 내용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 이후 국내 불교계에 꾸준히 영향을 미친 몽산의 저술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간경도감(刊經都監)이나 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16세기에는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된 문헌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의 한문본은 15세기부터 간행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와서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간행되어 유통되었다. 그에 따라 언해본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전라도 순창 취암사에서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가 간행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신미(信眉) 대사가 언해한 몽산의 또 다른 저술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가 널리 유통되고 있었던 것도,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의 간행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국어학적 특징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국어 표기법과 음운, 어휘 면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16세기 후반의 국어사 자료로서, ‘ㅸ’과 ‘ㆆ’은 전혀 쓰이지 않았으며 방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언해문의 한자 독음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으로 제시되었다. 특히 한양에서 간행된 16세기 전반기 한자음과는 다른 한자음이 나타나는데, 이 지역에서 전해지는 한자음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불교 용어 한자어의 경우도 현실음을 따랐으나 어떤 것은 불교계의 전통적인 독법에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테면 ‘解脫’의 ‘解’는 ‘하’로 주음 표시된 것과 같은 것이다. ‘人인道도者쟈’〈12ㄱ〉, ‘菩보提뎨心심’〈11ㄴ〉 등에서 ‘人인, 提뎨’는 당시의 현실한자음을, ‘解하脫탈’〈5ㄴ〉은 불교계의 전통 독음으로 보인다.

‘ㅿ’ 문자의 경우는 고유어와 한자어 표기에 모두 쓰였다. ‘아디거든’[碎]〈7ㄴ〉, ‘我아人’〈23ㄱ〉 등. 그러나 점차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고유어에서 15세기 한글 문헌에서라면 ‘ㅿ’으로 나타났을 환경에서 ‘ㅇ’로 나타나거나 ‘ㅅ’으로 대체된 경우가 있고(‘지어니’[造]〈23ㄴ〉, ‘지스며’〈10ㄴ〉, ‘오사’[獨]〈18ㄱ〉 등), 한자어에서는 같은 뜻의 구성요소가 ‘ㅿ’과 ‘ㅇ’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기도 하였다. ‘聖人’〈3ㄴ〉, ‘賤쳔人인’〈12ㄱ〉 등. 즉, ‘ㅿ’ 문자의 경우에 15세기~16세기 초기문헌에서였다면 이것이 반영되었을 만한 환경에서 ‘ㅿ’이 탈락되거나 ‘ㅅ’으로 바뀐 예가 보인다. 또한 이전 문헌에서 ‘ㅿ’이 사용되지 않았던 어휘나 문법 형태소에 ‘ㅿ’이 사용된 예도 나타나는데, 목적격 조사 ‘’이 ‘’로 표기된 경우가 있고(‘福’〈10ㄴ〉), ‘오-’[全]가 ‘오-’〈19ㄱ〉로, ‘므슥’이 ‘므글’〈23ㄱ〉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오-’의 경우는 〈악학궤범 5:12 처용가〉에 딱 하나의 예가 보였다.

목적격 조사가 ‘’이 아닌 ‘’로 나타난 것은 음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이지만, 그 외의 다른 예에 대해서는 당시 ‘ㅿ’의 음가와 관련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15세기에 실제 음소였던 ‘ㅿ’이 15세기 후반 이후 ‘ㅅ’, 혹은 ‘ㅇ’으로 변화하면서 소멸하였다고 설명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ㅿ’은 실제 음소가 아니었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ㅅ’유지 방언과 ‘ㅅ’ 탈락 방언(후음 ‘ㅇ’형)에서 이를 절충하여 표기할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였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전자는 ‘ㅿ’의 음가를 [z]이었다고 볼 때 ‘ㅿ〉ㅇ, ㅅ’으로의 통시적 변화를 음성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한편, 후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15세기 문헌 전반에서 발견되는 ‘ㅿ’을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따른다.

이 책에서 아음 불청불탁음 ‘

ㆁ’[ŋ]은 받침으로는 쓰였지만 초성에 사용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종성이 ‘
ㆁ’ 으로 끝난 명사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올 경우에는 항상 분철하였고, 훈민정음 창제 초기문헌 이래 ‘에’와 결합하여 ‘이’ 표기로만 쓰이던 지시대명사가 이 책에서는 ‘에’〈39ㄴ〉로 나타난다. 이 밖에도 ‘연’〈5ㄴ〉, ‘衆즁生’〈3ㄴ〉 등처럼 자형 ‘
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편, 각자병서가 쓰일 만한 환경에서는 각자병서가 아닌 평음형의 표기가 발견된다. ‘말매’〈32ㄴ〉, ‘말솜’〈40ㄱ〉, ‘몯’〈31ㄴ〉, ‘홀디니라’〈33ㄱ〉 등. 이들은 15세기 중기 국어 표기에서는 ‘말, -ㄹ, -ㄹ띠-~-ㅭ디-’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렇게 각자병서와 ‘ㅭ’이 ‘ㄹ’만 쓰여 ‘ㆆ’을 쓰지 않는 표기법은 1465년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로부터 개정된 국어 표기법의 결과로 해석된다.

한편, 합용병서는 15세기 문헌에서 쓰이던 “ㅺ, ㅼ, ㅽ, ㅻ; ㅳ, ㅄ, ㅶ, ㅷ; ㅴ, ㅵ” 등 10가지 중에서 ‘ㅻ, ㅷ, ㅵ’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만 보인다. ‘’〈23ㄱ〉, ‘나모지’〈4ㄱ〉;‘’〈23ㄱ〉, ‘’〈39ㄴ〉;‘리’〈34ㄱ〉;‘디’〈11ㄴ〉, ‘건내여’〈38ㄱ〉; ‘리오’〈21ㄴ〉, ‘거슬’〈10ㄴ〉, ‘妙道로’〈26ㄴ〉;‘싀니’[苦]〈35ㄱ〉;‘’[孵]〈9ㄴ〉, ‘리며’〈31ㄴ〉, ‘그 ’[時]〈40ㄴ〉 등. 이 중에서 ‘거슬’은 15세기 문헌에서는 ‘거슬’형으로 나타나던 것인 점이 특이하다. 이 책에는 15세기 말 정도에 정착·사용되던 초성 합용병서 중에서 ‘ㅴ’가 ‘ㅺ’로 바뀐 예도 나타난다. ‘’〈40ㄱ〉~‘’〈26ㄴ〉. 이와 함께 ‘ㅂ’계통의 합용병서 ‘ㅷ’과 ‘ㅄ’계통의 ‘ㅵ’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합용병서 ‘ㅷ’ 또는 ‘ㅵ’을 포함한 단어 - ‘① 다, , 다, 다, 다 등. ② 리[疱.수두], 다[溢.넘치다], 르다[刺], 리다[破] 등’이 이 문헌에 사용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을 뿐 이와 같은 표기방법이나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헌보다 후대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는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성 합용병서 중에서 특이한 사실로는, ‘ㅂㅍ’과 ‘ㅅㅋ’이 쓰인 용례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너비 ᄪᅧ’〈14ㄴ〉, ‘뫼  데’〈6ㄴ〉와 같은 예는 훈민정음(해례본)의 규정 어디에서도 예시된 적이 없는 표기로서,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종성 표기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종성해’에 제시된 팔종성가족용(八終聲可足用)의 규정, 그리고 훈몽자회(1527) 범례의 ‘언문자모’에 나오는 초성종성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의 규정대로 적용하였으며, 그 외의 다른 받침 표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곳’[花]〈41ㄴ〉, ‘낫밤’〈15ㄱ〉,‘디’[具]〈41ㄱ〉 등. 이와 함께 사이시옷도 ‘ㅅ’으로 통일되어 나타난다. ¶‘바랏므레’〈10ㄱ〉, ‘ 光明’〈11ㄱ〉;‘손’〈11ㄱ〉, ‘믈긔’[水穴]〈10ㄴ〉 등.

형태소의 통합 표기에서 실질 형태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가 이어질 때는 대체로 연철(連綴)이 지켜졌으나, 분철(分綴)과 중철(重綴)도 나타난다. 분철은 한자어 뒤에 이어질 때에 한정되었으며, 중철은 한자에 한자음을 병기할 때 한자음의 말음이 ‘ㄱ, ㄴ, ㄹ, ㅁ, ㅂ’ 뒤에서, 고유어의 경우에는 ‘ㄹ, ㅁ, ㅂ’ 뒤에서 사용되었다. ¶‘神通力력글’〈30ㄴ〉, ‘帝釋셕기’〈39ㄴ〉, ‘人身신’〈25ㄴ〉, ‘四王天텬니오’〈14ㄱ〉, ‘얼굴’〈12ㄱ〉, ‘萬物믈’〈3ㄱ〉, ‘몸’〈15ㄴ〉, ‘正念념’〈25ㄴ〉, ‘비’〈5ㄴ〉, ‘業업블’〈8ㄱ〉 등.

이 책에 나타난 모음체계를 살펴볼 수 있는 증거 자료 중에서 모음 ‘’가 변화한 예도 드물기는 하지만 나타난다. ‘라미’〈15ㄱ〉는 ‘[風]〈〉람’으로 변화한 사실을 보여주는 예로, 국어의 역사상 비어두 음절에서 ‘’가 ‘아’로 변한 것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예가 아닌가 한다. 16세기 후기는 ‘’의 1단계 변화가 거의 완성되었던 시기로, 모음 체계의 대립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모음조화의 질서가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는데 이 자료에서도 그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산승’〈34ㄱ〉(cf. ‘산승은’〈29ㄴ〉), ‘인연’〈18ㄱ〉, ‘그 天텬’〈10ㄴ〉, ‘어리라’[得]〈36ㄴ〉, ‘道도를’〈17ㄱ〉 등.

이 문헌에 반영된 가장 특징적인 음운현상은 ‘ㄷ’구개음화의 최초 출현 예가 다수 나타난다는 것이다(백두현 1991, 김무봉 1993). 지금까지의 국어사 연구에서 구개음화가 나타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은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1571~1572)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자료의 출현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부쳐’〈30ㄴ〉와 ‘부톄’〈30ㄴ〉, ‘弟졔子’〈40ㄱ〉(cf. 弟 아뎨〈훈몽자회, 상:16ㄴ〉) 등과 ‘帝졔釋셕기’〈39ㄴ〉와 ‘帝뎨釋셕기’〈40ㄱ〉, ‘天텬帝졔釋셕기’〈40ㄴ〉와 ‘天텬帝뎨釋셕’〈40ㄴ〉과 같은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기~16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부텨, 弟뎨, 帝뎨’ 등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자와 같이 변화한 예에서 ‘ㄷ’ 구개음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문헌에서는 과도교정의 예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 가디’[三般]〈39ㄴ〉, ‘닐굽 가디’〈39ㄴ〉, ‘오딕’[唯]〈39ㄴ〉, ‘正法법’〈34ㄴ〉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가디, 오딕, 正’은 16세기 전반까지의 문헌에서 각각 ‘가지, 오직, 正’으로 초성이 ‘ㄷ’이 아닌 ‘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ㄷ’으로 교정한 것이니, 과도교정(hyperforeignism)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구개음화 경향이 확산·심화됨으로써 ‘ㅈ,ㅊ’과 같은 치음이 ‘i/j’ 앞에 올 경우에 본음 ‘ㄷ,ㅌ’에서 변화한 음으로 착각해 이와 같은 과도 교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구개음화와 과도교정의 사례를 통해 1570년대 전라도 순창 지역에서는 ‘ㄷ’ 구개음화가 확산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추가할 것은 ‘셧그티라’[舌頭]〈38ㄱ〉와 같은 예이다. 이것은 전라도 순창 지역에서 보여주는 구개음화의 범위가 ‘ㄷ’구개음화만이 아니라 ‘ㅎ’구개음화도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셔[舌]+ㅅ+긑[端/頭]+이+라’로 분석되며, 이 ‘셧긑’은 바로 ‘혓긑’의 구개음화형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국어 표기법 중에서 한자와 우리말을 섞어 쓸 경우에 한자음에 따라서 중성이나 종성을 보완해 쓰는 방식이 훈민정음 해례의 ‘합자해’에 다음과 같이 예시되어 있다. ‘孔子ㅣ魯ㅅ사’〈훈민정음해례: 합자해〉. 이 문헌에 쓰인 주격 표기는 16세기의 다른 문헌과 대체로 같아 모음으로 끝난(개음절) 한자어 뒤에 주격조사가 올 때 ‘ㅣ’는 선행 체언과 분리해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한자음에 붙여 쓴 경우가 나타난다. 즉 모음으로 끝난 고유어나 한자어 뒤에서 ‘ㅣ’가 쓰였으나 ‘이’로 분리해 표기한 경우도 있고(‘부텨이 니샤’〈40ㄱ〉, ‘業업報보이’〈7ㄱ〉), 한자음에 합용하여 쓴 경우도 발견된다(‘두 가짓 道되 업스니라’〈38ㄱ〉). 이것은 언해본의 역자(=표기자)가 훈민정음(해례본)의 ‘합자해’ 표기방식을 정확히 알지 못한 결과로도 볼 수 있고, 주격 ‘ㅣ(i)’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중모음에서 ‘ㅣ’하향중모음에 대한 발음이 뚜렷하게 인식됨으로써 표기 형태도 독립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자음(폐음절) 뒤에서는 주격 표지를 ‘이’로 표기하는 것이 정상인데 ‘ㅣ’가 쓰인 예도 나타난다. ¶‘萬만德덕ㅣ라 호’〈3ㄴ〉 등.

한편, 이 문헌은 어휘에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다른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휘가 여러 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일부는 다른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거나 전라도 간행 문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어형으로 나타나므로 당시의 전라도 순창 지역어를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지방 사찰판이 갖는 특성 중에서 이 책의 배포 범위와 지역 독자층을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명사의 경우에, ‘거슬다, 구령이, 굼더기, 안녁, 가모티, 멸오; 숟하다, 싀다’ 등이 그것이다. 다른 문헌에서는 ‘거슬다, 구렁이’로 나타나는 것이 이 책에서는 ‘거슬’〈10ㄴ〉, ‘구령이’〈10ㄱ〉로 나타난다. ‘굼더기’〈10ㄱ〉는 ‘귀더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아내, 부인”을 뜻하는 ‘안녁’[內便]〈11ㄱ〉, ‘일반 여자’를 뜻하는 ‘녀편’〈39ㄴ〉이 보인다. 오늘날 “가물치”를 뜻하는 ‘가모티’〈10ㄱ〉가 쓰였고, ‘멸오’(멸외 10ㄱ)는 ‘멸오’에 조사 ‘ㅣ’가 연결된 것으로 분석되므로 ‘멸구’의 방언형인 ‘멸고, 멸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숟하다’는 오늘날의 ‘숱하다’와 같은 의미로, ‘싀니’의 어간 ‘싀-’는 ‘싀-’(시고 짜다)의 이 지역 방언형으로 추정된다.

한편,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어휘가 발견되는데, ‘개옺, 곱다, 로다, 로이’ 등을 들 수 있다. ‘개옺’은 ‘개[浦]+곶[串]’의 합성어이며, ‘곱다’는 ‘다’[溜. 고이다]와 쌍형어로서 ‘고온’〈6ㄴ〉처럼 활용하는 ‘ㅂ’불규칙용언이었다. ‘로다’〈27ㄱ〉는 ‘[謀]+-로-’로, ‘로이’〈8ㄱ〉는 ‘+롭+이’로 분석되며 “교활하다, 꾀를 부리다”와 관련 있는 단어들로 파악된다. 그리고 한자어 ‘喝’이 특수한 의미로 굳어져 쓰인 ‘핵다’〈7ㄴ〉·‘액다’〈25ㄱ〉 등이 있다. ‘{핵/액}다’는 감탄사 ‘핵, 액’에 접미사 ‘-다’가 결합한 파생어이다. 또한 복합동사 ‘봇닷겨’〈8ㄱ〉는 ‘-+-+-이-’로 분석할 수 있다. 그 밖에 ‘어긔-’[差]의 영변화 파생어로 부사 ‘어긔’〈8ㄱ〉가 보이고, ‘헤부러’〈15ㄱ〉, ‘믜리부러’〈15ㄱ〉, ‘첫’[最始]〈26ㄴ〉, ‘퍼기’〈10ㄴ〉, ‘아쇠라’〈39ㄴ〉 등과 같이 이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어휘들도 사용되었다. 이들 어휘의 의미는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것도 있다. 반드시 본문의 주해 부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 방언사 기술과 관련하여 국어학 연구자들의 관심이 기대된다.

5. 문헌적 가치와 특기 사항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는 1567년 전라도 순창 지역어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문헌에는 15세기 말기에 정착된 국어 표기법 및 국어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16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어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현재까지 발굴·소개된 국어사 문헌자료 중에서 구개음화(口蓋音化)가 폭넓게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언해본은 전라도 순창 취암사라는 지방의 한 사찰에서 독자적으로 간행된 문헌이다. 시주질을 살펴볼 때 대개는 이 지역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보시(法布施)의 차원에서 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문헌에는 한양에서 간행된 관판문헌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언어현상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 시간적, 공간적 범위는 16세기 후반 전라도 순창 지역어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이 음운·형태 및 어휘 면에서 폭넓게 확인된다.

국어학적 측면의 특징 몇 가지만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자료에서는 ‘ㄷ’ 구개음화와 ‘ㅎ’ 구개음화가 발견되는 최초의 자료로서, 그러한 예를 통해 1570년대를 전후로 전라도 북부 지역에서 구개음화가 확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5세기 중후반의 관판문헌에서였다면 ‘ㅿ’으로 표기되었을 만한 환경에서 ‘ㅅ’ 또는 ‘ㅇ’ 등으로 반영된 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5세기 훈민정음의 국어 표기에서 ‘ㅿ’의 음가와 표기 의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문헌이 16세기 후반 전라도의 지역 방언과 그 변화하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이전 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ㅿ’의 의도와 관련하여 근원적인 문제를 재고할 만하다. 또한 이 문헌을 통해 16세기 후반 전라도 순창 지역어로 추정되는 형태·어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일부 어휘에 불과하지만, 이 지역 방언의 통시적 변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방언사 분야는 연구 업적이 영성한 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방언사를 정밀하게 기술할 정도로 자료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에서만 원인을 찾기 전에 과연 연구자들이 해당 지역 방언사 자료를 적극적으로 찾아 면밀하고 철저히 분석해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자료 부족의 탓으로만 돌리고 수수방관한다면 학문적 발전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문헌을 역주하면서 면밀히 살펴본 관점에서 말한다면, 사실 이 해제는 이 문헌이 담고 있는 여러 문제를 모두 거론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즉 음운·형태·어휘의 측면에서 더 분석되어야 할 여러 가지 국어사적 사실이 이 문헌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해제는 그중에서 아주 일부만 거론했을 뿐이며, 따라서 이 문헌은 여전히 전라도 방언 연구를 위한 원석(原石)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문헌을 포함하여 전라도 지역과 관련이 깊은 여러 문헌자료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사 자료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16세기 전라 방언사 자료만 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전라도 고산 화암사 간행의 『법집별행록절요언해』(1522), 전주 완산 간행의 『부모은중경언해』(1545), 광주판 『천자문』(1575), 『백련초해』(1576), 전남 순천 송광사 간행의 『초발심자경문언해』(1577)와 개찬본 『몽산화상법어약록』(1577) 등이 있다.

미문이지만, 이 자료들에 나타난 국어와 16세기 당시 관판문헌에 나타난 국어, 그리고 현대국어 전라(서남) 방언을 다각도로 대조해 연구하였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하였다. 이 연구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것을 기초로 세밀한 역주 작업이 우선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어사 ‘자료의 성격과 해당 자료에 나오는 글자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연구’ 과정을 거친다면, 16세기 중·후반기 전라 방언의 실상을 적잖이 발견해 국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방언사를 아우르는 한국어 역사 기술을 위해 전라(서남) 방언 연구자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기대한다. 이 문헌의 역주는 그런 연구를 위한 아주 작은 노력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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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웅(1989), 『16세기 우리 옛말본』, 샘 문화사.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1. 머리말

1.1.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은 당(唐)나라의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이 번역한 한역(漢譯 : 唐 貞觀 23년, 649 A.D.) 불전(佛典)이다. * 이 해제의 작성에는 김영배 외(1995)의 도움이 컸다. 문법 항목은 그 책에 실려 있는 필자의 집필 부분을 그대로 가져 왔다. 주001)

물론 한역(漢譯) 『반야바라밀다심경』이 이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명(題名)을 달리하고 내용이 조금씩 다른 책 수종(數種)이 현전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5세기 초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등의 책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뒤의 본론에서 다룰 것이다.
이 책은 인도(印度)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승불교의 독특한 사상을 담고 있는 중요한 경전(經典) 중 하나이다. 현장은 육백 부(部)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대반야경』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그리고 육백 부의 경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뽑아 간결하게 요약해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 한 권의 책이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14행(行) 54구(句) 260자(字)에 주002)
현장법사 한역(漢譯)의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모두 260자(字)로 되어 있다. 제명(題名)은 첫 머리에 ‘마하(摩訶)’를 포함시킨 경우가 있는가 하면, 빼기도 하여 열 자(字), 또는 여덟 자(字)로 서로 다르다. 우리가 연구 및 역주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인 1464년 간행의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에는 어디에도 ‘마하(摩訶)’를 쓰고 있지 않으므로, 이 논의에서의 제명은 갖추어 부를 경우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하고, 줄여서 부를 때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또는 『심경(心經)』이라 하기로 한다.
『대반야경』 육백 부의 정요(精要)를 모두 담은 것이다. 이 경전(經典)은 대부분의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독송(讀誦)되고 있으므로,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해도 웬만큼은 알고 있을 정도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의 심오함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漢譯)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402~413 A.D.) 이후 이본(異本) 여러 책이 찬술되었다. 위에서 말한 현장(玄奘)의 책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한역 이본들이 조성된 것은 물론, 주석서(註釋書)의 저술도 잇달았다. 인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이나 일본,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주석서들이 나왔다. 주003)

특히 중국에는 수십 종의 주석서가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고승(高僧) 원측(圓測)에 의해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가 만들어진 이후에 동일한 제명(題名)으로 원효(元曉)가 풀이한 주석서 등 몇몇 책이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주004)
김영배(1995 : 93~94)에 의하면 원효의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는 현재 전하지 않고, 원측의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는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지은이가 당(唐)나라의 원측(圓測)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원측(圓測)’이 입당(入唐)해서 활동하였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중 일부만이 오늘에 전한다. 주005)
한역 이본 및 주석서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배(1995), 한정섭(1995), 혜담(1997) 등 참조.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일찍이 한문 경전의 국어역이 시도되었고, 그 최초의 번역본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인 것이다.

1.2. 한문본 『반야심경』을 우리 문자로 번역한 최초의 책인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는 조선 세조 10년(天順 8년, 1464 A.D.)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이 언해본의 저본(底本)은 엄밀하게 말해 현장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아니고, 송(宋)나라의 사문(沙門) 중희(仲希)의 주해본(註解本)인 『반야심경약소현정기(般若心經略疏顯正記)』이다. 이 책은 당나라 현장(玄奘)법사의 한역(漢譯)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에 역시 같은 당나라의 법장(法藏) 현수(賢首)대사가 약소(略疏)를 붙여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唐 長安 2년, 702 A.D.)를 짓고, 여기에다 다시 송(宋)나라의 중희가 주해를 더하여 『반야심경약소현정기(般若心經略疏顯正記)』(송 경력 4년, 1044 A.D.)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주해본인 『반야심경소현정기』 주006)

『반야심경소현정기』라고 한 이 명칭은 언해본 책의 본문 첫머리에 있는 제명(題名)이다. 제명 바로 다음에 중희가 술(述)한 병서(幷序)가 나온다.
에 세조가 직접 정음으로 구결을 달고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황수신(黃守身),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을 하여, 목판본 1권 1책으로 간행을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주(譯註)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반야심경언해』의 저본은 중희의 『반야심경약소현정기』인 것이다. 그런데 언해가 이루어진 부분은 현장(玄奘)의 경 본문과 법장(法藏)의 약소이고, 중희의 주석(註釋)인 ‘현정기(顯正記)’ 부분은 제외되었다. 중희의 주석은 해당하는 경 본문의 언해문 다음이나, 약소 구결문과 약소 언해문 사이에 협주(夾註) 형식으로 실려 있을 뿐 언해하지는 않았다.

1.3. 언해본의 간행 및 번역에 관련된 사항은 『반야심경언해』와 같은 시기에, 같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책인 『금강경언해』의 책머리에 동일하게 실려 있는 간경도감 도제조(都提調) 황수신(黃守身)의 ‘진금강경심경전(進金剛經心經箋)’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반야심경언해』의 끝에 실려 있는 한계희(韓繼禧)의 발문(跋文)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주007)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蜜多心經諺解)』의 간행일은 ‘진전문(進箋文)’과 ‘심경발(心經跋)’이 서로 다르다. 이는 간행일이라기보다 각각 원고를 쓴 날이 될 것이다. 황수신(黃守身)의 ‘진전문’에는 ‘天順 八年 四月 初七日’로 되어 있고, 한계희(韓繼禧)의 ‘심경발’에는 ‘天順 八年 二月 仲澣’으로 되어 있다. 두 달 가까이 차이가 난다. 판밑 원고 작성은 2월 중한(仲澣)에 마무리 되었고, 간행은 4월에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는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이후 그 후쇄본의 쇄출(刷出) 및 복각 간행이 몇 차례 이루어진 듯하다. 현재 원간 초쇄본으로 보이는 책 2본을 비롯하여 후쇄본 1종 및 복각본 2종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책들 중 1994년에 공개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된 바 있는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소장본을 연구 및 역주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008)

소중한 책을 발굴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필자 등으로 하여금 국어사적 연구와 역주(譯註)를 할 수 있게 해 준 당시 소요산 자재암(自在庵) 주지 법타(法陀)스님(현재 동국대 정각원장)께 여기에 적어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 책이 공개된 당시에 동악어문학회 연구진에 의해 역주 및 국어학적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주009)
김영배·장영길 편저(1995), 『반야심경언해의 국어학적 연구』, 동악어문학회 학술총서 3, 대흥기획.
그러나 이제 십여 년이 지나 다시 그때의 내용을 깁고 보태어 이 해제 및 역주를 하게 되었다.

이 논의의 제2장에서는 한문 경전의 성격 및 언해의 저본(底本)에 대해 살피고, 제3장에서는 판본 및 언해 체제 등에 대해 살필 것이다. 제4장에서는 표기법과 문법 등을 주로 논의할 것이다.

2. 한문본 『반야심경』의 성격 및 언해의 저본

2.1. 한역 『반야심경』으로는 아래 예문 (1)의 책들이 알려져 있다. 물론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도 ‘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릿다야 수우트라)’라는 이름으로 전한다고 한다. 한역본 『반야심경』은 대체로 7~9종이 전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중 8종을 가려 간행 연대순으로 그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10)

현전하는 한문본 『반야심경』의 목록 작성은 김영배(1995), 한정섭(1995), 혜담(1997) 등을 참고로 하였다. 하지만 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겹치는 부분만 종합해서 싣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다른 자료들을 참고해서 정리했다.

(1) ㄱ.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구마라집 역 402~413년

ㄴ.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현장(玄奘) 역 649년

ㄷ.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佛說般若波羅蜜多心經) 의정(義淨) 역 당대(唐代)

ㄹ.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普遍地藏般若波羅蜜多心經) 법월(法月) 역 738년

ㅁ.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般若)·이언(利言) 역 790년

ㅂ.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지혜륜(智慧輪) 역 859년

ㅅ.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법성(法成) 역 847~859년 (敦煌出土)

ㅇ.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佛說聖佛母般若波羅蜜多經) 시호(施護) 역 982년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이 책들 중 『반야심경언해』 경(經) 본문의 저본이 되는 책은 (1ㄴ)의 현장(玄奘) 한역본(漢譯本)이다.

2.2. 위에서 밝힌 대로 우리가 연구 및 역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반야심경언해』 본문(本文)의 원전인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당(唐) 현장(玄奘)이 한역한 책이다. 그런데 현장의 『반야심경』은 구성 형식이 다른 불교 경전들과 얼마간 차이가 있다. 곧 경전의 일반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경전의 체제는 대체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서분(序分)과 유통분(流通分)은 빠져 있다. 본문이라고 할 정종분(正宗分)만 있다. 그래서 내용도 입의분(入義分), 파사분(破邪分), 공능분(功能分), 총결분(總結分) 등 본문만 있는 구성이다. 이는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의 두 종류 『반야심경』 중 약본(略本)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주011)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의 성격이나 경전의 형식 등에 대해서는 혜담(1997) 참조. 이 책에 의하면 위 예문 (1)에 있는 한문본 중 구마라집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과 현장의 『반야바라밀다심경』만이 약본(略本)이고 나머지는 광본(廣本)이라고 한다. 혜담(1997:17).

또 불교 의식(儀式)이나 법회(法會) 등의 독송(讀誦)에 쓰고 있는 『반야심경』의 제명(題銘)에 ‘마하(摩訶)’가 들어가 있는 점은 현장(玄奘)의 책과도 다른 점이다. 이는 현장본보다 먼저 한역된 구마라집 한역(漢譯)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에서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주01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혜담(1997:22) 참조.

이 경전의 명칭은 산스크리트본에 의하면 ‘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릿다야 수우트라)’라 되어 있고, 이를 한역(漢譯)한 이름이 ‘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산스크리트어 명칭과 한역 명칭을 종합하여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최상의 지혜를 완성하기 위한 핵심을 설한 경전’이란 뜻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주013)

김영배(1995:91~92), 혜담(1997:21~32) 참조. 그 외 경전의 내용에 관련된 사항은 무비(2005), 성법(2006), 성열(1990) 등 참조.
이에 대한 법장(法藏)의 견해는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 병서(倂序)에 잘 드러나 있다. 법장이 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의 일단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약소 구결문, 언해문, 현대어역의 순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 ㄱ. [구결문]

般若心經者 實謂曜昏衢之高炬ㅣ며 濟苦海之迅航이라 拯物導迷옌 莫斯ㅣ 爲最니라 然則般若 以神鑑으로 爲體오 波羅蜜多 以到彼岸으로 爲功이오 心 顯要妙所歸오 經은 乃貫穿言敎ㅣ니 從法就喩며 詮㫖爲目 故로 云호 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시니라 〈6ㄱ:5~7ㄴ:3〉

ㄴ. [언해문]

般若心經은 眞實로 닐오 어드운 길흘 비취 노 홰며 受苦ㅅ 바 건네  라 物을 거리며 迷惑 引導호맨 이 더으니 업스니라 그러면 般若 神奇히 비취요로 體 삼고 波羅蜜多 뎌  가로 功 삼고 心 조외며 微妙호 간 고 나토고 經은 言敎 씨니 法을 브터 가뵤매 나가며  닐오로 일훔 이런로 니샤 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시니라 〈8ㄱ:8~8ㄴ:5〉

ㄷ. [현대어역]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진실(眞實)로 이르되, “어두운 길을 비추는 높은 횃불이며, 수고(受苦)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빠른 배이다.”(라고 하니) 물(物)을 건지며 미혹(迷惑)을 인도(引導)함에는 이에서 더한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 반야(般若)는 신기(神奇)하게 비춤으로 체(體)를 삼고, 바라밀(波羅蜜多)은 저 가(언덕)에 감으로 공(功)을 삼고, 심(心)은 종요로우며 미묘(微妙)함이 간 곳을 나타내고, 경(經)은 언교(言敎)를 꿰는 것이니, 법(法)을 따라 견줌에 나아가며, 뜻을 이르는 것으로 이름을 지어 이르시되,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고 하신 것이다. 〈김무봉 역〉

2.3. 그러면 수십 종에 달하는 주해서들 중 법장의 ‘약소’와 중희의 ‘현정기’가 언해의 저본으로 선택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한계희(韓繼禧) 작성의 ‘심경발(心經跋)’에서 찾을 수 있다. 곧 법장의 ‘약소’가 ‘홀로 종지(宗旨)를 터득했음’과 중희의 ‘현정기’를 이용하여 ‘장소(藏疏)를 나누는 등 분절(分節)의 편의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3) ㄱ. [심경발 원문]

自譯此經逮唐 迄今造䟽著 觧代各有人, 法藏之註 獨得其宗. 上命孝寧大君臣補 率臣繼禧 就爲宣譯, 又得大宋沙門仲希所述顯正記 科分藏䟽 逐句□ 주014)

이 연구 및 주해의 대상인 자재암본 『반야심경언해』에는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판독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공란으로 처리한 것이다.
釋 極爲明備 據䟽分莭 釐入各文之下, 但希䟽據 本非今所行, 時有不同.

ㄴ. [심경발 번역문]

이 경전이 번역된 당나라에서 지금까지 주소(注疏)를 짓고 의해(義解)를 저술한 사람이 시대마다 있었지만, 법장(法藏)의 주소(註疏)가 홀로 그 종지(宗旨)를 터득하였다. 임금께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에게 명하셔서, 신(臣) 계희(繼禧)와 더불어 곧 번역 반포하게 하시고, 또 대송(大宋) 사문(沙門) 중희(仲希)가 저술한 현정기(顯正記)를 구하여 장소(藏疏)를 나누어 글귀마다 해석하니, 극히 소상하게 갖추어져 소(疏)에 따라 절을 나누고, 각기 본문(本文) 밑에 바로잡아 넣었으나, 중희가 저본으로 한 책이 지금에는 통행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이종찬 교수 번역]

또 ‘심경발(心經跋)’에는 『반야심경언해』의 간행 동기를 알 수 있는 언급이 있다. 이 발문을 통해 언해의 동기 등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승려들이 일상으로 대하면서도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왕이 민망히 여김’이라고 하였다.

(4) ㄱ. [심경발 원문]

惟. 我 主上殿下 以此經緇素常習 故特今敷譯, 盖忄悶 晨昏致誦 而不知其所以誦 即釋迦如來 哀此衆生 終日游相 而不知其相之意也. 其開覺人天 入佛知見之 㫖聖聖同揆. 鳴呼, 至哉.

ㄴ. [심경발 언해문]

아! 우리 주상전하께서 이 경이 승려들이 평소 늘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펴서 번역하게 하셨으니, 대저 새벽 저녁으로 외우면서도 외워야 하는 까닭을 모름을 민망히 여기심이니, 곧 석가여래께서 이 중생들이 종일토록 상(相)에 노닐면서도 그 상(相)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애석히 여김이다. 인천(人天)을 깨우쳐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게 하고자 하시는 뜻은 성인(聖人) 성인(聖人)이 같은 생각이시니, 아! 지극하시도다. [이종찬 교수 번역]

3. 판본 및 언해 체제

3.1. 현전하는 『반야심경언해』는 모두 네 종류이다. 크게는 원간본(原刊本)과 중간본(重刊本)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원간본을 다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원간 초쇄본(初刷本)으로 구분되는 이른바 초간본(初刊本)이고, 다른 하나는 학조(學祖)의 발문이 첨부된 원간 후쇄본(後刷本)이다. 이 두 종류의 책은 원간본 및 원간본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의 간행 연대는 1464년(세조 10년)이고, 후자(後者)는 1495년(연산군 1년)이다.

중간본(重刊本) 역시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 복각본(覆刻本)이다. 하나는 명종(明宗) 8년(1553 A.D.)에 황해도 황주(黃州)의 토자비산(土慈悲山) 심원사(深源寺)에서 간행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명종(明宗) 20년(1565 A.D.)에 전남 순창(淳昌)의 구악산(龜岳山) 무량사(無量寺)에서 간행한 책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원간본 및 원간본 계통의 책은 중앙에서 간행되어 관판(官板)의 성격을 띠고, 중간본은 지방의 사찰판(寺刹板)이다.

네 종류의 판본에 대해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주015)

이 목록의 작성에 김영배(1995)를 토대로 하고, 그 외의 사항은 필자가 관련 자료를 실사한 결과이다.

1) 원간 초쇄본

(가) 일사본(一簑本)

 간행연대 : 세조 10년(天順 8년, 1464 A.D.)

 간행처 : 간경도감(刊經都監)

 책크기 : 28㎝ ×19㎝, 반곽 21.2㎝×15.5㎝

 소장처 :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一簑文庫)[고 1730-44] 소장

 편차 : 언해 본문 1~67장, 심경발 1~2장 등 합 69장

 기타 : 보물 771호, 일지사 영인 소개(1973)

(나) 소요산(逍遙山) 자재암본(自在庵本)

 간행연대 : 세조 10년(天順 8년, 1464 A.D.)

 간행처 : 간경도감(刊經都監)

 책크기 : 32.5㎝ ×19㎝, 반곽 21.8㎝×15.8㎝

 소장처 : 동두천시 소요산 자재암(自在庵) 소장

 편차 : 금강심경전 1~3장, 주016)

‘자재암본’에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진전문(進箋文)’이 있다. 이 ‘진전문’은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금강경언해』에도 실려 있다. 뒤에 있는 역주의 첫 머리에 이를 싣고, 이종찬 교수의 번역문을 함께 싣는다. 아울러 이 역주서의 뒤에 발문(跋文)도 번역해서 실었다. 이 번역은 김영배 외(1995)에도 실린 바 있다. 역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게 어려운 번역의 일을 흔쾌히 수락해 주신 이종찬 교수께 여기에 적어서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진전문’이 『금강경언해』에도 실리고, 또 두 책이 함께 간행되었음은 다음의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 臣黃守身等謹將新雕印翻譯金剛經一卷心經一卷糚潢投 ... (...신 황수신 등은 삼가 새로 만든 인자(印字)로 금강경(金剛經) 한 권, 심경(心經) 한 권을 번역하고 표구 장식하여 바치오니...)”.
조조관 1~2장, 언해 본문 1~67장, 심경발 1~2장 등 합 74장

 기타 : 보물 1211호, 동악어문학회 학술총서3(1995), 역주 및 영인 공개

2) 원간 후쇄본

(가) 홍치판본(弘治板本) 주017)

이 책의 간행과 관련된 사항은 책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학조의 발문(跋文)에 상세하다. 같은 해에 원간본의 판목에서 다시 인출 ·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금강경언해』 등의 책에도 동일한 발문이 매행(每行)의 글자 수만 달리한 채 수록되어 있다. 이 발문을 통해 당시에 간행된 책과 간행 부수 등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於是 擇經律論中 開人眼目者 印出飜譯 法華經楞嚴經各五十件 金剛經六祖解心經永嘉集各六十件 釋譜詳節二十件 又印漢字金剛經五家解五十件 六經合部三百件...). 김영배 · 김무봉(1998) 참조. 역주서의 맨 뒤에 역시 원문과 함께 이종찬 교수님의 번역문을 싣는다.

 간행연대 : 연산군 1년(弘治 8년, 1495 A.D.)

 간행처 : 왕실(王室)

 책크기 : 25.5㎝ ×19㎝, 반곽 21.4㎝×14.8㎝

 소장자 : 고(故) 최범술(崔凡述) → 김민영(金敏榮) 주018)

필자는 홍치판 『반야심경경언해』를 김민영(金敏榮)님의 장서를 열람하던 중에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고(故) 최범술(崔凡述)님 구장본이었으나, 지금은 김민영님 소장으로 소장자의 이동이 있었다.

 편차 : 언해 본문 1~67장, 학조발 1~3장 등 합 70장

 기타 : 불서보급사 영인 소개(1972년)

3) 복각본 1

(가) 심원사판(深源寺板)

 간행연대 : 명종 8년(嘉靖 32년, 1553 A.D.)

 간행처 : 황해도 황주군 토자비산(土慈悲山) 심원사(深源寺)

 책크기 : 30.3㎝ ×18.8㎝, 반곽 21.5㎝×15.8㎝

 소장처 : 서울대 규장각(奎章閣) 소장

 편차 : 언해 본문 1~67장, 간기 1장 등 합 68장

4) 복각본 2

(가) 무량사판(無量寺板)

 간행연대 : 명종 20년(嘉靖 44년, 1565 A.D.)

 간행처 : 전남 순창군 구악산(龜岳山) 무량사(無量寺)

 책크기 : 28.5㎝ ×14.9㎝, 반곽 20.5㎝×14.9㎝

 소장처 : 고(故) 조명기(趙明基) → 모(某) 미술관(美術館) 소장

 편차 : 미상(공개하지 않음)

3.2. 이 네 종류의 책 중 우리가 연구 및 역주(譯註)의 대상으로 한 책은 초간본인 소요산 자재암본(自在庵本)이다. 자재암본의 자세한 형태서지는 다음과 같다.

 내제: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

 판심제: 진전문-金剛心經箋, 조조관 열함-雕造官, 본문-心經, 발-心經跋

 책크기: 32.5㎝×19㎝

 반곽: 21.8㎝×15.8㎝

 판식: 4주 쌍변

 판심: 상하 대흑구 내향 흑어미

 행관: 유계 8행, 본문은 큰 글자 매행 19자, 약소는 중간 글자 18자, 주해는 작은 글자 쌍행 18자, 언해는 작은 글자 쌍행 18·19자, 정음 구결은 작은 글자 쌍행.

이 책의 편찬 양식은 좀 독특한 편이다. 이는 중희의 현정기(顯定記)에 의해 장소(藏疏)를 나눈 후 글귀마다 해석하고, 소(疏)에 따라 분절(分節)해서 각각 본문(本文) 밑에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 원문인 본문(本文)은 큰 글자, 약소(略疏)는 중간 글자, 중희의 주해는 본문 구결문 및 약소(略疏) 구결문과 언해문 사이에 쌍행의 작은 글자로 썼다. 물론 주해는 번역하지 않고, 한자 작은 글자로 적었다. 원문은 행(行)의 첫머리에서 시작하고, 약소는 한 글자 내려서 썼는데, 언해는 경 원문의 것과 약소의 것 모두 쌍행으로 현토된 정음 구결문 다음에 한자로 된 주해를 두고, 그 밑에 쌍행의 작은 글자로 적어 내려갔다. 언해문의 맨 앞부분에는 큰 ○표를 하여 구분하고, 한자 쌍행으로 된 주해의 맨 앞에는 작은 ○표를 두어 구분했다.

구성은 대체로 경 원문에 정음으로 구결을 단 구결문을 앞에 놓고, 그 뒤에 한문으로 된 쌍행의 주해를 둔 후, 주해 다음에 언해문을 배치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해당 원문에 딸린 약소 구결문을 두고, 약소 구결문 다음에 다시 한문 주해를 배치한 후 언해를 하였다. 경(經)에 대한 약소(略疏)가 아니고, 형식에 대한 설명의 방법으로 약소를 단 경우에는 주소(註疏)를 한 이가 설화자의 자격으로 개입(해설)을 하는데, 이 구절의 앞에는 △표를 하여 구분하는 등 자못 복잡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불교 용어나 한자어에 대한 풀이는 협주(夾註)의 형식을 취해서 이해를 도왔다. 협주의 시작과 끝에는 ‘【흑어미】’ 표시를 하여 구분했다. 다른 간경도감본들과 마찬가지로 협주가 끝나는 곳이 언해문의 마지막이면 마감하는 ‘ 】’ 표시를 생략했다.

이 책은 모두 74장으로 되어 있다. 맨 앞부터 진금강심경전(進金剛心經箋) 3장, 조조관(雕造官) 열함(列銜) 2장,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 병서(幷序) 1~14까지 14장, 언해 본문 15~67까지 53장, 심경발(心經跋) 2장 등이다. 판심서명도 부문마다 다르게 되어 있어서 ‘金剛心經箋 - 雕造官 - 心經 - 心經跋’ 등이다. 언해문은 다른 언해서들과 마찬가지로 한자와 정음을 함께 썼다.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병기(倂記)되어 있다. 한자음을 포함하여 언해문에 방점이 있는데, 구결문의 쌍행으로 된 정음 구결에는 방점이 없다. 이는 정음 초기 문헌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후대의 것으로 분류되는 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4. 어학적 고찰

4.1. 표기법

『반야심경언해』는 같은 해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책인 『선종영가집언해』,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등에 견주어 볼 때 어떤 부분은 유사한 표기 양상을 보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변화된 표기 형태를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앞의 다른 세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대의 표기법에 가깝다.

이 책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을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방점표기

언해문에는 정음과 한자가 함께 쓰였는데, 한자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 한자음을 병기(倂記)했다. 방점은 언해문의 정음과 동국정운 한자음에만 표기하고, 본문과 약소 구결문의 쌍행(雙行)으로 된 정음구결에는 표기하지 않았다. 정음 구결에 방점을 찍지 않은 문헌은 『활자본 능엄경언해』(1461년 간행) 이후에 간행된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간경도감본 전부는 방점이 없는 구결이 쌍행으로 되어 있다.

2) 한자음 표기

언해문의 한자에만 정음으로 독음(讀音)을 달았다. 동국정운 한자음이다. 하지만 구결이 달린 경(經)의 원문과 약소의 한자에는 한자음 독음이 없다. 한자음 독음이 언해문에만 달린 문헌은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 『활자본 능엄경언해』(1461년 간행) 이후에 간행된 책들이다. 간경도감 간행의 언해본들은 전부 여기에 해당된다.

3) ‘ㅸ’

‘ㅸ’은 쓰이지 않았다. 이 책에는 겸양법 선어말어미의 쓰임이 없어서 ‘ㅸ’이 분포할 만한 환경이 드물기는 하지만, 어휘 내부에서는 물론 용언 활용형에서도 쓰임이 없다. 아래의 예에서와 같이 ‘ㅸ’은 이 문헌에서 ‘오, 우’로 바뀌어 실현되었다.

(1) ㄱ. 어드운〈8ㄱ〉, 즐거운〈24ㄴ〉, 더러운〈41ㄱ〉, 두려우며〈56ㄴ〉, 조외며〈8ㄱ〉 등

ㄴ. 외〈40ㄴ〉/ 외야〈67ㄱ〉, 오리〈62ㄴ〉

ㄷ. 셔욼〈66ㄴ〉, 글워리니〈67ㄱ〉

4) ‘ㆆ’

‘ㆆ’은 주로 한자음 표기에 사용되었다. 고유어 표기에서는 아래 (2ㄱ)과 같이 사이글자로 쓰인 예가 있을 뿐이다.『반야심경언해』보다 앞선 시기의 문헌에 보이던 관형사형어미와 명사 통합형 ‘-ㅭ+전청자형’ 표기는 이 책에서 ‘-ㄹ+전탁자형’ 표기로 바뀌었다.

(2) ㄱ. 다  사교미라〈11ㄴ〉 /  사교 이 마 心經일〈19ㄱ〉

ㄴ. 아롤 꼬디 아닐〈65ㄴ〉

ㄷ. 홀띠니〈30ㄴ〉, 아니홀띠니라〈65ㄴ〉

5) ‘ㅿ’

‘ㅿ’은 대부분의 출현 환경에서 그대로 쓰였다. 어휘 내부에서는 물론, 체언의 곡용과 용언의 활용 등 형태소 경계에서도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 문헌에는 (3ㄹ)과 같이 강세 보조사 ‘’의 쓰임이 빈번한 편이다.

(3) ㄱ. 처믄〈19ㄴ〉, 〈55ㄱ〉, 두번〈67ㄱ〉, 오〈62ㄱ〉

ㄴ. 〈34ㄴ〉 / 〈66ㄱ〉 / 〈57ㄱ〉

ㄷ. 니〈25ㄴ〉, 아〈34ㄴ〉, 지미니〈44ㄱ〉, 나가〈19ㄴ〉

ㄹ. -야〈28ㄱ〉, 브터〈34ㄱ〉

6) 각자병서(各自竝書)

이 문헌에 각자병서는 ‘ㄲ, ㄸ, ㅆ, ㆅ’이 보인다. ‘ㅃ, ㆀ, ㅥ’은 쓰이지 않았다. (4ㄱ), (4ㄴ)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 흔히 보이던 각자병서 표기이고, (4ㄷ) ~(4ㅁ)은 동명사어미 ‘-ㄹ’ 다음에서 실현된 각자병서 표기이다.

(4) ㄱ. 말미〈8ㄱ〉

ㄴ. 두르-[廻]〈11ㄴ〉, 드위-[飜]〈17ㄴ〉, -[引]〈41ㄱ〉

ㄷ. 아롤 꼬디〈65ㄴ〉

ㄹ. 홀띠니〈30ㄴ〉

ㅁ. 갈씨라〈66ㄱ〉, 뫼홀씨니〈23ㄱ〉, 두플씨니〈23ㄱ〉

7) 합용병서(合用竝書)

합용병서는 ‘ㅼ ㅽ ; ㅳ ㅄ ; ㅴ’ 등이 쓰였으나 ‘ㅺ, ㅻ, ㅶ, ㅷ, ㅵ’은 보이지 않는다. ‘ㅻ’은 다른 간경도감본에서도 그 예가 없으니 ‘ㅻ’을 제외한 그 외는 해당하는 어휘가 없는 공백이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5) ㄱ. [ㅼ] 〈20ㄱ〉, ㅎ〈36ㄱ〉, 〈62ㄱ〉

ㄴ. [ㅽ] -[速]〈8ㄴ〉 / 리〈66ㄱ〉, 〈51ㄴ〉

ㄷ. [ㅳ] 건내-[速]〈62ㄱ〉, [義]〈29ㄴ〉

ㄹ. [ㅄ] -[用]〈21ㄴ〉

ㅁ. [ㅴ] -[貫穿]〈8ㄴ〉, [俱]〈36ㄴ〉

8) 종성표기

이 문헌의 종성표기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 규정에 충실하다. 8종성 이외의 다른 예는 없다. 『금강경언해』 등 다른 간경도감본 문헌에 흔히 보이는 ‘ㅿ’이 여기서는 쓰이지 않았다.

(6) ㄱ. 긋-(〈긏-[斷]) : 긋니〈51ㄱ〉

 닛-(〈닞-[忘]) : 닛고〈63ㄴ〉

 -(〈-[愛]) : 오니〈63ㄴ〉

ㄴ. 낟-(〈낱-[現]) : 낟고〈34ㄱ〉

ㄷ. 깁-(〈깊-[深]) : 깁고〈12ㄱ〉

ㄹ. 숫(〈[炭]) : 숫 외〈40ㄴ〉

 닷-(〈-[修]) : 닷니〈51ㄱ〉

 업-(〈없-[無]) : 업디〈11ㄴ〉

이 책에는 공손법 선어말어미 ‘--’의 쓰임이 없어서 초성에 쓰인 ‘ㆁ’의 예는 드물다. 하지만 종성에 ‘ㆁ’이 올 경우에 분철하기도 하고 연철하기도 했다. 각각 하나씩의 예가 있다.

(7) ㄱ. 이 지츠로〈67ㄱ〉, 관(管) 대로니〈67ㄴ〉

9) 사이글자 표기

사이글자 표기는 대부분 ‘ㅅ’으로 단일화하였다. 그러나 아래 (8ㄴ)의 경우처럼 예외적으로 ‘ㅭ’이 쓰인 경우가 있다.

(8) ㄱ. 呪ㅅ 말(呪詞)〈64ㄱ〉, 經文ㅅ 〈33ㄴ〉, 菩提ㅅ 果德〈14ㄴ〉, 後ㅅ 卽說〈19ㄴ〉

ㄴ.  사교미라〈11ㄴ〉 /  사교〈19ㄱ〉

10) 한자음 표기 주019)

자세한 내용은 정우영(1995: 108 ~111) 참조.

『반야심경언해』에는 한자어를 정음만으로 표기한 예가 상당수 보인다. 이 어휘들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부터 정음으로 많이 적혔던 예들인데, 당시에 이미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녜’는 초기 문헌부터 자음동화(子音同化)된 형태로 적혔다.

(9) 녜(常例)〈7ㄴ〉, 간(暫間)〈8ㄱ〉, (將次)〈11ㄱ〉, (衆生,禽)〈65ㄴ〉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는 정음으로 적혔으나, 이 책에서 한자로 적힌 예도 있다.

(10) 미혹(迷惑, 미혹)〈8ㄴ〉, 수고(受苦, 슈고)〈8ㄴ〉, 위-(爲-, 위-)〈19ㄴ〉, 중생(衆生, )〈21ㄴ〉, 지극(至極, 지극)〈17ㄴ〉, 진실(眞實, 진실)〈7ㄴ〉

4.2. 문법

1) 문법의 특성 요약

대부분의 초기(初期)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가 그러하듯 『반야심경언해』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 이른바 직역 위주 번역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책의 경 본문 언해는 설화자가 독자에게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고, 약소(略疏) 언해는 설화자가 독자에게 해설을 하거나 화자가 청자에게 경 본문의 대강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문법 형태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같은 형태의 곡용어미나 활용어미가 반복해서 출현하는가 하면, 종결어미는 주로 평서형의 ‘-니라’ 주020)

고영근(1987)은 평서형 종결어미의 설명에서 ‘-니라’를 ‘-다’보다 보수성을 띤 어미로 다루었다.
로 끝맺고 있다. 또 불교 용어 등의 한자 어휘에는 낯선 낱말들이 더러 보이나, 고유어에서는 이른바 희귀어나 난해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경어법 선어말어미 중 존경법의 ‘-으시/으샤-’ 이외에 겸양법 선어말어미 ‘-/-, -/-, -/-’이나 공손법 선어말어미 ‘--, --’의 쓰임이 없고,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도-’만 쓰이는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종결어미는 평서형 중심으로 되어 있으나, 의문형, 명령형, 감탄형 구성도 간혹 볼 수 있다. 연결어미는 나열의 ‘-고/오’, 병렬의 ‘-며’ 등이 주류를 이룬다. 약소(略疏) 언해는 항목 나열식 구성이 많아서 수사(數詞)의 쓰임이 활발한 편이고,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파생어의 산출은 매우 생산적이다. 여기에서는 단어의 형성, 품사, 체언의 곡용, 용언의 활용, 종결어미, 연결어미 등 『심경』의 문법적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문법 사실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주021)

중세국어의 전반적인 문법 현상은 허웅(1975), 고영근(1987), 안병희 · 이광호(1990)를 참고하였다.

2) 단어의 형성

단일어는 제외하고 복합법과 파생법에 의해 이루어진 단어들의 구성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가) 복합어

합성어 중 복합어의 용례는 드문 편이다. 다만 동사 주022)

본고에서의 동사는 동작 동사(active verbs)는 물론이고 상태동사(qualitive verbs)까지를 포괄하는 술어이다.
의 경우에는 몇몇 예에서 다양한 합성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1) ㄱ. 나가-[就]〈8ㄴ, 17ㄱ, 17ㄴ, 19ㄴ, 21ㄱ, 28ㄱ, 40ㄱ, 42ㄱ…〉, 흘러가-[流]〈12ㄱ〉, 내-[引出]〈41ㄱ〉, 건내-[超]〈62ㄱ〉

ㄴ. 몯얫-〈40ㄴ〉, 尙얫-〈66ㄴ〉, 두쇼〈29ㄱ〉

ㄷ. 모도잡-[統]〈17ㄴ〉, 니-[游]〈67ㄱ〉

ㄹ. 일훔짛-[爲号]〈25ㄴ〉

(1ㄱ)은 ‘동사어간 + 부동사어미 -아/어 + 동사어간’형의 복합동사인데, 약소문(略疏文)의 성격상 ‘就~釋’의 구문이 많아서 ‘나가-’의 출현이 빈번하다. (1ㄴ)은 파생동사어간 ‘몯-’와 ‘尙-’에 부동사어미 ‘-야’가 오고 여기에 존재사 ‘잇-[有]’이 합성된 것으로 완료상태를 표시한다. 주023)

복합동사 구성은 아니지만 ‘이시-’에서 ‘이’가 탈락한 ‘외야 실〈25ㄴ〉’ 구성도 보인다.
‘두쇼-’는 특이하게도 동사어간 ‘두-[置]’와 존재사 ‘이시-’의 ‘시-’가 합성한 것이다 주024)
‘두-’와 ‘잇-’이 합성한 용례로 ‘뒷 『석 9:11』, 뒷관 『월석21:118』, 뒷다 『법3:97』’ 등이 보이고, ‘두-’와 ‘시-’이 합성한 것으로는 ‘둣거니 『남명하:48』, 둣니 『박초상:65』’ 등이 보인다. 이기문(1972:146) 참조.
(1ㄷ)은 ‘동사어간 + 동사어간’형 복합동사이고 주025)
‘니-’와 같은 유형의 합성어로는 ‘걷니-[步]’, ‘니-[飛]’, ‘노니-[遊]’, ‘사니-[生]’ 등이 있는데, 이 책에 다른 용례는 없다. ‘니-’는 같은 시기에 동화되지 않은 ‘니-’로도 쓰였다.
(1ㄹ)은 ‘체언 + 동사어간’형 복합동사이다.

(2) ㄱ. 간[乍]〈8ㄱ〉

ㄴ. 두[再三]〈67ㄱ〉

ㄷ. 녀나[餘]〈62ㄱ〉

(2ㄱ)은 한자어에서 왔으나 한자어라는 의식이 엷어져 정음문자(正音文字)로 표기된 복합명사이고, (2ㄴ)은 수관형사끼리 결합하여 부정 수관형사가 된 것이다. (2ㄷ)은 좀 특이한 경우이다. 체언 ‘녀느[他]’와 ‘남다’의 관형사형 ‘나’이 결합하여 합성관형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주026)

여기에서 ‘녀나’은 ‘十餘’의 의미가 아니고 ‘다른[他餘]’의 의미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추정한 것이다. ‘十餘’의 의미로 쓰인 합성관형사는 ‘여라/여라믄’이었다(여라 『구급하:62』 / 여라믄 『박초상:2』). 허웅(1975:105, 115) 참조.

나) 파생어

파생어는 접두사에 의한 것은 드물고 주로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에 의한 동사형성이 활발하다.

(1) 둘찻〈12ㄴ, 40ㄴ〉, 세찻〈14ㄱ, 40ㄴ〉, 네찻〈14ㄴ〉, 다찻〈19ㄱ〉

기수사(基數詞)에 접미사 ‘-찻’이 붙어 관형사적인 용법에 쓰인 서수사(序數詞)이다. ‘나찻’은 중세국어 문헌에서 문증(文證)되지 않고 이 책에서는 이 경우에 ‘처’이 쓰였다.

(2) ㄱ. 글월〈67ㄱ〉

ㄴ. 처〈11ㄴ, 14ㄴ, 17ㄱ, 19ㄴ, 40ㄱ, 41ㄱ

접미사 ‘-월(〈-)’과 ‘-엄’에 의한 명사 파생어이다. (2ㄱ)은 명사 ‘글’에 접미사 ‘-’이 결합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글왈’로도 쓰였다. 이런 유형의 파생어에는 ‘빗발, 발, 긧발’ 등이 있다. (2ㄴ)은 관형사 ‘첫’에 접미사 ‘-엄’이 결합한 것인데, 동사어기에 ‘-암/엄’이 결합한 파생어는 ‘무덤, 주검’ 등에서 볼 수 있으나 관형사에 의한 것은 희소하다.

(3) 체언 어기에 ‘--’가 붙은 파생동사는 그 예가 상당수 보이나 한자어에 기울었다. 이는 『심경』이 직역 위주의 언해서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나타나는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27)

중출(重出)인 경우에는 먼저 나오는 것 하나만을 제시한다. 나머지는 색인을 참조.

 引導-〈8ㄴ〉, 微妙-〈8ㄴ〉, 일훔-〈8ㄴ〉, 重-〈12ㄱ〉, 觀-〈14ㄴ〉, 至極-〈17ㄴ〉, 玄微-〈17ㄴ〉, 證-〈17ㄴ〉, 滅-〈19ㄴ〉, 爲-〈19ㄴ〉, 通達-〈20ㄴ〉, 自在-〈20ㄴ〉, 求-〈21ㄴ〉, 空-〈22ㄱ〉, 得度-〈22ㄴ〉, 現-〈22ㄴ〉, 麤-〈24ㄴ〉, 變-〈24ㄴ〉, 細-〈24ㄴ〉, 究竟-〈24ㄴ〉, 果證-〈24ㄴ〉, 得-〈24ㄴ〉, 노-〈25ㄴ〉, 因-〈25ㄴ〉, 疑心-〈27ㄴ〉, 取-〈29ㄴ〉, 斷滅-〈29ㄴ〉, 害-〈33ㄴ〉, 斷-〈33ㄴ〉, 實-〈33ㄴ〉, 顯-〈34ㄱ〉, 卽-〈34ㄴ〉, -〈34ㄴ〉, 住-〈36ㄴ〉, 平等-〈37ㄱ〉, 生-〈38ㄴ〉, 果得-〈41ㄱ〉, 減-〈44ㄱ〉, 增-〈44ㄱ〉, 緣-〈44ㄴ〉, 對答-〈53ㄱ〉, 正-〈59ㄱ〉, 等-〈59ㄱ〉, 能-〈59ㄱ〉, 結-〈59ㄱ〉, 讚歎-〈59ㄱ〉, 牒-〈59ㄴ〉, 神奇-〈59ㄴ〉, 虛-〈61ㄴ〉, 盛-〈63ㄴ〉, 一定-〈63ㄴ〉, 眞實-〈63ㄴ〉, 秘密-〈65ㄴ〉, 尙-〈66ㄴ〉, 靑白-〈66ㄴ〉, 簡略-〈66ㄴ〉

(4) 부사에 ‘--’가 붙는 파생동사의 예도 산견된다. 상태동사 어간형성일 경우가 많다.

 -〈11ㄴ〉, 몯-〈17ㄴ〉, 아니-〈14ㄴ, 28ㄱ〉,

 덛덛-[常]〈57ㄱ〉, -[齊]〈62ㄱ〉

‘’은 『용가』, 『월곡』 등에서 부사로 쓰인 예가 있다. ‘아니’는 같은 시기에 명사로도 쓰였는데, 이 책에도 용례(아니〈38ㄱ〉)가 보인다. ‘덛덛’과 ‘’은 어근이 불확실하지만 이 범주에 포함시킨다. 다만 ‘덛덛’은 체언으로 쓰인 한 예가 있다(덛더든 거슬 『능엄1:85』).

(5) 사동어간 형성은 동사어기에 접미사 ‘-기-, -이-, -ㅣ-, -오-, -우-, -호-’가 결합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ㄱ.  숨기고 (隱他고)〈34ㄴ〉

ㄴ. 秘密般若 기시니 (明秘密般若시니)〈19ㄴ〉

ㄷ. 일후믈 셰시니라 (立名시니라)〈17ㄱ〉

 等 正覺 뵈샤 나토시논 젼라 (示現等正覺故ㅣ라)〈62ㄴ〉

ㄹ. 닐오 般若 이 나토샨 法이오 (般若等은 是所顯之法이오)〈17ㄱ〉

ㅁ. 나 리고  일우 디니 (廢己고 成他義니)〈34ㄱ〉

ㅂ. 이 마초건댄 (准此컨댄)〈33ㄴ〉

사동어간 형성의 접미사 ‘-기-’는 선행동사의 어간 말음이 ‘ㅁ, ㅅ’일 때 나타나고, ‘-이-’는 어간 말음이 ‘ㅊ, ㅸ ; ㅿ, ㄹ’일 때 나타난다. 어간 말음이 ‘ㅿ’이면 반드시 분철하고 ‘ㄹ’이면 대부분 분철한다. 또 어간 말음이 모음일 때는 ‘-ㅣ-’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셰-’와 ‘기-’의 쓰임이 흔하다.

(6) 피동어간 형성은 동사어기에 접미사 ‘-히-’가 결합한 ‘자피-(〈잡+히-)’가 있을 뿐이다. ‘-히-’는 선행동사의 말음이 ‘ㅂ, ㄷ, ㄱ, ㅈ’일 때 나타나서 유기음화 된다.

 둘흔 藏애 자표미오 (二 藏攝이오)〈11ㄴ〉

(7) 상태동사 어간 형성은 체언어기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와 동사어기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로 나뉘는데, 이 책에는 각각 하나씩의 용례가 있다.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는 동사어기에 접미사 ‘-브-’가 결합한 ‘저프-(〈젛+브-)’ 한 예(例)만이 눈에 띈다.

 밧긔 魔怨 저푸미 업스니 (外無魔怨之怖니)〈55ㄴ〉

상태동사 어간 형성 중 체언에서 파생한 것에는 체언어기에 ‘-외(〈-)’가 결합한 ‘조외-’가 보인다. 중세국어에서 ‘조[要] 『능엄2:95』’은 명사로 쓰였다. 어기의 끝 ‘ㄹ’은 ‘-’ 위에서 탈락되었다.

 要 조욀씨라〈8ㄱ〉

(8) 파생부사도 체언어기에 접미사가 결합한 형태와 용언어기에 접미사가 결합한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매우 생산적이어서 다양한 용례를 보인다.

ㄱ. 명사에 접사화한 조사 ‘-로’가 붙어서 파생된 것.

 實로〈8ㄱ〉, 眞實로〈8ㄱ〉, 젼로〈19ㄴ〉

ㄴ. 지시대명사 ‘이, 그, 뎌’에 연격(沿格)조사 ‘-리’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그리〈66ㄱ〉

ㄷ. 파생동사어간 ‘-’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결합시에 ‘ㆍ’ 는 탈락된다. 이 책에는 한자어의 예만 보인다.

 神奇히〈8ㄴ〉, 微妙히〈17ㄴ〉, 秘密히〈19ㄴ〉, 正히〈27ㄴ〉, 純히〈41ㄱ〉, 永히〈57ㄱ〉, 究竟히〈57ㄱ〉, 能히〈62ㄱ〉

ㄹ. 용언어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두려이[두렵-, 圓]〈8ㄱ〉, 져기[젹-, 少]〈12ㄱ〉, 기[-, 明]〈19ㄴ〉, 너비[넙-, 廣]〈19ㄴ〉, 티[-, 同]〈22ㄴ〉/히[-, 如]〈59ㄱ〉, 머리[멀-, 遠]〈24ㄱ〉, 니르리[니를-, 至]〈67ㄱ〉

 체언어기 ‘브즈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부사로 파생된 특이한 용례도 있다.

 브즈러니[브즈런-, 殷勤]〈67ㄱ〉

ㅁ. 동사어기에 접미사 ‘-오’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오로[올-, 全]〈34ㄴ〉, 도로[돌-, 還]〈49ㄴ〉

부사 ‘오로’는 같은 시기에 ‘올-’의 변이형 ‘오-’에서 파생된 ‘오로’가 쓰이기도 했다.

ㅂ. 동사어기에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아/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

버거[벅-, 次]〈20ㄱ〉, :다[다-, 皆]〈23ㄱ〉, 비르서[비릇-, 方] 주028)

비르서[비릇-, 方]:
<분석풀이>‘비릇-’은 체언 ‘비릇’에서 영변화(零變化)에 의해 파생된 용언이지만 체언에 ‘-아/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부사가 없으므로 용언어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34ㄱ〉

이 책에 그 용례가 많은 ‘:다’는 ‘다-’에 ‘-아’가 붙은 것인데 활용형과 형태상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주029)

허웅(1975:81), 고영근(1987:159) 참조. 허웅(1975:81)에서는 활용형과 파생부사가 구분되는 것으로 ‘滅와 生괘 다 다아(滅生俱盡) 『능엄4:69』’를 제시한 바 있다.

이 외에 동사어기가 그대로 부사로 파생된 이른바 어간형 부사 ‘초[초-, 具]〈12ㄱ〉, [-, 達]〈23ㄴ〉’도 보인다.

(9)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어’에 의한 파생어로 조사 ‘-브터’도 있는데, ‘-브터’는 동사 ‘븥-[附]’에 ‘-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것이다. ‘-브터’는 흔히 대격조사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미 문법화한 (9ㄱ)과 아직 실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9ㄴ)으로 나눌 수 있다.

ㄱ. 舍利子 色不異空브터 아랜 (從舍利子 色不異空下)〈19ㄴ〉

 이브터 아랜 (自下)〈24ㄴ, 63ㄴ〉

ㄴ. 義를브터 (依義야)〈17ㄱ〉, 브터 (於依他)〈44ㄱ〉

3) 체언

가) 명사

이 책에는 명사가 곡용할 때 명사어간이 자동적으로 교체하는 이른바 ‘ㅎ말음체언’들이 보이는데, 이 책의 ‘ㅎ말음체언’은 주로 ‘ㄹ’받침을 가진 명사와 모음으로 끝난 명사에서 두드러진다. 또 음절말 자음의 제약에 의해 자동적 교체를 하는 명사들도 보인다. 여기서는 곡용에 의해 어형이 바뀌는 명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ㄱ. ‘ㅎ’말음체언의 예

 둘[二]〈7ㄴ〉, 길[道]〈8ㄴ〉, 나[一]〈11ㄴ〉, 세[三]〈14ㄴ〉, 네[四]〈11ㄴ〉, [等]〈34ㄱ〉, 우[上]〈48ㄱ〉, 안[內]〈56ㄱ〉

ㄴ. 자동적 교체를 하는 명사의 예

 [外]〈29ㄱ, 55ㄴ〉, 앒[前]〈17ㄴ, 53ㄱ〉, [邊]〈17ㄴ, 34ㄴ〉, 곶[花]〈67ㄱ〉, 짗[羽]〈67ㄱ〉

비자동적 교체를 하는 명사류는 ‘나모〈40ㄴ〉’가 쓰였을 뿐이다.

(2) 특이한 곡용을 하는 체언이 있다. 명사어간 말음이 모음 ‘이’인 경우인데, 속격조사 ‘의’를 만나면 어간 말음 ‘이’를 탈락시킨다.

ㄱ. 蹄 톳긔 그므리니〈7ㄴ〉

ㄴ. 아 어믜 일후믈 니니라〈25ㄴ〉

이러한 곡용을 하는 체언에는 ‘아비[父], 늘그니[老人]’ 등이 있다. 주030)

‘어미, 아비’는 소급형이 ‘엄, 압’이어서 속격형이 위 (2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겠으나, 공시적으로는 다른 어휘와 마찬가지로 ‘이’가 탈락한 형태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가 탈락하지 않은 채 속격조사와 결합한 예도 중세국어 문헌에 보이고(아비의 『법화2:138』), ‘톳기’의 속격형은 ‘톳 『두초24:25』, 『금삼 4:36』’로 나타나기도 한다.

(3) 의존명사는 보편성 의존명사의 예로 ‘곧〈8ㄴ〉’, ‘젼〈11ㄴ〉’, ‘이(믜우니〈63ㄴ〉, 오리〈62ㄱ〉)’, ‘〈51ㄴ〉’ 등이 있고, 서술성 의존명사로는 ‘〈62ㄱ〉’, 단위성 의존명사로 ‘번〈57ㄱ〉’ 등이 보인다. 부사성 의존명사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4) 의존명사 ‘, ’는 계사나 조사와 결합하여 통사적 기능을 나타낸다.

ㄱ. ‘’는 동명사어미 ‘-ㄹ’에 후행하는데 계사나 주격조사 앞에서는 모음 ‘ㆍ’를 탈락시킨다. 이 책에는 주격조사와의 통합은 보이지 않는다. ‘, 시’가 ‘-ㅭ’의 영향으로 된소리가 되어 구결문의 ‘-ㄹ/ㄹ시’가 언해문에서는 모두 ‘-ㄹ/ㄹ씨’로 바뀐다.

 몯〈19ㄴ〉, 기실〈27ㄴ〉

 외실씨라〈24ㄴ〉, 브틀씨오〈54ㄱ〉

ㄴ. ‘’는 동명사어미 ‘-ㄴ, -ㄹ’에 후행하는데 ‘’와 마찬가지로 계사나 주격조사 앞에서는 모음 ‘ㆍ’를 탈락시킨다. ‘로’는 의존명사 ‘’와 구격조사 ‘-로’의 통합형이다.

 空혼디 아니니〈27ㄴ〉, 空〈23ㄱ〉

 브튼 업수미〈34ㄴ〉, 브툰디라〈44ㄱ〉

 이런로〈8ㄴ, 19ㄱ〉,

 홀띠니〈33ㄴ〉, 아롤띠니라〈59ㄴ〉

나) 대명사

이 책에서 인칭대명사는 단수에서 1인칭의 ‘나’, 2인칭의 ‘너’, 재귀대명사 ‘저’, 복수에서 1인칭 ‘우리’ 등이 보인다.

(1) ㄱ. ·내 숨고〈34ㄴ〉 / 나와〈34ㄴ〉

ㄴ. 네 宗〈27ㄴ〉

ㄷ. :제 空혼디 아니니〈27ㄴ〉

ㄹ. 우리 小乘 中에〈27ㄴ〉

중세국어 인칭대명사의 주격형과 속격형은 성조로 구별되었다. 1인칭의 주격형과 속격형은 모두 ‘내’인데 성조는 주격형이 거성, 속격형이 평성이었으며, 2인칭은 ‘네’인데 주격형은 상성, 속격형은 평성이었다. 재귀대명사는 ‘제’인데 곡용은 2인칭 ‘네’와 같았다. 따라서 (1ㄱ), (1ㄷ)은 주격형이고, (1ㄴ)은 속격형이다.『심경』에서는 위에 든 예 이외에 다른 형태의 인칭대명사 및 의문대명사의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2) ㄱ. 기픈 디 이 니신뎌〈8ㄱ〉, 이와 엇뎨 다료〈27ㄴ〉

ㄴ. 뎌의 疑心을 그츠시며〈29ㄴ〉, 뎌와 이왜〈62ㄱ〉

중세국어에서는 ‘이, 그, 뎌’가 그대로 지시대명사로 기능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가 대명사로 쓰인 예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지시대명사로 ‘예〈56ㄴ, 57ㄴ, 58ㄴ〉’, ‘이〈8ㄴ, 40ㄱ, 53ㄱ〉’, ‘뎌〈40ㄱ〉’ 등이 보인다.

다) 수사

서두에서 밝힌 대로 『심경』에는 항목 나열식의 설명이 많아서 수사의 쓰임이 활발한 편이다. 그 목록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ㄱ. 기수사(基數詞)

 나ㅎ〈11ㄴ〉, 둘ㅎ〈11ㄴ〉, 세ㅎ〈11ㄴ〉, 네ㅎ〈11ㄴ〉, 다〈12ㄱ〉, 여슷〈12ㄱ〉, 닐굽〈12ㄱ〉, 여듧〈12ㄱ〉, 아홉〈12ㄱ〉, 열ㅎ〈12ㄱ〉

ㄴ. 서수사(序數詞)

이 책에서 서수사는 한자로 적혔다. 다음에서 앞의 두 예(例)는 언해문, 뒤의 세 예(例)는 구결문의 예이나 주로 구결문에서 보인다.

第一〈25ㄴ〉, 第二〈24ㄴ〉, 第三〈13ㄱ〉, 第四〈14ㄴ〉, 第五〈18ㄱ〉

ㄷ. 기수사의 관형어적 용법

 〈17ㄱ〉, 두〈34ㄴ〉, 세〈29ㄱ〉, 네〈27ㄴ〉, 다〈47ㄱ〉

ㄹ. 서수사의 관형어적 용법 주031)

2절 나)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찻’은 중세국어 문헌에서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이 경우에 ‘처’이 쓰였다.

 둘찻〈12ㄴ〉, 세찻〈14ㄱ〉, 네찻〈14ㄴ〉, 다찻〈19ㄱ〉

ㅁ. 합성수사

 두〈67ㄱ〉

ㅂ. 한자어계 기수사

이 책에서 한자어계 기수사는 주로 관형어적 용법에 쓰였다.

二十萬〈8ㄱ〉, 一十四〈8ㄱ〉, 十二〈47ㄱ〉, 十八〈48ㄱ〉, 三〈48ㄱ〉, 十〈62ㄱ〉, 數千萬〈67ㄱ〉

4) 수식어

가) 관형사

관형사는 다시 성상관형사, 지시관형사, 수량관형사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 목록만 제시한다.

(1) ㄱ. 성상관형사

 거즛〈8ㄱ, 33ㄴ, 44ㄴ〉, 엇던〈62ㄱ, 66ㄱ〉

ㄴ. 지시관형사

 이〈53ㄱ〉, 그〈24ㄴ, 25ㄴ〉, 뎌〈22ㄴ, 25ㄴ〉

 녀나 주032)

녀나:
<참조>합성관형사 ‘녀나’의 형성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주 26) 참조.
〈62ㄱ〉

ㄷ. 수량관형사

수량관형사는 수사와 같은 형태가 많은데, 전술한 수사 중 (1ㄷ), (1ㄹ), (1ㅁ)은 그대로 수량관형사로 기능하였다. 그 외의 것으로는 ‘첫〈49ㄱ〉’, ‘여러〈27ㄴ〉’ 등이 보인다.

나) 부사

부사는 성분의 의미를 제한하는 성분부사와 문장 전체의 의미를 제한하는 문장부사로 나눌 수 있다.

(1) 성분부사

성분부사는 후행 성분과의 의미 관계를 중심으로 다시 성상, 지시, 부정부사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책에 부정부사의 용례는 없다. 여기서는 몇몇 예만 제시한다.

ㄱ. 성상부사

 다〈8ㄱ〉, 믄득〈19ㄴ〉, 져기〈19ㄴ〉, 곧〈28ㄱ〉, 오로 주033)

오로:
<풀이>같은 시기에 ‘오로’와 수의변이형 ‘오로’가 함께 쓰였는데, ‘오로’는 형용사 ‘올-[全]’에서, ‘오로’는 ‘오-[全]’에서 각각 접미사 ‘오’에 의해 부사로 파생된 것이다. 후대 문헌에는 ‘오로’보다 ‘오로’가 더 많이 나타난다. 이 책에서 형용사는 ‘오-’이 쓰였고, 부사는 ‘오로’만 한 번 보일 뿐이다.
〈34ㄴ〉, 모다〈34ㄴ〉, 비르서〈36ㄴ〉, 마〈40ㄴ〉, 오직〈41ㄱ〉, 비록〈42ㄱ〉, 두루〈44ㄱ〉, 어루〈44ㄱ〉, 도로〈49ㄱ〉, 몬져〈51ㄱ〉, 일즉〈53ㄱ〉, 티〈22ㄴ, 53ㄱ〉 / 히〈59ㄱ〉, 너비〈66ㄱ〉

ㄴ. 지시부사

 엇뎨〈27ㄴ〉, 그리〈66ㄱ〉

ㄷ. 부정부사

 용례 없음.

(2) 문장부사

문장부사는 문장 전체의 의미를 한정하여 주는 기능을 가진 성상의 문장부사와, 의미와 관계없이 두 문장을 연결해 주는 접속의 문장부사로 나뉜다.

ㄱ. 성상문장부사

 實로〈8ㄱ〉, 眞實로〈8ㄱ〉, 반기〈24ㄴ, 33ㄴ〉

ㄴ. 접속문장부사

 이런로〈8ㄴ〉, 그러면〈8ㄴ〉, 〈28ㄱ〉, 다가〈33ㄴ〉, 비록〈42ㄱ〉, 그러나〈42ㄱ〉

5) 격조사

가) 주격조사

주격표지는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선행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이, ㅣ, ∅’로 실현되었다. 다만 구결문에서는 주격조사 ‘∅’가 실현된 환경에서 ‘ㅣ’가 나타나는데, 이런 표기는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구결문에만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독서의 편의를 위한 배려로 생각된다. 당시의 언해 관여자는 ‘∅’임을 인식하였으면서도 독서 능률 향상을 위한 표기상의 배려로 ‘ㅣ’표기를 취한 것으로 추정한다.

(1) ㄱ. 체언의 끝소리가 자음일 때 : ‘이’

 구결문 : 色이〈25ㄴ, 36ㄱ〉, 空이〈36ㄱ〉

 언해문 : 사미〈21ㄴ〉, 미〈67ㄱ〉

ㄴ.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 이외의 모음일 때 : ‘ㅣ’

 구결문 : 空假ㅣ〈36ㄱ〉, 忠孝ㅣ〈66ㄱ〉

 언해문 : ·내〈34ㄴ〉, :제〈29ㄴ〉

ㄷ.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일 때, 구결문 : ‘ㅣ’, 언해문 : ‘∅’

 구결문 : 二諦ㅣ〈3ㄱ〉, 是二ㅣ〈37ㄴ〉

 언해문 : 二諦 녜 이시며〈7ㄴ〉 (二諦ㅣ 恒存며〈3ㄱ〉) 이 둘히 둘 아니 일후미 空相이라 시니라 (是二ㅣ 不二 名爲空相이라 시니라〈38ㄱ〉)

(1ㄴ) 언해문의 ‘:제(〈저+·ㅣ)’는 체언의 말음절 평성이 조사 ‘ㅣ’와 결합하여 상성으로 성조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경우 체언의 말음절이 거성이거나 상성이면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1ㄷ)의 언해문에서도 고유어인 경우에는 체언의 말음절이 평성이면 앞에서와 같은 성조의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 책에는 그러한 용례가 없다. 주034)

인칭대명사의 곡용에 따른 성조의 차이와 주격조사의 생략과 관계된 성조의 변동에 대해서는 안병희·이광호(1990:153~154, 162~164)를 참조할 것. 참고로 중세국어에서 주격조사의 생략으로 성조변동(평성→상성)이 일어난 명사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節], :[梨], :리[橋], 너:희[汝等], 고:래[鯨], 누:위[妹], 그:듸[2인칭 대명사 子, 公]
그런가 하면 (1ㄷ)의 환경에서 구결문은 ‘∅’인데 언해문에서는 ‘ㅣ’가 실현된 예외적인 표기(2ㄱ)도 눈에 띈다. 협주에서는 (1ㄷ)의 환경에서 ‘ㅣ’가 실현되었는데(2ㄴ), 체언과 용언을 구별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기로 생각된다.

(2) ㄱ. 오 體ㅣ 空 아닌댄〈34ㄱ〉 (擧體非空인댄〈30ㄴ〉)

ㄴ. 知ㅣ 滅니〈28ㄱ : 협주〉

(1ㄷ)의 환경에서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주격조사가 생략된 것도 있다. 이는 구결 작성 단계부터 ‘ㅣ’를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 理 一十四行애 다니〈8ㄱ〉 (理盡一十四行니〈5ㄱ〉)

표기상의 주격조사 생략 외에 이른바 부정격(不定格) 조사(infinitive case)에 해당하는 예가 이 책에도 보인다. 특히 ‘없다[無]’ 앞에서 두드러진다. 주035)

이 책에는 ‘없-[無]’ 앞에서 주격조사가 생략된 구문이 많이 보이는데, (4ㄴ)의 경우는 주격조사가 생략된 구문으로 다루어도 문제가 없겠으나, ‘道업스며 果업숨히라〈34ㄱ〉, 得업다〈53ㄱ〉’와 같은 구문은 ‘없-’이 접사로서 앞의 명사와 결합한 파생어 구성이거나 ‘체언’과 ‘없-’이 복합한 복합어 구성이라고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4) ㄱ. 因緣 젹디 아니야〈11ㄴ〉

ㄴ. 룜 업스실〈20ㄴ〉, 生滅 업스니라〈44ㄱ〉

보격조사가 생략된 구문도 보인다. 보격조사는 주격조사와 동일한 곡용을 하므로 이 논의에서 따로 다루지 않고 생략된 구문만을 제시하는데 그친다.

(5) ㄱ. 空 아니면〈34ㄱ〉

ㄴ. 숫 외 니라〈40ㄴ〉

나) 서술격조사

주격조사와 비슷한 곡용을 하는 것으로 서술격조사(계사)가 있다.

(1) ㄱ. 체언의 끝소리가 자음일 때 : ‘이-’

 구결문 : 是大神呪等이니라〈59ㄴ〉

 언해문 : 知覺이라〈59ㄱ〉

ㄴ.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 이외의 모음일 때 : ‘ㅣ-’

 구결문 : 非幻色故ㅣ라〈30ㄴ〉

 언해문 : 오리 업슨 呪ㅣ라〈60ㄱ〉

ㄷ. 체언의 끝소리가 ‘이’나 ‘ㅣ’일 때 : ‘∅’

 구결문 : 敎義 一對니〈13ㄴ〉, 敎義 分二니〈15ㄱ〉

 언해문 : 二諦 眞諦와 俗諦라〈7ㄴ〉 / 般若 이 體니〈17ㄴ〉

서술격조사 경우는 주격조사와는 달리 (1ㄷ)의 환경에서 모두 ‘∅’이다.

(2) ㄱ. 宗 간 고 닐오 趣ㅣ니 (宗之所歸曰趣ㅣ니)〈14ㄱ〉

ㄴ. 예서 닐오매 知ㅣ라 (此云知라)〈58ㄱ〉

(2ㄱ)은 ‘∅’로 실현될 환경에서 ‘ㅣ’가 되었는데, 이는 ‘趣’의 동국정운 한자음 ‘·츙’에서 기인한다. (2ㄴ)은 표기상의 오류로 생각된다.

다) 대격조사

대격조사 ‘ㄹ’은 이형태로 ‘/을, /를’을 가진다. ‘/을’은 체언의 말음이 자음일 경우이고, ‘/를’은 체언의 말음이 모음일 때 나타나는데 ‘/을’, ‘/를’의 교체는 모음조화에 의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자음을 가진 음성모음 뒤에서 ‘’이 나타나고 ‘i, j’나 음성모음 뒤에서도 주로 ‘’이 쓰였다. ‘를’이 실현될 곳에는 대부분 ‘’이 나타나서 ‘를’은 (1ㄹ)의 두 용례뿐이다.

(1) ㄱ. 德〈12ㄱ〉, 障〈12ㄱ〉, 모〈24ㄴ〉

ㄴ. 悲願力을〈24ㄴ〉, 목수믈〈24ㄴ〉

ㄷ. 나〈34ㄱ〉, 어미〈25ㄴ〉, 後〈54ㄴ〉, 蹄〈7ㄴ〉

ㄹ. 義를〈17ㄱ〉, 有를〈29ㄴ〉

ㅁ. 고길〈7ㄴ〉, 톳길〈7ㄴ〉, 아랠〈46ㄱ〉

대격조사의 생략도 흔히 보인다.

(2) ㄱ.  이 經 사교매〈11ㄴ〉

ㄴ. 나 敎 니와샤미오〈11ㄴ〉

라) 속격조사

속격조사는 무정물(無情物)이나 유정물(有情物) 지칭의 존칭체언 뒤에 ‘ㅅ’으로 나타나고, 유정물 지칭의 평칭체언 뒤에는 ‘/의’와 ‘ㅣ’로 나타난다.

(1) ㄱ. 부텻 됴 德〈12ㄱ〉 / 菩薩ㅅ 깁고 너븐 行〈12ㄱ〉

ㄴ. 그믌 벼리라〈19ㄴ〉 / 세 가짓 般若로〈14ㄱ〉

ㄷ. 그 사 어미 노며 로미〈25ㄱ〉

ㄹ. 이 뎌의 아리라〈25ㄴ〉

ㅁ. 제 性이 本來 空야〈27ㄴ〉

속격조사도 생략된 예가 있는데, 이는 선행 체언 뒤에 속격조사가 나타나지 않는 명사구 구성의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ㅁ)의 ‘제’는 주격과 속격의 형태가 동일하나 성조는 서로 달라서 주격이면 상성, 속격이면 평성이 된다. (2)는 ‘이’나 ‘ㅣ’로 끝난 체언 뒤에서 속격조사가 생략된 예이다.

(2) ㄱ. 뎌 새 눈 〈25ㄴ〉

(2)ㄴ. 우리 小乘 有餘位 中에도〈27ㄴ〉 주036)

이 책에서 속격조사가 생략된 예는 위의 (2ㄱ), (2ㄴ)과 같이 ‘이’나 ‘ㅣ’로 끝난 체언 뒤에서만 보인다. 따라서 이는 부정격이라기보다는 표기상의 격조사 생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5세기 국어에서 종속절의 주어는 속격형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명사를 가진 내포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병희 · 이광호(1990:175)에서는 이러한 기능을 갖는 속격조사를 주어적 속격이라고 하였다.

(3) ㄱ. 마 나토온 고 닐오 宗이오〈14ㄱ〉

ㄴ. 宗 간 고 닐오 趣ㅣ니〈14ㄱ〉

이 책에는 속격의 자리에 주격을 쓴 것이 있다.

羽儀  이 지츠로 威儀 사씨라〈67ㄱ〉

마) 처격조사

이 책에서 처격조사 ‘애/에/예, /의’는 서로 상보적 분포를 이루고 있다. ‘애/에’는 선행 체언 말음절 모음의 종류에 따라서 나눠진다. ‘예’는 선행 체언 말음절 모음이 ‘이(i)’나 ‘ㅣ(j)’인 경우에 실현되었다. ‘/의’는 특수한 처격조사로 이를 취하는 명사는 대체로 정해져 있으나 동일한 명사가 ‘’와 ‘애’를 다 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런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1) ㄱ. 뎌 〈17ㄴ〉, 生死애〈36ㄴ〉

ㄴ. 세 性에〈44ㄱ〉,  念에〈36ㄴ〉

ㄷ. 位예〈62ㄱ〉, 智예〈20ㄴ〉

ㄹ. 알〈42ㄴ〉, 밧긔〈55ㄴ〉

중세국어의 처격조사는 처소, 지향점, 시간, 원인, 비교 등의 기능을 보인다.

(2) ㄱ. 처소 : 그 中에〈24ㄴ〉

ㄴ. 지향점 : 有에 나가〈8ㄱ〉

ㄷ. 시간 : 長安 二年에〈66ㄴ〉

ㄹ. 원인 : 나매 性은 增減 업스니라〈44ㄱ〉

ㅁ. 비교 : 空애 다니〈27ㄴ〉 주037)

중세국어에서 ‘다-[異]’는 주로 격조사 ‘애/에, 에셔, 게’와 보조사 ‘두고’를 지배하는 용언이었다. 용언의 특수한 지배에 대해서는 안병희 · 이광호(1990:324~326) 참조.
/ 凡夫에 디날씨오〈62ㄱ〉

처격의 하위부류라고 할 수 있는 여격은 이 책에 용례가 없다. 이 책에서 처격조사가 생략된 예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처격이 가지는 처소의 기능이 문법적 기능보다 앞서므로 생략될 경우 그 문장 성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038)

안병희·이광호(1990:181)에서는 처격조사가 생략되면 그 문장이나 말이 적격성(適格性) (well-formedness)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바) 구격조사

구격조사는 체언의 말음이 자음이면 ‘로/으로’, ‘모음’이나 ‘ㄹ’이면 ‘로’로 나타난다. 구격조사가 생략된 예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서술어와의 관계가 긴밀하여 생략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1) ㄱ. 菩薩의 因行로〈14ㄴ〉,  닐오로〈8ㄴ〉

ㄴ. 眞空境으로 宗삼고〈14ㄴ〉, 이() 지츠로〈67ㄱ〉

ㄷ. 두 義로〈14ㄴ〉, 아래로〈21ㄴ〉, 令小菩薩로〈9ㄴ : 구결문〉

구격조사는 ‘도구격, 원인격, 향격, 자격격, 변위격’ 등으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 ‘변위격’이라고 할 만한 예는 없다. 나머지를 순서대로 보인다.

(2) ㄱ. 도구격 : 管으로 하 보다 니〈67ㄴ〉

ㄴ. 원인격 : 聲聞身으로 得度얌 직니란〈22ㄴ〉

ㄷ. 향격 : 아래로 衆生 救샤 브트니〈21ㄴ〉

ㄹ. 자격격 : 두 義로 趣 사니라〈14ㄴ〉

사) 공동격조사

‘과/와’로 나타난다. 체언의 끝음절이 자음이면 ‘과’, ‘모음’이나 ‘ㄹ’이면 ‘와’이다. 서술어의 성격에 따라 ‘공동, 나열, 비교’의 기능을 갖는다.

(1) ㄱ. 공동 : 처믄 敎와 義와  對니〈14ㄴ〉

ㄴ. 나열 : 苦와 集과 滅와 道왜 업스며〈50ㄱ〉

ㄷ. 비교 : 色이 空과 다디 아니호〈34ㄴ〉 주039)

앞의 주 37)에서 ‘다-’는 격조사 ‘애/에, 에셔, 게’와 보조사 ‘두고’를 지배한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는 ‘이와 엇데 다료〈27ㄴ, 28ㄱ〉’형 구문과 ‘空이 色과 다-, 色이 空과 다-〈29ㄱ, ㄴ〉’형 구문이 많아서 ‘다-’가 주로 공동격 ‘과/와’를 지배한다.

나열의 공동격조사는 대체로 집단 곡용을 하지만 예외도 있다. (2ㄱ)은 집단곡용의 예이고, (2ㄴ)은 그렇지 않은 경우다.

(2) ㄱ. 나와 괘 다 잇 디니〈34ㄱ〉

ㄴ. 수뭄과 顯홈과 둘 업수미〈34ㄱ〉

비교의 공동격조사는 ‘-’ 앞에서 생략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주040)

중세국어에서 ‘-[如]’는 주로 주격조사 ‘이’를 지배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공동격 ‘과/와〈27ㄴ, 28ㄱ, 41ㄱ〉’를 지배하거나 조사가 생략된 ‘이 -〈11ㄴ, 26ㄱ, 51ㄱ, 53ㄱ〉’ 구문을 이룬다.

(3) ㄱ. 든 알 사굠 니라〈54ㄴ〉

ㄴ. 이 三科 사교미 조 對法等論 니라〈48ㄱ〉

아) 호격조사

호격조사 ‘하, 아’ 중 이 책에는 ‘아’가 단 한 차례 나올 뿐이다.

(1) 舍利子아〈25ㄱ〉

6) 보조사

이 책에서 보조사의 쓰임은 극히 한정적이다. 대조의 의미를 가진 보조사를 비롯한 몇몇 용례가 있을 뿐이다.

(1) 대조 : ㄴ (/은, /는)

가장 많은 용례를 보인다. 대격조사의 경우처럼 ‘는’이 실현될 환경에서 모두 ‘’이 나타나 언해문에는 ‘는’이 보이지 않고 구결문에만 단 한 번의 쓰임이 있다.

ㄱ. 아랜〈24ㄴ〉, 어민〈25ㄴ〉 / 아호〈12ㄱ〉, 摠〈14ㄱ〉 / 둘흔〈11ㄴ〉, 여들븐〈12ㄱ〉 / 이〈27ㄴ〉, 道〈7ㄴ〉 / 般若深邃는〈65ㄱ : 구결문〉

『심경』에서 대조보조사는 주로 ‘수사(數詞)’에 후행하여 설명 항목을 나누는 역할이거나 처격조사와 함께하여 처소 및 순서의 다름을 표현하는 기능을 한다.

ㄴ. 나 ~둘흔 ~세 ~네흔 ~다〈11ㄴ〉

  二藏內옌〈2ㄴ〉, 空中엔〈48ㄱ〉

(2) 역시 : 도

‘역시’의 의미를 나타내나 때에 따라서는 ‘강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현대국어에서의 ‘도’와 형태, 용법이 같다.

ㄱ. 간도 空 아뇸 아닐〈8ㄱ〉

ㄴ. 곧 이 아논 空理도  得디 몯릴〈53ㄱ〉

ㄷ. 우리 小乘有餘位中에도〈27ㄴ〉

보조사 ‘도’는 (2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격의 위치에서 실현되면 대격조사가 생략되지만, (2ㄷ)처럼 처격조사를 지배할 때는 생략되지 않는다.

(3) 시발(始發) : 브터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어’가 동사 ‘븥-[附]’에 후행하여 문법화(文法化)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에서도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서처럼 대격조사가 선행한 ‘브터’의 출현이 훨씬 많다.

ㄱ. 舍利子色不異空브터〈19ㄴ〉, 이브터〈24ㄴ, 63ㄴ〉, 假브터〈37ㄱ〉, 空브터〈37ㄱ〉 / 法을브터〈54ㄴ〉

(4) 강세 : 

현대국어의 ‘야’에 해당되는 조사로서 당시엔 광범위하게 쓰였으나 『심경』에는 부동사어미에 후행하는 예들만 보인다.

滅야〈28ㄱ〉, 滅코〈28ㄱ, 29ㄴ〉, 空인브터〈34ㄱ〉

(5) 양보 : (이)ㄴ

보조사 ‘ㄴ’은 계사의 활용형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영근(1987:88)에서는 ‘비특수’ 보조사로 주어의 자리에 놓인다고 하였다.

空인〈36ㄴ〉, 色인〈36ㄴ〉, 呪힌〈59ㄴ〉

(6) 의문 : 고

해답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의문문의 서술어로 체언이 나타날 경우 바로 체언에 연결되는 조사이다. 의문사에 호응하여 설명의문문을 만드는데, 이런 조사에는 ‘고’ 외에도 ‘가/아/오’ 등이 있다. 이 책에는 아래의 한 예(例)만이 보인다.

菩提 엇던 뎌  감고〈66ㄱ〉

(7) 같음 : 다히

체언이나 동명사에 연결된다. 같은 기능을 하는 보조사로 ‘다(다이)’가 있다.

理다히 아로미 일후미 如理知니〈59ㄱ〉

(8) 위치 : 셔

보조사 ‘셔’는 ‘위치, 출발점, 비교’의 뜻을 가지나 이 책에서의 용례 〈17ㄴ, 21ㄱ, 25ㄴ, 57ㄴ〉는 모두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예셔 닐오매 等이라〈58ㄱ〉

7) 용언의 교체

가. 자동적 교체

용언어간의 교체는 대체로 곡용어간의 교체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용언어간의 자동적 교체에 해당하는 예를 나타나는 순서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번 출현하는 경우는 처음 나오는 것만 보인다.

 [자음]

깊-[深]〈7ㄴ〉, 긏-[隔, 斷]〈7ㄴ〉, 닞-[忘]〈7ㄴ〉, 없-[無]〈7ㄴ〉, 낱-[顯]〈8ㄱ〉, -[進]〈8ㄱ〉, -[奪]〈8ㄱ〉, -[備]〈8ㄱ〉, 좇-[隨]〈8ㄱ〉, 두-[圓]〈8ㄱ〉, -[通]〈8ㄱ〉, 어-[昏衢]〈8ㄴ〉, 높-[高]〈8ㄴ〉, 븥-[依]〈11ㄴ〉, -[修]〈12ㄱ〉, 녈-[淺]〈22ㄱ〉, 둪-[覆]〈23ㄱ〉, -[連]〈25ㄴ〉, -[作]〈33ㄴ〉, 더-[垢]〈38ㄴ〉, -[欣]〈51ㄱ〉, 즐-[樂]〈63ㄱ〉, -[愛]〈63ㄴ〉, [憎]〈63ㄴ〉, 맞-[逢]〈63ㄴ〉, -[竟]〈63ㄴ〉

 [모음]

니-[謂]〈8ㄱ〉, -[速]〈8ㄴ〉, 흐르-[流]〈12ㄱ〉, 다-[異]〈22ㄱ〉

나. 비자동적 교체

자음어간의 비자동적 교체에 해당하는 ‘아쳗-[厭]〈51ㄱ〉’, ‘묻-[問]〈53ㄱ〉’ 등이 보이고, 모음 어간의 비자동적 교체인 ‘잇-/이시-’도 산견된다.

  二諦 녜 이시며〈7ㄴ〉

세히 잇니〈14ㄴ, 17ㄱ, 22ㄱ〉

‘두-[置]’와 ‘이시-’의 축약형이 ‘두쇼’로 나타난다.

  疑心을 두쇼〈29ㄱ〉

8) 종결어미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심경』의 본문 언해는 설화자가 독자에게 해설하는 형식이다. 약소(略疏) 언해의 지문은 설화자가 독자에게 설명을 가하는 형식이고, 인용절은 경 본문의 대강을 밝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장은 (니샤 “~-다/라”, -니라)형 구성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용문의 종결어미는 ‘-다/라’인 경우가 많고 모문의 종결어미는 ‘-니라’형이 주류를 이룬다.『심경』에 보이는 종결어미는 평서형, 의문형, 명령형, 감탄형의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평서형

ㄱ. 이런로 니샤 ‘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시니라〈8ㄴ〉

ㄴ. 갓 空中에 알 諸法 업슬  아니라 뎌 空 아 智도  得디 몯릴 니샤 ‘知 업다’ 시니라〈51ㄴ〉

ㄷ. 니샤 ‘得 업다’ 시니라〈53ㄱ〉

ㄹ. 中論애 니샤 空ㅅ 義 잇 젼로 一切法이 이니라〈34ㄱ〉

ㅁ. 비르서 究竟이 외리라〈36ㄴ〉

평서형 종결어미 ‘-다’는 서술격조사 어간 ‘이-’나 선어말어미 ‘-오/우-, -과-, -니-, -리-, -더-’의 뒤에서 ‘-라’로 교체되었다. 이 책에서 대부분의 종결어미는 서법 형태소와 결합하여 ‘라’체의 부정법이나 직설원칙법을 표시하고 드물게 추측법을 보이기도 한다. 또 약소 언해 모문의 종결어미는 경 본문이나 경을 설한 주체에 대한 존대의 표시로 대부분 존경법의 선어말어미 ‘-시-’를 가지고 있다. 약소 언해의 인용절은 화자가 청자에게 일방적으로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며 주로 부정법을 보인다. 이 책에는 겸양법이나 공손법의 선어말어미는 보이지 않는다.

(2) 의문형

ㄱ. 이와 엇뎨 다료 〈27ㄴ, 28ㄱ〉

ㄴ. 엇뎨 이 그레 一切 다 업다 시뇨〈53ㄱ〉

ㄷ. 엇뎨 이 空이 이 色 滅티 아니료〈53ㄱ〉

ㄹ. 엇던 젼로 오직 無等  니디 아니시뇨〈62ㄱ〉

ㅁ. 엇뎨 노며 기프닐 혜아리리오〈67ㄴ〉

ㅂ. 菩提 엇던 뎌  감고〈66ㄱ〉

(2ㄱ)-(2ㅂ)은 『심경』에 나오는 의문문 전부이다. 모두 의문사와 호응하는 1, 3인칭의 설명의문문인데, 경의 난해한 부분에 대해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 자문(自問)하여 독백하는 형식이 많다. (2ㄱ)-(2ㅁ)은 선어말어미 ‘-니/리-’와 설명의 의문형어미 ‘-오’의 결합에 의한 의문문이고, (2ㅂ)은 체언 뒤에 의문 보조사 ‘고’가 결합한 의문문이다.

(3) 명령형

ㄱ. 다 업슨 디니 다 알 마초아 랑라〈34ㄴ〉

ㄴ. 두 번 브즈러니 야 略疏 내라 니〈67ㄴ〉

이 책에서 명령형은 그 용례가 적다. 모두 ‘라’체이다. 주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앞뒤의 문맥에 의지하면, (3ㄱ)은 불특정의 청자이고 (3ㄴ)은 약소(略疏)를 한 법장(法藏)이다.

(4) 감탄형

ㄱ. 般若 기픈 디 이 니신뎌〈8ㄱ〉

ㄴ. 理 一十四行애 다니 이 알리로다〈8ㄱ〉

ㄷ. 이럴 알리로다 니샤〈59ㄴ〉

중세국어의 감탄형은 감탄법어미에 의한 것과 감동법 선어말어미에 의한 것이 있는데, 이 책에는 두 유형이 다 보인다. (4ㄱ)은 감탄법어미 ‘-ㄴ뎌’에 의한 감탄문이다. ‘-ㄴ뎌’는 동명사어미 ‘-ㄴ’과 의존명사 ‘’의 활용형이 화석화한 것이고, (4ㄴ), (4ㄷ)은 감동법 선어말어미 ‘-도-’에 의한 감탄형이다.

9) 연결어미

중세국어의 연결어미는 그 종류가 매우 많다. 이 책에도 여러 종류의 연결어미들이 눈에 띈다. 여기서는 『심경』에 보이는 연결어미들을 유형별로 제시하고 그 용례를 들어 본다. 주041)

연결어미의 패러다임은 안병희 · 이광호(1990)에서 가져 왔다.

(1) 나열의 어미 : -고/오

항목 나열식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어미 중의 하나이다. ‘나열’의 의미를 가진다. ‘-고셔, -곤, -곡, -곰’ 등은 보이지 않는다.

ㄱ. 眞性 니고 ~敎 니니〈14ㄴ〉

ㄴ. 한 邪見을 헐오져 샨 젼오 ~空 迷티 아니케 샨 젼오〈11ㄴ〉

(2) 병행의 어미 : -며

선어말어미 ‘-리-’에 후행한 ‘-리며’나 보조사 ‘셔’에 선행한 ‘-며셔’, ‘-’ 등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동작의 거듭됨을 나타낸다. 전항의 ‘-고’와 비슷한 빈도로 보인다.

ㄱ. 生티 아니며 滅티 아니며 더럽디 아니며 조티 아니며〈38ㄴ〉

ㄴ. 사 心藏이 읏드미며 외야〈17ㄴ〉

(3) 양태의 어미 : -아/어

주동사(主動詞)보다 선행한 동작의 양태를 나타낸다. ‘-악/억’이나 ‘-암/엄’은 이 책에 쓰이지 않았다.

ㄱ. 顯了로 기 니샤 智慧 아로 내야 煩惱障 滅케 시고〈19ㄴ〉

ㄴ. 뎌 들 거두어 敎 니와샤 알게 노라〈12ㄱ〉

(4) 원인의 어미 : -니, -ㄹ

뒷말에 대한 원인, 이유, 조건, 상황, 설명의 계속 등을 나타낸다. ‘-매, -/늘, -관’는 이 책에 쓰이지 않았다.

ㄱ. 舍利 이 새 일후미니〈25ㄴ〉 / 色과 과 다 펴시니〈48ㄱ〉

ㄴ. 二乘의 疑心이 이 둘헤 나디 아니 나가 사기시니라〈28ㄱ〉

(5) 조건의 어미 : -면, -ㄴ댄

조건이나 가정을 나타낸다. ‘-거/거든, -란’는 쓰이지 않았다.

ㄱ. 우흘 마초면 어루 알리라〈48ㄱ〉

ㄴ. 이 마초건댄 반기 닐오 色中엔 空이 업다 홀띠니〈33ㄴ〉

(6) 양보의 어미 : -나, -오/우, -ㄴ, -거니와, -니언

양보나 앞을 긍정하고 뒤를 부정하는 등의 의미를 가진다. ‘-ㄹ, -ㄹ션’은 쓰이지 않았다.

ㄱ. 緣 조차시나 말에 건난 宗 性이 두려이 차 다 나니라〈8ㄱ〉

ㄴ.  流 조초 더럽디 아니며〈42ㄱ〉

ㄷ. 見思惑을 그추〈40ㄴ〉

ㄹ. 五蘊이 다 空 비취여 보샤〈23ㄱ〉

ㅁ. 緣브터 닐어니와, 緣을브터 업거니와〈42ㄱ〉

ㅂ. 福 더을니언 구틔여 사기디 아니홀띠니라〈65ㄴ〉

ㅅ.  障이 다아도 더디 아니며 德이 차도 더으디 아니니라〈42ㄱ〉 둘히 잇디 아니야도〈44ㄱ〉

(7) 의도의 어미 : -려

의지나 의향을 나타낸다.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를 수반한다.

ㄱ. 큰 菩提心 發케 호려 샨 젼오〈12ㄱ〉

(8) 원망(願望)의 어미 : -고져, -과뎌

원망이나 희구를 나타낸다. 이 책에는 스스로 동작이나 행동을 바랄 경우에 사용되는 ‘-고져’와 제3자의 동작이나 행동을 바랄 경우에 쓰는 ‘-과뎌’만 보이고 ‘-아져, -과여, -긧고’는 쓰이지 않았다.

ㄱ. 邪見을 헐오져 샨 젼오〈11ㄴ〉

ㄴ. 眞宗애 맛과뎌 노라〈66ㄱ〉

(9) 도달의 어미 : -게/에

어떤 동작이나 상태에 도달함을 나타낸다. 사역의 뜻도 가진다. ‘-긔/’는 쓰이지 않았다.

ㄱ. 一切 한 重 障 긋게 샨 젼오〈12ㄱ〉

ㄴ. 正見 내에 샨 젼오〈11ㄴ〉

(10) 부정 대상의 어미 : -디

부정의 대상임을 나타낸다. 현대국어 ‘-지’의 소급형이다. ‘-, -ㄴ동, -드란’은 쓰이지 않았다.

ㄱ. 因緣 젹디 아니야〈11ㄴ〉

ㄴ. 義 믄득 나토디 몯〈19ㄴ〉

(11) 긍정 대상의 어미 : -디위

긍정의 대상임을 강조하고 그 반대의 사태를 부정한다. ‘-디’가 ‘-디위, -디외, -디웨’ 등으로 바뀌었으나, 이 책에는 ‘-디위’만 쓰였다.

ㄱ. 宗 蘊中에 人 업수 일후미 蘊空이디위 蘊이 제 空혼디 아니니〈27ㄴ〉

이 책에 목적의 어미 ‘-라’, 한도의 어미 ‘-록’, 더해감의 어미 ‘-디옷, -ㄹ록’, 연속의 어미 ‘-라, -락, -ㄴ다마다’ 등은 쓰이지 않았다.

이 논의에서 선어말어미와 보조적 연결어미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10) 어휘

『심경』에는 희귀어라고 할 만한 고유어는 별로 없다. 다만 아래의 두 어휘는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이기에 따로 밝혀 둔다.

(1) ㄱ. 그 사 어미 : ·노며 로미(~聰悟~호미)〈25ㄴ〉

 : 영·노-(지혜- / 슬기-)

ㄴ. 蠡 죡·바기오〈67ㄴ〉

 죡박(쪽박)

이 책에도 다른 불경언해서와 같이 한자어가 한자어라는 의식이 엷어져 정음 문자로 표기된 것들이 있다.

(2) 녜[常例]〈7ㄴ〉, 간[暫間]〈8ㄱ〉, [將次]〈11ㄴ〉, 부텨[佛體]〈12ㄱ〉, [衆生]〈67ㄱ〉

5. 맺음말

5.1. 지금까지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전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책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한문본 『반야심경』을 우리 문자로 번역한 언해본이다. 저본(底本)인 한문본의 성격은 물론, 현전하는 언해본의 특성과 형태서지, 언해체제, 그리고 표기법과 문법 등 『반야심경언해』의 서지사항과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밝혔다.

『반야심경언해』는 조선조 세조 10년(1464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언해본의 저본(底本)은 송나라의 중희(仲希)의 주해본이다. 이 책은, 당나라 현장(玄奘)의 한역(漢譯) 『반야바라밀다심경』에 역시 같은 당나라의 법장(法藏)이 약소(略疏)를 붙여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702 A.D.)를 짓고, 여기에다 송나라의 중희가 주해를 더하여 『반야심경약소현정기』(1044 A.D.)가 이루어 진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주해본인 『반야심경소현정기』에 세조가 정음으로 구결을 달고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황수신(黃守身), 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을 하여, 목판본 1권 1책으로 간행을 하였다.

언해가 이루어진 부분은 현장(玄奘)의 경 본문과 법장(法藏)의 약소이고, 중희의 주석(註釋)인 ‘현정기(顯正記)’ 부분은 제외하였다. 중희의 주석은 해당하는 경 본문의 언해문 다음이나, 약소 구결문과 약소 언해문 사이에 협주(夾註) 형식으로 실려 있다.

5.2. 언해본의 간행 및 번역에 관련된 제반 사항, 곧 저본(底本)을 중희의 ‘현정기’로 한 이유와 언해의 목적, 그리고 간행 경위 등 전반적인 내용은 책 권두에 실려 있는 진전문을 통해 살필 수 있었다. 또한 『반야심경언해』의 끝에 실려 있는 한계희(韓繼禧)의 발문(跋文)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법장의 ‘약소’가 홀로 종지(宗旨)를 터득했음과 중희의 ‘현정기’를 이용하여 장소(藏疏)를 나누는 등 분절(分節)의 편의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반야심경언해』는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이후 그 후쇄본의 쇄출(刷出) 및 복각 간행이 두어 차례 이루어졌다. 현재 원간 초쇄본 2본을 비롯하여 후쇄본 1종, 복각본 2종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들 중 연구 및 역주의 대상이 된 책은 1994년에 공개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된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소장본이다. 현전하는 이본들 각각에 대해 형태서지를 밝히고 그 성격을 정리했다. 아울러 이 책은 경 본문, 약소, 현정기 등이 함께 배치(排置)되어 있어서 다른 언해본들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띠는데 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는 중희의 현정기(顯定記)에 의해 장소(藏疏)를 나눈 후 글귀마다 해석하고, 소(疏)에 따라 분절(分節)해서 각각 본문(本文) 밑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언해 체제가 다른 언해본들보다 다소 복잡하게 보인다.

5.3.『반야심경언해』는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언해불전으로 훈민정음 창제 초기 정음 표기의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표기법과 문법을 분리해서 정리했다. 방점 표기와 한자음 표기 등을 보면 이 책이 다른 간경도감본들과 같은 체제와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ㅸ, ㆆ’ 등이 쓰이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쓰인 점으로 보면, 간경도감본 초기의 문헌보다는 상대적으로 후기의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팔종성 표기는 훈민정음 해례 종성해의 규정에 충실하여 다른 문헌에서 팔종성 외에 흔히 쓰이는 ‘ㅿ’이 전혀 쓰이지 않은 점 등,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 또 ‘ㆆ’이 고유어 표기에 쓰이지 않았으면서도 사이글자에 용례가 있는 점도 이 문헌에서 특별한 점이다.

문법 항목에서는 이 책이 가지는 문체 및 언해상의 특성에 기인한 종결어미의 편중성을 밝히고, 경어법 선어말어미가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원인 등을 구명하였다. 이 책에는 경어법 선어말어미 중 존경법의 ‘-으시/으샤-’ 이외에 겸양법 선어말어미 ‘-/-, -/-, -/-’이나 공손법 선어말어미 ‘--, --’의 쓰임이 없고,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도-’만 쓰이는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책의 구성이 설화자인 약소를 주소(註疏)한 이가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는 문장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 이 책의 전반적인 문법 사항은 같은 해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등과 대체로 일치하며 상원사 ‘어첩’ 및 ‘권선문’과도 부합한다. 불경언해서가 대부분 그러하듯 이 책도 경 본문과 약소에 대한 풀이의 성격을 띠므로 체언과 보조사의 쓰임은 단조롭고, 이에 비해 용언, 특히 연결어미의 쓰임은 활발한 편이다.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파생용언의 형성은 매우 생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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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학 권3·4 해제

이유기(동국대학교 교수)

1. 소학

1.1. 소학의 간행

『소학(小學)』은 남송(南宋) 광종(光宗) 14년(1187)에 간행된 책이다. 편찬자는 주자(朱子, 1130~1200)와 그의 제자인 유청지(劉淸之, 1134~1190)이다. 주001)

<정의>유청지(劉淸之)의 자(字)는 자징(子澄)이다. 송(宋)나라 영종(寧宗)~이종(理宗) 때의 학자이다. 예양현위(澧陽縣尉)와 통판(通判) 등을 역임하였다. 주자의 제자였는데, 나이는 주자보다 네 살 아래였다.

* 이 역주서에 수록된 주석의 번역은 성백효(1993)과 이충구(1986a), 이충구 외(2019a)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역주의 체재에 관한 조언을 해 준 동국대학교 김일환 교수와, 주석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 준 동국대학교 양승목 박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이 책에 관한 많은 논의들 중에서 이 책의 편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검토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흔히 주자의 지시에 따라 유청지가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지만, 대개는 자세한 사정을 살펴보지 않은 채 옛 기록을 답습한 것이었다. 주자(朱子)는 ‘소학서제(小學書題)’에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교육 기관인 소학<세주>(小學: 초급 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재가 온전하게 전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주002)

삼대(三代)의 교재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때문이다.
자신이 이를 상당히 수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주003)
주자가 『소학』의 서제(書題)를 쓴 때가 ‘淳熙 丁未 三月朔旦’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소학언해』(1권 소학언해 서제: 3ㄱ)에 ‘旦(=아침)’의 독음이 ‘됴’로 적혀 있다. 그것은 조선 태조(太祖)의 왕이 된 후의 이름이 ‘旦’이어서, ‘旦’을 뜻이 같은 ‘朝’의 독음 ‘됴’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백효(1993:16) 참조. 율곡의 『소학집주』에는 ‘朝’로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소학서제’에서 유청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소학서제’뿐 아니라 ‘소학제사(小學題辭)’도 주자가 쓴 것인데, 이 글에서도 유청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004)
‘제사(題辭)’에는 필자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소학집성(小學集成)』의 별책(別冊)에서는 ‘제사’를 붙이면서 이를 ‘주씨제사(朱氏題辭)’라 이름붙이고, 주자가 이 ‘제사’를 쓴 사실이 『주자문집(朱子文集)』에 적혀 있음을 밝혔다. 『소학』에서 ‘제사’의 필자를 밝히지 않은 것은 주자 자신이 『소학』의 실제적 편찬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율곡의 『소학집주』에 실린 숙종(肅宗)의 ‘어제소학서(御製小學序)’에서도 주자가 옛날에 들은 것을 모았다고 밝혔을 뿐이다. 단지 책의 권위를 위해서 주자를 내세운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두 사람의 역할은 주자가 유청지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 편지에는 유청지가 작업한 내용과, 그에 대한 주자의 평가와 요청 및 수정 사실이 소상하게 드러나 있다. 주005)

이 편지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이충구 외(2019a:8-14)에 소개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에 의거한다면, 두 사람의 역할 비중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유청지가 기획을 하고 실제 작업을 하였지만, 전체적인 틀과 세부적인 내용에 걸쳐서 주자가 아주 철저하게 지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 각자가 구상한 편집 체재와 세부적인 내용을 서로 조율한 사정도 편지 속에서 드러난다. 이충구 외(2019a:14)에서 주자가 주편자(主編者)이고, 유청지는 주자를 도와 ‘기획과 원고 정리’를 한 것으로 본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 책을 두 사람의 공동 저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소학』의 개요에 대해서는 일찍이 원대(元代)의 허형(許衡, 1279~1368)이 정리한 바가 있다. 주006)

이 글은 허형(許衡)의 『소학대의(小學大義)』를 율곡이 요약한 것인데, 성백효(1993: 30-31)과 이충구 외(2019a:48)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1) 그 강목(綱目)이 세 가지가 있으니,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이요, 다음 계고(稽古)는 삼대(三代)에 성현이 이미 행한 자취들을 기록하여, 전편의 입교·명륜·경신의 말을 실증하였으며, 그 외편(外篇)인 가언(嘉言)·선행(善行)은 한대(漢代) 이래 현인(賢人)들이 말한 바의 아름다운 말과 행한 바의 선(善)한 행실을 실었으니, 그 강목은 또한 입교·명륜·경신에 지나지 않는다. 내편의 말을 부연하여 외편과 합해 보면 외편은 『소학』의 지류(枝流)임을 알 것이요, 외편의 말을 요약하여 내편과 합해 보면 내편은 『소학』의 본원(本源)임을 알 것이니, 내와 외를 합하여 양면으로 살펴보면 『소학』의 규모와 절목이 갖추어 있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다.(其綱目有三 立敎明倫敬身 次稽古所以載三代聖賢已行之迹 以實前篇立敎明倫敬身之言 其外篇嘉言善行 載漢以來賢者所言之嘉言 所行之善行 其綱目 亦不過立敎明倫敬身也 衍內篇之言 以合外篇 則知外篇者小學之枝流 約外篇之言 以合內篇 則知內篇者小學之本源 合內外而兩觀之 則小學之規模節目 無所不備矣)

이보다 더 자세한 개요는 율곡 이이(李珥)의 『소학집주』에 실린 「소학집주 총목」에 나온다.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 등 각 편의 개요를 정리한 것인데, 성백효(1993:31-38)과 이충구 외(2019a: 49-57)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주007)

‘입교편(立敎篇)’의 내용은 태교(台敎), 성장 단계별 교육 내용과 교육 지침, 「주례(周禮)」의 교육 내용과 형벌, 『왕제(王制)』에 기록된 교육 내용, 『제자직(弟子職)』에 기록된 학생의 바람직한 태도, 『논어』와 「악기(樂記)」에 기록된 학생의 본분과 교육의 지표 등이다. 그렇다면 ‘입교편(立敎篇)’은 학동(學童)이 아니라 스승과 부모에게 읽히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소학의 주석서와 번역서

명대(明代)에 들어 『소학』에 대한 많은 주석서가 출현하게 된다. 하사신(何士信)의 『소학집성(小學集成)』(1423), 오눌(吳訥)의 『소학집해(小學集解)』(1433), 진선(陳選)의 『소학증주(小學增註)』(1473), 주008)

진선(陳選)의 『소학증주(小學增註)』는 『소학구두(小學句讀)』 또는 『소학집주(小學集註)』로도 불린다.
정유(程愈)의 『소학집설(小學集說)』(1486)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주009)
진원(陳媛, 2012:100-18)에 이 주석서들의 간행 연대가 정리되어 있는데, 『소학집성』의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학집성』의 연대는 김주원(2002:36)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학집성(小學集成)』과 『소학집설(小學集說)』 및 율곡(栗谷)의 『소학집주(小學集註)』가 많이 이용되었다. 세종 때 『소학집성(小學集成)』의 목판본(1427년, 세종 9)과 활자본(1429년, 세종 11)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조선 초기에는 『소학집성(小學集成)』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후에는 주석이 더 간명하고 대중적인 『소학집설(小學集說)』이 많이 이용되었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은 김일손(金馹孫)이 1491년(성종 22)에 편자인 정유(程愈)로부터 직접 책을 받아 와서 곧바로 간행 보급하였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이 많이 읽히게 된 데에는 김안국(金安國, 1478년, 성종 9~1543년, 중종 38)의 공이 매우 컸다. 그는 경상 감사 시절에 『소학집설(小學集說)』을 판각하기도 하고, 경상도 유생들에게 『소학』 공부를 권장하여 『소학』 학습의 분위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주010)

『소학』 학습의 전통은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수수(授受) 관계를 통해서 이어졌고, 이이(李珥)의 『소학집주(小學集註)』 간행을 통해서 정점에 이르렀다.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다. 『소학』 학습의 전통은 박연호(2017)에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이러한 소학 열풍의 흐름 위에서 『번역소학』(1518)과 『소학언해』(1587)가 간행되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따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학』 학습 열풍에서 큰 분수령이 된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의 『소학집주(小學集註)』이다. 이 책은 1579년에 이미 편집이 이루어졌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612년(광해군 4)에야 6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17세기 말 이후에 와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1694년(숙종 20)에 이 책에 숙종의 ‘어제소학서’를 붙인 『소학집주(小學集註)』가 간행되고, 세자 교육에까지 활용되었다. 주011)

‘어제소학서’를 실제로 집필한 이는 이덕성(李德成)이다. 앞서 나온 여러 책에서 이미 언급된 사실이지만, 이 서문에서는 옛 삼대(三代)에는 8살이 되면 이 책을 읽혔다고 하였다(古之人 生甫八歲 必受是書 卽三代敎人之法也). 그리고 이 해에 세자가 8살이 되었으므로, 책의 간행이 세자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자가 나중에 경종(景宗)이 된다.
『소학』에 대한 숙종의 관심은 아들인 영조(英祖)에게 계승되었다. 1744년(영조 20)에 『어제소학언해(御製小學諺解)』가 간행되었고, 1766년(영조 42)에는 영조의 주석서 『어제소학지남(御製小學指南)』 2권 1책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주012)
우리나라 『소학』 주석서의 성립과 유통 상황은 정호훈(2009)에서 자세하게 밝혀졌다.

그 밖에도 『소학』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책이 여럿 있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1475년, 성종 6)에는 『소학』의 내용을 발췌 번역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013)

『내훈』의 내용 중 『번역소학』이나 『소학언해』와 중복되는 부분은 이현희(1988: 208-209)에 〈표〉로 정리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에는 박문호(朴文鎬)가 쓴 6권 6책의 필사본 『여소학(女小學)』이 나왔는데, 이 책에도 『소학언해』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 말기 고종 때에는 박재형(朴在馨)이 편찬한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이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저술은 1884년에 끝났으나, 책이 간행된 것은 1912년이다. 『소학』의 내용을 발췌하고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첨가하여, 6권 2책의 목판본으로 만들었다.

한문본 『소학』에 대한 현대의 역주서로는 성백효(1993)과 이충구 외(2019a, b)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율곡 이이의 『소학집주』에 대한 역주서인데, 원문과 주석을 번역하고 필요에 따라 그 밖의 주석을 가하였다.

2. 번역소학

2.1. 번역소학의 편찬 시기와 편찬자

『번역소학』은 1518년(중종 13, 무인년)에 찬집청(撰集廳)에서 1,300질이 간행되었다. 주014)

“『소학』 1천 3백 부를 찍어 조관(朝官)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또 배울 만한 종친을 골라서 아울러 나누어 주었다.(印小學 一千三百件 遍賜朝官 而又擇可學宗親 幷賜之)”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 무인), 7월 2일. 홍문관(弘文館)에서 중종에게 이 책의 간행을 건의한 것이 중종 12년 6월 27일이었으니, 그로부터 1년만에 책을 완성한 것이다(남곤의 발문에 따르면 9개월이 걸렸다고 하는데, 번역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중략)… 성상께서는 심학(心學)에 침잠하고 인륜을 후하게 하기를 힘쓰시어, 이미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을 명찬(命撰)하시고 또 『소학(小學)』을 인행(印行)토록 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코자 하시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삼강행실』에 실려 있는 것은, 거의가 변고와 위급한 때를 당했을 때의 특수한 몇 사람의 격월(激越)한 행실이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 행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소학』은 곧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인데도 일반 서민과 글 모르는 부녀들은 독습(讀習)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용(日用)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여계(女誡)』·『여측(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인반(印頒)하게 하소서. …(중략)…’ 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홍문관에서 아뢴 뜻이 지당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라.’”(弘文館啓曰 …(중략)… 聖上沈潛心學 懋厚人倫 旣命撰 續三綱行實 又命印小學 欲廣頒中外 意甚盛也 然三綱行實所載 率皆遭變 故艱危之際 孤特激越之行 非日用動靜常行之道 固不可人人而責之 小學之書 廼切於日用 而閭巷庶民及婦人之目不知書者 難以讀習矣 乞於群書內 最切日用者 如小學如列女傳如女誡女則之類 譯以諺字 仍令印頒中外 …(중략)… 傳于政院曰 弘文館所啓之意至當 其令該曹 磨鍊施行)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정축), 7월 2일.
이 책 제 10권의 맨 끝, 즉 남곤(南袞)의 발문(跋文) 뒤에 번역에 참여한 17명 중 16명의 열함(列銜)이 보인다. 책에 적힌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주015)
김정국(金正國)은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이다. 종래에는 참여자가 16명으로 알려졌으나, 열함의 첫 줄은 비어 있다. 본래는 17명이었는데, 한 명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2) 번역소학 편찬자 열함

김전(金詮), 남곤(南袞), 최숙생(崔淑生), 김안로(金安老), 윤탁(尹倬), 조광조(趙光祖), 김정국(金正國), 김희수(金希壽), 공서린(孔瑞麟), 정순명(鄭順明), 김영(金瑛),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 채소권(蔡紹權), 유인숙(柳仁淑), 정응(鄭譍)

이 명단에 조광조(趙光祖)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광조는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한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며, 『소학』 교육 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기묘사림(己卯士林)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번역소학』의 간행에 조광조의 역할이 아주 컸으리라 짐작된다. 주016)

이 책을 소개한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이 책의 편찬자를 ‘김전(金詮), 남곤(南袞), 최숙생(崔淑生) 등’이라고 적고 있다. 당연한 처사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조광조의 참여 사실이 가려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2.2. 번역소학의 체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소학집성』과 같은 10권으로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제 10권이 마지막 권이다. 그런데 이 책이 10책으로 이루어졌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아마 1책으로 묶인 제 6·7권이 발견되기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주017)

『번역소학』의 저본인 『소학집성(小學集成)』은 10권 5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세종대에는 1427년(세종 9)과 1429년(세종 11)에 각각 목판본과 활자본으로 된 『소학집성(小學集成)』을 간행하였는데, 이 역시 10권 5책이다. 제 1권은 본문의 첫 부분인 ‘立敎’로 시작한다. ‘서제(書題), 목록(目錄), 강령(綱領), 제사(題辭) …’ 등은 모두 별책(別冊)에 담았다. 이 별책은 책수(冊數)에는 포함되지만 권수(卷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즉 책수는 별책을 포함하여 5책이고, 권수는 별책을 제외하고 10권이다. 한편 세종대 활자본 『소학집성』의 간행 연대가 1428년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는 『세종실록』의 세종 10년 9월 8일 기사를 오해한 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판부사(判府事) 허조(許稠)가 아뢰었다. ‘… 청컨대 신(臣)이 일찍이 올린 『집성소학(集成小學)』을 주자소(鑄字所)에 내려보내서 인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判府事許稠啓 …請下臣所曾進集成小學于鑄字所印之 從之)”가 그것인데, 이를 간행 기사로 해석한 듯하다. 정인지(鄭麟趾)의 발문(跋文)에는 선덕(宣德) 4년 8월로 적혀 있다. 선덕 4년은 1429년(세종 11)이다.

홍윤표(1984b)에서는 제 6·7권(1책)의 영인본에 붙인 해제에서 이 책이 10권 8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 후에 발견된 제 3·4권도 6·7권처럼 1책으로 묶여져 있으므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제 1·2·5권 중 제1·2권이 각 권 1책이라면 홍윤표(1984b)의 추정대로 10권 8책이 되는 셈이다. 주018)

홍윤표(1984a)는 제 8·9·10권의 해제이고 홍윤표(1984b)는 제 6·7권의 해제인데, 같은 날짜에 발행된 두 영인본에 붙어 있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는 이 책이 10권 10책이라고 하였고, 뒤의 글에서는 이 책이 10권 8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뒤의 글이 나중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학언해』는 제 1권이 15장(張)이고 제 2권이 78장(張)이다. 이 사실만으로 추정한다면, 『번역소학』에서 제 1·2권을 1책으로 묶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제 1·2권을 1책으로 묶으면 『소학언해』 기준으로는 제 1책이 93장이 되는 셈이어서 분량이 많아 보이지만, 주019)

두 책의 각 면당 분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번역소학』은 각 면 19자 9행이고 『소학언해』는 각 면 19자 10행이다.
『번역소학』 제 9권은 이보다 훨씬 많은 108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번역소학』이 저본으로 삼은 『소학집성(小學集成)』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1429년(세종 11)에 간행된 『소학집성』 제 1권의 권수(卷首)에는 ‘서제(書題), 강령(綱領), 제사(題辭), 도목(圖目), 도설(圖說), 목록(目錄)’이 실려 있는데, 이 중 ‘도설(圖說)’의 분량이 무려 34장(張)에 이른다. 주020)
이 ‘도(圖)’를 이충구 외(2019a, b)에서는 각각 본문의 해당 내용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제시하였다.
만약 『번역소학』 제 1권에 붙어 있을 권수(卷首)에 도목(圖目)과 도설(圖說)이 포함되어 있다면, 제 1권만으로 1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렇다면 홍윤표(1984b)의 추정대로 이 책은 10권 8책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주021)
『소학언해』는 6권 4책으로 만들어졌다. 제 1·2권, 제 3·4권, 제 5권, 제 6권을 각각 한 책으로 묶었다. 『소학언해』를 6권으로 만든 것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을 따른 것이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卷首)는 ‘편목(篇目),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서(小學集說序), 범례(凡例), 총론(總論), 제사(題辭), 서제(書題)’로 구성되어 있고, 『소학언해』의 권수(卷首)는 ‘범례, 서제, 제사’의 한문과 언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이 책의 제1·2·5권이 전해지지 않지만, 10권 모두의 체재는 알 수 있다. 한문본이나 『소학언해』를 참고하면, 제 1권의 앞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다 알 수 있다. 전해지지 않는 제 5권의 내용은 『소학언해』 제 4권과 일치한다. 아래에 10권 전체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되, 구체적인 내용이 실린 장차(張次)는 제 3·4권에서만 밝히기로 한다. 〈표〉를 제시하기 전에 제 3·4권의 낙장 부분의 내용과 분량을 먼저 밝히기로 한다. 제 3권의 앞 부분과 제 4권의 뒷 부분에 낙장이 있지만, 그 내용과 분량은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의 제 3권은 앞의 두 장(1ㄱ~2ㄴ)이 떨어져 나가고, 3ㄱ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첫 면은 제 2편의 제 2장인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첫 부분으로 시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체재는 『소학집성』을 따르고 있는데, 『소학집성』 제 3권이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로 시작되고, 『번역소학』 제 3권의 3ㄴ은 『소학집성』 제 3권의 2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학집성』(3:1ㄱ)의 권수제(卷首題) 바로 뒤에는 ‘明倫第二之下’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바로 “禮記曰 將適公所 …”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제 3권의 첫 면은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첫 부분으로 시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소학언해』와의 대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번역소학』(3:3ㄴ)의 제 1행은 『소학언해』(2:38ㄱ)의 마지막 행(行)과 내용이 같은데, 『소학언해』 제 2권에서는 36ㄱ의 제 9행에서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가 시작된다.

둘째, 제 4권의 뒤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지만, 제 4권은 제 3편 ‘경신(敬身)’의 ‘음식지절(飮食之節)’의 마지막에서 끝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 4권의 남아 있는 부분 중 마지막 장차(張次)가 28ㄴ인데, 이 부분은 『소학집성』 제 4권의 30ㄱ에 해당하고, 『소학집성』 제 4권은 32ㄱ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소학집성』은 제 4권에서 ‘음식지절(飮食之節)’이 완전히 끝나고, 제 5권에서는 새로운 내용인 ‘계고(稽古)’로 시작된다.

그리고 제 4권의 낙장 부분은 세 장임이 거의 분명하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번역소학』 제 4권과 『소학언해』 제 3권은 모두 ‘경신(敬身)’으로 시작된다. 둘째, 『번역소학』 제 4권의 남은 부분 중 마지막 면(28ㄴ)의 내용은 『소학언해』(3:25ㄴ)의 제 8행에 해당한다. 넷째, 『소학언해』 제 3권의 남은 부분이 총 47행(3:25ㄴ 제 9행~28ㄱ 제 5행)이다. 이것은 권미제(卷尾題)와, 권미제 앞의 비어 있는 3행을 포함한 것이다. 다섯째, 『번역소학』은 각 면 19자 9행이고 『소학언해』는 각 면 19자 10행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여 추산하면, 『번역소학』 제 4권은 31ㄴ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표〉는 『번역소학』의 분권(分卷) 체재를 정리하고, 『소학언해』의 분권 체재와 비교하여 보인 것이다. 주022)

1587년(선조 20)에 간행된 도산서원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소학언해』 제 1권의 내용은 ‘입교(立敎)’인데, ‘입교’ 앞에 ‘범례(凡例), 서제(書題), 제사(題辭)’로 구성된 권수(卷首)가 붙어 있다. 이 권수와 ‘입교(立敎)’를 합한 것이 총 16장(張)이다.

〈표〉 『번역소학』과 『소학언해』의 분권 체재

내외편권차내용장수(張數)소학언해
내편1권〈추정〉
제 1편 입교(立敎) 주023)
제 1권의 ‘입교(立敎)’ 앞에는 권수(卷首)가 붙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권수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소학집성』과 『소학언해』의 권수이다. 1429년(세종 11)에 간행된 『소학집성(小學集成)』의 권수에는 ‘서제(書題), 강령(綱領), 제사(題辭), 도목(圖目), 도설(圖說), 목록(目錄)’이 들어 있고, 『소학언해』의 권수에는 ‘범례(凡例), 서제(書題), 제사(題辭)’가 들어 있다. 『소학집성』에 실린 도목(圖目)의 분량이 1장(張)이고 도설(圖說)의 분량이 34장(張)인데, 이 두 부분은 『소학언해』에는 없다. 『소학언해』에 이 부분이 없는 것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小學集說)』의 체재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학언해』의 권수가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에는 ‘편목(篇目), 정유의 집설서(集說序), 범례(凡例), 총론(總論), 제사(題辭), 서제(書題)’가 실려 있다.
〈참고〉
『소학언해』 제 1권은 16장 분량
1권(16장)
2권〈추정〉
제 2편 명륜(明倫)
(1) 명부자지친(明父子之親)
〈참고〉
『소학언해』에서는 제 2권 중 35장 분량
2권(78장)
3권(2)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1ㄱ~11ㄱ
(3) 명부부지별(明夫婦之別) 11ㄱ~23ㄴ
(4) 명장유지서(明長幼之序) 23ㄴ~33ㄴ
(5) 명붕우지교(明朋友之交) 33ㄴ~39ㄱ
(6) 통론(通論) 39ㄱ~47ㄴ
총 47장(추정)
4권제 3편 경신(敬身)
(1) 명심술지요(明心術之要) 1ㄱ~9ㄱ
(2) 명위의지칙(明威儀之則) 9ㄱ~21ㄴ
(3) 명의복지제(明衣服之制) 21ㄴ~25ㄴ
(4) 명음식지절(明飮食之節) 25ㄴ~31ㄴ
총 31장(추정)3권(28장)
5권〈추정〉
제 4편 계고(稽古)
(1) 입교(立敎)
(2) 명륜(明倫)
(3) 경신(敬身)
(4) 통론(通論)
〈참고〉
『소학언해』 제 4권 55장
4권(55장)
외편6권제 5편 가언(嘉言)
(1) 광입교(廣立敎) 2ㄱ~37ㄴ
총 37장 주024)
‘가언(嘉言)’이 시작되기 전에 한 장 반에 걸쳐서 외편(外篇)을 만든 동기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5권(121장)
7권(2) 광명륜(廣明倫) 1ㄱ~50ㄴ총 50장
8권(3) 광경신(廣敬身) 1ㄱ~43ㄴ총 43장
9권제 6편 선행(善行)
(1) 실입교(實立敎) 1ㄱ~19ㄴ
(2) 실명륜(實明倫) 19ㄴ~108ㄴ
총 108장6권(123장) 주025)
제 6권 123ㄴ에서 ‘경신(敬身)’이 끝나고, 이어서 만력(萬曆) 15년 4월에 쓴 이산해(李山海)의 발문(跋文)과, 간행에 관여한 32명의 열함(列銜)이 나온다. 만력 15년은 1587년(선조 20)이다. 32명의 열함(列銜) 중 한 사람이 삭제되었는데, 삭제된 이는 정여립(鄭汝立)이다. 이현희(1993:237)과 민병준(1990:37) 참조.
10권(3) 실경신(實敬身) 1ㄱ~35ㄴ총 35장 주026)
제 10권은 35ㄴ에서 끝나고, 이어서 두 장 반(1ㄱ~3ㄱ)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고, 그 뒤에 한 장에 걸쳐서 번역에 참여한 16명의 열함(列銜)이 나온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본래는 17명이었는데 한 명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두 책의 분권 방식을 비교해 보면, 『번역소학』은 편목(篇目)과 분량을 다 고려하였고, 『소학언해』는 편목(篇目)에 따라 분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책이 각각 체재 면의 저본으로 삼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소학집설(小學集說)』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분권 방식 면에서 『번역소학』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같고, 『소학언해』는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다.

2.3. 『번역소학』의 현전본과 영인 상황

이 책은 1518년(중종 13)에 찬집청(撰集廳)에서 간행하였다. 원간본은 을해자 목판본으로 추정되는데, 이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16세기 이후에 복각(覆刻)된 목판본만이 전하고 있다. 주027)

원간본이 을해자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의 복각본에 근거한 것이다.
이 중간본의 간행 시기는 알 수 없다. 교정청(校正廳)에서 간행한 『소학언해』(1587년)보다 앞선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이 책은 저본인 『소학집성』의 체재와 같은 10권으로 만들어졌는데, 주028)

『번역소학』이 10권으로 이루어진 것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같지만, 다른 면에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소학』은 인용문의 출처에 따라 장(章)이 바뀌는데,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의 표시 방법 면에서 이 책은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다. 즉 새로운 장(章)이 시작될 때 『소학집성(小學集成)』에서는 ‘一, 二, 三 …’과 같은 일련 번호를 붙였고, 『소학집설(小學集說)』에서는 ○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이 ○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 새로운 편(篇)이 시작되는 위치에서는 ○ 표시가 없다.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첫 장(章)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소학언해』도 이 책과 같은 방식을 취하였다.
그 중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제 3·4권(국립한글박물관), 제 6·7권(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제 8권(고려대학교 도서관) 제 9권(서울대학교 가람문고), 제 10권(국립중앙도서관)이다. 총 10권 중 제 1·2·5권을 제외한 총 7권이 전해지는 셈이다. 영인은 제 3권을 제외하고 다 이루어졌다. 홍문각에서 제 8·9·10권(1982년)과 제 6·7권(1984)을 영인하였고, 『서지학보』(24집)에서 제 4권(2000년)을 영인하였다. 역주서로는 다섯 권에 대한 역주를 한 권으로 묶은 『역주 번역소학 권 6·7·8·9·10』(정호완 2011)이 있다.

2.4. 국어학적 특징

이 책의 간행 배경, 서지 정보, 국어학적 특징 등은 이미 여러 국어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 책의 국어학적 의의와 특징은 이기문(1960), 이숭녕(1973), 안병희(1979), 홍윤표(1984a), 홍윤표(1984b), 이현희(1988), 정재영(2000)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혀졌고, 서지 사항은 제 8·9·10권의 해제인 홍윤표(1984a)와 제 6·7권의 해제인 홍윤표(1984b), 제3·4권의 해제인 정재영(2000)에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밝혀진 내용의 반복은 가능한 한 지양하고, 제 3·4권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029)

이 책에서는 ‘ㅸ, ㆆ’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ㅿ’은 쓰이기는 하나 ‘ㅇ’으로 바뀐 예도 있다. ‘ㆁ’은 원칙적으로 종성에서만 사용하였데, 예외적으로 초성이라 하더라도 높임의 선어말 어미 ‘-ᅌᅵ-’에서는 사용하였다. 그러나 종성에서도 ‘ㆁ’이 ‘ㅇ’으로 변한 것이 많다. 방점은 구결 달린 원문과 언해문에 다 찍혔다.

이 책의 번역 방식이 의역(意譯)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지적된 사실이다. 이러한 지적은 『소학언해』의 ‘범례(凡例)’에서도 나타난다.

(3) 무인년(戊寅年) 책은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고자 하여 글자의 뜻 밖의 주석에 있는 말을 아울러 집어넣어서 새겼으므로 번거롭고 불필요한 곳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戊寅本 欲人易曉 字義之外 幷入註語爲解 故未免有繁冗處 今卽刪去枝辭 一依大文 逐字作解 有解不通處則分註解之)

무인년(戊寅年) 책, 즉 『번역소학』이 주석의 내용을 언해에 반영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번역소학』에서는 협주를 전혀 쓰지 않는 대신 주석의 내용을 번역에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문과 주석에 없는 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소학언해』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서, 필요에 따라 주석의 내용을 협주에 넣었다. 단 협주에 어미(魚尾)는 표시하지 않았는데, 이 글에서는 대비를 위해 『소학언해』의 내용을 제시할 경우에 편의상 협주를 어미로 묶어서 표시하기로 한다.

(4)가. 계야 조 신 고며(齊戒以告鬼神고)〈3:11ㄴ〉

나. ᄌᆡ계ᄒᆞ여 ᄡᅥ 鬼神<원주>【조샹을 닐옴이라】 ᄭᅴ 告ᄒᆞ며〈소언 2:45ㄴ〉

(5)가. 님금이 라 시며 니브라 신 命이 잇디 아니커시든 간도 즉재 며 닙디 마롤 디니라(君이 未有命이어시든 弗敢卽乘服也ㅣ니라)〈3:5ㄴ〉

나. 님금이 命이 잇디 아니커시든 敢히 즉제 ᄐᆞ며 닙디 몯ᄒᆞᄂᆞ니라〈소언 2:40ㄱ-ㄴ〉 주030)

이 책에서는 원문의 ‘敢’을 ‘잠ᄭᅡᆫ도’로 번역하고 있다. 『소학언해』에서는 ‘敢히’로 바뀌었다.

(6)가. 제 가질 모긔셔 해 가죠ᄆᆞᆯ 구티 마롤 디니라(分毋求多ㅣ니라)〈4:4ㄱ〉

나. ᄂᆞᆫ홈애 함을 求티 말올 디니라〈소언 3:3ㄴ〉

이 책에서는 ‘ㅿ’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으나, ‘ㅇ’으로 변화한 것도 보인다. ‘어버ᅀᅵ’(3:16ㄱ, 3:24ㄱ, 3:41ㄴ, 3:42ㄱ, 4:1ㄴ, 4:23ㄴ)도 있고, ‘어버이’(3:22ㄴ, 3:39ㄴ)도 있다. 다른 권(卷)에서도 ‘어버ᅀᅵ(9:8ㄱ), ᄉᆞᅀᅵ(6:24ㄴ)’와 ‘어버이(9:8ㄴ), ᄉᆞ이(8:11ㄴ, 10:9ㄴ)’가 다 보인다.

15세기의 일반적인 언해서에서는 언해문에만 한자음을 달고, 원문에는 한자음이 없이 한글 구결만 달았는데, 이 책에는 언해문뿐 아니라 원문에도 한자음이 달려 있다. 원문에 한자음을 단 것은 아동이나 부녀자의 학습을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031)

이 책을 부녀자들에게도 읽히고자 하는 의도는 남곤(南袞)의 발문(跋文) 중 “우리말로 번역하여 널리 인쇄하여 배포하면 비록 어린이와 부녀자라 하더라도 책을 펴자마자 금방 깨달을 것이니, 백성을 순치(順治)하는 방법으로는 마땅히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如以方言 飜而譯之 廣印流布 則雖兒童婦女 開卷便曉 籲民之方 宜無急於此者)”란 말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소학』은 결코 아동이나 부녀자를 위한 책만은 아니었다. 남곤의 발문에는 중종(中宗)이 이전에 경연(經筵)에서 한 다음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에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일찍이 이 책을 읽었지만 그때에는 오직 입으로 읽기를 일삼았을 뿐이어서 그 뜻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때를 놓쳐 학문을 그르친 것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에 경연에서 옛날에 읽은 것을 다시 연마하려 하노니, 아마 보탬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를 위하여 강론해 달라.(予幼嘗讀此 然惟口讀是事耳 未嘗究極其旨意 今而思之 頗有後時失學之悔 玆欲於經筵 重理舊讀 庶幾有所補益 爾其爲予講之)”

이 책의 한자음 표기 중 몇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毋’이다. 이 글자는 본문에서만 보이는데, 모두 ‘모’로 나타난다(3:27ㄴ, 3:28ㄱ, 4:2ㄴ, 4:3ㄴ, 4:4ㄱ, 4:10ㄱ, 4:11ㄴ …). 그런데 『소학언해』에서는 예외 없이 ‘무’로 바뀌었다(2:59ㄴ, 2:60ㄱ, 3:2ㄴ, 3:3ㄴ, 3:3ㄴ, 3:9ㄴ, 3:11ㄱ …). 예가 아주 풍부하다.

‘男람子ᄌᆞ’(3:15ㄱ)는 원문의 예인데, 언해문에서는 ‘男남子ᄌᆞ’로 나타난다. 『소학언해』(2:48ㄱ-ㄴ)의 원문과 언해문에는 모두 ‘男남子ᄌᆞ’로 적혀 있다. 다른 문헌에 ‘男’의 독음이 ‘람’으로 적힌 예가 없으므로 오각일 가능성이 있으나, ‘ㄴ’이 ‘ㄹ’로 적히는 근대국어의 일반적인 현상이 여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언해문에 ‘親친迎연’이 나오는데(3:15ㄱ), 원문에는 ‘親친迎여ᇰ’으로 적혀 있고, 『소학언해』(2:48ㄴ)에서는 ‘친히 마자’로 나타난다. 이 책(3:12ㄴ)의 언해문에도 ‘친연’이 나오지만, 이는 원문에 없는 말을 보충한 것이다. 원문에서는 이 대목 바로 뒤에 ‘迎’이 나오지만, 그 경우에는 독음이 ‘여ᇰ’으로 적혀 있고, 언해문에서는 ‘마자’로 번역되어 있다. 다른 문헌에 ‘迎’의 독음이 ‘연’으로 표기된 예가 또 있기는 하다. ¶諸졔聖셔ᇰ을 迎연逢보ᇰ와 오시게 코져 린댄〈진언권공 24ㄱ〉. 그러나 모두 오각으로 보인다.

‘告’의 독음은 ‘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래 예문의 ‘가’의 화살표 왼쪽에 적힌 것은 원문의 것이고 오른쪽에 적힌 것은 언해문의 것이다. ‘나’는 해당 예문을 제시한 것이다.

(7)가. 告:고 → :고〈3:11ㄴ〉

나. 혼인ᄒᆞᆯ 날와 ᄃᆞᆯ로 님금ᄭᅴ 고ᄒᆞ며

다. 告:고 → 告:고〈소언 2:45ㄱ-ㄴ〉

(8)가. 告:고 → :고〈3:14ㄱ-ㄴ〉

나. 혼인ᄒᆞᄂᆞᆫ 례ᄂᆞᆫ 萬世의 비르소미니 … 말ᄉᆞᄆᆞᆯ … 고호ᄃᆡ 주032)

‘고호ᄃᆡ’의 객체는 사돈(査頓)이다.

다. 告:고 → 告:고〈소언 2:47ㄴ-48ㄱ〉

(9)가. 告:고 → 엳ᄌᆞ올〈3:29ㄴ〉

나. 君子ᄅᆞᆯ 뫼셔 안자셔 말ᄉᆞᆷ 엳ᄌᆞ올 사ᄅᆞ미

다. 告:고 → 告고〈소언 2:61ㄴ〉 주033)

이 예의 언해문에서 평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이다.

(10)가. 告·곡 → 告:고〈3:34ㄴ〉

나. 子貢이 버들 묻ᄌᆞ온대 孔子ㅣ ᄀᆞᄅᆞ샤ᄃᆡ 져ᇰ셔ᇰ으로 告ᄒᆞ고 어딘 일로 니ᄅᆞ다가

다. 告·곡 → :고〈소언 2:66ㄱ〉

성조 표시가 다른 것이 있지만, 그 혼란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이한 것은 (10다)의 ‘·곡’이다. 『훈몽자회』(훈몽자회 比叡 하 12ㄴ)와 『유합』(하 39ㄴ)에 ‘고할 고’로 나타나고, 『자전석요』(상 15ㄴ)에 ‘청할 곡, 뵈일 곡’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의 ‘고’와 ‘곡’이 의미에 따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10)의 경우는 ‘告’의 객체가 주체와 신분이 대등한 벗(友)이어서 나머지 경우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出·츌必·필告·곡ᄒᆞ며 反:반必·필面:면ᄒᆞ며’(소언 2:8ㄴ)에서는 ‘告’의 객체가 주체보다 상위자인 부모이다. ‘告’의 독음에는 ‘알리다’를 뜻할 때의 ‘고(거성, 號韻), 곡(입성, 沃韻)’과 ‘심문하다, 국문하다’를 뜻할 때의 ‘귝/국(입성, 屋韻)’ 세 가지가 있다. ‘고’는 『광운(廣韻)』의 ‘古到切’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곡’은 『광운』의 ‘古沃切’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出必告ᄒᆞ며 反必面ᄒᆞ며’(소언 2:8ㄴ)의 ‘告’는 『소학집성』(2:10ㄱ)에 ‘工毒反’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오늘날 경전의 ‘告’에 대해 『석문(釋文)』과 주자(朱子)의 주석에서는 모두 ‘谷’으로 읽고 있다.(今經傳告字 釋文朱註皆讀谷)”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고’로 읽힐 때와 ‘곡’으로 읽힐 때의 의미 차이는 없는 듯하다. 『송자대전(宋子大全)』(권 103, 書, 答尹爾和, 丁巳 10월 26일)에는 이에 대한 윤이화(尹爾和)의 질문과 송시열(宋時烈)의 답이 기록되어 있다. “‘告’ 자의 음은 ‘古’라고도 하고 ‘谷’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구별합니까?(告字音或古或谷 何以爲別)”라는 윤이화의 질문에 송시열은 “‘告’의 음이 ‘工毒反’이라고 하는 것이 『가례(家禮)』에 보이지만, 그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告音之工毒反者 見於家禮 然其義 則未見其有異也)”라고 답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의미에 따라 ‘고’와 ‘곡’을 구별할 근거가 없는 듯하다.

이제 이 책의 어휘 중 특이한 몇 가지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모로매’는 『소학언해』에서 예외 없이 ‘반ᄃᆞ시’로 바뀌었다. 이 현상은 ‘모로매’의 소멸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11) 모로매(3:6ㄴ, 3:7ㄴ, 3:25ㄴ, 4:24ㄱ)

→ 반ᄃᆞ시(소언 2:41ㄱ, 2:42ㄱ, 2:58ㄱ, 3:21ㄴ)

이 책과 『소학언해』에서는 ‘삼가ᄒᆞ다’가 많이 보인다.

(12)가. 삼가호매(3:16ㄴ) → 삼가매(소언 2:50ㄱ)

나. 삼가호ᄃᆡ(3:46ㄴ) → 삼가기(소언 2:76ㄴ)

다. 삼가ᄒᆞ야(4:8ㄴ) → 삼가ᄒᆞ고(소언 3:7ㄴ)

라. 삼가ᄒᆞ면(4:22ㄴ) → 삼가ᄒᆞ면(소언 3:20ㄱ)

cf. 음식을 모로매 삼가고 존졀며〈번역소학 8:16ㄱ〉

중세 국어 시기와 근대 국어 시기 여러 문헌에서 ‘삼가다’가 더 일반적이었지만, ‘삼가ᄒᆞ다’의 예도 적지 않다.

(13)가. 모로매 모다 삼가라〈석보상절 23:13ㄱ〉

나. 압흘 딩계고 뒤흘 삼가니 황왕의 뎐측이 기리 드리웟도다〈천의소감언해 진쳔의쇼감전 7ㄱ〉

(14)가. 너의 籌畵 參預호 삼가라〈두시언해 초간본 23:30ㄱ〉

나. 禮로  삼가더니〈속삼강행실도 효 34ㄱ〉

‘삼가ᄒᆞ다’는 동사 어간 ‘삼가-’에 연결 어미 ‘-아’가 붙은 ‘삼가’와 ‘ᄒᆞ다’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아 ᄒᆞ다’는 형용사를 동사화하는 장치인데, 심리 동사인 ‘삼가다’가 [동작성]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삼가하다’를 비표준어로 간주하고 있는데, ‘삼가하다’가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이와 관련된 규정을 재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의 ‘-ㄹ 저긔, -ㄹ 제’는 예외 없이 『소학언해』에서 연결 어미 ‘-ㄹᄉᆡ’로 바뀌었다.

(15)가. 드르실 저긔(3:4ㄱ) → 들으실ᄉᆡ(소언 2:38ㄴ)

나. 들 저긔(4:12ㄱ) → 들ᄉᆡ(소언 3:10ㄴ)

다. 의론ᄒᆞᆯ 제(3:25ㄴ) → 의논ᄒᆞᆯᄉᆡ(소언 2:58ㄱ)

『소학언해』에서 ‘-ㄹᄉᆡ, -ㄹᄊᆡ’가 인과 관계를 나타내지 않고 시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현희(1988:212-214)에서 이 변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

(16) 리 이브로 후려먹디 말며(毋嚃羹며)〈4:26ㄴ〉

‘ᄀᆡᇰᄭᅥ리’는 ‘국의 건더기’인데, 『소학언해』(3:23ㄴ)에서는 ‘국거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거리’의 의미가 특이하다. 현대 국어의 ‘국거리’는 ‘국을 끓이는 데 넣는 고기, 생선, 채소 따위의 재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즉 오늘날의 ‘거리’는 ‘조리하기 전의 재료’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ᄀᆡᇰᄭᅥ리’의 ‘거리’는 ‘조리가 다 된 국에서 국물을 제외한 건더기 부분’을 뜻하고 있다.

(17) 내 마리 올여도 구틔여 올 디레 두디 마롤 디니라(直而勿有ㅣ니라)〈4:4ㄱ〉

이 번역은 원문에 없는 말을 아주 많이 보충한 것이다. 번역문을 현대 국어로 옮기면, “내 말이 옳아도 굳이 옳다고 미리 단정하여 말하지 말지니라.” 정도가 될 것이다. 『소학집해』에는 주자의 주석 “직이물유(直而勿有)는 나의 소견을 개진(開陳)하여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해야지, 장악하고 선입견을 두어 오로지 강변(强辯)을 힘써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直而勿有 謂陳我所見 聽彼決擇 不可據而有之 專務强辨)”란 내용이 실려 있다. 문제는 ‘디레’이다. 여기의 ‘디레’는 ‘선입견’ 정도에 해당하는 명사이다. 종래의 고어사전에서는 표제어 ‘디레’를 들기는 하였지만, 뜻풀이를 하지 않은 예도 있고, 아예 표제어로 싣지 않은 경우도 있다.

타동사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목적어 없이 쓰이면서 부사어와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소학언해』에서도 많은 예가 보인다.

(18)가. 님금 뫼셔〈3:6ㄱ〉 → 님금ᄭᅴ 뫼와셔〈소언 2:40ㄴ〉

나. 님금 뫼셔〈3:7ㄱ〉 → 님금ᄭᅴ 뫼셔〈소언 2:41ㄴ〉

다. 先生ᄭᅴ 뫼셔〈3:28ㄴ〉 → 先生ᄭᅴ 뫼셔〈소언 2:60ㄴ〉

라. 얼우신ᄭᅴ 뫼셔〈3:30ㄴ〉 → 얼운의게 뫼셔〈소언 2:62ㄱ〉

마. 얼우신ᄭᅴ 뫼셔〈3:31ㄱ〉 → 얼운의게 뫼셔〈소언 2:62ㄴ〉

(19)가. 君子ᄅᆞᆯ 뫼셔〈3:29ㄴ, 30ㄱ, 31ㄴ〉 → 君子ᄭᅴ 뫼셔〈소언 2:61ㄴ, 61ㄴ, 63ㄱ〉

나. 君子ᄅᆞᆯ 뫼ᅀᆞ와〈3:29ㄱ〉 → 君子ᄭᅴ 뫼셔〈소언 2:61ㄱ〉

(20) 君 뫼셔 食실 제 君이 祭시거든〈논어언해 2:60〉

(21) 님금 뫼셔 밥 머그실 저긔〈내훈 1:9ㄱ〉

(18가-마)는 이 책과 『소학언해』가 같은 양상을 보인 예들이고, (19가, 나)는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이 책에서는 목적어와 호응하고 『소학언해』에서는 부사어와 호응하는 예이다. (20)은 『논어언해』의 예인데, 원문은 (18가)의 원문과 같다. 제시된 예 중 『내훈』의 예인 (21)이 시기적으로는 가장 앞선다. 원문은 역시 (18가)의 원문과 같다.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타동사로 쓰인 예들을 더 보도록 하자.

(22)가. 부텻 舍利 뫼셔다가 供養리라 야〈석보상절 23:46ㄱ〉

나. 리 사 마자 馬廏에 드러 오나 聖宗 뫼셔 九泉에 가려 시니〈용비어천가 109〉

다. 群臣이 武皇을 뫼도다〈두시언해 초간본 14:10ㄴ〉

이로 보아 이 동사가 타동사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목적어 없이 부사격 조사 ‘ᄭᅴ’로 이루어진 부사어와 호응하는 예가 결코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목적어 없이 부사어와 호응하는 ‘뫼다, 뫼시다’ 앞에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일 가능성이고, 둘째는 ‘뫼다, 뫼시다’가 타동사 외에 자동사로 쓰인 것일 가능성이다. 결정적인 근거가 보이지 않아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하기 어렵다.

(23) 昭陽殿 안햇 第一엣 사미 輦에 同야 님그믈 졷와 님 겨틔 뫼더니라(=昭陽殿裏第一人 同輦隨君侍君側)〈두시언해 초간본 11:16ㄱ〉

위 예문에서는 ‘隨君’은 ‘님그믈 졷ᄌᆞ와’로 언해하고 ‘侍君’은 ‘님그ᇝ 겨틔 뫼ᅀᆞᆸ더니라’로 언해하였다. ‘님그믈 겨틔’를 택하지 않고 ‘님그ᇝ 겨틔’를 택한 원인을 알기 어렵다. 반복을 피한 선택일 수도 있고, ‘側’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뫼ᅀᆞᆸ다’가 부사어 ‘겨틔’와 호응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겨틔’와 ‘의게, ᄭᅴ’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처소와 관련된 명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의게’의 기원적 구조는 ‘의(안 높임의 관형격 조사)+긍(처소 지시 의존명사)+에(부사격 조사)’이고, ‘ᄭᅴ’의 기원적 구조는 ‘ㅅ(높임의 관형격 조사)+그ᇰ(처소 지시 의존명사)+의(특수 처소 부사격 조사)’이다. 주034)

내부에 처소 명사를 지니고 있는 ‘의게, ᄭᅴ’는 애초에는 [도달점]을 뜻하는 부사격 조사로 쓰이다가, 분포가 확대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 책의 ‘비록 됫 다ᄒᆡ 가도(雖之夷狄이라두)’(4:5ㄱ)가 『소학언해』(3:4ㄴ)에서 ‘비록 되게 가도’로 바뀐 것은 ‘게’의 형태적 기원을 잘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만약 목적어 없이 부사어와 호응하는 ‘뫼다, 뫼시다’가 자동사라면, ‘존자(尊者)의 곁에서 존자와 함께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주035)

한편 ‘뫼ᅀᆞᆸ다’에서 어간 ‘뫼-’가 도출되는데, ‘뫼시-’에서는 어간 ‘뫼-’를 도출하기가 어렵다. ‘뫼시-’에 ‘-ᅀᆞᇦ-’이 쓰인 예도 있다. ¶大神히 뫼시니〈월인천강지곡 기 23〉. 그렇다면 두 어간 ‘뫼-’와 ‘뫼시-’가 공존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뫼시-’의 ‘시’를 ‘이시-’의 이형태 ‘시-’로 추정할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두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뫼-’ 뒤에 연결 어미 ‘-어’가 외현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일반적으로 ‘동사 어간+어+이시-’는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데, ‘뫼시-’는 그렇지 않은 까닭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두드리디’(4:25ㄴ)는 ‘(밥을) 뭉치지’를 뜻한다. 이 낱말은 종래의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다른 문헌의 용례도 없다. ‘다디르다/다디ᄅᆞ다(=들이받다, 내지르다)’의 ‘디르다/디ᄅᆞ다’가 [打]를 뜻하는 동사이므로 ‘다’는 이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 동사의 어간이거나 활용형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물체를 둔탁한 것으로 치는 행위’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현대 국어 ‘다듬다’의 ‘다’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학언해』(3:23ㄱ)에서는 ‘무ᇰ킈디’로 바뀌었다.

‘벱디’(4:5ㄱ)는 ‘베풀지’를 뜻한다. 『소학언해』(3:4ㄴ)에서는 ‘베프디’로 바뀌었다. 어간은 ‘벺-’으로 보이는데, 예가 아주 드물다. ‘烏鳥含情을 벱고야 말녓노라’(노계선생문집: 사제곡)에 보인다. 『번역소학』의 ‘벱’의 우하(右下) 위치에 권점(圈點)이 보이는데, 소장자가 그려 넣은 듯하다.

‘쟉쟉’(4:27ㄴ)은 ‘조금씩’을 뜻하는데, 어간 ‘쟉-[少]’이 중첩된 비통사적 합성어가 부사로 영파생된 것이다. 합성어이면서 파생어인 셈이다. 다른 문헌에서 ‘젹젹’이 보인다. ¶三年 무근  各 닷 홉과 섯거 라 生 뵈로 汁을  時節 븓들이디 마오 젹젹 주어 머기면 오라면 반기 말리라〈구급방언해 상 3ㄱ〉. 이 낱말은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게 적당히’를 뜻하는 현대어 ‘작작’으로 발달하였다.

보조사 ‘이라도’가 ‘이라두’로 변한 예가 있는데, 방언의 반영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과 언해문 및 『소학언해』의 순서로 제시한다.

(24)가. 雖婢妾이라두 → 비록  고매라도〈3:17ㄴ〉

→비록 죠ᇰ과 妾이라도〈소언 2:51ㄱ〉

나. 雖之夷狄이라두 → 비록 됫다ᄒᆡ 가도〈4:5ㄱ〉

→ 비록 되게 가도〈소언 3:4ㄴ〉

다. 雖蠻貊之邦이라두 → 비록 되나라히라도〈4:5ㄱ〉

→ 비록 되나라히라도〈소언 3:5ㄱ〉

라. 雖夜ㅣ나 → 비록 바미라두〈4:18ㄱ〉

→ 비록 밤이나〈소언 3:16ㄱ〉

‘ㅗ’가 ‘ㅜ’로 변한 것은 오늘날의 경기 방언 현상과 부합하는데, 다른 문헌에서도 보인다.

(25)가. 비록  긔약 사이 아니라두〈여씨향약언해 화산문고본 36ㄴ〉

나. 덥고 비올 제라두〈소학언해 6:2ㄱ〉

다. 홈을 디라두〈효경언해 17ㄴ〉

이 책의 사동 접미사 ‘-이-’가 『소학언해』에서 ‘-히-’로 바뀐 예가 있다. 이 책의 ‘ᄇᆞᆯ기다’가 예외 없이 『소학언해』에서 ‘-히-’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는 ‘ᄇᆞᆯ기다, 니기다’ 두 낱말에서만 이 현상이 보인다.

(26)가. ᄇᆞᆯ기노래니라(3:16ㄱ) → ᄇᆞᆯ킴이니(소언 2:49ㄴ) 주036)

‘ᄇᆞᆯ기노라’와 ‘ㅣ니라’ 사이에서 ‘ᄒᆞ야’가 생략된 것이다. 한편 『번역소학』에서는 종결 형식을 쓰고 『소학언해』에서는 연결 형식을 쓴 것도 중요한 차이이다.

나. ᄇᆞᆯ기니라(3:23ㄴ, 3:39ㄱ, 4:9ㄱ, 4:21ㄴ, 4:25ㄴ)

→ ᄇᆞᆯ키니라(소언 2:56ㄱ, 2:70ㄱ, 3:8ㄴ, 3:19ㄱ, 3:22ㄴ)

다. 니겨(熟, 3:6ㄴ) →닉켜셔(소언 2:41ㄱ)

동사 어간에 ‘-어 -’가 붙은 ‘두어홈’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다른 문헌의 관련 용례도 함께 제시한다.

(27)가. ᄢᅵᆫ  두어호미 올티 아니니라(不可以有挾也ㅣ니라)〈3:36ㄱ〉 주037)

‘ᄡᅦᆫ ᄆᆞᅀᆞᆷ 두어홈’은 ‘有挾’의 번역인데, ‘挾’은 ‘(힘 있는 측근을) 믿고 뽐냄’을 뜻한다. 『소학언해』(2:67ㄱ)에서는 ‘ᄢᅵᆷ을 두디 몯ᄒᆞᆯ 거시니라’로 바뀌었다.

나. 뫼셔 안자셔 시기디 아니커시든 믈을 자바디 말며(侍坐애 弗使ㅣ어든 不執琴瑟며)〈3:32ㄱ〉 주038)

‘자바ᄒᆞ디’는 『소학언해』(2:63ㄴ)에서 ‘잡디’로 바뀌었다.

다. 東州 밤 계오 새와 北寬亭의 올나니 三角山 第一峯이 마면 뵈리로다〈송강가사 성주본, 관동별곡〉

라. 내 보아니 이 도라가디 못홈이로다〈오륜전비언해6:33ㄱ〉

여기의 ‘두어ᄒᆞ다, 자바ᄒᆞ다’가 단어인지 구(句)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처럼 동사 어간에 ‘-어(아) ᄒᆞ-’가 붙는 현상은 가사 문학 작품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오륜전비언해』의 ‘보아ᄒᆞ니’는 현대 국어 ‘보아하니’로 이어지고 있다. 운율을 위해 만든 형식이 분포를 넓힌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주039)

현대 국어 ‘보아하니’는 국어사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이다.

활용형 ‘ᄀᆞᄅᆞ샤ᄃᆡ’는 이 책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이전의 문헌에서는 ‘ᄀᆞ로ᄃᆡ’는 쓰였지만, ‘ᄀᆞᄅᆞ샤ᄃᆡ’는 쓰인 적이 없다. 이 책 중에서도 3·4·6권에서만 나타난다(3:8ㄱ, 3:9ㄱ,…, 4:1ㄴ, 4:4ㄴ…, 6:1ㄴ, 6:2ㄴ). ‘ᄀᆞᆯᄋᆞ샤ᄃᆡ’는 『소학언해』에서 처음 나타난다(2:17ㄴ, 2:18ㄱ,…).

(28) 曲禮예 로 믈읫 보   우희 오면 조너고  아래 리오면 시르믈 뒷 거시오 기우리면 간샤  뒷 거시라(曲禮예 曰 凡視를 上於面則敖고 下於帶則憂ㅣ오 傾則姦이니라〈4:15ㄱ〉

‘조너ᄅᆞ고’는 ‘敖’의 번역인대, 이 책에서만 보인다. 부사형 ‘조널이(=함부로)’는 『내훈』에서 보인다.

(29) 기춤며 하외욤며 기지게 며 녁 발이 쳐 드듸며 지여며 빗기 보 말며 조널이 춤 바며 고 프디 말며〈내훈 1:45ㄱ〉

이 책의 ‘조너ᄅᆞ-’는 ‘조널이’가 ‘조너ᄅᆞ-(형용사 어간)+이(부사형 어미)’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책의 ‘조너ᄅᆞ고’가 『소학언해』(3:13ㄴ)에서는 ‘오만이오’로 바뀌었는데, ‘오만’은 ‘傲慢’일 것이다. 이렇게 바뀐 것은 ‘조너ᄅᆞ다’가 널리 알려진 낱말이 아니었거나 쓰이지 않는 낱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어 중 몇 가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션ᄉᆡᇰ(=先生)’(3:26ㄱ, 3:27ㄴ, 3:29ㄱ)은 15세기 불경언해류 문헌에서 볼 수 없던 낱말이다. 한자로 표기된 ‘先生’도 마찬가지이다. 한글로 표기된 ‘션ᄉᆡᇰ’은 『번역소학』과 비슷한 시기의 문헌인 『번역노걸대』(1517)에서 처음 보인다.

(30)가. 濂溪 周先生이 니샤〈내훈 1:19ㄴ〉

나. 션려 무로되〈번역노걸대 하 70ㄴ-71ㄱ〉

다음의 ‘비변도이’는 용례가 드물다.

(31) 보화의 다라셔 비변도이 가쥬려 말며 환란의 다라셔 구챠히 버서나려 말며 토와 사호매 이긔요 구티 말며 제 가질 모긔셔 해 가죠 구티 마롤 디니라(臨財야 毋苟得며 臨難야 毋苟免며 狠毋求勝며 分毋求多ㅣ니라)〈4:3ㄴ-4ㄱ〉

‘비변도이’는 ‘구차하게’를 뜻한다. ‘도이’는 ‘-ᄃᆞᇦ-’에 ‘-이’가 붙은 ‘ᄃᆞᄫᅵ’가 변한 것이다. 이 예문에서는 ‘苟’를 ‘비변도이’로도 번역하고 ‘구챠히’로도 변역하였다. 『소학언해』(3:3ㄴ)에서는 원문의 두 ‘苟’ 모두 ‘구챠히’로 번역하였다. ‘비변’의 다른 용례가 보이지 않는데, ‘鄙褊’인 듯하다. ‘褊’은 ‘옷의 품이나 땅이나 도량이 좁음’을 뜻하는데, ‘변’ 또는 ‘편’으로 읽혔다. ¶①:변〈동국정운 3:16ㄴ〉 ②편, 변〈자류주석 상 87ㄴ〉. ③편, 변〈자전석요하 62ㄴ〉.

‘大夫’는 원문이나 언해문에서 한자와 한글이 병기될 경우에는 ‘태부’로 표기되고, 한글로만 적힌 언해문일 경우에는 ‘태우’로 표기되었다.

(32)가. 大태夫부 → 大태夫부〈3:35ㄱ, 3:40ㄴ〉

나. 大태夫부 → 태웃(관형사형)〈4:15ㄴ-16ㄱ〉

다. 大태夫부 → 벼슬 노ᄑᆞ니〈3:38ㄴ〉

다음은 다른 문헌에 한글만 적힌 예이다.

(33)가. 광록태우〈삼강행실도 동경대본 충신 8ㄱ〉

나. 대광보국슝녹태우녕듕츄부〈천의소감언해 진쳔의쇼감차 1ㄱ〉

다. 태우려 닐어 샤〈맹자언해 4:13ㄱ〉

『소학언해』(2:66ㄱ-ㄴ, 2:70ㄴ-71ㄱ)에서는 원문의 경우는 ‘大대夫부’로 나타나고, 언해문의 경우는 한자 표기 없이 ‘태우’로 나타난다. 한문 원문에서 ‘대부’로 표기하면서 언해문에서 ‘태우’로 표기하는 것은 다음 자료에서도 볼 수 있다. (34가)는 ‘手提擲還崔大夫’의 독음을 적은 것이고, (34나)는 언해문이다.

(34) 슈뎨텩환최대부 → 손으로 자바 더뎌 최태우의게 도라보내도다〈고문진보 희쟉화경(戲作花卿) 두ᄌᆞ미(杜子美)〉

‘大夫, 士大夫’의 표기는 권(卷)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이현희 1988:218), 번역자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쟈ᇰᄎᆞᆺ ᄂᆞᄆᆡ 지븨 쥬연ᄒᆞ야 갈 저긔(將適舍)’의 ‘쥬연ᄒᆞ야’(4:11ㄱ)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말이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3:10ㄱ)에서는 ‘쟈ᇰᄎᆞᆺ 쥬인ᄒᆞᆫ 집의 갈ᄉᆡ’로 바뀌었는데, ‘쥬인ᄒᆞᆫ’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원문의 ‘舍’를 『소학집해』에서는 ‘館’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성백효(1993:181)에서는 “장차 관사에 갈 때에”로 번역하였고, 이충구 외(2019a:218)에서는 “객사에 가려할 때에는”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쥬연’이나 ‘쥬인’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이 책에는 오각이 많다. 옳은 표기를 괄호 속 화살표 뒤에 제시한다.

(35) 고ᇰᄉᆞㅣ(3:39ㄴ→고ᇰᄌᆞㅣ), 雖無道이나(3:40ㄱ→雖無道ㅣ나),

신해(3:40ㄴ→신하), 나ᅀᅵ가(3:26ㄱ→나ᅀᅡ가), 옯ᄂᆞ니라(4:3ㄴ→옮ᄂᆞ니라)

처ᅀᅡᆷ(4:22ㄱ→처ᅀᅥᆷ)

이 중 ‘雖無道이나’(3:40ㄱ)의 경우에는 같은 면의 바로 뒤에 ‘雖無道ㅣ나’가 두 번이나 나오므로 단순한 실수임이 틀림 없다. ‘처ᅀᅡᆷ’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줄 바로 아래에 옳게 새겨진 ‘처ᅀᅥᆷ’이 나온다. ‘옯ᄂᆞ니라’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소학언해』(3:3ㄱ)에도 ‘옯’으로 적혀 있다.

같은 글자가 중복되는 경우의 실수도 보인다.

(36)가. 얼우니 묻거시든  아니코 즉재 답호미 례져리 아니라(長者ㅣ 問이어든 不辭讓而對ㅣ 非禮也ㅣ니라〈3:25ㄴ〉

나. 君子 뫼셔 이쇼매 도라 라디 아니코 간대로 답호미 禮 아니라(侍於君子 不顧望而對ㅣ 非禮也ㅣ니라)〈3:31ㄴ〉

(36가, 나)의 ‘아니라’는 모두 ‘아니니라’의 실수로 보인다. 원문 구결에는 명제에 대한 청자(독자)의 인지(認知)를 요구하는 선어말 어미 ‘-니-’가 있는데 언해문에서는 빠져 있다. 둘 다 『소학언해』(2:58ㄱ, 2:63ㄱ)에서 ‘아니니라’로 바뀌었다.

‘례모(禮貌)’를 ‘례도’로 잘못 새긴 예가 보인다. 『소학언해』(3:15ㄴ)에서는 ‘녜모’로 나타난다.

(37) 비록 아도이 겨신 히라도 례도시며(雖褻이나 必以貌시며=비록 사사로운 자리라 하더라도 예모를 차리셨으며)〈4:17ㄴ〉

그 밖에도 많은 오자가 보인다. 언해문의 ‘主쥬人신’(3:38ㄱ)은 ‘쥬ᅀᅵᆫ’의 오각이다. 원문에서는 옳게 나타난다. ‘고져(=鼓子, 3:17ㄱ)’는 ‘고쟈’의 잘못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50ㄱ)에는 ‘고쟈’로 나타난다. 『훈몽자회』(중 1ㄴ)에서 ‘閹 고쟈 엄 宦 고쟈 환 閽 고쟈 혼 䦙 고쟈 시’가 보인다. ‘돗 ᄀᆞ로ᄆᆞᆯ(=布席, 3:37ㄱ)’은 ‘돗 ᄭᆞ로ᄆᆞᆯ’의 잘못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68ㄱ)에서는 ‘돗ᄀᆞᆯ ᄭᆞ라지라’로 나타난다. ‘ᄭᆞᆯ-’이 ‘ᄀᆞᆯ-’로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인데,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대ᄀᅿᆯ믄(=대궐문, 3:4ㄱ)’의 ‘ᄀᅿᆯ’은 이 책에서도 같은 예가 더 보이지 않으므로 오각임이 분명하다. 이 책에는 ‘蹶(3:27ㄱ), 厥(4:23ㄱ)’이 보이는데, 독음이 모두 ‘궐’로 적혀 있다. 한편 ‘門’의 독음이 원문에서는 ‘문’으로 적혀 있고 언해문에서는 ‘믄’으로 적혀 있는데, ‘믄’은 오각이거나 자획이 마멸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면(面)에서 ‘무ᇇ, 문(2개)’이 나온다. ‘門’의 독음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몬’으로 나타난다(법화경언해 7:20ㄴ, 법화경언해 7:189ㄴ, 원각경언해 하 1-1 : 5ㄴ, 선종영가집언해 상 2ㄴ). 그런데 이 책이 간행될 무렵인 16세기 초 문헌에서부터 ‘문’으로 적힌 예가 보인다(훈몽자회 중 4ㄱ, 법집별행록 3ㄴ, 유합 상 23ㄴ, 왜어유해 상 32ㄱ). 그러므로 여기에 적힌 ‘믄’은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몬〉문’의 변화는 오늘날 경기 방언의 특징과 부합한다.

‘그로’(3:44ㄱ)는 ‘그릇되게(違)’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형용사 ‘그르다’에서 영파생된 부사 ‘그르’가 쓰였다. 이 ‘그로’는 ‘서르〉서로’와 같은 유추의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부사격 조사 ‘-로’ 때문에 ‘-로’로 끝나는 부사어가 많아짐에 따라, 이에 유추되어 ‘그르’가 ‘그로’로 변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용례가 보이지 않아서 오각일 가능성이 크다. 『소학언해』(2:74ㄴ)에서는 ‘어글웃게’로 나타나는데, ‘어글웃게’도 드문 예이다. 대개는 ‘어글읏-’으로 나타난다. ‘어글읏(어글웃)-’은 ‘어글읓(어글웇)-’을 8종성 표기 규칙에 따라 표기한 것이다.

‘엄시’(3:14ㄴ)는 ‘없이’의 오각이다. 이 책(3:16ㄱ)의 ‘업소며, 업소믄’으로 보아, 방언형의 반영은 아닌 듯하다. 『소학언해』(2:48ㄱ)에는 ‘업시’로 적혀 있다. ‘和화悅얼’(3:44ㄴ)은 언해문의 예인데, ‘열’을 ‘얼’로 잘못 새겼다. ‘슬윗’(4:14ㄴ)은 ‘술윗(=수레의)’의 오각이다. 『소학언해』(3:13ㄱ)에서는 ‘술윗’으로 나타나고, 이 책에서도 ‘술윗’이 보인다(4:18ㄱ). ‘마년’(4:22ㄴ)은 ‘만년(=萬年)’을 뜻하는데, 오각인 듯하다. 『소학언해』(3:20ㄱ)에서는 한자 표기 ‘萬年’으로 바뀌었다.

다음 예문의 ‘져ᇰ다이’는 오각인지 오역인지 분명치 않다.

(38) 朝廷에 아랫태웃 벼슬  사려 말샤 딕히 시며 웃태웃 벼슬  사려 말샤 온화코 다이 더시다(朝與下大夫로 言에 侃侃如也시며 與上大夫로 言에 誾誾如也ㅣ러시다〈4:15ㄴ-16ㄱ〉

여기서는 ‘誾誾如也’를 ‘온화코 져ᇰ다이 ᄒᆞ더시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소학언해』의 번역이나 주석의 내용과 아주 다르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3:14ㄱ)에서는 ‘誾誾<원주>【화열호ᄃᆡ ᄌᆡᇰ홈이라】 ᄐᆞᆺᄒᆞ시다’로 나타난다. 이 협주는 『소학집설』에서 주자(朱子)가 인용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해설〉 “은은(誾誾)은 화열(和悅)하면서도 간쟁(諫諍)하는 것(誾誾和悅而諍也)”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져ᇰ’은 ‘간쟁(諫諍)’을 뜻하는 ‘ᄌᆡᇰ(諍)’의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다음 예문의 ‘븟 살가 야’가 그것이다.

(39) 뫼셔 활 솔딘댄 사 모도 잡고 뫼셔 投투壺호홀딘댄 사 모도아 놀 디니 제 이긔여든 잔 시서 븟 살가 야 홀 디니라(侍射則約矢고 侍投則擁矢니 勝則洗而以請이니라)〈3:32ㄴ〉

‘븟 살가 ᄒᆞ야’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소학언해』(2:64ㄱ)에서도 이 부분이 없이 ‘잔 시서 ᄡᅥ 請홀 디니라’로 적혀 있다. 실수인 듯하다.

이 책에는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번역이 꽤 있다.

(40) 士昏禮예 로 아비라셔 아리 친연라 갈 제 술  잔 머기고 로 가 너 도 사 마자 와 내 졔홀 이 니 힘 오로  거느려 업스신 어마님 일 니 네 티 라 아리 로 그리 호리다 오직 이를 이긔디 몯가 젓솝거니와 잠도 命을 닛디 아니호리다(士昏禮예 曰 父ㅣ 醮子애 命之曰 往迎爾相야 承我宗事야 勖帥以敬야 先妣之嗣를 若則有常라 子曰 諾다 唯恐不堪이언 不敢忘命호리다)〈3:12ㄱ-ㄴ〉

여기의 ‘업스신 어마님’은 ‘先妣’의 오역이다. 『소학집설』에서 “어머니를 선비라 하는 것은 대개 옛날의 명칭이다.(母曰先妣 盖古稱也)”라 하였는데, 예문에서는 ‘선비’를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잘못 알고 오역을 하였다. ‘업스신 어마님 일 니ᅀᅮᄆᆞᆯ’을 『소학언해』(2:46ㄱ)에서는 ‘어미를 니을이니(=어머니를 이으리니)’로 바로잡았다.

(41) 이 우 남진과 계집이 별히 호 기니라(右 明夫婦之別이라)〈3:23ㄴ〉

‘명부부지별’은 편목(篇目)의 제목인데, 이 언해에서는 그것을 문장으로 간주하고 번역하였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남진과 계집’은 주어가 아니라 관형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별히 호ᄆᆞᆯ’이란 번역도 좋지 않다. ‘분별하여 행동함을’이란 의미를 ‘별히 호ᄆᆞᆯ’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이 『소학언해』(2:56ㄱ)에서는 ‘이 우ᄒᆞᆫ 남진과 겨집의 ᄀᆞᆯᄒᆡ옴ᄋᆞᆯ ᄇᆞᆯ키니라(右ᄂᆞᆫ 明夫婦之別ᄒᆞ니라)’로 바뀌었다. 주040)

‘이라’와 ‘ᄒᆞ니라’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右 明夫婦之別이라’에서는 ‘明夫婦之別’이 편목의 제목이 되고, 『소학언해』의 ‘右ᄂᆞᆫ 明夫婦之別ᄒᆞ니라’에서는 ‘夫婦之別’이 편목의 제목이 된다.

(42) 벼 던 사 늘그니 거러 니디 아니며 庶人 늘그니 고기 업슨 밥 먹디 아니니라(君子ㅣ 耆老애 不徒行며 庶人이 耆老애 不徒食이니라)〈3:33ㄱ-ㄴ〉

‘벼슬 ᄒᆞ던 사ᄅᆞᆷ 늘그니’와 ‘庶人 늘그니’는 명사구가 다른 요소의 개입이 없이 연결된 것인데 아주 부자연스럽다. ‘기(耆)’는 60세를 뜻하고 ‘로(老)’는 70세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耆’와 ‘老’는 ‘君子’의 서술어이다. 『소학언해』(2:64ㄴ)에서는 ‘君子<원주>【이 군 벼슬 인 사이라】 ㅣ 늘금애 …(중략)… 샤ᇰ인이 늘금애’로 바로잡았다.

(43) 믈읫 손과로 들 제 문마다 손 야 소니 안 문에 니르거든(凡與客으로 入者ㅣ 每門에 讓於客야 客至寢門이어든)〈3:36ㄴ-37ㄱ〉

여기서는 구결 달린 원문 ‘入者ㅣ’와 언해문 ‘들 제’가 부합하지 않는다. 『소학언해』(2:68ㄱ)에서는 ‘들어가ᄂᆞᆫ 이’로 바로잡았다.

(44) 欒共子ㅣ 로 이 세 가지예 셤교  티 홀 디니 아비 나시고 스이 치시고 님그미 머기시니 아비 아니시면 나디 몯며 머기디 아니면 라디 몯며 치디 아니면 아디 몯니 나신 은혜와 가지니 그런 로  으로 셤겨 다 마다 주구믈 닐외욜 디니라(欒共子ㅣ 曰 民生於三애 事之如一이니 父ㅣ 生之고 師ㅣ 敎之고 君이 食之니 非父ㅣ면 不生이오 非食ㅣ면 不長이오 非敎ㅣ면 不知니 生之族也 故로 一事之야 唯其所在則致死焉이니라)〈3:42ㄴ-43ㄱ〉

여기서는 ‘民生於三애’를 ‘ᄇᆡᆨ셔ᇰ이 세 가지예’로 번역한 것이 문제이다. 『소학언해』(2:73ㄱ-ㄴ)에서도 똑 같이 나타난다. 두 책 다 ‘民生’을 ‘ᄇᆡᆨ셔ᇰ’으로 번역한 것이다. 동일한 원문의 번역이 『삼강행실도언해』에서도 보이는데, 그 책에서는 ‘生’이 ‘사ᄂᆞ니’로 번역되어 있다. 즉 ‘란공 닐오 사미 세 고대 사니’(삼강행실도언해 동경대본 충신 2ㄱ)로 나타난다. ‘民生於三애’의 의미는 진선(陳選)의 『소학증주』에 나타나 있다.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모두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 사람에 의해서 산다고 말한 것이다.(君父師 皆人之所由生也 故曰民生於三)”란 것이다.

(45) 晏子ㅣ 로 님그믄 시기시거든 臣下 조심야며 아비 어엿비 너기거든 식은 효도며 兄은 커든 아 며 남진 和悅커든 계집 유화며 싀어미 어엿비 너기거든 며느리 좃와호미 禮니라(晏子ㅣ 曰 君令臣共며 父慈子孝며 兄愛弟敬며 夫和妻柔며 姑慈婦聽이 禮也ㅣ니라)〈3:43ㄴ-44ㄱ〉

여기서는 ‘-거든’이 5번 쓰였는데, 비록 당시의 연결 어미 ‘-거든’의 의미역이 현대 국어 연결 어미 ‘-거든’에 비해 훨씬 넓기는 하였지만 모두 오역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74ㄱ)에서는 모두 ‘-고’로 바뀌었다.

(46) 曾子ㅣ 샤 아미 깃디 몯얏거든 간도 밧긧 사 사괴디 말며 갓가오니 親티 몯얫거든 간도 먼  가 求티 말며 혀근 이 피디 몯얏거든 간도 큰 이 니디 마롤 디니라(曾子ㅣ 曰 親戚이 不說이어든 不敢外交며 近者를 不親이어든 不敢求遠며 小者를 不審이어든 不敢言大니라)〈3:44ㄴ-45ㄱ〉 주041)

『소학집설』에서 ‘친척(親戚)’은 ‘부형(父兄)’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백효(1993:165)와 이충구 외(2019a:201)에 수록되어 있다. ‘아ᅀᆞ미’는 『소학언해』(2:75ㄱ)에서 ‘어버이와 권다ᇰ이’로 바뀌었다.

‘아ᅀᆞ미 깃디 몯얏거든’은 자동사 구문이고, 이어지는 ‘갓가오니 親티 몯얫거든’과 ‘혀근 이 피디 몯얏거든’은 타동사 구문이어서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문 원문의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소학언해』(2:75ㄱ)에서는 ‘어버이와 권다ᇰ이 깃거티 아니커든 … 갓가온 이 親티 아니커든 … 쟉은 이ᄅᆞᆯ ᄉᆞᆯ피디 몯ᄒᆞ얏거든 …’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서도 사정이 변하지 않았다.

(47) 論語에 로 슬윗 가온셔 돌보디 말며 말 리 말며 손 치디 마롤 디니라(論語에 曰 車中에 不內顧며 不疾言며 不親指니라)〈4:14ㄴ〉

이 예문에서는 수레를 탈 때의 세 가지 품위 없는 행동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소학언해』(3:13ㄱ)에서는 이 대목이 ‘親히 ᄀᆞᄅᆞ치디 아니ᄒᆞ더시다’로 끝난다. 높임의 선어말 어미 ‘-시-’를 쓴 것은 이 대목에 나타난 세 가지 행위를 수레를 탈 때의 공자(孔子)의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오류를 『소학언해』에서 바로잡은 것이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서는 이 내용의 바로 앞에 ‘수레를 타시면 반드시 바로 서서 고삐를 잡으셨다(升車 必正立 執綏)’란 내용이 실려 있다.

(48) 曲禮예 로 믈읫 보   우희 오면 조너고  아래 리오면 시르믈 뒷 거시오 기우리면 간샤  뒷 거시라(曲禮예 曰 凡視를 上於面則敖고 下於帶則憂ㅣ오 傾則姦이니라)〈4:15ㄱ〉

이 예문에서 자동사 ‘오ᄅᆞ면’을 쓴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타동사 ‘올이-’를 쓰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믈읫 보ᄆᆞᆯ ᄂᆞᄆᆡ ᄂᆞᆺ 우희 오ᄅᆞ면’이 『소학언해』(3:13ㄴ)에서는 ‘믈읫 봄이 ᄂᆞᆺᄎᆡ 올이면’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어 ‘봄이’와 서술어 타동사 ‘올이면’의 불일치가 흥미롭다. 두 책 모두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ᄂᆞ리오면’은 타동사여서 앞의 ‘오ᄅᆞ면’과 일치하지 않는다. 『소학언해』(3:13ㄴ)에서는 ‘믈읫 봄이 ᄂᆞᆺᄎᆡ 올이면 오만이오 ᄯᅴ예 ᄂᆞ리오면 근심홈이오’으로 되어 있다. 타동사를 쓴 점에서 일관성은 있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어 ‘봄이’와 호응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49) 네 아 들 리고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 슈 셰 이셔(棄爾幼志고 順爾成德이면 壽考維祺야)〈4:22ㄱ〉

여기서는 원문의 ‘順爾成德’을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부분이 『소학언해』(3:19ㄴ)에서는 ‘네 인 德을 順ᄒᆞ면’으로 바뀌었다. 두 책 모두 ‘네’가 평성이므로 주어가 아니라 관형어임을 알 수 있다. ‘어딘’은 원문에 없는 낱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소학언해』의 번역은 ‘덕이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전제한 것이어서, 부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이 책의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은 그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불필요한 ‘어딘’을 보충하였고, 원문의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성백효(1993:195)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너의 덕 이룸을 순히 하면’으로 번역하였다.

(50) 어버 업슨 시기 지븨 읏듬얫니 곳갈와 옷과 빗난 거로 편 도디 아니홀 디니라(孤子ㅣ 當室야 冠衣를 不純采니라)〈4:23ㄱ-ㄴ〉

이 예문은 “어버이 없는 자식이(어버이를 잃고) 집안의 가장(家長)이 된 이는 관(冠)과 옷을 빛나는 것으로 선(縇)을 두르지 말지니라.”란 뜻이다. ‘당실(當室)’은 아버지의 뒤를 물려받은 자를 말한다. ‘純’은 관(冠)이나 옷깃에 장식용 헝겊을 덧대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의 독음은 ‘준’이다. 여기서 주목할 낱말은 ‘편ᄌᆞ(編子)’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의 표제어 ‘편자’와 ‘망건편자’에서는 ‘편자’의 한자를 표기하지 않았다. ‘편ᄌᆞ’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망건의 아랫부분으로서, 망건을 졸라매기 위해 말총으로 띠처럼 굵게 짠 부분을 가리킨다. ¶邊巾 망건 편〈광재물보 의복 3ㄴ〉. 둘째는 ‘선(縇)’을 가리킨다. ‘선(縇)’은 옷이나 방석 따위의 가장자리에 덧대는 좁은 헝겊이다. 이 글 속에서의 ‘편ᄌᆞ’는 관(冠)이나 옷깃에 덧대는 장식용 헝겊이다. 동음이의어로서 ‘마철(馬鐵), 제철(蹄鐵)’을 뜻하는 ‘편ᄌᆞ’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유입된 차용어로 보인다. ¶편 馬鐵〈국한회어 329〉. 한편 ‘편ᄌᆞ’가 『소학언해』(3:21ㄱ)에서는 ‘단’으로 바뀌었다. ‘단’은 ‘옷단’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의 표제어 ‘단’에는 한자가 병기되지 않았는데, ‘緞’ 또는 ‘段’으로 보인다. 한편 ‘純’의 독음이 모두 ‘:슌’으로 적혀 있는데, 『소학언해』(3:20ㄴ)에서는 모두 ‘:쥰’으로 바뀌었다. ‘純’이 ‘縇’을 뜻할 때의 오늘날의 독음은 ‘준’이다. ¶①쥰(평성), :쥰(상성)〈동국정운 3:6ㄴ〉 ②·쥰(거성)〈동국정운 3:7ㄱ〉 ③쓘(평성)〈동국정운 3:8ㄱ〉 ④衣緣 선두를 준〈자전석요 하 29ㄱ〉.

(51) 세 번재 爵弁을 스이고 로 의 됴 저기며  됴 저고로 네거긔 슬 거 다 스이노니(三加 曰 以歲之正과 以月之令에 咸加爾服노니)〈4:22ㄴ-23ㄱ〉

여기서는 ‘져고로’가 문제이다. ‘저고로’는 ‘적[時]’에 부사격 조사 ‘오로(=ᄋᆞ로)’가 붙은 것이다. 이 ‘오로(ᄋᆞ로)’는 원문의 ‘以’의 일반적인 훈(訓)에 이끌린 번역이다. ‘以歲之正 以月之令’의 ‘以’는 ‘於’와 같으므로 ‘의 됴 저기며  됴 저고로’가 아니라 ‘의 됴 저기며  됴 저긔’가 더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소학언해』(3:20ㄴ)에서는 ‘ᄒᆡ의 됴홈과 ᄡᅥ ᄃᆞᆯᄋᆡ 됴ᄒᆞᆫ 제’로 바뀌었는데, 앞의 ‘以’는 ‘ᄡᅥ’로 번역하고 뒤의 ‘以’는 부사격 조사 ‘에’로 번역하였다.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결함이다. ‘제’는 의존 명사 ‘제’ 뒤에서 부사격 조사 ‘에’가 외현되지 않은 것이다. ‘以’가 ‘於’와 같은 의미로 쓰인 예는 ‘孟嘗君以五月五日生’(사기, 맹상군열전)에서 볼 수 있다.

(52) 君子 아뎌 뫼셔 밥 머글 저기어든 몬져 먹고  젠 후에 홀 디니(侍燕於君子 則先飯而後已니)〈4:27ㄱ-ㄴ〉

여기서는 ‘侍燕於君子’의 번역이 문제이다. 『소학언해』(3:24ㄴ)에서는 ‘君子ᄅᆞᆯ 아ᄅᆞᆷ뎌 뫼셔실 적이어든’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보다 앞선 시기의 『내훈』(1475)에서는 같은 원문을 ‘君子 아뎌 뫼셔 밥 머글 저기어든’(내훈 1:7ㄴ)으로 번역하였다. ‘君子ᄅᆞᆯ’ 대신 ‘君子ᄭᅴ’가 쓰인 것을 제외하면 『번역소학』의 번역과 같다. 세 책에 공통적으로 쓰인 ‘아ᄅᆞᆷ뎌(=사사로이)’는 ‘燕’이 지닌 ‘편안함, 한가함’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두 책에서 ‘밥 머글’이라고 한 것은 ‘燕’에 들어있는 ‘잔치’의 의미까지 고려한 결과로 짐작되는데, 이 역시 ‘燕’의 의미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한 글자를 서로 다른 의미로 두 번 번역한 셈이 되고 만다. 아주 문제가 많은 번역이다. 결국 이것은 저경(底本)의 문제로 보인다. 율곡의 『소학집주』에는 원문이 ‘侍食於君子’로 적혀 있으므로,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다. 주042)

성백효(1993:202)를 참조할 것.
문제가 있는 원문을 억지스럽게 번역한 셈이다.

(53) 曲禮예 로 님 앏셔 실과 주어시든 그  잇 거스란  푸물 디니라(曲禮예 曰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3:6ㄱ〉

여기서는 ‘님그ᇝ 앏ᄑᆡ셔’의 피수식어가 없고, ‘주어시든’의 주어가 없다. 『소학언해』(2:40ㄴ)에서는 ‘曲禮예 오 님금 앏셔 실과 주어시든 그  인 이란 그  품을 디니라(曲禮예 曰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문제의 근원은 한문 원문에 있는 듯도 하다. 이 대목의 원문을 성백효(1993:120)에서는 ‘「곡례」에 말하였다. 임금의 앞에서 과일을 하사하시거든 씨가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에 간직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언해문에도 ‘하사하시거든’의 주어가 없다. 원문의 구두(句讀)에 잘못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두를 달리하여, ‘曲禮예 曰 賜果ᄒᆞ야시ᄃᆞᆫ 於君前에셔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로 고쳐 보면, ‘「곡례」에서 이르기를, (임금이) 과일을 하사하시면 (먹은 다음) 임금의 앞에서 씨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을지니라.’란 뜻이 되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경우의 원문도 의심스럽다. ‘君賜果 其有核者 於君前 懷其核’이 상식에 부합하는 문장일 것이다. 이충구 외(2019a:149)에서는 ‘賜’를 ‘하사받다’로 번역하였는데, “임금의 앞에서 과일을 하사받다(賜果於君前)”가 적절한 표현인지는 필자가 판단하기 어렵다. 어떻든 『번역소학』과 『소학언해』에서는 ‘賜’의 의미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54) 論語예 로 鄕黨앳 사 술 머고매 막대 디픈 사미 나거든 날 디니라(論語의 曰 鄕人飮酒에 杖者ㅣ 出이어든 斯出矣니라)〈3:33ㄴ〉

이 대목의 주체는 공자(孔子)인데, 번역자는 독자에게 훈계하는 내용으로 오해하였다. 『소학언해』(2:65ㄱ)에서는 ‘論語의 ᄀᆞᆯ오ᄃᆡ 햐ᇰ다ᇰ앳 사ᄅᆞᆷ 술 먹이예 막대 딥프니 나거든 이예 나가더시다’로 바뀌었다.

(55) 얼우신 뫼셔  이실 저기어든 비록 여러 가짓 차반이라도 마다디 아니며 마조 안조 마다디 아니홀 디니라(御同於長者 雖貳나 不辭며 偶坐不辭ㅣ니라)〈3:31ㄱ〉

‘마조 안조ᄆᆞᆯ 마다ᄒᆞ디 아니홀 디니라’는 ‘偶坐不辭’를 오역한 것이다. 『소학언해』(2:63ㄱ)에서는 ‘ᄀᆞᆯ와 안자셔ᄂᆞᆫ ᄉᆞ야ᇰ티 아니홀 디니라’로 바뀌었다. 성백효(1993:150)에서는 ‘남과 짝하여 앉았으면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고, 이충구 외(2019:184)에서는 ‘손님과 배석하였을 때에도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다. ‘사양’의 대상은 ‘음식’이다.

(56) 그 벼슬 득디 몯야셔 得디 몯가 알하고 마 득얀 일흘가 야 알하니라(其未得之也앤 患得之고 旣得之얀 患失之니라〈3:9ㄱ-ㄴ〉 주043)

‘得’을 한자로 쓰기도 하고 한글로 쓰기도 하였다.

‘其未得之也’의 ‘其’는 허사(虛辭) 같기도 하고 ‘未得之’한 상황 전체를 지시하는 글자 같기도 하다. ‘未得之’를 ‘득디 몯ᄒᆞ야셔ᄂᆞᆫ’과 같이 서술어구로 번역할 경우에는 ‘其’를 관형사 ‘그’로 번역할 수가 없다. 위의 번역에서는 ‘其’를 관형사 ‘그’로 번역하고 원문에 없는 목적어 ‘벼슬’을 끼워 넣은 결과, 마치 ‘그’가 ‘벼슬’을 수식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벼슬’ 뒤에 목적격 조사를 쓰지 않은 것은 ‘그’가 ‘벼슬’을 수식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 같기도 하다. ‘벼슬 득디 못ᄒᆞ야셔’라는 상황 자체를 ‘그’가 지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벼슬’ 뒤에 목적격 조사 ‘을’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떻든 이 번역은 국어다운 번역이 아니다. 『소학언해』(2:43ㄴ)에서는 원문 ‘其未得之也’를 ‘그 얻디 몯ᄒᆞ야셔ᄂᆞᆫ’으로 번역하였다. 원문에 없는 목적어 ‘벼슬’을 보충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인데, 이 역시 국어의 구조에는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다.

(57) 말 졍외오 믿비 며 뎍을 두터이 고 공경면 비록 되나라히라도 니려니와 말 졍셩도며 믿비 아니고 뎍을 둗거이 며 공경히 아니면 비록 내 올와 힌 니리아(言忠信며 行篤敬이면 雖蠻貊之邦이라두 行矣어니와 言不忠信며 行不篤敬이면 雖州里나 行乎哉아〈4:5ㄴ〉

‘ᄃᆞᆫ니려니와’는 ‘行’을 번역한 것이다. 『소학언해』(3:5ㄱ)에도 ‘ᄃᆞᆫ니려니와’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의 ‘行’은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의 원문의 첫머리가 ‘言忠信’으로 시작하지만, 원전인 『논어』에는 이 앞에 본래 ‘子張問行 子曰’이 적혀 있다. ‘子張問行’은 ‘자장이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여쭈었다.’란 의미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달(達)함을 묻는 뜻과 같다. 자장(子張)의 뜻은 바깥에서 (도가) 행해짐을 얻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니, …(猶問達之意也 子張意在得行於外 故夫子反於身而言之 …)” 여기서 ‘行’을 ‘達’과 같은 것으로 본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行’은 ‘다님’이 아니라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짐(다스려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行’의 번역이 오역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번역자가 ‘行’의 뜻을 알면서도 ‘行’의 대표훈(代表訓)을 번역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8) 소니 믈러니거든 모로매 命을 도로 엳와 로 소니 도라보디 아니다 더시다(賓이 退어든 必復命曰 賓不顧矣라 더시다)〈3:3ㄴ〉

여기서는 시제와 관련된 오역이 보인다. ‘소니 도라보디 아니다’는 인용문인데, 문맥으로는 “손이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습니다.”란 뜻이다. ‘아니ᄒᆞᄂᆞᅌᅵ다’는 ‘아니ᄒᆞ니ᅌᅵ다’의 잘못이다. 둘은 시제가 다르다, ‘ᄒᆞᄂᆞᅌᅵ다’는 현재 시제이고 ‘ᄒᆞ니ᅌᅵ다’는 동사에 쓰일 경우 과거 시제이다. 오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ᄒᆞᄂᆞᅌᅵ다’를 『소학언해』(2:38ㄴ)에서는 간접 인용의 ‘아니타’로 바로잡았다. 동사의 보조 용언으로 쓰인 ‘아니타’는 과거 시제가 된다.

(59) 얼우니 니시 말 몯 차 다 마 몯 미처야 계시거든(長者ㅣ 不及이어든)〈3:28ㄱ〉

여기서는 원문에 없는 말을 상당히 많이 보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2:60ㄱ)에서는 ‘얼운이 미처 몯ᄒᆞ여 겨시거든’으로 바뀌었다. 이 책의 번역에서는 ‘몯 ᄆᆞ차’와 ‘몯 미처ᄒᆞ야’가 중복적인데, 두 가지 번역 구상이 뒤섞인 결과로 보인다. 즉 ‘얼우니 니시 말 몯 차 계시거든’이나 ‘얼우니 니시 마 몯 미처야 계시거든’ 둘 중 하나로 번역하려다가 교정이 누락되어 두 가지 번역이 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미처ᄒᆞ다’는 동사의 연결형에서 영파생된 부사 ‘미처’와 ‘ᄒᆞ다’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그러면 ‘몯 미처ᄒᆞ다’는 짧은 부정의 일반적인 형식이 된다. 만약 ‘미처ᄒᆞ다’가 ‘미처 ᄒᆞ다’ 즉 구(句)라면, ‘몯 미처 ᄒᆞ다’는 ‘부정 부사+부사+ᄒᆞ다’ 구조가 되는데, 이런 구조는 일반적이지 않다.

(60) 小儀예 로  그 이 엿보디 말며 과 갓가이야 서르 므더니 너기게 말며 녯 사괴던 사 왼 이 니디 말며 희앳 비 마롤 디니라(少儀曰 不窺密며 不旁狎며 不道舊故며 不戱色며)〈4:13ㄴ-14ㄱ〉

‘ᄂᆞᆷ과 갓가이ᄒᆞ야 서르 므더니 너기게 말며’는 ‘不旁狎며’의 번역인데, 『소학언해』(3:12ㄱ)에서는 ‘셜압ᄒᆞᆫ ᄃᆡ 갓가이 아니ᄒᆞ며’로 바뀌었다. ‘셜압’은 ‘설압(褻狎: 행동이 무례함)’이다. 두 책 모두 ‘旁’을 ‘가까이하다’로 번역하였지만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는 ‘旁’과 ‘狎’이 대등하게 접속된 것으로 보았는데, 『소학언해』에서는 ‘旁狎’을 ‘서술어-부사어’의 관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소학집해』의 주석에서는 ‘방은 널리 미침이다.(旁泛及也)’라 하였다. 그렇다면 두 책의 해석 모두 『소학집해』의 주석과는 다른 셈이다.

(61) 丹書에 로 논 미 게을은  이긔니 길고 게을오미 을 이긔닌 멸고(丹書에 曰 敬勝怠者 吉고 怠勝敬者 滅고)〈4:2ㄱ-ㄴ〉

이 내용은 『용비어천가』 제 7장의 주석에도 나온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관련된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의 ‘怠’에 대하여 『용비어천가』(1:12ㄱ)에서는 ‘怠惰慢也’라고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소학집해』의 주석과 부합한다. ‘怠’와 ‘惰慢’ 모두 ‘게으르다’ 외에 ‘소홀하다, 함부로 하다’를 뜻하기도 한다. 1895년에 간행된 『국한회어』(131)에서는 표제어 ‘반말하다’를 ‘怠慢半辭’로 풀이하였는데, 여기서 ‘怠慢’이 ‘소홀함, 사람을 함부로 대함’이란 뜻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오만(傲慢)’의 ‘慢’도 마찬가지이다. 이 예문의 ‘게을은, 게을옴’은 ‘怠’의 정확한 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대표훈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62)가. 益者ㅣ 三友ㅣ오 損者ㅣ 三友ㅣ니 友直며 友諒며 友多聞이면 益矣오 友便辟며 友善柔며 友便佞이면 損矣니라〈3:35ㄱ-ㄴ〉〈소학언해 2:66ㄴ〉

 나. 유익 버디 세히오 해왼 버디 세히니 直니 벋 사며 信實니 벋 사며 드론 일 하니 벋 사면 유익고 便便 고 不直니 벋 사며 부드러움 교로이 니 벋 사며 말 재오 아외니 벋 사면 유해니라〈3:35ㄴ〉

 다. 유익ᄒᆞᆫ 이 세 가짓 벋이오 해로온 이 세 가짓 벋이니 直ᄒ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신실ᄒ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들은 것 한 이 벋ᄒᆞ면 유익고 거도ᇰ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며 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말ᄉᆞᆷ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면 해로온이라〈소언 2:66ㄴ-67ㄱ〉

(62나, 다)는 원문 구결에는 차이가 없는데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뽑아서 번호로 구분한다.

(63)가. ①友便辟며 ②友善柔며 ③友便佞이면

 나. ①便便 고 不直니 벋 사며

  ②부드러움 교로이 니 벋 사며

  ③말 재오 아외니 벋 사면

 다. ①거도ᇰ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며

  ②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③말ᄉᆞᆷ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면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이 『소학집해』에 실려 있는데, 그것을 본 다음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주044)

성백효(1993:156)과 이충구 외(2019a:191)에 수록되었다.
해당 부분만 발췌한다.

(64) ①편(便)은 익숙함이다. 편벽(便僻)은 위의(威儀)에만 익숙하고 바르지 않음이고,

  ②선유(善柔)는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만 잘할 뿐 성실하지 않음이고,

  ③편녕(便佞)은 말에만 익숙할 뿐 문견(聞見)의 실속이 없으니,

   (便習熟也 便辟 謂習於威儀而不直 善柔 謂工於媚悅而不諒 便佞 謂習於口語而無聞見之實)

여기서 ②와 ③의 번역 차이에만 주목해 보자. 주자의 주석에서는 ‘善柔’를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을 잘함(工於媚悅)’이라고 하였다. 『소학언해』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善柔’를 ‘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번역소학』에서는 주자의 주석과 달리, ‘便佞’을 ‘말 재오 아다ᇰᄃᆞ외니’로 번역하고 ‘善柔’는 ‘부드러움 고ᇰ교로이 ᄒᆞᄂᆞ니’로 번역하였다. ‘善柔’의 번역은 지나친 직역이어서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만약 ‘부드러움’이 ‘아다ᇰᄃᆞ외욤’을 뜻한다면, ‘善柔’와 ‘便佞’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 셈이 될 것이다.

(65) 曲곡禮례예 로 어딘 사 사미 날 야 깃븐 이를  과뎌 아니미 사미 날 야 도이 호  과뎌 아니니  사괴요 오올에 니라(曲禮예 曰 君子 不盡人之歡며 不竭人之忠니 以全交也ㅣ니라)〈3:36ㄱ-ㄴ〉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이다. 이 번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학집해』의 다음 주석을 보아야 한다.

(66) 여씨(呂氏)가 이르되, “남이 기쁘게 해 주기를 다 바라고 남이 충성스럽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남에게 바라기를 후하게 하는 것이니, 남에게 바라기를 후하게 하는데 남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이는 사귐이 온전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된다. 환(歡)은 나에게 좋게 해 주는 것이고 충(忠)은 나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나에게 좋게 해 주기를 바람이 깊지 않고 나에게 마음을 다해 주기를 꼭 바라지 않는다면 잇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呂氏曰 盡人之歡 竭人之忠 皆責人厚者也 責人厚而莫之應 此 交所以難全也 歡 謂好於我也 忠 謂盡心於我也 好於我者 望之不深 盡心於我者 不要其必盡 則不至於難繼也) 주045)

성백효(1993:157)과 이충구 외(2019a:192)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소학』의 번역이 주석의 내용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현대 국어로 옮기면, “「곡례」에서 이르되, 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기쁜 일을 한껏 베풀기를 바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정성스럽게 행함을 한껏 베풀기를 바라지 않나니, 그럼으로써 사귐을 온전하게 하느니라.”가 될 것이다. 언해문 중 ‘-과뎌’는 화자와 청자 외의 제 3의 인물의 행위를 소망할 때에 쓰이는 종결 형식이다. 이 언해문은 ‘-과뎌’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정확한 언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이 『소학언해』(2:67ㄴ)에서는 ‘曲禮예 오 君子 사 즐겨홈을 다디 아니며 사 졍셩을 다디 아니야  사괴욤을 오게 니라’로 바뀌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 즐겨홈을 다디 아니며 사 졍셩을 다디 아니야’이다. 한문 원문 ‘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만 놓고 보면 『소학언해』의 번역은 원문의 구조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주석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67) 主人은 문의 드로 올녀그로 고 손 문의 드로 왼녀그로 며 主人은 東階예 나가고 손 西階예 나갈 디니 소니 主人의게셔 갑거든 主人의 오 계졀에 나갈 디니 主人이 구틔여  후에 소니 다시 西階로 나갈 디니라(主人은 入門而右고 客은 入門而左며 主人은 就東階고 客은 就西階니 客若降等則就主人之階니 主人이 固辭然後에 客이 復就西階니라)〈3:37ㄱ-ㄴ〉

이 예문의 ‘드로ᄃᆡ’는 『소학언해』(2:68ㄴ)에서 ‘들어’로 바뀌었다. 이 책의 번역은 ‘문에 들어갈 때 문의 오른쪽 또는 왼쪽에 치우쳐 들어감’을 뜻하고, 『소학언해』의 번역은 ‘문에 들어간 뒤,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향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책의 번역이 『소학집해』의 주석과 부합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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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학 권3·4 해제

이유기(동국대학교 교수)

1. 소학

1.1. 소학의 간행

『소학(小學)』은 남송(南宋) 광종(光宗) 14년(1187)에 간행된 책이다. 편찬자는 주자(朱子, 1130~1200)와 그의 제자인 유청지(劉淸之, 1134~1190)이다. 주001)

<정의>유청지(劉淸之)의 자(字)는 자징(子澄)이다. 송(宋)나라 영종(寧宗)~이종(理宗) 때의 학자이다. 예양현위(澧陽縣尉)와 통판(通判) 등을 역임하였다. 주자의 제자였는데, 나이는 주자보다 네 살 아래였다.

* 이 역주서에 수록된 주석의 번역은 성백효(1993)과 이충구(1986a), 이충구 외(2019a)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역주의 체재에 관한 조언을 해 준 동국대학교 김일환 교수와, 주석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 준 동국대학교 양승목 박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이 책에 관한 많은 논의들 중에서 이 책의 편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검토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흔히 주자의 지시에 따라 유청지가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지만, 대개는 자세한 사정을 살펴보지 않은 채 옛 기록을 답습한 것이었다. 주자(朱子)는 ‘소학서제(小學書題)’에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교육 기관인 소학(小學: 초급 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재가 온전하게 전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주002)

<정의>삼대(三代)의 교재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때문이다.
자신이 이를 상당히 수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주003)
<정의>주자가 『소학』의 서제(書題)를 쓴 때가 ‘淳熙 丁未 三月朔旦’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소학언해』(1권 소학언해 서제: 3ㄱ)에 ‘旦(=아침)’의 독음이 ‘됴’로 적혀 있다. 그것은 조선 태조(太祖)의 왕이 된 후의 이름이 ‘旦’이어서, ‘旦’을 뜻이 같은 ‘朝’의 독음 ‘됴’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백효(1993:16) 참조. 율곡의 『소학집주』에는 ‘朝’로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소학서제’에서 유청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소학서제’뿐 아니라 ‘소학제사(小學題辭)’도 주자가 쓴 것인데, 이 글에서도 유청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004)
<정의>‘제사(題辭)’에는 필자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소학집성(小學集成)』의 별책(別冊)에서는 ‘제사’를 붙이면서 이를 ‘주씨제사(朱氏題辭)’라 이름붙이고, 주자가 이 ‘제사’를 쓴 사실이 『주자문집(朱子文集)』에 적혀 있음을 밝혔다. 『소학』에서 ‘제사’의 필자를 밝히지 않은 것은 주자 자신이 『소학』의 실제적 편찬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율곡의 『소학집주』에 실린 숙종(肅宗)의 ‘어제소학서(御製小學序)’에서도 주자가 옛날에 들은 것을 모았다고 밝혔을 뿐이다. 단지 책의 권위를 위해서 주자를 내세운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두 사람의 역할은 주자가 유청지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 편지에는 유청지가 작업한 내용과, 그에 대한 주자의 평가와 요청 및 수정 사실이 소상하게 드러나 있다. 주005)

<정의>이 편지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이충구 외(2019a:8-14)에 소개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에 의거한다면, 두 사람의 역할 비중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유청지가 기획을 하고 실제 작업을 하였지만, 전체적인 틀과 세부적인 내용에 걸쳐서 주자가 아주 철저하게 지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 각자가 구상한 편집 체재와 세부적인 내용을 서로 조율한 사정도 편지 속에서 드러난다. 이충구 외(2019a:14)에서 주자가 주편자(主編者)이고, 유청지는 주자를 도와 ‘기획과 원고 정리’를 한 것으로 본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 책을 두 사람의 공동 저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소학』의 개요에 대해서는 일찍이 원대(元代)의 허형(許衡, 1279~1368)이 정리한 바가 있다. 주006)

이 글은 허형(許衡)의 『소학대의(小學大義)』를 율곡이 요약한 것인데, 성백효(1993: 30-31)과 이충구 외(2019a:48)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1) 그 강목(綱目)이 세 가지가 있으니,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이요, 다음 계고(稽古)는 삼대(三代)에 성현이 이미 행한 자취들을 기록하여, 전편의 입교·명륜·경신의 말을 실증하였으며, 그 외편(外篇)인 가언(嘉言)·선행(善行)은 한대(漢代) 이래 현인(賢人)들이 말한 바의 아름다운 말과 행한 바의 선(善)한 행실을 실었으니, 그 강목은 또한 입교·명륜·경신에 지나지 않는다. 내편의 말을 부연하여 외편과 합해 보면 외편은 『소학』의 지류(枝流)임을 알 것이요, 외편의 말을 요약하여 내편과 합해 보면 내편은 『소학』의 본원(本源)임을 알 것이니, 내와 외를 합하여 양면으로 살펴보면 『소학』의 규모와 절목이 갖추어 있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다.(其綱目有三 立敎明倫敬身 次稽古所以載三代聖賢已行之迹 以實前篇立敎明倫敬身之言 其外篇嘉言善行 載漢以來賢者所言之嘉言 所行之善行 其綱目 亦不過立敎明倫敬身也 衍內篇之言 以合外篇 則知外篇者小學之枝流 約外篇之言 以合內篇 則知內篇者小學之本源 合內外而兩觀之 則小學之規模節目 無所不備矣)

이보다 더 자세한 개요는 율곡 이이(李珥)의 『소학집주』에 실린 「소학집주 총목」에 나온다.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 등 각 편의 개요를 정리한 것인데, 성백효(1993:31-38)과 이충구 외(2019a: 49-57)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주007)

‘입교편(立敎篇)’의 내용은 태교(台敎), 성장 단계별 교육 내용과 교육 지침, 「주례(周禮)」의 교육 내용과 형벌, 『왕제(王制)』에 기록된 교육 내용, 『제자직(弟子職)』에 기록된 학생의 바람직한 태도, 『논어』와 「악기(樂記)」에 기록된 학생의 본분과 교육의 지표 등이다. 그렇다면 ‘입교편(立敎篇)’은 학동(學童)이 아니라 스승과 부모에게 읽히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소학의 주석서와 번역서

명대(明代)에 들어 『소학』에 대한 많은 주석서가 출현하게 된다. 하사신(何士信)의 『소학집성(小學集成)』(1423), 오눌(吳訥)의 『소학집해(小學集解)』(1433), 진선(陳選)의 『소학증주(小學增註)』(1473), 주008)

진선(陳選)의 『소학증주(小學增註)』는 『소학구두(小學句讀)』 또는 『소학집주(小學集註)』로도 불린다.
정유(程愈)의 『소학집설(小學集說)』(1486)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주009)
진원(陳媛, 2012:100-18)에 이 주석서들의 간행 연대가 정리되어 있는데, 『소학집성』의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학집성』의 연대는 김주원(2002:36)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학집성(小學集成)』과 『소학집설(小學集說)』 및 율곡(栗谷)의 『소학집주(小學集註)』가 많이 이용되었다. 세종 때 『소학집성(小學集成)』의 목판본(1427년, 세종 9)과 활자본(1429년, 세종 11)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조선 초기에는 『소학집성(小學集成)』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후에는 주석이 더 간명하고 대중적인 『소학집설(小學集說)』이 많이 이용되었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은 김일손(金馹孫)이 1491년(성종 22)에 편자인 정유(程愈)로부터 직접 책을 받아 와서 곧바로 간행 보급하였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이 많이 읽히게 된 데에는 김안국(金安國, 1478년, 성종 9~1543년, 중종 38)의 공이 매우 컸다. 그는 경상 감사 시절에 『소학집설(小學集說)』을 판각하기도 하고, 경상도 유생들에게 『소학』 공부를 권장하여 『소학』 학습의 분위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주010)

『소학』 학습의 전통은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수수(授受) 관계를 통해서 이어졌고, 이이(李珥)의 『소학집주(小學集註)』 간행을 통해서 정점에 이르렀다.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다. 『소학』 학습의 전통은 박연호(2017)에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이러한 소학 열풍의 흐름 위에서 『번역소학』(1518)과 『소학언해』(1587)가 간행되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따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학』 학습 열풍에서 큰 분수령이 된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의 『소학집주(小學集註)』이다. 이 책은 1579년에 이미 편집이 이루어졌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612년(광해군 4)에야 6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17세기 말 이후에 와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1694년(숙종 20)에 이 책에 숙종의 ‘어제소학서’를 붙인 『소학집주(小學集註)』가 간행되고, 세자 교육에까지 활용되었다. 주011)

‘어제소학서’를 실제로 집필한 이는 이덕성(李德成)이다. 앞서 나온 여러 책에서 이미 언급된 사실이지만, 이 서문에서는 옛 삼대(三代)에는 8살이 되면 이 책을 읽혔다고 하였다(古之人 生甫八歲 必受是書 卽三代敎人之法也). 그리고 이 해에 세자가 8살이 되었으므로, 책의 간행이 세자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자가 나중에 경종(景宗)이 된다.
『소학』에 대한 숙종의 관심은 아들인 영조(英祖)에게 계승되었다. 1744년(영조 20)에 『어제소학언해(御製小學諺解)』가 간행되었고, 1766년(영조 42)에는 영조의 주석서 『어제소학지남(御製小學指南)』 2권 1책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주012)
우리나라 『소학』 주석서의 성립과 유통 상황은 정호훈(2009)에서 자세하게 밝혀졌다.

그 밖에도 『소학』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책이 여럿 있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1475년, 성종 6)에는 『소학』의 내용을 발췌 번역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013)

『내훈』의 내용 중 『번역소학』이나 『소학언해』와 중복되는 부분은 이현희(1988: 208-209)에 〈표〉로 정리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에는 박문호(朴文鎬)가 쓴 6권 6책의 필사본 『여소학(女小學)』이 나왔는데, 이 책에도 『소학언해』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 말기 고종 때에는 박재형(朴在馨)이 편찬한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이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저술은 1884년에 끝났으나, 책이 간행된 것은 1912년이다. 『소학』의 내용을 발췌하고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첨가하여, 6권 2책의 목판본으로 만들었다.

한문본 『소학』에 대한 현대의 역주서로는 성백효(1993)과 이충구 외(2019a, b)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율곡 이이의 『소학집주』에 대한 역주서인데, 원문과 주석을 번역하고 필요에 따라 그 밖의 주석을 가하였다.

2. 번역소학

2.1. 번역소학의 편찬 시기와 편찬자

『번역소학』은 1518년(중종 13, 무인년)에 찬집청(撰集廳)에서 1,300질이 간행되었다. 주014)

“『소학』 1천 3백 부를 찍어 조관(朝官)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또 배울 만한 종친을 골라서 아울러 나누어 주었다.(印小學 一千三百件 遍賜朝官 而又擇可學宗親 幷賜之)”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 무인), 7월 2일. 홍문관(弘文館)에서 중종에게 이 책의 간행을 건의한 것이 중종 12년 6월 27일이었으니, 그로부터 1년만에 책을 완성한 것이다(남곤의 발문에 따르면 9개월이 걸렸다고 하는데, 번역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중략)… 성상께서는 심학(心學)에 침잠하고 인륜을 후하게 하기를 힘쓰시어, 이미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을 명찬(命撰)하시고 또 『소학(小學)』을 인행(印行)토록 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코자 하시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삼강행실』에 실려 있는 것은, 거의가 변고와 위급한 때를 당했을 때의 특수한 몇 사람의 격월(激越)한 행실이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 행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소학』은 곧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인데도 일반 서민과 글 모르는 부녀들은 독습(讀習)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용(日用)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여계(女誡)』·『여측(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인반(印頒)하게 하소서. …(중략)…’ 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홍문관에서 아뢴 뜻이 지당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라.’”(弘文館啓曰 …(중략)… 聖上沈潛心學 懋厚人倫 旣命撰 續三綱行實 又命印小學 欲廣頒中外 意甚盛也 然三綱行實所載 率皆遭變 故艱危之際 孤特激越之行 非日用動靜常行之道 固不可人人而責之 小學之書 廼切於日用 而閭巷庶民及婦人之目不知書者 難以讀習矣 乞於群書內 最切日用者 如小學如列女傳如女誡女則之類 譯以諺字 仍令印頒中外 …(중략)… 傳于政院曰 弘文館所啓之意至當 其令該曹 磨鍊施行)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정축), 7월 2일.
이 책 제 10권의 맨 끝, 즉 남곤(南袞)의 발문(跋文) 뒤에 번역에 참여한 17명 중 16명의 열함(列銜)이 보인다. 책에 적힌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주015)
김정국(金正國)은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이다. 종래에는 참여자가 16명으로 알려졌으나, 열함의 첫 줄은 비어 있다. 본래는 17명이었는데, 한 명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2) 번역소학 편찬자 열함

김전(金詮), 남곤(南袞), 최숙생(崔淑生), 김안로(金安老), 윤탁(尹倬),조광조(趙光祖), 김정국(金正國), 김희수(金希壽), 공서린(孔瑞麟),정순명(鄭順明), 김영(金瑛),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채소권(蔡紹權), 유인숙(柳仁淑), 정응(鄭譍)

이 명단에 조광조(趙光祖)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광조는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한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며, 『소학』 교육 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기묘사림(己卯士林)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번역소학』의 간행에 조광조의 역할이 아주 컸으리라 짐작된다. 주016)

이 책을 소개한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이 책의 편찬자를 ‘김전(金詮), 남곤(南袞), 최숙생(崔淑生) 등’이라고 적고 있다. 당연한 처사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조광조의 참여 사실이 가려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2.2. 번역소학의 체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소학집성』과 같은 10권으로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제 10권이 마지막 권이다. 그런데 이 책이 10책으로 이루어졌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아마 1책으로 묶인 제 6·7권이 발견되기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주017)

『번역소학』의 저본인 『소학집성(小學集成)』은 10권 5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세종대에는 1427년(세종 9)과 1429년(세종 11)에 각각 목판본과 활자본으로 된 『소학집성(小學集成)』을 간행하였는데, 이 역시 10권 5책이다. 제 1권은 본문의 첫 부분인 ‘立敎’로 시작한다. ‘서제(書題), 목록(目錄), 강령(綱領), 제사(題辭) …’ 등은 모두 별책(別冊)에 담았다. 이 별책은 책수(冊數)에는 포함되지만 권수(卷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즉 책수는 별책을 포함하여 5책이고, 권수는 별책을 제외하고 10권이다. 한편 세종대 활자본 『소학집성』의 간행 연대가 1428년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는 『세종실록』의 세종 10년 9월 8일 기사를 오해한 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판부사(判府事) 허조(許稠)가 아뢰었다. ‘… 청컨대 신(臣)이 일찍이 올린 『집성소학(集成小學)』을 주자소(鑄字所)에 내려보내서 인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判府事許稠啓 …請下臣所曾進集成小學于鑄字所印之 從之)”가 그것인데, 이를 간행 기사로 해석한 듯하다. 정인지(鄭麟趾)의 발문(跋文)에는 선덕(宣德) 4년 8월로 적혀 있다. 선덕 4년은 1429년(세종 11)이다.

홍윤표(1984b)에서는 제 6·7권(1책)의 영인본에 붙인 해제에서 이 책이 10권 8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 후에 발견된 제 3·4권도 6·7권처럼 1책으로 묶여져 있으므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제 1·2·5권 중 제1·2권이 각 권 1책이라면 홍윤표(1984b)의 추정대로 10권 8책이 되는 셈이다. 주018)

홍윤표(1984a)는 제 8·9·10권의 해제이고 홍윤표(1984b)는 제 6·7권의 해제인데, 같은 날짜에 발행된 두 영인본에 붙어 있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는 이 책이 10권 10책이라고 하였고, 뒤의 글에서는 이 책이 10권 8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뒤의 글이 나중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학언해』는 제 1권이 15장(張)이고 제 2권이 78장(張)이다. 이 사실만으로 추정한다면, 『번역소학』에서 제 1·2권을 1책으로 묶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제 1·2권을 1책으로 묶으면 『소학언해』 기준으로는 제 1책이 93장이 되는 셈이어서 분량이 많아 보이지만, 주019)

두 책의 각 면당 분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번역소학』은 각 면 19자 9행이고 『소학언해』는 각 면 19자 10행이다.
『번역소학』 제 9권은 이보다 훨씬 많은 108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번역소학』이 저본으로 삼은 『소학집성(小學集成)』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1429년(세종 11)에 간행된 『소학집성』 제 1권의 권수(卷首)에는 ‘서제(書題), 강령(綱領), 제사(題辭), 도목(圖目), 도설(圖說), 목록(目錄)’이 실려 있는데, 이 중 ‘도설(圖說)’의 분량이 무려 34장(張)에 이른다. 주020)
이 ‘도(圖)’를 이충구 외(2019a, b)에서는 각각 본문의 해당 내용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제시하였다.
만약 『번역소학』 제 1권에 붙어 있을 권수(卷首)에 도목(圖目)과 도설(圖說)이 포함되어 있다면, 제 1권만으로 1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렇다면 홍윤표(1984b)의 추정대로 이 책은 10권 8책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주021)
『소학언해』는 6권 4책으로 만들어졌다. 제 1·2권, 제 3·4권, 제 5권, 제 6권을 각각 한 책으로 묶었다. 『소학언해』를 6권으로 만든 것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을 따른 것이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卷首)는 ‘편목(篇目), 정유(程愈)의 소학집설서(小學集說序), 범례(凡例), 총론(總論), 제사(題辭), 서제(書題)’로 구성되어 있고, 『소학언해』의 권수(卷首)는 ‘범례, 서제, 제사’의 한문과 언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이 책의 제1·2·5권이 전해지지 않지만, 10권 모두의 체재는 알 수 있다. 한문본이나 『소학언해』를 참고하면, 제 1권의 앞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다 알 수 있다. 전해지지 않는 제 5권의 내용은 『소학언해』 제 4권과 일치한다. 아래에 10권 전체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되, 구체적인 내용이 실린 장차(張次)는 제 3·4권에서만 밝히기로 한다. 〈표〉를 제시하기 전에 제 3·4권의 낙장 부분의 내용과 분량을 먼저 밝히기로 한다. 제 3권의 앞 부분과 제 4권의 뒷 부분에 낙장이 있지만, 그 내용과 분량은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의 제 3권은 앞의 두 장(1ㄱ~2ㄴ)이 떨어져 나가고, 3ㄱ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첫 면은 제 2편의 제 2장인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첫 부분으로 시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체재는 『소학집성』을 따르고 있는데, 『소학집성』 제 3권이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로 시작되고, 『번역소학』 제 3권의 3ㄴ은 『소학집성』 제 3권의 2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학집성』(3:1ㄱ)의 권수제(卷首題) 바로 뒤에는 ‘明倫第二之下’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바로 “禮記曰 將適公所 …”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제 3권의 첫 면은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첫 부분으로 시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소학언해』와의 대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번역소학』(3:3ㄴ)의 제 1행은 『소학언해』(2:38ㄱ)의 마지막 행(行)과 내용이 같은데, 『소학언해』 제 2권에서는 36ㄱ의 제 9행에서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가 시작된다.

둘째, 제 4권의 뒤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지만, 제 4권은 제 3편 ‘경신(敬身)’의 ‘음식지절(飮食之節)’의 마지막에서 끝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 4권의 남아 있는 부분 중 마지막 장차(張次)가 28ㄴ인데, 이 부분은 『소학집성』 제 4권의 30ㄱ에 해당하고, 『소학집성』 제 4권은 32ㄱ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소학집성』은 제 4권에서 ‘음식지절(飮食之節)’이 완전히 끝나고, 제 5권에서는 새로운 내용인 ‘계고(稽古)’로 시작된다.

그리고 제 4권의 낙장 부분은 세 장임이 거의 분명하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번역소학』 제 4권과 『소학언해』 제 3권은 모두 ‘경신(敬身)’으로 시작된다. 둘째, 『번역소학』 제 4권의 남은 부분 중 마지막 면(28ㄴ)의 내용은 『소학언해』(3:25ㄴ)의 제 8행에 해당한다. 넷째, 『소학언해』 제 3권의 남은 부분이 총 47행(3:25ㄴ 제 9행~28ㄱ 제 5행)이다. 이것은 권미제(卷尾題)와, 권미제 앞의 비어 있는 3행을 포함한 것이다. 다섯째, 『번역소학』은 각 면 19자 9행이고 『소학언해』는 각 면 19자 10행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여 추산하면, 『번역소학』 제 4권은 31ㄴ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표〉는 『번역소학』의 분권(分卷) 체재를 정리하고, 『소학언해』의 분권 체재와 비교하여 보인 것이다. 주022)

1587년(선조 20)에 간행된 도산서원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소학언해』 제 1권의 내용은 ‘입교(立敎)’인데, ‘입교’ 앞에 ‘범례(凡例), 서제(書題), 제사(題辭)’로 구성된 권수(卷首)가 붙어 있다. 이 권수와 ‘입교(立敎)’를 합한 것이 총 16장(張)이다.

〈표〉 『번역소학』과 『소학언해』의 분권 체재

내외편권차내용장수(張數)소학언해
내편1권〈추정〉
제 1편 입교(立敎) 주023)
제 1권의 ‘입교(立敎)’ 앞에는 권수(卷首)가 붙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권수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소학집성』과 『소학언해』의 권수이다. 1429년(세종 11)에 간행된 『소학집성(小學集成)』의 권수에는 ‘서제(書題), 강령(綱領), 제사(題辭), 도목(圖目), 도설(圖說), 목록(目錄)’이 들어 있고, 『소학언해』의 권수에는 ‘범례(凡例), 서제(書題), 제사(題辭)’가 들어 있다. 『소학집성』에 실린 도목(圖目)의 분량이 1장(張)이고 도설(圖說)의 분량이 34장(張)인데, 이 두 부분은 『소학언해』에는 없다. 『소학언해』에 이 부분이 없는 것은 정유(程愈)의 『소학집설(小學集說)』의 체재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학언해』의 권수가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소학집설(小學集說)』의 권수에는 ‘편목(篇目), 정유의 집설서(集說序), 범례(凡例), 총론(總論), 제사(題辭), 서제(書題)’가 실려 있다.
〈참고〉
『소학언해』 제 1권은 16장 분량
1권(16장)
2권〈추정〉
제 2편 명륜(明倫)
(1) 명부자지친(明父子之親)
〈참고〉
『소학언해』에서는 제 2권 중 35장 분량
2권(78장)
3권(2)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 1ㄱ~11ㄱ
(3) 명부부지별(明夫婦之別) 11ㄱ~23ㄴ
(4) 명장유지서(明長幼之序) 23ㄴ~33ㄴ
(5) 명붕우지교(明朋友之交) 33ㄴ~39ㄱ
(6) 통론(通論) 39ㄱ~47ㄴ
총 47장(추정)
4권제 3편 경신(敬身)
(1) 명심술지요(明心術之要) 1ㄱ~9ㄱ
(2) 명위의지칙(明威儀之則) 9ㄱ~21ㄴ
(3) 명의복지제(明衣服之制) 21ㄴ~25ㄴ
(4) 명음식지절(明飮食之節) 25ㄴ~31ㄴ
총 31장(추정)3권(28장)
5권〈추정〉
제 4편 계고(稽古)
(1) 입교(立敎)
(2) 명륜(明倫)
(3) 경신(敬身)
(4) 통론(通論)
〈참고〉
『소학언해』 제 4권 55장
4권(55장)
외편6권제 5편 가언(嘉言)
(1) 광입교(廣立敎) 2ㄱ~37ㄴ
총 37장 주024)
‘가언(嘉言)’이 시작되기 전에 한 장 반에 걸쳐서 외편(外篇)을 만든 동기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5권(121장)
7권(2) 광명륜(廣明倫) 1ㄱ~50ㄴ총 50장
8권(3) 광경신(廣敬身) 1ㄱ~43ㄴ총 43장
9권제 6편 선행(善行)
(1) 실입교(實立敎) 1ㄱ~19ㄴ
(2) 실명륜(實明倫) 19ㄴ~108ㄴ
총 108장6권(123장) 주025)
제 6권 123ㄴ에서 ‘경신(敬身)’이 끝나고, 이어서 만력(萬曆) 15년 4월에 쓴 이산해(李山海)의 발문(跋文)과, 간행에 관여한 32명의 열함(列銜)이 나온다. 만력 15년은 1587년(선조 20)이다. 32명의 열함(列銜) 중 한 사람이 삭제되었는데, 삭제된 이는 정여립(鄭汝立)이다. 이현희(1993:237)과 민병준(1990:37) 참조.
10권(3) 실경신(實敬身) 1ㄱ~35ㄴ총 35장 주026)
제 10권은 35ㄴ에서 끝나고, 이어서 두 장 반(1ㄱ~3ㄱ)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고, 그 뒤에 한 장에 걸쳐서 번역에 참여한 16명의 열함(列銜)이 나온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본래는 17명이었는데 한 명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두 책의 분권 방식을 비교해 보면, 『번역소학』은 편목(篇目)과 분량을 다 고려하였고, 『소학언해』는 편목(篇目)에 따라 분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책이 각각 체재 면의 저본으로 삼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소학집설(小學集說)』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분권 방식 면에서 『번역소학』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같고, 『소학언해』는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다.

2.3. 『번역소학』의 현전본과 영인 상황

이 책은 1518년(중종 13)에 찬집청(撰集廳)에서 간행하였다. 원간본은 을해자 목판본으로 추정되는데, 이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16세기 이후에 복각(覆刻)된 목판본만이 전하고 있다. 주027)

원간본이 을해자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의 복각본에 근거한 것이다.
이 중간본의 간행 시기는 알 수 없다. 교정청(校正廳)에서 간행한 『소학언해』(1587년)보다 앞선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이 책은 저본인 『소학집성』의 체재와 같은 10권으로 만들어졌는데, 주028)

『번역소학』이 10권으로 이루어진 것은 『소학집성(小學集成)』과 같지만, 다른 면에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소학』은 인용문의 출처에 따라 장(章)이 바뀌는데,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의 표시 방법 면에서 이 책은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다. 즉 새로운 장(章)이 시작될 때 『소학집성(小學集成)』에서는 ‘一, 二, 三 …’과 같은 일련 번호를 붙였고, 『소학집설(小學集說)』에서는 ○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소학집설(小學集說)』과 같이 ○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 새로운 편(篇)이 시작되는 위치에서는 ○ 표시가 없다.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첫 장(章)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소학언해』도 이 책과 같은 방식을 취하였다.
그 중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제 3·4권(국립한글박물관), 제 6·7권(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제 8권(고려대학교 도서관) 제 9권(서울대학교 가람문고), 제 10권(국립중앙도서관)이다. 총 10권 중 제 1·2·5권을 제외한 총 7권이 전해지는 셈이다. 영인은 제 3권을 제외하고 다 이루어졌다. 홍문각에서 제 8·9·10권(1982년)과 제 6·7권(1984)을 영인하였고, 『서지학보』(24집)에서 제 4권(2000년)을 영인하였다. 역주서로는 다섯 권에 대한 역주를 한 권으로 묶은 『역주 번역소학 권 6·7·8·9·10』(정호완 2011)이 있다.

2.4. 국어학적 특징

이 책의 간행 배경, 서지 정보, 국어학적 특징 등은 이미 여러 국어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 책의 국어학적 의의와 특징은 이기문(1960), 이숭녕(1973), 안병희(1979), 홍윤표(1984a), 홍윤표(1984b), 이현희(1988), 정재영(2000)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혀졌고, 서지 사항은 제 8·9·10권의 해제인 홍윤표(1984a)와 제 6·7권의 해제인 홍윤표(1984b), 제3·4권의 해제인 정재영(2000)에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밝혀진 내용의 반복은 가능한 한 지양하고, 제 3·4권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029)

이 책에서는 ‘ㅸ, ㆆ’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ㅿ’은 쓰이기는 하나 ‘ㅇ’으로 바뀐 예도 있다. ‘ㆁ’은 원칙적으로 종성에서만 사용하였데, 예외적으로 초성이라 하더라도 높임의 선어말 어미 ‘-ᅌᅵ-’에서는 사용하였다. 그러나 종성에서도 ‘ㆁ’이 ‘ㅇ’으로 변한 것이 많다. 방점은 구결 달린 원문과 언해문에 다 찍혔다.

이 책의 번역 방식이 의역(意譯)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지적된 사실이다. 이러한 지적은 『소학언해』의 ‘범례(凡例)’에서도 나타난다.

(3) 무인년(戊寅年) 책은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고자 하여 글자의 뜻 밖의 주석에 있는 말을 아울러 집어넣어서 새겼으므로 번거롭고 불필요한 곳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戊寅本 欲人易曉 字義之外 幷入註語爲解 故未免有繁冗處 今卽刪去枝辭 一依大文 逐字作解 有解不通處則分註解之)

무인년(戊寅年) 책, 즉 『번역소학』이 주석의 내용을 언해에 반영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번역소학』에서는 협주를 전혀 쓰지 않는 대신 주석의 내용을 번역에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문과 주석에 없는 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소학언해』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서, 필요에 따라 주석의 내용을 협주에 넣었다. 단 협주에 어미(魚尾)는 표시하지 않았는데, 이 글에서는 대비를 위해 『소학언해』의 내용을 제시할 경우에 편의상 협주를 어미로 묶어서 표시하기로 한다.

(4)가. 계야 조 신 고며(齊戒以告鬼神고)〈3:11ㄴ〉

 나. ᄌᆡ계ᄒᆞ여 ᄡᅥ 鬼神<원주>【조샹을 닐옴이라】ᄭᅴ 告ᄒᆞ며〈소언 2:45ㄴ〉

(5)가. 님금이 라 시며 니브라 신 命이 잇디 아니커시든 간도 즉재 며 닙디 마롤 디니라(君이 未有命이어시든 弗敢卽乘服也ㅣ니라)〈3:5ㄴ〉

 나. 님금이 命이 잇디 아니커시든 敢히 즉제 ᄐᆞ며 닙디 몯ᄒᆞᄂᆞ니라〈소언 2:40ㄱ-ㄴ〉 주030)

이 책에서는 원문의 ‘敢’을 ‘잠ᄭᅡᆫ도’로 번역하고 있다. 『소학언해』에서는 ‘敢히’로 바뀌었다.

(6)가. 제 가질 모긔셔 해 가죠ᄆᆞᆯ 구티 마롤 디니라(分毋求多ㅣ니라)〈4:4ㄱ〉

 나. ᄂᆞᆫ홈애 함을 求티 말올 디니라〈소언 3:3ㄴ〉

이 책에서는 ‘ㅿ’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으나, ‘ㅇ’으로 변화한 것도 보인다. ‘어버ᅀᅵ’(3:16ㄱ, 3:24ㄱ, 3:41ㄴ, 3:42ㄱ, 4:1ㄴ, 4:23ㄴ)도 있고, ‘어버이’(3:22ㄴ, 3:39ㄴ)도 있다. 다른 권(卷)에서도 ‘어버ᅀᅵ(9:8ㄱ), ᄉᆞᅀᅵ(6:24ㄴ)’와 ‘어버이(9:8ㄴ), ᄉᆞ이(8:11ㄴ, 10:9ㄴ)’가 다 보인다.

15세기의 일반적인 언해서에서는 언해문에만 한자음을 달고, 원문에는 한자음이 없이 한글 구결만 달았는데, 이 책에는 언해문뿐 아니라 원문에도 한자음이 달려 있다. 원문에 한자음을 단 것은 아동이나 부녀자의 학습을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031)

이 책을 부녀자들에게도 읽히고자 하는 의도는 남곤(南袞)의 발문(跋文) 중 “우리말로 번역하여 널리 인쇄하여 배포하면 비록 어린이와 부녀자라 하더라도 책을 펴자마자 금방 깨달을 것이니, 백성을 순치(順治)하는 방법으로는 마땅히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如以方言 飜而譯之 廣印流布 則雖兒童婦女 開卷便曉 籲民之方 宜無急於此者)”란 말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소학』은 결코 아동이나 부녀자를 위한 책만은 아니었다. 남곤의 발문에는 중종(中宗)이 이전에 경연(經筵)에서 한 다음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에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일찍이 이 책을 읽었지만 그때에는 오직 입으로 읽기를 일삼았을 뿐이어서 그 뜻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때를 놓쳐 학문을 그르친 것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에 경연에서 옛날에 읽은 것을 다시 연마하려 하노니, 아마 보탬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를 위하여 강론해 달라.(予幼嘗讀此 然惟口讀是事耳 未嘗究極其旨意 今而思之 頗有後時失學之悔 玆欲於經筵 重理舊讀 庶幾有所補益 爾其爲予講之)”

이 책의 한자음 표기 중 몇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毋’이다. 이 글자는 본문에서만 보이는데, 모두 ‘모’로 나타난다(3:27ㄴ, 3:28ㄱ, 4:2ㄴ, 4:3ㄴ, 4:4ㄱ, 4:10ㄱ, 4:11ㄴ …). 그런데 『소학언해』에서는 예외 없이 ‘무’로 바뀌었다(2:59ㄴ, 2:60ㄱ, 3:2ㄴ, 3:3ㄴ, 3:3ㄴ, 3:9ㄴ, 3:11ㄱ …). 예가 아주 풍부하다.

‘男람子ᄌᆞ’(3:15ㄱ)는 원문의 예인데, 언해문에서는 ‘男남子ᄌᆞ’로 나타난다. 『소학언해』(2:48ㄱ-ㄴ)의 원문과 언해문에는 모두 ‘男남子ᄌᆞ’로 적혀 있다. 다른 문헌에 ‘男’의 독음이 ‘람’으로 적힌 예가 없으므로 오각일 가능성이 있으나, ‘ㄴ’이 ‘ㄹ’로 적히는 근대국어의 일반적인 현상이 여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언해문에 ‘親친迎연’이 나오는데(3:15ㄱ), 원문에는 ‘親친迎여ᇰ’으로 적혀 있고, 『소학언해』(2:48ㄴ)에서는 ‘친히 마자’로 나타난다. 이 책(3:12ㄴ)의 언해문에도 ‘친연’이 나오지만, 이는 원문에 없는 말을 보충한 것이다. 원문에서는 이 대목 바로 뒤에 ‘迎’이 나오지만, 그 경우에는 독음이 ‘여ᇰ’으로 적혀 있고, 언해문에서는 ‘마자’로 번역되어 있다. 다른 문헌에 ‘迎’의 독음이 ‘연’으로 표기된 예가 또 있기는 하다. ¶諸졔聖셔ᇰ을 迎연逢보ᇰ와 오시게 코져 린댄〈진언권공 24ㄱ〉. 그러나 모두 오각으로 보인다.

‘告’의 독음은 ‘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래 예문의 ‘가’의 화살표 왼쪽에 적힌 것은 원문의 것이고 오른쪽에 적힌 것은 언해문의 것이다. ‘나’는 해당 예문을 제시한 것이다.

(7)가. 告:고 → :고〈3:11ㄴ〉

 나. 혼인ᄒᆞᆯ 날와 ᄃᆞᆯ로 님금ᄭᅴ 고ᄒᆞ며

 다. 告:고 → 告:고〈소언 2:45ㄱ-ㄴ〉

(8)가. 告:고 → :고〈3:14ㄱ-ㄴ〉

 나. 혼인ᄒᆞᄂᆞᆫ 례ᄂᆞᆫ 萬世의 비르소미니 … 말ᄉᆞᄆᆞᆯ … 고호ᄃᆡ 고호ᄃᆡ:

<풀이>‘고호ᄃᆡ’의 객체는 사돈(査頓)이다.

 다. 告:고 → 告:고〈소언 2:47ㄴ-48ㄱ〉

(9)가. 告:고 → 엳ᄌᆞ올〈3:29ㄴ〉

 나. 君子ᄅᆞᆯ 뫼셔 안자셔 말ᄉᆞᆷ 엳ᄌᆞ올 사ᄅᆞ미

 다. 告:고 → 告고〈소언 2:61ㄴ〉 주033)

이 예의 언해문에서 평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이다.

(10)가. 告·곡 → 告:고〈3:34ㄴ〉

 나. 子貢이 버들 묻ᄌᆞ온대 孔子ㅣ ᄀᆞᄅᆞ샤ᄃᆡ 져ᇰ셔ᇰ으로 告ᄒᆞ고 어딘 일로 니ᄅᆞ다가

 다. 告·곡 → :고〈소언 2:66ㄱ〉

성조 표시가 다른 것이 있지만, 그 혼란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이한 것은 (10다)의 ‘·곡’이다. 『훈몽자회』(훈몽자회 比叡 하 12ㄴ)와 『유합』(하 39ㄴ)에 ‘고할 고’로 나타나고, 『자전석요』(상 15ㄴ)에 ‘청할 곡, 뵈일 곡’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의 ‘고’와 ‘곡’이 의미에 따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10)의 경우는 ‘告’의 객체가 주체와 신분이 대등한 벗(友)이어서 나머지 경우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出·츌必·필告·곡ᄒᆞ며 反:반必·필面:면ᄒᆞ며’(소언 2:8ㄴ)에서는 ‘告’의 객체가 주체보다 상위자인 부모이다. ‘告’의 독음에는 ‘알리다’를 뜻할 때의 ‘고(거성, 號韻), 곡(입성, 沃韻)’과 ‘심문하다, 국문하다’를 뜻할 때의 ‘귝/국(입성, 屋韻)’ 세 가지가 있다. ‘고’는 『광운(廣韻)』의 ‘古到切’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곡’은 『광운』의 ‘古沃切’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出必告ᄒᆞ며 反必面ᄒᆞ며’(소언 2:8ㄴ)의 ‘告’는 『소학집성』(2:10ㄱ)에 ‘工毒反’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오늘날 경전의 ‘告’에 대해 『석문(釋文)』과 주자(朱子)의 주석에서는 모두 ‘谷’으로 읽고 있다.(今經傳告字 釋文朱註皆讀谷)”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고’로 읽힐 때와 ‘곡’으로 읽힐 때의 의미 차이는 없는 듯하다. 『송자대전(宋子大全)』(권 103, 書, 答尹爾和, 丁巳 10월 26일)에는 이에 대한 윤이화(尹爾和)의 질문과 송시열(宋時烈)의 답이 기록되어 있다. “‘告’ 자의 음은 ‘古’라고도 하고 ‘谷’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구별합니까?(告字音或古或谷 何以爲別)”라는 윤이화의 질문에 송시열은 “‘告’의 음이 ‘工毒反’이라고 하는 것이 『가례(家禮)』에 보이지만, 그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告音之工毒反者 見於家禮 然其義 則未見其有異也)”라고 답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의미에 따라 ‘고’와 ‘곡’을 구별할 근거가 없는 듯하다.

이제 이 책의 어휘 중 특이한 몇 가지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모로매’는 『소학언해』에서 예외 없이 ‘반ᄃᆞ시’로 바뀌었다. 이 현상은 ‘모로매’의 소멸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11) 모로매(3:6ㄴ, 3:7ㄴ, 3:25ㄴ, 4:24ㄱ)

  → 반ᄃᆞ시(소언 2:41ㄱ, 2:42ㄱ, 2:58ㄱ, 3:21ㄴ)

이 책과 『소학언해』에서는 ‘삼가ᄒᆞ다’가 많이 보인다.

(12)가. 삼가호매(3:16ㄴ) → 삼가매(소언 2:50ㄱ)

 나. 삼가호ᄃᆡ(3:46ㄴ) → 삼가기(소언 2:76ㄴ)

 다. 삼가ᄒᆞ야(4:8ㄴ) → 삼가ᄒᆞ고(소언 3:7ㄴ)

 라. 삼가ᄒᆞ면(4:22ㄴ) → 삼가ᄒᆞ면(소언 3:20ㄱ)

  cf. 음식을 모로매 삼가고 존졀며〈번역소학 8:16ㄱ〉

중세 국어 시기와 근대 국어 시기 여러 문헌에서 ‘삼가다’가 더 일반적이었지만, ‘삼가ᄒᆞ다’의 예도 적지 않다.

(13)가. 모로매 모다 삼가라〈석보상절 23:13ㄱ〉

 나. 압흘 딩계고 뒤흘 삼가니 황왕의 뎐측이 기리 드리웟도다〈천의소감언해 진쳔의쇼감전 7ㄱ〉

(14)가. 너의 籌畵 參預호 삼가라〈두시언해 초간본 23:30ㄱ〉

 나. 禮로  삼가더니〈속삼강행실도 효 34ㄱ〉

‘삼가ᄒᆞ다’는 동사 어간 ‘삼가-’에 연결 어미 ‘-아’가 붙은 ‘삼가’와 ‘ᄒᆞ다’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아 ᄒᆞ다’는 형용사를 동사화하는 장치인데, 심리 동사인 ‘삼가다’가 [동작성]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삼가하다’를 비표준어로 간주하고 있는데, ‘삼가하다’가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이와 관련된 규정을 재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의 ‘-ㄹ 저긔, -ㄹ 제’는 예외 없이 『소학언해』에서 연결 어미 ‘-ㄹᄉᆡ’로 바뀌었다.

(15)가. 드르실 저긔(3:4ㄱ) → 들으실ᄉᆡ(소언 2:38ㄴ)

 나. 들 저긔(4:12ㄱ) → 들ᄉᆡ(소언 3:10ㄴ)

 다. 의론ᄒᆞᆯ 제(3:25ㄴ) → 의논ᄒᆞᆯᄉᆡ(소언 2:58ㄱ)

『소학언해』에서 ‘-ㄹᄉᆡ, -ㄹᄊᆡ’가 인과 관계를 나타내지 않고 시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현희(1988:212-214)에서 이 변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

(16) 리 이브로 후려먹디 말며(毋嚃羹며)〈4:26ㄴ〉

‘ᄀᆡᇰᄭᅥ리’는 ‘국의 건더기’인데, 『소학언해』(3:23ㄴ)에서는 ‘국거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거리’의 의미가 특이하다. 현대 국어의 ‘국거리’는 ‘국을 끓이는 데 넣는 고기, 생선, 채소 따위의 재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즉 오늘날의 ‘거리’는 ‘조리하기 전의 재료’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ᄀᆡᇰᄭᅥ리’의 ‘거리’는 ‘조리가 다 된 국에서 국물을 제외한 건더기 부분’을 뜻하고 있다.

(17) 내 마리 올여도 구틔여 올 디레 두디 마롤 디니라(直而勿有ㅣ니라)〈4:4ㄱ〉

이 번역은 원문에 없는 말을 아주 많이 보충한 것이다. 번역문을 현대 국어로 옮기면, “내 말이 옳아도 굳이 옳다고 미리 단정하여 말하지 말지니라.” 정도가 될 것이다. 『소학집해』에는 주자의 주석 “직이물유(直而勿有)는 나의 소견을 개진(開陳)하여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해야지, 장악하고 선입견을 두어 오로지 강변(强辯)을 힘써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直而勿有 謂陳我所見 聽彼決擇 不可據而有之 專務强辨)”란 내용이 실려 있다. 문제는 ‘디레’이다. 여기의 ‘디레’는 ‘선입견’ 정도에 해당하는 명사이다. 종래의 고어사전에서는 표제어 ‘디레’를 들기는 하였지만, 뜻풀이를 하지 않은 예도 있고, 아예 표제어로 싣지 않은 경우도 있다.

타동사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목적어 없이 쓰이면서 부사어와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소학언해』에서도 많은 예가 보인다.

(18)가. 님금 뫼셔〈3:6ㄱ〉 → 님금ᄭᅴ 뫼와셔〈소언 2:40ㄴ〉

 나. 님금 뫼셔〈3:7ㄱ〉 → 님금ᄭᅴ 뫼셔〈소언 2:41ㄴ〉

 다. 先生ᄭᅴ 뫼셔〈3:28ㄴ〉 → 先生ᄭᅴ 뫼셔〈소언 2:60ㄴ〉

 라. 얼우신ᄭᅴ 뫼셔〈3:30ㄴ〉 → 얼운의게 뫼셔〈소언 2:62ㄱ〉

 마. 얼우신ᄭᅴ 뫼셔〈3:31ㄱ〉 → 얼운의게 뫼셔〈소언 2:62ㄴ〉

(19)가. 君子ᄅᆞᆯ 뫼셔〈3:29ㄴ, 30ㄱ, 31ㄴ〉 → 君子ᄭᅴ 뫼셔〈소언 2:61ㄴ, 61ㄴ, 63ㄱ〉

 나. 君子ᄅᆞᆯ 뫼ᅀᆞ와〈3:29ㄱ〉 → 君子ᄭᅴ 뫼셔〈소언 2:61ㄱ〉

(20) 君 뫼셔 食실 제 君이 祭시거든〈논어언해 2:60〉

(21) 님금 뫼셔 밥 머그실 저긔〈내훈 1:9ㄱ〉

(18가-마)는 이 책과 『소학언해』가 같은 양상을 보인 예들이고, (19가, 나)는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이 책에서는 목적어와 호응하고 『소학언해』에서는 부사어와 호응하는 예이다. (20)은 『논어언해』의 예인데, 원문은 (18가)의 원문과 같다. 제시된 예 중 『내훈』의 예인 (21)이 시기적으로는 가장 앞선다. 원문은 역시 (18가)의 원문과 같다.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타동사로 쓰인 예들을 더 보도록 하자.

(22)가. 부텻 舍利 뫼셔다가 供養리라 야〈석보상절 23:46ㄱ〉

 나. 리 사 마자 馬廏에 드러 오나 聖宗 뫼셔 九泉에 가려 시니〈용비어천가 109〉

 다. 群臣이 武皇을 뫼도다〈두시언해 초간본 14:10ㄴ〉

이로 보아 이 동사가 타동사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뫼시다, 뫼ᅀᆞᆸ다’가 목적어 없이 부사격 조사 ‘ᄭᅴ’로 이루어진 부사어와 호응하는 예가 결코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목적어 없이 부사어와 호응하는 ‘뫼다, 뫼시다’ 앞에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일 가능성이고, 둘째는 ‘뫼다, 뫼시다’가 타동사 외에 자동사로 쓰인 것일 가능성이다. 결정적인 근거가 보이지 않아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하기 어렵다.

(23) 昭陽殿 안햇 第一엣 사미 輦에 同야 님그믈 졷와 님 겨틔 뫼더니라(=昭陽殿裏第一人 同輦隨君侍君側)〈두시언해 초간본 11:16ㄱ〉

위 예문에서는 ‘隨君’은 ‘님그믈 졷ᄌᆞ와’로 언해하고 ‘侍君’은 ‘님그ᇝ 겨틔 뫼ᅀᆞᆸ더니라’로 언해하였다. ‘님그믈 겨틔’를 택하지 않고 ‘님그ᇝ 겨틔’를 택한 원인을 알기 어렵다. 반복을 피한 선택일 수도 있고, ‘側’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뫼ᅀᆞᆸ다’가 부사어 ‘겨틔’와 호응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겨틔’와 ‘의게, ᄭᅴ’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처소와 관련된 명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의게’의 기원적 구조는 ‘의(안 높임의 관형격 조사)+긍(처소 지시 의존명사)+에(부사격 조사)’이고, ‘ᄭᅴ’의 기원적 구조는 ‘ㅅ(높임의 관형격 조사)+그ᇰ(처소 지시 의존명사)+의(특수 처소 부사격 조사)’이다. 주034)

내부에 처소 명사를 지니고 있는 ‘의게, ᄭᅴ’는 애초에는 [도달점]을 뜻하는 부사격 조사로 쓰이다가, 분포가 확대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 책의 ‘비록 됫 다ᄒᆡ 가도(雖之夷狄이라두)’(4:5ㄱ)가 『소학언해』(3:4ㄴ)에서 ‘비록 되게 가도’로 바뀐 것은 ‘게’의 형태적 기원을 잘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만약 목적어 없이 부사어와 호응하는 ‘뫼다, 뫼시다’가 자동사라면, ‘존자(尊者)의 곁에서 존자와 함께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주035)

한편 ‘뫼ᅀᆞᆸ다’에서 어간 ‘뫼-’가 도출되는데, ‘뫼시-’에서는 어간 ‘뫼-’를 도출하기가 어렵다. ‘뫼시-’에 ‘-ᅀᆞᇦ-’이 쓰인 예도 있다. <용례>¶大神히 뫼시니〈월인천강지곡 기 23〉. 그렇다면 두 어간 ‘뫼-’와 ‘뫼시-’가 공존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뫼시-’의 ‘시’를 ‘이시-’의 이형태 ‘시-’로 추정할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두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뫼-’ 뒤에 연결 어미 ‘-어’가 외현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일반적으로 ‘동사 어간+어+이시-’는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데, ‘뫼시-’는 그렇지 않은 까닭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두드리디’(4:25ㄴ)는 ‘(밥을) 뭉치지’를 뜻한다. 이 낱말은 종래의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다른 문헌의 용례도 없다. ‘다디르다/다디ᄅᆞ다(=들이받다, 내지르다)’의 ‘디르다/디ᄅᆞ다’가 [打]를 뜻하는 동사이므로 ‘다’는 이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 동사의 어간이거나 활용형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물체를 둔탁한 것으로 치는 행위’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현대 국어 ‘다듬다’의 ‘다’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학언해』(3:23ㄱ)에서는 ‘무ᇰ킈디’로 바뀌었다.

‘벱디’(4:5ㄱ)는 ‘베풀지’를 뜻한다. 『소학언해』(3:4ㄴ)에서는 ‘베프디’로 바뀌었다. 어간은 ‘벺-’으로 보이는데, 예가 아주 드물다. ‘烏鳥含情을 벱고야 말녓노라’(노계선생문집: 사제곡)에 보인다. 『번역소학』의 ‘벱’의 우하(右下) 위치에 권점(圈點)이 보이는데, 소장자가 그려 넣은 듯하다.

‘쟉쟉’(4:27ㄴ)은 ‘조금씩’을 뜻하는데, 어간 ‘쟉-[少]’이 중첩된 비통사적 합성어가 부사로 영파생된 것이다. 합성어이면서 파생어인 셈이다. 다른 문헌에서 ‘젹젹’이 보인다. ¶三年 무근  各 닷 홉과 섯거 라 生 뵈로 汁을  時節 븓들이디 마오 젹젹 주어 머기면 오라면 반기 말리라〈구급방언해 상 3ㄱ〉. 이 낱말은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게 적당히’를 뜻하는 현대어 ‘작작’으로 발달하였다.

보조사 ‘이라도’가 ‘이라두’로 변한 예가 있는데, 방언의 반영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과 언해문 및 『소학언해』의 순서로 제시한다.

(24)가. 雖婢妾이라두 → 비록  고매라도〈3:17ㄴ〉

  → 비록 죠ᇰ과 妾이라도〈소언 2:51ㄱ〉

 나. 雖之夷狄이라두 → 비록 됫다ᄒᆡ 가도〈4:5ㄱ〉

  → 비록 되게 가도〈소언 3:4ㄴ〉

 다. 雖蠻貊之邦이라두 → 비록 되나라히라도〈4:5ㄱ〉

  → 비록 되나라히라도〈소언 3:5ㄱ〉

 라. 雖夜ㅣ나 → 비록 바미라두〈4:18ㄱ〉

  → 비록 밤이나〈소언 3:16ㄱ〉

‘ㅗ’가 ‘ㅜ’로 변한 것은 오늘날의 경기 방언 현상과 부합하는데, 다른 문헌에서도 보인다.

(25)가. 비록  긔약 사이 아니라두〈여씨향약언해 화산문고본 36ㄴ〉

 나. 덥고 비올 제라두〈소학언해 6:2ㄱ〉

 다. 홈을 디라두〈효경언해 17ㄴ〉

이 책의 사동 접미사 ‘-이-’가 『소학언해』에서 ‘-히-’로 바뀐 예가 있다. 이 책의 ‘ᄇᆞᆯ기다’가 예외 없이 『소학언해』에서 ‘-히-’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는 ‘ᄇᆞᆯ기다, 니기다’ 두 낱말에서만 이 현상이 보인다.

(26)가. ᄇᆞᆯ기노래니라(3:16ㄱ) → ᄇᆞᆯ킴이니(소언 2:49ㄴ) 주036)

‘ᄇᆞᆯ기노라’와 ‘ㅣ니라’ 사이에서 ‘ᄒᆞ야’가 생략된 것이다. 한편 『번역소학』에서는 종결 형식을 쓰고 『소학언해』에서는 연결 형식을 쓴 것도 중요한 차이이다.

 나. ᄇᆞᆯ기니라(3:23ㄴ, 3:39ㄱ, 4:9ㄱ, 4:21ㄴ, 4:25ㄴ)

  → ᄇᆞᆯ키니라(소언 2:56ㄱ, 2:70ㄱ, 3:8ㄴ, 3:19ㄱ, 3:22ㄴ)

 다. 니겨(熟, 3:6ㄴ) →닉켜셔(소언 2:41ㄱ)

동사 어간에 ‘-어 -’가 붙은 ‘두어홈’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다른 문헌의 관련 용례도 함께 제시한다.

(27)가. ᄢᅵᆫ  두어호미 올티 아니니라(不可以有挾也ㅣ니라)〈3:36ㄱ〉 주037)

‘ᄡᅦᆫ ᄆᆞᅀᆞᆷ 두어홈’은 ‘有挾’의 번역인데, ‘挾’은 ‘(힘 있는 측근을) 믿고 뽐냄’을 뜻한다. 『소학언해』(2:67ㄱ)에서는 ‘ᄢᅵᆷ을 두디 몯ᄒᆞᆯ 거시니라’로 바뀌었다.

 나. 뫼셔 안자셔 시기디 아니커시든 믈을 자바디 말며(侍坐애 弗使ㅣ어든 不執琴瑟며)〈3:32ㄱ〉 주038)

‘자바ᄒᆞ디’는 『소학언해』(2:63ㄴ)에서 ‘잡디’로 바뀌었다.

 다. 東州 밤 계오 새와 北寬亭의 올나니 三角山 第一峯이 마면 뵈리로다〈송강가사 성주본, 관동별곡〉

 라. 내 보아니 이 도라가디 못홈이로다〈오륜전비언해6:33ㄱ〉

여기의 ‘두어ᄒᆞ다, 자바ᄒᆞ다’가 단어인지 구(句)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처럼 동사 어간에 ‘-어(아) ᄒᆞ-’가 붙는 현상은 가사 문학 작품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오륜전비언해』의 ‘보아ᄒᆞ니’는 현대 국어 ‘보아하니’로 이어지고 있다. 운율을 위해 만든 형식이 분포를 넓힌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주039)

현대 국어 ‘보아하니’는 국어사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이다.

활용형 ‘ᄀᆞᄅᆞ샤ᄃᆡ’는 이 책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이전의 문헌에서는 ‘ᄀᆞ로ᄃᆡ’는 쓰였지만, ‘ᄀᆞᄅᆞ샤ᄃᆡ’는 쓰인 적이 없다. 이 책 중에서도 3·4·6권에서만 나타난다(3:8ㄱ, 3:9ㄱ,…, 4:1ㄴ, 4:4ㄴ…, 6:1ㄴ, 6:2ㄴ). ‘ᄀᆞᆯᄋᆞ샤ᄃᆡ’는 『소학언해』에서 처음 나타난다(2:17ㄴ, 2:18ㄱ,…).

(28) 曲禮예 로 믈읫 보   우희 오면 조너고  아래 리오면 시르믈 뒷 거시오 기우리면 간샤  뒷 거시라(曲禮예 曰 凡視를 上於面則敖고 下於帶則憂ㅣ오 傾則姦이니라〈4:15ㄱ〉

‘조너ᄅᆞ고’는 ‘敖’의 번역인대, 이 책에서만 보인다. 부사형 ‘조널이(=함부로)’는 『내훈』에서 보인다.

(29) 기춤며 하외욤며 기지게 며 녁 발이 쳐 드듸며 지여며 빗기 보 말며 조널이 춤 바며 고 프디 말며〈내훈 1:45ㄱ〉

이 책의 ‘조너ᄅᆞ-’는 ‘조널이’가 ‘조너ᄅᆞ-(형용사 어간)+이(부사형 어미)’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책의 ‘조너ᄅᆞ고’가 『소학언해』(3:13ㄴ)에서는 ‘오만이오’로 바뀌었는데, ‘오만’은 ‘傲慢’일 것이다. 이렇게 바뀐 것은 ‘조너ᄅᆞ다’가 널리 알려진 낱말이 아니었거나 쓰이지 않는 낱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어 중 몇 가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션ᄉᆡᇰ(=先生)’(3:26ㄱ, 3:27ㄴ, 3:29ㄱ)은 15세기 불경언해류 문헌에서 볼 수 없던 낱말이다. 한자로 표기된 ‘先生’도 마찬가지이다. 한글로 표기된 ‘션ᄉᆡᇰ’은 『번역소학』과 비슷한 시기의 문헌인 『번역노걸대』(1517)에서 처음 보인다.

(30)가. 濂溪 周先生이 니샤〈내훈 1:19ㄴ〉

 나. 션려 무로되〈번역노걸대 하 70ㄴ-71ㄱ〉

다음의 ‘비변도이’는 용례가 드물다.

(31) 보화의 다라셔 비변도이 가쥬려 말며 환란의 다라셔 구챠히 버서나려 말며 토와 사호매 이긔요 구티 말며 제 가질 모긔셔 해 가죠 구티 마롤 디니라(臨財야 毋苟得며 臨難야 毋苟免며 狠毋求勝며 分毋求多ㅣ니라)〈4:3ㄴ-4ㄱ〉

‘비변도이’는 ‘구차하게’를 뜻한다. ‘도이’는 ‘-ᄃᆞᇦ-’에 ‘-이’가 붙은 ‘ᄃᆞᄫᅵ’가 변한 것이다. 이 예문에서는 ‘苟’를 ‘비변도이’로도 번역하고 ‘구챠히’로도 변역하였다. 『소학언해』(3:3ㄴ)에서는 원문의 두 ‘苟’ 모두 ‘구챠히’로 번역하였다. ‘비변’의 다른 용례가 보이지 않는데, ‘鄙褊’인 듯하다. ‘褊’은 ‘옷의 품이나 땅이나 도량이 좁음’을 뜻하는데, ‘변’ 또는 ‘편’으로 읽혔다. ¶①:변〈동국정운 3:16ㄴ〉 ②편, 변〈자류주석 상 87ㄴ〉. ③편, 변〈자전석요하 62ㄴ〉.

‘大夫’는 원문이나 언해문에서 한자와 한글이 병기될 경우에는 ‘태부’로 표기되고, 한글로만 적힌 언해문일 경우에는 ‘태우’로 표기되었다.

(32)가. 大태夫부 → 大태夫부〈3:35ㄱ, 3:40ㄴ〉

 나. 大태夫부 → 태웃(관형사형)〈4:15ㄴ-16ㄱ〉

 다. 大태夫부 → 벼슬 노ᄑᆞ니〈3:38ㄴ〉

다음은 다른 문헌에 한글만 적힌 예이다.

(33)가. 광록태우〈삼강행실도 동경대본 충신 8ㄱ〉

 나. 대광보국슝녹태우녕듕츄부〈천의소감언해 진쳔의쇼감차 1ㄱ〉

 다. 태우려 닐어 샤〈맹자언해 4:13ㄱ〉

『소학언해』(2:66ㄱ-ㄴ, 2:70ㄴ-71ㄱ)에서는 원문의 경우는 ‘大대夫부’로 나타나고, 언해문의 경우는 한자 표기 없이 ‘태우’로 나타난다. 한문 원문에서 ‘대부’로 표기하면서 언해문에서 ‘태우’로 표기하는 것은 다음 자료에서도 볼 수 있다. (34가)는 ‘手提擲還崔大夫’의 독음을 적은 것이고, (34나)는 언해문이다.

(34) 슈뎨텩환최대부 → 손으로 자바 더뎌 최태우의게 도라보내도다〈고문진보 희쟉화경(戲作花卿) 두ᄌᆞ미(杜子美)〉

‘大夫, 士大夫’의 표기는 권(卷)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이현희 1988:218), 번역자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쟈ᇰᄎᆞᆺ ᄂᆞᄆᆡ 지븨 쥬연ᄒᆞ야 갈 저긔(將適舍)’의 ‘쥬연ᄒᆞ야’(4:11ㄱ)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말이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3:10ㄱ)에서는 ‘쟈ᇰᄎᆞᆺ 쥬인ᄒᆞᆫ 집의 갈ᄉᆡ’로 바뀌었는데, ‘쥬인ᄒᆞᆫ’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원문의 ‘舍’를 『소학집해』에서는 ‘館’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성백효(1993:181)에서는 “장차 관사에 갈 때에”로 번역하였고, 이충구 외(2019a:218)에서는 “객사에 가려할 때에는”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쥬연’이나 ‘쥬인’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이 책에는 오각이 많다. 옳은 표기를 괄호 속 화살표 뒤에 제시한다.

(35) 고ᇰᄉᆞㅣ(3:39ㄴ→고ᇰᄌᆞㅣ), 雖無道이나(3:40ㄱ→雖無道ㅣ나),

신해(3:40ㄴ→신하), 나ᅀᅵ가(3:26ㄱ→나ᅀᅡ가), 옯ᄂᆞ니라(4:3ㄴ→옮ᄂᆞ니라)

처ᅀᅡᆷ(4:22ㄱ→처ᅀᅥᆷ)

이 중 ‘雖無道이나’(3:40ㄱ)의 경우에는 같은 면의 바로 뒤에 ‘雖無道ㅣ나’가 두 번이나 나오므로 단순한 실수임이 틀림 없다. ‘처ᅀᅡᆷ’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줄 바로 아래에 옳게 새겨진 ‘처ᅀᅥᆷ’이 나온다. ‘옯ᄂᆞ니라’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소학언해』(3:3ㄱ)에도 ‘옯’으로 적혀 있다.

같은 글자가 중복되는 경우의 실수도 보인다.

(36)가. 얼우니 묻거시든  아니코 즉재 답호미 례져리 아니라(長者ㅣ 問이어든 不辭讓而對ㅣ 非禮也ㅣ니라〈3:25ㄴ〉

 나. 君子 뫼셔 이쇼매 도라 라디 아니코 간대로 답호미 禮 아니라(侍於君子 不顧望而對ㅣ 非禮也ㅣ니라)〈3:31ㄴ〉

(36가, 나)의 ‘아니라’는 모두 ‘아니니라’의 실수로 보인다. 원문 구결에는 명제에 대한 청자(독자)의 인지(認知)를 요구하는 선어말 어미 ‘-니-’가 있는데 언해문에서는 빠져 있다. 둘 다 『소학언해』(2:58ㄱ, 2:63ㄱ)에서 ‘아니니라’로 바뀌었다.

‘례모(禮貌)’를 ‘례도’로 잘못 새긴 예가 보인다. 『소학언해』(3:15ㄴ)에서는 ‘녜모’로 나타난다.

(37) 비록 아도이 겨신 히라도 례도시며(雖褻이나 必以貌시며=비록 사사로운 자리라 하더라도 예모를 차리셨으며)〈4:17ㄴ〉

그 밖에도 많은 오자가 보인다. 언해문의 ‘主쥬人신’(3:38ㄱ)은 ‘쥬ᅀᅵᆫ’의 오각이다. 원문에서는 옳게 나타난다. ‘고져(=鼓子, 3:17ㄱ)’는 ‘고쟈’의 잘못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50ㄱ)에는 ‘고쟈’로 나타난다. 『훈몽자회』(중 1ㄴ)에서 ‘閹 고쟈 엄 宦 고쟈 환 閽 고쟈 혼 䦙 고쟈 시’가 보인다. ‘돗 ᄀᆞ로ᄆᆞᆯ(=布席, 3:37ㄱ)’은 ‘돗 ᄭᆞ로ᄆᆞᆯ’의 잘못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68ㄱ)에서는 ‘돗ᄀᆞᆯ ᄭᆞ라지라’로 나타난다. ‘ᄭᆞᆯ-’이 ‘ᄀᆞᆯ-’로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인데,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대ᄀᅿᆯ믄(=대궐문, 3:4ㄱ)’의 ‘ᄀᅿᆯ’은 이 책에서도 같은 예가 더 보이지 않으므로 오각임이 분명하다. 이 책에는 ‘蹶(3:27ㄱ), 厥(4:23ㄱ)’이 보이는데, 독음이 모두 ‘궐’로 적혀 있다. 한편 ‘門’의 독음이 원문에서는 ‘문’으로 적혀 있고 언해문에서는 ‘믄’으로 적혀 있는데, ‘믄’은 오각이거나 자획이 마멸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면(面)에서 ‘무ᇇ, 문(2개)’이 나온다. ‘門’의 독음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몬’으로 나타난다(법화경언해 7:20ㄴ, 법화경언해 7:189ㄴ, 원각경언해 하 1-1 : 5ㄴ, 선종영가집언해 상 2ㄴ). 그런데 이 책이 간행될 무렵인 16세기 초 문헌에서부터 ‘문’으로 적힌 예가 보인다(훈몽자회 중 4ㄱ, 법집별행록 3ㄴ, 유합 상 23ㄴ, 왜어유해 상 32ㄱ). 그러므로 여기에 적힌 ‘믄’은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몬〉문’의 변화는 오늘날 경기 방언의 특징과 부합한다.

‘그로’(3:44ㄱ)는 ‘그릇되게(違)’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형용사 ‘그르다’에서 영파생된 부사 ‘그르’가 쓰였다. 이 ‘그로’는 ‘서르〉서로’와 같은 유추의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부사격 조사 ‘-로’ 때문에 ‘-로’로 끝나는 부사어가 많아짐에 따라, 이에 유추되어 ‘그르’가 ‘그로’로 변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용례가 보이지 않아서 오각일 가능성이 크다. 『소학언해』(2:74ㄴ)에서는 ‘어글웃게’로 나타나는데, ‘어글웃게’도 드문 예이다. 대개는 ‘어글읏-’으로 나타난다. ‘어글읏(어글웃)-’은 ‘어글읓(어글웇)-’을 8종성 표기 규칙에 따라 표기한 것이다.

‘엄시’(3:14ㄴ)는 ‘없이’의 오각이다. 이 책(3:16ㄱ)의 ‘업소며, 업소믄’으로 보아, 방언형의 반영은 아닌 듯하다. 『소학언해』(2:48ㄱ)에는 ‘업시’로 적혀 있다. ‘和화悅얼’(3:44ㄴ)은 언해문의 예인데, ‘열’을 ‘얼’로 잘못 새겼다. ‘슬윗’(4:14ㄴ)은 ‘술윗(=수레의)’의 오각이다. 『소학언해』(3:13ㄱ)에서는 ‘술윗’으로 나타나고, 이 책에서도 ‘술윗’이 보인다(4:18ㄱ). ‘마년’(4:22ㄴ)은 ‘만년(=萬年)’을 뜻하는데, 오각인 듯하다. 『소학언해』(3:20ㄱ)에서는 한자 표기 ‘萬年’으로 바뀌었다.

다음 예문의 ‘져ᇰ다이’는 오각인지 오역인지 분명치 않다.

(38) 朝廷에 아랫태웃 벼슬  사려 말샤 딕히 시며 웃태웃 벼슬  사려 말샤 온화코 다이 더시다(朝與下大夫로 言에 侃侃如也시며 與上大夫로 言에 誾誾如也ㅣ러시다〈4:15ㄴ-16ㄱ〉

여기서는 ‘誾誾如也’를 ‘온화코 져ᇰ다이 ᄒᆞ더시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소학언해』의 번역이나 주석의 내용과 아주 다르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3:14ㄱ)에서는 ‘誾誾<원주>【화열호ᄃᆡ ᄌᆡᇰ홈이라】ᄐᆞᆺᄒᆞ시다’로 나타난다. 이 협주는 『소학집설』에서 주자(朱子)가 인용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해설〉 “은은(誾誾)은 화열(和悅)하면서도 간쟁(諫諍)하는 것(誾誾和悅而諍也)”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져ᇰ’은 ‘간쟁(諫諍)’을 뜻하는 ‘ᄌᆡᇰ(諍)’의 오각일 가능성이 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다음 예문의 ‘븟 살가 야’가 그것이다.

(39) 뫼셔 활 솔딘댄 사 모도 잡고 뫼셔 投투壺호홀딘댄 사 모도아 놀 디니 제 이긔여든 잔 시서 븟 살가 야 홀 디니라(侍射則約矢고 侍投則擁矢니 勝則洗而以請이니라)〈3:32ㄴ〉

‘븟 살가 ᄒᆞ야’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소학언해』(2:64ㄱ)에서도 이 부분이 없이 ‘잔 시서 ᄡᅥ 請홀 디니라’로 적혀 있다. 실수인 듯하다.

이 책에는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번역이 꽤 있다.

(40) 士昏禮예 로 아비라셔 아리 친연라 갈 제 술  잔 머기고 로 가 너 도 사 마자 와 내 졔홀 이 니 힘 오로  거느려 업스신 어마님 일 니 네 티 라 아리 로 그리 호리다 오직 이를 이긔디 몯가 젓솝거니와 잠도 命을 닛디 아니호리다(士昏禮예 曰 父ㅣ 醮子애 命之曰 往迎爾相야 承我宗事야 勖帥以敬야 先妣之嗣를 若則有常라 子曰 諾다 唯恐不堪이언 不敢忘命호리다)〈3:12ㄱ-ㄴ〉

여기의 ‘업스신 어마님’은 ‘先妣’의 오역이다. 『소학집설』에서 “어머니를 선비라 하는 것은 대개 옛날의 명칭이다.(母曰先妣 盖古稱也)”라 하였는데, 예문에서는 ‘선비’를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잘못 알고 오역을 하였다. ‘업스신 어마님 일 니ᅀᅮᄆᆞᆯ’을 『소학언해』(2:46ㄱ)에서는 ‘어미를 니을이니(=어머니를 이으리니)’로 바로잡았다.

(41) 이 우 남진과 계집이 별히 호 기니라(右 明夫婦之別이라)〈3:23ㄴ〉

‘명부부지별’은 편목(篇目)의 제목인데, 이 언해에서는 그것을 문장으로 간주하고 번역하였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남진과 계집’은 주어가 아니라 관형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별히 호ᄆᆞᆯ’이란 번역도 좋지 않다. ‘분별하여 행동함을’이란 의미를 ‘별히 호ᄆᆞᆯ’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이 『소학언해』(2:56ㄱ)에서는 ‘이 우ᄒᆞᆫ 남진과 겨집의 ᄀᆞᆯᄒᆡ옴ᄋᆞᆯ ᄇᆞᆯ키니라(右ᄂᆞᆫ 明夫婦之別ᄒᆞ니라)’로 바뀌었다. 주040)

‘이라’와 ‘ᄒᆞ니라’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右 明夫婦之別이라’에서는 ‘明夫婦之別’이 편목의 제목이 되고, 『소학언해』의 ‘右ᄂᆞᆫ 明夫婦之別ᄒᆞ니라’에서는 ‘夫婦之別’이 편목의 제목이 된다.

(42) 벼 던 사 늘그니 거러 니디 아니며 庶人 늘그니 고기 업슨 밥 먹디 아니니라(君子ㅣ 耆老애 不徒行며 庶人이 耆老애 不徒食이니라)〈3:33ㄱ-ㄴ〉

‘벼슬 ᄒᆞ던 사ᄅᆞᆷ 늘그니’와 ‘庶人 늘그니’는 명사구가 다른 요소의 개입이 없이 연결된 것인데 아주 부자연스럽다. ‘기(耆)’는 60세를 뜻하고 ‘로(老)’는 70세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耆’와 ‘老’는 ‘君子’의 서술어이다. 『소학언해』(2:64ㄴ)에서는 ‘君子<원주>【이 군 벼슬 인 사이라】ㅣ 늘금애 …(중략)… 샤ᇰ인이 늘금애’로 바로잡았다.

(43) 믈읫 손과로 들 제 문마다 손 야 소니 안 문에 니르거든(凡與客으로 入者ㅣ 每門에 讓於客야 客至寢門이어든)〈3:36ㄴ-37ㄱ〉

여기서는 구결 달린 원문 ‘入者ㅣ’와 언해문 ‘들 제’가 부합하지 않는다. 『소학언해』(2:68ㄱ)에서는 ‘들어가ᄂᆞᆫ 이’로 바로잡았다.

(44) 欒共子ㅣ 로 이 세 가지예 셤교  티 홀 디니 아비 나시고 스이 치시고 님그미 머기시니 아비 아니시면 나디 몯며 머기디 아니면 라디 몯며 치디 아니면 아디 몯니 나신 은혜와 가지니 그런 로  으로 셤겨 다 마다 주구믈 닐외욜 디니라(欒共子ㅣ 曰 民生於三애 事之如一이니 父ㅣ 生之고 師ㅣ 敎之고 君이 食之니 非父ㅣ면 不生이오 非食ㅣ면 不長이오 非敎ㅣ면 不知니 生之族也 故로 一事之야 唯其所在則致死焉이니라)〈3:42ㄴ-43ㄱ〉

여기서는 ‘民生於三애’를 ‘ᄇᆡᆨ셔ᇰ이 세 가지예’로 번역한 것이 문제이다. 『소학언해』(2:73ㄱ-ㄴ)에서도 똑 같이 나타난다. 두 책 다 ‘民生’을 ‘ᄇᆡᆨ셔ᇰ’으로 번역한 것이다. 동일한 원문의 번역이 『삼강행실도언해』에서도 보이는데, 그 책에서는 ‘生’이 ‘사ᄂᆞ니’로 번역되어 있다. 즉 ‘란공 닐오 사미 세 고대 사니’(삼강행실도언해 동경대본 충신 2ㄱ)로 나타난다. ‘民生於三애’의 의미는 진선(陳選)의 『소학증주』에 나타나 있다.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모두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 사람에 의해서 산다고 말한 것이다.(君父師 皆人之所由生也 故曰民生於三)”란 것이다.

(45) 晏子ㅣ 로 님그믄 시기시거든 臣下 조심야며 아비 어엿비 너기거든 식은 효도며 兄은 커든 아 며 남진 和悅커든 계집 유화며 싀어미 어엿비 너기거든 며느리 좃와호미 禮니라(晏子ㅣ 曰 君令臣共며 父慈子孝며 兄愛弟敬며 夫和妻柔며 姑慈婦聽이 禮也ㅣ니라)〈3:43ㄴ-44ㄱ〉

여기서는 ‘-거든’이 5번 쓰였는데, 비록 당시의 연결 어미 ‘-거든’의 의미역이 현대 국어 연결 어미 ‘-거든’에 비해 훨씬 넓기는 하였지만 모두 오역으로 보인다. 『소학언해』(2:74ㄱ)에서는 모두 ‘-고’로 바뀌었다.

(46) 曾子ㅣ 샤 아미 깃디 몯얏거든 간도 밧긧 사 사괴디 말며 갓가오니 親티 몯얫거든 간도 먼  가 求티 말며 혀근 이 피디 몯얏거든 간도 큰 이 니디 마롤 디니라(曾子ㅣ 曰 親戚이 不說이어든 不敢外交며 近者를 不親이어든 不敢求遠며 小者를 不審이어든 不敢言大니라)〈3:44ㄴ-45ㄱ〉 주041)

『소학집설』에서 ‘친척(親戚)’은 ‘부형(父兄)’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백효(1993:165)와 이충구 외(2019a:201)에 수록되어 있다. ‘아ᅀᆞ미’는 『소학언해』(2:75ㄱ)에서 ‘어버이와 권다ᇰ이’로 바뀌었다.

‘아ᅀᆞ미 깃디 몯얏거든’은 자동사 구문이고, 이어지는 ‘갓가오니 親티 몯얫거든’과 ‘혀근 이 피디 몯얏거든’은 타동사 구문이어서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문 원문의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소학언해』(2:75ㄱ)에서는 ‘어버이와 권다ᇰ이 깃거티 아니커든 … 갓가온 이 親티 아니커든 … 쟉은 이ᄅᆞᆯ ᄉᆞᆯ피디 몯ᄒᆞ얏거든 …’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서도 사정이 변하지 않았다.

(47) 論語에 로 슬윗 가온셔 돌보디 말며 말 리 말며 손 치디 마롤 디니라(論語에 曰 車中에 不內顧며 不疾言며 不親指니라)〈4:14ㄴ〉

이 예문에서는 수레를 탈 때의 세 가지 품위 없는 행동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소학언해』(3:13ㄱ)에서는 이 대목이 ‘親히 ᄀᆞᄅᆞ치디 아니ᄒᆞ더시다’로 끝난다. 높임의 선어말 어미 ‘-시-’를 쓴 것은 이 대목에 나타난 세 가지 행위를 수레를 탈 때의 공자(孔子)의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오류를 『소학언해』에서 바로잡은 것이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서는 이 내용의 바로 앞에 ‘수레를 타시면 반드시 바로 서서 고삐를 잡으셨다(升車 必正立 執綏)’란 내용이 실려 있다.

(48) 曲禮예 로 믈읫 보   우희 오면 조너고  아래 리오면 시르믈 뒷 거시오 기우리면 간샤  뒷 거시라(曲禮예 曰 凡視를 上於面則敖고 下於帶則憂ㅣ오 傾則姦이니라)〈4:15ㄱ〉

이 예문에서 자동사 ‘오ᄅᆞ면’을 쓴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타동사 ‘올이-’를 쓰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믈읫 보ᄆᆞᆯ ᄂᆞᄆᆡ ᄂᆞᆺ 우희 오ᄅᆞ면’이 『소학언해』(3:13ㄴ)에서는 ‘믈읫 봄이 ᄂᆞᆺᄎᆡ 올이면’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어 ‘봄이’와 서술어 타동사 ‘올이면’의 불일치가 흥미롭다. 두 책 모두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ᄂᆞ리오면’은 타동사여서 앞의 ‘오ᄅᆞ면’과 일치하지 않는다. 『소학언해』(3:13ㄴ)에서는 ‘믈읫 봄이 ᄂᆞᆺᄎᆡ 올이면 오만이오 ᄯᅴ예 ᄂᆞ리오면 근심홈이오’으로 되어 있다. 타동사를 쓴 점에서 일관성은 있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어 ‘봄이’와 호응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49) 네 아 들 리고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 슈 셰 이셔(棄爾幼志고 順爾成德이면 壽考維祺야)〈4:22ㄱ〉

여기서는 원문의 ‘順爾成德’을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부분이 『소학언해』(3:19ㄴ)에서는 ‘네 인 德을 順ᄒᆞ면’으로 바뀌었다. 두 책 모두 ‘네’가 평성이므로 주어가 아니라 관형어임을 알 수 있다. ‘어딘’은 원문에 없는 낱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소학언해』의 번역은 ‘덕이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전제한 것이어서, 부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이 책의 ‘네 어딘 덕을 슌히 일우면’은 그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불필요한 ‘어딘’을 보충하였고, 원문의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성백효(1993:195)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너의 덕 이룸을 순히 하면’으로 번역하였다.

(50) 어버 업슨 시기 지븨 읏듬얫니 곳갈와 옷과 빗난 거로 편 도디 아니홀 디니라(孤子ㅣ 當室야 冠衣를 不純采니라)〈4:23ㄱ-ㄴ〉

이 예문은 “어버이 없는 자식이(어버이를 잃고) 집안의 가장(家長)이 된 이는 관(冠)과 옷을 빛나는 것으로 선(縇)을 두르지 말지니라.”란 뜻이다. ‘당실(當室)’은 아버지의 뒤를 물려받은 자를 말한다. ‘純’은 관(冠)이나 옷깃에 장식용 헝겊을 덧대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의 독음은 ‘준’이다. 여기서 주목할 낱말은 ‘편ᄌᆞ(編子)’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의 표제어 ‘편자’와 ‘망건편자’에서는 ‘편자’의 한자를 표기하지 않았다. ‘편ᄌᆞ’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망건의 아랫부분으로서, 망건을 졸라매기 위해 말총으로 띠처럼 굵게 짠 부분을 가리킨다. ¶邊巾 망건 편〈광재물보 의복 3ㄴ〉. 둘째는 ‘선(縇)’을 가리킨다. ‘선(縇)’은 옷이나 방석 따위의 가장자리에 덧대는 좁은 헝겊이다. 이 글 속에서의 ‘편ᄌᆞ’는 관(冠)이나 옷깃에 덧대는 장식용 헝겊이다. 동음이의어로서 ‘마철(馬鐵), 제철(蹄鐵)’을 뜻하는 ‘편ᄌᆞ’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유입된 차용어로 보인다. ¶편 馬鐵〈국한회어 329〉. 한편 ‘편ᄌᆞ’가 『소학언해』(3:21ㄱ)에서는 ‘단’으로 바뀌었다. ‘단’은 ‘옷단’이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의 표제어 ‘단’에는 한자가 병기되지 않았는데, ‘緞’ 또는 ‘段’으로 보인다. 한편 ‘純’의 독음이 모두 ‘:슌’으로 적혀 있는데, 『소학언해』(3:20ㄴ)에서는 모두 ‘:쥰’으로 바뀌었다. ‘純’이 ‘縇’을 뜻할 때의 오늘날의 독음은 ‘준’이다. ¶①쥰(평성), :쥰(상성)〈동국정운 3:6ㄴ〉 ②·쥰(거성)〈동국정운 3:7ㄱ〉 ③쓘(평성)〈동국정운 3:8ㄱ〉 ④衣緣 선두를 준〈자전석요 하 29ㄱ〉.

(51) 세 번재 爵弁을 스이고 로 의 됴 저기며  됴 저고로 네거긔 슬 거 다 스이노니(三加 曰 以歲之正과 以月之令에 咸加爾服노니)〈4:22ㄴ-23ㄱ〉

여기서는 ‘져고로’가 문제이다. ‘저고로’는 ‘적[時]’에 부사격 조사 ‘오로(=ᄋᆞ로)’가 붙은 것이다. 이 ‘오로(ᄋᆞ로)’는 원문의 ‘以’의 일반적인 훈(訓)에 이끌린 번역이다. ‘以歲之正 以月之令’의 ‘以’는 ‘於’와 같으므로 ‘의 됴 저기며  됴 저고로’가 아니라 ‘의 됴 저기며  됴 저긔’가 더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소학언해』(3:20ㄴ)에서는 ‘ᄒᆡ의 됴홈과 ᄡᅥ ᄃᆞᆯᄋᆡ 됴ᄒᆞᆫ 제’로 바뀌었는데, 앞의 ‘以’는 ‘ᄡᅥ’로 번역하고 뒤의 ‘以’는 부사격 조사 ‘에’로 번역하였다.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결함이다. ‘제’는 의존 명사 ‘제’ 뒤에서 부사격 조사 ‘에’가 외현되지 않은 것이다. ‘以’가 ‘於’와 같은 의미로 쓰인 예는 ‘孟嘗君以五月五日生’(사기, 맹상군열전)에서 볼 수 있다.

(52) 君子 아뎌 뫼셔 밥 머글 저기어든 몬져 먹고  젠 후에 홀 디니(侍燕於君子 則先飯而後已니)〈4:27ㄱ-ㄴ〉

여기서는 ‘侍燕於君子’의 번역이 문제이다. 『소학언해』(3:24ㄴ)에서는 ‘君子ᄅᆞᆯ 아ᄅᆞᆷ뎌 뫼셔실 적이어든’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보다 앞선 시기의 『내훈』(1475)에서는 같은 원문을 ‘君子 아뎌 뫼셔 밥 머글 저기어든’(내훈 1:7ㄴ)으로 번역하였다. ‘君子ᄅᆞᆯ’ 대신 ‘君子ᄭᅴ’가 쓰인 것을 제외하면 『번역소학』의 번역과 같다. 세 책에 공통적으로 쓰인 ‘아ᄅᆞᆷ뎌(=사사로이)’는 ‘燕’이 지닌 ‘편안함, 한가함’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두 책에서 ‘밥 머글’이라고 한 것은 ‘燕’에 들어있는 ‘잔치’의 의미까지 고려한 결과로 짐작되는데, 이 역시 ‘燕’의 의미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한 글자를 서로 다른 의미로 두 번 번역한 셈이 되고 만다. 아주 문제가 많은 번역이다. 결국 이것은 저경(底本)의 문제로 보인다. 율곡의 『소학집주』에는 원문이 ‘侍食於君子’로 적혀 있으므로,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다. 주042)

성백효(1993:202)를 참조할 것.
문제가 있는 원문을 억지스럽게 번역한 셈이다.

(53) 曲禮예 로 님 앏셔 실과 주어시든 그  잇 거스란  푸물 디니라(曲禮예 曰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3:6ㄱ〉

여기서는 ‘님그ᇝ 앏ᄑᆡ셔’의 피수식어가 없고, ‘주어시든’의 주어가 없다. 『소학언해』(2:40ㄴ)에서는 ‘曲禮예 오 님금 앏셔 실과 주어시든 그  인 이란 그  품을 디니라(曲禮예 曰 賜果於君前이어시든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문제의 근원은 한문 원문에 있는 듯도 하다. 이 대목의 원문을 성백효(1993:120)에서는 ‘「곡례」에 말하였다. 임금의 앞에서 과일을 하사하시거든 씨가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에 간직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언해문에도 ‘하사하시거든’의 주어가 없다. 원문의 구두(句讀)에 잘못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두를 달리하여, ‘曲禮예 曰 賜果ᄒᆞ야시ᄃᆞᆫ 於君前에셔 其有核者란 懷其核이니라’로 고쳐 보면, ‘「곡례」에서 이르기를, (임금이) 과일을 하사하시면 (먹은 다음) 임금의 앞에서 씨 있는 것은 그 씨를 품을지니라.’란 뜻이 되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경우의 원문도 의심스럽다. ‘君賜果 其有核者 於君前 懷其核’이 상식에 부합하는 문장일 것이다. 이충구 외(2019a:149)에서는 ‘賜’를 ‘하사받다’로 번역하였는데, “임금의 앞에서 과일을 하사받다(賜果於君前)”가 적절한 표현인지는 필자가 판단하기 어렵다. 어떻든 『번역소학』과 『소학언해』에서는 ‘賜’의 의미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54) 論語예 로 鄕黨앳 사 술 머고매 막대 디픈 사미 나거든 날 디니라(論語의 曰 鄕人飮酒에 杖者ㅣ 出이어든 斯出矣니라)〈3:33ㄴ〉

이 대목의 주체는 공자(孔子)인데, 번역자는 독자에게 훈계하는 내용으로 오해하였다. 『소학언해』(2:65ㄱ)에서는 ‘論語의 ᄀᆞᆯ오ᄃᆡ 햐ᇰ다ᇰ앳 사ᄅᆞᆷ 술 먹이예 막대 딥프니 나거든 이예 나가더시다’로 바뀌었다.

(55) 얼우신 뫼셔  이실 저기어든 비록 여러 가짓 차반이라도 마다디 아니며 마조 안조 마다디 아니홀 디니라(御同於長者 雖貳나 不辭며 偶坐不辭ㅣ니라)〈3:31ㄱ〉

‘마조 안조ᄆᆞᆯ 마다ᄒᆞ디 아니홀 디니라’는 ‘偶坐不辭’를 오역한 것이다. 『소학언해』(2:63ㄱ)에서는 ‘ᄀᆞᆯ와 안자셔ᄂᆞᆫ ᄉᆞ야ᇰ티 아니홀 디니라’로 바뀌었다. 성백효(1993:150)에서는 ‘남과 짝하여 앉았으면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고, 이충구 외(2019:184)에서는 ‘손님과 배석하였을 때에도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다. ‘사양’의 대상은 ‘음식’이다.

(56) 그 벼슬 득디 몯야셔 得디 몯가 알하고 마 득얀 일흘가 야 알하니라(其未得之也앤 患得之고 旣得之얀 患失之니라〈3:9ㄱ-ㄴ〉 주043)

‘得’을 한자로 쓰기도 하고 한글로 쓰기도 하였다.

‘其未得之也’의 ‘其’는 허사(虛辭) 같기도 하고 ‘未得之’한 상황 전체를 지시하는 글자 같기도 하다. ‘未得之’를 ‘득디 몯ᄒᆞ야셔ᄂᆞᆫ’과 같이 서술어구로 번역할 경우에는 ‘其’를 관형사 ‘그’로 번역할 수가 없다. 위의 번역에서는 ‘其’를 관형사 ‘그’로 번역하고 원문에 없는 목적어 ‘벼슬’을 끼워 넣은 결과, 마치 ‘그’가 ‘벼슬’을 수식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벼슬’ 뒤에 목적격 조사를 쓰지 않은 것은 ‘그’가 ‘벼슬’을 수식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 같기도 하다. ‘벼슬 득디 못ᄒᆞ야셔’라는 상황 자체를 ‘그’가 지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벼슬’ 뒤에 목적격 조사 ‘을’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떻든 이 번역은 국어다운 번역이 아니다. 『소학언해』(2:43ㄴ)에서는 원문 ‘其未得之也’를 ‘그 얻디 몯ᄒᆞ야셔ᄂᆞᆫ’으로 번역하였다. 원문에 없는 목적어 ‘벼슬’을 보충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인데, 이 역시 국어의 구조에는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다.

(57) 말 졍외오 믿비 며 뎍을 두터이 고 공경면 비록 되나라히라도 니려니와 말 졍셩도며 믿비 아니고 뎍을 둗거이 며 공경히 아니면 비록 내 올와 힌 니리아(言忠信며 行篤敬이면 雖蠻貊之邦이라두 行矣어니와 言不忠信며 行不篤敬이면 雖州里나 行乎哉아〈4:5ㄴ〉

‘ᄃᆞᆫ니려니와’는 ‘行’을 번역한 것이다. 『소학언해』(3:5ㄱ)에도 ‘ᄃᆞᆫ니려니와’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의 ‘行’은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의 원문의 첫머리가 ‘言忠信’으로 시작하지만, 원전인 『논어』에는 이 앞에 본래 ‘子張問行 子曰’이 적혀 있다. ‘子張問行’은 ‘자장이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여쭈었다.’란 의미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달(達)함을 묻는 뜻과 같다. 자장(子張)의 뜻은 바깥에서 (도가) 행해짐을 얻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니, …(猶問達之意也 子張意在得行於外 故夫子反於身而言之 …)” 여기서 ‘行’을 ‘達’과 같은 것으로 본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行’은 ‘다님’이 아니라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짐(다스려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行’의 번역이 오역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번역자가 ‘行’의 뜻을 알면서도 ‘行’의 대표훈(代表訓)을 번역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8) 소니 믈러니거든 모로매 命을 도로 엳와 로 소니 도라보디 아니다 더시다(賓이 退어든 必復命曰 賓不顧矣라 더시다)〈3:3ㄴ〉

여기서는 시제와 관련된 오역이 보인다. ‘소니 도라보디 아니다’는 인용문인데, 문맥으로는 “손이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습니다.”란 뜻이다. ‘아니ᄒᆞᄂᆞᅌᅵ다’는 ‘아니ᄒᆞ니ᅌᅵ다’의 잘못이다. 둘은 시제가 다르다, ‘ᄒᆞᄂᆞᅌᅵ다’는 현재 시제이고 ‘ᄒᆞ니ᅌᅵ다’는 동사에 쓰일 경우 과거 시제이다. 오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ᄒᆞᄂᆞᅌᅵ다’를 『소학언해』(2:38ㄴ)에서는 간접 인용의 ‘아니타’로 바로잡았다. 동사의 보조 용언으로 쓰인 ‘아니타’는 과거 시제가 된다.

(59) 얼우니 니시 말 몯 차 다 마 몯 미처야 계시거든(長者ㅣ 不及이어든)〈3:28ㄱ〉

여기서는 원문에 없는 말을 상당히 많이 보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소학언해』(2:60ㄱ)에서는 ‘얼운이 미처 몯ᄒᆞ여 겨시거든’으로 바뀌었다. 이 책의 번역에서는 ‘몯 ᄆᆞ차’와 ‘몯 미처ᄒᆞ야’가 중복적인데, 두 가지 번역 구상이 뒤섞인 결과로 보인다. 즉 ‘얼우니 니시 말 몯 차 계시거든’이나 ‘얼우니 니시 마 몯 미처야 계시거든’ 둘 중 하나로 번역하려다가 교정이 누락되어 두 가지 번역이 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미처ᄒᆞ다’는 동사의 연결형에서 영파생된 부사 ‘미처’와 ‘ᄒᆞ다’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그러면 ‘몯 미처ᄒᆞ다’는 짧은 부정의 일반적인 형식이 된다. 만약 ‘미처ᄒᆞ다’가 ‘미처 ᄒᆞ다’ 즉 구(句)라면, ‘몯 미처 ᄒᆞ다’는 ‘부정 부사+부사+ᄒᆞ다’ 구조가 되는데, 이런 구조는 일반적이지 않다.

(60) 小儀예 로  그 이 엿보디 말며 과 갓가이야 서르 므더니 너기게 말며 녯 사괴던 사 왼 이 니디 말며 희앳 비 마롤 디니라(少儀曰 不窺密며 不旁狎며 不道舊故며 不戱色며)〈4:13ㄴ-14ㄱ〉

‘ᄂᆞᆷ과 갓가이ᄒᆞ야 서르 므더니 너기게 말며’는 ‘不旁狎며’의 번역인데, 『소학언해』(3:12ㄱ)에서는 ‘셜압ᄒᆞᆫ ᄃᆡ 갓가이 아니ᄒᆞ며’로 바뀌었다. ‘셜압’은 ‘설압(褻狎: 행동이 무례함)’이다. 두 책 모두 ‘旁’을 ‘가까이하다’로 번역하였지만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는 ‘旁’과 ‘狎’이 대등하게 접속된 것으로 보았는데, 『소학언해』에서는 ‘旁狎’을 ‘서술어-부사어’의 관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소학집해』의 주석에서는 ‘방은 널리 미침이다.(旁泛及也)’라 하였다. 그렇다면 두 책의 해석 모두 『소학집해』의 주석과는 다른 셈이다.

(61) 丹書에 로 논 미 게을은  이긔니 길고 게을오미 을 이긔닌 멸고(丹書에 曰 敬勝怠者 吉고 怠勝敬者 滅고)〈4:2ㄱ-ㄴ〉

이 내용은 『용비어천가』 제 7장의 주석에도 나온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관련된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의 ‘怠’에 대하여 『용비어천가』(1:12ㄱ)에서는 ‘怠惰慢也’라고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소학집해』의 주석과 부합한다. ‘怠’와 ‘惰慢’ 모두 ‘게으르다’ 외에 ‘소홀하다, 함부로 하다’를 뜻하기도 한다. 1895년에 간행된 『국한회어』(131)에서는 표제어 ‘반말하다’를 ‘怠慢半辭’로 풀이하였는데, 여기서 ‘怠慢’이 ‘소홀함, 사람을 함부로 대함’이란 뜻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오만(傲慢)’의 ‘慢’도 마찬가지이다. 이 예문의 ‘게을은, 게을옴’은 ‘怠’의 정확한 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대표훈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62)가. 益者ㅣ 三友ㅣ오 損者ㅣ 三友ㅣ니 友直며 友諒며 友多聞이면 益矣오 友便辟며 友善柔며 友便佞이면 損矣니라〈3:35ㄱ-ㄴ〉〈소학언해 2:66ㄴ〉

 나. 유익 버디 세히오 해왼 버디 세히니 直니 벋 사며 信實니 벋 사며 드론 일 하니 벋 사면 유익고 便便 고 不直니 벋 사며 부드러움 교로이 니 벋 사며 말 재오 아외니 벋 사면 유해니라〈3:35ㄴ〉

 다. 유익ᄒᆞᆫ 이 세 가짓 벋이오 해로온 이 세 가짓 벋이니 直ᄒ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신실ᄒ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들은 것 한 이 벋ᄒᆞ면 유익고 거도ᇰ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며 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말ᄉᆞᆷ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면 해로온이라〈소언 2:66ㄴ-67ㄱ〉

(62나, 다)는 원문 구결에는 차이가 없는데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뽑아서 번호로 구분한다.

(63)가. ①友便辟며 ②友善柔며 ③友便佞이면

 나. ①便便 고 不直니 벋 사며

  ②부드러움 교로이 니 벋 사며

  ③말 재오 아외니 벋 사면

 다. ①거도ᇰ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며

  ②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ᄅᆞᆯ 벋ᄒᆞ며

  ③말ᄉᆞᆷ만 니근 이ᄅᆞᆯ 벋ᄒᆞ면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이 『소학집해』에 실려 있는데, 그것을 본 다음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주044)

성백효(1993:156)과 이충구 외(2019a:191)에 수록되었다.
해당 부분만 발췌한다.

(64) ①편(便)은 익숙함이다. 편벽(便僻)은 위의(威儀)에만 익숙하고 바르지 않음이고,

  ②선유(善柔)는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만 잘할 뿐 성실하지 않음이고,

  ③편녕(便佞)은 말에만 익숙할 뿐 문견(聞見)의 실속이 없으니,

   (便習熟也 便辟 謂習於威儀而不直 善柔 謂工於媚悅而不諒 便佞 謂習於口語而無聞見之實)

여기서 ②와 ③의 번역 차이에만 주목해 보자. 주자의 주석에서는 ‘善柔’를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을 잘함(工於媚悅)’이라고 하였다. 『소학언해』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善柔’를 ‘아다ᇰᄒᆞ기 잘ᄒᆞᄂᆞᆫ 이’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번역소학』에서는 주자의 주석과 달리, ‘便佞’을 ‘말 재오 아다ᇰᄃᆞ외니’로 번역하고 ‘善柔’는 ‘부드러움 고ᇰ교로이 ᄒᆞᄂᆞ니’로 번역하였다. ‘善柔’의 번역은 지나친 직역이어서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만약 ‘부드러움’이 ‘아다ᇰᄃᆞ외욤’을 뜻한다면, ‘善柔’와 ‘便佞’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 셈이 될 것이다.

(65) 曲곡禮례예 로 어딘 사 사미 날 야 깃븐 이를  과뎌 아니미 사미 날 야 도이 호  과뎌 아니니  사괴요 오올에 니라(曲禮예 曰 君子 不盡人之歡며 不竭人之忠니 以全交也ㅣ니라)〈3:36ㄱ-ㄴ〉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이다. 이 번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학집해』의 다음 주석을 보아야 한다.

(66) 여씨(呂氏)가 이르되, “남이 기쁘게 해 주기를 다 바라고 남이 충성스럽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남에게 바라기를 후하게 하는 것이니, 남에게 바라기를 후하게 하는데 남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이는 사귐이 온전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된다. 환(歡)은 나에게 좋게 해 주는 것이고 충(忠)은 나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나에게 좋게 해 주기를 바람이 깊지 않고 나에게 마음을 다해 주기를 꼭 바라지 않는다면 잇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呂氏曰 盡人之歡 竭人之忠 皆責人厚者也 責人厚而莫之應 此 交所以難全也 歡 謂好於我也 忠 謂盡心於我也 好於我者 望之不深 盡心於我者 不要其必盡 則不至於難繼也) 주045) 성백효(1993:157)과 이충구 외(2019a:192)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소학』의 번역이 주석의 내용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현대 국어로 옮기면, “「곡례」에서 이르되, 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기쁜 일을 한껏 베풀기를 바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정성스럽게 행함을 한껏 베풀기를 바라지 않나니, 그럼으로써 사귐을 온전하게 하느니라.”가 될 것이다. 언해문 중 ‘-과뎌’는 화자와 청자 외의 제 3의 인물의 행위를 소망할 때에 쓰이는 종결 형식이다. 이 언해문은 ‘-과뎌’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정확한 언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이 『소학언해』(2:67ㄴ)에서는 ‘曲禮예 오 君子 사 즐겨홈을 다디 아니며 사 졍셩을 다디 아니야  사괴욤을 오게 니라’로 바뀌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 즐겨홈을 다디 아니며 사 졍셩을 다디 아니야’이다. 한문 원문 ‘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만 놓고 보면 『소학언해』의 번역은 원문의 구조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주석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67) 主人은 문의 드로 올녀그로 고 손 문의 드로 왼녀그로 며 主人은 東階예 나가고 손 西階예 나갈 디니 소니 主人의게셔 갑거든 主人의 오 계졀에 나갈 디니 主人이 구틔여  후에 소니 다시 西階로 나갈 디니라(主人은 入門而右고 客은 入門而左며 主人은 就東階고 客은 就西階니 客若降等則就主人之階니 主人이 固辭然後에 客이 復就西階니라)〈3:37ㄱ-ㄴ〉

이 예문의 ‘드로ᄃᆡ’는 『소학언해』(2:68ㄴ)에서 ‘들어’로 바뀌었다. 이 책의 번역은 ‘문에 들어갈 때 문의 오른쪽 또는 왼쪽에 치우쳐 들어감’을 뜻하고, 『소학언해』의 번역은 ‘문에 들어간 뒤,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향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책의 번역이 『소학집해』의 주석과 부합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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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학의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교수)

1. 〈소학〉 언해의 얼개

소학(小學)은 한 때 윤리와 국어 교과서였다. 한마디로 수신 과목으로 누구나 소학을 거쳐 깊고 넓은 유학의 세계로 헤엄쳐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면, 〈번역소학(飜譯小學)〉은 누구나 알기 쉽게 유교의 도덕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알기 쉬운 우리말에 바탕을 두어 꾸며졌다. 〈번역소학〉의 간행 동기를 풀이한 남곤(南袞, 1471~1527)의 〈번역소학〉 발문을 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임금께서 즐기시는 바, 차례에 따라서 흥겹게 읽어나갈 데가 있었다. 염려되는 것은 사람들이 한문을 거의 모르기에, 익히고 배움에 오히려 어려움이 있다. 만일 소학을 우리말로써 번역을 해서 인쇄를 하여 널리 펴면 비록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라도 책만 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방도이니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여기 우리말 곧 방언(方言)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함은 마치 신라 신문왕 시절에 설총(薛聰, 655~743)이 방언으로써 ‘법구경’을 읽어 풀이하여 국학에서 후생들을 교육, 지도하였다는 점과 매우 비슷하다. 여기 방언이라 함은 중국의 말이 표준어, 곧 중앙어라면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말은 지역성을 띤 방언이라는 개념이다. 자신들이 평소 쓰는 말을 갖고 연구하여 읽고 가르침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말과 글을 살려 나아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길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번역소학〉은 16세기 초 우리말 연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10권 10책 목판본으로, 중종 13년(1518) 통문관에서 장계를 올림으로써 김전(金銓)·최숙생(崔淑生) 등으로 하여금 번역해 간행하도록 하였다. 〈중종실록〉 권34의 기록을 보면, 이 책은 같은 해 7월에 목판본으로 간행, 1,300질을 널리 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은 간경도감에서 낸 불경언해류에서 비롯된 직역(直譯)의 전통을 넘어 상당한 내용을 의역 중심으로 번역을 하였으니 당시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쓰려고 했고,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것은 주(註)를 넣어 읽기에 좋도록 했다. 이는 더 많은 백성이 널리 읽으라는 취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불경언해류에서 보여준 직역의 전통에 어긋난다 하여 몹시 비판을 했으며, 나아가 의역에 치우쳤다고 하여 선조 때 새로이 〈소학언해〉를 간행하였다. 〈번역소학〉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복간본 낙질(落帙)본만이 전하고 있는데, 이 복간본은 교정청(校正廳)에서 1587년 〈소학언해〉를 발행하기 전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권6~8은 고려대학교 도서관, 권9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의 가람문고, 권10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본디 〈소학(小學)〉이란 책은 남송(南宋) 효종 때 유자징(劉子澄)에 의해 쓰여진, 아이들이 보는 수신서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들어와 조선조 세종 10년(1428) 9월에 명나라의 〈집성소학(集成小學)〉 100권을 구입해 주자소에서 간행토록 한 바 있다. 지금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제유주소 소학집성(諸儒註疏小學集成)〉(10권 5책)의 정인지가 쓴 발문에는 세종 11년(1429년, 선덕 4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주자소에서 간행한 〈집성소학〉인 듯하다. 중종 13년(1518)에 임금의 명을 받아 교서관에서 찍어 나누어준 ‘印小學一千三百件 遍賜朝官’의 ‘소학’이, 명(明)나라 하사신(何士信)이 주해한 10권의 〈소학집성〉, 즉 세종 때 간행한 〈집성소학〉을 저본으로 하여 언해한 〈번역소학〉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 뒤 선조 20년(1587)에는 교정청에서 언해한 〈소학언해〉가 간행되었으니, 이는 자료로서의 분량도 방대하고 같은 16세기 안에 70년의 시간을 두고 번역된 책이기에 두 권의 비교를 통해서 16세기 국어의 변천하는 모습을 연구하는 데 그 뜻이 깊다.

2. 간행의 의의와 서지

〈번역소학〉의 간행 의의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소학에 드러난 윤리가 백성의 생활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성리학의 질서가 조선 사회에 정착되어 가는 데 크게 기여한 책이다.

* 16세기 국어의 문법 변화와 음운 변화,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낱말을 찾아 볼 수가 있다.

* 15세기의 불경 언해에서 정착된 직역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의역을 하였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을 위한 어문 정책의 일환이었다.

* 훈민정음을 널리 펴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번역소학〉의 장본은 다음과 같다.

고려대학교 만송문고(晩松文庫, 유병헌 선생 소장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합하여 모두가 낙질본(落帙本)이 보관되어 있는데 1~5권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모두가 을해자본의 목판본이다. 사주 쌍변(四周雙邊), 반곽의 크기는 세로 24.2센티, 가로가 16.3센티다. 경계선이 있는 안에는 9행 19자로 구성되어 있다. 판심은 대흑구 상하내향흑어미(大黑口上下內向黑魚尾)의 고기 꼬리 모양이다. 판심의 제목은 ‘소학(小學)’이고 안의 제목은 ‘번역소학(飜譯小學)’이다. 책의 크기로는 세로 31센티, 가로 20.4센티 정도 보통의 크기다.

원간본도 을해자본(乙亥字本)으로 보인다. 이는 복각본이 을해자본으로 되어 있기에 그러하다. 목각본에서 그러하듯이 제법 오각으로 보이는 글자들이 있다(홍윤표 해제(1984) 참조). 이제 번역 소학의 몇 가지 면모를 알아보도록 한다.

3. 자료상의 특징

가) 반치음 /ㅿ/에 관련한 보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한편 여린히읗[ㆆ]과 순경음비읍[ㅸ]의 분포는 찾기가 어렵다.

* 우리말의 경우 : 어버(7:1ㄴ) (6:24ㄴ) 아(7:8ㄴ) / 손(7:47ㄴ) 처(7:7ㄴ) / 야(6:16ㄴ) 고(7:10ㄴ) 후에(7:2ㄴ) 말이(9:77ㄱ) 등

* 한자어의 경우 : 셩(6:8ㄴ) 현(6:8ㄴ) 쥬(7:17ㄱ) 부(7:42ㄱ) 졍(7:3ㄱ) 소(7:28ㄴ)

나) 어두자음군에 관한 음운으로는 /ㅺ, ㅼ, ㅽ, ㅳ, ㅄ, ㅶ, ㅴ/ 등이 보이나 /ㅵ/은 거의 찾기가 어렵다.

리디(6:9ㄴ) (6:30ㄱ) (6:20ㄴ) (6:34ㄱ) (6:5ㄴ) 기(7:35ㄱ) 디여(6:15ㄱ) 려(6:14ㄱ) 등

다) 받침에서 합용병서의 보기는 리을(ㄹ)계가 주류를 이룬다.

디(6:30ㄱ) 고(6:16ㄱ) 여듧(6:23ㄱ) 등

라) 각자병서(各字竝書)의 분포는 찾기가 어렵다.

마) 종성에서 시옷(ㅅ)과 디귿(ㄷ)이 변별적으로 분포한다.

듣고(7:5ㄱ) 벋에(7:3ㄴ) 닷고(6:16ㄱ) 잇고(6:13ㄴ) 등

바) ‘외-’에 관한 여러 가지의 표기가 두드러진다.

외며(6:5ㄱ) 도외여셔(6:3ㄴ) 도의디(6:32ㄴ) 되오져(6:32ㄴ) 도엿(7:4ㄴ) 졍셩도(7:25ㄱ). 이런도로(7:30ㄴ) 등.

사) 아래 아 /ㆍ/는 제 2음절 이하에서 /ㅡ/로 바뀌는 보기들이 나타나 보인다.

마(9:49ㄴ) 반드시(9:80ㄴ)

아) 한자어의 독음을 병기하는 것이 기본이나 언해문에서는 몇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한자어의 한자를 표기하지 않았다.

자) 받침에 오는 ‘ㆁ’ 표기가 ‘ㅇ’과 혼재하고 있고, 갈수록 ‘ㆁ’ 표기가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직설이 아닌 에둘러 적기가 상당수 보인다. 강한 긍정을 이중부정으로 하여 강조하는 표현들이 눈에 뜨인다.

〈에둘러 적기〉

* 내 나 나 다게(9:89ㄴ) : 내가 남은 날을 다하도록.

* 내 셩이 병을 저티 아니노라(9:73ㄴ) : 내 천성이 병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 가난  만나셔(9:103ㄱ) : 흉년을 만나서.

* 제 어미  가진 아며 누의를(9:35ㄴ) : 제 어머니는 한 가지인 아우며 누이동생을.

〈이중부정의 보기〉

* 아니 거시 아니니라(8:40ㄴ) : 아니할 것이 없다.

* 조심 아니티 몯 노니(9:54ㄴ) : 조심 아니하지 못 하나니.

〈어려운 말들〉

* 진실로 문지두리 며 소니옛술  거 삼가디 아니면(6:24ㄱ) : ‘문지두리’는 대문을 지탱하는 구실을 하는 것. 추기(樞機)라고도 이른다. 일종의 은유로서 사안의 중요함을 에둘러 이르고 있다.

* 위곡다[慇懃](7:37ㄱ)

* 간방며[逢迎](7:37ㄴ)

* 한 할마님[증조모](:29ㄴ)

* 병이 장 되어[병이 위독하여](9:30ㄱ)

* 위연며[웬만하다](9:31ㄱ)

* 질실한[質實](9:85ㄱ)

《벽온신방》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간행 경위

≪벽온신방(辟瘟新方)≫은 1653년(효종 4), 왕명에 의해 간행된 1권 1책의 의서(醫書)로 표지를 제외하고 전체가 39쪽으로 되어 있다. 간행 배경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이 책의 맨 앞에 실려 있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인 채유후(蔡裕後)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는 “黃海道 癘疫 禮曹請遣近侍 設祭祈禳 令醫司優送藥物 從之”(孝宗實錄 卷十 四年 癸巳 二月 乙卯條)라 하였고, 채유후의 서문에도 “癸巳春海西 癘疫大熾 民多死亡者 上聞而憂之 分出內局藥材 以濟之”라고 하여 계사년(1653) 봄, 해서지방(황해도)에 여역(전염성 열병의 통칭)이 크게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던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에 왕은 근시(近侍)를 파견하고 약물을 보내어 구제하도록 하였다.

다시 채유후의 서문을 보자. “趙復陽 以爲藥物不可以普濟 莫如備示其治法藥名 禮曺判書臣李厚源請令醫官 就攷辟瘟舊方而增減之 印布中外 上從之 遂命御醫臣安景昌等 重加究閱叅 以經驗量減其材料之難辦者 務增其俗方之易試者 仍諺釋其說 名之曰辟瘟新方 令校書館刊出”이라고 한 것을 보면, 조복양(趙復陽)은 약물로써는 많은 사람의 구제가 불가하므로 치료법이나 약명을 가르쳐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하였다. 그러자 예조판서 이후원은 의관들로 하여금 ≪벽온구방≫을 검토하고 내용을 증감하여 인포(印布)하게 할 것을 청하니 효종은 어의(御醫) 안경창 등에게 명하여 ≪벽온신방≫을 간행케 하였다. 이는 그 전의 ≪벽온구방≫에서 약재의 난해한 것은 빼고 속방(俗方, 민간에 전해지는 치료 방법) 중에 쓰기 쉬운 것은 더하여 간행한 책인데 그 간행 시기는 1653년 3월이고, ≪벽온신방≫의 언해본이 나온 것은 서문 마지막 부분의 기록대로 그 해 7월 기망(旣望, 음력 16일)이다.

결국 ≪벽온신방≫은 ≪벽온구방≫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편찬한 책인데, 여기서 ≪벽온구방≫이라 함은 이전의 ≪벽온신방(辟瘟神方)≫(1613), ≪간이 벽온방≫(1525. 1613) ≪신찬 벽온방(新纂 辟瘟方)≫(1613) 등을 말한다.

2. 체재 및 형태

이 책은 단권으로서 서명(書名)은 ≪벽온신방(辟瘟新方)≫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한문으로 된 채유후의 서문으로서 2장(張)에 걸쳐 있다. 서문 부분의 제목은 「辟瘟新方序」라 달고 있으며 판심제도 「辟瘟新方序」라 하였다. 서문이 끝난 다음 장부터 한문과 언해문으로 된 본문이 시작되는데 이는 모두 18장이며, 권수제는 「辟瘟新方」으로 붙여 놓았고 판심제도 「辟瘟新方」으로 되어 있다. 장차(張次)는 서문과 본문을 구분하여 서문이 1~2장, 본문은 1~18장으로 각각 차례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언해문에는 한자가 일절 쓰이지 않았다.

현재 ≪벽온신방≫은 목판본과 활자본의 두 가지 이본(異本)이 전한다. 목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활자본은 서울대학교 가람 문고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 이본 간에 차이는 거의 없고 다만 표기상으로 몇 군데 다른 곳이 있다. 또한 배자(排字)에 있어 목판본은 10행 20자(서문은 19자)인 반면에 활자본은 10행 17자가 되어 목판본은 전체가 20장, 활자본은 2장이 늘어난 22장인 점이 다르다.

표기에 차이를 보이는 곳은 다음의 예들이다. ‘먹으라’(목판본 4ㄴ)가 ‘먹이라’(활자본 5ㄱ)로, ‘엿쇄 닐웬만의’(목판본 6ㄴ)가 ‘엿쇄 닐헨만의’(활자본 7ㄱ)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목판본 5ㄱ에는 ‘슌마다☐냥식’으로 되어 있어 한 글자의 탈자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활자본 5ㄴ의 ‘슌마다냥식’을 통해 목판본에서 []이라는 글자가 빠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 두 이본 사이에는 오자(誤字)가 일치하는 예도 보인다. ‘만히 어터[더]’(목판본 3ㄱ, 활자본 3ㄱ), ‘덥게 여 며[머]그라’(목판본 4ㄱ, 활자본 4ㄴ), ‘우믈믈 반 잔을 [] 머그라’(목판본 8ㄴ, 활자본 9ㄴ) 등과 같다.

위에서 소개한 두 이본 중에서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홍문각에서 영인한 바 있는 목판본이다. 목판본은 1책 20장으로서 채유후의 서문이 2장, 본문이 18장으로 되어 있다. 책의 크기는 세로가 30.6cm, 가로가 20.6cm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가 21.6cm, 가로가 16cm로서 계선(界線)이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대로 10행 20자씩(서문은 19자)이다. 주(註) 쌍행(雙行)이며 판심은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서문은 매행 첫 두 자를 띄워 17자로 썼고, 본문에서 한문 부분은 각 항목의 제목에 해당하는 어구(語句)를 첫 간부터 쓰고, 제목 다음의 설명 부분은 첫 자를 띄워 19자를 배자하였다. 그리고 언해문은 제목 부분이나 설명 부분 할 것 없이 모두 두 자를 띄우고 매행 18자를 배자하고 있다.

3. 내용

≪벽온신방≫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서문과 본문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채유후가 쓴 것으로서 이 책의 간행 동기와 경위를 밝히고 있다. 그 다음의 본문은 내용이 오로지 온역(瘟疫, 급성 전염병의 하나)의 치료에 관한 것으로서 허준(許浚)의 ≪신찬 벽온방≫과 거의 같으나 이보다 기술이 간략하고 언해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제 ≪벽온신방≫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본문에 있는 10개 항목의 제목을 모두 들어 보기로 한다.

온역병원(瘟疫病源, 1ㄱ), 온역표증의한(瘟疫表證宜汗, 1ㄴ), 온역반표반리의화해(瘟疫半表半裏宜和解, 5ㄱ), 온역이등의하(瘟疫裡등宜下, 6ㄱ), 온역발황(瘟疫發黃, 10ㄴ), 대두온(大頭瘟, 11ㄱ), 온역양법(瘟疫禳法, 12ㄱ), 온역벽법(瘟疫辟法, 13ㄱ), 부전염법(不傳染法, 15ㄱ), 금기(禁忌, 17ㄱ)

위의 항목들을 보면 특히 온역의 증상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표(表), 반표반리(半表半裏), 이(裏)로 나누어, 각각 온역이 밖으로 나타나는 증상, 반은 밖으로 나타나고 반은 속에 있는 증상, 속에만 들어 있는 증상을 언급하고, 그 증상별로 여러 가지 상세한 처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 온역양법과 온역벽법 부분에서는 어떤 글자 4자를 써서 문에 붙이라든지, 사해(四海) 신령의 이름을 외우라든지 하는 무속적인 방법이 제법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부전염법 부분에서는 환자가 있는 집에 가더라도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 및 음운

(1) 연철·분철

중세 국어의 정서법이던 연철법(連綴法)이 17세기에 오면 정서법의 자리를 분철법(分綴法)으로 서서히 넘겨야 할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 문헌에서도 체언의 경우에는 이미 분철의 시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체언 중에서도 유독 ㅅ 종성의 경우에는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때 하나의 예외도 없이 연철 표기만 나타난다.

오(3ㄱ), 그(4ㄱ), 그(7ㄴ), 낼 거시니라(2ㄱ), 더온 거스로(3ㄴ), 블근 거로(13ㄱ).

조심 거시니라(17ㄴ).

명사의 종성이 ㄱ인 경우에 분철과 연철, 분철과 중철(重綴)이 각각 혼용된 예가 하나씩 발견된다.

속에(6ㄴ), 으로(15ㄱ).

cf. 소게(6ㄱ, 6ㄴ), 그로(13ㄱ).

그러나 동명사의 ㅁ 다음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경우에는 연철이 절대적이다. 단 하나의 분철 예가 보일 뿐이다.

더우락 호(2ㄱ), 이시미니(2ㄱ), 몯(5ㄱ), 열믈(12ㄴ). cf. 셩이니(6ㄴ).

다음으로, 용언의 경우에는 아직도 연철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중에서도 분철을 시도한 예가 몇 개 나타난다. ‘삼으라’의 경우에는 세 번 등장하는데 모두 분철 표기만 보여 준다. 그 외에 연철과 분철을 함께 보여 주는 예도 있다.

삼으라(2ㄴ, 5ㄱ, 10ㄱ).

먹으라(4ㄴ), 코 안 불어(11ㄱ).

cf. 머그라(4ㄴ, 6ㄱ, 7ㄱ, 8ㄱ), 코희 부러(11ㄴ), 코 굼긔 부러(12ㄱ).

(2) 병서자(並書字)

합용병서는 ㅅ계, ㅂ계만 보이고(ㅶ의 용례는 없음), ㅴ과 ㅵ은 각각 ㅺ과 ㅳ으로 교체된 예가 있어 ㅄ계의 합용병서는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자병서는 ㅆ만이 나타난다.

싸흐라(2ㄴ, 3ㄱ, 6ㄱ), 쑤고(3ㄴ), 써(12ㄴ).

(7ㄱ), (2ㄱ), 디오고(17ㄴ).

기(9ㄴ), 라(5ㄱ), 거나(10ㄱ).

(9ㄴ, 10ㄱ), 아므 (2ㄴ).

cf. 티(월인석보 1:42ㄱ),  (월인석보 7:9ㄴ).

(3) 종성의 ㅅ, ㄷ 및 자음군

중세 국어의 8종성법이 근대 국어에 오면 표기에서 ㄷ종성이 사라짐으로써 7종성법의 체계가 된다. 이 문헌에서도 앞 시대에 ㄷ종성이던 낱말에서 ㅅ으로 교체된 예가 나타난다. 그렇다고 ㄷ종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한 쪽에선 ㅅ종성을 오히려 ㄷ으로 역표기한 예가 나타나고 있다.

굿고(6ㄴ), 못여(1ㄱ), 못게(13ㄱ), 못니라(14ㄴ), 못니(17ㄴ), 져근덧(3ㄱ).

cf. 몯(5ㄱ), 굳다 샤(월인석보 14:59ㄴ), 져근덛(법화경 언해 2:129ㄴ).

복(3ㄴ), 만치(11ㄱ),  두닐곱을(15ㄱ).

cf. 복애(구급 간이방 2:113ㄴ),  (구급 간이방 3:9ㄱ).

모음 사이에서는 원칙적으로 두 자음만이 허용되었으나, 종성으로 쓰인 ㄺ, ㄼ은 자음 앞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그 전통은 이 문헌에도 이어지고 있다. ㄻ 종성도 15세기에는 자음 앞에서 그대로 쓰였으나 이 문헌에서는 ㅁ으로 교체된 것을 볼 수 있다.

굵게(4ㄱ), 츩 불휘(4ㄴ), 븕고(5ㄴ), 게(7ㄴ), 늙고(11ㄱ),  울 (13ㄴ), 븕나모(14ㄴ).

여 아홉이(11ㄴ).

옴니(11ㄴ, 16ㄴ), 옴디 아니니(11ㄴ, 15ㄴ), cf. 옮니로(능엄경 언해 10:19ㄱ).

(4) 자음동화

중세 국어에서 ㅅ, ㄷ 말음이 비음(鼻音) 앞에서 ㄴ으로 동화되지만 이를 표기에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문헌에 와서는 자음동화를 표기에 반영하여 ㅅ, ㄷ 말음을 ㄴ으로 표기한 예가 제법 등장하고 있다.

인(1ㄴ, 2ㄱ, 5ㄱ, 13ㄱ), 인니라(3ㄴ), 드런(6ㄱ), 닷쇈만의(5ㄴ), 닐웬만의(6ㄴ).

됸니라(3ㄱ, 4ㄱ, 7ㄴ, 9ㄴ), 됸니(3ㄴ, 11ㄱ).

그리고 ‘-’(炒)의 경우에 ㅅㄱ이 역행동화로 ㄱ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外), ‘-’(折)의 경우에는 ㄱㄱ으로 표기되지 않고 있다.

복가(4ㄴ, 10ㄴ, 11ㄱ), cf. 봇가(구급 간이방 6:12ㄱ).

밧긔(5ㄱ, 5ㄴ), 것거(4ㄱ).

(5) 모음 간의 유기음 표기

유기음 말음을 가진 체언이나 용언 어간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중세 국어에서는 연철하는 방법만이 유일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들면서부터는 다음의 세 가지 표기법이 등장하여 그때마다 자의로 쓰였다. 그 첫째 방법은 전통적인 연철 방법이고, 둘째 방법은 선행 음절의 종성과 후행 음절의 초성에 이중으로 표기하는 중철 방법이며, 셋째 방법은 ㅊ, ㅋ, ㅌ, ㅍ을 각각 ㅅㅎ, ㄱㅎ, ㅅㅎ, ㅂㅎ으로 재음소화하여 표기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문헌은 체언과 용언의 경우에 표기법의 선택이 각각 달리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먼저 체언의 경우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표기 방법이 다 나타난다.

첫째 방법(연철 표기) : 겨(傍, 11ㄴ), 치(面, 12ㄱ), 치며(面, 10ㄴ).

둘째 방법(중철 표기) : 닙플(葉, 8ㄱ), 낫(個, 10ㄴ).

셋째 방법(재음소화 표기) : 동녁로(東, 14ㄱ), 올흔 녁(右, 14ㄴ), 솟(鼎, 15ㄴ), 코 긋(端, 16ㄴ), 밋흔(底, 3ㄱ), 닙흔(葉, 3ㄱ), 닙(葉, 14ㄱ).

그러나 용언의 경우에는 오로지 첫째 방법인 연철 표기만이 나타난다.

더프면(蓋, 3ㄱ), 브(附, 3ㄱ), 더퍼(蓋, 7ㄴ), 마면(嗅, 16ㄴ).

(6) 어중(語中)의 경음화

선행 음절의 말음으로 인하여 경음화가 일어나는 경우에 이 문헌에서는 경음화 표기가 자의적으로 나타난다.

맛이(2ㄱ) : 맛당이(5ㄱ), 밧(2ㄱ) : 밧긔(5ㄱ, 5ㄴ), 니라(5ㄱ) : 디라(5ㄴ),

섯(十二月, 7ㄴ).

cf. 섯래(구급 간이방 6:23ㄴ).

(7) 모음 간의 ㄹㄴ 표기

모음 사이에서 ㄹㄴ을 ㄹㄹ로 적은 예가 발견된다. 그리고 모음 다음에서 ㄹㅇ이 ㄹㄹ로 변한 표기도 보인다.

열라(發熱, 8ㄱ), 솔립(松葉, 14ㄱ).

cf. 아츤 설날밤(除夜, 15ㄱ).

리(粉, 12ㄱ), (粉, 16ㄴ), 뢰여(乾, 14ㄱ).

이(구급간이방 1:67ㄴ), (구급간이방 6:1ㄴ), 외여(간이벽온방 14ㄴ).

(8) 그 밖의 혼용례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 이외에 동일한 낱말의 표기가 서로 다르게 된 예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게(細, 14ㄱ) : 게(14ㄱ), 다(五合, 2ㄴ) : 다솝(3ㄴ, 6ㄱ, 7ㄱ),

더우락치우락(寒熱, 5ㄴ) : 더오락치오락(6ㄴ), 맛당이(當, 5ㄱ) : 맛당히(5ㄴ, 6ㄴ, 12ㄱ).

이(多, 3ㄴ) : 이(3ㄱ), 불휘(根, 3ㄱ, 9ㄴ) : 불희(5ㄱ) : 불(14ㄱ).

라(呑, 13ㄱ) : 고(15ㄱ) : 기면(15ㄱ), 알며(痛, 1ㄴ) : 알프며(3ㄱ, 11ㄴ) : 아프고(4ㄴ).

2. 문법

(1) 주격 조사 ‘-가’

이 문헌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이 주격 조사 ‘-가’의 등장이다. ‘-가’는 이미 16세기 후반의 국어에 존재했던 것으로 거론되지만 실제로 문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이다. 그 문헌이 바로 이 ≪벽온 신방≫이다.

그 내가 병 긔운을 헤티니(其香能散疫氣, 15ㄴ).

위에서 보듯이 ‘-가’는 처음에 i, j로 끝나는 체언 뒤에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주격 조사 ‘-가’의 사용이 생산적이지 못하였고 따라서 이 문헌에서도 ‘-가’의 사용은 위의 예가 유일하다.

(2) 재구조화

체언이나 용언 어간이 종전의 형태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구조화한 예를 볼 수 있다. 15세기 국어에서 ‘솝’(裏)으로 쓰였던 말이 여기서는 ‘속’으로 재구조화하였고, ‘만-’(多)가 ‘많-’으로 재구조화하였다. ‘속’의 경우에는 재구조화 이후의 예만 보이지만 ‘만-’의 경우에는 재구조화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속에(6ㄴ), 소게(6ㄱ). cf. 甁ㄱ소배(월인석보 1:10ㄱ).

만여(8ㄴ), 만하(1ㄴ, 5ㄴ, 9ㄴ).

‘만여’는 재구조화 이전에 사용되던 ‘만-’의 활용형이고, ‘만하’는 재구조화 이후의 ‘많-’의 활용형이다.

(3) 의도법 ‘-오/우-’의 소멸

15세기 국어에서 명사형 어미 ‘-ㅁ’과 연결 어미 ‘-’ 앞에는 의도법의 선어말 어미 ‘-오/우-’의 첨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면서 동요되기 시작하여 17세기가 되면 쇠퇴하기에 이른다. 이 문헌에서도 ‘-오/우-’가 거의 사라졌으나 아직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이시미니(2ㄱ), 몯믈(5ㄱ), 셩이니(6ㄴ), 열믈(12ㄴ), 머그되(2ㄴ, 5ㄱ, 10ㄱ), 되(13ㄱ).

cf. 호(2ㄱ), 게 호되(12ㄱ).

(4) 접속 조사 ‘-과’

중세 국어에서 접속 조사는 체언의 음운 조건에 따라 체언의 끝소리가 모음이거나 ㄹ인 경우에는 ‘-와’, 그 밖의 자음인 경우에는 ‘-과’가 쓰인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모음인 경우에도 ‘-과’가 쓰인 예가 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바르게 쓰인 예도 있어 혼기(混記)로 보인다.

머리과 치 장 븟거든(頭面腫盛, 12ㄱ).

cf. 나 닷쇈만의 머리와 몸이 아프며(四五日頭身痛, 5ㄴ).

3. 어휘

(1) ‘즉시’와 ‘즉제’

‘즉시’는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한자어 ‘卽時’로 많이 사용되면서 현대어에까지 이르고 있는 낱말이다. 반면에 고유어로는 ‘즉자히’와 ‘즉재’가 초기부터 공존하면서 함께 쓰였다. 그러다가 ≪구급 간이방≫(1489)에 오면 ‘즉재’ 일변도로 쓰인 가운데 유일하게 ‘즉제’(2:90ㄴ)와 ‘즉채’(3:70ㄱ)가 하나씩 나타난다. 이 문헌에는 전통적으로 써 오던 ‘즉시’와 ≪구급 간이방≫에서 첫 선을 보인 ‘즉제’가 함께 나타난다.

누론 믈 토면 즉시 됸니(吐黃水卽差, 11ㄱ).

사이 마면 즉제 머리 쉿굼그로 드러(聞之卽上泥丸, 16ㄴ).

(2) 다솝(五合)

곡식이나 물의 양을 재는 단위로 ‘홉’(合)을 쓰는데, 여기서는 ‘다섯 홉’을 이르는 말로 ‘다솝’이라 하고 있다. ‘다섯’과 ‘홉’이 축약된 형태로 보이는데, 다른 데서는 같은 용례를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이형태(異形態)로 ‘다’도 쓰였다.

니 다솝과 달혀 쥭을 쑤고(粳米半升煮成粥, 3ㄴ), 믈  되 다솝 브어(6ㄱ).

믈  되 다솝과 강 세 편 대쵸 둘 녀허(7ㄱ), 믈  되 다 브어 칠 홉 되게 달혀(2ㄴ).

(3) ‘알다’와 ‘앓다’

기원적으로 ‘알다’는 동사 ‘앓다’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동사 어근 ‘앓-’에 접미사 ‘-/브-’가 통합되어 ‘앓-+-/브-→알/알프-’가 된 말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알/알프-’와 ‘앓-’이 분화되지 않고 자의적으로 사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예로서 ‘頭痛(두통)’을 번역하고 있는 구절을 보면 ‘알/알프-’와 ‘앓-’의 선택에 어떤 구분이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는 모두 ‘頭痛’을 번역한 구절들이다. ‘알/알프-’와 ‘앓-’이 똑같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머리 알며(1ㄴ), 머리 알프며(3ㄱ), 머리 알프며(11ㄴ).

머리 알며(2ㄴ), 머리 알커든(3ㄴ), 머리 알코(4ㄴ).

〈참고 문헌〉

서울대 도서관(2001). 『규장각소장 어문학자료 - 어학편 해설』. 홍문각.

이철용(1991). 온역에 관한 의서의 국어학적 연구. 『한양 어문』 9권. 한양어문학회.

홍윤표(1982). ≪벽온신방≫ 해제. 벽온신방 영인본. 홍문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언해 해제

이유기(동국대학교 교수)

1. 머리말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언해(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諺解)』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저술한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1209, 고려 희종 5)를 언해한 책이다. 1522년(조선 중종 17)에 간행되었는데, 간행처와 언해자를 알 수 없다. 언해의 대상인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당나라 때 선사(禪師)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의 저술인 선(禪) 수행 지침서 『법집별행록』의 주요 내용을 간추리고[절요(節要)], 그를 바탕으로 자기 견해를 기록한[사기(私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법집별행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풀이>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지눌의 『법집별행록』을 주해한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 이후, 연담유일의 책이 『사기(私記)』로 불리고, 지눌의 책은 『절요(節要)』로 불리고 있다. 이 글에서도 약칭을 쓸 경우에는 이를 따르기로 한다. 아울러 이에 따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언해』는 『절요언해』라 줄여 부를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언해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한 책은 성암고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이하 ‘성암본’이라 부름.), 또 한 책은 남권희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 성암본은 일찍이 안병희(1985)에 의해 소개되었고, 1998년 『서지학보』(제22호)에 영인되어 실렸다. 성암본은 낙장이 아주 많은데, 『서지학보』의 영인에서는 낙장 중 일부를 남권희본에서 보완하여, 총 19장을 제외한 나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언해서의 저경이 어느 책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언해서 이전에 나온 한문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중 현전하고 있는 조선 시대 판본은 규봉암본(圭峰庵本, 1486, 전라도 광주 규봉암 간행)밖에 없다. <풀이>전남 영광 불갑사(佛甲寺) 사천왕상 복장 유물 중 고려본으로 추정되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가 있다(송일기 2004a:73, 131 ; 송일기 2004b:19-20).

이 언해서의 저경을 추정하고자 한다면, 비록 근거가 충분치 않지만 규봉암본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규봉암본의 실물이나 영인본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소개한 규봉암본의 1ㄱ(첫 면), 25ㄴ, 26ㄱ, 58ㄴ(마지막 면)의 이미지를 보건대, 규봉암본과 신광사본(神光寺本, 1570년, 황해도 해주 신광사 간행)은 글자 모양이 미세하게 다를 뿐, 다른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광사본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원문)보기’로 내용 전체를 열람하고 다운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역주와 해제에서는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언해서를 대조하였다.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풀이>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청구기호는 ‘古貴 1797-8’. 책명은 실수로 ‘병’이 빠진 ‘법집별행록절요입사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지 사항과 국어학적 특징에 대해서는 안병희(1985)에서 이미 치밀하게 살펴본 바 있고, 그 이후에 최은규(1998), 김양원(2003), 이은영(2005) 등도 같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밝혀진 것은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는 데에 그치고, 그보다는 종래에 소개되지 않은 언해의 특징 및 문제점 등을 중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2. 법집별행록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2.1. 종밀과 법집별행록

이 언해서의 저경인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이하 ‘절요’)는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의 『법집별행록』의 내용을 간추리고 사사로운 견해를 적어 넣은 책이다. ‘별행(別行)’의 의미에 대해서는 회암정혜(晦菴定慧)와 연담유일(蓮潭有一)이 밝힌 바 있다. 즉 규봉 종밀이 참선 수행의 4종파인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 마조(馬祖)의 홍주선(洪州禪), 법융(法融)의 우두선(牛頭禪), 하택신회(荷澤神會)의 하택종(荷澤宗)을 비교한 다음, 그 중 하택종이 가장 나은 것으로 판단하여 특별히 유통하게 하였기 때문에 ‘별행(別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①法集別行者通集諸宗之法 而別行菏澤之法(회암정회, 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②法集別行者 四宗之法集之 而荷澤宗別行於世也.(연담유일, 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그런데 정작 『법집별행록』 또는 『법집』이란 책은 전하지 않는다. 불교학계에서는 지눌의 『절요』 중 ‘사기(私記)’를 제외한 ‘법집별행록절요’ 부분이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약칭: 사자승습도)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삼아, 『사자승습도』와 『법집』을 동일시하거나, 원류(源流)가 하나인 것으로 보고 있다(최연식 1999:117, 상오 2001:5). 신규탁(2010:117-203, 311)은 『사자승습도』의 원문과 번역문을 싣고, 『사자승습도』가 『법집별행록』이라고 단정하였다. 두 책의 관련성을 처음 밝힌 것은 字井伯壽(1966)이다. 『사자승습도』는 선종(禪宗)의 종파(宗派)에 대한 배휴(裴休, 791-864)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한 종밀(宗密)의 저작이다. 한편 배휴가 지은 「화엄원인론서(華嚴原人論序)」라는 글이 바로 「법집서(法集序)」의 와전(訛傳)이라는 견해도 있다. 송나라 때 정원(淨源) 법사는 『전당문(全唐文)』 「배휴조(裴休條)」에 실린 배휴(裴休)의 글 「화엄원인론서(華嚴原人論序)」가 「법집서(法集序)」의 와전이라고 주장하였다(淨源, 『原人發微錄』, 신찬속장경 58-719 중-하). 배휴(裴休)의 글과 번역문은 신규탁(2010:25-33)에 실려 있다.

2.2. 지눌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지눌(知訥, 1158~1210)은 고려 선종(禪宗)의 중흥조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諡號)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다.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이었던 정광우(鄭光遇)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에 출가하였는데, 특별한 스승은 없었고 육조 혜능(六祖慧能)을 특별히 흠모하였다고 한다.

1182년(명종 12)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곧 이어 보리사(菩提寺)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을 것을 결의하였다. 1200년(신종 3)에 길상사(吉祥寺)에서 정혜결사 운동을 계속하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길상사는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이다. 돈오 점수(頓悟漸修)를 역설하고, 점수(漸修)의 방법으로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강조하였다.

저서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진심직설(眞心直說)』,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등이 있다.

지눌의 『절요』는 우리나라 선종의 4집과(四集科) 교재 중의 하나이다. 4집과 교재란 제월경헌(霽月敬軒, 1544-1633)이 1578년에 제시한 참선 수행의 교과 과정이다(손성필 2013:16).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가 그것인데, 각각 『도서(都序)』, 『절요(節要)』, 『선요(禪要)』, 『서장(書狀)』이라 줄여 부른다.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가 참선 수행 지도서로서 얼마나 중요한 위상을 지녔는지는 1486년~1740년 사이의 현전 간본이 총 27종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송일기·김동연 2016). 이 책에 대한 주석서로는 상봉정원(霜峰淨源, 1627년~1709)의 『절요사기분과(節要私記分科)』(전하지 않음), 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의 『법집별행록절요사기』, 회암정혜(晦庵定慧, 1685~1741)의 『법집별행록절요사기해(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가 있다. 현대의 현토 주석서로는 안진호(1957), 안진호·조계종교재편찬위원회(1998), 대한불교조계종 교재편찬위원회(2005)가 있으며, 현대의 번역서로는 회암정혜와 연담유일의 주석까지 함께 붙여서 번역한 상오(2001)이 있다.

3.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언해

3.1. 문헌 개요

여기에서는 성암문고본을 대상으로 하여, 서지 사항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이 언해서의 간행처와 언해자는 알 수 없다. ‘嘉靖元年季春有 日’이란 간기를 통해 1522년(중종 17)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오역이 아주 많은 것으로 보아,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언해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은 앞뒤가 보존되지 않은 1책의 목판본이다. 해제를 통해 이 책의 모습을 알린 안병희(1985:2)는 구겨진 책장을 편 흔적이 뚜렷하고 개장(改裝)된 지 오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해책(解冊) 상태의 복장품이 발굴된 뒤에 제책(製冊)된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 장차가 113장(226면)인데, 약 58면의 낙장이 있다. 낙장이 1/4이 넘는 셈이다. 낙장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1ㄱ, 17ㄱㄴ, 39ㄱ, 40ㄱ-48ㄴ, 55ㄴ, 67ㄱ, 68ㄱㄴ, 84ㄴ, 93ㄱ-96ㄱ, 98ㄱ-106ㄴ, 109ㄱ-110ㄴ, 112ㄱㄴ(총 58면)

이 책의 영인은 『서지학보』 제22호(1998)에 실렸는데, 낙장된 58면 중 20면을 남권희본으로 보하여, 다음 총 38면을 제외한 나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2) 17ㄱㄴ, 39ㄱ, 40ㄱ, 55ㄴ, 67ㄱ, 68ㄱㄴ, 84ㄴ, 93ㄱ-95ㄴ, 96ㄴ, 98ㄱ-105ㄴ, 109ㄱ-110ㄴ, 112ㄱㄴ(총 38면)

이 책의 권수제는 ‘法법集집別별行ᄒᆡᇰ錄록’이며, 판심 서명은 ‘別行錄’이다. 제29-32장의 판심제 ‘別行錄’ 바로 아래에는 ‘一’ 자가 적혀 있다. 혹시 제2권을 준비하다가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풀이>이 언해서에서 언해한 내용은 한문본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데, 특히 거의 끝 부분에서 거의 절반 정도가 언해에서 제외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언해를 완결짓지 못하고 서둘러 끝낸 듯하다.

이 책의 판심 서명이 ‘別行錄’인 것은 지눌의 『절요』의 판심 서명이 ‘私記’ 또는 ‘私’인 것과 다르다. 책의 내용은 종밀의 저술을 절요(節要)한 ‘법집별행록절요’(이하 필요에 따라 ‘절요’라 칭함.)와 지눌의 저술인 ‘사기(私記)’로 나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둘이 시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즉 ‘절요’와 ‘사기’의 구별이 없다. 둘을 구별하지 않은 채 구결 달린 원문은 맨 위 칸을 비우지 않고 언해문은 맨 위 칸을 비웠을 뿐이다. 이와 달리 신광사본(한문본)에서는 ‘절요’는 행의 맨 위 칸을 비우지 않고 ‘사기’는 한 칸을 비워서 구별하고 있다. 다른 한문본도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협주의 형식도 특이하다. 흑구 어미를 사용하지 않고 협주가 시작되는 위치에 ○ 부호를 두고 소자(小字) 쌍행(雙行)으로 적었다. 협주가 끝나는 위치에는 아무런 부호가 없다(9ㄱ, 13ㄴ, 19ㄱ, 21ㄱ …). 그런가 하면 협주 부분에 아예 아무런 표시가 없는 곳도 있고(12ㄱ, 60ㄴ …), 협주가 끝나는 위치에까지 ◯이 표시된 곳이 더러 보인다(77ㄴ 2회, 81ㄴ, 84ㄱ). 더 특이한 것은 구결 달린 원문에도 협주가 달린 경우가 있는 것이다(21ㄱ-ㄴ, 26ㄴ, 27ㄴ, 28ㄱ, 67ㄴ 3회, 86ㄱ). 필자가 확인한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근거로 추정컨대, 이것은 한문본의 협주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 나타나는 협주들은 내용 면에서 협주로 기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언해자가 범한 실수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한편 원문에 협주를 단 것도 특이하지만, 원문에 협주를 달고도 언해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3) 文繁 不具載시니라(29ㄱ)

예문 (3)은 원문에 달린 협주 부분인데 언해에서는 제외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예는 내용의 측면에서 본다면 일반적인 협주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다.

3.2. 국어학적 특징

(1) ㅿ

이 책에서는 반치음이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ㅅ’으로 변화한 예도 보이고, 15세기에 ‘ㅇ’이나 ‘ㅅ’으로 표기되었던 것을 ‘ㅿ’으로 표기한 과잉교정의 사례도 보인다.

(4) 가. ᄆᆞᅀᆞᆷ(9ㄱ), 지ᅀᅳ며(13ㄴ), ᄉᆞᅀᅵ(37ㄱ), ᄒᆞ야ᅀᅡ(97ㄴ)

나. ᄉᆞ시(14ㄱ, 53ㄱ), 지수미(89ㄴ), 지술(106ㄴ)

다. ᅀᅵ셔(65ㄱ), 비르ᅀᅥ(54ㄱ)

라. 修슈心심人인(2ㄱ), 倖然연(2ㄱ)

(4가)는 15세기의 일반적인 표기법과 같이 쓰인 것이고, (4나)는 ‘ᄉᆞᅀᅵ, 지ᅀᅮ미, 지ᅀᅮᆯ’의 ‘ㅿ’이 ‘ㅅ’으로 변한 예이고, (4다)는 과잉교정의 예이며, (4라)는 한자음의 ‘ㅿ’이 ‘ㅇ’으로 변한 예이다. (4다)의 ‘비르ᅀᅥ’는 다른 문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이 책에서만 보이는데, 예가 아주 많다. 그러나 ‘비르서’의 용례도 적지 않다.

(5) 가. 비르ᅀᅥ : 40ㄴ, 45ㄴ, 47ㄴ, 54ㄱ, 59ㄱ, 65ㄱ, 81ㄴ

나. 비르서 : 19ㄴ, 27ㄴ, 40ㄴ

(2) ㆁ

‘ㆁ’은 음절 종성으로만 나타난다.

(6) 宗(1ㄴ), 볼디언(2ㄴ), 이ᇰ에(18ㄱ, 34ㄱ, 86ㄱ), 이(67ㄴ), 버ᇰ으다(75ㄴ)

(3) 방점

이 책의 성조 표시는 대단히 혼란스럽다. 방점이 있기는 하나, 아무런 원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7) 가. ·디 아·니·케 ·시·니라(2ㄴ)

나. ①알오져 홀딘댄(42ㄱ) ②보:고져 :홀·딘·댄(50ㄴ)

다. ①아:라(53ㄱ) ②아·라(53ㄱ)

라. ①:닷(2ㄴ) ②닷(83ㄱ)

(7가)에서는 어절말 거성의 평성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선종영가집언해』(1464)에서 이미 그 싹이 보이던 현상이다. (7나-라)는 동일한 어절이 서로 다르게 표시된 것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7다)에서는 같은 면 안에서의 혼란상을 볼 수 있다.

다른 언해서와 달리 원문에 한자음(전통적 한자음)이 달려 있는데, 원문의 구결에도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가 하면 방점을 찍지 않은 곳도 있다. 42ㄱ~ㄴ의 언해문 총 8행에는 방점이 전혀 찍히지 않았다. 그리고 40ㄴ의 언해문에서는 총 6행 중 제1행에만 방점이 찍히고 나머지 5행에는 방점이 전혀 찍히지 않았다. 방점이 찍히지 않은 두 곳은 모두 남권희본의 것이다.

(4) 중철

이 책에서는 중철의 예가 고유어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한자어와 고유어가 연결될 때에도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16세기 전반의 문헌에서 보이는 표기 현상이다. 종성 ‘ㄱ, ㄴ, ㄷ, ㄹ, ㅁ, ㅂ’의 순서로 제시한다.

(8) 가. 반기(14ㄴ), 옥개 나며(73ㄱ), 눈 기(106ㄱ)

나. 靈覺기라(56ㄴ2), 裴相國기(61ㄱ), 樂(66ㄴ)

(9) 가. 니며(28ㄴ)

나. 世間냇(6ㄴ), 聖人(77ㄴ), 관원(65ㄴ)

(10) ᄠᅳᆮ든(11ㄴ), 드로(13ㄴ), 디(20ㄱ)

(11) 時節레(5ㄱ), 每日레(7ㄱ), 知訥른 私記시니라(115ㄱ)

(12) 가. 삼면(2ㄴ), 석 뎜미(31ㄱ)

나. 本心믜(69ㄴ), 龜鑑(77ㄴ), 一念메(96ㄱ)

(13) 가. 여듧(96ㄱ)

나. 法비(28ㄱ), 法베(80ㄴ), 多劫베(72ㄱ)

(5) 관형격 조사의 형태

이 책에서는 관형격 조사 ‘의’나 처소 관형격 조사 ‘엣/앳’이 쓰일 위치에 부사격 조사가 쓰인 예가 많이 보인다. 이것은 중세국어 문헌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다.

(14) 가. 그러나 우희 三宗이 가지가짓 마리 디 아니나 다 이 二利行門에 제곰 맛호 조 디라  허믈 업스니라(29ㄴ)

나. 이 우희 頓悟와 漸修와 다 부텻 나가 經敎브터 니시니라(97ㄱ)

다. 이 後에 漸修 圓滿 漸修ㅣ니(71ㄴ)

라. 諸大乘經과  古今에 諸宗 禪門과 荷澤에 릴오 븓건댄(52ㄱ)

마. ᄭᅮ메 져ᇰ스ᇰ이(67ㄴ)

바. 祖師宗애 無心 道애 契合 사 定과 慧와의 걸이 닙디 아니니라(89ㄴ).

(14가, 나)의 ‘우희’는 ‘우흿’이 기대되는 자리에 쓰였다. (14다)의 ‘後에’는 ‘後ㅅ, 後엣’이 쓰일 위치에, (14라)의 ‘古今에, 荷澤에’는 ‘古今엣, 荷澤ᄋᆡ’가 쓰일 위치에, (14마)의 ‘ᄭᅮ메’는 ‘ᄭᅮ멧’이 쓰일 위치에, (14바)의 ‘祖師宗애’는 ‘祖師宗ᄋᆡ’가 쓰일 위치에 나타났다.

이 현상은 이 시기에 이미 부사격 조사 ‘에, 애’와 관형격 조사 ‘의, ᄋᆡ’가 비변별적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것은 오늘날 관형격 조사 ‘의’를 [에]로 발음하는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국어의 이 현상은 정확하게 말하면 정반대로 해석해야 한다. 즉 관형격 조사 [에](음성언어)를 표기 규정에서 ‘의’로 표기하기로 정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4가-바)에 나타난 외형상의 부사격 조사는 언해자가 관형격 조사로 인지하고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3.3. 언해의 특징

(1) 부분 번역

이 언해서에서는 한문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일부만을 언해하였다.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대비해 보면, 여러 곳에서 일부 내용을 언해 대상에서 제외하였는데, 거의 끝에 가서는 한문본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통째로 제외하였다. 제외된 내용은 모두 지눌이 덧붙인 ‘사기(私記)’이다. 내용이 빠진 위치를 ○○○으로 표시한다. 끝에 가서 절반 가량을 언해에서 제외한 사실은 애초에 이 언해서를 두 책으로 간행하려다가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15) 언해에서 제외된 내용

가. 牧牛子 曰호 ○○○ 自大師法眼이(언해서 77ㄱ)
제외된 내용 : 若論修證頓漸 義勢多端 撮其樞要 不出此錄中 頓悟漸修耳 審諸師所說 分列名義 開合不同 且如貞元疏云 第五辨修證淺深者 然一經之內上下諸文 皆明修證 恐文浩愽 復撮其要(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5ㄴ-16ㄱ)
나. 若云호 寂照ㅣ라 며 或知無念이라 호 則雙明定慧也ㅣ니라 ○○○ 前云호(82ㄱ)
제외된 내용 : 若云揚眉瞪目 皆稱爲道 即此名修 此通二義 一令知其 觸目爲道 即慧門也 二令心無所當 則定門也 餘可類知 不出定慧 牧牛子 每恨講師 不學禪法 及看澄觀所撰貞元疏 至辨脩證門 喜其合明禪旨故 錄之于此 其中所悟心之性相 能悟定慧二門 非此錄中 對辨要急之義 然恐學敎人 只以此文所明 全收禪法故 略辨得失 令生正信爾 就能悟門 明定慧(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7ㄱ)
다. 然이나 禪門 ○○○ 頓敎애(82ㄴ)
제외된 내용 : 以有能悟所悟修治之門 屬於漸宗 離垢定慧 以心地無癡無亂 離能所觀 名頓宗 自性定慧 行相有異 辨明修之 即其冝矣 又引禪門 無念無修拂迹顯理等 屬於定門 看心觀心等名慧門 或寂照 或知無念等 爲雙明也 然禪門 唯北宗定慧 有漸次先後之義 頓宗全無單修之相 況拂迹顯理之門 何有定慧之名迹耶 淸凉非不知 且以言迹分之 令汎學軰 知修行 不出定慧爾 夫心有法義之殊 宗師據法離言 以無迹之言 令人破執現宗 是謂迹絶於意地 理現於心源矣 學者因師激發 頓悟一法則心之義用 自然現發故 於破執現宗門 無是定是慧 隨義之說也(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7ㄱ-ㄴ)
라. 如是修行 方爲正門 成兩足尊 非認名執相之流所見所行也(84ㄴ 낙장 부분) ○○○
제외된 내용 : 禪門 揚眉瞪目之作用 云此通定慧二義 若約功行門義用 言之定慧 是諸聖修因之大意 經論之通宗 然禪門達者 揚眉瞬目現道之作 本非義理所傳 是達士相逢 文外相見 以心傳心之作用也 故先德云 妙旨迅速 言說來遲 纔隨語會 迷卻神機 揚眉當問 對面熙怡 是何境界 同道方知 據此而論(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8ㄱ-ㄴ)
마. 此無心合道ᄂᆞᆫ 亦是徑截門得入也ㅣ니라 ○○○ 此下ᄂᆞᆫ 正是所辨悟修頓漸義也 ᄒᆞ시니라(91ㄱ)
제외된 내용 : 其看話下語 方便妙密 不可具陳 但罕遇知音耳(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20ㄱ)
바. 運心頓修ㅣ오 不言功行頓畢ᄒᆞ시니라(97ㄱ) ○○○ 云無ᄅᆞᆯ 不離日用ᄒᆞ야 試如此做工夫ㅣ어다(106ㄱ)
제외된 내용 : 약 63면(기재를 생략함)(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25ㄱ~57ㄱ)
사.又云ᄒᆞᄃᆡ(107ㄱ) ○○○ 趙州狗子無佛性話ᄅᆞᆯ 喜怒靜閙에 亦須提撕ᄒᆞ야(107ㄴ)
제외된 내용 : 牧牛子曰 此法語 但彰八種病若檢前後所說 有眞無之無 將迷待悟等二種 故合成十種病也(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57ㄱ)

가장 많은 분량이 빠진 곳은 (15바)이다. 그런데 중간의 낙장 때문에 언해에서 제외된 부분의 범위가 분명치 않다. 언해서 97ㄱ의 원문 ‘運心頓修 不言功行頓畢’은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25ㄱ에 해당하는데, 낙장(98ㄱ~105ㄴ : 총 14면) 끝에 다시 이어지는 언해서의 106ㄱ은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57ㄱ에 해당한다.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가 총 108면(1ㄱ~59ㄴ)인데, 여기에서만도 그 중 약 63면(25ㄱ~57ㄱ)이 언해서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모두 ‘사기’ 부분이다. 중간의 낙장(총 14면)이 비교적 많기는 하지만, 한문본 1ㄱ-ㄴ이 언해서에서는 1ㄱ-5ㄴ(5배)에 해당하는 것을 고려하면, 낙장인 14면의 한문 원문은 3면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치에서 적어도 61면 정도가 언해에서 제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광사본 『절요』가 총 108면(1ㄱ~59ㄴ)이므로 61면은 절반이 넘는 분량이다. 언해서만 두고 본다면 ‘절요’ 부분과 ‘사기’ 부분의 분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대문(大文)의 수가 ‘절요’는 50개, ‘사기’는 69개이다(낙장 부분 제외). 그러나 언해되지 않은 약 61면이 모두 ‘사기’임을 고려하면, 한문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사기’의 양적 비중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해당 내용이 언해에서 제외된 까닭을 해명하는 일은 필자의 영역이 아니어서 억측을 삼가고자 한다.

(2) 언해자의 개입

이 책에는 특이하게도 언해자가 서술자(narrator)로서 글 속에 개입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화자를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16) 가. 牧牛子ㅣ … 觀行 龜鑑 시니라(1ㄴ)

나. 大安 元年 己巳 夏月레 海東 曺溪山 牧牛子 知訥 私記시니라(113ㄱ)

다. 엇뎨어뇨 니 心性 밧긔  法도 어로 어두미 업슨 젼니라 그럴 오직  아로로 곧 修行 사시니라(18ㄴ)

라. 이제 洪州의 쳐 뵈요 能히 말 것히라 니=今에 洪州의 指示 能語言等이라 니(59ㄴ-60ㄱ)

(16가)는 지눌의 ‘사기(私記)’ 부분이다. 이 문장의 주어 겸 화자는 지눌(목우자)인데 서술어에 높임의 ‘-시-’가 쓰였다. 지눌을 존대하기 위해 언해자가 서술자로서 개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다음 대문(大文)의 1인칭 대명사 ‘내(=나+ㅣ)’와의 불일치를 초래한다. (16나)는 간기(刊記)를 언해한 특이한 경우인데, 여기서도 언해자가 개입한 것을 볼 수 있다. (16다)는 종밀의 저술을 간추린 ‘절요(節要)’ 부분이다. 화자는 종밀(宗密)이며 ‘ᄆᆞᅀᆞᆷ 아로ᄆᆞ로 곧 修行ᄋᆞᆯ 삼-’의 주체도 종밀이다. 그런데 그 서술어에 높임의 ‘-시-’가 쓰인 것이다.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밀을 존대하기 위해 언해자가 서술자로서 개입한 것이다. (16라)는 화자가 종밀인 ‘절요’ 부분인데, ‘-라 ᄒᆞ니’는 원문에 없는 서술자의 목소리이다. 이런 언해자의 개입은 ‘니ᄅᆞ시니라(60ㄴ), ᄒᆞ시니라(64ㄴ), ᄒᆞ시니라(76ㄱ)’에서도 볼 수 있다. 언해자가 서술자로서 개입하는 것은 다른 언해서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3) 한문본과의 차이

이 책의 한문 원문이 한문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곳이 있다.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언해서의 구결문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17) 한문본과 언해서 구결문의 차이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언해서 구결문
가. 私曰(9ㄴ, 10ㄱ, 11ㄱ, 12ㄴ) 牧牛子ㅣ 曰호ᄃᆡ(44ㄴ, 46ㄴ, 50ㄴ, 60ㄴ)
나. 豈爲有智慧人也(14ㄱ-ㄴ) 豈有智慧人也ㅣ리오(69ㄴ)
다. 不在文字(16ㄱ)
라. 迷皆不能故 云阻也(15ㄴ) 迷皆不能故로 阻也ㅣ니라(75ㄱ)
마. 即云(17ㄱ) 前云호(82ㄱ)
바. 或知無念等故修心者 依此難爲趣入矣 今略伸而明之(18ㄱ) 或知無念이라 시니 修心之人이 難爲趣入故로 而今에 略伸而明之시니(83ㄱ)
사. 禪門又有修定慧外(19ㄱ) 又有修定慧外예(86ㄱ)

(17가)는 한문본의 ‘私曰’을 언해서에서 ‘牧牛子ㅣ 曰호ᄃᆡ’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신광사본에서도 ‘牧牛子曰’이 몇 군데 보인다(1ㄱ, 15ㄴ, 57ㄱ …). (17마)는 ‘前云’ 앞에서 원문의 일부 내용이 언해에서 제외된 데에 따른 변개이다. 그 밖에도 ‘然이나 禪門 頓敎애 至自性定慧雙明門컨댄(언해서 82ㄴ-83ㄱ)’의 ‘頓敎’와 ‘自性’은 원문에 없는 것을 보입(補入)한 것이다(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7ㄱ-ㄴ 참조). ‘禪門’ 뒤에 일부 내용이 언해에서 제외된 데에 따른 조처이다.

(4) 언해서 내부의 불일치

언해서 내부의 불일치도 보인다. 구결문의 내용이 언해문에서 달라진 것이다.

(18) 가. 皆類此也ㅣ니라(22ㄱ)

나. 이 密師의 무리라(22ㄱ-ㄴ) ‘或言皆不可得修와 不修等이 皆類此也ㅣ니라(22ㄱ)’가 ‘시혹 다 외다 니며 시혹 修며 不修호미 올티 몯다 닐오미 이 密師의 무리라(22ㄴ)’로 언해된 것인데, ‘이 密師의 무리라’는 오역이다. ‘다 이와 같다’란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類此’가 ‘이 물(무리)’로 번역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대문은 종밀 선사에 대한 기술이지, 종밀 선사를 따르는 무리에 관한 기술이 아니다.

(19) 가. 私曰호ᄃᆡ(39ㄴ)

나. 牧牛子ㅣ 닐오ᄃᆡ(39ㄴ)

(20) 가. 唯空寂知也ㅣ니(47ㄴ)

나. 오직 미 얼굴 업서 괴외호 히 아니(47ㄴ)

(21) 가. 一者ᄂᆞᆫ 解悟ㅣ니 謂호ᄃᆡ 明了 性과 相과 ᄒᆞᆯ 시오(91ㄴ)

나. 나 여 알 시니 닐오 不變性과 隨緣相과 기 알 시오(91ㄴ-92ㄱ)

(22) 가. 積於淨業면 此生애 雖未得徹悟ㅣ라도 不失成佛之正因也ㅣ리라(5ㄴ)

나. 조  뫼호면 이 生애 비록  아디 몯디라도 부텨 욀 正因을 일티 아니리(5ㄴ-6ㄱ)

(23) 가. 修行妙門 唯在此也(9ㄴ)

나. 修行 微妙 法門이 오직 이 荷澤祖師의 치샨 말매 자 잇니라(10ㄱ)

(18나)는 원문의 이해를 위하여 지시 대상을 밝힌 것이고, (19나)는 화자를 명시한 것이다. (20나)에서는 ‘얼굴 업서’와 ‘녀ᇰ녀ᇰ히’가 추가되었다. 다른 문헌이라면 협주로 처리될 내용을 본문에서 부연한 것이다. (21나)는 ‘性’과 ‘相’을 부연한 것이다. 원문의 ‘ᄒᆞᆯ’은 ‘明了’에 결합한 것이고, ‘性과 相과’는 ‘明了’의 대상이다.

(22나)의 ‘다’는 [愛]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업(業)’에 대한 번역으로 쓰였다.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 정업(淨業)’이라는 의미로 쓰인 듯한데, 파격적인 의역이다. (23나)의 언해에서는 부연이 가해졌다.

(5) 오역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오역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상당 부분에서는 원문의 구결부터 틀리게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역 중 일부를 검토하고 바로잡고자 한다.

(24) 가. 修豈稱眞哉이리오(12ㄱ-ㄴ)

나. 엇뎨 眞實이라 니리오(12ㄴ)

(24나)는 ‘修’를 언해에서 빠뜨린 것이다. ‘엇뎨’ 앞에 ‘닷고미(=닦음이)’를 추가하면 될 것이다.

(25) 가. 不知濟舟외 覆舟왜 功過懸殊니 故로 彼宗이 於頓悟門에 雖近나 而未的고 於漸修門엔 全乖니라(23ㄴ)

나.  타 이대 건넘과  타 므레 업팀괏 功이 머리 다  아디 몯 젼로(23ㄴ24ㄱ)

(25나)의 ‘ 타 이대 건넘과  타 므레 업팀괏 功이 머리 다  아디 몯’은 원문 ‘不知濟舟 覆舟 功過懸殊’의 ‘過’를 실수로 번역하지 않은 것이다. ‘功이’는 ‘功과 허므리’가 되어야 한다.

(26) 가. 答호 眞心本體 有二種用니 一者 自性의 本用이오 二者 隨緣應用이니(58ㄱ)

나. 답호 眞실 ‘眞실’은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옮긴 것이다. 한자어를 이렇게 표기한 예가 가끔 있다.  本體 두 가짓 用이 잇니 나 自性本體오 둘흔 隨緣應用이니(58ㄴ)

언해문의 ‘自性本體오’는 ‘自性本用이오’의 잘못이다. 구결 달린 원문에는 바로 되어 있다.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12ㄱ)에도 ‘自性本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문의 서두와 결말을 보면 두 가지 용(用)을 설명하는 것이 이 대문의 중심 내용이지만, 본론 부분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자성본체(自性本體), 자성본용(自性本用), 수연용(隨緣用)’ 세 가지를 다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자성본체’에 대한 설명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언해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예문은 원문에 협주가 붙은 특이한 예인데, 여기서 언해자는 연속적으로 실수를 범하고 있다. 본문과 협주의 문법적 경계를 인지하지 못한 데에 따른 오역이다. 이 책에는 협주 부호로 쓰이는 어미(魚尾)가 없고 그 대신 ○이 쓰였는데, 여기서는 ○ 대신 어미를 붙여 제시한다.

(27) 가. 又上애 三家의 見解異者 初 一切皆妄이라 니 <원주>【北宗이라】 次 一切皆眞이라 니 <원주>【洪州 馬祖이라】 後 一切皆無이라 니 <원주>【牛頭이라】 若就行야 說者댄 初 伏心滅妄니 <원주>【北宗이라】 次 信任情性니 <원주>【洪州 馬祖이라】 後 休心不起니 <원주>【牛頭이라】 (21ㄱ-ㄴ)

나.  우희 세 祖師의 見解 달오 初 一切ㅅ 거시 다 거즛 거시라 니 北宗이오 버거 一切ㅅ 거시 다 眞이라 니 <원주>【洪州 馬祖이라】 後 一切ㅅ 거시 다 업스니라 니 <원주>【牛頭 和尙이라】 다가 行애 나가 닐올뎐 初  복야 妄念을 업게 니 <원주>【北宗 神秀이라】 버거 情性을 信야 아니 <원주>【洪州 馬祖이라】 後  업게 야 닐왇디 아니케 니 <원주>【牛頭 和尙이라】 (21ㄴ-22ㄱ)

원문의 ‘初 一切皆妄이라 니 <원주>【北宗이라】’에서 ‘北宗이라’가 본문의 문장을 완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初 一切皆妄이라 니’만으로는 문장이 완결되지 않고 여기에 ‘北宗이라’가 붙어야만 문장이 완결된다. 협주의 내용이 본문의 문장 성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예가 연속적으로 보이는데, 언해문의 구조 면에서 볼 때 모두 협주가 아니라 본문의 요소이다. 언해문의 ‘北宗이오’는 원문의 ‘北宗이라’를 수정한 것이지만, 협주 내용이 원문의 문장 성분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北宗이오’ 부분은 특이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협주 부호가 사라지고 ‘北宗’을 본문처럼 대자(大字) 단행(單行)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이오’는 소자(小字) 쌍행(雙行)으로 적혀 있다. 이처럼 원문에 협주가 붙는 특이한 현상은 한문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영향이다.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4ㄴ-5ㄱ)에도 이 부분이 협주로 표시되어 있다.

오역의 진원지는 언해문의 ‘이라 ᄒᆞ니’이다. ‘이라 ᄒᆞ니’를 ‘이라 ᄒᆞ고’ 또는 ‘이오’로 고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다만, ‘後 一切ㅅ 거시 다 업스니라 니’와 ‘後  업게 야 닐왇디 아니케 니’는 성격이 다르다. 그대로 두거나 문장을 종결해야 한다. 이처럼 협주의 내용이 본문의 문장 성분으로 참여하는 예가 더 있다(26ㄴ, 27ㄴ, 28ㄱ, 67ㄴ 3회, 86ㄱ).

(28) 가. 又錄中에 所載혼 神秀等諸宗을 在前者(2ㄴ)

나. ᄯᅩ 語錄애 記호 神秀 諸宗을 몬져 두(3ㄱ)

‘記호’은 원문의 구결 ‘혼’을 ‘호ᄆᆞᆫ’으로 오역한 것이다. ‘記혼’으로 언해하여야 한다.

(29) 가. 知之一字 是衆妙之源이라(8ㄱ-ㄴ)

나. 아  字 이 모 衆生과 聖人과 욀 미묘 根源이라(9ㄱ)

여기서는 두 가지 오역이 보인다. 첫째, ‘아  자’은 ‘知之一字’에 대한 오역이다. ‘知  자<세주>(=‘知’라는 한 글자는)’으로 언해해야 한다. 이 저술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개념인 ‘知’를 오역한 것은 의외이다. 둘째, ‘이 모 衆生과 聖人과 욀 미묘 根源이라’도 오역이다. ‘是衆妙之源’은 ‘이것은 여러 미묘한 이치의 근원이다’란 뜻인데, 엉뚱하게 번역하였다.

(30) 가. 若依言敎ᄒᆞ야 息滅忘念호리니 念盡ᄒᆞ면 則心性이 覺悟ᄒᆞ야 無所不知ᄒᆞ논 디 如磨拂昏塵ᄒᆞ야 塵이 盡ᄒᆞ면 則鏡體明淨ᄒᆞ야 無所不照ᄐᆞᆺ ᄒᆞ리라(11ㄴ)

나. 다가 말브터 妄念을 그처 업게 호리니 妄念이 업스면 心性의 아로미 가와 아디 몯  업슨 디 거우루 라 거믄 듣그리 업스면 거우루 톄 고 조하 비취디 아니  업 리라(12ㄱ)

‘업게 호리니’는 오역이다. 원문이 ‘若 ··· 則’ 구문이고 ‘若’의 지배 범위가 ‘依言敎息滅忘念 念盡’이므로, 그 내부에서 ‘-리니’가 쓰일 수는 없다. ‘업게 호리니’가 아니라 ‘업게 야’가 되어야 할 것이다.

(31) 가. 覽鏡者ㅣ 要在辨自面之妍醜耳니라(32ㄴ)

나. 거울 볼 사미 모로매 제 치 고오며 구줌 요매 이실 미니라(33ㄱ)

‘거울 볼 사미 … 이실’은 ‘要’를 빠뜨린 번역이다. 본문의 뜻은 거울의 용도(필요성) 또는 거울을 보는 사람의 요구를 말한 것이다. 즉 ‘거울 보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제 얼굴이 고운지 못났는지를 알고자 함일 뿐’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2) 가. 古人이 云호 佛法이 貴在行持ㅣ언 不取一期口辨이라 니(32ㄴ)

나. 古人이 닐오 佛法이 귀히 行 디뇨매 잇고 갓 이브로 마초ᄧᅥ 요 取티 말라 시니=옛 사람이 이르되, 불법(佛法)이 귀한 것은 실천에 있으니, 한갓되이 입으로 증명하여 분별함을 취하지 말라 하시니(33ㄱ)

‘귀히’는 오역이다. ‘귀호미’가 옳은 번역이다. ‘불법이 귀한 것은 실천에 있다’는 것이다. 이 오역은 잘못된 구결에 이끌린 것이다. ‘佛法이 貴在行持ㅣ언’의 ‘이’ 때문에 ‘佛法’을 ‘잇고’의 주어로 착각한 것이다. ‘佛法貴在行持’에서 ‘佛法’의 서술어는 ‘貴’이다. 한편 ‘잇고’는 ‘이시니’의 잘못이다. 이와 짝이 되는 원문의 구결 ‘在 … ㅣ언’의 ‘ㅣ언’도 부적절하다. ‘(貴在行持)ᄒᆞ니’가 옳다.

(33) 가. 經營造作世間과 出世間괏 種種事數니(36ㄱ)

나. 世間과 出世間간앳 가지가짓 이 디내여 일워 짓니(36ㄱ)

‘디내여’는 ‘經營’의 ‘經’을 번역한 것이다. ‘經營’에서의 ‘經’은 ‘治’를 뜻하므로, ‘디내여’는 부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經’의 의미에는 ‘측량하다, 날줄, 글월, 경서(經書), 목매다, 변함없다, 다스리다, 지나다, 지경(地境), 곧다’ 등이 있다.

(34) 가. 洪覺範이 於林間錄中에 斥破此師의 所判고 扶顯洪州과 牛頭之旨者 此師의 所論過失리 似歸諸宗之主ㅣ라 恐惑後學之心故也ㅣ니(61ㄱ-ㄴ)

나. 洪覺範이 林間錄 中에 이 宗密禪師의 신 고 허러 리시고 洪州와 牛頭와 둘 들 자바 나토샤 이 洪覺範 和尙의 허믈 의론호미 여러 祖師의 見解를 리디 아니케 시니라 後代옛 學者ㅣ  모ᄅᆞᆯ가 저흐신 젼ᄎᆡ시니(62ㄱ)

‘洪覺範 和尙의 허믈 의론호미’의 ‘洪覺範 和尙’은 원문에는 ‘此師’로 나타난다. 이 ‘此師’는 ‘洪覺範 和尙’이 아니라 ‘宗密’이다. ‘此師’가 두 번 나오므로 지시 대상이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似歸諸宗之主ㅣ라’를 ‘여러 祖師의 見解를 리디 아니케 시니라’로 번역한 것도 잘못이다. ‘여러 종주에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로 번역해야 한다. 이 대목은 ‘(홍각범이 종밀 화상의 허물을 따져서 부정하고 홍주와 우두의 종지를 옳다고 보고 드러낸 것은) 종밀 화상의 논한 바 과실이 모든 종주(宗主)에게 귀결되는 것 같아서, 그것이 후학들의 마음을 현혹시킬까 두려워한 까닭이다.’를 뜻한다.

(35) 가. 豈不似覺來예 更求出獄脫枷乎ㅣ리오(72ㄴ)

나. 엇뎨 자다가 여 오매 구든 옥개 나며 모  갈 바사 료 求티 아니리오(73ㄱ)

(35가)에서는 원문의 ‘似’ 자를 언해에서 빠뜨렸다. 옳은 언해는 다음과 같다.

(36) 엇뎨 자다가 여 오매 구든 옥개 나며 모  갈 바사 료 求호미 ᄀᆞᆮ디 아니리오(=어찌 자다가 깬 이후에 굳은 감옥에서 벗어나며 목에 끼인 칼을 벗어버림을 구하는 것과 같지 않으리오?)

이 중 ‘求호미’의 ‘이’는 비교 부사격 조사이고, ‘ᄭᆡ여 오매’의 ‘오매’는 ‘來’를 직역한 것이다.

(37) 가. 若於達人相見야 不知敎外ㅣ여 傳心之旨고 說是定是慧ᄒᆞ면 則豈非令他로 墮於義用야 迷卻神機耶ㅣ리오 淸凉이 非不知此旨언마 且引迷宗失旨者야 令專修定慧爾니라(85ㄱ-ㄴ)

나. 다가  안 사 서르 맛나 經敎 밧긔  傳 들 아디 몯고 이 定과 이 慧와 니면 엇뎨  義用애 러디여  神妙 靈機 모게 리오 淸凉 國師ㅣ 이 들 모디 아니켄마  宗을 모며 들 일흔 사 혀 내여 오오로 定과 慧와 닷게  미니라(85ㄴ-86ㄱ)

여기에서는 세 가지 잘못을 범하였다. 첫째, 원문 ‘不知敎外ㅣ여’의 ‘ㅣ여’는 ‘예’의 잘못이고, 이를 언해한 ‘經敎 밧긔’는 오역이다. ‘ㅣ여’는 호격 조사인데, ‘不知敎外’는 호격어가 아니다. ‘예’를 각수가 ‘여ㅣ’로 잘못 읽은 것이다. 구결은 쌍행으로 적히므로 독자들은 ‘여ㅣ’를 ‘ㅣ여’로 읽게 된다. 그런데 ‘敎外예’로 고치더라도 이 ‘예’는 적절한 구결이 아니다. ‘不知敎外傳心之旨’에서 ‘敎外’는 부사어가 아니라 관형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경교(經敎)’도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지만, 그것이 아닌, ‘경교(經敎) 밖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敎外)예’가 아니라 ‘(敎外)옛’이 옳은 구결이다. 이에 따라 언해문도 ‘經敎 밧긧’이 되어야 한다.

둘째, ‘이 定과 이 慧와 니면’은 원문 ‘說是定是慧’의 ‘是’를 관형어로 번역한 것인데, ‘定’과 ‘慧’를 수식하는 관형어가 쓰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是’를 주어로 보아 ‘닐오 이 定이오 이 慧라 면(=이르되 이것은 정이고 이것은 혜라 하면)’으로 언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셋째, ‘엇뎨  義用애 러디여  神妙 靈機 모게 리오’도 오역이다. 원문은 ‘則豈非令他로 墮於義用야 迷卻神機耶ㅣ리오’인데, 언해에서 ‘非’를 빠뜨렸다. 그리고 ‘ᄠᅥ러디여’도 ‘떨어지게 ᄒᆞ야’로 언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옳은 언해는 ‘엇뎨  義用애 러디게 ᄒᆞ야  神妙 靈機 모게 호미 아니리오’이다.

(38) 가. 體非種種者 謂호 此性이 非凡이며 非聖이며 非因이며 非果ㅣ며 非善이며 非惡이며 無色며 無根며 無住며 乃至無佛며 無衆生也ㅣ니라(14ㄴ-15ㄱ)

나. 佛性의 體 種種이 아니라 호 닐온 이 佛性이 凡夫 아니며 聖人 아니며 因 아니며 果 아니며 善 아니며 惡 아니며 色 업스며 相 업스며 根 업스며 住 업스며 부텨 업스며  업스니라(15ㄱ)

‘ 업스니라’는 이 문장의 주어부인 ‘佛性의 體 種種이 아니라 호’과 호응을 이루지 못한다. ‘ 업닷 마리라’로 고쳐야 한다.

(39) 가. 不約知고 以顯心니 是 現量顯也ㅣ라(59ㄴ)

나. 아 거 자바 니시고  나토와 니디 아니시니 이 現量으로 나토와 니시니라(60ㄱ-60ㄴ)

‘아 거 자바 니시고  나토와 니디 아니시니’는 ‘不約知고 以顯心니’의 번역인데, 원문과 언해문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언해문의 의미와 일치하려면 원문이 ‘約知而 不說以顯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담유일(蓮潭有一)은 『節要科目幷入私記』(1797년 이전)에서 ‘不約知之不字 此字也’라 하였다. 즉 여기의 ‘不’이 ‘此’의 오기임을 밝힌 것이다(상오 2001:51-52). 신광사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12ㄴ)에도 ‘此’로 나타난다. 즉 올바른 원문이 ‘此約知以顯心’인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언해는 ‘이ᄂᆞᆫ 아ᄂᆞᆫ 거ᄉᆞᆯ 자바 ᄆᆞᅀᆞᄆᆞᆯ {나토시니/나토샤미니}(=이것은 아는 것을 잡아서 마음을 {나타내시니/나타내신 것이니})’이다.

(40) 가. 密師 豈不知牛頭之道ㅣ 圓滿成就耶ㅣ리오마(27ㄱ)

나. 宗密禪師 엇뎨 牛頭의 道理 圓滿히 일워 잇  모디 아니컨마(27ㄴ)

‘엇뎨~모디 아니컨마’은 오역이다. ‘엇뎨~모리오마’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원문의 ‘豈’와 구결 ‘ㅣ리오마ᄅᆞᆫ’을 보지 못하고 언해한 듯하다.

(41) 가. 疑局者 彼云호 唯認知호미 是偏局也ㅣ니라(44ㄱ)

나. 의심야 국집가 호 뎌 宗이 닐오 오직 아 거 아로미 이 츼자바 국집가 더니라=(44ㄱ)

여기서는 ‘疑’의 지배 범위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역이 발생한 듯하다. ‘疑’는 이 문장 전체를 지배한다. 이 문장은 ‘치우침(局)이라는 것은 저(홍주종)가 말하는 바, 오직 안다[知]는 것을 아는(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치우쳐 집착함이 아닌가 한다<세주>(=의심한다)’란 뜻이다. 그렇다면 언해는 ‘국집이라 호 뎌 宗이 닐온 오직 아 거 아로미 이 츼자바 국집호민가 ᄒᆞᄂᆞ니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42) 가. 次明漸修者 雖頓悟法身眞心미 全同諸佛나(71ㄴ)

나. 버거 漸漸 닷다 호 비록 法身 眞心미 젼혀 諸佛와 나(72ㄱ)

이 문장에서는 부사 ‘버거’가 ‘닷다 홈’을 수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역이다. 그 결과 ‘버거 漸漸 닷다 호’의 서술어를 찾을 수 없는 문장이 되고 말았다. 원문 ‘次明漸修者’에서 ‘明’을 빼고 ‘버거 漸漸 닷다 호’으로 언해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원문의 의미는 ‘다음으로 점수를 밝힌다면’이다. 즉 ‘次’는 ‘明’을 수식하는 것이다. ‘次明漸修者’를 ‘버거 漸漸 닷고 기건댄’으로 언해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43) 가. 豈不似覺來예 更求出獄脫枷乎ㅣ리오(73ㄱ)

나. 엇뎨 자다가 여 오매 구든 옥개 나며 모  갈 바사 료 求티 아니리오(73ㄱ)

이 예문은 원문의 ‘似’ 자를 빼먹은 오역이다. 옳은 언해는 ‘엇뎨 자다가 여 오매 구든 옥개 나며 모  갈 바사 료 求호미 ᄀᆞᆮ디 아니리오(=어찌 자다가 깬 이후에 굳은 감옥에서 벗어나며 목에 끼인 칼을 벗어버림을 구하는 것과 같지 않으리오?)’이다. ‘求호미’의 ‘이’는 [비교]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이다.

(44) 가. 說漸者 則看心修淨며 方便通經며 或頓悟漸修며 或漸修頓悟고 說頓者 直指心體며 或頓毁語言며 或頓悟頓修며 或無修無悟ㅣ라 시니라(78ㄱ)

나. 漸修 닐오  보와 조호 닷라 며 方便넷 經을 通達며 시혹  믄득 알오 졈졈 닷라 며 시혹 졈졈 닷가  다 알리라 며 頓悟 닐오 바  體 치시며 시혹 말 다 허르시며 시혹 頓悟頓修ㅣ라 며 시혹 닷곰도 업스며 아롬도 업스니라 시니라(79ㄱ-ㄴ)

원문의 ‘說漸者’과 ‘說頓者’을 각각 ‘漸修 닐오’과 ‘頓悟 닐오’으로 언해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각각 서술부 ‘ᄆᆞᅀᆞᄆᆞᆯ 다 알리라’, ‘닷곰도 업스며 아롬도 업스니라’와 호응하지 못한다. 각각 ‘漸修 니ᄅᆞᄂᆞ니ᄂᆞᆫ(=점수를 설하는 이는)’과 ‘頓悟 니ᄅᆞᄂᆞ니ᄂᆞᆫ(=돈오를 설하는 이는)’을 잘못 쓴 것이다.

(45) 가. 如宗鏡錄애 云호 如前所述安心之門에 直下애 相應면 無先定慧라 시니라(86ㄱ) ··· 絶一塵而作對어니 何勞遣蕩之功이며 無一念而生情이라 不假忘緣之力ᄒᆞ리니 (89ㄱ)

나. 宗鏡錄애 닐오 알 닐온 安心 法門네 바 드러마면 定과 慧왜 先後ㅣ 업스리라 시니라(86ㄴ) ···  듣글도 對야 지수미 업거니 엇뎨 잇비 룔 功을 며  念도 情 나미 업순 디라 緣慮 니줄 히믈 븓디 아니니라(89ㄴ)

여기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난다. ‘定과 慧왜 先後ㅣ 업스리라’는 ‘無先定慧’를 ‘定과 慧 사이에서 선후를 가릴 수 없다’는 의미로 본 것인데, 이것은 오역이다. ‘安心之門 直下相應 無先定慧’의 의미는 ‘安心의 門에 바로 상응하는 데에는 定慧에 앞서는 것이 없다’이다. 이것은 바로 뒤에 나오는 협주 ‘先明定慧시고 後現無心시니라’와도 부합한다.

‘ 듣글도 對야 지수미 업거니 엇뎨 잇비 룔 功을 며  念도 情 나미 업순 디라 緣慮 니줄 히믈 븓디 아니니라’는 비문이다. 이 문장의 직접 구성 요소는 ‘ 듣글도 ~-거니 엇뎨 잇비 룔 功을 며’와 ‘ 念도 ~디라 緣麗 니줄 히믈 븓디 아니니라’인데, 그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다. ‘-거니 : 디라’의 불일치도 부적절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엇뎨 잇비 룔 功을 며’와 ‘븓디 아니니라’의 불일치이다. 의문문과 평서문을 결합시켜서 비문이 된 것이다. 전절(前節)을 ‘ 듣글도 對야 지수미 업거니 엇뎨 잇비 룔 功을 리오’로 고쳐서 문장을 완결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한편 ‘ 念도 情 나미 업순 디라’도 오역으로 보인다. 원문은 ‘無一念而生情’인데, ‘生情’의 ‘生’은 자동사가 아니라 타동사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타동사로 번역하면 ‘情 내요미’가 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대한 실수가 보인다. ‘如宗鏡錄애 云호’의 ‘如’도 번역에서 누락되었는데, 이것은 ‘無先定慧라 시니라’의 잘못 쓰인 ‘ᄒᆞ시니라’와 관련이 있다. 『종경록(宗鏡錄)』의 인용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멀리 건너뛰어서 ‘緣慮 니줄 히믈 븓디 아니ᄒᆞᄂᆞ니라=不假忘緣之力ᄒᆞ시니’(89ㄴ)에서 끝난다(조계종 교재편찬위원회 1998:3 6, 상오 2001:90). 그렇다면 ‘如’의 번역은 ‘緣慮 니줄 히믈 븓디 아니ᄒᆞᄂᆞ니라’(89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定과 慧왜 先後ㅣ 업스리라 ᄒᆞ시니라’의 ‘ᄒᆞ시니라’는 삭제하고, ‘緣慮 니줄 히믈 븓디 아니ᄒᆞᄂᆞ니라’를 ‘緣慮 니줄 히믈 븓디 아니ᄒᆞᄂᆞ니라 ᄒᆞ샤미 ᄀᆞᄐᆞ니라’로 고쳐야 할 것이다.

(46) 가. 故로 石頭和尙이 云호ᄃᆡ 吾之法門ᄂᆞᆫ 先佛이 傳授ᄒᆞ샤ᄃᆡ 不論禪定精進ᄒᆞ시고 唯達佛之知見이라 ᄒᆞ시니 是也ㅣ니라 此無心合道ᄂᆞᆫ 亦是徑截門得入也ㅣ니라(90ㄴ-91ㄱ)

나. 이런 젼로 石頭和尙이 닐오 우리 法門이 過去 諸佛이 傳야 맛디샤 禪定과 精進과 니디 아니시고 오직 부텻 知見 알라 니시니 이 말미 이 無心道애 契合호미  이 즐어가 門에 드로미니라(91ㄴ)

이 부분의 언해도 옳지 않고 현결(懸訣)도 부적절하다. 언해자는 석두화상의 말의 범위를 ‘우리 法門이~드로미니라’로 본 듯하다. 그렇게 보면 ‘니ᄅᆞ디 아니ᄒᆞ시고’와 ‘알라 니ᄅᆞ시니’의 주체는 ‘過去 諸佛’인 셈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석두화상의 의견이 드러난 부분은 ‘이 말미 이 無心道애 契合호미  이 즐어가 門에 드로미니라’에 국한된다. 그러나 상오(2001:92)에서는 ‘吾之法門 先佛傳授 不論禪定精進 唯達佛之知見 是也’를 ‘나의 법문은 먼저 부처님이 전해 주시되, 선정(禪定)과 정진(精進)을 말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로 번역하고, 이 부분을 석두화상의 말로 보았다. 이 번역이 옳다.

이 대문의 ‘禪定과 精進과를 말하지 않고 오직 부처의 知見을 알라고 말함(①)’과 앞 대문의 ‘自性 定慧도 오히려 義用애 걸이곤 며 더러운  여희오 닷고려  漸修門넷 定慧 엇뎨 이 無心 道理예 나가리오(②)’는 인과 관계로 연결되고 있다. 즉 ②가 원인이고 ①이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런 젼로 石頭和尙이 닐오’가 놓여 있으므로, ①이 석두화상의 말이어야 문맥이 자연스럽다. 이 부분을 의미가 더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다듬으면, ‘(석두화상이 이르시되) 나의 법문(法門)은 앞선 부처들이 전해 주신 것이되, (나의 법문에서는) 선정과 정진을 말하지 않는다. (나의 법문은) 오직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가 될 것이다.

(47) 가. 若云호ᄃᆡ 頓悟과 漸修와ᄂᆞᆫ(91ㄴ)

나. ᄒᆞ다가 닐오ᄃᆡ 몬져 ᄆᆞᅀᆞᄆᆞᆯ 믄득 알오 後에ᅀᅡ 漸漸 닷고ᄆᆞᆫ(92ㄱ)

원문을 직역하지 않고 근거 없이 많이 부연하였다. 현결(懸訣)도 부적절하고 언해도 옳지 않다. 구결의 ‘와ᄂᆞᆫ’을 ‘와 홀뎬’으로 고치고 언해문은 ‘ᄒᆞ다가 믄득 알오 漸漸 닷고ᄆᆞᆯ 닐올뎬’으로 언해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부합할 것이다.

(48) 가. 似此之流 返不如依密師 如實言敎 專精觀察 能伏愛憎嗔喜人我勝負之心也ㅣ니라(110ㄴ-111ㄱ)

나. 이  사 두루혀 宗密禪師의 如實 言敎브터 專一히 펴보와 히 홈과 믜옴과 서글품과 깃붐과 내 어디로라   降伏게 홈만 디 몯니라(111ㄱ)

원문 ‘人我勝負之心’을 ‘내 어디로라 ᄒᆞᄂᆞᆫ ᄆᆞᅀᆞᆷ’으로 언해하였다. 크게 잘못된 번역이다. 원문은 ‘나와 남을 구별하는 마음[人我],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집착[勝負之心]’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49) 가. 然이나 皆不離心之性相니 並可通用이니라(80ㄱ)

나. 그러나 다 과 性과 相과 여희디 아니니 다 어루  用을  알에 시니라(80ㄱ-ㄴ)

원문 ‘並可通用’의 ‘通用’을 ‘用을  알에’로 언해한 것이다. ‘아울러 가히 통해 쓸지어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並’은 앞에서 말한 ‘漸’과 ‘頓’을 가리키고 있다. 다음 내용을 참고할 것.:漸修 닐오  보와 조호 닷라 며 方便넷 經을 通達며 시혹  믄득 알오 졈졈 닷라 며 시혹 졈졈 닷가  다 알리라 며 頓悟 닐오 바  體 치시며 시혹 말 다 허르시며 시혹 頓悟頓修ㅣ라 며 시혹 닷곰도 업스며 아롬도 업스니라 시니라(78ㄴ-79ㄱ).

(50) 가. 無定無慧면 是狂是愚ㅣ오 偏修一門면 是漸是近이니(81ㄱ)

나. 定 업스며 慧 업스면 이 미치며 이 어류미오 츼자바  門 닷면 이 漸修예 이 갓가오미니(81ㄱ)

‘이 漸修예 이 갓가오미니’는 ‘是漸是近’의 번역인데, 한문과 언해문이 일치하지 않는다. 상오(2001:76)에서는 ‘이는 漸이며 淺近한 것이거니와’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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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3 해제

김성주(동국대학교 교수)

1. 서론

『분류두공부시언해』 권3은 그 동안 연구자들 사이에 복사본이 돌아다녔을 뿐 영인본이 없어서 국어학도나 일반 독자들이 쉽게 문면을 볼 수 없었다. 『한국어연구(韓國語硏究)』 제5권에 영인이 됨으로써 이제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두시언해』는 선학들에 의해서 오래 전부터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두시’는 쉽게 접근을 허락하는 문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문인 두시가 일반적인 산문 한문이 아니며 한시 중에서도 전거(典據)가 많은 대표적인 문헌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를 번역한 ‘두시언해’도 불경 언해나 유경 언해와는 다른 다양하면서도 『두시언해』에서만 볼 수 있는 어휘와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권3은 이 문헌에서만 쓰인 난해한 어휘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다른 초간본 『두시언해』와 마찬가지로 『두시언해』에만 쓰인 어휘나 표현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또한 이 문헌은 다른 권차(卷次)에 비해서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가 많은 권차에 해당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은 ‘중간본’의 소위 변개(變改)가 아니라 교정(校定)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여기서는 『두시언해』 권3의 서지를 이호권(2008)에 기대어 간단히 살펴보고, 『두시언해』 권3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 중 변개가 아니라 교정으로 보이는 유의미한 차이와 『두시언해』에 자주 쓰이거나 『두시언해』에만 쓰이는 어휘나 표현을 역시 이호권(2008)의 논의를 바탕으로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것들까지 추가하여 제시하기로 한다.

2. 『두시언해』 권 제3의 서지

『두시언해』 권 제3의 서지에 대해서는 이호권(2008)에 언급되어 있는 대로, 이 책이 지금 현재 쉽게 실사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으므로 이호권(2008)에 기대어 간단한 서지적 정보를 언급하도록 한다. 이 책은 원래 통문관(通文館)의 고 이겸로(李謙魯) 선생의 구장(舊藏)이었지만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통문관에 소장되어 있을 당시 몇몇 연구자들이 복사해 둔 것이 있어 이를 이용하여 『한국어연구(韓國語硏究)』 제5호에 영인되었다고 한다. 이 글도 이 영인본과 ‘중간본’을 이용하여 역주하였다. 영인본을 통해 보면 이 책은 1481년(성종 12)의 을해자본(乙亥字本)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들과 체재는 물론 판식도 모두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시언해』 권3은 ‘술회 하(述懷 下)’(1ㄱ~49ㄱ) 53수, ‘질병(疾病)’(49ㄱ~55ㄱ) 4수, ‘회고(懷古)’(55ㄱ~69ㄴ) 4수 등 총 79수가 실려 있다. 이 중 ‘회고(懷古)’는 글자가 누락되어 있는데 이러한 예는 『두시언해』의 초간본에서 더러 보이는 현상이다. 『두시언해』의 간행 시기와 관련해서는 1481년에 25권 전체가 간행되었다는 견해와 그 이후에 간행되었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 초간본을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두시언해』의 간행을 지나치게 서둘렀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된다. 주제에 의해 분류한 제목이 빠진 것도 그러한 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호권(1998:194)은 본문의 조판 과정에서의 오류도 지적하고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의 행관(行款)은 8행 17자인데, 24ㄴ면 제6행의 앞줄은 18자로 되어 있다. 아마도 다음 판을 이미 짜 놓은 상태에서 교정을 하면서 고친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은 초간본의 판식을 흩뜨리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간행을 서둘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둘러 간행하기 위해서 조판을 다시 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3. 『두시언해』 권 제3의 교정

『두시언해』 권3의 본문, 주석, 언해에는 오자가 있다. 이호권(1998:195)은 아래의 (1가, 나, 다)의 ‘椽吏’의 ‘椽’은 ‘掾’으로 되어야 함을, (2나)의 ‘譔’은 ‘饌’이 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1) 가. 曾爲椽吏趨三輔

나. 椽吏 甫ㅣ 爲華州功曹也ㅣ라

다. 일즉 椽吏 외야 三輔애 가 뇨니〈두시 3:37ㄴ〉

이 구절은 주석에서 두보가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이 된 것을 말하고 있고, 언해에서도 ‘椽吏 외야’로 되어 있으므로 하급관리를 뜻하는 ‘掾吏’가 되는 것이 옳다. 게다가 ‘椽吏’의 ‘吏’도 ‘史’가 되어 ‘掾史’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나무목변을 가진 한자와 손수변을 가진 한자는 많은 경우 통용되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에 ‘椽’과 ‘掾’이 통용자일 가능성도 있으나, 이 책의 일곱번째 시인 ‘至德二載예 甫ㅣ 自京金光門로 出야 間道로 歸鳳翔호니 乾元初애 從左拾遺야 移華州椽야 與親故別고 因出此門야 有悲往事노라’에서 제목 중의 ‘移華州掾’에 ‘하급관리’의 뜻으로 ‘掾’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1가, 나, 다)의 ‘椽’은 ‘掾’의 오자일 가능성이 있다.

(2) 가. 王生哀我未平復 爲我力致美肴膳

나. 此下로 至終宴 極感設譔殷勤之意다

다. 이 소니 내의 病 됴티 몯호 어엿비 너겨 나 爲야 됴 차바 힘 닐위다〈두시 3:50ㄴ〉

또 (2나)는 (2가)의 주석인데, “이 이하로 종연(終宴)까지는 음식을 차려 놓은 것에 대해 지극히 감사하다는 뜻이다.”로 해석된다. 즉 잔치에 대한 구절이므로 주석의 ‘譔’은 ‘饌’으로 되어야 한다.

(3) 가. 閣애셔 듀 劉歆 爲얘니라(投閣爲劉歆)〈두시 3:15ㄱ〉

나. 飄颻히 라셔 리튜믈 수이 커 수이 가락 오락 야 노니놋다(飄颻搏擊便 容易往來遊)〈두시 3:26ㄴ〉

다. 藥 다 날  거시 더러 잇고(藥殘他日裹)〈두시 3:54ㄴ〉

이호권(1998:196~197)은 ‘중간본’이 ‘초간본’을 교정하였다고 보이는 예들을 위와 같이 제시하였다. (3가)의 ‘듀’은 ‘投’에 대한 번역이므로 중간본의 ‘더듀’이 옳은 것으로 보이며, (3나)의 ‘수이’는 ‘便’에 대한 번역으로 ‘커’의 다음에 다시 ‘수이’가 나오므로 역시 ‘중간본’의 ‘됴히’가 옳은 것으로 보이며, (3다)의 ‘더러’는 ‘殘’의 번역인데 문맥으로 보면 ‘남다’의 뜻인 ‘중간본’의 ‘기터’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

(4) 가. 늘근 나해 기로 술 비주믈 뵈아고  비옌 가야 橙子 옮겨 심고라(衰年催釀黍 細雨更移橙)〈두시 3:25ㄴ-26ㄱ〉

나.  알 보논 이제와 녜왓 드로 江漢애  가논  노라(眼前今古意 江漢一歸舟)〈두시 3:39ㄱ〉

이호권(1998:197~198)은 (4가)의 ‘심고라’에 대한 ‘중간본’의 ‘심교라’와, (4나)의 ‘노라’에 대한 ‘중간본’의 ‘탓노라’에 대해서, 교정본에서의 교정인지 중간본에서의 변개인지 확증하기가 어렵지만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필자도 확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중간본’의 어형이 교정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5) 가. 揚鑣驚主辱 拔劒撥年衰

나. 鑣 馬銜이니 揚鑣 言騎馬也ㅣ라 이 님금 辱도외이 겨샤 놀라  타 가 盜賊을 티고져 며 나 늘구믈 러 리고 갈 혀 나 盜賊을 버히고져 니라

다.  타 님금 受辱샤 놀라고 갈 혀 나 늘구믈 러 리노라〈두시 3:2ㄱ-ㄴ〉

(6) 가. 倚著如秦贅 過逢類楚狂

나. 브터 뇨미 秦ㅅ 사 사회 호니 디나녀 맛나 楚ㅅ 狂人 호라 〈두시 3:12ㄴ〉

이호권(1998:198~199)는 (5)와 (6)이 변개(變改)인지 교정(校定)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예로 제시하였다. (5나)의 ‘갈 혀 나’는 ‘중간본’에 ‘갈 혀셔’로 되어 있고, (6나)의 ‘호니’는 ‘중간본’에 ‘호며’로 되어 있다. 역시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5)는 중간본이 초간본의 번역을 잘못 파악한 것이라 생각되고, (6)은 초간본을 중간본이 교정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먼저 (5나)의 ‘갈 혀 나’는 ‘칼을 빼고 나가서’의 뜻이다. (6나)의 후반부 주석 즉 ‘이 님금 辱도외이 겨샤 놀라  타 가 盜賊을 티고져 며 나 늘구믈 러 리고 갈 혀 나 盜賊을 버히고져 니라’는 한 편의 시구(詩句)인 것처럼 번역되어 있는 부분인데 ‘님금 辱도외이 겨샤 놀라  타 가 盜賊을 티고져 -’와 ‘나 늘구믈 러 리고 갈 혀 나 盜賊을 버히고져 -’는 대우(對偶)를 이루고 있다. ‘ 타 가’의 대우로서는 ‘중간본’의 ‘갈 혀셔’보다는 ‘초간본’의 ‘갈 혀 나’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6나)의 ‘호니’와 ‘호며’의 문제는 (5나)보다도 좀 더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15세기의 ‘-니’는 ‘원인·이유’와 ‘배경·전제’의 용법이 있으며, ‘-며’는 선행절과 후행절이 대등한 관계가 있어 이들을 접속하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는 선행절인 ‘브터 뇨미 秦ㅅ 사 사회 호-’와 후행절인 ‘디나녀 맛나 楚ㅅ 狂人 호-’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에 따라 ‘초간본’의 ‘호니’가 옳은지 ‘중간본’의 ‘호며’가 옳은지 판단할 수 있다. (6나)의 선행절은 두보가 오초(吳楚)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가난한 진나라 사람이 장성한 아들을 처가에 보내는 데릴사위와 같은 신세라는 뜻이며, 후행절은 두보가 오초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치 공자에게 정치를 그만두라고 노래하던 초나라의 광인과 같다는 뜻으로 보인다. 즉 선행절의 ‘秦ㅅ 사 사회’와 후행절의 ‘楚ㅅ 狂人’은 모두 두보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선행절과 후행절은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초간본’의 ‘호니’보다는 ‘중간본’의 ‘호며’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

이호권(1998)이 지적한 것 이외에도 이 책에는 ‘중간본’이 ‘초간본’을 교정한 부분이 많이 있다.

(7) 가. 水鄉霾白蜃 → 埋〈두시 3:14ㄱ〉

나. 믌 올핸  蜃氣 무텻거

(8) 가. 孤城月水昏 → 水氣〈두시 3:28ㄱ〉

나. 외로왼 자새 믌 氣運이 어득도다

(9) 가. 漁舟箇箇個 → 輕〈두시 3:30ㄱ〉

나. 고기 잡  낫나치 가얍도다

(10) 가. 悲愁回白首 → 秋〈두시 3:44ㄴ〉

나.  슬허 셴 머리 도혀 라고

(11) 가. 城上擊柝複烏啼 → 復〈두시 13:44ㄴ〉

나. 城 우희셔 柝 두드리고  가마괴 우놋다

(12) 가. 舊識能爲態 → 難〈두시 3:46ㄱ〉

나. 녜 아니도 호미 어렵고

(13) 가. 白鷺群飛大劇幹 → 乾〈두시 3:57ㄴ〉

나. 야로비 모다 니 키 로 즐기놋다

(14) 가. 缺訛只與長川逝 → 江〈두시 3:72ㄱ〉

나. 오직 긴 로 다야  갈 디로다

(7)부터 (14)까지는 두시 원문이 잘못된 것들이다. (7가)의 ‘水鄉霾白蜃’은 ‘중간본’에 ‘埋’로 수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해문인 (7나)를 보면 ‘무텻거’로 언해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埋’가 옳다. (8가)의 ‘孤城月水昏’는 ‘중간본’에 ‘水氣’로 수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해문인 (8나)를 보면 ‘믌 氣運이’로 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水氣’가 옳다. (9가)의 ‘漁舟箇箇個’은 ‘중간본’에 ‘輕’로 수정되어 있는데, 해당 언해문인 (9나)를 보면 ‘가얍도다’로 언해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輕’이 옳다. (10가)의 ‘悲愁回白首’은 ‘중간본’에 ‘秋’로 수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해문인 (10나)를 보면 ‘’로 언해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秋’가 옳다. (11가)의 ‘城上擊柝複烏啼’는 ‘중간본’에 ‘復’로 수정되어 있는데, 해당 언해문인 (11나)를 보면 ‘’로 언해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復’가 옳다. (12가)의 ‘舊識能爲態’는 ‘중간본’에 ‘難’으로 수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해문인 (12나)를 보면 ‘어렵고’로 언해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難’이 옳다. (13가)의 ‘白鷺群飛大劇幹’은 ‘중간본’에 ‘乾(간)’으로 수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해문인 (13나)를 보면 ‘로’로 언해되어 있으므로 중간본의 ‘乾’이 옳다. 마지막 예인 (14가)의 ‘缺訛只與長川逝’는 ‘중간본’에 ‘江’으로 수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언해문인 (14나)를 보면 ‘로’로 언해되어 있어 이 경우에는 ‘초간본’과 ‘중간본’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음은 ‘초간본’의 언해가 ‘중간본’에 수정되어 있는 경우이다.

(15) 가. 感激요 소리 알리예 잇니라 → 알매〈두시 3:17ㄱ〉

나. 感激在知音

(16) 가. 새려 므렛 軒檻 더 라 낛 드리우메 供進고 → 새례〈두시 3:31ㄴ〉

나. 新添水檻供垂釣

(17) 가. 公이 楊雄 司馬相如의 後에 나나 일후믄 日月와 다 옛도다 → 後에 나셔 일훔이〈두시 3:64ㄴ〉

나. 公生楊馬後 名與日月懸

(15, 16, 17)은 ‘초간본’의 본문이 ‘중간본’에서 수정된 경우인데 ‘중간본’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16)에서 ‘초간본’의 ‘새려’와 ‘중간본’의 ‘새례’는 뜻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17)에서 ‘초간본’의 ‘나나’가 ‘중간본’에서 ‘나셔’로 되어 있고, ‘초간본’의 ‘일후믄’이 ‘중간본’에서 ‘일훔이’로 되어 있다. 그런데 (17)에서 전자의 경우 ‘나나’와 ‘나셔’만 놓고 볼 때는 역접과 계기이므로 확연한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17가)의 선행절과 후행절을 ‘초간본’의 ‘나나’와 ‘중간본’의 ‘나셔’를 넣어서 각각 현대어로 번역해 보면 둘 사이의 차이를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 가. 공(公)이 양웅(楊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뒤에 태어났지만, 이름은 일월(日月)과 함께 달려 있도다!

나. 공(公)이 양웅(楊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뒤에 태어나서, 이름은 일월(日月)과 함께 달려 있도다!

(17)은 진자앙이 양웅이나 사마상여보다는 뒤에 태어났는데 진자앙의 이름은 해와 달처럼 높이 달려 있다는 것으로 진자앙이 양웅과 사마상여보다 뒤에 태어났다는 사실과 진자앙의 이름이 해와 달처럼 높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가벼운 역접으로 보거나 아니면 계기적인 연결로 보든지 양자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필자로서는 수정된 ‘중간본’의 해석보다는 ‘초간본’의 해석이 좀 더 매끄럽지 않나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15)에서는 ‘초간본’의 ‘알리예’가 ‘중간본’에서 ‘알매’로 수정된 것인데, 이 표현의 원문은 ‘知音’으로서 잘 알려진 백아(伯牙)와 종자기(鐘子期)에 얽힌 고사성어로 ‘자기의 속내까지 알아주는 친한 벗’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초간본’의 ‘알리예’가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19) 가. 言四方貢試ㅣ → 賦〈두시 3:3ㄴ〉

나. 至劃易該 → 至劃易諺〈두시 3:9ㄱ〉

다. 棄杖 → 棄其杖〈두시 3:17ㄱ〉

라. 浩汗涯也 → 浩汗無涯也〈두시 3:17ㄴ〉

마. 言承諸公之笑也 → 言承諸公之笑語也〈두시 3:18ㄱ〉

바. 爲殘草의 刺喉而死故로 戒之曰千里井에 → 爲殘草의 所刺喉而死故戒之曰千里井에〈두시 3:18ㄴ〉

사. 言不得北歸故鄕而却徐行也ㅣ라 → 西〈두시 3:19ㄴ〉

아. 已求則可歸已得見妻子 → 已收則可歸而得見妻子〈두시 3:24ㄱ〉

자. 汗物 → 汚物〈두시 3:26ㄴ〉

차. 眞實로 醉야 어린 호미 잇노라 → 잇도다〈두시 3:28ㄱ〉

카. 作銅刀西都賦 → 東都〈두시 3:28ㄴ〉

타. 皆漫許與 → 謾〈두시 3:31ㄱ〉

파. 大厥 → 大闕〈두시 3:33ㄴ〉

하. 不爲愁ㅅ 住少時라니 → 不爲愁人住少時라니〈두시 3:34ㄱ〉

거. 莊子ㅣ 云虛室에 生白隱士之居也ㅣ라 → 莊子ㅣ 云虛室에 生白이라니 此 言高人隱士之居也ㅣ라〈두시 3:35ㄴ〉

너. 自比長病阮籍 → 長卿〈두시 3:37ㄱ〉

더. 望故鄕而歌詩也 → 歌詠〈두시 3:38ㄱ〉

러. 不與異俗 → 不與彼異俗〈두시 3:46ㄱ〉

머. 其子ㅣ 如銀鉤也ㅣ라 → 其字〈두시 3:65ㄱ〉

버. 朝爲行雲暮行爲雲暮爲行雨陽臺之下 → 朝爲行雲暮爲行雨陽臺之下〈두시 3:67ㄴ〉

서. 朔漠 胡地라 胡靑니라 → 朔漠 胡地라 胡中草色이 皆白호 明妃家草 獨靑니라〈두시 3:68ㄱ〉

(19가~서)는 모두 주석에서 ‘초간본’의 것을 ‘중간본’에서 교정한 것이다. 예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번다하므로 자세한 것은 해당 역주을 참조하기 바란다. 『두시언해』 권3에서 ‘초간본’의 잘못 된 곳을 ‘중간본’에서 이렇게 많이 교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두시언해』의 ‘중간본’을 단순히 17세기에 지방에서 간행된 목판본으로 『두시언해』의 ‘초간본’의 어휘와 표현들이 17세기에 맞게 변개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중간본’은 서둘러 간행한 『두시언해』 초간본의 내용을 많은 부분 교정하기도 하였다는 사실과 『두시언해』의 해석에서도 ‘중간본’을 적극적으로 참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외에도 ‘중간본’에는 ‘초간본’의 주석을 보충한 부분이 많이 있다. 여기서는 보충한 부분을 제시하기만 하고 따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주001)

<풀이>보충한 부분은 여러 가지 편집 상의 이유로 ‘( )’에 넣어 표시하기로 한다. 따라서 제시한 예문에서 괄호를 빼면 초간본의 주석이 되는 셈이다.

(20) 가. 差池 不齊皃ㅣ오 合沓 相繼也ㅣ라 (此 譏當時濫進者ㅣ 多也ㅣ라) 此下로 至不假媒 論當世事다

나. 銘鍾鼎 言褒賞功臣也ㅣ라 (此 言群臣이 蒙褒賞야 主恩이 厚矣니 宜法三台야 補佐王室也ㅣ라)

다. 주석 없음 → (秦贅 秦人이 家貧子壯則出贅더니 甫ㅣ 旅寓他鄕이 如贅然니라 楚狂 接輿也ㅣ라)

라. 軒轅이 制十二竹管야 爲律呂야 以(應鳳鳴니 雌雄이 各六이니 所以調八方之風이라 舜이 用桐야 作琴야 以)彈南風之薰니 今風이 飄疾則可見鳴管이 錯며 琴心이 傷야 皆(不諧)和也ㅣ라

마. 此 言製律이 (彈琴之聖賢이) 已遠야 風不調故로 甫ㅣ 因此而得病也ㅣ라

바. 靑錢 靑銅錢이라 雇直 顧船之價也ㅣ라 (此 言已備汝船直니 汝當急行舟야 令我로 飮美酒也ㅣ라)

사. (黃)冠

아. 豺虎 喩盜賊(니 言道路ㅣ 無阻難야 不墿日而出也)ㅣ라

자. 漢ㅅ 叔孫通이 制禮고 蕭何ㅣ 定律令니 此 言(開元之時예 禮樂律令이 修明야 爲太平之)盛也ㅣ라

(21) 此 言時事다〈두시 3:19ㄴ〉

(21)의 ‘此 言時事다’는 ‘중간본’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나 다른 여러 곳에서 이 표현이 사용된 예를 고려하면 ‘此 言時事다’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책의 세 번째 시인 ‘견민(遣悶)’의 ‘妖孽엔 關東애 더러운 내 나고 兵戈앤 隴右ㅣ 허렛도다(妖孽關東臭 兵戈隴右瘡)’ 구절에서도, ‘초간본’에 없는 구절이 ‘중간본’에 새롭게 제시되었을 때에도 ‘此 言時事다’이며, ‘초간본’에서도 ‘此 言~’이란 표현의 주석은 아래의 (22)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여러 군데에서 나오지만 ‘此 言~’이란 표현은 여기가 유일하다.

(22) 가. 此 言時景다〈두시 3:9ㄱ〉

나. 此 言開元之盛也ㅣ라〈두시 3:62ㄱ〉

다. 此 言觀中之景다〈두시 3:63ㄴ〉

4. 『두시언해』 권3의 어휘와 표현

『두시언해』의 어휘, 표현, 문법 등은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독창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 국어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연구의 역사에 비해 연구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분량이 많은데다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두시언해』에만 쓰이거나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두시언해』에서 유독 많이 쓰인 어휘에 대해서 『두시언해』 권3의 용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두시언해』 권3에는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된 많은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들 중 중요한 것은 예문을 통해 살펴보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것들은 예만 제시하기로 한다.

◾ 어긔릋다

‘어긔릋다’는 ‘어긋나게 하다’의 뜻으로 『두시언해』에만 쓰인 단어이다. ‘어긔’와 ‘릋’으로 분석될 가능성이 있으나 ‘릋’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어긔으릋다’의 존재는 ‘릋’의 분석을 더 어렵게 한다. ‘어긔’는 ‘어그’로 쓰인 예도 있어 ‘어긔릋다, 어긔맃다’는 각각 ‘어그릋다, 어그맃다’로도 사용되었다. ‘어긔릋다’는 주로 ‘위(違)’나 ‘착(錯)’에 대한 번역어로 쓰이지만, 『두시언해』 권15의 ‘추일기제정감호상정삼수(秋日寄題鄭監湖上亭三首)’의 한 구절인 ‘프른 프리  디 어긔르츠니(碧草逢春意)’의 경우 ‘逢’에 대한 번역어로 쓰여 특이한 경우에 속하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의역된 것으로 보인다. (23)은 『두시언해』 권3에 나오는 예들이다. (23가, 나)는 ‘어그릋다’의 예이고, (23다)는 ‘어그릋다’의 예이다. (24)는 『두시언해』의 다른 권차에서 보이는 ‘어그릋다’의 예이며, (25)는 ‘어그맃다’, (26)은 ‘어긔릋다’, (27)은 ‘어긔맃다’, (28)은 ‘어긔으릋다’, (29)는 ‘어긔다’의 용례이다.

(23) 가. 賦稅 골오 호매 어긔르츤가 전노니(恐乖均賦斂)〈두시 3:4ㄴ〉

나. 오히려 수우 대로 어긔르츠며(尙錯雄鳴管)〈두시 3:13ㄴ〉

다. 政化ㅣ 어그르처 큰 읏드메 외어든(政化錯迕失大體)〈두시 3:70ㄴ〉

(24) 가. 사 이 어그르추미 하니(人事多錯迕)〈두시 8:68ㄴ〉

나. 됴히 보고져  일즉 願이 어그르츠니(良覿違夙願)〈두시 9:1ㄴ〉

다. 仙賞홀 미 어그르츨 므를 섯흘류라(仙賞心違淚交墮)〈두시 9:5ㄱ〉

라. 陰陽이 번 어그르처 亂니(陰陽一錯亂)〈두시 16:65ㄴ〉

마. 生植엿 萬物이 半만 어그르치 외니(植物半蹉跎)〈두시 16:65ㄴ〉

바. 님자 일코 어그르처 비치 업도다(失主錯莫無晶光)〈두시 17:27ㄴ〉

사. 어그르처 放縱 비느리 업수라(蹭蹬無縱鱗)〈두시 19:2ㄴ〉

아. 어그르처 騏驎馬ㅣ 늘것도다(蹭蹬騏驎老)〈두시 19:33ㄴ〉

자. 잇비 화  조초 어그르추니(困學違從衆)〈두시 20:10ㄴ〉

차. 淮海예 어그르치 잇디 말라(淮海莫蹉跎)〈두시 23:18ㄴ〉

(25) 매 어그리춘 배 업도다(在野無所違)〈두시 15:4ㄴ〉

(26) 가. 오히려 수우 대로 어긔르츠며(尙錯雄鳴管)〈두시 3:13ㄴ〉

나. 녀뇨매 매 어긔르추미 하니(行邁心多違)〈두시 7:27ㄴ〉

다. 구룸  하해 오히려 어긔르츠니(雲天猶錯莫)〈두시 8:43ㄱ〉

라. 아니 號令이 어긔르츠니아(無乃號令乖)〈두시 10:19ㄱ〉

마. 劉向傳經야 맷 이리 어긔르체라(劉向傳經心事違)〈두시 10:34ㄴ-35ㄱ〉

바. 아니 한 더데 어긔르쳐 거슬가 전노라(俄頃恐違迕)〈두시 12:19ㄴ〉

사. 歲晩애 죠고맛 미 어긔르체라(歲晚寸心違)〈두시 23:27ㄴ〉

아. 녯 이 야 禮 어긔르치 아니놋다(懷舊禮無違)〈두시 24:48ㄴ〉

(27) 가. 글 스 소 興心이 어긔릿디 아니도다(墨客興無違)〈두시 15:49ㄱ〉

나.   어긔리츤가 전노라(亦恐歳蹉跎)〈두시 18:10ㄱ〉

다. 이 거시 더듸 러딜 아니 時節이 어그리츤가 니라〈두시 18:10ㄱ〉

(28) 믈러 올 제 날호야 녀 죠고맛 매 어긔으르체라(退食遲回違寸心)〈두시 6:14ㄱ〉

(29) 가. 가나 잇거나 호매 내 과 어긔여(去住與願違)〈두시 1:26ㄴ〉

나. 머리 도라 라왼 처엄 과 해 어긔도다(回首意多違)〈두시 5:17ㄱ〉

◾ 안직

‘안직’은 ‘가장’의 뜻으로 주로 ‘최(最)’의 번역어로 쓰였다. [最]의 의미에 해당하는 고유어로는 고려시대 석독구결에서 ‘最’이 쓰였는데 이것을 현재 ‘[안직]’으로 읽고 있다. 그러나 [最]의 뜻으로 쓰인 ‘안직’은 15세기 언해 문헌에서는 『두시언해』에만 보이며 『번역노걸대』 등에서 쓰인 ‘안직’은 [最]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의 뜻이다. (29)는 ‘[最]’의 뜻으로 쓰인 ‘안직’의 예이며, (30)은 ‘아직’의 뜻으로 쓰인 ‘안직’의 예이다.

(29) 가. 驥子아 안직 너를 憐愛노라(驥子最憐渠)〈두시 8:48ㄱ〉

나. 나그내 예 머리 안직 셰니(客間頭最白)〈두시 23:17ㄴ〉

(30) 가. 우리 잡말 안직 니디 마져(咱們閑話且休說)〈번노상:17ㄱ〉

나. 오나라 오나라 안직 가디 말라 내 너려 말솜 무러지라(來來 且休去 我問伱些話)〈번노상:26ㄱ〉

◾ 아야라

‘아야라’는 ‘겨우’의 뜻으로 분석이 어려운 단어이다. 역시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되었다.

(31) 가. 山城 아야라 온 層이로다(山城僅百層)〈두시 2:17ㄴ〉

나. 새 가지 아야라 다매 내와댓도다(新梢纔出牆)〈두시 18:10ㄴ〉

◾ 브왜다

‘브왜다’는 ‘상(喪)’에 대한 번역으로 쓰이는 단어로 ‘브-+와+이’로 분석된다. ‘브’는 ‘브다, 브딯다, 브티다’ 등 복합동사의 어간이나 동사로 쓰이는데 ‘[碎]’의 의미로 쓰이며, ‘와’는 접미사일 것으로 보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 ‘이’는 피동접미사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브왜다’는 ‘브와이다’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32)는 『두시언해』 권3의 ‘브왜다’의 예이며, (33)은 다른 권차의 ‘브왜다’, (34)는 ‘브와다’, (35)는 ‘브와이다’, (36)은 ‘-’로 시작되는 단어군의 예이다. 모음교체 관계에 있는 ‘브-’와 ‘-’는 『두시언해』에서 전자는 ‘브와다, 브왜다’로만 쓰이고, 후자는 ‘치다’로만 쓰이는 것이 흥미롭다.

(32) 브왜요 해 디내노라(喪亂飽經過)〈두시 3:23ㄴ〉

(33) 가. 流洛야 브왠  조차 니니라(流落隨丘墟)〈두시 1:31ㄴ〉

나. 브왠 저긔  미 허니(喪亂丹心破)〈두시 7:14ㄴ-15ㄴ〉

다. 平日에 사던  브왠 後에(平居喪亂後)〈두시 7:19ㄱ〉

라. 브왠 時節에 내 아 주리며(喪亂聞吾弟)〈두시 8:34ㄱ〉

마. 關中이 녜 브왤 제(關中昔喪敗)〈두시 8:65ㄴ〉

바. 녯 時節ㅅ 브왜요 다 可히 알리로소니(古時喪亂皆可知)〈두시 11:13ㄱ〉

사. 時節ㅅ 危亂애 브왜요 아노니(時危覺凋喪)〈두시 12:29ㄱ〉

아. 마 驊騮로 여 氣運을 브왜에 리아(忍使驊騮氣凋喪)〈두시 16:27ㄴ〉

자. 볼 사미 뫼티 이셔 비치 브왜니(觀者如山色沮喪)〈두시 16:47ㄱ-ㄴ〉

차. 時節이 비록 브왜요매 브터 이시나(時雖屬喪亂)〈두시 19:28ㄱ〉

카. 히미 서르 브왜니(筋力交凋喪)〈두시 20:24ㄴ〉

타. 브왜요미 赤壁 디 아니코(敗亡非赤壁)〈두시 20:26ㄴ〉

파. 하콰 콰애  브왠 히로다(天地一丘墟)〈두시 20:32ㄱ〉

하. 브왜야 나 숨 쉬요 니라(凋喪盡餘喘)〈두시 24:35ㄴ〉

(34) 늘근 브완 히믈 스스로 놀라노니(自驚衰謝力)〈두시 2:24ㄴ〉

(35) 브와요매 올로 길헤 나가노라(喪亂獨前途)〈두시 24:58ㄴ〉

(36) 가.  란 비치 초 보노라(清見光炯碎)〈두시 13:17ㄱ-ㄴ〉

나. 소리 업시 리 려디니  누니  도소니(無聲細下飛碎雪)〈두시 16:61ㄱ〉

다. 우리 무른 차 밥 브르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시 25:11ㄴ〉

◾ 답샇다

‘답샇다’는 ‘포개지다, 겹겹으로 쌓이다’의 뜻으로 ‘답’과 ‘샇’으로 분석된다. 이 단어는 주로 ‘적(積)’의 번역으로 쓰이는데 ‘답’은 ‘겹겹’의 의미로 쓰이는 ‘답답다’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샇’은 각자병서로 표기되지 않은 ‘쌓다’인 것으로 추정된다. ‘답샇다’는 피동형 ‘답사히다’도 『두시언해』에서 목격된다. 이 단어도 역시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되었다. (37)은 『두시언해』 권3에 쓰인 ‘답다’의 예이고, (38)은 다른 권차에 쓰인 ‘답다’의 예인데 『두시언해』에는 모두 13개의 ‘답샇다’의 예가 있다. (39)는 ‘답다’의 피동사인 ‘답사히다’의 예이며 (40)은 ‘쌓다’의 예이다.

(37) 져근 미 도혀 믌겨리 답사니(小江還積浪)〈두시 3:19ㄴ〉

(38) 가. 답사호믈 밧긔 도라 라셔(回眺積水外)〈두시 1:29ㄴ〉

나. 답사 陰氣예 서리와 눈괘 하도다(積陰雪雲稠)〈두시 22:38ㄱ〉

(39) 가. 주거미 답사효매 플와 나모왜 비뉘고(積屍草木腥)〈두시 4:10ㄴ〉

나. 芝蘭과 구슬왜 답사혓 도다(芝蘭疊璵璠)〈두시 24:1ㄴ〉

(40) 種種 花香 비허 須彌山 티 싸며(雨無數百千種種上妙天香天花 遍滿三千大千世界積高須彌供養如來)〈석상 23:20ㄱ〉

◾ 비레

‘비레’는 ‘절벽’의 뜻으로 『두시언해』에서만 쓰였으며, 19세기의 『신자전』에 ‘셕비레’라는 형태로 보인다. (41)은 『두시언해』 권3의 예인데 ‘두 비레’는 삼협(三峽) 중의 하나인 구당협(瞿唐峽)의 양안(兩岸)을 말한다. ‘비레’는 『두시언해』에 모두 14개의 예가 있는데 (42가)를 보면 ‘비레’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아래에서 바라본 절벽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1) 두 비레 시스니 가야 프르도다(雙崖洗更靑)〈두시 3:41ㄴ〉

(42) 가. 머리 도혀 두 비레 라노라(回首望兩崖)〈두시 6:46ㄴ〉

나. 비레 그츠니 핫고와 호왁과 도다(崖斷如杵臼)〈두시 6:2ㄱ〉

◾ 왇다

‘왇다’는 ‘새로 밭을 만들다’ 또는 ‘밭을 개간하다’의 뜻으로 ‘왇’에 ‘다’가 붙어서 이루어진 동사이다. ‘왇’은 다시 ‘’과 ‘왇’으로 분석되는데 ‘왇’은 ‘받[田]’으로 보이지만 ‘’은 정체를 알 수 없다. (43)은 『두시언해』 권3의 예이며, (44)는 ‘왇’이 명사로 쓰인 예이다. ‘왇다’는 『두시언해』 권3에만 있는 유일례이다.

(43) 왇야 븘소리 虛費다(畬田費火聲)〈두시 3:47ㄱ〉

(44) 왇 버후메 이 나 虛費리로소니(斫畬應費日)〈두시 7:17ㄱ〉

이외에도 권3에는 『두시언해』에서만 쓰인 단어들이 더러 있다. 권3에 나오는 어형 그대로 제시하며 두 개 이상일 경우에는 장차(張次)만 밝혔다. 보다 자세한 것은 본문의 역주를 참고할 수 있다.

(45) 고파〈두시 3:21ㄱ, 53ㄱ〉, 어르메〈두시 3:45ㄱ〉, 벼여셔〈두시 3:47ㄱ〉, 주메〈두시 3:62ㄱ〉, 낤비츤〈두시 3:64ㄱ〉, 녀와〈두시 3:66ㄱ〉, 다노라〈두시 3:67ㄱ, 72ㄱ〉, 보왼〈두시 3:73ㄱ〉, 찻〈두시 3:38ㄴ〉 등

5. 간략 두보 평전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 근처의 상강(湘江) 가에서 죽었다. 두보의 먼 선조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가 있고, 초당(初唐)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은 두보의 할아버지이다. 두보는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는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이외에도 일찍 죽은 어린 아들과 딸도 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숙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5세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 어렵게 되었으며 벼슬길로 진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또 안녹산의 난 등의 전란 등으로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사천 三台), 낭주(閬州, 사천 閬中), 운안(雲安), 기주(夔州, 사천 奉節),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갔다. 두시가 위대한 것은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백성의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시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 있으며 특히 방관과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太極 원년, 1세) 출생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開元 5년, 6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권16의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참조).

718년(開元 6년, 7세)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開元 13년, 14세)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李龜年 등, 권16의 ‘江南逢李龜年’ 참조).

730년(開元 18년, 19세) 순하(郇瑕, 산서 臨猗) 여행.

731년(開元 19년, 20세)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開元 23년, 24세) 진사 시험 낙방.

736년(開元 24년, 25세)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여행,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741년(開元 28년, 30세)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742년(天寶 원년, 31세)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天寶 3년, 33세)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먹음.

746년(天寶 5년, 35세) 장안 거주. 장안(西安)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終南山)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

747년(天寶 6년, 36세) 과거 시험 낙방.

748년(天寶 7년, 37세) 장안 거주.

751년(天寶 10, 40세)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4년(天寶 13, 43세) 아들 종무 출생.

755년(天寶 14, 44세) 하서현위(河西縣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部兵曹參軍)으로 전임되어 취임. 안녹산의 난 발발.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奉先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

756년(天寶 15, 45세) 2월 봉선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오자, 봉선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白水)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富縣)의 강촌(羌村, 鄜州 西北 三十里)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귀비, 양국충 등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 감숙 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

757년(至德 2, 46세)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 섬서 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 5월 좌습유(左拾遺) 임명.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

758년(乾元 원년, 47세) 두보는 방관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華縣)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어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759년(乾元 2, 48세)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司功參軍)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진주(秦州, 감숙 天水)로 감. 10월 적곡, 철당협, 한협, 청양협, 적초령을 지나 동곡(同谷, 감숙 成縣)으로 감. 목피령, 백사도, 비선각, 석거각, 검문을 지나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上元 원년, 49세)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 신진현(新津縣) 1차 여행.

761년(上元 2, 50세) 신진현(新津縣)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

762년(寶應 원년, 51세)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를 면주(綿州)까지 동행하며 전송. 때마침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이사시킴.

763년(廣德 원년, 52세) 봄에 낭주(閬州, 사천 閬中), 염정(鹽亭, 사천 盐亭), 한주(漢州, 사천 廣漢) 여행. 봄에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 대종이 섬주로 피난.

764년(廣德 2, 53세)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가서 촉지를 떠나는 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도로 돌아옴.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추천됨.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

765년(永泰 元年, 54세) 1월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으로 감.

766년(大曆 元年, 55세) 늦은 봄, 기주(夔州, 사천 奉節) 도착.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권17의 「최종문수계책(催宗文樹雞柵)」 참조).

767년(56세)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만련해 준 양서초당(瀼西草堂)에서 삶.

768년(大曆 3, 57세)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奉節)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湖北 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남 岳陽) 도착.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大曆 4, 58세)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권17 「백부행(白鳧行)」 참조).

770년(大曆 5, 59세)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 호남 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음).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서 머묾.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하남 偃師)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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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언해』 권제5 해제

김성주(동국대학교 교수)

1. 서론

『두시언해』는 전25권으로 초간본은 제1, 2, 4권을 제외한 총 22권이 현존한다. 그러나 권5는 그 동안 연구자들 사이에 복사본이 돌아다녔을 뿐 영인본이 없어서, 국어학도나 일반 독자들이 쉽게 문면을 볼 수 없었다. 『한국어연구』 제11권(2014)에 영인이 됨으로써 이제는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두시언해』는 선학들에 의해서, 오래 전부터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두시언해』는 쉽게 접근을 허락하는 문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문인 두시가 일반적인 산문이 아닌, 어려운 한시로 되어 있는 문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번역한 『두시언해』도 불경 언해와 달리 『두시언해』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불경언해류’에 친숙한 국어학도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두시언해』 권5는 다른 초간본 『두시언해』와 마찬가지로 이 문헌에만 쓰인 어휘나 표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한 이 문헌은 다른 권차(卷次)에 비해서,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가 많은 권차에 해당된다. 이 글에서는 『두시언해』 권5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를 남풍현(2014)의 해제를 바탕으로 제시한다.

2. 『두시언해』 권 제5의 서지

『두시언해』 권5의 서지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보고되어 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현재로서는 『한국어연구』 제11권에 영인된 것을 제외하면, 이 문헌을 실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에 자세한 형태 서지 연구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원래 남풍현 선생이 통문관(通文館)의 고 이겸로(李謙魯) 선생으로부터 구입하였고, 남풍현 선생은 ‘박동섭본 능엄경’ 또는 ‘소곡본 능엄경’이라 불리는 고려시대 능엄경 구결 자료와 이 문헌을 박동섭 씨와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는 개인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남풍현 선생은 이 문헌을 ‘소곡본 능엄경’과 바꾸기 전에 복사해 두었고, 훼손된 부분을 중간본에서 보충하여 『한국어연구』 제11권에 영인함으로서, 드디어 문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인본을 통해 보면 이 책은 1481년(성종 12)에 간행된 을해자본(乙亥字本)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들과 체재는 물론 판식도 모두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시언해』 권5는 시사(時事) 하 <원주>【율시 44수(律詩四十四首)】, 변새(邊塞) <원주>【고시 17수(古詩一十七首)】, 장수(將帥) <원주>【고시 4수(古詩四首) 율시 6수(律詩六首)】, 군려(軍旅) <원주>【고시 2수(古詩二首) 율시 7수(律詩七首)】로 분류되어 있다. 시 제목을 기준으로 하면 시사 하(時事下) 19수, 변새(邊塞) 3수, 장수(將帥) 6수, 군려(軍旅) 7수 등 총 35수가 실려 있다.

『두시언해』의 간행 시기와 관련해서는 1481년에 25권 전체가 간행되었다는 견해와 그 이후에 간행되었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을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을 지나치게 서둘렀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된다. 『두시언해』 권3의 분류 제목인 ‘회고(懷古)’가 빠진 것도 그러한 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호권(1998:194)은 『두시언해』 본문의 조판 과정에서의 오류도 지적하고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의 행관(行款)은 8행 17자인데, 권3의 24ㄴ면 제6행의 앞줄은 18자로 되어 있다. 다음 판을 이미 짜 놓은 상태에서 교정을 하면서, 고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은 초간본의 판식을 흩뜨리지 않고, 기존의 판식을 어기면서까지 간행을 서둘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둘러 간행하기 위해서 조판을 다시 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3. 『두시언해』 권 제5의 초간본과 중간본

『두시언해』는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로 인해, 15세기 국어와 17세기 국어 즉 후기 중세국어와 초기 근대국어의 변화를 확연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국어사 자료이다. 『두시언해』 권5도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문헌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는 남풍현(2014)의 기술에 바탕을 두고, 좀 더 보충하여 기술하도록 한다.

3.1. 모음조화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의 대조에서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모음조화 중에서도 ‘→으’의 변화인데, 이는 ‘ㆍ’의 음가가 변화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초간본에서 양성모음으로 표기되던 것이 중간본에서 음성모음으로 표기되는 경향이 짙다.

. →을 : 音信을〈5ㄱ〉, 僚屬을〈5ㄴ〉, 功을〈9ㄴ〉, 城을〈10ㄱ〉, 이하 생략.

. →를 : 를〈5ㄱ〉, 車駕를〈7ㄱ〉, 글워를〈7ㄱ〉, 帝堯를〈7ㄴ〉, 이하 생략.

. →들 : 고들〈25ㄱ〉〈31ㄴ〉

. →믈 : 라오믈〈5ㄱ〉, 收復호믈〈9ㄴ〉, 도라오믈〈11ㄱ〉, 和親호믈〈11ㄴ〉, 호믈〈20ㄱ〉〈22ㄴ〉〈25ㄱ〉〈29ㄴ〉, 이하 생략.

. →글 : 돗글〈38ㄴ〉

. →슬 : 오슬〈38ㄱ〉〈40ㄱ〉, 이바돌 거슬〈46ㄱ〉, 셕슬〈50ㄴ〉

. →늘 : 소늘[手]〈26ㄴ〉, 소늘[客]〈48ㄱ〉, 차바늘〈51ㄴ〉

. →흘 : 안흘〈19ㄱ〉, 돌흘〈28ㄴ〉, 흘〈31ㄴ〉, 뫼흘〈48ㄱ〉, 이하 생략

. →의 : 盜賊의〈8ㄱ〉, 雜虜의〈8ㄴ〉, 臣下의〈8ㄴ〉, 使者의〈10ㄴ〉, 이하 생략

. →믜(속격) : 사믜게〈9ㄱ〉, 사믜〈52ㄴ〉, 사믜〈35ㄱ〉

. →믜(처격) : 보믜[春]〈14ㄱ〉〈35ㄱ〉, 바믜〈15ㄱ〉, 아믜〈30ㄴ〉

. →븨 : 나 소리→나븨 소리〈36ㄱ〉

. →픠 : 알→알픠〈33ㄴ〉

. 로→으로 : 萬方으로〈7ㄴ〉, 謀略으로〈11ㄴ〉, 使至尊으로〈13ㄱ〉, 關山으로〈18ㄱ〉, 이하 생략

. →은 : 廟略은〈7ㄱ〉, 犬戎은〈8ㄴ〉, 刻扈從은〈8ㄴ〉, 此編은〈18ㄴ〉, 이하 생략.

. →믄 : 샤믄〈23ㄴ〉〈25ㄴ〉, 뮈유믄〈29ㄱ〉, 사믄〈31ㄱ〉〈31ㄱ〉〈33ㄴ〉〈38ㄴ〉, 요믄〈33ㄱ〉, 이하 생략.

. 곤→군 : 두곤→두군〈46ㄴ〉

. →는 : 매 주으려는 사믜게 븓니라〈53ㄱ〉

. →들흔 : 諸將들흔〈44ㄴ〉

. 란→으란 : 右翼으란〈7ㄴ〉

. →흔 : 돌흔〈54ㄴ〉

. →근 : 근〈31ㄱ〉〈37ㄱ〉, 근〈47ㄱ〉

. 거→거늘 : 니거늘〈20ㄴ〉, 거늘〈33ㄴ〉, 叛커늘〈40ㄱ〉

. 나→나늘 : 오나늘〈16ㄴ〉

. 나→나든 : 오나든〈21ㄱ〉〈35ㄱ〉

. 어→어늘 : 侈其居第어늘〈15ㄱ〉, 乘龍上昇이어늘〈18ㄱ〉, 還京師ㅣ어시늘〈18ㄱ〉, 驕傲ㅣ어늘〈32ㄴ〉, 이하 생략.

. →므 : 너므며〈24ㄴ〉, 나므니〈29ㄴ〉

. →브 : 자브니라〈18ㄱ〉, 자브라〈50ㄴ〉

. →프 : 노프니〈32ㄴ〉, 노픈〈28ㄴ〉〈36ㄱ〉〈36ㄴ〉

. →듸 : 먼 →먼 듸〈42ㄱ〉, 뷘 듸[空]〈48ㄱ〉

. →르 : →르〈10ㄴ〉

. →으 : 여→여으〈50ㄴ〉

아래는 초간본의 음성모음이 중간본에서 양성모음으로 바뀐 경우이다. 이 예들은 ‘초간본’에서 선행 형태가 음성모음일 경우에도 양성모음이 표기되었다가 중간본에서 음성모음이 표기되는 예와 함께,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르→ : 서르→서〈39ㄱ〉

. 수→소 : 비루수→비루소〈6ㄱ〉

. 들→ : 기들우니라→기우니라〈14ㄴ〉

. 훔→흠 : 일훔난→일훔난〈29ㄱ〉

. 욱→옥 : 더욱→더옥〈32ㄴ〉〈32ㄴ〉〈52ㄱ〉

3.2. ‘오/우’의 소실

화자 주어나 목적어 관계화를 나타내는 ‘오/우’는 16세기에 오면, 약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며, 근대국어 시기에서는 점점 사라지는데,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을 대조하면, 이러한 경향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랑호니→랑니〈5ㄱ〉, 롤디라→를디라〈7ㄱ〉, 어둘 히→어들 히〈13ㄴ〉, 사 뎬→사를 뎬〈28ㄱ〉, 자볼뎬→자블뎬〈28ㄱ〉, 자볼디니라→자블디니라〈28ㄱ〉, 맛듀라→밧디고〈29ㄱ〉, 위로홀 주리→慰勞 주리〈35ㄴ〉, 조보→조브믈〈45ㄱ〉, 미→미〈53ㄴ〉, 우 우셔→우음 우어셔〈53ㄴ〉

이와는 달리 ‘초간본’에서 ‘오/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간본’에서 ‘오/우’를 추가한 예도 보인다.

이받니→이받노니〈51ㄴ〉

3.3. ㅿ의 소실

『두시언해』의 초간본에도 ㅿ의 소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간본에서 ㅿ으로 표기되던 것이 중간본에서 ㅿ이 소실되는 경우가 많다.

가면[豊]〈34ㄴ〉, 겨[冬]〈50ㄱ〉, [邊]〈7ㄴ〉〈10ㄱ〉〈10ㄱ〉〈11ㄱ〉〈13ㄱ〉〈17ㄴ〉〈20ㄱ〉〈26ㄱ〉〈28ㄱ〉〈3 3ㄴ〉〈42ㄱ〉〈48ㄴ〉〈54ㄴ〉, [秋]〈10ㄴ〉〈17ㄴ〉〈35ㄱ〉〈35ㄱ〉〈38ㄴ〉〈47ㄱ〉, 나오다[進]〈30ㄴ〉, 나아가고〈30ㄴ〉〈48ㄴ〉, 니어[繼]〈31ㄴ〉〈32ㄱ〉, 두어[數]〈9ㄱ〉〈17ㄴ〉〈31ㄱ〉, 양〈41ㄴ〉, 〈5ㄱ〉〈6ㄴ〉〈16ㄴ〉〈19ㄱ〉〈23ㄴ〉〈37ㄱ〉〈42ㄴ〉, 〈25ㄴ〉〈30ㄱ〉〈33ㄱ〉, 바오미〈18ㄴ〉, 이〈28ㄴ〉〈35ㄱ〉〈43ㄴ〉〈49ㄴ〉, →아 : 어느 아〈28ㄱ〉, 鎭之라아〈47ㄴ〉, 倚仗야아〈47ㄴ〉, →아[奪]〈26ㄴ〉〈32ㄱ〉〈38ㄴ〉〈41ㄱ〉〈48ㄴ〉, 아[親]〈20ㄴ〉〈30ㄱ〉, 아라히〈12ㄴ〉〈34ㄴ〉, 우움[笑]〈30ㄴ〉〈53ㄴ〉, 즈음[隔]〈27ㄴ〉, 지우믈〈51ㄴ〉, 처엄〈6ㄱ〉〈7ㄴ〉〈17ㄱ〉〈18ㄱ〉〈42ㄴ〉〈43ㄱ〉〈48ㄱ〉, 헐므으닐〈16ㄱ〉, 오리로소니〈39ㄴ〉, -〈16ㄴ〉〈53ㄴ〉.

3.4. 강세첨사 ‘ㄱ’의 탈락

고려시대 석독구결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었고, 15세기 국어에서도 비록 일부의 예이기는 하나, 사용례가 확인되었던 강세첨사 ‘-ㄱ’이 『두시언해』의 중간본에서는 완전히 없어졌다.

. 말옥→말오 : 〈초간본〉靑海ㅅ 녀글  삼가 말며 越裳ㅅ 녁 무롬도 잇비 말옥 님그미 몬져 사호 그쳐  華山 陽애 보내욜 디니라 → 〈중간본〉靑海ㅅ 녀글 믈 삼가 말며 越裳ㅅ 녁 무룸도 잇비 말오 님그미 몬져 사호믈 그쳐  華山 陽애 보내욜 디니라 / 〈초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옥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 → 〈중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오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

. 이옥→이오 : 〈초간본〉此 言當立功圖形이옥 死不足恤이니라 → 〈중간본〉此 言當立功圖形이오 死不足恤이니라

. 곡→고 : 〈초간본〉此 言翰이 出則鎭邊遠곡 入則受寵遇也ㅣ라 → 〈중간본〉此 言翰이 出則鎭邉遠고 入則受寵遇也ㅣ라

3.5. ‘다’의 사동사 ‘다’ → ‘다’ 변화

15세기에 확연하게 구분되던 사동사 ‘다’와 주동사 ‘다’가 『두시언해』의 중간본에 오면, ‘다’가 ‘다’로 변화하게 된다.

〈초간본〉내 머리 도라 라 로 여 셜워 우러 슬픈 미 닐에 디 마롤 디어다〈두시 5:9ㄱ〉

→ 〈중간본〉내 머리 도라 라 로 여 셜워 우러 슬픈 미 닐에 디 마롤 디어다

〈초간본〉채 텨 피 나게  로 여 다시 漢臣의 오 저지디 마롤 디어다〈두시 5:10ㄱ〉

→ 〈중간본〉채 텨 피 나게  로 여 다시 漢臣의 오 저지디 마롤 디어다

〈초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옥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두시 5:14ㄴ〉

→ 〈중간본〉金湯티 구두믈 取디 말오 기리 宇宙로 여 새롭게 홀 디니라

〈초간본〉賛普ㅣ 해 使者 여 秦에 드려 보내니 조 和好호 通야 煙塵 그치놋다〈두시 5:20ㄱ〉

→ 〈중간본〉賛普ㅣ 해 使者를 여 秦에 드려 보내니 조 和好호믈 通야 煙塵을 그치놋다

〈초간본〉비르수 이 乾坤애 王室이 正도소니 도혀 江漢앳 客 넉스로 여 에 다〈두시 5:22ㄴ〉

→ 〈중간본〉비르수 이 乾坤애 王室이 正도소니 도혀 江漢앳 客의 넉스로 여 에 다

〈초간본〉諸公 表ㅣ 오디 아니호 니디 마롤 디니 茫然 여러 가짓 이리 사로 여 몯 믿게 다〈두시 5:22ㄴ〉

→ 〈중간본〉諸公의 表ㅣ 오디 아니호믈 니디 마롤 디니 茫然 여러 가짓 이리 사로 여 몯 밋게 다

〈초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  五陵ㅅ 사로 여 알에 다〈두시 5:25ㄴ〉

→ 〈중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믈  五陵ㅅ 사로 여 알게 다

〈초간본〉六合이 마  지비 외니 四夷ㅣ  외왼 軍이로다 그럴 貔虎  士로 여 모 니르와다 듣논 바애 勇猛히 호려 다〈두시 5:31ㄴ〉

→ 〈중간본〉六合이 마  지비 외니 四夷ㅣ  외왼 軍이로다 그럴 貔虎  士로 여 모 니르와다 듣논 바애 勇猛히 호려 다

〈초간본〉머리 롣 將軍 오미 엇뎨 더듸뇨 내 心中로 여곰 심히 快足디 아니케 다〈두시 5:35ㄴ〉

→ 〈중간본〉머리 롣 將軍은 오미 엇뎨 더듸뇨 내 心中으로 여곰 심히 快足디 아니케 다

〈초간본〉혼 녜 范增이 玉마 려 리니 吳國ㅅ 兵馬로 여  오 닙디 몯게 홀 디니라〈두시 5:37ㄱ〉

→ 〈중간본〉랑혼 녜 范增이 玉마를 려 리니 吳國ㅅ 兵馬로 여  오 닙디 몯게 홀 디니라

〈초간본〉올로 至尊로 여 社稷을 시름케 니 諸君 므스그로  升平호 報荅고〈두시 5:45ㄴ〉

→ 〈중간본〉올로 至尊으로 야 社稷을 시름케 니 諸君은 므스그로  升平호믈 報荅고

초간본의 ‘다’가 중간본에서 ‘이다’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초간본〉漢朝ㅣ 조 將軍을 시니 이 霍嫖姚 시리로다〈두시 5:52ㄴ〉

→ 〈중간본〉漢朝ㅣ 조 將軍을 시니 당당이 霍嫖姚를 이시리로다

초간본의 ‘여’가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여’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초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  五陵ㅅ 사로 여 알에 다〈두시 5:25ㄱ〉

→ 〈중간본〉意氣로 곧 大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믈  五陵ㅅ 사로 여 알게 다

〈초간본〉男兒ㅣ 世閒애 나 壯호매 미처 반기 諸侯 封욜 디니라〈두시 5:30ㄱ〉

→ 〈중간본〉男兒ㅣ 世間애 나 壯호매 미처 반기 諸侯를 封욜 디니라

〈초간본〉마 世예 그처 업다 니거시니 天子 엇뎨 블러다가 京都 守이디 아니시뇨〈두시 5:40ㄴ〉

→ 〈중간본〉마 世예 그처 업다 니거시니 天子 엇뎨 블러다가 京都를 守이디 아니시뇨

그러나 초간본의 ‘다’가 중간본에서 오히려 ‘다’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중간본〉韓公이 세 城 손 本來ㅅ 든 天驕子의 漢ㅅ 㫌旗 혀믈 그츄리라 너기더니 엇뎨 回紇의 를 다 어즈러이 여아 도혀 朔方兵을 머리 救리라 너기리오〈두시 5:45ㄱ〉

→ 〈초간본〉韓公이 세 城 손 本來ㅅ 든 天驕子 漢ㅅ 旌旗 혀믈 그츄리라 너기더니 엇뎨 回紇의  다 어즈러이 야 도혀 朔方兵을 머리 救리라 너기리오

그런데 동일한 ‘다’가 ‘-여’ 앞에서는 ‘’로 바뀌지만, ‘-오’ 앞에서는 중간본에서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다’로 쓰인다.

〈초간본〉여가 어즈러운 世 平와 서르 뵈아  번  님 正히 답답신  훤케 려뇨〈두시 5:37ㄱ〉

→ 〈중간본〉여가 어즈러운 世를 平와 서르 뵈아 번 근 님 正히 답답신 믈 훤케 려뇨〈두시 5:37ㄱ〉

〈초간본〉緜州ㅅ 副使ㅣ 누른 오 니버늘 우리 花卿이 러 려 即日에 平오니라〈두시 5:40ㄱ〉

→ 〈중간본〉緜州ㅅ 副使ㅣ 누른 오슬 니버늘 우리 花卿이 러 려 即日에 平오니라

〈초간본〉材質은 몸 구부믈 다호매 가니 微妙호  아 平오 取얘로다〈두시 5:48ㄴ〉

→ 〈중간본〉材質은 몸 구부믈 다호매 가니 微妙호믄 흘 아아 平오믈 取얘로다

3.6. 구개음화

『두시언해』의 중간본에서는 ㄷ구개음화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시언해』 권5의 예는 아래와 같다.

텨→쳐〈27ㄱ〉, 션→션졍〈28ㄱ〉, 됴 비→죠 비〈34ㄴ〉, 것거듀→것거주믈〈36ㄱ〉

『두시언해』 권5의 중간본은 역구개음화(逆口蓋音化)의 예도 보여주고 있으므로, 중간본의 시기에는 ‘ㄷ구개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녀름지→녀름디이〈46ㄱ〉, 비치→비티〈47ㄱ〉, 이그락 지락 니→이긔락 디락 니〈34ㄱ〉

3.7. 8종성법→7종성법

『두시언해』 초간본은 8종성법이므로, 받침 표기에 ‘ㄷ’이 쓰였지만, 중간본은 7종성법이므로 초간본에서 받침이 ‘ㄷ’으로 표기된 예들은 모두 ‘ㄷ’이 ‘ㅅ’으로 바뀌게 된다.

. ㄷ→ㅅ : 묻노라→뭇노라〈16ㄱ〉, 얻고져→엇고져〈22ㄱ〉, 몯 믿게→몯 밋게〈22ㄴ〉, 받오→밧오믈〈27ㄱ〉, 이문노라→뭇노라〈31ㄱ〉, 듣고져→듯고져〈34ㄴ〉, 듣노라→듯노라〈36ㄱ〉, 솓→솟〈50ㄱ〉.

3.8. 다→다

『두시언해』 초간본에서 ‘다’로 표기되던 단어들이 중간본에서 ‘다’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초간본 시기에는 언중들에게 ‘’의 의미가 인지되었다가, 중간본에 와서는 언중들에게 ‘’의 의미가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아래와 같다.

구룸→구룸〈32ㄱ〉, →〈36ㄱ〉, 닐〈36ㄴ〉, 닐〈38ㄱ〉, 〈38ㄴ〉.

중간본에서 ‘다’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니오〈37ㄴ〉, 가 붓그리노라〈29ㄴ〉

3.9. ‘ㄱ’의 복원

15세기 국어에서는 모음이나 ‘ㄹ’ 받침에 후행하는 ‘ㄱ’은 약화되어 표기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두시언해』 초간본도 이러한 표기법을 보여주는데, 중간본에서는 ‘ㄱ’이 복원되어 표기되었다. 예는 아래와 같다.

알에 다→알게 다〈25ㄱ〉

3.10. 경음화

『두시언해』 중간본에서는 경음화를 적극적으로 표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갑올고→갑옭고〈13ㄴ〉, 報答고→報答고〈45ㄴ〉, 엇더고→엇더고〈52ㄴ〉

3.11. ‘엣/앳’의 ‘ㅣ’ 탈락

『두시언해』 초간본에는 부동사 어미 ‘-어’에 ‘잇다’가 결합한 ‘-어 잇다’ 구문은, 선행모음에 따라 ‘-엣다/-앳다’로 표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중간본에서는 ‘ㅣ’가 탈락한 ‘-엇다/-앗다’로 표기된 예가 있다.

노팻더라→노팟더라〈38ㄱ〉, 옛도다→엿도다〈41ㄴ〉, 곳다온 프를→곧다온 프를〈35ㄱ〉

3.12. 중간본의 교정

『두시언해』 중간본에서는 초가본의 내용이 더러 교정되어 있는데, 올바른 교정보다는 초간본의 언어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 교정한 경우가 더 많다. 먼저 중간본에서 정당하게 교정된 예이다.

서→셔〈10ㄴ〉, 오 아 가막가치 깃비 우루믄→오 아 가막가치 깃비 우루믄〈두시 5:12ㄱ〉

위의 예에서 초간본의 ‘서’가 중간본에서 ‘셔’로 교정된 예인데 이는 올바른 교정이다. 그러나 중간본의 교정이 오히려 잘못된 경우가 더 많다.

사홈을 섯게로소니 → 섯겟도소니〈13ㄴ〉, 엇뎨 더듸니오 → 어뎨 더듸리오〈10ㄴ〉, 오랫디→오래디〈34ㄱ〉, 게 特出 材質을 倚仗야 리라〈두시 5:47ㄴ〉 → 〈중간본〉게 特出 材質을 倚仗야아 리라, 因→人 : 言因亂而道路ㅣ 不通也ㅣ라 → 言人亂而道路ㅣ 不通也ㅣ라〈16ㄴ〉, 羣臣이→群臣ㅣ〈18ㄱ〉, 하해→하해〈10ㄱ〉, 헐우도다→헐우로다〈26ㄴ〉, 서→셔〈10ㄴ〉, 大荒  가 텨→大荒 흘  텨〈31ㄴ〉, 霍嫖姚가→霍嫖姚인가

초간본에서 부동사 어미 ‘-어’ 뒤에 계사가 연결되는 구성을 중간본의 편집자들은 이해할 수 없거나 더 이상 이런 문법이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섯거+이로소니’ 구성을 ‘섯거#잇도소니’ 구성으로 교정하였다.

3.13. 연철과 분철

『두시언해』의 중간본에서는 초간본에서 연철 표기되었던 것이 분철로 표기된 경우가 많다. 예는 아래와 같다.

다→당당이〈8ㄱ〉, 시르미→시름이〈10ㄴ〉, 번드기→번득이〈17ㄴ〉, 처믜→처엄의〈18ㄱ〉, 미→이〈19ㄱ〉, 수를→술을[酒]〈30ㄴ〉, 사로→사으로〈41ㄱ〉, 사→사〈48ㄴ〉.

그러나 초간본에서 분철되었던 것이 중간본에서 연철된 경우도 있다.

믈읫 이리→므릣 이리〈29ㄴ〉, 닐오→니로〈40ㄴ〉

3.14. 중간본의 오각 내지 탈각

중간본에는 오각이나 탈각으로 볼 만한 것들이 있다. 예는 아래와 같다.

→ 〈5ㄴ〉, 긔→귀 〈9ㄱ〉, →귀 〈9ㄱ〉, 달애야→달애아 〈25ㄱ〉, 也ㅣ라→也ㅣ타 〈32ㄴ〉, 西ㅅ녁→西ㅅ덕 〈48ㄴ〉, 衆→象 〈53ㄴ〉

3.15. 기타

그 이외에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업스려마→어스려마〈29ㄴ〉, 遼海ㅅ 믌겨레 고래 버횰 디어다→遼海ㅅ 믌겨렛 고래 버횰 디어다〈52ㄴ〉, 黃金臺옌 賢俊 뎌 해 뒷도다→黃金䑓옌 賢俊을 두어 해 잇도다〈24ㄴ〉, 中에→듕에〈33ㄱ〉, 家門→가문〈38ㄴ〉,  치와→ 것과〈35ㄱ〉, 나 소리→나븨 소리〈36ㄱ〉, 洛陽ㅅ 宮殿이→洛陽애 宮殿이〈두시 5:45ㄴ〉, 리-→리-〈25ㄱ〉

4. 『두시언해』 권5의 어휘와 표현

『두시언해』는 어휘, 표현, 문법 등에서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독창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 국어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연구의 역사에 비해, 연구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분량이 많은데다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남풍현(2014)에서 제시된 예를 중심으로 『두시언해』 권5에 쓰인 희귀어와 『두시언해』에서만 쓰이거나,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두시언해』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쓰인 어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두시언해』 권5에는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된 많은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들 중 중요한 것은 예문을 통해 살펴보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것들은 예만 제시하기로 한다. 주001)

<풀이>남풍현(2014)에는 즉 ‘샇-[築]+오+ㄴ’으로 분석되는 ‘손’도 제시되어 있으나, 이것은 경음을 가진 단어를 평음으로 표기한 『두시언해』의 표기적 특징을 반영한 단어이므로, 뒤에 따로 기술한다.

(1) 다[穿] : 누니 게 라오 디  當호니 미 주그니   노햇 도다(眼穿當落日 心死著寒灰)〈두시 5:5ㄱ〉

(2) 듧다 :

가. 해 구무 듧고  지여 온 모 무두매 當얀 어루 모미 외녀(方其穴地負土야 全體而坑之얀 爲可忍耶아)〈법화 6:154ㄴ〉

나. 祖師ㅅ 眞機 聖解 通호미 어려우며 凡情이 듧디 몯논 젼로 일후믈 關이라 니라〈금삼序二2ㄱ〉

다. 시 四明ㅅ 누네 듧고 주으려 楢溪옛 도토바 주니라(履穿四明雪 飢拾楢溪橡)〈두시 24:38ㄴ〉

(3) 들우다 :

가. 다가 이 量애 너믄 사미면 石火電光  번 자보매 곧 자며 銀山鐵壁을 번 들우메 곧 들우리니(若是過量漢이면 石火電光 一捉애 便捉며 銀山鐵壁을 一透에 便透리니)〈금삼 序2:5ㄴ〉

나. 精微호 溟涬을 들우리오(精微穿溟涬)〈두시 16:2ㄱ〉

(4) 들워디다 :

가.  우희 무롭 다핫던 히 다 들워디옛더라(其榻上當膝處ㅣ 皆穿니라)〈번소 10:22ㄴ〉

나. 그 평상 우희 무롭 단 고디 다 들워디니라(管寧이 嘗坐一木榻더니 積五十餘年이로 未嘗箕股니 其榻上當膝處ㅣ 皆穿니라)〈소학 6:121ㄱ〉

. 위에서 ‘다’는 자타동 양용동사로 ‘뚫다, 뚫리다’의 뜻이다. ‘다’는 그 용례가 『두시언해』의 여기서만 보이며 다른 문헌에서는 ‘듧다’가 쓰였다. (1)은 『두시언해』 권5에 쓰인 ‘다’의 예이며, (2가, 나)는 각각 다른 문헌과 『두시언해』에 쓰인 ‘듧다’의 용례이며, (3)은 ‘듧다’의 사동사인 ‘들우다’, (4)는 ‘들우다’의 ‘-어디-’ 파생동사인 ‘들우디다’의 예이다.

(5) 가. 버리도 매 모디로 머겟니 雷霆ㅅ 威嚴을 震動호미 可니라(蜂蠆終懷毒 雷霆可震威)〈두시 5:10ㄱ〉

나. 塵沙傍蜂蠆 江峽繞蛟螭(塵沙ㅅ 서리예 蜂蠆 바라 니고 江峽에 蛟螭 버므러 니노라)〈두시 16:10ㄱ〉.

. 버리[蜂]에서 ‘벌’의 의미인 ‘버리’는 ‘벌’에 동물 명칭 등에 결합하는 파생접미사 ‘-이’가 결합한 형태이다. (5가)에서 볼 수 있듯이 ‘버리’는 두시 원문의 ‘봉채(蜂蠆)’에 대응한다. 15세기 국어에는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단어에 접미사 ‘-이’가 붙어 단어를 형성하는 현상이 있다. ‘벌’과 ‘버리’도 그런 관계를 가진 단어들 중 하나이다. (5나)에서와 같이 ‘봉채(蜂蠆)’는 『두시언해』의 다른 곳에서는 언해되지 않고 그대로 ‘蜂蠆’로 제시된 곳도 있다.

(6) 길헤셔 숫어 놀애 브르리 하니 河北엣 將軍이 다 入朝놋다(喧喧道路多謌謠 河北將軍盡入朝)〈두시 5:22ㄱ〉

(7) 가. 수다 : 近閒애 드로니 詔書ㅣ 려 都邑에셔 수니 엇뎨 麒麟로 여 地上애셔 니게 리오(近聞下詔喧都邑 肯使麒麟地上行)〈두시 17:29ㄴ〉

나. 수다 :  소리 수니 기리 조오로미 젹고 樓ㅣ 아라니 올로 時ㅣ 옮록 이쇼라(江喧長少睡 樓迥獨移時)〈두시 3:40ㄴ〉

다. 수다 : 나조히 도록 刀斗 티니 수 소리 萬方애 니도다(竟夕擊刁鬥 喧聲連萬方)〈두시 10:20ㄱ〉

라. 숫어리다 : 마 數 업슨 새 더으니 토아 沐浴야 짐즛 서르 숫어리다(已添無數鳥 爭浴故相喧)〈두시 10:6ㄴ〉

마. 숫워리다 : 다 西ㅅ 녁  서르 이디 아니호 치고 숫워려셔  가온  수를 업텨 머구라(共指西日不相貸 喧呼且覆杯中淥)〈두시 3:53ㄴ〉

바. 수어리다 : 靑女의 서리 온 싣남기 하니 黃牛ㅅ 峽엣 므리 수어리다(靑女霜楓重 黃牛峽水喧)〈두시 11:49ㄴ〉

사. 수어리다 : 매 蛟螭와 다 섯고니 엇뎨 져비 새 수어리미 업스리오(竟與蛟螭雜 空聞燕雀喧)〈두시 21:10ㄱ〉

아. 수워리다 : 먼 村애 가 사롤 이 다시 議論야 수워리  避야 모딘 범 잇  히 너기니(更議居遠村 避喧甘猛虎)〈두시 9:9ㄴ〉

자. 숫두워리다 : 潭州ㅅ 올 안히 甚히 淳朴며 녜로외니 員의  안핸 숫두워려 블로미 업도다(潭府邑中甚淳古 太守庭內不喧呼)〈두시 9:31ㄱ〉

. 숫다[喧]에서 ‘숫다’는 ‘떠들썩하게 말하다’의 의미로 두시 원문에서는 (6)에서 볼 수 있듯이 ‘훤훤(喧喧)’의 번역으로 쓰였다. ‘숫다’와 관련되는 단어가 비교적 많은데, 수다(7가), 수다(7나), 수다(7다), 숫어리다(7라), 숫워리다(7마), 수어리다(7바), 수어리다(7사), 수워리다(7아). 숫두워리다(7자) 등이 있다. ‘수다, 수다, 수다’는 ‘숫다’에 각각 사동접미사 ‘--, -으-, -우-’가 결합된 형태이며, ‘숫어리다, 숫워리다’는 각각 ‘숫다’에 ‘-어리-’와 ‘-워리-’가 결합된 단어이다. ‘수어리다, 수어리다, 수워리다’는 각각 ‘수다’나 ‘수다’에 ‘-어리-’나 ‘-워리-’가 결합된 단어이다. ‘숫두워리다’는 ‘숫다’와 ‘-워리-’ 사이에 ‘두’가 개입한 것으로 개입된 ‘두’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8) 가. 紫氣關 天地 어윈  臨야 잇고 黃金臺옌 賢俊 뎌 해 뒷도다(紫氣關臨天地闊 黃金臺貯俊賢多)〈두시 5:24ㄴ〉

나. 紫氣關은 天地 어윈  臨야 잇고 黃金䑓옌 賢俊을 두어 해 잇도다〈중간두시5:24ㄴ〉

. 디다[貯]에서 ‘디다’는 두시 원문의 ‘貯’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두시언해』는 물론 15세기 국어 전체 문헌 중에서도 (8가)에 제시된 『두시언해』 권5의 이 용례만 확인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중간본〉의 해당 번역이 (8나)와 같이 ‘두어’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중간본〉이 간행되던 시기인 17세기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9) 가. 히 뷘  여슷 리 드러오니 머리 이어고 旗旌을 드논놋다(庭空六馬入 駊騀揚旗旌)〈두시 5:48ㄱ〉

나. 오 요미 天下ㅣ 다니 래 긋어 微風에 드논놋다(曝衣遍天下 曳月揚微風)〈두시 11:24ㄱ〉

다. 녯 버듸 디 늘구매 뉘 너 리오 날로 여 손바리 가야와 드노코져 케다(故人情味晚誰似 令我手脚輕欲旋)〈두시 3:51ㄱ〉

. 드놋다(드놓다)[揚]에서 ‘드놋다’는 ‘들-[擧]’과 ‘놓-[放]’의 합성동사로서 두시 원문의 ‘揚’에 대응된다. 이 단어는 『두시언해』에서만 확인되는 단어인데, 『두시언해』에서는 감탄 표현인 ‘드논놋다’의 형태로 쓰였다. 선행동사인 ‘들-’의 받침 ‘ㄹ’은 탈락하였고 후행동사인 ‘놓-’은 후행하는 ‘놋’의 영향으로 비음화된 표기되어 ‘논’으로 표기되었다. 후행동사를 ‘놓-’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9다)의 ‘드노코져’에서 확인된다. ‘드논놋다’는 원시의 ‘揚’에 대한 번역으로 ‘드놓다’는 『두시언해』에서만 보이는 단어이다. (9가, 나)의 ‘드논놋다’는 두시 원문의 ‘揚’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반해, (9다)의 ‘드노코져’는 두시 원문의 ‘旋’의 번역으로 쓰였다.

(10)가. 애 긋븐 소리를 므더니 너기고져 간마 미 어즈럽건디 마 오랄 니라(欲輕腸斷聲 心緒亂已久)〈두시 5:26ㄴ-27ㄱ〉

나. 閬中엣 됴 이리 어루 애 긋브니 閬州ㅅ 城 南녀근 天下애 드므도다(閬中勝事可腸斷 閬州城南天下稀)〈두시 13:32ㄴ〉

다. 애 긋다 : 나 식 랑홈 야 렴호 애 긋도다〈은중10ㄱ〉 /  뫼헤셔 뎌 부로매 과 왜 니 뉘 지븨셔 애 긋 소리 工巧히 짓니오(吹笛秋山風月清 誰家巧作斷腸聲)〈두시 16:50ㄴ〉

라. 애 긋다 : 細柳營에 金甲 흐로 듣디 몯리로소니 秦州에 흐린 涇水 흐르 〈두시 3:37ㄴ〉 해 애 긋노라(未聞細柳散金甲 腸斷秦州流濁涇)〈두시 3:37ㄱ-ㄴ〉

. 긋브다[斷] : ‘긋브다’는 ‘끊다, 그치다’의 의미인 동사 ‘긏-’에 형용사파생접미사 ‘-브-’가 결합되어 형성된 단어로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10가)는 『두시언해』 권5에서 쓰인 용례이고, (10나)는 그밖의 권차에서 쓰인 용례이다. 『두시언해』에 쓰인 ‘긋브다’는 모두 주어로 ‘애’를 가진다. 15세기 국어의 ‘긏다’는 자타동양용동사인데, 『두시언해』에는 (10다)와 같이 ‘애 긋다’의 표현도 쓰이고 (10라)와 같이 ‘애 긋다’의 표현도 쓰인다.

(11) 智慧와 예 님금 스치샤미 드롓니 나며 드로매 諸公의게 옛도다(智謀垂睿想 出入冠諸公)〈두시 5:41ㄴ〉

. 닐여듧[七八] : (12)의 ‘닐여듧’도 ‘닐곱’과 ‘여듧’의 합성어인데 15세기 국어에서도 『두시언해』 권5의 이 예만 확인된다.

(12) 禽獸ㅣ 마 열헤 닐여들비 주그니 주기 소리 디 예 하 두르혀 도다(禽獸已斃十七八 殺聲落日回蒼穹)〈두시 5:49ㄴ〉

. 이다[冠]에서 ‘이다’는 ‘다’의 피동사로 ‘-’에 피동접미사 ‘-이-’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동사이다. 『두시언해』에서도 (11)과 같이 권5의 용례만 확인된다.

(13) 네 鎭에 나니 하니 敵鋒을 摧陷요미 다 무레 혀 나니라(四鎭富精銳 摧鋒皆絕倫)〈두시 5:53ㄱ〉

(14) 가. 다 : 摝  씨라 拯은 거려낼 씨오 濟 걷날 씨라〈월석 1:월석序9ㄱ〉

나. 디다 : 자내 지믈 어마님 맛디시고 부러 디여 여슷 里 가시니〈석상 3:37ㄴ〉

다. 러디다 : 모딘 길헤 러디면 恩愛 머리 여희여 어즐코 아야〈석상 6:3ㄴ〉

. 히다[絶]에서 ‘히다’는 ‘떨다’의 뜻인 ‘-’에 피동접미사 ‘-히-’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동사이다. 15세기 국어의 ‘다’는 (14나, 다)와 같이 ‘디다’와 ‘러디다’와 같이 다른 피동사들도 있었다.

위에서 (1)의 ‘듧다’, (5)의 ‘버리’, (6)의 ‘숫다’, (8)의 ‘디다’, (9)의 ‘드놋다(드놓다)’, (10)의 ‘긋브다’, (11)의 ‘이다’, (12)의 ‘닐여듧’, (13)의 ‘히다’는 모두 남풍현(2014)에서 『두시언해』 권5에 쓰인 희귀어(稀貴語)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두시언해』 권5에는 위에서 제시된 단어 이외에도 『두시언해』에서만 쓰인 단어이거나,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는 잘 쓰이지 않은 단어들이 많다. 여기서는 『두시언해』에서만 쓰인 용례만 제시한다.

먼저 동사, 형용사의 예이다. 여기에는 동사의 예로 ‘시름외다, 에이다’가, 형용사의 예로 ‘구즉다, 비뉘다, 시드럽다, 죠고마다’를 제시하였다.

(15) 시름외다:

가. 시름왼 데 되 픗뎌 부 나조히여 서코 슬픈 漢苑ㅅ 보미로다($愁思胡笳夕 凄凉漢苑春)〈두시 5:5ㄴ〉

나. 시름왼 드로 구룸 髻髮을 리니 허리와 四支예 貴 오시 어위도다(秋思拋雲髻 腰支膡寶衣)〈두시 5:17ㄱ〉

다. 天子ㅣ 처믜 시름왼 들 시고 都邑ㅅ 사 여희  슬허니라(天子初愁思 都人慘別顏)〈두시 5:18ㄱ〉

라. 穹廬ㅣ 아라히 牢落니 우희 잇 녀 구루미 시름외도다(穹廬莽牢落 上有行雲愁)〈두시 5:34ㄱ〉

마.  부 수풄 소리 것고 시름왼 돌 양 改變놋다(颼颼林響交 慘慘石狀變)〈두시 1:23ㄱ〉

바. 셔울히 다시 블 븓디 아니야 涇渭옛 사미 시름왼 양 훤야(京都不再火 涇渭開愁容)〈두시 4:24ㄱ〉

(16) 시름다 :

가. 太子ㅣ 니샤 사 목수미 흐를 믈 야 머므디 몯놋다 시고 도라 드르샤 시름야 더시다〈석상 3:18ㄱ〉

나. 주려셔 집마다  빌오 시름얀 곧마다 숤盞 求노라(飢籍家家米 愁徵處處盃)〈두시 3:9ㄴ〉.

. 시름외다에서 ‘시름외다’는 ‘시름’과 ‘외다’가 결합한 된어로 ‘걱정되다, 근심되다’의 의미이다. 『두시언해』 이외의 문헌에서는 ‘시름다’가 쓰였다. (15)는 ‘시름외다’의 예이고, (16)은 ‘시름다’의 예이다. (15가~라)는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이다.

(17) 가. 외로왼 구루미 殺伐ㅅ 氣運을 좃고  새 轅門을 에여가놋다(孤雲隨殺氣 飛鳥避轅門)〈두시 5:53ㄴ〉

나. 사 에여가 諫諍던 긄草 브레 오  타 나오니 기 기세 오고져 놋다(避人焚諫草 騎馬欲雞棲)〈두시 6:15ㄴ〉

다. 내 人生 일버어 기리 어려운  에여니고 먼  가매 다시 옷기 믈로 저지노라(偷生長避地 適遠更霑襟)〈두시 2:26ㄴ〉

라. 陶潛 世俗 에여니 한아비니 반기 能히 道理 아디 몯니라(陶潛避俗翁 未必能達道)〈두시 3:58ㄴ〉

. 에이다 : ‘피하다’의 의미이다.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단어인데, 『두시언해』에서도 ‘에여니다’, ‘예여가다’와 같은 표현만 확인될 뿐 단독으로 쓰인 경우가 없어서 아마도 15세기 당시에 이미 세력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7가, 나)는 ‘예여가다’의 예이고, (17다, 라)는 ‘에여니다’의 예이다.

(18) 가. 魏侯ㅣ 氣骨이 구즉고 精神이 니 華嶽ㅅ 묏부리예  매 보 도다(魏侯骨聳精爽緊 華嶽峯尖見秋隼)〈두시 5:38ㄴ〉

나. 아래로 어 가 坤軸 리티니 구즉 石壁 鏌鎁劒이 모댓 도다(下沖割坤軸 竦壁攢鏌鋣)〈두시 6:47ㄱ〉

다. 西嶽이 노파 구즉 히 尊니 여러 묏부리 버러 셔시? 兒孫이 도다(西嶽崚嶒竦處尊 諸峯羅立如兒孫)〈두시 13:4ㄱ〉

라. 빗나 后羿ㅣ 아홉  소아 디 고 구즉호 한 天帝ㅣ 龍 타 솟 고(爧如羿射九日落 嬌如群帝驂龍翔)〈두시 16:47ㄴ〉

마. 구즉 큰 賢人의 後에  秀骨이 고 보라(嶷然大賢後 復見秀骨清)〈두시 24:18ㄴ〉

바. 구즉 江海예 이숄 디 도로 雲路로 다 기도다(矯然江海思 復與雲路永)〈두시 24:40ㄴ〉.

(19) 가. 너 外曾孫이니 구즉구즉야 피 내  삿기 도다(爾惟外曾孫 倜儻汗血駒)〈두시 22:45ㄱ〉

다. 踔 구즉 셜 탁〈新類下55ㄴ〉

. 구즉다에서 ‘구즉’은 ‘우뚝’에 해당하는 부사로 보이며, ‘구즉다, 구즉구즉다’는 『두시언해』에만 쓰였다. (18)은 ‘구즉다’의 예이며, (19가)는 ‘구즉구즉다’, (19나)는 부사 ‘구즉’의 예이다.

(20) 가. 뉘 닐오 모딜에 소 거슬 기텨 두리라 리오 마 이 비뉘 거슬 시서 리놋다(誰云遺毒螫 已是沃腥臊)〈두시 5:4ㄱ〉

나. 주거미 답사효매 플와 나모왜 비뉘고 피 흘로매 내과 두들기 블겟도다(積屍草木腥 流血川原丹)〈두시 4:10ㄴ〉

다. 어젯 바 東녃 미 피 부러 비뉘니 東로셔 오 橐駝ㅣ 녯 都邑에 도다(昨夜東風吹血腥 東來橐駝滿舊都)〈두시 8:2ㄴ〉

라. 비와 아리 가진 비뉘 고기 본 먹디 아니니 나리 록 주류믈 마 西로 가락  東으로 오놋다(鱗介腥膻素不食 終日忍飢西復東)〈두시 17:19ㄱ〉

마. 햇 사미 비뉘 거슬 相對야셔 취바 長常 브르 먹디 몯호라(野人對膻腥 蔬食常不飽)〈두시 19:46ㄴ〉

바. 곧 이제 龍廐엣 므리 犬戎의 비뉘호  디 아니얫녀(卽今龍廄水 莫帶犬戎膻)〈두시 20:4ㄴ〉 / 中華와 夷狄괘 서르 섯거 모니 宇宙ㅣ  디위 비뉘도다(華夷相混合 宇宙一膻腥)〈두시 24:6ㄱ〉.

. (20)에서 비뉘다는 ‘비릿하다’의 뜻으로 두시 원문의 ‘腥, 膻, 腥膻’ 등에 대응된다. (20가)는 『두시언해』 권5에 나오는 예이고, 나머지는 그밖의 권차에 나오는 예이다.

(21) 시드럽다 :

가. 이 무리 恩惠를 感激야 오니 시드러운 俘獲은 엇뎨 足히 자브리오(此軰感恩至 羸俘何足操)〈두시 5:4ㄱ〉

나. 큰 올도 열 지비 업고 큰 族屬도 性命이 외외며 시드럽도다(大鄉無十家 大族命單贏)〈두시 25:36ㄴ〉

다. 山林에 시드러운 모 브툐니 반시 崎嶇히 어려이 뇨 免티 몯리로다(山林託疲薾 未必免崎嶇)〈두시 2:11ㄴ〉

(22) 시들다 :

가. 다 나래 窓牖中에셔 아 모미 여위오 시들며  기 듣글 무더 더러워 조티 몯  머리셔 보고〈법화 2:209ㄴ〉

나.  여위여 시들오  브르도다 사미 도라 보디 아니니〈남명上30ㄱ〉

. 시드럽다는 ‘시들다’에 형용사파생접미사 ‘-업-’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단어이다. ‘시드럽다’는 주로 『두시언해』에서만 쓰이고 나머지 15세기 문헌에서는 주로 ‘시들다’가 쓰였다. (21)은 ‘시드럽다’의 예이고 (22)는 ‘시들다’의 예이다.

. 죠고마다는 15세기에 ‘작다’의 뜻은 ‘쟉다, 젹다, 죡다, 횩다, 죠고마다, 져고마다’ 등이 있는데, 이 중 ‘죠고마다’와 ‘져고마다’는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23)은 ‘죠고마다’의 예이고, (24)는 ‘져고마다’의 예이다.

(23) 죠고마다 :

가. 邊塞ㅅ 우희 傳야 오 비치 죠고마고 구  디 點이 殘微도다(塞上傳光小 雲邊落點殘)〈두시 5:54ㄴ〉

나. 受苦로이 가 華蓋君을 보디 몯호니 艮岑앳  비치 슬피 죠고마더라(辛勤不見華蓋君 艮岑靑輝慘么麽)〈두시 9:5ㄱ〉

다. 매 거리  ?현이 죠고마가 식브고 누네 바라 양주ㅣ 뵈다(關心小剡縣 傍眼見揚州)〈두시 13:26ㄱ〉

라. 徐關 기픈 믌 기우리 외얏고 碣石 죠고마야  터리 도다(徐關深水府 碣石小秋毫)〈두시 13:30ㄱ〉

마. 뵈이 甚히 죠고마 거시로 슬픈 소리 모 사 感動다(促織甚微細 哀音何動人)〈두시 17:37ㄱ〉

(24) 져고마다 :  幕  건너 멀오 블근 幡은 무틔 올아 져고마도다(素幕渡江遠 朱幡登陸微)〈두시 24:48ㄱ〉

『두시언해』에는 ‘한자어 명사’와 ‘다’가 결합되어 합성동사나 합성형용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두시언해』에 쓰인 ‘한자어+다’ 중에는 그밖의 문헌에서는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더러 있다. 『두시언해』 권5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로는 ‘疑畏다, 制馭다, 豪俠다’가 있다. ‘疑畏다’는 ‘의심하다’, ‘制馭다’는 ‘말을 제압하다’, ‘豪俠다’는 ‘호탕하고 재빨라 남의 위급함을 도와주다’의 뜻이다. ‘疑畏다’와 ‘豪俠다’의 예는 (25, 26)에서 각각 제시된다.

(25) 의외(疑畏)다 : 되 滅니 사미 도혀 亂니 兵事ㅣ 衰殘니 將軍이 제 疑畏놋다(胡滅人還亂 兵殘將自疑)〈두시 5:15ㄴ〉

(26) 호협(豪俠)다 : 漁陽 豪俠 히니 부플 티며 뎌 피리 부놋다(漁陽豪俠地 擊鼓吹笙竽)〈두시 5:32ㄱ〉

다음은 『두시언해』에만 쓰이는 명사들 중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들이다. 여기에는 ‘가막가치, 구위, 다봇(다봊), 들굴, , 새집, 이랏, ㅎ, 픗뎌’ 등이 제시되어 있다. ‘가막가치’는 ‘까마귀와 까치’, ‘구위’는 ‘관청’, ‘다봇(다봊)’은 ‘다복쑥’, ‘들굴’은 ‘떼, 뗏목, 떨기’ 등 나무 줄기가 얽히고 설킨 것, ‘’은 ‘배의 돛대’, ‘새집’은 ‘띠집’, ‘이랏’은 ‘앵두’, ‘ㅎ’은 ‘근원’, ‘픗뎌’는 ‘풀피리’의 뜻이다.

‘가막가치’는 ‘가마괴’와 ‘가치’가 결합된 합성명사이다. (27)은 ‘가막가치’의 에이며, (28, 29)는 각각 ‘가마괴’와 ‘가치’의 예이다.

(27) 가막가치 :

가. 오 아 가막가치 깃비 우루믄 凱歌야 도라오 알외오져 놋다(今朝烏鵲喜 欲報凱歌歸)〈두시 5:11ㄱ〉

나. 關山애 티 비취유미 가지니 가막가치 제 해 놀라놋다(關山同一照 烏鵲自多驚)〈두시 12:7ㄴ〉

(28) 가마괴 :

가. 가마괴 本來 거므며 鵠이 本來 며(烏ㅣ 從來예 黑며 鵠이 從來예 白며)〈능엄 10:9ㄱ〉

나. 使者의 드트른 驛ㅅ 길흐로 오니 城에 비츤 가마괴 사굔 대 避놋다(使塵來驛道 城日避烏檣)〈두시 3:12ㄱ〉

(29) 가치 :

가. 녀르미여 겨리여  말도 아니코 안잿거시든 머리예 가치 삿기 치더니〈석상 3:38ㄴ〉

나. 너를 기들우노라 가마괴와 가치 믜여다니 글워 더뎌 鶺鴒을 뵈돗더라(待爾嗔烏鵲 拋書示鶺鴒)〈두시 8:39ㄴ〉.

. 15세기 국어에서 ‘관청’의 뜻으로는 ‘그위’가 일반적으로 쓰였는데 『두시언해』에서는 ‘그위’와 함께 ‘구위’도 쓰였다. (30)은 ‘구위’의 예이고, (31)은 ‘그위’의 예이다.

(30) 구위 :

가. 구윗 지비 期限이 잇니 亡命면 災禍ㅅ 그므레 버믈리라(公家有程期 亡命嬰禍羅)〈두시 5:26ㄱ〉

나. 구위예셔 지유미 마 限ㅣ 이실 소곰 굽노라 므레 잇도다(官作既有程 煮鹽烟在川)〈두시 1:18ㄱ〉

다. 구위로션  마래 돈 三百 받거든 옮겨 라  셔메 돈 六天 닐위니(自公斗三百 轉致斛六千)〈두시 1:18ㄱ〉

마. 구위 爲야 됴 삸대 採取야 다 梁과 齊예 바티놋다(爲官采美箭 五歲供梁齊)〈두시 1:23ㄱ〉

바.   草木ㅣ 니 닌 구윗 소곰 굽  비치로다(鹵中草木白 靑者官鹽烟)〈두시 1:18ㄱ〉

(31) 그위 :

가. 百官 온 그위니 한 臣下 니니라〈석상 3:7ㄱ〉

나. 須達이 닐오 太子ㅅ 法은 거즛마 아니시 거시니 구쳐 시리다 고 太子와 야 그위예 決라 가려 더니〈석상 6:24ㄴ〉

다. 니 기르미 흐르 고 조 니 그위와 아 倉廩이 다 豊實더니라(稻米流脂粟米白 公私倉廩俱豐實)〈두시 3:61ㄴ〉

라. 이 時節에 甚히 軍糧ㅣ 업서 一物이라도 그위예셔 다 아 슬노라(傷時苦軍乏 一物官盡取)〈두시 18:18ㄱ〉.

. 다봇(다봊)은 ‘다북쑥’의 의미이다.

(32) 가. 히미 能히 노피 디 몯고  다보 조차 니고 니(力不能高飛逐走蓬)〈두시 5:50ㄱ〉

나. 踈拙 몸 養호매 다보로 입 로니 아라니 〈두시 3:36ㄴ〉

다. 어느 고로 열리오(養拙蓬爲戶 茫茫何所開)〈두시 3:36ㄱ〉

라. 다봇 옮 호매 시르미 悄悄니 藥 行호매 病이 涔涔놋다(轉蓬憂悄悄 行藥病涔涔)〈두시 3:16ㄴ〉.

. ‘들굴’은 ‘떼. 뗏목. 등걸. 떨기’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일반적으로 ‘나뭇가지가 뭉쳐 있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로 보인다.

(33) 가. 들굴  사미 消息이 그츠니 張騫을 어둘 히 업도다(乘槎斷消息 無處覓張騫)〈두시 5:13ㄴ〉

나. 萬象 다  氣運엣 거시오 외로온 들구른 스스로 客星ㅣ 탓도다(萬象皆春氣 孤槎自客星)〈두시 2:21ㄱ〉

다. 새려 므렛 軒檻 더 라 낛 드리우메 供進고 부러  들구를 두어 라 예 드노라(新添水檻供垂釣 故著浮槎替入舟)〈두시 3:31ㄴ〉

라. 藥 다 날  거시 더러 잇고 고 니건  들구레 펫도다(黃落驚山樹 呼兒問朔風)〈두시 3:54ㄴ〉

마. 峓門이 예로브터 비릇니  조바 가 들구를 容納만 도다(峽門自此始 最窄容浮查)〈두시 6:47ㄱ〉

바. 나 듣고 세 소리예 眞實로 므를 디노니 奉命使者 八月ㅅ 들구를 虛히 조차 갯도다(聽猿實下三聲淚 奉使虛隨八月查)〈두시 10:34ㄱ〉

사. 됴 菜蔬ㅣ 더러운  뎟고 時節ㅅ 菊花ㅣ 나모 들굴 서리예 브어뎟도다(嘉蔬沒混濁 時菊碎榛叢)〈두시 12:17ㄴ-18ㄱ〉

아. 이운 들구른 혀 인 남 거두밀옛니 돌콰 다 充塞얏도다(枯查卷拔樹 礧磈共充塞)〈두시 13:7ㄴ〉

자. 내 衰老야  니 들굴와 토니 됴히 건너가 蟠桃 잇  스치노라(吾衰同泛梗 利涉想蟠桃) 梗 들구리라〈두시 13:30ㄱ〉

차. 눈 잇 두들게 들굴 梅花ㅣ 펫고   온 가짓 프리 낫도다(雪岸叢梅發 春泥百草生)〈두시 14:14ㄴ〉

타.  비치  가온 수레 뮈오 노피 바 우흿 들구를 좃놋다(清動杯中物 高隨海上查)〈두시 15:52ㄴ〉

파. 恩波ㅣ 隔絶야쇼 怪異히 너기디 말라 들굴 타 다  무러 하해 올아 가리라(莫怪恩波隔 乘槎與問津)〈두시 16:7ㄴ〉

하.  들구레 와 안자쇼미 됴니 仙人 늘그니 간 서르 디녯도다(浮查並坐得 仙老暫相將)〈두시 16:45ㄱ〉

거. 黃四娘의 지븨 고지 길헤 얏니 즈믄 들굴와 萬 들구리 가지 지즐워 얫도다(黃四娘家花滿蹊 千朶萬朶壓枝低)〈두시 18:7ㄴ〉

너. 저즌 藤蘿ㅅ 架子 고  엿 桂樹ㅅ 들구를 스치노라(露裛思藤架 煙霏想桂叢)〈두시 19:9ㄱ〉

더. 긼 가온대 阮籍이 아니오 들굴 우희 張騫이 도다(途中非阮籍 查上似張騫)〈두시 20:12ㄱ-ㄴ〉

러. 기에 굽스럿니 周史 듣노니 들굴  漢臣이 도다(伏柱聞周史 乘槎有漢臣)〈두시 20:27ㄴ〉

머. 起草호리라 몬져 길헤 우러 가고 들구를 타 조왼  뮈오도다(起草鳴先路 乘槎動要津)〈두시 20:39ㄴ〉.

. 은 ‘배의 돛대’의 뜻으로 『두시언해』에는 두시의 작자 두보의 인생 여정이 담겨 있으므로 다른 문헌에 비해 ‘말()’이나 ‘배()’에 대한 용어가 많다.

(34) 가. 구룸  돗기 遼海로 올마 오니 니리 東吳로셔 오놋다(雲帆轉遼海 粳稻來東吳)〈두시 5:32ㄱ〉

나. 일 녀매 흘 사미 게으르고 돗 로매 ㅣ 아니완히 부놋다(早行篙師怠 席掛風不正)〈두시 1:49ㄴ〉

다. 九江 봄픐 밧기오 三峽 나죗 돗 알피로다(九江春草外 三峽暮帆前)〈두시 2:2ㄴ〉.

. 새집은 ‘띠집’의 뜻으로 ‘띠’의 뜻인 ‘새’와 ‘집’이 결합한 합성명사이다.

(35) 가. 하 비 蕭蕭히 새지븨 오래 오니 뷘 뫼해 幽獨히 이쇼믈 곰 慰勞홀 주리 업도다(天雨蕭蕭滯茅屋 空山無以慰幽獨)〈두시 5:35ㄴ〉

나. 고사리 먹고 녀나 거슬 願티 아니호라니 내 새집을 眼中에 보노라(食蕨不願餘 茅茨眼中見)〈두시 1:24ㄴ〉

다. 巳公 새집 아래여 어루 곰 새 그롤 지리로다(巳公茅屋下 可以賦新詩)〈두시 9:25ㄴ〉.

. ‘이랏’은 ‘앵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두시언해』 권5에서만 확인되는 단어이다.

(36) 가. 賞功샤매 다 枤杜 브르리로소니 도라오샤 이랏 薦 저글 미츠시리로다(賞應歌枤杜 歸及薦櫻桃)〈두시 5:8ㄱ〉

나. 赤墀옛 이랏 가지 銀실로 론 籠애 비취엿거든(赤墀櫻桃枝 隐映銀絲籠)〈두시 4:23ㄴ〉

. ㅎ은 ‘근원’의 뜻이다. 『두시언해』 권5에서는 ‘믌 히’로 쓰였는데, 이는 ‘泉源’의 번역이다. 그런데 『두시언해』에서 ‘泉源’은 ‘믌 밑’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泉源’ 그대로 쓰이기도 하였다. ‘源’은 『두시언해』에서는 많은 경우 ‘ㅎ’으로 번역되었으나 ‘근원’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37)은 ‘ㅎ’의 예이고, (38가)는 ‘源泉’이 ‘믈 밑’으로 번역된 예, (38나)는 ‘源泉’이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두시의 번역으로 쓰인 예이다.

(37) 가. 믌 히 니 나 소리 섯겟고 즌기 펴시니 鴻鵠이 주려 놋다(泉源泠泠雜猿狖 泥濘漠漠飢鴻鵠)〈두시 5:36ㄱ〉

나. 峽이 四千里 여렛니 므른 數百 해셔 모도 흐르놋다(峽開四千裏 水合數百源)〈두시 6:49ㄱ〉

다. 다시 묻노라 네 어드러 가니오 西ㅅ 녁그로 岷江ㅅ 로 올아가놋다(重問子何之 西上岷江源)〈두시 8:7ㄱ〉

라. 宋玉 지븨 와셔  슬코 武陵  길홀 일후라(悲秋宋玉宅 失路武陵源)〈두시 8:12ㄱ〉

마. 凄凉 부듸  오고 浩蕩 말  묻노라(凄凉憐筆勢 浩蕩問詞源)〈두시 8:25ㄱ〉

바. 긄  三峽 므를 갓故로 흘리리오 붇陣 올로 즈믄 사 軍 러 리리로다(詞源倒流三峽水 筆陣獨掃千人軍)〈두시 8:30ㄴ〉

사. 믌   구븨와 荊門ㅅ 이 길흘 疑心노라(江水清源曲 荊門此路疑)〈두시 11:27ㄱ〉

아. 녯  樊川엣 菊花로  滻水ㅅ 해 登高요라(故里樊川菊 登高素滻源)〈두시 11:29ㄴ〉

자.  미 서늘 後를 져기 기들워 白帝 노피 자 가 眞實ㅅ  무르리라(稍待西風涼冷後 高尋白帝問眞源)〈두시 13:4ㄴ〉

차.  해 뭀 고기 하고 먼 두들 노 ?기 하도다(清源多衆魚 遠岸富喬木)〈두시 13:15ㄴ〉

카.  자보 근원을 알 일기예 린 거시 젹도다(秉心識本源 於事少滯礙)〈두시 25:7ㄴ〉

(38) 가. 읏드미 雷雨 버리와다 불휘 믌 미틔 싯기여 그처디니 엇뎨 하 디시리오(幹排雷雨猶力爭 根斷泉源豈天意)〈두시 6:40ㄴ〉

나. 泉源의 미여 슈믈 보매 미처 도혀 江海ㅣ 업틸가 전노라(及觀泉源漲 反懼江海覆)〈두시 13:8ㄱ〉.

. 픗뎌는 ‘풀피리’의 뜻으로 ‘플’과 ‘뎌’의 합성어이다. ‘플’이 ‘픗’으로 표기된 것은 15세기 국어에서 속격조사 ‘ㅅ’이 연결되는 구성에서 선행어의 받침을 탈락시키고 속격조사 ‘ㅅ’이 받침의 자리에 쓰이는 현상으로, ‘집→짓’, ‘바→바’ 등이 이런 현상에 속한다. (39가-다)는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이며, (39라-마)는 그밖의 권차에 쓰인 일부 예이다.

(39) 가. 시름왼 데 되 픗뎌 부 나조히여 서코 슬픈 漢苑ㅅ 보미로다(愁思胡笳夕 凄凉漢苑春)〈두시 5:5ㄴ〉

나.  픗뎌 부러 宮闕을 리시고 프른 盖ㅣ 關山로 나가시니라(清笳去宮闕 翠蓋出關山)〈두시 5:18ㄱ〉

다. 슬픈 픗뎌 두 소리 뮈니 壯士ㅣ 슬허 驕慢호 몯놋다(悲笳數聲動 壯士慘不驕)〈두시 5:31ㄱ〉

라. 슬픈 픗뎌 새배 그으기 수으놋다(哀笳曉幽咽)〈두시 4:13ㄴ〉

마. 시름왼 데 되 픗뎌 부 나조히여(愁思胡笳夕)〈두시 5:5ㄴ〉

바.  픗뎌 부러 宮闕을 리시고(清笳去宮闕)〈두시 5:18ㄱ〉.

아래는 『두시언해』에만 쓰인 부사들 중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예들이다.

. ‘새려’는 ‘새로’의 뜻으로 ‘새’에 부사파생접미사 ‘-려’가 결합된 것이다. ‘-려’가 부사파생접미사인 것은 ‘오히려’ 등에서 확인된다. (40가-라)는 『두시언해』 권5에 쓰인 ‘새려’의 용례이고, (40마, 바)는 그밖의 권차에 쓰인 용례의 일부이다.

(40) 가. 今朝 漢ㅅ 社稷을 다시 興起신 브터 새려 혜요리라(今朝漢社稷 新數中興年)〈두시 5:6ㄴ〉

나. 새려 블 브튼 棧道 서의얫고 녯 던 壇場 아라도다(牢落新燒棧 蒼茫舊築壇)〈두시 5:12ㄴ〉

다.   새려 사호 섯게로소니 雲臺예 녜  너피던 사미니라(白骨新交戰 雲臺舊拓邊)〈두시 5:13ㄴ〉

라. 河湟이 리여슈믈  앗겨 새려 節制 兼야 通히 가놋다(每惜河湟棄 新兼節制通)〈두시 5:41ㄴ〉

마. 새려 므렛 軒檻 더 라 낛 드리우메 供進고 부러  들구를 두어 라 예 드노라(新添水檻供垂釣 故著浮槎替入舟)〈두시 3:30ㄴ〉

바. 洛陽ㅅ 宮殿이 블 브터 다 업더니 宗廟 여 톳 굼긔 새려 짓놋다(洛陽宮殿燒焚盡 宗廟新除狐兔穴)〈두시 3:62ㄴ〉.

. 안직은 ‘가장’의 뜻으로 쓰인 단어로 두시 원문의 ‘최(最)’에 대응된다.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에도 ‘最[안직]’이 쓰였다. ‘안직’은 『번역노걸대』 등에서도 쓰였는데 이때의 ‘안직’은 ‘아직’의 뜻이다. (41)은 ‘最’의 뜻인 ‘안직’의 예이고, (42)는 ‘아직’의 뜻인 ‘안직’의 예이다.

(41) 안직[最]

가. 勃律天ㅅ 西ㅅ 녁 采玉河와 堅昆國엣 碧盌이 안직 오미 하더니라(勃律天西采玉河 堅昆碧盌最來多)〈두시 5:21ㄱ〉

나. 驥子아 안직 너를 憐愛노라(驥子最憐渠)〈두시 8:48ㄱ〉

다. 나그내 예 머리 안직 셰니(客間頭最白)〈두시 23:17ㄴ〉

(42) 안직(아직):

가. 우리 잡말 안직 니디 마져(咱們閑話且休說)〈번노상:17ㄱ〉

나. 오나라 오나라 안직 가디 말라 내 너려 말솜 무러지라(來來 且休去 我問伱些話)〈번노상:26ㄱ〉.

. 어득어드기는 두시 원문의 ‘昏昏’을 번역한 말로 ‘어득+어득+이’로 분석된다. 『두시언해』 권5 〈중간본〉은 해당 부분이 ‘이득이득기’로 되어 있으나 아마도 ‘어득어득기’의 잘못일 것으로 보인다.

(43) 어득어드기:

가. 어득어드기 閶闔애 妖怪왼 氣運이 다티옛니 十月에 荊州ㅅ 南녀긔셔 울에 怒야 우르다(昏昏閶闔閉氛祲 十月荊南雷怒號)〈두시 5:37ㄱ-ㄴ〉

나. 어득어드기 구룸  므레 阻隔야 가니 모 기우려 라고   슬노라(昏昏阻雲水 側望苦傷神)〈두시 8:62ㄴ〉

. 이믜셔는 15세기 국어에서 ‘이미, 벌써’의 뜻으로는 ‘마’가 일반적으로 쓰였는데 『두시언해』에서는 ‘이믜셔’가 쓰였다. 이 단어는 ‘이믜’와 ‘셔’로 분석되는데, 중간본인 『두시언해』 권1에는 ‘이믜’의 용례도 보인다. ‘이믜셔’는 두시 원문의 ‘既’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既’의 번역에는 ‘마’도 쓰였다. (44)는 ‘이믜셔’의 예들이며, (45)는 ‘이믜’의 예이다.

(44) 이믜셔 :

가. 徒衆 보내요매 이믜셔 長上이 잇고 머리 가 戍邊호매  모미 잇니라(送徒既有長 遠戍亦有身)〈두시 5:27ㄱ〉

나. 兵革ㅣ 이믜셔 긋디 몯니 나히 다 東 녀크로 征伐 가니라(兵革既未息 兒童盡東征)〈두시 2:67ㄴ〉

다. 사호  처 錦을 주시니 춤 츠 리 이믜셔 牀애 오니라(鬪雞初賜錦 舞馬既登床)〈두시 6:13ㄱ〉

라. 이믜셔 큰 지븨 기우롬과 다니 어루  남로 괴오리라(既殊大廈傾 可以一木支)〈두시 6:44ㄱ〉

마. 이믜셔 世閒애 얽여슈믈 免티 몯 時時예 예 와 던 모 쉬노라(既未免羈絆 時來憩奔走)〈두시 9:22ㄱ〉

바. 날로 다야 무르며 對答호미 이믜셔  호미 잇니 時節을 感歎며 이 자바셔 슬후믈 더으노라(與餘問答既有以 感時撫事增惋傷)〈두시 16:48ㄱ〉

사. 魴魚ㅣ 지고 됴호 第一인 디 아노니 이믜셔 브르 먹고 즐겨호니  슬프도다(魴魚肥美知第一 既飽歡娛亦蕭瑟)〈두시 16:62ㄴ〉

아. 이믜셔 비 오고 개어  집 아래 져고맛 받이러믈 다리고  두 돗 너븨만 부루 菜 즈야 심고니(旣雨已秋 堂下理小畦 隔種一兩席許萵苣)〈두시 16:65ㄱ〉

자. 됴 菜蔬ㅣ 이믜셔 가지 아니니 일훔과 數와 모 다 베프노라(嘉蔬既不一 名數頗具陳)〈두시 16:70ㄱ〉

차. 이믜셔 主人의 도라보 니버실 개 드러 외왼 亭子애 우놋다(既蒙主人顧 舉翮唳孤亭)〈두시 19:34ㄱ〉

(45) 이믜 : 이믜 뎌 비 리올 거시 업스니 길히 믯그럽고 오시  칩도다(既無禦雨備 徑滑衣又寒)〈두시 1:12ㄴ〉.

. ‘지즈로’는 ‘(어떤 것을) 말미암아’의 뜻으로 두시 원문의 ‘因, 仍, 遂’의 번역에 쓰인 단어이다.

나. 이제 니르록 메 스츄니 지즈로 左右에 잇 도다(至今夢想仍猶佐)〈두시 9:6ㄱ〉

다. 햇 興의 疎放호 지즈로 브르노라(因歌野興䟽)〈두시 15:16ㄴ〉.

『두시언해』 권5에는 문법 표현 중에서도 다른 문헌에 쓰이지 않은 것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예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ㄹ션’이다. ‘-ㄹ 션’은 ‘-ㄹ쎠’와 ‘-ㄴ’이 결합된 것으로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둘째는 종속적 연결어미 ‘-어’에 계사와 종결어미가 결합되어, 문장을 결합하는 경우이다.

. ‘ㄹ션’은 ‘-ㄹ쎠’와 ‘-ㄴ’이 결합된 형태로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중간본〉에서도 ‘ㆁ’이 ‘ㅇ’으로 표기되었을 뿐이지 동일한 형태로 볼 수 있는 ‘制馭션졍’으로 되어 있다.

(46) 가. 眞實로 能히 侵勞닐 制馭션 엇뎨 해 주규메 이시리오(苟能制侵陵 豈在多殺傷)

나. 城中에셔  말 로 니브를 밧고니 서르 그리 쳐션 어느 두 것 비듸 서르 마조 議論리오(城中㪷米換衾裯 想許寧論兩相直)〈두시 12:16ㄱ〉

다. 오직 芝蘭로 여 됴케 션 엇뎨 구틔여 지블 이웃야 살라 리오(但使芝蘭秀 何煩棟宇鄰)〈두시 20:29ㄱ〉

라. 오직 閭閻으로 여 도로 揖讓션 구틔여 솔와 대왜 오래 거츠러슈믈 議論리아(但使閭閻還揖讓 敢論松竹久荒蕪)〈두시 21:3ㄱ〉

. ‘-어(종결어미)+계사의 종결형’은 『두시언해』에서는 종속적 연결어미에 ‘계사+종결어미’가 연결된 구성이 쓰이기도 한다.

(47)   새려 사호 섯게로소니 雲臺예 녜  너피던 사미니라(白骨新交戰 雲臺舊拓邊)〈두시 5:13ㄴ〉

5. 간략 두보 평전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 근처의 상강(湘江) 가에서 죽었다. 두보의 먼 선조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가 있고, 초당(初唐)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은 두보의 할아버지이다. 두보는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는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이외에도 일찍 죽은 어린 아들과 딸도 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5세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었으며, 벼슬길로 진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또 안녹산의 난 등의 전란 등으로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사천 三台), 낭주(閬州, 사천 閬中), 운안(雲安, 사천 雲陽), 기주(夔州, 사천 奉節),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갔다. 두시가 위대한 이유는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백성의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시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며, 특히 방관과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太極 원년, 1세) 출생.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開元 5년, 6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권16의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참조).

718년(開元 6년, 7세)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開元 13년, 14세)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李龜年 등, 권16의 ‘江南逢李龜年’ 참조).

730년(開元 18년, 19세) 순하(郇瑕, 산서 臨猗) 여행.

731년(開元 19년, 20세)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開元 23년, 24세) 진사 시험 낙방.

736년(開元 24년, 25세)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여행,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현종이 이임보(李林甫)에게 재상 직을 맡김.

741년(開元 28년, 30세)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이 무렵 「야연좌씨장(夜宴左氏莊)」을 지었다. 여름에 사농소경(司農少卿)의 딸 양이(楊怡)와 결혼.

742년(天寶 원년, 31세) 743년까지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天寶 3년, 33세) 한림학사 이백이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황금을 받고 조정에서 쫓겨남. 두보는 이백을 낙양에서 만나 이후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먹음. 5월에 계조모 노씨 하직. 8월 언사로 돌아가 장례를 지내고, 묘지명을 지음. 장례가 끝난 후 양송 지역(양(梁)은 하남성 개봉, 송(宋)은 하남성 상구) 제3차 여행. 두보와 이백은 양송 지역에 살던 고적과 취대에 올라 넓은 평야를 보면서 옛 사람을 추모함. 이백과 함께 왕옥산으로 화개군을 찾아 떠남. 화개군이 죽은 것을 알자 이백은 제주(齊州) 제남(齊南)으로 가서 고천사(高天師)에게서 도가의 비록을 건네받아 연단의 길로 들어섰고, 두보는 제주(齊州)에서 이옹(李邕) 등과 교류함. 이옹의 손자 이지방이 새로 지은 정자의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당시 북해태수로 있던 이옹이 두보를 초대함. 이때 지은 두보의 「배이북해연역하정(陪李北海宴曆下亭)」(권14)의 “歷下亭은 제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제남에는 빼어난 선비도 많구나/바 右ㅅ 녀긘 이 亭子ㅣ 녜외니 濟水 南앤 일훔난 士ㅣ 하도다(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 구절은 지금도 회자됨. 가을에 연주(=노군)에서 이백과 재회(이백과의 마지막 만남).

746년(天寶 5년, 35세) 십여 년의 여행을 끝내고 장안으로 돌아옴. 장안(西安)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終南山)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

747년(天寶 6년, 36세) 과거 시험 낙방.

748년(天寶 7년, 37세) 장안 거주.

751년(天寶 10, 40세)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4년(天寶 13, 43세) 아들 종무 출생(魏將軍歌·投贈哥舒開府二十韻 참조).

755년(天寶 14, 44세) 하서현위(河西縣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部兵曹參軍)으로 전임되어 취임. 안녹산의 난 발발.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奉先)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後出塞五首 참조).

756년(天寶 15=至德 元年, 45세) 2월 봉선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오자, 봉선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白水)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富縣)의 강촌(羌村, 鄜州 西北 三十里)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귀비, 양국충 등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 감숙 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前出塞九首 참조).

757년(至德 2, 46세)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 섬서 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喜達行在所三首 참조). 5월 16일 좌습유(左拾遺)에 임명. 좌습유의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못되어 두보가 방관을 옹호하는 ‘정쟁오지(廷諍忤旨)’ 사건 발생. 윤달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留別賈嚴二閣老兩院補闕」·「北征」·喜聞官軍已臨賊境二十韻·収京三首」참조〉.

758년(乾元 원년, 47세) 두보는 방관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渭南市 華州區)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어,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겨울 업성의 안경서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는 이사업(李嗣業) 장군을 지방관과 함께 영접함(이사업 장군은 다음 해 정월 업성 전투에서 사망)(觀兵·觀安西兵過赴關中待命二首 참조)

759년(乾元 2, 48세)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司功參軍)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진주(秦州, 감숙 天水)로 감(即事·遣興三首·夕烽 참조). 10월 적곡, 철당협, 한협, 청양협, 적초령을 지나 동곡(同谷, 감숙 成縣)으로 감. 목피령, 백사도, 비선각, 석거각, 검문을 지나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上元 원년, 49세)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戲作花卿歌 참조). 신진현(新津縣) 1차 여행.

761년(上元 2, 50세) 신진현(新津縣)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寄贈王十將軍承俊 참조).

762년(寶應 원년, 51세)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를 면주(綿州, 四川 綿陽의 동쪽)까지 동행하며 전송. 때마침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이사시킴.

763년(廣德 원년, 52세) 낭주(閬州, 사천 閬中)(巴山 참조), 염정(鹽亭, 사천 盐亭 绵陽市東南部), 한주(漢州, 사천 廣漢 縣级市) 등을 여행하고 봄에 재주(梓州, 사천 绵陽市 三台縣)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西山三首·警急·王命·冬狩行 참조).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征夫 참조). 대종이 섬주(陝州)로 피난.

764년(廣德 2, 53세)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가서 촉지를 떠나는 길에 올랐다가(有感五首 참조) 도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도로 돌아옴(収京 참조).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추천됨(揚旗 참조).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

765년(永泰 元年, 54세) 1월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遣憤 참조)으로 감.

766년(大曆 元年, 55세) 늦은 봄, 기주(夔州, 사천 奉節) 도착(諸將五首·八陣圖 참조).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권17의 「催宗文樹雞柵」 ·陪栢中丞觀宴將士二首 참조). 겨울에 歷歷洛陽驪山提封등 작시.

767년(56세)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마련해 준 양서초당(瀼西草堂)에서 삶(柳司馬至·承聞河北諸節度入朝歡喜口號絕句十二首·久雨期王將軍不至 참조).

768년(大曆 3, 57세)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奉節)(喜聞盜賊蕃寇揔退口號五首 참조)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湖北 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남 岳陽) 도착.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大曆 4, 58세)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권17 「백부행(白鳧行)」 참조).

770년(大曆 5, 59세)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 호남 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음).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潭州(호남 長沙)에서 머묾.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하남 偃師)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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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8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시언해』의 간행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의 성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펀찬되었는데, 조선조에서도 세종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편찬되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시의 원문과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

이미 나와 있는 『두시언해』에 대한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한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주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3. 『두시언해』의 편찬자

『두시언해』의 편찬에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두시언해』 권8의 구성과 특징

본 역주의 저본은 을해자로 된 활자본으로,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팔(分類杜工部詩 卷之八)’과 같이 되어 있다. 판심제는 ‘두시 팔(杜詩八)’이다.

본 역주는 1954년 9월에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 출판한 『두시언해 권지칠팔(杜詩諺解 卷之七八)』을 이용하였다. 두시언해 제8권은 전체가 70장으로, 언해된 시는 대분류로 ‘황족(皇族), 세주(世胄), 종족(宗族), 외족(外族), 혼인(婚姻)’의 4부이며, 각 부에는 황족에 9편, 세주에 6편, 종족에 29편, 외족에 10편, 혼인에 3편의 시가 언해되었다. 전체적으로 총 57편의 시가 언해되었다.

역주는 8권을 상하 2권으로 나누어, 상권에는 황족 9편과 세주 6편 및 종족 7편이 포함되었고, 하권에는 종족의 남은 22편과 혼인 3편을 역주하기로 한다.

다음 쪽에 보인 사진은 1954년 통문관에서 영인 간행한 두시언해 권8의 제1면을 보인 것이다.

〈두시언해 권8 제1쪽 앞면〉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다르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는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번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어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5. 『두시언해』 권8의 오자, 탈자, 희귀어 등

1) 언해, 할주 및 원문의 탈자, 오자 등

(1) (3ㄴ) 언해문의 ‘早年에 와 才格 보니 淸秀 氣運이 星斗에 티소앳도다(早年見標格 秀氣衝星斗)’에서 ‘티소앳도다’가 주어진 대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원문의 ‘충(衝)’을 번역한 것이므로, ‘앳’은 ‘샛’의 잘못으로 보인다. ‘티소앳도다’는 ‘티소샛도다’로 복원되고, 그 의미는 ‘치솟아 있도다’와 같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2) (3ㄴ~4ㄱ) 언해문 ‘뎌즈  됴 政事 셰니 다 미 모 이비 傳놋다(頃來樹嘉政 皆已傳衆口)’에서 ‘다미’가 붙여 써 있고, ‘다[盡]+이(주격 조사)’와 같이 해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진다. 하나는 용언이 명사형 어미를 가질 때, 확실성의 선어말 어미 ‘-오/우-’가 개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미’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맥에서는 ‘다미’를 목적어로 해석해야 하는데, ‘다미’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문 원문의 해당 한자가 ‘개이(皆已)’이므로, ‘다 이미’의 뜻을 가지는 ‘다 마’의 오기로 보면 이런 문제가 없어진다. 원문의 ‘개이(皆已)’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3) (8ㄴ) 언해문 ‘부들 이리 鸞이 구즈기 솃 고 글지 니 鳳이  도다(筆飛鸞聳立 章罷鳳騫騰)’에서 ‘이리’는 한문의 ‘필비(筆飛)’에 해당하는 번역인데, ‘이리’로서는 어말 어미를 가지지 않은 것이 된다. ‘-리’는 연결 어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쓰인 것인데, 중세어의 연결 어미로 ‘-리’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리’는 ‘-니’의 잘못으로 보았다.

(4) (9ㄱ) 언해문의 ‘方寸 맛 매도 위고기 ㅎ얌 직니  번 許諾호 엇뎨 驕慢이며 쟈이리오(寸腸堪繾綣 一諾豈驕矜)’에서 ‘ㅎ얌’은 ‘얌’의 ‘’에서 ‘ㆍ’가 탈락한 것이 분명하다.

(5) (9ㄴ) 언해문의 ‘雲霧 헤틴 야 처 歡樂던 나조 노  서늘 氣運이 더라(披霧初歡夕 高秋爽氣澄)’에서 ‘야 ’는 ‘야’의 단순한 오자인 것으로 판단된다.

(6) (12ㄴ) 할주문 ‘白鬢 甫ㅣ 自言其老□다’’에서 네모 부분이 비어 있다. 한자나 한글 어느 글자든 하나의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이에 대해서 본 역주에서는 ‘白鬢(백빈) 甫(보)ㅣ 自言其老(자언기로)다’와 같이 ‘’를 상정하였다. ‘흰 귀밑털은 두보가 스스로 그 늙음을 말하였다’와 같이 풀이하였다.

(7) (12ㄴ) 언해문 ‘百年 人生애 두 녁 셴 구미티로소니 □ 번 여희요매 다 번  반되로다(百年雙白鬢 一別五秋螢)’에서 ‘□ 번’의 탈자는 ‘’인 것으로 여겨진다. ‘ 번 여희요매’는 원문의 ‘일별(一別)’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 (12ㄴ) 본문의 ‘忍斷盃□物 秪看座右銘’의 □는 언해문의 ‘마 盃中엣 物을 그치고 오직 안잿 올녀긧 書銘을 보시놋다’를 참조하여 ‘中’자가 탈락한 것으로 보았다.

(9) (12ㄴ~13ㄱ) 할주문의 ‘時예 王이 因病不飮디라 崔瑗이 有座右銘니라(忍斷盃中物 秪看座右銘)’에서 ‘ 因病不飮디라’는 그 자체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여기서의 해석은 ‘병으로 인하여 마시지 못하여’와 같이 해석되어야 하는데, ‘디라’로서는 그러한 해석을 얻을 수 없다. ‘디라’에서 ‘’이 탈락한 것으로 보아, ‘디라’와 같이 해석하였다.

(10) (13ㄱ) 언해문 ‘거믄 盖 能히 좃디 몯리로소니 나 술 醉야  말와 조차 니로라(不能隨皂盖 自醉逐浮萍)’에서 ‘니로라’의 ‘-로라’는 ‘-노라’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니-’는 ‘[走]-+니[行]-’와 같이 형성된 합성어로, ‘니[行]-’의 모음이 ‘ㅣ’로 되어 있어 이를 지정 형용사 ‘이-’의 모음으로 잘못 인식하여 ‘-노라’를 ‘-로라’로 쓴 것으로 여겨진다.

(11) (16ㄴ) 언해문의 ‘요조 이자비 마 사 보니 조 잇고 命은 업서 百寮ㅅ 아래셔 니놋다(比看伯叔四十人 有才無命百寮底)’에서 ‘이자비’는 ‘아자비’의 오자인 것으로 판단된다. 한문 원문의 ‘백숙(伯叔)’에 해당하는 번역어이므로, ‘아자비’라야 한다.

(12) (17ㄴ) 언해문의 ‘狄公 政事 자바쇼미 末年에 잇더니 흐린 미 배  濟水 더러이디 몯니라(狄公執政在末年 濁河終不汚淸濟)’에서 ‘배’는 원문의 ‘終(종)’에 대한 번역이므로, ‘매’여야 하는데, ‘매’가 ‘배’처럼 되어 단순한 오자가 생겼다.

(13) (18ㄴ) 언해문의 ‘주린 버미 뫼로 려오며 龍 거슯수미  므레 나니 일 도라오라 누른 드트리 사 오 더러이고 누네 수이 가 드니라(虎之飢下巉嵓蛟之橫出淸泚 早歸來黃汚人衣眼易眯)’에서 ‘거슯수미’는 ‘거슬[逆, 橫]-+-(강세 접미사)-+-우(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이(주격 조사)’로 분석되는 것으로, ‘수’가 ‘주’로 되어야 한다. 예를 보면, ‘아 生計 기우로 야  背叛야 거슯주메 니르러 門 호며〈내훈 3:40ㄱ〜ㄴ〉(개인 생계를 기우로 생각하여 써 배반하여 거스름에 이르러 문을 나누며)’와 같은 예가 있다.

(14) (20ㄱ) 할주문의 ‘太夫人 舟之母也ㅣ리 言何日에 抵家야 宴會親戚고’에서 ‘舟之母也ㅣ리’의 ‘-리’는 ‘-라’의 오자이다. 점 하나가 찍히지 않았을 뿐이다. ‘-라’를 복원하여 할주문을 ‘태부인은 이주(李舟)의 어미이다.’로 번역하였다.

(15) (20ㄴ~21ㄱ) 언해문의 ‘그듸 나콰 머리터리 새로외야 몸 가져 뇨 能히 나조도 저허요 브노라’는 본문의 ‘羨君齒髮新 行己能夕愓’을 번역한 것인데, ‘齒(치)’를 번역한 ‘나콰’가 문제이다, ‘나콰’는 ‘齒(치)’를 ‘나이와’로 번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니’가 ‘나이[年齡]’를 뜻하는 일도 있으나, 우선은 ‘니와’로 번역해야 할 곳으로 생각된다.

(16) (21ㄱ) 언해문의 ‘늘근 그려기 보 주류믈 견듸여 슬피 우러 이운 麥을 기들우겨 得時 노피  져비 빗난 개 새롭도다(老鴈春忍飢 哀號待枯麥 時哉高飛燕 絢練新羽翮)’에서 ‘기들우겨’은 ‘기들우거’의 오자로, ‘-겨’을 ‘-거’로 바로잡는다.

(17) (21ㄴ) 한문 제목 ‘入秦行贈西山檢察使竇侍御(입진행증서산검찰사두시어)’의 ‘진(秦)’은 ‘주(奏)’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입주(入奏)’는 대궐에 들어가 아뢰는 것으로, ‘진나라에 들어감’을 뜻하는 ‘입진(入秦)’과는 다른 것이다.

(18) (22ㄱ) 언해문이 ‘蔗漿이 브븨셔 가니 金盌이 언 니 어즈러운 더위 시서 足히  님 모 便安케 리로디(蔗漿歸廚金盌凍 洗滌煩熱足以寧君軀)’와 같이 어말 어미가 ‘디’로 되어 있다. 이는 ‘-다’의 단순 오기이다.

(19) (26ㄱ) 할주문에 ‘晉郄詵이 對策야 爲第一니 猶桂林一枝故로 及第者󰡤謂之折桂ㅣ 本此니라’에서 전혀 무슨 글자인지 판독할 수 없는 한자는 ‘개(皆)’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해석은 ‘진의 극선(郄詵)이 〈현량, 즉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대책을 제시하여 천하 제일이 되게 하겠다고 하니, 지금도 〈현량이〉 계수나무 숲의 한 가지이기 때문에 〈나중에 곤산의 편옥(片玉)이 될 것이므로〉 급제자를 모두(판독불능자는 ‘개(皆)’인 것으로 생각됨) 꺾인 계수라 하는 것은 본래 이것인 것이다’와 같이 된다.

(20) (26ㄴ) 원문 ‘창화장추곡(唱和將鶵曲) 전옹호록피(田翁號鹿皮)’의 할주문에 ‘樂府에 有鳳將鶵曲니라 田翁 甫ㅣ 自謂라 鹿皮翁 見前註다(악부(樂府)에 새끼와 함께하는 봉황의 노래가 있다. 밭노인은 두보가 스스로 이르는 것이다. 녹피옹은 앞의 주를 보라)’와 같이 ‘앞의 주를 보라’로 되어 있으나, 8권의 앞부분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1권~7권에 있는 주석을 다 참조하라고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녹피옹(鹿皮翁)은 한나라 때 치천(淄川) 사람으로 녹피공(鹿皮公)이라고도 하는데, 기계를 잘 만들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지방 관청의 말단 관리로 있다가 잠산(岑山) 위에 있는 신천에 수레와 잔도(棧道)를 만들어 올라가서 샘 곁에다 집을 짓고 사슴갗옷을 입고서 지초(芝草)를 캐먹고 신천을 마시며 70여 년을 살았다고 한다.

(21) (27ㄴ) 언해문의 ‘長安ㅅ 비예 열흜 즌긔 우리 무리 셕 잡고 새뱃 소리 드러 公卿의 블근 門이 쇠 여디 아니얏거 우리 무리 마 니르러 가 엇게 서르 도다(長安秋雨十日泥 我曹鞴馬聽晨雞 公卿朱門未開鏁)’에서 ‘니르러 가’의 ‘가’에 굵은 사선이 그어져 ‘사’와 같이 되어 있다. 이 글자가 정확하게 ‘가’를 적은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가’로 읽는다.

(22) (28ㄱ) 언해문에서 ‘우리 兄 자 便安히 야 보야로 무루플 폣다가 보션 업스며 頭巾 엽시 새뱃 예 나셔 놋다(吾兄睡穩方舒膝 不襪不巾踏曉日)’에서 ‘엽시’는 ‘불건(不巾)’의 번역으로 ‘업시’의 오자임이 분명하다.

(23) (28ㄱ) 언해문의 ‘四時와 八節에 도로혀 禮예 걸위여   겨지블 절고 아  절다(四時八節還拘禮 女拜弟妻男拜弟)’의 ‘’은 ‘여배제처(女拜弟妻)’의 ‘여(女)’에 해당하는 말로 ‘’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24) (28ㄱ) 언해문의 ‘一幅巾과 갓 모매 거디 아니니 머리옛 곱괴 바랫  어느 일즉 시스리오(幅巾鞶帶不掛身 頭脂足垢何曾洗)’에서 ‘머리옛 곱괴’는 ‘두지(頭脂)’에 해당하는 말로 ‘곱괴’의 ‘괴’는 ‘과’의 잘못이다.

(25) (29ㄴ) 언해문에서 ‘미 紫荊 남글 부니 비치  콰 다야 져므도다 고지 니여 녯 가지 여희니 미 횟도로 부니 도라올 히 업도다(風吹紫荊樹 色與春庭暮 花落辭故枝 風回反無處)’에서 ‘고지 니여’는 원문의 ‘화락(花落)’에 해당하는 말로, ‘니여’는 ‘디여’가 잘못된 것이다.

(26) (32ㄱ) 언해문의 ‘기예 나귀 타 나 아뫼 짓 門의 길  몰로라(平明跨驢出 未知適誰門)’에서 ‘아뫼 짓 문의 길 ’에서 ‘길’은 ‘적(適)’에 해당하는 번역으로, ‘갈’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27) (32ㄱ~ㄴ) 언해문의 ‘孫子ㅣ 가난야 논 이리 업스니 지비 거츤 村落 도ㅣ(諸孫貧無事 宅舍如荒村)’에서 ‘ㅣ’는 ‘다’에서 세로 획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도다’에서 ‘다’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28) (33ㄱ~ㄴ) 언해문의 ‘노 됫 白帝城 東西에 南애 龍모시 잇고 北에 虎溪 잇도다(嵯峩白帝城東西 南有龍湫北虎溪)’에서 ‘노 됫’은 ‘노 묏’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29) (34ㄱ) 언해문의 ‘쇼 머길 한아비와 나모지 이  依賴 줄 업스니 靑雲엣 리 여 버히게 디 말라(牧叟樵童亦無賴 莫令斬斷靑雲梯)’에서 ‘나모지 이’는 ‘초동(樵童)’의 번역으로, ‘이’는 ‘아’의 잘못임을 쉽게 알 수 있다.

(30) (34ㄱ~ㄴ) 언해문의 ‘뎌  어러어 로 催促딘 이 호니 病에 시름 업슬 저기 업더라(憶昨狂催走 無時病去憂)’에서 ‘催促딘’의 ‘딘’은 ‘-던’이나 ‘-단’이 잘못 적힌 것일 수 있다. ‘딘’의 왼쪽에 남은 공간이 좁아서 ‘단’보다는 ‘던’일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절대적으로 ‘단’이 아닌 것으로 보기 어렵다. 두보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므로, 우선은 확실성의 선어말 어미 ‘-오/우/아-’를 가진 ‘-단’인 것으로 본다.

2) 언해 번역의 문제

(1) (13ㄱ) 언해문의 ‘거믄 盖 能히 좃디 몯리로소니 나 술 醉야  말와 조차 니로라〈노라〉(不能隨皂盖 自醉逐浮萍)’에서 한문 원문의 ‘浮萍(부평)’을 언해에서는 ‘말왐(마름)’으로 번역하였으나, ‘부평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개구리밥과의 여러해살이 수초(水草). 몸은 둥글거나 타원형의 광택이 있는 세 개의 엽상체(葉狀體)로 이루어져 있는데 겉은 풀색이고 안쪽은 자주색이다. 여름에 연녹색의 잔꽃이 피고 전체를 약으로 쓴다. 논이나 못에서 자라는데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한다.’라고 되어 있으나, ‘마름’은 ‘마름과의 한해살이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줄기는 물속에서 가늘고 길게 자라 물 위로 나오며 깃털 모양의 물속뿌리가 있다. 잎은 줄기 꼭대기에 뭉쳐나고 삼각형이며, 잎자루에 공기가 들어 있는 불룩한 부낭(浮囊)이 있어서 물 위에 뜬다. 여름에 흰 꽃이 피고 열매는 핵과(覈果)로 식용한다. 연못이나 늪에 나는데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Trapa japonica).’라고 되어 있다. 15권에서는 ‘평(萍), 기(芰), 능(菱)’ 등이 모두 ‘말왐(마름)’으로 번역되고 있다.

(2) (14ㄴ) 언해문의 ‘ 미 嫋嫋(요뇨)히 江漢 부니 오직 다 올 와 잇노니 어딋 사미 아니오(風嫋嫋吹江漢 只在他鄕何處人)’에서 원문의 ‘하처인(何處人)’을 ‘어딋 사미 아니오’와 같이 번역하였다. 원문에는 ‘아니오’의 ‘아니’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 의미 해석에 문제가 생긴다. ‘어딋 사미고’와 같이 번역되어야 할 곳으로 생각된다. ‘하처인(何處人)’을 ‘도대체 어디 사람인가?’와 같이 해석하여, 한중왕이 지위가 낮아져 봉주에 있는 상황을 한탄한 것이면서, 동시에 두보 자신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한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3) (17ㄴ) 언해문의 ‘狄公 政事 자바쇼미 末年에 잇더니 흐린 미 배〈매〉  濟水 더러이디 몯니라(狄公執政在末年 濁河終不汚淸濟)’의 ‘흐린 미’는 ‘탁하(濁河)’를 번역한 것인데, ‘탁하’는 제나라 땅에 있는 강이름이라 한다(한성무 외 (1997) 참조). 또한 ‘ 濟水’는 ‘청제(淸濟)’를 번역한 것이지만, 이 역시 제나라 땅의 강이름이라 한다(한성무 외 (1997) 참조). 그러므로 고유명사인 것을 언해문에서는 일반 문장 구성처럼 번역한 것이다.

(4) (19ㄱ) 언해문의 ‘渥洼앳 騏驥ㅅ 삿기 게 다니 이 龍 어리로다(渥洼騏驥兒 尤異是龍脊)’에서 ‘악와(渥洼)’는 깊은 물웅덩이를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강의 이름이다. ‘악와’가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유명사로 본 것이라는 심증은 가나, 언해 당사자가 이를 고유명사로 정확하게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언해 당사자는 ‘渥洼 믈일후미라’와 같은 주석을 함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악와’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안서현(安西縣)의 경내에 있다고 한다. 전설상으로는 신마(神馬)를 낳는 곳이라 한다(한성무 외 (1997) 참조).

(5) (19ㄱ) 언해문의 ‘李舟 일훔난 아비와 아왜니 고 노파 流輩예 爲頭도다(李舟名父子 淸峻流輩伯)’에서 ‘李舟 일훔난 아비와 아왜니’는 원문의 ‘이주명부자(李舟名父子)’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이주는 이름난 아비의 아들이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이 구절 ‘이주명부자(李舟名父子)’는 본래 ‘이주명부지자(李舟名父之子)’로 ‘지’(之)‘자가 있었어야 할 것이나, 글자수 제한으로 ’지(之)‘자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6) (21ㄴ~22ㄱ) 언해문에서 ‘骨鯁 호미 代예 그처 업스니 고미 낫  어르 萬壑애 가 내야 迎風寒露館ㅅ 玉壺애 노햇 도다(骨鯁絶代無 烱如一叚淸冰出萬壑 置在迎風寒露之玉壺)’에서 ‘가 내야’의 ‘가’가 원문의 무슨 한자를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가(一叚)’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가(叚)’는 ‘빌리다’를 뜻하는 것이니, 해당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다른 본에는 이 ‘가(叚)’자가 ‘단(段)’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 ‘단(段)’이라 하여도 ‘가서’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학(萬壑: 첩첩산중)에 가서 내어’와 같이 의역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7) (27ㄱ) 언해문의 ‘兄과 다야 行年   혜리로소니 어디닌 이 兄이오 어린 거슨 이 이로다(與兄行年校〈較〉一歲 賢者是兄愚者弟)’에서 앞부분은 ‘형과 더불어 먹은 나이〈차이〉를 1년을 셀 것인데’에서 ‘나이 차이’가 번역되지 않았다. 원문의 ‘교(校)’는 ‘교(較)’로 된 본도 있다. ‘교(校)’에도 ‘비교’의 의미가 있으므로, ‘교(較)’와 의미가 통한다. 그런데 이 한자가 언해에서는 번역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형의 나이와 나의 나이를 비교하여 그 차이가 1년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려면, 언해와 같이 하여서는 안 된다. 현대역에 ‘차이’를 더한 것은 이 때문이다.

(8) (27ㄱ~ㄴ) 언해문의 ‘長安ㅅ 비예 열흜 즌긔 우리 무리 셕 잡고 새뱃 소리 드러(長安秋雨十日泥 我曹鞴馬聽晨雞)’에서 ‘추우십일니(秋雨十日泥)’를 언해자는 ‘비예 열흜 즌긔’를 ‘가을비에 십일의 진흙에’와 같이 번역하였다. 이는 ‘가을비 십일의 진흙에’와 같이 번역되었어야 한다. ‘십일’이 ‘가을비’의 수식을 받지 않으면, ‘열흘의 진흙’이라는 이상한 의미가 된다.

3) 희귀어 또는 특이어 등

(1) (29ㄱ~ㄴ) 언해문에서 ‘그려기 울워러 보니 토  行列이 잇도다(仰看雲中鴈 禽鳥亦有行)’에서 ‘토’의 ‘ㅎ’은 원문의 ‘금조(禽鳥)’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사전에서 그 단어를 확인하기 어렵다. 주석에서는 ‘ㅎ’을 ‘날짐승’이라 주석하였다. 언해와 한문 원문을 비교한 결과이다. 중세어 문헌에 ‘ㅎ’이나 ‘’이 날짐승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다른 예도 잘 발견되지 않는다. ‘’이 ‘’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한 것이 주목된다. ‘’이 집짐승이 되기 이전의 조류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2) (30ㄴ~31ㄱ) 언해문의 ‘偶然히 英秀 요 어려이 얻디 아니리니 모로매 이  헤이즐 毛質이 잇니라(偶然擢秀非難取 會是排風有毛質)’에서 ‘헤이즐’은 ‘헤[破, 排]-+잊虧(휴: 이지러지다, 줄다)]-+으(조음소)-+-ㄹ(미래 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된다. ‘헤잊-’의 용례는 이것이 유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헤티-’와 ‘잊-’의 예를 나누어 보이기로 한다. ¶거믄고와 글월왜  燭ㅅ브레 헤텻니 긴 바 비르서 참 직도다(거문고와 책이 밝은 촛불에 헤쳐 있나니 긴 밤을 비로소 마침 직하도다.)〈두시(초) 11:43ㄴ〉. 法身 化體 物와 나왜 이즌  업건마 오직 衆生 識心이 제 더러며 제 조필(부처님이 설한 정법인 법신과 변화된 몸인 화체는 객관 세계(세간 및 중생)와 내가 이즈러진 데가 없건마는 오직 중생의 식심이 스스로 더럽히며 스스로 좁히는 것이기 때문에)〈월석 15:79ㄱ〉.

(3) (31ㄴ) 언해문의 ‘미 나그내 오 불어  돋니 남기 여희  이어니 고지 아아도다(風吹客衣日杲杲 樹攪離思花冥冥)’에서 ‘아아도다’는 굳이 현대어로 번역하면 ‘어둑어둑하도다’가 된다. 그러나 ‘아아하다’는 ‘어둑어둑하다’보다는 밝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현대어로는 해당하는 말이 없다. ¶江漢로 나갈 말 업스니 시 그티 날로 아아도다(강한으로 나갈 사유가 없으니 시름 끝이 날로 어둑어둑하도다.)〈두시(초) 3:36ㄱ〉.

(4) (32ㄱ) 언해문의 ‘기예 나귀 타 나 아뫼 짓 門의 길  몰로라(平明跨驢出 未知適誰門)’에서 ‘아뫼’는 ‘아무의’로 해석되는 말이다. 중세어에서 ‘아뫼’형이 나타나는 것은 ‘아뫼나, 아뫼라, 아뫼어나, 아뫼오’와 같은 형식이다. 이들은 ‘아모’에 ‘이나, 이라, 이어나(이거나), 이오(이고)’가 결합한 형식들이다. ‘아뫼’가 관형어로 해석되는 예를 찾기 어려우나, 여기서의 ‘아뫼’는 관형 기능을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아뫼’를 ‘아모+(관형격 조사)’와 같이 ‘’를 관형격 조사로 분석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해제 참고문헌〉

국어국문학 편찬위원회 편(1994),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김일근(1964), “두시언해와 황산곡시집언해에 대한 이견,” 『국어국문학』 27, 137-143.

김일근(1966), “두시언해와 황산곡시집언해에 대한 재론,” 『국어국문학』 3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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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8(하) 보충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분류두공부시언해』 권8에 대한 전반적인 해제는 이미 권8(상)에서 상세히 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보충 해제’라는 이름으로, 권8(하) 부분의 본문과 협주 및 언해에 대하여 필요한 사항을 지적하기로 한다.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8(상)에서는 ‘5. 『두시언해』 권8(상)의 오자, 탈자, 희귀어 등’이란 제목 아래 ‘1) 언해, 할주 및 원문의 탈자, 오자 등’과 ‘2) 언해 번역의 문제’의 두 하위 부류를 두었으나, 여기서는 이를 조금 바꿔, 하위 부류를 셋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두시언해』 권8(하)의 오자, 탈자 등

(1) (39ㄱ) 원문의 ‘의답아동문(意答兒童問)’이 ‘드로 아희 무로 對答노니’와 같이 번역되었다. ‘무로’의 ‘’은 ‘’의 ‘ㅁ’의 오른쪽 획이 떨어졌거나 먹이 묻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로’은 ‘무로’이 되어야 한다.

(2) (40ㄴ) 원문의 ‘차시동일취(此時同一醉)’가 ‘이  변 醉호  호리니’와 같이 번역되었다. ‘ 번’이 ‘ 변’으로 되었다. ‘ 변’은 원문의 ‘일(一)’에 대한 번역이기 때문에 ‘ 번’이라야 한다.

(3) (43ㄱ) 원문의 ‘대주도의몽(對酒都疑夢)’이 ‘수를 相對야셔 다 민기 疑心고’와 같이 번역되었다. ‘민기’는 ‘민가’의 잘못이다. ‘민기’는 ‘민가’와 같이 되어야 ‘의심(疑心)-’의 보어 조건을 충족시킨다.

(4) (44ㄱ) 원문이 ‘비명환접혈(飛鳴還接趐)’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이 구절의 끝 한자가 ‘혈(趐)’로 되어 있으나, 이는 ‘날개 시(翅)’자로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번역도 ‘라 우루메 도로 개 相接고’와 같이 ‘개’로 되어 있고, 한성무(韓成武) 외 (1997:1083)에도 이 글자는 ‘시(翅)’로 되어 있다. 언해 담당자는 ‘혈(趐)’자를 ‘시(翅)’자인 것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5) (47ㄱ) 원문의 ‘전년학어시(前年學語時)’가 ‘前年희 말 홀 제’와 같이 번역되었다. ‘전년(前年)희’의 ‘희’는 ‘전년(前年)’이 ‘ㅎ’ 종성 체언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년(前年)’은 한자어이기 때문에 ‘ㅎ’ 종성 체언일 수 없다. ‘ㅎ’ 종성 체언은 고유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전년(前年)희’의 ‘희’는 ‘의’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만약 ‘전년(前年)’이 ‘ㅎ’ 종성 체언이었다고 한다면 ‘전년(前年)’ 뒤에 ‘희’가 쓰인 다른 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헌 자료에는 ‘전년(前年)’ 뒤에 ‘ㅎ’이 쓰인 다른 예를 찾을 수 없다.

(6) (48ㄱ~ㄴ) 원문 ‘이모추장전(二毛趨帳殿)’의 ‘이모(二毛)’가 ‘누 터리로’와 같이 번역되었다. ‘누 터리’는 ‘두 터리’의 오각임이 분명하다.

(7) (53ㄱ) 원문의 ‘물백휘수점(物白諱受玷)’이 ‘物이 하야야 허믈 受호 □避고’와 같이 번역되었다. □ 속의 한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해당 한자가 다 보이지 않으나, 원문에 ‘휘(諱)’가 있기 때문에, ‘휘피(諱避)’를 재구할 수 있다. 문제의 한자 오른쪽 아랫 부분의 획에 ‘수건 건(巾)’과 같은 획이 보이기 때문에, ‘휘(諱)’가 아닌 다른 한자가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번역문 한자의 ‘휘(諱)’에서, 입 구(口) 아래에 두 이(二)자가 오고 그 중간을 아래로 타고 내려 오는 획이 있는데, 두 이(二)자의 아래 획을 ‘수건 건’자와 흡사하게 쓰는 것이 〈두시언해〉 한자의 한 특색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는 확실히 ‘휘(諱)’로 볼 수 있다. ‘휘피(諱避)’는 ‘꺼려 피하다’의 뜻이 된다.

(8) (53ㄱ) 원문의 ‘념자숙자진(念子熟自珍)’이 ‘ 念 너□ 네 몸 珍寶외이 호 니기 라’와 같이 번역되었다. ‘너’ 뒤에 오는 글자가 보이지 않으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극히 희미한 가로 부분 획이 있으므로, ‘는’으로 읽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9) (54ㄱ) 제목 ‘송중표질왕례평사사남해(送重表姪王砅評事使南海)’의 할주 ‘砅 與厲로 同니라’로, ‘례(砅)’를 ‘려(厲)’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려(厲)’는 음도 ‘례(砅)’와 차이가 나고, 그 의미도 ‘갈다, 화(禍), 괴롭다’와 같은 것이어서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뜻을 이름에 가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려(厲)’는 ‘례(濿)’의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

(10) (54ㄴ) 원문의 ‘이조미현시(爾祖未顯時)’에 대하여 ‘爾祖 指王珪니 未顯時에 娵(추)杜氏다’와 같이 할주를 달고 있다. ‘네 할아버지는 왕규(王珪)를 가리키니, 세상에 이름이 나기 전에 두 씨(杜氏) 처녀한테 장가들었다’는 뜻이다. 할주에 쓰인 ‘娵(추)’는 ‘별이름, 미녀, 물고기’를 뜻하는 한자로, ‘장가들다’는 뜻을 가지지 못한다. ‘娵(추)’는 ‘娶(취)’의 잘못인 것이 분명한데, 언해 담당자는 이 둘 한자를 동일한 것으로 본 듯하다.

(11) (56ㄱ) 원문의 ‘륙궁사유순(六宮師柔順)’을 ‘여슷 宮이 부드더우며 順호 스사니’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부드더우며’는 ‘부드러우며’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중세어 문헌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형식은 ‘부드러며’나 ‘부드러우며’와 같은 두 가지 형식이다.

(12) (60ㄴ) 원문의 ‘소과빙문신(所過憑問訊)’이 ‘디나갈 제 묻저주믈 依憑야’와 같이 번역되었다. 번역문의 ‘묻저주물’은 ‘묻고 신문하고(따지고)’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저주믈’은 ‘져주물’의 철자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가로획이 아랫것만 보이는 것일 수 있다. ‘글월 보고 셰히 묻져주고  노하 보내니(글월 보고 자세히 묻고 따지고야 갓(겨우) 놓아 보내니)〈번노 상:50ㄴ~52ㄱ〉’와 같은 예가 참고된다.

(13) (61ㄱ) 원문의 ‘전어도원객(傳語桃源客) 인금출처동(人今出處同)’이 ‘桃源ㅅ 나그내더브러 말 傳라 사미 이제 出處ㅣ 호□’와 같이 나타나고 있다. ‘호-’가 어말 어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에 적합한 어미는 ‘-라’이다. ‘호-’가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결 어미 ‘-다’가 ‘-라’가 된다.

(14) (61ㄱ) 두시 제목의 ‘왕랑주연봉(王閬州筵奉)□□일구석별지작(一舅惜別之作)’에서 중간의 두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두보 연보』에 실린 두시 목록이나 한성무(韓成武) 외 (1997)의 『두보시 전역(杜甫詩全譯)』과 같은 책을 참고하여, □□에 필요한 한자는 ‘수십(酬十)’임을 확인할 수 있다.

(15) (61ㄴ) 원문의 ‘부주출군곽(浮舟出郡郭)’이 ‘ 워 옰 城郭애 니와’와 같이 번역되었다. ‘니와’는 ‘나와’가 되어야 한다. 원문의 ‘출(出)’에 대한 번역이다.

(16) (63ㄱ) 원문의 ‘주익배풍영(舟鷁排風影)’이 ‘옛 鷁鳥(익조) 매 버럿 그르메오’와 같이 번역되었다. ‘’는 ‘주(舟)’에 해당하는 번역인데, ‘’에서 세로 획이 빠졌다.

(17) (64ㄱ) 원문의 ‘온자위랑구(蘊藉爲郞久) 괴오병철존(魁梧秉哲尊)’이 ‘蘊藉(온자)야 郞官 외언 디 오라고 魁梧(괴오)야 明哲호 자바 尊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할주에서는 ‘괴(魁)는 큰 모양이고, 오(梧)는 그 음이 오(悟)이니, 가히 놀라 깨닫는 것이다’와 같이 풀이하고 있으나, ‘오(梧)’의 음이 ‘오(悟)’와 같다고 하여 그것을 ‘깨닫다’로 해석하는 것은 ‘괴오(魁梧)’의 뜻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괴오(魁梧)’의 ‘괴(魁)’는 큰 것을 나타내고, ‘오(梧)’는 오동나무를 뜻하므로, 또한 큰 것이다. 따라서 ‘괴오(魁梧)’는 체격이 장대하고 훌륭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깨닫는 것’의 의미는 그 다음에 오는 ‘철(哲)’과 관련된다. ‘철’이 ‘명철하다, 슬기롭다’를 뜻하므로, ‘깨닫는 것’과 관련된다.

(18) (64ㄴ~65ㄱ) 원문의 ‘치군시이만(致君時已晩) 회고의공존(懷古意空存)’이 ‘남그믈 이ㄹ 닐위으져 아도 時節이 다 느즈니 녯 이 논 곳 쇽졀업시 잇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남그믈’은 ‘군(君)’에 대한 번역이므로, ‘님그믈’이라 보아야 하고, ‘이ㄹ’는 ‘이고대’가 기형으로 새겨진 것이고, ‘닐위으져’는 ‘닐위오져’의 오각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아도’는 ‘야도’의 오각이고, ‘다’는 ‘마’의 오각이다. 오각이 가장 많은 구절이라 할 것이다.

(19) (67ㄱ) 원문의 ‘모혼신고별(暮婚晨告別)’이 ‘나조 婚娵(혼추)고 새배 여희유믈 니니 ’와 같이 번역되었다. ‘추(娵)’는 ‘별이름, 물고기, 미녀’를 뜻한다. ‘장가들다’를 뜻하는 ‘취(娶)’와는 전혀 다른 글자이고, 문맥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언해 담당자들은 이 ‘추(娵)’자를 ‘취(娶)’와 같은 글자로 생각하고, 그렇게 쓰고 있는 듯하다. ‘나조 婚娵(혼추)고’는 ‘나조 婚娶(혼취)고’로 되어야 한다.

(20) (69ㄴ~70ㄱ) 원문의 ‘량가성관관(兩家誠欵欵) 중도허창창(中道許蒼蒼)’이 ‘두 지븨셔 情誠이 欵欵(관관;간절하고 간절하다) 더니 中間ㅅ 길헤 相許호미 아라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창창(蒼蒼)’이 ‘아스라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창창(蒼蒼)’은 ‘푸르고 푸르다’의 뜻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늘이 희망을 뜻한다기보다는 그 거리가 먼 것을 뜻한다. 언해자가 이를 ‘아라도다’와 같이 번역한 것도 그러한 뜻을 함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스라하다’는 ‘보기에 아슬아슬할 만큼 높거나 까마득하게 멀다’와 같은 뜻이므로, 희망적인 뜻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관계가 맺어지기 어려움을 함축한다.

2. 언해 번역의 특징적 현상과 문제점

(1) (35ㄴ~36ㄱ) 원문의 ‘봉거신감전(烽擧新酣戰)’이 ‘烽火ㅣ 드니 새라 흐드리 사호노소니’와 같이 번역되었다. 여기서 ‘봉화(烽火)ㅣ 드니’는 현대어로 ‘봉화가 드니’와 같은 구성이다. ‘드니’의 ‘들-’은 타동사인데, 그 목적어가 주격 조사와 같은 ‘ㅣ’를 가진 것이 된다. 여기서는 ‘봉화(烽火)ㅣ’를 ‘이’ 주제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 주제는 선행 대상 ‘봉화’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의미론적인 효과를 가진다. ‘이’를 보조사로 분석한 것은 이 같은 분석을 반영한 것이다.

(2) (36ㄱ) 원문의 ‘불지림로일(不知臨老日)’의 번역 ‘아디 몯리로다 늘구믈 臨야 잇 나래’에서 ‘늘구믈 臨야’에서 ‘늘구믈’의 ‘을’은 ‘을’ 주제를 나타내는 형태로 분석된다. ‘을’ 주제는 선행 성분을 문제로 부각시키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본다.

(3) (36ㄱ) 원문의 ‘여나귀무계(汝懦歸無計)’를 언해에서는 ‘네 게을어 도라올 혜유미 업고’와 같이 번역하였다. 원문의 ‘나(懦)’는 ‘나약하다, 무기력하다’를 뜻하는데, 언해에서는 이를 ‘게을다’로 번역하고 있다. 언해자가 혹시 ‘나(懦)’를 ‘나(懶)’로 잘못 인식한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 ‘내’가 아닌 ‘너’에 대하여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네가 게을러’가 아니라 ‘네가 몸이 약하여’라고 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4) (36ㄴ) 원문 ‘로종금야백(露從今夜白)’을 ‘이스른 오 바 조차 니’와 같이 번역하였다. ‘오늜 바 조차’는 ‘종금야(從今夜)’에 대한 직역으로 여겨진다. 이 경우, ‘오늘 밤을 조차’의 의미가 분명치 않은 것이 문제이다. ‘오늘 밤따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5) (39ㄱ) 원문의 ‘래경전벌신(來經戰伐新)’이 ‘올 저긔 사호미 새로외요 디나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전벌신(戰伐新)’을 ‘전쟁의 새로움’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전벌신(戰伐新)’은 대력(大曆) 2년(767) 1월 곽자의(郭子儀)에게 비밀리에 주지광(周智光)을 죽이도록 한 일과, 대장 혼함(渾瑊) 및 이회광(李懷光)에게 명령을 내려 위수(渭水)의 병사들을 진압한 일을 가리킨다.〈백도백과 참조〉 따라서 ‘전벌신(戰伐新)’은 고유명사로 취급하는 것이 온당하다. ‘올 적에 전벌신(戰伐新)을 겪도다’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6) (39ㄴ~40ㄱ) 원문의 ‘수절시성성(愁絶始星星)’을 언해에서는 ‘이 열  이 議論리로소니 시르메 머리 비르서 셰다’와 같이 번역하였다. 협주에서는 ‘성성은 머리가 흰 것이다(星星은 髮白也ㅣ라)’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성(星)’의 의미에 ‘희뜩희뜩하다’와 같은 것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별이 반짝이는 것과 관련되는 의미이지,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원문이 ‘성성(惺惺)’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성성(惺惺)’은 ‘맑다, 영리하다’와 같은 뜻으로, 이를 ‘소생하다’와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머리가 세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은 동생을 오랜만에 만나서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하는 문맥인데, 거기서 비로소 머리가 센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시름이 아주 깊었다가 비로소 거기서 벗어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문이 ‘수절(愁絶)’로 되어 있으니, 시름이 그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7) (40ㄴ)의 ‘응재중선루(應在仲宣樓)’가 ‘이 仲宣의 樓에 이시리로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중선(仲宣)의 누(樓)’는 아마도 ‘중선루(仲宣樓)’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한(漢)나라 말기의 문학가 왕찬(王粲)은 자(字)가 중선(仲宣)이었는데, 형주(荊州)로 피난을 와서 살면서, 악양루(岳陽樓)에 자주 올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고 한다. 그 누각을 중선루(仲宣樓)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8) (48ㄱ~ㄴ) 원문의 ‘일명시란여(一命侍鸞輿)’가 ‘번 命호로 鸞輿(란여) 侍衛(시위)호라’와 같이 번역되었다. 원문의 ‘일명(一命)’이 ‘ 번 명(命)홈(한 번 명함)’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명(一命)’을 그냥 썼어야 한다. ‘일명(一命)’은 관직의 계급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명(一命)은 관비(官卑)를 말한다’는 할주도 있으나, ‘한 번 명함’으로는 이 할주조차 만족시키지 못한다. 중국의 주(周)나라 때에는 관계(官階)를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까지 나누었는데, ‘일명’이 가장 낮은 계급이었다(한성무 외 (1997) 참조). 후대에는 낮고 미미한 관직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관비(官卑)’란 주석은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9) (51ㄴ) 원문의 ‘산만부운합(山晩浮雲合) 귀시공로미(歸時恐路迷)’가 ‘묏 나조  구루미 모다시니 도라갈  길흘 迷失가 전노라’와 같이 번역되고 있다. ‘ 迷失가 전노라’에서 ‘-가’는 ‘가’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15~16세기 자료에서 ‘젛-’과 함께 쓰인 내포문 서술어의 어미는 대부분 ‘-ㄹ가’를 가진다. ‘-ㄴ가’가 쓰인 예가 단 하나 있기는 하나, 형용사에 연결된 것이다. 동사에 ‘-ㄴ가’가 나타나는 예는 ‘迷失가’가 유일한 예이다. 여기서는 이를 ‘-ㄹ가’의 잘못으로 본다. 어미 ‘-ㄹ가’는 ‘-ㄹ(동명사 어미)+가(보조사)’가 재구조화된 것이다.

(10) (52ㄱ) 원문의 ‘경착안시론(耕鑿安時論) 의관여세동(衣冠與世同)’이 ‘耕田(경전) 鑿井(착정)이라 호 時節을 便安케  議論이오 衣冠 世옛 사과 다 가지로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앞 구절 ‘경착안시론(耕鑿安時論)’의 번역이 문제이다. 언해자는 ‘경착(耕鑿)’을 행동의 표현이 아니라, 말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 ‘경착안시론(耕鑿安時論)’에서 ‘경착(耕鑿)’을 주어로, ‘안시론(安時論)’을 서술어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밭을 갈고(耕) 우물을 파는 것(鑿)은 그의 삶의 방식을 말한다. ‘안시론(安時論)’도 그의 행동의 하나로 해석해야 한다. 밭을 갈아 밥을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편안한 시절을 이야기하고‘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야 뒷부분과도 성격이 같아진다.

(11) (59ㄱ) 원문의 ‘수유거마객(雖有車馬客)’이 ‘비록 술위와   소니 오리 이시나’와 같이 번역되었다. ‘비록 술위와   소니’도 주격 조사 ‘이’를 가진 구성이고, ‘오리’도 ‘올 이(올 사람)’와 같이 분석되는 것으로, ‘말 탄 손이’와 ‘올 이’가 모두가 주어로 분석되어 이른바 이중 주어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역주자는 여기서 ‘말 탄 손이’는 ‘이’ 주제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구성은 주제를 가진 구성으로, 진정한 이중 주어문이 아니다.

(12) (65ㄴ) 원문의 ‘절대유가인(絶代有佳人)’이 ‘一代예 그츤 됴 사미 잇니’와 같이 번역되었다. 이 번역에서는 ‘一代예 그츤 됴 사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일대(一代)에 그친’은 ‘여러 대에 걸치지 못하고 일대에 그친 좋은 사람이 있나니’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는 ‘절대유가인(絶代有佳人)’에 대한 번역으로, ‘절대’는 ’대를 끊는‘ 의미가 아니라, ‘견주거나 맞설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견주거나 맞설 만한 사람이 없는 좋은 사람이 있나니’와 같이 번역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13) (66ㄱ~ㄴ) 원문의 ‘재산천수청(在山泉水淸)’이 ‘뫼해 이서 므리 더니’와 같이 번역되었다. ‘이서는’은 ‘이셔는’이 되어야 한다. ‘재(在, 有)’의 의미로는 ‘이시[有]-+-어(연결 어미)+는(보조사)’와 같은 구조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14) (66ㄴ) 원문의 ‘천한취수박(天寒翠袖薄) 일모의수죽(日暮倚脩竹)’이 ‘하히 칩고 프른 매 열우니  져믈어 긴 대 지여 샛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번역 부분의 서술어 ‘샛도다’에서 ‘샛-’에 해당하는 원문의 한자를 찾을 수 없다. ‘지여 샛도다’는 한자 ‘의(倚, 의지하다)’의 번역이므로, ‘지여 샛다’는 ‘지여 셋다’로 ‘지고 서 있다’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3. 희귀어 또는 특이어

(1) (35ㄱ) 원문 ‘란후수귀득(亂後誰歸得)’에 대한 번역이 ‘亂 後에 뉘 도라오 뇨’와 같이 되어 있다. 여기서 ‘난(亂)’은 ‘난(亂)+-(동사 파생 접미사)-+-ㄴ(관형사형 어미)’과 같이 분석된다. 이는 ‘난(亂)다’와 같은 임시어의 성립을 의미한다. 그 의미는 ‘난(亂)이 일어나다’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 (35ㄱ) 두시 원문 ‘여서유재벽(汝書猶在壁) 여첩이사방(汝妾已辭房)’을 언해 담당자는 ‘네 글워리 오히려 매 고잿니 네 妾이 셔 房 말오 가도다’와 같이 번역하였다. 언해의 ‘매’는 ‘애’로 ‘’은 지금은 없어진 ‘벽’이란 고유어를 보인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房 말오’의 ‘말-’이 ‘사양(辭讓)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현대어로는 ‘마다하-’와 같은 말에 해당한다.

(3) (35ㄴ) 두시 원문의 ‘수두방아상(垂頭傍我床)’이 ‘내 平床 바라 니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언해문의 ‘바라’는 ‘방(傍)’의 번역으로, 〈금성국어대사전〉에서는 ‘바라’를 부사로 ‘의지하여. 곁따라’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바라’가 이 예에서는 ‘평상(平床)을’과 같이 대격을 지배하는 것이 특이하고, 때로는 ‘ 관산(關山)애 바라’와 같이 처격(부사격) 조사 ‘애’를 지배하기도 한다. 혹시 ‘바라’가 그 활용이 극히 제한된 ‘*바라다’란 동사가 아닐까 의심해 본다.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엇뎨  시내 우희셔 나날 샬깃 門 바라셔 놀 니리오’〈杜詩(초) 6:44ㄴ〉와 같이 ‘바라셔’와 같은 형태도 나타난다.

(4) (35ㄴ~36ㄱ) 원문의 ‘봉거신감전(烽擧新酣戰)’이 ‘烽火ㅣ 드니 새라 흐드리 사호노소니’와 같이 번역되었다. 여기서 ‘새라’는 ‘새로’의 뜻으로 해석된다. 흔히 ‘새라’는 ‘새로’와 그 뜻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 나타나는 ‘새라’가 거의 유일한 예라는 것이다. 중세어 문헌에서 ‘새라’의 다른 쓰임을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 ‘흐드리’는 ‘흐드러지게’를 뜻하는 말인데. ‘*흐들-’이 가상적 어근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이것이 유일한 예이고, 다른 문헌에서 같은 예를 확인하기 어렵다.

(5) (37ㄱ) 원문의 ‘송여만행제(送汝萬行啼)’를 언해에서는 ‘너를 보내노라 므를 여러 가로로 흐르게 우노라’와 같이 번역하였다. 여기서 ‘가로로’는 ‘갈래로’와 같이 풀이된다(이조어사전 참조). 그러나 고어 자료에서 ‘가로’가 ‘갈래’의 의미로 쓰인 다른 예를 찾기 어렵다. 같은 원문에 대한 『중간본 두시언해』의 번역에 나타날 뿐이다.

(6) (37ㄴ~38ㄱ) 원문의 ‘제고금해반(‘諸姑今海畔)’이 ‘여러 아미 이제 바  갯고’와 같이 번역되었다. 여기서 ‘바(바다의)’은 ‘바[海]’에 관형격 조사 ‘ㅅ’이 연결될 때 ‘바’의 받침 ‘ㄹ’이 탈락하고 ‘ㅅ’이 받침으로 적힌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역사적으로 ‘바’에서 이미 ‘ㄹ’ 탈락하여, ‘바’가 된 뒤에 관형격 조사 ‘ㅅ’이 연결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느 해석이 정확한 것인지 알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나, 『두시언해』 중간본에도 ‘바’형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므로, 여기서는 ‘바’에서 ‘ㄹ’이 떨어진 뒤에 ‘ㅅ’이 붙은 것으로 본다.

(7) (53ㄱ) 원문의 ‘란봉유쇄핵(鸞鳳有鎩翮)’이 ‘鸞鳳(란봉)이 개 야듀미 잇고’와 같이 번역되었다. 언해의 ‘야듀미’는 ‘ *[傷, 鎩(쇄)]-+-y(조음소)-+-아(연결 어미)#디[化]-+-우(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이(주격 조사)’와 같이 분석된다. 여기서 ‘*[傷, 鎩(쇄)].’는 ‘상하다, 잘리다, 부서지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 가상적 어근이다. 현대어에 쓰이는 ‘(옷이) 해지다’와 같은 말의 어원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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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삶과 시대 배경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성(詩聖)이란 시에 있어서 성인(聖人)이란 뜻으로 그의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았으나, 두보가 태어난 것은 호남성 공현(鞏縣)이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預,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楊)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 때에 시를 지었다고 하고, 9세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14~5세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20대에 접어들어 진(晉, 산서성(山西省)), 오(吳, 강소성(江蘇省)) 월(越, 절강성(浙江省))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24세 때에 경조(京兆, 장안현 서북쪽에 있었다고 함)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유랑 길에 나서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두보는, 32세(744)로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던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34세(746)에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곳에서 1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두보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750)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39세 때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삼대예부〉를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실로 불우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39세(751) 때,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에 크게 패하였는데,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하였다. 42세(754) 때에는 장마가 계속되고 기근이 심하여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43세(755)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직을 얻었다. 그 낮은 관직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奉先縣)으로 가는 도중,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은 상태였다.

43세(755) 때,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제의 자리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갔다. 두보는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자신은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거리에는 반란군이 활개를 쳤다. 두보는 장안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45세(757, 지덕(至德) 2) 때,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죽음을 당하였다. 두보는 그 해 4월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했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上皇,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 생활을 하게 되었다. 46세(건원(乾元) 1, 758) 때,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6월에는 화주 사공(華州司功)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화주는 섬서성 화주현이고, 사공은 6참군의 하나로 주부(州府)의 좌리(佐吏) 벼슬이었다. 그러다가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하게 되자,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두보는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 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의 옛 친구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인데다, 세교(世交)도 있는 터였는데, 두보가 아무런 실권도 없으면서 엄무를 업신여기는 투로 취중에 비위를 건드렸다가 그를 격노케 하여 그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성도 근교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50세(보응(寶應) 1, 762) 때,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51세(광덕(廣德) 1, 763)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했다. 그런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다음 해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마음도 맞지 않았고, 관료 생활도 불편하였다. 폐병, 중풍병도 있어 53세(영태(永泰) 1, 765) 때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약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사천 지방에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이듬해(대력(大曆) 1, 766) 늦은 봄에 병이 조금 낫자 다시 강을 따라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내려갔다. 55세가 되는 해의 늦은 봄부터 56세 봄까지 약 2년 동안 기주에서 지내며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55세(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57세(769) 1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지붕을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두보는 58세(대력 5, 770)가 되는 해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牛炙, 쇠고기 구이)과 백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시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어 그것을 부인하는 설도 생기게 되었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 (두보의 생애에 대해서는 차석찬의 역사 창고 홈페이지,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위키백과 및 차상원(1981)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혹 참고한 것을 일일이 밝히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2.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킨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두보를 그의 이름이나 자(字) ‘자미(子美)’ 혹은 호(號) ‘소릉(少陵)’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두공부’라 부르는 것이 두보를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를 몇 가지 예를 보이면,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가 그러한 예이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3권에도 〈기제두이금강야정(寄題杜二錦江野亭))〉이라는 엄무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들 시를 그 제재에 따라 54류로 나누어 언해하였다. 편수는 다음과 같이 약 63편이 된다.

(1) ≪두시언해(杜詩諺解)≫의 편명

기행(紀行), 기행 하(紀行下), 술회 상(述懷上), 술회 하(述懷下), 질병(疾病), 회고(懷古), 시사 상(時事上), 시사 하(時事下), 장수(將帥), 군려(軍旅), 궁전(宮殿), 거실 상(居室上), 거실 하(居室下), 인리(隣里), 황족(皇族), 세주(世胄), 종족(宗族), 외족(外族), 혼인(婚姻), 선도(仙道), 은일(隱逸), 석노(釋老, 寺觀附), 사관(寺觀), 사시(四時, 춘하추동), 절서(節序), 주야(晝夜), 몽(夢),(월(月)), 우설운뢰부(雨雪雲雷附), 운뢰(雲雷), 산악(山嶽), 강하(江河), 도읍(都邑), 누각(樓閣), 조망(眺望), 정수(亭樹), 원림(園林), 과실(果實), 지소(池沼), 주즙(舟楫), 교량(橋梁), 연음(燕飮), 문장(文章), 음악(音樂), 기용(器用), 식물(食物), 조(鳥), 수(獸), 충(蟲), 화(花), 죽(竹), 목(木), 투증(投贈), 기간 상(寄簡上), 기간 중(寄簡中), 기간 하(寄簡下), 회구(+懷舊), 수기(酬寄), 송별 상(送別上), 송별 하(送別下), 경하(慶賀), 상도(傷悼), 잡부(雜賦).

이들 중 ‘기행’, ‘기행 하’를 내용이 같은 것으로 보아 하나로 묶고, ‘상중하’나 ‘상하’로 되어 있는 것을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아 다시 하나로 합치고, ‘석노 사관부(釋老寺觀附)’ 뒤에 오는 ‘사관(寺觀)’ 혹은 ‘우설 운뢰부(雨雪雲雷附)’ 뒤에 오는 ‘운뢰(雲雷)’를 따로 독립시키지 않고, 또 편명이 빠진 것 같이 보이는 ‘월(月)’을 독립된 편명으로 넣고, 권10의 춘하추동을 모두 ‘사시(四時)’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 하나로 치면, 전체가 54류가 된다. 이 숫자는 ≪중간 두시언해≫ 영인본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다. 흔히 두시의 내용은 52부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에 보인 바와는 차이가 난다. 초간본 전질이 발견되면 혹 그 정확한 편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것이나, 우선은 위에 보인 바와 같은 편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언해된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보의 원시와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2. ≪두시언해≫ 편찬의 목적

≪두시언해≫를 편찬한 목적은 중간본에 게재된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그 첫째 이유는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인다.

(2) ≪두시언해≫ 편찬의 첫째 목적

가. 시(詩)는 ‘국풍<세주>(國風, ≪시경≫의 한 체로 ≪시경≫을 가리킴)’과 ‘이소<세주>(離騷,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의 제목으로 ≪초사(楚辭)≫를 가리킴)’에서 내려와 성하여 이백과 두보를 일컫는다(시선과 시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본래의 기운이 흐리고 아득한(渾茫한) 상태이다. 단어와 문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삽(難澁, 이를 ‘간삽(艱澁)’이라 하였다)하여, 주석을 많이 해 놓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나.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 전한 신 유윤겸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핵심 정리[須溪]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였다.

다. 이에 널리 주석을 수집하고, 불필요한 것을 베어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지리, 인물, 글자의 뜻이 어려운 것은 간략하고 간소하게 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고 읽는 데 편하게 하였으며, 또 우리 글로 그 뜻을 번역하였다.

라. 임금이 뜻하신 바의 이른바 난삽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글을 이루고 정서하여 임금께 올렸더니,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시었다.

(2가)는 두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2나)는 성종이 ≪두시언해≫ 편찬을 명하게 된 동기를 말한 부분이다. 동기는 (2가)와 거의 같다. (2다)는 편찬의 과정과 결과를 말한 것이고, (2라)는 난삽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원고를 임금께 보인 것을 말한 것이다.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은 세교(世敎)에 있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권장하는 데, 즉 세상을 교화하는 데 시의 큰 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시언해≫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3)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

가. 공효의 측면을 생각하면, 시도(詩道)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있다.

나. 큰 것은, 위로는 종묘(郊廟)의 노래를 지어 성덕을 찬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민속의 노래로 당대의 정치가를 찬미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感發懲創]으로 족하다.

다. 사람의 선과 악, 이것이 공자가 시 삼백 편을 산정(刪定)하여 사악함이 없는 교훈이 있게 한 까닭이다.

라. 시는 중국의 육조(六朝)에 이르러 극히 부미(浮靡, 헛되고 중심이 없음)하여 시 삼백 편의 메시지가 땅에 떨어졌다. 자미(子美), 즉 두보는 성당 시대에 태어나 막힌 것을 척결하고, 퇴풍(頹風), 침울(沈鬱), 돈좌(頓挫, 넘어지고 꺾이는 것)를 떨치고 일어나, 고운 것, 화려하고 왜곡된 것만을 찾는 풍습을 적극 물리쳤다. 난리가 일어나 쥐새끼처럼 도망다니는 때에, 두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고 지성(至誠)과 충성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썼다.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백세를 용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까닭은 사람을 감발징창(感發懲創)하게 하는 것은 실로 시 삼백 편과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고, 또 세상의 일을 말하고 실제를 진술하는 것은 시사(詩史)라고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후세의 사람들이 풍월을 읊는다고 비웃을 수 있겠느냐? 성정(性情, 정서)을 새기고 깎는 일은 가히 본받을 만하고 의논할 만하다.

(3가)는 시의 궁극적인 효용이 세상을 교화하는 세교(世敎)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가 인간을 일부러 퇴폐하게 하고 세상을 더럽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기술이다. 얼른 보면 이는 당연한 기술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는 아마도 조위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3나)는 종묘의 노래이든 백성의 노래이든 감발징창(感發懲創)의 공효를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3다)는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사악하지 않게 하기 위함임을 말한 것이다. (3라)는 두시가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사람을 감발징창케 하는 힘을 가져, 시 자체를 시사(詩史)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의 시 삼백 편과 표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성종이 이 시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나 공자가 시 삼백 편에 뜻을 두고 있는 것, 그 아름다운 은혜와 배움을 부르는 것이 시도(詩道)를 만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고, 공자에 있어서의 시 삼백 편의 산정(刪定)과 주자집주(朱子集註)에서의 큰 밝힘이 이제는 시인데, 그것은 바로 당시 성상(聖上)인 성종에 기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두시언해≫의 편찬의 목적은 단어와 문장의 난삽함을 덜기 위한 목적이 하나이며, 세상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이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위의 서에서 잘 언급되지 않은 것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2.3. ≪두시언해≫ 간행 연대의 문제

이미 나와 있는 ≪두시언해≫에 대한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한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몇 가지 사전이나 해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4) 초간본 간행 연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가. 이병주(1958:123) : 두시언해의 간행은 성화 17년 신축(성종 12년, 1481년) 12월 상한성종의 봉명으로 찬하여 강희안 서체의 ‘을해자’로 상재된 최초의 역시서다.

나.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

다. 안병희(1971) ≪분류두공부시언해≫ 해제 : 간행 연대는 중간본에 실린 조위의 서문 등에 의하여 성종 12년(성화 17)임이 확실하다.

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 이호권(n.d.), 한글디지탈박물관 ≪두시언해≫ 전문가 해제 : 1481년(성종 12)에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1420~?) 등이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언해하여 을해자로 간행한 책이다.

위의 (4가-마)에 보인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한결같이 그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고 있다. 이 연대는 조위의 서문에 나타난 시기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이 연도는 분명히 조위가 서문을 작성한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동안은 서문을 작성한 시기와 간행 연대를 같이 보았다. 조위의 서문에서 관련 사항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필요한 사항을 부가하여, (2가, 나)를 다시 (5가, 나)와 같이 가져오고, 서문을 쓴 날짜 관련 사항을 (5다)에 보이기로 한다.

(5) 조위의 두시 서의 편찬 시기 관련 사항

가. 성화 신축 가을[成化辛丑秋]에 성상께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유윤겸(柳允謙) 등에게 명하시었다.

나. 성종 임금께서 홍문각 전한(典翰) 유윤겸(柳允謙) 등에게 명하였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잡하여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핵심 정리[須溪]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다. 성화 17년 12월 상한(上澣). 승훈랑(承訓郞),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制敎) 겸 경연 검토관(檢討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문원 교검(校檢) 신(臣) 조위(曺偉) 근서(謹書).

(5가)에 의하면, 성종이 유윤겸 등에게 이른바 ≪두시언해≫ 편찬의 명을 내린 것이 “성화 신축 가을[成化辛丑秋]”이다. ‘성화(成化)’는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그 신축년(辛丑年)은 1481년에 해당한다. 이 해를 성화(成化) 연호로 말하면 성화(成化) 17년이다. 그런데 (5다)와 같이 조위(曺偉)가 서문을 쓴 것도 ‘성화(成化) 17년’이다. 조위의 서문이 책의 간행과 때를 맞추어 쓴 것이라면, 책의 편찬을 명한 것과 책이 간행된 것이, 많아야 네 달이 조금 넘는다. 음력으로 가을에 해당되는 기간을 8, 9, 10월이라 하고, 그 8월에 성종의 명이 있었다고 했을 때의 계산이 그러하다. 성종의 명이 9월이나 10월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석 달이 될 가능성도 있고, 성종의 명이 10월 말에 있었다면, 조위의 서문이 12월 상한에 된 것이므로, 그 기간은 두 달이 되든가 채 그 기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전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 기간 동안에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을 갖추어 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만약 두시의 시구 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을 때, 그 하나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문으로 주석이 되어 있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번역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섯 달에 25권을 만들려면 한 달에 5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6일에 완성해야 한다. 단지 번역만이 아니라 번역과 조판과 교정과 인쇄와 제본을 합하여 모두 6일만에 끝내야 한다. 세 달이 걸렸다면, 한 달에 적어도 8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4일만에 완성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6) 편찬과 간행 사이의 불가사의한 시간

조위(曺偉)의 서문이 간행시에 쓰여진 것이라면, 전 25권이나 되는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걸린 시간은 많아야 다섯 달, 적으면 두서너 달밖에 되지 않는다.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으로 언해하여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간행한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래에는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과 관련되는 몇 가지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7)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대한 견해(밑줄 필자)

가.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 가.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

나.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

다. 안병희(1979)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해져 왔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1481년(성종 12년)에 완성하여 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라. 안병희(1997:18) : 두시언해도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이므로 원고에 잘못이 나타나고, 책이 인출된 뒤에 교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된다. 이 교정도 언해가 1481년에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 안병희(1997:20) : 두시언해는 언해에 착수한 바로 1481년(성종12)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되어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 김일근(1964:142) :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조위의 서문 일자에 의하여 성종 12년 12월일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1권이 선성(先成)된 시기이며, 그 완성 간행은 적어도 근 2년후 성종 14년 7월(실록) 황산곡시언해(黃山谷詩諺解)의 하명 직전까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7가)에 의하면 ≪두시언해≫ 편찬은 세종 25년(1443) 4월에 시작된 것이다. 조위의 서문이 1481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그 기간은 39년이 된다. ≪두시언해≫ 25권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세종 25년(1443) 4월에 두시언해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해는 두시 주석서를 모으도록 한 해이다. ≪세종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8) 세종 25년(1443) 4월 21일 기사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으므로 구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시 주석서를 모으는 것이 언해 작업의 기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은 두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주석을 모아 하나로 만드는 것도 두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7가)와 같이 그로부터 언해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7나)에서는 성종 12년을 괄호에 1491년으로 적고 있어 편찬 기간에 대하여 특별한 의심을 가지지 않은 듯하다. 이것이 바로잡힌 것은 (7다)에 와서이다. 1491년이 1481년이 되었다. (7라, 마)에서는 이것이 다시 확인된다. (7라)에서는 두시언해가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고 있고, (7마)에서는 두시언해가 언해를 시작한 바로 그 해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6)에 제시한 것과 같이 25권이나 되는 거질의 책을 단 서너 달에 완성한다는 것은 컴퓨터 조판과 고도의 인쇄술이 발달한 21세기인 지금도 어려운 일이라고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조판, 교정, 인쇄, 제본에 드는 시간만도 서너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5나)에 보는 바와 같이, 주석만 하더라도 그것을 통일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은 ≪찬주분류두시≫의 것을 좇는다고 하여도, 번역이 남아 있다. 산문이 아닌, 시의 번역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책의 간행이 번역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활자를 만들어야 하고, 조판을 해야 하고, 교정을 보아야 하고, 인쇄를 해야 하고, 제본을 해야 한다. 종이가 부족하면 그것을 조달해야 한다. 단기간에 책의 간행이 끝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생각이다.

(7바)에서는 특이하게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 시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보고 있다. 김흔의 ‘번역두시서’에 의하면 성종 12년은 ≪두시언해≫ 제1권이 먼저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성종 12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종 14년 7월에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黃山谷詩)’를 언해하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그 이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의강(2006:76-77)에서는 유윤겸의 품계와 전보를 중시하고 있다. 유윤겸은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 홍문관 전한으로 있었다. 그 후 약 1년 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하다가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품계가 승진되고 부제학에 임명된다. 성종 14년(1483) 2월 11일에는 통정대부 공조(工曹) 참의(參議)로 전보된다. 이를 이의강(2006:77)에서는 ≪두시언해≫의 일이 끝났기 때문에 홍문관보다는 업무가 수월한 공조에 전보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문과의 사람의 공조에 전보된다는 것을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이라는 해석은 온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휴식을 취하게 하려면 그냥 쉬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윤겸을 공조에 전보한 것은 공조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활자를 만들고, 조판을 하고, 인쇄를 하는 작업이 이때에야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성종 16년에도 유윤겸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지칭하고 있다. 성종 19년(1488)에는 호조 참의가 되기도 한다. 이는 1484년 유윤겸은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를 내놓고 공조 참의로 간 것이 아니라, 홍문관 부제학의 직을 가지고 공조 참의로 발령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겸직을 한 것을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성종 13년(1482)년의 실록 기사에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 등이 흉년의 때를 맞아 출판 사업의 정지를 청하는 기록과 임금이 그것을 윤허하는 기록이 나온다. 중단을 요청하는 사업에 ≪두시≫에 관한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9) 성종 13년(1482) 7월 6일 세번째 기사

해마다 흉년이 드는 것이 근고(近古)에 없는 바로서, 바야흐로 흉년을 구제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사전(四傳)과 ≪춘추(春秋)≫, ≪강목신증(綱目新增)≫, ≪문한류선(文翰類選)≫, ≪두시(杜詩)≫, ≪이백시(李白詩)≫, ≪용학구결(庸學口訣)≫과 같은 것을 모두 국(局)을 설치하여 공억(供億)이 따르게 되니, 만약 하루의 비용을 논하면 〈이것이〉 작으나, 날짜를 합하여 계산하면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약간의 자본이 됩니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9)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려우므로, 출판 사업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유윤겸 등이 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에 ≪두시(杜詩)≫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성종 12년에 ≪두시언해≫가 완성되었다면, 성종 13년에 따로 국(局)을 두어 예산을 써 가며 또 ≪두시≫에 관한 일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두시언해≫는 성종 13년(1482)에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혹 이때의 일은 ≪두시언해≫가 아닌 한문본을 말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으나 그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셋째, (7라, 마)에 의하면, ≪두시언해≫를 서너달 동안에 전 25권을 한꺼번에 간행하려면, 모든 주석 전문가, 번역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야 하고, 또 나라의 모든 행정력과 출판 관련 물자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를 출판하는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9)에는 해마다 흉년이 계속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성종 12년에도 흉년이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시기에 ≪두시언해≫ 출판에 모든 행정력과 출판 물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9)는 하던 일도 중지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시에 대해서는 세종 15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예조 좌참판 권도(權蹈)가 상언하는 내용이다.

(10) 세종 15년(1433) 계축 두번째 기사

우리 태종 대왕께서 전에 두시(杜詩)를 읽어 보시려고 하시므로, 신의 선친 권근(權近)이 ‘그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되오니, 청컨대 ≪주역(周易)≫을 강습하옵소서.’ 하여, 태종께서 그대로 좇으셨으니, 두시도 오히려 불가하다 하옵거늘, 그 이단의 황당한 글을 경연의 석상에서 강론하심이 옳겠습니까?

두시와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주역(周易)≫을 강습하도록 청하여 태종이 그대로 좇았다는 것이다. 성종 15년(1484)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이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11) 성종 15년(1484) 갑진(甲辰) 첫번째 기사

예전 태종(太宗)께서 ≪두시(杜詩)≫를 진강하고자 하시니, ≪두시≫는 시사(詩史)로서 모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지만, 신의 조부(祖父) 권근(權近)이 오히려 진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 ≪문한유선≫이겠습니까?

이를 보면, ≪두시언해≫ 전권을 서너 달만에 완간하기 위하여 나라의 모든 연구 인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넷째, 김흔(金訢)의 문집인 ≪안락당집(顔樂堂集)≫ 권2에 실려 있는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는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12)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

몇 달 간 문서를 견주고 교감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凡閱幾月 第一卷先成]. 이를 정서하여 전하께 나아가 성상의 재가를 품의하니 성상께서 보시고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上賜覽曰可 令卒事). 이어 신에게 서문을 쓸 것을 명하시었다.

조위의 ‘두시서’와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흔의 서문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있고(이병주 1965, 1966), ≪두시언해≫가 두 개의 서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김일근(1964, 1966)의 입장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김흔의 ‘번역두시서’의 내용이 더 자세하다. 조위의 ‘두시서’에는 서문을 쓴 날짜가 명기되어 있어 김흔의 서문과 구별된다.

김흔의 서에서 자세한 것의 하나가 ‘제1권이 먼저 이루어져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병주(1966)에서는, 김일근(1964)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권1’이 아니라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으로 해석하였다.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안병희(1997)에서 보면 그것은 ≪두시언해≫ 전 25권 1질(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석이고 번역이고 판식이고 인쇄고 제본이고 간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재가를 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일근(1964)의 해석과 같이 여기서는 제1권의 원고가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2)의 밑줄 친 부분도 이해가 된다.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고 하는 것은 제1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편찬에 걸린 시간도 적합하게 되고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제1권의 원고를 만드는 데만 서너 달이 걸렸다는 것이므로 그 기간도 무리가 없게 된다.

다섯째,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서문 작성이 곧 그 책의 간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서문을 맨 나중에 쓰고 서문을 쓴 뒤에는 곧 출판이 되기 때문에 서문 연도와 출판 연도가 같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간기(刊記)가 있으면 그에 적시된 날짜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고, 내사기가 있는 것은 내사 연도를 흔히 그 책의 간행 연대로 본다. 서문이 쓰여진 연대와 내사 연도가 다를 경우, 당연히 내사 연도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다. 25권이나 되는 전질이 여러 해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서문이 제1권에만 있다면, 서문이 쓰여진 시기는 당연히 간행 시기보다 몇 년이나 앞서게 된다. ≪두시언해≫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책의 간행이 끝난 뒤에 그 한 질을 임금에 진상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와 같은 언급은 실제로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여섯째, 김일근(1964)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잡고 있다. 이것은 성종이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를 명한 시기를 참고하여 그 전에는 ≪두시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일근(1966)에서는 “물론 성종 14년 7월이란 절대 숫자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될 수 있는 것의 하나는 반치음 ‘ㅿ’의 소실과 관련된다. 이기문(1972a, 1972b)에 의하면, 반치음 소실을 가장 먼저 보이는 문헌이 ≪두시언해≫인 것으로 나타난다. 또 이기문(1972b: 37)에는 ≪두시언해≫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이 반치음이 소실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이다. 그 뒤에 언급되는 것이 ≪번역박통사≫의 예이다. ≪두시언해≫ 초간본에는 ‘’도 ‘’으로 나타나는 예가 있다. 검색프로그램 유니콩크(UniConc)로 중세어 자료를 검색해 보면, ‘이’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1481년의 ≪두시언해≫이다. 그 다음이 ≪구급간이방≫(1489년)이고 그 다음이 ≪삼강행실도≫(동경대본)이고, 그 다음이 ‘순천김씨언간’이고, 그 다음이 ≪속삼강행실도≫(1514년)이고, 그 다음이 ≪번역노걸대≫(1517년)이다. ‘’의 경우도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두시언해≫(1481년)이다. 그 다음이 ≪삼강행실도≫(동경대본)이고, 그 다음이 ‘순천김씨언간’이고, 그 다음이 ≪야운자경≫(1577년)이고, 그 다음이 ≪경민편언해≫(중간:1579년)이고, 그 다음이 ‘이응태묘출토언간’(1586)이다.

≪두시언해≫를 제외하면, 의서(醫書)나 구어적 특성을 많이 가지거나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에 ‘이’나 ‘’형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비교하면, ≪두시언해≫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두시언해≫는 구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책도 아니고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나 ‘’형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 이유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가 늦은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간본에 ‘, ’과 함께 ‘이, ’이 나타나는 것은 책의 편찬이 꽤 오래 지속되었으며, 도중에 반치음이 소실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구급간이방≫(1489년)과 연대를 맞추면 ≪두시언해≫ 초간본이 완간되는 것은 아마도 1489년경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을 1481년부터 따지면 8년 뒤가 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3) ≪두시언해≫ 간행 연도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4.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은 이미 위에서 간행 연대를 논의하는 자리에 이미 등장하였다. 편찬 관여자의 이름이 등장한 예를 (4)와 (7)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14) ≪두시언해≫ 편찬자에 대한 언급(밑줄 필자)

가.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4가)

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다)

다.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7가)

라.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7나)

마. 최현배(1940/1976:122) : ≪증보문헌비고≫(권245, 장15)에 기대면, 성종이 여러 선비를 명하여 두시를 주석할 새 유윤겸이 백의(白衣)로서 뽑혔다 하며, 그 주석된 것을 언해하여서 두시언해를 역은 이는 성종조의 조위요, 의침도 언해에 협력하였다.

바. 안병희(1997) :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한 홍문관의 문신들이다. 이때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의침은 훨씬 전에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종 때의 두시 주해에는 승려와 백의(白衣)가 참여하였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으나, 언해에 대하여는 그러한 기록이 썩 후대에 나타날 뿐이다.

(14가)에서는 조위(曺偉), 의침(義砧)이 언급되고, (14나)에서는 유윤겸(柳允謙), 의침이 언급되고, (14다)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의 명기 없이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이 언급되고, (14라)에서는 유윤겸, 의침이 언급되고, (14마)에서는 조위, 의침이 언급되나, (14바)에서는 의침이 제외되고 있다.

이 문제에 깃들인 가장 큰 혼동의 하나는 두시에 대한 주석과 두시에 대한 언해를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14다)가 전형적인 예이다. 두시에 대한 언해가 40년 동안 행해진 국가적인 대업이라고 한 것은 주석과 언해를 다 합해서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조위의 서문에 등장하는 두시언해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유윤겸이다. 그러나 (14마)에 의하면, 유윤겸은 주석과 관련되는 인물이다. 조위의 서문에서도 주석과 관련되는 문맥에 유윤겸이 등장한다.

실록 세조 1년(1455) 8월 26일 다섯 번째 기사에는 유윤겸과 함께 유휴복(柳休復)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하고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15) 세조 1년(1455) 8월 26일 유윤겸과 유휴복의 상소

유기(柳沂)의 손자인 유휴복(柳休復), 유윤겸(柳允謙)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할아버지 유기가 죄를 입을 때에, 아버지 유방선(柳方善)·유방경(柳方敬) 등이 이에 연좌되어 모두 신몰(身沒)하여 관노로 되었는데, 을미년에 사유(赦宥)를 받았으나, 언관(言官)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환속(還屬)되었다가, 정미년에 외방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고, 무신년에는 경외(京外)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또 할아버지 유기는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죄에는 간여하지 않았는데, 단지 어떤 사람이 민무구 등은 가련한 사람이라고 한 말을 유기와 더불어 같이 들었다고 말하여 이로써 죄를 입었고, 신의 아버지도 역시 오래지 않아서 사유하심을 입어 평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일은 신 등(等)이 출생하기 전에 입었던 것이니, 빌건대 홍은(鴻恩)을 내리시어 특별히 부시(赴試)를 허가하여 주소서.

유휴복, 유윤겸이 이로써 부시를 허락받아 유휴복은 1460년에, 유윤겸은 14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유윤겸이 두시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성종 11년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6) 성종 11년(1480) 10월 26일(임신), 시독관(侍讀官) 이창신(李昌臣)의 주청

“두시(杜詩)는 시가(詩家)의 근본인데, 전 사성(司成) 유윤겸이 그 아비 유방선(柳方善)에게 전수(傳受)하여 자못 정통하고 능숙하니, 청컨대 연소(年少)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수업(受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유윤겸이 이때 자신에게 수업을 받은 문신들과 함께 언해에 착수한 것으로 본 것이 안병희(1997:7)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누가 언해를 진행하였는지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윤겸이 두시에 능숙하고 정통하였다고 하니 그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유휴복도 두시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가져 세종 때 백의로, 승 만우(卍雨)와 함께 두시의 주해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휴복은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에게 두시를 가르쳐 문리를 크게 깨치게 하였다고도 한다(안병희 1997 참조). 그러나 유휴복은 성종 때의 두시 언해와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휴복은, 당시 62세인 유윤겸의 종형으로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도 안병희(1997)이다.

조위(曺偉)는 성종이 유윤겸에게 두시언해를 명하였을 때(1481), 28세로 정6품의 직위에 있었다. 조위는 성종 6년(1475) 예문관 검열로 있었으나, 금주령을 어겨 처벌을 받기도 한다. 같은 해 10월 사헌부에서는 조위를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부처(付處, 조선시대의 형벌. 유형의 하나. 서울과 고향의 중간 지점에서 거처하게 하는 것)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특별히 원에 의하여 가족이 살고 있는 금산군(金山郡)에서 부처하게 하였다. 성종 7년(1476)에는 진도에 부처된 박증(朴增)과 함께 금산에 부처되었던 조위가 방면된다.

성종은 12년 10월 18일 권건, 김흔, 조위 등에게 ‘이단(異端)을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道)가 유행(流行)할 수 없으며 이단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어 바치게 한다. 성종 138권, 13년(1482) 2월 22일(신유) 기사에는 조위가 시독관(侍讀官)으로 ‘매’를 기르는 일에 관하여 진언하는 기사가 나온다. 성종 22년(1491) 5월 28일에는 조위가 동부승지 임금에게 다른 관직에 임명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본직(本職)에 겸무(兼務)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청을 올린다. 성종 23년(1492) 10월 1일에는 조위가 좌승지로 전답의 부세 외에 요역(徭役)이 심히 번거로우니 이것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원망을 가질 듯하다는 진언도 한다. 조위는 성종 12년 이후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이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17)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 기사

≪분류두시(分類杜詩)≫를 내리며 이르기를, “서문은 바로 죄인 조위(曺偉)가 지은 것이니 삭제하고, 또 죄인 성현(成俔) 같은 사람이 지은 서문이나 발문도 아울러 삭제하라.”

여기서 ≪분류두시(分類杜詩)≫는 ≪두시언해≫를 가리킨다. 연산군 때 조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7)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에 ≪두시언해≫에서 조위 서문이 삭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17)의 기사는 처음 ≪두시언해≫에 실린 서문이 조위의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17)의 일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7)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포된 모든 ≪두시언해≫를 수거하여 그 서문을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 개인에게 배포된 책을 다 수거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더구나 연산군의 재위는 10년으로 끝나므로, (17)의 왕명은 적어도 완전히는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혹시 김흔(金訢)의 서문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간본에서 조위의 서를 제거한 뒤에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하여 김흔의 서문이 쓰여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김흔의 서문에 그것을 쓴 날짜가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위는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것일까? 서문을 쓴 것이 편찬에 참여하였다는 정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는가? 유윤겸에 대한 기록과 같이 조위도 두시에 정통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안병희(1997)에 의하면, 두시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문신들이다. 조위는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은 벼슬을 하였다. 그것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이다. 홍문관의 문신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성종 11년(1480)에는 홍문관 관원들을 궁궐 앞에 소집하여 전(箋) 1제와 시(詩) 2제를 시험하였는데, 교리 김흔(金訢)이 지은 전(箋) 1편과 시 1편이 수석을 하고, 조위(曺偉)가 지은 시 1편이 수석을 하여 조위에서 비단 1필을 하사하고, 조위에게 활 1장(張)을 하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로 보아 1480년 당시에는 김흔이나 조위가 분명히 홍문관 관원이었다.

(18) ≪두시언해≫의 편찬에 관여한 인물

가.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다. 조위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많이 하였으나,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성종 11년 (1480) 당시 김흔(金訢)과 조위(曺偉)가 홍문관의 관원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두시 언해 참여자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의 문신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2.5. ≪두시언해≫의 저본(底本)

위의(8)에 보인 바와 같이 세종 25년(1443)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찬주분류두시≫ 권10, 제1장 앞면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는 송나라 서거인(徐居仁)이 편한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分類杜工部詩集)≫에 의거하여 편차와 분류식을 따르고, 원나라 고숭란(高崇蘭)이 편한 ≪집천가주비점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批點分類杜工部詩集)≫에 따라서 유진옹(劉辰翁)의 비점을 인쇄해 넣은 것이라 한다. 오른쪽에 보인 사진은 1524년 선조 때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찬주분류두시≫의 제1장 앞면을 보인 것이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찬주분류두시≫가 25권인 것과 ≪두시언해≫가 25권인 것이 일치한다(김정은(n.d.), “≪찬주분류두시≫ 해제” 참조). 다만 책수는 ≪찬주분류두시≫가 21책인 데 대하여 두시언해는 17책(혹은 19책)이어서 차이를 가진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사진에 보인 ≪찬주분류두시≫ 권10에 제시된 시의 첫 행만 보아도 7자가 한 행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서는 14자가 한 행이 되고 있다. ≪찬주분류두시≫는 왜 행의 길이를 같은 시에서도 차이를 두었는가? 이는 주석의 양을 고려한 조치로 여겨진다. 행이 길어지면 주석의 양이 많아질 수 있다. 따라서 주석이 많아져 주석만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의 길이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언해에서는 주석을 극히 절제하였기 때문에, 주석의 양을 고려하여 행의 길이를 조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역주하는 저본은 을해자로 된 활자본으로,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세로 21.7cm, 가로 14.2cm.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두시언해≫ 권10, 1장 앞면

오른쪽에 보인 사진은 197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초간본을 복원(復元) 영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다르다. ≪찬주분류두시≫의 주석과 ≪두시언해≫의 주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그러나 ≪두시언해≫에는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번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었다. 언해본에서는 언해문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내용은 주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6. ≪두시언해≫ 중간본과 언어적 특징

중간본은, 장유(張維)의 서문에 의하면 인조 10년(1632)에 ≪두시언해≫ 초간본을 보기 힘들어 지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대구부사 김상복(金相宓)의 도움을 받아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오숙은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한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개간(改刊)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간본은 초간본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있고, 이와는 달리 오각(誤刻)에 의한 잘못도 있다고 한다. 중간본은 전권이 전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초간본은 1, 2, 4권이 전하지 않고, 5권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중간본과 비교하면, 초간본에는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특징이고,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음(牙音) 표기에 ‘ㆁ(아음, 꼭지 달린 이응)’이 사용된 것도 초간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어느 경우에나 모두 반치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초간본이라도 ‘’[間]는 ‘이’로 쓰인 것이 나타난다. ‘’도 ‘’으로 쓰인 예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간본의 편찬이 늦어져 나중의 변화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간본에도 ‘상구(上句)’과 같은 표기가 나타나고 ‘구룸’ 같은 표기도 나타난다. 이는 초간본에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깃[羽]’에 대하여 ‘짓’과 같은 표기가 초간본에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짓’이란 어형이 잘 나타나지 않고 ‘깃’이 더 일반적이라 할 것인데, ≪두시언해≫에 ‘깃’과 ‘짓’이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예. 안자셔 鴛鴦 다딜어 닐에 호니 기시 기우니 翡翠ㅣ 도다 모로매 白鷺 놀래디 마라 벋야 靑溪예 잘디로다(앉아서 원앙을 다구쳐 일어나게 하니 깃이 기우니 청호반새와 물총새가가 나직하도다. 모름지기 백로를 놀라게 하지 마라. 벗하여 푸른 시내에 잘 것이로다.)〈두시(초) 15:26ㄴ〉. ‘’과 ‘’, ‘’와 ‘이’의 예와 같이 초간본의 발간이 늦어져 후대의 변화가 부분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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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편찬되었는데, 조선조에도 세종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편찬되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는 가령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를 말한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보의 원문과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 ≪두시언해≫ 간행 연대

이미 나와 있는 ≪두시언해≫에 대한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한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3. ≪두시언해≫의 편찬자

≪두시언해≫의 편찬에 종래에는 유윤겸(柳允謙), 조위(曺偉), 의침(義砧), 유휴복(柳休復)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위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많이 하였으나,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성종 11년(1480) 당시 김흔과 조위가 홍문관의 관원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두시 언해 참여자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의 문신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4. ≪두시언해≫의 저본

세종은 25년(1443)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찬주분류두시≫ 권11, 1장 앞면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왼쪽에 보인 사진은 1485년에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병자자본(丙子字本)의 제1장 앞면을 보인 것이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이 외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5. ≪두시언해≫ 권11의 판식

≪두시언해≫ 권11, 제1장 앞면

이제 역주하는 저본은 을해자로 된 활자본으로,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세로 21.45cm, 가로 15.5cm.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본면 왼쪽에 보인 사진은 1978년 1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초간본을 복원(復元)하여 영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다르다. ≪찬주분류두시≫의 주석과 ≪두시언해≫의 주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는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번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어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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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14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일생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아왔으나, 두보는 호남성 공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預,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揚)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일곱 살 때에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하고, 아홉 살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다. 14, 5세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하게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20대에 접어들어 진(晉, 산서성), 오(吳, 강소성), 월(越, 절강성)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에는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24세 때에 경조(京兆, 서안 즉 장안과 그 부근)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이백은 천보(天寶) 3년(744, 두보 32세)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었다. 이 유랑의 길에서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천보 5년(746, 두보 34세),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장안에서 그는 거의 10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천보 10년(751, 두보 39세)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 〈삼대예부〉를 지어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불우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천보 10년,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契丹)에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는 병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했다. 개원 연간에는 농사도 풍년이 들었으나 천보 연간에 들어오면서 기근이 잇달았다. 천보 13년(754, 두보 42세)에는 장마가 계속되어 기근이 심해지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두보는 처자를 한때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천보 14년(755, 두보 43세)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라는 아주 낮은 관직을 얻었다. 이 소직(小職)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아,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으나, 소직이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두보는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은 상태였다.

천보 14년(755, 두보 43세)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모든 영화를 버리고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위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가 버렸다. 두보는 난을 피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두보는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長安)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서 활개치고 다녔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시로 옮기면서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지덕(至德) 2년(757, 두보 45세)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살해되었다. 두보는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의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를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하였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자, 두보는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다. 건원(乾元) 1년(758, 두보 46세) 5월까지 두보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나라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이에 두보도 죄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건원 1년,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두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자, 두보는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건원 2년(759, 두보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겼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인 옛 친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였으나, 세교(世交)도 있는 터여서, 성도의 교외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해 주었다. 두보는 거기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보응(寶應) 1년(762, 두보 50세)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광덕(廣德) 1년(763, 두보 51세)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광덕 2년(764, 두보 52세)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맞지 않았다. 폐병 및 중풍 등의 병도 있어 영태(永泰) 1년(765, 두보 53세)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영태 1년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두보는 유일한 후원자를 잃고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揚子江)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대략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사천 지방에서는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하여졌다. 이듬해 대력(大曆) 1년(766, 두보 54세) 늦은 봄 두보는 병이 얼마간 나아지자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서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갔다. 대력 1년 늦은 봄부터 대력 3년 봄까지 약 2년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기주에 온 이래로 2년 동안 두보는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대력 2년(767, 두보 55세)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력 4년(769, 두보 57세) 1월 두보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위를 가린 배를 집 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난을 피해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대력 5년(770, 두보 58세) 가을과 겨울 사이 두보는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牛炙, 소고기 구이)과 백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

2. 『두시언해』의 해제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른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그 약칭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의 성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생략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편찬되었는데, 조선조 때에도 세종 때 『찬주분류두시』가 편찬되었다. 『두시언해』는 이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는 가령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를 말한다. 14권에도 이옹(李邕)의 〈등력하고성원외손(登歷下古城 員外孫) 신정(新亭)호니 정(亭)이 대작호(對鵲湖)니라 시(時)예 이지방(李之芳)이 자상서랑(自尙書郞)로 출제주(出齊州)야 제차정(製此亭)니라〉와 같은 긴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라 부르는 것은 한문으로 된 두시 원문과 두시를 우리말로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어느 곳에도 ‘언해(諺解)’라는 이름이 쓰인 것이 없다.

2.2.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

이미 나와 있는 『두시언해』에 대한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우리의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주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2.3. 『두시언해』의 편찬자

『두시언해』의 편찬에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위(曺偉)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많이 하였으나,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성종 11년(1480) 당시 김흔과 조위가 홍문관의 관원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두시 언해 참여자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의 문신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2.4. 『두시언해』의 저본

세종은 25년(1443) 4월 21일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이 외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2.5. 『두시언해』 권14의 판식

이제 역주하는 저본은 을해자로 된 활자본으로,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가로 14.6cm, 세로 21.5cm,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여기에 보인 사진은 1978년 1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초간본을 복원(復元)하여 영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므로,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다르다. 『찬주분류두시』의 주석과 『두시언해』의 주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는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번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언해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두시언해』 14권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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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15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시언해』의 간행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의 성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였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편찬되었는데, 조선조에서는 세종 때 『찬주분류두시』가 편찬되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시의 원문과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

이미 나와 있는 『두시언해』에 대한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한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주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3. 『두시언해』의 편찬자

『두시언해』의 편찬에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두시언해』 권15의 판식

이제 역주하는 저본은 을해자로 된 활자본으로,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세로 21.6cm, 가로 15.16cm,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다음 면 왼쪽에 보인 사진은 1978년 1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초간본을 복원(復元)하여 영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이와 달리 『두시언해』에는 그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도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다르다. 『찬주분류두시』의 주석과 『두시언해』의 주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는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번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어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5 1ㄱ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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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 권16에 관하여

송준호(전 연세대학교 교수)

이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6에는 문장(文章), 서화(書畵), 음악(音樂), 기용(器用), 식물(食物) 등 5가지로 분류된 제재들을 읊은 시 총 67수가 실려 있다.

이 두시(杜詩)의 언해(諺解)는 〈춘망(春望)〉의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나라히 破亡니 뫼콰  잇고”로 하여, “”이라는 조사를 붙여서 언해함으로써, 자연의 유상함과 인간사의 무상함이 대비되어 발상되고 있는 이 작품의 본질을 잘 살려서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은 “잣 보 플와 나모 기폣도다”로 하여, “성춘(城春)”이 댓구인 앞 구의 “국파(國破)”와 대응되는 구조로서 “춘(春)”이 동사로 전성하여 풀이되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상에서처럼 이 두시의 언해는 성종 12년(1481) 즈음에 언해되었음에도 참으로 놀랄 부분이 많은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말과 한문이 서로 다른 이질성의 어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또 한자(漢字)에 대한 이해를 대부분 “일자일의(一字一意; 한 글자에 한 가지의 뜻)”만인 것으로 학습했음으로 해서, 〈촉상(蜀相)〉의 “영계벽초자춘색(映堦碧草自春色)”을 “버텅에 비취옛 프른 프른 절로  비치 외옛고”로 언해되어 “자(自)”를 “절로”로만 잘못 이해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두보시에 대하여 백가(百家; 백 사람)가 주를 달았다고 알려진 바대로, 그 치밀한 수사와 수다한 전고(典故)의 작품들을 이렇게 언해한 우리 선인들은, 이 두시언해를 우리 문학사상 번역문학의 금자탑으로 확립시킨 그 놀라운 재능과 보람된 공로의 주인공으로 길이 기려질 분들이다.

이제 이 16권의 언해를 풀어 읽으면서 밝혀지는 문제점들을 예시함으로써 해제를 대신하기로 한다.

1. 오자(誤字)의 문제

〇〈단청인 증조장군패(丹靑引贈曹將軍覇)〉의 “간유화육불화육(幹惟畵肉不畵肉)”에서 “불화육(不畵肉)”은 분명히 “불화골(不畵骨)”의 착오된 기록으로 추정된다. 이 언해문에서도 “간(幹)은 오직 고기 그리고  그리디 몯 니”로 되어 있어서 “”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〇〈야청허십송시 애이유작(夜聽許十誦詩愛而有作)〉의 끝 구 ‘전(闐; 마차 소리)’ 자는 분명히 ‘격(闃; 고요하다)’ 자를 오기한 것이 확실하다. 이 “전(闐)” 자는 시적 의미로도 맞지 않으며 각운(脚韻)의 규칙으로도 맞지 않는다. 중간본에는 이 “격(闃)” 자로 정정되어 있으며 두보의 원 시집에도 이 글자로 되어 있다.

〇〈증촉승여구사형(贈蜀僧閭丘師兄)〉의 ‘지수원(祗樹園)’은 ‘기수원(祇樹園)’이라야 맞는데, ‘기(祇)’ 자를 ‘지(祗)’ 자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2. 한문장(漢文章)과 우리말 문장 간의 구조적 이질성 문제

〇〈송두구귀성도(送竇九歸成都)〉에서, “비이갱고절 하인부대명(非爾更苦節何人符大名)”을, “네  節介 苦로이 아니면, 어느 사미 큰 일후메 마리오”로 언해하였는데, 여기서 “갱고절(更苦節; 또 절개를 고생스럽게 지키다)”은 “이(爾 ; 자네)”를 뒤에서 수식해 주는 관형어라 이에 맞춰 “다시금 절개를 고생스럽게 지킨 자네가 아니면, 어느 사람이 그 큰 명성에 걸맞겠는가?”로 번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문장에서는 관형어가 반드시 그 수식을 받는 말 앞에만 놓이는 것이 절대적인 원칙이라 이러한 우리말 문장의 어법으로 체질화된 우리 선인들이 전혀 생소한 후치형 관형어의 구문 구조를 서술어의 구조로 풀이하게 된 것은 모국어적 생리로서의 당연한 결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언해 후 문맥의 의미론적 합리성 여부를 점검하거나 작자의 주제의식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하서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〇〈기장십이산인표 삼십운(寄張十二山人彪三十韻)〉의 “조통교계밀 만접도류신(早通交契密晩接道流新)”을 “사괴요 親密호 일 通고, 道流의 새로외요 느져 接對호라”로 언해하여, “밀(密)”을 형용사의 명사형으로, “신(新)”도 역시 형용사의 명사형으로 풀어 읽었는데, 이 “밀(密)”은 실로 “친밀히”라는 상태부사로서 “통(通)”을 뒤에서 수식한 것이고, “신(新)”은 실로 “새로”라는 상태부사로서 “접(接)”을 뒤에서 수식한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부사어가 반드시 동사나 형용사 같은 서술어 앞에 놓이기 때문에 뒤에 놓이는 경우는 여기에서처럼 동사나 형용사 같은 서술어로 읽혀지는 언어 관습이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싯귀는 “일찌감친 사귐을 친밀히 통했고, 늦게서는 도류들을 새로 접했도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3. 어휘 자체가 다르게 표기된 문제

〇〈야청허십송시 애이유작(愛聽許十誦詩愛而有作)〉의 ‘서르(서로)’가 중간본에서는 ‘서’로 바뀌어 표기되어 있다.

4. 작품의 주지에 맞지 않게 오역된 문제

〇〈강각와병 주필기정최노양시어(江閣臥病走筆寄呈崔盧兩侍御)〉의 “향문금대갱(香聞錦帶羹)”에서 “문(聞)”의 뜻을 “맡다(고어)”나 “맏다(고어)”로 언해하지 않고 “듣다”로만 직역하여 주지에 맞지 않게 하였다.

〇〈증촉승여구사형(贈蜀僧閭丘師兄)〉에서 “아주금관성 형거지수원(我住錦官城兄居祗樹園)”의 “주(住)”를 “머물다”로 언해하지 않고 “잇다”로 한 것은, “거(居)”를 “살다”로 언해해서 안정된 상태의 여구(閭丘)와 대비적으로 불안정하고 외로운 작자 두보 자신의 상황을 암시한 것임을 잘못 이해한 소치이다.

〇〈애청허십송시 애이유작(愛聽許十誦詩愛而有作)〉의 “자연자초예 취박수전척(紫鷰自超詣翠駮誰剪剔)”을 “紫鷰이 절로 어 가니 翠駮을 뉘  리오”로 언해되어 앞의 싯귀가 뒤의 싯귀의 원인이 되는 부사형 어절로 풀이하였으나, 이것은 전후 두 싯귀가 대등한 병렬형임을 오해한 풀이다.

〇〈송고팔분문학적홍길주(送顧八分文學適洪吉州)〉의 “필력파여지(筆力破餘地)”를 “부듸 히미 나  혜티놋다”로 언해하여 ‘여지(餘地)’를 사전적 기본 지시 의미로의 직역만 하고, 그 전의적인 의미인 ‘여유(餘裕)’로는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오역을 하고 있다.

5. 문장의 주지에 맞지 않는 어미를 사용한 문제

〇〈희위육절(戱爲六絶)〉의 “금인치점류전부 불각전현외후생(今人嗤點流傳賦不覺前賢畏後生)”의 주(註)에 “論語에 後生可畏라 니 이졧 사미 前人의 됴 그를 우니 非可畏者ㅣ니라”에서 “後生可畏라 니”는 순접의 어미인데, 이것은 마땅히 “~라 나”라는 역접의 어미로 했어야 한다.

6. 착오로 기록된 문제

〇〈이조팔분소전가(李潮八分小篆歌)〉에 주(註)를 달면서, 한(漢)나라 영제(靈帝)의 연호인 “광화(光和)”를 그 앞서의 환제(桓帝)의 연호라고 잘못 기술하였다.

7. 고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은 고어

〇 싁싁다 : ‘아스라이 예스럽다’의 뜻인 듯한 말.

8. 초간본과 중간본 사이에 음운 변천의 현상 문제

〇 반치음이나 순경음의 변천 양상은 모두 확인되는 대로 적시하였다.

9. 일러 두기

〇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두보의 시에 대하여 수행한 『찬주두시 택풍당비해(纂註杜詩 澤風堂批解)』를 인용할 경우에는 그냥 축약해서 『두시비해(杜詩批解)』로 쓰기로 하였다.

끝으로 이 언해문의 현대어적 풀이는 먼저 언해문의 어휘와 구문 형태를 현대어와 현대어적 형태로 바꾸어서 가능한 한 그 언해문의 원형을 살려서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두시가 기본적으로 그 내적 요소들 상호간의 생명적 유기성과 긴밀도가 보다 강하고 높은 시라는 점에서, 그것도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는 물론 고시(古詩)도 그 각 구(句)들 혹은 각 연(聯)들 사이에는 상호 철저하게 강하고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짓고 있다는 점에서, 두 구씩 혹은 네 구씩 분리해서 각각의 독립된 의미 단위들처럼 개별적 문장 형태로 이루어진 이 언해문들은 작품 전체의 주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는 근원적인 한계를 지닌 자료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문의 현대어적 풀이는 두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언해문의 원형을 살려서 읽을 수 있도록 한 <원주>【직역】 글이고, 또 하나는, 언해문이 나눈 두 구씩 혹은 네 구씩의 의미 단위들이, 그 각 단위들 상호간에는 물론 작품 총체의 주지를 기축으로 어떻게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통일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의미망의 구조에 상응한 종결형 혹은 연결형의 어미로 남겨서 거의 산문화한 문장들로 제시한 <원주>【의역】 글임을 밝혀둔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7 해제

김영배·김성주

1. 서론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의 성당(盛唐)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성당 시기는 우리의 신라시대에 해당하는 때이며, 이 시기의 신라와 당의 관계를 생각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두시가 전래되었을 것이나, 이에 대한 내용은 문헌의 산실로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채몽필(蔡夢弼)이 찬한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원나라 고초방(高楚芳)이 찬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元版) 등 두시에 관한 서적들이 많이 복각 간행되었으며, 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두시언해』는 두시를 중시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기풍이 더해져서 이루어졌다.

『두시언해』의 원래 이름은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다. ‘두’는 ‘두보’의 성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한때 지냈던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에서 따온 것이고, ‘분류(分類)’는 두시를 연대별로 실은 것이 아니라 내용별로 분류하여 실었음을 뜻한다.

성종 조에 『두시언해』가 언해되기 전에 이미 세종 조에 『찬주분류두시』가 편찬 간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찬주분류두시』는 조선시대에 활자본과 복각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어 보급되었다. 현재 갑진자(甲辰字)본, 갑인자(甲寅字)본, 병자자(丙子字)본, 훈련도감(訓練都監) 목활자본, 이들의 복각본 등이 남아 있는데 갑진자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혹 세종 대에 갑인자본으로 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안병희 1998). 『두시언해』는 이 『찬주분류두시』를 바탕으로 고려 때부터 발달해 온 금속활자 기술로 만들어졌다.

『두시언해』에는 두보의 시 전편(全篇)인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 등 1,483편이 기행·술회·회고·우설(雨雪)·산악·강하(江河)·문장·서화·음악·송별·경하(慶賀) 등 54부로 분류되어 있다(임홍빈 2011).

2. 『두시언해』 권17의 서지

‘두시’와 『두시언해』에 대한 많은 선학들의 연구가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두시언해』 전체에 대해서는 간략히 말하고 주로 권17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한다.

『두시언해』의 간행 시기에 대해서는 1481년 9월에 간행의 명령이 내려져 그 해 12월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설(이병주 1958, 안병희 1998), 1482년이거나 그 이후일 것이라는 설(김일근 1964, 임홍빈 2011, 스기야마 유타카 2012)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후자의 견해가 우세한 듯하다. 이 글에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고 보고, 두 견해가 모두 옳을 수 있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두시언해』가 1481년 12월에 간행이 되었다는 설은, 안병희(1998)에서 소상히 언급되었는데, 『두시언해』와 같은 거질이 3~4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이러한 전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최근 스기야마(2012)에서 제시한 장서각 소장 『두시언해』 권10의 지배문서의 존재는 『두시언해』의 간행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지만,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두시언해』의 인출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두시언해』의 작업에 승려 의침(義砧)이나 유휴복 등이 참여하였다는 이전의 견해는 그 잘못이 이미 안병희(1998)에 소상히 지적되어 있다. 나이로 보아 이들이 『두시언해』의 작업에 직접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두시언해』에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관원들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두시언해』는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전25권, 17책의 거질(巨帙)로 초간본은 현재 제1, 2, 4권을 제외한 22권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 글의 대상인 『두시언해』 권17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동경대 소창문고, 통문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본은 교정본이다.

『두시언해』의 중간본은 초간본 발간 이후 150여년 뒤인 1632년(인조 10)에 경상감사 오숙(吳䎘, 1592~1634)의 주관 하에 대구부사 김상복(金尙宓)의 주역으로 영남의 각읍에서 분간하여 간행되었다. 중간본 『두시언해』는 초간본을 그대로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교정(校正)하여 중간(重刊)한 것이므로, 초간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7세기 국어의 특징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두시언해』의 중간본도 수 종의 판이 현전한다. 『두시언해』의 초간본과 중간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였으며, 단지 주석을 달면서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해당 시구의 아래에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3. 『두시언해』 권17의 문법과 어휘

이 글에서는 중세국어의 문법과 어휘 관련 사항 가운데 『두시언해』 권17에만 집중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두시언해』 권17에는 사동과 부정에 대한 특이한 현상이 있다. 먼저 중세국어의 장형 사동 구문을 살펴본다. 중세국어 언해문은 대개 한문 원문이 유표적 사동문일 때는 ‘令, 使, 敎, 遣’에 해당하는 번역어가 있으며, 사동문의 원동사는 사동사, 장형 사동 ‘-게/긔 ᄒᆞ다’, 명령형 등의 다양한 표현이 있다.

(1) 가. -로 ᄒᆡ여 ~ 게 ᄒᆞ다 : 闕에 가 춤 츠고 雄豪호  五陵ㅅ 사로 여 알에 다 (意氣卽歸雙闕舞 雄豪復遣五陵知)〈두시 5:25ㄱ〉.

나. -로 여 ~ 단형사동 : 한 사 中에  번 보매 날로 여 마니 넉슬 뮈우다(衆中每一見 使我潛動魄)〈두시 8:19ㄴ〉.

다. -로 여 ~ 명령형 : 님굼이 高允으로 여 太子를 글 치라 더니(帝使允으로 授太子經더시니)〈번소 9:44ㄱ〉.

라. 여곰 ~ -게 ᄒᆞ다 : 詔命을 바다 여곰 幕府엣  參預케 도다(奉詔令參謀)〈두시 22:37ㄱ〉.

마. 여곰 ~ 단형사동 : 픐 서리예 길히 업슬 여곰 이고져 노라(草茅無徑欲教鋤)〈두시 22:14ㄱ〉.

‘令, 使’ 등은 ‘-로/ᄅᆞᆯ ᄒᆡ여(곰)’으로 해석될 경우 원동사 부분이 (1가)는 ‘-게/긔 ᄒᆞ다’ 장형 사동, (1나)는 단형사동, (1다)는 명령형, (1라)는 ‘令, 使’ 등이 ‘ᄒᆡ여곰’으로 번역되는 경우이다. (1라,마)와 같이 ‘令, 使’ 등이 ‘ᄒᆡ여곰’으로 번역되는 경우에도 사동문의 원동사에 해당하는 것은 장형사동, 단형사동의 예가 있다.

그런데 ‘令, 使’ 등에 해당하는 형식이 ‘-로 ᄒᆡ여’인 것은 『두시언해』에서 처음 등장한다. ‘令, 使’ 등 고대중국어의 사동사들이 ‘-로/ᄅᆞᆯ ᄒᆡ여곰’으로 번역되는 경우는 『두시언해』에서는 아래의 (2)와 같이 2개만 있고, 나머지의 경우 모두 ‘-로 ᄒᆡ여’로 모두 50개 이상이 있다. 『두시언해』에서는 ‘-로/ᄅᆞᆯ ᄒᆡ여곰’이 2회, ‘-로/ᄅᆞᆯ ᄒᆡ여’가 50회 이상으로 나타나므로, 상대적으로 ‘-로 ᄒᆡ여’가 월등히 많은 수치이며, 무엇보다도 ‘-로/ᄅᆞᆯ ᄒᆡ여’가 중세국어 문헌에서 처음 나타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하다. 아래의 (3)은 『두시언해』 권17에 나오는 ‘-로 여’ 사동문의 예이다.

(2) 가. 집 와 보콰로 여곰 것게 디 말오라(莫使棟梁摧)〈두시 3:10ㄴ〉

나. 各各 蒼生로 여곰 環堵 두게 고(各使蒼生有環堵)〈두시 7:29ㄴ〉

(3) 가. 다 鴟梟로 여 서르 怒야 우르게 야리아(盡使鴟梟相怒號)〈두시 17:3ㄱ〉

나. 東녃 햇 여윈 리 날로 여 슬케 니(東郊瘦馬使我傷)〈두시 17:27ㄱ〉

다. 엇뎨 麒麟로 여 地上애셔 니게 리오(肯使麒麟地上行)〈두시 17:29ㄴ〉

다음은 부정 구문에 쓰이는 ‘-디웨’이다.

(4) 가. 오직 壯健야 쇠甲 이긔리 얻디웨 엇뎨 사호 因야셔 龍의 삿기 求리오(祗收壯健勝鐵甲 豈因格鬭求龍駒)〈두시 17:32ㄱ〉

나. 오직 노 놀애여 鬼神 잇 호 아디웨 므스므라 주려 주거 굴허 몃귀욜 이 알리오(但覺高歌有鬼神 焉知餓死填溝壑)〈두시 15:37ㄴ〉

다. 文翁 能히 時俗 敎化호 오직 보디웨 李廣의 諸侯 封이디 몯호 어느 알리오(但見文翁能化俗 焉知李廣未封侯)〈두시 21:16ㄴ〉

라. 여희엿다가 다시 서르 맛보니 偶然히 그리 디웨 어느 足히 期約리오(離別重相逢 偶然豈定期)〈두시 22:22ㄴ〉

마. 매 君臣이 相合호 取리라 디웨 엇뎨 品命의 달오 議論료(會取君臣合 寧銓品命殊)〈두시 24:59ㄴ〉

(4)는 장형부정문의 선행문 어미가 ‘-디웨’가 쓰인 부정문의 예이다. 중세국어에서 장형부정문의 선행문은 주로 ‘-디’와 ‘-ᄃᆞᆯ’이 쓰이지만, 좀 더 이른 시기의 문헌인 『석보상절』 등에서는 ‘-디ᄫᅵ’가 쓰였다. ‘-디ᄫᅵ’는 좀 더 뒤의 문헌에서는 ‘-디위’로 나오는데, ‘-디웨’는 ‘-디위’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 ‘-디웨’는 『두시언해』에서만 5회 쓰였으며 그 중에 (4가)는 『두시언해』 권17의 예이다.

『두시언해』는 중세국어의 불경 언해 문헌, 의학서 자료, 역학서 자료 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풍부한 어휘를 보인다. 여기서는 『두시언해』에서 자주 볼 수 있거나, 『두시언해』에서만 볼 수 있는 어휘를 대상으로 살펴본다.

■ 디나들다

(5) 가. 톳기 세  굼긔 디나드러실 기피 시름 아니놋다(兔經三窟莫深憂)〈두시 17:12ㄱ〉

나. 아히 돈 삼만 모도아 주니 길 나가다가 아븨 벋 려옹의 집븨 디나드니(裒錢三萬遣之 道出滑州 過父友呂翁家)〈이륜 40ㄱ〉

‘디나들다’는 이 책의 아홉 번째 시인 ‘見王監兵馬使호니 ~ 請余賦詩二首다’에 나오는 단어로 뜻은 ‘지나가다가 들어가다’로 보인다. (5가)에서는 ‘經’에, (5나)에서는 ‘過’에 해당된다. 이 단어는 ‘디나다’와 ‘들다’의 합성어인데, 고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지나다’의 뜻인 ‘디나다’의 합성동사로 기존의 고어사전류에서 등재된 단어는 ‘디나가다’와 ‘디나오다’뿐이다.

■ 바라

(6) 가. 모로매 主人을 바라 리라(會傍主人飛)〈두시 17:16ㄱ〉

나. 비  차 수프를 바라 微微도다(帶雨傍林微)〈두시 17:38ㄱ〉

(6)의 ‘바라’는 ‘傍’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곁에 두다’ 정도의 의미로 보인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바라’의 예는 모두 22개가 검색되는데, 그 중 17개가 『두시언해』에 나온다. 그런데 『두시언해』 이외에 나오는 ‘바라’를 살펴보면, 모두 『두시언해』에 나오는 ‘바라’와는 관련이 없는 단어가 대부분이다. 『두시언해』 이외에 ‘바라’의 형태로 검색되는 예 5개를 제시하면 아래의 (7)과 같다. 주001)

『두시언해』에 출현하는 17개의 ‘바라’ 중 16개가 ‘傍’의 번역어로 쓰였고, 1개는 ‘緣’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 예는 「樂遊園歌」에 나오는 구절로 그 예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예) 구루믈 바라 淸切 놀앳 소리 오놋다(緣雲清切歌聲上)〈두시 15:1ㄴ〉

(7) 가. 눈므리 눈 바라 사 글 적시놋다〈순천 3:26〉

나. 鈸 바라 발〈훈몽중 8ㄴ〉

다. 處 바라 쳐〈광천 31ㄴ〉

라. 내 모매 죄이 산과 바라  주 아라〈초발-계초9ㄱ〉

마. 海 바라 〈석천3b〉

(7가)의 ‘바라’는 정확한 의미를 제시하기가 주저되는 부분이 있으나, ‘바로’의 이표기로 생각되며, (7나)는 악기 이름인 ‘바라’이다. (7라,마)의 ‘바라’는 ‘바다’의 다른 표기이다. (7)에 제시된 단어 중 유일하게 (7다)에 제시된 ‘바라’가 (6)에 제시된 『두시언해』의 ‘바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7다)의 ‘바라’는 ‘處’의 새김으로 제시된 만큼 ‘곳, 장소’를 뜻하는 우리말인 것으로 보아왔다. 이렇게 보면 (7)에 제시된 ‘바라’는 적어도 ‘傍’에 대응되는 우리말 번역어로 쓰인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傍’의 번역어로 쓰인 ‘바라’는 『두시언해』에만 나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두시언해』에 출현하는 17개의 ‘바라’ 중에서 2 예가 『두시언해』 권17에 나온다.

■ 하숫그리다

(8) 가. 님 겨틔 하숫그릴 사미 잇니라(君側有讒人)〈두시 17:18ㄴ〉

나. 주우린 라민 藤草애 뎌셔 하숫그리놋다(饑鼯訴落藤)〈두시 20:24ㄱ〉

(8)의 ‘하숫그리다’는 (8가)에서 ‘讒’, (8나)에서 ‘訴’에 대응되는 번역어로 ‘讒訴, 譖訴’ 등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8나)의 ‘하숫그리놋다’가 비록 대응하는 『두시언해』의 원문은 ‘讒’이거나 ‘訴’이기는 하지만, 문맥에서의 의미는 주린 다람쥐가 수풀 속에서 ‘재잘거리는’ 또는 ‘소곤거리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보인다. 『훈몽자회』에 ‘하솟그릴’의 형태로 ‘讒’과 ‘譖’의 훈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讒訴, 譖訴’의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하고 이러한 용법은 『두시언해』의 용례인 (8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원래의 의미는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뭐라고 재잘거리다’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15세기 문헌에서 ‘하숫그리다’는 2개의 예가 발견되는데, 이것이 모두 『두시언해』의 예인 점과 그 중 한 예는 『두시언해』 권17의 예라는 점을 밝혀둔다. 주002)

<풀이>그 외에도 근대국어 문헌에서 ‘하솟거리다. 하쇼리다. 하쇽거리다’ 등의 용례를 참조할 수 있다.

■ 붑괴다

(9) 가. 굴에 눌러 야슈메 바리 갓 붑괴얫도소니(頓轡海徒湧)〈두시 17:24ㄱ〉

나. 하콰  예 사미 붑괴야 우르니라(乾坤沸嗷嗷)〈두시 8:56ㄴ〉

다. 豺狼이 붑괴여 서르 너흐놋다(豺狼沸相噬)〈두시 22:32ㄱ〉

라. 버러 드러온 므리 붑괴니(羅落沸百泓)〈두시 25:12ㄱ〉

(9)의 ‘붑괴다’는 『두시언해』에서만 보이는 단어이다. (9가)의 경우 ‘湧’의 번역어로, (9나~라)의 경우 ‘沸’의 번역어로 쓰였다. ‘涌’과 ‘沸’는 모두 ‘물이 끓는다’는 뜻이므로 ‘붑괴다’의 의미를 ‘물이 끓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정도로 볼 수 있다. (9나)는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켜 ‘부글부글 끓어올라 우는’ 것이고, (9다)는 범과 이리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서로 싸우는 장면이며, (9라)는 가뭄이 들어 교룡(蛟龍)을 놀라게 하여 비를 오게 하려는 의도로 불을 질러 물이 끓는 장면이다. 모두 ‘부글부글 끓는다’는 의미에 부합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이미 박진호(2000)에서 ‘*봎-/*붚-’과 ‘괴-’의 합성어로 본 적이 있다. 중세국어의 ‘붑괴다’의 용례 4개가 모두 『두시언해』에 실려 있으며, 그 중 한 예는 『두시언해』 권17에 나온다.

■ 멀험

(10) 가. 멀허메 굽슬며 해 이셔 쇽졀업시 키 잇도다(伏櫪在空坰大存)〈두시 17:26ㄱ〉

나. 雄壯  멀허메 굽스러셔 恩惠 디 아니리로소니(雄姿未受伏櫪恩)〈두시 17:30ㄱ〉

다. 리 우러셔 녯 멀허믈 고(馬嘶思故櫪)〈두시 9:17ㄱ〉

라. 簪纓 사미 모니 멀허멧 리 우르고(盍簪喧櫪馬)〈두시 11:37ㄴ〉

마. 閑 멀험 한〈훈몽 하:4ㄴ〉

(10)의 ‘멀험’은 ‘마판(馬板)’을 가리킨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마판’은 ‘마구간의 바닥에 깔아 놓은 널빤지’ 또는 ‘마소를 매어 두는 바깥의 터’로 뜻풀이 되어 있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검색되는 ‘마판’의 용례 5개 중 4개가 『두시언해』에 있으며, 그 중 2개가 『두시언해』 권17에 나온다. ‘멀험’은 ‘말’과 관계되는 단어이고, 『두시언해』 권17은 ‘말’에 대한 시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보인다.

■ 다ᄆᆞᆺᄒᆞ다

(11) 가. 八駿으로 다야  가디 아니고 몬져 울리로라(不與八駿俱先鳴)〈두시 17:29ㄱ〉

나. 그듸와 다야 기리 서르 라리로다(與君永相望)〈두시 8:68ㄱ〉

다. 齊梁ㅅ 사로 다야도 뒤헷 드트리 욀가 전노라(恐與齊梁作後塵)〈두시 16:12ㄴ~13ㄱ〉

‘다ᄆᆞᆺᄒᆞ다’는 ‘함께 하다’의 뜻이다. ‘與’의 번역어로 ‘다ᄆᆞᆺ’이 쓰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인데, ‘다ᄆᆞᆺᄒᆞ다’즉 ‘다ᄆᆞᆺ’과 ‘ᄒᆞ다’가 결합된 복합어의 형태로 쓰이는 것은, 『두시언해』에만 39개의 용례가 검색되며, 나머지 문헌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

■ 믄드시

(12) 가. 소리와 빋괘 믄드시 오 東로 向도다(聲價欻然來向東)〈두시 17:29ㄴ〉

나. 믄드시 서르 맛보니 이 여희 돗기로다(忽漫相逢是別筵)〈두시 23:23ㄱ〉

(12)의 ‘믄드시’는 ‘믄득, 믄드기’ 등으로로 쓰이며 대응되는 한자가 ‘훌연(欻然), 홀(忽)’인데서 알 수 있듯이 ‘갑자기’의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믄드시’의 형태는 『두시언해』에서만 목격된다.

■ ᄀᆞ리티다

(13) 가. 리티 번게를 디나 로 城中이 기울에 모다 아다(走過掣電傾城知)〈두시 17:30ㄴ〉

나.   벌어질 잡노라 사 리티다(更接飛蟲打著人)〈두시 10:7ㄴ〉

다. 볼 사미  리티고 라가 貪히 시름니(觀者貪愁掣臂飛)〈두시 16:35ㄴ〉

(13)의 ‘ᄀᆞ리티다’는 (13가)에서 ‘掣’, (13나)에서 ‘打’, (13다)에서 ‘掣’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들을 참고하면 ‘ᄀᆞ리티다’의 의미는 (13가~다)의 문맥을 보면 ‘치다’ 또는 ‘강하게 잡아 끌다’로 해석된다. 대당 한자어의 의미와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ᄀᆞ리티다’는 ‘갑자기 강하게 끌거나 치다’ 정도의 의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ᄀᆞ리티다’ 쓰인 용례가 (13)의 3개뿐인데 이 용례들은 모두 『두시언해』의 용례들이다.

■ 브티들이다

(14) 가. 病야 브티들여셔 長沙ㅅ 驛에 와 서르 아노라(扶病相識長沙驛)〈두시 17:33ㄴ〉

나. 사 브티들이여쇼 늘근 노미 붓그리노라(提攜愧老夫)〈두시 23:35ㄴ〉

다. 아 브티들여 고기 낛 돌해 셔쇼라(兒扶立釣磯)〈두시 24:50ㄱ〉

‘브티들이다’는 ‘븥-’와 ‘들이-’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단어인데, ‘들이-’는 ‘들-’에 피동접미사 ‘-이-’가 붙어 파생된 단어이다. 즉 ‘브티들이다’는 ‘의지해 들리다’ 정도의 의미이다. (14가)는 두보 자신이 병이 들어, 부축을 받고 장사역(長沙驛)에 와 있음을 서술하고 있고, (14나)는 두보 자신이 늙어 힘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며, (14다)는 두보 자신이 강가의 낚시를 할 수 있는 바위 위에 아이의 부축을 받고 서 있다는 내용이다. 모두 남으로부터 부축을 받는다는 피동의 뜻이 들어 있다. ‘브티들이다’는 『두시언해』에 나오는 (14가~다)가 중세국어 용례의 전부이다.

■ ᄯᅴ차다

(15) 가. 비 차 수프를 바라 微微도다(帶雨傍林微)〈두시 17:38ㄴ〉

나.  벼른 새지븨 찻도다(春星帶草堂)〈두시 15:55ㄱ〉

다.  城이   찻거(江城帶素月)〈두시 16:49ㄱ-ㄴ〉

(15)는 ‘ᄯᅴ차다’의 용례로 ‘ᄯᅴ’와 ‘차다’로 분석되며 ‘대(帶)’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다. (15가~다)에서 각각 ‘비 차, 새지븨 찻도다,   찻거’을 보면, ‘ 차다’의 구 구성이 아닌 ‘ᄯᅴ차다’의 복합어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5가)와 (15다)를 보면 ‘ᄯᅴ차다’는 전형적인 ‘주어+목적어+ᄯᅴ차다’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간략 두보 평전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 요만촌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에서 죽었다. 두보의 선조로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 초당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이 있었고,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는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숙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5세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지냈다. 안사의 난 등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낭주(閬州), 운안(雲安), 기주(夔州),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졌다. 두시의 위대함 중에는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백성의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시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 있으며 특히 방관과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太極 원년, 1세) :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開元 5년, 6세) :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

718년(開元 6년, 7세) :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開元 13년, 14세) :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이구년 등)

730년(開元 18년, 19세) : 순하(郇瑕, 산서 의씨현) 여행.

731년(開元 19년, 20세) :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開元 23년, 24세) : 진사 시험 낙방

736년(開元 24년, 25세) :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지역,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741년(開元 28년, 30세) :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742년(天寶 원년, 31세) :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天寶 3년, 33세) : 제2차 여행 ;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 먹음.

746년(天寶 5년, 35세) 장안 거주. 장안(西安)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이었음.

747년(天寶 6년, 36세) : 과거 시험 낙방.

748년(天寶 7년, 37세) : 장안 거주.

751년(天寶 10, 40세) :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4년(天寶 13, 43세) : 아들 종무 출생.

755년(천보 14, 44세) : 하서 현위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으로 전임되어 취임. 11월 봉선으로 가족 방문. 안녹산의 난 발발.

755년(천寶 14, 44세) :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현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

756년(天寶 15, 45세) : 2월, 봉선현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오자, 봉선현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백수)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부현)의 강촌(羌村)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

757년(至德 2, 46세) :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 5월 좌습유(左拾遺) 임명.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

758년(乾元 원년, 47세) : 두보는 방관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화현)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나가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화주의 사공참군 시절 몇 수의 영물시를 지었는데, 모두 동물을 빌려 자신이 신세를 한탄한 작품.

759년(乾元 2, 48세) :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머나먼 진주(秦州, 감숙 천수) 10월 다시 동곡(同谷, 감숙 성현)으로 감.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上元 원년, 49세) :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 신진현 1차 여행.

761년(上元 2, 50세) : 신진현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

762년(寶應 원년, 51세) :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 전송.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로 이사시킴.

763년(廣德 원년, 52세) : 봄에 낭주(閬州, 사천 낭중), 염정(鹽亭, 사천 지역), 한주(漢州, 사천 광한) 여행. 봄에 재주(梓州)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 대종이 섬주로 피난.

764년(廣德 2, 53세) :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감.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으로 추천됨.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

765년(永泰 元年, 54세) :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중경), 충주(忠州, 사천 충현), 운안(雲雁, 사천 운양)을 떠돎.

766년(大曆 元年, 55세) : 늦은 봄, 기주(夔州, 四川 奉節) 도착.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이 책의「催宗文樹雞柵」10 참조)

767년(56세) :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만련해 준 양서 초당에서 삶.

768년(大曆 3, 57세) :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봉절현)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호북성)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북 岳陽) 도착.

768년(57세) :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大曆 4, 58세) :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담주(潭州, 장사)에 도착.(이 책의 「백부행白鳧行」18 참조)

770년(大曆 5, 59세) :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음). 양양으로 가다가 장사에서 머룲.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낙양 부근)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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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의 배경과 권18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삶과 시대 배경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성(詩聖)이란 시에 있어서 성인(聖人)이란 뜻으로 그의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았으나, 그가 태어난 것은 호남성 공현(鞏縣)이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預,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楊)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만 7세 때에 시를 지었다고 하고, 만 9세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만 14~5세(이후 두보의 나이는 만으로 표시한다)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20대에 접어들어 진(晉, 산서성(山西省)), 오(吳, 강소성(江蘇省)) 월(越, 절강성(浙江省))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24세 때에 경조(京兆, 장안현 서북쪽에 있었다고 함)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유랑 길에 나서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두보는, 32세(744)로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던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34세(746)에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곳에서 1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두보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750)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39세 때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삼대예부〉를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실로 불우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39세(751) 때,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에 크게 패하였는데,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하였다. 42세(754) 때에는 장마가 계속되고 기근이 심하여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43세(755)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직을 얻었다. 그 낮은 관직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奉先縣)으로 가는 도중,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은 상태였다.

43세(755) 때,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제의 자리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갔다. 두보는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자신은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거리에는 반란군이 활개를 쳤다. 두보는 장안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45세(757, 숙종 지덕(至德) 2) 때,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죽음을 당하였다. 두보는 그 해 4월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를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했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上皇,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 생활을 하게 되었다. 46세(숙종 건원(乾元) 1, 758) 때,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6월에는 화주 사공(華州司功)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화주는 섬서성 화주현이고, 사공은 6참군의 하나로 주부(州府)의 좌리(佐吏) 벼슬이었다. 그러다가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하게 되자,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두보는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 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의 옛 친구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인데다, 세교(世交)도 있는 터였는데, 두보가 아무런 실권도 없으면서 엄무를 업신여기는 투로 취중에 비위를 건드렸다가 그를 격노케 하여 그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성도 근교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50세(보응(寶應) 1, 762) 때,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51세(대종 광덕(廣德) 1, 763)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다음해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마음도 맞지 않았고, 관료 생활도 불편하였다. 폐병, 중풍병도 있어 53세(대종 영태(永泰) 1, 765) 때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약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사천 지방에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이듬해(대종 대력(大曆) 1, 766) 늦은 봄에 병이 조금 낫자 다시 강을 따라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내려갔다. 55세가 되는 해의 늦은 봄부터 56세 봄까지 약 2년 동안 기주에서 지내며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55세(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琳)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57세(769) 1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지붕을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두보는 58세(대력 5, 770)가 되는 해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牛炙, 쇠고기 구이)과 백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시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어 그것을 부인하는 설도 생기게 되었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 (두보의 생애에 대해서는 차석찬의 역사 창고 홈페이지,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위키백과 및 차상원(1981)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혹 참고한 것을 일일이 밝히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2.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관련된 문제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8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대종 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킨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두보를 그의 이름이나 자(字) ‘자미(子美)’ 혹은 호(號) ‘소릉(少陵)’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두공부’라 부르는 것이 두보를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제재별로 분류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를 몇 가지 예를 보이면,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가 그러한 예이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3권에도 〈기제두이금강야정(寄題杜二錦江野亭))〉이라는 엄무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들 시를 그 제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이 목록은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수정한 것이다.

(1) 『두시언해(杜詩諺解)』의 대분류 및 중분류 제목

[1] 기행(紀行), [2] 기행 하(紀行下), [3] 술회 상(述懷上), [4] 술회 하(述懷下), [5] 질병(疾病), [6] 회고(懷古), [7] 시사 상(時事上), [8] 시사 하(時事下), [9] 변새(邊塞), [10] 장수(將帥), [11] 군려(軍旅), [12] 궁전(宮殿), [13] 성수(省守), [14] 능묘(陵廟), [15] 거실 상(居室上), [16] 거실 하(居室下), [17] 인리(隣里), [18] 제인거벽(題人居壁), [19] 전원(田園), [20] 황족(皇族), [21] 세주(世胄), [22] 종족(宗族), [23] 외족(外族), [24] 혼인(婚姻), [25] 선도(仙道), [26] 은일(隱逸), [27] 석로(釋老, 寺觀附), [28] 사관(寺觀), [29] 사시(四時), [30] 하(夏), [31] 추(秋), [32] 동(冬), [33] 절서(節序), [34] 주야(晝夜), [35] 몽(夢), [36] 월(月), [37] 우설운뢰부(雨雪雲雷附), [38] 운뢰(雲雷), [39] 산악(山嶽), [40] 강하(江河), [41] 도읍(都邑), [42] 누각(樓閣), [43] 조망(眺望), [44] 정사(亭榭), [45] 원림(園林), [46] 과실(果實), [47] 지소(池沼), [48] 주즙(舟楫), [49] 교량(橋梁), [50] 연음(燕飮), [51] 문장(文章), [52] 서화(書畫), [53] 음악(音樂), [54] 기용(器用), [55] 식물(食物), [56] 조(鳥), [57] 수(獸), [58] 충(蟲), [59] 어(魚), [60] 화(花), [61] 강두오영(江頭五詠), [62] 초(草), [63] 죽(竹), [64] 목(木), [65] 투증(投贈), [66] 기간 상(寄簡上), [67] 기간 중(寄簡中), [68] 기간 하(寄簡下), [69] 회구(懷舊), [70] 수기(酬寄), [71] 송별 상(送別上), [72] 송별 하(送別下), [73] 경하(慶賀), [74] 상도(傷悼), [75] 잡부(雜賦)

(1)은 개별 시의 제목이 아닌, 상위 분류의 제목을 일단 모두 제시한 것이다. 이들 중 [36]의 ‘월(月)’은 대분류 제목이 누락된 것으로 판단되어, 역주자가 만들어 넣은 것이다. 상위 분류의 제목에는 대분류의 제목이 대부분이지만, 중분류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과 같은 제목이 그 하나이다. 18권에서 ‘강두오영’에 포함된 시는 3수인데, 2수는 이미 ‘조(鳥)’ 대분류에서 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 뒤에는 별다른 표시 없이 12수의 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분류 ‘화(花)’에 속한다. ‘강두오영’에는 ‘화(花)’에 속하는 16수의 시 가운데 단지 3수만이 속하는 것이다. 이는 대분류 속의 일부가 중분류에 속하고 있음을 보이는 예이다.

[29]의 ‘사시(四時)’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과 동렬에 서 있으나, ‘사시’는 ‘춘, 하, 추, 동’을 아우르는 상위 범주이다. ‘사시’가 ‘춘(春)’의 자리에 있고, ‘춘’이 빠져 있다. ‘사시’를 초대분류 제목으로, 그 아래에 ‘춘(春)’을 보충하여, ‘춘, 하, 추, 동’을 대분류 제목으로 보기로 한다. 이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이란 제목이 고시 몇 수, 율시 몇 수와 같은 할주를 가지고 있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고, 춘하추동의 계절이 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와 제재를 제공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다.

(1)의 분류 중 대분류의 일부에 포함되는 중분류를 제외하고, ‘기행’, ‘기행 하’를 의미 부류가 같은 것으로 보고, 다시 ‘상중하’나 ‘상하’로 되어 있는 것을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고, ‘석로 사관부(釋老寺觀附)’ 뒤에 오는 ‘사관(寺觀)’ 혹은 ‘우설 운뢰부(雨雪雲雷附)’ 뒤에 오는 ‘운뢰(雲雷)’를 합치지 않고 따로 독립시키고, 대분류 제목이 빠진 것으로 보이는 ‘월(月)’을 독립된 분류로 세우고, ‘사시’를 제외하고, ‘춘, 하, 추, 동’을 독립된 대분류로 취급하면, 전체가 64대분류가 된다.

이 숫자는 『중간 두시언해』 영인본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다. 흔히 두시의 내용은 52부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에 보인 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초간본 전질이 발견되면 혹 그 정확한 편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분류와 중분류 또는 초분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도 분류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우선은 위에 같은 분류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두시에 대한 이해가 더 심화되어 더 정확하게 부류가 나누어질 날이 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언해된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보의 원시와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것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2. 『두시언해』 편찬의 목적

『두시언해』를 편찬한 목적은 중간본에 게재된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그 첫째 이유는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시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쉽게 풀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인다.

(2) 『두시언해』 편찬의 첫째 목적

가. 시(詩)는 ‘국풍(國風, 『시경』의 한 체로 『시경』을 가리킴)’과 ‘이소(離騷,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의 제목으로 『초사(楚辭)』를 가리킴)’에서 내려와 성하여 이백과 두보를 일컫는다(시선과 시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본래의 기운이 흐리고 아득한(渾茫한) 상태이다. 단어와 문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삽(難澁)하여, 주석을 많이 해 놓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나.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신 유윤겸(柳允謙)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였다.

다. 이에 널리 주석을 수집하고, 불필요한 것을 베어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지리, 인물, 글자의 뜻이 어려운 것은 간략하고 간소하게 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고 읽는 데 편하게 하였으며, 또 우리 글로 그 뜻을 번역하였다.

라. 임금이 뜻하신 바의 이른바 난삽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글을 이루고 정서하여 임금께 올렸더니,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시었다.

(2가)는 두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2나)는 성종이 『두시언해』 편찬을 명하게 된 동기를 말한 부분이다. 동기는 (2가)와 거의 같다. (2다)는 편찬의 과정과 결과를 말한 것이고, (2라)는 난삽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원고를 임금께 보인 것을 말한 것이다.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은 세교(世敎)에 있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권장하는 데, 즉 세상을 교화하는 데 시의 큰 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시언해』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3)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

가. 공효의 측면을 생각하면, 시도(詩道)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있다.

나. 큰 것은, 위로는 종묘(宗廟)의 노래를 지어 성덕을 찬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민속의 노래로 당대의 정치가를 찬미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감발징창(感發懲創)]으로 족하다.

다. 사람의 선과 악, 이것이 공자가 시 삼백 편을 산정(刪定)하여 사악함이 없는 교훈이 있게 한 까닭이다.

라. 시는 중국의 육조(六朝)에 이르러 극히 부미(浮靡, 헛되고 중심이 없음)하여 시 삼백 편의 메시지가 땅에 떨어졌다. 자미(子美), 즉 두보는 성당 시대에 태어나 막힌 것을 척결하고, 퇴풍(頹風), 침울(沈鬱), 돈좌(頓挫, 넘어지고 꺾이는 것)를 떨치고 일어나, 고운 것, 화려하고 왜곡된 것만을 찾는 풍습을 적극 물리쳤다. 난리가 일어나 쥐새끼처럼 도망다니는 때에, 두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고 지성(至誠)과 충성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썼다.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백세를 용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까닭은 사람을 감발징창(感發懲創)하게 하는 것은 실로 시 삼백 편과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고, 또 세상의 일을 말하고 실제를 진술하는 것은 시사(詩史)라고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후세의 사람들이 풍월을 읊는다고 비웃을 수 있겠느냐? 성정(性情, 정서)을 새기고 깎는 일은 가히 본받을 만하고 의논할 만하다.

(3가)는 시의 궁극적인 효용이 세상을 교화하는 세교(世敎)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가 인간을 일부러 퇴폐하게 하고 세상을 더럽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기술이다. 얼른 보면 이는 당연한 기술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는 아마도 조위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3나)는 종묘의 노래이든 백성의 노래이든 감발징창(感發懲創: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의 공효를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3다)는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사악하지 않게 하기 위함임을 말한 것이다. (3라)는 두시가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사람을 감발징창케 하는 힘을 가져, 시 자체를 시사(詩史)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의 시 삼백 편과 표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종이 두보의 시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나, 공자가 시 삼백 편에 뜻을 두고 있는 것, 그 아름다운 은혜와 배움을 부르는 것이 시도(詩道)를 만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고, 공자에 있어서의 시 삼백 편의 산정(刪定)과 주자집주(朱子集註)에서의 큰 밝힘이 이제는 두보의 시인데, 그것은 바로 당시 성상(聖上)인 성종에 기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두시언해』의 편찬의 목적은 단어와 문장의 난삽함을 덜기 위한 목적이 하나이며, 세상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이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위의 서에서 잘 언급되지 않은 것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2.3. 『두시언해』 간행 연대의 문제

『두시언해』에 대한 기존의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몇 가지 사전이나 해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와 보기로 한다.

(4) 초간본 간행 연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가. 이병주(1958:123) : 『두시언해』의 간행은 성화 17년 신축(성종 12년, 1481년) 12월 상한 성종의 봉명으로 찬하여 강희안 서체의 ‘을해자’로 상재된 최초의 역시서다.

나.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

다. 안병희(1971)의 『분류두공부시언해』 해제 : 간행 연대는 중간본에 실린 조위의 서문 등에 의하여 성종 12년(성화 17)임이 확실하다.

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 이호권(n.d.), 한글디지탈박물관 『두시언해』 전문가 해제 : 1481년(성종 12)에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1420~?) 등이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언해하여 을해자로 간행한 책이다.

위의 (4가-마)에 보인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한결같이 그 간행 연대를 1481년(성종 12)으로 보고 있다. 이 연대는 조위의 서문에 나타난 시기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이 연도는 분명히 조위가 서문을 작성한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동안은 서문을 작성한 시기와 간행 연대를 같이 보았다. 조위의 서문에서 관련 사항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필요한 사항을 부가하여, (2나)를 다시 (5가, 나)와 같이 나누어 가져오고, 서문을 쓴 날짜 관련 사항을 (5다)에 보이기로 한다.

(5) 조위의 두시 서의 편찬 시기 관련 사항

가.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신 유윤겸(柳允謙) 등에게 명하시었다.

나.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였다.

다. 성화 17년 12월 상한(上澣). 승훈랑(承訓郞),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制敎) 겸 경연 검토관(檢討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문원 교검(校檢) 신(臣) 조위(曺偉) 근서(謹書).

(5가)에 의하면, 성종이 유윤겸 등에게 이른바 『두시언해』 편찬의 명을 내린 것이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이다. ‘성화(成化)’는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그 신축년(辛丑年)은 1481년에 해당한다. 이 해를 성화(成化) 연호로 말하면 성화(成化) 17년이다. 그런데 (5다)와 같이 조위(曺偉)가 서문을 쓴 것도 ‘성화(成化) 17년’이다. 조위의 서문이 책의 간행과 때를 맞추어 쓴 것이라면, 책의 편찬을 명한 것과 책이 간행된 것이, 많아야 다섯 달밖에 되지 않는다. 음력으로 가을에 해당되는 기간을 7, 8, 9월이라 하고, 그 8월에 성종의 명이 있었다고 했을 때의 계산이 그러하다. 성종의 명이 9월이나 10월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석 달이 될 가능성도 있고, 성종의 명이 10월 말에 있었다면, 조위의 서문이 12월 상한에 된 것이므로, 그 기간은 두 달이 되든가 그 기간이 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전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 기간 동안에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을 갖추어 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만약, 두시의 시구 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을 때, 그 하나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문으로 주석이 되어 있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번역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섯 달에 25권을 만들려면 한 달에 5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6일에 완성해야 한다. 단지 번역만이 아니라 번역과 조판과 교정과 인쇄와 제본을 합하여 모두 6일만에 끝내야 한다. 세 달이 걸렸다면, 한 달에 적어도 8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4일만에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6) 편찬과 간행 사이의 불가사의한 시간

조위(曺偉)의 서문이 간행시에 쓰여진 것이라면, 전 25권이나 되는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걸린 시간은 많아야 다섯 달, 적으면 두서너 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으로 언해하여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간행한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래에는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과 관련되는 몇 가지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7)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대한 견해(밑줄 필자)

가.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

나.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

다. 안병희(1979)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해져 왔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1481년(성종 12년)에 완성하여 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라. 안병희(1997:18) : 『두시언해』도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이므로 원고에 잘못이 나타나고, 책이 인출된 뒤에 교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된다. 이 교정도 언해가 1481년에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 안병희(1997:20) : 『두시언해』는 언해에 착수한 바로 1481년(성종12)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되어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 김일근(1964:142) :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조위의 서문 일자에 의하여 성종 12년 12월일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1권이 선성(先成)된 시기이며, 그 완성 간행은 적어도 근 2년후 성종 14년 7월(실록) 『황산곡시언해(黃山谷詩諺解)』의 하명 직전까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7가)에 의하면 『두시언해』 편찬은 세종 25년(1443) 4월에 시작된 것이다. 조위의 서문이 1481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그 기간은 39년이나 된다. 『두시언해』 25권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세종 25년(1443) 4월에 두시언해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때는 두시 주석서를 모으도록 하였고, 두시에 대한 여러 주석을 참고하여 교감본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8) 세종 25년(1443) 4월 21일 기사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으므로 구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시 주석서를 모으는 것이 언해 작업의 기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은 두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한 것은 교감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의 성격을 가지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이루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7가)와 같이, 언해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7나)에서는 성종 12년을 괄호에 1491년으로 적고 있다. 이것이 바로잡힌 것은 (7다)에 와서이다. 1491년이 1481년로 바뀌었다. (7라, 마)에서는 이것이 다시 확인된다. (7라)에서는 두시언해가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고 있고, (7마)에서는 두시언해가 언해를 시작한 바로 그 해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6)에 제시한 것과 같이 25권이나 되는 거질의 책을 단 서너 달만에 완성한다는 것은 컴퓨터 조판과 고도의 인쇄술이 발달한 21세기인 지금에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조판, 교정, 인쇄, 제본에 드는 시간만도 서너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5나)에 보는 바와 같이, 주석만 하더라도 그것을 통일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은 『찬주분류두시』의 것을 좇는다고 하여도, 번역이 남아 있다. 산문이 아닌, 시의 번역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책의 간행이 번역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활자를 만들어야 하고, 조판을 해야 하고, 교정을 보아야 하고, 인쇄를 해야 하고, 제본을 해야 한다. 종이가 부족하면 그것을 조달해야 한다. 단기간에 책의 간행이 끝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7바)에서는 특이하게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 시기를 성종 14년(1483) 7월로 보고 있다. 김흔의 ‘번역두시서’에 의하면 성종 12년은 『두시언해』 제1권이 먼저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성종 12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종 14년 7월에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黃山谷詩)』를 언해하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그 이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의강(2006:76-77)에서는 유윤겸의 품계와 전보를 중시하고 있다. 유윤겸은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있었다. 그 후 약 1년 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하다가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품계가 승진되고 부제학에 임명된다. 성종 14년(1483) 2월 11일에는 통정대부 공조(工曹) 참의(參議)로 전보된다. 이를 이의강(2006:77)에서는 『두시언해』의 일이 끝났기 때문에 홍문관보다는 업무가 수월한 공조에 전보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문과의 사람이 공조에 전보된다는 것을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이라는 해석은 온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휴식을 취하게 하려면 그냥 쉬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윤겸을 공조에 전보한 것은 공조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활자를 만들고, 조판을 하고, 인쇄를 하는 작업이 이때에야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성종 16년에도 유윤겸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지칭하고 있다. 성종 19년(1488)에는 호조 참의가 되기도 한다. 이는 1484년(성종 15) 유윤겸은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를 내놓고 공조 참의로 간 것이 아니라, 홍문관 부제학의 직을 가지고 공조 참의로 발령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겸직을 한 것을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성종 13년(1482)년의 실록 기사에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 등이 흉년의 때를 맞아 출판 사업의 정지를 청하는 기록과 임금이 그것을 윤허하는 기록이 나온다. 중단을 요청하는 사업에 『두시』에 관한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9) 성종 13년(1482) 7월 6일 셋째 기사

해마다 흉년이 드는 것이 근고(近古)에 없는 바로서, 바야흐로 흉년을 구제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사전(四傳)과 춘추(春秋), 강목신증(綱目新增), 문한류선(文翰類選), 두시(杜詩), 이백시(李白詩), 용학구결(庸學口訣)과 같은 것을 모두 국(局)을 설치하여 공억(供億)이 따르게 되니, 만약 하루의 비용을 논하면 작으나, 날짜를 합하여 계산하면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약간의 자본이 됩니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9)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려우므로, 출판 사업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유윤겸 등이 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에 『두시(杜詩)』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성종 12년에 『두시언해』가 완성되었다면, 성종 13년에 따로 국(局)을 두어 예산을 써 가면서 또 『두시』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두시언해』는 성종 13년(1482)에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혹 이때의 일은 『두시언해』가 아닌 한문본을 말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으나 그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셋째, (7라, 마)에 의하면, 『두시언해』를 서너 달 동안에 전 25권을 한꺼번에 간행하려면, 모든 주석 전문가, 번역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야 하고, 또 나라의 모든 행정력과 출판 관련 물자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를 출판하는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9)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성종 12년에도 흉년이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시기에 『두시언해』 출판에 모든 행정력과 출판 물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9)는 하던 일도 중지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시에 대해서는 세종 15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예조 좌참판 권도(權蹈)가 상언하는 내용이다.

(10) 세종 15년(1433) 계축 둘째 기사

우리 태종 대왕께서 전에 두시(杜詩)를 읽어 보시려고 하시므로, 신의 선친 권근(權近)이 ‘그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되오니, 청컨대 『주역(周易)』을 강습하옵소서.’ 하여, 태종께서 그대로 좇으셨으니, 두시도 오히려 불가하다 하옵거늘, 그 이단의 황당한 글을 경연의 석상에서 강론하심이 옳겠습니까?

두시(杜詩)와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주역(周易)』을 강습하도록 청하여 태종이 그대로 좇았다는 것이다. 성종 15년(1484)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이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11) 성종 15년(1484) 갑진(甲辰) 첫째 기사

예전 태종(太宗)께서 두시(杜詩)를 진강하고자 하시니, 두시는 시사(詩史)로서 모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지만, 신의 조부(祖父) 권근(權近)이 오히려 진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 『문한유선』이겠습니까?

이를 보면, 『두시언해』 전권을 서너 달만에 완간하기 위하여 나라의 모든 연구 인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두시의 번역에 국가의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넷째, 김흔(金訢)의 문집인 『안락당집(顔樂堂集)』 권2에 실려 있는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는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12)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

몇 달 간 문서를 견주고 교감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凡閱幾月 第一卷先成]. 이를 정서하여 전하께 나아가 성상의 재가를 품의하니 성상께서 보시고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上賜覽曰可 令卒事). 이어 신에게 서문을 쓸 것을 명하시었다.

조위의 ‘두시서’와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흔의 서문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있고(이병주 1965, 1966), 『두시언해』가 두 개의 서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김일근(1964, 1966)의 입장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김흔의 ‘번역두시서’의 내용이 더 자세하다. 조위의 ‘두시서’에는 서문을 쓴 날짜가 명기되어 있어 김흔의 서문과 구별된다.

김흔의 서에서 자세한 것의 하나가 ‘제1권이 먼저 이루어져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병주(1966)에서는, 김일근(1964)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권1’이 아니라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으로 해석하였다.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안병희(1997)에서 보면 그것은 『두시언해』 전 25권 1질(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석이고 번역이고 판식이고 인쇄고 제본이고 간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재가를 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일근(1964)의 해석과 같이 여기서는 제1권의 원고가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2)의 밑줄 친 부분도 이해가 된다.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고 하는 것은 제1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편찬에 걸린 시간도 적합하게 되고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제1권의 원고를 만드는 데만 서너 달이 걸렸다는 것이므로 그 기간도 무리가 없게 된다.

다섯째,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서문 작성이 곧 그 책의 간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서문을 맨 나중에 쓰고 서문을 쓴 뒤에는 곧 출판이 되기 때문에 서문 연도와 출판 연도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간기(刊記)가 있으면 그에 적시된 날짜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고, 내사기가 있는 것은 내사 연도를 흔히 그 책의 간행 연대로 본다. 서문이 쓰여진 연대와 내사 연도가 다를 경우, 당연히 내사 연도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다. 25권이나 되는 전질이 여러 해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서문이 제1권에만 있다면, 서문이 쓰여진 시기는 당연히 간행 시기보다 몇 년이나 앞서게 된다.

『두시언해』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간행이 끝난 뒤에 그 한 질을 임금에게 진상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와 같은 언급은 실제로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여섯째, 김일근(1964)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잡고 있다. 이것은 성종이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를 명한 시기를 참고하여 그 전에 『두시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일근(1966)에서는 “물론 성종 14년 7월이란 절대 숫자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될 수 있는 것의 하나는 반치음 ‘ㅿ’의 소실과 관련된사실이다. 이기문(1972a, 1972b)에 의하면, 반치음 소실을 가장 먼저 보이는 문헌이 『두시언해』이다. 또 이기문(1972b: 37)에는 『두시언해』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이 반치음이 소실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이다. 그 뒤에 언급되는 것이 『번역박통사』이다. 중세어 자료를 검색해 보면, ‘’의 반치음이 소실되어 ‘이’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 1481년의 『두시언해』이다. 그 다음이 『구급간이방』(1489년)이고, 그 다음이 『삼강행실도』(동경대본)이고, 그 다음이 ‘순천김씨언간’이고, 그 다음이 『속삼강행실도』(1514년)이고, 그 다음이 『번역노걸대』(1517년)이다.

『두시언해』를 제외하면, 의서(醫書)나 구어적 특성을 많이 가지거나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에 ‘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비교하면, 『두시언해』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두시언해』는 구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책도 아니고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가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 이유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가 늦은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간본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은 책의 편찬이 꽤 오래 지속되었으며, 편찬 도중에 반치음 소실의 싹이 반영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구급간이방』(1489년)과 연대를 맞추면 『두시언해』 초간본이 완간되는 것은 아마도 1489년경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을 1481년부터 따지면 8년 뒤가 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3) 『두시언해』 간행 연도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4.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은 위에서 간행 연대를 논의하는 자리에 이미 등장하였다. 편찬 관여자의 이름이 등장한 예를 (4)와 (7)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14) 『두시언해』 편찬자에 대한 언급

가.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4가)

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다)

다.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7가)

라.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7나)

마. 최현배(1940/1976:122) : 『증보문헌비고』(권245, 장15)에 기대면, 성종이 여러 선비를 명하여 두시를 주석할 새 유윤겸이 백의(白衣)로서 뽑혔다 하며, 그 주석된 것을 언해하여서 두시언해를 역은 이는 성종조의 조위요, 의침도 언해에 협력하였다.

바. 안병희(1997) :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한 홍문관의 문신들이다. 이때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의침은 훨씬 전에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종 때의 두시 주해에는 승려와 백의(白衣)가 참여하였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으나, 언해에 대하여는 그러한 기록이 썩 후대에 나타날 뿐이다.

(14가)에서는 조위(曺偉), 의침(義砧)이 언급되고, (14나)에서는 유윤겸(柳允謙), 의침이 언급되고, (14다)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의 명기 없이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이 언급되고, (14라)에서는 유윤겸, 의침이 언급되고, (14마)에서는 조위, 의침이 언급되나, (14바)에서는 의침이 제외되고 있다.

이 문제에 깃들인 가장 큰 혼동의 하나는 두시에 대한 주석과 언해를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14다)가 전형적인 예이다. 두시에 대한 언해가 40년 동안 행해진 국가적인 대업이라고 한 것은 주석과 언해를 다 합해서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조위의 서문에 등장하는 두시언해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유윤겸이다. 그러나 (14마)에 의하면, 유윤겸은 주석과 관련되는 인물이다. 조위의 서문에서도 주석과 관련되는 문맥에 유윤겸이 등장한다.

실록 세조 1년(1455) 8월 26일 다섯 번째 기사에는 유윤겸과 함께 유휴복(柳休復)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하고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15) 세조 1년(1455) 8월 26일 유윤겸과 유휴복의 상소

유기(柳沂)의 손자인 유휴복(柳休復), 유윤겸(柳允謙)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할아버지 유기가 죄를 입을 때에, 아버지 유방선(柳方善)·유방경(柳方敬) 등이 이에 연좌되어 모두 신몰(身沒)하여 관노로 되었는데, 을미년에 사유(赦宥)를 받았으나, 언관(言官)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환속(還屬)되었다가, 정미년에 외방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고, 무신년에는 경외(京外)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또 할아버지 유기는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죄에는 간여하지 않았는데, 단지 어떤 사람이 민무구 등은 가련한 사람이라고 한 말을 유기와 더불어 같이 들었다고 말하여 이로써 죄를 입었고, 신의 아버지도 역시 오래지 않아서 사유하심을 입어 평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일은 신 등(等)이 출생하기 전에 입었던 것이니, 빌건대 홍은(鴻恩)을 내리시어 특별히 부시(赴試)를 허가하여 주소서.

유휴복, 유윤겸이 이로써 부시를 허락받아 유휴복은 1460년에, 유윤겸은 14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유윤겸이 두시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성종 11년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6) 성종 11년(1480) 10월 26일(임신), 시독관(侍讀官) 이창신(李昌臣)의 주청

“두시(杜詩)는 시가(詩家)의 근본인데, 전 사성(司成) 유윤겸이 그 아비 유방선(柳方善)에게 전수(傳受)하여 자못 정통하고 능숙하니, 청컨대 연소(年少)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수업(受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유윤겸이 이때 자신에게 수업을 받은 문신들과 함께 언해에 착수한 것으로 본 것이 안병희(1997:7)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누가 언해를 진행하였는지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윤겸이 두시에 능숙하고 정통하였다고 하니, 그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유휴복도 두시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가져 세종 때 백의로, 승 만우(卍雨)와 함께 두시의 주해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휴복은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에게 두시를 가르쳐 문리를 크게 깨치게 하였다고도 한다(안병희 1997 참조). 그러나 유휴복은 성종 때의 두시 언해와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휴복은, 당시 62세인 유윤겸의 종형으로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도 안병희(1997)이다.

조위(曺偉)는 성종이 유윤겸에게 두시언해를 명하였을 때(1481), 28세로 정6품의 직위에 있었다. 조위는 성종 6년(1475) 예문관 검열로 있었으나, 금주령을 어겨 처벌을 받기도 한다. 같은 해 10월 사헌부에서는 조위를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부처(付處, 조선시대의 형벌. 유형의 하나. 서울과 고향의 중간 지점에서 거처하게 하는 것)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특별히 원에 의하여 가족이 살고 있는 금산군(金山郡)에서 부처하게 하였다. 성종 7년(1476)에는 진도에 부처된 박증(朴增)과 함께 금산에 부처되었던 조위가 방면된다.

성종은 12년 10월 18일 권건, 김흔, 조위 등에게 “이단(異端)을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道)가 유행(流行)할 수 없으며 이단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어 바치게 한다. 성종 138권, 13년(1482) 2월 22일(신유) 기사에는 조위가 시독관(侍讀官)으로 ‘매’를 기르는 일에 관하여 진언하는 기사가 나온다. 성종 22년(1491) 5월 28일에는 조위가 동부승지로 임금에게 다른 관직에 임명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본직(本職)에 겸무(兼務)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청을 올린다. 성종 23년(1492) 10월 1일에는 조위가 좌승지로 전답의 부세 외에 요역(徭役)이 심히 번거로우니 이것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원망을 가질 듯하다는 진언도 한다. 조위는 성종 12년 이후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이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17)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 기사

『분류두시(分類杜詩)』를 내리며 이르기를, “서문은 바로 죄인 조위(曺偉)가 지은 것이니 삭제하고, 또 죄인 성현(成俔) 같은 사람이 지은 서문이나 발문도 아울러 삭제하라.”

여기서 『분류두시(分類杜詩)』는 『두시언해』를 가리킨다. 연산군 때 조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7)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에 『두시언해』에서 조위 서문이 삭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17)의 기사는 처음 『두시언해』에 실린 서문이 조위의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17)의 일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7)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포된 모든 『두시언해』를 수거하여 그 서문을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 개인에게 배포된 책을 다 수거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더구나 연산군의 재위는 10년으로 끝나므로, (17)의 왕명은 적어도 완전히는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혹시 김흔(金訢)의 서문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간본에서 조위의 서문을 제거한 뒤에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하여 김흔의 서문이 쓰여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김흔의 서문에 그것을 쓴 날짜가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위는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것일까? 서문을 쓴 것이 편찬에 참여하였다는 정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는가? 유윤겸에 대한 기록과 같이 조위도 두시에 정통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안병희(1997)에 의하면, 두시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문신들이다. 조위는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은 벼슬을 하였다. 그것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이다. 조위는 홍문관의 문신이라고 할 수 없다. 홍문관 문신들만이 언해에 참여한 것이라면, 조위는 서문만을 쓰고 언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증거도 찾아지지 않으므로, 조위를 편찬에 관여한 인물로 보기로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8) 『두시언해』의 편찬에 관여한 인물

가.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다. 조위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하였다. 연산군 10년에는 『분류두시』에서 조위의 서문을 삭제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두시언해』에 조위의 서문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가 두시 언해에 참여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서문만 쓰고 편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우므로, 그 반대의 증거나 나오지 않는 한, 조위를 편찬 참여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해 참여자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과의 문신들과 조위로 그 범위가 좁혀진다.

2.5. 『두시언해』의 저본(底本)

위의 (8)에 보인 바와 같이 세종 25년(1443)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는 송나라 서거인(徐居仁)이 편한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分類杜工部詩集)』에 의거하여 편차와 분류식을 따르고, 원나라 고숭란(高崇蘭)이 편한 『집천가주비점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批點分類杜工部詩集)』에 따라서 유진옹(劉辰翁)의 비점을 인쇄해 넣은 것이라 한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찬주분류두시』가 25권인 것과 『두시언해』가 25권인 것이 일치한다(김정은(n.d.), “『찬주분류두시』해제” 참조). 다만 책수는 『찬주분류두시』가 21책인 데 대하여 두시언해는 17책(혹은 19책)이어서 차이를 가진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찬주분류두시』는 왜 행의 길이에, 같은 시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는가? 이는 주석의 양을 고려한 조치로 여겨진다. 행이 길어지면 주석의 양이 많아질 수 있다. 따라서 주석이 많아져 주석만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의 길이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언해에서는 주석을 극히 절제하였기 때문에, 주석의 양을 고려하여 행의 길이를 조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2.6. 『두시언해』 중간본과 언어적 특징

중간본은, 장유(張維)의 서문에 의하면 인조 10년(1632)에 『두시언해』 초간본이 보기 힘들어지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대구부사 김상복(金相宓)의 도움을 받아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오숙은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한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개간(改刊)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 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간본은 초간본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있고, 이와는 달리 오각(誤刻)에 의한 잘못도 있다. 중간본은 전권이 전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초간본은 1, 2, 4권이 전하지 않고, 5권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로 알려져 있다.

중간본과 비교하면, 초간본에는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특징이고,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음(牙音) 표기에 ‘ㆁ(옛이응, 꼭지 달린 이응)’이 사용된 것도 초간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어느 경우에나 모두 반치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초간본이라도 ‘’[間]는 ‘하  예  몰애옛 며기로다(하늘 땅 사이에 한 모래의 갈매기로다)〈두시(초) 3:35ㄱ〉’와 같이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일반적이나, ‘虛空 밧긘  매 잇고  이옌 두 며기로다(허공 밖에는 한 매 있고, 강 사이에는 두 갈매기로다.)〈두시(초) 3:26ㄴ〉와 같이 ‘이’로 쓰인 것이 나타난다. 유니콩크 자료에 ‘ 故園에 가고져 논 미로다〈두시(초) 10:33ㄴ〉’ 및 ‘ 어느  시러곰 됴히 열려뇨〈두시(초) 10:39ㄴ〉’와 같이 ‘’이 ‘’과 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입력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영인본에는 이 자리에 반치음이 그대로 있다.

초간본에도 반치음이 소실된 예가 나타나는 것은 초간본의 간행이 늦어져 후대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두시언해가 1481년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초간본에도 ‘상구(上句)’과 같은 표기가 나타나고 ‘구름’과 같은 표기도 나타난다. 이는 초간본에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깃[羽]’에 대하여 ‘짓’과 같은 표기가 초간본에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짓’이란 어형이 잘 나타나지 않고 ‘깃’이 더 일반적인데, 『두시언해』에는 ‘깃’도 나타나고 ‘짓’도 나타난다. ‘안자셔 鴛鴦 다딜어 닐에 호니 기시 기우니 翡翠ㅣ 도다(앉아서 원앙을 다구쳐 일어나게 하니 깃이 기우니 물총새가가 나직하도다.)〈두시(초) 15:26ㄴ〉’에서와 같이 당시의 일반적인 어형인 ‘깃’이 나타나는 반면, ‘時節이 바라온 제 사 이리 急促니 미 거스리 부니 짓과 터리왜 야디놋다(시절이 위태로운 때 사람의 일이 촉급한데, 바람이 거슬려 부니 깃과 털이 해어지는구나.)〈두시(초) 7:15ㄴ〉’에서와 같이 ‘짓’이 쓰여, 구개음화가 적용된 예가 있음을 보인다. 두시언해가 1481년 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3. 『두시언해』 권18 해제

3.1. 『두시언해』 권18의 서지 사항

본 역주은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한 『두시언해』 권지 17, 18 에서 85쪽~130쪽에 영인된 권지 18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십팔(分類杜工部詩 卷之十八)’이며, 판심제는 ‘두시 십팔(杜詩十八)’이다.

『두시언해』 권18은 전체가 23장으로, 언해된 시는 대분류로 ‘화(花), 초(草), 죽(竹), 목(木)’의 4부가 있으며, 특이하게 중분류라 할 수 있는 강두오영(江頭五詠)이 있다.

각 부에는 ‘화(花)’에 9편(16수), 강두오영(江頭五詠)에 3편, 초(草)에 3편, 죽(竹)에 3편, 목(木)에 14편 등 총 30편의 시가 언해되어 있다. 여기서 ‘편’은 제목을 중심으로 그 편수를 센 것이다. 하나의 제목에도 여러 수(首)의 시가 포함될 수 있다.

형식상으로만 보면, 대분류 제목 ‘화(花)’에 ‘탄정전감국화(歎庭前甘菊花)’ 1편만이 언해되어 있는 것과 같이 되어 있다. 대분류 제목 ‘화(花)’의 할주에는 ‘고시(古詩) 3수, 율시(律詩) 13수’와 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화(花)’에는 16수의 시가 언해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되는 다른 특이점은 형식상 ‘강두오영(江頭五詠)’에 9편의 시가 언해되어 있는 것이다. ‘강두오영’의 할주에는 ‘이수(二首)는 견조문(見鳥門)다(2수는 ‘새’부에서 보았다)’와 같이 되어 있으므로, ‘강두오영’에 속할 수 있는 것은 3수뿐이다. 그러나 ‘강두오영’에는 6편의 시가 더 있다. ‘강두오영’에 넷째 수로 포함된 ‘풍우간주전락화의위신구(風雨看舟前落花戱爲新句)’는 ‘배 앞’이 드러나 있으므로, 내용상 ‘강두’에 속하지 않는다. 이 제목에는 ‘낙화’가 들어 있어, 이 시는 대분류 ‘화(花)’에는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분류 ‘화(花)’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탄정전감국화’ 1수를 포함하여, ‘강두오영’의 3수 및 나머지 5수와 ‘강반독보심화칠절구(江畔獨步尋花七絶句)’가 포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끝의 제목에는 ‘칠절구(七絶句)’가 들어 있다. 이를 7수의 시로 보면, ‘화’에는 16수의 시가 포함되는 것이 된다. 대분류 ‘화(花)’에 포함되는 시를 ‘고시(古詩) 3수, 율시(律詩) 13수’라 한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강두오영’이 ‘중분류 제목’이라는 것인데, 형식상 대분류 제목과 위계에 차이가 없이 제시되어 혼동의 염려가 있다. ‘강두오영’에는 ‘고시 몇 수’ 혹은 ‘율시 몇 수’와 같은 할주가 달려 있지 않다. 대분류 제목에 이러한 할주가 빠지는 일이 없는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는 ‘강두오영’이 대분류 제목이 아님을 말해 주는 하나의 징표가 될 수 있다.

『두시언해』 권18, 제1장 앞면

다음 쪽의 오른쪽에 보인 사진은 1955년 통문관에서 영인 간행한 두시언해 권18의 제1면을 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차이지는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차이를 보인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두시언해』에는 ‘언해’에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자세한 주석이나 주변적인 내용도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3.2. 『두시언해』 권18의 오자, 탈자, 희귀어 등

3.2.1. 언해, 할주 및 원문의 탈자, 오자 등

(1) (2ㄱ) 원문의 ‘서근유인점(庶近幽人占)’이 ‘幽隱 사 占得호매 거 갓갑도다’와 같이 번역되었다. 언해자는 원문의 ‘서(庶)’를 ‘거(거의)’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그 언해가 ‘幽隱 사 占得호매 거 갓갑도다(숨은 사람의 차지함에 거의 가깝도다)’와 같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서(庶)’는 ‘바라다’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이를 반영하면, 원문의 해당 구절은 ‘숨은 사람의 차지가 되기를 바란다’와 같이 된다.

(2) (7ㄴ) 원문의 ‘보답춘광지유처(報荅春光知有處)’의 한자 ‘답(答)’이 ‘답(荅)’으로 되어 있고, 할주의 ‘수를 머거 人生 보내요미 春光報荅논 이리라’에서도 ‘답(答)’이 ‘답(荅)’으로 되어 있다. 『두시언해』 전체에서 한자 ‘답(答)’이 ‘답(荅)’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두시언해』 필사자의 개인적인 습관이나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답(荅)’은 ‘좀콩, 팥, 마름쇠, 당하다’를 뜻하고, ‘답(答)’은 ‘대답하다, 맞다, 맞추다’를 뜻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구별했어야 한다.

(3) (7ㄴ~8ㄱ) 원문의 ‘류련희접시시무(留連戱蝶時時舞)’에 대한 언해문이 ‘머므□셔 노 □ 時時예 춤츠고’와 같이 네모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머므□셔’는 ‘류(留)’에 대한 번역이므로, 네모 부분은 ‘러’인 것이 분명하고, ‘□’ 부분은 원문의 ‘접(蝶)’에 대한 번역이므로, 네모 부분은 ‘나’인 것이 분명하다.

(4) (13ㄱ) 언해문 ‘큰 지비 다가 기울면 梁棟 오져 조로이 너기리니(큰 집이 만약 기울면 들보와 기둥 만들고자(만들려고) 중요하게 여길 것이니)’에서 ‘조로이’는 ‘종요로이, 종요롭게, 중요하게’를 뜻하는 말로, ‘조[宗要]+-(형용사 파생 접미사)-+-이(부사 파생 접미사)’에서 ‘--’의 ‘ㅂ’이 연철되어 ‘비’가 되고, ‘ㅂ’이 약화되어 ‘-’가 되고, 다시 ‘ㅸ’이 [w]로 약화됨에 따라, ‘’가 ‘로’로 되고, 다시 ‘’가 ‘’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는 음운 법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 할 수 있으나, 표기법상으로는 불규칙한 것, 혹은 일탈형(逸脫形)이라 할 수 있다.

(5) (16ㄴ) 언해문 ‘혀니 다 벌어지로소니 호매 맛호 일흐리로다(깨뜨리니 다 벌레인 것이니, 따거나 줍는 것에 마땅함을 잃을 것이로다(따거나 줍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다)’에서 ‘호매’는 ‘[摘, 采]-+-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애(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와 같이 분석되는 것이지만, ‘-’는 ‘-’의 잘못이다. ‘다’의 어간을 ‘다’로 잘못 인식한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따다’를 ‘땋다’로 잘못 아는 것과 흡사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어간이 ‘-’라면, 거기에 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 ‘-오-’를 가진 명사형 어미 ‘-ㅁ’과 처격의 부사격 조사 ‘애’가 연결 되면, ‘매’가 된다.

(6) (16ㄴ) 원문 ‘분연불적구(紛然不適口) 기지존기피(豈止存其皮)’에 대한 할주문 ‘이 히 업서 거플 이실  아니라 이베 맛디 몯디 니 시라(이는 살이 없어 껍질만 있을 뿐 아니라, 입에 맞지 못하다 이르는 것이다)’에서 ‘몯디’는 ‘몯다’의 잘못이다.

(7) (19ㄱ) 원문의 ‘천계위수사(天雞爲愁思)’의 ‘천(天)’이 언해문에서는 ‘대(大)’와 같이 ‘천(天)’의 상부 ‘한 일 획’이 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아주 짧은 가로획과 같은 것이 보이는 듯도 하나, 분명하지 않다.

(8) (21ㄴ) 원문 ‘이근방이첨(移根方爾瞻)’을 언해에서는 ‘옮겨 심군 불휘 뵈야로 너를 보노라(옮겨 심은 뿌리를 바야흐로 너를 보노라)’에서 ‘불휘를’의 ‘를’은 ‘는’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옮겨 심은 뿌리’는 두보가 막부에 와서 제공받은 직책을 가리킨다. 그것은 두보의 직책이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엄무(嚴武)이다. 엄무는 ‘너’로 되어 있다.

(9) (22ㄱ) 원문 ‘위멱상근수촌재(爲覔霜根數寸栽)’를 언해자는 ‘서리옛 불휘 두 寸만 栽種을 爲야 얻노라’와 같이 번역하였다. ‘위멱(爲覔)’의 ‘위(爲)’를 부사적인 성분인 ‘위하여’와 같이 번역한 것이다. ‘위멱(爲覔)’은 ‘찾는 것을 하다’의 뜻이므로, ‘찾다, 얻다’의 뜻인데, 자수를 맞추기 위하여 한 글자를 더 쓴 것이거나, ‘찾는 것, 얻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진 것인데, ‘위(爲)야’ 번역은 문맥에 맞는 것이라 볼 수 없다.

3.2.2. 언해 번역에 나타나는 특이한 문제의 해석

(1) (8ㄱ) 할주문의 ‘즉용사(卽欲死) 너모 얏 마리라’는 ‘곧 죽고자 하는 것은 너무 사랑하여라는 말이다’와 같이 풀이된다. ‘야’에 사이시옷 혹은 관형격 조사인 ‘ㅅ’이 쓰인 것이 특이하다. ‘곧 죽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여의 말이다’와 같이 ‘ㅅ’을 직접 ‘의’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그것은 현대어로는 자연스럽지 않다. ‘ㅅ’을 관형격 조사가 아닌 사이시옷으로 보는 방법도 가능하고, 관형격 조사 ‘ㅅ’이 가진 특수한 기능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 鶴 도라오 엇뎨 더듸니오(혼자의 학은 돌아옴을(이) 어찌 더딘 것인가’〈두시(초) 14:31ㄱ〉와 같이 부사 뒤에 ‘ㅅ’이 쓰인 예도 있다.

(2) (14ㄴ) 언해문 ‘時物을 보고 늘구믈 嗟歎다니 어긔 미처 와 凄凉호 慰勞노라’는 ‘제철 물건을 보고 늙음을 한탄하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처량함을 위로하노라’와 같이 풀이될 수 있다. ‘어긔 미처 와’는 우선 ‘여기 미쳐 와’와 같은 의미인데, ‘여기까지 와’의 뜻이다. 중세어에서 ‘급(及)’에 해당하는 말은 ‘및다’로 보아야 한다. 현대어와 같이 ‘미치다’였다면, 그 연결 어미 ‘-아/어’ 결합형은 ‘미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어에서 ‘미쳐’는 ‘광(狂)’의 의미로 쓰였다.

(3) (14ㄴ) 언해문 ‘예 사라셔 足히 곰 내 늘근  보내리로소니 기운 盖 폇호 기들오노라(여기 살아서 족히 그것으로써 내 늙은 모양을(내 늙음을) 보낼 것이니, 기운 덮개(지붕) 펴 있는 듯함을 기다리노라)’에서 ‘기운 개(盖)’의 ‘개(盖)’는 ‘덮개’의 뜻인데, 높이 자란 소나무의 윗부분이 지붕과 같이 양옆으로 퍼져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4) (15ㄱ) 언해문 ‘偃蹇야 龍과 버믜 얼굴 니 제 主意 과 구룸 모다 슈믈 當놋다(위엄을 가져 용과 범의 모습과 같으니, 저의 기상은 바람과 구름 합해 놓은 것을 감당하도다)’에서 ‘주의(主意)’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주된 뜻, 주된 의미, 주된 주장,주된 의지’와 같이 하여서는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주의(主意)’를 주관하다와 같이 풀이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기상(氣象)’으로 해석하였다.

(5) (16ㄴ) 언해문 ‘슬프다 여름 조미 져그니 싀오 워 棠梨ㅅ 맛 도다(슬프다, 열매 맺음이 적으니, 시고 떫어 산이스랏(산앵두) 맛 같도다)’에서 ‘당리(棠梨)’가 우리말로 어떤 식물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당리(棠梨)’를 대부분 ‘팥배’로 풀이하고 있다. ‘당리(棠梨)’의 ‘리(梨)’가 배나무나 배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중시하면 ‘팥배’로 번역된다. 그러나 할주에는 ‘당자(棠子)’에 붉은 것과 흰 것의 둘이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당자(棠子)’에는 ‘리(梨)’자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당(棠)’에도 팥배의 뜻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산앵두’의 뜻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풀이를 중시하기로 한다. 할주에 ‘당자(棠子)’에 붉은 것과 흰 것의 둘이 있다는 기술이, 산이스랏꽃이 붉은 것과 흰 것의 둘이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산이스랏의 열매는 모두 붉은 것으로 되어 있어, 흰색이 열매의 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꽃의 색깔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6) (18ㄱ) 언해문의 ‘서르 빗기 도최 모면 러듀미 蒲柳ㅣ라와 몬제로다’에서 앞절 ‘서르 빗기 도최 모면’은 원문 ‘교횡집부근(交橫集斧斤)’에 대한 번역이다. 현대역으로 보이면, ‘서로 교차하여 도끼가 모이면’이 된다. 그러나 정작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문제이다. ‘도최 모면’은 ‘도끼를 든 사람이 모이면’의 뜻으로 이해된다. ‘교횡(交橫)’은 ‘여기저기서’의 뜻으로 이해된다.

(7) (18ㄴ) 할주문에 ‘莫記 이운  모 시라’가 있는데, 이 부분의 원문은 ‘ 향당개막기(鄕黨皆莫記)’이고, 이 부분의 언해문은 ‘鄕黨앳 사미 다 모놋다(시골 마을사람들이 다 모르는구나)’이다. ‘이운 ’는 ‘시든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중세어 자료에서 ‘’가 소유물을 뜻하는 경우 외에 일반 문맥에서 ‘것’을 뜻하는 의존 명사로 쓰이는 일은 다른 예에서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8) (18ㄴ~19ㄱ) 언해문의 ‘아디 몯리로다 몃 즈믄 오 슬퍼 사롤 디 업도다’에서 ‘오’는 ‘[年]+고(의문 보조사) ’와 같이도 분석할 수 있고, ‘[年]#이(지정 형용사)-+-고(의문 어미)’와 같이도 분석될 수 있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 것으로 본다.

(9) (19ㄱ)의 원문 ‘천계위수사(天雞爲愁思)’에 대한 언해가 ‘大〈天〉雞 爲야 시름놋다’와 같이 되어 있다. 원문 ‘천계위수사(天鷄爲愁思)’의 ‘위(爲)’를 언해자는 ‘위(爲)야’와 같이 부사적인 성분으로 해석하였다. 이 ‘위(爲)야’는 ‘천계(天鷄)’을 목적 대상으로 해석케 하는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위(爲)’는 본래 ‘되다’의 뜻을 가지는 서술어이므로, ‘천계위수사(天鷄爲愁思)’는 ‘천계가 시름이 되도다’와 같이 번역되어야 할 곳이다. 언해는 다소 의역에 치우친 것이거나 ‘위(爲)’를 ‘위하여’와 같이 해석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번역이라 할 수 있다.

3.2.3. 희귀어 또는 특이어 등

(1) (1ㄱ) ‘프른 곳부리라 重陽애  직디 아니도다(푸른 꽃부리라 중양절에 땀 직하지 아니하도다)’의 ‘곳부리’는 원문의 ‘청예(靑蘂)’를 번역한 것으로, 원문의 ‘예(蘂)’는 ‘꽃술’을 가리키는 것인데, 언해 담당자는 이를 ‘부리’로 번역하였다. ‘부리’는 꽃잎 전체를 가리킨다. 중세어에 ‘꽃술’을 뜻하는 ‘여희’라는 단어가 있었으나, ‘여희’의 용례가 단 하나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여희’ 대신 ‘부리’라는 단어가 다의적으로 ‘부리’와 ‘꽃술’을 가리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세어 자료에서 현대의 ‘꽃술’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곶술’과 같은 단어는 찾아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꽃술’을 가리킬 때에는 ‘예(蘂)’를 그대로 한자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두시언해 18권 5ㄴ에서의 ‘화저(花底)’에 그러한 예가 나온다. ¶ 蘂 여희 예〈훈몽 하 :2ㄴ〉. 블근 고 즈믄 예 扶持얏고 누른 입거우즌 만화 비취엿도다(붉은 꽃은 천의 꽃술을 떠받치고 있고, 누런 수염은 만의 꽃을 비추고 있도다.)〈두시(초) 18:5ㄴ〉.

(2) (3ㄴ) ‘불인 고지 이츠며 게을어  바니’의 ‘바니’는 원문 ‘취화곤라방주즙(吹花困懶旁舟楫)’의 ‘방(旁)’을 번역한 것이다. ‘바니’는 ‘발[旁]-+-(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니(연결 어미)’와 같이 분석된다. 중세어에 ‘같이하다, 곁에 따르다, 옆을 스치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 ‘발다’라는 동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어로는 ‘바래다가 주다’와 같이 쓰이는 ‘바래다’가 중세어 ‘발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4ㄴ)의 언해문 ‘   남기 드리염 프니(江邊一樹垂垂發)’에서 ‘드리염’은 ‘드리[垂]-+-엄(부사 파생 접미사)’으로 ‘드리워. 늘어뜨려’의 뜻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리-’는 현대어의 ‘드리우-’에 해당한다. ‘-염’은 ‘띄엄띄엄, 쉬엄쉬엄, 긔엄긔엄(기어서 기어서)’의 ‘-엄’과 그 성격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매화나무가 드리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한데, 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꽃이 많이 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4) (8ㄴ)의 언해문의 ‘서리와 눈괘 번 저져 얼외면’은 ‘상설일점응(霜雪一霑凝)’의 번역이다. 언해문의 ‘얼외면’이란 형식은 다른 중세어 자료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얼외-’가 원문의 ‘응(凝)’에 해당되므로, ‘얼-’은 ‘얼음이 얼다’의 ‘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중세어 자료에서 ‘얼외면’의 ‘-외-’와 같은 파생 접미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얼-’에 연결되는 일반적인 사동 접미사는 ‘-우-’이다. ‘얼외-’의 ‘-오-’는 모음조화에는 맞지 않으나, ‘-우-’에 대응되는 사동 접미사라 할 수 있다. ‘-외-’의 ‘-이-’는 피동 접미사인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는 ‘얼리게 되면’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를 간략화한 것이 ‘얼려지면, 얼게 되면’과 같은 풀이이다.

(5) (9ㄱ) 언해문 ‘모딘 불휘 수이 너추러 나니(모진 뿌리 쉽게 뻗어 나니)’에서 ‘수이’는 원문의 ‘이(易)’에 대한 번역으로, 시조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부사이다. ‘수이 감을 자랑마라’와 같은 예의 ‘수이’가 그러한 예이다. 중세어에 ‘*숩-’이란 어형이 나타나면 ‘수이’의 형성은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숩-’이란 어형은 찾아지지 않는다. ‘쉽+이〉쉬〉수〉수이’와 같은 변화를 상정해 볼 수도 있고, ‘*숩-’과 같은 가상적 어간을 상정해볼 수도 있다.

(6) (10ㄱ~ㄴ) 언해문 ‘매셔 이에여 러듀미(강에서 흔들리어 떨어짐이)’에서 ‘이에여’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형식이다. ‘흔들다[搖]’를 뜻하는 타동사 ‘이어-’에 피동 접미사 ‘-이-’가 연결되고 다시 연결 어미 ‘-어’가 이어진 구성이다. ‘흔들리어’를 뜻하는 구성이나, ‘이에여’란 형식은 다른 데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7) (11ㄱ)의 언해문 ‘오직 여곰 버히디 마라 모로매 구루믈 이저 기로 볼디로다(但令無翦伐 會見拂雲長)’에나타나는 ‘이저’는 ‘[振, 拂]-+잊[虧(휴:이지러지다)]-+-어(연결 어미)’와 같이 분석되는 것으로. 기본형은 ‘잊다’가 된다. 이를 옛말 사전에서는 모두 ‘떨치다’와 같이 풀이하고 있으나, ‘펄렁펄렁 흔들다, 출렁출렁 물결치다’와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구루믈 이저’는 ‘구름을 펄렁펄렁 흔들어’와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쪽의 ‘혀 프른 거슬 화 보내야 믓겨를 잇게 라(幸分蒼翠拂波濤)’는 ‘행여(혹시라도) 푸른 것을 나누어 보내어 물결을 출렁출렁 파도치게 하라’와 같이 풀이할 수 있다.

(8) (11ㄴ)의 언해문 ‘마시 니 녀르멧 벌어지 어여 가고(味苦夏蟲避)’의 ‘어여’는 원문의 ‘피(避)’에 해당하는 말로, ‘피하여’를 뜻한다. ‘어여’는 ‘어이다’란 동사가 있었음을 말한다. ‘어이다’는 ‘돌아가다’를 뜻하는 ‘에다’의 선대형이라 할 수 있다. 사전에서는 이를 ‘에다’에서 보라고 하고 있다. ‘어이다’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한다.

(9) (12ㄴ) 언해문 ‘노 가지와 읏듬괘  두들게 녜외니 깁수윈 칠욘 戶牗ㅣ 뷔엿더라(높은 가지와 줄기가 벌판의 언덕에 예스러우니, 깊숙한(깊숙하게) 칠한 문과 창이 비어 있더라(열려 있더라)’에서 ‘녜외니’는 ‘예스러우니’를 뜻하는 말로, ‘녜[故]’에 접미사 ‘-외-’가 쓰였다. ‘깁수윈’의 ‘깁수위-’는 ‘깊숙하-’의 옛말로 풀이되고 있으나, ‘-수위-’의 어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0) (13ㄱ) 언해문 ‘큰 지비 다가 기울면 梁棟 오져 조로이 너기리니(큰 집이 만약 기울면 들보와 기둥 만들고자(만들려고) 중요하게 여길 것이니)’에서 ‘조로이’는 ‘종요로이, 종요롭게, 중요하게’를 뜻하는 말로, ‘조[宗要]+-(형용사 파생 접미사)-+-이(부사 파생 접미사)’에서 ‘--’의 ‘ㅂ’이 연철되어 ‘-비’가 되고, ‘ㅂ’이 약화되어 ‘-’가 되고, 다시 ‘ㅸ’이 [w]로 약화됨에 따라, 그 영향으로 ‘’가 ‘로’로 되고, 다시 ‘’가 ‘’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11) (13ㄴ~14ㄱ) 언해문의 ‘幽深 비치 幸혀 秀發니 드믄 가지  되오와닷도다(깊고 그윽한 빛이 다행히 뛰어나게 발하니, 드문 가지 또 위풍당당히 솟아올라 있도다)’에서 ‘되오와닷도다’의 ‘되오왇다’는 원문의 ‘앙장(昻藏)’을 번역한 말로, ‘위풍당당하다. 위풍당당히 솟아올라 있다’를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사전에서는 이것을 ‘되알지다’와 같이 풀이한 곳도 있고, ‘되게 해서 돋우다’와 같이 풀이한 곳도 있다. 나뭇가지에 대하여 ‘되알지다’는 어울리지 않고, ‘되게 해서 돋우다’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되오왇-’의 용례는 이 예와, 〈월인석보 2:67ㄴ〉의 ‘明帝 니샤 아래  두들기 절로 되오와니 바 奇異 光明이 이실 (명제 이르시되, 예전에 한 언덕이 저절로 위풍당당히 솟아올라 밤에 기이한 광명이 있기 때문에 )’의 두 예가 거의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12) (14ㄴ) 언해문 ‘내 불휘와 고고리 업수니 너를 야 슈미  아라도다(내가 뿌리와 꼭지가 없으니, 너를 짝하고 있었던 것이 또 아스라하도다)’에서 ‘고고리’는 ‘꼭지’를 뜻한다. 꼭지에 의하여 꽃이 가지에 붙어 있게 된다.

(13) (15ㄱ) 언해문 ‘즈믄  後에 慘憺히 하해 서려 슈믈 矜誇디 말라(천년 후에 장엄하게 조용히 하늘에 서려 있음을 자랑하지 말라)’의 ‘참담(慘憺)히’의 해석이 문제이다. ‘참담(慘澹)’은 ‘딱하고 슬픈 모양, 비참하고 아픈 모양, 얼굴에 독기가 있는 모양’ 등의 의미를 가진다. 천년 후의 잣나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므로, ‘딱하고 슬픈 모양’은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장엄하게 하늘을 뒤덮은 모양이 어울린다. ‘참(慘)’이 ‘비참하다’의 뜻을 가지는 것이 문제인데, 이는 장엄한 것을 보는 시인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을 보는 심정은 비참한 것일 수 있다.

(14) (18ㄴ) 언해문 ‘우르적시 黃雀이 딕주리니 서늘 다보 로 기우려 보놋다’의 ‘우르적시’은 원문의 ‘추추(啾啾)’에 해당하는 우리말이다. ‘추추(啾啾)’는 ‘여럿의 소리, 시끄러운 소리, 웅얼거리다’를 뜻한다. ‘우르적시’에서 ‘우르-’는 ‘울[啼]-+-으(조음소)-’와 같이 분석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 ‘적시’에서 ‘적시-’의 어원이 밝혀지지 않는다. ‘울부짖-’의 ‘짖[吠]-’과는 그 음성적인 거리가 상당하다. 옛 문헌 자료에 ‘우르적시-’가 나타나는 것도 여기뿐이다.

(18ㄴ)의 같은 예문에서 ‘딕주리니’의 ‘딕주리-’는 원문의 ‘탁(啄)’에 해당된다. ‘딕주리다’는 ‘거듭거듭 쪼다. 거듭거듭 찍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딕주리-’에서 ‘딕-’은 현대어의 ‘찍[啄(탁), 斧(부:찍다), 斫(작:찍다)]-’에 해당하는 말로 분석될 수 있다. 그러나 ‘주리-’의 어원이 불명하다.

(15) (19ㄱ) 언해문 ‘부  아다온 氣運을 앗놋다(꿰어 부는 바람은 아름다운 기운을 빼앗는구나)’에서 ‘부’은 ‘[徹]-+불[吹]-+-(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ㄴ(관형사형 어미)’과 같은 구성으로, 현대어의 ‘꿰[徹]-’에 해당하는 ‘-’의 용례도 발견되고, ‘블[吹]-’의 용례도 다소 발견되나, 이 둘이 복합하여 나타나는 ‘불-’의 용례는 이 예가 유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살 머겨 쏘시니 그 사리 스믈 여듧 부플 다 여 해 차 가아 鐵圍山애 바니(살을 장전하여 쏘시니 그 살이 스믈여덟 북을 다 꿰어 땅을 통해 가 철위산에 박히니)〈석상 3:1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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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언해』 권19 해제

김성주

1. 서론

이 책은 『두시언해』 권19에 대한 역주서이다. 『두시언해』 권19는 모두 3개의 초간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고, 둘째는 고 이인영 구장본으로 현재 통문관에 소장된 책이며, 셋째는 개인소장본이다. 이 중에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교정본으로 권17, 권18과 함께 한 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한국어연구』 2에 영인이 있으며, 안병희 님의 간략한 해제도 있다. 이 글은 안병희(2004)에 기대어 작성한 것이다.

국어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두시언해』에 대해서 연구되어 왔다. 이병주(1959)와 전재호(1973)를 비롯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에는 ‘심경호, 안병희, 이종묵, 안대회, 정재영, 김성규, 조남호, 이현희’ 님이 서지, 한문학, 국어학적으로 두시와 『두시언해』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러나 ‘두시언해’는 국어학도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문인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고, 이를 번역한 ‘언해’도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여 직역 위주의 번역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시언해』를 이해하려면 역주서가 필요하다. 두시의 주석서 내지 번역서로는 중국의 경우 韓成武·張志民(1998)의 『두보시전역(杜甫詩全譯)』과 蕭滌非(2014)의 『두보전집교주(杜甫全集校注)』가 있고, 일본의 경우 鈴木虎雄(1928~31/1978)의 『두보전시집(杜甫全詩集) 1-4』과 吉川幸次郞의 원고를 제자인 興膳宏이 편집하여 2016년에 출판한 『두보시주(杜甫詩注)』 제1~10책, 그리고 일본의 한시 전공자들이 모여 전체 두보시를 번역한 下定雅弘·松原郞(2016)의 『두보전시역주(杜甫全詩譯註)』 1~4가 있다. 한국에서 나온 번역서나 주석서로는 일찍이 중요 두시에 대해서 이병주(1958/1970)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注)』가 있고, 중국 한시 전공자들이 모여서 전체 두시를 주석하고 번역할 목적으로 이영주 외(1999)의 『두보초기시역해』를 필두로, 최근의 김만원 외(2016)의 『정본완역 두보전집 제7권(성도 2차 시기)』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체 두시에 대한 최초의 번역인 『두시언해』가 15세기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현대국어로 된 전체 두시에 대한 주석서나 번역서가 없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두시언해』의 초간본을 대상으로 『두시언해』의 역주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책도 이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시언해』 초간본은 국립중앙박물관본, 통문관본(고 이인영 구장본), 개인소장본 등 세 개가 있다.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본은 교정본으로서 『한국어연구』 2에 권17, 권18과 함께 영인되었고, 나머지 두 본은 영인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은 교정본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를 대상으로 주석과 역주를 하였으며 해제도 이 책에 대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에 대해서는 일찍이 고 안병희 님께서 영인과 함께 간략한 해제를 제시하였다. 본인은 이 책을 실사하지 못하였으므로 안병희(2004)의 기술에 기대서 이 책의 서지 사항을 간략히 작성한다.

2. 『두시언해』 권 제19의 교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두시언해』 권19(초간본)는 교정본이다. 현재 초간본 중 교정본은 가람문고본 권6, 7과 국립중앙박물관본 권17, 18, 19가 있다. 그중 권19는 오자가 많아서 상당한 교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병희(1998 : 126, 2004 : 100)는 『두시언해』 초간본 중 교정되지 않은 통문관 소장본과 교정되어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비교하여 『두시언해」 권17, 18, 19의 교정 내용을 제시하였다. 여기서는 이 글에서 권19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제한다.

(1) 가. 思憶시(니라)(4ㄱ3뒤) ← 시놋다

나.  (鑑)(5ㄱ4앞) ←  보

다. (黃衣)書卷(8ㄱ7앞) ← 누른 書卷

라. (그저긔)(12ㄴ5앞) ←  모

마. 기(르)로(14ㄱ6뒤) ← 기로로

바. 璜(고)(16ㄱ4뒤) ← 璜니

사. 絹(이니 古)(20ㄱ2) ← 絹也ㅣ니

아. (훤)도다(26ㄱ5뒤) ← 어위도다

자. 喩(薛丈)ㅣ(34ㄴ5뒤) ← 喩李四ㅣ

차. 言(薛丈)ㅣ(35ㄱ1앞) ← 言李四ㅣ

카. (이 두이 나라셔)(36ㄴ4앞) ← 用神女與鶴事야

타. (굴근 모기)(40ㄴ5뒤) ← 모기 굵게

파. 먹(노라)(42ㄱ5뒤) ← 먹놋다

하. 애( 덥다노)라 ← 애 데요라

거. 夜(雨剪春)(43ㄱ1뒤) ← 夜剪春雨

너. 맛(나)놋다(47ㄱ6뒤) ← 맛낫놋다

더. (혀) 잇(47ㄱ8앞) ← 몃다 잇

(2) 가. 醉거(1ㄱ1앞) → 醉커

나. 喩薛丈ㅣ(34ㄴ5뒤) → 喩薛丈이

다. 言薛丈ㅣ(35ㄱ1앞) → 言薛丈이

라. 뷘 닶 빗(40ㄴ7앞) → 뷘  빗

(1)은 『두시언해』 권19 중 교정본이 아닌 통문관 소장본과 교정본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의 비교를 통해서 교정본인 국박본에 교정되어 있는 것들을 옮긴 것이고, (2)는 『두시언해』 중간본에서 교정본인 국박본의 내용이 수정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1)과 (2)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국박본이 교정본임에도 불구하고 교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두시언해』의 출판은 빨리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정은 대부분 잘못된 글자를 오려내고 을해자로 새로 인쇄한 종이를 붙이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혹 글자의 획만 오려내고 붙인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교정의 대상이 된 오자는 원고에서 잘못된 것과 조판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중에서도 확실한 것으로는 (1)자, (1)차의 ‘李四’와 ‘薛丈’의 혼동, (1더)의 ‘몃다’와 ‘혀’는 원래부터 원고가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3. 『두시언해』 권19의 내용과 특징

주지하다시피 『두시언해』의 저본은 『찬주분류두시』이며, 『찬주분류두시』의 저본은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와 『집천가주비점두공부시집』이다. 전자는 두시를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고, 후자는 두시를 연대순으로 나열해 놓은 것이다. 『두시언해』의 저본인 『찬주분류두시』는 시의 배열은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와 같이 하였고, 시의 주석은 『집천가주비점두공부시집』의 내용을 많이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두시언해』에서의 두시의 배열은 『집천가주비점두공부시집』의 그것과 동일하다.

『두시언해』 권19는 ‘투증(投贈)’과 ‘기간 상(寄簡上)’의 두 주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자에는 ‘고시 1수’와 ‘율시 6수’가 후자에는 ‘고시 17수’가 들어 있다. 아래에서 ‘투증(投贈)’과 ‘기간 상(寄簡上)’에 들어 있는 시를 제시한다.

(3) 가. 投贈<원주>【古詩一首 律詩六首】 : 01「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오언고시), 02「上韋左相二十韻」(오언배율), 03「贈韋左丞丈濟」(오언배율), 04「遣悶奉呈嚴公二十韻」(오언배율), 05「奉贈鮮于京兆二十韻」(오언배율), 06「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오언배율), 07「敬贈鄭諫議十韻」(오언배율)

나. 寄簡上<원주>【古詩十七首】 : 08「寄韓諫議註」(칠언고시), 09「暮秋枉裴道州手札率爾遣興寄遞呈蘇渙侍御」(칠언고시), 10「蘇大侍御訪江浦賦八韻記異并序」(오언고시), 11「寄裴施州」(칠언고시), 12「鄭典設自施州歸」(오언고시), 13「寄薛三郞中璩」(오언고시), 14「奉贈射洪李四丈」(오언고시), 15「奉酬薛十二丈判官見贈」(오언고시), 16「貽華陽柳少府」(오언고시), 17「投簡咸華兩縣諸子」(칠언고시), 18「贈鄭十八賁」(오언고시), 19「贈衛八處士」(오언고시), 20「贈蘇徯」(오언고시), 21「君不見簡蘇徯」(칠언고시), 22「贈李白」(오언고시), 23「戲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源明」(오언고시), 24「戲贈二友」(오언고시)

‘투증’에는 ‘고시 1수’와 ‘율시 6수’가 있는데, (01)은 오언고시이며, 나머지는 모두 오언배율이다. 일반적으로 한시는 고체시와 근체시로 크게 구분하고, 근체시는 다시 절구와 율시로 나누는 것이 보통인데, 율시의 형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장편으로 된 배율이 있다. 『찬주분류두시』와 『두시언해』는 율시와 배율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두시언해』에서 모든 배율은 율시로 분류되어 있다. 그런데 ‘투증’에 속한 7수 중 고시인 (01)을 제외한 나머지 6수가 모두 오언배율인데도 『두시언해』의 ‘투증’ 주제 아래 협주에는 ‘고시 1수 율시 6수’라 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보는 중국의 근체시 중에서도 율시의 완성자로 보고 있으나, 이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두보의 율시는 여전히 오언율시가 작품수에 있어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두보는 칠언율시의 개척자이자 완성자이기도 하며 배율에 있어서도 두보의 배율은 이전의 배율에 비해서 주제의 다양화의 관점에서 개척자라 불린다. 그런데 『두시언해』 권19의 ‘투증’ 항목의 전체 7수 중 배율 그중에서도 오언배율이 6수나 되므로, 『두시언해』 권19는 두보의 오언배율을 살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두시언해』 권19의 하반부 ‘기간 상(寄簡上)’에는 고시 17수가 들어 있다. 그중 (08, 09, 11, 17, 21)의 5수는 칠언고시이고, 나머지는 오언고시이다. 『두시언해』의 주제 분류에서 상하로 나누어질 때에는 고시가 먼저 배치하고, 절구와 율시를 뒤에 배치한다. ‘기간’은 비교적 많은 수의 시가 포함되어 있어 한 책으로 묶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상하로 나누어 상은 『두시언해』 권19에, 하는 『두시언해』 권20에 수록하였는데, 『두시언해』 권19에는 ‘기간’ 중에서 고시에 해당하는 시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시들에 대한 창작 시기와 배경 그리고 내용은 각각의 시들의 주석 앞부분에 붙어 있는 ‘역주자 해설’란을 참고하기 바란다.

4. 『두시언해』 권19의 어휘와 표현

『두시언해』는 어휘, 표현, 문법 등에서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비해 독창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두시언해』의 성격을 정확하게 밝혔다고 보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 『두시언해』의 분량도 많은데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서 『두시언해』 전체를 대상으로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두시언해』에서만 사용된 많은 어휘를 『두시언해』 권19가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용례에 대해서는 이 책의 해당 주석을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사용된 어휘나 표현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사용된 어휘나 표현은 크게, 첫째 문법 형태 및 표기법, 둘째 동사, 셋째 명사, 넷째 한자어로 나눌 수 있다. 『두시언해』 권19에는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고 『두시언해』의 다른 권에서도 볼 수 없는 문법 형태가 있다. 아래 (10)의 ‘賦러’이다. 먼저 『두시언해』 권19의 예를 보자.

(4) 가. 賦러 揚雄이 오리로다 혜오 詩란 子建이 親近리로다 보다라(賦料揚雄敵 詩看子建親)「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두시 19:1ㄴ〉.

나. 〈중간본〉賦라 楊雄이아 오리로다 혜오 詩란 子建이아 親近리로다 보다라

다. 如來ㅣ 이 두 그틀 두드려 두 소로 호아 브티시니라〈금삼 3:5ㄱ〉.

(4가)의 ‘賦러’이 ‘賦로’이라면 이 예는 ‘-로’이 ‘-러’으로 표기된 유일례이다. 〈중간본〉에는 (4나)와 같이 ‘賦라’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로 15세기 문헌에는 (4다)와 같이 ‘-로’이 사용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옛 문헌에서 유일례로 보이는 예가 오기(誤記)나 탈획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두시언해』와 같이 시급히 만들어진 책일 경우에는 이럴 가능성이 더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 권19는 교정본이 있기 때문에 교정이 되지 않은 채 유포된 비교정본(非校訂本) 즉 소위 『두시언해』의 유포본(流布本)에 비해서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의 교정본인 권17이나 권19 등도 교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안병희(1972, 2004)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賦러’이 ‘賦로’의 이표기인지 아니면 오기인지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교정본인 『두시언해』 권19에 문법 형태인 복합조사 ‘-로’의 이표기 또는 오기로 볼 수 있는 (4가)의 ‘賦러’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

(5) 가. 字 : 녯 사미 나날 마 머나 프른 史記예 字ㅣ 泯滅티 아니얫도다(故人日已遠 靑史字不泯)「贈鄭十八賁」〈두시 19:42ㄱ〉.

나. 녯 사미 나날 마 머나 프른 史記에 긄字ㅣ 泯滅티 아니얫도다

다. 긄字 : 苦縣ㅅ 光和ㅅ 저긧 그리 오히려  셧니 긄字 여위오 세요미 貴야 보야로 神妙호매 通니라(苦縣光和尙骨立 書貴瘦硬方通神)「李潮八分小篆歌」〈두시 16:15ㄴ〉.

(5가)의 ‘字’는 (5다)와 같이 『두시언해』의 다른 권에서는 모두 ‘긄字’로 쓰였다. 『두시언해』에는 〈중간본〉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개의 ‘긄字’가 있다. 이 중에서 2개는 〈중간본〉의 예이고, 세 개는 〈초간본〉의 예이다. (5가)의 〈초간본〉 『두시언해』 권19의 〈중간본〉은 역시 ‘긄字’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두시언해』는 ‘ㆆ’이나 ‘각자병서’가 쓰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시언해』에 ‘ㆆ’이나 ‘각자병서’가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대부분 소위 유포본(流布本)을 대상으로 검토되어 주장된 것이다. 그러나 권6, 권7, 권17, 권18, 권19 등 『두시언해』의 교정본을 통해서도 ‘ㆆ’과 ‘각자병서’의 쓰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두시언해』에서도 ‘ㆆ’과 ‘각자병서’가 제한적이나마 쓰였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두시언해』가 ‘ㆆ’과 ‘각자병서’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문헌인 이상 이전의 관습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정본인 『두시언해』 권17에도 ‘官ㆆ 字’와 같은 ‘ㆆ’ 표기가 있고, ‘칠꼬’와 같은 각자병서 표기가 있으므로 『두시언해』에서도 부분적이나마 ‘ㆆ’과 ‘각자병서’가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동사로는 ‘갓고로혀-, 흐늘티-, 므여-’ 등이 있다.

(6) 聦明호 管輅ㆎ게 넘고 尺牘요 陳遵을 갓고로혀리로다(聦明過管輅 尺牘倒陳遵)「上韋左相二十韻」〈두시 19:5ㄴ〉.

(7) 가. 갓고로디- : 魔王이며 제 귓것히 다 갓고로디니라〈월석 4:14ㄴ〉.

나. 갓고로디- : 버미 갓고로딘 며 龍이 업더딘 야 가나모 서리예 롓니 믌 그제와 핏 點을 가매 드리우노라(虎倒龍顚委榛棘 淚痕血點垂胸臆)「柟木爲風雨所拔歎」〈두시 6:41ㄴ〉.

(8) 갓고로왇- : 文殊ㅣ 老維摩 다 딜어 갓고로와시니〈남명 상:43ㄴ〉.

(9) 갓고로와티- : 維摩 갓고로와툐 어루 分別야 붓그러움 시소미 어려울 시라〈남명 상:44ㄱ〉.

(6)의 ‘갓고로혀-’는 (7~9)의 ‘갓고로디-, 갓고로왇-, 갓고로와티-’ 등의 예로 미루어 보면 ‘갓고로’와 ‘혀-’로 분석할 수 있다. (6)의 ‘갓고로혀-’는 원문의 ‘倒’에 대응하는 번역이므로 현대국어로는 ‘거꾸러뜨리다’ 정도로 파악할 수 있다.

(10) 가. 갓- : 四倒 갓오미 외야〈월석 20:96ㄱ〉.

나. 顚倒 갓 씨라〈능엄 1:80ㄴ〉.

다. 웃 對答 갓오 이 對答 正니〈능엄 4:127ㄱ〉.

라. 일후미 筆受ㅣ니 天竺ㅅ 마리 이와 갓 버거 모로매 그를 두르혀고〈원각 하2-1:48ㄱ〉.

마. 倒 갓 시라〈육조 하:22ㄴ-1〉.

바.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사. 갓오- : 爛慢히 곳다온 酒樽을 갓오리로다(爛熳倒芳樽)「寄高適」〈두시 21:23ㄴ〉.

아. 갓로 :  닐오 옷 아래 조 야딜 갓로 닙고〈월석 25:22ㄴ〉.

자. 오 갓로 니버 도로 술위 머여 타 와(倒衣還命駕)「重過何氏五首」〈두시 15:11ㄴ〉.

(11) 가. 갓골- : 倒 갓골 도〈신유 하:17ㄱ〉.

나. 어즈러이 폣 긴 소리 갓골오(紛披長松倒)「九成宮」〈두시 6:2ㄴ〉.

다. 갓고로 : 어리여 迷惑야 邪曲 信야 갓고로 볼〈월석 9:57ㄴ〉.

라. 갓고로 : 긄  三峽 므를 갓고로 흘리리오(詞源倒流三峽水)「醉歌行」〈두시 8:30ㄴ〉.

‘갓고로혀-’가 ‘갓고로’와 ‘혀-’로 분석될 때, (11다, 라)의 ‘갓고로’는 현대국어의 ‘거꾸로’에 대응되는 것으로 (11가)와 같이 ‘갓골-’에서 부사화파생접미사 ‘-오’가 결합되어 형성된 부사로 볼 수 있다. ‘갓골-’은 (11나)와 같이 『두시언해』에서도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동사 ‘갓골-’은 원래 ‘갓-’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세기 국어에서 로 표기되던 어휘들이 ‘ㅗ’로 변화하는 많은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더욱이 (10)에서와 같이 15세기의 다양한 문헌에서 동사 ‘갓-’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아, 자)와 같이 ‘갓고로’와 같이 부사로 쓰인 ‘갓로’가 있고, 더군다나 ‘갓-’의 사동사인 ‘갓오-’를 (10사)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갓오-’ 또한 『두시언해』에서만 용례를 확인할 수 있는 어휘이기도 하다.

한편 ‘갓고로혀-’가 부사 ‘갓고로’와 동사 ‘혀-/-[引]’의 구 구성일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도 『두시언해』 권19에 나오는 ‘갓고로혀-’가 유일례이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할 듯하다.

(12) 가. 믌겨리 흐늘티니  이 디리로다 酒盃ㅣ 니 도기 곧 뷔도다(浪簸船應坼 杯乾甕即空)「遣悶奉呈嚴公二十韻」〈두시 19:9ㄴ〉.

나. 〈중간본〉 믌겨리 흔들티니  당당이 디리로다 酒盃ㅣ 니 도기 곧 뷔도다

다. 흐늘- : 노며 가온 峯頂에 막대 흐느러 녜 놀며〈영가 하:105ㄴ〉.

라. 흐늘- : 녜 永嘉ㅣ 六祖 보오매 막대 흐늘오셔 눈 다호매 道ㅣ 잇거늘〈남명 하:76ㄱ〉.

마. 흐늘- : 구루믄  므를 조차 디고  블근 뫼 흐느러 슬프도다(雲隨白水落 風振紫山悲)「人日兩篇」〈두시 11:8ㄱ〉.

(13) 가. 후늘- : 錫杖 세 번 후늘면 獄門이 절로 열이고〈월석 23:83ㄴ〉.

나. 후- : 鱍鱍 고기 리 후 라〈금삼 4:12ㄱ〉

다. 흔들- : 딕누리옛 대  여 가야이 옥을 흔들오〈백련 10ㄴ〉.

라. 搖 흔들 요〈신유 하:47ㄱ〉.

마. 攪 흔들 교〈신유 하:54ㄱ〉.

(12가)의 ‘흐늘티-’는 ‘흐늘-’과 ‘티’로 분석된다. ‘흐늘-’은 ‘흔들다’의 뜻이고, ‘티’는 강세접미사이다. ‘흐늘-’의 용례는 (12가~마)와 같이 『두시언해』를 포함한 15세기의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흐늘-’은 (12가)의 ‘후늘-’에서 변화하였거나 동시대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후늘-’은 (13나)와 같이 ‘후-’로도 쓰였으며 16세기 이후에는 (13다~마)에서 볼 수 있듯이 ‘흔들-’로 변화하였다.

(14) 가. 므여- :  토 사 扶持호 디 아니코 每常 扶持거든 반기 므여놋다(上馬不用扶 每扶必怒嗔)「寄薛三郞中璩」〈두시 19:31ㄴ〉.

나. 〈중간본〉  토 사 扶持호 디 아니코 每常 扶持거든 반기 므여놋다

다. 믜여- : 네 아리 목이 믜여거〈삼강동경 열:7ㄱ〉. 官吏의 怒야 믜여호 잇비 아니호리라(不勞吏怒嗔)「前出塞九首」〈두시 5:27ㄴ〉.

라. 믜- : 앗기며 貪며  믜며 새오로 됴티 몯 根源을 일울〈석상 13:56ㄴ〉.

마. 일의노 아 아니 환히 누워 안 와 믜여 리다(嬌兒惡臥踏裏裂)「茅屋爲秋風所破歌」〈두시 6:42ㄴ〉.

바. 믭- : 믜 사 일훔 쓰며〈석상 9:17ㄱ〉.

(14가)의 ‘므여-’는 ‘미워하다’의 뜻이다. 15세기의 동사 중에는 ‘동사, 동사+어-, 동사+ㅂ-, 동사+ㅂ+어-’의 관련형을 가지는 동사가 많은데 ‘미워하다’의 뜻인 ‘믜-’도 이런 동사 유형에 속한다. 즉 ‘믜-, 믜여-, 믭-, 미워-’ 등이다. 이 중 ‘미워-’ 형은 17세기에 들어서 활발하게 쓰이며 나머지 형태의 동사나 형용사는 15세기 당시에도 쓰이는데, ‘믜-, 믜여-, 믭-’도 (14다~바)와 마찬가지로 15세기의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14다)에 쓰인 ‘믜여-’의 ‘믜’는 하향중모음의 탈락으로 ‘므’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 15세기에 하향중모음을 가진 많은 어휘들이 하향중모음이 탈락한 형태로도 쓰이고 있음을 많은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므여-’는 ‘믜여-’의 ‘믜’의 하향중모음이 탈락하여 생긴 형태로 규정할 수 있다.

『두시언해』 권19에만 쓰인 어휘로 명사에 해당하는 것은 ‘머귀나모’가 있다.

(15) 그듸 알 것드럿 머귀남글 보디 아니다(君不見前者摧折桐)「君不見簡蘇徯」〈두시 19:45ㄴ〉.

(15)에서 ‘머귀남글’을 확인할 수 있다. ‘머귀남글’의 ‘남글’은 ‘나무’의 의미인 ‘나모~’이 목적격 조사 ‘-/을’과 결합할 때 생기는 형태이다. 따라서 단독형은 ‘머귀나모’인데, 이는 ‘머귀’와 ‘나모’의 합성어이다.

(16) 가. 梧桐 머귀니 合歡樹ㅣ 梧桐 니라〈월석 7:54-1ㄱ〉.

나. 梧 머귀 오 桐 머귀 동〈광주판천자문 33ㄱ〉.

다. 머귀나모 여름만게 비여〈온역 16ㄴ〉.

(17) 가. 菩提樹는 부톄 그 나모 아래 안샤 菩提 일우실 菩提樹ㅣ라 니라〈석상 3:39ㄴ〉.

나. 王祥이 믄득 남글 안고 우니〈번소 9:25ㄱ〉.

‘머귀’는 (16가, 나)에서 볼 수 있듯이 ‘梧, 桐’ 등에 대응하므로 ‘오동나무’의 ‘오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온역이해방』에는 ‘머귀나모’라는 어휘도 등장한다. ‘나모’는 (17나)와 같이 목적격 조사와 결합하면 ‘남글’이 되며, ‘남글, 잣남글’ 등에서 복합조사로 쓰인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18) 健壯 미 마디 아니야 東 녀긔 가 다대 자보 얻고져 놋다(壯心不肯已 欲得東擒胡)「戲贈二友」〈두시 19:47ㄴ〉

(19) 가. 請 드른 다대와 노니샤 바 아니 마치시면 어비 아리 사시리가〈용가 52〉.

나. 匈奴 이젯 다대라〈삼강런던 충:6〉.

다. 韃 다대 달〈훈몽 중:2ㄴ〉.

(20) 가. 西郊胡正煩(西郊애 되 正히 어즈럽더라)「至德二載예 甫ㅣ 自京金光門로 出야 間道로 歸鳳翔호니 乾元初애 從左拾遺야 移華州掾야 與親故別고 因出此門야 有悲往事노라」〈두시 3:22ㄴ〉.

나. 此篇 言異域之物와 羌胡之人이 今在目中니 此ㅣ 甫之所以嘆喪亂之飽見也ㅣ라〈두시 3:23ㄱ-ㄴ〉.

(21) 가. 陰山驕子汗血馬 長驅東胡胡走藏(陰山엣 驕子ㅣ 피 나  타 東胡 기리 모니 되 라가 수므니라)「憶昔二首」〈두시 3:60ㄱ〉.

나. 胡人이 自謂天之驕子ㅣ라니 此 指回紇다 東胡 指安慶緖니 言回紇이 助唐야 討慶緖也ㅣ라

(18)의 ‘다대’는 원문의 ‘胡’에 대응하는 말로서 ‘Tartar’를 가리킨다. 이 낱맡은 주로 ‘달단(韃靼)’으로 음역되어 쓰였다. ‘다대’는 (19)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 활발하게 쓰였다. (19가)와 같이 정음 초기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도 용례를 확인할 수 있고 (19나, 다)에서 ‘匈奴, 韃’ 등의 주석에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의 ‘다대’는 『두시언해』 권19에서만 쓰인 어휘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19)를 제시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두시언해』에서 ‘胡’에 대응되는 말은 (20가, 21가)와 같이 ‘되’인데 이상하게도 『두시언해』 권19의 해당 부분에서는 ‘다대’로 언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20가, 21가)의 주석에 해당하는 (20나, 21나)를 보면 각각 ‘羌胡之人’과 ‘胡人’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대’라는 어휘가 15세기에 두루 쓰였지만 『두시언해』에서 ‘胡’는 항상 ‘되’로 언해되는데 『두시언해』 권19의 예인 (18)에서만 이상하게도 ‘다대’로 언해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22) 가. 블근 옷 니븐 使者ㅣ 하딕고 命을 도로 가져 가니 故人 두 번 절야셔 아다온 政治 謝拜노라(紫衣使者辭復命 再拜故人謝佳政)「寄裴施州」〈두시 19:26ㄴ〉.

나. 블근 옷 니븐 使者ㅣ 하딕고 命을 도로 가져 가니 故人 두 번 절야셔 아다온 政治 謝拜노라

(23) 가. 迦葉이 雞足山애  제 가 저 下直니라〈월석 25:14ㄱ〉.

나. 내 그  부텻긔 下直고 宴晦야 淸齋다니〈능엄 5:35ㄴ〉.

다. 會通禪師ㅣ 鳥窠禪師 가 머리 갓가 侍者 외얫다가  下直호〈남명 상:14ㄱ〉.

(24) 考功의 等第에 거슯저디여 올로 京尹의 堂애 가 下直호롸(忤下考功第 獨辭京尹堂)「壯遊」〈두시 2:40ㄴ〉.

(12가)의 ‘하딕-’는 한자어 ‘하직(下直)-’이 한글로 표기된 것인데 ‘하딕-’라는 표기법은 『두시언해』는 물론 15세기 전체 문헌에서도 이 예가 유일례이다. (22나)에서 볼 수 있듯이 〈중간본〉에서도 동일하게 ‘하딕고’로 언해되어 있다. ‘下直’이 동사로 쓰여 언해될 때는 (23가~다)와 같이 모두 ‘下直-’로 표기되는 것이 15세기의 일반적인 질서이고, 비록 〈중간본〉의 예이기는 하지만 (24)와 같이 『두시언해』에서도 ‘下直-’가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두시언해』 권19의 ‘하딕고’는 한자어 ‘下直’이 한글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두시언해』 권19에서는 ‘福외-’의 용례도 확인된다.

(25) 가. 勸 그듸 嘆恨디 말라 반개 福 외디 아니홀 줄 아니니라(勸君休嘆恨 未必不爲福)「戲贈二友」〈두시 19:48ㄱ-ㄴ〉.

나. 鬼神은 盈을 害코 謙을 福고 人道 盈을 惡코 謙을 好니〈주역 2:10ㄴ〉.

(25가)에서 ‘福외-’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福’이 동사로 쓰였다면 (25나)와 같이 ‘福-’로 언해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25나)는 『주역언해』의 예이고, 『주역언해』를 포함한 16세기의 경서 언해들은 전형적인 언해라기보다는 한문 원문에 음독구결을 현토한 한글구결문의 성격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사로 쓰인 ‘福’을 언해한다면 역시 ‘福-’가 가장 일반적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25가)의 ‘福외-’는 상당히 특이한 예에 속하는데 (25가)의 ‘福외디’는 대응되는 원문을 상세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즉 (25가)의 ‘福외디’에 대응하는 원문은 단순히 ‘福’이 아니라 ‘爲福’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25가)의 ‘福외디’는 한자어 ‘福’이 동사로 쓰여 ‘福외-’로 언해된 것이 아니라 원문의 ‘爲福’을 언해한 것이어서 ‘福외디’는 ‘福’이 ‘福’으로 ‘爲’가 ‘외디’로 언해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따라서 (25가)의 ‘福외디’는 ‘福’이 동사로 쓰였을 때의 언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25가)는 ‘福외-’라는 동사로 파악할 수 없고 ‘福’을 주어로 ‘외-’를 동사로 파악하여야 한다.

5. 간략 두보 평전

여기서는 『두시언해』의 중요한 시들과 『두시언해』 권19에 나오는 시를 대상으로 두보의 일생을 간략히 살펴본다.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 태어나 770년 장사(長沙)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상강(湘江) 가에서 죽었다. 두보의 먼 선조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찬한 두예(杜預, 220~284)가 있고 초당(初唐)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은 두보의 할아버지이다. 두보는 부인 양 씨와의 사이에 종문, 종무 두 아들과 딸도 몇 명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모 아래에서 자랐으며 14~15세 때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었으며 벼슬길로 진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또 안녹산의 난 등의 전란 등으로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사천 三台), 낭주(閬州, 사천 閬中), 운안(雲安, 사천 雲陽), 기주(夔州, 사천 奉節),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갔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며, 특히 엄무는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태극 원년, 1세) 출생

정월. 하남 공현(鞏縣)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개원 5년, 6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함(「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권16).

718년(개원 6년, 7세)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개원 13년, 14세)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정주자사 최상, 예주자사 위계심, 기왕 이범, 비서감 최척, 가수 이구년 등, 「江南逢李龜年」 권16 참조).

730년(개원 18년, 19세) 순하(郇瑕, 산서 臨猗) 여행.

731년(개원 19년, 20세) 제1차 여행 :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개원 23년, 24세) 진사 시험 낙방.

736년(개원 24년, 25세) 제2차 여행 :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여행,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현종이 이임보(李林甫)에게 재상 직을 맡김.

741년(개원 28년, 30세)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야연좌씨장(夜宴左氏莊) 권15」을 지음. 여름에 사농소경(司農少卿)의 딸 양이(楊怡)와 결혼.

742년(천보 원년, 31세) 743년까지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천보 3년, 33세) 낙양에서 장안 조정에서 쫓겨난 이백과 만난 이후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먹음. 5월에 계조모 노씨 하직. 8월 언사(偃師)로 돌아가 장례를 지내고 묘지명을 지음. 장례가 끝난 후 양송 지역(梁은 하남성 개봉, 宋은 하남성 상구) 제3차 여행. 두보와 이백은 양송 지역에 살던 고적(高適)과 취대에 올라 넓은 평야를 보면서 옛 사람을 추모함. 이백과 함께 왕옥산으로 화개군을 찾아 떠남(22「贈李白」). 화개군이 죽은 것을 알자 이백은 재주(齊州, 산동 齊南)로 가서 고천사(高天師)에게서 도가의 비록을 건네받아 연단의 길로 들어섰고, 두보는 제주에서 이옹(李邕) 등과 교류함. 이옹의 손자 이지방이 새로 지은 정자의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당시 북해태수로 있던 이옹이 두보를 초대함. 「배이북해연역하정(陪李北海宴曆下亭)」(권14)의 “歷下亭은 제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제남에는 빼어난 선비도 많구나/바 右ㅅ 녀긘 이 亭子ㅣ 녜외니 濟水 南앤 일훔난 士ㅣ 하도다(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 구절은 지금도 회자됨. 가을에 연주(=노군)에서 이백과 재회(이백과의 마지막 만남).

746년(천보 5년, 35세) 십여 년의 여행을 끝내고 장안으로 돌아옴. 장안(西安)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終南山)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

747년(천보 6년, 36세) 과거 시험 낙방.

748년(천보 7년, 37세) 장안 거주(01「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03「贈韋左丞丈濟」지음).

751년(천보 10, 40세)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2년(천보 11, 41세) (07「敬贈鄭諫議十韻」)

753년(천보 12, 42세) (05「奉贈鮮于京兆二十韻」)

754년(천보 13, 43세) 아들 종무 출생(06「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17「投簡咸華兩縣諸子」).

755년(천보 14, 44세) 하서현위(河西縣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部兵曹參軍)으로 전임되어 취임(02「上韋左相二十韻」). 안녹산의 난 발발.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奉先)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권2, 23「戲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源明」).

756년(천보 15, 지덕 원년, 45세) 2월 봉선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 오자, 봉선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 섬서 白水)로 피난. 부주(鄜州, 섬서 富縣)의 강촌(羌村, 鄜州 西北 三十里)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귀비, 양국충 등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 감숙 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

757년(지덕 2, 46세)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 섬서 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 5월 16일 좌습유(左拾遺)에 임명. 좌습유의 일을 시작한지 한 달이 못되어 두보가 방관을 옹호하는 ‘정쟁오지(廷諍忤旨)’ 사건 발생. 윤달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北征」 권1).

758년(건원 원년, 47세) 두보는 방관(房琯)을 변호하다가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 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渭南市 華州區)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어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겨울 업성의 안경서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는 이사업(李嗣業) 장군을 지방관과 함께 영접함(19「贈衛八處士」).

759년(건원 2, 48세)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司功參軍)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진주(秦州, 감숙 天水)로 감. 10월 적곡, 철당협, 한협, 청양협, 적초령을 지나 동곡(同谷, 감숙 成縣)으로 감. 목피령, 백사도, 비선각, 석거각, 검문을 지나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상원 원년, 49세)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戲作花卿歌」). 신진현(新津縣) 1차 여행.

761년(상원 2, 50세) 신진현(新津縣)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寄贈王十將軍承俊」).

762년(보응 원년, 51세)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를 면주(綿州, 四川 綿陽의 동쪽)까지 동행하며 전송. 때마침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사천 지역을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이사시킴(14「奉贈射洪李四丈」24「戲贈二友」).

763년(광덕 원년, 52세) 낭주(閬州, 사천 閬中), 염정(鹽亭, 사천 盐亭 绵陽市東南部), 한주(漢州, 사천 廣漢 縣级市) 등을 여행하고 봄에 재주(梓州, 사천 绵陽市 三台縣)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征夫」). 대종이 섬주(陝州)로 피난.

764년(광덕 2, 53세)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가서 촉지를 떠나는 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도로 돌아옴.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추천됨(「揚旗」).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04「遣悶奉呈嚴公二十韻」).

765년(영태 원년, 54세) 1월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으로 감.

766년(대력 원년, 55세) 늦은 봄, 기주(夔州, 사천 奉節) 도착.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길렀다(「催宗文樹雞柵」 권17, 08%「寄韓諫議註」16「貽華陽柳少府」18「贈鄭十八賁」20「贈蘇徯」21「君不見簡蘇徯」).

767년(56세)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林)이 마련해 준 양서초당(瀼西草堂)에서 삶(11「寄裴施州」12「鄭典設自施州歸」13「寄薛三郞中璩」15「奉酬薛十二丈判官見贈」).

768년(대력 3, 57세)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奉節)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湖北 江陵) 도착.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이사.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남 岳陽) 도착.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대력 4, 58세)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09「暮秋枉裴道州手札率爾遣興寄遞呈蘇渙侍御」10「蘇大侍御訪江浦賦八韻記異并序」).

770년(대력 5, 59세)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 호남 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음).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서 머묾.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하남 언사)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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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렬·박종우(2009)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서울 : 뿌리와이피리(원저 : 吉川幸次郞(1968) 『吉川幸次郞全集 第12卷』 중 「杜甫私記 第1卷, 杜甫私記 續稿, 杜甫の詩論と詩一京都大學文學部最終講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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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川洋一(1966/1987) 『杜甫』 角川書店.

『분류두공부시언해』의 권20 해제

김성주(동국대학교 교수)

1. 개요

이 책은 『두시언해』 권20에 대한 역주서이다. 『두시언해』 권20은 〈초간본〉이 통문관에 소장되어 있고, 〈중간본〉은 동국대, 한중연 장서각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국어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두시언해』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이병주(1959)와 전재호(1973, 1976)을 비롯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에는 ‘심경호, 안병희, 이종묵, 안대회, 정재영, 김성규, 조남호, 이현희’ 선생 등이 서지, 한문학, 국어학적 관점으로 두시와 『두시언해』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러나 ‘두시언해’는 국어학 관점만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문인 두시가 어렵고, 이를 번역한 ‘언해’도 시적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여 직역 위주의 번역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시언해』를 이해하려면 역주서가 필요하다. 두시의 주석서나 번역서로는 중국에서 출간된 韓成武·張志民(1998)의 『杜甫詩全譯』과 蕭滌非(2014)의 『杜甫全集校注』가 있고, 일본에서 출간된 鈴木虎雄(1928~31/1978)의 『杜甫全詩集 1-4』과 吉川幸次郞의 원고를 제자인 興膳宏이 편집(編輯)하여 2016년에 출판한 『杜甫詩注 第1-10冊』, 그리고 일본의 한시 전공자들이 모여 전체 두보시를 번역한 下定雅弘·松原郞(2016)의 『杜甫全詩譯註 一~四』가 있다. 한국에서 나온 번역서나 주석서로는 일찍이 중요 두시에 대해서 이병주(1958/1970)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注)』가 있고, 중국한시 전공자들이 모여서 전체 두시를 주석하고 번역할 목적으로 이영주 외(1999)의 『두보초기시역해』를 시작으로 최근의 강민호 외(2017)의 『정본완역 두보전집 제8권(두보기주시기시역해 1)』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체 두시에 대한 최초의 번역인 『두시언해』가 15세기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현대국어로 된 전체 두시에 대한 주석서나 번역서가 없다.

2. 『두시언해』 권20의 내용과 특징

『두시언해』 권20의 주제 분류는 ‘기간(寄簡)’이다. ‘기간’은 편지 형식의 시인데 두보의 시대에는 편지를 시로 대신하였다. 『두시언해』에서 ‘기간’은 권19, 권20, 권21에 걸쳐서 수록되었는데, 상중하로 나누어, 권19에 기간 상(寄簡上)(고시 17수), 권20에 기간 중(寄簡中)(율시 13수), 권21에 기간 하(寄簡下)(율시 52수)를 수록하였다. 이를 통해서 주제별로 분류한 『두시언해』의 배열은 ‘고시 → 율시 → 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간’은 절구 형식의 시가 없지만 만약 있었다면 권21의 ‘기간 하’의 율시 52수 다음에 배열되었을 것이다.

권20에 수록된 시가 ‘율시 13수’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전체 두시는 약 1500수 정도이므로 『두시언해』는 25권으로 되어 있어 한 권당 평균 60수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20은 13수로만 구성되어 있어 권20에 실린 시들은 긴 시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권20에는 두시 중에서 가장 긴 시인 ‘「추일기부영회봉기정감심이빈객지방일백운(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01)’으로부터, 40운의 장시(長詩)가 ‘「기악주고사마육장파주엄팔사군양각로오십운(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02), 「기유협주백화사군사십운(寄劉峽州伯華使君四十韻)」(03), 「증왕이십사시어계사십운(贈王二十四侍御契四十韻)」(04)’이며, 30운으로 된 장시(長詩)가 ‘「추일형남(秋日荊南)애 송석수설명부(送石首薛明府)의 사만고별(辭滿告別)야셔 봉기설상서(奉寄薛尙書)논 송덕서회배연지작(頌德敍懷裵然之作)이니 삼십운」(05), 「기팽주고삼십오사군적괵주잠이십칠장사참삼십운(寄彭州高三十五使君適虢州岑二十七長史參三十韻)」(06), 「증이팔비서별삼십운(贈李八秘書別三十韻)」(08)’ 등이다. 두시 중 ‘기간(寄簡)’에 해당하는 시가 길다. 『두시언해』의 평균이 권당 60수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권20의 13수는 상대적으로 적게 수록된 것이다.

권20에 수록된 시는 율시 중 배율(排律)에 속한다. 배율은 첫 연과 마지막 연을 제외한 모든 구가 대구(對句)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권20의 첫째 시인 「추일기부영회봉기정감심이빈객지방일백운(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은 첫 연과 마지막 연까지 철저히 대구를 지키고 있어, 대구의 달인인 두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는 두시 중에서 가장 긴 시로 알려져 있다.

권20에 수록된 시들은 두보가 장안(長安)에 머물던 시기에 지어진 것은 없고, 진주(秦州)부터 마지막으로 두보가 머물렀던 호남(湖南) 지방에 머물던 시기에 지어진 시들이다. 둘째 시인 「기악주고사마육장파주엄팔사군양각로오십운(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와 여섯째 시인 「팽주고삼십오사군적괵주잠이십칠장사참삼십운」가 진주(秦州)에서 창작되었고, 넷째 시인 「증왕이십사시어계사십운(贈王二十四侍御契四十韻)」과 열한째 시인 「기이십사원외포십이운(寄李十四員外布十二韻)」, 그리고 열둘째 시인 「기동경가영십운(寄董卿嘉榮十韻)」이 성도에서 지어졌으며, 여덟째 시인 「증이팔비서별삼십운(贈李八秘書別三十韻)」, 셋째 시인 「기류협주백화사군사십운(寄劉峽州伯華使君四十韻)」, 첫째 시인 「추일기부영회봉기정감심이빈객지방일백운(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 등이 기주(夔州)에서 창작되었으며, 다섯째 시인 「추일형남 송석수설명부 사만고별 봉기설상서 송덕서회배연지작 삼십운(秋日荊南 送石首薛明府 辭滿告別 奉寄薛尙書 頌德敍懷裵然之作 三十韻)」과 일곱째 시인 「봉증소이십사군(奉贈蕭二十使君)」이 형주(荊州)에서 창작되었고, 열셋째 시인 「이거공안경증위대랑균(移居公安敬贈衛大郞鈞)」과 아홉째 시인 「봉증로오장참모거(奉贈盧五丈參謀琚)」가 공안(公安)에서 지어졌다.

3. 『두시언해』 권20의 어휘와 표현

『두시언해』 권20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문법 형태와 어휘는 아래와 같다.

. 무이-

(1) 兵戈 무여 니도다(兵戈動接聯)〈두시20:20ㄱ〉

(1)의 ‘무이-’는 ‘뮈-’가 2음절로 표기된 형태이다. 원문의 ‘동(動)’의 번역이다. 사동사는 ‘뮈우-’이다. 15세기에는 ‘뮈-’와 유사한 어휘로 ‘움즈기-’가 있다. 『두시언해』에서도 ‘뮈-’가 ‘무이-’로 표기된 것은 권20의 이 예가 유일하다.

. 바퇴오-

(2) 이저딘 울흘 가 가져다가 바퇴오고(缺籬將棘拒)〈두시20:10ㄱ〉

(2)의 ‘바퇴오-’는 ‘받치-’의 의미로 『두시언해』에서는 ‘받퇴-’가 주로 쓰이는데 ‘바퇴오-’의 용례는 『두시언해』 권20의 이 용례가 유일하다.

. 뷔이-

(3) 갯 지츨 뷔이여 다시 두위이저 가도다(鎩翮再聯翮)〈두시20:18ㄱ〉

(3)의 ‘뷔이-’는 ‘베이다’의 뜻으로 원문의 ‘쇄(鎩)’의 번역이다. 15세기 문헌 중에서는 『두시언해』 권20의 이 예가 유일하다.

. 애여러

(4) 戎衣  번 니버 애여러   내니(一戎纔汗馬)〈두시20:42ㄱ〉

(4)의 ‘애여러’는 ‘애오라지’의 뜻으로 원문의 ‘재(纔)’에 대한 번역이다. 『두시언해』에서 ‘애오라지’의 뜻인 ‘재’는 ‘아야라, 애야라, 애여러, 아야로시, 애야시, ’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중 ‘애야라, 애여러, 아야로시, 애야시’는 모두 『두시언해』에서만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애여러’는 『두시언해』 권20의 예가 유일하다. 〈중간본〉에도 ‘애여러’로 되어 있다. 참고로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나머지 어휘 ‘애야라, 아야로시, 애야시’의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5) 가.  더으니 애야라 비치 잇고(煙添纔有色)〈두시12:24ㄴ〉

나. 구룸  石壁예 새 애야라 차 가놋다(嵐壁鳥纔通)〈두시13:30ㄴ〉

다. 지븐 애야라 稻梁이 足 만도다(家纔足稻梁)〈두시15:13ㄱ〉

(6) 아야로시: 누비 오시 아야로시 무루페 디날 만 도다(補綻纔過膝)〈중간두시1:5ㄴ〉

(7) 애야시:  므른 애야시 너덧 자 깁고(秋水纔深四五尺)〈두시7:22ㄱ〉

. 우-

(8) 머리 도로혀 라셔 말 우던 이 追思고(回首追談笑)〈두시20:23ㄴ〉

(8)의 ‘우-’도 『두시언해』 권20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유일하다. ‘(웃음을) 웃다’의 뜻으로 『두시언해』에서는 주로 ‘우 웃-’이 쓰였다.

. 젼

(9) 宮闕엣 젼 보라오미 소오미라와 느도다(宮莎軟勝緜)〈두시20:17ㄱ〉

(9)의 ‘젼’는 ‘잔디’의 뜻으로 『두시언해』 권20의 이 예가 유일하다. ‘젼’의 ‘젼’은 ‘田’의 당시 발음 표기일 가능성이 있다. ‘젼’의 ‘’는 현대국어에서 ‘잔디’를 뜻하는 ‘떼’의 선대형(先代形)이다.

. 하야히

(10) 靑溪옛 머릿터리 蕭蕭히 비세 하야히 비취옛더라 니디 말라(莫話靑溪髮 蕭蕭白映梳)〈두시20:45ㄴ〉

(10)의 ‘하야히’는 ‘하얗게’의 뜻으로 ‘하야ᄒᆞ-’에 부사파생접미사 ‘-이’가 결합한 파생부사이다. 『두시언해』 권20에서만 용례가 나타난다.

아래에서 『두시언해』 권20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단어는 아니지만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 어휘 중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몇몇 단어를 제시한다.

. 지즈로

(11) 가. 飄零히 니 길히 지즈로 百里로소니(飄零仍百里)「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두시20:1ㄱ-ㄴ〉

나. 거믄 머릿 百姓이 지즈로 얽이니라(黔首遂拘攣)〈두시20:5ㄱ〉

다. 滏口에 軍師ㅣ 지즈로 모니(滏口師仍會)〈두시20:33ㄱ〉

라. 너 닌 벼스리 지즈로 貴니(似爾官仍貴)〈두시20:36ㄱ-ㄴ〉

마. 鵬鳥ㅣ 야 지즈로 개 드렛도소니(鵬圖仍矯翼)〈두시20:40ㄴ〉

(11)의 ‘지즈로’는 ‘지즐-’에 부사화접미사 ‘오’가 결합된 파생부사이다. 『두시언해』 권20에 모두 5개의 용레가 보인다. 『두시언해』에서 ‘지즈로’는 ‘지즈루’로도 쓰이는데, ‘지즈루’는 ‘지즐-’에 부사화접미사 ‘우’가 결합된 파생부사이다. 이들은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되는데 주로 ‘仍’이나 ‘因’에 대응되지만 (11나)의 ‘지즈로’는 ‘遂’의 번역으로 쓰였다. 『두시언해』에는 원문에 ‘仍’이 쓰였으나 ‘지즈로’나 ‘지즈루’로 언해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중 ‘지즈루’는 『두시언해』에서도 〈두시5:41ㄴ〉, 〈두시8:42ㄴ〉, 〈두시16:9ㄱ〉의 3번의 용례만 확인된다.

. 비뉘-

(12) 犬戎의 비뉘호 디 아니얫녀(莫帶犬戎羶)〈두시20:4ㄱ〉

(12)의 ‘비뉘ᄒᆞ-’는 ‘비리-’와 ‘누리-’의 합성어로 보이는데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12)의 예 이외의 용례는 『두시언해』 〈초간본〉과 〈중간본〉을 통틀어 ‘비뉘고’〈중간두시4:10ㄴ〉, ‘비뉘’〈두시5:4ㄱ〉, ‘비뉘니’〈두시8:2ㄴ〉, ‘비뉘’〈두시17:19ㄱ〉, ‘비뉘’〈두시19:46ㄴ〉, ‘비뉘도다.’〈두시24:5ㄴ〉 등 6개의 용례가 더 있다.

. 서의여-

(13) 가. 生涯ㅣ 마 서의여니(生涯已寥落)〈두시20:7ㄴ〉

나. 江海예 이셔 나날 서의여도다(江海日凄凉)〈두시3:59ㄱ〉

다. 이제 와 내 오 서의여호라(於今獨蕭索)〈두시9:2ㄴ〉

라. 賢聖이 다 서의여니라(賢聖盡蕭索)〈두시14:2ㄴ〉

마. 치위옛 이리 이제 서의여니(寒事今牢落)〈두시16:73ㄴ〉

(13)의 ‘서의여-’는 ‘쓸쓸하다’의 뜻으로 15세기에는 ‘서의-’ 계열과 ‘서의여-’ 계열이 쓰였는데 이들은 각각 파생부사로 ‘서의히’와 ‘서의여히’가 있다. 이 중 ‘서의여-’ 계열은 『두시언해』에서만 용례가 확인된다. ‘서의여ᄒᆞ-’에 대응하는 원문을 보면 『두시언해』 권20의 예인 (13가)는 ‘요락(寥落)’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비해, (13나)는 ‘처량(凄凉)’, (13다, 라)는 ‘소색(蕭索)’, (13마)는 ‘뇌락(牢落)’의 번역으로 쓰였다.

. 수워리-

(14) 수워려 토 해 채 텨 가 게을오라(喧爭懶著鞭)〈두시20:8ㄱ-ㄴ〉

(14)의 ‘수ᅀᅮ워리-’는 ‘어수선하게 떠들어대다’의 의미로 『두시언해』에만 쓰인 단어이다. 『두시언해』에는 (1)의 용례 이외에 ‘수워리’〈두시9:9ㄴ〉, ‘수워리놋다’〈두시13:28ㄱ〉, ‘수워려’〈두시22:3ㄴ〉, ‘수워료’〈두시22:4ㄴ〉, ‘수워리고’〈두시22:11ㄱ〉, ‘수워려’〈두시23:45ㄱ〉 등 6개의 용례가 더 있다. ‘수ᅀᅮ워리-’는 ‘수ᅀᅮ-’에 강세접미사 ‘-워리-’가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워리-’는 ‘나열하다’의 뜻인 ‘벌-’의 사동사 ‘벌이-’가 접미사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숫두리-, 숫두워리-, 숫두어리-’의 ‘두’를 ‘*두-(吃)’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5세기에는 ‘숫-’ 계열의 동사로 ‘숫-, 수-, 수-, 수-, 숫워리-, 숫어리-, 수워리-, 수어리, 수워리-, 수어리-, 숫두리-, 숫두워리-, 숫두어리-’ 등의 단어들이 쓰였는데, 이 중 『남명집언해』에 쓰인 ‘수-’의 예 2개를 뺀 나머지는 모두 『두시언해』에서만 쓰였다.

. 아라이

(15) 가. 世閒앳 緣故ㅣ 아라이 서르 지즈러 오놋다(世故莽相仍)〈두시20:23ㄴ〉

나. 正 길히 아라이 리오〈남명 상76ㄴ〉

(15)의 ‘아라이’는 ‘아스라이’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아라히’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남명집언해』에서도 ‘아라이’가 쓰인 것으로 보아서 이 용례가 오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사-

(16) 丹砂 녯 저우레 사도다(丹砂冷舊秤)〈두시20:25ㄱ〉

(16)의 ‘사-’는 ‘서늘하다’의 뜻으로 『두시언해』에는 ‘서늘- 서-’로 쓰였지만 ‘사-’도 쓰였다. ‘사-’의 파생부사로 ‘사히’가 있다. (16)의 예 이외에 『두시언해』에서 ‘사-’가 쓰인 것으로는 ‘사케’〈두시9:5ㄱ〉, ‘사’〈두시11:32ㄱ〉, ‘사호미’〈두시19:36ㄴ〉, ‘사’〈두시23:56ㄱ〉 등이 있다.

4. 간략 두보 평전

여기서는 『두시언해』의 중요 시들과 『두시언해』 권20에 나오는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두보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하여 제시한다.

두보(杜甫)는 712년 낙양 근처 공현(鞏縣, 현재의 鞏義市)의 요만촌(瑤灣村)에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다가 770년 장사(長沙)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도중 상강(湘江) 가에서 죽었다. 두보의 먼 선조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典集解)』를 펴낸 두예(杜預, 220-284)가 있고 초당(初唐)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은 두보의 할아버지이다. 두보는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는 어릴 때 죽은 아들과 딸을 제외하면 종문, 종무 두 아들과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딸도 몇 명이 있었다.

두보는 14~15세 때에는 이미 시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나 두보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되었으며, 벼슬길로 진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또 안녹산의 난 등의 전란 등으로 평생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여러 난을 겪으면서 낙양(洛陽), 장안(長安), 진주(秦州), 성도(成都), 재주(梓州, 사천 四川 三台), 낭주(閬州, 사천 四川 閬中), 운안(雲安, 사천 四川 雲陽), 기주(夔州, 사천 四川 奉節), 장사(長沙) 등을 돌아다녔지만 시작(詩作)은 계속 이어갔다.

두보가 교류한 이로는 이백(李白), 소원명(蘇源明), 정건(鄭虔), 고적(高適), 잠삼(岑參), 이옹(李邕), 방관(房琯), 엄무(嚴武) 등이며 특히 엄무는 성도 시절 두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었다. 두보가 성도를 떠난 것도 엄무의 죽음이 큰 원인이 되었다.

아래에 두보의 간략한 연대기를 제시한다.

712년(太極 원년, 1세) 정월. 하남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 요만촌(瑤灣村)에서 출생. 현종 즉위.

717년(開元 5년, 6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구경(「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권16).

718년(開元 6년, 7세) 봉황을 읊은 시 지음.

725년(開元 13년, 14세) 시단에 두각을 나타냄. 문인들이 모인 장소에 출입함(「江南逢李龜年」 권16 참조).

730년(開元 18년, 19세) 순하(郇瑕, 산서 臨猗) 여행.

731년(開元 19년, 20세) 제1차 오월(吳越, 강소와 절강 지역) 여행.

735년(開元 23년, 24세) 진사 시험 낙방.

736년(開元 24년, 25세) 제2차 제조(齊趙, 산동과 하북 남부) 여행, 소원명(蘇源明)을 만남. 현종이 이임보(李林甫)에게 재상 직을 맡김.

741년(開元 28년, 30세) 은자 장개 방문. 낙양으로 돌아와 낙양 동편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의 묘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토실(土室)을 짓고 삶. 여름에 사농소경(司農少卿)의 딸 양이(楊怡)와 결혼.

742년(天寶 원년, 31세) 743년까지 낙양 거주. 둘째 고모의 묘지명을 지음.

744년(天寶 3년, 33세) 낙양에서 장안 조정에서 쫓겨난 이백과 만난 이후 이백을 따라 양송 지역을 유람하며 선도를 익히고 선약을 캐리라 마음 먹음. 8월 언사(偃師)로 돌아가 노조모의 장례가 끝난 후 양송 지역(하남성 개봉과 상구 일대) 제3차 여행. 두보와 이백은 양송 지역에 살던 고적(高適)과 취대에 올라 넓은 평야를 보면서 옛 사람을 추모함. 이백과 함께 왕옥산으로 화개군을 찾아 떠남(「贈李白」 권21). 화개군이 죽은 것을 알자 이백은 재주(齊州, 산동 齊南)로 가서 고천사(高天師)에게서 도가의 비록을 건네받아 연단의 길로 들어섰고, 두보는 제주에서 이옹(李邕) 등과 교류함. 이옹의 손자 이지방이 새로 지은 정자의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당시 북해태수로 있던 이옹이 두보를 초대함(「陪李北海宴曆下亭」 권14). 가을에 연주(兖州)에서 이백과 재회(이백과의 마지막 만남).

746년(天寶 5년, 35세) 십여 년의 여행을 끝내고 장안으로 돌아옴. 장안(西安)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지원자이었던 부친 두한(杜閑)의 사망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함. 어떤 때에는 장안성 남쪽 종남산(終南山)에서 약초를 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음. 이 시기 두보와 가깝게 지내던 글벗은 소원명(蘇源明)과 광문관 박사 정건(鄭虔)이었음(「戲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源明」 권19).

747년(天寶 6년, 36세) 과거 시험 낙방.

748년(天寶 7년, 37세) 장안 거주.

751년(天寶 10, 40세)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침. 현종은 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두보의 문장을 시험해 볼 것을 재상에게 명함. 이임보가 출제하고 집현원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감독함. 두보는 이 일을 시에서 자주 언급함. 선우중통이 남조 토벌.

754년(天寶 13, 43세) 아들 종무(宗武) 출생.

755년(天寶 14, 44세) 하서현위(河西縣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部兵曹參軍)으로 전임되어 취임. 안녹산의 난 발발. 11월 우위솔부병조참군의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 것 없는 봉급을 가지고 가족들이 있는 봉선(奉先)으로 향하였으나 어린 아들은 굶어 죽어 있었음(「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권2).

756년(天寶 15=至德 元年, 45세) 2월 봉선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솔부의 직책을 계속 수행. 여름으로 접어들어 반군이 진격해 오자, 봉선에 살고 있는 가족을 걱정하여 백수(白水)로 피난. 부주(鄜州)의 강촌(羌村, 鄜州 西北 三十里) 도착. 6월 현종이 촉으로 피난. 양귀비, 양국충 등 양씨 일가 멸족. 7월 숙종 영무(靈武, 감숙 靈武)에서 즉위. 두보는 숙종의 행재소가 있던 영무로 가다가 반군에 잡혀 장안에 억류됨.

757년(至德 2, 46세) 4월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머물던 봉상(鳳翔, 섬서 鳳翔)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 5월 16일 좌습유(左拾遺)에 임명. 좌습유의 일을 시작한지 한 달이 못되어 두보가 방관을 옹호하는 ‘정쟁오지(廷諍忤旨)’ 사건 발생. 윤달 8월 휴가를 얻어 강촌(羌村)으로 감(「北征」 권1).

758년(乾元 원년, 47세) 좌습유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화주(華州, 섬서 渭南市 華州區)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어 지방의 문교 업무를 맡게 됨.

759년(乾元 2, 48세) 3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옴. 7월 사공참군(司功參軍) 사직. 늦은 봄 화주를 떠나 진주(秦州, 감숙 天水)로 감(02「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 권20, 06「彭州高三十五使君適虢州岑二十七長史參三十韻」 권20). 10월 적곡, 철당협, 한협, 청양협, 적초령을 지나 동곡(同谷, 감숙 成縣)으로 감. 목피령, 백사도, 비선각, 석거각, 검문을 지나 12월 1일에 성도로 향함.

760년(上元 원년, 49세) 성도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움(「戲作花卿歌」). 신진현(新津縣) 1차 여행.

761년(上元 2, 50세) 신진현(新津縣) 2차 여행. 12월 엄무 성도윤으로 부임(「寄贈王十將軍承俊」 권5).

762년(寶應 원년, 51세) 4월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붕어. 대종(代宗) 등극. 이백 사망. 6월 경성으로 돌아가는 엄무를 면주(綿州, 四川 綿陽의 동쪽)까지 동행하며 전송. 때마침 위구르와 토번의 침입으로 재주와 낭주 등 사천 동북부를 떠돌다 성도로 돌아감. 늦가을에 가족을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이사시킴.

763년(廣德 원년, 52세) 낭주(閬州, 사천 閬中), 염정(鹽亭, 사천 盐亭), 한주(漢州, 사천 廣漢) 등을 여행하고 봄에 재주(梓州, 사천 三台)로 돌아옴. 8월, 방관이 낭주에서 죽음. 낭주로 이사. 안사의 난 종결. 토번이 장안을 함락. 대종이 섬주(陝州)로 피난.

764년(廣德 2, 53세) 3월 성도 초당으로 돌아가서 촉지를 떠나는 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하여 성도로 돌아옴(04「贈王二十四侍御契四十韻」 권20, 11「寄李十四員外布十二韻」 권20). 6월 엄무에 의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추천됨(12「寄董卿嘉榮十韻」권20). 소원명(蘇源明)과 정건(鄭虔) 죽음.

765년(永泰 元年, 54세) 1월 정월 막부의 직책을 사직하고 초당으로 돌아옴. 4월 엄무 돌연 병사. 5월 성도를 떠남. 민강(岷江)을 통해 유주(楡州, 사천 重慶), 충주(忠州, 사천 忠縣), 운안(雲雁, 사천 雲陽)으로 감.

766년(大曆 元年, 55세) 늦은 봄, 기주(夔州, 사천 奉節) 도착(10「贈崔十三評事公輔」 권20). 이 무렵 두보는 오골계 고기로 중풍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골계를 몇 마리 기름.(「催宗文樹雞柵」 권17).

767년(56세) 적갑(赤甲)으로 이사. 기주(夔州) 도독(都督)인 백무림(栢茂琳)이 마련해 준 양서초당(瀼西草堂)에서 삶(08「贈李八秘書別三十韻」 권20, 03「寄劉峽州伯華使君四十韻」 권20, 01「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審李賓客之芳一百韻」 권20).

768년(大曆 3, 57세)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를 받음. 정월 기주(夔州, 사천 奉節)를 출발하여 협주(峽州, 호북 宜昌) 하뢰(下牢)에 도착함으로써 삼협(三峽)을 완전히 벗어남. 3월 강릉(江陵, 湖北 江陵) 도착(05「秋日荊南애 送石首薛明府의 辭滿告別야셔 奉寄薛尙書논 頌德敍懷裵然之作이니 三十韻」 권20, 07「奉贈蕭二十使君」 권20). 가을 공안(公安, 湖北 公安)으로 이사(13「移居公安敬贈衛大郞鈞」 권20, 09「奉贈盧五丈參謀琚 권20). 늦겨울 공안 출발 악주(岳州, 호남 岳陽) 도착. 설을 악양(岳陽)에서 보냄.

769년(大曆 4, 58세) 정월 악양 출발. 형산(衡山), 상담(湘潭, 호남 湘潭),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 도착.

770년(大曆 5, 59세) 늦봄 담주(潭州)에서 이구년(李龜年)과 재회. 4월 군벌의 반란을 피해 형주(衡州)로 피난. 침주(郴州, 호남 郴州)로 가는 도중 뇌양(耒陽, 호남 耒陽)에 이르러 방전역(方田驛)에서 섭 현령이 보내준 음식을 받음(일설에는 두보가 방전역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 이후에 지은 시가 있음). 양양(襄陽, 호북 襄陽)으로 가다가 담주(潭州, 호남 長沙)에서 머묾. 겨울 고향으로 향하는 상강 기슭에서 세상을 떠남. 두보가 죽은 뒤에 두보의 영구는 43년 후 손자 두사업(杜嗣業)에 의해 언사(偃師, 하남 偃師) 서북의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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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의 배경과 권21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삶과 시대 배경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盛唐) 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성이란 시에 있어서 성인(聖人)이란 뜻으로, 그의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았으나, 두보가 태어난 것은 호남성 공현(鞏縣)이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預,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楊)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만 7세 때에 시를 지었다고 하고, 만 9세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만 14~5세(이후 두보의 나이는 만으로 표시한다)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20대에 접어들어 진(晉, 산서성(山西省)), 오(吳, 강소성(江蘇省)) 월(越, 절강성(浙江省))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24세 때에 경조(京兆, 장안현 서북쪽에 있었다고 함)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유랑 길에 나서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두보는, 32세(744)로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던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34세(746)에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곳에서 1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하였다. 두보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750)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39세 때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삼대예부〉를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실로 불우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39세(751) 때,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에 크게 패하였는데, 병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하였다. 42세(754) 때에는 장마가 계속되고 기근이 심하여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43세(755)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직을 얻었다. 그 낮은 관직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奉先縣)으로 가는 도중,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어린 자식은 거의 굶어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43세(755) 때,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제의 자리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갔다. 두보는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자신은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거리에는 반란군이 활개를 쳤다. 두보는 장안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느끼며 가족의 안부를 염려하였다.

45세(757, 지덕(至德) 2) 때,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죽음을 당하였다. 두보는 그 해 4월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를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하였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上皇,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 생활을 하게 되었다. 46세(건원(乾元) 1, 758) 때,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6월에는 화주 사공(華州司功)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화주는 섬서성 화주현이고, 사공은 6참군의 하나로 주부(州府)의 좌리(佐吏) 벼슬이었다. 그러다가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하게 되자,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두보는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 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의 옛 친구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인데다, 세교(世交)도 있는 터였는데, 두보가 아무런 실권도 없으면서 엄무를 업신여기는 투로 취중에 비위를 건드렸다가 그를 격노케 하여 그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성도 근교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50세(보응(寶應) 1, 762) 때,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51세(광덕(廣德) 1, 763)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다음해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마음도 맞지 않았고, 관료 생활도 불편하였다. 폐병, 중풍병도 있어 53세(영태(永泰) 1, 765) 때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약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천 지방에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이듬해(대력(大曆) 1, 766) 늦은 봄에 병이 조금 낫자 다시 강을 따라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내려갔다. 55세가 되는 해의 늦은 봄부터 56세 봄까지 약 2년 동안 기주에서 지내며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55세(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琳)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57세(769) 1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지붕을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하였는데, 5일 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두보는 58세(대력 5, 770)가 되는 해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牛炙, 쇠고기 구이)과 백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시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어 그것을 부인하는 설도 생기게 되었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두보의 생애에 대해서는 차석찬의 역사 창고 홈페이지,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위키백과 및 차상원(1981)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혹 참고한 것을 일일이 밝히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2.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관련된 문제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의 성으로 ‘두보’를 가리키는 말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킨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두보를 그의 이름이나 자(字) ‘자미(子美)’ 혹은 호(號) ‘소릉(少陵)’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두공부’라 부르는 것이 두보를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제재별로 분류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는,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가 그러한 예이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3권에도 〈기제두이금강야정(寄題杜二錦江野亭))〉이라는 제목의 엄무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실려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들 시를 그 제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이 목록은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수정한 것이다.

(1) 〈두시언해(杜詩諺解)〉의 대분류 및 중분류 제목

[1] 기행(紀行), [2] 기행 하(紀行下), [3] 술회 상(述懷上), [4] 술회 하(述懷下), [5] 질병(疾病), [6] 회고(懷古), [7] 시사 상(時事上), [8] 시사 하(時事下), [9] 변새(邊塞), [10] 장수(將帥), [11] 군려(軍旅), [12] 궁전(宮殿), [13] 성수(省守), [14] 능묘(陵廟), [15] 거실 상(居室上), [16] 거실 하(居室下), [17] 인리(隣里), [18] 제인거벽(題人居壁), [19] 전원(田園), [20] 황족(皇族), [21] 세주(世胄), [22] 종족(宗族), [23] 외족(外族), [24] 혼인(婚姻), [25] 선도(仙道), [26] 은일(隱逸), [27] 석로(釋老, 寺觀附), [28] 사관(寺觀), [29] 사시(四時), [30] 하(夏), [31] 추(秋), [32] 동(冬), [33] 절서(節序), [34] 주야(晝夜), [35] 몽(夢), [36] 월(月), [37] 우설운뢰부(雨雪雲雷附), [38] 운뢰(雲雷), [39] 산악(山嶽), [40] 강하(江河), [41] 도읍(都邑), [42] 누각(樓閣), [43] 조망(眺望), [44] 정사(亭榭), [45] 원림(園林), [46] 과실(果實), [47] 지소(池沼), [48] 주즙(舟楫), [49] 교량(橋梁), [50] 연음(燕飮), [51] 문장(文章), [52] 서화(書畫), [53] 음악(音樂), [54] 기용(器用), [55] 식물(食物), [56] 조(鳥), [57] 수(獸), [58] 충(蟲), [59] 어(魚), [60] 화(花), [61] 강두오영(江頭五詠), [62] 초(草), [63] 죽(竹), [64] 목(木), [65] 투증(投贈), [66] 기간 상(寄簡上), [67] 기간 중(寄簡中), [68] 기간 하(寄簡下), [69] 회구(懷舊), [70] 수기(酬寄), [71] 송별 상(送別上), [72] 송별 하(送別下), [73] 경하(慶賀), [74] 상도(傷悼), [75] 잡부(雜賦).

(1)은 개별 시의 제목이 아닌, 상위 분류의 제목을 우선 모두 제시한 것이다. 이들 중 [36]의 ‘월(月)’은 대분류 제목이 누락된 것으로 판단되어, 역주자가 만들어 넣은 것이다. 상위 분류의 제목에는 대분류의 제목이 대부분이지만, 중분류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과 같은 제목이 그 하나이다. 18권에서 ‘강두오영’에 포함된 시는 3수인데, 2수는 이미 ‘조(鳥)’ 대분류에서 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 뒤에는 별다른 표시 없이 12수의 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분류 ‘화(花)’에 속한다. ‘강두오영’에는 ‘화(花)’에 속하는 16수의 시 가운데 단지 3수만이 속하는 것이다. 이는 대분류 속의 일부가 중분류에 속하고 있음을 보이는 예이다.

[29]의 ‘사시(四時)’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과 동렬에 서 있으나, ‘사시’는 ‘춘, 하, 추, 동’을 아우르는 상위 범주이다. ‘사시’가 ‘춘(春)’의 자리에 있고, ‘춘’이 빠져 있다. ‘사시’를 초대분류 제목으로, 그 아래에 ‘춘(春)’을 보충하여, ‘춘, 하, 추, 동’을 대분류 제목으로 보기로 한다. 이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이란 제목이 고시 몇 수, 율시 몇 수와 같은 할주를 가지고 있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고, 춘하추동의 계절이 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와 제재를 제공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다.

(1)의 분류 중 대분류의 일부에 포함되는 중분류를 제외하고, ‘기행’, ‘기행 하’를 의미 부류가 같은 것으로 보고, 다시 ‘상중하’나 ‘상하’로 되어 있는 것을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고, ‘석로 사관부(釋老寺觀附)’ 뒤에 오는 ‘사관(寺觀)’ 혹은 ‘우설 운뢰부(雨雪雲雷附)’ 뒤에 오는 ‘운뢰(雲雷)’를 합치지 않고 따로 독립시키고, 대분류 제목이 빠진 것으로 보이는 ‘월(月)’을 독립된 분류로 세우고, ‘사시’를 제외하고, ‘춘, 하, 추, 동’을 독립된 대분류로 취급하면, 전체가 64대분류가 된다.

이 숫자는 〈중간 두시언해〉 영인본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다. 흔히 두시의 내용은 52부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에 보인 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초간본 전질이 발견되면 혹 그 정확한 편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분류와 중분류 또는 초분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도 분류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우선은 위와 같은 분류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두시에 대한 이해가 더 심화되어 더 세밀히 또 더 정확하게 부류가 나누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언해된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보의 원시와 두시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것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2. 〈두시언해〉 편찬의 목적

〈두시언해〉를 편찬한 목적은 중간본에 게재된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그 첫째 이유는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시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쉽게 풀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인다.

(2) 〈두시언해〉 편찬의 첫째 목적

가. 시(詩)는 ‘국풍(國風, 〈시경〉의 한 체로 〈시경〉을 가리킴)’과 ‘이소(離騷,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의 제목으로 〈초사(楚辭)〉를 가리킴)’에서 내려와 성하여 이백과 두보를 일컫는다(시선과 시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본래의 기운이 흐리고 아득한[渾茫한] 상태이다. 단어와 문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삽(難澁)하여, 주석을 많이 해 놓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나.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 전한 신 유윤겸 등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 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시었다.

다. 이에 널리 주석을 수집하고, 불필요한 것을 베어 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지리, 인물, 글자의 뜻이 어려운 것은 간략하고 간소하게 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고 읽는 데 편하게 하였으며, 또 우리 글로 그 뜻을 번역하였다.

라. 임금이 뜻하신 바의 이른바 난삽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글을 이루고 정서하여 임금께 올렸더니, 나에게 서문을 쓰라 명하시었다.

(2가)는 두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2나)는 성종이 〈두시언해〉 편찬을 명하게 된 동기를 말한 부분이다. 동기는 (2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2다)는 편찬의 과정과 결과를 말한 것이고, (2라)는 난삽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원고를 임금께 보인 것을 말한 것이다.

둘째 목적은 세교(世敎)에 있었다. 즉 세상을 교화하는 데 시의 큰 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시언해〉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3)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

가. 공효의 측면을 생각하면, 시도(詩道)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있다.

나. 큰 것은, 위로는 종묘(宗廟)의 노래를 지어 성덕을 찬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민속의 노래로 당대의 정치가를 찬미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쳐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하게 하는 것[감발징창(感發懲創)]으로 족하다.

다. 사람의 선과 악, 이것이 공자가 시 삼백 편을 산정(刪定)하여 사악함이 없는 교훈이 있게 한 까닭이다.

라. 시는 중국의 육조(六朝)에 이르러 극히 부미(浮靡, 헛되고 중심이 없음)하여 시 삼백 편의 메시지가 땅에 떨어졌다. 자미(子美), 즉 두보는 성당 시대에 태어나 막힌 것을 척결하고, 퇴풍(頹風), 침울(沈鬱), 돈좌(頓挫, 넘어지고 꺾이는 것)를 떨치고 일어나, 고운 것, 화려하고 왜곡된 것만을 찾는 풍습을 적극 물리쳤다. 난리가 일어나 쥐새끼처럼 도망다니는 때에, 두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고, 지성(至誠)과 충성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썼다.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백세를 용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까닭은 사람을 감발징창(感發懲創)하게 하는 것은 실로 시 삼백 편과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고, 또 세상의 일을 말하고 실제를 진술하는 것은 시사(詩史)라고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후세의 사람들이 풍월을 읊는다고 비웃을 수 있겠느냐? 성정(性情, 정서)을 새기고 깎는 일은 가히 본받을 만하고 의논할 만하다.

(3가)는 시의 궁극적인 효용이 세상을 교화하는 세교(世敎)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가 인간을 일부러 퇴폐하게 하고 세상을 더럽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기술이다. 얼른 보면 이는 당연한 기술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는 아마도 조위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3나)는 종묘의 노래이든 백성의 노래이든 감발징창(感發懲創: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쳐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하게 하는 것)의 공효를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3다)는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사악하지 않게 하기 위함임을 말한 것이다. (3라)는 두시가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사람을 감발징창케 하는 힘을 가져, 시 자체를 시사(詩史)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의 시 삼백 편과 표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종이 두보의 시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나, 공자가 시 삼백 편에 뜻을 두고 있는 것, 그 아름다운 은혜와 배움을 부르는 것이 시도(詩道)를 만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고, 공자에 있어서의 시 삼백 편의 산정(刪定)과 주자집주(朱子集註)에서의 큰 밝힘이 이제는 두보의 시인데, 그것은 바로 당시 성상(聖上)인 성종에 기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두시언해〉의 편찬의 목적은 단어와 문장의 난삽함을 덜기 위한 것이 그 하나이며, 세상을 교화시키는 것이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위의 서에서 잘 언급되지 않은 것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2.3. 〈두시언해〉 간행 연대의 문제

〈두시언해〉에 대한 기존의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몇 가지 사전이나 해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와 보기로 한다.

(4) 초간본 간행 연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가. 이병주(1958:123) : 〈두시언해〉의 간행은 성화 17년 신축(성종 12년, 1481년) 12월 상한성종의 봉명으로 찬하여 강희안 서체의 ‘을해자’로 상재된 최초의 역시서다.

나.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

다. 안병희(1971)의 〈분류두공부시언해〉 해제 : 간행 연대는 중간본에 실린 조위의 서문 등에 의하여 성종 12년(1481, 성화 17)임이 확실하다.

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 이호권(n.d.), 한글디지탈박물관 〈두시언해〉 전문가 해제 : 1481년(성종 12)에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1420~?) 등이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언해하여 을해자로 간행한 책이다.

위의 (4가-마)에 보인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한결같이 〈두시언해〉 초간본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고 있다. 이 연대는 조위의 서문에 나타난 시기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이 연도는 분명히 조위가 서문을 작성한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동안은 서문을 작성한 시기와 간행 연대를 같이 보았다. 조위의 서문에서 관련 사항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필요한 사항을 부가하여, (2나)를 (5가)와 같이 가져오고, 서문을 쓴 날짜와 관련되는 사항을 (5나)와 같이 보이기로 한다.

(5) 조위의 〈두시언해〉 ‘서(序)’의 편찬 시기 관련 사항

가.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 전한 신 유윤겸 등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 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시었다.

나. 성화 17년 12월 상한(上澣). 승훈랑(承訓郞),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制敎) 겸 경연 검토관(檢討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문원 교검(校檢) 신(臣) 조위(曺偉) 근서(謹書).

(5가)에 의하면, 성종이 유윤겸 등에게 이른바 〈두시언해〉 편찬의 명을 내린 것이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이다. ‘성화(成化)’는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그 신축년(辛丑年)은 1481년에 해당한다. 이 해를 성화(成化) 연호로 말하면 성화 17년이다. 그런데 (5나)와 같이 조위(曺偉)가 서문을 쓴 것도 ‘성화(成化) 17년’이다. 조위의 서문이 책의 간행과 때를 맞추어 쓴 것이라면, 책의 편찬을 명한 것과 책이 간행된 것이, 많아야 다섯 달밖에 되지 않는다. 음력으로 가을에 해당되는 기간을 7, 8, 9월이라 하고, 그 7월에 성종의 명이 있었다고 했을 때의 계산이 그러하다. 성종의 명이 8월이나 9월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석 달이 될 가능성도 있고, 성종의 명이 9월 말에 있었다면, 조위의 서문이 12월 상한에 된 것이므로, 그 기간은 세 달이 되든가 그 기간이 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전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 기간 동안에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을 갖추어 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두보의 시구 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을 때, 그 하나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문으로 주석이 되어 있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번역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섯 달에 25권을 만들려면 한 달에 5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6일에 완성해야 한다. 단지 번역만이 아니라 번역과 조판과 교정과 인쇄와 제본을 합하여 모두 6일 만에 끝내야 한다. 세 달이 걸렸다면, 한 달에 적어도 8권을 완성해야 하고, 한 권을 4일 만에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6) 편찬과 간행 사이의 불가사의한 시간

조위(曺偉)의 서문이 간행시에 쓰여진 것이라면, 전 25권이나 되는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걸린 시간은 많아야 다섯 달, 적으면 서너 달밖에 되지 않는다.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으로 언해하여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간행한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래에는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과 관련되는 몇 가지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7)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대한 견해(밑줄 필자)

가.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 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

나.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

다. 안병희(1979)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해져 왔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1481년(성종 12년)에 완성하여 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라. 안병희(1997:18) : 〈두시언해〉도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이므로 원고에 잘못이 나타나고, 책이 인출된 뒤에 교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된다. 이 교정도 언해가 1481년에 끝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 안병희(1997:20) : 〈두시언해〉는 언해에 착수한 바로 1481년(성종12)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되어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 김일근(1964:142) :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조위의 서문 일자에 의하여 성종 12년 12월일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1권이 선성(先成)된 시기이며, 그 완성 간행은 적어도 근 2년 후 성종 14년 7월(실록) 〈황산곡시언해(黃山谷詩諺解)〉의 하명 직전까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7가)에 의하면 〈두시언해〉 편찬은 세종 25년(1443) 4월에 시작된 것이다. 조위의 서문이 1481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그 기간은 39년이나 된다. 〈두시언해〉 25권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세종 25년(1443) 4월에 두시언해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때는 두시 주석서를 모으도록 하였고, 두시에 대한 여러 주석을 참고하여 교감본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8) 세종 25년(1443) 4월 21일 기사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으므로 구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시 주석서를 모으는 것이 언해 작업의 기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은 두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하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한 것은 교감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이루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7가)와 같이, 언해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7나)에서는 성종 12년을 괄호에 1491년으로 적고 있다. 이것이 바로잡힌 것은 (7다)에 와서이다. 1491년이 1481년으로 바뀌었다. (7라, 마)에서는 이것이 다시 확인된다. (7라)에서는 〈두시언해〉가 “서너 달만에 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고 있고, (7마)에서는 〈두시언해〉가 언해를 시작한 바로 그 해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6)에 제시한 것과 같이 25권이나 되는 거질의 책을 단 서너 달 만에 완성한다는 것은 컴퓨터 조판과 고도의 인쇄술이 발달한 21세기인 지금에도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조판, 교정, 인쇄, 제본에 드는 시간만도 서너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두시언해〉 출판은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5가)에 보는 바와 같이, 주석만 하더라도 그것을 통일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은 〈찬주분류두시〉의 것을 좇는다고 하여도, 번역이 남아 있다. 산문이 아닌, 시의 번역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책의 간행이 번역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활자를 만들어야 하고, 조판을 해야 하고, 교정을 보아야 하고, 인쇄를 해야 하고, 제본을 해야 한다. 종이가 부족하면 그것을 조달해야 한다. 단기간에 책의 간행이 끝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7바)에서는 특이하게 〈두시언해〉 초간본이 간행된 시기를 성종 14년(1483) 7월로 보고 있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 의하면 성종 12년은 〈두시언해〉 제1권이 먼저 이루어진 시기이다. 성종 12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종 14년 7월에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黃山谷詩)〉를 언해하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그 이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의강(2006:76-77)에서는 유윤겸의 품계와 전보(轉補)를 중시하고 있다. 유윤겸은,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있었다. 그 후 약 1년 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하다가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품계가 승진되고 부제학에 임명된다. 성종 14년(1483) 2월 11일에는 통정대부 공조(工曹) 참의(參議)로 전보된다. 이를 이의강(2006:77)에서는 〈두시언해〉의 일이 끝났기 때문에 홍문관보다는 업무가 수월한 공조에 전보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과의 사람이 공조에 전보된다는 것을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이라는 해석은 온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휴식을 취하게 하려면 그냥 쉬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윤겸을 공조에 전보한 것은 공조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활자를 만들고, 조판을 하고, 인쇄를 하는 작업이 이때에야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성종 16년에도 유윤겸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지칭하고 있다. 성종 19년(1488)에는 호조 참의가 되기도 한다. 이는 1484년 유윤겸은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를 내놓고 공조 참의로 간 것이 아니라, 홍문관 부제학의 직을 가지고 공조 참의로 발령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겸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성종 13년(1482)년의 실록 기사에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 등이 흉년의 때를 맞아 출판 사업의 정지를 청하는 기록과, 임금이 그것을 윤허하는 기록이 나온다. 중단을 요청하는 사업에 〈두시〉에 관한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9) 성종 13년(1482) 7월 6일 셋째 기사

해마다 흉년이 드는 것이 근고(近古)에 없는 바로서, 바야흐로 흉년을 구제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사전(四傳)과 춘추(春秋), 강목신증(綱目新增), 문한류선(文翰類選), 두시(杜詩), 이백시(李白詩), 용학구결(庸學口訣)과 같은 것을 모두 국(局)을 설치하여 공억(供億)이 따르게 되니, 만약 하루의 비용을 논하면 작으나, 날짜를 합하여 계산하면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약간의 자본이 됩니다. 생각컨대 오늘날의 급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9)는 유윤겸 등이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려우므로, 출판 사업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두시(杜詩)〉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성종 12년에 〈두시언해〉가 완성되었다면, 성종 13년에 따로 국(局)을 두어 예산을 써 가면서 또 〈두시〉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두시언해〉는 성종 13년(1482)에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혹 이때의 일은 〈두시언해〉가 아닌 한문본을 말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으나, 그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셋째, (7라, 마)에 의하면, 〈두시언해〉를 서너달 동안에 전 25권을 한꺼번에 간행하려면, 모든 주석 전문가, 번역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야 하고, 또 나라의 모든 행정력과 출판 관련 물자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를 출판하는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9)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성종 12년에도 흉년이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시기에 〈두시언해〉 출판에 모든 행정력과 출판 물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9)는 당시에 하던 일도 중지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시(杜詩)에 대해서는 세종 15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예조 좌참판 권도(權蹈)가 상언하는 내용이다.

(10) 세종 15년(1433) 계축 둘째 기사

우리 태종 대왕께서 전에 두시(杜詩)를 읽어 보시려고 하시므로, 신의 선친 권근(權近)이 ‘그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되오니, 청컨대 〈주역(周易)〉을 강습하옵소서.’ 하여, 태종께서 그대로 좇으셨으니, 두시도 오히려 불가하다 하옵거늘, 그 이단의 황당한 글을 경연의 석상에서 강론하심이 옳겠습니까?

두시와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주역(周易)〉을 강습하도록 청하여 태종이 그대로 좇았다는 것이다. 성종 15년(1484)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이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11) 성종 15년(1484) 갑진(甲辰) 첫째 기사

예전 태종(太宗)께서 두시(杜詩)를 진강하고자 하시니, 두시는 시사(詩史)로서 모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지만, 신의 조부(祖父) 권근(權近)이 오히려 진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 〈문한유선〉이겠습니까?

이를 보면, 〈두시언해〉 전권을 서너 달만에 완간하기 위하여 나라의 모든 연구 인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두시의 번역에 국가의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넷째,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흔(金訢)의 문집인 〈안락당집(顔樂堂集)〉 권2에 실려 있는 김흔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는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12)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

몇 달 간 문서를 견주고 교감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凡閱幾月 第一卷先成]. 이를 정서하여 전하께 나아가 성상의 재가를 품의하니 성상께서 보시고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上賜覽曰可 令卒事). 이어 신에게 서문을 쓸 것을 명하시었다.

조위의 ‘두시서’와 김흔의 ‘번역두시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흔의 서문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있고(이병주 1965, 1966), 〈두시언해〉가 두 개의 서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김일근(1964, 1966)의 입장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김흔의 ‘번역두시서’의 내용이 더 자세하다. 조위의 ‘두시서’에는 서문을 쓴 날짜가 명기되어 있어 김흔의 서문과 구별된다.

김흔의 서에서 자세한 것의 하나는 ‘제1권이 먼저 이루어져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병주(1966)에서는, 김일근(1964)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권1’이 아니라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으로 해석하였다.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안병희(1997)에서 보면 그것은 〈두시언해〉 전 25권 1질(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석이고 번역이고 판식이고 인쇄고 제본이고 간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재가를 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일근(1964)의 해석과 같이 여기서는 제1권의 원고가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2)의 밑줄 친 부분도 이해가 된다.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고 하는 것은 제1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끝내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야 편찬에 걸린 시간도 적합한 것이 되고 납득할 만한 것이 된다. 제1권의 원고를 만드는 데만 서너 달이 걸렸다는 것이므로 그 기간도 무리가 없게 된다.

다섯째,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서문 작성이 곧 그 책의 간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서문을 맨 나중에 쓰고 서문을 쓴 뒤에는 곧 출판이 되기 때문에 서문 연도와 출판 연도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간기(刊記)가 있으면 그에 적시된 날짜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고, 내사기가 있는 것은 내사 연도를 흔히 그 책의 간행 연대로 본다. 서문이 쓰여진 연대와 내사 연도가 다를 경우, 당연히 내사 연도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다. 25권이나 되는 전질이 여러 해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서문이 제1권에만 있다면, 서문이 쓰여진 시기는 당연히 간행 시기보다 몇 년이나 앞서게 된다. 〈두시언해〉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간행이 끝난 뒤에 그 한 질을 임금에게 진상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와 같은 언급은 적합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여섯째, 김일근(1964)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잡고 있다. 이것은 성종이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를 명한 시기를 참고하여 그 전에 〈두시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일근(1966)에서는 “물론 성종 14년 7월이란 절대 숫자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될 수 있는 것의 하나는 반치음 ‘ㅿ’의 소실과 관련된 사실이다. 이기문(1972a, 1972b)에 의하면, 반치음 소실을 가장 먼저 보이는 문헌이 〈두시언해〉이다. 또 이기문(1972b: 37)에 의하면, 〈두시언해〉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은 반치음 소실의 가장 이른 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뒤에 언급되는 것이 〈번역박통사〉이다. 중세어 자료를 검색해 보면, ‘’의 반치음이 소실되어 ‘이’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 1481년의 〈두시언해〉이다. 그 다음이 〈구급간이방〉(1489년)이고, 그 다음이 〈삼강행실도〉(동경대본)이고, 그 다음이 ‘순천김씨언간’이고, 그 다음이 〈속삼강행실도〉(1514년)이고, 그 다음이 〈번역노걸대〉(1517년)이다.

〈두시언해〉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의서(醫書)나 구어적 특성을 많이 가지거나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에 ‘’가 ‘이’로 나타난다. 이들과 비교하면, 〈두시언해〉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두시언해〉는 구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책도 아니고,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가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 이유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가 늦은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간본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은 책의 편찬이 꽤 오래 지속되었으며, 편찬 도중에 반치음 소실의 싹이 반영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구급간이방〉(1489년)과 연대를 맞추면 〈두시언해〉 초간본이 완간되는 것은 아마도 1489년경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을 1481년부터 따지면 8년 뒤가 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3) 〈두시언해〉 간행 연도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4.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은 위에서 간행 연대를 논의하는 자리에 이미 등장하였다. 편찬 관여자의 이름이 등장한 예를, 다른 예와 함께 (4)와 (7)에서 다시 가져오고, 필요한 부분에 밑줄을 치기로 한다.

(14) 〈두시언해〉 편찬자에 대한 언급

가.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曺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4나)

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라)

다.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7가)

라.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7나)

마. 최현배(1940/1976:122) : 〈증보문헌비고〉(권245, 장15)에 기대면, 성종이 여러 선비를 명하여 두시를 주석할 새 유윤겸이 백의(白衣)로서 뽑혔다 하며, 그 주석된 것을 언해하여서 두시언해를 엮은 이는 성종조의 조위요, 의침도 언해에 협력하였다.

바. 안병희(1997) :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한 홍문관의 문신들이다. 이때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의침은 훨씬 전에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종 때의 두시 주해에는 승려와 백의(白衣)가 참여하였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으나, 언해에 대하여는 그러한 기록이 썩 후대에 나타날 뿐이다.

(14가)에서는 조위(曺偉), 의침(義砧)이 언급되고, (14나)에서는 유윤겸(柳允謙), 의침이 언급되고, (14다)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의 명기 없이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이 언급되고, (14라)에서는 유윤겸, 의침이 언급되고, (14마)에서는 조위, 의침이 언급되나, (14바)에서는 의침이 제외되고 있다.

이 문제에 깃들인 가장 큰 혼동의 하나는 두시에 대한 주석과 언해를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14다)가 전형적인 예이다. 두시에 대한 언해가 40년 동안 행해진 국가적인 대업이라고 한 것은 주석과 언해를 다 합해서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조위의 서문에 등장하는 두시언해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유윤겸이다. 그러나 (14마)에 의하면, 유윤겸은 주석과 관련되는 인물이다. 조위의 서문에서도 주석과 관련되는 문맥에 유윤겸이 등장한다.

실록 세조 1년(1455) 8월 26일 다섯 번째 기사에는 유윤겸과 함께 유휴복(柳休復)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하고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15) 세조 1년(1455) 8월 26일 유윤겸과 유휴복의 상소

유기(柳沂)의 손자인 유휴복(柳休復), 유윤겸(柳允謙)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할아버지 유기가 죄를 입을 때에, 아버지 유방선(柳方善)·유방경(柳方敬) 등이 이에 연좌되어 모두 신몰(身沒)하여 관노로 되었는데, 을미년에 사유(赦宥)를 받았으나, 언관(言官)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환속(還屬)되었다가, 정미년에 외방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고, 무신년에는 경외(京外)에서의 임의로운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또 할아버지 유기는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죄에는 간여하지 않았는데, 단지 어떤 사람이 민무구 등은 가련한 사람이라고 한 말을 유기와 더불어 같이 들었다고 말하여 이로써 죄를 입었고, 신의 아버지도 역시 오래지 않아서 사유하심을 입어 평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일은 신 등(等)이 출생하기 전에 입었던 것이니, 빌건대 홍은(鴻恩)을 내리시어 특별히 부시(赴試)를 허가하여 주소서.

유휴복, 유윤겸이 이로써 부시를 허락받아 유휴복은 1460년에, 유윤겸은 14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유윤겸이 두시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성종 11년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6) 성종 11년(1480) 10월 26일(임신), 시독관(侍讀官) 이창신(李昌臣)의 주청

“두시(杜詩)는 시가(詩家)의 근본인데, 전 사성(司成) 유윤겸이 그 아비 유방선(柳方善)에게 전수(傳受)하여 자못 정통하고 능숙하니, 청컨대 연소(年少)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수업(受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유윤겸이 이때 자신에게 수업을 받은 문신들과 함께 언해에 착수한 것으로 본 것이 안병희(1997:7)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누가 언해를 진행하였는지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윤겸이 두시에 능숙하고 정통하였다고 하니 그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유휴복도 두시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가져 세종 때 백의로, 승 만우(卍雨)와 함께 두시의 주해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휴복은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에게 두시를 가르쳐 문리를 크게 깨치게 하였다고도 한다(안병희 1997 참조). 그러나, 유휴복은 성종 때의 두시 언해와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휴복은, 당시 62세인 유윤겸의 종형으로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도 안병희(1997)이다.

조위(曺偉)는 성종이 유윤겸에게 두시 언해를 명하였을 때(1481), 28세로 정6품의 직위에 있었다. 조위는 성종 6년(1475) 예문관 검열로 있었으나, 금주령을 어겨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사헌부에서는 조위를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부처(付處, 조선시대의 형벌. 유형의 하나. 서울과 고향의 중간 지점에서 거처하게 하는 것)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특별히 원에 의하여 가족이 살고 있는 금산군(金山郡)에서 부처하게 하였다. 성종 7년(1476)에는 진도에 부처된 박증(朴增)과 함께 금산에 부처되었던 조위가 방면된다.

성종은 12년 10월 18일 권건, 김흔, 조위 등에게 ‘이단(異端)을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道)가 유행(流行)할 수 없으며, 이단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어 바치게 한다. 성종 13년(1482) 2월 22일(신유) 기사에는 조위가 시독관(侍讀官)으로 ‘매’를 기르는 일에 관하여 진언하는 기사가 나온다. 성종 22년(1491) 5월 28일에는 조위가 동부승지로 임금에게 다른 관직에 임명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본직(本職)에 겸무(兼務)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청을 올린다. 성종 23년(1492) 10월 1일에는 조위가 좌승지로 전답의 부세 외에 요역(徭役)이 심히 번거로우니, 이것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원망을 가질 듯하다는 진언도 한다. 조위는 성종 12년 이후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이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17)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 기사

〈분류두시(分類杜詩)〉를 내리며 이르기를, “서문은 바로 죄인 조위(曺偉)가 지은 것이니 삭제하고, 또 죄인 성현(成俔) 같은 사람이 지은 서문이나 발문도 아울러 삭제하라.”

여기서 〈분류두시(分類杜詩)〉는 〈두시언해〉를 가리킨다. 연산군 때 조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위의 (17)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에 〈두시언해〉에서 조위 서문이 삭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설적이게도(17)의 기사는 처음 〈두시언해〉에 실린 서문이 조위의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17)의 일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7)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포된 모든 〈두시언해〉를 수거하여 그 서문을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 개인에게 배포된 책을 다 수거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더구나, 연산군의 재위는 10년으로 끝나므로, (17)의 왕명은 적어도 완전히는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혹시 김흔(金訢)의 서문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간본에서 조위의 서문을 제거한 뒤에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하여 김흔의 서문이 쓰여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김흔의 서문에 그것을 쓴 날짜가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위는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것일까? 서문을 쓴 것이 편찬에 참여하였다는 정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는가? 유윤겸에 대한 기록과 같이 조위도 두시에 정통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안병희(1997)에 의하면, 두시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문신들이다. 조위는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은 벼슬을 하였다. 그것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이다. 조위는 홍문관의 문신이라고 할 수 없다. 홍문관 문신들만이 언해에 참여한 것이라면, 조위는 서문만을 쓰고 언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증거도 찾아지지 않으므로, 조위를 편찬에 관여한 인물로 보기로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8) 〈두시언해〉의 편찬에 관여한 인물

가.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다. 조위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하였다. 연산군 10년에는 〈분류두시〉에서 조위의 서문을 삭제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두시언해〉에 조위의 서문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가 두시 언해에 참여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서문만 쓰고 편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우므로, 그 반대의 증거나 나오지 않는 한, 조위를 편찬 참여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해 참여자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의 문신들과 조위로 그 범위가 축소된다.

2.5. 〈두시언해〉의 저본(底本)

위의 (8)에 보인 바와 같이, 1443년(세종 25)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찬주분류두시〉는 송나라 서거인(徐居仁)이 편한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分類杜工部詩集)〉에 의거하여 편차와 분류식을 따르고, 원나라 고숭란(高崇蘭)이 편한 〈집천가주비점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批點分類杜工部詩集)〉에 따라서 유진옹(劉辰翁)의 비점을 인쇄해 넣은 것이라 한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찬주분류두시〉가 25권인 것과 〈두시언해〉가 25권인 것이 일치한다(김정은(n.d.)의 “〈찬주분류두시〉 해제” 참조). 다만 책수는 〈찬주분류두시〉가 21책인 데 대하여, 〈두시언해〉는 17책(혹은 19책)이어서 차이를 가진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고르지 않다. 〈찬주분류두시〉는 왜 행의 길이에, 같은 시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는가? 이는 주석의 양을 고려한 조치로 여겨진다. 행이 길어지면 주석의 양이 많아질 수 있다. 따라서, 주석이 많아져 주석만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의 길이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언해에서는 주석을 극히 절제하였기 때문에, 주석의 양을 고려하여 행의 길이를 조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할 뿐이다.

2.6. 〈두시언해〉 중간본과 언어적 특징

중간본은, 장유(張維)의 서문에 의하면 인조 10년(1632)에 〈두시언해〉 초간본이 보기 힘들어지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대구부사 김상복(金相宓)의 도움을 받아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오숙은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한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개간(改刊)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 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간본은 초간본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있고, 이와는 달리 오각(誤刻)에 의한 잘못도 있다. 중간본은 전권이 전한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초간본은 1, 2, 4권이 전하지 않고, 5권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가 〈한국어연구(韓國語硏究)〉(한국어연구회 편) 제11권(2014, 도서출판 역락)에 영인이 됨으로써 이제는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중간본과 비교하면, 초간본에는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특징이고,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음(牙音) 표기에 ‘ㆁ(옛이응, 꼭지 달린 이응)’이 사용된 것도 초간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어느 경우에나 모두 반치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초간본이라도 ‘[間]’는 ‘하  예  몰애옛 며기로다(하늘 땅 사이에 한 모래의 갈매기로다)〈두시(초) 3:35ㄱ〉’와 같이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일반적이나, ‘虛空 밧긘  매 잇고  이옌 두 며기로다(허공 밖에는 한 매 있고, 강 사이에는 두 갈매기로다.)〈두시(초) 3:26ㄴ〉와 같이 ‘이’로 쓰인 것도 나타난다. 유니콩크 자료에 ‘ 故園에 가고져 논 미로다〈두시(초) 10:33ㄴ〉’ 및 ‘ 어느  시러곰 됴히 열려뇨〈두시(초) 10:39ㄴ〉’와 같이 ‘’이 ‘’과 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입력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영인본에는 이 자리에 반치음이 그대로 있다.

초간본에도 반치음이 소실된 예가 나타나는 것은 초간본의 간행이 늦어져 후대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두시언해가 1481년 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초간본에도 ‘상구(上句)’과 같은 표기가 나타나고 ‘구름’과 같은 표기도 나타난다. 이는 초간본에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깃[羽]’에 대하여 ‘짓’과 같은 표기가 초간본에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짓’이란 어형이 잘 나타나지 않고 ‘깃’이 더 일반적인데, 〈두시언해〉에는 ‘깃’도 나타나고 ‘짓’도 나타난다. ‘안자셔 鴛鴦 다딜어 닐에 호니 기시 기우니 翡翠ㅣ 도다(앉아서 원앙을 찔러 일어나게 하니 깃이 기우니 물총새가 나직하도다.)〈두시(초) 15:26ㄴ〉’에서와 같이 당시의 일반적인 어형인 ‘깃’이 나타나는 반면, ‘時節이 바라온 제 사 이리 急促니 미 거스리 부니 짓과 터리왜 야디놋다(시절이 위태로운 때 사람의 일이 촉급한데, 바람이 거슬러 부니 깃과 털이 해어지는구나.)〈두시(초) 7:15ㄴ〉’에서와 같이 ‘깃’이 ‘짓’으로 쓰여, 구개음화가 적용된 예가 있음을 보인다. 〈두시언해〉가 1481년 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3. 〈두시언해〉 권21 해제

3.1. 〈두시언해〉 권21의 서지 사항

본 역주은 통문관(通文館)에서 1955년 영인한 〈영인 두시언해〉 권20, 21, 22 합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이십일(分類杜工部詩 卷之二十一)’이며, 판심제는 ‘두시 이십일(杜詩 二十一)’이다.

〈두시언해〉 권21은 전체가 45장으로, 언해된 시는 전체가 64수로, 중분류 제목 ‘기간 하(寄簡下)’에 속한 것이 율시 52수, 대분류 제목 ‘회구(懷舊)’에 속한 것이 고시 3수와 율시 9수로 12수이다. 이 분류에서 통문관 영인본이 가진 특이성의 하나는 ‘기간 하(寄簡下)’란 제목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제목을 볼 수 있는 것은 중간본 두시언해 제21권의 제1면에서이다. 통문관 영인본에도 권지20에는 시작 위치에 ‘기간 중(寄簡中)’이 있기 때문에, 21권에 ‘기간 하’가 빠진 것은, 단순한 오각으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른쪽에 보인 사진은 1955년 통문관에서 영인 간행한 두시언해 권21의 제1면을 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차이지는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차이를 보인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두시언해〉에는 ‘언해’에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굳이 주석에 반영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자세한 주석이나 주변적인 내용에 대한 소개도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3.2. 〈두시언해〉 권21의 오자, 탈자, 희귀어 등

(1) (1ㄱ) 3.1.의 서지 사항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통문관에서 영인한 〈두시언해〉 권지21에는 여기서 우리가 ‘중분류제목’이라 한, ‘기간 하(寄簡下)’란 제목이 영인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이 원본에서는 낙자(落字)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중간본에는 이 부분에 ‘기간 하(寄簡下)’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반영하였다.

(2) (4ㄱ) ‘ 荊州ㅣ 賞玩호미 가야 새로외요미녀’에서 ‘새로외요미녀’를 ‘새[新]+-로외(형용사 파생 접미사)-+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이(지정 형용사)-+-녀(의문 어미)’와 같이 분석하였다. ‘새로움뿐이겠느냐’의 뜻인데, 형용사 파생 접미사를 ‘-로외-’로 상정하였다. 어간을 ‘새-’과 같이 상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서는 ‘새외-’ 또는 ‘새로외-’까지 가는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3) (4ㄱ) 원문의 ‘출입(出入)’에 대한 언해 ‘드나로’을 ‘들[入]-#나[出]-#[入(?)]-+-오(확실성의 양태 선어말 어미)-+-ㅁ(명사형 어미)+(대격 조사)’과 같이 분석하였다. ‘드나-’에 해당하는 현대어는 ‘드나들-’이다. 이는 ‘들[入]-+나[出]-+들[入]-’과 같은 구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중세어에서 나중의 ‘들-’에 해당하는 말이 ‘-’로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여기서는 이 ‘-’을 ‘들-’의 이형태로 보았다.

(4) (5ㄴ) 원문의 ‘측신천지갱회고(側身天地更懷古)’의 ‘측신’을 언해자는 ‘모 기우려(몸을 기울여)’와 같이 언해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시 언해는 ‘언무소용(言無所容)’이란 할주를 달았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가 문제인데, 언해는 ‘측신(側身)’ 즉 ‘몸을 기울이다’에 대하여 그것을 ‘무소용(無所容)’과 같은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 ‘측(側)’이라는 한자의 쓰임에 동사적인 용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의미가 무소용(無所容)이라는 것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게 된다. ‘몸을 기울이다’는 의심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는 ‘무소용(無所容)’의 ‘용(容)’이 ‘받아들이다, 용납하다’ 등과 같은 뜻을 가진다는 것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측신(側身)’은 ‘몸을 기울이다’로, 의심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나 용납하지 않는 태도’와 내용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8ㄱ)의 언해 부분 ‘마 어로 그듸와 니리로다(관청은 가히 그대와 이을 것이로다.)’에 나타나는 ‘어로’는 ‘가히’의 뜻으로, 중세어 문헌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어루’형이다.

(6) (8ㄴ)의 ‘宮中엣 漢ㅅ 客星 도다(궁중의 한나라 사위 같도다)’의 ‘도다’에서 ‘-’을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문제된다. 중세어에는 ‘-’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도다’를 ‘[如]-+-도(감탄 선어말 어미)-+-다(어말 어미)’와 같이 분석하였다. ‘다’를 ‘다’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으나, 여기서는 중세어에 ‘다’와 ‘다’가 쌍형으로 있는 것으로 보았다.

(7) (8ㄴ)의 ‘望雲亭에셔 술 머구믈 돕솝놋다(망운정에서 술 마시는 것을 돕사옵는구나.)’에서 ‘돕솝놋다’는 ‘돕놋다’의 오기로 보인다. ‘’가 변해 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을 흔히 주체 겸양의 선어말 어미로 보나, 여기서는 ‘--’을 기본적으로 화자 겸양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본다.

(8) (10ㄱ)의 ‘엇뎨 져비 새 수어리미 업스리오(어찌 제비와 참새가 수런거림이 없을 것인가?)’에서 ‘수어리미’는 ‘수/수[喧(훤)]-+-어리/워리(동사 파생 접미사)-+-ㅁ(명사형 어미)+이(주격 조사)’와 같이 분석된다. 여기서 문제는 명사형 어미 ‘-ㅁ’에 대하여 그 앞에 늘 붙어다니는 확실성의 인식 양태 선어말 어미 ‘-오/우/아’가 쓰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명사형 어미에서 ‘-오/우/아’가 소실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11ㄱ)의 ‘궁녀개함근어연(宮女開函近御筵)’의 언해 부분에 ‘宮女ㅣ 函 여러 님 돗긔 갓가이 노솝놋다(궁녀가 함을 열어 임금의 자리에 가까이 놓사옵는구나.)’의 서술어 형태와 같이 ‘--’이 ‘-솝-’으로 적히고 있다. 이는 위의 (7)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솝-’은 ‘--’의 ‘’가 변해 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0) (11ㄴ)의 원문 ‘비등무나고인하(飛騰無那故人何)’에 대한 언해 부분 ‘라뇨 아니 故人에 엇더니오?’에 나타나는 ‘아니’가 문제이다. ‘아니’는 원문의 ‘무나(無那)’에 해당하는 말로, ‘무나’는 일반적으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 의미가 그대로 번역에 반영될 수 없다. ‘아니’는 ‘아니, 그 사람이 왔어?’와 같은 예에서처럼 ‘정말로’로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1) (12ㄱ)의 제목 ‘기고삼십오첨사(寄高三十五詹事)’에서 ‘고삼십오(高三十五)’는 고적(高適)을 가리킨다. 첨사(詹事)는 황태자궁이나 황태자 시강원(侍講院)의 칙임(勅任) 관리를 뜻하는데, ‘삼십오’가 뜻하는 것이 ‘첨사’의 서열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2) (13ㄴ)의 원문 ‘시억상심처(詩憶傷心處)’에 대한 언해문 ‘글런  슬턴  노니(글로는 마음 슬퍼하던 땅을 생각하노니)’의 ‘글런’은 ‘글론’의 잘못으로 본다. ‘런’으로는 다른 마땅한 해석이 찾아지지 않는다.

(13) (14ㄴ)의 원문 ‘백발비화락(白髮悲花落)’에 대한 언해문의 ‘셴머리예 고 디논 주를 슬코(센머리에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고)’에서 ‘고’는 ‘고지’의 오기이다. 주어로 보아야 한다. 그 대구인 ‘청운선조비(靑雲羨鳥飛)’의 언해 부분 ‘프른 구루메 새 뇨 브노러’에서 ‘브노러’는 ‘브노라(부러워하노라)’의 잘못으로 본다.

(14) (18ㄴ)의 할주에 ‘鞚은 馬勤이니(공(鞚)은 말의 굴레이니)’와 같이 나타나는데, ‘근(勤: 부지런하다)’은 ‘륵(勒: 굴레)’의 오각인 것이 분명하다.

(15) (31ㄱ)의 원문 ‘휘루각서동(揮淚各西東)’의 언해문 ‘믈 리고 제이곰 西東로 가리라’에서 ‘제이곰’은 제여곰’의 잘못으로 여겨진다. ‘제여곰’을 ‘제이곰’이라고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제이곰’이란 형태가 〈두시언해〉의 여기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오류가 확실해 보인다.

(16) (34ㄴ)의 원문 ‘애밀송화로(崖蜜松花老)’에 대한 언해문 ‘비러옛 른 소나못 고지 닉고’에서 ‘비러’는 ‘비레’의 오각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만 ‘벼랑’이 ‘비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소 문제가 되는 것은 중간본에도 그 자리에 ‘비러’가 쓰이고 있는 것이다. 단순 오각 답습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원문 ‘산배죽엽춘(山柸竹葉春)’에서 ‘배(柸)’는 ‘배(杯)’의 오각인 것이 분명하다. ‘배(柸)’는 그 뜻이 ‘원망하다’를 뜻한다. 이에 대한 언해가 ‘뫼햇 숤잔은 댓 보미로다(산의 술잔은 댓닢의 봄이로다)’에서 ‘댓’은 ‘댓닢’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원문은 ‘죽엽’인데, 그것을 ‘대쌀’로 언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17) 원문의 ‘세월수여도(歲月誰與度)’의 언해문 ‘ 눌와 다 디내니오(세월을 누구와 함께 지낼 것인가?)’에서 ‘눌와’의 ‘ㄹ’이 문제이다. 관련 서술어가 ‘지내-’이므로, ‘눌’은 대격으로 해석될 수 없다. ‘눌’은 ‘누(누구)’의 대격형이 비격형으로 재구조화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18) (38ㄴ)의 원문 ‘안암발수소(眼暗髮垂素)’의 언해문 ‘누니 어듭고 머릿터리 니 드롓도다(눈이 어둡고 머리털이 희게 드리워 있도다.)’에서 ‘니’가 ‘희게, 하얗게’와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니’가 부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현대어의 ‘부지런하니 일하면’과 같은 예에 쓰이는 ‘-니’와 같다. ‘-니’를 방언적인 어미라고도 한다.

(19) (39ㄴ)의 원문 ‘월명유자정(月明遊子靜)’에서 ‘유자(遊子)’가 언해문 ‘ 거 내 괴외야(달 밝거늘 내가 고요하여)’와 같이 ‘내’로 번역된 것이 특이하다. ‘유자(遊子)’는 흔히 ‘나그네’나 ‘길 떠나는 아들’과 같이 번역되기도 하였다. ‘두보’가 나그네로 ‘바람에 불려 다니듯이’ 다니고 있었으므로, ‘나그네’를 ‘나’로 번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서술어 ‘고요하다(괴외다)’를 적용하면, ‘내가 고요하여’와 같이 된다. 호응에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의심된다.

(20) (39ㄴ)의 원문 ‘건곤차심조(乾坤此深阻)’를 언해에서는 ‘乾坤애 이 히 깁고 險阻도다(하늘과 땅에 이 땅이 깊고 험하도다)’와 같이 번역하였다. 그러나 ‘땅’이 깊다는 것은 ‘땅’ 일반에 대하여 쓰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땅’은 평평하거나 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깊은 것인가? ‘하늘’, 즉 ‘건(乾)’이 깊은 것이다. ‘건곤차심조’는 ‘하늘과 땅이 이처럼 깊고 험한 것이다’와 같이 번역되었어야 한다. ‘차(此)’는 지시사이나, ‘이처럼, 이렇게’와 같이 부사적으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21) (39ㄴ)의 제목 ‘제정십팔저작장(題鄭十八著作丈)’은 ‘정십팔저작장(鄭十八著作丈)에게 제한다’와 같이 번역된다. 정십팔저작장은 정건(鄭虔)을 말한다. 한성무 외(1997:207)에는 이 시의 제목이 ‘제정십팔저작장고거(題鄭十八著作丈故居)’와 같이 뒤에 ‘고거(故居)’를 더 가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여 번역하면, ‘정십팔저작장의 옛 집에 제한다’와 같이 된다. 이 경우, ‘고거(故居)’가 더 있는 제목이 올바른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에 대하여 ‘제한다, 제목을 붙인다’와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성무 외(1997)에는 ‘제(題)’를 앞에 가진 시 제목이 5개 정도 있는데, ‘노래’에 대한 것이 2편, 건물에 대한 것이 3편이 있을 뿐이다. 사람에 대하여 ‘제’를 붙인 것이 없다. 따라서, ‘고거(故居)’를 가진 제목이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

(22) (44ㄴ)의 제목 ‘잠여림읍지책산호정봉회리원외솔이성흥(蹔如臨邑至㟙山湖亭奉懷李員外率爾成興)’에서 ‘책산호(㟙山湖)’는 ‘작산호(鹊山湖)’의 잘못으로 여겨진다. 작산(鹊山)이 호수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작산호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작산은 황하(黃河) 북쪽 강기슭, 낙구(濼口) 강변에 비스듬히 대가 되고 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까마귀 까치가 날아와 온 산꼭대기를 뒤덮는다고 한다. 선진 시대의 명의인 편작(扁鹊)이 일찍이 이 마을에서 불노장생의 묘약인 연단(煉丹)을 만들었다고 한다. 죽은 뒤에 이곳에 장사를 지내 작산(鹊山)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23) (44ㄴ)의 원문 ‘야정핍호수(野亭逼湖水)’의 ‘호수(湖水)’를 언해에서는 ‘믈’과 같이 번역하였다. 중세어의 ‘’은 흔히 ‘강(江)’을 가리키는 것인데, ‘호(湖)’를 ‘’으로 번역한 것이 특이하다.

(24) (45ㄱ)의 원문 ‘일주관두면기회(一柱觀頭眠幾回)’에서 ‘면(眠)’에 대한 언해가 ‘뇨’와 같이 적힌 것으로 보인다. 이는 ‘[眠]-+-(앗)-+-(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ㄴ(동명사 어미)#이(지정 형용사)-+-고(의문 보조사)’와 같이 분석될 수 있는 것으로, ‘잔 것인가. 잤는가’와 같이 풀이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앗-’이 ‘--’과 같이 적힌 것이 주목된다. 이는 형태소 분석에 보인 바와 같이 ‘앗’으로 적혔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앗’을 ‘’으로 적은 것은 ‘ㆍ’ 소실의 징후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과거 시제 형태의 기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有]-’가 받침 ‘ㅅ’과 같이 발음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과거 시제 형태 ‘-았/었-’의 발생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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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언해』의 배경과 권22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두보의 삶과 시대 배경

두보(杜甫, 712~770)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성당(盛唐) 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버지 두한(杜閑)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성(詩聖)이란 시에 있어서 성인(聖人)이란 뜻으로 그의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의 조상은 대대로 양양(襄陽)에서 살았으나, 두보가 태어난 곳은 호남성 공현(鞏縣)이다. 두보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의 저자인 두예(杜豫, 222~284)의 13대손이며, 당나라 초기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심언(杜審言, 645~708)의 손자이다. 부인 양(楊) 씨와의 사이에는 종문(宗文), 종무(宗武) 두 아들을 두었고, 딸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만 7세 때에 시를 지었다고 하고, 만 9세 때에는 이미 지은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조숙하였고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만 14~5세(이후 두보의 나이는 만으로 표시한다) 때 이미 문단에 나아가 자기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20대에 접어들어 진<세주>(晉, 산서성(山西省)), 오<세주>(吳, 강소성(江蘇省)), 월<세주>(越, 절강성(浙江省)) 등을 유랑하고, 23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24세 때에 경조(京兆, 장안현 서북쪽에 있었다고 함)로 돌아와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유랑 길에 나서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 등을 유랑하였다. 이때 두보는, 32세(744)로 조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가고 있던 이백(李白, 699~762)과 낙양에서 만났다. 고적(高適, ?~765), 이옹(李邕, 678~747) 등과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34세(746)에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곳에서 1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들지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두보는 자기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 38세(750) 때 현종에게 〈조부(鵰賦)〉를 지어 바쳤고, 39세 때에는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삼대예부〉를 바친 것이 주효하여 집현원(集賢院)에 대제(待制)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선서<세주>(選序, 관리임용 후보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용되지 못하였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실로 불우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다. 39세(751) 때, 당나라는 전쟁에서 남조(南詔), 대식(大食), 거란에 크게 패하였는데,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도 무겁게 부과하였다. 42세(754) 때에는 장마가 계속되고 기근이 심하여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에서 농사를 짓는 친척집에 맡기기도 하였다. 43세(755)에는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직을 얻었다. 그 낮은 관직이 자기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비웃는 심정을 피력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얻은 것이 기뻐 처자를 만나러 장안을 출발해서 봉선현(奉先縣)으로 가는 도중, 여산(驪山) 온천에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두보는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큰 세상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선현에 도착해 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은 상태였다.

43세(755) 때,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수도 장안까지 반란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촉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제의 자리도 아들 숙종(肅宗)한테 넘어갔다. 두보는 가족들을 이끌고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 두고, 자신은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 잡혀 도로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거리에는 반란군이 활개를 쳤다. 두보는 장안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45세(757), 지덕(至德) 2년 때, 반란군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죽음을 당하였다. 두보는 그 해 4월 장안을 탈출하여 남루한 몰골로 섬서성 봉상 행재(行在)에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황제는 그 해 5월 두보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간관(諫官)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했다. 그 해 말에 장안이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세주>(上皇,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 생활을 하게 되었다. 46세(건원(乾元) 1, 758) 때,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당 조정은 두보의 후원자였던 방관(房琯, 697~763)을 재상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두보도 좌습유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 6월에는 화주 사공(華州司功)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화주는 섬서성 화주현이고, 사공은 6참군의 하나로 주부(州府)의 좌리(佐吏) 벼슬이었다. 그러다가 낙양으로 가는 길이 뚫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과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관군이 크게 패하여 낙양이 다시 위험하게 되자,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두보는 47세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현)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세주>(同谷, 감숙성 성현)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을 향하였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곤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四川) 지방의 성도(成都)로 갔다. 성도에서 두보는 성도 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 엄무(嚴武)를 만났다. 엄무는 두보의 옛 친구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엄무는 두보보다 10년이나 연하인데다, 세교(世交)도 있는 터였는데, 두보가 아무런 실권도 없으면서 엄무를 업신여기는 투로 취중에 비위를 건드렸다가 그를 격노케 하여 그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두보는 성도 근교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50세(보응(寶應) 1, 762) 때,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근처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51세(광덕(廣德) 1, 763) 1월,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천 지방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엄무가 다시 성도에 돌아오게 되어, 두보도 다음해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두보에게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마음도 맞지 않았고, 관료 생활도 불편하였다. 폐병, 중풍병도 있어 53세(영태(永泰) 1, 765) 때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왔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자강을 내려와서 다시 표류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15일 추석이 지난 후에는 운안<세주>(雲安, 지금의 운양)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약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사천 지방에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으로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이듬해(대력(大曆) 1, 766) 늦은 봄에 병이 조금 낫자 다시 강을 따라 기주<세주>(夔州, 사천성 봉절현)로 내려갔다. 55세가 되는 해의 늦은 봄부터 56세 봄까지 약 2년 동안 기주에서 지내며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다.

55세(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琳)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 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57세(769) 1월 악주(鄂州)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두보는 담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지붕을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다시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郴州)에 있는 외가 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두보는 58세(대력 5, 770)가 되는 해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였다고 한다.

뇌양에서 홍수에 막혀 여러 날 굶고 있었는데, 뇌양 현령이 그것을 알고 전해 준 우적<세주>(牛炙, 쇠고기 구이)과 백주<세주>(白酒, 소주의 일종, 흰술)를 먹고 그날로 죽었다고 한다. 시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어 그것을 부인하는 설도 생기게 되었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鄂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 언사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豫)의 묘 근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묘 옆에 묻었다고 한다. (두보의 생애에 대해서는 차석찬의 역사 창고 홈페이지,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위키백과 및 차상원(1981)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혹 참고한 것을 일일이 밝히지 못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2.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관련된 문제

2.1. 『두시언해』의 성격

『두시언해』는 중국 성당시대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시를 언해한 책으로, 조선조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명으로, 성종 12년(1481, 성화(成化) 신축년) 가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제(原題)는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이며, 25권 17책(혹은 19책)의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를 흔히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고 하며, 약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두공부(杜工部)’의 ‘두’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며, ‘공부(工部)’는 두보가 52세(광덕 2, 764) 3월에 성도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을 때, 엄무의 천거에 의하여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 되었는데, 바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공부’를 가리킨다. 정식의 관직명대로 한다면 ‘공부원외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원외랑’을 약하고 그냥 ‘공부’라고만 부른 것이다. 두보를 그의 이름이나 자(字) ‘자미(子美)’ 혹은 호(號) ‘소릉(少陵)’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두공부’라 부르는 것이 두보를 높이는 의미를 가진다.

제목에 들어 있는 ‘분류’란 말은 두보의 시를 제재별로 분류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기초로 두보의 시 1,46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언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를 몇 가지 예를 보이면, 권10에 실려 있는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가 지은 〈군성조추(軍城早秋)〉와 같은 시가 그러한 예이다. 22권에도 〈수별두이(酬別杜二)〉라는 제목을 가진 엄무의 시가 실려 있고, 23권에도 〈기제두이금강야정(寄題杜二錦江野亭)〉이라는 엄무의 시가 실려 있다. 22권에는 〈증두이습유(贈杜二拾遺)〉라는 고적(高適)의 시도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이들 시를 그 제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이 목록은 『역주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0』의 해제를 수정한 것이다.

(1) 『두시언해(杜詩諺解)』의 대분류 및 중분류 제목

[1] 기행(紀行), [2] 기행 하(紀行下), [3] 술회 상(述懷上), [4] 술회 하(述懷下), [5] 질병(疾病), [6] 회고(懷古), [7] 시사 상(時事上), [8] 시사 하(時事下), [9] 변새(邊塞), [10] 장수(將帥), [11] 군려(軍旅), [12] 궁전(宮殿), [13] 성수(省守), [14] 능묘(陵廟), [15] 거실 상(居室上), [16] 거실 하(居室下), [17] 인리(隣里), [18] 제인거벽(題人居壁), [19] 전원(田園), [20] 황족(皇族), [21] 세주(世胄), [22] 종족(宗族), [23] 외족(外族), [24] 혼인(婚姻), [25] 선도(仙道), [26] 은일(隱逸), [27] 석로(釋老, 寺觀附), [28] 사관(寺觀), [29] 사시(四時), [30] 하(夏), [31] 추(秋), [32] 동(冬), [33] 절서(節序), [34] 주야(晝夜), [35] 몽(夢), [36] 월(月), [37] 우설운뢰부(雨雪雲雷附), [38] 운뢰(雲雷), [39] 산악(山嶽), [40] 강하(江河), [41] 도읍(都邑), [42] 누각(樓閣), [43] 조망(眺望), [44] 정사(亭榭), [45] 원림(園林), [46] 과실(果實), [47] 지소(池沼), [48] 주즙(舟楫), [49] 교량(橋梁), [50] 연음(燕飮), [51] 문장(文章), [52] 서화(書畫), [53] 음악(音樂), [54] 기용(器用), [55] 식물(食物), [56] 조(鳥), [57] 수(獸), [58] 충(蟲), [59] 어(魚), [60] 화(花), [61] 강두오영(江頭五詠), [62] 초(草), [63] 죽(竹), [64] 목(木), [65] 투증(投贈), [66] 기간 상(寄簡上), [67] 기간 중(寄簡中), [68] 기간 하(寄簡下), [69] 회구(懷舊), [70] 방문(訪問), [71] 수기(酬寄), [72] 송별 상(送別上), [73] 송별 하(送別下), [74] 경하(慶賀), [75] 상도(傷悼), [76] 잡부(雜賦).

(1)은 개별 시의 제목이 아닌, 상위 분류의 제목을 일단 모두 제시한 것이다. 이들 중 [36]의 ‘월(月)’은 대분류 제목이 누락된 것으로 판단되어, 역주자가 만들어 넣은 것이다. 상위 분류의 제목에는 대분류의 제목이 대부분이지만, 중분류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과 같은 제목이 그 하나이다. 18권에서 ‘강두오영’에 포함된 시는 3수인데, 2수는 이미 ‘조(鳥)’ 대분류에서 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61]의 ‘강두오영(江頭五詠)’ 뒤에는 별다른 표시 없이 12수의 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분류 ‘화(花)’에 속한다. ‘강두오영’에는 ‘화(花)’에 속하는 16수의 시 가운데 단지 3수만이 속하는 것이다. 이는 대분류 속의 일부가 중분류에 속하고 있음을 보이는 예이다.

[29]의 ‘사시(四時)’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과 동렬에 서 있으나, ‘사시’는 ‘춘, 하, 추, 동’을 아우르는 상위 범주이다. ‘사시’가 ‘춘(春)’의 자리에 있고, ‘춘’이 빠져 있다. ‘사시’를 초대분류 제목으로, 그 아래에 ‘춘(春)’을 보충하여, ‘춘, 하, 추, 동’을 대분류 제목으로 보기로 한다. 이는 [30]의 ‘하(夏)’, [31]의 ‘추(秋)’, [32]의 ‘동(冬)’이란 제목이 고시 몇 수, 율시 몇 수와 같은 할주를 가지고 있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고, 춘하추동의 계절이 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와 제재를 제공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다.

(1)의 분류 중 대분류의 일부에 포함되는 중분류를 제외하고, ‘기행’, ‘기행 하’를 의미 부류가 같은 것으로 보고, 다시 ‘상중하’나 ‘상하’로 되어 있는 것을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고, ‘석로 사관부(釋老寺觀附)’ 뒤에 오는 ‘사관(寺觀)’ 혹은 ‘우설 운뢰부(雨雪雲雷附)’ 뒤에 오는 ‘운뢰(雲雷)’를 합치지 않고 따로 독립시키고, 대분류 제목이 빠진 것으로 보이는 ‘월(月)’을 독립된 분류로 세우고, ‘사시’를 제외하고, ‘춘, 하, 추, 동’을 독립된 대분류로 취급하고, [70]의 ‘방문(訪問)’을 권22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16수의 중분류 제목으로 보면, 전체가 64대분류가 된다.

이 숫자는 『중간 두시언해』 영인본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다. 흔히 두시의 내용은 52부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에 보인 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초간본 전질이 발견되면 혹 그 정확한 편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분류와 중분류 또는 초분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도 분류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우선은 위에 같은 분류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두시에 대한 이해가 더 심화되어 더 세밀히 또 더 정확하게 부류가 나누어질 날이 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언해된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라 부르는 것은 두보의 원시와 이를 언해한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인 것이다. 『두시언해』 각권의 권두제나 권말제에는 모두 ‘언해(諺解)’라는 말이 없이 그 권수가 밝혀져 있다.

2.2. 『두시언해』 편찬의 목적

『두시언해』를 편찬한 이유는 중간본에 게재된 조위(曹偉)의 서문에 의하면, 그 첫째가 두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시언해』는 두시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쉽게 풀이하고자 편찬된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2) 『두시언해』 편찬의 첫째 목적

가. 시(詩)는 ‘국풍(國風, 『시경』의 한 체로 『시경』을 가리킴)’과 ‘이소(離騷,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의 제목으로 『초사(楚辭)』를 가리킴)’에서 내려와 성하여 이백과 두보를 높이 친다(시선과 시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본래의 기운이 흐리고 아득한[渾茫한] 상태이다. 단어와 문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삽(難澁)하여, 주석을 많이 해 놓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나.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 전한 신 유윤겸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시었다.

다. 이에 널리 주석을 수집하고, 불필요한 것을 베어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지리, 인물, 글자의 뜻이 어려운 것은 간략하고 간소하게 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고 읽는 데 편하게 하였으며, 또 우리 글로 그 뜻을 번역하였다.

라. 임금이 뜻하신 바의 이른바 난삽한 것은 일목요연하게 글을 이루고 정서하여 임금께 올렸더니,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시었다.

(2가)는 두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2나)는 성종이 『두시언해』 편찬을 명하게 된 동기를 말한 부분이다. 동기는 (2가)와 거의 같다. (2다)는 편찬의 과정과 결과를 말한 것이고, (2라)는 난삽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원고를 임금께 보인 것을 말한 것이다.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은 세교(世敎)에 있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권장하는 데, 즉 세상을 교화하는 데 시의 구실이 큰 것으로 보았다. 『두시언해』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3) 『두시언해』 편찬의 둘째 목적

가. 공효의 측면을 생각하면, 시도(詩道)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있다.

나. 큰 것은, 위로는 종묘(宗廟)의 노래를 지어 성덕을 찬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민속의 노래로 당대의 정치가를 찬미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감발징창(感發懲創)]으로 족하다.

다. 사람의 선과 악, 이것이 공자가 시 삼백 편을 산정(刪定)하여 사악함이 없는 교훈이 있게 한 까닭이다.

라. 두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고 지성(至誠)과 충성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썼다.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백세를 용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까닭은 사람을 감발징창(感發懲創)하게 하는 것은 실로 시 삼백 편과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고, 또 세상의 일을 말하고 실제를 진술하는 것은 시사(詩史)라고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3가)는 시의 궁극적인 효용이 세상을 교화하는 세교(世敎)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가 인간을 일부러 퇴폐하게 하고 세상을 더럽게 하고 악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기술이다. 얼른 보면 이는 당연한 기술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는 아마도 조위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3나)는 종묘의 노래이든 백성의 노래이든 감발징창(感發懲創: 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것이 되도록 마음속 깊이 느껴 촉발시키는 것)의 공효를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3다)는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사악하지 않게 하기 위함임을 말한 것이다. (3라)는 두시가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사람을 감발징창케 하는 힘을 가져, 시 자체를 시사(詩史)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의 시 삼백 편과 표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성종이 두보의 시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나, 공자가 시 삼백 편에 뜻을 두고 있는 것, 그 아름다운 은혜와 배움을 부르는 것이 시도(詩道)를 만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고, 공자에 있어서의 시 삼백 편의 산정(刪定)과 주자집주(朱子集註)에서의 큰 밝힘이 이제는 두보의 시인데, 그것은 바로 당시 성상(聖上)인 성종에 기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두시언해』의 편찬의 목적은 단어와 문장의 난삽함을 덜기 위한 목적이 하나이며, 세상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이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위의 서에서 잘 언급되지 않은 것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2.3. 『두시언해』 간행 연대의 문제

『두시언해』에 대한 기존의 해제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2년, 즉 1481년으로 보고 있다. 『두시언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그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의 상식이 되고 있다. 몇 가지 사전이나 해제에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4) 초간본 간행 연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가. 이병주(1958:123) : 『두시언해』의 간행은 성화 17년 신축(성종 12년, 1481년) 12월 상한 성종의 봉명으로 찬하여 강희안 서체의 ‘을해자’로 상재된 최초의 역시서다.

나.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曹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

다. 안병희(1971)의 『분류두공부시언해』 해제 : 간행 연대는 중간본에 실린 조위의 서문 등에 의하여 성종 12년(성화 17)임이 확실하다.

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ㆍ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曹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4가-라)에 보인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한결같이 그 간행 연대를 1481년으로 보고 있다. 이 연대는 조위의 서문에 나타난 시기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이 연도는 분명히 조위가 ‘서문’을 작성한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동안은 ‘서문’을 작성한 시기와 ‘간행 연대’를 같이 보았다. 조위의 서문에서 관련 사항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필요한 사항을 부가하여, (2가, 나)를 다시 (5가, 나)와 같이 가져오고, 서문을 쓴 날짜와 관련되는 사항을 (5다)에 보이기로 한다.

(5) 조위의 두시 서의 편찬 시기 관련 사항

가. 성화 신축 가을[成化辛丑秋]에 성상께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유윤겸(柳允謙) 등에게 명하시었다.

나. 성화 신축년 가을[成化辛丑秋]에 임금께서 홍문관 전한 신 유윤겸에게 명하시었다. 그 내용은 두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지만 주해 모음[會箋]은 번거로워 갈피를 못잡을 염려가 있고, 수계(須溪) 유진옹(劉辰翁)의 핵심 정리는 간단하나 누락의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의 설이 어지럽고 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을 다스려 불가불 핵심을 하나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너희들이 책을 편찬하여 보라 하였다.

다. 성화 17년 12월 상한(上澣). 승훈랑(承訓郞), 홍문관 수찬(修撰), 지제교(知制敎) 겸 경연 검토관(檢討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문원 교검(校檢) 신(臣) 조위(曹偉) 근서(謹書).

(5가)에 의하면, 성종이 유윤겸 등에게 이른바 『두시언해』 편찬의 명을 내린 것이 “성화 신축 가을[成化辛丑秋]”이다. ‘성화(成化)’는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그 신축년(辛丑年)은 1481년에 해당한다. 이 해를 성화(成化) 연호로 말하면 성화(成化) 17년이다. 그런데 (5다)와 같이 조위(曹偉)가 서문을 쓴 것도 ‘성화(成化) 17년’이다. 조위의 서문이 책의 간행과 때를 맞추어 쓴 것이라면, 책의 편찬을 명한 것과 책이 간행된 것이, 많아야 다섯 달밖에 되지 않는다. 음력으로 가을에 해당되는 기간을 8, 9, 10월이라 하고, 그 8월에 성종의 명이 있었다고 했을 때의 계산이 그러하다. 성종의 명이 9월이나 10월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진다. 석 달이 될 가능성도 있고, 성종의 명이 10월 말에 있었다면, 조위의 서문이 12월 상한에 된 것이므로, 그 기간은 두 달이 되든가 그 기간이 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전 2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 기간 동안에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을 갖추어 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6) 편찬과 간행 사이의 불가사의한 시간

조위(曹偉)의 서문이 간행 시에 쓰여진 것이라면, 전 25권이나 되는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걸린 시간은 많아야 다섯 달, 적으면 두서너 달밖에 되지 않는다. 두보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를 완성도 높은 번역과 정확한 주석으로 언해하여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간행한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래에는 이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과 관련되는 몇 가지 언급을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7) 『두시언해』의 편찬과 간행에 대한 견해(밑줄 필자)

가.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

나. 안병희(1979)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때부터 행해져 왔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義砧) 등이 1481년(성종 12년)에 완성하여 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다. 안병희(1997:20) : 『두시언해』는 언해에 착수한 바로 1481년(성종12)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되어 을해자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라. 김일근(1964:142) :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조위의 서문 일자에 의하여 성종 12년 12월일로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1권이 선성(先成)된 시기이며, 그 완성 간행은 적어도 근 2년후 성종 14년 7월(실록) 『황산곡시언해(黃山谷詩諺解)』의 하명 직전까지 지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7가)에 의하면 『두시언해』 편찬은 세종 25년(1443) 4월에 시작된 것이다. 조위의 서문이 1481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그 기간은 39년이나 된다. 『두시언해』 25권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간이다. 그러나 세종 25년(1443) 4월에 두시언해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때는 두시 주석서를 모으도록 하였고, 두시에 대한 여러 주석을 참고하여 교감본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8) 세종 25년(1443) 4월 21일 기사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으므로 구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시 주석서를 모으는 것이 언해 작업의 기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은 두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한 것은 교감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의 성격을 가지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이루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7가)와 같이, 언해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7나)에서는 두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 이후 되어 왔으나, 번역은 1481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7다)에서는 두시언해가 언해를 시작한 바로 그 해 연말에 전질 25권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6)에 제시한 것과 같이 25권이나 되는 거질의 책을 단 서너 달 만에 완성한다는 것은 컴퓨터 조판과 고도의 인쇄술이 발달한 21세기인 지금에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조판, 교정, 인쇄, 제본에 드는 시간만도 서너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5나)에 보는 바와 같이, 주석만 하더라도 그것을 통일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은 『찬주분류두시』의 것을 좇는다고 하여도, 번역이 남아 있다. 산문이 아닌, 시의 번역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책의 간행이 번역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활자를 만들어야 하고, 조판을 해야 하고, 교정을 보아야 하고, 인쇄를 해야 하고, 제본을 해야 한다. 종이가 부족하면 그것을 조달해야 한다. 단기간에 책의 간행이 끝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7라)에서는 특이하게 『두시언해』 초간본이 간행된 시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보고 있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 의하면 성종 12년은 『두시언해』 제1권이 먼저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성종 12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종 14년 7월에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黃山谷詩)』를 언해하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그 이전에 『두시언해』의 간행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의강(2006:76-77)에서는 유윤겸의 품계와 전보를 중시하고 있다. 유윤겸은, 조위의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있었다. 그 후 약 1년 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하다가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품계가 승진되고 부제학에 임명된다. 성종 14년(1483) 2월 11일에는 통정대부 공조(工曹) 참의(參議)로 전보된다. 이를 이의강(2006:77)에서는 『두시언해』의 일이 끝났기 때문에 홍문관보다는 업무가 수월한 공조에 전보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문과의 사람이 공조에 전보된다는 것을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이라는 해석은 온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휴식을 취하게 하려면 그냥 쉬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윤겸을 공조에 전보한 것은 공조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활자를 만들고, 조판을 하고, 인쇄를 하는 작업이 이때에야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성종 16년에도 유윤겸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지칭하고 있다. 성종 19년(1488)에는 호조 참의가 되기도 한다. 이는 1484년 유윤겸은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를 내놓고 공조 참의로 간 것이 아니라, 홍문관 부제학의 직을 가지고 공조 참의로 발령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겸직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성종 13년(1482)년의 실록 기사에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 등이 흉년의 때를 맞아 출판 사업의 정지를 청하는 기록과 임금이 그것을 윤허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중단을 요청하는 사업에 『두시』에 관한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9) 성종 13년(1482) 7월 6일 셋째 기사

해마다 흉년이 드는 것이 근고(近古)에 없는 바로서, 바야흐로 흉년을 구제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사전(四傳)과 춘추(春秋), 강목신증(綱目新增), 문한류선(文翰類選), 두시(杜詩), 이백시(李白詩), 용학구결(庸學口訣)과 같은 것을 모두 국(局)을 설치하여 공억(供億)이 따르게 되니, 만약 하루의 비용을 논하면 작으나, 날짜를 합하여 계산하면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약간의 자본이 됩니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9)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려우므로, 출판 사업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유윤겸 등이 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에 『두시(杜詩)』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성종 12년에 『두시언해』가 완성되었다면, 성종 13년에 따로 국(局)을 두어 예산을 써 가면서 또 『두시』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두시언해』는 성종 13년(1482)에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혹 이때의 일은 『두시언해』가 아닌 한문본을 말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으나 그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셋째, (7라, 마)에 의하면, 『두시언해』를 서너달 동안에 전 25권을 한꺼번에 간행하려면, 모든 주석 전문가, 번역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야 하고, 또 나라의 모든 행정력과 출판 관련 물자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시언해』를 출판하는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9)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성종 12년에도 흉년이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시기에 『두시언해』 출판에 모든 행정력과 출판 물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9)는 하던 일도 중지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시에 대해서는 세종 15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예조 좌참판 권도(權蹈)가 상언하는 내용이다.

(10) 세종 15년(1433) 계축 둘째 기사

우리 태종 대왕께서 전에 두시(杜詩)를 읽어 보시려고 하시므로, 신의 선친 권근(權近)이 ‘그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되오니, 청컨대 『주역(周易)』을 강습하옵소서.’ 하여, 태종께서 그대로 좇으셨으니, 두시도 오히려 불가하다 하옵거늘, 그 이단의 황당한 글을 경연의 석상에서 강론하심이 옳겠습니까?

두시와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주역(周易)』을 강습하도록 청하여 태종이 그대로 좇았다는 것이다. 성종 15년(1484)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을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이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11) 성종 15년(1484) 갑진(甲辰) 첫째 기사

예전 태종(太宗)께서 두시(杜詩)를 진강하고자 하시니, 두시는 시사(詩史)로서 모두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지만, 신의 조부(祖父) 권근(權近)이 오히려 진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 『문한유선』이겠습니까?

이를 보면, 『두시언해』 전권을 서너 달 만에 완간하기 위하여 나라의 모든 연구 인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두시의 번역에 국가의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넷째,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흔(金訢)의 문집인 『안락당집(顔樂堂集)』 권2에 실려 있는 김흔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에는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12)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飜譯杜詩序)’

몇 달 간 문서를 견주고 교감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凡閱幾月 第一卷先成]. 이를 정서하여 전하께 나아가 성상의 재가를 품의하니 성상께서 보시고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上賜覽曰可 令卒事). 이어 신에게 서문을 쓸 것을 명하시었다.

조위의 ‘두시서’와 김흔의 ‘번역두시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흔의 서문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있고(이병주 1965, 1966), 『두시언해』가 두 개의 서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김일근(1964, 1966)의 입장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김흔의 ‘번역두시서’의 내용이 더 자세하다. 조위의 ‘두시서’에는 서문을 쓴 날짜가 명기되어 있어 김흔의 서문과 구별된다.

김흔의 서에서 자세한 것의 하나가 ‘제1권이 먼저 이루어져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병주(1966)에서는, 김일근(1964)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권1’이 아니라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으로 해석하였다. “진상(進上)인 견본(見本)의 1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안병희(1997)에서 보면 그것은 『두시언해』 전 25권 1질(帙)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석이고 번역이고 판식이고 인쇄고 제본이고 간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재가를 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일근(1964)의 해석과 같이 여기서는 제1권의 원고가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2)의 밑줄 친 부분도 이해가 된다. ‘가하다고 하시고 일을 끝낼 것을 명하시었다’고 하는 것은 제1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편찬에 걸린 시간도 적합한 것이 되고 납득할 만한 것이 된다. 제1권의 원고를 만드는 데만 서너 달이 걸렸다는 것이므로 그 기간도 무리가 없게 된다.

다섯째,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서문 작성이 곧 그 책의 간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서문을 맨 나중에 쓰고 서문을 쓴 뒤에는 곧 출판이 되기 때문에 서문 연도와 출판 연도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간기(刊記)가 있으면 그에 적시된 날짜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고, 내사기가 있는 것은 내사 연도를 흔히 그 책의 간행 연대로 본다. 서문이 쓰여진 연대와 내사 연도가 다를 경우, 당연히 내사 연도가 간행 연도가 되는 것이다. 25권이나 되는 전질이 여러 해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서문이 제1권에만 있다면, 서문이 쓰여진 시기는 당연히 간행 시기보다 몇 년이나 앞서게 된다. 『두시언해』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간행이 끝난 뒤에 그 한 질을 임금에게 진상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제1권이 먼저 이루어졌다’와 같은 언급은 적합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여섯째, 김일근(1964)에서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를 성종 14년(1483) 7월로 잡고 있다. 이것은 성종이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를 명한 시기를 참고하여 그 전에 『두시언해』가 끝난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일근(1966)에서는 “물론 성종 14년 7월이란 절대 숫자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될 수 있는 것의 하나는 반치음 ‘ㅿ’의 소실과 관련된 사실이다. 이기문(1972a, 1972b)에 의하면, 반치음 소실을 가장 먼저 보이는 문헌이 『두시언해』이다. 또 이기문(1972b: 37)에는 『두시언해』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이 반치음이 소실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이다. 그 뒤에 언급되는 것이 『번역박통사』이다. 중세어 자료를 검색해 보면, ‘’의 반치음이 소실되어 ‘이’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 1481년의 『두시언해』이다. 그 다음이 『구급간이방』(1489년)이고 그 다음이 『삼강행실도』(동경대본)이고, 그 다음이 ‘순천김씨언간’이고, 그 다음이 『속삼강행실도』(1514년)이고, 그 다음이 『번역노걸대』(1517년)이다.

『두시언해』를 제외하면, 의서(醫書)나 구어적 특성을 많이 가지거나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에 ‘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비교하면, 『두시언해』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두시언해』는 구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책도 아니고 일반에게 널리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가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 이유는 『두시언해』의 간행 연대가 늦은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간본에 ‘’와 함께 ‘이’가 나타나는 것은 책의 편찬이 꽤 오래 지속되었으며, 편찬 도중에 반치음이 소실의 싹이 반영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구급간이방』(1489)과 연대를 맞추면 『두시언해』 초간본이 완간되는 것은 아마도 1489년경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을 1481년부터 따지면 8년 뒤가 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3) 『두시언해』 간행 연도

『두시언해』의 간행을 1481년 가을에 성종이 명하고 그 전(全) 25권이 1481년 12월 상순(上旬)에 완간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흔(金訢)의 ‘번역두시서’와 반치음의 변화를 토대로 추측하면 『두시언해』 초간본의 완간은 1489년 즈음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4.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인물은 위에서 간행 연대를 논의하는 자리에 이미 등장하였다. 편찬 관여자의 이름이 등장한 예를 (4)와 (7)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가져오기로 한다.

(14) 『두시언해』 편찬자에 대한 언급

가. 서울대 민족문화연구소 편(1973) 『국어국문학사전』의 ‘두시언해’ 항 : 성종 12년(1481) 간행. 활자본. 25권 19책. 본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조위(曹偉), 의침(義砧) 등이 번역한 것.(=4가)

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두시언해’ 항 : 초간본은 세종ㆍ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曹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 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다)

다. 이병주(1966) : 두시를 주석하는 국가적인 서업(緖業)은 진작 세종 25년(1443) 4월에 비롯하여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은 무론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까지 총동원된 대업으로, 무려 40년만에 결정, 상재(上梓)를 본 아방(我邦) 최초의 역시집임을 재삼 밝혀 둔다.(=7가)

라. 안병희(1971) :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은 세종조부터 행해졌으나, 번역은 성종의 명으로 유윤겸 등 문신과 승려인 의침 등이 성종 12년(1491)에 완성한 것이다.(=7나)

마. 최현배(1940/1976:122) : 『증보문헌비고』(권245, 장15)에 기대면, 성종이 여러 선비를 명하여 두시를 주석할 새 유윤겸이 백의(白衣)로서 뽑혔다 하며, 그 주석된 것을 언해하여서 두시언해를 역은 이는 성종조의 조위요, 의침도 언해에 협력하였다.

바. 안병희(1997) :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한 홍문관의 문신들이다. 이때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의침은 훨씬 전에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세종 때의 두시 주해에는 승려와 백의(白衣)가 참여하였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으나, 언해에 대하여는 그러한 기록이 썩 후대에 나타날 뿐이다.

(14가)에서는 조위(曹偉), 의침(義砧)이 언급되고, (14나)에서는 유윤겸(柳允謙), 의침이 언급되고, (14다)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의 명기 없이 집현전의 거유(鋸儒)와 사문(沙門)의 명석(名釋), 초지(梢知)의 백의(白衣)와 청금(靑衿)이 언급되고, (14라)에서는 유윤겸, 의침이 언급되고, (14마)에서는 조위, 의침이 언급되나, (14바)에서는 의침이 제외되고 있다.

이 문제에 깃들인 가장 큰 혼동의 하나는 두시에 대한 주석과 언해를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14다)가 전형적인 예이다. 두시에 대한 언해가 40년 동안 행해진 국가적인 대업이라고 한 것은 주석과 언해를 다 합해서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조위의 서문에 등장하는 두시언해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유윤겸이다. 그러나 (14마)에 의하면, 유윤겸은 주석과 관련되는 인물이다. 조위의 서문에서도 주석과 관련되는 문맥에 유윤겸이 등장한다.

실록 세조 1년(1455) 8월 26일 다섯 번째 기사에는 유윤겸과 함께 유휴복(柳休復)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하고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15) 세조 1년(1455) 8월 26일 유윤겸과 유휴복의 상소(일부)

유기(柳沂)의 손자인 유휴복(柳休復), 유윤겸(柳允謙)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 또 할아버지 유기는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죄에는 간여하지 않았는데, 단지 어떤 사람이 민무구 등은 가련한 사람이라고 한 말을 유기와 더불어 같이 들었다고 말하여 이로써 죄를 입었고, 신의 아버지도 역시 오래지 않아서 사유하심을 입어 평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일은 신 등(等)이 출생하기 전에 입었던 것이니, 빌건대 홍은(鴻恩)을 내리시어 특별히 부시(赴試)를 허가하여 주소서.

유휴복, 유윤겸이 이로써 부시(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것)를 허락받아 유휴복은 1460년에, 유윤겸은 14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유윤겸이 두시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성종 11년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6) 성종 11년(1480) 10월 26일(임신), 시독관(侍讀官) 이창신(李昌臣)의 주청

“두시(杜詩)는 시가(詩家)의 근본인데, 전 사성(司成) 유윤겸이 그 아비 유방선(柳方善)에게 전수(傳受)하여 자못 정통하고 능숙하니, 청컨대 연소(年少)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수업(受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유윤겸이 이때 자신에게 수업을 받은 문신들과 함께 언해에 착수한 것으로 본 것이 안병희(1997:7)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누가 언해를 진행하였는지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윤겸이 두시에 능숙하고 정통하였다고 하니 그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유휴복도 두시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가져 세종 때 백의로, 승 만우(卍雨)와 함께 두시의 주해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휴복은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에게 두시를 가르쳐 문리를 크게 깨치게 하였다고도 한다(안병희 1997 참조). 그러나 유휴복은 성종 때의 두시 언해와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휴복은, 당시 62세인 유윤겸의 종형으로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도 안병희(1997)에서이다.

조위(曹偉)는 성종이 유윤겸에게 두시언해를 명하였을 때(1481), 28세로 정6품의 직위에 있었다. 조위는 성종 6년(1475) 예문관 검열로 있었으나, 금주령을 어겨 처벌을 받기도 한다. 같은 해 10월 사헌부에서는 조위를 경상도 개령현(開寧縣)에 부처(付處; 조선시대의 형벌. 유형의 하나. 서울과 고향의 중간 지점에서 거처하게 하는 것)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특별히 원에 의하여 가족이 살고 있는 금산군(金山郡)에서 부처하게 하였다. 성종 7년(1476)에는 진도에 부처된 박증(朴增)과 함께 금산에 부처되었던 조위가 방면된다.

성종은 12년 10월 18일 권건, 김흔, 조위 등에게 ‘이단(異端)을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道)가 유행(流行)할 수 없으며 이단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지어 바치게 한다. 성종 138권, 13년(1482) 2월 22일(신유) 기사에는 조위가 시독관(侍讀官)으로 ‘매’를 기르는 일에 관하여 진언하는 기사가 나온다. 성종 22년(1491) 5월 28일에는 조위가 동부승지로 임금에게 다른 관직에 임명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본직(本職)에 겸무(兼務)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청을 올린다. 성종 23년(1492) 10월 1일에는 조위가 좌승지로 전답의 부세 외에 요역(徭役)이 심히 번거로우니 이것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원망을 가질 듯하다는 진언도 한다. 조위는 성종 12년 이후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이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17) 연산군 10년(1504) 12월 23일 기사

『분류두시(分類杜詩)』를 내리며 이르기를, “서문은 바로 죄인 조위(曹偉)가 지은 것이니 삭제하고, 또 죄인 성현(成俔) 같은 사람이 지은 서문이나 발문도 아울러 삭제하라.”

여기서 『분류두시(分類杜詩)』는 『두시언해』를 가리킨다. 연산군 때 조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7)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에 『두시언해』에서 조위 서문이 삭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17)의 기사는 처음 『두시언해』에 실린 서문이 조위의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17)의 일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7)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포된 모든 『두시언해』를 수거하여 그 서문을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 개인에게 배포된 책을 다 수거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더구나 연산군의 재위는 10년으로 끝나므로, (17)의 왕명은 적어도 완전히는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혹시 김흔(金訢)의 서문이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간본에서 조위의 서문을 제거한 뒤에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하여 김흔의 서문이 쓰여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김흔의 서문에 그것을 쓴 날짜가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위는 『두시언해』 편찬에 관여한 것일까? 서문을 쓴 것이 편찬에 참여하였다는 정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는가? 유윤겸에 대한 기록과 같이 조위도 두시에 정통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안병희(1997)에 의하면, 두시 언해에 참여한 사람은 유윤겸을 중심으로 한 홍문관 문신들이다. 조위는 시독관, 동부승지, 좌승지와 같은 벼슬을 하였다. 홍문관 문신들만이 언해에 참여한 것이라면, 조위는 서문만을 쓰고 언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증거도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18) 『두시언해』의 편찬에 관여한 인물

가. 종래에는 유윤겸, 조위, 의침, 유휴복 등이 언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으나, 의침이나 유휴복은 두시를 주석하는 일에는 참여하였으나, 두시를 언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성종의 명을 받은 것이 유윤겸이므로, 『두시언해』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 문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다. 조위는 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벼슬을 하였다. 연산군 10년에는 『분류두시』에서 조위의 서문을 삭제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두시언해』에 조위의 서문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조위가 두시 언해에 참여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서문만 쓰고 편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우므로, 그 반대의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조위를 편찬 참여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해 참여자는 유윤겸을 중심으로 하는 홍문관의 문신들과 조위로 그 범위가 축소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5. 『두시언해』의 저본(底本)

위의 (8)에 보인 바와 같이 세종 25년(1443)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중외(中外)에 두시(杜詩)에 대한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를 구입(購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편찬 작업을 맡은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신석조(辛碩祖) 등 6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주본(會註本)이 세종대에 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5년(성종 16)에 간행된 갑진자본(甲辰字本)과 병자자본(丙子字本)이다.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는 송나라 서거인(徐居仁)이 편한 『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分類杜工部詩集)』에 의거하여 편차와 분류식을 따르고, 원나라 고숭란(高崇蘭)이 편한 『집천가주비점분류두공부시집(集千家註批點分類杜工部詩集)』에 따라서 유진옹(劉辰翁)의 비점을 인쇄해 넣은 것이라 한다.

『두시언해』가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저본으로 하여 편찬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해를 모으고 그것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서 이미 주석본이 만들어졌다면, 언해를 할 때에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찬주분류두시』가 25권인 것과 『두시언해』가 25권인 것이 일치한다(김정은(n.d.), “『찬주분류두시』해제” 참조). 다만 책수에는 『찬주분류두시』가 21책인 데 대하여, 『두시언해』는 17책(혹은 19책)이어서 차이를 가진다.

책의 권차, 시를 분류한 문목(門目), 시의 제목과 본문 등에 있어서 『두시언해』의 체재는 대체로 『찬주분류두시』의 체재와 일치한다. 『찬주분류두시』는 언해본이 아니므로 당연히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언해본에도 협주가 있으나 그 양은 『찬주분류두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찬주분류두시』는 회주본(會註本)이나 회전(會箋)의 성격을 가지므로, 주석의 양이 많다.

언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이다. 『두시언해』는 거의 예외 없이 두시에서 대가 되는 2행씩을 한 행으로 잡은 데 대하여, 『찬주분류두시』에서는 행의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찬주분류두시』는 왜 행의 길이에, 같은 시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는가? 이는 주석의 양을 고려한 조치로 여겨진다. 행이 길어지면 주석의 양이 많아질 수 있다. 따라서 주석이 많아져 주석만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의 길이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언해에서는 주석을 극히 절제하였기 때문에, 주석의 양을 고려하여 행의 길이를 조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 판본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전하는 『찬주분류두시』 판본에는 갑진자본(1485년), 병자자본(1523년 추정), 갑인자본(1524년), 훈련도감자본(1615년) 등이 있으나, 『두시언해』의 편찬이 시작된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481년 이전에 간행된 『찬주분류두시』가 있을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2.6. 『두시언해』 중간본과 언어적 특징

『두시언해』 중간본은, 장유(張維)의 서문에 의하면 인조 10년(1632)에 『두시언해』 초간본이 보기 힘들어지자, 경상감사 오숙(吳䎘)이 대구부사 김상복(金相宓)의 도움을 받아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오숙은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한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개간(改刊)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 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간본은 초간본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있고, 이와는 달리 오각(誤刻)에 의한 잘못도 있다. 중간본은 전권이 전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초간본은 1, 2, 4권이 전하지 않고, 5권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로 알려져 있다.

중간본과 비교하면, 초간본에는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특징이고,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음(牙音) 표기에 ‘ㆁ(옛이응, 꼭지 달린 이응)’이 사용된 것도 초간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어느 경우에나 모두 반치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초간본이라도 ‘’[間]는 ‘하  예  몰애옛 며기로다(하늘 땅 사이에 한 모래의 갈매기로다)〈두시(초) 3:35ㄱ〉’와 같이 반치음 ‘ㅿ’이 쓰인 것이 일반적이나, ‘虛空 밧긘  매 잇고  이옌 두 며기로다(허공 밖에는 한 매 있고, 강 사이에는 두 갈매기로다.)〈두시(초) 3:26ㄴ〉와 같이 ‘이’로 쓰인 것이 나타난다. 유니콩크 자료에 ‘ 故園에 가고져 논 미로다〈두시(초) 10:33ㄴ〉’ 및 ‘ 어느  시러곰 됴히 열려뇨〈두시(초) 10:39ㄴ〉’와 같이 ‘’이 ‘’과 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입력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영인본에는 이 자리에 반치음이 그대로 있다.

초간본에도 반치음이 소실된 예가 나타나는 것은 초간본의 간행이 늦어져 후대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두시언해가 1481년 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초간본에도 ‘상구(上句)’과 같은 표기가 나타나고 ‘구름’과 같은 표기도 나타난다. 이는 초간본에 모음조화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깃[羽]’에 대하여 ‘짓’과 같은 표기가 초간본에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짓’이란 어형이 잘 나타나지 않고 ‘깃’이 더 일반적인데, 『두시언해』에는 ‘깃’도 나타나고 ‘짓’도 나타난다. ‘안자셔 鴛鴦 다딜어 닐에 호니 기시 기우니 翡翠ㅣ 도다(앉아서 원앙을 다구쳐 일어나게 하니 깃이 기우니 물총새가가 나직하도다.)〈두시(초) 15:26ㄴ〉’에서와 같이 당시의 일반적인 어형인 ‘깃’이 나타나는 반면, ‘時節이 바라온 제 사 이리 急促니 미 거스리 부니 짓과 터리왜 야디놋다(시절이 위태로운 때 사람의 일이 촉급한데, 바람이 거슬려 부니 깃과 털이 해어지는구나.)〈두시(초) 7:15ㄴ〉’에서와 같이 ‘짓’이 쓰여, 구개음화가 적용된 예가 있음을 보인다. 두시언해가 1481년 말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3. 『두시언해』 권22 해제

3.1. 『두시언해』 권22의 서지 사항

본 역주은 통문관(通文館)에서 1955년 영인한 『영인 두시언해』 권20, 21, 22 합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광곽(半匡郭)은 유계(有界) 8행 17자, 번역문 및 협주는 쌍행 17자이며, 판심은 상하 내향 2엽 흑어미이다.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 이십이(分類杜工部詩 卷之二十二)’이며, 판심제는 ‘두시 이십이(杜詩 二十二)’이다.

『두시언해』 권22는 전체가 56.5장으로 되어 있으며, 언해된 시는 전체가 46수이다. (1)의 중분류 제목으로는 [70]의 ‘방문’에서 [72]의 ‘송별 상’에 해당한다. 권22의 중분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19) [70] 방문(訪問), [71] 수기(酬寄), [72] 송별 상(送別上)

이 중 [70]의 ‘방문’에는 22권의 첫 시 ‘회일심최집이봉(晦日尋崔戢李封)’에서, 16째 시인 ‘문곡사육관미귀(聞斛斯六官未歸)’에 이르는 시가 포함된다. 이에는 위의 (1)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상위 분류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두시언해』의 원제목이 『분류두공부시언해』이므로, 16편의 시가 그 상위 제목을 가지지 않는 것은 시집의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합당한 제목을 붙인다면, ‘방문(訪問)’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16편 시의 제목에는 ‘심(尋), 견방(見訪), 빈지(賓至), 유객(有客)’ 등과 같은 말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보인 사진은 1955년 통문관에서 영인 간행한 『두시언해』 권22의 제1장 전면을 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해는,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표시하고, 또 한문 원문의 이해에 필요한 주석을 부가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두시언해』는 두시 원문에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다른 언해본과는 눈에 띄게 차이지는 점이다. 『찬주분류두시』에도 두시 원문에는 어떠한 종류의 구결도 달려 있지 않다. 두시 원문의 각 한자에 한자음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불경 언해와 차이지는 점이다. 『두시언해』가 일반 대중이나 초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배 계층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한자에 한자음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두시언해』의 주석에는 구결이 달려 있어, 『찬주분류두시』와 차이를 보인다. 『찬주분류두시』는 우리말 번역을 가지지 않는 회주본이므로 자연히 주석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두시언해』에는 ‘언해’ 부분에 『찬주분류두시』의 한문 주석의 내용이 상당 부분 흡수되었기 때문에 주석의 양이 상당히 줄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언해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주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자세한 주석이나 주변적인 내용도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3.2. 『두시언해』 권22의 오자, 탈자, 희귀어 등

(1) (1ㄱ)의 제목에 나오는 최집(崔戢)은 두보의 친구인 것이 틀림없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시중에 ‘최후(崔侯)’로도 언급되고 있으므로, 벼슬을 한 인물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戢’은 ‘집’과 ‘즙’의 두 가지 음을 가지고 있다. ‘집’은 ‘그치다’의 뜻이고, ‘즙’은 ‘거두다’의 뜻으로 되어 있다. 뜻으로 보아서는 ‘즙’으로 읽는 것을 권함 직하나, 한국 사람의 이름에 대한 의식에 ‘즙’보다는 ‘집’이 더 인명으로 느껴지는 것을 참작하여 ‘집’으로 읽는다.

(2) (1ㄱ)의 ‘들여’은 ‘들[入]-+-이(사동 파생 접미사)-+-거(부사형 어미)’로 분석되어 사동사 ‘들이-’가 자동사 ‘들-’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중간본에는 ‘들어’로 되어 있어, 초간본의 ‘들여’이 오자가 아닌가 의심된다. ¶아 비치 돇부우리로 혼 창의 들어 주근 시 자다가〈두중 22:1ㄱ〉.

(3) (2ㄴ)의 ‘이제 니르리 阮籍·히 니기 술 醉·야 모 爲·야 다’에서 ‘완적들ㅎ’과 같이 복수표지 ‘ㅎ’이 고유 명사에 붙은 것이 특이하다. 완적 및 그와 같은 사람들이. 원문의 ‘등(等)’을 ‘들’로 번역하여, 고유 명사의 복수가 가능한 것처럼 되었다. 중세어에서도 ‘ㅎ’은 일반적으로 보통 명사 뒤에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완적’과 같이 고유 명사 뒤에 연결된 것은 일반 예들과는 다른 것이다. 현대어에서 ‘*철수들이 왔다’와 같은 예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어 ‘등(等)’은 ‘철수 등이 왔다’와 같이 성립 가능하다. ‘완적히’는 ‘완적 등이’를 억지로 ‘완적히’와 같이 번역한 것이거나, ‘완적’을 일종의 보통 명사처럼 취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완적과 같이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어에서도 이러한 예는 찾기 어렵다.

(4) (1ㄴ)의 ‘기들올’은 ‘기들오[待]-+-ㄹ(미래 관형사형 어미)’와 같이 판독하여 〈두시언해〉 초간본의 중세어 기본형을 ‘기들오-’와 같이 상정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한 일반적인 해독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기들올’의 ‘올’이 정확하게 ‘올’을 적은 것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판각된 글자는 ‘을’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중세어의 ‘기들오다’가 ‘*기들으-’로 적힌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어간을 ‘기들오-’와 같이 상정한 것이다. 이 단어가 중간본에는 ‘기들울’과 같이 나타난다.

(5) (2ㄱ)의 ‘:버릐 소·리·도 · 더·워 :노놋:다’의 ‘노놋다’의 어말 어미 ‘-다’에 성조가 상성으로 찍혀 있는 것이 의아한 느낌을 준다. 어말 어미 ‘-다’의 성조는 대부분 거성이거나 평성이기 때문에 ‘-다’에 상성은 특이한 것 이다. 22권 9ㄴ의 ‘니놋다’에도 ‘-다’에 상성이 찍혀 있다.

(6) (4ㄱ)의 ‘머·굴 · 시·혹 ·내 믿·노라’에서 원문의 ‘자보(自保)’를 언해자는 ‘내 믿노라’와 같이 번역하였다. ‘자보’는 ‘스스로 지키다’의 의미로. ‘내가 준비해 둔 것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언해가 정확히 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조금 의심되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7) (4ㄴ)의 ‘담 우흐로 흐린 수를 남가’에서 ‘남가’는 ‘넘겨’의 뜻인데, 이를 ‘남[越]-+-(사동 파생 접미사)+-아(연결 어미)’와 같이 분석하였다. 그런데, ‘남[越]-’을 뜻하는 중세어형의 ‘남-’에 대하여 그 사동사인 ‘남-’란 어형은 중세어 자료에서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국립국어연구소의 ‘표준국어대사전’과 한글학회의 ‘우리말대사전’에 ‘넘기다’를 뜻하는 ‘남다’란 표제어가 올려져 있다. ‘--’란 사동 접미사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8) (6ㄱ)의 ‘盤얘 다 차바니’에서 ‘반(盤)+얘(처격 조사, 부사격 조사)’의 처격 조사 ‘얘’는 ‘애’의 오표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반’이 ‘ㅣ’ 모음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예’의 이형태로 볼 여지도 없다.

(9) (7ㄱ)의 ‘불러 어두믈 리 호매’의 ‘어두믈’이 ‘:어두ː믈’과 같이, ‘믈’에도 상성의 성조가 찍힌 것으로 보인다. 상성의 위의 한 점은 ‘ㅁ’의 왼쪽 끝에 매달린 것과 같이 되어 있다. 여기서 위의 한 점은 오각이거나 티가 붙은 것으로 본다. ‘믈’은 거성을 가진 것으로 본다.

(10) (7ㄱ)의 ‘雲霧ㅅ 소개 어·느 사미 少微星이 잇디 니던고’에서 ‘잇디’는 분명히 ‘잇·다’의 잘못이므로,주석에서 이것이 잘못임을 지적하였다.

(11) (7ㄴ)의 ‘白日이 올마기록’은 ‘올마가도록’의 잘못이므로, 이를 주석에 반영하였다.

(12) (9ㄱ)의 ‘날 더브러’의 ‘더브러’가 ‘더·브러’에서 ‘브’와 ‘러’ 사이 왼쪽에 점 하나가 있으나, 이 중간점은 무시하기로 한다. 다른 예들의 쓰임에서 ‘더브러’는 더·브러’와 같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3) (9ㄴ)의 ‘왯다가’의 ‘-가’에는 왼쪽에 점 둘이 찍혀 있다. 위에 있는 점 하나는 ‘-다’와 ‘-가’ 사이에 있으나, 이 점은 무시하기로 한다. 다른 예들의 쓰임에서 ‘-다가’는 ‘-가’에만 거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4) (10ㄴ)의 ‘ 조차 니리 업수믈’이 영인본에서는 ‘리’가 보이지 않는다. ‘리’를 평성의 ‘리’로 해독한 것은 역주자의 추측에 의한 것이다.

(15) (12ㄱ)의 ‘다 올 오직 表弟 미니’에서 ‘미니’의 ‘’는 ‘’의 오각인 것이 분명하므로, 이를 주석에 반영하였다.

(16) (13ㄴ)의 ‘謝安이 登臨얏 虛費 가티 아니니’에서 ‘얏’은 ‘얀’의 잘못으로 해석된다. ‘야’와 같은 연결 어미 구성 뒤에 사이시옷이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연결 어미 뒤에 사이시옷이 쓰인 다른 예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얀’과 같이 관형사형 어미 ‘-ㄴ’이 뒤에 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른 예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李生을 보디 몯얀 디 오라니(이생을 보지 못한 것이 오래니)〈두시 21: 42ㄱ〉. 蘊藉야 郞官 외언 디 오라고(마음이 넓고 포용력이 커 낭관된지 오래고)〈두시(초) 8:64ㄱ〉.

(17) (20ㄱ)의 ‘氣運·이 豪華·코 兵·을 미·들·니·라’의 ‘미·들·니·라’에서 언해자는 원문의 ‘조(阻)’를 ‘믿다’로 언해하였으나, ‘의심하다’로 보는 것이 문맥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조(阻)’에 ‘믿다’의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18) (25ㄱ)의 ‘우·흐로 請·호 甲兵·을 :덜오’의 ‘덜오’에서 ‘오’ 앞에는 조금 치켜 옆으로 길게 그은 점이 있으나, 잘못 찍어 지운 것으로 본다. ‘덜’이 상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에는 그 영향으로 거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를 찍으려고 하다가 옆으로 그어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19) (29ㄱ)의 ‘:주린 :매고·기 ·브르 먹·디 :몯·얀 ·갤 기우려 :사 조·차 ·니라’는 원문의 ‘측시수인비(側翅隨人飛)’에 해당하는 것으로, 언해자는 ‘측시’를 ‘날개를 기울여’와 같이 해석하였으나, 이는 ‘측면의 날개로’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여겨진다. ‘측면의 날개’는 정도의 길이 아닌 길로 가는 것을 말한다. 곁눈질을 하는 것에 해당한다.

(20) (40ㄴ)의 ‘南녁 늘·근 ·사·미 ·오혀·려 思慕·놋·다’에서 ‘·오혀·려’는 ‘·오히·려’의 잘못으로 보았다. ‘오혀려’가 쓰인 다른 예를 확인할 수 없다.

(21) (43ㄴ)의 ‘:둘·희 :쁘디 도·라볼 ·예 마·리니’에서 ‘쁘디’는 ‘디’의 잘못임이 분명하여 고친다. 원문의 ‘정(情)’도 ‘쁟’이 ‘’의 잘못임을 말해 준다.

(22) (44ㄱ)의 ‘사·호·맷 ·리 天下·애 어·드·웻·니’에서 ‘사·호·맷 ·리’는 원문의 ‘융마(戎馬)’에 해당한다. 언해자는 ‘융마(戎馬)’를 정말로 ‘싸움의 말’로 해석한 것이다, 이럴 경우, ‘전쟁의 말이 온 세상에 어두워 있다’는 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러나 ‘융마’는 전쟁에서 쓰는 수레와 말이라는 뜻으로, 군대를 가리킨다. 군대가 온 세상에 가득하여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야 뒤에 이어지는 말도 잘 해석된다.

(23) (47ㄴ)의 ‘말·옥 :범 한 · 眞實·로 디나:갈 ·뱨니·라’에서 ‘뱨’는 ‘배’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단순 오자라 할 수 있다.

(24) (47 ㄴ)의 ‘주·으려· 아· 서르 밧·과 머·구미 잇·고’에서 ‘주·으려·’은 ‘주·으리·’의 잘못으로 보았다. ‘주으려-’가 어간으로 쓰인 다른 예가 없다.

(25) (47ㄴ~48ㄱ)의 ‘그:듸 나·라 다··릴 조 ·졋·건마· 하· 門·이 鬱然·히 놉·도다’에서 ‘나·라 다··릴 조’는 원문의 ‘경제재(經濟才)’에 해당한다. 원문의 ‘경제(經濟)’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언해자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도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것으로 여겨진다.

(26) (48ㄴ)의 ‘ 江沱·애 누·엇더·러 ·라’에서 ‘누·엇더·러’의 ‘러’는 ‘라’의 잘못으로 본다. 회상의 ‘-더-’ 뒤에 오는 종결 어미는 ‘-라’이기 때문이다.

(27) (49ㄱ)의 ‘韋生·이 ·나하 져·므니’에서 ‘나하’는 ‘나히’의 잘못으로 보았다. 중세어 자료에서 ‘나하’가 원문의 ‘춘추(春秋)’에 해당하는 ‘나이’를 뜻하는 예는 찾아지지 않는다.

(28) (50ㄱ~ㄴ)의 ‘그·테 사·괴요·매 미·촌 ·배 엇·노라’에서 ‘엇노라’는 ‘잇노라’의 잘못으로 본다.

(29) (53ㄱ)의 ‘한 病·에 ·어·즈러·이 브·터 엇·노니’에서 ‘엇·노니’는 ‘잇·노니’의 잘못임이 분명하여 이를 반영하였다.

(30) (56ㄱ의 ‘나 岷山 아·랫 ·토라· 커·’에서 ‘아랫’의 ‘아’ 앞에는 진하고 굵은 사선이 오른쪽 아래로 그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잘못 그은 것으로 본다. ‘아래’의 ‘아’는 흔히 평성이기 때문이다.

(31) (57ㄱ)의 ‘陽漢· 모 便安 히·니’에서 ‘陽漢’은 ‘漢陽’의 잘못이다. 원문에 ‘漢陽’으로 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언해에서 이를 ‘陽漢’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해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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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문온역이해방≫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책의 간행 및 그 배경과 경과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은 조선 중종 37년 함경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김안국(金安國)이 왕명을 받아 호군(護軍) 박세거(朴世擧), 사맹(司猛) 홍침솔(洪沉率), 내의원 정(正) 문세련(文世璉), 직장(直長) 유지번(柳之蕃), 전의감 전 첨정(僉正) 이척(李倜), 직장(直長) 정추(鄭樞), 혜민서 전 직장(直長) 홍세하(洪世河) 등과 함께 전염성 열병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시행하기 쉬운 처방과 구비하기 쉬운 약을 취하되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 60여 방에 다시 40여 방을 첨가하여 이것을 진양(鎭禳), 불상전염(不相傳染), 복약방술(服藥方術), 노복(勞復) 등 4부문으로 나누고, 약에는 우리말 향명(鄕名)을 부기하고 필요한 곳에는 채취하는 법을 덧붙여, 중종 37년(1542)에 언해 간행한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기로 한다.

(1)가. ≪분문온역이해방≫의 편찬은 김안국이 주도한 것이다.

나. ≪분문온역이해방≫이 간행된 것은 중종 37(1542)년이다.

다. 약이름에는, 우리말 이름을 더하고 그 채취하는 법을 덧붙인 것도 있다. 모든 약이름에 우리말 이름을 덧붙인 것은 아니다.

중종실록 37년 6월 13일(임진)의 기록에는 함경도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慶源), 부령(富寧), 경성(鏡城), 경흥(慶興), 회령(會寧) 등의 읍에 전염병이 치성(熾盛)하므로 ≪온역이해(瘟疫易解)≫를 하송(下送)하여 구료(救療)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나타난 ≪온역이해(瘟疫易解)≫는 ≪분문온역이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 보이기로 한다.

(2)가. 중종 37년에는 함경도 지역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나. 중앙에서는 ≪온역이해≫를 하송하여 구료케 하였다고 한다. 이에서 ≪온역이해≫는 ≪분문온역이해방≫을 말한다.

중종 1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온역질(瘟疫疾)은 전염되기 쉽고 사람이 많이들 그로 인해 죽기 때문에, 세종조에는 생명을 중히 여기고 아끼는 뜻에서 ≪벽온방(辟瘟方)≫ 같은 것을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경향에 인포(印布)하였는데, 지금은 희귀해졌기로 신이 또한 언해를 붙여 개간하였습니다. 또 ≪창진방(瘡疹方)≫에 대해서는, 이미 번역하여 개간하였으나 경향에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요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병으로 죽기 때문에 신이 경상도로 갈 적에 이를 싸 가지고 가서 거기서 간행하여 반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구급에 간편한 비방을 널리 반포하던 성종조의 전례를 따라 많이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소서.” 하고 주청한 것이 실록에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이전에도 ≪벽온방≫을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경향에 인포(印布)하였는데, 희귀해져서 김안국 자신이 또한 언해를 붙여 개간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로 보면, ≪분문온역이해방≫의 김안국 서문에 나타나는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는 아마도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또한 이해에 편하도록 한다.

(3)가. 김안국은 이전에도 ≪벽온방≫과 ≪창진방(瘡疹方)≫을 번역, 개간한 일이 있다.

나. 김안국 서문에 나타나는 ‘이전에 초하여 두었던 구초(舊抄)’는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중종 때에는 전염병이 크게 번지는 것은 실록 기사에서 알 수 있다([21] 참조).

중종 20년 2월 4일(계사)에는 평안도 관찰사 김극성(金克成)이 치계하기(馳啓, 보고하여 올리기)를, ‘전일에 치계한 뒤에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도내(道內)의 백성들은 벽동(碧潼) 14명, 위원(渭原) 5명, 가산(嘉山) 18명, 삭주(朔州) 15명, 영원(寧遠) 4명, 선천(宣川) 44명, 평양(平壤) 28명, 영변(寧邊) 34명, 정주(定州) 58명, 의주(義州) 47명, 운산(雲山) 25명, 숙천(肅川) 22명, 창성(昌城) 27명, 덕천(德川) 102명, 용천(龍川) 30명, 은산(殷山) 59명, 강동 18명, 자산(慈山) 30명[이상 6백 명. 총계는 7천 7백 24명이다.]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에 대한 중종의 전교는 ‘이 장계(狀啓)를 보건대, 전염병이 이미 전일에 환자가 없던 고을에도 퍼졌으니 두어 달 뒤에는 다른 도(道)에도 파급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지극히 염려스럽다. 여러모로 빠짐없이 치제(致祭)하며 비손(손을 비비면서 소원을 말하는 것)했는데도 전염병이 이렇게 퍼지니 내가 재변을 해소할 방도를 모르겠다. 시종(侍從)들은 매양 자주 사(赦)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모두 나쁜 기운의 소치인데, 나쁜 기운은 허다히 형옥(刑獄) 사이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소방(疏放)하는 한 가지 일이 재변을 해소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에 만일 어느 죄 이상을 소방하여 인심이 화열(和悅)해지게 한다면 혹 나쁜 기운이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니, 시행 여부를 삼공(三公)에게 의논하라’는 것이었다.

중종 21년 2월 14일(계묘)에는 다시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평안도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고, 앓아 누운 사람도 많아 이들도 구료(救療)하지 못하여 죽게 될 것인데, 계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관찰사는 역시 한 도(道)의 주인이니 그런 일을 목격(目擊)하고서 어찌 처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만, 나의 진념(軫念)하는 뜻을 들어 본도(本道)의 관찰사에게 하서(下書)하여 처치해 가는 계책을 치계(馳啓)하도록 하고, 아울러 그런 뜻으로 민간을 방문(訪問)해 보고 아뢰도록 해야 한다.’ 하고, 또 정부의 낭관(郞官)을 불러 전교하기를 “재변이 이러한데 내가 무슨 계책을 써야 멈추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내가 길이 염려스러운 것은 수령(守令)들이 마음을 다해 처치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매장하지도 않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救恤)하지도 않으므로 그렇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번에 익숙한 조관(朝官)을 경차관(敬差官)이란 이름으로 내보내어, 무릇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는 일과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모두 단속하게 하도록 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또 사당(祠堂)을 세워 여귀(癘鬼)에게 제사하는 일을 전일에 정원(政院)에 물으니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과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의논하기 바랍니다.’ 했는데 내가 그때, 의논할 것이 없다고 답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백성들이 이렇게 죽어가게 되고 조종조(祖宗朝)에서도 극성(棘城, 삼국시대 만주의 금주에 있던 성. 선비족의 모용씨가 294년 북부여의 세력을 몰아내고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24] 참조)에 사당을 세워 지금도 제사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여역을 멈추게 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되, 뒷날에도 그대로 하고 폐하지 않음이 어떻겠는가? 또 소방(疏放)하는 일에 대해 전일에 대신들의 뜻이, 사(赦)는 소인(小人)들의 요행이므로 자주 내림이 합당하지 못하고, 단지 장 1백(杖一百) 이하의 죄인만 사면(赦免)함은 하늘의 시변에 응답하는 일이 못 된다고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건대 과연 1백 이하만 소방함은 진실로 경(輕)하다. 만일 서울과 외방(外方)의 도 1년(徒一年) 이하의 죄인들을 아울러 소방한다면 인심이 거의 기뻐하게 되어 재변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니, 정부와 의논하라.”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의 수가 정확하게 보고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하는 일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게 하는 것,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게 하는 것, 치제(致祭, 죽은 사람이 있을 때 제물과 제문을 주어 제사지내게 하는 것)하는 것, 비손하는 것, 원통하고 억울한 죄인들을 소방하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4)가. 당시에도 전영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는 중앙에 정확하게 보고 되고 있었다.

나. 전염병은 나쁜 기운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았고,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죽은 사람 매장, 굶주린 사람 구제나 제사지내는 것, 비손하는 것, 죄인 석방으로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 등과 같은 방법이었다. 의학적으로 전염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4나)는 ≪분문온역이해방≫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판본

≪분문온역이해방≫의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은 지금 전하지 않고,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생각되는 목판본만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완본이 아닌 낙장본으로, 29장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김안국 서 2장, 진양문((鎭禳門) 16장 7행, 불상전염문(不相傳染門) 4장 10행은 전부 남아 있으나, 복약방술문(服藥方術門)은 5장 13행만이 남아 있고, 노복문(勞復門)은 전하지 않는다.

목판본 1책으로 세부 판식은 다음과 같다. 1-7장: 사주 쌍변(四周雙邊), 6-29장: 사주 단변(四周單邊), 반엽 광곽(半葉匡郭): 20.9×17.5cm, 유계(有界), 반엽 10행 18자, 판심: 상하 세화문 어미(上下細花紋魚尾), 판심제: 이해방(易解方). 책 크기: 30.5×22cm.([35] 참조)

영인본으로는 1982년 홍문각에서 이 책과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벽온신방(辟瘟新方)≫ 등을 합본하여 낸 것이 있고, 1992년에는 김신근 편으로 여강출판사에서 ≪한국의학대계≫를 낸 것이 있는데, 그 38권에 포함된 것이 이 책이다.

3. 표기상의 특징

이 책의 표기법상의 특징을 홍문각 영인본의 홍윤표(1982)[26]의 해제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로 한다. 부분적으로 언어상의 특징도 포함시켜 지적하기로 한다.

(5)가. ≪분문온역이해방≫에는 언해문 한글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책보다 먼저 출간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에 방점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이 책에 방점이 찍힌 것은 이 책에 상당히 정성을 들였음을 의미한다. 크기가 매우 작아지고, 그 위치나 형태가 다소 일정하지 않게 찍히고 있다.

나. 언해문 한글 받침의 옛이응(ㆁ)은 철저하게 ‘ㆁ’ 자가 쓰이고 있으나 극히 예외적으로 유모(ㅇ) 형태의 이응이 쓰이는 일이 있다. 예. 쉬궁을 (2ㄱ), 밤만 (12ㄱ), 붕(鯽魚)를 (19ㄴ),  병니 잇 (19ㄴ).

‘쉬궁(시궁창)’의 ‘궁’은 ‘구’ 아래에 ‘ㆁ’이 쓰인 것이기 때문에, ‘구’ 아래에 ‘ㆁ’이 쓰인 것인지, ‘구’ 아래에 ‘ㅇ’이 쓰인 것인지를 구별하기 어렵다. ‘ㅇ’과 ‘ㆁ’의 구별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면, ‘ㆁ’을 구별하기 쉽게 두드러지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편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ㅇ’과 ‘ㆁ’ 글자의 구별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붕’는 15세기와 같으면, ‘부’와 같이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붕’와 같이 쓴 것은 후행 음절의 ‘ㆁ’이 차츰 종성으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병하니’는 ‘병’이 받침이 ‘ㅇ’으로 쓰인 예이다. ‘’은 거의 예외 없이 옛이응 받침으로 쓰였던 것이다.

다. 언해문의 된소리 표기에는 ‘ㅅ’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ㅂ’은 특이한 예에만 쓰이고 있다.

보기) 귿 롣고(7ㄱ), 나못 불휘 손락(7ㄴ), 싸라(9ㄱ, 24ㄴ), 라(8ㄱ, 16ㄴ), 교(15ㄱ), 가가(10ㄴ), 밤만(12ㄴ), 과(14ㄴ), 허(20ㄴ), 올손온가락으로(21ㄴ), 하휘와(25ㄴ); 열(4ㄱ), 지지(25ㄱ), 헤(6ㄱ), 좁 (27ㄱ),  약이라 (16ㄱ).

위의 예에서 보면, ‘[種], [米], [庭], -[用]’ 등에서 ‘ㅂ’계 된소리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ㅂ’이 중철된 것이다. ‘좁’과 같은 표기는 이 시대에 어두(語頭)의 ‘ㅂ’이 발음되었다기보다는 된소리로 발음되었음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ㅂ’계 된소리는 과거의 발음을 보이는 전통적인 표기의 성격을 가진다.

라.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어말 ‘ㄷ’과 ‘ㅅ’이 구별되어 표기되고 있다.

  보기) 귀시니 븓디 몯니(8ㄴ), 술 몯 먹니어든(13ㄴ).

여기서는 ‘몯’의 받침이 ‘ㄷ’이 15세기에서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이 주목되는 것이다.

마.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사이시옷이 후행어의 두음과 함께 쓰이기도 하였다. 보기) 나못 불휘 손락(7ㄴ), 밤만(12ㄴ), 올손 온가락으로(21ㄴ).

이들 예는 위의 (다)의 된소리 표기의 예로도 보인 것이다. 사이시옷이 된소리로 발음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ㅅ’이 사이시옷 표기인지 된소리 표기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기 어렵다.

바.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구개음화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보기) 흘리디(2ㄱ), 덥단 모딘 을(12ㄱ), 탄티(14ㄴ).

사.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경음화 현상이 비경음화 현상과 병행하여 나타나고 있다. 보기) 싸라(9ㄱ, 21ㄴ, 23ㄴ, 24ㄴ, 26ㄴ, 27ㄱ), 사라(10ㄴ, 16ㄴ, 17ㄱ); 허(15ㄴ, 25ㄴ), 디허(16ㄴ);  너삼 휘(22ㄱ), 가리 불휘(24ㄴ), 묏미나리 불휘(24ㄴ).

아.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어말 유기음은 선행어의 받침을 내파화하고 후행어의 두음을 외파화하는 것으로 표기된다.

  보기)  닙플 야(9ㄴ).

자.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체언의 겹받침이나 용언의 겹받침이 모두 연철되어 쓰이고 있다.

  보기) (24ㄴ), 믿(10ㄴ), 글혀(10ㄴ).

이는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에서의 표기와 대조된다. 후자에서는 용언의 겹받침만 연철되고 체언의 겹받침은 연철되지 않았다.

차.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를 보면 자음 동화에 의한 표기가 나타난다. 보기) 인니(7ㄴ), 난만(10ㄴ), 됸니라(7ㄴ, 10ㄱ, 11ㄱ).

카.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에는 보조사 ‘곰’도 쓰이고 ‘식’도 쓰이고 있다. 보기) 세 번곰 머그면(9ㄱ),  환곰 라(12ㄴ), 세 닐굽곰(15ㄱ), 여슷 환식 라(14ㄴ),  달힌 므레 스므낫식 라(16ㄴ).

타.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에는 15세기 중세어에서는 특수교체를 보이던 명사가 교체를 하지 않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 보기) 시예 면(21ㄱ).

‘시’는 15세기 중세어에서는 처격 조사가 올 때, ‘실의(‘시루에’의 의미)’와 같은 변화를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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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CD-ROM 간행위원회(1995/1997), 조선왕조실록:중보판, 서울시스템주식회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1),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홍문각 편(1982), ≪분문온역이해방, 간이벽온방, 오마양저염역병치료방, 벽온신방≫, 홍문각.

홍윤표(1982), “해제: 분문온역이해방,” 홍문각 편(1982).

후쿠이[福井 玲] 편(2002), 오구라신페이[小倉進平] 소장본 CD. No. 1.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해제 *
이 역주본이 이루어지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여러분들을 여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적으로는 평생의 동료인 외우(畏友)로, 이번엔 ‘이 문헌’의 초서로 된 발문을 해서(楷書)로 옮기고 번역한 이종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원고의 일부를 도와준 정우영 동국대학교 교수,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겨 준 김무봉 동국대학교 교수, 교정을 보아 준 김성주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입력과 교정을 맡은 하정수 동국대학교 강사, 필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자료검색 프로그램 UniConc를 설치해준 김지오 동국대학교 강사에게 도움을 받았다. 간접적으로는 10년 전 ‘이 문헌’의 복사본을 보내주신 송일기 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지난 6월 용정사본 복사본을 마련해 주신 이호권 한국방송대학교 교수, 신심사 방문을 주선해 주신 이성수 불교신문사 편집국장, 귀한 문화재 책판을 보여주신 신심사 지성(智性) 스님, 이 책의 출판을 직접 담당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홍현보 선생 이상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사의를 여기에 적어둔다.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머리말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권두 서명 아래는 한글로 “부모의 은 갑 경이라”라고 적혀 있다. 서명의 첫 부분 ‘불설(佛說)’은, 흔히 불교의 모든 경전(經典) 처음에 쓰여 ‘부처님의 말씀(가르침)’을 뜻하며 나머지 제목과 합치면 “소중한 부모님의 은덕 갚을 길을 일러 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주002)

이와 같이 해당 문헌의 서명(書名)을 한자 아래 이어서 정음으로 적은 것으로는, 1541년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治療方)』, ‘쇠며 이며 이며 도티며 서 뎐염  고티 방문’과 1542년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 ‘시긔 덥단 고틸 일 분류야 수이 알에  방문’과 같은 책이 있다. 이들 책은 원간본은 아니고 복각본(覆刻本)들이지만, 원간본도 이와 같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역주의 저본으로 이용할 오응성 발문이 붙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인종 1년(1545)에 간행되었다(이하 ‘이 문헌’이라 부른다.). ‘이 문헌’은, 그동안 훈민정음 창제에서 120년 되는 해에 이루어진 16세기 중엽의 국내 소장본 중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졌던 1563년의 송광사판보다 18년이나 앞서 간행된 것이다. 이 문헌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부모은중경언해〉로서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송일기·유재균:2000ㄴ) 국어사 연구에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문헌’은 첫머리에 서명을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부처님이 사위성에서 여러 제자와 대중들을 데리고 남행하시다가, 길가에 있는 마른 뼈에 절하셨는데, 그것은 그 뼈에 대한 전세의 인연 때문이라 하셨다. 그 뼈를 흑백과 경중으로 남녀를 구별하라 하시고, 가볍고 검은 뼈가 여인의 것인데, 세상의 어머니들이 회임 10개월 동안의 고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고, 그에 따른 부모님의 열 가지 은혜를 노래[게송(偈頌)]로 기렸다. 이어서 자식이 성장하면서 저지르는 불효의 열 가지 사례를 들고, 그 막중한 은혜에 보답함에 있어서 어려운 일을 여덟 가지로 이르시고 불효한 자식은 이 경전을 읽고 쓰며,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복을 닦으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나,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계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부모님 은혜를 갚을 길은 이 경전을 많이 말할수록 부모는 지옥을 여의고 천상에 나게 된다고 이르셨다. 이에 모든 대중이 발원하면서 부처님 가르치심을 결코 어기지 않기를 서원하고, 이 경전의 이름을 여쭈어 인정받아 봉행했다.

‘이 문헌’의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인종 1년(1545)에 간행한 것이다.

‘이 문헌’의 판식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삽화를 두었는데,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세주>(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다음에 적은 바와 같이 조금씩 달라진다.

첫 장 앞면(1ㄱ, 이하 숫자는 장의 차례를 나타내며, ‘ㄱ·ㄴ’은 각각 그 장의 ‘전·후’ 면을 나타냄.) 서명 다음의 2~7행은 원문, 8~10행과 1ㄴ 3행까지 언해문, 나머지 7행분 지면에 변상도(1. 여래정례도)가 배치되었다. 2ㄱ에서 6ㄱ까지는 원문과 언해문이 단락에 따라 계속되고, 다음 내용은 부모에 대한 열 가지 은혜를 노래[게송(偈頌)]로 지은 것인데, 6ㄴ의 첫 행은 제1, 제2… 형식의 제목과 그 풀이, 나머지 지면을 대략 상하로 반분하여 위에는 변상도, 아래에는 오른쪽에 5언율시(律詩)로 역시 1자를 내려서 언해문을 1행에 두 줄씩, 작은 글자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11ㄱ까지 열 가지 은혜를 그린 그림[십은변상도(十恩變相圖)]이 끝나고, 11ㄴ~17ㄴ까지 원문, 그리고 언해문이 되풀이되며, 18ㄱ부터 21ㄴ까지는 8비유도(譬喩圖)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변상도가 반 면뿐이면서도 세로로 배치되었고, 22ㄱ에서 26ㄴ까지는 원문에 따라 언해문과 변상도[삼보공양도(三寶供養圖)] 22ㄴ, 다음은 다시 원문과 언해문에 아비무간지옥도(阿鼻無間地獄圖) 25ㄱ 8행 분이 배치되고, 주003)

이 변상도에 관해서는 박도화(2004:111~121)에 그 제목과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25ㄱ 9, 10행부터 원문, 언해문 두 단락이 이어지며 26ㄴ 끝 5행에 ‘보부모은중진언(報父母恩重眞言)’과 ‘왕생진언(往生眞言)’으로 끝난다. 27ㄱ~ㄴ은 간행자의 한문 초서로 된 발문과 시주기(施主記)가 두 면에 걸쳐 있다.

이 발문을 근거로 하여 ‘이 문헌’을 〈부모은중경언해〉의 최고본(最古本)으로 보는 것이다. 주004)

‘초역본-오응성본’과, 이 역주본에 영인으로 붙인 ‘신심사 판본’의 형태서지를 보인다. ‘초역본’은 송일기(2001:192)를 따랐고, ‘신심사 판본’은 2011. 11. 11. 직접 세심사를 방문하여 실측하고, 책판을 인출(印出)한 것을 대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안준영(이산각연구소장, 용비어천가 목판복원 판각자) 님이 인출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현보 선생이 답사를 담당하였다.

가. 초역본(初譯本) - 오응성(吳應星)본

ㄱ) 수제(首題) : 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 갑 경이라

ㄴ) 단권(單卷) 1책, 27장, 목판본, 28.5×19.5cm.

ㄷ) 4주(周) 단변(單邊), 반엽(半葉) 광곽(匡郭) : 19×15cm,

ㄹ) 유계(有界), 10행(行), 주(注) 쌍행(双行).

ㅁ) 판심제 : 恩.

ㅂ) 판심 : 상하(上下) 대흑구(大黑口),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ㅅ) 권말[跋文] : 가정(嘉靖) 기원지을사(紀元之乙巳)(1545) 월(月) 일(日) 보성후학(寶城後學) 오응성(吳應星) 근지(謹誌).

ㅇ) 소장처 : 화봉문고(華峰文庫) 여승구 님.

나. 신심사(神心寺) 판본

ㄱ) 수제(首題) : 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 갑 이라

ㄴ) 단권 : 1책(후쇄 인출본), 27장, 목판본, 29.5×20.9cm.

ㄷ) 4주 단변, 반엽 광곽 : 19.0×14.5cm.

ㄹ) 유계, 반엽 10행, 한자 18자, 정음 17자. 변상도면(6ㄴ~11ㄱ) 하단 한자 10자, 정음은 작은 글자로 쌍행 9자.

ㅁ) 판심제 : 恩.

ㅂ) 판심 : 상하 대흑구, 내향 흑어미(간혹 2~3엽도 있음).

ㅅ) 권말 간기 : 가정(嘉靖) 42년(1563) 계해(癸亥) 모춘(暮春) 기망(旣望) 조계(漕溪) 눌암(訥菴) 서우신심장실(書于神心丈室). … 축원 … 청홍도(淸洪道) 아산지(牙山地) 동림산(桐林山) 신심사(神心寺) 유판(留板). (신심사는 사명(寺名)이 세심사(洗心寺)로 바뀌고, 책판은 현재 전함.)

ㅇ) 소장처 :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세심사(洗心寺).

이 ‘신심사 판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책판의 상태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현재 책판 수는 모두 13판으로, 그 내용은 1-3장, 4-16장, 5-13장, 6-14장, 7-8장, 9-10장, 11-15장, 17-18장, 19-20장, 21-22장, 23-24장, 25-26장, 27장(간기와 시주질)이 각각 1판씩 계 13판이다. 그런데 여기에 빠진 장차가 있으니, 2장과 12장의 한 판이 유실된 셈이다. 그리하여 영인에 있어서는 오응성본의 복사로 해당 장차를 보충하였다.

‘이 문헌’의 서지와 관련해서 덧붙일 것은 책판의 각수(刻手)에 대해서인데, 발문에 기록된 ‘쌍순(双淳), 혜식(惠湜)’ 두 분의 각자(刻字) 중 특히 종성 ‘ㆁ’의 각자에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파악했다. 자세한 것은 ‘Ⅳ.1.4. ㆁ 표기’에서 논의키로 한다.

Ⅱ. 줄거리와 분단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다가 제자들과 남방으로 가시던 중에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보시고 절하시었다.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그 까닭을 여쭈니, ‘그 뼈는 부처님 전생의 조상이거나 누대의 부모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절하는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른 뼈를 둘로 나누라 하시고, 빛이 희고 무거운 것은 남자의 뼈이고, 빛이 검고 가벼운 것은 여자의 뼈라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이 뼈를 보고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남자는 절에 가서 강설도 듣고 경도 외우며 부처님께 예배도 하고 염불을 하므로 그 뼈가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자식을 낳음에 피를 서 말 서 되 쏟고, 아이 기르는 데 젖을 여덟 섬 너 말이나 먹이므로 그 뼈가 검고 가벼워졌다고 말씀하셨다.

아난이 이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은덕을 보답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부처님은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면 열 달 동안 고생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어머니가 아기를 낳은 열 가지 은혜를 게송(偈頌)으로 지어 이르셨다. 첫째: 아이를 배어서 열 달 동안 길러주신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고통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라도 먹여주신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진자리 갈아주신 은혜,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 여덟째: 고향 떠난 자식을 염려해 주신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 힘든 일도 마다 아니하시는 은혜, 열째: 백세가 되어서도 팔십인 자식을 사랑하시는 은혜가 그것이다.

중생들은 이러한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고 불효를 일삼으니, 그 열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모님의 은덕을 듣고, 모든 대중들이 엎어져 스스로 몸을 치며 피를 흘리고 기절하여 오래 있다가 깨어나서 이제야 죄인인 줄 알았사오니,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 일러주시기를 청하였다.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여덟 가지 비유를 들어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씀하셨다.

이때 대중들이 부모님의 은덕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 여쭈니,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모를 위해 이 경을 쓰고, 읽고, 외우고, 죄를 참회하고, 공양하고, 재계를 받고, 보시를 하고, 복을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불효한 자식은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초를 여러 겁이 지나도록 계속 겪게 되니, 부모의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부모를 위하여 거듭 경(經)을 펴내 참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 모든 대중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각기 원을 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길이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경의 이름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대보부모은중경’이라 하시고 항상 받들어 지니라고 하셨다.

이상의 내용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때 부처님이 왕사성에서 대비구와 보살 대중을 데리고 남행하시다가, 어느 길가의 마른 뼈 무더기에 예배한다.(여래정례도(1))〈1ㄱ1~2ㄱ7〉.

(2) 부처님이 마른 뼈에 예배한 까닭과 그 뼈 중에서 검고 가벼운 것이 여인(어머니)의 것인데, 그 원인은 해산에서 겪은 고통이라 하니, 아난이 그 은혜의 보답 방법을 여쭙는다.〈2ㄱ8~3ㄴ5〉.

(3) 부처님이, 세상 어머니들이 잉태하여 해산에 이르는 열 달 동안의 과정을 낱낱이 구체적으로 들어 설한다.〈3ㄴ6~5ㄴ〉.

(4) 모든 어머니들이 잉태하여 해산에 이르는 열 가지 은혜를 한시로 읊는다.(부모10은도(10))〈6ㄱ~11ㄱ10〉.

(5) 자식이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불효를 저지르는 사례를 이르고 참회와 보은할 것을 설한다.〈11ㄴ~17ㄱ4〉.

(6) 부모님 은덕을 갚기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설한다.(8비유도(8))〈17ㄱ5~21ㄴ〉.

(7) 부모님에 대한 보은의 방법은, 참회하며 불경을 서사 독송하고 덕을 닦으라고 경계한다.(삼보공양도(1))〈22ㄱ~22ㄴ〉.

(8) 불효자가 아비지옥에 떨어져 받는 무서운 고통을 이른다.〈23ㄱ~24ㄱ3〉.

(9)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경을 이룸에 따라 부처를 보며 그 덕에 따라 천상에 나서, 영영 지옥을 여의게 된다고 하셨다.〈24ㄱ4~ㄴ〉.

(10) 이에 제자들은 보은을 위한 굳은 서원을 하고 이 경전의 이름을 부처님께 여쭈어 인정받아 물러난다.(아비지옥도(1))〈25ㄱ~26ㄴ〉.

Ⅲ. 간략한 연구사를 위하여

여기서는 순전히 국어사적 연구를 중심으로 다룬 것으로, 나머지 서지학적, 불교 미술사학적인 연구는 해당 분야 연구로 미룬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의 언해본이 문헌상으로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40년대로 보인다. 최현배(1946:141~143)에서 ‘이 문헌’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그 앞부분에 “… 여기에는 언해한 책에 대해서만 小倉進平의 기술과 나의 본 것을 아울러 다음과 같이 간단히 벌려든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여기 ‘이 기술이란’은 오쿠라신페이(小倉進平)(1940:268~271)의 〈朝鮮語學史(日文)〉(增訂版)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소개가 학계의 고찰로는 처음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가정(嘉靖) 32년(1553) 경기도 장단(長端)의 화장사(華藏寺) 판본을 시작으로 정조(正祖) 때 화성 용주사본에 이르기까지 연대와 간행지를 간략히 적은 것으로, 10종의 이본이 소개되어 있다.

그 후에는 안병희(1979)의 “중세국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고찰”에 한 쪽 정도의 소개가 있고, 전광현(1986:1~12)에서는 〈부모은중경언해〉 영인(태학사)에서 ‘송광사본, 남고사본, 용주사본, 강재희본’과 간기 없는 1종을 합해 6종의 이본을 영인하고, 거기에 붙인 “해제”에 모두 25종의 이본을 고찰한 것이 있다.

위와 같은 연구의 환경 조성으로 그동안 드물게나마, 방옥산(1976), 황홍주(1989), 최홍렬(1990)의 석사논문이 나왔으며, 1990년대 후반에 신중진(1996), 유필재(1997)의 연구가 있었는데, 차례로 간단히 언급해 둔다.

방옥산(1976)은 발표된 지 30여 년이 지났고 지방에서 간행된 것이어서 미처 자료를 얻어 볼 수가 없어 논하기 어렵다. 추후라도 찾으면 보고할 것을 약속드린다.

황홍주(1989)에서는 당시까지 국내 소장 자료 중에서는 최고본인 송광사본(1563)을 기준으로 17세기의 고방사본(1668), 18세기의 금산사본(1720)을 주로 비교하여 그 통시적이 변천에 따른 표기, 음운, 통사 부분의 현상을 고찰하였다. 그 중 음운 부분의 ‘ㄱ, ㄷ, ㅅ’이 비자음(鼻子音)의 동화현상에 의해 변동한 모습이라든가, 통사 부분에서 15세기에는 판정의문과 설명의문이 구별되는 의문사(疑問詞) 통합 여부가 여기서는 구별 없이 쓰였다는 점 등을 지적한 것은 황홍주(1989: 41, 64)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아닌가 한다.

최홍렬(1990)에서는 2세기의 시대차가 있는 16세기 중엽의 송광사본과 18세기 전반의 남고사본(1741?, 1794?)을 비교 대상으로 표기와 문자, 음운론적, 형태론적, 어휘론적 특징에 대한 차이를 언급했다.

신중진(1996)에서는 당시로 보아서는 비교적 새로 알려진 율사본(栗寺本)을 중심으로 송광사본, 희방사본, 간기 미상본(태학사 영인본의 이본)과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정리하여 간기 미상본은 율사본의 복각본임을 밝히고, ‘국어사적 특징’ 중에서 율사본의 ‘됴케〈12ㄴ〉, 이슥게〈17ㄴ〉’를 설명함에 이현희(1995:565)를 인용하여 ‘-거〉(-것)〉-게()〉-거야~-게야’의 변천상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먹니〈5ㄴ〉, 몽라도〈16ㄴ〉, 잇〈5ㄴ〉, 니다가〈14ㄴ〉’ 등의 예는 종래에도 언급된 것이지만, 이는 16·17세기에 이미 후부변자음의 조음방식동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초역본이 나타난 현재로는 16세기부터 나타났다고 고쳐져야 할 것이다. ‘문법적 특징’으로는 이승희(1996:76)에 따라 감동법 선어말어미 ‘-옷-(돗)’이 포함된 ‘-놋다’에 ‘-도-’가 더 통합된 ‘-놋도다’가 15세기에 드물게 나타났는데, 율사본에는 ‘-놋다’, ‘-놋도다’, ‘-도다’가 쓰여 이를 이중감동법으로 보았다. 또한 ‘상 표시’에 있어서 ‘단장여 이실 ’〈2ㄴ〉와 ‘ 오 훠 신고 이실 ’〈2ㄴ〉에서, 전자는 15세기의 완료 상태 지속의 상 표시인데, 후자는 15세기에는 잘 볼 수 없는 완료 상태 지속의 예이므로, 이는 그 쓰임이 확대되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유필재(1997)에서는 ‘이 문헌’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부모은중경언해〉의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졌던 일본 동경대학 문학부의 소창문고(小倉文庫) 소장의 화장사본을 현지에서 확인하고, 이 책이 국내의 송광사 판본에 없는 성조(聲調) 표기가 많음에 착안하여 이 책의 성조 표기는 “…하나의 어절에 대해서 한 음절에 거성 혹은 상성만이 표기되는바, 그 위치는 중세국어 성조 표기에서 각 어절에 나타나는 최초의 거성 혹은 상성의 위치와 일치한다.” 하고, 이를 화장사본이 간행된 16세기 경기지역어의 성조 자료로 보고, 종래의 방점 자료에 추가할 수 있게 된 것에 이 자료의 의의를 두었다. 그러나 뒤에 보는 바와 같이 ‘이 문헌’의 초역본(1545)으로 알려진 오응성 발문본이 학계에 소개되어 비교해본 결과, 화장사 판본에 대한 연구 결과에는 재고할 점이 있어 보인다.

이호권(2000)에서는 종래에도 알려진 것이지만, 좀 더 자세하게, ‘용주사판 부모은중경(언해)’은 서명이 같은 ‘부모은중경’이라도 종래의 초역본 계통의 이본과는 전혀 다른 판본으로서, 이는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백성들에게 ‘효(孝)’를 교화하기 위해 간행된 것이며, 책판은 주자소(鑄字所)에서 정조 20년(1796)에 판각하여 인출하고, 그 보관은 생부 사도세자의 능사(陵寺)인 용주사에 보관토록 한 것으로 보았다. 이 용주사 판본을 용주사 간행으로 보는 것은 에타토시오(江田俊雄 1934:155)부터이며, 편찬자 추정은 조선총독부(1932:32)가 처음이나, 그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서, 오쿠라신페이(1940:271)도 같았으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조가 창설한 규장각으로 추정하였다. 적극적인 증거는 없으나 지나친 추정을 삼갔다.

이 용주사판의 구성과 체재는 다 알려진 것이나, 책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변상도에 대해서 사찰판본의 변상도와 다른 것은, 유교적 관념에 어긋나는 장면을 제외하고 새로 구성한 것이고, 그림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그렸다고 보고, 이는 종래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소작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당시의 사적인 배경으로 보아서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번역 양식도 초역(抄譯)인 사찰 판본에 대하여 용주사 판본은 완역(完譯)이며 직역(直譯)이어서 그 체재가 불경언해서보다는 유경언해서에 가깝고, 초역판계의 복각본, 후대에 개간한 이본은 모두 서남방언의 영향을 받은 자료인데 반해서, 이 용주사판은 그 국어학적 여러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말 중앙어(경기지역어)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위의 논문과 같은 해에, 서지학계의 연구로 송일기·유재균(2000ㄴ)은 종래의 ‘이 문헌’의 최고본(最古本)으로 알려진 화장사 판본(1553)보다 앞선 판본을 발굴 소개하면서, 언해본 31종 및 한글본 4종 등 모두 35종에 대한 개판 및 형태적 특징들을 고찰하였다(별표1 참조). 송일기(2001)는 초역본 출현 시기는 ‘이 문헌’의 한문본이 18종 이상 개판(開板)되었으며, 불가서(佛家書), 유가서(儒家書), 의가서(醫家書) 등 언해본이 간행되던 시대 배경에서 전주, 완산(完山)의 서방산(西方山) 근방에 살았던 민간인 오응성(吳應星)이 부모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축원할 목적으로 번역 간행하였다는 것을 밝혀내었으니, 이는 학계의 낭보(朗報)였다. 곧, ‘가정(嘉靖) 기원지을사(紀元之乙巳) 월일(月日) 보성(寶城) 후학(後學) 오응성(吳應星) 근지(謹誌)’의 발문이 있는 초역본(初譯本)(여승구(呂承九) 님 소장본)인데, 여기 ‘가정(嘉靖) 기원지을사(紀元之乙巳)’는 명나라, 가정 24년으로 인종(仁宗) 1년(1545)이다. 이 발문으로 해서 ‘이 문헌’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부모은중경〉의 최고본이라는 구실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 초역본(오응성 발문본)이 소개된 후, 종래 각지에서 간행된 복각본에 대한 본격적인 국어학계의 연구로 이호권(2005)이 있다. 여기서는 번역 양식에 따라 ‘이 문헌’의 한문본을 초역(抄譯)한 이본(異本)들과 완역(完譯)한 용주사 판본으로 나누어, 송일기·유재균(2000ㄴ)의 연구를 정밀화하고, 초역판계의 이본들로 간기(刊記)가 있는 30종을 대조하여 이들 사이의 복각 관계와(별표2 참조) 초역 판본의 언어 사실과 후대 판본의 그것을 비교하여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을 밝혔다.

〈별표1〉 부모은중경 언해본의 계통도 주005)

이 ‘부모은중경 언해본’의 계통도는 송일기·박민희(2010:125)를 따랐다.

(*표시는 새로 추가된 판본임)


〈별표2〉 은중경언해 초역판계 유간기 판본의 계통 주006)

이 계통 표는 이호권(2005:80)을 따랐다.

오응성판(1545) → 화장사판(1553) ⇢ 송광사판(1563) ⇢ 징광사판(1580)

        → 심신사판(1563)

        → 패엽사판(1564)

        → 쌍계사판(1567) → 율사판(1618) → 영자암판(1676)=안심사판(1806)

        → 흥복사판(1573)

       ―⇢ 희방사판(1592) ⇢ 동화사판(1609) → 통도사판(1648)

                        → 고방사판(1668)=조계암판?(1686)

                        ⇢ 수암사판?(1680)

                        → 청룡사판(1686)

       ………………………⇢ 최연판(1635) → 불암사판(1687)

       ………………………⇢ 신흥사판(1658)

위 표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2) 조원암판계, 3) 금산사판계, 4) 진정사판계로 정리하여 이본들 사이의 복각 관계를 밝히고, 초역판의 언어 사실과 후대 판본의 그것을 비교하여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징을 밝혔다.

위의 논문이 나온 다음 해에 정재영(2006)은 불갑사(佛岬寺)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441)에다가 후대에 필서(筆書)로 기입된 차자(借字)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이 문헌’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 논문의 부제에 보인 것처럼 주제는 구결과 언해문(번역문)에 대한 고찰이지만, 여기서는 언해문 관계만을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화암사판의 ‘은중경’ 번역문은 “전체 변상도의 수나, 그림 양식과 원문의 내용 등에서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변상도 삽입 순서가 바뀌어 잘못된 것과 각 변상도에서 표현상 차이를 보일 뿐이다. … 언해본의 변상도는 그림 내용이 같지만 화암사판에 비해 단순하게 선으로 처리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송일기(2001)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번역문의 특징적인 언어 사실을 음운, 한자음 표기, 문법, 어휘 등 여러 면에서 고찰하고, 이 자료는 16세기 후반 전라도 방언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여승구 님의 소장본(초역본)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고, 또한 초역본의 복각본들이 간행지의 방언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도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필자는 이른바 초역본을 대상으로 역주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 영인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초역본을 발굴·소개한 송일기 교수께 문의한 바 있다. 그때 소장자인 여승구 님께 직접 연락하여 청해볼 일이라고 해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담당자인 홍현보 선생과 같이 공문을 작성해서 지난 5월 하순에 (주)화봉문고 사무실에서 여승구 사장님을 면담한 바 있다. 주007)

여승구 사장님은 앞으로 영인본을 간행할 예정이어서 영인을 승낙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에 따라 현전하는 복각본 중에서 영인본 자료를 정해야 할 형편이 되어, 〈부모은중경언해〉 해제, ‘3. 현전 이본과 소장처’〈100대 한글문화유산 정비사업, 2004〉에서 ‘1563년(명종 18) 충청도 아산 신심사판 : 책판 세심사(洗心寺) 현전’이 있어서 이를 영인 후보로 정하고, 조계종 총무원을 통해 ‘세심사’ 주지스님을 소개 받아 지난 6월 7일 오후에 방문한바, 책판을 준비해 놓으셨으나, 그보다도 직접 인출한 이본이라도 있는지를 알아보니, 뜻밖에도 이미 6년 전에 충남대학교의 사재동 교수가 정년 후 ‘백제불교문화대학장’으로 활발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2005년 11월에 발원자(史在東, 盧泰朝, 朱亨喆, 史眞實)들의 법보시(法布施), 비매품으로 하여 〈불설대보부모은중경〉-원전과 불교문화학적 연구- 사륙배판(311면)으로 간행한 책을 받아 보게 되었다.

각주에 보고한 바와 같이, 뒤늦게 알게 된 사재동(2005)에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해제와 ‘세심사본’ 영인, 부모은중경 현대역과 연구논문들이 실렸는데, 논문으로는 송일기(2000) ‘한국판 〈부모은중경: 언해 한글〉의 판본 및 한글서체에 관한 연구’, 박도화(2004)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변상도의 도상 형성 과정’, 노태조(2005) ‘〈은중경〉과 〈孝經〉의 대비 고찰’, 이렇게 세 논문이다. 또 부록으로 1) 돈황본 부모은중경, 2) 돈황본 부모은중경 강경문, 3)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용주사판본을 실었다.

이렇게 사재동(2005)의 연구 결과가 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관련 논문에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필자는 새삼스럽게 이런 정보가 부족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물론, 일반 출판물이 아니고, 주로 불교 신도를 대상으로 한 법보시라는 점과 그에 따라 비매품이고, 간행이 서울이 아닌 대전이어서 연구자들 눈에 잘 뜨이지 않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연대적으로는 앞서지만, 필자의 작업 절차로는 중간에 이 영인본(세심사본)의 해제에 대해 언급해 두어야겠기에, 송일기(2000ㄱ, 2001)을 참고하여 집필한 사재동(2006)의 ‘Ⅱ-2 〈부모은중경〉의 불교문헌적 실태와 전개’에서 서지관계 부분을 간단히 인용하여 그 논의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사재동(2006)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오응성 간본(1545)을 비롯하여 화장사 장본(1553), 세심사 장본(1563), 갑사 장본(1567, 이는 쌍계사본 유판 갑사 장본임-필자) 등 16세기 판본들의 공통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음 항목의 번호를 필자의 관점에 따라 붙인 것이다.

① 역대 목판의 복각, 중간의 관례는 그 초간본과 최소한 100년 가까이 시대 차가 요구됨.

② 16세기 판본들의 국문에는 16세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15세기적 요소가 잔존되어 있음.

③ 이들 판본의 방점은 당시 현실적 성음의 요건이 아니라 15세기적 성음의 복각적 보수 현상임.

④ 이 밖에도 음운, 어휘, 어법 등이 15세기의 잔영을 보이는 의고적 성향이 있음.

⑤ 여기에 오응성 발문 중의 “余故手傳本…以通其覽焉”을 통해 ‘오래된 은중경을 경문 사이사이에 언해했다’는 것과 또한 ‘금아중간(今我重刊)’이라는 대목은 중간본임을 스스로 밝힌 것으로 보아서, 결과적으로 이 ‘부모은중경’은 15세기에 초간되거나 그 수준에 달하는 시대적 특성을 갖춘 선행 모본이 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학계에서는 처음이어서 필자 자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나, 불가불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기로 한다. 주008)

실은 이 초역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1년 5월 초순, 송일기 교수의 호의로 그 복사본 1책을 받은 때였다. 서가에 둔 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가, 10년이 지난 금년 3월에야 ‘이 문헌’의 역주를 맡으면서 비로소 고구(考究)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위 ①은 초간본과 복각본 혹은 중간본이 반드시 그런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진다기보다 필요에 따라서 간행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②, ③, ④는 이미 학계에서 다루어진 사항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데, 결국 문제의 초점은 ⑤의 오응성 발문의 문제다. 주009)

이 발문은 ‘언해본’의 순서에 따라 역주의 끝 부분에 옮겼다.

무릇 발문에는, 그 책의 내용의 대강과 간행에 관련된 일을 적어 남겨 놓게 마련인데, 이 한문으로 된 글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함축성이 많은 한문 문장이기에) 다른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문제되는 “여고수전본경 간이언해(余故手傳本經 間以諺解 : 내가 그런 이유로 손수 이 경전을 전하되 사이사이 언문으로 풀고)…”를 그대로 풀이하여, 필자는 초역본의 간행자인 오응성이 적극적으로 이를 처음으로 언해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만일 15세기에 이루어진 ‘은중경언해’가 당시까지 전해졌다면, 과연 ‘내가 손수 풀이했다’고 쓸 수 있었을까. 또한 그동안에 소실됐다고 해도 아무런 전고(典故)도 남기지 않고 일실(逸失)됐다고는 이해가되지 않아서, 사재동 교수의 견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금아중간(今我重刊)”이란 ‘중간본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라 판단한 것도 ‘중간’을 글자 그대로 ‘재간(再刊), 거듭 간행함’의 뜻으로 보는데, 이는 그 대상을 무엇으로 보느냐, 곧 위에서 추정한 15세기의 <서명>〈은중경〉 초간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 증조부가 이룬 은중경[乃吾曾祖所成恩重經]’으로 보느냐 할 때, 필자는 이를 후자로 볼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 붙임1 - 이본(異本)과 그 소장처

연대간행지판본소장처
1545(명종 1)전라도 완주오응성(吳應星) 발문본화봉문고(여승구님).
1553(명종 8)경기도 장단화장사(華藏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小倉文庫).
1563(명종 18)충청도 아산신심사(神心寺)판책판(冊版) 세심사 현전.
1563(명종 18)전라도 순천송광사(松廣寺)판서울대 일사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림사, 산기문고?
1564(명종 19)황해도 문화패엽사(貝葉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567(명종 22)충청도 은진쌍계사(双溪寺)판서울대 가람문고, 연세대, 보림사
1573(선조 6)전라도 김제흥복사(興福寺)판보림사.
1580(선조 13)전라도 낙안징광사(澄光寺)판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림사.
1582(선조 15)경상도 의령보리사(菩提寺)판일본 吉澤義則 님.
1592(선조 24)경상도 풍기희방사(喜方寺)판서울대가람문고, 연세대, 동국대.
1609(광해 1)경상도 대구동화사(桐華寺)판화봉문고(여승구 님)
1618(광해 10)충청도 공주율사(栗寺)판남권희님, 고려대 육당문고.
1635(인조 13)미상최연(崔衍) 발문본연세대.
1648(인조 26)경상도 양산통도사(通度寺)판범우사.
1658(효종 9)강원도 양양신흥사(神興寺)판책판 신흥사 현전, 산기문고?
1668(현종 9)경상도 개령고방사(敲防寺)판연세대, 영남대, 고려대 화산문고, 책판 운흥사 현전.
1676(숙종 2)전라도 고산영자암(影子庵)판동경대 소창문고(小倉文庫).
1680(숙종 6)경상도 청도수암사(水岩寺)판적천사.
1686(숙종 12)경상도 양산조계암(曹溪菴)판고려대 만송문고, 계명대.
1686(숙종 12)경상도 경주천룡사(天龍寺)판계명대, 영남대.
1687(숙종 13)경기도 양주불암사(佛巖寺)판고려대, 연세대, 계명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산기문고?, 미국 하버드대 옌칭, 책판 불암사 현전.
1689(숙종 15)평안도 향산조원암(祖院庵)판동국대.
1692(숙종 18)강원도 고성건봉사(乾鳳寺)판간송문고.
1705(숙종 31)평안도 정주용장사(龍藏寺)판구 이겸로님(산기문고).
1717(숙종 43)경기도 개성용천사(龍泉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720(숙종 46)전라도 금구금산사(金山寺)판서울대 가람문고, 성암문고,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731(영조 7)함경도 영흥진정사(鎭靜寺)판소장처 미상.
1760(영조 36)전라도 고창문수사(文殊寺)판여승구 님, 책판 문수사 현전.
1794(정조 18)전라도 전주남고사(南高寺)판일본 동경대 소창문고.
1796(정조 20)경기도 화성용주사(龍珠寺)판서울대 규장각 외 다수, 책판 용주사 현전.
1801(순조 1)전라도 전주남고사(南高寺)판서울대 규장각.
1806(순조 6)전라도 고산안심사(安心寺)판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성암문고, 장서각.
1912(경성) 서울강재희(姜在喜)판국립중앙도서관.
1925(경성) 서울권상로(權相老)판신문관(新文館) 인쇄.

※ 기타 국도본(國圖本, 16세기), 우천각본(宇天刻本, 17세기), 아단본(雅丹本, 17세기) 등 간기 미상(未詳)본 다수.

Ⅳ. 어학적 고찰

‘이 문헌’의 간행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반포한 시기(1446년)로부터 꼭 100년(<세주>발문의 ‘가정(嘉靖)’ 을사(乙巳)년은 인종 1년, 서기 1545년임)이 되는 해에 이루어졌다. 관점에 따라서는 ‘길다, 짧다’ 할 수도 있겠지만,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을 때에 3세대의 시기는 그리 짧은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동안, 사람들의 말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성언어의 차원이고, 문헌에 나타난 문자언어는 표기의 보수성으로 인해서 음성언어만큼 그 변화를 표기에, 당대의 언어에 맞게 반영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곧, 우리가 문헌을 통해서 그 시대의 언어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므로, 이 글도 말하자면 16세기 중엽의 언어 현상을, ‘이 문헌’에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고찰해 보려는 것이 이 장의 목표이다.

1. 표기와 음운

1.1. 모음의 변동

1.1.1. ‘ㆍ’의 변동

우선 모음 ‘ㆍ’의 표기를 통해서 이 시대의 ‘ㆍ’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보자. 통설에 따른다면, 16세기 후반에는 비어두음절에서 ‘ㆍ〉ㅡ’의 변화가 완성된다고 보는데, ‘이 문헌’에서의 실상은 어떤가?

다음에 보이는 것은, ‘이 문헌’에 ‘ㆍ’가 쓰인 총 235개 어절 중에서 잘못 쓰인 것만을 추려 내어 ( ) 안에 바른 표기를 나타낸 것이다.

〈 〉 안의 표기는, 오응성본의 장차와 ‘전면-ㄱ, 후면-ㄴ’을, ( ) 안 숫자는, 같은 면에 2회 이상 나타난 것임.

(는)〈2ㄴ〉  가븨()여우니라〈3ㄴ〉

드(르)라〈3ㄴ〉  람믈()〈6ㄴ〉

믈()〈7ㄱ, 10ㄴ〉  시(름)〈7ㄴ, 11ㄱ〉

다믄()〈8ㄴ〉  편안호믈()〈8ㄴ〉

흐(르)놋다〈10ㄴ〉  믄()〈11ㄴ〉

은(늘)〈11ㄴ〉  더위(를)〈12ㄴ〉

말솜()과〈13ㄴ〉  사믈()〈13ㄴ〉

그(르)〈14ㄴ〉  부모의()〈14ㄴ, 15ㄴ〉

흐(르)고〈17ㄱ〉  은(늘)〈17ㄱ, 24ㄱ〉

모믈()〈17ㄱ(2)〉  여(듧)〈17ㄴ〉

운(늘)〈18ㄴ〉  은혜(를)〈20ㄱ〉

우리(는)〈22ㄱ〉  오을()〈23ㄴ〉

사믜()〈24ㄱ〉  교슈(를)〈26ㄱ(3)〉

일호믈()〈26ㄱ, ㄴ〉  말솜()〈26ㄴ〉

      합계 36회

이 잘못 쓰인 횟수 36을 총 235개 어절에 대한 비율로 계산한다면 약 6.5%가 된다. 한 세기 동안에 변화한 비율로만 본다면 아주 적은 분량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앞서도 말한 ‘표기의 보수성’이란 성격을 감안해도, ‘ㆍ’의 비어두음절에서의 소멸이 16세기 후반에 완성된다는 설에 따른다면, ‘이 문헌’의 ‘ㆍ’ 표기는 중세국어 문헌의 표기의 전통을 그런대로 잘 지킨 것으로 본다.

1.1.2. 모음조화로 본 ‘야:여’

다음은 모음조화의 적용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한 방편으로 ‘-’ 용언의 활용형 ‘야:여’의 표기를 대상으로 하였는데, 여기서도 숫자가 적은 ‘여’ 쪽을 모두 적어 둔다.

단여〈2ㄴ〉, 엿고〈5ㄴ〉, 토여〈8ㄱ〉, 신고여도〈10ㄴ〉,

미가여서〈16ㄴ〉, 노여〈16ㄴ〉, 긔절여〈17ㄴ〉, 엇뎨여〈17ㄴ〉

      합계 8회

‘야 : 여’의 표기 수는 총 31회인데, 이 중 위의 8회만이 모음조화를 어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 ‘31:8’을 백분율로 계산하면, 약 26%가 모음조화를 어긴 표기가 되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가 초점이다. 이 26%란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니라고 보는데, 이는 10곳 중에 4곳이 모음조화를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 방언에 중앙방언적인 ‘야’와 함께 ‘여’형이 공존하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2. 병서

1.2.1. 각자병서 ‘ㅆ’

각자병서 중 ‘ㅆ, ㆅ’은 훈민정음 제정 초기에 있어서 나머지 ‘ㄲ, ㄸ, ㅃ, ㅉ’과 달리 국어의 어두음에 ‘경음/된소리’로 쓰이다가, 1465년 『원각경언해』 이후 각자병서의 전면적 표기가 지양되면서, 이 ‘ㅆ, ㆅ’도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ㅆ’만은 『원각경언해』 이후 문헌에도 간헐적으로 쓰이다가 16세기에 들어 이런 표기가 활발히 나타나지만, ‘ㆅ’은 17세기에 ‘ᄻ’으로 다시 쓰이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헌’은 ‘ㅆ’ 표기가 아래 예문에 든 것처럼 단 2개이지만,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싸홈며〈은중 15ㄱ〉   닐그며〈은중 22ㄴ〉

*싸호샤〈용가 52〉  * 글와리라〈석상 서: 4ㄴ〉

*사홈도 닐와며〈번소 8:10〉  *스디 아니시니라〈원각 하2-2:7ㄱ〉

*싸호매〈속삼 충:1ㄱ〉  * 뵌대〈속삼 열:7ㄱ〉

1.2.2. 합용병서 ‘ㅅ’계와 ‘ㅂ’계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서부터 ‘ㅅ’계의 ‘ㅺ, ㅼ, ㅽ’은 된소리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문헌’에 쓰인 용례를 실사와 허사로 나누어 그 쓰인 횟수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ㅺ: (잠) 3, / 2,  1, 지럼 1,  1, - 1, - 1, - 2.  계 12회

ㅼ:  2,  7회,  2,  1.  계 12회

ㅽ: 디- 1, 이- 1.  계 2회

  합계 26회

ㅳ: [意] 4, (셜)다[悲] 1.  계 5회

ㅄ: -[苦] 2, -[掃] 1, -[包] 1, 긔-[嚬] 1  계 5회

ㅶ: -[曝] 1.  계 1회

  합계 11회

‘ㅺ’ 표기에서, ‘간’은 첫음절 받침 ‘ㅅ’이 그대로 쓰인 경우와 둘째 음절 초성에 병서되기도 했으니, 『석보상절』에서도 두 가지 표기가 보인다.

간 머리 수기거나〈석상 13:53ㄴ〉,

耶輸ㅣ 잠도 듣디 아니〈석상 6:6ㄱ〉.

다음으로, ‘/’의 ‘ㅺ’은 본래 ‘곳/곶’에 사잇소리가 굳어져 ‘(년), (블)’으로 표기된 것으로 16세기의 ‘이 문헌’에 처음 보인다.

‘지람’은 ‘구지라’〈월석 17:84ㄴ〉, ‘구지럼’〈석상 19:30ㄴ〉, ‘지람’〈노걸 상:34ㄱ〉, ‘지럼’〈은중 16ㄱ〉으로 쓰여 ‘이 문헌’의 예가 고어사전의 표제어에 유일한 예로 되어 있다.

‘[末]’은 이미 ‘리 틀’〈우마역 1541, 15ㄴ〉에도 보이므로 ‘이 문헌’의 예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하겠다.

나머지 ‘[謀], -(조사), -[覺], -[挾]’ 등은 이미 15세기 중엽에도 쓰인 전통적인 표기이다.

‘ㅼ’ 표기에서는 ‘[地], (부사), -[帶], [女息]’ 등은 모두 전통적 표기이다.

‘ㅽ’ 표기에서는 ‘디-[沒]’는 ‘므레 디여’〈석상 9:37ㄱ〉에도 보이는 전통적인 표기이다. 그러나 ‘이-[抽]’는 ‘혀 여내여’〈은중 26ㄱ〉로 쓰여 ‘拔出’의 풀이로 쓰였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쓰인 ‘-’와 강조의 ‘--/-혀-’의 결합인 ‘-/혀-’에 ‘내-[出]’(←나-+ㅣ(사동))가 통합한 ‘혀내-’가 ‘-’에서 활음 ‘j’ 탈락과 모음 사이에서 ‘ㅎ→ㅇ[ɦ]’으로 약화하여 ‘여내-’의 구성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은 “龍 자바 머구믈 데 足 씨라”〈석상 13:11ㄱ주〉와 같이 전통적으로 쓰이던 것이나, ‘셜다’는 어중에 쓰인 ‘ㅳ’이 문제인데, 이는 형용사 ‘셟-+도+다’로 분석되는 어간말자음의 ‘ㅂ’이 제2음절 초성으로 합용한 병서로서 ‘ㅳ’ 등의 형성 기원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신중진(1996:250)에서는 표기에서 특이한 것을 다루는 중, 초역본 ‘여듧’의 ‘’이 ‘ㄹ+ㅂ’으로 세로로 연서(連書)한 예에 대하여 율사본과 율사본의 복각본인 간기 미상본에는 ‘여듧(3ㄴ)/여듦(5ㄱ)’로 ‘’이 ‘’처럼 표기된 것을 자음군단순화의 표기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호권(2005:68)에서는 초역본에 4회 나타나는 ‘여듧/여’의 ‘’이 병서되지 않고 연서된 것은, 편찬자가 그 합자법을 몰라서 그런 표기가 된 것으로 보고, 이는 당시 ‘ㄹ’을 앞세운 경우 세 자음의 발음이 가능했음을(이기문 1959/1978:32-33) 방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필자는 앞의 ‘자음군단순화의 표기 반영’이라는 데 대하여, 이는 ‘’이 ‘’처럼 보이는 것은 각수에 의한 각자의 미숙(?)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초역본에는 ‘’이 세로로 적힌 것은 4회로 모두 같이 표기되었다.

다음 ‘ㅄ’의 ‘-[苦], -[掃], -[包], 긔-[嚬]’와 ‘ㅶ’의 ‘-[曝]’는 다 같이 사전에도 실려 있고, 전통적인 표기를 그대로 따라 사용하였으므로 더 부연할 것이 없다.

ㅅ계ㅂ계
예〈14ㄴ〉〈2ㄴ(2)〉디〈3ㄱ, 10ㄱ, 11ㄱ〉
지럼믄〈16ㄱ〉〈2ㄴ, 21ㄱ〉드로〈13ㄴ〉
(년)〈9ㄴ〉〈2ㄱ, 3ㄱ, 14ㄴ〉셜다〈10ㄱ〉
틔〈4ㄱ〉()〈9ㄱ〉 것〈8ㄱ(2)〉
(잠)〈10ㄴ, 12ㄱ, 16ㄴ〉해〈19ㄴ〉디〈16ㄱ〉
여〈17ㄴ〉시기〈16ㄴ〉다가[包]〈16ㄱ〉
(세존)〈22ㄱ〉〈14ㄴ, 15ㄱ,ㄴ, 16ㄴ, 23ㄴ〉긔디〈8ㄱ〉
(블) 〈23ㄴ〉〈2ㄴ〉며〈14ㄴ〉
락〈24ㄱ〉디니〈23ㄴ〉 
 〈1ㄱ,ㄴ, 5ㄱ〉 
 여〈26ㄱ〉 

1.2.3. ‘ㅿ’ 표기

‘ㅿ’은 정음 창제 후인 15세기 중엽에서조차 특정한 환경에만 쓰이다가 16세기에 들면서 소실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15세기 후반의 『두시언해(1481)』에 이르면, ‘[間]’와 ‘이’가 같이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 이를테면 ‘ㅿ’의 소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 문헌’에서는 위의 ‘ㅿ’ 소실 초기에서 반세기나 지난 후인데도, 3-1)과 같이 ‘ㅿ’ 유지 어형이, 3-2)에서는 ‘ㅅ’으로 표기된 어형이 나타나고, 3-3)에서는 ‘ㅿ’ 소실된 어형이 나타난다. 3-1)은 15세기 중엽에도 쓰인 어휘들로서, 어형이 조금 바뀐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ㅿ’의 쓰임을 유지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복되는 숫자를 제외하면 이 ‘ㅿ’ 유지형 어휘는 7종이 된다(강세접미사 ‘-’ 제외). 3-2)는 ( ) 안에 보인 바와 같이 ‘ㅿ→ㅅ’으로 반영된 모습을 보여준다(중복된 횟수를 제외하면 어휘 수는 위와 같은 7개이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어버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ㅅ’ 유지형이며, 이들 예는 대체로 ‘이 문헌’이 간행된 당시의 전주, 완주 지방의 방언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1.2.3.1. ‘ㅿ’ 유지

엇뎨야〈3ㄴ, 22ㄱ〉  처〈6ㄴ〉

미〈7ㄴ(2), 9ㄱ, 11ㄱ〉  아과〈14ㄴ〉

〈15ㄱ〉  〈17ㄱ〉

이슥게〈17ㄴ〉  이제〈17ㄴ〉

가미〈17ㄴ〉  엇뎨여〈17ㄴ〉

가〈19ㄴ〉  브텨〈21ㄴ〉

엇뎌야〈24ㄴ〉  텨〈26ㄱ〉  합계 19례

1.2.3.2. ‘ㅿ→ㅅ’ 표기

니섯()도다〈9ㄱ〉  지서()〈15ㄱ〉

어버시()〈16ㄱ〉  어버시()〈17ㄱ〉

시()업고〈17ㄱ〉  사()디〈17ㄴ〉

사()내며〈18ㄴ〉  눈()〈19ㄱ〉

지슨()〈22ㄴ, 23ㄴ〉    합계 10례

1.2.3.3. ‘ㅿ→ㅇ’ 표기

이예〈5ㄴ, 3ㄴ, 12ㄱ(2), 12ㄴ, 24ㄱ〉  합계 6례

1.2.4. ‘ㆁ’ 표기

‘ㆁ(옛이응)’ 자는 알려진 바와 같이 15세기 중엽에는 초성으로도 제법 쓰이다가 16세기 초엽에는 초성으로 거의 쓰이지 않게 되고 받침으로만 쓰이게 되었는데, 16세기 중반의 ‘이 문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 역주한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1542)』 역주에서 임홍빈(2009:16)의 해설을 따르면, 『분문온역이해방』은 “받침의 옛이응(ㆁ)은 철저하게 ‘ㆁ’ 자가 쓰이고 있으나 극히 예외적으로 유모(ㅇ) 형태의 ‘이응’이 쓰이는 일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아음(牙音)의 불청불탁음인 ‘ㆁ’는 훈민정음의 초성(자음) 17자 중에서 소실된 문자로는 좀 이질적인 면이 있다. 곧, 자형(字形)은 후(喉)음의 불청불탁음인 ‘ㅇ’으로 통합되었지만, 그 음가는 아음의 ‘ㅇ’[ŋ]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ㆁ’은 고유어에서 제한적인 분포에 쓰이는, 곧 어두(語頭)의 초성에는 쓰이지 못하고 종성으로만 쓰이고, 어중에서는 연철 표기에 따라 후행음절의 초성에도 쓰이는 글자였다. 정음 창제 초기문헌인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그리고 15세기 후반의 『능엄경언해』 등에는 그런대로 쓰였으나, 『두시언해(1481)』 초간본에만 와도 그 쓰임이 적어지고, 16세기로 넘어가면 『번역박통사(1517)』 이전에 ‘-다’(고려호로 가노다)만이 예외적으로 쓰일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이 문헌’에서 종성 ‘ㆁ’ 표기는 다음에 제시하는 바와 같다. 곧, 자료 4-1)에서 종성 ‘ㆁ’이 제대로 쓰인 예는 총 69개 예(중복 출현 포함)이고, 이 중에서 고유어는 한 단어가 3회(-) 쓰인 것이 유일하다.

한편, 4-2)는 종성 ‘ㆁ’의 자형이 사라진 것을 반영한 것으로, 여기서는 한자어 11개, 고유어 7개 예로 앞의 비율보다는 많이 다르다.

여기서 덧붙여 둘 것은, 이 책을 판각한 각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앞의 ‘Ⅰ. 머리말’ 끝에 언급한 바를 여기서 자세하게 다룬다.

‘이 문헌’의 서체(書體)에 대해서는 전문가에 미루고(송일기·유재근 2000ㄴ:41-42), 필자는 상식적인 관점만으로도 글씨의 같음과 다름을 사람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 가름할 수 있다고 보고, 이런 관점에 따라서 ‘이 문헌’의 글씨체[혹은 각자(刻字)]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물론 이는 발문에 나타난 ‘각수(刻手) 쌍순(双淳), 혜식(惠湜)’ 두 분의 글씨[刻字]라고도 하겠는데, 문제는 어느 분이 어느 면을 판각했느냐 하는 점이다. 처음에는 ‘ㆁ’ 자의 쓰임에만 관심을 가지고 보다가, 나중에는 ‘이 문헌’ 전체를 생각해 보았는데, 두 분을 A, B로 하여, A, B가 판각한 면을 필자 나름대로 구별하여 그 전부를 보인 것이 다음 표이다.

A 1ㄱ ~4ㄴ (8면)

B 5ㄱ~8ㄴ(8면)

A 9ㄱ~20ㄴ(24면)

B 21ㄱ~24ㄴ(8면?)

A 25ㄱ~26ㄴ(4면)

※ A-36면, B-16면, 계 52면.

이 결과는 숫자가 다른 만큼 두 분이 작업한 양이 달랐다고 보는 것이고, 그 근거를 두 가지만을 들어둔다. 첫째는 무엇보다 글씨체로서 A는 한자나, 한글이나 모두 가능한 대로 정자(正字)체로 바른 고딕체 글씨라면, B는 고딕체이면서도 A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글씨가 좀 왼쪽으로 좀 치우친(?) 구부정하며 바르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를 ‘이 문헌’의 4장 후면(4ㄴ)과 5장 전면(5ㄱ)의 두 면을 대비해 보면 필자의 위의 말이 어떤 뜻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ㆁ’ 자의 판각 차이점으로서 다음 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적기로 한다. 주010)

종래 이런 비슷한 논의로는 신중진(1996:231)이 있는데, 자형의 특징으로 ‘ㅇ’ 판각이 다른 자형과 달리 굵기가 가늘어서 이것으로 다른 이본(異本)과의 관계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기준)으로 소개한 바 있다.

A 1ㄱ~ㆁ 4  B 5ㄱ~x 0

  1ㄴ~ㆁ 5   5ㄴ~ㅇ 7(ㆁx)

  2ㄱ~ㆁ 1   6ㄱ~ㅇ 0

  2ㄴ~ㆁ 3   6ㄴ~ㅇ 3(ㆁx)

  3ㄱ~ㆁ 1   7ㄱ~ㆁ 3

  3ㄴ~ㆁ 1   7ㄴ~ㆁ 4

  4ㄱ~x 0   8ㄱ~ㅇ 7(ㆁx)

  4ㄴ~x 0   8ㄴ~ㅇ 0

위의 왼편 ‘1ㄱ’ 등은 장차(張次), 오른편 ‘ㆁ’ 다음의 숫자는 종성이 쓰인 횟수, (ㆁx)는 ‘ㆁ’이 아닌 ‘ㅇ’을 나타낸 것이다. A, B를 대비해 보면 A는 종성 ‘ㆁ’을 제대로 쓴 데 비해서, B는 우선 ‘7ㄱ, 7ㄴ’에서만 제대로 종성 ‘ㆁ’을 쓰고, ‘5ㄴ’에서 7회, ‘6ㄴ’에서 3회, ‘8ㄱ’에서 7회를 종성 ‘ㅇ’을 쓴 결과인데, 환언하면 A는 종성 ‘ㆁ’을 제대로 판각한 데 대해서, B는 종성 ‘ㅇ’으로 판각한 것이 많으나, ‘ㆁ’으로 판각한 것도 일부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나머지 36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판각의 차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언어 현실에 종성 ‘ㆁ’(옛이응)은 이미 자형(字形)으로서는 쓰이지 않게 되고 그 자리에 ‘○’으로 대체가 진행 중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2.4.1. 종성 ‘ㆁ’ 표기

샤의〈1ㄱ〉  대이〈1ㄴ〉  이〈12ㄴ〉  족도〈13ㄴ〉

거든〈1ㄴ〉  사의〈1ㄴ〉  도〈13ㄴ〉  스의〈13ㄴ〉

의〈2ㄴ〉  샤〈2ㄴ〉  교도〈13ㄴ〉  의티〈13ㄴ〉

단여〈2ㄴ〉  도〈3ㄱ〉  뎨의〈13ㄴ〉  시리〈13ㄴ〉

음니〈3ㄱ〉  님도다〈7ㄱ〉  셕〈13ㄴ〉  습이〈13ㄴ〉

〈7ㄱ〉  권려〈7ㄱ〉  타의〈14ㄴ(2)〉  야〈14ㄴ〉

 다힌〈7ㄴ〉  고〈7ㄴ〉  오이〈14ㄴ〉  심이〈14ㄴ〉

간의〈7ㄴ〉  〈9ㄱ(2)〉  호니〈14ㄴ〉  심케〈15ㄱ〉

노라〈9ㄴ〉  얏()〈9ㄴ〉  〈14ㄴ,15ㄱ〉  좌의〈15ㄴ〉

타의〈10ㄱ〉  홈〈10ㄱ〉  싀권으란〈16ㄴ〉  을〈22ㄴ〉

산티〈10ㄴ〉  하니〈10ㄴ,11ㄱ〉  〈23ㄴ〉  〈23ㄴ〉

내을〈11ㄱ〉  각고〈11ㄱ〉  젼의〈24ㄱ〉  을〈24ㄴ〉

해〈11ㄱ〉  이〈11ㄱ〉  〈24ㄴ〉  호야〈24ㄴ〉

티〈11ㄴ〉  〈11ㄴ〉  〈24ㄴ(2)〉  대과〈26ㄱ〉

〈12ㄱ〉  돋〈12ㄴ〉  의〈26ㄴ〉    니라〈26ㄴ(2)〉

내의〈12ㄴ〉  면〈12ㄴ〉  대보부모은〈26ㄴ(2)〉

     합계 69례(중복 출현 포함)

1.2.4.2. ㆁ → o

멍니〈5ㄴ〉  복와〈5ㄴ〉

장〈5ㄴ(2)〉  향엿고〈5ㄴ〉

향여〈5ㄴ〉  사근장〈5ㄴ〉

듕니〈6ㄴ, 8ㄱ〉  오장이〈6ㄴ〉

졍이〈6ㄴ〉  랑이〈8ㄱ(2)〉

긔디〈8ㄱ〉  졍을〈8ㄱ〉

양〈8ㄱ〉  갑리잇고〈24ㄴ〉

아니호리이다〈26ㄱ(2)〉  엇뎨니잇가〈26ㄱ〉

     합계 20례(중복 출현 포함)

1.2.5. 비자동적 교체의 체언

체언에 조사가 통합될 때, 그 체언이 자동적인 교체를 보이는 경우와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 중의 한 가지로 이른바 ‘ㅎ종성(말음)체언’이 ‘이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둘희〈2ㄴ〉  안셔〈5ㄴ〉  안〈5ㄴ〉

뫼히〈5ㄴ(2), 6ㄴ〉  (피)뫼히라도〈5ㄴ〉  뫼히라〈5ㄴ〉

〈12ㄴ〉  〈15ㄱ〉  골〈16ㄴ〉

해〈19ㄴ〉  (한도)갈히〈23ㄴ〉  히〈24ㄱ〉

우희〈24ㄴ〉  내히〈26ㄱ〉  -계 16개

cf. 갈로[以刀]〈6ㄱ, 19ㄱ-ㄴ, 20ㄱ〉

여기서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둟[二](1), 않[內](2), 묗[山](5), [地](2), (한도)갏[刀](1), [村](1), 곯[郡](1), [肉](1), 웋[上](1), 냏[川](1) 등으로 10개 단어이다. 이 중에서 ‘(한도)갈히’ 1례는 말음이 유지된 것이지만, 예외적인 경우는 본시 ‘갈로’ 쓰일 것이 ‘갈로’로 쓰였기 때문에 ‘ㅎ’이 탈락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단어의 경우 ‘한도+갈히’와 같이 합성어에서는 ‘ㅎ’유지형도 쓰여서 ‘ㅎ’ 탈락이 진행 중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ㅎ’탈락은 15세기 중엽에서조차, ‘하리〈석상 6:35ㄴ〉, 하〈석상 6:35ㄴ〉, 하〈석상 9:25ㄱ〉, () 갈로 쇼 다효〈원각 하2-2:10ㄱ〉’ 등에서와 같이 ‘ㅎ’ 탈락형이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다.

또한 ‘곻[鼻]’는 ‘ㅎ’종성체언으로 쓰인 것이지만, ‘이 문헌’에서 ‘눈과 귀와 고와 입과’〈4ㄴ〉에서는 ‘고’로 나타나며, 16세기 말엽 〈소학언해(1588)〉에는 ‘귀와 눈과 코와 입과’〈소언 3:7ㄱ〉와 같이 초성의 ‘ㄱ’이 유기음화한 예도 나타난다. 초성 유기음화의 예로 ‘이 문헌’에 쓰인 것은 없지만, ‘[臂]’은 ‘ 면’〈온역 7ㄱ〉, ‘와’〈구간 1:60ㄴ〉 등이 있는데, 앞의 ‘’는 초성 ‘ㅂ’이 유기음화되었으면서도 종성에 ‘ㅎ’도 쓰인 예이고, 뒤의 ‘와’는 종성 ‘ㅎ’은 탈락하고, 초성 ‘ㄱ’을 유기음화한 예도 있다.

또 하나의 비자동적인 교체를 보이는 것으로 ‘구무/’이 세 번 쓰인 예가 있다. ‘(털)굼기〈5ㄱ〉, 굼기〈5ㄱ〉, (털)구무마다〈17ㄴ〉’인데, 앞 2예는 7)항에 언급되는 비음동화의 예인데, 이는 모음 조사와 결합하면 ‘굼기, 굼글, 굼그로...’와 같이 ㄱ곡용으로 쓰이나, 자음 조사와 결합하거나, 체언 단독형으로 쓰이면 ‘구무도, 구무와 구무’로 쓰인다. 같은 유형의 체언으로 ‘나모[木]/, 녀느[他]/, 불무[冶]/’ 등이 있다.

1.2.6. ㄱ 약화 표기

‘ㄱ’ 약화 현상은, 두 형태소의 결합에서 앞 형태소의 말음이 ‘ㄹ’[l]이나, 부모음 ‘ㅣ[j]’ 또는 서술격조사 ‘ㅣ[i]’일 때 다음에 오는 형태소의 두음이 ‘ㄱ[k]’이면 약화되어 ‘ㅇ[ɦ]’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 문헌’에서도 다음과 같은 보기가 나타난다.

뎨오〈2ㄱ〉  하나비어나〈2ㄱ〉

부뫼어나〈2ㄱ〉  희오〈2ㄴ, 3ㄱ〉

오〈2ㄴ〉  알오〈2ㄴ〉

알어니와〈2ㄴ〉  가지어든〈3ㄴ〉

하젼되오〈3ㄱ,ㄴ〉  사오나이 되오〈9ㄴ〉

알오쟈〈11ㄱ〉  여희오〈14ㄱ〉

메오〈18ㄱ〉  합계 15례

이 현상은 〈석보상절〉 이래 15세기 말의 문헌에 이르기까지 잘 지켜졌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위의 보기에 들어가야 할 ‘말고’〈5ㄴ〉가 ‘ㄱ’약화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ㄱ’을 유지한 채로 쓰이고 있다. 이런 ‘ㄱ’ 복구의 예들이 언제부터 나타난 것인지 국어사 문헌자료에서 검색해 보았다. 아래에 제시한 것처럼 ‘이 문헌’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속삼강행실도(1514)』가 있고, 16세기 초엽의 〈순천김씨언간〉과 좀 뒤의 『장수경언해(16세기 중엽)』, 『선가귀감(1569)』, 그리고 『초발심자경문언해(1577)』에서 사용된 예가 있었다. 이들은, 이를테면 ‘말오’ 표기에서 ‘말고’ 표기로 복구되는 이른 시기의 예로 보인다. 이렇게 16세기 후반에 시작된 이 표기는 그대로 근대국어로 이어져 현대국어에 이른다.

한편 ‘말오’ 표기는 그 예가 많지는 않으나, 17세기에도 이어지다가 다음 보기의 끝 두 예문처럼, 18세기 중엽 『맹자율곡언해(1749)』, 『지장경언해(1752)』의 예가 마지막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ㄱ’ 약화 현상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남았던 보수적, 의고적인 표기로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 너비 알고 의론을 잘더니〈속삼 충:1ㄱ〉

아려나  누겨 잡녀 말고〈순천 13:10〉

내 디 엇엇더니 샹덕도 말고 쳐블 렷거니〈순천 80:1〉

복숑와  마늘 과실 먹디 말고〈은중 5ㄴ〉

미 어  업시 훤츠리 다 알고〈장수 30ㄴ〉

 迷 가져 아롬 기드리디 말고 〈선가 16ㄴ〉

다시 엇디려뇨 구러 묻디 말고 부리 박디 몯 고대 목숨 리고〈선가 17ㄱ〉

을 알고 약을 노니〈초발 야운:44ㄴ〉

來年을 기린 後에 말오려 홈이로다〈맹율 3:65ㄱ〉

불승 받디 몯야셔 몬져 먹니 말오리니〈지장 중:19ㄱ〉

1.2.7. 비음동화(鼻音同化)

이 비음동화는 주지하는바와 같이 『훈민정음언해』 치두음의 협주에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열니 혓그티 웃 닛머리예 다니라”〈훈언 15ㄱ주〉에 쓰였는데, ‘다니라’는 ‘닿-++니+라’로 분석되어, 어간 ‘닿-’이 ‘닫-(불파의 폐쇄음)’으로, 여기에 선어말어미 ‘’의 ‘ㄴ’이 역행동화로 ‘닫-→단-’이 된 것을 제2음절 초성 ‘’에 각자병서로 표기한 것이다. 그 다른 예로 초기문헌에 많이 나타나는 ‘니-’는 본시 『석보상절』,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서는 동화되기 전의 ‘니-’가 쓰이다가, 『월인석보』에 오면 ‘니-/니-’ 양형이 공통으로 쓰이나, 비음동화형은 뒤의 용례에 보다시피 단 5례에 불과하고, 전자가 압도적인 빈도로 쓰였다. 한편 불경언해 중에서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영가집언해』를 이어, 15세기 중엽의 『구급방언해(1466)』, 『내훈(1475)』, 특히 권수가 많은 『두시언해(1481)』에 이르면 ‘니-’의 용례가 아주 많아지고, 이는 그대로 16세기에까지 이어져 16세기 말엽의 『소학언해(1588)』까지도 이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표기법의 전통으로 예측해 볼 때 16세기 중엽의 ‘이 문헌’은 그 동화 현상을 예상할 수 있으며 그 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ㄱ)의 보기는 앞에 든 ‘니-’와 같은 동화의 보기이다. 그런데 다음 두 예는 필자가 본 바로는 처음 보는 것으로서, ㄴ)은 앞 형태소 말음 ‘ㄱ’이 후행 형태소의 두음인 비음 ‘ㄴ’과 ‘ㅁ’의 영향을 받아 같은 ‘ㄱ’과 동일 서열의 연구개비음 ‘ㆁ’으로 변동된 것이고, ㄷ)은 앞 형태소 말음 ‘ㅂ’이 뒷 형태소 두음 ‘ㄴ’의 영향으로 ‘ㅂ’과 동일 서열의 양순비음 ‘ㅁ’으로 변동된 것이다. 16세기 말엽 『논어언해(1590)』예는 아래 *7이다. 그런데 최근에 영인·역주한 『정속언해(1517)』에도 아래 인용한 예(*6)는 이미 16세기 초엽에도 이런 동화현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16세기 초엽의 『정속언해』(*6), 중엽의 ‘이 문헌’(*7), 말엽의 『논어언해』(*8)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16세기를 통틀어 보편적으로 쓰인 것으로서, 이 동화 현상의 발생을 17세기까지 거론할 것이 못된다(신중진 1996:245). 예(*6)에 대해 홍윤표(1984)에서는 그 표기(‘잠’)가 오기(誤記)일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주를 달고 이를 인용하였다(김문웅 2010:42).

1: 前生애 니 다가 後生애 다시 난 모미 後身이라〈월석 1:45ㄴ주〉

2:   그려기 츄 長常 더브러 니더니〈월석 22:61ㄱ〉

3: 므레 니 中에 龍의 히미  크고〈월석 20:8ㄴ주〉

4: 무틔 니 中에 象의 히미 크니라〈월석 20:8ㄴ주〉

5: 더 호아 가져 니니라〈월석 25:24ㄱ〉

*6: 어버이 빗 내요미 다 글 호로브터 잠 거시니(以顯父母 皆由學以基之也)〈정속 8ㄱ〉

*7: 아기란   누이고 즌  눔 은〈은중 8ㄴ〉

*8: 富를 可히 求 꺼신댄 비록 채를 잠 士ㅣ라도〈논어 2:18ㄱ〉

ㄱ) ㄴ+ㄴ⟵ㄷ+ㄴ(괄호 안은 참고로 적은 것임.)

인(잇)*〈5ㄴ〉

()니믜()〈6ㄴ〉

진(짓)〈10ㄴ〉

인(잇)니〈2ㄴ〉

()니다가〈14ㄴ〉

()니라〈26ㄴ〉  계 6례

ㄴ) ㆁ+ㄴ⟵ㄱ+ㄴ, ㆁ+ㅁ⟵ㄱ+ㅁ

멍(먹)니〈5ㄴ〉

(목)라도〈16ㄱ〉

(목)〈17ㄱ〉  계 3례

ㄷ) ㅁ+ㄴ⟵ㅂ+ㄴ

눔(눕)〈8ㄴ〉  계 1례

1.2.8. 종성 ‘ㅅ-ㄷ’의 표기

15세기 국어에서는 8종성으로, 특히 음절말 위치에서 ‘ㅅ’과 ‘ㄷ’이 대립된 점이 현대국어와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초엽에 들어 음절말 종성의 ‘ㅅ’과 ‘ㄷ’이 [t]로 중화됨으로써 15세기의 8종성이 17세기에는 7종성 ‘ㄱ, ㆁ, ㄴ, ㄷ, ㅁ, ㅂ, ㄹ’으로 된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ㅅ’과 ‘ㄷ’이 그런대로 다음에 보이는 것과 같이 구별되어 쓰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기의 보수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 음가는 연철된 경우 ‘드로〈13ㄴ〉’를 제외하면 나머지 16례는 모두 불파음의 ‘ㄷ’으로 발음되었다고 본다.

(아홉) 가짓 5ㄴ, 6ㄱ~ㄴ, 12ㄴ, 24ㄴ.  오역긧 6ㄱ.

졋어미 9ㄱ. (졎+어미)  고 6ㄴ, 9ㄱ~ㄴ.

몯고 8ㄱ.  더니라 9ㄴ.

드로 13ㄴ.  듣글도 15ㄴ.

몯야 17ㄴ.  돋 (다힌) 12ㄴ.

닛디 14ㄴ. (닞+디)  합계 17례

1.2.9. 연철·분철·중철

1.2.9.1. 연철 표기

‘이 문헌’의 표기는 전통적인 연철로, 아래 보이는 분철과 중철을 제외한 전부이다. 이 연철 표기(용례 116례 줄이기로 함.)된 자음은 다음과 같았다.

ㄱ: 16,  ㄴ: 12,  ㄷ: 3,  ㄹ: 28,  ㅁ: 32,  ㅂ: 4,

ㅅ: 10,  ㅈ: 5,  ㅊ: 1,  ㅌ: 2,  ㅍ: 1,  ㅎ: 2.

  합계 116회

1.2.9.2. 분철 표기

이 몸이 6ㄱ.  은덕을  22ㄱ.  계 2례.

1.2.9.3. 중철 표기

이 중철 표기는 앞 형태소의 말음을 그대로 두고서 그 말음을 다시 모음으로 시작하는 후행 형태소의 초성으로 쓰는 표기이다. 이를테면 연철에서 분철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표기라 할 만하니, 이는 실질형태소와 형식형태소를 분리하고자 하는 문법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예에서 중철된 자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좀 다른 점은 이 중 ‘ㅍ’이 용언이고, 나머지는 체언이다. (이 자음 중, 유성자음은 32회이고, 무성자음은 10회이다.)

ㄱ : 8,  ㄴ : 29,  ㅁ : 3,  ㅅ : 1,  ㅍ : 1.

  합계 42회

사미 1ㄴ.  슈미산니라도 5ㄴ.

업산니라도 5ㄴ.  오역긧 6ㄱ.

간 6ㄱ.  은니라 6ㄱ~ㄴ, 7ㄱ~ㄴ.

인연니 6ㄴ.  믈 6ㄴ.

은니 8ㄱ, 9ㄴ, 11ㄱ.  은니라 9ㄱ.

은 10ㄴ, 11ㄴ, 12ㄴ.  여니언 11ㄱ.

얼운니 13ㄴ.  옥긔 14ㄴ.

지럼믄 15ㄱ.  덕기 17ㄱ.

은 17ㄱ, 18ㄱ~ㄴ, 19ㄱ~ㄴ,  슈미산 18ㄱ.

  20ㄴ, 21ㄴ, 24ㄴ(2).  죄인니라 22ㄱ.

복글 22ㄴ.  디옥긔 22ㄴ, 23ㄴ, 24ㄱ~ㄴ.

면 23ㄴ.  갑리잇고 24ㄴ.

  합계 42례

1.2.10. 한자음의 표기

‘이 문헌’의 한자음 표기는 당시의 전통적인 조선한자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기의 특징은 언해문 전체는 한글로만 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자는 표기되지 않고 해당 한자의 음만 노출되어 있다. 현대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문헌’의 언해문은 ‘한글전용체’의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 이르기까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석보상절(1447)〉 - 한자와 고유어(정음) 글자를 큰 글자로 같게 표기하고, 모든 한자는 밑에 작은 글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하였음.

〈월인천강지곡(1447)〉 -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큰 글자(정음)로 앞세우되 후음 ‘ㅇ’을 쓰지 않았고, 그 밑에 한자를 작은 글자로 표기하였으며, 고유어(정음)도 한자와 같은 크기로 이어 표기하였음. 이런 표기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음.

〈월인석보(1459)〉 - ‘석보상절’식 표기를 따름. 여기에서 표기한 〈월인천강지곡〉 가사도 석보상절식으로 바꾸어 표기하였음. 즉 모든 한자를 크게 키우고, 그 밑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작게 표기함. 단, 협주는 2행으로 작은 글씨이므로 동국정운식 표기를 나란히 같은 크기로 적었음.

〈능엄경언해(1461)〉 - ‘석보상절’식 표기와 같이 한자와 고유어(정음)를 나란히 표기하였으나, 한자 뒤에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도 같은 크기로 아래에 적었음.

15세기 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지양하고 전통한자음을 쓰기 시작한 『육조법보단경언해』,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에서도 예문에서처럼 석보상절식 표기가 이어지다가, 『속삼강행실도(1514)』는 대체로 한자와 전통한자음 표기를 나란히 하면서도 글자 크기는 같아졌고, 『이륜행실도(1518)』에 이르면 한자를 전혀 적지 않으면서 모두 전통한자음으로 적는 것은 물론 글자 크기도 같아지게 되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후 문장 표기의 한 혁신이라 할 만하다. ‘이 문헌’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지어진 것으로서, 언해문에 한자는 전혀 쓰지 않은 정음체의 문장으로서 당시로서는 돋보이는 점이다.

世솅尊존이 象頭山산애 겨샤〈석상 6:1ㄱ〉

셰世존尊ㅅ 일 리니 먼萬리里 外 ㅅ 일이시나...〈월인 상:1ㄱ〉

世솅尊존ㅅ 일 리니 萬먼里링ㅅ 外ㅅ 일이시나 눈에 보논가 너기쇼셔[萬먼里링外 萬먼里링 밧기라]〈월석 1:1ㄴ〉

如來ㅅ 果광體톙 그 體톙 本본來 그러커시니〈능엄 1:8ㄱ〉

그  大대師ㅣ 寶보林림에 니를어시〈육조 상:1ㄱ〉

仙션間간 고로 供養노니〈진권 4:ㄱ〉

(王)中이 登封 (사)미라〈속삼 효:1ㄱ〉

윗나랏  슈 션공의 아리니(衛 公子壽者 宣公之子)〈이륜 형:1ㄱ〉

1.2.11. 초역본의 방점 표기

〈부모은중경언해〉는 중세국어 정음 문헌 중에서 방점(傍點)이 표시되지 않은 문헌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주011)

중세국어 성조(聲調)를 연구한 김성규(1994:129)에 의하면, 방점이 찍히지 않은 문헌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었다. 『부모은중경언해』 화장사판(1553년)과 송광사판(1563년), 그리고 희방사판 『칠대만법(1569)』, 서봉사판 『계초심학인문(1583)』 등.
그러나 그 양상이 매우 불규칙하여 기능이 과연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이 문헌’에 방점이 사용된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번거롭지만, 이 문헌에 나타난 방점을 이해하기 위해 『훈민정음』 해례본에 규정한 방점 표기의 원칙과 기능, 그리고 이 문헌에 이르는 동안의 방점 표기법의 역사를 간략히 기술하기로 한다.

방점 표기는, 1446년 음력 9월에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例義)’에 제시된 가점법(加點法)과, ‘훈민정음 해례’ 합자해(合字解)의 원칙 해설, 그리고 용자례(用字例)의 구체적인 용례들을 통해 문자화하는 방법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은 ‘훈민정음’ 즉 ‘한글’로 한국어나 외래어 음운을 표기할 때, 어절 단위로 해당 음절의 글자 왼쪽에 점을 찍어 표시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방점(傍點/旁點)’이라 부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조(聲調. toneme)의 높낮이[고저]를 나타내는 표지로서, 그 종류는 0점(점 없음), 1점, 2점의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0점(무점)은 가장 낮은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평성(平聲)’이라 하였으며, 1점은 가장 높은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거성(去聲)’이라 하였고, 2점은 처음이 낮고 끝이 높은 소리로서 ‘상성(上聲)’이라 하였다.

이 방점 표기의 원칙은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와 ‘해례’ 합자해에 제시되었다. 구체적인 용례는 주로 ‘합자해’와 ‘용자례’에 여러 차원으로 제시되었다. ‘·’[地], ‘·’[酉時], ‘:별’[星]과 같은 단어 차원의 예들과, ‘합자해’의 ‘괴·여’[我愛人], ‘소·다’[覆物] 등의 어절 차원의 예, 그리고 “孔子ㅣ魯ㅅ:사”과 같은 절(節) 차원의 예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전한 문장 종결형식을 갖춘 용례는 해례본에 제시되지 않았다.

단어를 포함하여 완전한 문장 종결형식의 성조 실현을 방점으로 반영한 첫 문헌은 훈민정음 교과서 구실을 한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부터라 할 수 있다. 주012)

정우영(2005: 82-94)에 따르면, 제1차 〈훈민정음〉 언해본은 1446년 12월 말까지, 또는 늦어도 1447년 4월 이전까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의’편만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이어서 훈민정음 초기문헌인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에서도 방점을 적극적으로 표기에 반영함으로써 방점 표기가 국어 표기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주013)
현재 전하는 15세기 정음문헌 중에서 방점 표기가 반영되지 않은 문헌도 있다. 예를 들면, 『금양잡록(1492)』, 『악학궤범(1493)』에 실린 정음가사, 이종준의 『신선태을자금단(1497)』 등인데, 이는 거의 예외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 관판(官版)의 정음문헌에는 방점 표기가 철저하게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방점 표기가 우리말 소리의 고저(高低)를 반영한 표지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훈민정음 창제 후 문헌 편찬자들은 당시 한국어의 음소(音素)와 운소(韻素)를 모두 문자화함으로써 ‘정음(正音)’ 즉 ‘표준화한 말소리[語音]’를 독자들(백성)에게 널리 가르쳐 펼칠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세기 말기 이후로는 방점 표기가 점차 소홀해져서 대체로 16세기 말기 임진란 이후의 한글문헌에 이르러서는 소멸·폐지되기에 이른다. 주014)
17세기에도 방점이 표기된 문헌으로, 1610년 송광사판 『선가귀감언해』가 있다. 이것은 원간본인 1569년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판에 방점 표기가 있는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복각한 데 원인이 있다.

15세기 중기 정음문헌에서부터 16세기 말기 문헌까지 방점이 반영된 한글문헌을 살펴보면, 방점 표기의 원칙에 몇 차례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점 표기 원칙의 제1차 변화는 1464년 『선종영가집언해』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원각경언해(1465)』를 거치면서 일반화하기에 이른다. 대체로 그 변화는 문장에서 어절의 말음절을 거성(=높은 음조)으로 표기(=발음)하던 것을 평성(=낮은 음조)으로 표기(=발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역주본의 저본인 ‘이 문헌’ 1545년 오응성 발문이 붙은 『부모은중경(언해)』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방점이 사용되었다. 그 경향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15)

이 초역본(1545)이 발견·소개되기 전에, 유필재(1997)에서 화장사판(1553) 『부모은중경언해』의 방점을 조사·분석한 바 있다. 이 오응성 발문이 붙은 초역본(1545)도 화장사판의 경향과 다르지 않다.

첫째, 방점은 5장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전체 27장 중에서 전반부는 방점 표기가 적게 나타나고, 후반부로 갈수록 많이 나타난다. 비교적 내용이 많은 장을 조사해 보아도 1면에 20어절을 넘지는 않는다. 방점이 많이 나타난 면을 조사한 결과를 보이면 (1)과 같다.

(1) 12ㄴ(16개 어절) 13ㄴ(10개 어절) 14ㄴ(10개 어절)

 23ㄴ(19개 어절) 26ㄴ(13개 어절)

둘째, 고유어의 경우에는 대체로 하나의 어절에는 하나의 음절에만 방점 표시가 되어 있으나, 한자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나타난다.

(2) 가. ·올 ·피주리 되여 :아긔 이븨 흘러 ·드니라〈5ㄴ〉

 나. 믄 :: 렴야〈14ㄴ〉.  다 :디·오긔 다시 드러〈23ㄴ〉

(2나)는 예외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은 한자 구성요소 ‘永+永’으로 된 첩어이고, ‘:디·오긔’는 ‘地+獄+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자의 기본성조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므로 고유어와는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체언의 곡용형 또는 용언의 활용형에서는 어간에만 방점을 찍으며, 어절의 말음절에는 방점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대세이다.

(3) 가. 닐곱 ·리면 회 아기 삼여슌 와 팔만쳔 털굼기 나니라〈5ㄱ〉

 나. 다 리면/여 리면〈4ㄴ〉. 여ㅂ 리면〈5ㄱ〉. 아홉 리면〈5ㄴ〉

 다. 일·후·미 ·모미·면 鼻 아·니·오〈능엄 3:44ㄱ〉. cf. ·몸[身]

 라. ·어미 ·식 ·여 ·열 ·이예 안·나 니·나 편·티 아니여〈12ㄱ〉

(3가)는 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방점 표기의 예이다. ‘·리면’은 ‘거성-평성-평성’형이지만, 같은 문헌의 앞·뒷장에 나오는 (3나)의 ‘리면’에서는 방점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이 문헌이 어말 평성화 이후의 것이기는 하지만, 체언의 어간 ‘·’[月]이 거성이므로 모두 ‘평-평-평’으로 실현되었다고 해석할 수 없다. 아예 같은 면의 다른 문장에서 방점이 쓰인 예가 없기 때문이다. ‘月[달]’을 뜻하는 []은 중세국어 문헌에서 ‘거성’이며, ‘+이면’으로 통합되면 15세기 율동규칙에 따라 ‘·리·면’(거-평-거)으로 실현되는 것이 정상이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곡용형 ‘리면’이나 ‘이면’으로 나타나는 예를 찾지 못하였으나, 체언의 기본성조가 거성인 (3다) ‘·몸’의 곡용형이 ‘·모미·면’(거-평-거)으로 실현되는 예를 볼 때, (3가)의 ‘·리면’에 표시된 1점은 방점 ‘거성’을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절말의 평성화가 반영된 문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헌 전체에 이 같은 경향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지만, (3라)에서 ‘·여, 안·나, 니·나, 편·티’와 같은 예는 이 문헌에서 거의 유일하게 집중적으로 나타난 문장으로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넷째, 방점 표기가 매우 불규칙하며, 15~16세기 한양에서 간행한 관판 정음문헌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1음절어의 경우만 〈표〉로 정리해 대체적인 경향을 알아본다.

〈표1〉은 1음절 한자어 및 고유어로서, 방점이 표기된 경우를 몇 개 모아본 것이다. 한자어의 경우는 15~16세기 문헌들과 같이 나타나지만, 고유어인 ‘다’[皆]와 ‘피’[血]의 경우는 중세국어 방점 표기 문헌의 것과 다른 것도 나타난다. 이 예들을 보면 15세기 국어 성조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표1〉 ‘이 문헌’의 방점 표기 경향(1음절어)

음절대상(횟수)15세기 문헌16세기 전기
1음절어·겁(劫)〈26ㄱ2〉같음. 〈육조 중70ㄴ〉같음
:다[皆.상성]〈7ㄴ7〉(4회)같음. 〈남명 상4ㄴ〉같음
·다[皆.상성]〈16ㄴ5〉(2회)다름다름
·이[此.거성]〈5ㄴ8〉(3회)같음. 〈시식 4ㄱ〉같음
·피[血.거성]〈7ㄴ7〉(6회)같음. 〈월석 1:7ㄴ〉같음
:피[血.상성]〈5ㄴ9〉(1회)다름다름
·혹(或)〈14ㄴ7〉(3회)같음. 〈권공 23ㄴ〉같음

그러나 15세기 문헌에서 ‘거성’이나 ‘상성’으로 나타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이 이 문헌에서는 방점으로 반영되지 않은 예를 감안하면, 성조의 계승과 변화의 와중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섯째, 거성과 상성의 혼란을 보여준다. 〈표2〉는 15세기와 16세기 초기 정음문헌에서 ‘상성’이던 것을 이 문헌에서 ‘거성’으로 표기한 예이다.

〈표2〉 상성(15~16세기 문헌) ⇒ 거성(‘이 문헌’의) 경향

15~16세기 문헌‘이 문헌’
가(상-거)〈박초 상10ㄴ〉가(거-평, 假使)〈18ㄱ3〉(7회)
녜(상-거)〈월석 17:79ㄴ〉녜(거-평, 昔)〈9ㄴ6〉
다(상-거)〈석상 13:48ㄴ〉다믄(거-평, 但)〈8ㄴ9〉
父母ㅣ(상-상)〈석상 6:7ㄱ〉부뫼(거-평)〈10ㄴ6, 12ㄴ8〉
간(상-평)〈석상 9:12ㄴ〉잠(거-평)〈10ㄴ9〉
漸쪔漸쪔(상-상)〈석상 9:15ㄱ〉졈졈(거-거)〈13ㄴ7〉
賤히(상-거)〈영가 상:26ㄴ〉쳔히(거-평)〈14ㄴ3〉
내애(상-평-거)〈능엄 1:20ㄱ〉내의(거-평-평)〈12ㄴ7〉
父母도(상-상-거)〈월석 10:24ㄴ〉부모도(거-평-평)〈14ㄱ1〉
어엿버(상-평-거)〈월석 25:4ㄱ〉어엿버(거-평-평)〈9ㄱ9〉
얼우(상-평-평)〈두초 21:6ㄴ〉얼우(거-평-평)〈13ㄱ10〉
五臟(상-거-거)〈월석 4:7ㄱ〉오을(거-평-평)〈23ㄴ10〉
우다가(상-평-거)〈월석 23:78ㄴ〉우다가(거-평-평)〈14ㄴ7〉

〈표2〉에서는 15~16세기 정음문헌에서 제1음절 어간이 ‘상성’으로 표기되던 것이, ‘이 문헌’에 와서 ‘거성’으로 표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어절의 말음절 성조도 15세기에는 ‘거성’으로 실현되던 어형이 ‘거성→평성’으로 표기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표3〉은 15세기 정음문헌에서 ‘거성’으로 표기되던 것을 ‘이 문헌’에 와서 ‘상성’으로 표기한 경우이다. 주016)

이 같은 경향에 대하여는 유필재(1997:231-234)에서 구체적인 예와 해석이 갖추어져 있다.

〈표3〉 거성(15~16세기 문헌) ⇒ 상성(‘이 문헌’의) 경향

15~16세기 문헌‘이 문헌’
各各(거-거)〈육조 중:28ㄱ〉각각(상-상, 各各)〈26ㄱ1〉
아(거-거)〈월석 8:83ㄱ〉아긔(상-거)〈5ㄴ9〉
어믜(거-거)〈능엄 5:40ㄴ〉어믜(상-거)〈9ㄴ10〉
獄애(거-거)〈석상 9:8ㄴ〉옥긔(상-평, 獄)〈14ㄴ2〉
고(거-거)〈구방 하:3ㄱ〉고(상-평)〈16ㄴ7〉
디(거-거)〈능엄 9:74ㄴ〉디(상-거)〈8ㄱ8〉
그리(거-평-거)〈월석 17:15ㄱ〉그리운(상-평-평)〈16ㄴ10〉
地獄이(거-거-거)〈영가 상:53ㄱ〉디오기(상-거-평, 地獄)〈23ㄴ2〉

〈표3〉에는 15~16세기 문헌에서 제1음절 어간이 ‘거성’으로 표기되던 것이, ‘이 문헌’에 와서 ‘상성’으로 표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표2〉와 〈표3〉을 비교해 볼 때, ‘거성⇒상성’으로 표기하는 예가 더 많다. 유필재(1997: 232~233)에서도 지적된바 있지만, 이와 같은 경향은 1553년 화장사판에서도 같은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는 화장사판이 앞 시기에 간행된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복각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오쿠라문고(小倉文庫)에 소장된 화장사판(1553)이 오응성 발문의 ‘이 문헌’(1545)을 복각한 자료라면, 화장사판을 당시 경기도 지역의 성조를 반영하는 문헌자료로 본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개연성이 크다. 특히 ‘이 문헌’처럼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판을 거듭하여 간행한 문헌일수록 어떤 자료를 최초(最初) 또는 최고(最古)의 자료라고 확정하고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문헌에 나타난 언어 사실을 면밀히 조사·분석하여 충실히 보고하는 것이 후속 연구를 위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2.1. 조사

조사의 쓰임도 초기문헌 이래의 용법과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으나, 음운의 변동으로 일어난 차이나, 표기상의 차이 등을 중심으로 문제될 만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2.1.1. 주격조사

주격조사의 이형태는 그 표기대로 ‘-이/-ㅣ/-∅’와 같은데, ‘이 문헌’에는 한자어라도 모두 정음으로 표기하였으므로, 한자로 표기할 때와는 조사의 표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辛苦ㅣ’→‘신괴’와 같은데, 이 예는 많지 않아서 해당 한자와 아울러 아래에 예를 보인다. 자음으로 끝난 체언 아래서 그 자음이 연철되는 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과 같다. ‘ 子息이→시기’ 또한 체언의 종성이 ‘ㆁ’인 경우는 초기문헌에서도 ‘ㆁ’이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음절 초성으로 쓰이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도 ‘大衆이→대이〈1ㄴ, 22ㄱ〉’와 같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영형태(零形態)인 ‘-∅’ 주격의 예도 많지 않아서 그 예들을 다 옮긴다.

‘-ㅣ’

신괴(辛苦)〈3ㄴ〉 (樣姿)〈9ㄱ~ㄴ, 15ㄴ〉

부뫼(父母)〈10ㄱ, 12ㄴ, 13ㄴ, 15ㄱ〉 슈괴(受苦)〈12ㄱ(2)〉

녜되(禮度)〈13ㄴ〉 뎨(弟子)〈17ㄱ, 24ㄴ, 26ㄴ〉

‘-∅’

집 나건 오라도〈2ㄱ〉 흐로미〈7ㄴ〉

어미 식 여〈3ㄴ, 4ㄱ, 12ㄱ〉회태 플 틔 이슬티〈4ㄱ외 9회〉

(나) 님도다〈7ㄱ〉어미 편티 아녀 놋다〈10ㄴ〉

어미 바   누웟도다〈10ㄴ〉 흐고〈17ㄴ〉

은혜 부모와 가지로다〈9ㄱ〉쇠가히  블 토야〈23ㄴ〉

이 일호믈 너희 져 니라〈26ㄴ〉

2.1.2. 목적격조사

‘이 문헌’에 쓰인 목적격조사는 ‘-/-을/-’의 세 형태이고, 초기문헌에 쓰였던 ‘-ㄹ/를’의 두 형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은 ‘이 문헌’에 쓰인 목적격조사의 예이다.

마〈5ㄴ〉  은〈10ㄴ, 11ㄴ, 12ㄴ, 17ㄱ·ㄴ, 18ㄱ·ㄴ, 19ㄱ·ㄴ, 20ㄴ, 21ㄴ, 22ㄱ·ㄴ, 24ㄴ〉

대을〈1ㄱ〉  

〈2ㄴ, 21ㄱ〉  모믈〈17ㄴ〉

어미〈6ㄱ〉  너희〈17ㄴ〉

〈6ㄱ〉  슈미산〈18ㄱ〉

간〈6ㄱ〉  모믈〈18ㄴ, 26ㄱ〉

람믈〈6ㄴ〉  눈〈19ㄱ〉

깁오〈6ㄴ〉  가믈〈19ㄴ〉

〈7ㄱ, 10ㄴ, 11ㄴ〉  은혜〈20ㄱ, 21ㄱ〉

아기〈8ㄱ·ㄴ〉  을〈20ㄴ〉

시글〈9ㄴ, 11ㄱ〉  쇠무저글〈21ㄴ〉

이[事]〈10ㄴ(2)〉  은덕을〈22ㄱ〉

그츠믈〈11ㄱ〉  을〈22ㄴ, 24ㄴ〉

은더글〈11ㄴ〉  죄〈22ㄴ〉

믈〈12ㄴ〉  블〈23ㄴ〉

더위〈12ㄴ〉  어〈23ㄴ〉

치위〈12ㄴ〉  오을〈23ㄴ〉

마(言)〈13ㄱ〉  부텨〈24ㄴ(3)〉

버블〈13ㄴ〉  슈고〈24ㄴ〉

사믈〈13ㄴ〉  모〈26ㄱ〉

머기〈16ㄱ〉  교슈〈26ㄱ(3)〉

이(事)〈15ㄱ(2)〉  혀〈26ㄱ〉

호믈〈17ㄱ〉  일호믈〈26ㄱ, 26ㄴ(2)〉

부모〈16ㄴ, 18ㄱ~ㄴ, 20ㄴ, 24ㄴ〉

위 예를 모음조화 적용 여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제시한다.

모음조화가 적용된 표기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표기
-10회- → -을16회
-을8회-을 → -14회
-14회- → -를없음
-를없음-를 → -17회
소계32회소계47회
합계79회

합계 79회를 모음조화가 적용이 된 것(32회)과 그렇지 않은 것(47회)으로 나누어 보면,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후자가 많아서,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전자가 40.50%, 후자는 59.49%로서 약 60%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 문헌’에 쓰인 이 조사의 세 이형태 ‘-/을/’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가 주목된다.

곧, 그동안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다시 현대국어로 이어진 조사의 간소화는, 결국 체언 말음이 자음이냐 모음이냐에 따른 음운론적 이형태 ‘-을/를’ 두 가지로 귀결된다. ‘이 문헌’에서는 ‘-를’이 쓰일 환경인데도 전혀 쓰이지 않고 그 자리에 ‘-’을 썼다.

이 밖에 ‘-(으/)란’이 목적격으로 쓰인 예가 7례가 빠졌는데 이를 다음에 참고로 추가한다.

아기란〈8ㄴ(2)〉, 버드란〈13ㄴ〉, 효도란〈15ㄱ〉, 말란〈16ㄱ〉, 싀권으란〈16ㄴ〉, 권으란〈16ㄴ〉.

2.1.3. 관형격조사

‘이 문헌’에 쓰인 관형격조사는 초기문헌에 쓰이던 그대로 ‘-/의/ㅣ/ㅅ’의 네 이형태가 나타난다. 다음에 그 예를 모두 제시한다.

사〈1ㄱ, 4ㄱ〉  좌의〈15ㄴ〉

의〈1ㄴ〉  겨지븨〈16ㄱ〉

나의〈2ㄱ〉  제 (녁)〈16ㄴ〉

젼의〈2ㄱ〉  제 (모)〈17ㄴ〉

남의〈2ㄴ〉  브효의〈17ㄱ〉

녀이〈2ㄴ〉  부텨의〈17ㄱ, 26ㄱ~ㄴ〉

어믜〈3ㄴ, 5ㄴ, 6ㄱ(3), 6ㄴ, 9ㄱ(2), 10ㄱ, 11ㄱ, 12ㄴ〉  부모의〈18ㄱ~ㄴ, 19ㄱ~ㄴ, 20ㄱ~ㄴ, 21ㄱ·ㄴ, 22ㄴ, 24ㄴ(2)〉

안〈5ㄴ〉  브모의〈20ㄴ〉

아긔(이븨)〈5ㄴ〉  제 ()〈21ㄱ〉

어〈6ㄱ〉  죄이〈23ㄴ〉

부모의〈8ㄱ, 11ㄱ~ㄴ, 13ㄴ, 14ㄴ, 15ㄱ, 17ㄱ~ㄴ〉  젼의〈24ㄱ〉

나〈10ㄱ〉  사믜〈24ㄴ〉

시긔〈10ㄴ〉  의〈26ㄱ·ㄴ〉

인뉴의〈11ㄴ〉  (주근) 후 ()〈2ㄴ~3ㄱ〉

얼우〈13ㄱ, 16ㄱ〉  (아홉)가짓 (굼기)〈5ㄱ〉

스의〈13ㄴ〉  (열) 가짓 은니라〈6ㄱ〉

형뎨의〈13ㄴ〉  (여러) 가짓 (일)〈12ㄴ〉

부텨의〈22ㄱ(2), 26ㄱ(2)〉  블〈23ㄴ〉

효옛〈6ㄱ〉  제 (녁)〈16ㄴ〉

〈14ㄴ〉  제 (모믈)〈17ㄴ〉

  제 ()〈21ㄱ〉

여기서도 앞의 목적격조사의 경우와 같이 모음조화 적용 여부로 나누어 제시한다.

모음조화가 적용된 표기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표기
-8회- → -의31회
-의21회-의 → -4회
29회35회
합계64회

위 자료의 끝 4례는 ‘-ㅅ’이 쓰인 경우와, ‘-/의’의 준 것으로 보는 ‘-ㅣ’의 3회 쓰임은 모음조화와 관련되지 않으므로 따로 보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모음조화가 적용이 된 21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적었고,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조금 많았다.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전자가 45.31%, 후자가 54.69%로 나타난다. 이 수치는 앞으로 후자가 많아질 가능성을 보이는 정도로 예측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적용된 것 중 ‘-의’가 ‘-’보다 3배 가까이 많고, 적용되지 않은 것 중 ‘-의’ 표기가 31회로 ‘-’ 표기보다 8배 가깝다는 것이다. 또, 합계 64회 중 ‘-의’ 표기가 52회, ‘-’ 표기가 12회라는 것은, 앞으로 이 관형격조사 표기는 ‘-의’로 단일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끝 4례와 관련해서, ‘이 문헌’의 ‘부텨의 교수’〈26ㄱ(2)〉 경우, 15세기 문헌에서였다면 ‘부텻 敎授를’ 정도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이 ‘-ㅅ’의 사용이 ‘이 문헌’ 정도면 조사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사잇소리’로 쓰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1.4. 대조의 보조사 ‘-ㄴ//은/’

‘이 문헌’에서는 ‘-’에 대응되는 ‘-는’이 전혀 쓰이지 않아서 용례가 없다. 아래에 제시된 자료를 목적격조사의 경우와 같이, 사용 빈도수를 계산하여 다음에 제시한다.

모음조화가 적용된 것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것
-7회- → -은2회
-은4회-은 → -1회
-9회-는 → -15회
-ㄴ1회
21회18회
합계39회

위에서 모음조화가 적용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횟수는 3회 차이로 별로 문제될 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총 39회 중, 모음조화 적용 여부를 떠나 그 쓰인 횟수로만 보면 ‘-’이 24회로 그 중 많이 쓰인 것이 주목된다. 이는 나머지 ‘-/은/’의 쓰인 횟수를 합한 14회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이〈2ㄱ〉  어미〈8ㄱ, 8ㄴ(2), 9ㄱ〉  아홉채〈10ㄴ〉

〈2ㄴ〉  다채〈8ㄴ〉  어미〈10ㄴ〉

남〈2ㄴ〉  여슷채〈9ㄱ〉  열채〈11ㄱ〉

녀이〈2ㄴ, 3ㄱ〉  아비〈9ㄱ〉  〈16ㄱ〉

이제〈2ㄴ〉  닐곱채〈9ㄴ〉  지럼믄〈16ㄱ〉

남〈3ㄱ〉  녜〈9ㄴ〉  부모〈16ㄴ〉

장은〈5ㄴ〉  눈서븐〈9ㄴ〉  남지〈16ㄴ〉

아〈6ㄱ(2)〉  귀미튼〈9ㄴ〉  어버시〈17ㄱ〉

(둘)채〈7ㄱ〉  여(*)채〈9ㄴ〉  우리〈17ㄴ, 22ㄱ〉

(세)채〈7ㄴ〉  눈므〈10ㄱ〉  다힌(屠)〈12ㄴ〉

네채〈8ㄱ〉  여희믄〈10ㄱ〉  믄〈11ㄴ, 14ㄴ〉

2.1.5. 처소의 부사격조사

15세기에서 일부 체언에 관형격조사와 같은 형태인 ‘-/의-’가 쓰인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 문헌’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쓰인 이형태는 ‘-애/예//의’ 네 가지이고, ‘-애’와 상대되는 ‘-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뒤의 자료를 그 형태별로 사용 횟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애 3회, - 10회, -의 21회, -예 13회, 합계 47회.

그 쓰인 현상을 보면, 양성모음계 ‘-애, -’의 합계보다는 ‘-의’ 한 형태가 배나 되는 빈도로 나타나는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이 네 가지를 빈도수로 보면 ‘-예’가 제일 많은데, 여기에는 ‘이’ 한 단어가 5회가 들어 있고, 그 쓰인 환경도 ‘-i/j’로 별 문제가 없다. 이로 보아서 이형태 ‘-예’의 쓰임은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본다. 다만, 예외로 ‘-예’가 쓰일 환경이 아닌, 체언 말음 ‘오’에 ‘-예’가 통합된 ‘거우로예’〈6〉는 특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 검토할 것은, 15세기에 쓰이던 ‘특이 처소의 부사격조사’ 혹 ‘특이처격어’로 불리는 ‘-/의’가 ‘이 문헌’에 쓰인 양상에 대해서이다. 이 두 이형태의 쓰인 용례는 전자가 10회, 후자가 21회로 합계 31회인데, 이 형태와 통합된 체언이 이른바 특이한 체언에 속하는가, 아닌가를 가려보기로 한다.

○전통적으로 ‘-/의’가 통합되던 체언 :

둘ㅎ[二], 낮[晝], 안ㅎ[內], 입[口], 가[胸], 날[日], 밧ㄱ[外], 밤[夜](2), 옥[獄], 집[家](2), 디옥(地獄)(5).

합계 11단어(괄호 안 숫자는 빈도수로 제외).

○전통적으로 ‘-/의’가 통합되지 않던 체언 :

사(王舍城), (生), 뎔[寺], [終], 남[他], 타(他鄕)(3), 일야(日夜), 렴(思念)홈, 후(後), 젼(前)(2), 사면(四面).

합계 11단어.

위의 숫자를 보면 공교롭게도 두 가지 체언의 수가 같이 나왔다. 이 예들 중에서 후자의 ‘왕사셩’은 전자로 분류할 수도 있으나, ‘-城의/城에’ 만의 용례를 검색해 보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두 문헌 만에서도 후자 ‘-城에’가 빈도수로는 약 3배가 넘게 나타났기 때문에 후자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양상은 ‘처소의 부사격조사’에 ‘-의/에’가 구별 없이 쓰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문헌’에서는 ‘특이 처소의 부사격조사’라는 용어를 더 이상 쓸 형편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 문헌’에 쓰인 네 가지 이형태 ‘-애//의/예’에서 ‘-예’는 그 쓰임으로 보아 당분간 전통적인 표기법을 따른 것이 예상되나, 나머지 세 이형태 중 ‘-애/에’의 용례 수를 합한 13회보다 ‘-의’가 쓰인 용례가 21회라는 경향은 앞으로 이 ‘-의’가 더 세력을 넓혀 나갈 것인가가 주목된다. 주017)

15세기에는 일부 체언에 관형격조사와 같은 형태인 ‘-/의-’가 쓰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런 체언은 ‘신체, 방위, 지리, 광물, 천문, 절기, 식물, 음식, 가옥, 기구, 수’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애/에’와 ‘-/의’는 그 형태만으로는 처소의 부사격조사인지, 관형격조사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 구별은 선행체언이 유정체언(사람, 동물 등)이면 ‘-/의’를 관형격조사로, 그 밖에 무정체언이면 ‘-애/에’를 처소의 부사격조사로 보는 것이다.

일시예〈1ㄱ〉  거우로예〈6ㄴ〉  지븨〈15ㄴ(2)〉

샤의〈1ㄱ〉  가믜〈7ㄱ〉  후의〈16ㄴ〉

삼계예〈1ㄴ〉  나〈7ㄴ〉  져〈17ㄴ, 22ㄴ〉

둘희〈2ㄴ〉  밧긔〈10ㄱ〉  바〈17ㄴ〉

이 의〈2ㄴ〉  타의(잇도다)〈10ㄱ〉  엇게예〈18ㄱ〉

뎌〈3ㄱ〉  일야의〈10ㄱ〉  모매〈20ㄱ〉

이예〈3ㄴ,5ㄴ,12ㄱ~ㄴ(2),24ㄱ〉  렴호〈10ㄱ〉  디옥긔〈22ㄴ, 23ㄴ, 24ㄱ·ㄴ〉

(플) 틔〈4ㄱ〉  예〈14ㄴ〉  디옥의〈23ㄴ〉

나〈4ㄱ〉  바〈10ㄴ〉  면〈23ㄴ〉

안셔〈5ㄴ〉  타의〈14ㄴ(2)〉  머리예〈23ㄴ〉

(아긔) 이븨〈5ㄴ〉  옥긔〈14ㄴ〉  나호매〈3ㄴ〉

나믜〈6ㄱ〉  거리예〈14ㄴ〉  매〈3ㄴ〉

예〈6ㄴ〉  〈14ㄴ〉

2.1.6. 도구의 부사격조사

‘이 문헌’에 쓰인 이 조사는 ‘-로/으로/오로/’의 세 형태이고, ‘-로’는 전혀 쓰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새로운 이형태인 ‘-오로’로 대체된 결과로 판단된다. 그 자료는 아래와 같으며, 그 쓰인 환경을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체언 말음의 모음 아래 : -로(5회) 남녁+오로, 웋+오로

체언 말음의 모음 아래 : -으로(1회) 말솜+오로, +오로

체언 말음의 -ㄹ 아래 : -로(5회) 덕+오로, 머금+오로

체언 말음의 자음 아래 : -오로(7회) +오로

합계 14회(체언말 자음 ㄱ, ㅁ, ㄷ, ㅎ, ㆁ).

여기서는 ‘-오로’의 빈도가 전체 14회의 꼭 반을 차지한다. 종래 이것의 형성에 대해서는 “순자음 아래서 ‘-로’의 ‘’가 원순모음화한 것”으로 설명한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위의 자료에 제시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 쓰인 7회의 예를 체언과 조사로 분석한 결과(위 자료의 오른 편) 선행 체언의 끝 자음이 연구개자음 ‘ㄱ’과 순자음 ‘ㅁ’이 각각 2회이고, 순자음 아닌 경우가 네 가지나 된다. 따라서 이는 ‘순자음’에 의한 ‘원순모음화’라는 견해가 여기서는 적용될 수가 없고, 격조사 ‘-로’ 자체에서 제2음절 모음 ‘ㅗ’에 의한 역행동화로 형성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경우도 모두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남녀고로〈1ㄱ〉  쇠로〈23ㄴ〉

아래로〈5ㄴ〉  그믈로〈23ㄴ〉

우호로〈5ㄴ〉  오로〈23ㄴ〉

소매로〈8ㄴ〉  쇠술위로〈23ㄴ〉

드로〈13ㄴ〉  죄로〈24ㄱ〉

말소모로〈17ㄴ〉  덕고로〈24ㄴ〉

갈로〈6ㄱ, 19ㄴ, 20ㄱ〉  잠기로〈26ㄱ〉

모므로〈20ㄴ〉  쇠그믈로〈26ㄱ〉

2.1.7. 접속조사 ‘-와/과’

접속조사 ‘-와/과’는 체언(N1…N3)이 나열·접속할 경우에, “‘N1’과/와 ‘N2’과/와 ‘N3’과/와”와 같은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15세기 쓰이던, 이른바 집단곡용의 쓰임이 훨씬 줄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다음에 그 예를 든다.

세존하 어믜 은과 덕과 엇뎨야 가리잇고〈3ㄴ〉

눈과 귀와 고와 입과 혀와 과 여니라〈4ㄴ〉

엇계와 두 무룹과 이니라〈4ㄴ〉

아란과 대이 부텨 오〈1ㄴ〉

쇠젹곳과 쇠마치와 한도갈히 비오시 오로 려〈23ㄴ〉

와 히 타디여〈23ㄴ〉

이 집단곡용은 둘 이상의 체언이 이 조사로 연결될 경우 끝에 오는 체언에도 ‘-와/과’를 통합한 다음에 이 어절의 성분에 알맞은 격조사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15세기 국어 형식과 동일한 쓰임을 보인 경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예문의 반 정도는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1.8. 선어말어미

여기서는 ‘이 문헌’에 나타난 선어말어미에 쓰인 기능에 따라 그 용례만 보이기로 한다.

2.1.8.1. 주체높임 ‘-시-’

영속샤〈1ㄱ〉  가시다가〈1ㄱ〉  보시고〈1ㄱ〉

절시거〈1ㄱ〉  스이시고〈1ㄴ〉  아비시니〈1ㄴ〉

절시니잇고〈1ㄴ〉  니샤  〈2ㄱ~ㄴ, 3ㄴ, 11ㄴ, 17ㄴ, 22ㄴ, 23ㄴ, 24ㄴ, 26ㄴ〉

사실 제〈3ㄱ〉  니시〈17ㄱ, 22ㄱ〉

합계 19례(중복 어절수 제외 10례)

2.1.8.2. 객체높임 ‘--’

‘이 문헌’에서는 ‘--’과 ‘--’은 그 변천된 형태가 각 1례씩, ‘--’은 2례, 합계 4례가 전부이다.

갑소오리잇고〈17ㄴ〉  아오니〈17ㄴ〉

받고〈19ㄱ〉  듣고〈26ㄴ〉  합계 4례.

2.1.8.3. 상대높임 ‘-/-’

이 이형태의 두자음(頭子音)이 ‘ㆁ’(옛이응)인 ‘--’는 후음의 ‘ㅇ’으로 대체된 ‘-이/잇-’형이 아래와 같이 쓰였다.

절시니잇고〈1ㄴ〉  알리잇가〈3ㄱ〉  가리잇고〈3ㄴ, 24ㄴ〉

죄인니로소이다〈17ㄴ〉  갑소오리잇고〈17ㄴ〉  갑오리잇고〈22ㄱ〉

엇뎌니잇가〈26ㄱ〉  아니호리이다〈26ㄱ(3)〉

-계 11례(‘-이-’ 4례, ‘-잇-’ 7례)

이 글에서 어말어미를 따로 논한 부분이 없어서, 여기 선어말어미 ‘-잇-’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종결어미 ‘-가/고’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위에 보인 바와 같이 ‘이 문헌’에 쓰인 ‘-가/고’는 모두 7회 쓰인바, 모두가 의문사와 호응되는 ‘-고’가 쓰일 자리에 ‘-가’가 2회 쓰인 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다. 이미 15세기 중엽에도 드물긴 하지만, 설명의문에 판정의문의 ‘-가’가 있다. ‘世尊하 내 어미 五百僧齋호 화락천에 엇더 업스니가’〈월석 23:68ㄴ〉. ‘이 문헌’에서도 그런 드문 예외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달리 보아야 할 것인가를 짚고 가야겠다. 그런데, 근대국어에서는 문제의 ‘-가/고-’를 그 변별적 기능이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류성기 1997:84). 따라서 ‘이 문헌’에 쓰인 ‘의문사’ ‘-가’는 ‘-고’와 구별되어 쓰인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소실과정의 한 단면을 보인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2.1.8.4. 의도법 ‘-오/우-’

이 선어말어미로 목적격 활용으로서 관형사형에 개입되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고, 다음 예문에서처럼 서술어에 쓰인 것만 나타나는데 주어 1인칭 활용어미로서 ‘-오/우-’가 나타난다.

졀노라〈2ㄱ〉  닐오리라〈3ㄴ, 17ㄴ〉

(저허)노라〈7ㄱ〉  괴노라〈8ㄴ〉

싯노라〈9ㄴ(2)〉  노라〈9ㄴ〉

아니호리이다〈26ㄱ(3)〉  경이라 노니〈26ㄴ〉

-계 12례

선어말어미에 속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명사형어미 ‘-옴/움’에 개입하는 ‘-오/우-’의 예를 간단히 정리하기로 한다. ‘이 문헌’에 쓰인 명사형 어미는 ‘-ㅁ/음/옴/움’의 네 가지 이형태인데, 그 쓰인 횟수는, ‘-ㅁ’(12개), ‘-음’(1개), ‘-옴’(9개), ‘-움’(1개)이다. 전통적인 용법의 ‘-옴/움’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 ‘-(으)ㅁ’으로 정리되는 것의 용례는 13례이므로, 그만큼 15세기 국어의 활용 형태로부터 새로운 형태로 동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으로 명사형 어미 ‘-디’가 있다. 이는 15세기 당시에도 드물게 쓰인 것으로 ‘이 문헌’에서는 꼭 한 번의 용례가 있다. 다음 인용 끝줄에 *표를 한 것이다. 여기 ‘ 뵈디 붓그려’는 ‘남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또는 ‘남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명사형 어미 ‘-옴/움’과 ‘-디’를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나호매〈3ㄴ〉  머그모로〈3ㄴ〉  (이 몸이) 나〈6ㄱ〉  니믜〈7ㄱ〉

드리우미〈7ㄱ〉  머굼고〈7ㄱ〉  흘로미〈7ㄴ〉  깃브미〈7ㄴ〉

셜우미〈7ㄴ,8ㄱ〉  편안호믈〈8ㄴ〉  여희믄〈10ㄱ〉  여희미〈10ㄱ〉

홈〈10ㄱ〉 가미〈10ㄴ〉  그초믈〈11ㄱ〉  구조미〈12ㄱ〉

믈〈12ㄴ〉 노로미〈14ㄴ〉  싸홈며〈15ㄱ〉  머기믄〈16ㄱ〉

보고자 호믈〈17ㄱ〉 셜오미〈23ㄴ〉  합계(중복 포함) 23례.

* 뵈디 붓그려 구짓고 소기니라〈15ㄴ〉

2.1.8.5. 감동법 ‘-도/돗/옷/ㅅ-’

‘이 문헌’의 선어말어미 중에서 같은 기능의 선어말어미가 겹쳐 통합되는 경우에 대하여 살펴본다. ‘-()ㅅ도-/-()옷도-’ 용례들을 ‘이중감동법’이라 하는데(이승희 1996:76), 그 예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와 ‘-돗-’은 서술격조사 ‘이-’나 선어말어미 ‘-리-’ 뒤에서 ‘-로-’와 ‘-롯-’으로 변동된 것으로, ‘-도-’와 ‘-로-’는 합해서 14회, ‘-롯-’ 1회이다. 이것은 결국 단일 형태의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15회 쓰인 셈이고, ‘-ㅅ도-’와 ‘-옷도-’의 이중 형태 감동법 선어말어미는 18회 쓰인 것이다. 단일 형태와 이중 형태의 선어말어미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그 감동의 세기가 더한 것인가는 좀 더 고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중 형태의 선어말어미가 근대국어에서 계승되지 못한 것을 보면, 한 기능의 같은 형태가 여럿 쓰인다는 것은 복잡성을 더하는 것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면이 있으므로, 가능하면 ‘한 기능:한 형태’의 대응이 되도록 쓰이는 방향으로 단순화 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16세기 중엽의 감동의 선어말어미 ‘-ㅅ도-, -옷도-’의 이중 형태는 ‘-도-’로 단일화가 되기 전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인다. 참고로 근대국어에서는 ‘-도-’만이 감동법의 선어말어미로 쓰였다(류성기 1997:84).

-도-13회-ㅅ도-10회
-로-1회-옷도-8회
-롯-1회
15회18회

※‘-도-’와 ‘셜다’를 제외한 이중 형태의 분석만을 해당 예의 오른편에 보인 것임.

드도다〈6ㄴ〉  니섯도다〈9ㄱ〉  -ㅅ도-

여도다〈6ㄴ〉  ()-ㅅ도-  놋도다〈9ㄱ〉  ()-옷도-

도다〈6ㄴ〉  ()-ㅅ도-  손놋도다〈9ㄴ〉  ()-옷도-

잇도다〈6ㄴ〉  셜다〈10ㄱ〉  *(셟-)-도-

엿도다〈7ㄱ〉  -ㅅ도-  잇도다〈10ㄱ〉

듯도다〈7ㄱ(2), 7ㄴ〉  흐놋다〈10ㄱ〉  ()-옷도-

여럿도다〈7ㄴ〉  -ㅅ도-  애긋도다〈10ㄱ〉  ()-ㅅ도-

도다〈7ㄴ, 8ㄱ〉  어렵도다〈10ㄴ〉

놋도다〈7ㄴ〉  ()-옷도-  아녀놋다〈10ㄴ〉  ()-옷-

그지업도다〈8ㄱ〉  누웟도다〈10ㄴ〉  -ㅅ도-

아니도다〈8ㄱ〉  -ㅅ도-  구치도다〈10ㄴ〉  ()-ㅅ도-

누이놋도다〈8ㄴ〉  ()-옷도-  업도다〈11ㄱ〉

둡놋도다〈8ㄴ〉  ()-옷도-  조차갓도다〈11ㄱ〉  -ㅅ도-

즐겁도다〈8ㄴ〉  아니놋다〈13ㄴ〉  ()-옷-

가지로다〈9ㄱ〉  죄인니로쇠이다〈17ㄴ〉  -롯-

2.1.8.6. 현재 시상 ‘-/ㄴ-’

이 선어말어미 ‘-/ㄴ-’은 ‘이 문헌’에서 유일하게 쓰인 것이다. ‘--’에서 ‘ㆍ’가 준 것으로는 16세기 초엽의 〈번역박통사, 1517〉, 〈번역소학, 1519〉 등에서 내포문에서 이 ‘-ㄴ-’이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 예문과 같다. 한 장의 앞뒤를 두고 같은 형식의 서술어에 ‘다’와 ‘다’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전자의 ‘--’가 후자의 ‘-ㄴ-’으로 변화하리라는 조짐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구형 속에 개신형이 이미 ‘이 문헌’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라 하겠다.

어미 주려도 양 아니다〈8ㄱ〉

어미 편안호믈 구티 아니다〈8ㄴ〉

2.1.9. 사동접미사

여기 나타난 사동접미사는 모두 6례로 ‘-이-’ 한가지만이 쓰였다. 특별히 논의할 만한 것이 없지만 용례를 다음에 제시한다.

누이놋도다〈8ㄴ〉  -이-

머기〈8ㄱ〉  -이-

머기고〈8ㄴ〉  -이-

거스려〈13ㄴ〉  -이-

더러이며〈15ㄱ〉  -이-

머기〈16ㄱ〉  -이-  합계 6례

2.1.10. 피동접미사

이와 관련된 예는 모두 3개가 나온다. 어간 ‘감기-’는 ‘감-+-기-’로, ‘가티-’는 ‘갇-+-히-’로, ‘불이-’는 ‘불-+-이-’로 분석된다.

감겨〈14ㄴ〉  -기-

가티며〈14ㄴ〉  -히-

(람)불여〈14ㄴ〉  -이-

※ 피동접미사 ‘-이-’ 1, ‘-히-’ 1, ‘-기-’ 1.  합계 3례.

Ⅴ. 어휘

여기서는 ‘이 문헌’에 나타난 어휘에 대하여 조사해 제시하고자 한다. 문헌의 본문이라고 해 보았자 26장밖에 되지 않으며, 특수 지식인층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반 독자들을 전제로 한 내용이므로 거론할 것이 많지 않다. 거론할 어휘 자료는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리지 않았거나, 실렸다 해도 그 예문이 좀 드문 것 등을 조사·보고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어휘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해당 단어가 들어있는 한문 대목을 옮기고, 다음으로 ‘이 문헌’의 한문 완역본인 용주사판본(1796)의 해당 부분을 대응되게 인용하여 참고토록 하였다. 이와 함께 한글로 표기된 언해문의 단어 1~17) 항이 끝난 뒤에 ‘이 문헌’에 쓰인 한자어 전부를 제시하였다. 표제어가 동사(동작·상태)일 경우는 ‘Vstem+-다’ 형으로 제시하고, 품사범주와 단어의 의미 순서로 제시한다. 이때 의미는 해당 출처의 한문과 언해문의 문맥, 그리고 국어 문헌 자료에 나타난 다른 용례들을 참고하여 추정하였다.

1. 하젼되다 : (형) 방자하다.

녀이 디 하젼되오 미 음니(女人在世 恣情婬欲)〈은중 3ㄱ〉

계집은 셰샹의 이실 에 음난 욕심에 을 방이 며〈용주 은중 5ㄴ〉

이 형용사는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에만 실려 있는데, 이 대목의 용례 외에 다른 것은 실려 있지 않다. 언해문의 대본인 한문에 한자 ‘恣’ 자와 〈용주사본 은중경언해〉에서 “방이 며”가 있으므로, 그 문맥을 참고하여 뜻을 ‘방자하다’[恣] 정도로 파악하였다. 그 구성은 ‘어근+되-(접미사)’의 형식으로 분석되지만, 그 어근인 ‘하젼’의 어원이 분명치 않다. 혹 16세기 전기의 ‘하뎐(下典)’과 관계가 있고, 그것이 구개음화를 겪어 ‘하젼’이 되고, 거기에 ‘되-’(〈-외다)가 결합한 형용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만 확인된다면, “하인(=종)처럼 제멋대로 노는 태도가 있다”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뎐(下典)〉하젼’으로 ‘典’이 구개음화한 한자어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주018)

仇音方은 禮賓寺 하뎐이라〈1514, 속삼, 열:16ㄱ〉. 구음방이 례빙시 하뎐이라〈1617. 동국신속_삼강, 열녀:8ㄴ〉
16세기 전라도 방언 한자음 자료가 적어 그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2. 님다: (동) 임당(臨當)하다. 임박하다.

여 열  디나니 나 시 님도다(懷經十箇月 産難欲將臨)〈은중 7ㄱ〉

식 연지 열 만에 산 어려오미 쟝 님고〈용주 은중 13ㄱ〉

이 동사는 고어사전들에 모두 실려 있으며, 1항과 같이 유일한 예로 실었다. 한문의 ‘임(臨)’ 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 ‘맞다’[迎], ‘그 일에 당하다’도 있고 문맥도 그러하므로 ‘임당하다, 임박하다’로 푼 것이다. 다만 어근 ‘님’은 한자어 ‘림(臨當)’에서 당시 국어의 두음규칙에 따라 ‘ㄹ→ㄴ’으로 반영된 것이다. 이에 대한 〈용주사본〉은 한문을 그대로 옮겨 ‘장 님고’로 한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3. ?다: (형) ‘?친하다’에 대한 방언 이형태.

셜운 믈 머굼고 ?호온  권려 닐오 주글가 너겨 저허노라(含悲告親族 惟懼死來侵)〈은중 7ㄴ〉

ㄱ) 화장사판본(1553) 온  권려 닐오〈7ㄴ〉

ㄴ) 세심사판본(1563) 칭호온  권당려 닐오〈 ʺ 〉

ㄷ) 송광사판본(1563) ? ?은  ? ? 려 닐오〈 ʺ 〉

ㄹ) 기방사판본(1592) 친호온  권당려 닐오〈 ʺ 〉

ㅁ) 용주사판본(1796) 친족[결네라]의게 고니〈13ㄴ6〉

ㅂ) 화암사판본(1441) 칭혼  권당려 닐오(필사본)〈6장〉

이 부분은 복사본으로 보아서 글자 모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표를 해 놓았다. 필자가 이용할 수 있었던 후대의 복각본이나 자료는 ㄱ)-ㅂ)과 같은데, ㅁ)을 제외한 그 밖의 판본은 각각 ‘온, 호온, 호온, 혼’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하면 불가불 ‘친-’를 상정할 수밖에 없어 ‘-’로 복원하고, 이는 간행지인 전라도 전주·완주 지방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다: (동) 배(倍)하다. 갑절이 되다.

나코 아기 건실타 니 깃브미 더옥 도다(生已聞兒健 歡喜倍加常)〈은중 7ㄴ〉

은니 기프니 다시 슬프고 셜우미 도다(恩深復倍悲)〈은중 8ㄱ〉

나키 다매 아 건장믈 듯고 즐거우며 깃브기 샹시에셔 나 도다〈용주 은중 8ㄱ〉

은혜 깁프매 다시 나 슬퍼도다〈용주 은중 15ㄱ-ㄴ〉

어근이 한자어 ‘倍’로 된 이 동사는 고어사전에는 한글로 된 자료는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예문에서 보듯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문헌’에 나온 예가 정음 표기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보이며, 15세기 자료 및 17세기 『가례언해(1632)』에서도 ‘倍-’를 비롯하여 파생부사 ‘倍히’ 등 한자로 표기된 예가 여러 개 발견된다. 따라서 새로 엮을 고어사전에서는 한자 표기는 물론이고 ‘이 문헌’과 같은 정음 표기도 표제어로 등재해야 할 것이다.

*녜 고매셔 倍터니 諸梵天王이 各各 너교…〈월석 14:19ㄱ〉

*東 녀긔   바리 이쇼 그 苦ㅣ  倍니…〈월석 21:26ㄴ〉

*戒 닐오 比丘戒 二百五十이니 尼 倍니라 律을 니시고…〈능엄 6:19ㄱ〉

*보로 寰中에 布施호미 福이 녜 예셔 倍니 고지 錦 우희 開니…〈금삼 4:32ㄱ〉

*이긔 일 히 잇니 네 갑 倍히 주리라 라〈월석 13:19ㄴ-20ㄱ〉

* 자 여 치 되니 이 닐온 바  倍다  者ㅣ이라〈가례 6:7ㄴ〉

5. 손다: (동) 손상(損傷)하다. 상해 가다.

식 기 은니 기프니 고온  사오나이 되오 싯노라 니 반룡이 손도다(恩深摧玉貌 洗濁損盤龍)〈은중 9ㄴ〉

은혜 깁허 옥 얼골이 것거지니 가싀여 반룡이 샹도다〈용주 은중 18ㄱ〉

이 동사는 〈교학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런데 표제어를 ‘:손〮다〮’로 하고 예문은 모두 한자로 쓰인 것을 올려놓았고, 정음으로 표기된 예로는 『박통사 하(1677)』가 있다. 이것은 현재 발견되지 않은 1517년 이전의 『번역박통사 하』에도 17세기 자료와 마찬가지로 정음 표기로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방점을 재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방점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문헌’의 예로써 16세기 중엽에도 정음 표기로 쓰인 예가 있었다는 증거는 확보된 셈이다.

*衆生이 常住를 侵勞야 損커나[常住는 뎘 거시라] 僧尼 더러거나〈월석 21:39ㄴ〉

*뎌 觀音 念혼 히므로 능히  터럭도 損티 몯며〈법화 7:88ㄱ〉

*시혹 酒色애 잇버 損커나〈구급 상:59ㄴ〉

*사 一萬을 죽이면 스스로 三千을 손다 니라 뎌 구 리아〈박통, 1677, 하:25ㄱ〉

6. 브효다: (동) 불효(不孝)하다.

 믈 아니며 은 리며 더글 더디고 브효니라(不生恭敬 棄恩背德 無有仁慈 不孝不義)〈은중 11ㄱ~12ㄱ〉

공경믈 지 아니여 은혜 리고 은혜 반며 인미 업서 불효고 불의니〈용주 은중 25 ㄱ-ㄴ〉

불효믈〈용주 은중 43ㄱ〉

‘브효’는 한자어 ‘不孝’의 정음 표기로서, 15세기 정음문헌에는 한자에 동국정운 한자음을 달아 ‘不·孝·’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문헌에 나오는 ‘不孝’에 대한 정음 표기는 아래 예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브효’ 또는 ‘븨효’〈장수경언해 75ㄱ~ㄴ〉로 반영되어 있어 특이하다. 16세기 당시 현실음은 ‘不블’이 본음이지만, 16세기 중엽 〈장수경언해〉의 경우에서는 ‘孝효’를 비롯하여 ‘能릉, 調됴’와 결합한 한자어에 한해서는 ‘不 블〉브’로 ‘ㄹ’이 탈락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주019)

참고로 〈장수경언해〉의 예를 제시한다. 不惜身命(블셕신, 27ㄱ3), 不能轉讀(브뎐독, 72ㄱ1)/終不能變(블변, 21ㄱ4), 不孝(븨효, 75ㄱ~ㄴ)/不行(블, 16ㄴ7), 水旱不調(슈한브됴, 63ㄱ6), 終不至死(블지, 44ㄴ2) 등. 〈장수경언해〉의 ‘븨효’는 ‘브효’에 대한 변이음으로서 활음 ‘j’가 제1음절에 첨가되어 ‘ㅣ’하향중모음화한 것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심은주(2003) 참조.
이것은 현대 한자음에서 ‘不불’이 ‘ㄷ, ㅈ’ 위에서 ‘부’로 실현되는 것과는 환경이 다르며 규칙화하기도 어렵다. ‘이 문헌’에서 ‘브효’(12ㄱ)로 나타나고, 그 밖에 1518년 『번역소학』과 『정속언해』에도 ‘브효’로 표기되었다. 이것은 ‘不孝’에 대한 16세기 전반기 조선 한자음이 ‘브효’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어제경세문답, 1761』에는 다시 ‘블효’로, 한편에서는 원순모음화한 ‘불효’도 『지장경언해, 1752?』 쓰여 현재에 이른다.

*다가 有情히 不孝 거나〈석상 9:38ㄱ〉.

감히  마 내여 브효앳 이를 아니니〈번소 7:42ㄱ〉

그 죄 브효만 크니 업스니라〈정속 2ㄴ〉

어믜 녀글 듕히 아니 너기면 그 어미를 브효 디오〈정속 11ㄴ〉

그 삼강의 효험이 업니 진실로 나의 블효미오 진실로 나의 블쵸미라〈경문 3ㄱ〉

*다가 즁이 부모 불효며 혹 살해호매 니로면 반시 무간옥애 러뎌〈지장 상:18ㄱ〉

*질병을 근심치 아님도 불효요 형졔 친쳑을 박게 도 불효라 야〈계녀서〉

7. 셕: (명) 성정(性情). 성. 노기(怒氣).

부뫼 치고 얼운니 뒤덥거든 졈졈 라면 거스려 화동티 아니여 도혀 셕내니라 친 버드란 리고〈은중 13ㄴ〉

父母訓罰 伯叔語非 童幼憐愍 尊人護 漸漸長成 狼戾不調 不伏虧爲 返生嗔恨 棄諸親友朋 부뫼 치며 벌고 아자비 그르다 니 거시어 어린 거시라 야 어엿버며 블샹이 넉여 어룬이 둣덥허 뎜뎜 라매 모질고 패려고 슌차 아니여 그르믈 항복지 아니고 도로혀 분을 내여 모든 결네와 벗을 리고〈용주 은중 27ㄴ~28ㄱ〉

이 명사는 고어사전에 실린 유일한 예인데, 뜻은 『이조어사전』에는 성정(性情)으로, 『교학 고어사전』과 『우리말큰사전』은 같으면서도 전자는 ‘성. 노기(怒氣)’로, 후자는 ‘성. 노기’로 표기한 것이 다르다. 『17세기국어사전』에도 다루지 않았으며, 그 당시 문헌을 검색해 보아도 다른 예는 보이지 않는다.

8. 겨집다: (동) 혼인하다.

타의 나가 부모도 리며 집도 여희오 여러  디나면 겨집야 오래 드러오디 아니니라(被人誘進 逃竄他鄕 違背爺孃 離家別貫 或因經紀 或爲征行 荏苒因循 便爲婚娶 由斯留碍 久不還家〈은중 14ㄱ〉

사의 이물 닙어 타향에 도망여 아비와 어미 반고 집을 나고 고향을 니별며 혹 쟝질도 고 혹 길 가기도 며 그리저리  이에 문득 혼인고 댱가드러 일노 말믜아마 머물고 걸리여 오래 집의 도라오지 아니며〈용주 은중 28ㄴ〉

이 동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용례는 아니다. 시대적으로 빠른 것은 16세기 초반 ‘겨집야도’〈이륜 9〉, ‘겨집야’〈번역소 9:67〉이고, 그 다음이 ‘이 문헌’의 예이며, 그 후로는 17세기의 〈현풍곽씨언간, 16세기 중엽〉 정도에 보인다. 이는 고유어로서 그 쓰임의 세력을 넓히지 못하여, 정음 창제 초기문헌의 『석보상절』 이래 한자어 ‘婚姻다’가 우세하게 쓰이다가 현대국어에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석보상절』의 ‘주’는 ‘혼인(婚姻)’이라는 글자의 뜻을 풀이해 놓고 있어 참고할 만한다.

*須達이  무로 婚姻 위야 아미 오나....〈석상 6:16ㄴ〉

*사회녀긔셔 며느리녁 지블 婚이라 니고 며느리녀긔셔 사회녁 집을 姻이라 니니 가들며 셔 마조 婚姻이라 니니 가들며 셔 마조 다 婚姻다 니라〈석상 6:16ㄴ주〉

아바님게 유무니 풍난의 겨집여 이라 여 겨시니〈곽씨 86-6〉

9. 간슈다: (동) 간수(看守)하다. 보살펴 지키다.

被人謀点橫事勾牽 枉被刑責牢獄 枷鎖或遭病患厄難縈纏 困苦飢嬴? 無人看侍被他嫌賤倚棄街衢 죄 니버 옥긔 가티며 야 주려도 간슈리 업스면 미 쳔히 너겨 거리예 더디니〈은중14ㄱ~ㄴ〉

사의 물 닙어  일에 걸니이여 원통이 형별을 닙어 옥의 칼 여 기이여 혹 병이 드러 과 어려오미 얼키이여 곤고 괴롭고 주리고 여위여 사이 보펴 주리 업스며 남의게 나모라고 천히 넉이물 닙어 길거리에 려〈용주 은중 29ㄱ〉

藥과 病 간슈리 업거나 醫 맛나고도 왼 藥 머겨 아니〈석상 9:36ㄱ〉

保 간슈씨라〈삼강 열:1〉

攝衛 몸 간슈씨라 (주 줄임) 내 뎌 알 婆羅門 모...〈능엄 6:16ㄴ〉

攝衛 자바 간슈씨라 (주 줄임) 比丘 比丘尼 優婆塞...〈법화 7:77ㄴ〉

念念에 녜 제 精進야 一心으로 간슈야〈금강 83ㄱ〉

젼로  내야 經營야 得을 求며 간슈야 몸과  이디 아니호미〈원각 상2-2:117ㄱ〉

保 간슈씨라〈삼강 런던 열:1〉

형뎨 서르 내 죽거지라 토온대 도기 갈 간슈고 닐우 두 분니 어딘 사미어〈이륜 옥산:9ㄱ〉

이는 고어사전들에 모두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 음으로만 본다면 한자어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나, 『석보상절』에서부터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원각경(언해)』 등의 불경언해와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등에 이르기까지 정음으로만 표기되어 현대어에 이르게 된 것이다. 『17세기국어사전』에도 실리고, 근래의 『한국어대사전, 2009』에는 ‘간수(看守)하다’로 올려놓았다.

위 예문의 쓰임을 본다면, 대체로 “보살펴 잘 지키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한다.

10. 구의다: (동) 구하여 치료하다. 구원하다.

被他嫌賤倚棄街衢 因此命終無人救療 쳔히 너겨 거리예 더디니 인야 주거도 구의리 업서 오장이 서거 볃 며〈은중 14ㄴ〉

남의게 나모라고 쳔히 넉이물 닙어 길거리에 려 일노 인여 목숨이 매 사이 구리 업서〈용주 은중 29ㄱ〉

이 ‘구의다’는 ‘구의리’[←구의-+ㄹ#이+Ø]에서 분석된 동사로서, 한문의 ‘구료(救療)’에 대응된다. 이 단어의 뜻은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치료하다’로, 『우리말큰사전』에서는 ‘구원하다’로 한 것이 다르다. 『17세기국어사전』에는 표제어에 올라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계승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단순한 ‘치료보다’는 한자 뜻대로 “구하여 치료하다”가 적합하다.

11. : (부) 영영(永永). 영원히.

부모의 믄  렴야 혹 우다가 눈 멀며(父母心隨 永懷憂念 或因啼泣眼闇目盲)〈은중 14ㄴ〉

*부뫼 이 라가 기리 근심과 년려 품어 혹 피 나록 우러 눈이 어두어 멀며 혹...〈용주 은중29ㄴ〉

여기 ‘영영’은 한자어로 현대어에도 쓰이는 것이나, 굳이 들어 놓는 것은 『이조어사전』, 『교학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실려 있어도 그 용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초역본은 원문의 ‘永’ 자를 ‘’으로 풀이했으나, 용주사본은 고유어 ‘기리’로 한 것이 다르다. 15·16세기 국어에서 이 부사는 ‘이 문헌’의 이 대목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접미사 ‘-히’를 결합하여 ‘永히, 永永히’ 또는 ‘영영히’로 쓴 용례는 15·16세기 문헌에서는 물론이고, 17세기에도 보인다. 『17세기국어사전』에는 표제어로 ‘영영’과 ‘영영히’를 따로 올려놓았다.

*오로브터 永永히 너와 원슈디 아니호리라 니고〈관음경(1485) 11ㄴ〉

*滅相은 生死ㅣ 永히 다씨니 〈월석 13:54ㄱ〉

아 영을 닐러 시병라코 드듸여 영영 니별코 가니 드 사이 감탄더라〈동신충(1617) 1:23ㄴ〉

히 긴 슈고 마 좌 긔약야 히 욕낙 져룔 디니라〈초발(1577) 발심34ㄱ〉

히 그 집 나 구실을 더르시다(永蠲其家丁役)〈선조소학(1588) 6:61〉

희두탕은 아기를 모욕 기면 히 역 아니 니라 〈두창(1608) 상:6ㄴ〉

12. 슈히: (부) 수상(殊常)히.

머글 것 다가 어버시 머기 붓그레 너기니  슈샹히 너겨 웃니라 쳐식 머기믄 더럽고 바도〈은중 16ㄱ〉

應賫(=齎)饌物 供養尊親 每詐羞慙 異人恠笑〈은중 15ㄴ〉

응당 음식을  가져 어버이 공양기 양 븟그려 야 다른 사이 괴이히 녁이고 우슬가 며〈용주 은중 31ㄴ〉

이 부사는 고어사전에 형용사 ‘슈다’와 같이 다 실렸는데, 이 두 단어가 모두 유일한 예문으로 실려 있어 드문 용례로 판단해 예로 든다. 그 밖에도 아래에 제시한 것과 같이 16세기의 〈순천김씨언간〉에도 발견된다. 이것도 어근 ‘슈’이 한자어일 가능성이 있어 그 뜻을 고려하여 “보통과는 달리 이상하여 의심스럽다”를 뜻하는 ‘殊常-’ 또는 그 파생부사 ‘殊常히’를 15세기 국어문헌에서 찾아보았으나 발견되지 않는다. 문헌상으로는 16세기부터 20세기 초기 문헌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한자로 표기된 ‘殊常’은 용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를 보기 드문 것으로 보아 제시한다. 주020)

<용례>以鎌閉目이라 殊常매 左道 긔별이 이신 후 믿처 오오리〈인어대방(1790) 6:5ㄴ〉.

제 지 더뎌 두리라 고 누의 슈샹히 맛당이 아니 너기고 〈순천 28:6〉

13. 감심히: (부) 마음에 달게(=기꺼이) 여겨.

남지 티고 구지저도 고 감심히 너기니[夫婿打罵 忍受甘心] 〈은중 16ㄴ〉

지아비 치고 짓 거 참고 바다 에 달게 넉이며〈용주 은중 32ㄱ〉

*시운이 이에 니니 주거도 실로 감심노니(時運至此 死實甘心)〈동신삼 열:78ㄴ〉

이 부사도 『교학 고어사전』에만 유일한 용례로 실려 있으며, 이에 앞서는 15세기의 한자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부사를 파생시킨 용례가 ‘이 문헌’보다 시대가 늦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617』에도 나와 예문으로 들어 놓았다. ‘감심(甘心)’의 뜻은 『한한대사전』에는 “①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는 일. ② 뜻대로 함. ③ 그런대로 만족함.” 등으로 풀이했는데, 여기서는 직역한 용주사판본과 같이 “마음에 달게 여겨, 마음으로 기꺼이 여겨”로 풀이한다.

14. 미가다: (동) (아직) 시집가지 아니하다.

 시기 미가여셔 다 효도다가 혼인 후의 브효니 〈은중 16ㄴ〉

或復是女 通配他人 未嫁之時 咸皆孝順 婚嫁已訖 不孝遂增〈은중 16ㄱ〉

혹 다시 이 다른 사의게 필되면 혼인 아니하여실 에 다 효도롭고 공슌다가 임의 혼인매 불효기 드여 더야〈용주 은중 32ㄱ〉

이 ‘미가-’는 한문의 “未嫁之時”의 ‘未嫁(미가)’에 대응되는 번역으로서, 어근은 한자어 ‘未嫁(미가)’이지만, 15-16세기 국어의 언해문에는 ‘未嫁’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어사전에는 전혀 표제어로 싣지도 않았고, 정음 표기로는 ‘이 문헌’의 이 대목이 가장 빠른 셈이다. 또한 현대의 국어사전에도 명사 ‘미가녀(未嫁女)’는 나와 있으나, ‘미가하다’는 실려 있지 않다. 16세기 중기에 전주·완주 지역에 살던 언해자에게는 한자어로 인식되어 사용했다면, 결국 국어 어휘사에서 이 단어는 사어(死語)가 된 셈이다. 『17세기국어사전』에 실려 있으며, 앞으로 고어사전을 만들 때에는 표제어로 올려야 할 것이다.

15. 교슈: (명) 교수(敎授). 학문이나 기예(技藝) 등을 가르침.

뎨 대과 모 사미 다 각각 발원호 이 모 텨 듣글민(만) 너겨 쳔 겁 디나도 부텨의 교슈 닛디 아니호리이다 혀 여 내여 잠기로 가라 피 흘러 내히 되어도 부텨의 교슈 닛디 아니호리이다〈은중 26ㄱ〉

是諸大衆 聞佛所說 各發願言 我等 盡未來際 寧碎此身 猶如微塵 經百千劫 誓不違於如來聖敎 寧以百千劫 拔出其舌 長 百由旬鐵犂耕之血流 成河誓不違於如來聖敎 〈은중 25ㄴ〉

여 치믈 어긔지 말으리이다〈용주 은중 46ㄴ〉, 치시믈〈47ㄱ(2), 47ㄴ〉, 치시물〈47ㄴ〉

*부텻 敎授 듣[敎授는 쳐 심길씨라] 各各 큰 盟誓야〈석상 6:47ㄴ〉

‘교슈’는 이 한문 ‘如來聖敎(여래성교)’의 언해문인 ‘부텨의 교슈’에 나오는 단어이다. ‘교슈’가 한자어임은 『석보상절(1447)』의 용례 ‘부텻 敎授’와 ‘敎授’에 대한 협주 “敎授는 쳐 심길씨라”를 통해 확인된다. 오늘날에는 보통 “①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침, ② 대학에서, 전문 학술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표준국어대사전』, 여기서는 ①과 관련된 뜻으로 풀이된다. 위 본문의 ‘교슈’는 한문에 5번이나 되풀이되나, ‘이 문헌’은 ‘초역’이므로 세 번만 옮겼으며, ‘완역’인 용주사판본은 다섯 번 중에서 ‘가르치심’(4회) 또는 ‘가르침’(1회)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위의 ‘교슈’는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가르침’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16. 녜도다: (동) 예의(禮儀)와 법도(法度)를 표하다. 절하다.

뎨 다 부텨의 말솜 듣고 깃거 녜도고 믈러 와 니라(尒時 大衆天人阿修羅等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作禮而退)〈은중 26ㄴ〉

이 모든 뎨와 하 사과 인간 사과 아슈라 등이 부쳐의 말 바 듯고 다 크게 즐기고 깃거야 미더 바다 밧들어 여 녜를 베프고 믈러나다〈용주 은중 48ㄴ-49ㄱ〉

*유덕 일와 례도로 슝더니 이 복야 좃더라(專尙德禮 夷民懷眼)〈속삼 충:3ㄱ〉

싀어버이 셤기미 졔하며 손 졉호미 다 녜도 잇니 샤득이 사롬 몯 이긔여〈삼강 중간, 동경:열19ㄱ〉

‘녜도다’는 한문 ‘작례이퇴(作禮而退)’에서 ‘작례(作禮)’에 대한 번역으로,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에는 표제어 ‘녜도’를 싣고, 〈속삼강행실도〉의 예문을 보인 다음 참조로 → ‘례도(禮度)’를 표제어로 삼아 이를 부연했다.

여기 ‘녜도’의 ‘녜’는 16세기 전통한자음 ‘禮례’가 두음 제약 현상으로 ‘례→녜’로 변동한 것이다. ‘이 문헌’보다 앞선 『속삼강행실도, 1514』에서는 한자도 제시하지 않고 ‘례도’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녜도다’는 한문 원문 ‘작례(作禮)’의 번역으로서, 15세기 정음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저다’로 번역되었다. 주021)

예를 들어 〈법화경언해〉에서 구결문 ‘頭面禮足고’〈4:3ㄴ〉에 대하여 언해에서는 “頭面으로 바래 저고”〈4:4ㄱ〉로 대역되어 있다.
따라서 ‘녜도다’는 “예의와 법도를 표하다” 또는 “절하다” 정도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17. 아니다: (조동)(조형) 아니하다.

이 항목은 새로 나타난 희귀어도 아니고 고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단어도 아니다. 이 어휘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사전 이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아니다’에 대해서 처음 설명한 글은, 필자가 알기로는 『남명천계송언해』를 다룬 김영신(1988:212)이 아닌가 싶다. 간단하게 예문을 들고 ‘아니니라’와 ‘아니며’는 ‘아니니라:아니니라’와 ‘아니며:아니며’의 수의변동으로 파악하였다. 주022) 김영신(1988:212-3)에 제시된 예문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에 바른 예문으로 고쳐 둔다. 문제는 212쪽의 끝에서 둘째 줄 예문이다. “✩ 眞求티 아니니라(⟵ 아니니라) 3”로 되어 있는데 영인본을 찾아보니 ‘아니니라’는 ‘아니니’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맞는 예문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밝혀 둔다.

위에 밝힌 품사에 따라서 ‘이 문헌’의 예문도 아울러 제시한다.

ㄱ) 아니다 (보조동사) : 올매 올모매 이 道애 여희디 아니니〈법화 2:20ㄱ〉

ㄴ) 아니다 (보조형용사) : 至極디 아니  업거시〈능엄 1:3ㄱ〉

‘ㄱ’) 아닣다 (보조동사) : 엇뎨 모 觸디 아닌뇨〈능엄 2:114ㄱ〉

‘ㄴ’) 아닣다 (보조형용사) : 文勢ㅣ 그러티 아니타〈법화 5:213ㄴ〉

ㄷ) 아니다 (보조동사) : 부모의 은덕을 티 아니며〈은중 11ㄴ〉

  僧堂 여희디 아냐 節介 디니다〈선가 상:20ㄴ〉

ㄹ) 아니다 (보조형용사) : 阿難이 對答오 아니다〈능엄 1:54ㄱ〉

  븐 이 어미 편티 아녀 놋다〈은중 10ㄴ〉

이 예문을 보면, 굳이 이렇게 따로 설정할 것이 무어냐고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ㄱ’)와 ‘ㄴ’)은 ‘아니-’의 어간 말모음 ‘ㆍ’가 준 이형태 ‘아닣-’이 된 것이라 설명하고, ㄷ)과 ㄹ)도 ‘아니-’에서 어간의 ‘’가 준 이형태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ㄱ, ㄴ)만 표제어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이형태로 처리하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관점으로는 거꾸로 ㄷ, ㄹ)에서 ㄱ, ㄴ)이 파생되고, ‘ㄱ’, ‘ㄴ’)은 여기서 어간 말모음이 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15세기 당시에도 ㄷ, ㄹ)은 드물게 쓰여서 ㄱ, ㄴ)을 근거로 나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위 예문을 좀 간단히 하여 ㄱ)과 ㄴ), ㄷ)과 ㄹ)을 표제어로 두고 ‘ㄱ’)과 ‘ㄴ’)은 줄이자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한 것 이외에 역주에서 언급한 어휘에도, ㉠ 고어사전의 표제어로 제안 하는 것, ㉡ 일부 사전에만 표제어로 실려 있는 것, ㉢ 이미 고어사전에 실려 있으나, 정음 표기로 그 예가 문헌상 유일한 것 등을 다음에 들어 둔다.

 ㉠ 놋다(다)〈9ㄴ〉  심〈14ㄴ〉

 골코(곯다)〈16ㄱ〉  의종고(의다)〈16ㄱ〉

 말솜과〈13ㄴ〉  말소모로(말솜)〈17ㄴ〉  계 5개

 ㉡ 신고여도(신고다)〈10ㄴ〉  쳔히(賤히)〈14ㄴ〉

  이슥게(이슥다)〈17ㄴ〉  눔〈19ㄴ〉  계 4개

 ㉢ 싀권〈16ㄱ〉  우(運)〈18ㄴ〉

  우레[雷]〈23ㄴ〉  호야(호다)〈24ㄴ〉

  잠기로〈26ㄱ〉        계 5개

합계 14개

■ 붙임2 - 정음으로 표기된 한자어

‘이 문헌’의 언해 양식상의 특징은 한문 원문에 구결이 표시되지 않았으며, 언해문은 고유어든 한자어든 정음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전주·완주 지역의 한자음을 연구할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자어로 분석되는 단어를 어절 단위로 장차에 따라 조사, 제시한다.

솔샤〈1ㄱ〉  인뉴의〈11ㄴ〉  젼혀(全)〈16ㄱ〉

아란과〈1ㄱ〉  〈11ㄴ〉  미가여서〈16ㄴ〉

아라니〈2ㄴ, 3ㄴ, 26ㄱ〉  은〈11ㄴ, 12ㄴ〉  효도다가〈16ㄴ〉

념불도〈3ㄱ〉  브효니라〈11ㄴ〉  혼인〈16ㄴ〉

녀이〈2ㄴ, 3ㄱ〉  식〈12ㄱ〉  후의〈16ㄴ〉

?하젼되오〈3ㄴ〉  슈괴〈12ㄱ〉  브효니〈16ㄴ〉

음니〈3ㄴ〉  탄티〈12ㄴ〉  부모〈16ㄴ〉

회티〈4ㄱ(3), 4ㄴ(3), 5ㄱ(2), 6ㄱ〉  슈고뢰여도〈12ㄴ〉  노여〈16ㄴ〉

녜도〈12ㄴ〉  감심히〈16ㄴ〉

한삼〈2ㄴ〉  혼인며〈12ㄴ〉  싀권으란〈16ㄴ〉

남의〈2ㄴ〉  신고호〈12ㄴ〉  소(疏)히〈16ㄴ〉

단하여〈2ㄴ〉  면〈12ㄴ〉  남진(조차)〈16ㄴ〉

뎨〈1ㄱ〉  부모도〈12ㄴ〉  부모〈16ㄴ〉  졉하고〈16ㄴ〉

샤의〈1ㄱ〉  편니라〈12ㄴ〉  문안〈17ㄱ〉

분(粉)〈2ㄴ〉  원니라〈12ㄴ〉  은(恩)과〈17ㄱ〉

샤〈2ㄴ〉  브효니〈13ㄱ〉  죄(罪)도〈17ㄱ〉

디혜〈5ㄱ〉  답며〈13ㄴ〉  뎨〈17ㄱ〉

졈졈〈4ㄴ〉  도〈13ㄴ〉  부모〈17ㄱ〉

효옛〈6ㄱ〉  슈욕야〈13ㄴ〉  은〈17ㄱ〉

간슈〈6ㄴ〉  버블〈13ㄴ〉  긔졀여〈17ㄴ〉

인연니〈6ㄴ〉  부모의〈13ㄴ〉  죄인니로소이다〈17ㄴ〉

오장이〈6ㄴ〉  교도〈13ㄴ〉  져(前)〈17ㄴ〉

님도다〈7ㄱ〉  형뎨의〈13ㄴ〉  셰존하〈17ㄴ〉

혼팀〈7ㄱ〉  시리〈13ㄴ〉  위야〈17ㄴ〉

긔졀고〈7ㄴ〉  부뫼〈13ㄴ〉  부모〈18ㄱ·ㄴ〉

건실타〈7ㄴ〉  화티〈13ㄴ〉  슈미산〈18ㄱ〉

도다〈7ㄴ〉  친〈13ㄴ〉  우〈18ㄴ〉

고〈7ㄴ〉  습이〈13ㄴ〉  은혜〈20ㄱ〉

간의〈7ㄴ〉  계고니라〈13ㄴ〉  브모의〈20ㄴ〉

양〈8ㄱ〉  타의〈14ㄱ〉  은덕을〈22ㄱ〉

은혜〈9ㄱ〉  부모도〈14ㄱ, 15ㄱ〉  죄인니라〈22ㄱ〉

혐의론〈9ㄱ〉  죄(니버)〈14ㄴ〉  부모〈22ㄱ〉

시글〈9ㄴ〉  야〈14ㄴ〉  을〈22ㄱ〉

반룡이〈9ㄴ〉  간슈리〈14ㄴ〉  져늬(前)〈22ㄴ〉

손도다〈9ㄴ〉  쳔히〈14ㄴ〉  죄〈22ㄴ〉

기()(改)놋도다〈9ㄴ〉  인야〈14ㄴ〉  복글〈22ㄴ〉

렴〈10ㄱ〉  오이〈14ㄴ〉  브효〈23ㄴ〉

진실로〈10ㄱ〉  타의〈14ㄴ〉  면〈23ㄴ〉

관산(밧긔)〈10ㄱ〉  〈14ㄴ〉  ()〈23ㄴ〉

일야의〈10ㄱ〉  렴야〈14ㄴ〉  죄이〈23ㄴ〉

일쳔〈10ㄱ〉  혹〈14ㄴ(3)〉  어〈23ㄴ〉

렴호〈10ㄱ〉  심이〈14ㄴ〉  오을〈23ㄴ〉

부뫼〈10ㄴ〉  효도란〈15ㄱ〉  젼의〈24ㄱ〉

산티〈10ㄴ〉  심케〈15ㄱ〉  브효던〈24ㄱ〉

은〈10ㄴ〉  좌의〈15ㄴ〉  경〈24ㄴ〉

내을〈11ㄱ〉  안부도〈15ㄴ〉  (城)〈23ㄴ〉

각고〈11ㄱ〉  탄니〈16ㄱ〉  디옥긔〈22ㄴ,23ㄴ,24ㄴ(2)〉

셰라도〈11ㄱ〉  슈히〈16ㄱ〉  슈고〈24ㄴ〉

이〈11ㄱ〉  쳐식〈16ㄱ〉  뎨〈26ㄱ〉

진야〈11ㄱ〉  의고〈16ㄱ〉  대과〈26ㄱ〉

각각〈26ㄱ〉  발원호〈26ㄱ〉  쳔〈26ㄱ(2)〉

겁〈26ㄱ(2)〉  교슈〈26ㄴ(3)〉  아라니〈26ㄴ〉

경〈26ㄴ(2)〉  아란〈26ㄴ〉  뎨〈26ㄴ〉

녜도고〈26ㄴ〉  봉니라〈26ㄴ〉

Ⅵ. 맺음말

1. 거듭 밝히지만, 이 역주본의 대본은 여승구님 소장의 ‘초역본-오응성 발문본(1545)’이고, 영인본의 저본(底本)은 신심사판(1563)의 인출(印出)본이다.[이 작업은 2011년 11월 11일, 안준영 선생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홍현보 선생, 안재응 총무부장의 수고가 컸음을 밝혀 두며, 신심사판의 결판(缺板)인 2장과 12장은 오응성 발문본 복사본으로 보충했음도 밝힌다.]

2. ‘이 문헌’은 언해본이면서도 한자 표기는 전혀 없이 정음으로만 이루어진 문장인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현재까지는 최초의 정음체 문장은 『이륜행실도(1518)』로 보고 있는데, ‘이 문헌’은 그보다는 뒤지지만 그나름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3. ‘Ⅳ. 국어학적인 고찰’에서 본 바와 같이 16세기 중엽의 전주·완주 지역의 언어사실을 그런대로(방언 포함)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정음 창제 후 100년이 지났으면서도, 중세국어 문법의 전통적인 용법을, 음운적인 변천을 고려해도 그런대로 계승해온 것도 무시할 수 없다.

4. ‘방점 표기’에 대해서는 ‘이 문헌’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나타나며, 고유어는 대체로 한 어절에 한 음절에만 표기되나, 한자어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곡용과 활용형에서는 어간에만 표기되고, 말음절에는 표기하지 않은 것이 대세이며, 전체적으로 표기는 매우 불규칙하며, 거성과 상성의 혼란, 15·16세기 중앙의 관판 문헌과 일치하지 않음이 많다.

5. 어휘 면에 있어도 1)~16) 외에, 17) ‘아니다’ 뒤에 보충한 ㄱ) 고어사전의 표제어로 제안하는 것 : 5개, ㄴ) 일부 사전에 표제어로 올려 있는 것 : 4개, ㄷ) 사전에 실려 있어도 그 예가 귀한 것 : 5개를 다 합치면 약 30단어 정도가 ‘이 문헌’에 나타난 귀한 자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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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언해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Ⅰ. 머리말

1.1. 〈아미타경언해〉는 조선조 세조(世祖) 10년(天順 8년, 1464)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목판본(木版本)의 불경언해서이다. 저본(底本)은 요진(姚秦) 홍시(弘始) 4년(402 A.D.)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이다. 따라서 언해본의 갖은 이름은 〈佛說阿彌陀經〉이다. 물론 다른 언해서들과 같이 이 책의 어디에서도 ‘언해’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언해(諺解)’라는 용어가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16세기 초반 무렵이고(1514년 4월 丁未條, ‘諺解醫書’), 책명에 직접 언해가 쓰인 것은 16세기 후반 〈소학언해(小學諺解)〉(1588년간)에서부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한문본과 한글본의 책이 같이 전해질 경우, 대체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에 간행된 정음(正音) 문헌 중 한글로 번역의 과정을 거친 책에 대해서는 한문본 책명 다음에 ‘언해’라는 용어를 써서 한문본과 구분하여 왔다. 주001)

‘언해(諺解)’의 개념 및 언해 경위, 언해본의 성격 등에 대해서는 김영배·김무봉(1998:307~415) 참조.
〈아미타경언해〉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漢譯)의 〈佛說阿彌陀經〉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세조가 직접 구결을 달고 번역을 해서 1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내제 옆칸 아래쪽 역기란(譯記欄)에 ‘御製譯解’라 한 것과, 같은 경전의 내용이 〈월인석보〉 권칠(卷七)에도 번역·편입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세조가 직접 구결을 달고 번역한 책임을 알 수 있다. 주002)

〈아미타경언해〉의 전반적인 서지사항은 김영배(1997)에 소상하다. 이 해제(解題)의 작성에서 판본, 형태 서지, 유통 등은 주로 그 논의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일부 내용은 그대로 옮기기도 했다. 그 외 표기법에 관련된 부분은 김무봉(1997ㄱ, 1997ㄴ, 1999)의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하거나 보완한 것이다.
이는 〈아미타경〉이 언해본으로 간행되기에 앞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편찬한 〈석보상절〉(1447년간) 권7(현재는 부전)이나, 왕위에 오른 후 간행한 〈월인석보〉(1459년간) 권7(61ㄴ~77ㄴ)에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003)
여기에 대해서는 김영배(1997:37)에 상세한 내용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경언해〉의 활자본과 목판본이 간행되기에 앞서, 그 번역의 대부분은 수양대군이 엮은 〈석보상절〉에 이미 편입되어 있었고(이 대목이 실린 〈석보상절〉 권칠(七)은 현재 전하지 않음), 세조가 되어 〈월인천강지곡〉과 합편해서 〈월인석보〉로 간행하니,『아미타경』은 〈월인석보〉 제7권 61장 후면에서 끝(77장)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에 해당되는 〈월인천강지곡〉은 기(其)200에서 기(其)211의 12장(章) 〈월석七55ㄴ~61ㄴ〉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활자본이나 목판본 모두 「불설아미타경」이란 내제 밑에 ‘어제역해(御製譯解)’라는 번역자 관계의 기록이 있게 된 것이다.”

〈아미타경언해〉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인 15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 40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인간(印刊)되었다. 한문으로 된 저경(底經)의 원문 모두를 합쳐야 겨우 10여 장에 지나지 않는 적은 분량의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언해본의 간행이 거듭된 것은, 한국 불교, 특히 조선 시대 불교에서 〈아미타경〉이 차지하는 경전(經典)으로서의 비중이나 경(經)의 성격 때문이겠지만, 국어학도들에게는 원간본 및 중간본들에 실려 전하는 언어 사실로 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책들은 한국어의 변천을 살피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경〉의 국어역인 〈아미타경언해〉는 세조대에만 두 차례나 간행되었다. 하나는 세조 7년(1461 A.D.) 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활자본(活字本)인 을해자본(乙亥字本) 주004)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의 서지사항과 언어 사실은 안병희(1980), 최은규(1993) 참조.
〈아미타경언해〉이고, 다른 하나는 세조 10년(1464 A.D.)에 간행된 목판의 간경도감본 〈아미타경언해〉이다. 간경도감본은 판식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언어사실에서는 활자본에서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미 선행 연구(안병희, 1980:378)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표현이 달라진 1곳, 불교 용어의 한자음 표기가 달라진 2곳 등, 세 군데 정도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주005)
목판본(쌍계사본)에서 표현 및 표기가 달라진 곳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활자본〉 〈목판본〉 둘·어 범·그·러 이실· 〈6ㄱ〉 / 둘·어실· 〈7ㄱ〉.
般반若: 〈13ㄱ〉 / 般·若: 〈15ㄱ〉.
解:갱脫· 〈13ㄱ〉 / 解脫· 〈15ㄱ〉

1.2.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 초쇄본은 전하지 않는 듯, 아직 공개된 바 없다. 오늘날 전해지는 책 중 원간본 계통의 책으로는, 원간본의 판목에서 쇄출(刷出)된 후쇄본으로 보이는 1책이 있을 뿐이다. 1990년에 발굴·공개된 바 있는 이 책은 최영란님 구장본(舊藏本)이었으나, 지금은 충북 단양 소재(所在) 구인사(救仁寺) 소장으로 바뀌었다. 보물 10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에는 복각본 등에 보이는 내제 아래쪽 역기란(譯記欄)에 ‘御製譯解’라는 역기가 삭제되어 있어서 초쇄본으로 보기 어렵다. 원간본의 판목으로 뒤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원간본의 언어사실과 판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현전 최고본(最古本)이어서 국어사 연구를 위해서는 원간 당시의 자료로 이용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일반에 널리 공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이 이용하기 어려운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복각본(覆刻本) 중 가장 먼저 인출된 책인 쌍계사본(1558 A.D. 간행)을 통해 원간본의 언어사실에 접근해 왔다. 이 책의 간행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다수의 복각본들이 주로 지방의 사찰 등에서 간행되었는데, 이들 복각본들은 일부의 탈각(脫刻)이나 오각(誤刻), 방점 표기의 부정확함 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자료만은 일부 흠결(欠缺)을 가진 채, 원간 당시의 것으로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일부 복각본 중에는 다른 문건이 합철(合綴)되어 있어서 이용에 주의를 요한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간행된 책들은 원간본 간행 이후 3~4세기라는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이 있어서인지 언해 체재의 변개는 물론, 번역어에도 언해 당시의 언어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당시 〈아미타경언해〉를 수지(受持)·독송(讀誦)하던 사람들의 우리 문자에 대한 인식이나, 언해 경전 편찬자들이 실제 사용하던 언어가 반영되어 그렇게 된 것으로 본다. 그 즈음에 이르러 경전을 독송하거나 그 뜻을 새기고자 하는 사람들에 맞추어 언해 불경을 새로이 편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이루어진 판본이 오늘날 전해지는 한자음역만 있는 판본(밀양 표충사 간본, 1898 A.D.)이거나 일산문고본(18세기 중엽 간행 추정)처럼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판본일 것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현전 간본 중 간경도감본 이후 18세기 중엽까지 간행된 책들은 대부분 간경도감본을 판밑으로 한 복각본들이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 간행된 책들은 경의 본문에 해당되는 소재언어(素材言語;Source Language)만 간경도감본과 같은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漢譯)의 『불설아미타경』을 저본으로 했을 뿐, 판식이나 언어사실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이 책들에 실려 전하는 언어들은 간경도감본(刊經都監本, 1464년간)에 견인된 것으로 보이는 표기가 일부 없지 않으나, 대체로 18세기 중반 이후의 표기 및 음운, 문법 등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때 간행된 중간본(重刊本) 중 오늘에 전하는 책으로는 일산문고본 등 3종이 있다. 국립도서관 일산문고에 소장되어 있어서 「일산문고본」 주006)

일산문고본 〈아미타경언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무봉(1999) 참조. 일산문고본 〈아미타경언해〉와 같은 책이 충남대 도서관에 있다는 김주원 교수의 전언이 있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
으로 불리는 이 책에는 간기가 없어 자세한 간행 경위나 정확한 간행 연대는 알 수가 없지만, 경(經)의 원문 일부와 언해문이 전재되어 있는 해인사본 〈염불보권문〉 주007)
해인사본 〈염불보권문〉의 서지사항은 김영배(1996) 참조.
의 간행 연대인 건륭(乾隆) 사십일년(四一年) 병신(丙申)[1776 A.D.]과, 언어사실 등 몇몇 정황을 종합하면 18세기 중반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본다. 다른 두 책은 모두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인데, 하나는 고종 8년(1871 A.D.) 양주 덕사에서 간행된 책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 35년(1898 A.D.) 밀양 표충사에서 간행된 책이다.

Ⅱ. 판본 및 경(經)의 성격

2.1. 여기서는 언해본의 판본과 형태 서지, 한문본의 성격 및 내용 등을 살필 것이다. 우선 〈아미타경언해〉의 현전본을 계통별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외에 김영배(1997)에서는 현전하지 않는 책 몇몇 본(本)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현전하는 책만을 대상으로 제시한다.

[1] 교서관(校書館) 활자본(活字本), ?1461년 간행, 을해자(乙亥字),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2] 간경도감(刊經都監) 목판본(木版本), 1464년 간행, 후쇄본(後刷本), 단양(丹陽) 구인사(救仁寺) 소장(所藏)).

복각본(覆刻本)

1) 나주 쌍계사본, 명종 13년(1558 A.D.) 간행.

동국대 도서관 소장(귀213.16-아39ㄱㅅ). 총 30장 1책.

2) 해남 대둔사본, 17세기 초반(1632년경 간행) 추정. 주008)

이 책의 실재(實在) 가능성은 김영배(1997:54)의 각주 15)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 2008년 2월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의해 이 책이 공개되었다. 이 책은 동국대의 전신(前身)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소장이었는데, 당시 이 학교의 교수로 있던 일본인 에타 도시오(江田俊雄)가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에타교수 사후(死後) 유족들 의해 에타교수의 장서가 일본의 고마자와대학에 기증되었고, 그 책들 가운데 이 책이 있었던 것이다. 고마자와대학 도서관측은 이 책에 중앙불전의 장서인(藏書印)이 있는 것을 보고, 중앙불전의 후신인 동국대에 반환하여 일반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서지사항과 어학적 연구는 후고를 기약한다.

일본 고마자와대학 ⟶ 동국대 도서관 소장.

3) 고성 운흥사본, 숙종 28년(1702 A.D.) 간행.

국립도서관 일산문고, 서울대 규장각 소장(가람古294.3355-Am57b).

서울대 규장각 소장(일사古294.3355-B872eh).

4) 대구 동화사본 주009)

동화사본은 책마다 편철 내용에 차이가 있다. 규장각 소장의 한 책(古294. 355-B872a)과 일본(日本) 톈리대[天理大] 소장의 책은 〈아미타경언해〉만 있고,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에는 다른 문건이 합철되어 있다. 이 책에는 서문 5장과 「아미타경언해」 29장의 뒤에 「왕랑반혼전」 9장이 이어진 후 다시 30장에 시주질과 「乾隆十八年十一月日慶尙道大丘八公山桐華寺開刊」의 간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간기 뒤에 「임종정념결」과 「부모효양문」 원문 및 언해문 7장이 이어지고 맨 뒷장 끝행에 다시 「乾隆六年辛酉季春日慶尙道新寧八公山修道寺開刊」의 간기가 나온다. 김영배(1997)에서는 이를 〈아미타경언해〉 동화사본에다 수도사 간행 「임종정념결」 등의 후쇄본을 합철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 〈아미타경언해〉의 서문 5장과 「왕랑반혼전」 9장, 시주질 및 간기 1장, 「임종정념결」 및 「부모효양문」 7장 등 〈아미타경언해〉 본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22장만으로 장철된 책도 전한다. 김영배(1997:44~46) 참조.
, 영조 29년(1753 A.D.) 간행

동국대 도서관 4책(D213.16아39ㄱㄷ3 등), 서울대 규장각 2책(古294.335-B8 72a, 일사古294.3355-B872b), 연세대 도서관, 국립도서관 위창문고(위창古-1788), 성암고서박물관, 일본 천리대(天理大) 도서관 각 1책.

*이 책 동화사본 중 일부에는 팔공산(八公山) 수도사(修道寺) 간행의 「임종정념결(臨終正念訣)」과 「부모효양문(父母孝養文)」(1741년간) 후쇄본이 합철되어 있다.

[3] 개찬본(改撰本)

1) 한자음역만 있는 책.

밀양 표충사본, 고종 35년(1898 A.D.) 간행.

국립도서관 위창(韋滄)문고(위창古1788-8), 동국대 도서관 소장(D213.16 -아39ㄱㅍ).

2) 한자음역에 한글 구결이 있는 책.

양주 덕사본, 고종 8년(1871 A.D.) 간행.

서울대 규장각(古1730-7). 동국대 도서관 소장.

3) 한글 구결·한자음역문 뒤에 당시 언어로 번역한 언해문이 있는 책.

간행지, 간행연대 미상(18세기 중반으로 추정).

국립도서관 일산문고 소장(일산古 1745-9).

*해인사본 염불보권문(1776 A.D.)에 일산문고본의 경(經) 원문 일부(구결 제외)와 언해문 전문 전재(구결문과 한자 음역문 제외).

이상의 여러 판본 중 활자본의 서지와 언어사실은 안병희(1980), 최은규(1993)에 자세한 논의가 있고, 간경도감본 및 그 복각본 등 각 중간본(重刊本)들의 형태서지와 현전 상황 등은 김영배(1997)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그 논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한자음역에 한글 구결이 있는 양주 덕사본에 대해서는 김무봉(1997)에서 간경도감본과의 구결 비교를 통한 연구가 있었고,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책인 일산문고본에 대해서는 김무봉(1999)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2.2. 앞에서 밝힌 대로 〈아미타경언해〉의 저본은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漢譯)의 『佛說阿彌陀經』(姚秦, 弘始 四年 A.D.402)에 수(隋)나라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A.D. 538-597)가 주석을 붙인 한문본 〈佛說阿彌陀經〉이다. 언해본은 경(經)의 본문(本文)에만 정음으로 구결을 달고 한글로 번역을 하였다.

간경도감 원간본의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권두서명 : 佛說阿彌陀經, 판심서명 : 阿彌陀經

책의 규모 : 분권(分卷)을 하지 않은 29장 1책의 목판본.

세로 30.4cm×가로 18.7cm.

판식 : 사주쌍변(四周雙邊). 반엽(半葉)은 매면(每面) 유계(有界) 8행, 본문 구결문은 큰 글자로 19자, 구결문의 정음 구결은 쌍행인데, 방점이 찍혀 있지 않다. 언해문은 한 글자 내려서 중간 글자로 18자. 흑어미 표시가 없는 협주(夾註) 역시 18자이나, 작은 글자로 쌍행이다. 언해문과 협주의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注音)되어 있다.

판심 : 상하 대흑구 내향흑어미.

간기 : 天順八年 甲申歲(1464) 朝鮮國 刊經都監 奉敎雕造/ 忠毅校尉行忠佐衛中部副司正 臣 安惠書

2.3. 이 책의 한문본인 한역본 『佛說阿彌陀經』은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ㄱ).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1권. 구마라집(鳩摩羅什)역, 요진(姚秦) 홍시(弘始) 4년(402 A.D.).

(ㄴ). 소무량수경(小無量數經) 1권.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역, 송(宋) 효강(孝康) 연간(424~454 A.D.).

(ㄷ). 칭찬정토불섭경(稱讚淨土佛攝經) 1권. 현장(玄裝)역, 당(唐) 영휘(永徽) 원년(650A.D.).

위의 (ㄱ,ㄷ)은 〈高麗大藏經〉과 〈大正新修大藏經〉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주010)

김영배(1997:35)에서는 〈고려대장경〉과 〈대정신수대장경〉의 『아미타경』과 〈아미타경언해〉 쌍계사본(1558)의 원문(原文)을 대교(對校)하여 제시하였다. 위의 내용도 그 논의에서 가져왔다.

高麗大藏經 제11, pp.185-189 동국대학교 영인, 1959.

大正新修大藏經 제12, pp.346-348, 大正新修大藏經 刊行委員會, 1923/1967.

다만 (ㄴ)은 그 일부만이 ‘拔一切業障根本得生淨土神呪’로 전한다(大正新修大藏經 第12 p.351).

『아미타경』은 정토교(淨土敎)의 근본 경전[所依經典] 중 하나로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과 더불어 정토(淨土) 3부경(三部經)이라고 불린다. ‘무량수경’을 ‘대경(大經)’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아미타경’(이하 줄여서 이렇게 씀)을 ‘소경(小經)’, 또는 ‘미타경’이라 하기도 하고, 경 가운데 나오는 구절을 따서 ‘일체제불소호념경(一切諸佛所護念經)’ 또는 이를 줄여서 ‘호념경(護念經)’이라고도 한다. 이들 경전에서는 일반 범부들도 칭명염불(稱名念佛)이나 관상법(觀想法)에 의한 수행 방법으로 능히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고 설한다. 주011)

김명실(1997) 참조.

2.4. 이 ‘아미타경’의 범어(梵語) 원전명은 ‘SukhāvatĪvyūha nāma-mahāy ānasūtra[樂有莊嚴經/극락장엄이라 이름하는 대승경전]’이며,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 udāna)이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제자가 먼저 질문하면 석존이 그에 대해 답변하는 데서 교설(敎說)이 시작되고, 이후 문답(問答)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책은 제자의 질문이 없는데도 석존이 스스로 말을 꺼내고 일방적(一方的)으로 교설한다. 성문제자(聲聞弟子) 가운데 지혜 제일인 사리불(舍利弗)을 상대로 해서 수많은 법회(法會) 대중(大衆)에게 극락국토의 장엄상과 아미타불의 공덕을 찬탄하고, 염불왕생법(念佛往生法)에 대해 교시한다.

법회에는 많은 대장로(大長老), 아라한(阿羅漢), 문수보살(文殊菩薩) 등 대보살중(大菩薩衆), 석제환인(釋堤桓因) 등 여러 천인(天人)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특히 사리불을 대표로 하는 성문제자들에게 교설한 것은 그들의 지혜로는 타방현재불(他方現在佛)인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에 대해서 짐작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석존이 먼저 말씀을 꺼내고, 이어서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주012)

김명실(1997)의 논의를 요약하여 옮긴 것이다.
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머무르면서 장로(長老)인 사리불(舍利弗) 등을 위해 서방(西方)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및 그 국토인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위치와 공덕·장엄을 말씀하신다. 극락세계는 서방으로 십만억 불국토(佛國土)를 지난 곳에 있는데, 그곳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으며, 오직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있어서 극락이라고 부른다. 또한 극락세계의 장엄(莊嚴)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어 환희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를테면, 가로수, 연못, 누각 등이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하늘 음악과 꽃비가 내리며, 새들이 진리를 노래하고, 바람이 나무와 그물 방울을 흔들면 백천 가지 악기가 연주되는 것 같으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삼보(三寶)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곳에는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三惡道)라는 이름조차 없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아미타불은 지혜와 자비의 광명이 한량없고[無量光] 수명이 한량없는[無量壽] 부처님으로서, 이미 성불하신 지 10겁이 지났다. 극락에 태어나는 중생들도 한량없는 광명과 수명을 얻는다. 이와 같은 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기 위해서는 자력(自力)의 작은 선근(善根)으로는 어려우니, 중생으로서는 염불수행을 해야 가능하다.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하루, 나아가 이레 동안 일심으로 외우면, 임종 때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들이 와서 극락세계로 맞아 간다고 설하였다.

또한 6방(동·서·남·북, 상·하)의 많은 불·보살이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하며, 아미타불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공덕을 찬탄하니, 염불하는 중생들은 이 경전을 믿고 받아 지녀서 왕생극락을 발원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모든 부처께서 호념(護念)하실 것임을 설한 것이다.

〈아미타경〉의 내용을 삼분과(三分科: 序分, 正宗分, 流通分)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서분(序分)〉

1). 가르침의 장소와 청중(聽衆).

〈정종분(正宗分)〉

1). 극락세계와 아미타불

극락세계의 장엄한 모습과 무량공덕의 아미타불.

2). 염불(念佛) 수행(修行)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남.

염불 수행으로 왕생함. 모든 부처의 증명으로 믿음을 권함.

〈유통분(流通分)〉

1).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며 떠남.

사리불(舍利弗)과 모든 비구(比丘)와 일체 세간(世間)의 천인(天人)과 아수라(阿脩羅)들이 석존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해서 예수(禮數)하고 떠남.

Ⅲ. 표기법

3.1. 표기법 개관 주013)

이 표기법의 많은 부분은 김무봉(1997)에서 가져왔고, 일부의 내용은 보완했다.

이 책은 같은 해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1월), 〈금강경언해〉(4월), 〈반야심경언해〉(4월)에 비해 앞선 시기의 표기법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월인석보〉나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의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다. 주014)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에 대해서는 안병희(1980), 최은규(1993) 참조.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아미타경」은 정토 삼부경의 하나로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다. 주015)

김명실(1997) 참조.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주로 성문제자(聲聞弟子)가 석존(釋尊)께 질문하면 석존이 그에 대해 대답하는 교설(敎說)이 있고, 교설이 있은 후 문답하는 형식인데 비해, 이 경전은 석존이 성문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이라고 하는 사리불에게 일방적으로 교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설화자가 석존의 말씀을 전하는 내용이 많아 주체존대 선어말어미 ‘-시/샤-’의 쓰임이 빈번하고, 화자인 석존의 말씀을 우리말로 옮김에 따라 화자에 의에 구사되는 ‘-니라’형의 종결어미와 설화자에 의한 ‘-시니라’형 종결어미가 많다.

목판본 〈아미타경언해〉는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는 쓰이지 않던 ‘ㅸ’과 ‘ㆆ’이 나타나고 협주의 시작과 끝에 흑어미 표지를 두지 않으며, 방점 표기에서 어말의 거성(去聲)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주016)

〈반야심경언해〉, 〈아미타경언해〉 등의 방점 표기에 대해서는 정우영(1996) 참조.
활자본의 영향을 입은 표기가 보인다. 주017)
이 외에 구결문과 언해문 사이에 ○ 표지를 두지 않고, 협주 뒤에 한문 주해가 올 경우나 한문 주해와 주해 사이에 ○표지를 둔 것도 활자본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결문의 정음 구결에 방점을 찍지 않고, 언해문의 협주에 한글 소활자(小活字)를 사용하는 등 전반적인 체재는 간경도감본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는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불경언해서들과 비교하면서 이 책의 표기 특성을 살피려고 한다.

3.2. ㅸ

‘ㅸ’은 훈민정음의 초성 17자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예의」 및 「해례 제자해」에서 순경음으로 규정된 이후, 〈용비어천가〉(1447년간) 등의 정음 초기 문헌에 더러 보이고 간경도감 간행의 언해서에는 〈능엄경언해〉(1462년간)의 ‘[礫](5:72ㄴ)’이나 〈목우자수심결언해〉(1467년간)에 몇몇 예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 주018)

이 논의에서는 목판본〈아미타경언해〉를 ‘이 책’ 또는 〈아미〉라는 약칭으로도 부를 것이다.
에서는 용언 활용형과 겸양법 선어말어미 ‘--, --’의 통합형에서 일반적인 쓰임을 보인다. 그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ㄱ. 즐거씨라〈5ㄴ〉 주019)

이 논의에서 〈 〉속에 있는 앞의 숫자는 장차를 표시하고, 뒤쪽 ‘ㄱ’은 장의 앞면, ‘ㄴ’은 뒷면을 가리킨다.
, 고〈9ㄱ〉, [難]〈27ㄴ〉, 어려〈28ㄴ〉

ㄴ. -니〈1ㄴ〉, 디니〈17ㄴ〉, 〈18ㄴ〉, 듣니〈2ㄱ〉, 듣〈25ㄱ〉, 일〈27ㄴ〉, 받〈29ㄱ〉

ㄷ. 외오〈9ㄱ〉, 욀씨니〈15ㄴ〉, 외야〈25ㄴ〉

이 책에서 ‘ㅸ’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모두 ‘ㅸ’이 실현되었다. 다만 〈용비어천가 10:1ㄱ, 98장〉에서 한 차례 용례가 보일 뿐 그 이후 쓰임이 없는 ‘-’는 여기서도 ‘외-’로 실현되었다.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와는 달리 ‘ㅸ’의 쓰임이 정음 초기 문헌과 같이 실현된 것은 앞서 간행된 〈월인석보〉(1459년간)나 활자본 〈아미타경언해〉(?1461년간)의 표기법에 이끌린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1ㄱ)의 ‘-’은 〈월인석보〉와 이 책 이외의 다른 문헌에서는 그 용례가 없는 희귀어 중의 하나이다.

3.3. ㆆ

‘ㆆ’은 훈민정음 초성체계에서는 후음(喉音)의 전청자(全淸字)로 영모(影母)에 해당되지만 「용자례(用字例)」에는 빠져 있어서 불완전(不完全)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음 초기 문헌에서 주로 동국정운 한자음 영모자(影母字)의 표기와 입성 표시 사잇글자로 쓰였고, 고유어 표기에서는 동명사어미 ‘-ㄹ’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ㅭ’에 사용되었다. 정음 초기문헌 이래 단독으로 쓰인 예는 없고, 사잇글자로의 쓰임도 〈용비어천가〉나 「훈민정음언해본」이후 극히 제한적이다. 간경도감본에서는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에 널리 쓰였으나, 고유어 표기에서는 동명사어미 ‘-ㄹ’ 다음에서 몇몇 용례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ㄹ’ 다음에서 폭넓은 쓰임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해에 간행된 문헌 중 〈영가집언해〉에서는 후행하는 체언의 초성이 한자어 무성자음인 경우에만 ‘-ㅭ’로 나타나고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상원사어첩 및 중창권선문〉에는 모두 ‘-ㄹ’로만 실현되었다.

(2) ㄱ. 護念 經이라〈19ㄴ, 20ㄴ, 21ㄴ, 22ㄴ, 23ㄴ, 25ㄱ〉

ㄴ. 아디 아니며〈14ㄴ〉, 닐디니라〈16ㄱ〉, 發願디니〈16ㄴ〉

ㄷ. 命終 제 / 命終 쩨〈17ㄴ〉, 나고져  사〈26ㄴ〉

ㄹ. 밥 머 〈9ㄱ〉

ㅁ. 念僧홀 〈12ㄴ〉

ㅂ. 모릴니라〈16ㄴ〉, 아니씨라〈3ㄱ〉

ㅅ. 應 〈3ㄱ〉, 薩 〈4ㄱ〉

이 책에서 동명사어미 ‘-ㄹ’은 대부분 ‘-ㅭ’으로 실현되어 ‘ㆆ’의 쓰임이 다양하다. (2ㄱ)은 ‘-ㅭ’의 후행요소가 한자어 무성자음인 경우이고, (2ㄴ)은 ‘-ㅭ’이 후행의 ‘디(〈+이/이-)’ 또는 ‘디-’와 통합된 형태인데, 이 책에 용례가 많이 보인다. (2ㄷ)은 ‘-ㅭ’+‘치음의 전청자’형이다. 이 책에서는 그 출현환경이 제한적이어서 위의 두 용례만 보인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ㅭ+전청자형’인 ‘-제’와 ‘-ㄹ+전탁자형’인 ‘-쩨’가 병기되기도 했다. (2ㄹ)은 후행요소가 합용병서인 경우인데 ‘-ㅭ’으로 실현되었다. (2ㅁ)은 후행요소가 불청불탁자인 경우 ‘-ㄹ’이 쓰인 예이다. (2ㅂ)은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인데, 정음 초기 문헌부터 ‘-ㄹ/ ㄹ씨’로 나타난다. 주020)

동명사어미 ‘-ㅭ’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 중 ‘-ㅭ’은 〈능엄경언해〉 등에서 더러 보이나, ‘ㅭ’나 ‘ㅭ시’는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2ㅅ)은 동국정운 한자음에서의 용례를 보인 것이다.

3.4. ㅿ

유성마찰음 ‘ㅿ’은 훈민정음 초성체계에서는 불청불탁(不淸不濁)의 반치음으로 일모(日母)에 해당된다. 15세기 문헌에 두루 나타나며 16세기 중반까지 쓰였다. 이 책에서는 ‘ㅿ’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모두 ‘ㅿ’으로 실현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ㅿ’의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모두 모음간에서(‘V-V’)의 용례이다.

(3) ㄱ. 〈12ㄴ〉 / 로〈17ㄴ〉, 믌〈19ㄱ〉

ㄴ. 지〈11ㄱ〉 / 지샨〈11ㄴ〉

ㄷ. 니〈1ㄴ〉 / 고〈9ㄱ〉, 〈29ㄱ〉 / 거뇨〈13ㄱ〉 / 〈18ㄴ〉, 디니〈17ㄴ〉

ㄹ. 말 드러〈14ㄱ〉

(3ㄱ)은 체언 어간 내부 모음간에 나타난 ‘ㅿ’의 용례와, 체언과 조사 통합형에 나타난 ‘ㅿ’의 용례이다. (3ㄴ)은 용언어간과 선어말어미 통합형에서의 용례이고, (3ㄷ)은 겸양법 선어말어미 ‘--’의 통합형에서의 용례이다. (3ㄹ)은 첨사 ‘’의 예이다.

3.5. 사이글자

사이글자는 체언이 결합할 때 음성 환경에 따라 체언 사이에 끼어드는 자음글자이다. 〈용비어천가〉(1447년간)에는 ‘ㄱ, ㄷ, ㅂ, ㅅ, ㅿ, ㆆ’의 6자가 쓰였고, 「훈민정음 언해」(1459년 이전 간행)에는 ‘ㄱ, ㄷ, ㅂ, ㅸ, ㅅ, ㆆ’의 6자가 쓰였다. 〈석보상절〉에 이르러 ‘ㅅ’으로 통일을 꾀한 듯하나 ‘ㄱ, ㄷ’이 쓰인 예도 있다. 뒤에 간행된 〈월인석보〉(1459년간)에는 ‘ㅅ’ 외에 ‘ㄱ, ㄷ, ㅂ, ㆆ’이 쓰였고,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간)에는 ‘ㅅ’ 외에 ‘ㄷ, ㆆ’이 쓰였으나 〈아미타경언해〉(1464년간)와 같은 해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에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다만 〈반야심경언해〉에는 ‘ㄹ’ 다음에 ‘ㆆ’이 쓰인 예가 있다. 주021)

〈반야심경언해〉에서 ‘ㄹ’ 다음에 사잇글자로 ‘ㆆ’이 쓰인 것으로는 ‘ 사교미라 〈11ㄴ〉,  사교 〈19ㄱ〉’ 등이 있다.

이 책에서는 사이글자와 구 구성의 속격에서 모두 ‘ㅅ’으로 통일되었다.

(4) ㄱ. 菩薩ㅅ 中에〈4ㄴ〉, 부텻 〈5ㄴ〉, 네 가짓 보니〈7ㄱ〉, 하류고〈9ㄱ〉,  곳고리라〈10ㄴ〉, 부텻 나라해〈11ㄱ〉, 부텻 光明이〈13 ㄱ〉, 부텻 목숨과〈13ㄴ〉, 하 뎌기〈29ㄱ〉, 부텻 니샤〈29ㄱ〉

ㄴ. 버길[階道]〈7ㄴ〉, 술윗[車輪]〈8ㄱ〉, 믌〈19ㄱ〉

위의 예에서 보듯 이 책에는 사이글자가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제한적이다. 대부분 ‘부텨’ 또는 ‘보살(菩薩)’이 선행어가 되는 구 구성이다. (4ㄱ), (4ㄴ) 모두에서 ‘ㅅ’ 외의 어떤 사이글자 표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ㅅ’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이 제한적이고, 같은 해에 간행된 불경언해 중 〈반야심경언해〉를 제외한 다른 문헌에서는 사이글자의 예외적인 용례가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간경도감본에 이르러 비로소 사이글자 ‘ㅅ’으로의 통일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6. 초성 병서표기

3.6.1. 〈아미타경언해〉는 29장 분량의 소책자(小冊子)인데다가 언해문이 중활자(中活字)로 되어 있고, 협주(夾註)가 많지 않아서 연구자들이 자료로 삼을 어사(語辭)의 선택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ㅭ+전청자’ 표기가 널리 쓰인 관계로 각자병서의 예는 드물다.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문헌에 보이는 각자병서 8자(ㄲ, ㄸ, ㅃ, ㅉ, ㅆ, ㆅ, ㆀ, ㅥ)중 이 책에는 ‘ㅉ, ㅆ’만이 쓰였다.

(5) ㄱ. 命終 쩨〈17ㄴ〉 / 命終 제〈17ㄴ〉

ㄴ. 다쐐/여쐐〈17ㄴ〉, 쎠〈26ㄱ〉 / 클씨라〈3ㄱ〉, 주길씨니〈3ㄱ〉, 니라〈15ㄱ〉

(5)의 예와 같이 각자 병서는 주로 동명사어미 ‘-ㄹ’ 통합형에서 볼 수 있고, 그 외 명사나 부사에서 한두 가지의 예를 볼 수 있으나 매우 드문 편이다.

3.6.2. 이 책에서 합용 병서의 용례도 몇몇 눈에 띈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 보이는 ‘ㅺ, ㅼ, ㅽ, ㅻ ; ㅳ, ㅄ, ㅶ, ㅷ ; ㅴ, ㅵ’ 중 ‘ㅅ’계열의 ‘ㅺ, ㅼ’, ‘ㅂ’계열의 ‘ㅳ’, ‘ㅄ’계열의 ‘ㅴ’ 등이 보인다.

(6) ㄱ. (ㅺ):-[布]〈7ㄴ〉, 미-[飾]〈8ㄱ〉, 가-[顚到]〈17ㄴ〉 -[難]〈27ㄴ〉

(ㅼ):[並]〈4ㄱ〉, ㅎ[地]〈5ㄴ〉

ㄴ. (ㅳ):[意]〈15ㄱ〉, 술윗[車輪]〈8ㄱ〉

ㄷ. (ㅴ):니[食]〈9ㄱ〉, [一時]〈2ㄱ〉

3.7. 종성표기

〈아미타경언해〉의 종성 표기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8종성 외에 다른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곶 〈9ㄱ〉’에서 ‘ㅈ’의 용례가 한 군데 있어서 시선을 끄는데, 이는 활자본의 표기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월인석보〉에는 ‘곳〈7:65ㄴ〉’으로 되어 있다.

(7) ㄱ. 낫(〈낮) : 밤낫 여슷 로[晝夜六時]〈9ㄱ〉

닛-(〈닞-) : 護持야 닛디 아니씨라〈19ㄴ〉

ㄴ. 믿(〈밑) : 믿나라해 도라와[還到本國]〈9ㄱ〉

ㄷ. 놉-(〈높) : 德이 놉고 나히 늘글씨라〈3ㄱ〉

ㄹ. 업-(〈없) : 오히려 업거니〈11ㄱ〉

ㅁ. 섯-(〈-) :  로 섯디 아니면[一心不亂]〈17ㄴ〉

겻-(〈) : 受苦 겻다 논 디라〈28ㄱ〉

ㅂ. 衣裓은 곶 담 그르시라〈9ㄱ〉

(7ㄱ)은 기저형에서는 말음으로 ‘ㅈ’을 가지나 자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나 휴지 앞에서 ‘ㅅ’으로 교체된 것이다. (7ㄴ)은 ‘ㅌ’, (7ㄷ)은 ‘ㅍ’, (7ㄹ)은 ‘ㅄ’, (7ㅁ)은 ‘ㅺ’을 가지나 모두 교체된 것이다.

3.8. 주격과 서술격표기

중세 국어 문헌에서 주격과 서술격은 선행 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그 기저형 ‘-이’와 ‘이-’의 교체형이 대체로 동일(同一)한 양상으로 실현되었다. 문헌에 따라서는 구결문과 언해문의 주격과 서술격 표기 양상이 조금씩 달라진 것도 있는데, 이는 구결문의 의고성에 말미암는 것이다. 〈아미타경언해〉의 주격 및 서술격 표기 양상은 다른 15세기 문헌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3.8.1. 주격조사의 표기는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이,ㅣ, ø’로 실현되었다. 다만 구결문에서는 ‘ø’ 형태가 출현할 만한 환경이 없어서 구결문의 용례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수(水)’의 동국정운 한자음이 ‘水(:)’여서 ‘水(:)’다음의 주격조사 자리에 ‘∅’가 실현된 예는 보인다.

(8) ㄱ. 이 : 구결문 一時佛이〈1ㄴ〉

언해문  미〈12ㄱ〉

ㄴ. ㅣ : 구결문 彼佛國土ㅣ〈14ㄱ〉

언해문 曼陀羅花ㅣ 듣거든〈9ㄱ〉

ㄷ. ø : 구결문 八功德水 充滿其中고〈7ㄱ〉

언해문 八功德水 그 中에 고〈7ㄴ〉

킈 술윗 호〈8ㄱ〉

그 소리 五根과 五力과〈10ㄴ〉

주격조사는 그 예가 많지 않지만 한자어와 고유어 뒤에서 모두 ‘이,ㅣ, ø’로 실현되었다. 또 ‘ㅣ’가 / i , j/ 이외의 체언 말음과 결합할 때 선행체언의 중성에 합철된 예도 더러 보인다.

이때 체언이 평성이면 성조가 상성으로 바뀌지만 거성이거나 상성이면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9) ㄱ. 부:톄(〈부텨+ㅣ)〈2ㄱ〉, :네( 〈너+ㅣ)〈11ㄱ〉/ 네(너+ㅣ)〈13ㄱ〉 ; 속격

ㄴ. ·내(〈·나+ㅣ)〈18ㄱ〉

(9ㄱ)의 ‘부:톄’는 ‘부텨[佛體]’에 주격조사 ‘ㅣ’가 통합되어 하강 이중모음을 이룬 예인데, 체언 말음절이 평성이므로 주격조사와 통합시 성조가 상성으로 바뀐 것이다. ‘네’는 2인칭 대명사 ‘너[汝]’에 주격조사와 속격조사 ‘ㅣ’가 통합된 형태이다. 주격조사와 통합할 때는 상성으로 성조가 바뀌나 속격조사와 통합시에는 성조에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9ㄴ)의 ‘·나[我]’는 원래 거성(去聲)이었으므로 주격조사와의 통합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3.8.2. 이 책에서 서술격조사도 음운론적 조건에 따른 교체가 주격조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서술격조사의 용례는 주격조사에 비해 많은 편이고,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같은 양상의 교체형을 볼 수 있다. 구결문에서도 ‘ø’의 실현이 보인다.

(10) ㄱ. 이 : 구결문 故名極樂이니라〈6ㄱ〉

언해문 極樂이라 니라〈6ㄴ〉

ㄴ. ㅣ : 구결문 號爲阿彌陀ㅣ시니라〈13ㄱ〉

언해문 號ㅣ 阿彌陀ㅣ니라〈13ㄴ〉

ㄷ. ø : 구결문 非是算數之所能知며〈14ㄱ〉, 所能知之오〈14ㄴ〉

언해문 恒河앳 몰애니〈19ㄱ〉

특기할 것은 ‘, ’ 등이 의존명사와 서술격조사의 통합에서는 체언의 ‘ᆞ’가 탈락되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불경언해서에서도 마찬가지다.

(11) ㄱ. 닐디니라〈16ㄱ〉, 信디니〈19ㄴ〉

ㄴ. 주길씨니〈3ㄱ〉, 즐거씨라〈5ㄴ〉

3.9. 모음조화표기

중세국어 시기에는 형태소 내부나 경계에서 양모음은 양모음끼리, 음모음은 음모음끼리 어울리는 현상, 이른바 모음조화 현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졌다. 보조사 ‘ㄴ’과의 통합에 있서나 대격조사, 처격조사와의 통합에서도 상당히 규칙적이다. 그러나 다음의 예는 이 책에서의 조사 통합이 양모음쪽으로 우세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는 간경도감 언해서에 공통되는 현상이다.

(12) ㄱ. 應〈3ㄱ〉, 부텨〈13ㄱ〉, 分〈15ㄴ〉

ㄴ. 世界〈20ㄱ〉

3.10. 한자음표기

〈아미타경언해〉의 한자음 표기는 경의 본문에는 주음을 하지 않고 국한혼용문인 언해문과 협주의 한자에만 주음을 하였다. 언해문의 한자는 중활자(中活字)인데 한글 주음은 글자의 오른쪽에 두었고, 협주는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는데, 한자에는 같은 크기의 소활자로 주음하였다. 한자음은 다른 간경도감본 언해서와 마찬가지로 동국정운음이다. 〈동국정운〉에 없는 불교용어 중에는 몇 차례 변개된 것이 있는데, 이 책에 있는 ‘般若〈15ㄱ, 〉, 解脫〈15ㄱ, 〉, 三藐〈25ㄴ, 삼먁〉’의 주음도 〈법화경언해〉 이후의 음으로 바뀌어 있다. 주022)

불경언해에 나오는 불교용어의 한자음에 대해서는 안병희(1980), 최세화(1991) 참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 ㄱ. 般若 반 〈석보상절, 월인석보, 활자본아미타경언해, 목판본능엄경언해, 금강경삼가해, 남명집언해〉

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목판본아미타경언해〉

ㄴ. 解脫 퇋 〈석보상절〉

갱 〈월인석보, 몽산법어언해, 활자본아미타경언해, 활자·목판본 능엄경언해, 금강경언해, 남명집언해〉

 〈법화경언해, 목판본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ㄷ. 三藐 삼막 〈석보상절, 활자본 아미타경언해, 목판본능엄경언해〉

삼먁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목판본아미타경언해〉

3.11. 방점 및 희귀어

이 책의 언해문에는 점획형으로 된 방점이 찍혀 있다. 활자본에는 정음 구결에도 방점이 찍혀 있으나 활자본 〈능엄경언해〉 이후 구결문의 방점은 사라졌다. 그러나 목판본 〈아미타경언해〉의 방점은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불경언해서들의 방점표기와는 달리 앞선 시기의 표기가 반영되어 있다. 주격조사의 방점이 대부분 거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말의 거평(去平)교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이 역시 활자본의 방점 표기에서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본다. 주023)

〈영가집언해〉와 〈금강경언해〉의 용례는 정우영(1996) 참조.

(14) :엇·뎨 〈16ㄴ〉 / cf. :엇뎨 〈영가집언해 하:22ㄱ〉, 〈금강경언해:10ㄴ〉

이 책에는 15세기 문헌뿐만 아니라, 이후 문헌에서도 그 용례가 드믄 희귀어가 몇몇 있다.

(15) ㄱ. 버길[階道]〈7ㄴ〉

ㄴ. 술윗[車輪]〈8ㄱ〉

ㄷ. 갓갓[種種]〈10ㄱ〉

ㄹ. -[難]〈27ㄴ〉

(15ㄱ,ㄴ,ㄷ)은 합성어이다. 특히 (15ㄱ)은 다른 곳에서의 쓰임이 없는 유일한 용례이다.

3.12. 기타

앞에서 밝힌 대로 〈아미타경언해〉는 설화자(說話者)가 석존(釋尊)의 말씀을 전하고, 석존이 사리불(舍利佛)에게 교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주체존대 선어말어미 ‘-시/샤-’의 쓰임이 빈번하고 종결어미는 주로 ‘-니라’형 구성으로 되어 있다.

(16) ㄱ. 그 부톄 장로사리불려 니샤〈5ㄱ〉

그 해 부톄 겨샤 일후미 阿彌陀ㅣ시니〈5ㄴ〉

ㄴ. 法王子 佛子ㅣ라 호미 니라〈4ㄴ〉

이제 現야 겨샤 說法시니라〈5ㄴ〉

이티 功德莊嚴이 이러 잇니라〈8ㄴ〉

〈아미타경언해〉의 구결문과 언해문의 구성은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판본들과 차이를 두고 있다. 동명사어미 ‘-ㄹ’과 무성자음이 통합된 경우 〈선종영가집언해〉, 〈반야심경언해〉 등은 구결문에서 ‘-ㄹ+전청자형’으로 실현되고, 언해문에서는 ‘-ㄹ+전탁자형’으로 실현된 데 비해, 이 책은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ㄹ+전탁자형’으로 실현되었다.

(17) ㄱ. 두루 둘어실(周帀圍繞)〈7ㄱ〉

ㄴ. 린 업스실(無所障礙실)〈13ㄴ〉, 無量無邊阿僧祇劫일(無量無邊阿僧祇劫일)〈13ㄴ〉

Ⅳ. 맺음말

지금까지 〈아미타경언해〉의 판본(板本), 형태 서지(形態書誌), 경(經)의 성격, 표기 사실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해제(解題)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보다는 선행 연구의 성과를 요약·정리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아미타경언해〉는 「훈민정음」창제 직후인 세조대에만 두 차례에 걸쳐 인간(印刊)되었다. 하나는 1461년경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이고, 다른 하나는 3년 후 간경도감에서 세 군데 정도의 수정을 거쳐 다시 간행된 목판본 〈아미타경언해〉이다. 앞의 두 책 간행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복각(覆刻) 및 개찬(改撰)의 책들이 간행되었다. 그만큼 독자들의 수요(需要)가 많았다는 방증(傍證)일 것이다. 게다가 같은 내용이 활자본보다 앞서 간행된 〈월인석보〉(1459년간) 권칠(卷七)에 번역·수록되어 있고,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석보상절〉(1447년간) 권칠(卷七)에도 실려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런 이유로 〈아미타경언해〉는 세조가 직접 구결을 달아서 번역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복각본들의 내제 아래쪽 역기란(譯記欄)에 ‘御製譯解’라 한 것도 이런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이 책은 15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 400여 년 동안 지방 사찰 등에서 수차례에 걸쳐 중간(重刊)되었다.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 까지는 주로 간경도감(刊經都監)본의 복각(覆刻) 간행이었고, 이후에 간행된 책들은 판식(板式)과 언해 체제는 물론 언어 사실 등이 달리진 개찬본(改撰本)들이다. 4세기 여 동안 간행된 책들 중 18세기 중엽 이후에 간행된 책들인 개찬본들은 각기 그 시대의 언어가 반영되어 있어서 국어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아왔다.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아미타경언해〉의 초쇄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 듯,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다만 역기란(譯記欄)이 삭제된 한 책(보물 1050호)이 단양의 구인사(救仁寺)에 전하는 바, 이는 원간본의 판목에서 나중에 쇄출(刷出)된 것으로 판단한다. 비록 원간 후쇄본(後刷本)이라고 할지라도 언어 사실 등을 연구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후 간행된 책들은 나주 쌍계사 등 주로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되었다. 현재 동국대 도서관 등 몇몇 도서관에 여러 책들이 전하는데, 이를 복각본과 개찬본(改撰本)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특히 동화사본 등 일부의 판본에는 「임종정념결」이나 「부모효양문」이 합철되어 있어서 이용에 주의를 요한다.

2). 〈아미타경언해〉의 한문본은 요진(姚秦) 홍시(弘始) 4년(402 A.D.)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佛說阿彌陀經』이다. 이 책은 정토교(淨土敎)의 근본 경전[所依經典] 중 하나로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과 더불어 정토(淨土) 3부경(三部經)이라고 불린다.

『아미타경』은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 udāna)이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제자가 먼저 질문하면 석존이 그에 대해 답변하는 데서 교설(敎說)이 시작되고, 이후 문답(問答)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책은 제자의 질문이 없는데도 석존이 스스로 말을 꺼내고 일방적(一方的)으로 교설한다. 성문제자(聲聞弟子) 가운데 지혜 제일인 사리불(舍利弗)을 상대로 해서 수많은 법회(法會) 대중(大衆)에게 극락국토(極樂國土)의 장엄상(莊嚴相)과 아미타불의 공덕을 찬탄하고, 염불왕생법(念佛往生法)에 대해 교시(敎示)하는 내용이다. 경의 구성은 서분(序分)에서 가르침의 장소와 청중(聽衆)에 대해 설명하고, 정종분(正宗分)에서는 극락세계의 장엄한 모습과 무량공덕의 아미타불(阿彌陀佛) 찬탄, 그리고 염불(念佛) 수행(修行)으로 극락세계에서 왕생(往生)할 것을 설하고 있다. 또한 염불하는 중생들에게 이 경전을 믿고 받아 지녀서 왕생극락을 발원하라고 부탁한다. 유통분(流通分)에서는 사리불(舍利弗)과 모든 비구(比丘)와 일체 세간(世間)의 천인(天人)과 아수라(阿脩羅)들이 석존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해서 예수(禮數)하고 떠난다는 내용이다.

3).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주로 성문제자(聲聞弟子)가 석존(釋尊)께 질문하면 석존이 그에 대해 대답하는 교설(敎說)이 있고, 교설이 있은 후 문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전은 석존이 성문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이라고 하는 사리불에게 일방적으로 교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미타경언해〉의 번역 양식은 여타 언해본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설화자(說話者)가 석존의 말씀을 전하는 내용이 많아 ‘주체존대 선어말어미’ ‘-시/샤-’의 쓰임이 빈번하고, 화자(話者)인 석존의 말씀을 우리말로 옮김에 따라 화자에 의에 구사되는 ‘-니라’형의 종결어미와 설화자(說話者)에 의한 ‘-시니라’형 종결어미가 많다.

또 이 책의 표기법은 같은 해(1464년)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1월), 〈금강경언해〉(4월), 〈반야심경언해〉(4월)에 비해 앞선 시기의 표기법을 보이고 있다. 곧, 다른 문헌에는 쓰이지 않던 ‘ㅸ’이나 ‘ㆆ’이 나타나고 협주의 시작과 끝에 흑어미 표지를 두지 않으며, 방점 표기에서 어말의 거성(去聲)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활자본의 영향을 입은 표기가 보인다. 그러나 구결문의 정음 구결에 방점을 찍지 않고, 언해문의 협주에 한글 소활자(小活字)를 사용하는 등 전반적인 체제는 간경도감본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또 구결문과 언해문 사이를 구분하는 ○ 표지를 두지 않고, 협주 뒤에 한문 주해가 올 경우나 한문 주해와 주해 사이에 ○ 표지를 둔 것도 활자본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선행연구와 앞에서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목판본에 반영된 언어가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에서 적잖이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체제나 분량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목판본은 활자본의 언어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앞의 논의나 김영배 외(1997)에 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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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심다라니경언해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Ⅰ. 머리말

1.1.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조선조 성종(成宗) 16년(成化 21, 1485 A.D.) 을사(乙巳) 2월에, 당시의 고승(高僧)이었던 학조(學祖)가 간행한 불경언해서이다. 3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의 권명(卷名)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각 권에 실려 있는 내용을 반영하여 명칭을 달리 붙인 때문일 것이다. 언해 경위 및 편찬자 등에 대해서는, 원문과 언해문 사이[24장 앞뒤]에 장철(張綴)되어 있는 학조의 발문(跋文)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주001)

책의 간행 경위 등에 대해서는, 원문 뒤에 첨부되어 있는 학조(學祖)의 발문에 의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역주의 뒤에 한문으로 된 학조의 발문(跋文)을 우리말로 옮겨 놓았다. 번역에 도움을 준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김갑기 교수와 불교학과 해주(海住) 스님께 특히 적어서 고마운 뜻을 표한다.
발문(跋文)을 쓴 학조가 바로 책의 편찬·간행자이고,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의 뜻에 의하여 간행한 책임을 밝히고 있다.

이보다 앞서 간경도감(刊經都監) 등에서 간행된 책들이 주로 대승경전류(大乘經典類)의 언해본이거나 선(禪) 수행(修行) 지침서들의 언해본인데 비해, 다라니경(陀羅尼經)의 언해서인 이 책 주002)

이하 〈불정심다라니경언해〉를 필요에 따라 ‘이 책’, 또는 ‘이 경전’이라 부를 것이다.
은 다른 언해본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선 언해 체제와 판식 등에서 큰 차이가 난다. 다른 언해서들은 대체로 경(經)의 원문(原文)이나 경소(經疏)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한 대문(大文)씩 단락(段落)을 짓고, 이어서 원문에 구결을 단 구결문(口訣文)을 둔 후, 구결문을 바탕으로 하여 번역을 했다. 이른바 언해(諺解)를 행한 것이다. 언해의 방법은 대역(對譯)의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구결문이 없다. 앞쪽[1장ㄱ~22장ㄴ] 주003)
장차(張次) 다음의 ‘ㄱ’은 장(張)의 앞면을 가리키고, ‘ㄴ’은 뒷면을 가리킨다. 이하 같다.
에 구결문 없이 변상도(變相圖)와 경(經)의 원문을 두고, 뒤쪽에 언해문을 별도로 두었다. 다만, 우리가 연구의 원전으로 삼고 있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이희승선생 구장본에는 이 책을 이용했던 이가 현토(懸吐)한 것으로 보이는 한자 약체자(略體字)로 된 자토(字吐) 구결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언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작성하는 구결문과는 성격이 다르다. 나중에 누군가가 기입(記入)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간(印刊) 양식도 달라서, 경(經)의 원문(原文)과 변상도가 있는 앞부분은 목판본(木版本)인데 비해, 언해문(諺解文)이 있는 뒷부분은 을해자(乙亥字)로 된 활자본이라는 점이다. 앞부분이 목판본인 이유는 각 면마다 상단(上段)에 하단(下段)에 있는 경(經) 원문(原文)의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한 그림[변상도(變相圖)]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출판 양식이 달라서 그러했겠지만 판식 등의 언해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 양상도 종전의 언해서들과는 사뭇 다르다. 원문 부분과 언해문 부분을 각기 따로 만들어서 합편(合編)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차이가 난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리하면 별책(別冊)이 될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숙종(肅宗) 37년(康熙 50년, 1711 A.D.)에 전라도 순창군(淳昌郡) 회문산(廻門山) 신광사(新光寺)에서 간행된 책(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D213.19 불73ㅅ)은 언해문 없이,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앞부분인 원문 부분과 동일한 판식의 복각(覆刻)으로 보이는 원문만으로 장책(粧冊)되어 있다. 그 책의 형태는 이 〈불정심다라니경언해〉에서 뒤쪽에 있는 언해문 부분을 삭제하고, 원문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복각 인출(印出)한 후, 장정(裝幀)을 새롭게 한 분책의 모습이다. 원간본과 비교하면 판심(版心)에 변개(變改)가 있어서 판심(版心) 서명(書名)이 새로이 들어가는 등 다소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복각본 판각 당시의 변형 정도로 보인다.

1.2. 저본(底本)인 한문본의 편찬자와 간행자 등에 관련된 정보는 별로 없다. 국내에서 한문 원문만으로 유통되는 경전 중 현전하는 간본이 다수 있기는 하지만, 언해된 책의 저본이 어떠한 책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기록이 없고, 이 책의 어디에서도 단서가 될 만한 근거가 없다. 다만 학조의 발문에 의해 한문본이 당(唐)나라에서 편찬되었던 당나라본[唐本]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주004)

‘爰 命工人 効唐本詳密 而圖之 楷正而寫之 鏤而刊之’[이에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당(唐)나라본 책을 본받아 자세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자획을 바르게 베껴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학조의 발문 중에서 발췌〉.

그런데 이 경전의 한문본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의 경(經)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좀 오래된 듯하다. 고려 시대인 13세기 초에 당대(當代)의 권세가(權勢家)였던 최충헌(崔忠獻)과 그의 아들인 우(瑀), 향(珦) 삼부자(三父子)의 호신(護身)을 위해 간행한 책인 휴대용[수진본(袖珍本)] 첩장(帖裝) 소자본(小字本)『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經)』(이원기님소장, 보물 691호) 3권(卷) 1첩(帖) 주005)

이 첩장본(帖裝本)의 도판(圖版) 등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천혜봉(1990:190) 참조.
의 내용이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한문 원문 부분과 일치한다. 이로 미루어 한문본이 우리나라에 유통된 시기와 한문본의 이름이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조금 뒤에 같은 이름의 책이 간행된 기록도 있어서 이를 뒷받침한다. 주006)
이보다 조금 뒤에도 같은 이름의 책이 간행된 기록이 있다. 고려 충렬왕 22년(丙申, 1296 A.D.)의 일이다. 김두종(1973:103) 참조.

그런가 하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원간본의 소장자였던 이희승선생의 해제(1958)에 의하면, 표지에 「관음경(觀音經)」이라는 서외제(書外題)가 있었다고 한다. 주007)

이에 대해 이희승은 영인본의 해제(1958)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 영인본의 저본인 필자 소장본의 표지에는 「觀音經」이라 묵서(墨書)하였으니, 이 불정심경은 관음경의 일부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관음경은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법화경」중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보문품(普門品)만을 분리하여 한 경(經)으로 한 것이니,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제난(諸難)을 잘 구하여 소원을 이루어 주며, 또 33신(身)으로 양상과 자태를 달리하여 나타나서, 구호의 대상이 되는 수난자(受難者)에 적응(適應)한 법을 설하는 것이 상례라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의 서명이 「언해 관음경(諺解 觀音經)」으로 되어 있지만 『관음경』과는 별개의 책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간행된 한문본 책의 서명 중에는 <서명>「다라니경(陀羅尼經)」 주008)
<정의>‘다라니경(陁羅尼經)’은 다라니를 문자로 옮겨 놓은 경전(經典)이다. ‘다라니(陁羅尼)’는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읽거나 외우는 것을 이른다. 총지(摠持) 또는 능지(能持)라고도 한다. 곧, 모든 악법(惡法)을 막거나 버리고 선법(善法)을 지킨다는 뜻이다. 번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限定)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이에게는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 흔히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이나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陁羅尼)’,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이라고 된 책도 보인다. 이 한문본 『다라니경(陀羅尼經)』은 책의 내용 때문인지 우리나라에 널리 유통되었던 듯하다. 주009)
마음을 오롯이 하여 읽고 지니면 재액(災厄)을 막거나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많은 책들이 이름을 달리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어떻든 한문본인 〈불정심다라니경〉은 오늘날 동국대 도서관 등에 여러 책이 현전한다.

1.3. 또한 다른 언해본들에서처럼 이 책 역시 어디에서도 ‘언해’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언해(諺解)’라는 용어가 실록(實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초반 무렵(1514년 4월 丁未條, ‘諺解醫書’)이다. 기록상으로는 「노박집람 범례(老朴集覽凡例)」(1510년대 초반, ‘兩書諺解’), 「사성통해서(四聲通解 序)」(1517년간, ‘諺解音義’), 「이륜행실도 서(二倫行實圖序)」(1518년간, ‘曰諺解正俗 諺解呂氏鄕約’) 등에 보이는 ‘언해(諺解)’라는 표현이다. 책명에 직접 언해가 쓰인 것은 16세기 후반의 〈소학언해(小學諺解)〉(1588년간)가 처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한문본과 한글본의 책이 같이 전해질 경우, 대체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에 간행된 정음(正音) 문헌 중 한글로 번역의 과정을 거친 책에 대해서는 한문본 책명 다음에 ‘언해’라는 용어를 써서 한문본과 구분하여 왔다. 주010)

‘언해(諺解)’의 개념 및 언해 경위, 언해본의 성격 등에 대해서는 김영배·김무봉(1998:307~415) 참조.
〈불정심다라니경언해〉도 마찬가지다. 언해된 부분이 원문과 별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 원문 부분과 동일(同一)한 제명(題名)을 언해문에 그대로 쓰고 있다.

1.4.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저 앞에서 밝힌 대로 조선조 성종(成宗) 16년(成化 21, 1485 A.D.) 2월에, 학조(學祖)에 의해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간(重刊)되었다. 초간(初刊)이 왕실의 원력(願力)에 의해 조성된 것인데 비해, 이후에 중간된 책들은 대부분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된 이른바 사찰판본(寺刹板本)이다. 이러한 중간본들은 거의가 원간을 판밑으로 한 복각본(覆刻本)들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동국대 중앙도서관 등에 수종이 현전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경의 일부만을 음역(音譯)한 책도 있다. 19세기 말(高宗 13년, 1876 A.D.)에 간행된 양주(楊州) 천마산(天摩山) 보정사(寶晶寺) 간행의 책은 상권의 처음부터 두 번째 단락이라고 할 수 있는 모다라니(姥陀羅尼)까지만 음역을 했다. 또한 1569년 무등산 안심사(安心寺)에서 간행된 책은 모다라니만 음역이 되어 있다. 그 밖의 부분은 원문에 구두점만을 두었다. 독송(讀誦)의 중요성이 강조된 때문으로 판단한다. 이 중 널리 이용되는 판본은 고 이희승선생 구장본(舊藏本)이다. 1958년 정양사에서 이희승 선생의 해제를 붙여 영인된 후, 1974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재차 영인하여 일반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1.5.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표기법은 같은 해(1485년 A.D.)에 간행된 국역불서 〈영험약초언해(靈驗略抄諺解)〉 주011)

〈영험약초언해〉 역시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편찬·간행자인 당대(當代)의 고승(高僧) 학조(學祖)에 의해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되었다.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 수구즉득다라니(隨求卽得陀羅尼),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 등 네 가지 다라니의 영험담(靈驗談)을 모아서 번역한 책이다.
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두 책 모두 15세기 후반의 언어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말 표기에서 ‘ㅸ’과 ‘ㆆ’은 쓰이지 않고, ‘ㅿ’과 ‘ㆁ’은 나타난다. 각자병서로는 드물게도 ‘ㅆ, ㅉ’이 쓰였다. 사이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그런가 하면 용언 어간 ‘-’가 무성자음 /ㄱ, ㄷ/ 등으로 시작되는 어미 ‘-거나, -거든, -고져, -더니, -게, -디’와 만날 경우, 대부분 격음화된 형태인 축약형으로 표기되었다. 두 책의 한자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 한자음이 주음(注音)되어 있는데, 이 책들은 동국정운 한자음(漢字音)이 주음된 15세기 마지막 문헌이 될 것이다. 비록 일부에서의 예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정음표기의 특징 중 하나는, 한자어인 경우 이를 한자로 적지 않고 정음(正音)으로 쓴 예가 몇몇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한자어라는 인식이 이때 벌써 엷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판단한다,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문장 구성은 상권의 앞부분과 하권의 예화(例話) 부분은 석존(釋尊)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고, 그 외에는 주로 경전의 편찬자인 설화자(說話者)가 〈불정심다라니경〉의 수지(受持)와 독송(讀誦)을 권(勸)하는, 이른바 설득하는 내용의 문장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다라니경을 몸에 지니고 정성을 다해 읽으면 갖가지 재앙(災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설(勸說)하는 내용으로 된 문장들이다.

1.6. 이 책은 15세기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간(重刊)되었다. 왕실(王室)에서 인간(印刊)을 주도했던 초간본(初刊本)과는 달리, 불자(佛者)들이 널리 독송(讀誦)·수지(受持)하면서, 나중에는 지방의 사찰을 중심으로 유포(流布)의 범위(範圍)를 넓혀 간 듯하다. 언해본은 물론, 한문본도 여러 책이 현전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불교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012)

〈불정심다라니경〉은 밀교(密敎)의 경전인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경전을 온 마음으로 읽고 지니면 재액(災厄)을 막고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널리 유통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학조(學祖)의 발문에서도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15세기 후반의 한국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에 하나이다. 이 책과 같은 해에 간행된 〈영험약초언해〉 주013)
〈영험약초언해〉(1485년 간행)에 대해서는 김영배·김무봉(1998)참조.
등의 책을 통해 우리는 당시 한국어의 실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중세국어 시기의 매우 소중한 국어사자료 중 하나가 된다.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제Ⅱ장에서는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형태서지(形態書誌)와 각 판본의 현황, 그리고 경(經)의 성격과 내용 등을 살필 것이고, 제Ⅲ장에서는 표기법 등 언어적 특성을 살펴서 이 책의 전반적인 특성과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밝힐 것이다.

Ⅱ. 형태서지 및 경(經)의 성격

2.1.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초간(初刊)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간(重刊)되었다. 대부분 초간본을 판밑으로 한 복각본(覆刻本)들이다. 현전하는 판본만도 상당수에 이른다. 여기서는 이 책의 형태서지(形態書誌)와 간본(刊本)의 현황, 그리고 경(經)의 성격 및 내용 등을 살피려고 한다. 우선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간단한 서지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간본은 현재 두 본(本)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보물 1108호로 지정되어 있는 호림(湖林)박물관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희승선생 구장본(舊藏本)이었으나, 지금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귀중본실에 소장되어 있는 책(일석貴 294.333 B872)이다. 이 논의는 주로 일반에 공개된 바 있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책 주014)

이 책은 원 소장자였던 이희승 선생의 해제를 붙여 1958년 정양사에서 〈아미타경언해〉 고성 운흥사본(1702년 A.D.간행)과 함께 영인이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74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재차 영인하였다. 그런데 앞의 주 7)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언해〉를 영인한 영인본에는 서명(書名)이 ‘언해(諺解) 관음경(觀音經)’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희승 선생은 해제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의 표지에 관음경(觀音經)##‘이라는 묵서(墨書)가 있어서 그렇게 붙였다는 설명을 두었다. 그러나 이 책은 관음경과는 별개의 것이다.
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따라서 서지사항은 주로 원간본인 그 책을 중심으로 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2.2. 이 책은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중권은 불정심요병구산방(佛頂心療病救産方), 하권은 불정심구난신험경(佛頂心救難神驗經)이다. 주015)

이 언해서의 책권이 3권 1책이라고 해도 초간 당시부터 분책(分冊)을 염두에 둔 장책(粧冊)은 아니었던 듯하다. 각 권의 내용이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도 권에 따라 나눠지지 않고 일련장차(一連張次)로 되어 있어서, 분권(分卷)이 장(張)의 중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판심에도 권차 표시는 없다. 각권의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달라서 내용이 달라지는 부분을 경계로 하여 분권(分卷)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의 지적대로 오히려 원문인 한문 부분과 언해문 부분을 합편(合編)한 형식으로 보인다.
각 권의 내용을 반영하여 권명(卷名)이 서로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다. 저 앞에서의 지적대로 이 책의 언해 체제는 독특하다. 여타의 언해서들이 구결문을 앞쪽에 두고, 바로 이어서 그 구결문을 정음(正音)으로 옮긴 대역(對譯)의 형식을 취한데 비해, 이 책은 구결문 없이 언해문만을 책의 뒤쪽에 별도로 두었다. 그것도 원문과 언해문을 완전히 분리하여 앞쪽에는 변상도(變相圖)와 한문 원문만을 두고, 뒤쪽에 언해문을 별도로 배치했다.

대부분의 불전언해서들은 경(經)이나 경소(經疏)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단락을 짓고, 구결을 현토(懸吐)하여 구결문을 만든 뒤에 비로소 언해를 했다. 곧, 대역(對譯)의 형식인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은 형식이 다르다. 원문에 대당(對當)되는 언해문이 원문의 뒤쪽에 별도로 있다. 구결문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번역된 내용까지 당시 번역의 일반적인 상궤(常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언해된 글의 문체(文體) 주016)

번역을 문체의 문제로 접근한 논의로는 김완진(1983)이 있다.
는 대체로 구결문에 견인되어 직역투(直譯套)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비록 구결문이 없다고 해도 이 책 역시 직역투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구결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번역의 한 과정으로서 구결문을 전제(前提)한 채 언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한다. 다음의 문장이 이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1) 爾時觀世音菩薩而白釋迦牟尼佛言是我前身不可思議福德因緣欲令利益一切衆生起大悲心能斷一切繫縛能滅一切怖畏一切衆生蒙此威神悉能離苦解脫〈원문:1ㄱ,ㄴ〉

그 觀世音菩薩이 釋迦牟尼佛 오샤 “이 내 前身이 思議 몯홀 福德 因緣으로 一切 衆生을 利益게 코져 야 大悲心을 니르와다 一切 얼쿄 그츠며 一切 저포 업게 호니 一切 衆生이 이 威神을 니버 다 苦 여희여 버스리다”〈언해문:25ㄱ〉

이 부분은 경(經)의 서분(序分) 부분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께 고(告)하는 내용인데, 직접 인용의 문장형식으로 번역을 했다. 이러한 번역 양상은 당시에 간행되었던 대부분의 대역(對譯) 언해불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구결문이 없는 이 언해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앞에서의 설명대로 비록 구결문을 따로 두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번역의 단계에서 구결문이 전제가 된 때문이다.

2.3. 책의 각 장(張)은 좀 독특한 체제로 되어 있다. 반엽(半葉)의 매면(每面)마다 주017)

이 책은 선장본(線裝本)으로 판심(版心)이 접혀 있어서 반엽(半葉) 단위로 변상도가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엽(全葉) 그림인 것이다.
윗 단(段)에는 아래쪽에 있는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한 그림이 목판화로 새겨져 있다. 이른바 변상도(變相圖)이다. 변상도의 적당한 곳에 네모 테두리를 하고 아래쪽에 있는 경(經)의 내용 중 핵심에 해당하는 어휘나 구절을 써 두었다. 원문과 변상도가 있는 앞쪽은 목판본이고, 언해문이 있는 뒤쪽은 〈두시언해〉와 같은 을해자(乙亥字)의 활자본이다. 변상도는 맨 앞장의 앞면과 뒷면의 세로로 절반에 걸쳐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이 전면화(全面畵)로 판각(板刻)되어 있고, 뒷면의 세로로 절반 정도에 패기(牌記)가 있다. 경(經)의 원문이 있는 부분은 전엽(全葉) 반면화(半面畵)이다. 우리가 보는 부분은 나빗간을 중심으로 접혀 있어서 반엽화(半葉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엽화(全葉畵)이다. 원문의 맨 뒷면에는 다시 신장(神將)인 위타천(韋駄天)을 새긴 위타천상도(韋駄天像圖)가 전면화로 판각되어 있다. 그 뒤에 학조(學祖)의 발문이 있어서 간행과 관련된 시기나 경위(經緯)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나, 간기(刊記)는 없다. 발문 뒤에 언해문이 장철되어 있다.

원간본의 책 편차(編次)는 다음과 같다.

변상도(變相圖 : 觀世音菩薩像)와 패기(牌記)

불정심다라니경 권 상 원문 1장 앞면 1행~9장 뒷면 4행

불정심요병구산방 권 중 원문 9장 뒷면 5행~13장 뒷면 끝

불정심구난신험경 권 하 원문 14장 앞면 1행~22장 뒷면 6행

일자정륜왕다라니 22장 뒷면 7행~8행

자재왕치온독다라니 23장 앞면 1행~2행

변상도(韋駄天像圖 : 童眞菩薩像) 23장 뒷면

학조(學祖)의 발문(跋文) 24장 앞면 1행~뒷면 8행

〈이상 원문 부분 : 목판본〉

불정심다라니경 권 상 언해문 25장 앞면 1행~30장 앞면 12행

불정심요병구산방 권 중 언해문 30장 앞면 13행~32장 뒷면 9행

불정심구난신험경 권 하 언해문 32장 뒷면 10행~37장 뒷면 끝행

〈이상 언해문 부분 : 활자본〉

원간본의 서지(書誌) 사항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판식(板式)은 원문과 변상도가 있는 목판본(木版本)의 앞부분과 언해문이 있는 활자본(活字本)의 뒷부분이 서로 다르다. 상단(上段)에 변상도가 판각(板刻)된 때문에 원문이 있는 앞부분을 목판본으로 조성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판식(板式)이나 행관(行款) 등이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책크기 : 30.8㎝ × 18.3㎝

권수제 : 佛頂心陀羅尼經

권말제 : 佛頂心經

판심제 : 원문 부분 - 없음

언해문 부분 - 佛頂

판심 : 원문 부분 - 흑구(黑口)없이 상(上) 하향(下向) 흑어미

언해문 부분 - 대흑구(大黑口) 상하(上下)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

판식 : 원문 부분 - 4주 쌍변(雙邊)

언해문 부분 - 4주 단변(單邊)

반곽 : 21㎝ × 14.7㎝

행관 : 원문 ; 상단 - 변상도(變相圖), 하단 - 유계(有界) 8행 9자

언해문 ; 유계(有界) 14행 17자

주(註) 표시 : 흑어미(黑魚尾) 주018)

이 책에서는 불교 용어나 한자어 등 설명이 필요한 곳에는 주(注)를 달았는데, 주를 다는 방식은 언해문과 동일한 크기의 활자를 한 줄로 쓰되, 주의 위쪽과 아래쪽에 【흑어미】 표시를 두어 구분했다.

종이 : 저지(楮紙)

위의 편차와 서지 사항의 일별(一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원문과 언해문을 서로 분리해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판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목판본인 원문 부분의 위쪽에 있는 변상도는 매우 우아하면서도 정치(精緻)한 느낌을 주고, 주019)

이에 대해 천혜봉(1990:172)은 “교(巧)를 극(極)한 섬세·우아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판화 미술의 백미라 일컬어 추호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라고 판화 미술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한문 원문은 격조 있는 해서체(楷書體)로 단아(端雅)하면서도 힘이 있어 보인다. 변상도의 아래쪽과 경계를 이루는 한문 원문 부분의 상단(上端)에 하향(下向) 흑어미를 두고, 판심 서명은 따로 두지 않았다. 흑어미에서 조금 내려 온 위치에 장차(張次)를 두었다. 아래쪽에는 흑어미가 없다. 언해문 부분은 을해자(乙亥字)의 미려(美麗)한 활자로 되어 있다. 언해문의 활자는 작은 글자인데, 한자와 한글의 글자 크기는 같다. 한자에는 같은 크기의 활자로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되어 있고, 한글과 한자의 음역(音譯)에만 방점이 점획(點劃)으로 찍혀 있다. 판심 서명은 상하내향흑어미의 위쪽 흑어미 바로 아래에 한자로 ‘불정(佛頂)’이라고 쓰였다.

2.4. 이 책은 조선조 성종(成宗) 16년(成化 21, 1485 A.D.) 을사(乙巳) 2월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 한씨(韓氏)의 뜻에 따라 당시의 고승인 학조(學祖)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 있는 학조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곧, 이 책은 성종의 연수(延壽)와 마원(魔怨)의 소진(消殄)을 위하고, 창생(蒼生)을 시름과 궁핍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생산(生産)의 어려움에서 회복케 하려는 데 뜻을 두고 간행된 책이다. 아래 학조의 발문을 보면 그러한 의도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주020)

역주의 뒤에 학조의 발문(跋文) 전문(全文)과 그 내용을 우리말로 옮겨 놓았다.

(2) 我仁粹王大妃殿下, 爲主上殿下, 睿算靈長, 消殄魔怨 爰 命工人 効唐本詳密 而圖之楷正而寫之 鏤而刊之, 而壽其傳, 蓋益自利他. 使人人而樂誦, 推己及人, 令箇箇而知歸, 拯蒼生於憂逼之際, 復子女於生産之難. 〈학조의 발문(跋文)에서 발췌〉

우리 인수왕대비전하께서 주상전하를 위하여 영장(靈長)의 뛰어난 헤아림으로 마원(魔怨)을 다 없애고자, 이에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당(唐)나라본 주021)

이때 인수왕대비가 보았던 당본(唐本)이 명(明)나라 헌종(憲宗) 13년(成化, 1477년 A.D.)에 조성된 책인 이른바 ‘성화판(成化板)’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2006년 10월 원주시 치악산 명주사 소재 고판화박물관의 ‘2006 중국 고판화 특별전-판화의 원류를 찾아’ 전시회 도록을 통해서다. 성화판(成化板) 〈불정심다라니경〉 중 한 책이 이 고판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소장본(所藏本) 책을 전시하면서 소개한 내용이다. 이 책은 현재 강원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경전은 밀교(密敎) 경전인데 중국에서는 당대(唐代) 이후에 밀교가 점점 쇠퇴하여 이 경전을 구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학조(學祖)의 발문에도 일부 언급되어 있다.
책을 본받아 자세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자획을 바르게 베껴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중략〉.... 창생(蒼生)을 시름과 궁핍한 지경에서 구제하고, 자녀를 생산(生産)의 어려움에서 회복케 하려고 함이다. 〈학조(學祖)의 발문 중에서〉

저 앞에서 논의한 대로 이 책의 원간본은 현재 두 책이 전한다. 하나는 이희승선생 구장본으로 지금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호림(湖林)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이다. 호림박물관 소장의 책은 현재 보물 1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간(初刊)이 왕실의 원력(願力)에 의해 조성된 것인데 비해, 이후에 중간된 책들은 대부분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된 이른바 사찰판본(寺刹板본)이다. 이러한 중간본들은 거의가 원간을 판밑으로 한 복각본(覆刻本)들이다.

현전하는 원간 및 중간(重刊)의 판본들은 다음과 같다. 주022)

〈불정심다라니경언해〉와 한문본 〈불정심다라니경〉의 현전 상황 등 판본과 관련된 내용은 주로 김영배ㆍ김무봉(1998)과 각 도서관의 도서목록을 찾아서 확인했다.
한문본 중에는 언해본 중 원문이 있는 앞부분만을 분책하여 별책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복각 판본도 있고[순창 신광사판], 경의 일부 내용을 한글로 음역(音譯)한 책도 있어서 참고로 제시한다.

[1] 원간본 : 서울대 중앙도서관 (일석貴 294.333 B872) 소장.

 호림박물관(湖林博物館) 소장(보물 1108호).

[2] 중간본(복각본)

1). 평안도 대청산 해탈암(解脫庵)판, 명종(明宗) 16년(1561 A.D.) 간행.

간기 : 嘉靖四十年辛酉六月日平安道祥原地大靑山解脫菴開板

국립중앙도서관(古 1741-21) 소장. 고 이겸로님(산기 3-335) 소장.

2). 경북 상주 봉불암(奉佛庵)판, 인조(仁祖) 9년(1631 A.D.) 간행.

간기 : 崇禎四年辛未四月日刊留于慶尙道尙州牧地奉佛庵

 *뒤에 〈佛說高王觀世音經〉 첨부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가람古 294.333-B872g) 소장.

서울대 규장각 (古1730-12) 소장.

국립중앙도서관(古 1745-26) 소장.

3). 경남 동래 범어사(梵魚寺)판, 인조(仁祖) 22년(1644 A.D.) 간행.

국립중앙도서관 (한 21-197) 소장.

[3] 한문본

1). 무등산 안심사(安心寺)판, 선조(宣祖) 2년(1569 A.D.) 간행.

간기 : 隆慶三年己巳仲夏全羅道同卜無等山安心寺重刊

*모다라니(姥陀羅尼) 부분만 한글로 음역(音譯)하고, 그 밖의 부분은 원문에 중권점(中圈點)과 우권점(右圈點) 등 구두점(句讀點)만을 두었다. 주023)

한문본의 일부에 음역(音譯)이 있거나 구두점만 있는 것은 독송(讀誦)의 중요성이 강조된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 (古1730-59 소장). 서울대 규장각 (古1730-59A) 소장.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D213.19제79ㅇ3) 소장.

*안심사본은 제진언집(諸眞言集)과 합편되어 있어서 서명이 ‘제진언집’인 책도 있다. 주024)

안심사(安心寺) 판본의 책을 언해본으로 다룬 논의가 있으나,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언해본이 아니고 한문본이다. 다만,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모다라니(姥陀羅尼) 부분이 한글로 음역(音譯)이 되어 있고, 그 외의 부분은 구두점만 있을 뿐이다.

2) 전라도 순창군 회문산 신광사(新光寺)판, 숙종(肅宗) 37년(1711 A.D.) 간행.

간기 : 康熙五年辛卯九月日淳昌郡回門山新光寺開板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D213.19 불73ㅅ) 소장.

3) 경기도 양주 천마산(天摩山) 보정사(寶晶寺)판, 고종(高宗) 13년(1876 A.D.) 간행.

* 상권의 처음부터 두 번째 단락인 모다라니(姥陀羅尼)까지만 음역(音譯),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D213.19 불73ㅂ) 소장.

이상의 여러 판본 중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원간본은 원 소장자였던 이희승선생이 또 다른 소장(所藏) 고서(古書)였던 고성 운흥사(雲興寺)본 〈아미타경언해〉(1702년 간행)와 합편으로 영인·간행(1958년)한 바 있다. 그 영인본에 이희승선생이 간단한 해제(解題)를 붙였는데, 이후 이 책에 대한 논의는 주로 그 해제에 기대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해제의 내용이 너무 소략(疏略)하여 전모를 알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단편적으로 이 책을 소개한 것으로는 안병희(1979)와 김영배·김무봉(1998)이 있다.

2.5. 앞에서 밝힌 대로 〈불정심다라니경〉은 ‘다라니(陁羅尼)’를 적은 경전의 하나이다. ‘다라니(陁羅尼)’는 밀교(密敎)의 경전이다. 이 경전은 온 마음을 기울여서 읽고 지니면 재액(災厄)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널리 유통되었다고 한다. ‘불정(佛頂)’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정수리의 공덕을 인격화(人格化)하여 숭배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불상(佛像)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대상이다. ‘심(心)’은 의식(意識) 작용(作用)의 본체(本體)이며, 일반상(一般相)을 인지(認知)하는 정신작용이다. ‘다라니(陁羅尼)’는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읽거나 외우는 것을 이른다. 총지(摠持) 또는 능지(能持)라고도 한다. 진언(眞言)을 외워서 모든 법을 가진다는 뜻이다. 곧, 모든 악법(惡法)을 막거나 버리고 선법(善法)을 지킨다는 뜻이다. 번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이에게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무한한 의미와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흔히 짧은 구절로 된 것은 ‘진언(眞言)’이나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은 ‘다라니(陁羅尼)’,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다라니경(陁羅尼經)’은 ‘다라니’를 문자로 옮겨 놓은 경전(經典)이다. 따라서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陁羅尼經)’은 부처의 으뜸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경전인 것이다.

2.6.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상·중·하 3권의 내용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각 권의 내용을 반영하여 권명(卷名)도 차이가 있다. 상권(上卷)은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중권(中卷)은 불정심요병구산방(佛頂心療病救産方), 하권(下卷)은 불정심구난신험경(佛頂心救難神驗經)이다.

상권(上卷)에서는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중생이 번뇌(煩惱)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락(安樂)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說)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방법으로 앞부분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석존(釋尊)께 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는 관세음보살로 하여금 중생들을 안락(安樂)하게 하고, 번뇌를 막게 하기 위하여 모다라니(姥陀羅尼)를 독송(讀誦)하게 하는 형식이다. 이후에는 이 책의 원고를 썼거나 편찬한 이에 해당하는 설화자가 이 다라니의 내용을 독자인 중생에게 설명하고, 중생이 번뇌를 피하거나 막기 위하여 이 ‘다라니’를 송지(誦持)하라고 권설(勸說)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경전에서 독자인 중생은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경전은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의 고통(苦痛), 중죄(重罪), 악업(惡業)을 없애고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하여 이 다라니를 설(說)한다는 배경 설명으로, 이 경전의 가치를 말하고, 독송(讀誦)하는 형식으로 모다라니(姥陀羅尼)를 소개했다. ‘모다라니’는 관세음보살이 말세(末世)의 중생을 위하여 설한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경전의 앞부분을 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께 고(告)하는 형식을 빌려 이 경전의 편찬 목적 및 가치를 밝히고 있는데, 그 일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일체(一切)의 중생(衆生)에게 이익(利益)이 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서 모든 얽매임을 끊으며, 모든 두려움을 없게 하니, 일체(一切) 중생이 이러한 위신(威神)을 입고 다 고통(苦痛)을 여의어 벗어날 것입니다.”

(중략)

“...고통(苦痛) 받는 중생(衆生)을 위(爲)하여 액(厄)을 덜어주며, 난(難)을 당해 고통받는 중생(衆生)을 구(救)하는 무애자재심왕지인(無碍自在心王智印) 주025)

무애자재심왕지인(無碍自在心王智印):
<정의>‘무애자재(無碍自在)’는 장애(障碍)가 없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고, ‘심왕(心王)’은 의식(意識) 작용(作用)의 본체(本體)를 이른다. ‘지인(智印)’은 사람이 ‘인(印)’이 있으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이, 반야(般若)의 지(智)로써 인(印)을 삼는다면 실상(實相)의 이(理)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지인(智印)’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다라니법(大陁羅尼法)을 말하겠습니다. 일체(一切)의 고통 받는 중생(衆生)을 구(救)하여 (고통에서) 빼어내되, 모든 병(病)을 덜어주며 악업(惡業)이 중(重)한 죄(罪)를 없게 하겠습니다. 일체(一切)의 여러 선지(善智)를 이루며, 모든 마음의 원(願)을 빨리 채워서 일체(一切) 중생(衆生)에게 이익(利益)이 되게 하고, 안락(安樂)하게 하여 번뇌(煩惱)를 막게 하고 싶습니다.” 〈상권:25ㄱ~25ㄴ〉

서분(序分)에 해당하는 이 부분의 내용을 보면 〈불정심다라니경〉의 성격과 경전의 가치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경전의 핵심을 밝히고 있다. 그 아래의 내용은 이러한 가치를 가진 ‘다라니’이므로 송지(誦持)하라고 권설(勸說)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면 여러 불·보살의 가피(加被)를 입어 모든 재액(災厄)을 물리치고 안락(安樂)을 누리며,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중권(中卷)에는 경전의 독자인 선남자, 선여인을 대상으로 임산부가 해산(解産)할 때 이 다라니를 외우면 무사히 출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온갖 심신(心身)의 병마(病魔)와 고통의 예를 들고, 그 해소 방법으로서의 이 다라니의 역할과 효험(效驗)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심신의 병마를 극복하거나 치료를 위한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요병(療病)과 구산(救産)을 위한 처방문(處方文)으로서 ‘다라니경’의 효험이다. 경전에서는 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4) “만약 사람이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짐짓 달래어 권(勸)해서 이 다라니경(陁羅尼經) 상·중·하(上·中·下) 삼권(三卷)을 쓰면, 대장경(大藏經)에 맞춰서 이 공덕(功德)을 갖추어 이를 것이다. 사람이 열두 장(藏) 대존경(大尊經)을 만들고 자마황금(紫磨黃金)으로 불상(佛像)을 주성(鑄成)하여 이루는 것과 같으니, 이 다라니경(陁羅尼經)을 공양(供養)한 위신력(威神力)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중권:32ㄱ~32ㄴ〉

하권(下卷)에서는 이 다라니를 지니면 어떠한 위험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거나 영험(靈驗)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몇 가지 예화(例話)를 들어서 소개하고 있다. 곧, 다라니의 효험에 대한 설명이다. 권명(卷名) 그대로 이 다라니를 송지(誦持)한 덕분에 얻은 구난(救難)과 신험(神驗)의 기록이다.

(5)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능(能)히 이 경전(經典) 세 권(三卷)을 써서 부처의 집에 오색(五色) 재전(裁剪:자투리)으로 주머니를 기워 넣으며, 혹 몸을 좇아 공양(供養)하는 이는, 이 사람이 만약 머무르거나 눕거나 위험한 곳에 있으면, 언제나 신장(神將)인 백천(百千)의 나라연(那羅延) 주026)

<정의>‘나라연(那羅延)’은 ‘견고(堅固)하다’는 뜻이다. 또는 힘이 아주 뛰어난 천상(天上)의 역사(力士)를 이르기도 한다.
금강밀적(金剛密跡) 주027)
<정의>‘금강밀적(金剛密跡)’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큰 위엄을 나타내어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천신(天神)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밀적(密迹)’은 항상 부처를 모시고 부처의 비밀한 사적을 기억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곧, 금강역사(金剛力士)를 이른다.
과 대력(大力) 무변(無邊)의 아타발구라신(阿吨鈸拘羅神) 주028)
아타발구라신(阿吨鈸拘羅神):
<정의>‘아타발구라신(阿吒鈸拘神)’은 밀교(密敎)의 16 대야차대장(大夜叉大將)의 하나인 광신귀신대장(曠神鬼神大將)을 이른다. 곧, 대원수명왕(大元帥明王)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다라니를 외우는 이는 온갖 어려움에서 자기의 원(願)대로 벗어난다고 한다.
이 몸에 검륜(劒輪)을 가지고 밤낮을 좇아 호위(護衛)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난(難)을 덜지 아니한 이가 없으며, 재액(災厄)을 구(救)하지 아니한 이가 없으며, 사(邪)를 끊지 아니한 이가 없으리라.”〈하권:36 ㄱ~36ㄴ〉

마지막에는 이러한 예화를 통해 느낀 바가 큰 중생들에게, 이 경전의 수지(受持)와 독송(讀誦)의 봉행(奉行)을 권하는 내용으로 결론을 삼는다.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5') “그러므로 알라. 이 경(經)의 공덕(功德)이 끝이 없으니, 기뻐하여 신수(信受)하고 머리에 얹어서 봉행(奉行)할지니라.”〈하권:37ㄴ〉

Ⅲ. 어학적 고찰

3.1. 개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구결문 없이 언해문만 있는 책이다. 언해문은 작은 활자로 되어 있다. 정음과 한자가 모두 같은 크기의 소활자(小活字)이다. 한자음 역시 한자와 같은 크기의 소활자(小活字)로 되어 있다.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되어 있다. 한자음과 정음에는 점획(點劃)으로 방점이 찍혀 있다. 어려운 한자어나 불교 용어에는 주(注)를 달아서 이해를 도왔다. ‘주(注)’의 위와 아래에는 흑어미(黑魚尾) 표시를 하여 일반 문장과 구분했다.

이 책의 원고를 썼거나 책을 편찬한 이인 설화자는 상권의 앞부분에서 관세음보살과 석존이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경전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 대화를 비롯한 문장의 구성은 비록 구결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축자역(逐字譯), 곧 직역(直譯)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구결문이 겉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구결문을 전제한 번역의 글이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판단한다.

어떻든 이 책에는 ‘다라니’를 ‘송지(誦持)’하면 거기에 따르는 과보(果報)가 있을 것이라고 믿음을 주는 내용이 많다. 이러한 ‘다라니’ 경전의 특성으로 인해 종결형식은 추측법의 평서형 종결어미 ‘-리라’의 출현이 빈번한 편이다.

이 책은 15세기 후반인 1485년에 간행된 책이다. 언어 사실에서는 같은 해에 같은 체제로 간행된 책인 〈영험약초언해〉와 더불어 당시 표기법의 특성을 보인다. ‘ㅸ’이나 ‘ㆆ’이 쓰이지 않고, ‘ㅿ’이나 ‘ㆁ’이 쓰이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한편으로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에서처럼 유성자음 다음에서 분철한 예가 일부 있는가 하면, 〈원각경언해〉(1465년 A.D.) 이후 보이지 않던 ‘ㅆ’과 ‘ㅉ’이 쓰이기도 했다. 사이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용언 어간 ‘-’가 무성자음 /ㄱ, ㄷ/ 등으로 시작되는 어미 ‘-거나, -거든, -고져, -더니, -게, -디’와 만날 경우, 대부분 격음화된 형태인 축약형으로 표기하였다.

일부에서의 예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정음표기의 특징 중 하나는, 한자어인 경우 이를 한자로 적지 않고 정음(正音)으로 쓴 예가 몇몇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자어라는 인식이 이때 벌써 엷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판단한다.

여기서는 같은 시기에 간행된 다른 불경 언해서들과 비교하면서 이 책의 어학적 특성, 특히 표기법 등을 살피려고 한다.

3.2. 각 권별 화법의 특성

이 책은 한문본 ‘다라니경’을 우리말로 옮긴 언해본이다. 3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권별(卷別) 내용에 따라 권명(卷名)을 달리 했고, 각 권의 구성도 약간씩 다르다. 각 권별로 화법(話法)의 특성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6) ㄱ. “됴타 됴타 善男子 善女人이여 내 나라해 나도다” 시고 護持호 눈 티 샤 어엿비 너기샤 마디 아니시리라 이 陁羅尼 功德이 그지업스니 며 사미 보거나 듣거나 스거나 디니거나 供養커나 면 그 福 닐어 혜아리디 몯리라〈상권:28ㄱ〉

 ㄴ. 다가 善男子 善女人이 과글이 가알피 어더 니도 몯 사  朱砂로 이 陁羅尼와 秘字印을 써 靑木香과 됴 茱萸로 글횬 므레 섯거 면 一切 病患이 됴티 아니니 업스리라〈중권:31ㄱ~31ㄴ〉

 ㄷ. 녜 罽賓陁國에 病이 流行야  나라해 니 病 어든 사미  이틀 디내디 아니야 다 죽더니 (후략)〈하권:32ㄴ〉

상권은 경의 내용에 대한 설화자(說話者)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의 온갖 번뇌를 없애고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하여 이 다라니를 설(說)한다는 내용으로 이 경전의 가치를 말한 후, (6ㄱ)에서처럼 이와 같은 복덕(福德)이 있을 것이니, 중생들에게 이 ‘다라니’를 송지(誦持)하라고 권설(勸說)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중권은 (6ㄴ)의 예처럼 요병(療病)과 구산(救産)을 위한 처방문(處方文)으로서 ‘다라니경’의 효험(效驗)에 대한 설명이다. 대화 없이 설화자가 주로 청자에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 설화자의 상대인 청자, 또는 독자로 설정된 사람은 선남자, 선여인이다.

하권에서는 (6ㄷ)과 같이 이 다라니를 송지(誦持)한 덕분에 얻은 구난(救難)과 신험(神驗)의 예화를 들고, 그런 신험이 있으므로 중생들에게 이 경전을 수지(受持)·독송(讀誦)하여 봉행(奉行)하라고 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설화자가 일방적(一方的)으로 설명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하권의 예화(例話) 부분은 삽화(揷話)의 성격상 대화체가 많다.

3.3. 문장 종결 형식

이 책은 ‘다라니’의 언해인데, 다라니경전의 특성은 중생들이 ‘다라니’의 영험(靈驗)을 믿고 송지(誦持)하면 재액(災厄)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음 주는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책의 종결형식은 추측법의 평서형 종결어미 ‘-리라’의 출현이 빈번한 편이다. 이 경전의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결 형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장은 추측법으로 끝맺음을 한다.

(7) ㄱ. 이 陁羅尼經을  닐굽 遍을 외오면 願이 이디 몯니 업스며  一切 사  得야 一切 惡趣예 러디디 아니리라 〈상:29ㄴ〉

ㄴ. 그  이웃 나라햇 長者ㅣ 지븨 와 무러 닐오 “長者 엇디 樂디 아니뇨”〈하:33ㄱ~ㄴ〉

ㄷ. 리 朱砂로 이 頂輪王秘字印을 써 香水예 면 곧 주근 아기 미러 리오리니 리 므레 리라〈중:30ㄴ~31ㄱ〉

ㄹ. (전략) 授記시고 니샤 “됴타 됴타 善男子 善女人이여 내 나라해 나도다” 시고〈상:28ㄱ〉

ㅁ. “(전략) 一切 衆生을 利益 安樂야 煩惱 막게 야지다 願온 慈悲로 어엿비 너기샤 드르쇼셔”〈상:25ㄴ〉

(7ㄱ)은 추측법의 평서형종결어미 ‘-리라’에 의해 완성된 문장이다. 이 경의 편찬자인 설화자가 청자인 선남자, 선여인에게 이르는 말이다. 경전을 암송(暗誦)하면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책은 대부분 이러한 종결형식으로 되어 있다. (7ㄴ)은 이웃 나라의 장자(長者)와 대화하는 내용이다. 대화 가운데 묻고 대답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묻는 말인 경우, 이처럼 의문형 종결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화(例話)로 구성된 하권에 몇몇 예가 보인다. 대체로 1,3인칭 설명의문형이다. (7ㄷ)은 ‘-라’체의 명령형 종결형식이다. 이 책에 예가 드문 편인데, 요병(療病)과 구산(救産)의 비법(秘法)을 전하는 중권을 비롯한 몇몇 곳에 이러한 문장이 보인다. (7ㄹ)은 설화자의 설명에 나오는 부분인데, 이 ‘다라니’경을 외우고 염(念)하면 불·보살들이 수기(授記)한 후에 이를 것이라는 말의 내용이다. 이 책에 다른 예로는 ‘-리로다’형 구성이 두엇 주029)

그 예는 아래와 같다. ‘그럴 써 供養호미 어루 다 니디 몯 알리로다’〈하:33ㄴ〉 / ‘加被논 功德은 다 니디 몯리로다’〈하:37ㄴ〉
정도 더 있는 감탄형 종결형식이다. (7ㅁ)은 역시 이 책에 그 예가 드문 ‘쇼셔’체의 소망을 나타내는 평서형 종결형식이다. 주030)
종결어미 ‘-지다’는 앞에 ‘-거/어-, -아/어-’ 등의 선행을 요구하는데, 이를 ‘쇼셔’체 ‘청원의 명령법’으로 본 견해(안병희, 이광호, 1990:247~248)와 ‘소망 평서형’으로 보는 견해(고영근, 1997:333~334)가 있다.
마지막 문장은 ‘쇼셔’체의 명령형 종결형식이다.

3.4. ㅸ

‘ㅸ’은 훈민정음의 초성 17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의」 및 「해례 제자해」에서 순경음으로 규정된 후 〈용비어천가〉(1447년간), 〈석보상절〉(1447년 간행〉, 〈월인천강지곡〉(1447년간행), 〈몽산법어언해〉(?1459년 간행), 〈월인석보〉(1459년 간행) 등의 정음 초기 문헌에 쓰인 바 있다. 간경도감 간행의 언해서 중에는 〈능엄경언해〉(1462년간), 〈아미타경언해〉(1464년간), 주031)

아미타경언해:
〈아미타경언해〉(1464년 간행)에는 ‘ㅸ’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모두 이 음운이 실현되었다. 이는 〈아미타경언해〉의 내용이 이보다 앞서서 간행된 〈월인석보〉(1459년 간행) 권7에 실려 있고,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석보상절〉(1447년 간행) 권7에도 실려 있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본다. 또, 이보다 3년쯤 전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되는 활자본 〈아미타경언해〉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1467년간) 등에 몇몇 예가 보인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용언 활용형과 겸양법 선어말어미 등에서 예외 없이 ‘오, 우’로 바뀌었다.

(8) ㄱ. 오샤〈25ㄱ〉, 苦로왼〈27ㄱ〉, 요괴왼〈29ㄱ〉/智慧왼〈30ㄴ〉, 셜워〈30ㄴ〉, 두리운〈31ㄴ〉, 法다오〈34ㄴ〉, 가온〈35ㄴ〉, 어려운〈36ㄱ〉, 외니라〈36ㄱ〉, 어드운〈37ㄱ〉

 ㄴ. -온〈25ㄴ〉, 보와〈31ㄴ〉, 닙와〈35ㄴ〉, 저와〈37ㄴ〉, 연와〈37ㄴ〉

 ㄷ. 글왈 〈32ㄴ〉

이 책에서 ‘ㅸ’은 쓰이지 않았다. (8ㄱ)의 예에서처럼 용언 활용형은 말할 것도 없고, (8ㄴ)의 겸양법 선어말어미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 ‘오, 우’로 바뀌었다. ‘ㅸ〉ㅇ’ 형태는 이 문헌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다. ‘연와’는 ‘엱와’의 연철표기이다. (8ㄷ)은 ‘*글’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초기 문헌부터 ‘ㅸ’이 실현되지 않았다.

3.5. ㆆ

‘ㆆ’은 정음 초기 문헌에서 주로 동국정운 한자음의 영모자(影母字) 표기와 종성 ‘ㄹ’ 다음에 와서 입성 표시 글자로 쓰였다. 고유어 표기에서는 사이글자나 동명사어미 ‘-ㄹ’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ㅭ’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주032)

동명사어미 ‘-ㄹ’과 ‘-ㅭ’의 교체에 대해서는 김무봉(1993:10~12), 김무봉(1997:67~68) 참조.
그러나 이 문헌에서 사이글자 표기는 ‘ㅅ’으로 통일되었고, 동명사어미는 모두 ‘-ㄹ’로만 실현되어 ‘ㆆ’이 쓰이지 않았다.

(9) ㄱ. 懺悔홀 고디〈27ㄱ〉, 미둘 〈29ㄱ〉, 나 시졀에〈30ㄴ〉, 命終 제〈31ㄴ〉

 ㄴ. 홀딘댄〈29ㄱ〉, 아롤디니라〈34ㄱ〉, 奉行홀디니라〈37ㄴ〉

 ㄷ. 아니홀 야〈36ㄴ〉

 ㄹ. 그럴〈33ㄱ, 34ㄱ, 37ㄴ〉, 올〈 35ㄴ〉

 ㅁ. 因 〈25ㄱ〉, 佛 〈25ㄱ〉

위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책에서 동명사어미는 대부분 ‘-ㄹ+전청자형’ 등으로 실현되어 ‘ㆆ’의 쓰임이 없다. (9ㄱ)은 ‘-ㄹ’의 후행요소가 무성자음인 경우이고, (9ㄴ)은 ‘-ㄹ’이 후행의 ‘디-(〈+이-)’와 통합된 형태이다. 주033)

〈석보상절〉(1447년 간행) 등에 나타나던 동명사어미 ‘ㅭ디-’형이 ‘-ㄹ디’형으로 교체된 시기는 주로 〈능엄경언해〉(1462년 간행) 이후가 된다.
(9ㄷ)은 동명사어미 ‘-ㄹ’ 뒤에 합용병서가 온 경우이다. (9ㄹ)은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인데, 정음 초기 문헌에는 ‘-ㄹ/ ㄹ씨’로 나타났었다. 주034)
동명사어미 ‘-ㅭ’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 중 ‘-ㅭ’은 〈능엄경언해〉 등에서 더러 보이나, ‘ㅭ’나 ‘ㅭ시’는 정음 초기 문헌부터 쓰이지 않은 듯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헌에는 이 형태 ‘-ㄹ’만이 쓰였을 뿐이다. (9ㅁ)은 동국정운 한자음의 용례이다.

3.6. ㅿ

유성마찰음 ‘ㅿ’은 훈민정음 초성체계에서는 불청불탁(不淸不濁)의 반치음이다. 일모(日母)에 해당된다. 정음 초기 문헌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15세기 문헌에 두루 나타나며 16세기 중반까지 쓰였다. 이 책에서는 ‘ㅿ’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모두 실현되었다. 다만, 간경도감 간행의 책에 보이는 종성에서의 예는 이 책에 없다. 이런 현상은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다. 8종성 표기에 충실한 때문으로 본다. 이 책에서 ‘ㅿ’의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모두 모음간에서(‘V-V’)의 용례이다.

(10) ㄱ. 미〈27ㄴ〉, 아〈31ㄴ〉, 마〈31ㄴ〉, 예〈31ㄴ〉, 눈〈28ㄱ〉, 믌〈35ㄱ〉

 ㄴ. 지〈27ㄱ〉, 〈29ㄴ〉,

 ㄷ. 오〈29ㄴ〉, 그기〈32ㄱ〉

 ㄹ. 供養오니〈26ㄴ〉, 보오〈27ㄴ〉, 向와〈27ㄴ〉, 저와〈 37S〉

 ㅁ. 업슨〈27ㄱ〉/ 업슬〈금강경언해 145ㄴ〉 cf. 믌

(10ㄱ)은 체언 어간 내부 모음 간에 나타난 ‘ㅿ’의 용례와, 체언과 조사 통합형에 나타난 ‘ㅿ’의 용례이다. (10ㄴ)은 용언 활용형과 명사형어미 통합형에서의 용례이고, (10ㄷ)은 부사의 내부에 쓰인 용례이다. (10ㄹ)은 겸양법 선어말어미 ‘--’ 통합형에서의 용례이다. 이 문헌 당시에는 ‘ㅸ’이 쓰이지 않아서 ‘-오-’의 형태로 나타난다. ‘저오-’는 /ㅿ/ 앞에서 /ㄹ/ 이 탈락된 형태이다. (10ㅁ)은 이보다 앞선 문헌인 〈금강경언해〉(1464년 간행) 등에서는 ‘-’으로 표기되었고, 이 책에서도 조사 통합형인 경우에 ‘믌〈35ㄱ〉’로 실현된 점에 비추어 볼 때 ‘없-’은 8종성 규정에 충실한 표기의 예로 보인다.

3.7. 사이글자

사이글자는 체언이 결합할 때 음성 환경에 따라 체언 사이에 끼어드는 자음글자이다. 〈용비어천가〉(1447년간)에는 ‘ㄱ, ㄷ, ㅂ, ㅅ, ㅿ, ㆆ’의 6자가 쓰였고, 「훈민정음 언해」(1459년 이전 간행)에는 ‘ㄱ, ㄷ, ㅂ, ㅸ, ㅅ, ㆆ’의 6자가 쓰였다. 〈석보상절〉에 이르러 ‘ㅅ’으로 통일을 이룬 듯하나 ‘ㄱ, ㄷ’이 쓰인 예도 있다. 뒤에 간행된 〈월인석보〉(1459년간)에는 ‘ㅅ’ 외에 ‘ㄱ, ㄷ, ㅂ, ㆆ’이 쓰였고,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간)에는 ‘ㅅ’ 외에 ‘ㄷ, ㆆ’이 쓰였으나, 〈아미타경언해〉(1464년간)와 같은 해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등에서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다만 〈반야심경언해〉에는 ‘ㄹ’ 다음에 ‘ㆆ’이 쓰인 예가 있다. 주035)

〈반야심경언해〉에서 ‘ㄹ’ 다음에 사잇글자로 ‘ㆆ’이 쓰인 것으로는 ‘ 사교미라〈11ㄴ〉,  사교〈19ㄱ〉’ 등이 있다.

이 책에서는 사이글자와 구 구성의 속격에서 모두 ‘ㅅ’으로 통일되었다.

(11) ㄱ. 우 조〈31ㄴ〉, 父母ㅅ 기픈〈27ㄴ〉, 부텻 알〈28ㄴ〉, 부텻 三昧〈30ㄱ〉, 뎘 님자히〈36ㄴ〉, 아 因緣을〈33ㄴ〉, 轉輪王ㅅ 福〈29ㄴ〉

 ㄴ. 바〈27ㄱ〉, 西ㅅ녁〈32ㄴ〉, 간도〈32ㄴ〉, 믌〈35ㄱ〉, 믈〈35ㄴ〉, 뎘돈〈36ㄴ〉

(11ㄱ)은 구 구성의 속격에서 ‘ㅅ’이 실현된 예이고, (11ㄴ)은 합성어 사이에 사이글자로 ‘ㅅ’이 온 예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ㅅ’ 외의 어떤 표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책에는 속격의 ‘ㅅ’이 출현할 만한 환경이 많다. 고유어와 고유어 사이, 한자어와 한자어 사이, 고유어와 한자어 사이에서 모두 볼 수 있다.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 중 〈반야심경언해〉(1464년 간행)를 제외한 다른 문헌에서는 ‘ㅅ’ 이외의 사이글자 표기 용례가 없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간경도감 간행 문헌에 이르러 사이글자가 ‘ㅅ’으로 통일되었고, 간경도감 이후에 간행된 책인 이 문헌 역시 예외가 아니다.

3.8. 초성병서 표기

3.8.1. 각자병서 표기는 〈원각경언해〉(1465년 간행) 이래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예외적으로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문헌에 보이는 각자병서 8자(ㄲ, ㄸ, ㅃ, ㅉ, ㅆ, ㆅ, ㆀ, ㅥ)가운데 ‘ㅉ, ㅆ’의 용례가 보인다.

(12) ㄱ. 써〈27ㄴ, 30ㄴ, 34ㄱ, 36ㄱ〉, 쓰면〈32ㄱ〉, 쑤믈〈33ㄴ〉, 쓰게〈34ㄱ〉 cf. 스거나〈28ㄱ, 28ㄴ〉

 ㄴ. 눈〈28ㄱ〉, 연와〈37ㄴ〉

(12)의 예와 같이 이 문헌에서 각자 병서는 주로 동사 어간 ‘쓰-[書]’의 활용형에서 볼 수 있다. 그 외에는 명사나 동사에서 각자병서가 쓰인 두 어휘의 예를 더 볼 수 있다. (12ㄱ)의 ‘쓰-’는 같은 책에서 ‘스-[書]’로 나타나기도 한다. (12ㄴ)의 ‘눈[眼睛]’는 〈능엄경언해〉(1462년 간행) 등에 나오는 어휘인데 주로 이렇게 표기되었다. 〈영험약초언해〉(1485년 간행)에도 같은 표기가 나온다. ‘연와[戴]’는 ‘엱와’의 연철 표기이다.

3.8.2. 이 책에는 합용 병서의 용례도 몇몇 눈에 띈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 보이던 ‘ㅺ, ㅼ, ㅽ, ㅻ ; ㅳ, ㅄ, ㅶ, ㅷ ; ㅴ, ㅵ’ 중 ‘ㅅ’계열의 ‘ㅺ, ㅼ ㅽ,’ ‘ㅂ’계열의 ‘ㅳ, ㅄ’, ‘ㅄ’계열의 ‘ㅴ’ 등이 보인다.

(13) ㄱ. (ㅺ) : 釋迦牟尼佛〈25ㄱ〉/부텻긔〈30ㄱ〉, 디〈27ㄱ〉, 미〈29ㄱ〉, 삼면〈30ㄴ〉, 〈33ㄱ〉, 야〈36ㄴ〉

  (ㅼ): 히〈27ㄱ〉, 〈30ㄴ〉, 〈30ㄴ, 32ㄱ〉, 리〈35ㄱ〉

  (ㅽ) : 리〈25ㄴ, 30ㄴ, 31ㄴ, 33ㄱ〉, 혀〈25ㄴ〉

 ㄴ. (ㅳ): 술위〈27ㄴ〉, 나디〈28ㄴ, 34ㄱ〉, 러디디〈29ㄴ〉, 뎃〈30ㄱ〉

  (ㅄ) : 려〈36ㄴ〉

  (ㅶ) : 긔〈 31ㄴ〉

 ㄷ. (ㅴ): 그〈25ㄱ, 25ㄴ, 26ㄴ, 33ㄱ〉, 〈35ㄱ〉, 어〈36ㄴ〉,  〈36ㄴ〉, 이고〈36ㄴ〉

(13ㄱ) ‘부텻긔’의 ‘ㅅ긔’은 ‘ㅅ’이 존대자질을 가진 체언 다음에 오는 관형격조사인데, 여기에 여격조사 ‘-긔’가 통합된 형태이다. 이 형태는 초기 문헌에서부터 존대자질을 가진 체언 다음에 와서 여격조사로 기능했다. 현대국어 높임의 여격조사 ‘-께’의 직접적 소급 형태이다. 당시에는 이 예에서처럼 고유의 다음에서는 분철한 형태인 ‘-ㅅ긔’가 쓰였고, 한자어 다음에서는 ‘-’의 형태로 나타난다.

‘’도 ‘’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여기의 ‘ㅅ’은 관형격조사이고, ‘’은 ‘끝’의 의미를 가진 명사인데, 두 형태가 통합된 ‘’은 문법화하여 현대국어의 접미사 ‘-껏’의 기능을 가진다. 이 형태는 〈석보상절〉(1447년 간행) 이래 16세기에도 널리 쓰였다. ‘ㅻ, ㅷ, ㅴ’은 이 문헌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다. ‘ㅻ’은 〈석보상절〉 등 초기의 문헌에만 주로 나타난다.

3.9. 종성표기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종성 표기는 『훈민정음』해례의 종성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8종성 외에 다른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용비어천가〉(1447년 간행) 이래 간경도감 간행의 언해 문헌에 종종 보이던 ‘ 없-’ 등도 이 문헌에서는 모두 ‘ 없-’으로 표기되었다. 곧, 유성후두마찰음 ‘ㅇ[ɦ]’ 앞에서 ‘ㅅ’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ㅿ’이 이 문헌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14) ㄱ. 갑-(〈갚-) : 이제 와 원슈를 갑고져 다니〈35ㄴ〉

 ㄴ. -(〈-) : 請야 쑤믈 디 아니야셔〈33ㄴ〉

  긋-(〈긏-) : 邪 긋디 아니니 업스리라〈36ㄴ〉

  (〈) : 五色 젼으로  기워 녀흐며〈36ㄱ〉

 ㄷ. 업-(〈없) : 미둘 업거든〈29ㄱ〉 cf. 반기 겨지븨 모 옮겨〈28ㄴ〉 주036)

중세국어 당시에 종성에 합용병서가 올 경우, 자음으로 시작되는 음절 앞이나 휴지 앞에서는 종성에 대표음 하나만 실현되거나 겹받침일 경우는 8종성에 해당하는 자음으로 바뀌어 표기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옮-’은 이 예의 경우처럼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당시의 겹받침이 유성자음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두시언해〉(1481년 간행)에 ‘옴도다 (권20:26ㄴ)’가 쓰이기도 했다.

 ㄹ. -(〈앉-) : 寶蓮花애 거든〈28ㄴ〉

 ㅁ. 앏(〈앒) : 간도 앏뒤헤 나디 아니야〈34ㄱ〉

 ㅂ.  없-(〈 없-) : 觀世音菩薩이  업슨 大神力과〈29ㄱ〉

(14ㄱ)은 기저형에서 음절 말음으로 ‘ㅍ’을 가지는 어휘가 자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나 휴지 앞의 환경에서 대표음 ‘ㅂ’으로의 교체를 반영한 표기인 것이다. (14ㄴ)은 ‘ㅊ’, (14ㄷ)은 ‘ㅄ’, (14ㄹ)은 ‘ㄵ’, (15ㅁ)은 ‘ㄿ’이 자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나 휴지 앞에서 모두 대표음으로 교체되었다. 중화(中和)를 반영한 표기이다. 이 문헌에서 여덟 종성 외에 다른 종성은 쓰이지 않았다. (14ㅂ)은 앞의 설명대로 8종성 표기의 예외 중 하나였는데, 여기서는 해례의 규정에 충실한 것으로 본다.

3.10. 주격과 서술격표기

〈불정심다라니경언해〉에서 주격과 서술격은 선행 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그 기저형인 ‘-이’와 ‘이-’의 교체형이 대체로 동일(同一)한 양상으로 실현되었다. 주격조사는 ‘이, ㅣ, ∅’로 실현되었고, 서술격조사는 ‘이-, ㅣ-’로 실현되었다. 서술격조사에서 ‘∅’는 해당하는 어휘가 없어서 빈칸이다. 구결문이 있는 문헌 중에는 구결문과 언해문의 주격과 서술격 표기 양상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는데, 구결문이 없는 이 책의 주격 및 서술격 표기 양상은 다른 15세기 문헌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하지만 고유어와 한자어에서 부분적으로 다른 예가 있다.

3.10.1. 주격조사의 표기는 ‘이,ㅣ, ø’로 실현되었다. 다만, 한자로 적힌 경우 선행 체언의 말음이 ‘이,ㅣ’인데도 주격조사에 ‘-ㅣ’가 실현된 경우가 많다.

(15) ㄱ. 이 : 한자어 一切 衆生이 이 威神을 니버〈25ㄱ〉

  고유어 미 散亂티 아니야〈27ㄴ〉/ 쳔이 그지 업수〈33ㄱ〉

 ㄴ. ㅣ : 한자어 녜 波羅奈國에  長者ㅣ 이쇼〈33ㄱ〉

  고유어 :네 큰 慈悲로 리 니라〈25ㄴ〉

 ㄷ. ø : 고유어 어미 보고 문득 목 노하  우러〈35ㄱ〉 / 아 어미로 죽거나〈30ㄴ〉

 ㄹ. ∅⟶ㅣ: 한자어 이 陀羅尼ㅣ 十惡 五逆과〈26ㄴ〉, 그지 업슨 俱胝ㅣ〈29ㄴ〉, 沙彌ㅣ〈37ㄴ〉 / 百千萬罪ㅣ 다 업스리라,〈26ㄴ〉, 闡提ㅣ 法 아닌 法 니며〈 26ㄴ〉, 胎ㅣ 야디여〈30ㄴ〉

위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격조사는 대체로 ‘이,ㅣ, ø’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체언이 한자로 적힌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15ㄱ)에는 종성이 있는 고유어 ‘’과 ‘쳔’에 주격조사 ‘-이’가 통합된 예가 있는데, ‘쳔(〈錢糧)’은 분철했다. 주037)

여기서 체언 ‘쳔’과 조사 ‘이’를 분철한 것은 이 어휘의 어원이 한자 ‘천량(錢糧)’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錢糧’은 살림살이에 드는 돈과 양식, 또는 재물을 이른다.
(15ㄹ)은 한자어인 경우인데, 체언의 음절 말음이 / i , j/ 인데도 주격조사에 ‘ㅣ’가 실현된 예이다. 이는 한자 표기에서 주격조사 표시가 없으면 주어와 다른 문장 성분과의 구분이 모호해서 야기될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보인다. 이 문헌에 구결문이 실려 있지 않지만 구결문이 있었다면 그 구결문에도 이런 표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 무렵에 간행된 책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038)
이런 양상은 간경도감본 중 〈금강경언해〉(1464년 간행)의 구결문에 이미 나타나고, 이보다 나중에 간행된 〈육조법보단경언해〉(1496년 간행)에는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금강경언해’의 예에 대해서는 김무봉(1993:18~21)참조,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예에 대해서는 김무봉(2006:31~32) 참조.

주격조사 통합에서 성조의 변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있다. 체언이 평성이면 (15ㄴ)의 고유어 예처럼 주격조사 ‘-ㅣ’와의 통합으로 성조(聲調)가 상성(上聲)으로 바뀌지만, 거성(去聲)이거나 상성이면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독으로 쓰일 경우, 1인칭 대명사 ‘나[我]’는 거성이고, 2인칭 대명사 ‘너[汝]’는 평성이다.

(15') ㄱ. :네(〈너+·ㅣ)〈25ㄴ〉 ; 주격(상성)/ 네(〈너+ㅣ)〈13ㄱ〉 ; 속격(평성)

 ㄴ. ·내(〈·나+ㅣ)〈25ㄱ〉 ; 주격(거성)/ 내(〈·나+ㅣ)〈25ㄱ〉 ; 속격(평성)

(15'ㄱ)의 ‘네’는 2인칭 대명사 ‘너[汝]’에 주격조사와 속격조사 ‘-ㅣ’가 통합된 형태이다. 주격조사와 통합될 때는 상성으로 성조가 바뀌나, 속격조사와 통합시에는 성조에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15'ㄴ)의 ‘·나[我]’는 단독형이 거성(去聲)이었으므로 주격조사와의 통합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3.10.2. 서술격조사도 음운론적 조건에 따른 교체가 주격조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문헌에는 서술격조사의 용례는 매우 적은 편이다. 고유어 ‘∅-’와 한자어 ‘ㅣ-, ∅-’는 해당하는 어휘 용례가 없어서 빈칸이다.

(16) ㄱ. 이 : 한자어 엇던 모딘 因緣이어뇨〈35ㄱ〉

  고유어 이제 마 열다시니〈33ㄴ〉

 ㄴ. ㅣ : 고유어 선어 얌에라〈31ㄱ〉

의존명사 ‘, ’는 서술격조사와 통합할 때 체언의 ‘ᆞ’가 탈락되는데, 이 문헌에 몇몇 예가 보인다. 이런 현상은 다른 불경언해서에서도 마찬가지다.

(16') ㄱ. 아롤디니라〈34ㄱ〉, 奉行홀디니라〈37ㄴ〉

 ㄴ. 그칠시라〈27ㄱ〉

3.11. 분철표기

15세기에 간행된 정음문헌들의 곡용형과 활용형 표기 방식은 대부분 연철이었다. 다만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ㄴ, ㄹ, ㅁ, ㅿ’ 등 유성자음일 때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와 통합하면 분철 표기를 했다. 용언의 경우에는 어간 말음 ‘ㄴ, ㅁ’이 어미 ‘-아’와 만나면 분철 표기를 했다. 이는 〈월인천강지곡〉의 편찬자인 세종의 형태소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표기일 것이다. 이후에 간행된 책들에서도 이러한 환경에서 분철 표기한 예가 더러 보인다.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서는 체언의 경우 조사와의 통합에서 분철한 예가 있는데, 일부는 어원이 한자어인 경우이다. 비록 정음으로 적었다고 하더라도 한자어와 국어를 혼용할 경우 분철했던 습관이 반영된 것으로 판단한다. 이 책에서의 분철 조건 역시 〈월인천강지곡〉의 경우와 상사하다. 선행체언의 말음이 ‘ㄴ, ㄹ, ㆁ’일 경우에 분철 표기했다.

 ㄱ. 돈을〈36ㄴ, 37ㄴ〉, 젼으로〈36ㄱ〉, 두 번이러니〈 34ㄴ〉, 세 번을〈35ㄱ〉

 ㄴ. 시졀에〈34ㄴ〉

 ㄷ. 이〈35ㄱ〉 쳔이〈33ㄱ〉

(17ㄱ)은 체언의 말음이 ‘ㄴ’일 경우 조사와의 통합에서 분철한 예이다. ‘재전’은 한자어 ‘裁剪’에서 온 말로 짐작되고, ‘번/番’ 역시 한자어이므로 두 예는 한자어와 고유어의 혼용(混用)일 때 분철하던 관행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17ㄴ)의 ‘시졀/時節’과 (17ㄷ)의 ‘쳔/錢糧’도 마찬가지다.

3.12. 음운 축약 표기

이 책에는 용언 어간 ‘-’가 무성자음 /ㄱ, ㄷ/ 등으로 시작되는 어미 ‘-거나, -거든, -고져, -더니, -게, -디’ 등과 통합될 때, 대부분 격음화 된 형태인 축약형으로 표기하였다.

(18) ㄱ. 아니커나〈29ㄱ〉, 住커나〈36ㄱ〉,

ㄴ. 죽거나 커든〈30ㄴ〉, 아니커든〈31ㄱ〉

ㄷ. 利益게 코져〈25ㄱ〉, 코져〈29ㄱ〉

ㄹ. 몯야 터니〈35ㄱ〉,

ㅁ. 케 며〈30ㄴ〉, 供養케 시니〈33ㄱ〉

ㅂ. 편안티〈29ㄱ〉, 害티〈32ㄴ〉, 闕티〈34ㄱ〉, 救티〈36ㄱ〉, 損티〈37ㄱ〉

(18)의 예문은 이 문헌만의 특별한 현상이다. 이러한 음운 현상의 반영이 부분적으로 다른 문헌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유독 용례가 많다. 독송(讀誦)을 중시하는 ‘다라니경’의 특성이 반영된 때문으로 본다.

3.13. 한자어의 정음 표기

앞에서 밝힌 대로 〈불정심다라니경언해〉에는 한자어를 정음으로 적은 어휘들이 몇몇 보인다. 이 어휘들은 〈석보상절〉(1447년 간행〉을 비롯한 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이미 정음으로 적혔던 어휘도 있고, 이 문헌 이전에는 한자로 적혔던 어휘였는데, 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정음 표기된 어휘도 있다. 그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9)ㄱ. 녜(〈常例)〈29ㄱㄴ〉, 시졀(〈時節)〈34ㄴ〉, (〈樣姿/樣子)〈30ㄴ〉, 편안(〈便安)〈29ㄱ〉, 원슈(〈怨讐)〈35ㄴ〉, 요괴(〈妖怪/饒怪)〈29ㄱ〉, (〈思量)〈30ㄴ, 32ㄱ, 34ㄴ〉, 쳔(〈錢糧)〈32ㄱ, 33ㄱ〉, 침로(〈侵勞)〈32ㄴ〉

ㄴ. 젼(〈裁剪)〈36ㄱ〉

예문 (19ㄱ)에 나오는 어휘들은 정음 초기 문헌부터 한자와 정음으로 병기(倂記)되던 말들이다. ‘녜’는 한자어 ‘상례(常例)’에서 온 말인데, 정음 초기 문헌부터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인 ‘녜’로 나타난다. 일찍이 우리말화 하여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의 어휘들도 마찬가지다. (19ㄴ)의 ‘젼(〈裁剪)’은 ‘옷감의 자투리’를 이르는 한자말인데, 이 문헌의 한자 원문에는 ‘젼[雜綵]’으로 적혔다. 여기에 처음 보이고 이후에는 더러 쓰였다.

3.12. 어휘

이 문헌에는 15세기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 잘 쓰이지 않던 어휘가 몇몇 보인다. 일부 어휘는 이 책 이후에 널리 쓰이기도 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 ㄱ. 大悲心을 니르와다 一切 얼쿄 그츠며 一切 저포 업게 호니〈25ㄱ〉

ㄴ. 鱓魚 얌에라〈31ㄱ〉

ㄷ. 西方앳  우 조  리 가져다가〈31ㄴ〉

ㄹ. 이 사 긔 노코 니벳 옷외로 두프면〈31ㄴ〉

ㅁ. 그 長者의 夫妻 깃거 봄뇌요미 그지업서〈34ㄱ〉

ㅂ. 오로브터 永永히 너와 원슈디 아니호리라〈35ㄴ〉

ㅅ. 이 經 三卷을 써 부텻 지븨 五色 젼으로  기워 녀흐며〈36ㄱ〉

ㅇ. 그 뎘 님자히 이고〈36ㄴ〉

(20ㄱ)은 ‘얼키-[繫縛]’의 활용형인데, 그 용례가 드물다. (20ㄴ)의 ‘얌어’는 ‘뱀장어’와 비슷하게 생긴 ‘드렁허릿과’의 민물고기이다. (20ㄷ)의 ‘우훔’은 ‘움큼’을 이른다. (20ㄹ)의 ‘’은 ‘심장(心臟)’을 이르는데, ‘[心]#[臟]’으로 분석된다. (20ㅁ)의 ‘봄뇌-[踊躍]’는 ‘뛰어놀-’의 의미이다. (20ㅂ)의 ‘永永히’는 이후 문헌에서 정음 표기로 바뀌어 ‘영영, 영원히’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 (20ㅅ)의 ‘젼’은 한자어 ‘재전(裁剪)’에서 온 말인데, 이 경전의 원문에는 ‘젼[雜綵]’으로 적혔다. 당시 문헌에 용례(用例)가 드물다. (20ㅇ) ‘이고’는 ‘꾸어주-’의 의미이다. ‘-[使借]’에 사동접미사 ‘이’가 통합된 형태이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형태서지(形態書誌)와 각 판본의 현황, 그리고 경(經)의 성격과 내용, 언어적 특성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책의 전반적인 성격과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밝혔다. 이 책은 조선조 성종(成宗) 16년(成化 21, 1485 A.D.) 을사(乙巳) 2월에, 고승(高僧) 학조(學祖)가 간행한 불경언해서이다. 3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에 실려 있는 내용을 반영하여 명칭을 붙인 때문에 각 권의 권명(卷名)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언해 경위 및 편찬자 등에 대해서는,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 장철(張綴)되어 있는 학조의 발문(跋文)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의 고찰을 통해서 그 전반적인 현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이 책은 15세기에 간행된 다른 언해서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다른 언해서들은 대체로 경(經)의 원문(原文)이나 경소(經疏)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한 대문(大文)씩 단락(段落)을 짓고, 이어서 원문에 구결을 단 구결문(口訣文)을 둔 후, 구결문을 바탕으로 번역을 했다. 언해의 방법은 대역(對譯)의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구결문이 없다. 앞쪽에 구결문 없이 변상도(變相圖)와 경(經)의 원문을 두고, 뒤쪽에 언해문을 별도로 두었다. 또한 인간(印刊) 양식도 달라서, 경(經)의 원문(原文)과 변상도가 있는 앞부분은 목판본(木版本)인데 비해, 언해문(諺解文)이 있는 뒷부분은 을해자(乙亥字)로 된 활자본이다. 앞부분이 목판본인 이유는 각 면마다 상단(上段)에는 하단(下段)에 있는 경(經) 원문의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한 그림, 곧, 변상도(變相圖)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2) 저본(底本)인 한문본에 대해서는 학조의 발문에 의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당(唐)나라에서 편찬되었던 당본(唐本)이다. 그런데 이 경전의 원문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의 경(經)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좀 오래인 듯하다. 고려 시대인 13세기 초에 최충헌(崔忠獻)과 그의 아들 등 삼부자(三父子)의 호신(護身)을 위해 간행한 책인 수진본(袖珍本)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 3권(卷) 1첩(帖)의 내용이 이 책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한문 원문 부분과 일치한다. 이로 미루어 한문본이 우리나라에 유통된 시기와 한문본의 이름이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책 간행 당시에 인수왕대비가 보았던 당본(唐本)이 명(明)나라 헌종(憲宗) 13년(成化, 1477년 A.D.)에 조성된 책인 이른바 ‘성화판(成化板)’이라는 주장이 원주시의 고판화박물관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이 경전은 밀교(密敎) 경전인데 중국에서는 당대(唐代) 이후에 밀교가 점점 쇠퇴하여 이 경전을 구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학조(學祖)의 발문에도 일부 언급되어 있다.

3)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성종(成宗) 16년(1485 A.D.)에 초간(初刊) 간행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간(重刊)되었다. 초간(初刊)이 왕실의 원력(願力)에 의해 조성된 것인데 비해, 이후에 중간된 책들은 대부분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된 이른바 사찰판본(寺刹板本)이다. 이러한 중간본들은 거의가 원간을 판밑으로 한 복각본(覆刻本)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중앙도서관, 호림박물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동국대 중앙도서관 등에 수종이 현전한다. 이 중 널리 이용되는 판본은 역시 원간본인 고 이희승선생 구장본(舊藏本)이다. 지금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불정심다라니경언해〉는 구결문 없이 언해문만 있는 책이다. 언해문은 작은 활자로 되어 있다. 정음과 한자가 모두 같은 크기의 소활자(小活字)이다. 한자음 역시 한자와 같은 크기의 소활자(小活字)로 되어 있다.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注音)되어 있다. 이 책은 동국정운 한자음(漢字音)이 주음된 15세기 마지막 문헌이 될 것이다. 한자음과 정음에는 점획(點劃)으로 방점이 찍혀 있다. 어려운 한자어나 불교 용어에는 주(注)를 달아서 이해를 도왔다. ‘주(註)’의 위와 아래에는 흑어미(黑魚尾) 표시를 하여 일반 문장과 구분했다.

〈불정심다라니경언해〉의 문장 구성은 상권의 앞부분과 하권의 예화(例話) 부분은 석존(釋尊)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고, 그 외에는 주로 설화자(說話者)가 〈불정심다라니경〉의 수지(受持)와 독송(讀誦)을 권(勸)하는, 이른바 설득하는 내용의 문장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다라니경을 몸에 지니고 정성을 다해 읽으면 갖가지 재앙(災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설(勸說)하는 내용으로 된 문장들이다.

이 책의 원고를 썼거나 책을 편찬한 사람인 설화자는 상권의 앞부분에서 관세음보살과 석존이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경전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 대화를 비롯한 문장의 구성은 비록 구결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축자역(逐字譯), 곧 직역(直譯)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구결문이 겉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구결문을 전제한 번역의 글이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판단한다.

이 책에는 ‘다라니’ 경전의 특성으로 인해 종결형식은 추측법의 평서형 종결어미 ‘-리라’의 출현이 빈번한 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장 종결 형식은 추측법의 평서형이다.

이 책은 15세기 후반인 1485년에 간행된 책이다. 언어 사실에서는 같은 해에 같은 체제로 간행된 책인 〈영험약초언해〉와 더불어 당시 표기법의 특성을 보인다. ‘ㅸ’이나 ‘ㆆ’이 쓰이지 않고, ‘ㅿ’이나 ‘ㆁ’이 쓰이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에서처럼 유성자음 다음에서 분철한 예가 일부 있는가 하면, 〈원각경언해〉(1465년 A.D.) 이후 보이지 않던 ‘ㅆ’과 ‘ㅉ’이 쓰이기도 했다. 사이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용언 어간 ‘-’가 무성자음 /ㄱ, ㄷ/ 등으로 시작되는 어미 ‘-거나, -거든, -고져, -더니, -게, -디’ 등과 만날 경우, 대부분 격음화 된 형태인 축약형으로 표기하였다.

일부에서의 예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정음표기의 특징 중 하나는, 한자어인 경우 이를 한자로 적지 않고 정음(正音)으로 쓴 예가 몇몇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자어라는 인식이 이때 벌써 엷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5세기에 간행된 다른 불경언해서들과 비교하면서 이 책의 어학적 특성, 특히 문장 구성 및 표기법 등을 살펴서 이 책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살폈다.

이 책은 15세기 이후 수차례에 걸쳐 중간(重刊)되었다. 언해본은 물론, 한문본도 여러 책이 현전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한 면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15세기 후반의 한국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에 하나이다. 이 책과 같은 해에 간행된 〈영험약초언해〉 등의 책을 통해 우리는 당시 한국어의 실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중세국어 시기의 매우 소중한 국어사자료 중 하나가 된다.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윤곽이 드러났다고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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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영응기』 해제

이종찬(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1. 배경

조선조는 유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았기에 지난 왕조의 이념이었던 불교를 배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러했던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국가적 공식 종교로는 인정된 것이 아니로되, 개개인의 신앙적 지표로는 여러 면으로 이어져 왔다. 여기 논의되는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만 하여도 국가적 공식 행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궁중에서의 불교적 의식으로 거행되었으니, 이는 역대 군주들의 불교 신봉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이 나오게 되는 배경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일 듯하여, 역대 군왕들의 불교 의식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태조는 임신년(壬申年, 1392) 7월에 등극을 하고, 그해 10월 9일에 <인명 realname="自超">자초(自超)

정명(正名):
명분을 바로 세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자로가 여쭙되,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대접하여 정치를 하려 하면 선생님은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 공자 말씀하시되 ‘반드시 명분을 바룰 것이다. ……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롭지 않고, 말이 순리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지 않고, 예악이 일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되지 않고, 형벌이 적중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을 둘 데가 없다.’ 하시다.” 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爲政 子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 名不正則 言不順 言不順則 事不成 事不成則 禮樂不興 禮樂不興則 刑罰不中 刑罰不中則 民無所措手足)자초(自超):
<정의>1327~1405. 조선 초기의 승려. 호는 무학(無學). 속성은 박씨. 고려말에 중국에 들어가 지공(指空) 화상에게 법을 묻고, 나옹(懶翁) 화상을 오래도록 따라 의발을 이어받았다. 조선 태조가 즉위한 해에 대사를 불러 왕사로 삼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로 봉했다.
왕사로 삼는다. 주002)
『태조실록』, 태조 1년(1392) 10월 9일.
“중 자초를 봉하여 왕사로 삼다.[封僧自超爲王師]”
그해 윤12월에 <인명 realname="鄭摠">정총(鄭摠)
안병희(安秉禧), 「초기 한글 표기의 고유어 인명에 대하여」, 『언어학』2, 1977. 서울대학교.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 『규장각』3. 서울대학교도서관. 정상훈, 「갑인자 사리영응기에 대하여」, 『동원론집』 제7집. 동국대학교 대학원.정총(鄭摠):
<정의>1358~1397.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본관 청주. 조선의 개국공신1등.
에게 대장경 인출의 발원문을 지어 올리라 하니, 정총이 부정적 발언을 하자, 태조는 <인명 realname="李穡">이색(李穡) 이색(李穡):
<정의>1328~1396.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본관은 한산.
도 불교를 믿지 않았느냐 하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주005)
『태조실록』, 태조 1년(1392) 윤12월 4일.
첨서중추원사 정총에게 명하여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올리게 하니, 정총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은 유학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라고 하였다.(命僉書中樞院事鄭摠 製印出大藏經願文以進 摠曰 殿下何拳拳於佛事 請勿信 上曰 李穡爲儒宗信佛 若不足信 穡豈信哉 摠對曰 穡爲世大儒 而取譏於人者 良以此也 上曰 然則穡反不及於汝乎 其勿復言)
이에 정총이 대답하기를,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색이 도리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지천사(支天寺)로 경판을 수송하는 일이나, 대장경의 운반에 호송의 행렬을 명하는 등 주006)
『태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12일.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검교 참찬문하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로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오교(五敎)·양종(兩宗)의 중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命檢校參贊門下府事兪光祐行香 五敎兩宗僧徒誦經 儀仗鼓吹前導)
이 있다. 문소전(文昭殿) 옆의 불당 건설의 직접적 계기도 태조가 삼신여래의 불상을 주조하다 마치지 못하고 승하한 뒷일의 계승이라는 것이니, 조선 초기 임금들의 신불적 자세를 십분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 후 태종은 척불(斥佛)의 의지가 강했지만, 태조의 호불(好佛)로 인하여 차마 크게 개혁하지는 못하고, 주007)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윤3월 23일.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헌부에서도 또한 오교·양종의 명리의 중[僧]을 파하고, 절과 토지 노비는 모조리 공가(公家)에 붙이고, 오직 산문의 도승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는데, 나도 역시 그 불가함을 알고 꼭 파하려고 하나, 태상왕(태조)께서 바야흐로 불사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차마 갑자기 혁파하지를 못한다.”라고 하였다.(上笑曰 憲府亦請罷五敎兩宗名利之僧 其寺社土田臧獲 盡屬于公 唯任置山門道僧 予亦知其不可欲罷之 以太上方好佛事 故不忍遽革)
무해무덕하게 보게 되었다. 주008)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씨의 도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려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그는 득도한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승려라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라고 하였다.(視事于便殿 上曰 佛氏之道 其來尙矣 予欲無毁無譽 然有盡其道者 則吾當尊事之 往者有僧自超 人皆仰之 卒無得道之驗 如此輩 吾視之如路人 若指空則其可不尊事耶 群臣皆曰 然)
세종은 신불(信佛)을 넘어 호불에 가깝다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조에는 불교에 관한 기사가 208건이나 되는 것도 하나의 예라 할 것이나, 이 중에는 유생이나 관료들의 불교 비판적 기사도 많으니 단순한 세종의 호불로 보기에는 무리이기는 하지만, 유생들의 불교 비난이나 철폐의 기사에는 허락하지 않는 “불윤(不允)”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뒷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은 대군일 때도 신불을 넘어서 광신(狂信)과 같은 면모를 보이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유<세주>(瑈, 수양대군의 이름)가 승려의 무리에 뒤섞여 뛰고 돌아 땀이 등을 적시되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이 불교를 혹하게 믿어 일찍이 이르기를, ‘불교가 공자(孔子)의 도보다도 나은데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비방한 것은 불씨(佛氏)의 도를 깊이 몰랐기 때문이다. 천당과 지옥과 죽고 삶의 인과는 실로 있는 이치이지 결코 허탄함이 아니다. 불교를 모르고 배척하는 자는 모두가 망녕된 이이니 나는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종실 중에서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용(瑢)이 깊이 공경으로 믿는다.주009)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7월 1일.
수양 대군 이유(李瑈)와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유가 승도(僧徒) 속에 섞여서 뛰어 돌아다녀 땀이 흘러 등이 젖었어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불도의 가르침에 혹신(惑信)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의 도보다 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그르다고 한 것은 불씨(佛氏)를 깊이 알지 못한 것이었다. 천당·지옥과 사생·인과가 실로 이치가 있는 것이요,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닌데, 불씨의 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는 모두 망령된 사람들이라, 내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종실 중에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깊이 존경하여 신봉하였다.(命首陽大君瑈都承旨李思哲 祈雨于興天寺 瑈雜於僧徒中 踴躍周匝 汗流沾背 略無倦色 惑信釋敎 嘗謂 勝於孔子之道 程朱非之 不深知佛氏者也 天堂地獄 死生因果 實有是理 決非虛誕 不知佛氏之道而斥之者 皆妄人 吾不取也 於宗室中 瑈及安平大君瑢深敬信之)
하였다. 이 『사리영응기』를 쓰게 되는 불당 건설에도 이 두 대군에게 감독하도록 한 것이 세종의 뜻이었다.

이 『사리영응기』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조선조의 깊은 불교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작자

김수온(金守溫, 1409~1481)의 자는 문량(文量)이고, 호는 괴애(乖崖), 식우(拭疣)이다. 본관은 영동(永同)이요, 김훈(金訓)의 아들이고, 승려인 신미(信眉)의 아우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가 되고, 23년(1441)에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세종의 특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승문원교리로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을 3년에 걸쳐 편찬하였고, 주010)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10월 27일.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저작랑 유성원·사직 민보화 등에게 명하여 여러 방서(方書)를 수집해서 분문류취(分門類聚)하여 합해 한 책을 만들게 하고, 뒤에 또 집현전 직제학 김문·신석조, 부교리 이예, 승문원 교리 김수온에게 명하여 의관(醫官) 전순의·최윤·김유지 등을 모아서 편집하게 하고, 안평 대군 이용(李瑢)과 도승지 이사철·우부승지 이사순·첨지중추원사 노중례로 하여금 감수하게 하여 3년을 거쳐 완성하였으니, 무릇 3백 65권이었다. 이름을 『의방유취(醫方類聚)』라고 하사하였다.(命集賢殿副校理金禮蒙著作郞柳誠源司直閔普和等 裒集諸方 分門類聚 合爲一書 後又命集賢殿直提學金汶辛碩祖副校理李芮承文院校理金守溫 聚醫官全循義崔閏金有智等編集之 令安平大君瑢都承旨李思哲右副承旨李師純僉知中樞院事盧仲禮監之 歷三歲而成 凡三百六十五卷 賜名曰醫方類聚)
다음 해에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였다. 주011)
『세종실록』, 세종 28년(1446) 12월 2일.
사직 김수온에게 명하여 석가보를 증수하게 하다.(命副司直金守溫 增修釋迦譜)
세조 3년(1457)에 문과 중시에 합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정조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윤, 공조판서를 거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 4등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을 나란히 하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도왔다. 고승 신미의 동생으로 불교에 조예가 깊어 세종과 세조의 불교 신봉에 일조하여 불경의 국역에도 공이 컸다. 유저로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아버지의 불충스러웠던 일로 물의가 되기도 하였고 주012)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1월 30일.
김훈에게 장 1백 때려 전라도 내상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 “옥구진 병마사 김훈이 조모의 복을 당해서 빈소에 가지 않고 마음대로 상경하여 여러 달을 머물고 있으면서 몰래 인덕궁에 출입하고, 첩기(妾妓) 벽단단을 인연하여 잔치를 베풀고 의복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를 핵문(劾問)하기에 이르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니, 매우 간휼(奸譎)합니다. 빌건대, 직첩을 거두고 그 사유를 국문하여 율문에 의하여 죄를 논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시다.(杖金訓一百 流全羅道內廂 初 司憲府劾啓 沃溝鎭兵馬使金訓持祖母之服 不奔殯所 擅自上京 累月淹留 隱密出入于仁德宮 因妾妓碧團團設享 受賜衣服 迨其劾問 不以實答 甚爲奸譎 乞收職牒 鞫問其由 依律論罪 上可之)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6월 5일.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훈련 주부 김수온이 이제 서반에서 동반으로 옮겨 임명되었사온데, 그 아비 김훈이 기왕에 불충을 범하였으므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온이 문과 출신으로 이미 동반을 지냈는데, 너희의 말이 늦지 아니하냐. 또 조정의 신하로서 이 같은 흠절이 있는 자가 자못 많은데, 너희들이 그것을 다 쫓아낼 것이냐. 속히 서경함이 마땅하니라.” 하였다. 수온의 형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라고 하였는데, 수양대군 이유(李瑈)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고 수온도 또한 부처에게 아첨하여 매양 대군들을 따라 절에 가서 불경을 열람하며 합장하고 공경하여 읽으니, 사림에서 모두 웃었다.(司諫院啓 訓鍊注簿金守溫 今以西班 移敍東班 其父訓曾犯不忠 告身未可署經 上曰 守溫出身文科 已經東班 乃言不亦晩乎 且庭臣有如此瑕類者頗多 若等其悉去之乎 宜速署經 守溫之兄 出家爲僧 名曰信眉 首陽大君瑈安平大君瑢酷信好之 坐信眉於高座 跪拜於前 盡禮供養 守溫亦侫佛 每從大君往寺 披閱佛經 合掌敬讀 士林笑之)
형이 이름난 승려로 왕족과 가깝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주013)
위 주 참조.
『세종실록』, 세종 30년(1448) 7월 26일.
생원 유상해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요망한 중 신미가 꾸미고 속이기를 백 가지로 하여 스스로 생불이라 하며, 겉으로 선을 닦는 방법을 하는 체하고 속으로 붙여 사는 꾀를 품어서 인심을 현혹시키고 성학(聖學)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신미의 아우인 교리 수온이 유술로 이름이 났는데, 이단의 교(敎)를 도와서 설명하고 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붙어서 아첨하여 진취(進取)의 자료로 삼으니, 비옵건대, 수온을 잡아다가 그 죄의 이름을 바루고, 특히 요망한 중을 베어 간사하고 요망한 것을 끊으면, 신하와 백성이 모두 대성인의 하는 일이 보통에서 뛰어남이 만만(萬萬)인 것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生員兪尙諧等上疏曰 臣等聞妖僧信眉矯詐百端 自謂生佛 陽爲修善之方 陰懷寄生之謀 其眩惑人心 蓁蕪聖學 莫之勝說 且信眉之弟校理守溫以儒術著名 而助說異端之敎 依阿貴近 以資進取 乞將守溫 正名其罪 特斬妖僧 以絶邪妄 則臣民咸知大聖人之所爲 出於尋常萬萬也不報)
본 『사리영응기』를 쓰게 되는 것도 이러한 불교적 조예를 가질 수 있었던 가계와 주변의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서지

3.1. 책의 체제

이 책의 체제는 다음과 같다.

표지 : 당초문양(唐草紋樣)의 바탕에 황갈색 표지.

외제 : 사리영응기 단(舍利靈應記 單).

책의 제원 : 세로 30.4cm×가로 19.8cm.

내제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판식(板式) :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세로 22.1cm×가로 15.8cm.

자행수 : 매면 9행, 15자. 쌍행주(雙行註).

판심제(版心題) : 영응기(靈應記).

판심 : 상하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

활자 :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갑인자(甲寅字):

<정의>1434년(세종 16)에 만든 동활자. 일명 위부인자(衛夫人字). 왕명에 의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천(李蕆),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直殿) 김호(金鎬),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 명나라 후기의 판본으로 글자 본을 삼아 만들었다.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20여만 자가 되었다.
이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주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개주된 활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주조했다는 의미의 초주(初鑄)를 붙여 구별한다.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정음 활자도 주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하기 위해 주조 된 것이다. 그래서 ‘초주갑인자 병용 한글자’ 또는 ‘월인석보 한글자’라 일컫는다. 본 『사리영응기』의 정음표기 활자도 이 활자인 셈이다.

지질(紙質) : 저지(楮紙).

위 체제의 책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귀중본(貴21809-김57ㅅ)으로 분류 보존되어 있는 것이고, 원문은 『식우집(拭疣集)』 권2에 실려 있다. 이 원문은 본문만 있지, 주로 달린 쌍행의 글은 없다. 그렇다면 이 단행본으로 간행된 『사리영응기』도 김수온의 편집인지, 아니면 어느 제3자가 편집하면서 주석을 첨가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작자의 신변적 정황이나 주석문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이 『사리영응기』를 써 올리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는 방편으로 주석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우집』 권2에는 석가여래의 사리 출현의 글 2편이 더 있다. 그 영이(靈異)한 형상은 이 『사리영응기』와 유사하다. 하나는 「여래현상기(如來現相記)」이고, 또 하나는 「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이다. 「여래현상기」의 앞 부분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10년(1464) 4월 어느날, 효령대군 신 이보(李𥙷)가 와서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소원을 같이하는 승속들과 화암사에서 부처님께 공양하여 분신사리 약간 잎을 애걸하여 서로 봉안할 곳을 상의하니 모두가 ‘회암사는 우리나라의 큰 절로서 3 화상의 부도가 있는 곳이니 어찌 여기에 봉안하지 않겠는가.’ 하여, 이에 여러 선행을 모아 서남쪽에 석종을 세워서 사리가 평안하게 하였습니다. 이 달 28일 경술에 승속인 수만 인들이 모여 원각도량을 개설하고 낙성을 하였습니다. 이때 향 폐백을 내리시어 신으로 하여금 부처님께 바치어 이 회합을 성대하게 하셨습니다. 이날 밤 2경에 새로 조성한 석종 위에 홀연 광채가 <건물>천전당(天殿堂) 위로 비치어 나무들이 다 밝히 구별되더니 4경에 이르러 그 광채가 더욱 빛나고 또한 기이한 향기 퍼지고 가벼운 번갯불도 빛나더니 감로의 이슬이 뜰에 내렸습니다. 또 석종 위의 공중에는 신승(神僧) 대여섯 행렬이 있는 듯 없는 듯하더니 탁자 위에 분신사리 850잎이 보였습니다. 다음날 신해에 석종에다 공양을 하니 또 서기(瑞氣)가 공중에 알연히 떠 있었고, 저녁이 되자 서기가 석종으로부터 일어나 빙빙 돌다가 서남방을 향하여 사라지더니 그 위에 석가여래의 황금빛 장육(丈六) 진신이 나타나 원만한 모습에 위엄스런 용모 빛나시니 사부대중이 놀라고 기뻐 파도처럼 달려 예배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삼가 분신사리 약간 잎을 가져다 바치니, 임금과 중궁이 강녕전에 있다가 봉함을 열고 보시니, 광명이 투철하여 이리저리 비치니 마치 여래의 온몸이 지척 사이를 떨어지지 않은 듯하였다. 두 전하께서 더욱 공경을 더하여 매수를 세어보니 또 나뉘어진 분신이 3백 70잎이었다. 함원전에 공양하게 되매 또 나뉘어진 분신 46잎을 얻었다.

이에 임금이 손수 특사(特赦)의 글을 지어 중외(中外)에 선포하였다. 도성 안에 옛날에 <건물>흥복사가 있었는데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랜지라, 곧 중창하라 명령하시고 <건물>원각사라는 현액을 내리시니 문무백관들이 하례의 글을 올리었다. 그 후 5월 9일 신유에 특별히 신 <인명 realname="">이보와 <인명 realname="洪允成">인산군 홍윤성을 보내어 향의 폐백을 올리고 석종에 공양을 하니, 또 상서로운 빛이 사방으로 넘쳐나 산천과 공중이 대낮처럼 밝았다. 사리가 또 나뉘어 3백 잎이 되어 <인명 realname="">보와 <인명 realname="洪允成">윤성이 복명을 하고 분신사리를 올리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셨다. 대신에게 명하여 일을 독려하게 하여 <건물>원각사를 시작하고 또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에 <시간 realname="0000-06-13L0">6월 13일 을미에 바로 불상을 조성하던 곳에 누런 구름이 드리우고 하늘에서 꽃비가 사방으로 내리고 때로는 서기가 석종에서 나와 세 갈래 길에 빗겨 있다가 위로 솟으니 도성 안 남녀들이 우러러 보고 기뻐하며 일찍이 없던 일에 감탄하였다. 임금은 또 글을 지어 중외에 선포하셨다.(上卽位之十年夏四月有日 孝寧大君臣𥙷來啓曰 臣嘗與同願緇素供佛于檜菴寺 乞舍利 卽分身若干粒 相興謀所以安之 咸曰 檜菴 我國之大刹 而三和尙浮圖之所在 盍安於是 乃募諸善 樹石鍾于西南隅 以妥舍利 用是月二十八日庚戌 會緇素數萬餘指 設圓覺道場以落之 時降香弊 令臣獻佛 以賁其會 是夜二鼓 新厝石鍾上 忽放光屬天殿堂 山木皆可瞭辨 至四更 其光尤煜煜 且有異香芬馥 輕電閃㸌 甘露降庭 又於石鍾上空中 神僧五六行道 若有若亡 見卓子上舍利分身八百五十枚 翼日辛亥 供養石鍾 又有瑞氣空濛掩靄 及夕 瑞氣從石鍾而起 盤旋繚結 向西南而去 其上現釋迦金色丈六眞身 相好圓滿 威光煜赫 四衆驚喜 奔波膜拜 謹將分身舍利若干粒以進 上與中宮 御康寧殿 開封視之 光明瑩徹 輝映交射 如來全身 不違咫尺 兩殿尤加敬重 數其枚 則又已分身三百七十粒 及供養于含元殿 又得分身四十六枚 於是 上手製赦文 宥中外 都城中 舊有寺曰興福 廢毀巳久 卽令重創 賜額圓覺 百官具箋陳賀 越五月初九日辛酉 特遣臣補及仁山君臣洪允成 齎香弊 供養石鍾 又有祥光四溢 山川大虛 煜煜如晝 舍利又分身三百粒 補及允成復命 以分身舍利進 上益大喜 命大臣董役 經始圓覺寺 且造佛像 乃於六月十三日乙未 直造佛之處 黃雲靉靆 天雨四花 時有瑞氣 出自石鍾 三道橫亘 屬于其上 都人士女 瞻仰歡喜 歎未曾有 上又製文 赦中外)

그런데 『사리영응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 아무 기사가 없으나, 「여래현상기」는 세조실록에 기사가 실려 있다. 주015)

『세조실록』, 세조 10년(1464) 5월 2일.
영순군 이부에게 명하여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근일에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 법회를 베푸니, 여래가 현상하고 감로가 내렸다. 누런 가사의 중 3인이 탑을 둘러싸고 정근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빚이 대낮과 같이 환하였고 채색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 분신(舍利分身)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를 함원전에 공양하였고, 또 분신이 수십 매였다. 이와 같이 기이한 상서는 실로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를 세워서 원각사로 삼고자 한다.”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이어서 하례를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효령대군 이보(李補)가 부처를 만드는 데 매우 독실하여 어릴 때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더욱 열심인데, 회암사를 원찰로 삼고 항상 왕래하면서 재를 베풀더니, 이 때에 이르러 여래가 현상하였고, 신승(神僧)이 탑을 둘러쌌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보지 못하였으나, 오로지 이보(李補)만이 이를 보았다고 스스로 말하였다.(命永順君 溥傳于承政院曰 近日孝寧大君於檜巖寺設圓覺法會 如來現相 甘露降 黃袈裟僧三 繞塔精勤 其光如電 又有放光如晝 彩霧滿空 舍利分身數百 卽以舍利供養於含元殿 又分身數十枚 如此奇祥 實爲難遇 予欲復立興福寺爲圓覺寺 承政院啓曰 允當 仍請行賀禮 從之 …… 孝寧大君 補奉佛甚篤 自少至老尤甚 以檜巖寺爲願刹 常往來齋施 至是 如來現相 神僧繞塔 他人皆不得見 而唯補自言見之)
그렇다면 김수온의 「여래현상기」도 단행본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도 연상이 된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는 또 다른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원본인 갑인자본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필사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초판본 외에도 많은 필사본이 유통되지 않았나 짐작이 간다.

3.2. 내용

세종 31년(1449) 7월에 문소전(文昭殿) 옆에 불당을 건설하라고 명령하여 그달 28일에 시작하여 그해 11월 20일에 마치고, 자재암 주지 신미(信眉)와 김수온에게 명령하여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한 것이다.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1. 본문(1) : 세종 31년(1449) 7월 왕명에 의하여 예불참문을 짓게 됨.

2. 주소(註疏):

2.1. 초입도량정념작관(初入道場正念作觀, 처음 도량에 들어 바른 생각으로 관을 세움)

2.2. 여시작관이 거불(如是作觀已擧佛, 이렇게 관을 세우고나서 부처를 들다)

2.3. 작불요묘(作佛要妙, 부처께 예배하는 요령과 묘법)

2.4. 일체공경(一切恭敬, 일체의 공경)

2.5. 작관이 동발시언(作觀已同發是言, 관을 하고나면 함께 이런 말을 함)

2.6. 공양이 귀명례삼보(供養已歸命禮三寶, 공양이 끝나고 삼보에게 지성 공경으로 예배함)

2.7. 제불찬(諸佛讚, 모든 부처님께 찬양)

2.8. 삼보찬(三寶讚, 삼보의 찬양)

2.9. 참회(懺悔, 참회함)

2.10. 오참(五懺, 5가지 참회)

2.10.ㄱ. 아제자등지심참회(我弟子等至心懺悔,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

2.10.ㄴ. 아제자등지심권청(我弟子等至心勸請, 우리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권청함)

2.10.ㄷ. 아제자등지심수희(我弟子等至心隨喜,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따라 기뻐함)

2.10.ㄹ. 아제자등지심회향(我弟子等至心廻向,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함)

2.10.ㅁ. 아제자등지심발원(我弟子等至心發願, 우리 제자들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함)

2.11. 삼자귀의(三自歸依, 3번 자신에 귀의)

3. 본문(2) : 신성악곡(新聲樂曲)과 악장(樂章)을 짓다.

4. 본문(3) : 수양대군에게 악인을 영솔하고 음악을 알리게 하다.

5. 본문(4) : 11월 28일 재계 시작, 12월 2일, 살육을 금하고, 51명의 비구스님과 대군을 비롯한 관원에게 임무를 맡기다.

6. 본문(5) : 3일에, 부처님을 대궐에 모셨다가, 다시 새 불전에 모시게 함.

7. 본문(6) : 4일, 향을 받들음.

8. 본문(7) : 5일 점안을 함.

9. 소(疏)

10 본문(8) : 6일, 낙성연.

11. 소(疏)

12. 본문(9) : 낙성연의 저녁, 안평대군과 영응대군과 대회 참여자에게 명하여 지성으로 사리를 구하라 함. 불전 앞에 참여한 이가 261인이다. 그날 저녁 2 잎의 사리와 다음날 아침 4 잎의 사리를 얻었다.

13. 본문(10) : 시, 4언 46구 184자의 장편.

14. 소(疏)

14.1. 정근입장인명(精勤入場人名, 정성 근면으로 도량에 든 인명) 261명의 명단.

4. 의의

이 『사리영응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논의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조선 초기 군왕이나 왕족들의 불교 신봉이 돈독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후의 기록으로서, 불사에 참여하였던 사람의 이름을 정음으로 기록함으로서, 정음의 실제적 활용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4.1. 조선초의 불교 애호

위에서도 보았듯이 조선왕조가 유교적 이념으로 건국을 하나, 전 왕조의 이념이었던 불교적 사유를 쉽사리 떨쳐내지는 못한다. 태조가 임신년(壬申年, 1392) 7월 17일에 수창궁(壽昌宮)에서 등극을 하고, 9월 21일, 대사헌 남재(南在, 1351~1419)가 시무(時務) 11조를 상소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불교에 대한 경계를 알리는 글이었으니, 주016)

삼대(三代) 이래로 유학의 도(道)가 밝지 못하온데, 진(秦)나라의 분서(焚書)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초왕(楚王) 영(英)이 가장 먼저 이를 좋아했으나 마침내 단양(丹陽)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이를 가장 독실히 믿었으나 대성(臺城)에서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불도징(佛圖澄)은 조(趙)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구마라즙(鳩摩羅什)은 진(秦)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지공(指空)은 원(元)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했으니, 역대(歷代)의 군주가 그 교(敎)를 공경하여 능히 그 복을 누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신라가 불교에 미혹하여 그 재력(財力)을 다 없애서 탑묘(塔廟)가 민가(民家)에 절반이나 되더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고, 고려의 의종(毅宗)은 3만 명의 중들을 공양(供養)한 것이 한 달에 십여 곳의 절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내 임천(臨川)에서 탄식함이 있었으며, 공민왕은 해마다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개최하고 보허(普虛)와 나옹(懶翁)을 국사로 삼았는데, 보허와 나옹이 모두 사리(舍利)가 있었지마는, 나라의 멸명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說)은 믿을 것이 못됨이 명백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불교의 청정 과욕(淸淨寡欲)을 흠모하려 한다면, 선왕(先王)의 공묵무위(恭默無爲) 사상을 본받을 것이고, 불교의 자비 불살(慈悲不殺)을 본받으려 한다면 선왕의 능히 관인(寬仁)하고 능히 호생(好生)하는 덕을 생각할 것이고, 불교의 인과응보의 설(說)을 두려워한다면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처벌하고, 죄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경하게 처벌하고, 공 가운데 의심나더라도 중하게 상주는 것으로 규범을 삼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다만 백성들만 그 은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천지 귀신도 또한 몰래 돕게 될 것입니다.(大司憲南在等上言 一 三代以降 斯道不明 及經秦火 人心益晦 至漢 明帝時 佛氏之敎 始入中國 楚王 英最先好之 卒被丹陽之死 梁 武帝最篤信之 未免臺城之餓 佛圖澄不能存趙 鳩摩羅什不能存秦 指空不能存元 未聞歷代人君敬其敎而能享其福者也 以我東方言之 新羅惑於浮屠 竭其財力 塔廟半於閭閻 遂至於亡 高麗 毅王歲飯僧三萬 月至佛寺十餘所 卒有臨川之嘆 恭愍王歲開文殊會 以普虛懶翁爲師 普虛懶翁俱有捨利 無救於亡 由是觀之 佛氏報應之說 不足信明矣 伏惟殿下慕佛氏淸淨寡欲 則以先王恭默無爲爲法 效佛氏慈悲不殺 則以先王克寬克仁好生之德爲念 畏佛氏報應之說 則以賞善罰惡 罪疑惟輕 功疑惟重爲範 如是則非獨生民蒙其澤 天地鬼神亦且陰佑之矣)
『태조실록』, 태조 2년 1월 16일에는, 대사헌 남재가 다시 불교의 폐해를 진술한다.(上坐殿 大司憲南在 極陳佛氏之弊)
조선조의 불교의 경계에 대한 글로는 처음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남재는 태조를 도와 조선을 세운 1등의 개국공신으로 태조가 등극한 후 은거하다가 태조가 직접 찾아 1등공신으로 책봉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해 10월 9일에 자초(自超, 無學)를 왕사로 책봉하고, 주017) 위 주2 참조.
12월에는 정총(鄭摠, 1358~1397)이 대장경을 인출(印出)하라는 명을 받고 불교를 믿지 말 것을 건의하다 거절되는 일이 있었다. 주018) 『태조실록』, 태조 11년(1392) 윤12월 4일.
정총도 개국 1등공신이다.

태종은 즉위하는 해에, 사헌부에서 바로 오교 양종(五敎兩宗)의 혁파의 상소를 받지만, 경연에서 강의하면서 “태상왕이 불사를 좋아하셔서 차마 급히 개혁할 수가 없다.” 한다. 주019)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3년 윤3월 23일.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헌부(憲府)에서도 또한 오교·양종의 명리(名利)의 중[僧]을 파하고, 사사(寺社)·토전(土田)·장획(臧獲)은 모조리 공가(公家)에 붙이고, 오직 산문의 도승(道僧)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는데, 나도 역시 그 불가함을 알고 꼭 파하려고 하나, 태상왕께서 바야흐로 불사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차마 갑자기 혁파하지를 못한다.”라고 하였다.(上笑曰 憲府亦請罷五敎兩宗名利之僧 其寺社土田臧獲 盡屬于公 唯任置山門道僧 予亦知其不可 而切欲罷之 以太上方好佛事 故不忍遽革)
그래서 태종은 중도적 처지로 바뀌면서 불도를 진심으로 닦는 이에게는 존경을 하지만, 도를 얻지 못하면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하여, 태조가 아끼었던 자초(무학) 대사에게까지도 경의를 갖지 않았다. 주020)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 6월 20일.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도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僧)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그는 득도(得道)한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指空)과 같은 중이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군신(群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라고 하였다.(視事于便殿 上曰 佛氏之道 其來尙矣 予欲無毁無譽 然有盡其道者 則吾當尊事之 往者有僧自超 人皆仰之 卒無得道之驗 如此輩 吾視之如路人 若指空則其可不尊事耶 群臣皆曰 然)

다음은 이 『사리영응기』와 관계되는 세종의 불교 관계 기사를 열거하여 본문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8일.(사헌부에서 연화승을 금하고 민간의 사채 및 신역을 거두지 말 것을 상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불교의 도는 마땅히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으며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겠거늘, 지금 무식한 중의 무리가 그 근본을 생각지 않고 절을 세우고 부처를 만든다 설법을 하고 재를 올린다 운운하며, 천당·지옥이니 화복이니 하는 말로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여 백성의 입 속의 먹을 것을 빼앗고, 백성의 몸 위에 입을 것을 벗겨다가 흙과 나무에 칠을 하여 만들고 이것에 옷과 음식을 이바지하니, 정사를 좀먹고 백성을 해침이 이보다 더 큼이 없사오며, 더군다나 이런 흉년 든 해에 이같이 함은 진실로 마음 아픈 일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서울 밖에서 권선문을 가지고 마을에 드나드는 자를 엄중히 금지할 것이오며, 만약 영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에 따라 논죄하고, 그 속이고 꾀어 취한 재물은 다 몰수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司憲府上疏曰 佛氏之道 當以淸淨寡欲爲本 今無識僧徒 不顧其本 曰創寺造佛 曰法筵好事 將天堂地獄禍福之說 眩惑愚民 奪民口中之食 脫民身上之衣 以塗土木 以供衣食 蠱政害民 莫甚於此 況此凶歉之歲 誠爲痛心 伏望京外持願文出入閭里者 痛行禁理 如有違令者 依律論罪 其誑誘所取之物 悉令收沒 以賑飢饉之民)

■세종 1년(1419) 11월 1일.(산릉에 나아갈 때 불교 의식을 겸용하는 것에 대한 이론)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산릉에 나아가는 의식에 불교 의식을 겸용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니, 변계량은 겸용하여도 좋다고 하였으나, 홀로 허조가 옳지 못하다고 대답하였다.(御便殿視事上曰 赴山陵儀, 兼用佛儀可乎 卞季良以爲 兼用可也 獨許稠對曰 不可)

■세종 1년 11월 28일.(의정부·육조·대간에서 올린 절의 노비를 혁파하라는 상서)

국가에서 회암사는 불교의 수법 도량(修法道場)이요, 진관사는 수륙 도량(水陸道場)이므로, 노비를 넉넉하게 주어 공양하게 하였으니, 여기에 있는 자는 진실로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고 욕심을 적게 하여, 불조(佛祖)의 임금을 수하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정신을 계승하고, 국가의 무거운 은혜에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회암사 중 가휴(可休)·정후(正厚)와 진관사 중 사익(斯益)·성주(省珠) 등 수십여 인은 항상 절의 계집종과 음욕을 방자히 행하여 삼보(三寶)를 더럽혔고 국법을 범하였습니다. 이름난 절로서 이와 같을진댄, 딴 절 중들의 더럽고 행실이 없음은 단정코 알 수 있습니다. …… 각 절의 노비를 모두 관에 이속(移屬)시키고, 중들로 하여금 괴롭게 수행하게 하여, 그 도를 바르게 하기를 비나이다.(議政府上書曰 國家以檜巖作法之場津寬水陸之所 優給奴婢 以資供養 居是者 誠宜淸淨寡欲 以續佛祖 壽君福國 以報重恩 今檜巖寺僧可休正厚 津寬寺僧斯益省珠等數十餘人 常與寺婢恣行淫欲 汚染三寶 以干邦憲 號爲名刹 尙且乃爾 其他寺社僧徒汚穢無行 斷可知矣 …… 乞將各寺奴婢 悉令屬公 令僧徒苦志修行 以正其道)

■세종 1년 11월 29일.(상왕이 중들의 불안을 불식키 위해 회암사 등에 전토를 더 줄 것을 말하다)

상왕이 조말생과 원숙에게 묻기를, “절의 노비를 이제 다 혁파하였는데, 중들의 생각에는 또 장차 절의 전토를 혁파하여 불도가 영영 끊어진다 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불교를 물리치려고 하나, 그 업(業)이 이미 오래되어서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니, 회암사 같은 이름난 절에는 전토를 더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니, 조말생 등이 답하여 아뢰기를, “상교가 매우 합당합니다.”라고 하였다.(上王問趙末生元肅曰 寺社奴婢 今已盡革 僧徒之心以爲 又將革其土田 僧道永絶矣 是亦不可不慮也 雖欲闢之 其業已久 不可遽革 莫若如檜巖等名刹 加給田土 以慰其心 末生等對曰 上敎甚當)

■세종 3년(1421) 7월 2일.(사간원의 불교 억제책)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만약 불교가 세상에 시행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습속이 이미 익숙해졌으므로, 그 법을 갑자기 배척할 수가 없으며, 그 무리들을 하루 아침에 다 제거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우선 미리 방법을 만들어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도록이라도 하고, 엄중히 금지하여 거리낌없이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중이 출가하는 법은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거하여 법을 밝혀 엄격히 다스리고, 그 도첩(度牒)의 법식도 또한 처음 입사(入仕)하는 예에 의거하여 승록사(僧錄司)에서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는 대간(臺諫)에 공문을 보내어 서경(署經)을 거쳐 시행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이름과 수효를 또한 알지 않을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과 지방의 관리로 하여금 그 경내의 중들을 조사하여, 그 도첩을 상고해서 기록하여 안적(安籍)을 만들어서, 저곳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지 못하도록 하며, 인보(隣保)의 법에 의거하여, 나누어 맡는 승려를 정하여, 통솔자가 있게 하고, 그들이 출입할 때는 서울은 예조에서, 지방은 당지의 관원이 그 고장(告狀)을 받아, 그 길 잇수[里數]의 멀고 가까운 것을 계산하고, 그 왕래하는 기일을 써서 통행장(通行狀)을 줄 것이며, 도첩이 없는 자나, 몸이 승적(僧籍)에 기재되지 않은 자나, 출입할 때에 행장이 없는 자나, 갔다가 돌아오면서 기일을 넘긴 자나, 저곳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자가 있으면, 무시로 고찰하여 엄중히 법을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司諫院上疏曰 若以佛氏之敎 行於世也已久 習俗旣熟 其法不可遽斥 其徒不可一朝盡去 則姑且預爲之方 勿至濫溢 嚴爲之禁 勿使橫行可也 願自今僧人出家之法 依經濟六典 申明糾理 其度牒之式 亦依初入仕例 僧錄司報于禮曹 禮曹移關臺諫 署經施行 且其名數 亦不可不知 願令中外官吏推其境內僧徒 考其度牒 錄成案籍 毋令彼此移徙 依隣保之法 定其色掌僧人 使有統率 其出入之時 京中則禮曹 外方則所在官受其告狀 計其道路遠近 書其往來日期 以給行狀 其有無度牒者身不付籍者出入無行狀者往返過期者彼此移徙者 無時考察 痛繩以法上不允)

■세종 6년(1424) 3월 12일.(불교의 폐해와 개혁에 관한 성균관 생원 신처중 등 1백 1명의 상서문)

오직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신라의 말기에 불교를 존숭하고 신봉하여 탑묘(塔廟)를 세우고, 국왕이 믿는 것을 이름하여 비보(裨補)라 하고, 경대부가 믿는 것을 원찰(願刹)이라 일컬어, 숫놈 하나가 부르면 암놈 백 마리가 화답하듯이 온 세상이 그대로 따라서, 즐거이 귀와 눈에 익히게 되고 골수에 젖어 의리로 깨닫게 할 수 없고 구설로 다툴 수도 없어서, 그대로 내려온 폐단이 지난 왕조에 이르러서는 부처를 섬기기를 더욱 근실히 하여, 암자도 짓고 탑도 세워 해마다 흥행하지 아니한 때가 없어서, 필경에는 국왕의 존엄한 몸으로 친히 부처의 문[桑門]에 거둥해서 제자의 예로 공손하게 거행하여 무부 무군의 교를 제창하며 불충 불효의 풍속을 이루니, 인심은 허물어지고 천리도 멸망되었으니, 강충(降衷)의 성품이 어디에 있으며, 수도하는 가르침은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이 풍속을 상하게 하고 국가와 조정을 그르치게 한 것이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成均館生員申處中等一百一人詣闕上書曰 惟我大東新羅之季 崇信浮屠 營立塔廟 國君信之則號爲裨補 卿大夫信之則稱爲願刹 一雄唱百雌和 擧世靡然悅而從之 習於耳目 浹於骨髓 未可以義理曉也 亦未可以口舌爭也 因循之弊 至於前朝 事佛益勤 而營菴立塔 無歲不興 至以國君之尊 親擧玉趾 屢幸桑門 恭行弟子之禮 以倡無父無君之敎 以成不忠不孝之俗 毁人心滅天理 降衷之性安在 修道之敎未聞 其所以傷風敗俗 迷國誤朝者 良有以也)

■세종 6년 4월 5일.(불교의 혁파에 관해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절만을 남겨두자는 예조의 계)

석씨(釋氏)의 도는 선·교 양종 뿐이었는데, 그 뒤에 정통과 방계가 각기 소업(所業)으로써 7종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잘못 전하고 거짓을 이어받아, 근원이 멀어짐에 따라 말단이 더욱 갈라지니 실상 그 스승의 도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寺社)를 세워, 각 종(宗)에 분속시켰는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나, 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修葺)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계·천태·총남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 4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를 넉넉하게 급여하고 우거하는 중의 인원을 작정하며 무리지어 사는 규칙을 작성하여,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할 것입니다. 이어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하고, 서울에 있는 흥천사를 선종 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 도회소(敎宗都會所)로 하며, 나이와 행동이 아울러 높은 자를 가려 뽑아 양종의 행수 장무(行首掌務)를 삼아서 중들의 일을 살피게 하기를 청합니다.(禮曹啓 釋氏之道 禪敎兩宗而已 厥後正傳傍傳 各以所業 分而爲七宗 傳誤承訛 源遠而末益分 實有愧於其師之道 且中外多建寺社 分屬各宗 其數猥多 緇流四散 曠廢莫居 修葺不繼 漸致頹毁 乞以曹溪天台摠南三宗 合爲禪宗 華嚴慈恩中神始興四宗 合爲敎宗 擇中外堪寓僧徒之處 量宜置三十六寺 分隷兩宗 優給田地 酌定居僧之額 群居作法 俾之精修其道 仍革僧錄司 以京中興天寺爲禪宗都會所 興德寺爲敎宗都會所 揀取年行俱高者 以爲兩宗行首掌務 令察僧中之事)

■세종 7년(1425) 6월 27일.(환속한 승려 중 재예가 있는 사람은 승직에 있던 경력을 임명에 반영토록 하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환속한 사람 박의문·김여정 등의 소장을 상고하여 본즉, 전자에 각기 불교 종파 중에서 선택되어 직임을 받았다가, 이제 환속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원하여 성중과 애마(成衆愛馬; 둘 다 궁성의 수위나 임금의 시중을 맡았던 관원)로 차등 정정[差定]하기를 청하옵는 바, 본조에서 이 사건을 자세하게 상고하옵건대, 단지 이 사람뿐이 아니오라 모두 환속한 뒤에 벼슬길에 종사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처음 입사(入仕)할 때에 시험 보이는 것을 면제시키고, 그 조상 계보와 재능과 인품을 상고하여 성중 애마에 상당한 곳으로 정하여 보내되, 그 중에 재예가 있어서 일을 맡길 만한 자는 제수할 때에 승직에 있던 것을 통계하여 임명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吏曹啓 還俗人朴義文金麗精等狀考 在前各宗中選受職 今而還俗 願欲從仕 乞於成衆愛馬差定 本曹據此看詳 非徒此人 凡還俗後自願從仕者 除初入仕試取 考其祖系才品 成衆愛馬相當處定送 其中有才藝可任者 除授時通計僧職敍用 從之)

■세종 14年(1432) 2월 14일.(효령 대군이 한강에서 수륙재를 개설하자 길사순이 중지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다)

효령 대군 이보가 성대하게 수륙재를 7일 동안 한강에서 개설하였다. 임금이 향을 내려 주고, 삼단(三壇)을 쌓아 중 1천여 명에게 음식 대접을 하며 모두 보시를 주고, 길가는 행인에게 이르기까지 음식을 대접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날마다 백미 두어 섬을 강물 속에 던져서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베풀었다.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이 강을 덮으며,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서울 안의 선비와 부녀(婦女)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양반의 부녀도 또한 더러는 맛좋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와서 공양하였다. 중의 풍속에는 남녀가 뒤섞여서 구별이 없었다. 전 판관 길사순이 글을 올려 중지하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孝寧大君𥙷大設水陸于漢江七日 上降香 築三壇 飯僧千餘 皆給布施 以至行路之人 無不饋之 日沈米數石于江中 以施魚鰲 幡蓋跨江 鍾鼓喧天 京都士女雲集 兩班婦女 亦或備珍饌以供 僧俗男女 混雜無別 前判官吉師舜上書諫之 不允)

■세종 16년(1434) 4월 12일.(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회암사의 사찰 수리와 아울러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상서하다)

집현전 부제학 <인명 realname="">설순 등이 상서하기를, “그윽이 듣자오니, 부도(浮屠)란 것은 외방의 교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취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옵니다. 그 교가 무부 무군하며, 세상을 미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 함은 진실로 선현들이 이미 자세히 말한 바이고, 전하께서도 밝게 아시는 바이므로, 신 등은 이에 감히 군말씀[贅言]을 더 아뢰지 못하옵니다마는, 잠깐 좁은 소견으로써 우러러 천총(天聰)을 더럽히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저번에 미친 중이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어서 백성의 고혈을 짜 내어 가지고 떼를 지어 한강에 모여 수륙재의 모임을 베풀었사온바, 이에 위로는 거가(巨家)·대족(大族)으로부터 여항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받들고 시주하기를, 오직 남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재물을 소모하고, 풍속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으되, 유사가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국가에서 이를 금하지 아니하매, 점차 퍼져 나가서 서로 만연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되었나이다. 귀하고 이름난 사람을 인연하여 앞으로 회암사를 다시 세우려 함에 그 비용으로 드는 전곡과 화폐가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오니, 그 폐단이 지난날보다 더욱 심하고 많으옵니다.”라고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을 내 이미 다 아노라.”라고 하였다.(集賢殿副提學偰循等上書曰 竊聞浮屠者 本方外之敎 理國家者所不取也 其無父無君 惑世誣民 固前賢之所詳論 而殿下之所灼知也 臣等玆不敢贅 姑以管見 仰瀆天聰 竊惟往者狂僧 欺誘愚俗 浚民膏血 群聚漢江 設水陸會 於是上自巨家大族 下至閭巷婦女 瞻奉施舍 惟恐不及 傷財敗俗 莫此爲甚 有司不敢言 國家不之禁 轉相滋蔓 以至今日 益無畏憚 因緣貴顯 將欲重創檜巖 錢穀貨幣 不可勝計 其弊尤甚於往日者萬萬矣 …… 上曰 爾等之言 予已知悉)

■세종 21년(1439) 4월 18일.(사헌부에서 흥천사 안거회의 철폐와 규찰하는 사령을 전대로 시행하도록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불교는 본래 이적의 한 법(法)이온데, 만세에 강상을 헐어버리오니, 성도(聖道)에 있는 거칠은 잡풀밭입니다. 군신의 의를 버리고 부자의 친을 끊으며, 거짓으로 삼도(三途) 의 설을 지어내고 허망하게 육도(六道)의 설을 떠벌리어 드디어 우매한 백성들로 하여금 화를 무서워하고 복을 사모하게 하여 생령을 좀먹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나옵신 성인으로 밝고 빛나게 닦으신 학식으로, 그 불교의 허탄하고 망령됨을 밝게 통촉하시지 못하심이 없으시옵거니와, 근자에 흥천사 사리각은 태조께옵소 창건하신 바로, 전하께서는 그 집의 기울어져 무너짐을 차마 그냥 보시지 못하시와 이에 수리할 것을 명하시오니, 이것은 전하께서 선조를 받드시는 성심에서 나오신 것이지, 불법에 미혹되어 그러하옵심이 아닐 것이옵니다. 이 절에 사는 자들은 그 전조(田租)만 거두어도 또한 의식을 마련하기에 족할 것이므로 앉아서 그 이득을 누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확연하게 강단(剛斷)을 내리시고 특히 교지를 내리시와 빨리 흥천사의 안거회를 파하게 하시고, 두 절에는 왕지(王旨)를 받은 뒤에 추핵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시고 규찰하는 사령(使令)을 그전대로 시행하게 하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司憲府上疏曰 佛氏 本夷狄之一法 毁萬世之綱常 而聖道之蓁蕪也 棄君臣之義 絶父子之親 謬起三途 虛張六道 遂使愚民畏慕禍福 耗蠧生靈 有不可勝言矣 殿下以天縱之聖緝熙之學 其於釋氏之誕妄 罔不洞照矣 近者興天舍利閣 乃太祖所創 殿下不忍視其傾圯 爰命修葺 此乃殿下出於奉先之誠心 非惑於佛氏而然也 居是寺者 但收其田租 亦足以資衣食而坐享其利也 …… 伏望殿下 廓回剛斷 特降愈音 亟罷興天安居之會 還收兩寺取旨推劾之命 糾察之令 依舊施行 不允)

■세종 23년(1441) 윤11월 14일.(사리각 경찬회에 관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본월 10일에 글을 갖추어 흥천사의 사리탑 경찬회를 파하기를 청하였던 바, 전지(傳旨)하시기를, ‘한(漢)나라 이후로부터 역대의 임금이 부처를 섬기지 아니한 이가 없었으므로 나도 한다.’ 하시니, 신 등이 명을 들은 뒤로 통분하옴을 이기지 못하와, 이튿날 또 그 뜻을 말씀드렸더니, 또 전지하시기를, ‘너희들의 말한 바는 모두 내가 아는 바이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를 여뀌잎처럼 작다고 일컬었고, 불교가 천하에 퍼졌는데, 작은 나라라고 하여 어찌 못하겠느냐.’ 하시니, 신 등이 명을 듣고 더욱 놀래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 임금이 상소를 보고 이르기를, “옛적 우리 태조께서 이미 사리각을 창건하시고, 또 경찬회를 베풀었으므로 나도 전의 법을 따라 수리한 것인데, 어찌 두세 번 진청(陳請)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시다.(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於本月十日 具疏請罷興天舍利塔慶讃會 傳旨若曰 自漢以來歷代君主 莫不事佛 予亦爲之 臣等聞命以還 不勝憤咽 翼日又口陳其意 傳旨又曰 爾等所言 皆予所知 古稱我國小如蓼葉 佛法遍天下 小邦何獨不爲 臣等聞命 尤切驚駭 …… 上覽疏曰 昔我太祖旣創舍利閣 又設慶讃會 予亦因前規修之耳 何必再三陳請乎)

■세종 23년 윤11월 20일.(성균 생원 조변륭 등이 경찬회의 일로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기를 청하다)

성균 생원 <인명 realname="">조변륭 등 4백여 인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윤11월 18일에 전하의 흥천사 경찬회의 명을 엎드려 듣자옵고 삼가 이유를 갖추어 우러러 성상께 아뢰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오니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 전하께서 이미 부처의 옳지 못함을 알으시면 속히 고쳐서 착한 것에 따름이 가하옵거늘,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에 매양 이미 안다고 하시고는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니, 능히 과실을 고치지 못하실 뿐 아니라, 또 뉘우칠 줄을 못하시고 도리어 허물과 그름을 꾸미고 덮으시니, 이는 허물을 들이는 실수가 부처를 숭상하는 실수보다 더하옵니다. 이제 우리 국가의 억만년 무궁한 업(業)이 겨우 세 성왕을 전하였사온데, 전하께서 생각지 않으심이 이처럼 극진함에 이르시면 자손 만세의 모양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아무쪼록 고치시기를 전하께 깊이 바라옵니다.”라고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成均生員曹變隆等四百餘人上疏曰 臣等於閏十一月十八日 伏聞殿下興天慶讃之命 謹具情由 仰干冕旒 未蒙兪允 不勝慷慨 …… 殿下旣知佛氏之非是 則速改從善可也 其於群臣之諫 每曰已知之 而尙不頷肯 非惟不能改過 而又不知悔過 而反爲文過以飾非 是則入過之失 尤愈於崇佛之失矣 今我國家億萬世無窮之業 纔傳三聖 而殿下之不思 至於此極 則子孫萬世之儀形 將若之何 庶幾改之 深有望於殿下 不報)

■세종 23년 윤11월 24일.(성균관 유생 유이 등이 경찬회에 관해 상소하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를 의정부에 청하다)

성균 생원 유이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근래에 흥천사의 일을 가지고 두 번 천총(天聰)을 모독하였사오나, 아직도 윤허를 얻지 못하오니 통분을 이기지 못하와 두세 번 번거롭게 하옴을 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 하물며 전하께서는 만백성의 대표로서 불교를 숭상해 믿으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는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기를 가르치고 더러운 진흙 위에 다시 더러운 진흙을 칠하는 것과 같사오니, 불교를 숭상하는 징조를 장차 어떻게 막으오리까. 신 등은 천년 이래에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서 스스로 세상에 드문 시대를 만났다고 여기었더니, 이단을 물리치는 한가지 일에도 두세 번이나 간하였으되 능히 천청(天聽)을 돌이키지 못하와, 가슴속이 답답하여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을 어찌 뜻하겠습니까. 폐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 등이 평일에 전하께 바라던 바가 땅을 쓸은 듯하옵니다. 진실로 신 등의 아뢴 말이 정치의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어 족히 위에서 들을 것이 못 된다면, 신 등이 어찌 감히 천청을 두 번이나 모독하여 외람되게 광참(狂僭)한 말을 올리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기를, 좋은 약이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슬릴지라도 행함에 도움된다고 하오니, 전하께서 깊이 살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라고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成均生員柳貽等上疏曰 臣等近將興天之事 再瀆聰聽 尙未蒙允 不勝痛悼 不避再三之瀆 …… 況殿下以萬民之表 崇信佛敎 乃至於此 則是敎猱升木 如塗塗附 廣袖高髻之漸 將何以禦之 臣等千載之下 獲逢堯舜之君 自以爲不世之遇 豈意闢異端一事 再三進諫 未能上回天聽 鬱鬱飮泣於胸中哉 弊至如此 則臣等平日所望於殿下者 掃地如也 苟若臣等之進言 有違於治體 而不足上聞 則臣等何敢再瀆天聰而冒進狂僭之說哉 臣等以爲良藥苦口而利於病 忠言逆耳而利於行 伏惟殿下深察焉不報)

■세종 23년 윤11월 25일.(경찬회를 근일에 행하려 하다가 좌우의 논의에 따라 일단 중지하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고, 성학(聖學)에 우유(優游)하였으니, 내가 어찌 불교를 숭상해 믿겠느냐. 다만 그 법이 오래고 멀어서 갑자기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전자에 한두 대신이 내게 이르기를, ‘불교를 갑자기 없앨 수 없다.’고 하더니, 이제 경찬회를 파하기를 간하는 데에 그 사람도 소문에 서명하여 올렸으니, 인신(人臣)으로서 군부(君父)에게 이처럼 기망할 수 있겠느냐. 경찬회의 일은 예로부터 있었는데, 이제 만약 천연하면 간하는 말이 어지러울 것이니, 근일에 행함이 마땅하다. 너희들은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도승지 조서강이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제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우선 성상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소.”라고 하니, 우승지 이승손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본래 불교를 숭상하는 임금이시라면 이 일은 족히 간할 것이 못 되오나, 즉위하신 이후로 한 가지 일이라도 불교에 영향을 미친 것이 없으셨는데, 이제 갑자기 경찬회를 일으키시매, 이러므로 모든 신하들이 마음을 다하여 간하오니, 이것도 일이 작을 때에 방지하고 점점 커지기 전에 막는 뜻입니다. 경찬회를 그만두지 아니하오면, 장차 절을 세우고 부처를 만들어 머리 깎은 중들이 세력을 펴서 폐단을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성을 쌓는 역사가 바야흐로 한창이옵고, 사신이 올 때가 또한 임박하였으니, 신은 아직 중지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매, 좌우에서 모두 그 논의에 따르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었다.(上謂承政院曰 予自少講論經史 優游聖學 予豈崇佛敎 但其法久遠 未易遽革 曩者一二大臣謂予曰 佛法未可遽革 今諫慶讃 其人亦署名疏中以進 人臣於君父 不可如是欺罔 慶讃之事 自古有之 今若遷延 則諫諍紛紜 當於近日行之 爾等擬議以聞 都承旨趙瑞康顧左右曰 上意至此 諸公謂何 姑從上意 無乃可乎 右承旨李承孫曰 殿下本崇佛之主 則此事固不足諫 卽位以來 無一事及於佛 而今乃遽起慶讃 是以凡百臣僚盡心諫諍 此亦防微杜漸之意 慶讃不已 則將至於建寺造佛 而髡首鴟張 弊不能救矣 方今築城之役方殷 使臣之來又逼 臣謂莫如姑停之 左右皆從其議 上然之)

■세종 23년 12월 9일.(지중추원사 정인지 등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실망을 상소하다)

지중추원사 정인지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근일에 듣자옵건대, 전하께서는 흥천사의 부도(浮屠)에 경찬회를 행하시려고 모든 일을 준비하셨다고 하오니, 신 등은 그 옳지 못함을 삼가 아뢰었사오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자도 걱정 먹어도 걱정이 되와 삼가 소회를 뒤에 나열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낱낱이 받아들이시고 다시 삼사(三思)하고 유념하시어 일국 신민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옵소서.

1. 신 등은 그윽이 듣자옵건대, 고려 태조 이후로 부처를 섬기는 일이 점점 성하여 5백 년 사이에 대대로 옳은 정치가 없고, 말엽에 이르러서는 풍속이 크게 허물어져서 대소 부녀들이 사찰에 연달고, 무뢰한 승도들이 여염집에 혼잡하여, 음란한 풍속이 크게 행하고 정치·교화가 쇠미하여 드디어 어지러워 망하는 데 이르니, 태종께서는 그 일을 목격하시고 도첩(度牒)의 법을 세우시고 절에 가는 영(令)을 엄하게 하시니, 큰 중이 없어지고 새로 창건하는 절을 금하게 되어 수십 년 사이에 풍속이 바로 잡혀서, 실로 국가의 공고한 기틀이 마련되었거늘, 이제 전하께서 다시 그 근원을 열으시니, 말류를 어찌 막으오리까. 이것이 신 등의 절통해 하는 바입니다.

1.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로부터 제왕들이 부처에게 귀의하지 아니한 이가 없고, 또 천하가 부처에게 귀의하는데, 우리 나라는 여귀잎처럼 작거늘, 어찌 홀로 폐할 수 있으랴.’ 하셨으나, 신 등은 생각하기를, 한(漢)·당(唐) 이후로 역대 제왕이 간혹 부처를 섬겨서 큰 화패(禍敗)는 없는 이가 있었으나, 모두 가히 본받을 것은 못된다 하겠습니다. 당(唐) 고조는 승니(僧尼)를 사태(沙汰)하였는데, 태종 말년에 이르러 애착이 많아서 다시 부도(浮屠)를 세워 정관의 정치에 누가 되었고, 태종이 죽은 지 수십 년도 못되어 당나라에 화가 참혹하였으니, 부처의 힘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스스로 성하고 쇠함이 있어 진(秦)·한(漢) 이후로 대대로 좋은 정치가 없고, 이단이 날마다 성하여 승니(僧尼)와 도사를 비록 갑자기 끊을 수는 없사오나, 임금으로서 처리하는 도리는, ‘갑자기 끊을 수 없으니 아직 숭상해 믿는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비유하건대, 좋은 곡식을 기르는 자가 가라지를 갑자기 없앨 수 없다고 하여 따라서 북돋우어 키울 수 없는 것과 같고, 또 여귀잎 같은 나라로서 중이 되는 자가 날마다 많아서 놀고 앉아 먹고 국가의 의무를 도피하는 자의 근거지가 될 것이오니, 이것도 국가에서 마땅히 엄하게 금할 것이옵니다.

1. 전왕조의 불교가 성한 나머지에 사람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세도(世道)가 휩쓴 듯하였는데, 태종께서 영의정 하륜과 더불어 모의하고 엄하게 배척을 가하여 10에 7, 8을 없애어 우리 도를 밝히고 풍속을 다시 바르시와, 오늘날에 이르러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불교가 옳지 못함을 알게 되어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로 돌아가게 하시매 들인 힘은 적되 공은 많을 때이온데, 전하께서 도리어 독단으로 모든 의논을 배척하고 일으켜서 높여 섬기시니, 이것이 신 등의 소망에 어긋나는 바이옵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知中樞院事鄭麟趾等上疏曰 臣等近日伏聞殿下欲慶讃興天寺浮屠 措辦諸事 臣等謹陳其不可 未蒙兪允 臣等寢食輾轉 謹以所懷條列于後 伏望殿下一一採納 更留三思 以副一國臣民之望 一 臣等竊聞高麗自太祖以來 事佛漸盛 五百年間 世無善政 至于末葉 風俗大毁 大小婦女絡繹寺刹 無賴僧徒混雜閭閻 淫風大行 政敎衰微 遂至亂亡 太宗目擊其事 立度牒之法 嚴上寺之令 絶棟樑之僧 禁新創之寺 數十年間 風俗歸正 實爲社稷鞏固之基 今殿下復開其源 末流安可塞哉 此臣等之所以痛切者也 一 殿下以爲 自古帝王 莫不歸佛 且以天下歸佛 而我國小如蓼葉 安得獨廢哉 然臣等以爲漢唐以後歷代帝王 間有事佛 無大禍敗者 皆非所以可法也 唐高祖沙汰僧尼 太宗末年多愛,復立浮屠 以累貞觀之治 崩未數十年 唐室之禍慘矣 佛力果安在哉 天地之氣 自有盛衰 秦漢以後 世無善治 異端日熾 僧尼道士 雖不得遽絶 然君上處之之道 不可謂未能遽絶而姑崇信之也 譬如養嘉穀者 不可以稂莠爲不可遽除 從而培壅之也 且以蓼葉之國 爲僧者日衆 遊手坐食 以爲逋逃之藪 此亦國家之所當痛禁者也 一 前朝佛法爛熳之餘 人皆歸佛, 世道靡然 太宗 與一相河崙謀議 痛加排闢 十去七八 吾道以明 風俗復正 至於今日 一國臣民皆知佛氏之非正 闢異端歸正道 事半功倍之秋也 殿下乃反獨斷排群議而起之 尊而事之 此臣等之所以缺望者也 上終不允)

■세종 28년(1446) 10월 9일.(사헌부 집의 정창손이 불사를 정지시키기를 상소하였다)

사헌부 집의 정창손 등이 상소하기를, “불교가 괴탄(怪誕)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은, 사책(史策)을 상고해 보면 실패한 자취가 명백합니다. 그러하오나 역대의 군신(君臣)들이 그 그릇된 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숭신(崇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진실로 보응의 설과 화복의 논이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간 때문입니다. …… 지난번 흥천사에서 경찬하던 날로부터 불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시종과 대간이 번갈아 장소를 올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힘껏 간하였사오나, 천의(天意)를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조야에서 지금까지 실망하고 있습니다. ……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고명하신 성학(聖學)으로서 어찌 불교에 미혹하여 이러한 신봉하는 행사를 만들어 복상(福祥)을 기원하겠습니까. 다만 세자의 성효가 천성에서 나왔음으로써 전하께서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감히 이 일을 하게 되었지마는,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천만세의 후에는 역대의 불교를 좋아한 군주와 더불어 사책(史策)에 이름이 함께 전하게 될 것이니, 신 등은 매우 두려워하며 매우 원통히 여깁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강단(剛斷)을 크게 돌리시어 사교를 제거하되, 의심하지 마시고 빨리 정파하기를 명하신다면, 유학에 매우 다행하겠사오며 국가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 황수신·우승지 박중림을 내전에서 불러 보시고, 조종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찬경(讚經)을 피람(披覽)한 예와 지금 대간이 와서 간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또 말하기를, “대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대신들도 모두 이와 같은데, 무릇 일을 가부를 의논할 때에는 ‘옳습니다.’고 하였다가, 후일에는 ‘그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만약 말한 사람이 아무라고 가리킨다면 부끄러울 것이니, 이로써 감히 말을 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개 우의정 하연을 가리킨 것이다. 황수신 등이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또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장령 강진에게 이르기를, “불경을 써서 피람(披覽)하라는 일로써 대간에게 전지(傳旨)한 지가 지금 벌써 7, 8월이 되었다. 전일에 정부에서 불사(佛事)를 정지시키기를 청하더니 이튿날 사헌부에서 또 말하게 되니, 이것은 반드시 정부의 말을 듣고 와서 계한다. …… 임금과 신하는 의리로써 합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도가 합하지 않으면 떠나게 되는데, 만약 나로써 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몸을 떠나게 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신하가 되어 임금을 속임이 이 지경에 이른다면 용납해 참고 있겠는가. 다만 이단의 일로 인하여 간신(諫臣)을 처벌한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혐의를 피하는 일은 현명한 사람은 하지 않는 법인데, 내가 비록 부덕한 사람이지만, 임금이 되어 간사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고서도 혐의를 피하고자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정사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창손·강진과 지평 조욱·유맹부, 사간원 우사간 변효경, 지사간 정지담, 헌납 원내인·박윤창, 정언 윤배·김통을 의금부에 내리고, 이내 좌부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가서 이들을 국문하게 하였다.(司憲府執義鄭昌孫等上疏曰 佛氏之所以怪誕幻妄 迷國誤朝 稽諸史策 覆轍昭昭 然歷代君臣 莫覺其非 靡不崇信者 誠報應之說禍福之論 入人深也 …… 曩因興天慶讃之日 佛法復萌 當是之時 侍從臺諫 迭上章疏 守闕力爭 未回天意 朝野至今缺望 …… 臣等竊念殿下高明聖學 豈惑於佛 作此崇奉 以祈福祥也 直以聖子誠孝 出於天至 殿下重違其意 敢爲此擧 臣等竊謂千萬世之後 與歷代好佛之主同垂於史策 臣等深竊懼焉 深竊痛焉 伏望殿下廓回剛斷 去邪勿疑 亟命停罷 斯道幸甚 國家幸甚 疏上 上大怒 引見都承旨黃守身右承旨朴仲林于內 語祖宗賓天之後 讃經披覽之例與今臺省來諫之事 且曰 非止臺諫 當今大臣 皆若此 凡事當議可否之時則曰可 後日曰否 予若指言某也則可愧矣 是以不敢發言也 蓋指右議政河演也 及守身等出 上又使首陽大君謂掌令康晋曰 以寫經披覽 傳旨臺諫 今已七八月矣 前政府請止佛事 明日憲府亦言之 是必聞政府之言而來啓 …… 君臣以義合 故道不合則去 若以予爲不合 引身而去 則予何言哉 人臣而欺君至此 其可容忍乎 但因異端之事而罪諫臣 衆必疑之 然避嫌 賢者不爲 予雖不德 旣爲人君 見姦詐不直之人 欲避嫌而不之罪 則豈可謂好善惡惡之政乎 遂下昌孫晋及持平趙頊柳孟敷司諫院右司諫卞孝敬知司諫鄭之澹獻納元乃仁朴允昌正言尹培金統于義禁府 仍命左副承旨李思哲往鞫之)

■세종 31년(1449) 7월 1일.(수양대군과 도승지 이사철에게 흥천사에서 기우제 하라 명하다)

수양대군 이유(李瑈)와 도승지 이사철을 명하여 흥천사에서 기우제 하게 하였는데, 이유가 승도(僧徒) 속에 섞여서 뛰어 돌아다녀 땀이 흘러 등이 젖었어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불도의 가르침에 혹신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의 도보다 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그르다고 한 것은 불씨(佛氏)를 깊이 알지 못한 것이었다. 천당·지옥과 사생·인과가 실로 이치가 있는 것이요,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닌데, 불씨의 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는 모두 망령된 사람들이라, 내 취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종실 중에서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깊이 존경하여 신봉하였다.(命首陽大君瑈都承旨李思哲 祈雨于興天寺 瑈雜於僧徒中 踴躍周匝 汗流沾背 略無倦色 惑信釋敎 嘗謂 勝於孔子之道 程朱非之 不深知佛氏者也 天堂地獄 死生因果 實有是理 決非虛誕 不知佛氏之道而斥之者 皆妄人 吾不取也 於宗室中 瑈及安平大君瑢深敬信之)

■세종 31년(1449) 12월 3일.(세자의 쾌차로 보사재·보공재를 베풀다)

세자의 병이 나았으므로, 보사제(報祀祭)를 종묘와 사직에 행하고, 또 보공재(報功齋)를 불당과 흥천사에서 베풀되, 향악을 연주하여 받들게 하였다.(以世子疾愈 行報祀 祭宗廟社稷 又設報功齋于佛堂及興天寺 奏鄕樂以供之)

이렇듯 사간원이나 유생들의 끈질긴 상소가 있어도 세종은 자신의 불교 신봉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것이 이 『사리영응기』가 탄생하게 되기까지 이르게 된 배경적 힘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사리영응기』가 이루어진 시기와 연관되는 대군들이 호불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자.

■세종 29년(1447) 9월 24일.(불골을 흥천사 사리각에 간직하게 하다)

안평대군 이용에게 명하여 불골(사리)을 흥천사의 사리각에 간직하게 하였다. 불골은 본디 이 각에 있었는데 일찍이 대궐 안에서 들여왔던 것이었다. 외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돌려간 것이었다.(命安平大君瑢 藏佛骨于興天寺舍利閣 佛骨本在此閣 嘗取入禁中 外人莫之知 至是還之)

■세종 30년(1448) 7월 21일.(생원 유상해 등이 불당의 역사를 파할 것을 상소하다)

생원 유상해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또 생각하기를 귀척(貴戚)의 신하는 간절한 기개와 풍성한 충성으로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는 사람이니, 임금이 만일 허물이 있으면 허물을 고치게 하고 틀리는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다른 신하의 비할 것이 아닌데, 지금 효령 대군은 부도(浮屠)를 높이고 믿어서 밖에서 주창하고, 안평 대군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안에서 호응하옵니다. 안팎이 서로 응원하여 부처를 섬기기를 날로 부지런히 하며, 혹은 토목을 크게 일으키어 사사(寺社)를 영건하고, 혹은 금을 녹여 경을 쓰는 등 재물을 백단으로 허비하여 성상의 마음을 그르쳐서 오늘의 일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불당의 역사를 파하여 신 등의 바람에 부합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生員兪尙諧等上疏曰 臣等又謂貴戚之臣 愷切忠藎 而與國同休戚者也 君若有過 則繩愆糾繆 非他臣之可比今也孝寧大君崇信浮屠而倡之於外 安平大君同心協力而應之於內 內外相援 而事佛日勤 或大興土木 營建寺社 或銷金寫經 費財百端 以誤聖上之心 以致今日之事 是則無惑乎王之不知也 伏惟殿下罷其佛堂之役 以副臣等之望)

■세종 30년 7월 25일.(대간이 관사를 닫고 와서 불당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안평대군이 의정부와 육조 당상의 청으로 밀지를 받들고서 두세 번 왕복하다)

대간(臺諫)이 관사를 닫고 와서 불당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의정부와 육조 당상이 와서 청하므로, 안평대군이 밀지를 받들고서 사람을 물리치고 왕복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는데, 근시(近侍)와 사관(史官)은 모두 참석하여 듣지 아니하였다.(臺諫闔司來請停佛堂 不報 議政府六曹堂上亦來請 安平大君承密旨 屛人往復者再三 近侍及史官 皆不與聞)

■세종 30년 8월 5일.(수양과 안평 대군이 궁금 옆에 불당을 설치하다)

대간이 불당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두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마침내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만년에 병으로 대신과 접견하지 못하였는데, 광평과 평원 두 대군이 연하여 죽고, 소헌 왕후가 또 승하하니, 임금의 마음이 힘입을 데가 없었다. 이에 수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이 사설에 혹하여 먼저 뜻을 열고 인도하여 궁금 옆에 불당을 두므로, 일국의 신료가 극진히 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히려 하늘을 돌이키지 못하여 성덕(聖德)에 누를 끼쳤으니, 이것은 실로 두 대군의 빌미를 연한 허물이었다.(臺諫請停佛堂之役再三 竟不報上晩年以病不得與大臣接見 而廣平平原二大君連逝 昭憲王后又薨 聖心無聊 於是首陽大君瑈 安平大君瑢惑於邪說 先意啓迪 置佛堂於宮禁之傍 一國臣僚 莫不極諫 而尙不回天 以累聖德 此實兩大君啓迪之過也)

■세종 30년 12월 5일.(불당 경찬회를 베풀다)

불당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고 5일 만에 파하였다. 불당의 제도가 사치와 화려함이 지극하여 금과 구슬이 눈을 부시게 하고, 단청이 햇볕에 빛나며, 붉은 비단으로 재봉하여 기둥에 입혀서 주의(柱衣)라고 이름하여 더럽혀짐을 방지하고, 향나무를 새겨 산을 만들고 금부처 세 구를 그 가운데 안치하였으니, 그 금부처는 안평대군이 일찍이 성녕대군 집에서 감독해 만든 것이다. 근위대로 하여금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가를 호위하는 의식과 같이 대내에 메고 들어가게 하여, 친히 관람하신 뒤에 불당에 안치하였다. 그 바깥담을 쌓을 때에 자꾸 얼어서, 담의 안팎에 숯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하니, 잠시 만에 담이 말랐다. 종친·대군·제군(諸君)들이 다투어 일재(日齋)를 베풀어 혹 뒤질까 염려하였고, 의정부 좌참찬 정분과 병조판서 민신이 그 역사에 제조(提調)가 되었으므로, 모두 털옷[毛衣]을 하사하고, 이명민은 역사를 감독한 일로써 품계를 뛰어 올려 벼슬을 제수하였다. 정분과 민신은 처음에는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관으로써 예에 따라 간하였으나, 감독의 명을 받음에 미쳐서는 지극히 사치하게 하기를 힘써서 임금의 뜻을 맞추니, 식자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경찬회를 베풀자,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기일 전에 그곳에서 치재(致齋)하고 모든 일을 통찰하게 하며, 또 각사(各司)의 장관으로 하여금 공급할 찬품(饌品)을 친히 감독하게 하니, 모두 내주 옹인(內廚饔人)이 장만한 것으로 어선(御膳)과 다름이 없고, 또 외승(外僧)과 사장(社長)을 불당밖의 건천(乾川)에서 공궤하니, 하룻동안에 공궤한 사람이 7, 8백 명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소비한 쌀이 2천 5백 70여 석이었다. 신곡을 지어 관현에 올리고, 악기를 모두 새로 만들어서 공인(工人) 50명과 무동(舞童) 10명으로 미리 연습시켜서 부처에게 공양하여, 음성공양이라고 일렀으니, 종(鍾)·경(磬)·범패(梵唄)·사(絲)·죽(竹)의 소리가 대내에까지 들리었다. 정분·민신·이사철·박연·김수온 등이 여러 중들과 섞이어 뛰고 돌면서 밤낮을 쉬지 아니하니, 땀이 나서 몸이 젖어도 피곤한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이명민이 한 환자(宦者)와 더불어 선언하기를, “바야흐로 정근(精勤)할 때에 문에 나와 돌아보니, 사리가 빛을 내는데, 빛이 불꽃과 같고, 가운데에 흰 기운이 있어 진하게 맺혀서, 떨어지는 것이 진주와 같았다.”고 하니, 듣는 자들이 비난하기를, “진실로 그런 것이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문밖에 있는 명민만이 홀로 보고, 당 안에 있는 여러 사람은 보지 못하였을까.”라고 하였다. 회를 파하고는 수양 대군이 경찬회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계문(契文)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벌여 써서 축(軸)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으니, 주서 성임도 참여하였다. 수양 대군이 말하기를, “너는 공자(孔子)의 도(道)와 석가(釋迦)가 누가 낫다고 이르느냐.”라고 하니, 성임이 대답하기를, “공자의 도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대강 그 뜻을 알거니와, 석씨(釋氏)에 이르러서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매, 대군이 말하기를,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비록 불사르고 갈아 없애려 해도 베풀어 할 곳이 없다’ 한 것은,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佛堂成 設慶讃會 凡五日而罷 佛堂制作 窮極侈麗 金珠眩目 丹靑耀日 以絳綃裁縫被楹 謂之柱衣 以防汚毁 刻香木爲山 安黃金佛三軀于其中 其金佛 安平大君嘗監鑄于誠寧大君第 令近仗具冠帶 如衛大駕儀輿入于內 親賜觀覽 然後安于佛堂 其築外垣時方凍洌 垣之內外 燃炭以溫之 須臾而燥 宗親大君諸君爭設日齋 惟恐或後 議政府左參贊鄭苯兵曹判書閔伸提調其役 皆賜毛衣 李命敏以督役 超資授職 苯伸初以政府六曹隨例諫諍 及承監督之命 務極奢侈 以稱上意 識者譏之 及作會 命都承旨李思哲 先期致齋于其所 統察諸事 又令各司長官親監供給饌品 皆內廚饔人所辦 與御膳無異 又供外僧及社長於佛堂外乾川 一日所供 不下七八百人 所費米二千五百七十餘石 爲製新曲 被之管弦 樂器皆令新造 以工人五十舞童十人預習之 用以供佛 謂之音聲供養 鍾磬梵唄絲竹 聲聞大內 苯伸思哲朴堧金守溫雜於群僧 踴躍周匝 不徹晝夜 汗出渾身 略無倦色 命敏與一宦者宣言 方精勤時 出門顧見 舍利放光 光如火焰 中有白氣 濃結滴落 若眞珠然 聞者譏之曰 誠有是歟 何故在門外命敏獨見 而堂內衆人 未之見也 會罷 首陽大君圖慶讃會 又製契文 列書與會人名 作軸分與之 注書成任亦與焉 首陽大君語曰 汝謂孔子之道 與釋迦孰優 任曰 孔子之道 吾嘗讀其書 粗知其義 至若釋氏 吾不嘗見 其書未敢知也 大君曰 釋氏之道過孔子 不啻霄壤 先儒曰 雖欲挫燒舂磨, 無所施 此未知其理而妄言者也)

■세종 31년(1449) 11월 1일.(세자의 병으로 약사재·수륙재를 행하게 하다)

수양대군 이유·도승지 이사철에게 명하여 약사재(藥師齋)를 불당에서 행하게 하니, 병조 정랑 김수온이 이에 따르고, 안평대군 이용에게 수륙재를 대자암에서 행하게 하니, 소윤 정효강이 이에 따랐다. 수온은 간승(姦僧) 신미의 아우이었다. 몹시 불도를 좋아하여 깊이 그 학설을 믿어 왔고, 항상 말하기를, “만일 불경을 읽어서 그 뜻을 얻으면, 『대학』·『중용』은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효강은 천성이 사특하고 괴팍하여 부처를 독실히 너무 좋아하였다. 길에서 중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공경하기를 다하였는데, 김수온과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의 관계가 밀접하였으므로, 모든 불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들을 임명토록 하였다.(命首陽大君瑈都承旨李思哲 行藥師齋于佛堂 兵曹正郞金守溫從之 安平大君瑢行水陸齋于大慈菴 少尹鄭孝康從之 守溫 姦僧信眉之弟也 酷好佛 深信其說 恒言曰 若讀佛經得其旨 則大學中庸 特粗粕耳 孝康性傾邪剛愎 好佛甚篤 道見僧則必下馬致敬 與守溫爲唇齒 凡有佛事 必命之)

4.2. 불교 의식과 궁중 음악의 자료적 가치

소(疏)로 기록된 주소(註疏)에는,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사리의 출현을 기원하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부처님께 예배하기 위한 도량(道場)을 건설하면서, 부처님을 뵙는 의식에서 삼보(三寶)에게 공양하고 회향하는 절차와 찬송 및 참회의 글들은 한 편 한 편이 훌륭한 시문학이다. 이 역시 불교 가송의 뛰어난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불찬(諸佛讚)이나 삼보찬(三寶讚)의 찬시는 게송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 중의 1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眉細初疑柳葉靑 又驚新月暮天生

假饒騪巧吳王筆 畵也元來畵不成

눈썹 가늘어 처음엔 푸른 버들잎인가 의심하고

또 초승달이 저녁 하늘에 돋음에 놀라다.

교묘한 오왕의 붓을 빌린다 해도

그림이라 원래 그림으론 이룰 수가 없네.

이는 작관이동발시언(作觀已同發是言)의 주소 아래에 있는 수십 편 게송의 일부이니, 부처님의 32상호(相好)의 하나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을 찬미한 것이다. 1수의 시로 독립시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이 항에 있는 염언(念言)의 십 수 편이 모두 이러한 수준 높은 작품이니, 이것만으로도 연작의 장편시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또 주목되는 것은 세종이 직접 신성악곡(新聲樂曲)을 지었으니,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등 7곡이고, 악장 9수를 지었으니 귀삼보(歸三寶) 등이다.

常住十方界 無邊勝功德

大捨大慈悲 廣爲衆生益

歸依至心禮 消我顚倒業

항상 시방세계에 머무니, 가없는 좋은 공덕

큰 희사와 큰 자비로, 널리 중생에 이익이 되니

지극한 마음의 예로 귀의하여, 나의 전도된 업을 소멸시키소서.

이는 귀삼보의 악장이다. 악장의 형식이 원래 시이니 여기서도 시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사리영응기』에서 군왕의 문학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본 〈사리영응기〉의 말미의 시는 전형적 게송(偈頌)이니, 작자 김수온의 게송문학이 추가되는 셈이다.

새로 지은 악장을 가지고 찬양의 음악을 알리게 하여 행사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궁중음악의 실물을 보인 셈이어서, 조선조 음악의 산 기록으로 남게 된 좋은 자료이다.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이가 45인이라 했으니 45인조의 관현악인 셈이고, 그 때 등장하는 악기의 하나하나가 다 열거되어 있어 조선 초기 악기의 실상을 살피기에도 좋은 자료이다. 화동(花童)이 10인이니 의식에 올리는 꽃이 10가지인 셈이다.

4.3. 정음 표기의 인명(人名)

본문이 끝나고 4언의 장시(長詩)로 마무리한 뒤에, 그 말미에 ‘정근입장인명(精勤入場人名)’이 있어, 당시 이 경찬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 인명의 기록에는 몇 가지의 흥미로운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총 261명인데 기록의 순서가 승려 52명, 대군이 6명, 일반 관리가 203명이니, 이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불교적 행사인 이 간행 사업에 참여한 인명을 기록함에 있어서 왕족인 대군보다도 사업의 주체인 승려를 앞세웠다는 것은 사리(事理)를 분명히 한 당시의 사회적 질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불교적 행사이기에 불교를 앞세웠다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당시의 정명적(正名的) 주021)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47명의 이름이 정음으로 표기된 점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는 이들의 이름이 한자로 표기될 수 없는 우리 고유어 호칭이었기 때문이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이라면 이런 경우에 한자의 차음으로 표기(이두식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 책의 인명 표기는 바로 세종이 정음을 창제한 근본적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어서 매우 의의가 깊다 하겠다.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吾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라 말한 바와 같이 백성의 ‘말’을 기록하려는 군왕의 뜻에 바로 부합하는 좋은 실례이다. 그간의 이 『사리영응기』에 대한 고찰이 주로 정음 표기의 인명에 대한 어학적 고찰에 기울었으나, 주022) 필자는 그보다는 ‘말’의 기록을 정음의 실용적 수단으로 삼았던 창제자의 실험 정신이 정확히 반영된 것이라는 점에 더 무거운 의미를 두고 싶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록된 이름이 ‘문자적 이름으로서의 명칭(名稱)’이 아니고, ‘언어적(정음적) 부름 수단으로서의 호칭(呼稱)’이었다는 점이다. 조심스러운 추론이기는 하나, 여기에 정음으로 표기된 인물들이 주로 하급 관리임을 고려한다면, 하층민에게는 기록 대상으로서의 문자적인 이름인 명칭은 필요하지 않았고, 부름 수단으로서의 언어적 호칭만이 통용되었던 당시의 풍속을 반영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정음 호칭을 기록하면서도 개개인의 성(姓)은 한자로 기록하고 활자도 본문의 크기와 같이 했음은 성(姓)은 씨족 공동의 문자적 명칭인 개념을 지닌 대상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여기서도 유교의 명분론을 중시하였던 조선조 사회의 질서 의식을 엿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음으로 표기함으로써 한자로는 정확히 표기할 수 없는 이름, 곧 이것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대로 정확하게 발음해야 그 사람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면에서, 정음이 한자보다 매우 주도면밀한 문자임을 실험하고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이두로도 족하다는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의 상소를 대하면서 새 글자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다분히 세종의 의중이 표출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47명의 직함 중 대부분은 상림원 급사(上林園給事)인데, 상림원은 궁중의 정원을 맡은 관서의 이름으로, 세조 4년에 장원서(掌苑署)로 개칭이 된다. 상림원 사정(司正)이 7품이고 급사(給事)는 전직(殿直)이나 섭대부(攝隊副)와 함께 9품으로서, 최하위의 군직(軍職)이다. 그러니까 정음으로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궁중의 잡무를 맡은 하위직 인물이었던 셈이다.

『사리영응기』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정음으로 표기된 사람 47명의 이름을 모두 보이면 다음과 같다.

司協郞 前典樂署典律 臣 <인명 realname="">韓실구디

服勤副尉 前上林園司正 臣 <인명 realname="">朴검

服勤副尉 前上林園司正 臣 <인명 realname="">朴타내

服勤副尉 前上林園司正 臣 <인명 realname="">金올마내

調協郞 前典樂署副典律 臣 <인명 realname="">高오디

調協郞 前典樂署副典律 臣 <인명 realname="">李오마디

尙工副尉 上林園副司正 臣 <인명 realname="">薛쟈가

尙工副尉 行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姜타내

典引郞 前掖庭署左班殿直 臣 <인명 realname="">河마디ᇰ

典引郞 前掖庭署左班殿直 臣 <인명 realname="">金타내

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金도티

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盧고소미

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車매뇌

前上林園給事 臣 <인명 realname="">姜리대

龍賁侍衛司 前後領攝隊副 臣 <인명 realname="">崔올미동

前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林더믈

前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金재

前上林園副給事 臣 <인명 realname="">金검불, 臣 <인명 realname="">劉은, 臣 <인명 realname="">梁오지, 臣 <인명 realname="">金구디, 臣 <인명 realname="">崔수새, 臣 <인명 realname="">咸디, 臣 <인명 realname="">金막, 臣 <인명 realname="">金막, 臣 <인명 realname="">龍오마디, 臣 <인명 realname="">姜관, 臣 <인명 realname="">權모리쇠, 臣 <인명 realname="">玄더대, 臣 <인명 realname="">石, 臣 <인명 realname="">姜, 臣 <인명 realname="">姜막, 臣 <인명 realname="">金, 臣 <인명 realname="">許우루미, 臣 <인명 realname="">田오마디, 臣 <인명 realname="">朴북쇠, 臣 <인명 realname="">金어리, 臣 <인명 realname="">閔막, 臣 <인명 realname="">金돌히, 臣 <인명 realname="">石눅대, 臣 <인명 realname="">李아가지, 臣 <인명 realname="">朴곰, 臣 <인명 realname="">姜타내, 臣 <인명 realname="">朴오마대, 臣 <인명 realname="">姜막, 臣 <인명 realname="">金거매, 臣 <인명 realname="">李쟈근대.

이 밖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에서도 ‘方羅睺羅’와 같이 발음을 한자로 적은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우선 한자로 적을 수 있는 이름은 최대한 한자로 적으려고 했지만 한자로 표기하지 않았던 이름은 정음으로 쉽게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 이후 사람 이름을 정음으로 적은 문헌은 이 책이 처음이다. 참고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광해군 9년, 1617)에서는 한자 이름과 정음 이름을 나란히 병기한 것을 볼 수 있으니, 한자로 썼지만 더욱 확실한 이름을 적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명 realname="虫介">虫介벌개, <인명 realname="裴敬仝">裴敬仝배경동, <인명 realname="李石乙大">李石乙大니돌대, <인명 realname="李毛知">李毛知니모디, <인명 realname="良里加">良里加냥니가,

<인명 realname="卵乙同">卵乙同알동, <인명 realname="內隱伊">內隱伊논이, <인명 realname="裵鐵重">裵鐵重배텰듕, <인명 realname="金芿叱達">金芿叱達김늣달, <인명 realname="多勿">多勿다믈,

<인명 realname="張愁伊同">張愁伊同댱쉬동, <인명 realname="末今">末今말금, <인명 realname="仇叱非">仇叱非굿비, <인명 realname="李介未致">李介未致니개미티, <인명 realname="李召史">李召史니조이,

<인명 realname="建金伊">建金伊건쇠, <인명 realname="石乙含">石乙含돌함, <인명 realname="孫末叱世">孫末叱世손귿셰, <인명 realname="是加">是加시개, <인명 realname="金聆金">金聆金김녕쇠.

한자 표기가 정음 표기와 다른 것을 볼 때, 한자는 이두식으로 뜻을 표기하였고, 그 부분을 정음으로 표기하여 부르는 이름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정음이 얼마나 면밀한 글자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사리영응기』가 부르는 이름 그대로를 적은 것과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정음 표기는 이두식 표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 이미 현실음과 괴리가 생겨 어색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쓰여진 정음 활자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주석(註釋)에 사용하였던 활자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두 책이 같은 시기에 주자소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책의 활자는 갑인자(甲寅字)인데, 이 갑인자는 세종 16년(1434)에 만든 동활자로서 진(晉)나라 위부인자(衛夫人字) 서체와 닮았다고 하여 일명 ‘위부인자’라고도 한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지중추원사 이천(李蕆),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 김호(金鎬),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 명나라 후기의 판본(『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논어(論語)』 등)으로 글자 본을 삼아 만든 활자이다. 경자자(세종 2년, 1420)보다 모양이 좀 크고 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모두 합하여 20여만 자에 이른다. 이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주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개주된 활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주조했다는 의미의 초주(初鑄)를 붙여 구별하는데, 이 초주갑인자로 찍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손보기, 『세종시대의 인쇄출판』(1986),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학연의(大學衍義)』,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 표제주소소학(標題註疏小學),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당유선생집(唐柳先生集),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전후집(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前後集),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칠정산내편(七政山內篇), 칠정산외편(七政山外篇), 시선(詩選), 동국정운(東國正韻),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석보상절(釋譜詳節),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 시전대전(詩傳大全),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 증간교정왕장원집주분류동파선생시(增刊校正王狀元集註分類東坡先生詩), 국어(國語), 태양통궤(太陽通軌),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 오성통궤(五星通軌),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경오원력(庚午元曆), 교식통궤(交食通軌),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선덕십년월오성능법(宣德十年月五星凌法), 수시력입성(授時曆立成), 산곡시주(山谷詩註), 당시고취(唐詩鼓吹), 당시고취속편(唐詩鼓吹續編), 당송귀법(唐宋句法), 전한서(前漢書), 신간보주석문황제내경소문(新刊補註釋文黃帝內經素問), 소미통감집석(少微通鑑輯釋), 소학집주(小學集註),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어제시(御製詩),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영가진각대사증도가집(永嘉眞覺大師證道歌集), 좌익원종공신록권(左翼原從功臣錄券), 국조보감(國朝寶鑑),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동국지지(東國地誌), 진법(陳法),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능엄경발(楞嚴經跋), 북사(北赦),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어제시(御製詩),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표해록(漂海錄), 황화집(皇華集), 정선당송십가연주시격(精選唐宋十家聯珠詩格), 동문선(東文選), 문선(文選), 향산시초(香山詩抄), 시대문(詩大文), 서대문(書大文), 수계선생평점간재시집(須溪先生評點簡齋詩集), 후한서(後漢書).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정음 활자도 주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하기 위해 주조된 것인데, 한자는 이미 만든 갑인자를 썼고, 한글은 새로 만들어 보충한 것이다. 그래서 ‘초주갑인자 병용 한글활자’ 또는 ‘월인석보 한글자’라 일컫는다. 『사리영응기』의 정음표기 활자가 이 활자이다. 원본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음의 표기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사리영응기 24장 앞뒤쪽〉

〈석보상절 권21, 1장 앞뒤쪽〉

〈월인천강지곡 상, 1장 앞뒤쪽〉

〈동국정운 권6, 40~41장〉

태종 3년(1403) 2월에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동활자의 주조를 명하였는데, 이때 수개월 걸려 완성된 활자가 계미자(癸未字)이다. 이 글자는 밀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그 끝을 송곳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그 후 세종은 세종 2년(1420)에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는데, 활자와 조판용 동판을 튼튼하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하여, 인쇄중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의 능률이 계미자보다 훨씬 증가하여 하루에 20여 장을 찍어냈다. 세종은 세종 16년(1434) 7월에 또다시 개주에 착수하여 큰 자와 작은 자의 동활자 20여만 개를 만들게 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이다. 이는 글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명정한 필서체이며, 이 갑인자에 이르러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메워 조판해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켜 하루의 인출량이 40여 장으로 대폭 증진되었다.

갑인자는 선조 13년(1580)에 재주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전해지고 있는 인본이 가장 많다. 이 활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조선 말기까지 보주 또는 개주되면서 주용되었다. 네모난 해서체는 칼로 깎은 듯하여 계미자와 경자자에 실증을 느낀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크고 아름다운 붓길대로 나타내는 서체를 따서 갑인자 활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술상으로도 경자자보다 옆면을 비스듬하게 등쪽에서 좁혀서 만들어 밀랍을 쓰지 않고 판을 짤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다. 인쇄술의 능률이 한 단계 뛰어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글을 창제하고 처음으로 한글 활자를 찍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세종 29년(1447)에 인출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세종 30년(1448)에 인출된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한글이 모두 갑인자로 찍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영응기』를 포함해서 모두 4가지의 책에서 초주갑인자 한글 활자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사법어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학교 교수)

1. 서론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지은 한문본 『수심결(修心訣)』을 조선 세조때 신미(信眉)가 우리말로 언해하여 1467년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책이다.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의 서두에서 삼계(三界)의 고뇌를 ‘화택<세주>(火宅=불난 집)’에 비유해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부처[佛]를 이루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心]이 참 부처이고 자기 성품[自性]이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해 밖에서만 찾는다고 하고, 마음[心]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을 9문 9답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지눌은 이 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체계화하였는데, 분량이 적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선수행(禪修行) 지침서이자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의 이름은 작자인 지눌의 호(號) ‘목우자(牧牛子)’를 앞에 붙여 ‘목우자수심결’이라 부르나, 한문본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일반적으로 『목우자수심결언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글의 예문 설명에서는 판심제에 따라 ‘수심결’로 줄여 부르기로 한다.)

한편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晥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등 4편의 법어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당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권수제는 ‘法語’이나 후대에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된 책에서 권말서명이 ‘四法語’로 나타나므로 학계에서는 흔히 ‘사법어(四法語)’라 부른다.

이 두 책은 1467년(세조 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합철되어 있어서 판식(板式)이나 체재 등에서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인다. 그러한 형태적 유사성은 국어학적 특성의 유사성으로까지 이어진다. 『목우자수심결언해』와 『사법어언해』는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표기법이나 문법, 어휘 면에서 흥미로운 양상을 많이 보여준다.

이 책들보다 먼저 간행된 책에서는 이미 사라진 ‘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든가, 다른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는 문법적 특성이 보인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사법어언해』는 총 9장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헌에 없는 희귀어가 여러 개 사용되어 어휘 면에서도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서지 사항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는 내제(內題) 다음에 2행에 걸쳐 ‘丕顯閤訣 慧覺尊者譯’이라고 되어 있어서 동궁(東宮)의 편당(便堂)인 비현합(丕顯閤)에서 구결을 달고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언해본은 번역자의 이름을 책에 밝히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목우자수심결언해』는 번역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특이하다. 이는 뒤에서 살필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도 마찬가지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원간본에는 그 앞에 『사법어언해』가 합철되어 있다. 이 책의 끝에는 “成化三年丁亥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 … 安惠柳睆朴耕書”라는 간기가 있으므로 1467년(세조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되었다는 것과 판하본(板下本)의 글씨를 안혜(安惠)·유환(柳睆)·박경(朴耕)이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복각되기도 하였는데, 1500년(연산군 6년)에 간행된 중간본은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후 간기를 따로 붙인 것이다. 원간본인 간경도감판에 비해 판식과 판각, 인쇄가 매우 엉성하다. 봉서사 중간본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가 합철된 것과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이 합철된 것 두 가지가 있다. 두 책 모두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권말에 나오는 간기가 ‘弘治十二年’으로 되어 있으나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과 합철된 책의 권말에 ‘弘治十三年’이라는 간기가 뚜렷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十三’에서 탈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서사에서 간행된 중간본은 후쇄본까지 있어 꽤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경도감판인 원간본은 목판본으로서, 불분권(不分卷) 1책(冊)이며 크기는 23.1×17cm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8×12.8㎝이며 유계(有界)에 9행 17자이다. 판심(版心)은 상하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다. 권수제(卷首題), 권말제는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고 판심제(版心題)는 ‘수심결(修心訣)’이다.

현재 원간본은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一簑 古貴 294.315-J563ma, 보물 770호)와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목우자수심결 도서번호 : L174361)에 소장되어 있고, 봉서사에서 간행된 중간본과 그 후쇄본이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에는 일사문고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한편,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10장 내외의 적은 분량이어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것은 『목우자수심결언해』와 합철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문고본이다. 소창문고본(사법어 도서번호 : L174529)도 일사문고본과 같은 책이지만 후대에 『사법어언해』 부분만 따로 제책한 것이다.

그런데 『사법어언해』는 간기가 따로 제시되어 있지 않아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법어언해』의 간기로 그 간행 연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일사문고본 『목우자수심결언해』 권말의 “成化三年丁亥歲 朝鮮國刊經都監奉敎雕造”라는 기록을 통해 『사법어언해』의 원간본도 1467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책은 각 법어(法語)에 구결을 달아 원문을 먼저 싣고 우리말 번역을 보이는 체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후에 지방의 사찰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500년(연산군6년)에 경상도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후 간기를 따로 붙여 간행하였고, 1517년(중종 12년)에 충청도 연산(連山) 고운사(孤雲寺)에서 체제를 바꾸어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하여 중간하였다. 고운사판은 합철된 『몽산법어언해』의 체재와 같이 법어를 대문으로 나누어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간경도감 판본과 차이가 있다. 이후 1525년(중종20년) 황해도 황주(黃州) 심원사(深源寺), 1577년(선조 10) 전라도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1605년(선조38년)에 원적사(圓寂寺) 등에서 다시 간행된 『사법어언해』는 고운사판의 체재와 동일하다.

『사법어언해』 원간본의 판식(板式)은 『목우자수심결언해』 원간본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총 9장으로 크기는 23.1×17cm이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8×12.8㎝이며 유계(有界)에 9행 17자이다. 한글 구결과 언해는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대부분의 간경도감본과 마찬가지로 상하대흑구(上下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이며, 권수제와 판심제는 ‘法語’로 되어 있다. 고운사 계통의 중간본은 총 13장이며, 사주단변(四周單邊)인 것이 많고 7행 18자이다. 그러나 송광사본은 총 27장에 7행 15자이다.

현재 원간본은 규장각 일사문고에 2부, 일본 동경대 소창문고에 1부가 전하며 중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을 비롯한 공사립 도서관과 개인소장으로 다수가 전한다. 1973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일사문고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합철)과 고운사판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와 합철)이 출판되었다. 또한 1979년에는 홍문각에서 『오대진언(五大眞言)』과 합본된 송광사판 영인본이 출판되었다.

3. 표기법 및 음운 주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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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제시하는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국어학적 특징은 이현희 외(1997)의 내용을 많이 참조하였다. 형태나 통사, 어휘의 특징 등은 이현희 외(2007)의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 많다. 출처의 약호는 『목우자수심결언해』는 ‘수심결’로, 『사법어언해』는 ‘법어’로 하며, 해당 장의 앞·뒷면은 각각 ‘ㄱ·ㄴ’으로 구별 표기한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의 원간본인 간경도감판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언해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언해본의 표기법 및 음운의 특성은 거의 유사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 등도 쓰였는데 ‘ㅿ’의 쓰임에는 혼란이 없다. ‘ 업순’〈수심결19ㄴ〉과 ‘이’〈수심결45ㄱ〉, ‘에’〈법어8ㄴ〉에서처럼 ‘ㅿ’이 종성에만 적히는 것과 ‘저’〈법어2ㄱ〉, ‘디녀’〈법어2ㄱ〉, ‘지’〈법어2ㄱ〉, ‘나믈릴’〈법어5ㄴ〉, ‘매’〈법어6ㄱ〉, ‘오’〈법어6ㄴ〉에서처럼 초성에 적힌 것이 모두 보인다. 한편, ‘ㆁ’은 ‘이’〈수심결19ㄱ〉〈법어2ㄱ,7ㄴ〉, ‘디니노다’〈법어2ㄱ〉, ‘스스’〈법어6ㄴ〉, ‘스이’〈수심결15ㄱ〉〈법어9ㄴ〉, ‘’〈법어6ㄱ〉, ‘’〈수심결19ㄴ〉에서처럼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였다. ‘ㆁ’의 연철 표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가장 철저히 지켜졌는데 대개 『두시언해(杜詩諺解)』(1481)를 기점으로 ‘ㆁ’ 종성화 표기가 점차 증가하다가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에서는 정착 단계에 이른다.

국어 표기법에서 다소 특이한 것은 ‘ㅸ’인데, ‘ㅸ’은 부사 파생접미사 ‘-이’와 결합할 때에만 쓰였다. ‘수’〈법어2ㄱ〉, ‘가야’〈수심결9ㄱ〉, ‘어즈러’〈수심결7ㄱ〉〈법어5ㄱ〉, ‘조’〈수심결11ㄱ〉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관판 문헌에 반영된 표기법을 보면 ‘ㅸ’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부터 전격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수’〈석상20:30ㄴ〉~‘쉬’〈월석13:12ㄴ〉와 같이 표기되던 것이 ‘수이’〈능엄1:34ㄴ〉~‘쉬이’〈능엄6:89ㄱ〉로 일사불란하게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는 국어 표기법사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특이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책의 원고는 1461년 이전에 언해되어 그 후 부분적으로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책에서 ‘ㅸ’이 제한적 분포를 보이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15세기에 실제 음소로서 존재했던 ‘ㅸ’이 당시에 이미 ‘ㅸ’이 음소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ㅸ’은 실제로 존재했던 음소가 아니었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수이/쉬이’ 방언형과 ‘수비/쉬비’ 방언형을 절충적으로 표기하기 위한 문자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ㅸ’의 음가를 [β]이었다고 볼 때 동남방언 등에서 ‘ㅸ〉ㅂ’으로 변화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실과 정음 초기문헌부터 1461년 이전 문헌에서 활발히 쓰이던 90여개 이상의 어휘에서 어느 문헌을 기점으로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음운사적, 음성학적 관점으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 이전 문헌들, 특히 방언이나 차자표기 자료들에서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을 제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ㆆ’의 실현 양상은 두 문헌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것만 볼 수 있는데, 『사법어언해』에서는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것 외에 사이시옷으로 쓰인 예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차이가 이들 문헌의 표기법이 달랐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료의 양이나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나타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예로는 ‘어루 마촤 디라’〈수심결45ㄱ〉, ‘求 사미’〈수심결45ㄴ〉, ‘디언뎡’〈법어2ㄴ〉, ‘마디니’〈법어5ㄴ〉, ‘니 時節’〈법어5ㄱ〉 등이 있으며, ‘ㆆ’이 사이시옷으로 쓰인 예로는 ‘無ㆆ字’〈법어2ㄴ〉가 있다. 이때 ‘ㆆ’이 사이시옷으로 쓰인 ‘無ㆆ字’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60년경) 등 훈민정음 창제 초기문헌의 표기법과 동일하다. ‘ㆆ’이 관형사형 어미 ‘ㄹ’과 병서되어 쓰인 예는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 언급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볼디언’〈법어5ㄴ〉, ‘마롤디니라’〈법어5ㄱ〉, ‘드률 時節’〈법어5ㄴ〉 등과 같이 ‘ㆆ’이 폐지된 채 관형사형 어미 ‘ㄹ’만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고유어의 각자병서 표기는 더 드문 편이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ㅆ’만 쓰였는데, ‘말’〈36ㄱ〉, ‘아니’〈2ㄴ〉와 같은 예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이 ‘말로’〈19ㄴ〉, ‘아니’〈12ㄴ〉 등으로 쓰였다. 『사법어언해』에서는 ‘말’〈6ㄱ〉, ‘믜’〈2ㄴ〉 등 극소수에서 ‘ㅆ’과 ‘ㆀ’을 발견할 수 있을 뿐 대체로 폐지되었다. 이것은 15세기 국어 표기법의 역사로 볼 때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1465)에서부터 ‘ㆆ’과 각자병서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어 ‘ㅭ→ㄹ’로, ‘각자병서→전청자(후음은 차청자)’로 적는 원칙을 따른 결과이다. 이들 문헌에 쓰인 ‘ㅆ’, ‘ㆀ’에 대해서는 문자의 보수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이들 문헌이 각자병서가 사용되던 시기에 언해되었으나 그 원고를 후대에 간행하면서(1467년) 제대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ㆀ’는 『법화경언해』(1463)부터 폐지되었는데 『사법어언해』에 보이는 것이어서 이 책의 원고 작성 시기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 문헌에 사용된 합용병서는 정음창제 초기문헌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로’〈수심결5ㄴ〉, ‘리오’〈수심결42ㄴ〉, ‘두’〈수심결25ㄱ〉, ‘’〈수심결10ㄱ〉와 ‘-’〈수심결2ㄴ〉, ‘’〈수심결3ㄱ〉, ‘’〈수심결2ㄴ〉, ‘’〈법어2ㄱ〉, ‘든’〈법어2ㄴ〉, ‘며’〈법어5ㄴ〉, ‘힘미’〈법어6ㄱ〉 ‘’〈법어2ㄴ,5ㄴ〉, ‘며’〈법어9ㄴ〉, ‘리고’〈법어6ㄱ〉, ‘해’〈법어5ㄴ〉, ‘븨니’〈법어6ㄴ〉, ‘리’〈법어9ㄴ〉 등이 그것이다.

자음동화(비음화)가 반영되지 않은 형태와 반영된 형태가 모두 보이기도 한다. ‘듣노라’〈수심결19ㄱ〉와 ‘든논’〈수심결19ㄱ〉의 공존, ‘니다가’〈수심결12ㄴ〉·‘뇨리니’〈법어5ㄴ〉에 대한 ‘녀’〈수심결24ㄴ〉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 ‘믌결’〈수심결30ㄱ〉에 대한 ‘믓겨리’〈수심결24ㄴ〉처럼 사이시옷 앞에서 ‘ㄹ’이 탈락된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가 모두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런 것은 15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한편 이들 문헌에는 ‘ㅈ’ 구개음화로 해석될 수 있는 예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는 ‘몬져’〈24ㄴ,29ㄱ〉에 대한 ‘몬저’〈10ㄱㄴ,25ㄱ,30ㄴ,35ㄱㄴ,37ㄱㄴ〉가,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는 ‘이제’〈6ㄱ〉에 대한 ‘이졔’〈6ㄴ〉 등이 보인다. 이 중 『목우자수심결언해』에는 ‘몬저’가 13회나 출현한 데 반해 ‘몬져’는 2회밖에 출현하지 않아 ‘몬저’를 단순한 오기로 처리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후자 ‘이졔’를 ‘이제’의 과잉교정 표기로 본다면 ‘ㅈ’ 구개음화에 대한 역표기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몬져’라는 단어에서 ‘ㅈ’구개음화가 시작되었는지, 또 왜 이 단어에서만 혼기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주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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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현(2007)에서는 이들 문헌에 나타나는 예를 가지고 이 시기에 이미 ‘ㅈ’구개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 문헌에 보이는 제한된 예를 가지고 15세기에 ‘ㅈ’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이와 같은 점은 이현희 외(2007: 36~37)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ㆍ’의 비음운화 현상도 보인다. 『사법어언해』에서 ‘사’〈5ㄱ〉이 ‘사름’[人]〈5ㄴ〉으로 표기된 예는 비어두 위치에서 ‘ㆍ〉ㅡ’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져’[將·持]〈수심결11ㄱ〉, ‘져셔’〈수심결35ㄴ〉와 같이 어간의 제1음절에서 ‘ㅏ’를 가지고 있던 단어(가지다)가 ‘ㆍ’로 표기된 것은 ‘ㅏ〉ㆍ’로의 변화를 보여 일반적 변화 유형 ‘ㆍ〉ㅏ’와는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자인 신미(信眉)의 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색다르긴 하지만 어두 위치뿐 아니라 비어두 위치에서의 ‘ㆍ’의 변화와 관련 있는 사실이라 지적해둔다.

모음조화가 적용되지 않은 예들도 여럿 발견된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보, 보믈’〈13ㄴ〉 등처럼 같이 형태소 경계에서 모음조화에 맞거나 맞지 않은 예가 정음 초기문헌에 비해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증가했다. ‘부텨’〈수심결12ㄴ〉, ‘더라’[←덜-+아]〈수심결24ㄴ〉, ‘어료’〈수심결2ㄴ〉 등은 음성모음 어간이 양성모음의 어미나 조사를 취한 예로, 같은 문헌에서 모음조화에 맞는 ‘부텨를’〈수심결2ㄴ〉, ‘더러’〈수심결24ㄴ〉, ‘어드리니’〈수심결3ㄱ, 25ㄱ〉 등과 대조적이다.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는 ‘오’ 모음동화 현상이 발견된다. ‘알포로’〈6ㄱ〉, ‘니로모로 브터’〈5ㄱ〉가 그것인데, 이들은 보통 ‘알로’〈석상3:19ㄴ〉, ‘니로로〈원각,하3-1:20ㄴ〉 브터’와 같이 표기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부사격 조사 ‘로/으로’가 제2음절 ‘로’의 원순모음 ‘ㅗ’의 영향으로 제1음절 ‘/으’가 ‘오’로 역행동화되어 ‘오로’로 표기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수의적인 것으로 15세기의 문헌에는 보이기는 하지만 드문 편에 속한다. ‘밧고로’〈석상24:2ㄱ〉, ‘녀고로’〈월석8:93ㄱ〉 등.

지금까지 살펴본 표기법 및 음운 현상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본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의 중간본은 앞의 원간본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우선 『목우자수심결언해』과 『사법어언해』의 경우, 봉서사판은 간경도감판의 복각본이므로 내용이나 체재에 있어 원간본인 간경도감판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봉서사판 『목우자수심결언해』는 ‘드라가며’〈2ㄴ〉[cf. 도라가며], ‘브틀디니’〈3ㄴ〉[cf. 브툴디니]처럼 간경도감판과 다른 예가 보이는데 이는 복각 과정에서 오각(탈획)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법어언해』의 경우, 『목우자수심결언해』에 비해 중간본이 많은 편이라 좀 더 다양한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 봉서사판의 경우 탈자로 보이는 예가 몇 개 있으며, ‘彌勒’의 ‘彌’가 약자인 ‘弥勒’〈5ㄴ〉로 나타난다는 차이를 보인다. 고운사판, 심원사판, 원적사판은 원간본과 표기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세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원간본의 ‘디녀’〈2ㄱ〉, ‘힐후미’〈2ㄴ〉, ‘잇거시니’〈2ㄴ〉로 쓰인 형태가 이 책들에서는 ‘디녀’〈1ㄱ〉, ‘힐호미’〈2ㄴ〉, ‘잇커시니’〈2ㄴ〉로 나타난다.

일부 예에서는 한자음 표기에서도 동국정운식을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표기 형태는 송광사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송광사판은 체재나 표기에서 고운사판과 비슷하지만 한자음 표기가 동국정운음을 지양하고 현실한자음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구개음화를 반영한 표기도 ‘오직’〈3ㄱ〉, ‘오딕’〈13ㄴ〉, ‘中’〈7ㄱ〉, ‘中’〈15ㄱ〉, ‘兄셩弟뎨’〈15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간본의 ‘ㅸ’은 ‘수비’〈2ㄱ〉, ‘어즈러비’〈10ㄱ〉처럼 ‘ㅂ’으로 되어 있으며 ‘ᅙ’, ‘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ㅿ’과 관련해서는 간경도감판이나 다른 중간본에서는 ‘ㅅ’으로 쓰인 것이 이 책에서는 ‘ㅿ’으로 쓰였다는 것이 특이하다.

4. 형태 및 통사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형태적 특성은 크게 단어 형성과 굴절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단어 형성과 관련해서는 ‘ㅎ’과 ‘나-’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 ‘나-’가 있다. 15세기에 ‘나-’는 “날카롭다”와 “날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날카롭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往往애 根機 난 사미 한 히믈 虛費 아니야’〈24ㄴ〉에서 ‘나-’는 ‘根機’의 속성을 형용하고 있어 “예리하다”, “뛰어나다” 정도의 문맥 의미를 갖는다. ‘나-’는 비슷한 유형의 합성어인 ‘맛들다’, ‘맛보다’와는 달리 항상 형용사로만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굴절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가치’[鵲]의 속격형 ‘가’, 보조사 ‘곳’, 동사 ‘니-’ 등이 있다. ‘가치’의 속격형 ‘가’는 유정 체언인 ‘가치’ 뒤에 속격 조사 ‘-’가 결합하면서 어간의 말음 ‘이’가 탈락된 어형이다. ‘네  가마괴 울며 가 우룸 소릴 듣다’〈수심결19ㄱ〉. 마찬가지로 ‘아비’, ‘곳고리’, ‘가야미’, ‘져비’, ‘고기’, ‘아기’, ‘가히’ 뒤에 관형격 조사 ‘-/의’가 결합하면 어간의 말음 ‘이’가 탈락된다. ‘아 지븨’〈월석13:11ㄱ〉, ‘어믜 누니’〈월석11:96ㄱ〉, ‘곳고 놀애’〈두초8:46ㄴ〉, ‘져븨 삿기’〈두초10:7ㄴ〉, ‘가 머리’〈월석4:7ㄴ〉 등. 15~16세기 자료에서 ‘가’의 예는 드물기는 하지만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보다 앞선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기록할 만하다.

보조사 ‘-곳/옷’의 결합 양상도 특이하다. ‘곳’이 모음으로 끝난 용언의 활용형 뒤에서 ‘ㄱ’ 약화 현상을 겪어 ‘옷’으로 실현된 예가 보인다. ‘이제 다가 닷디옷 아니면 萬劫을 어긔리니’〈수심결44ㄴ〉. 15세기에는 곡용의 경우 모음 또는 ‘ㄹ’로 끝나는 환경 뒤에서, 활용의 경우 반모음 ‘j’ 또는 ‘ㄹ’로 끝나는 환경 뒤에서 ‘ㄱ’ 약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예는 예외가 되는 셈이다.

동사 ‘니-’의 경우 자음 어미와 결합할 때는 ‘니-’로, 모음 어미와 결합할 때는 ‘닐ㅇ-’으로 어간형의 교체를 보인다. 그런데 ‘-거-’가 통합된 어미와 결합하는 경우엔 ‘닐어늘’이 아닌 ‘니거늘’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에는 선어말 어미 ‘-거/어/나-’가 자동사 뒤에서는 ‘-거-’로, 타동사 뒤에서는 ‘-어-’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 문헌에는 ‘니-’의 일반적 교체가 나타나는 예와 그렇지 않은 예가 모두 발견된다. ‘漸漸 닷논 들 알 마 초 닐어’〈수심결24ㄱ〉, ‘믄득 니 實로 니건댄 …’〈수심결10ㄱ〉.

형태적 특성과 관련하여 ‘니르-’[至], ‘니를-’[至]의 활용도 주목된다. 이들은 상보적 분포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쌍형어의 어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일한 환경에서 두 가지 어형이 다 나타난다. 그러한 점은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도 마찬가지다. ‘妄念이 믄득 니로매 다 좃디 아니야 덜오  더라’〈24ㄴ〉, ‘아브터 나죄 니르며 十二時中에 시혹 드르며’〈18ㄴ〉, ‘漸漸 熏修야 와 今生애 니르러 듣고 곧 아라’〈10ㄱ〉, ‘이제 마 보 잇  니를란 손 뷔워 도라오미 몯리니’〈45ㄴ〉.

통사적 특성과 관련해서는 추측 표현의 ‘다’, ‘V홈 -’와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중 ‘다’는 ‘如’ 또는 ‘似’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는 추측 표현이다. 현대국어의 ‘듯하-’ 구문과 마찬가지로 ‘-’이 어미로 사용되는 경우와 ‘-’가 일종의 보조용언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확인된다. ‘마치 가얍고 편안 리니’[恰似輕安리니]〈수심결37ㄴ〉, ‘머리옛 블 救 야 표 닛디 말라’[如救頭然야 不忘照顧라]〈수심결43ㄴ〉. 그 외에 ‘如’가 ‘V홈 -’로 언해된 예도 보인다. ‘돌히 플 지즈룸 티 야  닷고 삼니’[如石壓草야 以爲修心니]〈수심결25ㄴ〉.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의 예로는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 다 如來ㅅ 圓覺妙心에 나니라 시니 이 아롤 디니라’[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 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시니 是知]〈3ㄱ〉, ‘이 法 正히 랑야 어돈 功德 디 몯다 샴 니 이런  아로리라’[正思此法야 所獲功德니 是知]〈44ㄴ〉가 있다. 이 중 ‘이 아롤 디니라’는 한문 원문 ‘是知’에 대응되며 ‘이#알-+-오-+-ㄹ#+이-+-니라’로 분석되는데 ‘-ㄹ#+이-+-니라’ 부분이 당위의 의미를 나타낸다. ‘아로리라’ 역시 ‘是知’에 대한 언해로, ‘알-+-오-+-ㄹ#이+-이-+라’로 분석된다. 표면상으로는 선어말 어미 ‘-리-’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의 명사구 보문 구성인 셈이다. 이러한 당위의 의미는 명령형 어미를 통해 실현되기도 한다. ‘명령’의 언표내적 효력이 당위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반기 알라 마 無量佛所애 한 善根을 시므니라 시며’[當知 己於無量無邊所애 種諸善根이라 시며]〈수심결45ㄱㄴ〉.

한문 원문 번역과 관련해서는 ‘是’, ‘此’, 부정 부사 ‘아니’의 쓰임의 주목된다. 한문의 ‘是’는 원래 지시어로 사용되었으나 白話文에서 점차 계사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是’에서는 지시어 및 계사의 기능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다가 부텨 求코져 홀 딘댄 부톄 곧 이 미니’[若欲求佛인댄 佛卽是心이니]〈2ㄴ〉, ‘모매 여희디 아니니 色身 이 거즛 거시라’[不離身中니 色身은 是假ㅣ라], 〈2ㄴ〉에서는 두 가지 기능이 모두 나타나 언해문에서도 지시어 ‘이’와 계사 ‘-이-’로 이중 번역된 듯하다.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 다 如來ㅅ 圓覺妙心에 나니라 시니 이 아롤 디니라[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 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시니 是知]’〈수심결3ㄱ〉에서는 지시어로만 사용되어 언해문에서도 ‘이’로만 번역되었다.

반면 ‘此’의 경우는 지시어로만 사용되었으며 언해문에서도 지시어 ‘이’로만 번역되었다. ‘이  여희오 밧긔 부텨 외요미 업순 디라’[離此心外예 無佛可成이라]〈수심결3ㄱ〉. 그런데 ‘是’와 ‘此’가 같이 나타날 경우는 이를 모두 언해에 반영하거나 둘 중 하나만 반영한 것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하나는 지시어로, 하나는 서술격조사로 번역하였다. ‘達摩門下애 올마 서르 傳 거시 이 이 禪이니’[達摩門下애 轉展相傳者ㅣ 是此禪也ㅣ니]〈수심결2ㄱ〉, ‘이 觀音ㅅ 理예 드르샨 門이시니’[此ㅣ 是觀音ㅅ 入理之門이시니]〈수심결19ㄴ〉.

부정 부사 ‘아니’의 위치가 특이한 경우도 있다. ‘이런  當야 아니 이 虛空가’[當伊麽時야 莫是虛空麽아]〈19ㄴ〉는 “이런 때를 만나니 이것이 虛空이 아닌가” 정도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莫是虛空麽’의 ‘莫’은 ‘是虛空’을 부정하는 의미로 쓰였다. 한문(백화문) 원문을 축자역하면서 ‘아니 이 虛空가’로 언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녯 聖人ㅅ 道애 드르샨 因緣이 明白며 젹고 쉬워 힘 져고매 막디 아니니’[古聖入道因緣이 明白簡易야 不妨省力니]〈수심결7ㄴ〉에서 ‘不妨省力’의 언해 양상도 특이하다. 이는 “옛 성인이 道에 들어가신 因緣이 明白하고 簡易하여 노력이 적은 것에 막히지 아니하니(노력이 적어도 무방하니)” 정도로 해석된다. ‘省力’은 술목 구성으로 ‘힘 더롬(노력을 덞)’과 같이 목적어-서술어 구성으로 번역되어야 하지만 ‘힘 져곰’처럼 주술 구성으로 번역됐다. 이때 ‘不妨’은 현대국어의 ‘無妨’과 같은 뜻인데 ‘막디 아니-’로 언해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와 『사법어언해』에 공통적으로 많이 쓰인 구문도 있다. ‘-오미 몯-’와 같은 형식의 구문으로, 이는 이지영(2008: 171-177)에서 “합당함 혹은 마땅함에 미치지 못함”, “불급(不及)”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논의된 바 있다. 이 구문은 『목우자수심결언해』에 6회, 『사법어언해』에 3회 보인다. ‘對答호 네 미친 마 가야 發야 邪正分揀 아니호미 몯리니 이 어린 갓 사미라’〈수심결9ㄴ〉, ‘이제 마 보 잇  니를란 손 뷔워 도라오미 몯리니  번 사 모 일흐면 萬劫에 다시 도라오미 어려우리니 請 모로매 삼갈디니라’〈수심결45ㄴ〉, ‘디 몯  반기 늘근 쥐 곽 글굼티 디언 옮기힐후미 몯리라’〈법어2ㄴ〉, ‘낫 세 와 밤 세  뎌와 볼디언뎡 일 업슨 匣 소배 안조미 몯리며 보단 우희 주거 안조 구틔디 마롤디니’〈법어5ㄴ〉, ‘大凡 디 行脚홀뎬 모로매 이 道로 져 뇨리니 現成 供養을 먹고 쇽졀업시 날 디내요미 몯리라’〈법어4ㄴ~5ㄱ〉.

‘-오미 몯-’ 구문에 대응되는 한자는 대개 ‘不, 未, 不可, 不得’이며 이는 ‘몯’의 의미와 연결된다. 또한 ‘몯-’ 뒤에는 항상 ‘-ㄹ(관형사형어미)#이(의존명사)+-이-(계사)’로 분석되는 ‘리’가 결합된다. 이 구문은 16세기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데, 동일 원문을 달리 언해한 예를 보면 해당 부분이 ‘-디 몯-’와 같은 장형 부정문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傲慢 어루 길오미 몯리며 私慾 어루 노노하 호미 몯리며 든 어루 호미 몯리며 라온 이 어루 장호미 몯리라’〈내훈1:7ㄴ〉, ‘오만홈을 可히 길오디 못 거시며 욕심을 可히 방죵히 못 거시며 을 可히 게 못 거시며 즐기믈 可히 극히 못 거시니라’〈어내1:6ㄱ〉.

5. 어 휘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의 어휘는 크게 특이하다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 다른 문헌에서도 볼 수 있는 어휘인데 이 문헌에 쓰인 용법이 다소 특이하거나, 다양한 의미 가운데 일부 의미만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자어 중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行’, ‘一切’, ‘種種’, ‘後’, ‘비-’, ‘애’, ‘셜웝’, ‘불웝’, ‘태우’, ‘自己’ 등이 있다.

‘行’은 동사적 용법을 보일 때는 평성을, 명사적 용법을 보일 때는 거성의 성조를 보이는데 이 문헌에서도 그와 같은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 중에 명사적 용법의 경우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 거성이 아닌 상성으로 실현되는 예조차 이 문헌에서는 거성으로만 실현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行’이 명사적 용법을 보이는 예로는 ‘苦行’〈RHH, 3ㄱ〉, ‘功行이’〈LHH, 26ㄱ,44ㄴ〉, ‘萬行’〈HHH, 25ㄱ〉, ‘行’〈H, 29ㄴ〉, ‘行이’〈HH, 24ㄴ,44ㄴ〉가 있으며, 동사적 용법을 보이는 예로는 ‘修行이’〈LLH, 24ㄴ〉, ‘修行호’〈LLHL, 29ㄴ〉, ‘行이라’〈LLH, 35ㄱ〉, ‘行’〈LH, 36ㄱ〉, ‘行커나’〈LLH, 30ㄱ〉, ‘行호미나’〈LHLH, 30ㄴ,38ㄱ〉, ‘行호미라’〈LHLH, 29ㄴ,35ㄱ〉, ‘行논’〈LHL, 36ㄱ〉, ‘行리오’〈LLHH, 35ㄴ〉가 있다.

‘一切’와 ‘種種’은 15세기에 명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체로 후행 명사구를 수식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특성은 이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一切’과 ‘種種’의 명사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一切ㅅ 소리와’〈44ㄱ〉, ‘種種엣 일며 뇨미’〈18ㄴ〉, ‘種種앳 相皃와 種種앳 일훔 지허’〈20ㄱ〉가 있으며, 관형사적 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一切 소리와 一切 分別’〈19ㄴ〉, ‘一切 衆生’〈44ㄱ〉, ‘一切 衆生 種種 幻化ㅣ’〈3ㄱ〉, ‘種種 苦 受호미’〈43ㄱ〉가 있다.

또한 15세기의 ‘後’는 공간적 개념으로의 ‘뒤’라는 의미를 가지지 않고 시간적 개념으로만 ‘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와 같은 점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實로 니건댄 이  몬져 알오 後에 닷논 根機니’〈10ㄱ〉, ‘그럴 圭峯이 몬저 알오 後에 낫논 들 기피 기샤’〈10ㄴ〉, ‘마 이 理 알면 다시 階級 업도소니 엇뎨 後에 닷고 브터 漸漸 熏修야 漸漸 일리오’〈23ㄴ-24ㄱ〉, ‘그러면 엇뎨  번 아로로 곧 後에 닷고 러 리리오〈24ㄴ〉’ 등에서 그러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자어에 기원을 두는 어휘들이 한글로 적힌 예도 있다. ‘ 비야[亦乃謗讟야]’〈42ㄴ〉, ‘노 앳 想 지[作懸崖之想야]’〈11ㄱ〉에서의 ‘비-’, ‘애’가 그것이다. 그와 같은 쓰임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셜웝[說法]’〈번박.상:75ㄱ〉, ‘불웝[佛法]’〈번박.상:74ㄴ〉, ‘태우[大夫]’〈소언4:39ㄴ〉 등.

‘自己’의 경우 15세기에 “本人”, “자기의 몸”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이 문헌에 보이는 ‘自己’는 모두 “本人”의 의미로 쓰였다. ‘四大로 몸 삼고 妄想으로  사마 自性이 이 眞實ㅅ 法身인  아디 몯며 自己 靈知ㅣ 이 眞實ㅅ 부톈  아디 몯야’〈수심결12ㄴ〉, ‘다시 보믈 求홀  업거니 엇뎨 몯 보논 디 이시리오 自己 靈知도  이러니 마 이 내 인댄 엇뎨 다시 아로 求며…’〈13ㄴ〉, ‘丈夫 디 자 無上 菩提 求린 이 리고 어딀 리오 모 文字 잡디 말오 바 모로매 들 아라 一一히 自己예 나가 本宗애 마면〈42ㄴ〉’.

고유어 어휘 중에는 ‘모’, ‘-’, ‘맛들-’, ‘맛보-’, ‘날혹기’ 등이 주목된다. ‘모’의 경우는 15세기에 동일 음상과 성조를 가지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든”의 의미를 가지는 관형사만 보인다(“모든”의 의미를 가지는 관형사, “모인”의 의미를 가지는 ‘몯-’의 활용형, “모인 사람(것)”의 의미를 가지는 ‘몯-’의 동명사형). ‘제 性이 이 眞實ㅅ 法인  아디 몯야 法을 求코져 호 머리 모 聖人 밀오 부텨를 求코져 호’〈2ㄴ〉, ‘過去엣 諸 如來도 오직 이  긴 사미시며 現在옛 모 賢聖도  이  닷신 사미시며 未來옛 學 닷 사도 반기 이런 法을 브툴 디니’〈3ㄱㄴ〉, ‘願 모 道 닷 사미 이 마 자 맛보아 다시 孤疑야 제 믈루믈 내디 마롤 디어다’〈42ㄱㄴ〉.

“製(제)”의 의미를 갖는 ‘-’은 15세기의 ‘-’과 16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의 혼효형이다. ‘마 無量劫中에 한 聖人을 셤기와 한 善根 심거 般若 正 因을 기피   上根性이니’〈45ㄱ〉의 예가 보인다. ‘-’은 대개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나 보이는 것인데 15세기의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 발견되는 것이어서 다소 특이하다.

“好(호)”의 의미를 가지는 ‘맛들-’은 [[맛+-이]+들-]과 같은 주어-서술어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이 문헌에는 ‘맛들-’이 타동사적 용법을 가지는 예가 존재한다. ‘다가 殊勝 고 信티 아니코 사오나 외요 맛드러 어려 너교 내야’〈45ㄴ〉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맛들-’은 ‘사오나 외요’을 목적어로 취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맛보-’의 경우 [[맛+-]+보-]와 같이 목적어-서술어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자동사적 용법을 갖지 않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疑心논 디 믄득 그처 丈夫 들 내야 眞實 正 보와 아로 發야 親히 그 마 맛보아 제 제 즐기논 해 니르면’〈21ㄱ〉에서 ‘그 마’을 목적어로 취해 타동사적 용법을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느리고 느직하게”의 의미를 갖는 어휘 ‘날혹기’도 있다. ‘시혹  디위 컨댄 不覺애 한 디흐리로소니 노하 날혹기 야 아 殃孽 다시 受야려’〈43ㄱ〉. 이는 “조심조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날혹-’에서 온 부사인데 주로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두시언해(杜詩諺解)』 등의 문헌에 나타난다. ‘날혹기’는 “천천히 한다”는 의미의 ‘날회-’(‘날호-’로도 나타남)와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가 결합한 합성어로 보인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는 지금까지 살핀 것 외에 ‘가야’, ‘구여’, ‘외야’, ‘도’, ‘비르서’, ‘버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의 어휘화한 부사도 나타난다. 이 중 ‘가야’, ‘구여’, ‘외야’, ‘도’, ‘비르서’, ‘버거’ 등은 용언 어간에 어미가 결합한 형태가 어휘화한 것이며 ‘眞實로’, ‘恒常애’, ‘往往애’ 등은 명사에 조사가 결합한 형태가 어휘화한 것이다. ‘이 모 今生 向야 濟度티 몯면 가야 어느 生 기드려 이 모 濟度리오’〈44ㄴ〉, ‘내 이제 다가 믈루믈 내어니 시혹 게을우믈 내야 恒常애 後 라다가 … 비록  句ㅅ 佛法을 드러 信解受持야 셜우믈 免코져  엇뎨 외야 得료’〈43ㄴ〉, ‘엇뎨 智慧왼 사미 보 잇  알오 도 求티 아니야 艱難호 기리 怨歎리오’〈45ㄴ〉, ‘다가 昏沉이 더욱 하거든 버거 慧門으로 法 야 …’〈30ㄴ〉, ‘…  닷가 비르서 일 업슨 사미 외리니 다가 이러면 眞實로 이로 닐오 定慧 平等히 디녀 佛性 기 본 사미리라’〈30ㄴ-31ㄱ〉, ‘往往애 根機 난 사미 한 히믈 虛費 아니야 …’〈24ㄴ〉

『사법어언해』는 매우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어휘들이 많다. 이 문헌에만 보이는 것도 있고, 다른 문헌에도 보이지만 예가 매우 드문 것도 있다. 먼저 한자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보단(蒲團)’, ‘공부(工夫)’ 등이다. ‘보단(蒲團)’은 여름에 부들의 잎을 채취해 말렸다가 틀어 만든, 스님이 앉는 방석이다. ‘蒲團’의 음역어인데 현대국어로 오면서는 ‘포단’으로 굳어졌다. ‘ 가짓 道 일울 사미…  보단애 올아 곧 오다가’[有一般辨道之人이…才上蒲團야 便打瞌睡다가]〈5ㄱ〉. 18세기 자료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에는 한글로 ‘포단’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안희 포단을 둣거이 라 아 올녀 안치고’〈을병3:27〉.

‘공부(工夫)’는 총 7회 등장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것과 의미 차이를 보인다. 불가(佛家)에서의 ‘공부’는 대개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 일, 참선(參禪)에 진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여러 모로 생각한다.”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것은 “정신의 수양과 의지의 단련을 위하여 힘쓰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상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의미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고유어 중에서는 ‘다다’, ‘너운너우니’, ‘올’, ‘옮기힐호-’, ‘재’, ‘노구’, ‘쟈’, ‘ㅎ’, ‘’, ‘븨-’, ‘나믈리’ 등이 주목된다. 이 중 ‘다다’, ‘너운너우니’, ‘올’, ‘옮기힐호-’는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에만 보이는 것들이다. 먼저 ‘다다’은 “다만”[單]의 의미를 지니는 어휘이다. 15세기엔 “다만”의 의미를 가진 어휘로는 ‘다’이 두루 쓰였고 간혹 ‘다믄’이나 ‘다’도 쓰였다. ‘다’이 중복된 형태의 ‘다다’은 이 문헌에만 보인다. ‘오직 다다 無ㆆ字 드러 十二時中 四威儀內예 모로매 야’〈법어2ㄱ〉. ‘내 다  아 甚히 거니’〈월석22:28ㄱ〉. ‘王이 다 돈 나로 供養대’〈석상24:39ㄴ〉. ‘이 高麗ㅅ 말소믄 다믄 高麗ㅅ 해만  거시오’〈번노.상:5〉.

‘너운너우니’는 “너울너울, 유유히”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관련 어형으로 『남명집(南明集)』에 ‘너운너운’, 『두시언해(杜詩諺解)』에 ‘너운너운’과 ‘너운너운히’가 있다. ‘보단 우희 주거 안조 구틔디 마롤디니 모로매 너운너우니 뇨리니’[又不可執在蒲團上死坐ㅣ니 須要活弄호리니]〈법어5ㄴ〉. ‘소내   갓신 잡고 너운너운 오 가시거늘’〈남명.상:52ㄱ〉. ‘너운너운 오 구 氣運이 둗겁고’〈두시9:37ㄴ〉, ‘너운너운히 새 니 길로 드러가 업드롤 厄 거 免호리라’〈두시19:30ㄱ〉.

‘올’는 “올가미”를 의미하는 희귀어이다. ‘모 부텨와 祖師와의 사게 믜 고 올 자보리니’〈2ㄴ〉. 한글학회 사전에서는 ‘올’를 ‘올가미’로 풀이하였으나 다른 고어사전류에서는 합성어 ‘올잡-’으로 파악하여 “옭아잡다”로 풀이하기도 했다. ‘올’는 한문 “要捉敗佛祖의 得人憎處호리니”의 ‘捉敗’에 대한 번역 ‘올 잡-’의 일부로서, 신미(信眉)가 언해한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1460년경)에서는 이 구절을 ‘올긔 잡-’으로 번역하였다. ‘ 난 사 바 드위텨 趙州의 올긔 자바 내 마 도로 가져 오라’〈몽법12ㄱ〉. 이를 고려할 때 ‘올’는 ‘올잡-’의 일부가 아닌, “올가미”를 뜻하는 독립된 어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옮기힐호-’는 “함부로 옮기다”의 뜻을 지닌 어휘이다. ‘디 몯  반기 늘근 쥐 곽 글굼티 디언뎡 옮기힐호미 몯리라’[未得透徹時옌 當如老鼠ㅣ 咬棺材相似ㅣ언 不可改移니라]〈법어2ㄴ〉. 여기에서는 ‘不可改移’에서 ‘改移’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다. ‘옮기힐호-’는 ‘옮기-’와 ‘힐호-’가 결합한 어휘인데 ‘힐호-’의 실사적 의미가 약해 합성어가 아닌 파생어로 볼 가능성도 있다. ‘힐호-’는 단독으로 쓰인 예가 없고, ‘누위힐호-’〈두시19:25ㄱ〉, ‘두위힐호-’〈두시25:10ㄱ〉, ‘입힐호-’〈정속13ㄱ〉와 같이 합성어의 후행 어근으로 쓰인 예만 발견된다. 그에 반해 ‘힐후-’는 “힘들이다”, “다투다”의 의미를 지니고 독립적으로 쓰일 뿐 아니라, 합성어의 후행 어근으로 쓰인 예도 ‘힐호-’에 비해 훨씬 많다. ‘難은 힐훌 씨라’〈법화1:32〉, ‘世間과 힐후디 아니디 아니 씨라’〈월석7:5〉, ‘가도힐후-’〈두시14:2〉, ‘갑힐후-’〈정속26〉, ‘고티힐후-’〈번소10:25〉, ‘두르힐후-’〈능엄3:67〉, ‘밀힐후-’[推激]〈두초16:2〉, ‘입힐후-’〈노번.상:65〉 등. 그와 같은 합성어 중에 일부는 ‘힐호-’형과 ‘힐후-’형이 모두 보이는 것도 있다. ‘두위힐호-’〈두시25:10ㄱ〉, ‘드위힐후다’〈능엄7:82〉 등. ‘옮기힐호-’의 경우도 ‘옮기-’ 뒤에 ‘힐후-’가 결합된 ‘옴기힐후-’형이 16세기의 『소학언해(小學諺解)』에 나타난다. ‘옷과 니블와 삳과 돗과 벼개와 几 옴기힐후디 아니며[衣衾簞席枕几 不傳며]’〈소언2:6ㄱ〉.

‘재’는 “가장”, “극도로”의 의미를 가지는데, 15세기에 빈번하게 쓰였던 ‘’과 의미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15세기에는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와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에만 보인다. ‘昏沈과 散亂애 재 힘 더야 장 며 장 다면 더욱 더욱 새외오’〈법어8ㄴ〉, ‘이 淸淨 空寂 미 이 三世 諸佛ㅅ 재 조  미시며’〈수심결20ㄱ〉, ‘다가 妄念이 재 盛커든 몬저 定門으로 理예 마초 흐로 자바’〈수심결30ㄴ〉, ‘極 재 극’〈훈몽-초.하:15〉.

‘노구’와 ‘쟈’는 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 ‘… 곧 淸凉호 아로미  노굿 더운 므레  쟛 믈  브 니라’[便覺淸凉호미 如一鍋湯애 才下一杓冷水相似ㅣ니라]〈5ㄴ~6ㄱ〉. 이들은 각각 ‘鍋’, ‘杓’에 대한 번역어로서 여기에서는 단위성 의존명사로 쓰였다. ‘노구’는 이후에 『훈몽자회(訓蒙字會)』와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 『왜어유해(倭語類解)』 등의 문헌에서 ‘노고’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鏊 노고 오’〈훈몽초,중:6〉〈왜어.하:14〉, ‘우리 손조 바 지 머그면 가마와 노곳 자리와 사발와 뎝시왜 다 잇녀’〈노번.상:68〉.

한자 ‘杓’에 대응하는 ‘쟈’는 16세기의 『훈몽자회(訓蒙字會)』(1527)를 비롯하여 근대국어 문헌에서 몇 예를 찾을 수 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의 ‘杓 나므쥭 쟉’〈훈몽.중:9ㄴ〉을 제외하면 다른 문헌에서는 모두 ‘쟈’로 나타난다. ‘漏杓 섯쟈’〈역어.하:13ㄴ〉, ‘처음브터 나죵지 시러곰  쟈 흐린 믈을 디 못고 처음 달힐 ’〈자초17ㄴ〉. ‘쟈’의 한자 대응어 ‘杓’은 『역어유해(譯語類解)』(1690)에서 현대국어의 ‘주걱’에 해당하는 ‘주게’로 언해되기도 한다. ‘榪杓 나모쥬게. 銅杓 놋쥬게’〈역어.하:13ㄴ〉. 이들 용례를 종합할 때 ‘쟈’는 “주걱, 국자, 그릇” 정도에 해당하는 단위명사로 볼 수 있다. 한편 ‘杓’ 자는 중세국어에는 [쟉]이었는데현재음은 [표]가 되었다. 변화의 원인이나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국한회어』(1895)와 『경향신문』(1906) 등을 보면 19세기 말 이후 ‘杓[표]’로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원(根源)”의 의미를 갖는 ‘ㅎ’는 15세기에 드물게 나타나는 어휘인데 이 문헌에 보인다. ‘어린 구루미 다 흐르면 萬里靑天에 보옛 리  해 리니’〈법어9ㄱ〉, ‘모 會中을 爲샤 기픈  펴 뵈신대’[宣示深奧신대]〈능엄1:29ㄴ〉, ‘堂 오리 次第 어둠 야 반기 그 해 다리라’〈법화1:16ㄴ〉, ‘源 믈불휘 원’〈신유,하50ㄱ〉, ‘奧 기픈 오’〈신유,하38ㄱ〉. “여아(女兒)”의 의미를 갖는 ‘’과는 기저형의 종성 ‘ㅎ(/h/)’의 유무로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한 부분만 음상의 차이를 보이는 ‘ㅎ’과 ‘’은 최소대립쌍을 이루는 최소대립어라 할 수 있다.

‘’의 예도 흥미롭다. ‘두 주머귈 쥐며  니르와다’[捍双拳며 竪起脊梁야], 〈5ㄴ〉. ‘등’는 ‘+’의 합성어로, “등마루” 즉 “척추(脊椎)”를 의미한다. ‘’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통합하면 어간의 끝음절 모음 ‘ㆍ’가 탈락 ‘’형으로 바뀌지만 그 명사 뒤에 휴지나 공동격 ‘와’, 그리고 자음 조사가 오면 ‘’형을 유지하는 특수한 곡용을 한다.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 『구급방언해(救急方諺解)』,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일부 문헌에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로셔 各 寸 百 壯 ’[去脊各一寸灸之百壯]〈구방.상:36〉, ‘와 보콰 셔와 긷괘 기 소리 나’〈법화2:124ㄴ〉, ‘몬져  둘챗  아랫 오목 로’〈구간3:48ㄱ〉, ‘脊  쳑’〈자회.상:14ㄱ〉.

‘븨-’는 현대국어의 ‘비비-’[擦]에 해당하는 어휘이다. ‘百年을 녯 죠 븨니 어느 나래 머리 내와료’〈법어6ㄴ〉. 15세기에 ‘비븨-’는 비교적 빈번하게 쓰였지만 ‘븨-’와 ‘비-’는 드물게 보인다. ‘븨-’는 『사법어언해』를 비롯하여 『능엄경언해』와 『구급방언해』, 『구급간이방언해』에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둘찻 리 實로  體어늘 눈 비븨유믈 因야 달이 외니’〈능엄2:27ㄴ〉, ‘모 智慧 잇닌 븨논 根源이 이 얼굴와 얼굴 아니왜며 봄과 봄 아뇸과 여희요 닐오미 몯리라’〈능엄2:83ㄱ〉, ‘지네와 蝎의 헐인  胡椒와 마와 生薑과 다 라 아 븨라’〈구방.하:80ㄴ〉, ‘마리어나 이어나 라  븨요미 다 됴니라’〈구간6:63ㄱ〉, ‘모롭 불휘 더운 므레 닐굽 번 시서 라 만 케 비야 곳굼긔 부러 들에 라’〈구간1:41ㄴ〉. 그 중 『능엄경언해』에서는 ‘비븨-’와 ‘븨-’가 모두 발견되고 『구급간이방언해』에서는 ‘비-’와 ‘븨-’가 모두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나믈릴’이다. 『사법어언해』에 보이는 ‘나믈릴’은 예가 드물 뿐 아니라 분석하기도 쉽지 않다. ‘해 사미 이 이셔 나믈릴 아디 몯야’[多有人이 在這裏야 不識進退야 解免不下야]〈5ㄴ〉에서 ‘나믈릴’은 구결문 “不識進退야”에서 ‘進退’에 대한 번역으로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나믈리’라는 명사가 있다면 뒤에 목적격 조사 ‘ㄹ’이 결합된 것으로 보면 되지만, 15세기 다른 문헌에서 ‘나믈리’라는 명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오히려 합성동사인 ‘나믈리-’와 합성명사인 ‘나믈림’은 발견된다. ‘阿難아 내 이제 너 爲야 이 두 일로 나믈려 마초아 교리라’〈능엄2:87ㄴ〉, ‘두 이 別業엣 眚 봄과 모 分엣 祥瑞 아니라 法과 가뵤 서르 나토실 니샤 나믈려 마초아 교리라 시니라’〈능엄2:88ㄱ〉, ‘權은 저욼 림쇠니  고대 固執디 아니야 나믈림 야 맛긔 씨오’〈석상13:38ㄱ〉.

따라서 이때의 ‘나믈릴’은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나믈리’를 부사로 보는 것이다. ‘나’와 ‘믈리’를 각각 어간 ‘-+-오(접미사)’, ‘므르-+-이(접미사)’가 결합한 파생부사로 보면 합성부사 ‘나믈리’가 체언 자격으로 목적격조사 ‘ㄹ’을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둘째, 합성동사 ‘나믈리-’ 뒤에 동명사형 어미 ‘-ㄹ’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아디 몯야’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나믈릴’에는 목적격조사가 결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석보상절에서 ‘進退’에 대한 ‘나믈림’과 사법어의 ‘나믈릴’에서 대비되는 동명사 어미 ‘-ㅁ’과 ‘-ㄹ’이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다르지만, 기원적으로는 동일한 기능을 가졌으며, 형태 결합도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후자를 수용한다. 비록 후기 중세국어에서 동명사형 어미 ‘-ㄹ’이 생산적이지 않은 점은 있지만, 그런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크게 문제라 할 것은 아니다. 고립적인 용례이므로 앞으로 더 숙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6. 결론

이 글에서는 『목우자수심결언해(牧牛子修心訣諺解)』과 『사법어언해(四法語諺解)』의 특성을 크게 서지 사항, 표기법 및 음운, 형태 및 통사, 어휘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결론은 앞서 살펴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두 책은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번역하였다는 점과 1467년(세조13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합철되어 간행되었기 때문에 판식이나 체제에서 유사할 뿐 아니라 어학적 특성까지도 거의 유사하다. 또한 원간본 『사법어언해』는 간기가 따로 없어 합철된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간기를 통해 그 간행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간경도감에서 합철되어 간행된 이후 지방의 사찰에서도 간행되었는데, 특히 『사법어언해』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수차례 간행되었다. 『사법어언해』는 경상도 합천 봉서사, 충청도 연산 고운사, 황해도 황주 심원사, 전라도 순천 송광사, 원적사에서 중간본이 간행되었는데 책의 분량이 너무 적어 『목우자수심결언해』,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 『오대진언(五大眞言)』과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표기법 및 음운과 관련해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쓰였고 방점과 ‘ㆍ, ㆁ, ㆆ, ㅿ, ㅸ’이 쓰였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ㅸ’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부터 대체로 폐지되었는데 더 후대 자료인 이 문헌에 쓰인 점이 특이하다. 이를 볼 때 이 책의 원고는 1461년 이전에 언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1467년에 간행될 때 부분적으로만 수정되어 간행됨으로써 이전 시기의 표기의 흔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들 문헌에는 고유어 표기에서 합용병서의 예가 정음 창제 초기문헌과 다를 바 없이 발견되지만, 각자병서는 ‘ㅆ’, ‘ㆀ’의 경우에 극소수의 예만 발견된다.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1465)의 고유어 표기에서 일괄 폐지된 각자병서와 ‘ㆆ’의 예가 일부 남아 있는 것도 이 문헌이 그보다는 이른 시기에 언해되었다가 부분 수정되어 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들 문헌에는 ‘ㅈ’구개음화로 볼 수 있는 ‘몬저’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중 『목우자수심결언해』에 보이는 ‘몬저’는 ‘몬져’에 비해 출현 빈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오기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15세기에 유독 ‘몬저’와 같은 예에서만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당시에 ‘ㅈ’구개음화 현상이 존재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이들 문헌에서는 ‘ㆍ’의 비음운화, 모음조화의 혼란, ‘오’ 모음동화와 자음동화 등을 반영한 표기도 발견된다.

형태 및 통사, 어휘와 관련해서는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있는 특성도 있었지만 드물게 보이는 특성도 있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에서는 ‘가치’의 관형격형 ‘가’가 발견되고, 보조사 ‘-곳/옷’의 실현 양상이 다른 문헌과 차이를 보인다. 대개 16세기 이후에 보이는 ‘-’[製]이 이 문헌에 보인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 외에 15세기에 드물게 보이는 ‘날혹기’[徐]가 이 문헌에 발견되기도 한다.

통사적 특성과 관련해서는 추측 표현의 ‘다’, ‘V홈 -’와 당위 표현의 ‘V호리라’, ‘V홀 디니라’가 다른 문헌에 비해 자주 보인다. 이때 ‘V호리라’는 계사 구문에 쓰인 것이어서 선어말 어미 ‘-리-’가 아닌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 구성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 한문 번역과 관련해서는 ‘是’, ‘此’가 문맥에 따라 지시어와 계사 둘 중 하나로 번역되기도 하고 둘 다로 번역되기도 했다. 부정 부사 ‘아니’가 한문 원문을 축자역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언해문과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된 경우도 있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과 『사법어언해』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보이는 구문도 있었다. “불급(不及)”의 의미를 지니는 ‘-오미 몯-’와 같은 형식을 포함한 구문이다. 이 구문에서는 ‘몯-’ 뒤에 항상 ‘관형사형 어미+의존명사+계사’로 분석되는 ‘리’가 결합되는 특성이 있다. ‘-오미 몯-’ 구문은 후대에 ‘-디 몯-’와 같은 장형 부정문으로 바뀌면서 사라진다.

한편 『사법어언해』에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헌에는 없거나 드물게 보이는 어휘가 여러 개 발견된다. 한자어 중에서는 ‘보단(蒲團)’, ‘공부(工夫)’, 고유어 중에서는 ‘다다’[單], ‘너운너우니’[弄/蹁], ‘올’[陷穽], ‘옮기힐호-’[改移], ‘재’[極], ‘노구’[鍋], ‘에’[連], ‘쟈’[杓], ‘ㅎ[根源]’, ‘’[脊椎], ‘븨-’[擦], ‘나믈릴’[進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 문헌〉

강건기(1990), 『마음 닦는 길』, 불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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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에 관하여

김정수(한양대학교 교수)

1. 서언

세종이 명을 내려 간행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 당시의 백성의 교육을 위해 일련의 조선시대 윤리 도덕 교과서 중 가장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많이 읽힌 책으로서 기념비적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효(孝)·충(忠)·정(貞)의 삼강(三綱)이 조선시대의 사회, 나아가서 나라 존립의 정신적 기반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 서지학적으로도 〈삼강행실도〉는 조선 삽화(揷畵)의 대표적인 예로서 그 간본의 변천은 곧 조선 삽화의 변천이 될 수 있어 문화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2. 삼강행실도의 편찬과 간행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한문본과 언해본이 있다.

조선 세종 10년(1428)에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서 대신들과 의논하게 되었는데, 세종은 직제학 설순(偰循)이 책임자가 되어 집현전에서 백성을 교화(敎化)시킬 수 있는 새로운 책을 편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세종은 특히 효(孝)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중국의 ≪이십사효(二十四孝)≫(원나라 곽거경 편찬)에 새로 중국의 이름난 효자 20여 명을 증보하고, 또 우리나라 삼국(三國)과 고려(高麗) 시대의 효자로서 특출한 자들도 함께 모아 엮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 책은 세종 14년(1432) 6월에 초고가 완결되어 임금에게 올려졌는데, 이듬해에 각판이 완료되자 정초(鄭招)에게 발문을 작성케 하여 16년(1434) 11월 25일 인출(印出)함으로써 종친과 신료들, 그리고 각도(各道)에 반포하게 되었다. 권채(權採)의 서문에 따르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가운데 참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속에서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새겨놓고, 그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讚詩)를 한 수씩 붙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문본 ≪삼강행실도≫’이다.

이 책은 이후 후대에서 여러 번 간행되었으며, 성종 12년에는 열녀도만을 언해하여 ≪언문 삼강행실 열녀도≫를 찍어 간행한 적도 있지만, 이른바 ‘언해본 ≪삼강행실도≫’가 나온 것은 성종 21년의 일이다.

성종 20년(1489) 6월,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세종조에는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해서 민심을 선도하였는데, 이제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비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일반이 읽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축소하되 목판인쇄는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성종이 즉석에서 이를 받아들여 내용을 추려 1책으로 산정본(刪定本)을 간행케 명하였다. 이 언해본은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는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산정본을 그대로 중종 5년(1506)에 재간행하였으니 이것이 지금 남아 전한다. 이후 중중, 명종, 선조, 영조 때에 계속해서 간행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명씩 뽑아 모두 105명, 즉 원래 3권 3책인 것을 1책으로 대폭 축소하여 펴내게 된 것이다.

3. 세종의 〈삼강행실도〉 간행 기록

원고 검토가 끝난 원고본 〈삼강행실도〉는 권채의 서문에 의하면 곧 주자소에 넘겨져서 판각에 들어간 모양이며, 이 목판 작성은 원고본 완료부터 8개월 뒤인 세종 15년(1433) 2월에 완료되고 있다. 주자소는 이름 그대로 활자로 정부의 간행물을 간행하는 인쇄소였지만 목판 인쇄도 하였으며 세종 초간본의 글자체가 태종조의 계미자도 아니고 바로 그해에 새로 주조한 갑인자(甲寅字)와도 다르며, 명나라 초기의 관간(官刊)본에서 볼 수 있는 위부인체(衛夫人體)의 소위 한림체일 뿐 아니라 중국 명초 판본처럼 구두점까지 찍혀 있어서 이 특별본 출판을 위해서는 명체(明體)에 능한 문신이나 사자원(寫字員)을 시켜서 원고를 고치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해서 1433년 2월에 판각이 완료되자 세종은 예문 대제학 정초에게 발문을 작성케 하였고, 다시 1년 2개월 뒤인 1434년 4월에는 중추원사 윤회에게 삼강행실도 간행 반포의 뜻을 국민에게 알리는 임금의 교서를 쓰게 하였으며, 이 교서를 붙여서 인출하여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삼강행실도〉 간행본이 종친과 신료들, 그리고 각도로 반포된 것이다.

이상의 〈삼강행실도〉 초간본 간행 경위를 연대별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 10년(1428) 10월 〈삼강행실도〉 편찬 하명.

세종 14년(1432) 6월 원고본 완료 진상.

세종 15년(1433) 2월 주자소 판각 완료. 발문 작성.

세종 16년(1434) 4월 교지 작성.

세종 16년(1434) 11월 내외 반포.

이상과 같은 진행 경위를 볼 때 언제 인쇄하였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1433년 2월 판각 완료와 함께 발문이 만들어졌고, 그 발문이 추각된 단계에서 인쇄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초인본(初印本)이 임금에게 진상되어 그것을 검토한 후 반포의 교지가 1434년 4월에 작성되고, 그 교지가 또 추각되어 드디어 완성본으로서 인쇄되고 제본 완료된 것이 1434년 11월인 것이다. 따라서 1433년 2월에서 1434년 4월까지의 14개월 동안은 ‘진삼강행실도(進三綱行實圖)’에서 발문에 이르는 중심부의 인쇄와 세종의 재검토 기간이었고, 그 뒤 교지를 추각 제본하는 데 1434년 4월부터 11월까지 약 7개월이 걸린 셈이다.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에 대하여

김정수(한양대학교 교수)

이 책은 경기도박물관 소장본(보물 제1053호)과 같이 인출된 책으로, 덕종비(德宗妃)인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가 고승(高僧) 학조(學祖)에게 시식권공(施食勸供)과 일월상행(日月常行)의 법사(法事)를 상교 국역(詳校國譯)시켜 연산군 2년(1496) 5월에 간행한 활자본(인경목활자본)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이고,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7자(字), 주쌍행(註雙行), 흑구(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의 형태이다.

이 책은 절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여러 가지 의식에서 외울 진언 곧 범어 주문과 한문 불경과 그 언해문 및 협주를 엮은 〈진언권공〉과 〈삼단시식문〉 두 권을 한데 묶은 것으로 1496(연산군 2)년에 간행되었다. 발문에 따르면 인수대비가 어느 중을 시켜서 〈육조 대사 법보단경〉과 함께 번역하고 왕실 비용으로 아주 좋은 나무 활자를 써서 400 벌을 찍어 널리 보급한 것이다. 안병희(1978)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학조(學祖) 스님이 이 일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여기서는 서울대학교도서관에 간수된 원본을 명지대학교에서 국학 자료 총서 제2집으로 영인한 책을 이용했는데, 편집이 잘못 되어 네 쪽이 서로 바뀌어 있다. 곧 〈삼단시식문〉의 29뒤와 30앞 두 쪽이 30뒤와 31앞 두 쪽과 맞바뀌어야 한다. 경기도박물관에도 다른 원본(보물 1053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모든 제목과 아울러 모든 진언이나 불경의 원문을 반드시 한글로 먼저 적고 한자로 줄을 바꾸어 받쳐 적은 점이 특이하다. 안병희(1978)의 해제에 따르면 이와 같이 한글을 앞세우고 한자를 받친 책은 16세기에 나온 〈육자신주(六字神呪)〉와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의 게송 부분 뿐이라 한다. 아마 의식을 행할 때 진언이나 불경을 여러 사람이 암송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와 아울러 한글 창제 직후에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서 한자음을 한글로 크게 적고 한자를 작게 받쳐 적은 경우와 같이 한글의 위상을 존중하고 높이려는 의지도 있었음이 확실히 느껴 진다. 원본의 편집상 특이한 점 하나는 〈삼단시식문〉 34앞 쪽 넷째 줄부터 35앞 쪽 첫째 줄에 걸친 원문이 35뒤 쪽 이하의 언해문에서는 협주의 모양으로 인쇄된 점이다. 열두 가지 인연을 풀이하는 내용으로는 협주로 처리할 만 한데, 원문은 본문의 일부로 적으면서 언해문은 협주로 보이게 한 것이 어색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안병희(1978):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 해제.” 명지대학 국어국문학과 국학자료 간행위원회, 국학 자료 총서 제2집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 명지대학 출판부.

상원사 중창권선문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1. 머리말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두 건(件)의 편지글이다. 하나는 조선조(朝鮮朝) 세조(世祖) 10년(天順 8년, 1464 A.D.)에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승려가 오대산(五臺山)의 상원사(上院寺)를 중수(重修)할 때, 널리 시주(施主)를 모으기 위해서 쓴 ‘권선문(勸善文)’이고, 다른 하나는 국왕인 세조가 정철(正鐵)과 미포(米布) 등 중창에 필요한 물자(物資)를 보내면서 내린 서찰, 곧 ‘어첩(御牒)’이다. 두 편지글이 모두 상원사 중창의 취지를 담고 있는 ‘권선문’이어서 흔히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으로 부른다. 줄여서 ≪상원사 중창 권선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는 편의상 세조의 편지글은 ‘어첩’이라 하고, 신미 등의 편지글은 ‘중창 권선문’, 또는 ‘권선문’이라 부르기로 한다. 두 편의 편지글이 조성된 시기는 최근의 연구에서 신미 등의 ‘권선문’이 먼저 쓰이고, 세조의 ‘권선문’이 나중에 쓰인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이는 신미 등의 ‘권선문’과는 달리, 세조의 ‘권선문’에는 연기(年記)가 없었던 데서 기인한 착오였다. 주001)

신미 등의 ‘권선문’ 중 한문으로 된 글 말미에는 ‘天順八年臘月十八日’이라는 연기(年記)가 씌어 있으나 세조의 ‘권선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지금까지 세조의 글이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로 바로 잡혔다. 이는 조정에서 상원사에 정철(正鐵), 미포(米布) 등의 물품(物品)을 보낸 시기가 천순(天順) 9년인 세조 11(1465)년 2월 20일 정유조(丁酉條)의 일로 적혀 있는 세조실록의 기사(記事)로 확인된 결과이다.

* 이 해제의 작성을 위해 필자는 2010년 6월 23일 월정사(月精寺) 성보박물관을 방문해서 첩장(帖裝)으로 조성되어 있는 ‘상원사 중창 권선문’ 실책을 보고 내용 전반에 대해 조사를 한 바 있다. 실사의 기회를 준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부주지 원행 스님, 당시 재무국장 삼혜 스님께 특히 여기에 적어서 감사의 뜻을 밝힌다. 또 월정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사 홍은미 선생과 불교신문사 이성수 기자의 도움도 컸다. 이 분들의 도움으로 이 해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 이 글은 김무봉(1997)의 내용 중 일부는 고치고 일부는 보완한 것임을 밝혀 둔다. 필자의 논의는 십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동안 새롭게 밝혀진 사실 등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이 두 문헌은 이능화(李能和, 1918)의 소개로 학계에 알려진 후, 최남선(1928), 다카하시(高橋亨, 1929), 양주동(1948) 등이 해제를 붙여 사진판으로 공개한 바 있다. 안병희(1979)에서는 간략하게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최범훈(1985)에서는 전문을 활자화(活字化)하여 옮겨 싣고 주해를 시도하였다. 또한 일본(日本)의 동경외국어대학(東京外國語大學) 조선어학과(朝鮮語學科) 연구실에서는 ≪중기조선어자료선(中期朝鮮語資選)≫(1987)에서 최남선(1928)을 전재하여 다른 중세국어 자료 주002)

동경외국어대학 어학교육연구협의회 발행의 이 책자에는 다른 중세 한국어 자료와 함께 이 문건(文件)이 실려 있는데, 자료 제공자는 마에마(前間恭作)이고 제명(題名)은 어첩(御牒)이다. 그리고 어첩(御牒) 밑에 작은 글자로 ‘附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이라고 적어 놓았다.
와 함께 교재로 쓴 바 있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15세기에 간행되었던 다른 한글 자료들이 주로 관판(官板) 언해본이었던 데 비해, 현존 최고(最古)의 필사(筆寫) 한글 자료라는 사실 때문에 관련 학자들에게 주목받아 왔다. 아울러 편지글 뒤에 붙어 있는 국왕 및 왕비, 세자, 세자빈, 대군, 군, 공주, 부원군(府院君), 부부인(府夫人) 등 종실(宗室) 은 물론 내명부(內命婦) 및 외명부(外命婦),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수령(首領), 방백(方伯) 등 관료의 직함(職啣)과 인기(印記), 수결(手決)이 나열되어 있어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크다.

2. 첩장(帖裝) 조성의 경위에 대한 관견(管見)

오늘날 전해지는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첩장(帖裝, 摺本)으로 되어 있는 두 건의 자료인데, 처음에 편지를 썼던 신미(信眉)나 세조(世祖) 등의 진필(眞筆)은 아닌 듯하다.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새로이 필사(筆寫)된 듯, 두 편지글의 필체가 비슷하다 주003)

두 편지글의 필체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미의 「권선문」이 조금 흘려 쓴 이른바 해행서체(楷行書体)인 데 비해, 「어첩」은 정자의 해서체(楷書体)로 또박 또박 써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는 왕과 신하의 글이 함께 실릴 경우, 서체(書體)를 달리 하여 구분하는 일종의 대우법으로 ‘훈민정음 혜례본’도 ‘예의’ 부분과 ‘해례’ 부분에 차이를 둔 점에서 왕조시대의 관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후술한 예정이지만 언어 사실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난다. 또한 이 첩장에는 교정을 행한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한문으로 기록된 부분에는 오자가 없고 교정을 행한 내용도 없는 반면, 언해문에만 교정을 행한 데에다, 언해문 중에서도 세조의 ‘권선문’ 부분에만 교정을 행한 것이다. 이 점 두 편지글을 새로 필사하여 첩장을 조성하면서 읽을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 하는 문제 및 두 편의 권선문에 대해 필사자 및 사찰에서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아울러 당시 우리 문자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어떠했던가에 대해서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비록 국왕과 국왕에 의해 법호(法號)를 받은 승려의 서찰이라고 하더라도, 서찰을 첩장으로 만들어 공개한 것도 그렇고, 진필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필사된 점으로 미루어, 절에서 신도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첩장으로 만들어 보관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이 자료가 정작 우리의 시선을 끄는 점은 다른 데 있다. 이 자료가 편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두 건의 첩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그리고 두 문건(文件)이 각각 조금씩 다르게 편철되어 있는 사실이다.

하나는 표지에 ‘어첩(御牒)’이라는 서외제가 있는 문헌인데, 이 문헌에는 우리가 자료로 하는 두 편지글이 원문 주004)

여기서 ‘원문’은 한문으로 된 서찰을 이른다. 서찰의 한문 문장이 먼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과 함께 언해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표지에 아무런 서외제가 없는 문헌인데, 두 편지글의 원문만 있고 언해문은 없다. 이렇게 각각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두 문헌은 편철 차례나 체제 등 전반적인 면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존대법 표현 중 대두법(擡頭法)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자의 글 중 신미 등이 임금에게 올린 글은 임금이나 임금과 관련된 사항, 그리고 삼보(三寶)를 표현할 때는 세 글자를 올려 쓴 데 비해, 후자는 두 글자만 올려서 썼다. 또 전자는 세조의 편지글 중 삼보(三寶)는 두 글자 정도 주005)

여기서 ‘정도’라고 표현한 것은 올려 쓴 글자의 높이가 첫장과 다른 장에서 약간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는 첫장과 다른 장의 대우 대상이 달라서 필사자가 가진 대우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무게도 달랐기 때문에 그 비중에 따라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올려 쓰고, 혜각존자를 지칭하는 말은 한 글자 올려 쓴 데 비해 후자는 삼보를 두 글자 반 정도 올려 쓰고, 혜각존자는 한 글자 반 정도 올려 썼다.

두 문헌의 차례도 차이가 난다. 전자는 신미 등의 중창 권선문 원문이 앞에 나오고 발신일인 ‘天順八年臘月十八日’을 쓴 후 언해문을 두고 있다. 언해문이 끝나면 세조의 편지글 원문이 나오고 발신일 날짜 없이 언해문이 나온다. 편지글이 끝나면 세조가 스스로를 불제자(佛弟子)라고 밝힌 아래쪽에 직함을 쓰고 수결을 친 후 옥새(玉璽)를 눌렀다. 그 다음장에는 왕비인 자성왕비(慈聖王妃) 윤씨의 인기(印記)가 있고, 그 다음장에 세조가 보낸 물자의 품목(品目)이 적혀 있다. 이어서 세자의 수결과 인기, 세자빈의 인기가 있고, 그 뒤를 이어 공주(公主), 부부인(府夫人), 정경부인(貞敬夫人), 정부인(貞夫人) 등 종실 여인들과 외명부 여인들의 인기(印記)가 나온다. 주로 왕이나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외에 종실과 외명부 여인들이 열기되어 있는 점이 후자와 다르다. 그에 비해 후자는 맨앞에 신미 등의 중창 권선문 원문이 나오고 그 뒤에 발신일을 둔 후, 왼쪽 아래에 신미 등 중창 불사에 참여한 승려로 보이는 이들의 이름이나 수결이 보인다. 다른 이들은 신미보다 한 글자 반 정도 낮추고 한 행 정도의 간격을 둔 것으로 보아 혜각존자에 대한 예우로 생각된다. 그 다음에 세조의 편지글 원문만 나오고 세조의 수결과 옥새 인기(印記)를 둔 후, 자성왕비의 등장 없이 바로 하사 물자의 품목이 보인다. 그 뒤에 세자의 수결과 인기, 대군(大君), 부원군(府院君), 군(君) 등 종실, 그 뒤를 이어 중앙정부의 관리들과 관찰사, 절제사, 목사, 부사, 현감 등 지방 관리들의 직함과 수결이 보인다. 시주자명에 해당되는 부분에 전자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하여 18명이 등장하는 데 비해 후자에는 무려 235명이 등장한다. 주006)

첩장의 본문 뒤편에 열기(列記)되어 있는 공덕주(功德主)들의 명단에는 직함이 누락된 경우도 있고, 수결이 없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신(臣) 등의 표현이 빠진 예도 있다. 역주편에 있는 그대로를 싣고 한글로 옮겼다.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위의 두 문헌 중 언해문이 있는 전자에는 주로 왕실의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공주, 부부인 등 종실 여인들과 외명부의 정경부인, 정부인들의 직함과 인기 주007)

당시에 여인들이 수결을 쓰는 일은 드물었던 듯하다. 수결은 남성들의 직함 밑에 나타난다. 남성 중 왕이나 세자의 경우는 수결과 인기를 함께 썼다. 여인들은 성과 이름만 있거나 정부인(貞夫人) 이상의 경우에는 인기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수결을 자주 쓸 만큼 여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던 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가 보이는 반면, 한문만 있는 후자에는 왕과 세자만 등장할 뿐, 자성왕비를 비롯하여 종실은 물론 내외명부의 여인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해문을 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는 시주(施主)와는 관계없이 절을 찾는 신도들이 주로 여성이었다는 사실의 반영이면서, 그들에게 공개하고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언해한 후 첩장으로 만들어서 보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두 문헌의 필사자는 동일인(同一人)으로 보이나 필사의 의도는 달리 했던 것 같다. 같은 내용에 해당되는 부분이 양쪽에 모두 있을 경우 두 문헌의 서체와 체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앞의 주 3)에서 밝힌 대로 이는 왕과 신하의 글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는 점과 읽는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주 3)에서 제기한 의문과 더불어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3. 형태 서지

이 첩장은 1997년 국보 140호에서 292호로 등급이 조정되었다. 언해문이 있는 첩장(帖裝, 摺本)은 어첩(御牒)이라 쓴 표지가 있는 책으로 표지를 제외한 부분은 모두 32면이다. 편의상 ‘언해본’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한문만으로 되어 있는 첩장으로 표지를 제외한 부분은 모두 64면이다. 간단히 서지 사항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장정(裝幀)은 첩장으로 되어 있으며 표장(表裝)은 붉은 바탕에 당초문(唐草紋)이 들어 있는 비단이다. 언해문이 있는 첩장에는 위쪽 가운데에 가로로 ‘어첩(御牒)’이라 필사되어 있다. 표지를 제외한 부분의 용지는 두껍고 광택(光澤)이 있는 담황색(淡黃色) 장지(壯紙)이다. 첩장의 크기는 세로 31.2㎝, 가로 12.2㎝이다. 변란의 상‧하는 쌍변, 좌·우는 접히지 않는 부분에 세선(細線)이 있다. 판광(板匡)은 세로 24.4㎝, 가로 12.3㎝이다. 행관(行款)은 매면 유계 6행, 매 행의 글자 수는 일정치 않아서 신미 등의 편지글 원문은 16자, 언해문은 17자이다. 원문은 위에서 세 글자 내려서 시작하고 언해문은 한 글자 내려서 시작했다. 세조의 편지글도 신미 등의 글과 글자 수에 있어서는 일치 한다. 다만 글의 시작을 원문과 언해문 모두 두 글자 내려서 시작했다. 이는 삼보(三寶)나 혜각존자 등에게 대두법을 두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보(三寶) 등은 두 글자 올리고, 혜각존자는 한 글자 올리는 존대법[대두법(擡頭法)]을 쓰고 있다.

승려가 삼보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불타(佛陀)와는 대우의 등급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언해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언해문의 표기에서는 국한문을 혼용하였으나 한자에는 독음을 달지 않았다. 한글에는 방점이 표기되어 있다. 신미 등의 편지글 원문은 제목을 포함하여 4장 1행이고 언해문은 4장 5행이다. 세조의 편지글은 3장 2행이고, 언해문은 4장 4행이다. 그런데 월정사(月精寺)에서 원촌(原寸)대로 영인했다는 자료에는 발신일이 언해문의 두 문헌 모두에 나와 있다. 아마도 두 문헌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4. 어학적 고찰

위에서 밝힌 대로 상원사 「어첩」 및 「중창 권선문」은 세조 10년(1464)에 작성된 편지글이다. 경전류가 아닌 서간을 언해한 글의 특성상 한글 구결문의 작성이 없이 바로 언해가 이루어져서, 여타 언해문과는 성격을 달리 하는 부분이 있다. 우선 구결문이 없기 때문에 구결문에 견인되는 따위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서, 가능한 한 쉬운 우리말로의 번역이 이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또 대격조사 중 자유교체(free alternation)형 ‘ㄹ’의 쓰임이 빈번한 것 등 음운축약형의 잦은 출현이 그러하다. 아울러 문장의 호흡이 길고 연결어미 ‘-니’에 의존한 종속절이 많은 편이다. 대부분의 15세기 언해문들은 구결문의 작성이 언해문에 선행하여 언해문은 구결문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같은 해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주008)

선종영가집언해:
<풀이>이하 〈선종영가집언해〉는 〈영가〉, 〈아미타경언해〉는 〈아미〉, 〈금강경언해〉는 〈금강〉, 〈반야심경언해〉는 〈심경〉이라는 약호를 쓰기로 한다.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등과 비교해 보면 당시의 언어사실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자에 한자음을 따로 달지 않았다는 점과 한자와 정음자를 동일한 크기의 글자로 썼다는 점이다. 당연히 구결문 없이 원문에 바로 언해를 했다. 다만 첩장으로 된 언해문 전부를 합해 봐야 겨우 10장 56행에 불과한 짧은 문건이어서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못할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여기서는 표기법, 음운, 문법, 어휘 등의 언어사실 중 특기할 만한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논의에서는 이미 밝힌 대로 첩장(帖裝)의 서외제(書外題)와 상관없이 세조(世祖)의 편지글은 ‘어첩(御牒)’이라 하고, 신미(信眉)의 편지글은 ‘권선문(勸善文)’이라 부를 것이다.

4.1 표기 및 음운

이 자료는 국한문을 혼용하였으나 한자에는 음을 달지 않았다. 한자로 표기된 어휘와 다른 형태소와의 통합관계만 봐서는 당시의 현실음으로 읽었는지 아니면 동국정운 음으로 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방점은 한글에만 찍혀 있다.

1) ㅸ

‘ㅸ’은 훈민정음의 초성 17자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예의 및 해례 제자해에 순경음으로 규정된 이후, 〈용비어천가〉 등의 정음 초기 문헌에 더러 나타난다. 그러나 〈능엄경언해〉(1462)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어첩’ 및 ‘권선문’과 같은 해에 간행된 네 건의 문헌 중 〈아미〉에만 보이는 것은 〈아미〉가 이보다 먼저 간행된 활자본 〈아미〉(1461?)의 영향을 입어서, 앞선 시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첩’ 및 ‘중창 권선문’에서는 ‘ㅸ’이 ‘오, 우, ㅇ’로 실현되었다. 그 목록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이후의 논의에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방점 표시는 생략한다.

(1) ㄱ. 받오샤 〈권선 1:2〉, 주009)

〈권선 12〉:
이하 논의에서 〈권선〉은 신미 등의 편지글인 「권선문」의 약칭이고, 〈어첩〉은 세조의 편지글을 지칭한다. 〈 〉 속에 있는 앞의 숫자는 장차를 표시하고, 뒤의 숫자는 행을 표시한다. 다만 장의 표시는 원문을 제외하고 언해문만을 대상으로 하며, 앞뒷면을 따로따로 하여 일련 장차를 붙인다.
받와 〈권선 4:2〉, 듣오시고 〈권선 3:2〉

닙오니 〈권선 1:6〉, 갑올 〈권선 1:6〉, 젹오니 〈권선 2:2〉

비올 〈권선 2:6〉, 비오며 〈권선 5:4〉

ㄴ. 므거우시고 〈권선 2:1〉

ㄷ. 도아 〈권선 3:4〉 / 도와 〈어첩 5:3〉

이 문헌에는 위와 같이 ‘ㅸ’이 ‘오, 우, ㅇ’로 실현된 예가 모두 보이는데, ‘〉오’로의 변화는 (1ㄱ)의 예와 같이 주로 겸양법 선어말어미 ‘--, --, --’의 통합형에서 나타난다. (1ㄷ)의 ‘도아’는 ‘-’의 활용형인데, 〈권선〉과 〈어첩〉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실현되었다. 어떤 사정으로 ‘ㅸ’이 탈락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오사(誤寫)인지 주목이 요구되나, 15세기 문헌에는 이러한 표기가 더러 보인다.

(1)′ ㄱ. 實로 서르 도아 發샨 젼로 〈법화 1:14ㄴ〉

ㄴ. 긴 놀애 도아 보내니 〈두언 8:50ㄴ〉

2) ㆆ

‘ㆆ’은 훈민정음 초성체계에서는 후음(喉音)의 전청자(全淸字)로 영모(影母)에 해당된다. 그러나 해례의 용자례(用字例)에는 빠져 있다. 주로 동국정운 한자음과 사이글자의 표기에 사용되었고, 고유어 표기에서는 동명사어미 ‘-ㄹ’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ᇙ’에 사용되었다. 〈영가〉 등의 문헌에서는 한자음 영모자(影母字)의 표기에 두루 나타난다. 그러나 ‘어첩’과 ‘권선문’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자음 표기에서는 볼 수 없다. 사이글자는 〈용비어천가〉나 〈훈민정음 언해본〉 이외의 문헌에서는 ‘ㅅ’ 단일형으로 기울었는데, 이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유어 표기에 쓰이던 동명사어미 ‘-ᇙ’은 〈영가〉에서는 후행하는 체언의 초성이 한자어 무성자음인 경우에만 나타나고, 〈아미〉에서는 고유어 표기에 두루 쓰인다. 그러나 〈금강〉과 〈심경〉 및 「어첩」과 「권선문」에서는 모두 ‘-ㄹ’로만 실현되었다.

(2) ㄱ. 여희여 날 리오 〈어첩 1:5〉, 목수 칠 리오 〈어첩 1:5〉

安保케  리오 〈어첩 1:6〉, 모릴 引導 리시니 〈어첩 2:1〉

ㄴ. 뉘 갑올 디 (권선 1:6), 福 비올  〈권선 2:6〉

ㄷ. 土木  꺼슬 〈권선 3:6〉, 利益게 홀띠니라 〈권선 5:6〉

ㄹ. 사 닐올디 아니니 〈어첩 5:1〉, 져기  거슬 〈어첩 5:2〉

ㅁ.  〈권선 3:4〉, 이럴 〈어첩 5:1〉

(2ㄱ)은 동명사어미 ‘-ㄹ’의 후행요소가 불청불탁자인 경우 ‘-ㄹ’로 실현된 예인데, 이 문헌에는 후행체언의 초성이 고유어인 용례만 있고, 한자어의 경우에는 해당 어사가 없어서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2ㄴ)은 후행체언의 초성이 합용병서인 경우인데, ‘ㅂ’계 앞이건 ‘ㅅ’계 앞이건 모두 ‘-ㄹ’로 실현되었다. (2ㄷ)은 ‘-ㄹ+전탁자’형이다. 이전 문헌에서 ‘-ㅭ+전청자’형으로 실현되던 표기가 〈법화경언해〉(1463) 이후 ‘ㄹ+전탁자’형, 또는 ‘-ㄹ+전청자’형으로 바뀌어 나타나는데, 이 문헌에는 두 가지 표기가 모두 보인다. (2ㄷ)의 ‘ 꺼슬’과 (2ㄹ)의 ‘ 거슬’은 ‘권선문’과 ‘어첩’에서 각각 다르게 실현된 것인데, 이 표기는 〈원각경언해〉 (1465) 이후에는 ‘-ㄹ+전청자’형으로 단일화된다. (2ㄹ)은 ‘-ㄹ+전청자’형 표기로 실현된 예이다. (2ㅁ)은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인데, 정음 초기 문헌부터 ‘-ㅭ’같은 표기 없이 주010)

동명사어미 ‘-ㅭ’과 의존명사 ‘’의 통합형 중 ‘-ㅭ’은 〈능엄경언해〉(1462) 등에서 더러 보이나 ‘ㅭ’는 문증(文證)되지 않는다. ‘’ 통합형으로는 아래와 같은 예가 있다.
ㄱ. 種種히 發明  일후미 妄想이니 〈능엄 2:61ㄱ〉
ㄴ. 가 괴외히 이셔 비  닐오 微妙히 고미오 〈능엄 4:13ㄴ〉
‘-ㄹ’ 또는 ‘-ㄹ’로 실현되었다. 이 문헌에서는 예와 같이 모두 ‘-ㄹ’로 나타난다.

‘-ㅭ+전청자’형 표기는 앞선 시기의 언어 사실을 보여주는 〈아미〉를 제외하고는 다른 3건의 문헌 모두에서 ‘-ㄹ+전청자’형 또는 ‘-ㄹ+전탁자’형으로 실현되는데, 이 문헌에서도 동명사 어미 ‘-ㅭ’의 표기에 나타나지 않아서 ‘어첩’과 ‘권선문’에는 ‘ᅙ’의 쓰임이 없다.

3) ㅿ

유성 후두마찰음 ‘ㅿ’은 훈민정음 해례에는 불청불탁(不淸不濁)의 반치음(半齒音)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15세기 문헌에 두루 나타나며 16세기 중반까지 쓰였다. ‘어첩’ 및 ‘중창권선문’의 ‘ㅿ’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모두 ‘ㅿ’으로 실현되었는데, 다만 후술할 수의교체형 ‘~’ 중에서는 ‘’만이 실현되어 8종성 규정에 충실하려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3) ㄱ.  〈권선 1:4〉,  업서 〈권선 5:5〉, cf. 업수믈 〈권선 5:4〉 지 〈권선 2:6〉, 지려 〈권선 3:4〉 미 〈어첩 2:4, 5:4〉,  〈어첩 4:5〉 다소니 〈권선 3:1, 4:3〉

ㄴ.  〈어첩 2:4〉

ㄷ. 비올 〈권선 2:6〉, 비오며 〈권선 5:4〉, 두 〈어첩 3:3〉

‘ㅿ’이 출현할 수 있는 여러 환경 중 이 문헌에서는 ① ‘v - v’, ② ‘y - y’, ③ ‘r - v’의 예만이 보인다. 다만 신미 등의 편지글은 글의 성격상 겸양법 선어말어미 ‘--’의 빈번한 출현으로 그 용례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3ㄱ)은 위 ①의 예이고, (3ㄴ)은 ②, (3ㄷ)은 ③의 예이다. 이 중 (3ㄴ)은 한자어로 어원은 ‘매상(每常)’이나 차용한지 오래되어 우리말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때의 환경은 ‘y-v’이다. (3ㄷ)은 ‘ㅅ〉ㅿ’의 변화 뒤에 ‘ㄹ’이 탈락된 형태이다. (3ㄱ)은 각각 체언과 조사, 용언어간과 어미, 용언어간과 선어말어미 등의 통합형과 행태소 내부 모음간에서의 ‘ㅿ’의 용례이다. ‘지’, ‘지려’는 동사 ‘-[作]’의 활용형인데, 이 문헌에서 자음이나 휴지 앞에서의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3ㄷ)은 각각 ‘빌-[祝]’, ‘둘’에서 ‘ㄹ’이 탈락한 형태이다.

4) 사이글자

사이글자는 체언이 결합할 때 음성적 환경에 따라 체언 사이에 끼어드는 자음글자이다. 〈용비언천가〉에는 ‘ㄱ, ㄷ, ㅂ, ㅅ, ㅿ, ᅙ’의 6자가 쓰였고, 〈훈민정음언해〉에는 ‘ㄱ, ㄷ, ㅂ, ㅸ, ㅅ, ᅙ’의 6자가 쓰였으나, 〈석보상절〉 이후 ‘ㅅ’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여전히 ‘ㅅ’외에 잔형인 ‘ㄱ, ㄷ’이 보인다. 〈월인석보〉(1459)에서는 ‘ㄱ, ㄷ, ㅂ, ᅙ’이 쓰였고,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 주011)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의 간행 연대와 언어사실에 대해서는 김무봉(1993ㄱ) 참조.
에서는 ‘ㄷ, ᅙ,’이 쓰이는 등 잔존형이 보이나, 〈선종〉과 〈금강〉, 〈심경〉에서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주012)
〈심경〉의 표기법에 대해서는 정우영(1995) 참조.
다만 〈심경〉에서는 ‘ㄹ’ 다음에 ‘ᅙ’이 쓰인 예가 있다. ‘어첩’ 및 ‘권선문’에서는 사이글자나 구 구성의 속격에서 모두 ‘ㅅ’으로 나타난다. 그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4) 天地ㅅ 아恩 〈권선 1:5〉 드틄길헤〈어첩 2:4〉

江陵 五臺 〈권선 2:2〉 오나리〈어첩 2:6〉

나랏사 〈권선 3:4〉 劫ㅅ 녯 因 아니면〈어첩 3:1〉

님귀예 〈권선 4:4〉 눗므리〈어첩 4:1〉

德ㅅ 根源을 〈권선 5:2〉

위의 예 중에서 ‘눗므리’는 ‘므리’에서 ‘ㄴ’을 탈락시키고, 대신 사잇소리 ‘ㅅ’을 표기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주013)

〈석보상절〉에는 일부 용언 어간의 종성 ‘ㅧ(〈ㄵ)’에서 ‘ㄴ’을 탈락시킨 예가 있다.
帝釋 앗 히어나 〈석보상절 19:6ㄱ〉

5) 초성병서

5.1) 각자병서

이 문헌에서 초성 각자병서의 예는 매우 드문데, 이는 각자병서가 출현할 어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몇 안되는 용례는 모두 ‘ㄹ+전탁자’형 표기에 의한 것뿐이다.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문헌에 쓰인 8자(ㄲ, ㄸ, ㅃ, ㅉ, ㅆ, ㆅ, ㆀ, ㅥ) 중 ‘ㄲ, ㄸ, ㅆ’ 등 3글자만 쓰였다.

(5)  꺼슬 〈권선 4:1〉, 利益게 홀띠니라 〈권선 5:6〉

지려 〈권선 3:4〉 / 이럴〈어첩 5:1〉

5.2) 합용병서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 보이는 ‘ㅺ, ㅼ, ㅽ, ᄮ ; ㅳ, ㅄ, ㅶ, ᄩ; ᄢ, ᄣ’ 등 10가지 합용병서 중 ‘ㅄ’계열은 나타나지 않고, ‘ㅅ’계열의 ‘ㅼ’과 ‘ㅂ’계열의 ‘ㅳ, ㅄ’이 보일 뿐이다. 이 역시 합용병서가 출현할 만한 어사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 어휘 목록은 다음과 같다.

(6) 〈ㅼ〉 ㅎ[地] : 江陵 五臺 〈권선 2:2〉 文殊겨신 히라 〈권선2:4〉, 더욱 勝 히라 〈권선 2:5〉 福 비올  삼고져 〈권선 2:6〉

  [又] : 눗므리 그지 업다니  〈어첩 4:1〉

 〈ㅳ〉 [志] : 뉘 갑올 디 주014)

이 문헌에서 ‘디’는 ‘디’로 되어 있으나 필사 과정에서의 오사(誤寫)일 것이다. 이 외에도 원 첩장(帖裝)에는 교정을 행한 예가 몇몇 보인다.
업스리오마 〈권선 1:5〉

 〈ㅄ〉 [米] : 와 布貨와 〈권선 3:6〉

  -[用] : 土木  꺼슬 주라 시니 〈권선 3:6〉 / 져기  거슬 도와 〈어첩 5:2〉 날 爲야  과 〈어첩 4:5〉

6) 종성표기

이 문헌의 종성표기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몇 안 되는 종성표기에서 ‘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외에 어떤 것도 쓰인 예가 없다. 〈선종〉, 〈금강〉 등과는 달리 모음 뒤 유성후두마찰음 ‘ㅇ’ 앞에서 ‘ㅅ’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ㅿ’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7) ㄱ. 달이 맛나 〈권선 4:1〉, 아라 맛나 〈어첩 2:3〉

 ㄴ. 낫 바 〈어첩 3:3〉

 ㄷ. 업다니 〈어첩 4:1〉/ cf. 업스며 〈권선 1:4〉, 업시 〈권선 1:5〉

 ㄹ. 업수믈 〈권선 5:4〉/ cf.  업서 〈권선 5:5〉, 네  〈권선 1:4〉

〈7ㄱ〉, 〈7ㄴ〉은 기저형에서는 그 말음으로 ‘ㅈ’을 가지나, 자음으로 시작되는 음절 앞이나 휴지 앞에서 ‘ㅅ’으로 바뀐 예이다. (7ㄷ)은 (7ㄱ), (7ㄴ)과 같은 환경에서 ‘ㅄ’이 ‘ㅂ’으로 교체된 표기이다. (7ㄹ)은 〈선종〉, 〈금강〉 등에서 ‘없-’으로 실현되기도 하였으나, 이 문헌에서는 ‘없-’으로 표기되었다. 이 표기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형태음소적 표기법에 충실한 문헌에서는 ‘없-’으로 실현되었으나,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ㅿ~ㅅ’ 수의교체형으로 나타난다. 이는 한자어 ‘무강(無疆)’ 또는 ‘무변(無邊)’에 대응하는 우리말 표현에서 실제의 발음 현실을 표기에 반영하느냐, 반영하지 않느냐에 따른 혼란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 외에도 ‘지 〈권선 2:6〉, 지려 〈권선 3:4〉’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8종성법에 충실하려 했던 듯하다.

정음 초기의 문헌에서 ‘ㆁ’을 받침으로 가진 명사는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와 통합될 때 연철하기도 하고 분철하기도 했는데, 이 문헌에서는 연철했다.

(8) ㄱ. 쥬 〈권선 1:6〉, cf. 내 〈권선 3:3〉

 ㄴ. 欲굴허 〈어첩 2:5〉

7) 주격과 서술격 표기

15세기 문헌에서 주격과 서술격 표기는 그 기저형 ‘-이’와 ‘이-’가 선행체언 말음절이나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각각 다르게 실현되었다. 대부분의 15세기 문헌은 한글 구결문과 언해문이 함께 하였는데, 구결문과 언해문의 주격과 서술격 표기는 약간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는 구결문의 의고성에 말미암는 것인데, ‘어첩’과 ‘권선문’에는 언해문만 있어서 ‘이, ㅣ, ∅’가 모두 보인다.

7.1) 주격조사

이 문헌에서 주격조사의 쓰임은 선행체언이 한자일 때나 한글일 때 모두 ‘이, ㅣ, ∅’로 실현되었다. 다음의 용례 중 위는 고유어 체언 뒤에서의 경우이고, 아래는 한자어 뒤에서의 경우이다.

(9) ㄱ. 이 : 네  便安야 〈권선 1:4〉

  뫼만 恩이 므거우시고 〈권선 2:1〉

 ㄴ. ㅣ : ‧내(←나+ㅣ) 반기 도아 〈권선 3:4〉, ·뉘 갑올 디 〈권선1:6〉

  三寶ㅣ 일로 더욱 노며 〈권선 4:5〉, 道ㅣ 마며 〈어첩 2:3〉

 ㄷ. ∅ : ‧우리 特別히 달이 맛나 받와 〈권 4:1〉

  :즁‧내 날 爲야 〈권선3:3〉

  福利  업서 〈권선 5:5〉

주격조사는 그 용례가 많지 않지만 한자어와 고유어 어휘 뒤에서 모두 ‘이, ㅣ, ∅’로 실현되었다. (9ㄱ)은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 뒤에서 ‘이(ⅰ)’로 실현된 예인데, 이 문헌에서는 다른 주격형에 비해 그 용례가 많은 편이다. (9ㄴ)은 체언 말음절이 ‘이(ⅰ)’나 ‘ㅣ(y)’이 외의 모음으로 끝날 때 주격조사가 ‘ㅣ(y)’로 실현된 예인데, 그 용례가 흔치 않다. ‘내’는 대명사 ‘나(余)’에 주격조사 ‘ㅣ’가 통합되어 하강 이중모음을 이룬 예인데, 주격형과 속격형이 모두 ‘내’이나 성조(聲調)가 거성(去聲)이므로 주격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에서 대명사 ‘나’의 속격형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15세기 문헌에서 속격형은 평성(平聲)의 ‘내’이다. ‘뉘’ 역시 거성이므로 ‘누’의 주격형이다. 속격형은 상성으로 표기된다. (9ㄷ)은 체언 말음절이 모음 ‘이’나 ‘ㅣ’로 끝난 경우 주격조사가 생략된 예이다. ‘·우·리’에서 말음절 ‘리’가 거성이므로 주격조사가 성조변동 없이 ‘∅’로 실현된 것이다. 주015)

이 문헌에는 ‘우리’의 용례가 더러 있는데, 주격으로 쓰인 것은 위의 (9ㄷ)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속격으로 쓰였다. 속격으로 쓰인 예는 다음과 같다.
우리 聖上이 〈권선 1:2〉, 우리 衣鉢 다 내야 〈권선 2:5〉
다만 이 문헌에서 ‘·우리’의 말음절 ‘리’가 평성인 것은 오기(誤記)로 생각된다. 주016)
이 문헌에는 방점표기가 다소 불안정한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경우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범훈(1985:634) 참조.
또 ‘:즁·내’는 말음절 ‘내’가 거성이므로 주격조사가 생략되고, 하향 이중모음을 이룬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후기 중세국어 문헌에서 체언 말음절이 ‘이(i)’나 ‘ㅣ(y)’로 끝나고 평성이면 성조가 변하여 상성이 된다.

7.2) 서술격조사

이 문헌에서 서술격조사의 실현은 주격조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선행체언 말음절이나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각각 ‘이, ㅣ, ∅’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문헌은 내용이 짧아서 대부분의 예를 연결어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용례 중 위는 고유어 체언 뒤에서의 경우이고, 아래는 한자어 체언 뒤에서의 경우이다.

(10) ㄱ. 이 : 文殊 겨신 히라 〈권선 2:4〉

     일훔난 山이며 〈권선 2:3〉

 ㄴ. ㅣ : 님금과 善知識괘니 〈어첩 1:4〉

 ㄷ. ∅ : 녯 因 아니면 〈어첩 3:1〉

     고 미 菩提니라 〈어첩 5:4〉

(10ㄱ)은 선행체언의 말음이 자음인 경우의 예이고, (10ㄴ)은 선행체언의 말음절이 ‘이(i)’나 ‘ㅣ(y)’ 이외의 모음인 경우의 예인데. 이 문헌에서 고유어의 예는 보이지 않는다. (10ㄷ)은 체언의 말음절이 ‘이(i)’인 경우의 예이다. 이 문헌에서 체언의 말음절이 ‘ㅣ(y)’인 예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15세기 문헌에서는 이 때에도 주격에서처럼 말음절이 평성이면 성조의 변동이 일어나나, 이 역시 해당 어사가 없다.

8) 모음조화

중세국어 시기에는 한 형태소 내부나 경계에서 양모음은 양모음끼리, 음모음은 음모음끼리 어울리는 현상, 이른바 모음조화 현상이 있었는데, 이 문헌에서는 대체로 잘 지켜졌으나 일부에서 음절 경계 곧, 조사와의 통합에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보조사 ‘ㄴ’과 대격조사 ‘ㄹ’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8.1) 보조사 ‘ㄴ’

보조사 ‘ㄴ’은 선행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몇 가지 이형태를 가진다. 우선 체언의 말음이 자음일 때는 모음 ‘/으’가 개재되어 ‘/은’이 되고, 모음일 때는 ‘ㄴ’ 또는 ‘ㄴ’의 중가형 ‘/는’으로 나타나는데, 이 문헌에서는 ‘은’과 ‘는’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이 문헌에 나타난 보조사의 목록이다.

(11) ㄱ. ㄴ : 미츠닌 〈권선 5:1〉, 우흐론 〈권선 5:3〉, 아래론 〈권선 5:4〉

 ㄴ.  : 五臺 〈권선 2:3〉, 上院寺 〈권선 2:5〉, 三寶 〈어첩1:5〉, 父母 〈어첩 1:5〉

 ㄷ.  : 님금 〈어첩 1:6〉, 善知識 〈어첩 2:1〉

(11ㄱ)은 각각 ‘는’ 또는 ‘’으로 실현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기저형 ‘ㄴ’으로 되어 있어서 ‘는’의 실현을 배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11ㄷ)의 두 예는 실현 환경으로는 모두 ‘은’이 되어야 하나, 이 문헌, 특히 어첩에서는 양성 모음인 ‘’으로 실현되었다.

8.2) 대격조사

대격조사 ‘ㄹ’ 역시 선행체언 말음 또는 말음절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몇 가지 이형태를 갖는다. 체언 말음이 자음이면 ‘/으’가 개재되어 ‘/을’이 되고, 말음절이 모음이면 ‘ㄹ’ 또는 ‘ㄹ’에 ‘/을’이 결합된 ‘/를’로 나타나는데, 이 문헌에서는 대체로 이 규정이 잘 지켜졌으나, 몇몇 모음조화에 어긋난 예를 볼 수 있다.

‘어첩’ 및 ‘권선문’에는 여러 문법 형태소 중 대격 조사의 용례가 많은 편이다. (12)에서는 그 중 예외적으로 쓰인 것만을 살펴보려고 한다.

(12) ㄱ. :날 〈권선 3:3〉, 〈어첩 4:2, 4:5〉, 모릴 〈어첩 2:1〉

 ㄴ. 목수믈 〈권선 4:3〉 / 목수 〈어첩 1:5〉 菩提心을 〈권선 5:2〉 / 正因 〈어첩 5:3〉

 ㄷ. 師等 〈어첩 5:2〉

 ㄹ. 뎌를 〈권선 3:4〉 / 뎌 〈어첩 4:3〉

(12ㄱ)은 ‘’로 실현되어야 할 환경에서 기저형인 ‘ㄹ’이 쓰인 예이다. 특기할 것은 이 경우에 거성인 ‘나[我]’의 대격형이 모두 상성으로 실현된 점이다. (12ㄴ)은 같은 환경인데도 ‘어첩’과 ‘권선문’에서 각각 다르게 실현된 예이다. ‘권선문’에서는 대격조사의 경우 모음조화가 잘 지켜지고 있으나, ‘어첩’에서의 모음조화 파괴는 (12ㄷ, 12ㄹ)의 예와 더불어 주목을 요한다. (12ㄷ)은 ‘권선문’에서의 용례는 보이지 않으나 모음조화 규정에서 벗어나 있다. (12ㄹ)은 같은 어휘 ‘뎔[寺]’의 대격형이 ‘어첩’에서는 ‘권선문’과 다르게 표기되었다.

이 외에 처격, 속격, 구격, 의도법 선어말어미, 부사형어미, 매개모음 등에서도 모음조화는 대체로 잘 지켜졌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예외도 있다.

(13) ㄱ. 天下애 일훔난 山이며 〈권선 2:3〉

 ㄴ. 師의 功이 아니아 〈어첩 3:1〉 / 師 날 爲야  과 〈어첩 4:5〉

(13ㄱ)은 처격인데 ‘-에’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나, 이 문헌에서는 ‘애’로 실현되었다. (13ㄴ)은 같은 어휘 ‘사(師)’의 속격형인데 양성과 음성으로 각각 달리 실현된 예이다.

9) 어간 ‘-’와 어미의 결합에서 어미의 초성이 무성자음 ‘ㄱ, ㄷ’으로 시작되면 반드시 축약형 ‘ㅋ, ㅌ’으로 실현되었다. 이 문헌에서 ‘-’와 ‘ㅂ, ㅈ’이 연접한 용례는 없다.

(14) ㄱ. 安保케  리오 〈어첩 1:6〉 / 아니케 야 〈어첩 2:6〉, cf. 잇게 니 〈어첩 2:6〉

 ㄴ. 和애 違타 듣고 〈어첩 3:2〉

다만 어간 ‘-’에 선행하는 체언의 말음이 무성자음이면 ‘-’가 생략되었다.

(14)′ 利益게 홀띠니라 〈권선 5:6〉

10) 어간과 어미의 통합에서 ‘ㄹ’ 다음에 ‘ㄱ’이 탈락한 형태와, ‘ㄴ’과 ‘ㅿ’ 앞에서 ‘ㄹ’이 탈락한 예가 보인다.

(15) ㄱ. 億萬歲예 길에 야 〈권선 5:5〉

 ㄴ. 究意한 正因 노니 〈어첩 5:3〉

 ㄷ. 비오- 〈권선 2:6, 5:4〉, 두 〈어첩 3:3〉

11) 이 문헌에 실현된 중성 글자는 단일자가 11자이고, 합용자는 /w/계 이자합용중성자(二字合用中聲字) 1자, /j/계 이자합용중성자 7자, /w/계 삼자합용중성자 1자 등 9자이다.

(16) 단일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ㆍ (11자)

합용자 ㅘ (/w/계 이자합용중성자) (1자)

 ㅐ ㅔ ㅖ ㅚ ㅟ ㅢ ㆎ(/j/계 이자합용중성자) (7자)

 ㅙ(/w/계 삼자합용중성자) (1자)

이 문헌은 한문 원문을 가능한 한 쉬운 우리말로 옮기고, 대격조사와 보조사의 표기에서 자유교체형을 자주 쓰는 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표기법에서는 예외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의 표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는 구결문의 작성이 없어서 번역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첩장 조성의 과정에서 교정이 있었던가, 아니면 편지글 작성자나 필사자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4.2 문법적 특성

중세국어 시기의 문장은 대체로 복문이 많은데, 이 문헌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결어미 ‘-니’에 기댄 문장 접속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종결어미의 형태가 다양하지 못하고 극히 단조롭다. 선어말어미는 글의 성격상 겸양법 선어말어미의 쓰임이 흔한 반면 공손법 선어말어미 ‘--, --’의 쓰임은 없다. 여기서는 단어의 형성, 곡용, 활용, 어휘 등의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이 문헌은 짧은 편지글이어서 단일어는 물론이거니와 합성어 구성도 그리 다양한 편은 아니다. 특히 복합어 구성에서 동사는 전무하고 명사와 수사, 형용사에 몇 예가 보일 뿐이다.

(1) ㄱ. 아恩 〈권선 1:5〉, 나랏사 〈권선 3:4〉, 님귀 〈권선 4:4〉, 드틄길ㅎ 〈어첩 2:4〉, 오날 〈어첩 2:6〉, 눗믈 〈어첩 4:1〉

 ㄴ. 낫바 〈어첩 3:3〉

 ㄷ. 두 〈어첩 3:3〉

 ㄹ. 그지없- 〈어첩 4:1〉, 없- 〈권선 5:4〉

(1ㄱ, 1ㄴ)은 복합명사이다. 이 중 (1ㄱ)은 선행명사가 후행명사를 수식하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구(句) 구성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큰 어휘들이다. (1ㄱ)의 ‘눗믈’은 ‘믈’에서 ‘ㄴ’이 탈락한 형태이다. (1ㄴ)은 직접구성요소가 각각 대등한 관계를 가지는 복합명사이다. (1ㄷ)은 복합수사인데 ‘ㅿ’ 앞에서 ‘ㄹ’이 탈락되었다. 문장에서는 주로 관형어의 기능을 한다. (1ㄹ)의 전자는 명사 ‘그지’와 형용사 ‘없-’이 합성하여 복합형용사를 구성한 예이고, 후자는 명사 ‘’과 형용사 ‘없-’이 합성한 것이다. 각각 ‘무궁(無窮)’과 ‘무변[無疆]’에 대응하는 말이다.

2) 이 문헌에서 파생어 형성은 복합어에 비해 생산적이다. 접미사 ‘-’에 의한 동사, 형용사 형성이 다수 보이고, ‘-이, -혀’에 의한 파생부사 형성도 더러 보인다. 또 ‘-우-’와 ‘-히-’에 의한 사동어간 형성도 있고, 접미사 ‘만-’에 의한 파생형용사 형성의 예도 있다. 접미사 ‘-’에 의한 파생용언 형성의 어휘를 나타나는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17)

이 논의에서 동작동사와 상태동사는 구분하지 않는다.

(2) 便安- 〈권선 1:4〉, 靈異- 〈권선 2:4〉, 勝- 〈권선 2:5〉 爲- 〈권선 3:3, 어첩4:2,5,6, 5:2〉, 願- 〈권선 4:6〉, 利益- 〈권선 5:6〉, 重- 〈어첩 1:3〉, 安保- 〈어첩 1:6〉, 引導- 〈어첩 2:1〉, 和- 〈어첩 2:4〉, 違- 〈어첩3:2〉, 濟度- 〈어첩 3:5〉, 感動- 〈어첩 3:6, 4:6〉, 靈- 〈어첩 4:3〉, 究竟- 〈어첩 5:3〉, 付囑- 〈어첩5:4〉

위와 같이 ‘-’에 의해 구성되는 동사, 형용사는 꽤 많은 편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문헌이 가지는 특징을 하나 정리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문헌에서는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말은 가능한 한 바꾸되, 바꿀 수 없어서 한자어를 썼을 경우는 한자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每常)처럼 차용한지 오래되어 우리말화한 것은 우리말로 적었다.

3) 파생부사는 주로 형용사 어기에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이루어졌으나 명사에 ‘-혀’가 결합한 예도 있고, 동사 어기에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아’가 결합하여 파생된 예도 있다.

(3) ㄱ. 特別히 〈권선 3:2, 4:1〉, 能히 〈어첩 3:2〉

 ㄴ. 키 〈권선 1:2〉, 업시 〈권선 1:5〉, 번드기 〈권선 2:4〉, 반기 〈권선 3:4〉, 달이 〈권선 4:1〉, 너비 〈권선 4:6〉, 티 〈어첩 3:2〉, 져기 〈어첩 5:2〉, 기리 〈어첩 5:5〉

 ㄷ. 혀 〈권선 4:3〉

 ㄹ. :다(〈다+아, 共, 竭, 悉) 〈권선 1:5, 2:5, 5:1〉

위 (3ㄱ)은 어간 ‘-’가 접미사 ‘-이’와 결합할 때 ‘ㆍ’가 탈락하면서 ‘히’로 실현되었으나 접미사는 ‘-이’이다. 이 문헌에서도 그렇지만 15세기 문헌에서는 주로 한자어의 예만 보인다. (3ㄴ)의 ‘키’도 형용사 ‘크-’가 ‘-이’와 결합하면서 ‘ㅡ’가 탈락한 것이다. 파생부사 ‘번드기’와 ‘반기’는 각각 형용사 ‘번득-’와 ‘반-’가 접미사 ‘-이’와 결합할 때 ‘-’가 탈락된 형태이다. ‘달이’는 ‘다-’와 접미사 ‘이’가 결합한 것이데, ‘ㆍ’가 탈락하고 설측음화에 의해 ‘달이’가 된 것이다.

(3ㄷ)은 한자어 ‘행(幸)’의 우리말 음 ‘’에 접미사 ‘-혀’가 결합하여 부사로 파생된 것이다. ‘행(幸)’이 우리말로 적힌 것은 차용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한자어라는 의식이 엷어져 우리말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ㄷ)은 동사어기에 접사화한 부동사어미 ‘-아’가 결합하여 파생된 정도부사이다.

4) 사동어간 형성의 접미사 중 이 문헌에는 ‘-히-’와 ‘-오/우-’가 보인다. 이 문헌에서의 사동은 주로 통사론적 사동에 의존하고 있다.

(4) ㄱ. 綸命을 리오샤 〈권선 3:3〉

 ㄴ. 기리 後子孫애 드리우노라 〈어첩 5:5〉

 ㄷ. 利 너표려 시고 〈권선 3:5〉

(4ㄱ, 4ㄴ)은 각각 사동접미사 ‘-오/우-’에 의한 사동 형성이고, (4ㄷ)은 어기 ‘넙-’에 접미사 ‘-히-’가 결합하여 유기음화된 것이다.

5) 명사 어기에 접미사 ‘만-’가 결합하여 형용사가 된 예가 있다.

(5) 뫼만- 〈권선 2:1〉, 터럭만- 〈권선 2:2〉

지금까지 ‘어첩’과 ‘권선문’에 보이는 복합어와 파생어 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6) 위에서 제시한 예들 외에 복합어 구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구(句) 구성으로 보아야할지 난해한 어휘가 있어서 소개한다. 다른 문헌에 그 용례가 없어서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6) 조 念을 가져 欲굴허 디디 아니케 야 〈어첩 2:5〉

‘欲굴’은 ‘욕갱(欲坑)’에 대응하는 우리말 표현인 바, 속격 표지 없이 선행체언이 후행체언을 꾸며주는 의미를 갖는 어사이다.

7) 이 문헌에는 명사가 곡용을 할 때 명사어간이 자동적으로 교체하는 이른바 ‘ㅎ말음체언’이 보이고, 음절말 자음의 제약 때문에 자동적 교체를 보여주는 명사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비자동적 교체를 하는 ‘[宗]’와 같은 어사도 있다.

(7) ㄱ. ‘ㅎ’ 말음체언의 예

 나라ㅎ 〈권선 1:3〉, 네ㅎ 〈권선 1:4〉, 쇼ㅎ 〈권선 1:6〉, 뫼ㅎ 〈권선 2:1〉 ㅎ 〈권선 2:4-6〉, 우ㅎ 〈권선 5:3〉, 길ㅎ 〈어첩 2:4〉

 ㄴ. 음절말 자음교체의 예

   〈권선 1:4, 5:5〉 / 업수믈 〈권선 5:4〉

  맛나[遇] 〈권선 4:1〉, 낫바[晝夜] 〈어첩 3:3〉

  밧긔[外] 〈어첩 3:4〉, cf. 城 밧 훤 해 〈석보 6:27ㄴ〉

 ㄷ. 비자동적 교체의 예

  리오[宗] 〈어첩 1:5,6, 2:1〉

(7ㄱ)의 ‘네ㅎ[四]’, ‘뫼ㅎ[山]’와 (7ㄴ)의 ‘[外]’ 등은 이 문헌에 곡용형과 교체형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용례가 없을 뿐이지 같은 환경에 서면 각각 곡용형과 교체형으로 실현될 것이므로 적어 놓았다.

8) 의존명사 ‘’와 ‘’는 동명사어미 ‘-ㄹ’에 후행하여 주격조사나 서술격조사와 통합될 때 ‘ㆍ’가 탈락되는데, 이 문헌에서 ‘’와의 통합형은 보이지 않고, ‘’와의 통합형만 보인다. ‘’와의 통합형은 어미화한 ‘-ㄹ’만 보인다.

(8) ㄱ. 사 닐올디 아니니 〈어첩 5:1〉, 利益게 홀띠니라 〈권선 5:6〉

 ㄴ. 뎌를 지려  〈권선 3:4〉, 내 이럴 〈어첩 5:1〉

(8ㄱ)은 의존명사 ‘’가 주격조사 및 서술격조사와 통합하여 각각 주어와 서술어의 기능을 보여주는 예이고, (8ㄴ)은 어미화한 ‘-ㄹ’가 ‘이유’를 나타내는 어미로 쓰인 것이다.

9) 중세국어 시기의 문장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이 문헌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이는 구결문의 작성 없이 언해가 이루어진 때문으로 생각되는데, 접속어미 ‘-니’에 기대어 상당히 길어진 문형들을 계속 접하게 된다. 따라서 상원사 ‘어첩’ 및 ‘중창 권선문’은 문장 구성이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 있는 문헌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모두 10장(張) 56행(行) 774자(字) 주018)

언해문만을 대상으로 한 이 문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선문’은 5장 29행인데, 각 장의 글자 수는 1장 77, 2장 89, 3장 78, 4장 91, 5장 79장 등 모두 414자이고, ‘어첩’은 5장 27행인데 각 장의 글자 수는 1장 58, 2장 83, 3장 96, 4장 56, 5장 67자 등 모두 360자이다.
로 되어 있는 이 문헌에서 종결어미는 평서형 다섯, 의문형 셋, 그리고 인용문으로 되어 있는 세 문장 등 모두 열한 개 유형이 있을 뿐이다. 이 중 인용문 속에 들어있는 문장도 하나는 직접인용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완전한 종결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나머지 두 문장은 간접인용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명령형과 평서형이다.

(9) ㄱ. 江陵 五臺 天下애 일훔난 山이며 文殊 겨신 히라 〈권선 2:2-4〉

 ㄴ. 上院寺 더욱 勝 히라 〈권선 2:4-5〉

 ㄷ. 現在와 未來왜 다 利益게 홀띠니라 〈권선 5:5-6〉

 ㄹ. 닐온 고 미 菩提니라 〈어첩 5:4〉

 ㅁ. 이 世子 付囑야 기리 後子孫애 드리우노라 〈어첩 5:4〉

평서형은 (9)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서술격 조사 어간 ‘이’에 ‘-라’가 통합된 유형 두 문장과, 부정칭의 선어말어미 ‘-니-’에 통합된 유형 두 문장, 그리고 시상 및 의도법 선어말어미가 통합된 ‘-노-’와 결합한 유형 한 문장 등이다.

(10) ㄱ. 師의 功이 아니아 〈어첩 3:1〉

 ㄴ. 엇뎨 能히 이티 마리오 〈어첩 3:1-2〉

 ㄷ. 衆生 濟度시 큰 慈悲예 엇디 시료 〈어첩 3:5-6〉

(10)은 이 문헌에 나오는 의문형이다. (10ㄱ)은 의문보조사 ‘-아’가 결합된 판정의문문이고, (10ㄴ), (10ㄷ)은 선어말어미 ‘-리-’와 의문종결어미 ‘-오’가 결합되어 설명의문문을 구성한 것이다.

(11) ㄱ. 綸命을 리오샤 니샤 “내 날 爲야 뎌를 지려  내 반기 도아 나랏사람과로 利 너표려” 시고, 御衣 현  내시며 와 布貨와 土木  꺼슬 주라 시니 〈권선문 3:3~4:1〉

 ㄴ. 이제 ‘내 和애 違타’ 듣고 〈어첩 3:2〉

(11ㄱ)의 인용문은 상당히 복잡한 문장(文章)이다. ‘너표려’라는 의도형 연결어미 다음에 종결어미 없이 바로 주절의 서술어가 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도 어디서부터가 대화이고 어디서 부터가 지문인지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주라’라는 명령형 어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와’부터가 대화일 것으로 생각된다. (11ㄴ)은 간접인용문의 성격을 띤 평서형이다.

10) 이 문헌에 나오는 한자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불교용어이고, 하나는 임금과 관련된 용어이다. 대부분 한자로 적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유어로 바꿀 수 있는 말은 가능한 한 바꾸었으나 바꾸기 어려운 몇몇 어휘들은 그대로 한자를 쓰고 있다.

(12) ㄱ. 임금과 관련된 어휘

  聖上 〈권선 1:2〉, 天命 〈권선 1:2〉, 民 〈권선 1:3〉, 兩殿 〈권선 3:2〉, 綸命〈권선 3:3〉, 御衣 〈권선 3:6〉, 聖壽 〈권선 5:4〉, 潛邸 〈어첩 2:2〉, 世子 〈어첩5:4〉

 ㄴ. 불교관련 어휘

  文殊 〈권선 2:3〉, 靈異 〈권선 2:4〉, 上院寺 〈권선 2:4〉, 衣鉢 〈권선2:5〉, 布施〈권선4:4〉, 三寶 〈권선 4:5, 어첩 1:4,5〉, 法輪 〈권선 4:5〉, 施主 〈권선 4:6〉, 菩提心 〈권선 5:2〉 善知識〈어첩 1:4, 2:1〉, 慧覺尊者 〈어첩 2:3〉, 師 〈어첩3:1, 4:2,5,6〉, 劫 〈어첩3:1〉, 因 〈어첩 3:1〉, 衆生 濟度 〈어첩 3:5〉, 慈悲 〈어첩 3:5-6〉, 悅師 〈어첩 4:2〉, 祖師 〈어첩 4:2〉, 正因 〈어첩 5:3〉, 菩提 〈어첩5:4〉, 付囑 〈어첩 5:4〉

또한 이 자료는 짧은 편지글이지만 15세기 문헌에서 잘 쓰이지 않은 어휘가 두엇 보인다.

(13) ㄱ. 다-[乂] : 동사. 다스리다. ‘만 民이 다라’ 〈권선 1:3〉

 ㄴ. 헤다히-[奔來] : 동사. 헤매어 다니다. ‘두 百里 밧긔 헤다혀오니’ 〈어첩 3:3-4〉

5. 맺는 말

5.1 지금까지 상원사 ‘어첩’ 및 ‘중창 권선문’의 서지 사항과 언어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문건(文件)은 편지글인데, 하나의 첩장 속에 합철되어 있어서 흔히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중창권선문(重創勸善文)”(1464년)이라 불러왔다. 두 편지글 중 하나는 세조가 신미 등에게 보낸 어첩이요, 다른 하나는 신미 등이 세조에게 보낸 서찰이다. 두 편지글은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여져 두 건의 첩장으로 장정되어 오늘에 전해진다. 표지에 ‘御牒’이라는 제명이 있는 문헌과 표지에 아무런 제명이 없는 문헌인데, 우리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문헌은 전자다. 이 문헌에는 두 편지글의 원문과 언해문이 함께 실려 있다. 편지글 뒤에 세조(世祖)와 자성왕비(慈聖王妃),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공주, 부부인, 정경부인, 정부인 등 주로 종실 및 외명부 여인들이 열기(列記)되어 있고 인기(印記)가 있다. 후자에는 언해문 없이 원문만 있고, 신미 등 세조에게 서찰을 보낸 발신자들이 열기(列記)되어 있으며, 국왕과 세자 외에 종실의 대군(大君), 군(君), 부원군(府院君),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열기되어 있다. 그러나 여인들은 왕비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두 문헌은 편철 순서나 체제, 대두법(擡頭法)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편 같은 첩장 속의 두 편지글도 서체가 조금 차이가 난다. 두 편지글은 세조와 신미의 진필(眞筆)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재사(再寫)된 듯하다. 세조의 편지글은 또박또박 정자로 쓴 해서체(楷書體)인데 비해, 신미 등의 글은 원문과 언해문 모두 흘려서 쓴 해행서체(楷行書體)이다. 편지 작성일(作成日)은 신미 등의 편지글에는 끝에 ‘天順八年臘月十八日’이라 되어 있어서 정확한 작성 일시를 알 수 있으나, 세조의 편지글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혼선이 빚어진 바 있다. 얼마 전까지 세조의 편지글이 먼저 쓰여진 것으로 알려졌었으나 근자에 신미의 편지글이 먼저 쓰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5.2 이 문헌은 세조 10년(1464)에 쓰여진 것으로 당시의 언어사실을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 중 하나다. 이 서찰이 쓰여진 해에 간경도감에서 〈선종영가집언해〉, 〈아미타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등이 간행되었는데, 모두 불전 원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을 한 이른바 불경언해서들이다. 그러나 ‘어첩’ 및 ‘권선문’은 먼저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한문서찰에 구결문의 작성 없이 언해가 이루어져서 구결문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구결문이 없어서 당시의 실용 언어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문장의 호흡이 길고 뜻의 전달이 잘 안되는 등의 문제점도 발견된다.

표기법이나 음운에서는 같은 해에 간행된 다른 언해서들과 큰 차이가 없다. 문장은 종결어미에 의한 구성은 적고, 어미 ‘-니’에 의존한 종속절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글을 쓴 세조나 신미 등의 신분이 반영된 듯 임금과 관련된 어휘나 불교 관계 어휘가 많다.

그 밖의 언어 사실은 본문에서의 설명으로 대신한다. 특기할 것은 단어의 구성에서 접미사 ‘-’에 의한 파생어 형성이 생산적이고, 선어말어미는 겸양법 선어말어미의 쓰임이 많은 반면 공손법 선어말어미는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헌에서 접미사 ‘-’에 의한 파생어와 불교용어, 임금 관련 용어 외에 대부분의 한자어는 고유어로 옮겨졌다. 이는 언해에서 쉬운 우리말로의 번역에 노력한 결과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편지를 쓴 두 사람 모두 당시 불경언해를 주도했던 인물이어서 언어사실에서 관판본의 불경언해서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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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外國語大學校(1987), 「中期朝鮮語資料選」.

석보상절 제20 해제*
<정의>* 이 역주 작업은 주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뒤의 논의에서 다시 밝히겠지만, 『석보상절』 권 20의 내용이 『월인석보』(1459년 간행) 권 18 및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 권 6, 7에도 번역되어 실려 있기 때문에, 비교가 가능하도록 역주 대상 문헌인 『석보상절』은 물론,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 등 각각 다른 시기에 간행된 두 책에서 대응되는 부분도 함께 실어 놓았다. 『석보상절』 권 20은 원본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복사본으로 작업을 했으나, 원본과의 대교(對校)를 통한 확인의 과정은 거치지 못했다. 대신 현전하는 다른 『석보상절』이나 대응되는 두 책의 내용을 참고했다. 하지만 원본을 처음 소개했던 천혜봉교수의 지적대로 원본에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아서 해독에 어려움이 따랐다. 이런 일련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김성주교수와 박대범군이 입력과 교정 작업을 진행해 주었다. 그리고 서정호군과 전기량양은 역주의 교정을 보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여기에 적어서 사의를 표한다.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Ⅰ. 책의 전래 경위

『석보상절』(1447년 간행)은 애초에 24권으로 간행되었다.

<정의>『석보상절』 초간본의 간행 권수(卷數)가 24권이라는 사실은 이동림(1959), 이병주(1967), 김영배(1986) 등에 의해 일찍이 밝혀진 바 있다. 곧 국립도서관 소장본 4책의 원 소유자였던 세종 때의 황해도 해주 목사(권 9의 마지막장에 쓴 職銜은 ‘嘉善大夫黃海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兼判海州牧事’이다.) 신자근(申自謹)이 정통(正統) 14년(세종 31년, 1449년) 9월에 손수 쓴 것으로 보이는 ‘共廿四’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共廿四’라는 글자는 권 6과 권 13의 표지 아래쪽 마구리에 적혀 있다고 한다. 이병주(1967), 김영배(1986)에서는 권 23과 권 24의 내용으로도 확인한 바 있다.
이 초간본 중에 8권만이 현전한다. 권 6, 9, 13, 19 등 4책이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정의>국립도서관 소장의 4책에는 주묵(朱墨)으로 교정을 한 흔적이 있다. 이른바 교정본(校正本)인 것이다. 『석보상절』의 교정에 대해서는 안병희(1974)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호권(2001)에는 교정 및 교정에 따른 정정(訂正) 내용이 논의 곳곳에 나오고, 부록에는 4책의 교정일람표가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권 23, 24 등 2책이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권 20, 21 등 2책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들이 발굴·공개된 경위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보고가 있었으므로 여기서 따로 다루지는 않는다.
<정의>국립도서관 소장의 4책에 대해서는 에타 도시오(江田俊雄:1936),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2책에 대해서는 이병주(1967), 리움미술관 소장의 2책에 대해서는 천혜봉(1990)에 소상한 소개가 있다. 중간본인 권 3에 대해서는 천병식(1985), 권 11에 대해서는 심재완(1959)에 간행 연도 추정 등 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초간본은 아니지만 그 복각본(覆刻本) 2책도 현전한다. 권 3과 권 11이다. 권 11은 심재완교수에 의해 영인·공개(1959)된 바 있다. 이 책은 1560년 경 전라도 순창(淳昌)의 무량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의>중간 복각본인 권 11의 간행 연도에 대해서는 안병희(1974:20~21)에서 무량사판 『월인석보』 권 23(명종 14년, 1559년 간행) 및 같은 무량사판인 『월인석보』 권 21(명종 17년, 1562년 간행)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권 3은 천병식교수에 의해 영인·공개(1985)되었다. 간기(刊記)는 없지만, 책의 맨 뒷면 안쪽에 붙어 있는 후세(後世)의 부전(附箋)으로 간행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곧 부전에 적힌 “嘉靖四拾辛酉年中月龜岳山無量寺開板”을 근거로 하여 1561년(명종 16)에 역시 순창의 무량사에서 중간(重刊)된 책으로 보았다. 이로써 『석보상절』은 전체 24권의 책 중 초간본 8권, 중간본 2권 등 모두 10권의 책이 오늘에 전하고 있는 셈이다. <정의>현전하는 10권의 문화재 지정 여부는 다음과 같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검색사이트에 의하면 국립도서관 소장의 ‘권 6, 9, 13, 19’ 등 4책은 보물 523-1호,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의 ‘권 23, 24’ 등 2책은 보물 523-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애초 심재완교수 소장이었다가 지금은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소장처가 바뀐 ‘권 11’ 역시 보물 5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천병식교수 소장의 ‘권 3’ 및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권 20, 21’에 대한 정보는 없다.

초간본 권 20은 1990년 2월 24일 무렵의 언론 보도로 처음 존재 사실이 공개되었고, 그해 3월에는 서지학자 천혜봉교수가 미술관련 잡지 『가나아트』 3·4월호(통권 12호)에 소개하여 전모가 밝혀졌다. 당시의 소장자가 자신의 고전적(古典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진가(眞價)를 알고,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앞에서 밝힌 대로 현재는 ‘초간본 권 21’과 함께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의>초간본인 권 21 역시 천혜봉교수에 의해 1989년 11월 16일 경 언론에 공개되었다. 권 20이 공개되기 이전의 일이다. 이 책은 고서(古書) 수집가 우찬규(禹燦奎)님 소장이었는데, 천혜봉(千惠鳳)교수가 발굴하여 공개한 것이다. 권 21은 모두 65장 130쪽 정도의 분량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끝의 두 장인 64, 65장이 낙장이고, 60~63까지는 훼손이 심해서 해독이 어렵다. 이 책 역시 복사본으로 연구자들에게 유통되고 있다. 위의 천혜봉(1990:98~99)에 의하면 두 책은 납탑본(納塔本)이었다고 한다. 두 권이 한 책으로 묶여서 탑장(塔藏)되어 있다가 빛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원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오래 전에 입수한 사본을 대상으로 이 역주 작업을 진행했다. 이 책은 53장 106쪽으로 되어 있으나, 애초 천혜봉교수가 소개한 대로 권수(卷首) 쪽의 첫 장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2장부터 15장까지의 좌하귀 부분이 침윤(浸潤)과 마멸(磨滅)로 심하게 훼손되어 이 부분에 대한 해독이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역주(譯註) 작업 및 연구(硏究)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책의 형태서지 및 구성, 그리고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월인석보』 및 『법화경언해』와의 대응 관계, 어학적 특성 등을 살펴서 내용에 대한 확인은 물론,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밝혀보고자 한다. 역주에 원본의 서영(書影)을 실을 수가 없어서 원본에 있는 내용을 모두 입력한 후, 그 입력된 내용을 원문 대신 제시하려고 한다. 원문에 있는 내용이라면 방점은 물론 동국정운(東國正韻) 한자음까지 그대로 옮겨서 원문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아울러 비교·연구가 가능하도록 간행 연대가 조금씩 다른 『월인석보』(1459년 간행)와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의 대응 부분도 함께 제시할 것이다.

Ⅱ. 형태 서지

앞에서 밝힌 것처럼 필자는 역주 대상의 책인 『석보상절』 권 20을 직접 살피지 못했다. 현 소장처의 방침으로 열람(閱覽) 및 실사(實査)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용하고 있는 책은 공개 당시의 첫 번째 소장처에서 나온 복사본을 다시 복사한 것이다. 이 재복사본은 『석보상절』 권 20이 세상에 공개된 1990년 이후, 수년이 지나 연구자들 사이에 유통되었던 사본(寫本)으로 필자도 그 무렵에 입수한 것이다.

이 책의 전반적인 형태서지(形態書誌)는 현전(現傳)하는 다른 초간본 책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뒤의 역주(譯註)에 원본의 서영(書影)을 함께 싣지 못하므로 책의 판식(板式) 등 서지 사항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본에 의해 알 수 있는 내용만 살피면 다음과 같다. 복사본이어서 책 전체의 크기는 알 수가 없고, 판광(版匡)의 반곽(半廓)은 세로〔縱〕 21.45cm, 가로〔橫〕 15.9cm이다. 이를 국립도서관 소장의 책인 권 6, 9, 13, 19의 반곽 22~22.3cm x 15.7~15.9cm 및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책인 권 23, 24의 반곽 22.2cm x 15.8cm 등과 비교해 보면 원척(原尺)대로 복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변란(邊欄)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다. 첫 장(張)이 낙장(落張)이어서 정확한 권두서명(卷頭書名)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초간의 책들처럼 1장의 첫 행(行)에 세로로 ‘釋·셕譜:봉詳節·第·똉二·十·씹’이라고 썼을 것으로 판단한다. 본문의 끝장인 53장의 뒷면을 보면, 쌍행(雙行)으로 되어 있는 첫 행(行) 다섯 번째 글자에서 내용이 마무리되는데, <정의>권 20의 맨 뒷장에 실려 있는 마지막 문장, 곧 협주문을 가리킨다. 『법화경』의 24번째 품(品)인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이 종료되었음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협주에 쓰인 “·잇·자· 妙·/音菩뽕薩·品:픔·이·라” 중 ‘/’ 뒤쪽에 있는 ‘音菩뽕薩·品:픔·이·라’를 이른다. 이 10자를 5자씩 두 줄로 배열한 것이다. 이 책의 편집 관행대로 품(品)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의 글이다. <정의>『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의 저경(底經)은 『법화경』이다. 그러니까 권 13에서 시작하여 권 21까지에 걸쳐 『법화경』 7권 전체를 언해한 것이다. 본문에 경(經)의 원문이나 구결문(口訣文)은 두지 않고, 경(經) 원문의 국어역인 번역문만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협주를 두어 이해를 도왔다. 이런 이유로 협주에는 『법화경』의 계환(戒環) 요해(要解)를 옮긴 것이 많다. 제1품(品)인 서품(序品)부터 마지막 품(品)인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를 번역해서 실은 것인데, 각 품(品)의 끝에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쌍행으로 “잇자 ~品이라”고 하여 품(品)의 마무리임을 알리고 있다. 이 책 권 20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 행(行)인 2행부터 6행까지는 원래 공란(空欄)이었다. <정의>이 53장 뒷면은 원래 품(品)의 종료임을 알리는 1행의 일부와 권말서명이 있는 7행을 제외한 그 나머지 지면이 공란(空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 전하는 책에는 나중에 누군가가 붓으로 쓴 낙서(落書)가 있다. 2행부터 6행까지와 권말 서명의 아래쪽, 그리고 8행에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을 토로한 필서(筆書)가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권말 서명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7행(行)에 대자(大字)로 ‘釋·셕譜:봉詳節·第·똉二·十·씹’이라고 권말서명(卷末書名)을 두었다. 판심(版心)은 상하(上下) 공히 대흑구(大黑口)이고,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위쪽 흑어미 바로 밑에 판심서명(版心書名)인 ‘釋譜’를 두고, 바로 이어서 권차(卷次)인 ‘二十’을 썼다. 그리고는 중간에 두어자 정도의 사이를 띈 후 아래쪽 흑어미 바로 위에 장차(張次)를 썼다. 매엽(每葉)은 무계(無界) 8행(行)이고, <정의>이미 알려진 대로 『석보상절』의 초간본은 동활자본(銅活字本)이고, 중간본은 복각(覆刻)의 목판본(木版本)이다. 이렇게 판본(版本) 자체가 달라졌으므로 판식(版式) 등에서도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두드러진 차이점 중 하나는 초간본에는 행(行)과 행(行) 사이에 계선(界線)이 없는데 비해, 중간본 중 권 3에는 계선을 두었다는 점이다. 같은 중간본임에도 권 11에는 없다. 그 외 방점(傍點)의 모양이 초간본은 원점(圓點)인 데 비해 중간본은 점획(點劃)으로 한 것도 그렇고, 활자의 자양(字樣) 등에서도 차이가 난다. 매행(每行)의 글자 수는 15자(字)이다. 협주(夾註)가 필요한 곳에는 작은 글자 쌍행(雙行)으로 설명을 하였으나 따로 흑어미 등의 표지는 두지 않았다. 협주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법화경(法華經)』의 계환(戒環) 요해(要解)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논의 할 것이다. 활자(活字)는 한자와 정음자 모두 동활자(銅活字)가 사용되었다. <정의>이호권(2001:27)에 의하면 동활자(銅活字)가 없는 경우에는 목활자(木活字)로 보충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자는 갑인자(甲寅字)로 대자(大字)와 소자(小字)의 두 종류이다. 대자(大字)는 본문에 쓰였고, 소자(小字)는 협주에 쓰였다. 정음(正音)의 경우에는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가 쓰였다. 대자(大字)는 본문에 쓰였고, 중자(中字)는 협주에 쓰였다. 소자(小字)는 본문과 협주의 한자 독음(讀音)에 쓰였다. <정의>『석보상절』에 쓰인 정음(正音) 글자의 명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이호권(2001:27)의 각주 14)에서는 이를 정리하고, ‘갑인자 병용 한글자’라는 명칭이 비교적 온당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석보상절』 권 20의 보존 상태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의 탑장(塔藏)과 그 이후 보존 과정에서의 침습(浸濕) 및 마멸(磨滅)로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 곳곳에 있다. 훼손에 의해 해독이 불가능한 부분을 정리하고, 그 부분에 대한 원본의 내용을 추정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오른쪽 ( ) 안에 쓴 것은 필자가 같은 책의 전후(前後) 맥락(脈絡)은 물론,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의 같은 곳을 참고하여 복원(復原)한 내용이다. ‘ * ’ 표시는 1행 15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1, 2자 정도가 많거나 적음을 표시한 것이다. 『석보상절』 권 20의 1행(行)당 글자 수가 예외를 두지 않고, 15자씩인 점으로 미루어 이 부분은 원본 부합(符合)의 정확도가 떨어짐을 함의하고 있다.

1장 : 낙장(落張)

2ㄱ : (1행) <정의>‘ㄱ’은 장(張)의 앞면을 가리키고, ‘ㄴ’은 장(張)의 뒷면을 가리킨다. ( ) 안의 숫자는 장(張)의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행차(行次)를 표시한 것이다. 아래쪽 5자 안 보임 (뽕提똉法·법)

(7행) 위쪽 2자, 아래쪽 5자 안 보임 (·펴·아), <정의>이 부분은 사본에 첫 번째 글자가 뭉개져 있고, 두 번째 글자는 희미하게라도 보이는데, ‘아’인지 ‘어’인지 모호하여 분간이 되지 않는다. 같은 행에 있는 다른 글자의 ‘ㅏ’ 및 ‘ㅓ’와의 비교도 쉽지 않다. 순수히 ‘ㅏ,ㅓ’로 된 모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말의 앞에는 ‘대자비(大慈悲)’이라는 목적어가 있으므로 타동사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 이 부분의 경(經)의 원문은 ‘有大慈悲’이다. 이를 『월인석보』에서는 ‘큰 慈悲 잇고’로 옮겼고, 『법화경언해』에서는 ‘有大慈悲고’로 옮겼다. 따라서 앞뒤의 문맥과 희미하게 보이는 두 번째 글자에서 유추하여 ‘펴아’가 쓰였던 것으로 추정했다. (:업서 能)

(8행) 위쪽 1자, 아래쪽 7자 안 보임 (·히), (佛·智·딩慧· 如)

2ㄴ : (1행) 아래쪽 7자 안 보임 (·然智·딩慧·)

3ㄱ : (7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恩)

(8행) 아래쪽 7자 안 보임 (라 그저·긔 菩뽕薩)

3ㄴ : (1행) 아래쪽 8자 안 보임 (·히 부텻 ·이 :마· 듣) * 1자 많음

(2행) 위쪽 2자 안 보임 (깃·부)

(2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恭)

4ㄱ : (7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은)

(8행) 아래쪽 6자 안 보임 (·호· 조·시·며) * 1자 적음

4ㄴ : (1행) 아래쪽 5자 안 보임 (·도 도로 :녜 ·) * 2자 적음

(2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에)

5ㄱ : (7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엇·뎨)

(8행) 위쪽 2자 안 보임 (시·니)

(8행) 아래쪽 9자 안 보임 (世·솅尊존·하 ·이 藥·약王)

5ㄴ : (1행) 아래쪽 13자 안 보임 (뽕薩··이 百·千쳔萬·먼億· 那)

6ㄱ : (8행) 아래쪽 4자 안 보임 (師 佛)

6ㄴ : (1행) 아래쪽 4자 안 보임 (:톄 八·十)

7ㄱ : (8행) 아래쪽 4자 안 보임 (러·니 一·) * 1자 많음

7ㄴ : (1행) 중간 4자 안 보임 (二·), (), (·라)

(1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이 寶:)

8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득)

8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一)

9ㄱ : (8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내 비·록)

9ㄴ : (1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

10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界·갱)

10ㄴ : (1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히 )

11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

11ㄴ : (1행) 아래쪽 3자 안 보임 (供養)

12ㄱ : (8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妙·)

12ㄴ : (1행) 아래쪽 2자 안 보임 (·을 여)

13ㄱ : (8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菩)

13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

14ㄱ : (8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몸)

14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陁)

15ㄱ : (8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

15ㄴ : (1행) 아래쪽 1자 안 보임 (·하)

위의 일별(一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좌하귀 부분의 마멸로 인해 2장부터 15장까지 각 장(張) 앞면의 끝 행인 제8행 아래쪽과 뒷면의 첫 행인 제1행 아래쪽에 해독(解讀)이 어려운 글자가 상당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뒷장으로 갈수록 나아져서 점점 해독 불가능한 글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16장부터 마지막 장인 53장까지는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대로 복원(復原) 작업은 책의 앞뒤 내용을 통해 그 맥락을 살피고,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를 참고하는 한편, 글자 수를 고려하여 확정했다. 한자어의 독음(讀音)은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 가져왔다.

Ⅲ. 내용의 구성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에는 『법화경』의 경(經) 본문이 정음(正音)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법화경』 첫 번째 품(品) <정의>‘품(品)’은 범어로 ‘verga’라고 한다. 같은 종류의 것을 모아서 한 뭉치로 만드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품류(品類), 또는 품별(品別)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법화경』에서는 편(篇)과 장(章)을 나누어서 뜻과 이치(理致)를 차별화한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인 ‘서품(序品)’부터 마지막 품(品)인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를 번역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중 권 20에는 『법화경』 권 6에 실려 있는 제22품 ‘촉루품(囑累品)’,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권 7에 실려 있는 제24품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등 세 개의 품(品)이 있다. 이 『법화경』의 내용은 나중에 『월인석보』(1459년 간행) <정의>『법화경』이 번역되어 실려 있는 『월인석보』는 권 11부터 권 19까지이다. 따라서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와 대응되는 『월인석보』는 권 11부터 권 19까지임을 알 수 있다. 와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에 다시 번역되어서 국어사 연구 자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정의>물론 세 차례의 번역(飜譯)이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두루 알고 있는 대로 『월인석보』(1459년 간행)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삽입하여 재편찬한 결과 모두 25권으로 확대된 것이고, 『법화경언해』(1463년 간행)는 경(經)의 원문(原文)은 물론, 계환(戒環)의 요해(要解)까지에도 정음(正音)으로 구결을 달아서 번역을 한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에는 품(品)이 종료되는 마지막 부분에 “·잇·자· ~品:픔·이·라(여기까지는 ~품(品)이다.)”라는 쌍행(雙行)의 협주(夾註)를 두어 앞선 품(品)의 종료와 새로운 품(品)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정의>이 점은 『월인석보』의 설명이 보다 친절한 편이다. ‘【~~잇 ~品 고 아래 ~品이라】〔여기까지 ~품(品)을 마치고 아래는 ~품(品)이다.〕’라 하여 다음 품(品)의 내용까지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행의 끝까지를 여백으로 두었다. 다음 행은 ‘그’, 또는 ‘그저긔’로 시작하여 내용이 전환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에는 『석보상절』 다른 책에서 내용이 바뀔 때 흔히 사용하던 권원(圓圈) 표시〔〇〕를 두지 않았다. 권 21도 마찬가지다. 권 20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석보상절』 20 : 1ㄱ2 ~5ㄱ4 ← 『법화경』 권 6 촉루품(囑累品) 제22

‘촉루(囑累)’는 후일(後日)에 할 일을 미리 말하여 맡겨 두고, 부탁한다는 뜻을 가진 불교 용어이다. 따라서 이 ‘촉루품(囑累品)’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많은 보살(菩薩), 마하살(摩訶薩)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중(大衆)들에게 『법화경』의 가르침을 닦고 익혀서 널리 펼 것을 부탁한다는 설법(說法)이다. 곧, 무량(無量)의 보살(菩薩)들에게 미래세(未來世)에 할 일을 미리 부촉(付囑)하고, 그 일을 하도록 여러 분신화불(分身化佛)과 다보불(多寶佛)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다.

2. 『석보상절』 20 : 5ㄱ5 ~32ㄴ3 ← 『법화경』 권 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3

‘본사품(本事品)’은 ‘본사설(本事說)’이라고도 한다. 12부경의 하나로, 경전(經典) 가운데 불제자들이 지난 세상에 이룬 행업(行業)이나 사실(事實) 등을 설(說)한 부분이다. 따라서 『법화경』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지난날의 행적(行蹟)과 이러한 행업(行業)을 생각하여 이 내용이 들어 있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부촉하는 내용이다.

이 품(品)은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쪽에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인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의 소신(燒身) 법공양(法供養)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다. 그 다음에는 『법화경』을 수지(受持)해서 얻는 공덕이 소신에 의한 법공양보다 크다는 부처님의 설법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는 『법화경』이 모든 경전 중에서도 으뜸임을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뒤에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듣고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의 큼과 신비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 부처님이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부촉하는 내용으로 끝냈다.

3. 『석보상절』 20 : 32ㄴ4 ~53ㄴ1 ← 『법화경』 권 7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제24

지난 세상에서 10만 종류의 음악을 운뢰음왕불(雲雷音王佛)에게 공양하고 정화수왕지불(淨華宿王智佛)의 국토에 태어났다는 묘음보살(妙音菩薩)의 행적(行蹟)을 설명한 품(品)이다. 묘음보살(妙音菩薩)은 여러 부처님을 친근(親近)하여 깊은 지혜를 성취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三昧)를 얻었으며, 신통력(神通力)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앞쪽에는 묘음보살이 정화수왕지불의 국토에서 삼매(三昧)와 신통력(神通力)의 힘으로 8만 4천의 보살들에게 둘러싸여 사바세계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왔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사바세계에 온 이유는 석가모니불을 공양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화덕보살(華德菩薩)이 부처님께 묻고, 부처님이 답하는 형식을 빌려서 묘음보살이 신통력(神通力)을 갖게 된 전생(前生)의 인연(因緣)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부처님이 설법하는 형식을 통해 묘음보살이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 화현(化現) 등의 다양한 방편(方便)을 써서 중생들을 도탈(度脫)케 하고, 궁극적으로는 중생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는 내용이 있다. 끝에는 묘음보살이 부처님과 다보불(多寶佛)에게 공양하고 8만 4천의 보살에 둘러 싸여 정화수왕지불의 국토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위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의>이 내용은 김기종(2010:64~65)에서 가져 왔다. 일부의 내용은 필자가 바로 잡고 다시 정리했다. 이 외에도 저경(低經)에 관한 상세한 논의가 있어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석보상절』 권 20의 본문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법화경』 권 6 촉루품(囑累品) 제22,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3, 권 7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제24 등 경(經)의 본문을 정음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경 본문 속에는 쌍행으로 배열된 협주가 나온다. 두루 아는 대로 협주는 번역자나 번안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가(加)한 주석(註釋)에 해당된다. 당연히 고유의 말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로 국어사 연구자들에게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협주의 대부분은 『법화경』을 요해(要解)한 송(宋)나라 계환(戒環)의 요해 부분을 정음으로 옮긴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협주 고유의 기능을 가진 것도 있다.

권차
(卷次)
경의 내용장차(張次)저경(底經)해당
월곡(月曲)
  권  20•석가모니불이 무량보살(無量菩薩)에게 미래세에 법화경을 널리 설법할 것을 부촉함 2ㄱ1~4ㄱ4妙法蓮華經囑累品 第22 其321
•석가모니불이 분신화불(分身化佛)과 다보불(多寶佛) 등을 본국으로 돌려보냄 4ㄱ4~5ㄱ4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前身)인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 몸과 팔을 태워 법공양(法供養)을 한 인연 5ㄱ5~20ㄱ2     妙法蓮華經藥王菩薩本事品 第23
•법화경을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이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의 법공양보다 크다는 석존의 설법 20ㄱ2~26ㄱ7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듣고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 26ㄱ7~30ㄱ2
•석가모니불이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부촉함 30ㄱ2~32ㄴ3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석존을 공양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해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옴 32ㄴ4~45ㄱ6妙法蓮華經 妙音菩薩品 第24 其322  ~324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신통력(神通力)을 갖게 된 전생의 인연에 대한 설명 45ㄱ6~47ㄱ3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신통력과 지혜에 대한 석가모니불의 설법 47ㄱ3~51ㄴ7
•묘음보살이 석가모니불과 다보불(多寶佛)에게 공양하고 돌아감 51ㄴ7~53ㄴ1

협주(夾註)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법화경』 계환(戒環)의 요해(要解) 부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서 확인이 된다. 『석보상절』에서는 요해(要解) 중 일부를 협주로 하였고, 『월인석보』에서는 요해(要解) 전체를 협주로 하고 있다.

(1) ㄱ.【·녀나· 深심妙· 法·법·은 權꿘敎· 漸:쪔敎·· 니르·시·니 深심妙·ㅣ·라 ·샨 ··든 ·이 法·법·이 :다  佛·乘·이·론 젼··라】〈석상20:3ㄱ, 협주문〉

ㄴ.【如來ㅅ 智慧 信타 샤 能히 種智 信야 一乘 向 사미니 이 經을 爲야 닐어 佛慧 得게 야 二乘에 걸이디 아니케  디니라 녀나 深妙法은 權漸敎 니시니  深妙타 니샤 이 法이 다 一佛乘 爲논 젼라】〈월석18:18ㄱ~18ㄴ, 협주문〉

ㄷ. 信如來ㅅ 智慧 謂能信種智야 趣向一乘者시니 當爲說是經샤 令得佛慧야 而不滯二乘ㅣ샷다 餘深妙法은 指權漸教 也시니 亦曰深妙者 是法이 皆爲一佛乘故ㅣ시니라 〈법언6:124ㄱ, 계환 요해 정음 구결문〉

ㄹ. 如來ㅅ 智慧 信호 能히 種智 信야 一乘에 가 向 사 니시니 반기 이 經을 爲야 니샤 佛慧를 得야 二乘에 거디 아니케 샬 띠로다 녀나 深妙法은 權엣 漸敎 치시니  深妙ㅣ라 니샤 이 法이 다 一佛乘 爲샨 젼시니라 〈법언6:124ㄱ~124ㄴ, 계환 요해 언해문〉

협주 중에는 어려운 용어에 대한 해설이나 품(品)의 종료임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2) ㄱ. 容顔·이 甚·씸·히 奇긩妙··시·며【容· :즈·오 顔· ·모·야히·라】〈15ㄱ〉

ㄴ. 【·잇·자· 藥·약王菩뽕薩·本:본事·品:픔·이·라】〈32ㄴ〉

(2ㄱ)은 어휘 ‘용안(容顔)’에 대한 설명이다. 협주에서 명사류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법인 ‘~/는//은 ~이라’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2ㄴ)은 23품(品)의 종료임을 나타내는 협주문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법화경』을 저경(低經)으로 하고 있는 『석보상절』 권13부터 권21까지의 책 중 현전하는 권13, 권19, 권21 모두에서 품(品)을 마치는 자리에는 ‘·잇·자· ~品:픔·이·라’라는 협주를 두어 종료를 표시했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앞뒤에 다른 내용이 덧붙는 경우도 있다. 주021) ·잇·자· 囑·죡累:品:픔·이·니 :말··로 브·틸 ·씨 囑·죡·이·오 法·법·으·로 니· ·씨 累:·라】〈석보20:5ㄱ〉,【~~·이 如來ㅅ · 노·신 德·득·이·라 ·잇·자· 觀관世·솅音菩뽕薩·普:퐁門몬品:픔·이·니 옷 소·리· 聲·이·라 ·고~~】〈석보21:19ㄴ〉.

역주(譯註)에서는 맨 앞에 『석보상절』 권 20의 본문을 두고, 그 밑에 그에 대응하는 『월인석보』 권 18의 해당 부분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 역시 그에 대응하는 『법화경언해』의 해당 부분 정음 구결문, 언해문, 계환의 요해 구결문, 요해 언해문 등의 순(順)으로 배열해서 실어 놓았다. 그런 다음에 『석보상절』의 현대어역과 주석을 두었다. 『석보상절』, 『월인석보』, 『법화경언해』 등 세 책의 서로 대응되는 부분을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석보상절 권20월인석보 권18법화경언해 권6, 권7
〔협주〕 촉루품 제22에 대한 설명 : 12ㄴ7 ~14ㄴ16 : 116ㄱ1 ~119ㄱ5계환(戒環)의 요해(要解) 정음 구결문 및 언해문
〈월곡〉기 321 : 14ㄴ2 ~15ㄱ1
석가모니불이 무량보살(無量菩薩)에게 미래세에 법화경을 널리 설법할 것을 부촉함(1ㄱ2 ~4ㄱ4)왼편과 같음 : 15ㄱ2 ~19ㄴ26 : 119ㄱ6 ~125ㄴ9
석가모니불이 분신화불(分身化佛)과 다보불(多寶佛) 등을 본국으로 돌려보냄(4ㄱ4 ~5ㄱ4)왼편과 같음 : 19ㄴ2 ~20ㄴ76 : 126ㄱ2 ~127ㄴ3
     〔협주〕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 대한 설명 : 20ㄴ7 ~22ㄴ76 : 128ㄱ1 ~132ㄱ2계환(戒環)의 요해(要解) 정음 구결문 및 언해문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前身)인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 몸과 팔을 태워 법공양(法供養)을 한 인연(5ㄱ5 ~20ㄱ2)왼편과 같음 : 22ㄴ7 ~44ㄱ46 : 132ㄱ3 ~159ㄱ9
법화경을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이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의 법공양보다 크다는 석가모니불의 설법(20ㄱ2 ~26ㄱ7)왼편과 같음 : 44ㄱ4 ~53ㄱ46 : 159ㄴ2 ~172ㄴ4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듣고 수지(受持)하여 얻는 공덕(26ㄱ7 ~30ㄱ2)왼편과 같음 : 53ㄱ4 ~58ㄴ26 : 172ㄴ5 ~180ㄱ7     
석가모니불이 수왕화보살(宿王華菩薩)에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호지(護持)할 것을 부촉함(30ㄱ2 ~32ㄴ3) 왼편과 같음 : 58ㄴ2 ~62ㄱ6               6 : 180ㄱ9 ~184ㄴ8
     〔협주〕 묘음보살품 제24에 대한 설명 : 62ㄱ6 ~63ㄱ67 : 1ㄱ5 ~3ㄱ3계환(戒環)의 요해(要解) 정음 구결문 및 언해문
     〈월곡〉기 322 ~324(3) : 63ㄱ7 ~64ㄴ6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석가모니불을 공양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해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옴(32ㄴ4 ~45ㄱ6)왼편과 같음 : 64ㄴ7~81ㄴ57 : 4ㄱ6 ~23ㄱ8
묘음보살(妙音菩薩)이 신통력(神通力)을 갖게 된 전생의 인연에 대한 설명(45ㄱ6 ~47ㄱ3)왼편과 같음 : 81ㄴ5 ~84ㄴ2          7 : 23ㄴ2 ~26ㄱ3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신통력과 지혜에 대한 석가모니불의 설법(47ㄱ3 ~51ㄴ7)왼편과 같음 : 84ㄴ2 ~87ㄱ7 이하는 낙장(落張)으로 인해 비교 불가능7 : 26ㄱ3 ~34ㄱ1
묘음보살이 석가모니불과 다보불(多寶佛)에게 공양하고 돌아감(51ㄴ7 ~53ㄴ1)낙장(落張)으로 인해 비교 불가능7 : 34ㄱ2 ~36ㄱ3

Ⅳ. 어학적 고찰

두루 알고 있는 대로 『석보상절』은 우리 문자인 ‘훈민정음’을 사용해서 찬술(撰述)한 최초의 산문(散文) 문헌이다. 이 책은 ‘훈민정음’ 반포(頒布) 이듬해인 1447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어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아 왔다. 책에 실려 있는 내용도 그러하지만, 우리 문자가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산문 자료라는 점에서도 연구 대상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표기(表記)는 물론, 형태, 통사, 어휘 등 책 전체가 국어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전해지는 책이 적어서 공개되는 순간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권 20이 학계에 소개된 지 2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원본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어서 그런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표기와 어휘 등을 중심으로 살펴서 이 책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특성을 간단하게나마 밝히고자 한다.

1) 이 책의 표기에서 두드러진 점은 방점(傍點)과 모음 ‘ㆍ’ 및 ‘ㆎ’의 ‘ㆍ’ 표기에 둥근 점인 이른바 원점(圓點)을 썼다는 것이다. 정음이 일부라도 들어있는 문헌에서 ‘ㆍ’가 들어가는 모음 및 방점 표기에 전면적으로 원점(圓點)이 쓰인 책은 『훈민정음(해례본)』(1446년 간행)과 『동국정운』(1447년 편찬) <정의>여기서 ‘간행’이라 하지 않고 ‘편찬’이라고 한 것은 이 책의 실제 간행이 이루어진 해는 이보다 1년 늦은 세종 30년(正統 13년, 1448년)이라고 본 견해(안병희:1979 등)를 따른 것이다. 정도를 들 수 있다. 이렇듯 초기 문헌에서는 두 형태에 원점(圓點)을 썼으나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행)부터는 비스듬히 찍는 점인 점획(點劃)으로 바뀌었다. 『훈민정음(해례본)』과 『동국정운』에서는 방점도 그렇지만 모음의 단체자(單體字)와 합체자(合體字) 모두에서 ‘ㆍ’를 원점(圓點)으로 했고, 『용비어천가』(1447년 간행),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사리영응기』(1449년 간행) 등에서는 방점 및 ‘ㆍ’와 ‘ㆎ’의 ‘ㆍ’ 표기에만 원점으로 표기하였다. ‘ㆎ’ 이외의 합체자(合體字)에 쓰이던 원점의 ‘ㆍ’는 고딕체인 막대형의 방획(方劃)으로 자양(字樣)이 바뀐 것이다. 『홍무정운역훈』부터는 방점은 물론, 단체자 ‘ㆍ’와 합체자 ‘ㆎ’에서의 ‘ㆍ’까지 점획(點劃)으로 바뀌고, 그 외의 합체자들은 앞의 문헌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획(方劃)을 썼다. 이후에 간행된 책인 『월인석보』나 간경도감 간행의 정음 문헌에서는 방점 및 ‘ㆍ’와 ‘ㆎ’의 ‘ㆍ’는 점획으로 표기하였고, 그 외 모든 합체자 모음에 쓰이던 ‘ㆍ’는 방획으로 표기하였다.

2) 모음조화의 경우에는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023) [外]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석보상절』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이 단어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처소부사격조사와의 통합에서 ‘의’를 취한다. 밧긔〈11ㄴ, 21ㄴ〉, 밧긧것니오〈12ㄱ〉, 안팟글〈11ㄴ〉. 대체로 잘 지켜지고 있다. 다만, 〔i〕, 〔j〕 다음에서는 체언에 조사가 통합되는 경우와 용언 어간에 어미가 통합되는 경우가 서로 다르다. 체언에 조사가 통합되는 경우는 양성모음 다음에는 물론이거니와, 〔i〕, 〔j〕 다음에도 양성모음 계열 조사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고유어와 한자어 모두에서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석보상절』은 한문 불경(佛經)의 번역이어서 고유어에 비해 한자어 어휘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용례도 한자어가 많을 수밖에 없다. 용언 어간에 어미가 통합되는 경우에는 대체로 어간의 계열에 따라 모음조화가 이루어졌으나, 〔i〕와 〔j〕 다음에서 음성모음 계열의 어미 및 선어말어미의 통합이 우세하다. 다만 〔i〕, 〔j〕 다음에 ‘-오/우’로 시작되는 어미가 통합되는 경우에는 〔i〕, 〔j〕 앞에 오는 음절주음이 양성모음인 경우에 ‘-오’를 취하는 경향이 높다. 그 외에 모음조화의 원칙을 벗어난 수의적(隨意的)인 형태도 더러 보인다. 다음은 조사통합의 경우에 나타나는 모음조화의 예이다. <정의>『석보상절』의 모음조화에 대해서는 이호권(2001:64~86)에 상세한 분석이 있어서 이 논의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3) ㄱ. 사〈13ㄱ〉, 든〈3ㄱ〉, 마〈3ㄴ〉, 부텨를〈7ㄴ〉, 모〈11ㄴ〉, 주를〈7ㄴ〉,

모매〈3ㄴ〉, 데〈24ㄴ〉, 고로〈7ㄱ〉, 거스로〈10ㄴ〉

ㄴ. 이〔是〕〈27ㄴ〉, 〔歲〕〈27ㄱ〉, 이〔是〕〈10ㄴ〉, 홰〔炬〕〈25ㄱ〉

ㄷ. 여래(如來)〈2ㄴ〉, 해(解)〈14ㄱ〉, 칙(勅)〈3ㄴ〉, 투쟁(鬪諍)〈27ㄴ〉, 대자비(大慈悲)〈2ㄱ〉, 법화삼매(法華三昧)〈53ㄱ〉, 무생법인(無生法忍)〈28ㄱ, 53ㄱ〉, 일체중생(一切衆生)〈24ㄱ〉

(3ㄱ)은 고유어 어휘에 보조사 ‘/은’, 목적격조사 ‘/를//을’, 처소부사격조사 ‘애/에’, 도구부사격 조사 ‘로/으로’가 통합된 예이다. 모음조화가 철저하게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 (3ㄴ)은 고유어 〔i〕와 〔j〕 다음에서 양성모음 계열의 조사가 통합된 예이고, (3ㄷ)은 〔i〕와 〔j〕로 끝나는 한자어 체언 다음에서 양성모음 계열의 조사가 통합된 예이다. 〔i〕와 〔j〕로 끝나는 고유어와 한자어 체언 뒤에서는 양성모음 계열의 조사 통합이 우세함을 보여준다. 다음은 어간과 어미의 통합에서 보이는 모음조화의 예이다.

(4) ㄱ. 다라〈52ㄱ〉, 나토아〈50ㄴ〉, 나아〈46ㄱ〉 / 불러〈2ㄴ〉, 드러〈2ㄴ〉, 수머〈41ㄱ〉

ㄴ. 노니〈10ㄴ〉, 업스니〈49ㄱ〉, 안며〈7ㄴ〉, 드르며〈45ㄱ〉

ㄷ. 시니〈50ㄴ〉~시므며〈45ㄴ〉, 비니〔散〕〈9ㄱ〉~비흐며〈52ㄱ〉

ㄹ. 조쳐〈27ㄴ, 46ㄱ〉, 거리〈35ㄱ〉, 려〈42ㄴ〉, 가져〈42ㄴ〉, 거리쳐〈48ㄴ〉, 이셔〈49ㄱ〉

ㅁ. 버로미〈7ㄱ, 42ㄱ〉, 앗교미〈2ㄱ〉, 앗굠과〈43ㄱ〉, 니교〈8ㄱ〉, 룜〈12ㄴ〉, 얽〈25ㄴ〉 / 너교〈8ㄴ, 17ㄴ〉, 이쇼〈21ㄴ〉 cf. 즐규믈〈12ㄱ〉

ㅂ. 펴아〈2ㄱ, 11ㄴ, 30ㄱ〉, 내야〈3ㄴ〉, 내야〈31ㄴ〉

(4ㄱ)은 어간 끝음절 모음의 계열에 따른 모음조화의 예이고, (4ㄴ)은 받침이 있는 어간 끝음절 모음의 계열에 따른 ‘/으’ 선접형 어미의 모음조화 예이다. (4ㄷ)은 〔i〕로 끝난 어간에 받침이 이어진 경우, 매개모음 ‘/으’가 혼용(混用)된 예이다. ‘빟-’의 경우는 혼용의 예가 흔한 편이지만 ‘시-/시므-’의 경우에는 ‘시므-’가 절대적으로 우세한데, 이 책에는 이 정도의 예만 보인다. (4ㄹ)은 〔i〕로 끝나는 어간 다음에 연결어미로 ‘-어’가 통합된 예이다. 이 책에서 어간이 〔i〕로 끝난 경우에는 이처럼 연결어미로 ‘-아/어’ 중에 ‘-어’가 왔다. (4ㅁ)은 어간이 〔ㄹ〕로 끝난 경우와 〔i〕로 끝난 경우에 명사형어미 ‘-옴/움’중 ‘-옴’이, 설명형어미 ‘-오/우’ 중 ‘-오’가 온 예이다. (4ㅂ)은 어미 통합에서 모음조화 원칙에서 벗어난 이른바 수의적인 통합형이다. 음성모음 다음과 〔j〕 다음에서 각각 양성모음 계열의 어미가 통합된 예이다. ‘펴아’는 『월인석보』 권 18에서 ‘펴’(2회)로 바뀌기도 하고 ‘發샤’(1회)로 바뀌기도 했다.

이렇듯 어미 통합의 경우에도 대체로 모음조화가 지켜졌으나, 조사 통합에서와는 달리 어간의 끝음절 〔i〕 다음에서는 음성모음 계열의 어미 통합이 우세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어간 끝음절 모음이 비록 음성모음이라고 하더라도 받침이 〔ㄹ〕인 경우와 〔i〕로 끝난 경우에는 명사형어미 ‘-옴/움’중 ‘-옴’이, 설명형어미 ‘-오/우’ 중 ‘-오’가 와서 모음조화에 어긋나기도 했다.

3) 이 책에서 종성 ‘ㆁ’은 모음 앞에서 연철 표기하였다. 다른 『석보상절』에서는 분철한 예가 없지 않으나 이 책에서는 ‘ㆁ’이 어간 말음인 경우에 예외 없이 연철했다. <정의>현전하는 초간본 여덟 권의 ‘ㆁ’ 연철과 분철에 대해서는 이호권(2001:97~103) 참조. 그에 따르면 권 9와 권 13도 ‘ㆁ’의 경우 예외 없이 연철되었다고 한다.

(5) ㄱ. 잇자〈5ㄱ, 32ㄴ, 53ㄱ〉

ㄴ. 쳔랴니〈11ㄴ〉, 쳔랴〈11ㄴ〉

ㄷ. 야로〈27ㄱ〉, 야〈50ㄱ〉

ㄹ. 기자〈9ㄱ〉, 바〈17ㄴ〉, 스스샤〈19ㄱ〉, 당다〈31ㄱ〉

이 책에 종성에 ‘ㆁ’이 쓰인 명사는 위에 보이는 정도인데,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의 통합에서는 모두 연철했다. (5ㄱ)은 각 품(品)의 종료에 나오는 협주문에서의 예이다. ‘’은 여기서 ‘끝’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5ㄴ)은 ‘살림살이에 드는 돈과 양식(糧食)’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천(錢糧)’에서 온 말인데, 이 책이 원전을 함께 싣지 않고 번역한 데에다 당시에 이미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던 듯 정음으로 적혀서 연철되었다. (5ㄷ)의 ‘:’도 ‘모양(模樣/貌樣)’을 가리키는 한자어 ‘:(樣)’에서 온 말로 보이는데, 이 어휘도 초기 문헌부터 이렇게 정음으로 적혀서 연철되었다. (5ㄹ)의 경우도 각각 이 책에 한두 용례씩 보인다. ‘기’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4) 이 책에는 같은 뜻을 가졌지만 표기에서는 다르게 실현된 형태들이 더러 보인다. 『석보상절』이 정음 초기에 간행된 문헌이어서 당시까지 표기 형태를 확정 짓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고, 편찬자의 개인적인 언어 습관일 수도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형태에 대해서는 현전하는 『석보상절』 다른 책이나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용비어천가』 및 『월인천강지곡』 등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같은 내용을 싣고 있는 『월인석보』 등과의 면밀한 비교·검토를 통해 그러한 표기의 전반에 대한 이해에 이를 것으로 본다. 몇몇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6) ㄱ. 부텻긔〈5ㄱ, 39ㄱ〉 / 부텨〈9ㄴ, 15ㄱ, 45ㄱ, 50ㄴ〉, 부텨며〈21ㄱ〉

ㄴ. 가아〈36ㄱ, 37ㄴ, 52ㄴ〉, 나아〈13ㄴ, 46ㄱ〉 / 가〈15ㄱ, 27ㄱ〉

ㄷ. 업긔〈11ㄴ〉, 조킈〈11ㄴ〉, 펴디긔〈16ㄴ〉, 표현(表現)킈〈17ㄴ〉, 버서나긔〈25ㄴ〉, 이익(利益)긔〈32ㄴ〉, 요익(饒益)긔〈51ㄱ〉, 득(得)긔〈53ㄱ〉 / 알에〈2ㄴ〉, 맛게〈35ㄴ〉, 보게〈40ㄴ〉, 에〈42ㄱ〉, 보게〈44ㄴ〉, 득(得)게〈49ㄴ〉

ㄹ. 즉자히〈18ㄱ〉 등

(6ㄱ)은 통합형조사인 ‘ㅅ+긔’와 단일형 조사인 ‘’가 함께 쓰인 예이다. 이호권(2001:106)에서는 이를 ‘ㅅ+긔’의 문법화 진행 정도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표기자의 언어 취향인 것으로 정리하였다. ‘’의 문법화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판단의 결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책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다른 『석보상절』에서도 ‘’가 많이 쓰였다는 점은 어원에 대한 인식이 엷어져서 ‘’의 형태로 정착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 책보다 『월인석보』 권 18에 ‘부텻긔’ 형태가 더 많은 것은 원고 작성자의 언어 소양이 반영된 것이거나 ‘ㅅ’에 대한 표기 원칙의 변화에 따른 것일 수 있다. (6ㄴ)은 어간의 모음과 동일한 형태를 가진 모음 어미와의 통합에서 어미를 쓰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여 두 가지 형태로 표기된 예이다. 이렇게 어간과 같은 형태의 모음 어미를 겹쳐서 쓴 예는 『월인석보』에도 더러 보인다. 이는 문법 의식과 표기 편의의 상충에 기인한 것으로 아직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거나 표기자의 언어 습관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6ㄷ)은 보조적 연결어미 ‘-긔’와 ‘-게’의 사용례이다. 책 전체로 보면 ‘-게’ 사용례가 더 많다. 나중에 나온 책들에서 ‘-게’의 사용이 점점 많아지는 점으로 보아 ‘-긔’가 고형(古形)이고 ‘-게’가 신형(新形)임을 알 수 있다. (6ㄹ)은 한자어 ‘즉(卽)’과 ‘즉시(卽時)’의 옮김인데, 이 책에 많은 용례가 보인다. 그리고 모두 이 형태로만 쓰였다. 『석보상절』 권 20에 쓰인 ‘·즉자·히’는 『월인석보』 권 18에서 표현이 달라진 1개를 제외하고 모두 ‘·즉재’로 바뀌었다. <정의>『석보상절』 권 20에는 ‘·즉자·히’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월인석보』 권 18에서 대부분 ‘·즉재’로 바뀌었다. 다만 하나만이 달라져서 ‘곧’으로 옮겨졌다. <용례>즉자히 아바긔 〈석상20:13ㄴ〉 → 아비 爲야 偈 닐오〈월석:4ㄱ〉.

5) 이 책에는 동명사어미 ‘-ㄹ’과 ‘-ㅭ’의 혼용 예가 상당 수 보인다. 두 형태 중 ‘-ㅭ’의 쓰임이 훨씬 우세하다. ‘-ㄹ’은 후행하는 체언의 두음이 각자병서인 경우, 또는 유성자음으로 시작하는 명사 및 의존명사의 앞이나, ‘ㅅ’ 계열 합용병서가 두음인 의존명사 및 ‘’에 의해 구조화된 어미 앞에 온다. ‘-ㅭ’은 후행하는 체언의 두음이 무성자음인 고유어 및 한자어 앞에 오고, ‘ㅂ’계 합용병서를 두음에 가진 일반명사와 의존명사 ‘’에 의해 구조화된 어미 앞에 온다.

(7) ㄱ. 聲聞 求 사콰〈18ㄴ〉,  사미〈20ㄴ〉, 受持 사〈31ㄱ〉

ㄴ. 니르 時節에〈4ㄴ〉, 涅槃 時節이〈15ㄴ〉, 成道 時節에〈31ㄱ〉

ㄷ. 주 주리〈31ㄱ〉, 니〔說〕 저긔〈32ㄱ〉, 니르〔說〕 저긔〈51ㄴ, 53ㄱ〉 / 니르실〔起〕 쩌긔〈44ㄴ〉 / 濟渡욜 야〈50ㄱ〉 / 봀 분〈47ㄱ〉,  미니라〈44ㄴ〉,  미리라〈12ㄴ〉

ㄹ. 너 들〈36ㄴ〉, 너 〈37ㄴ〉

ㅁ. 디니〈2ㄴ〉, 아니딘댄〈19ㄴ〉

ㅂ.  〈35ㄴ〉, 입힐훔 씨라〈27ㄴ〉, 이실 씨니〈17ㄴ〉, 니즐〈12ㄱ〉, 아니니라〈13ㄱ〉

ㅅ. 求따〈13ㄱ〉

(7ㄱ)은 무성자음으로 시작되는 명사 앞에 ‘-ㅭ’이 온 예이다. 이 책에는 고유어가 많지 않아서 후행하는 체언이 일반명사인 예는 ‘사’이 유일하다. ‘-ㄹ+각자병서’의 예는 없다. (7ㄴ)은 후행하는 한자어 체언의 두음이 무성자음 ‘ㅅ’인 경우의 예이다. (7ㄷ)은 후행하는 체언이 의존명사인 경우이다. 의존명사의 두음이 무성자음이면 ‘-ㅭ+전청자’형과 ‘-ㄹ+각자병서’형이 모두 쓰였으나 ‘-ㅭ’의 예가 더 많다. 후행 체언이 유성자음으로 시작되는 명사나 의존명사 앞에서는 ‘-ㄹ’이 쓰였다. 후행하는 의존명사가 ‘ㅅ’계 합용병서인 경우에는 ‘-ㄹ’이 왔다. ‘-ㄽ’으로 표기된 것은 후행하는 의존명사의 초성 ‘ㅅ’이 위치 이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7ㄹ)은 후행하는 체언이 ‘ㅂ’계 합용병서인 일반명사 앞에 ‘-ㅭ’이 표기된 예이다. (7ㅁ)과 (7ㅂ)은 같은 의존명사에 의해 문법화한 어미라고 하더라도 ‘’계열의 어미와 ‘’계열의 어미 앞에 오는 동명사가 서로 다름을 보여주는 예이다. ‘’계열의 어미 앞에는 ‘-ㅭ’이오고, ‘’계열어미 앞에는 ‘-ㄹ’이 온 것이다. (7ㅅ)은 의문형인데, 이 책에 ‘-ㅭ다’형은 없고 이 형태만이 유일하다.

6) 『석보상절』 권 20에는 사용례가 적어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이 책에 처음 나오는 어휘가 있다. 이른바 희귀어(稀貴語)와 고어사전 미수록(未收錄) 어휘들이다. 그런가 하면 기원적으로는 한자어인데, 고유어처럼 일관되게 정음(正音)으로만 적힌 어휘들도 있다. 먼저 희귀어 및 미수록 어휘를 밝히고, 이어서 한자어이지만 정음으로 적힌 어휘의 순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기 : 명사. 아주 적은 무게의 단위를 나타내는 도량형 명사이다.

(1수(銖)의 100분의 1이고, 1냥(兩)의 2,400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가볍거나 적은 양을 이른다.)

〔一·百· 기자·  銖쓩ㅣ·오 여·슷 銖쓩ㅣ 分분·이·오 :네 分분·이  兩:·이·라〈9ㄱ〉〕

‘기’은 사용례가 흔하지 않은 어휘이다. 이 책에도 단 한 차례만 쓰였다. 무게의 단위로 1수(銖)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양을 가리킨다. 1수(銖)는 1냥(兩)의 24분의 1에 해당하므로, 1기장은 1냥(兩)의 2,400분의 1이다. 애초에는 기장쌀〔黍〕 한 알의 무게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점점 일반화하여 가벼운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따라서 ‘기’은 매우 가벼운 무게 단위를 가리키는 이른바 도량형 명사 중 하나이다. 이 어휘를 『고어사전』(교학사)에서는 잡곡 ‘기〔黍〕’으로 풀었고, 『이조어사전』(연세대 출판부)에서는 ‘기장쌀 한 알의 무게’ 또는 ‘1수(銖)의 10분지 1’이라고 하였으나, 1기장은 ‘1수(銖)의 100분의 1’이므로 잘못이다. 또 『우리말큰사전』(어문각)에서는 ‘①기장〔黍〕, ②기장 한 알의 너비, 곧 1푼, ③기장 한 알의 무게, 곧 2400냥 분의 1 등’으로 풀었다. 한자 자전에서는 1서(黍)에 대해 1척(尺)의 100분의 1의 길이, 1홉〔合〕의 1,200분의 1의 용량(容量), 1수(銖)의 100분의 1의 중량(重量)이라고 정리하였다. 따라서 ‘기’은 원래 곡식 ‘기〔黍〕’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변하여 ‘기’처럼 매우 가벼운 무게〔量〕나, ‘기’ 정도의 길이, 또는 너비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뜻에서 무게 단위나 길이, 또는 너비를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용례 :  기 너븨 分이오 돈 나히 文이라〈영가 상:38ㄴ〉, 열 기이 絫ㅣ오 열 絫ㅣ 銖ㅣ라〈능엄3:24ㄱ〉.

〔2〕 데엋 : 명사. 밖. 외부(外部).

〔神씬力·륵·으·로 ·신 供養··이 데어·쳇 :쳔랴··니 :쳔랴· 法·법·만 :몯·〈11ㄴ〉〕,

‘데엋’은 다른 중세국어 문헌에 용례가 드물다. 다만 이 책에는 세 번에 걸쳐 쓰였다. 그 외에는 『법화경언해』에 한 용례가 있을 뿐이다. “한 마 너비 더드머 幾 窮究며【幾 져글 씨니 멀터운 데어치 아니라】조외닐 자바(博探衆說야 硏幾摭要야)”〈법화경언해 서:21ㄴ〉. 이에 대해 『우리말큰사전』(어문각)에서는 ‘데면데면한 거죽’이라 풀었다.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월인석보』〈18:31ㄱ〉에는 ‘데어쳇’이 ‘’이라 되어 있다. 또 『법화경언해』〈6:142ㄱ〉 계환(戒環) 요해(要解)에 대한 정음 구결문에는 ‘外(외)’이고, 언해문에는 ‘’이라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데엋’은 ‘거죽’, 또는 ‘밖’이나 ‘외부’의 의미를 가진 말로 본다. 神力으로 샨 거시 밧 쳔애 넘디 아니하니〈월석18:31ㄱ〉. 神力의 化샨 거슨 밧 쳔애 남디 못하니(神力所化 不過外財니)〈법화경언해6:142ㄱ~144ㄱ〉.

용례 : 得·득道:·면 :다 얼구·를 데어·체 :혜·여 죽사·리· 니·즐·〈12ㄱ〉, 迹·젹·은 자·최·니 데어·쳇 ·보논 :이· 迹·젹·이·라 ··니·라〈38ㄴ〉

〔3〕 ·-〔耀〕 : 형용사. 눈이 부시다.

〔光明·이 ··에 비·취시·며 믈읫 相··이 :다 ·샤〈42ㄱ〉〕

사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이른바 미수록 어휘이다. 이 부분에 대한 『월인석보』의 내용은 ‘光明이 와에 비취시며〈월석18:77ㄴ〉’이고, 『법화경언해』의 정음 구결문은 ‘光明이 照曜시며(光明이 비취시며)〈법화7:18ㄴ〉’이다. 이 형태는 『월인석보』에 몇몇 용례가 있고, 『법화경언해』에도 쓰였다. 이로 미루어 ‘와·-’는 『월인석보』 간행 무렵 ‘ㅸ〉ㅗ/ㅜ’의 변화가 반영된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와·-(브와·-)’의 직전 형태인 ‘·-’는 이 책에 처음 나오고, ‘ㅸ〉ㅗ/ㅜ’의 변화에 의해 이후에는 ‘와·-(브와·-)’로 표기된 것이다. 『번역박통사』(1510년대 간행)에는 ‘브와·-〈70ㄴ〉’의 형태가 보인다.

〔4〕 :게여· : 부사. 너그럽게. 큼직하게. :게-〔雄〕+·이(부사파생접미사)→:게여·(부사).

〔· 端돤正··고 ··과 ·힘·괘 :게여· 勇:猛:·니·라〈42ㄱ〉〕

사전에 없는 미수록 어휘이다. 형용사 ‘:게-〔雄〕’에서 접미사에 의해 파생된 부사이다. 부사의 형태는 이 책에 처음 보인다.

〔5〕 『석보상절』에는 기원적으로 한자어지만 정음으로 표기된 어휘들이 더러 보인다. 이 책 권 20에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석보상절』의 편찬이 원문을 싣지 않고 번역문만을 실은 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이 어휘들이 대부분 불경과 밀접히 관련된 불교용어인 점으로 미루어 불교가 곧 생활이었던 고려시대에 우리말처럼 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 · : 명사. 모습. 모양. 한자어 ‘樣子/樣姿’에서 온 말이다.

〔諸졍菩뽕薩·摩망訶항薩· 衆··이 ·잇 ··로 :세 번 · 소·리 :내·야 ··〈4ㄱ〉〕

이 책에는 정음으로 적혀서 ‘얼굴 생김새’ 외에 ‘모습/모양’의 뜻으로 쓰였다. 이 책에 사용례가 많은데 모두 ‘·’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월인석보』에서는 그대로 받은 예는 하나에 지나지 않고, 그 외는 주로 한자 ‘相’, 또는 ‘形’으로 받거나, 앞에 오는 ‘잇’과 함께 ‘(·이) ·티’로 옮겼다. 주027) 菩뽕薩·衆··· ··도 :젹거·늘〈석상20:37ㄱ〉 → 菩뽕薩·衆··도 · · :젹거·든〈월석18:71ㄱ〉, ·이럴· 種:種: · ·나·토시·며〈석상20:38ㄱ〉 → ·이럴· 種:種: 形·을 나·토·아〈월석18:72ㄴ〉, 너희 :위··야 그 ·· :뵈·시리·라〈석상20:40ㄴ〉 → 너희 爲·윙··야 相·· 나·토·시리·라〈월석18:76ㄱ〉, ·잇 ··로[如是] :세 번 · 소·리 :내·야〈석상20:4ㄱ〉 → ·이 ·티 :세 번 · 소·리 :내·야〈월석18:19ㄱ〉. 『월인석보』에서 ‘相’이나 ‘形’으로 옮긴 말은 원문인 『법화경』에 그렇게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는 이때 이미 고유어처럼 인식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2). : : 명사. 모양. 모습. 한자어 ‘樣’에서 온 말로 보인다.

〔濟·졩渡·똥·욜 :야· 조·차 ·· 現···야〈50ㄱ〉〕

‘·’와 비슷하게 쓰인 말로 ‘:’이 있다. 이 말 역시 한자 ‘樣’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는 ‘:’으로 표기되었다. 용례가 드문 편이다. 정음으로 적혀서 ‘:’의 말자음 ‘ㆁ’이 연철 표기되었다.

3). ·녜 : 부사. 늘. 항상. 언제나. 한자어 ‘常例’에서 온 말이다.

〔이 :사·미 現· :뉘·예 이·베·셔 ·녜 靑蓮련華 香·내 나·며〈29ㄴ〉〕

한자어 ‘상례(常例)’에서 온 말인데, 훈민정음 초기 문헌부터 자음 동화가 반영된 표기인 ‘·녜’로 적었다. 이 책의 용례에서는 모두 ‘·녜’이다. 『월인석보』 권 18에도 그대로 실현되었다. ‘녜’는 명사로도 쓰였으나 이 책에 명사의 용례는 없다. 이 말은 『법화경』 원문의 ‘常’을 옮긴 것이다.

4). 침노·- : 동사. 쳐들어가다. 한자어 ‘侵勞/侵擄·-’에서 온 말이다. <정의>‘침노·-’의 ‘침노’는 한자어 ‘侵勞’ 및 ‘侵擄’로 쓸 수 있으나, 당시에는 한자로 적을 경우 모두 ‘侵勞’만을 썼다.

〔침노··야 害··논 ·고·로 니· 賊·쯕·이·라 ·고 〈29ㄱ〉〕

‘침노·-’는 불법적(不法的)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자어 ‘침노(侵勞/侵擄)·-’에서 온 말인데, 이 책에는 ‘침노·-’라 적혀 있다. 이후에 간행된 다른 문헌의 경우, 대부분 한자로 ‘侵勞·-’라 썼다. 드물지만 ‘침로·-’라 쓴 예도 있다. ‘침노·-’는 『법화경』 계환(戒環) 요해(要解)의 ‘侵’을 옮긴 말이다. 衆生이 常住를 侵勞야 損커나〈월석21:39ㄴ〉. 魍魎 鬼神이 서르 침로야〈불정:32ㄴ〉. 사을 侵勞며〈육조 중: 63ㄱ〉.

5). 류·- : 동사. 연주하다. 한자어 ‘風流·-’에서 온 말이다.

〔諸졍天텬·이 하· 류··야 놀·애·로 부텨·를 讚·잔嘆·탄··〈7ㄴ〉〕

‘풍류(風流)를 즐기다’, 또는 ‘악기를 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 책에 다른 용례는 없다. 이 말은 『법화경』의 ‘伎樂’을 옮긴 것인데, 『월인석보』 권 18에는 ‘류·’로 옮기거나 ‘伎樂’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6). 미·혹·- : 동사. 마음이 어리석어 헤매다. 한자어 ‘迷惑·-’에서 온 말이다.

〔· 외·야 嗔친心심·과 미·혹·호· ·어·즈류·미 아·니 외·며〈27ㄴ〉〕

‘미혹(迷惑)’은 불교에서 말하는 3독(毒)의 하나이다. ‘우치(愚痴)’를 이르는 것으로 현상(現象)과 도리(道理)에 대하여 마음이 어두운 것을 말한다. 곧 고통 받는 근원과 모든 번뇌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미·혹·-’은 한자어 ‘迷惑·-’에서 온 말인데, 정음 초기 문헌부터 이렇게 정음으로 적혔다.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화경』 원문의 ‘愚痴’나 ‘痴暗’을 옮긴 말이다.

7). :·뎍 : 명사. 행한 일의 실적. 한자어 ‘行蹟’에서 온 말이다.

〔貴·귕 :·뎍 ·히·로 智·딩慧·ㅅ ·브·리 곡도 因緣·을 노·겨 :업·긔 ·고〈11ㄴ〉〕

한자어 ‘行蹟’에서 온 말인데, 이후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서도 주로 정음으로 적었다. 정음으로 적혀서 아래의 『월인석보』 권 1에서는 ‘:·뎍’의 어간 말자음 ‘ㄱ’이 연철 표기되었다. 『법화경』 계환(戒環) 요해(要解)의 ‘妙德 妙行’을 옮긴 말이다. 梵은 조 뎌기라 혼 디니〈월석1:20ㄱ〉, 維那離國은싸홈 즐기고 조 뎍 업스며〈월석2:11ㄱ〉, 觀照로 뎍 닷그면〈남명 상:15ㄱ〉

8). :위·- : 동사. 위하-. 한자어 ‘爲·-’에서 온 말이다.

〔한 聲聞문衆· :위··야 法·법華經·을 니르·더시·니〈7ㄴ〉〕

『석보상절』에는 이 말을 전부 정음으로 적었다. 그만큼 당시에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9). :쳔 : 명사. 재물(財物). 한자어 ‘錢糧’에서 온 말이다.

〔供養··이 데어·쳇 :쳔랴··니 :쳔랴· 法·법·만 :몯·〈11ㄴ〉〕

‘돈〔錢〕’과 ‘양식〔糧〕’의 합성어인데, 당시 문헌에서 대부분 정음으로 적혔다. 『법화경』 계환(戒環) 요해(要解)의 ‘財’를 옮긴 말이다. 정음으로 적혀서 ‘:쳔·’의 어간 말자음 ‘ㆁ’이 연철 표기되었다.

이 외에 한자어 ‘分別’에서 온 말인 ‘분·별’도 두 차례 주029) 世·솅尊존·하 분·별 :마·쇼:셔〈3ㄴ, 4ㄱ〉. 보인다. ‘分別’의 원 뜻인 ‘가름’의 의미가 아니라, ‘근심/걱정’의 의미로 쓰였다. 우리말에 오랫동안 쓰이면서 의미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곧 유연성(有緣性) 상실로 인해 한자어 기원의 어휘라는 인식이 엷어져 정음으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 『법화경』 원문(原文)의 ‘慮’를 옮긴 말인데, 『월인석보』에는 ‘分別’로, 『법화경언해』에는 ‘분·별’로 표기되었다. 또 한자어 ‘盜賊’에서 온 ‘도’〈28ㄴ〉도 쓰였다.

현전 『석보상절』의 다른 책에 ‘’으로 적힌 바 있는 ‘衆生’은 이 책에서 전부 한자 ‘衆·生’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석보상절』 권 20에서 이 어휘의 출현이 대부분 ‘일체(一切) 중생(衆生)’의 형태로 ‘일체(一切)’와 짝을 이루어 나타나거나 한자 어휘 속에 포함되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단독으로 쓰인 예도 있고, 그런 경우에도 한자로 적었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석보상절』 권 20의 공개 경위, 형태서지, 책의 상태 및 훼손된 부분에 대한 원문 복원, 수록된 내용, 같은 내용이 번역되어 있는 『월인석보』 및 『법화경언해』와의 대응 관계, 그리고 표기 및 형태의 특징, 희귀어 및 사전 미수록 어휘 등에 대해 살폈다. 이를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석보상절』은 처음 24권으로 간행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책은 모두 10권이고, 이 중 6, 9, 13, 19, 20, 21, 23, 24 권 등 여덟 책만이 초간본(初刊本)이다. 권 3과 권 6의 두 권은 16세기 중엽 무렵에 간행된 복각본(覆刻本)이다. 우리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권 20은 초간본 중 가장 늦게 발굴·공개된 책이다. 소장처의 입장으로 원본 실사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그 동안 다른 책들에 비해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편이었다. 모두 53장 106쪽의 분량이지만 첫 장이 낙장(落張)이고, 15장까지는 좌하귀 부분이 훼손되어 각 장의 앞면 8행 아래쪽과 뒷면 1행 아래쪽의 해독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를 같은 내용이 번역되어 실려 있는 『월인석보』, 『법화경언해』 등을 참고로 하여 복원해서 제시했다.

『석보상절』 권 13부터 권 21까지는 『법화경』 제1품인 서품(序品)부터 마지막 품(品)인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까지를 번역해서 실어 놓았다. 권 21에는 『법화경』 권 6의 제22품 촉루품(囑累品),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권 7의 제24품 묘음보살(妙音菩薩品) 등이 번역되어 실려 있다. 한편 『월인석보』는 모두 25권 중 권 11부터 권 19까지 아홉 권이 『법화경』을 번역해서 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석보상절』 권 20의 내용은 『월인석보』 권 18과 『법화경언해』 권 6 및 권 7에도 들어 있다. 이러한 관계를 감안해서 세 책에서 서로 대응하는 부분을 정리·제시해서 비교 연구가 가능하도록 했다. 역주에서는 세 책의 내용을 모두 차례대로 입력해서 실어 두었다. 세 책은 간행 연도에 따라, 그리고 편찬 방법 빛 편찬자의 언어 습관에 따라 얼마간 차이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석보상절』의 특성을 찾고자 했다.

2) 『석보상절』은 한글 반포 다음해인 1447년에 간행되었다. 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산문 자료이다. 거기에다 다른 불경언해서들과는 달리 원문이나 정음 구결문 없이 번역문만으로 된 책이다. 그만큼 원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에서 찬술되었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그런 때문인지 번역도 비교적 자유역(自由譯)에 가깝고, 어휘도 비록 한자어에서 온 말이라고 하더라도 정음으로 적은 예가 많은 등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문헌이다. 특히 표기 형태가 매우 정연할 뿐만 아니라, 동주자(銅鑄字)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양(字樣) 등도 이 책의 특징 중 하나이다. 번역에서는 경(經)의 본문은 본문 그대로 당시의 우리말로 옮겼고, 계환(戒環)의 요해(要解) 부분은 협주로 옮겨서 가독성(可讀性)을 높이면서도 이해의 편의를 도모하도록 했다.

문자 표기에서는 방점 및 모음 ‘ㆍ’와 ‘ㆎ’의 아래 아〔ㆍ〕 글자는 원점(圓點)으로 하고, 그 외의 모음 표기는 고딕체의 방획(方劃)을 써서 『훈민정음(해례본)』(1446년 간행) 및 『동국정운』(1447년 편찬)보다는 후대(後代)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표기 방법은 『용비어천가』(1447년 간행),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 및 『사리영응기』(1449년 간행)와 일치한다. 이렇게 단체자 ‘ㆍ’ 및 합체자 ‘ㆎ’의 아래 아〔ㆍ〕와 방점을 원점(圓點)으로 표기한 방법은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행)을 거치면서 바뀌었다. 『홍무정운역훈』을 시작으로 『월인석보』(1459년 간행)는 물론, 그 이후에 간행된 간경도감본들은 방점 및 모음의 표기에 점획(點劃) 및 방획(方劃)만을 사용하였다.

3) 어학적 고찰로는 이 책의 언어 성격을 알 수 있는 몇몇 형태를 대상으로 했다. 모음조화와 ‘ㆁ’의 연철표기, 그리고 ‘부텻긔/부텨’, ‘가아/가’처럼 같은 뜻을 가진 말의 두 가지 형태 표기 등에 대해 살폈다. 특히 보조적 연결어미 ‘-긔’와 ‘-게’의 표기 경향, 동명사어미 ‘-ㄹ’ 및 ‘-ㅭ’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러한 표기 특성은 이 책이 정음 창제 직후에 간행되어 아직 우리말 표기에서 어떤 원칙 같은 것이 확립되기 이전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라고 봤다. 이 책에는 다른 문헌에 쓰인 적인 없는 희귀어 및 고어사전 미수록 어휘가 몇몇 보인다. 이에 대해 살피고 그 뜻을 밝혔다. 대표적인 어휘로는 곡식의 이름에서 무게 단위를 가리키는 어휘로 바뀐 ‘기’, ‘외부(外部)나 외면(外面)’을 뜻하는 ‘데엋’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눈부시다’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耀〕’와 ‘너그럽게, 큼직하게’의 뜻을 가진 ‘:게-〔雄〕’의 파생부사 ‘:게여·’도 처음 나오는 어휘이다. 그리고 기원적으로는 한자어지만 이 책에서 정음으로 적힌 어휘의 특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樣子/樣姿), :/樣, ·녜/常例, 침노/侵勞/侵擄·-, 류/風流·-, 미혹/迷惑·-, :·뎍/行蹟, :위/爲·-, :쳔/錢糧’ 등이다. 이들은 모두 정음으로 적혔다. 이 책에 정음으로 적힌 한자어 기원의 어휘가 많은 이유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석보상절』의 편찬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책의 편찬에서 원문 없이 정음만으로 번역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는 정음으로 적힌 어휘의 대부분이 불교 관련 어휘이거나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일 수 있는 어휘인 점으로 미루어 불교가 곧 생활의 일부분이었던 고려시대에 이들 어휘가 우리말처럼 쓰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한자어라는 인식이 엷어져서 우리말처럼 사용되었고, 문자 창제 이후에는 표기도 정음으로 하게 된 것으로 본다.

이 글은 뒤의 역주를 위한 해제 성격의 논의이므로 여기에서 다 살피지 못한 내용은 향후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논의의 장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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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상절 제21에 대하여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책의 전래

『석보상절』 초간본 제21(1권)은 1989. 11. 15. 중앙일보 사회 1면, 문화면 기사로 알려진바, 이는 고서(古書) 수집가 우찬규(禹燦奎)님 소장인데, 천혜봉(千惠鳳) 교수가 발굴하여 공개되었다.

이 책은 65장 130페이지로 끝 64, 65 등 2장이 파손되어 지편(紙片)의 일부부만 있었던 것으로 원본은 실사하지 못하였고, 원본의 복사본은 끝의 60ㄱ~63ㄴ이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을 보여준다. 이 복사본은 구 소장자가 새 주인에게 넘기기 전에 복사된 것으로 2001~2002년 경에 학계에 웬만큼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귀중본은 현재 ‘초간본 제20’과 함께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Ⅱ. 형태 서지

『석보상절』 제21(이하 ‘이 문헌’으로 줄임)의 원본을 실사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서 못내 유감이다. 이는 ‘호암미술관’ 에 의해 열람, 실사를 허락받지 못한 데 말미암은 것임을 밝혀 둔다.

현재 필자가 이용하고 있는 복사본은 발견 당시 소장하였던 곳에서 나온 복사본을 재복사한 것이다. 이 재복사본은 『석보상절』 제21이 세상에 공개된 1989년 이후, 수년이 지나 국어학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진 재복사본을 필자도 그 무렵에(2001~2년 이후) 입수한 것이다.

이 책은 현전하는 『석보상절』의 다른 책의 경우와 대체로 같음을 알 수 있다.

판광(版匡) :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복사본은, 세로〔縱〕 22.2~22.3cm, 가로〔橫〕 16.2~16.5cm로서 이 값〔數値〕을 국립도서관 소장 『석보상절』 제6, 9, 13, 19의 판광(22~22.3 ×15.7~15.9cm)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석보상절』 제23, 24의 판광(22.2×15.8cm)에 비추어 보면(김영배 2000:26), 실물 크기로 복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판심(版心) : 이미 전해지는 『석보상절』의 그것과도 마찬가지로 ‘대흑구(大黑口), 하향(下向) 흑어미(黑魚尾)에, 줄인 책명 ‘석보(釋譜) 권차(卷次) 이십일(廾一)’과 두 글자 정도 사이를 두고 장차(張次)인 한자 숫자와 상향(上向) 어미(魚尾)와 대흑구(大黑口) 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판심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ㄱ~59ㄱ(이후 63ㄴ까지는 훼손된 것)에서 판심의 앞뒤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단 두 장(5ㄱ~ㄴ, 15ㄱ~ㄴ)이고, 앞쪽만을 비교적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세 쪽(24ㄱ, 46ㄱ, 52ㄱ)이며, 그밖에 앞쪽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7ㄱ, 8ㄱ, 10ㄱ, 16ㄱ, 19ㄱ, 22ㄱ, 25ㄱ, 32ㄱ, 37ㄴ, 40ㄱ, 43ㄱ, 45ㄴ, 53ㄱ) 등이 있다. 이렇게 번거롭게 적어두는 것은 복사본의 실상을 밝히기 위함이다.

표지는 떨어져 나간 것으로 공개되었으나, 필자의 짐작으로는 본시 『석보상절』 제20과 『석보상절』 제21 두 권은 합본(合本)되어 있던 것이, 발견 후 공개되는 과정에서 각권으로 나누어져서 표지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상정(想定)해 본다.

필자가 이용하는 복사본에서, 언급이 중복되겠지만, 제20(1~53쪽)은 1(ㄱㄴ)쪽이 낙장이고, 끝의 ‘53ㄴ’은 1행이 소자(小字) 쌍행으로 ‘音菩뽕薩/品픔이라’로 끝나고 2, 3, 4, 5, 6행은 공란이며, 다음 7행은 대자(大字) ‘釋셕譜봉詳節第뎽二十씹’으로 ‘석보상절’의 다른 책의 끝 장(張)과 같이 되어 있다.

『석보상절』 제21의 첫 장의 상태는 다음과 같으며, 그 이후의 훼손된 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장 : 1행 釋셕譜봉詳節第뗑廾一일

2행 그無盡意菩薩이즉자 (동국정음 표기는 생략함) (계속)

2ㄱ : 〔요해〕 줄임 끝의 7, 8행 훼손, 곧 7행 끝 2자 미상, 8행 첫줄 끝 2자 훼손, 8행 둘째 줄 위 5자 빼고 10자 훼손 불명. 주001)

*
관례에 따라 장차(張次) 표시를 ‘2ㄱ1’(2쪽 앞면 1행)으로 나타냄.

2ㄴ : 〔요해〕 쌍행 두 줄, 끝 훼손 4자는 전후 참고 복원 가능. 주002)

*
이는 관련되는 『월인석보』 제19와 『법화경언해』 7권을 참고.

3장에서 55장까지는 거의 제대로 보임.

56ㄴ: 3행 끝자 보이지 않음.

57ㄴ: 3행 끝 협주, 2자 훼손 전후 참고 복원 가능.

58ㄱ: 6행 끝 2자 훼손 부분은 전후 참고 복원 가능.

58ㄴ: 3행 중간 3자 훼손, 복원 가능, 끝 3자도 복원 가능.

4행 끝 3자 훼손, 복원 가능.

59ㄱ: 5, 6행 끝 2자 전후 복원 가능, 7행 중간 2자 복원 가능.

59ㄴ: 2, 3, 4행 훼손 부분 정후 참고 복원 가능.

60ㄱ: 5행 끝 2자, 『월인석보』 제19 115장 이하와 『법화경언해』 7권 179장 이하를 참고로 복원 가능.

6행 끝 2자 복원 가능.

7행 2,3,4,5,6,7,8자

8행 1,2,3,4,5,6,7,8자 훼손.

60ㄴ: 1, 2, 3행 완전 훼손.

4행 끝 3자 훼손.

61ㄱ: 4, 5, 6, 7, 8행 각 4, 5, 9, 8, 8자 훼손.

61ㄴ: 1, 2, 3행 전부 훼손.

4행 위 5자, 아래 5자 훼손.

5행 4자 훼손.

62ㄱ: 4행 4자, 5행 13자, 6행 14자, 7-8행 전부 훼손.

62ㄴ: 1행 전부, 2-3행 각각 12자 훼손, 4행 14자, 8행 1자 훼손.

63ㄱ: 1행 5자, 2-3행 각각 7자, 4행 14자, 5-8행 전부 훼손.

63ㄴ: 1-2행 전부, 3행 14자, 4행 8자, 5-6행 각각 7자, 7-8행 전부 훼손.

64, 65장 : ‘겉 표지와 끝 두장은 파손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고 발표(중앙일보 1989. 11. 15. 사회 1면, 문화면).

여기서 이 책의 장차에 대해서 언급해 둘 것이 있다. 공개 발표 당시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의 장수(張數)는 65장으로 되었다고 본바, 이는 Ⅲ의 대비 표에서 보면 내용이 『법화경언해』의 후반부를 저경으로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 낙장된 부분을 공개 발표 당시 두 장으로 보았는데, 이호권(2001:45)에서 “… 법화경 권7 끝부분인데 내용으로 보아 4~5장 정도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했다.

이 글에서는 훼손 부분과 낙장된 장수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석상 21:63ㄴ〉의 훼손된 끝장에 남아 있는 6행 중에 “…□□病을 어드며(白癩 모…)”가 보이며, 다음 7, 8행은 훼손된 것으로 돼 있다. 여기 ‘□□’ 안은 전혀 안 보이는 것이나, 그 아래에 나오는 협주를 근거로 ‘〔白癩〕’로 추정할 수 있고, 이를 저경인 『법화경』과 대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법언 7:184ㄴ〉 “… 이 사미 現世예 白癩病을 得고 다가 업시워 우 사…”는(한문 현토 : 此人이 現世예 得白癩病고 若輕笑之者 ….)

또한 이 대목을 〈월석 19:120ㄴ〉에서는 “… 이 사미 現世예 白癩病을 얻고<협주>【癩 모미 다 허러 히미며 며 다 야디 病이라】 다가 업시워 우 사 …”과 같이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참고로 『석보상절』의 낙장된 나머지도 추정할 수 있다.

곧, 『월인석보』 제19는 ‘120ㄴ~125ㄱ’으로 끝나므로 약 5장 부분인데 대해서 『법화경언해』의 경우 권7은 184ㄴ~191ㄴ으로 여기에는 한문 원문과 그 요해 부분의 한문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를 제외하고 그 언해문만을 계산해 보면, 언해문은 한 행에 작은 글자로 두 줄씩 되어 있으므로, 이를 『월인석보』 식으로 판을 짰다면 약 6장 정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참고로 이 책의 낙장 부분을 추정한다면, 『월인석보』의 해당 분량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아서 대략 4~5장 정도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책의 공개 당시의 기사 중(1989.11.15. 중앙일보 문화면)에 고 안병희(安秉禧)교수의 “『석보상절』 제21권이 법화경의 마지막 부분일 것으로 막연히 추측해온 것을 확인하게 됐다.”는 말과, 이어 “『석보상절』이 다른 책과 달리 내용에 중복이 없고 간결하게 요약된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 또한 “이번 발견의 가장 큰 의의는 법화경의 일부인 다라니의 음역(音譯)이 독특한 점 … 한 가지 독특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성 표기의 차이점”이라 했다. 그 후에 쓴 안병희(1998)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의 서지(書誌)’ 〈서지학보〉 22호(12~13)에 다라니 음역에 관한 논의가 있으나, 그때는 『월인석보』 제19가 공개되기 전이어서, 필자는 이 대목을 안병희(2009:320~321)에 보충 수정해서 논의(소개)할 것임을 밝혀 둔다. 다라니에 대해서는 ‘Ⅳ. 어학적 고찰’에 언급될 것이다.

Ⅲ. 내용의 개요

편집 내용 차례는 해당 품(品)이 끝나는 곳에는 쌍행 협주로, ‘… 잇자 … 품(品)이라’ 하고, 글줄이 바뀌면서 그 다음 내용이 이어져 그 품의 끝과 다음 품의 시작임을 나타냈다.

1. 석상 21:1ㄱ2~21:20ㄴ8 -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제25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은 무슨 까닭으로 ‘관세음’이라고 하는가를 여쭌 데 대하여,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이 어떤 곳에서, 어떤 고난을 받는 중생이든 다 구제하여 주는 보살이며, 또 설법하는 데 있어서도 그때마다 그 형편에 알맞게 온갖 몸〔화신〕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셨다.

2. 석상 21: 21ㄱ1~21:33ㄱ3 - 법화경 다라니품(陀羅尼品) 제26

여기서는 약왕(藥王)보살, 용시(勇施)보살 등이, 부처님께 선남·선녀들이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거나 베껴 쓰면 얼마만큼의 복덕을 받을 것인가 여쭌 데 대하여, 이 경에서 4구게 하나라도 수지 독송하고 수행하면 공덕이 많을 것이라고 하니, 약왕이 ‘이 경전을 설하는 사람들에게 ‘다라니주’를 설하여 그들을 수호하겠다.’고 하고서 보살, 천왕, 나찰녀 등에게도 주문을 설하여 이 경전 수지하는 법사를 지키겠다고 서원했다.

3. 석상 21: 33ㄱ4~21:49ㄱ4 - 법화경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제27

아득한 과거세 운뢰음숙왕화지불(雲雷音宿王華智佛) 시절, 묘장엄왕(妙莊嚴王)의 두 아들, 정장(淨藏), 정안(淨眼)의 인도로 성불의 수기(授記)을 받고, 왕은 화덕보살(華德菩薩), 두 아들은 약왕(藥王), 약상(藥上)보살이 된다는 등의 여러 방편을 통하여 법화경 신앙으로 중생을 이끌어 들이는 갖가지 실례를 설하였다.

4. 석상 21: 49ㄱ5~21:63ㄴ이하 64, 65장 낙장? -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 제28

동방의 보위덕상왕불국(寶威德上王佛國)에서 보현보살이 나타나, 세존께 불멸(佛滅) 후에 어떻게 해야 법화경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은 데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 네 가지 법을 성취해야 가능하다고 하며서, 첫째 부처님에 의하여 호념하심이 되는 일, 둘째 덕본(德本)을 심는 일, 세째 정정취(正定聚)에 드는 일과 넷째 온갖 중생을 구하려는 뜻을 내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으로 마쳤다.

이상을 다시, 『석보상절』을 주로 하고, 여기에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의 대응되는 내용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김기종 2010:65-91 참고) 주003)

*
대체적인 차례는 아래 표와 같이 제시하지만 〈석상〉에서는 〈월석〉과 〈법화〉의 차례가 세부적으로는 조금 바뀐 것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주석으로 언급하였음.

석보상절 제21월인석보 제19법화경언해 권제7
월곡 기 325~339 : 1ㄱ~8ㄱ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수지하여 복덕(福德)과 지혜 : 1ㄱ~9ㄴ4 왼편과 같음 : 8ㄱ2~31ㄴ3      법언 7:37~70ㄱ1     
제외됨            〈협주〉 손경덕(손경덕)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워 죽음에서 벗어남  : 20ㄱ4~21ㄴ1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 : 9ㄴ4~16ㄴ4
관세음보살이 다보불에게 영락을 공양함 : 16ㄴ4~20ㄴ8
왼편과 같음 : 31ㄴ3~39ㄱ6
                    : 39ㄱ6~41ㄴ4
법언 7:70ㄱ~81ㄱ
법언 7:81ㄴ~84ㄴ
제외됨      석존의 게송 :41ㄴ4~49ㄴ7 이하 결락      법언 7:84ㄴ~104ㄴ     
약왕보살, 용수보살 등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중생을 호지하는 다라니를 말함 : 21ㄱ1~33ㄱ3왼편과 같음 : 56ㄴ1~70ㄱ1           법언 7:105~122          
제외됨     〈협주〉 묘장엄왕본사품 제27 해설  :70ㄱ1~71ㄴ7          
화덕보살의 전신인 묘장엄왕이 법화경을수지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인연 : 33ㄱ4~49ㄱ4               왼편과 같음 : 71ㄴ7~93ㄱ4
〈협주〉 보현보살권발품 제28 해설 :93ㄱ4~97ㄴ7
월곡 기 340(1) :98ㄱ1~98ㄴ1
법언 7:123~152
보현보살이 무량보살과 함께 법화경을 듣기 위해 기사굴산에 옴 : 49ㄱ5~51ㄴ3왼편과 같음 : 98ㄴ2~103ㄱ4     법언 7:153~191
보현보살이 법확경 호지하여 여래 멸도 후에 널리 유통시킬 것을 맹세함 : 51ㄴ3~59ㄴ2      왼편과 같음 : 103ㄱ5~114ㄴ5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이익과 비방하는 죄보에 대한 설법 : 59ㄴ3~63ㄴ8 이하 낙장     왼편과 같음:114ㄴ5~125ㄱ2     

Ⅳ. 어학적 고찰

1. 어휘

이 문헌이 세상에 알려진 지도 10여 년이 흘러서, 기존의 고어사전에는 표제어로 실리지 않은 것은 거의 없으며, 혹 희귀어로 볼 수 있는 것도 이 문헌보다 간행 연대가 늦은 것이어서 여기 별로 언급할 것이 없으나, 대체로 그 표기나 쓰임이 좀 다른 것을 ‘이 문헌’에 쓰인 순서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도 (평-평-거, 부사) : 동강 동강 된 모양.

…다가  사미 주규려  時節을 當야도 觀世音菩薩ㅅ 일후믈 일면 뎌의 자본 갈과 막다히왜 도 버허디여 버서나리어며…〈석상 21:4ㄱ5〉.

…다가  사미 害 니브 當야셔 觀世音菩薩ㅅ 일훔 일면 뎌 자본 갈 막대 미조차 귿그티 야디여 解脫을 得며…〈법언 7:53ㄴ〉.

(…若復有人이 臨當被害야셔 稱觀世音菩薩名者ㅣ면 彼所執刀杖이 尋段段壞야 而得解脫며…〈법언 7:52ㄴ).

…다가  사미 被害/ 當야셔 觀世音菩薩ㅅ 일후믈 일면 뎌 자본 갈콰 막다히 미조차 귿그티 야디여 버서나 得리라〈월석 19:23ㄴ~24ㄱ

✻能히 衆生로 害 니부메 當야 갈히 귿그티 야디여 그 兵戈로 믈 버히며 〈능엄 6:27ㄱ〉.

✻뎌 觀音 念혼 히므로 갈히 미조차 귿그티 야디며〈법언 7:89ㄱ〉.

이 ‘도’는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 저경인 『법화경』과 이 문헌을 증보한 『월인석보』에서 그 문장을 옮김에 달리 표현한 것으로 유일한 희귀어라 할 수 있으니, 현전 사전류에 표제어로 소개된 것이 없다.

이 구성은 ‘(어근)+이(부사형성접미사)’(버허디여)로 된 것인데, 〈월석〉과 〈법언〉에서 대응되는 단어는 두 문헌 모두 ‘귿그티 (야디여)’로 나타난다. 이를 참고하여 ‘도’의 뜻을 ‘(막대기 같은 것이) 동강 동강으로 잘린 모양’으로 보고, ‘귿그티’는 ‘귿〔末〕+그티’의 구성이나, ‘그티’도 다시 ‘긑+이’로 볼 수 있겠으나, ‘귿’은 ‘긑’의 이형태로 볼 수 있어, 문헌에서의 용례가 『번역소학』에 보이긴 한다.

✻디 아니호믄 다 귿텟 사오나온 道ㅣ 해니 〈번소8:41ㄱ〉

‘귿그티’의 뜻은 본시 ‘끝 끝마다’일 것이나 여기서는 ‘도장(刀杖, 칼과 마대)’에 대한 표현이기에 ‘토막 토막으로’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한편, ‘귿그티’를 고어사전에서 찾았더니,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uniconc 등에 사용하는 입력 자료에서는 위에 보인 〈능엄 6:27ㄱ〉의 예까지 단 3회 예문이 고작이다. 그래도 엄연히 중세국어로 쓰인 어휘가 사전류에서 빠진 것을 아무도 언급한 적이 없이 오늘날까지 온 것은 연구자 모두의 잘못이다. 명사 ‘귿〔末/端〕’은 〈교학고어사전〉과 〈큰사전〉에 표제어로 실렸으나, ‘그티’도 사전에서 볼 수가 없다. 이번 기회에 이 ‘귿그티’도 새로운 어휘로서 표제어로 실리기를 기대한다.

.

② (:못・):니(상성) : ‘-니’는 조건, 가정, 이유를 나타내는 연결어미.

아뫼나 이 觀世音菩薩ㅅ 일후믈 디니 사 큰 브레 드러도 브리  :못・:니 이 菩薩ㅅ 위신력 전라〈석상 21:2ㄴ6〉.

여기 ‘못니’는 앞뒤를 참고해도 서술어의 연결어미일 수밖에 없는데, ‘-니’의 방점이 거성이 아닌 상성인 것이 문제이다. 역주에서는 ‘:니’의 위 방점이 이상하다고 보아서 ‘-니’도 수정한 것이다. 결국 이는 표기의 잘못으로 본다.

③ 믿 (평성, 명사) : 밑〔底〕. 아래〔下〕. 근본(根本).

觀音을 염혼 히로 믿 사게 도라디리어며〈석상 21:5ㄴ〉.

淨三昧 淨藏 淨眼 믿 삼논 배오〈석상 21:35ㄱ〉.

믿나라 向니〈월석 13:7ㄱ〉.

✻ 하로  삼고 德으로 믿 삼고〈법언 1:14ㄱ〉.

이 명사는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현전 사전에 표제어로 다 올라 있으나, 그 예문이 위에 든 〈월석〉이나 〈법언〉의 것으로 돼 있으므로, 이에 앞서 〈석상〉의 이 예문을 앞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다.

④ 듣다며 : 듣닥으며, 들어가지고. ‘들어서 받아들이고서’ 정도로 본다. 듣-〔聞〕+닥-+며. 여기 ‘닥-’은 기본형 ‘다다’의 활용형으로 합성동사 ‘듣다다’의 중세국어의 유일한 용례로 풀이한다. 「우리말큰사전4」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실렸으며, 「이조어사전」에는 표제어가 없고 「교학고어사전」에는 기본형은 아니나 활용형 ‘다가’를 표제어로 하여 뜻은 ‘다그어, 가져, 가져서’로 하고 예문은 모두 ‘월석’의 예를 처음으로 들었다.

네 바리 어듸 가 어든다 도로 다가 두어라 야 〈월석 7:8ㄱ〉

⑤ 옷(평-평, 명사) : 홑〔單〕.

옷소리 聲이라 고 雜 한 소리 음이라 니〈석상 21:19ㄴ~20ㄱ〉.

옷 發니 聲이오 雜 모니 音이니〈법화 7:41ㄱ〉.

※옺(평-거, 명사): 홑〔單〕.

單 오지오 複 겨비라〈능엄8:15ㄴ〉.

各各 오로 表시니라〈법언1:45ㄱ〉.

위에 보인 것처럼 이 ‘옷/옺’은 당시에 쌍형으로 쓰인 것으로 보고자 하며 이와 관련된 어형으로 ‘옻’이 17세기 초엽에 쓰였다.

※옻(명사): 홑〔單〕

내 眞實로 옷고외 오치로다(我眞衣裳單)〈두언중1:19ㄱ〉.

歲暮애 옷외 오치로다(歲暮衣裳單)〈두언중4:9ㄴ〉.

⑥ 뎌른(평-평-거, 합성명사) : 단점(短點). 결점〔缺點〕.

鳩槃茶ㅣ어나 餓鬼히 뎌른 求야도 便을 得디 몯리다 시고〔뎌른라 샤 사나라〕〈석상 21:25ㄴ주〉.

✻〔若鳩槃茶ㅣ며 若餓鬼等이 伺求其短야도 無能得便리다〕〈법언 7:112ㄴ〉.

鳩槃茶ㅣ며 餓鬼等이 그 뎌른 여 求야도 능히 便安 得디 몯리다…〈월석 19:60ㄱ〉.

‘뎌르-’와 ‘뎌-’는 일찍부터 쌍형으로 쓰여서 다 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그 예문은 〈법언〉의 것이 첫 예문으로 돼 있으므로 〈석상〉의 ‘뎌른-’을 첫 예문으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⑦ 위사(상-거-거, 구) : ‘위샤’의 잘못.

그 뎌 부톄 王 위사 說法샤 利益외며〈석상 21:42ㄱ〉.

여기 ‘위사’는 바로 이은 ‘說法샤’의 ‘-샤’자나, 다음 면의 ‘부텻 모미 쉽디 몯샤 端正며 싁싁샤미 로 奇特샤…’ 등과 대비해 보아도 그 글자 모양이 이상하니, 이는 ‘샤’의 ‘ㅑ’에서 오른쪽 윗 획이 하나 떨어져서 그리 된 것으로 보려는 것이다. 역주에서는 ‘샤’로 교정하였다.

2. 다라니의 한자음 표기

『석보상절』에서 정음으로 된 한자음 표기는 흔히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 돼 있다고 한다. 다른 것이라면, 이미 많이 언급된 모음으로 된 한자음에도 종성 ‘ㅇ’이 쓰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쓰는 ‘다라니’(陀羅尼)의 한자음 표기에는 순음(脣音)에 순중음(脣重音)과 순경음(脣輕音), 치음(齒音)에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整齒音)으로 구별하여 썼다. 곧,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설명이 없으나, 『훈민정음 언해본』 끝 부분에,

“中國 소리옛 니쏘리 齒頭와 正齒왜 요미 잇니 ᅎ ᅔ ᅏ ᄼ ᄽ 字 齒頭ㅅ 소리예 고 ᅐ ᅕ ᅑ ᄾ ᄿ 字 正齒ㅅ 소리예 니….”

처음으로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나고, 이어 그 각각의 조음방식을 협주로 다음과 같이 풀이해 두었다.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열니 혓그티 웃닛머리예 다니라”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두터니 혓그티 아랫 닛므유메 다니라”

이 글자들은 빗줄〔斜線〕의 한 쪽 획이 다른 한 쪽의 획보다 더 길게 그어져야 구별되니, 이는 쓰기나 보기에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종은 중국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정리함에 있어서 『홍무정운(洪武正韻)』(1375)을 참고로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1449)에 이 글자를 썼으니, 참고 삼아 7음과 청탁(淸濁)의 그 자모표를 다음에 옮긴다.

〈홍무정운역훈〉

청탁 7음아음설두음순중음순경음치두음정치음후 음반설음반치음
(牙音)(舌頭音)(脣重音)(脣輕音)(齒頭音)(正齒音)(喉音)(半舌音)(半齒音)
전청(全淸)見 ㄱ端 ㄷ幇 ㅂ非 ㅸ精 ᅎ照 ᅐ影 ㆆ----
차청(次淸)溪 ㅋ透 ㅌ滂 ㅍ--淸 ᅔ穿 ᅕ曉 ㅎ----
전탁(全濁)群 ㄲ定 ㄸ並 ㅃ奉 ㅹ從 ᅏ牀 ᅑ厘 ㆅ----
불청불탁疑 ㆁ泥 ㄴ明 ㅁ微 ㅱ----喩 ㅇ來 ㄹ日 ㅿ
전청(全淸)--------心 ᄼ審ᄾ------
전탁(全濁)--------邪 ᄽ禪 ᄿ------

이 책에 실린 ‘다라니’는 그 저경(底經)인 『법화경언해』 권7의 ‘제26품 다라니품’에 있는 5편과 ‘제28 보현보살권발품’에 실린 1편을 합하여 모두 6편으로, 이에 대응되는 〈석상 21〉, 〈월석 19〉, 〈법언 7〉에서의 출처를 아울러 다음에 보인다.

Ⅰ편 43구 〈석상 21:23ㄱ~24ㄱ〉〈월석 19:57ㄴ~59ㄴ〉 〈법언 7:110ㄴ~111ㄱ〉

Ⅱ편 13구 〈석상 21:25ㄴ~26ㄱ〉〈월석 19:61ㄱ~ㄴ〉 〈법언 7:113ㄱ〉

Ⅲ편 6구 〈석상 21:26ㄴ〉 〈월석 19:62ㄴ〉 〈법언 7:114ㄴ〉

Ⅳ편 9구 〈석상 21:27ㄴ〉 〈월석 19:63ㄴ~64ㄱ〉 〈법언 7:115ㄴ〉

Ⅴ편 19구 〈석상 21:29ㄱ~ㄴ〉 〈월석 19:65ㄴ~66ㄱ〉 〈법언 7:117ㄴ〉

Ⅵ편 20구 〈석상 21:55ㄴ~56ㄴ〉〈월석 19:109ㄱ~110ㄴ〉〈법언 7:173ㄴ~174ㄱ〉

다음에는 여기에 쓰인 다라니의 한자음 표기를 정리함에 있어서, 이미 역주 부분에 각각 전문이 실려 있으므로 그 원문을 되풀이하거나, 그것을 어구별로 옮기는 번거로움을 덜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라니에 쓰인 자음(字音)을 한자씩 나오는 대로 뽑아 이를 앞 표에 보인 7음과 청탁음 별, 출처 별로 아래에 정리해 보인다. 여기 덧붙여 둘 것은, 이 ‘다라니’음은 저경인 『법화경』과 『법화경언해』에는 다라니의 음을 한자를 빌어서 나타난 표기만이고, 여기 보이는 ‘다라니’는 그 한자음 표기와 그에 대응되는 부분을 훈민정음을 빌어서 나타낸 것으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에서만이므로 그 출처도 두 문헌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보이는 것은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한 글자가 아래 위 같으며, 위 것이 〈석상〉, 아래 것이〈월석〉인데, 한수자(漢數字) 표기는 문헌의 장차 표기 글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앞이 위에 보인 편수를 로마자 Ⅰ~Ⅵ로, 뒤 것은 해당 편의 어구의 순서를 나타낸 것이다. 이 어구의 순서는 『법화경』의 순서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이 편수와 어구 수도 같을 수밖에 없다.

〈다라니에 쓰인 자모(字母)의 일람〉

견모(見母) 〔ㄱ〕 : 5자

〈釋〉Ⅰ:<세주>三十 〈1〉

(이 표기는 〈석상21〉의 다라니 Ⅰ편 30구 〈1회 쓰임〉을 나타낸 것임)

〈月〉Ⅰ:<세주>三十 〈1〉

〈釋〉Ⅰ:<세주>三十九, Ⅵ:<세주>十九 〈2〉

〈月〉Ⅰ:<세주>三十九, Ⅵ:<세주>十九 〈2〉

·긷〈釋〉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2〉

·〈月〉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2〉

·〈釋〉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2〉

·〈月〉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2〉

〈釋〉Ⅵ:<세주>四 〈1〉

〈月〉Ⅵ:<세주>四 〈1〉

군모(群母) 〔ㄲ〕 : 7자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2), Ⅵ:<세주>十五(2),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2), Ⅵ:<세주>十九 〈13〉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2), Ⅵ:<세주>十五(2),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2), Ⅵ:<세주>十九 〈13〉

〈釋〉Ⅳ:<세주>四 〈1〉

〈月〉Ⅳ:<세주>四 〈1〉

·뀽〈釋〉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三 〈2〉

〈月〉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三 〈2〉

〈釋〉Ⅲ:<세주>六 〈1〉

〈月〉Ⅲ:<세주>六 〈1〉

〈釋〉Ⅳ:<세주>七 〈1〉

〈月〉Ⅳ:<세주>七 〈1〉

〈釋〉Ⅰ:<세주>十八, Ⅳ:<세주>六 〈2〉

〈月〉Ⅰ:<세주>十八, Ⅳ:<세주>六 〈2〉

주004)

*
〈석상21:56ㄱ〉에서 이 글자의 왼쪽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데, 이 글자의 표기된 곳 〈석상19:26ㄴ〉에는 ‘阿僧祇낑劫·겁:디:내·야’에서 확인할 수 있음.
〈釋〉Ⅵ:<세주>十四 〈1〉

〈月〉Ⅵ:<세주>十四 〈1〉

단모(端母) 〔ㄷ〕 : 7자

〈釋〉Ⅰ:<세주>八,Ⅰ:<세주>十一,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一, Ⅰ:<세주>四十三, Ⅱ:<세주>八, Ⅴ:<세주>十五, Ⅴ:<세주>十六, Ⅴ:<세주>十七, Ⅵ:<세주>九,Ⅵ:<세주>十, Ⅵ:<세주>十一 〈12〉

〈月〉Ⅰ:<세주>八,Ⅰ:<세주>十一,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一, Ⅰ:<세주>四十三, Ⅱ:<세주>八, Ⅴ:<세주>十五, Ⅴ:<세주>十六, Ⅴ:<세주>十七, 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13〉

:던〈釋〉Ⅰ:<세주>二十五 〈1〉

:단〈月〉Ⅰ:<세주>二十五 〈1〉

·뎽〈釋〉Ⅰ:<세주>九, Ⅰ:<세주>十, Ⅰ:<세주>十九,Ⅰ:<세주>三十二,Ⅰ:<세주>三十三, Ⅵ:<세주>三, Ⅵ:<세주>十六,(3) Ⅵ:<세주>十八, Ⅵ:<세주>二十, 〈11〉

·디〈月〉Ⅰ:<세주>九,Ⅰ:<세주>十,Ⅰ:<세주>十九,Ⅰ:<세주>三十二,Ⅰ:<세주>三十三, Ⅵ:<세주>三, Ⅵ:<세주>十六(3),Ⅵ:<세주>十八,Ⅵ:<세주>二十〈11〉

·뒁〈釋〉Ⅰ:<세주>二十四,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6〉

:더〈月〉Ⅰ:<세주>二十四,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多-더) 〈6〉

:뒁〈釋〉Ⅵ:<세주>十九 〈1〉

:더〈月〉Ⅵ:<세주>十九 〈1〉

〈釋〉Ⅴ:<세주>十八, Ⅵ:<세주>十六 〈2〉

〈月〉Ⅴ:<세주>十八, Ⅵ:<세주>十六 〈2〉

:딩〈釋〉Ⅱ:<세주>十三, Ⅳ:<세주>九, Ⅵ:<세주>七 〈3〉

:디〈月〉Ⅱ:<세주>十三, Ⅳ:<세주>九, Ⅵ:<세주>七 〈3〉

투모(透母) 〔ㅌ〕 : 1자

·톙〈釋〉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2〉

·티〈月〉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2〉

정모(定母) 〔ㄸ〕 : 10자

·딷〈釋〉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2〉

·〈月〉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2〉

·똉〈釋〉Ⅰ:<세주>六, Ⅱ:<세주>六, Ⅱ:<세주>七, Ⅱ:<세주>八 〈4〉

·띠〈月〉Ⅰ:<세주>六, Ⅱ:<세주>六, Ⅱ:<세주>七, Ⅱ:<세주>八 〈4〉

〈釋〉Ⅴ:<세주>一 주005)

*
‘똉’의 종성 ‘ㅇ’ 왼쪽에 〔:〕 상성의 방점이 찍혔고 나머지에는 ‘똉’에 방점이 없음.
,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5〉

〈月〉Ⅴ:<세주>一,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5〉

〈釋〉Ⅵ:<세주>八, Ⅵ:<세주>十九 〈2〉

〈月〉Ⅵ:<세주>八, Ⅵ:<세주>十九 〈2〉

〈釋〉Ⅵ:<세주>一,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 〈5〉

〈月〉Ⅵ:<세주>一,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 〈5〉

·뛍〈釋〉Ⅵ:<세주>十六 〈1〉 주006)

*
〈법언7:173ㄴ〉에는 ‘惰’로 돼 있는데, 〈석상21:56ㄱ〉만 ‘墯’로 표기됨.

·떠〈月〉Ⅵ:<세주>十六 〈1〉

·띄ᇰ〈釋〉Ⅳ:<세주>六 〈1〉

·〈月〉Ⅳ:<세주>六 〈1〉

〈釋〉Ⅰ:<세주>二十一, Ⅰ:<세주>三十二, Ⅳ:<세주>四, Ⅳ:<세주>五,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2),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三 〈13〉

〈月〉Ⅰ:<세주>二十一, Ⅰ:<세주>三十二, Ⅳ:<세주>四, Ⅳ:<세주>五,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四, Ⅵ:<세주>五(2),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三 〈13〉

·띵〈釋〉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Ⅵ:<세주>一, Ⅵ:<세주>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3), Ⅵ:<세주>十九,Ⅵ:<세주>二十 〈10〉

·띠〈月〉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Ⅵ:<세주>一 주007)

*
여기만 ‘:’이고 나머지는 ‘·띠’로 같음. 결국 한 글자가 두 가지 음으로 쓰인 것임.
, Ⅵ:<세주>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3),Ⅵ:<세주>十九,Ⅵ:<세주>二十 〈10〉

·뗟〈釋〉Ⅰ:<세주>三十二 〈1〉

·찌ᇹ〈月〉Ⅰ:<세주>三十二 〈1〉

니모(泥母) 〔ㄴ〕 : 9자

〈釋〉Ⅰ:<세주>四十三, Ⅲ:<세주>二, Ⅲ:<세주>三, Ⅲ:<세주>四, Ⅲ:<세주>五, Ⅲ:<세주>六 〈6〉

〈月〉Ⅰ:<세주>四十三, Ⅲ:<세주>二, Ⅲ:<세주>三, Ⅲ:<세주>四, Ⅲ:<세주>五, Ⅲ:<세주>六 〈6〉

·녇〈釋〉Ⅰ:<세주>三十四,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Ⅵ:<세주>十三 〈6〉

·〈月〉Ⅰ:<세주>三十四,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Ⅵ:<세주>十三 〈6〉

〈釋〉Ⅰ:<세주>二十一,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7〉

〈月〉Ⅰ:<세주>二十一,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7〉

〈釋〉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5〉

〈月〉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5〉

:녱〈釋〉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Ⅱ:<세주>十二, Ⅳ:<세주>八 〈5〉 주008)

*
‘抳’와 ‘柅’로 각각 표기됨.

:니〈月〉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Ⅱ:<세주>十二, Ⅳ:八 〈5〉

:녱〈釋〉Ⅰ:<세주>三, Ⅰ:<세주>四,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八 〈8〉

:니〈月〉Ⅰ:<세주>三, Ⅰ:<세주>四,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四, Ⅳ:<세주>一, Ⅳ:<세주>二, Ⅵ:<세주>八 〈8〉

·녱〈釋〉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2〉

·니〈月〉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2〉

느ᇢ〈釋〉Ⅲ:<세주>三, Ⅴ:<세주>十九 주009)

*
Ⅴ:十九는 ‘䨲’자임.
<세주/>, Ⅵ:<세주>十九 〈3〉

느ᇢ〈月〉Ⅲ:<세주>三, Ⅴ:<세주>十九, Ⅵ:<세주>十九 〈3〉

방모(幇母) 〔ㅂ〕 : 2자

·붱〈釋〉Ⅰ:<세주>二十二 〈1〉

·붜〈月〉Ⅰ:<세주>二十二 〈1〉

〈釋〉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九,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八, Ⅵ:<세주>十六, Ⅵ:<세주>十八 〈6〉

〈月〉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九,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八, Ⅵ:<세주>十六, Ⅵ:<세주>十八 〈6〉

병모(並母) 〔ㅃ〕 : 3자

便·뼌〈釋〉Ⅰ:<세주>二十四 〈1〉

便·뼌〈月〉Ⅰ:<세주>二十四 〈1〉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四十二, Ⅱ:<세주>六, Ⅱ:<세주>八, Ⅱ:<세주>十三,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七,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3)<세주/>,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 〈21〉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四十二, Ⅱ:<세주>六, Ⅱ:<세주>八, Ⅱ:<세주>十三, Ⅵ:<세주>二, Ⅵ:<세주>三, Ⅵ:<세주>七, Ⅵ:<세주>九(2)<세주/>, Ⅵ:<세주>十(3)<세주/>, Ⅵ:<세주>十一,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五,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 〈21〉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4〉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三, Ⅰ:<세주>三十二, Ⅵ:<세주>二十 〈4〉

봉모(奉母) 〔ㅹ〕 : 2자

·ᄬᅮᆮ〈釋〉Ⅰ:<세주>三十二, Ⅵ:<세주>八 〈2〉

·〈月〉Ⅰ:<세주>三十二, Ⅵ:<세주>八 〈2〉

〈釋〉Ⅳ:<세주>八 〈1〉

〈月〉Ⅳ:<세주>八 〈1〉

명모(明母) 〔ㅁ〕 : 6자

·명〈釋〉Ⅰ:<세주>七 〈1〉

·며〈月〉Ⅰ:<세주>七 〈1〉

·묵〈釋〉Ⅰ:<세주>十, Ⅰ:<세주>十一, Ⅱ:<세주>四 〈3〉

·〈月〉Ⅰ:<세주>十, Ⅰ:<세주>十一, Ⅱ:<세주>四 〈3〉

〈釋〉Ⅰ:<세주>三, Ⅰ:<세주>四(2)<세주/>,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二, Ⅳ:<세주>六, Ⅵ:<세주>十七 〈7〉

〈月〉Ⅰ:<세주>三, Ⅰ:<세주>四(2)<세주/>,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二, Ⅳ:<세주>六, Ⅵ:<세주>十七 〈7〉

〈釋〉Ⅰ:<세주>三十一,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3〉

〈月〉Ⅰ:<세주>三十一, Ⅰ:<세주>三十三, Ⅵ:<세주>十八 〈3〉

〈釋〉Ⅰ:<세주>二十七 〈1〉

〈月〉Ⅰ:<세주>二十七 〈1〉

:민〈釋〉Ⅴ:<세주>二 〈1〉

:민〈月〉Ⅴ:<세주>二 〈1〉

미모(微母) 〔ㅱ〕 : 1자

·〈釋〉Ⅰ:<세주>二,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3〉

〈月〉Ⅰ:<세주>二,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3〉

종모(從母) 〔ᅏ〕 : 1자

ᅏᅯᆼ〈釋〉Ⅱ:<세주>一, Ⅱ:<세주>二 〈2〉

ᄿᅥ〈月〉Ⅱ:<세주>一, Ⅱ:<세주>二 〈2〉

심모(心母) 〔ᄼ〕 : 9자

ᄼᅡᆷ〈釋〉Ⅰ:<세주>三十一(2), Ⅵ:<세주>十七 〈3〉

ᄼᅡᆷ〈月〉Ⅰ:<세주>三十一(2), Ⅵ:<세주>十七 〈3〉

〈釋〉Ⅰ:<세주>十四 〈1〉

〈月〉Ⅰ:<세주>十四 〈1〉

ᄼᅥᆼ〈釋〉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 〈2〉

〈月〉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 〈2〉

ᄼᅥᆼ〈釋〉Ⅳ:<세주>八 〈1〉

〈月〉Ⅳ:<세주>八 〈1〉

ᄼᅥᆼ〈釋〉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五 〈3〉 주010)

*
<분석풀이>여기서 한 글자 ‘娑’가 두 가지 음으로 쓰임.

〈月〉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五 〈3〉

·ᄼᅫᆼ〈釋〉Ⅰ:<세주>二十二 〈1〉

·〈月〉Ⅰ:<세주>二十二 〈1〉

ᄼᅴᇰ〈釋〉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Ⅵ:<세주>十四, Ⅵ:<세주>十五,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 〈7〉

ᄼᅳᇰ〈月〉Ⅰ:<세주>三十四, Ⅵ:<세주>十二, Ⅵ:<세주>十三, Ⅵ:<세주>十四, Ⅵ:<세주>十五,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七 〈7〉

ᄼᅵᆫ〈釋〉Ⅵ:<세주>二十 〈1〉

ᄼᅵᆫ〈月〉Ⅵ:<세주>二十 〈1〉

시ᇢ〈釋〉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八 〈5〉

시ᇢ〈月〉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八 〈5〉

·ᄼᅡᆮ〈釋〉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2) 〈6〉

·ᄼᅡᇹ〈月〉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七, Ⅵ:<세주>十八, Ⅵ:<세주>十九(2) 〈6〉

조모(照母) 〔ᅐ〕 : 4자

:ᅐᅵᆼ〈釋〉Ⅰ:<세주>五, Ⅱ:<세주>十一 〈2〉

:〈月〉Ⅰ:<세주>五, Ⅱ:<세주>十一 〈2〉

·ᅐᅧᆼ〈釋〉Ⅰ:<세주>二十二 〈1〉

·〈月〉Ⅰ:<세주>二十二 〈1〉

〈釋〉Ⅰ:<세주>六 〈1〉

〈月〉Ⅰ:<세주>六 〈1〉

:ᅐᅵᆼ〈釋〉Ⅱ:<세주>三, Ⅱ:<세주>四 〈2〉

:〈月〉Ⅱ:<세주>三, Ⅱ:<세주>四 〈2〉

천모(穿母) 〔ᅕ〕 : 3자

ᅕᅡᆼ〈釋〉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Ⅵ:<세주>十二 〈7〉

〈月〉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Ⅵ:<세주>十二 〈7〉

:ᅕᅨᆼ〈釋〉Ⅰ:<세주>三十 〈1〉 주011)

*
<분석풀이>여기서 한 글자 ‘差’가 두 가지 음으로 쓰임.

:〈月〉Ⅰ:<세주>三十 〈1〉

ᅕᅵᆼ〈釋〉Ⅰ:<세주>三十三 〈1〉

〈月〉Ⅰ:<세주>三十三 〈1〉

·ᅕᅡᆮ〈釋〉Ⅵ:<세주>十八 〈1〉

·〈月〉Ⅵ:<세주>十八 〈1〉

상모(牀母) 〔ᅑ〕 : 4자

·ᅑᅨᆼ〈釋〉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3〉

:〈月〉Ⅱ:<세주>九, Ⅱ:<세주>十, Ⅱ:<세주>十一 〈3〉

ᅑᅵᆼ〈釋〉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2〉

〈月〉Ⅱ:<세주>十二, Ⅱ:<세주>十三 〈2〉

〈釋〉Ⅳ:<세주>五 〈1〉

〈月〉Ⅳ:<세주>五 〈1〉

〈釋〉Ⅳ:<세주>七 〈1〉

〈月〉Ⅳ:<세주>七 〈1〉

심모(審母) 〔ᄾ〕 : 5자

ᄾᅧᆼ〈釋〉Ⅰ:<세주>七, Ⅰ:<세주>八, Ⅰ:<세주>二十 〈3〉

〈月〉Ⅰ:<세주>七, Ⅰ:<세주>八, Ⅰ:<세주>二十 〈3〉

〈釋〉Ⅰ:<세주>九, Ⅰ:<세주>十九, Ⅵ:<세주>八 〈3〉

〈月〉Ⅰ:<세주>九, Ⅰ:<세주>十九, Ⅵ:<세주>八 〈3〉

ᄾᅲᆼ〈釋〉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2〉

〈月〉Ⅰ:<세주>二十五, Ⅰ:<세주>三十五 〈2〉

:〈釋〉Ⅰ:<세주>三十 〈1〉

:〈月〉Ⅰ:<세주>三十 〈1〉

·ᄾᅧᆼ〈釋〉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三十九, Ⅵ:<세주>四, Ⅵ:<세주>十九 〈5〉

·〈月〉Ⅰ:<세주>三十五(2)<세주/>, Ⅰ:<세주>三十九, Ⅵ:<세주>四, Ⅵ:<세주>十九 〈5〉

영모(影母) 〔ㆆ〕 : 8자

·〈釋〉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2〉

·〈月〉Ⅰ:<세주>四十, Ⅰ:<세주>四十一 〈2〉

·〈釋〉Ⅰ:<세주>一 〈1〉

(훼손) 주012)

*
글자의 왼쪽만 조금 보임.
〈月〉Ⅰ:<세주>一 〈1〉

·ᅙᅥᆮ〈釋〉Ⅳ:<세주>九 〈1〉

·ᅙᅥᇹ〈月〉Ⅳ:<세주>九 〈1〉

〈釋〉Ⅰ:<세주>十三, Ⅰ:<세주>十七, 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四,Ⅰ:<세주>二十五,Ⅰ:<세주>二十八, Ⅰ:<세주>三十一, Ⅰ:<세주>四十二,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五, Ⅱ:<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四, Ⅳ:<세주>一, Ⅴ:<세주>四, Ⅵ:<세주>一, 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四, Ⅵ:<세주>十六(2)<세주/>, Ⅵ:<세주>十九, Ⅵ:<세주>二十 〈25〉

〈月〉Ⅰ:<세주>十三, Ⅰ:<세주>十七, Ⅰ:<세주>十八, Ⅰ:<세주>二十二, Ⅰ:<세주>二十四,Ⅰ:<세주>二十五,Ⅰ:<세주>二十八, Ⅰ:<세주>三十一,Ⅰ:四<세주>十二, Ⅰ:<세주>四十三, Ⅱ:<세주>五, Ⅱ:<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四, Ⅳ:<세주>一, Ⅴ:<세주>四, Ⅵ:<세주>一, Ⅵ:<세주>九, Ⅵ:<세주>十, Ⅵ:<세주>十一, Ⅵ:<세주>十四, Ⅵ:<세주>十六(2)<세주/>, Ⅵ:<세주>十九, Ⅵ:<세주>二十 〈25〉

:〈釋〉Ⅰ:<세주>八, Ⅰ:<세주>十三 〈2〉

:〈月〉Ⅰ:<세주>八, Ⅰ:<세주>十三 〈2〉

·ᅙᅲᆨ〈釋〉Ⅱ:<세주>三 〈1〉

·〈月〉Ⅱ:<세주>三 〈1〉

·〈釋〉Ⅰ:<세주>二十六 〈1〉

〔漚〕 주013)

*
〈월석19:58ㄱ〉 한자 두 글자는 보이지 않아 〈법화7:110ㄴ〉 ‘漚究隷’에서 복원함.
〈月〉Ⅰ:<세주>二十六 〈1〉

〈釋〉Ⅱ:<세주>九, Ⅴ:<세주>一,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五 〈5〉

〈月〉Ⅱ:<세주>九, Ⅴ:<세주>一, Ⅴ:<세주>二, Ⅴ:<세주>三, Ⅴ:<세주>五 〈5〉

효모(曉母) 〔ㅎ〕 : 2자

〈釋〉Ⅱ:<세주>二 〈1〉

〈月〉Ⅱ:<세주>二 〈1〉

〈釋〉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Ⅴ:<세주>十五,Ⅴ:<세주>十六,Ⅴ:<세주>十七,Ⅴ:<세주>十八, Ⅴ:<세주>十九 〈9〉

〈月〉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Ⅴ:<세주>十五,Ⅴ:<세주>十六,Ⅴ:<세주>十七,Ⅴ:<세주>十八, Ⅴ:<세주>十九 〈9〉

유모(喩母) 〔ㅇ〕 : 5자

:영〈釋〉Ⅰ:<세주>四十一(2) 〈2〉

:여〈月〉Ⅰ:<세주>四十一(2) 〈2〉

·영〈釋〉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三 〈2〉

·여〈月〉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三 〈2〉

〈釋〉Ⅱ:<세주>十 〈1〉

(훼손) 주014)

*
이 글자는 오른쪽 위 부분만 조금 보임. 〈월석〉에 쓰인 예를 못 찾았음.
〈月〉Ⅱ:<세주>十 〈1〉

〈釋〉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2〉

〈月〉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2〉

·잉〈釋〉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2〉

·이〈月〉Ⅰ:<세주>十六, Ⅰ:<세주>十七 〈2〉

래모(來母) 〔ㄹ〕 : 11자

〈釋〉Ⅵ:<세주>十七 〈1〉

〈月〉Ⅵ:<세주>十七 〈1〉

〈釋〉Ⅰ:<세주>三十九, Ⅵ:<세주>十六, Ⅵ:<세주>十九 〈3〉

〈月〉Ⅰ:<세주>三十九 〈1〉 󰌿

〈月〉Ⅵ:<세주>十六 〈1〉 󰍕 〈3〉 주015)

*
<분석풀이>한 글자가 〈월석〉에서 ‘랴, 려, ·랴ᇦ’ 세 가지 음으로 쓰임.

·랴ᇦ〈月〉Ⅵ:<세주>十九 〈1〉 󰍅

·렁〈釋〉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4〉

·러〈月〉Ⅰ:<세주>二十四, Ⅰ:<세주>三十六, Ⅰ:<세주>三十七, Ⅰ:<세주>四十 〈4〉

〈釋〉Ⅰ:<세주>二十一, Ⅰ:<세주>二十八, Ⅰ:<세주>二十九, Ⅱ:<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六(2) 〈8〉

〈月〉Ⅰ:<세주>二十一, Ⅰ:<세주>二十八, Ⅰ:<세주>二十九, Ⅱ:<세주>六, Ⅵ:<세주>七, Ⅵ:<세주>九, Ⅵ:<세주>十六(2) 〈8〉

·롕〈釋〉Ⅰ:<세주>五,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Ⅰ:<세주>二十八, Ⅰ:<세주>二十九, Ⅱ:<세주>一, Ⅱ:<세주>二, Ⅱ:<세주>五,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Ⅵ:<세주>四, 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十六 〈16〉

·리〈月〉Ⅰ:<세주>五, Ⅰ:<세주>二十五, Ⅰ:<세주>二十六, Ⅰ:<세주>二十七, Ⅰ:<세주>二十八,Ⅰ:<세주>二十九, Ⅱ:<세주>一, Ⅱ:<세주>二, Ⅱ:<세주>五, Ⅱ:<세주>七, Ⅱ:<세주>八, Ⅱ:<세주>十二, Ⅵ:<세주>四, Ⅵ:<세주>五, Ⅵ:<세주>六, Ⅵ:<세주>十六 〈16〉

:롕〈釋〉Ⅰ:<세주>八, Ⅰ:<세주>十一, 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四,Ⅰ:<세주>十五,Ⅰ:<세주>二十,Ⅰ:<세주>二十四,Ⅰ:<세주>三十一, Ⅲ:<세주>五, Ⅲ:<세주>六, Ⅴ:<세주>一,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Ⅵ:<세주>十二 〈21〉

:리〈月〉Ⅰ:<세주>八, Ⅰ:<세주>十一, Ⅰ:<세주>十二, Ⅰ:<세주>十三, Ⅰ:<세주>十四,Ⅰ:<세주>十五,Ⅰ:<세주>二十,Ⅰ:<세주>二十四,Ⅰ:<세주>三十一, Ⅲ:<세주>五, Ⅲ:<세주>六, Ⅴ:<세주>一, Ⅴ:<세주>三, Ⅴ:<세주>四, Ⅴ:<세주>五, Ⅴ:<세주>六, Ⅴ:<세주>七, Ⅴ:<세주>八, Ⅴ:<세주>九, Ⅴ:<세주>十, Ⅵ:<세주>十二 〈21〉

·롕〈釋〉Ⅰ:<세주>三十二, Ⅰ:<세주>三十三, Ⅳ:<세주>三, Ⅳ:<세주>四, Ⅳ:<세주>五, Ⅳ:<세주>七, Ⅵ:<세주>十八, Ⅵ:<세주>二十 〈8〉

·리〈月〉Ⅰ:<세주>三十二, Ⅰ:<세주>三十三, Ⅳ:<세주>三, Ⅳ:<세주>四, Ⅳ:<세주>五, Ⅳ:<세주>七, Ⅵ:<세주>十八, Ⅵ:<세주>二十 〈8〉

〈釋〉Ⅰ:<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二, Ⅲ:<세주>三 〈4〉

〈月〉Ⅰ:<세주>六, Ⅲ:<세주>一, Ⅲ:<세주>二, Ⅲ:<세주>三 〈4〉

〈釋〉Ⅱ:<세주>十三 〈1〉

〈月〉Ⅱ:<세주>十三 〈1〉

〈釋〉Ⅰ:<세주>二十二, Ⅰ:<세주>四十二, Ⅲ:<세주>四 〈3〉

〈月〉Ⅰ:<세주>二十二, Ⅰ:<세주>四十二, Ⅲ:<세주>四 〈3〉

〈釋〉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Ⅳ:<세주>八, 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Ⅵ:<세주>十九 〈8〉

〈月〉Ⅰ:<세주>三十八, Ⅰ:<세주>三十九, Ⅳ:<세주>八, Ⅴ:<세주>十一, Ⅴ:<세주>十二, Ⅴ:<세주>十三, Ⅴ:<세주>十四, Ⅵ:<세주>十九 〈8〉

일모(日母) 〔ㅿ〕 : 2자

:〈釋〉Ⅰ:<세주>一, Ⅰ:<세주>二 〈2〉

〔:〕 주016)

*
이 글자는 왼쪽만 조금 보이나 다음 어구에 ‘爾’가 쓰이고 그 음이 표기됨으로 복원한 것임.
〈月〉Ⅰ:<세주>一, Ⅰ:<세주>二 〈2〉

:〈釋〉Ⅰ:<세주>四十三 〈1〉

〔:〕 주017)

*
이 글자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한자어구 ‘阿摩若那多夜’에서 ‘若’ 음을 표시한 ‘(荏蔗)’ 두 자가 반절(反切)을 나타낸 것이므로 남광우(1995)에서 두 글자를 찾아서 ‘荏:, 蔗:쟝’ 두 글자의 반절(反切)로 ‘若’의 음을 ‘:’로 복원했다. 남광우(1995:428)에서 荏 :〈동국정운3:37ㄱ〉, 남광우(1995:434)에서 蔗 :쟝〈동국정운6:25ㄱ〉 인용함.
〈月〉Ⅰ:<세주>四十三 〈1〉

i) 위에 보인 한자를 자모별로 합계하면 ‘이 문헌’의 다라니에 쓰인 한자수는 다음과 같다.

견모(見母) 〔ㄱ〕 : 5자

군모(群母) 〔ㄲ〕 : 7자

단모(端母) 〔ㄷ〕 : 7자

투모(透母) 〔ㅌ〕 : 1자

정모(定母) 〔ㄸ〕 : 10자

니모(泥母) 〔ㄴ〕 : 9자

방모(幇母) 〔ㅂ〕 : 2자

병모(並母) 〔ㅃ〕 : 3자

봉모(奉母) 〔ㅹ〕 : 2자

명모(明母) 〔ㅁ〕 : 6자

미모(微母) 〔ㅱ〕 : 1자

종모(從母) 〔ᅏ〕 : 1자

심모(心母) 〔ᄼ〕 : 9자

조모(照母) 〔ᅐ〕 : 4자

천모(穿母) 〔ᅕ〕 : 3자

상모(牀母) 〔ᅑ〕 : 4자

심모(審母) 〔ᄾ〕 : 5자

영모(影母) 〔ㆆ〕 : 8자

효모(曉母) 〔ㅎ〕 : 2자

유모(喩母) 〔ㅇ〕 : 5자

래모(來母) 〔ㄹ〕 : 11자

일모(日母) 〔ㅿ〕 : 2자

합계 : 109자

ii) 〈석상〉과 〈월석〉의 한자음 정음 표기는 널리 알려진 유모(喩母)의 종성 ‘ㅇ’이 전자엔 씌었는데 후자에 일률적으로 다 쓰이지 않았다.

iii) 〈석상〉에 쓰인 종성 ‘ㄱ, ㄷ’에 대하여 〈월석〉에서는 종성 ‘ㆆ’만을 쓴 것이 다르고, 〈석상〉 ‘ㅱ, ㄴ, ㅇ, ㅁ’에 〈월석〉 ‘ㅱ, ㄴ, ㅿ, ㅁ’을 썼으니, ‘ㅇ, ㅿ’ 제외하고 나머지는 같이 쓰였다.

iv) ▴정모(定母)의 ‘地’ 자는 ‘·띵(·띠), :’와 같이 1자 2음으로 쓰임.

▴심모(心母)의 ‘娑’ 자도 ‘ᄼᅥᆼ()’와 ‘·ᄼᅫᆼ(·)’와 같이 1자 2음으로 쓰임.

▴천모(穿母)의 ‘差’ 자는 ‘:ᅕᅨᆼ(:)’와 ‘ᅕᅵᆼ()’와 같이 1자 2음으로 쓰임.

▴래모(來母)의 ‘略’ 자는 ‘량(랴/려/·랴ᇦ)’와 같이 1자 3음으로 쓰임.

v) 같은 음을 나타내는데 ‘黎·梨·犂’의 세 글자가 쓰임.

vi) 한 글자가 1회만 쓰인 것.

견모(見母)의 ‘迦, 鳩’ 2자

군모(群母)의 ‘乾, 拘, 求, 祇’ 4자

단모(端母)의 ‘亶, 埵’ 2자

투모(透母) -------------------

정모(定母)의 ‘墯, 蹬, 袠’ 3자

니모(泥母) -------------------

방모(幇母)의 ‘簸’ 1자

병모(並母)의 ‘便’ 1자

봉모(奉母)의 ‘浮’ 1자

명모(明母)의 ‘咩, 牟, 泯’ 3자

미모(微母) -------------------

종모(從母) -------------------

심모(心母)의 ‘桑, 莎, 辛’ 3자

조모(照母)의 ‘蔗, 遮’ 2자

천모(穿母)의 ‘刹’ 1자

상모(牀母)의 ‘旃, 常’ 2자

심모(審母)의 ‘首’ 1자

영모(影母)의 ‘安, 頞, 郁, 歐’ 4자

효모(曉母)의 ‘訶’ 1자

유모(喩母)의 ‘韋’ 1자

래모(來母)의 ‘蘭’ 1자

일모(日母)의 ‘若’ 1자

vii) 한 글자가 10회 이상 쓰임.

병모(並母)의 ‘婆〔뿽〕’ 21회

영모(影母)의 ‘阿〔〕’ 25회

래모(來母)의 ‘隷〔·롕〕’ 16회, ‘履〔:롕〕’ 21회

viii) ‘다니’ 자모의 모음

앞의 자모 일람에서 모음(사성 제외)에 대하여 〈석상〉과 〈월석〉의 같음과 다름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ㄱ) 두 문헌에 쓰인 자모의 모음이 같은 것

ㅏ:ㅏ, ㅑ:ㅑ, ㅓ:ㅓ, ㅕ:ㅕ, ㅜ:ㅜ, ㅝ:ㅝ, ㅟ:ㅟ

(ㄴ) 두 문헌에 쓰인 자모의 모음이 다른 것.

ㅕ:ㅑ 憍 : Ⅰ:<세주>三十九 / 略 량:려 Ⅵ:<세주>十六ㅡ

ㅓ:ㅏ 亶 던:단 Ⅰ:<세주>二十五 / 沙 ᄼᅥᆼ: Ⅰ:<세주>三十四 / 阿 : Ⅰ:<세주>十三

ㅖ:ㅣ 帝 뎽:디 Ⅰ:<세주>九 / 剃 톙:티 Ⅰ:<세주>二十三 / 第 똉:띠 Ⅰ:<세주>六 / 尼 녱:니 Ⅰ:<세주>二十一 / 泥 녱:니 Ⅴ:<세주>六 / 抳 녱:니 Ⅱ:<세주>九 / 禰 녱:니 Ⅰ:<세주>三 / 膩 녱:니 Ⅰ:<세주>十八 / 差 ᅕᅨᆼ: Ⅰ:<세주>三十 /緻 ᅑᅨᆼ: Ⅱ:<세주>九 / 隷 롕:리 Ⅰ:<세주>五 / 履 롕:리 Ⅰ:<세주>八 / 利 롕:리 Ⅰ:<세주>三十二 / 黎 롕:리 Ⅰ:<세주>六ㅡ

ㅝ:ㅓ 埵 뒁:더 Ⅵ:<세주>十九 / 墯 뛍:떠 Ⅵ:<세주>十六 / 痤 ᅏᅯᆼ:ᄿᅥ Ⅱ:<세주>一

ㅢ:ㅡ 蹬 띄ᇰ: Ⅳ:<세주>六 / 僧 ᄼᅴᇰ:ᄼᅳᇰ Ⅰ:<세주>三十四ㅡ

ㅣ:ㅐ 地 띵: Ⅵ:<세주>一

ㅕ:ㅣ 袠 뗟:ᅑᅵᇹ Ⅰ:<세주>三十二

ㅘ:ㅓ 曼 :먼 Ⅰ:<세주>二

ㅙ:ㅐ 娑 ᄼᅫᆼ: Ⅰ:<세주>二十二ㅡ

ㅣ:ㅡ 旨 ᅐᅵᆼ: Ⅰ:<세주>五 / 枳 ᅐᅵᆼ: Ⅱ:<세주>三 / 爾 : Ⅰ:<세주>一

(ㄷ) 위 (ㄱ)은 〈석상〉과 〈월석〉에 쓰인 다라니 음의 모음이 같은 경우이고, (ㄴ)은 두 문헌에 쓰인 다라니 음의 모음이 달라진 것이다. 문제는 (ㄴ)의 경우로 그 중 제일 많은 것이 ‘ㅖ→ㅣ’인데, 이는 선행 초성의 자음이 설음(舌音) ‘ㄴ, ㄸ’과 정치음(正齒音) ‘ᅐ, ᅑ’의 음운환경이 원인인 것으로 보이며, 그밖에 그 예가 1, 2, 3회 정도로 적은 것은 주로 상대 모음과의 관계 ‘양성모음→음성모음’, ‘반모음 오/우〔w〕+단모음→단모음’, ‘전설모음→중설모음’으로 바뀐 것으로 본다.

Ⅴ. 맺음말

현전하는 『석보상절』 열 권(권제3, 6, 9, 11, 13, 19, 20, 21, 23, 24) 중에서 가장 늦게 알려진 ‘이 문헌’에 대하여 위에서 논한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서지학적으로는 〈석상〉 제13에서 시작된 『법화경언해』 권제1~7의 내용이 ‘이 문헌’에서 끝나니, 〈석상〉 권제14, 15, 16, 17, 18 등 다섯 권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이로써 『법화경』의 내용은 『석보상절』의 권제13에서 권제21까지 총 9권에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화경』의 동일 원문에 대해 『석보상절』 권제13~21, 『월인석보』 권제11~19, 『법화경언해』 권제1~7 등 세 번에 걸쳐서 언해가 되었으므로 동일 원문의 언해 양상을 용이하게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이 문헌’은 『법화경』 권7의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 다라니품 제26, 묘장엄왕본사품 제27, 보현보살권발품 제28을 언해한 것이다.

둘째, ‘이 문헌’에는 6편의 다라니가 실려 있는데, 그 저경인 『법화경언해』 권7에는 한자음은 표기되지 않은 채 한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이 문헌’과 『월인석보』 권19에 실린 다라니가 다라니의 한자음 표기 연구의 자료가 된다. 여기서는 6편에 쓰인 한자음은 모두 107자로 이를 자모(字母) 별로 정리하고, 그것이 ‘이 문헌’과 『월인석보』 권19에서 자모별로 어떻게 다른가를 정리하였다.

셋째, 어휘면에서 희귀어로는 ‘도(평-평-거, 부사)’가 기존 고어사전의 표제어로 등재되지 않은 것이며, 그밖의 몇몇 단어는 가장 빠른 예를 보여주므로 고어사전에서 표제어를 대표하는 첫 예문으로 실을 것을 제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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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영가집언해≫에 대하여

장영길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은 중국 당나라의 영가(永嘉) 현각(玄覺)이 지은 책인데, 수행자가 선정에 들 때 유의할 점과 수행의 방법을 논의한 책으로 십단(十段)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송나라 행정(行靖)이 주를 달고 정원(淨源)이 과문(科門)을 수정하였다. 이것을 언해한 책이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이다. 세조가 직접 한글로 구결을 달고, 혜각존자 신미(信眉)와 효령대군 보(補) 등이 언해한 이 책은 세조 10년(1464년)에 간경도감에서 상·하 2권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선종영가집언해≫ 또는 ≪영가집언해≫로 불려왔는데 판심 서명인 ≪영가집(永嘉集)≫으로도 불린다.

영가 현각스님(665~713)은 중국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 출신으로 속가의 성은 대(戴), 법명은 현각, 자는 명도(明道), 호는 진각(眞覺)이다. 8세에 출가하여 육조 혜능(慧能)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온주 용흥사에 주하면서 ≪증도가(證道歌)≫와 ≪관심십문(觀心十門)≫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선종영가집언해≫에 대해서는 홍문각 영인본에 첨부한 김무봉(1995)과 홍윤표(1992)에 비교적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그쪽에 기대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두 자료의 내용을 참고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선종영가집언해≫의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것 중에 ‘권상(卷上)’은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그리고 ‘권하’는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원간본의 책판으로 연산 1년(1495년)에 인출된 하권 1책과 동일 계통의 후쇄본으로 보이는 1책이 역시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으로는 중종 15년(1520년)에 경남 장수사(長水寺)에서 간행된 복각본이 있다. 이 판본은 최근까지 그 목판이 남아 있어 후쇄본이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83년에 홍문각에서 이 복각본을 영인·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한편 해인사 소장본이 있는데 간년이 분명치 않다.

본 연구의 저본이 된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권상’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낙장은 없다. 그런데 서울대 규장각 일사문고본 ‘권하’는 앞의 1ㄱ부터 5ㄱ까지가 낙장이며, 5ㄴ도 마멸이 심하다. 뒷부분에는 ‘석음(釋音)’과는 장차를 달리하여 ‘함허당 찬송 병서(涵虛堂讚頌幷序)’와 ‘함허당 설의(涵虛堂說義)’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 중 제9장의 뒷면부터가 낙장이다. 중간본과 대조해 보면 2장 반이 낙장이다. 한편 ‘권하’의 제112장 자리에 ‘권상’의 제112장을 잘못 삽입하였기 때문에 홍문각에서 영인할 때 이 112장은 중간본의 112장을 첨부해 두었다. 얼른 보면 112장이 둘이 있으므로 참고할 때 유의해야 한다.

‘권상’을 중심으로 서지를 살펴보면, 원 표지는 무늬 없는 두꺼운 황색지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21cm, 세로 33cm이며, 판식은 사주쌍변, 반곽은 가로 16cm, 세로 21.7cm이다. 판심은 대흑구 상하 내향 흑어미이고, 판심제는 ‘永嘉集 卷上’이다. 행관은 매면 유계 8행, 매행 대·중·소 공히 19자이다. 그런데 과주를 언해한 경우에는 1자를 내렸기 때문에 1행 18자가 된다. 그런데 본문 언해문 중 20자가 되는 곳과 과주 언해문 중 19자가 되는 곳이 가끔 보인다(상32ㄴ, 상33ㄱ, 상65ㄱ 등).

언해 체제를 보면, 먼저 원문을 싣고 언해문을 달았는데, 본문과 과주는 1행 1줄, 언해문은 1행 2줄이다. 본문은 대자로 처음부터 시작하여 1행 19자이고, 언해문 역시 처음부터 시작하였으나 소자 두 줄이며 매행 19자이다. 과주는 본문보다 한 글자 내려 중자로 실었으며, 언해문은 역시 한자 내려 소자로 1행 2줄로 달았기 때문에 모두 1행 18자이다. 구결문과 언해문 사이에는 ○표를 두어 구분했다.

≪선종영가집언해≫의 표기는 같은 해에 간행된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등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미타경언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바, ≪아미타경언해≫가 기타 삼서(三書)와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간경도감본보다 먼저 간행된 을해자본 ≪아미타경언해≫(1461)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책의 국어사적 자료 고찰에 대해서는 김무봉(1995)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수 있다.

이 언해본이 후쇄본일 가능성이 다소 있긴 하지만, 김무봉(1995)의 고찰에 의하면 언어표기 등은 원간본의 모습 그대로이므로 국어사적으로 지니는 가치는 원간본과 동일하다 할 것이다.

참고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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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머리말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은 1560년(명종 15)에 간행된 고전적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교 관련 문헌이자, 언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당시의 국어 연구에 도움이 되는 국어사 자료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귀중본인데, 안병희(1977) 이후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주001)

안병희(1977), 안병희(1992, 재수록:396~406) 참조.
1994년에는 한국서지학회 간행의 학회지 『서지학보』 14집에 책 전체를 영인·공개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경란(2005) 등의 단편적인 논의만 있었을 뿐, 학계에서 폭넓게 다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 이 책의 역주(譯註)를 맡게 되어, 이미 발표된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한 해제를 붙이고자 한다. 남경란(2005)에서는 이 책 외에 이 책의 번각본으로 보이는 1567년 간행본이 있고, 그 책에는 1560년 판의 결락(缺落) 장(張)인 44장과 45장이 모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책을 볼 수가 없어서, 역주 대상의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으로 했다. 따라서 이 해제에서는 1560년 간행본을 중심으로 소개를 할 것이다. 그 외 1908년 간행본 1본이 더 있다고 하였으나, 주002)
남경란(2005:126~148) 참조.
그 책은 체제가 다른 것이어서 논외로 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섯 자(字) 진언의 염송(念誦)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그 결과 무량한 공덕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곧 청정한 몸가짐과 마음으로 이 진언을 염송하면 보살과(菩薩果)를 증(證)할 것이라는 결과 제시를 통해, 동기 제공을 하는 등 여섯 글자 주문(呪文)의 효험(效驗)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선정에 드는 방법, 진언을 섭수(攝受)하여 얻는 효과, 진언을 지성으로 염하면 공덕이 끝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 등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밀교적 성격이 짙은 불서이다. 진언 여섯 자 각 글자의 의미, 이 진언 염송의 효험, 진언 염송을 통한 미래의 준비 등 신앙생활에 대해 권장하는 내용 순(順)으로 되어 있다. 그 진언이 바로 ‘관음보살육자대명왕신주’라고 하는 ‘옴마니반몌훔(唵嘛呢叭𡁠吽)’이다. 깊은 의미까지는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반에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진언(眞言) 주003)

진언(眞言):
<정의>진언(眞言)은 불교에서 종교적 신험(神驗)을 얻기 위하여 외우는 주문(呪文)이다. 신비(神秘)한 주어(呪語)가 된다고 하여 신주(神呪)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mantra’를 번역해서 주(呪), 신주(神呪), 밀언(密言)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 등의 불교에서는 그 뜻을 번역하지 않고 범어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번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限定)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이에게는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 이것을 외우고 그 문자를 관하면 그 진언에 응하는 여러 가지 공덕이 생겨나고, 세속적인 소원의 성취는 물론 성불할 수 있다고도 한다. 흔히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이나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陁羅尼)’,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다라니(陁羅尼)’라고 할 때는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읽거나 외우는 것으로 한정해서 이르기도 한다. 총지(摠持) 또는 능지(能持)로 옮긴다. 곧, 모든 악법(惡法)을 막거나 버리고 선법(善法)을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진언(眞言), 곧 주(呪)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특히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나, 이 책의 주된 대상이 되는 ‘관세음보살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六字大明王眞言)’ 곧 ‘옴마니반몌훔(唵嘛呢叭𡁠吽)’ 등은 일반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주문에 속한다.
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 중 하나는 15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료가 드문 편인 16세기 국어사 자료로써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은 체제가 독특하여 시선을 끈다. 구결 현토 문장의 구성을, 한글 독음만으로 되어 있는 문장 한 줄과 한자가 포함된 문장인 원문 구결문 한 줄을 쌍행으로 만들어 나란히 배열해 두고 있는 점이다. 이는 당시 국어 발음의 실제 모습이나 사용된 한자 각각의 현실 발음, 소리와 소리가 이어질 때 나타나는 음운 현상, 불교 용어의 국어 발음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 하나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던 내용은 1548년(명종 3) 간행의 『십현담요해』 언해본이 일반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책 전체에 방점이 없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정리되기도 했었다는 점이다. 주004)

『십현담요해』(언해본)은 2009년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를 통해 처음 공개된 바 있다.
또한 이 책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26장부터 번역문의 끝인 40장까지는 구결문이 없이 본문 원문과 본문 독음문이 쌍행으로 있고, 그 뒤에 언해문이 있는 특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번역문인 언해문을 오로지 한글만으로 표기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지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어떻든 이 책은 판형이 그다지 넓거나 크지 않고, 책의 장수도 많지 않은 데에다 활자의 크기가 판광에 비해 큼지막하고, 거기에 더해 동일한 내용을 구결문과 독음문으로 나누어 두 줄로 배치하는 등으로 인해 실제 내용은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16세기 중엽의 국어사 자료이면서 당시 불교 신앙의 한 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는 간단한 형태서지 및 국어사적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형태서지 및 서지적 특성

이 책은 단권으로 된 목판본이다. 책 앞쪽의 1장에는 변상도가 있고, 그 다음에 이른바 왕실 축수문 패기(牌記) 1장이 있다. 본문은 모두 45장인데 44장 및 45장은 결락(缺落)이다. 46장의 앞면에 변상도 1장이 더 있고, 그 장차가 46장이어서 2장이 결락임을 확인할 수 있다. 주005)

남경란(2005:130)에서는 1567년에 간행된 번각본에 1560년 숙천부 간행의 책에서 볼 수 없던 44장 및 45장 두 장이 온전히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 뒤에는 장차를 달리하여 1장 및 2장의 앞면에 책 간행지인 평안도 숙천부(肅川府)의 영리(營吏) 김은정(金殷鼎)이 서사(書寫)한 발문이 있다. 또한 2장 뒷면부터 3장 앞면까지 시주질이 있다. 시주 중에는 당시의 숙천(肅川) 부사를 비롯하여 발문을 서사한 김은정 등 많은 수의 시주자들이 열기(列記)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체 장수는 51장이고, 그 중 2장이 없어서 현전 49장이다.

이 언해본을 조성할 때 저본으로 했거나 그에 가까웠던 책은 이 언해본의 첫머리에서 거론한 ‘여의륜집경(如意輪集經)’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설화자(說話者)가 안찰했다고 하는 ‘집경(集經)’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특정하기가 어렵다. 책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언해의 저본은 호남후인(湖南後人) 둔세당(遁世堂)이 중국에서 구하여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책이 이 ‘여의륜집경(如意輪集經)’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책이 더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또한 지금은 ‘여의륜집경(如意輪集經)’이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책마저 없는 듯하여 확인이 어렵다.

부록 마지막 장인 3장의 뒷면 끝 행에 있는 다음의 기록이 이 책의 간행 연대를 또렷하게 보여 준다.

1) 嘉靖三十九年五月日肅川府館北開板藏于 寺

가정(嘉靖) 39년은 명종 15년이니 1560년이다. 평안도의 숙천부(肅川府)에서 아전(衙前)으로 있던 김은정이 발문을 서사하고, 부사(府使)가 대시주로 등재될 만큼 관아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원본을 직접 접하지 못했다. 이미 소개된 내용과 서영(書影)을 통해 확인한 서지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형태서지

책크기 : 세로 22.2㎝ * 가로 14.1㎝

서외제 :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새로 개장한 표지)

내제 :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판심제 : 판심서명은 없이 장차만 있음

판심 : 대흑구 상하내향 흑어미

판식 : 사주단변

반곽 : 세로 13.8㎝ * 가로 9.5㎝

행관 : 매면 무계 7행

매행당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음. 구결문과 구결 독음문은 13자~14자

언해문과 협주문은 23~24자이나 17자인 곳도 있는 등 출입이 큰 편임

 주표시 : 협주의 시작 부분에만 ○ 표시를 하고 작은 글자 두 줄로 썼음

 특기사항 : 26장 앞면 6행부터 40장 앞면 2행까지 구결문 없이 원문과 원문 독음문만 두고, 단락이 끝난 다음 이를 한글로 옮긴 언해문을 두었음

번역의 형식은 구결문의 한자에 한글 독음을 단 독음문을 오른쪽 한 행으로 만들고, 나란히 왼쪽 한 행에 한문 원문에 한글로 구결을 단 구결문을 두었다. 구결문의 본문은 큰 글자 한 행, 구결은 작은 글자 쌍행으로 하였다. 그렇게 하나의 대문이 완료되면 그 뒤에 행을 바꾸어서 중간 글자로 언해문을 두었는데 한글만으로 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책으로는 1496년에 간행된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본과 『야운자경서』(1577년 간행, 송광사판) 등이 있다. 주006)

안병희(1992:399) 참조.
그 내용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07)
책에는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한글 구결의 경우 작은 글자 2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불가피하여 한 줄로 옮겨 쓰고 작은 글자로 적었다.

3) ㄱ. 안여의륜집겨ᇰ호니 운호ᄃᆡ 약인이 셔ᇰᄎᆔᄎᆞ법문쟈ㅣ 〈1ㄱ〉

ㄴ. 按如意輪集經호니 云호ᄃᆡ 若人이 成就此法門者ㅣ 〈1ㄱ〉

ㄷ. 여의륜집을 안찰호니 니샤 다가 사이 이 법문을 일올 쟤 〈2ㄱ〉

(3ㄱ)은 구결문의 한글 독음만 표기한 것으로 책에서는 구결문의 오른쪽에 두었다. (3ㄴ)은 구결문인데, 본문 원문은 한자로 썼으나 구결은 한글로 달되, 작은 글자 쌍행으로 표기하였다. 위치는 한글 독음문의 왼쪽이어서 읽는 순서로는 후순위이다. (3ㄷ)은 한글 언해문인데 모든 문장을 한글만으로 표기했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위 제시문의 맨 뒤에 오는 주격조사 ‘ㅣ’를 본문에서는 한글 독음문과 구결문 모두 선행명사와 분리 표기를 한 데 비해 번역문인 언해문에서는 통합 표기를 했다는 점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26장 앞면 6행부터 언해문의 끝인 40장 앞면 2행까지는 본문에 구결을 달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 오른쪽 역시 구결 현토 없는 독음문을 배치하여 앞쪽 부분의 번역 양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 ㄱ. 옴ᄌᆞ렴텬도쥬ᇰᄉᆡᇰ죠ᇰ결파훼 마ᄌᆞ렴슈라도듀ᇰᄉᆡᇰ죠ᇰ결파훼 〈26ㄱ〉

ㄴ. 唵字念天道衆生種決破壞 嘛字念脩羅道中生種決破壞 〈26ㄱ, 26ㄴ〉

ㄷ. 옴 렴면 텬도애 날  일히 업시며 〈27ㄱ〉

  맏 렴면 슈라도 에 날  일히 업시며 〈27ㄱ〉

ㄹ. 옴자(唵字)를 염(念)하면 천도(天道)에 생겨날 씨를 일정히 없어지게 하며,

  마자(嘛字)를 염(念)하면 수라도(脩羅道) 중에 생겨날 씨를 일정히 없어지게 하며,

위의 (4ㄱ), (4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글 구결의 현토 없이 원문만을 제시했다. 그 다음에는 ‘옴마니반몌훔’ 각각에 해당하는 독음문 1행과 원문 1행이 모두 끝나면, 곧 도합 12행이 끝나면 (4ㄷ)과 같이 번역문인 언해문을 둔 것이다. (4ㄹ)은 역주서에서 현대어역한 내용이다.

이런 점 때문에 역주서에서는 단락별로 한글 독음문의 내용을 모아서 먼저 제시한 후 같은 대문에 해당하는 구결문을 두고, 또한 같은 대문에 속하는 언해문을 두는 순서로 제시하고 이를 현대어역한 후 그 밑에 주석을 두는 형식을 취했다.

Ⅲ. 국어학적 특성

앞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은 16세기 중엽에 간행되었다. 다른 불경 언해본 책들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방점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번역의 형식에서도 여타의 불경 언해서들과는 차이가 난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인 15세기 중·후반 무렵에 간행되었던 책들과 16세기에 간행되었던 불경 언해서들에서 대체로 방점 표기를 유지해 왔던 점에 비추어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보다 12년이나 앞서 1548년에 강화도 정수사에서 간행된 『십현담요해』 언해본에서 이미 방점 표기의 폐지가 전면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과 아울러 특기할 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변화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음으로 끝나는 명사 말음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통합할 경우, 이전 시기에는 대체로 연철 표기를 해 왔으나 이 책에서는 분철 표기의 확대를 볼 수 있다. 또한 용언의 어간 말음이 자음인 경우,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를 만나면 대체로 연철 표기를 해 왔고, 이 책에서도 그 원칙이 지켜졌으나 어간 말음이 ‘ㄹ’인 경우에는 분철 표기한 예가 상당수 보인다. 결론적으로 형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보이는 내용이다.

2) 음운 중 ‘ㅿ’은 두 예에서만 보이고, ‘ㆁ’은 종성에서만 쓰였다. 각자병서는 ‘ㅆ’만 보인다.

3) 접속조사 ‘과/와’와 공동격조사 ‘과/와’는 선행명사의 말음과 관계없이 ‘과’만 쓰였다. 도구 부사격조사는 선행명사의 말음이 유음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오로’를 썼다. 겸양법 선어말어미의 사용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4) 진언이어서 대부분의 문장이 평서형으로 단조로운 편이다.

역주에서 비중을 두고 진행했던 몇몇 사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역주를 수행하면서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에서 벗어났거나 번역에서 오류가 보이는 내용에 대해 가능한 한 역주에 반영하여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형태를 괄호 안에 넣어 표시를 해 두었다.

2) 형태 분석은 중세국어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의 범위 내에서 진행하였다. 문법 용어도 대체로 학교문법에서 사용하는 명칭들을 사용하였다.

3) 조사나 어미들 중 당시의 일반적인 문법 현상과 부합하지 않는 형태에 대해서는 이를 바로 잡아서 역주를 진행했다.

4) 이 책에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어휘가 몇몇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뒤 문맥을 분석하여 합당한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5) 언해에서 사용한 어휘 중 현대에 이르러 의미의 변화가 크지 않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살려서 그대로 쓰고자 하였다. 굳이 용어를 쓴다면 ‘등량(等量)의 이식(移植)’에 비중을 두고자 했다.

6) 이 책은 불교 관련 문헌이어서 진언(眞言)과 관련된 전문용어나 불교관련 용어가 상당수 나온다. 이런 전문용어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쉽게 풀어서 옮겼다.

이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은 16세기 중엽의 국어사 연구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중세 한국어 연구 자료의 대부분은 15세기 문헌 자료이고, 16세기 자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16세기 자료는, 15세기 자료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관판(官版) 일변도라는 한계는 넘어섰지만 현전 자료가 많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독특한 번역 양식도 그렇지만 상대적인 희소성으로 인해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적절한 활용으로 국어사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김무봉(2015), 『훈민정음, 그리고 불경 언해』, 역락.

남경란(2005), 「육자선정의 일고찰」, 『배달말』 37집, 배달말학회.

박진호(2009), 『십현담요해』 언해본에 대한 국어학적 고찰, 『성철대종사 소장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의미』,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대한불교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안병희(1977), 「중세어 자료 ‘六字神呪’에 대하여」, 『이숭녕선생 고희기념 국어국문학논총』, 탑출판사.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 지성사(재수록).

하정용(2009), 해인사 백련암 소장 『십현담요해』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 『성철대종사 소장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의미』,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대한불교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대한불교종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2009), 『십현담요해』 언해본(영인자료),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영험약초·수구영험·오대진언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진언(眞言)은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적어서 외우는 어구(語句), 곧 주문(呪文)을 이른다. 번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이에게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 아울러 신성성(神聖性)을 온전히 간직하기 위함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짧은 구절로 된 것을 ‘진언(眞言)’이나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陁羅尼)’, 또는 ‘대주(大呪)’라고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명(冊名)에 따라 ‘진언(眞言)’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오대진언(五大眞言)≫은 조선조 성종 16년(成化 21, 乙巳, 1485 A.D.)에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가 일반 민중들이 진언을 쉽게 익혀서 암송(暗誦)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범문(梵文)의 한자 대역에 다시 정음(正音)으로 음역(音譯)을 붙여서 간행한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오대(五大)’라는 서명(書名)으로 인해 흔히 「사십이수진언(四十二首眞言)」,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陁羅尼)」, 「수구즉득다라니(随求即得陁羅尼)」,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등 다섯 편의 진언이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자재보살근본다라니(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한 편이 더 있어서 모두 6편을 수록해 놓은 책이다. 주001)

여섯 편 진언의 갖은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관세음보살사십이수진언(觀世音菩薩四十二首眞言) ②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신묘장구대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圎滿無礙大悲心神妙章句大陁羅尼) ③천수천안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④불설금강정유가최승비밀성불수구즉득신변가지성취다라니(佛說金剛頂瑜伽最勝祕密成佛随求即得神變加持成就陁羅尼) ⑤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⑥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이 책의 체제는 진언을 범자(梵字)로 적어서 맨 오른쪽에 놓고, 왼쪽에 행(行)을 나란히 하여 정음 음역을 둔 후, 다시 그 왼쪽에 한자를 배치하는 방법을 취했다. 책의 체제를 보면 3행씩 짝을 맞추어 범자, 정음, 한자 진언을 병치(竝置)할 수 있도록 판식(板式)의 조정이 있었음을 확인 수 있다. 진언만 있는 부분은 유계(有界) 9행이고, 진언의 제목과 주(註)가 있는 「사십이수진언」은 2행을 제외하고 진언을 나란히 실을 수 있도록 유계 8행으로 한 점 등이 그러하다. 모두 민중의 송습(誦習)을 위함이라는 간행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처라고 본다.

맨 뒤에 있는 「불정존승다라니」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편에 대해 한역(漢譯)을 한 이는 당(唐)나라의 승려 불공(不空)이다. 다만 마지막에 있는 「불정존승다라니」 한 편만은 인도 계빈국(罽賔國)의 승려 불타파리(佛陁波利)가 한 것으로 전한다. 이 한자 진언을 정음 진언으로 옮긴 이는 발문(跋文)을 쓴 학조(學祖)가 아닐까 한다. 범자 진언이 되었건, 한자 진언이 되었건 진언을 정음으로 옮기는 불사(佛事)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범자(梵字)와 한자(漢字) 모두에 능통한 실력자가 아니면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당대의 학승(學僧)인 학조일 가능성이 높다.

각 진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 앞면부터 23장 뒷면까지는 「사십이수진언」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은 다른 다섯 편의 진언들과는 달리 42수(首)에 달하는 진언을 차례로 배열하였으되, 각 면(面)의 위로부터 1/3쯤 되는 곳까지 해당 진언을 암송(暗誦)할 때의 손 모양을 그린 수인도(手印圖)를 두었다. 24장 앞면 첫 행부터 29장 앞면 3행까지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이 진언을 포함한 다섯 편에는 수인도 없이 진언만을 두었다. 29장 앞면 5행부터 32장 앞면 6행까지는 「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가 있다. 32장 앞면의 7행부터 59장 앞면 7행까지는 「수구즉득다라니」가 있고, 59장 앞면의 9행부터 92장 뒷면 3행까지 「대불정다라니」가 있다. 그리고 92장 뒷면의 4행부터 97장 뒷면 2행까지 「불정존승다라니」를 두었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이 책의 98장 앞면 1행부터 106장 뒷면 끝까지 한문으로 된 「영험약초(靈驗略抄)」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07장 앞면에는 쓴 이가 불분명한 후기(後記) 성격의 글이 있고, 다시 2장에 걸쳐 학조의 발문(跋文)이 있다. 주002)

이 역주의 맨 뒤에 ‘후기(後記)’와 학조의 ‘발문(跋文)’을 번역하여 실어 놓았다. 번역에 도움을 주신 동국대 김갑기 교수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원간본으로 알려진 월정사본(月精寺本)에는 발문의 뒤에 18장에 달하는 언해본 「영험약초」가 실려 있다고 한다. 주003)
상원사에서 발굴된 책인 월정사본 「오대진언」에 대해서는 안주호(2003, 2004) 참조.
판심 서명은 ‘五大’이다. 장차는 한문본 ‘영험약초’에까지 이어져 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서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사십이수진언(四十二首眞言) : 1장 앞면 1행~23장 뒷면 8행(상단에 手印圖 있음)

2)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陁羅尼) : 24장 앞면 1행~29장 앞면 3행

3) 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 29장 앞면 5행~32장 앞면 6행

4) 수구즉득다라니(随求即得陁羅尼) : 32장 앞면 7행~59장 앞면 7행

5)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 59장 앞면 9행~92장 뒷면 3행

6)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 92장 뒷면 4행~97장 뒷면 2행

7) 영험약초 한문본(대비심다라니) : 98장 앞면 2행~100장 뒷면 2행

8) 영험약초 한문본(수구즉득다라니) : 100장 뒷면 3행~103장 앞면 3행

9) 영험약초 한문본(대불정다라니) : 103장 앞면 4행~104장 뒷면 9행

10) 영험약초 한문본(불정존승다라니) : 105장 앞면 1행~106장 뒷면 9행

11) 영험약초 한문본 후기(後記) : 106장 앞면 일부(1~6행)

12) 학조(學祖)의 발문(跋文) 1장 앞면 1행~2장 뒷면 1행

13) 영험약초 언해본 : 대비심다라니, 수구즉득다라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의 순으로 4편 수록, 1장 앞면 1행~18장 뒷면 2행

각 진언별 편철(編綴) 순서는 맨 앞에 ‘曰’ 자로 끝나는 진언의 명칭이 갖은 이름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계청문(啓請文)을 둔 후, 범자, 정음, 한자의 순으로 진언을 적어 나갔다. 다만, ‘신묘장구다라니’와 ‘근본다라니’ 앞에는 계청문이 없다. 모두 ‘대비심다라니’에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오대진언(五大眞言)≫은 여러 종류의 이본이 현전하는데, 이 중 1996년에 상원사의 목조 문수동자 좌상 복장 유물로 발굴된 월정사본(보물 793-5호)을 원간본으로 보고 있다. 주004)

상원사에서 복장 성물로 발굴된 책을 월정사본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지금은 월정사의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간본 중 하나인 ‘성암문고’의 책은 1장부터 23장까지만 있는 낙장본(落張本)이다. 그 외의 중간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리산 철굴(鐵堀, 1531 A.D.) 판본을 비롯하여 수종이 현전한다.

이 역주의 저본(底本)이 된 책은 간행 연대 미상의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도서번호 貴 D 213.19 다231ㅇ2)이다. 책의 체제 등 전반적인 내용은 원간본에 견줘 큰 차이가 없다. 원간 후쇄본(後刷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언해본 「영험약초」는 없다.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판심(版心)을 중심으로 좌하(左下) 귀 등 일부의 내용은 마멸로 인해 판독이 불가능했던 듯하다. 누군가에 의해 필사, 보완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 보완된 내용은 언어 사실이 원본과 많이 달라져 있어서 이용에 주의가 요구된다. 역주 작업에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책인 충청도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 간행의 책으로 보완을 했다. 주005)

역주에서는 음역(音譯) 위주로 되어 있는 진언의 특성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 진언의 문자는 물론, 방점(傍點) 등도 일일이 대조해서 실었다. 쉽지 않은 입력 및 대조 작업을 꼼꼼하게 해준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의 박대범, 서정호 군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또 힘든 교정 작업을 도와 준 함병호 군과 전기량 양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책은 이른바 숭정본(崇禎本, 崇禎 7년, 1634년 A.D. 간행)이다. 특히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의 40장과 50장은 낙장이어서 모든 내용을 숭정본의 것으로 대체했다.

이 책은 ‘진언집(眞言集)’이다. 민중들의 진언 송습(誦習)을 목적으로 간행된 책이다. 띄어 읽기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문헌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간행된 다른 책들과는 달리 구두점(句讀點) 표시가 매우 정연하다. 띄어 읽기의 자리에는 반드시 둥근 고리 점, 곧 권점(圈點)을 두어 표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두점(讀點)’의 자리에는 글자의 한 가운데에 권점(圈點)을 두었고, 구점(句點)의 자리에는 오른쪽 권점(圈點)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뒤에 붙인 역주의 원문에서는 두점(讀點) 부분은 붙여 쓰기를 했고, 구점(句點) 부분은 띄어쓰기를 했다. 현대국어로의 옮김에서는 진언의 특성을 살려서 구점, 두점 구분 없이 권점(圈點)이 있는 부분은 모두 띄어쓰기를 하였다. 한자 진언에는 따로 구두점 표시가 없어서 정음 진언을 기준으로 띄어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자 진언 중에는 두 글자나 세 글자를 모아서 쓴 이른바 합자(合字)가 있다. 이런 글자는 두 글자의 사이에 연결 표시[^]를 해서 합자임을 밝혔다.

≪영험약초(靈驗略抄)≫는 앞에서 밝힌 대로 진언이 보여주는 이적(異蹟)이나 영험한 일 등을 사실이나 예화(例話)를 중심으로 제시하고 설명한 책이다. 그 대상은 『오대진언』에 실려 있는 여섯 편의 진언 중 「대비심다라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 네 편이다. 중간본 중에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도 있으나 판심서명이 ‘五大’이고, 「오대진언」의 원간본으로 알려진 월정사본의 뒤에 「영험약초」가 합철되어 있으므로, 초간의 연대는 「오대진언」과 같은 해(成化 21년, 乙巳, 1485 A.D.)로 본다. 이 책의 언해체제와 언어사실 등은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불정심다라니경언해」와 흡사하다. 15세기 후반의 언어사실과 언해체제 등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주006)

「불정심다라니경언해」에 대해서는 김무봉(2008) 참조.
두 책 모두 한문본은 목판본으로 되어 있고, 언해본은 활자(活字)인 을해자(乙亥字)로 되어 있는 점 등 비슷한 체제를 보이는 정음 문헌들이다.

이 역주의 저본(底本)은 1550년(嘉靖 29, 庚戌)에 간행된 경상도 풍기의 소백산(小伯山) 철암(哲菴/喜方寺) 판본(板本)이다. 동국대 도서관(貴 D213.19 영 93c2) 등에 수종이 현전한다. 이 책은 「오대진언」과는 달리 단행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1장 앞면부터 18장 뒷면 2행까지 언해본 「영험약초」가 나오고 바로 다음 장에 한문본 「영험약초」가 이어진다. 그런데 언해본 「영험약초」는 장차를 1장부터 새로 시작했다. 한문본은 107장부터이다. 이러한 장차 표시는 「오대진언」 뒤에 편철되어 있다고 하는 원간 그대로이다. 내용도 완전히 일치한다. 후기(後記)와 발문(跋文)도 같다. 판심서명도 ‘五大’로 되어 있다. 곧, 「오대진언」의 뒤에 편철되어 있던 「영험약초」만을 분권한 형식이다. 다른 점은 107장의 후기(後記) 바로 다음 행에 ‘主上三殿壽萬歲’(주상 삼전(三殿)의 만수(萬壽)를 기원합니다.)라는 구절과 ‘嘉靖二十九年庚戌四月日慶尙道豊基地小伯山哲菴開板(성종 21년(1550년) 4월 일 경상도 풍기지 소백산 철암에서 판각본을 내다.)’라는 간기(刊記)가 있어서 중간본임을 보여준다.

≪수구영험≫은 ≪오대진언≫과 ≪영험약초≫의 내용상 합본(合本)에 해당한다. 온전하지 못한 채로 현전하는 책들을 보면 ≪오대진언≫에 나오는 진언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그 뒤에 ≪영험약초≫를 둔 방식이다. 곧 ‘진언’ 한 편과 그에 대당되는 ‘영험약초’ 한 편씩을 모아서 한 권으로 묶은 형식인 것이다. 마치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해서 편찬·간행한 ≪월인석보≫를 연상케 하는 책이다. 물론 간행시기가 달라서 언해체제나 언어사실은 앞의 두 책(‘오대진언’, ‘영험약초’)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정음이 주(主)가 된 책이라는 점이다. ‘진언’의 경우는 물론 ‘영험약초’의 경우에도 한문 원문이 실려 있지 않다.

현전하는 책은 대부분 낙장본(落張本)이다. 선본(善本)으로 공개된 책은 아직 없다. 원간본 중 하나로 짐작되는 「사십이수진언」은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소재 불명이다. ‘성암문고’에 있는 목판본의 책은 「수구즉득다라니」 26장과 「불정존승다라니」 3장 등 모두 29장만 있는 낙장본(落張本)이다. 안병희(1987)에 의해 간행 연대가 1476년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 책은 현실 한자음이 주음된 최초의 문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특히 서명(書名)과 진언명(眞言名), 그리고 계청문(啓請文)에 정음을 먼저 쓰고 그 옆에 나란히 한자를 썼다는 점, 진언을 모두 현실 한자음으로 썼다는 점에서 주목 받을 만한 책이다. 이런 이유로 안병희(1987)에서 한글판 ≪오대진언≫이라 한 것이다. 주007)

이 책의 가치나 간행 연도 등 자세한 내용은 안병희(1987)에 소상하다. 특히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 한자음을 처음으로 썼다는 점 등으로 이 책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쉬운 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선본이 한 책도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전하는 낙장본으로 미루어, 원간본은 「사십이수진언」, 「신묘장구대다리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의 진언과 영험담이 함께 있는 5권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 진언별로 판심서명이 다른 점으로 보아 분권(分卷)으로 간행하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역주의 저본(底本)은 중간본인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충청도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 1569 A.D.) 간행본이다. 표지에는 한자로 ‘随求咒’라 써 놓았다. 모두 29장의 목판본(木版本)이다. 1장부터 26장까지에 걸쳐 「수구즉득다라니」가 있다. 그 중 1장부터 3장까지 계청문(啓請文)이 있고, 4장부터 17장까지는 「대수구대명왕다라니」 등의 다라니를 정음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현전 중간본들은 모두 5장부터 8장까지가 낙장이다. 이 책의 판목이 근대까지 남아 있었음을 시사(示唆)하는 부분이다. 18장부터 26장까지는 ≪영험약초≫에 있는 「수구즉득다라니」와 동일(同一)한 내용을 번역해서 수록하고 있다. 다만 번역과 표기 등에서는 간행 연대가 다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제목은 「수구영험」이다. 정음만으로 표기하여 ‘슈규험’이라고 했다. 책의 내용 중 진언명(眞言名)과 진언의 구두(句讀)에는 권점(圈點) 표시를 해서 구분했다. 모두 문(文)의 중간 위치에 권점을 두었다. 다른 문헌의 경우에서는 두점(讀點)의 위치이다. 구점(句點) 표시는 없다. 뒤에 붙인 역주에서는 이를 그대로 옮기되 현대어로의 옮김에서는 띄어쓰기를 했다.

27장 앞면부터 29장 앞면까지는 정음으로 쓴 ‘대비심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27장의 제1행에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한자로만 쓴 권두서명 ‘佛頂尊勝陀羅尼’가 있다. 판심서명은 ‘千手’이다. 이는 수록되어 있는 진언과 권두서명이 서로 달라서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희(1987)에 의해 복각에 사용된 판밑본의 문제로 지적된 바 있다. 잔존하는 목판을 적당히 손질하여 판각한 결과로 본 것이다. ≪영험약초≫와 같은 원전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언어사실과 체제가 다른 점 등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따라서 역주에서 원문을 옮길 때는 권점과 방점 등을 있는 그대로 입력했다.

위에서 살핀 대로 영험약초·수구영험·오대진언 등 3본의 책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모두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소중한 한글 자료들이다. 국어사는 물론, 서지학이나 불교학 연구에도 이용 가치가 큰 책들이다. 이런 이유로 뒤에 역주(譯註)를 붙인다. 관련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무봉(2008), 『역주 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남경란(1999), ‘〈오대진언〉·〈영험약초〉의 국어학적 연구’, 『한국전통문화연구』(대구 효성가톨릭대학) 13집.

안병희(1979),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 3, 서울대 도서관.

안병희(1987), ‘한글판 〈오대진언〉에 대하여’, 『한글』 195호, 한글학회.

안주호(2003), ‘상원사본 〈오대진언〉의 표기법 연구’, 『언어학』 11-1, 대한언어학회.

안주호(2004), ‘〈오대진언〉에 나타난 표기의 특징 연구’, 『한국어학』 25, 한국어학회.

≪신선 태을 자금단≫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간행 경위

≪신선 태을 자금단≫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1책으로서, 고 안병희 교수가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간본을 해제와 함께 계간 ≪서지학보≫ 6호(1991년)에 영인하여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학계에 알려지게 된 의서(醫書)이다. 신선 태을 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 이하 「자금단」이라 약칭한다.)이란 명칭은 서명(書名)이면서 동시에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약명(藥名)이기도 하다. 이 책은 환약인 자금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재와 제조 방법 및 사용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책의 저자인 이종준(李宗準, ?~1499)은 책의 끝부분에서 간행 동기를 비교적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 그는 이 약을 여러 사람에게 처방하여 놀랄 만한 효험을 얻었기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그의 내제(內弟)인 진사 권숙균(權叔均)의 풍종(風腫, 풍습으로 몸이 붓는 병), 흥해(興海) 군수 강백진(康伯珍)의 폭종(暴腫, 갑자기 부어오르는 병증), 손 만호(孫萬戶)의 중풍, 영천(永川) 군수 윤수천(尹壽泉)의 첩이 걸렸던 복하(腹瘕, 여자의 뱃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병) 등과 같은 병을 모두 자금단으로써 고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맨 뒷부분에서 “… 在家出入不可無此藥也 玆不可不傳 且公卿間坌集 而求難以一一酬應 乃書顚末幷圖山茨菰入梓流布云”(집에 있을 때나 출입할 때 이 약이 없으면 안 된다. 이에 부득불 전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높은 벼슬아치들이 모여들어 약을 구해도 일일이 요구에 응하기가 어려우므로 곧 약에 대한 모든 것을 쓰고 산자고의 그림을 그려 책을 편찬 유포한다.)이라고 하여, 저자는 자금단 약이 신통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가 없어 그 대신 책을 펴내게 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고는 뒤이어 “皇明弘治丁巳端陽節 慵齋病叟李宗準仲鈞經驗刊施”라는 간기가 있고, 그 다음에 한 줄로 된 ‘慵齋珍琓(陽刻), 仲鈞(陰刻), 核眼之記(陽刻), 偉人救急(陰刻)’이라는 네 개의 인기(印記)가 차례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이종준이 1497년(연산군 3)에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현존하는 15세기 문헌 자료 중에서는 맨 마지막의 국어사 자료가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의 15세기 국어 문헌 거의가 관판(官版)의 성격을 띠는데 비해 이 책은 민간에서 간행된 것이어서 15세기 국어의 또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독특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2. 체제 및 형태

≪신선 태을 자금단≫은 단권의 목판본으로서, 첫 장에는 산자고(山茨菰)의 그림이 있는데 앞면에는 장묘(長苗), 개화(開花), 뒷면에는 잔화(殘花), 결자(結子), 엽고(葉枯) 상태의 모양을 각각 그려 놓고 있다. 그 다음 장에서 책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쓰고 나서 한문으로 된 본문을 시작하고 있다. 본문이 20장이어서 책 전체는 첫 장의 그림까지 합쳐 모두 21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차(張次)는 본문부터 시작해서 20ㄱ쪽까지 있다.

본문에서는 자금단이라는 환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5가지의 약재와 환약의 제조법, 그리고 환약의 사용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중에서 약재와 제조법에 대한 설명은 본문의 8ㄴ의 8행까지 이어지며, 이 부분에서는 한글로 된 언해가 없이 한문으로만 되어 있다. 간혹 본문 중에서 특정한 약재에 대하여 한문 다음에 고유어 이름을 한글로 달아 놓은 것이 있는데 다음의 예가 그 전부이다.

老鴉蒜鄕名 가마귀물옷(2ㄱ), 山茨菰下諺書 물옷(2ㄴ), 鵲蒜 가마(2ㄴ) 百蟲倉生膚木鄕名 븕나무(4ㄴ).

그러고 나서 8ㄴ의 9~10행에 “別具湯使于後 : 이후 각별히 므레 프러  법을 초 내노라”라고 해서, 여기서부터는 환약의 사용법에 대한 설명이 한문과 언해문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17ㄴ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성암고서박물관의 소장본은 13ㄱ, 13ㄴ, 14ㄴ이 낙장이다. 그래서 ≪서지학보≫ 6호에 게재된 영인본에는 낙장 부분을 일본 교토대학이 소장한 사본으로 보완해 놓음으로써 우리는 전문(全文)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본의 보사자(補寫者)가 중세 한국어에 대한 소양이 거의 없는 사람인 듯하여 필사에 많은 오류를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을 ‘숟’으로 표기해 놓은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책은 반곽(半郭)의 크기가 세로 15.8cm, 가로 12.1cm이고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본문에는 계선(界線)이 있으며 1면에 10행, 매행 15자씩이다. 판심은 백구(白口)에 흑어미(黑魚尾)가 마주 놓인 형식이다. 그리고 판심제는 없고 장차만 나타나 있다. 본문 중 한문만으로 된 약재와 제조법 부분에서 제목(서명과 약재명)은 첫 간부터 썼으나 이하 설명 부분에서는 배자(排字)를 조금씩 달리 하고 있다. 즉, 중국 의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설명하는 부분(한문)은 매행 첫 자를 띄우고 쓰는 14자 배자를 하였고, 저자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기술한 ‘今按’(이제 보니) 부분은 매행 두 자를 띄우고 쓰는 13자 배자를 하였다. 그리고 언해문이 붙은 사용법 부분에서는 한문 본문을 첫 간부터 시작해서 15자로 쓰고 언해문은 한 자 낮춰 14자로 썼다. 여기서도 ‘今按’ 부분은 한문이나 언해문 모두 똑같이 두 자를 낮춰 매행 13자로 쓰고 있다. 언해 부분이 끝나고 17ㄴ의 7행부터 다시 시작되는 마지막의 한문 부분은 전반부의 한문에서 보여 주었던 형식대로 매행 한 자를 낮춰 쓰고 ‘今按’ 부분 역시 한 자를 더 낮춰 13자로 쓰고 있다.

3. 저자 및 내용

이 책의 저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종준(李宗準, ?~1499)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일찍이 안병희(1991)에서 자세히 소개하였기에 여기서는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해에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한다.

李宗準은 字 仲鈞, 號 傭齋다. 號로는 그 밖에 傭軒, 浮休子, 尙友堂, 藏六堂, 太庭逸民이 있다. 慶州人으로서,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한 집안 출신인데 아버지 時敏도 1453년(端宗 1) 生員, 進士에 합격하였으나 金宗瑞 등의 사건에 연루되어 官界의 길이 막혀 安東 琴溪村에 내려와 살았으며, 이때 저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文才가 뛰어났으나, 金宗直의 門人으로서 훌륭한 학자와 사귀면서 文章과 書畵에 더욱 이름을 날리었다. 1498년(燕山 4)에 일어난 戊午士禍로 이듬해 鞠殺의 변을 당하였기 때문에 文籍이 흩어져서 生平 등이 정확하지 않다. 文集인 傭齋遺稿가 후손에 의하여 單券으로 1824년(純祖 24) 간행되었으나 내용이 극히 소루하다. 거기 실린 行狀도 집안에 전래되던 것으로 文字의 欠落이 있었다고 한다. 行狀과 그 밖에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1477년(成宗 13) 進士가 되고, 1485년 文科에 甲科로 합격하였다. 1488년 湖當으로 선발되어 賜暇讀書의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뒤로 副修撰, 兵曹佐郞, 慶尙道都事, 兵曹正郞, 義城縣令, 舍人의 벼슬에 있었다. 1498년 士禍로 杖八十에 北界로 귀양을 가게 되어 端川磨谷驛을 지나면서 驛舍 벽 위에 宋나라 李師中의 詩를 썼는데, 그것으로 결국 죽게 되었다. 肅宗 때에 弘文館副提學으로 追贈되고 安東의 鏡光書院 등에 祭享된 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환약 자금단의 약재와 제조법, 그리고 사용법에 관한 것이다. 먼저 본문 첫 장을 보면, 자금단 약의 다른 이름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唐陳自明宋遂江李迅寶皆名神仙追毒元又名聖授丹又名神仙解毒萬病元大明玄洲道人涵虛子臞仙謂之玉樞丹止謙道人王應기作今名唐人謂之錠子藥

今按唐人凡作錠藥皆謂之錠子藥東人不知以此名爲錠子藥可笑(1ㄱ)

여기서 우리는 자금단 약의 이칭(異稱)으로, 신선추독원(神仙追毒元), 성수단(聖授丹), 신선해독만병원(神仙解毒萬病元), 옥추단(玉樞丹) 등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今按’이라 해서 약명에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나라 사람은 정약(錠藥)이라고 하는 것을 대개 정자약(錠子藥)이라고 이르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이를 모른 채 약 이름을 정자약이라고 하니 우습도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항목마다 ‘今按’을 통해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일은 전체에 걸쳐 베풀어지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하고 있는 약명 항목의 본문 바로 다음부터는 자금단의 약재인 산자고(山茨菰)로 시작해서 천금자(千金子), 문합(文蛤), 홍아대극(紅牙大戟), 사향(麝香) 등의 차례로 한 가지씩 자세히 설명한다. 5가지 약재마다 중국 의서에 근거하여 설명을 한 다음에 앞에서 본 대로 ‘今按’이라 하여 저자가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바탕한 설명을 제시해 놓았다.

5가지 약재를 간단히 소개하면, 먼저, 산자고는 높이가 30cm 정도 되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일명 금등롱(金燈籠)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천금자는 높이가 50~70cm 정도 되는 대극과의 두해살이풀로서 일명 속수자(續隨子)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합은 붉나무에 생긴 혹 모양의 벌레집을 말하며, 기침, 설사, 출혈증의 약재로 쓴다. 일명 오배자(五倍子)라고도 한다. 또한, 홍아대극은 꼭두서니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봄에 붉은 싹이 나오기 때문에 흔히 홍아대극이라고 부른다. 끝으로, 사향은 높은 산지에서 사는 사향노루의 사향 선(腺)을 건조시켜 얻는 분비물이다. 사향은 생약으로서 강심, 흥분, 진경제(鎭痙劑)로, 또 기절하였을 때 정신이 들게 하는 약으로 쓰였다.

이상에서 소개한 5가지 약재로써 환약인 자금단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今按’ 부분이 아닌 중국 의약서에 근거한 설명 부분이다.

山茨菰去皮淨焙二兩(1ㄱ)

千金子一名續隨子去赧硏去油取霜秤一兩(3ㄴ)

文蛤一名五倍子搥破洗焙淨秤三兩(4ㄴ)

紅牙大戟去蘆洗淨焙乾秤一兩半(5ㄱ)

麝香三錢別硏(5ㄴ)

右除千金子麝香外三味爲細末却入硏藥令勻用糯米煮濃飯爲糊於木臼內杵千餘下分爲四十粒合時宜用端午七夕重陽日或遇天德月德日亦佳(7ㄴ)

이에 의하면 환약을 제조하기 위한 약재는, 껍질을 벗기고 불기운에 말린 산자고 두 냥, 역시 껍질을 벗겨 갈아서는 기름을 제거하고 하얗게 만든 천금자 한 냥, 부수어 씻고 약한 불기운에 말린 문합 석 냥, 싹이 나오는 머리 부분을 없애고 깨끗하게 씻어 약한 불기운에 말린 홍아대극 한 냥 반, 따로 갈아 놓은 사향 서 돈 등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먼저 천금자와 사향을 제외한 나머지 3가지 약재를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든다. 여기에다 천금자와 사향을 넣고 고루 섞어서 걸쭉한 찹쌀 미음에 개어 40알을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환약은 단오나 칠석, 또는 9월 9일에 만들어야 하는데 천덕일(天德日)이나 월덕일(月德日)에 만드는 것도 좋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약재와 제조법 부분이 끝나면 이제는 한문과 언해문으로 된 이 약의 사용법 부분이 이어진다. 이에는 자금단 약을 사용하거나 복용해야 할 질환들을 들고 그 질환마다 약의 사용 및 복용 방법을 설명하였다. 질환으로는 일체의 약독 고독 장기(藥毒蠱毒瘴氣), 육독(肉毒), 음식독(飮食毒), 악창(惡瘡), 황종(黃腫), 학질(瘧疾), 자액(自縊), 익사(溺死), 화소(火燒), 간질(癎疾), 중풍(中風) 등을 들고 있다. 이들 질환에 따라 사용하는 방법에는 환약을 환부에 바르기도 하고 먹기도 한다고 하였다. 먹을 때는 생강이나 박하즙에 또는 정화수에 갈아서 먹기도 하고, 마른 박하를 진하게 달인 물에 갈아서 먹어도 좋다고 하였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 및 음운

(1) 연철·분철

중세 국어의 정서법은 이른바 연철법(連綴法)으로서, 이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끝자음을 뒤에 오는 모음의 조사나 어미의 초성으로 내려 적는 표기법이다. 이러한 표기법의 원칙이 ≪신선 태을 자금단≫에도 잘 지켜지고 있으나 그것은 용언의 경우에 해당되고, 체언의 경우에는 상당 부분에서 체언과 조사를 각각 분리해서 표기하려는 분철법(分綴法)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용언의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프러(8ㄴ), 라(9ㄱ), 드러(10ㄴ),

주근(9ㄱ), 머그면(10ㄱ), 혀근(10ㄴ),

구더(9ㄴ), 어드나(12ㄱ), 세워더(11ㄱ),

마(13ㄴ)

위에서 보듯이 용언의 경우는 연철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체언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그것은 받침의 자음에 따라 분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자음별로 살펴보면, 마지막 받침이 ㄱ, ㄴ, ㅁ, ㅂ일 때는 연철 분철이 대등하게 나타난다.(ㄷ 종성은 예가 없어 제외하였다.)

약이(9ㄴ), 약을(10ㄱ), 약은(17ㄴ), 샤독이(11ㄴ), 쥭을(17ㄱ), 쥭이(17ㄱ)

cf. 뵈앗븐 저긔(9ㄴ),  기(13ㄴ), 녀그로(14ㄱ)

한으로(9ㄴ), 긔운으로(11ㄱ), 신이(13ㄱ),  번의(16ㄱ)

cf. 누니(15ㄴ), 현 버(16ㄴ)

심이(12ㄱ-ㄴ), 사으란(13ㄴ), 효험이(16ㄱ), 효험은(17ㄱ)

cf. 미(11ㄴ) 메(13ㄴ), 바(15ㄴ), 말미(15ㄴ)

법을(8ㄴ), 즙에(16ㄴ)

cf. 이비(15ㄴ), 이베(13ㄴ), 겨지븐(17ㄴ)

그러나 체언의 끝자음이 ㄹ, ㅅ, 그리고 유기음일 경우에는 연철 일변도로 표기하고 있다. 그 밖에 ㅁ 종성이라도 동명사의 ㅁ일 경우에는 연철 표기만을 보여 준다.

므레(8ㄴ), 손바래(10ㄱ), 수레(12ㄴ), 입시우리(15ㄴ), 브레(14ㄱ), 손바리(15ㄴ)

cf. 대양혈에(15ㄱ)

귓거싀(13ㄱ), 니를 거시니(17ㄱ)

가치(10ㄱ), 니플(11ㄱ),  나(16ㄱ)

져구믈(11ㄱ), 거름 거로매(15ㄴ), 머구미(16ㄴ), 초아 두미(17ㄱ)

8종성 중에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ㆁ에 대해서는, 다른 종성의 경우와 달리 이미 15세기 국어에서 연철하지 않고 종성으로 쓰는 분철이 정착된 실정이어서 여기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이상에 제시된 표기 용례를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분철의 실현이 거의 한자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헌 자료에서는 한자어도 모두 한자 없이 한글로만 표기하고 있어 표기상으로는 고유어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연철 분철의 시행에 있어서는 한자어와 고유어를 철저히 구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실제로 분철한 경우에 고유어는 전체를 통해 단 3개(한으로, 심이, 사으란)밖에 없고, 반대로 연철한 용례 중에서 한자어는 체언 용언을 통틀어 단 1개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ㄹ 종성의 경우에는 오직 연철법만이 허용되는 대세 속에서도 유일하게 등장한 한자어에 대해서만은 분철이 되고 있는 것을 볼 때(대혈에〈15ㄱ〉) 더욱 분명해진다.

(2) 병서자(並書字)

각자병서(各自並書)는 ≪원각경 언해≫(1465)에서부터 전면적으로 폐지된 이후 이 책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각자병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원각경 언해≫이전이라면 각자병서가 쓰였을 곳이 대개 다음의 예들이 될 것이다.

말미(15ㄴ), 빌시라(9ㄱ), 니를 거시니(17ㄱ), 술 비즐 제(12ㄴ), 욀 줄(16ㄴ)

그리고 합용병서(合用並書)는 ㅅ계, ㅂ계, ㅄ계가 초성에서 다 그대로 쓰였다.

메(13ㄴ), 라(13ㄱ)

빌시라(9ㄱ), 며(10ㄴ), 마(15ㄴ), 그칠 (17ㄴ)

더니(12ㄴ)

나디 아니야신(10ㄱ)

(10ㄴ)

(12ㄱ)

자료의 제약으로 ㅼ, ㅳ, ㅶ의 용례는 찾을 수 없었지만 ㅴ, ㅵ이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ㅼ, ㅳ, ㅶ의 사용에도 변동이 없었을 것이다.

(3) 종성의 표기

15세기 국어에서 종성의 ㅅ과 ㄷ이 혼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마지막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ㄷ종성이 쓰여야 할 자리에 ㅅ이 쓰인 혼기가 발견된다. 그것은 ‘굳-[固]’이 ㅅ 두음을 가진 어간과 합성어를 형성하면서 ‘굿-’으로 변한 예이다. 이는 다분히 ㅅ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환경에서 쓰인 ‘굳-’은 어간 말음 ㄷ을 그대로 유지한 예가 이 책에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귀 굿세니와(15ㄴ).

cf. 심히 구더(9ㄴ), 말미 굳며(15ㄴ)

종성에서 주목되는 현상이 한 가지 발견된다. 그것은 8종성법을 벗어난 표기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제외한 모든 문헌에서 철저히 지켜오다시피 한 8종성법을 넘어선 유기음 종성 표기가 하나라도 등장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일한 낱말에 대해서 같은 책의 한 쪽에선 8종성법에 따른 표기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귀밑 대혈에 브티라(15ㄱ).

cf. 귀믿머리 알니란(15ㄱ)

그리고 용언의 어간 말음 ㅎ은 어떤 경우에도 종성으로 표기되는 일이 없다. 그 중에서 ㅅ 앞의 ㅎ은 ㅅ으로, ㄴ 앞의 ㅎ은 ㄷ으로 바뀌어 표기되었는데, ㅎ을 종성에서 ㄷ으로 표기한 예가 나타난다.

됻다(12ㄴ), 됻니(12ㄴ).

cf. 됴리라(9ㄴ)

또한 종성으로 쓰인 합용병서로는 사이ㅅ이 덧붙은 예를 제외하고 ㄺ, ㄼ이 보인다. 이는 훈민정음 초기 문헌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9ㄱ), 엷고(10ㄱ), 여듧 가짓(10ㄴ)

(4) ㅿ, ㆁ

ㅿ은 고유어나 한자어에서 동요 없이 표기되고 있다.

여(9ㄱ), 이야(10ㄱ), 미(11ㄴ), 브며(11ㄴ), 거어든(12ㄱ)

머거(12ㄴ), 두(17ㄱ)

독(肉毒, 9ㄱ), 발엸(發熱病, 11ㄱ)

ㆁ도 종성에서 일관되게 쓰이고 있으나 일부에서 ㅇ으로 표기된 곳이 보인다. ㅇ으로 표기한 예가 주로 한 곳에 집중되어 있고, 또한 필사한 부분에서 보이고 있으므로 이는 오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창(10ㄱ), 죽 병과(10ㄴ), 병드러(10ㄴ), 븟 병에란(10ㄴ), 졍신(13ㄱ)

(5) 어두음 ㄹ

고유어나 한자어에서 어두의 ㄹ은 어떤 모음 위에서도 ㄴ으로 교체되거나 탈락됨이 없이 어두에 그대로 쓰고 있다.

라귀(9ㄱ), 리질(痢疾, 10ㄴ)

(6) 한자음과 방점

이 문헌의 권수제(卷首題)로 써 놓은 ‘神仙太乙紫金丹 신션태을금단’에서만 한자와 한자음을 병기하였을 뿐 그 이외의 한자어에 대해서는 한자와 한자음을 병기한 곳이 전혀 없다. 언해문에서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권수제만 보아도 이 문헌에 쓰인 한자음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15세기 한자음의 규범이었던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폐기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 방점도 이 문헌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 문법

(1) 보조사 ‘-/’과 ‘-란’

‘-/’과 ‘-란’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보조사로서, 설명의 대상으로 앞세우거나 대조의 뜻을 나타내거나 할 경우에 쓰인다. 그러면서 허웅(1975:389)은 단독으로 체언에 붙을 때 ‘-/’은 주어에 붙는 것이 대부분이고, ‘-란’은 목적어에 붙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그보다 다른 면에서 양자 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음이 주목된다. 우선 양적으로 ‘-란’은 ‘-/’보다 2배 정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면 ‘-란’과 ‘-/’은 각각 어떤 조건일 때 쓰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 예문을 보기로 한다.

며 더워  답답며  부러 만야 브며 과글이 목 리브며 목 안히 브 에란(11ㄴ)

얌과 가히와 지네와 일쳬 모딘 벌에 믈이니란(14ㄱ)

노 셔 려디니와 다티니와 업더디거나 니란(14ㄴ)

이 약 머그리(16ㄱ)

아기  겨지븐(17ㄴ)

위의 예문을 통해서 양자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즉, 체언이나 체언에 직접 관련된 말이 둘 이상 연결되거나 나열될 경우에는 ‘-란’이 쓰였고, 그렇지 않고 하나의 체언일 때는 그 다음에 ‘-/’이 연결되었다. 이러한 기준은 전체를 통해 각각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그 예외란 ‘-란’이 단일한 체언 아래 쓰인 예가 한 군데서 발견되고, ‘-/’이 둘 이상의 체언이 열거된 경우임에도 쓰인 예가 또한 한 군데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다음의 예문들이다.

믈읫 므레 머그라 니란(16ㄴ)

힘 거디쥐여 움주쥔 병과   긔운으로 브 과 손바리 싀저려 알파 거름 거로매 어려워 (15ㄴ)

(2) ‘-’의 활용형

‘-’의 활용형 ‘야’가 ‘여’로 바뀐 예를 한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발티 몯여신 적과(11ㄴ).

cf. 나디 아니야신 저긔(10ㄱ)

(3) 부정법

15세기 국어의 이른바 긴 부정문 중에서 ‘몯-’ 부정문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디 몯-’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옴/움이 몯-’ 형식이다.

萬法을 아디 몯면(不了萬法, 능엄경 언해 4:1ㄴ)

오히려 머구미 몯리니(尙不可食, 능엄경 언해 6:99ㄴ)

이 중에서 후자 형식의 부정문은 ≪금강경 삼가해≫(1482)에 와서 거의 소멸 상태에 이르게 되고 ≪신선 태을 자금단≫과 동시대인 ≪육조 법보단경 언해≫(1496)에 오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문헌에선 전자 형식과 함께 후자 형식의 부정문이 상존하고 있다.

쉬이 디 몯리니(未易得磨, 9ㄴ)

아 아귀 세워더 놀이디 몯거든(小兒牙關緊急, 11ㄱ)

갓 일개로 혜요미 몯리라(不可執一也, 12ㄴ)

아기  겨지븐 머구미 몯리라(孕婦不可服, 17ㄴ)

그렇다면 두 형식 사이에 의미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니, 그것은 동일한 ‘不可稽留’의 한문 구절에 대한 ≪내훈≫(1475)의 언해가 ≪어제 내훈≫(1736)에서는 바뀌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더듸 머므로미 몯리다(내훈 2상:52ㄴ)

더듸 머므로디 못리이다(어제 내훈 2:43ㄴ)

≪내훈≫에서 ‘-옴이 몯-’로 언해한 부정문이 ≪어제 내훈≫의 언해에서는 ‘-디 못-’의 부정문으로 교체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옴이 몯-’ 형식의 부정문은 15세기 국어에서만 존재했던 형식이고 그 의미도 ‘-디 몯-’ 형식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번역 문체

의서(醫書)의 번역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 언해의 직역과는 달리 원문의 뜻을 살려 번역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신선 태을 자금단≫은 의역하는 정도를 넘어 한문 원문에 없는 상세한 설명까지 더하는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믈읫 가치 엷고 터히 노 긔와 가치 두텁고 터히 덛덛 긔와 창과 머리와 과 손바래난 모딘 긔와(癰疽發背疔腫, 10ㄱ)

새로 어드나 오라거나 걸이나 이틀걸이나 날마 알나 다 묻디 말오(不問新久, 12ㄱ)

새배  아니 기른 제 몬져 기룬 우믌믈와  흐르 므레(皆用井花水或長流水, 16ㄴ)

cf. 鼠頭쥐머리 燒作屑井花水<원주>새배  아니 기러셔 몬져 기론 우믌믈服方寸匕日三 = 쥐머리 론  새배  아니 기러셔 몬져 기론 우믌므레  술만 프러  세 번곰 머그라(구급 간이방 7:29ㄱ)

위의 예문에서 언해문의 밑줄 그은 부분을 보면, 한문 원문의 癰疽(옹저), 新久(신구), 井花水(정화수)에 대해서 각각 그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언해서는 특별한 용어에 대해 협주를 달아 풀이해 놓고 그 내용을 언해문에 반영하는 방식이 일관된 형식이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협주에서 베풀어야 할 내용을 협주의 방식을 거치지 않고 언해문의 본문에 바로 나타내고 있다.

3. 어휘

(1) 사전에 올려 있지 않은 어휘

≪신선 태을 자금단≫은 앞에서 밝힌 대로 고 안병희 교수가 1991년 ≪서지학보≫ 6호에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자료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간행된 옛말 사전은 대부분 이 문헌이 발표되기 전에 나온 사전들이어서 이 문헌에 쓰인 어휘 중에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제법 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그런 어휘를 열거하려 한다. 그 의미도 함께 제시하려 하지만 이들 어휘에 대한 다른 용례가 없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서 한문 원문과 문맥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한 그 의미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ㄱ. 굼굼

알  고 머그면 이야 굼굼 랍다가 즉재 스러디니라(搽痛處幷磨服良久覺痒立消, 10ㄱ)

한문 원문에서 ‘굼굼’에 해당하는 한자(漢字)가 ‘각(覺)’일 듯하지만 ‘굼굼’과 ‘覺’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본문에 쓰인 ‘굼굼’은 ‘랍다’[痒]를 수식해 주는 부사임이 분명하고 또한 가려운 정도를 나타내는 의태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낱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구급방 언해≫(1466)의 “나 毒氣  예 이셔 금굼히 알고 랍거든”(餘毒在肉中滛滛痛痒, 하:80ㄱ)에 보이는 ‘금굼히’이다. ‘금굼히’도 ≪신선 태을 자금단≫의 ‘굼굼’과 마찬가지로 형용사 ‘랍-’[痒]을 수식하는 부사로 쓰인 것이어서 두 말은 동일한 낱말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구급방 언해≫의 ‘금굼히’에 대응하는 한자를 확인하니 ‘滛滛(제제)’임을 알 수 있었고 ‘滛滛’는 또한 ‘濟濟(제제)’와 같은 표기임이 파악되었다. 그러고 보니 ‘濟濟’는 많고 성하다는 뜻으로 지금도 쓰이는 말이어서 ‘굼굼’도 이와 같은 뜻으로 ‘많이, 크게’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옛말 사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 두고자 한다. 현재 나와 있는 옛말 사전 어디에도 ≪신선 태을 자금단≫의 ‘굼굼’은 올라 있지 않지만 ≪구급방 언해≫(하:80ㄱ)의 ‘금굼히’는 모두 등재되어 있는데 그 풀이를 ‘근근하게’ ‘때때로’ ‘근근히, 근질근질’로 각각 해 놓고 있다. 아마도 문맥과 대응 한자를 근거로 해서 이런 풀이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그것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현재의 사전들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한자를 잘못 읽었다는 점이다. ≪구급방 언해≫에 보면 ‘금굼히’에 해당하는 한자가 분명히 ‘滛滛’로 되어 있음에도 사전들은 모두 이를 ‘淫淫(음음)’으로 보고 ‘淫淫’으로 전사(轉寫)해 놓고 있다. 滛와 淫은 독음도 서로 다르고 뜻도 아주 다르다. 이로 인해 풀이가 ‘많이, 크게’하고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ㄴ. 마

걸이나 이틀걸이나 날마 알나 다 묻디 말오(12ㄱ)

이 부분은 한문 원문이 없이 자세한 설명을 베풀고 있는 구절이므로 ‘날마’에 해당하는 한자를 따로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쉽게 그 뜻이 파악된다. 학질의 유형을 나열하는 대목에서 하루거리(하루씩 걸러서 앓는 학질)와 이틀거리(이틀 걸러 발작하는 학질)를 들고 그 다음에는 매일 앓게 되는 학질을 들 차례에서 ‘날마’이 쓰인 것이다. 그 ‘매일’에 해당하는 말이 ‘날마’이다. 그러므로 ‘마’은 보조사 ‘-마다’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마’은 방언형으로 보인다.

ㄷ. 나다

일쳬 일훔 업슨 모딘 이 나디 아니야신 저긔(一切無名惡瘡未破之時, 10ㄱ)

‘나-’에 해당하는 한자가 ‘破(파)’로 되어 있고 ‘나-’의 대상이 또한 창종(瘡腫)으로 되어 있어 의미 파악은 어렵지 않다. 거기다 중세 국어의 동사 ‘-’[裂]와 쉽게 연결되기 때문에 ‘나-’는 동사 어간 ‘-’[裂]와 ‘나-’[出]가 연결 어미 ‘-어’를 매개로 하여 결합된 통사적 합성 동사로서 ‘터져 나오다’의 뜻임을 짐작할 수 있다.

ㄹ. 싀저리다

손바리 싀저려 알파(手脚疼痛, 15ㄴ)

한자로 ‘疼痛(동통)’을 ‘싀저려 알파’로 번역한 것이다. 손발이 아픈 상태를 ‘싀저려 알파’라고 한 것을 보아 시큰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싀-’[酸]와, 손발이 저리다는 뜻으로 쓰이는 ‘저리-’[麻]의 어간끼리 결합된 비통사적 합성 동사로 보인다. 뜻도 ‘시큰하고 저리다’로 보면 무난할 듯하다.

ㅁ. 심

여러 가짓 심 알커든(諸般瘧疾, 12ㄱ),

여러 가짓 심이 아니 됴리 업거니와 오직 긔엣 심과 심과(諸瘧無不愈者氣瘧牡瘧, 12ㄱ-ㄴ)

‘심’에 대응되는 한자가 한결같이 ‘瘧(학)’ 내지 ‘瘧疾(학질)’로 되어 있어 ‘심’은 학질을 가리키는 고유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학질을 가리키는 우리말로는 ‘고봄’(능엄경 언해 5:2ㄱ, 동경대본 훈몽자회 중:34ㄴ), ‘고곰’(예산본 훈몽자회 중:16ㄴ)이 쓰였으나 ‘심’은 이 문헌에서 처음 보는 낱말이다. 최학근의 ≪한국 방언 사전≫(1978)에는 ‘심’이 학질을 뜻하는 전남 진도의 방언으로 수록되어 있다.

ㅂ. 죽다

혀근 아의 며 느즌 놀라 죽라  병과(小兒急慢驚風, 10ㄴ)

한문의 ‘驚風(경풍)’을 언해에서 ‘놀라 죽라  병’으로 나타내었다. 오늘날의 국어사전에, 경풍은 어린 아이에게 나타나는 증상의 하나로서, 풍(風)으로 인해 갑자기 의식을 잃고 경련하는 병증을 말하며, 급경풍과 만경풍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죽다’는 ‘죽은 듯이 가라앉다’ 또는 ‘까무러치다’의 뜻을 가진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은 동사 어간 ‘죽-’[死]과 ‘-’[潛]이 직접 통합하여 형성된 비통사적 합성 동사이다.

ㅅ. 홀리다

여와 과 쥐게 홀리니와(狐狸鼠莽, 9ㄱ)

‘홀리-’[迷惑]는 현대 국어에서도 쓰는 말이기 때문에 그 뜻이나 용법에 대해서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언급해 두고자 하는 것은, 현대어와 같은 표기와 뜻을 가진 낱말이라도 옛글에 쓰였다면 그 낱말도 옛말로 다루어 그 쓰임의 같고 다름을 밝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홀리다’도 옛말 사전에 올려야 할 낱말로 보는 것이다. ‘홀리다’는 올려 있지 않지만 ‘먹다’ 같은 동사는 현재 나와 있는 옛말 사전에 모두 올라 있다.

ㅇ. 글다

이비 기울며 입시우리 글며(口喎斜脣, 15ㄴ)

‘힝글-’은 한문에서 바로 ‘斜(사)’로 나와 있어 ‘비스듬하다, 틀어지다’의 뜻으로 쓰인 말임을 곧 알 수 있다. 현재도 구안괘사(口眼喎斜)라 해서 안면 신경이 마비되어 입과 눈이 한 쪽으로 돌아가고 틀어지는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2) 조금 달리 표기된 형태로서 사전에 올려야 할 어휘

동일한 낱말이라도 시대와 문헌에 따라 그 표기가 조금씩 달라지거나 음운 현상 등으로 형태가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리하여 표기가 달라진 어휘에 대해서도 옛말 사전에서는 빠짐없이 실어서 그 출전과 본말과의 관계 등을 밝힘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본 낱말은 현재의 사전에 올라 있지만 그로부터 달라진 표기나 변이된 형태의 낱말은 올라 있지 않은 예 중에서 이 문헌에서만 보이는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ㄱ. 거디쥐다

아귀 굿세니와 힘 거디쥐여 움주쥔 과(牙關緊急筋脉攣縮, 15ㄴ)

‘죄어들다’의 뜻으로 쓰인 ‘거디쥐-’는 15세기에 ‘거두쥐-’(월인석보 17:52ㄴ, 구급 간이방 2:46ㄱ)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디쥐-’의 형태는 이 문헌에서만 보이며, 따라서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ㄴ. 다

다 더운 수레 라 머기라(並用熱酒磨下, 16ㄱ)

cf. 다 병 : 並(광주 천자문 40ㄱ)

‘다’은 중세 국어에서 ‘다’으로 널리 쓰이던 ‘더불어, 함께’란 뜻의 말이다. 이에는 ‘다’에서 조금씩 달라진 여러 형태들이 사전에 올라 있다. ‘다몯, 다못, 다므기, 다믇, 다믓, 다’ 등. 그러나 ‘다’은 빠져 있다. 안병희(1987)에 의하면 ‘다’은 한글판 ≪오대 진언≫(1476)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ㄷ. 븕나무

百蟲倉生膚木鄕名 븕나무(4ㄴ)

위의 예는 약재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한문의 명칭 다음에 우리말의 나무 이름을 한글로 달아 놓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어형대로 ‘븕나모’라 하지 않고 ‘븕나무’라 한 것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중세 국어에서는 ‘나모’만 일관되게 쓰였는데 여기서 ‘븕나무’라 하여 ‘나무’가 쓰인 것은 최초가 아닌가 한다. 이 문헌에서도 다른 데서는 여전히 ‘나모’가 쓰이고 있어(버드나모, 12ㄱ) ‘븕나무’의 등장은 더욱 이채로운 것이다. 마땅히 ‘븕나무’가 사전에 실려야 할 것이다.

ㄹ. 비다

두  가지니 다 빌 시라(搽與擦同摩拭也, 9ㄱ)

동사 ‘비-’는 손으로 비빈다는 말인데, 이는 중세 국어에서 주로 ‘비븨-’와 ‘비-’의 형태로 많이 사용되었다. 한편으로 어두 경음화가 일어난 ‘븨-’도 제법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비-’는 ‘븨-’에서 어간 말음이 단모음으로 교체된 것이 또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비븨다’, ‘비다’, ‘븨다’와 함께 ‘비다’도 사전에 새로 올려야 할 것이다.

(3) 최초의 출전을 바꿔야 할 어휘

옛말 사전에는 표제어의 낱말이 등장하는 여러 문헌 자료의 예문을 시대순으로 수록함으로써 그 낱말이 언제 어느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신선 태을 자금단≫의 출현으로 이미 사전에 등재된 옛 낱말 중에는 최초의 출전을 이 문헌으로 앞당겨야 할 낱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그 낱말들을 열거하여 낱말마다 현재의 옛말 사전에서 밝히고 있는 최초의 출전과 이 문헌과의 시간적인 차를 살피고자 한다.

ㄱ. 곳블

과  긔운으로 곳블 며(感冒風寒, 11ㄴ)

감기(感氣)를 가리키는 고유어 ‘곳블’이 현재의 옛말 사전에는 16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분문 온역 이해방≫(1542)의 “그  그모도록 곳블도 만나디 아니며”(4ㄱ)를 맨 먼저 들고 있는데, 그 자리에 이 문헌의 예문으로 교체해야 할 것이다.

ㄴ. 두드러기

여러 가짓  마니와 두드러기와(諸風癮疹, 10ㄴ)

‘두드러기’는 현대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는 낱말인데, 이 낱말의 최초 등장을 옛말 사전에서는 예산본 ≪훈몽자회≫(1527)의 “두드러기 은:癮”(중:16ㄱ)으로 잡고 있다. 이 역시 최초의 예를 이 문헌의 것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ㄷ. 딜앐

여러 가짓 딜앐과(諸般癎疾, 15ㄱ)

‘딜알’은 그 뒤로 구개음화하여 지금까지도 비속어로 남아 있는 말이다. 그런데 ‘딜알’이 단독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역어유해≫(1690)가 처음인 것으로 사전에 밝혀져 있다. 비록 합성어 형태이긴 하지만 이제는 ‘딜알’의 등장을 이 문헌에까지 소급해야 할 것이다.

ㄹ. 벅버기

   긔운으로 브 과 손바리 싀저려 알파 거름 거로매 어려워  벅버기 이 다 긧이니(骨節風腫手脚疼痛行止艱辛應是風氣, 15ㄴ-16ㄱ)

‘응당’ ‘반드시’의 뜻으로 쓰인 ‘벅버기’가 ≪동문유해≫(1748) 하:47ㄴ에 처음 나타나고 ‘벅벅이’는 진주에서 간행된 우병영본 ≪병학지남≫(1737) 2:16ㄱ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는 18세기 이후 문헌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을 이제 15세기 말까지 앞당기게 되었다.

ㅁ. 아귀

아 아귀 세워더 놀이디 몯거든(小兒牙關緊急, 11ㄱ)

현대어에서도 ‘입아귀’로 쓰이는 ‘아귀’는 옛말 사전에서 “아귀 셴 : 口硬馬”(노걸대 언해 하:8ㄴ)을 첫 예문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선 태을 자금단≫은 ≪노걸대 언해≫(1670)보다 무려 173년이나 앞서는 문헌이므로 ‘아귀’의 출현은 그만큼 앞당겨지는 것이다.

ㅂ. 의식

대뎌디 즈칄 약은 의식 토니(大抵下泄藥例多上吐, 17ㄴ)

‘의식’은 본래 ‘반드시’의 뜻으로 쓰인 말이나 여기서는 한문 원문의 ‘例多(예다)’로 보아 ‘흔히’나 ‘자주’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지금까지 16세기 초의 문헌인 ≪속 삼강행실도≫(1514), ≪번역 소학≫(1518), ≪정속 언해≫(1518) 등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문헌의 등장으로 15세기에도 쓰이던 말임이 밝혀진 셈이다.

ㅅ. 한

모로매  한으로 슬허 므레 프러 라(須用細鎊鎊之和水用之可也, 9ㄴ)

‘한’은 오늘날 줄처럼 쓰는 연장의 하나인 환[雁歧鑢]을 말한다. 현재의 옛말 사전에는 ≪동문유해≫(1748)의 예가 가장 이른 것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헌의 예가 나타남으로써 이 낱말의 첫 등장은 18세기에서 15세기로 크게 앞당겨지게 되었다.

〈참고 문헌〉

안병희(1987). 한글판 ≪오대 진언≫에 대하여. 『한글』 195호. 한글학회.

안병희(1991). ≪신선 태을 자금단≫ 해제. 『서지학보』 6호. 한국서지학회.

정우영(1993). ≪신선 태을 자금단≫의 국어학적 연구. 『동악어문론집』 7집. 동악어문학회.

허웅(1975). 『우리 옛말본』. 샘문화사.

『십현담요해』 언해본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한문본 『십현담』 과 『십현담요해』

이 역주서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의 언해본을 저본(底本)으로 한 것이다. ‘십현담(十玄談)’은 10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중국 조동종(曹洞宗) 계통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 ?~961)이 지은 7언 8구의 게송(偈頌)이다. 율시(律詩) 형식으로 된 10수(首)의 현담인 것이다. 상찰(常察)은 중국 5대10국 시기의 승려이다. 지금은 강서성(江西省)의 성도(省都)가 된 남창시(南昌市)의 옛 지명 홍주(洪州)의 봉서산(鳳棲山) 동안원(同安院)에 주석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육조(六祖) 혜능(惠能) 이후 중국 선종(禪宗)의 양대 법맥 중 하나를 이끌었던 청원행사(淸原行思: ? ~740)의 6대 법손(法孫)으로 구봉도건(九峯道虔: ?~921)의 법맥을 이었다.

‘현담(玄談)’은 경론(經論)을 강의하기 전에 그 유래와 대의(大意)를 설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십현담(十玄談)’은 동안상찰 선사가 선(禪)의 원리를 열[十] 항목으로 나누어 풀이한 게송이다. 이 게송에 대한 주해본(註解本)이 나중에 나왔는데, 대표적인 주해본으로는 첫째, 중국 법안종(法眼宗)을 개창한 청량문익(淸凉文益: 885~958)의 주(註)가 있다. 이 주석은 지금 ‘동안찰십현담청량화상주(同安察十玄談淸凉和尙註)’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이른바 ‘청량주(淸凉註)’이다. 둘째,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열경(悅卿)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저술한 주석이다. 이번 역주 대상 언해본의 저본이 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이다. 1475년 무렵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001)

십현담(十玄談) 및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의 저술과 편찬 경위 등은 물론, 형태서지에 대해서는 하정용(2009:7~38)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성철스님 강설본과 11본 이자(異字) 비교표’는 십현담(十玄談)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컸다.
김시습의 자(字)를 따서 ‘열경주(悅卿註)’, 또는 ‘경주(卿註)’라고 한다. 셋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주석이다. 그는 김시습의 주석을 보고 뜻을 밝히는 데 김시습과 소견(所見)이 다른 바가 보여 주해한다고 했다. 주002)
한종만(2009:103~132) 참조. 그 논의에서는 청량문익, 설잠(雪岑) 김시습, 만해 한용운 등 3인의 주석을 비교 검토하여, 주해의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최귀묵(2009:81~102)은 ‘십현담요해’에 나타난 김시습 글쓰기의 특징과 위상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청량문익의 청량주와 김시습의 열경주를 비교하여, ‘십현담요해’에 대한 이해와 주해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다루었던 내용 등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동안상찰의 ‘십현담’은 오랜 기간 유통되는 과정에서 처음 풀이했던 원문의 시어(詩語)에 일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본(宋本), 원본(元本), 명본(明本)을 거치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문의 내용 중 일부에 변개가 따랐던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현담의 배열 순서에도 일부 변동이 있었다. 하정용(2009: 33~34)의 ‘이자(異字) 비교표’를 보면 성철(性徹) 스님 강설본(講說本)을 포함한 12본의 이본 중 일부에 현담의 시어(詩語)가 약간씩 다르기도 하고, 배열의 순서에서도 이본별로 다른 경우가 있다. 십현담의 순서를 12본 중 동일한 명칭의 사용이 많은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앞의 5수는 종문(宗門)의 요지를 서술한 것이며, 뒤의 5수는 실천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게송 이름에 빗금을 친 것은 12개의 판본에 다르게 나타난 게송 제목 중 많이 쓰인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대체로 속장경(續藏經)에 수록되어 있는 책들에 이자(異字) 출현의 빈도가 높고 현담의 순서 배치에도 변화가 많은 편이다.

1) ➀심인(心印) ➁조의(祖意)/조의(祖義) ➂현기(玄機) ➃진이(塵異) ➄연교(演敎)/불교(佛敎) ➅달본(達本)/환향곡(還鄕曲) ➆환원(還源)/파환향곡(破還鄕曲) ➇회기(廻機)/전위(轉位)/전위귀(轉位歸) ➈전위(轉位)/전위귀(轉位歸)/회기(回機) ➉일색(一色)/정위전(正位前)/전일색(前一色) 등이다.

이 중 언해본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2) ➀심인(心印) ➁조의(祖意) ➂현기(玄機) ➃진이(塵異) ➄불교(佛敎) ➅환향곡(還鄕曲) ➆파환향곡(破還鄕曲) ➇회기(廻機) ➈전위귀(轉位歸) ➉정위전(正位前), 그리고 뒤에 조주삼문(趙州三門)을 실었다. ‘조주삼문’에는 ➀문수면목(文殊面目) ➁관음묘창(觀音妙唱) ➂보현묘용(普賢妙用) 등이 있다.

박진호(2009:70)에는 본문에 해당하는 ‘십현담요해’ 부분과 부록으로 보이는 ‘조주삼문’은 언해의 체제, 번역 양상, 번역어 등에서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 있다. 주003)

이 외에도 박진호(2009:39~79)에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언해본이 보이는 국어학적 특성 등 관련 내용 전반에 걸쳐 상세한 논의가 있고, 같은 책의 부록(2009: 133~191)에는 언해본 전문을 옮겨 실은 후 현대어역을 두어 이 역주 작업에서 도움 받은 바 크다.

Ⅱ. 언해본 『십현담요해』

십현담요해 언해본은 모두 44장의 목판본(木版本)이고, 불분권(不分卷) 1권의 책이다. 그 중 35장과 38장은 빠져 있어서[缺落] 실제는 42장만 전한다. 2009년 이 책이 처음 소개된 이후 다른 책의 출현에 대한 안내가 없어서 현재로서는 유일본이다. 44장 뒷면 10행의 간기(刊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어서 간행 연도를 알 수 있다.

3) 嘉靖卄七年戊申春中月日江華地麽利山淨水寺刻板

(가정 27년 무신 춘 중월 일 강화지 마리산 정수사 각판)

가정(嘉靖) 27년은 조선 명종(明宗) 3년인 1548년이다. 강화도의 정수사에서 판각(板刻)한 후 쇄출(刷出)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전하는 책이 초쇄본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책은 성철(性徹)스님 구장본이었는데, 열반 후 남겨진 고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시습이 저술한 한문본 ‘십현담요해’와 함께 발견되어 2009년 10월에 있었던 성철스님 열반 16주기 추모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언해본의 경우에는 박진호 교수의 국어학적 고찰과 더불어 언해 원문을 싣고 현대어역이 첨부되었다. 역주자는 원본을 직접 접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 책에 소개된 내용과 서영(書影)으로 서지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 서외제 : 十玄談, 판심서명 : 주004)

현재 필자가 접할 수 있는 책은 영인본(影印本)이어서 판심서명이 잘 보이지 않지만, ‘玄’ 자로 짐작되는 글자가 보이고, 청량문익의 주에도 판심서명은 ‘玄’ 자로 되어 있다.

책판의 크기[板匡] : 15.2㎝ * 25.0㎝

반엽의 사주 크기[半廓] : 12.1㎝ * 19.4㎝

변란(邊欄) : 사주단변(四周單邊)

매면(每面) : 무계(無界) 10행(行)

행별 글자의 구성 : 구결문 중 원문 단행(單行), 한글 구결, 언해, 협주 등 쌍행(雙行)

매행당 글자의 수 : 21자를 기본으로 하되, 22자에서 25자까지 늘어남

언해는 게송인 현담에 한글로 구결을 달아서 먼저 본문 구결문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글로 옮긴 것이다. 그 다음에는 김시습이 요해한 주해에 역시 한글 구결을 달아 주해 구결문을 만든 후 이를 한글로 옮겼다. 위에서 밝힌 대로 구결이 달려 있는 구결문은 각 행별로 한 행에 한 줄씩 배치를 하였다. 반면, 언해문(諺解文), 협주문(夾註文), 그리고 구결문(口訣文)에 달려 있는 구결은 작은 글자를 써서 쌍행(雙行)으로 구성하였다. 협주의 시작과 끝에는 상하내향의 흑어미(黑魚尾)를 두었으나 협주로써 문단이 끝나는 경우에는 아래쪽 흑어미를 생략했다.

그런데 여기서 ‘십현담요해’ 언해본에 대해 밝혀 두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십현담요해’ 언해본은 김시습의 주석, 곧 열경주만을 대상으로 했고, 한문본에 있는 청량문익의 주는 제외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김시습의 한문본 ‘십현담요해’를 언해의 저본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십현담의 본문에 해당하는 게송의 경우에는 김시습의 ‘십현담요해’에 있는 현담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해본의 원고를 조성한 미상의 작성자가 송본(宋本) 이래의 여러 이본들을 참고하여, 그 나름 타당하다고 판단한 원문을 상정(想定)해서 언해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주005)

하정용(2009:29~36) 참조.

역주 작업을 할 때 늘 갈등이 되는 부분은 많은 언해서(諺解書)들의 내용 구성이 주로 원문과 주해로 되어 있는데, 그럴 때 원문은 원문대로 배열을 하고 주해문은 주해문대로 배열을 하는 것이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단순한 해독에 머무르지 않고 이른바 가독성(可讀性)과 문식(文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다. 어떤 방식이 독자를 위해 더 바람직한 방안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역주에서도 언해본에 있는 체제를 그대로 가져와서 원문과 주해를 저본 순서대로 옮기기로 했다.

언해본의 구성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5) ㄱ) 한자 ‘十玄談要解序’ : 1장 앞면 전체, 1장 뒷면 여백

ㄴ) 언해 서문(序文) : 2장 앞면 1행 ~8장 앞면 4행

ㄷ) 오파원류도(五派源流圖) : 2장 뒷면

ㄹ) 입제(立題: 언해본 수록 현담의 제목) : 8장 앞면 5행 ~8장 앞면 7행

ㅁ) 심인(心印) : 8장 앞면 8행 ~10장 앞면 3행

ㅂ) 조의(祖意) : 10장 앞면 4행 ~12장 앞면 7행

ㅅ) 현기(玄機) : 12장 앞면 8행 ~14장 뒷면 4행

ㅇ) 진이(塵異) : 14장 뒷면 5행 ~20장 앞면 1행

ㅈ) 불교(佛敎) : 20장 앞면 2행 ~26장 뒷면 4행

ㅊ) 환향곡(還鄕曲) : 26장 뒷면 5행 ~28장 뒷면 10행

ㅋ) 파환향곡(破還鄕曲) : 29장 앞면 1행 ~31장 앞면 9행

ㅌ) 회기(廻機) : 31장 앞면 10행 ~33장 뒷면 10행

ㅍ) 전위귀(轉位歸) 34장 앞면 1행 ~(35장 및 38장) 결락으로 불분명 주006)

현재 전해지는 『십현담요해』 언해본은 백련문화재단 소장의 책이 유일본인데, 35장 및 38장이 빠져 있어 전체 내용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38장이 없어져서 아홉 번째 현담인 전위귀(轉位歸)의 끝부분과 열 번째 현담인 정위전(正位前)의 시작 부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ㅎ) 정위전(正位前) 39장 앞면 1행 ~40장 앞면 6행, 40장 뒷면 여백

전체 10현담이 끝나면 41장 앞면부터 조주3문(趙州三門)이 시작되어 44장 뒷면 2행까지 이어진다. 조주3문은 문수면목(文殊面目), 관음묘창(觀音妙唱), 보현묘용(普賢妙用) 등이다. 맨 뒷장의 여백에 간행과 관련된 몇 가지 정보가 있다. 44장의 10행에 해당하는 끝줄에 간행 사실을 알 수 있는 간기(刊記)가 있고, 그 앞쪽 상단에 주상(主上)과 왕비(王妃)에 대한 이른바 왕실(王室) 축수문(祝壽文)을 두었다. 그 아래쪽에 각수(刻手)와 시주(施主)로 보이는 이들의 명단이 나온다.

Ⅲ. 언해본 『십현담요해』의 국어학적 특성

언해본의 특징 중 무엇보다 지적할 만한 내용은 이 자료가 16세기 중엽에 간행된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점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책 전체에 방점을 두지 않은 문헌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560년에 평안도(平安道) 숙천부(肅川府)에서 간행된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을 꼽아 왔었다. 그런데 이 『십현담요해』 언해본은 그 책보다 12년이나 앞서 간행되었음에도 방점이 찍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중앙의 관판본(官版本)이 주류를 이루었던 15세기 간행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식을 덜 중시하는 사각본(私刻本)인 데에다, 사찰 교육용으로 이용하려는 실용성이 중시되어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표기법 및 번역의 양상 등은 대체로 15·16세기의 일반적인 번역 방법이나 표기법을 따르고 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어두의 일부 무성자음(無聲子音)에 각자병서(各字竝書)를 과도하게 썼다는 점과 전체적으로 중철 및 혼철 표기가 많이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학적인 내용은 박진호 교수의 고찰(2009:39~79)에서 대부분 다루어져 여기서는 따로 정리할 내용이 많지 않다. 역주에서 비중을 두고 진행했던 몇몇 사항만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역주를 수행하면서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에서 벗어났거나 번역에서 오류가 보이는 내용에 대해 가능한 한 역주에 반영하여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형태를 괄호 안에 넣어 표시를 해 두었다.

2) 형태 분석은 중세국어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의 범위 내에서 진행하였다. 문법 용어도 대체로 학교문법에서 사용하는 명칭들을 사용하였다.

3) 조사나 어미들 중 당시의 일반적인 문법 현상과 부합하지 않는 형태에 대해서는 이를 바로 잡아서 역주를 진행하였다.

4) 이 책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어휘가 몇몇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뒤 문맥을 분석하여 합당한 의미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5) 언해에서 사용한 어휘 중 현대에 이르러 의미의 변화가 크지 않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살려서 그대로 쓰고자 하였다. 굳이 다른 표현을 쓴다면 ‘등량(等量)의 이식(移植)’에 비중을 두고자 했다.

6) 이 책은 현담(玄談)을 언해한 글이어서 선(禪)과 관련된 전문용어나 불교관련 용어가 상당수 나온다. 이런 전문용어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쉽게 풀어서 옮기려고 노력했다.

이 ‘십현담요해’ 언해본은 16세기 중엽의 국어사 연구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중세 한국어 연구 자료의 대부분은 15세기 문헌 자료이고, 16세기 자료는 상대적으로 적다. 16세기 자료는, 15세기 자료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관판(官版) 일변도라는 한계는 넘어섰지만 현전 자료가 많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간 저본이 가지는 불교학 분야에서의 가치로 인해 국어학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면이 있다. 적절한 활용으로 국어사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박진호(2009), 『십현담요해』 언해본에 대한 국어학적 고찰, 『성철대종사 소장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의미』,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대한불교조계종 백련불교 문화재단.

최귀묵(2009), 『십현담요해』에 나타난 김시습 글쓰기의 특징과 위상, 『성철대종사 소장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의미』,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대한불교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하정용(2009), 해인사 백련암 소장 『십현담요해』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 『성철대종사 소장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의미』,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대한불교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한종만(2009), 『십현담』 각 주석의 비교검토, 『성철대종사 소장 십현담요해 언해본의 의미』,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대한불교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대한불교종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2009), 『십현담요해』 언해본(영인자료), 성철 큰스님 열반 16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집.

통제와 절제의 미학, 여성 교훈서 『여사서언해』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여사서언해』의 문헌적 가치

조선은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이상을 구현하고, 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가적 치국방략으로 중화사대주의를 국가 통치의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민풍 교화의 일환으로서, 특히 여성 교육을 위해 유향의 『열녀전』, 반소의 『여계』와 『송사열녀전』, 『원사열녀전』, 채옹의 『여훈』과 『여효경』, 『내훈』, 『안씨가훈』, 『시경』, 『서전』, 『예기』, 『주역』과 같은 중국 서적을 전범적인 교화서로 채택하였다. 이들 중국 원전에서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언해서로 만들어 일반백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민풍 교화서로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효·충·열의 수범적인 사례를 널리 수집하여 보충한 민풍 교화서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에서의 여성 수신 교훈서로는 성종 6년(1475)에 소혜왕후가 『열녀전』, 『소학』, 『여교』, 『명감』에서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편찬한 『내훈』과, 중종 27년(1532)에 최세진이 조태고의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에 이어, 영조 12년(1736)에 중국의 4대 여훈서를 언해한 『여사서언해』 및 융희 원년(1907) 이를 개간한 개간본 『여사서언해』와, 영조 대 『어제내훈』 등이 있다.

여성들을 위한 수신 교훈서와 백성들을 위한 교화서는 내용상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내용상 상호 출입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면밀한 대조를 통해 여성 교육의 흐름뿐만 아니라 국어사 변천을 연구하는 데 이 『여사서언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중국의 원전인 『여사서』가 일찍 세종 시대에 인간된 『삼강행실도』나 성종 6년(1475)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쓴 『내훈』에 삽입된 효충열의 수범적인 중국의 사례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여사서언해』는 소혜왕후의 『소학언해』 등 여타 민풍 교화서의 내용에서 따온 부분이 많기 때문에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폭넓은 시기에 걸쳐 국어사적 변화를 조망하는 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간본 『여사서언해』(1907) 주001)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4권 2책의 『여사서언해』를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한자음은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문 원문과 순한글로 된 언해문을 구분하였고, 언해 방식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중간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개간본’으로 명명할 것이다.
와의 대교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과정의 국어사적 변화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문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여사서언해』의 영향을 받은 궁실 여성의 교훈서로서도 필사된 『곤범』과 『곤의』 등은 각종 경서와 성리서, 모도문 등의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조선 궁중 여성 교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주002)

황문환 외, 『역주곤범』, 장서각소장총서 3, 역락, 200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한글자료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참조. 박재연, 『한글 필사문헌과 사전 편찬』, 역락, 49~97쪽, 2012.
『여사서언해』의 보급은 궁실이나 사대부가의 여성에서부터 여항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한글의 보급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실과 기능을 하였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전형화한 내용인 『여사서언해』는 조선의 주체의식을 이끌어내어 국가적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가문과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회집단의 가정교육 체계를 구현해 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여성들의 한글 학습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근거로는 18세기 이후 영남 사대부들의 여성들에게 ‘내방가사’라는 조선 후기 집단 여성문학으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 교훈서의 내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체험을 덧붙여 낭송하기에 편하도록 3.4조 2음보 격의 ‘내방가사’라는 교술 문학 장르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는 『규곤의측』, 『규의』, 『여자초학』, 『천금록』, 『여교』, 『일심공덕』 주003)
권영철, 〈일신공덕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1집, 1971. 참조. 『일신공덕』은 경북 봉화에 권상용(1851~1933)이 1912년에 지은 필사본이다.
, 『태교신기』 주004)
권영철, 〈태교신기 연구〉, 『여성문제연구』 제2집, 1972. 참조. 유희의 모부인 숙인 이씨 사주당(1739~1821)이 쓰고 유희가 1801년에 언해한 책이다.
, 『규방필독』 주005)
권영철, 〈규방필독에 대하여〉, 『여성문제연구』 제9집, 1980. 참조. 『규방필독』은 경북 성주 초전면 고산정 송홍설 씨 소장본인데 송인건(1892~1954)이 1930년대에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기녀서』, 『여훈』, 『규범』 주006)
권영철, 〈규방문헌을 통해 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천동 용궁 전씨 녹문대 고씨부인 소장본이다.
, 『여자계행편』 등 필사본 여성 교훈서 주007)
권영철, 〈규방문학을 통해본 영남여성의 교육관〉, 『여성문제연구』 제3집, 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3. 참조.
가 사대부가의 여성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면서 개인의 체험과 상상력이 결합한 교술적 내방가사인 〈계녀〉, 〈계녀가〉, 〈계녀사〉, 〈여 드러보아라〉 등의 계녀가류의 내방가사 문학의 장을 여는 촉매적인 구실을 하였다. 주008)
이정옥, 『내방가사의 향유자 연구』, 박이정출판사, 1999.
이 『여사서언해』는 여성층을 통해 한글을 확산시키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계녀〉류의 내방가사와 비교를 통해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사회 집단이나 가문을 중심으로 한 여성 교훈서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규범』,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규범선영』 주009)

이을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 해제〉, 『정신문화연구』 제7집, 1980. 28~37쪽. 이 책의 내용은 “1. 수신, 2. 독서, 3. 효친, 4. 충군, 5. 우애, 6. 돈목, 7. 제가, 8. 교자, 9. 신교, 10. 휼린, 11. 제기, 12. 분묘, 13. 간복, 14. 잡술, 15. 안분, 16. 징분, 17. 숭검, 18. 적선, 19. 거향잡의, 20 검속신심지례”로 구성되어 있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부의』 주010)
김지용, 『내훈』, 명문당, 2011. 해제 참조.
, 이승희(1847~1916)의 『가범(家範)』, 『여범(女範)』, 『규의(閨儀)』와, 왕성순(王性淳, 1868~1923)의 『규문궤범』(1915) 주011)
한국국학진흥원, 『규범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2, 한국국학진흥원, 2005.
, 이만규의 『가정독본(家庭讀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문 교훈서와 함께 이를 언해한 한글본 『규범』, 『한씨부훈』, 『여사수지』, 『부의』 등의 다양한 교훈서가 활발하게 간행됨으로써 여성 중심의 수신 교육과 한글 교육의 확산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여사서언해』의 내용 가운데 조선과 중국의 민속이 차이를 보이는 내용들도 나타난다.

“古고者쟈女녀生 三삼日일애 臥와之지床상下하야 弄농之지瓦와塼젼고”

“남아를 낳으면 침상 위에 뉘이고 화려한 옷을 입혀 구슬을 쥐어 주고 여아를 낳으면 침상 아래 뉘이고 수수한 옷을 입혀 실패를 쥐어준다.(詩云, 乃生男子, 載寢之狀, 載衣之裳, 戱弄之障....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裼, 載弄之瓦)”

여자의 직임인 직조와 방적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고대 신화에서 여성신이 직조 신으로 상징되는 것은 동서양이 동일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올림푸스 신들 가운데 직조의 여신인 아테나(미네르바)가 만든 성의를 입는다는 고대 서양의 신화와 이집트의 직조의 여신인 네이트와 같은 이야기이다. 여성이 새벽 일찍 일어나 장만하는 음식 가운데 “쟝 구으며”에서 ‘짱깨’라는 음식의 차이를 확인할 수도 있다.

『여사서언해』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시대 변천에 따른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사회에 들어서면서 유교 중심적 사회 조직이 느슨해지면서 여성들의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도리를 교술하는 문학적 텍스트를 대량 산출해 내는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중국과 조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 여성교육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여사서언해』의 원전이 중국 하은주 시대로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시기까지 광범위한 시대를 거치면서 ‘하늘[天]-남(男)’, ‘땅[地]-여(女)’를 상징하는 두 순환적 주체가 평등적 관점에서 송나라 이후 성리학과 결속되면서 ‘상(上)-하(下)’, ‘존(尊)-비(卑)’의 관계로 변화되는 남성 중심의 윤리관이 고착되는 과정을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국어학 사료로서, 그리고 여성교육의 변화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경서를 포함한 교화서들 간의 정밀한 텍스트의 상호 교섭에 대한 비교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곧 중국의 후덕한 황후나 효열녀의 고사 중심에서 우리나라의 효열녀의 고사들이 삽입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역시 『여사서』의 텍스트의 내용이 이곳저곳으로 부분적인 발췌를 하여 옮겨 씀으로써 그 자체의 전이가 된 자료를 정밀하게 대조할 경우 국어사 서술의 진폭 또한 매우 넓은 자료이다.

성종 6년(1475) 소혜왕후 심씨의 『내훈』과 더불어 『여사서언해』는 관찬서로서 그 이후 다양한 여성 교훈서들의 남본이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조선조 여성들 글쓰기와 글읽기가 대량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글의 확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문헌임이 분명하다. 주012)

이상규, 『한글고문서연구』, 경진, 2011.

『여사서언해』는 18세기 국어사적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데 매우 유리한 문헌이다. 특히 후기 국어의 변화는 ‘’의 비음운화 완성, ‘원순모음화’의 완성, ‘-오/우-’의 변화와 동요, ‘-/으-’의 잔류와 탈락, ‘-어+잇[有]-’의 축약과 함께 과거시제의 형성과 과거진행상의 분화, 명사형어미 ‘-음〉-기’의 교체와, ‘-ㄴ+것-’의 활성화에 따른 진행상(process)의 문화법, ‘-ㅁ-+-애’의 문법화에 따른 ‘-매’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여사서언해』의 초간본과 약 120년의 차이를 보이는 개간본 『여사서언해』와의 비교를 통한 후기 국어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강행실도』, 『내훈』 등의 중복되는 부분의 언해 자료의 비교를 통해 16세기까지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후기 근세국어 연구 자료 가운데 핵심적인 문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여사서언해』의 서지

한문본 『여사서(女四書)』는 중국의 여성 교육서로 청나라 시대에 왕상(王相, 1662~1722)이 간행한 책이다. 후한시대에서 청나라에 이르는 폭넓은 시간 대 속에서 여성 교육의 지향점과 목표는 상당한 변화와 굴절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중국에서 여성교화서의 변천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여사서』로 통합되기 이전에 명나라 신종 8년(1580)에 『여계』와 『내훈』 두 권을 묶고 신종의 서문을 올려 여성 교육서로 널리 인간하였으며, 청나라 때 왕상이 다시 이것에다가 『여논어』와 『여범첩록』을 덧붙이고 주석을 달아 『여사서』로 통합되어 인간되었다. 왕상은 『여사서집주』본과 『장원각여사서(壯元閣女四書)』로 여러 차례 인간하여 여성 교육서로 보급하였다. 현재 중국 소재 『여사서』의 이본 연구는 정밀하게 연구된 바가 없지만 중국 내에서도 대표적인 여성 교화서로 『여사서』가 여러 차례 인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유교사회의 글로벌 여성 교육서였다.

『여사서』가 조선에 어느 시기 어떠한 경로로 유입되었는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지은 『내훈』에 이미 명나라 인효문황후가 지은 『내훈』의 내용이 중간에 삽입된 것으로 보아 『여사서』 이전에 여성 교육서가 조선 초기부터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에 『여범첩록(女範捷錄)』을 지은 저자는 명나라 사람 집경공(集敬公) 왕씨에게 시집가서 평생 수절한 왕절부 유씨(劉氏) 여인이며, 그의 아들 왕상(王相)이 청나라 초기에 와서야 『여사서』를 간행한 것이다. 즉 왕상이 앞의 세 가지 책과 함께 합본하여 『여사서』를 간행한 시기는 조선 숙종 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왕상의 자는 진승(晉升)이고, 그의 어머니가 유씨이니, 남편 왕씨가 죽은 후 60년 동안 절개를 지키고, 90세 때 조정의 표창을 받았으므로, 그를 ‘왕절부(王節婦)’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 왕상이 흩어져 있던 여성 교육서를 한데 모아 『여사서』로 집대성함으로써, 조선에는 영조 때에 처음으로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나타난다. 『영조실록』 영조 10년(1734) 갑인 12월 20일조에,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비로소 『정관정요』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판(唐板)인 『여사서』는 『내훈』과 다름이 없다. 옛날 성왕의 정치는 반드시 가문을 바로잡는 일로써 근본으로 삼았으니, 규문(閨門)의 법은 곧 왕화(王化)의 근원이 된다. 이 서적을 만약 간행하여 반포한다면 반드시 규범(閨範)에 도움이 있을 것이나, 다만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후에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제조(提調) 이덕수(李德壽)로 하여금 언문으로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영조 10년(1734) 12월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673~1744)에게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명하여 영조 12년(1736) 8월에 영조가 직접 서문을 내려 인간토록 명령을 내렸다. 『영조실록』 영조 12년(1736) 병진 8월 27일조에는,

“임금이 『여사서』의 서문을 친히 지어서 내리고 나서 홍문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내사기에는, ‘乾隆 二年 三月 十九日 內賜 洛川君 縕 女四書 一件 命除謝恩 行都承旨 臣 李’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천군 이온은 숙종의 6남 연령군의 양자로서, 숙종 46년(1720)에 태어나 영조 13년(1737) 9월에 죽었다. 그러므로 명을 받고 언해하여 영조 13년(1737)에 인쇄를 마치어 반사(頒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에서의 『여사서언해』 편찬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에 여성에 관한 책을 관찬본으로 발행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다가 이 책은 특히 영조의 왕명에 의하여 갑인자체 금속활자로 한문과 한글을 섞어 찍어낸 귀중한 책이다. 이 『여사서』에 사용한 한글은 놋쇠 활자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다만 중국의 『여사서』의 순차 배열과는 달리 저술의 시대 순에 따라 한·당 시대의 『여계』와 『여논어』 두 권을 묶어 상책(上冊)으로 하고, 명·청 시대의 『내훈』과 『여범첩록』두 권을 중·하책으로 총 4권 3책으로 언해하여 인간하였다.

2.1. 『여사서언해』의 초간본

1737년에 영조의 명에 의해 발행된 갑인자체 『여사서언해』외에도 1907년(융희 1)에 송병순이 서문을 쓰고 박만환이 한글로 번역 간행한 목판본 책도 있다. 이 책은 갑인자본인 어제 여사서 본과는 그 배열과 번역에 모두 차이가 있고, 오히려 중국의 『여사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국회도서관 『한국고서종합목록』에 의하면 갑인자체 4권 3책 완질을 갖추고 있는 곳은 서울대 규장각, 장서각, 간송미술관, 파리의 동양문고, 미국의 하버드대학, 범우사 자료실 등이며, 서울대 고도서본은 ‘건륭 2년(1737) 삼월 십구일’의 내사기가 있는 교정본이다. 한글 표기에는 교정하지 않고 한자음 표기에만 교정을 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인 1737년에 발행된 금속활자본은 영조의 서문이 들어 있으며,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 있는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왕명에 따라 영조 12년(1736)에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명을 받고 300질을 인간하여 발포하였다. 이 책은 사주단변으로 반곽은 24.6cm×16.6cm이고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내사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초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 각권에 따라 언해자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말자음 ‘ㅅ’, ‘ㄷ’의 표기 성향의 차이와, ㄷ-구개음화의 실례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ㄷ-구개음화가 4권의 본문에는 간혹 나타나는 데 비하여 서문에는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서문도 〈신종어제여계 서〉, 〈어제여사서 서〉, 〈여계 원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어제여사서 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여사서언해』가 어명에 의해 출판된 서적이지만 조선 초기에 엄격한 출판 방식에서 벗어나 여기저기에 오류가 나타나며 언해 방식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스이’(여범, 73ㄴ)의 오각이 보이며, 〈여논어〉 제12장과 〈여내훈〉 제1장~제5장까지 언해 방식에서 있어서 그 전후와 달리 한자어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한문 현토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4권 〈여범첩록〉은 원문에 다양한 고사들을 삽입하고 있어 1~3권까지와 체재가 완전히 다르다. 아마도 언해한 사람이 여러 명이었거나 한 사람이 했더라도 시차를 두고 그 일관성을 잃은 탓으로 보인다.

2.2. 『여사서언해』의 개간본

영조 13년(1737)에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를 초간본이라 하고,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한 목판본 4권 2책을 흔히 중간본이라고 하나 주013)

이근용, 〈중간본 여사서 언해 해제〉, 『중간본 여사서 언해』(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6. 홍윤표, 〈여사서 해제〉, 『여사서』(영인본 포함), 홍문각, 1998. 특히 홍윤표 교수는 1907년 박만환이 언해하여 4권 2책의 목판본을 중간본이라고 규정하고 영남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남부방언 가운데 전라도 방언 지역에서 인간된 것이기는 하지만 방언 자료라고 할만큼 뚜렷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판본 자체가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영조 13년(1737)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는 어명에 의해 간행한 관찬본이지만, 1907년 간행본은 민간에서 목판본으로 인출한 것이어서 초간-중간으로 이어지는 계기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개간본이라고 해야 옳다.

개간본인 목판본 4권 2책은 서울대, 전북대를 비롯한 10여 곳의 대학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범우사의 자료실에는 목판본 두 질이 있다. 1907년 발행된 목판본은 4권 2책 상하로 되어 있고, 사주단변이며 반곽은 21.0cm×16.2cm 크기로 유계 10행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崇禎二百八十年丁未遯月日恩津宋秉珣”으로 되어 있으며, 발문은 “丁未季夏上澣潭陽田愚敬序”로 되어 있고 간기는 “瀛洲精舍丁未刊板”으로 되어 있다. 이 개간본 『여사서언해』는 1907년 전남 고흥에서 박만환이 언해했으며 송병순의 서문과 전우경의 발문을 달아 간행한 사간본으로 목판본 4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홍윤표(1989:1)는 이 판본을 중간본으로 규정하고, “영남방언을 반영한 자료로 생각된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판본을 중간본이라 하지 않고 개간본이라고 한 이유는 영조 13년(1737)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와는 달리, 편찬 체제나 내용의 배열순서가 다르며 판형이나 언해 방식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전면 새로 언해하고 판각을 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자음은 전혀 없고 한문 원문을 싣고 그 뒤에 언해를 붙였으며, 언해의 문체적 양식도 의역체인 점이 크게 다르다. 1907년 발행된 목판본은 4권 2책으로 된 개간본인데, 이 『여사서』의 영인본은 홍문관(1996) 자료와 해오름한글서예학회 편 영인본(2004) 자료가 있다.

2.3. 『여사서언해』의 필사본

『여사서언해』 필사본으로는 장서각 소장 필사본이 있다. 필사 연대가 19세기 말 20세기 초로 추정되는 3권 1책, 무계 10행 글자 수는 부정하며 반곽 22cm×17.8cm 크기로 제검은 『國文女四書』이며 〈신종황뎨어졔계셔〉 “만녁팔년(1580) 셰 경진 츈삼월 어졔서”가 있으며 장서각인이 찍힌 순한글본이 있다.

이 필사본 『여사서언해』는 한글 서체연구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계』, 『여논어』는 정자체로 『내훈』은 반흘림이 섞인 흘림체로 되어 있다. 아직 필사본 『여사서언해』의 문헌적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완전 궁체 한글로 쓴 것으로 보아 궁정 여성들 사이에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또 표기 양식도 일부 차이를 보여주지만 대체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자료로 보이기 때문에 영조 13(1737)에 갑인자체본 『여사서언해』에서 필사본 『여사서언해』까지의 비교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의 국어사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3. 『여사서언해』의 내용과 갈래

초간 『여사서언해』는 본문으로 한문을 싣고 이어서 언해를 하였는데 한문 원문에는 그 당시의 한자음을 달고 한글 구결토를 달았으며, 언해문에도 한자어는 대다수 한자음을 한자 다음에 부기하였다. 당시 여성 교훈용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자음과 한글 학습 양면에 걸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여사서언해』의 서(序)와 범례에 의하면 중국의 『여사서』와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내훈』을 각각 언해하여 널리 펴도록 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국에서 『여사서』의 순서(여계-내훈-여논어-여범첩록)와는 달리 시대의 앞뒤를 따라 『여계』를 권1, 『여논어』를 권2, 『내훈』을 권3, 『여범첩록』을 권4로 하고 권1·2를 한 책으로 묶어 전체 3책으로 엮었다.

각 권의 내용을 보면, 『여계』는 여자가 자라서 출가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고, 시가와의 화목을 위하여 여자로서 하여야 할 일체의 몸가짐 등을 서술한 것으로, ‘비약(卑弱), 부부(夫婦), 경순(敬順), 부행(婦行), 전심(專心), 곡종(曲從), 화숙매(和叔妹)’ 등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논어』는 여성들에게 가사, 대인관계, 윗사람 섬기는 일, 순종, 정조 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입신(立身), 학작(學作), 학례(學禮), 조기(早起), 사부모(事父母), 사구고(事舅姑), 사부(事夫), 훈남녀(訓男女), 영가(營家), 대객(待客), 화유(和柔), 수절(守節)’ 등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훈』은 명나라 성조 황제의 비 인효문황후의 저술인데 황녀와 궁인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조태고의 『여계』가 너무 간략하고, 『여헌』, 『여칙』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여성들을 교육하는 책이 마땅치 않아, 과거 어느 것보다 탁월하고 만세에 수범이 될 만한 것을 가려뽑아 저술하였다고 그 동기를 기술하고 있다. 『여사서』 중 『내훈』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고사를 인용하면서 잘못된 품행과 풍속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의 차례는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 부신(夫娠),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 적선(積善), 천선(遷善), 숭성(崇聖), 경현범(景賢範), 사부모(事父母), 사군(事君), 사아고(事兒姑), 봉제사(奉祭祀), 모의(母儀), 목친(睦親), 자공(慈功), 체하(逮下), 대외척(待外戚)’ 등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범』은 『여범첩록(女範捷錄)』이 본래의 이름인데 보통 줄여서 『여범』으로 통칭하고 있다. 『여범첩록』의 차례는 ‘통론(通論), 후덕(后德), 모의(母儀), 효행(孝行), 정열(貞烈), 충의(忠義), 자애(慈愛), 병례(秉禮), 지혜(智慧), 근검(勤儉), 재덕(才德)’ 등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용』을 비롯하여 『대학』, 『시경』, 『서경』, 『서전』, 『사기』, 『춘추좌씨전』, 『백호통』, 『전국책』, 『통감』과 역대 사서 등 방대한 서적에서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황실에서부터 여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열효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 『여사서』는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을 비롯한 한국, 일본 등 한문 생활권 여성들의 규범서로 큰 영향을 미쳐 왔으며, 여성 생활 규범을 살피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어 왔다. 주014)

아라시로(荒域孝信), 『열녀전』, 明德出版社, 1969. 야마자키 준이치(山峙純一), 『열녀전』(상중하), 明治書院, 1996. 시모미 다카오(下見隆雄), 『유향의 열녀전 연구』, 東海大學校出版會, 1989. 이사 라팔스(Lisa Raphlas), 『Sharing the Light : Representation of Women and Virture in Early Chaina』, State University od New Yprk Press, 1998.

여성 교훈서는 한문으로 된 것과 한글로 언해가 된 자료로 그 갈래를 세울 수 있다. 먼저 한문으로 된 여성 교훈서로는 단연 중국에서 전파된 『여사서』 계열과 소혜왕후의 『내훈』계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여사서』 계열의 최초의 언해된 자료로는 중종 27(1532)에 최세진(崔世珍)이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를 교서관에서 2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전하는 책은 인조 연간(1620~1640)에 2권 2책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여훈언해』는 명나라 무종(武宗) 때 성모 장성자인황태후(聖母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 편찬한 『여훈』을 언해한 것이다.

『내훈』은, 성종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가 성종 6년(1475)에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책으로서 원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선조 6년(1573) 3권 4책 내사기가 있는 호사문고 소장본이 전한다. 주015)

김지홍, 『내훈』, 영인본, 명문당, 2011.
광해군 2년(1610) 훈련도감자로 효종 7년(1656) 목판본 3권 3책 판본,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3권 3책에는 ‘어제내훈소지가’가 서문 뒤에 붙어 있는 『어제내훈』 주016)
영조 13년(1737) 계유자본 『어제내훈』은 현재 장서각(No. 3-69) 소장본이 있다.
이 있다. 이 내훈은 이본 간에 연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들의 상호 비교를 통한 국어사적 변화를 조망하는데 매우 긴요한 자료인 동시에 『여사서언해』와 내용의 출입 특히 한문 원전의 인용 부분이 동일한 것이 많기 때문에 『여사서언해』와 『내훈』과의 정밀한 비교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에는 대다수 남성이 편찬한 여성 교훈서들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우암 송시열의 『계여서(戒女書)』, 병와 이형상의 『규범선영(閨範選英)』 주017)

권영철, 『병와 이형상연구』, 한국문화연구원, 이화여대.
, 한원진(1682~1751)이 편찬한 『한씨부훈(韓氏婦訓)』, 영가 김복한의 『규범(閨範)』(국립도서관소장본), 이덕무(1741~1793)가 편찬한 『사소절(士小節)』, 경암 왕성순이 1915년 연활자본으로 간행한 『규문궤범(閨門軌範)』 주018)
한국국학진흥원, 『경암 왕성순의 규문궤범』, 근현대 국학자료 총서 2, 2005.
등이 있다.

이러한 한문본을 한글로 언해한 자료는 대개 필사본으로 전해오기 때문에 자료 접근이 어려워 문헌 자료 간의 상호 관계를 추적하기는 만만찮다. 15~18세기에는 유교 이념을 보급하고 내재화하기 위해 규훈서를 작성한 반면, 19~20세기 초 작자는 유교 이념을 회복하여 무너지는 국가와 윤리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규훈서를 작성하였다. 특히 18세기 이후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고 여성 교육 담론이 활성화되었으며, 교육 텍스트가 양산되는 등 특기할 만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이 시기 여성 교육과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가운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계녀서』는 여성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덕행을 바탕으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닦아서 가정을 잘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이에 필요한 올바른 도리를 순수한 국문으로 적어 간곡하게 훈계한 것이다.

우암 『계녀서』 계열은 매우 다양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를 들어보면 (1) 삼희제 손진번본 주019)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의 맏딸을 공주 탄방(炭坊)에 사는 탄옹 권사의 둘째 아들인 권유(權惟)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딸에게 언문으로 지은 계녀의 글을 『우암선생계녀서』라고 한다. 물론 이 이름은 후대에 널리 유포되는 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유가에서 시집을 가는 딸에 대한 교육서로서 이본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 가운데 고종 28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원계리에 거주하던 우암의 9대손인 송병준 씨댁에서 이 계녀서의 사본 1종이 발견되었으며, 동년에 경주군 강동면 금호댁 가인 삼희제 손진번 씨댁에서, 원계서원에서 등사한 필사본과 고종 32년에 다시 등사한 필사본이, 맏자부인 여강 이씨에게 전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재욱, 우암선생계녀서, 대동인쇄소. 소화14년 9월), (2) 이기준본 여훈계(女訓誡) 주020)
여훈계(女訓誡) 한글 친필 원본이 충청도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족보박물관에 1929년에 충남 공주군 우성면 옥성리에서 부친 이기준(李基俊)씨가 무남독녀 외동딸 이종석(李鍾錫)을 위해 친필로 쓴 ‘여훈계(女訓誡)’가 기증됐다. 이 여훈계는 옥성리(‘개전이’라는 금강 가 마을)에서 단양 이씨 대종가의 부친 이기준씨와 모친 오귀순씨의 외동딸로 1930년에 태어난 이종석씨가 1945년 시집갈 때 친정에서 받아 소지하고 평생 읽은 책자이다.
. (3) 우암유잠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권씨 가문에 출가하는 딸을 경계하는 글인 〈계녀서〉를 회덕군청 용지에 순한글 묵서로 잘 쓴 〈우암유잠〉 단책(單冊)으로 계축(1913년) 납월일 외천 정사에서 썼다는 필서기(筆書記)가 있다. (4) ‘우암션계녀셔’는 한글 필사본 1책으로 26cm×17.8cm의 크기이다. 필사 연대는 무오원월으로 되어 있으며 25장으로 장책되어 있다. (5) 남한당 김한구 이본 우암 송선생 계녀서, (6) 국립중앙도서관 우암션[생]계녀셔, (7) 경북대본, (8) 계명대본 등 매우 다양한 이본들이 전하고 있다.

규훈서의 구성과 서술 방식이 달라지면서 서간과 유서의 형식도 존재한다. 항목화 되고 간략화 되는 특성과 하강의 구조를 갖고 있는 규훈서도 보인다. 규훈서에서 효와 열, 남녀의 분별 등의 가치가 여전히 중요시되며 강조되고 있으나 보수적인 유교 이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의 책임과 구실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순종을 요구하던 모습과는 다른 점을 보이는 것이다. 교육 주체자로서의 어머니의 구실을 강조하고, 금기 조항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규훈서를 통해 여성의 일상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고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양상을 추적할 수 있어, 규훈서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규훈서 자료의 적극적인 발굴과 가훈서, 수신서, 전통 윤리교육서, 계녀서, 여성 작가 규훈서 등과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4. 『여사서언해』의 교훈서와의 출입 관계

『여사서언해』(1737)는, 먼저 여성 교훈서의 남상(濫觴)이라고 할 수 있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崔世珍)이, 명나라 무종(武宗) 성모 장성자인황태후(聖母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 편찬한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가 있으나 현전하지 않고, 성종의 어머님인 소혜왕후 한씨가 선조 6년(1573)에 지은 『내훈』과는 150년 정도 차이가 있으며, 개간본 『여사서언해』(1907)와는 170여 년의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여사서언해』의 텍스트 간의 출입 관계를 면밀하게 대조한다면 16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국어사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원전이 중국의 한문본 판본이기 때문에 번역의 양식적 차이도 현저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4.1. 『내훈』과 『여사서언해』의 관계

먼저 『내훈』 〈언행장 제일〉과 『여사서언해』 〈여계〉 ‘부행’ 제4에 내용을 비교해 보자.

女:녕敎・・애 닐・오・ ・겨지・비 ・네 ・・뎌기 잇・니 나・ :겨지・븨 德・득 ・이・오 :둘흔 :겨지・븨 :마리・오 :세흔 :겨지・븨 양・・오 :네흔 :겨지・븨 功공・이・니 :겨지・븨 德・득・은 구・틔・여 ・조・와 聰총明・이 ・ 달・미 아・니・오 :겨지・븨 :마 구・틔・여 ・이・비 ・나・며 :말・미 ・・카오・미 아・니・오 :겨지・븨 양・ ・ 구・틔여 顔안色・・이 :됴・며 :고오・미 아・니・오 :겨지・븨 功공・ 구・틔여 工巧:・호미 :사・게 너・무・미 아・니・라 ・조・며 ・며 正・・며 安靜:・・야 節・介・갱・ 자・바 整:齊쪵・며 ・몸 行・요・매 붓・그・러우・믈 두・며 뮈・욤・과 마니 이:쇼・매 法・법 이・쇼・미 닐・온 :겨지・븨 德・득・이・라 :말・ ・・야 닐・어 :모딘 :마・ 니・디 아・니・며 시・졀・인 後:에・ 닐・어 :사・게 아・쳗브・디 아・니・호미 ・이 닐・온 :겨지・븨 :마리・라 :더러・운 거・슬 시 ・서 ・옷과 ・무・미 ・조・며 沐・목浴・욕・을 시・졀로 ・야 ・모 :더럽・게 아・니・호미 ・이 닐・온 :겨지・븨 양・라 ・질삼・애 ・・ 專一・ ・야 노・・과 우・믈 ・즐기・디 아・니・며 술・와 ・밥과・ ・조히 ・야 손・ 이:바・도・미 ・이 닐・온 겨지・븨 功・이・라 ・이 :네・히 :겨지・븨 ・큰 德・득・이・라 :업수・미 :몯・리・니 그・러・나 ・요・미 甚씸히 :쉬우・니 오・직  :두・매 이실 ・미라 :녯:사・미 닐・오・ 仁・이 :머・녀 ・내 仁・을 ・코져 ・면 仁・이 니・를리・라 ・니 ・이・ 니・니・라

부 뎨

계집이 네 가지 실이 이시니 나흔 니론 계집의 德덕이오 둘흔 니론 계집의 말이오 세흔 니론 계집의 얼골이오 네흔 니론 계집의 功공이니 그 니론 계집의 德덕은 반시 조와 그미 졀등며 탁이홈이 아니며 계집의 말은 반시 辯변 입과 利니 말이 아니며 계집의 얼굴은 반시 얼굴 비치 아롬답고 빗나미 아니며 계집의 功공은 반시 조 공교홈이 사의게 디나미 아니라 幽유며 閒한며 貞뎡며 靜졍고 節졀을 딕희여 整졍齊졔 며 몸을 홈애 붓그림을 두고 움즈기며 고요이 법되 이시미이 니론 계집의 德덕이오 말을 야 닐너 사오나온 말을 니디 말며  후에 말야 사의게 슬여 아니케 홈이 이 니론 계집의 말이오 틔글과 더러온 거 시서 服복飾식을 션명이 며 졍결이 고 沐목浴욕을 로 야 몸이 더러워 욕되디 아니케 홈이 이 니론 계집의 얼굴이오 을 紡방績젹기예 오로디 야 희롱며 우음을 됴히 너기디 말고 酒쥬食식을 潔결齊졔 히 야 賓빈客을 공궤홈이 이 니론 계집의 功공이니 이 네 가지 계집의 큰 졀이오 가히 업디 몯 거시라 그러나 옴이 甚심히 쉬오니 오직  두기에 잇 디라 녯사이 말을 두되 仁인이 멀랴 내 仁인코져 면 仁인이 이예 니른다니 이 니이니라

앞의 『내훈』과 뒤의 『여사서언해』를 비교해 보면 성조의 소멸과 함께 한자음의 표기의 변화, ‘ㅿ’의 소실, 분철표기의 확대, ‘며 〉 閒한며’, ‘專一 〉 오로디’와 같이 고유어와 한자 어휘의 드나듬을 비롯한 ‘〉얼골’의 어휘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여사서언해』는 『내훈』과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언어 변화를 확인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4.2. 『삼강행실도와』와 『여사서언해』의 관계

『여사서언해』와 『삼강행실도』와의 관계는 원문이 완전 일치하는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효행, 충의, 열녀의 중국 사실이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아마 한문본 『삼강행실도』를 만들 때 이미 중국에서 만들어진 『내훈』과 『여범첩록』이 참고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ㄱ) 故고로 楊양香향이 범을 搤외야 아비 잇 줄만 알고 몸 잇 줄을 모로고〈여사서언해 효행편〉.

ㄴ) 양향액호(楊香搤虎) : 楊香이라 홀 리 열 네힌 저긔 아비 조차 가아 조 뷔다가 버미 아비 믈러늘 라드러 버믜 모 즈르든대 아비 사라나니라 원이 곡식이며 비단 주고 그 집 문에 홍문 셰니라〈삼강행실도 3ㄱ〉.

ㄱ)의 『여사서언해』 효행편의 양향(楊香)의 내용이 ㄴ)의 『삼강행실도』에서는 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아래 ㄱ)의 『여사서언해』의 〈여범〉에 실린 황보규 부인의 고사는 ㄴ) 『삼강행실도』의 내용보다 더 상세하게 실려 있기도 하다.

ㄱ) 皇황甫보規규의 夫부人인이 글을 능히 잘 더니 規 죽으매 董동卓탁이 그 고음을 듯고 娶고져 거 夫부人인이 免면티 몯 줄을 알고 이에 卓탁의 門문의 가 어 義의로 다래되 卓탁이 듯디 아니거 이에 責야 지저  나 大대臣신의 妻쳐라 義의로 辱욕을 밧디 아닐 거시오 너 姜강胡호 雜잡種죵이라 일이 내 지아븨 帳댱下하의 엿더니 이제 감히 네 君군夫부人인의게 禮례 업시 굴니오 卓탁이 노여 그 머리 수 우 고 어즈러이 티니 짓기 입에 긋치디 아니 고 죽으니라〈여범 21ㄴ〉.

ㄴ) 禮宗罵卓 : 皇甫規 죽거늘 겨지비 졈고 곱더니 相國 董卓이  一百과  스므 匹로 聘니 奴婢와 쳔괘 길헤 더니 그 각시 더른 리 고 董卓 집 門 의 가 러 마 니 甚히 어엿브더니〈삼강행실도 3ㄱ〉.

앞으로 『여사서언해』에 실린 각종 고사와 『삼강행실도』의 내용과 정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사서언해』에 실린 각종 고사는 여훈교화서 뿐만 아니라 〈내방가사〉에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어 이들의 흐름 관계는 앞으로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4.3. 초간본 『여사서언해』와 개간본 『여사서언해』의 관계

1907년에 인간된 개간본 『여사서언해』를 비교해 보자. 초간본 『여사서언해』의 〈부 뎨〉가 1907년에 인간된 개간본 『여사서언해』에는 다음과 같다.

신언쟝 뎨삼

부인의 가라침이 네가지 잇니니 말이 그 하나에 거지라 마음이 만를 응니 말이 아니면 엇지 베풀리오 말이 례졀에 마지면 가히써 뉘쳐을 면고 말이 리치에 당치 못면 앙이 반다시 좃니라 샹말에 오 화열 안과 슌졍 말은 사이 돍이 아니라가히 궁글리며 훼담고 말이 만면 렬 불이 어덕을 불름 갓다고  오 입이 문갓게 면 말이 덧덧이 잇고 입이 물쏘듬 갓게 면 말이 징거업다 니 심다 말을 가히 삼가지 아니치 못지니라 하말며 부인의 덕셩이 짒ㄱ고 한가야 말을 슝샹  아니라 말이 만면 과실이 만지니 말 져금만 갓지 못지라 고로 셔경…

ㄱ) 孝효와 敬경은 어버이 셤기 근본이니 공양홈이 어려온 줄이 아니라 공경홈이 어려올 飮음食식 供공奉봉으로 孝효 삼으면 이 末말이니라 孔공子ㅣ 샤 孝효 人인道도의 지극 德덕이라 시니 神신明명애 通통며 四海에 감동은 孝효의 지극홈이라〈초간본 『여사서언해』 부모쟝 뎨십이〉.

ㄴ) 효도와 공경은 어버이 셤기 근본이라 공양이 어려운 데 아니라 공경이 어려우니 음식 공봉으로써 효도를 삼으면 이거시 치니라 공ㅣ 샤 효 인도의 지극 덕이라 시니 신명에 통고 예 감동홈이 효도의 지극이라〈개간본 『여사서언해』 부모쟝 뎨십이〉.

ㄱ)은 초간본이고 ㄴ)은 개간본 『여사서언해』이다. 개간본의 언해에는 한자와 한자음 병기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 한글로 되어 있다. ‘공양홈이 〉 공양이’, ‘공경홈이 〉 공경이’로 ‘+옴’이 생략되는 등의 차이가 나타난다. 또 이유나 원인을 나타내는 ‘-ㄹ’가 ‘-니’로 바뀌었으며, ‘末말이니라’와 같은 한문 번역체가 ‘치니라’로 바뀌는 등,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국어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초간본과 개간본 사이에는 언해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인간된 『여사서언해』를 중간본이라고 불렀으나 이것은 전혀 새롭게 언해한 것으로 언해 형식이나 세주 작성 방식, 한자음 병기, 한글 구두가 없는 점으로 보면 전혀 다른 개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간본 『여사서언해』와 비교 연구를 통해 18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국어 변천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사서언해』와 다른 교화서와 내방가사 등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국어사적 변화뿐만 아니라 문헌간의 상호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여사서언해』의 국어학적 특징

『여사서언해』의 표기 방식은 당대에 표준화되고 고정된 표기법이 아니라 표기자의 개인적 의식과 방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한두 가지의 문헌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마치 그 시대의 공인된 표기방식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는 18세기 전기 문헌자료의 하나인 『여사서언해』의 일부 내용이 성종 6년(1475)에 인간된 『내훈』에서부터 1907년에 인간된 『여사서언해』의 개간본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한문 원문을 언해한 자료를 비교할 수 있는, 곧 통시적 연구를 위해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이어지는 『여사서언해』의 두 이본(소위 초간과 중간)의 비교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표기법의 혼란 양상과 초간에서의 보여주는 한문 대문의 한자 어휘를 직역 방식이 중간에서 고유어로 대치한 의역의 번역 방식 차이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 후기 국어사 흐름을 읽어내는 데 『여사서언해』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5.1. 표기 양식

5.1.1. 표기 양식의 특징

초성은 14자(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와 ㅅ계 합용병서 4자(ㅺ, ㅼ, ㅽ, ㅾ)와 ㅂ계 합용병서 3자(ㅲ, ㅳ, ㅄ)와 각자병서 3자(ㄸ, ㅆ, ㅃ)가 있다. 중세어에서 ㅂ계 합용병서가 대체로 ㅅ계 합용병서로 통합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ㅅ계 합용병서가 ㅂ계 합용병서로 통합되는 모습도 보여주기 때문에 병서 표기의 혼란상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합용병서가 현실음의 표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음과 구별을 위한 표기 의식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성은 ‘ㆍ, ㅏ, ㅑ, ㅓ, ㅗ, ㅛ, ㅜ, ㅠ, ㅡ , ㅐ, ㅒ, ㅔ, ㅖ, ㅚ, ㅘ, ㅝ, ㅙ, ㅞ’ 등이 나타나며,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적인 음소가 아닌 ‘ᅟᆐ(帚(여계원서 1ㄱ), 萃(내훈 32ㄴ)), ㆌ(醜(여논어 34ㄴ), 取(어제여계서 1ㄴ))’가 쓰이고 있다.

종성 표기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의 8종성과 겹받침으로 ‘ㄺ, ㄻ, ㄼ’의 예가 있다. 특히 어말 ‘ㅅ:ㄷ’의 표기는 ‘빋(여계 3)’과 ‘빋치(여계 16)’처럼 ‘ㅅ’과 ‘ㄷ’이 교체표기가 공존하고 있다. ‘을(2:38)’과 같이 ‘ 〉 ’으로 기본형 어간이 재구조화된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음절말 자음군의 표기도 기본형 어간의 표기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나 어간말 자음이 단순화한 예가 보이며(옴기다(3:53, 4:28), 읇프며(2:25))의 경우 재분석한 이중표기로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체언의 경우 분철표기가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에 기본형의 어간을 고정시키려는 표기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사서언해』보다 앞선 『노걸대언해』(1670)에 이미 어말 ‘ㄷ’이 ‘ㅅ’으로 대거로 교체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사서언해』에서는 오히려 ‘ㄷ, ㅅ’이 교체표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한 특징이다. 다시 말하자면 표기자가 기본형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5.1.2. 분철 표기의 확산과 표기상의 특징

18세기 초기 자료에서 이미 체언의 분철표기는 표기자의 의식에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어는 물론이거니와 고유어의 표기에서도 체언의 어간과 격조사는 분철 표기로 고정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분철표기는 한자어와 격조사 간의 분리 의식이 고유어나 의존명사 혹은 동명사로 확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의존명사 ‘ㅣ’의 경우 ‘어리니(어린+이), 더니(더+이)’의 경우나 동명사형에서 ‘피미, 도오미, 興感믈, 붇러믈, 사오나오미’와 같은 예에서는 문법경계 의식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에 연철표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의존명사 ‘것’의 경우는 아직 연철표기로 나타나고 있다.

5.1.3. 부사화 파생접사 ‘-이, -히’의 표기

남광우(1977)교수는 부사화 접사 ‘-이, -히’의 실현 환경을 2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주021)

남광우, 〈여사서〉 『이숭녕 선생 고희기념 국어국문학론총』, 탑출판사, 1977.
곧,

① 어근 말음이 모음인 경우 부사화 접사는 완전히 ‘-히’다.

② 어근 말음이 ‘ㅁ, ㅂ’인 경우는 부사화 접사는 ‘-히’가 주로 나타나고 ‘ㄱ, ㄴ, ㄷ ,ㄹ, ㅇ’의 경우는 ‘-히, -이’가 교체되고 있다.

ㄱ) 能히, 諄諄히, 죡히, 可히, 젹히, 졍졔히, 潔齊히, 귀히, 가히, 甚히, 박히, 구챠히, 젼일히, 샤특히, 맛당히, 맏당히, 과도히, 整齊히, 감히, 자셰히, 強梁히, 親히, 周全히, 欵曲히, 荒忙히, 졀졀히, 朦朧히, 공슌히, 싁싁히, 重히, 嚴히, 위히, 判然히, 湛然히, 지극히, 부즈런히, 디완히, 심히, 庶히, 順히, 洽히, 貴히, 薄히

ㄴ) 부즈런이, 우연이, 션명이, 졍결이, 헙슈록이, 맛당이, 젼일이, 이, 일즉이, 맏당히, 諄諄이, 殷勤이, 從容이, 切實이, 샤특이, 젼쳔이, 당졍이, 극진이, 씍씍이, 지극이

(1) “샤특히/샤특이, 싁싁히/씍씍이, 지극히/지극이, 諄諄히/諄諄이, 부즈런히/부즈런이, 젼일히/젼일이, 맛당히/맏당히/맛당히/맏당이”에서 ‘-히’, ‘-이’ 교체표기형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근에 대한 의식이 아직 고정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어말의 ‘ㅌ’이 ‘ㅣ’ 이외의 모음 앞에서도 ‘받 갈고(여논어 29ㄱ)’에서처럼 주로 목적격과 결합하는 경우에 ‘ㅊ’으로 변한 예가 보인다.

(3) 어말자음군 중 ㄼ의 ‘ㅂ’이 탈락한 “軌 뎌 자최 와 단 말이라”(여내훈 47ㄱ)의 예가 보인다.

(4) 어말 ㅺ이 ㄲ으로 나타난다. ‘입시울을’(여논어 2ㄱ)과 ‘입시욹의’(여논어 8ㄱ)에서처럼 혼용되고 있다.

(5) 한자음의 경우 어두 ‘ㄹ’이 ‘ㄹ, ㄴ’ 간에 교체표기로 주로 나타나며, 어두에서도 ‘ㄹ, ㄴ’이 탈락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ㄴ’의 경우에도 어두의 환경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ㄱ) 禮녜, 례, 理리, 厲녁, 論논, 閭녀, 倫뉸, 利니, 隣린, 冷, 聯년, 路로, 累누, 量량, 里니, 良냥, 殮념, 狼낭, 令령

ㄴ) 女녀, 념녀

ㄷ) 니버, 닉여, 니어, 니론, (너)기디, 넷사, 니러, 닙고

다른 18세기의 자료에서처럼 어중의 ‘ㄹ+ㄹ〉ㄹ+ㄴ’의 표기도 강하게 나타난다(실노, 진실노, 홀노).

5.1.4. 어말 /ㅅ/:/ㄷ/표기

말음 ㅅ과 ㄷ의 표기는 18세기 국어의 일반적인 경향과 같으나 ㄷ의 표기도 매우 강한 양상을 보인다(붇그림, 맏보며, 거든, 긷거고). 어간과 어미의 구별 표기의식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파생접미사에 의한 용언의 어간도 그러한 구별을 잘 나타낸다. 어말 /ㅅ/:/ㄷ/표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5.1.5. ‘’의 변화

18세기 중반에는 ‘’의 비음운화가 마무리된 상태이다. 다만 비어두음절에서 ‘〉아’로 회귀되는 예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보인다.

ㄱ) 람[壁](여논어 2), 람[風](여논어 4), 가온대(여범 60)

ㄴ) 아 〉 아희(여범 13), 나 〉 나희(여논어 2), 소 〉 서릐(여논어 18)

비어두음절에서 ‘’의 변화는 거의 대부분 ‘ 〉 으’의 변화가 완료된 시점인데 그 역으로 ‘〉아’로 표기된 “[壁] 〉 바람,  〉 바람[風], 가온 〉 가온대[中]”과 같은 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5.1.6. 유성음 사이에서의 ‘ㅎ’, ‘ㄱ’의 탈락

ㅎ종성 체언의 경우도 ㄱ)의 예에서처럼 아직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ㅎ’이 탈락한 ㄴ)의 예들을 통해 18세기 초에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ㄱ) 흔(여계 1), 터히라(여계 24), 터(여내훈 42), 흘(여논어 26), 세흘 네흘(여논어 8), 뫼(여내훈 38), 길히(여내훈 19), 길흘(여내훈 22), 나히나(여내훈 8), 나라(여논어 16), 나라흘(여내훈 57), 나라히(여범 21), 우흐로(여내훈 8), 안흐로(여내훈 30), 안(여논어 16), 흘(여내훈 26), 나흘(여내훈 30), (여내훈 34), 하히(여내훈 37), 열헤(여내훈 46), 나둘히로(여내훈 46), 칼흘(여범 18), 코흘(여범 20), (여범 28), 노흐로(여범 22), 뫼흘(여범 25), 히(여범 2)

ㄴ) 하은(여계 1), 저으샤(녀계서 3), 하의(여논어 21), 돌이니(여논어 17), 칼이니(여내훈 26), 하을(여내훈 38), 칼을(여범 21), 칼에(여범 33), 이(여범 22), 아희들을(여논어 35)

‘저으샤’(녀계서 3)의 경우 ‘저허더(녀계원서 3)’의 예에서처럼 ‘칼을/칼흘, 코/코흘, 칼이니/, 하은/하히’와 같은 교체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서히 퇴화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ㄱ종성 체언의 경우도 “남게(여범 29), 남기(여내훈 75), 굼그로(여범 60), 솟긔(여범 30), 밧긔셔(여범 3)”처럼 일부 잔존하고 있으나 ㅎ종성 체언보다는 탈락한 빈도가 훨씬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5.2. 음운 현상

5.2.1. 구개음화

ㄱ, ㄴ의 예에서처럼 한자음 표기는 거의 ㄷ-구개음화를 외면하고 있으며, 부사형어미 ‘-디’ 역시 매우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구개음화에 적용된 예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가 한자어나 고유어표기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아래의 ㄱ), ㄴ)의 예에서처럼 한자음에서나 형태소 경계 환경에서 아주 드물게 ㄷ-구개음화형들이 발견되며 어휘부 내에서는 훨씬 적은 예들이 나타난다.

ㄱ) 帝뎨, 天텬, 聽텽, 治티, 朕딤, 沖튱, 迪뎍, 中듕, 朝됴, 展뎐, 調됴, 重듕, 竉툥, 典뎐, 知디, 適뎍

ㄴ) 仲즁, 廚쥬, 名稱팅(여계 2)/名稱칭(여계 4), 酒物쥬(여논어 28)/酒脯듀(여논어 25), 處텨(여논어 17)/處쳐(여계 25), 全뎐(여논어 34)/全젼(여논어 35), 치디(여계 6ㄴ)

ㄷ) 고됴히, 엇디, 침, 귿칠(여계 6ㄴ), 지람을(여논어 22ㄴ), 엇지, 잇지(어제서 6ㄱ)

ㄹ) 어긔룯지(예계 15ㄱ), 품어져(여논 33ㄴ), 지라(여내훈 10ㄴ), 리디, 어디니, 디, 말을어디, 敏티, 디니라, 갈디어다, 기우러디며, 지리오, 下치, 다지, 닑지(어제서 6ㄱ), 호지(여사 5ㄱ), 重치(여사서 4ㄴ), 어긔룯지(1:13), 지, 푸러져

한자음에서 ㄷ-구개음화는 매우 보수적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ㄷ-구개음화가 사회계층적 차이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였기 때문에 대체로 사대부 층에서는 의식적으로 이 현상을 기피하였다. 특히 한자음의 경우가 고유어에 비해 보수적 표기가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구개음화는 구어적 자료와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ㄷ-구개음화는 표기방식을 전제로 하여 관찰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계층적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ㄴ)의 예를 살펴보면 한자음에서도 교체적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확산된 음운 변화였음을 알 수 있다. ㄷ)은 어휘 내부에서의 구개음화가 실현된 예이고 ㄹ)은 연결어미 ‘-디’가 구개음화로 적용된 예들이다. ㄷ-구개음화가 형태소 경계 환경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5.2.2. 원순모음화

순자음 아래에서 원순모음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원순모음화는 문헌상으로는 17세기 말기인 1690년에 간행된 『역어유해』에서 확인된다. 원순모음화 현상은 ‘’의 비음운화 이후 모음체계의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음운 현상인데 17세기 말 『역어유해』(1690)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들어서서 『경신록언해』(1796), 『동문류해』(1748), 『한청문감』(영조 말년)에서와 함께 생산적인 음운현상이었다.

ㄱ) 푸러져(어제서 5ㄴ), 문(여계 10ㄱ), 이뮈(여논어 11ㄴ), 물러(여논어 18ㄴ), 므롯(여논어 2ㄱ)/무릇(여논어 4ㄴ), 믄득(여내훈 3ㄴ)/문득(여논어 2ㄱ), 무롭플(여논어 1ㄴ), 브즈런고(여내훈 25ㄱ)/부즈런케(여논어 26ㄱ), 려(여논어 18ㄴ), 푸른(여논어 37ㄴ), 어여서부터(여논어 5ㄴ), 블이(여내훈 72ㄴ)/불을(여논어 14ㄴ), 물(여논어 32ㄱ), 물리매(여논어 8ㄱ), 머무러(여논어 8ㄱ), 밋부디(여범 7ㄴ), 머무러(여논어 32ㄱ), 머무로면(여논어 33ㄱ), 물(여논어 18ㄱ)/믈(여논어 18ㄴ), 王公으로부터(여사서 5ㄱ), 더부러(여사서 6ㄱ), 부즈런이(여계서 3ㄱ), 문(여계 10ㄴ).

ㄴ) 아롬답고(여계 12ㄱ), 우솜(여논어 9ㄱ).

ㄷ) 나가물(여범 66ㄱ).

ㄱ)와 같이 ‘므롯/무릇’, ‘믄득/문득’, ‘브즈런/부즈런’, ‘블/불’, ‘믈/물’과 같은 교체형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진행 중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원순모음화는 직접순행동화였지만 ㄴ)의 예에서처럼 역행 순행동화의 예들이 보이며, ㄷ)에서처럼 형태소 경계의 환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5.2.3. 경음화와 유기음화

어두된소리에 각자병서 ㄸ, ㅃ, ㅆ이 쓰이었고 합용병서에 ㅾ, ㅺ, ㅼ가 쓰이고 있다. 어두합용병서의 표기는 ㅂ계와 ㅅ계가 다 쓰이고 있으며, 각자병서의 경우는 ‘빠여’, ‘따흔’, ‘쓰미’ 등이 나타나며 어중의 된소리표기는 매우 생산적이다.

ㄱ) 後漢(여계 1:1), (여사서 1:3), 허(여사 2:11), 힘(여사 2:10), 지람(여사 2:22), 며(여논어 4ㄴ), 뵈(여논어 4ㄱ), 썩어(여범 15ㄴ), 빠여(여내훈 78ㄴ), 빠디니(여범 17ㄱ), 빼히고(여내훈 57ㄱ)

ㄴ) 싸하(여사 2:5), 씍씍이(여사 4:17), 따흔(여내훈 57ㄴ), 씻단 말(여논어 10), 쓰미(여계 6ㄱ)

어두 환경에서와 형태소 경계 환경에서 경음화한 예들이 모두 다타나고 있다. 그러나 남부방언의 영향으로 ‘덤덤홈’(여훈원서 3), ‘싁싁히(3:14)’와 ‘氏’는 ‘씨’아닌 ‘시’로 ‘班반氏시’(여계 1:1)와 같이 경음화에 적용되지 않은 표기도 나타난다. 어중의 된소리화가 다음과 같이 표기되고 있다.

붇러오믈(여계원서 2ㄴ), 업디니라(3:72ㄱ)

유기음화현상도 ‘칼(여범 18), 코(여범 20), (여범 28)’은 이미 17세기 후반에 나타나는데 어휘별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구급간이방』과 『훈몽자회』에 ‘양지’이던 것이 ‘양치질’(여논어 10)로 나타나고 있다. ‘켜다[引], 두로혀디(여논어 2), 니르혀(여논어 8), 뒤혀(여논어 10)’가 보이며 ‘실켜 수오(여논어 4)’와 ‘燭을 켜며(여논어 32)’의 예들도 보인다.

5.2.4. 자음동화

자음동화는 ‘ㅅ+ㄱㄱ+ㄱ, ㅅ+ㄴㄴ+ㄴ, ㅂ+ㄴㅁ+ㄴ’의 예들이 보인다. ‘묵금(여논어 24), 석거(여범 19), 닥(여논어 16)’와 같은 ‘ㅅ+ㄱㄱ+ㄱ’의 동화는 『두시언해』 중간에서 이미 보이는데 ‘읻니라(여논어 29ㄱ), 만나며(여논어 53ㄱ)’와 ‘ㅂ+ㄴㅁ+ㄴ’의 동화의 예인 ‘영화롬니라’(여논어 2ㄴ)의 예도 나타난다.

6. 형태·문법적 특징

6.1. 격조사

6.1.1. 주격조사는 수의적으로 생략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분명한 조건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여사서언해』에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행음절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중세어와 달리 한자어나 ㅣ-모음 아래에서도 혼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주격조사 ‘-가’가 이미 필사본에서는 16세기 초반에 나타나지만 문헌자료에서는 17세기 『벽온신방』에 “그 내가 병 긔운을 헤티니”(벽온 15ㄴ)에 예가 나타나는데 『여사서언해』에서 “疏蛙 니가 성긔고 버레 먹단 말이라”(여논어 17)의 유일한 용례를 보인다.

6.1.2. 목적격 조사로는 『여사서언해』에서는 ‘, 을’이 나타나는데 선행 체언이 개음절인 경우 음양 조화표기와 관계없이 ㄱ)의 예에서처럼 ‘’로 실현되고 있다. ‘’의 비음운화가 완료된 상황에서 비어두음절의 ‘’가 음성 실현형으로는 ‘아’였던 남부 방언의 영향으로 보인다.

ㄱ) 陽道, 外治, 內治, 位, 緒, 졍, 머리, 理, 닐욀바, 一書, 坤維, 末世, 禮, 용의, 垢, 夙夜, 무리, 쇠, 누에

ㄴ) 陰德을, 訓迪, 샤믈, 조종을, 힘씀을, 근노심을, 글을, 本을, 俗을, 臣을, 訓을, 을, 兔홈을, 辱을, 줄을, 一通을, 몸을, 사을, 일을, 아을, 람을

선행 체언이 폐음절인 경우 역시 모음조화 상관없이 ㄴ)에서처럼 거의 대부분 ‘을’로 나타나고 있다. ‘모시를(여논어 4), 百事를(여논어 5), 빗(여계 5), 빋(여계 16), 돌(여논어 15), 거(여논어 15), 받(여논어 29)’과 예외적인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의 비음화 이후 형태소 경계에서 모음체계의 불완전함을 반영하는 개인적 표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ㄱ) 館관閣각에 臣신을 명야(어제서 6ㄱ)

받들어 훋사을 勸권노니(여논어 34ㄱ)

女녀子들을 권노니(여논어 36ㄱ)

ㄴ) 강을 허  와(여논어 10ㄴ)

ㄱ)의 예에서 목적격조사가 부사격으로 사용된 예들이 많이 나타난다. 수로 수여동사에서 목적어가 생략된 관계로 목적격조사가 이동한 결과이다. “館관閣각에 臣신(에게) [ ]obj을 명야”의 구성에서 목적격 표지가 수여표지로 이동한 결과로 해석할 수있다. ㄴ)의 예는 시간 부사격의 위치에 목적격 조사가 실현된 것이다. 자동사구문에서 실현되는 이유도 문형구조의 역사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뿐만 아니라 도구격을 지배하는 ‘만들다’와 같은 서술어에 ‘로’와 ‘를’이 교체되는 이유도 동일한 현상으로 보인다. 목적격조사가 타동사 구문 이외에 나타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1.3. 주제격조사는 선행음절이 개음절인 체언에서는 ‘’이 폐음절 체언에는 ‘은’이 실현되고 있어 목적격 조사와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ㄱ) 天子 后 諸女 나 道 이  지아비 叔妹

ㄴ) 坤은 근본은 興은 아은 뉘임은 陽은 陰은 계집은 敬은 順은 말은 얼굴은 功은 하은 허믈은 법은

주제격 조사나 목적격 조사에서 이러한 경향은 ‘’의비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18세기 전반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증수무원록언해』나 『경신록언석』(1796)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6.1.4. 처격조사로는 ‘애, 에, 의, 예, ’가 나타난다. 음양 조화표기와 무관하다.

ㄱ) 禮애, 朝夕애, 易애, 夫婦애, 三百篇애, 昔年애, 사흘만애, 鄙諺애, 기림애, 中外애, 몸애

ㄴ) 階序에, 位에, 外에, 이에, 胎教에, 古者에, 후에, 鄉村에, 지게에, 朝暮에, 귀에, 기에

ㄷ) 가의, 床下의, 집의, 庭戶의, 道路의, 몸의

ㄹ) 이예, 지게예, 바회예, 兩儀예, 魏예

ㅁ) 밧, 안

처격조사로는 ‘애, 에’는 음양조화표기와 무관하게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ㅣ모음 아래에서 실현되던 ‘예’는 ‘에’와 교체표기로도 나타나며, ㅎ곡용어에서는 ‘’가 실현되고 있다. 여격을 표시하는 처격조사 가운데 ‘의게’와 ‘의’는 선행 체언이 유정물의 유무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된다.

6.1.5. 속격조사는 ‘의’, ‘’과 사잇소리 ‘ㅅ’, ‘ㄷ’이 실현된다. 내포문이나 접속문의 주어가 속격을 수반하는 현상이 18세기 초반에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어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었지만 18세기 국어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홍빈(2011:56)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소의 “주어적 속격”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웃 사 파 가”에서 ‘파 -’의 주어인 ‘사’가 속격과 결합하는데 ‘파 -’의 동작의 주제 곧 행동주라고 할 수 있다. 『여사서언해』에서는 내포문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되거나 혹은 접속절의 선행문의 주어가 속격으로도 실현될 뿐만 아니라 대격으로도 실현되고 있다.

ㄱ) 내포문에서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

현은 모의 어려서 치매 말암으며(어제서 4ㄴ)

너희 무리의 이  줄을 넘녀야(여계 3ㄴ)

기피 훗사의 능히 와 것지 못을 앗셔 야(어논어 1ㄱ)

이 글은 송시의 지은 배어(어논어 1ㄱ)

갓 쳐부의 가히 어티 아니티 못며(여계 6ㄱ)

ㄴ) 접속절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

쳐 유야 은 서 인니라(여논어 21ㄱ)

집의 늉며 톄홈과 나라 폐면(여논어 16ㄱ)

셔애 암의 사볘 쳑엳고(여논어 19ㄱ)

시애 녀계의 긔롱미(여논어 19ㄱ)

셩쥬의 흥제 문왕의(여논어 45ㄱ)

ㄷ) 접속절의 주어가 대격으로 실현

공뎡을 그륻되미 읻게 말올 니라(여논어 29ㄴ)

ㄱ)에서는 동명사로 구성되는 내포문의 주어가 속격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ㄴ)에서는 접속적의 주어가 역시 소격으로 실현되는 예이지만 ㄷ)은 접속절의 주어가 대격으로 실현되는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격조사의 배합의 혼란이 아니라 통사론적으로 주어 거듭나기를 회피하려는 데서 생겨난 현상으로 20세기 국어에 까지 이어진 현상이다.

속격이 주격이나 목적격과 교차가 되는 예도 나타난다.

ㄱ) 엇디 德덕의 닥지 몯며 집의 바로디 몯홈을 근심리오(여범 3ㄴ)

ㄱ)의 예에서 ‘德덕의’는 후행하는 ‘닦다’의 대상 곧 목적격으로 ‘집의’는 ‘바로디 몯홈을’의 주어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격이나 주격 위치에 속격이 실현되고 있다.

6.1.6. 접속격조사는 ‘와, 과’는 역시 선행음절의 환경과 관계없이 다만 “內訓와(여계서 4), 父母과(여논어 18), 束脩과(여논어 25), 是과(여논어 36)”와 같이 음양 조화 표기와 무관한 예들이 보인다. 실현되며 선행음절의 말음이 ㄹ인 체언에도 ‘신발과(여논어 11), 실과(여논어 22), 과(여내훈 78)’와 같이 주로 ‘과로 실현된다. ㅎ곡용어에 나타던 ‘콰’는 보이지 않는다.

ㄱ) 투부와 음녀과로 한 쳐(여범 71ㄴ)

ㄴ) 이  사람은 개와 쥐 이 이실(여논어 9ㄱ)

부모 셤김과 님군을 셤김과 구고 셤김에 니고(여논어 8ㄱ)

례와 의와 념과 티 나라 네 벼리니(여범 50ㄱ)

기름과 소고모가 호쵸와 몌조 항아리와 독에(여논어 30ㄱ)

ㄱ)의 예처럼 공동격조사가 여럿 이어날 때 마지막 체언에 복합격으로 실현되는 중세어의 잔류 형태도 보이지만 이미 ㄴ)의 예에서처럼 마지막 체언의 공동격은 생략되고 있다. 중세어에서 접속격이 연이어 나타날 때 ‘[N1]과/와+[N2]과/와+.....[Nn]과/와+C’와 같은 구성에서 마지막의 ‘[Nn]과/와+C’가 접속격이 생략되고 ‘[Nn]+C’로 바뀐 결과이다.

6.2. 용언의 활용

6.2.1. ‘-’ 용언의 축약과 탈락이 대량으로 나타난다. ‘부즈른()을’, ‘오롣(-)’, ‘아니-’ 등이 ‘부즈런을’, ‘오롣다’, ‘아닐’과 같이 실현되어 ‘-’의 축약과 함께 어간내부를 재조정하는 일련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ㄱ) 통티(여계 2ㄴ)

ㄴ) 부즈런을(여계 6ㄴ), 오롣다(여계 13ㄴ), 아닐(여계 13ㄴ), 아니미(여논어 25ㄱ), 부즈런의(여논어 28ㄱ), 삼갈만(내훈 7ㄱ), 삼가기로(내훈 7ㄱ), 비로소믈(여논어 16ㄱ), 삼가미(여논어 19ㄴ), 삼가디(여논어 22ㄱ), 졀검애(여논어 29ㄱ), 부즈런으로(여논어 30ㄴ), 니만(여논어 29ㄴ), 아니미냐(여논어 33ㄱ), 비로매(여논어 45ㄱ), 삼가니(여논어 81ㄱ)

이와 같은 현상은 아직 ‘-ㄴ(관형사형)/-ㄹ(관형사형)’이 동명사어미로 사용되는 특징이 남아 있기 때문이 것로 보인다.

6.2.2. 중세어 문헌에서 보이는 ‘잇다[有]’가 ‘이셔, 이실, 이신, 이셔도, 이쇼, 잇고, 잇디, 이시며’와 같은 활용을 보이다가 ‘이스매, 이스믈, 이슬지라도, 이스리니, 이스면, 이슬시, 이시믈, 이거시어든’과 활용됨으로써, ‘ㅣ’가 ‘ㅡ’로 변하였다.

6.2.3. 중세어에서는 ㄹ변칙 용언을 ‘ㄷ’이 ‘ㄷ, ㄴ, ㄹ, --’ 아래에서는 탈락되고 있다. ‘여듸(여계 18), 디(여범 28), 아디(여범 70)’와 같이 실현된다. ‘끌다, 베풀다’의 예에서도 ㄹ 불규칙으로 활용되고 있다.

‘웃다’는 규칙활용을 하는 것이지만 중세어나 근세어에서 변칙활용을 하던 것으로 중세어에서 ‘우, 우며’ 활용을, 근세어에서는 ㄱ)과 같이 활용한다.

우음(여계 13, 여범 33), 우서(여범 61), 우솜(여논어 9), 우솝도소니(여논어 26)

6.3. 과거시상 선어말어미의 정착

과거시상 선어말어미는 ‘-어(연결어미)/아+잇(이시)-’의 구성으로 서술어의 행위가 현재 시점 이전에 이루어진 상황을 나타낸다. 그러나 ‘-어(연결어미)/아+잇(이시)-’의 구성의 서술어가 순간성을 지닌 경우 과거의 상태나 행위의 지속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미기능이 차츰 분화됨으로써 16세기부터 ‘-어(연결어미)/아+잇(이시)-〉-앳/-엣’으로나 ‘-+-어(연결어미)/아+잇(이시)-〉-얏/-엿’으로 축약된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이미 완료상의 과거시상과 진행상의 과거시상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동사 구성에서는 ‘-아/어 잇-’구성이 성립되지 않지만 자동사의 경우에도 결과를 감각이나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ㄱ) 구녈삼뎡은 첫편의 사겻니라(여논어 37ㄴ)

뎐긔 모도아 얃디라(여내훈 6ㄴ)

내 귀에 닉고 애 감초왓더니(여내훈 7ㄱ)

현홈과 부홈애 엿나니라(여내훈 81ㄱ)

집공의 원 되얏더니(여범 1ㄱ)

과거시상 선어말어미 ‘-더-’는 서술격조사 ‘이-’나 미래선어말 어미 ‘-리-’ 다음에 ‘-러-’로 교체되고,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 다음에서는 ‘-다-’로 교체되었는데 서술격조사의 환경에서 ‘-러-’가 다시 ‘-더-’로 회귀하였다.

6.4. 현재시상 선어말어미 ‘--’ 탈락

현재시상 선어말어미 ‘--’는 종결형 ‘-다’ 앞에서는 ‘-ㄴ(는)다’로 감탄종경어미 ‘-구나’ 앞에서는 ‘-는구나’로 관형형 앞에서는 ‘-느-’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가 탈락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ㄱ) 다(여논어48ㄴ), 돈목다(여논어72ㄴ), 인의다(여논어72ㄴ)

ㄴ) 니라(여범1ㄱ)

현재시상어미의 분포 배합이 재배열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 탈락 환경을 보다 더 정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6.5. 동명사형어미 ‘음〉기’의 교체

18세기에 들어와 동명사형어미가 ‘-(으)ㅁ’에서 대폭 ‘-기’로 교체되는 동시에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 형식으로 바뀌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국어에서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가 탈락되면서 동명사형어미와 명사화접사 간의 형태적 차이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5세기 국어에서는 ‘-음’이 명사화를 할 수 있는 기제였으나 일부 ‘-기’형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국어에서는 ‘-기’가 ‘-음’보다 더 능동적인 기제인 동시에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의 형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18세기에 들어와서 ‘-음’이 대량으로 ‘-기’로 교체되는 조건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다. 주022)

<풀이>‘-음’에서 ‘-기’로 교체가 시작된 시기는 17세기 『박통사언해』와 같은 구어체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음’의 ‘-기’로의 교체시기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당시 여항에 널리 배포된 『삼강행실도』(16세기)에서 본 『여사서언해』가 주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ㄱ)의 예는 ‘-옴/움-〉-(/으)+ㅁ’으로 교체된 동명사 형들의 예들이다. 16세기 의도법선어말어미 ‘-오/우’와 결합된 형태에서 ‘-오/우’의 탈락과 함께 매개모음이 삽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ㄴ)의 예는 아직 ‘-옴/움-’의 형태로 실현되는 예들이다. 중세어에서 의도법 선어말어미가 문법적 기능은 소실하였지만 그 잔류 형태가 형태소 배합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쩌면 매개모음의 조음소적 기능으로 잔류된 형태들이다. ㄷ)의 예는 이른바 ‘-음〉-기’가 교체된 예들이다.

ㄱ) 주시믈(여계 1ㄱ), 바듬(여계 2ㄱ), 뉘임은(여계 1ㄱ), 잡으미오(여계 3ㄱ), 어딜미(여계 3ㄱ), 다림이(여계 3ㄱ), 니음이니(여계 3ㄴ), 쓰미(여계 6ㄱ), 나매(여계 6ㄴ), 가지믈(여계 6ㄴ), 니이니(여계 6ㄴ), 가지다은(여계 6ㄴ), 나매(여계 9ㄱ), 가지믈(여계 9ㄱ), 문(여계 10ㄴ), 디나미(여계 10ㄴ), 이시미이(여계 10ㄴ), 붓그림을(여계 10ㄴ), 드미(여계 16ㄱ), 나매(여계 16ㄱ), 가심이오(여계 19ㄱ), 기림애(여계 19ㄱ), 아니을(여계 22ㄴ), 붇그림을(여계 23ㄴ), 니미니라(여논 1ㄱ), 되오매(여논 1ㄴ), 셰오믈(여논 1ㄴ), 애(여논 1ㄴ), 안매(여논 1ㄴ), 뎍즁을(여논 4ㄱ), 게어름믈(여논 4ㄱ), 궁믈(여논 4ㄱ), 파매(여논 8ㄱ), 이심을(여논 8ㄴ), 매(여논 10ㄴ), 자매(여논 11ㄴ), 봄애(여논 29ㄱ), 다리믈(여논 33ㄱ), 아니을(여논 33ㄱ), 오매(여논 33ㄱ), 이매(내훈 4ㄴ), 침을(내훈 6ㄱ), 움김을(내훈 11ㄱ), 싸힘은(내훈 12ㄱ), 너기미니(내훈 16ㄱ), 홈만(내훈 33ㄱ), 막음은(내훈 34ㄴ), 이심을(내훈 34ㄴ), 도으시미(내훈 37ㄴ), 업시을(내훈 42ㄱ), 셩장(내훈 49ㄱ), 감동은(내훈 51ㄴ), 닐음을(내훈 51ㄴ), 거듬은(내훈 53ㄱ), 셤김을(내훈 53ㄴ), 파은(내훈 58ㄴ), 아님이(내훈 62ㄴ), 도음을(내훈 66ㄱ), 니이니라(내훈 70ㄱ), 베품을(내훈 73ㄱ), 이심애(여범 12ㄱ), 가침은(여범 12ㄴ), 기림을(여범 13ㄴ), 우귀매(여범 19ㄱ), 무냥을(여범 50ㄴ), 크믈(여범 60ㄴ).

ㄴ) 교도홈이(여계 2ㄱ), 근심홈을(여계 3ㄴ), 몯홈을(여계 6ㄱ), 피홈은(여계 6ㄴ), 부부되옴은(여계 9ㄴ), 슌홈은(여계 10ㄴ), 이쇼매(여논 1ㄴ), 금이(여논 1ㄴ), 기모홈이(여논 8ㄱ), 홈을(여논 21ㄱ), 틔호미(여논 28ㄴ), 맏당홈을(여논 33ㄱ), 물오며(여논 35ㄱ), 치샤믈(내훈 4ㄴ), 졀당홈이(내훈 7ㄱ), 완만홈을(내훈 48ㄱ), 홈이(내훈 69ㄴ), 경복홈을(내훈 82ㄴ), 편피홈으로(내훈 82ㄴ), 부롬은(내훈 82ㄴ).

ㄷ) 리기(여계 2ㄴ), 살기(여논 21ㄴ), 들레기을(여논 21ㄴ), 오기(여논 32ㄱ), 마시기(여논 33ㄴ), 먹기(여논 33ㄴ), 졉기로(내훈 8ㄱ), 젹기로(내훈 12ㄱ), 갑기(내훈 22ㄱ), 기예(내훈 22ㄱ), 젹누기에(내훈 22ㄱ), 슌젼기(내훈 22ㄱ), 받갈기에(내훈 25ㄴ), 누젹기(내훈 26ㄱ), 슈고롭기로(내훈 29ㄴ), 뢰기(내훈 29ㄴ), 쓰기(내훈 29ㄴ),  브기만(내훈 30ㄱ), 셤기기(내훈 31ㄴ), 가지기(내훈 34ㄱ), 기(내훈 37ㄴ), 어디기(내훈 39ㄱ), 기(내훈 42ㄱ), 젹기로(내훈 42ㄴ), 죵기에(내훈 49ㄱ), 셤기기(내훈 51ㄴ), 깁기(내훈 53ㄱ), 혹기(내훈 57ㄴ), 겸억기(내훈 57ㄴ), 교만기(내훈 57ㄴ), 들기(내훈 60ㄱ), 막기에셔(내훈 60ㄱ), 크기여(내훈 64ㄱ), 들기(내훈 66ㄴ), 샹기(내훈 69ㄴ), 어렵기로(내훈 81ㄱ), 교기로(내훈 81ㄴ), 구로기(여범 18ㄱ), 움기매(여범 50ㄴ), 죽기에(여범 50ㄴ).

‘-기’가 대량으로 교체되는 시기와 ‘-ㄴ(관형사형) 것’의 내포문화의 시기가 서로 엇물려 있다. 주023)

<풀이>채완(1979 : 99), 〈명사화소 ‘-기’에 대하여〉, 『국어학』 8. 채완 교수는 ‘-는 것’과 ‘-기’는 일산용어, 서민어로부터 그 세력을 넓혀 나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음’에서 ‘-기’로의 교체조건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국어에서도 ‘-음’에서 ‘-기’의 분포상의 제약을 후행 서술어의 제약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18세기 이들의 교체기의 교체조건으로 설명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채완(1979:101) 교수는 후행 서술어와의 공기 조건에서 ‘보다, 듣다, 알다, 개닫다’ 드으이 지각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기’와 호응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하였으나 ‘-음〉-기’의 교체조건으로서 설명력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장석진(1966) 교수는 ‘-음’이 문어적이고 추상적, 개념적 질적인데 비해 ‘-기’는 ‘구체적, 사실적, 양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임홍빈(1974) 교수는 ‘-음’은 [+존재][+대상성]의 자질을 ‘-기’는 [-존재][-대상성] 자질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일찍 정인승(1956)은 ‘기정’과 ‘미정’의 차이로 임홍빈(1974)은 ‘대상화’ 자질로 설명해 왔다.

18세기 ‘-음’이 ‘-기’의 발달과정에서 그 기능이 축소되면서 점차 ‘-기’가 확산되는 동시에 ‘-느 것’ 형식의 명사문으로 확장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형태소 배합에서 ‘-우/우’ 의도법 선어말어미의 탈락과 함께 ‘-음’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 동사계열은 18세기 당시에도 ‘’, ‘홈’, ‘기’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들 부류가 대체적으로 ‘-ㄴ(관형사형) 것’의 형식으로 발전한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옴/움’이 ‘ㄱ’로 교체되는 발단은 ‘오/우’이 탈락과 함께 단순한 [사실성(factive)]의 경우에서 [과정성(process)]의 의미가 분화되면서 점진적으로 ‘옴/움〉기’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과거시상이 완료와 과정성(진행성)의 분화로 ‘-아+잇-〉-엣/앳-〉-었/았-’의 통합과 함께 ‘-고+있-’이라는 문법기제가 발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6. 삽입모음 ‘-오/우-’의 동요

중세어에서 화자의 의도를 나타내는 의도법이라고 하는 ‘-오/우-’는 관형사형어미와 결합하면 그 뒤에 오는 피수식어가 관형사형으로 쓰인 동사의 목적어임을 나태내고 그 밖의 어미와 결합하면 1인칭 주어와 호응되는 문법범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명상형어미 ‘-ㅁ’과 설명법어미 ‘-’와 의도법 ‘-려’는 ‘-오/우-’의 문법적 기능이 소멸된 이후에도 반드시 이 삽입모음과 결합하였는데 16세기에 들어서서 이 삽입모음이 탈락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명사형과 결합에서 동요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18세기 국어에서도 삽입모음 ‘-오/우-’의 동요는 그대로 이어지면서 특히 처격과의 결합 환경에서,

‘-매’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

6.7. 곡용 ‘ㅁ+ㅐ’와 연결어미 ‘-매’의 혼란

ㄱ)의 예와 같이 명사형과 처격 ‘애’의 결합형이 ‘ㅁ-+-애’의 결합이냐 혹은 ‘-매’의 결합이냐는 연분철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곡용환경이 활용환경으로 문법화를 거친 결과로 볼 수 있다. 16세기 단계에서 “여희여 오매 날리 더니 도라오니 홀연히 비치로다”(두시 10)에서 ‘오매’는 ‘오[來]-+-오(의도법선어말어미)-+-ㅁ(명사형어미)-+-애(처격조사)’의 구성으로 ‘-오-’의 양태요소가 상성이기 때문에 ‘-ㅁ-’이 명사형이다. 따라서 ‘-매’는 아직 어미로 재구조화를 거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국어에서는 곡용형이 활용형으로 문법적 변화를 반영하는 교체형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ㄱ) 이 글을 닑그매도 오히려 닑지 아닌 젼과 흐면(어제서 6ㄱ)

야용을 말며 들매 의식을 폐티 말며(여계 6ㄱ)

얼굴을 헙슈록이 고 나매 료됴히 도 짓고(여계 16ㄱ)

 번 자매 바로 하빗 나기지(여논어 11ㄴ)

녀ㅣ 츌가매 부쥬ㅣ 친이 되나니(여논어 21ㄱ)

존친에 믿며 부모의게 졈미(여논어 26ㄴ)

손이 오매 탕이 업서(여논어 33ㄱ)

조차오매 가난 가히 받긔 들리디 몯  니라(여논어 35ㄴ)

왕매 움즉여 물오며(여논어 35ㄴ)

졔애 이매 나라히 편안니(여논어 20ㄱ)

홈이 이시면 움기매 반시 허믈이 업고(여논어 34ㄱ)

인을 베프매 반시 친을 목을 몬져고(여논어 72ㄴ)

싀어미 졋 먹이매 산남의 귀 윤을 육고(여범 18ㄱ)

야흐로 우귀매 지아비 슈자리에 가 죽거(여범 18ㄱ)

 익글매 손을 버혀(여범 28ㄱ)

다 움기매 반시 의에 합며(여범 51ㄱ)

『여사서언해』에서는 ㄱ)의 예가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매’는 ‘-ㅁ+-ㅐ’의 곡용의 환경에서 처소나 시간의 의미가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연결 어미로 전환되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국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문법범주의 재편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8. 부사화접사 ‘이/히’의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

부사화 접사 ‘이/히’의 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근대후기 국어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뒤에 ‘-’가 연결될 때 부사화접사 ‘이/히’가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를 보이고 있다.

ㄱ) 아답게, 닉게(여논어 18ㄴ), 길게(여논어 22ㄴ), 교티케(여논어 26ㄱ), 이즈러디게(여논어 34ㄱ), 들케(여논어 36ㄱ), 맏걷게(여논어 12ㄴ), 늗게야(여논어 26ㄱ), 넉넉게(여논어 67ㄴ)

ㄱ)의 예들처럼 부사화접사 ‘이/히’의 부사형어미 ‘게’로의 교체되는 환경 조건이 대체로 ‘-’와 통합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사동법이라는 문법 범주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7. 번역어와 어휘

7.1. 번역어

7.1.1. 한문 원문의 ‘以’는 일찍 한자 차용 어휘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것인데, 이것에 대응되는 번역어는 ‘’이다. 그런데 ‘’의 통합 분포는 아래와 같이 매우 넓다.

ㄱ) 으로 라(여범 24ㄴ)

ㄴ) 數수年년(여계 3ㄴ), 대개(여계 4ㄱ), 힘(어제서 6ㄴ), 막음은(내훈 34ㄴ), 나라히(여논어 20ㄱ), 足죡히(여계 24ㄴ)

ㄷ) 야(여계 13ㄴ), 야(여범 8ㄴ)

ㄹ) 로(여범 8ㄴ), 로(여범 8ㄴ) 義의로(여범 21ㄴ), 로(여범 8ㄴ), 이실로(여계, 4ㄱ)

ㅁ) 시러곰(여계 4ㄴ), 더으며(여계원서 2ㄴ), 一일通통을(여계원서 4ㄱ), 면(여계 6ㄱ)

ㅂ) 일워곰(여계서 4ㄴ)

ㄱ)의 예에서 ‘’가 단독 성분으로 사용되는가 하면, ㄴ)의 예처럼 명사나 부사 아래 통합되는 보조사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ㄷ)에서 ㅁ)까지는 부사형어미나 격조사와도 통합되는 보조사적 기능을 하고 있다. ㅂ)은 ‘시러곰’(여계 4ㄴ)와 ‘일워곰’(여계서 4ㄴ)에서처럼 강세 첨사와 통합 서열이 달라지기도 한다. ‘’의 통합 분포는 ‘으로’와의 통합이 제일 높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국어의 자격을 나타내는 ‘로서’와 재료나 수단, 도구의 의미를 갖는 ‘로써’와 구분되듯이 ‘로써’로 점차 이행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7.1.2. ‘與’의 번역어인 ‘다’, ‘다’과 같은 이형태와 함께 ‘다만’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ㄱ) 다(여계 70ㄴ), 다(여계 18ㄱ), 다몯(여내훈 6ㄴ), 다(여내훈 46ㄴ), 다(여내훈 46ㄴ)

ㄴ) 다만(여계 6ㄴ), 다만(여내훈 8ㄴ)

중세어에서도 ‘다’, ‘다몯’, ‘다몯’, ‘다믓’, ‘다믇’ 등의 있듯이 이 문헌에서도 ‘다, 다몯, 다’과 같은 이형태와 함께 이미 ‘다만’으로 굳어진 예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은 선행 명사구가 공동격과 호응관계를 같는 경우 현대국어의 ‘함께’, ‘더불어’로 어형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다’이 자음동화에 의한 ‘다’, ‘다만’으로 바뀐 어휘는 전혀 다른 제한의 의미를 갖는 어휘로 분화되었다. 근대국어에서 ‘다’과 ‘다만’의 분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7.1.3. ‘使’의 번역어인 부사어 ‘야/여’, ‘야곰’, ‘여’, ‘여곰’와 ‘부리-’와 같은 어휘들이 나타난다.

ㄱ) 사오나온 말을 니디 말며  후에 말야 사의게 슬여(여계 2ㄴ)

ㄴ) 儒유臣신으로 여곰 註주解야(여계서 3ㄴ)

保보와 傅부와 姆무로 여곰 朝됴夕셕애 宮궁闈위에 進진講강야(여계서 4ㄱ)

芸운閣각으로 여곰 刊간印인야 廣광布포게 노니(어제서 6ㄱ)

賢현婦부ㅣ 될 디라 젼 사으로 여곰 홀노 千쳔古고애 아답게 아니  니라(여논어서 1ㄴ)

ㄷ) 淫음樂악과 慝특禮례를 心심志지예 부리디 말라 니(여사서 72ㄱ)

중세어에서는 아래ㄱ), ㄴ) 예에서처럼 ‘부리-’, ‘시키-’가 ‘使’의 번역어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ㄱ) 使者 브리신 사미라.(석보 6:2ㄱ)

四天太子 곧 那吒類니 能히 鬼神 브리니라.(능언 6:14ㄴ)

吏 다리 거시오. 民은 브리 거시오.(법언, 2:196ㄴ)

ㄴ) 彩色로 佛像 그리 제 거나  시겨 야도 다 마 佛道 일우며(석보 13:52ㄴ)

만이레 어버 시기 일로 외니라 야 내 들 바 면(번소 7:2ㄴ)

마라 애라 너 시기노라 개더긔 공도 바다 네게 두다가 보내고랴(순천김씨 언간)

그러나 『여사서언해』에서는 ‘부리-’가 단 한 차례 나오는 이외에 거의 대부분 ‘야/여’, ‘야곰’, ‘여’, ‘여곰’이 실현되고 있다.

7.1.4. ‘及’의 번역어로는 ‘밋’, ‘믿’이 나타나고 있다.

8. 어휘의 변화

8.1. 한자 번역어

다음으로 특이한 희귀한 고유어가 나타나는 사례를 살펴보자.

ㄱ) 아을 나 매일 희여도 오히려 그 尫왕가(여계 9ㄱ)

귀로 길말을 듯디 말며 눈으로 샤특히 보디 말며 (예계 15ㄴ)

檢검은 허믈 뎜검단 말이라 强강良냥은 에딜긘 거동이니(여논어 13ㄴ)

‘희여도, 길말, 에딜긘, 이긔여, 들네여, 장를, 며, 야, 밧람을, 벙어리다. 어긔룯지’ 등의 희귀한 어휘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번역문이기 때문에 한자어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8.2. ‘-()-’의 탈락과 축약에 의한 조어

어근에 ‘-’가 결합하는 많은 어휘들이 ‘-’를 생략하는 경향이 많이 보이고 있다. ‘부즈런을’(여계 6ㄴ)의 예에서처럼 ‘부즈런(홈/)을’의 구성에서 ‘홈/’이 생략된다. 이것은 근대국어 단계에서 축약에 의한 새로운 조어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8.3. ‘-/쓰-’의 혼용

현대어에서는 ‘쓰-’가 ‘(글을) 쓰다’, ‘사용하다’, ‘(맛이) 쓰다’ 등을 의미하는 동음어이지만, 15세에는 ‘쓰[書]-’는 ‘(글을) 쓰다’를 의미했으며, ‘[用]-’는 ‘사용하다’, ‘(맛이) 쓰다’ 등을 의미하여 서로 구별되었다. 이 ‘쓰다’가 15세기와 16세기 문헌에서는 ‘스다’로 나타나기도 근대국어 단계에 들어서서 이들의 의미가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다.

8.4. 방언적 요소

『여사서언해』는 남부 방언화자인 이덕수(1673~1744)가 1734년 왕명을 받아 당나라의 『여사서』를 한글로 풀이해 민간에 반포한 것이다. 따라서 방언적 요소가 발견되는데 ‘애/에’애/에 혼기를 보여주는 “가네(여논어 66ㄱ)”나 비어두음절의 ‘’가 그대로 나타나는 ‘아알(여논어 66ㄱ)’의 예들은 남부 방언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있다. 특히 ‘氏 시’의 표기는 예외 없이 ‘시’로 표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 마무리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사서언해』는 조선조 여성 교육을 위해 활용된 교화서 가운데 하나이다. 영조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여사서언해』와 소혜왕후가 쓴 『내훈』을 함께 부녀자 교육서로 활용하기를 바라는 바와 같이 여성 기초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사서언해』는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지만 유교적 국치를 기본으로 하였던 조선의 여성교화서로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중국과 조선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위치의 변화나 민속적인 유사성과 차이 등을 밝혀내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반 교훈서들과 문장의 첨입과 효충열의 고사들이 이 책 저 책 사이에 삽입된 예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한 18세기 국어사 자료가 아닌 16세기에서 20세기에까지 이르는 국어사 발달을 조명할 수 있는 근대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간본 『여사서언해』와는 약 1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향후 초간본과의 정밀한 비교 연구를 통해 근대어에서 현대어로 넘어오는 과정에 국어사적 연구를 위한 핵심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여사서언해』(1737)는 이보다 앞선 문헌인 『노걸대언해』(1670)와 이 보다 뒤에 나온 『경신록언해』(1796)와의 중간에 위치한 문헌 자료로서 국어사 연구뿐만 아니라 여성교육사, 여성사 등 전반에 걸쳐 활용도가 매우 높은 자료임이 분명하다. 본 주해서를 만드는 데 일일이 주석을 달지는 않았으나 이숙인 교수의 『여사서』 연구 성과는 많은 지침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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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학언해』 해제

이상규 (경북대학교 교수)

1. 『여소학』 문헌 해제

『여소학』은 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다. 이본은 3종류로 알려져 있는데 원필사본과 두 가지 이본이 있다. 현재 원필사본은 소실되었고(그 을 즈니 화예 와더라) 등초본 2종은 학계에 알려져 있다.

먼저 원필사본은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주001)

<정의>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1846~1918)는 조선 말기 경학자이면서 문인이다. 본관은 영해이고, 자는 경모(景模), 호는 호산(壺山) 또는 풍산(楓山)이다. 주요 저술로 경전 주석서인 『칠서상설』과 『여소학언해』가 있다. 특히 그가 지은 『논어집주상설((論語集注詳說)』은 널리 알려져 있다.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 눌곡리에 풍림정사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가 고종 19년(1882)에 부녀자들에게 필요한 글을 모아 언해한 6권 6책의 필사본 부녀자용 교육서이다. 호산은 헌종 12년(1846) 3월 1일에 충북 회인군(懷仁郡) 눌곡리(訥谷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다닌 적은 있지만 주로 눌곡리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문집인 『호산집(壺山集)』의 부록 권1에 나오는 연보에 임오년(37세 때) 4월 조에 ‘여소학성(女小學成)’이라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책이 188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002)
<풀이>홍윤표, 『여소학(女小學)』, 해제, 홍문각 영인본.

호산이 이 책을 쓴 동기에 대해,

“집 뎨 칠팔셰예 언문을 강 통야 익히넌 거시 허탄 쇼셜이라 움과 괴이 닐이 규문에 하관이냐 고 이젼 셩현의 말심얼 뫼와 조고마치 얼 만드러 리치고 출가할 졔롱의 너허 보더니 근친 시에 그 을 즈니 화예 와더라”

라고 하여, 자기 집 매제가 7, 8세에 언문을 익힌 후 허탄한 소설이나 읽고 있으니 새롭게 성현의 말씀을 모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기록했던 책을 매제의 혼사 때 농에 넣어 보냈는데, 근친 왔을 때 물어보니 화재로 타버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이 책을 언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 에 언문이 잇스니 그 글 지으시니 셩인이라 부인과 어린 희도 울만 니 로 침에도 가히 통할 거시라 그 글로 경셔를 번역야 부인덜노 우게 엿더니 셰샹이 리고 시쇽이 무너저셔 이젼 법이  어둡더라 부귀가 부인덜언 너머 편야 샤치 풍쇽만 날노 셩고 간난니 치산에 골몰야 언문얼 겨를치 못더라”

언문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한글 소설 따위가 아닌 경서와 사서를 번역하여 부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함으로써 시속의 풍화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그 말과 그 닐이 경서에 잇고 긔예 잇넌지라 두루 외와셔 이 얼 만드러 녀의게 주노라”라고 하여 책을 만든 과정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은, 한문 대문을 한자 한 글자마다 훈과 음을 밝히고, 구두점을 붉은색으로 찍은 다음, 난상에 한글 구결을 표시하고 있다. 그 다음 단락별 언해문을 제시하고 있어 다른 판본류 언해 방식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이본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호산의 1차 친필본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의 후손이 필사한 등사본으로 두 이본만이 남아 있다. 하나는 198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한 『호산집』의 제4책에 영인되어 있다. 이 자료는 『여소학』을 저본으로 하여 등사한 것으로 호산의 후손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

또 하나는 홍윤표 교수의 소장본으로 홍문각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것이 있다. 홍윤표 교수는 이 두 이본이 거의 차이가 없으며, 필체까지도 동일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홍윤표 소장본은 한문 원문에 주서(朱書)로 점을 찍어 놓고, 그 난상에 한글로 구결을 써 놓았는데 비하여, 아세아문화사 영인본은 그러한 좌점(左點)과 구결이 없다는 점일 뿐이다.

책을 언제 누가 썼는가? 두 가지 등사본은 그 필사 연대가 각각 다르다. 아세아문화사 영인본은 1915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이고, 홍윤표 소장본은 1906년에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홍윤표 교수 소장본의 〈여소학 끝에 쓰는 글〉에는, “병오 모츈 길일에 긔록노라(병오년(1906) 3월 길일에 기록하노라.)”라고 하고, 〈발문〉에는, “무신년(1908) 맹하(4월) 망조에 또 기록하노라.”라고 하였다. 〈글자의 훈이 같은 동음이의어 한자 고찰〉에서는 “임신년(1932) 7월 로봉 64세 늙은이가 옮겨 씀”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그 후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등사의 기록이 『여소학』 본문의 등사는, “병오년(1906) 모춘(3월)”에 이루어졌고, 발문은 2년 뒤인 “무신년(1908) 맹하(4월)에 또 기록하노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 뒤편에 〈자훈방언동이고(字訓方言同異考)〉에서는, “임신년(1932) 7월 로봉 64세 늙은이가 옮겨 씀”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글을 쓴 ‘노봉’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호산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나 그 후손으로 보인다. 이 책의 최종 등사 시기는 “임신년(1932) 7월”이나 『여소학』 본문의 등사는 “병오년(1906) 모춘(3월)”에 이루어졌으며, 발문은 본문을 등사한 2년 뒤인 “무신(1908)년 맹하(4월)”이라고 할 수 있다. 곧 호산 박문호의 초고 필사 연대는 임오년(1882)이고, 이를 다시 재서한 것은 병오년(1906)이며, 후발을 쓴 것은 무신년(1908)이다. 그 후 노봉(魯峯)이라는 이가 발문을 덧붙여 정서한 것은 임신년(1932)이다.

홍윤표 소장본은 책 크기가 30.4cm×20.8cm이고, 반엽 광곽은 25cm× 16.5cm, 판심 어미는 없고 장차만 판심의 하단에 쓰여 있다. 무계 10행 22자. 모두 6책 328장으로 되어 있다. 제1책의 앞에 ‘제사(題辭), 목록’이 있고, 권1의 본문이 이어진다. 제6책의 뒷부분에 ‘여소학발(女小學跋)’과 ‘후발(後跋)’, 그리고 ‘자훈방언동이고(字訓方言同異考)’가 들어 있다.

그 편찬 형식은 매우 특이하여 앞에 원문인 한자를 쓰고, 그 한자 하나하나의 아래에 일일이 모두 한글로 훈과 음을 달고, 그 원문의 다음에 한글로 언해를 하였다. 원문에는 한자와 그 훈음을 달았지만, 언해문은 순수하게 한글로만 썼다. 이와 같은 형식은 동경대학본 『백련초해』와 거의 동일한 형식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언해 방식은 대개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문헌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한자음만을 달아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예컨대 『여훈언해』 등), 이 책은 한자 하나하나에 모두 석음을 달고 있어서 매우 특징적이다. 그런데 그 석음도 규범적인 석음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맥에 따라 다르게 달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이 책에 인용된 문헌은 ‘『주역(周易)』,『좌전(左傳)』,『국어(國語)』,『사기(史記)』,『내훈(內訓)』,『예기(禮記)』,『여계(女誡)』,『소학집해(小學集解)』,『모시(毛詩)』,『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소학언해(小學諺解)』,『오륜행실(五倫行實)』,『안씨가훈(安氏家訓)』,『논어(論語)』’ 등 고거제서(考據諸書)가 대단히 많다.

본고는 홍윤표 교수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등사본인 관계로 오자나 오서가 엄청나게 많이 나타나 어학서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여성 교육서로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다.

2. 어문학적 특징

『여소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교체기에 등사된 것이지만 실재로는 19세기 후반 고종 19년(1882)에 호산의 표기법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충청 방언의 화자가 쓴 관계로 충청 방언의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 쓰인 한글 표기는 19세기 말의 충청도 회인 지역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한글로 표기되어 있는 한자의 석음과 언해문은 19세기 말의 충북 방언을 반영하고 있어서, 국어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1 표기법상의 특징

첫째, 표기법이 분철표기로 정착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과도분철표기 현상과 더불어 문법의식의 확대로 형태소 재분석 표기법이 많이 나타난다.

일음을/이름을(제사1ㄱ)(2:33ㄱ), 올은/옳은(1:14ㄴ)(2:8ㄴ), 은/빠른(1:22ㄱ), 안즐안/앉으란(2:15ㄴ), 할우넌/하루는(2:38ㄴ).

형태소 경계 곧 곡용이나 굴절의 환경에서 과도 분철 표기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어간의 기본형을 유지하려는 의도의 재분석 표기도 많이 나타난다.

직히여(2:7ㄱ), 식히면(2:19ㄴ), 족하를(2:20ㄱ), 끗희(4:24ㄴ), 것치(4:6ㄱ), 식혀(4:26ㄱ), 닷코(4:41ㄱ), 엽헐(4:41ㄱ), 맛흔(5:14ㄱ), 겻희(5:20ㄱ), 직힐세(5:43ㄴ)

분철의식과 함께 문법적 표기 의식의 발로로 재분석 표기형이 다량으로 나타나고 있는 표기법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둘째, 어말 ‘ㅅ’과 ‘ㄷ’은 거의 ‘ㅅ’ 표기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밧지/받지(1:15ㄱ), 낫슬/낯을(1:18ㄴ), 뻣고/뻗고(1:20ㄴ), 듯도/듣도(1:23ㄱ), 겻희서/곁에서(1:40ㄱ), 돗설/돝을(2:13ㄱ), 갓게/같게(3:2ㄴ), 밧세/밭에(5:24ㄱ)

위의 예에서처럼 어말 ‘ㄷ’과 ‘ㅅ’은 대부분 ‘ㅅ’으로 통일되었으며 ‘밧세[田]’처럼 어간 말음이 ‘ㅅ’으로 재구조화된 충청도 방언의 특징도 드러난다.

셋째, 자음동화 표기가 표기법에 반영되어 있다.

빅기(1:20ㄱ), 옹겨(1:27ㄱ), 낭겨(1:27ㄱ), 익게(1:29ㄴ), 성기고(1:39ㄴ), 빅기지(2:31ㄱ), 쪽껴서(5:35ㄴ)

어말 정지음은 ‘t+k 〉 k+k’, ‘m+k 〉 ŋ+k’와 같은 연구개 자음화 현상이 뚜렷하다. 그리고 [+obstruent] 자음은 [+sonorant]자음으로 동화하는 위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음동화를 그대로 음소론적 표기를 하면서 변자음화가 보인다.(‘쪽겨서, 씩기고, 코’ 따위)

넷째, 어말자음군의 단순화 현상은 현재의 충청도 방언의 현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익되/읽되(1:12ㄴ), 밥지/밟지(1:20ㄴ)(2:32ㄱ), 발끼를/밟기를(1:23ㄱ), 극지/긁지(1:28ㄱ), 말꼬/맑고(2:7ㄱ), 담께/닮게(2:15ㄱ), 박지/밝지(3:4ㄴ), 측이/칡이(4:26ㄴ), 북히며/붉히며(5:42ㄴ), 말근/맑은(5:42ㄴ)

‘ㄺ’은 ‘ㄱ’과 ‘ㄹ’로 실현되고 있다. 중부 방언과 남부 방언이 교체하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ㄼ’은 ‘ㅂ’으로 ‘ㄻ’은 ‘ㅁ’으로 실현되고 있다.

다섯째, o〉u 표기가 널리 확산되어 있다. 현재 중부 방언에서도 o〉u 표기는 확산 중에 있는 것인데, 19세기 말 이미 이러한 현상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루(2:8ㄱ), 계우(2:15ㄴ), 한부루(4:58ㄱ), 함부루(4:32ㄴ) 루(5:12ㄴ), 도적랴구(5:14ㄱ), 루넌(3:22ㄴ), 일굽(5:20ㄱ)

2.2 음운 체계와 음운 현상

먼저 음운 체계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모음 체계에서 ‘으:어’의 대립이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은/는’과 ‘을/를’이 ‘언/넌’과 ‘얼/럴’로 표기된 예들이 매우 많이 보인다.

‘어:’은 예외 없이 ‘으:’로 표기되는데 장모음 ‘어’가 고모음 ‘으’로 상승되는 충청도 방언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중세어에서 상성조의 ‘어:’는 ‘으:’로 상승되었으며, 이를 표기법에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계집〉기집’과 같은 ‘에〉이’ 현상과 ‘오〉우’ 현상이 통합적으로 모음 체계의 재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원순모음화 현상이 나타나며 표기법상 의고적인, 곧 원순모음화에 이탈하는 예들도 나타난다.

어둡더라(제사:2ㄱ), 알움온(1:29ㄴ), 압푸더니(1:38ㄴ), 시푼(1:26ㄴ), 시푼(2:2ㄱ), 무면(1:40ㄴ), 베푸니(2:16ㄴ), 물(2:25ㄴ), 절문이(2:29ㄱ), 우룸으로(3:42ㄴ), 노푸니(4:14ㄱ), 분(4:44ㄱ), 무룹에(4:44ㄱ), 시무고(5:11ㄱ), 가풀(5:28ㄱ), 구술(5:29ㄱ), 푸지(5:32ㄴ)

원순모음화 현상은 어휘부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곡용이나 활용의 환경인 형태소 경계에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움라우트 현상도 보이며, ㅣ-모음 순행동화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듸리여(1:8ㄴ),(2:2ㄴ), 듸리되(2:44ㄴ), 지픵이(1:27ㄱ), 길(1:30ㄴ), 기지(1:30ㄴ), 기니라(1:37ㄴ), 기럴(1:37ㄴ), 기씩(2:9ㄴ), 든(2:15ㄱ), 겨떠니(2:22ㄱ), 듸럽히니(2:34ㄱ), 끼리요(2:37ㄴ), 두루이(4:42ㄴ), 키니(5:19ㄴ), 오비(5:21ㄱ), 뵈일만치(5:33ㄴ), 듸럽피지(5:39ㄱ)

움라우트 현상은 개재자음 [+coronal]자음인 ‘ㄹ’이 있어도 이 현상이 적용되고 있다. 음운 환경에 별 구애를 받지 않고 확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전설모음화 현상도 나타나며 아울러 과도 교정형이 많이 나타난다. 곧 전설모음화 현상은 치찰음 ‘ㅅ’, ‘ㅈ’, ‘ㅊ’과 모음 ‘으’가 직접 결합하면, 모음 ‘으’가 전부화 모음 ‘이’로 교체되는데, 그 역으로 ‘이’가 아닌 원래대로 ‘으’로 되돌리는 과도 교정형이 대량으로 나타난다. 19세기 후반부터 생겨난 이 현상은 음운 현상의 단순한 정착 과정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말심(1:7ㄴ)(2:3ㄴ), 반찜(1:21ㄴ), 거만시럽고(1:21ㄴ), 덕시럽고(1:22ㄴ), 기치기럴(1:29ㄴ), 거시리지(1:32ㄴ), 변덕시럽기도(1:37ㄱ), 침도(2:6ㄱ), 시린(2:31ㄴ), 시린(2:35ㄱ), 질기던(4:2ㄴ), 못하여씨면(4:3ㄴ), 시리넌(5:4ㄱ), 시려도(5:32ㄴ), 질기니(5:22ㄴ), 심얼(5:30ㄴ), 씨러지니(5:35ㄱ)

위의 예처럼 전부모음화는 어휘 내부뿐만 아니라 곡용이나 활용과 접사와 같은 문법 형태와 그 경계의 환경에까지 확대된 음운현상이다.

발즈고(1:2ㄱ), 리츠니(1:2ㄴ), 넘츠게(1:20ㄱ), 즈기럴(1:24ㄴ), 스려지(1:24ㄴ), 슬어고 (1:36ㄱ), 즈지(1:37ㄱ), 츠지(1:38ㄴ), 곤츠지(2:5ㄴ), 츠거던(2:14ㄴ), 츠며(2:19ㄱ), 즈게(2:28ㄴ), 미츠지(2:30ㄱ), 떠러즈면(4:3ㄴ), 측이(4:26ㄴ), 즌(4:30ㄴ), 이즈게(4:34ㄱ), 해츠랴(5:17ㄴ), 즈니(5:20ㄴ)

위의 예처럼 ㄷ-구개음화 결과 ‘디-〉지-’가 과도 교정에 의해 ‘디-〉지-〉즈-’로 바뀐 예들을 비롯한, 전부모음화에 역행하는 과도 교정형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사회언어학적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대부 층에서는 ㄷ-, ㄱ-구개음화형이나 전설모음화형을 소위 ‘뭇찌다’라고 하여 ‘상스러운 말씨’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 교정형이 많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ㄷ’ 구개음화가 보이며(‘갓치, 그치지’ 등), ‘ㄱ’과 ‘ㅎ’ 구개음화도 보인다.

치(1:19ㄴ), 쥐즙고(2:3ㄴ), 끗철(4:42ㄱ)

집흔(1:31ㄱ), 지로(4:14ㄱ), 짓듸리여(5:34ㄴ)

심얼(1:35ㄱ), 심써(2:36ㄴ), 세려써(2:39ㄱ), 심이(5:20ㄱ)

길겁게(1:36ㄱ), 김성과(4:59ㄱ), 산김성에(4:5ㄴ), 기니고(5:3ㄴ), 기럼길노(1:34ㄴ)

위의 예에서처럼 ㄷ-구개음화와 ㄱ-구개음화, ㅎ-구개음화형이 보인다. 그와 더불어 ㄱ-구개음화의 과도 교정형이 많이 나타나는 것 역시 전설모음화와 같은 사회언어학적 요인의 결과가 아닌가 판단한다.

2.3 문법적 특징

근대 국어에서 문장의 종류와 구성 성분은 현대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몇 가지 구성 성분의 형태나 기능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가령 주격조사 ‘가’가 중세국어 말에 등장하여 근대국어를 지나며 점차 세력을 넓혀 갔으며, 관형격 ‘ㅅ’은 관형어적 기능이 축소되면서 오늘날 합성어 형성에서 사이시옷 역할 정도로 남게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격조사가 대단히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격조사의 기능이 흩으러져 있는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인덜로(제사 2ㄱ), 혼일노(3:1ㄴ)”의 예에서처럼, ‘-로’가 여격의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금슈에 갓갑기로(1:2ㄴ)”, “늑 터도”에서 처격 ‘-에’가 공동격 ‘-와’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처격은 ‘-에’와 ‘-의’가 혼용되고 있다.

례의를 둘 이 잇니라(1:1ㄱ)

럴 주도 말며(1:21ㄱ)

적장얼(5:36ㄴ)

위의 예처럼 대격 ‘-를’이 주격이나 여격 등의 기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보조사 ‘-꺼지’, ‘-도’ 등이 실현되고 있어 현대 충청 방언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접속어미 가운데 의도를 나타내는 ‘-려면’에 대응되는 ‘-면’이 실현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꼽을 수 있다.

문장의 종결형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평서문 어미가 ‘-니라’에서 ‘-니다’로 바뀌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의문문 어미 가운데 ‘-다’는 축소되고, ‘-ㄴ가’와 ‘-냐’가 활발해졌다. 부정문은 아직도 ‘NP+아니-’의 구조를 보이는 다양한 표현이 나타나며, 부정문에서만 쓰이게 된 ‘-디’는 점차 구개음화한 ‘-지’로 바뀌어 갔다.

명사화 어미로 ‘-음’은 줄어들고, ‘-기’가 늘어나는데, 특히 ‘-음’ 명사화 표현 대신에 ‘~것’ 보문화 구문의 사용이 크게 늘었다. 인용의 보문소라고 할 ‘-고’는 근대국어 후기에 형성되었다.

사동법과 피동법을 각각 담당하는 사동사와 피동사는 그 생산성이 줄고, 간접 사동의 ‘-게 다’와 간접 피동의 ‘어지다’ 형은 사용을 확대해 나갔다. 시제는 새로운 체계를 이루었다. 즉 근대국어 초부터 현재형의 ‘--’가 ‘--’으로 바뀌고 과거형 ‘-엇-’의 쓰임이 늘며, 근대국어 후기에 미래 시제 ‘-겟-’이 형성되어, 새로운 형태의 시제 형태소를 갖추었다. 이들로 인하여 서법과의 관련성이 줄고 시제 중심적 성격의 문법 범주를 형성하게 되었다. 높임법에서는, 객체 높임은 특수한 몇 개의 단어 표현으로 축소되고, ‘--’이 객체 높임의 경계를 넘어 높임법의 모든 하위 범주로 기능을 넓혀 가는 변화를 겪어 현재에 이른다. 선어말 어미 ‘-오/우-’는 기능 부담이 약화되어 점차 소멸해 갔다.

마지막으로, 부정법이나 사동 및 피동 그리고 명사화 구절의 형성 등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접미사 등에 의해 개별화된 형태론적 표현에서 점차 통사적 복문 구조를 가진 장형 구조로 발달해 나가는 방향성을 지적할 수 있다.

“덜에 우지 못”에서 ‘덜에’은 ‘못하다’의 주어이나 관형격으로 실현된 의사주격형이다. 이와 같이 다음은 관형절 주어의 실현 양상을 보이기 위해 먼저 그 실례를 살펴 보자.

[거쳐의 편기럴] 구지 말고(1:24ㄱ)

[식과 며느리의 효고 공경넌] 니(1:28ㄴ)

[효의 집흔 사랑하넌] 맘이 잇넌 니난(1:31ㄱ)

[효의 부모 섬기](1:36ㄱ)

[남의 만무이 보는] 거슬 막으며(2:16ㄱ)

[부모의 식 랑기럴](2:18ㄱ)

[샹의 만넌] 거슬 보면 울고(2:19ㄴ)

[의 능] 걸로 능치 못니계(2:31ㄴ)

[범민의 덕을 일넌] 거슨(2:35ㄴ)

[남의 탈복] 곳을 동쳔의 려 노코(3:48ㄴ)

위의 예처럼 관형절의 주어가 관형격 ‘-의’를 취하고 있다. 중세어에서는 관형절의 주어가 높임의 자질을 갖는 경우 관형격 ‘ㅅ’을 취하기도 하였다.

현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중세 한국어의 관형절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거쳐의 편기럴] 구지 말고(1:24ㄱ)”에서 관형절에는 목적어가 결여되어 있는데,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목적어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곧 ‘구하다’의 목적어는 ‘거쳐’가 된다. 이처럼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성분과 동일한 관형절을 ‘관계 관형절’이라고 부른다.

“[샹의 만넌] 거슬 보면 울고(2:19ㄴ)”에서처럼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주어와 동일하지 않다. 이처럼 관형절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관형절 안의 결여된 성분과 동일하지 않거나, 관형절에 결여된 성분이 없는 관형절을 ‘동격 관형절’이라고 부른다.

[널을 무거워] 운동지 못하(5:30ㄴ)

또한 관형절의 목적어가 주어인 위의 예문이 있다. “널이 무거워 운동(움직이지) 못하므로”와 같은 뜻인데 이는 단순한 오류인지 불확실하다.

2.4 어휘적 특징

어휘는 대체로 ‘쟝은(4:43ㄴ)(길이는)’과 같은 한자어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점이 하나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충청도 특유의 방언적 현상도 나타난다.

‘잘은 적우리와(4:34ㄱ)(짧은 저고리와)’, ‘반편이(1:18ㄱ)(반푼수)’, ‘노주어(4:26ㄱ)(나누어 주어)’, ‘여(4:45ㄴ)(뽀개어)’, ‘적겨(4:49ㄱ)(젖히어)’, ‘남저지와(4:58ㄱ)(나머지와)’, ‘뭇되 어지(5:27ㄱ)(묻되 어찌)’와 같은 충청도 방언어휘가 반영되어 있다.

궁중어인 ‘수되(1:26ㄴ)(놓아)’, ‘수고(2:2ㄱ)(놓고, 올리고)’도 나타난다. 그리고 ‘어실미넌(1:30ㄱ)’, ‘허여즈미(5:16ㄱ)’와 같이 의미가 불확실한 예도 나타나며 ‘좀람한틔도(제사 1ㄱ), 일를(1:4ㄴ)’과 같이 희귀한 어휘도 보인다.

조어법에서 ‘-’가 생략되어 ‘닌(3:50ㄴ)(니{}ㄴ)’과 같은 어형이나 부사형의 축양형인 ‘너서(4:31ㄱ)(넣[入]-+-{어}서)’, ‘써(4:26ㄱ)(씻[洗]-+-어)’와 같은 축양형의 어휘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삽입모음을 넣어 음절을 늘인 ‘트되(4:16ㄴ)([如]-+-{으}-+-되), 이부되(입[着]-+-{으}-+-되)’와 같은 어형도 나타난다.

대명사 ‘어느’가 관형형어미 없이 그대로 관형어로도 사용되는데 ‘어는(4:59ㄱ)’과 같이 관형형어미 ‘-ㄴ’이 첨가된 예도 나타난다.

본문 대문의 한자에 대한 석과 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 6권 뒤 〈발문〉에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얼 츰으로 졍셔 예 음과 톄에만 살피고 글 뜻선 시쇽얼 조서리 졍지 니 엿더니 이제 두 번 졍셔면서 샹고 즉 시 샹량 꺼시 읍지 못지라 메뎌 아국에 글 뜻설 젼혜 쇽담 방언얼 쓰고 혹 문도 써서 아담 것과 쇽된 거시 서로 석끼고 참과 그짓설 분간 쑤 업써서 닐과 물명언 르되 글 뜻선 튼 거시 허다 고로 이졔야 그 튼 거설 인야 조곰 르게 니 길도 긴영 질쟝와 일을실 이를지 일늘위 거튼류 그러허고 또 혹 억지로 르게 것도 잇쓰니 쓸뎨 써용 씰고와 날일난 날 늘샹 거튼류 그러허고 그 즁에 억지로 랴 여도 못넌 것도 또 잇쓰니”

위의 설명처럼 한자의 석(새김)은 시속을 쫓았으나, 동의적인 뜻을 가진 경우에는 임의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한자의 음도 시속을 따랐기 때문에, 현재의 음과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매우 많이 있다.

者적쟈(1:4ㄱ), 義글쯧의(1:6ㄱ), 曉알호(1:7ㄱ), 數조삭(1:8ㄱ), 后화후(1:8ㄱ), 諺시쇽말언(1:9ㄱ), 諺언문언(1:11ㄱ), 烈울렬(1:11ㄴ), 品픔수픔(1:13ㄱ), 季말계(1:16ㄴ), 論의론론(1:22ㄴ), 庭당뎡(1:24ㄴ)

위의 예에서처럼 글자의 자석이 시속을 쫓은 관계로 현대어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解풀(1:4ㄱ), 曉알호(1:7ㄱ), 昭발글죠(1:8ㄱ), 召불을죠(1:8ㄱ), 便문듯변(1:12ㄴ), 革죽격(1:14ㄱ)

위의 예에서처럼 글자의 자음도 시속을 쫓은 관계로 현대어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k/h의 대응은 당시 자서의 영향인지 실제 현실음의 반영인지는 불확실하다.

諺언무언(1:11ㄴ), 不안향불(1:16ㄱ)/不안햘불(1:16ㄱ), 陰그늘은(1:17ㄴ)

이 책은 필사본인 관계로 위의 예와 같은 오자가 매우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료를 이용하는데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참고 문헌〉

안자추/김종완옮김, 『안씨가훈』, 푸른역사, 2008.

유향지음/이숙인 옮김, 『열녀전』, 글항아리, 2013.

이상규, 『여사서언해』 해제, 세종기념사업회, 2014.

이선영/이승희, 『내훈』, 채륜, 2011.

홍윤표, 『여소학』 해제, 홍문각 영인본, 1989.

『여훈언해』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지적 고찰

1. 『여훈(女訓)』과 『여훈 언해(女訓諺解)』의 간행

『여훈 언해』는 중국 명나라에서 찬술(撰述)된 한문본 『여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그러면 한문본 『여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찬술된 책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훈 언해』의 맨 앞에 나오는 「어제 여훈서(御製女訓序)」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제 여훈서」는 명나라 11대 황제인 세종(世宗)이 1530년에 쓴 글이다. 아래 「어제 여훈서」의 시작 부분을 보자.

짐(朕)의 어머니인 장성자인 황태후께서 옛날 제후왕의 집에 계실 때 일찍이 한 편의 글을 지으시니, 그 서명(書名)이 이른바 『여훈(女訓)』이다.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 공예연인관목순성헌황제(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께서 친히 쓰신 글을 내리셔서 책의 앞머리에 올려놓으시고, 어머니께서 또한 스스로 그 다음에 서문을 쓰셨다.
(朕聖母章聖慈仁皇太后 昔在藩邸 嘗著一書 名曰女訓 朕皇考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親灑奎章 冠諸卷首 聖母亦自序於其次)〈여훈서:1ㄱ〉

위의 기록에서 『여훈』은 명나라 세종의 어머니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가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시기는 명나라 10대 황제 무종(武宗) 때인 1508년으로 밝혀졌는데, 그것은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 말미에 ‘大明正德戊辰春王正月上浣日書’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후 세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1530년에 다시 『여훈』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세종의 「어제 여훈서」를 싣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여훈』을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기록은 다음의 『중종 실록』에서 발견된다.

오위장 최세진이 여훈을 번역하여 올리니 전교하기를,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五衛將崔世珍 進飜譯女訓 傳曰令校書館印出)〈중종실록 27년, 9월 12일〉

위의 기록을 통해서 『여훈 언해』는 중종 27년(1532) 최세진이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위의 기록에 나타난 것 이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재 실책이 전하는 언해본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 언해』 주001)

이 책은 1990년 1월 15일, 홍문각에서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영인한 바 있다. 이 책도 서명(書名)은 『女訓』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여훈』이라 함은 모두 명나라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번역 간행한 책은 『여훈 언해』라 해서 한문본 『여훈』과 구별하고자 한다.
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저본(底本)인 명나라 『여훈』의 원문에 구결을 달고 번역만 하였을 뿐, 간행 연대나 간행처 등에 관련한 기록이 따로 없어 더 이상 간행에 대하여 언급할 내용이 없다. 이런 가운데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추정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만송문고 소장본이 인조(仁祖) 연간, 특히 1620~164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도 동의하는 바인데, 그것은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에 나타난 언어 현상이 17세기 국어의 특징에 매우 부합되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다음에서 보듯이 『인조 실록』에 여훈을 언급한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임금이 국장 도감에 하교하기를, “대행 왕후는 부드럽고 온순하고 정결하고 조용한 자품을 타고났으며, 인자하고 후덕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잠저에 있을 때부터 시부모님을 잘 섬기어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했으며, 나를 동기간처럼 대하여 사친(私親)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잘하였다. 그리고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서 훌륭히 여훈(女訓)을 준행하였다.”라고 하였다.
(上下敎于國葬都監曰 大行王后 稟柔順貞靜之資 有仁厚恭儉之德 自在邸時 善事舅姑 誠孝篤至 待予同氣 有踰私親 治家有法 克遵女訓)〈인조실록 14년, 2월 3일〉

위의 기록에서 『여훈 언해』의 간행 연대를 직접 언급한 것은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여성의 범절과 법도를 강조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가 이때(인조 14년(1636)) 이미 보급된 것으로 볼 때, 그렇다면 1620~1630년대에 간행되었던 책이 아닌가 한다.

중종 때 간행된 최세진의 『여훈 언해』는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만송문고본의 『여훈 언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를 대상으로, 어떻게 언해가 이루어졌으며 언해본의 서지적 사항과 언어 현상은 어떤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책에는 어제서(御製序)부터 맨 끝의 후서(後序)까지 서문(序文)이 모두 네 개나 있다. 맨 앞에 「어제 여훈서(御製女訓序)」(1530년)가 있고, 그 다음에 순일도인(純一道人)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여훈서(女訓序)」(1508년) 가 붙어 있다. 이어서 같은 시기에 쓴 것이지만 쓴 사람이 나타나 있지 않은 「여훈서(女訓序)」(1508년)가 또 있다. 그런 다음에 본문이 다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여훈 후서(女訓後序)」(1530)가 있다. 여기서도 쓴 시기는 밝혀 놓았으나 쓴 사람은 역시 명기(明記)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네 가지 서문의 끝에 각각 나타나 있는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그 연대를 ( ) 안에 부기해 둔다.

(1) 御製女訓序 嘉靖庚寅季餘十有九日 (1530)
(2) 女訓序 正德戊辰十有一月長至之吉 大明興國純一道人書于中正齋 (1508)
(3) 女訓序 大明正德戊辰春王正月上浣日書 (1508)
(4) 女訓後序 嘉靖九年十二月二十六日 (1530)

위의 네 가지 서문의 끝에 있는 기록에는 한결같이 서문을 쓴 사람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2)의 서문 끝에는 순일도인(純一道人)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순일도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어 (2)의 서문도 쓴 사람을 모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모두 쓴 사람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서문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위의 서문들이 누구의 글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가 있다.

맨 먼저 (1)의 「어제 여훈서」는 어느 임금이 썼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끝의 기록에 나타난 연호가 바로 말해 주고 있다. 가정(嘉靖)은 명나라의 11대 황제 세종(世宗) 주후총(朱厚摠)의 연호로서 1522~1566년의 45년간 사용되었던 이름이다. 이것으로 (1)의 서문은 명나라 세종이 쓴 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2)와 (3)의 「여훈서」를 쓴 사람에 대해서도 (1)의 「어제 여훈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명나라 세종은 「어제 여훈서」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보필하는 신하인 소(少)와 스승인 총(璁) 등이 이르기를, 짐이 마땅히 서문을 써야 할 것이라 하고, 이제 와서 예관들이 또 이르기를 짐이 마땅히 서문을 써서 어머님의 은덕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다함이 없이 자세하게 보이라 하지만, 짐이 가볍게 거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짐의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이미 앞머리에 서문을 쓰셨고, 또 어머님께서 그 다음에 서문을 쓰셨으니 이제 남아있는 쓸 자리가 없는지라, 그래서 짐이 다시 덧붙여 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 때문에 그 날 어머님 앞에 나아가 글을 쓸 것인지를 여쭈매 곧 어머님의 명을 받게 되니 이르시기를, 네가 그 서문을 써서 모두 마땅히 전하게 하라고 하셨다.
(先該輔臣少傅璁等 謂朕宜爲之序 至是 禮官時等 又謂朕宜序之 闡揚聖母恩德 于以昭示無窮 朕未之輕擧 以爲朕 皇考 旣序諸首 聖母又序諸次 已無餘蘊矣 又不待朕復贅之矣 是日因詣聖母前 奏陳書完 卽蒙慈命曰 汝其序之 庶 可爲傳)〈여훈서:1ㄴ~2ㄱ〉

위의 글을 보면, 『여훈』의 앞머리에는 명나라 세종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쓴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 세종의 어머니가 쓴 서문이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두 서문 중의 앞엣것인 (2)의 「여훈서」는 세종의 아버지가 쓴 글이고, 그 다음 것인 (3)의 「여훈서」는 세종의 어머니가 쓴 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2)의 「여훈서」를 쓴 사람으로 되어 있는 순일도인(純一道人)의 실체는 다름 아닌 세종의 생부(生父)인 흥원왕임이 밝혀졌다. 흥원왕은 명나라 8대 황제인 헌종(憲宗)의 아들이며, 9대 황제 효종(孝宗)의 이복 동생으로 원래는 지방 국가의 제후였으나 그의 친자인 세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제 예종(睿宗)으로 추존된 사람이다. 그의 생몰 연대(1476~1519)에서 알 수 있듯이 (2)의 서문을 쓸 때(1508)는 그가 생존하였으나 세종이 (1)의 어제 서문을 쓸 당시(1530)는 친부(親父) 예종의 사후(死後)이기 때문에 서문에서 예종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3)의 「여훈서」를 쓴 세종의 생모도 원래 흥원왕의 번비(藩妃)였으나 아들 세종이 황제가 되자 아버지 흥원왕이 예종이 되면서 어머니는 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가 되었으며, 이어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로 존숭받게 된 것이다. 장성자인 황태후는 『여훈』을 편찬하고 부군(夫君)의 서문과 함께 자신의 서문도 차례로 싣고 있다.

끝으로, (4)의 「여훈 후서」는 명나라 세종 황제의 황후가 쓴 서문이다. 후서는 『여훈』을 편찬하게 된 경위와 여성 교화서의 유래를 들면서, 『여훈』에서 가르치는 바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편찬자인 세종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세종의 비(妃)에게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서에서 필자인 세종의 황후는 자신을 1인칭 대명사인 ‘첩(妾)’으로 지칭하였고 시어머니인 세종의 모후(母后)에 대해서는 성모(聖母)로 칭하고 있다. 「여훈 후서」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비로소 내가 예전에 만든 『여훈』을 네게 주노니 네가 마땅히 힘을 부지런히 다하고 힘써 닦아 거의 나의 글로 책을 만들어 그것으로 장래를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오직 본받으며 공경하여 무심하고 소홀히 하지 말며 잊지 마라.”고 하셨다. 부족한 제가 명(命)을 정중히 받고 물러나 두 번 머리를 조아리고 일러 말하기를, “오호라, 지극하도다. 우리 성모의 왕성하신 마음이여.” … 우리 임금님의 완전하신 효와 깊으신 어짐이 천성에 바탕하여 계시므로 비록 깊은 궁궐에 계시지만 조회(朝會)에 나오실 때와 다름이 없이 지극히 공경하신 교화(敎化)가 나타나서, 부족한 제가 비박(菲薄)한 덕으로 위로 임금님께 상대가 됨을 얻었사오니, 항상 두려워서 능히 여섯 궁(宮)의 어른이 되지 못할까 염려되는 바이다. 매일 오직 이 편찬한 것을 외워서 음미하고 이를 생각하며 이를 공경함으로써 빛난 교훈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을 구하도다.
(自今伊始以吾昔著女訓 授爾 爾宜勤力勉脩 庶不負吾著書以望於將來之意 爾惟體之敬之 勿忽勿忘 妾拜命而退 再稽首而言曰 嗚呼至矣 我聖母之盛心也 … 仰惟我皇上 純孝深仁 本於天性 雖處深宮 無異臨朝而至敬之化 刑焉 妾以菲德 乃獲上配至尊 恒惕惕然懼弗能爲 六宮之長 日惟誦味是編 念玆敬玆 以求無忝於光訓云)〈여훈 후서:21ㄴ~23ㄴ〉

위에 인용한 후서(後序)의 글 맨 앞부분에 있는 구절 “내가 예전에 만든 『여훈』을 네게 주노니”에서 ‘내’는 『여훈』을 지은 장성자인 황태후를 말하고, 『여훈』을 받은 ‘네’는 황태후의 며느리가 되는 세종의 황후를 가리킨다. 이 밖에 윗글의 뒷부분에 있는 구절 “부족한 제가 … 여섯 궁(宮)의 어른이 되지 못할까 염려되는 바이다.”에서 ‘여섯 궁’은 중국의 궁중에 있었던 황후의 궁전과 부인 이하의 다섯 궁실을 말하므로, 여섯 궁의 어른은 바로 황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황후 자신이 여섯 궁의 어른으로서 그 본분과 그에 따른 제구실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4)의 「여훈 후서」는 세종의 황후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훈 언해』에 있는 네 가지 서문을 검토하면서 쓴 시기와 쓴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 결과 명나라에서 간행된 『여훈』은 11대 황제 세종의 모후(母后)인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에 의해 편찬되었고, 명나라 10대 무종(武宗) 때인 1508년과 세종 때인 1530년의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된 사실이 파악되었다. 그런데 『세조 실록』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여훈』이 또 등장한다.

우승지 이극감과 세자 필선 홍응에게 명하여 전대(前代)의 여훈(女訓)을 찬술(撰述)하여 바치게 하였다.
(命右承旨李克堪 世子弼善洪應 撰前代女訓以進)〈세조실록 5년, 8월 21일〉

위의 기록에 의하면 세조 5년(1459)에 전대(前代)의 『여훈』을 찬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대(前代)의 『여훈』은 앞에서 살펴본 1508년과 1530년에 각각 간행된 『여훈』과는 또 다른 책인 듯하다. 어찌 보면 전대(前代)의 『여훈』은 언해된 책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훈』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간행된 세 가지 책이 있음을 일단 알게 되었지만 그 책들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 이제 세 가지의 한문본 『여훈』 중에서 우리의 언해본은 어느 책을 대상으로 하여 언해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1532년에 간행된 최세진의 번역본은 1459년 판, 1508년 판, 1530년 판의 세 『여훈』 중에 어느 책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인지, 그리고 17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또 세 책 중의 어느 것을 언해한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후자의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에는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 서문 가운데 1530년에 쓴 「어제 여훈서」와 「여훈 후서」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송문고본은 1530년에 간행된 한문본 『여훈』을 언해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전자인 1532년에 찬술한 최세진의 번역본이다. 간행 연대로만 본다면 한문본 세 책이 모두 최세진의 번역본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세 책이 다 번역본의 저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1530년에 간행된 한문본 『여훈』은 최세진의 번역본(1532)보다 불과 2년밖에 앞서지 않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촉급하다고 보고, 홍윤표 교수가 언급한 대로 주002)

홍윤표(1990). 『여훈언해』 해제. 『여훈언해ㆍ규합총서』 영인본. <현대말>홍문각.
최세진이 1530년 판 『여훈』을 가지고 번역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게 볼 때 최세진의 번역본은 전대(前代)의 『여훈』이나 1508년 판 『여훈』 중 어느 하나를 두고 번역한 책으로 보인다.

2. 『여훈 언해』의 체재와 내용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2권 2책의 목판본이다. 이 책은 다른 언해본과는 달리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첫째 부분은 한문본의 원문을 전부 그대로 전사(轉寫)해 놓은 것이다. 한문본 부분에 나타나 있는 목차를 차례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여훈서(女訓序)
-여훈서(女訓序)
-여훈목록(女訓目錄)
-여훈(女訓)
규훈 제일(閨訓第一), 수덕 제이(脩德第二), 수명 제삼(受命第三), 부부 제사(夫婦第四), 효구고 제오(孝舅姑第五) 경부 제육(敬夫第六) 애첩 제칠(愛妾第七) 자유 제팔(慈幼第八) 임자 제구(姙子第九) 교자 제십(敎子第十) 신정 제십일(愼靜第十一) 절검 제십이(節儉第十二)
-여훈후서(女訓後序)

이렇게 해서 한문본 부분이 끝나면 뒤이어 둘째 부분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이 언해본이다. 언해본 부분은 「어제 여훈서」부터 「여훈 후서」까지 목차별로 먼저 한문 원문에 한글로 된 구결(口訣)을 첨가한 구결문을 앞에 제시하고, 이어서 국한 혼용의 언해문을 게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언해본에서 볼 수 있는 대역(對譯) 형식의 체재이다. 그런데 언해본 부분에서는 언해문에 있는 한자뿐만 아니라 구결이 달려 있는 한문 원문에도 일일이 한자음을 달아 놓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 책의 독자층인 부녀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면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의 2책은 각각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건(乾)ㆍ곤(坤)의 2책 중에 건책(乾冊)에는 먼저, 원본인 한문본의 전문이 그대로 실려 있고, 그 다음의 언해본 부분은 다시 「어제 여훈서」부터 본문에 해당하는 「여훈」의 네 번째 목차인 ‘부부 제4’까지 구결문과 함께 언해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그리고 「여훈」의 다섯째 목차인 ‘효구고 제5’에서부터 「여훈 후서」까지의 언해본 부분은 모두 곤책(坤冊)에 실려 있다. 건ㆍ곤 2책 중에서 두 번째 책인 곤책은 처음부터 맨 끝의 「여훈 후서」까지 판심제(版心題)는 모두 ‘女訓’으로, 권차(卷次)는 모두 ‘하(下)’로 되어 있으며, 장차(張次)는 1~48장까지로 표시하고 있어 그 체재가 일원화되어 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책인 건책은 판심제, 권차, 장차 등에 있어서 일률적이지 않다. 한문본 부분의 「어제 여훈서」에서 「여훈 목록」까지는 판심제를 ‘女訓序’로, 본문에 해당하는 「여훈」부분은 ‘女訓’으로, 그리고 마지막의 「여훈 후서」 부분은 ‘女訓後序’로 각각 표시하고 있어 조금씩 다르다. 권차(卷次)는 한문본 부분 전체에 표시되지 않았고, 장차(張次)만 한문본 부분을 1~23장까지 일련번호로 매겨 놓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언해본 부분은 다시 「어제 여훈서」부터 차례로 구결을 단 구결문이 먼저 나오고 언해문이 뒤이어 제시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언해본 부분부터는 판심제가 ‘女訓’으로, 권차는 ‘상’으로, 장차는 새로 1장부터 시작하여 42장까지로 각각 기재되어 있어, 같은 건책에 실려 있지만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 사이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구분되어 있어 2권 1책같이 편찬되어 있다. 그러면 건ㆍ곤 2책의 판심에 기재된 사항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차(張次)에서 각 장(張)의 앞면 뒷면을 각각 ㄱ, ㄴ으로 표시하여 덧붙인다.

◇ 건책(乾冊)
〈한문본 부분〉
(목차) (판심제) (권차) (장차)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女訓序 ― 1ㄱ~3ㄴ
-여훈서(女訓序) 女訓序 ― 4ㄱ~6ㄴ
-여훈서(女訓序) 女訓序 ― 7ㄱ~8ㄴ
-여훈목록(女訓目錄) 女訓序 ― 9ㄱ~9ㄴ
-여훈(女訓) 女訓 ― 10ㄱ~20ㄴ
-여훈후서(女訓後序) 女訓後序 ― 21ㄱ~23ㄱ
〈언해본 부분〉
-어제여훈서(御製女訓序) 女訓 上 1ㄱ~11ㄱ
-여훈서(女訓序) 女訓 上 12ㄱ~21ㄴ
-여훈서(女訓序) 女訓 上 22ㄱ~29ㄴ
-여훈목록(女訓目錄) 女訓 上 30ㄱ~30ㄴ
-여훈(女訓) 제1~제4 女訓 上 31ㄱ~47ㄱ
◇ 곤책(坤冊)
〈언해본 부분 계속〉
-여훈(女訓) 제5~제12 女訓 下 1ㄱ~40ㄴ
-여훈후서(女訓後序) 女訓 下 41ㄱ~48ㄴ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여훈 언해』라는 한 책으로 편찬해 놓았어도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은 별개의 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동일한 건책(乾冊) 속에 하나로 묶어 편찬하고 있으면서도 한문본 부분과 언해본 부분 사이에는 판심제도 서로 다르고 권차와 장차도 서로 달리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전체적인 판식(版式)에 대해서는 홍윤표 교수의 해제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기대어 소개한다. 책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22.3cm, 34.5cm이고, 사주 쌍변(四周雙邊)에 반엽(半葉)의 광곽(匡郭)은 가로 세로 각각 16.5cm, 24.2cm이다. 행수(行數)는 10행이고 1행의 글자수는 18자이나 언해문은 모두 1자씩 낮추어 쓰고 있어서 매행(每行) 17자로 되어 있다. 원문에 한글로 달아 놓은 구결과 주(注)는 소자(小字) 쌍행이다. 판심의 어미(魚尾)는 상하 삼엽화문어미(三葉花紋魚尾)이며 판심의 상하 어미 사이에 판심제, 권차, 장차가 기재되어 있다. 판심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바로 앞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여훈 언해』의 내용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문 네 개를 제외하면 「여훈 목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12개 주제에 관한 것이 전부다. 12개 주제별로 하나하나 교훈의 내용을 서술한 부분이 목차 중의 하나인 「여훈」이다. 「여훈」 부분에 있는 12개 주제를 들고, 주제별로 교훈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규훈(閨訓) : 여자가 집안에서 할 일, 여자로서 몸가짐과 생활 태도 등에 관한 교훈.
② 수덕(脩德) : 올바른 부덕(婦德)에 관한 교훈.
③ 수명(受命) : 결혼하는 딸이 시집에 가서 행할 도리를 부모가 가르침.
④ 부부(夫婦) : 부부 각자가 자기의 도리를 지키고 화목할 것을 교훈함.
⑤ 효구고(孝舅姑) :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섬기며 효도할 것을 교훈함.
⑥ 경부(敬夫) :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는 도리에 관한 교훈.
⑦ 애첩(愛妾) : 아내는 첩을 사랑하고 첩은 아내를 정성껏 공경할 것을 교훈함.
⑧ 자유(慈幼) : 아이나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줄 것을 교훈함.
⑨ 임자(姙子) : 임신한 여자가 조심할 일을 교훈함.
⑩ 교자(敎子) : 자녀의 성장 단계에 따라 어머니가 가르쳐야 할 내용에 관한 교훈.
⑪ 신정(愼靜) : 조용하면서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여자의 덕에 관한 교훈.
⑫ 절검(節儉) : 여자로서 씀씀이를 아끼고 검소할 것을 교훈함.

이상과 같이 내용은 12가지 주제별로 교훈한 것이지만, 그 중심은 「여훈 후서」에 언급된 대로 공경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집안에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삼가고 조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여훈 언해』의 핵심으로 되어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와 음운

가. 표기 문자

『여훈 언해』는 이에 나타난 표기 문자만 보아도 17세기 전반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한글 표기에서 ㅸ, ㆆ은 말할 것도 없고, ㅿ과 ㆁ도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소실 문자 중에 남아 있는 문자가 있다면 ‘ㆍ’가 유일하다. 그리하여 『여훈 언해』에 나타난 문자 체계는 25자 체계로서 사실상 17세기 국어의 25자 체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한편 초성으로 쓰인 병서자(並書字)는 중세 국어의 전통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각자병서와 ㅅ계, ㅂ계, ㅄ계의 합용병서가 중세 국어에서처럼 표기에 사용되었다. 자료의 제약으로 합용병서에서 ㅷ, ㅵ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 외에는 모두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각자병서는 『원각경 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로 한글 표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는데, 『여훈 언해』에 와서 ㅆ이 등장하여 일부의 표기에서 쓰인 것이 발견된다. ㅆ을 제외한 그 밖의 각자병서는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음에 병서자가 쓰인 예를 들어 본다.

ㅺ : 며(상:10ㄱ) 죵여(상:11ㄱ) 며(상:37ㄴ) 걷러디(상:46ㄱ) 러(하:9ㄱ) 君子(하:12ㄴ) 티고(하:33ㄴ) 이 며(하:33ㄴ-34ㄱ)
ㅼ : (상:17ㄱ) 이라(상:17ㄴ) 희(상:32ㄴ) 님이(하:8ㄴ) 돈이라(하29ㄱ)
ㅽ : 리샤(상:6ㄴ) 딘(상:18ㄱ) 이(상:27ㄴ) 들  이쇼(상:26ㄴ) 리(하:28ㄱ)
ㅳ : 이라(상:8ㄱ) 여(상:18ㄱ) 을(상:27ㄱ)  지거든(하:3ㄴ) 러리며(하:29ㄱ)
ㅄ : 공경으로((상:41ㄱ) 힘(하:27ㄴ) 곰(하:40ㄱ)
ㅶ : 샤(상:9ㄱ) 기(상:33ㄱ) 거슬이(하:23ㄴ)
ㅴ : (상:18ㄱ)

이 밖에 『여훈 언해』에는 다른 데서 전혀 볼 수 없는 ᄳᅠ, ᄪᅠ과 같은 특이한 합용병서가 나타나는데, 이는 각각 ㅴ, ㅍ의 오각으로 보아야 할 표기들이다.

ᄳᅠ : 그 몸을 려(衛其身)(하:23ㄴ) (보기) 大瞿曇이 슬허 리여 棺애 녀고(월인석보 1:7ㄴ).
ᄪᅠ : 모 리(庶草)(하:19ㄱ) (보기) 믈읫 프리 처 나 닐오 苗ㅣ라(원각경 언해 하 2-1:33ㄱ).

그리고 각자병서 ㅆ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ㅆ이 사용되었던 일부 낱말에 한해 나타나고 있다.

ㅆ : 머리예 씌오시고(冠首)(상:6ㄴ) 싸힌(積)(상:6ㄴ) 쓰기예(戴)(상:34ㄱ) 싸호믈(鬪)(상:46ㄴ) 싸미(割)(하:22ㄴ) 싸믄(積)(하:24ㄱ)

위에서처럼 각자병서 ㅆ으로 표기해야 할 낱말임에도 아래처럼 그냥 ㅅ으로 표기된 예가 『여훈 언해』에 제법 등장하고 있다.

말이며(상:10ㄴ) 말을(하:9ㄱ) 中正齋예셔 스노라(싱:21ㄴ) 글 스며(하:28ㄴ) 갇 싀우믄(하:28ㄴ) 綜理(상:28ㄱ) 夫의게 주실(상:40ㄴ)

이 시기에 오면, 합용(合用)이든 각자(各自)든 모든 병서자들은 일률적으로 된소리를 나타내는 표기 수단이 된다. 그리하여 동일한 된소리의 표기에 합용병서의 ㅅ계가 채택되기도 하고 ㅂ계가 채택되기도 하는 한편, 각자병서까지도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어 표기에 심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여훈 언해』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ㅄ과 ㅆ의 혼동을 보여주는 예로서 ‘힘-/힘쓰-’가 있으며, 15세기에 ‘활 쏘-’[射]로 표기되던 말이 『여훈 언해』에서 ‘활 -’로 나타나기도 한다.

힘(하:27ㄴ) / 힘써(하:45ㄴ) 힘디(하:45ㄴ)
활 며(하:28ㄴ)

그런데 ‘활 -’는 원래 ‘활 쏘-’였다. “활 쏘리 하건마”(용비어천가 45장)과 “소다爲覆物而쏘다爲射之之類”(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 ㅆ이 표기되던 자리에 ㅄ으로 대체된 것은 ㅂ계 합용병서도 된소리 표기로 변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활-’의 등장은 이미 16세기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음절말의 겹받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겹받침 다음에 모음이 왔을 때는 연철 표기의 방법으로 겹받침의 두 자음이 그대로 유지되지만 자음이나 휴지(休止) 앞에서의 겹받침은 두 자음 중 제2자음이 탈락한다.

[外] : 밧긔(상:29ㄱ) 밧기며(하:35ㄱ) / 밧 마리 드디 아니고(하:33ㄴ) 밧 政 돕고(하:45ㄴ)
없-[無] : 업디라(상:8ㄱ) 업니(하:12ㄴ) / 업고(상16ㄴ) 업다 니나(하:33ㄱ)
-[修] : 닷그며(상:19ㄱ) 닷가(하:45ㄴ) / 닷디 아니즉(상:36ㄴ)

그러나 ㄹ로 시작되는 ㄺ, ㄻ, ㄼ과 같은 겹받침의 경우는 모음 앞에서와 같이 자음이나 휴지 앞에서도 두 자음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원래 모음과 모음 사이에 두 자음만 올 수 있는데, ㄹ이 맨 앞에 올 경우에는 세 자음도 허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ㄺ : 그시미라(상:9ㄱ) 기 처음으로 울으매(하:3ㄴ) 글그며 안자 겨시거든(하:3ㄴ) 근 의(하:23ㄱ) 고 근 거시(하23ㄴ) 디 몯고(하:27ㄴ) 고 소담면(하:39ㄱ)
ㄻ : 올마(하:27ㄴ)  거(하:22ㄴ)
ㄼ : 몸소 오신 이리라(상:10ㄱ) 여듧 어든(하:28ㄱ) 이 며(하:33ㄴ-34ㄱ)

위의 예 가운데 ‘’[熟]은 연철 표기의 ‘’과 분철 표기의 ‘’이 혼합된 중철(重綴) 표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신’은 어간 ‘-’[蹈] 의 말음 ㅂ이 모음 어미 앞에서 w로 교체된 형태이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이라면 ‘오신’은 ‘신’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초성의 병서자와 겹받침을 살펴보았는데, 『여훈 언해』에서 보이고 있는 표기들은 중세 국어와 별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표기법

표기법이라 함은 그 시대의 문자 체계로써 그 언어를 어떤 형태로 적느냐 하는 규칙, 즉 정서법을 말한다. 이 표기법에는 여러 규칙들이 포함되지만 여기서는 연속된 언어를 적을 때 각 음절을 어떻게 적느냐 하는 문제에 국한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이 자음일 때 후속되는 모음의 조사나 어미 앞에서 그 자음을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 내려 적을 것인가 아니면 말음의 자리에 그대로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즉, ‘글을 읽으니’로 적을 것인가 ‘그를 일그니’로 적을 것인가 하는, 이른바 분철(分綴)로 표기할 것이냐 연철(連綴)로 표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15세기 국어의 표기법은 연철 표기로 출발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문헌에서 연철법은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졌었다. 그러다가 15세기말에 이르면 그렇게 철저하던 연철법에도 틈이 생겨 여기저기서 분철 표기가 조금씩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분철의 추세가 더욱 세력을 얻어 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6세기에는 연철법과 분철법의 혼합형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중철(重綴) 표기까지 새로 등장하여 마치 16세기는 연철, 분철, 중철 표기의 각축장이 된 듯한 느낌이다. 17세기 문헌에 드러난 표기법도 16세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가운데 분철은 꾸준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체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17세기에는 같은 시기의 문헌이라도 문헌마다 표기법의 실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불균형이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용언의 경우는 연철 표기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철 표기도 문헌마다 그 빈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여훈 언해』도 이와 같은 17세기 문헌의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는 표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주003)

『여훈 언해』에는 아래와 같이 동일한 낱말을 두고 서로 다른 5가지의 표기가 등장할 정도로 표기의 혼란이 나타나기도 한다.
믈읫(상:37ㄴ), 므(상:19ㄴ), 므(상:34ㄴ), 믈읟(하:27ㄴ), 므릇(하:47ㄴ).
체언의 경우는 ㄷ, ㅅ 말음일 때를 제외하고는 분철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용언의 경우에는 전반에 걸쳐 연철이 절대적인 우세를 나타내고 있다. 중철 표기는 전체적으로 몇 예를 보일 뿐이다. 그런 중에서도 『여훈 언해』의 표기 실태를 보면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으로 쓰인 자음에 따라 그 사정이 조금씩 다름을 볼 수 있어 여기서는 말음의 자음 ㄴ, ㅁ, ㄹ, ㄱ, ㅂ, ㄷ, ㅅ 별로 그 실태를 보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ㄴ

a. 손이라(상:17ㄱ) 눈에(상:27ㄴ) 슈건을(상:33ㄱ) 긔운이(상:46ㄴ) 녀편이라(하:24ㄱ) 아이 아니라(하:29ㄱ) 잔을(하:34ㄱ) 차반이며(하:39ㄱ) 겨집어룬에게(하:45ㄴ) 손으로(상:34ㄱ) 손을(상:41ㄱ) 손애(하:34ㄱ)
b. 소로(하:28ㄱ) 소니(하:34ㄴ) 열 누니(하:34ㄴ)
c. 크니 업고(상:16ㄴ) 노프니과 니(상:45ㄴ) 어디니(하:27ㄴ) 重니 업니(하:33ㄱ) 크니며 쟈그니며(하:35ㄴ)
d. 人女ㅣ 되얀 이(상:16ㄴ) 婦ㅣ 되얀 이(상:16ㄴ) 貞婦 되연 이(상:41ㄴ)
(비교) 婦 되얀니(상:29ㄱ)

위에서 보다시피 ㄴ말음의 경우, 체언에서는 분철이 절대적이다. 연철의 예는 전체를 통해 b의 예가 전부이다. 반면에 c에서처럼 용언의 관형사형 ㄴ 어미 다음에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된 형태에서는 어김없이 연철이 되고 있다. 하나의 예외도 허락지 않을 정도이다. 단, d와 같이 완료형의 관형사형에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되었을 경우는 분철과 연철이 다 나타난다.

그리고 용언의 경우는 어간 말음이 ㄴ인 낱말의 예가 없어 언급을 생략한다.

(2) ㅁ

a. 버금에(상:8ㄱ) 몸으로(상:8ㄴ) 말이며(상:10ㄴ) 어마님이라(상:10ㄴ) 가슴에(싱:27ㄴ) 이라(상:34ㄴ) 님이(하:8ㄴ) 이(하:14ㄱ) 밤이어든(하:23ㄱ) 일홈으로(하:24ㄱ) 처엄은(하:46ㄱ)
b. 버그매(상:6ㄴ) 일호미(하:5ㄴ) 목수미(하:20ㄱ) 모(하:30ㄱ) 미(하:38ㄱ)
c. 남은(상:8ㄱ) 담은(상:9ㄱ) 삼으니(상:25ㄴ) 품어시면(하:15ㄱ)
d. 져믄(상:10ㄱ) 말믜아마(상:10ㄱ) 너므리오(상:29ㄱ) 사므며(상:41ㄱ) 여너머(하:47ㄱ)

ㅁ말음의 경우는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체언이나 용언 모두에서 분철과 연철 표기를 다 보여 주고 있다. 그 분포로 보면, 분철의 경우에 체언에서 훨씬 우세하고, 연철의 경우에는 용언에서 우세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명사 ‘사’을 선정하여 여기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었을 때, 분철ㆍ연철의 사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전부 보임으로써 분철의 추세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게 하고자 한다.

e. 사을(상:10ㄱ, 상:41ㄱ, 상:45ㄴ) 사의게(상:10ㄱ, 하:23ㄴ) 사이(상:16ㄴ, 상:17ㄱ, 상:26ㄱ, 하:13ㄱ, 하:15ㄱ, 하:18ㄱ, 하:40ㄴ) 사의(상:28ㄱ, 상:33ㄱ, 상:33ㄴ, 상:34ㄴ, 하:3ㄱ, 하:13ㄱ, 하:24ㄱ, 하:46ㄱ) 사은(상:34ㄴ)
f. 사미(하:27ㄴ, 하:28ㄴ, 하:40ㄱ) 사(하:29ㄴ)

위의 e, f를 보면, 체언에서의 분철은 일방적이다. 그러나 용언에서는 그 용례가 많지 않아 위와 같은 조사는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ㅁ말음의 경우에 연철이 전체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동명사(動名詞)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었을 때, 연철이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분철 표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연철에 비하면 철저히 약세에 놓여 있음이 현실이다.

g. 침을(상:8ㄴ) 動홈애(상:10ㄴ) 업이니(상:21ㄱ) 싁싁홈으로(상:41ㄱ) 和睦홈으로(상:41ㄱ) 안앤(하:23ㄱ) 居욤애(하:33ㄴ) 샹密홈은(하:47ㄱ)
h. 셰호미(상:8ㄴ) 어디르믈(상:11ㄱ) 믈(상:11ㄱ) 아다오믈(상:17ㄱ) 업시녀기미(상:20ㄴ) 閑暇미(상:28ㄱ) 키미라(상:33ㄱ) 치믈(상:34ㄱ) 不孝호미라(상:41ㄴ) 親호미(하:3ㄱ) 공敬요미(하:9ㄴ) 업스믈(하:13ㄱ) 안맨(하:22ㄴ) 너므미 업스미오(하:24ㄱ) 居요매(하:33ㄴ) 사므미오(하:38ㄴ)

(3) ㄹ

a. 글을(상:6ㄴ) 겨를에(상:6ㄴ) 실을(상:10ㄴ) 말(상:11ㄱ) 孝 줄을(상:28ㄴ) 얼굴의(상:33ㄱ) 허믈이(상:37ㄴ) 믈결이(상:46ㄱ) 믈을(하:4ㄱ) 받올 일을(하:4ㄱ) 配필이(하:8ㄴ) 닐온 말이라(하:12ㄴ) 발을(하:22ㄴ) 거울의(하:23ㄱ) 禮졀을(하:24ㄱ) 날을(하:45ㄱ)
b. 리(상:17ㄱ) 닐온 마리라(상:17ㄴ) 겨집 사의 이리(상:33ㄴ) 리(하:8ㄴ) 허므리(하:9ㄱ) 못 므리(하:18ㄱ) 아리라(하:19ㄱ) 얼고리(하:23ㄴ)  주 아라(하:28ㄱ) 벼(하:29ㄱ)
c. 오(상:7ㄱ) 닐오(상:7ㄴ) 울얼어(상:10ㄱ) 들어 좃(상:33ㄱ) 일오디라(상:41ㄴ) 울으매(하:3ㄴ) 말아(하:4ㄱ) 알미오(하:8ㄴ) 들으믈(하:28ㄱ)
d. 마롤디니라(상:11ㄱ) 아로(상:29ㄱ) 드러야(상:34ㄴ) 어디러(상:46ㄱ) 져므러(상:46ㄴ) 병드러(하:3ㄴ) 비러 호매(하:18ㄱ) 댱가 드리믄(하:28ㄴ) 받드러(하;34ㄱ) 도라(하:34ㄱ) 프러(하:35ㄱ) 그라(하:45ㄴ) 더브러(하:46ㄱ) 여시며(하:47ㄱ) 맛드려(하:48ㄱ)

ㄹ말음의 경우는 체언 용언 할 것 없이 분철과 연철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체언에 있어서는 분철 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나고, 용언에서는 연철 표기가 우세하다는 17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에 일치하는 양상이다.

(4) ㄱ

a. 을(상:6ㄴ) 아젹의(상:46ㄴ) 복이(하:4ㄴ) 음식을(하:8ㄴ) 豊쇽이(하:47ㄱ) 암이(상:17ㄱ) 암이(하:9ㄱ)
b. 소개(상:11ㄱ) 기(하:3ㄴ)  바기(하:18ㄴ)

ㄱ말음(ㄺ 말음 포함. 이하 마찬가지임)을 가진 체언의 경우도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때는 분철 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도 자주 등장하는 ‘식(子息)’이란 명사를 전부 들고 그 아래에 모음의 조사가 왔을 때 실제로 분철과 연철이 어떤 비율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자.

c. 식이라(상:11ㄱ) 子식을(상:28ㄴ, 하:30ㄱ) 식이(상:37ㄴ, 하:23ㄴ) 식을(하:22ㄴ, 하:23ㄴ) 子식이(하:29ㄴ)
d. 시기(하:13ㄴ, 하:13ㄴ, 하:13ㄴ) 시글(하:13ㄴ)

‘식’ 하나를 놓고 봤을 때 분철은 연철의 2배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ㄱ말음을 가진 체언의 경우에 전체적으로 분철의 비율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짐작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언의 경우로 오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ㄱ말음일 때 분철의 예는 하나도 없고 연철의 예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e. 소긴 거시(상:10ㄱ) 니기고(상:19ㄱ) 늘그샤(하:3ㄴ) 글그며(하:3ㄴ) 근(하:23ㄱ) 근(하:23ㄱ) 쟈근 것(하:33ㄱ) 마가(하:34ㄱ)

용언의 어근에 부사 접미사 ‘-이’가 통합되어 파생 부사를 형성하는 경우에는 분철이 더 적극적이다.

f. 싁싁이(하:8ㄱ, 하:23ㄱ, 하:33ㄱ) 至극이(하:34ㄴ, 하:48ㄱ) 닉이(하:47ㄱ)
g. 기(상:11ㄱ)

(5) ㅂ

a. 법을(상:10ㄱ) 입에(상:11ㄱ) 基업이(하:4ㄴ) 눈섭의(하:8ㄱ) 깁이(하:38ㄱ) 밥의(하:39ㄱ)
b. 바블(하:14ㄱ) 바비(하:38ㄱ)

말음이 ㅂ인 경우도 바로 앞의 ㄱ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체언에서는 분철이 우세한 반면, 용언에서는 연철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ㅂ말음의 체언은 모음의 조사 앞에서 분철이 압도하는 분위기이다. ㅂ말음의 명사로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집’과 ‘겨집’을 대상으로 분철ㆍ연철 실태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c. 집의(상:17ㄱ, 하:14ㄴ) 집을(상:42ㄱ, 하:30ㄱ) 집이(상:42ㄱ) 집이라(하:44ㄴ)
d. 지븨(상:40ㄴ) 지비(하:20ㄱ) 지블(하:28ㄴ)
e. 겨집은(상:32ㄴ) 겨집의(상:28ㄱ, 상:34ㄱ, 상:37ㄴ, 하:38ㄱ, 하:46ㄱ) 겨집이(상:33ㄱ, 하:9ㄱ, 하:19ㄱ, 하:45ㄴ) 겨집을(하:46ㄴ)

‘집’의 경우에는 연철이 분철의 절반 정도라도 나타났지만, ‘겨집’의 경우는 그렇게 많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연철 표기는 하나도 없이 분철 일색이다.

반면에 용언의 경우는 아래에서 보듯이 체언의 경우와는 딴판이다. 용언 어간에 모음의 어미가 연결된 형태에서 분철은 하나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f. 니버(상:10ㄱ) 니브며(상:17ㄱ) 구븐(상:19ㄴ, 하:18ㄴ) 자바(상:33ㄱ) 자브며(상:33ㄴ, 하:24ㄱ)

(6) ㄷ

ㄷ말음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양상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체언 용언 할 것 없이 모두 15세기의 연철 시대를 회복한 것처럼 거의 연철 표기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분철 표기가 있다면 아래에서 보듯이 체언에서 ‘이, 을’의 예가 있고, 파생부사로서 ‘덛덛이’가 있을 뿐이다. 어간 말음이 ㄷ인 용언에서 분철된 예는 하나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연철 표기는 ㄷ말음에서도 철저하다. 아래에 ㄷ말음을 가진 체언 용언의 예들을 전부 나열해 본다. 전체적으로 그 예가 많지 않다.

a. 을(상:27ㄱ, 하:45ㄴ) 이(하:40ㄱ) 덛덛이(하:33ㄴ)
b. (상:8ㄴ) 디(상:11ㄱ, 상:19ㄴ, 상:21ㄱ, 하:14ㄴ) 들(상:37ㄴ, 하:4ㄴ, 하:13ㄱ, 하:30ㄱ) (하:13ㄱ, 하:14ㄴ) 버디(하:29ㄱ) 그윽 고디나(하:34ㄴ)
c. 어더(상:6ㄴ, 상:42ㄱ, 하:29ㄱ) 미더(상:11ㄱ) 바다든(상:45ㄱ) 구드니(하:4ㄴ) 바다(하:13ㄴ) 어랴(하:14ㄴ) 어덧노라(하:47ㄴ) 모닷(하:47ㄴ)

(7) ㅅ

말음ㅅ의 경우도 앞의 ㄷ말음에서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즉, 연철 위주로 모든 표기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체언의 경우에 ‘옷의, 못애’의 두 예를 제외하고는 분철 표기를 볼 수 없고, 용언에는 ㅅ을 어간 말음으로 하는 낱말이 전체를 통해 하나도 사용된 예가 없어 더 이상 언급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없-’[無]의 경우에 모음 어미와의 연결에서 분철된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으므로 어간 말음이 ㅅ인 용언에서도 분철은 없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는 바이다. 특히 의존 명사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모음 조사와의 연결에서 분철된 표기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a. 옷의(하:3ㄴ) 못애(하:19ㄱ)
b. 열다새(상:34ㄱ) 그르(하:4ㄱ) 오(하:8ㄴ, 하:14ㄱ, 하:29ㄱ) 오스로(하:18ㄴ) 마(하:22ㄴ) 그르슬(하:28ㄱ) 마시(하:39ㄱ)
c. 序 거시라(상:7ㄴ) 소긴 거시(상:10ㄱ) 몯 거시며(상:46ㄱ)  거슬(하:3ㄴ) 니블 거(하:8ㄴ) 근 거시(하:23ㄴ)  거싀(하:39ㄱ)
d. 업디라(상:8ㄱ) 업니(상:16ㄴ) 업서(상:20ㄴ) 업며(하:4ㄱ) 업스믈(하:13ㄱ) 업스미오(하:23ㄴ) 업스며(하:34ㄱ)

이로써 ㅅ말음의 경우도 ㄷ말음과 함께 체언 용언을 막론하고 아직 연철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ㄷ, ㅅ이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t]으로 중화되었으나, 초성의 자리에서는 두 자음이 중화되지 않고 ㄷ[t], ㅅ[s]의 본 음가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본 음가를 의식했기 때문에 ㄷ과 ㅅ말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접사(接辭)가 오면 연철하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와 ‘이’처럼 ㄷ, ㅅ이 말음의 위치에 있을 때는 두 자음이 [t]으로 중화되어 실제로 말음에서 혼기(混記)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디’와 ‘시’처럼 연철하여 ㄷ, ㅅ이 초성의 위치에 왔을 때는 각각 [t], [s]의 본 음가대로 실현되므로 ㄷ, ㅅ 사이에 혼기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제 표기법의 마지막으로 중철(重綴) 표기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중철 표기는 자음을 말음으로 가진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조사나 어미가 연결될 때 그 자음을 말음의 자리에도 적고 그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도 적음으로써 같은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방식이다. 연철법과 분철법이 혼합된 양상이기도 하고 또한 양자의 절충안이라 할 수도 있다.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16세기 문헌 자료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시기의 문헌 사이에도 중철의 사용 비율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17세기도 16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17세기 문헌 중에도 중철 표기가 활발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여훈 언해』에는 중철 표기가 얼마 되지 않은 편이다. 전체를 통해 아래의 예가 전부이다.

a. 글월(하:28ㄴ) 니로(하:28ㄴ) 알리(하:33ㄱ) 기우러딜 시(하:34ㄱ) 딜 시(하:34ㄱ) (하:22ㄴ)
b. 압픠(상:8ㄱ) 밋처(상:10ㄱ, 상:20ㄱ, 상:28ㄴ) 긋테(상:20ㄴ) 빗(하:39ㄴ)

위에서 a는 8종성에 속하는 말음이 중철 표기된 예이고, b는 유기음을 말음으로 하는 체언 용언의 중철 표기이다. a에서 ‘글월’은 명사 ‘글월’에 조사 ‘-’이 연결되면서 ㄹ을 이중으로 적었고, ‘니로’와 ‘알리’는 용언의 관형사형과 의존 명사 ‘이’가 통합되면서 관형사형 어미 ㄴ과 ㄹ을 각각 이중으로 표기한 예이며, 그 다음의 ‘시’도 의존 명사 ‘’에 부사 접미사 ‘-이’를 더하면서 ㅅ을 이중으로 표기한 것이다. 끝의 ‘’은 어간말에 붙은 겹받침 중의 제2자음이 이중으로 표기된 경우이다.

다음으로 b는 유기음을 말음으로 하고 있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경우에 중철 표기는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이때는 8종성 제한 규칙으로 유기음을 말음의 자리에 표기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유기음 말음 다음에 모음의 접사가 연결되면 연철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기음 말음의 경우에도 중철의 방식이 적용되어 말음 표기를 해야 했지만 받침에 유기음을 그대로 적을 수는 없었고, 유기음을 8종성으로 교체하여 받침으로 적었으니 곧 ㅊ→ㅅ /ㄷ, ㅌ→ㄷ /ㅅ, ㅍ→ㅂ, ㅋ→ㄱ 등으로 교체하여 적었다. 이러한 교체는 유기음 말음 다음에 휴지(休止)나 자음이 올 때도 적용되었다. 그러고 나서 후속하는 음절의 초성에 또한 말음의 유기음을 그대로 옮겨 적음으로써 중철 표기의 형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유기음 말음의 경우는 일반적인 중철의 표기처럼 동일한 자음을 이중으로 표기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훈 언해』에서는 유기음 말음의 경우에도 중철보다는 아래와 같은 연철 표기가 훨씬 우세하게 나타난다.

c. 미츤(상:9ㄴ) (상:11ㄱ) 뉘오(상:19ㄴ) 겨틔(상:28ㄱ) (상:33ㄴ) 노프니(상:45ㄴ) 조며(상:45ㄴ) 로(하:9ㄴ) 기픈(하:19ㄱ) 비(하:23ㄱ) 그츠미오(하:38ㄴ)

다. 말음 ㅅ, ㄷ의 혼용

말음으로 쓰인 ㅅ과 ㄷ 사이에 혼용이 많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말음의 위치에서 ㅅ과 ㄷ이 중화되어 발음에서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할 것이다. ㅅ과 ㄷ의 중화는 아래의 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a. 망녕도이 니디 말고(상:33ㄴ)
귀예 닉이 든 배라(하:47ㄱ)
b. 근原이 果연히 어 인뇨(상:18ㄱ)
父母ㅣ 되연 사이(하:15ㄱ)

위의 예에서 a의 ‘니디’와 ‘든’은 원래 ‘니디’와 ‘듣’의 ㄷ말음이 ㄴ 앞에서 비음화(鼻音化)한 형태이고, b의 ‘인뇨’와 ‘되연’은 ‘잇뇨’와 ‘되엿’의 ㅅ말음이 ㄴ 앞에서 비음화한 형태이다. ㅅ과 ㄷ이 다같이 ㄴ 앞에서 ㄴ으로 비음화한 것은 결과적으로 말음ㅅ과 ㄷ이 동일한 음가로 실현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원래 15세기 국어에서는 이러한 ㅅ과 ㄷ이 말음에서도 혼란이 없이 엄격히 구별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서 서서히 혼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혼란은 자의대로가 아니고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ㄷ말음이 ㅅ으로 교체됨으로써 ㄷ말음이 점차 축소되어 가는 양상이었다. 『여훈 언해』에는 ㄷ → ㅅ의 말음 교체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오히려 ㅅ → ㄷ의 교체가 더 우세할 정도로 활발하다. 물론 『여훈 언해』에도 원래의 말음대로 ㅅ이나 ㄷ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에 대한 예는 생략하고, ㄷ → ㅅ과 ㅅ → ㄷ으로의 교체가 일어난 예만 보기로 한다. 그러면서 원래의 말음으로 표기된 어형도 함께 예시해 둔다.

c. ㄷ → ㅅ
밧고(상:7ㄱ) 밋브샤(상:10ㄱ) 긋테(상:20ㄴ) 덧덧이(상:26ㄴ) 듯고(상:28ㄱ) 곳 能히(상:38ㄱ) 엇디 몯 거시온(하:5ㄱ) 져근덧(하:9ㄴ)  밧디(하:13ㄱ) 못가(하:48ㄱ)
(참고) 받고(상:8ㄱ) 미더(상:11ㄱ) 덛덛이(하:33ㄴ) 듣디 몯(하:34ㄴ) 곧 능히(하:9ㄴ) 어덧노라(하:47ㄴ) 치믈 받디(상:46ㄱ) 몯가(상;27ㄱ)
d. ㅅ → ㄷ
믿(상:19ㄱ) 구븐 걷(상:19ㄴ) 비(하:3ㄴ) 藥을 맏보와(하:9ㄱ) 맏당히(하:13ㄴ) 이러면(하:14ㄱ) 욷사(하:18ㄱ) 훋손(하:19ㄱ) 닏디 말라(하:20ㄱ) 후엗 사(하:24ㄱ-ㄴ) 여 (하:28ㄱ) 열다 (하:28ㄴ) 졷디 몯(하:29ㄴ) 갇(하:23ㄴ) 빋나고(하:39ㄱ)
(참고) 밋(상:27ㄴ) 린 것(하:23ㄱ) 로(하:9ㄴ) 맛드려(하:48ㄱ) 맛당히(상:7ㄴ) 이러면(하:35ㄱ) 웃사(하:18ㄱ) 닛디 말라(하:45ㄴ) 內則읫 말과(상:27ㄱ) 다 비치(하:39ㄱ) 좃 아다온 德을(상:33ㄱ) 갓(상:26ㄴ) 빗나고(하:30ㄱ)

이상과 같은 ㅅ과 ㄷ의 상호 교체는 두 자음이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 발음의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음의 위치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음 앞에서 ㅅ, ㄷ은 여전히 [s]이고 [t]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음 앞에서는 연철의 방법으로 ㅅ, ㄷ 말음을 그 아래 초성의 자리로 옮겨 적음으로써 원래의 음가가 실현되므로 ㅅ과 ㄷ의 교체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모음 앞이라도 분철의 방법으로 자음을 말음의 위치에 고정해 놓으면 ㅅ과 ㄷ의 교체도 가능하였던 것이다.

을(상:27ㄱ, 하:45ㄴ) --- 을(하:45ㄱ)

위의 예에서 보듯이 모음 앞에서도 말음 ㅅ과 ㄷ의 교체가 일어난 것을 보면 ㅅ과 ㄷ이 말음의 위치에서 [t]으로 중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훈 언해』에는 ‘옷의’[衣] ‘못애’[池]와 같이 ㅅ말음을 모음 조사 앞에서 분철 표기한 예도 있다. 그러면 이 경우에도 ㅅ이 [t]으로 중화된 상태로 보아야 하는가? 이 경우는 [t]이 아니고 본래의 [s]음으로 실현되는 표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옫의’ ‘몯애’와 같은 교체형이 쓰인 일이 없고, 연철형에서도 ‘오, 오스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중화 상태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을’의 경우에 연철형은 『여훈 언해』에서 ‘들’로만 나타난다는 점이 ‘옷의’ 경우와 다르다. 이러한 표기는 17세기 후반에 더욱 확산되면서 모음 앞의 ㅅ말음도 [t]음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라. 비음화(鼻音化)의 표기

폐쇄음이 비음을 만나게 되면 비음으로 변한다. 이른바 비음화 현상이다. 이런 비음화는 15세기 국어에서도 실현되었던 현상일 테지만 그 비음화를 표기에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있다면 ‘니-’를 ‘니-’로, ‘걷너-’를 ‘건너-’로, ‘아닏니라’를 ‘아닌니라’로 표기한 정도가 15세기 문헌에 보일 뿐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비음화를 반영한 표기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가 되었다. 『여훈 언해』에는 비음화를 반영한 표기가 상당수 등장하고 있는데, 주로 ㅅ말음이 ㄴ 앞에서 ㄴ으로 비음화한 것을 표기한 예가 대부분이며 그것도 몇 낱말에 집중되어 있다. ㄷ이나 ㅂ의 비음화를 표기한 예는 아래의 b, c에서 보듯이 한두 낱말에 불과하다. 이제 비음화의 예를 나타난 대로 다 열거하고자 한다. 물론 비음화를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만 그 예는 생략한다.

a. 인 집(상:6ㄱ) 라미 인노라(상:11ㄱ) 어 인뇨(상:18ㄱ) 인디라(상:21ㄱ, 상:25ㄴ, 상:26ㄴ, 하:40ㄱ) 우희 인 사(하:19ㄴ) 아래 인 사(하:19ㄴ) 인 거시며(하:24ㄱ) 혼자 인(하:33ㄱ) 限量이 인니(하:40ㄱ) 人女ㅣ 되얀 이(상:16ㄴ) 婦ㅣ 되얀 이(상:16ㄴ) 婦 되얀니(상:29ㄱ) 婦이 되얀 者(상:36ㄴ) 貞婦 되연 이(상:41ㄴ) 양진믈(하:3ㄴ) 며 만난 것 야(하:4ㄱ) 婦ㅣ 도연 者(하:5ㄱ) 겨집이 되연 者(하:9ㄱ) 妻ㅣ 되연 者(하:12ㄴ) 父母ㅣ 되연 사(하:15ㄱ) 어미 되연 쟤(하:29ㄴ) 載얀 바(상:16ㄱ) 터연 故로(상:16ㄴ) 臨연 (하:33ㄴ) 서 니언디라(상:18ㄴ) 後 닌(상:28ㄴ-29ㄱ) 後世 닌디라(상:45ㄱ) 며 만[味]난 것(하:4ㄱ)  둔 쟈(하:29ㄱ) 소기디 아닌냐(하:33ㄱ) 아 나한 者(하:27ㄴ)
b. 밤의 니기(상:33ㄴ) 니디 말고(상:33ㄴ) 니시거든(하:3ㄴ) 니맨(하:22ㄴ) 귀예 닉이 든 배라(하:47ㄱ)
c. 能히 밤 먹거든(하:28ㄱ)

마. 구개음화 및 원순모음화

ㄷ, ㅌ이 i, j 앞에서 ㅈ, ㅊ으로 변하는 구개음화와, ㅁ, ㅂ, ㅍ 아래의 ㅡ모음이 ㅜ모음으로 변하는 원순모음화를 『여훈 언해』에서는 볼 수가 없다. 대체로 두 음운 변화는 17세기 말엽에 가서야 문헌에서 확인되는 현상인 것으로 보아, 두 가지 변화를 전혀 볼 수 없는 『여훈 언해』는 17세기 말엽 이전의 문헌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래에 구개음화(a)와 원순모음화(b)에 해당하는 예 중의 일부를 보이지만, 음운 변화가 일어난 예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a. 엇디(상:8ㄴ) 어딘(상:8ㄴ) 뎌튝 거시(하:4ㄱ) 쳐티기(하:5ㄱ) 고티디(하:18ㄱ) 디키디(하:30ㄱ) 皇황帝뎨(상6ㄴ) 朕딤(상:6ㄴ) 張댱氏시(상:7ㄱ) 治티化화(상17:ㄱ) 天텬地디(하:3ㄱ)
b. 믈결이(상:46ㄱ) 져므러(상:46ㄴ) 븓들며(하:3ㄴ) 믈을(하:4ㄱ) 브즈러니(하;4ㄴ) 허므리(하:9ㄱ) 브르고져(하:18ㄴ) 믈 리고(하:28ㄱ) 스믈 어(하:28ㄴ) 더브러(하:46ㄱ) 御어物믈(상:27ㄴ)

2. 문법

가. 용언 활용에서의 ㄱ 회복

중세 국어에서 용언의 어간 말음이 ㄹ이거나 j일 때, 그 아래에 ㄱ으로 시작되는 ‘-거-, -고, -게/긔’ 등의 어미가 연결되면 어미는 두음 ㄱ이 탈락한 ‘-어-, -오, -에/의’ 등으로 교체된다. 이른바 ㄱ탈락 현상이라는 것인데, 『여훈 언해』에서는 ㄱ탈락 현상이 폐지되고 ㄱ이 회복되었다. 어간 말음 ㄹ, j 아래에서도 ‘-거-, -고, -게/긔’ 등의 어미가 교체됨이 없이 그대로 연결되었다.

a. 기 알고(상:11ㄱ) 그 디 멀고(상:19ㄴ) 니디 말고(상:33ㄴ) 貞女ㅣ 되고(상:37ㄱ) 병들게 면(상:37ㄴ) 舅姑 닐외고(하:8ㄱ) 恩養을 뵈고(하:14ㄴ) 어딘 안해 되고져 (하:14ㄴ) 癆증이 일고(하:29ㄴ) 나 길게 리라(하:39ㄴ) 直解 고(하:45ㄱ) 날을 고(하:45ㄱ) 티(하:9ㄱ)
b. 德을 삼디 말오(하:18ㄴ)

위의 a에서는 ㄹ이나 j 아래에서도 ‘-고, -게, -고져’ 등과 같은 ㄱ을 유지한 어미가 그대로 쓰였다. ‘티’는 용언의 활용형은 아니나 15세기에 두 낱말이 합성하는 과정에서 ㄹ 다음의 ㄱ이 탈락하여 ‘티’(능엄경 언해 2:14ㄱ)로 쓰이다가 ㄱ이 회복된 것이어서 여기에 포함시킨다. 이로써 중세 국어에서 볼 수 있었던 어미의 교체 현상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어미가 단일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문헌 전체를 통해 ㄹ 아래에서 어미 ‘-고’가 ‘-오’로 교체되어 쓰인 유일한 예를 b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전체의 흐름에서 낙오된 사례처럼 보인다.

중세 국어의 이러한 교체 현상은 ㄹ, j 외에 i모음 아래에서도 일어났는데, 이때의 i모음은 체언에 연결되는 서술격 조사이다. 서술격 조사 i에 한해서는 ㄹ, j 아래에서처럼 ㄱ이 탈락한 어미로 교체되어 쓰였다. 이러한 중세 국어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여훈 언해』에서도 서술격 조사 i 아래에서는 ㄹ, j의 경우와 달리 ‘-거-, -고’가 여전히 ‘-어-, -오’로 교체되어 쓰이고 있다.

c. 聖은 어디르시미오(상:9ㄱ) 몯 거시오(상:16ㄴ) 이 가지오(하:14ㄱ) 열다 어(하:28ㄴ) 靜 德이오(하:34ㄴ) 害로오미 모 배오(하:34ㄴ) 열둘히어니와(하:47ㄴ)

이와 관련해서 체언에 조사가 연결될 때도 체언의 음운 조건에 따라 교체가 실현되는 조사 중에 접속 조사 ‘-과/와’가 있다. 이는 체언의 말음이 모음일 경우에 ‘-와’, 자음일 경우에는 ‘-과’가 통합된다는 점에서 중세 국어와 현대 국어가 동일하지만, 중세 국어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ㄹ일 경우에도 앞의 용언에서처럼 ㄱ이 탈락한 ‘-와’를 선택한다는 점이 다르다.

d. 곳과 果實와(석보상절 6:40ㄱ) 입시울와 혀와 엄과 니왜 다 됴며(석보상절 19:7ㄴ)

그러나 『여훈 언해』에 와서는 체언이 ㄹ말음일 때도 ‘-과’가 연결되었다. 이는 이미 16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현상이다.

e. 하과 희(상:45ㄴ) 녜節과 禮 되며(하:28ㄴ)

접속 조사와 관련해서 16세기 후반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이탈을 『여훈 언해』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말음이 모음인 체언임에도 ‘-와’가 아니고 ‘-과’를 연결해 쓰고 있는 현상이다. 마치 모든 환경에 걸쳐 ‘-과’로 단일화하려는 시도처럼 보이나 그 세력은 부분에 그친다. 등장하는 예를 전부 제시한다.

f. 돕 신하과 믿 日로 講 禮官 等(상:6ㄴ) 노프니과 니(상:45ㄴ) 夫婦의 이과 妻妾의 서 이시믄(상:46ㄴ) 父母과 가지시고(하:3ㄱ) 天地과 시니(하:3ㄱ) 신하과 妾이(하:12ㄴ) 驕오과 홈을(하:33ㄴ)

나. ㅎ말음 체언

중세 국어에는 ㅎ말음 체언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그 뒤에 조사가 연결되면 조사의 두음에 ㅎ이 나타나는 체언을 말한다. 체언 단독으로 쓰이거나 사이ㅅ 앞에서는 ㅎ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체언은 아니지만 복수 접미사 ‘-ㅎ’도 ㅎ말음을 갖고 있어 ㅎ말음 체언에 포함하여 함께 다루고자 한다. 이들 체언의 ㅎ말음은 이미 15세기에서부터 일부 낱말에서 소실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훈 언해』에도 ‘하ㅎ’과 복수 접미사 ‘-ㅎ’을 제외하고는 말음ㅎ에 별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특히 ‘하ㅎ’은 15세기 국어에서부터 ㅎ이 소멸된 ‘하리, 하, 하래, 하와’와 같은 표기가 일반화하다시피 되었다. 『여훈 언해』에서도 ‘하ㅎ’과 ‘하’이 비등한 수준으로 등장한다.

a. 하히니(상:9ㄱ) 하희(상:45ㄴ) 하히오(하:7ㄴ) 하(하:8ㄱ) 하히(하:20ㄱ) 하(하:40ㄱ)
b. 하이(상:9ㄱ) 하과(상:45ㄴ) 하은(하:7ㄴ) 하애(하:33ㄱ) 하의(하:38ㄴ)

이 밖에 복수 접미사 ‘-ㅎ’에서 ㅎ이 소실된 표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암’[雌]도 ㅎ말음을 현대어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여훈 언해』에서는 ㅎ 소실형과 유지형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c. 모 아리(하:19ㄱ) 모 아(하:35ㄱ)
d. 암(하:9ㄱ) / 암(상:17ㄱ)

그 외에는 ㅎ말음이 아무 변동 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

e. 히라(상:9ㄴ) 둘히(상:10ㄴ) 나토(상:19ㄱ) 안흐로(상:21ㄱ) 나라(상:27ㄴ) 스믈히어든(하:28ㄴ) 나(하:39ㄴ) 터(하:46ㄴ) 열둘히어니와(하:47ㄴ)

다. 주격 조사

중세 국어의 주격 조사는 음운 조건에 따라 체언 말음이 자음일 때는 ‘-이’가 쓰이고, 모음일 때는 ‘-ㅣ’가 연결되어 체언의 모음과 결합함으로써 하향 이중 모음을 형성하였다. 체언 말음이 모음이라도 ‘i, j’ 모음일 때는 주격 조사가 표면적으로는 생략되는 이른바 zero 주격 조사의 형태가 된다. 이 변동 규칙은 당시에 철저히 지켜졌다. 그러나 15세기에 i, j로 끝난 경우라도 한자어 아래에는 주격 조사 ‘-ㅣ’가 연결되는 일이 많았다. 이는 주어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a. 理ㅣ 衆生 미니(능엄경 언해 2:23ㄴ) 機ㅣ 져글(법화경 언해 2:94ㄱ) 如來ㅣ 녜 이셔(법화경 언해 5:146ㄴ) 如來ㅣ 方便으로(법화경 언해 5:147ㄱ)

『여훈 언해』에서는 전체적으로 중세 국어의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서 벗어나는 예들이 가끔 언해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체언의 말음이 자음임에도 ‘-ㅣ’가 연결되거나 반대로 모음으로 끝난 체언 뒤에 ‘-이’가 연결되는 등의 이탈 현상을 말한다.

b. 恩澤ㅣ(상:10ㄱ) 人臣ㅣ(상:25ㄴ) 婦人ㅣ(하:4ㄴ, 하:22ㄴ) 禎祥ㅣ(하:14ㄴ) 人婦이 되얀 이(상:16ㄴ) 婦이 되얀 者(상:36ㄴ) 保이 臨연 (하33ㄴ)

위와 같은 이탈 현상은, 번역을 위해 한문 원문에 달아 놓은 한글 구결에서 더욱 심한 혼란을 드러낸다. 『여훈 언해』의 내용 중에서 첫 부분인 〈어제 여훈서〉와 바로 다음의 〈여훈서〉(純一道人이 씀)의 구결문에는 중세 국어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으나 그 뒤의 본문에서는 구결문에 사용된 주격 조사나 서술격 조사에서 ‘이, ㅣ, Ø'의 구별은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 형태가 주격이나 서술격에서 거의 배제되고, 체언 말음이 자음이든 모음이든 상관없이 주격이나 서술격에서 모두 ‘ㅣ’ 형태 일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의 형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전체를 통해 예외의 수준이라 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서술격 조사에서는 ‘ㅣ’를 표기해야 할 부분에서 ‘ㅣ’를 생략한 예도 많이 나타난다. 아래에 그 예들을 보이되, 자음 다음에도 ‘ㅣ’ 구결을 쓴 예(c)와, 서술격에서 ‘ㅣ’를 생략한 예(d)는 그 일부만 제시한다.

c. 朕ㅣ 幾務之暇애(상:1ㄴ) 子孫臣民ㅣ(상:5ㄱ) 婦人之職ㅣ(상:25ㄱ) 庶可爲傳ㅣ라(상:2ㄴ) 不可不學ㅣ니(상:22ㄱ) 割不正ㅣ어든(하:21ㄱ) 不惟正其身ㅣ라(하:21ㄴ) 皇考이 日躋聖敬之功시며(상:3ㄴ) (보기) 一粒之食이(하:36ㄱ) 耳所熟聞이라(하:43ㄴ)
d. 受命出府러니(상:14ㄱ) 婦道를 奚修리오(상:22ㄴ) 旣受어든(상:43ㄱ) 冠帶垢어든(하:1ㄴ) 貞女之幽行也니라(하:32ㄱ)

또한 구결에서 처격 조사 ‘-예’를 사용해야 할 곳에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래 예에서는 말음 j 밑에서도 ‘-예’가 아니고 ‘-애/에’가 구결로 사용되었다.

e. 越明年辛亥애(상:14ㄱ) 如夫尊鴈之際에(상:39ㄱ) 事有巨世애(하:6ㄴ)
(다른 보기)七歲에 男女ㅣ 不同席며 十歲예 閨門不出閾고(상:31ㄱ)

라. 삽입모음 ‘-오/우-’

중세 국어 문법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우-’가 있다. 이 의도법 어미는 아무 곳이나 삽입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어미에 한해서 그 앞에 삽입된다. 필수적으로 ‘-오/우-’가 삽입되는 어미로는 명사형 어미 ‘-ㅁ’이 있고 이 밖에 연결어미로 ‘-’와 ‘-려’가 있다. 반면에 이러한 삽입모음을 취하기도 하고 취하지 않기도 하는 부류도 있는데, 이에 속하는 어미로는 관형사형 어미 ‘-ㄴ, -ㄹ’이 있고 연결어미 ‘-니, -니, -리니’와 종결어미 ‘-리라’가 있다. 이 삽입모음은 15세기 후반에 동요되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소멸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표기상으로는 더 후대에까지 존속한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17세기의 『여훈 언해』에는 삽입모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를 위해서 삽입모음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어미의 경우에 삽입모음의 개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앞에서 삽입모음을 항상 수반하는 어미에는 ‘-ㅁ, -, -려’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중에서 ‘-려’는 『여훈 언해』에 한 번도 쓰인 일이 없고, ‘-’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삽입모음이 모두 개재되고 있다. 그러므로 ‘-려, -’ 어미의 경우에는 삽입모음의 동요를 확인할 수가 없다. 반면에 명사형 어미 ‘-ㅁ’의 경우에는 용례도 많지만 삽입모음의 사용에 있어서도 소실형과 개재형이 비등하게 나타나고 있어, 여기서는 명사형 어미 ‘-ㅁ’의 경우를 대상으로 하여 그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명사형 어미 ‘-ㅁ’ 앞에 삽입모음 ‘-오/우-’를 취한 표기는 ‘다’ 및 ‘-다’류 용언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도 ‘다’ 및 ‘-다’류 용언의 경우에는 삽입모음이 건재함을 보여 주는 듯하다.

a. 셰호미(상:8ㄴ) 動홈애(상:10ㄴ) 徵험호미(상:19ㄴ) 剛紀되디 몯홈을(상:21ㄱ) 공경홈을(상:28ㄴ) 싁싁홈으로(상:41ㄱ) 공敬요미(하:9ㄴ) 하티 호미라(하:8ㄱ) 막게 호(하:8ㄴ) 아디 몯호미(하:14ㄱ) 블러 홈을(하:18ㄴ) 平호믈 樂호믄(하:23ㄴ) 居욤애(하:33ㄴ)

이처럼 삽입모음의 사용례가 문헌 전체를 통해 많이 나타나지만 ‘-다’류가 아닌 용언으로서 명사형에 삽입모음이 사용된 예는 거의 모습을 감춘 상태이다. 아래의 예가 전부이다.

b. 어버이를 섬교매(상:25ㄴ) 婦ㅣ 되요매(상:38ㄱ) 어디로믈(하:8ㄱ) 나며 믈로미(하:30ㄱ)

위에 제시한 b의 예를 제외하고는 ‘-다’류가 아닌 용언의 명사형에서 삽입모음의 표기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아래의 c가 확실한 추세를 보여 준다.

c. 어디르믈(상:11ㄱ) 업시녀기미(상:20ㄴ) 디 업이니(상:21ㄱ) 키미라(상:33ㄱ) 치믈(상:34ㄱ) 게으르믈(하:4ㄱ) 안앤(하:23ㄱ) 너므미 업스미오(하:23ㄱ) 어딘 일을 싸믄(하:24ㄱ) 치미(하:27ㄴ) 나타나믈 표며(하:28ㄴ) 댱가 드리믄(하:28ㄴ) 덕을 사므미(하:38ㄴ) 셤기믈(하:39ㄴ)

위의 a에서 보았듯이 명사형에서 삽입모음의 존재를 확고히 보여 주는 표기는 ‘다’ 및 ‘-다’류 용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서 ‘-다’ 용언류에서도 삽입모음의 소멸이 진행되고 있음을 또한 아래의 d가 보여 준다. 그러나 아직은 ‘-다’ 용언에서 삽입모음의 표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d. 植立과 齊治과(상:16ㄴ) 求 코져 미(상:17ㄱ) 徵험미(상:20ㄴ) 身의 立믄(상:29ㄱ) 쟝만미오(상:33ㄴ) 공경로(하:8ㄱ) 공경믈(하:9ㄴ) 가지로 아니믈(하:28ㄱ) 덛덛미(하:34ㄱ)

마. 그 밖에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 문법 형태에서 주목되는 현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먼저, 존칭 여격 조사 ‘-’의 표기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기원적으로 ‘-’는 15세기에 존칭 관형격 조사였던 ㅅ과 대명사 ‘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조사로 보는 것이다. 이는 15세기 문헌들에 나타난 표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처럼 합용병서로 적기도 하였지만 ‘-ㅅ긔’와 같이 ㅅ을 분리해서도 많이 적고 있기 때문이다.

a. 아긔(용비어천가 25장) 부텻긔(월인천강지곡 기74) 如來ㅅ긔(월인석보 14:15ㄴ)
b. 하(월인석보 21:21ㄴ) 부텨(석보상절 6:9ㄴ) 世尊(월인석보 7:3ㄴ)

『여훈 언해』에도 존칭 여격 ‘-’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처럼 ㅅ을 분리해서 적은 예는 없고 하나로 굳어진 ‘-’로만 쓰이고 있다.

c. 聖母(상:7ㄱ) 鳥考(상:10ㄱ) 父母(상:41ㄴ) 舅姑(하:3ㄱ) 大舜(하:8ㄴ) 님금(하:29ㄱ)

이와 같이 관형격 ㅅ은 ‘긔’에 흡수되어 ‘-’로 일원화되었는데 『여훈 언해』에서는 이러한 ‘-’에 다시 ㅅ을 더한 ‘-ㅅ’가 등장하기도 한다.

d. 皇后ㅅ(상:7ㄱ) 舅곳(상:28ㄴ) 夫子ㅅ(상:29ㄱ) 父母ㅅ(상:33ㄴ)

다음으로, 객체높임의 문법 형태인 ‘-//-’ 대신에 ‘-솝/좁/옵-’의 변이된 형태가 쓰인 것을 일부에서 볼 수 있다.

e. 머리 굽솝고(하:46ㄱ) 글의 인 주 엿조오매(상:8ㄱ) 곳 慈命을 닙소오니(상:8ㄱ) 敎令을 밧조와(상:27ㄴ) 그 후에 조차 뫼오와(상:27ㄴ)

또 한 가지는 파생 부사의 형태이다. 부사 접미사 ‘-이’를 ‘-다’류 용언에 붙여 파생 부사를 만드는 경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어근에 접미사 ‘-이’를 바로 붙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어간 ‘~-’에 접미사 ‘-이’를 붙이는 방법이다. 후자의 경우 ‘~-’에 ‘-이’가 결합될 때는 ‘’의 ‘ㆍ’가 탈락하여 ‘-히’가 된다. 그런데 『여훈 언해』에는 동일한 ‘-다’ 용언에 대해 두 가지 방법으로 각각 만들어진 부사가 공존하고 있는 예를 볼 수 있다.

f. 至극이(하:34ㄴ) / 至극히(하:34ㄱ) 맛당이(하:46ㄱ) / 맛당히(하:45ㄴ)

이와는 달리 부사에 부사 접미사 ‘-히’를 붙인 예도 발견된다.

g. 근原이 果연히 어 인뇨(상:18ㄱ) 너모히 디 몯 거시오(하:40ㄱ)

‘果연’과 ‘너모’는 그 자체로서 엄연히 부사로 쓰이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다시 부사 접미사 ‘-히’를 붙여 쓰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ㆁ의 소멸로 나타난 현상이다. 15세기에 상대 높임법의 선어말 어미로 --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평서법으로 ‘-다, -니다, -리다’, 의문법에 ‘-니고, -리가’ 등의 형태가 상대 높임법으로 쓰이던 어미들이다. 이러한 높임법의 ‘--’ ‘--’은 17세기에 들어서 ㆁ의 소실로 ‘-이-’, ‘-잇-’이 되었다. 『여훈 언해』에는 15세기에 청원형(請願形) 높임법으로 쓰였던 ‘-지다’가 ㆁ이 소실되면서 ‘-지이다’가 아닌 ‘-징이다’로 바뀌어 나타난 예가 있다.

h.  지거든  무텨 시서징이다(하:3ㄴ)
i.  지거든  무텨 셰답야징이다.(하:3ㄴ~4ㄱ)

이는 상대 높임법 ‘--’의 ㆁ이 소실된 상태에서도 그 음가 [ŋ]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징이다’와 같이 ㅇ을 말음에 적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3. 어휘 및 한문

가. 어형의 교체

17세기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여훈 언해』에는 중세 국어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근대 국어의 새로운 형태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중세 국어의 편린들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낱말에 따라서는 중세 국어에서 사용되었던 구형과 이를 개신한 신형이 함께 나타나는 것도 있는데, 이 경우 아직은 신형이 구형을 능가하지 못한 가운데 구형이 버티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몇 낱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다

15세기의 동사 ‘다’가 16세기에 오면 어형이 바뀐 ‘다’로 등장한다. 이 ‘다’가 『여훈 언해』에 그대로 이어져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가 구형인 ‘글다’보다는 열세에 있다. 15세기의 잔영인 ‘글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a. 句 버혀 直解 고(하:45ㄱ)
b. 女訓 拾貳篇을 그노니(상:28ㄱ)
내 녜 근 女訓으로(하:45ㄴ)
내의 글 그라(하:45ㄴ)

15세기의 ‘다가’와 ‘반기’ 및 ‘초다’가 16세기에 와서 ‘만일’과 ‘반시’ 그리고 ‘초다’로 바뀌고 ‘초다’는 다시 ‘초다’로 변하여 모두 17세기로 넘어온 것은 ‘-’의 경우와 같지만, ‘다가’, ‘반기’, ‘초다’의 형태는 『여훈 언해』에서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만일’, ‘반시’, ‘초다’ 일색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다’의 경우에는 ‘다’와 이전의 ‘글다’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2) [地]

중세 국어에서 ㅎ말음 명사이던 ‘ㅎ’[地]이 ‘ㅎ’으로 발달한 유일한 예가 발견된다. 『여훈 언해』에서 ‘ㅎ’의 출현은 하나의 돌발 사태로 보일 정도로 아직은 ‘ㅎ’의 천하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ㅎ’이 등장하였다는 것은 현대 국어의 형태가 이미 싹트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c. 頓首 머리 해 두드리다(상:9ㄱ)

(3) 처음

중세 국어의 ‘처’이 16세기에 ㅿ의 소실로 ‘처엄’이 되었다가 17세기에 ‘처음’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훈 언해』에서도 ‘처엄’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 ‘처음’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도 역시 현대 국어로의 진입을 보여 주는 어형이다. 이로써 『여훈 언해』가 ‘처음’이 등장하는 앞선 문헌이 아닌가 한다.

d. 기 처음으로 울으매(하:3ㄴ)
e. 처엄의 두 姓의 됴흐믈 合며(상:44ㄴ)
洪武 처엄은 女戒 잇고(하:46ㄱ)

(4) 앞

15세기의 ‘앒’에서 ㄹ의 탈락으로 ‘앞’이 된 것은 16세기 문헌에서이다. 앞의 어휘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신구형이 모두 등장한다.

f. 聖母 압픠 나아가(상:8ㄱ)
g. 羅列여 알 게 며(상:34ㄴ)
알로 唐과 虞ㅅ나라로(하:46ㄴ)

(5) 일즙

위에서는 17세기에 등장한 개신된 형태의 낱말이 아직은 중세 국어에서 사용되던 옛 형태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에 등장한 ‘일즙’의 경우는 다르다. 15세기의 ‘일즉’[早]이 17세기에 등장한 ‘일즙’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h. 일즉 睿主ㅅ겨틔 뫼오와(상:28ㄱ)
i. 녜 藩邸에 겨실제 일즙  글을 지으시니(상:6ㄴ)
일즙 受 바 書와 傳의 말로 編輯여(상:19ㄴ)
일즙 女訓  集을 지으샤(하:45ㄱ)

나. 한자어의 표기

16ㆍ7세기의 언해서 중에는 언해문을 국한 혼용 하지 않고 고유어나 한자어 모두를 한글로만 표기한 문헌들이 있다. 그러나 『여훈 언해』는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고 거기에다 한자음을 병기하는 체재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낱말 단위로 하지 않고 음절별로 국한 혼용의 표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표기 방식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여훈 언해』에는 일반화하다시피 되어 있다. 그 예를 몇 개 들어 본다.

i. 사侈(하:38ㄱ) - 奢치와(하:38ㄱ) - 奢侈(하:39ㄱ), 화麗(하:39ㄴ) - 華려며(하:30ㄱ), 녜節과(하:28ㄴ) - 禮졀을(하:24ㄱ), 공敬미라(하:9ㄴ) - 恭경야(상:19ㄴ), 궁究면(하:47ㄴ) - 窮구며(하:28ㄴ), 존節며(하:38ㄱ) - 撙節며(하:40ㄱ), 風쇽을(하:39ㄴ) - 風俗이(상:29ㄴ), 端졍고(하:9ㄱ) - 端正야(하:23ㄴ)

주로 2음절로 된 한자어에서 제1음절이나 제2음절 중의 어느 한 음절만 한자 표기를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두 음절 중 어느 음절을 한자로 표기하느냐 하는 것에 어떤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사치’란 낱말을 표기하면서 ‘사侈’로도 적고 ‘奢치’로도 적은 것을 보면 자의적인 표기였음이 드러난다. 심지어 ‘奢侈’로도 적었으니 원칙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다. 한문 원문과 구결문의 검토

앞서 서지적 고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훈 언해』는 원본인 한문본을 먼저 실어 놓고 그 다음에 이를 번역한 언해본을 실어 놓았다. 그러므로 한 책 속에 한문 원문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앞 부분에 있는 한문본에 순 한문으로 된 원문이 있고, 또 한 번은 한문본에 뒤이어 있는 언해본 부분에서 한글 구결이 달려 있는 구결문 체재의 한문 원문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원문을 비교해 본 결과 한자의 누락이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언해본 부분의 구결문과 언해문에는 한자마다 한자음을 일일이 병기해 놓고 있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로 보인다. 이 한자음 병기(倂記)가 누락된 곳도 몇 군데 된다. 이렇게 한자마다 한자음을 달면서 동일한 한자에 서로 다르게 한자음을 달아 놓은 경우도 나타난다. 이제 이러한 용례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1) 원 한문과 구결문의 비교

한문본의 원문과 언해본의 구결문을 비교하여 양자간에 차이나는 부분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예문으로 인용한 구결문의 한글 구결은 생략한다.(이하 모두 같음)

a. 嘉靖庚寅季餘十有九日(여훈서:3ㄴ)

위의 구절은 한문본 부분에 있는 「어제 여훈서」의 맨 끝구절로서 서문을 쓴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구절이 한문본의 원문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언해본의 구결문에는 빠져 있다.

b. 嚴周而密則未有如我(하:43ㄱ-7,8행)

b는 『여훈 언해』의 언해본 부분에 있는 「여훈 후서」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이 언해본의 구결문에는 있으나 한문본 부분의 원문에는 지워져 있다. 그리하여 한문본의 ‘여훈후서:22ㄱ-5행’은 공란으로 비어 있다.

이하 c~g는 한문본의 원문과 언해본의 구결문을 비교한 결과 어느 한 쪽에서 한 글자가 빠져 있는 구절들을 제시한 것이다. 아래 예문의 각 항에서 앞쪽의 것은 한문본의 원문 구절이고, 뒤쪽의 것은 같은 구절의 언해본 구결문이다. 양쪽을 비교해 보면 한문본에서 한 자가 빠진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c. 事業莫大於脩齊治平(여훈서:4ㄱ) — 事莫大於脩齊治平(상:12ㄱ)
d. 抑豈婦人儀哉(여훈서:5ㄴ) — 抑豈婦人之儀哉(상:15ㄴ)
e. 不可以不敬夫(여훈서:8ㄱ) — 不可以不知敬夫(상:24ㄴ)
f. 齊家俗(여훈서:8ㄴ) — 齊家範俗(상:25ㄴ)
g. 亦由不賢之婦之所致也(여훈:12ㄱ) — 亦由不賢婦之所致也(상:40ㄱ)

이뿐만 아니라 동일한 구절에서 원 한문과 구결문 사이에 서로 다른 글자를 쓰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번역을 위해 구결문을 작성하면서 원문의 글자를 바꾼 것이지만, 글자는 서로 달라도 뜻은 같은 자끼리 교체한 것이다. 각 항의 앞엣것이 한문본의 원문이다.

h. 玆觀妃所編女訓(여훈서:5ㄴ) — 慈觀妃所編女訓(상16ㄱ)
i. 自然淳龐(여훈서:8ㄴ) — 自然淳厖(상:25ㄱ)
j. 上浣日(여훈서:8ㄴ) — 上澣日(상:25ㄴ)
k. 始仕而陳任事之謀(여훈서:18ㄱ) — 始任而陳任事之謀(하:26ㄱ)

끝으로, 한문본의 ‘國家’를 구결문에서 ‘家國’으로 앞뒤 바꿔 놓은 곳이 있다.

l. 夫國家之興(여훈후서:22ㄱ) — 夫家國之興(하:42ㄴ)

(2) 한자음 병기의 누락

언해본 부분의 구결문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원 한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한자 하나하나에 모두 한자음을 병기해 놓고 있다. 그런 중에 한자음 병기를 빠뜨린 곳이 아래와 같이 몇 군데 발견된다. 밑줄을 표시한 글자에는 한자음 표기가 빠져 있다.

a. 誠能능以이傳뎐訓훈之지書셔(상:5ㄱ)
b. 士庶셔人(상:10ㄴ)
c. 所소以이合합體톄而이同동尊卑비也야(상:43ㄴ)
d. 則無무以이御어婦부(상:43ㄴ)
e. 有유大대事(하:2ㄴ)
f. 或因안奉봉承승乏핍人인而이他타卜복(하:10ㄴ)
g. 婦부愛其기妾(하:11ㄴ)
h. 五오味미昏智디(하:37ㄱ)

언해문에 등장하는 한자에도 한자음을 병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한자음 병기를 누락한 곳이 있다.

i. 春츈王왕正月월上샹澣한日일에 스노라(상:29ㄴ)
j. 尹윤吉길甫의 아리라(하:19ㄱ)

(3) 한자음의 혼기(混記)

동일한 한자에 대한 음(音)을 조금씩 다르게 표기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본래 말음이 ㅕ인 한자음에 j를 덧붙여 ㅖ의 한자음을 쓰기도 하였다.

a. 邸 : 뎌/뎨
昔셕在藩번邸뎌샤(상:1ㄱ) — 皇황太태后후ㅣ 藩번邸뎨에 겨실 제(상:6ㄱ-ㄴ)
b. 妻 : 쳐/쳬
士庶셔人인妻쳐ㅣ(상:5ㄴ) — 士庶셔人의 妻쳬ㅣ(상:10ㄴ)
c. 書 : 셔/셰
女녀敎교ㅅ書셔ㅣ 이시니(상:26ㄴ) — 小쇼學之지書셰ㅣ(상:22ㄴ)
d. 勢 : 셔/셰
勢셔ㅣ로 핍박기 어렵고(하:12ㄴ) — 難난以이勢셰逼핍ㅣ오(하:10ㄴ)

둘째, 모음 i, j 앞에서 ㄹ과 ㄴ을 혼용한 예들이 많이 나온다. 어두 어중 상관없이 혼용되고 있다.

e. 麗 : 려/녀
錦금繡슈華화麗려ㅣ(하:36ㄴ) — 絶졀侈치麗녀之지費비야(하:37ㄱ)
f. 令 : 령/녕
不불特특三삼宮궁敎교令령ㅣ(상:23ㄴ) — 皇황太태妃비睿예母모之지敎교令녕야(상:23ㄴ)
g. 列 : 렬/녈
祖조考고列렬聖셩聖셩母모고(상:2ㄱ) — 祖조考고列녈聖셩聖셩母모(상:7ㄱ)
h. 寧 : 령/녕
居거安안寧령也야애(하:31ㄴ) — 身신不블康강寧녕야(하:17ㄴ-18ㄱ)
i. 禮 : 례/녜
禮례官관이 裝장䌙황여 드리와(상:7ㄴ) — 禮녜官관 時시等등이  닐오(상:7ㄴ)
j. 隆 : 륭/늉
家가道도의 隆륭셩믈 닐위며(상:46ㄴ) — 明명可가以이致티家가道도之지隆늉며(상:44ㄴ)
k. 理 : 리/니
但단文문理리奧오妙묘야(23ㄱ) — 敎교以이窮궁理니正졍心심之지道도와(하:25ㄴ-26ㄱ)
l. 臨 : 림/님
如여臨림師保보야(하:31ㄴ) — 스승이며 保보이 臨님연 (하:33ㄴ)

셋째, 한자 자체가 두 가지 음을 갖고 있는 경우, 두 가지가 다 나타난다.

m. 揖 : 읍/즙
婿셔ㅣ 婦부 揖읍고(상:45ㄱ) — 壻셔ㅣ 揖즙婦부以이入입야(상:43ㄴ)
n. 則 : 즉/측 주004)

‘則’ 자에 대해서 『광주 천자문』에서는 ‘법즉 즉’으로 석(釋)과 음(音)을 달아 놓았고, 『석봉 천자문』에서는 ‘법측 측’으로 석ㆍ음이 표기되어 있다. 두 문헌은 모두 16세기 후반의 자료들이다.

則즉敬경抑억搔소之지며(하:1ㄴ)—有유所소謂위女녀憲헌女녀則측이나(상:23ㄱ)

넷째, 말음에서 비음(鼻音) 간의 혼용이 일어나고 있다. 주005)

이와 같은 현상은 『천자문』의 이본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稱, 賓’자에 대해서 『광주 천자문』에서는 ‘친, 빙’으로 각각 자음(字音)을 표시하였고, 이와 달리 『석봉 천자문』에서는 ‘칭, 빈’으로 표시하고 있다.

o. 親 : 친/칭
愛親친之지意의如여此노니(상:5ㄴ) — 人인有유親칭踈소며(하16ㄱ)
p. 貧 : 빈/빙
不블以이宣션貧빈而이不블畏외니라 — 居거貧빙賤쳔也야애(하:31ㄴ)

다섯째, ㅈ 아래 쓰인 이중모음이 단모음으로 교체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q. 節 : 졀/절
비로소 節졀儉검 德덕을 일우리라(상:34ㄴ)— 方방成셩節절儉검之지德덕也야ㅣ니라(상:32ㄴ)
r. 坐 : 좌/자 주006)

‘坐, 佐’자에 대해서도 『광주 천자문』에서는 각각 ‘자, 좌’로 그 음을 표기하였고, 『석봉 천자문』에서는 정반대로 ‘좌, 자’로 표기해 놓았다.

坐좌則즉不블偏편其기身신며(하:21ㄱ)—坐자則즉敬경侍시立닙之지고(하:1ㄴ)

그리고 위의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혼용이 있다. 한자음 초성의 ㅎ으로 인한 차이이다.

s. 育 : 육/휵 주007)

<풀이>‘育’ 자의 음도 두 천자문에서 서로 달리 나타내고 있다. 즉 『광주 천자문』에는 ‘휵’, 『석봉 천자문』에는 ‘육’으로 각각 음을 달아 놓았다.

考고와 母모의 敎교育육이(상:8ㄴ) — 考고母모之지敎교育휵이(상:3ㄱ)

Ⅲ. 마무리

『여훈 언해(女訓諺解)』는 명나라에서 찬술(撰述)된 한문본 『여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여훈』은 명나라 11대 황제인 세종(世宗)의 어머니 장성자인 황태후(章聖慈仁皇太后)가 1508년에 편찬하였고, 그 후 아들인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 1530년에 다시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을 최세진이 처음으로 중종 27년(1532년)에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간행하였으나 이는 현재까지 전하지 않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책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2권 2책의 목판본 『여훈 언해』이다. 만송문고본 『여훈 언해』는 한문본 『여훈』의 원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한 책이지만, 이 책은 다른 언해본과는 달리 앞부분에 한문본의 원문을 전부 그대로 옮겨 실은 다음 구결문과 언해문으로 구성된 언해본을 싣고 있다. 한문본과 언해본을 같은 책에 묶어 편찬한 셈이다. 그러나 번역자나 간행 연대 및 간행처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언해문에 나타난 언어적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대략 언제쯤 간행된 책인지를 추정할 뿐이다.

먼저, 『여훈 언해』의 문자 체계는 17세기 국어의 25자 체계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방점, ㅿ, ㆁ 등은 자취를 완전히 감춘 상태이다. 표기법에 있어서는 분철과 연철이 교차하는 가운데 적어도 체언에서는 분철 표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중철 표기는 일부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받침에서 ㅅ과 ㄷ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든지, 중세 국어에서 용언의 어간 말음이 ㄹ이거나 j일 때, 그 아래에서 ㄱ이 탈락하던 규칙이 폐지되었다든지, 아직 구개음화나 원순모음화 같은 음운 현상을 보여 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 등은 『여훈 언해』가 17세기 전반기쯤의 문헌 자료임을 추정케 한다.

그 밖에 중세 국어 문법의 특징인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우-’가 전반적으로 쇠퇴했음에도 ‘-다’류 용언에선 ‘-오/우-’의 표기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고, ㅎ말음 명사도 대부분 중세 국어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어휘에 있어서도 『여훈 언해』에는 16세기 및 17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개신된 낱말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신형의 낱말들은 중세 국어에서 사용된 옛 형태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개신된 형태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되는 초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다, , 처음, 앞’과 같은 개신형들이 ‘글다, , 처엄, 앒’ 등의 구형에 비해 열세에 있다. 반면에 17세기에 처음 등장한 ‘일즙’은 중세 국어의 ‘일즉’을 제압한 느낌이다.

구결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일일이 자음(字音)을 달면서도 동일한 한자에 대해서 한자음을 조금씩 다르게 병기(倂記)한 곳이 발견된다. 이는 같은 시대의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어서 단순한 오기(誤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김동소(2007), 『한국어의 역사』, 정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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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문(1978), 『16세기 국어의 연구』, 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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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섭(1992), 『국어 표기법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허웅(1989), 『16세기 우리 옛말본』, 샘문화사.
홍윤표(1993), 『국어사 문헌자료 연구』, 태학사.
홍윤표 외(1995), 『17세기 국어사전』, 태학사.

영험약초·수구영험·오대진언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진언(眞言)은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적어서 외우는 어구(語句), 곧 주문(呪文)을 이른다. 번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이에게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 아울러 신성성(神聖性)을 온전히 간직하기 위함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짧은 구절로 된 것을 ‘진언(眞言)’이나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陁羅尼)’, 또는 ‘대주(大呪)’라고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명(冊名)에 따라 ‘진언(眞言)’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오대진언(五大眞言)≫은 조선조 성종 16년(成化 21, 乙巳, 1485 A.D.)에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가 일반 민중들이 진언을 쉽게 익혀서 암송(暗誦)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범문(梵文)의 한자 대역에 다시 정음(正音)으로 음역(音譯)을 붙여서 간행한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오대(五大)’라는 서명(書名)으로 인해 흔히 「사십이수진언(四十二首眞言)」,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陁羅尼)」, 「수구즉득다라니(随求卽得陁羅尼)」,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등 다섯 편의 진언이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자재보살근본다라니(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한 편이 더 있어서 모두 6편을 수록해 놓은 책이다. 주001)

여섯 편 진언의 갖은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관세음보살사십이수진언(觀世音菩薩四十二首眞言) ②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신묘장구대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圎滿無礙大悲心神妙章句大陁羅尼) ③천수천안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④불설금강정유가최승비밀성불수구즉득신변가지성취다라니(佛說金剛頂瑜伽最勝祕密成佛随求卽得神變加持成就陁羅尼) ⑤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⑥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이 책의 체제는 진언을 범자(梵字)로 적어서 맨 오른쪽에 놓고, 왼쪽에 행(行)을 나란히 하여 정음 음역을 둔 후, 다시 그 왼쪽에 한자를 배치하는 방법을 취했다. 책의 체제를 보면 3행씩 짝을 맞추어 범자, 정음, 한자 진언을 병치(竝置)할 수 있도록 판식(板式)의 조정이 있었음을 확인 수 있다. 진언만 있는 부분은 유계(有界) 9행이고, 진언의 제목과 주(註)가 있는 「사십이수진언」은 2행을 제외하고 진언을 나란히 실을 수 있도록 유계 8행으로 한 점 등이 그러하다. 모두 민중의 송습(誦習)을 위함이라는 간행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처라고 본다.

맨 뒤에 있는 「불정존승다라니」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편에 대해 한역(漢譯)을 한 이는 당(唐)나라의 승려 불공(不空)이다. 다만 마지막에 있는 「불정존승다라니」 한 편만은 인도 계빈국(罽賔國)의 승려 불타파리(佛陁波利)가 한 것으로 전한다. 이 한자 진언을 정음 진언으로 옮긴 이는 발문(跋文)을 쓴 학조(學祖)가 아닐까 한다. 범자 진언이 되었건, 한자 진언이 되었건 진언을 정음으로 옮기는 불사(佛事)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범자(梵字)와 한자(漢字) 모두에 능통한 실력자가 아니면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당대의 학승(學僧)인 학조일 가능성이 높다.

각 진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 앞면부터 23장 뒷면까지는 「사십이수진언」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은 다른 다섯 편의 진언들과는 달리 42수(首)에 달하는 진언을 차례로 배열하였으되, 각 면(面)의 위로부터 1/3쯤 되는 곳까지 해당 진언을 암송(暗誦)할 때의 손 모양을 그린 수인도(手印圖)를 두었다. 24장 앞면 첫 행부터 29장 앞면 3행까지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이 진언을 포함한 다섯 편에는 수인도 없이 진언만을 두었다. 29장 앞면 5행부터 32장 앞면 6행까지는 「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가 있다. 32장 앞면의 7행부터 59장 앞면 7행까지는 「수구즉득다라니」가 있고, 59장 앞면의 9행부터 92장 뒷면 3행까지 「대불정다라니」가 있다. 그리고 92장 뒷면의 4행부터 97장 뒷면 2행까지 「불정존승다라니」를 두었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이 책의 98장 앞면 1행부터 106장 뒷면 끝까지 한문으로 된 「영험약초(靈驗略抄)」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07장 앞면에는 쓴 이가 불분명한 후기(後記) 성격의 글이 있고, 다시 2장에 걸쳐 학조의 발문(跋文)이 있다. 주002)

이 역주의 맨 뒤에 ‘후기(後記)’와 학조의 ‘발문(跋文)’을 번역하여 실어 놓았다. 번역에 도움을 주신 동국대 김갑기 교수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원간본으로 알려진 월정사본(月精寺本)에는 발문의 뒤에 18장에 달하는 언해본 「영험약초」가 실려 있다고 한다. 주003)
상원사에서 발굴된 책인 월정사본 「오대진언」에 대해서는 안주호(2003, 2004) 참조.
판심 서명은 ‘五大’이다. 장차는 한문본 ‘영험약초’에까지 이어져 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서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사십이수진언(四十二首眞言) : 1장 앞면 1행~23장 뒷면 8행(상단에 手印圖 있음)

2)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陁羅尼) : 24장 앞면 1행~29장 앞면 3행

3) 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 29장 앞면 5행~32장 앞면 6행

4) 수구즉득다라니(随求卽得陁羅尼) : 32장 앞면 7행~59장 앞면 7행

5)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 59장 앞면 9행~92장 뒷면 3행

6)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 92장 뒷면 4행~97장 뒷면 2행

7) 영험약초 한문본(대비심다라니) : 98장 앞면 2행~100장 뒷면 2행

8) 영험약초 한문본(수구즉득다라니) : 100장 뒷면 3행~103장 앞면 3행

9) 영험약초 한문본(대불정다라니) : 103장 앞면 4행~104장 뒷면 9행

10) 영험약초 한문본(불정존승다라니) : 105장 앞면 1행~106장 뒷면 9행

11) 영험약초 한문본 후기(後記) : 106장 앞면 일부(1~6행)

12) 학조(學祖)의 발문(跋文) 1장 앞면 1행~2장 뒷면 1행

13) 영험약초 언해본 : 대비심다라니, 수구즉득다라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의 순으로 4편 수록, 1장 앞면 1행~18장 뒷면 2행

각 진언별 편철(編綴) 순서는 맨 앞에 ‘曰’ 자로 끝나는 진언의 명칭이 갖은 이름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계청문(啓請文)을 둔 후, 범자, 정음, 한자의 순으로 진언을 적어 나갔다. 다만, ‘신묘장구다라니’와 ‘근본다라니’ 앞에는 계청문이 없다. 모두 ‘대비심다라니’에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오대진언(五大眞言)≫은 여러 종류의 이본이 현전하는데, 이 중 1996년에 상원사의 목조 문수동자 좌상 복장 유물로 발굴된 월정사본(보물 793-5호)을 원간본으로 보고 있다. 주004)

상원사에서 복장 성물로 발굴된 책을 월정사본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지금은 월정사의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간본 중 하나인 ‘성암문고’의 책은 1장부터 23장까지만 있는 낙장본(落張本)이다. 그 외의 중간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리산 철굴(鐵堀, 1531 A.D.) 판본을 비롯하여 수종이 현전한다.

이 역주의 저본(底本)이 된 책은 간행 연대 미상의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도서번호 貴 D 213.19 다231ㅇ2)이다. 책의 체제 등 전반적인 내용은 원간본에 견줘 큰 차이가 없다. 원간 후쇄본(後刷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언해본 「영험약초」는 없다.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판심(版心)을 중심으로 좌하(左下) 귀 등 일부의 내용은 마멸로 인해 판독이 불가능했던 듯하다. 누군가에 의해 필사, 보완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 보완된 내용은 언어 사실이 원본과 많이 달라져 있어서 이용에 주의가 요구된다. 역주 작업에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책인 충청도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 간행의 책으로 보완을 했다. 주005)

역주에서는 음역(音譯) 위주로 되어 있는 진언의 특성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 진언의 문자는 물론, 방점(傍點) 등도 일일이 대조해서 실었다. 쉽지 않은 입력 및 대조 작업을 꼼꼼하게 해준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의 박대범, 서정호 군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또 힘든 교정 작업을 도와 준 함병호 군과 전기량 양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책은 이른바 숭정본(崇禎本, 崇禎 7년, 1634년 A.D. 간행)이다. 특히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의 40장과 50장은 낙장이어서 모든 내용을 숭정본의 것으로 대체했다.

이 책은 ‘진언집(眞言集)’이다. 민중들의 진언 송습(誦習)을 목적으로 간행된 책이다. 띄어 읽기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문헌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간행된 다른 책들과는 달리 구두점(句讀點) 표시가 매우 정연하다. 띄어 읽기의 자리에는 반드시 둥근 고리 점, 곧 권점(圈點)을 두어 표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두점(讀點)’의 자리에는 글자의 한 가운데에 권점(圈點)을 두었고, 구점(句點)의 자리에는 오른쪽 권점(圈點)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뒤에 붙인 역주의 원문에서는 두점(讀點) 부분은 붙여 쓰기를 했고, 구점(句點) 부분은 띄어쓰기를 했다. 현대국어로의 옮김에서는 진언의 특성을 살려서 구점, 두점 구분 없이 권점(圈點)이 있는 부분은 모두 띄어쓰기를 하였다. 한자 진언에는 따로 구두점 표시가 없어서 정음 진언을 기준으로 띄어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자 진언 중에는 두 글자나 세 글자를 모아서 쓴 이른바 합자(合字)가 있다. 이런 글자는 두 글자의 사이에 연결 표시[^]를 해서 합자임을 밝혔다.

≪영험약초(靈驗略抄)≫는 앞에서 밝힌 대로 진언이 보여주는 이적(異蹟)이나 영험한 일 등을 사실이나 예화(例話)를 중심으로 제시하고 설명한 책이다. 그 대상은 『오대진언』에 실려 있는 여섯 편의 진언 중 「대비심다라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 네 편이다. 중간본 중에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도 있으나 판심서명이 ‘五大’이고, 「오대진언」의 원간본으로 알려진 월정사본의 뒤에 「영험약초」가 합철되어 있으므로, 초간의 연대는 「오대진언」과 같은 해(成化 21년, 乙巳, 1485 A.D.)로 본다. 이 책의 언해체제와 언어사실 등은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불정심다라니경언해」와 흡사하다. 15세기 후반의 언어사실과 언해체제 등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주006)

「불정심다라니경언해」에 대해서는 김무봉(2008) 참조.
두 책 모두 한문본은 목판본으로 되어 있고, 언해본은 활자(活字)인 을해자(乙亥字)로 되어 있는 점 등 비슷한 체제를 보이는 정음 문헌들이다.

이 역주의 저본(底本)은 1550년(嘉靖 29, 庚戌)에 간행된 경상도 풍기의 소백산(小伯山) 철암(哲菴/喜方寺) 판본(板本)이다. 동국대 도서관(貴 D213.19 영 93c2) 등에 수종이 현전한다. 이 책은 「오대진언」과는 달리 단행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1장 앞면부터 18장 뒷면 2행까지 언해본 「영험약초」가 나오고 바로 다음 장에 한문본 「영험약초」가 이어진다. 그런데 언해본 「영험약초」는 장차를 1장부터 새로 시작했다. 한문본은 107장부터이다. 이러한 장차 표시는 「오대진언」 뒤에 편철되어 있다고 하는 원간 그대로이다. 내용도 완전히 일치한다. 후기(後記)와 발문(跋文)도 같다. 판심서명도 ‘五大’로 되어 있다. 곧, 「오대진언」의 뒤에 편철되어 있던 「영험약초」만을 분권한 형식이다. 다른 점은 107장의 후기(後記) 바로 다음 행에 ‘主上三殿壽萬歲’(주상 삼전(三殿)의 만수(萬壽)를 기원합니다.)라는 구절과 ‘嘉靖二十九年庚戌四月日慶尙道豊基地小伯山哲菴開板(성종 21년(1550년) 4월 일 경상도 풍기지 소백산 철암에서 판각본을 내다.)’라는 간기(刊記)가 있어서 중간본임을 보여준다.

≪수구영험≫은 ≪오대진언≫과 ≪영험약초≫의 내용상 합본(合本)에 해당한다. 온전하지 못한 채로 현전하는 책들을 보면 ≪오대진언≫에 나오는 진언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그 뒤에 ≪영험약초≫를 둔 방식이다. 곧 ‘진언’ 한 편과 그에 대당되는 ‘영험약초’ 한 편씩을 모아서 한 권으로 묶은 형식인 것이다. 마치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해서 편찬·간행한 ≪월인석보≫를 연상케 하는 책이다. 물론 간행시기가 달라서 언해체제나 언어사실은 앞의 두 책(‘오대진언’, ‘영험약초’)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정음이 주(主)가 된 책이라는 점이다. ‘진언’의 경우는 물론 ‘영험약초’의 경우에도 한문 원문이 실려 있지 않다.

현전하는 책은 대부분 낙장본(落張本)이다. 선본(善本)으로 공개된 책은 아직 없다. 원간본 중 하나로 짐작되는 「사십이수진언」은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소재 불명이다. ‘성암문고’에 있는 목판본의 책은 「수구즉득다라니」 26장과 「불정존승다라니」 3장 등 모두 29장만 있는 낙장본(落張本)이다. 안병희(1987)에 의해 간행 연대가 1476년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 책은 현실 한자음이 주음된 최초의 문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특히 서명(書名)과 진언명(眞言名), 그리고 계청문(啓請文)에 정음을 먼저 쓰고 그 옆에 나란히 한자를 썼다는 점, 진언을 모두 현실 한자음으로 썼다는 점에서 주목 받을 만한 책이다. 이런 이유로 안병희(1987)에서 한글판 ≪오대진언≫이라 한 것이다. 주007)

이 책의 가치나 간행 연도 등 자세한 내용은 안병희(1987)에 소상하다. 특히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 한자음을 처음으로 썼다는 점 등으로 이 책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쉬운 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선본이 한 책도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전하는 낙장본으로 미루어, 원간본은 「사십이수진언」, 「신묘장구대다리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의 진언과 영험담이 함께 있는 5권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 진언별로 판심서명이 다른 점으로 보아 분권(分卷)으로 간행하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역주의 저본(底本)은 중간본인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충청도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 1569 A.D.) 간행본이다. 표지에는 한자로 ‘随求咒’라 써 놓았다. 모두 29장의 목판본(木版本)이다. 1장부터 26장까지에 걸쳐 「수구즉득다라니」가 있다. 그 중 1장부터 3장까지 계청문(啓請文)이 있고, 4장부터 17장까지는 「대수구대명왕다라니」 등의 다라니를 정음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현전 중간본들은 모두 5장부터 8장까지가 낙장이다. 이 책의 판목이 근대까지 남아 있었음을 시사(示唆)하는 부분이다. 18장부터 26장까지는 ≪영험약초≫에 있는 「수구즉득다라니」와 동일(同一)한 내용을 번역해서 수록하고 있다. 다만 번역과 표기 등에서는 간행 연대가 다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제목은 「수구영험」이다. 정음만으로 표기하여 ‘슈규험’이라고 했다. 책의 내용 중 진언명(眞言名)과 진언의 구두(句讀)에는 권점(圈點) 표시를 해서 구분했다. 모두 문(文)의 중간 위치에 권점을 두었다. 다른 문헌의 경우에서는 두점(讀點)의 위치이다. 구점(句點) 표시는 없다. 뒤에 붙인 역주에서는 이를 그대로 옮기되 현대어로의 옮김에서는 띄어쓰기를 했다.

27장 앞면부터 29장 앞면까지는 정음으로 쓴 ‘대비심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27장의 제1행에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한자로만 쓴 권두서명 ‘佛頂尊勝陀羅尼’가 있다. 판심서명은 ‘千手’이다. 이는 수록되어 있는 진언과 권두서명이 서로 달라서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희(1987)에 의해 복각에 사용된 판밑본의 문제로 지적된 바 있다. 잔존하는 목판을 적당히 손질하여 판각한 결과로 본 것이다. ≪영험약초≫와 같은 원전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언어사실과 체제가 다른 점 등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따라서 역주에서 원문을 옮길 때는 권점과 방점 등을 있는 그대로 입력했다.

위에서 살핀 대로 영험약초·수구영험·오대진언 등 3본의 책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모두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소중한 한글 자료들이다. 국어사는 물론, 서지학이나 불교학 연구에도 이용 가치가 큰 책들이다. 이런 이유로 뒤에 역주(譯註)를 붙인다. 관련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무봉(2008), 『역주 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남경란(1999), ‘〈오대진언〉·〈영험약초〉의 국어학적 연구’, 『한국전통문화연구』(대구 효성가톨릭대학) 13집.

안병희(1979),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 3, 서울대 도서관.

안병희(1987), ‘한글판 〈오대진언〉에 대하여’, 『한글』 195호, 한글학회.

안주호(2003), ‘상원사본 〈오대진언〉의 표기법 연구’, 『언어학』 11-1, 대한언어학회.

안주호(2004), ‘〈오대진언〉에 나타난 표기의 특징 연구’, 『한국어학』 25, 한국어학회.

영험약초·수구영험·오대진언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진언(眞言)은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音) 그대로 적어서 외우는 어구(語句), 곧 주문(呪文)을 이른다. 번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 전체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과 밀어(密語)라고 하여 다른 이에게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 아울러 신성성(神聖性)을 온전히 간직하기 위함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짧은 구절로 된 것을 ‘진언(眞言)’이나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陁羅尼)’, 또는 ‘대주(大呪)’라고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명(冊名)에 따라 ‘진언(眞言)’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오대진언(五大眞言)≫은 조선조 성종 16년(成化 21, 乙巳, 1485 A.D.)에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가 일반 민중들이 진언을 쉽게 익혀서 암송(暗誦)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범문(梵文)의 한자 대역에 다시 정음(正音)으로 음역(音譯)을 붙여서 간행한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오대(五大)’라는 서명(書名)으로 인해 흔히 「사십이수진언(四十二首眞言)」,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陁羅尼)」, 「수구즉득다라니(随求即得陁羅尼)」,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등 다섯 편의 진언이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자재보살근본다라니(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한 편이 더 있어서 모두 6편을 수록해 놓은 책이다. 주001)

<정의>여섯 편 진언의 갖은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관세음보살사십이수진언(觀世音菩薩四十二首眞言) ②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신묘장구대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圎滿無礙大悲心神妙章句大陁羅尼) ③천수천안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④불설금강정유가최승비밀성불수구즉득신변가지성취다라니(佛說金剛頂瑜伽最勝祕密成佛随求即得神變加持成就陁羅尼) ⑤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⑥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이 책의 체제는 진언을 범자(梵字)로 적어서 맨 오른쪽에 놓고, 왼쪽에 행(行)을 나란히 하여 정음 음역을 둔 후, 다시 그 왼쪽에 한자를 배치하는 방법을 취했다. 책의 체제를 보면 3행씩 짝을 맞추어 범자, 정음, 한자 진언을 병치(竝置)할 수 있도록 판식(板式)의 조정이 있었음을 확인 수 있다. 진언만 있는 부분은 유계(有界) 9행이고, 진언의 제목과 주(註)가 있는 「사십이수진언」은 2행을 제외하고 진언을 나란히 실을 수 있도록 유계 8행으로 한 점 등이 그러하다. 모두 민중의 송습(誦習)을 위함이라는 간행의 목적에 부합하는 조처라고 본다.

맨 뒤에 있는 「불정존승다라니」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편에 대해 한역(漢譯)을 한 이는 당(唐)나라의 승려 불공(不空)이다. 다만 마지막에 있는 「불정존승다라니」 한 편만은 인도 계빈국(罽賔國)의 승려 불타파리(佛陁波利)가 한 것으로 전한다. 이 한자 진언을 정음 진언으로 옮긴 이는 발문(跋文)을 쓴 학조(學祖)가 아닐까 한다. 범자 진언이 되었건, 한자 진언이 되었건 진언을 정음으로 옮기는 불사(佛事)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범자(梵字)와 한자(漢字) 모두에 능통한 실력자가 아니면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당대의 학승(學僧)인 학조일 가능성이 높다.

각 진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 앞면부터 23장 뒷면까지는 「사십이수진언」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은 다른 다섯 편의 진언들과는 달리 42수(首)에 달하는 진언을 차례로 배열하였으되, 각 면(面)의 위로부터 1/3쯤 되는 곳까지 해당 진언을 암송(暗誦)할 때의 손 모양을 그린 수인도(手印圖)를 두었다. 24장 앞면 첫 행부터 29장 앞면 3행까지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이 진언을 포함한 다섯 편에는 수인도 없이 진언만을 두었다. 29장 앞면 5행부터 32장 앞면 6행까지는 「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가 있다. 32장 앞면의 7행부터 59장 앞면 7행까지는 「수구즉득다라니」가 있고, 59장 앞면의 9행부터 92장 뒷면 3행까지 「대불정다라니」가 있다. 그리고 92장 뒷면의 4행부터 97장 뒷면 2행까지 「불정존승다라니」를 두었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이 책의 98장 앞면 1행부터 106장 뒷면 끝까지 한문으로 된 「영험약초(靈驗略抄)」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07장 앞면에는 쓴 이가 불분명한 후기(後記) 성격의 글이 있고, 다시 2장에 걸쳐 학조의 발문(跋文)이 있다. 주002)

<정의>이 역주의 맨 뒤에 ‘후기(後記)’와 학조의 ‘발문(跋文)’을 번역하여 실어 놓았다. 번역에 도움을 주신 동국대 김갑기 교수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원간본으로 알려진 월정사본(月精寺本)에는 발문의 뒤에 18장에 달하는 언해본 「영험약초」가 실려 있다고 한다. 주003)
<정의>상원사에서 발굴된 책인 월정사본 「오대진언」에 대해서는 안주호(2003, 2004) 참조.
판심 서명은 ‘五大’이다. 장차는 한문본 ‘영험약초’에까지 이어져 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서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사십이수진언(四十二首眞言) : 1장 앞면 1행~23장 뒷면 8행(상단에 手印圖 있음)

2)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陁羅尼) : 24장 앞면 1행~29장 앞면 3행

3) 관재자보살근본다라니(觀自在菩薩根本陁羅尼) : 29장 앞면 5행~32장 앞면 6행

4) 수구즉득다라니(随求即得陁羅尼) : 32장 앞면 7행~59장 앞면 7행

5)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陁羅尼) : 59장 앞면 9행~92장 뒷면 3행

6)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陁羅尼) : 92장 뒷면 4행~97장 뒷면 2행

7) 영험약초 한문본(대비심다라니) : 98장 앞면 2행~100장 뒷면 2행

8) 영험약초 한문본(수구즉득다라니) : 100장 뒷면 3행~103장 앞면 3행

9) 영험약초 한문본(대불정다라니) : 103장 앞면 4행~104장 뒷면 9행

10) 영험약초 한문본(불정존승다라니) : 105장 앞면 1행~106장 뒷면 9행

11) 영험약초 한문본 후기(後記) : 106장 앞면 일부(1~6행)

12) 학조(學祖)의 발문(跋文) 1장 앞면 1행~2장 뒷면 1행

13) 영험약초 언해본 : 대비심다라니, 수구즉득다라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의 순으로 4편 수록, 1장 앞면 1행~18장 뒷면 2행

각 진언별 편철(編綴) 순서는 맨 앞에 ‘曰’ 자로 끝나는 진언의 명칭이 갖은 이름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계청문(啓請文)을 둔 후, 범자, 정음, 한자의 순으로 진언을 적어 나갔다. 다만, ‘신묘장구다라니’와 ‘근본다라니’ 앞에는 계청문이 없다. 모두 ‘대비심다라니’에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오대진언(五大眞言)≫은 여러 종류의 이본이 현전하는데, 이 중 1996년에 상원사의 목조 문수동자 좌상 복장 유물로 발굴된 월정사본(보물 793-5호)을 원간본으로 보고 있다. 주004)

<정의>상원사에서 복장 성물로 발굴된 책을 월정사본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지금은 월정사의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간본 중 하나인 ‘성암문고’의 책은 1장부터 23장까지만 있는 낙장본(落張本)이다. 그 외의 중간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리산 철굴(鐵堀, 1531 A.D.) 판본을 비롯하여 수종이 현전한다.

이 역주의 저본(底本)이 된 책은 간행 연대 미상의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도서번호 貴 D 213.19 다231ㅇ2)이다. 책의 체제 등 전반적인 내용은 원간본에 견줘 큰 차이가 없다. 원간 후쇄본(後刷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언해본 「영험약초」는 없다.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판심(版心)을 중심으로 좌하(左下) 귀 등 일부의 내용은 마멸로 인해 판독이 불가능했던 듯하다. 누군가에 의해 필사, 보완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 보완된 내용은 언어 사실이 원본과 많이 달라져 있어서 이용에 주의가 요구된다. 역주 작업에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책인 충청도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 간행의 책으로 보완을 했다. 주005)

역주에서는 음역(音譯) 위주로 되어 있는 진언의 특성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 진언의 문자는 물론, 방점(傍點) 등도 일일이 대조해서 실었다. 쉽지 않은 입력 및 대조 작업을 꼼꼼하게 해준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의 박대범, 서정호 군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또 힘든 교정 작업을 도와 준 함병호 군과 전기량 양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책은 이른바 숭정본(崇禎本, 崇禎 7년, 1634년 A.D. 간행)이다. 특히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의 40장과 50장은 낙장이어서 모든 내용을 숭정본의 것으로 대체했다.

이 책은 ‘진언집(眞言集)’이다. 민중들의 진언 송습(誦習)을 목적으로 간행된 책이다. 띄어 읽기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문헌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간행된 다른 책들과는 달리 구두점(句讀點) 표시가 매우 정연하다. 띄어 읽기의 자리에는 반드시 둥근 고리 점, 곧 권점(圈點)을 두어 표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두점(讀點)’의 자리에는 글자의 한 가운데에 권점(圈點)을 두었고, 구점(句點)의 자리에는 오른쪽 권점(圈點)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뒤에 붙인 역주의 원문에서는 두점(讀點) 부분은 붙여 쓰기를 했고, 구점(句點) 부분은 띄어쓰기를 했다. 현대국어로의 옮김에서는 진언의 특성을 살려서 구점, 두점 구분 없이 권점(圈點)이 있는 부분은 모두 띄어쓰기를 하였다. 한자 진언에는 따로 구두점 표시가 없어서 정음 진언을 기준으로 띄어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자 진언 중에는 두 글자나 세 글자를 모아서 쓴 이른바 합자(合字)가 있다. 이런 글자는 두 글자의 사이에 연결 표시[^]를 해서 합자임을 밝혔다.

≪영험약초(靈驗略抄)≫는 앞에서 밝힌 대로 진언이 보여주는 이적(異蹟)이나 영험한 일 등을 사실이나 예화(例話)를 중심으로 제시하고 설명한 책이다. 그 대상은 『오대진언』에 실려 있는 여섯 편의 진언 중 「대비심다라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 네 편이다. 중간본 중에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도 있으나 판심서명이 ‘五大’이고, 「오대진언」의 원간본으로 알려진 월정사본의 뒤에 「영험약초」가 합철되어 있으므로, 초간의 연대는 「오대진언」과 같은 해(成化 21년, 乙巳, 1485 A.D.)로 본다. 이 책의 언해체제와 언어사실 등은 같은 해에 간행된 책인 「불정심다라니경언해」와 흡사하다. 15세기 후반의 언어사실과 언해체제 등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주006)

「불정심다라니경언해」에 대해서는 김무봉(2008) 참조.
두 책 모두 한문본은 목판본으로 되어 있고, 언해본은 활자(活字)인 을해자(乙亥字)로 되어 있는 점 등 비슷한 체제를 보이는 정음 문헌들이다.

이 역주의 저본(底本)은 1550년(嘉靖 29, 庚戌)에 간행된 경상도 풍기의 소백산(小伯山) 철암(哲菴/喜方寺) 판본(板本)이다. 동국대 도서관(貴 D213.19 영 93c2) 등에 수종이 현전한다. 이 책은 「오대진언」과는 달리 단행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1장 앞면부터 18장 뒷면 2행까지 언해본 「영험약초」가 나오고 바로 다음 장에 한문본 「영험약초」가 이어진다. 그런데 언해본 「영험약초」는 장차를 1장부터 새로 시작했다. 한문본은 107장부터이다. 이러한 장차 표시는 「오대진언」 뒤에 편철되어 있다고 하는 원간 그대로이다. 내용도 완전히 일치한다. 후기(後記)와 발문(跋文)도 같다. 판심서명도 ‘五大’로 되어 있다. 곧, 「오대진언」의 뒤에 편철되어 있던 「영험약초」만을 분권한 형식이다. 다른 점은 107장의 후기(後記) 바로 다음 행에 ‘主上三殿壽萬歲’(주상 삼전(三殿)의 만수(萬壽)를 기원합니다.)라는 구절과 ‘嘉靖二十九年庚戌四月日慶尙道豊基地小伯山哲菴開板(성종 21년(1550년) 4월 일 경상도 풍기지 소백산 철암에서 판각본을 내다.)’라는 간기(刊記)가 있어서 중간본임을 보여준다.

≪수구영험≫은 ≪오대진언≫과 ≪영험약초≫의 내용상 합본(合本)에 해당한다. 온전하지 못한 채로 현전하는 책들을 보면 ≪오대진언≫에 나오는 진언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그 뒤에 ≪영험약초≫를 둔 방식이다. 곧 ‘진언’ 한 편과 그에 대당되는 ‘영험약초’ 한 편씩을 모아서 한 권으로 묶은 형식인 것이다. 마치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해서 편찬·간행한 ≪월인석보≫를 연상케 하는 책이다. 물론 간행시기가 달라서 언해체제나 언어사실은 앞의 두 책(‘오대진언’, ‘영험약초’)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정음이 주(主)가 된 책이라는 점이다. ‘진언’의 경우는 물론 ‘영험약초’의 경우에도 한문 원문이 실려 있지 않다.

현전하는 책은 대부분 낙장본(落張本)이다. 선본(善本)으로 공개된 책은 아직 없다. 원간본 중 하나로 짐작되는 「사십이수진언」은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소재 불명이다. ‘성암문고’에 있는 목판본의 책은 「수구즉득다라니」 26장과 「불정존승다라니」 3장 등 모두 29장만 있는 낙장본(落張本)이다. 안병희(1987)에 의해 간행 연대가 1476년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 책은 현실 한자음이 주음된 최초의 문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특히 서명(書名)과 진언명(眞言名), 그리고 계청문(啓請文)에 정음을 먼저 쓰고 그 옆에 나란히 한자를 썼다는 점, 진언을 모두 현실 한자음으로 썼다는 점에서 주목 받을 만한 책이다. 이런 이유로 안병희(1987)에서 한글판 ≪오대진언≫이라 한 것이다. 주007)

<정의>이 책의 가치나 간행 연도 등 자세한 내용은 안병희(1987)에 소상하다. 특히 한자음 표기에서 현실 한자음을 처음으로 썼다는 점 등으로 이 책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쉬운 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선본이 한 책도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전하는 낙장본으로 미루어, 원간본은 「사십이수진언」, 「신묘장구대다리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 「불정존승다라니」 등의 진언과 영험담이 함께 있는 5권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 진언별로 판심서명이 다른 점으로 보아 분권(分卷)으로 간행하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역주의 저본(底本)은 중간본인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충청도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 1569 A.D.) 간행본이다. 표지에는 한자로 ‘随求咒’라 써 놓았다. 모두 29장의 목판본(木版本)이다. 1장부터 26장까지에 걸쳐 「수구즉득다라니」가 있다. 그 중 1장부터 3장까지 계청문(啓請文)이 있고, 4장부터 17장까지는 「대수구대명왕다라니」 등의 다라니를 정음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현전 중간본들은 모두 5장부터 8장까지가 낙장이다. 이 책의 판목이 근대까지 남아 있었음을 시사(示唆)하는 부분이다. 18장부터 26장까지는 ≪영험약초≫에 있는 「수구즉득다라니」와 동일(同一)한 내용을 번역해서 수록하고 있다. 다만 번역과 표기 등에서는 간행 연대가 다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제목은 「수구영험」이다. 정음만으로 표기하여 ‘슈규험’이라고 했다. 책의 내용 중 진언명(眞言名)과 진언의 구두(句讀)에는 권점(圈點) 표시를 해서 구분했다. 모두 문(文)의 중간 위치에 권점을 두었다. 다른 문헌의 경우에서는 두점(讀點)의 위치이다. 구점(句點) 표시는 없다. 뒤에 붙인 역주에서는 이를 그대로 옮기되 현대어로의 옮김에서는 띄어쓰기를 했다.

27장 앞면부터 29장 앞면까지는 정음으로 쓴 ‘대비심신묘장구대다라니’가 있다. 27장의 제1행에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한자로만 쓴 권두서명 ‘佛頂尊勝陀羅尼’가 있다. 판심서명은 ‘千手’이다. 이는 수록되어 있는 진언과 권두서명이 서로 달라서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병희(1987)에 의해 복각에 사용된 판밑본의 문제로 지적된 바 있다. 잔존하는 목판을 적당히 손질하여 판각한 결과로 본 것이다. ≪영험약초≫와 같은 원전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언어사실과 체제가 다른 점 등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따라서 역주에서 원문을 옮길 때는 권점과 방점 등을 있는 그대로 입력했다.

위에서 살핀 대로 영험약초·수구영험·오대진언 등 3본의 책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모두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소중한 한글 자료들이다. 국어사는 물론, 서지학이나 불교학 연구에도 이용 가치가 큰 책들이다. 이런 이유로 뒤에 역주(譯註)를 붙인다. 관련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무봉(2008), 『역주 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남경란(1999), ‘〈오대진언〉·〈영험약초〉의 국어학적 연구’, 『한국전통문화연구』(대구 효성가톨릭대학) 13집.

안병희(1979),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 3, 서울대 도서관.

안병희(1987), ‘한글판 〈오대진언〉에 대하여’, 『한글』 195호, 한글학회.

안주호(2003), ‘상원사본 〈오대진언〉의 표기법 연구’, 『언어학』 11-1, 대한언어학회.

안주호(2004), ‘〈오대진언〉에 나타난 표기의 특징 연구’, 『한국어학』 25, 한국어학회.

오륜행실도 고찰-효자를 중심으로-

성낙수(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가 망하고, 유교를 국시로 내세우고 건국한 조선에도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개국 초기의 혼란스럽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진정되고, 어느 정도 기강이 바로잡혔던 세종 때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이 점철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세종 10년(1428)에 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버지를 죽인다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심각한 강력 범죄겠지만, 특히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는 이 시대에는 그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김화는 능지처참에 처해졌지만, 죄인이 죽었다고 해서, 받은 충격이 쉽게 가시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세종은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마침내 세종 13년(1431) 집현전 직제학이었던 설순 등에게 『삼강행실도』 편찬을 명하여 만 1년만인 세종 14년 6월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그 뒤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세종 16년(1434) 11월에 반포하였다. 권부(權溥)가 지은 『효행록(孝行錄)』의 우리나라 옛 사실들을 보태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례를 뽑아, 그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서 칭송하도록 하였다. 이 책의 제목인 삼강(三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유교적인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효자·충신·열녀 각각 3권 3책으로 되었는데,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에서 있었던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기술했다. 이는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했으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그것을 원용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각각의 사실에 그림을 붙이고, 이를 설명한 영가(詠歌)나 찬(贊)을 달았다. 내용은 ‘효자도, 충신도, 열녀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대상으로 하였고,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가 죽음[龍逢諫死]’ 외에 109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109명의 열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330명 중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22명, 충신 17명, 열녀 15명이 실려 있다.

이 책은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서,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까지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판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삼강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속적으로 중간되어, 도덕서로서 널리 읽혔다.

성종 시대에 들어서 삼강행실의 장려정책을 펴기 위해서,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 사족(士族)의 가장(家長)과 부로(父老)·교수(敎授)·훈도(訓導)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허침(許琛)과 이조 정랑(吏曹正郞) 정석견(鄭錫堅)에게 명하여, 세종조의 『삼강행실도』를 산정(刪定)하게 하였다. 실제로 내용을 새롭게 보태지는 않고, 각각의 사례 110개 중에 35개 씩 추려내어, 3권 1책으로 줄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언해본 『삼강행실도』이다. 이 책은 본문의 상단 여백에 언해, 즉 한글 번역을 추가한 것으로 선조 13년(1580)과 41년(1608)경에 중간(重刊)되어, 지속적으로 간행과 보급이 이루어졌다. 언해본은 번역방식에 따라 의역(音譯) 계통과 직역(直譯) 계통으로 나눠지는데, 조선 초기에는 의역 계통이 간행·보급되다가, 조선 후기에는 직역 계통으로 바뀌었다.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는 중종 13년(1518) 조신(曺伸)이 왕명에 의해,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윤리를 진작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의 초간본은 수택본(手澤本)으로 경상도 금산군(金山郡;지금의 김천)에서 간행하였다. 본문의 각 장은 전면이 도판으로, 도판 상단 여백에 언해가 실려 있고, 후면에는 한문으로 된 행적기록과 시찬(詩贊)이 있다.

이 책은 원래 중종 때의 학자 김안국(金安國)이 승정원(承政院)에 재직할 때 경연에서 중종에게 그 가치를 아뢰어, 왕명으로 편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왕명이 이행되기 전에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가게 되자, 전 사역원정(前司譯院正) 조신이 찬집에 대한 책임을 맡아 간행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찬술 동기는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五倫) 중에서 장유와 붕우의 이륜을 민간에 널리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간행된 시기의 사회적 배경을 통해서도 편찬 동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간행 연도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로,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무렵이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로 하여금 연산군에 의해서 극도로 문란해진 정치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전통적인 유교정치를 회복하고, 한편으로는 촌락 집단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이른바 향약(鄕約)을 처음으로 전국에 시행하게 했으며, 민중생활에서도 윤리적인 규범을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하에서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致主義)를 주장했던 김안국이 백성의 교화를 위해서 『이륜행실도』를 간행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간행은 앞서 세종 16년(1434)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실제적인 ‘오륜도(五倫圖)’의 완결을 의미한다.

내용은 장유와 붕우의 행실이 뛰어난 역대 명현의 행적을 가려 뽑아 형제도(兄弟圖)에는 종족도(宗族圖)를, 붕우도(朋友圖)에는 사생도(師生圖)를 첨가한 것이다. 형제도에 25명, 종족도에 7명, 붕우도에 11명, 사생도에 5명 등 모두 48명의 명현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 사람은 한 명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중간본(重刊本)으로 선조 12년(1579) 교서관(校書館)에서 개간한 것이 있는데, 판식(版式)은 초간본과 대체로 같으나, 표기법과 언어·사실 등은 차이가 난다. 이 밖에도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과 영조 6년(1730)에 각각 평양·경상·강원 감영의 개간본이 간행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규장각 도서에 있다. 중간본에는 강혼(姜渾)의 서(序)와 박문수(朴文秀)의 발(跋)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의 중간이 여러 차례 이루어진 것은 왕조시대에 윤리 진작을 위한 조정의 권면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는 정조 21년(1797)에 이병모(李秉模)·윤시동(尹蓍東) 등이 왕명에 의하여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수정, 편찬한 책이다. 내용으로는 세종 시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중종시대에 간행된 『이륜행실도』를 통합하면서, 기존의 행실도류 판화와는 전혀 다른 판화 양식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는 서지학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의의가 깊은 책으로 평가 받는다.

고활자 정리자(整理字)로 간행되었으며 5권 4책으로 되었다. 책 앞부분에 정조의 어제윤음(御製綸音)과 당시 좌승지 이만수(李晩秀)의 ‘오륜행실도 서(序)’가 실려 있다. 중간본은 철종 10년(1859)에 목판으로 간행되었는데, 김병학(金炳學)의 서문이 있다. 각 이본(異本)에는 장서기(藏書記)·내사기(內賜記)와 소장기관의 인(印) 및 교열자의 명단 등이 기재, 수록되어 있다. 또한 삽화본과 언해가 실려 있어, 간본의 변천은 조선시대 판화의 변천과 함께 국어사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서지학적 가치가 높은 문화적 유물이다.

정조는 서문에서 “앞서 간행된 삼강(三綱)·이륜(二倫)이라는 책이 선후로 발간되어 학관(學官)에 반포되어 있어, 백성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좋게 이룩하는 근본이 되었으므로, 두 책을 표준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강조하고 행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이 책을 간행함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이 모든 일반 백성을 대상 독자로 삼고 있음은, 권채(權採)의 서문에도 있는 바처럼 도판을 먼저 싣고, 그 다음에 행적을 붙임으로써, 백성들이 그림을 통하여 흥미를 가지게 되고, 연후에 설명을 읽도록 한 체제상의 특징에서도 볼 수 있다. 책의 내용으로 권1에서 권3까지 수록된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은 앞서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을 재정리하여 수록하였다.

권1의 효자도(孝子圖)에는 민손단의(閔損單衣)를 포함한 역대 명현 33인의 효행이 실려 있고, 권2의 충신도에는 용방간사(龍逄諫死)를 포함한 35인의 충신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충신도에는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항목도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권3인 열녀도에는 백희체화(伯姬逮火) 등 35인의 역대 열녀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한편, 권4·권5의 충신·종족·붕우·사생은 앞의 『이륜행실도』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즉, 권4의 형제도(兄弟圖)에는 급수동사(伋壽同死)를 포함한 24인의 우애를, 종족도(宗族圖)에는 군량척처(君良斥妻) 등 7인의 사실을, 권5에는 누호양여(樓護養呂) 등 붕우 11인과 사생(師生) 5인의 선행을 기록하고 있다. 수록된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인이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인, 충신 6인, 열녀 5인만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서, 또한 전통 회화사의 연구를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책이다. 즉 조선 후기 판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수록한 인물마다 행실을 기리는 찬(贊)과 시를 적은 글 다음에 삽화를 배치하여, 모두 150점의 판화를 실었다. 내용과 기법에 있어서 인물·풍속·산수·건물 등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고, 당시 유행한 화풍이 반영되어 있으며, 새김 기술이 정교하다.

구성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서와 같이 다른 시간에 벌어진 2·3개의 장면을 한 화면에 엮는 복합적인 구성에서 탈피하여, 한 장면만을 부각하여 보다 간단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아울러 전통적인 부감법(俯瞰法)의 시점을 사용하고, 긴장감이 강한 사선 구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삼강행실도』에 비하여 주변의 경물이 다양하고, 나무의 종류도 많아졌으며, 건물을 위용이 있게 그려, 보다 풍부하게 화면을 구성하였다. 각선(刻線)의 흐름도 보다 유려하여졌고, 가늘고 굵은 선을 대상에 따라 적절히 그렸는데, 인물의 표현·수지법(樹枝法)·준법(皴法) 등을 보면, 당시 도화서(圖畵署)를 중심으로 유행한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이 역력하다. 그러나 아직 김홍도가 그렸다는 증거가 밝혀지지 않았고, 이러한 유형의 작업에는 여러 명의 화원과 각수(刻手)가 참여한 예로 보아, 김홍도나 당시 그의 화풍을 보인 김득신(金得臣)·이인문(李寅文)·장한종(張漢宗) 등의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조선 말기에는 판화를 소재로 하여 민화에서 다수 그려졌고, 글과 판화를 필사(筆寫)한 책이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판화 가운데 <효아포시(孝娥抱屍)>·<누백포호(婁伯捕虎)>·<정부청풍(貞婦淸風)>·<명수구관(明秀具棺)>·<중암의장(仲淹義莊)> 등은 작품성이 뛰어나다.

본서에서는 『효자』의 역주만 다루므로, 그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2. 서지학적인 특징

서지학적인 측면에서는 구성, 판화, 표현상의 특징으로 대별해서 살펴볼 수 있다.

2.1. 구성상의 특징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는 정조 21년(1797)에 이병모(李秉模)·윤시동(尹蓍東) 등이 왕명에 의하여,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고, 수정하여 편찬하였다. 5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활자 정리자(整理字)로 간행되었다. 이 『오륜행실도』는 꽃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장식하고, 5개의 구멍을 뚫어 매어서, 책을 만들었다.

『오륜행실도』는 규장각의 직제학 이병모와 제학 윤시동이 교열(校閱)을 하고, 제학 이만수(李晩秀) 등이 감인(監印)하였다. 이 책의 구성은, 책머리에 정조 21년에 정조가 내린 어제윤음(御製輪音)이 있으며, 그 다음 이만수가 쓴 『오륜행실도』의 ‘서(序)’가 있다. 다음에는 세종 14년(1432)에 권채(權採)가 쓴 ‘삼강행실도 원서(原序)’, 영조 5년(1726)에 윤헌주(尹憲柱)가 쓴 ‘삼강행실도 원발(原跋)’, 중종 13년(1518)에 강혼(姜渾)이 쓴 ‘이륜행실도 원서(原序)’가 실려 있다. 이어서 교열하고 감인(監印)한 사람들의 관직과 명단이 첨부되어 있다.

『오륜행실도』의 내용은 효자(孝子) 33명, 충신(忠臣) 35명, 열녀(烈女) 35명, 형제(兄弟) 24명, 종족(宗族) 7명, 붕우(朋友) 11명, 사생(師生) 5명 등이다. 권1~권3까지는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수록하였는데, 이것은 앞서 간행된 『삼강행실도』 중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권4·권5에는 충신·종족·붕우·사생을 수록하였는데, 이것은 『이륜행실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처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본래 언해가 없는 형태였으나‚ 성종 12년(1481)에 먼저 열녀편이 언해되었고‚ 성종 20년(1489)에 이르러서는 수록인물을 대폭 골라서 줄이고, 각각의 인물에 언해를 달았다. 그리고 이 산삭 언해(刪削諺解)된 이후 간행되는 모든 행실도들의 표준이 되었다. 『삼강행실도』의 체제는 앞면에는 삽화와 언해를 싣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쓴 본문(기사)과 그 본문을 압축한 찬시(讚詩)의 형태이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즉 삽화·언해·본문·찬시의 구성요소는 동일하나, 그것을 수록하는 방식이 약간 다른데‚ 제1면에는 삽화를, 그 다음에는 본문·찬시·언해를 차례로 싣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또한 삽화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타나는데‚ 『삼강행실도』와 다른 행실도들이 하나의 내용을 1~3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하는데 비해‚ 이 책에서는 중심이 되는 내용 한 장면만을 그리고 있다.

『오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수록 인물의 숫자와 기사의 제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삼강행실도』(언해본)에 수록된 효자편은 총 35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비해, 『오륜행실도』에는 ‘곽거매자(郭巨埋子)’와 ‘원각경부(元覺警父)’의 두 내용이 빠져 33인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륜행실도』에 수록되어 있는 형제편은 총 25명의 사례가 실려 있는데‚ 『오륜행실도』에는 ‘노조책려(盧操策驢)’의 내용이 빠졌다. 그리고 『삼강행실도』의 열녀편에 있는 ‘이씨감연(李氏感燕)’의 기사는 『오륜행실도』에서는 ‘왕씨감연(王氏感燕)’으로 인물 명이 바뀌었는데‚ 이는 『삼강행실도』의 오류를 수정한 것이다. 또한 열녀편의 ‘미처담초(彌妻啖草)’는 ‘미처해도(彌妻偕逃)’로 바뀌었다. 또한 『이륜행실도』의 종족편에 있는 ‘원백동찬(元伯同爨)’의 기사는 ‘장윤동찬(張閏同爨)’으로 인물이 바뀌었는데‚ 이 역시 『이륜행실도』의 오류를 수정한 것이다.

이 책이 간행된 1790년대는 정조 재위 기간 중에서도 여러 가지 서적의 간행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시기이다. 즉위 초부터 왕권강화와 문예부흥책에 심혈을 기울인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서 사상적·문화적 통치 기반을 조성하고자 했다. 규장각은 군왕의 각별한 지원 아래 자비대령화원 등과 같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판화 제작과 도서 편찬의 기능을 갖추게 된다.『오륜행실도』는 이러한 정조의 문화적 의지와 정책의 일환으로서, 규장각의 효율적인 체제를 통해서, 우수한 판화를 지니고, 탄생된 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2. 판화의 특징

『오륜행실도』의 판화는 기존의 행실도류 판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제시했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한 화면에 한 가지 장면만을 묘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줄거리 전달 중심인 기존의 행실도류 판화 형식에서 과감하게 탈피한 형식이다. 이러한 변화를 토대로 이 책의 판화에서는 이름표식도 사라지고, 회화성이 풍부한 판화로 새롭게 변모했다.

이 책에서는 기존의 행실도류 판화의 도상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기존 판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구도와 산수표현법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대 일반 화단의 뛰어난 회화 수준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다량으로 유입, 유통되고 있던 중국 서적의 다양하고 뛰어난 삽화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볼 때 이 책의 판화는 윤리 교화서라는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당시 사람들의 시각적 변화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판화가 새로운 화풍으로 제작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러한 판화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유기적으로 결합된 수평적 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윤리 교화서적인 『삼강행실도』 판화의 제작 시에도 그대로 확인된다.

『오륜행실도』에서 새롭게 등장한 양식들이 이후 민화 외에 일반회화 등을 통해서 더욱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점은 당시의 소비자들 사이에 이러한 양식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의 문헌에는 제작자가 기록된 바가 없기 때문에 기존의 여러 가지 연구에서 막연하게 김홍도를 제작자로 추측해왔다. 그러나 이 책의 원화의 실질적인 제작에는 당시 자비대령화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화원들 가운데 몇몇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판화의 우수성으로도 주목받을 만하다.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2.3. 표현상의 특징

조선 초기에 나온 『삼강행실도』에 비하여, 한문으로 된 원문을 언해할 때에 『오륜행실도』에서는 비록 한자어로 된 말이라 할지라도,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로 적었다. 그것은 어려운 한자보다는 한글로 적어, 좀 더 서민들이 읽기를 바라고 한 것이다.

(1) ㄱ. 金自强이 져머셔 아비 죽거늘 어미 孝道호 데 거슬 일 업더니 어미 죽거늘 法다이 居喪며 아비 옮겨다가 合葬고-合葬  무들씨라-侍墓  제 三年을 신 아니 신더니 居喪 고  아비 야 三年 사로려 거늘 겨지븨 녁아미 블 브티고 구틔여 어 오거늘 自强 아니 도라보고 (〈삼강행실도〉 고대본 효자도:33)

ㄴ. 김강은 본됴 셩쥬 사람이니 어려 아비 죽고 어미 셤기되 을 승슌여 그미 업더니 어미 죽으매 부도「듕의 법이라」 디 아니고 티 가례 조차 그 아비와 합장고 삼년을 녀묘야 거상을 매  아비 여 삼년을 다시 이시려거 쳐족들이 잇글고 길로 나가 인여 그 막을 블지르니 강이 빗 라 보고.(〈오륜행실도 1:62〉)

(1ㄱ)과 (1ㄴ)을 비교해 보면, 대립되는 ‘金自强〉김강’, ‘合葬〉합장’, ‘三年〉삼년’, ‘居喪〉거상’, ‘爲〉위’, ‘廬〉녀’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오륜행실도』의 언해 부분은 한자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초기의 『삼강행실도』에서는 한문으로 된 원문에 토를 다는 정도의 직역을 한 경우가 많았는데, 『오륜행실도』에서는 의역을 한다든지, 부연 설명을 해서, 이해하기가 쉽도록 배려하였다.

(2) ㄱ. 崔婁伯 水原吏尙翥之子 尙翥獵爲虎所害婁伯時年十五 欲捕虎 母止之 婁伯曰 父讎不可報乎 卽荷斧跡虎 虎旣食飽食臥 婁伯直前叱虎曰 汝害吾父 吾當食汝 虎乃掉尾俛伏 遽所而刳其腹 取父骸肉 安於器

ㄴ. 翰林學士 崔累伯 水原 戶長 아리러니 나히 열다신 저긔 아비 山行 갓다가 범믈여늘 가아 자보려 니 어미 말이더니 婁伯이 닐오 아비 怨讐를 아니 가리가 고 즉자히 돗긔 메오 자최 바다가니 버미 마 브르 먹고 누엇거늘 바드러 가아구지주 네 내 아비를 머그내 내 모로매 너를 머구리라 야 리 젓고 업뎨어늘 베텨   아 와 와 내야 그르세 담고(〈삼강행실도〉 고대본 효자도:32)

ㄷ. 최누은 고려 적 슈원 아젼 샹쟈의 아이니 샹쟤 산영다가 범의게 해 배 되니이 누의 나히 십오셰라. 법을 잡고져 거 어미 말린대 누이 오 아븨 원슈엇디 아니 갑흐리오 고 즉시 돗긔 메고 범의 자최 오니 범이 이믜 다 먹고 블러 누엇거 누이 바로 알 라드러 범을 디저 오 네 내 아비 해쳐시니 내 너 먹으리라. 범이 리 치고 업거 돗긔로 어  헤티고 아븨 와 을 내여 그 담고(〈오륜행실도 1:60-61〉)

(2ㄱ)의 한문으로 된 원문을 언해한 (2ㄴ)과 (2ㄷ)을 비교해 보면, 전자에서 한자어에 토만 단 것과 같은 표현이 많은 데 대하여, 후자에서는 좀 더 의역을 하고, 자세한 내용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속삼강행실도』를 편찬한, 중종 때의 윤헌주가 쓴 ‘삼강행실도 원발’에 “되돌아 보건대, 옛날 언문으로 번역한 것이 말이 너무 간단하여, 해득(解得)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에 글을 모두 고쳐서, 더하기도 하고, 깎아 줄이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일지라도, 모두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이것을 한 도에 나누어 반포하여, 풍화(風化)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한 데서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3) ㄱ. 兪石珎 高山 鄕吏러니 아비 모딘 病야 날마다 病곳 오면 죽거든 사미 마 몯 보거늘 石珎이 밤낫 겨 이셔 하 블러 울며 두루 藥 얻더니 미 닐오 산 사  피예 섯거 머기면 됴리라 야 즉자히 가락 버혀 머기니 病이 즉자히 됴니라.(〈삼강행실도〉 고대본 효자도:34)

ㄴ. 유셕딘은 본됴 고산현 아젼이니 아비 텬을 이악질을 어더 일에 병이 발야 긔졀니 사이 마 보디 못디라. 셕딘이 듀야로 겻 뫼셔 하긔 부르지디며 두로 의약을 구니 사이 닐오 산사의  피에 섯거 먹으면 가히 나으리라 대 셕딘이 즉시 왼손 무명지 허 그 말대로 여 나오니 병이 즉시 나으니라. (〈오륜행실도1:63-64〉)

(3ㄱ)에서 “모딘 病야 날마다 病곳 오면”이 (3ㄴ)에서는 “이악질을 어더 일에 병이 발야 긔졀니”로 좀 더 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전자에서 “가락 버혀”라고 한 것을 후자에서는 “왼손 무명지 허”로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앞에서 빠졌던 내용을 보탠 부분도 많은데, 그 예를 다음에 보인다.

(4) ㄱ. 尹殷保ㅣ 徐秩이와  스스그 글 호더니 서르 닐오 님금과 어버와 스과 가지로 셤디라 고 됴 차반 어드면 이바며 名日이면 모로매 이바디더니 스이 죽거늘 둘히 제여곰 어버그 侍墓 살아지라 請야 어엿비 너겨 그리라 야 거믄 곳갈 쓰고 居喪 여 손 블 디더 祭 더라.(〈삼강행실도〉 고대본 효자도:35)

ㄴ. 윤은보와 셔즐은 본됴지례현 사이니 가지로 그 고을 사 쟝지도의게 글 호더니  서로 닐오 스승은 부모와 가지니 믈며 우리 스승이 식이 업디라 고 됴흔 음식을 어드면 스승을 먹이고 명일을 만나면 쥬찬을 초아 아비 셤기더니 쟝지되 죽으매 두 사이 그 어버이게 녀묘호믈 쳥대 어버이 어엿비 너겨 허니 이에 졔복으로 스승의 묘측에 이셔 몸소 밥 지어 졔뎐을 밧드더니(〈오륜행실도 1:65-66〉)

위에서 (4ㄱ)에서보다는 (4ㄴ)에서 밑줄 친 부분처럼 상세한 내용을 덧붙였음을 알 수 있다.

3. 국어학적인 특징

국어학적인 측면으로는 표기법, 음운, 어휘, 형태·통사의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초기에 나왔던 『삼강행실도언해(三綱行實圖諺解)』,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한 역대 문헌과 비교해 봐야 할 뿐만 아니라, 현대국어의 여러 양상과도 비교해 봐야 한다.

3.1. 표기법의 특징

표기법은 『훈민정음』이 창제 당시부터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므로,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당시에는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어근[root]이나 접사[affix], 기본형태[basic morph] 등에 관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주001)

*
<정의>현대국어에서 맞춤법이 제정된 것은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이며, 지금의 『한글 맞춤법』은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되도록 문교부에서 고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에서 기본형태를 밝혀 적어, 언어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다음에 그 예를 보인다.

(5) ㄱ. 곶爲李花, 의갗爲狐皮, 爲土, 낛爲釣, 爲酉時, 못爲池

ㄴ. 나치, 옮거늘, 도다, 앉거늘, 낛드리워

(5ㄱ)은 『훈민정음해례』에 나타나 있는 예를 든 것으로 발음대로 쓰지 않고,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것이다. 발음대로라면, 각각 ‘곧, 여갇, , 낙, , 몯’이었을 것이다. (5ㄴ)은 뒤에 닿소리로 시작되는 요소가 오므로, 하나의 받침만 쓰거나, 중화된 음으로 적어야 하는데도,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예들이다.(고영근 1997:22) 또한 홀소리로 시작되는 어미, 또는 접사, 조사가 이어질 때에도 어근이나 체언의 형태소를 밝혀 적는 경우도 많았다.(고영근 1997:23)

(6) ㄱ. 눈에, 손로, 일, 몸이, 죵

ㄴ. 안아, 안시니다, 담아, 감아

(6ㄱ)은 체언과 조사, (6ㄴ)은 어근과 접사, 또는 어미와 합쳐질 때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예들이다. 『오륜행실도』에서도 이와 같은 표기법은 이어지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7) 즁유의  뢰니 공 뎨라 어버이 셤기믈 지효로  집이 가난

셤김-을

야 믈음식을 먹으며 어버이 위야 니밧긔 을 져오더니 어버이 죽

-의

은 후의 남으로 초나라 놀 조츤 술위 일이오 오만종의 곡식을 흐며

좇-은

자리 겹으로 안즈며솟츨 버려 먹을 이에 탄식여 오 비록 믈을

앉-으며 -을

먹으며 어버이 위야 을 지랴 나 가히 엇디 못리로다 대 공 드시고 샤 로 가히 닐오 살아셔 셤기매 힘을 다고 죽은 후 셤기매 모믈 다다 리로다(〈오륜행실도 1:4〉)

모-을

위의 (7)에서 밑줄 친 부분은 체언이나 어근이 뒤에 오는 홀소리에 연철하여 표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세국어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받침으로 끝나는 어근이나 체언 다음에 홀소리로 시작되는 접사 또는 어미, 조사가 와도 구분하여 썼다.

(8) 강혁은 한나라 님츼 사이니 어려서 아븨 일코 란리 만나 어미 업

사-이니

고 피란여 양 믈을 고 드른 거 주어 공양 로 도적을 만나

믈-을

혹 겁박여 잡아가려 면 믄득 울며 비되 노뫼 이셔라 고 말이 공슌

잡-아 말-이

고 졀야 사을 감동니 도적이 마 해티 못고 혹 피란 곳을

사-을 곳-을

르치니 인여 난리듕에 모 다 보젼디라 가난고 궁박여 몸과 발을

발-을

벗고 고공이 되어 어미 공양되 어믜몸에 편 거 아니 죡 거시 업

몸-에

디라 건무 한 광무 대 년호라 말에 어미로 더브러 고향에 도라와 양 셰시에 관가의셔 셩 졈고 혁이 어미 늙으므로 요동티 아니니 향리사이

늙-으므로 사-이

일 강거효 거효 큰 라 라 더니 어미 죽으매 양 무덤겻 녀막고 거상을 되 상복을 마 벗디 못니 군 승연 군슈아 벼이라 을 보내여 상복을 벗겻더니 원화 한 쟝뎨 대 년호라 듕에 됴셔샤 곡식 쳔셕을 주시고 양 팔월의 댱니 원이라 로 존문고 고양과 술을 주라 시다

술-을

(〈오륜행실도 1:9-10〉)

이 예들은 이 시기에는 이미 이른바 형태주의 표기법 혹은 ‘끊어적기’(고영근 1997:23)가 상당히 일반화했음을 보여준다. 주002)

*
이는 이른바 형태주의적 표기로 ‘어간’과 ‘어미’, ‘체언’과 ‘조사’를 구분해 적기로 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앞서 현대 언어학적 인식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이희승・안병희 1989:158-195)

3.2. 문자·음운론적인 특징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한글 자모가 28자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초기에는 이런 글자들이 다 잘 쓰였으나, 어떤 글자들은 변화가 일어났고, 어떤 글자들은 아예 없어졌는데, 주003)

*
ㆆ, ㅿ, ㆁ, ㆍ, ㅸ, ㅹ’와 같은 글자들이 없어졌다.(박병채, 271-274)
18세기 말에 쓰여진 『오륜행실도』에서도 역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사례들을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2.1. ‘ㅿ, ㅸ, ㆁ’이 사용 안 됨.

15세기에 사용되던 반치음이나 순경음, 그리고 이른바 ‘옛이응’이 이 책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국어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반치음 ‘ㅿ’은 중세국어에서부터 사용되었지만, 이는 ‘ㅅ’과 상보적 분포[com plementary distribution]를 이루었다. 즉 ‘ㅅ’이 유성음화되는 위치에서 거의 정확하게 ‘ㅿ’이 사용되었다.(허웅1986:468-470) 그러므로 이는 음소로 보기보다는 변이음[allo-phone]으로 보아야 하지만, 표기는 17세기까지도 되었으므로, 『오륜행실도』에서 쓰이지 않은 것은 변화로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다음은 이전의 문헌에서 ‘ㅿ’이 쓰였던 예들이 『오륜행실도』에서 다르게 표기된 것이다. 주004)

*
예 문헌의 인용은 관례에 따름. 단 책 이름이 없는 것은 『오륜행실도』이며, 쪽 다음에 앞면과 뒷면을 표시하는 ‘ㄱ, ㄴ’은 생략함.

(9) 겨(구간 1:75)〉겨〈오륜 1;2, 1:23, 1:44〉, 마(훈몽 중:7)〉마을(오륜 1:39), 아(월인 1:5)〉아(오륜 1:41, 1:42), 처(용가 78)〉처음(오륜 1:62).

그러므로 『오륜행실도』에서는 ‘ㅿ’으로 표기되었던 것은 ‘ㅇ’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ㅸ’도 ‘ㅂ’이 울림소리가 된 것인데, 후에 반홀소리 /w/로 바뀌거나 없어지기 전의 과도기음으로 본다.(허웅 1986:314-321) 『오륜행실도』에서는 ‘ㅸ’이 쓰이던 자리에 반홀소리 ‘오·우(/w/)’로 표기가 되었다. 특히 용언에서는 현대국어에서도 이른바 ‘ㅂ 불규칙 용언’ 주005)

*
<풀이>어간의 끝소리인 ‘ㅂ’이 닿소리 요소 앞에서는 기본형태가 유지가 되지만, 홀소리로 시작되는 요소 앞에서 '오/우(/w/'로 바뀌게 된다.
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다.

(10) 셜워고(오륜 1:52) ¶디치로 셜다가(월인 9:26), 치워(오륜 1:25) ¶치과 더과(월인 7:58), 두려오니(오륜 1:39) ¶두려 光이라(월인 8:26)

(11) 이(훈민 해례본 용자해), 이귀(석보 19:17), 이(석보 13:18), :리(훈몽 상:21), 다시다(삼강 효:15)

『오륜행실도』에서는 이런 ‘ㆁ’의 표기는 하지 않고, 받침이나 초성으로 ‘ㅇ’이 쓰였다.

(12) 이에(오륜 1:4, 1:5), 니어(1:25), 더여디이다(1:56)

3.2.2. 겹닿소리의 간소화

15세기부터 겹닿소리는 합용병서(合用並書)의 형태로 많이 쓰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된소리 표기가 아닌,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주006)

*
합용병서가 단순한 된소리 표기가 아님은, ‘’이 『계림유사』에서 ‘菩薩’로 표기된 것과 비교해 볼 때 ‘ㅂ’이 발음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이희승·안병희 1989:35)
여기에는 크게 ‘ㅅ계’와 ‘ㅂ계’가 있었다. 이들이 된소리로 바뀌게 된 것은 허웅(1986:471-482)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3)ㄱ. ‘ㅅ계’는 대체로 서기 16세기 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진다.

ㄴ. ‘ㅂ계’는 17세기 끝에서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여 1730년 경에는 그 변천은 완성되었다.

ㄷ. ‘ㅄ계’는 16세기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된소리로 합류한 것도 있고, ‘ㅂ계’로 합류한 것도 있다.(이것은 ‘ㅂ계’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런데 『오륜행실도』에서는 위의 세 계통의 겹닿소리가 다 쓰이고 있는데, 이 때는 거의 된소리로 변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래에 제시하는 예들은 현대국어에서 예외 없이 된소리이기 때문이다.

(14) ㄱ. ‘ㅅ계’

ㅺ : 쳐(1:25), 리디(1:49-50), 리(1:60), 고(1:18), 디저(1:60), 러(1:15), (1:66), 코(1:50), 라(1:26), 무러(1:58), 여(1:56)

ㅼ : (1:23), 다가(1:56), (1:12), (1:11), 이(1:35), 여(1:25), 니(1:13), (1:37), 을(1:21), (1:25), 어(1:37), 라와(1:48), 오니(1:60), 이(1:35)

ㅽ : 디고(1:43), 혀(1:17), 쳣더니(1:27), (1:64), 니(1:58), 리(1:66)

ㅾ : 긔(1:29)

ㄴ. ‘ㅂ계’

ㅳ : 을(1:49), 안(1:21)

ㅄ : 홈에(1:21), 고(1:12), (1:37), 을(1:4)

ㅶ : 면(1:19)

3.2.3. 겹홀소리의 표기와 음가

“훈민정음” 창제 이래 두겹홀소리로 표기되었던 ‘ㅑ, ㅕ, ㅒ, ㅖ, ㅙ, ㅝ, ㅞ, ㅠ’가 이 책에서는 그대로 표기가 되었다. ‘ㅐ, ㅔ, ㆎ’는 각각 /aj, əj, ʌj/와 같은 ‘내림겹홀소리’였을 것인데, 서기 1780년경까지는 그런 발음의 표기였다가, 서기 1800년대에 와서야 단모음이 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허웅 1986:482-487), 『오륜행실도』에서의 이런 표기는 아직 ‘내림겹홀소리’의 표기라고 해야 한다. ‘ㅚ, ㅟ, ㅢ’도 각각 /oj, uj, ɨj/를 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들이 ‘오름겹홀소리’가 되었다가, 홑홀소리로 바뀐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의 표기는 ‘내림겹홀소리’의 표기다.(허웅 1986:486-487) 마찬가지로 세겹홀소리로 표기된 ‘ㅒ, ㅖ, ㅙ, ㅞ’는 각각 /jaj, jəj, waj, wəj/의 표기였으나, 19세기에 각각 /jɛ, je, wɛ, we/로 변했고, ‘ㆉ, ㆌ’는 대개 말끝에서 주격, 또는 지정사가 연결될 때에 나타나는데, 주격조사 ‘가’가 생기고, 겹홀소리들의 변화가 일어난 19세기에 없어졌는데(허웅 1986:487-488), 이 책에서는 그대로 쓰이고 있다.

『오륜행실도』에서 쓰이고 있는 겹홀소리들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15) ㄱ. /j/ 계 : ‘ㅐ, ㅑ, ㅒ, ㅔ, ㅕ, ㅖ, ㅛ, ㅠ, ㅢ, ㆎ’

ㄴ. /w/ 계 : ‘ㅘ, ㅙ, ㅚ, ㅝ, ㅞ, ㅟ’

ㄷ. 겹홀소리+ㅣ : ‘ㆌ, ㆉ’

(15ㄴ)에서는 ‘(1:21)’처럼 ‘쇼+ㅣ(주격조사)’인 것도 있으나, ‘매(1:11)’에서는 한자 발음을 그렇게 적은 것이다.

3.2.4. 거센소리 되기와 나눠적기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거센소리(ㅎ 포함)는 차청(次淸)으로 표기가 되었는데, 이 소리는 원래부터 거센소리로 낱말에 들어있던 것과 ‘ㅎ’이 앞음절의 끝이나 뒤음절의 첫소리로 올 때, 거센소리가 될 수 있는 예삿소리 ‘ㄱ, ㄷ, ㅂ, ㅈ’은 각각 ‘ㅋ, ㅌ, ㅍ, ㅊ’로 바뀐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16)ㄱ. 원래의 거센소리 : 그치디(1:5), 치더니(1:21), 명월쳥풍이로다(1:61), 베플고(1:39),비통여(1:52), 수풀의(1:23), 일더라(1:15), 칼과(1:39), 타(1:58)

ㄴ. ‘ㅎ+예삿소리, 예삿소리+ㅎ’ : 긔츌티(1:29), 념녀티(1:27), 랑티(1:25), 이러고(1:19), 일코(1:9), 청컨대(1:54)

(16ㄴ)과는 달리 기본형태를 밝히기 위한 표기에는 ‘ㅎ’과 예삿소리를 구분해 적었다.

(17) 못(1:35), 죡(1:9), 지극(1:17), 닙히고(1:2), 딕희니(1:61), 읇허(1:61)

이 책을 쓸 때에는 거센소리에 대한 음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예들이 있다. 즉 거센소리를 받침소리 /ㄷ/과 거센소리의 합음으로 보고, 이를 나누어 적은 것이다.

(18) 솟츨(1:4), (1:33), 빗(1:39), 밧(1:44), 잇튼(1:27)

(18)의 예들은 체언의 기본형태에 ‘ㅊ’ 또는 ‘ㅌ’을 받침으로 해도, 그것이 홀소리로 시작되는 요소가 올 때 ‘ㅊ’ 또는 ‘ㅌ’이 연철되었다고 봐도 되는데 주007)

*
<풀이>‘솣을’, ‘낯을’, ‘빛’, ‘잍은날’로 적어도 발음은 같은데, 그 당시에는 거센소리 앞에 /ㄷ/ 소리가 꼭 발음되었을 이유는 없다.
, 구태여 ‘ㅅ 받침’(발음으로는 /ㄷ/)을 쓴 것은, 뒤에 오는 ‘ㅊ’, ‘ㅌ’ 소리가 ‘/ㄷ/’ 다음에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다음의 예처럼 거센소리를 예삿소리와 ‘/ㅎ/’의 합음이라고 보고, 나누어 썼다.

(19) 깁흔(1:29, 1:42)

거센소리의 생성에는 이른바 ‘ㅎ 말음 체언’ 주008)

*
‘ㅎ 말음 체언’에 대한 용어는 많으나, 다른 받침이 있는 체언에도 쓰이는 점을 고려하여, 이 명칭이 맞다고 본다.(성낙수 2011:75-90)
이 큰 몫을 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우리말에서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중세국어 이후 우리말 표기에 많이 등장하며, 이 책에서도 많은 예가 나온다.

(20) 겻(1:9), 길히(1:18), 나라히(1:44), 밋(1:43), 밧(1:44), 히(1:23)

(20)에 나타난 예들처럼 ‘ㅎ 말음’이 쓰일 경우 뒤에 예삿소리로 시작되는 요소가 오면, 거센소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다른 옛 문헌에서는 이런 경우가 아주 많다.

(21) 하콰 콰(능엄 2:20), 너븐 드르콰(능엄 9:22), 몸과 콰 손과 발와(석보 13:19)

그러므로 ‘ㅎ 말음 체언’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거센소리의 생성이 쉬웠다는 방증이 된다.

3.2.5. 잇몸소리가 입천장소리 되지 않음

입천장소리 되기는 입천장소리가 아닌 소리가 뒤에 오는 홀소리 /i/나 반홀소리 /j/를 닮아, 입천장소리가 되는 현상이다. 이는 /i/나 /j/가 앞홀소리이면서, 높은홀소리어서 발음하기가 쉽기 때문에 입천장소리가 아닌 소리가 발음하기 쉬운 곳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잇몸소리 ‘ㄷ, ㄸ, ㅌ’이 각각 센입천장소리 ‘ㅈ, ㅉ, ㅊ’으로 바뀌거나, 여린입천장소리 ‘ㄱ, ㄲ, ㅋ’이 각각 센입천장소리 ‘ㅈ, ㅉ, ㅊ’으로 바뀌거나, 목구멍소리 ‘ㅎ’이 센입천장소리 ‘ㅅ’이 되는 현상들이 있는데, 통시적인 면에서는 잇몸소리가 센입천장소리로 바뀌는 현상만 다룬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자어는 원래 중국어를 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말과는 많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발음들이 우리말로 바뀌어, 현대국어에서는 입천장소리가 아니었던 것이 입천장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아직 그 현상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22) 뎨라 : ‘뎨(弟子)+라’(1:2), 톈하(天下)(1:5), 됴석(朝夕)(1:12), 시듕(侍中) (1:12), 됴서(詔書)(1:17), 됴뎡(朝廷)(1:21), 듁순(竹筍)(1:23), 딘(晉)나라(1:28)

순수한 우리말에서도 현대국어에서는 입천장소리가 된 것이 이 책에서는 잇몸소리로 표기한 것이 많다.

(23) 내티고져(1:2), 어딜이(1:2), 엇디(1:4), 됴화여(1:5), 도라오디(1:5), 못디라(1:7), 해티(1:10), 레딜대(1:12), 티거(1:17), 텨서(1:29)

(22)의 예들은 〈한글 맞춤법〉에서 인정하는 입천장소리 되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다.(이희승·안병희 1991:41-45)

3.2.6. ‘ㄴ’과 ‘ㄹ’이 머릿소리 규칙에 적용 안 됨

‘머릿소리 규칙’은 현대국어에서 말의 첫머리에 오는 닿소리가 본래의 음가를 잃고, 다른 음으로 발음되거나 없어지는 것과 어떤 음이 올 수 없음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유형이 있다.

(24)ㄱ. 흐름소리[流音] /ㄹ/이 말머리에 올 수 없다. 어두에서 홀소리 앞에서 /ㄹ/은 /ㄴ/으로 바뀐다. 또한 다음 (24ㄴ)의 규칙에 의해서 /i/나 /j/ 앞에서는 ‘Ø(영)’이 된다.

(예) 량심(良心)→양심, 력설(力說)→역설, 류행(流行)→유행, 리과(理科)→이과, 락원(樂園)→낙원, 로인(老人)→노인, 루각(樓閣)→누각, 래일(來日)→내일, 뇌성(雷聲)→뇌성

ㄴ. 잇몸 콧소리[齒頸鼻音] /ㄴ/이 말머리에서 /i/나 /j/ 앞에서 ‘Ø(영)’이 된다.

(예) 녀자(女子)→여자, 뇨소(尿素)→요소, 뉴대(紐帶)→유대, 니토(泥土)→이토.

ㄷ. 말머리에 겹자음이 올 수 없다. 그러나 옛말에서는 많이 쓰였다.

ㄹ. /ㆁ/이 말머리에서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륜행실도』에서는 (24ㄱ, ㄴ, ㄷ)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은 예들이 많다. (24ㄷ)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25)ㄱ. 니디(1:58), 니레(1:42), 니고(1:15), 니문에(1:11), 니블을(1:15), 니어(1:25), 니옷(1:15), 니워(1:12), 닐러(1:19), 닑디(1:22), 님군긔(1:40), 님재(1:19), 님츼(1:9), 녀막을(1:62), 녀진이(1:52), 녀허(1:61), 년호라(1:9), 념녀티(1:27), 녜(1:19), 뉴시(1:58), 뉵아편을(1:22)

ㄴ. 란리(1:9), 량나라(1:39), 리변을(1:35), 리의(1:27)

3.2.6. 앞홀소리 되기 없음

우리말에서 뒤홀소리 /ㅏ/, /ㅓ/, /ㅗ/, /ㅜ/, /ㅡ/ 는 뒤 음절 모음 /ㅣ/가 이어나면, /ㅣ/의 전설성에 동화되어, 앞홀소리 /ㅐ/, /ㅔ/, /ㅣ/, /ㅚ/, /ㅟ/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일부 낱말을 제외하고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륜행실도』에서는 이런 앞홀소리 되기에 관한 예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한성 혹은 경기도 지역어가 쓰였을 뿐만 아니라, 기본형태를 적는 것에 충실했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일어날 수 있는 변화지만, 그렇지 않음을 표시함.)

(26) 긔이히(1:39) *기이히, 긔졀엿다가(1:56) *기졀하엿다가, 누이며(1:45) *뉘이며, 더듸니(1:32) *더디니, 버히니(1:21) *베히니, 삿기(1:44) *샛기, 죽이니(1:17) *쥑이니, 부드치니(1:21) *부디치니

3.2.7. 입술소리 다음의 둥근홀소리 되기 없음

중세국어부터 쓰이던 입술소리 다음의 안둥근홀소리 ‘ㅡ’가 현대국어에서는 대부분 둥근홀소리 ‘ㅜ’로 바뀌었다. 이는 입술소리가 양입술을 오무려서 내는 소리이므로, 그 다음에 내는 소리는, 안둥근홀소리보다는 둥근홀소리로 내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아직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표는 위와 같음.)

(27) 강믈이(1:13) *강물이, 니블을(1:15) *이불을, 더브러(1:9) *더부러, 므른대(1:37) *무른대므(1:19) *무, 믄득(1:9) *문득, 브드치니(1:21) *부드치니, 브르시되(1:21) *부르시되, 브르지져(1:11) *부르지져, 브리디(1:12) *부리디, 븍두셩이라(1:35) *북두셩이라, 블고(1:25) *불고, 블근(1:56) *불근, 블지르니(1:2) *불지르니, 블측(1:0) *불측, 븟그러워(1:11) *붓그러워, 븟드러(1:42) *붓드러, 프른(1:56) *푸른

3.2.8. 없어짐

이는 기본형태에서 어떤 음소가 떨어져 나가거나, 없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현대국어에서는 〈한글 맞춤법〉에서 어휘형태소[lexicological morpheme]일 경우에는 기본형태를 밝혀 적고, 문법형태소[grammatical morpheme]일 때에는 변이형태[allo-morph]로 적어도 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주009)

*
지금 쓰고 있는 〈한글 맞춤법〉은 이른바 형태주의로 ‘어간’(엄격히 말하면 ‘어근’)과 ‘어미’, ‘체언’과 ‘조사’를 구분해 적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어휘형태소는 기본형태를 밝혀 적고, 문법형태소는 변이형태를 그대로 적는다’는 말과 같다.(이희승·안병희 1989: 58-105)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체언에서 둘 받침이 묵음이 되거나, 용언에서 불규칙적인 활용으로 변화가 일어나면, 그대로 적었다.(*표는 위와 같음.)

(28)ㄱ. 안(1:21) *앉, 업디라(1:23) *없디라

ㄴ. 우다가(1:5) *울다가, 니어(1:25) *닛어, 비되(1:9) *빌되, 슬피(1:21) *슬프이, 누른(1:25) *누렇은, 누이며(1:45) **눕이며

(28ㄱ)은 둘받침으로 끝나는 어근인 기본형태에서 하나의 음소가 음절 규칙에 따라서 없어지는 경우이고, (28ㄴ)은 불규칙 용언으로 어근인 기본형태에서 음소가 없어지는 것이다. (28ㄱ)은 다음과 같이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29) 늙고(1:23) *늑고, 닑디(1:22) *닉디, 디(1:52) *밥디

3.2.9. 더해짐

더해짐은 없었던 음소가 더해지는 것인데, 대개 홀소리충돌[hiatus]을 막기 위해서 반홀소리 /j/가 더해지거나, 이른바 ‘르 불규칙 용언’인 경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다음의 예가 그런 것이다.

(30)ㄱ. 되여(1:35) *되어, 보내여(:135) *보내어, 웨여(1:35) *웨어, 되엿디라(1:39) *되엇디라, 여(1:55) *어

ㄴ. 블러(1:12) *브르어, 리(1:66) *르이, 게얼니(1:7) *게으르이

(30ㄱ)은 홀소리와 홀소리가 만날 때 반홀소리 /j/가 더해진 예이고, (30ㄴ)은 ‘르 불규칙 용언’의 끝음절 ‘르’가 홀소리로 시작되는 요소와 만날 때 ‘ㅡ’가 없어지고, ‘ㄹㄹ’이 된 것이다.

3.2.10. 줄어짐

줄어짐은 두 개 이상의 음소나 음절이 합해져, 줄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다음에 그 예들을 보인다.

(31)ㄱ. 검뉘(1:35) *검누이, 셰라(1:39) *셰이라, 셩히(1:39) *셩이, 너겨(1:41) *너기어, 져(1:42) *지어, 이셔(1:43) *이시어, 긋쳐(1:44) *그치어, 셤견(1:45) *셤기언, 얼켯(1:56) *얼키엇, 베혀(1:58) *베히어

ㄴ. 면티(1:53) *면디, 고티(1:54) *고디, 해티(1:9) *해디

(31ㄱ)은 두 음절이 합해진 경우고, (31ㄴ)은 두 음소가 합해진 경우다.

3.3. 형태·통사론적 특징

여기서는 어휘·형태소·통사가 서로 맞물려 있으므로, 이를 명사류·부사류·관형사류·조사류·동사류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3.3.1. 명사류

명사류는 명사·대명사·수사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비슷한 점이 많으므로, 함께 다루기로 한다.

3.3.1.1. 본래명사류와 파생명사류

본래명사류는 본래부터 명사류였던 것이고, 파생명사류는 다른 품사에서 파생접사에 의하여, 파생된 것이다. 다음의 예를 보자.

(32)ㄱ. 설포(1:11), 사1:11), 아비(1:11), 너(1:12), 내(1:12), 우리(1:65), 므(1:19), 둘(1:25), 세(1:2), 그(1:19), 뉘(1:21), 스믈여(1:7), 여긔(1:21)

ㄴ. 늣김(1:61); {늣기-}+{-ㅁ}, 무덤(1:9); {묻-}+{-엄}, 홈(1:21); {호-}+{-ㅁ}, 슬픔(1:5); {슬프-}+{-ㅁ}, (1:66); {-}+{-ㅁ}, 어(1:29); {얼-}+{-}, 우롬(1:5); {울-}+{-옴}, 죽엄(1:42); {죽-}+{엄}

(32ㄱ)은 본래부터 명사·대명사·수사인 예들이나, (32ㄴ)은 동사류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여기에 쓰인 파생접미사는 ‘{-ㅁ/-옴/-/-엄}이다.

본래명사류에는 다음과 같은 옛말들이 나타나고 있다.

(33) ㄱ. 나모(1:56)/(1:21),

ㄴ. 나라ㅎ(1:44), ㅎ(1:52), 밧ㅎ(1:44), 우ㅎ(1:13), 길ㅎ(1:18)

(33ㄱ)은 중세어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어근이고, (33ㄴ)은 이른바 ‘ㅎ 말음 체언’으로 현대국어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3.3.1.2. 예삿말과 높임말

명사류에는 예삿말과 높임말이 있다. 물론 이들은 높임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높임말이 주어로 쓰일 때는 ‘주체 높임법’이 사용되고, 목적어나 부사어로 쓰일 때에는 ‘객체높임법’이, 듣는이가 되면 ‘상대높임법’이 사용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특별히 높임말 명사류가 없고, 다만, 조사 또는 동사류의 높임법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34) ㄱ. 어미업면세 아이치우리로다(1:2)

[-높임] [-높임] [-높임] [-높임]

ㄴ. 다이 노모겨시되 (1:6)

[+높임] [+높임]

(34ㄱ)은 주어 자리에 있는 낱말이 높임말이 아니고, 서술어에도 높임법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34ㄴ)은 ‘노모’가 높임말이 아님에도 서술어에 높임법이 쓰였으므로 높임말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주어가 생략되어도, 서술어를 보면 높임말을 확인할 수 있다.

(35) (천자) 원화 듕에 됴셔샤 곡식 천 셕을 주시고(1:10)

[+높임] [+높임] [+높임]

(35)에서는 주어는 생략되어 있으나, 서술어에 높임법이 쓰였으므로, 이 문장의 주어는 황제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술어의 쓰임만으로 높임말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음과 같이 조사의 쓰임을 보고도 알 수 있다.

(36) 부모 됴셕으로 뵈는 녜라(1:11)

[+높임] [+높임] [+높임]

(36)에서 ‘부모’에게 조사 ‘긔’가 쓰이고, 서술어에 ‘뵈’가 쓰여, ‘부모’는 높임말이 되었다.

3.3.2. 부사류

부사류는 부사만 있는데, 이를 본래부사와 파생부사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37)ㄱ. 거의(1:14), 과연(1:7), 다시(1:12), 더브러(19), 더옥(1:25), 드듸여(1:2), 므릇(1:5), 양(1:9), 바로(1:31), 비록(1:4), (1:11), 리(1:66), 엇디(1:4), 이제(1:19), 죠금도(1:47), 친히(1:25), 홀로(1:15), 맛당이(1:18), 내(1:7), 각각(1:12), 고로(1:35), 몸소(1:15), 므릇(1:5), 믄득(1:9), 서로(1:48), 스로(1:7), 마(1:51), 이믜(1:6), 자조(1:11)

ㄴ. 가히(1:4); {가(可)}+{-}+{-이}, 감히(1:7); {감(敢)+{-}+{-이}, 게얼리(1:47); {게어르-}+{-이}, 귀히1:15); {귀(貴)}+{-}+{-이}, 오(1:2); {-}+{-오}, 닐오(1:23); {닐-}+{-오}, 먼니(1:37); {멀-}+{-리}, 비로소(1:35); {비롯-}+{-오}, 슈고로이(1:21); {슈고(受苦)}+{-롭-}+{-이}, 싁싁이(1:39); {싁싁}+{-}+{-이}, 심히(1:5); {심(甚)}+{-}+{-이}, 어엿비(1:66); {어엿브-}+{-이}, 급히(1:54); {급(急)+{-}+{-이}

(37ㄴ)에서 부사 파생접미사는 {-이}가 대부분이나, {-오}나 {-오}, {-리}와 같은 것들도 쓰였다.

3.3.3. 관형사류

관형사류에는 관형사만 있는데, 여기에도 본래관형사와 파생관형사가 있다.

(38)ㄱ. 모든(1:33), 므(1:19), 여러(1:21), 온(1:21)

ㄴ. 그(1:2), 다(1:29), 두(1:19), 세(147) 구(147), 148, (1:25), 네(137), 십오(1:38), 이(156), 삼(162), (1:4), 쳔(1:10)

(38ㄱ)은 본래부터 관형사였으나, (38ㄴ)은 다른 품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컨대 ‘그, 이’ 같은 것은 대명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때의 파생접미사는 {-Ø-(영)}이다. 그러나 수사에서 파생된 관형사는 기본형태를 바꾸지 않은 것은 파생접미사가 {-Ø-(영)}이나, ‘, 두, 세, 네’은 각각 다르다. 주010)

*
<정의>최현배(1937:791-796) 이래로 이는 ‘셈어떤씨[數冠形詞]’로 다루어왔다. 본고에서는 이를 수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39) ; 나+ㄴ(관형사 파생접미사), 두; 둘+ㄴ(관형사 파생접미사), 세; 셋+ㄴ(관형사 파생접미사), 네; ㄴ(관형사 파생접미사)

3.3.4. 조사류

조사는 격조사와 접속조사, 보조사로 나눈다.

격조사(格助詞)는 체언을 같은 문장 안의 다른 낱말과 일정한 문법적 관계를 맺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격(格) 개념의 차이에 따라 격조사의 하위분류방법이 달라진다. 변형생성문법에서는 격을 심층구조상의 내면격(또는 심층격)과 표면구조상의 표면격으로 구분한다. 격조사를 표면상에 나타난 형태에만 국한하여 분류하는 것이 표면격에 대한 분류인데, 본고에서는 이 방법을 택한다.

격조사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40)ㄱ. 주격 조사 : 앞의 체언을 주어가 되게 함.

ㄴ. 관형격 조사 : 앞의 체언을 관형어가 되게 함.

ㄷ. 목적격 조사 : 앞의 체언을 타동사의 목적어가 되게 함.

ㄹ. 부사격 조사:앞의 체언을 부사어가 되게 함. 다른 격조사에 비해 그 숫자가 많으며, 처소, 도구, 자격, 원인, 동반, 비교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님.

ㅁ. 호격 조사:독립어로서 호칭이 되게 함.

접속조사(接續助詞)는 두 성분을 이어 주는 구실을 한다.

보조사(補助詞)는 여러 성분에 두루 붙어 특별한 뜻을 더해 주는 구실을 하며, 격조사가 올 자리에 쓰이거나, 격조사 혹은 보조사 뒤에 다시 보조사가 쓰이기도 하며, 체언뿐만 아니라 부사나 연결어미 뒤에도 쓰인다.

3.3.4.1. 격조사

이 책에서 격조사의 쓰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ㄱ. 주격조사 : 계모ㅣ(1:1), 이(1:35); {ㅣ/이}

ㄴ. 관형격조사 : 문하의(1:23), 병의(1:35), 민손의(1:2); {의}

ㄷ. 목적격조사 : 병을(1:56), 술위(1:4), 말을(1:2); {/을/를}

ㄹ. 부사격조사 : 처소-겻(1:9), 믈에(1:29); {ㆎ/에}

떠남-집의셔(1:35), 아래셔(1:56); {셔/의셔}

닿음-디(1:35)

수여-부모긔(1:11), 법의게(1:50), 님군긔(1:40); {긔/의긔}

향방-종려(132), 쳔려(1:56); {다려}

연장-몸으로(1:15), 벼로(1:52), 입으로(1:58); {로/으로/으로}

ㅂ. 호격조사 : 부모여(1:21)

3.3.4.2. 접속조사

접속조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42) 문안과(1:52), 부모와(1:65), 사과(1:48)

3.3.4.3. 보조사

보조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43)ㄱ. 시작-일로브터(1:15); {로브터}

ㄴ. 단지-믈만(1:45); {만}

ㄷ. 각자- (1:37); {마다}

ㄹ. 자격-법대로(137); {대로}

ㅁ. 동일-티(1:42); {티}

ㅂ. 각자-아마다(1:51); {마다}

ㅅ. 역시-죠곰도(1:47); {도}

ㅇ. 종착-죵신디(1:46); {디}

ㅈ. 미침-죵신토록(1:21); {토록}

ㅊ. 주제-집은(1:12), 조아(1:19); {은/}

3.3.5. 동사류

동사류는 서술어가 되는 기능을 하는데, 동사·지정사·형용사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활용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여기서는 본래의 낱말과 파생 낱말을 살펴보고, 어근과 어미, 접사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기로 한다.

3.3.5.1. 본래의 낱말와 합성·파생 낱말

동사류도 원래부터 동사·형용사였던 것이 있는 반면, 다른 품사와 합성이 되거나 파생된 것도 많다. 주011)

*
<풀이>다른 품사와 결합된 경우 합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두 낱말을 분리했을 때, 앞에 오는 낱말이나 뒤에 오는 낱말이 독립되어 쓰일 수 있으면, 합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예를 들면, ‘감동하-’는 ‘감동을(도, 만, 까지, 은) 하-’로 분리할 수 있으므로 합성이라고 본다. 이 때의 ‘하-’는 이른바 대동사(代動詞) 혹은 ‘허동사(虛動詞)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서정수 1994:539-587) 이 경우 ’-‘는 독립된 낱말이므로 파생접사로 보기는 어렵다.

다음은 본래동사와 합성이나 파생된 동사의 예들이다.(편의상 몇 개만 예를 든다.)

(44)ㄱ. 가-(1:58), 가지-(1:29), 갑-(1:18), 견-(1:48), 그치-(1:5), 나-(1:44)

ㄴ. ① 감동-(1:2); 감동(感動)+-, 거상-(1:27); 거상(居喪)+-, 거쳐-(1:50); 거처(居處)+-, 겁박-(1:9); 갑박(劫迫)+-, 구-(1:33); 구(求)+-

② 깃드리-(1:47); 깃+들+이-, 길들-(1:44); 길+들-, 벼-(1:25); 벼+-, 랑-(1:47); 랑+-, 절-(1:37); 절+-

(44ㄱ)은 본래동사이고, (44ㄴ)은 합성동사인데, (44ㄴ①)은 한자에 ‘-’가 붙어서 합성 혹은 파생이 되었고, (44ㄴ②)는 우리말에 파생접사가 붙어서 합성이 되었다.

다음은 본래형용사와 합성 혹은 파생형용사의 예이다.

(45) ㄱ. 그-(1:25), 누르-(1:25), 검-(1:54), 븕-(1:56), 슬프-(1:27), 프르-(1:56)

ㄴ. ①진-(1:35); 진(盡)+-, 쳥-(1:39); 쳥(淸白)+-, 지극(1: 42); 지극(至極)+-, 가-(1:50); 가(艱難)+-, 슈고롭-(1:21); 슈고(受苦)+롭-, 샹셔롭-(1:33); 샹셔(祥瑞)+롭-

②더-(1:56); 더+-, -(1:41); +-, 못-(1:45); 못+-, 이윽-(1:35);이+-, 밋브-(1:7);밋+브-

(45ㄱ)은 본래형용사들이며, (45ㄴ①)은 한자에서 파생된 것이고, (45ㄴ②)는 우리말에서 파생된 예들이다.

3.3.5.2. 어근과 어미

동사류는 활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며, 이는 교착어인 우리말의 한 특징이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활용을 하는 동사류는 어간[stem]과 어미[ending]로 구분해왔다. 우리말에서 활용을 처음으로 주장한 최현배(1937:173)에서는, “풀이씨의 끝이, 그 쓰히는 법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바꾸히는 조각(部分)을 씨끝(語尾, termination)이라 하며, 그 바꾸히지 아니하는 조각을 씨줄기, 더러는 줄이어서 줄기(語幹, stem, Stamm)라 일컫느니라.”라고 하였다. 또한 최현배(1937:174)에서는 “풀이씨를 이루기에 최소한도의 중심개념을 대표하는 줄기를 씨몸 더러는 씨뿌리 또는 뿌리(語根)라 라며, 그 다음에 돕는 조각을 도움뿌리(補助語幹-助根)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학교문법에서도 잘 적용이 되다가 1985년 이른바 통합문법에서 그 내용이 바뀌었다. ‘깨뜨리이시었습니다’라는 낱말을 예를 들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46) ㄱ. 뜨리이 시 었 습 니

줄기 도움줄기 씨끝

ㄴ. 뜨리 이시 었 습 니

어간 접사 선어말어미 어말어미

형태론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46ㄱ)에서 ‘뜨리’와 ‘이’는 파생접미사이므로 활용에서 ‘도움줄기’로 보아도 무방하나, 굴곡접미사인 ‘시’, ‘었’, ‘습’, ‘니’는 각각 접미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는 접미사이긴 하나, 전통적인 관점에서 ‘씨끝’ 곧 어미로 불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칭을 붙인다.

(47) 뜨리

어근 강조접미사 태접미사 존대접미사 시제접미사 겸양접미사 시상접미사 종결어미

[root] [emphatic [voice [honorific [tense [humble [aspect [terminal

suffix] suffix] suffix] suffix] suffix] suffix] suffix]

이러한 관점에서 동사류는 다음과 같이 어근과 어미로 구분한다.

어근+(접미사)자격법어미명사형 어미, 관형사형 어미, 부사형 어미
연결법어미연결어미, 보조적 연결어미
종결법어미종결어미

3.3.5.3.1. 자격법 어미

자격법 어미는 명사형 어미, 관형사형 어미, 부사형 어미로 나눈다.

3.3.5.3.1.1. 명사형 어미

『오륜행실도』에서 명사형 어미의 쓰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49)ㄱ. 거상기(1:35); 거상+++, 먹기(1:23); 먹++, 살기(1:12);살++

ㄴ. 뉘우미(1:39); 뉘우치++이, 봉양호믈(1:58); 봉양+++을, 신호믈(1:35);대신+++을, 셤기믈(1:3); 셤기++을, 랑미(1:48); 랑+++이

(49ㄱ)에서는 명사형 어미 ‘-기’가, (49ㄴ)에서는 ‘-ㅁ/-옴’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3.3.5.3.1.2. 관형사형 어미

관형사형 어미의 쓰임은 다음과 같다.

(50)ㄱ. 거상(1:8); 거상++, 돕(1:7); 돕+, 니러(1:44); 니러+

ㄴ. 누른(1:25); 누르+, 늙은(1:12); 늙+, 다른(1:54); 다르+, 셩(1:29); 셩++, 어린(1:39); 어리+, 죽은(1:4); 죽+

ㄷ. 공양(1:9); 공양++, (1:37); +, 나갈(1:48); 나가+, 죽을(1:40); 죽+

ㄹ. 다리던(1:12); 다리+더+, 만나던(1:19); 만나+더+

ㅁ. 아니연(1:42); 아니++여+

(50ㄱ)에서는 진행을 나타내는 관형사형 어미 ‘-’이 쓰였고, (50ㄴ)에서는 ‘-ㄴ/-은’이 쓰였는데, 형용사일 때는 시간성과 관련이 없는 수식이고, 동사일 때는 동작이 완료되었음을 나타낸다. (50ㄷ)은 동작이나 상태의 추정을 나타내는 ‘/-ㄹ/-을’이 쓰였다. (50ㄹ)에서는 ‘회상 시상 접미사’ ‘-더-’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쓰여, 과거의 일이 완료되었음을 나타낸다. (50ㅁ)은 내포문의 서술어에 완료 시제 접미사 ‘엿’이 쓰이고, 관형사형 어미와 합쳐진 형태다.

3.3.5.3.1.3. 부사형 어미

부사형 어미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51)ㄱ. 급히(1:54); 급++이, 능히(1:7); 능++이, 셩히(1:39); 셩++이, 슬피(1:21); 슬프+이, 게얼리(1:47); 게으르+이, 괴이히(1:39); 괴++이

ㄴ. 갑게(1:19); 갑+게, 밋브게(1:7); 밋브+게

ㄷ. 죵신토록(1:21); 죵신++도록

(51ㄱ)에서는 부사형 어미는 ‘-이’, (51ㄴ)에서는 ‘-게’, (51ㄷ)에서는 ‘-도록’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3.5.3.2. 연결법 어미

연결법 어미에는 연결어미와 보조적 연결어미가 있다.

3.3.5.3.2.1. 연결어미

연결법 어미는 그 쓰임이 다양하므로,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52)ㄱ. {-으니} : 상황, 이유·원인

예 : 가니(1:19); 가+니, 가더니(1:58) : 가+더+니, 감동니(1:9); 감동++니, 갓더니(1:51); 가+앗+더+니, 치더니(1:21); 가치+더+니, 구니(1:33); 구++니, 늙으니(1:9); 늙+으니, 노핫더니(1:40); 놓+앗+더+니, 등이니(1:37); 등+이+니, 밧자와시니(1:54); 받+자오+앗+이니, 되엿더니(1:21); 되+엿+더+니, 만나니(1:19); 만나+니, 병드럿더니(1:35); 병+들+엇+더+니

ㄴ. {-고} : 벌림

예 : 가고(1:5); 가+고, 가지고(1:5); 가지+고, 감동고(1:2); 감동++고, 거리고(1:52); 거리+고, 니러나고(1:25); 닐+어+나+고, 사이오(1:58); 사람+이+오

ㄷ. {-야/아셔} : 상황, 이유·원인

예 : 가난야(1:4); 가난++야, 가셔(1:18); 가+아셔, 감동여(1:33); 감동++여, 놀나(1:19); 놀나+아, 가초아(1:51); 가초+아, 거쳐와(1:42); 거치+어+오+아, 길러(1:48); 기르+어, 니러(1:19); 니+러,

ㄹ. {-나} : 반전

예 : 가난나(1:50); 가난++나

ㅁ. {-(으)며} : 벌림

예 : 가지며(1:12); 가지+며, 검으며(1:43); 검+으며, 누이며(1:45); 눕+이+며, 니러나며(1:54); 닐+어+나+며, 두리며(1:29); 두리+며, 먹으며(1:4); 먹+으며

ㅂ. {-(으)려} : 의도

예 : 가려(1:9); 가+려, 잡으려(1:25); 잡+으려, 가려(1:7); 가++려

ㅅ. {-(아)다가} : 멈춤

예 : 디나다가(1:52); 디나+다가, 라렬엿다가(1:48); 라렬++엿+다가, 호다가(1:27); 배호+다가, 살앗다가(1:58); 살+앗+다가, 뷔다가(1:30); 뷔+다가

ㅇ. {-(아)다가} : 보탬

예 : 가져다가(1:29); 가지+어다가, 져다가(1:46); 지+어다가

ㅈ. {-(으)매} : 인정

예 : 급재매(1:51); 급재++매, 갓치이매(1:40); 갓치+이+매

ㅊ. {-(으)되} : 조건

예 : 것거디되(1:44); +어+디+되, 되되(1:58); 되+되, 먹으되(1:29); 먹+으되, 브르시되(1:21); 브르+시+되

ㅋ. {-(으)면} : 가정

예 : 겨이면(1:15); 겨+이+면, 먹으면(1:37); 먹+으면, 다면(1:29); 다다르+면

ㅌ. {-오} : 근거

예 : 오(1:2); +오, 샤(1:4); +시+아대, 닐오(1:4); 닐+오

ㅍ. {-거} : 기정사실

예 : 나거(1:23); 나+거, 누엇거(1:60); 눕+엇+거, 버히거(1:37); 버히+거, 내티거(1:12); 내티+거

ㅎ. {-매} : 이유·원인

예 : 나으매(1:6); 낫+으매, 되매(1:35); 되+매, 병들매(1:45); 병+들+매

ㄲ. {-고져} : 희망

예 : 내티고져(1:2); 내티+고져, 효양고져(1:50); 효양++고져, 먹고져(1:23); 먹+고져

ㄸ. {-야도} : 양보

예 : 못야도(1:7); 못++야도

ㅃ. {-으므로} : 이유·원인

예 : 늙으므로(1:9); 늙+으므로

ㅆ. {-(으)라} : 목적

예 : 보라(1:51); 보+라

3.3.5.3.2.2. 보조적 연결어미

보조적 연결어미는 본용언과 보조용언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에는 {-디}, {-아}, {-게}, {-고}가 있다.

(53)ㄱ. {-디}

예 : 가디(1:11); 가+디, 것디(1:52); 걷+디, 공양디(1:15); 공양++디, 그치디(1:5); 그치+디

ㄴ. {-아}

예 : 나아갈(1:39); 나+아+가+ㄹ, 도라가(1:5); 돌+아+가+아, 라와(1:27); +아+오+아, 드러가(1:23); 들+어+가+아

ㄷ. {-게}

예 : 넘게(1:35); 넘+게, 아니케(1:9); 아니+게

ㄹ. {-고}

예 : 거리고(:152); 거리+고

3.3.5.3.3. 종결법 어미

우리말의 종결법 어미는, 상대높임법으로 말할이와 들을이의 상대적 높낮이를 나타내며, 서술법·의문법·청유법·명령법·감탄법을 표현한다. 이는 구어[spoken language]에서 분명하며, 문어[written language]에도 반영이 된다. 그런데 옛 문헌의 경우는 구어의 자료가 많지 않으면, 당시의 종결법 어미를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다.『오륜행실도』의 경우도 거의 문헌 형식으로 되어 있어, 구어의 쓰임을 잘 알 수 없지만, 직접인용 등의 예들에서 분석하는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종결법 어미를 [+높임]과 [-높임]으로 나누고, ‘서술법·의문법·청유법·명령법·명령법’으로 분류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3.3.5.3.3.1. 서술법 어미

서술법은 말할이가 들을이에게 자기의 말을 해버리는 데 그치거나, 약속을 하거나, 또는 느낌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허웅 1975:487) 이에는 다음과 같은 어미가 쓰인다.

(54)ㄱ. {-다} : [+높임]

예 : 치우리이다(1:2), 하직이다(1:5), 그리리이다(1:6), 나이다(1:19), 잇이다(1:21)

ㄴ. {-다/-라} : [-높임]

예 : 되니라(1:2), 뎨라(1:4), 못리로다(1:4), 리로다(1:4), 사이라(1:4), 죽은디라(1:5), 사이러라(1:5), 못디라(1:6), 허랃디라(1:6), 더라(1:7), 이셔라(1:9), 시다(1:10), 못리라(1:12), 이시다(1:12), 셰오다(1:13), 일더라(1:15), 되니라(1:15), 되리라(1:19), 되버서날디라(1:32), 살리라(1:33), 아니니라(1:33), 복호 (133), 이틀이라(1:35), 어디라(1:19), 아니리라(1:19), 직녜라(1:19), 시니라(1:19), 올나가더라(1:19), 되엿디라(1:39)

3.3.5.3.3.2. 의문법 어미

의문법은 말할이가 들을이에게 대답을 요구하거나, 자기 마음속에 의문을 품어보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허웅 1975:495) 이에는 다음과 같은 어미가 쓰인다.

(55)ㄱ. {-오} : [+높임]

예 : 버리오(1:40), 모로리오(1:39), 삼으리오(1:19)

ㄴ. {-냐/-뇨} : [-높임]

예 : 봉양소냐(1:6), 잇뇨(1:19)

ㄷ. {-다} : [-높임]

예 : 다(1:21), 아니다(1:27), 죽을다(1:39)

ㄹ. {-고} : [-높임]

예 : 당고(1:20), 두엇고(1:48), 놀날가(1:54)

3.3.5.3.3.3. 명령법 어미

명령법은 말할이가 들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하기를 또는 해주기를 요구 혹은 명령하는 표현법이다.(허웅 1975:516) 여기서 청유법 어미는 찾을 수 없었다.

(56)ㄱ. {-쇼셔} : [+높임]

예 : 구호쇼셔(1:53), 가쇼셔(1:53)

ㄴ. {-라} : [-높임]

예 : 시험하라(1:39), 츠라(1:24), 딕희라(1:25)

3.3.5.3.3.4. 감탄법 어미

감탄법은 말할이가 어떤 일에 감탄하는 것을 표현하는 종결법이다.

(57)ㄱ. {-다} : [-높임]

예 : 샷다(1:21

ㄴ. {-도다/-로다} : [-높임]

예 : 무궁도다(1:61)감탄, 명월쳥풍이로다(1:61)

3.3.5.3. 접미사

동사류에서 나타나는 접미사는 어근과 어미를 제외한 부분으로서, 강세접미사·태접미사·주체높임접미사·시제접미사·객체높임접미사·상대높임접미사·시상접미사가 있다. 이 중에서 강세접미사·태접미사는 파생접미사이고, 나머지는 굴곡접미사다. 파생접미사는 활용에서는 다시 어간을 만들므로, 최현배(1937)에서의 이른바 도움줄기[補助語幹]의 개념에 맞는 것이다.

3.3.5.3.1. 강세접미사

강세접미사는 낱말 뜻을 강하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 이에는 {-치-}가 쓰인다.

(58) {-치-}

예 : 쳣더니(1:27); (ㄷ)+치+엇+다+니, 쳐(1:25); +치+어

3.3.5.3.2. 태접미사

태접미사에는 수동태 접미사와 사동태 접미사가 있다.

3.3.5.3.2.1. 수동태 접미사[passive voice suffix]

수동태는 주어가 어떤 동작의 대상이 되어, 그 작용을 받을 때의 관계를 나타내는 동사의 한 형태인데, 수동태접미사는 능동태의 동사를 수동태의 동사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이에는 {-이-}가 쓰인다.

(59) {-이-}

예 : 갓치이매(1:40);갓치+이+매, 열리디라(1:54), 열+리++디+라, 뵈여(1:54);보+이+어, 막히여(1:42);막+히+어, 믈리이니(1:30);믈+리+이+니, 잡히여(1:39);잡+히+여

3.3.5.3.2.2. 사동태 접미사[causative voice suffix]

사동태는 남에게 어떤 행동을 시키게 하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의 한 형태다. 여기에는 파생접미사 {-이-}가 쓰인다.

(60) {-이-}

예 : 이시다(1:12); +이+시+다, 몰니이니(1:47); 몰+니+이+니(1:47), 누이며(1:45); 눕+이+며, 닙히고(1:2); 닙+히+고, 저히며(1:39); 젛+이+며, 죽이니(1:17); 죽+이+니

3.3.5.3.3. 주체높임접미사

존대접미사는 주체 높임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에는 {-시-}가 있다.

(61) {-시-}

예 : 감동샤(1:19); 감동++시+아, 므신대(1:5); 믇+으시+ㄴ대, 시다(1:10); +시+다, 졍문시다(1:44); 졍문++시+다

3.3.5.3.4. 시제접미사

시제접미사는 이 책에서 현재 {-Ø-}, 완료 {-앗-}이 쓰인다.

3.3.5.3.4.1. 현재시제접미사

현재시제는 동작이나 상태가 현재임을 나타낸다 현재시제접미사에는 {-Ø-}가 쓰인다.

(62) {-Ø-}

예 : 리로다(1:4); +Ø+로+다, 사이라(1:5); 사+이+Ø+라, 시다(1:10); +Ø+시+다, 셰오다(1:13); 셰오+Ø+다

3.3.5.3.4.2. 완료시제접미사

완료시제는 동작이나 상태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낸다. 완료시제접미사에는 {-앗-}이 쓰인다.

(63) {-앗-}

예 : 엿더니(1:18); +엿+더+니, 되엿더니(1:21); 되+엿+더+니, 샷다(1:21); +시+앗+다, 두엇거(1:27); 두+엇+거, 밧와시니(1:54); 밧+오+아시+니

3.3.5.3.5. 객체높임접미사

객체높임은 목적어나 부사어에 해당되는 객체를 높이는 것이다. 객체높임접미사에는 {--}이 쓰인다.

(64) {--}

예 : 뵈고(1:45); 뵈++고, 밧와시니(1:54); 밧+오+아시+니

3.3.5.3.6. 시상접미사

시상접미사에는 {-니-}, {-리-}, {-더-} 등이 쓰인다.

3.3.5.3.6.1. 지속 혹은 진행시상접미사

지속 혹은 진행을 나타내는 접미사에는 {-니-}가 쓰인다. 서술어가 동사이면, 진행시상[progressive aspect]이 되고, 형용사나 지정사면, 지속시상[durative aspect]이 된다.

(65) {-니-}

예 : 되니라(1:2); 되+니+라, 오니라(1:12); 오+니+라, 잇뇨(1:19); 잇++뇨, 잇이다(1:21); 잇++이+다, 니니라(1:25); 니+니+라

3.3.5.3.6.2. 회상시상접미사

지난 일을 회상하는 구실을 하는 회상시상[retrospective aspect] 접미사에는 {-더-}가 쓰인다.

(66) {-더-}

예 : 더라(1:27); +더+라, 니더라(1:28); 니+더+라, 놀나더라(1:34); 놀나+더+라, 사이러라(1:5); 사+이+러+라, 향합이러라(1:66); 향합+이+러+라

3.3.5.3.6.3. 추정시상접미사

어떤 동작이나 상태에 대하여 미루어 짐작하는 추정[prospective aspect] 시상접미사에는 {-리-}가 쓰인다.

(67) {-리-}

예 : 치우리이다(1:2); 치우+리+이+다, 리로다(1:4); +리+로다, 그리리이다(1:7); 그리++리+이+다, 되리라(1:18); 되+리+라

3.3.5.3.7. 상대높임접미사

상대높임접미사는 중세국어에서 {--}로 쓰이던 것인데, 이 책에서는 {-이-}로 나타난다. 들을이를 높이는 구실을 하며, 종결어미 {-다} 혹은 {-가}와 같이 쓰인다.

(68) {-이-}

예 : 치우리이다(1:2); 치우+리+이+다, 그리리이다(1:7); 그리++리+이+다

4. 맺는 말

이상으로 『오륜행실도』 ‘효자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책은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서지적·국어학적으로 의미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서지학적으로는 이 책은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한 것이기는 하나, 내용에 있어서는 특히 『삼강행실도』의 대상이 많이 삭제되거나 바뀌었고, 『이륜행실도』는 그대로 옮겨왔다. 내용 설명에서도 『오륜행실도』에서는 먼저 나온 책들보다는 의역이 많고, 자세한 면이 있다.

판화에서도 이전의 행실도류 판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나타냈는데, 한 화면에 한 가지 장면만을 묘사했다. 기존 판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구도와 산수표현법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국어학적으로는 18세기 말의 국어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국어사적인 변화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다만 문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종결어미와 같은 실제 대화에서 쓰이는 자료가 풍부하지는 않다. 또한 이번에 다룬 것은 ‘효자도’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다른 권에서 나온 자료들로 보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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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 고찰-충신을 중심으로-

성낙수(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본고는 앞서 논의한 ‘효자’편에 이어서, ‘충신’편의 특징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같은 책이므로, 역사적・서지학적인 측면은 대동소이하기에 생략하고, 국어학적인 특징을 찾아, 앞서 논의한 것에서 부족한 내용을 깁고 고치려는 것이 목적이다.

『오륜행실도』는 원래 세종대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1434)를 산정(刪定)하여 언해한 성종대의 『삼강행실도』(1490)와 중종대에 만들어진 『이륜행실도』(1518)를 재번역하여, 정조의 명을 받아 정조 21년(1797)에 간행한 교화서이다.

『오륜행실도』라는 이름은 다음과 같은 정조의 말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1) 나는 이것을 두렵게 여겨서, 내각의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훈의(訓義)

설순(偰循):
<정의>조선 전기의 때의 학자 ·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보덕(輔德). 고려 때 귀화한 위구르(Uighur) 출신 손(遜)의 손자로 장수(長壽)의 아들로서,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 1420년(세종 2) 교리, 이듬해 좌사경(左司經), 1425년 시강관을 거쳐 인동현감이 되었음. 1427년 문과중시에 합격, 이듬해 왕명으로 『효행록(孝行錄)』을 증수하였고, 1431년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삼강행실도』를 편수하기 시작, 1434년 완성하였으며, 그 해 이조 우참의가 되어 윤회(尹淮) 등과 함께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하였고,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여러 분야의 학문에 박학하였으며 특히 역사에 뛰어났고,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음.훈의(訓義):
<정의>한자·한문 읽는 법과 뜻.
에 따라 고증(考證)
태종황제(太宗皇帝):
<정의>명나라 태종. 명나라 제3대 황제(재위 1402~1424). 지방의 번왕(蕃王)으로 연왕(燕王)이라 불렸으며 건문제가 공격해오자 난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음.고증(考證):
<정의>깊이 헤아려 논증함.
하라.” 하였으며, 삼강
효행록(孝行錄):
<정의>고려 충목왕 때의 효자 권보(權溥)와 그의 아들 준(準)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 고려 말에 초판이 나왔으며, 세종 10년(1428)에 설순(偰循) 등이 개정하여 중간하였음. 초간본에는 이제현(李齊賢)의 서(序)가 있고, 후에 권근(權近)이 주해와 발문을 달아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그것을 이제현에게 주면서 찬(賛)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아버지를 위안하였다 함. 이에 권보도 38효행을 골라 이제현에게서 찬을 지어 받았는데, 전 24찬은 12구(句), 후 38찬은 8구로 되어 있음.삼강:
<정의>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 관계의 기본으로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으로,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것임. 이는 유교 전통의 인간 관계 덕목인 오륜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 특히 주종적 상하관계의 원리로서 기강 확립을 꾀하려는 성격이 강하며, 그 내용은 효, 충, 열로 요약됨.
이륜
이제현(李齊賢):
<정의>고려 충렬왕 14년(1287)~공민왕 16년(1367).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진(瑱)이다. 아버지 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음.이륜:
<정의>윗사람에 대한 예절[장유]과 벗 사이의 믿음[붕우]에 관한 예절.
의 행실 등의 글도 『소학』과 같이 출판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서, 하나의 책으로 정리해서, 『오륜행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삼강행실도』의 간행은 다음과 같은 서문에서 그 뜻을 살펴볼 수 있다.

(2) 선덕(宣德)

주자소(鑄字所):
<정의>태종 3년(1403)에 승정원의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어 문종 1년(1451) 7월부터 12월까지 잠깐 폐지된 적이 있으며, 세조 6년(1460) 5월에 교서관에 이속시켜, 전교서(典校署)로 개칭되었음.선덕(宣德):
<정의>명조(明朝) 제5대 황제 선종(宣宗) 주첨기(朱瞻基)의 연호로 서기 1426년~1435년의 10년간 사용되었음.
신해년(辛亥年)
고명(誥命):
<정의>중국 황제가 제후국의 국왕을 인준(認准)하는 문서. 고려 말 또는 조선 시대 국왕은 형식적으로는 중국 황제의 고명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즉위한 다음 추인하는 데 불과하였음.신해년(辛亥年):
<정의>세종 13년. 선덕 6년. 서기 1432년.
여름에 우리 주상 전하가 근신(近臣)에게 명하기를, “삼대(三代)
사관혼의(士冠婚儀):
<정의>동자(童子)가 직분을 받아 사(士)의 지위에 있으면, 나이 20세에 관례를 치르는 일과 혼례를 치르는 일.삼대(三代):
<정의>중국(中國) 상대(上代)의 하(夏), 은(殷), 주(周)의 세 왕조(王朝)를 말함.
의 정치는 모두 인륜을 밝혔는데, 후세에는 교화가 차츰 해이해져서, 백성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부자・군신・부부의 큰 인륜이 모두 본연의 성품과 위배되어, 항상 박(薄)한 데에 흘렀다. 그러나 간혹 탁월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습속에 휩쓸리지 아니하여, 보고 듣는 사람을 깨우쳐 일으키는 자도 많았다. 내가 그 특이한 것을 뽑아서, 그림으로 그리고, 찬(贊)을 지어서, 안팎에 반포하고자 하니, 거의 어리석은 남자나 무식한 여자들도 모두 보고 느껴 흥기할 것이니,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라고 하시고, 여기서 집현전
영릉(英陵):
<정의>조선 4대 임금 세종(世宗)과 그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모신 능. 현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음. 여기서는 세종을 가리킴.집현전:
<정의>세종 2년(1420)에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기관. 집현전 제도는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 한나라 이래 있었으나, 그 제도가 정비된 것은 당나라 현종 때로서 학사(學士)를 두고 시강(侍講)·장서(藏書)·사서(寫書)·수서(修書)·지제고(知制誥) 등을 담당하게 하였음.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에 이 제도가 도입되어 삼국시대에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집현전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인종 때임.
부제학
공렬(功烈):
<정의>드높고 큰 공적.부제학:
<정의>조선시대 홍문관과 그 전신이었던 집현전의 정3품 당상관직.
설순(偰循) 주010)
찬(贊):
<정의>인간의 훌륭함, 사물의 아름다움 등을 찬양하는 한문체의 글. 원래는 신명(神明)에게 바치는 글이었으나 후세에 변하여 잡찬(雜贊) ·애찬(哀贊) ·사찬(史贊) 등으로 나누어졌음. 잡찬은 인물 ·서화(書畵) ·문장 등에 대한 찬으로 대표적인 예는 족자나 액자로 된 회화 속에 쓰여진 시(詩) ·가(歌) ·문장 등이 있고, 애찬이란 남의 죽음을 애도하고 고인의 덕을 찬양하는 글로서 한(漢)나라의 채옹(蔡邕)이 쓴 “의랑호공부인애찬(議郞胡公夫人哀贊)”은 유명함. 사찬이란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을 비롯한 역대 사서의 책 끝에 그 책에 수록된 인물에 대한 포폄(褒貶 : 칭찬함과 나무람)을 적은 것임. 우리나라도 예부터 많은 학자 ·지명인사들에 의한 여러 가지 찬이 전해짐.
에게 명령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셨다. 그리하여 중국으로부터 우리 동방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있는 것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없이 하여, 효자・충신・열녀로 뚜렷이 기술할 만한 사람을 각각 1백 10인을 뽑아서 전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후면에는 그 사실을 기록했으며, 아울러 시(詩)까지 써 놓았다. 효자에 있어서는 삼가 태종황제(太宗皇帝) 주011)
사도(司徒):
<정의>중국의 관직명. 순임금 때에는 주(主)로 교육(敎育)만을 맡았으나, 주(周)나라 때에는 호구(戶口)・전토(田土)・재화(財貨)・교육(敎育)을 맡아보았음. 전한(前漢) 때에 대사도(大司徒)로 이름을 고치어, 대사마(大司馬)・대사공(大司空)과 아울러 삼공(三公)이라 했음.
께서 하사하신 <서명 realname="孝順事實">『효순사실(孝順事實)』의 시를 기록하고, 겸하여 신의 고조(高祖) 신 <인명 realname="權溥">보(溥)가 지은 <서명 realname="">『효행록(孝行錄)』 주012)
전악(典樂):
<정의>조선시대 장악원에서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6품 잡직. 궁중에서 음악을 맡아보던 잡직(雜職)으로, 임시로 봉급을 주기 위해 두었던 체아직(遞兒職) 녹관(祿官)이다. 이 중에 가장 우두머리였으므로 아래로 종6품 부전악·정7품 전율·종7품 부전율·정8품 전음·종8품 부전음·정9품 전성·종9품 부전성 모두를 거느렸음. 음악교육과 연습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정원은 1명이었고, 영조 때에 1명을 더 늘려 2명이 되었음.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음악인인 악사(樂師)에게 주었으며, 그 아래에는 종6품 잡직인 부전악 2명을 두었고, 1명은 악사, 1명은 악생(樂生)이나 악공(樂工)을 임명했음.
가운데 있는 명현(名賢) <인명 realname="李齊賢">이제현(李齊賢) 주013)
성조(聖祖):
<정의>거룩한 조상. 곧 성인이나 성왕의 조상을 이름.
의 찬(贊)을 가져왔고, 그 나머지는 보신(輔臣) 주014)
천서(天敍):
<정의>하늘에서 부여한 차서(次序). 즉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현대말>높은 벼슬아치들.
으로 하여금 나누어 짓게 하였으며, 충신과 열녀의 시도 문신들로 하여금 나누어 짓게 하여, 편찬이 끝나자, 『삼강행실도』란 이름을 내리고, 주자소(鑄字所) 주015)
오전(五典):
<정의>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道理). 곧 부자(父子) 사이의 친애(親愛).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義理), 부부(夫婦) 사이의 분별(分別), 장유(長幼) 사이의 차서(次序), 붕우(朋友) 사이의 신의(信義). 아버지는 의리(義理)로, 어머니는 자애(慈愛)로, 형은 우애(友愛)로, 아우는 공경(恭敬)으로, 자식은 효도(孝道)로 각각(各各) 대하여야 할 마땅한 길.
로 하여금 발간해서 영구히 전하게 하였다.

정조가 이를 다시 『오륜행실도』로 편찬하게 된 뜻은 다음과 같은 서문에 담겨 있다.

(3) 정조 21년 정사 정월 초하루에, 늙은이는 쉬게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위로해야 한다는 뜻으로 팔방의 백성들에게 고명(誥命) 주016)

천질(天秩):
<정의>하늘이 만물에 질서를 지어 줌. 또는 그 질서.
을 반포하고, 그 후에 또 향음주, 향약조례, 사관혼의(士冠婚儀) 주017)
오례(五禮):
<정의>나라에서 행하는 5가지 의례(儀禮).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등의 제사에 관한 길례(吉禮), 본국(本國) 및 이웃나라의 국상(國喪)이나 국장(國葬)에 관한 흉례(凶禮), 출정(出征) 및 반사(班師)에 관한 군례(軍禮), 국빈(國賓)을 맞이하고 보내는 빈례(賓禮), 즉위 ·책봉 ·국혼(國婚) ·사연(賜宴) ·노부(鹵簿) 등에 관한 가례(嘉禮) 등을 말함.
를 한 권의 책으로 합쳐서 가르치게 한 바가 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의 의식(儀式)이 높이 갖추어진 것은, 우리 영릉(英陵) 주018)
주역(周易):
<정의>유교 경전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글로 일컬어짐. 공자가 극히 진중하게 여겨 받들고 주희(朱熹)가 ‘역경(易經)’이라 이름하여 숭상한 이래로 『주역』은 오경의 으뜸으로 손꼽히게 되었음. 『주역』은 상경(上經)·하경(下經) 및 십익(十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십익은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 등 10편을 말함.
시대부터 착한 도(道)를 서로 계승하여, 정치와 교화가 아름답고 밝게 되자, 『삼강(三綱)』과 『이륜(二倫)』이라는 책이 선・후로 발간되어, 학관(學官)에 반포되어 있으므로, 백성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좋게 이루게 하는 근본이 되었으니, 이제 향음례(鄕飮禮)를 강론하고, 행하게 하려면, 마땅히 이 두 책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고, 그 책을 『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고 이름을 지은 다음에 신(臣) 만수(晩秀) 주019)
계사(繫辭):
<정의>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통틀어 이르는 말. 점술가들이 많이 이용하는 『주역』은 8괘(八卦)와, 그것을 결합한 64괘, 그리고 각 괘의 길흉을 서술한 괘사(卦辭), 각 괘를 이루는 여섯 개의 효를 설명한 효사(爻辭)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괘사와 효사를 합친 것을 계사(繫辭)라고 함.<정의>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정신(正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철보(喆輔)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복원(福源)이며,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임. 정조 7년(178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정조 13년(178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음.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선발하기 위해 작성한 의정부의 제2차 추천기록)에 등록되었음. 정조 19년(1795) 대사성으로 규장각 제학을 겸했으며, 이듬해 정리자(整理字)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고, 이듬해 대사간에 이어 정조 23년(1799)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했고, 정조 24년(1800)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학․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으며,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녕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음.
가 이 사업에 간여한 일이 있음을 들으시고, 이 책의 서문을 쓰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래서 이 책을 편찬한 이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말하였다.

(4) 이 책의 내용을 말한다면, 위로는 순결한 행실과 아름다운 절개를 싣고, 옆으로 높은 공렬(功烈) 주020)

과 거룩한 모범이 될 만한 일들을 채취하여, 글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형용하며, 시로 읊고, 찬(贊) 주021)
으로 기려서,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들로 하여금 책을 펴서, 한 번만 눈으로 보아도 그 감동된 마음과 애절한 심정이 자연스럽게 생기도록 하였다. 신하로서는 충성하고, 자식으로서는 효도하고, 아내로서는 정조를 지키며,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고, 친구를 친구로 대접한다는, 각자가 타고난 성품과 당연히 해야 할 직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사도(司徒) 주022)
전악(典樂) 주023)
의 소속이 깨우치거나, 가르쳐 주는 공력을 기다릴 것 없이, 어진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여기에 따르게 되며, 어리석은 사람도 걸음을 빨리 하여,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성조(聖祖) 주024)
께서 처음으로 편집하라고 명하신 것이요, 전하께서도 계승하여 천명하신 것이다. 이제 신들이 관려(管蠡) 주025) 관규여측(管窺蠡測)의 준말. 대롱으로 엿보고 송곳이 가리키는 곳을 살핀다는 뜻으로, 작은 소견이나 자기 견해를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
같은 소견으로 어찌 그 중간에 한 말씀으로 찬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다만 <서명 realname="">『상서(尙書)』 주026) 중국 전통 산문의 근원. 한대(漢代) 이전까지는 ‘서(書)’라고 불렸는데, 이후 유가사상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을 포함시켜 한대(漢代)에는 『상서(尙書)』라 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와서 『서경(書經)』이라 부르게 되었음. 현재는 『상서』와 『서경』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으며, 우(虞),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역사적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상서는 5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周) 당시의 원본이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에 나온 위작(僞作)임. 상서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소실되어 전승과정이 복잡하고 진위(眞僞)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판본으로는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음.
에 이르기를, “천서(天敍) 주027)
도 법칙이 있는데, 우리 인간은 오전(五典) 주028)
을 바로 잡아야 하니, 이 오전을 도타이 하라. 천질(天秩) 주029) 도 예(禮)가 있으니, 우리 인간도 오례(五禮) 주030) 를 써야 할 것인 바, 이 오례를 떳떳이 하라. 다같이 공경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융화를 이루어 착하게 하라.”라고 했다. 또 주역(周易) 주031) 계사(繫辭) 주032) 에서 말하기를, “그 기회와 변통을 보아, 법과 예를 행하라. 미루어 행하는 것은 도(道)에 있으며, 말을 아니 해도 믿게 되는 것은 덕과 행동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은 요순의 백성이요, 이 세상도 당우의 세상이다. 당우의 교화를 이 세상에 행함과 동시에 요순의 정치가 이 백성에게 미치게 된 것도 전하께서 모든 정치를 하실 때마다 요순과 당우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삼강행실도』 ‘충신도’에 수록된 이는 110명이었지만, 『언해 삼강행실도』에는 35명이 실려 있고, 『오륜행실도』에도 35명이 실려 있다. 이 중 중국사람이 29명, 우리나라 사람이 6명이다. 주인공은 여성은 한 명도 없고, 다 남자이며, 거의 벼슬살이를 한 사람들이다.

2. 국어학적인 특징

국어학적인 측면으로는 표기법, 음운, 어휘, 형태・통사의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초기에 나왔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언해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한 역대 문헌과 비교해 봐야 할 뿐만 아니라, 현대국어의 여러 양상과도 비교해 봐야 한다.

2.1. 표기법의 특징

표기법은 ‘훈민정음’이 창제 당시부터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므로,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당시에는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어근[root]이나 접사[affix], 기본형태[basic morph] 등에 관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주033) <정의>현대국어에서 맞춤법이 제정된 것은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이며, 지금의 〈한글 맞춤법〉은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되도록 문교부에서 고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에서 기본형태를 밝혀 적어, 언어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다음에 그 예를 보인다.

(5)ㄱ. 곶爲李花, 의갗爲狐皮, 爲土, 낛爲釣, 爲酉時, 못爲池

ㄴ. 나치, 옮거늘, 도다, 앉거늘, 낛드리워

(5ㄱ)은 『훈민정음해례』에 나타나 있는 예를 든 것으로 발음대로 쓰지 않고,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것이다. 발음대로라면, 각각 ‘곧, 여갇, , 낙, , 몯’이었을 것이다. (5ㄴ)은 뒤에 닿소리로 시작되는 요소가 오므로, 하나의 받침만 쓰거나, 중화된 음으로 적어야 하는데도,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예들이다.(고영근 1997:22) 또한 홀소리로 시작되는 어미, 또는 접사, 조사가 이어질 때에도 어근이나 체언의 형태소를 밝혀 적는 경우도 많았다.(고영근 1997:23)

(6)ㄱ. 눈에, 손로, 일, 몸이, 죵

ㄴ. 안아, 안시니다, 담아, 감아

(6ㄱ)은 체언과 조사, (6ㄴ)은 어근과 접사, 또는 어미와 합쳐질 때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예들이다. 『오륜행실도』에서도 이와 같은 표기법은 이어지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7) 유의  뢰니 공 뎨라 어버이 셤기믈[셤김-을] 지효로  집이 가난야 믈음식을 먹으며 어버이 위야 니 밧긔[-의] 을 져오더니 어버이 죽은 후의 남으로 초나라 놀 조츤[좇-은] 술위 일이오 오만종의 곡식을 흐며 자리 겹으로 안즈며[앉-으며] 솟츨[-을] 버려 먹을 이에 탄식여 오 비록 믈을 먹으며 어버이 위야 을 지랴 나 가히 엇디 못 리로다 대 공 드시고 샤 로 가히 닐오 살아셔 셤기매 힘을 다고 죽은 후 셤기매 모믈[모-을] 다다 리로다(『오륜행실도』 ‘자로부미’).

위의 (7)에서 밑줄 친 부분은 체언이나 어근이 뒤에 오는 홀소리에 연철하여 표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세국어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받침으로 끝나는 어근이나 체언 다음에 홀소리로 시작되는 접사 또는 어미, 조사가 와도 구분하여 썼다.

(8) 강혁은 한나라 님츼 사이니[사-이니] 어려서 아븨 일코 란리 만나 어미 업고 피란여 양 믈을[믈-을] 고 드른 거 주어 공양 로 도적을 만나 혹 겁박여 잡아[잡-아]가려 면 믄득 울며 비되 노뫼 이셔라 고 말이[말-이] 공슌고 졀야 사을[사-을] 감동니 도적이 마 해티 못고 혹 피란 곳을[곳-을] 르치니 인여 난리듕에 모 다 보젼디라 가난고 궁박여 몸과 발을[발-을] 벗고 고공이 되어 어미 공양되 어믜 몸에[몸-에] 편 거 아니 죡 거시 업디라 건무<원주>【한 광무 대 년호라】 말에 어미로 더브러 고향에 도라와 양 셰시에 관가의셔  셩 졈고 혁이 어미 늙으므로[늙-으므로] 요동티 아니니 향리 사이[사-이] 일 강거효<원주>【거효 큰 라】라 더니 어미 죽으매 양 무덤겻 녀막고 거상을 되 상복을 마 벗디 못 니 군 승연<원주>【군슈 아 벼이라】을 보내여 상복을 벗겻더니 원화<원주>【한 쟝뎨 대 년호라】 듕에 됴셔 샤 곡식 쳔셕을 주시고 양 팔월의 댱니<원주>【원이라】로 존문고 고양과 술을[술-을] 주라 시다(『오륜행실도』 ‘강혁거효’).

이 예들은 이 시기에는 이미 이른바 형태주의 표기법 혹은 ‘끊어적기’(고영근 1997:23)가 상당히 일반화했음을 보여준다. 주034) 이는 이른바 형태주의적 표기로 ‘어간’과 ‘어미’, ‘체언’과 ‘조사’를 구분해 적기로 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앞서 현대 언어학적 인식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이희승・안병희 1989:158-195)

2.2. 문자・음운론적인 특징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한글 자모가 28자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초기에는 이런 글자들이 다 잘 쓰였으나, 어떤 글자들은 변화가 일어났고, 어떤 글자들은 아예 없어졌는데, 주035) ‘ㆆ, ㅿ, ㆁ, ・, ㅸ, ㅹ’와 같은 글자들이 없어졌다.(박병채 271-274) 18세기 말에 쓰여진 『오륜행실도』에서도 역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사례들을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2.1. ‘ㅿ, ㅸ, ㆁ’이 사용 안 됨.

15세기에 사용되던 반치음이나 순경음, 그리고 이른바 ‘옛이응’이 이 책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국어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반치음 ‘ㅿ’은 중세국어에서부터 사용되었지만, 이는 ‘ㅅ’과 상보적 분포[complementary distribution]를 이루었다. 즉 ‘ㅅ’이 유성음화되는 위치에서 거의 정확하게 ‘ㅿ’이 사용되었다.(허웅 1986:468-470) 그러므로 이는 음소로 보기보다는 변이음[allo-phone]으로 보아야 하지만, 표기는 17세기까지도 되었으므로, 『오륜행실도』에서 쓰이지 않은 것은 변화로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다음은 이전의 문헌에서 ‘ㅿ’이 쓰였던 예들이 『오륜행실도』에서 다르게 표기된 것이다.

(9) 겨(구간 1:75)〉겨(오륜 1:2, 1:23, 1:44), 마(훈몽 중:7)〉마을(오륜 1:39), 아(월인 1:5)〉아(오륜 1:41, 1:42), 처(용가 78)〉처음(오륜 1:62)

그러므로 『오륜행실도』에서는 ‘ㅿ’으로 표기되었던 것은 ‘ㅇ’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ㅸ’도 ‘ㅂ’이 울림소리가 된 것인데, 후에 반홀소리 /w/로 바뀌거나 없어지기 전의 과도기음으로 본다.(허웅 1986:314-321) 『오륜행실도』에서는 ‘ㅸ’이 쓰이던 자리에 반홀소리 ‘오・우(/w/)’로 표기가 되었다. 특히 용언에서는 현대국어에서도 이른바 ‘ㅂ 불규칙 용언’ 주036) <풀이>어간의 끝소리인 ‘ㅂ’이 닿소리 요소 앞에서는 기본형태가 유지가 되지만, 홀소리로 시작되는 요소 앞에서 ‘오/우’(/w/)로 바뀌게 된다. 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다.

(10) 셜워고(오륜 1:52) ¶디치로 셜다가(월인 9:26),

치워(오륜 1:25) ¶치과 더과(월인 7:58),

두려오니(오륜 1:39) ¶두려 光이라(월인 8:26)

‘ㆁ’은 『훈민정음』에서 ‘아음(牙音)’의 ‘불청불탁(不淸不濁)’에 해당되는 표기로, 종성으로서만이 아니라 초성으로서도 음가가 있었다. 15세기에는 그런 음가를 가진 낱말들이 다음과 같이 많이 쓰였다.

(11) 이(훈민해례 용자해), 이귀(석보 19:17), 이(석보 13:18), : 리(훈몽 상:21), 다 시다(삼강 효:15)

『오륜행실도』에서는 이런 ‘ㆁ’의 표기는 하지 않고, 받침이나 초성으로도 모두 ‘ㅇ’으로 표기하였다.

(12) 이에(오륜 1:4, 1:5), 니어(1:25), 더여디이다(1:56)

2.2.2. 겹닿소리의 간소화

15세기부터 겹닿소리는 합용병서(合用並書)의 형태로 많이 쓰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된소리 표기가 아닌,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크게 ‘ㅅ계’와 ‘ㅂ계’가 있었다. 이들이 된소리로 바뀌게 된 것은 허웅(1986:471-482)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3)ㄱ. ‘ㅅ계’는 대체로 서기 16세기 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진다.

ㄴ. ‘ㅂ계’는 17세기 끝에서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여 1730년 경에는 그 변천은 완성되었다.

ㄷ. ‘ㅄ계’는 16세기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된소리로 합류한 것도 있고, ‘ㅂ계’로 합류한 것도 있다.(이것은 ‘ㅂ계’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런데 『오륜행실도』에서는 위의 세 계통의 겹닿소리가 다 쓰이고 있는데, 이 때는 거의 된소리로 변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래에 제시하는 예들은 현대국어에서 예외없이 된소리이기 때문이다.

(14)ㄱ. ‘ㅅ계’(‘오륜’ 생략, 숫자는 쪽수. 이하 같음)

ㅺ : 어(42ㄴ, 50ㄴ), 을며(73ㄱ), 처(8ㄱ), 흐니(12ㄱ), 츠려(75ㄴ), 치리라(18ㄴ), 거(12ㄱ)

ㅼ : (68ㄱ), 라(65ㄱ, 70ㄴ), (32ㄴ), (5ㄴ), 여(23ㄱ), 디뇨(47ㄴ), (50ㄱ), 라간(48ㄱ), 이라(58ㄱ)

ㅽ : 디려(66ㄱ), (66ㄱ), 으며(43ㄱ), 리고(57ㄱ), 니(50ㄱ)

ㅾ : 저(40ㄴ), 여(63ㄱ), 여디고(33ㄱ), 치니(33ㄴ)

ㄴ. ‘ㅂ계’

ㅳ : 이(75ㄱ), 으니(23ㄱ)

ㅄ : (66ㄱ), 하(67ㄴ), 화(4ㄱ), 던(32ㄴ), (5ㄴ), 아(68ㄱ), 기(2ㄱ), (32ㄴ)

ㅶ : 듯(27ㄱ), 고(43ㄱ)

2.2.3. 겹홀소리의 표기와 음가

‘훈민정음’ 창제 이래 두겹홀소리로 표기되었던 ‘ㅑ, ㅕ, ㅒ, ㅖ, ㅙ, ㅝ, ㅞ, ㅠ’가 이 책에서는 그대로 표기가 되었다. ‘ㅐ, ㅔ, ㆎ’는 각각 /aj, əj, ʌj/와 같은 ‘내림겹홀소리’였을 것인데, 서기 1780년 경까지는 그런 발음의 표기였다가, 서기 1800년 대에 와서야 단모음이 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허웅 1986:482-487), 『오륜행실도』에서의 이런 표기는 아직 ‘내림겹홀소리’의 표기라고 해야 한다. ‘ㅚ, ㅟ, ㅢ’도 각각 /oj, uj, ɨj/를 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들이 ‘오름겹홀소리’가 되었다가, 홑홀소리로 바뀐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의 표기는 ‘내림겹홀소리’의 표기다.(허웅 1986:486-487) 마찬가지로 세겹홀소리로 표기된 ‘ㅒ, ㅖ, ㅙ, ㅞ’는 각각 /jaj, jəj, waj, wəj/의 표기였으나, 19세기에 각각 /jɛ, je, wɛ, we’로 변했고, ‘ㆉ, ㆌ’는 대개 말끝에서 주격, 또는 지정사가 연결될 때에 나타나는데, 주격조사 ‘가’가 생기고, 겹홀소리들의 변화가 일어난 19세기에 없어졌는데,(허웅 1986: 487-488) 이 책에서는 그대로 쓰이고 있다.

『오륜행실도』에서 쓰이고 있는 겹홀소리들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15)ㄱ. /j/ 계 : ‘ㅐ, ㅑ, ㅒ, ㅔ, ㅕ, ㅖ, ㅛ, ㅠ, ㅢ, ㆎ’

ㄴ. /w/ 계 : ‘ㅘ, ㅙ, ㅚ, ㅝ, ㅞ, ㅟ’

ㄷ. 겹홀소리+ㅣ : ‘ㆌ, ㆉ’

(15ㄴ)에서는 ‘(22ㄴ)’처럼 ‘쇼+ㅣ(주격조사)’인 것도 있으나, ‘믄(58ㄴ)’에서는 한자 발음을 그렇게 적은 것이다.

2.2.4. 거센소리 되기와 나눠 적기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거센소리(ㅎ 포함)는 차청(次淸)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소리는 원래부터 거센소리로 낱말에 들어있던 것과 ‘ㅎ’이 앞음절의 끝이나 뒤음절의 첫소리로 올 때, 거센소리가 될 수 있는 예삿소리 ‘ㄱ, ㄷ, ㅂ, ㅈ’은 각각 ‘ㅋ, ㅌ, ㅍ, ㅊ’로 바뀐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16)ㄱ. 원래의 거센소리 : 차탄더니(50ㄴ), 칼로(43ㄱ), 털을(12ㄱ), 파고(7ㄴ)

ㄴ. ‘ㅎ+예삿소리, 예삿소리+ㅎ’ : 격동케(74ㄴ), 면티(48ㄱ)

(16ㄴ)과는 달리 기본형태를 밝히기 위한 표기에는 ‘ㅎ’과 예삿소리를 구분해 적었다.

(17) 못게(70ㄱ), 밧흘(73ㄱ), 잡히여(42ㄱ)

이 책을 쓸 때에는 거센소리에 대한 음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예들이 있다. 즉 거센소리를 예삿소리와 거센소리의 합음으로 보고, 이를 나누어 적었다.

(18) (23ㄱ), 딕희여(35ㄱ), 츠려(75ㄴ)

(18)의 예들은 체언의 기본형태에 ‘ㅊ’을 받침으로 해도, 그것이 홀소리로 시작되는 요소가 올 때 ‘ㅊ’이 연철되었다고 봐도 되는데, 구태여 ‘ㅅ 받침’-발음으로는 /ㄷ/을 쓴 것은, 뒤에 오는 ‘ㅊ’소리가 ‘/ㄷ/’ 다음에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다음의 예처럼 거센소리를 예삿소리와 ‘/ㅎ/’의 합음이라고 보고, 나누어 썼다.

(19) 깁히(57ㄱ)

거센소리의 생성에는 이른바 ‘ㅎ 말음 체언’이 큰 몫을 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우리말에서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중세국어 이후 우리말 표기에 많이 등장하며, 이 책에서도 많은 예가 나온다.

(20) 길셔(18ㄱ), 둘흘(50ㄴ), 들(7ㄴ), 밧흘(73ㄱ)

(20)에 나타난 예들처럼 ‘ㅎ 말음’이 많이 쓰일 경우 뒤에 예삿소리로 시작되는 요소가 오면, 거센소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다른 옛 문헌에서는 이런 경우가 아주 많다.

(21) 하콰 콰(능엄 2:20), 너븐 드르콰(능엄9:22), 몸과 콰 손과 발와(석보 13:19)

그러므로 ‘ㅎ 말음 체언’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거센소리의 생성이 쉬웠다는 방증이 된다.

2.2.5. 잇몸소리가 입천장소리 되지 않음

입천장소리 되기는 입천장소리가 아닌 소리가 뒤에 오는 홀소리 /i/나 반홀소리 /j/를 닮아, 입천장소리가 되는 현상이다. 이는 /i/나 /j/가 앞홀소리이면서, 높은홀소리여서 발음하기가 쉽기 때문에 입천장소리가 아닌 소리가 발음하기 쉬운 곳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잇몸소리 ‘ㄷ, ㄸ, ㅌ’이 각각 센입천장소리 ‘ㅈ, ㅉ, ㅊ’으로 바뀌거나, 여린입천장소리 ‘ㄱ, ㄲ, ㅋ’이 각각 센입천장소리 ‘ㅈ, ㅉ, ㅊ’으로 바뀌거나, 목구멍소리 ‘ㅎ’이 센입천장소리 ‘ㅅ’이 되는 현상들이 있는데, 통시적인 면에서는 잇몸소리가 센입천장소리로 바뀌는 현상만 다룬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자어는 원래 중국어를 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말과는 많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발음들이 우리말로 바뀌면서, 현대국어에서는 입천장소리가 아니었던 것이 입천장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아직 그 현상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22) 대댱(63ㄱ), 댱슈(7ㄴ), 뎡몽쥬(79ㄴ), 됴뎡(15ㄱ)

순수한 우리말에서도 현대국어에서는 입천장소리가 된 것이 이 책에서는 잇몸소리로 표기한 것이 많다.

(23) 갑디(33ㄱ), 됴희와(32ㄴ), 딕희여(35ㄱ), 티거(9ㄴ), 텨(3ㄴ)

(22)의 예들은 〈한글 맞춤법〉에서 인정하는 ‘입천장소리 되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다.(이희승・안병희 1991:41-45)

2.2.6. ‘ㄴ’과 ‘ㄹ’이 머릿소리 규칙에 적용 안 됨

‘머릿소리 규칙’은 현대국어에서 말의 첫머리에 오는 닿소리가 본래의 음가를 잃고 다른 음으로 발음되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유형이 있다.

(24)ㄱ. 흐름소리[流音] /ㄹ/이 말머리에 올 수 없다. 어두에서 홀소리 앞에서 /ㄹ/은 /ㄴ/으로 바뀐다. (예) 량심(良心)→양심, 력설(力說)→역설, 류행(流行)→유행, 리과(理科)→이과, 락원(樂園)→낙원, 로인(老人)→노인, 루각(樓閣)→누각, 래일(來日)→내일, 뇌성(雷聲)→뇌성

ㄴ. 잇몸 콧소리[齒頸鼻音] /ㄴ/이 말머리에서 /i/나 /j/ 앞에서 영(零)이 된다. (예) 녀자(女子)→여자, 뇨소(尿素)→요소, 뉴대(紐帶)→유대, 니토(泥土)→이토.

ㄷ. 말머리에 겹자음이 올 수 없다. 그러나 옛말에서는 많이 쓰였다.

ㄹ. /ㆁ/이 말머리에서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륜행실도』에서는 (24ㄱ, ㄴ, ㄷ)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은 예들이 많다. (24ㄷ)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25)ㄱ. 냥식과(29ㄴ), 녈녀(7ㄴ), 뇽방이(2ㄱ), 뉵슈뷔(57ㄴ), 니디(20ㄴ)

ㄴ. 렬렬여(83ㄴ), 률이(12ㄱ), 릉과(13ㄱ), 리(7ㄴ)

2.2.6. 앞홀소리 되기 없음

우리말에서 뒤홀소리 /ㅏ/, /ㅓ/, /ㅗ/, /ㅜ/, /ㅡ/는 뒤 음절 모음 /ㅣ/가 이어나면 /ㅣ/의 전설성에 동화되어 앞홀소리 /ㅐ/, /ㅔ/, /ㅣ/, /ㅚ/, /ㅟ/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일부 낱말을 제외하고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륜행실도』에서는 이런 앞홀소리 되기에 관한 예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한성 혹은 경기도 지역어가 쓰였을 뿐만 아니라, 기본형태를 적는 것에 충실했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일어날 수 있는 변화지만 그렇지 않음의 표시)

(26) 긔록니라(63ㄴ) *기록니라, 긔졀엿다가(45ㄴ) *기졀하엿다가, 거즛(38ㄱ) *거짓, 저(40ㄴ) *저, 믜온(77ㄴ) *미온

2.2.7. 입술소리 다음의 둥근홀소리 되기 없음

중세국어부터 쓰이던 입술소리 다음의 안둥근홀소리 ‘ㅡ’가 현대국어에서는 대부분 둥근홀소리 ‘ㅜ’로 바뀌었다. 이는 입술소리가 양입술을 오무려서 내는 소리이므로, 그 다음에 내는 소리는, 안둥근홀소리보다는 둥근홀소리로 내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아직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표는 위와 같음.)

(27) 머믈고(65ㄴ) *머물고, 믈러나라(27ㄴ) *물러나라, 믈의(66ㄱ) *물의, 브른대(57ㄱ) *부른대, 븍방(11ㄴ) *북방, 븟그러오미(58ㄴ) *부끄러오미, 리고(57ㄱ) *리고

2.2.8. 없어짐

이는 기본형태에서 어떤 음소가 떨어져 나가거나, 없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현대국어에서는 〈한글 맞춤법〉에서 어휘형태소[lexicological morpheme]일 경우에는 기본형태를 밝혀 적고, 문법형태소[grammatical morph eme]일 때에는 변이형태[allo-morph]로 적어도 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그러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체언에서 둘 받침이 묵음이 되거나, 용언에서 불규칙적인 활용으로 변화가 일어나면, 그대로 적었다.(*표는 위와 같음.)

(27)ㄱ. 업도다(58ㄴ) *없도다

ㄴ. 어(42ㄴ) *어, 디(23ㄱ) *디, 블러(12ㄱ) *브르어, 누어(78ㄱ) *눕어

(27ㄱ)은 둘받침으로 끝나는 어근인 기본형태에서 하나의 음소가 음절 규칙에 따라서 없어지는 경우이고, (27ㄴ)은 불규칙 용언으로 어근인 기본형태에서 음소가 없어지는 것이다. (27ㄱ)은 다음과 같이 기본형태를 밝혀 적은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28) 늙고(15ㄱ) *늑고, 디(43ㄱ) *디

2.2.9. 더해짐

더해짐은 없었던 음소가 더해지는 것인데, 대개 홀소리 충돌[hiatus]을 막기 위해서 반홀소리 /j/가 더해지거나, ‘르 불규칙 용언’인 경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다음의 예가 그런 것이다.

(29)ㄱ. 되여(33ㄱ) *되어, 보여(38ㄱ) *보어, 여(45ㄴ) *어

ㄴ. 닐러(12ㄱ) *니르어, 리(30ㄱ) *르이, 불러(43ㄱ) *부르어

(29ㄱ)은 홀소리와 홀소리가 만날 때 반홀소리 /j/가 더해진 예이고, (29ㄴ)은 ‘르 불규칙 용언’의 끝음절 ‘르’가 홀소리로 시작되는 요소와 만날 때 ‘ㅡ’가 없어지고, ‘ㄹㄹ’이 된 것이다.

2.2.10. 줄어짐

줄어짐은 두 개 이상의 음소나 음절이 합해져, 줄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다음에 그 예들을 보인다.

(30)ㄱ. 군(9ㄴ) *군이, 급히(9ㄴ) *급이, 너겨(63ㄱ) *너기어, 기려(65ㄴ) *기다리어

ㄴ. 면티(48ㄱ) *면디, 셰코(52ㄴ) *셰고

(30ㄱ)은 두 음절이 합해진 경우고, (30ㄴ)은 두 음소가 합해진 경우다.

2.3. 형태・통사론적 특징

여기서는 어휘・형태소・통사가 서로 맞물려 있으므로, 이를 명사류・부사류・관형사류・조사류・동사류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이하에서, 필요한 경우에만 형태소 분석을 하기로 함.)

2.3.1. 명사류

명사류는 명사・대명사・수사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비슷한 점이 많으므로, 함께 다루기로 한다.

2.3.1.1. 본래명사류와 전성명사류

본래명사류는 본래부터 명사류였던 것이고, 전성명사류는 다른 품사에서 파생접사에 의하여, 파생된 것이다. 다음의 예를 보자.

(31)ㄱ. 간관(77ㄴ), 강남(69ㄴ), 강산(65ㄱ), 개(30ㄱ), 거진(75ㄱ)

ㄴ. 무덤(52ㄴ), 홈(52ㄴ), 삶(7ㄴ), 죽엄(25ㄱ)

(31ㄱ)은 본래부터 명사・대명사・수사인 예들이나, (31ㄴ)은 동사류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여기에 쓰인 파생접미사는 ‘{-ㅁ/-옴/-/-엄}이다.

본래명사류에는 다음과 같은 옛말들이 나타나고 있다.

(32)ㄱ. 굼ㄱ(12ㄴ)

ㄴ. 길셔(18ㄱ), 둘흘(50ㄴ), 들(7ㄴ), 밧흘(73ㄱ)

(32ㄱ)은 중세어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어근이고, (32ㄴ)은 이른바 ‘ㅎ 말음 체언’으로 현대국어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2.3.1.2. 예삿말과 높임말

명사류에는 예삿말과 높임말이 있다. 물론 이들은 높임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높임말이 주어로 쓰일 때는 ‘주체 높임법’이 사용되고, 목적어나 부사어로 쓰일 때에는 ‘객체높임법’이, 들을이가 되면 ‘상대높임법’이 사용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특별히 높임말 명사류가 없고, 다만 조사 또는 동사류의 높임법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33)ㄱ. 튱혼을 위로여디이다 대 샹이 좃 (84ㄱ)

[+높임] [+높임] [+높임][-높임]

ㄴ. 님군뫼셧더니 (22ㄴ)

[+높임] [+높임]

(33ㄱ)에서 인용한 말은 말할이가 신하이고, 들을이가 임금이므로 상대 높임이 되었고, 상위문은 주어가 임금이므로, 주체 높임이 되었다. (32ㄴ)은 ‘님군’은 높임말이 아님에도 서술어에 높임법이 쓰였으므로 높임말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주어가 생략되어도, 서술어를 보면 높임말을 확인할 수 있다.

(34) (주어) 디 말라 다 (23ㄱ)

[+높임] [+높임]

(34)에서는 주어는 생략되어 있으나, 서술어에 높임법이 쓰였으므로, 이 문장의 주어는 황제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술어의 쓰임만 높임말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음과 같이 조사의 쓰임을 보고도 알 수 있다.

(35) 쥬운이 텬긔 와 (15ㄱ)

[+높임][+높임][+높임]

(35)에서 ‘텬’에게 조사 ‘긔’가 쓰이고, 서술어에 ‘뵙-’이 쓰여, ‘텬’는 높임말이 되었다.

2.3.2. 부사류

부사류는 부사만 있는데, 이를 본래부사와 파생부사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36)ㄱ. 각각(70ㄴ), 구여(12ㄴ), 다시(12ㄱ), 더욱(43ㄱ), 도로(38ㄱ), 몬져(40ㄴ)

ㄴ. 가히(5ㄴ), 구챠히(75ㄴ), 깁히(57ㄱ), 만이(40ㄱ) 오(2ㄱ)

(36ㄴ)에서 부사 파생접미사는 {-이}가 대부분이나, {-오}나 {-리}와 같은 것들도 쓰였다.

2.3.3. 관형사류

관형사류에는 관형사만 있는데, 여기에도 본래관형사와 파생관형사가 있다.

(37)ㄱ. 모든(22ㄴ), 거즛(38ㄱ), 여러(45ㄴ), 무(43ㄴ)

ㄴ. 두(6ㄱ), 스무(61ㄱ), 큰(6ㄱ), 이(32ㄴ), 그(33ㄱ), (33ㄴ)

(37ㄱ)은 본래부터 관형사였으나, (37ㄴ)은 다른 품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컨대 ‘그, 이’ 같은 것은 대명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때의 파생접미사는 {-∅-(영)}이다. 그러나 수사에서 파생된 관형사는 기본형태를 바꾸지 않은 것은 파생접미사가 {-∅-(영)}이나, ‘, 두, 세, 네’은 각각 다르다.

(38) ;나+ㄴ(관형사 파생접미사), 두;둘+ㄴ(관형사 파생접미사), 세;셋+ㄴ(관형사 파생접미사), 네;ㄴ(관형사 파생접미사)

2.3.4. 조사류

조사는 격조사와 접속조사, 보조사로 나눈다.

격조사(格助詞)는 체언을 같은 문장 안의 다른 낱말과 일정한 문법적 관계를 맺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격(格) 개념의 차이에 따라 격조사의 하위분류 방법이 달라진다. 변형생성문법에서는 격을 심층구조상의 내면격(또는 심층격)과 표면구조상의 표면격으로 구분한다. 격조사를 표면상에 나타난 형태에만 국한하여 분류하는 것이 표면격에 대한 분류인데, 본고에서는 이 방법을 택한다.

격조사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39)ㄱ. 주격 조사 : 앞의 체언을 주어가 되게 함.

ㄴ. 관형격 조사 : 앞의 체언을 관형어가 되게 함.

ㄷ. 목적격 조사 : 앞의 체언을 타동사의 목적어가 되게 함.

ㄹ. 부사격 조사:앞의 체언을 부사어가 되게 함. 다른 격조사에 비해 그 숫자가 많으며, 처소, 도구, 자격, 원인, 동반, 비교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님.

ㅁ. 호격 조사 : 독립어로서 호칭이 되게 함.

접속조사(接續助詞)는 두 성분을 이어 주는 구실을 한다.

보조사(補助詞)는 여러 성분에 두루 붙어 특별한 뜻을 더해 주는 구실을 하며, 격조사가 올 자리에 쓰이거나, 격조사 혹은 보조사 뒤에 다시 보조사가 쓰이기도 하며, 체언뿐만 아니라 부사나 연결어미 뒤에도 쓰인다.

이 책에서 격조사의 쓰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0)ㄱ. 주격조사 : 거진이(75ㄱ), 검극이(47ㄴ), 나라히(6ㄱ);{ㅣ/이}

ㄴ. 관형격조사 : 건강의(49ㄴ), 고향의(17ㄴ), 곳의(3ㄴ), 공의(58ㄴ);{의}

ㄷ. 목적격조사 : 가기(82ㄱ), 거마(18ㄱ), 고굉을(40ㄱ);{을//를}

ㄹ. 부사격 : 닿음-;결을에(65ㄴ), 들에(12ㄴ), 들(7ㄴ);{ㆎ/에}

떠남-군듕의셔(63ㄱ), 길셔(18ㄱ), 듕노에셔(29ㄴ);{셔/의셔}

수여-금인의게(42ㄱ), 네게(30ㄱ), 녹산의게(29ㄴ), 놈의게(77ㄴ);{긔/의긔}

향방-날려(30ㄱ), 니겸려(29ㄴ);{다려}

가온대로(57ㄴ), 남경으로(52ㄱ), 셔문으로(10ㄱ);{으로}

연장-공으로(40ㄱ), 관로(54ㄴ), 군로(7ㄴ), 널로(3ㄴ);{로/으로/으로}

ㅂ. 호격조사 : 놈아(30ㄱ), 닐위미여(43ㄴ), 도적놈아(38ㄱ)

접속조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41). 고경과(29ㄴ), 남졔운과(33ㄴ), 냥식과(29ㄴ)

보조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42)ㄱ. 시작-일로브터(1:15);{로브터}

ㄴ. 단지-녹만(15ㄱ), ;{만}

ㄷ. 각자- 홈마다(52ㄴ);{마다}

ㄹ. 자격-대로(82ㄱ);{대로}

ㅁ. 동일-티(3ㄴ);[티]

ㅂ. 각자-날마다(32ㄴ);{마다}

ㅅ. 역시-대부인도(12ㄴ), ;{도}

ㅇ. 종착-죵들디(70ㄴ);({디}

ㅈ. 주제-공승은(17ㄴ), 너(25ㄱ);{은/}

2.3.5. 동사류

동사류는 서술어가 되는 기능을 하는데, 동사・지정사・형용사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활용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여기서는 본래의 낱말과 파생 낱말을 살펴보고, 어근과 어미, 접사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기로 한다.

2.3.5.1. 본래의 낱말과 합성・파생 낱말

동사류도 원래부터 동사・형용사였던 것이 있는 반면, 다른 품사와 합성이 되거나, 파생된 것도 많다. 주037) <풀이>다른 품사와 결합된 경우 합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두 낱말을 분리했을 때, 앞에 오는 낱말이 뒤에 오는 낱말이 독립되어 쓰일 수 있으면, 합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예를 들면, ‘감동하-’는 ‘감동을(도, 만, 까지, 은) 하-’로 분리할 수 있으므로 합성이라고 본다. 이때의 ‘하-’는 이른바 대동사(代動詞) 혹은 허동사(虛動詞)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서정수 1994:539 -587) 이 경우 ‘-’는 독립된 낱말이므로 파생접사로 보기는 어렵다.

다음은 본래동사와 합성이나 파생된 동사의 예들이다.(편의상 몇 개만 예를 든다.)

(43)ㄱ. 가-(15ㄴ), 가지-(12ㄴ),

ㄴ.① 간-(2ㄱ);간(諫)+-, 강개-(27ㄱ);강개(慷慨)+-, 강잉여(24ㄴ);강잉(强仍)+-

② 랑-(2ㄱ), -(21ㄱ), 아니-(35ㄱ)

(43ㄱ)은 본래동사이고, (43ㄴ)은 합성동사인데, (43ㄴ①)은 한자에 ‘-’가 붙어서 합성 혹은 파생이 되었고, (43ㄴ②)는 우리말에 ‘-’가 붙어서 합성이 되었다.

다음은 본래형용사와 합성 혹은 합성 혹은 파생형용사의 예이다.

(44)ㄱ. 괴롭-(12ㄴ), -(12ㄴ), 늙-(15ㄱ), 다-(57ㄱ), 슬프-(13ㄱ)

ㄴ. ① 렬렬-(83ㄴ);렬렬(烈烈)+하-, 약-(15ㄱ);약(弱)+-, 오활하-(54ㄴ);오활(迂闊)+--

② 더-(43ㄱ);더+-, 득-(38ㄴ);득+-

(44ㄱ)은 본래형용사들이며, (44ㄴ①)은 한자에 ‘-’가 붙은 것이고, (44ㄴ②)는 우리말에서 합성 혹은 파생된 예들이다.

2.3.5.2. 어근과 어미

동사류는 활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며, 이는 교착어인 우리말의 한 특징이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활용을 하는 동사류는 어간[stem]과 어미[ending]로 구분해왔다. 우리말에서 활용을 처음으로 주장한 최현배(1937:173)에서는 “풀이씨의 끝이, 그 쓰히는 법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바꾸히는 조각(部分)을 씨끝(語尾, termination)이라 하며, 그 바꾸히지 아니하는 조각을 씨줄기, 더러는 줄이어서 줄기(語幹, stem, Stamm)라 일컫느니라.”라고 하였다. 또한 최현배(1937:174)에서는 “풀이씨를 이루기에 最小限度의 中心槪念을 代表하는 줄기를 씨몸 더러는 씨뿌리 또는 뿌리(語根)라 하며, 그 다음에 돕는 조각을 도움뿌리(補助語幹-助根)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학교문법에서도 잘 적용이 되다가 1985년 이른바 통합문법에서 그 내용이 바뀌었다. ‘깨뜨리이시었습니다’라는 낱말을 예를 들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45)ㄱ. 뜨리 이 시 었 습 니

줄기 도움줄기 씨끝

ㄴ. 뜨리 이 시 었 습니

어간 접사 선어말어미 어말어미

형태론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45ㄱ)에서 ‘뜨리’와 ‘이’는 파생접미사이므로 활용에서 ‘도움줄기’로 보아도 무방하나, 굴곡접미사인 ‘시’, ‘었’, ‘습’, ‘니’는 각각 접미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는 접미사이긴 하나, 전통적인 관점에서 ‘씨끝’ 곧 어미로 불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칭을 붙인다.

(46) 뜨리

어근 강조 태 주체높임 시제 겸양 시상 상대높임 종결어미

접미사 접미사 접미사 접미사 접미사 접미사 접미사 접미사

[root] [emphatic [voice [honorifi [tense [humble [aspect [honorific [terminal

suffix] suffix] suffix1] suffix] suffix] suffix] suffix2] suffix]

이러한 관점에서 동사류는 다음과 같이 어근과 어미로 구분한다.

자격법 어미; 명사형 어미, 관형사형 어미, 부사형 어미

(47) 어근+(접미사)+ 연결법 어미; 연결어미

종결법 어미; 종결어미

2.3.5.2.1. 자격법 어미

자격법 어미는 명사형 어미, 관형사형 어미, 부사형 어미로 나눈다.

『오륜행실도』에서 명사형 어미의 쓰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48)ㄱ. 가기(82ㄱ);가-+-기, 기(2ㄱ);-+-기+, 살기(45ㄱ);살-+-기+

ㄴ. 갑흐미(3ㄴ);갑ㅎ-+-음+이, 귀미(18ㄴ);귀--+-ㅁ+이, 셤기미(58ㄱ);셤기-+-ㅁ+이

(48ㄱ)에서는 명사형 어미 ‘-기’가, (48ㄴ)에서는 ‘-ㅁ/-옴’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관형사형 어미의 쓰임은 다음과 같다.

(49)ㄱ. 간(7ㄴ);간+-+-는,

ㄴ. 가진(38ㄱ); 가지-+-ㄴ, 겨신(61ㄱ);겨시-+-ㄴ, (30ㄱ);-+-

ㄷ. 갑흘(35ㄴ);갑ㅎ-+-을, 겨실(81ㄴ);겨시-+-ㄹ, 누릴(36ㄱ);누리-+-ㄹ

ㄹ. 머므러(45ㄴ);머믈르-+-엇-+-더-+-ㄴ, 먹던(12ㄴ);먹-+-더-+-ㄴ

(49ㄱ)에서는 진행을 나타내는 관형사형 어미 ‘-’이 쓰였고, (49ㄴ)에서는 ‘-ㄴ/-은’이 쓰였는데, 형용사일 때는 시간성과 관련이 없는 수식이고, 동사일 때는 동작이 완료되었음을 나타낸다. (49ㄷ)은 동작이나 상태의 추정을 나타내는 ‘-ㄹ/-을’이 쓰였다. (49ㄴ)에서는 ‘회상 시상 접미사’ ‘-더-’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쓰여, 과거의 일이 완료되었음을 나타낸다.

부사형 어미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50)ㄱ. 구챠히(75ㄴ);구차+하-+-이, 만히(75ㄴ);많-+-이

ㄴ. 굴게(50ㄱ);굴+하-+-게, 알게(3ㄴ);+알-+-게

(50ㄱ)에서는 부사형 어미는 ‘-이’가, (50ㄴ)에서는 ‘-게’가 쓰임을 알 수 있다.

2.3.5.2.2. 연결법 어미

연결법 어미에는 연결어미와 보조적 연결어미가 있다.

2.3.5.2.2.1. 연결어미

연결법 어미는 그 쓰임이 다양하므로,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51)ㄱ. {-으니} : 상황, 이유・원인

예 : 가니(15ㄴ), 갓더니(5ㄴ)

ㄴ. {-고} : 벌림

예 : 가지고(12ㄴ), 갑고(3ㄴ), 거리고(10ㄱ), 일고(18ㄱ)

ㄷ. {-아셔} : 상황, 이유・원인

예 : 간야(2ㄱ), 강개여(27ㄱ), 거두어(57ㄱ), 고여(6ㄱ)

ㄹ. {-나} : 반전

예 : 이시나(18ㄴ);, 죽으나(27ㄱ)

ㅁ. {-으며} : 벌림

예 : 가며(72ㄴ), 경신며(2ㄱ), 치며(29ㄴ), 잡으며(33ㄱ)

ㅂ. {-으려} : 의도

예 : 가려(60ㄴ), 구원려(26ㄴ), 닙히려(42ㄴ), 망려(40ㄱ), 엄습랴(38ㄱ)

ㅅ. {-다가} : 멈춤

예 : 가다가(18ㄱ), 가도앗다가(53ㄱ), 긔록엿다가(45ㄴ), 나오다가(27ㄱ)

ㅇ. {-도록} : 미침

예 : 죽도록(36ㄱ), 흐르도록(15ㄴ), 니록(30ㄱ)

ㅈ. {-거든} : 가정

예 : 구거든(82ㄱ), 되엿거든(65ㄴ)

ㅊ. {-으되} : 조건

예 : 굴므되(8ㄱ),

ㅋ. {-으면} : 가정

예 : 이러면(32ㄴ), 잡으면(36ㄱ)

ㅌ. {-오} : 근거

예 : 오(2ㄱ), 샤(15ㄴ), 닐오(3ㄴ)

ㅍ. {-거} : 기정사실

예 : 드리거(50ㄴ), 보거(10ㄱ), 거(12ㄱ), 아니거(2ㄱ), 어(50ㄴ)

ㅎ. {-매} : 상황

예 : 마치매(38ㄴ), 졉시매(35ㄴ), 매(54ㄴ), 반매(29ㄱ), 실신매(47ㄴ)

ㄲ. {-고져} : 희망

예 : 되고져(57ㄴ), 맛고져(18ㄱ), 밧고져(13ㄱ), 죽이고져(77ㄴ)

ㄸ. {-아도} : 양보

예 : 죽어도(13ㄱ)

ㅃ. {-거니와} : 사실

예 : 구미어니와(35ㄴ), 업거니와(35ㄴ), 죽거니와(3ㄴ)

ㅆ. {-지언정} : 양보

예 : 될디언뎡(50ㄱ), 죽을디언졍(47ㄴ)

ㅉ. {-ㄴ대} : 상태

예 : 말린대(12ㄱ);말-+-리-+-ㄴ대, 브신대(81ㄴ);브-+-시-+-ㄴ대, 원컨대(13ㄱ);원+-+-건대

2.3.5.2.2.2. 보조적 연결어미

보조적 연결어미는 본용언과 보조용언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에는 {-디}, {-아}, {-게}, {-고}가 있다.

(52)ㄱ. {-디}

예 : 가디(2ㄱ), 그치디(30ㄱ), 르치디(3ㄴ)

ㄴ. {-아}

예 : 구여(38ㄴ), 의논여(21ㄱ), 잡아(23ㄱ)

ㄷ. {-게}

예 : 괴롭게(12ㄴ), 굴게(50ㄱ), 알게(3ㄴ)

ㄹ. {-고}

예 : 가지고(12ㄴ), 거리고(10ㄱ), 브릅고(27ㄴ)

2.3.5.2.3. 종결법 어미

우리말의 종결법 어미는, 상대높임법으로 말할이와 들을이의 상대적 높・낮이를 나타내며, 서술법・의문법・청유법・명령법・감탄법을 표현한다. 이는 구어[spoken language]에서 분명하며, 문어[written language]에도 반영이 된다. 그런데 옛 문헌의 경우는 구어의 자료가 많지 않으면, 당시의 종결법 어미를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오륜행실도』의 경우도 거의 문헌 형식으로 되어 있어, 구어의 쓰임을 잘 알 수 없지만, 직접인용 등의 예들에서 분석하는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종결법 어미를 [+높임]과 [-높임]으로 나누고, ‘서술법・의문법・청유법・명령법・명령법’으로 분류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3.5.2.3.1. 서술법 어미

서술법은 말할이가 들을이에게 자기의 말을 해버리는 데 그치거나, 약속을 하거나, 또는 느낌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허웅 1986:487) 이에는 다음과 같은 어미가 쓰인다.

(53)ㄱ. {-다} : [+높임]

예 : 딩계리이다(15ㄴ), 봉양리이다(70ㄱ), 아니리이다(23ㄱ), 쟝우로소이다(15ㄴ), 죽이리이다(33ㄱ)

ㄴ. {-다/-라} : [-높임]

예 : 가니라(5ㄴ), 갑흐리라(57ㄴ), 갑흘디라(27ㄴ), 굴엿노라(33ㄴ) 라나더라(52ㄴ), 슬프다(13ㄱ), 실신다(47ㄴ), 튜증시다(82ㄱ)

2.3.5.2.3.2. 의문법 어미

의문법은 말할이가 들을이에게 대답을 요구하거나, 자기 마음속에 의문을 품어보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허웅 1986:495) 이에는 다음과 같은 어미가 쓰인다.

(54)ㄱ. {-가} : [+높임]

예 : 뎡리잇가(5ㄴ), 망가(2ㄱ), 뵈오리잇가(5ㄴ), 말고(16ㄱ)

ㄴ. {-오} : [-높임]

예 : 가리오(55ㄱ), 그치리오(47ㄴ), 다래리오(50ㄱ), 무드리오(65ㄴ)

ㄷ. {-냐/-뇨} : [-높임]

예 : 사랏냐(78ㄱ), 나뇨(47ㄴ), 디뇨(47ㄴ), 엇더뇨(35ㄴ), 잇냐(22ㄴ)

ㄹ. {-다} : [-높임]

예 : 말인다(15ㄴ), 멸다(6ㄱ), 보내엿다(72ㄴ), 아니엿다(60ㄴ)

ㅁ. {-아} : [-높임]

예 : 아니랴(20ㄴ); 아니+-+-리-+-아

2.3.5.2.3.3. 명령법 어미

명령법은 말할이가 들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하기를 또는 해주기를 요구 혹은 명령하는 표현법이다.(허웅 1986:516) 여기서 청유법 어미는 찾을 수 없었다.

(55)ㄱ. {-쇼셔} : [+높임]

예 : 라나쇼셔(9ㄴ), 마르쇼셔(15ㄱ), 쇼셔(82ㄱ)

ㄴ. {-라} : [-높임]

예 : 도모라(6ㄱ), 라나라(32ㄴ), 막으라(50ㄴ), 먹으라(40ㄴ)

2.3.5.2.3.4. 감탄법 어미

감탄법은 말할이가 어떤 일에 감탄하는 것을 표현하는 종결법이다.

(56) {-도다/-로다} : [-높임]

예 : 니미로다(6ㄱ), 다핫도다(13ㄱ), 못리로다(45ㄱ), 아니시다(43ㄱ), 업리로다(40ㄴ)

2.3.5.3. 접미사

동사류에서 나타나는 접미사는 어근과 어미를 제외한 부분으로서, 강세접미사・태접미사・주체높임접미사・시제접미사・객체높임접미사・상대높임접미사・시상접미사가 있다. 이 중에서 강세접미사・태접미사는 파생접미사이고, 나머지는 굴곡접미사다. 파생접미사는 활용에서는 다시 어간을 만들므로 최현배(1937)에서의 이른바 도움줄기[補助語幹]의 개념이 맞는 것이다.

2.3.5.3.1. 강세접미사

강세접미사는 낱말의 뜻을 강하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 이에는 {-치-}가 쓰인다.

(57) {-치-}

예 : 치거(43ㄱ);+치+거, 밀치고(18ㄱ);밀치고(18ㄱ);밀-+-치-+-고

3.3.5.3.2. 태접미사

태접미사에는 수동태 접미사와 사동태 접미사가 있다.

2.3.5.3.2.1. 수동태접미사[passive voice suffix]

수동태는 주어가 어떤 동작의 대상이 되어, 그 작용을 받을 때의 관계를 나타내는 동사의 한 형태인데, 수동태접미사는 능동태의 동사를 수동태의 동사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이에는 {-이-}가 쓰인다.

(58) {-이-}

예 : 잡히여(42ㄱ);잡-+-히-+-여, 깃드림(35ㄴ);깃+들-+-이-+ㅁ, 플니샤(15ㄴ);플-+-니-+-시-+-아

2.3.5.3.2.2. 사동태접미사[causative voice suffix]

사동태는 남에게 어떤 행동을 시키게 하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의 한 형태다. 여기에는 파생접미사 {-이-}가 쓰인다.

(59) {-이-}

예 : 이여(84ㄱ);-+-이-+-여, 먹이고(12ㄴ), 버히니(40ㄴ)버히-+-이-+-니, 벗기고(42ㄱ);벗-+-기-+-고, 죽이리라(72ㄴ);죽-+-이-+-리-+-라

2.3.5.3.3. 주체높임접미사

높임접미사는 주체 높임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에는 {-시-}가 있다.

(59) {-시-}

예 : 너기샤(14ㄴ);너기-+-시-+아, 무르시(15ㄴ);묻-+-으시-+고, 내시고(82ㄱ);내-+-시-+고

2.3.5.3.4. 시제접미사

시제접미사는 이 책에서 현재 {-Ø-}, 완료 {-앗-}이 쓰인다.

2.3.5.3.4.1. 현재시제접미사

현재시제는 동작이나 상태가 현재임을 나타낸다 현재시제접미사에는 {-Ø-}가 쓰인다.

(60) {-Ø-}

예 : 됴셰라(17ㄴ);도셔+이-+-Ø-+-라, 말이오(58ㄴ);말+이-+-Ø-+-오

2.3.5.3.4.2. 완료시제접미사

완료시제는 동작이나 상태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낸다. 완료시제접미사에는 {-앗-}이 쓰인다.

(61) {-앗-}

예 : 가도앗다가(53ㄱ);가도-+-앗-+-다가, 결단여시니(13ㄱ);결단+-+-여시-+-니, 굴엿노라(33ㄴ);굴+-+-엿-+-노라

2.3.5.3.5. 객체높임접미사

객체높임은 목적어나 부사어에 해당되는 객체를 높이는 것이다. 객체높임접미사에는 {--}이 쓰인다.

(62) {--}

예 : 받와(47ㄱ);받-+--+-아, 엿오(5ㄱ);엿+-오-+-대,

2.3.5.3.6. 시상접미사

시상접미사에는 {-니-}, {-리-}, {-더-} 등이 쓰인다.

2.3.5.3.6.1. 지속 혹은 진행시상접미사

지속 혹은 진행을 나타내는 접미사에는 {-니-}가 쓰인다. 서술어가 동사이면, 진행시상[progressive aspect]이 되고, 형용사나 지정사면, 지속시상[durative aspect]이 된다.

(63) {-니-}

예 : 기리니라(18ㄱ), 니라(27ㄴ), 멸다(6ㄱ), 반다(29ㄴ)

2.3.5.3.6.2. 회상시상접미사

지난 일을 회상하는 구실을 하는 회상시상[retrospective aspect]접미사에는 {-더-}가 쓰인다.

(64) {-더-}

예 : 겨시더니(80ㄱ), 니럿더니(17ㄴ), 머므더니(61ㄱ), 인이러라(30ㄴ)

2.3.5.3.6.3. 추정시상접미사

어떤 동작이나 상태에 대하여 미루어 짐작하는 추정[prospective aspect]시상접미사에는 {-리-}가 쓰인다.

(65) {-리-}

예; 년좌리라(12ㄱ), 못리로다(45ㄱ), 무엇리오(22ㄴ)

2.3.5.3.7. 상대높임접미사

상대높임접미사는 중세국어에서 {--}로 쓰이던 것인데, 이 책에서는 {-이-}로 나타난다. 들을이를 높이는 구실을 하며, 종결어미 {-다} 혹은 {-가}와 같이 쓰인다.

(66) {-이-}

예 : 뎡리잇가(5ㄴ), 딩계리이다(15ㄴ), 봉양리이다(70ㄱ), 뵈오리잇가(5ㄴ), 죽이리이다(33ㄱ)

3. 맺는 말

이상으로 『오륜행실도』 ‘충신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책은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서지적・국어학적으로 의미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은 앞에서 역주한 ‘효자도’에서 논의하였다. 본고는 그것을 이어 깁고 고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충신도’에 나타난 국어학적 특징은 ‘효자도’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내용이 다르므로 쓰여진 낱말이나 문장에서 더 많은 자료를 분석할 수 있었다. 다른 더 좋은 자료는 나머지 내용들에서 보충되리라고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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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 권3 「열녀」에 대하여

1.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1) 『삼강행실도』(한문본)

세종 16년(1434)에 처음 간행한 한문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3권 3책 목판본으로서, 처음 편찬 간행할 때에는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實孝子圖)』, 『삼강행실충신도(三綱行實忠臣圖)』,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3부로 구성하고, 각 책마다 반포 교지, 전(箋), 서(序), 발(跋)을 다 실었다. 이것은 각도에서 재량껏 세 책을 모두 간행하지 않고 한 책만 낼 수도 있도록 책마다 독립된 체재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본문은 중국과 한국의 역대 인물에서 선정된 효자, 충신, 열녀 각 110명씩 330명의 그림과, 공적을 정리한 글을 싣고, 여기에 이를 찬양한 내용의 시(詩)와 찬(讚)을 수록하였다. 책의 편집체제는 1명을 1판장에 배치하여, 접었을 때 앞면에 해당하는 부분에 표제와 함께 그림이, 뒷면에 해당하는 부분에 전기와 시・찬(詩讚)이 보이도록 하였다. 문장과 시찬은 모두 읽기 쉽게 동그란 권점(圈點)을 찍어 해석하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림과 권점의 표시는 이 책이 백성 교화용으로 제작된 윤리서라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종이 이 책을 편찬토록 한 계기는, 세종 10년(1428)에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사람이 아비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서이다. 세종은 그 책임을 통감하고 효제의 마음을 돋우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안을 찾던 중, 변계량이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책을 펴내자고 아뢰자 곧바로 직제학 설순을 책임자로 하여 책을 지어 펴내라고 명령하였으니, 이 사실은 『세종실록』 제42권, 세종 10년(1428) 10월 3일 기사에 자세히 적혀 있다. 우선적으로 중국의 『이십사효』 주001)

<정의>이십사효(二十四孝) : 원(元)나라 곽거경(郭居敬)이 엮은 책이다. 이 책의 24효(孝)란, 우순(虞舜)·한문제(漢文帝)·증삼(曾參)·민손(閔損)·중유(仲由)·동영(董永)·염자(剡子)·강혁(江革)·육적(陸績)·당부인(唐夫人)·오맹(吳猛)·왕상(王祥)·곽거(郭巨)·양향(楊香)·주수창(朱壽昌)·유검루(庾黔婁)·노내자(老萊子)·채순(蔡順)·황향(黃香)·강시(姜詩)·왕포(王褒)·정난(丁蘭)·맹종(孟宗)·황정견(黃庭堅) 등 24명을 이른다.
에 수록된 24인을 바탕으로 20인을 증보하여 새로 효행록을 편찬하라는 것이었다.

경연에 나아가, 임금이 일찍이 진주(晉州) 사람 김화(金禾)가 그 아비를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을 흐리고는 곧 자책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니, 판부사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효행록(孝行錄)’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항간의 서민들로 하여금 이를 항상 읽고 외게 하여 점차로 효제와 예의(禮義)의 마당으로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직제학 설순(偰循)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이 박악(薄惡)하여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가 아니지만, 그러나 실로 교화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전에 편찬된 중국의 『이십사효(二十四孝)』에다가 또 중국인 20여 명의 이름난 효자를 더 넣고, 고려와 삼국 시대의 효자로서 특출한 자들도 함께 모아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에서 이를 주관하라.” 하니, 설순이 대답하기를, “효도는 곧 백행의 근원입니다. 이제 이 책을 편찬하여 사람마다 이를 알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고려사』로 말씀하오면 춘추관에 수장되어 있어 관 밖의 사람은 참고하여 살펴볼 수 없사오니, 청컨대 춘추관으로 하여금 이를 초록(抄錄)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즉시 춘추관에 명하여 이를 베끼도록 하였다. 주002)

○辛巳/ 御經筵 上嘗聞晋州人金禾弑父之事 矍然失色 乃至自責 遂召群臣 議所以敦孝悌 厚風俗之方 判府事卞季良曰 請廣布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尋常讀誦 使之駸駸然入於孝悌禮義之場 至是 上謂直提學偰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 孝行特異者 亦皆褏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 循對曰 孝乃百行之原 今撰此書 使人人皆知之 甚善 若高麗史 莊之春秋館 外人不得考閱 請令春秋館抄錄以送 卽命春秋館抄之

그런데 위 기사에서 ‘효행록’을 고려 때 간행된 『효행록(孝行錄)』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후에 『효행록』의 증보본에 대한 편찬과 간행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때의 ‘효행록’은 ‘효행을 기록한 책’으로 해석함이 옳다. 3년 후 세종 13년(1431) 여름에 세종이 다시 집현전 직제학 설순(偰循) 등에게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도록 하명하였다고 하였고, 이듬해 편찬이 끝났다고 하였으니 주003)

이 사실은 서문에 밝히고 있으며, 이 서문이 세종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앞선 3년 동안이 자료를 수집하고 읽고 선별한 기간이었고, 1년 동안이 글을 정리하고 그림을 그려서 편찬한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효행록』은 고려 충목왕 때 권보(權溥)와 그의 아들 권준(權準)이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이다. 처음에는 이제현(李齊賢)이 서문을 쓰고, 권근(權近)이 주해(註解)와 발문(跋文)을 달아서 고려 때 간행하였는데, 권보가 늙자 아들 권준이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를 그리게 한 뒤, 그것을 이제현에게 주면서 찬(贊)을 지어 달라 부탁하여, 권보도 별도로 38효행을 골라 이제현으로부터 찬(贊)을 지어받았으니, 이십사효도의 24찬은 12구(句)로, 38효행의 38찬은 8구로 짓게 되었다. 권보의 『효행록』은 중국의 『이십사효』를 인용하여 간행한 책인데, 이제 세종이 변계량의 제안에 의해 ‘효행록’을 제작할 것을 명하면서, 중국의 『이십사효』와 『고려사』를 참조하라고 하였다는 사실은, 권보의 책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효행을 모아 엮어 책을 만들라’는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즉 『효행록』의 증보가 아니라,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서 등 최대한 많은 자료를 통해 ‘효행을 정리하여 기록한 책’을 새롭게 편찬하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십사효』는 이미 고려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매우 인기가 높았던 책으로,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의 시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에서도 『이십사효』의 내용을 보고 지은 ‘맹종동순(孟宗冬筍)’이라는 시가 있을 정도이다. 이런 여러 책을 정리하여 권보의 책과 같은 새로운 ‘효행록’을 편찬하게 된 것이고, 그 책 이름에 『삼강행실도』라는 이름을 붙이게 한 것이다. 물론 이때 권보의 『효행록』을 참고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권채(權採)가 쓴 ‘삼강행실도 서문’에는 구체적인 사실이 적혀 있다.

세종 13년(선덕(宣德) 주004)

명나라 제5대 황제 선종(宣宗)의 연호. 1426년~1435년.
신해년(辛亥年) 주005)
세종 13년(1431). 명나라 선덕 6년.
여름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근신(近臣)에게 명하기를, “삼대(三代)의 정치는 모두 인륜을 밝혔는데, 후세에는 교화가 차츰 해이해져서, 백성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군신·부자·부부의 큰 인륜이 모두 본연의 성품과 위배되어, 항상 박(薄)한 데로 흘러버렸다. 그러나 간혹 탁월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습속에 휩쓸리지 아니하여, 보고 듣는 사람을 깨우쳐 일으키는 자도 많았다. 내가 그 중 특출한 것을 뽑아서, 그림으로 그리고, 찬(贊)을 지어서, 안팎에 반포하고자 하니, 무릇 어리석은 남자나 무식한 여자들도 모두 보고 느껴 흥기할 것이니,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라고 하시고, 이에 집현전 부제학 신 설순(偰循)에게 명령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셨다. 주006)
宣德辛亥夏 我主上殿下 命近臣若曰 三代之治 皆所以明人倫也 後世敎化陵夷 百姓不親 君臣父子夫婦之大倫 率皆昧於所性 而常失於薄 間有卓行高節 不爲習俗所移 而聳人觀聽者 亦多 予欲使取其特異者 作爲圖贊 頒諸中外 庶幾愚夫愚婦 皆得易以觀感而興起 則亦化民成俗之一道也 乃命集賢殿副提學臣偰循 掌編摩之事(『삼강행실도』 서(序) 중에서)

이 서문과 세종실록의 기록을 정리하면, 세종 10년(1428)에 김화가 아비를 살해한 사실을 듣고 세종이 중국의 『이십사효』 등의 책과 『고려사』 등 우리나라 역사 기록을 총망라하여 새로운 ‘효행록’을 편찬하라 명하였고, 세종 13년(1431)에 왕명에 따라 설순 등이 『효순사실(孝順事實)』과 『효행록(孝行錄)』 등을 참고하여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세종 14년(1432) 6월에 집현전에서 편찬을 완료함과 동시에, 권채(權採, 1399~1438)의 서문과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전문(箋文)이 찬진되고, 세종 15년(1433) 2월에 예문관 대제학 정초(鄭招, ?~1434)가 왕명을 받들어 『삼강행실도』의 발문(跋文)을 찬진하자, 이에 세종 16년(1434) 4월에 주자소에 이송하여 판각하고 인출(印出)하여 반포하고, 아이들과 부녀자들도 알 수 있도록 중앙은 한성부와 오부에서, 지방은 감사와 수령의 친속들이 교육하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교서문은 윤회(尹淮, 1380~1436)에게 찬진토록 하였다. 그 후 같은 해 11월에는 실제로 인출된 『삼강행실도』를 종친과 신하들에게 반사하고, 각도(各道)에도 나누어 주었으며, 세종 21년(1439) 3월에는 함길도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부거현(富居縣)에까지 내려 보내도록 하였다. 또한 세종 25년(1443)에는 함길도의 경원·경흥·회령·온성·종성·부거 등 각 고을에도 『삼강행실도』를 보냈다. 또한 세종 25년(1443) 12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니, 세종 26년(1444) 2월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1445)와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자, 세종은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주007)

세종실록 권103, 세종 26년 2월 20일조.
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삼강행실도』의 언해는 세종 때에 이미 착수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언해를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세종 때는 나타나지 않으며, 『성종실록』 성종 12년(1481) 3월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나므로, 당시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로 인해 언해하려는 세종의 뜻은 이루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권채가 쓴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져 있다.

이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참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속에서 효자, 충신, 열녀로서 특출한 자 각 1백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그리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讚詩)를 한 수씩 붙였는데, 이때 시는 효자도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孝順事實)』에 실린 시와, 나의 고조할아버지 권보(權溥)께서 고려 때 편찬한 『효행록』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贊)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것과, 충신도・열녀도의 찬과 시들은 모두 편찬관들이 나누어 지었다. 주008)

於是 自中國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 得孝子忠臣烈女之卓然可述者 各百有十人 圖形於前 紀實於後 而幷系以詩 孝子則謹錄太宗文皇帝所賜孝順事實之詩 兼取臣高祖臣溥所撰孝行錄中名儒李齊賢之贊其餘則令輔臣 分撰忠臣烈女之詩 亦令文臣 分製編訖(『삼강행실도』 서(序) 중에서)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세종 10년의 기록에서 변계량이 제안한 ‘효행록’ 제작이 고려 때 제작된 『효행록』의 증보본 제작을 말한 것이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새로 편찬한 ‘효행록’을 『삼강행실도』라고 이름붙이면서, 각각 이야기의 그림과 행장 뒤에 붙인 시(詩)와 찬(贊)에, 권보 부자가 지은 『효행록』의 찬(이제현이 지음)을 가져다 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고려의 『효행록』을 편찬한 권보가 『삼강행실도』 서문을 쓴 권채의 고조할아버지였기에 더욱 성실히 이루어졌겠으나, 『효순사실』을 참고한 서적이므로 요긴하게 쓰여진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효자도가 가장 먼저 나오고, 충신도, 열녀도의 순서로 나오는데, 효자를 충신 앞에 편집한 것도 세종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식이 아비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백성을 가르치고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된 것들을 참고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한 바와 같이, 실로 방대한 중국의 정사(正史)들을 참고하였으며, 특히 중국 역사서의 ‘열전(列傳)’과 비교해 보면 그 원문을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을 만큼 비슷한 문장이 많다. 더욱이 효자편은 중국의 『효순사실』과 고려의 『효행록』에서 인용하여 편찬하였고, 체재도 두 책을 따라 행적 기록 끝부분에 시(詩)와 찬(贊)을 넣되, 앞의 두 책에 기록된 시찬이 있으면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했다. 충신편과 열녀편에 대해서는 앞선 간행 책이 없어 정사(正史)와 기타 안팎의 많은 책에서 수집하여 기록하였고, 시와 찬도 모두 새로 쓴 것이라 적고 있다. 시와 찬을 인용했다는 『효순사실』의 전체 목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009)

『효순사실(孝順事實)』(명 성조(태종)인 영락 18년(세종 2, 1420) 간행. 인터넷 대만 국가도서관에서 원전을 열람함.

제1권제2권제3권제4권제5권제6권제7권제8권제9권제10권
1. 虞舜大孝 2. 文王問安 3. 武王達孝 4. 漢王嘗藥 5. 伯奇履霜 6. 考叔遺羹 7. 曹參養志 8. 閔損單衣 9. 子路負米 10. 伯兪泣杖 11. 老萊斑衣 12. 子春傷足 13. 剡子鹿乳 14. 蔡順桑椹 15. 劉平感盜 16. 王琳守冢 17. 江革巨孝 18. 蕭固孝謹 19. 彭修扞賊 20. 廉范負骨 21. 姜詩出鯉 22. 黃香扇枕1. 周磐祿養 2. 薛包灑婦 3. 董永貸錢 4. 丁蘭刻木 5. 申屠哀感 6. 蔡邕廢寢 7. 杜孝寄魚 8. 子華守母 9. 陸績遺橘 10. 李密終養 11. 王祥剖冰 12. 王衰廢詩 13. 夏方遭癘 14. 孟宗泣竹 15. 庾衷躬稼 16. 盛彦泣螬 17. 劉般夢粟 18. 王延躍魚 19. 許孜埋獸 20. 范宣幼孝 21. 卞眕赴難1. 何琦息火 2. 法宗求骸 3. 丘傑感靈 4. 潘綜救父 5. 王彭泉湧 6. 原平傭作 7. 賈恩捄棺 8. 吳逵葜親 9. 頤之悲戀 10. 匡昕活母 11. 齊人號絶 12. 子平營葬 13. 道愍求母 14. 虛之感神 15. 張稷憂疾 16. 叡明冰淚 17. 黙婁誠禱 18. 叔謙訪藥 19. 元卿心痛 20. 子鏘斷尊 21. 崇傃行服1. 운공귀조 2. 순구고졸 3. 길분대부 4. 자여퇴수 5. 사미감송 6. 효서획침 7. 사윤감몽 8. 숙방치오 9. 견념식부 10. 회명수성 11. 불해봉시 12. 위정우관 13. 숙수면익 14. 소려지애 15. 완탁식풍 16. 효극걸식 17. 서분독경 18. 명철력경 19. 장손상서 20. 문공배묘 21. 실달보구1. 양인추복 2. 장승음수 3. 왕숭지포 4. 덕림창유 5. 육앙애훼 6. 육정공어 7. 진족효애 8. 언광획약 9. 석가효덕 10. 도비부모 11. 축인마무 12. 덕무훼척 13. 士儁감수 14. 보림호견 15. 덕효단쇄 16. 화추효감 17. 효숙도상 18. 효의사절 19. 숙재언식 20. 노조순모 21. 지관불망1. 소현청골 2. 계전수필 3. 허단격수 4. 경신현친 5. 경분심계 6. 인걸망운 7. 현위봉교 8. 일지발백 9. 구령상응 10. 법신우색 11. 지도곡묘 12. 가순치서 13. 백회감우 14. 두양감친 15. 임찬명반 16. 사정몽모 17. 요노전양 18. 맹희득금 19. 연경수율 20. 곽종기수1. 고척근천 2. 후의용신 3. 대우명목 4. 허유체읍 5. 이약안친 6. 행도획궐 7. 조반여묘 8. 구양수정 9. 이기야기 10. 서적매행 11. 수창심모 12. 지절감화 13. 공민와관 14. 하후몽약 15. 희교치상 16. 사마순례 17. 소공구모 18. 고등효충 19. 이식효의 20. 양정어여1. 악비충효 2. 윤문효용 3. 여령생지 4. 주태우호 5. 선응순효 6. 두의도선 7. 오이면와 8. 곽의거유 9. 수도유모 10. 수손이사 11. 진안대명 12. 몽룡효경 13. 樊연대사 14. 왕윤포부 15. 희헌순고 16. 소손수상 17. 이무종명 18. 일덕귀양 19. 황무몽부 20. 사총저목 21. 양목감천 22. 왕천익수1. 종의고분 2. 서옥옹부 3. 왕용로처 4. 총존구어 5. 응상격안 6. 곽전효우 7. 덕정감사 8. 강겸화린 9. 왕남고천 10. 소조위부 11. 극기면병 12. 주악동사 13. 손앙구친 14. 탕상곡빙 15. 오우탈도 16. 명삼척호 17. 왕중배정 18. 이영윤저 19. 종노매점 20. 장십배모 21. 왕흥와빙 22. 중례거황1. 숙선침강 2. 여승애손 3. 이씨분상 4. 담씨빈효 5. 이씨거상 6. 장씨곡부 7. 왕씨천장 8. 양향액호 9. 장씨척천 10. 담녀태척 11. 요씨효절 12. 왕씨치가 13. 양자감성 14. 조부필자 15. 문씨양고 16. 견씨심경 17. 유씨효고

『효순사실』은 세종 때 명나라 태종(영락제)이 보내온 책으로, 명나라 태종이 쓴 ‘어제효순사실 서’에는 영락 18년(세종 2, 1420)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표에서처럼, 이 책은 모두 10권 207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70여편이 『삼강행실효자도』에 나온다. 다만 『삼강행실도』의 ‘문제상약(文帝嘗藥)’이 『효순사실』에는 본디 ‘한왕상약(漢王嘗藥)’이었고, ‘악정상족(樂正傷足)’이 ‘자춘상족(子春傷足)’이었으니 조금 수정되긴 하였으나, 그밖에는 대다수가 제목까지도 같다.

그런데 처음 세종이 신하들에게 명을 내릴 때부터, 『삼강행실도』의 반포 교지와 전(箋), 서문, 발문까지 어떤 기록에도 ‘열녀(烈女)’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이십사효(二十四孝)』나 『시경(詩經)』, 『예기(禮記)』, 『효순사실』, 고려 권보의 『효행록』까지를 거론하면서도 ‘효자, 충신’만 거론할 뿐 ‘열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삼강행실열녀도』의 내용을 보면 많은 인물이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과 송대(宋代)의 『고열녀전』, 명나라 초기 영락제 때 간행된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등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고금열녀전』을 우선적으로 참조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열녀전’이란 말을 거론한 적은 없다. 이것은 ‘열녀전’보다는 그 열녀(列女)들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서, 즉 중국의 여러 사서(史書)의 열전(列傳)을 근본으로 하였다는 주장을 은연중에 강조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열녀도 110편의 출처를 모두 살펴보면 『고열녀전』과는 16편만이 겹칠 뿐이며, 명나라 때 『고금열녀전』에서 선택적으로 뽑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오륜행실도』(『삼강행실도』 언해본)와 『고열녀전』은 6편만이 겹칠 뿐이다.

『삼강행실도』가 『삼강행실록』이 아님은, 이야기를 그린 그림을 새겨 맨앞에 놓고, 그 뒤에 글을 새겨 놓아 글 모르는 사람도 그림을 보고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즉 글보다 그림을 강조한 제목이다. 또한 인물이 중국사람이면 중국의 의식주를 따라 그렸고, 왜인(倭人)이면 왜의 복장과 두발 등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는지를 알게 하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에 따른 여러 장면을 한 그림 속에 몇 개로 쪼개어 그 흐름대로 그려 넣은 것은, 시간을 달리하는 여러 장면을 한 그림 속에 표현하되 시간차를 내타낸 것이다. 예를 들면 대문 바깥, 대문안 마당, 집안 등으로 화면을 가로 잘라서 사람들을 배치하고 그것으로 다른 장면을 표현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중국의 유사한 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방법으로서, 중국의 책에서는 한 쪽의 윗부분에 그림을, 아랫부분에 글을 싣는 형식이었다. 후대 명청 시대에 가서야 그림이 강조되었는데, 유명한 지부족재장판(知不足齋藏版) 『열녀전(列女傳)』(1779)은 첫 쪽을 비어두고, 둘째 쪽과 셋째 쪽에 걸쳐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림을 펼쳐 보는 효과를 얻도록 하였고, 그림 뒤쪽부터 글을 실었다.

세종 16년(1434)에 반포된 초간본의 인쇄는 극히 제한된 부수만 찍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간본은 용지 관계도 있지만 수요가 제한되어 있어서 특별 관판(官版) 이외는 지역 수요자를 위한 한정판이었고, 관판의 경우도 대개는 각 관서와 관원들에게 반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특히 널리 읽혀야 할 책이거나 오래 보존되어야 할 책은 각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관간본(官刊本)을 복각하거나 재간행케 하는 것이 관례였으니, 그래서 정부 활자본의 경우도 활자본의 주요 기능은 지방에서의 복각을 위해 적은 부수만 신속히 최소 비용으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주010)

삼강행실도(한문본) 해제, 김원용, 1982.
그러나 언해본이 나온 뒤로는 읽기 힘든 한문본이 급격히 사라져 현전하는 한문본은 한두 편 뿐이다. 다만 세종 때 펴낸 한문본의 원판이 내용을 대폭 줄인 언해본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니, 이것은 세종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려는 후대 임금들의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한문본은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백성의 윤리서로서 본보기가 되었고, 백성의 생활 규범과 사회 질서의 초석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후대의 여러 행실도의 기틀이 되었다.

2) 『삼강행실도』(언해본)

성종 20년(1489) 6월, 경기관찰사 박숭질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세종조에는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해서 민심을 선도하였는데, 이제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비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일반이 읽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축소하되 목판 인쇄는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성종이 즉석에서 이를 받아들여 내용을 추려 1책으로 산정본(刪定本)을 간행케 명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한문본에서 효·충·열 각 35명씩 모두 105명만을 뽑아 산정하고 언해하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는데, 이 간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를 다시 인출한 중종 5년(1506) 간행본이 영국 런던대학교에 소장되어 전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역주본(2010)을 간행한 바 있다. 이 한문본과 언해본은 그 판본이 같은 목판본으로, 언해본은 다만 한문본 목판의 이마 부분에 언해문을 덧새겨서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한문본의 효자, 충신, 열녀 330명에서 각각 35명씩 뽑아 모두 105명, 즉 원래 한문본 3권 3책인 것을 1책으로 대폭 축소하여 펴낸 것이다. 주011)

『삼강행실도』(언해본) 해제(김정수, 2010) 참조.
이 중종 때의 간본 『삼강행실도』(언해본)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세종 때 한문본이 완성된 뒤에 이미 언해 작업을 착수하여 성종 때에 완료된 것임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즉, 『용비어천가』 등 초기 문헌의 표기와 비슷한 언어 형태가 보이고, 한글의 자형은 『월인석보』와 같다. 그리고 방점과 ‘ㅸ, ㅿ, ㅆ, ㆅ’ 자가 쓰이기도 하였다. 주012)
『한글문헌 해제』(박종국, 2003) 153쪽 참조.

3)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세종이 명하여 처음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그뒤 여러 형태의 다른 책들로 계승되어 간행되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강행실도』(한문본) - 세종 16년(1434) : 효자, 충신, 열녀 각 110인씩 330인의 행적과 그림.

『삼강행실열녀도』(언해본) - 성종 12년(1481) : 한문본의 산정본, 효충열 각 35인씩 105인의 행적과 그림.

『삼강행실도』(언해본) - 성종 21년(1490) : 한문본의 산정본, 효충열 각 35인씩 105인의 행적과 그림.(우리나라 사람은 효자4,충신6,열녀6 등 16명임)

『삼강행실도』(언해본) - 중종 5년(1506) : 원간본(성종 21년)의 재인출. 교서, 서문, 발문 등이 빠짐.

『속삼강행실도』 - 중종 9년(1514) : 한문본에 빠진 사람을 추가한 69인의 행적과 그림.

『이륜행실도』 - 중종 13년(1518) : 형제, 종족, 붕우, 사생 등을 모아 엮은 48인의 행적과 그림.

중간본 『삼강행실도』(언해본) : 중종 6년(1511), 중종 9년(1520), 명종 9년(1554), 선조 14년(1581), 선조 39년(1606), 영조 5년(1729), 고종 19년(1882) 등. 주013)

중간본 『삼강행실도』(언해본)에 대한 것은 『한글문헌학』(백두현, 2015) 247쪽에서 인용함.

중간본 『속삼강행실도』 - 선조 14년(1581), 영조 3년(1727) 등

중간본 『이륜행실도』 - 선조 13년(1579), 영조 3년(1727), 영조 6년(1730) 강원감영판본 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광해군 9년(1617) : 1,515인+부록(삼강행실도 16인+속삼강행실도 56인 발췌) 등 1,587인.

『오륜행실도』 - 정조 21년(1797) : 삼강행실도(언해본)와 이륜행실도의 합본이지만 그 언해문은 새로 번역한, 150인의 행적과 그림.

여기서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자.

『속삼강행실도』는 중종의 명에 따라 신용개(申用漑) 등이 중종 9년(1514)에 간행한 1책의 목판본으로서, 『삼강행실도』(한문본)에 빠진 사람을 찾아 추가로 간행하였다고 하지만, 체재는 언해본과 같이 본문 윗면에 언해문을 새겼다. 원문에는 시(詩)와 찬(讚)을 붙이고, 1장에 한 사람씩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 모두 69인의 사적을 수록・언해하였는데,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 사람은 효자 33인, 충신 2인, 열녀 20인으로 모두 55인이고, 명나라 사람은 효자 3인, 충신 3인, 열녀 8인으로 모두 14인이니, 『삼강행실도』보다는 우리나라 사람이 좀더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륜행실도』는 중종 13년(1518) 김안국(金安國)이 편찬한 책이다. 강혼(姜渾)이 쓴 서문에 의하면, 당시 승정원의 승지로 있던 김안국이 건의하니 중종이 이를 받아들여 왕명으로 편찬하려 했으나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멀어지게 되어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지금의 경북 김천)에 은거하고 있던 전 사역원정 조신(曹伸)에게 편찬케 하였으니, 이때 김안국은 집필과 편집 등을 맡았고 조신이 이를 받아 금산에서 인쇄,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안국의 행장(行狀)에 기록된 것을 보면, 중종 11년(1516)에 상계(上啓)한 내용에서 그가 건의한 내용은 『삼강행실도』의 인간(印刊)이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큰 성과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나서, 그렇지만 『삼강행실도』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두 가지 규범은 삼강과 함께 오륜이 되므로 제외할 수 없는 인륜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안국은 이미 이때부터 장유와 붕우의 윤리 내용을 『삼강행실도』에 보충하여 『오륜행실도』를 편찬 반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주014)

<원주>≪慕齋集≫ 권15. 〈先生行狀〉 今上十一年 丙子 公啓曰 祖宗朝 撰三綱行實 形諸圖畵 播之歌詠 頒諸中外 使民勸習 甚盛意也 然長幼朋友 與三綱兼爲五倫 以長幼推之敦睦宗族 以朋友推之鄕黨僚吏 亦人道所重不可闕也 以臣迂濶之見 當以此二者 補爲五倫行實 擇古人善行 爲圖畵詩章 頒諸中外 敦勵而獎勵之 上深然之.

주015)

이륜행실도 해제, 김문웅(2010) 참조(재인용).
이러한 사실은 『오륜행실도』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유교적 윤리 교육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삼강’만으로는 부족함이 대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륜행실도』가 주인공 48명 주016)
한(漢)나라 12명, 당(唐)나라 10명, 송(宋)나라 10명, 원(元)나라 5명, 진(晉)나라 4명, 주(周), 촉(蜀), 남송(南宋), 위(魏), 후위(後魏), 북제(北齊), 수(隋)나라 각각 1명씩이고, 우리나라 사람은 없다.
모두 중국인이란 점에서, 『속삼강행실도』에서 보여주었던 우리나라 사람 위주로 편찬한 주체적 인식이 퇴보된 느낌을 준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띠었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언해문을 본문 안에 원문과 나란히 이어 붙였고, 우리나라 인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게 되었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광해군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를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으로 되어 있는데,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사람 73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는데,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이 책이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우선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서 ‘동국 사람’만 뽑아 함께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속편(續編)의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그런 반면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모두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으로써,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속삼강행실도』에서부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속삼강행실도』가 명나라 사람 14명에 비교해 조선 사람이 월등히 많은 55명이나 실었다는 것이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음으로써,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었고, 인쇄하여 제책하였을 때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함께 인물의 행적을 집약시킨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재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재, 즉 그림과 글을 한 쪽의 위아래에 함께 실은 것과는 다른 체재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 의식과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수록하여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도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음으로써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음도 주목할 일이다. 주017)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2015) 참조.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원전 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문헌을 인용한 지금까지의 행실도류는 그 원전이 중국 사서 어딘가에 있고, 그 원전을 조금 줄이긴 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문장 그대로를 인용하였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모든 사람이 조선 사람뿐이기 때문에 그런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진다면 앞의 행실도들은 인용서 또는 모아 엮은 책이지만 이 책은 창작한 책이라는 특징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속삼강행실도』의 조선인 55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인 14인보다 많은 수량이며 그들 이야기는 창작이긴 하나 책 전체가 창작물은 아니다.

5) 『오륜행실도』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합본 형태로 간행된 것이다. 정조의 명에 따라 이병모(李秉模), 윤시동(尹蓍東) 등이 두 책을 합하여 정조 21년(1797)에 정리자(整理字) 주018)

정조 19년 『정리의궤』를 찍기 위해 만든 활자. 생생자(生生字)를 본으로 만들었는데, 중국의 『사고전서』의 강희자전체다.(손보기, 『금속활자와 인쇄술』 261쪽 참조)
로 새로 찍어 간행하였다. 권5의 끝에는 발문(跋文)이 붙어 있는데 『오륜행실도』를 주자소(鑄字所)에서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하여 반포케 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동활자인 정리자로 된 부분은 각 본문의 한문 원문일 뿐이고 그 언해문은 목활자로 되어 있다. 이 목활자의 글자체는 개화기에 들어 서양식 신식 인쇄의 활자 제작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삼강행실도』가 편찬된 이래 이륜을 더해 오륜에 대한 행실도를 내고자 한 시도는 이미 앞서 말한 대로 중종 11년(1516)에 김안국이 임금에게 제안했던 적이 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280여년이 지난 뒤에야 『오륜행실도』가 간행된 것이다. 사실상 김안국의 제안이 비로소 이루어진 셈이다.

정조 21년 정월 초하루 정조가 내린 윤음(綸音) 주019)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1797) 1월 1일에 내린 윤음에 따르면, ‘… 그리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같은 책도 정치를 돕고 세상을 권면하는 도구로서 『소학』과 함께 버릴 수 없는 책이므로, 하나로 정리하여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라고 명명하였다. … 세종(世宗)의 융성하던 시절에 양로연(養老宴)을 처음으로 실시하고,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라고 하였으니, 이미 이전부터 편찬이 시작되었고 이때 집필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에 따라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같은 해 7월 실록에, ‘주자소(鑄字所)에서 오륜행실(五倫行實)을 인쇄하여 올렸다.’ 주020)
정조실록 47권, 정조 21년(1797) 7월 20일 ‘鑄字所印進五倫行實’.
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7월 20일까지는 인쇄가 완료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기록을 보면, 세종 때 『삼강행실도』가 100여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021)
위의 7월 20일 기록에 이어서, ‘世宗朝 命集賢諸臣 蒐閱古今傳記 得孝子忠臣烈女之卓然者 百有餘人 圖形於前 紀實於後 刊頒中外 俾補風敎 今所傳三綱行實是也’라고 하였다. 처음 한문본 『삼강행실도』 서문의 ‘各百有十人’을 혼동한 듯하다.
이때까지 남아있던 책은 성종 때의 언해본 『삼강행실도』이며, 세종 때의 한문본 『삼강행실도』는 이미 전해지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한문본은 효충열 각각 110인씩 330명이기 때문이다. 또 『오륜행실도』의 제1, 제2, 제3권의 체재도 언해본 『삼강행실도』와 같다는 것은 더욱 이를 증명해 주는 일이다.

이 책이 두 책을 합본한 형태이긴 하지만 『삼강행실도』의 내용 중 효자 2인(곽거매자(郭巨埋子), 원각경부(元覺警父))의 이야기가 빠져 있고, 열녀도 ‘이씨감연(李氏感燕)’이 ‘왕씨감연(王氏感燕)’으로 성이 바뀌는 등, 차례가 조금씩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륜행실도』에서는 수록 순서를 ‘형제, 종족, 붕우, 사생’으로 나누어 실은 반면 『오륜행실도』에서는 오륜에 맞추어 ‘형제’와 ‘붕우’를 제4권에, ‘종족’과 ‘사생’을 제5권에 두어 차례를 달리하였다. 또한,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삼강행실도』(언해본)는 현재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를 다시 인출한 중종 5년(1506) 간행본이 영국 런던대학교에 소장되어 전하는데, 런던대학교 소장본에는 서문과 발문이 없이 목록과 본문만 있다. 그런데 『오륜행실도』에 정조의 ‘어제 윤음’을 비롯하여 ‘오륜행실도 서문’과 함께, ‘삼강행실도 서문’과 ‘이륜행실도 서문’, ‘오륜행실도 발문’까지를 모두 싣고 있어 그 자취를 한꺼번에 다 알 수 있게 하였다. 『오륜행실도』의 한문 원문은 『삼강행실도』와 똑같지만, 이를 번역한 언해문은 새로 언해한 것이며, 그림과 글씨도 모두 새로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한문을 재해석하고 그림도 새로운 해석에 맞추어 다시 그린 것이다.

이상의 여러 행실도류 책을 비교하여 분석한다면 원문의 변화, 언해문 해석의 차이, 글자와 문장의 변화, 인쇄 방법의 변화,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림 속에 새겨진 사람의 옷차림이나 의식주(衣食住) 양식의 변화까지 조선 시대의 모든 분야의 변천을 알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 아닐 수 없다.

6) 행실도 그림의 의미와 체재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나라의 행실도류는 우선 그림을 먼저 새겨 놓은 뒤 이어서 한문 원문을 새기었고, 이를 번역한 언해문을 그림의 머리 부분에 새기거나 한문 원문과 나란히 본문에 이어 새겼다. 당시 한문을 모르는 대다수 백성들에게 유교적 윤리 교화를 위해서는 그림보다 더 나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실도류는 새로운 간행 방법이었고, 더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제작 의도가 담겨 있는 간행물이라 할 수 있다. 한 그림 속을 서너 등분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겨 넣었고, 그림 옆쪽에 한문 원문을 새겨서 바로 그림과 함께 그 내용을 파악하게 하였다. 나아가 그 원문을 언해하여 누구나 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글을 잘 모르는 백성들까지 교화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인 임금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행장의 인물이 중국사람이나 왜인이면 그림 속 그들의 생김새나 의복, 가옥 등도 그대로 따라서 그렸고, 자연이나 수목들도 현실감 있게 그렸기 때문에 사회상의 역사적 흐름을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은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안견(安堅) 등이 그렸을 것이고, 주022)

「삼강행실도에 대하여」(김원용, 1982, 『삼강행실도』 5쪽)에는, ‘안견, 최경, 안귀생, 배련 등’을 추정하고 있다.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작가는 기록이 없으나 『이륜행실도』는 편찬 실무자 전 사역원정 조신(曹伸)이거나 그의 지친이었을 것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내용이 방대하여 김수운(金水雲), 김신호(金信豪), 이징(李澄), 이신흠(李信欽)이 나누어 그렸으며, 『오륜행실도』는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가 그렸다고 한다. 주023)
정병모(2000), 『한국의 풍속화』 149~181쪽 참조.

그런데 사실은, 그림을 삽입하여 사람의 행실을 엮는 방식은 이미 중국에서 시작된 형식이며, 더욱이 조선 태종 때(1404) 명나라 영락제의 명으로 제작된 『고금열녀전』(1403)이 간행된 지 1년만에 600여권이나 조선에 직수입된 사실은, 『삼강행실도』 간행에 내용과 체재 면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해 준다. 중국은 후한의 유향이 지은 『열녀전』 7권에다가, 남송(南宋) 때 채기(蔡驥)가 한나라 이후 여성들을 모아 권8을 추가하여 새로 엮은 『신편고열녀전(新編古列女傳)』(1214) 주024)

채기가 쓴 『신편고열녀전』 목록서(目錄序) 끝에 ‘가정 칠년(嘉定七年)’이라고 적혀 있다. 가정 7년은 서기 1214년이다.
을 내면서 고개지(顧愷之)의 그림을 삽입하였는데, 그 형태는 ‘상도하문’이었다. 또 청나라 초기의 『열녀전』(1778)은 앞쪽을 공백으로 그냥 두면서까지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다.

〈남송 때 『신편고열녀전』(1214)의 편집 체재〉

〈세종 『삼강행실도』(1434)의 편집 체재〉

〈세종 때 『삼강행실도』(1434)〉

〈성종 때 『삼강행실도』(1475)〉

〈중종 때 『이륜행실도』(1518)〉

〈청나라 초기 『열녀전』(1779)의 편집 체재〉(*책을 펼쳐서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앞쪽을 비어두고 시작하였다.)

〈조선 정조 때 『오륜행실도』(1797)의 편집 체재〉

2. 열녀전의 다양성

1) 「열녀전」의 유래

중국은 오래전부터 여성의 교화를 위한 책이 다양하게 간행되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여성과 관련된 책은, 유향의 『열녀전』, 반소의 『여계』, 『송사열녀전』, 『원사열녀전』, 『고금열녀전』, 채옹의 『여훈』과 『여효경』, 『내훈』, 『안씨가훈』, 『시경』, 『서전』, 『예기』, 『주역』, 『여사서』 등 중국 서적을 전범적인 교화서로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한글 창제 후 우리말로 번역한 조선에서의 여성 수신 교훈서로는, 『삼강행실도』를 비롯한 여러 행실도류와 함께, 성종 6년(1475)에 소혜왕후가 『열녀전』, 『소학』, 『여교』, 『명황계감』에서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편찬한 『내훈』과, 중종 27년(1532)에 최세진이 조태고의 『여훈』을 언해한 『여훈언해』에 이어, 영조 12년(1736)에 중국의 4대 여훈서를 언해한 『여사서언해』 및 융희 원년(1907) 이를 개간한 개간본 『여사서언해』, 영조 대 『어제내훈』 등이 있었다. 주025)

『역주 여사서언해』, ‘여사서언해 해제’, 이상규(2014) 참조.

그 가운데서도 중국 한나라 때의 유향(劉向, 서기전77~6) 주026)

<정의>유향은 전한(前漢)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 서기전247~195)의 후예다. 본명은 경생(更生)이고, 자는 자정(子政)이다. 그는 황실 종친으로서 30여 년간 관직생활을 했는데, 황궁의 장서고(藏書庫)였던 석거각(石渠閣)에서 수많은 서적을 정리, 분류, 해제하는 일을 했던 것이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 또 오경(五經)의 강론과 찬술에 온 힘을 쏟아 경학, 사학, 문학, 목록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식이 여성의 행적이나 유형을 다양하게 수집 정리할 수 있게 한 것이다.(『열녀전』(이숙인 역주, 2013, 글항아리) 해제 참조)
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은 동양의 여성 수신 교훈서로서는 효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고려 말 정추(鄭樞)의 문집에 『열녀전』이라는 책 제목이 확인되는바, 적어도 고려 말에는 이 책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전』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유통된 시기는 조선 초부터이다. 『태종실록』 태종 4년(1404) 기사를 보면, 3월에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110부를 가져왔고(3월 27일 기사), 11월에 추가로 500부를 받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11월 1일 기사). 『고금열녀전』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명에 의해 영락 원년(1403)에 해진(解縉) 등이 편찬한 책으로, 유향의 『열녀전』과, 한대(漢代) 이후에 나온 역대 사서(史書)의 열전(列傳)에 실린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선별하여, 3권으로 펴낸 것이다. 황제의 명으로 간행된 『고금열녀전』이 간행된 바로 다음 해에 무려 600부 이상이나 조선에 유입되어 유통되었던 것이다. 이 『고금열녀전』의 유입이 세종의 『삼강행실도』 간행에 영향을 주었음은, 그 두 책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 중종 때(1543~1544) 간행된 『고열녀전(언해)』은 바로 유향이 처음 지었던 『열녀전』과 명나라 영락제가 명하여 다시 엮은 『고금열녀전』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여기에 우리말 번역을 붙인 새로운 형태의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주027)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 열녀전』, ‘해제’, 국립한글박물관(2015) 참조.

예컨데 여성 수신 교훈서의 또다른 맥을 형성하고 있는, 한문본 『여사서(女四書)』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왕진승(王晉升; 1662~1722)이 간행한 책인데, 이 책은, 후한의 조태고(曹大家) 반소(班昭)가 지은 『여계(女誡)』, 당나라 송약소(宋若昭)가 지은 『여논어(女論語)』, 명나라 영락제의 황후(인효문황후)가 지은 『내훈(內訓)』과 명나라 왕절부 유씨(王節婦劉氏)가 지은 『여범첩록(女範捷錄)』을 묶어 엮은 것으로서, 왕절부 유씨의 아들인 청나라 왕진승이 어머니의 글(여범첩록)에 다른 세 편의 글을 더하여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곧바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영조의 명으로 이덕수(李德壽)가 언해하여 『여사서언해』를 영조 13년(1737)에 개주갑인자 활자로 간행하게 된다. 그러나 『여사서』가 『삼강행실도』(1434)보다 3백년이나 뒤에 간행된 책이므로 『여사서』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던 『여계』나 『여논어』, 『내훈』을 개별적으로 참고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들 책의 관계는 원문이 완전 일치하는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효행, 충의, 열녀의 중국 사실이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이처럼 중국의 고대 때부터 여성의 행실에 대해 소개하는 책들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것들이 우리나라에 곧바로 수입되어 특히 조선시대 유교 숭상 정책에 편승하여 행실류뿐만 아니라 고전소설류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2) 열녀전의 내용과 변화

국립한글박물관이 출판한 ‘소장자료총서2’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 열녀전』(2015) ‘해제’에 따르면, 이 자료는 조선 중종 38년(1543) ~39년(1544) 사이에 간행된 『고열녀전(古列女傳)』(언해본)이 그 대상본인데, 이 책은 목판본으로, 모두 8권이었지만 현재 발견된 것은 권4 「정순전(貞順傳)」 한 권뿐이라고 한다. 이 한 권에는 그림, 한문, 언해문의 순서로 구성된 15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문장 실력이 뛰어난 문인 신정(申珽)과 유항(柳沆)이 번역하고 당대 명필이었던 유이손(柳耳孫)이 글을 썼으며, 조선 전기 인물화로 명성을 떨친 화가 이상좌(李上佐)가 그린 미려한 판화 13점도 포함되어 있다. 주028)

어숙권 『패관잡기(稗官雜記)』[4]의 기록(‘고열녀전 언해본 해제’(2015)에서 참조함).
이 언해본의 원전인 『고열녀전(古列女傳)』은 중국 한나라 때 사람 유향(劉向)이 편찬한 『열녀전』으로, 그가 살던 때에 두루 전하던 중국 역사상 모범이 될 만한 여성들과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망하게 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일곱 부류로 나누어 담고 있다. 사실 유향이 편찬한 책은 『열녀전』인데, 이후 북송(北宋) 때 사람 소송(蘇頌; 1020~1101)과 왕회(王回; 1023~1065)가 ‘송(頌)’을 추가로 붙여 『고열녀전(古列女傳)』이라고 이름을 지어 펴냈고, 이를 다시 남송(南宋) 때 사람 채기(蔡驥)가 한나라 이후 여성들을 모아 권8을 추가하여 새로 엮은 『신편고열녀전(新編古列女傳)』(1214) 주029)
채기가 『신편고열녀전』 목록서(目錄序)를 쓰면서 그 끝에 ‘가정 칠년 갑술 십이월 초오일(嘉定七年甲戌十二月初五日)’이라고 적었다. 가정 7년은 서기 1214년이다.
을 간행하였으니, 이때 고개지(顧愷之; 348~409)가 그린 그림과 함께 글을 새겨 펴내게 된 것이라 한다. 위의 언해본 『고열녀전』에도 이상좌가 그림을 그렸으면서도 원본 그대로 ‘진(晉)나라 대사마참군 고개지의 그림’이라고 적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개지는 동진(東晉) 때 참군이라는 관직을 얻었던 사람으로, 한나라 사람 유향보다 400여 년이나 지난 시대의 사람이다. 또한 소송과 왕희, 채기라는 사람들이 『고열녀전』이란 책을 엮으면서 그림을 새롭게 삽입하였다고 하지만, 고개지가 살았던 시대와는 650여년이나 떨어진 때에 비로소 그림을 삽입하였다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고개지는 4세기 사람으로서 10세기에 엮어 펴낸 『고열녀전』과 『신편고열녀전』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고개지가 그린 그림이 삽입된 『열녀전』이 이미 고개지 생전에 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설에는 진(晉)나라 사람 고개지가 유향의 『열녀전』 중 일부만 그렸는데, 그 그림이 전해지다가 송대(宋代)나 원대(元代)를 거치면서 다른 사람이 추가로 그림을 그려서 『고열녀전』을 간행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편고열녀전』에 그림이 들어간 것 가운데 유명한 판본으로는 건안(建安) 여씨(余氏)가 근유당(勤有堂)에서 펴낸 책이 있다. 이 책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도광(道光) 5년(1825) 완원(阮元)의 아들 완복(阮福)이 이를 영각(影刻)한 『고호두화 열녀전(顧虎頭畵列女傳)』을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문선루총서(文選樓叢書)”에 실려 있다. 주030)

이러한 사실은, 인터넷 주소 http://ctext.org/zh을 통하여 운영되는 ‘제자백가 중국철학서 전자화계획 도서관’(중국)에 올려진 원전을 열람한 것이다.
속표지에는 ‘『고호두화 열녀전』 남송 여씨본(南宋余氏本) 양주완씨영무 중간(揚州阮氏影橅重刊)’이라고 표기하였으나, 서문에는 ‘고열녀전서(古列女傳序)’이고, 목록에는 ‘신편고열녀전 목록(新編古列女傳目錄)’이라고 적었으며, 본문이 시작되는 제1권은 ‘신간고열녀전(新刊古列女傳) 권지일(卷之一)’이라고 하는 등, 제목이 세 가지나 함께 사용되고 있다. 호두(虎頭)는 고개지(顧愷之)의 자(字)인데, 완씨는 이 책에 실린 것이 고개지의 그림이라 보았던 것이다.

유향이 처음 편찬한 『열녀전』은 말 그대로 ‘여러 여성 이야기[列女傳]’였다. 유향은 한나라 이전의 여러 유명한 여성 106명의 삶을 일곱 가지로 분류하여 책을 편찬하였다. 송(宋) 때의 『고열녀전』은 여기에 한나라 이후 20명을 더하여 126명을 실었다. ‘여러 여성 이야기’에는 모범이 될 만한 부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망하게 한 여성들도 두루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의도는 그 이야기들을 읽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강행실도』에 실린 여성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여성[烈女]’을 중심으로 모았으니, 유향이 뽑은 사람들을 모두 인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향이 『열녀전』 권7에 수록한 얼폐전(蘖嬖傳) 15명은, 이미 『고금열녀전』에서 뿐만 아니라 『삼강행실도』(한문본)에서도 완전히 제외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얼폐전은 ‘나라와 가문을 망친 여성’들을 모아놓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세종 때 『삼강행실도』에는 110편이 있지만, 중국사람이 95명이고 우리나라 사람이 15명이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얼폐전’의 여성들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세종은 중국의 서적을 수입하여 우리의 여성 교육을 위한 유교서적을 편찬하면서, ‘열녀(列女)’ 가운데 ‘열녀(烈女)’만 가려 『삼강행실도』를 지음으로써 더욱 유교적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체재는 이미 태종 때 들어온 중국의 『고금열녀전』에서도 나타났던 시도였다. 한편 세종은 『명황계감(明皇誡鑑)』과 같은 책을 내어 또다른 부류의 여성에 대해 경계하기도 하였는데, 『명황계감』은 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의 미색에 탐닉하다가 정사를 등한시하고 국가를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행태를 경계하기 위해 편찬한 책으로서, 그 내용에 의거하여 후일 세종 자신이 직접 168장 분량의 노랫말을 지어 붙이기도 하였다. 세조는 이 책을 다시 증수하고 언해하여 『명황계감언해』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열녀전(列女傳)』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열녀(烈女)’만을 뽑아내어 『삼강행실열녀도』를 엮으면서 그 제목이 『열녀전(烈女傳)』으로 변하여 정착되었고, 그 내용이 다양한 책에 인용되면서 고착화되었던 것이다.

예컨데, 국립한글박물관이 역주한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 열녀전』이라는 책의 저본인 『고열녀전(古列女傳)』도 본문엔 ‘고열녀전 권4 정순전(古列女傳卷四貞順傳)’으로 시작하면서도, 원본 겉장에는 『열녀전(烈女傳)』이라 적고 있다. 즉 ‘열녀전(列女傳)’과 ‘열녀전(烈女傳)’이라는 이름이 한 책 안에서 혼동하며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책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처음부터 조선사람에겐 오직 ‘열녀(烈女)’만이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정체된 인식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거나, 또는 조선 사회에 직수입된 『고금열녀전』(1403)보다 『삼강행실도』(1434) 「열녀도」의 위력이 더 강력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조선왕조실록』 전체 내용을 찾아보아도 ‘열녀(列女)’라는 말을 쓴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이런 추정을 더욱 가능케 한다.

3) 유향의 『열녀전』과 해진의 『고금열녀전』

중국 한(漢)나라는 후궁과 외척이 권세를 휘두르던 시기였다.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 여후(呂后), 성제(成帝)의 외척 조비연(趙飛燕), 합덕(合德) 자매와 이평(李平) 등이 유명하다. 유향(劉向)은 이런 후궁과 외척 세력이 황실을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하려는 생각으로 『열녀전』을 지었다고 한다. 유씨 왕실의 측근이었던 그는 당대까지 전해지고 있던 여러 문헌에서 여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그러한 시기는 유학을 필요로 하였고, 유학을 지배 이념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높아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원리에 입각해 여성을 정의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열녀전』은 바로 이 가부장적 원리가 중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배태된 텍스트다. 주031)

‘유향의 고열녀전과 삼강행실도 열녀편’(강명관, 2015) 216쪽 참조.
권1은 ‘훌륭한 어머니’, 권2는 ‘현명한 아내’, 권3은 ‘지혜로운 여성’, 권4는 ‘예와 신의를 지킨 여성’, 권5는 ‘도리를 실천한 여성’, 권6은 ‘지식과 논리를 갖춘 여성’, 권7은 ‘나라와 가문을 망친 여성’이다. 이 유향의 책은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역사 사실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송대에 ‘권8 속열녀전’이 추가되어 『고열녀전』이 나오게 된다. 내용을 보면,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국어(國語)』, 『춘추좌전(春秋左傳)』, 『춘추공량전』, 『사기(史記)』 등의 앞선 자료에서 두루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가 효의왕후(孝懿王后) 마씨의 유지를 받들어 해진(解縉) 등에게 유향의 『열녀전』을 본보기로 삼아 새로 편찬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1403)이다.

『태종실록』 4년(1404) 3월 27일 기사에 따르면, 이날 사은사 이빈(李彬)과 민무휼(閔無恤) 등이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명에 전하고 개정을 약속받은 뒤 돌아오면서, 영락(永樂) 2년의 『대통력(大統曆)』 100부와 『열녀전』 110부를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고금열녀전』은 『고열녀전』과, 한대 이후부터 명대 초기까지의 여러 역사서에서 수집한 내용을 합하여, 상권은 역대의 후비(后妃), 중권은 제후와 대부의 처, 하권은 사(士)와 서인(庶人)의 사적을 각각 수록한 책이다. 3월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도 역시 진하사 이지(李至), 조희민(趙希閔)이 황제가 하사한 『고금열녀전』 500부를 더 받아왔다. 중국에서 주는 책은 조선에서 필요할 경우, 대개 번각(飜刻)하기 마련인데 왜 이렇게 많은 부수를 들여왔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 『고금열녀전』에는 『고열녀전』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으며, 권7 얼폐전을 생략한 편집 체재를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가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볼 때, 『고금열녀전』이 우리나라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행실도류 제작에도 그 본보기가 되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고려 때까지 유향의 『열녀전』이 전래되어 읽혔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명나라 영락제가 새로 짓게 한 『고금열녀전』(1403)은 간행되자마자 610부나 되는 방대한 양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역사상 유래 없는 엄청난 물량 공세를 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뒤 조선 세종 때 『삼강행실도』(1434)가 반포됨으로써 그 후 ‘열녀전(列女傳)’이라는 말은 좀체 찾기 힘들고, 중종 때 『고열녀전』이 언해하여 간행되지만 표지에는 『열녀전(烈女傳)』으로 적기까지 이른다. 무엇보다 610권이란 엄청난 물량이 한꺼번에 유입되면서 조선에는 인쇄 출판물에 대한 관심과, 여성 또는 백성의 유교적 교육을 위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에 따른 주자(鑄字) 제조와 인쇄 배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세종 시대의 문화 융성에 기폭제가 되었다고 본다.

4) 여러 중국 『열녀전』의 내용 비교

그럼 여기에서, 『오륜행실도』 「열녀」편 즉, 『삼강행실열녀도』의 내용과 체재에 영향을 준 저본(底本)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하여, 유향의 『열녀전』과 송대(宋代)의 『고열녀전』, 명나라 『고금열녀전』과 청나라 때의 『열녀전』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유향의 『열녀전』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다. 주032)

『신역(新譯) 열녀전(列女傳)』(2003) 삼민서국(대만).

권1 모의전(母儀傳)

1. 유우이비(有虞二妃) 2. 기모강원(棄母姜嫄) 3. 설모간적(契母簡狄) 4. 계모도산(啓母塗山) 5. 탕비유신(湯妃有㜪)

6. 주실삼모(周室三母) 7. 위고정강(衛姑定姜) 8. 제녀부모(齊女傅母) 9. 노계경강(魯季敬姜) 10. 초자발모(楚子發母)

11. 추맹가모(鄒孟軻母) 12. 노지모사(魯之母師) 13. 위망자모(魏芒慈母) 14. 제전직모(齊田稷母)

권2 현명전(賢明傳)

1. 주선강후(周宣姜后) 2. 제환위희(齊桓衛姬) 3. 진문제강(晉文齊姜) 4. 진목공희(秦穆公姬) 5. 초장번희(楚莊樊姬)

6. 주남지처(周南之妻) 7. 송포여종(宋鮑女宗) 8. 진조쇠처(晉趙衰妻) 9. 도답자처(陶荅子妻) 10. 유하혜처(柳下惠妻)

11. 노검루처(魯黔婁妻) 12. 제상어처(齊相御妻) 13. 초접여처(楚接輿妻) 14. 초로래처(楚老萊妻) 15. 초어릉처(楚於陵妻)

권3 인지전(仁智傳)

1. 밀강공모(密康公母) 2. 초무등만(楚武鄧曼) 3. 허목부인(許穆夫人) 4. 조희씨처(曹僖氏妻) 5. 손숙오모(孫叔敖母)

6. 진백종처(晉伯宗妻) 7. 위영부인(衛靈夫人) 8. 제영중자(齊靈仲子) 9. 노장손모(魯臧孫母) 10. 진양숙희(晉羊叔姬)

11. 진범씨모(晉范氏母) 12. 노공승사(魯公乘姒) 13. 노칠실녀(魯漆室女) 14. 위곡옥부(魏曲沃婦) 15. 조장괄모(趙將括母)

권4 정순전(貞順傳)

1. 소남신녀(召南申女) 2. 송공백희(宋恭伯姬) 3. 위선부인(衛宣夫人) 4. 채인지처(蔡人之妻) 5. 여장부인(黎莊夫人)

6. 제효맹희(齊孝孟姬) 7. 식군부인(息君夫人) 8. 제기량처(齊杞梁妻) 9. 초평백영(楚平伯嬴) 10. 초소정강(楚昭貞姜)

11. 초백정희(楚白貞姬) 12. 위종이순(衛宗二順) 13. 노과도영(魯寡陶嬰) 14. 양과고행(梁寡高行) 15. 진과효부(陳寡孝婦)

권5 절의전(節義傳)

1. 노효의보(魯孝義保) 2. 초성정무(楚成鄭瞀) 3. 진어회영(晉圉懷嬴) 4. 초소월희(楚昭越姬) 5. 합장지처(蓋將之妻)

6. 노의고자(魯義姑姊) 7. 대조부인(代趙夫人) 8. 제의계모(齊義繼母) 9. 노추결부(魯秋潔婦) 10. 주주충첩(周主忠妾)

11. 위절유모(魏節乳母) 12. 양절고자(梁節姑姊) 13. 주애이의(珠崖二義) 14. 합양우제(郃陽友娣) 15. 경사절녀(京師節女)

권6 변통전(辯通傳)

1. 제관첩정(齊管妾婧) 2. 초강을모(楚江乙母) 3. 진궁공녀(晉弓工女) 4. 제상괴녀(齊傷槐女) 5. 초야변녀(楚野辯女)

6. 아곡처녀(阿谷處女) 7. 조진녀연(趙津女娟) 8. 조불힐모(趙佛肸母) 9. 제위우희(齊威虞姬) 10. 제종리춘(齊鍾離春)

11. 제숙류녀(齊宿瘤女) 12. 제고축녀(齊孤逐女) 13. 초처장질(楚處莊姪) 14. 제녀서오(齊女徐吾) 15. 제태창녀(齊太倉女)

권7 얼폐전(蘖嬖傳)

1. 하걸말희(夏桀末姬) 2. 은주달기(殷紂妲己) 3. 주유포사(周幽褒姒) 4. 위선공강(衛宣公姜) 5. 노환문강(魯桓文姜)

6. 노장애강(魯莊哀姜) 7. 진헌여희(晉獻驪姬) 8. 노선무강(魯宣繆姜) 9. 진녀하희(陳女夏姬) 10. 제영성희(齊靈聲姬)

11. 제동곽희(齊東郭姬) 12. 위이난녀(衛二亂女) 13. 조령오녀(趙靈吳女) 14. 초고이후(楚考李后) 15. 조도창후(趙悼倡后)

권8 속열녀전(續列女傳)

1. 주교부인(周郊婦人) 2. 진국변녀(陳國辯女) 3. 섭정지자(聶政之姊) 4. 왕손씨모(王孫氏母) 5. 진영지모(陳嬰之母)

6. 왕릉지모(王陵之母) 7. 장탕지모(張湯之母) 8. 준불의모(雋不疑母) 9. 한양부인(漢楊夫人) 10. 곽부인현(霍夫人顯)

11. 엄연년모(嚴延年母) 12. 한풍소의(漢馮昭儀) 13. 왕장처녀(王章妻女) 14. 반녀첩여(班女婕妤) 15. 한조비연(漢趙飛燕)

16. 효평왕후(孝平王后) 17. 갱시부인(更始夫人) 18. 양홍지처(梁鴻之妻) 19. 명덕마후(明德馬后) 20. 양부인예(梁夫人嫕)

원래 유향의 『열녀전』은 위의 목록에서 권7까지만이다. 권8 「속열녀전」은 남송 때 사람 채기가 한나라 이후 전한과 후한의 여성 20명을 모아 추가하여 엮은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위 목록은 『고열녀전』의 목록이다.

다음은 명나라 영락제 때 해진(解縉)이 새로 만든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의 목록이다. 주033)

『고금열녀전』 원본은 버지니아대학(University of Virginia) 도서관 소장본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인용함. 아울러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사부(史部) 제7을 함께 참조함.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권1

우(虞)

1. 유우이비(有虞二妃)

하(夏)

2. 계모도산(啟母塗山)

상(商)

3. 설모간적(契母簡狄)

4. 탕비유신(湯妃有㜪)

주(周)

5. 기모강원(棄母姜嫄)

6. 태왕비 태강(太王妃太姜)

7. 왕계비 태임(王季妃太任)

8. 문왕비 태사(文王妃太姒)

9. 선강후(宣姜后)

전한(前漢)

10. 풍소의(馮昭儀)

11. 반첩여(班婕妤)

12. 효평왕후(孝平王后)

후한(後漢)

13. 광렬음후(光烈隂后)

14. 명덕마후(明徳馬后)

15. 화희등후(和熹鄧后)

16. 문명왕후(文明王后)

당(唐)

17. 태목순성황후 두씨(太穆順聖皇后竇氏)

18. 문덕순성황후 장손씨(文徳順聖皇后長孫氏)

19. 서현비(徐賢妃)

20. 위현비(韋賢妃)

21. 장헌왕후(荘憲王后)

22. 의안곽후(懿安郭后)

송(宋)

23. 장목곽후(章穆郭后)

24. 자성광헌조후(慈聖光獻曹后)

25. 풍현비(馮賢妃)

26. 선인성렬고후(宣仁聖烈髙后)

27. 흠성헌숙향후(欽聖憲肅向后)

28. 헌성자열오후(憲聖慈烈呉后)

29. 성숙사후(成肅謝后)

원(元)

30. 소예순성홍길리후(昭睿順聖鴻吉哩后)

국조(明)

31. 태조 효자소헌지인문덕승천순성고황후(太祖孝慈昭憲至仁文徳承天順聖髙皇后)

고금열녀전 권2

주 열국(周列國)

1. 위고정강(衛姑定姜)

2. 위선부인(衛宣夫人)

3. 위종이순(衛宗二順)

4. 제전직모(齊田稷母)

5. 제상어처(齊相御妻)

6. 제영중자(齊靈仲子)

7. 제효맹희(齊孝孟姬)

8. 제기양처(齊杞梁妻)

9. 제위우희(齊威虞姬)

10. 제종리춘(齊鍾離春)

11. 제숙류녀(齊宿瘤女)

12. 제고축녀(齊孤逐女)

13. 왕손씨모(王孫氏母)

14. 노계경강(魯季敬姜)

15. 유하혜처(栁下惠妻)

16. 장문중모(臧文仲母)

17. 노공승사(魯公乘姒)

18. 송공백희(宋共伯姬)

19. 진조쇠처(晉趙衰妻)

20. 진백종처(晉伯宗妻)

21. 진양숙희(晉羊叔姬)

22. 진범씨모(晉范氏母)

23. 진어회영(晉圉懷嬴)

24. 초자발모(楚子發母)

25. 초장번희(楚荘樊姬)

26. 손숙오모(孫叔敖母)

27. 초평백영(楚平伯嬴)

28. 초소정강(楚昭貞姜)

29. 초소월희(楚昭越姬)

30. 식군부인(息君夫人)

31. 여장부인(黎莊夫人)

32. 조장괄모(趙将括母)

33. 조진녀연(趙津女姢)

34. 위곡옥부(魏曲沃負)

35. 대조부인(代趙夫人)

36. 도답자처(陶答子妻)

37. 개구자처(蓋丘子妻)

전한(前漢)

38. 진영모(陳嬰母)

39. 왕릉모(王陵母)

40. 제태창녀(齊太倉女)

41. 준불의모(雋不疑母)

42. 양부인(楊夫人)

43. 엄연년모(嚴延年母)

후한(後漢)

44. 양부인(梁夫人)

45. 정문구처(程文矩妻)

46. 황보규처(皇甫規妻)

진(晉)

47. 도간모(陶侃母)

48. 양위처(梁緯妻)

49. 우담모(虞潭母)

수(隋)

50. 정선과모(鄭善果母)

51. 배륜처(裴倫妻)

당(唐)

52. 이덕무처(李徳武妻)

53. 초영구비(楚靈龜妃)

54. 고예처(髙叡妻)

55. 양열부(楊烈婦)

56. 동창령모(董昌齡母)

오대(五代)

57. 왕응처(王凝妻)

송(宋)

58. 진성화처(陳省華妻)

59. 사방득처(謝枋得妻)

원(元)

60. 감문흥처(闞文興妻)

61. 풍숙안(馮淑安)

국조(명)

62. 한태초처(韓太初妻)

63. 비우첩(費愚妾)

고금열녀전 권3

주 열국(周列國)

1. 제의계모(齊義繼母)

2. 제상괴녀(齊傷槐女)

3. 노모사(魯母師)

4. 노검루처(魯黔婁妻)

5. 노의고자(魯義姑姊)

6. 송포여종(宋鮑女宗)

7. 진궁공처(晉弓工妻)

8. 채인처(蔡人妻)

9. 추맹가모(鄒孟軻母)

10. 초백정희(楚白貞姬)

11. 소남신녀(召南申女)

12. 위망자모(魏芒慈母)

전한(前漢)

13. 진과효부(陳寡孝婦)

14. 합양우제(郃陽友娣)

15. 경사절녀(京師節女)

16. 양과고행(梁寡髙行)

후한(後漢)

17. 양홍처(梁鴻妻)

18. 조세숙처(曹世叔妻)

19. 왕패처(王霸妻)

20. 악양자처(樂羊子妻)

21. 포선처(鮑宣妻)

22. 오허승처(呉許升妻)

23. 방연모(龎涓母)

24. 유장경처(劉長卿妻)

25. 음유처(隂瑜妻)

원위(元魏)

26. 위부처(魏溥妻)

27. 방애친처(房愛親妻)

28. 아씨정녀(兒氏貞女)

수(隋)

29. 효녀왕순(孝女王舜)

30. 담씨효부(覃氏孝婦)

31. 조원해처(趙元楷妻)

당(唐)

32. 번회인모(樊㑹仁母)

33. 번언침처(樊彦琛妻)

34. 두씨이녀(竇氏二女)

송(宋)

35. 주아(朱娥)

36. 장씨녀(張氏女)

37. 조씨녀(趙氏女)

38. 서씨녀(徐氏女)

39. 왕정부(王貞婦)

40. 담씨부(譚氏婦)

41. 한씨녀(韓氏女)

42. 진당전(陳堂前)

43. 유당가모(劉當可母)

44. 첨씨녀(詹氏女)

45. 왕씨부(王氏婦)

원(元)

46. 조효부(趙孝婦)

47. 유신처(俞新妻)

48. 이지정(李智貞)

49. 이경문처(李景文妻)

50. 조빈처(趙彬妻)

51. 이오처(李五妻)

52. 유사연처(俞士淵妻)

53. 혜사현처(惠士玄妻)

국조(명)

54. 이대처(李大妻)

55. 영씨녀(寗氏女)

56. 장민도처(張敏道妻)

57. 임사중처(任仕中妻)

58. 이충처(李忠妻)

59. 보선경처(步善慶妻)

60. 서윤양처(徐允讓妻)

61. 이무처(李茂妻)

62. 허옹이첩(許顒二妾)

63. 고씨오절부(髙氏五節婦)

64. 부처악씨(傅妻岳氏)

65. 서덕안처(徐徳安妻)

위와 같이 『고금열녀전』은 159명(내용상으로는 162명)이나 되어 『고열녀전』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추가하였다.

〈『고금열녀전』 서문(원본 사진) 주034)

이 『고금열녀전』 원본 사진은 버지니아대학(University of Virginia) 도서관 소장본을 인터넷에서 내려받기 한 것이다. 명나라 태종의 어제서문 끝부분에, ‘영락 원년(1403) 9월 초하루 아침에 서문을 쓰다.’라고 쓰여 있다.

다음은 중국의 구십주(仇十洲)가 그린 그림에 왕도곤(汪道昆, 1525~1593)이 편집한 지부족재장판(知不足齋藏版) 『열녀전(列女傳)』의 목록이다. 주035)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소장본. 인터넷에서 내려받음.
구십주의 이름은 영(英)이고, 자는 실보(實父, 實甫)이며, 십주는 그의 호인데, 1552년에 죽었으나 태어난 때는 알려지지 않은 명나라 중기 때 화가로서 명사대가(明四大家) 중 한 사람이다.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만력 연간(1573~1620)에 왕도곤이 16권으로 편집한 『열녀전』으로서, 청나라 고종(건륭) 44년(1779)에 청나라 사람 포정박이 편집하여 펴낸 총서에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유향의 『열녀전』이 주제에 따라 분류하였다면, 『고금열녀전』은 왕족, 양반, 평민 등 신분별로 권수를 나누어 시대별로 나열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왕도곤의 『열녀전』은 더 많은 사람을 뽑아 그 양에 따라 권수를 나누었지만, 『열녀전』처럼 각각의 제목을 붙여 주제별로 권수를 나누면서도, 『고금열녀전』처럼 각권마다 신분과 시대순으로 편집하였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중국 열녀전 중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판화 작품으로 유명하다.

제1권

1. 유우이비(有虞二妃) 2. 계모도산(啓母塗山) 3. 기모강원(棄母姜嫄) 4. 태왕비태강(太王妃太姜) 5. 왕계비태임(王季妃太任) 6. 문왕비태사(文王妃太姒) 7. 주선강후(周宣姜后) 8. 위고정강(衛姑定姜) 9. 위선부인(衛宣夫人) 10. 위영부인(衛靈夫人) 11. 위종이순(衛宗二順) 12. 제효맹희(齊孝孟姬) 13. 제영중자(齊靈仲子) 14. 제위우희(齊威虞姬) 15. 제종리춘(齊鍾離春) 16. 제숙류녀(齊宿瘤女) 17. 제녀부모(齊女傅母) 18. 제상어처(齊相御妻) 19. 제전직모(齊田稷母) 20. 제기량처(齊杞梁妻) 21. 제고축녀(齊孤逐女) 22. 왕손씨모(王孫氏母)

제2권

1. 제관첩정(齊管妾婧) 2. 제의계모(齊義繼母) 3. 제상괴녀(齊傷槐女) 4. 제녀서오(齊女徐吾) 5. 제섭정자(齊聶政姊) 6. 노계경강(魯季敬姜) 7. 노장손모(魯臧孫母) 8. 노지모사(魯之母師) 9. 노검루처(魯黔婁妻) 10. 노추결부(魯秋潔婦) 11. 노과도영(魯寡陶嬰) 12. 노칠실녀(魯漆室女) 13. 송포여종(宋鮑女宗) 14. 진문제강(晉文齊姜) 15. 진어회영(晉圉懷嬴) 16. 진조쇠처(晉趙衰妻) 17. 진백종처(晉伯宗妻) 18. 진양숙희(晉羊叔姬)

제3권

1. 진범씨모(晉范氏母) 2. 진궁공처(晉弓工妻) 3. 밀강공모(密康公母) 4. 허목부인(許穆夫人) 5. 여장부인(黎莊夫人) 6. 식부인(息夫人) 7. 조희씨처(曹僖氏妻) 8. 주남지처(周南之妻) 9. 소남신녀(召南申女) 10. 주교부인(周郊婦人) 11. 주주충첩(周主忠妾) 12. 채인지처(蔡人之妻) 13. 진국변녀(陳國辯女) 14. 아곡처녀(阿谷處女) 15. 추맹가모(鄒孟軻母) 16. 진목공희(秦穆公姬) 17. 백리해처(百里奚妻) 18. 초무등만(楚武鄧曼) 19. 초성정무(楚成鄭瞀) 20. 초평백영(楚平伯嬴) 21. 초소월희(楚昭越姬) 22. 초처장질(楚處莊姪) 23. 초백정희(楚白貞姬) 24. 손숙오모(孫叔敖母)

제4권

1. 초자발모(楚子發母) 2. 초강을모(楚江乙母) 3. 한사인처(韓舍人妻) 4. 초어릉처(楚於陵妻) 5. 초완포녀(楚浣布女) 6. 구천부인(句踐夫人) 7. 조진녀연(趙津女娟) 8. 조불힐모(趙佛肹母) 9. 조장괄모(趙將括母) 10. 대조부인(代趙夫人) 11. 위절유모(魏節乳母) 12. 개구자처(蓋邱子妻) 13. 과부청(寡婦淸) 14. 우미인(虞美人) 15. 풍소의(馮昭儀) 16. 효평왕후(孝平王后) 17. 광열음후(光烈陰后) 18. 명덕마후(明德馬后) 19. 화희등후(和熹鄧后)

제5권

1. 진영모(陳嬰母) 2. 왕릉모(王陵母) 3. 준불의모(雋不疑母) 4. 양부인(楊夫人) 5. 엄연년모(嚴延年母) 6. 진나부(秦羅敷) 7. 양부인예(梁夫人嫕) 8. 왕사도처(王司徒妻) 9. 주애이의(珠崖二義) 10. 조포모(趙苞母) 11. 강시처(姜詩妻) 12. 서서모(徐庶母) 13. 경사절녀(京師節女) 14. 동해효부(東海孝婦) 15. 합양우제(郃陽友娣) 16. 양절고자(梁節姑姊) 17. 양과고행(梁寡高行) 18. 육속모(陸續母) 19. 서숙(徐淑) 20. 농모조아(龎母趙娥)

제6권

1. 포선처(鮑宣妻) 2. 오허승처(吳許升妻) 3. 유장경처(劉長卿妻) 4. 제태창녀(齊太倉女) 5. 이문희(李文姬) 6. 순양양향(順陽楊香) 7. 숙선웅(叔先雄) 8. 효녀조아(孝女曹娥) 9. 왕경모(王經母) 10. 연단후(燕段后) 11. 양양후(涼楊后) 12. 장부인(張夫人) 13. 유곤모(劉琨母) 14. 도간모(陶侃母) 15. 주서모(朱序母) 16. 양위처(梁緯妻) 17. 우담모(虞潭母) 18. 하후영녀(夏侯令女)

제7권

1. 황보밀모(皇甫謐母) 2. 위경유처(衛敬瑜妻) 3. 양록주(梁綠珠) 4. 의양팽아(宜陽彭娥) 5. 순관(荀灌) 6. 왕씨녀(王氏女) 7. 명공왕후(明恭王后) 8. 곡률씨비(斛律氏妃) 9. 대의공주(大義公主) 10. 세부인(洗夫人) 11. 위유씨처(魏劉氏妻) 12. 종사웅모(鍾仕雄母) 13. 정선과모(鄭善果母) 14. 위부처(魏溥妻) 15. 방애친처(房愛親妻) 16. 조원해처(趙元楷妻) 17. 요씨치이(姚氏癡姨) 18. 담씨부(覃氏婦) 19. 이정효녀(李貞孝女) 20. 예정녀(倪貞女) 21. 왕효녀(王孝女)

제8권

1. 강채빈(江采蘋) 2. 위현비(韋賢妃) 3. 초영구비(楚靈龜妃) 4. 배숙영(裴淑英) 5. 고예처(高叡妻) 6. 진막처(陳邈妻) 7. 당부인(唐夫人) 8. 최원위모(崔元暐母) 9. 유중영모(柳仲郢母) 10. 양열부(楊烈婦) 11. 후씨재미(侯氏才美) 12. 담분처(湛賁妻) 13. 복고회은모(僕固懷恩母) 14. 이일월모(李日月母)

제9권

1. 번회인모(樊會仁母) 2. 정의종처(鄭義宗妻) 3. 경양이씨(涇陽李氏) 4. 적양공자(狄梁公姊) 5. 번언침처(樊彦琛妻) 6. 견정절부(堅正節婦) 7. 정감처(鄭邯妻) 8. 정소란(鄭紹蘭) 9. 강담오구(江潭吳嫗) 10. 주연수처(朱延壽妻) 11. 왕씨효녀(王氏孝女) 12. 가효녀(賈孝女) 13. 두씨이녀(竇氏二女) 14. 장씨이녀(章氏二女) 15. 갈씨이녀(葛氏二女) 16. 목란녀(木蘭女) 17. 관반반(關盼盼) 18. 마희악처(馬希萼妻) 19. 주행봉처(周行逢妻) 20. 맹창모(孟昶母) 21. 화예부인(花蕊夫人) 22. 임공황숭하(臨邛黃崇嘏) 23. 왕응처(王凝妻)

제10권

1. 소헌두후(昭憲杜后) 2. 장목곽후(章穆郭后) 3. 자성조후(慈聖曹后) 4. 풍현비(馮賢妃) 5. 헌숙향후(憲肅向后) 6. 소자맹후(昭慈孟后) 7. 주후(朱后) 8. 자열오후(慈烈吳后) 9. 성숙사후(成肅謝后) 10. 왕소의(王昭儀) 11. 현목공주(賢穆公主) 12. 김정부인(金鄭夫人) 13. 김갈왕비(金葛王妃) 14. 진모풍씨(陳母馮氏) 15. 유안세모(劉安世母) 16. 이호의처(李好義妻) 17. 나부인(羅夫人) 18. 진인처(陳寅妻) 19. 순의부인(順義夫人) 20. 진문용모(陳文龍母)

제11권

1. 오하모(吳賀母) 2. 충방모(种放母) 3. 포효숙식(包孝肅媳) 4. 이정모(二程母) 5. 윤화정모(尹和靖母) 6. 유우처(劉愚妻) 7. 구희문처(歐希文妻) 8. 망성막전(莽城莫荃) 9. 소상촌부(小常村婦) 10. 도단우처(凃端友妻) 11. 진당전(陳堂前) 12. 강하장씨(江夏張氏) 13. 유당가모(劉當可母) 14. 임천양씨(臨川梁氏) 15. 회리오씨(會里吳氏) 16. 한희맹(韓希孟) 17. 여릉소씨(廬陵蕭氏) 18. 임해민처(臨海民妻) 19. 응성효녀(應城孝女)

제12권

1. 조씨녀(趙氏女) 2. 무호첨녀(蕪湖詹女) 3. 서씨녀(徐氏女) 4. 동팔나(童八娜) 5. 여량자(呂良子) 6. 임노녀(林老女) 7. 흡엽씨녀(歙葉氏女) 8. 나애경(羅愛卿) 9. 구첩천도(寇妾蒨桃) 10. 조회첩(趙淮妾) 11. 천태엄예(天台嚴蘂) 12. 가주학아(嘉州郝娥) 13. 굉길랄후(宏吉剌后) 14. 요리씨(姚里氏) 15. 감문흥처(闞文興妻) 16. 풍숙안(馮淑安) 17. 조맹부모(趙孟頫母) 18. 이무덕처(李茂德妻) 19. 장덕신(蔣德新)

제13권

1. 유신지처(兪新之妻) 2. 제남장씨(濟南張氏) 3. 섭정보처(葉正甫妻) 4. 정씨윤단(鄭氏允端) 5. 용천만씨(龍泉萬氏) 6. 대석병후처(戴石屛後妻) 7. 조빈처(趙彬妻) 8. 곽씨이부(霍氏二婦) 9. 유사연처(兪士淵妻) 10. 혜사원처(惠士元妻) 11. 영정절녀(寗貞節女) 12. 자의자씨(慈義紫氏) 13. 정씨축리(程氏妯娌) 14. 주씨부(周氏婦) 15. 왕방처(王防妻) 16. 용유하씨(龍游何氏) 17. 황문오절(黃門五節) 18. 유취가(劉翠哥) 19. 호묘단(胡妙端) 20. 대동유의(大同劉宜) 21. 유씨녀(柳氏女) 22. 진숙진(陳淑眞)

제14권

1. 효자마후(孝慈馬后) 2. 성효장후(誠孝張后) 3. 영왕곽비(郢王郭妃) 4. 영왕루비(寧王婁妃) 5. 화운처(花雲妻) 6. 왕량처(王良妻) 7. 저복처(儲福妻) 8. 도희영처(屠羲英妻) 9. 충민숙인(忠愍淑人) 10. 왕유처(王裕妻) 11. 이묘연(李妙緣) 12. 이묘혜(李妙惠) 13. 인절부(藺節婦)

제15권

1. 한태초처(韓太初妻) 2. 산음반씨(山陰潘氏) 3. 호형화처(胡亨華妻) 4. 고씨오절(高氏五節) 5. 난성견씨(欒城甄氏) 6. 장우처(張友妻) 7. 구녕강씨(甌寧江氏) 8. 방씨세용(方氏細容) 9. 요소사자(姚少師姊) 10. 해대신녀(解大紳女) 11. 해정량처(解禎亮妻) 12. 절효범씨(節孝范氏) 13. 왕소아(王素娥) 14. 정자처(程鎡妻) 15. 추새정(鄒賽貞) 16. 한문병처(韓文炳妻) 17. 태주반씨(台州潘氏) 18. 섭절부(葉節婦) 19. 정문구처(程文矩妻) 20. 유씨쌍절(兪氏雙節) 21. 초시손씨(草市孫氏) 22. 동미처(董湄妻) 23. 정환처(鄭瓛妻) 24. 장송필처(張宋畢妻) 25. 사탕처(謝湯妻) 26. 동성기녀(東城棄女)

제16권

1. 나무명모(羅懋明母) 2. 사계포씨(沙溪鮑氏) 3. 진주저(陳宙姐) 4. 왕응원처(汪應元妻) 5. 보선경처(步善慶妻) 6. 왕정녀(王貞女) 7. 비우처(費愚妻) 8. 허옹이첩(許顒二妾) 9. 방정녀(方貞女) 10. 방열녀(方烈女) 11. 태열녀(態烈女)

명나라 개국 초기인 영락제가 중국의 고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훈육할 목적으로 펴낸 『고금열녀전』이 태종 4년(1404) 우리나라에 610부나 유입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전범서(典範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방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이 책의 내용을 조선 사회에 맞게 걸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중국의 ‘열녀전(列女傳)’이 조선에 들어와 ‘열녀전(烈女傳)’으로 바뀐 것은 책을 낸 목적과 의미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고치거나 각색하지 않고 원문 문장 그대로를 실었고, 다만 부분적으로 내용을 줄이기는 하였으나 편집상 책의 분량을 맞추기 위함이지, 1500여년 동안 이어온 동양 여인들의 옛 이야기를 왜곡하고자 했던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서양의 예수가 나타났던 동시대에 동양에서 간행되었던 유향의 『열녀전(列女傳)』이, 2천년 동안 끊임없이 변형되거나 와전되지 않고 그대로 읽혔다는 것은 사회 규범적이고 이념적인 면에서 동양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교육적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고개지라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크게 효과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양한 여성의 삶의 모습을 편벽되지 않게 적고 있음도 큰 장점 중 하나로 본다. 오히려 조선 초기 실록에서는 ‘열녀전(列女傳)’이라고 말하면서 『고금열녀전』을 상고하지만, 조선 중기 중종 때에 가서는 유향의 『열녀전』에 나오는 ‘칠실(漆室)의 여자’를 인용하고 있다. 주036)

칠실(漆室)의 여자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둥에 의지해서 탄식했다(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 12월 15일 기사) - 『열녀전』 권3 인지전(仁智傳) ‘노칠실녀(魯漆室女)’에 “노(魯)나라 칠실(漆室)이란 고을에 사는 아직 시집가지 못한 처녀가 하루는 걱정하기를 ‘우리 나라는 임금이 늙었고 태자는 어리니 만일 국란이 있으면 임금이나 백성이 모두 욕을 당할 것인데 여자들은 어디로 피할까?’ 했다.” 하였다.
그리고 중종 38년(1543)에 『고열녀전』의 언해본이 간행되었으니 이 언해본은 ‘권4 정순전’이라는 원문으로 보아 유향의 『고열녀전』을 저본으로 삼은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고금열녀전』은 세 권 뿐이고 권별 제목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후대에 가면서 더 정밀한 그림과 더 다양한 여성이 추가됨으로써 생명력을 더욱 높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조선에 들어와서 ‘열녀(烈女)’를 강조하여 여성의 행동을 좀더 경직되게 위축시킨 면은 있으나 인위적으로 내용을 왜곡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고, 광해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같이 모든 백성을 아우르는 국가 통합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로서, 행실도류의 발전이고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중국 『열녀전』들이 『삼강행실도』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알아 보자.

3. 『오륜행실도』 권3 「열녀(烈女)」편의 출처 분석

1)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권3과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관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륜행실도』는 체재상 『삼강행실도』 언해본과 『이륜행실도』를 단순하게 합책(合冊)한 형태이다. 그러나 그 판각은 새로 짰다. 즉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그 한문본 판본의 본문 밖 머릿부분에 언해문을 새긴 것과는 달리, 『오륜행실도』는 본문에 한문과 언해문을 나란히 이어서 새겼고, 물론 그림도 새로 그려서 새로 새긴 한문과 언해문과 함께 새판을 짠 것이다. 언해문이 본문에 나란히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번역소학』(1518)에서부터 볼 수 있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3)도 그러하므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목판본이 한자 금속활자와 한글 목활자로 제작되어 매우 정밀하게 인쇄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사에 기록될 만하다. 그러나 그 원문 내용은 세종의 『삼강행실도』에서 3분의 1(35인)만 발췌하여 간행한 성종의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원문 그대로를 새판에 새김으로써 내용상 변화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은 성종 때 언해한 것과는 달리 새로 번역을 해서 새겼다. 낱말마다 풀어 해석한 방식이 다르고 표기법도 많이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오륜행실도』 권3 「열녀」편의 내용과 출처를 분석하려면, 처음 간행한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한문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여기서는 한문본 『삼강행실열녀도』 전체를 기준으로 삼아, 언해본과 『오륜행실도』 「열녀」편을 비교하고, 아울러 이를 다시 중국의 『열녀전』들과 비교하여, 각각의 출처를 낱낱이 찾아 비교해 보기로 한다.

〈『오륜행실도』 이야기 한 편의 편집 체재〉

① 언해문의 글자와 그림의 새김

『삼강행실열녀도』는 처음 세종 때 간행한 한문본의 목판 인본(木版印本)이 성종 때 그대로 언해본에 쓰였다. 다만 세종 때의 목판 윗부분에 언문 해석을 새겨서 인쇄한 것이다. 그러나 『오륜행실도』는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함으로써 본문 안에 한문과 언해문을 나란히 새겼다. 『오륜행실도』의 한자 글자는 고활자 정리자(整理字)로 찍었는데, 한글 글자는 이른바 ‘정리자 한글 목활자’를 새로 만들어 찍었던 것이다.

정리자는 정조 19년(1795)에 『정리의궤(整理儀軌)』를 찍기 위하여 생생자(生生字; 중국 청나라 때 취진판(聚珍板) 자전에 쓰였던 글자체)를 본으로 삼아 큰 자 16만 자, 작은 자 14만 자를 부어 만들었다. 이 활자로는 그림을 나무에 새겨 활자와 같이 그림판으로 넣어 찍었기에 인쇄 기술이 더욱 발달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 크기는 1.1×1.4cm 정도이고, 20자 10줄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22자 12줄의 큰 판을 만들기도 하였다. 기름칸에는 위에만 검은 접지표를 넣고 있다. 그런데 이 활자로 『오륜행실도』를 찍을 때 새로 언문 글자를 만들어야 했으니 바로 이른바 ‘정리자 한글자’로 언해문의 언문을 찍었던 것이다. 이 한글자는 정리자를 부어낼 때 나무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1797년의 『오륜행실도』는 정리자 한문자로 분문을 찍고, 본문의 뒤에 이어서 실은 언해문을 이 목활자 한글자로 찍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한글 번역이 들어 있는 외에도 『화성의궤』에서 보는 것처럼 그림을 목판에 새겨 찍은 점이 한 특색이다. 글자의 크기는 큰 자 1.1×1.4cm, 작은 자 0.7×0.7cm로 정리자 한문 글자와 각각 같은 크기이고, 반장에 20자 10줄, 위 검은 접지표에 아래 가로선으로 되어 있다. 글자체는 조금 굵어 보이나 균형이 잡혀 있는 점에서 궁체의 완성형이라는 느낌을 준다. 주037)

『금속활자와 인쇄술』(손보기, 1977) 261쪽 참조.

실제로 ‘무신자 병용 한글 활자’ 이후에 만든 한글 활자로는 ‘교서관인서체자 병용 한글활자’와, 초주정리자와 함께 쓴 ‘오륜행실 한글자’, 박종경이 만든 ‘전사자(全史字)’, 구한말 교과서 인쇄에 사용한 ‘학부(學部) 활자’ 등이 있으나, 이들 활자는 모두 나무로 만든 활자이며, 글씨체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와 다르다. 주038)

『한글금속활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자료총서Ⅳ, 2006) 239쪽 참조.

이처럼, 『오륜행실도』의 그림은 나무판에 직접 새긴 것이고, 그림을 새긴 활판 틀에 금속활자로 만든 한자와 목활자로 만든 한글 글자를 끼워 고정시켜서 찍어낸 책이다. 그림판과 금속활자, 목활자가 함께 쓰인 방식은, 인쇄 기술이 고도의 숙련을 필요로 하는 한 단계 발전된 인쇄술이 아닐 수 없다.

중종 12년(1517)에 『소학』과 『열녀전』의 언해 사업이 추진되어 주039)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 6월 27일 기록. 성상께서는 심학(心學)에 침잠하고 인륜을 후하게 하기를 힘쓰시어, 이미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을 명찬(命撰)하시고 또 《소학(小學)》을 인행(印行)토록 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코자 하시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삼강행실』에 실려 있는 것은, 거의가 변고와 위급한 때를 당했을 때의 특수한 몇 사람의 격월(激越)한 행실이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 행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소학』은 곧 일상 생활에 절실한 것인데도 일반 서민과 글 모르는 부녀들은 독습(讀習)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용(日用)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여계(女誡)』·『여칙(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인반(印頒)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궁액(宮掖)으로부터 조정 경사(朝廷卿士)의 집에 미치고 아래로는 여염의 소민(小民)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강습하게 해서, 일국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게 하소서.
중종 13년(1518)년 1년만에 『번역소학』과 『이륜행실도』도 간행되었으나, 『열녀전』의 언해 사업은 26년이 지난 중종 38년(1543)에서야 사업에 착수하게 되어 주040)
중종실록 중종 38년(1543) 11월 6일 기록. 대제학 성세창이 아뢰기를, “동로 왕씨의 『농서』를 이제 보니, 농상의 요체를 그 안에 갖추 실었는데, 우리 나라의 일과는 다른 듯하나 또한 본받을 것이 없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제 듣건대, 『열녀전(烈女傳)』을 개간(開刊)하느라 공역(工役)이 적지 않다 하니, 그 일이 끝난 뒤에 개간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大提學成世昌啓曰 東魯王氏 農書今見之 農桑之要 備載其中 雖與我國之事似異 然亦無可法之事 但今開刊烈女傳 工役不小 事畢後開刊何如 傳曰 知道].
이듬해(1544)에 『고열녀전』(언해본)이 간행된 듯하다. 지금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책이 이것인데, 목판본 1책이다. 이 『고열녀전언해』 주041)
이 제목은 글쓴이가 다른 언해본 책들처럼 고쳐 이름지어 본 것이다.
는 『삼강행실도』 언해본과 『오륜행실도』의 중간 시기의 간행물로서, 『이륜행실도』(1518)가 새롭게 간행한 책이면서도 언해문을 본문 안에 새기지 않고 『삼강행실도』 언해본처럼 본문 밖 상단에 새긴 체재를 따른 것과는 달리, 같은 해에 간행된 『번역소학』(1518)과 같이 본문 안에 한문 원문과 그 언해문을 나란히 새겨 넣었다는 점에서, 행실도류의 판짜기 형식을 깨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의 형식으로 나아간 전단계 모습인 것이다.

② 『삼강행실도』(언해본)과 『오륜행실도』의 언해 방식 비교

성종 때 간행된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그림 위에 새겨 놓아서 같은 쪽에서 그림을 보면서 언문을 읽을 수 있었으니 매우 편리하였지만, 언해문이 한자와 혼용하여 표기되었다. 반면, 『오륜행실도』는 목활자를 만들어 굵은 글씨로 크게 찍어내어 글자가 매우 선명하고, 한글만 써서 언해하였다. 다만 그림 뒤쪽에, 한문 원문 뒤에 언해문을 실어 그림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또한 『삼강행실도』가 한문 원문에도 작은 동그라미로 번역상 띄어쓰기를 표시하였고, 언해문에도 4성 방점을 일일이 표시하며, 한자말은 한자와 독음 한글 표기를 나란히 병기하였다. 반면, 『오륜행실도』는 한문이나 언해문 모두 띄어쓰기 표시와 방점 표시를 전혀 하지 않았고, 언해문의 한자말도 한글로만 기록하여 활판 인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영조 때부터 임금이 내린 윤음을 언해하여 한문본과 언해본 두 종류가 함께 전해지는 일이 많은데, 이때 언해문은 모두 한자말이라도 한글 전용으로 표기하고 있다. 영조・정조 때는 윤음 주042)

영조 33년(1757) 간행 『어제계주윤음언해(御製戒酒綸音諺解)』(규장각 소장본) 참조.
뿐만 아니라 『오륜행실도』처럼 단행본까지 언해문을 한글만 사용하여 찍어내기에 이르렀다.

2) 『삼강행실열녀도』와 『열녀전(列女傳)』과의 관계

세종 16년(1434)에 간행된 한문본 『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實孝子圖)』 110도, 『삼강행실충신도(三綱行實忠臣圖)』 110도,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 110도로 3권 3책, 330편의 그림과 행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책의 처음 인쇄 부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조선 시대 간본(刊本)은 용지 관계도 있지만 수요가 제한되어 있어서 특별 관판(官版) 이외는 지역 수요자를 위한 한정판이었고, 관판의 경우도 대개는 각 관서(官署)와 관원들에게 반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특히 널리 읽혀야 할 책이거나 오래 보존되어야 할 책은 각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관간본(官刊本)을 복각(覆刻)하거나 재간(再刊)케 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그래서 정부 활자본의 경우도 활자본의 주요 기능은 지방에서의 복각판 원본을 소부수 적당량을 신속하게 최소 비용으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주043)

‘삼강행실도에 대하여’, 김원용(1982), 『삼강행실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해제 참조.

그러므로 각 도에서 이 원간본을 내려받아 한꺼번에 만들지 않고 필요에 따라 따로따로 각권씩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효자도, 충신도, 열녀도 세 책이 오롯이 한 벌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다. 또 처음 판각부터 각 책마다 반포 교지, 전문과 서문, 발문을 다 수록하여 각권별로 인쇄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전하는 책 가운데는 부분적으로 제목만 새기고 그림과 행장이 빠진 내용이 있는데, 그 빠진 부분들이 판본마다 다르다. 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처럼 차례에 없던 사람이 마지막에 추가로(‘은보감오(殷保感烏)’) 은보감오(殷保感烏) :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 조선 지례현 사람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의 이야기다. 효자도의 목록에는 110도만 적혀 있으나 본문에는 마지막에 ‘은보감오’라는 행장이 더 있어서 111도가 되지만, 중간에 나오는 ‘효신여묘(孝新廬墓)’는 제목만 새겼을 뿐 그림과 글이 새겨지지 않았으니 결국 110도인 셈이다.
기록된 판본도 있다.

한편, 『2011년도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3차 회의 안건』(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이라는 공개 문헌을 보면,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조창현 씨가 소장하고 있는 『삼강행실효자도』는 ‘허자매수(許孜埋獸)’, ‘효신여묘(孝新廬墓)’, ‘은시단지(恩時斷指)’, ‘성무구어(成茂求魚)’ 등 4편이나 결락(缺落)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 규장각 소장본 「충신도」에서도 ‘한기원훈(韓琦元勳)’, ‘곽영타매(郭永唾罵)’, ‘몽주운명(夢周隕命)’, ‘길재거절(吉再拒節)’, ‘원계함전(原桂陷陳)’ 등 다섯 명이 제목만 적혀 있고 그림과 내용은 공백이며, 김원용(金元龍) 님 소장본 「열녀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본의 저본임)에서도 ‘주주사애(住住死崖)’, ‘한씨절립(韓氏節粒)’, ‘여귀액엽(黎貴縊枼)’ 등 세 편이 내용 없이 제목만 적혀 있는 상태이다.

이제 김원용 님 소장본인 『삼강행실열녀도』(한문본)의 목록을 기준으로 하여, 『삼강행실도』 언해본과 『오륜행실도』의 「열녀도」를 비교해 보고, 중국의 『고열녀전』, 『고금열녀전』, 왕도곤의 『열녀전』 등 세 가지와도 비교함으로써 그 출처를 밝혀 보기로 한다.

『삼강행실열녀도』(한문본)의 출처 분석표

『삼강행실도』(한문본) 「열녀도」(1434)『삼강행실도』(언해본)「열녀도」(1490)『오륜행실도』 「열녀도」(1797)남송 채기 『고열녀전』(1214)명 영락제 『고금열녀전』 (1403)명 왕도곤 『열녀전』(1600전후)나라와 출처
1. 황영사상(皇英死湘)유우이비(有虞二妃)〇(1-1)〇(1-1)우(虞). 고열녀전
2. 태임태교(太任胎敎)주실삼모(周室三母)〇(1-6,7,8)〇(1-4,5,6)주(周). 고열녀전
3. 강후탈잠(姜后脫簪)주선강후(周宣姜后)〇(1-9)〇(1-7)주(周). 고열녀전
4. 소의당웅(昭儀當熊)한풍소의(漢馮昭儀)〇(1-10)〇(4-15)한(漢). 고열녀전
5. 첩여사연(婕妤辭輦)반녀첩여(班女婕妤)〇(1-11)한(漢). 고열녀전
6. 왕후투화(王后投火)효평왕후(孝平王后)〇(1-12)〇(4-16)한(漢). 고열녀전
7. 마후의련(馬后衣練)명덕마후(明德馬后)〇(1-14)〇(4-18)한(漢). 고열녀전
8. 문덕체하(文德逮下)〇(1-18)당(唐). 舊唐書.『용가』 70장
9. 조후친잠(曹后親蠶)〇(1-24)〇(10-3)송(宋). 宋史.慈聖曹后
10. 효자봉선(孝慈奉先)〇(1-31)〇(14-1)명(明). 고금열녀전.태조고황후
11. 공강수의(共姜守義)           위(衛). 시경.용풍편‘栢舟’
12. 맹희서유(孟姬舒帷)     제효맹희(齊孝孟姬)〇(2-7)〇(1-12)제(齊). 시경.소아편‘都人士’
13. 백희체화(伯姬逮火)1. 백희체화(伯姬逮火)1. 백희체화송공백희(宋恭伯姬)〇(2-18)   송(宋). 고열녀전春秋.
14. 백영대인(伯嬴待刃)     초평백영(楚平伯嬴)〇(2-27)〇(3-20)초(楚). 고열녀전春秋.
15. 정강유대(貞姜留臺)     초소정강(楚昭貞姜)〇(2-28)   초(楚). 고열녀전春秋.
16. 여종지례(女宗知禮)2. 여종지례(女宗知禮)2. 여종지례송포여종(宋鮑女宗)〇(3-6)〇(2-13)송(宋). 고열녀전春秋.
17. 식처곡부(殖妻哭夫)3. 식처곡부(殖妻哭夫)3. 식처곡부제기양처(齊杞梁妻)〇(2-7)〇(1-20)제(齊). 고열녀전春秋.
18. 송녀불개(宋女不改)4. 송녀불개(宋女不改)4. 송녀불개채인지처(蔡人之妻)〇(3-8)〇(3-12)채(蔡). 고열녀전春秋.
19. 절녀대사(節女代死)5. 절녀대사(節女代死)6. 절녀대사경사절녀(京師節女)〇(3-15)〇(5-13)한(漢). 고열녀전春秋.
20. 고행할비(高行割鼻)6. 고행할비(高行割鼻)5. 고행할비양과고행(梁寡高行)〇(3-16)〇(5-17)양(梁). 고열녀전春秋.
21. 목강무자(穆姜撫子)7. 목강무자(穆姜撫子)7. 목강무자   〇(2-45)〇(15-19)한(漢). 後漢書.程文矩妻
22. 예종매탁(禮宗罵卓)9. 예종매탁(禮宗罵卓)9. 예종매탁   ○(2-46)   한(漢). 後漢書.皇甫規妻
23. 정의문사(貞義刎死)8. 정의문사(貞義刎死)8. 정의문사   〇(3-20)   한(漢). 後漢書.樂羊子妻
24. 원강해곡(媛姜解梏)10. 원강해곡(媛姜解梏)10. 원강해곡       한(漢). 後漢書.盛道妻
25. 영녀절이(令女截耳)11. 영녀절이(令女截耳)11. 영녀절이     〇(6-18)위(魏). 三國志.夏侯令女
26. 여영보구(呂榮報仇)         〇(6-2)오(吳). 後漢書.吳許升妻
27. 왕비거호(王妃距胡)           진(晉). 晉書·列傳・烈女
28. 신씨취사(辛氏就死)           진(晉). 晉書·列傳・烈女
29. 종씨매희(宗氏罵晞)           진(晉). 晉書·列傳・烈女
30. 두씨수시(杜氏守尸)           진(晉). 晉書·列傳・烈女
31. 염설효사(閻薛效死)           진(晉). 晉書·列傳・烈女
32. 모씨만궁(毛氏彎弓)           진(晉). 晉書·列傳・烈女
33. 양씨의열(楊氏義烈)           진(晉). 晉書·列傳・烈女
34. 장씨타루(張氏墮樓)           진(晉). 晉書·列傳・烈女
35. 이씨감연(李氏感燕)12. 이씨감연(李氏感燕)12. 왕씨감연(王氏感燕)       송(宋). 태평광기 권제270
36. 유씨분사(劉氏憤死)         〇(7-11)원위(元魏). 魏書.魏劉氏妻
37. 유씨동혈(柳氏同穴)           수(隋). 隋書.襄城王恪妃
38. 원씨훼면(元氏毁面)           수(隋). 隋書.華陽王楷妃
39. 유씨투정(柳氏投井)       〇(2-51)   수(隋). 隋書.裵倫妻
40. 최씨견사(崔氏見射)13. 최씨견사(崔氏見射)13. 최씨견사   〇(3-31)〇(7-16)수(隋). 隋書.趙元楷妻
41. 숙영단발(淑英斷髮)14. 숙영단발(淑英斷髮)14. 숙영단발   〇(2-52)〇(12-18)당(唐). 新唐書.李德武妻
42. 상자둔거(象子遁居)       〇(3-32)〇(9-1)당(唐). 新唐書.樊會仁母
43. 상관완절(上官完節)       〇(2-53)〇(8-3)당(唐). 新唐書.楚王靈龜妃
44. 위씨참지(魏氏斬指)15. 위씨참지(魏氏斬指)15. 위씨참지   〇(3-33)〇(9-5)당(唐). 舊唐書
45. 옥영침해(玉英沈海)           당(唐). 舊唐書.符鳳妻
46. 진씨명목(秦氏瞑目)       〇(2-54)   당(唐). 新唐書.高叡妻秦氏
47. 이두투애(二竇投崖)       〇(3-34)〇(9-13)당(唐). 小學.善行
48. 동씨봉발(董氏封髮)           당(唐). 新唐書.賈直言妻董
49. 경문수정(景文守正)           당(唐). 新唐書.殷保晦妻傳
50. 열부중도(烈婦中刀)           당(唐). 新唐書.竇烈婦傳
51. 주처견매(周妻見賣)           당(唐). 新唐書.周迪妻某氏
52. 이씨부해(李氏負骸)16. 이씨부해(李氏負骸)16. 이씨부해   〇(2-57)〇(9-23)오대(五代). 五代史.家範(사마광)
53. 조씨액여(趙氏縊輿)17. 조씨액여(趙氏縊輿)17. 조씨액여   〇(3-37)〇(12-1)송(宋). 宋史.趙氏女
54. 서씨매사(徐氏罵死)18. 서씨매사(徐氏罵死)18. 서씨매사   〇(3-38)〇(12-3)송(宋). 宋史.徐氏女
55. 희맹부수(希孟赴水)       〇(3-41)〇(11-16)송(宋). 宋史.韓希孟
56. 이씨액옥(李氏縊獄)19. 이씨액옥(李氏縊獄)19. 이씨액옥   〇(2-59)   송(宋). 宋史.謝枋得妻李氏
57. 조씨우해(趙氏遇害)       〇(3-40)〇(7-18)송(宋). 宋史.潭氏婦趙
58. 옹씨동사(雍氏同死)20. 옹씨동사(雍氏同死)20. 옹씨동사       송(宋). 宋史.趙卯發傳
59. 정부청풍(貞婦淸風)21. 정부청풍(貞婦淸風)21. 정부청풍   〇(3-39)〇(11-18)송(宋). 宋史.王貞婦
60. 양씨피살(梁氏被殺)22. 양씨피살(梁氏被殺)22. 양씨피살   〇(3-45)〇(11-14)송(宋). 宋史.王氏婦梁
61. 뇌란약마(挼蘭躍馬)           요(遼). 遼史.列傳
62. 주주사애(住住死崖) 주045)
강주주(康住住)라는 여인은 부주(鄜州) 사람이다. 남편이 일찍 죽어 상복을 마치자, 그 아버지가 친정으로 데려가서 엄기(嚴沂)라는 남자의 아내되기를 허락하였다. 강씨는 죽기를 맹서하며 아비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남편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돌아가지 못하니, 언덕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그녀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금사(金史), 열전)
          나라, 그림, 내용 없음. 金史. 列傳
63. 장결돈좌(莊潔頓挫)           금(金). 金史.李英妻張氏
64. 난씨해적(欒氏解賊)           금(金). 金史.相琪妻
65. 독길액사(獨吉縊死)           금(金). 金史.獨吉氏
66. 묘진부정(妙眞赴井)           금(金). 金史.馮妙眞
67. 명수구관(明秀具棺)23. 명수구관(明秀具棺)23. 명수구관       금(金). 金史.蒲察氏
68. 정렬분사(貞烈焚死)       〇(2-60)〇(12-15)원(元). 元史.闞文興妻王氏
69. 유모자서(兪母自誓)       〇(3-47)〇(13-1)원(元). 元史.兪新之妻聞氏
70. 숙안조면(淑安爪面)       〇(2-61)〇(12-16)원(元). 元史.馮氏淑安
71. 의부와빙(義婦臥氷)24. 의부와빙(義婦臥氷)24. 의부와빙   〇(3-51)〇(13-2)원(元). 元史.濟南張氏
72. 동아자액(冬兒自縊)           원(元). 元史.李冬兒
73. 금가정사(錦哥井死)       〇(3-50)〇(13-7)원(元). 元史.趙彬妻朱氏
74. 귀가액구(貴哥縊廐)           원(元). 元史.貴哥蒙古氏
75. 유씨악수(劉氏握手)           원(元). 元史.臺叔齡妻劉氏
76. 장씨자인(張氏自刃)           원(元). 元史.湯煇妻張氏
77. 동씨피면(童氏皮面)25. 동씨피면(童氏皮面)25. 동씨피면   〇(3-52)〇(13-9)원(元). 元史.俞士淵妻童氏
78. 장녀투수(張女投水)           원(元). 元史.張氏女
79. 왕씨경사(王氏經死)26. 왕씨경사(王氏經死)26. 왕씨경사   〇(3-53)〇(13-10)원(元). 元史.惠士玄妻王氏
80. 채란청심(彩鸞淸心)       〇(3-49)   원(元). 元史.李景文妻徐氏
81. 모씨고장(毛氏刳腸)         〇(13-14)원(元). 元史.周婦毛氏
82. 숙정투하(淑靖投河)           원(元). 元史.吳守正妻禹氏
83. 주씨구욕(朱氏懼辱)27. 주씨구욕(朱氏懼辱)27. 주씨구욕       원(元). 元史.黃仲起妻朱氏
84. 왕씨사묘(王氏死墓)           원(元). 元史.焦士廉妻王氏
85. 허씨부지(許氏仆地)           원(元). 元史.趙洙妻許氏
86. 취가취팽(翠哥就烹)28. 취가취팽(翠哥就烹)28. 취가취팽     〇(13-18)원(元). 元史.李仲義妻劉氏
87. 묘안쉬도(妙安淬刀)           원(元). 元史.鄭琪妻羅氏
88. 절부투강(節婦投江)           원(元). 元史.柯節婦陳氏
89. 화유쌍절(華劉雙節)           원(元). 元史.張訥妻劉氏 張思孝妻華氏
90. 유씨단설(劉氏斷舌)           원(元). 元史.安志道妻劉氏
91. 고부병명(姑婦幷命)           원(元). 元史.宋謙妻趙氏
92. 영녀정절(寗女貞節)29. 영녀정절(寗女貞節)29. 영녀정절   〇(3-55)〇(13-11)명(明). 고금열녀전
93. 왕씨호통(王氏號慟)       〇(3-58)   명(明). 고금열녀전
94. 반씨운명(潘氏隕命)       〇(3-60)   명(明). 고금열녀전
95. 부처구사(傅妻俱死)       〇(3-64)   명(明). 고금열녀전
96. 미처담초(彌妻啖草)30. 미처담초(彌妻啖草)30. 미처해도(彌妻偕逃)       백제. 삼국사기.열전 都彌
97. 현처사수(玄妻死水)           고려사.玄文奕妻
98. 정처해침(鄭妻偕沈)           고려사.鄭文鑑
99. 안처구사(安妻俱死)           고려사.安天儉妻
100. 최씨분매(崔氏奮罵)31. 최씨분매(崔氏奮罵)31. 최씨분매       고려사.鄭滿妻崔氏
101. 삼녀투연(三女投淵)           고려사.江華三女
102. 열부입강(烈婦入江)32. 열부입강(烈婦入江)32. 열부입강       고려사.李東郊妻裴氏
103. 김씨사적(金氏死賊)           고려사.金彦卿妻金氏
104. 경처수절(慶妻守節)           고려사.景德宜妻安氏
105. 송씨서사(宋氏誓死)           고려.咸陽郡誌
106. 임씨단족(林氏斷足)33. 임씨단족(林氏斷足)33. 임씨단족       조선.태조4년.崔克孚妻林氏
107. 김씨박호(金氏撲虎)34. 김씨박호(金氏撲虎)34. 김씨박호       조선.태종1년.兪天桂妻金氏
108. 한씨절립(韓氏節粒)           조선. 그림・내용 없음
109. 여귀액엽(黎貴縊枼)           조선. 그림・내용 없음
110. 김씨동폄(金氏同窆)35. 김씨동폄(金氏同窆)35. 김씨동폄       조선.태종13년.李橿妻金氏

태종 때 중국 명나라 황제가 보내 준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1403)이 610부나 되고, 그때로부터 30여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은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으므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국의 『열녀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정작 그 출처를 살펴본 결과, 매우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삼강행실도』가 이야기마다 제목을 붙인 형식은 『고금열녀전』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열녀전』(7권)과 『고열녀전』(8권)의 형식을 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고금열녀전』은 왕조 이름을 앞에 적은 뒤, 제목 없이 시대와 연대순으로 이야기를 나열하였다. 특히 ‘기모강원(棄母姜嫄)’은 후직(后稷)의 탄생과 일대기로서, 중국의 『고열녀전』, 『고금열녀전』, 『왕씨 열녀전』에 모두 나오지만 『삼강행실도』에는 빠졌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열녀(烈女)’와 관련된 이야기라 할 수 없고 기묘한 신화에 속하므로 제외한 듯하다.

명나라 영락제 때 새로 엮은 『고금열녀전』은, 세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순임금의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부터 명나라 태조의 비인 효자황후(孝慈皇后)까지 모두 31명(내용상 32명)의 천자 혹은 황제의 비이고, 제2권은 63명이 나오는데, 주대(周代)에서부터 전한, 후한, 수, 당, 오대(五代), 명나라까지 제후의 비(妃) 또는 양반을 다룬 듯하며, 제3권은 주 열국에서부터 후한, 원위(元魏), 수, 당, 송, 명나라까지의 평민을 중심으로 65명(내용상 67명)을 다루어 전체 159명(내용상으로는 162명)의 행장을 소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삼강행실도』(한문본) 110도(圖)를, 그 가운데 가려뽑은 『삼강행실도』 언해본과 『오륜행실도』를 비교하여 같고 다름을 확인해 보았으며, 모든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본 결과, 유향의 『열녀전(列女傳)』과 겹치는 것은 16가지였을 뿐이며, 그마저 영락제 때의 『고금열녀전』과 모두 겹치는 것을 볼 때, 세종 시대 『삼강행실도』를 간행할 때는 유향의 『열녀전』(사실상 『고열녀전』)과 영락제의 『고금열녀전』을 함께 참고하면서 취사선택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중국의 『열녀전』 인물들을 분류하여 『삼강행실도』에 실으면서 ‘열녀도’가 아닌 ‘효자도, 충신도’에 분류된 이야기도 많다. 예컨데, 『고열녀전』의 권4 정순전(貞順傳) 15번째 이야기 ‘진과효부(陳寡孝婦)’ 주046)

『고금열녀전』에는 권3의 13번째 ‘진과효부(陳寡孝婦)’와 같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삼강행실효자도』 14번째에 실었다.

또한 같은 내용이 『고열녀전』과 『고금열녀전』에 반드시 겹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책의 권차와 묶음이 서로 다르고, 제목을 정하는 방식도 다른 것을 보면 1400여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간행된 두 책의 간행 목적과 정치적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당시 들어와 있던 중국 열녀전(列女傳)들을 보고 그 형식과 내용을 참조하긴 하였지만,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간행사업으로서 『삼강행실도』를 펴낼 때는 중국의 모든 사서(史書)들을 총망라하여 찾아보도록 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아울러 『고금열녀전』에 나오는 이야기면 우선적으로 수록하였던 것이다. 또 『한서』, 『진서』, 『위서』, 『수서』, 『구당서』, 『신당서』, 『송사』, 『금사』, 『원사』 등 중국의 역사서를 두루 망라하여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출처의 분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강행실도(한문본) 열녀도삼강행실도(언해본) 열녀도오륜행실도 열녀도고열녀전고금열녀전청대 열녀전
전체 110편35편35편124편159편309편
한문본과 겹치는 부분35편35편16편50편42편

다시 정리하면, 『시경(詩經)』 2편, 『소학(小學)』 1편, 『용비어천가』 1편, 『춘추(春秋)』 1편, 『후한서』 5편, 『삼국지(三國志)』 1편, 『진서(晉書)』 8편, 『태평광기(太平廣記)』 1편, 『위서(魏書)』 1편, 『수서(隋書)』 4편, 『구당서(舊唐書)』 3편, 『신당서(新唐書)』 8편, 『오대사(五代史)』 1편, 『송사(宋史)』 9편, 『요사(遼史)』 1편, 『금사(金史)』 6편, 『원사(元史)』 24편, 『삼국사기』 1편, 『고려사』 8편, 조선 5편 등에서 참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 상고시대부터 전한의 무제(武帝)까지 2천여 년 동안의 통사와 열전을 기록한 책으로서 유향이 기록한 『열녀전』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4. 『삼강행실열녀도』 및 『오륜행실도』 권3 「열녀」의 종합적 이해

앞의 1장에서 보인 바처럼,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1428) 10월 3일 기사에는, 처음 『삼강행실도』가 만들어지게 된 동기와 의도, 집필자, 참고 문헌, 대상의 범위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 권채(權採)가 쓴 ‘삼강행실 서문’에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참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自中國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라고 한 바와 같이, 처음부터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한두 가지 문헌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삼강행실도』의 체재가 유향의 『열녀전』 혹은 남송 때의 『고열녀전』의 체재를 따랐음은 사실이나, 그뿐만 아니라 명나라 초 영락제의 『고금열녀전』 내용을 더 많이 인용한 것을 볼 때, 여러 열녀전을 두루 참고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삼강행실열녀도』의 내용과 그 출처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열녀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헌, 특히 중국의 역사서를 모두 섭렵하여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예컨데 『삼강행실도』(한문본)의 여덟번째 이야기 ‘문덕체하(文德逮下)’는 『고금열녀전』에도 등장하지만, 본디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당 태종비 문덕황후로서, 조선 세종 27년(1445)에 편찬되어 세종 29년(1447)에 간행된 『용비어천가』 권제8, 70장에서도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이 (당 태종과 같은) 영기한 재주를 내시어 백성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시매, 여섯 준마가 시기를 맞추어 나니.

하늘이 (이 태조와 같은) 용기와 지혜 가진 분을 주시어 나라의 편안을 위하시니, 여덟 준마가 때를 맞추어 나니. 주047)

天挻英奇(천연영기)샤 安民(안민) 爲(위)실 六駿(육준)이 應期(응기)야 나니. 天錫勇智(천석용지)샤 靖國(정국)을 爲(위)실 八駿(팔준)이 應時(응시)야 나니.

이 『용비어천가』 70장 노래의 주석에는,

당나라 태종은 여섯 마리의 준마가 있으니 그 이름이, 특륵표, 삽로자, 청추, 권모과, 십벌적, 백제오이다. 태종이 문덕황후를 소릉에 장사지내며, 스스로 글을 지어 비문을 새기고 아울러 여섯 마리 말 모양을 새기고 글을 함께 새겨 능 뒤에 세우니, 뒷사람이 이를 베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 주048)

唐太宗六駿 曰特勒驃 曰颯露紫 曰靑騅 曰拳毛騧 曰什伐赤 曰白蹄烏 太宗 葬文德皇后於昭陵 御製刻石文 幷六馬像贊 皆立於陵後 後人 遂摹焉作圖 傳之至今

하였고, 다시 밑줄 친 곳에 주석 달기를,

문덕황우는 장손씨요, 수(隋)나라 우효위장군 성(晟)의 딸이니, 시호는 문덕(文德)이다. 소릉(昭陵)은 경조 예천현 서북쪽 구종산(九嵕山)에 있다. 태종이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겼는데, 황후는 검소하여 유언에 박장(薄葬; 소박하게 장례를 치름)토록 할 것과, 금과 옥을 순장하지 말도록 하고, 자손으로 하여금 마땅히 받들어 법을 삼으라고 이른 사실을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주049)

文德皇后長孫氏 隋右驍衛將軍晟之女也 諡曰文德 昭陵在京兆醴泉縣西北九嵕山 太宗 爲文刻石 稱皇后節儉 遺言薄葬 不蔵金玉 當使子孫 奉以爲法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문덕황후의 이야기는 조선 초기부터 회자되고 있었고, 그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소상히 기록할 만큼 중국 역사를 깊게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강행실도』(한문본) ‘11) 공강수의(共姜守義)’에 나오는 시는 『시경』에서 인용한 ‘잣나무 배[栢舟]’라는 시다.

汎범彼피栢舟쥬ㅣ여 在彼피中河하ㅣ로다

髧담彼피兩髦모ㅣ 實실維유我아儀의니

之지死ㅣ언 矢시靡미他타호리라

母모也야天텬只지시니 不블諒人只지아

汎범彼피栢舟쥬ㅣ여 在彼피河하側측이로다

髧담彼피兩髦모ㅣ 實실維유我아特특이니

之지死ㅣ언 矢시靡미慝특호리라

母모也야天텬只지시니 不블諒人只지아 주050)

『시경언해(詩經諺解)』(광해군 5년(1613)) 제3권 「국풍(國風)」 용풍(鄘風) 장 첫째 시.

위나라의 세자인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 아내는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기어이 시집을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시가를 지어 읊었다는 내용이다.

『삼강행실열녀도』 110편에서 (1)에서 (10)편까지는 해진의 『고금열녀전』에서 인용하였다. (11)부터 (18)까지는 주대 제후의 비와 춘추 시대 인물인데, (11)의 ‘공강수의(共姜守義)’만 『시경(詩經)』 용풍(鄘風) 「백주(柏舟)」의 서(序)에서 인용되고 있을 뿐, (12)에서 (18)까지도 역시 『고금열녀전』에서 인용되고 있다. (19) 이하는 한대(漢代) 이후의 제왕가의 비(妃)가 아닌 여성들이 주인공인데, 한대 초기의 여성을 다룬 (19) ~(23)도 모두 『고금열녀전』을 옮긴 것이었다. 요컨대 하(夏) 왕조로부터 주(周), 춘추 전국, 한(漢)의 일부까지 모두 23편 중에서 (11)을 제외한 22편이 『고금열녀전』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24)에서 (38), (61)에서 (67), (81)에서 (91) 등은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중국 후대의 ‘열녀전’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는 이야기로서,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집필자들은 결코 ‘열녀전’만 참고하지 않았음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중국의 역대 사서를 중심으로 매우 치밀한 검토를 통하여 이야기를 뽑아내어 『삼강행실도』를 엮었다는 것이 위의 표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다만, 『삼강행실도』 집필진이나 세종의 의도라고 보았던 권7 「얼폐전」의 제외시킴은, 이미 『고금열녀전』 편찬자의 의도였음이 드러났다. 즉 권7 「얼폐전」은 악녀와 음녀(淫女) 등 부정적 여성상이기 때문에 후대에는 채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종 때 언해본이 만들어지면서 110명에서 35명만을 선별할 때 여성의 정절이 뛰어난 인물만으로 축약되었으니 여성의 유교적 생활은 현실적으로 더욱 위축되고 경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맺음말(정리)

1) 『오륜행실도』는 조선 초 세종 때 처음 간행된 『삼강행실도』(한문본)로부터 이어진 행실도류의 가장 완성된 형태의 책이다. 내용과 형식, 인쇄 기술과 판형 뿐만 아니라, 한글 글자체와 한글 표기법에서도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을 선택하고, 이야기와 함께 그림을 새겨 표현하는 방식은 이미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더욱이 우리나라 행실도류의 내용 가운데 상당수가 중국 한나라 때 사람 유향(劉向, 서기전77~서기전6)이 엮은 『열녀전(列女傳)』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었으나, 이때 이미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한(漢)나라 무제 때(서기전108년~서기전91년)에 이루어진 『사기(史記)』가 읽히고 있었으니, 그 가운데 유향이 주목한 것은 제왕의 연대기(年代記), 세가(世家), 열전(列傳)들 사이에 끼어 있던 여성들의 삶이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상을 모아 보임으로써 사회 질서를 재편해 보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유향의 의도는 『열녀전』을 엮어냄으로써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을 형성하며 중국을 비롯한 조선과 일본 등 주변국에 지속적으로 오랜 세월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중국 역대 국가들의 정사(正史)에는 ‘열전(列傳)’의 형식으로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여자들의 삶만 떼내어 모아 엮은 ‘열녀전(列女傳)’은 시대마다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며 계속해서 재간행되어 왔다.

2) 『열녀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명확치 않으나 고려 말 문헌에 그 이름이 전하다가, 조선에 들어와 명나라 영락(永樂) 원년(1403)에 간행된 『고금열녀전』이 태종 4년(1404)에 두 차례에 걸쳐 610부나 직수입되었다. 이 엄청난 물량 공세를 받은 조선은 그 내용과 편집 구성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특히 여성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에게 새로운 나라 조선이 주창하는 새로운 이념과 학문을 가르쳐야겠다는 시대적 소명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처지는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명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 의도 또한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열녀전(列女傳)’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재해석됨으로써,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남녀노소 모두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우게 하였으며, 역사 속에서 효자(孝子), 충신(忠臣), 열녀(烈女)의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유교적 윤리 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로 『삼강행실도』가 간행되기에 이른다. 그동안 중국의 『예기(禮記)』와 여성과의 관계, 주051)

이숙인,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여이연, 2005).
소혜왕후 한씨의 『내훈(內訓)』과 여성과의 관계 주052) 이경하(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의 ‘『내훈』의 『소학』 수용 양상과 의미’ (2008.5.3.). 등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렇듯 대다수 연구가 남성의 권위에 눌린 여성의 유교적 맹종만을 강조하지만, 세종은 여성에게 출산 휴가 100일을 주는 제도를 만든 사례를 보더라도 오히려 여성에 대한 배려가 주도면밀했던 분으로서,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해야 하겠다. 『삼강행실도』의 순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왕조시대는 위계적으로 ‘충효(忠孝)’를 앞세우지만, 세종은 효자를 충신 앞에 놓았고, 부인의 정절(貞節)만을 요구하는 열녀(烈女)는 맨끝으로 미루고 있다. 더욱이 세종이 맨처음 이 책을 간행하라 명할 때부터 이 책의 서문이나 발문 어디에도 ‘열녀(烈女)’나 ‘열녀전(列女傳)’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열녀전(列女傳)』은 『삼강행실도』에서, 용광로에 들어간 쇠처럼 온갖 문헌이 함께 녹아 새롭게 태어났으니, 열녀를 효자와 충신과 나란히 함으로써 삼강(三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열녀(列女)’ 가운데 ‘열녀(烈女)’를 강조함으로써 많은 여성이 제외되고 110인만 선별되었는데, 성종 때는 이를 언해하면서 다시 35인으로 축소되어 결과적으로 여성의 처세가 정절(貞節)만을 강조하면서 경직되고 완고해지게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뜻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로 이어지면서 이민족에 대한 절개로 강조되었다. 한편 단순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열녀전(列女傳)’에서, 지아비와 윗사람, 가정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여성들의 ‘열녀전(烈女傳)’으로 조선에 정착한 것도 『삼강행실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까지는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110명씩 동등한 수량으로 제시하였다는 것과, 오히려 효자를 강조하면서 열녀는 맨뒤로 열거하였다는 것은 행실도의 작은 배려로 봄직한 일이다.

3) 중종 때 간행된 『고열녀전(언해본)』은 『삼강행실도』 언해본과 『오륜행실도』의 중간 단계의 간행물이다.

『이륜행실도』(1518)가 새롭게 간행된 책이면서도 언해 문장을 본문 안에 새기지 않고 『삼강행실도』 언해본처럼 본문 밖 상단에 새긴 체재를 따른 것과는 달리, 같은 행실도류지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고열녀전(언해본)』이 우리말 해석 문장을 본문 안에 큰 글자로 한문 원문과 나란히 새겨 넣었다는 점은, 본문 밖 언해문 새김 형식을 깨고 『오륜행실도』 형식으로 나아간 전단계 모습을 띤 변화다. 『오륜행실도』는 목활자를 만들어 굵은 글씨로 크게 찍어내어 글자가 매우 선명하고, 한자를 혼용하지 않고 언해문 전체를 한글로만 써서 표기하였다. 이 또한 한글 표기의 획기적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언해문의 한글이 그 어느 언해본보다도 선명하고 굵은 글씨로 본문에 새겨짐으로써 한글의 위상을 최상으로 높인 간행물이라 할 수 있다.

4) 『삼강행실도』 서문에 밝힌 대로, 처음부터 중국의 『열녀전』과 『고금열녀전』만이 참고 문헌으로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나라 곽거경(郭居敬)이 편찬한 『이십사효』나 『효순사실』 등, 모든 중국 역사서를 참고하지 않은 문헌이 없었다. 세종의 명에 따라 처음 간행된 『삼강행실도』의 「열녀도(烈女圖)」 110편을 중심으로 그 출처를 살펴본 결과, 사마천의 『사기』는 기본이고, 유향의 『열녀전』과 겹치는 송나라 때의 『고열녀전』 중 16편과 명나라 영락제 때의 『고금열녀전』 중 50편을 비롯하여, 중국 문헌 『시경』 2편, 『소학』 1편, 『춘추』 1편, 『후한서』 5편, 『삼국지』 1편, 『진서(晉書)』 8편, 『태평광기』 1편, 『위서(魏書)』 1편, 『수서』 4편, 『구당서』 3편, 『신당서』 8편, 『오대사』 1편, 『송사』 9편, 『요사』 1편, 『금사』 6편, 『원사』 24편 등 중국의 정사(正史)와 다양한 문헌을 참고함으로써 오류를 범하지 않고 정확한 기록을 수록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었고, 우리나라 문헌 『삼국사기』 1편, 『고려사』 8편, 『함양군지(咸陽郡誌)』 1편, 『용비어천가』 1편에 같은 기록이 보이듯이, 나라 안팎의 모든 역사 기록물을 참고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대보다는 좀더 후대의 역사에서 더 많이 인용함으로써 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 위주로 엮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오륜행실도』 「열녀」편의 내용과 형식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중국의 『열녀전』과 조선 세종 때의 『삼강행실열녀도』를 비교 분석하였고, 나아가 열녀전류와 행실도류를 두루 살펴본 결과, 방대한 출처와 일관된 편찬 의도, 발전된 인쇄 기술을 정확히 규명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열녀전(列女傳)』(서기전 6년 이전, 유향(劉向))

『고열녀전(古列女傳)』(1214, 채기(綵綺))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1402, 해진(解縉) 등)

『효순사실(孝順事實)』(1420, 이제현(李齊賢) 등)

(원본은 인터넷으로 열람.

https://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HP-SQFP?i=803.)

『삼강행실도』(1434, 설순(偰循) 등)

『번역소학(飜譯小學)』(1518, 김전(金詮) 등)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1518, 조신(曺伸) 등)

『시경언해(詩經諺解)』(1613, 교정청)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이성(李惺) 등)

『어제계주윤음언해(御製戒酒綸音諺解)』(1757,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지부족재장판(知不足齋藏版) 『열녀전(列女傳)』(1779)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Harvard- Yenching institute) 소장본. - http://www.harvard-yenching.org 참조.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1781) 사부(史部) 7 참조.

『금속활자와 인쇄술』(손보기, 1977),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삼강행실도』, 해제 ‘삼강행실도에 대하여’(김원용, 198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의 풍속화』(정병모, 2000), 한길아트

『한글문헌 해제』(박종국, 2003), 세종대왕기념사업회

『新譯 列女傳』(黃淸泉 注譯, 2003), 三民書局(대만))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이숙인, 2005), 여이연

『한글금속활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자료총서Ⅳ, 2006), 국립중앙박물관

『대동문화연구』 제70권 ‘소혜왕후 『내훈』의 『소학』 수용 양상과 의미’(이경하, 2010),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한국어발달사증보』(2009, 박종국), 세종학연구원

『2011년도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3차 회의 안건』(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2011)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 열녀전』(고은숙, 김민지, 2015), 국립한글박물관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Ⅰ』,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해적이’(정호완, 2015),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오륜행실도』 해제* 주001)
<정의>* 이 해제는 송철의 등(2006)의 역주 『오륜행실도』에서, 황문환의 『오륜행실도』 해제(2006: 873~888)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광호(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정조 21년(1797)에 정조의 명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두 책을 합책하고 그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간행한 책이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이다. 5권 4책, 소장본에 따라서는 5권 5책의 언해본(諺解本)으로, 원문의 한자는 동활자(銅活字)이고, 언해문의 정음(正音) 곧 한글은 목판본(木版本)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제목 ‘오륜행실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대 문헌에서 ‘오륜(五倫)’의 ‘행실(行實)’을 본받을 만한 인물들을 가려 뽑아 그 ‘행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기(傳記) 형식으로 실어 놓은 교화서(敎化書)이다. 역사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중국인 133명과 그들과 견줄 만한 우리나라 사람 17명, 도합 150명의 전기를 효자(孝子) 33명, 충신(忠臣) 35명, 열녀(烈女) 35명, 형제(兄弟) 31명, 붕우(朋友) 16명으로 나누어 실어 놓았다. 그 순서 역시 유교에서 윤리적인 순위에 따라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로 정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다만 ‘오륜’ 가운데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에서 ‘장유(長幼)’의 예는 제외되어 있다.

이만수가 쓴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에 대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근본이 되었다.[爲化民成俗之本]”와 같이 천명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이 책은 교화(敎化)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판 곧 그림을 맨 앞에 싣고, 이 내용을 설명하는 글인 전기(傳記)를 뒤에 싣는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였는데, 이는 책 이름에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도(圖)’가 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오륜행실도』의 초간본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초간본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 본은 1972년에 을유문화사에서, 규장각본은 1989년 홍문각에서 각각 영인, 간행되었는데, 대체로는 규장각 본을 많이 이용한다. 본 해제는 규장각본(도서 번호 ‘가람 古 170-Y510’)과 동일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을 대상으로 한다. 주002)

서지 사항 : 33.8×20.9㎝. 사주쌍변(四周雙邊). 반엽 광곽(半葉匡郭): 21.9×13.8㎝, 유계(有界), 한문 10행 20자, 언해문 10행 19자, 주쌍행(注雙行). 판심(版心): 흑어미(黑魚尾), 원표제: 五倫行實, 내제·판심제: 五倫行實圖.

2. 『오륜행실도』의 체제와 간행 경위

2.1. 책의 체제

『오륜행실도』의 전체 체제는 크게 서문 부분과 본문 부분의 둘로 나누어 있다. 서문 부분은 권1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간행에 관련된 기록들로서, 간행 당시인 정조 21년 정월 초하루에 내린 정조의 윤음(綸音) 3장(6면)을 비롯하여, 주003)

<정의>이 윤음의 제목은 ‘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주례향약윤음(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酒禮鄕約綸音)’으로 판심(版心)은 ‘어제윤음(御製綸音)’이다.
‘오륜행실도서(五倫行實圖序)’ 2장(4면)(판심: 五倫行實圖), ‘삼강행실도 원서(三綱行實圖原序)’ 2장(4면)(판심: 오륜행실도, 세자(細字) ‘三綱原序’), ‘이륜행실도 원서(二倫行實圖原序)’ 2장(4면)(판심: 五倫行實圖, 세자 ‘二倫原序’), 그리고 ‘奉 敎授閱, 奉 校監印’ 2장(4면)(판심: 五倫行實 세자 ‘校印諸臣’)으로 되어 있다. 주004)
<정의>교열에는 규장각 직제학 이병모(李秉模), 규장각 제학 윤기동(尹耆東), 감인(監印)에는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 규장각 검교(檢校) 심상규(沈象奎), 춘추관 교수(敎授) 김근순(金近淳), 부사과(副司果) 신현(申絢),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오태증(吳泰曾), 동(同) 김이영(金履永), 부사과(副司果) 조석중(曺錫中), 동(同) 홍석주(洪奭周)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오륜행실도』에 ‘삼강행실도 원서’와 ‘이륜행실도 원서’가 동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이 『오륜행실도』가 두 책을 저본(底本)으로 합책(合冊), 간행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오륜’의 순서(장유유서는 제외)에 따라 5권으로 분권(分卷)하여 본문을 나누어 실었다. 각각의 권은 그 책머리에 목록(目錄)을 실었는데, 권1~권3은 『삼강행실도』와, 권4, 5는 『이륜행실도』와 그 목록이 대체로 일치한다.

(1) 『오륜행실도』 권제1 목록 - 효자(35인)

1. 민손단의(閔損單衣) 2. 자로부미(子路負米)

3. 고어도곡(皐魚道哭) 4. 진씨양고(陣氏養姑)

5. 강혁거효(江革巨孝) 6. 설포주소(薛包酒掃)

7. 효아포시(孝娥拘屍) 8. 황향선침(黃香扇枕)

9. 정란각목(丁蘭刻木) 10. 동영대전(董永貸錢)

11. 왕부폐시(王裒廢詩) 12. 맹종읍죽(孟宗泣竹)

13. 왕상부빙(王祥剖冰) 14. 허자매수(許孜埋獸)

15. 왕연약어(王延躍魚) 16. 양향액호(楊香搤虎)

17. 반종구부(潘綜救父) 20. 검누상분(黔婁嘗糞)

21. 숙겸방약(叔謙訪藥) 22. 길분대부(吉翂代父)

23. 불해봉시(不害捧屍) 24. 왕숭지박(王崇止雹)

25. 효숙도상(孝肅圖像) 26. 노조순모(盧操順母)

27. 맹희득금(孟熙得金) 28. 서적독행(徐積篤行)

29. 오이면화(吳二免禍) 30. 왕천익수(王薦益壽)

31. 유씨효고(劉氏孝姑) 32. 누백포호(婁佰捕虎)

33. 자강복총(自强伏塚) 34. 석진단지(石珍斷指)

35. 은보감오(殷保感烏)

(2) 『오륜행실도』 권제2목록 - 충신(35인)

1. 용방간사(龍逄諫死) 2. 난성투사(欒成鬭死)

3. 석작순사(石碏純臣) 4. 왕촉절두(王蠾絶脰)

5. 기신광초(紀信誑楚) 6. 소무장절(蘇武杖節)

7. 주운절함(朱雲折檻) 8. 공승추인(龔勝推印)

9. 이업수명(李業授命) 10. 혜소위제(嵇紹衛帝)

11. 변문충효(卞門忠孝) 12. 환이치사(桓彛致死)

13. 안원매적(顔袁罵賊) 14. 장허사수(張許死守)

15. 장흥거사(張興鋸死) 16. 수실탈홀(秀實奪笏)

17. 연분쾌사(演芬快死) 18. 약수효사(若水効死)

19. 유겹연생(劉韐捐生) 20. 부찰직립(傅察直立)

21. 방예서금(邦乂書襟) 22. 악비열배(岳飛涅背)

23. 윤곡부지(尹穀赴池) 24. 천상불굴(天祥不屈)

25. 방득불식(枋得不食) 26. 화상손혈(和尙噀血)

27. 강산장군(絳山葬君) 28. 하마자분(蝦虫麻自焚)

29. 보안전충(普顔全忠) 30. 제상충렬(堤上忠烈)

31. 비녕돌진(丕寧突陣) 32. 정이상소(鄭李上疏)

33. 몽주순명(夢周殞命) 34. 길재항절(吉再杭節)

35. 원계함진(原桂陷陣)

(3) 『오륜행실도』 권제3 목록 - 열녀(35인)

1. 백희체화(伯姬逮火) 2. 여종지례(女宗知禮)

3. 식처곡부(殖妻哭夫) 4. 송녀불개(宋女不改)

5. 고행할비(高行割鼻) 6. 절녀대사(節女代死)

7. 목강무자(穆姜撫子) 8. 정의문사(貞義刎死)

9. 예종매탁(禮宗罵卓) 10. 원강해고(媛姜解梏)

11. 영녀절이(令女截耳) 12. 왕씨감연(王氏感燕)

13. 최씨견사(崔氏見射) 14. 숙영단발(淑英斷髮)

15. 위씨참지(魏氏斬指) 16. 이씨부해(李氏負骸)

17. 조씨의여(趙氏縊輿) 18. 서씨매사(徐氏罵死)

19. 이씨의옥(李氏縊獄) 20. 옹씨동사(雍氏同死)

21. 정부청풍(貞婦淸風) 22. 양씨피살(梁氏被殺)

23. 명수구관(明秀具棺) 24. 의부와빙(義婦臥冰)

25. 동씨피면(童氏皮面) 26. 왕씨경사(王氏經死)

27. 주씨구욕(朱氏懼辱) 28. 취가취팽(翠哥就烹)

29. 영녀정절(寗女貞節) 30. 미처해도(彌妻偕逃)

31. 최씨분매(崔氏奮罵) 32. 열부입강(烈婦入江)

33. 임씨단족(林氏斷足) 34. 김씨박호(金氏撲虎)

35. 김씨동폄(金氏同窆)

(4) 『오륜행실도』 권제4 목록

ㄱ. 형제(24인)

1. 급수동사(伋壽同死) 2. 복식분축(卜式分畜)

3. 왕림구제(王琳救弟) 4. 허무자예(許武自穢)

5. 정균간형(鄭均諫兄) 6. 조효취팽(趙孝就烹)

7. 목용자과(繆肜自撾) 8. 이충축부(李充逐婦)

9. 강굉동피(姜肱同被) 10. 왕랑쟁탐(王覽爭酖)

11. 유곤수병(庾衮守病) 12. 왕밀역제(王密易弟)

13. 채확자사(蔡廓咨事) 14. 극살쟁사(棘薩爭死)

15. 양씨의양(楊氏義讓) 16. 달지속제(達之贖弟)

17. 광진반적(光進反積) 18. 덕규사옥(德珪死獄)

19. 두연대형(杜衍待兄) 20. 장존포금(張存布錦)

21. 언소석적(彦霄析籍) 22. 도경인경(道卿引頸)

23. 곽전분재(郭全分財) 24. 사달의감(思達義感)

ㄴ. 부(附) 종족(7인)

25. 군량척처(君良斥妻) 26. 공예서인(公藝書忍)

27. 진씨군식(陳氏羣食) 28. 중엄의장(仲淹義莊)

29. 육씨의거(陸氏義居) 30. 문사십세(文嗣十世)

31. 장윤동찬(張閏同爨)

(5) 『오륜행실도』 권제5 목록

ㄱ. 붕우(11인)

1. 누호양려(樓護養呂) 2. 범장사우(范張死友)

3. 장예휼고(張裔恤孤) 4. 도종심시(道琮尋屍)

5. 오곽상보(吳郭相報) 6. 이면환금(李勉還金)

7. 서회불부(徐晦不負) 8. 사도경탁(査道傾橐)

9. 한이경복(韓李更僕) 10. 순인맥주(純仁麥舟)

11. 후가구의(侯可求醫)

ㄴ. 부(附) 사생(師生)(5인)

1. 운창자핵(云敞自劾) 2. 환영분상(桓榮奔喪)

3. 견초염빈(牽招斂殯) 4. 양시입설(楊時立雪)

5. 원정대탑(元定對榻)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권으로 나누어진 본문 부분은 오륜(五倫)의 순서에 따라 분권되었는데, 다만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장유’ 부분은 ‘형제’ 부분으로 대체되었다.

『오륜행실도』의 각 권은 권수(卷首)에 목록을 실었는데, 다음 [도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권1, 권2, 권3은 『삼강행실도』와, 권4와 권5는 『이륜행실도』와 그 목록 내용이 대체로 일치한다. 다만, 『이륜행실도』에서는 『오륜행실도』와 다르게 수록 전기를 분권(分卷)하지 않고 형제도·종족도·붕우도·사생도(師生圖)에 따라 나누어 실은 반면, 『오륜행실도』에서는 형제와 부(附) 종족도를 권4로, 붕우와 부(附) 사생도와 주자 발(鑄字跋)을 권5로 나누어 실어 놓았다. 목록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수정간행(修正刊行)’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권5에 실려 있는 주자 발에 따르면 『오륜행실도』는 주자소(鑄字所)에서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하여 반포(頒布)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오륜행실도』와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를 대조하여 [도표 1]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05)

<정의>이 도표는 황문환(2006: 875)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 원 도표에 약간의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 본 해제는 『오륜행실도』 전체의 해제인데, 그 가운데 권4와 권5에 해당하는 부분을 두 줄로 표시한다.

[도표 1]

내용/
책명
오륜도수록인 수
오륜행실도권1효자도33
권2충신도35
권3열녀도35
권4형제도24
부(附) 종족도7
권5붕우도11
부(附) 사생도5
주자도

『오륜행실도』 각 권에 실려 있는 전기(傳記)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다음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전기의 제목 ‘복식분축(卜式分畜)’과 그림이 먼저 실려 있고 뒤에 ‘한문 원문’이, 그리고 그 뒤에 ‘언해문’이 실려 있다.

『오륜행실도』 권4의 ‘복식분축’ 체제 예

(3ㄱ)

(3ㄴ)

(4ㄱ)

[그림 1] 권4 형제도

도판 (3ㄱ), 곧 그림은 전기(傳記)의 중요한 내용을 한 장면으로 나타낸 것으로 그 오른쪽 상단에 당해 전기의 제목을 사자성어(四字成語), 즉 (3ㄱ)에서처럼 ‘복식분축(卜式分畜)’으로 실어 놓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전기의 한문 원문은 먼저 사실을 실어 놓고, 그 내용에 대한 ‘시(詩)’나 ‘찬(贊)’을 반드시 덧붙여 놓았는데, 시는 7언 율시, 찬은 4언 고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기의 한문 원문인 1행 20자에 대하여 시나 찬은 한 자를 낮추어 1행 19자(띄는 부분도 한 자로 계산함)로 하였다. 그림이나 한문 원문에는 없으나 언해문에서는 인명이나 지명,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 어구(語句) 등에 대하여는 세자(細字) 두 줄, 곧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협주를 달아 놓았다.

2.2. 간행 경위

『오륜행실도』에 대한 간행 기록은 이 책의 서문인 ‘오륜행실도 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쓴 이만수(李晩秀)의 서문에는 간행 시기와 목적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6) 이만수의 『오륜행실도』 서(序)

[1] 上之二十有一年丁巳月正元日 誕誥八方以休老勞農之義尋以鄕飮酒鄕約條例士冠婚儀釐爲一 編又敎若曰我朝儀物之備隆自我 英陵盛際 聖神相承治敎体明而三綱二倫之書後先彙 成列于學官爲化民成俗之本 今欲講行鄕禮宣自二書而表章之乃命其書曰五倫行實以 臣晩秀與聞是役俾爲之序 臣 謹拜稽首言曰…(이하 생략)

[1′] 임금(정조)께서 21년 정사년 정월 초하루에 노인을 쉬게 하고 농부를 위로하려는 뜻으로 온 세상에 가르치심을 널리 펴시고 향음주(鄕飮酒: 송별연)·향약 조례·사관혼의(士冠婚儀: 성년식이나 혼례 의식) 등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드시었다. 또 가르침을 내리시어, “우리나라의 의식(儀式)과 문물(文物)이 갖추어진 것은 세종대왕의 성대한 때부터인데, 이것을 성스럽고 신령한 자손들이 서로 이어받아 정치와 교화(敎化)가 밝아졌다. 그간 『삼강』, 『이륜』 두 책이 선후로 간행되어 학관(學官)에 널리 반포되어 있으므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근본이 되었다. 이제 향례를 가르치고 시행하려면 반드시 이 두 책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시고, 책명을 『오륜행실(五倫行實)』로 하도록 명령하신 다음, 신 이만수가 이 사업에 간여함을 들으시고 이 서문을 쓰게 하셨다. 신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아룁니다. …

위의 서문에서 정조가 『오륜행실도』를 간행하도록 한 시기가 정조 21년( 1797) 정월임이 밝혀졌고 정조의 윤음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주006)

<정의>윤음에는, ‘上之二十一年正月初一日’이라고 했는데, 오륜행실도 서문에는, ‘上之二十有一年丁巳月正元日’이라고 적고 있으니, ‘정사년 정월 초하루[丁巳正月元日]’라는 말이므로, ‘정(正)’과 ‘월(月)’의 한자 순서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록에는, ‘丁巳二十一年春正月壬寅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서문에서 간행 목적이 궁극적으로 향례(鄕禮)의 강행(講行)이었음이 나타난다. 이런 목적 이외에도 이 책의 간행이 단순히 두 책, 곧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책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책의 내용을 수정하였고, 특히 언해 부분에서는 ‘증정(證訂)’(증거를 가지고 올바르게 고침)하였으며, 간행의 성격을 윤색하고 고교(考校)(올바로 고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향례의 실천을 위해서는 이미 있었던 ‘향음주례(鄕飮酒禮)·향약조례(鄕約條例)·사관의(士冠義)·사혼의(士昏義)’ 등을 합하여 별도의 책 『향례합편(鄕禮合編)』이 편찬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실천서가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유교의 기본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오륜행실도』는 바로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같이 이미 널리 보급되고 알려진 윤리에 관한 책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된 것이다.

이만수의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의식과 문물이 갖추어진 것이 세종대왕의 성대한 때부터[我朝儀物之備隆自我 英陵盛際]’라 하여, 특히 세종 대를 언급한 것은 좀 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오륜행실도』와 동시에 간행이 추진된 『향례합편』의 ‘총서(總敍)’에 따르면 세종 대의 간행 사업이 『오륜행실도』의 간행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황문환 2006: 878).

(7) 『향례합편』의 총서(總敍)

[2] 昔我世宗盛際 行義老宴于勤政殿 復命儒臣校刊小學之君編纂三綱行實廣頒中外 予小子憲章而修述者 基在斯乎 於是命諸臣 採輯小學諸家註解而檃栝之 復以三綱行實二倫行實合編校正 命名曰五倫行實(띄어쓰기는 필자 추가)

[2′] 옛날 우리 세종대왕의 성대한 시절에 근정전에서 양로연을 열고 유신(儒臣)들에게 명령하시를, “『소학』을 교정하여 간행하고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라.” 하시었다. 나 소자가 이를 받들고 계승하려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여러 신하에게 『소학』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주해(註解)를 수집하여 간행하도록 하고 또 『삼강행실』과 『이륜행실』을 합편·교정하여 이름 짓기를 『오륜행실』이라 하였다.

정조 자신이 ‘소자인 내가 이를 받들고 계승하려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予小子憲章而修述]’고 하였듯이, 『오륜행실도』의 간행은 선왕(先王) 세종의 『삼강행실도』 편찬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곧 세종이 근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푼 이후 집현전의 문신들로 하여금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고 그것을 주자소에서 인쇄하게 하였듯이, 정조도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이후에 문신들로 하여금 『오륜행실도』를 편찬하고 그것을 인쇄하도록 한 것이다(황문환 2006:878, 김문식 2000:157-158).

앞에 인용한 이만수의 서문(序文)에서는 저본(底本)만 언급하고 간행 성격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위 [2]의 문맥만을 참조하자면 『오륜행실도』는 기존의 두 저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단순히 합책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이나 다음의 실록(實錄)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7) 정조실록 권지 47, 정조 21년 7월 丁亥조

[3] 上旣頒鄕禮合編 又命閣臣沈象奎等 取三綱二倫兩書而合釐之 證訂諺解 名曰五倫行實 命鑄字所 活印廣頒 俾作鄕禮之羽翼

[3′] 임금께서 이미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반포하신 뒤, 다시 내각 신하인 심상규(沈象奎) 등에게 명하여 『삼강』과 『이륜』의 두 책을 합책하고 수정하여 언해(諺解)를 증정(證訂)하게 한 뒤 이름을 『오륜행실』이라 하시었다. 주자소에 명하시기를 활자로 인쇄한 뒤 이를 널리 반포하여 ‘향례’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위 실록 내용에 따르면 『오륜행실도』의 간행은 합책, 곧 ‘양서의 합’에 수정[釐]이 가해졌으며, 특히 언해에서는 ‘증정(證訂)’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륜행실도 서’에서 이 책의 간행 성격을 윤색(潤色), 고교(考校) 등으로 표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주007)

此乃我殿下所以命臣等潤色 而臣等所以承命考校者也(밑줄 필자).

언해의 증정은, 문장 구조의 변화를 『이륜행실도』의 문장과 비교하여 증정의 내용을 후술하기로 한다.

3. 수정 간행의 내용

이미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목록 내용은 저본과 유사하다 하더라도 『오륜행실도』에서 수록의 체제가 달라진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삼강행실도』 충신도의 ‘방득여소(枋得茹蔬)’, 열녀도의 ‘이씨감연(李氏感燕)’과 ‘미처담초(彌妻啖草)’는 각각 『오륜행실도』 권2의 충신도에서 ‘방득불식(枋得不食)’, 권3의 열녀도에서 ‘왕씨감연(王氏感燕)’ 및 ‘미처해도(彌妻偕逃)’로 그 제목이 바뀌었다. 또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종족항의 ‘원백동찬(元伯同爨)’은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의 부(附) 종족에서 ‘장윤동찬(張閏同爨)’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물론 그 주인공 등이 바뀌었으므로 그 내용도 서로 다르게 설명되어 있다. 또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노조책려(盧操策驢)’는 『오륜행실도』 권1의 효자도에서 그 제목이 ‘노조순모(盧操順母)’로 바뀌어 실려 있다. 이외에도 『삼강행실도』 효자도의 ‘곽거매자(郭巨埋子)’ 및 ‘원각경부(元覺敬父)’가 『오륜행실도』에서 제외되었다. 주008)

<정의>황문환(2006: 879)에서는 ‘元定對榻(원정대탑)’이 『이륜행실도』에 없던 것인데 『오륜행실도』 권5 붕우도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규장각 가람문고 ‘古 170.951 G413i’의 『이륜행실형제도』(영인본)를 참조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원래 ‘낙장본’으로 맨 끝에 있는 이 제목이 낙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문각 영인본 이륜행실도 규장각도 ‘2074’ 영인본에는 ‘원정대탑’이 실려 있다.

3.1. 언해문 배치의 수정

『오륜행실도』는 그 저본(底本)과 똑같이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재를 취하고 있으나 언해문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 [그림 2-1], [그림 2-2]에서 알 수 있듯이 전본들은 한결같이 언해문을 ‘그림’ 밖 난상에 배치하고 한문 원문을 그 다음 면에 배치한 반면, 『오륜행실도』는 [그림]을 먼저 싣고 그 다음에 한문 원문, 그리고 언해문을 맨 끝에 배치하였다.

[그림 2-1] 『삼강행실도』 효자도의 ‘자로부미(子路負米)’

[그림 2-2]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급수동사(伋壽同死)’

[그림 3-1] 『오륜행실도』 권1 효자도 ‘자로부미(子路負米)’

[그림 3-2]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 ‘급수동사(伋壽同死)’

언해문의 위치에 따라 전본을 ‘난상 언해’, 『오륜행실도』를 ‘본문 언해’로 부른다면 결국 저본의 ‘난상 언해’ 방식을 읽기 쉽게 ‘본문 언해’ 방식으로 수정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저본의 언해문이 글자가 작고 행간의 선도 없어서 읽기에 불편한 점을 고려한 것으로, 수정을 통해 글자를 보다 크게 고치고 행간의 선을 추가하여 그 정교함의 정도를 높였다. 따라서 수정된 방식이 훨씬 수월하게 읽혔을 것이다.

또한 저본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언해문이 ‘난상’에 배치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삼강행실도』는 한문본이 먼저 간행되고 그 뒤에 언문본이 간행되었다. 곧 한문본은 세종 16년(1434)에 이미 간행되었지만 언해본은 세종 당시부터 논의되다가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간행되었다. 따라서 언해본은 결국 이미 간행된 한문본의 목판(木板)에 언해 부분을 덧붙인 것으로 언해본의 언해문은 자연히 ‘난상 언해’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륜행실도』는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목표를 가진 『삼강행실도』와 동일한 목적으로 간행되었으므로 처음부터 『삼강행실도』와 같은 체재를 취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형제와 종족’, ‘붕우와 사생’을 보완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체재를 『삼강행실도』에 맞추었고 그 결과 언해가 ‘난상’에 실렸을 것이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결국 『오륜행실도』에서 ‘본문 언해’ 방식을 택한 것은 기타의 언해 방식의 배치 방식을 따른 것인 동시에 언해문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언해문을 본문에 실음으로써 『오륜행실도』는 교화서(敎化書)로서의 본래의 목적에 보다 충실한 체재를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목판본에 언해문을 새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방식은 『이륜행실도』까지만 적용되었을 뿐, 광해군 9년(1617) 임란 이후 대대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만 1,587명의 행적을 찾아 실어 펴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이미 난상에 새겼던 언해문 방식을 버리고 본문 안의 한문 원문에 이어 편집하는 방식을 채택한 바 있다. 『오륜행실도』의 편집 방식은 이를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3.2. 도판 구성의 수정

[그림 2]와 [그림 3-1], [그림 3-2]를 비교해 보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자로부미(子路負米)’와 ‘급수동사(伋壽同死)’에서는 그 내용이 시공간(時空間)의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오륜행실도』의 그림은 그 내용이 전부 표시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한 장면에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전자에 비하여 후자는 전설(傳說) 내용 가운데 한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수정된 것이다.

[그림 2]의 『삼강행실도』 ‘자로부미’ 그림을 보면 맨 위쪽에 ‘자로’가 쌀을 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고, 부모가 앉아 있는 모습과 그 뒤 벼슬이 높이 되어 따르는 수레가 많고 곡식이 많아도 요 한 표를 깔고 솥에 음식하여 소박하게 먹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이륜행실도』의 ‘급수동사’ 그림에서는 태자 ‘급’의 배다른 공자 ‘삭’과 그 어미가 모의하여 태자 ‘급’을 배에서 죽이려 할 때, ‘삭’과 친형제인 공자 ‘슈’가 이를 말리는 장면이 맨 밑에 있다. 그리고 제나라에 태자 ‘급’을 사신으로 보낼 때 ‘슈’가 태자의 깃발을 들고 태자로 가장하여 대신 죽게 되는데, 태자가 이를 알고 스스로 죽는 장면이 맨 위에 그려져 있다.

저본들과는 달리 『오륜행실도』 권1 효자도의 ‘자로부미’ [그림 3-1]에서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로’가 쌀을 지고 있는 한 장면만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권4 형제도의 ‘급수동사’[그 3-2]에서는 태자 ‘슈’가 이복 동생 ‘급’을 따라 죽는 장면만이 그려져 있다.

3.3. 언해 내용의 수정

저본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오륜행실도』와 비교하면, 언해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정조 실록’의 기록(권47, 21년 7월 20일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정(證訂)이나 합리(合釐)의 뜻이 담겨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륜행실도』에서 특히 ‘증정’은 넓게는 수록 체재의 수정을 비롯하여 저본의 내용을 가감하거나 대체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작게는 저본의 내용을 구체화하거나 잘못을 고치는 곧 정정(訂正)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륜행실도』 붕우(朋友)도의 ‘누호양려(樓護養呂)(한나라)’는 언해에서 그 제목이 누락되어 있으나 『오륜행실도』에서는 ‘누호 한나라 졔군 사이니’로 보충되어 있다. 그 한문 원문도 『이륜행실도』에서는 ‘누호(樓護)’로만 되어 있으나 두 말 할 필요 없이 『삼강/오륜 행실도』에서는 ‘누호제군인(樓護齊郡人)’으로 되어 있다. 『오륜행실도』가 저본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이러한 양상은 책 전체에 일관되게 유지된다. 여기서는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급수동사(伋壽同死)’와 『오륜행실도』의 그것을 각각 원문과 언해문을 제시하고 그 내용을 비교하고자 한다.

(8) 『이륜행실도』 형제도와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 ‘급수동사(伋壽同死)’

ㄱ. 『이륜행실도』 한문 원문

伋壽同死 周

衛公子壽者 宣公之子 太子伋之異母弟 公子朔之同母兄也 其母與朔謀 欲殺伋而立壽 使人與伋 乘舟於河中 將沈而殺之 壽知不能止 因與之同舟 舟人不得殺又使伋之濟 將使盜 見載㫌 要而殺之壽止伋 伋曰棄父之命 非子道也 不可壽又與之偕行 其母不能止 乃戒之曰壽無爲前也 壽又竊伋㫌以先行 盜見而殺之 伋至痛壽代己之死涕泣哀載 其屍環至境而自殺

ㄱ′. 『이륜행실도』 언해문

윗나라 공 슈 션공이란 님금의 아리니 태급비 다 아믜게 난 아이오 공 삭이와  어믜게 난 형이라 ㉠그 어미 삭이와 야 태 주기고  셰요려야 사마로 야 태와 타 가다가 므레 드리텨 주기려 거  말리디 몯야 조차 그  타 가니 몯 주기니라  ㉢졧나라 태 보내고 도적야 길헤 가 태의 긔 가거든 보고 주기라 대  가디 말라 야 태 닐오 ㉤아 명을 더디면 식의 되 아니라 대   조차가더니 그 어미 말리디 몯야 경계야 닐오 앏셔디 말나 더니   태의 긔 아사 앒 셰고 가거 도적이 태라 너겨 주기니라 태 미처 가 보고 제 모긔 주근 주 슬허 울고 주거믈 시러 모라와 저도 손조 주그니라

ㄴ.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 한문 원문

伋壽同死 列國 衛

衛 公子壽者 宣公之子 太子伋之異母弟 公子朔之同母兄也 其母與朔謀 欲殺伋 共讒於公 公令伋之齊 使賊先待於隘而殺之 壽知之以告伋使去之 伋不可曰 棄父之命 惡用子矣 有無父之國則可也 及行 壽飮以酒 載其旌而先往 賊殺之 伋至曰 君命殺我 壽有何罪 賊又殺之 國人傷之 作二子乘舟之詩

ㄴ′. 『오륜행실도』 언해문

위나라 공 슈 션공의 아이오 태 급의 다른 어미게 나흔 아이오 공 삭의  어미의게 나흔 형이라 ㉡슈의 어미 삭으로 더브러 여 급을 죽이려 여 가지로 션공의게 참소니 공이 급으로 여곰 ㉣졔나라 신 가라 고 도적을 즈레 보내여 죽이라 니  알고 급의게 고여 라나라 대 급이 듯디 아니여 오 ㉥아븨 명을 리면 엇디 식이라 리오 고 쟝   술로 급을 먹여 케 고 급의 긔 만이 아사 몬져 가니 도적이 긔 보고 급인가 여 죽이거 급이 니러 오 님군이 날을 죽이라 시니  무 죄 이시리오 대 도적이  죽이니 나라 사이 슬허 여 이승쥬[두 사이  고 가단 말이라]라  글을 지으니라

(8)의 ㄱ과 ㄴ에서 전체적인 의미로는 태자 ‘급(伋)’과,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슈(壽)’ 두 형제의 의로움이 나타나나 그 구체적인 문면(文面)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륜행실도』와 『오륜행실도』에서 한문 원문의 첫머리 “衛 公子壽者 宣公之子 太子伋之異母弟 公子朔之同母兄也”까지는 같으나 그 이하에서는 거의 같은 문면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ㄱ과 ㄴ, ㄱ′과 ㄴ′에서 보면 대략적인 의미는 유사하나 구체적으로는 ㉠과 ㉡, ㉢과 ㉣, ㉤과 ㉥이 비슷한 문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다르다 하겠다. 겨우 한 가지 예만을 제시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차이가 곳곳에 존재한다. 여기서 정조 실록의 합리(合釐)와 증정(證訂)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추가로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사이의 언해 내용이 달라진 사항들을 황문환(2006: 884-885)에서 인용한다. 다만 황문환의 (9)ㄱ의 ㉢에서는 ‘遂’가 빠져 있다.

(9) 『삼강행실도』 효자도와 『오륜행실도』 권1의 효자도

ㄱ. ‘민손단의(閔損單衣)’ 한문 원문

閔損 … 早喪母父聚後生二子 母嫉損生子衣棉絮衣損以蘆花絮 ㉡父冬月令損御車體寒失靷 父察知之欲遣後妻 … 父善其言而止 ㉢母亦感悔遂成慈母

ㄴ. 『삼강행실도』(초간본)의 언해

㉠[] 閔민損손 다어미 損손이 믜여 제 아란 소옴 두어 주고 閔민損손이란 품 두어 주어늘 ㉡[] 치  셕슬 노하 린대 아비 알오 다 어미를 내툐려 커늘… 아비 올히 너겨 아니 내틴대 ㉢어미 도 뉘으처 어엿비 너기더라

ㄷ. 『삼강행실도』(영조 대 중간본)의 언해

민손 … 일즉 어미 죽고 아비 후쳐를 취여 두 아을 나흐니 손의 계뫼 민손을 믜워여 나흔 아으란 오 소음 두어 닙히고 손으란 품을 두어 닙히더니 ㉡겨의 그 아비 민손으로 여곰 술의 몰 치워  혁 노하 린대 아비 알고 후쳐 내치고져 거늘 … 아비 그 말을 어딜이 너겨 아니 내치니 ㉢계뫼 도로혀 뉘읏쳐 어엿비 너기더라

ㄹ. 『오륜행실도』 권1 효자도의 언해

민손 … 일즉 어미 죽고 아비 후쳐 여 두 아을 나흐니 손의 계뫼 손을 믜워여 나흔 아으란 오 소음 두어 닙히고 손으란 품을 두어 닙히더니 ㉡겨에 그 아비 손으로 여곰 술위 몰 치워 혁을 노하 린 아비 펴 알고 후쳐 내티고져 거 … 아비 그 말을 어딜이 너겨 아니 내티니 ㉢계뫼  감동고 뉘웃처 드듸여  어미 되니라

한문 원문 ㄱ에 대한 세 가지 번역 ‘ㄴ, ㄷ, ㄹ’에서 초간본 ㄴ의 언해 ㉠에서는 한문 원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반면에(㉠[∅]), 중간본 ㄷ과 『오륜행실도』 ㄹ에서는 한문 원문이 번역되어 있다. 단, 중간본에서는 ‘후쳐’를 취한 주어 ‘아버지’가 번역되어 있으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주어인 ‘아버지’가 생략되어 있다.

또 초간본 ㄴ에는 ‘동(冬)’의 번역이 ‘㉡[∅]’과 같이 생략되어 있으나 중간본 ㄷ과 『오륜행실도』 ㄹ에는 모두 ‘겨’로 번역되어 있다. 한문 원문 ㄱ의 ㉢에 보이는 ‘모(母)’는 초간본인 ㄴ에서는 ‘어미’로, 중간본 ㄷ과 『오륜행실도』 ㄹ에서는 ‘계모’로 번역되어 차이가 있다. 또한 『오륜행실도』에서는 한문 원문 ㉢ 부분을 ‘드여  어미가 되니라’로 언해하고 있으나 초간본과 중간본에서는 공히 ‘도혀(도로혀) 뉘으처 어엿비 너기더라’로 언해되어 있어 역시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4. 중간본

『오륜행실도』의 초간본은 관례에 따라 중요한 기관과 중요한 신하를 비롯하여 한성의 오부(五部), 팔도의 감영, 사도(四都)인 수원부(水原府), 광주부(廣州府), 개성부(開城府), 강화부(江華府)의 유수부(留守府), 그리고 330주현(州縣)의 관리와 향교에 각각 한 질씩 배포되었다.

이처럼 초간본의 배포량이 많았기 때문에 『오륜행실도』는 초간본 이후 중간된 것이 없었다. 현전하는 중간본으로는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중간된 것이 유일하다. 이 간본도 저본(底本)들의 중간본과는 달리 거의 초간본을 복각(復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간본을 복각본 정도로 간행하게 된 이유는 초간본의 판목(板木)이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김병학(金炳學)이 쓴 중간본(重刊本)의 서문 ‘오륜행실도 중간 서(重刊序)’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주009)

<정의>夜三更 火起於殯殿都監假家 延燒宣人門及東北所 部將廳 衛將所 鑄字所 大廳板堂 並六十二間(철종 실록 권9, 철종 8년 10월 15일조).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철종 8년(1859) 10월 빈전도감의 가건물에서 일어난 화재가 주자소에 옮겨 붙어 그 안에 있던 『오륜행실도』 초간본의 목판이 소실되었다.

(10) 是書舊有板本 前冬不戒于火 遂命內閣重刊而印頒之

이 책은 옛날에 판본이 있었으나 지난 겨울 불조심하지 않아 화재를 당했다. 이에 내각에 중간(重刊)의 명을 받아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복각에 가까운 성격으로 인해 중간본의 내용은 초간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 서문 부분에 중간 서문 ‘오륜행실도 중간 서’가 더 들어가고 중간에 참여한 신하가 ‘교인제신(校印諸臣)’ 부분에 추가된 사실, 그리고 5권 4책으로 분책되었던 것이 5권 5책으로 나누어졌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중간본 그림이 초간본에 비하여 다소 엉성하고 투박해진 경향도 보이지만, 이는 결국 복각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일 것이다.

5. 맺는말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이후 행실도류의 문헌은 유교(儒敎) 윤리를 구현할 수 있는 교화서(敎化書)로서 언제나 당시의 국가적 간행 사업의 주요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행실도류는 한편으로는 중간(重刊)과 개간(改刊)을 거듭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편찬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행실도류만큼 조선 시대 전반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간행된 문헌도 드물다 할 것이다. 성종 12년(1481)에 간행된 『삼강행실도』를 시작으로 광해군 9년(1617)에 우리나라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그 뒤를 잇는다는 사실은 행실도류가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행실도류의 문헌 중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판’의 성격을 갖는다. 이미 있었던 행실도를 합책하여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간행 이후 교화서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기존의 행실도류와의 관련성이 풍부하여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인 비교 연구의 대상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오륜행실도』를 통하여 18세기 말의 언어 사실뿐만 아니라 음운사, 문법사, 어휘사 등 국어사 전반에 걸쳐서 당해 언어 사실이 변천하여 온 과정까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역(意譯)에서 직역(直譯) 위주로 번역 양상이 달라지면서 언해 내용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곧 문체상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 구성, 즉 통사 구조의 차이도 상세하게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다. 물론 『오륜행실도』를 중심으로 비단 ‘국어사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역사적 사실의 비교 연구 또한 가능할 것이다.

본 역주 연구는 『오륜행실도』의 언해 부분 외에도 그 수록 목록의 차이, 도판과 한문 원문 등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전체를 포괄적으로 논의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작업이 국어사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본다. 아울러 국어사뿐만 아니라 미술사, 윤리사, 사회사 및 가치관이나 윤리관까지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토대 구축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 논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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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환(2006), 『오륜행실도』 해제, 『역주 오륜행실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한국학 연구 총서 5,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 위의 참고 논저 목록은 『오륜행실도』 권4, 권5를 연구하는 데 있어 참고가 될 것임. 실제로 본 역주 연구에서는 일일이 그 전고를 밝히지 않았음.

『오륜행실도』 해제* 주001)
<정의>* 이 해제는 송철의 등(2006)의 역주 『오륜행실도』에서, 황문환의 『오륜행실도』 해제(2006: 873~888)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광호(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정조 21년(1797)에 정조의 명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두 책을 합책하고 그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간행한 책이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이다. 5권 4책, 소장본에 따라서는 5권 5책의 언해본(諺解本)으로, 원문의 한자는 동활자(銅活字)이고, 언해문의 정음(正音) 곧 한글은 목판본(木版本)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제목 ‘오륜행실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대 문헌에서 ‘오륜(五倫)’의 ‘행실(行實)’을 본받을 만한 인물들을 가려 뽑아 그 ‘행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기(傳記) 형식으로 실어 놓은 교화서(敎化書)이다. 역사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중국인 133명과 그들과 견줄 만한 우리나라 사람 17명, 도합 150명의 전기를 효자(孝子) 33명, 충신(忠臣) 35명, 열녀(烈女) 35명, 형제(兄弟) 31명, 붕우(朋友) 16명으로 나누어 실어 놓았다. 그 순서 역시 유교에서 윤리적인 순위에 따라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로 정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다만 ‘오륜’ 가운데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에서 ‘장유(長幼)’의 예는 제외되어 있다.

이만수가 쓴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에 대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근본이 되었다.[爲化民成俗之本]”와 같이 천명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이 책은 교화(敎化)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판 곧 그림을 맨 앞에 싣고, 이 내용을 설명하는 글인 전기(傳記)를 뒤에 싣는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였는데, 이는 책 이름에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도(圖)’가 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오륜행실도』의 초간본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초간본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 본은 1972년에 을유문화사에서, 규장각본은 1989년 홍문각에서 각각 영인, 간행되었는데, 대체로는 규장각 본을 많이 이용한다. 본 해제는 규장각본(도서 번호 ‘가람 古 170-Y510’)과 동일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을 대상으로 한다. 주002)

서지 사항 : 33.8×20.9㎝. 사주쌍변(四周雙邊). 반엽 광곽(半葉匡郭): 21.9×13.8㎝, 유계(有界), 한문 10행 20자, 언해문 10행 19자, 주쌍행(注雙行). 판심(版心): 흑어미(黑魚尾), 원표제: 五倫行實, 내제·판심제: 五倫行實圖.

2. 『오륜행실도』의 체제와 간행 경위

2.1. 책의 체제

『오륜행실도』의 전체 체제는 크게 서문 부분과 본문 부분의 둘로 나누어 있다. 서문 부분은 권1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간행에 관련된 기록들로서, 간행 당시인 정조 21년 정월 초하루에 내린 정조의 윤음(綸音) 3장(6면)을 비롯하여, 주003)

<정의>이 윤음의 제목은 ‘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주례향약윤음(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酒禮鄕約綸音)’으로 판심(版心)은 ‘어제윤음(御製綸音)’이다.
‘오륜행실도서(五倫行實圖序)’ 2장(4면)(판심: 五倫行實圖), ‘삼강행실도 원서(三綱行實圖原序)’ 2장(4면)(판심: 오륜행실도, 세자(細字) ‘三綱原序’), ‘이륜행실도 원서(二倫行實圖原序)’ 2장(4면)(판심: 五倫行實圖, 세자 ‘二倫原序’), 그리고 ‘奉 敎授閱, 奉 校監印’ 2장(4면)(판심: 五倫行實 세자 ‘校印諸臣’)으로 되어 있다. 주004)
<정의>교열에는 규장각 직제학 이병모(李秉模), 규장각 제학 윤기동(尹耆東), 감인(監印)에는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 규장각 검교(檢校) 심상규(沈象奎), 춘추관 교수(敎授) 김근순(金近淳), 부사과(副司果) 신현(申絢),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오태증(吳泰曾), 동(同) 김이영(金履永), 부사과(副司果) 조석중(曺錫中), 동(同) 홍석주(洪奭周)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오륜행실도』에 ‘삼강행실도 원서’와 ‘이륜행실도 원서’가 동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이 『오륜행실도』가 두 책을 저본(底本)으로 합책(合冊), 간행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오륜’의 순서(장유유서는 제외)에 따라 5권으로 분권(分卷)하여 본문을 나누어 실었다. 각각의 권은 그 책머리에 목록(目錄)을 실었는데, 권1~권3은 『삼강행실도』와, 권4, 5는 『이륜행실도』와 그 목록이 대체로 일치한다.

(1) 『오륜행실도』 권제1 목록 - 효자(35인)

1. 민손단의(閔損單衣) 2. 자로부미(子路負米)

3. 고어도곡(皐魚道哭) 4. 진씨양고(陣氏養姑)

5. 강혁거효(江革巨孝) 6. 설포주소(薛包酒掃)

7. 효아포시(孝娥拘屍) 8. 황향선침(黃香扇枕)

9. 정란각목(丁蘭刻木) 10. 동영대전(董永貸錢)

11. 왕부폐시(王裒廢詩) 12. 맹종읍죽(孟宗泣竹)

13. 왕상부빙(王祥剖冰) 14. 허자매수(許孜埋獸)

15. 왕연약어(王延躍魚) 16. 양향액호(楊香搤虎)

17. 반종구부(潘綜救父) 20. 검누상분(黔婁嘗糞)

21. 숙겸방약(叔謙訪藥) 22. 길분대부(吉翂代父)

23. 불해봉시(不害捧屍) 24. 왕숭지박(王崇止雹)

25. 효숙도상(孝肅圖像) 26. 노조순모(盧操順母)

27. 맹희득금(孟熙得金) 28. 서적독행(徐積篤行)

29. 오이면화(吳二免禍) 30. 왕천익수(王薦益壽)

31. 유씨효고(劉氏孝姑) 32. 누백포호(婁佰捕虎)

33. 자강복총(自强伏塚) 34. 석진단지(石珍斷指)

35. 은보감오(殷保感烏)

(2) 『오륜행실도』 권제2 목록 - 충신(35인)

1. 용방간사(龍逄諫死) 2. 난성투사(欒成鬭死)

3. 석작순사(石碏純臣) 4. 왕촉절두(王蠾絶脰)

5. 기신광초(紀信誑楚) 6. 소무장절(蘇武杖節)

7. 주운절함(朱雲折檻) 8. 공승추인(龔勝推印)

9. 이업수명(李業授命) 10. 혜소위제(嵇紹衛帝)

11. 변문충효(卞門忠孝) 12. 환이치사(桓彛致死)

13. 안원매적(顔袁罵賊) 14. 장허사수(張許死守)

15. 장흥거사(張興鋸死) 16. 수실탈홀(秀實奪笏)

17. 연분쾌사(演芬快死) 18. 약수효사(若水効死)

19. 유겹연생(劉韐捐生) 20. 부찰직립(傅察直立)

21. 방예서금(邦乂書襟) 22. 악비열배(岳飛涅背)

23. 윤곡부지(尹穀赴池) 24. 천상불굴(天祥不屈)

25. 방득불식(枋得不食) 26. 화상손혈(和尙噀血)

27. 강산장군(絳山葬君) 28. 하마자분(蝦虫麻自焚)

29. 보안전충(普顔全忠) 30. 제상충렬(堤上忠烈)

31. 비녕돌진(丕寧突陣) 32. 정이상소(鄭李上疏)

33. 몽주순명(夢周殞命) 34. 길재항절(吉再杭節)

35. 원계함진(原桂陷陣)

(3) 『오륜행실도』 권제3 목록 - 열녀(35인)

1. 백희체화(伯姬逮火) 2. 여종지례(女宗知禮)

3. 식처곡부(殖妻哭夫) 4. 송녀불개(宋女不改)

5. 고행할비(高行割鼻) 6. 절녀대사(節女代死)

7. 목강무자(穆姜撫子) 8. 정의문사(貞義刎死)

9. 예종매탁(禮宗罵卓) 10. 원강해고(媛姜解梏)

11. 영녀절이(令女截耳) 12. 왕씨감연(王氏感燕)

13. 최씨견사(崔氏見射) 14. 숙영단발(淑英斷髮)

15. 위씨참지(魏氏斬指) 16. 이씨부해(李氏負骸)

17. 조씨의여(趙氏縊輿) 18. 서씨매사(徐氏罵死)

19. 이씨의옥(李氏縊獄) 20. 옹씨동사(雍氏同死)

21. 정부청풍(貞婦淸風) 22. 양씨피살(梁氏被殺)

23. 명수구관(明秀具棺) 24. 의부와빙(義婦臥冰)

25. 동씨피면(童氏皮面) 26. 왕씨경사(王氏經死)

27. 주씨구욕(朱氏懼辱) 28. 취가취팽(翠哥就烹)

29. 영녀정절(寗女貞節) 30. 미처해도(彌妻偕逃)

31. 최씨분매(崔氏奮罵) 32. 열부입강(烈婦入江)

33. 임씨단족(林氏斷足) 34. 김씨박호(金氏撲虎)

35. 김씨동폄(金氏同窆)

(4) 『오륜행실도』 권제4 목록

ㄱ. 형제(24인)

1. 급수동사(伋壽同死) 2. 복식분축(卜式分畜)

3. 왕림구제(王琳救弟) 4. 허무자예(許武自穢)

5. 정균간형(鄭均諫兄) 6. 조효취팽(趙孝就烹)

7. 목용자과(繆肜自撾) 8. 이충축부(李充逐婦)

9. 강굉동피(姜肱同被) 10. 왕랑쟁탐(王覽爭酖)

11. 유곤수병(庾衮守病) 12. 왕밀역제(王密易弟)

13. 채확자사(蔡廓咨事) 14. 극살쟁사(棘薩爭死)

15. 양씨의양(楊氏義讓) 16. 달지속제(達之贖弟)

17. 광진반적(光進反積) 18. 덕규사옥(德珪死獄)

19. 두연대형(杜衍待兄) 20. 장존포금(張存布錦)

21. 언소석적(彦霄析籍) 22. 도경인경(道卿引頸)

23. 곽전분재(郭全分財) 24. 사달의감(思達義感)

ㄴ. 부(附) 종족(7인)

25. 군량척처(君良斥妻) 26. 공예서인(公藝書忍)

27. 진씨군식(陳氏羣食) 28. 중엄의장(仲淹義莊)

29. 육씨의거(陸氏義居) 30. 문사십세(文嗣十世)

31. 장윤동찬(張閏同爨)

(5) 『오륜행실도』 권제5 목록

ㄱ. 붕우(11인)

1. 누호양려(樓護養呂) 2. 범장사우(范張死友)

3. 장예휼고(張裔恤孤) 4. 도종심시(道琮尋屍)

5. 오곽상보(吳郭相報) 6. 이면환금(李勉還金)

7. 서회불부(徐晦不負) 8. 사도경탁(査道傾橐)

9. 한이경복(韓李更僕) 10. 순인맥주(純仁麥舟)

11. 후가구의(侯可求醫)

ㄴ. 부(附) 사생(師生)(5인)

1. 운창자핵(云敞自劾) 2. 환영분상(桓榮奔喪)

3. 견초염빈(牽招斂殯) 4. 양시입설(楊時立雪)

5. 원정대탑(元定對榻)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권으로 나누어진 본문 부분은 오륜(五倫)의 순서에 따라 분권되었는데, 다만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장유’ 부분은 ‘형제’ 부분으로 대체되었다.

『오륜행실도』의 각 권은 권수(卷首)에 목록을 실었는데, 다음 [도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권1, 권2, 권3은 『삼강행실도』와, 권4와 권5는 『이륜행실도』와 그 목록 내용이 대체로 일치한다. 다만, 『이륜행실도』에서는 『오륜행실도』와 다르게 수록 전기를 분권(分卷)하지 않고 형제도·종족도·붕우도·사생도(師生圖)에 따라 나누어 실은 반면, 『오륜행실도』에서는 형제와 부(附) 종족도를 권4로, 붕우와 부(附) 사생도와 주자 발(鑄字跋)을 권5로 나누어 실어 놓았다. 목록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수정간행(修正刊行)’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권5에 실려 있는 주자 발에 따르면 『오륜행실도』는 주자소(鑄字所)에서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하여 반포(頒布)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오륜행실도』와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를 대조하여 [도표 1]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05)

<정의>이 도표는 황문환(2006: 875)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 원 도표에 약간의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 본 해제는 『오륜행실도』 전체의 해제인데, 그 가운데 권4와 권5에 해당하는 부분을 두 줄로 표시한다.

[도표 1]

내용/
책명
오륜도수록인 수
오륜행실도권1효자도33
권2충신도35
권3열녀도35
권4형제도24
부(附) 종족도7
권5붕우도11
부(附) 사생도5
주자도

『오륜행실도』 각 권에 실려 있는 전기(傳記)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다음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전기의 제목 ‘복식분축(卜式分畜)’과 그림이 먼저 실려 있고 뒤에 ‘한문 원문’이, 그리고 그 뒤에 ‘언해문’이 실려 있다.

『오륜행실도』 권4의 ‘복식분축’ 체제 예

(3ㄱ)

(3ㄴ)

(4ㄱ)

[그림 1] 권4 형제도

도판 (3ㄱ), 곧 그림은 전기(傳記)의 중요한 내용을 한 장면으로 나타낸 것으로 그 오른쪽 상단에 당해 전기의 제목을 사자성어(四字成語), 즉 (3ㄱ)에서처럼 ‘복식분축(卜式分畜)’으로 실어 놓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전기의 한문 원문은 먼저 사실을 실어 놓고, 그 내용에 대한 ‘시(詩)’나 ‘찬(贊)’을 반드시 덧붙여 놓았는데, 시는 7언 율시, 찬은 4언 고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기의 한문 원문인 1행 20자에 대하여 시나 찬은 한 자를 낮추어 1행 19자(띄는 부분도 한 자로 계산함)로 하였다. 그림이나 한문 원문에는 없으나 언해문에서는 인명이나 지명,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 어구(語句) 등에 대하여는 세자(細字) 두 줄, 곧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협주를 달아 놓았다.

2.2. 간행 경위

『오륜행실도』에 대한 간행 기록은 이 책의 서문인 ‘오륜행실도 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쓴 이만수(李晩秀)의 서문에는 간행 시기와 목적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6) 이만수의 『오륜행실도』 서(序)

[1] 上之二十有一年丁巳月正元日 誕誥八方以休老勞農之義尋以鄕飮酒鄕約條例士冠婚儀釐爲一 編又敎若曰我朝儀物之備隆自我 英陵盛際 聖神相承治敎体明而三綱二倫之書後先彙 成列于學官爲化民成俗之本 今欲講行鄕禮宣自二書而表章之乃命其書曰五倫行實以 臣晩秀與聞是役俾爲之序 臣 謹拜稽首言曰…(이하 생략)

[1′] 임금(정조)께서 21년 정사년 정월 초하루에 노인을 쉬게 하고 농부를 위로하려는 뜻으로 온 세상에 가르치심을 널리 펴시고 향음주(鄕飮酒; 송별연)·향약 조례·사관혼의(士冠婚儀; 성년식이나 혼례 의식) 등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드시었다. 또 가르침을 내리시어, “우리나라의 의식(儀式)과 문물(文物)이 갖추어진 것은 세종대왕의 성대한 때부터인데, 이것을 성스럽고 신령한 자손들이 서로 이어받아 정치와 교화(敎化)가 밝아졌다. 그간 『삼강』, 『이륜』 두 책이 선후로 간행되어 학관(學官)에 널리 반포되어 있으므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근본이 되었다. 이제 향례를 가르치고 시행하려면 반드시 이 두 책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시고, 책명을 『오륜행실(五倫行實)』로 하도록 명령하신 다음, 신 이만수가 이 사업에 간여함을 들으시고 이 서문을 쓰게 하셨다. 신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아룁니다. …

위의 서문에서 정조가 『오륜행실도』를 간행하도록 한 시기가 정조 21년( 1797) 정월임이 밝혀졌고 정조의 윤음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주006)

<정의>윤음에는, ‘上之二十一年正月初一日’이라고 했는데, 오륜행실도 서문에는, ‘上之二十有一年丁巳月正元日’이라고 적고 있으니, ‘정사년 정월 초하루[丁巳正月元日]’라는 말이므로, ‘정(正)’과 ‘월(月)’의 한자 순서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록에는, ‘丁巳二十一年春正月壬寅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서문에서 간행 목적이 궁극적으로 향례(鄕禮)의 강행(講行)이었음이 나타난다. 이런 목적 이외에도 이 책의 간행이 단순히 두 책, 곧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책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책의 내용을 수정하였고, 특히 언해 부분에서는 ‘증정(證訂)’(증거를 가지고 올바르게 고침)하였으며, 간행의 성격을 윤색하고 고교(考校)(올바로 고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향례의 실천을 위해서는 이미 있었던 ‘향음주례(鄕飮酒禮)·향약조례(鄕約條例)·사관의(士冠義)·사혼의(士昏義)’ 등을 합하여 별도의 책 『향례합편(鄕禮合編)』이 편찬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실천서가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유교의 기본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오륜행실도』는 바로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같이 이미 널리 보급되고 알려진 윤리에 관한 책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된 것이다.

이만수의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의식과 문물이 갖추어진 것이 세종대왕의 성대한 때부터[我朝儀物之備隆自我 英陵盛際]’라 하여, 특히 세종 대를 언급한 것은 좀 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오륜행실도』와 동시에 간행이 추진된 『향례합편』의 ‘총서(總敍)’에 따르면 세종 대의 간행 사업이 『오륜행실도』의 간행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황문환 2006: 878).

(7) 『향례합편』의 총서(總敍)

[2] 昔我世宗盛際 行義老宴于勤政殿 復命儒臣校刊小學之君編纂三綱行實廣頒中外 予小子憲章而修述者 基在斯乎 於是命諸臣 採輯小學諸家註解而檃栝之 復以三綱行實二倫行實合編校正 命名曰五倫行實(띄어쓰기는 필자 추가)

[2′] 옛날 우리 세종대왕의 성대한 시절에 근정전에서 양로연을 열고 유신(儒臣)들에게 명령하시를, “『소학』을 교정하여 간행하고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라.” 하시었다. 나 소자가 이를 받들고 계승하려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여러 신하에게 『소학』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주해(註解)를 수집하여 간행하도록 하고 또 『삼강행실』과 『이륜행실』을 합편·교정하여 이름 짓기를 『오륜행실』이라 하였다.

정조 자신이 ‘소자인 내가 이를 받들고 계승하려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予小子憲章而修述]’고 하였듯이, 『오륜행실도』의 간행은 선왕(先王) 세종의 『삼강행실도』 편찬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곧 세종이 근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푼 이후 집현전의 문신들로 하여금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고 그것을 주자소에서 인쇄하게 하였듯이, 정조도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이후에 문신들로 하여금 『오륜행실도』를 편찬하고 그것을 인쇄하도록 한 것이다(황문환 2006:878, 김문식 2000:157-158).

앞에 인용한 이만수의 서문(序文)에서는 저본(底本)만 언급하고 간행 성격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위 [2]의 문맥만을 참조하자면 『오륜행실도』는 기존의 두 저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단순히 합책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이나 다음의 실록(實錄)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7) 정조실록 권지 47, 정조 21년 7월 丁亥조

[3] 上旣頒鄕禮合編 又命閣臣沈象奎等 取三綱二倫兩書而合釐之 證訂諺解 名曰五倫行實 命鑄字所 活印廣頒 俾作鄕禮之羽翼

[3′] 임금께서 이미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반포하신 뒤, 다시 내각 신하인 심상규(沈象奎) 등에게 명하여 『삼강』과 『이륜』의 두 책을 합책하고 수정하여 언해(諺解)를 증정(證訂)하게 한 뒤 이름을 『오륜행실』이라 하시었다. 주자소에 명하시기를 활자로 인쇄한 뒤 이를 널리 반포하여 ‘향례’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위 실록 내용에 따르면 『오륜행실도』의 간행은 합책, 곧 ‘양서의 합’에 수정[釐]이 가해졌으며, 특히 언해에서는 ‘증정(證訂)’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륜행실도 서’에서 이 책의 간행 성격을 윤색(潤色), 고교(考校) 등으로 표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주007)

此乃我殿下所以命臣等潤色 而臣等所以承命考校者也(밑줄 필자).

언해의 증정은, 문장 구조의 변화를 『이륜행실도』의 문장과 비교하여 증정의 내용을 후술하기로 한다.

3. 수정 간행의 내용

이미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목록 내용은 저본과 유사하다 하더라도 『오륜행실도』에서 수록의 체제가 달라진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삼강행실도』 충신도의 ‘방득여소(枋得茹蔬)’, 열녀도의 ‘이씨감연(李氏感燕)’과 ‘미처담초(彌妻啖草)’는 각각 『오륜행실도』 권2의 충신도에서 ‘방득불식(枋得不食)’, 권3의 열녀도에서 ‘왕씨감연(王氏感燕)’ 및 ‘미처해도(彌妻偕逃)’로 그 제목이 바뀌었다. 또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종족항의 ‘원백동찬(元伯同爨)’은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의 부(附) 종족에서 ‘장윤동찬(張閏同爨)’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물론 그 주인공 등이 바뀌었으므로 그 내용도 서로 다르게 설명되어 있다. 또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노조책려(盧操策驢)’는 『오륜행실도』 권1의 효자도에서 그 제목이 ‘노조순모(盧操順母)’로 바뀌어 실려 있다. 이외에도 『삼강행실도』 효자도의 ‘곽거매자(郭巨埋子)’ 및 ‘원각경부(元覺敬父)’가 『오륜행실도』에서 제외되었다. 주008)

<정의>황문환(2006: 879)에서는 ‘元定對榻(원정대탑)’이 『이륜행실도』에 없던 것인데 『오륜행실도』 권5 붕우도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규장각 가람문고 ‘古 170.951 G413i’의 『이륜행실형제도』(영인본)를 참조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원래 ‘낙장본’으로 맨 끝에 있는 이 제목이 낙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문각 영인본 이륜행실도 규장각도 ‘2074’ 영인본에는 ‘원정대탑’이 실려 있다.

3.1. 언해문 배치의 수정

『오륜행실도』는 그 저본(底本)과 똑같이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재를 취하고 있으나 언해문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 [그림 2-1], [그림 2-2]에서 알 수 있듯이 전본들은 한결같이 언해문을 ‘그림’ 밖 난상에 배치하고 한문 원문을 그 다음 면에 배치한 반면, 『오륜행실도』는 [그림]을 먼저 싣고 그 다음에 한문 원문, 그리고 언해문을 맨 끝에 배치하였다.

[그림 2-1] 『삼강행실도』 효자도의 ‘자로부미(子路負米)’

[그림 2-2]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급수동사(伋壽同死)’

[그림 3-1] 『오륜행실도』 권1 효자도 ‘자로부미(子路負米)’

[그림 3-2]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 ‘급수동사(伋壽同死)’

언해문의 위치에 따라 전본을 ‘난상 언해’, 『오륜행실도』를 ‘본문 언해’로 부른다면 결국 저본의 ‘난상 언해’ 방식을 읽기 쉽게 ‘본문 언해’ 방식으로 수정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저본의 언해문이 글자가 작고 행간의 선도 없어서 읽기에 불편한 점을 고려한 것으로, 수정을 통해 글자를 보다 크게 고치고 행간의 선을 추가하여 그 정교함의 정도를 높였다. 따라서 수정된 방식이 훨씬 수월하게 읽혔을 것이다.

또한 저본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언해문이 ‘난상’에 배치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삼강행실도』는 한문본이 먼저 간행되고 그 뒤에 언문본이 간행되었다. 곧 한문본은 세종 16년(1434)에 이미 간행되었지만 언해본은 세종 당시부터 논의되다가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간행되었다. 따라서 언해본은 결국 이미 간행된 한문본의 목판(木板)에 언해 부분을 덧붙인 것으로 언해본의 언해문은 자연히 ‘난상 언해’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륜행실도』는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목표를 가진 『삼강행실도』와 동일한 목적으로 간행되었으므로 처음부터 『삼강행실도』와 같은 체재를 취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형제와 종족’, ‘붕우와 사생’을 보완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체재를 『삼강행실도』에 맞추었고 그 결과 언해가 ‘난상’에 실렸을 것이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결국 『오륜행실도』에서 ‘본문 언해’ 방식을 택한 것은 기타의 언해 방식의 배치 방식을 따른 것인 동시에 언해문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언해문을 본문에 실음으로써 『오륜행실도』는 교화서(敎化書)로서의 본래의 목적에 보다 충실한 체재를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목판본에 언해문을 새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방식은 『이륜행실도』까지만 적용되었을 뿐, 광해군 9년(1617) 임란 이후 대대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만 1,587명의 행적을 찾아 실어 펴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이미 난상에 새겼던 언해문 방식을 버리고 본문 안의 한문 원문에 이어 편집하는 방식을 채택한 바 있다. 『오륜행실도』의 편집 방식은 이를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3.2. 도판 구성의 수정

[그림 2]와 [그림 3-1], [그림 3-2]를 비교해 보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자로부미(子路負米)’와 ‘급수동사(伋壽同死)’에서는 그 내용이 시공간(時空間)의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오륜행실도』의 그림은 그 내용이 전부 표시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한 장면에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전자에 비하여 후자는 전설(傳說) 내용 가운데 한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수정된 것이다.

[그림 2]의 『삼강행실도』 ‘자로부미’ 그림을 보면 맨 위쪽에 ‘자로’가 쌀을 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고, 부모가 앉아 있는 모습과 그 뒤 벼슬이 높이 되어 따르는 수레가 많고 곡식이 많아도 요 한 표를 깔고 솥에 음식하여 소박하게 먹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이륜행실도』의 ‘급수동사’ 그림에서는 태자 ‘급’의 배다른 공자 ‘삭’과 그 어미가 모의하여 태자 ‘급’을 배에서 죽이려 할 때, ‘삭’과 친형제인 공자 ‘슈’가 이를 말리는 장면이 맨 밑에 있다. 그리고 제나라에 태자 ‘급’을 사신으로 보낼 때 ‘슈’가 태자의 깃발을 들고 태자로 가장하여 대신 죽게 되는데, 태자가 이를 알고 스스로 죽는 장면이 맨 위에 그려져 있다.

저본들과는 달리 『오륜행실도』 권1 효자도의 ‘자로부미’ [그림 3-1]에서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로’가 쌀을 지고 있는 한 장면만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권4 형제도의 ‘급수동사’[그 3-2]에서는 태자 ‘슈’가 이복 동생 ‘급’을 따라 죽는 장면만이 그려져 있다.

3.3. 언해 내용의 수정

저본인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오륜행실도』와 비교하면, 언해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정조 실록’의 기록(권47, 21년 7월 20일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정(證訂)이나 합리(合釐)의 뜻이 담겨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륜행실도』에서 특히 ‘증정’은 넓게는 수록 체재의 수정을 비롯하여 저본의 내용을 가감하거나 대체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작게는 저본의 내용을 구체화하거나 잘못을 고치는 곧 정정(訂正)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륜행실도』 붕우(朋友)도의 ‘누호양려(樓護養呂)(한나라)’는 언해에서 그 제목이 누락되어 있으나 『오륜행실도』에서는 ‘누호 한나라 졔군 사이니’로 보충되어 있다. 그 한문 원문도 『이륜행실도』에서는 ‘누호(樓護)’로만 되어 있으나 두 말 할 필요 없이 『삼강/오륜 행실도』에서는 ‘누호제군인(樓護齊郡人)’으로 되어 있다. 『오륜행실도』가 저본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이러한 양상은 책 전체에 일관되게 유지된다. 여기서는 『이륜행실도』 ‘형제도’의 ‘급수동사(伋壽同死)’와 『오륜행실도』의 그것을 각각 원문과 언해문을 제시하고 그 내용을 비교하고자 한다.

(8) 『이륜행실도』 형제도와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 ‘급수동사(伋壽同死)’

ㄱ. 『이륜행실도』 한문 원문

伋壽同死 周

衛公子壽者 宣公之子 太子伋之異母弟 公子朔之同母兄也 其母與朔謀 欲殺伋而立壽 使人與伋 乘舟於河中 將沈而殺之 壽知不能止 因與之同舟 舟人不得殺又使伋之濟 將使盜 見載㫌 要而殺之壽止伋 伋曰棄父之命 非子道也 不可壽又與之偕行 其母不能止 乃戒之曰壽無爲前也 壽又竊伋㫌以先行 盜見而殺之 伋至痛壽代己之死涕泣哀載 其屍環至境而自殺

ㄱ′. 『이륜행실도』 언해문

윗나라 공 슈 션공이란 님금의 아리니 태급비 다 아믜게 난 아이오 공 삭이와  어믜게 난 형이라 ㉠그 어미 삭이와 야 태 주기고  셰요려야 사마로 야 태와 타 가다가 므레 드리텨 주기려 거  말리디 몯야 조차 그  타 가니 몯 주기니라  ㉢졧나라 태 보내고 도적야 길헤 가 태의 긔 가거든 보고 주기라 대  가디 말라 야 태 닐오 ㉤아 명을 더디면 식의 되 아니라 대   조차가더니 그 어미 말리디 몯야 경계야 닐오 앏셔디 말나 더니   태의 긔 아사 앒 셰고 가거 도적이 태라 너겨 주기니라 태 미처 가 보고 제 모긔 주근 주 슬허 울고 주거믈 시러 모라와 저도 손조 주그니라

ㄴ. 『오륜행실도』 권4 형제도 한문 원문

伋壽同死 列國 衛

衛 公子壽者 宣公之子 太子伋之異母弟 公子朔之同母兄也 其母與朔謀 欲殺伋 共讒於公 公令伋之齊 使賊先待於隘而殺之 壽知之以告伋使去之 伋不可曰 棄父之命 惡用子矣 有無父之國則可也 及行 壽飮以酒 載其旌而先往 賊殺之 伋至曰 君命殺我 壽有何罪 賊又殺之 國人傷之 作二子乘舟之詩

ㄴ′. 『오륜행실도』 언해문

위나라 공 슈 션공의 아이오 태 급의 다른 어미게 나흔 아이오 공 삭의  어미의게 나흔 형이라 ㉡슈의 어미 삭으로 더브러 여 급을 죽이려 여 가지로 션공의게 참소니 공이 급으로 여곰 ㉣졔나라 신 가라 고 도적을 즈레 보내여 죽이라 니  알고 급의게 고여 라나라 대 급이 듯디 아니여 오 ㉥아븨 명을 리면 엇디 식이라 리오 고 쟝   술로 급을 먹여 케 고 급의 긔 만이 아사 몬져 가니 도적이 긔 보고 급인가 여 죽이거 급이 니러 오 님군이 날을 죽이라 시니  무 죄 이시리오 대 도적이  죽이니 나라 사이 슬허 여 이승쥬[두 사이  고 가단 말이라]라  글을 지으니라

(8)의 ㄱ과 ㄴ에서 전체적인 의미로는 태자 ‘급(伋)’과,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슈(壽)’ 두 형제의 의로움이 나타나나 그 구체적인 문면(文面)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륜행실도』와 『오륜행실도』에서 한문 원문의 첫머리 “衛 公子壽者 宣公之子 太子伋之異母弟 公子朔之同母兄也”까지는 같으나 그 이하에서는 거의 같은 문면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ㄱ과 ㄴ, ㄱ′과 ㄴ′에서 보면 대략적인 의미는 유사하나 구체적으로는 ㉠과 ㉡, ㉢과 ㉣, ㉤과 ㉥이 비슷한 문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다르다 하겠다. 겨우 한 가지 예만을 제시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차이가 곳곳에 존재한다. 여기서 정조 실록의 합리(合釐)와 증정(證訂)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추가로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사이의 언해 내용이 달라진 사항들을 황문환(2006: 884-885)에서 인용한다. 다만 황문환의 (9)ㄱ의 ㉢에서는 ‘遂’가 빠져 있다.

(9) 『삼강행실도』 효자도와 『오륜행실도』 권1의 효자도

ㄱ. ‘민손단의(閔損單衣)’ 한문 원문

閔損 … 早喪母父聚後生二子 母嫉損生子衣棉絮衣損以蘆花絮 ㉡父冬月令損御車體寒失靷 父察知之欲遣後妻 … 父善其言而止 ㉢母亦感悔遂成慈母

ㄴ. 『삼강행실도』(초간본)의 언해

㉠[] 閔민損손 다어미 損손이 믜여 제 아란 소옴 두어 주고 閔민損손이란 품 두어 주어늘 ㉡[] 치  셕슬 노하 린대 아비 알오 다 어미를 내툐려 커늘… 아비 올히 너겨 아니 내틴대 ㉢어미 도 뉘으처 어엿비 너기더라

ㄷ. 『삼강행실도』(영조 대 중간본)의 언해

민손 … 일즉 어미 죽고 아비 후쳐를 취여 두 아을 나흐니 손의 계뫼 민손을 믜워여 나흔 아으란 오 소음 두어 닙히고 손으란 품을 두어 닙히더니 ㉡겨의 그 아비 민손으로 여곰 술의 몰 치워  혁 노하 린대 아비 알고 후쳐 내치고져 거늘 … 아비 그 말을 어딜이 너겨 아니 내치니 ㉢계뫼 도로혀 뉘읏쳐 어엿비 너기더라

ㄹ. 『오륜행실도』 권1 효자도의 언해

민손 … 일즉 어미 죽고 아비 후쳐 여 두 아을 나흐니 손의 계뫼 손을 믜워여 나흔 아으란 오 소음 두어 닙히고 손으란 품을 두어 닙히더니 ㉡겨에 그 아비 손으로 여곰 술위 몰 치워 혁을 노하 린 아비 펴 알고 후쳐 내티고져 거 … 아비 그 말을 어딜이 너겨 아니 내티니 ㉢계뫼  감동고 뉘웃처 드듸여  어미 되니라

한문 원문 ㄱ에 대한 세 가지 번역 ‘ㄴ, ㄷ, ㄹ’에서 초간본 ㄴ의 언해 ㉠에서는 한문 원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반면에(㉠[∅]), 중간본 ㄷ과 『오륜행실도』 ㄹ에서는 한문 원문이 번역되어 있다. 단, 중간본에서는 ‘후쳐’를 취한 주어 ‘아버지’가 번역되어 있으나 『오륜행실도』에서는 주어인 ‘아버지’가 생략되어 있다.

또 초간본 ㄴ에는 ‘동(冬)’의 번역이 ‘㉡[∅]’과 같이 생략되어 있으나 중간본 ㄷ과 『오륜행실도』 ㄹ에는 모두 ‘겨’로 번역되어 있다. 한문 원문 ㄱ의 ㉢에 보이는 ‘모(母)’는 초간본인 ㄴ에서는 ‘어미’로, 중간본 ㄷ과 『오륜행실도』 ㄹ에서는 ‘계모’로 번역되어 차이가 있다. 또한 『오륜행실도』에서는 한문 원문 ㉢ 부분을 ‘드여  어미가 되니라’로 언해하고 있으나 초간본과 중간본에서는 공히 ‘도혀(도로혀) 뉘으처 어엿비 너기더라’로 언해되어 있어 역시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4. 중간본

『오륜행실도』의 초간본은 관례에 따라 중요한 기관과 중요한 신하를 비롯하여 한성의 오부(五部), 팔도의 감영, 사도(四都)인 수원부(水原府), 광주부(廣州府), 개성부(開城府), 강화부(江華府)의 유수부(留守府), 그리고 330주현(州縣)의 관리와 향교에 각각 한 질씩 배포되었다.

이처럼 초간본의 배포량이 많았기 때문에 『오륜행실도』는 초간본 이후 중간된 것이 없었다. 현전하는 중간본으로는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중간된 것이 유일하다. 이 간본도 저본(底本)들의 중간본과는 달리 거의 초간본을 복각(復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간본을 복각본 정도로 간행하게 된 이유는 초간본의 판목(板木)이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김병학(金炳學)이 쓴 중간본(重刊本)의 서문 ‘오륜행실도 중간 서(重刊序)’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주009)

<정의>夜三更 火起於殯殿都監假家 延燒宣人門及東北所 部將廳 衛將所 鑄字所 大廳板堂 並六十二間(철종 실록 권9, 철종 8년 10월 15일조).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철종 8년(1859) 10월 빈전도감의 가건물에서 일어난 화재가 주자소에 옮겨 붙어 그 안에 있던 『오륜행실도』 초간본의 목판이 소실되었다.

(10) 是書舊有板本 前冬不戒于火 遂命內閣重刊而印頒之

이 책은 옛날에 판본이 있었으나 지난 겨울 불조심하지 않아 화재를 당했다. 이에 내각에 중간(重刊)의 명을 받아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복각에 가까운 성격으로 인해 중간본의 내용은 초간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 서문 부분에 중간 서문 ‘오륜행실도 중간 서’가 더 들어가고 중간에 참여한 신하가 ‘교인제신(校印諸臣)’ 부분에 추가된 사실, 그리고 5권 4책으로 분책되었던 것이 5권 5책으로 나누어졌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중간본 그림이 초간본에 비하여 다소 엉성하고 투박해진 경향도 보이지만, 이는 결국 복각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일 것이다.

5. 맺는말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이후 행실도류의 문헌은 유교(儒敎) 윤리를 구현할 수 있는 교화서(敎化書)로서 언제나 당시의 국가적 간행 사업의 주요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행실도류는 한편으로는 중간(重刊)과 개간(改刊)을 거듭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편찬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행실도류만큼 조선 시대 전반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간행된 문헌도 드물다 할 것이다. 성종 12년(1481)에 간행된 『삼강행실도』를 시작으로 광해군 9년(1617)에 우리나라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그 뒤를 잇는다는 사실은 행실도류가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행실도류의 문헌 중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판’의 성격을 갖는다. 이미 있었던 행실도를 합책하여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간행 이후 교화서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기존의 행실도류와의 관련성이 풍부하여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인 비교 연구의 대상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오륜행실도』를 통하여 18세기 말의 언어 사실뿐만 아니라 음운사, 문법사, 어휘사 등 국어사 전반에 걸쳐서 당해 언어 사실이 변천하여 온 과정까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역(意譯)에서 직역(直譯) 위주로 번역 양상이 달라지면서 언해 내용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곧 문체상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 구성, 즉 통사 구조의 차이도 상세하게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다. 물론 『오륜행실도』를 중심으로 비단 ‘국어사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역사적 사실의 비교 연구 또한 가능할 것이다.

본 역주 연구는 『오륜행실도』의 언해 부분 외에도 그 수록 목록의 차이, 도판과 한문 원문 등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전체를 포괄적으로 논의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작업이 국어사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본다. 아울러 국어사뿐만 아니라 미술사, 윤리사, 사회사 및 가치관이나 윤리관까지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토대 구축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 논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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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참고 논저 목록은 『오륜행실도』 권4, 권5를 연구하는 데 있어 참고가 될 것임. 실제로 본 역주 연구에서는 일일이 그 전고를 밝히지 않았음.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간행 및 배경과 경과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은 중종 36년(1541) 봄 평안도에 소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다른 지방에까지 번져 피해를 입게 되자, 이에 왕명으로 가축전염병에 관한 의서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고, 그해 11월에 가축전염병에 대하여, ≪우마의방(牛馬醫方)≫, ≪본초(本草)≫, ≪신은(神隱)≫, ≪산거사요(山居四要)≫, ≪사림광기(事林廣記)≫, ≪편민도찬(便民圖纂)≫ 등 여러 의약서와 생활문화 관련서에서 치료방을 모아 약재명에는 우리의 향약명(鄕藥名)으로 주를 달고, 한문으로 된 치료방을 이두문과 언해문으로 풀이하여 교서관에서 19건을 인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이 권응창(權應昌)의 서문에서 확인된다. 19건 중 10건은 병조와 전생서(典牲署), 사축서(司畜署), 오부(五部),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에 보내고, 나머지 9건은 개성부와 8도에 보내어 즉시 판을 새겨 인출하여 필요한 관서에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 이본에 대하여

이 책의 이본에 대하여 오구라[小倉進平](1940:334-7)는 당시까지에는 2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하나는 일본의 궁내성 도서료(宮內省圖書寮本)에 있는 궁내성본(宮內省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오카다(岡田信利)란 개인이 소장하고 있었던 오카다본(岡田本)이다. 이 두 종류의 이본에 대한 오구라[小倉進平](1940:334-7)의 지적은 다음과 같다.

(1) 궁내성본과 오카다본의 차이

가. 궁내성본은 서명이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으나, 오카다본은 ‘馬’ 자가 빠져 ≪우양저염역병치료방(牛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다.

나. 궁내성본은 권응창(權應昌)의 서(序)가 반엽 9행 17자로 되어 있으나, 오카다본은 9행을 다시 2행으로 나누어 반엽 18행 17자로 되어 있다.

다. 궁내성본은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가정(嘉靖) 4년, 김희수(金希壽) 서)과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가정 20년, 권응창(權應昌) 서)이 합철되어 있다. 전부 다 동일한 판식에 속하나(가정 20년에 ≪치료방≫을 ≪벽온방≫의 체재에 맞추어 인쇄한 것인지, 혹은 같은 해에 ≪벽온방≫을 신판인 ≪치료방≫에 맞추어 재판을 한 것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오구라[小倉進平](1940)의 지적이다), 오카다본은 ≪치료방≫만으로 단행본을 이루게 되어 있다.

라. 궁내성본은 언문에 의하여 표기된 조선어 왼편에 음의 장단·사성을 나타내는 점이 찍혀 있지 않으나, 오카다본에는 그것이 찍혀 있다.

마. 궁내성본과 오카다본 사이에는 간간이 자구의 차이가 존재하나, 어느 것에도 약간의 오식(誤植)이 인정된다.

이러한 차이를 지적한 뒤에 오구라[小倉進平](1940:334-7)는 권응창(權應昌)의 이두 서문 거의 전부를 옮겨 싣고 있다. 서문 끝부분의 연도와 수결 부분만이 빠졌을 뿐이다. 오구라(1940)는 권응창의 서문을 그냥 옮겨 놓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두 서문을 띄어 쓰고 표점(標點)을 찍음과 동시에 구결 부분에 방점을 찍어 표시하였고, 그 내용의 대강을 소개하고 있다. (1라)는 특히 훈민정음 자료에 대한 오구라(1940)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훈민정음의 방점이 성조를 표시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장단(長短)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나, 사성(四聲)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두 서문에 대한 오구라(1940)의 띄어쓰기와 표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구라(1940)에 의한 구결 부분은 작은 글자로 나타내기로 한다.

(2) 오구라(1940)에 소개된 권응창(權應昌) 이두 서문

平安道觀察使尙震書狀, 據曹啓目節該粘連啓下<구결자>是白有亦, 今年春節分本道牛疫大熾多致染斃<구결자>爲白去乙曹以治療之法醫方相考啓下<구결자>導良, 受敎內節該事知理馬<구결자>乙用良相當藥材<구결자>上下賫持, 刻日下送隨方治療<구결자>爲白乎旀, 醫司所無之物令本道監司廣求治療<구결자>爲白乎旀, 賫去藥材段置皆是鄕藥易得之物, 不足<구결자>爲白去等道<구결자>以隨宜准備用<구결자>使內亦受敎<구결자>爲白有置本道牛疫至今寢息<구결자>不冬, <구결자>便亦多斃至爲可慮<구결자>是白昆, 令本道監司前行移受敎, 關內 <구결자>辭緣相考, 牛疫染斃村里<구결자>良中藥物<구결자>這這備給, 各其官事知醫生<구결자>乙用良趂時分往救療<구결자>爲白乎矣, 前<구결자>矣啓下治療方法外, 他書<구결자>良中牛<구결자>叱分不喩六畜染疫治療之方散載亦多<구결자>爲白置,牛疫<구결자>亦平安一道<구결자>叱分不喩, 他道<구결자>良中置多有染斃之處<구결자>爲白沙餘良羊猪等<구결자>段置京外染疫致斃亦多<구결자>爲白去等, <구결자>右良諸畜染疫治療方法<구결자>乙竝只相考, 京外<구결자>良中謄書廣布, 使之依方治療宜當<구결자>爲白在果, 諸方文字鄕村窮巷民人等解見<구결자>不得叱分不喩, 藥名<구결자>乙良置解知<구결자>不得爲白沙餘良, 轉轉謄寫之際多致誤寫, 據而治療必應無驗可慮<구결자>是白昆, 令醫司藥理文字通解醫員等擇定上項諸畜染疫治療方文<구결자>乙吏讀諺文<구결자>爲等如兩件解釋, 藥名<구결자>乙良置鄕名<구결자>以書寫成冊, 令校書館十九件刻日印出, 十件<구결자>乙良本曹及典牲署·司畜署·五部·典醫監·惠民署<구결자>爲等如分上, 九件<구결자>乙良開城府及八道急速分送, 令各道卽時刻板, 多印分送于各官, 染疫<구결자>爲乎追乎檢擧治療如何.

이 서문을 통하여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의 편찬 배경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소의 전염병이 평안도 일대에서 크게 번졌다는 것, 그것이 다른 도에도 퍼지게 되었다는 것, 그 편찬 체계가 한문 원문과 그것을 풀이한 이두문과 언해문으로 되었다는 것, 약명에는 향약명을 첨가하여 알기 쉽게 하였다는 것, 19건을 인출하여 배포한 곳이 어디어디라는 것 등을 소상히 알게 해 준다. 오구라(1940)의 띄어쓰기와 표점 및 구결에 쓰인 한자 표시가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이본에 대한 언급은 홍문각(弘文閣)에서 1982년에 영인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해제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오구라(1940)를 참고로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본이 4종이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는 오구라(1940)에서 오카다본(岡田信利)이라 한 것인데, 이것을 1541년에 출간된 원간본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언급은 오구라(1940)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미키[三木 榮](1965)이다. 다른 하나의 이본은 일본 궁내청 서릉부(宮內廳 書陵部)에 있는 것으로 오구라(1940)에서 궁내성본이라 했던 것이다. 여기에 다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일사문고본(一簑文庫本)과 1644년의 교서관본을 더 소개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이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3) 홍문각 영인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해제에 나타난 이본 소개

가. 궁내청본은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1578년판)과 합철되어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 본은 그렇지 않다.

나. 오카다(岡田信利)본과 궁내청본은 활자본인 데 비해 일사문고본과 교서관본은 목판본이다. 특히 궁내청본은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과 판식, 활자, 지질 등이 동일한 을해자(乙亥字)본이다.

다. 궁내청본과 일사문고본 그리고 교서관판은 서명이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지만, 오카다본은 ‘마(馬)’가 빠진 ≪우양저염역병치료방(牛羊猪染疫病治療方)≫이다.

라. 오카다(岡田信利)본은 방점이 있지만, 다른 세 본은 방점이 없다.

마. 오카다(岡田信利)본과 궁내청본은 권응창(權應昌)의 서문이 있지만, 일사문고본은 그 서문이 없다. 그리고 권응창의 서문도 궁내청본은 9행 17자의 판식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오카다(岡田信利)본은 9행을 다시 2행으로 나누어 18행 17자의 판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교서관본에는 최명길(崔鳴吉)의 발문이 있다.

홍문각 영인본(1982)의 해제를 쓴 사람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이 해제를 쓴 이는 일사문고본 외에 다른 이본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3가)는 (1다)를 참고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3가)는 오카다본(岡田本)을 1541년의 원간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1가-마)에는 어디에도 그러한 언급이 없다. (3가)에서 말하는 "나머지 두 가지 본"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문맥으로 보면, 그 두 가지는 일사문고본과 궁내청본인 듯하다. 여기에 교서관본(校書館本)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자세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3나)에서는 그 교서관본(校書館本)을 ‘목판본’이라 언급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3나)의 궁내청본에 대한 언급은 (1다)를 참고로 한 것이 분명하다. 판식 외에도 활자, 지질까지 동일한 을해자본(乙亥字本)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3다)는 (1가)와 내용이 동일하다. 그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라)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오카다본에는 방점이 있는데, 궁내성본에는 방점이 없다는 것이 오구라(1940)의 (1라)에서의 지적이다. 홍문각 영인본을 해제한 사람은 그것을 일사문고본으로 보고, 일사문고본이 1578년판의 복각본(覆刻本)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간본만이 방점을 가지고 이후의 간본이 방점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마)의 끝부분에서는 갑자기 교서관본이 언급되고, 교서관본에는 최명길(崔鳴吉)의 발문(跋文)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1.1.에서 본 바와 같이, 초간본도 교서관에서 인출한 것이므로, (3마)의 끝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교서관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게 된다. 교서관본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미키[三木 榮](1965)이다. 미키[三木 榮](1965)는 자신이 직접 고(故) 오쿠다이라[奧平武彦]의 소장본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미키[三木 榮](1965)는 이 교서관본이 인조 14(숭정 9년, 1636)년 본이 활자본에 의거한 정판본(整版本)이며, 한문, 이두문, 언해문의 세 가지로 기술되어 있고, 최명길(崔鳴吉)의 발문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최명길 발문 전문도 소개되고 있다. 그 발문 일부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이 부분은 안병희(1975)에도 소개되고 있다.

(4) 최명길(崔鳴吉)의 발문 일부

今上 十四年丙子夏 平安黃海兩道 牛疫大熾 至秋猶不止 延入京畿 以及湖西 朝廷患之 工曹參判尹毅立 出其先人所藏 內賜諺解馬牛治療方一冊 乃嘉靖二十年 奉敎撰著 而萬曆六年 又因牛疫再刊 以頒者也 司僕寺提調李曙見大喜 具由以聞 上卽付校書館 印布中外

(4)에 의하면 인조 14(1639)년 여름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가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는 것, 이에 경기 지역에도 번지고 호서 지방에도 번져, 조정이 근심하였는데, 공조 참판 윤의립(尹毅立)이 그의 선조가 소장하고 있던, 말과 소의 치료방 1책을 가져왔다는 것, 그 책은 가정(嘉靖) 20(1541)년에 간행된 것으로, 내사 언해된 것이라는 것, 선조 11(萬曆 6, 1578)년에도 소의 전염병 때문에 재간된 일이 있었다는 것, 즉시 교서관에 분부하여 인쇄 반포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를 ‘인조 14년본’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 이본은 김신근 편(1988)의 여강출판사 영인본과 판식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나, 글자의 획이 다소 둔하고 날카로운 면이 감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이본은 선조 11년본을 정밀하게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미키[三木 榮](1965)는 또 다른 이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인조 22(순치(順治) 원년 1644)년에 나온 책으로 교정을 완료하여 이미 나온 우역방에 새로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처방을 부가하여, 수백 건을 인출, 각도와 주에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책 뒤의 이식(李植)의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미키[三木 榮](1965) 자신은 이 책의 간본은 본 일은 없고, 사본만을 겨우 부탁하여 볼 기회를 가진 것이라 한다. 양본이 아닌 책으로, 언해문이 본문에 병기되어 있으나, 이두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 14년본의 본문 첫 장 앞면〉

〈일사문고본 5장 뒷면〉

홍문각 영인본(1982)은 분명히 일사문고분이다. 일사 방종현 선생의 고서 구입기(購入記)가 면지(面紙)에 적혀 있다, 단기 4282년(1949년)에 이병직(李秉直) 소장 경매장에서 3만 2천원에 구입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 궁내성도서료(宮內省圖書寮)의 활자본을 따로 베껴 온 것이 있다는 언급도 있다. 반면, 일사문고본에는 내사기도 없고, 권응창의 이두(吏讀) 서문도 없고, 제목이 있고 그 풀이가 있은 뒤에 곧 본문이 시작된다. 홍문관 영인본이 일사문고본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판식이 일치하고, 훼손된 부분으로 지적된 면수가 일치하고, 자체가 일치한다.

그러나 그 해제에 제시된 사항은 상당 부분에 걸쳐 잘못이 있는 것 같고 혼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사문고본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은 총 15장으로 된 것인데, 그 해제는 그것을 총 16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 장의 오차가 있다. 또 일사문고본은 제11장이 낙장인데, 해제에서는 낙장을 제12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도 한 장의 오차가 있다. 해제자의 단순한 오류인지, 무엇인가 한 장이 더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해제자의 단순한 잘못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한다.

여기에 혼란을 더하고 있는 것이 김신근 편 (1988)에 영인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의 해제이다. 이 해제에서는 김신근 편 (1988)의 영인 저본을 일사문고본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일사문고에서는 이 책을 찾을 수 없다. 김신근 편 (1988)에 있는 이본(異本)에 대한 소개는 홍문각 영인(1982)의 해제를 참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3)과 같이 그 이본을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어 다시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홍문각 영인의 일사문고본과 김신근 편(1988)의 여강출판사 영인본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여강출판사 영인본에는 내사기도 있고, 권응창(權應昌)의 이두 서문도 있고, 자체도 정미(整美)한 을해자본(乙亥字本)이다. 이에 비하여 홍문각에서 영인한 일사문고본은 목판본이고 자체도 상당히 투박하다.

여강출판사 영인본의 내사기를 행 바꿈 없이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5) 여강출판사 영인본의 내사기

萬曆6年正月日 內賜行副護軍李仲樑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一件 命除謝恩 都承旨臣尹(수결)

이에 의하면, 여강출판사 영인본은 만력 6(1578)년에 부호군(副護軍)의 직위에 있었던 이중량(李仲樑)에게 내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내사를 수행한 것은 도승지 윤이다. 명제사은(命除謝恩)은 임금이 책을 내린 데 대해서는 특별히 은혜를 갚을 필요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내사본의 서명은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명시되어 있다. 여강출판사 영인본은 만력 6년에 내사된 것이므로, 1578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마송문고에 소장된 본이 바로 이 책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하여 일사문고본은 숭정(崇禎) 9(1636)년 해주(海州)에서 복각(覆刻)된 것이므로, 그것은 적어도 58년이나 뒤진 것이다. 여강출판사 영인본을 ‘선조 11(만력 6년, 1578)년본’(혹은 마송문고본)이라 부르기로 한다.

책의 제목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권두제는 일사문고본과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이 다 같이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으나, 권말제에서 차이를 보인다. 일사문고본은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治療方)≫으로 ‘병(病)’ 자가 빠져 있다. 만력 6년본의 권말제는 권두제와 같이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다. ‘병(病)’ 자가 그대로 있다. 간기의 있고 없음에도 일사문고본과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은 큰 차이를 가진다. 일사문고본은 “숭정(崇禎) 9년 병자(丙子) 팔월 일 해주목(海州牧) 개간(開刊)”과 같은 간기를 가지고 있으나,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에는 이러한 간기가 없다.

일사문고본과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은 판식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사문고본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인 데 대하여, 선조 11년본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홍문각 해제에서는 일사문고본을 사주쌍변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다. 어미는 선조 11년본이 상하내향 삼엽화문어미(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로 되어 있는 데 대하여, 일사문고본은 상하내향 흑어미로 되어 있어, 이 차이도 크다. 판심제는 다 같이 ‘우역방(牛疫方)’이다.

표기상으로, 선조 11(만력 6)년본에는 일사문고본과 같이 한글 언해에 반치음이 전혀 쓰이지 않고 있으나, 옛이응(ㆁ)은 받침에서 부분적으로 쓰이고 있다. 옛이응(ㆁ)이 전혀 쓰이고 있지 않은 일사문고본과 구별된다. 선조 11년본에는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큰 오식이 있는데, 그것은 5장 앞면에 나타나는 ‘미베’와 ‘효허이’이다. 이것이 일사문고본에서는 ‘이베’와 ‘효허미’로 교정되어 있는 것이다.

(6)가. 만력 6년본 5장 앞면 1행: 미베 브면 효허이 뎍 인니라

나. 일사문고본 5장 앞면 1행: 이베 브으면 효허미 뎍 인니라

(6가)와 (6나)의 밑줄 친 부분을 비교하면, (6가)의 ‘미’가 (6나)의 ‘이’로 바뀌고, (6가)의 ‘이’가 (6나)의 ‘미’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6가)의 교정 지시가 잘못 수행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교정자는 ‘이’를 ‘미’로 교정하라 한 것인데, 실제로 교정된 것은 엉뚱한 글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6나)에서는 바로잡히고 있다.

홍문각 영인본의 해제자가 원간본이라고 추정한 일본인 소재의 오카다(岡田信利) 소장본은 그동안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일본 도쿄대(東京大)의 후쿠이(福井 玲) 교수가 오구라(小倉進平) 문고본을 디지털화한 것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오카다본을 손으로 그대로 옮긴 등사본(謄寫本)이지만 책의 형태로 장정이 되어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를 ‘오구라본’이라 불러 보자. 이 책은 사주 윤곽선이나 계선(界線)이 없이 내용만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곳곳에 붉은 글씨로 교정이 되어 있다. 이것은 오구라 교수가 궁내성도서료본과 오카다본을 비교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을 교합(校合)한 것이다. 이 교합은 오구라 교수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뒤의 메모 글씨와 교합의 글씨체가 동일하다. 후쿠이 교수의 디지털본에 의하여 오카다본과 궁내청본의 윤곽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패이지에 그 첫 면을 보이기로 한다.

오카다본은 (1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책의 제목이 ≪우양저염역병치료방(牛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다. ‘마(馬)’ 자가 빠져 있다. 오카다본에는 권말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구라문고본에 권말제가 붉은 글씨로 써 있기 때문이다. 오카다본은 도승지 권응창(權應昌)의 서문이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14장이며 전체가 1책이다. 본문 행관은 8행 17자, 서문과 언해문 및 협주가 쌍행으로 되어 있다. 언해문에는 방점이 찍혀 있다. 오카다본의 본문 첫 면을 후쿠이 교수가 펴 낸 CD본에서 가져와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001)

오구라신페이(小倉進平) 문고본에 소장되어 있는 오카다본 첫면을 여기에 소개하게 된 것은 후쿠이[福井 玲] 교수의 호의에 의한 것이다. 첫 면의 영인 소개를 허락해 준 후쿠이 교수에게 사의를 표한다.

〈오카다본으로 추정되는 사본. 오구라문고 소장〉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과 합철되어 있는 궁내청본은 15장 1책으로, 서문, 언해 부분이 단행으로 된 것이 오카다본과의 큰 차이이다. 본문 행관은 9행 17자로 되어 있다. 제목이≪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고, 권말제도 이와 같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권응창(權應昌)의 이두 서문은 단행으로 되어 있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언해문에 방점이 없다는 것은 (1라)에도 지적된 것이지만, 오구라의 주서 메모에도 나타나 있다. 오구라의 교합으로 보면, 궁내청본은 오카다본의 표기에 대하여 몇 가지 교정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괄루(括蔞: 하눌타리)’의 ‘괄’ 자가 나무목 변(栝)으로 나타나는 것, 오카다본의 반치음이 대부분 소실되어 ‘ㅇ’으로 바뀐 것, ‘너고리肉’과 같은 것이 ‘너고리古其’와 같이 바뀐 것, ‘방무네(한 방문에)’가 ‘방문네’와 같이 바뀐 것 등을 알 수 있다.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의 이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7)가. 오카다[岡田信利]본 : 중종 41(1541)년의 원간본으로 추정된다. 오류를 많이 가지는 것이 원간본이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책의 제목이 ≪우양저염역병치료방(牛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고, 본문 14장 1책으로, 반엽 행관은 8행 17자, 이두 서문, 언해문 및 주석은 쌍행으로 되어 있다. 을해자 활자본인 것으로 추측된다. 언해문과 주석 한글에는 방점이 찍혀 있다. 한문 원문이 있고, 이를 이두로 풀이한 이두문, 훈민정음으로 풀이한 언해문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동경대학 도서관 오구라[小倉] 문고에 손글씨로 등사한 사본이 있다. 이에 의하면, 오카다본에는 권응창 이두 서문이 있고 그 끝 부분이 “左承旨臣權應昌依允”과 같이 되어 있다. 언해 부분의 한글에 방점이 있다.

나. 궁내청본 : 일본의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진 본. 오구라(小倉進平)가 궁내성도서료본이라 했던 것이다.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과 합철된 책으로, 책의 제목이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되어 있고, 권두제와 권말제가 일치한다. 본문 15장 1책으로, 반엽 행관은 9행 17자이다. 이두 서문, 언해문은 단행으로 되어 있고, 주석만 쌍행으로 되어 있다. 을해자 활자본이다. 목활자가 섞여 있다고도 한다. 이는 만력 6년본을 토대로 추측한 것이다. 권응창 이두 서문이 있고 그 끝 부분이 “左承旨臣權應昌依允”과 같이 되어 있다. 언해, 주석 부분의 한글에 방점이 없다.

다. 선조 11년 내사본 : 선조 11(1578)년 내사기를 가진 이본으로, 김신근 편(1988)에 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본은 내용이 (7나)의 궁내청본과 거의 같으나, 그래도 미세한 차이를 가진다. 궁내청본과 달리 ≪간이벽온방≫과 합철되어 있지 않다. 제목이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권두제와 권말제가 일치한다. 본문 15장 1책으로, 반엽 행관은 9행 17자이다. 판심은 상하내향 삼엽화문어미이고, 판심제는 ‘우역방(牛疫方)’이다. 권응창의 이두 서문, 언해문이 단행으로 되어 있고, 주석은 쌍행으로 되어 있다. 을해자 활자본으로 목활자가 섞여 있다고 한다. 권응창 이두 서문의 끝 부분이 오카다본이나 궁내청본과 달리 “左承旨臣權應昌次知依允”과 같이 되어 있다. ‘차지(次知) 계(啓)’가 더 있다. 언해, 주석 부분의 한글에 방점이 없다. 내사기가 만력 6년으로 되어 있어, 그 발간이 1578년임을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마송문고에 소장된 책이 이 책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조 11년 내사본 본문 첫장 앞면(여강출판사 영인)〉

라. 일사문고본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일사(一簑) 방종현 귀중본으로 되어 있다. 권두제는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나, 권말제는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으로, 권두제에서 ‘병(病)’ 자가 빠져 있다. 본문 15장 1책으로, 반엽 행관은 9행 17자이다. 판심은 상하 내향 흑어미, 판심제는 ‘우역방(牛疫方)’이다. 제 11장이 낙장이고, 1장 앞면, 10장 뒷면, 15장 앞뒷면이 다소 많이 훼손되어 있다. 내사기도 권응창의 이두 서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단행으로 되어 있고, 주석은 쌍행으로 되어 있다. 목판본으로 글자가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판식이 선조 11(만력 6)년본과 기본적으로 같으므로, 1578년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언해, 주석 부분의 한글에 방점이 없는 것은 궁내청본이나 김신근(1988)의 여강출판사 영인본과 같다. 권말에 숭정 9년 병자 8월 일 해주목 개간이란 간기가 있다. 1636년판인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반엽 광곽은 21.2×15cm, 계선이 있고, 책의 크기는 31.4×19.1cm이다.

마. 인조 14(숭정 9년, 1636)년본 : 미키[三木 榮](1965)에 제시된 이본. 미키(1965)는 자신이 직접 고(故) 오쿠다이라[奧平武彦]의 소장본을 보았다고 한다. 미키(1965)는 이 교서관본이 인조 14(숭정 9년, 1636)년 본이 활자본에 의거한 정판본(整版本)이며, 한문, 이두문, 언해문의 세 가지로 기술되어 있고, 최명길(崔鳴吉)의 발문이 있다고 한다. 최명길 발문 전문도 소개되어 있다.

바. 인조 22(순치 원년, 1644)년본 : 미키[三木 榮](1965)에 제시된 이본. 교정을 완료하여 이미 나온 우역방(牛疫方)에 새로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처방을 부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백 건을 인출, 각도와 주에 보냈다는 이식(李植)의 발문이 있다고 한다. 미키(1965) 자신은 이 책의 간본은 본 일은 없고, 사본만을 보았다고 하는데, 양본이 아닌 책으로, 언해문이 본문에 병기되어 있고, 이두문은 병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 22년본 본문 첫 장 앞면. 미키(1965)에서 옮김〉

본 역주가 그 저본으로 삼은 것은 김신근 편(1988)의 여강출판사 영인본이다. 이것은 선조 11(1578)년의 내사기를 가진 책으로, (7다)에 해당한다.

3. 표기상의 특징

이 책의 표기법상의 특징을 홍문각 영인본의 해제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8)가. 오카다본과 달리 1578년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에는 한글 언해에 반치음 ‘ㅿ’이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예, 브으라( 1ㄴ, 2ㄱ, 4ㄱ, 5ㄱ), 브오(2ㄴ), 처엄(3ㄱ), 무(14ㄱ). 그러나 언해문에도 일부 쓰인 예가 있고(예, ‘브라(6ㄴ)’), 주석에도 반치음이 쓰인 예가 있다. 예, 댄무믿(14ㄱ), 댄무닙무(14ㄱ). 그러나 15세기에 반치음이 쓰인 ‘여[狐]’는 주석에서도 ‘여(1ㄴ)’와 같이 쓰이고 있다.

나. 선조 11(만력 6, 1578)년본에는 받침 ‘ㆁ’에 옛이응이 쓰이고 있다. 이는 일사문고본에 옛이응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과 크게 대조된다. 예. (1ㄴ), 문네(2ㄴ) 등.

다. 된소리 표기에는 ‘ㅅ’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ㅂ’은 특이한 예에만 쓰이고 있다.

  예. 리 (2ㄴ, 13ㄴ, 15ㄴ),

   (1ㄴ), [亦](1ㄴ), 미(9ㄴ), 라(8ㄱ)

   레(6ㄱ), (13ㄴ), 신당(13ㄴ),

   (4ㄴ), 디(2ㄴ), 글(8ㄱ), 며(14ㄱ)

라. 어말 ‘ㄷ’과 ‘ㅅ’은 구별되어 표기되고 있다.

예. 몯니라(6ㄱ), 게(7ㄱ); 곳그테(9ㄴ), 졋과(4ㄴ)

마. 사이시옷이 후행어의 두음과 함께 쓰이기도 하였다.

 예. 신당(13ㄴ), 릿그틀(15ㄴ). 참고. 곳그테(9ㄴ)

바. 구개음화의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 디 말라(2ㄴ)

사. 어말 유기음은 선행어의 받침을 내파화하고 후행어의 두음을 외파하는 것으로 표기된다.

 예. 닙플(4ㄱ), 닙플(5ㄱ), 닙피어나 (14ㄱ).

 후행어의 두음으로 연철된 예도 있다.

 예. 벼(4ㄴ), 나(13ㄴ), 릿그틀(15ㄴ)

아. 체언의 겹받침은 연철되지 않고, 용언의 겹받침은 연철되어 쓰이고 있다.

 예. 을(6ㄱ), 마(5ㄴ).

자. 체언과 조사, 체언과 파생 접미사 사이에 받침이 중철되는 일이 있다.

 예. 방문네(3ㄱ), 연니(9ㄴ), 소올(8ㄱ), 황칠리어나(10ㄱ).

차. 자음 동화에 의한 표기가 다수 나타난다.

 예. 인니라(4ㄴ), 닙플(5ㄱ), 됸니라(7ㄴ), 댄닙(8ㄴ, 9ㄴ).

카. 모음 체언 뒤에도 접속 조사 ‘과’가 쓰인 일이 많이 나타난다.

 예. 쇼과(5ㄴ), 개과(5ㄴ), 과(9ㄱ).

4. 해제 참고문헌

국어국문학 편찬위원회 편(1994),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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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편(1976/1986:중판), 국어국문학사전, 신국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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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小倉進平](1940), ≪朝鮮語學史≫, 刀江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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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미상(n.d.),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CD-ROM 간행위원회(1995/1997), 조선왕조실록:중보판, 서울시스템주식회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1),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홍문각 편(1982), ≪분문온역이해방, 간이벽온방, 오마양저염역병치료방, 벽온신방≫, 홍문각.

홍윤표(1982), “해제: 분문온역이해방,” 홍문각 편(1982).

홍윤표·송기중·정광·송철의 편(1995), ≪17세기 국어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후쿠이[福井 玲] 편(2002), 오구라신페이[小倉進平]문고 소장본 CD. No. 1.

『원각경언해』 해제

정우영(동국대학교 교수. 국어학)

1. 머리말

『원각경(圓覺經)』은 북인도 계빈(罽賓)의 고승인 불타다라(佛陀多羅 : 覺救)가 한역한 것으로 연대는 확실치 않고, 그 정식 이름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다. 주001)

「원각경」의 번역자와 번역 연대에 대하여는 이설이 많다. 경(經) 제목에 ‘經’(sūtra)이 ‘修多羅(수다라)’와 함께 중복 사용된 점 등의 이유로 당나라 초기의 위찬(僞撰)이 아닌가 간주되기도 한다. 전해주·김호성(1996:99) 참조.
당나라에서는 9세기에 「대방광원각다라니(大方廣圓覺陁羅尼)」를 비롯하여 5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주002)
<정의>배휴(裵休)가 지은 ‘약소서(略疏序)’의 주해에 따르면, ① 대방광원각다라니(大方廣圓覺陁羅尼), ② 수다라요의(修多羅了義), ③ 비밀왕삼매(秘密王三昧), ④ 여래결정경계(如來決定境界), ⑤ 여래장(如來藏)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방광원각경, 원각수다라요의경, 원각요의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원각경」이라는 약칭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다(이하 「원각경」으로 줄여 부른다.). 이 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보는 학자가 많고 문헌학적으로 의문시되고는 있으나, 그 내용이 대승(大乘)의 참뜻을 잘 표현하고 있어 한국과 중국에서 널리 유통되어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금강경」, 「수능엄경」, 「대승기신론」 등과 함께 불교 전문 강원(講院)의 4교과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어 왔다.

이 경에 대한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대방광원각경대소(大方廣圓覺經大疏)·대소초(大疏鈔)·약소(略疏)·약소초(略疏鈔) 등과, 조선 초기 함허당 득통(涵虛堂 得通)의 원각경소(圓覺經疏) 등이 있으나, 종밀의 것을 제일로 꼽고 있다.

이 글의 텍스트인 『원각경언해』는, 역사적 근거가 가장 명확한 당나라 규봉 종밀(宗密, 780~841)의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를 저본으로 하여 조선 세조(世祖)가 구결을 단 『어정구결원각경(御定口訣圓覺經)』을 대본으로 혜각존자 신미(信眉)·효령대군(孝寧大君)·한계희(韓繼禧) 등이 한글로 번역하고, 황수신(黃守身) 등이 새기고 박아 세조 11년(1465. 成化元年) 간경도감에서 목판본 10권 10책으로 간행한 책이다. 주003)

<정의>권두의 내제 다음에 “御定口訣/慧覺尊者臣僧信眉孝寧大君臣補仁順府尹臣韓繼禧等譯”이란 기록과 황수신의 「진원각경전(進圓覺經箋)」 및 간행에 참여한 박원형(朴元亨)·김수온(金守溫) 등 조조관(雕造官)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 명칭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처럼 크고[大], 방정하고[方], 광대한[廣] 원각(圓覺)을 설명하는 것이 모든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경(經)이라는 뜻으로서, 지고한 깨달음의 원융불이(圓融不二)한 경지인 원각을 돈교(頓敎)적인 측면에서 밝히고, 그 수행과 깨달음의 길을 점교(漸敎)적 측면에서 단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어, 불교 수행에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

한편, 국어사 자료로서의 이 책의 중요성은, 세종 28년 1446년 9월 『훈민정음』(해례본)에서 국어표기법이 규정되고, 그 표기 규범들이 정음 초기문헌들을 통해 실용화되었는데, 이 문헌에 이르러 ‘ᅙ’과 각자병서 표기법이 폐지되는 하나의 큰 분수령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 같은 특징에 주목하여, 선행연구에서는 음운사적·표기법사적 고찰이 있었으며, 주로 변화의 원인과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주004)

<정의>대표적인 것으로 이기문(1963, 1972)과 이익섭(1963, 1992), 이현규(1976), 지춘수(1986), 정우영(1996가, 2002)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문헌에 대한 서지 사항은 안병희(1979)에서 간명하게 소개되었으며, 소장 현황과 표기법의 특징 등은 한재영(1993)에 좀더 자세히 기술되었다. 이 책은 1140여 장 약 2300 쪽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분량이지만, 같은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인 『능엄경언해』(1461,2)나 『법화경언해』(1463)에 비하면 개별 문헌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제2장 문헌 개관에서는 서지, 판본 현황, 내용 구성 등을 살펴보고, 제3장에서는 표기법과 음운의 특징적 사실을 기술하며, 제4장 어휘에서는 이 책에 나타난 새말과 희귀어들을 목록과 함께 제공함으로써 이용자들의 편의를 돕고자 한다.

2. 문헌 개관

2.1 서지

『원각경언해』의 편찬 체재는 다음과 같다.

책크기 : 32cm×23.3cm
내제 :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판심제 : 圓覺(서 : 圓覺經序. 전 : 圓覺經箋. 조조관 : 雕造官)
반곽 : 21.8cm×18.5cm
판식 : 4주 쌍변
판심 : 흑구 상하 내향 흑어미(상하 안쪽으로 향한 검은지느러미 모양)
행관 : 유계 9행, 본문 큰자는 1행에 17자, 주해·번역문은 작은자 쌍행으로 17자
권말제 :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이 책의 한문 주해·본문 및 언해문의 편찬 양식은 목판본 『능엄경언해』와 같으며, 1463년 『법화경언해』, 1464년의 『선종영가집언해』·『금강경언해』·『반야심경언해』와는 대동소이하다. 주005)

<정의>『법화경언해』에는 한문 주해에 『훈민정음』(해례본)과 같은 방식의 구두점이 사용되었다.
‘약소서·서’의 본문과 한문 주해, 그리고 언해는 행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첫머리부터 시작하였으며, 원권(圓圈.○)으로 본문·주해·언해를 각각 구분하고 글자 크기를 대자·소자로 달리 처리하였을 뿐 본문과 언해를 별행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의 본문 격인 상·하(上·下)권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 경 본문과 주해가 따로 있기 때문인데, 경 본문은 큰자로 행의 첫칸부터 쓰고, 바로 뒤에 원권(○)으로 나누어 작은자 쌍행으로 언해문을 썼다. 경 본문에 대한 종밀의 주해문은 줄을 바꾸어 중자로 1자 낮추어 가지런히 쓰되, 주해문에 대한 한문 주해가 있을 경우에는 ○표를 하고 작은자 쌍행으로 써나가며, 모든 주가 마무리된 끝에 다시 ○표로 분단하여 언해문을 썼다. 언해문 속의 협주는 시작과 끝을 흑구로 안쪽을 향해 지느러미 모양(【 】)으로 감쌌으며, 번역문보다 뒤쪽에 올 때는 흑구의 끝을 생략하였다.

이제, 이 책 원간본의 편차를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 원간본은 완질이 전해지지 않는다(§2.2). 원간본의 복각본인 서울대 규장각본을 참고하되, 원간본이 남아 있는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서 목판본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선종영가집언해』, 『반야심경언해』의 원간본 편찬 체재를 고려하여 표로써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06)

<정의>한재영(1993:150)에서는 중간본을 이용해 정리하였으로 ‘箋·雕造官’이 권10에 들어 있다. 그러나 간경도감판 언해서들의 원간본의 편찬 체재와, 모처에 비장된 권1 「원각경서」(원간본의 후쇄본)를 참고해 볼 때, ‘箋’과 ‘雕造官’이 권1 「원각경서」 앞에 위치했음이 틀림없다.

〈표〉 『원각경언해』 원간본의 분권과 권차 주007)

<정의>권2~권10의 판심제는 각권의 첫장만 “圓覺上○之○” 식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之〉 자가 빠진 채 “圓覺上○○”식으로 되어 있어 권차를 확인하기 어렵다.

권별내용(판심제)장별(지은이)
권1진원각경전(進圓覺經箋)1~3장 (黃守身. 1465.3.19)
조조관(雕造官)1~2장 (黃守身 등)
원각경약초서(圓覺經略鈔序)1장(思齊)
원각경약소서(圓覺經序)1~14장 (裵休)
원각경서(圓覺經序)15~84장 (宗密)
권2원각경(圓覺 上一之一)1~118장 (이하 宗密 주해)
권3〃(圓覺 上一之二)1~97장
권4〃(圓覺 上一之二)98~192장
권5〃(圓覺 上二之一)1~53장
〃(圓覺 上二之二)1~86장
권6〃(圓覺 上二之二)87~173장
〃(圓覺 上二之三)1~47장
권7〃(圓覺 下一之一)1~68장
〃(圓覺 下一之二)1~57장
권8〃(圓覺 下二之一)1~65장
〃(圓覺 下二之二)1~47장
권9〃(圓覺 下三之一)1~135장
권10〃(圓覺 下三之二)1~103장
합계1148 장

2.2 판본 현황 및 영인본

현재 전해지는 『원각경언해』의 판본은 대개 다음과 같다(한재영 1993, 김영배 2000).

(1) 원간본 : 세조 11년(1465)

가. 심악본〔ㅇ 51-1. 191〕 : 하3-1(1~4장앞 낙장), 하3-2(103장 이하 낙장)〈영본〉
나. 일사문고본〔일사 고귀 294.33-W49bd〕 : 하2-1(맨끝 낙장)
다. 일사문고본〔일사고귀 294.334-Si65d〕 : 상1-2(4~192장), 하3-1(4~135)

(2) 원간본 계열의 후쇄본 주008)

<풀이>원간본과의 구별은, 내제 다음에 나오는 “御定口訣/慧覺尊者臣僧信眉孝寧大君臣補仁順府尹臣韓繼禧等譯”이란 기록이 있고 없음으로 한다. 안병희(1979) 참조.

가. 서울대규장각 〔고귀1730-9A1/2〕
서(1-72 낙장), 상1-1(92장 이후 낙장), 상2-2(1~173장 1책 장정)
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문고: 하2-1, 하2-2, 하3-1, 하3-2
다. 일본 田川孝三 소장: 상2-1, 상2-3

(3) 원간본의 복각본

가. 서울대규장각 〔고1730-9〕 (완질)
나. 서울대규장각〔고1730-9A〕: 상2-3(1~47장), 하1-1(1~65장. 이하 낙장)
다. 서울대규장각 가람문고 〔고294.334-B872w-1465 v.1-10〕 (완질)
라. 성암고서박물관 〔3-266〕: 상2-2(20~173), 상2-3(1~47장)
마. 서울대규장각 일사문고 〔고294.33-w49b〕: 상2-2(43~173장)

(4) 중간본 : 선조 8년(1575) 전라도 안심사(安心寺) 간행

가. 동국대도서관 〔귀213.18-원11ㅅ11〕
나. 서울대규장각 〔고1730-9C〕
간기 : 萬曆三年(1575) 正月望前有日 全羅道 高山地 安心寺 開板

다음으로, 『원각경언해』의 영인 자료에 대하여 알아보자. 현재 학계에 널리 소개된 것은 세 가지이다. 1977년 대제각에서 1책으로 모아 축소·영인한 것과, 1980년 선암사에서 1책으로 축소·영인한 것, 그리고 1995년에 홍문각에서 5책으로 축소해낸 영인본이 있다. 대제각의 영인 저본은 중간본인 안심사판이며(안병희 1979), 홍문각 영인본은 (3다) 서울대 가람문고본이라고 알려져 있다(김영배 2000). 그러나 둘을 비교·확인해 본 결과 오각된 곳이 모두 일치하고 훼손된 부분도 모두 같다. 둘다 (3다)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본과 동일한 계열로서 원간본의 복각본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근거는, ‘서11뒤(5행-9행), 서12뒤(6행-9행), 하1-1:2앞(7행), 하1-1:2뒤(2행), 하3-2:43뒤(4행-9행)’ 부분이 대제각과 홍문각 영인본에서 똑같이 훼손된 상태로 나타나며 오각된 부분도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전자에는 장서인이나 도서번호가 없는 반면, 후자에는 (3다)와 똑같은 도서번호와 장서인이 첫장에 아주 선명히 드러나 있다. 또 다른 영인 자료인 1980년 선암사 영인본도 조사 결과, 앞의 두 자료와 완전히 동일한 계열의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다만, 책의 제목이 앞것과는 달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인 것이 차이나며, 하권의 경우에는 편철이 뒤바뀌어 있어 이용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결국 지금까지 나온 영인본은 원간본과 원간본 계열 후쇄본은 전혀 없으며, (3다)와 같은 원간본의 복각본만이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원각경언해』의 원간본은 완질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 언해서가 국어사 자료 중에서 연구 논문 편수가 극히 적은 원인이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희망적인 것은, 현재 흩어져 있는 원간본과 원간본 계열 후쇄본을 조합하면 거의 완질로 꾸며질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이번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영인·주해하는 권1 「원각경서」의 경우도 학계에 전혀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은 모처의 비장본 중 하나로, 기존의 영인본에 나타나는 오각이나 훼손된 부분을 바르게 복원할 수 있는 아주 양호한 상태의 자료이다.

역주와 영인을 계기로 이 책에 대한 연구가 깊이 있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3 내용 구성

『원각경언해』의 제1권은 「원각경서」이다. 이것은 배휴(裵休)와 그의 스승인 규봉 종밀선사(宗密禪師)의 글을 언해한 내용인데, 이 경의 특징과 중요성, 그리고 이 주석서의 성립 배경과 이에 얽힌 일화가 밝혀져 있다. 경 본문에서 설해질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였으며 본문에서 사용되는 선(禪)과 관련된 기초적인 불교 용어들이 거의 다 들어 있어 입문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내용이다. 특히 백가(百家)의 글을 인용하여 본문에 대한 상세한 주를 달고 있어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꾸며진 점은 「원각경서」의 큰 특징이라 하겠다.

제2권에서 제10권까지는 경(經)의 본문에 해당되는데 상·하편으로 짜여졌다. 석가여래 부처님이 문수(文殊), 보현(普賢), 보안(普眼), 금강장(金剛藏), 미륵(彌勒), 청정혜(淸淨慧), 위덕자재(威德自在), 변음(辯音), 정제업장(淨諸業障), 보각(普覺), 원각(圓覺), 현선수(賢善首) 보살 등 12명의 보살과 문답을 통해 원각(圓覺)의 묘리(妙理)와 그 관행(觀行)을 설하는 내용인데, 부처님과 12 보살과의 문답을 각각 1장(章)으로 삼았기 때문에 전체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면, 제1 문수보살장은 이 경의 안목(眼目)이 되는 부분으로, 누구나 본래부터 갖고 있는 원각(圓覺)에 환원하기만 하면 생사가 곧 열반이요, 윤회가 곧 해탈이 됨을 가르치고 있다. 제2 보현보살장부터 제11 원각보살장까지는 원각을 닦고 증득하는 데 필요한 사고와 실천에 대하여 설하였고, 끝으로 제12 현선수보살장에서는 이 경의 이름과 신수봉행하는 방법, 그리고 수지하는 공덕과 이익 등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각 장(章)에서 설한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009)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8:663) 참조. ‘원각경’(徐京洙 집필).

① 문수보살장 : 여래인행(如來因行)의 근본과 과상(果相)

② 보현보살장 : 중생들이 원각의 청정경계(淸淨境界)를 듣고 수행하는 법

③ 보안보살장 : 중생들이 어떻게 사유하고 주지(住持)해야 하는가?

④ 금강장보살장 : 중생이 본래 성불한 것이라면 왜 다시 일체의 무명(無明)을 설했는가, 만일 무명이 본래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인연으로 본래가 성불한 것이라고 설했는가, 만일 본래 불도를 이루고 다시 무명을 일으켰다면 여래는 언제 다시 일체 번뇌를 일으킬 것인가 하는 3가지 질문에 답함.

⑤ 미륵보살장 : 윤회를 끊는 방법

⑥ 청정혜보살장 : 성문성(聲聞性)·연각성(緣覺性) 등 오성(五性)의 계위

⑦ 위덕자재보살장 : 세 가지 근성(根性)에 따른 수행 방법

⑧ 변음보살장 : 원각문(圓覺門)에 의해 수습(修習)하는 길

⑨ 정제업보살장 : 말세의 중생을 위한 장래안(將來眼)

⑩ 보각보살장 : 수행자가 닦아야 할 법(法)과 행(行), 제거해야 할 병과 발심하는 법,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는 법에 대해 설함.

⑪ 원각보살장 : 원각경계(圓覺境界)를 닦기 위해 안거(安居)하는 법

⑫ 현선수보살장 : 이 경의 이름, 신수봉행(信受奉行) 방법, 이 경을 수지(受持)하는 공덕과 이익 등에 대하여 설하였다.

3. 표기법과 음운의 특징

국어표기법의 변천사에서 『원각경언해』가 차지하는 위상은 남다르다. 훈민정음 표기법이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해례본)에서 규정된 이래, 정음 초기문헌들을 통해 규범화·실용화되었는데, 처음에 「능엄경언해」에서 ‘ㅸ’이 ‘오/우/◦’ 등으로 전격 교체됨으로써 그 이후 한글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주010)

필자는 이를 국어표기법의 ‘제1차 개정’이라 부른다. 정우영(2002:560) 참조.
그런데 또다시 이 『원각경언해』에 와서 ‘ᅙ’과 각자병서가 구결문 및 언해문의 우리말 표기에서 폐지되기에 이른다(제2차 개정). 이 문헌을 계기로 다음 문헌부터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므로 『원각경언해』는 이른바 ‘규범문헌’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셈이다.

이 장에서는 종래의 연구에서 특징적 사실로 거론된 ① 〈ㆆ〉과 각자병서의 폐지에 대한 역사적 과정, ② 방점 표기의 변화에 대한 의의 등을 살펴보고, 그 밖에 음운현상과 관련하여 모음조화의 실상 등,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와 비슷하지만 차이가 나는 몇 가지 주제도 함께 지적하기로 한다.

3.1. 〈ㆆ〉과 각자병서의 폐지

훈민정음의 ‘ㆆ’은 후음 전청자로서 ‘挹字初發聲’의 음가를 지닌 후두폐쇄음 /ˀ/이고, 각자병서 ‘ㄲ ㄸ ㅃ ㅉ ㅆ ㆅ’은 훈민정음의 오음(五音) 전탁자로서 각각 ‘虯·覃·步·慈·邪·洪字初發聲’의 음가를 지닌 초성 자모들이다. 이들 자모는 주로 개신한자음―동국정운음과 홍무정운역훈음―의 초성 표기를 위해 제자되었다. 먼저 ‘ㆆ’은 개신한자음의 종성 표기에도 쓰였으며, 국어음을 위해서는 사이시옷(하, 快ㆆ字) 표기와 관형사형어미 ‘-ㄹ’과 후행어의 통합 표기(길)에 사용되었고, ‘ㄲ ㄸ ㅃ …’ 등 6개 각자병서는 관형사형어미와 후행어의 통합 표기 「-ㄹ+ㄲ·ㄸ·ㅃ·ㅉ·ㅆ」과, 어두음 ‘ㅆ[쏘다]·ㆅ[다]’ 표기, 그리고 비어두음절 초성 ‘ㅉ[조-. 隨]·ㅆ[조-. 稽首]’ 등에서 수의적으로 사용되었다.

‘ㆆ’과 각자병서는 동국정음 한자음 표기를 제외하고는 이 책에서 일절 찾아볼 수 없다. 10권 1140여 장(약 2300쪽)에서 사이시옷 표기로 쓰인 ‘飮ㆆ字’가 유일하다. 각자병서도 모두 폐지되었으며 이것의 변형으로 추정되는 (5나다라)가 보일 뿐이다. (ㄱ은 앞면, ㄴ은 뒷면을 나타낸다.)

(5) 가. 注 中엣 飮ㆆ字와 得字와 (상1-1:116ㄴ)

나. 엇뎨 修行이 이시리오 가 저흐샤 (상2-1:110ㄴ)

cf. (구결문) 恐…何有修行이리오 가 샤 (상2-1:110ㄱ)

다. 經이 그리 핡가 저허(經이 恐文繁야) (상2-2:136ㄱ)

라.  어느제 다시 迷고 (상2-3:27ㄴ)

(5가)는 후음 전청자 ‘ㆆ’([ˀ])을 무성음인 후행 음절 초성(ㅈ)의 후두화 부호로 이용한 경우이다. (5나다라)의 ‘가, 핡가, 고’는 현실발음으로는 존재하나 표기법에서는 폐지됨으로써 야기되는 조음적 공백을 보상하려는 표기로 해석된다. 폐지되기 전에는 ‘가~까, 가~할까, 고~꼬’ 등으로 표기법에 융통성을 보였으나, 주011)

<정의>같은 문헌에 나타나는 이 같은 양상을 두고 ‘원칙이 없고 혼란스러운 표기법’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 표기법의 원리가 ‘표기의 발음≒표준 발음 실현’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같은 문장 바로 앞뒤에서 두 가지 표기가 나타나는 것은, 표기자에게 ‘융통성’을 부여하여 어느 것이나 선택해 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가지 표기방법이 허용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당시에도 조음 결과가 서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각각 [hʌlk’a], [halk’a], [hʌlk’o]로 동일한 표면형들이 도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병서 폐지로 ‘가, 할가, 고’로만 적음으로써 철자상 된소리로는 발음되지 않자 이 같은 편법을 써서 된소리 발음을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ㆆ’과 각자병서의 공식적 폐지는 『원각경언해』에서 이루어졌지만 폐지를 위한 시험 운용에는 약간의 시차가 있었다. ‘ㆆ’을 없앤 표기가 좀더 이른 문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극히 적은 예이지만, 「석보상절」 등 정음 초기문헌에 ‘-ㄹ’ 다음에 ‘ㆆ’ 또는 각자병서를 쓰지 않은 예가 나타난다. ‘ㆆ’ 폐지가 눈에 띄게 반영된 문헌은 신미(信眉)가 번역한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경)의 구결문 표기부터이인데, 앞선 시기 문헌의 구결 표기 ‘디니라, 딘댄’ 등과는 달리 ‘홀디니라, 홀딘댄’ 등으로 나타난다. 이 전통은 「능엄경언해」(1461,2)에도 계승되어 언해문에까지 확대되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법화경언해」(1463)에도 ‘ㆆ’을 쓰지 않는 원칙이 이어지며, 세조 10년(1464)에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금강경언해」·「반야심경언해」 등 불경언해의 주012)

<정의>세조 10년에 나온 목판본 「아미타경언해」는 세조 7년(1461) 이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활자본을 목판본으로 바꾸어 간행한 데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세조 10년의 국어표기법의 원칙이 적용된 문헌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단순하게 간행연대만 보고 표기법을 논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문헌 간행시기와, 당대의 문헌들에 반영된 표기법이 다른 경우는 간행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면밀히 검토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위험한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다.
구결문에는 ‘ㆆ’과 각자병서가 전혀 없는 표기만 보인다. ‘ㆆ’ 폐지라는 표기법 개정의 준비가 시행되기 1년 전에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정우영 1996가:56).

한편, 각자병서를 쓰지 않는 경향은 「능엄경언해」 활자본(1461)부터 나타난다. 구결문에서 어미 ‘-ㄹ’ 다음에 ‘ㅆ’이 아주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ㄸ’이 한두 예가 나타날 뿐 전반적으로 폐지된 모습을 보인다. 주013)

「능엄경언해」의 언해문과 구결문에 뒤섞여 나타난다.
(언해문) 아로미 아닐(1:72), 드리혈(3:2), 다(4:128), 닷젯(9:41)
(구결문) 知ㄹ(1:72), 吸塵(3:2), 知따(4:128), 修…젯(9:40)
이것은 1462년의 목판본에 이어지고, 1463년의 「법화경언해」 언해문의 경우는 6종의 각자병서가 빠짐없이 쓰였지만, 구결문의 경우는 ‘ㅆ’이 간혹 쓰일 뿐 나머지 각자병서는 일절 쓰이지 않는다. 세조 10년(1464) 「선종영가집언해」를 비롯한 불경언해의 ‘구결문’에서는 어떤 종류의 각자병서도 찾아볼 수 없다. 드디어, 세조 11년(1465) 『원각경언해』 전 10권에서 ‘ㆆ’과 각자병서는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를 제외하고 언해문과 구결문에서 일괄 폐지된다. 훈민정음 표기법이 성립된 지 불과 20년만의 일이다.

그런데 ‘ㆆ’과 각자병서의 폐지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평가가 조금 다르다. ‘ㆆ’은 동국정운음 표기에서 파생된 부가적인 용법이므로 이것의 폐지에 대하여는 이의가 없지만, 각자병서에 대하여는 그간 “급격한 변화, 극적인 변화, 공식주의적인 무리, 과잉조처…” 등으로 평가되어 왔었다(지춘수 1986, 이익섭 1992). 된소리로서의 위치가 확고했던 일부 각자병서(ㅆ·ㆅ)까지 일괄 폐지한 것은 지나친 처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각자병서(전탁)는 이원적인 기능, 즉 국어음에는 된소리, 개신한자음에는 유성무기음(또는 유성유기음)이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문자정책상 이것의 단일화가 더 시급한 문제로 제기됐을 것이며, 그 결과 이를 국어음 표기에서 폐지하는 방향으로 개정한 것이므로, 정책적인 면에서는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ㆆ’과 각자병서를 폐지한 개정 작업은 종래의 주장처럼 “극적으로, 급격하게” 단시일 내에 급조된 조치가 아니라, 실제로는 1450년대 말 구결문에서부터 시험 운용됨으로써 적어도 5, 6년간의 시험기를 거쳐 혼란과 불편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행해진 제2차 표기법 개정은 개신한자음 재구에 필요했던 ‘ㆆ’과 각자병서[전탁]를 폐지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고, 정작 이들 표기 항목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동국정운 한자음 표기에서는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 있으므로, 『원각경언해』에서 행해진 국어표기법 개정 작업은 미완(未完)의 개정(改定)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3.2 방점 표기

『원각경언해』의 방점 표기는 훈민정음 초기문헌인 「훈민정음언해」 등과는 조금 다르지만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서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음 초기문헌은 구결문과 언해문에 모두 방점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는 언해문에서만 사용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이미 1461년 활자본 「능엄경언해」부터 시작된 사실로서, 적어도 15세기 문헌자료에서는 구결문에 방점 표기가 있고 없음이 어떤 문헌의 성립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로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014)

<정의>간행이나 성립된 시기를 알 수 없는 『아미타경언해』 활자본을 예로 들어보자.
(가) 如是我聞···니 (활자.아미 1ㄴ)
(나) 如是我聞 니 (목판.아미 1ㄴ)
활자본은 (가)처럼 방점이 쓰였으나, 세조 10년에 간행된 (나) 목판본에는 그것이 쓰이지 않았다. 현전 문헌자료 중 구결문에서 방점을 쓰지 않은 문헌의 상한연대는 1461년 「능엄경언해」이므로, (가) 『아미타경언해』 활자본은 대체로 1459년 『월인석보』 이후 1461년 『능엄경언해』 활자본보다 앞선 시기에 성립·간행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에는 방점 표기에 대한 변화의 조짐이 짙어진다. 정음 초기문헌에는 조사와 활용어미의 마지막 음절이 거성(1점)인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 문헌에는 어말 위치에서 평성(0점)으로 변화해 가는 경향을 보인다. 주015)

<정의>『반야경언해』(금강경언해)에서 그 같은 경향이 일기 시작하며, 성조 표기의 변화를 1464년을 기점으로 제1기와 제2기로 나누었다(김완진 1973:108-110).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이런 경향은 이보다 두어 달 앞서 나온 『선종영가집언해』에서부터 시작되었다(정우영 1996나).
주격의 평성화가 주조를 이루었지만(한재영 1993:156), 처격이나 보조사와의 통합에서, 그리고 부사나 용언의 부사형, 관형사형 등에서도 상당수가 나타난다. (6)은 원간본 계열의 「원각경서」 전 84장을 대상으로 제1기 문헌 표기와 비교·대조해본 것이다. (빗금/ 앞은 제1기 문헌, 뒤는 ‘서’에 나타난 횟수이다.)

(6) 제1기 문헌과의 비교

가. 주격 : ··디(용 8)/··디(2):·디(3),

일·후·미(석9:29ㄱ)/일·후·미(1):일·후미(15)

나. 처격 : :·(석24:7ㄴ)/―(0)::(3)

다. 보조사 : :세·흔(석21:51ㄱ)/:세·흔(1)::세흔(2)

라. 부사 : 그·러·나(석9:10ㄴ)/그·러·나(2):그·러나(6),

반··기(석,서5ㄴ)/―(0):반·기(6),

:엇·뎨(월,서13ㄴ)/:엇·뎨(4)::엇뎨(5),

비·르·서(석11:1ㄴ)/비·르·서(1):비·르서(1)

마. 부사형: :업·서(석9:34ㄴ)/:업·서(3)::업서(4)

바. 관형사형: :업·슨(석6:41ㄱ)/:업·슨(2)::업슨(3)

사. 제1음절이 상성인 2음절어: 어말의 평성화(0)가 일반적 경향

:아·디(석9:13ㄴ)/:아·디(2)::아디(7),

:셰·여(석9:19ㄴ)/―(0)::셰여(1)

cf. :이·리(석6:9ㄱ)/:이·리(3):―(0),

:버·디(석6:19ㄴ)/:버·디(3):―(0)

아. ·누니, ··비치, 空·호미, 구·스리, 나·토미, 뫼·호미, 바·리, 사·교미, 아·리, 아·로미, 靈·호미 외 다수.

1464년에 간행된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에는 어말 평성화의 개신파가 전 문헌에 반영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는 「반야심경언해」가 가장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정우영 1996나). 그러나 그 이듬해에 나온 이 『원각경언해』에서는 어말 평성화의 경향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음절로 구성된 어절에서, 용언 어간과 어미 ‘-아/어, -디’ 결합시 첫음절이 상성(2점)이면 끝음절은 평성(0점)으로 표기되는 경향이 우세하다. 명사인 경우는 다소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지만, (6나다마바사)에서 보듯이, 제1기 문헌에서는 ‘상·거(2·1)’에 전혀 예외가 없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상·평(2·0)’의 경향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3.3 기타 특징적인 표기

첫째, 특이한 사이시옷 표기가 사용되었다. 두 구성요소가 통합될 때 나타나는 경음화 현상을 이 책에서는 (7가)처럼 네 가지 방식으로 적었다.

(7) 가. ① 世間ㅅ法(상2-2:32ㄱ), ② 品ㅂ字(하2-2:20ㄴ), ③ 飮ㆆ字 (상1-1:116ㄴ), ④ 者ㅈ字(상2-2:51ㄴ)

나. 見ㅈ字(상2-2:69ㄱ), 契ㅈ字(상1-2:18ㄴ), 佛ㅈ字(상1-2:37ㄱ), 相ㅈ字(하1-1:45ㄴ), 性ㅈ字(하1-1:45ㄴ), 我ㅈ字(하3-1:2ㄱ), 異ㅈ字(하3-2:52ㄱ), 伊ㅈ字(하2-2:19ㄱ), 正ㅈ字(상1-2:97ㄴ), 鐘ㅈ字(하2-1:47ㄴ) 등.

(7가)의 ①은 정음 초기문헌부터 쓰이던 일반적인 방식으로 전후 환경에 관계없이 〈ㅅ〉을 그 표지로 쓴 것이며, ②는 일찍이 「용비어천가」와 「훈민정음언해」에서 시도된 것으로서, 선행어 말음이 유성음으로 끝난 경우에 말음 ‘ㅁ’과 동일한 서열(양순음)의 전청자 〈ㅂ〉을 그 표지로 쓴 것이다. ③은 ②를 원용한 방식으로 후음 전청자 ‘ㆆ’을 무성음인 후행 음절 초성의 후두화 부호로 이용한 경우이다. 특이한 표기 방식은 ④인데, 후행 음절 ‘字’자의 초성과 동일한 글자 〈ㅈ〉을 썼다. 독자로 하여금 표기자가 의도하는 발음을 가장 근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주016)

「법화경언해」와 「선종영가집언해」에도 이 방식이 사용되었다. 萬ㅈ字(법화2:31ㄱ), 可ㅈ字(법화2:49ㄴ). 想ㅈ字(영가,하76ㄱ), 緖ㅈ字(영가,하93ㄱ) 등.
(7나)는 이 책에서 ④의 방식으로 쓰인 목록의 일부이다.

둘째, 모음조화는 훈민정음 초기 문헌보다 규칙성이 덜해졌다. 주017)

이를 종래에는 음운현상의 하나로 간주해 왔으나, 근래에는 국어 표기법의 일종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견해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김동소(1998) 참조.
일반적으로, 모음조화는 형태소의 첫 모음에 따라 그 첫 모음과 같은 부류의 모음이 뒤따르는 동화현상의 하나로 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세국어의 모음은 양성모음(ㅏ, ㅗ, 丶)과 음성모음(ㅓ, ㅜ, ㅡ)으로 분류되는데, ‘ㅣ’는 중성모음이라 하여 두 모음 부류와 비교적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나모, 구룸’처럼 주로 한 단어의 내부에서 나타나지만, 체언과 조사(/ 등, / 등), 용언 어간과 어미(‘-아/-어’계 어미)가 연결될 때에도 선행하는 어간의 모음에 따라 규칙적으로 교체 실현되었다(곽충구 1999:152-3).

위의 원칙에서 벗어난 경우를 체언과 조사(/은, /을)를 중심으로, 동일한 체언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경우만 조사하여 (8)에 제시한다. 그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ㄱ」 줄만 제시한다(빗금/의 앞은 정상 표기, 뒤는 예외적 표기이며, 숫자는 출현 횟수이다.).

(8) 覺(7)/은(1), 境을(31)/(4), 空(3)/은(1), 過患(2)/을(2), 功(6)/을(1), 權을(4)/(1), 根本(1)/은(1), 根本(23)/을(3). 합계: 정상(77회. 85%)/예외(14회. 15%) cf. 句는(20)/(13)

한자어 체언과 조사가 결합된 경우를 고유어의 경우와 동등하게 해석할 수는 없지만, 「용비어천가」 등 제1기 문헌에 나타난 예외적 표기가 4.2%로 나타난 데 비해, 「능엄경언해」 등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의 제2기 문헌에서는 평균 13% 정도로 증가했고, 특히 ‘/는, /를’의 경우는 예외가 각각 약 67%, 60%가 되는 환경도 나타나고 있어(한영균 1994:66, 84) 모음조화의 규칙성을 상실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일부 사실만으로 이 현상을 성급히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음운현상으로 보든 표기법의 한 기제로 보든 모음조화 원칙을 지키려는 경향은 보이지만 둘다 철저히 지켜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음조화’와 관련하여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진실이 아직 다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훈민정음 중성(모음) 제작과 운용에 음양이론을 주축으로 하는 철학적 배경이 강하게 반영되었으며, 당시 주변국의 표기이론도 참고하였을 것이라는 점과, 국어사적으로 ‘丶’가 고대국어 자료에 존재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고, 또한 향가·계림유사·향약구급방·조선관역어 등 국어사 자료에서 모음조화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정음 창제 초기문헌, 특히 첫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 가장 철저히 지켜지고 그 이후 문헌에서 점차 약화되며, 16세기 이후 서민들의 언어가 반영된 자료에서는 뚜렷한 규칙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까지를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15세기 한글문헌에 나타난 ‘모음조화’는, 철학적 음양이론을 배경으로 주변국(몽고 등)의 음양대립 표기이론까지 참고하여(김동소 2002), 그들이 가장 이상적인 표준 발음[正音]이라고 판단한 ‘모음조화’ 현상을 표기법으로 제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문자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모음조화’가 지켜지는 국어로 통일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해볼 수도 있다. 표기법을 제정할 때의 언중들의 발음 현실은 미약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향성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훈민정음 제정에 관한 연구가 좀더 진척되면 그 진실이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상에서 다루지 않은 주제들은 간경도감판 불경언해에 나타난 표기와 음운의 경향과 별로 차이가 없다. 예컨대, 종성표기는 ‘팔종성법’이 적용되었으며(9가), 초성 합용병서 표기도 여전하고(9나), 한자음 표기는 국한혼용으로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을 주음으로 달았으며(9다), 불교용어의 경우는 「법화경언해」에서 수정된 한자음이 그대로 적용되었다(9라). 다음 (9)에 이 같은 예들을 간략히 제시한다.

(9) 가. 긋니라[←긏-.서4ㄱ], 닛[←-.상1-1:81ㄴ], 닷논[←-.상1-1:8ㄱ], 업다[←없-]

cf. 우[상1-2:107ㄴ], 아(상1-2:14ㄴ)

나. ㅺ(.夢) ㅼ(.汗) ㅽ(.骨) ㅳ(.筏) ㅄ(.種) ㅶ(.伴) ㅴ(.蜜) ㅵ(려.碎)

cf. ㅻ(없음), ㅷ(없음)

다. ·피·와 氣·킝分·뿐·엣 類· 반·기 아·로·미 잇·고(서2ㄴ)

라. 解脫[:·](서57ㄴ), 般若[·:](서78ㄱ), 阿難[·난](서10ㄱ)

阿耨多羅三藐三菩提[·녹당랑삼·먁삼뽕똉]의‘藐’[·먁](하3-1:86ㄱ)

4. 어휘

이 책에 쓰인 어휘는 다양하지 못하다. 불경언해가 대개 단조롭지만, 이 책에는 한자어로 된 추상적인 불교용어가 많으며 고유어 어휘는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다행히도 불경의 본문에 대해 백가서를 동원해 주해한 것도 있고, 난해한 본문은 우리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생활 용어를 이용해 구체적인 비유로 설하고 있어 그나마 귀한 고유어 어휘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어사전과 각종 국어사 자료들을 검색하여 출현 빈도가 드물다고 생각되는 어휘와 새말을 선정, 가나다 순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018)

<정의>이 목록은 김동소(2001)를 이용하여 작성하였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김동소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1) 지다 : 그늘지다.¶녀르멧 진  고깃 무저게 日光 비취욤 업스면 곧 서거 (상,2-2:27ㄱ) cf. 지니 이 수프리오(능2:48)

(2) 래춤 : 가래침.¶가래춤과 곳믈와 고롬과 피와 과(상2-2:27ㄴ) cf. ―(역어유해,상37)

(3) 로 : 따로. 남달리.¶卓 로 난 이라(서2ㄴ)

(4) 둘의 : 둘레[周].¶둘의 四十里니 金몰애 섯거 흐르며(상2-2:154ㄴ)

(5) 들에- : 들레다[喧]. ¶수픐 예 가마괴 들에요 니브며(상1- 2:129ㄴ)

(6) 마치 : 마치. ¶마치 뮈워  번 툐매(하2-1:49ㄱ)

(7) 묏괴 : 들고양이. 살쾡이.¶貍 묏괴라(상1-2:129ㄴ) cf. 狸리 俗呼野猫(자회,상10ㄱ)

(8) 믈드리- : 물들이다[染].¶一綟ㅅ실 믈드료매 一千 올 一萬 오리  빗 이룸  젼라(상1-1:114ㄱ) cf. 덞- : 오직 덞디 아니며(월13:13)

(9) 바ㅎ : 바늘끝[針鋒].¶ 바 셰여(서69ㄴ)

(10) 반되블 : 반딧불이.¶반되브를 가져 須彌山 로려 야도(상2-3:40ㄴ) cf. 반되爲螢(정음해례:용자)

(11) 얌 : 뱀. ¶노 우희 얌 보며(상1-1:61ㄱ)

(12) 새박 : 새벽.¶믄득 새바 거우루로  비취오(서46ㄴ)

(13) 새배 : 새벽.¶사미 새배 華 보다가(상2-3:27ㄴ)

(14) 세우 : 세게. ¶세우 홀 게 전노니(서81ㄴ)

(15) 세닐굽 : 이십일(21).¶닐구블 일워 세닐구빌 二十一輪이 잇거든(하2-2:14ㄱ) cf. 세닐웨  요(석13:57ㄴ)

(16) 쟈래 : 자라.¶海中엣 고기와 쟈래왓 무리 種類ㅣ 各別홈 야(상2-2:84ㄱ)

(17) 조지- : 틀어 매다. ¶冠은 머리 조져 슬시니 나히 스믈힌 저기라(서67ㄴ)

(18) 지즐우- : 누르게 하다. ¶有情을 지즐우며(상1-2:86ㄱ)

cf. 지즐-[壓]. 돌히 플 지즈룸 티 야(목25ㄴ)

(19)  : 막(膜). ¶膜 누네  이라(하3-1:17ㄴ). cf. 頭腦와 과(腦膜)(영가,상25)

(20) 촉촉- : 촉촉하다[潤]. ¶支體 보라오며 촉촉시라(하3-2:28ㄱ)

cf. 히 마니 촉촉도다(肌膚潛活若)(두중14:2)

(21) 타락 : 타락(駝酪). ¶歌羅邏타 예셔 닐오매 열운 타락이니(상2-2:26ㄴ)

cf. 酪 타酪이오(월10:120ㄱ). 駝 : 약대 타(자회,상10ㄴ)

(8)의 ‘믈드리다’는 통사적 구성 ‘믈+들-’에 사동접미사 ‘-ㅣ-’가 결합된 사동사로 이미 「능엄경언해」에 ‘믈드러’(10:9)가 나타난다.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이보다 앞선 문헌에서는 ‘덞-[染]’이 쓰였는데 간경도감판 불경언해부터 ‘믈들-~므들-’형이 쓰이기 시작하여 그 세력이 점차 확장되어 감을 여러 국어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의 ‘얌’은 「법화경언해」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용비어천가」에서 「능엄경언해」까지는 ‘얌’형으로 통일성 있게 쓰였던 사실과 대조적이어서 제시한다. 이것은 제2음절 ‘얌’의 ‘ja’에서 전이음 ‘j’가 앞 음절에 영향을 주어 제1음절이 ‘[pʌ]→[pʌj]’로 ㅣ하향중모음화한 것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15)의 ‘세닐굽’에서 구성요소 ‘세’와 ‘닐굽’은 대등한 가치를 지닌 숫자이다. 「석보상절」에는 날짜 표시어로 ‘세닐웨’가 쓰였는데, 두 어휘의 차이점은 ‘세·닐굽’은 곱한 숫자 ‘이십일(二十一)’이 ‘갯수’를 나타낸 것임에 대해, 후자 ‘세·닐웨’는 뒷자리에 날짜 관련 수사 ‘닐웨[七日]’가 있으므로 둘을 곱한 결과가 ‘스무하루[21일]’라는 ‘날수[日數]’를 가리키도록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원각경서」에는 “三七이 二十一이 외니라”(서60ㄴ)가 보이는데, 전통적으로 구구셈이 이용된 흔적을 언해문에서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21)의 ‘타락’은 이미 「월인석보」에도 나오므로 희귀어라고 하기 어려우나 한글로 적힌 어휘로는 흔치 않은 예라 소개한다. 「월인석보」의 ‘타酪’에서 ‘타’는 한자어 ‘酡’가 아니라, 「훈몽자회」에 보이듯이, ‘약대’ 즉 낙타의 ‘駝’를 한글로 적은 것이며 ‘酪’은 그대로 ‘젖’을 가리켜 결국 ‘타酪’은 ‘낙타의 젖’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물명고」에 “酪(락)은 낙타의 젖으로 만든 것인데, 지금은 소나 말 젖으로 만든다.”(1:8)는 설명이 우리의 추정에 확신을 준다. 주019)

酪 駝乳所成 今亦牛馬乳造 타락 (물명1:8)

이 밖에도 이 책에는 [부유하다(富)]는 뜻의 ‘가며-’와 ‘가멸-’이 공존하고, [다하다(盡)]는 뜻의 ‘다-’와 ‘다-’, [더하다(加)]는 뜻의 ‘더으-’와 ‘더-’가 공존하는 등, 아직도 더 자세히 밝혀야 할 자료들이 많이 들어 있다.

이제, 본문에서 다루어지는 국어학적 해설을 바탕으로 중세국어에 대한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 학계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판본 자료의 영인을 계기로 『원각경언해』의 국어학적 연구가 정밀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조선 세조 때의 고승인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와 당시 불교에 높은 식견을 가진 최고의 학자들이 공력을 다해 우리말·글로 옮긴 이 불경언해서를 꼼꼼히 읽어 가는 가운데, 독자들 모두가 이 책에서 설하는 원각(圓覺)에 빠짐없이 도달하기를 기원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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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언해 권5 개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상2의1

종남산 초당사 사문 종밀 소초

원각경언해 권5 개요

원각경의 본이름은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으로, “일체중생의 본래 성불(本來成佛)을 드러내는 ‘원각(圓覺)’ 즉 완전 원만한 깨달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는 뜻이다. 〈원각경언해〉 총 10권 중에서 권5는 〈상2의1〉과 〈상2의2〉로 구성되어 있다. 〈상2의1〉은 보현보살이 세존께 수행(修行)의 실제(實際)에 대하여, 〈상2의2〉는 보안보살이 수행의 방편(方便)과 점차(漸次)에 대하여 여쭙고 세존께서 이에 답하는 내용이다.

원각경의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이 역주에서는, 원문에서 빈 칸 없이 시작하는 큰 글씨의 〈원각경〉 본문(구결문)과 언해문을 앞에 단락별로 모아 편집한 뒤, 전체 〈원각경언해〉를 원전 순서대로 제시하고 이를 현대국어로 역주·해설하였다. 부록에는 지금까지 학계에 소개된 적이 없는 초간본(1465)의 1472년 후쇄본을 입수하여 영인·수록하였다.

원각경언해 상2의1 경 본문 및 언해

첫째 단락 주제

보현보살이 세존께 원각 청정 경계 수행을 여쭙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3b.jpg">원각경언해 상2의1:3ㄴ於是예 普賢菩薩이 在大衆中샤 卽從座起샤 頂禮佛足시고 右繞三帀시고 長跪叉手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4a.jpg">원각경언해 상2의1:4ㄱ샤 而白佛言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4b.jpg">원각경언해 상2의1:4ㄴ大悲世尊하 願爲此會옛 諸菩薩衆시며 及爲末世옛 一切衆生쇼셔 修大乘者ㅣ 聞此圓覺淸淨境界고 云何修行리고

○ 경 본문의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4a.jpg">원각경언해 상2의1:4ㄱ이 普퐁賢菩뽕薩이 大땡衆 中에 겨샤 곧 座쫭로셔 니르샤 부텻 바 頂禮롕시고 올녀그로 도라 세 번 도시고 長跪뀡叉창手샤 부텻긔 오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4b.jpg">원각경언해 상2의1:4ㄴ大땡悲빙 世솅尊존하 願 이 會옛 한 菩뽕薩衆을 爲윙시며  末世솅옛 一切촁衆生 爲윙쇼셔 大땡乘 닷리 이 圓覺각 淸쳥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5a.jpg">원각경언해 상2의1:5ㄱ 境界갱 듣고 엇뎨 脩行리고

○ 현대역

이에 보현보살이 대중 가운데 계시어[=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부처님의 발에 정례(頂禮)하시고, 오른쪽으로 돌아 세 번 감도시고, 장궤차수(長跪叉手)하시고 부처님께 사뢰시길,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이 법회에 〈참석한〉 많은 보살 대중을 위하시며, 또 말세에 〈처한〉 일체중생들을 위하소서. 대승을 닦을 사람들이 이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듣고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둘째 단락 주제

제환(諸幻)을 영원히 여읠 방편(方便)과 점차(漸次)를 설하소서.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5b.jpg">원각경언해 상2의1:5ㄴ世尊하 若彼衆生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5b.jpg">원각경언해 상2의1:5ㄴ知如幻者도 身心이 亦幻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6a.jpg">원각경언해 상2의1:6ㄱ云何以幻으로 還修於幻이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8b.jpg">원각경언해 상2의1:8ㄴ若諸幻性이 一切盡滅인댄 則無有心커니 誰爲修行이완 云何復說修行如幻이니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9b.jpg">원각경언해 상2의1:9ㄴ若諸衆生이 本不修行면 於生死中에 常居幻化야 曾不了知如幻境界리니 令妄想心으로 云何解脫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0b.jpg">원각경언해 상2의1:10ㄴ願爲末世一切衆生쇼셔 作何方便야 漸次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1a.jpg">원각경언해 상2의1:11ㄱ修習야 令諸衆生으로 永離諸幻이리고

○ 경 본문의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5b.jpg">원각경언해 상2의1:5ㄴ世솅尊존하 다가 뎌 衆生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5b.jpg">원각경언해 상2의1:5ㄴ幻 홈 알리도 身신과 心심괘  幻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6a.jpg">원각경언해 상2의1:6ㄱ엇뎨 幻로 도로 幻을 닷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8b.jpg">원각경언해 상2의1:8ㄴ다가 한 幻性이 一切촁 다 滅홀딘댄 미 업거니 뉘 脩行리완 엇뎨 幻 호 脩行호 다시 니시니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09b.jpg">원각경언해 상2의1:9ㄴ다가 한 衆生이 本본來 脩行 아니 면 生死 中에 녜 幻化황애 사라 간도 幻  境界갱 아디 몯리니 妄想 로 엇뎨 解脫케 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1a.jpg">원각경언해 상2의1:11ㄱ願 末世솅옛 一切촁 衆生 爲윙쇼셔 므슴 方便뼌을 지 漸쪔漸쪔 次第똉로 닷가 니겨 한 衆生로 한 幻 永히 여희에 리고

○ 현대역

세존이시여. 만약에 저 중생이 환(幻)과 같음을 아는 사람도 몸과 마음이 또한 환인 것이니, 어떻게 환으로 도로 환을 닦을 것입니까? 만약에 많은 환성(幻性)이 일체가 다 소멸할진댄[=소멸할 것이면] 마음이 없어졌는데 누가 수행(修行)할 것이기에 어찌 환 같은 것을 수행함을 다시 말씀하십니까? 만약에 많은 중생이 본래 수행을 아니 하면 생사 중에 항상 환화(幻化)에 살아 잠깐도 환 같은 경계를 알지 못할 것이니, 망상(妄想)의 마음으로 어떻게 해탈하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말세에 처한 일체 중생을 위하소서. 무슨 방편을 지어서[=만들어서] 점점 순서대로[=점차(漸次)로] 닦아 익혀야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많은 환(幻)을 영원히 여의게[=이별하게] 하겠습니까?

셋째 단락 주제

환(幻) 같은 삼매(三昧)를 닦아 익힐 방편과 점차를 설하리라.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3a.jpg">원각경언해 상2의1:13ㄱ作是語巳시고 五體投地샤 如是三請샤 終而復始야시 爾時世尊이 告普賢菩薩言샤 善哉善哉라 善男子아 汝等이 及能爲諸菩薩와 及末世衆生의 修習菩薩如幻三昧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3b.jpg">원각경언해 상2의1:13ㄴ方便漸次야 令諸衆生으로 得離諸幻케 니 汝今諦聽라 當爲汝說호리라 時普賢菩薩이 奉敎歡喜와 及諸大衆과 黙然而聽시더니

○ 경 본문의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3a.jpg">원각경언해 상2의1:13ㄱ이 말 시고 五體톙 해 더디샤 이티 세 번 請샤 고 다시 비르서시 그 世솅尊존이 普퐁賢菩뽕薩려 니샤 됴타 됴타 善쎤男남子아 너희히 能히 諸졍菩뽕薩와 末世솅 衆生 菩뽕薩 幻  三삼昧 닷가 니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3b.jpg">원각경언해 상2의1:13ㄴ方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4a.jpg">원각경언해 상2의1:14ㄱ便뼌 漸쪔次 爲윙야 한 衆生로 한 幻 여희요 得득게 니 네 이제 仔細솅히 드르라 반기 너 爲윙야 닐오리라 時씽예 普퐁賢菩뽕薩이 敎 받와 歡환喜힁와 한 大땡衆과 야셔 듣오시더니

○ 현대역

이 말씀을 하시고,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시고 이같이 세 번을 청하시어 마치고 다시 시작하시거늘, 그때 세존이 보현보살더러 말씀하셨다. “좋다, 좋다. 선남자야. 너희가 능히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의 보살 환(幻) 같은 삼매를 닦아 익힐 방편과 점차를 위하여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많은 환을 여의는 것을 얻도록 할 것이니, 네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내가〉 너[=보현보살]를 위하여 말해 주리라.” 이때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받자와] 환희(歡喜)하며 많은 대중과 잠잠히 하고서 들으셨다.

넷째 단락 주제

환꽃[幻華]은 멸하나 공성(空性)은 무너지지 않고, 제환(諸幻)을 멸하면 각심(覺心)은 움직이지 않는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6a.jpg">원각경언해 상2의1:16ㄱ善男子아 一切衆生의 種種幻化ㅣ<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6b.jpg">원각경언해 상2의1:16ㄴ皆生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6b.jpg">원각경언해 상2의1:16ㄴ如來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圓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覺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妙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心호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8a.jpg">원각경언해 상2의1:38ㄱ猶如空華ㅣ 從空而有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9a.jpg">원각경언해 상2의1:39ㄱ幻華雖滅나 空性은 不壞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9b.jpg">원각경언해 상2의1:39ㄴ衆生幻心이 還依幻滅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0b.jpg">원각경언해 상2의1:40ㄴ諸幻이 盡滅면 覺心이 不動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1a.jpg">원각경언해 상2의1:41ㄱ依幻說覺도 亦名爲幻이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1a.jpg">원각경언해 상2의1:41ㄱ若說有覺야도 猶未離幻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1b.jpg">원각경언해 상2의1:41ㄴ說無覺者도 亦復如是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2a.jpg">원각경언해 상2의1:42ㄱ是故幻滅이 名爲不動이라

○ 경 본문의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6a.jpg">원각경언해 상2의1:16ㄱ善쎤男남子아 一切촁 衆生의 種種앳 幻化황ㅣ<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6b.jpg">원각경언해 상2의1:16ㄴ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6b.jpg">원각경언해 상2의1:16ㄴ如來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圓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覺각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妙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1:17ㄱ心심에 나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8a.jpg">원각경언해 상2의1:38ㄱ空앳 고지 空브터 이숌 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8b.jpg">원각경언해 상2의1:38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9a.jpg">원각경언해 상2의1:39ㄱ幻 고지 비록 滅나 空性은 허디 아니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39b.jpg">원각경언해 상2의1:39ㄴ衆生 幻 미 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0a.jpg">원각경언해 상2의1:40ㄱ로 幻 브터 滅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0b.jpg">원각경언해 상2의1:40ㄴ한 幻이 다 滅면 覺각心심이 뮈디 아니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1a.jpg">원각경언해 상2의1:41ㄱ幻 브터 覺각 닐옴도  일후미 幻이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1a.jpg">원각경언해 상2의1:41ㄱ다가 覺각 이쇼 닐어도  幻 여희디 몯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1b.jpg">원각경언해 상2의1:41ㄴ覺각 업수믈 니리도  이 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2a.jpg">원각경언해 상2의1:42ㄱ그럴 幻滅호미 일후미 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2b.jpg">원각경언해 상2의1:42ㄴ디 아니호미라

○ 현대역

“선남자야.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가 모두 여래(如來)의 원각(圓覺) 묘심(妙心)에서 생겨남이 〈마치〉 공(空)의 꽃이 공(空)에서 있음과[=생긴 것과] 같다. 환(幻)한 꽃이 비록 멸하나 공한 본성은 허물어지지 아니하나니, 중생의 환상과 같은 마음이 도로 환에 의거하여 멸하나니, 많은 환이 모두 멸하면 각심(覺心)이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환에 의거하여 각(覺)을 말함도 또한 이름이 환이며, 만약에 각이 있음을 말하여도 아직 환을 여의지[=멀리하지] 못한 것이며, 각이 없음을 말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환을 멸한 것이 이름이 움직이지 아니함[=부동(不動)]이다.”

다섯째 단락 주제

허망한 모든 경계를 여의라. 환(幻)을 알면 여읜 것이요, 환을 여의면 그것이 곧 깨달음[覺]이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3b.jpg">원각경언해 상2의1:43ㄴ善男子아 一切菩薩及末世衆生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4a.jpg">원각경언해 상2의1:44ㄱ應當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4a.jpg">원각경언해 상2의1:44ㄱ遠離一切幻化虛妄境界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4b.jpg">원각경언해 상2의1:44ㄴ由堅執持遠離心故로 心如幻者 亦復遠離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5a.jpg">원각경언해 상2의1:45ㄱ遠離 爲幻을 亦復遠離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5a.jpg">원각경언해 상2의1:45ㄱ離遠離 幻을 亦復遠離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6b.jpg">원각경언해 상2의1:46ㄴ得無所離면 卽除諸幻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7b.jpg">원각경언해 상2의1:47ㄴ譬如鑽火니 兩木이 相因야 火出木盡면 灰飛煙滅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9a.jpg">원각경언해 상2의1:49ㄱ以幻修幻도 亦復如是야 諸幻이 雖盡야도 不入斷滅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9b.jpg">원각경언해 상2의1:49ㄴ善男子아 知幻면 卽離라 不作方便며 離幻면 卽覺이라 亦無漸次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1a.jpg">원각경언해 상2의1:51ㄱ一切菩薩와 及末世衆生이 依此修行야 如是라 乃能永離諸幻리라

○ 경 본문의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3b.jpg">원각경언해 상2의1:43ㄴ善쎤男남子아 一切촁 菩뽕薩와 末世솅衆生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4a.jpg">원각경언해 상2의1:44ㄱ반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4a.jpg">원각경언해 상2의1:44ㄱ一切촁ㅅ 幻化황 虛헝妄 境界갱 머리 여희욜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4b.jpg">원각경언해 상2의1:44ㄴ머리 여흰  구디 자바 가죠 브틀 미 幻 닐  머리 여희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5a.jpg">원각경언해 상2의1:45ㄱ머리 여흰 이 幻을  머리 여희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5a.jpg">원각경언해 상2의1:45ㄱ머리 여희욤 여흰 幻을  머리 여희욜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6b.jpg">원각경언해 상2의1:46ㄴ여흴 곧 업수믈 得득면 곧 한 幻을 덜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7b.jpg">원각경언해 상2의1:47ㄴ가비건댄 블 비븨욤 니 두 남기 서르 因야 브리 나 남기 다면  며  滅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9a.jpg">원각경언해 상2의1:49ㄱ幻로 幻 닷곰도  이 야 한 幻이 비록 다아도 그처 滅호매 드디 아니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49b.jpg">원각경언해 상2의1:49ㄴ善쎤男남子아 幻을 알면 곧 여희요미라 方便뼌을 짓디 아니며 幻을 여희면 곧 覺각이라  漸쪔漸쪔 次第똉 업스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1a.jpg">원각경언해 상2의1:51ㄱ一切촁 菩뽕薩와 末世솅 衆生이 이 브터 脩行야 이티 야 能히 한 幻을 永히 여희리라

○ 현대역

“선남자야, 일체의 보살과 말세 중생들이 반드시 일체의 환화(幻化)인 허망한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이니, 멀리 여읜[=떠난] 마음을 굳게 잡아 가짐에 말미암아 마음이 환(幻) 같은 것을 또한 멀리 여의며, 멀리 여읜 이 환을 또한 멀리 여의며, 멀리 여읨을 여읜 환을 또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이니, 여읠 것이 없음을 얻으면 곧 많은 환을 덜 것이다. 비유하건대 불 비비는 것과 같으니, 두 나무가 서로 원인이 되어 불이 나[=붙어] 나무가 다하면[=다 타면] 재가 날며 연기가 멸(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환(幻)으로 환을 닦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많은 환이 비록 다하여도 그쳐 멸함[=단멸(斷滅)]에 들지 않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환을 알면 곧 여읨이라 〈그래서〉 방편(方便)을 짓지[=만들지] 아니하며, 환을 여의면 〈그것이〉 곧 각(覺)이라 또 점점(漸漸)과 차례가 없으니 일체의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이 이로 말미암아 수행하고, 이같이 하여야만 능히 많은 환을 영원히 여의리라.”

여섯째 단락 주제

환(幻)은 각(覺)으로부터 생겨났다가, 환이 멸하면 각은 원만해지는 법. 나무가 모두 불에 타면 불이 꺼지듯, 항상 모든 환을 멀리 여의라. 각에는 점차와 방편이 없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1b.jpg">원각경언해 상2의1:51ㄴ爾時世尊이 欲重宣此義샤 而說偈言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a.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ㄱ普賢아 汝ㅣ 當知라 一切諸衆生의 無始幻無明이 皆從諸如來圓覺心야 建立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a.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ㄱ猶如虛空華ㅣ 依空而有相다가 空華ㅣ 若復滅면 虛空은 本不動니 幻從諸覺生얫다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b.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ㄴ幻滅면 覺이 圓滿니 覺心이 不動故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b.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ㄴ若彼諸菩薩와 及末世衆生이 常應遠離幻이니 諸幻을 悉皆離면 如木中生火야 木盡면 火還滅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3a.jpg">원각경언해 상2의1:53ㄱ覺則無漸次며 方便도 亦如是니라

○ 경 본문의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1b.jpg">원각경언해 상2의1:51ㄴ그 世솅尊존이 이 들 다시 펴려 샤 偈곙 니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a.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ㄱ普퐁賢아 네 반기 알라 一切촁 한 衆生 無뭉始싱옛 幻無뭉明이 다 한 如來圓覺각心심을 브터 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b.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ㄴ虛헝空ㅅ 고지 虛헝空 브터 相이 잇다가 虛헝空ㅅ 고지 다가  滅면 虛헝空 本본來 뮈디 아니홈 니 幻이 覺각브터 냇다가 幻이 滅면 覺각이 圓滿만니 覺각心심이 뮈디 아니 젼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2b.jpg">원각경언해 상2의1:52ㄴ다가 뎌 諸졍 菩뽕薩와 末世솅 衆生이 녜 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3a.jpg">원각경언해 상2의1:53ㄱ기 幻을 머리 여희욜디니 한 幻을 다 여희면 나못 가온 블 나 남기 다면 브리 도로 滅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1_053a.jpg">원각경언해 상2의1:53ㄱ覺각 漸쪔漸쪔 次第똉 업스며 方便뼌도  이 니라

○ 현대역

그때 세존이 이와 같은 뜻을 다시 펴려고 하시어 게(偈)를 이르셨다. “보현아, 너는 응당[=마땅히] 알아라. 일체의 많은 중생의 무시[無始=시작이 없는] 환 무명(幻無明)이 모두 많은 여래(如來)의 원각심(圓覺心)에 말미암아 섰으니, 허공 꽃이 허공에 말미암아 상[相=모양]이 있다가 허공 꽃이 만약에 또 멸하면, 허공은 본래 움직이지 아니함과 같으니, 환(幻)이 각(覺)으로부터 생겨났다가 환이 멸하면 각이 원만해지나니 각심(覺心)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만약에 저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들이 항상 마땅히 환을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이니, 많은 환을 모두 여의면 나무 가운데 불이 (일어)나서 나무가 다하면[=다 타면] 불이 도로 멸하듯 하니라. 각(覺)은 점점(漸漸)과 차례가 없으며 방편(方便)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원각경언해 상2의2 경 본문 및 언해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상2의2

종남산 초당사 사문 종밀 소초

첫째 단락 주제

보안보살이 세존께 수행(修行)할 점차(漸次)를 여쭙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2b.jpg">원각경언해 상2의2:2ㄴ於是예 普眼菩薩이 在大衆中샤 卽從座起샤 頂禮佛足시고 右繞三帀시고 長跪叉手샤 而白佛言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3a.jpg">원각경언해 상2의2:3ㄱ大悲世尊하 願爲此會諸菩薩衆시며 及爲末世一切衆生샤 演說菩薩脩行漸次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4a.jpg">원각경언해 상2의2:4ㄱ云何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4b.jpg">원각경언해 상2의2:4ㄴ思惟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4b.jpg">원각경언해 상2의2:4ㄴ云何住持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5a.jpg">원각경언해 상2의2:5ㄱ衆生이 未悟ㅣ어든 作何方便야 普令開悟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6b.jpg">원각경언해 상2의2:6ㄴ世尊하 若彼衆生이 無正方便과 及正思惟면 聞佛如來ㅅ說此三昧고 心生迷悶야 卽於圓覺애 不能悟入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7b.jpg">원각경언해 상2의2:7ㄴ願興慈悲샤 爲我等輩와 及末世衆生샤 假說方便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8a.jpg">원각경언해 상2의2:8ㄱ作是語已시고 五體投地샤 如是三請샤 終而復始야시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2b.jpg">원각경언해 상2의2:2ㄴ이 普퐁眼菩뽕薩이 大땡衆 中에 겨샤 곧 座쫭로셔 니르샤 부텻 바 頂禮롕시고 올 녀그로 도라 세 번 도시고 長跪뀡叉창手샤 부텻긔 오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3a.jpg">원각경언해 상2의2:3ㄱ大땡悲빙 世솅尊존하 願 이 會옛 한 菩뽕薩衆을 爲시며  末世솅옛 一切촁 衆生 爲샤 菩뽕薩ㅅ 脩行 漸쪔次 펴 니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4a.jpg">원각경언해 상2의2:4ㄱ엇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4b.jpg">원각경언해 상2의2:4ㄴ思量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4b.jpg">원각경언해 상2의2:4ㄴ엇뎨 住뜡持띵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5a.jpg">원각경언해 상2의2:5ㄱ衆生이 아디 몯거든 므슴 方便뼌을 지 너비 여러 알에 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6b.jpg">원각경언해 상2의2:6ㄴ世솅尊존하 다가 뎌 衆生이 正 方便뼌과 正 思量 업스면 佛如來ㅅ 이 三삼昧 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7a.jpg">원각경언해 상2의2:7ㄱ샤 듣고 매 迷몡며 닶가오미나 곧 圓覺각애 能히 아라 드디 몯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7b.jpg">원각경언해 상2의2:7ㄴ願 慈悲빙 니르와샤 우리 물와 末世솅衆生 爲윙샤 方便뼌을 假강야 니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8b.jpg">원각경언해 상2의2:8ㄴ이 말 시고 五體톙 해 더디샤 이티 세 번 請샤 고 다시 비르서시

○ 현대역

이에 보안보살이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곧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부처님 발에 정례(頂禮)하시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세 번 감도시고 장궤차수(長跪叉手)하시어 부처님께 말씀드리시길,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원컨대 이 법회에 참여한 많은 보살 대중을 위하시며 또 말세에 〈처한〉 일체 중생을 위하시어 보살이 수행할 점차를 펴 말씀해 주소서.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주지(住持)해야 합니까? 중생이 알지[=깨닫지] 못하거든 무슨 방편을 써야 널리 열어 깨닫게[=개오(開悟)하게]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에 저 중생이 정(正)한 방편과 정한 생각이 없으면 불여래(佛如來)가 이 삼매(三昧) 말씀하심을 듣고서도 마음에 미혹하며 답답함이 생겨나 곧 원각(圓覺)에 능히 알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자비를 일으키시어 우리 무리와 말세 중생을 위하시어 방편을 빌려 말씀해 주소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시고 이와 같이 세 번을 청하시면서 마치고 다시 시작하시거늘,

둘째 단락 주제

수행의 점차, 사유, 주지, 방편을 청하니 세존이 허락하시다.

○ 경 본문

【종밀주석】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8a.jpg">원각경언해 상2의2:8ㄱ爾時世尊이 告普眼菩薩言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8b.jpg">원각경언해 상2의2:8ㄴ 善哉善哉라 善男子아 汝等이 乃能爲諸菩薩와 及末世衆生야 問於如來脩行漸次와 思惟住持와 乃至假說種種方便니 汝今諦聽라 當爲汝說호리라 時普眼菩薩이 奉敎歡喜와 及諸大衆과 黙然而聽시더니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8b.jpg">원각경언해 상2의2:8ㄴ그 世솅尊존이 普퐁眼菩뽕薩려 니샤 됴타 됴타 善쎤男남子아 너희히 能히 諸졍菩뽕薩와 末世솅衆生 爲윙야 如來修行 漸쪔次와 思量과 住뜡持띵와 種種 方방便뼌을 假강說호매 니르리 묻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9a.jpg">원각경언해 상2의2:9ㄱ네 이제 仔細솅히 드르라 반기 너 爲윙야 닐오리라 時씽예 普퐁眼菩뽕薩이 敎 받와 歡환喜힁와 諸졍大땡衆과 야셔 듣오시더니

○ 현대역

그때 세존이 보안보살더러 말씀하시기를, “좋다, 좋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능히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을 위하여 여래의 수행 점차와 생각[=사량(思量)]과 주지(住持)와 갖가지 방편을 가설(假說)함에 이르기까지 묻나니, 네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그러자〉 이때 보안보살이 가르침을 받으시고 기뻐하여 모든 대중과 〈함께〉 잠잠히 하고서 들으시었다.

셋째 단락 주제

원각심(圓覺心)을 구하려면 좌선하고 이 몸이 환화(幻化)임을 알라.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9a.jpg">원각경언해 상2의2:9ㄱ善男子아 彼新學菩薩와 及末世衆生이 欲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9b.jpg">원각경언해 상2의2:9ㄴ求如來淨圓覺心인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9b.jpg">원각경언해 상2의2:9ㄴ應當正念야 遠離諸幻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1a.jpg">원각경언해 상2의2:11ㄱ先依如來ㅅ 奢摩他行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2a.jpg">원각경언해 상2의2:12ㄱ堅持禁戒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5b.jpg">원각경언해 상2의2:15ㄴ安處徒衆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2:17ㄱ宴坐靜室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5b.jpg">원각경언해 상2의2:25ㄴ恒作是念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5b.jpg">원각경언해 상2의2:25ㄴ我今此身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5b.jpg">원각경언해 상2의2:25ㄴ四大和合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a.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ㄱ所謂髮毛瓜齒皮筋髓腦垢色은 皆歸於地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b.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ㄴ唾涕膿血津液涎沫痰淚精氣大小便利 皆歸於水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b.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ㄴ煖氣 爲火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8a.jpg">원각경언해 상2의2:28ㄱ動轉은 歸風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8b.jpg">원각경언해 상2의2:28ㄴ四大ㅣ 各離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9b.jpg">원각경언해 상2의2:29ㄴ今者妄身이 當在何處ㅣ어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0b.jpg">원각경언해 상2의2:30ㄴ卽知此身이 異竟無體어늘 和合야 爲相이 實同幻化ㅣ로다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9b.jpg">원각경언해 상2의2:9ㄴ善쎤男남子아 뎌 新신學菩뽕薩와 末世솅衆生이 如來ㅅ 淨쪙圓覺각心심을 求코져 홀딘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09b.jpg">원각경언해 상2의2:9ㄴ반기 念념을 正히 야 한 幻을 머리 여희욜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1a.jpg">원각경언해 상2의2:11ㄱ몬져 如來ㅅ 奢샹摩망他탕行 브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2a.jpg">원각경언해 상2의2:12ㄱ禁금戒갱 구디 디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5b.jpg">원각경언해 상2의2:15ㄴ徒똥衆과 便뼌安히 處쳥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17a.jpg">원각경언해 상2의2:17ㄱ靜室에 宴坐쫭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5b.jpg">원각경언해 상2의2:25ㄴ녜 이 念념을 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5b.jpg">원각경언해 상2의2:25ㄴ내 이제 이 모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5b.jpg">원각경언해 상2의2:25ㄴ四大땡 섯거 어우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a.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ㄱ닐온 머리터럭과 터럭과 톱과 니와 갓과 콰 힘과 와 骨髓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b.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ㄴ頭腦와 와 빗과 다 地띵예 가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b.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ㄴ래춤과 곳믈와 고롬과 피와 과 液역과<협주>【液역 입 안햇 精華ㅣ라】 춤과 더품과 痰땀과 믈와 精氣킝와 大땡小便뼌利링와 다 水예 가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7b.jpg">원각경언해 상2의2:27ㄴ더운 氣킝分뿐은 火황애 가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8a.jpg">원각경언해 상2의2:28ㄱ뮈워 옮교 風에 가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8b.jpg">원각경언해 상2의2:28ㄴ四大땡 各각各각 여희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29b.jpg">원각경언해 상2의2:29ㄴ이제 妄 모미 반기 어느 고대 잇거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0b.jpg">원각경언해 상2의2:30ㄴ곧 이 모미 畢竟에 體톙 업거늘 섯거 어우러 相 외요미 實로 幻化황   알리로다

○ 현대역

“선남자야. 저 신학보살(新學菩薩)과 말세 중생이 여래의 청정한 원각심을 구하고자 할 것이면, 반드시 염(念)을 정(正)히 하여 많은 환(幻)을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이니라. 먼저 여래의 사마타행(奢摩他行)에 의거하여 금계(禁戒)를 굳게 지니고, 도중(徒衆)과 편안히 거처하며, 조용한 방에 연좌하여[=좌선하여] 항상 이 염을 짓되[=하되] 나의 지금 이 몸은 사대(四大)가 섞어져 합쳐진 것이니라. 이른바 머리카락과 털과 손발톱과 이빨과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와 두뇌와 때와 빛은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가래침과 콧물과 고름과 피와 땀과 액(液)과<협주>【액은 입안의 정화(精華)이다.】 침과 거품과 담(痰)과 눈물과 정기(精氣)와 대소변은 모두 물로 돌아가고,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여 옮기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가나니, 사대가 각각 떠나면[=분리되면] 이제 허망한 몸은 반드시 어느 곳에 있겠는가? 곧 이 몸은 필경 실체(實體)가 없거늘 섞어 합쳐져 형상이 되는 것이 실로 허깨비(환상) 같다는 것을 알 것이로다.”

넷째 단락 주제

사대(四大)와 육진(六塵)이 흩어지면 마음이란 것도 볼 수 없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2b.jpg">원각경언해 상2의2:32ㄴ四緣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3a.jpg">원각경언해 상2의2:33ㄱ假合야 妄有六根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3b.jpg">원각경언해 상2의2:33ㄴ六根과 四大왜 中外예 合成이어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4a.jpg">원각경언해 상2의2:34ㄱ妄有緣氣ㅣ 於中에 積聚야 似有緣相니 假名爲心이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a.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ㄱ善男子아 此虛妄心이 若無六塵면 則不能有리니 四大ㅣ 分解야 無塵可得이라 於中緣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a.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ㄱ塵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b.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ㄴ各歸散滅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b.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ㄴ畢竟無有緣心可見이니라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2b.jpg">원각경언해 상2의2:32ㄴ네 緣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3a.jpg">원각경언해 상2의2:33ㄱ假강히 어우러 妄히 六륙根이 잇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3b.jpg">원각경언해 상2의2:33ㄴ六륙根과 四大땡왜 안팟긔 어우러 외어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4a.jpg">원각경언해 상2의2:34ㄱ妄히 잇 緣氣킝 그 中에 모다 緣 相이 잇 니 거즛 일후미 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a.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ㄱ善쎤男남子아 이 虛헝妄 미 다가 六륙塵띤이 업스면 能히 잇디 몯리니 四大땡 호아 흐터 塵띤이 어루 得득 것 업순디라 그 中에 緣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a.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ㄱ塵띤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b.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ㄴ各각各각 흐터 滅호매 가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5b.jpg">원각경언해 상2의2:35ㄴ畢竟에 緣 미 어루 볼 것 업스니라

○ 현대역

“(땅·물·불·바람의) 네 가지 연(緣)이 임시로 합쳐져 허망하게 육근(六根)이 있나니, 육근과 사대[四大=地·水·火·風]가 안팎으로 어우러져 되거늘, 허망하게 있는 연기(緣氣)가 그 가운데 모여 연하는 모습이 있는 듯하니, 거짓 이름이 ‘마음’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 허망한 마음이 만약에 육진(六塵)이 없으면 능히 있지 못할 것이니, 사대가 나누어 흩어져 티끌이 가히 얻을 것이 없어지느니라. 그중에 인연과 티끌이 각각 흩어져 멸함으로 돌아가면, 필경에 얽혀 맺어지는 마음이 가히 볼 것이 없어지느니라.”

다섯째 단락 주제

몸과 마음은 환(幻)의 때, 때의 모습이 멸하면 시방이 청정하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6b.jpg">원각경언해 상2의2:36ㄴ善男子아 彼之衆生이 幻身이 滅故로 幻心이 亦滅며 幻心이 滅故로 幻塵이 亦滅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7b.jpg">원각경언해 상2의2:37ㄴ幻塵이 滅故로 幻滅이 亦滅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9a.jpg">원각경언해 상2의2:39ㄱ幻滅이 滅故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9b.jpg">원각경언해 상2의2:39ㄴ非幻은 不滅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0a.jpg">원각경언해 상2의2:40ㄱ譬如磨鏡호매 垢盡明現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1b.jpg">원각경언해 상2의2:41ㄴ善男子아 當知身心이 皆爲幻垢ㅣ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2a.jpg">원각경언해 상2의2:42ㄱ垢相이 永滅면 十方애 淸淨리라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6b.jpg">원각경언해 상2의2:36ㄴ善쎤男남子아 뎌 衆生이 幻 모미 滅 幻 미  滅며 幻 미 滅 幻 塵띤이  滅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7b.jpg">원각경언해 상2의2:37ㄴ幻 塵띤이 滅 幻 滅이  滅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9a.jpg">원각경언해 상2의2:39ㄱ幻 滅이 滅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39b.jpg">원각경언해 상2의2:39ㄴ幻 아닌 거슨 滅티 아니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0a.jpg">원각경언해 상2의2:40ㄱ가비건댄 거우루 닷고매  다면 고미 現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1b.jpg">원각경언해 상2의2:41ㄴ善쎤男남子아 반기 몸과 괘 다 幻  아롤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2a.jpg">원각경언해 상2의2:42ㄱ 相이 永히 滅면 十씹方애 淸淨리라

○ 현대역

“선남자야. 저 중생이 허깨비[幻]인 몸이 멸하므로 허깨비인 마음이 또 멸하며, 허깨비인 마음이 멸하므로 허깨비인 티끌이 또 멸하며, 허깨비인 티끌이 멸하므로 허깨비인 멸함이 또한 멸하며, 허깨비인 멸함이 멸하므로 허깨비 아닌 것은 멸하지 아니하나니, 비유하건대 거울 닦음에 때[垢]가 다 없어지면 밝음이 나타나듯 하느니라. 선남자야. 반드시 몸과 마음이 모두 허깨비인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 때로 된 모습이 영원히 멸하면 시방이 청정해지리라.”

여섯째 단락 주제

본래의 원각(圓覺)은 마니(摩尼) 보주와 같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2b.jpg">원각경언해 상2의2:42ㄴ善男子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3a.jpg">원각경언해 상2의2:43ㄱ譬如淸淨摩尼寶珠ㅣ 映於五色야 隨方各現커든 諸愚癡者 見彼摩尼예 實有五色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7b.jpg">원각경언해 상2의2:47ㄴ善男子아 圓覺淨性이 現於身心야 隨類各應커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8a.jpg">원각경언해 상2의2:48ㄱ彼愚癡者 說淨圓覺애 實有如是身心自相이라 호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8b.jpg">원각경언해 상2의2:48ㄴ亦復如是시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9a.jpg">원각경언해 상2의2:49ㄱ由此로 不能遠於幻化 是故로 我ㅣ 說身心幻垢ㅣ라 노니 對離幻垢면 說名菩薩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0a.jpg">원각경언해 상2의2:50ㄱ垢ㅣ 盡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0a.jpg">원각경언해 상2의2:50ㄱ對ㅣ 除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0a.jpg">원각경언해 상2의2:50ㄱ卽無對垢와 及說名者니라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2b.jpg">원각경언해 상2의2:42ㄴ善쎤男남子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3a.jpg">원각경언해 상2의2:43ㄱ가비건댄 淸淨 摩망尼닝寶珠즁ㅣ 五色애 비취여 方 조차 各각各각 나토거든 한 어리닌 뎌 摩망尼닝예 實로 五色 잇다 봄 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7b.jpg">원각경언해 상2의2:47ㄴ善쎤男남子아 圓覺각淨性이 몸과 과애 現야 類 조차 各각各각 應거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8a.jpg">원각경언해 상2의2:48ㄱ뎌 어리닌 淨圓覺각애 實로 이  몸과 괏 제 相 잇니라 닐오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8b.jpg">원각경언해 상2의2:48ㄴ 이 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49a.jpg">원각경언해 상2의2:49ㄱ일로브터 能히 幻化황 머리 몯 그럴 내 몸과 괘 幻 라 니노니 幻  여희닐 對됭면 일후믈 菩뽕薩이라 니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0a.jpg">원각경언해 상2의2:50ㄱ 다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0a.jpg">원각경언해 상2의2:50ㄱ對됭 덜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0a.jpg">원각경언해 상2의2:50ㄱ곧  對됭니와 일훔 니리 업스니라

○ 현대역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청정한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오색(五色)에 비치어 방향을 따라 각각 나타나는데, 많은 어리석은 사람은 저 마니에 실제로 오색이 있다고 보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원각의 청정한 성품이 몸과 마음에 나타나 부류를 좇아 각각 응하는데, 저 어리석은 사람은 청정한 원각에 실제로 이 같은 몸과 마음의 자기 모습[相]이 있는 것이라고 말함이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것으로부터 능히 환화(幻化)를 멀리하지 못하므로, 그러므로 내 몸과 마음이 허깨비의 때[垢]라고 말하는 것이니, 허깨비인 때를 떠나보낸 사람을 대하면 이름을 보살이라고 말하나니, 때가 다하고 대(對)가 제거되면 곧 때를 대한 사람과 이름 말하는 사람이 없어지느니라.”

일곱째 단락 주제

온갖 환화(幻化)를 증득하여 영상(影像)을 멸하면 일체가 청정하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2b.jpg">원각경언해 상2의2:52ㄴ善男子아 此菩薩와 及末世衆生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a.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ㄱ證得諸幻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b.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ㄴ滅影像故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b.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ㄴ爾時예 便得無方淸淨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4a.jpg">원각경언해 상2의2:54ㄱ無邊虛空이 覺所顯發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1b.jpg">원각경언해 상2의2:61ㄴ覺圓明故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2a.jpg">원각경언해 상2의2:62ㄱ顯心의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7b.jpg">원각경언해 상2의2:67ㄴ心淸淨故로 見塵이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9a.jpg">원각경언해 상2의2:69ㄱ見淸淨故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9a.jpg">원각경언해 상2의2:69ㄱ眼根이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0a.jpg">원각경언해 상2의2:70ㄱ根淸淨故로 眼識이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5a.jpg">원각경언해 상2의2:75ㄱ識淸淨故로 聞塵이 淸淨며 聞淸淨故로 耳根이 淸淨며 根淸淨故로 耳識이 淸淨며 識淸淨故로 覺塵이 淸淨야 如是乃至鼻舌身意ㅣ 亦復如是리라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2b.jpg">원각경언해 상2의2:52ㄴ善쎤男남子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a.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ㄱ아 이 菩뽕薩와 末世솅 衆生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a.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ㄱ한 幻을 證得득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b.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ㄴ그리멧 像 滅 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3b.jpg">원각경언해 상2의2:53ㄴ그 곧 方 업슨 淸淨을 得득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54a.jpg">원각경언해 상2의2:54ㄱ無뭉邊변 虛헝空이 覺각 나타 發혼 고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1b.jpg">원각경언해 상2의2:61ㄴ覺각이 두려이 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2a.jpg">원각경언해 상2의2:62ㄱ心심의 淸淨을 나토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7b.jpg">원각경언해 상2의2:67ㄴ미 淸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7b.jpg">원각경언해 상2의2:67ㄴ見견塵띤이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9a.jpg">원각경언해 상2의2:69ㄱ見견이 淸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69a.jpg">원각경언해 상2의2:69ㄱ眼根이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0a.jpg">원각경언해 상2의2:70ㄱ根이 淸淨 眼識식이 淸淨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5a.jpg">원각경언해 상2의2:75ㄱ識식이 淸淨 聞문塵띤이 淸淨며 聞문이 淸淨 耳根이 淸淨며 根이 淸淨 耳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5b.jpg">원각경언해 상2의2:75ㄴ식이 淸淨며 識식이 淸淨 覺각塵띤이 淸淨야 이티 鼻삥와 舌와 身신과 意와애 니르리  이 리라

○ 현대역

“선남자야. 이 보살과 말세의 중생이 많은 환(幻)을 증득(證得)하여 그림자의 영상을 멸한 까닭으로 그때 곧 방(方) 없는[=원만한?] 청정을 득하리니, 가없는 허공이 깨달음[覺]에 나타나 발한 것이니라. 깨달음이 원만하게 밝으므로 마음의 청정함을 나타나게 되며, 마음이 청정하므로 견진(見塵)이 청정하며, 보는 것이 청정하므로 안근(眼根)이 청정하며, 근(根)이 청정하므로 안식(眼識)이 청정하며, 식(識)이 청정하므로 문진(聞塵)이 청정하며, 듣는 것이 청정하므로 이근(耳根)이 청정하며, 근(根)이 청정하므로 이식(耳識)이 청정하며, 식(識)이 청정하므로 각진(覺塵)이 청정하여 이와 같이 비(鼻)와 설(舌)과 신(身)과 의(意)에 이르기까지 또 이와 같으리라.”

여덟째 단락 주제

근(根)이 청정하면 6진(塵)·4대(大)·12처(處)·18계(界)·25유(有)가 모두 청정하다.

○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8b.jpg">원각경언해 상2의2:78ㄴ善男子아 根淸淨故로 色塵이 淸淨며 色淸淨故로 聲塵이 淸淨며 香味觸法도 亦復如是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0b.jpg">원각경언해 상2의2:80ㄴ善男子아 六塵이 淸淨故로 地大淸淨며 地淸淨故로 水大淸淨며 火大風大도 亦復如是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2b.jpg">원각경언해 상2의2:82ㄴ善男子아 四大淸淨故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2b.jpg">원각경언해 상2의2:82ㄴ十二處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3a.jpg">원각경언해 상2의2:83ㄱ十八界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5a.jpg">원각경언해 상2의2:85ㄱ二十五有ㅣ 淸淨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6b.jpg">원각경언해 상2의2:86ㄴ彼淸淨故로

○ 경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78b.jpg">원각경언해 상2의2:78ㄴ善쎤男남子아 根이 淸淨 色塵띤이 淸淨며 色이 淸淨 聲塵띤이 淸淨며 香과 味밍와 觸쵹과 法법도  이 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0b.jpg">원각경언해 상2의2:80ㄴ善쎤男남子아 六륙塵띤이 淸쳥淨 地띵大땡 淸淨며 地띵ㅣ 淸淨 水大땡 淸淨며 火황大땡와 風봉大땡도  이 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2b.jpg">원각경언해 상2의2:82ㄴ善쎤男남子아 四大땡 淸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2b.jpg">원각경언해 상2의2:82ㄴ十씹二處쳥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3a.jpg">원각경언해 상2의2:83ㄱ十씹八界갱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5a.jpg">원각경언해 상2의2:85ㄱ二十씹五 有왜 淸淨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5-2_086b.jpg">원각경언해 상2의2:86ㄴ뎨 淸쳥淨

○ 현대역

“선남자야. 근(根)이 청정하므로 색진(色塵)이 청정하며, 빛[色]이 청정하므로 성진(聲塵)이 청정하며, 냄새[香]와 맛[味]과 닿음[觸]과 법(法)도 또한 이와 같으리라. 선남자야. 육진(六塵)이 청정하므로 지대(地大)가 청정하며, 땅이 청정하므로 수대(水大)가 청정하며, 화대(火大)와 풍대(風大)도 또한 이와 같으리라. 선남자야. 사대(四大)가 청정하므로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와 이십오유(二十五有)가 청정할 것이니, 저것이 청정하므로…” (“출세간의 모든 법이 깨끗하다.” 하는 내용이 6권 〈상2의2〉에 이어진다.)

원각경언해 권8 개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하 2의 1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下 二之一

종남산 초당사 사문 종밀 소초

終南山 草堂寺 沙門 宗密 疏鈔

원각경언해 권8 개요

원각경(圓覺經)의 본이름은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인데, “일체 중생의 본래 성불(本來成佛)을 드러내는 원각(圓覺), 즉 완전 원만한 깨달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는 뜻이다.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는 당나라 때 인도 계빈의 고승인 불타다라(佛陀多羅;覺救)가 번역한 한역 불경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을 규봉 종밀(圭峰宗密;780~841)이 주석한 〈대방광 원각경 대소초(大方廣圓覺經大疏鈔)〉를 저본으로 삼아,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조가 구결(口訣)을 달고 신미(信眉)·효령대군(孝寧大君)·한계희(韓繼禧) 등이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목판본으로서 총 10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권8은 〈하2의1〉과 〈하2의2〉로 구성되어 있다.

〈하2의1〉은 위덕자재보살이 세존께 원각묘심(圓覺妙心)을 깨닫기 위한 수행과정(修行課程)에서 쓰이는 관행(觀行)의 종류에 대해 여쭈었고, 〈하2의2〉는 변음보살이 이 3종의 관행을 실제에서 닦고 익히는 방편에 대해 말씀해주실 것을 청하자 이에 세존께서 설하신 내용이다.

이 역주서에서는 원각경(圓覺經)의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원각경〉 본문의 요지를 앞에 제시하고, 〈경 본문〉(세조의 구결문)과 신미 등이 번역한 〈본문 언해〉만을 따로 떼어 단락별로 편집, 필자의 〈현대역〉을 붙여 놓았다. 그 뒤부터는 〈원각경언해〉 권8을 원전의 순서대로 제시하고 이것을 현대국어로 역주·해설하였다. 부록에는 지금까지 학계에 소개된 적이 없는 〈원각경언해〉 초간본(1465)의 1472년 후쇄본을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에 위치한 조계종 원각사(圓覺寺)[http://wongaksa.or.kr] 주지이신 정각(正覺) 스님의 후의(厚意)에 힘입은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원각경언해 〈하2의1〉 경 본문의 요지

원각경(圓覺經)은, 문수사리보살을 비롯한 12명의 보살의 질문에 대해, 세존(世尊)께서 시방(十方)에 가득하여 생멸(生滅)이 없는 원각묘심(圓覺妙心)과 누구나 여기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수행 방법에 대해 설하신 경전이다.

그 중에서 〈하2의1〉은 위덕자재장(威德自在章) 또는 ‘위덕자재보살장’이라고 하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덕자재보살이 부처님께 원각(圓覺) 묘심을 깨닫기 위해, 일체의 방편과 점차(漸次)와 수행하는 사람의 종류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하신다.

‘위없는 묘각(妙覺)이 시방에 가득하여 여래와 일체 법(法)을 출생하게 한다. 여래와 일체 법은 동체(同體)여서 평등하므로 모든 수행에는 실제로 둘이 없지만, 방편으로 수순(隨順)하는 데는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돌아갈 바를 원만히 거둔다면 성품의 차별에 따라 사마타·삼마발제·선나의 세 가지가 있다. 이 3가지 법문(法門)은 모두 원각(圓覺)을 따르는 길이므로 이를 따르고 닦아 익혀 원만히 깨달으면 원각을 이룰 것이다.’

원각경언해 〈하2의1〉 경 본문 및 언해

󰊱 위덕자재보살이 진리의 문에 드는 방편(方便)·점차(漸次)와 수행인의 종류를 여쭙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3b.jpg">원각경언해 하2의1:3ㄴ於是예 威德自在菩薩이 在大衆中샤 卽從座起샤 頂禮佛足시고 右繞三帀시고 長跪叉手샤 而白佛言샤 大悲世尊이 廣爲我等샤 分別如是隨順覺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4a.jpg">원각경언해 하2의1:4ㄱ性샤 令諸菩薩로 覺心의 光明야 承佛圓音와 不因修習야 而得善利케 시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4b.jpg">원각경언해 하2의1:4ㄴ世尊하 譬如大城에 外有四門커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5a.jpg">원각경언해 하2의1:5ㄱ隨方來者ㅣ 非止一路야 一切菩薩이 莊嚴佛國며 及成菩提ㅣ 非一方便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5b.jpg">원각경언해 하2의1:5ㄴ惟願世尊이 廣爲我等샤 宣說一切方便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6a.jpg">원각경언해 하2의1:6ㄱ次시며 幷修行人이 摠有幾種니고 令此會菩薩와 及末世衆生求大乘者ㅣ 速得開悟야 遊戱如來大寂滅海케 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6b.jpg">원각경언해 하2의1:6ㄴ作是語巳시고 五體投地샤 如是三請샤 終而復始야시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3b.jpg">원각경언해 하2의1:3ㄴ이 威德득自在菩뽕薩이 大땡衆 中에 겨샤 곧 座쫭로셔 니르샤 부텻 바 頂禮롕시고 올녀그로 도샤 세 번 도시고 長跪뀡叉창手샤 부텻긔 오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4a.jpg">원각경언해 하2의1:4ㄱ大땡悲빙 世솅尊존이 너비 우리 爲윙샤 이  覺각性 隨順쓘호 分분別샤 諸졍菩뽕薩로  光明을 아라 부텻 두려우신 소리 받와 닷가 니교 因티 아니야 善쎤 利링 得득게 시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4b.jpg">원각경언해 하2의1:4ㄴ世솅尊존하 가비건댄 큰 城에 밧긔 네 門몬이 잇거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5a.jpg">원각경언해 하2의1:5ㄱ方 조차 오리  길 아니야 一切촁 菩뽕薩이 佛國귁을 莊嚴며 菩뽕提똉 일우미  方便뼌 아니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6a.jpg">원각경언해 하2의1:6ㄱ願 世솅尊존이 너비 우리 爲윙샤 一切촁ㅅ 方便뼌 漸쪔次 펴 니시며  修行 사미 모다 몃 가지 잇니고 이 會ㅅ 菩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6b.jpg">원각경언해 하2의1:6ㄴ뽕薩와 末世솅ㅅ 衆生 大땡乘 求리 리 여러 아로 得득야 如來ㅅ 큰 寂쪅滅海예 놀에 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7a.jpg">원각경언해 하2의1:7ㄱ이 말 시고 五體톙 해 더디샤 이티 세 번 請샤 고 다시 비르서시

〈현대역〉

이[=여기]에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이 대중 가운데에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부처님의 발에 정례(頂禮)하시고 오른쪽으로 도시어 세 번 감도시고 장궤차수(長跪叉手)하시고 부처님께 사뢰셨다. “대비하신 세존께서 널리 우리[=저희]를 위하여 이와 같이 각성(覺性=불성(佛性))에 수순(隨順)하는 것을 널리 분별하시어, 보살들로 〈하여금〉 마음의 광명을 알아[=깨달아] 부처님의 원만하신 소리[圓音]을 받고 닦아 익히지 않고도 선한 이익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큰 성(城)에 밖에 네 개의 문(門)이 있는데 방향을 따라서 오는 사람이 한 길만이 아닌 것과 같아서 일체 보살이 불국(佛國)을 장엄하며 보리(菩提)를 이루는[=성취하는] 것이 한 가지 방편(方便)〈만〉이 아니니, 원컨대 세존께서 널리 우리[=저희]를 위하시어 일체의 방편과 점차(漸次)를 펴 말씀하시며 또 수행하는 사람이 모두 몇 가지가 있습니까? 이 법회(法會)에 〈와 있는〉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로서 대승(大乘)을 구하는 이가 빨리 열어 앎[=깨달음]을 득하여 여래의 큰 적멸(寂滅) 바다에서 노닐게 하소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시어 이같이 세 번을 청하시고 마치고 다시 시작하셨다.

󰊲 보살들과 말세 중생을 위하여 원각에 들어가는 3종류의 관행(觀行)을 설하리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6b.jpg">원각경언해 하2의1:6ㄴ爾時世尊이 告威德自在菩薩言샤 善哉善哉라 善男子아 汝等이 乃能爲諸菩薩와 及末世衆生야 問於如來如是方便니 汝今諦聽라 當爲汝說호리라 時威德自在菩薩이 奉敎歡喜와 及諸大衆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7a.jpg">원각경언해 하2의1:7ㄱ黙然而聽시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7b.jpg">원각경언해 하2의1:7ㄴ善男子아 無上妙覺이 徧諸十方야 出生如來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8a.jpg">원각경언해 하2의1:8ㄱ與一切法과 同體平等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8b.jpg">원각경언해 하2의1:8ㄴ於諸修行애 實無有二컨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9b.jpg">원각경언해 하2의1:9ㄴ方便隨順은 其數ㅣ 無量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0b.jpg">원각경언해 하2의1:10ㄴ圓攝所歸컨댄 循性差別야 當有三種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7a.jpg">원각경언해 하2의1:7ㄱ그 世솅尊존이 威德득自在菩뽕薩려 니샤 됴타 됴타 善쎤男남子아 너희히 能히 諸졍菩뽕薩와 末世솅 衆生 爲윙야 如來ㅅ게 이  方便뼌을 묻니 네 이제 仔細솅히 드르라 반기 너 爲윙야 닐오리라 時씽예 威德득自在菩뽕薩이 敎 받와 歡환喜힁와 諸졍大땡衆과 야셔 듣오시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7b.jpg">원각경언해 하2의1:7ㄴ善쎤男남子아 無뭉上妙覺각이 十씹方애 周徧변야 如來 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8a.jpg">원각경언해 하2의1:8ㄱ一切촁 法법과 體톙 야 平等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8b.jpg">원각경언해 하2의1:8ㄴ한 修行애 實로 둘 업건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09b.jpg">원각경언해 하2의1:9ㄴ方便뼌으로 隨順쓘호 그 數숭ㅣ 無뭉量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0b.jpg">원각경언해 하2의1:10ㄴ가 고 두려이 잡건댄 性의 差창別을 조차 반기 세 가지 잇니라

〈현대역〉

그때 세존께서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더러 이르시되, “좋다, 좋다. 선남자(善男子)여, 너희들이 능히 보살들과 말세 중생을 위하여 여래(如來)께 이와 같은 방편을 묻나니 너[=너희]는 이제 자세히 들으라. 응당 너[=너희]를 위하여 말해주리라.” 그때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환희(歡喜)하며 대중들과 조용히 하고서 들으셨다. “선남자여, 무상(無上=최고의) 묘각(妙覺)이 시방(十方)에 두루 가득하여 여래(如來)를 나오게 하니, 일체의 법(法)과 체(體=본체)가 같아 평등하여 모든 수행(修行)에 실제로 둘이 없건마는 방편으로 수순(隨順)하는 데는 그 수(數)가 무량하니, 돌아가는 곳을 원만(圓滿)히 잡는다면 성(性=근성(根性))의 차별(差別)에 따라 마땅히 세 가지가 있느니라.”

󰊳 정관(靜觀)의 사마타(奢摩他)에 대해 설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4a.jpg">원각경언해 하2의1:14ㄱ善男子아 若諸菩薩이 悟淨圓覺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5b.jpg">원각경언해 하2의1:15ㄴ以淨覺心으로 取靜爲行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8a.jpg">원각경언해 하2의1:18ㄱ由澄諸念야 覺識의 煩動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8b.jpg">원각경언해 하2의1:18ㄴ靜慧ㅣ 發生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9a.jpg">원각경언해 하2의1:19ㄱ身心客塵이 從此永滅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9b.jpg">원각경언해 하2의1:19ㄴ便能內發寂靜輕安야 由寂靜故로 十方世界諸如來心이 於中에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0a.jpg">원각경언해 하2의1:20ㄱ顯現호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1a.jpg">원각경언해 하2의1:21ㄱ如鏡中像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3b.jpg">원각경언해 하2의1:23ㄴ此方便者 名奢摩他ㅣ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4a.jpg">원각경언해 하2의1:14ㄱ善쎤男남子아 다가 諸졍菩뽕薩이 淨圓覺각 아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5b.jpg">원각경언해 하2의1:15ㄴ淨覺각心심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6a.jpg">원각경언해 하2의1:16ㄱ靜을 取츙야 行 사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8a.jpg">원각경언해 하2의1:18ㄱ한 念념 교 브터 識식의 어즈러이 뮈유믈 아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8b.jpg">원각경언해 하2의1:18ㄴ靜慧ㅣ 發야 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9a.jpg">원각경언해 하2의1:19ㄱ身신과 心심과 客塵띤괘 이 브터 永히 滅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19b.jpg">원각경언해 하2의1:19ㄴ곧 能히 寂쪅靜과 輕安이 안해 發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0a.jpg">원각경언해 하2의1:20ㄱ寂쪅靜을 브틀 十씹方 世솅界갱ㅅ 한 如來ㅅ 미 그 中에 나타 現호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1a.jpg">원각경언해 하2의1:21ㄱ거우룻 中엣 像 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3b.jpg">원각경언해 하2의1:23ㄴ이 方便뼌은 일후미 奢샹摩망<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4a.jpg">원각경언해 하2의1:24ㄱ他탕ㅣ라

〈현대역〉

“선남자여, 만약에 보살들이 청정(淸淨)한 원각(圓覺)을 알아[=깨달아]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써 정(靜=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아 모든 염(念=생각)이 맑아짐으로 말미암아 식(識=의식)이 어지럽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깨닫고] 정혜(靜慧=고요한 지혜)가 피어 나와서 몸[身]과 마음[心]과 객진(客塵=번뇌)이 이것에 의해 영원히 소멸하여 곧 능히 적정(寂靜)과 경안(輕安)이 안에서 피어나서 적정에 의지하므로, 시방 세계의 모든 여래(如來)의 마음이 그 중에 〈뚜렷이〉 나타남이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으니 이 방편은 이름이 사마타(奢摩他)니라.”

󰊴 환관(幻觀)의 삼마발제(三摩鉢提)에 대해 설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5b.jpg">원각경언해 하2의1:25ㄴ善男子아 若諸菩薩이 悟淨圓覺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6a.jpg">원각경언해 하2의1:26ㄱ以淨覺心으로 知覺心性과 及與根塵이 皆因幻化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6b.jpg">원각경언해 하2의1:26ㄴ卽起諸幻야 以除幻者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7a.jpg">원각경언해 하2의1:27ㄱ變化諸幻야 而開幻衆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8b.jpg">원각경언해 하2의1:28ㄴ由起幻故로 便能內發大悲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9b.jpg">원각경언해 하2의1:29ㄴ輕安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0a.jpg">원각경언해 하2의1:30ㄱ一切菩薩이 從此起行야 漸次增進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2a.jpg">원각경언해 하2의1:32ㄱ彼觀幻者ㅣ 非同幻故ㅣ며 非同幻觀이 皆是幻故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2b.jpg">원각경언해 하2의1:32ㄴ幻相을 永離시 是諸菩薩所圓妙行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3a.jpg">원각경언해 하2의1:33ㄱ如土長苗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3b.jpg">원각경언해 하2의1:33ㄴ此方便者 名三摩鉢提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5b.jpg">원각경언해 하2의1:25ㄴ善쎤男남子아 다가 諸졍菩뽕薩이 淨圓覺각을 아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6a.jpg">원각경언해 하2의1:26ㄱ淨覺각心심으로 心심性과 根塵띤괘 다 幻化황 因  아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6b.jpg">원각경언해 하2의1:26ㄴ곧 한 幻 니르와다 幻릴 덜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7a.jpg">원각경언해 하2의1:27ㄱ한 幻 變변化황야 幻衆을 여러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8b.jpg">원각경언해 하2의1:28ㄴ幻 니르와도 브틀 곧 能히 大땡悲빙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29b.jpg">원각경언해 하2의1:29ㄴ輕安이 안해 發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0a.jpg">원각경언해 하2의1:30ㄱ一切촁 菩뽕薩이 이 브터 行 니르와다 漸쪔漸쪔 次第똉로 더 나가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2a.jpg">원각경언해 하2의1:32ㄱ뎌 幻 보니 幻 디 아니 젼며 幻 디 아니 보미 다 이 幻인 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2b.jpg">원각경언해 하2의1:32ㄴ幻相 永히 여흴시 이 諸졍菩뽕薩의 圓妙 行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3a.jpg">원각경언해 하2의1:33ㄱ 苗 길움 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3b.jpg">원각경언해 하2의1:33ㄴ이 方便뼌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라

〈현대역〉

“선남자여, 만약에 보살들이 청정한 원각(圓覺)을 알아[=깨달아]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써 심성(心性)과 근진(根塵=6근과 6진)이 모두 환화(幻化)로 인한 것임을 알고[=깨닫고] 곧 온갖 환(幻)을 일으켜 〈이것으로〉 환(幻)이 되는 것을 덜고[=제거하고], 온갖 환(幻)을 변화시켜 환(幻) 같은 무리[=환중(幻衆)]를 열어[=깨우쳐] 환(幻)을 일으킴에 의거하므로 곧 능히 대비(大悲) 경안(輕安)이 안에 피어날 것이니, 일체 보살이 이것에 의거해 수행을 일으켜 점점 차례로 더 〈공부해〉 나아가느니라. 저 환(幻)을 보는 것은 환(幻) 같지 않기 때문이며, 환(幻)과 같지 아니한 것을 봄[=관찰함]도 모두 환(幻)인 까닭에 환(幻)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는 것이 보살들의 원묘(圓妙=원만하고 오묘함)한 수행이니라. 〈이것은 마치〉 흙에 싹[苗]을 기르는 것과 같으니, 이 방편은 이름이 삼마발제(三摩鉢提)이니라.”

󰊵 적관(寂觀)의 선나(禪那)에 대해 설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4b.jpg">원각경언해 하2의1:34ㄴ善男子아 若諸菩薩이 悟淨圓覺야 以淨覺心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5a.jpg">원각경언해 하2의1:35ㄱ不取幻化와 及諸靜相과 了知와 身心괘 皆爲罣礙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5b.jpg">원각경언해 하2의1:35ㄴ無知覺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6b.jpg">원각경언해 하2의1:36ㄴ明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9b.jpg">원각경언해 하2의1:39ㄴ不依諸礙야 永得超過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0b.jpg">원각경언해 하2의1:40ㄴ礙 無礙境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2a.jpg">원각경언해 하2의1:42ㄱ受用世界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2b.jpg">원각경언해 하2의1:42ㄴ及與身心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3a.jpg">원각경언해 하2의1:43ㄱ相在塵域호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3b.jpg">원각경언해 하2의1:43ㄴ如器中鍠이 聲出于外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9b.jpg">원각경언해 하2의1:49ㄴ煩惱涅槃이 不相留礙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0a.jpg">원각경언해 하2의1:50ㄱ便能內發寂滅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1a.jpg">원각경언해 하2의1:51ㄱ輕安야 妙覺애 隨順 寂滅境界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1b.jpg">원각경언해 하2의1:51ㄴ自他身心의 所不能及이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2a.jpg">원각경언해 하2의1:52ㄱ衆生壽命이 皆爲浮想이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3a.jpg">원각경언해 하2의1:53ㄱ此方便者 名爲禪那ㅣ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4b.jpg">원각경언해 하2의1:34ㄴ善쎤男남子아 다가 諸졍菩뽕薩이 淨圓覺각 아라 淨覺각心심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5a.jpg">원각경언해 하2의1:35ㄱ幻化황와 한 靜相과 아롬과 身신心심괘 다 료미 외요 取츙티 아니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5b.jpg">원각경언해 하2의1:35ㄴ知딩覺각 업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6b.jpg">원각경언해 하2의1:36ㄴ明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39b.jpg">원각경언해 하2의1:39ㄴ한 료 븓디 아니야 永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0b.jpg">원각경언해 하2의1:40ㄴ룜과 룜 업슨 境을 건너 디나 得득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2a.jpg">원각경언해 하2의1:42ㄱ受用과 世솅界갱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2b.jpg">원각경언해 하2의1:42ㄴ 身신과 心심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3a.jpg">원각경언해 하2의1:43ㄱ서르 塵띤域에 이쇼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3b.jpg">원각경언해 하2의1:43ㄴ그릇 中엣 鍠이 소리 밧긔 나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49b.jpg">원각경언해 하2의1:49ㄴ煩뻔惱와 涅槃빤괘 서르 리오디 몯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0a.jpg">원각경언해 하2의1:50ㄱ곧 能히 寂쪅滅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1a.jpg">원각경언해 하2의1:51ㄱ輕安이 안해 發야 妙覺각애 隨順쓘 寂쪅滅 境界갱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1b.jpg">원각경언해 하2의1:51ㄴ自와 他탕왓 身신心심의 能히 밋디 몯홀 고디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2a.jpg">원각경언해 하2의1:52ㄱ衆生의 壽命이 다 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2b.jpg">원각경언해 하2의1:52ㄴ想이 외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53a.jpg">원각경언해 하2의1:53ㄱ이 方便뼌은 일후미 禪쎤那낭ㅣ라

〈현대역〉

“선남자여, 만약에 보살들이 청정한 원각(圓覺)을 알아[=깨달아]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써 환화(幻化)와 온갖 고요한 모습과 앎과 신심(身心)이 모두 걸림이 됨을 취하지 아니하여[=않으면] 지각(知覺) 없는 명(明)은 온갖 걸림[=장애]에 의하지 않고 영원히 걸림과 걸림 없는 경계를 건너 지남을 득하여 수용(受用)과 세계(世界)와 또 몸과 마음이 서로 티끌 세상에 있음이 〈마치〉 그릇 속의 쇠북소리가 밖으로 나오듯이 하여, 번뇌(煩惱)와 열반(涅槃)이 서로 가리게 하지 못하고 능히 적멸(寂滅)과 경안(經安)이 안에서 피어나서 묘각(妙覺)에 수순한 적멸의 경계는 나[自]와 남[他]의 몸과 마음[=身心]이 능히 미치지 못할 바이며, 중생의 수명(壽命)이 모두 들뜬[=덧없는] 생각이 될 것이니, 이 방편은 이름이 선나(禪那)이니라.”

󰊶 삼관(三觀)을 수순(隨順)하여 원만히 닦아 익히면 원각을 이루리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0b.jpg">원각경언해 하2의1:60ㄴ善男子아 此三法門이 皆是圓覺親近隨順이니 十方如來ㅣ 因此成佛시며 十方菩薩의 種種方便一切同異ㅣ 皆依如是三種事業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1a.jpg">원각경언해 하2의1:61ㄱ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2a.jpg">원각경언해 하2의1:62ㄱ若得圓證면 卽成圓覺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2b.jpg">원각경언해 하2의1:62ㄴ善男子아 假使有人이 修於聖道야 敎化成就百千萬億阿羅漢辟支佛果야도 不如有人이 聞此圓覺無礙法門고 一刹那頃을 隨順修習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1a.jpg">원각경언해 하2의1:61ㄱ善쎤男남子아 이 세 法법門몬이 다 이 圓覺각 親친近끈히 隨順쓘호미니 十씹方 如來ㅣ 이 因야 成佛시며 十씹方 菩뽕薩 種種앳 方便뼌 一切촁 홈과 달옴괘 다 이  세 가짓 事業을 븓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2a.jpg">원각경언해 하2의1:62ㄱ다가 圓히 證호 得득면 곧 圓覺각 일우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2b.jpg">원각경언해 하2의1:62ㄴ善쎤男남子아 다가 사미 聖道 닷가 百千쳔 萬먼億 阿羅랑漢한과 辟벽支징佛果광 敎化황야 일워도 사미 이 圓覺각ㅅ 룜 업슨 法법門몬 듣고  刹那낭ㅅ  隨順쓘야 닷가 니굠 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3a.jpg">원각경언해 하2의1:63ㄱ디 몯니라

〈현대역〉

“선남자여, 이 세 가지 법문(法門)은 모두 이 원각(圓覺)을 친근하게 수순하는 것이니, 시방의 여래(如來)가 이로 인하여 성불(成佛)하시며, 시방 보살의 갖가지 방편 일체와 같음과 다름이 모두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사업(事業=수행)에 의거하나니, 만약에 원만히 증득(證得)하면 곧 원각(圓覺)을 이룰[=성취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도(聖道=거룩한 도)를 닦아서 백·천·만·억의 아라한과(阿羅漢果)와 벽지불과(辟支佛果)를 교화해 이루어도[=성취해도] 〈어떤〉 사람이 이 원각(圓覺)의 걸림[막힘]이 없는 법문(法門)을 듣고서 한 찰나 사이라도 수순(隨順)하고 닦아 익힌 것만 같지 못하니라.”

󰊷 게송 : 위덕자재장에서 설한 내용을 다시 노래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4b.jpg">원각경언해 하2의1:64ㄴ爾時世尊이 欲重宣此義샤 而說偈言샤 威德아 汝當知라 無上大覺心이 本際ㅣ 無<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5a.jpg">원각경언해 하2의1:65ㄱ二相컨마 隨於諸方便야 其數ㅣ 卽無量니 如來無摠開示 便有三種類니라 寂靜奢摩他 如鏡照諸像고 如幻三摩提 如苗漸增長고 禪那唯寂滅은 如彼器中鍠니 三種妙法門이 皆是覺隨順이니 十方諸如來와 及諸大菩薩이 因此得成道니 三事 圓證故로 名究竟涅槃이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4b.jpg">원각경언해 하2의1:64ㄴ그 世솅尊존이 이 들 다시 펴려 샤 偈꼥 니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5a.jpg">원각경언해 하2의1:65ㄱ威德득아 네 반기 알라 無뭉上 大땡覺각心심이 本본際졩 두 相이 업건마 한 方便뼌을 조차 그 數숭ㅣ 곧 無뭉量니 如來ㅣ 뫼화 여러 뵈요미 곧 세 가짓 類 잇니라 寂쪅靜 奢샹摩망他<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1_065b.jpg">원각경언해 하2의1:65ㄴ탕 거우뤼 한 像 비취욤 고 幻  三삼摩망提똉 苗ㅣ 漸쪔漸쪔 기룸 고 禪쎤那낭ㅣ 오직 寂쪅滅호 뎌 그릇 中엣 鍠 니 세 가짓 妙法법門몬이 다 이 覺각 隨順쓘호미니 十씹方 諸졍如來와 諸졍大땡菩뽕薩왜 이 因야 成道 得득니 세 이 두려이 證 일후미 究竟涅槃빤이라

〈현대역〉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고 하시어 게송(偈頌)을 이르시되,

“위덕(威德)이여, 너는 반드시 알아라. 위 없는 대각심(大覺心)은 본제(本際)가 두 모습이 없건마는 온갖 방편을 좇아 그 수는 곧 무량하니, 여래(如來)가 모아 열어 보인 것이 곧 세 가지 종류가 있느니라. 적정(寂靜)한 사마타(奢摩他)는 거울이 온갖 영상을 비춤과 같고, 환(幻) 같은 삼마제(三摩提=삼마발제(三摩鉢提))는 싹이 점점 자라는 것과 같고, 선나(禪那)가 오직 적멸(寂滅)한 것은 저 그릇 속의 굉(鍠=쇠북소리)과 같으니라. 세 가지 묘한 법문(法門)이 모두 이 원각(圓覺)을 수순하는 것이니, 시방의 모든 여래와 대보살들이 이것을 인하여 도(道)를 이루어 득하나니, 세 가지 일을 원만히 증득하므로 이름이 구경열반(究竟涅槃)이니라.”

원각경언해 〈하2의2〉 경 본문의 요지

〈하2의2〉는 변음보살장(辨音菩薩章)으로서, 이 글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변음보살은 〈하2의1〉 위덕자재보살장(威德自在菩薩章)에서 삼관(三觀)―사마타(奢摩他)·삼마발제(三摩鉢提)·선나(禪那)―이 말세 수행자들의 기본 방편이라는 말씀을 듣고, 이것의 실제 수행방법으로서 이 모든 방편을 몇 가지로 닦아 익혀야 하는가에 대해 세존께 설법을 청한다. 이에 세존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씀하신다.

모든 여래(如來)의 원각(圓覺)은 청정(淸淨)하기 때문에 본래 수습(修習)할 것도 없고 수습할 자도 없다. 그러나 보살과 말세의 중생이 깨닫지 못해 환력(幻力)으로 닦아 익히니, 여기에는 25종의 청정한 정륜(定輪)이 있다. 정륜은 사마타·사마발제·선나의 3법을 돈(頓)·점(漸), 단(單)·복(複)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다.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이 관문(觀門)을 지녀 수순하고, 부지런히 닦으면 부처님의 대비(大悲)의 힘에 의해 오래지 않아 열반(涅槃)을 증득할 것이다.

원각경언해 〈하2의2〉 경 본문 및 언해

󰊱 변음보살(變音菩薩)이 세존께 삼관(三觀) 닦는 법을 여쭙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1a.jpg">원각경언해 하2의2:1ㄱ於是예 辨音菩薩이 在大衆中샤 卽從座起샤 頂禮佛足시고 右繞三帀시고 長跪叉手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1b.jpg">원각경언해 하2의2:1ㄴ샤 而白佛言샤 大悲世尊하 如是法門이 甚爲希有시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2a.jpg">원각경언해 하2의2:2ㄱ世尊하 此諸方便이 一切菩薩이 於圓覺門에 有幾修習이니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3a.jpg">원각경언해 하2의2:3ㄱ願爲大衆과 及末世衆生샤 方便開示샤 令悟實相케 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3b.jpg">원각경언해 하2의2:3ㄴ作是語已시고 五體投地샤 如是三請샤 終而復始야시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1b.jpg">원각경언해 하2의2:1ㄴ이 辨뼌音菩뽕薩이 大땡衆 中에 겨샤 곧 座쫭로셔 니르샤 부텻 바 頂禮롕시고 올녀그로 도샤 세 번 도시고 長跪뀡叉창手샤 부텻긔 오샤 大땡悲빙 世솅尊존하 이  法법門몬이 甚씸히 希힁有시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2a.jpg">원각경언해 하2의2:2ㄱ世솅尊존하 이 한 方便뼌이 一切촁 菩뽕薩이 圓覺각門몬에 몃 닷가 니교미 잇니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3a.jpg">원각경언해 하2의2:3ㄱ願 大땡衆과 末世솅 衆生 爲윙샤 方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3b.jpg">원각경언해 하2의2:3ㄴ便뼌으로 여러 뵈샤 實相 알에 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4a.jpg">원각경언해 하2의2:4ㄱ이 말 시고 五體톙 해 더디샤 이티 세 번 請샤 고 다시 비르서시

〈현대역〉

이에 변음보살(辨音菩薩)이 대중 가운데에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부처님의 발에 정례(頂禮)하시고, 오른쪽으로 돌아 세 번 감도시고, 장궤차수(長跪叉手)하시고 부처님께 사뢰시되 “대비(大悲)하신 세존(世尊)이시여, 이와 같은 법문(法門)은 매우 희유(稀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이 많은 방편(方便)은 일체의 보살(菩薩)이 원각(圓覺)의 문(門)에 닦아 익히는 것[=방법]이 몇 가지가 있습니까? 원컨대, 대중(大衆)과 말세(末世)의 중생을 위하시어 방편(方便)으로 열어 보이시어 실상(實相)을 알게 하소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시어 이같이 세 번을 청하시어 마치고 다시 시작하시었다.

󰊲 대중과 말세 중생을 위해 삼관 닦는 법을 설하리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3b.jpg">원각경언해 하2의2:3ㄴ爾時世尊이 告辨音菩薩言샤 善哉善哉라 善男子아 汝等이 乃能爲諸大衆과 及末世衆生야 問於如來如是修習니 汝今諦聽라 當爲汝說호리라 時辨音菩薩이 奉敎歡喜샤 及諸大衆과 黙然而聽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4a.jpg">원각경언해 하2의2:4ㄱ더니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4a.jpg">원각경언해 하2의2:4ㄱ그 世솅尊존이 辨뼌音菩뽕薩려 니샤 됴타 됴타 善쎤男남子아 너희히 能히 諸졍大땡衆과 末世솅 衆生 爲윙야 如來ㅅ게 이  닷가 니교 묻니 네 이제 仔細솅히 드르라 반기 너 爲윙야 닐오리라 時씽예 辨뼌音菩뽕薩이 敎 받와 歡환喜힁샤 한 大땡衆과 야셔 듣오시더니

〈현대역〉

그때 세존이 변음보살(辨音菩薩)더러 말씀하셨다. “좋다, 좋다. 선남자(善男子)여. 너희들이 능히 모든 대중과 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여래에게 이같이 닦아 익히는 〈방법을〉 물으니, 네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내가〉 너[=변음보살]를 위하여 말해주리라.” 이때 변음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받자와] 환희(歡喜)하며 많은 대중과 잠잠히 하고서 〈설법을〉 들으셨다.

󰊳 깨닫지 못한 보살과 말세 중생에게는 25종의 청정한 정륜(定輪)이 있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4b.jpg">원각경언해 하2의2:4ㄴ善男子아 一切如來ㅅ 圓覺이 淸淨야 本無修習과 及修習者ㅣ언마 一切菩薩와 及末世衆生이 依於未覺야 幻力으로 修習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5a.jpg">원각경언해 하2의2:5ㄱ爾時예 便有二十五種淸淨定輪니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4b.jpg">원각경언해 하2의2:4ㄴ善쎤男남子아 一切촁 如來ㅅ 圓覺각이 淸淨야 本본來 修習씹과 修習씹리왜 업건마 一切촁 菩뽕薩와 末世솅 衆生이 아디 몯호 브터 幻力륵으로 修習씹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5a.jpg">원각경언해 하2의2:5ㄱ그  곧 二十씹五種 淸淨 定輪륜이 잇니

〈현대역〉

“선남자여. 일체 여래의 원각(圓覺)은 청정하여 본래 닦아 익힐 것과 닦아 익힐 사람이 없건마는 일체의 보살과 말세의 중생이 알지[=깨닫지] 못함에 의해 환력(幻力)으로 닦아 익혀 그 때에 곧 이십오종(二十五種)의 청정한 선정(禪定)의 바퀴가 있느니라.”

󰊴 단수(單修)로 하는 삼관(三觀) : 사마타·삼마발제·선나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6b.jpg">원각경언해 하2의2:6ㄴ若諸菩薩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7b.jpg">원각경언해 하2의2:7ㄴ唯取極靜야 由靜力故로 永斷煩惱야 究竟成就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8a.jpg">원각경언해 하2의2:8ㄱ不起于座야 便入涅槃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9a.jpg">원각경언해 하2의2:9ㄱ此菩薩者 名이 單修奢摩他ㅣ라 若諸菩薩이 唯觀如幻야 以佛力故로 變化世界야 種種作用야 備行菩薩 淸淨妙行호 於陀羅尼예 不失寂念과 及諸靜慧면 此菩薩者 名이 單修三摩鉢提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1a.jpg">원각경언해 하2의2:11ㄱ若諸菩薩이 唯滅諸幻며 不取作用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2a.jpg">원각경언해 하2의2:12ㄱ獨斷煩惱야 煩惱ㅣ 斷盡야 便證實相면 此菩薩者 名이 單修禪那ㅣ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6b.jpg">원각경언해 하2의2:6ㄴ다가 諸졍菩뽕薩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7b.jpg">원각경언해 하2의2:7ㄴ오직 至징極끅 靜을 取츙야 靜 히믈 브틀 煩뻔惱 永히 그처 究竟히 成就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8a.jpg">원각경언해 하2의2:8ㄱ座쫭애 니디 아니야 곧 涅槃빤애 들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9a.jpg">원각경언해 하2의2:9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 單단修호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09b.jpg">원각경언해 하2의2:9ㄴ다가 諸졍菩뽕薩이 오직 幻 호 보아 佛力륵을  젼로 世솅界갱 變변化황야 種種앳 作작用야 菩뽕薩ㅅ 淸淨 妙行 초 行호 陀땅羅랑尼닝예 寂쪅念념과 한 靜慧 일티 아니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 單단修호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1a.jpg">원각경언해 하2의2:11ㄱ다가 諸졍菩뽕薩이 오직 한 幻 滅며 作작用 取츙티 아니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2a.jpg">원각경언해 하2의2:12ㄱ오 煩뻔惱 그처 煩뻔惱ㅣ 그처 다아 곧 實相 證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2b.jpg">원각경언해 하2의2:12ㄴ禪쎤那낭 單단修호미라

〈현대역〉

“만약에 보살(菩薩)들이 오직 지극한 정(靜=고요함)을 취하여 정(靜)한 힘에 의거하므로 번뇌(煩惱)를 영원히 끊어 구경(究竟)하게 성취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곧 열반(涅槃)에 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奢摩他)를 단수(單修)한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오직 환(幻=허깨비) 같음을 보아[=관찰하여] 부처님의 힘을 쓴 까닭으로 세계(世界)를 변화시켜 갖가지로 작용을 하여 보살의 청정(淸淨)한 묘행(妙行)을 갖추어 행하되, 다라니(陀羅尼)에서 적념(寂念)과 많은 정혜(靜慧=고요한 지혜)를 잃지 않으면, 이 보살은 홑으로 삼마발제(三摩鉢提)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오직 모든 환(幻)을 멸하여 작용을 취하지 아니하고 혼자 번뇌(煩惱)를 끊어 번뇌가 끊어져 다하여 곧 실상(實相)을 증(證)하면[=깨달으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禪那)를 단수(單修)한다고 하느니라.”

󰊵 사마타를 첫머리로 하여 삼마발제·선나를 곁들여 닦는 7관문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5b.jpg">원각경언해 하2의2:15ㄴ若諸菩薩이 先取至靜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6a.jpg">원각경언해 하2의2:16ㄱ以靜慧心으로 照諸幻者야 便於是中에 起菩薩行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6b.jpg">원각경언해 하2의2:16ㄴ此菩薩者 名先修奢摩他고 後修三摩鉢提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7a.jpg">원각경언해 하2의2:17ㄱ若諸菩薩이 以靜慧故로 證至靜性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7b.jpg">원각경언해 하2의2:17ㄴ便斷煩惱야 永出生死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8a.jpg">원각경언해 하2의2:18ㄱ此菩薩者 名이 先修奢摩他고 後修禪那ㅣ라 若諸菩薩이 以寂靜慧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8b.jpg">원각경언해 하2의2:18ㄴ復現幻力種種變化야 度諸衆生고 後斷煩惱야 而入寂滅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奢摩他고 中修三摩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9a.jpg">원각경언해 하2의2:19ㄱ鉢提고 後修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9b.jpg">원각경언해 하2의2:19ㄴ若諸菩薩이 以至靜力으로 斷煩惱已고 後起菩薩 淸淨妙行야 度諸衆生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0a.jpg">원각경언해 하2의2:20ㄱ此菩薩者 名이 先修奢摩他고 中修禪那고 後修三摩鉢提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0b.jpg">원각경언해 하2의2:20ㄴ若諸菩薩이 以至靜力으로 心斷煩惱고 後度衆生야 建立境界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1a.jpg">원각경언해 하2의2:21ㄱ此菩薩者 名이 先修奢摩他고 齊修三摩鉢提와 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1b.jpg">원각경언해 하2의2:21ㄴ若諸菩薩이 以至靜力으로 資發變化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2a.jpg">원각경언해 하2의2:22ㄱ後斷煩惱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2b.jpg">원각경언해 하2의2:22ㄴ此菩薩者 名이 齊修奢摩他와 三摩鉢提고 後修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3b.jpg">원각경언해 하2의2:23ㄴ若諸菩薩이 以至靜力으로 用資寂滅고 後起作用야 變化界면 此菩薩者 名이 齊修奢摩他와 禪那고 後修三摩鉢提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5b.jpg">원각경언해 하2의2:15ㄴ다가 諸졍菩뽕薩이 몬져 至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6a.jpg">원각경언해 하2의2:16ㄱ징極끅 靜 取츙야 靜慧心심으로 한 幻니 비취여 곧 이 中에 菩뽕薩行 니르와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6b.jpg">원각경언해 하2의2:16ㄴ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 몬져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7a.jpg">원각경언해 하2의2:17ㄱ다가 諸졍菩뽕薩이 靜慧  至징極끅 靜 性을 證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7b.jpg">원각경언해 하2의2:17ㄴ곧 煩뻔惱 그처 生死애 永히 나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8a.jpg">원각경언해 하2의2:18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 몬져 닷고 禪쎤那낭 後에 닷고미라 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8b.jpg">원각경언해 하2의2:18ㄴ慧로  幻力륵ㅅ 種種 變변化황 現야 한 衆生 度똥脫고 後에 煩뻔惱 그처 寂쪅滅에 들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9a.jpg">원각경언해 하2의2:19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 몬져 닷고 三삼摩망鉢提뎽 가온 닷고 禪쎤那낭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19b.jpg">원각경언해 하2의2:19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至징極끅 靜 히므로 煩뻔惱 긋고 後에 菩뽕薩ㅅ 淸淨 妙行 니르와다 한 衆生 度똥脫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0a.jpg">원각경언해 하2의2:20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 몬져 닷고 禪쎤那낭 가온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0b.jpg">원각경언해 하2의2:20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至징極끅 靜 히므로 매 煩뻔惱 긋고  衆生 度똥脫야 境界갱 셰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1a.jpg">원각경언해 하2의2:21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 몬져 닷고 三삼摩망鉢提똉와 禪쎤那낭와 기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1b.jpg">원각경언해 하2의2:21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至징極끅 靜 히므로  變변化황 도아 發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2a.jpg">원각경언해 하2의2:22ㄱ後에 煩뻔惱 그츠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2b.jpg">원각경언해 하2의2:22ㄴ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와 三삼摩망鉢提똉와 기 닷고 禪쎤那낭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3b.jpg">원각경언해 하2의2:23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至징極끅 靜 히므로 寂쪅滅을 돕고 後에 作작用 니르와다 世솅界갱 變변化황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奢샹摩망他탕와 禪쎤那낭와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4a.jpg">원각경언해 하2의2:24ㄱ기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後에 닷고미라

〈현대역〉

“만약 보살들이 먼저 지극한 정(靜=고요함)을 취하여 고요한 지혜(智慧)의 마음으로써 많은 환(幻)으로 된 것을 비추어 곧 이 가운데서 보살행(菩薩行)을 일으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奢摩他)를 먼저 닦고 삼마발제(三摩鉢提)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정혜(定慧=선정과 지혜)를 사용하므로 지극히 고요한 성품을 증(證)하고[=깨닫고] 곧 번뇌를 끊어서 생사(生死)에서 영원히 벗어나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奢摩他)를 먼저 닦고 선나(禪那)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정(寂靜)의 지혜로써 또 환력(幻力)의 갖가지 변화(變化)를 나타내어 많은 중생을 도탈(度脫)하고 나중에 번뇌를 끊어서 적멸(寂滅)에 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를 먼저 닦고 삼마발제를 중간에 닦고 선나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지극히 고요한 힘으로써 번뇌(煩惱)를 끊고 나중에 보살의 청정(淸淨)한 묘행(妙行)을 일으키어 많은 중생을 도탈(度脫)하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를 먼저 닦고 선나를 중간에 닦고 삼마발제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지극히 고요한 힘으로써 마음에 번뇌를 끊고 또 중생을 도탈(度脫)하여 경계(境界)를 세우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를 먼저 닦고 삼마발제와 선나를 가지런히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지극히 고요한 힘으로써 변화(變化)를 도와 일으키고 나중에 번뇌(煩惱)를 끊으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奢摩他)와 삼마발제(三摩鉢提)를 가지런히 닦고 선나(禪那)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지극히 고요한 힘으로써 적멸(寂滅)을 돕고 나중에 작용(作用=움직여 기능을 발휘함)을 일으켜 세계를 변화시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사마타(奢摩他)와 선나(禪那)를 가지런히 닦고 삼마발제(三摩鉢提)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 삼마발제를 첫머리로 하여 사마타·선나를 곁들여 닦는 7관문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4b.jpg">원각경언해 하2의2:24ㄴ若諸菩薩이 以變化力으로 種種隨順고 而取至靜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5a.jpg">원각경언해 하2의2:25ㄱ此菩薩者 名이 先修三摩鉢提고 後修奢摩他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5b.jpg">원각경언해 하2의2:25ㄴ若諸菩薩이 以變化力으로 種種境界예 而取寂滅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三摩鉢提고 後修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6a.jpg">원각경언해 하2의2:26ㄱ若諸菩薩이 以變化力으로 而作佛事고 安住寂靜야 而斷煩惱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6b.jpg">원각경언해 하2의2:26ㄴ此菩薩者 名이 先修三摩鉢提고 中修奢摩他고 後修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7a.jpg">원각경언해 하2의2:27ㄱ若諸菩薩이 以變化力으로 無礙作用고 斷煩惱故로 安住至靜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三摩鉢提고 中修禪那고 後修奢摩他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8a.jpg">원각경언해 하2의2:28ㄱ若諸若薩이 以變化力으로 方便作用고 至靜과 寂滅와 二俱隨順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三摩鉢提고 齊修奢摩他와 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8b.jpg">원각경언해 하2의2:28ㄴ若諸菩薩이 以變化力으로 種種起用야 資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9a.jpg">원각경언해 하2의2:29ㄱ至靜고 後斷煩惱면 此菩薩者 名이 齊修三摩鉢提와 奢摩他고 後修禪那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9b.jpg">원각경언해 하2의2:29ㄴ若諸菩薩이 以變化力으로 資於寂滅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0a.jpg">원각경언해 하2의2:30ㄱ後住淸淨 無作靜慮면 此菩薩者 名이 齊修三摩鉢提와 禪那고 後修奢摩他ㅣ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4b.jpg">원각경언해 하2의2:24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種種앳 隨順쓘고 至징極끅 靜을 取츙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5a.jpg">원각경언해 하2의2:25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 몬져 닷고 奢샹摩망他탕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5b.jpg">원각경언해 하2의2:25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種種 境界갱예 寂쪅滅을 取츙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 몬져 닷고 禪쎤那낭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6a.jpg">원각경언해 하2의2:26ㄱ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佛事 짓고 寂쪅靜에 便뼌安히 住뜡야 煩뻔惱 그츠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6b.jpg">원각경언해 하2의2:26ㄴ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 몬져 닷고 奢샹摩망他탕 가온 닷고 禪쎤那낭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7a.jpg">원각경언해 하2의2:27ㄱ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룜 업슨 作작用고 煩뻔惱 그츨 至징極끅 靜에 便뼌安히 住뜡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7b.jpg">원각경언해 하2의2:27ㄴ 몬져 닷고 禪쎤那낭 가온 닷고 奢샹摩망他탕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8a.jpg">원각경언해 하2의2:28ㄱ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方便뼌 作작用고 至징極끅 靜과 寂쪅滅와 둘흘  隨順쓘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 몬져 닷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8b.jpg">원각경언해 하2의2:28ㄴ고 奢샹摩망他탕와 禪쎤那낭와 기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9a.jpg">원각경언해 하2의2:29ㄱ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種種앳 用 니르와다 至極끅 靜을 돕고 後에 煩뻔惱 그츠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와 奢샹摩망他탕와 기 닷고 禪쎤那낭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29b.jpg">원각경언해 하2의2:29ㄴ다가 諸졍菩뽕薩이 變변化황力륵으로 寂쪅滅을 돕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0a.jpg">원각경언해 하2의2:30ㄱ後에 淸淨 지 업슨 靜慮령에 住뜡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摩망鉢提똉와 禪쎤那낭와 기 닷고 奢샹摩망他탕 後에 닷고미라

〈현대역〉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의 힘으로써 갖가지로 수순(隨順)하고 지극한 고요함[靜]을 취하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를 먼저 닦고 사마타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變化)의 힘으로써 갖가지 경계에 적멸(寂滅)을 취하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를 먼저 닦고 선나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變化)의 힘으로써 불사(佛事)를 행하고 적정(寂靜)에 편안히 머물러서 번뇌(煩惱)를 끊으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를 먼저 닦고 사마타를 중간에 닦고 선나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變化)시키는 힘으로써 걸림 없는 작용을 하고 번뇌(煩惱)를 끊으므로 지극한 정(靜=고요함)에 편안히 머무르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를 먼저 닦고 선나를 중간에 닦고 사마타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變化)의 힘으로써 방편(方便)을 작용하고 지극한 고요함과 적멸(寂滅)의 두 가지를 함께 수순(隨順)하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를 먼저 닦고 사마타와 선나를 가지런히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의 힘으로써 갖가지 작용(作用)을 일으키어 지극한 고요함을 돕고 나중에 번뇌(煩惱)를 끊으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와 사마타를 가지런히 닦고 선나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변화의 힘으로써 적멸을 돕고 나중에 청정(淸淨)한 지음 없는 정려(靜慮)에 머무르면, 이 보살은 이름이 삼마발제와 선나를 가지런히 닦고 사마타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 선나를 첫머리로 하여 사마타·삼마발제를 곁들여 닦는 7관문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0b.jpg">원각경언해 하2의2:30ㄴ若諸菩薩이 以寂滅力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1a.jpg">원각경언해 하2의2:31ㄱ而起至靜야 住於淸淨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禪那고 後修奢摩他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1b.jpg">원각경언해 하2의2:31ㄴ若諸菩薩이 以寂滅力으로 而起作用야 於一切境에 寂用으로 隨順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禪那고 後修三摩鉢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2a.jpg">원각경언해 하2의2:32ㄱ提라 若諸菩薩이 以寂滅力種種自性으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2b.jpg">원각경언해 하2의2:32ㄴ安於靜慮고 而起變化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禪那고 中修奢摩他고 後修三摩鉢提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3a.jpg">원각경언해 하2의2:33ㄱ若諸菩薩이 以寂滅力 無作自性으로 起於作用 淸淨境界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3b.jpg">원각경언해 하2의2:33ㄴ歸於靜慮면 此菩薩者 名이 先修禪那고 中修三摩鉢提고 後修奢摩他ㅣ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4a.jpg">원각경언해 하2의2:34ㄱ若諸菩薩이 以寂滅力種種淸淨으로 而住靜慮야 起於變化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4b.jpg">원각경언해 하2의2:34ㄴ此菩薩者 名이 先修禪那고 齊修奢摩他와 三摩鉢提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5b.jpg">원각경언해 하2의2:35ㄴ若諸菩薩이 以寂滅力으로 資於至靜고 而起變化면 此菩薩者 名이 齊修禪那와 奢摩他고 後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6a.jpg">원각경언해 하2의2:36ㄱ修三摩鉢提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6b.jpg">원각경언해 하2의2:36ㄴ若諸菩薩이 以寂滅力으로 資於變化고 而起至靜淸明境慧면 此菩薩者 名이 齊修禪那와 三摩鉢提고 後修奢摩他ㅣ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0b.jpg">원각경언해 하2의2:30ㄴ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滅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1a.jpg">원각경언해 하2의2:31ㄱ力륵으로 至징極끅 靜을 니르와다 淸淨에 住뜡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 몬져 닷고 奢샹摩망他탕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1b.jpg">원각경언해 하2의2:31ㄴ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滅力륵으로 作작用 니르와다 一切촁 境에 寂쪅 用로 隨順쓘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2a.jpg">원각경언해 하2의2:32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 몬져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後에 닷고미라 다가 諸졍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2b.jpg">원각경언해 하2의2:32ㄴ菩뽕薩이 寂쪅滅力륵ㅅ 種種앳 自性으로 靜慮령의 便뼌安히 고 變변化황 니르와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 몬져 닷고 奢샹摩망他탕 가온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3a.jpg">원각경언해 하2의2:33ㄱ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滅力륵ㅅ 지 업슨 自性으로 作작用앳 淸淨 境界갱 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3b.jpg">원각경언해 하2의2:33ㄴ르왇고 靜慮령에 가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 몬져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가온 닷고 奢샹摩망他탕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4a.jpg">원각경언해 하2의2:34ㄱ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滅力륵ㅅ 種種 淸淨으로 靜慮령에 住뜡야 變변化황 니르와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4b.jpg">원각경언해 하2의2:34ㄴ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 몬져 닷고 奢샹摩망他탕와 三삼摩망鉢提똉와 기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5b.jpg">원각경언해 하2의2:35ㄴ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滅力륵으로 至징極끅 靜을 돕고 變변化황 니르와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6a.jpg">원각경언해 하2의2:36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와 奢샹摩망他탕와 기 닷고 三삼摩망鉢提똉 後에 닷고미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6b.jpg">원각경언해 하2의2:36ㄴ다가 諸졍菩뽕薩이 寂쪅滅力륵으로 變변化황 돕고 至징極끅히 靜 淸明 境엣 慧 니르와면 이 菩뽕薩은 일후미 禪쎤那낭와 三삼摩망鉢提똉와 기 닷고 奢샹摩망他탕 後에 닷고미라

〈현대역〉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으로써 지극한 고요함을 일으켜 청정(淸淨)에 머무르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를 먼저 닦고 사마타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으로써 작용(作用)을 일으켜 일체 경계(境界)에서 적멸(寂滅)의 작용에 수순하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를 먼저 닦고 삼마발제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인 갖가지 자성(自性)으로써 정려(靜慮)에 편안히 머무르고 변화(變化)를 일으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를 먼저 닦고 사마타를 중간에 닦고 삼마발제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인 지음 없는 자성(自性)으로 작용(作用)으로 청정(淸淨)한 경계를 일으키고 정려(靜慮)에 돌아가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를 먼저 닦고 삼마발제를 중간에 닦고 사마타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인 갖가지 청정(淸淨)으로써 정려(靜慮)에 머물러 변화를 일으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를 먼저 닦고 사마타와 삼마발제를 가지런히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으로써 지극한 고요함을 돕고 변화(變化)를 일으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와 사마타를 가지런히 닦고 삼마발제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들이 적멸(寂滅)의 힘으로써 변화를 돕고 지극히 고요한 청명(淸明)한 경계의 지혜를 일으키면, 이 보살은 이름이 선나와 삼마발제를 가지런히 닦고 사마타를 나중에 닦는다고 하느니라.

󰊸 원만히 삼종관(三種觀)을 닦는 관문(觀門)과 세존의 당부 말씀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7a.jpg">원각경언해 하2의2:37ㄱ若諸菩薩이 以圓覺慧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7b.jpg">원각경언해 하2의2:37ㄴ圓合一切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8a.jpg">원각경언해 하2의2:38ㄱ於諸性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8b.jpg">원각경언해 하2의2:38ㄴ相애 無離覺性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9a.jpg">원각경언해 하2의2:39ㄱ此菩薩者 名이 爲圓修三種自性淸淨隨順이니 善男子아 是名菩薩 二十五輪이니 一切菩薩의 修行이 如是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9b.jpg">원각경언해 하2의2:39ㄴ若諸菩薩와 及末世衆生이 依此輪者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0a.jpg">원각경언해 하2의2:40ㄱ當持梵行야 寂靜思惟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0b.jpg">원각경언해 하2의2:40ㄴ求哀懺悔호 經三七日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1a.jpg">원각경언해 하2의2:41ㄱ於二十五輪에 各安標記고 至心求哀야 隨手結取호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1b.jpg">원각경언해 하2의2:41ㄴ依結開示면 便知頓漸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2a.jpg">원각경언해 하2의2:42ㄱ一念疑悔면 卽不成就리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7a.jpg">원각경언해 하2의2:37ㄱ다가 諸졍菩뽕薩이 圓覺각慧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7b.jpg">원각경언해 하2의2:37ㄴ一切촁 두려이 어울워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8a.jpg">원각경언해 하2의2:38ㄱ한 性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8b.jpg">원각경언해 하2의2:38ㄴ相과애 覺각性 여희욤 업스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9a.jpg">원각경언해 하2의2:39ㄱ이 菩뽕薩은 일후미 三삼種 自性 淸淨을 두려이 닷 隨順쓘이니 善쎤男남子아 이 일후미 菩뽕薩ㅅ 二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39b.jpg">원각경언해 하2의2:39ㄴ十씹五輪륜이니 一切촁 菩뽕薩의 修行이 이 니라 다가 諸졍菩뽕薩와 末世솅 衆生이 이 輪륜을 브트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0a.jpg">원각경언해 하2의2:40ㄱ반기 梵뻠行 디녀 寂쪅靜히 思惟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0b.jpg">원각경언해 하2의2:40ㄴ求哀 懺참悔횡호 三삼七日을 디내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1a.jpg">원각경언해 하2의2:41ㄱ二十씹五輪륜에 各각各각 보라 두고 至징心심으로 求哀야 소 조차 자바 取츙호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1b.jpg">원각경언해 하2의2:41ㄴ자보 브터 여러 보면 곧 頓돈과 漸쪔과 알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2a.jpg">원각경언해 하2의2:42ㄱ 念념을 疑悔횡면 곧 成就 몯리라

〈현대역〉

만약에 보살들이 원각(圓覺)의 지혜로써 일체를 원만히 합쳐 모든 성(性=본성)과 상[相]에 각성(覺性)을 여읨이 없으면, 이 보살은 이름이 자성(自性)의 청정(淸淨)함을 원만히 닦는 3가지 수순(隨順)이라고 하나니, 선남자(善男子)여, 이 이름을 ‘보살의 이십오륜(二十五輪)’이라고 하니, 일체 보살의 수행(修行)이 이와 같으니라. 만약에 모든 보살(菩薩)과 말세 중생이 이 윤(輪=25륜)에 의지하려는 이는 마땅히 범행(梵行=계율)을 지녀 적정(寂靜=고요하고 편안)하게 사유(思惟)하여 구애(求哀) 참회(懺悔)함을 삼칠일[=21일]을 지내어 이십오륜(二十五輪)에 각각 보람[=표적]을 해 두고 지심(至心)으로 애절하게 구하여 손을 따라 잡아서 취해야 할 것이니, 잡음에 의거하여 열어 보면 곧 돈(頓)과 점(漸)을 알 수 있을 것이니, 한 생각이라도 의회(疑悔=의심하고 뉘우침)하면 곧 성취하지 못하리라.

󰊹 게송 : 이십오륜(二十五輪)을 지녀 부지런히 닦고 익혀 열반을 증득하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2b.jpg">원각경언해 하2의2:42ㄴ爾時世尊이 欲重宣此義샤 而說偈言샤 辨音아 汝當知라 一切諸菩薩 無礙淸淨慧ㅣ 皆依禪定生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3b.jpg">원각경언해 하2의2:43ㄴ所謂奢摩他와 三摩提와 禪那왜니 三法을 頓漸修야 有二十五種니라 十方諸如來와 三世修行者ㅣ 無不因此法야 而得成菩提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4a.jpg">원각경언해 하2의2:44ㄱ唯除頓覺人과 幷法不隨順이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6b.jpg">원각경언해 하2의2:46ㄴ一切諸菩薩와 及末世衆生이 常當持此輪야 隨順勤修習이니 依佛大悲力야 不久證涅槃리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2b.jpg">원각경언해 하2의2:42ㄴ그  世솅尊존이 이 들 다시 펴려 샤 偈꼥 니샤 辨뼌音아 네 반기 알라 一切촁 諸졍菩뽕薩ㅅ 룜 업슨 淸淨慧ㅣ 다 禪쎤定을 브터 나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3b.jpg">원각경언해 하2의2:43ㄴ닐온 奢샹摩망他탕와 三삼摩망提똉와 禪쎤那낭왜니 세 法법을 頓돈과 漸쪔과로 닷가 二十씹五種이 잇니라 十씹方 諸졍如來와 三삼世솅 修行리왜 이 法법을 因야 菩뽕提똉 일우믈 得득디 아니리 업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4a.jpg">원각경언해 하2의2:44ㄱ오직 頓돈覺각 사과 法법을 隨順쓘 아니리와 조쳐 더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6b.jpg">원각경언해 하2의2:46ㄴ一切촁 諸졍菩뽕薩와 末世솅 衆生괘 녜 반기 이 輪륜을 디녀 隨順쓘야 브즈러니 修習씹홀디니 부텻 大땡悲빙力륵을 브터 오라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08-2_047a.jpg">원각경언해 하2의2:47ㄱ아니야 涅槃빤 證리라

〈현대역〉

그때 세존(世尊)께서 이 뜻을 거듭 펴려고 하시어 게(偈)로 이르시되,

변음(辨音)이여, 너는 반드시 알아라. 일체 보살의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가 모두 선정(禪定)에 의거하여 생기나니, 이른바 사마타(奢摩他)와 삼마제[三摩提=삼마발제]와 선나(禪那)이니, 세 가지 법(法)을 돈(頓)과 점(漸)으로 닦아서 〈모두〉 이십오종(二十五種)이 있느니라. 시방세계의 모든 여래(如來)와 삼세(三世)에 수행(修行)할 사람이 이 법(法)으로 인하여 보리(菩提)를 이루지 못할 사람이 없나니, 오직 돈각(頓覺)한 사람과 법(法)을 수순(隨順)하지 않는 사람은 함께 제하느니라. 일체의 보살들과 말세의 중생이 항상 마땅히 이 윤(輪=25륜)을 지녀 수순(隨順)하고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할 것이니, 부처님의 대비(大悲)한 힘에 의하여 오래지 아니하여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하리라.

원각경언해 권10 개요

역주 원각경언해 제10집 하3의2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下 三之二

終南山 草堂寺 沙門 宗密 疏鈔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 하권 3의 2

중국 종남산의 초당사 사문 종밀이 주석하고 간추려 엮음

원각경언해 권10 개요

이 책의 본디 이름은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다. 이는 일체 중생의 본래 성불(本來成佛)을 드러내는 원각(圓覺), 즉 완전 원만한 깨달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비롯한 12분의 보살의 질문에 대하여 시방(十方)에 편만(徧滿)하여 생멸(生滅)이 없는 원각(圓覺) 묘심(妙心)과 그것을 깨닫기 위한 수행 방법에 대하여 설하신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은 보통 「원각경(圓覺經)」이라고 줄여 부르며, 당나라 때 인도 계빈의 고승인 불타다라(佛陀多羅;覺救)가 한문으로 번역한 불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불경을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宗密;780~841)이 주석한 책이 『대방광 원각경 대소초(大方廣圓覺經大疏鈔)』이다. 조선 세조(世祖) 대에 이 책에 세조가 직접 구결(口訣)을 달아 을해자 활자본으로 『원각경구결』을 간행한 뒤, 이 책을 저본으로 삼아 세조11년(1465)에 신미(信眉)·효령대군(孝寧大君)·한계희(韓繼禧) 등이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바로 『대방광 원각 수다라 요의경』 언해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라고 줄여 부르고 있다.

이 문헌은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총 10권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각 권은 권1(원각경서), 권2(상1-1), 권3(상1-2전반), 권4(상1-2후반), 권5(상2-1, 2-2), 권6(상2-2, 2-3), 권7(하1-1, 1-2), 권8(하2-1, 2-2), 권9(하3-1), 권10(하3-2)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권은 분량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 역주할 권10은 〈하3의2〉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하3의2〉는 원각보살장(圓覺菩薩章, 1-65장)과 현선수보살장(賢善首菩薩章, 65-103장)이 들어 있다. 권10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원각보살장(圓覺菩薩章)은, 원각보살이 부처님께 부처님이 입멸한 후에 깨닫지 못한 말세 중생은 어떻게 안거(安居)하여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닦아야 하며, 원각 가운데 가장 청정한 관(觀)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이에 답하신 내용이다.

한편, 현선수보살장(賢善首菩薩章)은 현선수보살이 부처님께 이 경(經)의 이름, 이 경을 받들어 지니는 법, 이 경을 지녀서 얻는 공덕, 이 경을 지니는 사람을 보살피는 법, 그리고 이 경을 유포하면 어느 곳에 이르는가에 대해 설법을 청하자 이에 부처님이 답하신 내용이다. 현선수보살장의 요점은 이 경전을 어떻게 받들어 지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원각보살장」과 「현선수보살장」의 요지

『원각경언해』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역주하는 권 제10은 〈하3의2〉로서 ‘원각보살장’과 ‘현선수보살장’의 두 편의 보살장이 들어 있다.

1. 원각보살장(圓覺菩薩章) : 『원각경언해』의 제1장에서 65장까지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그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원각보살(圓覺菩薩)이 부처님께 부처님이 입멸한 후에 깨닫지 못한 말세 중생은 어떻게 안거(安居)하여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닦아야 하며, 원각 가운데 가장 청정한 관(觀)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이 이에 대해 답하시는 내용이다.

부처님 멸도 후나 말세 때에 대원각(大圓覺)의 마음을 믿고 수행하려는 자는 도량을 건립하여 120일(장기)과 100일(중기)과 80일(단기) 중에서 한 가지 기한을 정하고 참회하며 삼칠일(三七日)을 지낸 뒤에, 바르게 사유하되 들은 경계가 아니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 사마타·삼마발제·선나는 모두 청정한 관문이므로, 중생이 이것들을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부처가 출세(出世=세상에 나타남)하였다고 할 것이다. 둔한 근기(根機) 때문에 성취하지 못한 자라도 부지런히 모든 죄를 참회하면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하여 부처의 경계가 현전(現前)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2. 현선수보살장(賢善首菩薩章) : 『원각경언해』의 제65장 뒷면에서 제103장 뒷면까지에 들어 있으며,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선수보살(賢善首菩薩)이 부처님께 이 가르침의 이름과 이 경을 받들어 지니고 닦아 익히는 공덕, 그리고 이 경을 유포할 때의 공덕에 대하여 설법을 청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이 경은 12부 경의 청정한 안목으로 「대방광원각다라니」·「수다라요의」·「비밀왕삼매(祕密王三昧)」·「여래결정 경계」·「여래장 자성차별」이라 이름하고, 중생이 이것에 의지해 수행하면 점차 증진하여 부처의 경계에 이르리라. 이 경의 이름은 돈교(頓敎) 대승(大乘)이므로 돈기(頓機)의 중생은 이것을 따라 개오(開悟)하고, 이것은 또한 점수(漸修)하는 모든 무리들도 이에 포섭된다. 그리고 어떠한 공덕도 이 경의 한 구절이라도 설하는 공덕에 미치지 못하며, 이 경은 말세의 수행자를 보호하여 악마와 외도(外道)들이 수행자의 몸과 마음을 퇴전(退轉)하지 못하게 한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자 대중 가운데 있던 화수금강(火首金剛)을 비롯한 8만 금강이 말세에 결정(決定) 대승을 지녀 수행하는 자를 보호하겠다고 발원하며, 또 대범왕(大梵王)과 대력귀왕(大力鬼王) 등이 그 권속과 함께 이 경을 지녀 수행하는 사람들을 수호할 것을 발원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모든 대중들은 크게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역주에서는 원각경(圓覺經)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본문 요지를 앞에 제시하고, 세조가 한문 불경에 토를 단 〈경 본문〉, 신미 등의 〈본문 언해〉, 그 뒤에 〈현대역〉을 단락별로 편집하였다. 그 뒤는 『원각경언해』 권10을 원전 순서대로 제시하고, 현대국어로 역주·해설하였다. 부록 영인본은 서울대 규장각본으로 1465년 『원각경언해』의 16세기 복각본이다. 입력 자료는 서울대도서관 심악문고에 소장된 초간본(1465년)과 대교·검토를 통해 확정하였다.

원각경언해 〈하3의2〉 경 본문과 언해

1. 원각보살장(圓覺菩薩章)

󰊱 원각보살이 부처님께 안거(安居)하는 법과 세 종류의 관행(觀行) 닦는 법을 여쭙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2b.jpg">원각경언해 하3의2:2ㄴ於是예 圓覺菩薩이<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3a.jpg">원각경언해 하3의2:3ㄱ在大衆中샤 卽從座起샤 頂禮佛足시고 右繞三帀시고 長跪叉手샤 而白佛言샤<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3b.jpg">원각경언해 하3의2:3ㄴ大悲世尊이 爲我等輩샤 廣說淨覺種種方便샤 令末世衆生으로 有大增益게 시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4a.jpg">원각경언해 하3의2:4ㄱ世尊하 我等은 今者애 已得開悟와니와 若佛滅後에 末世衆生未得悟者ㅣ<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4b.jpg">원각경언해 하3의2:4ㄴ云何安居야 修此圓覺淸淨境界며 此圓覺中엣 三種淨觀은 以何爲首ㅣ고 惟願大悲샤 爲諸大衆과 及末世衆生샤 施大饒益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5a.jpg">원각경언해 하3의2:5ㄱ作是語已시고 五體投地샤 如是三請샤 終而復始야시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2b.jpg">원각경언해 하3의2:2ㄴ이 圓覺菩薩이 大<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3b.jpg">원각경언해 하3의2:3ㄴ衆中에 겨샤 곧 座로셔 니르샤 부텻 바 頂禮시고 올녀로 도샤 세 번 도시고 長跪叉手샤 부텻긔 오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3b.jpg">원각경언해 하3의2:3ㄴ大悲 世尊이 우리 무 爲샤 淨覺앳 種種 方便을 너비 니샤 末世 衆生으로 큰 增益이 잇게 시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4a.jpg">원각경언해 하3의2:4ㄱ世尊하 우리 이제 마 여러 아로 得와니와 다가 부텨 滅신 後에 末世衆生이 다 몯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4b.jpg">원각경언해 하3의2:4ㄴ엇뎨 安居야 이 圓覺淸淨境界 닷며 이 圓覺 中엣 세 가짓 淨觀 므스그로 몬져 리고 願 大悲샤 諸大衆과 末世衆生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5a.jpg">원각경언해 하3의2:5ㄱ 爲샤 큰 饒益을 쇼셔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5b.jpg">원각경언해 하3의2:5ㄴ이 말 시고 五體 해 더디샤 이티 세 번 請샤 고 다시 비르서시늘

〈현대역〉

이에 원각보살(圓覺菩薩)이 대중 가운데에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부처님의 발에 정례(頂禮)하시고, 오른쪽으로 도시어 세 번 감도시고 장궤차수(長跪叉手)하시고 부처님께 사뢰시었다.

“대비하신 세존(世尊)이 우리 무리를 위하시어 정각(淨覺=깨끗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갖가지 방편(方便)을 널리 말씀하시어 말세 중생(末世衆生)으로 하여금 큰 증익(增益)이 있게 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우리는 이제 이미 열어 앎(=깨달음)을 득하였거니와 만약에 부처 멸도하신(=열반하신) 후에 말세 중생이 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안거(安居)하여 이 원각(圓覺) 청정경계(淸淨境界)를 닦으며, 이 원각(圓覺) 중에 있는 세 가지의 정관(淨觀)은 무엇으로써 먼저 할 것입니까? 원컨대, 대비(大悲)하시어 여러 대중(大衆)과 말세(末世)의 중생(衆生)을 위하시어 큰 요익(饒益)을 하소서(=베푸소서).” 〈원각보살이〉 이 말씀을 하시고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시어 이같이 세 번을 청하시어 마치고 다시 〈오체투지를〉 시작하시었다.

󰊲 물음에 대해 칭찬하고 그 물음에 따라 말씀해주실 것을 허락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5a.jpg">원각경언해 하3의2:5ㄱ爾時世尊이 告圓覺菩薩言샤 善哉善哉라 善男子아 汝等이 乃能問於如來如是方便야 以大饒益으로 施諸衆生니 汝今諦聽라 當爲汝說호리라 時圓覺菩薩이 奉敎歡喜샤 及諸大衆과 默然而聽시더니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5b.jpg">원각경언해 하3의2:5ㄴ그  世尊이 圓覺菩薩려 니샤 됴타 됴타 善男子아 너희히 能히 如來ㅅ 이  方便 무러 큰 饒益으로 한 衆生의게 施니 네 이제 仔細히 드르라 반기 너 爲야 닐오리라 時예 圓覺菩薩이 敎 받와 歡喜샤 한 大衆과 야셔 듣오시더니

〈현대역〉

그 때에 세존(世尊)이 원각보살(圓覺菩薩)더러 말씀하셨다. “좋구나, 좋구나, 선남자(善男子)여. 너희들이 능히 여래(如來)께 이와 같은 방편(方便)을 물어 큰 요익(=饒益.이익)을 많은 중생(衆生)에게 베푸나니, 너(=너희)는 이제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너희)를 위하여 설하리라.” 그 때에 원각보살(圓覺菩薩)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환희(歡喜)하시고 많은 대중과 〈함께〉 조용히 하고서 들으시었다.

󰊳 도량에서 안거(安居)하는 법 : ① 기한을 정하고 깨끗한 거처를 두어 수행하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6a.jpg">원각경언해 하3의2:6ㄱ善男子아 一切衆生이 若佛住世어나 若佛滅後ㅣ어나 若末法時예 有諸衆生이 具大乘性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7a.jpg">원각경언해 하3의2:7ㄱ信佛秘密大圓覺心야 欲修行者ㅣ<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7b.jpg">원각경언해 하3의2:7ㄴ若在伽藍얀 安處徒衆며 有緣事故로 隨分思察호 如我已說고<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8b.jpg">원각경언해 하3의2:8ㄴ若復無有他事因緣이어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9a.jpg">원각경언해 하3의2:9ㄱ卽建道場호 當立期限이니 若立長期ㄴ댄 百二十日이오 中期 百日이오 下期 八十日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1a.jpg">원각경언해 하3의2:11ㄱ安置淨居ㅣ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2a.jpg">원각경언해 하3의2:12ㄱ若佛이 現在어든 當正思惟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2b.jpg">원각경언해 하3의2:12ㄴ若佛滅後ㅣ어든 施設形像고 心存目想야 生正憶念호 還同如來常住之日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4b.jpg">원각경언해 하3의2:14ㄴ懸諸幡華야 經三七日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7a.jpg">원각경언해 하3의2:17ㄱ稽首十方 諸佛名字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2a.jpg">원각경언해 하3의2:22ㄱ求哀懺悔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6b.jpg">원각경언해 하3의2:26ㄴ遇善境界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7b.jpg">원각경언해 하3의2:27ㄴ得心輕安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8a.jpg">원각경언해 하3의2:28ㄱ過三七日야 一向攝念호리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6a.jpg">원각경언해 하3의2:6ㄱ善男子아 一切衆生이 다가 부톄 住世커나 다가 부톄 滅 後ㅣ어나 다가 法末時예 한 衆生이 大乘 性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6b.jpg">원각경언해 하3의2:6ㄴ자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7a.jpg">원각경언해 하3의2:7ㄱ부텻 秘密 大圓覺心 信야 修行코져 리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7b.jpg">원각경언해 하3의2:7ㄴ다가 伽藍애 이션 徒衆에 便安히 이시며 因緣ㅅ일 잇 젼로 分 조차 思量야 표 내 마 닐옴 티 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8b.jpg">원각경언해 하3의2:8ㄴ다가  녀늣 일 因緣이 업거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09a.jpg">원각경언해 하3의2:9ㄱ곧 道場을 셰요 반기 期限 셰욜디니 다가 長期ㄴ댄 百二十日이오 中期 百日이오 下期 八十日 셰여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1a.jpg">원각경언해 하3의2:11ㄱ淨居 둘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2a.jpg">원각경언해 하3의2:12ㄱ다가 부톄 現在커든 반기 思惟 正히 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2b.jpg">원각경언해 하3의2:12ㄴ다가  滅 後ㅣ어든 形像 펴고 매 두며 누네 念야 正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3a.jpg">원각경언해 하3의2:13ㄱ 憶念 내요 도로 如來ㅅ 常住 날티 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4b.jpg">원각경언해 하3의2:14ㄴ한 幡華 라 三七日 디나게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7a.jpg">원각경언해 하3의2:17ㄱ十方 諸佛ㅅ 名字 稽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17b.jpg">원각경언해 하3의2:17ㄴ首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2a.jpg">원각경언해 하3의2:22ㄱ求哀야 懺悔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6b.jpg">원각경언해 하3의2:26ㄴ善境界 맛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7b.jpg">원각경언해 하3의2:27ㄴ미 輕安을 得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8a.jpg">원각경언해 하3의2:28ㄱ三七日을 디내야 一向야 念을 자보리라

〈현대역〉

“선남자(善男子)여, 일체 중생(一切衆生)이 만약에 부처님이 주세(住世)하거나(=세상에 살아 계시거나) 만약에 부처님이 멸도한 후이거나 만약에 말법시(末法時)에 많은 중생(衆生)이 대승(大乘)의 성품(性品)이 갖추어져 부처님의 비밀한 대원각심(大圓覺心)을 믿어 수행하고자 하는 이가 만약에 가람(伽藍)에 있어서는 도중(徒衆)에 편안히 있으며, 인연(因緣)의 일이 있는 까닭으로 분(分)을 좇아 사량(思量)하여 살피되, 내가 이미 설함과 같이 하라. 만약에 또 다른 일의 인연(因緣)이 없거든 곧 도량(道場)을 세우되 반드시 기한을 세워야 할 것이니, 만약에 장기(長期)라면 120일이요, 중기(中期)는 100일이요, 하기(下期=단기)는 80일을 세워 정거(淨居=깨끗한 거처)를 두어야 할 것이니라. 만약에 부처가 계실 때이거든 응당 사유(思惟)를 바르게 하고, 만약에 또 〈부처가〉 멸한(=열반하신) 후이거든(=후라면) 형상(形像)을 펴고(=시설하고) 마음에 두며 눈으로 염하여 바른 억념(憶念)을 내되(=기억을 되살리되) 도로 여래(如來)께서 상주(常住)한 날과 같이 하여 많은 번화(幡華=깃발과 꽃)를 달아 삼칠일(三七日=21일)이 지나도록 시방(十方) 여러 부처님의 명자(名字)에 계수(稽首)하여 애절하게 참회(懺悔)하면 좋은 경계(境界)를 만나 마음이 경안(輕安=상쾌하고 편안함)을 얻으리니 삼칠일(三七日)을 지나도록 〈이 생각을〉 하여 일향(一向)하여(=언제나 한결같이 하여) 생각을 잡아야(=거두어 지녀야) 하리라.

󰊴 보살이 도량에서 안거하는 법 : 결제 기한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 법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9a.jpg">원각경언해 하3의2:29ㄱ若經夏首야 三月安居호 當爲淸淨菩薩止住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1a.jpg">원각경언해 하3의2:31ㄱ心離聲聞며 不假徒衆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1b.jpg">원각경언해 하3의2:31ㄴ至安居日야 卽於佛前에 作如是言호 我比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2b.jpg">원각경언해 하3의2:32ㄴ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3a.jpg">원각경언해 하3의2:33ㄱ某甲 踞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3b.jpg">원각경언해 하3의2:33ㄴ菩薩乘 修寂滅行야 同入淸淨實相住持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4a.jpg">원각경언해 하3의2:34ㄱ以大圓覺으로 爲我伽藍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4b.jpg">원각경언해 하3의2:34ㄴ身心이 安居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5a.jpg">원각경언해 하3의2:35ㄱ平等性智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5b.jpg">원각경언해 하3의2:35ㄴ涅槃自性이 無繫屬故로<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6a.jpg">원각경언해 하3의2:36ㄱ今我ㅣ 敬請오 不依聲聞고 當與十方如來와 及大菩薩와 三月安居노니 爲修菩薩無上妙覺大因緣故로 不繫徒衆노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8a.jpg">원각경언해 하3의2:38ㄱ善男子아 此名菩薩 示現安居ㅣ니 過三期日야 隨往無礙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29b.jpg">원각경언해 하3의2:29ㄴ다가 夏首 디내야 三月 安居호 반기 淸淨 菩薩 止住 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1a.jpg">원각경언해 하3의2:31ㄱ매 聲聞을 여희며 徒衆을 븓디 아니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1b.jpg">원각경언해 하3의2:31ㄴ安居日에 니르러 곧 佛前에 이  말호 우리 比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2b.jpg">원각경언해 하3의2:32ㄴ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3a.jpg">원각경언해 하3의2:33ㄱ某甲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3b.jpg">원각경언해 하3의2:33ㄴ菩薩ㅅ乘에 踞야 寂滅行 닷가 淸淨 實相 住持예 가지로 드러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4a.jpg">원각경언해 하3의2:34ㄱ大圓覺로 우리 伽藍을 사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4b.jpg">원각경언해 하3의2:34ㄴ身心이 安居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5a.jpg">원각경언해 하3의2:35ㄱ平等性智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5b.jpg">원각경언해 하3의2:35ㄴ涅槃 自性이 여 브툰  업슬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6a.jpg">원각경언해 하3의2:36ㄱ이제 내 恭敬야 請오 聲聞을 븓디 아니고 반기 十方 如來와 大菩薩와 三月 安居노니 菩薩ㅅ 無相妙覺ㅅ 大因緣 닷고 爲 徒衆에 이디 아니노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8a.jpg">원각경언해 하3의2:38ㄱ善男子아 이 일후미 菩薩의 安居 나토아 뵈요미니 三期日을 디내야 가 조차 룜 업스니라

〈현대역〉

“만약에 첫여름을 지내 석 달을 안거(安居)한다면 마땅히 청정(淸淨)한 보살(菩薩)의 지주(止住=머물러 살 곳)를 만들어 마음에 성문(聲聞)의 〈경계를〉 여의며 도중(徒衆)에 붙지(=휩쓸리지) 아니하고 안거일(安居日)에 이르러 곧 부처님 앞에 이 같은 말을 하라. ‘우리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 아무(=아무개=某甲)가 보살승(菩薩乘)에 걸터앉아 적멸(寂滅)한 행(行=수행)을 닦아 청정(淸淨)한 실상(實相) 주지(住持)에 함께 들어가 대원각(大圓覺)으로 우리(=나)의 가람(伽藍=수행처)을 삼아 몸과 마음[身心]이 〈평등성지에〉 안거(安居)하며, 평등성지(平等性智)라서 열반(涅槃) 자성(自性)이 〈번뇌에〉 얽매여 붙은 데가 없으므로 이제 내가(=제가) 공경하여 청합니다. 성문(聲聞)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땅히 시방(十方)의 여래(如來)와 대보살(大菩薩)과 석 달을 안거하옵나니, 보살(菩薩)의 무상묘각(無相妙覺) 큰 인연(因緣) 닦기를 위하므로 도중(徒衆)에 매이지(=휩쓸리지) 아니합니다(=않겠습니다).’라고. 선남자(善男子)여, 이것 이름이 ‘보살이 안거(安居)하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니, 세 기한의 날을 지내어 감에 따라서 걸림이(=장해가) 없어지느니라.

󰊵 삼관(三觀)의 방편을 제시하다 : ① 총괄적 내용과 사마타(奢摩他) 공관(空觀)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8b.jpg">원각경언해 하3의2:38ㄴ善男子아 若彼末世修行衆生이 求菩薩道야 入三期者ㅣ 非彼所聞 一切境界어든 終不可取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0b.jpg">원각경언해 하3의2:40ㄴ善男子아 若諸衆生이 修奢摩他댄 先取至靜야 不起思念야 靜極면 便覺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1a.jpg">원각경언해 하3의2:41ㄱ如是初靜이 從於一身야 至一世界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1b.jpg">원각경언해 하3의2:41ㄴ覺亦如是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2a.jpg">원각경언해 하3의2:42ㄱ善男子아 若覺이 遍滿一世界者ㅣ면 一世界中예 有一衆生의 起一念者 皆悉能知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2b.jpg">원각경언해 하3의2:42ㄴ百千世界도 亦復如是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3a.jpg">원각경언해 하3의2:43ㄱ非彼所聞一切境界어든 終不可取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38b.jpg">원각경언해 하3의2:38ㄴ善男子아 다가 뎌 末世ㅅ 修行 衆生이 菩薩道 求야 三期예 들리 뎌의 드론 一切 境界 아니어든 내내 取호미 몯리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0b.jpg">원각경언해 하3의2:40ㄴ善男子아 다가 諸衆生이 奢摩他 닷골딘댄 몬져 至極 靜을 取야 思念을 니르왇디 아니야 靜호미 至極면 곧 覺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1a.jpg">원각경언해 하3의2:41ㄱ이티 처 靜호미 一身을 브터 一世界예 니를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1b.jpg">원각경언해 하3의2:41ㄴ覺도  이 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2a.jpg">원각경언해 하3의2:42ㄱ善男子아 다가 覺이 一世界예 다 면 一世界ㅅ 中에 잇  衆生의 一念 니르와도 다 能히 알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2b.jpg">원각경언해 하3의2:42ㄴ百千 世界도  이 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3a.jpg">원각경언해 하3의2:43ㄱ뎌의 드론 一切 境界 아니어든 내내 取호미 몯리라

〈현대역〉

“선남자(善男子)여, 만약에 저 말세(末世)에 수행할 중생이 보살도(菩薩道)를 구하여 삼기(三期=장기·중기·하기)에 드는 사람은 그(=수행자)가 들은 일체 경계(境界)가 (부처님께 들은 원각 청정경계가) 아니거든 끝내 취(取)하지 말아야 하리라.”

“선남자(善男子)여, 만약에 모든 중생(衆生)이 사마타(奢摩他)를 닦을진댄(=닦을 것이라면) 먼저 지극한 고요함[靜]을 취하여 사념(思念)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곧 깨달을 것이니, 이와 같이 처음의 고요함이 한 몸[一身]으로부터 〈나와〉 한 세계(世界)에 다다를(=이를) 것이니 깨달음도 또 이와 같은 것이다. 선남자(善男子)여, 만약에 깨달음이 한 세계(世界)에 모두 가득하면 한 세계(世界) 중에(=안에) 있는 한 중생(衆生)의 한 생각 일으킴을 모두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니, 백천(百千) 세계(世界)도 또 이와 같은 것이다. 그(=수행자)가 들은 바 일체 경계(境界)가 〈부처님께 들은 원각 청정경계가〉 아니거든 끝내 취(取)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삼관(三觀)의 방편을 제시하다 : ② 삼마발제(三摩鉢提) 가관(假觀)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3a.jpg">원각경언해 하3의2:43ㄱ善男子아 若諸衆生이 修三摩鉢提ㄴ댄 先當憶想 十方如來와 十方世界 一切菩薩야 依種種門야 漸次修行야 勤苦三昧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4b.jpg">원각경언해 하3의2:44ㄴ廣發大願야 自熏成種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5a.jpg">원각경언해 하3의2:45ㄱ非彼所聞 一切境界어든 終不可取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3a.jpg">원각경언해 하3의2:43ㄱ善男子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3b.jpg">원각경언해 하3의2:43ㄴ아 다가 諸衆生이 三摩鉢提 닷골딘댄 몬져 반기 十方如來와 十方世界 一切 菩薩을 思量야 念야 種種 門을 브터 漸次로 修行야 三昧 勤苦히 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4b.jpg">원각경언해 하3의2:44ㄴ大願을 너비 發야 제 熏야 種 일울디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5a.jpg">원각경언해 하3의2:45ㄱ뎌의 드론 一切 境界 아니어든 내내 取호미 몯리라

〈현대역〉

“선남자(善男子)여, 만약에 모든 중생(衆生)이 삼마발제(三摩鉢提)를 닦을진댄(=닦을 것이면) 먼저 반드시 시방 여래(十方如來)와 시방 세계(十方世界)의 일체 보살(菩薩)을 사량(思量)하여 염(念)하고 갖가지 관문(觀門)에 의지하여 점차로 수행(修行)하여 삼매(三昧)를 근고(勤苦)히 하여 큰 원(願)을 널리 펴 스스로 훈습(熏習)하여 종자를 이루어야 할 것이니, 그가 들은 바 일체 경계(境界)가 〈부처님께 들은 원각 청정경계가〉 아니거든 끝까지 취(取)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삼관(三觀)의 방편을 제시하다 : ③ 선나(禪那) 중도관(中道觀)-삼관을 바로 닦은 결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5b.jpg">원각경언해 하3의2:45ㄴ善男子아 若諸衆生이 修於禪那댄 先取數門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8b.jpg">원각경언해 하3의2:48ㄴ心中에 了知 生住滅念 分齊頭數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3a.jpg">원각경언해 하3의2:53ㄱ如是周徧야 四威儀中에 分別念數 無不了知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3b.jpg">원각경언해 하3의2:53ㄴ漸次增進야 乃至得知 百千世界예 一滴之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4a.jpg">원각경언해 하3의2:54ㄱ雨호 猶如目覩 所受用物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5a.jpg">원각경언해 하3의2:55ㄱ非彼所聞 一切境界어든 終不可取니 是名三觀初首方便이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5b.jpg">원각경언해 하3의2:55ㄴ若諸衆生이 徧修三種야 勤行精進면 卽名如來ㅣ 出現于世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5b.jpg">원각경언해 하3의2:45ㄴ善男子아 다가 諸衆生이 禪那 닷골딘댄 몬져 數門을 取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48b.jpg">원각경언해 하3의2:48ㄴ心中애 生과 住와 滅왓 念의 分齊頭數 아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3a.jpg">원각경언해 하3의2:53ㄱ이티 周徧야 四威儀中에 分別念ㅅ 數를 아디 아니홈 업서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4a.jpg">원각경언해 하3의2:54ㄱ漸次로 더 나가 百千 世界옛  처딘 비를 아로매 니르로 누네 보아 受用 物티 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5a.jpg">원각경언해 하3의2:55ㄱ뎌의 드론 一切 境界 아니어든 내내 取호미 몯리니 이 일후미 三觀 처 方便이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55b.jpg">원각경언해 하3의2:55ㄴ다가 諸衆生이 三種 다 닷가 精進 브즈러니 行면 곧 일후미 如來ㅣ 世예 出現호미니라

〈번역문〉

“선남자(善男子)여, 만약에 여러 중생이 선나(禪那)를 닦을진댄(=닦을 것이면) 먼저 수문(數門=수식관(數息觀))을 취하여 심중(=마음속)에 생겨나고[生] 머무르고[住] 없어지는[滅] 생각[念]의 갈래[분제(分齊)]와 숫자[頭數]를 알아서 이와 같이 두루 미쳐 4위의(威儀=행주좌와) 중에 분별(分別)하는 생각의 수효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점차(漸次)로 더 나아가(=이 힘이 증진되어) 백천 세계에 떨어진 하나의 비(=빗방울)도 알기에 이르되, 〈마치〉 눈으로 보고 수용(受用)하는 물건과 같이 하리니, 저(=수행자)가 들은 바 일체의 경계(境界)가 아니거든 끝까지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 이름이 ‘삼관(三觀)의 처음 방편(方便)’이다. 만약에 모든 중생이 세 종류(=3종의 관법)를 모두 닦아 정진(精進)을 부지런히 하면 곧 이름이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出現)한 것’이니라.”

󰊸 근기(根機)가 무딘 중생의 수행법 : 업장을 참회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0b.jpg">원각경언해 하3의2:60ㄴ若後末世옛 鈍根衆生이 心欲求道호 不得成就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1a.jpg">원각경언해 하3의2:61ㄱ由昔業障이니 當勤懺悔야 常起希望야 先斷憎愛嫉妬諂曲고 求勝上心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1b.jpg">원각경언해 하3의2:61ㄴ三種淨觀애 隨學一事야 此觀을 不得이어든 復習彼觀야 心不放捨야 漸次求證이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0b.jpg">원각경언해 하3의2:60ㄴ다가 後末世엣 鈍根衆生이 매 道 求호려 호 일우디 몯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1a.jpg">원각경언해 하3의2:61ㄱ녯 業障 브투미니 반기 브즈러니 懺悔야 녜 라 니르와다 몬져 믜윰과 옴과 嫉妬와 謟曲과 긋고 勝 노  求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1b.jpg">원각경언해 하3의2:61ㄴ세 가짓 淨觀애  이 조차 화 이 觀 得디 몯거든  뎌 觀 니겨  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2a.jpg">원각경언해 하3의2:62ㄱ하 리디 아니야 漸次로 證 求홀디니라

〈현대역〉

“만약에 훗날 말세(末世)에 근기(根機)가 무딘 중생(衆生)이 마음에 도(道)를 구하고자 하되 이루지 못하는 것은 옛날의 업장(業障)에 말미암음이니, 마땅히 부지런히 참회하여 항상 바람[=희망]을 일으키어 먼저 미움과 사랑과 질투(嫉妬)와 첨곡(謟曲=아첨과 굽은 마음)을 끊고 빼어난 높은 마음을 구하여 세 가지 청정한 관(觀)에서 한 가지 일을 좇아(=골라) 배워 이(=수행자가 취한/선택한) 관(觀)을 얻지(=성취하지) 못하거든(=못하면) 또 저(=나머지 다른) 관(觀)을 익혀서 마음을 놓아버리지 말고 점차로(=조금씩) 증(證 <세주>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니라.”

󰊹 본문 내용을 게송으로 거듭 노래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3b.jpg">원각경언해 하3의2:63ㄴ爾時世尊이 欲重宣此義샤 而說偈言샤 圓覺아 汝當知리 一切諸衆生이 欲求無上道댄 先當結三期야 懺悔無始業야 經於三七日 然後에 正思惟호리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4a.jpg">원각경언해 하3의2:64ㄱ非彼所聞境이어든 畢竟不可取니라 奢摩他至靜과 三摩正憶持와 禪那明數門과 是名三淨觀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4b.jpg">원각경언해 하3의2:64ㄴ若能勤修習면 是名佛出世라 鈍根未成者 常當勤心懺 無始一切罪호리니 諸障이 若消滅면 佛境이 便現前리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3b.jpg">원각경언해 하3의2:63ㄴ그  世尊이 이 들 다시 펴려샤 偈 니샤 圓覺아 네 반기 알라 一切 諸衆生이 無上道 求호려 홀딘댄 몬져 반기 三期를 結야 無始業 懺悔야 三七日 디낸 後에 正히 思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4a.jpg">원각경언해 하3의2:64ㄱ惟호리니 뎌의 드론 境이 아니어든 畢竟에 取호미 몯리라 奢摩他 至極 靜과 三摩 正 憶持와 禪那 數門 굠과 이 일후미 세 淨觀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4b.jpg">원각경언해 하3의2:64ㄴ다가 能히 브즈러니 修習면 이 일후미 부텨 出世호미라 鈍根 일우디 몯닌 녜 반기 無始 一切 罪 브즈러니 매 懺호리니 한 障이 다가 消滅면 佛境이 곧 現前리라

〈현대역〉

그 때에 세존(世尊)이 뜻을 다시 펴려고 하시어 게송(偈頌)을 말씀하셨다.

“원각(圓覺)이여, 너는 반드시 알라. 일체 제 중생(衆生)이 위없는 도[=무상도(無上道)]를 구하려고 할진댄, 먼저 반드시 세 기한(=장기·중기·하기)을 맺어서(=정해서), 무시업(無始業 <세주>비롯됨이 없는 업(業))을 참회(懺悔)하고 삼칠일(三七日)을 지낸 후에 정히(正)히 사유(思惟)해야 할 것이니, 그것이 들은 경계(境界)가 아니거든, 끝끝내 취하지 말아야 하리라. 사마타(奢摩他)의 지극한 고요함[靜]과 삼마(三摩 <세주>삼마발제)의 정(正)한 억지(憶持 <세주>기억해 지님), 선나(禪那)의 수문(數門) 밝힘, 이 이름이 3가지 정관(淨觀=청정한 관법)이니, 만약 〈이를〉 능히 부지런히 닦고 익히면 이 이름이 ‘부처님이 세상에 오심’이라. 둔근(鈍根)으로 이루지 못하는 이는 항상 반드시 비롯됨 없는(=무시 이래 지어온) 온갖 죄(罪)를 부지런히 마음에 참회해야 할 것이니, 만약에 많은 업장(業障)이 소멸(消滅)하면 부처의 경계가 곧 앞에 나타나리라.”

2. 현선수보살장(賢善首菩薩章)

󰊱 현선수보살이 부처님께 이 경전의 이름과 그것의 유통(지닐 방법, 수습의 공덕, 수행자 보호, 도달하는 경지)에 관해 묻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6b.jpg">원각경언해 하3의2:66ㄴ於是예 賢善首菩薩이 在大衆中샤 卽從座起샤 頂禮佛足시고 右繞三帀시고 長跪叉手샤 而白佛言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7a.jpg">원각경언해 하3의2:67ㄱ大悲世尊이 廣爲我等과 及末世衆生샤 開悟如是不思議事시니 世尊하 此大乘敎ㅣ<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8a.jpg">원각경언해 하3의2:68ㄱ名字ㅣ 何等이며 云何奉持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8b.jpg">원각경언해 하3의2:68ㄴ衆生이 修習야 得何功德이며 云何使我로 護持經人이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9a.jpg">원각경언해 하3의2:69ㄱ流布此敎면 至於何地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9b.jpg">원각경언해 하3의2:69ㄴ作是語已시고 五體投地샤 如是三請샤 終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a.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ㄱ而復始야시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6b.jpg">원각경언해 하3의2:66ㄴ이 賢善首菩薩이 大衆 中에 겨샤 곧 座로셔 니르샤 부텻 바 頂禮시고 올녀그로 도샤 세 번 도시고 長跪叉手샤 부텻긔 오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7a.jpg">원각경언해 하3의2:67ㄱ大悲 世尊이 너비 우리와 末世衆生 爲샤 이  不思議事 여러 알외시니 世尊하 이 大乘敎ㅣ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8a.jpg">원각경언해 하3의2:68ㄱ名字ㅣ 므스기며 엇뎨 바다 디니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8b.jpg">원각경언해 하3의2:68ㄴ衆生이 修習야 엇던 功德을 得며 엇뎨 우리로 經 디닐 사 護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69a.jpg">원각경언해 하3의2:69ㄱ持케 며 이 敎 흘려 펴면 어느 地位예 니를리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a.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ㄱ이 말 시고 五體 해 더디샤 이티 세 번 請샤 고 다시 비르서시

〈현대역〉

이에 현선수보살(賢善首菩薩)이 대중 가운데에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부처님의 발에 정례(頂禮)하고 오른쪽으로 도시어 세 번 감도시고, 장궤차수(長跪叉手)하시고 부처님께 사뢰셨다. “대비하신 세존이(=세존께서) 널리 우리(=저희)와 말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불사의(不思議)한 일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대승의 가르침은 이름[名字]이 무엇이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며, 중생들이 수습(修習)하여 어떤 공덕을 얻으며, 이 경을 지니는 사람을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호지(護持=보호)하게 하며, 또 이 가르침을 흘려 펴면(=유포(流布)하면) 어떤 지위(地位=경지)에 이르게 됩니까?” 이 말씀을 하시고는 오체(五體=다섯 활개)를 땅에 던지시고 이와 같이 세 번을 청하시어 마치고, 다시 〈이와 같이〉 시작하시었다.

󰊲 물음에 대해 칭찬하고 그 물음에 따라 말씀해 주실 것을 허락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a.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ㄱ爾時世尊이 告賢善首菩薩言샤 善哉善哉라 善男子아 汝等이 乃能爲諸菩薩와 及末世衆生야 問於如來如是經敎功德名字니 汝今諦聽라 當爲汝說호리라 時賢善首菩薩이 奉敎歡喜샤 及諸大衆과 默然而聽시더니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a.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ㄱ그  世尊이 賢善首菩薩려 니샤 됴타 됴타 善男子아 너희들이 能히 諸菩薩와 末世衆生 爲야 如來ㅅ 이  經敎ㅅ 功德名字 묻니 네 이<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b.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ㄴ제 仔細히 드르라 반기 너 爲야 닐오리라 時예 賢善首菩薩이 敎 받와 歡喜샤 諸大衆과 야셔 듣오시더니

〈현대역〉

그때 세존께서 현선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좋구나, 좋구나, 선남자여. 너희들이 능히 여러 보살들과 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여래에게 이와 같은 경교(經敎)의 공덕과 이름을 물으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말해주리라.” 그 때에 현선수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환희하시면서 여러 대중과 〈함께〉 잠잠히 하고서 〈부처님 말씀을〉 들으시었다.

󰊳 경의 이름과 이 경을 받들어 지니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b.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ㄴ善男子아 是經은 百千萬億恒河沙諸佛所說이시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2a.jpg">원각경언해 하3의2:72ㄱ三世如來之所守護ㅣ시며 十方菩薩之所歸依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2b.jpg">원각경언해 하3의2:72ㄴ十二部經淸淨眼目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3b.jpg">원각경언해 하3의2:73ㄴ是經은 名大方廣圓覺陀羅尼며 亦名 修多羅了義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4a.jpg">원각경언해 하3의2:74ㄱ亦名 秘密王三昧며 亦名 如來決定境界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4b.jpg">원각경언해 하3의2:74ㄴ亦名 如來藏自性差別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5a.jpg">원각경언해 하3의2:75ㄱ汝當奉持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0b.jpg">원각경언해 하3의2:70ㄴ善男子아 이 經은 百千 萬億 恒河沙 諸佛ㅅ 니시논 고디시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2a.jpg">원각경언해 하3의2:72ㄱ三世 如來ㅅ 守護시논 고디시며 十方菩薩의 歸依논 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2b.jpg">원각경언해 하3의2:72ㄴ디며 十二部經淸淨 眼目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3b.jpg">원각경언해 하3의2:73ㄴ이 經은 일후미 大方廣圓覺陀羅尼며  일후미 修多羅了義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4a.jpg">원각경언해 하3의2:74ㄱ 일후믄 祕密王三昧며  일후믄 如來決定境界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4b.jpg">원각경언해 하3의2:74ㄴ 일후믄 如來藏自性差別이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5a.jpg">원각경언해 하3의2:75ㄱ네 반기 바다 디니라

〈현대역〉

“선남자여, 이 경은 백·천·만·억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 〈수효 같은〉 부처님들께서 설하시는 바이시며, 삼세의 여래께서 수호하시는 바이시며, 시방의 보살들이 귀의하는 바이며, 십이부경(十二部經)의 청정한 안목이다. 이 경은 ‘대방광원각다라니(大方廣圓覺陀羅尼)’라 이름하며, 또는 ‘수다라요의(修多羅了義)’라 하며, 또는 ‘비밀왕삼매(祕密王三昧)’라 하며, 또는 ‘여래결정경계(如來決定境界)’라 하며, 또는 ‘여래장 자성차별(如來藏自性差別)’이라 이름하나니, 너(=그대)는 반드시 받들어 지녀라.”

󰊴 이 경에 따라 수행하면 어느 곳에 이르는가에 대해 말씀하시다 : 부처의 경지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6a.jpg">원각경언해 하3의2:76ㄱ善男子아 是經은 唯顯如來境界니 唯佛如來 能盡宣說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7b.jpg">원각경언해 하3의2:77ㄴ若諸菩薩와 及末世衆生이 依此修行면 漸次增進야 至於佛地리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6a.jpg">원각경언해 하3의2:76ㄱ善男子아 이 經은 오직 如來ㅅ 境界 나토니 오직 佛如來 能히 다 펴 니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7b.jpg">원각경언해 하3의2:77ㄴ다가 諸菩薩와 末世衆生이 이 브터 修行면 漸次로 더 나가 佛地예 니를리라

〈현대역〉

“선남자여, 이 경은 오직 여래의 경계를 나타나게 하니, 오직 부처님 여래여야만 능히 모두 펴서 설할 수 있느니라. 만약에 보살들과 말세의 중생이 이에 의거해 수행하면 점차로 더 나아가서 부처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 이 경교<세주>(경전의 가르침)를 닦아 익혀 얻을 공덕에 대해 말씀하시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8a.jpg">원각경언해 하3의2:78ㄱ善男子아 是經은 名爲 頓敎大乘이니 頓機衆生이 從此開悟며 亦攝漸修 一切群品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9a.jpg">원각경언해 하3의2:79ㄱ譬如大海ㅣ 不讓小流ㅣ어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9b.jpg">원각경언해 하3의2:79ㄴ乃至蚊蝱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0a.jpg">원각경언해 하3의2:80ㄱ及阿修羅ㅣ 飮其水者ㅣ 皆得充滿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1b.jpg">원각경언해 하3의2:81ㄴ善男子아 假使有人이 純以七寶로 積滿三千大千世界야 以用布施야도 不如有人이 聞此經名及一句義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3a.jpg">원각경언해 하3의2:83ㄱ善男子아 假使有人이 敎百千恒河沙衆生야 得阿羅漢果야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3b.jpg">원각경언해 하3의2:83ㄴ不如有人이 宣說此經야 分別半偈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5a.jpg">원각경언해 하3의2:85ㄱ善男子아 若復有人이 聞此經名고 信心不惑면 當知是人은 非於一佛 二佛에 種諸福慧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5b.jpg">원각경언해 하3의2:85ㄴ如是乃至盡恒河沙一切佛所애 種諸善根야 聞此經敎ㅣ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8a.jpg">원각경언해 하3의2:78ㄱ善男子아 이 經은 일후미 頓敎大乘이니 頓機 衆生이 이 브터 여러 알며  漸漸 닷 一切ㅅ 한 類 자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9a.jpg">원각경언해 하3의2:79ㄱ가비건댄 大海 져근 流 辭讓 아니커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79b.jpg">원각경언해 하3의2:79ㄴ蚊蝱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0a.jpg">원각경언해 하3의2:80ㄱ阿修羅애 니르리 그 믈 마시리 다 滿 得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1b.jpg">원각경언해 하3의2:81ㄴ善男子아 다가 사미 純히 七寶로 三千大千世界예 사하 와  布施야도 사미 이 經 일훔과  句ㅅ  드르니 디 몯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3a.jpg">원각경언해 하3의2:83ㄱ善男子아 다가 사미 百恒河沙 衆生 쳐 阿羅漢果 得게 야도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3b.jpg">원각경언해 하3의2:83ㄴ사미 이 經을 펴 닐어 半偈 分別홈 디 몯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5a.jpg">원각경언해 하3의2:85ㄱ善男子아 다가  사미 이 經ㅅ 일훔 듣고 매 信야 疑惑 아니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5b.jpg">원각경언해 하3의2:85ㄴ반기 알라 이 사 一佛二佛에 한 福과 慧와를 심군디 아니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5b.jpg">원각경언해 하3의2:85ㄴ이티 恒河沙 다오매 니른 一切 佛 한 善根을 심거 이 經敎 드르니라

〈현대역〉

“선남자여, 이 경은 이름이 돈교대승(頓敎大乘)이니, 돈기(頓機)의 중생이 이에 의거해 열어 알며[=개오(開悟)하며], 또 점차로 닦는 일체 많은 무리들도 포섭하니(=거두잡으니), 비유하건대 큰 바다는 작은 흐름을 사양하지 않는데(=거절하지 않는데), 모기와 등에, 그리고 아수라에 이르기까지 그 물을 마시는 이는 모두 충만함(=배부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약 〈어떤〉 사람이 순전히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에 쌓아 채워 두고 그것으로써 보시하여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이름이나 한 구절의 이치를 들은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선남자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백 항하사 〈수효의〉 중생을 가르쳐(=교화하여) 아라한의 과위를 얻게 하여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을 펴 일러(=설하여) 반 게송을 분별함만 〈같지〉 못한 것이다. 선남자여,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이름을 듣고 믿어서 의혹을 〈갖지〉 않으면, 반드시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께 많은 복과 지혜를 심은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같이 항하사를 다함에 이른 일체의 부처님께 많은 선근(善根)을 심어서 이 경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다.”

󰊶 이 경을 받들어 지니는 사람을 어떻게 보살필까에 대해 말씀하시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6a.jpg">원각경언해 하3의2:86ㄱ汝善男子ㅣ 當護末世옛 是修行者야 無令惡魔와 及諸外道ㅣ 惱其身心야 令生退屈케 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6a.jpg">원각경언해 하3의2:86ㄱ너 善男子ㅣ 반기 末世옛 이 修行릴 護持야 모딘 魔와 한 外道왜 그 身心을 보차 믈러 구부믈 내에 말라

〈현대역〉

“너(=그대) 선남자는 반드시 말세에 이 수행하는 이들을 보호하여 모진 마귀와 많은 외도들이 그의 몸과 마음을 괴롭혀(=흔들어) 물러나 굽히는(=퇴굴하는) 마음을 내게(=일으키게) 하지 말라.”

󰊷 화수금강 등 8만 금강과 그 권속들이 이 경전 수행자를 호지하겠다고 발원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7b.jpg">원각경언해 하3의2:87ㄴ爾時會中에 有火首 金剛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8a.jpg">원각경언해 하3의2:88ㄱ摧碎金剛과 尼藍婆金剛等 八萬金剛이 幷其眷屬과 卽從座起야 頂禮佛足고 右繞三帀고 而白佛言오 世尊하 若後末世一切衆生이 有能持此決定大乘이면 我當守護호 如護眼目며 乃至道場所修行處에 我等金剛이 自領徒衆야 晨夕에 守護야 令不退轉케 며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8b.jpg">원각경언해 하3의2:88ㄴ其家애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9a.jpg">원각경언해 하3의2:89ㄱ乃至永無災障며 疫病이 銷滅고 財寶ㅣ 豊足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9b.jpg">원각경언해 하3의2:89ㄴ常不乏少케 호리다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7b.jpg">원각경언해 하3의2:87ㄴ그  會中에 火首金剛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8a.jpg">원각경언해 하3의2:88ㄱ摧碎金剛과 尼藍婆金剛 八萬 金剛이  그 眷屬과 곧 座로셔 니러 부텻 바 頂禮고 올녀<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8b.jpg">원각경언해 하3의2:88ㄴ그로 도라 세번 도고 부텻긔 오 世尊하 다가 後末世 一切衆生이 能히 이 決定 大乘을 디니리 이시면 내 반기 守護호 眼目 간슈시 며 道場 修行 고대 니르리 우리 金剛이 제 徒衆을 領야 아나조 守護야 믈리그우디 아니케 며 그 지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9a.jpg">원각경언해 하3의2:89ㄱ永히 災障 업스며 疫病이 銷滅호매 니르고 財寶ㅣ 豊足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9b.jpg">원각경언해 하3의2:89ㄴ녜 업서 젹디 아니케 호리다

〈현대역〉

그 때에 회중(會中)에(=모임 대중 가운데) ‘불머리금강’[화수금강(火首金剛)], ‘때려부수는 금강’[최쇄금강(摧碎金剛)]과 니람파금강(尼藍婆金剛) 등 팔만 금강과 또 그들의 권속들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세 번 감돌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후 말세 일체 중생들이 능히 이 결정된 대승경전을 지니는 이가 있으면, 내(=저희)가 반드시 수호하되 눈을 간수하듯이 할 것이며, 도량 수행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우리(=저희) 금강들이 자기의 도중(徒衆)을 거느리고 아침저녁으로 수호하여 〈수행인들이〉 물러나 구르지 않게 하며, 그 집에 영원히 재앙과 장애가 없어져 역병(疫病)이 소멸함에 이르고, 재화와 보물이 풍족하여 항상 없어지거나 적어지지 않게(=모자람이 없게) 하겠습니다.”

󰊸 모든 하늘왕과 귀신왕들이 이 경전을 지녀 수행하는 자를 수호하겠다고 발원하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9b.jpg">원각경언해 하3의2:89ㄴ爾時 大梵王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0a.jpg">원각경언해 하3의2:90ㄱ二十八天王과 幷須彌山王과 護國天王等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0b.jpg">원각경언해 하3의2:90ㄴ卽從座起야 頂禮佛足고 右繞三帀고 而白佛言오 世尊하 我亦守護是持經者야 常令安隱야 心不退轉케 호리다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1a.jpg">원각경언해 하3의2:91ㄱ爾時有大力鬼王이 名吉槃茶ㅣ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1b.jpg">원각경언해 하3의2:91ㄴ與十萬鬼王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2a.jpg">원각경언해 하3의2:92ㄱ卽從座起야 頂禮佛足고 右繞三帀고 而白佛言오 我亦守護是持經人야 朝夕에 侍衛야 令不退屈케며 其人所居一由旬內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2b.jpg">원각경언해 하3의2:92ㄴ若有鬼神이 侵其境界어든 我當使其碎如微塵호리다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89b.jpg">원각경언해 하3의2:89ㄴ그  大梵王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0a.jpg">원각경언해 하3의2:90ㄱ二十八天王과  須彌山王과 護國天王 等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0b.jpg">원각경언해 하3의2:90ㄴ곧 座로셔 니러 부텻 바 頂禮고 올녀그로 도라 세번 도고 부텻긔 오 世尊하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1a.jpg">원각경언해 하3의2:91ㄱ내  이 持經릴 守護야 녜 安隱야 미 믈리그우디 아니케 호리다 그  大力鬼王이 일후미 吉槃茶ㅣ<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1b.jpg">원각경언해 하3의2:91ㄴ十萬鬼王과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2a.jpg">원각경언해 하3의2:92ㄱ곧 座로셔 니러 부텻 바 頂禮고 올녀그로 도라 세번 도고 부텻긔 오 내  이 持經 사 守護야 아나죄 侍衛야 믈러 굽디 아니케 며 그 사 사 一由旬 內예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2b.jpg">원각경언해 하3의2:92ㄴ다가 鬼神이 그 境界 보차리 잇거든 내 반기 아 微塵 게 호리다

〈현대역〉

그 때에 대범천왕과 28천왕과 또 수미산왕과 호국천왕 등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세 번 감돌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내(=저희)가 또 이 경을 지니는 이를 수호하여 항상 안은(安隱)토록 하여 마음이 물러나 구르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 때에 이름이 길반다(吉槃茶)인(=길반다라는 이름의) 힘센 귀신왕이 십만 귀신왕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세 번 감돌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나(=저희)도 이 경 지니는 이를 수호하고 아침저녁으로 시위(侍衛)하여 물러나 굽히지 않게 할 것이며, 그 사람이 사는 곳에서 한 유순(由旬) 이내에 〈어떤〉 귀신이 그 경계를 침노하는(=괴롭히는, 보채는) 것이 있으면 내(=저희)가 반드시 〈그를〉 부수어 먼지같이 만들어(=티끌처럼 부수어) 버리겠습니다.”

󰊹 원각도량 법회를 모두 맺으시다.

〈경 본문〉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2b.jpg">원각경언해 하3의2:92ㄴ佛說此經已야시 一切菩薩 天龍鬼神 八部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3a.jpg">원각경언해 하3의2:93ㄱ眷屬과 及諸天王 梵王等 一切大衆이 聞佛所說고 皆大歡喜와 信受奉行오니라

〈본문 언해〉

<원본위치 imgFile="P17_WG_e01_v010_093a.jpg">원각경언해 하3의2:93ㄱ부톄 이 經을 닐어시 一切 菩薩와 天과 龍과 鬼神과 八部 眷屬과 諸天王梵王 等 一切 大衆이 부텨 니샤 듣고 다  歡喜와 信受야 奉行오니라

〈현대역〉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니, 일체 보살과 하늘[天]과 용(龍)과 귀신(鬼神)과 팔부의 권속들과 모든 천왕·범왕 등 일체 대중이 부처님 설하심을 듣고 모두가 매우 환희하여 신수(信受)하고(=믿고 받아들여) 봉행하였다.

『월인석보』 제4에 대하여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이 『월인석보』 제4(복각본)가 세상에 알려진 지도 10여 년이 지났으며, 그 동안 소장자의 호의로 경북대학교 출판부에서 1997년에 영인하면서, 그 부록으로 남권희 교수의 “〈월인석보〉 권4 복각본의 형태와 서지”와 김동소 교수의 “〈월인석보〉 권4의 연구”로 해서, 이 방면의 연구자들에게는 ‘이 문헌(『월인석보』 제4를 이렇게 부름, 이하 같음)’에 대하여 웬만큼 알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이번에 전문을 역주하면서 위의 두 글에 의지한 바가 큼을 여기에 밝히며, 두 분께 사의를 표한다.

2. 서지와 내용

2.1. 형태 서지

본시 ‘이 문헌’의 소장자는 대구의 김병구(金秉九) 님이었으나, 2010년 4월 현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으로 바뀌었음을 이번의 실사(4월 23일)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 문헌’의 형태 서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표지 : 이는 복각본 인쇄 당시의 표지는 아니라고 보며, 전 소장자(?)가 소장하게 되면서 새로 제본한 듯, 짙은 갈색의 비단 무늬를 입힌 5침안정법(五針眼訂法) 장정(裝幀)으로 되어 있음.

책 크기 : 32.5×21.9cm

반광(半匡) : 21.9×17.8cm

판식(板式) : 4주(周) 단변(單邊) 유계(有界)

판심(板心) : 대흑구(大黑口) 상하(上下)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판심제(板心題) : 月印釋譜 四(월인석보 4)

판각(板刻) : 원본에 충실한 복각본(覆刻本)이다. 판식과 지질, 판각 상의 마모(磨耗)나 목리(木理)의 상태로 보아 대체로 16세기 초~중반의 시기로 추정한다.

행관(行款) : 월인천강지곡 부분 - 7행 14자(큰 글자)

석보상절 부분 - 7행 15자(공격 제외, 중간 글자)

협주(夾註) 부분 - 쌍행(雙行) 15자(공격 제외, 작은 글자)

장차(張次) : 66장(1장 전면에서 66장 후면), 67장 이후 낙장

1~15장은 원 책장에 배접(褙接)하여 제본,

16~59장은 원 책장 그대로,

60~66장은 원 책장에 배접하여 제본한 것임.

훼손 상태 : 1장 전면이 훼손 상태가 심해서 2행과 5, 6, 7행이 적게는 4자에서 많게는 11자에 이르기까지 지편이 떨어져 나가고, 2장 이하로 가면서 차차 훼손 부분이 조금씩 적어지며, 9장 전면 7행 끝의 4자(3자는 남은 글자로 복원 가능, 1자는 문맥으로 복원 가능) 훼손으로 끝난다. 책 뒤는 두 장(65장 전, 후면에 한두 글자, 66장 전면에 두어 글자, 후면에 8자)이 조금 훼손되었다.

이 밖에 남권희(1997)에는 판식의 흑구와 흑어미 사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횡선(橫線)’에 대한 조사, 판심 아래 흑구 부분에 새겨진 여러 가지 각수(刻手)(6명 이상)의 표시를 조사 정리한 것이 있다. 또한 제17장 후면, 변란 아래의 묵서(墨書)는 ‘이 문헌’을 읽고 공부하던 이가 쓴 것으로, ‘丙字 誤 甲字 是 學者的 甲辰的觀’(이하 해독 불능)을 언급해 놓았다.

2.2. 내용

‘이 문헌’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운문의 〈월인천강지곡〉을 주로 하고, 산문의 〈석보상절〉은 그 해설로 되어 있다. 김동소(1997:139)에서는 내용을 6단락으로 나누었으나, 이 글에서는 ‘월인천강지곡’을 먼저 놓고, 이에 대한 ‘석보상절’ 내용을 다음에 둔, ‘이 문헌’의 찬집의 의도에 따라서, 내용을 Ⅰ~Ⅷ 단락으로 나누어, 각 단락을 ① 본문의 장차(張次), ② 내용의 개략, ③ 저경(底經)과 그 출처 등을 차례로 보였다.

Ⅰ-① 월인천강지곡 기 67~기 74〈1ㄱ3~4ㄴ2〉(1장 전면 3행, 이하 이와 같음.)

석보상절 〈4ㄴ3~14ㄴ〉

② 구담(瞿曇)이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각을 이루려 할 제, 마왕 파순이 미인계로 그의 세 딸을 보내어 구담을 항복시키려 하는 등 여러 차례 수도를 방해하나, 번번이 물리쳐서 도리어 마왕을 굴복시키고 정각을 이룸.

③ 석가보(釋迦譜)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釋迦降生釋種成佛緣譜) 제4의 3, 〈대정신수대장경 제50, 31~34쪽〉.

Ⅱ-① 월인천강지곡 기 75~기 78〈15ㄱ1~16ㄴ6〉

석보상절 〈16ㄴ7~38ㄱ4〉

② 여래 열반 후, 정법은 가섭존자, 아난존자, 상나화수존자, 우바국다존자에게 차례로 맡겨졌다. 우바국다존자가 마돌라국에서 설법하려 할 때, 마왕 파순이 진주를 뿌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등으로 방해하다가 도리어 교화를 받고 하늘로 올라가고, 돌라 성중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바국다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을 얻게 됨.

③ 아육왕전(阿育王傳) 권5, 상나화수인연(商那和修因緣) 제9〈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8하~120중〉.

Ⅲ-① 월인천강지곡 기 79~기 81〈38ㄱ5~39ㄴ2〉

석보상절 〈39ㄴ3~43ㄴ5〉

② 세존이 2월 초이레, 마왕을 항복시키고 입정(入定)하여 삼명(三明), 육신통(六神通)을 얻고 팔정도(八正道)를 이루시며,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십신력(十神力), 사무외(四無畏)를 득하시니, 무량한 일체 중생과 모든 고취(苦趣)들이 다 기뻐함.

③ 석가씨보(釋迦氏譜) 법왕화상(法王化相) 오도승시적(悟道乘時迹) 단혹성각상(斷惑成覺相) 〈대정신수대장경 제50, 92쪽 상〉.

Ⅳ-① 월인천강지곡 기 82〈43ㄴ6~44ㄱ4〉

석보상절 〈44ㄱ5~44ㄴ〉

② 탄왕(彈王)이 여래께 “여래의 공덕은 누가 증명하느냐”라고 여쭈니, 육종진동(六種震動)하여 지신(地神)이 〈솟아나와〉 “내가 증명한다”고 함.

③ 저경 미상

Ⅴ-① 월인천강지곡 기 83〈45ㄱ1~45ㄴ1〉

석보상절 〈45ㄴ2~46ㄴ6〉

② 정각을 이루신 여래께서 적멸도량(寂滅道場)에 계셨는데, 41위 법신대사(法身大士)와 천룡팔부(天龍八部)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노사나신(盧舍那身)을 나타내시어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시니, 그 이름이 돈교(頓敎)임.

③ 불조통기(佛祖統紀) 권3, 교주석가모니불본기(敎主釋迦牟尼佛本紀) 제1의3 상, 〈대정신수대장경 제49, 149쪽 상〉.

Ⅵ-① 월인천강지곡 기 84〈46ㄴ7~47ㄱ6〉

석보상절 〈47ㄱ7~49ㄱ7〉

② 여래께서 깨달아 얻으신 묘법을 중생들이 모를 것이니, 차라리 열반에 드시려 했는데, 대법천왕을 비롯한 여러 천왕과 천중들이 허공에서 내려와 간절히 설법을 청하매 삼승(三乘)을 설법하게 되니, 시방(十方)의 부처들이 내려와 찬탄하심.

③ 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 4, 〈대정신수대장경 제50, 36쪽 중~하〉.

Ⅶ-① 월인천강지곡 기 85~기 92〈49ㄴ1~52ㄴ7〉

석보상절 〈53ㄱ1~62ㄱ5〉

② 여래께서 득도하신 지 마흔 아흐레가 되도록 공양하는 이가 없었다가, 차리니가 숲에서 가부좌하고 있을 적에, 북인도의 두 장사꾼이 지나다가 와서 공양을 받고, 그들에게 머리터럭과 손톱을 주어 고향에 돌아가 탑을 이루게 함.

③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32, 이상봉식품(二商奉食品) 하, 〈대정신수대장경 제3, 801쪽 상~803쪽 중〉.

Ⅷ-① 월인천강지곡 기 93〈62ㄱ6~62ㄴ5〉

석보상절 〈62ㄴ6~66ㄴ, 미완인 채, 이하 낙장〉

② 석존 전세, 선록왕(善鹿王) 시절에 새끼 밴 사슴의 사정을 듣고 선록왕이 그 대신 범마달왕에게 공상되어서는 거꾸로 범마달왕을 교화하는 이야기와, 인욕선인(忍辱仙人) 시절에 가리왕에게 수족을 베이는 이야기.

③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6, 〈대정신수대장경 제25, 178쪽 중~하〉.

현우경(賢愚經) 권2, 찬제바리품(羼提波梨品) 제12, 〈대정신수대장경 제4, 359쪽 하~360쪽 상〉.

3. 희귀어

‘이 문헌’에 나오는 희귀어에 대하여는 앞서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김동소(1997)의 ‘희귀어 1~36’에 다 언급된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있고 중복되는 것도 있으나, 필자는 그에 대해서 좀더 보충한다든지, 고어사전에 수록해야 할 예문을 살펴보고, 필자가 더 추가한 ‘37, 38, 39’를 고찰하기로 한다.

먼저 희귀어는 체언과 용언의 기본형, 부사 등을 표제어로 하여, 품사, 뜻, 예문과 출처를 밝히고, 표제어에 방점은 붙이나,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줄이기로 한다. 아울러 이 어휘가 종래의 문헌에 보이지 않는 최초의 용례라든가, 종래의 문헌에 씌었다 하더라도 사전에 실려 있는 용례가 ‘이 문헌’보다 후대의 것이라든지 등을 밝히려 한다.

1) 로거·티·다 (동) 가로 넘어뜨리다.

波旬은 魔王ㅅ 일후미니  모디다 논 디라 부톄 衆生 便安케 호려 커시든 거티며 쥬 부텻 法을 호거든 아례나 어즈려 罪  클 모디다 니라〈월석 4:4ㄴ~5ㄱ〉

이 동사는 종래의 문헌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새로 고어사전에 등록해야 할 것이다. 그 구성은 ‘〔橫〕+거티〔蹶, 跌〕로 분석되고, 뜻은 ‘가로 넘어뜨리다’를 그대로 따른다. 김동소 교수는 여기에 의미상으로는 경상도 방언 ‘갈거치다/걸거치다(방해하다, 불편을 주다)’에 가까울 가능성을 언급했다.

2) · (명) 콩팥. 신장(腎臟).

五臟( )과 肝과 (만하와) 부하와 ·기·라〈월석(복) 4:7ㄱ~ㄴ〉

cf. 腎  신〈훈몽 상:14ㄱ〉

腎  안 오장앗(앳) ·치·라〈구급간 3:75ㄴ〉

이 어휘는 위에 보인 것처럼, 종래 16세기의 『훈몽자회』(1527)와 『구급간이방』(1489)의 16세기 복각본으로 ‘, ’의 독립형은 알려졌으나, 그 곡용형은 ‘이 문헌’의 용례가 처음이다. 따라서 사전에 합성어 ‘·’으로 등록되어야 할 것이다.

3) 슬·히 (명) ? 수레바퀴 모양의 무기.

너희 獄卒와《獄卒 地獄앳 罪人 달호 거시라》 阿鼻地獄앳 연자 갈히며 슬·히·며 火爐ㅣ며 다 가져 閻浮提로 오라 야 뫼호고 魔王 波旬이 구세딜어 리 瞿曇이 害라 니《害 주길 씨라》 우흐로셔 브리며 더 쇠며 갈히며 슬·히·며 잠개히 虛空애 섯비주 菩薩 갓가 오 몯더니〈월석 4:11ㄴ~12ㄱ〉

汝等獄卒及閻羅王 阿鼻地獄刀輪劍戟火車爐炭 一切都舉向閻浮提 魔王震吼勅諸兵衆 速害瞿曇 上震大雷雨熱鐵丸 刀輪武器交橫空中 然其火箭不近菩薩 【釋迦譜 釋 迦降生釋種成佛緣譜 第四之三(出 觀佛三昧經)】 〈『대정장(大正藏)』 제50권, 32쪽 상〉

이 명사는 그 독립형을 ‘슳’과 슬히’ 어느 쪽으로 보아야 할지 확실치 않아서 다른 용례가 새로운 문헌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뜻은 저경으로 보이는 위의 인용문에 찾아보면 밑줄 친 ‘刀輪’에 해당하므로, 고대의 무기에 이런 것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수레바퀴 모양의 무기’를 그대로 따른다.

4) 구세디르·다 (동) 벼락같이 소리지르다.

魔王 波旬이 구세딜·어 리 瞿曇이 害라 하니〈월석 4:12ㄱ〉

이의 저경은 3)에 보인 것 중의 일부, 곧 ‘魔王震吼勅諸兵衆 速害瞿曇’에 해당되는 부분인데, 저경이 1대 1의 번역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震吼’에 대응된다. 이를 ‘벽력같이 소리 지르다’로 한 바, 필자를 다만 ‘벼락’만을 현대어와 같이 했을 뿐이다. 이도 새로이 사전에 등록되어야 할 것이다.

5) 빚다 (동) ? 섞여 횡행하다.

우흐로셔 브리며 더 쇠며 갈히며 슬·히·며 잠개히 虛空애 섯비주· 菩薩 갓가 오 몯더니〈월석 4:12ㄱ〉

cf. 바디 아니며 빗디 아니며(不縱不橫)〈원각 상1의2:117ㄴ〉

빗근 남 라 나마시니(于彼橫木又飛越兮)〈용가 86〉

橫 빗글씨니 橫死 제 命 아닌 일로 주글씨라〈석상 9:22ㄱ〉

이 동사도 앞의 3)의 예문에 나오는바, 그 저경의 ‘上震大雷雨熱鐵丸 刀輪武器交橫空中 然其火箭不近菩薩’에서 ‘섯비주’는 ‘-〔混〕+빚〔?〕+(오/우)’로 분석될 것이므로 그 어간은 ‘빚-’이 될 수밖에 없는데, 김동소(1997)에서는 ‘섯빚-’을 ‘交橫’으로 보아 ‘-’과 새로운 형용사 (?)‘빚-〔橫〕’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빚-’은 아무래도 ‘-〔橫〕’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빗-’은 모음 어미 앞에서는 ‘-’으로 쓰였으므로 당시 ‘-’이란 형용사도 쓰였다고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그 뜻은 그대로 김동소 교수의 ‘섞여서 횡행함’이라도 무방할 것이다.

6) 환··다 (형) 시원하다.

菩薩이 眉間앳 터리 기 드르샤 阿鼻地獄 견지시니 터리예셔 큰 므리 브 한 브리 간 디거늘 罪人히 보고 제여곰 지 罪 아라 미 환야 南無佛을 일니〈월석 4:12ㄴ~13ㄱ〉

是時菩薩徐舉眉間毫擬阿鼻地獄 令罪人見白毫流水 注如車軸大火暫滅 自憶前世所作諸罪 心得清涼稱南無佛(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2쪽 상〉

cf. 暢 싀훤 씨오〈석상 24:20ㄴ〉

이 형용사는 참고로 보인 『석보상절』의 ‘싀훤-’에서 제1음절 주모음 ‘/으’의 교체형임을 쉬 알 수 있고, 이는 ‘싀원-〉시원-〉시원하-’로 변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저경으로 보는 『석가보』의 밑줄 친 ‘淸凉’의 번역으로도 잘 대응된다.

7) 블눋다 (동) 불에 눋다.

八萬 四千 天女히 魔王 보니 블누른 나모 고 오직 菩薩ㅅ 白毫相光 울워〈월석 4:14ㄱ〉

八萬四千天女視波旬身狀如木 但瞻菩薩白毫相光 無數天子天女皆發無上菩提道意(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2쪽 상〉

cf. 茱萸와 木瓜와 소곰 各 半 兩  봇가 눋게 야 몬져 沙甁에 믈 서 되 다마 글혀〈구급방 상:31ㄴ〉

누를 쵸〈훈몽 하:6ㄴ〉

이 항목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

8) 헤듀·티·다 (동) 훼방하다.

세찻 說法 나래 나랏 사미 다 모다 왯더니 魔王이  류 天女를 라 모 사  어즈려 나토 得道 몯게 고 魔王이  깃거 닐오 毱多 說法을 잘 헤듀·티과·라 더니〈월석 4:19ㄴ~20ㄱ〉

第三日國土人盡來雲集聞尊者說法 (初雨真珠第二雨金寶第三日)魔王化作天女 作天伎樂惑亂人心 未得道者心皆惑著於天樂 乃至無有一人得道 如是魔大歡喜而作是言 我能破壞優波毱多說法(아육왕전 권제5, 상나화수인연)〈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8쪽 하〉

이 항목도 그대로 따른다.

9) : 주·검 → ‘세 주검’의 오자임.

尊者ㅣ 만히 주근 얌과 주근 가히와 주근 사과 세 가짓 주거로 花鬘 라 魔王손 가져 니거늘 魔王이 보고 깃거 닐오 優婆毱多도 내손 自得  몯 놋다 고 머리 내와다 花鬘 바다 毱多ㅣ  주거므로 魔王 모 대 魔王이 세 주거믈 보고 닐오 엇뎨 이 주거믈 내 모 다〈월석 4:21ㄱ~ㄴ〉

尊者優波毱多以三種死屍 一者死蛇二者死狗三者死人 以此三種化作花鬘即往魔所 魔見歡喜而作是言 優波毱多於我亦不得自在 魔即申頭受其花鬘 優波毱多以三屍結於魔項 魔見三屍著項而作是言 豈應捉是死屍著我項許耶(아육왕전 권제5, 상나화수인연)〈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8쪽 하~119쪽 상〉

우선 이 대목은 결론적으로, 한 단어가 아니라, ‘관형사+명사’의 한 구로 이루어진 것임을 전제로 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곧, ‘ 주거므로’의 ‘’는 김동소 교수의 언급처럼 오각임을 필자도 동의하면서 좀 더 그 실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요컨대 이 예문의 줄거리는 ‘존자가 세 가지 주검으로 된 화만을 마왕의 목에 매니, 마왕이 세 주검을 어찌 내 목에 맸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여기 ‘세 (가지) 주검’이란 말이 세 번 공통점은 세 번 다 ‘주거(/므)로’를 수식하는 관형어가,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세 (가짓)’와 ‘세’로 공통되나, 두 번째는 마땅히 ‘세’가 쓰일 자리에 ‘’가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뜻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불가불 다른 글자로 보아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저경을 보면, 해당되는 부분이 각각 ‘삼종사시(三種死屍), 삼시(三屍), 삼시(三屍)’로 대응되므로 예문의 밑줄 친 두 번째 ‘ 주거므로’의 ‘’는 오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글자는 무슨 글자의 오각이냐가 문제이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글자는 문맥에 따라서 ‘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방점도 상성 ‘:세’에 맞는 것이다.

여기에 좀 더 부연하자면, 당시의 필사는 모두 붓글씨에 의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세’에서 ‘’로 잘못 썼을까? 그 답은 비교적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두 글를 쓰는 차례에 따라 단음(單音)으로 갈라서 써놓으면, ‘ㅅ, ㅓ, ㅣ’와 ‘ㅅ, ㄱ, ㅣ’가 되는데, 여기서 각각의 첫째와 세째 글자는 문제가 없으므로 제외하면, 남는 ‘ㅓ’ 자와 ‘ㄱ’ 자가 오자가 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곧 ‘ㅓ’ 자를 씀에 있어서 세로의 획 윗부분을 정확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 모양이 ‘ㄱ’ 자와 비슷해질 가능성이 있음에 오자 발생의 근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오각은 언제 이루어진 것인가? 이는 지금 전래되는 관판본(官板本)인 초간본(1459)을 보아서 적어도 당시에는 제대로 되었다고 보며, 이 복각본이 이루어진 16세기 당시에 오각된 것으로 보려는 것이다. 이 ‘탈획·오자’에 대해서는 김동소(1997:142)에 “다른 16세기 복각본들처럼 상당수의 탈획과 오자가 나타난다.” 하고, 조사한 것을 제시해 놓은 것이 참고된다.

10) 닉:젓·다 (형) 익숙하다. 타당하다. 가능하다.

히 蓮ㅅ 불휘로 須彌山 여 려니와 이 글오려 호 닉:젓·디 아니니라 魔王이 닐오 너옷 몯 그르면 내 뉘그 가료〈월석 4:24ㄱ〉

寧以藕根懸須彌山欲解此縛無有是處 魔語梵王言汝不能解我當歸誰(아육왕전 권 제5, 상나화수인연)〈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9쪽 상〉

‘닉〔熟/慣〕+:젓-(접미사, 뜻: -쩍다, -롭다, -스럽다)’로 보아 ‘익숙하다’를 따른다.

11) ·:되·다 (형) 뜻이 굳다. 뜻이 강하다. 완고하다.

驕慢 ·되·야  업시울 씨라〈월석 4:25ㄴ〉

이 형용사는 협주 ‘교만(驕慢)’의 풀이인데, 그 구성은 ‘·〔意〕+:되-〔甚, 急, 固〕’의 합성어이며, ‘뜻이 굳다. 뜻이 강하다. 완고하다.’로 풀이한 데 그대로 따른다. 다만, ‘:되-’의 방점이 여기서는 평성으로 된 것이 미진한 점이다. 종래의 문헌에 보이지 않으므로 새로 표제어로 올려야 할 것이다.

12) 뎐디·위·다 (동) 전하여 알리다.

네찻 說法 나래 魔王이 尊者 몯 니저 하로셔 려와 뎐디위호 艱難티 마오져 며 하해 나고져 며 涅槃 得고져 거든 다 尊者 優波毱多 가라 如來ㅅ 說法을 몯 보거든  尊者 優波毱多 가라 더라〈월석 4:36ㄴ~37ㄴ〉

第四日魔憶念 尊者身自宣令恩德從天來下 欲破貧窮欲生天欲得涅槃 當詣尊者優波毱多所 不見如來大悲說法者 亦當詣尊者優波毱多所(아육왕전 권5 상나화수인연 제9)〈대정신수대장경 제50, 사전부 120쪽 상〉

cf. 한아비 부텻 法 뎐디··야 니 려오미 한아비 짒일 뎐디··야 子孫애 니 려오미 〈석상 24:4ㄴ〉

이제 구의 장 嚴謹야 人家애 디위여 선 아니완 사을 브티디 못게 니 네 비록 요동 사이로라 나 내 밋디 못여라(如今官司好生嚴謹 省會人不得安下面生歹人 你)誰說遼東人家 我不敢保裏)〈노걸 상:44ㄴ~45ㄱ〉

이 동사는 전래 문헌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참고에 보인 두 동사 ‘뎐디-(傳知, 전해 맡기다)’와 ‘디위-(知委, 알리다)’를 합해 놓은 듯하다고 한바, 다른 자료가 나타나기 전까지 ‘전하여 알리다’로 추정해 두는 데 동의한다.

13) 섭섭얼현다 (형) ? 정하지 않다. 부실하고 데면데면하다. 부실하고 침착하지 못하다.

十八不共法은 열여듧 가짓 아니  法이니 부톄 오 두시고 二乘과 디 아니 씨라 나핸 모매 뎌기 허믈 업스샤미오 … 다샌 섭섭얼현  업스샤미오 여스센 … 열여들벤 이 劫엣 이 아실 씨라〈월석 4:41ㄴ~42ㄴ〉

이 ‘섭섭얼현-’의 뜻을 알아보기 전에 위에 나오는, 불교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부처님께만 있는 공덕으로 이승(二乘: 보살에게는 없는 열여덟 가지)의 출전을 소개한다.

‘십팔불공법’은 흔히 거론되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여기 인용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권 제5 광승품(廣乘品) 제19〈대정신수대장경 제8 반야부(4) p.255 하~256 상〉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학 개론류에 흔히 쓰이는 것으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제17의 ‘십팔불공법(十力과 四無所畏와 三念住와 大悲)’이다.

여기서 위 예문의 원문을 차례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諸佛身無失, 2. 口無失, 3. 念無失, 4. 無理想, 5. 無不定心, 6. 無不知己捨心, 7. 欲無減, 8. 精進無減, 9. 念無減, 10. 慧無減, 11. 解脫無減, 12. 解脫知見無減, 13. 一切身業隨智慧行, 14. 一切口業隨智慧行, 15. 一切意業隨智慧行, 16. 智慧知見過去世無閡無障, 17. 智慧知見未來世無閡無障, 18. 智慧知見現在世無閡無障

김동소 교수는 이 원문을 참고로 ‘섭섭얼현’을, ‘무부정심(不無定心)’에서 ‘무심(無心)’을 뺀 나머지 ‘不定’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 뜻을 ‘정하지 않은’으로 보았으나, 자세치 않다고 했다.

이 ‘섭섭얼현-’를 분석한다면, ‘섭섭-[1)섭섭하-, 허전하-, 2)부실하-, 착실치 아니하-, 허무하-]’에서 그 어근 ‘섭섭’에 ‘얼현-[어련하-, 데면데면하-, 범연하-]’가 결합된 비통사적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그 뜻도 여기 괄호 안에 보인 현대어의 뜻과 관련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그 뜻을 ‘부실하고 데면데면하다/ 부실하고 침착하지 못하다’ 로 추정해 보지만, 이는 좀 더 궁구(窮究)할 문제다.

한편, 〈법화경언해〉 권2 19ㄴ~20ㄱ에도 이 대목이 있는데, 문제의 5)는 ‘一定티 못  (업스샤미오)’로, 한자 ‘부정심(不定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헌’의 ‘섭섭얼현-’는 고유어로 바꾸느라 고심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다음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종래 불교계에서는 ‘십팔불공법’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불교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광복 전부터 학계에 알려진, 대불교사전은 일본(日本)의 〈망월불교대사전(望月佛敎大辭典, 8권 초판 1933, 증정판 1954, 증정 4판 1967〉이 있다. 여기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2361쪽~2366쪽)’ 항목에는 그 출전이 대품반야경 권5 광승품(廣乘品)으로 되어 있고, 이어서 이에 대한 해석을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6에서 옮긴 것이 있다.

... 十八不共法 (一) 佛의 十八不共法. … (二) 般若經 所說의 佛十八不共法. 一 諸佛身無失(원어 줄임) … 五 無不定心 (원문 줄임) : … 十八 … (이어 大智度論 제26에서 이의 해석) 初 諸佛身無失 (일문 설명) … 五 無不定心이란 부처님은 항상 定心 아닌 적이 없고, 마음을 거두어들여 善法 가운데 머물러, 제법실상(諸法實相) 속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 六 無不知己心이란 (필자 옮김. 이하 줄임).

*(이 대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음) : … 五 無不定心 佛之行住坐臥常不離甚深之定, 攝心 住善法中, 於諸法實 相中不退失. …

그리고, 이런한 풀이는 〈망월불교대사전〉보다 후에 나온 대만(臺灣)의 불광대장경편수위원회(佛光大藏經編修委員會)의 〈佛光大辭典〉(초판 1988)에도 이 ‘십팔불공법’ 항목에 위의 원전들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정산(定散)’〈3180쪽 중〉이란 항목에서 ‘정심(ǂ산심)’의 설명을 보면, “… 故定心卽停止妄想, 凝聚心思, 因精神集中而獲得之心 …”로 풀이했다. 곧, ‘정심’이란 망상을 멈추고 마음을 모아서, 정신을 집중해서 얻은 마음’이라 본 것이다. 여기서는 ‘무부정심’에서 ‘무부(불)’을 ‘정심’의 수식어로 보았으니, 이를 풀이에 원용하면 ‘무부정심은 깊은 선정(禪定) 속(경지)에서 산란케 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러면 〈월인석보〉 4의 원문 ‘다샌 섭섭얼현  업스샤미오’는 ‘(선정에서) 부실하고 침착하지 못한 산란한 마음이 없으시고’로 풀이되는데, 이것이 한문 해석의 원뜻이 웬만큼 반영된 것인지가 문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간행 중(현재 12권)에 있는 〈가산불교대사전(伽山佛敎大辭林)〉이 완간되기 전이어서 여기에 참고하지 못했다.

14) ··다 (형) 분명하다.

世尊이 너기샤 四天王이 조 로 바리 주니 나 바면 세히 츠기 너기리로다 샤 네 바리 다 바샤 왼 소내 포 싸시고 올 소로 누르시니 神通力으로  바리 외요 네 그미 ·더·라〈월석 4:58ㄱ〉

爾時世尊 從毘沙門大天王邊受於鉢已 而說偈言 清淨持戒佛世尊 善伏諸根施全鉢 不缺壞心殷重施 汝當來世得淨田 爾時世尊) 受四鉢已 如是次第相重安置 左手受已 右手按下 神通力故 合成一鉢 外有四脣.....(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32, 2상봉식품(二商奉食品) 하) 〈대정신수대장 제3, 801쪽 상~803쪽 중〉

cf. 便便  양이라〈영 소학 3:11〉

이런 어형이 종래 사전에는 실린 것이 없으므로, 김 교수는 『석가보』에서 “便悉受四鉢 累置左手中 右手按之 合成一鉢 令四際現〈4:15〉를 인용하고, 그 뜻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이긴 하나, 고어사전에는 이와 관련되는 어형이 있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그 뜻을 밝혀 보려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참고로 보인 ‘-’는 보기만 해도 ‘-’와 유사성으로 해서 관련됨을 알 수 있고, 이는 전자의 ‘ㄹ’과 모음 사이에서 무성폐쇄음인 ‘ㅎ’의 발음이 잘되지 않는 데서, ‘ㅎ’ 탈락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으니, ‘-’는 전자에 직결되는 어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는 당시의 형용사 ‘-’[가래다, 가르다, 분별하다]에서 파생된 것임도 틀림없다고 본다. 따라서 ‘-’의 뜻도 ‘분명하다’로 밝혀지니, 위의 문맥에도 잘 들어맞는다.

한편, 위에 보인 저경은 김기종(2010:77)에 따른 것이고, 김동소 교수는 『석가보』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여, ‘四際現(네 바리때의 가장자리 금이 나타나 있고)’로 되어 있고, 전자는 ‘有四脣(네 바리때의 언저리 금이 〈그대로〉 있고)’로 되어서 전자의 ‘際[1. 사이, 2. 가장자리, 변두리…]’와 후자의 ‘脣[1. 입술, 2. 언저리…]’ 사이에 뜻이 공통되는 점이 있으므로 두 표현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15) 과··다 (형) : 칭찬할 만하다. 찬미스럽다.

그제 바지히  恭敬 과  내아 禮數고 세 번 도고 니래 도로 오시니라〈월석 4:62ㄱ〉

爾時商主 及諸人等 聞於世尊說是往昔因緣之事 即於髮爪 生希有心 生大尊重恭敬之心 頭頂一心 禮世尊足 圍遶三匝 却步而行(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32, 이상봉식품(二商奉食品) 하)〈대정신수대장경 제3, 801쪽 상~803쪽 중〉

이 형용사는 동사 ‘과-[일컫다, 칭찬하다, 부러워하다]’에 형용사 파생접미사 ‘-ㅂ-’이 결합된 것으로, 당시에는 다음과 같이 생산적인 파생법이었다고 본다.

信-〈석상 24:16 〉 快樂-〈석상 24:28〉 恭敬-〈석상 11:6 〉

怒-〈월석 17:74 〉 합디〈법화 2:111〉 感動고〈법화 3:115〉

-〈법화 2:11 〉

16) 모·리 (명) (사냥에서 짐승들을) 몰아 넣은 곳.

그 나랏 王 梵摩達이 鹿野苑에 山行거늘 善鹿王 惡鹿王이 眷屬과 다 모리예 드러 잇더시니〈월석 4:63ㄱ~ㄴ〉

波羅柰國梵摩達王 遊獵於野林中見二鹿群 群各有主 一主有五百群鹿 一主身七寶色(대지도론(大智度論) 권16)〈대정신수대장경 제25, 178쪽 중〉

김동소 교수는 이 명사를 동사 ‘몰-〔驅〕’의 파생어일 듯하고, 저경은 의역했기 때문에 대응되는 한자를 찾을 수 없고, 문맥으로 보아 그 의미는 ‘(사냥에서 짐승들을) 몰아넣은 곳’으로 추정했다. 다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현재로는 위의 추정을 따르기로 한다.

17) 莊嚴··다 (동) 장하게 꾸미다. 단정하게 꾸미다.

魔王 세 리 닐오《세  悅彼와 喜心과 多媚왜라》 우리 어루 瞿曇  일케 호리니 분별 마쇼셔 고  莊嚴··야 菩薩 (와) 禮數고〈월석 4:6ㄱ〉

(觀佛三昧經云) 魔有三女 (長名悅彼 中名喜心 小名多媚) 而白父言 我能往亂願父莫愁 即自莊飾 過踰魔后百千萬倍 盻目作姿現諸妖冶 禮敬菩薩旋繞七匝(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1쪽 하〉

고 一萬 가짓 뎍 닷 因을 가비니 이 因으로 부텨  果 莊嚴·탓 디라〈월석 4:46ㄱ~ㄴ, 협주 저경 미상〉

이 동사는 유일하게 『교학 고어사전』에만 표제어로(이는 표제어가 정음표기이나, 예문의 해당 어휘는 ‘莊嚴-’와 같이 어근이 한자로 되어 있음) 실려있는데, 장엄(莊嚴)의 본 뜻은 본시 불교용어로서, ‘공덕장엄(功德莊嚴)’은 ‘공덕을 갖춤’의 뜻이고, 또 ‘교식(交飾)’, ‘장(莊)과 장(裝)’ 자가 통용되어 ‘치행장(治行裝)’의 뜻도 있었던 것이 실상이라고 보았다. 여러 문헌의 용례로 보아도 15세기는 물론 17세기까지도 ‘꾸밈’이란 뜻이었다 했다.

그리고 “이 낱말의 의미가 바뀌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총독부의 〈조선어 사전〉(1920)에 “嚴かなること”, J. S. Gale의 〈한영 대자전〉(1931)에 “To be magnificient”, 문세영 〈조선어 사전〉(1940)에 “엄숙한 것” 등으로만 풀이된 데에 영향이 있을 것 같다. 고어사전은 물론 현대어 사전에서도 ‘교식(交飾)’이라는 불교적인 의미를 추가해야 하고, 특히 옛 문헌을 주석할 때 주의해야 할 일이다.”라고 주장 했다.

필자도 동의하면서 참고로 『한한대사전』〈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9~2008〉의 ‘장엄(莊嚴)’ 항목의 뜻을 옮겨 둔다.

장엄(莊嚴)

一. 단정하게 꾸밈.

二. 장중하고 엄숙함.

三. 문사(文辭)가 전아(典雅)하고 장중함.

四. 건축물이 성대하고 매우 정연함을 이르는 말.

五. 1. 좋은 물건으로 국토를 성대하게 장식함.

2. 탑을 세우거나 부처를 꾸밈.

3. 보살의 상(像)이 장중하고 위엄스러움을 이르는 말.

4. 복덕(福德) 등으로 심신을 정화함.

18) ·랍·다 (형) 가렵다.

우리 天女ㅣ로니 오 우리 모 太子 받노다 ·라 ·도 잘 디·기··며싀저·리 도 잘 주므르노니 太子ㅣ 시란 져근덛 누 쉬시며 甘露 좌쇼셔 고〈월석 4:6ㄴ~7ㄱ〉

我是天女六天無雙 今以微身奉上太子 我等善能調身按摩 今欲親近坐樹疲極 宜須偃息服食甘露 即以寶器獻天甘味(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1쪽 하〉

cf. 헌 해 면 瘡이 져기 랍거든 고  라와 디 몯리어든 즉재 살 〈구급방 하:3ㄱ〉

알거든 면 즉재 알디 아니고 몬져 랍거든 알록 라(癰疽發背巳潰未潰及諸毒腫葀)〈구간 3:25ㄱ〉

이 ‘랍-〔痒〕’은 종래 『구급방』이나, 『구급간이방』의 16세기 복각본들로 알려져 있는 것인데, ‘이 문헌’에서 보이는 것이 그래도 앞선 것으로 보아, 사전의 예문으로 앞에 놓여야 할 것이다.

19) 디·기·다 (동) 찍어 긁다.

예문은 18)과 같음.

cf. 네 긴 손으로 날을 딕여 주고려 내 뎌 디기디 못로다(…我不搯他)〈박통 하:6ㄴ〉

종래의 사전에서, 『이조어 사전』은 ‘눌러 짜다’, 『우리말 큰사전』은 ‘딕이다, 긁는 셈으로 쪼다’, 『교학 고어사전』은 ‘눌러 짜다’로 해놓았다. 그런데 이의 저경은 18)에 보인 바와 같이 ‘안마(按摩)’를 옮기면서 ‘라 도 잘 디기며 싀저리 도 잘 주므르노니’로 풀어서 쓴 대목이어서 그 뜻에 대응되는 한자를 알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박통사언해』의 예문을 참고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 ‘도(搯)’는 한한사전에 그 뜻이 ‘꺼내다, 치다(때리다, 두드리다), 뽑다, 뽑아내다’ 등으로 풀이되는 것인데 김동소 교수는 ‘찍어 긁다’로 풀이했다.

20) 싀저·리·다 : (동) 시고 저리다. (손발이) 쑤시고 아프다.

예문은 18)과 같음.

cf. 손발이 싀저려 알파 거름 거로매 어려워  병 벅버기 다 퓽귓 병이니 다 더운 수레 라 머기라(手脚疼痛行止難辛應是風氣用熱酒磨下)〈신선태(1497) 15ㄴ~16ㄱ〉

이 동사는 종래의 사전에서 볼 수 없는 것이나, 비교적 늦게 알려졌고(안병희 1991), 국어학적인 연구는 정우영(1993)에서, 이의 역주는 김문웅(2009)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참고로 보인 예문의 원문의 ‘동통(疼痛)’을 풀이한 것이어서 그 뜻을 파악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래서 김동소 교수는 ‘싀-〔酸〕’와 ‘저리-〔痲〕’의 복합어로 보아 ‘시고 저리다’로 하였다. 정우영(1993:92) ‘시고 저리다. 시근거리고 아프다’, 김문웅(2009:77) ‘시큰하고 저리다’로 한 것이 참고된다.

21) ·잠·개 : (명) 날이 있는 무기(武器).

ㄱ-1) 魔王이 더 怒야 十八億 兵馬 모도니 變야 …… 온가짓  외며 블도 吐며 뫼토 메며 (울에 번)게 며 잠개 가져〈월석 4:8ㄱ〉

ㄴ-1) 우흐로셔 브리며 더 쇠며 갈히며 슬히며 잠개히 虛空애 섯비주 菩薩 갓가 오 몯더니〈월석 4:12ㄱ〉

ㄱ-2) 魔王益忿更召諸鬼神王 合一億八千萬衆 皆使變爲師子熊羆 兕虎象龍 牛馬犬豕 猴猨之形 不可稱言 蟲頭人軀 蚖蛇之身 黿龜之首 而有六目 或一頸而多頭 齒牙爪距擔山吐火 雷電四繞擭持戈矛 菩薩慈心不驚不怖 一毛不動光顏益好 鬼兵不能得近(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4쪽 상〉

ㄴ-2) 當閻羅王宮上 告勅諸鬼 汝等獄卒及閻羅王 阿鼻地獄刀輪劍戟火車爐炭 一切都舉向閻浮提 魔王震吼勅諸兵衆 速害瞿曇 上震大雷雨熱鐵丸 刀輪武器交橫空中 然其火箭不近菩薩(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2쪽 상〉

cf. 一毫도 아니 뮈시니 鬼兵 모딘 잠개 나드디 몯게 외니〈월곡 69〉

兵 잠개 자 사미오〈월석 서:6ㄴ〉

小三災 갈잠개와 주으륨과 病괘라〈법화 2:36ㄱ〉

갈잠개예 허러(刀兵所傷)〈구간 1:57〉

‘잠개〔兵器〕’는 참고에 보인 바와 같이 이미 『월인천강지곡』이나 『월인석보』에 알려진 것이지만 ‘〔刃〕’과 결합한 합성어로는 ‘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저경의 〈석가보〉에는 ‘擭持戈矛(‧잠‧개 가‧져)’ 또는 ‘刀輪武器(‧갈히‧며 슬‧히‧며 ‧잠‧개‧‧히)’로 되어 있어서 그 뜻은 ‘〔刃〕이 있는 무기’로 보는 데 따른다. ‘갈〔刀〕잠개, 兵잠개’ 등의 결합형은 15세기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혹, ‘-〔飛〕+잠개[날아다니는 무기]’로 볼 가능성도 있으나, 이 경우 ‘-’의 방점이 없는 것이 난점이다.

22) 마·촘 ·해 (합성어) 근처. 근방.

波旬이 … 제 寶冠 바사 閻羅王宮 마촘 해 견져 한 귓것 알외야 너희 獄卒와 阿鼻地獄앳 연자 갈히며 슬히며 火爐ㅣ며 다 가져 閻浮提로 오라 야 뫼호고〈월석 4:11ㄱ〉

魔復更念此衆或不能降伏瞿曇 復脫寶冠擬地 當閻羅王宮上 告勅諸鬼 汝等獄卒及閻羅王 阿鼻地獄 刀輪劍戟火車爐炭 一切擧向閻浮提(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3쪽 하〉

cf. 竈下黃土 가‧마 믿 마‧촘 아‧랫 ‧누런 ”〈구간 1:25ㄱ〉

伏龍肝 가‧마 믿 마‧촘 아‧랫  〈구간 1:85, 2:22ㄱ, 2:94ㄴ, 2:95ㄱ, 2:105ㄱ, 6:33ㄱ〉

竈心土 솓 믿 마‧촘 아‧랫 〈구간 2:37ㄱ, ㄴ〉

竈心土 가‧마 믿 마‧촘 아‧랫 〈구간 2:59ㄱ, ㄴ〉

釜月下土 가‧마 믿 마‧촘 아‧랫 〈구간 2:17ㄱ〉

저경으로 보이는 『석가보』에서 이 부분은 의역이어서 이 합성어에 대응되는 한자어는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구급간이방언해』(복각본)에는 참고로 보인 바와 같이, 이 명사가 여러 번 씌었으나, 여전히 그 뜻을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여기서 다음 『노걸대언해』의 예문이 참고된다.

네 遼東 잣 안 어늬 마셔 사다(你在遼東城裏那些個住)〈노걸 상:43〉(평양감영판)

이 대목을 『번역 노걸대』와 『중간노걸대 언해』에는 다음과 같이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네 遼東 ‧자‧새 어‧느 녀‧긔‧셔 :사‧‧뇨〈번역 노걸대, 상:48ㄱ‧ㄴ〉

너희 遼東ㅅ 城 안 어셔 사다〈중간노걸대 언해, 상:44ㄴ〉

이러므로 ‘마촘/마’의 뜻은 ‘부근, 근방’ 정도로 생각되고, ‘이 문헌’의 ‘마촘 해’는 ‘근처, 근방’으로 김동소 교수는 마무리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91년 이래, ‘한글 고전 역주사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위의 『구급간이방 언해』(2008) 2권, 3권도 간행된바, 여기에 ‘마촘’을 풀이한 것이 있어서 덧붙여 두기로 한다.

배꼽처럼 볼록한 곳.〈남성우 2008:55, 65, 103, 156〉

볼록한 곳.〈남성우 2008:247〉

가까운 곳.〈남성우 2008:273〉

맞춤. 가까운 곳. 바로.〈김문웅 2008:73〉

맞춤. 여기서는 ‘똑바로’라는 뜻이다.〈김문웅 2008:108〉

맞춤. 똑바로.〈김문웅 2008:110〉

23) 달·호·다 (동) 다루다. 다스리다.

獄卒 地獄‧앳 罪人 달‧호 거시라〈월석 4:11ㄴ〉

cf. 그‧  바‧ 아‧‧리 出家‧‧야 … 그 집 門 몰라 드리라 보니 地獄‧티 사 달‧호거‧늘 두리여 도로 나오려 더니〈석상 24:14ㄴ〉

이 동사는 참고에 보인 바와 같이 이미 『석보상절』에서 씌어 사전에도 실렸으므로 생소한 것은 아닌데, 초기 문헌에 흔하지 않다고 해서 김동소 교수는 희귀어에 넣어 놓았다.

24) (:말) 겻·구·다 (동) (말로) 겨루다.

魔王이 다시 兵馬 니와다 려와 제 나 菩薩 드 말 겻·구·더·니 菩薩이 智慧力으로  누르시니 즉자히 地動니 魔王이며 제 귓것히 다 갓고로디니라〈월석 4:14ㄴ〉

cf. 時魔王自前與佛相難 菩薩以智慧力 伸手按地應時地動 魔與官屬顛倒而墮(석가보, 석가강생성불연보 제4의3(출 관불삼매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32쪽 상〉

魔王益忿 更召諸鬼神王 … 魔王自前 與佛相難詰…(석가보 석가강생성불연보 제4의3(출 서응본기))〈대정신수대장경 제50, 34쪽 상〉

이 동사도 23)의 ‘달호다’와 같이 이미 알려진 것이나, ‘말’과 결합하는 예는 찾기 힘들므로 희귀어에 포함시켰다 한다. 〈석가보〉의 한문은 ‘상난(相難), 상난힐(相難詰)’에 대응된다.

25) 갓·고·로디다 (동) 거꾸러지다. 넘어지다.

菩薩이 智慧力으로  누르시니《力은 히미라》 즉자히 地動니 魔王이며 제 귓것히 다 갓·고·로디·니·라〈월석 4:14ㄴ〉

菩薩以智慧力 伸手按地應時地動 魔與官屬顛倒而墮 已降魔怨成正真覺(석가보 석가강생석종성불연보 제4의3)〈대정신수대장경 제50, 32쪽 상〉

cf. 네헨 구슬로 뮨 幢이 갓·고·로디·며 如意珠를 일코〈석상 23: 26ㄴ〉

이 동사도 『석보상절』이나, 『두시언해』에 씌어 사전에 다 나와 있으므로 새로울 것이 없다. 이는 물론 통사적 합성어로 본다.

26) 니 (부) 찬찬히. 차근차근. 차분히.

妙法법은 微妙 法이니 나다나디 아니‧야 니 기푸미 微오 至極야 말로 몯 다 닐오미 妙ㅣ라〈월석 4:15ㄱ〉

*이는 『월인천강지곡』 기 75의 주로서 본시 『월인천강지곡』 초간본에는 없었던 것임.

cf. 해 이 관원이  니 며 계 크다(咳這官人好尋思計量大)〈번박 상:24ㄱ〉 니 다(謂循次歷審無攙越之意)〈노박집 단자해 2〉

해 네 너므 다(該你㢤細祥)〈번박 상:33ㄱ〉

네 그리도록  을 혜언든(料着你那細詳時)〈번박 상:64ㄱ〉

이 부사는 16세기 문헌이지만 『번역박통사』에 이를 파생시킨 형용사를 볼 수 있으므로, ‘+이〉히〉이〉니’를 상정할 수 있다. ‘니’를 여기 올려놓은 것은 “초기 훈민정음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사전의 종래 예문에 앞서 『월인석보』의 이 용례를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27) 저즐다 (동) 저지르다.

作 지 씨니 所作 저즈다   마리라〈월석 4:18ㄴ〉

cf. 盜賊ㅣ 곧 能히 저즐고(賊卽能爲)〈선가 상:28ㄴ〉

다 너희 婦人의 저즈는 배니라(皆汝婦人所作)〈어내훈 3:37ㄱ〉

盜賊ㅣ 곧 能히 저즐고(賊卽能爲)〈선가 상:28ㄴ〉

이 동사는 ‘저즐-’의 활용형에서 ‘ㄹ’ 탈락형으로 후대의 문헌에 보이는데, 사전 예문으로 표제어 다음에 실어야 할 것이다.

28) 사·오납·다 (형) 사납다. 억세다. 나쁘다. 못나다.

十力 世尊ㅅ 弟子 혼 이리라 우리 히미 사·오나· 현마 그르디 몯리니〈월석 4:23ㄱ〉

梵天答言十力世尊弟子所作 我力微弱終不能解(아육왕전, 상나화수인연)〈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9쪽 상〉

네 衆生 여려(*러) 根이 어딜며 사·오나·  아실 씨오〈월석 4:23ㄴ〉

cf. 그 中에  느룸과 사·오나··과· 一定딘댄〈석상 19:10ㄱ〉

(그 中에 優劣을 一定딘댄〈월석 17:56ㄴ〉)

優 더을 씨오 劣은 사·오나··씨·라〈월석 17:57ㄱ〉

참고에 보인 바와 같이, ‘사오납-’은 ‘우열(優劣)’의 ‘劣’로서 그 사전적 뜻은 1)못하다, 2)적다, 3)낮다(수준, 정도, 지위), 4)약하다, 5)어리석다, 6)겨우, 간신히〈한한대사전, 동아출판사〉 등인데, 고어사전에서는 이 여러 가지 뜻의 어느 한 가지로 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ㄱ) 사납다, ㄴ) 억세다, ㄷ) 나쁘다 〈이조어사전〉,

ㄹ) 사납다, ㅁ) 좋지 않다, ㄷ) 못나다, ㄹ) 억세다, ㅁ) 약하다 〈교학 고어사전〉,

ㅂ) 사납다, ㅅ) 모자라다 〈우리말 큰사전 ‘옛말과 이두’〉

등으로 옮겼다. 이는 그 쓰인 문맥에 따라 옮기다 보니 부차적인 뜻으로까지 확대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김동소 교수는 이는 “현대어의 ‘사납다, 나쁘다’보다 ‘어딜다’의 상대 개념인 ‘劣’의 뜻으로 더 많이 쓰였다.”고 했다.

29) (:·샬뗴)· (보조사) -야.

魔王이 너교 如來ㅅ 弟子 勢力을 大梵天王도 이리 恭敬니《勢力은 威嚴엣 히미라   마리라 恭 버릇업디 아니 씨오 敬은 고마 초심 씨라》 부텻 勢力이 어드리 그지료 나 소교려 샬뗴 므슷 이 몯시료 마 큰 慈悲心로 나 어엿비 너기샤 내그 셜 이 아니시닷다〈월석 4:24ㄴ~25ㄱ〉

魔見如來弟子勢力大梵天王猶言語恭敬 佛之勢力何可度量 若欲加惱於我何事不能 大悲憐愍故不加惱於我 (아육왕전 권5 상나화수인연 제9)〈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9쪽 상〉

이 표기는 『용비어천가』라면 ‘나 소교려  뎨’로 표기했을 텐데, 『석보상절』에서는 ‘샬 뗴’로, 『월인석보』에 오면 위 두 가지 표기법이 혼용된다 하고 어떤 원칙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하고, 이 부분을 ‘나를 속이려 하실 저 분이야’의 뜻으로 보았다.

필자는 이를 부연해서, ‘샬뗴’를 ‘-+시+오/우+ㄹ뗴(가정의 연결어미)+(강세의 보조사)’로 분석하여 ‘…하실 바에야’로 풀이해 보았다. 문맥으로 보아서는 좀 나은 것이 아닌가 한다.

30) 辱 바·티·다 (동) 욕 입히다. 욕 받게 하다.

如來 어엿비 너기샤  번도 아니 구지즈시니 尊者 阿羅/(28ㄴ)漢이샤 어엿비 너기실  아니샤 天人 阿修羅ㅅ 알 나 辱바티시니가〈월석 4:28ㄱ~ㄴ〉

如來慈愍乃至未以一惡言而見輕毀 汝阿羅漢無悲忍心於天人阿修羅前毀辱於我(아육왕전, 상나화수인연)〈대정신수대장경 제50. 119쪽 중〉

이는 ‘辱+바티-〔呈〕’로 ‘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으로 희귀어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다.

31) 올다 (형) ?노을처럼 붉다.

紫金은 올 金이라〈월석 4:34ㄴ〉

cf.  蓮련花황ㅣ 소‧사‧나아 ‧므‧레 ‧디‧니 그 고‧지 올‧고 貴‧귕 光明‧이 잇‧더‧라〈석상 11(복각본):31ㄴ〉

其華紅赤有妙光〈석가보 대방편불보은경 권3〉

위의 참고를 보면, 〈석가보〉 예문의 ‘其華紅赤’, ‘이 문헌’에서는 ‘紫’에 해당된다. 종래의 사전에는,

불꽃처럼 밝다〈이조어사전〉, 〈교학 고어사전〉

불꽃처럼 환하게 붉다〈우리말큰사전〉

로 풀이한바, 김동소 교수는 이는 ‘紫’의 뜻에 알맞다고 보기 어려워, 그 구성을 ‘노을〔霞〕+븕다〔赤〕’로 보고, ‘노을/노’ 이표기에서 ‘올’을 상정하고, 모음조화 표기법에 따라 ‘븕다’를 ‘다’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노을처럼 붉다’로 보면 ‘紫’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뒷날의 연구로 미룬다고 했다.

32) 늘·의·다 (동) ? 늘어지다. 해이(解弛)해지다. 무지러지다.

十八不共法은 열여듧 가짓 아니  法이니 부톄 오 두시고 二乘과 디 아니 씨라 나핸 … 닐구벤 됴 일 고져 홀 미 늘의디 아니실 씨오 여들벤 精進샤미 늘의디 아니실 씨오 아호밴 조 念이 늘의디 아니실 씨오 열헨 智慧 늘의디 아니실 씨오 열나핸 버서나샤미 늘의디 아니실 씨오 열둘헨 알며 보샤미 늘의디 아니실 씨오〈월석 4:42ㄱ〉

十八不共法: 1. 諸佛身無失, 2. 口無失, 3. 念無失, 4. 無理想, 5. 無不定心, 6. 無不知己捨心, 7. 欲無, 8. 精進無, 9. 念無, 10. 慧無, 11. 解脫無, 12. 解脫知見無, 13. 一切身業隨智慧行, 14. 一切口業隨智慧行, 15. 一切意業隨智慧行, 16. 智慧知見過去世無閡無障, 17. 智慧知見未來世無閡無障, 18. 智慧知見現在世無閡無障〈대품반야경 권5 광승품〉, 〈법화 2:11ㄱ~ㄴ〉

〈법화경언해 2:19ㄴ~20ㄱ〉 주에 나온 것을 참고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十八不共法은 나 모매 허믈 업스샤미오 둘흔 이베 허믈 업스샤미오 세흔 念에 허믈 업스샤미오 네 다 想 업스샤미오 다 一定티 몯  업스샤미오 여스슨 알오 리디 아니시니 업스샤미오《… 주 …》 닐구븐 欲이 더룸 업스샤미오《…주…》 여들븐 精進이 더룸 업스샤미오 아호 念이 더룸 업스샤미오 열흔 慧 더룸 업스샤미오 열나 解脫이 더룸 업스샤미오《… 주 …》 열둘흔 解脫知見이 더룸 업스샤미오 열세 一切 身業이 智慧行을 조샤미오 열네흔 一切 口業이 智慧行을 조샤미오 열다 一切 意業이 智慧行을 조샤미오 열여스슨 智慧로 過去世 아샤 마  업스샤미오 열닐구븐 智慧로 未來世 아샤 마  업스샤미오 열여들븐 智慧로 現在世 아샤 마  업스샤미라

cf. 太子ㅣ 粥 좌신 後에  녜 거시 憍眞如 다 사미 보고 修行이 늘의샷다 너겨 다 제 잇던  도라니거늘〈석상 3:41ㄱ~ㄴ〉

吉慶 계우샤 늘의어신 맷 길헤〈악학 5:12〉

이 ‘늘의-’의 뜻은 예문 등을 참고로, 종래의 사전에는 ‘느리다’로 해 놓았는데, 김동소 교수는 이를 ‘늘어지다, 해이(解弛)해지다’로 보았으며, ‘십팔불공법’의 번역으로 보이는 위 예문에서는 한문의 ‘감(減)’ 자에 대응되는 것이므로, 이 글자의 ‘덜다〔損〕, 빼다〔損其數〕, 무지러지다〔盡〕’란 뜻 중에서 ‘무지러지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법화경언해〉에서 이 대목은 ‘더룸’으로 되어 있어서 현대어로 옮긴다면 ‘덜음(없으심이고)’이 된다.

33) 뎐·톄·로 (부) 차례로 번갈아.

如來 成佛야시 햇 神靈이 虛空ㄱ 神靈 알외며 虛空ㄱ 神靈이 하 神靈 알외야  노 하 우희 니르리 뎐·톄·로 알외더라〈월석 4:44ㄴ〉

cf. 西天ㅅ 부텨와 祖師왜 뎐‧톄로 서르 傳샤 大地디옛 衆生 어드우믈 슬우시놋다(西天佛祖遆相傳 大地衆生消黑暗)〈진언권 43ㄴ〉(1496)

이는 한자 ‘전체(傳遞)’를 정음으로 표기한 것으로서, ‘차례로 번갈아’의 뜻인데, 종래는 『진언권공』의 예문으로 알려졌으나, ‘이 문헌’의 용례가 나와서 사전의 표제어 다음에 실어야 할 것이다.

34) ·사 (·리로·다)

如來 너기샤 내 得혼 妙法을 너비 펴아 世界 利케 사 리로다 샤〈월석 4:46ㄱ〉

이제 히 涅槃사 리로다”〈월석 4:47ㄴ〉

종래의 중세국어 문법서에서 여기 ‘-사’의 문제를 다룬 것은 김동소 교수가 지적한 대로 고 허 웅(1975:562) 님의 다음 글이 유일한 것이다.

그(극)히 드문 예로서 도움 풀이씨 「다」를 접속하여 ‘당위’를 나타낸다.

히 說法 마오 涅槃애 어셔 드사 리로다 다가〈석보 13:58〉

참고로, 같은 사실을 기술한 법화경의 글을 보인다.

내 히 說法 말오 涅槃애 리 드로리라타가 =我寧不說法고 疾入於涅槃호리라타가〈법화 1:235〉

이것은 한 씨끝으로 보아야 할지 의문이나, 우선 여기 실어 두고 뒷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와 같이 인용하고, 이 ‘-사’는 특수 보조사 ‘’와 어떤 관계가 있을 듯하나 뒷 연구를 기다리기로 한다고 한바, 필자도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다.

35) ·질·들·다 (동) 길들다.

뎌 바지히 녜 두 ·질·든 쇼 앏 셰여 니더니〈월석 4:54ㄱ〉

彼等商主 別有一具調伏之牛 恒在先行 (若前所有恐怖之處 而彼一具調善之牛 如打橛縛駈不肯行) 彼等商主 別有一具調伏之牛 恒在先行 (若前所有恐怖之處 而彼一具調善之牛 如打橛縛駈不肯行)(불본행집경 권32, 2상봉식품 하)〈대정신수대장경 제3, 801쪽 상~803쪽 중〉

cf. 녜 사 븓던 젼로 사게 ·질·드·니(昔依人故馴服於人) 〈능엄 8:122ㄴ〉

이 ‘질들-〔馴〕’은 〈능엄경 언해〉에 처음 보이는데, 복각본이긴 하나, ‘질들-’의 용례를 『월인석보』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길들-’ 『십구사략언해』(1772), 『몽어유해 보편』(1790) 등에 보이므로, 18세기 중반에 ‘질들-’에서 과잉 수정으로 ‘길들-’로 바뀌었다고 보아 왔다.

36) 荒唐히 (부) 황당하게.

王이 …… 環刀  仙人ㅅ 手足 베텨늘[手 소니오 足 바리라] 仙人이 아라토 아니코 겨시거늘 王이 荒唐히 너겨 무〈월석 4:66ㄴ〉

cf. 太子이   낟곰 닐웨예  낟곰 좌시고 여슷  히쥣도 아니샤 한비도 오며 울에도 며 녀르미여 겨리여  도 아니코 안잿거시든 머리예 가치 삿기 치더니 사미 보고 荒唐히 너겨 프리며 남기며 고콰 귓굼긔 더뎌도 앗디 아니시더니〈석상 3:38ㄱ~ㄴ〉

妖怪 常例디 아니 荒唐 이리라〈석상 9:24ㄱ〉

비두리 모다 오거든   새 廬에 와 사더라〈삼강 효25〉(1481)

寥寥야  것도 업소 히 너기디 말라〈금삼 4:9ㄴ〉

참고에 보인 바와 같이, 당시에는 형용사 ‘황당(荒唐)-’와 그 파생 부사 ‘荒唐히’가 한자어로는 물론 정음 표기로도 쓰였으므로, 여기서 파생된 부사도 널리 쓰인 것으로 보여, 고어사전에 모두 표제어로 나와 있다. 이를 여기 희귀어 속에 포함시킨 것은 ‘히’의 예문이 한자어로 된 〈석상 3:38ㄴ〉, 〈월석 10:7ㄴ〉, 〈법화 3:55ㄱ〉 등이고, 정음 표기 예문 〈내훈 3:45ㄱ〉, 〈금삼 4:9ㄴ〉, 〈육조 상:43ㄱ〉 등에서 인용된 것이 있으므로, ‘이 문헌’의 용례를 한자 표기어보다 앞에 둘 것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

37) ·리막·다 (동) 가려막다.

閻羅 ·리막·다 논 디니 모딘 일 지믈 ·리마·· 閻羅ㅣ라 니라〈월석 4:11ㄱ〉

이 동사는 위에 보인 바와 같이 ‘이 문헌’의 ‘협주’의 일부로 나오는 것으로 중세국어 유일의 예문으로서, 하나는 기본형이고 다른 하나는 활용형이다. 그런데 이것이 김동소 교수의 희귀어에 빠진 것은 단순한 착오로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이 합성어는 ‘리다〔障〕’와 ‘막다〔防〕’라는 두 동사의 합성어이고(리막다), 또한 ‘리둪-, 리-, 리-, 리얼-’과 같은 합성도 있어서, 낯익은 동사로 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동사의 용례는 전혀 새로운 것이어서, 여태까지 고어사전의 표제어로도 등록된 적이 없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새로 등재해야 할 것이다.

38) 다 (형) 성하다. 신선하다.

그 나랏 王 梵摩達이 鹿野苑에 山行거늘 善鹿王 惡鹿王이 眷屬과 다 모리예 드러 잇더시니 善鹿王이 王 나 드러 샤 우리 一千 사미  주그면 고기 물리니 王이 恩惠 내샤  나콤 供上게 시면《供上 우희 받 씨라》 王도  고기 좌시고 우리도 리나 더 살아지다〈월석 4:63ㄱ~64ㄱ〉

cf. 고와 이랏과 여러 가지  과시를(杏兒櫻桃諸般鮮果)〈번박 상:5〉

믈읫 거시 코 맛나면 반시 쳔신고(凡物鮮味雖微必薦)〈동국신 열1:53〉

釋種이 盛 加夷國에 리샤〈월인 상:5ㄱ〉

토 平며 나모도 盛더니〈석상 6:23ㄴ〉

내 모맷 光明이 無量 無數 無邊 世界 盛히 비취여〈석상 9:4ㄱ〉

이는 이미 참고에 보인 바와 같이 〈번역박통사〉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보이므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그 용례로 ‘이 문헌’의 것을 앞에 놓아야 할 것이다. 또한, 참고에 보인 한자 표기 ‘盛-’(상-평)는 〈교학 고어사전〉에 ‘-〔鮮〕’(평-평)와는 성조로 구별되어, 표제어가 달리 설정되었음을 덧붙여 둔다.

39) 수고(受苦) ·다 (형) 고통 받음이 괴롭다.

苦趣 受苦  갈 씨니 地獄 餓鬼 畜生히라〈월석 4:43ㄴ〉

cf. 衆生 버서날 이 아니야 六趣에 뇨 受苦 주를 모 어즐다 니라 〈석상 3:20ㄴ〉

福이 다면 도라 려 맨 受苦 길로 가니 엇뎨 受苦 因緣을 닷가 受苦  果報 求다 샤〈석상 3:34ㄱ〉

種種 受苦 病얫다가 내 일후믈 드르면 다 智慧 잇고〈석상 9:7ㄱ〉

雜말 업시 淸淨고 겨지비 업스며 惡趣ㅣ며 受苦 소리 업고 惡趣는 머즌 길히니〈석상 9:10ㄴ〉

種種 受苦 病 얫다가 내 일후믈 드르면 다 端正고〈월석 9:18ㄱ〉

이 형용사는 어근이 한자어이므로 고어사전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참고에 보인 것처럼 중세국어 시대는 제법 많이 쓰인 어휘로 볼 수 있다.

4. 마무리

4-1. 이 『월인석보』제4는, 16세기 전반의 복각본으로 남권희 교수에 의하여 고문헌 소장가인 김병구(金秉九) 님의 자료에서 확인 발굴된(1996) 것으로, 1997년 경북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 간행되었고, 이후 소장처는 2010년 청주고인쇄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그 내용은 팔상도(八相圖)의 ‘수하항마(樹下降魔)에서 석존이 성도하여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녹원전법(鹿苑轉法)까지의 이야기며, 그 한문 저경은 석가보, 석가씨보, 아육왕전, 불본행집경, 대지도론, 현우경 등이라고 본다. 본문은 66장(? 2장 낙장)이고, 본문 격인 〈월인천강지곡〉은 기 67에서 기 93까지 모두 27곡(약 25면)과 이에 대한 주석인 〈석보상절〉 부분이 약 107면에 실려 있다.

4.2. 희귀어

희귀어 39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으로 고어사전에 새로 표제어로 등록되어야 할 것은 다음 17 항목이다.

1) 거티다 3) 슬히/슳 4) 구세디르다 5) 섯빚다

6) 환다 7) 블눋다 8) 헤듀티다 10) 닉젓다

11) 되다 12) 뎐디위다 13) 섭섭얼현다 14) 다

15) 과다 16) 모리 21) 잠개 30) 辱바티다

31) 올다

둘째: 종래에 이미 알려져 있으나, 의미의 수정이 필요한 4 항목이 있다.

17) 엄(莊嚴)다 19) 디기다 28) 사오납다 32) 늘의다

셋째: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나, 사전의 예문이 후대의 것이어서 ‘이 문헌’의 예문을 표제어 다음에 올려야 할 것이 8 항목이 있다.

18) 랍다 20) 싀저리다 22) 마촘 26) 니

27) 저즐다 35) 질들다

넷째: 종래에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나, 다만 그 용례가 희귀하므로 소개한 것이 5 항목이 있다.

23) 달호다 24) (말) 겻구다 25) 갓고로디다 33) 뎐톄로 36) 히

다섯째: 그밖에 표기와 관련된 것이나, 오자로 보아 추정한 것 등 4 항목 있다.

2) 기라 9)  주검 29) 샬 뗴 34) 사 (리로다)

여섯째: 새로운 동사 용례 하나와 의미 관련으로 필자가 새로 추가한 것이 3 항목이다.

37) 리막다 38) 다 39) 수고(受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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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13에 대하여

장세경(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부처는 대중을 상대로 설법할 때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실례(實例)나 우화(寓話) 등을 들어 설명하였다. 부처는 중생의 감당할 수 있는 힘에 맞추어 갖가지 다른 교를 설법했지만 목적은 동일한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보이는 비유와 부처의 법신은 불멸이며 보편하다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비유가 7가지인데 본 월인석보 제13에는 신해유(信解喩), 약초유(藥草喩), 수기유(授記喩)가 실려 있다.

신해유는 묘법연화경 28품 가운데 제4경이다. 궁자유(窮子喩)라고도 하는데 남의 말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자기 마음속으로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장자(長者)와 가난한 아들〔窮子〕의 이야기를 비유하였다. 아들이 어려서 집을 나가 유랑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아버지 나라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났는데 너무 부자여서 두려워 도망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잡아다가 여러 방법으로 달래어 제 자리에 돌아오게 하였다. 이것은 부처가 스스로 성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살로서의 자각을 갖게 만드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약초유는 묘법연화경 28품 가운데 제5경에 있다. 인간(人間)과 천상은 소초(小草)에, 보살은 대초(大草)에 비유하고 있다. 약초에는 대중소(大中小)의 차별이 있으나 비가 내리면 함께 골고루 번성하여 병을 고치는 목적을 이룸과 같이 중생에게는 성문, 연각(緣覺), 보살의 구별이 있으나 평등하게 여래의 법우(法雨)를 맞으면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즐거운 과(果)를 얻게 함을 비유한 것이다.

수기유는 묘법연화경 28품 가운데 제6경에 있다. 중근(中根)의 가섭(迦葉) 등 사대성문(四大聲聞)이 소승(小乘)에서 대승(大乘)으로 돌아옴에 부처가 이 네 사람에게 당래(當來)에 부처가 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수기한 내용을 담았다.〈홍법원 편, 불교학대사전 참고〉

묘법연화경은 28품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각각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품 서품(序品), 제2품 방편품(方便品), 제3품 비유품(譬喩品), 제4품 신해품(信解品), 제5품 약초유품(藥草諭品), 제6품 수기품(授記品), 제7품 화성유품(化城喩品), 제8품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제9품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제10품 법사품(法師品), 제11품 견보탑품(見寶塔品), 제12품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제13품 권지품(勸持品), 제14품 안락행품(安樂行品), 제15품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제16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7품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제18품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제19품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제20품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제21품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제22품 촉루품(囑累品), 제23품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4품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제26품 다라니품(陀羅尼品), 제27품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제28품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다음은 법화경언해 권2와 권3의 내용 중에서 법화경 제4품, 제5품, 제6품 경전 내용만을 뽑아 정리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제13에 인용된 내용의 줄거리이다.

법화경 제4 신해유품(信解喩品) 내용 정리

그때에 <인명 realname="">혜명 수보리와 <인명 realname="">마하가전연과 <인명 realname="">마하가섭과 <인명 realname="">마하목건련이 <인명 realname="">부처님 따라서 미증유의 법과 <인명 realname="">세존이 <인명 realname="">사리불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기(記)를 주심을 듣고 불가사의한 마음을 내어 기뻐 높이 뛰며, 〈<인명 realname="">수보리는 나이와 덕이 많은 사람들보다 높으므로 장로라고 일컬으며, 혹은 구수라고도 하며 혹은 혜명이라고도 이르느니라. 계경에 이르시기를 ‘이 사람이 불법 중에 능히 지혜의 목숨을 얻었다.’고 하신 것이 이것이니라. <인명 realname="">대가섭을 먼저 벌임이 옳거늘 <인명 realname="">수보리를 먼저 놓은 것은 또 당한 근기 때문이니, <인명 realname="">수보리가 공(空) 앎이 제1이고, 성문이 오직 편공을 생각해서 보살의 법을 마음에 즐기지 아니하다가 이제 공의 법을 버리고 실상의 도를 증득하므로 해공인으로 나타내 펴시니 아래에 게송을 설함에 이르러서야 곧 <인명 realname="">가섭에게 당하며 수기함에 미치시어 또 <인명 realname="">가섭에게 먼저 하시니 바른 차례이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가지런히 하고 오른 어깨를 기울게 하여 벗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어 한 마음으로 합장하여 몸을 굽혀 공경하여 존안을 우러러 뵙고 <인명 realname="">부처님께 여쭈되, “저희는 중들의 우두머리에 있으며, 나이가 다 늙었으며, 스스로가 여기기를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하여 더 이상 감당하여 맡을 수가 없어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나아가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예전에 설법을 이미 오래 하시었거늘 저희가 그때에 자이레 있어서 몸이 피로하여 오직 공(空)하고 모양이 없고 지을 것이 없는 것만을 생각하고 보살의 법과 신통력에 노닐어 장난만 하고 <인명 realname="">부처님 나라를 깨끗하게 함과 중생을 성취시킴엔 마음에 즐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명 realname="">세존이 우리들로 하여금 삼계에서 나와 열반을 증득하게 하시며, 또 이제 저희는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한 생각도 즐거운 마음을 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저희가 지금 <인명 realname="">부처님 앞에서 성문들에게 야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 전하심을 듣고 마음에 심히 기뻐하여 미증유한 일을 얻어 오늘 문득 불가사의한 법을 능히 듣자옴을 생각지도 아니하였었는데, 깊이 저희가 경하하여 큰 선리를 얻으니, 그지없는 보배를 구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저절로 법을 얻었습니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저희가 오늘 비유를 즐겨 일러 이 뜻을 밝히겠습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나이가 매우 어려서 아비를 버리고 도망하여 가서 다른 나라에 오래 살기를 혹은 열 살, 혹은 스무 살, 혹은 쉰 살에 이르렀더니, 나이가 이미 늙어 더욱 곤궁해져서 사방에 다녀 옷과 밥을 구하다가, 점점 멀리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본국에 마침내 향하였습니다.

그보다 먼저 그 아비가 아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여 한 성 가운데 머물렀습니다. 그 아비의 집이 매우 부유하게 되어 재물과 보배가 그지없어 금은, 유리, 산호, 호박, 파리, 구슬 등이 그 여러 창고에 다 가득하여 넘치며, 종과 시종과 아전이 많으며 코끼리, 말, 수레와 소와 양이 셀 수도 없었는데, 물건을 내고 들이며 불어나게 하며 이익되게 함이 다른 나라에까지 소문이 가득하며 장수와 거간들이 또 심히 많았더이다.

그때에 가난한 아들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고 국읍을 지나다니다가 제 아비가 있는 성에 다달았습니다.

아비가 늘 아들을 생각하되, 아들 여읜 지가 50여년이로되 잠깐도 남을 향하여 이와 같은 일을 말하지 않고 오직 저 혼자만 생각하고 마음에 후회스러운 측은한 뜻을 품으며, 혼자 생각하기를, ‘늙고 재물은 많이 두어 금은 보배가 창고에 가득하여 넘쳐도 자식이 없으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으면 재물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맡길 데가 없을 것이로구나.’ 하여 이러므로 부지런히 매양 제 아들을 생각하며 또 생각하되, ‘내가 만일 아들을 찾아 재물을 맡기면 시원히 쾌락하고 다시는 시름이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그때에 가난한 아들이 품팔이하여 옮고 옮아서 아비의 집에 마침내 다다라 대문 곁에 서서, 멀찍이 보니 제 아비가 사자상에 걸터앉아 보궤로 발을 받쳤는데, 많은 바라문과 찰리와 거사가 다 공경하고 빙 둘러 싸며, 진주 영락이 값이 천만이나 비싼 것으로 그 몸을 장엄하였으며, 이민과 동복이 손에 백불을 잡고 좌우에 모시고 섰으며, 보배 휘장을 덮고 여러 가지 빛난 번을 드리우며, 향물을 땅에 뿌리고 많은 이름난 꽃을 뿌리며, 보물을 벌이고 내고 들이며 가지며 주어 이러한 갖가지로 장엄하게 꾸며 위덕이 특별히 높으니, 가난한 아들은 아비의 큰 세력 있음을 보고 곧 두려워함을 품어 여기에 왔음을 뉘우쳐 생각하되, ‘이는 혹 왕이거나 혹 왕같은 사람이구나. 내가 용력하여 물건을 얻을 땅이 아니니, 차라리 가난한 마을에 가면 내 힘을 펼 곳이 있어서 옷이나 밥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빨리 달아나더이다.

그때에 부유한 장자가 사자좌에서 아들을 보고 문득 아들임을 알아채고 마음에 매우 기뻐하여 곧 생각하기를, ‘내 재물 창고를 이제 맡길 데가 있도다. 내가 항상 이 아들을 생각하되 볼 수가 없었는데 문득 제발로 내게 왔으니 내 소원에 아주 맞도다. 내가 비록 나이 늙었으나, 아직도 옛날같이 탐하고 아끼노라.’ 하고 곁엣사람을 보내어 빨리 뒤따라 가서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그때에 부리는 사람이 빨리 달려가 아들을 잡으려고 하니 가난한 아들이 놀라서 ‘원수여! 내가 서로 너희를 범한 일이 없는데 어찌 잡으려 하는가?’ 하면서 매우 겁내 울거늘 종이 잡기를 더 급히 햐여 억지로 끌어 데려오니 그제는 가난한 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죄 없이 잡혀 갇혔으나 이는 반드시 죽겠구나.’ 하여 더욱 두려워 고민하여 까무러쳐 땅에 거꾸러지거늘, 아비가 멀리서 보고 종더러 이르기를, “구태여 이 사람을 데려오지 말 것이니, 굳이 데려오지 말고 찬물로 낯에 뿌려 정신이 들게 하고 더이상 더불어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비가 제 아들은 미천하고 못남을 알고 저는 힘 있고 부유하여 아들이 어렵게 여김을 알고 이 아들을 자세히 보아 자기 아들임을 알았으나 방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내 아들이다.”라고 하지 않고 종에게 이르기를, 그에게 “내 이제 너를 놓아 줄테니 네 뜻에 따라 갈 곳을 가거라.”라고 이르라고 시키니, 가난한 아들이 기뻐하여 미증유를 얻어 땅에서 일어나 가난한 마을에 가서 옷과 밥을 구하였더이다.

그때에 장자(부자 아비)가 제 아들을 달래어 끌어오게 하려고 방편을 만들기를, 은밀히 모습이 초췌하고 위덕이 없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보내면서 이르기를, “너희가 저기 가서 가난한 아들더러 천천히 이르기를, ‘여기에 일할 곳이 있으니 네 품값을 갑절 줄테니 가자.’라고 해 보아라. 가난한 아들이 만약 응낙하거든 데려와 일을 하게 하고, 아들이 만일 무엇을 시키려고 하느냐고 묻거든 대답하기를, ‘너를 써서 똥을 치우게 하리니 우리 두 사람도 또한 너와 함께 하리라.’ 하여라.” 하였다. 그때에 심부름하는 두 사람이 곧 가난한 아들을 만나서 이미 얻어 위의 일을 다 일렀습니다.

그때에 가난한 아들은 먼저 그 값을 받고 곧바로 따라 두 사람과 함께 똥을 치니 그 아비가 아들을 보고 가엽게 여기고 황망히 여겼으며, 또 다른 날에는 창문 안에서 아들의 몸이 여위고 시들며 똥과 흙과 티끌이 묻어 더러워 깨끗하지 못한 모습을 멀찍이 보고는, 곧 자신의 영락과 부드러운 옷과 장엄하게 꾸민 것들을 벗고서 거칠고 헌 때묻은 옷으로 갈아입고 티끌을 몸에 묻히고 오른손으로 똥 치는 그릇을 잡고 겉으로 떠는 모습을 하며 다른 모든 일하는 사람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부지런히 하며 게으르지 말라.” 이르고 나서 이윽고 아들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 뒤 이르기를, “어이. 이 사람아. 너는 이제부터 여기서 일을 하고 다시는 다른 곳에 가지 말라. 반드시 너의 품값을 더할 것이니 여러 가지 네가 구하는 그릇과 쌀, 면, 소금, 초 등을 네가 걱정하며 어렵게 여기지 말라. 또 늙고 오래된 종이 있으니 네가 구한다면 너에게 딸려 줄 터이니, 좋게 네 마음을 편안히 하라. 내가 너의 아비와 같으니 다시는 근심을 말라.” 하였고, “어째서 이러는가 하면 내가 나이는 늙고 너는 젊고 장대하니, 너는 항상 일할 제 속이며 게으르며 성내며 원망하고 탄식하는 말이 없고, 네가 이 여러 가지 나쁜 것들이 다른 일하는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볼 수 있었으니, 오늘부터 앞으로는 내가 낳은 아들같이 널 대하리라.’ 하고, 곧 장자가 다시 이름을 짓고 이를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때에 가난한 아들은 비록 이 만남을 기뻐하였으나, 오히려 옛날같이 손으로 일하는 천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겼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20년을 한결같이 똥 치우는 일을 하였더이다. 그렇게 지난 후에야 마음과 몸으로 서로 온전히 믿고서 들고 나며 어려움이 없었으나 그래도 사는 곳은 아직도 본래 있던 초가집에서 살더이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그때에 장자가 병들어 장차 죽음이 오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알고 가난한 아들더러 이르기를, “내가 지금 금은 진보를 많이 두어 창고에 넘치니 그 중에 많고 적음과 가지며 내어줄 것들을 네가 다 알아서 해보아라. 내 마음이 이와같으니 반드시 내 뜻을 받아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너와 곧 다르지 아니하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을 써서 잃어버림이 없게 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때에 가난한 아들은 곧 주인의 교칙을 받아 많은 것, 금은 진보와 여러 창고를 거느려서 알되, 한 그릇의 밥도 구하여 사사로이 가지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는 곳은 그저 본래 살던 곳에 있으면서 낮고 미천하다는 마음을 또 능히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또 얼마간 세월을 지내고서야 아비와 아들의 뜻이 점점 통하고 편안해져서 큰 뜻을 이루어 예전의 마음을 스스로가 더럽게 여기는 줄을 알고 마침내 죽을 제 다다라서야 아들에게 명하여 친척과 국왕과 대신과 찰리와 거사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 마음을 열어 이르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내 아들이다. 내가 낳은 아들인데 아무 성 중에서 나를 버리고 도망하여 달아나 비틀거리면서 모진 고생을 50여년 동안 하더니, 그 본래의 이름은 아무개이고 내 이름은 아무개이니 옛적 본성에 있어서 문득 이 사이에 만나 찾게되었소이다. 이는 실로 내 아들이고 실로 나는 제 아비이니, 이제 내가 지닌 일체의 재물이 다 이 아들의 가진 것이며, 전에 재물을 내고 들였던 것도 아들이 알아서 했던 것이외다.” 하였습니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이제 가난한 아들이 아비의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미증유의 일을 얻어, 생각하기를, ‘내가 본래 구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늘 이 보배 창고가 저절로 이르렀다.’라고 하였습니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매우 부유한 장자는 곧 <인명 realname="">여래이시고, 저희는 다 불자와 같으니, <인명 realname="">여래께서 항상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저희를 아들이라 하시었습니다.

저희가 오늘날에 미증유를 얻어 전에 바란 것이 아닌 것을 오늘 저절로 얻으니, 이는 저 가난한 아들이 그지없는 보배를 얻은 듯합니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저희가 지금 불도(佛道)를 얻었으며 열매를 얻어 누(漏 흘러 샘) 없는 법에 청정안을 얻으니, 저희가 긴 밤(오랜 세월)에 <인명 realname="">부처님의 깨끗한 계(戒)를 지니다가 처음 오늘에야 과보를 얻으며 법왕의 법 가운데서 범행을 오래 닦다가 오늘이야 누 없고 위 없는 큰 과보를 얻으니, 저희가 오늘에야 진실한 성문이 되었습니다. 불도의 소리로 일체 듣게 하며, 저희가 오늘에야 진실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세간(世間), 천인(天人), 마범(魔梵) 등 널리 대중 가운데서 공양 받음이 마땅하리로소이다.

법화경 제5 약초유품(藥草喩品) 내용 정리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인명 realname="">마하가섭과 또 모든 대제자에게 이르시되,

“좋다! 좋다! <인명 realname="">가섭이 <인명 realname="">여래의 진실 공덕을 잘 일렀으니 진실로 (네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인명 realname="">여래가 또 한량없는 무변 아승기 공덕을 두었으니 너희가 만일 한량없는 억겁에 (걸쳐서) 말한다 해도 능히 다 못할 것이다. <인명 realname="">가섭아! 반드시 알아라. <인명 realname="">여래는 이 모든 법에 왕이다. 만일 말함이 있다면 다 헛되지 아니하니 일체법에 지혜의 방편으로 늘여서 설하였으나, 그 설한 법이 다 일체 지혜의 바탕에 다다른 것이다. <인명 realname="">여래가 일체 모든 법의 돌아갈 데를 보아 알며 또 일체 중생의 깊은 마음의 행함을 알아 사무치어 막힌 데 없으며 또 제법에 다 밝게 알아서 모든 중생에게 일체 지혜를 보이느니라. <인명 realname="">가섭아! 견줄진대 3천대천세계의 산천 계곡과 토지에서 나는 초목 수풀과, 또 여러 가지 약초가 종류 여러 가지며 이름과 빛깔이 각각 다르거든, 빽빽한 구름이 가득히 피어 3천대천세계를 다 덮어 일시에 같이 큰 비를 부어 그 젖음이 널리 흡족하면, 훼목 총림과 여러 가지 약초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와 작은 가지, 작은 잎과 중간 뿌리, 중간 줄기와 중간 가지, 중간 잎과 큰 뿌리, 큰 줄기와 큰 가지, 큰 잎과 모든 나무의 크고 작음이 상중하를 따라서 각각 받아들임 있어, 한 구름에서 비 오매 스스로 종류와 성질에 맞추어 나서 자라남을 얻어 꽃과 열매가 피고 여무니, 비록 한 땅에서 난 것이며 한 비에 적심이나 모든 초목이 각각 차별이 있느니라. <인명 realname="">가섭아! 반드시 알아라. <인명 realname="">여래가 또 이와 같아서 세간에 출현한 것은 큰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큰 음성으로 세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에 널리 닿음은 저 큰 구름이 3천대천 국토에 다 덮듯 하여, 그러므로 대중 가운데서 이 말을 일컫기를, ‘내가 <인명 realname="">여래·<인명 realname="">응공·<인명 realname="">정편지·<인명 realname="">명행족·<인명 realname="">선서·<인명 realname="">세간해·<인명 realname="">무상사·<인명 realname="">조어장부·<인명 realname="">천인사·<인명 realname="">불세존이니, 제도하지 못한 사람을 제도하게 하며 알지 못한 사람을 알게 하며 편안하지 못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열반하지 못한 사람을 열반 얻게 하리라. 금세 후세를 신실하게 알아 내가 일체 아는 이이며, 일체를 보는 이이며, ‘도’ 아는 이이며 ‘도’ 여는 이이며 ‘도’ 이르는 이이니, 너희 천인 아수라의 무리가 다 여기에 오라, 법 들음을 위한 까닭이다.’ 하니라.

그때 무수 천만억 종 중생이 <인명 realname="">부처님께 와서 법을 듣거든, <인명 realname="">여래가 그때에 이 중생의 모든 ‘근’의 날카로움과 둔함과 정진함과 게으름을 보아 감당할 바를 좇아 위하여 설법하여 갖가지 한량없는 이들을 다 기뻐하게 하여 훤하게 선리를 얻게 하니, 이 모든 중생이 이 법 듣고 현세에 편안하고 후세에 좋은 곳에 나서 도리로서 즐거움을 받으며 또 다시 법을 얻어 들어 이미 법을 듣고 여러 장애를 여의어 모든 법 가운데 힘에 따라 능히 수행함으로써 차례로 다시 ‘도’에 드니, 저 큰 구름이 일체에 비를 내리면 훼목 총림과 또 여러 약초가 스스로 종성같이 갖추어 적심을 입어 각각 자라남을 얻듯이 하니라. <인명 realname="">여래 설법은 한 모양, 한 맛이니, 이른바 해탈상과 이상과 멸상이니, 마침내 일체 종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 중생이 <인명 realname="">여래의 법을 듣고 혹 지녀 읽고 외워 말씀처럼 수행하여도 얻은 공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어째서인가? 오직 <인명 realname="">여래가 이 중생의 종상과 체성에 어느 일을 염하며 어느 일을 생각하며 어느 일을 닦으며, 어찌 ‘염’하며 어찌 생각하며 어찌 닦으며, 어느 법으로 ‘염’하며 무슨 법으로 생각하며 어떤 법으로 닦으며, 어느 법으로 어느 법을 얻을 줄 알아, 중생이 갖가지 땅에 머무르거든 오직 <인명 realname="">여래만이 실답게 보아 밝게 알아 막힌 데 없으니, 저 훼목 총림 모든 약초들이 상중하의 성품을 스스로가 알지 못하듯이 한 것이다. <인명 realname="">여래는 이 한 모양, 한 맛의 법을 아니, 이른바 해탈상과 이상과 멸상과 구경열반인 상적 멸상이다. 마침내 빈〔空〕 곳에 돌아가니, <인명 realname="">부처가 이를 아나 중생 마음의 욕망을 보고 도와서 지켜 보호하니, 이런 까닭으로 즉시 위하여 일체종지를 이르지 아니하거늘, 너희 <인명 realname="">가섭은 심히 희유하여 능히 <인명 realname="">여래의 수의설법을 알아 능히 믿고 능히 받으니 어찌된 것인가? 모든 <인명 realname="">부처의 수의설법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때에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어 게를 이르시되, ‘유’를 헌 법왕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욕을 좇아 갖가지로 법을 이르느니라. <인명 realname="">여래가 존중하여 지혜 깊고 멀어 이 중요한 것을 오래 잠잠하여 빨리 이름을 힘쓰지 아니하니, 지혜 있는 이는 만일 들으면 능히 믿어 알려니와 지혜 없는 이는 의심하고 후회하여 길이 잃어버림이 될 것이므로 이런 까닭으로 <인명 realname="">가섭아, 힘을 좇아 위하여 일러 갖가지 인연으로 정견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인명 realname="">가섭아! 반드시 알아라. 견줄진대 큰 구름이 세간에 일어 일체를 다 덮듯이 하니, 지혜의 구름이 적심을 품으며 번게 빛이 빛나며 우레 소리 멀리 퍼져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며 햇빛이 가리어 땅 위가 서늘하며 구름이 뭉게뭉게 모여 드리워 퍼져 능히 받아 잡을 듯하면, 그 비가 널리 같아서 사방에 다 내려 흘러 부음이 그지없어 솔토가 가득히 흡족하면, 산천 험한 골 깊은 곳에 난 훼목 약초와 크고 작은 모든 나무와 백곡 묘가와 감자와 포도가 비에 적심에 풍족하지 아니할 것이 없으며 마른 땅이 널리 흡족하여 약초와 나무가 다 무성하니, 그 구름이 낸 한 맛의 비에 초목 총림이 분수를 좇아 적심을 받아 일체 모든 나무의 상·중·하 등이 스스로 크고 작음에 맞추어 각각 생장을 얻어 뿌리·줄기·가지·잎과 꽃·열매와 빛이 한 비에 미쳐서 다 빛남을 얻어 체상 성분의 크고 작음답게 적심이 한가지이로되 각각 더 무성하니, <인명 realname="">부처도 이와 같아서 세간에 나타남이, 견줄진댄 큰 구름이 일체에 널리 덮듯이 한 것이다. 이미 세간에 나서 중생들 위하여 모든 법의 실상을 가리어 부연하여 이르니, 큰 성인 <인명 realname="">세존께서 모든 천인과 일체 중생 가운데 이 말을 펴되 ‘나는 <인명 realname="">여래 양족존이다. 세간에 나는 것이 큰 구름 같아서 일체 시든 중생을 가득히 적시어 다 수고를 여의어 편안한 즐거움과 세간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할 것이니, 모든 천인의 무리가 일심으로 잘 들어 다 여기에 와서 무상존을 뵈어라. 나는 <인명 realname="">세존이라서 능히 미칠 이가 없을 것이니, 중생 편안하게 하려 하여, 그러므로 세간에 나서 대중을 위하여 감로의 정법을 이르니, 그 법이 한 맛이라서, 해탈 열반이니, 한 미묘한 소리로 이 뜻을 부연하여 펴서 늘 대승 위하여 인연을 짓노라. 내가 일체를 보되, 널리 다 평등하여 저 사람과, 이 사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내가 탐착 없으며 또 장애 없어 늘 일체를 위하여 평등히 설법하되, 한 사람 위하듯이 하여 많은 곳에도 또 그리하여 늘 펼쳐 법을 이르고, 잠깐도 다른 일이 없어, 가고 오며 앉고 서는 것에 끝내 가쁨이 없고 세간을 가득히 충족하게 함이, 비가 널리 적시게 하듯 하여, 귀하고 천하며 높고 낮음과 계율 지니며 헒과 위의 가짐과 또 못 가짐과 정견과 사견과 날카로운 ‘근’과 둔한 ‘근’에 한가지로 법우를 내리게 하되 게으름이 없으니, 일체 중생이 내 법 듣는 이가 힘의 받을 곳을 좇아 여러 가지 땅[지위]에 머무르되, 혹 인천전륜성왕제석천범천의 모든 왕에 있는 이는, 이것은 작은 약초이고, 무루법을 알아서 능히 열반 얻으며, 여섯 신통력을 일으키며, 또 3명을 얻어서 혼자 산의 수풀에 있어 늘 선정 행하여 연각을 증득한 이, 이는 중품의 약초이고, <인명 realname="">세존의 계신 곳을 구하여 내가 반드시 <인명 realname="">부처가 되리라 하고 정진 정행하는 이는, 이들은 상품의 약초이다. 또 모든 불자가 불도에 오로지 마음 가지고 늘 자비를 행하여 스스로가 <인명 realname="">부처 될 줄을 알아 결정하여 의심 없는 이는, 이 이름이 작은 나무이고, 신통에 편안히 머물러 불퇴륜을 옮겨 무량 억백천 중생을 제도하는 이와 같은 보살은 이름이 큰 나무이다. <인명 realname="">부처의 평등한 설법은 한 맛의 비와 같거늘 중생의 성품을 좇아 받음이 같지 아니한 것이니 저 초목의 받음이 각각 다르듯 한 것이다. <인명 realname="">부처가 이 비유로, 방편으로 열어 보여 갖가지 말로 한 법을 부연하여 이르나, <인명 realname="">부처의 지혜엔 바다에 한 방울의 떨어진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법우를 뿌려 세간을 충만케 하면 한 맛의 법에서 힘을 좇아 수행하는 것이, 저 총림의 약초와 모든 나무가 크고 작음을 좇아 점점 더 무성하여 좋아지듯 한 것이다. 모든 <인명 realname="">부처의 법은 늘 한 맛으로, 모든 세간이 널리 구족함을 얻어 점점 차례로 수행하여 다 도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성문 연각이 산림에 있어서 최후신에 머물러 ‘법’ 듣고 ‘과’ 얻을 이는, 이름은 약초가 각각 더 자라남을 얻음이고, 혹은 모든 보살이 지혜가 굳어서 3계를 꿰뚫어 알아 최상승을 구하는 이는, 이 이름은 작은 나무가 더 자라남을 얻음이고, 또 선정에 머물러 신통력을 얻어 모든 법의 공함을 듣고 마음에 가장 기뻐하여 무수한 빛을 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이는, 이 이름은 큰 나무가 더 자라남을 얻음이다.

이와 같이 <인명 realname="">가섭아, <인명 realname="">부처가 설하는 법은 견주건대 큰 구름 같아서 한 맛의 비로 인화를 적시어 각각 열매 맺음을 얻게 하느니라. <인명 realname="">가섭아! 마땅히 알아라. 여러 인연과 갖가지 비유로 불도를 열어 보이니, 이는 내 방편이며 모든 <인명 realname="">부처도 또 그러하시니라. 오늘 너희 위하여 가장 진실한 일을 설하니, 모든 성문중은 다 멸도가 아니거니와 너희가 행할 것이야 말로 이 보살도이니 점차 닦고 배우면 다 마땅히 성불하리라.” 하였다.

법화경 제6 수기유품(授記喩品) 내용 정리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게송 이르시고 모든 대중에게 이르시어 이와 같은 말을 이르시되, “내 이 제자 <인명 realname="">마하가섭은 미래세에 마땅히 3백만억 모든 <인명 realname="">부처 <인명 realname="">세존을 능히 받들어 보여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여 모든 <인명 realname="">부처의 한량없는 큰 법을 널리 펴다가 최후신에 <인명 realname="">부처 됨을 이루어 이름이 광명<인명 realname="">여래·<인명 realname="">응공·<인명 realname="">정편지·<인명 realname="">명행족·<인명 realname="">선서·<인명 realname="">세간해·<인명 realname="">무상사·<인명 realname="">조어장부·<인명 realname="">천인사·<인명 realname="">불세존일 것이니, 나라의 이름은 <지명>광덕이고, 겁의 이름은 대장엄이리라. 부처의 목숨은 12소겁이고, 정법 주세는 20소겁이고, 상법도 또 20소겁을 머무르리라. 나라의 경계 엄숙히 꾸며 여러 가지 더러운 기와, 돌과 가시덤불과 똥, 오줌 등 깨끗하지 못한 것이 없으며, 그 땅이 평정하여 높고 낮으며 구덩이와 두둑이 없고 유리로 땅을 만들고 보배나무가 벌여 있고, 황금으로 노끈을 만들어 길가에 늘이고 여러 보화를 흩어 두루 다 청정하게 하리라. 그 나라의 보살이 한량없는 천억이며 모든 성문 대중도 또 수 없으며, 마의 일 없어 비록 마와 마의 백성이 있어도 다 불법을 지킬 것이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어 게송을 이르시되, “모든 비구에게 이르니, 내 <인명 realname="">부처의 눈으로 이 <인명 realname="">가섭을 보니 미래세에 무수 겁을 지나 마땅히 능히 <인명 realname="">부처가 될 것이니, 내세에 3백만억 모든 <인명 realname="">부처 <인명 realname="">세존을 공양하여 받들어 보이어 <인명 realname="">부처의 지혜를 위하여 깨끗하게 범행을 닦아 최상의 이족존을 공양하고 일체 위없는 지혜를 닦아 최후신에 능히 <인명 realname="">부처됨을 이룰 것이니 그 땅이 청정하여 유리로 땅을 만들고 많은 보화의 나무가 길가에 늘어서고 금줄로 길에 늘여 보는 사람이 기뻐하며, 늘 좋은 향이 나며, 많은 이름 난 꽃을 흩어 갖가지 기묘한 것으로 장엄하며, 그 땅이 평정하여 두둑과 구덩이가 없으며 모든 보살 대중이 능히 저울에 달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 그 마음이 부드러워 큰 신통을 미치어 모든 <인명 realname="">부처의 대승 경전을 받아 지니며, 모든 성문 대중의 누 없는 후신과 법왕의 아들도 또 능히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천안으로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인명 realname="">부처의 당한 목숨은 12소겁이고, 정법 주세는 20소겁이고, 상법도 또 20소겁을 머무를 것이니, <인명 realname="">광명 세존의 그 일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인명 realname="">대목건련과 <인명 realname="">수보리와 <인명 realname="">마하가전연들이 다 두려워 한 마음으로 합장하여 존안을 우러러 뵈어 눈길을 잠깐도 깜박이지 아니하여 즉시 모아 한 소리로 하여 게송을 사뢰되, “<인명 realname="">대웅맹 세존께서 모든 <인명 realname="">석씨법왕이시니 우릴 불쌍히 여기시는 까닭으로 <인명 realname="">부처님 음성을 주시니, 만일 우리 깊은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기하심을 보시면 마치 감로수 뿌려 더움을 덜고 차가움을 얻듯이 할 것입니다. 굶주린 나라를 따라서 와 문득 대왕의 음식 만나 마음에 오히려 의심과 두려움을 품어 즉시 문득 먹지 못하다가 만일 또 그가 왕의 가르침(명령)을 얻으면 그리 한 후에야 먹듯이 하여, 우리도 또 이와 같아서 늘 소승의 허물을 생각하고, 마땅히 어찌하여야 <인명 realname="">부처님 무상 지혜를 얻을 줄 알지 못하더니, 비록 <인명 realname="">부처님 음성이 ‘우리가 <인명 realname="">부처될 것’ 이라는 이르심을 들었으나 마음에 오히려 시름하여 두려움을 품어 문득 먹지 못하듯 하니, 만일 <인명 realname="">부처님 수기를 입으면 그리하여야 곧 훤하게 안락할 것입니다. <인명 realname="">대웅맹 세존께서 늘 세간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시니 원하되, “우리에게 수기를 주소서! 주린 사람은 먹으라는 가르침을 기다리듯 할 것입니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모든 대제자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모든 비구에게 이르시되, “이 <인명 realname="">수보리는 마땅히 내세에 3 백만억 나유타 부처를 뵈어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여 늘 범행을 닦아 보살도가 갖추어져 최후신에 <인명 realname="">부처가 되어 ‘호’가 <인명 realname="">명상여래·<인명 realname="">응공·<인명 realname="">정편지·<인명 realname="">명행족·<인명 realname="">선서·<인명 realname="">세간해· <인명 realname="">무상사·<인명 realname="">조어장부·<인명 realname="">천인사·<인명 realname="">불세존일 것이니, 겁명은 유보이고, 국명은 <지명>보생이리라”고 했다. 그 땅이 평정하고 파리로 땅을 만들고, 보배 나무로 장엄하고 두둑과 구덩이와 모래와 돌과 가시덤불과 대소변의 더러운 것들이 없고 보배로운 꽃이 땅에 덮여 두루 청정하거든 그 땅의 사람이 다 보대와 진묘 누각에 있으며, 성문 제자가 한량없고 가없어 산수 비유의 능히 알 것이 아니며, 모든 보살 대중도 무수 천만억 나유타일 것이다. <인명 realname="">부처님의 목숨은 12소겁이고, 정법이 세간에 머무름은 20소겁이고, 상법도 또 20소겁을 머물 것이니, 그 <인명 realname="">부처님이 늘 허공에 계셔 많은 사람 위하여 설법하여 한량없는 보살과 성문 대중을 도탈케 할 것이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어 게송을 이르시되, “모든 비구 대중아! 이제 너희더러 이르니, 다 마땅히 한 마음으로 내 말을 들어라. 내 큰 제자 <인명 realname="">수보리는 마땅히 능히 <인명 realname="">부처가 되어 ‘호’가 <인명 realname="">명상일 것이니 마땅히 무수 만억 모든 부처를 공양하여 <인명 realname="">부처의 행함을 좇아 점점 큰 도가 갖추어져 최후신에 32상을 얻어 단정하고 곱고 미묘함이 보배 산 같을 것이니, 그 <인명 realname="">부처님 국토가 엄숙하게 깨끗함이 제일이다. 중생으로서 보는 사람이 사랑하여 즐거워하지 아니할 이 없으니,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그 가운데 한량없는 대중을 도탈케 할 것이다. 그 <인명 realname="">부처님 법 가운데 보살들이 많되 다 날카로운 근기이라서, 불퇴륜을 옮길 것이니 저 나라는 늘 보살로 장엄할 것이다. 모든 성문 대중도 능히 달아서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 다 3명을 얻으며 6신통이 갖추어지며 8해탈에 머물러 큰 위덕이 있을 것이다.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설법하되 그지없는 신통 변화 불가사의를 나타내거든 제천 인민의 수가 항사 같으니, 다 합장하여 <인명 realname="">부처님 말씀을 들어 받을 것이다. 그 <인명 realname="">부처님 당한 목숨은 12소겁이고, 정법 세간에 있음은 20소겁이고, 상법도 또 20소겁을 머무르리라.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다시 모든 비구 대중에게 이르시되, “내 오늘 너희에게 이르니, 이 <인명 realname="">대가전연은 당래세에 여러 가지 공양할 것으로 8천억 부처를 공양하여 받들어 섬겨 공양 존중하다가, 모든 부처 멸도한 후에 각각 탑묘를 세우되, 높이가 천 유순이고 길이, 넓이는 바로 똑같이 5백 유순일 것이니,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의 칠보로 아울러 이루고 많은 빛난 영락과 도향, 말향, 소향과 증개 당번으로 탑묘를 공양할 것이니, 이것이 지난 후에 마땅히 또 2만억 부처를 공양하되 또 이와 같아서 이 모든 부처를 공양하고 보살도가 갖추어져 마땅히 능히 <인명 realname="">부처가 되어, 호가 <인명 realname="">염부나제 금광여래 <인명 realname="">응공·<인명 realname="">정편지·<인명 realname="">명행족·<인명 realname="">선서·<인명 realname="">세간해·<인명 realname="">무상사·<인명 realname="">조어장부·<인명 realname="">천인사·<인명 realname="">불세존일 것이니, 그 땅이 평정하고 파리로 땅을 만들고 보화의 나무로 장식하고 황금으로 노끈을 만들어 길가에 늘이고 묘한 꽃이 땅에 덮이어 두루 청정하거든 보는 사람이 기뻐하며 4악도인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의 ‘도’가 없고 천인이 많이 있으며, 성문 대중과 또 모든 보살이 무량 만억이라서, 그 나라를 장식할 것이다. <인명 realname="">부처님 목숨은 12소겁이고, ‘정법 세간에 머무름’은 20소겁이고, 상법도 또 20소겁을 머무르리라.”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어 게송을 이르시되, “모든 비구 대중아! 다 한 마음으로 들어라. 내가 이른 것 같은 것은 진실하여 다름이 없으니, 이 <인명 realname="">가전연은 반드시 갖가지 미묘한 좋은 공구로 모든 <인명 realname="">부처를 공양하다가 모든 <인명 realname="">부처 멸도 후에 7보탑을 세우고 또 화향으로 사리를 공양하며, 그 최후신에 <인명 realname="">부처님 지혜를 얻어 등정각을 이룰 것이니, 국토가 청정하며 한량없는 만억 중생을 도탈케 하여 다 시방의 공양을 받으며 <인명 realname="">부처의 광명이 능히 <인명 realname="">부처의 광명보다 더할 이 없을 것이니, 그 <인명 realname="">부처의 호는 이르되 <인명 realname="">염부금광이고, 보살 성문이 일체유를 끊은 이들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어 그 나라를 장식하리라.”고 하셨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또 대중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너에게 이르니, 이 <인명 realname="">대목건련은 마땅히 갖가지 공구로 8천의 모든 부처를 공양하여 공경 존중하다가 모든 부처 멸도 후에 각각 탑묘 세우되, 높이 천 유순이고, 세로와 넓이가 바로 똑같이 5백 유순일 것이니,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의 칠보로 어울러 이루고 많은 빛난 영락과 도향, 말향, 소향과 증개 당번으로써 공양할 것이니, 이 지난 후에 마땅히 또 2백만억 모든 부처를 공양하되, 또 이와 같이 하여 마땅히 <인명 realname="">부처되어 호가 다마라발전단향여래·<인명 realname="">응공·<인명 realname="">정편지·<인명 realname="">명행족·<인명 realname="">선서·<인명 realname="">세간해·<인명 realname="">무상사·<인명 realname="">조어장부·<인명 realname="">천인사·<인명 realname="">불세존일 것이니, 겁명은 희만이고, 국명은 <지명>의락일 것이니, 그 땅이 평정하고 파리로 땅을 만들고 보배 나무로 장식하고 진주 꽃을 흩어 널리 청정하거든 보는 사람이 환희하며 천인들이 많으며 보살 성문이 그 수가 그지없을 것이다. <인명 realname="">부처의 목숨은 24소겁이고, 정법 세간에 있음은 40소겁이고, 상법도 또 40소겁을 머무르리라”고 했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어 게송을 이르시되, “내 이 제자 <인명 realname="">대목건련은 이 몸 버리고 8천2백 만억 모든 <인명 realname="">부처 <인명 realname="">세존을 보아 불도 위하는 까닭으로 공양 공경하여 모든 <인명 realname="">부처께 늘 범행 닦아 무량겁에 불법 받아 지니다가 모든 <인명 realname="">부처 멸한 후에 7보탑을 세우되, 금찰로 길이 나타내고 꽃향기와 기악으로 모든 <인명 realname="">부처의 탑묘를 공양하며 차례로 보살의 도가 갖추어져 의락의 나라에서 능히 <인명 realname="">부처가 되어 호가 ‘다마라 전단향’일 것이니, 그 <인명 realname="">부처의 수명은 24겁일 것이니, 늘 천인 위하여 불도를 펼쳐 이르며 성문이 그지없어 항사 같은 이들이 3명 6통을 갖추어 큰 위덕이 있으며, 보살도 무수하여 뜻에 정진함이 굳어 <인명 realname="">부처의 지혜에서 다 물러나지 아니할 것이다. <인명 realname="">부처 멸도 후에 정법은 40소겁을 머물고 상법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모든 제자가 위덕이 갖추어진 이들이 그 수가 5백이니, 다 마땅히 수기하되 ‘미래세에 다 <인명 realname="">부처 될 것이다.’ 한다. 나와 너희들이 예전 세상의 인연을 내 이제 마땅히 이를 것이니, 너희 잘 들어라.”라고 하셨다.

월인석보 제14에 대하여

조규태(경상대학교 교수)

월인석보 제14의 내용은 월인석보 제13에 이어서 법화경 제7품인 화성유품(化城喩品)을 해설한 것이다. 부처는 중생이 감당할 수 있는 힘에 맞추어 갖가지 다른 교를 설법했지만 목적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보이는 비유와 부처의 법신은 불멸이며 보편하다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비유가 일곱 가지인데, 그 가운데 월인석보 제14에 실린 화성유품의 내용을 법화경언해 권3과 대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법화경 권3 제7 화성유품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르셨다. “지나간 한량없고 가없는 불가사의 아승기 겁에, 그때 부처가 계셨는데, 이름이 ‘대통지승 여래 응공 정편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시더라. 그 나라의 이름은 호성이고, 겁의 이름은 대상이었다. 비구들아! 그 부처가 멸도하신 지 그토록 오래고 머니, 비유하면 3천대천세계에 있는 땅을 아무 때 어떤 사람이 갈아서 먹물을 만들어 동방의 1천 국토 지나서야 한 점을 떨어뜨리되, 크기가 작은 티끌 같고, 또 1천 국토 지나서 한 점을 떨어뜨려, 이와 같이 옮고 옮아 땅덩이로 만든 먹을 다하는 그런 세월이라면, 너희가 상상을 하겠느냐? 이 모든 국토를 산수 스승이거나 산사 스승의 제자가 능히 끝을 헤아려 그 수를 알겠느냐?” 하니, 비구들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인명 realname="">세존이시여!” 하였다. <인명 realname="">부처께서 “모든 비구들아! 이 사람이 지난 국토를 점 찍거나, 점 아니 찍거나 한 것을 다 부수어 티끌 만들어 한 티끌에 한 겁을 헤아려도, 저 부처 멸도하신 지가 또 이 수에 지남이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아승기겁이니라. 내가 여래의 지견력을 가진 까닭으로 저 오래고 먼 것을 보되, 오늘 보는 것과 같이 하노라.” 하였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어 게송으로 이르셨다. “내 생각하되, 과거세 한량없고 가없는 겁에 부처님의 이름이 <인명 realname="">대통지승이시더니, 사람이 힘으로 3천대천 나라를 갈아 이 모든 땅덩이를 다하여 다 먹을 만들어 1천 국토 지나서야 한 티끌 점을 내리게 하여, 이같이 옮고 옮아 점 찍어 이 모든 진묵을 다하고, 이같이 모든 국토를 점 찍거나 찍지 아니한 것들을 또 다 부수어 티끌 만들어 한 티끌로 한 겁을 삼아도 그 겁은 이 모든 티끌의 수보다 넘을 것이다. 저 부처 멸도하신 지가 이같이 한량없는 겁이거늘, 여래의 막힘없는 지혜가 저 부처의 멸도와 또 성문 보살을 알되, 오늘의 멸도하심을 봄과 같다. 모든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라. 부처의 지혜는 깨끗하고 미묘하여 누 없으며 거리낌 없어 한량없는 겁을 막힘없이 넘나드는 것이다.” 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르시되, “대통지승불의 목숨이 5백4십만억 나유타 겁이시더니, 그 부처님께서 본래 도량에 앉으시어 마군을 헐어 버리시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미 얻을 것이거늘, 모든 불법이 나타나 앞에 있지 아니하더라. 이같이 한 소겁으로 열 소겁에 이르도록 결가부좌하시어 몸과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시되, 모든 불법이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더니, 그때 도리천의 제천이 먼저 저 부처님 위하여 보리수 아래 사자좌를 펴되, 높이가 한 유순이더니, 부처님께서 이에 앉으시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마땅히 얻으리라.”고 하셨다. 때 맞추어 이 자리에 앉으시거늘, 그때 모든 범천왕이 많은 하늘꽃을 뿌리되 면마다 백 유순이고, 향풍이 때때로 꽃에 불어 시든 꽃을 불어 버리고 다시 새 꽃을 뿌리기를 10소겁이 차도록 부처님께 공양하며, 멸도에 이르러도 늘 이 꽃 뿌리며, 사왕 제천이 부처님 공양을 위하여 늘 하늘북을 치며, 다른 제천도 하늘의 풍악을 울려, 10소겁이 차며 멸도에 이르러도 또 이같이 하더라. 모든 비구들아, 대통지승불이 10소겁 지나시어야 모든 불법이 나타나 앞에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시리라. 그 부처가 출가하지 아니하셨을 적에 열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첫째는 이름이 지적이었다. 모든 아들이 각각 여러 가지 진귀한 장난감을 두었더니, 아버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다는 말을 듣고 다 보배 버리고 부처님께 가니 모든 어머니가 울며 따라가 보내었더니라. 그 할아버지 전륜성왕이 1백 대신과 또 다른 1백천만억 인민과 더불어 다 위요하여 좇아 도량에 가서 다 대통지승여래께 친근하고자 하여, 공양 공경하오며 존중 찬탄하여 다다라 머리를 조아려 절하옵고 부처님께 돌기를 마치고, 일심으로 합장하여 세존께 우러러 보아 게로 찬송하되, “대위덕 세존께서 중생 제도를 위하시는 까닭으로 한량없는 억세에야 그제야 성불을 얻으시고 모든 원이 이미 갖추어지시니, 좋으시도다. 길함이 위 없으시도다. 세존께서 심히 희유하시어 10소겁을 한 번 앉으시되 몸과 손발이 가만히 있으시어 편안히 움직이지 아니하시며, 그 마음이 늘 편안하시고 잠깐도 흩어져 어지러움이 있지 아니하시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시고, 길이 적멸하시어 누 없는 법에 편안히 머무르시니, 오늘 세존께서 편안히 불도 이루심을 보니, 우리는 좋은 이익을 얻어 경하하며 매우 환희하옵니다. 중생이 늘 고뇌하여 눈멀어 도사가 없고 괴로움 다할 도를 알지 못하여 해탈 구함을 알지 못하며, 긴 밤에 악취를 더하고 제천 대중은 복이 줄어 아득함을 좇아 아득함에 들어가 오랫동안 부처님 이름 듣지 못하더니, 지금 부처님께서 가장 높고 편안한 누 없는 도를 얻으시니, 우리와 천인이 가장 큰 이득을 얻음이 될 것이므로 이런 까닭으로 다 머리 조아려 무상존께 귀의하옵나이다.” 하였다. 그때 16왕자가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세존께 ‘법륜 옮기소서!’하고 권하고 청하여 다 이 말을 하되, “세존께서 설법하시면 편안함이 많을 것이니, 제천 인민을 불쌍히 여겨 이익되게 하소서!” 하였다. 다시 게송을 사뢰되, “부처님은 함께할 짝이 없으시어 백복으로 스스로 장식하시어 무상 지혜를 얻으시니, 원하옵건대, 세간 위하시어 이르시고 우리와 모든 중생을 도탈하시고 위하시어, 가리어 나타내어 보이시고 이 지혜를 얻게 하소서! 만약 우리가 부처님을 얻으면(성불하면) 중생도 또 그러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중생의 깊은 마음과 생각을 아시며 또 행하는 도를 아시며 또 지혜의 힘과 즐김과 복 닦음과 예전의 명에 행하던 ‘업’을 세존께서 다 아시니, 반드시 위없는 법륜을 옮기소서!” 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르셨다. “대통지승불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실 때에 시방에 각각 오백만억 모든 부처 세계의 대지가 진동을 하며, 그 나라 사이에 있는 어두운 땅에 해와 달의 위광이 능히 비추지 못할 곳을 다 매우 밝히니, 그 가운데 중생이 각각 능히 서로 보아 다 말을 하되 여기에 어찌 문득 중생이 생겨났느냐?” 하며, 또 나라 경계의 제천 궁전과 범궁에 이르기까지 대지가 진동을 하며 큰 빛이 널리 비치어 세계에 가득하여 모든 하늘의 광명보다 더 밝더니라. 그때 동방 오백만억 모든 국토 가운데의 범천 궁전에 광명이 비치어 상례의 밝음보다 더하니, 모든 범천왕이 각각 이 생각을 하되, ‘오늘 궁전 광명이 예전에 있지 아니하던 빛이니 어떤 인연으로 이 모습이 나타났는가?’ 하고, 그때 모든 범천왕이 즉시 각각 서로 나아가 모여 이 일을 의논하더니, 그때 저 무리 가운데 한 대범천왕이 있으되 이름이 구일체이더니 그가 모든 범천의 중생을 위하여 게송을 읊었다. “우리 모든 궁전에 광명이 예전에 있지 아니하던 것이 이 어떤 인연인가? 각각 모두 찾음이 옳도다! 대덕천이 난 것인가?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심인가? 이 큰 광명이 시방에 다 비치시도다.” 그때 오백만억 국토의 모든 범천왕이 궁전과 함께 각각 의극으로 여러 가지 하늘꽃을 담아 모두 서방에 가서 이 모습을 찾다가 대통지승여래가 도량의 보리수 아래 계시어 사자좌에 앉아 있으시거늘, 제천과 용왕 건달바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 등이 공경하여 그 주위에 둘러싸고 있음을 보며 또 16왕자가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소서!” 청하옵거늘, 이를 보고, 즉시 모든 범천왕이 머리 숙여 부처님께 절하고 백천 번 둘레를 감돌고 즉시 하늘꽃을 부처님 위에 흩으니, 그 흩은 꽃이 수미산 같더라. 부처님 앉으신 보리수를 아울러 공양하니, 그 보리수의 높이 열 유순이었다. 꽃 공양 다하고 각각 궁전을 저 부처님께 바치고 이 말을 사뢰되, “오직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를 이익되게 하시어, 바친 궁전을 원하옵건대 받으소서!” 하였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즉시 부처님 앞에 일심으로 한결같은 소리로 게송을 읊었다. “세존께서 심히 희유하시어 능히 다시 만나뵙기 어려우니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시어 능히 일체를 구호하시고, 천인의 큰 스승으로서 세간을 불쌍히 여기시므로 시방 모든 중생이 널리 다 요익을 입나이다. 우리가 온 곳은 5백만억 먼 나라인데, 깊은 선정의 낙을 버림은 부처님 공양함을 위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상의 복으로 궁전을 장엄하게 꾸며 이제 세존께 바치니 오직 원하옵건대 불쌍히 여겨 받으소서!” 하였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게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각각 이 말을 사뢰되,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께서 법륜 옮기시어 중생 도탈케 하시어 열반의 길을 여소서!” 하고, 그때 모든 범천왕이 일심으로 한 소리로 게를 사뢰되, “부처님이시여! 오직 원하옵건대 설법하시어 큰 자비력으로 고뇌에 찬 중생을 도탈케 하소서!”라고 했다. 그때에 대통지승여래가 잠자코 허락하시니라.

또 비구들아! 동남방 오백만억 국토의 모든 대범왕이 각각 궁전에 광명 비침이 예전에 있지 아니함을 스스로 보고 환희 용약하여 희유심을 내어 즉시 각각 서로 나아가 모두 이 일을 의논하더니, 그때 저 무리 가운데 한 대범천왕이 있으되, 이름이 대비이더니 모든 범천의 대중 위하여 게를 이르되, “이 일은 어떤 인연으로 이런 모습이 나타났는가? 우리 모든 궁전에 광명이 예전에 있지 아니하더니 대덕천이 났기 때문인가?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셨기 때문인가? 예전에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하였더니 모두 일심으로 구하여 천만억 국토 지나 광명을 함께 찾음이 마땅하도다. 다분히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시어 괴로운 중생을 도탈하심이도다.”

그때 5백만억 모든 범천왕이 궁전과 함께 하여 각각 의극에 여러 가지 하늘꽃 담아 모두 서북방에 가서 이 모습을 찾다가 대통지승여래가 도량 보리수 아래 계시어, 사자좌에 앉아 계시거늘 제천 용왕 건달바 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 등이 공경 위요함을 보며 또 16왕자가 부처님께 ‘법문을 전륜하소서!’ 청하는 것을 보고, 그때 모든 범천왕이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절하고 백천 번 감돌고 즉시 하늘의 꽃으로 부처님 위에 흩으니 흩은 꽃이 수미산 같더니, 부처님과 보리수를 같이 공양하여 꽃 공양 다하고 각각 궁전을 그 부처님께 바치고 이 말을 사뢰되, “오직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를 요익게 하시어 바치는 궁전을 원하옵건대 받으소서!” 하였다. 그때에 모든 범천왕이 즉시 부처님 앞에 일심으로 한 소리로 게송을 읊었다. “성주이시며 천중왕이시여! 가릉빈가의 소리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니, 우리는 오늘 공경하여 예배하옵니다. 세존께서 심히 희유하시어 오래 되어서야 한 번 나타나시니, 180겁을 헛되이 지내고 부처님께서 안 계셔서 삼악도가 가득하고 제천 대중이 줄어 적더니, 오늘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시어 중생 위하여 눈이 되시며 세간이 귀의할 곳이시어 일체를 구하시고, 중생의 아버지 되시어 불쌍히 여기시어 요익하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예전의 복경으로 오늘 능히 세존을 만났습니다.” 했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게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각각 이 말을 사뢰되,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께서 일체를 불쌍히 여기시어 법륜 옮기시어 중생을 제도하소서!” 하였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일심으로 한 소리로 하여 게를 사뢰되, “대성이시여! 법륜을 옮기시어 모든 법상을 나타내 보이시고 고뇌의 중생을 제도하시어 큰 환희를 얻게 하소서. 중생이 이 법 듣고 도를 얻거나 하늘에 나면 모든 악도가 감하여 적어지고 참아서 선하게 될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했다. 그때에 대통지승여래가 잠자코 허락하셨다. “또 비구들아 남방 오백만억 국토의 모든 대범왕이 각각 궁전에 광명 비침이 옛날에 있지 아니함을 스스로 보고 환희 용약하여 희유심을 내어 즉시 각각 서로 나아가 모두 이 일을 의논하되, 어떤 인연으로 우리 궁전에 이 빛 비침 있었느냐?” 하더니라.

그 무리 가운데 한 대범천왕이 있으되, 이름이 <인명 realname="">묘법이더니 모든 범중을 위하여 게를 읊었다. “우리 모든 궁전에 광명이 심히 엄숙히 비치니 이는 인연 없음이 아니니, 이런 상서로운 모습을 구함이 옳도다. 백천 겁 지나되 이 모습을 예전에 보지 못하였더니 대덕천이 남인가?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심이신가?” 그때 오백만억 모든 범천왕이 궁전과 함께 각각 의극으로 여러 가지 하늘꽃을 담아 모두 함께 북방에 가서 이 모습을 찾음에 대통지승여래가 도량 보리수 아래 계시어 사자좌에 앉아 계시거늘, 제천 용왕 건달바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 등이 공경 위요함을 보며, 또 16왕자가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소서!’ 청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절하고 백천 번 감돌고 즉시 하늘꽃을 부처님 위에 흩으니 흩은 꽃이 수미산 같았다. 부처님과 보리수를 아울러 공양하니 꽃 공양 다하고 각각 가지고 온 궁전을 그 부처님께 바치고 이 말을 사뢰되, “오직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를 요익케 하시어 바친 궁전을 원하옵건대, 받으심을 드리우소서!” 하였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즉시 부처님 앞에 일심으로 같은 소리로 하여 게송을 읊었다. “세존께서 심히 뵙기가 어려우시어 모든 번뇌를 깨뜨리신 분이니, 130겁을 지내어 오늘에야 능히 한 번 뵈니, 모든 주리며 목마른 중생에게 법우로 가득하게 하시니, 옛날에 못 뵙던 그지없으신 지혜가 우담바라꽃과 같으시니 오늘에야 만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궁전이 광명 입은 까닭으로 장엄히 꾸며졌으니, 세존께서는 가장 불쌍히 여기시어 오직 원하되, 이 궁전을 받으소서!”라고 했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게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각각 이 말을 사뢰되, “오직 원하옵건대, <인명 realname="">세존께서 법륜을 옮기시어 일체 세간의 제천 마왕 범천 사문 바라문으로 하여금 다 편안함을 얻어 도탈을 얻게 하소서!” 하고, 그때에 모든 범천왕이 일심으로 같은 소리로 하여 게송을 읊었다. “오직 원하옵건대, 천인존이시여! 무상 법륜을 옮기시어 큰 법고를 치시며 법라를 부시며 큰 법우를 널리 내리시어 무량 중생을 도탈케 하소서! 우리가 다 귀의하여 청하오니 반드시 심원한 소리로 일러 주소서!”라고 했다. 그 대통지승여래가 잠자코 허락하신 것이다. 서남방과 하방에 이르러도 또 이와 같았다.

그때 상방 5백만억 국토의 모든 대범천왕이 자기 궁전에 광명이 엄숙히 비침이 예전에 있지 아니함을 스스로 보고, 환희 용약하여 희유심을 내어 즉시 각각 서로 나아가 모두 이 일을 의논하되 ‘어떤 인연으로 우리 궁전에 이 광명이 있느냐?’ 하더니, 그때 저 무리 중에 한 대범천왕이 있으니, 이름이 시기이더니, 모든 범중 위하여 게를 이르되, “오늘 어떤 인연으로 우리 모든 궁전에 위덕 광명이 비치어 엄숙히 꾸며진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 아니냐? 이 같은 묘한 모습은 예전에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던 것이니 대덕천이 남인가?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심이신가?” 하였다.

그때 오백만억 모든 범천왕이 궁전과 함께 하여 각각 의극으로 여러 가지 하늘꽃을 담아 모두 하방에 가서 이 모습을 찾다가 대통지승여래가 도량의 보리수 아래 계시어 사자좌에 앉아 계시거늘 제천 용왕 건달바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 등이 공경 위요함을 보며 또 16왕자가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소서!’ 청하는 것을 보고, 그때 모든 범천왕이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절하고 백천 번 감돌고 즉시 하늘의 꽃으로 부처님 위에 흩으니, 흩은 꽃이 수미산 같았다. 부처님의 보리수를 아울러 공양하여 꽃 공양 다 하고 각각 가지고 온 궁전을 저 부처님께 바치고 이 말을 사뢰되, “오직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를 요익게 하시어 바친 궁전을 원하옵건대 받으소서!” 하였다. 그때 모든 범천왕이 즉시 부처님 앞에 일심으로 같은 소리로 게송을 읊었다, “좋으시도다! 모든 부처님과 세간 구하시는 성존을 뵈오니, 능히 3계의 지옥에 모든 중생을 힘써 건져 내시니, 넓은 지혜의 천인존이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능히 감로문을 여시어 일체 널리 제도하시니, 예부터 한량없는 겁을 헛되이 지내어 부처님께서 안 계시고 세존 나지 않으신 때에 시방이 늘 어두워 3악도가 더 늘어나며 아수라가 또 성하고 모든 하늘 대중이 더 줄고 죽어서 악도에 떨어질 이가 많으며, 부처님 좇아 법 듣지 못하여 늘 선하지 못한 일을 행하여 체력과 지혜가 다 감하여 적어지고 죄업 인연의 까닭으로 즐거움과 즐거운 생각을 잃어 사견의 법에 머물러 선한 법을 알지 못하며, 부처님 교화를 입지 못하여 늘 악도에 떨어지더니, 부처님께서 세간의 눈이 되시어 오래 지나서야 그제야 나시니,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므로 세간에 나타나 초월하시어 정각 이루시므로, 우리가 심히 기뻐하여 경하하오며 또 그밖의 일체 무리가 기뻐하여 미증유를 찬탄하옵니다. 우리의 모든 궁전이 광명 입은 까닭으로 엄숙히 꾸며졌사온데, 오늘 세존께 바치니 오직 불쌍히 여기시어 받으소서! 원하옵건대, 이 공덕으로 일체 중생에게 널리 미쳐 우리와 중생이 다 같이 불도를 이루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그때에 오백만억 모든 범천이 게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각각 부처님께 여쭈되,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께서 법륜을 옮기시어 많이 편안하게 하시며 많이 도탈하소서!” 하고, 그때 모든 범천왕이 게를 사뢰되, “세존께서 법륜을 옮기시어 감로의 법고를 치시고 고뇌의 중생을 도탈하시어 열반의 도를 열어 보이소서! 오직 원하옵건대, 저의 청을 받으시어 크고 미묘한 소리로 한량없는 겁 동안 익히신 법을 불쌍히 여기시어 펴소서!”

그때 대통지승여래가 시방의 모든 범천왕과 또 16왕자의 청을 받으시어 즉시 12행 법륜을 세 가지로 옮기시니,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하늘이거나 마군이거나 범천이거나 세간의 어느 누구도 능히 설하지 못할 바이니, 이르시되, “이것이 고통이며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며 이것이 고통의 없어짐이며 이것이 고통을 없애는 길이다.” 하셨다. 또 12인연의 법을 널리 이르시니, 무명의 인연은 ‘행’이고, ‘행’의 인연은 ‘식’이고, ‘식’의 인연은 명색이고, 명색의 인연은 6입이고, 6입의 인연은 ‘촉’이고, ‘촉’의 인연은 ‘수’이고, ‘수’의 인연은 ‘애’이고, ‘애’의 인연은 ‘취’이고, ‘취’의 인연은 ‘유’이고, ‘유’의 인연은 ‘생’이고, ‘생’의 인연은 늙음과 죽음, 근심과 슬픔, 고통과 번뇌이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6입이 멸하고, 6입이 멸하면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늙음과 죽음, 근심과 슬품, 고통과 번뇌가 멸하리라. 부처님께서 천인 대중 가운데 이 법 이르실 때에 6백 만억 나유타 사람이 일체 세간의 법을 따르지 아니한 까닭으로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을 얻어, 다 깊고 미묘한 선정과 3명과 6통을 얻으며 8해탈이 갖추어지고, 제2, 제3, 제4 설법하실 때, 천만억 항하사 나유타 등 중생이 또 일체법을 본받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을 얻으니, 이로부터 후에 모든 성문 대중이 한량없고 가없어서 헤아리지 못하겠더라. 그때에 16왕자가 다 동자로 출가하여 사미가 되어, 모든 근기가 통리하며 지혜가 밝아 이미 백천만억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여 범행을 깨끗이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 다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이 모든 한량없는 천만억 대덕 성문이 다 이제 이루었으니, 세존께서 또 반드시 우리를 위하시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을 이르소서. 우리가 들으면 다 닦아 배우리다. 세존이시여, 우리 뜻에 여래의 지견을 원하오니, 깊은 마음의 염원을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아 아실 것입니다.”

그때 전륜성왕이 거느리신 무리 가운데 8만억 사람이 16왕자의 출가를 보고 또 출가를 구하니, 왕이 곧 듣고 허락하신 것이다. 그때 저 부처님께서 사미의 청을 받으시고 2만 겁을 지내셔서야 4부 대중 가운데 이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이 묘법연화경이니 보살 가르치시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바이었다. 이 경 설하시니, 16사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한 까닭으로 다 수지하여 외우고 찬송하며 통달한 것이다. 이 경 설하실 제, 16보살 사미가 다 신수하며 성문 무리 가운데서도 또 신해할 이가 있었으나, 그 밖의 중생 천만억 중생들은 다 의혹을 품었더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되 8천 겁에 잠깐도 그만두지 아니하시고, 이 경 설하시고 즉시 고요한 방에 드시어 선정에 머무르심이 8만4천 겁이시거늘, 이 때에 16보살 사미가 부처님 방에 드시어 고요히 선정에 드신 줄 알고 각각 법좌에 올라 또 8만4천 겁에 4부 대중을 위하여 묘법연화경을 널리 설하여 가려서 낱낱이 다 6백 만억 나유타 항하사 등 중생을 제도하여 보이며 가르치며 이롭게 하며 기뻐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대통지승불이 8만4천 겁을 지나시고 삼매로부터 일어나시어 법좌에 가시어 조용히 앉으시어 널리 대중에게 설하시되, “이 16보살 사미가 심히 희유하여 모든 ‘근’이 통리하며 지혜가 밝아 이미 한량없는 천만억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여 모든 부처님께 늘 범행 닦아 부처님의 지혜를 받아 지녀 중생에게 열어 보여 그 가운데 들게 하는 것이니, 너희가 다 마땅히 자주 친근하여 공양할지니라. 어째서인가 하면, 만일 성문이거나 벽지불이거나 또 모든 보살이 능히 이 16보살이 설한 경법을 믿어 받아 지니고 헐지 아니하는 이는, 이 사람이 다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여래의 지혜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르시되, “이 16보살이 늘 이 <서명>묘법연화경을 즐겨 설법하여 하나하나 보살의 교화함이 6백 만억 나유타 항하사 등의 중생이니, 태어나는 세상마다 난 데를 보살과 함께 나서 그 법 들음을 좇아 다 신해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4만억 모든 부처 <인명 realname="">세존을 능히 만나되 오늘까지도 다하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비구들아, 내 오늘 너희에게 이르니, “저 <인명 realname="">부처의 제자 16사미가 오늘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시방 국토에 현재하여 설법하되 한량없는 백천만억 보살 성문이 권속이 되었으니, 그 중 두 사미는 동방에서 부처되시니,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아촉이시니 <지명>환희국에 계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수미정이시다. 동남방 두 부처는,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사자음이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사자상이시니라. 남방의 두 부처는,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허공주이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상멸이시니라. 서남방 두 부처는,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제상이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범상이시니라. 서방 두 부처는,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아미타이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도일체세간고뇌이시니라. 서북방 두 부처는,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다마라발 전단향 신통이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수미상이시니라. 북방 두 부처는, 첫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운자재이시고, 둘째 이름은 <인명 realname="">운자재왕이시니라. 동북방의 부처는 이름이 <인명 realname="">괴일체세간포외이시니라.

열여섯째 나 <인명 realname="">석가모니불은 사바국토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노라. 비구들아, 우리가 사미 되어 있을 제, 각각 한량없는 백천만억 항하사 등 중생을 교화하니, 날 좇아 법을 들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니, 이 모든 중생이 오늘 성문의 경지에 머무른 이를 내 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교화하니, 이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이 법으로 점차 불도에 들리라. 어찌된 것인가 하면, <인명 realname="">여래의 지혜는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때 교화한 한량없는 항하사 등 중생은 너희들 모든 비구와 또 내가 멸도한 후 미래 세상 가운데의 성문 제자가 이들이다. 나 멸도한 후에 또 어떤 제자가 이 경을 듣지 못하고 보살의 행할 바를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얻은 공덕에 멸도했다는 생각을 내어, 마땅히 열반에 들려고 하리라. 내 다른 나라에서 부처가 되어 다시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니, 이 사람이 비록 멸도했다는 생각을 내어 열반에 드나, 저 땅에서 부처의 지혜를 구하여 이 경을 얻어 들을 것이니, 오직 불승으로 멸도를 얻을 뿐이라서 다시 그 밖의 다른 승법은 없으니, 모든 여래의 방편 설법은 제외하고서이니라. 비구들아. 만일 <인명 realname="">여래가 열반할 때가 다다르며 대중이 또 청정하며 신해 굳으며 공법을 투철히 알며 선정에 깊이 든 줄을 스스로 알면, 곧 모든 보살과 성문 대중을 모아 이 경을 위하여 설법하니, 세간에 2승이 멸도를 얻음은 없고 오직 1불승만이 멸도를 얻을 따름이다. 비구야, 반드시 알아라. <인명 realname="">여래가 방편으로 중생의 성품에 깊이 들어 그 뜻에 작은 법을 즐겨 5욕에 깊이 집착한 줄 알고 이들을 위한 까닭으로 열반을 설하매, 이 사람이 만일 들으면 곧 믿고 받느니라.

견줄진대, 5백 유순의 험하고 어렵고 궂은 길이 멀고 끊어진, 사람 없는 두려운 땅에, 만일 많은 대중이 이 길을 지나 보배가 있는 곳에 가고자 하거든, 한 도사가 총명한 지혜로 명달하여 험한 길에 통하며 막힌 모양을 잘 알아서 많은 사람을 인도하여 이 어려운 곳을 지나고자 하더니, 거느린 사람들이 중도에 게을러 물러나 도사에게 이르되, “우리 고단함이 지극하고 또 두려워 능히 다시 나아가지 못할 것이거늘, 앞길이 오히려 멀므로 이제 물러 돌아가고자 합니다.” 했다. 도사가 방편이 많아 이 생각을 하되, ‘이들이 불쌍하도다. 어찌 큰 보배를 버리고 물러나서 도로 가려고 하느냐?’라고 생각하고, 방편력으로 험한 길 가운데 3백 유순 지나서 한 성을 만들고 많은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물러나 도로 가지 말아라. 이 큰 성이 능히 사이에 머물러 각자의 뜻대로 할 것을 좇을 것이니, 만일 이 성에 들면 훤히 편안함을 얻을 것이며, 혹 능히 보배가 있는 곳에 나아가려 해도 또 가히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피곤함이 지극한 대중이 마음에 매우 기뻐하고 미증유를 찬탄하여, “우리는 지금 이 험한 길을 면하고 훤히 편안함을 얻었노라.” 하고, 이제 많은 사람이 화성(化城)에 나아가 들어 이미 지난 제도됐다는 생각을 내며 편안한 생각을 내더니, 그때 도사가 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쉼을 얻어 다시 피곤한 게으름이 없어진 줄 알고 즉시 화성을 없애고 많은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라! 보배가 있는 땅이 가까이 있으니, 먼저 번의 큰 성은 내가 변화로 지은 것이라서 너희 쉼을 위할 따름이었다.” 하였느니라.

비구들아, <인명 realname="">여래도 또 이와 같아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큰 도사가 되어서, 여러 가지 생사 번뇌의 악도가 험난하고 장원함에 감직하며 건넘직함을 아니, 만일 중생이 오직 1불승만을 들으면 <인명 realname="">부처를 보고자 아니하며 친근하고자 아니하여, 곧 이런 생각을 하되, ‘불도가 장원하여 오래 부지런히 수고함을 받아야 가히 능히 이룰 것이다.’ 할 것이므로,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이 마음의 겁약 졸렬함을 아시고 방편력으로 중간에 쉬게 함을 위한 까닭으로 두 가지 열반을 설하니, 만약 중생이 두 경지에 머무르거든 <인명 realname="">여래가 그때에 곧 위하여 이르되, “너희가 할 일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너희가 머무른 경지는 <인명 realname="">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우니 마땅히 보아 살펴 헤아릴 것이다. 너희가 얻은 열반은 진실 아닌 것이니, 다만 이 <인명 realname="">여래가 방편의 힘으로 1불승을 가려서 3승을 설한다.” 하니, 저 도사가 쉬게 함을 위한 까닭으로 큰 성을 만들고 이미 쉬었음을 알고 이르되, ‘보배의 땅이 가까이 있으니 이 성은 참이 아니라 내가 지었을 따름이다.’ 함과 같은 것이다.

그때 <인명 realname="">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펴려 하시고 ‘게’를 이르시되, “대통지승불이 10겁 동안 도량에 앉으시되 불법이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불도 이룸을 얻지 못하고 계시더니, 모든 천신 용왕 아수라의 무리들이 늘 하늘의 꽃을 흩어서 저 부처님을 공양하오며 제천이 하늘의 북을 치며 많은 풍류를 아울러 하며 향기로운 바람이 시든 꽃에 불면 다시 새 고운 꽃을 흩으니, 10소겁 지내서야 불도 이룸을 얻으시거늘, 제천과 세인이 마음에 다 날아 솟음을 품더니라.

저 부처의 16아들은 다 그 권속 천만억이 둘러싸서 함께 <인명 realname="">부처님께 가서, 머리 조아려 <인명 realname="">부처님의 발에 절하고 “법륜 전하소서!” 하고 청하오되, 성스런 스승이 법우로써 나와 일체를 흡족하게 적시니, <인명 realname="">세존은 심히 만나기가 어려우시어 오래 되어서야 한 번 나타나시니, 중생에게 알림을 위하시어 일체를 진동하게 하소서. 동방 모든 세계 5백만억 나라 범천 궁전에 광명 비침이 옛날에 있지 아니한 것이니, 모든 범천이 이 모습 보고 찾아와서 <인명 realname="">부처님께 이르러 꽃 흩어 공양하옵고 궁전을 아울러 받들고 <인명 realname="">부처님께 ‘법륜 전하소서.’ 청하여, ‘게’로 찬탄하거늘, <인명 realname="">부처님께서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아시고 청 받으시고도 잠자코 앉으신 것이다. 3방과 또 4유와 상하가 또 그러하여 꽃 흩고 궁전 받들고 부처님께 ‘법륜 전하소서.’ 청하되 “세존은 심히 만나기가 어려우시니 원하건대, 본래의 자비로 감로문을 넓게 여시어 무상 법륜을 전하소서.” 하니, 한량없는 지혜의 세존께서 저 많은 사람의 청을 받으시고 위하시어 갖가지 법 4제 12인연을 펴시되 “무명으로 늙음과 죽음에 이르도록 다 태어남의 인연을 의지하여 있으니 이와 같이 많은 허물과 시름을 너희는 마땅히 알지니라.” 하시고, 이 법 펴실 때에 6백만억 해의 중생들이 여러 가지 수고의 끝을 다하여 여의고 다 아라한이 되며, 제2 설법하실 적에 천만 항하사 중생이 모든 법에 본받지 아니하여 또 아라한을 얻으니, 이후로 ‘도’ 얻은 이들은 그 수가 그지없어 만억 겁을 헤아려도 능히 그 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16왕자가 출가하여 사미가 되어 다 저 부처님께 청하오되 “대승법을 설하소서. 저희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다 마땅히 불도를 이룰 것이니, 원하건대, 세존의 혜안 제일 깨끗함과 같음을 얻고 싶습니다.” 하니, 부처님께서 아이의 마음에 예전 세상에 행함을 아시고 그지없는 인연과 여러 가지 비유로 6바라밀과 또 여러 신통한 일을 설하시어 진실한 법과 보살이 행하는 도를 가리시고 이 법화경의 항하사 같은 게를 읊으신 것이다. 저 부처님께서 경 설하시고 고요한 방에서 선정에 드시어 일심으로 한 곳에 8만4천 겁을 앉아 계시거늘, 이 사미들이 부처님께서 선에서 나오지 아니하신 줄을 알고 한량없는 억만 무리 위하여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를 설하되, 각각 법좌에 앉아 이 대승 경전을 설하여 부처님께서 편안히 적멸하신 후에도 법화경을 펴 도우시니, 낱낱의 사미 등이 제도한 모든 중생은 6백만억 항하사 등의 무리이었다.

저 부처님 멸도 후에 이 모든 법을 들은 사람이 있는 곳마다 모든 불토에서 늘 스승과 같이 태어나니, 이 16사미가 힘을 갖추어 불도를 행하여 이제 시방에 나타나서 각각 정각을 이루었으니, 그때에 법을 들은 사람은 각각 모든 부처님께 있어 성문에 머물러 있는 이를 점차 불도를 가르치시니, 내가 16왕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또 너 위하여 설하였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방편으로 너희를 이끌어 부처님 지혜에 나가게 하노라. 이 본래의 인연으로 지금 법화경을 설하여 너희를 불도에 들게 하니, 삼가 놀라서 두려워하는 마음 먹지 말아라.

견주건댄, 험악한 길이 멀어 끊어지고 사나운 짐승이 많으며 또 수초 없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곳에 무수한 천만 대중이 이 험악한 길을 지나고자 하더니, 그 길이 심히 멀어 오백 유순이 넘으니, 그때 한 도사가 잘 알고 지혜 있으며 밝히 알아 마음이 흔들림 없이 험한 곳에 들어가서 많은 환난을 제도하더니, 많은 사람이 다 힘들어 하여 도사에게 이르되, “우리 오늘 매우 고달파서 이에 물러 도로 가고자 합니다.” 하거늘, 도사가 생각하되, ‘이 무리가 심히 불쌍하도다. 어찌 물러나 도로 가고자 하여 큰 보배를 잃느냐?’ 뒤미처 좇아 방편을 생각하되, ‘신통력을 펴야 하리로다.’ 하고서 큰 성곽 짓고 여러 사택을 꾸미고 두루 원림과 시내와 목욕하는 못이 있고, 겹문의 높은 누각에 남녀가 다 가득하게 하여 곧 이 변화를 만들고 많은 사람을 위로하여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이 성에 들면 각각 가히 즐거움을 좇으리라.” 하거늘, 모든 사람이 이미 성에 들어가 마음에 다 매우 기뻐하고 다 편안한 생각을 내어 스스로 이미 ‘건넘을 얻었다.’고 여기거늘, 도사가 쉼을 알고 많은 사람 모아 이르되, “너희가 다 나아감이 마땅하니, 이는 다만 만든 성일 뿐이니, 내 너희 가쁨이 지극하여 중도에 물러 돌아가고자 함을 보았으므로 방편력으로 이 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너희는 이제 부지런히 정진하여 모두 보배가 있는 곳에 나아감이 마땅하다.” 하니라.

나도 또 이와 같아서 일체의 도사가 되어서 모든 도를 구하는 사람이 길 가는 중에 게을러져 능히 생사 번뇌의 여러 가지 험한 길을 건너지 못함을 보므로, 이런 까닭으로 방편력으로 쉬게 함을 위하여 열반을 일러 설하되, “너희가 괴로움이 멸하여 해야 할 일을 다 이미 이루었다.” 하고, 이미 열반에 다달아 다 아라한 얻은 줄 알고서야 그제야 대중을 모아 대중을 위하여 진실한 법을 설하노라.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력으로 가려서 3승을 설하신 것이니, 오직 1불승이 있건만, 쉴 곳을 마련할 까닭으로 둘을 설하신 것이다. 지금 너희를 위하여 진실을 설하니, 너희가 얻은 것은 멸도가 아니었다. 부처님의 일체지혜를 위하여 마땅히 큰 정진을 발하여라. 너희가 일체지 〮10력 등의 불법을 증득하여 32상이 갖추어져야, 이것이 진실한 멸도이니라. 모든 부처님 도사가 쉬게 함을 의거하여 열반을 설하시고, 이미 쉰 줄 아시고서는 이끌어 부처님 지혜에 들이신 것이다.

《어제월인석보 제15》 해제

임홍빈(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어제월인석보》 간행의 목적

흔히 《월인석보(月印釋譜)》라 불리는 책은 ‘천순(天順) 3년(1459년, 세조 5년)’ 기묘 7월 7일, 세종이 지었다고 하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수양대군이 지었다고 하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을 개고하여 합편한 책이다. 1457년 왕세자였던 도원군(桃源君)이 죽자, 세조는 이를 슬피 여겨 부왕인 세종과 소헌왕후 및 도원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책을 간행한다는 뜻을 《어제월인석보(御製月印釋譜)》 서(序)에서 밝히고 있다.

조선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가 죽은 뒤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에게, 추천(追薦,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그 기일에 불사 같은 것을 베푸는 일)에는 전경(轉經, 경전의 각 권마다 처음, 가운데, 끝의 중요한 대목이나 품명만을 읽고 나머지는 책장을 그냥 넘기며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없으니, 석보(釋譜)를 만들어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수양은 이 말을 듣고, 남제(南齊)의 율사인 승우(僧祐)와 당나라의 율사인 도선(道宣)이 만든 《석가보(釋迦譜)》와 《석가씨보(釋迦氏譜)》가 있어서 그것을 참조해 보니 내용이 들쭉날쭉하였기 때문에, 두 책을 아울러 《석보상절》을 만들고 정음으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게 하였다는 것이 《어제월인석보(御製月印釋譜)》 서(序)에 천명되고 있다. 《석보상절(釋譜詳節)》 서에서는 단지 ‘이저긔 여러 經에 여 내야(이제 여러 불경에서 뽑아내어)’와 같이만 되어 있었던 것인데, 《어제월인석보》에 와서 그 출전이 명시된 것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하늘에 뜬 하나의 달이 모든 강물에 비치듯이 부처님이 세상 어디에나 나타남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석보’는 석가의 연보, 곧 석가모니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2. 《월인석보》의 정식 명칭

여기서 우선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위에 보인 바와 같이 흔히 우리가 《월인석보(月印釋譜)》라고 부르는 책의 정식 명칭은 《어제월인석보(御製月印釋譜)》라는 것이다. 안병희(1993)에서는 고서 목록 작성의 관행에 따르면, 권두 서명에 보이는 바와 같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석보상절(釋譜詳節)”과 같이 불러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실지로 그런 이름으로 등록된 고서 목록서가 있음을 지적하고도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석보상절(釋譜詳節)”이란 책 이름이 나타나는 곳은 정광 교수가 소개한 옥책본을 제외하면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책의 권두 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월인천강지곡 제1/석보상절 제1”과 같은 제목이다. 이것을 책의 정식 명칭으로 보기에는 그 범위가 지극히 제한된다. “제1, 제2, …” 등과 같은 순차 표시 때문이다. 그것을 《어제월인석보》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세조 서에 《어제월인석보》란 서명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식 명칭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오구라[小倉進平](1940/1964)에는 ‘어제월인석보서(御製月印釋譜序)’가 지적되고 있으나, 그것을 서명으로는 취급하지 않고 있다. ‘월인석보’에만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최현배(1940/1976)에서도 ‘월인석보’의 서명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

판심제가 《월인석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이 책의 명칭을 《월인석보》라 한다는 것이 안병희(1993)의 지적이나, 엄밀한 의미에서 판심제는 극도로 축약된 제목의 하나인 것이다. 판심제는 ‘어제월인석보’에서 ‘월인석보’ 부분만을 택한 것이다.

3. 《어제월인석보》 간행에 참여한 사람들

무엇보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누가 《어제월인석보(御製月印釋譜)》와 같은 체재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어제월인석보》와 같이 되어 있으므로, 이 일을 한 것은 당연히 세조라 하기 쉽다. 그러나 《어제월인석보》는 그 양이 방대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임금이 나라의 정사를 보는 어느 만기지가(萬機之暇)에 어떻게 이토록 방대한 책을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이는 결코 흔히 이야기되는 바와 같이 당시의 임금인 세조가 손수 이것을 만든 것이라고는 볼 수 없게 된다. 《석보상절》이 그대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재편되고 풍부하게 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제월인석보》의 간행에 참여한 사람을 봉천스님의 블로그에서는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 11인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기초로 한 기술인지를 역주자(譯註者)는 확인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5년 2월 9일(임술)조 기사에는 관직을 제수한 사람들의 명단이 제시되고 있다. 그 명단과 관직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이의(李宜) : 원천(原川) 윤(尹)

김수온(金守溫)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황치신(黃致身) : 인수부(仁壽府) 윤(尹)

곽연성(郭連城) : 인순부(仁順府) 윤(尹)

성임(成任) : 공조(工曹) 참의(參議)

유서(柳潊)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권반(權攀)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성순조(成順祖) :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안지귀(安知歸) : 진주목사(晋州牧使)

실록에는 이들이 왜 관직을 제수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김수온(金守溫)과 성임(成任)이 일찍이 행직(行職)으로서 우선당(友善堂)에 벼슬을 하여 “석보(釋譜)”를 선사(繕寫, 정서하는 것을 말함)하였는데, 그 공(功)으로 모두 관직을 받았음을 첨기하고 있다. 이곳의 “석보(釋譜)”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말하는 것인지 《어제월인석보(御製月印釋譜)》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수온과 성임이 일찍이 행직으로서 우선당에 벼슬을 하여 “석보”를 선사하여 공으로 관직을 받은 것과, 위의 사람들이 관직을 제수한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위의 사람들이 《어제월인석보》의 간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수효가 모두 9명이다. 여기에 신미(信眉)를 합치면 10인이 된다. 신미는 아마도 간행에 관여하기는 하였으나 관직을 제수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나머지 1인이 찾아지지 않는다. (1)의 9인이 모두 《어제월인석보》의 간행에 관여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야후 백과 사전에는 세조를 도와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으로 신미(信眉), 수미(守眉), 홍준(弘濬), 학열(學悅), 학조(學祖), 김수온(金守溫)과 같은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 어떠한 근거에서 이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인지 역주자에게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4. 《석보상절》 서(序)의 문제

《어제월인석보》 앞에 실린 《석보상절》 서에 대해서는 의심되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우선 그 내용을 구결문으로 된 원문과, 그 언해문 및 그 현대어역을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2) 가. 《석보상절》 서의 구결문

佛이 爲三界之尊샤 弘渡群生시니 無量功德이 人天所不能盡讚이시니라 世之學佛者ㅣ 鮮有知出處始終니 雖欲知者ㅣ라도 ㉠亦不過八相而止니라 頃에 因追薦 爰采諸經야 別爲一書야 名之曰釋譜詳節이라 고 旣據所次야 ㉡繪成世尊成道之迹고 又以正音으로 就加譯角羊노니 庶幾人人이 易曉야 而歸依三寶焉이니라 ㉢正統 十二年 七月 二十五日 首陽君 諱 序노라

나. 《석보상절》 서의 언해문

부톄 三界옛 尊이 외야 겨샤 衆生 너비 濟渡시니 그지업서 몯내 혜 功과 德괘 사콰 하히 내내 기리디 몯논 배시니라 世間애 부텻 道理 호리 부텨 나아 니시며 마니 겨시던 처  알리노니 비록 알오져 리라도 ㉠八相 넘디 아니야서 마니라 近間애 追薦 因 이저긔 여러 經에 여 내야 各別히  그를 라 일훔 지허 로 釋譜詳節이라 고 마 次第 혜여 론 바 브터 ㉡世尊ㅅ道 일우샨 이 양 그려 일우고  正音으로 곧 因야 더 飜譯야 사기노니 사마다 수 아라 삼보애 나가 븓긧고 라노라

다. 《석보상절》 서에 대한 현대문

부처가 삼계에의 높으신 분이 되어 계셔서 중생을 널리 제도하시니 끝이 없어 끝내 못 헤아리올 공과 덕은 사람들과 하늘들이 내내 기리지 못하는 바이신 것이다. 세간에 부처님의 도리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님이 나다니시며 가만히 계시던 처음과 마지막을 알게 하고자 하니 비록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또 ㉠팔상을 넘지 않고서 말아 버린다. 근간에 추천하는 일로 인해서 이제 여러 경전에서 가려내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 이름지어 이르되 석보상절이라 하고 이미 차례를 헤아리어 만든 바에 의거하여 ㉡세존의 도를 이루어 내신 일의 모양을 그려 이룩하고 또 정음으로써 더 번역하여 풀이하노니 사람마다 쉽게 알아 삼보에 나아가 귀의하기를 바라노라.

우선 가장 먼저 의심이 되는 것은 《어제월인석보》 앞에 붙어 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인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과 “석보상절 서”는 그 서체(書體)가 《어제월인석보》의 서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어제월인석보》의, 특히 한글 협주의 서체는 길죽한 네모형의 글자를 하고 있다. 동글동글한 네모형의 글자와는 분명히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월인석보》 권7의 43, 44 이후에도 이와 흡사한 서체가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서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인정될 수 있는 일이다.

국어학회 편(1971:346)의 ‘월인석보’에 대한 해제에서는 《세종어제훈민정음》과 불화(佛畵) 8장이 《어제월인석보》 권두에 있었음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 서체가 《어제월인석보》와 다른지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어제월인석보》 협주의 서체는 《세종어제훈민정음》의 첫 장 앞면 왼쪽 협주의 서체와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훈민정음 언해본인 《세종어제훈민정음》의 첫 장 앞면 협주의 서체가 두 가지로 달라지게 된 것이, 훈민정음 언해의 서명에 “세종어제”란 네 글자를 넣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훈민정음 언해본인 《세종어제훈민정음》이나 《석보상절》 서가 본래부터 《어제월인석보》 권두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책 자체가 《어제월인석보》인데 왜 거기에 훈민정음 언해본인 《세종어제훈민정음》이나 《석보상절》 서가 본래부터 권두에 있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종어제훈민정음》이나 《석보상절》 서가 본래부터 《어제월인석보》 권두에 있었다면 그 권말제 역시 달라졌어야 한다. 권말제는 각 권에 따라, “月印千江之曲 第八/釋譜詳節 第八” 등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석보상절》 서(序)가 본래부터 《어제월인석보》 권두에 있었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상당한 모순을 안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월인석보》에 《석보상절》도 있으므로, 《석보상절》서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을 법도 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어제월인석보》에 《어제월인석보》 서가 없다면 혹 그럴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어제월인석보》에 왜 《석보상절》 서를 가져다 놓은 것인가?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어제월인석보》에는 석보상절에 대한 서문도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있는 바와 같이 《어제월인석보》에 《석보상절》 서가 본래부터 있었다는 것은 《석보상절》 서문이 두 번 되풀이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는가? 전혀 없다. 《석보상절》 서는 나중에 누가 덧붙인 것이다.

셋째, 대제각 영인본 《어제월인석보》에는 불화 8장이 영인되어 있다. 7장이 석가의 일생 중 중요한 장면을 그린 팔상도에 해당한다. 국어학회 편(1971)에는 팔상도 8장이 책 앞뒤 내면지에 영인되어 있다. 그것은 석보상절 11권의 권두에 있던 것이라 한다. 필치가 약간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국어학회 편(1971)의 해제에 의하면 이 팔상도는 《어제월인석보》 권두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팔상도가 본래부터 《어제월인석보》 권두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것은 《어제월인석보》 서에 언급되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어제월인석보》 서에서는 팔상도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본래부터 팔상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팔상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석보상절》이었을지 모른다. 《석보상절》 서에는 (2가, 나)의 밑줄 친 ㉠, ㉡과 같이 ‘팔상’이나 ‘그림’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어제월인석보》에는 팔상도 외에도 2면의 불화가 더 들어 있다. 이 두 장의 불화에는 부도(浮圖/浮屠, 중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탑)와 같은 형태의 그림 속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비명과 같이 쓰여 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보이기로 한다.

(3) 가. 世宗御製月印千江之曲(세종 임금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으셨다)

나. 昭憲王后同證正覺(소헌왕후가 마찬가지로 정각을 증하셨다)

(4) 가. 今上纂述釋譜詳節(지금 상감이 석보상절을 찬술하셨다)

나. 慈聖王妃共成佛果(자성왕비가 함께 불과를 이루셨다)

여기에 들어간 새로운 사실은 (3나), (4나)와 같은 사실이다.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것과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은 것을 고인(故人)들의 업적과 같이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형의 비명으로 제시한 것이 그러한 의도를 반영한다. 그러나 세조가 《어제월인석보》를 간행한 것이 세조 5년(1459)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때는 세조가 살아 있을 때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부도와 같은 그림 속에 그의 업적을 써 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불화 2면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넣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가)는 “지금 상감”이 석보상절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지었다는 것이므로, “지금 상감”이란 표현은 적어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다섯째, 《석보상절》 서의 존재나 가치를 가장 의심스럽게 하는 요소는 (2가㉢)에 나타나는 아래의 (5가)와 같은 구절이다. (5가)가 가진 문제를 (5나, 다)와 같이 지적해 보이기로 한다.

(5) 가. 正統 十二年 七月 二十五日 首陽君 諱 序노라

나. (5가)에서는 “수양대군”을 “수양군(首陽君)”이라 하고 있다.

다. (5가)에서는 “휘(諱)”라는 말을 완전히 잘못 쓰고 있다.

(5가)의 정통 12년(1447) 7월 25일은 맞는다고 하더라도, (5나)에 보인 바와 같이 ‘수양대군’을 ‘수양군’이라 하고 있는 것은 “대군”과 “군”의 엄격한 사용으로 볼 때, 도저히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른 시기에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은 려증동(1990)이다. ‘수양대군’을 ‘수양군’과 같이 부르는 것은 가령 ‘대장 수양’을 ‘대령 수양’과 같이 부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겸양이라고 할지 모르나, 계급이나 신분을 가지고 겸양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겸양을 한다고 하여도 ‘양반’이 자신을 ‘노비’로 부르는 일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5다)는 ‘휘(諱)’라는 말을 전혀 잘못 쓰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산 사람의 이름은 ‘명(名)’이고, 죽은 사람의 이름은 ‘휘(諱)’이다. (5가)에서는 이 글자가 ‘높은 사람의 이름, 기일, 제삿날’과 같은 뜻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뜻을 적용하면 (5가)의 끝 부분은 아마도 ‘수양군 높은 사람이 서하노라’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일 수도 있고, ‘수양군 기일에 서하노라’와 같이도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이는 세조 5년(1459)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여섯째, 려증동(1990)에서는 《석보상절》 서가 날조된 것으로 보고, 《석보상절》 서에 ‘나’라는 말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서문에는 ‘나’라는 말이 반드시 쓰이는 것으로 본다), 서문 속에서 석보상절을 누가 지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 서문 속에서 책의 분량을 밝히지 않은 것, 책이름 석보상절에 대한 풀이가 없는 것, 석보상절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였는데, 그 그림이 몇 폭이며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은 것, 석보상절이라는 책을 정음으로 번역하였다고 하였는데, 누가 번역하였다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 수양대군이 문과(文科) 쪽 인물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무과 쪽 인물에 가깝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5가)와 같은 잘못이다.

《석보상절》 서가 후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은 위에서 보아도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어제월인석보》에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5. 《어제월인석보》의 지은이 문제

《석보상절》을 지은 것은 수양대군이고,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것은 세종이라는 것이 널리 퍼져 있는 상식이다. 이 지은이 문제는 《석보상절》 서와도 관련되고, 《어제월인석보》의 서문 다음에 있는 불화 2면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3가)와 (4가)만을 다시 가져와 보기로 한다.

(3) 가. 世宗御製月印千江之曲(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어제하셨다.)

(4) 가. 今上纂述釋譜詳節(지금 상감이 석보상절을 찬술하셨다.)

(3가) 및 (4가)와 관련되는 것은 《어제월인석보》 서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6) 가. 世宗이 날려 니샤 追薦이 轉經 니 업스니 네 釋譜 라 飜譯호미 맛니라 야시 (월석 1:11ㄱ)

나. 念호 이 月印釋譜 先考 지샨 거시니 依然야 霜露애 애와텨 더욱 슬허노라 (월석 1:12ㄱ)

다. 進上니 보 주오시고 곧 讚頌을 지샤 일후믈 月印千江이라 시니 (월석 1:13ㄱ)

(4가)와 (6가)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석보상절》을 지은 것이라는 속설의 원천을 제공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6나)에 의하면, 《월인석보》가 밑줄 친 ‘선고(先考)’가 지으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선고는 물론 세종이다. 그것을 명확히 지적한 것이 세조의 서문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 심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같은 서문에 (6가), (6다)와 같은 기술도 있다. (6가)는 《석보상절》이 세종의 충고로 지어진 것임을 밝힌 것이고, (6다)는 그것을 보고 세종이 곧 찬송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보상절》을 수양(首陽)이 지었다고 보는 것은 온당한 것인가? 실제로 《석보상절》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수양이 지었다고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를 감수해야 한다. 우선 그 분량이 아주 방대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석보상절》이 24권이다. 그 외에 《석보상절》은 불교에 대한 정심한 지식과 인식의 깊이를 가지고 있어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수양이 당시의 불교 인식의 최고 경지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믿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나, 왕자로서 그러한 정도의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인식의 깊이를 가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누군가 뒤에서 수양을 도운 인물이 있다. 뒤에 세조실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조 5년 2월 9일(임술) 김수온(金守溫)과 성임(成任)이 행직으로 우선당에 출근하면서 《석보상절》을 선사(繕寫)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수양은 《석보상절》 찬술의 책임만을 맡은 것일 수 있다. 그것이 (6가)에서 그 찬술을 제안하고 권고한 세종의 입장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가 문제된다. 수양은 세종의 의중을 파악하고, 혹은 세종의 권고에 따라 《석보상절》의 간행을 주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석보상절》을 결국은 세종이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6나)에서 세조가 《월인석보》를 세종이 지은 것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큰 과장이 아닌 것이다.

세조실록에서 세조의 행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려증동(1990)이다.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瑈)였다. 태종 17년(1417)에 유가 태어나자 진평대군(晉平大君)이라는 봉을 받았다. 뒤에 봉호가 함평(咸平)으로 바뀌었다가 또 진양(晉陽)으로 바뀌었다. 얼마 뒤에 또 수양(首陽)으로 바뀌었다.

행장을 간추려 보면, 임자년(세종 14, 1432)에 활쏘기에서 진양이 백발백중하기에 세종이 ‘진평은 정말 굳세고 용맹스런 사람이로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임술년(세종 24, 1442)에는 사냥에서 북방 야인들이 진양대군을 두고 진양대호(晉陽大虎)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또 을축년(세종 27, 1445)에는 세자(문종)가 수양대군과 더불어 나라일을 의논하면서 ‘수양 같은 이를 병조판서로 삼게 되면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행장을 종합하여 려증동(1990)에서는 수양을 문과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기보다는 무과 쪽 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한 사람이 《석보상절》 편찬과 같은 방대한 일을 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6다)에서는 세종이 수양이 지은 《석보상절》을 보고 곧 ‘월인천강’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세종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분량이 너무나 방대하다. 현전하는 《어제월인석보》 25권 끝 부분에 있는 《월인천강지곡》은 577장이나 된다. 한두 장 정도를 세종이 읊은 것이라고 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나, 시적(詩的)으로 완숙한 경지에 이른 시구를 임금이 577장 또는 그 이상을 지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은 임금이다. 만기지가(萬機之暇)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어제월인석보》를 처음서부터 마지막까지 짓는 일, 그것은 실제로 임금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종은 아마도 운만 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7) 가. 수양이 《석보상절》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지은 것은 아니다. 수양은 세종의 의중을 파악하고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일을 총괄한 사람이다.

나.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지은 것도 아니다. 세종은 아마도 운만 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배경에서 《어제월인석보》 앞부분에 있는 《석보상절》 서를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7가, 나)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세조 즉 수양이 《석보상절》을 지었다고 하는 (3가), (4가)와 같은 사실에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것일 수 있다. (3가), (4가)의 비명과 같은 구절을 부도 그림에 새겨 넣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6. 《어제월인석보》 제15의 발굴

《어제월인석보》 권15는 두 번에 걸쳐 발굴되었다. 첫 번째의 발굴은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입수된 책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어제월인석보》 권25가 발견된 것이 95년 12월 15일이니만큼, 근 3년만에 새로운 자료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를 ‘성암본’이라 부르기로 한다.

성암본은 최은규(1998)의 해제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서지학보》 21에 영인이 실려 있다. 강순애(2003)에도 이에 대한 소개가 되었다. 책의 크기는 세로 가로 각각 33.7cm, 22.5cm로 보고하고 있다. 판식은 사주쌍변이며 반곽은 세로 23.2cm, 가로 17.5cm이다. 판심은 흑구(黑口)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로 되어 있다고 한다. 반곽의 크기를 제외하면 다른 《월인석보》와 같고, 행관(行款)도 마찬가지이다. 유계(有界)에, 월인부(月印部)는 14자, 상절부(祥節部)는 한 자 내려서 15자로 되어 있으며, 협주는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제는 ‘월인석보’이며, 표지 없이, 29장 반엽만 남아 있는 것인데, 장정은 아주 최근에 이루어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결락본이지만 인면이 선명하고 본문 부분이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를 보여 준다. 영인으로 그 책 모습의 대강은 볼 수 있다. 책은 처음과 끝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본문 중간에도 몇 장의 낙장이 있다고 한다. 50장 앞면부터 84장 뒷면까지 남아 있고, 71장 뒷면부터 76장 뒷면까지는 낙장 상태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책의 내용은 법화경의 법사품 제10, 견보탑품 제11을 줄여서 번역한 《석보상절》과 그것을 노래한 《월인천강지곡》 기(其) 296에서 302(59ㄴ~62ㄴ)까지의 7곡으로 되어 있다.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모두 견보탑품에 대한 것이다. 해제에 의하면, 《석보상절》 부분은 《법화경언해》를 통하여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완전히 새로운 자료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석보상절’ 부분이 《법화경언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의 발굴은 2000년 5월 17일자 ‘문화일보’에 소개된 《어제월인석보》 제15이다. 구암사측은 16일 “절내에 보관돼 있던 고서 한 권을 최근 문화재청 전문위원인 박상국 씨가 확인한 결과, 월인석보 초판본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15일 전북도를 통해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신청을 냈다.”고 밝혔다.

박상국 씨는 《어제월인석보》 제25도 찾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제월인석보》 제25는 95년 2월 순천대 박물관 발굴팀이 전남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 배안에서 찾아낸 전적 189책 가운데 포함된 복장본 중의 하나였다.

권15에 대해서는 강순애(2003)에 소개가 있다. 이에 의하면, 권15는 전북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394번지의 구암사에서 발굴된 뒤, 2000년 2월 22일 보물 740-10로 지정되었다. 그 뒤 구암사에서 본사인 전남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번지의 선운사로 이관되어 선운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권두부터 권말까지 87장으로 되어 있으며, 성암본과 달리 결락이 없는 완장본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가로 각각 33.7cm, 22.5cm로 보고 되고 있다. 표지는 없이 본문 29장 반엽만, 판식은 사주쌍변이며 반곽은 세로 22.0cm, 가로 16.4cm이다. 판심은 흑구(黑口)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로 되어 있다. 반곽의 크기를 제외하면 성암본이나 다른 월인석보와 같고, 행관(行款)도 마찬가지이다. 유계(有界)에 반엽 7행 16자(소자 14행 16자)라고 한다(강순애 2003 참조). 그러나 이는 석보상절부의 행 위의 빈칸도 고려한 것이다. 협주는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제는 ‘월인석보’이다.

국립국어원 디지털한글박물관에는 《어제월인석보》 제15 전권 87장이 모두 디지털 사진으로 올려져 있다. 이것은 결락을 가지지 않은 구암본인 것으로 여겨진다. 본고가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디지털한글박물관본이다.

《어제월인석보》 제15가 발견됨으로써 《어제월인석보》 제1부터 제25까지는 3, 5, 6, 16, 24권만이 결본이고, 나머지 모든 간본을 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4, 21, 22권은 초간본은 볼 수 없고, 16세기 이후에 사찰에서 번각한 번각본으로만 볼 수 있다. 초간본으로는 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3, 25권 총 17권이 찾아졌고, 16세기 이후의 사찰에 의한 번각본으로는 1, 2, 4, 7, 8, 17, 21, 22, 23권이 찾아진 것이다. 25권 이상 더 없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25권이 종권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7. 《어제월인석보》 제15의 내용 구성

법화경은 모두 28개의 품(品,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묘법연화경’의 적문(迹門) 14품과 본문 14품만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간혹 무량의경,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과 함께, 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법화삼부경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무량의경(無量義經, 開經)

덕행품(德行品) 第一

설법품(說法品) 第二

십공덕품(十功德品) 第三

적문(迹門) 14품

서품(序品) 第一

방편품(方便品) 第二

비유품(譬喩品) 第三

신해품(信解品) 第四

약초유품(藥草喩品) 第五

수기품(授記品) 第六

화성유품(化城喩品) 第七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第八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第九

법사품(法師品) 第十

견보탑품(見寶塔品) 第十一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第十二

권지품(勸持品) 第十三

안락행품(安樂行品) 第十四

본문(本門) 14품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第十五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第十六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第十七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第十八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第十九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第二十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第二十一

촉루품(囑累品) 第二十二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第二十三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第二十四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第二十五

다라니품(陀羅尼品) 第二十六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第二十七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第二十八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

《어제월인석보》 제15는, 1장 앞면 3행부터 59장 뒷면 4행까지는 《월인천강지곡》 기(其) 294, 기 295와 《석보상절》 및 그 협주문으로 되어 있다. 《월인천강지곡》 기 294, 기 295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은 《묘법연화경》 적문(迹門) 14품 가운데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 제8,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제9, 법사품(法師品) 제10 부분이다. 강순애(2003)에서는 이를 아울러 성불수기 부분이라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권15의 59장 뒷면 4행부터 87장 앞면 3행까지를 다보탑 용출 부분으로 보았는데, 《석보상절》에서 이에 해당되는 것은 《묘법연화경》 적문(迹門) 14품 가운데 견보탑품(見寶塔品) 제11이다.

8. 해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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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19에 대하여

남성우(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1. 〈월인석보〉 제19

〈월인석보(月印釋譜)〉 제19는 남권희 교수에 의하여 1999년 7월 초에 경북 고령(高靈)에 소재하고 있는 가야대학교에 소장된 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월인석보〉 제19는 가로 22.5cm, 세로 32.8cm이고 모두 12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25장 중 여섯 장(50ㄱ~56ㄱ)이 낙장이고 몇 장이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온전한 상태이다.

〈월인석보〉는 조선조 세조가 즉위 5년(1459)에 선고(先考)와 선비(先妣) 그리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죽은 도원군(桃源君)의 선가천도(仙駕薦度)를 위해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수정 합편으로 연정첨삭(硏精添削)되고 협주세문(夾註細文)이 많이 삽입되었다. 〈석보상절〉은 세종 29년(1447) 7월부터 31년(1449) 사이에 완성되어 간행되었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한문의 악장체로 칭송한 것이다.

2. 〈월인석보〉 제19의 저본(底本) 경전(經典)과 내용

〈월인석보〉 제19의 저경(底經)은 〈묘법연화경〉 권7이다. 〈월인석보〉 제19는 〈묘법연화경〉 권7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제25, 다라니품(陁羅尼品) 제26,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제27 및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제28을 언해한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 권7(1463년)과 내용상 일치한다.

〈월인석보〉 제19는 〈월인천강지곡〉 325곡~339곡부터 시작되고 8장 앞부분부터 97장 뒷부분까지는 〈석보상절〉과 협주세문이다. 98장의 340곡 다음에 98장 뒷부분부터 125장 앞부분까지는 〈석보상절〉과 협주세문이다.

〈법화경언해〉와 내용이 일치하는 〈월인석보〉는 제11부터 제19까지이다.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가 내용상 일치하는 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월인석보〉〈법화경언해〉비고
권111. 서품, 2. 방편품〈석보상절〉 권13은 법화경언해와 내용이 같다.
권123. 비유품     
권134. 신해품, 5. 약초유품, 6. 수기품     
권147. 화성유품     
권158. 오백제자수기품, 9. 수학무학인기품, 10. 법사품, 11. 견보탑품     
권1716. 여래수량품, 17. 분별공덕품, 18. 수희공덕품, 19. 법사공덕품, 20. 상불경보살품〈석보상절〉 권19는 법화경언해의 18. 수희공덕품부터 21. 여래신력품과 내용이 같다.
권1821. 여래신력품, 22. 촉루품, 23. 약왕보살본사품, 24. 묘음보살품〈석보상절〉 권20은 법화경언해의 22. 촉루품부터 24. 묘음보살품과 내용이 같다.
권1925. 관세음보살보문품, 26. 다라니품, 27. 묘장엄왕본사품, 28. 보현보살권발품〈석보상절〉 권21은 법화경언해와 내용이 같다.

월인석보(月印釋譜) 제20 해제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월인석보(月印釋譜)』(전 25권?)는 세조(世祖) 5년(1459)에 간행되었다. 이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가계(家系)와 그 일대기를 적은 『석보상절(釋譜詳節)』(전24권, 세종 29년, 1447)과, 세종(世宗)이 『석보상절』을 보고 이를 바탕으로 지은 악장(樂章)체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전 3권)을 첨삭하여 합편한 것이다.

이 『월인석보』가 간행된 지 5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동안에 보전되어 전하는 것이 초간본이나 중간본이나 낙장본을 통틀어 다음과 같이 20권이고, 이 글을 쓰는 현재(2004. 6.)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결본(缺本)이 제3, 5, 6, 16, 24의 다섯 권이다. 주001)

<정의>십여 년 전에도 풍문으로는 이 다섯 권 중의 몇몇 권을 고서 중개인들이 팔러 다닌다는 말을 들은 바도 있으며, 실제로 그 후에 당시에 결본이던 것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있다. 필자가 정년 후에 이 방면의 소식에 대하여 어두워진 탓인지 모르겠으나, 근래에는 이 결본에 대한 정보에 접한 일이 없다.

전하고 있는 책 : 1, 2, 4(중),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1(중), 22(중), 23(중), 25

전하지 않는 책 : 3, 5, 6, 16, 24.

종래에 결본이었던 것이 새로 발굴되어 소개됨에 따라 여러 차례 그 내용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필자가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온 지도 30여 년이 흘렀는데(김영배 1972), 근래에 썼던 김영배(1998)에서도 『월인석보』의 전래 현황을 일람표로 소개하면서 『월인석보』 제20(이하 ‘이 책’으로 적음)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빈칸으로 처리했었다. 그 후 김영배(2001)에서는 전해지고 있음을 밝히기는 하였으되, 소장자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책의 영인본은 2001년 10월 9일(강순애, 아세아문화사)에 간행되었다.

이 글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0여 년 동안 추진하고 있는 한글 고전 현대어역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동안 이 사업회에서 간행한 역주본(譯註本)들은 본문의 역주와 영인본(影印本)의 합편으로 간행되었으나, 이번에는 역주에 앞서 해제를 두어 서지적, 어학적 고찰을 보태기로 하였다. 이 글에서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이왕에 언급된 것은 가능한 한 줄이고, 표기나 음운, 문법, 어휘 등 특별히 문제될 만한 점을 중심으로 고찰하기로 하였다.

2. 서지(書誌)와 내용

2.1 서지

이 책의 형태 서지는 다음과 같다. 주002)

<정의>이 글은 강순애(2001)에 힘입은 바가 크다. 여기에 적어 사의를 표한다.

(1) 『월인석보』 제20권의 형태 서지

내제(內題) : 월인천강지곡 제20(月印千江之曲 第二十) (큰 글자)

석보상절 제20(釋譜詳節 第二十) (중간 글자)

판심제(版心題) : 월인석보 20(月印釋譜 二十)

반곽(半廓) : 22.3㎝ × 17.0㎝

판식(板式) : 4주쌍변유계(四周雙邊有界)

판심(版心) : 대흑구 상하 내향 흑어미(大黑口上下內向黑魚尾)

행관(行款) : 월인천강지곡 7행 14자(큰 글자)

주(注)는 쌍행(雙行) 14자(작은 글자)

석보상절 7행 15자(중간 글자)

주(注)는 쌍행(雙行) 14자(작은 글자)

권말제(卷末題) : 낙장으로 없음

본문 : 1 ~117장 주003)

<정의>이 책의 훼손(毁損)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15장 낙장(落張) ②82장ㄴ, 83장ㄱ 낙장 ③107장~110장 낙장(영인본엔 공백의 책장을 끼워 넣으면서, 실수로 판심의 장차를 ‘일백일(一百一)’로 적었음. 이 앞의 15, 82ㄴ, 83ㄱ의 경우도 같음.) ④118장 이하 낙장 ⑤68ㄱ~82ㄴ(이 부분은 장차에 따라서 적게는 약 1/4, 많게는 2/3 정도만 본문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음.)
한편 이 책의 118장 이하는 낙장으로 없으나, 그 낙장된 분량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까닭은 이 책에 실린 ‘월인천강지곡’의 끝이 ‘기411’인데 『월인석보』 제21권은 첫 부분이 ‘월인천강지곡 기412’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경(底經)인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 권 제1 「효양품(孝養品)」 제2의 나머지 분량을 대략 계산해 본다면, 중간에 다른 협주(夾註) 세문(細文)이 더 없다면, 낙장된 것은 약 8면(面) 정도이고, 장차는 118~121(또는 122)일 것이라 추정된다.

표지(表紙) : 오래된 표지이나, 초간본 당시의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됨.

제첨(題簽) : 필자가 산 영인본에는 월인석보에서 집자(集字)한 것으로 재첨을 새로 만들어 붙였으나, ‘보(譜)’자가 잘못되어 『월인석보(月印釋報)』로 되었음.

2.2 내용

이 책의 내용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분단에 따라 전권을 5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책의 내용

가. 제1단

① 월인천강지곡 기341 (1ㄱ~1ㄴ2)

* ‘1ㄴ2’는 ‘1장 뒤쪽 2행’을 뜻함.

② 석보상절 (1ㄴ3~2ㄱ5)

a. 내용 : 대범천왕이 영산회(靈山會)에 참석하여 석존께 법을 청함.

b. 저경 : 『석씨계고(釋氏稽古)』 권4.

(『대정신수대장경』 제49권 사전부(史傳部) 1. p.873.).

『불조통기(佛祖統紀)』 권5.

(『대정신수대장경』 제49권 사전부 1. p.170.).

③ 협주(夾註) 세문(細文) (2ㄱ5~3ㄱ2)

a. 내용 : 금색두타(金色頭陀)인 가섭(迦葉)부부의 내력.

b. 저경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

(『대정신수대장경』 제51권, 사전부 3. p.205.).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권3.

(『대정신수대장경』 제49권, 사전부 3. p.496.).

④ 석보상절 (3ㄱ2~4ㄱ6)

a. 내용 : 세존께서 가섭에게 정법을 전수함.

b. 저경 : 『법정종기(傳法正宗記)』 권1.

(『대정신수대장경』 제51권, 사전부 3. pp.717~718.).

『불조역대통재』 권3.

(『대정신수대장경』 제49권, 사전부 1. p.496).

⑤ 협주 세문 (4ㄱ6~5ㄴ2)

a. 내용 :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많은 사람에게 보였으나,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파안미소(破顔微笑)하므로, 정법(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가섭에게 부촉함.

b. 저경 : 『불조역대통재』 권3.

(『대정신수대장경』 제49권. p.496).

『잡아함경(雜阿含經)』 권41.

(『대정신수대장경』 제2권, 아함부(阿含部) 하. pp.302~303.).

『별역(別譯)잡아함경』 권6.

(『대정신수대장경』 제2권, 아함부 하. pp.417~419.).

나. 제2단

① 월인천강지곡 기342~기346 (5ㄴ3~7ㄴ7)

② 석보상절 (8ㄱ1~29ㄱ2)

a. 내용 : 불제자 아난이 왕사성에 들어가 탁발하다가 가난한 바라문의 아들이 부모를 정성으로 효양함을 보고 찬탄했는데, 6(師) 외도(外道)의 무리가 부처는 태어난 지 7일에 어머니를 돌아가게 한 불효자라고 비난하여, 아난이 돌아와 부처님께 불법에 효양함이 있는가 물은 데 대하여, 부처님이 『대방편불보은경』을 설하기 전의 광경. 주004)

<정의>이 대목은 문장이 종결되지 않고 ‘……臥具 醫藥과 一切 주어’로 끝나는데, 이 내용은 제3단과 제4단을 건너뛰어 제5단에 이어진다. 이 사실은 각주 5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b. 저경 : 『大方便佛報恩經』 권1 서품(序品) 제1, 효양품(孝養品) 제2.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本緣部) 상, pp.124~127.).

다. 제3단

① 월인천강지곡 기347~기348 (29ㄱ3~30ㄱ1)

② 협주 세문 (30ㄱ2~38ㄱ5)

a. 내용: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것을 안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의 열반을 차마 볼수 없어 먼저 공중에 몸을 살라 열반에 드니, 대중이 슬퍼하여 탑을 세움. 아난이 사리불이 어떤 인연으로 여래보다 먼저 멸도하게 되었는가를 세존께 여쭈니, 세존께서 사리불은 전세에서도 그런 인연이 있었으니, 바라내국대광명왕의 이야기가 그것이라고 설함.

b. 저경 : 『대방편불보은경』 권 제5, 자품(慈品) 제7.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p.148~150.).

라. 제4단

① 월인천강지곡 기349~기405 (38ㄱ6~61ㄱ6)

② 긴 협주 세문 (61ㄱ~91ㄱ)

a. 내용 :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을 모두 옮김. 과거세(過去世)에 섭파국(葉波國) 습파왕(濕波王)의 수대나태자가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음을 알게 된 적국(敵國)에서 이 기회에 왕자를 이용하여 전쟁에서 늘 이기게 하는 코끼리 ‘수단연’을 보시 받아오려고 8명의 도사를 보냈는데, 태자는 본래의 서원(誓願)을 어기지 않으려고 ‘수단연’을 내 주었다. 그러자 섭파국의 신하들이 습파왕에게 간하여 왕자를 단특산에 12년 귀양하게 하였는데, 그 와중에서도 바라문에게 왕손 오누이를 내 준다든지, 자신의 비(妃)를 내준다든지 하는 보시를 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이 모두 왕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의 태자가 지금의 부처 자신이고, 습파왕은 정반왕이라 하여,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하여 보시함이 이와 같음을 설함.

b. 저경 : 『태자수대나경』

(『대정신수대장경』제3권, 본연부 상, pp.418~424.).

마. 제5단

① 월인천강지곡 기406~기411 (91ㄴ1~93ㄴ6)

② 석보상절 (93ㄴ7~117ㄴ)

*118장 이하는 낙장. 주005)

이 부분은 각주 4에서 언급한 바대로 제2단의 끝에서 연결되는 것으로서, ‘브즈러니 닷가 精進며 戒施 多聞과…’로 시작됨.

a. 내용 : 전세에 부모를 효양하던 고행 인연을 설한 것으로, 과거세에 바라내국 나사왕의 나후대신이 흑심을 품어, 대왕과 첫째와 둘째 왕자를 죽이고 셋째 왕자가 다스리는 소국도 치려 하였다. 이 소국의 수사제 왕자는 보시를 즐겨 몸이 황금색이었는데, 궁전의 신령이 나후대신의 반역을 알려 7일분의 식량을 가지고 이웃 나라로 피하는데, 양식이 떨어지자 수사제 왕자는 자신의 살을 베어 부모를 효양한다는 이야기이다. 효양품의 끝 부분임.

b. 저경 : 『대방편불보은경』 권 제1, 효양품 제2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p.127~129.).

이제 앞에서 언급한 제2단 끝(29ㄱㄴ)과 이에 이어지는 제5단의 첫 부분(93ㄴ7)에 대하여 검토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 밝힌 내용을 표로 보인다.

〈표-1〉 책의 내용(제 2단 이하)

     장    면    행내       용
제2단29 ㄱ 2〈석보상절 본문〉臥具와 醫藥과 一切를 주어/(끝 )
제3단29 ㄱ 3
30 ㄱ 1
30 ㄱ 2

38 ㄱ 5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부분을 협주 세문으로 처리함〉


기347
기348
(사리불이 세존보다 먼저 열반에 드니, 전세에도 그러하였다고 하는 바라내국대광명왕의 이야기.)


제4단38 ㄱ 6

61 ㄱ 6
61 ㄱ 7

91 ㄱ 7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 석보상절 부분을 협주 세문으로 처리함〉


기349

기405
(태자수대나경)

제5단91 ㄴ 1

93 ㄴ 6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기406

기411
93 ㄴ 7

〈석보상절 본문〉
브즈러니 닷가 精進며 戒施……

여기에서 우리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첨삭 합편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한 실상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즉 『석보상절』 부분(29ㄱ2 : 臥具와 醫藥과 一切를 주어)의 문장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월인천강지곡』과 그에 대응되는 『석보상절』 부문, 협주 세문(제3단과 제4단 : 29ㄱ3~91ㄱ7)을 삽입하고, 이어서 『석보상절』의 본문(제2단)에 대응되는 『월인천강지곡』(기406~411)을 배치한 후에, 비로소 중단되었던 『석보상절』의 내용(브즈러니 닷가……)으로 이어나간 것이다.

이로써 제3·4단은 합편과정에서 새로 보충해 넣은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만 합편 전의 『월인천강지곡』도 여기의 순서와 같았는지, 아니면 『월인천강지곡』도 첨삭이 있었는지는 『월인천강지곡』 중·하권이 전하지 않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3. 표기

이 책의 표기법의 일단을 살피기로 하되,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은 생략하고, 정음 창제 초기의 사례로서는 드문 것과 문제될 만한 것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3.1. 합용병서

(3) 합용병서 표기 주006)

<정의>( ) 안의 내용은 이 책의 장차(張次)와 전후면(前後面)을, (( )) 안의 숫자는 출현 횟수를 나타낸다. 곧 (89ㄴ(2))는 이 책의 89장 후면에 2회 나타난다는 뜻이다. 1회 나타날 때에는 출현 횟수를 표시하지 않았다.

ㅳ : 디신  (2ㄱ)나못 니플 다가(79ㄱ)

눈 브르고〔睜〕(115ㄱ)어르 므로려〔摑〕(115ㄱ)

ㅄ : 라〔用〕(63ㄴ) 시고〔包〕(106ㄱ)

〔米〕(89ㄴ(2)) 값〔價〕(57ㄱ)

안 닶겨〔悶〕(105ㄱ) 〔用〕 (61ㄱ)

ㅶ : 야디여〔裂〕(73) 터러그로 〔織〕(88ㄴ)

ㅷ : 더니[-拂](51ㄴ)

ㅴ : 〔時〕(2ㄴ) 〔時〕(30ㄱ)

미〔隙〕(31ㄱ)

ㅵ : 넘면〔溢〕(71ㄱ)

ㅺ : 미고〔飾〕(2ㄴ)오〔敷〕(16ㄴ) 러〔跪〕(19ㄴ)

〔難〕(37ㄴ)시니〔覺〕(66ㄴ)

ㅼ : 〔地〕(26ㄱ)리〔女兒〕(2ㄴ)미라(61ㄴ)

ㅽ : 고〔拔〕(14ㄱ)혀고져〔拔〕(18ㄴ)리〔速〕(19ㄱ) 려〔灑〕(30ㄱ)로〔骨〕(37ㄴ)아〔瞪〕(106ㄱ)

이 합용병서의 보기 중에는 ‘ㅳ’ 항의 ‘어르, 다가’와 같은 아주 드문 보기도 있다.

3.2. ‘-ㅭ’과 체언 초성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정음 창제 초기에는 관형사형 어미 ‘-ㅭ’에 이어지는 체언의 초성이 무성평음인 경우 ‘ㄱ, ㄷ, ㅂ, ㅅ, ㅈ’이 그대로 표기되었으니, 이 책에서의 보기는 다음과 같다.

(4) 관형사형 어미 ‘-ㅭ’에 후행하는 무성평음을 평음으로 표기한 경우

〔出〕 제(4ㄱ)涅槃 저긔(4ㄴ)비  저긔(16ㄱ)

죽사리 時節(28ㄱ) (29ㄱ)涅槃 저긔(4ㄴ)

라 제(38ㄴ)나 제(41ㄴ)여희 (48ㄴ)

슬 (48ㄴ)주 제(49ㄱ) 도라 제(51ㄴ)

 (61ㄱ)싸 저긔(64ㄱ)비 거시(64ㄴ)

 白象(65ㄱ)쏘ᇙ 벌에(69ㄴ)이 (69ㄴ)

겨 제(69ㄴ) 적도(75ㄴ)가(82ㄱ)

브 사(86ㄱ) (93ㄱ)몯  (97ㄱ)

  (97ㄱ)올타  적도(100ㄱ) 적도(100ㄱ)

* 셜셔(30ㄱ·ㄴ, 37ㄱ), 아가(41ㄱ), 주가(46ㄴ)

이 중 끝의 세 예(특히 ‘아가’)는 공시적으로는 ‘관형사형 어미+명사’의 구조로 보기가 어려운 경우이나, 함께 들어 두었다.

그런데 기원적으로 ‘-ㅭ ’ 형에서 발달한 ‘-ㄹ씨라, -ㄹ씨니, -ㄹ’ 등은 『석보상절』에서도 이미 ‘-ㅭ 시라, -ㅭ 시니, -ㅭ ’로 나타나지 않고 모두 ‘-ㄹ씨라, -ㄹ씨니, -ㄹ’로 표기되었다. 『석보상절』보다 간행연대가 10여 년이나 뒤지는 이 책도 당연히 ‘-ㄹ씨라, -ㄹ씨니, -ㄹ’ 등의 표기를 보여 준다. 여기서는 그 밖의 보기만을 든다.

(5) 관형사형 어미 ‘-ㅭ’에 후행하는 무성평음을 경음으로 표기한 경우

우실 쩌글(61ㄴ)일흐실까 노니(66ㄱ)주실까 노다(66ㄴ)

언마 바따(87ㄱ)

이 중 ‘우실 쩌글’은 (4)항의 ‘涅槃 저긔(4ㄴ),  적도(75ㄴ)’와 대조적이며, ‘일흐실까, 주실까, 바따’는 (4)항의 ‘아가’와 대조적인데, 이러한 표기의 변화로 미루어 (4)항의 다른 예들도 조만간에 (5)항의 보기와 같은 표기 방식으로 바뀔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능엄경언해』(1461) 등에 이르면 이러한 표기가 크게 확산되니,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6) 『능엄경언해』(1461)의 표기(관형사형 어미+무성평음으로 시작하는 의존명사)

가. 구들 씨라〔固〕(능 1:8ㄱ)릴 씨오(능 1:16ㄱ)얽(능 1:24ㄴ)

아디 몯 씨라(능 10:40ㄱ)

나. 無所言說 시라(능 10:26ㄱ)(구결문)

: 닐올 말 업슬 씨라(능 10:26ㄱ)(언해문)

以起徧常論니라(능 10:10ㄴ)(구결문)

: 徧常論 니르와니라(능 10:10ㄴ)(언해문)

다.無所言說 씨라(능 10:26ㄴ)(구결문)

: 닐올 말 업슬 씨라(능 10:26ㄴ)(언해문)

計以爲常 씨라(능 10:11ㄱ)(구결문)

: 아라 혜여 常 사 씨라(능 10:11ㄱ)(언해문)

이 중 (6가)와 같이 언해문에서는 ‘-ㄹ 씨라, -ㄹ 씨오, -ㄹ’와 같이 표기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다. (6나)는 왼 편이 구결문이고 오른 편이 그에 대응되는 언해문인데, 구결문에는 ‘-ㄹ 시라, -ㄹ니라’와 같이 ‘-ㄹ+평음’으로 씌었는데, 언해문에는 모두 ‘-ㄹ 씨라, -ㄹ니라’와 같이 ‘-ㄹ+각자병서’로 표기되었다. 그에 비하여 (6다)는 구결문과 언해문이 모두 ‘-ㄹ 씨라’로 씌었으니, 보수적이던 구결문의 표기도 언해문의 표기와 같은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원각경언해』(1465)에 오면 인위적인 표기의 통일로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ㅭ+’의 표기는 창제 초기부터 융합된 표기(-ㄹ 씨니, -ㄹ 씨라, -ㄹ)로도 씌어서 이런 표기를 확산시키는 시초가 되었다고 본다.

3.3. 그 밖의 각자병서

(7) 가. ㆀ : 〔繫〕(14ㄱ)  메〔駕〕(42ㄱ) 술위 메 (70ㄱ)

나. ㅥ : 노〔置〕 야(80ㄱ) 저다〔畏〕(56ㄴ)

이들은 모두 어중에서 각자병서로 씌었으니, (7가)의 ‘ㆀ’은 사동접사 ‘-이-’를 표시한 것이고, (7나)의 ‘ㅥ’은 어간말음 ‘ㅎ’이 ‘ㄴ’ 위에서 비음동화된 표기이고, 『훈민정음』(언해본)의 ‘다니라’와 같이 동화현상을 보이는 표기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용례이기에 들어 둔다.

3.4. 종성의 ‘ㅈ, ㅊ, ㅿ, ㅌ’

(8) 가. 〔花〕 자바(4ㄱ) 어미〔乳母〕(38ㄴ) cf. 어미(62ㄱ)

나. 〔面〕 버으릴 씨오(2ㄱ) cf. 치 허러(79ㄱ)

다. 이니다〔牽〕(42ㄱ) 어 내샤〔牽〕(52ㄴ)

라. 낱 太子 님 아이로(56ㄱ)

cf. 낫  어르(두언 초 8:22)

헤아리디 어려운 낫 독 거시라(남명집 상:75)

마. 아기 앗이 져근 갓 나라 王이 외야 겨시더니(103ㄱ)

(8가, 나)의 밑줄 친 부분의 종성 표기는 『훈민정음』(해례)의 ‘8종성표기’가 적용되지 않은 것인데 이는 조만간 ‘ㅅ’으로 중화되는 것이고, (8다)의 ‘ㅿ’는 모음 앞에서 실현됨을 보여 주고 있으며, (8라)도 ‘8종성표기’가 적용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나, 이는 중화된다면 ‘낟’으로 되어야 할 텐데, 사전에 실려 있는 것은 『두시언해』(1481)이지만, 『남명집언해』(1482)에서는 ‘낫’으로 나타난다. 이는 ‘낱’의 8종성표기 ‘낟’이 음절말 위치에서 ‘ㄷ:ㅅ’의 대립이 없어지면서 ‘낫’으로 표기된 것이다.

(8마)의 ‘아기’는 ‘도라 아기 보니(월석 10:24)’에서처럼 ‘-’이 바른 표기인데, 여기서는 ‘ㅅ:ㄷ’이 중화된 표기를 보여 준다. 이는 ‘ㅅ:ㄷ’이 음절말에서 대립을 이루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증거가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3.5. 한자어

(9) 절고 야(81ㄴ) cf. 人事(宣孟 11:14)

종래의 고어사전에는 위에 든 것처럼 『맹자언해』의 한자 주음(注音)만이 수록되어 있으나, 이 책의 ‘’는 한자 없이 나타나 있어서 한자어라는 인식이 그리 강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접미사 ‘-다’와 결합하여 나타나므로 ‘다’를 표제어로 사전에 등재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3.6. ‘-’의 축약 표기

3.6.1. 한자어 어근 + -

(10) 滅度타(5ㄱ)受티(8ㄱ)盛케(9ㄴ)念케(19ㄱ)

孝養케(19ㄴ)貴케(87ㄴ)盛코(103ㄴ)尊코(87ㄴ)

請커늘(42ㄴ)*利益게(21ㄱ)*得게(25ㄱ)

위의 용례는 모두 ‘한자어 어근+-’로 파생된 용언의 어간말음 ‘’가 어미 ‘-다, -디, -게, -고, -거늘’과 결합하여 ‘ㆍ’가 탈락하고 ‘ㅎ’이 어미의 두음을 유기음화시킨 것이다. ‘*’로 표시한 예들은 어근말음이 무성폐쇄음인 경우로서 어간의 ‘’가 완전히 탈락한 것이다.

3.6.2. 보조동사 ‘-’의 축약

(11) 孝養케 코져(25ㄱ)得게 코져(25ㄱ)念케 코져(19ㄱ)아니케 코져(18ㄴ,35ㄴ)

알에 코져(25ㄱ) 얻게 코져(62ㄴ) 업게 코져(85ㄴ) 보게 코져(99ㄴ)

몯게 코져(99ㄴ) 건나게 코져(19ㄴ)

(11)은 본동사 뒤에 이어지는 보조동사 ‘-’가 어미 ‘-고져’와 축약되면서 어미의 두음 ‘고’를 유기음화시킨 것이다. (10)에서와 같이 접미사 ‘--’나 보조동사 어간의 ‘-’에서 모음 ‘ㆍ’가 탈락하고 후행음절을 유기음화시키는 예는 이 책에 매우 많이 나타난다.

4. 문법

4.1. 명령형 어미

(12) 가. -라 : 라(90ㄱ) 이바라(89ㄱ)

나. -으라 : 드르라(101ㄱ)

다. -어라 : 머거라(115) cf. 두어라(월석 7:8)

라. -아라 : 보아라(석보 23:13)

마. -라 : 라(17ㄴ) 나가라(67ㄴ) 알라(94ㄴ, 99ㄱ, 100ㄱ)

니라(91ㄱ) 심기라(4ㄱ) 말라(34ㄱ, 67ㄴ)

잇거내라(65ㄱ) 가져가라(36ㄴ) 주라(88ㄴ)

라(90ㄱ) 라(63ㄴ)

(12가)는 어간말음절 모음이 양성모음이고 폐음절인 경우이며, (12나)는 어간말음절 모음이 음성모음이고 폐음절인 경우인데, 이 때에는 ‘-라’와 ‘-으라’가 교체된다. 그런데 (12다, 라)에서 보듯이 ‘-아라/어라’도 당시에 이미 사용되었다. (12마)는 매개모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12가, 나)와 같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라/으라’와 ‘-아라/어라’는 간접명령과 직접명령으로 대립하였던 가능성이 있다. 간접명령문은 간접인용문에 쓰이는 명령문이다. (12마)의 ‘나가라, 가져가라’는 ‘-아라’가 쓰인 것인지, ‘-라’가 쓰인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4.2. 존칭 호격조사 ‘-하’

(13) 가. 世尊(17ㄴ, 32ㄱ) 대왕(35ㄴ〈2〉, 36ㄱ)

나. 부톄 니샤 善男子하 仔細히 드러 이대 라(17ㄴ)

다. 舍利弗이 이 말 듣고 셜 …… 諸天 龍 鬼神과 非人과려 닐오 善男子하 世間이 뷔리며 世間 누니 업스리니 셜셔(30ㄱ)

이 책에서도 존칭의 호격조사 ‘-하’는 (13가)와 같이 씌었다. (13나, 다)의 ‘-하’의 쓰임은 단순하지 않다. (13나, 다)의 화자와 청자는 다음과 같다.

(13나) (13다)

화자 : 부텨 사리불

청자 : 선남자 제천, 용, 귀신

그러므로 (13나, 다)의 ‘-하’는 존칭의 호격조사로 보기 어렵다. 종래의 고어사전들에서도 같은 형태의 ‘-하’를 표제어를 달리해서, 하나는 ‘-이시여’로 다른 하나는 ‘-아, -야’로 풀이하거나(유창돈 1964, 한글학회 1992), 한 표제어 아래 ①‘-아, -이여’와 ②‘-이시여’로 풀이해 놓았다(남광우 1997). 결국 (13나, 다)의 ‘-하’는 존칭이 아니고 평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3. 원망(願望)의 어미 ‘-고옷’

(14) 가. 내 말옷 아니 從면(73ㄱ)

날옷 어엿비 너겨(111ㄱ)

나옷 天王釋을 소기논디면(117ㄴ)

그리옷 아니면(117ㄴ)

나. 내 다  이셔 王ㅅ 功德을 듣니 布施샤  들 거스디 아니야 먼 여 갓가 여 놀애 블러 讚嘆 부러 머리셔 오니 이제 어고옷  거시 이셔다 王이 닐오 求논 거스란 疑心디 말라(20:34ㄴ)

(我在他方聞王功德布施不逆人意 名聲遠聞上徹蒼天下徹黃泉 遠近歌歎實無虛言 故從遠來歷涉山川 今欲有所得 王言 我今名爲一切之施 有所求索莫自疑難…)(대방편불보은경 권 제5 자품)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149)

다. 사미 온가짓 됴 차반 라 各別히 올여든 그 사미 먹고 吐하면 어딋던 다시 먹고옷 료 이제 내 布施도 가비건댄 吐ㅣ 니…(20:90ㄱ)

(譬如有人 設百味食 特有所上其人食已嘔吐於地 豈復香潔可更食不 今我布施亦若吐…)(태자수대나경)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p.418~424)

이른바 강조의 보조사 ‘-곳/옷’은 전통적으로 체언이나 부사에 바로 통합되어 쓰이는 것이다. 이 책의 (14가)는 그러한 용례를 보여 준다.

그러나 (14나, 다)의 ‘-옷’은 강조의 보조사 ‘-곳/옷’과는 전혀 문법적 성격이 다른 형식이다. 이 예문의 ‘어고옷, 먹고옷’은 문맥으로 보아서 각각 ‘얻(잡)고자, 먹고자’의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음 (15)에서는 ‘-곳/옷’역시 [원망(願望)]의 뜻을 나타낸다.

(15) 너희 吉 사미 외옷 녀 凶 사미 외옷 녀(汝等은 欲爲吉人乎아 欲爲凶人乎아)(내훈 초 1:25)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4. 옛말과 이두)에서는 이 ‘-옷’을 ‘-곳’의 이표기로 보고 ‘-고자’로 풀이하였다. 이렇게 되면, (14 나, 다)의 ‘-고옷’과 (15)의 ‘-옷’은 이표기로 보이고, ‘-고옷’의 ‘-고’의 문법적 성격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고옷/곳/옷’ 또는 ‘-ㅅ-’이 [원망]의 의미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며 이 ‘-ㅅ-’은 기원적으로 볼 때 [원망]의 선어말어미 ‘-지-’와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4.4. -(/으)ᅵᇰ-

(16) 天帝釋이 太子ㅅ 바도리라 야 귓것티 골업슨 波羅門이 외야 太子 와 妃子 주쇼셔 야 太子ㅣ 닐오 됴다 妃子ㅣ 닐오 나  주시면 뉘 太子 供養리고(84:ㄴ)

이 ‘-(/으)ᅵᇰ-’는 야쎠체 공손 선어말어미이다. 그 예가 풍부하지 않으므로 여기에 제시해 둔다.

4.5. 기타

(17) 가. 布施 아니 마샤 正覺 일우시니 그 낤 말이 내내 리(월곡 기405, 61ㄱ)

나. 녜 님 孫子ㅣ라니 이젠  일 이럴 아니 안기뇌(월곡 기395, 57ㄱ)

(17가)의 ‘리’는 ‘ㅿ’ 종성 뒤에 ‘ㅸ’이 나타난 것인데, 종래에는 ‘니’(월인 상:64), ‘리’(용가 16) 두 예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 책에서 용례 하나를 추가하게 되었다. 한글학회편의 『우리말큰사전』(제4권 : 옛말과 이두)에서는 ‘웃ㅸ-’를 어간으로 하여 ‘웃ㅂ-’의 ‘ㅸ 벗어난 줄기’로 처리하였다. (17나)의 ‘안기뇌’의 ‘-뇌’도 드문 예로서, 종래의 사전에는 중세국어의 용례로 〈월곡 기26〉, 〈월석2:45〉와 〈번노 하:35〉의 보기를 싣고 있을 뿐이다. 이 ‘-뇌’는 ‘-노다’의 축약형이다.

(18) 가. 아기 셔울 가고라 골티 말오라 우리도 리 니거지

나. 衆生이 四苦ㅣ 업고라 布施 너펴지라 父母를 나 보지(기386:53ㄱ-ㄴ)

여기에 보이는 종결형식 ‘-지’는 대단히 드문 예이다. 현전하는 『월인천강지곡』에서 종결 위치에 ‘-지’가 쓰인 것은 이 보기가 처음이라 생각된다. 이는 ‘니거지라, 보지라’에서 종결어미 ‘-라’가 생략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는 반말체 종결형식으로 간주해 둔다.

5. 어휘

고문헌이 새로 발굴되어 공개되면,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부문이 어휘 부문이다. 음운과 문법 부문에 비하여 어휘 부문에서 새로운 것이 드러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전혀 새로운 어휘가 발견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래에 이미 발견된 어휘가 용례가 충분치 않아 의미나 구조가 불분명하던 것이 새로운 문헌의 등장으로 인해 그 정체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수도 있다.

이 책의 어휘에 대한 연구에는 정우영(2001)이 있다. 이 역주본에서는 정우영(2001)의 성과를 거의 그대로 따랐으며, 새로운 어휘와 몇몇 문제되는 어휘를 다룬 후, 끝에 정우영(2001)의 어휘 일람을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였다. 용언의 경우에는 기본형을 표제어로 삼았다.

(1) 것 / 것워

(19) 가. 아바긔 請샤 府庫 여르시니 것 救시니(월곡 기351, 39ㄴ)

나. 太子ㅣ 城 바 나가니 天帝釋이 것워와 귀머그니와 눈머니와 버워리 외야 긼 잇거 보고 도라드러…(63ㄱ)

☞太子便出城 天王釋下化作貧窮聾盲瘖瘂人 悉在道邊 太子見之 卽迴車還宮…

〈태자수대나경〉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p.419)

(19가)는 『월인천강지곡』 기351의 후련이고, (19나)는 (19가)에 관련되는 『석보상절』 부분이다. 이는 앞의 내용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제3단으로서, ‘태자수대나경’의 옮김인바, 섭파국 습파왕의 수대나 태자가 보시하기를 좋아해서 부왕의 허락을 받아 국고(國庫)에서 보배를 꺼내어 네 성문 밖에 놓아두고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는 장면의 바로 앞 대목이다.

여기에서 밑줄 친 ‘것’와 ‘것워’는 표기가 다르지만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다. (19나)의 ‘것워’는 저경(底經)으로 보아서 ‘빈궁(貧窮)한 사람’을 뜻하고, 『월인천강지곡』은 동일한 부분을 옮기면서 ‘것’로 달리 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것’와 ‘것워’는 표기는 다르지만 동의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 대해서 사전에 따라 서로 다르게 풀이한 경우가 있다.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제4권 : 옛말과 이두)에는 ‘것, 와, 것워’ 모두 표제어로 수록하였는데, 이 중 ‘것’를 대표로 삼고 그 뜻은 ‘거지’라 풀이하였다. 이는 ‘것’의 ‘ㅸ’이 ‘w’로 변화하여 ‘와’와 ‘워’로도 표기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남광우(1997)에는 ‘것’는 ‘거지’로, ‘와’와 ‘워’는 각각 표제어를 달리하여 ‘탕자(蕩子)’와 ‘요동개(개의 한 품종)’로 풀이하면서, 그 용례를 아래와 같이 들어 놓았다.

(20) 가. 와 : 탕자(蕩子). 蕩子 와라(금삼 4:22)

나. 워 : 요동개(개의 한 품종). 獦獠 워라(육조 상:7)

여기에서는 ‘워’를 (19가, 나)의 ‘것, 것워’와 다른 단어로 간주한 것이다. 이 세 단어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떠오른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같은 단어라고 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20나)의 뜻풀이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갈료(獦獠)’를 『동아 한한대사전』에서는 ‘개’가 아니라 ‘중국에서 북방인들이 남방인들을 욕할 때 쓰는 말’로 풀이하였다. ‘갈료’의 한자(漢字) 축자적 의미를 따진다면, ‘獦’이 ‘큰 이리, 주둥이가 짧은 개, 성(姓)’이고, ‘獠’가 ‘밤 사냥, 사냥, 오랑캐 이름’이다. ‘獦’은 ‘개’를 뜻하나, ‘獠’는 ‘개’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 이 사전에서 수록한 예문 ‘5조가 6조에게 이르기를 너는 광남의 갈료[남부지방의 야만인]인데도 진실로 불성이 있도다 = 五祖謂六祖 汝廣南獦獠 有甚佛性(전등록(傳燈錄))’로 보아, ‘갈료(獦獠)’는 현대국어의 ‘강아지’로서의 ‘개새끼’가 아닌, 비어(卑語)나 욕(辱)으로서의 ‘개새끼’와 걸맞은 말이다. 그러므로 (19가, 나)의 ‘것, 것워’는 모두 ‘거지’를 뜻하고, (20가, 나)는 그 뜻이 확대된 것이고, 그 중 (20나)는 욕하는 말이라 결론짓는다.

(2) 아

(21) (앞부분 낙장) …ㅣ 듣고 해 디여 그울며 우루믈 그치디 아니 太子ㅣ 닐오 아그치라 디나건 겁에 提和竭羅佛ㅅ 時節엣 本來ㅅ 期約 그듸 아시니 (20:83ㄴ)

☞ …鳩留國有一婆羅門來 從我乞兩兒便以與之 妃聞太子言 便感激躄地如太山崩 宛轉啼哭而不可止 太子言 且止 汝識過去提和竭羅佛時本要不耶…

〈태자수대나경〉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422)

이 대목은 구류국의 바라문이 수대나 태자에게 가서 어린 오누이를 종을 삼으려고 달래 가지고 데려간 다음, 태자비가 두 아이들을 찾다 못하여 우는 장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 그치라’는 저경(底經)의 ‘차지(且止)’의 옮김인데, 비슷한 어형에 이끌려서 ‘아’을 현대어 ‘아직’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문맥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다. 이 ‘아’은 이 책에 처음 나오는 말로 새로 사전 등재해야 할 것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동아 한한대사전』과 일본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모로바시 테츠지 : 諸橋轍次)에서는 ‘차(且)’자를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았다. 비교적 필요한 내용만 발췌한다.

(22) 가. 동아 한한대사전

1. 또. ① 또. 또한. 다시 더. ② 거듭하여. 그 위에. ③ 막상.

④ 비록. 가사. 가령. ⑤ 도대체. 대저.

2. 잠깐. 얼마간.

3. 구구하다. 임시적이다.

나. 대한화사전

1.かつ[동시에. 또한.].

2. しばらく[잠깐].

여기에서 두 사전이 모두 ‘잠깐’이란 의미를 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문 (21)의 ‘아’에 가장 가까운 의미는 바로 ‘잠깐’이라 생각된다. 곧 ‘아 그치라’는 ‘잠깐 그치라’는 뜻이다.

결국 이 ‘아’은 ‘아직’과는 거리가 있는 말로 동의어가 될 수 없다. 별개의 단어로 사전에 수록하고, 품사는 부사로, 뜻은 ‘잠깐’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3) 자것

(23) 사미 살면 주구미 잇고 일이 일면 야듀미 잇고 자것이 보 냇다가  이우니라(20:35ㄱ)

☞ 人生有死 事成有敗 物生於春秋自枯

『대방불보은경』 권 제5, 자품 제7.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150)

이 대목은 제3단에 나오는데, 바라내 대왕이 자신의 머리를 바라문에게 보시하기 전에 슬퍼하는 부인과 태자에게 타이르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자것’의 뜻이 문제다.

‘자것’은 다른 문헌에도 나온다. ‘匠人 자것  사미라’(석보 11:10)이 그것인데, 뜻은 사전에 ‘연장, 쟁기’로 실려 있다. 주007)

<정의>종래 사전에 풀이한 ‘자것: 연장’에 참고되는 것은 주로 북한의 평안남북도에서 쓰이는 ‘잡은거: 도구’로서 평안방언의 어휘였다. 이 어형은 물론 ‘잡은것’에서 ‘ㅅ’이 탈락한 형태이다. 이를 필자의 『평안방언연구 자료편』(1997)에는 싣지 못했으나, 필자(1979)에서 발표하였던 것을 필자(1984:82)와 필자(1997:430)에 옮겨 실었다. 현재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사회과학출판사, 1992)에는 ‘잡은것’과 그 준말인 ‘잡은거’가 표제어로 다 실려 있고 뜻은 ‘손으로 다루어 쓰는 도구’라 했다.
이 뜻은 위 글의 문맥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저경의 문맥으로 보아서 복합명사로 보고 그 뜻을 ‘만물’로 풀이하고자 한다. 이는 『동아 한한사전』에서 ‘물(物)’자의 풀이에 첫 번째로 ‘만물(萬物)’을 들어 놓은 데 근거를 둔 것이다. 따라서 사전에 이미 실려 있는 ‘연장’의 뜻인 ‘자것’은 그대로 두고, ‘만물’의 뜻인 ‘자것’도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나, 이런 용례가 단 하나이므로 좀더 적확한 보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4) 프귀/프귀

(24) 가. …프귀오 먹논 거시 나못 여(이하 훼손 부분)(69ㄱ)

나. 프귀 옷 닙고(75ㄱ)

다. 섭나모 셰시고 프귈 니샤 비 리오시니(월곡 기365, 20:45ㄱ)

라. 모딘 이 프귈 머그며 고 새 됴 우룸 우더니(월곡 기367, 20:45ㄴ)

(24가, 나)의 ‘프귀’는 이미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현대어 ‘푸성귀’의 중세국어시대 어형으로 사전에 실려 있는 것이나, (24다, 라)의 ‘프귀’(프귀+ㄹ)는 ‘프귀’에서 제2음절의 받침 ‘ㆁ’이 탈락한 것으로서, 이 문헌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이 ‘프귀’의 ‘’자는 영인본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쇄가 잘못되었다든지, ‘ㆁ’받침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든지 한 것이 아니다. 글자 크기로 보아서도 받침이 쓰이지 않은 다른 글자들과 크기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프귀’는 ‘프귀’와 더불어 동의어로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5) ‘-’과 ‘-’

(25) 願 父母ㅣ 누어 便安시며  便安시며 구즌  아니 시며 하히 護持시며 사미 며 그위며 도기며 모딘  다 스러디고 일마다 吉祥쇼셔(114ㄱ)

☞ 願我父母常得十一餘福 臥安覺安 不見惡夢 天護人愛 縣官盜賊陰謀消滅 觸事吉祥

『대방편불보은경』 권1 효양품 제2) (『대정신수대장경』 제3권 본연부 상, p.129)

정우영(2001: 243~244)에서는 자세한 고증을 통해 ‘’의 의미는 ‘깨어’이고, 어간 형태는 ‘-’〔覺〕로 잡았다. 어간 형태의 추정에 근거가 된 것은 ‘더니’(월곡 기 118)이다. 의미 해석에 대하여는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어간 형태의 설정에는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어서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1985)는 20년 전에 『월인석보』(제22권. 복각본) 주008)

<정의>이 책의 인쇄 상태는 좋지 않다. 그러나 초간본이 전하지 않는 현재로서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 알려지면서 새로 발견된 어휘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 글과 관련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26) 善友ㅣ 자거시 도 지즈라 兄님 눈에 모 바니

善友ㅣ 샤 도긴가 너기샤  일훔을  부르시니(기467, 22 : 10ㄴ)

여기에 나타난 ‘샤’를 어떻게 풀이하느냐가 문제였다. 이에 대응되는 『석보상절』부분이 없어서 참고할 수도 없었으며, 당시의 고어사전에는 ‘-〔溜〕’(괴다, 잠기다)으로 되어 있어서 고민하다가 문맥으로 보아서 ‘답답하여’로 풀이하고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구고(舊稿)를 다시 생각하게 되어 다행한 일이다.

(26)의 ‘샤’는 전련(前聯)의 ‘자거시’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아 ‘(잠을) 깨시어’로 풀이하면,

(26) 善友(太子)가 주무시거늘 도적을 핑계로 형님의 눈에 못을 박으니.

善友(太子)가 깨시어 도적인가 여기시어 아우의 이름을 크게 부르시니.

와 같이 전후련(前後聯)이 부합하여 문제는 해결되는 셈이다. 그러나 (26)의 ‘샤’의 구조는 ‘-+시+ 아/어’와 같이 되어 어간을 ‘-’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말한 ‘더니’이다. ‘--’은 어간에 직접 통합하는 선어말어미이다. 어간과 ‘--’ 사이에는 다른 선어말어미가 개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니’의 어간 형태는 ‘-’이다. 그렇다면 (26)의 ‘샤’의 어간 형태는 ‘-’이고 ‘더니’의 어간 형태는 ‘-’가 되는 셈인데, 문제가 간단치 않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경상도 방언 ‘까배다’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까배다’는 ‘(잠을) 깨우다’를 뜻한다. 이 사실은 ‘더니’의 의미 해석에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27) 珍羞盛饌 맛내 좌시며  자 제 風流ㅣ 더니

持鉢乞食샤 衆生 爲시며 三昧定에 釋梵이 뵈니(월곡 기 118)

위에서 (26)의 ‘샤’가 자동사이므로 (27)의 ‘더니’에는 사동 접미사 ‘-아-’가 통합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해 보는데, 문제는 사동 접미사 ‘-아-’가 다른 곳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사동 접미사 ‘--’와 어떤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속단할 수는 없다.

(6) 새로운 어휘 일람

여기서는 정우영(2001)에서 풀이한 어휘 일람을 가나다 순으로 보이기로 한다. 표제어는 용언의 경우 기본형으로 잡고, 품사의 약호와 뜻을 적고 예문은 출전을 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앞에서 이미 고찰한 어휘(1~5)는 일람의 끝에 따로 추기(追記)하였다(51~55).

1. 가ㆍㆍ기 : 󰄖 갑자기. (20 : 106ㄱ)

2. 거ㆍ두들다 : 󰄉 걷어들다. (20 : 71ㄱ)

3. 구세디르다 : 󰄉 크게 소리지르다. (20 : 115ㄱ)

4. 그ㆍ다 : 󰄉 숨기다. (20 : 97ㄴ)

5.ㆍ금 : 󰄍 미상(未詳). [價(?)]. (20 : 86ㄴ)

6. 金바지 : 󰄍 단금사(鍛金師). (20 : 2ㄱ)

7. ㆍ다 : 󰄉 깨다〔覺〕. (20 : 114ㄱ)

8. 다 : 󰄉 갉다〔刮〕. (20 : 112ㄴ)

9. 다 : 󰄉 남기다(?). (20 : 86ㄱ)

10. ㆍ늗ㆍ겁다 : 󰄺 슬프다. (기350, 20 : 43ㄴ)

11. 늘ㆍ의다 : 󰄺 줄다〔減〕. (기404, 20 : 60ㄴ)

12. :니다 : 󰄉 이다〔戴〕. (기365, 20 : 45ㄱ)

13.ㆍ락닥ㆍ다 : 󰄺 즐겁고 기뻐하다. (20 : 72ㄱ)

14. 믈굼 : 󰄖 물끄러미. (20 : 106ㄱ)

15.ㆍ받다 : 󰄉 속내를 시험하다. (기384, 20 : 52ㄴ, 84ㄴ)

16. 뱟 :괴다 : 󰄺 한(恨)이 되다. (20 : 97ㄴ)

17. 브릇ㆍ그다 : 󰄉 달라붙다. (기382, 20 : 51ㄴ)

18. ㆍ렵다 : 󰄺 가렵다. (기379, 20 : 50ㄴ)

19. ㆍ아 :내다 : 󰄉 발라내다. (20 : 67ㄱ)

20. 山/산ㆍ자ㆍ히 : 󰄍 사냥꾼〔獵師〕. (기370, 20 : 46ㄴ, 91ㄱ)

21. 삼 : 󰄍 삼장. [삼 노끈으로 성글게 엮어 짜 만든 옷] (20 : 88ㄴ)

22. 舍翁 : 󰄍 남편. (기369, 20 : 46ㄱ, 기388, 20 : 54ㄱ)

23. ㆍ옷 : 󰄍 미복(微服). (20 : 106ㄱ)

24. 섭나모 : 󰄍 섶나무. (기365, 20 : 45ㄱ)

25. :셜다 : 󰄺 서럽게 여기다. (기370, 20 : 46ㄴ, 47ㄱ)

26.ㆍ수ㆍ암ㆍ쇼 : 󰄍수소〔牡〕와 암소〔牝〕. (기396, 20 : 57ㄱ)

27. 술다 : 󰄺 순하다. (기368, 20 : 46ㄱ)

28. 수ᇝ구치다 : 󰄉 질투하다. (20 : 33ㄴ)

29.ㆍㆍ다 : 󰄉 용서하다. (20 : 89ㄴ)

30. 안도도다 : 󰄉 안아 돋우다. (기350, 20 : 39ㄱ)

31. :애프다 : 󰄺 애타도록 슬프다. (기397, 20 : 57ㄴ)

32. 어르ㆍ다 : 󰄉 눈초리를 치켜 뜨다. (20 : 115ㄱ)

33. 어ㆍ울ㆍ다 : 󰄉 함께 타다. (20 : 65ㄴ)

34. :에다 : 󰄉 피하다. (20 : 85ㄱ)

35. 에ㆍ우다 : 󰄉 에우다. (20 :45ㄱ)

36.ㆍ엳 : 󰄖 다시〔復〕 (20 : 67ㄴ)

37.ㆍ열엿 : 󰃾 󰄝 열여섯. (20 : 111ㄱ)

38. 오ㆍ갈 : 󰄍 왜가리.(기363, 20 :44ㄱ, 20 : 71ㄴ)

39.ㆍ오누의 : 󰄍 오누이. (20 : 62ㄴ)

40. 辱바티다 : 󰄉 욕 바치다. (20 : 14ㄱ)

41.ㆍ이데ㆍ도ㆍ록 : 󰄖 여기에 이르기까지. (20 : 86ㄴ)

42. 잇다ㆍ감 : 󰄖 이따금. (20 : 100ㄱ)

43. 졎어미 : 󰄍 젖어미〔乳母〕. (20 : 39ㄴ)

44. 즌ㆍ퍼리 : 󰄍 진펄. (20 : 72ㄴ)

45. ㆍ즘ㆍ : 미상(未詳). 가늘고 고운〔細軟〕(?) (20 : 69ㄱ)

46. 짓긇다 : 󰄉 소리 내어 끓다. (기376, 20 : 49ㄱ)

47.ㆍ다 : 󰄉 잔뜩 붙다. (20 : 113ㄴ)

48. 탐ㆍ탁다 : 󰄺 줏대 없다(?). (기369, 20 : 46ㄱ)

49. 프귀 : 󰄍 푸성귀. (20 : 45ㄱ)

50. :흐다 : 󰄉 희짓다. (20 : 86ㄴ)

51. 것/것워/것와 : 󰄍 거지.

* 이들은 의미 차이에 따라 각각 표제어를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문이 충분치 못하므로, 같은 표제어로 처리하고, ‘①탕자(蕩子) ②중국의 북방인들이 남방인들을 야만이라고 욕할 때 쓰이는 말’로 기술함.

52. 아 : 󰄖 잠깐. 얼마간.

* 단일 용례이므로 그 의미가 그리 분명치 않다.

53. 자것 : 󰄍 연장. 도구.

* 이 책에서는 ‘만물(萬物)’을 뜻하므로 구별해야 할 것으로 보이나, 예가 충분치 못하므로 다른 예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54. 프귀/프귀 : 󰄍 푸성귀.

* 쌍형 명사로 보인다.

55. - : 󰄉 깨다〔覺〕.

* 이 어휘의 어간은 ‘-’이다. ‘-’를 어간으로 하는 ‘더니’는 사동사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책의 ‘’와는 구별된다.

* 이 밖에 위 ‘45. ·즘·’은 「17세기 국어사전」(홍윤표 외, 태학사. 1995)와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연구원, 1999)에는 표제어로 실려 있어서 풀이에는 이를 따랐다.

6. 맺음말

『월인석보』 제20권은 2001년에 새로 발굴되어, 그 해 10월에 서지 연구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이 책의 실제 장수(張數)는 훼손 부분을 포함하여 111장이다. 비록 낙장과 훼손된 부분이 있으나, 나머지 부분은 아주 보관이 잘된 선본(善本)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는 『월인천강지곡』 71수(기341~기411)와 ‘수대나 태자 이야기’와 ‘수사제 태자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어서 국어학 분야는 물론이고, 서사문학의 연구에도 값진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의 내용과 저경(底經)을 비교하는 작업은 여러 분야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서지 사항에서 특기할 부분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첨삭 합편하여 『월인석보』로 합편하는 과정에서 석보상절의 내용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문장 중간에서 끊고(20ㄱ 2행), 중간에 새로 첨가하는 내용을 끼워 넣은(20ㄱ 3행~91ㄱ 7행) 다음, 비로소 앞에서 끊기었던 부분에 이어지는 대목(93ㄴ 7행)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의 전개는 현전하는 『월인석보』의 다른 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 논의한 어학적 고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기법에서는 ① 합용병서의 용례, ② ‘(관형사형어미)+체언 어두의 무성평음’을 표기한 방법, ③ 각자병서의 표기의 예, ④ 종성 표기에 등장하는 ‘ㅈ, ㅊ, ㅿ, ㅌ’, ⑤ ‘--’의 축약 현상 등을 논의하였다.

문법부문에서는 ① 명령형 ‘-라/으라/라’와 ‘-어라/아라’의 교체 현상, ② 호격조사 ‘-하’가 평칭에 사용된 예, ③ [원망(소망)]을 나타내는 선어말 요소 ‘-옷/곳’의 문법적 성격, ④ ‘야쎠체’의 선어말어미 ‘-(/으)-’의 용례를 확인하였다.

어휘부문에서는 ① 일반적으로 [거지]를 뜻하는 ‘것/것워/워’가 ‘탕자(蕩子)’ 또는 ‘중국 북방인들이 남방인들을 욕할 때 쓰는 말’로도 쓰였음을 밝히고, ② 처음 발견된 ‘아’은 ‘잠깐’을 뜻하는 부사일 것으로 파악하였고, ③ ‘연장, 도구’를 뜻하는 ‘자것’이 ‘만물’의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④ ‘프귀/프귀’는 쌍형어일 것으로 보았고, ⑤ ‘’〔覺〕는 ‘-’의 활용형이 아니라, ‘-’의 활용형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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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1947) 『여요전주(정보판)』, 을유문화사.

이유기(1995) “선어말어미 ‘-지-’의 통합관계”, 『동악어문론집』 30, 동악어문학회.

이유기(2002) 『역주 남명집언해』(하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우영(2002ㄱ) 『역주 원각경언해』(서, 1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우영(2002ㄴ) “월인석보 권20의 어휘연구”, 『국어국문학』 131, 국어국문학회.

〈사전류〉

남광우(1997) 『교학 고어사전』, 교학사.

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 편(1992) 『조선말대사전』(상·하), 동광출판사.

유창돈(1964) 『이조어사전』, 연세대출판부.

한글학회 편(1992) 『우리말 큰사전』(옛말과 이두), 어문각.

두산동아 편(1982/2000) 동아한한대사전, 두산동아(주).

諸橋轍次(1958) 大漢和辭典, 岩波書店, 일본 동경.

월인석보 제21(상권) 해제

한재영(한신대학교 교수)

Ⅰ. ≪월인석보≫

먼저 ≪월인석보≫ 전반에 관한 내용을 살핀다. 안병희(1979)와 규장각의 문헌해제에 실린 이호권 교수의 자세한 해제에 기댄 것이다.

≪월인석보≫는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왕자 시절에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몸소 지은 찬불가이다. 합편의 방식은 부왕(父王)인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그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하였다. 책 이름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에서 앞의 두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합편에 있어서는 조권과 문장에 상당한 변개가 있었다. 조권을 보면 ≪석보상절≫ 권11과 권19의 내용이 각각 ≪월인석보≫ 권21과 권18에 나타나고, 같은 권13이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1, ≪월인석보≫는 권2와 권3의 내용을 보이는 등 권11부터 권차가 달라져 있다. 문장의 경우에도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의 위치가 바뀌고, 한자음 종성 ㅇ과 협주의 추가 등 부분적 변개와 곡차의 변동이 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인 첨삭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월인석보≫는 전혀 새로운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원간 연대는 〈어제월인석보서〉의 “天順 3年 己卯(1459) 7月 7日序”이라는 기록에 따라 1459년(세조 5)으로 추정된다. 편찬 간행의 경위는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아,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전 24권)을 지었는데 그것을 보고 세종이 친히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전 3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두 책은 세종대에 모두 동활자(銅活字)로 간행되었으나, 간행된 직후부터 합편의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 교정본 권6, 9, 13, 19의 교정 내용과 난상(欄上)의 기록, 본문의 절단 상태, 그리고 ≪월인천강지곡≫ 낙장(落張)의 편입 위치 등이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결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세조 즉위 후에 다시 사업이 시작되어 목판본(전 25권)으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과 함께 정음 창제 직후의 산문자료로서 귀중하다. 중간본이라 하더라도 보기 드문 이유만이 아니라, 국어사 자료로서 갖는 가치 때문에 더욱 소중한 문헌이 된다.

≪월인석보≫에 쓰인 한글 글자는 그 획(劃)이 한글 창제 당시와는 달리 부드러운 필서형으로 바뀌어 한글 자형(字形)의 변천 역사를 보여준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석보상절≫과 함께 한글 창제 직후의 산문자료로서 국어학, 국문학, 불교학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체 25권 가운데 원간본은 현재 영본으로만 전한다. 권 1, 2, 7~15, 17~20, 23, 25의 17권이 전하고, 16세기 이후에 다시 간행된 중간본도 있다. 대부분이 국가 지정문화재인 보물(745호, 93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원간본과 소장자는 다음과 같다.

권 1, 2: 서강대학교 도서관(1972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인)

권 7, 8: 동국대학교 도서관

권 9, 10: 김민영(1956년 연세대 동방학 연구소 영인)

권 11, 12: 호암미술관 소장

권 13, 14: 연세대학교 도서관(1982년 홍문각 영인)

권 15: 성암문고 및 순창 구암사

권 17: 성암문고 및 순창 구암사,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1986년 교육연구사 영인)

권 17, 18: 강원도 홍천 수타사(1957년 동방학연구소 영인, 수타사본의 권17 낙장부분만 1972년 한글 150호에 영인)

권 19: 가야대 박물관 소장

권 20: 임흥재 소장(2001년 아세아문화사, 200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영인)

권 23: 삼성출판박물관 소장(200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영인)

권 25: 보림사 소장(2005년 아세아문화사 영인)

이 책은 전질이 복각된 일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분적으로 지방사찰에서 16세기에 복각되었다. 현재 전하는 중간본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권1, 2: 1568년(선조1) 풍기 희방사판이 전한다. 책판이 6. 25 이전까지 보존되어 현대의 후쇄본도 있으며, 권1은 1960년 국어학회에서 고전선총으로 영인하였다.

권4: 16세기 중엽 간행으로 추정되며, 간행지는 미상이다. 김병구 씨의 소장으로 1997년 경북대학교 출판부 영인하였고, 현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권7, 8: 1572년(선조5) 풍기 비로사판이 전한다. 권7은 경북 의성군의 모씨가 소장하고 있고, 권8은 서울대도서관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전자는 1968년 동악어문학회에서 영인하였으며, 후자는 소재불명인 권7과 함께 송석하 청사진의 저본인데, 그 청사진본을 1957년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한 바 있다. 간년 미상의 권8이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 연구소 육당문고에도 전한다.

권21: 1542년(중종37) 안동 광흥사판과 1562년(명종17) 순창 무량굴판 그리고 1569년(선조2)의 은진 쌍계사판이 전한다. 세 가지 이본이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무량굴판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심재완 교수의 소장으로도 전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광흥사판은 1983년 홍문각에서 영인하였고,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무량굴판은 1963년 동방학지 6집에 영인하였으며, 심재완 교수 소장 무량굴판은 1991년 모산학술연구소에서 영인하였다.

권22: 간행지 미상인 권22가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200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영인하였다.

권23: 1559년(명종14) 순창 무량굴판이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간행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도 전한다. 이는 보존상태가 나빠서 책의 앞뒤에 낙장이 있으며 판심제가 마멸되었다. 200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영인하였다.

복각본이라 하더라도 인출의 시기가 오래된 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현전하는 ≪월인석보≫는 원간본과 복각본을 다 합쳐도 권3, 5, 6, 16, 24의 5권이 결권이 된다.

Ⅱ. ≪월인석보≫ 권21

여기서는 현전하는 ≪월인석보≫ 권21의 현황을 소개한다.

1. 권21 개관

앞서 본 바와 같이 ≪월인석보≫의 중간본은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한두 권씩 지방 사찰에서 복각(覆刻)되었다. 권21의 경우 16세기 중간본(重刊本)이 세 종류의 이본(異本)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심재완 교수 소장으로 전하고 있다. 이들은 판(板)을 보관했던 장소에 따라 각각 광흥사판, 무량굴판, 쌍계사판으로 불린다.

먼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소장 현황을 규장각의 장서목록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광흥사판

도서기호: 가람古 811.05-Se46wi-v.21(1-2)

편저자: 세조(世祖)(조선) 편

판본사항: 목판본(木版本)

간행지: 안동(安東)

책권수: 2책(영본(零本))

인출연도: 20세기 전반(1930~1940년경)

간행자: 광흥사(廣興寺)

책크기: 31.8×21.8cm

광곽(匡郭): 사주단변(四周單邊)

반엽(半葉) 광곽: 19.8×17.4cm, 유계(有界), 7행 16자(월인천강지곡 14자) 주(注) 쌍행

판심: 대흑구(大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권말(卷末): 嘉靖二十一年壬寅(1542) 三月日 慶尙道 安東 下柯山 廣興寺開板.

비고: 권21만 있는 영본으로, 제1~114장까지와 제115~222장까지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권말에 동일한 내용의 시주질(施主秩)이 있다.

(2) 무량굴판

도서기호: 古 1721-1B

편저자: 세조(조선) 편

판본사항: 목판본

간행지: 순창(淳昌)

책권수: 1책(66장, 영본)

인출연도: 명종17년(1562), 후쇄(後刷)

간행자: 무량굴(無量崛)

책크기: 32×22.7cm

광곽: 사주단변

반엽광곽: 20.9×17.2cm(4葉ㄱ), 유계, 7행 16자(월인천강지곡 14자) 주(注) 쌍행(雙行)

판심: 대흑구, 상하내향흑어미

비고: 1562년(명종17)에 전남 순창의 무량굴에서 다시 간행한 책의 후쇄본으로, 소장본 권수 1ㄱ부터 3ㄱ까지와, 권말 69ㄱ 이하가 낙장되어 제3장 뒷면부터 제68장까지만 있다.

(3) 쌍계사판

도서기호: 古 1721-1A-v.1-2 / 가람古 811.05-Se46we-v.21(1-2)

편저자: 세조(조선) 편

판본사항: 목판본

간행지: 은진(恩津)

책권수: 2책(영본)

인출연도: 20세기 전반(1930~1940년경)

간행자: 쌍계사(雙溪寺)

책크기: 29.1×20.9cm(古 1721-1A-v.1-2),

28.7×21cm(가람古 811.05-Se46we-v.21(1-2))

광곽: 사주단변

반엽광곽: 20.6×17.3cm(11葉ㄱ), 유계, 7행 16자(월인천강지곡 14자) 주 쌍행

판심: 대흑구, 상하내향흑어미

표지서명: 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古 1721-1A-v.1-2)

간기(刊記): 隆慶 三年 己巳(1569) 二月 日 忠淸道 寒山地 竹山里…大施主 白介萬 等.

비고: 1569년(선조2)에 다시 새긴 목판을 1930~40년경에 인출하여 만든 책이다. 도서기호가 ‘古 1721-1A-v.1-2’로 된 두 책과 ‘가람古 811.05-Se46we-v.21(1-2)’로 되어진 두 책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나 장정된 상태에는 차이를 보인다. 두 가지 모두 1ㄱ부터 10ㄴ까지 낙장이나, ‘古 1721-1A-v.1-2’는 11ㄱ부터 97ㄴ까지와 102ㄱ부터 222ㄴ까지가 각각 나뉘어 장정이 되어 있으며, ‘가람古 811.05-Se46we-v.21(1-2)’는 11ㄱ부터 114ㄴ까지와 115ㄱ부터 222ㄴ까지가 각각 나뉘어 장정이 되어 차이를 보인다.

광흥사판과 쌍계사판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청구기호 ‘한 古朝21- 279’인 광흥사판은 시주질까지 완전하나, 건(乾)과 곤(坤)으로 분책되어 있는 청구기호 ‘한古朝21-180’인 쌍계사판은 건의 경우 1ㄱ부터 10ㄴ까지가 낙장이며, 98ㄱ부터 101ㄴ까지도 낙장인 상태이다. 곤은 102ㄱ부터 222ㄴ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103ㄴ의 후반부부터 방점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시주질과 같은 내용이 없다. 무량굴판은 위의 책 이외에도 제172장과 제211장이 결장(缺張)인 심재완 교수의 소장본이 있다. 그에 관해서는 1991년 모산학술연구소에서 영인한 책에 실린 ‘판본고’를 참고로 삼을 수 있다.

이 이본들은 ‘ㅿ, ㅸ, ㆆ’을 유지하는 등 15세기 초간 당시의 언어 사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으나 판하(板下)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새긴 완전한 복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판하면서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광흥사판의 경우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받침으로 사용된 ‘ㅇ, ㅱ’이라든가 이영보래(以影補來) 표기인 ‘ㅭ’의 ‘ㄹ’을 삭각(削刻) 주001)

<정의>삭각(削刻)은 김정남(1995)에서의 용어이다. 복각을 하는 과정에서 단순하게 획이 떨어져 나간 탈각과 달리 수정의 의도가 들어있는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다. 적절한 사용으로 판단하여 이 자리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하는 등의 내용은 중간(重刊) 과정에서의 수정 작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무량굴판의 경우에는 방점의 탈락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지금까지 단순한 탈각(脫刻)으로 여겨져 왔으나 광흥사판의 한자음 수정과 평행하게 생각해 본다면 다분히 의도적인 삭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즉 성조가 어휘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소실되어간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20년의 간격밖에 없는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방점 차이는 어쩌면 방점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었던 경상도에서 간행되었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전라도에서 간행되었느냐의 차이가 될 수도 있다. 광흥사판의 편찬자들에게 방점이 무의미한 것이었다면 방점 역시 한자음 받침의 ‘ㆁ’이나 ‘ㅱ’ 혹은 ‘ㅭ’의 ‘ㆆ’처럼 삭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방점이 나타나는 부분과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책에 함께 묶인 까닭에 대한 설명이 부담으로 남는다.

쌍계사판은 그 판목이 현재 갑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서 갑사판으로도 불린다. 다른 두 이본보다 판이 조잡하고 낙장이 많으며 방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특히 한자음의 경우 간행 당시의 현실음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전혀 다른 성격의 자료인 셈이다.

여기서는 세 이본들 중 원간본의 모습을 비교적 많이 유지하고 상보적인 측면까지 지니고 있는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대교(對校)에 관심을 가지기로 한다.

2.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대교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대교(對校)는 주로 김정남(1995)의 내용을 취한 것이다. 특히 우리의 작업 대상이 되는 광흥사판의 경우 ‘상권’과 ‘하권’으로 분책이 되어 있어 여기서는 ‘상권’ 부분의 대교에 주된 관심을 가지기로 한다.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은 동일한 판하(板下)를 이용한 복각본인 듯, 획의 굵기 정도에 있어 미세한 차이를 보일 뿐 특별히 다른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부분은 많지 않다. 장차까지 일치하는 이들 이본 사이에는 주로 오각(誤刻)이나 탈각(脫刻)에 의한 차이가 많이 발견된다. 주된 차이는 한자음과 방점에서 찾을 수 있으나, 탈자와 오자 또는 언어의 변화 등에 의한 차이도 보인다. 고유어와 한자어로 갈라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 보기로 한다.

2.1. 고유어

2.1.1. 탈자·오자

어느 한쪽의 판본에서만 오류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소개하는 예들은 대조의 결과 차이가 나는 경우를 든 것이다. 오류의 양상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각기 다른 양상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광흥사판〉 〈무량굴판〉 〈장차〉

거·시·라기시라70ㄱ

救·티·옷 아·니·면救·티·옷 아니·면56ㄴ

그 ·러그 ·리20ㄱ

나·니·다나·니·다29ㄱ

다·시다·사96ㄴ

다되라다되리 주002)

<정의>탈각인 듯하나 오각일 가능성도 높음.
46ㄱ

도도족98ㄴ

마··디·니마·디·니78ㄴ

머·글·씨·라머굴씨라76ㄱ

몰애믈애16ㄱ

버·수·믈버믈60ㄴ

브·니보·니43ㄱ

世·옛世·엣64ㄱ

솟글·코솟들코 주003)

<정의>각수의 실수로 보인다. <풀이>‘글’의 ‘ㄱ’이 거꾸로 새겨져 ‘ㄷ’의 아래 획이 없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23ㄱ

어셔이셔97ㄱ

·옛97ㄱ

일·후·믈일믈26ㄴ

일일46ㄴ

제 :겨집졔 :겨집60ㄱ

터럭더럭78ㄴ

1ㄱ

·:혀·:허·53ㄱ

·리·리리라96ㄱ

2.1.2. 받침표기

‘ㅭ’ 받침을 광흥사판에서는 ‘ㄹ’로 바뀌었는데 대부분 한자어의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고유어의 예는 흔하지 않다.

저·허·씨라저허씨라94ㄴ

2.1.3. 표현상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

다음의 예들은 두 판본의 간행에 관여한 이들의 언어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예들이다. 각기 성격이 달라 언어적인 차이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無間·앳無間ㅅ29ㄱ

:아·시·리러·니·라:아샤리러니·라21ㄱ

:업시·우거·든:업시·위커든20ㄱ

地獄·브·터地獄·여러26ㄱ

·리·:더·니·리·니·다46ㄴ

2.2. 한자음 표기

2.2.1. 탈자·오자

우선 동일한 한자의 발음이 여러 가지 양상을 보여 정음을 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1ㄱ

·뗑1ㄱ

93ㄱ

2ㄴ

92ㄱ

특히 이중모음과 단모음의 표기 사이의 오류가 눈에 많이 뜨인다.

92ㄴ

·넘·념96ㄴ

ᄋힵᆫ24ㄴ

38ㄴ

便·뼌·뻔64ㄴ

·뻐ᇰ91ㄱ

·앙·양23ㄱ

38ㄱ

100ㄴ

25ㄴ

ᅌᆦᇰ20ㄴ

·역·ᅙᅥᆨ89ㄴ

··ᅙᅥᆨ69ㄴ

·ᅙᅥᆨ83ㄴ

28ㄴ

이중모음과 단모음의 혼기 양상 가운데 ‘ㄷ, ㅌ’, ‘ㅎ’ 뒤에서 나타나는 단모음 표기의 예가 많아 따로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60ㄱ

:쌍:썅20ㄴ

·상·상18ㄱ

·쎙·쏑31ㄱ

·석·셕1ㄱ

·써ᇙ60ㄱ

52ㄱ

82ㄱ

54ㄱ

::21ㄴ

·54ㄱ

·뗑1ㄱ

·뜌·뚱92ㄴ

12ㄱ

5ㄴ

94ㄱ

11ㄱ

··42ㄴ

··터ᇙ41ㄴ

:청95ㄴ

·63ㄱ

ᅘᅥᇰ54ㄱ

간혹 한자음이 아예 적혀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표기없음·86ㄴ

·표기 없음 주004)

<풀이>빈공간의 다음 글자 ‘에’의 획을 올려 그어서 자리를 메우고 있다.
37ㄴ

표기없음85ㄱ

그밖의 오각이나 탈각의 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카94ㄱ

·긱9ㄱ

·겁·컴29ㄱ

:공:콩34ㄱ

::14ㄴ

··54ㄱ

·퀀88ㄴ

·94ㄱ

30ㄴ

30ㄴ

4ㄴ

75ㄴ

·먼·민35ㄴ

13ㄴ

·브ᇢ43ㄱ

·붕3ㄴ

·둔17ㄴ

·악·95ㄴ

··악17ㄱ

··42ㄱ

··39ㄱ

13ㄱ

·쥼70ㄱ

12ㄱ

·뙥·똭8ㄴ

·합100ㄴ

·18ㄱ

·18ㄱ

··21ㄴ

20ㄴ

·현·(罒)33ㄴ

·황·횡31ㄴ

·횡·황34ㄱ

··93ㄴ

5ㄴ

:힁:읭1ㄴ

이와 같이 탈자나 오자는 대개 한 문헌에서 생긴 것을 다른 문헌과 비교해 보아 고칠 수 있으나, 두 문헌에서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서 다른 부분과의 비교를 통해서야 비로소 오자나 탈자임을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들 경우에 판하 자체의 잘못인지 우연히 둘 다 탈각되거나 오각된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앙·앙20ㄴ

2.2.2. ㅇ(喩母) 받침 표기

ㅇ 받침은 주로 광흥사판에서 많이 제거되었는데 남아 있는 부분도 상당수 있으며 특히 협주 부분은 수정의 눈길이 많이 미치지 못한 탓인지 더 많이 남아 있는 경향을 보인다. ‘ㅇ’이 남아 있는 예와 ‘ㅇ’이 삭각된 예들을 소개한다.

• ‘ㅇ’이 남아있는 예

··91ㄱ, 52ㄱ

·밍·밍91ㄱ, 91ㄱ

82ㄴ

··91ㄱ

93ㄱ

2ㄴ

:쬥98ㄴ

·퐁94ㄴ

·홰93ㄴ

• ‘ㅇ’이 삭각된 예

:과:광15ㄱ

:귀:귕33ㄱ, 46ㄱ

:녀:녕33ㄱ

19ㄴ, 30ㄴ

15ㄱ, 29ㄱ

:례:롕22ㄴ

25ㄱ, 41ㄱ, 42ㄱ, 45ㄱ

::26ㄱ

41ㄱ

37ㄱ

::46ㄴ

·셰·솅37ㄴ

30ㄱ, 30ㄴ

·ㅊ 주005)

<풀이>‘ㅇ’을 삭각하면서 ‘ㆍ’까지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77ㄴ

::33ㄱ

·29ㄱ

·뎨·뎽33ㄱ

61ㄴ

:쬐:쬥29ㄱ, 38ㄴ, 43ㄴ

·띠·띵25ㄱ, 30ㄱ, 37ㄴ, 38ㄱ, 38ㄴ

12ㄴ

·포·퐁94ㄴ

16ㄱ

::26ㄴ

30ㄴ, 52ㄴ

19ㄱ

2.2.3. ㅭ(以影補來) 표기

ㅭ 받침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는 ‘ㆆ’을 제거시킨 형태가 광흥사판에 많이 나타난다. 다양한 양상을 보여, ‘ㅭ’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ㄹ’을 크게 다시 새긴 경우가 있는가 하면 ‘ㅭ’의 ‘ㄹ’은 그대로 두고 ‘ㆆ’만 삭각하여 기형적인 글자 모양을 그대로 둔 경우도 있다. ‘ㅭ’ 중에서 ‘ㆆ’의 ‘ㆁ’만을 제거한 경우도 나타난다. 많지는 않지만 ‘ㅭ’이 두 문헌에서 그대로 유지된 예들도 있다.

• ‘ㅭ’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ㄹ’을 크게 다시 새긴 경우

·별·62ㄱ

·뿔·57ㄱ

·살· 62ㄱ

·살83ㄱ

• ‘ㅭ’의 ‘ㄹ’은 그대로 두고 ‘ㆆ’만 삭각한 경우

·벌52ㄴ, 57ㄱ

·뿔51ㄴ

51ㄴ

• ‘ㅭ’ 중에서 ‘ㆆ’의 ‘ㆁ’만을 제거한 경우

·뿔34ㄱ, 37ㄴ

·살14ㄴ

• ‘ㅭ’이 두 문헌에서 그대로 유지된 경우

·66ㄱ

·써ᇙ60ㄱ

·· 94ㄴ

2.2.4. 순경음 ㅱ 받침 표기

순경음 ㅱ은 받침 표기에서 유지된 예가 ㅭ 경우보다 많고 또 전체가 제거된 예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ㅇ’만 부분적으로 제거된 예가 많이 나타난다. 또 이 ‘ㅇ’의 제거가 탈각인지 삭각인지 구분이 어려우나 무량굴판에도 나타난다.

• 받침 표기에서 유지된 경우

::56ㄱ

··56ㄴ

::55ㄴ

::55ㄴ

• ‘ㅇ’만 부분적으로 제거된 예(1)

:굼:62ㄴ

::16ㄱ

:똠:30ㄴ

:뭄:41ㄴ, 66ㄱ

·봄·38ㄱ, 38ㄴ

:봄:20ㄱ

:숌15ㄱ, 51ㄱ

:쓤:15ㄱ, 29ㄱ, 37ㄱ, 41ㄱ

19ㄱ, 26ㄱ

·횸·38ㄴ

::21ㄴ

30ㄱ

• ‘ㅇ’만 부분적으로 제거된 예(2)

·봄·봄65ㄱ

:5ㄱ

• 전체가 제거된 예(1)

:또:57ㄱ

·보·58ㄴ, 67ㄱ, 67ㄴ

63ㄴ

:쓔:43ㄱ, 46ㄴ

:쓔:쓰ᇢ67ㄴ

51ㄱ

::58ㄴ

• 전체가 제거된 예(2)

·구82ㄴ

·보·봄67ㄴ

2.2.5. ㆁ(凝母) 받침 표기

종성 ‘ㆁ’이 와야 할 자리에 ‘ㅇ’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난다. 두 판본에 골고루 혼기 양상이 보인다.

5ㄴ, 59ㄴ

:광:광95ㄴ

:광11ㄴ

15ㄴ

:등:38ㄱ

77ㄱ

15ㄱ

妄語·망:망·60ㄱ

44ㄴ

聖女·:녕·셩:녕20ㄱ

15ㄱ

22ㄴ, 63ㄴ

::쟝83ㄱ

·짱·16ㄱ

··졍58ㄱ

:뎡:15ㄱ

69ㄴ

다음의 예들은 종성의 소리값이 없는데도 ‘ㆁ’ 표기가 나타나는 보여준다. 표기에 있어 ‘ㅇ’과 ‘ㆁ’의 단일화가 진행되는 과정의 일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1ㄱ

:녀:59ㄴ

·띠·80ㄱ

2.2.6. ㆁ 초성 표기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ㆁ’을 초성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 ‘ㅇ’로 바뀐 예가 무량굴판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11ㄴ

··업36ㄱ, 46ㄴ, 78ㄱ

::웅69ㄴ

··원63ㄱ

2.2.7. 기타

유일예라는 점이 부담이 되기는 하나 무량굴판에 보이는 다음의 예는 구개음화와 관련하여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長者::쟝쟝18ㄱ

Ⅲ. ≪월인석보≫ 권21상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현전하는 ≪월인석보≫ 권21은 크게 세 종류의 이본이 존재한다. 모두 원간본이 아닌 복각본으로서 광흥사판, 무량굴판, 쌍계사판이 그것이다. 이들 중 광흥사판과 쌍계사판의 경우에는 두 책으로 분책이 되어 간행되었다. 동일한 시주질이 각각 뒤에 붙어 있어 분책 간행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는 ≪월인석보≫ 권21상을 역주의 대상 범위로 하였으므로 대조의 범위도 ≪월인석보≫ 권21상인 제1~114장까지로 한정하였다. ≪월인석보≫ 권21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역주와 함께 다양한 측면에서의 대조 및 검토 작업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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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21(하권) 해제

한재영(한신대학교 교수)

Ⅰ. ≪월인석보≫

먼저 ≪월인석보≫ 전반에 관한 내용을 살핀다. 안병희(1979)와 규장각의 문헌해제에 실린 이호권 교수의 자세한 해제에 기댄 것이다.

≪월인석보≫는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왕자 시절에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몸소 지은 찬불가이다. 합편의 방식은 부왕(父王)인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그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하였다. 책 이름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에서 앞의 두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합편에 있어서는 조권과 문장에 상당한 변개가 있었다. 조권을 보면 ≪석보상절≫ 권11과 권19의 내용이 각각 ≪월인석보≫ 권21과 권18에 나타나고, 같은 권13이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1, ≪월인석보≫는 권2와 권3의 내용을 보이는 등 권11부터 권차가 달라져 있다. 문장의 경우에도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의 위치가 바뀌고, 한자음 종성 ㅇ과 협주의 추가 등 부분적 변개와 곡차의 변동이 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인 첨삭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월인석보≫는 전혀 새로운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원간 연대는 〈어제월인석보서〉의 “天順 3年 己卯(1459) 7月 7日序”이라는 기록에 따라 1459년(세조 5)으로 추정된다. 편찬 간행의 경위는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아,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전 24권)을 지었는데 그것을 보고 세종이 친히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전 3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두 책은 세종대에 모두 동활자(銅活字)로 간행되었으나, 간행된 직후부터 합편의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교정본 권6, 9, 13, 19의 교정 내용과 난상(欄上)의 기록, 본문의 절단 상태, 그리고 ≪월인천강지곡≫낙장(落張)의 편입 위치 등이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결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세조 즉위 후에 다시 사업이 시작되어 목판본(전 25권)으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과 함께 정음 창제 직후의 산문자료로서 귀중하다. 중간본이라 하더라도 보기 드문 이유만이 아니라, 국어사 자료로서 갖는 가치 때문에 더욱 소중한 문헌이 된다.

≪월인석보≫에 쓰인 한글 글자는 그 획(劃)이 한글 창제 당시와는 달리 부드러운 필서형으로 바뀌어 한글 자형(字形)의 변천 역사를 보여준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석보상절≫과 함께 한글 창제 직후의 산문자료로서 국어학, 국문학, 불교학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체 25권 가운데 원간본은 현재 영본으로만 전한다. 권 1, 2, 7~15, 17~20, 23, 25의 17권이 전하고, 16세기 이후에 다시 간행된 중간본도 있다. 대부분이 국가 지정문화재인 보물(745호, 93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원간본과 소장자는 다음과 같다.

권 1, 2: 서강대학교 도서관(1972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인)

권 7, 8: 동국대학교 도서관

권 9, 10: 김민영(1956년 연세대 동방학 연구소 영인)

권 11, 12: 호암미술관 소장

권 13, 14: 연세대학교 도서관(1982년 홍문각 영인)

권 15: 성암문고 및 순창 구암사

권 17: 성암문고 및 순창 구암사,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1986년 교육연구사 영인)

권 17, 18: 강원도 홍천 수타사(1957년 동방학연구소 영인, 수타사본의 권17 낙장부분만 1972년 한글 150호에 영인)

권 19: 가야대 박물관 소장

권 20: 임흥재 소장(2001년 아세아문화사, 200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영인)

권 23: 삼성출판박물관 소장(200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영인)

권 25: 보림사 소장(2005년 아세아문화사 영인)

이 책은 전질이 복각된 일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분적으로 지방사찰에서 16세기에 복각되었다. 현재 전하는 중간본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권1, 2: 1568년(선조1) 풍기 희방사판이 전한다. 책판이 6. 25 이전까지 보존되어 현대의 후쇄본도 있으며, 권1은 1960년 국어학회에서 고전선총으로 영인하였다.

권4: 16세기 중엽 간행으로 추정되며, 간행지는 미상이다. 김병구 씨의 소장으로 1997년 경북대학교 출판부 영인하였고, 현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권7, 8: 1572년(선조5) 풍기 비로사판이 전한다. 권7은 경북 의성군의 모씨가 소장하고 있고, 권8은 서울대도서관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전자는 1968년 동악어문학회에서 영인하였으며, 후자는 소재불명인 권7과 함께 송석하 청사진의 저본인데, 그 청사진본을 1957년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한 바 있다. 간년 미상의 권8이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 연구소 육당문고에도 전한다.

권21: 1542년(중종37) 안동 광흥사판과 1562년(명종17) 순창 무량굴판 그리고 1569년(선조2)의 은진 쌍계사판이 전한다. 세 가지 이본이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무량굴판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심재완 교수의 소장으로도 전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광흥사판은 1983년 홍문각에서 영인하였고,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무량굴판은 1963년 동방학지 6집에 영인하였으며, 심재완 교수 소장 무량굴판은 1991년 모산학술연구소에서 영인하였다.

권22: 간행지 미상인 권22가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200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영인하였다.

권23: 1559년(명종14) 순창 무량굴판이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간행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도 전한다. 이는 보존상태가 나빠서 책의 앞뒤에 낙장이 있으며 판심제가 마멸되었다. 200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영인하였다.

복각본이라 하더라도 인출의 시기가 오래된 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현전하는 ≪월인석보≫는 원간본과 복각본을 다 합쳐도 권3, 5, 6, 16, 24의 5권이 결권이 된다.

Ⅱ. ≪월인석보≫ 권21

여기서는 현전하는 ≪월인석보≫ 권21의 현황을 소개한다.

1. 권21 개관

앞서 본 바와 같이 ≪월인석보≫의 중간본은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한두 권씩 지방 사찰에서 복각(覆刻)되었다. 권21의 경우 16세기 중간본(重刊本)이 세 종류의 이본(異本)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심재완 교수 소장으로 전하고 있다. 이들은 판(板)을 보관했던 장소에 따라 각각 광흥사판, 무량굴판, 쌍계사판으로 불린다.

먼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소장 현황을 규장각의 장서목록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광흥사판

도서기호: 가람古 811.05-Se46wi-v.21(1-2)

편저자: 세조(世祖)(조선) 편

판본사항: 목판본(木版本)

간행지: 안동(安東)

책권수: 2책(영본(零本))

인출연도: 20세기 전반(1930~1940년경)

간행자: 광흥사(廣興寺)

책크기: 31.8×21.8cm

광곽(匡郭): 사주단변(四周單邊)

반엽(半葉) 광곽: 19.8×17.4cm, 유계(有界), 7행 16자(월인천강지곡 14자) 주(注) 쌍행

판심: 대흑구(大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권말(卷末): 嘉靖二十一年壬寅(1542) 三月日 慶尙道 安東 下柯山 廣興寺開板.

비고: 권21만 있는 영본으로, 제1~114장까지와 제115~222장까지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권말에 동일한 내용의 시주질(施主秩)이 있다.

(2) 무량굴판

도서기호: 古 1721-1B

편저자: 세조(조선) 편

판본사항: 목판본

간행지: 순창(淳昌)

책권수: 1책(66장, 영본)

인출연도: 명종17년(1562), 후쇄(後刷)

간행자: 무량굴(無量崛)

책크기: 32×22.7cm

광곽: 사주단변

반엽광곽: 20.9×17.2cm(4葉ㄱ), 유계, 7행 16자(월인천강지곡 14자) 주(注) 쌍행(雙行)

판심: 대흑구, 상하내향흑어미

비고: 1562년(명종17)에 전남 순창의 무량굴에서 다시 간행한 책의 후쇄본으로, 소장본 권수 1ㄱ부터 3ㄱ까지와, 권말 69ㄱ 이하가 낙장되어 제3장 뒷면부터 제68장까지만 있다.

(3) 쌍계사판

도서기호: 古 1721-1A-v.1-2 / 가람古 811.05-Se46we-v.21(1-2)

편저자: 세조(조선) 편

판본사항: 목판본

간행지: 은진(恩津)

책권수: 2책(영본)

인출연도: 20세기 전반(1930~1940년경)

간행자: 쌍계사(雙溪寺)

책크기: 29.1×20.9cm(古 1721-1A-v.1-2),

28.7×21cm(가람古 811.05-Se46we-v.21(1-2))

광곽: 사주단변

반엽광곽: 20.6×17.3cm(11葉ㄱ), 유계, 7행 16자(월인천강지곡 14자) 주 쌍행

판심: 대흑구, 상하내향흑어미

표지서명: 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古 1721-1A-v.1-2)

간기(刊記): 隆慶 三年 己巳(1569) 二月 日 忠淸道 寒山地 竹山里…大施主 白介萬 等.

비고: 1569년(선조2)에 다시 새긴 목판을 1930~40년경에 인출하여 만든 책이다. 도서기호가 ‘古 1721-1A-v.1-2’로 된 두 책과 ‘가람古 811.05-Se46we-v.21(1-2)’로 되어진 두 책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나 장정된 상태에는 차이를 보인다. 두 가지 모두 1ㄱ부터 10ㄴ까지 낙장이나, ‘古 1721-1A-v.1-2’는 11ㄱ부터 97ㄴ까지와 102ㄱ부터 222ㄴ까지가 각각 나뉘어 장정이 되어 있으며, ‘가람古 811.05-Se46we-v.21(1-2)’는 11ㄱ부터 114ㄴ까지와 115ㄱ부터 222ㄴ까지가 각각 나뉘어 장정이 되어 차이를 보인다.

광흥사판과 쌍계사판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청구기호 ‘한 古朝21- 279’인 광흥사판은 시주질까지 완전하나, 건(乾)과 곤(坤)으로 분책되어 있는 청구기호 ‘한古朝21-180’인 쌍계사판은 건의 경우 1ㄱ부터 10ㄴ까지가 낙장이며, 98ㄱ부터 101ㄴ까지도 낙장인 상태이다. 곤은 102ㄱ부터 222ㄴ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103ㄴ의 후반부부터 방점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시주질과 같은 내용이 없다. 무량굴판은 위의 책 이외에도 제172장과 제211장이 결장(缺張)인 심재완 교수의 소장본이 있다. 그에 관해서는 1991년 모산학술연구소에서 영인한 책에 실린 ‘판본고’를 참고로 삼을 수 있다.

이 이본들은 ‘ㅿ, ㅸ, ㆆ’을 유지하는 등 15세기 초간 당시의 언어 사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으나 판하(板下)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새긴 완전한 복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판하면서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광흥사판의 경우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받침으로 사용된 ‘ㅇ, ㅱ’이라든가 이영보래(以影補來) 표기인 ‘ㅭ’의 ‘ㄹ’을 삭각(削刻) 주001)

<풀이>삭각(削刻)은 김정남(1995)에서의 용어이다. 복각을 하는 과정에서 단순하게 획이 떨어져 나간 탈각과 달리 수정의 의도가 들어있는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다. 적절한 사용으로 판단하여 이 자리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하는 등의 내용은 중간(重刊) 과정에서의 수정 작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무량굴판의 경우에는 방점의 탈락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지금까지 단순한 탈각(脫刻)으로 여겨져 왔으나 광흥사판의 한자음 수정과 평행하게 생각해 본다면 다분히 의도적인 삭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즉 성조가 어휘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소실되어간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20년의 간격밖에 없는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방점 차이는 어쩌면 방점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었던 경상도에서 간행되었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전라도에서 간행되었느냐의 차이가 될 수도 있다. 광흥사판의 편찬자들에게 방점이 무의미한 것이었다면 방점 역시 한자음 받침의 ‘ㆁ’이나 ‘ㅱ’ 혹은 ‘ㅭ’의 ‘ㆆ’처럼 삭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방점이 나타나는 부분과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책에 함께 묶인 까닭에 대한 설명이 부담으로 남는다.

쌍계사판은 그 판목이 현재 갑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서 갑사판으로도 불린다. 다른 두 이본보다 판이 조잡하고 낙장이 많으며 방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특히 한자음의 경우 간행 당시의 현실음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전혀 다른 성격의 자료인 셈이다.

여기서는 세 이본들 중 원간본의 모습을 비교적 많이 유지하고 상보적인 측면까지 지니고 있는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대교(對校)에 관심을 가지기로 한다.

2.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대교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대교(對校)는 주로 김정남(1995)의 내용을 취한 것이다. 특히 우리의 작업 대상이 되는 광흥사판의 경우 ‘상권’과 ‘하권’으로 분책이 되어 있어 여기서는 ‘상권’ 부분의 대교에 주된 관심을 가지기로 한다.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은 동일한 판하(板下)를 이용한 복각본인 듯, 획의 굵기 정도에 있어 미세한 차이를 보일 뿐 특별히 다른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부분은 많지 않다. 장차까지 일치하는 이들 이본 사이에는 주로 오각(誤刻)이나 탈각(脫刻)에 의한 차이가 많이 발견된다. 주된 차이는 한자음과 방점에서 찾을 수 있으나, 탈자와 오자 또는 언어의 변화 등에 의한 차이도 보인다. 고유어와 한자어로 갈라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 보기로 한다.

2.1. 고유어

2.1.1. 탈자·오자

어느 한쪽의 판본에서만 오류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소개하는 예들은 대조의 결과 차이가 나는 경우를 든 것이다. 오류의 양상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각기 다른 양상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광흥사판〉 〈무량굴판〉 〈장차〉

거·시·라기시라70ㄱ

救·티·옷 아·니·면救·티·옷 아니·면56ㄴ

그 ·러그 ·리20ㄱ

나·니·다나·니·다29ㄱ

다·시다·사96ㄴ

다되라다되리 주002)

탈각인 듯하나 오각일 가능성도 높음.
46ㄱ

도도족98ㄴ

마··디·니마·디·니78ㄴ

머·글·씨·라머굴씨라76ㄱ

몰애믈애16ㄱ

버·수·믈버믈60ㄴ

브·니보·니43ㄱ

世·옛世·엣64ㄱ

솟글·코솟들코 주003)

<풀이>각수의 실수로 보인다. ‘글’의 ‘ㄱ’이 거꾸로 새겨져 ‘ㄷ’의 아래 획이 없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23ㄱ

어셔이셔97ㄱ

·옛97ㄱ

일·후·믈일믈26ㄴ

일일46ㄴ

제 :겨집졔 :겨집60ㄱ

터럭더럭78ㄴ

1ㄱ

·:혀·:허·53ㄱ

·리·리리라96ㄱ

2.1.2. 받침표기

‘ㅭ’ 받침을 광흥사판에서는 ‘ㄹ’로 바뀌었는데 대부분 한자어의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고유어의 예는 흔하지 않다.

저·허·씨라저허씨라94ㄴ

2.1.3. 표현상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

다음의 예들은 두 판본의 간행에 관여한 이들의 언어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예들이다. 각기 성격이 달라 언어적인 차이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無間·앳無間ㅅ29ㄱ

:아·시·리러·니·라:아샤리러니·라21ㄱ

:업시·우거·든:업시·위커든20ㄱ

地獄·브·터地獄·여러26ㄱ

·리·:더·니·리·니·다46ㄴ

2.2. 한자음 표기

2.2.1. 탈자·오자

우선 동일한 한자의 발음이 여러 가지 양상을 보여 정음을 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1ㄱ

·뗑1ㄱ

93ㄱ

2ㄴ

92ㄱ

특히 이중모음과 단모음의 표기 사이의 오류가 눈에 많이 뜨인다.

92ㄴ

·넘·념96ㄴ

ᄋힵᆫ24ㄴ

38ㄴ

便·뼌·뻔64ㄴ

·뻐ᇰ91ㄱ

·앙·양23ㄱ

38ㄱ

100ㄴ

25ㄴ

ᅌᆦᇰ20ㄴ

·역·ᅙᅥᆨ89ㄴ

··ᅙᅥᆨ69ㄴ

·ᅙᅥᆨ83ㄴ

28ㄴ

이중모음과 단모음의 혼기 양상 가운데 ‘ㄷ, ㅌ’, ‘ㅎ’ 뒤에서 나타나는 단모음 표기의 예가 많아 따로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60ㄱ

:쌍:썅20ㄴ

·상·상18ㄱ

·쎙·쏑31ㄱ

·석·셕1ㄱ

·써ᇙ60ㄱ

52ㄱ

82ㄱ

54ㄱ

::21ㄴ

·54ㄱ

·뗑1ㄱ

·뜌·뚱92ㄴ

12ㄱ

5ㄴ

94ㄱ

11ㄱ

··42ㄴ

··터ᇙ41ㄴ

:청95ㄴ

·63ㄱ

ᅘᅥᇰ54ㄱ

간혹 한자음이 아예 적혀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표기없음·86ㄴ

·표기 없음 주004)

<풀이>빈공간의 다음 글자 ‘에’의 획을 올려 그어서 자리를 메우고 있다.
37ㄴ

표기없음85ㄱ

그밖의 오각이나 탈각의 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카94ㄱ

·긱9ㄱ

·겁·컴29ㄱ

:공:콩34ㄱ

::14ㄴ

··54ㄱ

·퀀88ㄴ

·94ㄱ

30ㄴ

30ㄴ

4ㄴ

75ㄴ

·먼·민35ㄴ

13ㄴ

·브ᇢ43ㄱ

·붕3ㄴ

·둔17ㄴ

·악·95ㄴ

··악17ㄱ

··42ㄱ

··39ㄱ

13ㄱ

·쥼70ㄱ

12ㄱ

·뙥·똭8ㄴ

·합100ㄴ

·18ㄱ

·18ㄱ

··21ㄴ

20ㄴ

·현·(罒)33ㄴ

·황·횡31ㄴ

·횡·황34ㄱ

··93ㄴ

5ㄴ

:힁:읭1ㄴ

이와 같이 탈자나 오자는 대개 한 문헌에서 생긴 것을 다른 문헌과 비교해 보아 고칠 수 있으나, 두 문헌에서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서 다른 부분과의 비교를 통해서야 비로소 오자나 탈자임을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들 경우에 판하 자체의 잘못인지 우연히 둘다 탈각되거나 오각된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앙·앙20ㄴ

2.2.2. ㅇ(喩母) 받침 표기

ㅇ 받침은 주로 광흥사판에서 많이 제거되었는데 남아 있는 부분도 상당수 있으며 특히 협주 부분은 수정의 눈길이 많이 미치지 못한 탓인지 더 많이 남아 있는 경향을 보인다. ‘ㅇ’이 남아 있는 예와 ‘ㅇ’이 삭각된 예들을 소개한다.

• ‘ㅇ’이 남아있는 예

··91ㄱ, 52ㄱ

·밍·밍91ㄱ, 91ㄱ

82ㄴ

··91ㄱ

93ㄱ

2ㄴ

:쬥98ㄴ

·퐁94ㄴ

·홰93ㄴ

• ‘ㅇ’이 삭각된 예

:과:광15ㄱ

:귀:귕33ㄱ, 46ㄱ

:녀:녕33ㄱ

19ㄴ, 30ㄴ

15ㄱ, 29ㄱ

:례:롕22ㄴ

25ㄱ, 41ㄱ, 42ㄱ, 45ㄱ

::26ㄱ

41ㄱ

37ㄱ

::46ㄴ

·셰·솅37ㄴ

30ㄱ, 30ㄴ

·ㅊ 주005)

<풀이>‘ㅇ’을 삭각하면서 ‘ㆍ’까지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77ㄴ

::33ㄱ

·29ㄱ

·뎨·뎽33ㄱ

61ㄴ

:쬐:쬥29ㄱ, 38ㄴ, 43ㄴ

·띠·띵25ㄱ, 30ㄱ, 37ㄴ, 38ㄱ, 38ㄴ

12ㄴ

·포·퐁94ㄴ

16ㄱ

::26ㄴ

30ㄴ, 52ㄴ

19ㄱ

2.2.3. ㅭ(以影補來) 표기

ㅭ 받침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는 ‘ㆆ’을 제거시킨 형태가 광흥사판에 많이 나타난다. 다양한 양상을 보여, ‘ㅭ’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ㄹ’을 크게 다시 새긴 경우가 있는가 하면 ‘ㅭ’의 ‘ㄹ’은 그대로 두고 ‘ㆆ’만 삭각하여 기형적인 글자 모양을 그대로 둔 경우도 있다. ‘ㅭ’ 중에서 ‘ㆆ’의 ‘ㆁ’만을 제거한 경우도 나타난다. 많지는 않지만 ‘ㅭ’이 두 문헌에서 그대로 유지된 예들도 있다.

• ‘ㅭ’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ㄹ’을 크게 다시 새긴 경우

·별·62ㄱ

·뿔·57ㄱ

·살· 62ㄱ

·살83ㄱ

• ‘ㅭ’의 ‘ㄹ’은 그대로 두고 ‘ㆆ’만 삭각한 경우

·벌52ㄴ, 57ㄱ

·뿔51ㄴ

51ㄴ

• ‘ㅭ’ 중에서 ‘ㆆ’의 ‘ㆁ’만을 제거한 경우

·뿔34ㄱ, 37ㄴ

·살14ㄴ

• ‘ㅭ’이 두 문헌에서 그대로 유지된 경우

·66ㄱ

·써ᇙ60ㄱ

·· 94ㄴ

2.2.4. 순경음 ㅱ 받침 표기

순경음 ㅱ은 받침 표기에서 유지된 예가 ㅭ 경우보다 많고 또 전체가 제거된 예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ㅇ’만 부분적으로 제거된 예가 많이 나타난다. 또 이 ‘ㅇ’의 제거가 탈각인지 삭각인지 구분이 어려우나 무량굴판에도 나타난다.

• 받침 표기에서 유지된 경우

::56ㄱ

··56ㄴ

::55ㄴ

::55ㄴ

• ‘ㅇ’만 부분적으로 제거된 예(1)

:굼:62ㄴ

::16ㄱ

:똠:30ㄴ

:뭄:41ㄴ, 66ㄱ

·봄·38ㄱ, 38ㄴ

:봄:20ㄱ

:숌15ㄱ, 51ㄱ

:쓤:15ㄱ, 29ㄱ, 37ㄱ, 41ㄱ

19ㄱ, 26ㄱ

·횸·38ㄴ

::21ㄴ

30ㄱ

• ‘ㅇ’만 부분적으로 제거된 예(2)

·봄·봄65ㄱ

:5ㄱ

• 전체가 제거된 예(1)

:또:57ㄱ

·보·58ㄴ, 67ㄱ, 67ㄴ

63ㄴ

:쓔:43ㄱ, 46ㄴ

:쓔:쓰ᇢ67ㄴ

51ㄱ

::58ㄴ

• 전체가 제거된 예(2)

·구82ㄴ

·보·봄67ㄴ

2.2.5. ㆁ(凝母) 받침 표기

종성 ‘ㆁ’이 와야 할 자리에 ‘ㅇ’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난다. 두 판본에 골고루 혼기 양상이 보인다.

5ㄴ, 59ㄴ

:광:광95ㄴ

:광11ㄴ

15ㄴ

:등:38ㄱ

77ㄱ

15ㄱ

妄語·망:망·60ㄱ

44ㄴ

聖女·:녕·셩:녕20ㄱ

15ㄱ

22ㄴ, 63ㄴ

::쟝83ㄱ

·짱·16ㄱ

··졍58ㄱ

:뎡:15ㄱ

69ㄴ

다음의 예들은 종성의 소리값이 없는데도 ‘ㆁ’ 표기가 나타나는 보여준다. 표기에 있어 ‘ㅇ’과 ‘ㆁ’의 단일화가 진행되는 과정의 일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1ㄱ

:녀:59ㄴ

·띠·80ㄱ

2.2.6. ㆁ 초성 표기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ㆁ’을 초성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 ‘ㅇ’로 바뀐 예가 무량굴판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11ㄴ

··업36ㄱ, 46ㄴ, 78ㄱ

::웅69ㄴ

··원63ㄱ

2.2.7. 기타

유일예라는 점이 부담이 되기는 하나 무량굴판에 보이는 다음의 예는 구개음화와 관련하여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長者::쟝쟝18ㄱ

Ⅲ. ≪월인석보≫ 권21하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현전하는 ≪월인석보≫ 권21은 크게 세 종류의 이본이 존재한다. 모두 원간본이 아닌 복각본으로서 광흥사판, 무량굴판, 쌍계사판이 그것이다. 이들 중 광흥사판과 쌍계사판의 경우에는 두 책으로 분책이 되어 간행되었다. 동일한 시주질이 각각 뒤에 붙어 있어 분책 간행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월인석보≫ 권21에 국한하여 볼 때 우선 광흥사판과 무량굴판의 경우에는 각각의 시주질에 차이를 보인다. 광흥사에서 개판한 사정과 무량굴에서 개판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책의 간행 연도로 보면 광흥사판이 20년 앞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예들은 광흥사판보다는 무량굴판의 상태가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차이를 보이는 대부분이 광흥사판에서의 탈각으로 인한 것이다.

광흥사판의 ‘딜오’〈137ㅇ〉는 ‘덜오’의 잘못. 무량굴판에는 ‘덜오’로 되어 있다.

광흥사판의 ‘ㄱ리니’〈140ㄷ〉는 ‘리니’의 오각. 무량굴판에는 ‘리니’로 되어 있다.

광흥사판의 ‘퓌우고’〈149ㄷ〉가 무량굴판에는 ‘픠우고’로 표기되어 있다.

광흥사판의 ‘울워미’〈200ㅇ〉는 ‘울워미’의 잘못. 무량굴판에는 ‘울워미’로 되어 있다.

광흥사판의 ‘딜씨오’〈217ㄷ〉는 ‘밀씨오’의 잘못. 무량굴판에는 ‘밀씨오’로 되어 있다.

광흥사판의 ‘無情호리’〈219ㅇ〉는 ‘無情호라’의 잘못. 무량굴판에는 ‘無情호라’로 되어 있다.

월인석보 권21하의 내용을 중심으로 탈각의 예만 간단히 살핀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우리가 대할 수 있는 현전본의 인출 대상이 된 목판의 보관 상태에서 그 까닭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대할 수 있는 광흥사판이 ‘嘉靖二十一年壬寅(1542)三月日 慶尙道 安東 下柯山 廣興寺開板’의 간기를 가지고 있으나, 20세기 전반 즉 1930~40년경에 인출 시기의 목판 상태는 그리 좋았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의 관심을 방점이나 한자음으로 넓힐 경우에 보다 많은 경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논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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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22에 대하여

한재영(한신대학교 교수)

〈월인석보 제22〉의 간행 연대는 분명하지는 않다. 희방사, 갑사 무량굴 등에서 복각한 것과 비교하여 거의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짐작되며,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16세기 간행본인 셈이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월인석보 제22〉 역시 세조 때 처음으로 간행된 본을 바탕으로, 복각하여 간행한 중간본이며, 1권 1책이다.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8cm×18.0cm, 유계(有界), 반엽(半葉) 7행(行) 14자(字)~15자(字), 주쌍행(註雙行), 흑구(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로 판심제(版心題)는 ‘月印釋譜’이다. 책의 크기는 33.8cm×22.8cm이다. 일견 책의 상태는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갖추어져 있어 일부 훼손된 마지막장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듯이 보이나 24장 이후 낙장이 있으며, 72장부터 108장까지도 낙장이다.

〈월인석보 제22〉의 33ㄴ에 보이는 ‘거늘’이라든가, 37ㄴ에 보이는 ‘너’라든가 46ㄱ의 ‘귀’ 등은 〈월인석보 제22〉가 16세기 중반의 복각본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먼저 ‘거늘’을 ‘먹거늘’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은 〈월인석보 권22〉가 16세기 중엽의 한 사찰에서 복각된 복각본이어서 군데군데 오각이 보인다는 점을 기억한 판단이다. 이도 그러한 오각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2인칭 복수 대명사인 ‘너’는 〈월인석보 권22〉에 보일 뿐이다. ‘너’를 보이는 다른 자료들은 16세기 자료인 순천김씨묘 출토 간찰이나 번역소학이나 번역노걸대 등에서 찾아볼 수 있어, 현전하는 월인석보 권22가 16세기 중엽에 간행된 책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귀’의 경우 중세국어에서의 귀[耳]는 거성으로 나타나는 데에 비하여, 여기에서는 평성으로 되어 있다. 복각본인 탓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월인석보에 대한 구구한 설명을 줄이고자 하는 까닭은, 월인석보에 관한 많은 논문과 해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논저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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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23에 대하여

한재영(한신대학교 교수)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으로,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어 〈월인천강지곡〉을 펴내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여기서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월인석보 제23〉은 보물 제 745-8호로 지정된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이다. 세조 때의 초간본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책의 실제 간행 연대는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삼성출판박물관의 소장본을 실제로 대하지는 못하고, 사진으로만 본 상태에서의 판단은 섣부른 것일 수도 있겠으나 1963년 동방학지 6집에 영인된 연세대학교 소장본이나 전남 영광 불갑사에서 발굴된 명종 14년(1559)의 순천 구악산 무량굴판본과 비교하여 볼 때 크게 다르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의 간행연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까닭이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월인석보 제23〉은 책의 앞부분이 15장이나 낙장인 상태이며, 뒷부분 107장 이후 역시 낙장인 상태라는 점과 판본 전체를 배접하여 수리하면서 제19장이 제28장의 뒤에 가 있고, 제74장과 제75장의 순서가 바뀌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27장과 제74장의 후면은 결락되어 있어 책의 상태가 온전하지는 못한 편이다. 판심부분도 파손이 되어 보사하였고, 흑구와 사주 역시 개칠(改漆)하였다. 실사자의 보고에 따르면,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1.4cm×17.2cm, 유계(有界) 반엽(半葉) 7행 14자(大字), 16자(중, 소자), 주쌍행(註雙行), 흑구(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여기서는 결락된 부분에 대하여서만 흐름이 끊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무량굴판본을 취하여 역주를 행하였다.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월인석보 제23〉의 앞부분에 보이는 15장의 낙장 부분은 무량굴판으로 보완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역주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자료로서 결락된 제27장과 제74장의 후면은 무량굴판을 영인하여 보인다.

〈월인석보 제23〉의 전반부인 제53장의 앞면 즉 〈월인천강지곡〉의 기496와 그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부분까지는 전법에 관한 부분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권30 등의 부분과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聖佛經)의 내용이 협주로 번역이 되어 실렸으며, 그 후반인 〈월인천강지곡〉의 기497 이후는 〈석가보(釋迦譜)〉 권2·4, 〈목련경(目蓮經)〉, 〈우란경(盂蘭經)〉 등에서 부분 인용되어 있다.

다른 중세국어 자료에서도 간간이 모음조화에 어긋나는 예들이 보이기는 하나, 여기에서도 모음조화에 어긋나는 예들이 눈에 뜨여 들어 두기로 한다. ‘饉은(55ㄴ)/饉(31ㄱ), 깃가(66ㄱ,ㄴ)/깃거(101ㄱ), 菩提心을(46ㄱ)/菩提心(77ㄱ), 父母애(96ㄴ)/父母에(97ㄴ), 세흔(29ㄱ)/세(16ㄴ)’ 등이 그것이다.

월인석보와 관련해 더 넓고 깊은 논의는 다음의 참고 논저로 미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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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25 해제* <정의>* 이 역주와 해제 작업의 과정에서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저경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이종찬 교수(동국대학교 명예교수)와 김갑기 교수(동국대학교 국문과)에게서 자주 도움을 받았고, 불교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는 해주 스님(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교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들은 이유기 교수(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와 김지오 양(동국대학교 강사)이 많이 도와주었다. 고마운 뜻을 여기 적어 둔다.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1995년 9월은, 당시까지 그 간행 여부조차 미심했던 ≪월인석보 제25≫(세조 5년(1459))가 <정의>그 무렵 학계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1992년 11월 7일, 진단학회 제20회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이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는데, 그 주제가 “월인석보의 종합적 검토”였다. 여기서 고 안병희 교수는 ‘월인석보의 편간과 이본’을 발표하면서 그 권수에 대하여, 1992년 10월에 공개된 ‘월인석보 제23’의 원간본(김종규님 소장) 내용과 ‘석보상절 제23·24’의 내용의 연결 관계로 보아 종래의 24권 추정을 재고하게 한다 하고, 그 전체 권수는 25권 또는 그보다 1권이 많거나 적다고 추정했다.〈안병희 1992:2~3, 1993:187~188〉 필자도 여기에 토론자로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필자 나름의 계산으로 중간본 ‘월인석보 제21’처럼 각권의 장수가 200장 이상 늘어나도 ‘월인석보’의 총권수는 ‘석보상절’과 같이 24권으로 끝날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추정은 추정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536년 만에 두 번째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뜻 깊은 달이었다.

이는 국어국문학은 물론 불교학, 서지학 연구에도 큰 낭보(朗報)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 저간의 발굴과정을 관련 자료를 통해 가능한 대로 알아보기로 한다.

이 ≪월인석보 제25≫(이하 ‘이 문헌’으로 부름)는 지금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인 보림사(寶林寺)에 소장돼 있으며, 보물 7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찰은 신라 경덕왕 18년(759)에 개찰(開刹)되어 오랜 세월에 부침(浮沈)을 겪다가, 1951년 3월 11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공비들이 후퇴하면서 절에 불을 질러 천왕문(天王門)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람이 소실되고 말았는데, 현재의 사찰은 1984년 이후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복원되었다(≪가지산 보림사(迦智山寶林寺)≫(1995:20) 참조).

이런 유서 깊은 사찰이어서, 장흥군에서는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1994년 11월에 ‘종합학술조사’를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조사단이 구성되고 1995년 1월부터 9월까지를 기간으로 하여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 대상은 고사찰의 지표(地表) 조사와 시굴(試掘) 조사였다.

이에 앞서 1971년에는 화마(火魔)에서 유일하게 남았던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을 보수하면서 복장(腹藏)의 고서(古書)가 다량 출토되었는데 모두 일실되고 말았다.

1995년 1월, 조사가 시작되어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가람의 배치, 근래 복원된 대적광전에 모신 국보 117호인 철조 비로사나불 좌상(이 불상은 철조(鐵造) 불상이었기에 다행히 1951년 화재에서 보존된 것임.), 복원된 대웅보전을 조사하고, 고건축물로는 유일한 사천왕문을 조사하게 되었다.

사천왕상의 외형적인 형태를 조사하며, 앞에 적은 복장 불서의 일실을 알고 있었으나, 형식으로라도 몸통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어 살펴본바, 예상했던 대로 거기에는 전적류(典籍類)의 찌꺼기와 이물질(異物質)만 있었다. 그런데 사천왕상의 몸통이 아닌 팔굽 위·아래와 다리의 무릎 위·아래 뒷면에 각각 덧붙인 판자가 있어서 그 판자를 뜯어보니, 뜻밖에도 그 속에서 다량의 불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정의>이때 나온 불서는 모두 48종, 판본은 125종, 책수는 총 203책으로 정리되었음.(송일기 1997: 87~125). 이 복장(腹藏) 불서(佛書)는 위에 적은 대로 팔·다리의 공간에서 나왔으므로, 그 출처를 따른다면 수족장(手足藏)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나, 학계에서는 일괄해서 ‘복장’으로 쓰고 있다. 더구나 현재까지 불상이나 나한상(羅漢像)에서 나온 것은 모두 그 몸통에서 출토된 것이고, 팔과 다리의 공간에서 나온 것은 학계에 보고된 바도 없고 이 사천왕상에서 나온 것이 유일한 것이라 한다.(≪가지산 보림사≫ 19쪽, 42~43쪽). . 학술조사의 기간은 1995년 1월부터였지만, 이 불서의 발굴은 그해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어서의 일로, 불서 감정을 맡았던 박상국 선생의 기억을 근거로 발견 시기를 앞에 적은 바와 같이, 1995년 9월로 적었다. 다량의 복장 불서가 발굴되자, 당시 보림사 주지 현광(玄光)스님은 이 고문헌의 조사를 문화재관리국 박상국 민속예능실장(후에 문화재 전문위원)에게 의뢰한 바, 그 조사 과정에서 뜻밖에도 ≪월인석보 제25≫를 발견하게 된 것이니, 결국 이 행운의 주인공은 박상국 선생이었다.

이런 사실이 소문으로 알려지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박상국 실장이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보도자료(A4 용지 두 장분)를 각언론사에 배부하고 기자 회견을 하게 되며, 이것이 1995년 12월 16일 도하(都下)의 각 신문에 ‘월인석보 권25 발견’으로 기사화되었다.

이어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이 문헌’을 보물 745-9호로 지정했다. 앞에도 잠간 적은 바와 같이 1971년 사천왕상 보수 시에 발견된 불서가 모두 없어졌는데, 만에 하나 ‘이 문헌’도 당시에 발견되어 나머지 불서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었을 것인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의>이때 나왔던 사천왕상의 복장불서는 150여점이며, 그 중 38점의 목록이 작성되었다 하나, 현재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이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38점 중의 한 책인 ≪월인석보 제17≫은 다행히 조선대학교 장태진 교수에 의해 조사 보고되고,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장태진(1972) ‘보림사본 ≪월인석보 제17≫에 대하여’(한글 150, 131~132쪽). 장태진 편(1986) ≪月印釋譜 第十七≫(영인본) 교학연구사.

이 발견이 이루어진 지 10년 만에 강순애(2005) 영인본 간행으로 연구에 이용하기 쉽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2. 서지와 내용

2.1. 형태 서지

이 책의 형태 서지는 박상국(1995), 강순애(1998)에 따랐다.

발견 당시 가철본 상태였던 이 문헌은 현재 전통적인 능화판 무늬의 누른 앞·뒤 표지(앞 표지에는 왼편 가장자리 위편에 제첨(題簽)과 오침안정법식 제책)에, 본문의 각 장도 새로 한지로 배접해서 반듯하게 펴져 반반한 지면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이 글을 쓰면서 원본을 실사한다는 관점에서, 2009년 9월 18일 보림사를 방문, 지묵(知黙) 주지스님의 배려로 귀중본 보관 금고에서 이 문헌을 내주셔서 열람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국립국어원의 PDF파일을 내려 받아 이 역주본 부록으로 영인할 수 있는 문제도 쾌히 승낙해 주신 데 대하여 여기 적어 깊은 사의를 표한다.

표지와 본문 1, 2장은 낙장(落張)되었으므로 3장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내제(內題)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라면 1행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제이십오(第二十五)’, 2행에 ‘석보상절(釋譜詳節) 제이십오(第二十五)’가 제명(題名)이 있었을 것이고, 3행부터 내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판십제(版心題) : 月印釋譜 二十五 (*영인본 ‘판심제’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46면 후면의 판심은 장차(張次)와 어미(魚尾)가 확실히 보임.)

규격(規格) : 31.8×21.7cm
지질(紙質) : 저지(楮紙)
판종(版種) : 목판본(木板本)
반곽(半廓) : 22.3×17.0cm
판식(板式) : 4주(周) 쌍변(雙邊), 유계(有界)
판심(版心) : 대흑구(大黑口) 상하(上下)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영인본으로는 대흑구가 간혹 보임.)
행관(行款) : 월인천강지곡 부분, 7행 14자(큰 글자)
석보상절 부분, 7행 16자(중간 글자)
협주(夾註) : 쌍행(雙行) 16자(작은 글자)
장차(張次) : 3장 전면에서 144장 전면으로 끝남.
훼손 상태 : 1, 2장 낙장. 3장 판심 부분과 왼쪽 아래 일부. 4장 판심 부분. 131장에서 141장까지 각 장의 7행 일부의 부식(腐蝕)한 부분이 장을 거듭할수록 점점 그 크기가 커져서 141장은 후면의 3행 정도가 부식되었으며, 141장에서 144장 전면까지는 부식한 부분이 두 군데로 늘어나고 판심 중심의 위아래도 부식이 심함.

가철본 상태였던 것을, 현재는 앞에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각 장의 배접과, 새 표지로 제본하면서 표지 다음에 한지로 다섯 장을, 뒤표지 앞에는 석 장을 각각 끼워 넣은 상태이었다.

2.2. 내용

필자는 김영배(2006)에서 ≪석보상절 제24≫와 ‘이 문헌’의 내용을 대비한 결과 181면이 수정 증보되었고, 약 10면 정도가 삭제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서로 대응이 되어 ‘이 문헌’이 전25권의 끝 권임을 알게 되었다.

내용은 저경(底經)의 단락에 따라 ⅰ) 본문의 장차(張次), ⅱ) 내용의 개략, ⅲ) 저경(底經)의 출전 등의 차례로 보이기로 한다. 저경은 강순애(2005)와 김기종(2006), 특히 김기종(고려대학교 연구교수)의 ‘저경 자료’에 크게 의존했다. 이밖에 주해에 필요한 것으로 일부(삼의 육물(三衣六物)의 설명 중에서)는 필자가 찾은 것도 있다. ⅲ에서는 먼저 경전명(經典名)을 밝히고, 그 뒤에 ≪대정신수대장경≫에서 해당 저경이 있는 출처(出處)를 밝히는데, 쪽수 다음의 ‘상, 중, 하’는 한 쪽이 3단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저경의 출전과 내용〉

(1-ⅰ) 3ㄱ1(3장 전면 1행) ~9ㄴ1(9장 후면 1행). - *이하 이와 같은 식으로 나타냄.
(1-ⅱ) 세존 열반 후, 유교(遺敎)를 결집하기 위해 가섭존자가 부처님 제자 1천 명을 필발라굴로 모으는데, 아난 말고는 모두 ‘나한’이어서 가섭이 아난을 내치니, 아난이 분발하여 그날 밤으로 득도하여 다시 참여하게 되며, 비니법장의 결집을 위해 교범파제를 불러오려 하나, 그는 ‘상왕(象王)이 가면 상자(象子)도 따라야 한다’면서 스스로 불살라 멸도함.
(1-ⅲ) 경율이상(經律異相) 권13, 가섭결집삼장출척아난사진여루(迦葉結集三藏黜斥阿難使盡餘漏) 3, ‘대지론(大智論)’〈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제53, 사휘부(事彙部) 상, 65쪽〉

(2-ⅰ) 9ㄴ1 ~11ㄱ5
(2-ⅱ) 가섭이 우바리를 청하여 율장(律藏)을, 아난에게는 경장(經藏)을 결집하게 하는데, 아난이 법좌에 올라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하니 모두 의심했다가 그 의심이 풀렸음.
(2-ⅲ)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전부(事傳部) 3, 205~206쪽〉.

(3-ⅰ) 11ㄱ5 ~12ㄱ4
(3-ⅱ) 〔협주〕 ‘아난’은 ‘환희(歡喜)’라는 뜻인데, 출가한 실달태자가 성도(成道)하는 날 태어나서, 정반왕은 경사스러움이 함께 일어났다고 하여 ‘환희’라고 이름지었다.
(3-ⅲ)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권1, 십대제자편(十大弟子篇) 제8, 〈대정신수대장경 제54, 사휘부(事彙部), 교외부(敎外部) 1064쪽〉

(4-ⅰ) 12ㄱ4 ~14ㄱ6
(4-ⅱ) 초조(初祖) 가섭존자가 아난에게 정법을 부촉하며 게를 이르고 계족산에 들어가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림. 〔협주〕는 인도의 28조사(祖師)와 동토〔중국〕의 6대사(大師)
(4-ⅲ) 경덕전등록 권1, 제1조 마하가섭 〈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전부 206쪽〉

(5-ⅰ) 14ㄱ6 ~57ㄱ7
(5-ⅱ) 3의(衣)〔승가리, 울다라승, 안다회)와 발다라〔바루〕, 니사단〔앉을 때 까는 자리〕, 녹수낭〔물 거르는 주머니〕를 합쳐 3의(衣) 6물(物)이라 이르는데, 여기서는 3의의 명칭, 자재, 격식, 짓는 법과 가사의 공덕, 위력 등을 주로 설명하고, 발다라, 니사단, 녹수낭에 대한 설명은 이 단락의 끝 6면으로 간단함.
(5-ⅲ) 법원주림(法苑珠林) 권35 법복편(法服篇) 제30, 공능부(攻能部) 제2, 〔비화경(悲華經)〕, 제난부(濟難部) 제4, 위손부(違損部) 제4, 감응연(感應緣) 〈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휘부 상, 556~562쪽〉와 ‘발다라, 닛단, 녹수낭’의 저경은 〈십송율(十誦律〉, 〈사분율(四分律)〉, 승기(僧祇)〉, 〈계소(戒疏)〉, 〈초(鈔)〉, 〈오분율(五分律)〉, 〈살바다(薩婆多)〉, 비나야(鼻奈耶)〉 등에서 간단한 인용문이어서 다 옮기기 어려워, 주에 필요한 일부만을 찾는 데 그쳤음.

(6-ⅰ) 57ㄱ7 ~62ㄱ6
(6-ⅱ) 2조 아난존자가 열반하기 전에 아사세왕과 비사리왕의 공양을 받고 두 나라가 다투지 않게 서응을 보이고 상나화수 존자에게 정법을 위촉함.
(6-ⅲ) 경덕전등록 권1, 제2조 아난〈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전부 206쪽〉

(7-ⅰ) 62ㄱ7 ~62ㄴ6
(7-ⅱ) 월인천강지곡 기 577(1곡).
(7-ⅲ) ........

(8-ⅰ) 62ㄴ7 ~64ㄴ5
(8-ⅱ) 왕사성에서 세존이 탁발하던 중에 만난 ‘사야’와 ‘비사야’란 두 동자가 공양하고 발원했는데, 이 공덕으로 후세에 ‘사야’는 파련불읍의 아육왕이 됨.
(8-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시수대장경 제50, 사전부(史傳部) 76쪽〉.

(9-ⅰ) 64ㄴ6 ~66ㄴ3
(9-ⅱ) 세존의 전생인 바사기왕이 한 불상을 채색으로 그려서 화사(畵師)에게 주어 그것을 본으로 8만4천의 불상을 그리게 하여 나라 안에 편 인연으로 세존이 8만4천의 탑보(塔報)를 받게 됨.
(9-ⅲ) 석가보 권5, 석가획8만4천탑숙연기(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 제32 〔賢愚經〕〈대정신수대장경 제50, 사전부 82쪽〉.

(10-ⅰ) 66ㄴ3 ~73ㄴ4
(10-ⅱ) 파련불읍 빈두바라왕의 두 왕자, 무우(無憂)와 이우(離憂) 중에서 여러 곡절 끝에 무우가 아육왕이 됨.
(10-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6쪽〉.

(11-ⅰ) 73ㄴ4 ~88ㄱ5
(11-ⅱ) 아육왕의 명을 거스른다고 그의 500 대신을 죽이는 등 모진 일 끝에 ‘단정(端正)’이라는 비구의 도력(道力)으로 아육왕이 불법에 귀의하게 됨.
(11-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7~78쪽〉.

(12-ⅰ) 88ㄱ5 ~91ㄱ5
(12-ⅱ) 아육왕이 사리탑을 세우려고 용왕에게 가서 사리를 나누어 받아 8만4천 병을 만들어 야사 상좌의 도움으로 염부제에 한 날, 한 시에 8만4천탑을 세우니, 사람들이 경하하여 법아육왕이라 함.
(12-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8쪽〉, 아육왕전 권1 본토시연(本土施緣) 제1〈대정신수대장경 제50, 102쪽〉.

(13-ⅰ) 91ㄱ6 ~92ㄱ4
(13-ⅱ) 월인천강지곡 기578~579(2곡).
(13-ⅲ) .......

(14-ⅰ) 92ㄱ5 ~93ㄱ4
(14-ⅱ) 아육왕이 병중에 정성으로 빌어 8만4천탑이 일일이 곁에 오게 되어 비구들의 도움으로 번(幡)을 달고, 병이 나아 12년을 더 사니, 그 번의 이름을 ‘속명번(續命幡)’이라 함.
(14-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가섭어아난(迦葉語阿難)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9쪽〉

(15-ⅰ) 93ㄱ4 ~105ㄱ3
(15-ⅱ) 아육왕이 탑을 세우고, 부처님 생정에 수기(授記)한 비구인 우바국다존자를 만나, 부처님이 설법한 곳을 시작으로, 6년 고행, 성도(成道), 초전법륜(初傳法輪), 열반 한 곳을 각각 안내 받아 공양하고 사리불탑, 대목건련탑에도 공양함.
(15-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9쪽〉.

(16-ⅰ) 105ㄱ3 ~110ㄱ2
(16-ⅱ) 목련이 사문(沙門)을 없애려는 난타와 우반난타 두 용왕을 위신력으로 항복받아 제자가 되겠다는 두 용왕을 사위성 세존께 데리고 가서 우바새(優婆塞)가 되게 함.
(16-ⅲ)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28 청법품(聽法品) 제36〈대정신수대장경 제2, 아함부 하, 703쪽 중, 하~704쪽 상, 중〉.

(17-ⅰ) 110ㄱ2 ~114ㄱ2
(17-ⅱ) 아육왕이 부처님 대제자의 대목건련탑, 마하가섭탑, 아난탑을 차례로 찾아가서 수많은 진보로 공양했으나, 박구라탑에서는 그가 남을 위해 한 법도 이른 것이 없다고 돈 한 닢으로 공양했는데. 그 한 닢마저 왕에게 돌아와서 다 이르기를 존자가 욕심이 없어 한 닢도 받지 않는다고 찬탄했다.
(17-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9쪽 중, 하〉.

(18-ⅰ) 114ㄱ2 ~130ㄴ5
(18-ⅱ) 세존의 성도한 도량보리수(道場菩提樹)를 왕이 지극히 여기고 공양했는데, 왕의 한 부인이 그 보리수를 시샘하여 더운 젖을 부어 나무를 시들게 하니, 오히려 왕이 까무러쳐서 그 부인이 환심을 사려고 보리수 찬 젖을 부어 살게 하니, 왕은 더욱 많은 보배로 공양했다. 또 빈두로존자와 대중 스님께도 수많은 진보(珍寶)로 공양함.
(18-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80쪽 상, 중, 하〉.

(19-ⅰ) 130ㄴ5 ~135ㄴ1
(19-ⅱ) 아육왕의 아우 성용(善容)이 사견(邪見)에 빠져서, 왕은 방편으로 그로 하여금 구중 기녀들과의 환락을 통해 그 부질없음 깨닫게 하고 출가케 하여 사문이 되고 아라한이 되게 함.
(19-ⅲ) 석가보 권3, 아육와제출가조석가석상기(阿育王弟出家造釋迦石像記) 제25, 〔求離牢獄經〕 〈대정신수대장경 제50, 67쪽 상, 중〉.

(20-ⅰ) 135ㄴ ~136ㄱ5
(20-ⅱ) 월인천강지곡 기580~581(2곡).
(20-ⅲ) .......

(21-ⅰ) 136ㄱ6 ~139ㄱ2
(21-ⅱ) 아육왕이 8만4천탑을 세우고 탑마다 많은 재보로 보시하고, 끝에 가서는 염부제를 삼보(三寶)에 보시한다고 종이에 써 봉(封)하고 명종함.
(21-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81쪽 상, 중〉.

(22-ⅰ) 139ㄱ2 ~140ㄱ3
(22-ⅱ)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나, 아누루타대신이 이의를 냈다. 그 까닭은 아육왕 본래의 서원이 10억만금을 채워 모든 공덕을 지으려던 것인데, 아직 4억만금이 모자라기 때문이라 하니, 신하들이 의논하여 4억금을 절에 보내고서야 법익태자의 아들 삼파제(三波提)태자가 왕이 되었다.
(22-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81쪽 상〉.

(23-ⅰ) 140ㄱ4 ~142ㄴ4
(23-ⅱ) 아육왕의 법익태자가 아주 훌륭해서 후궁 가운데 한 부인이 사통(私通)하려 했으나, 태자가 고사(固辭)하므로 이 일이 탄로 날까봐 계략으로 태자를 변방에 보내고, 모략하여 왕을 꾀어 태자의 눈자위를 빼어오라는 칙서를 보내니, 태자는 왕명을 그대로 따라 하고 성을 나와 걸식하는 신세가 되어 유랑하다가 왕성에 오게 되고, 그 사이에 있던 일이 소문이 나서 왕의 귀에 들려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니, 그들은 바로 태자부부였다. 모든 사실이 드러나 왕이 신령께 빌어 눈을 회복시킨다는 내용임.
(23-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법익경〕, 아육왕식법익괴목인연경(阿育王息法益壞目因緣經云〕〈대정신수대장경 제50, 81쪽 중~82쪽 상, 중?〉

(24-ⅰ) 142ㄴ5 ~143ㄱ6
(24-ⅱ) 월인천강지곡 기582~583(2곡).
(24-ⅲ) ........

(25-ⅰ) 143ㄱ7 ~144ㄴ(이하 낙장)
(25-ⅱ) (협주) *여기는 원본의 훼손이 심하나, 저경과 그 언해인 ‘금강경삼가해’가 있어서 참고됨.) ‘석존의 탄생, 출가, 성도, 49년간 300여 회의 설법 끝에 열반에 드셨으나, 2천년이 지난 지금, 부처님이 가시며 오심이 있다 하나, 실은 오셔도 오신바 없으심이 달이 천강(千江)에 비춤과 같고, 가셔도 가신바 없으심이 허공을 여러 나라에서 나눔과 같으며. 자비로운 모습을 얻어 뵈옴이 어렵다 이르지 말라, 기원도량에서 여의지 아니하신 것이다.’가 그 개요인데, 결국 ‘월인천강지곡’ 기582, 583의 부연 설명으로, 이는 ‘월인천강지곡’ 기1, 2의 서사(序詞)에 대응하는 결사(結詞)임을 알게 한다(김기종 2006:114~117).
(25-ⅲ)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설의(金剛般若蜜經五家解說誼) 권상,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언해본) 제1:28ㄴ~29ㄴ〉,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1≫ 232~236쪽〉.

3. 희귀어에 대하여

이 글의 성격상 으레 국어학 분야의 표기와 음운, 문법 등에 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나, 어휘 부분 외에는 이미 다른 문헌에도 나타나는 것으로써 특별히 다룰 만한 것이 없어서 줄이고, 희귀어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 글은 필자(2001)에서 논의한 내용을, 고치고 더 보탠 것이다. 먼저 희귀어라고 생각되는 어휘를 가나다순으로 배열하되, 의미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짝을 이루는 것들은 함께 묶어서 제시하고, 품사 또는 기본형 및 의미를 밝힌 다음, 예문과 출처를 보이도록 하며, 방점은 표제어에만 붙이고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나타내지 않기로 한다. 아울러 이 낱말이 종래에 전하는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든가, 또 종래의 문헌에 씌었다 하더라도 활용형이 다르다든가, 또는 사전에 실려 있는 용례가 ‘이 문헌’보다 후에 나온 것이라든가 하는 문제 등을 밝히려 한다.

혹 관견의 소치로 근래 발굴된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새로 소개된 어휘 자료가 여기에 언급되는 것과 중복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1. ·겨피·다 [동] 겹치다.

¶重複 겨필씨라〈월석 25:17ㄱ〉

cf. 빗난 돗 겨펴 오〈법언 2:73ㄱ〉

이 어휘는 이미 소개된 것이나, 종래의 사전에는 위의 ≪법화경언해≫ 용례가 표제어로 돼 있으므로 이 단어로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당시 이와 관련되는 명사로 ‘單 오지오 複 ·겨비·라’〈능엄 8:15ㄴ〉와 같은 용례가 있다. 그러므로 ‘겨피-’는 ‘겹-+히’ 혹은 *겹-+이’로 분석될 수밖에 없는데, 전자의 경우 접미사 ‘-히’가 명사에 직접 결합되어 부사가 파생되었다고 하기는 미심한 것이다.

한자를 어근으로 한 경우 다음과 같은 보기 들은 있다.

甚히〈석상 23:42ㄱ〉 便安히〈석상 23:17ㄴ〉

自然히〈석상 24:12ㄱ〉 親히〈석상 24:28ㄴ〉

能히〈석상 23:29ㄴ, 35주〉

위는 모두 ≪석보상절≫ 23, 24에서의 보기이나, 다른 문헌에도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그 어근을 보면, 명사도 있지만 대체로 어근에 ‘-’가 결합되어 형용사가 되고 어간의 모음 ‘’가 줄고 파생 접미사로 ‘-이’가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고작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겨피-’는 ‘*겹-’는 문헌 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이런 용례가 있었다면 모를까 현재까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에 현대어에도 쓰이는 부사 ‘겹겨비’〈법화 2:253ㄱ〉가 있다.

2. :너·모 [명] 네모〔四角〕.

¶ 鉤紐 브티 해 너모 반 거슬 브 디니〈월석 25:26ㄱ〉

이 어휘도 종래의 사전에 실려 있기는 하나, 그 용례가 ≪이조어사전≫은 〈두초 16:40〉의 것이고, ≪우리말큰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은 〈번역박통사 상:17〉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용례가 나오기 전까지는 ≪능엄경언해≫의 ‘方器 너모 그르시라.〈능 2:4ㄱ〉’를 맨 앞에 올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월인석보≫의 이 용례가 나왔으므로 이것이 제일 먼저 실려야 할 것이다.

3. 노ᇇ드· [명] 논두렁.

¶이 葉相 노ᇇ두을 表니〈월석 25:24ㄱ〉

cf. 埢 논드〈물보 경농〉

종래 고어사전에는 15~6세기 문헌의 쓰임은 보이지 않고 18세기의 〈물보(物譜)〉의 보기만 실렸던바, ‘이 문헌’의 예를 중세국어 어휘로서 새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4. 누·웨 [명] 누에.

¶蠶은 누웨라〈월석 25:42ㄱ〉 누웨〈월석 25:43ㄴ〉 누웨〈월석 25:44ㄱ〉

cf. 누에 爲蠶〈훈민 용자례〉

누베 〈경북(이상규 2000:171)〉, 〈함북의 대부분(김태균 1986:137)〉 <풀이>사용지점은 두 번에 걸친 조사를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한글(2차 조사)과 한자(1차 조사)로 구별해 놓았다. 성진, 길주, 경성, 부령, 경원, 온성, 종성, 회령; 城津, 鶴上, 鶴中, 鶴西, 吉州, 東海, 下古, 漁浪, 羅津, 富居, 靑岩, 富寧, 雄基, 慶源, 南陽, 穩城, 鍾城, 會寧, 判乙, 花豊, 三社, 延上, 富山.

이 어휘는 ≪훈민정음언해≫에서조차 현대어와 동일한 어형을 보이는데 반하여, 경북방언이나 함북방언의 ‘누베’형은 그보다 더 앞선 시대의 것으로서, 문헌상으로는 ‘*누베〉*누〉누웨〉누에’의 변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고어사전에 새로운 표제어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5. 니르잡·다 [동] 일으켜잡다.

¶王이 시드러 幡을 몯 니르자바 커늘 比丘히 王 도 잡더니〈월석 25:92ㄴ〉

이 ‘니르잡-’은 중세국어에서 볼 수 있는, ‘니르-, 니르왇-, 니르위-, 니르-’와 같이 ‘니르-+잡-’으로 분석하여, 이 대목을 ‘… 번을 일으켜잡지 못하거늘 …’로 풀이해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새로 ‘니르잡다’란 동사를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니르-’는 어근 ‘닐-’에 사동 접미사 ‘-으-’가 결합한 것이다.

6. ·:실 [명] 날실〔經絲〕.

¶經絲 시리라〈월석 25:42ㄴ〉

7. ·시:실 [명] 씨실〔緯絲〕.

¶緯絲 시시리라〈월석 25:42ㄴ〉

cf. 시 히 디 아니고〈번노 하:62〉

≪번역노걸대≫(1515)의 ‘시, ’은 사전에 실려 있었어도 그 합성어인 ‘실, 시실’은 없었으므로 새로운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8. ·뎌도리 [명] 집비둘기.

¶鴿 뎌도리라〈월석 25:54ㄱ〉

이 어휘는 종래의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뎌돌+이라’ 또는 ‘뎌도리+Ø라’로 분석할 수 있겠는데, 당시에 이미 동물 명칭에 접미사 ‘-이’가 나타나는 것이 더 보편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전자보다는 후자를 취하였다. 의미를 ‘집비둘기’로 본 것은 『동아 한한대사전』2162쪽(집비둘기 합)에 따른 것이다.

9. 뎌·긔 [대] 져기, 저곳.

¶뎌긔 닐오〈월석 25:24ㄱ〉

cf. 어긔〈두초 11:16〉

종래의 사전에는 『두시언해』의 용례가 실렸으나 ‘이 문헌’의 것이 더 앞선다. 표기도 차이가 난다.

10. ·드·러·니·다 [동] 들어가다.

¶그제 龍王히 王 려 龍宮에 드러니거늘 王이 龍게 舍利 求야 供養지라 야〈월석 25:89ㄱ〉

이는 ‘드러니-+거늘’로 분석될 수 있음을 쉬 알 수 있고, 이 ‘드러니-’는 ‘드러가-, 드러오-’와 같이 한 어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러가-, 드러오-’는 중세어의 용례가 있어서 고어사전에 실려 있으나, ‘드러니-’는 아직 그 용례가 없었다. 같은 뜻의 ‘드러가-’는 이 ‘드러니-’보다는 후에 발달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전하는 문헌에서는 ‘이 문헌’의 보기가 늦게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애초에는 ‘드러니-’가 일반적이었으나, 신형인 ‘드러가-’의 출현으로 ‘드러니-’는 후에 사어가 된 것으로 보인다.

11. 딯·다 [동] 찧다〔搗〕.

¶宮內ㅅ 사미 일 지 兇主 맛뎌늘 와개 디·터·니 比丘ㅣ 보고,〈월석 25:77ㄴ〉

이는 새로 나온 단어가 아니라, 사전의 예문으로 실은 데 대한 한 의견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조어사전≫에는 예문의 순서가 “...디터니..〈신속 효2:70〉, ...디니...〈두초 7:18〉, ...디며...〈능엄 4:130〉, ...디허...〈월석 17:19〉”로, 간행 연대가 늦은 것이 먼저이고, 오랜 것이 뒤에 놓였고, 이 다음에 “...디호...〈법화 5:155〉, ...디호...〈두초 20:45〉”도 있다. 이 차례는 〈월석〉, 〈능엄〉, 〈법화〉, 〈두초〉로 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말큰사전≫은 용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나, 그 출전의 연대는 〈월석 17:17〉, 〈능엄 4:130〉, 〈두초 7:39〉로 제대로 돼 있다.

≪교학 고어사전≫은 표제어 ‘디타’로 용례는 “...디코〈구급 하:76〉, ...디허...〈두해 7: 37〉, ...디턴..〈두해 9:5〉”로 돼 있다.

앞의 두 사전보다 후에 나온 것이지만, 〈월석〉이나 〈능엄〉 혹은 〈법화〉의 용례를 볼 수 없다. 물론 표제어는 ‘딯다’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헌의 용례를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서, 고어사전 용례를 인용할 경우 그 출전의 연대를 확인 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덧붙여 둔다.

12. 침 [명] 〔句(鉤)針〕. 바느질의 한 가지인 박음질, 한 땀씩 곱짚어 나가며 꿰매어 겉으로는 실밥이 이어지고 뒷면에서는 겹으로 가게 꿰매는 방식. <정의>이 용어의 자문에 응해준 분은, 유희경 박사(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박선영 선생(서울시무형문화재침선장 제11호)으로 여기에 적어 감사함을 표한다.

13. 침 [명] 〔一列針〕 ‘홈질’은 두 천을 겹쳐 S자형으로 꿰매어나가는 수법.

¶鼻奈耶애 七條 四日이오 五條 二日이라〕 十誦애 모로매 믈러 호고〔침이라〕 바 호디 말라〔침이라〕 알 緣에셔 으로미〔緣은 옷 변라〕 네 가락애 鉤를 브티고 뒤흔 緣에셔 으로미 여듧 가락애 紐月 브티라  鉤紐 브티 해 너모 반한 거슬 브디니 굳게 논 디어늘/ 壇子ㅣ라 니 외니라〈월석 25:26ㄱ~ㄴ〉

cf. 침 句針〈역 하:6〉

침 一列針〈역 하:6〉

이 부분의 저경은 강순애(2005)나 김기종의 ‘저경 자료’에는 없는 것이기에 ‘알 緣에셔 으로미〔緣은 옷 변라〕 네 가락애 鉤를 브티고’를 한문으로 고쳐서 CBETACBETA(中華電子佛典協會) Chinese Electronic Tripitaka Collection, Feb. 2008, Taisho Tripitaka(대정신수대장경)에서 검색하여 다음 글을 찾았다.

九明作衣法 … 四分中 大衣五日不成 尼提僧吉(準鼻奈耶 七條四日 五條二日) 十誦 須却刺 不得直縫 前去緣施鞙(音絃 鉤也) 後去緣八指施紐 今時垂臂 前八後四 俱顚倒也 又安鉤約處揲以方物 本在助牢 而目云壇子非也〈불제비구육물도(佛制比丘六物圖) 권1, 대정신수대장경 제45 899쪽〉

여기서 ‘침, 침’ 뜻에 해당되는 곳은 ‘須却刺 不得直縫’ 인데, ‘각자(却刺)’는 ‘믈러 호다’에, ‘직봉(直縫)’은 ‘바 호다’에 대응된다. 이 ≪월인석보≫의 용어에서 ≪역어류해≫까지 약 230년, ≪역어류해≫에 인용한 ‘句針 침’, 一列針〔침〕’으로 17세기 말엽까지는 이 용어가 이어지는 셈인데, 이후 현대어까지의 연결이 문제이다.

그래서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문의했으나, 구전되는 용어도 그렇고 문헌도 없어서, 이번엔 현대어에서 이런 바느질 방법을 무엇이라 하느냐를 찾아서 거꾸로 연결해 보기로 했다.

호기 : 두 천을 겹쳐 S자형으로 꿰매어 나감.

박기 : 한 땀씩 곱짚어 나가며 꿰매어 겉으로는 실밥이 이어지고 뒷면에서는 겹으로 가게 꿰매는 방식. 〈이훈종(1992:97) ≪민족생활어사전≫ 한길사〉

이 자료로서 대강 현대어의 이 두 용어가 ‘침, 침’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 이를 국어사전에서 어떻게 설명했는가를, 일제하에서 간행된 본격적인 국어대사전이라 할 수 있는 문세영(1940, 수정증보판) ≪조선어사전≫과 광복후, 6·25전쟁 후에 나온 한글학회의 ≪큰사전≫을 찾아보았다.

홈질 名. -하다 他. 바누질에서 성기게 호는 짓.〈문세영 1940 : 1798쪽〉

박음질 名. -하다 他. 바누질의 한 가지. 이에는 온땀침과 반땀침의 두 가지 법이 있는데 먼젓것은 뒤땀을 뜨되 바눌을 뺀 밑을 다시 뜨는 것이오 나중것은 땀을 반씩 떠서 박는다.〈문세영 1940 : 615쪽〉

홈질 : 바느질의 한 가지. 바늘땀을 위아래 쪽으로 간걸러서 호는 것(호갬질). 〈(한글학회) ≪큰사전≫(1950/1957, 3445쪽) 을유문화사〉

박음질 : 바느질의 한 가지. 실을 곱꿰매는 일. 이에는 온땀침과 반땀침의 두 가지가 있는데, 온땀침은 바늘을 전에 바늘 뽑은 구멍에 다시 들이밀어서 앞으로 한 땀을 비켜서 빼내는 것이고, 반땀침은 전에 바늘을 들이민 구멍과 바늘 빼낸 구멍의 중간에 바늘을 들이밀어서 앞으로 한 땀을 드티어 뜸. 〈(한글학회) ≪큰사전≫(1950/1957, 1202쪽) 을유문화사〉

위의 두 사전은 같은 내용이나, 후자가 좀더 자세하게 설면한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결국, 이훈종(1992)의 ‘호기’를 ‘홈질’로, ‘박기’를 ‘박음질’로 고쳤으나, 내용은 같은 바느질 방식을 설명한 것으로 이훈종(1992)에는 그림이 붙어 있으므로 설명이 간단했고, 큰사전은 말로만의 설명이므로 길어진 것이 다르다 할 것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계보를 그릴 수가 있게 되었다.

믈러 호다(침)〔却刺〕 ⟶ 침〔句針〕 ⟶ 박음질/박기

바 호다(침)〔直縫〕 ⟶ 침〔일렬침〕 ⟶ 홈질/호기

종래에는 이 두 어휘(12, 13)가 같이 쓰인 ≪역어류해≫(1690)의 예가 ≪이조어사전≫과 ≪우리말큰사전≫에 실렸고, ≪교학 고어사전≫에는 표제어로 올려 있지 않았는데, ‘이 문헌’의 용례가 새로 나타나서 중세국어 어휘로 등록되게 되었다. ‘이 문헌’의 ‘침이라’는 ‘믈러 호-’의 협주로 쓰인 것이고, ‘침이라’는 ‘바 호디 말라’에서 ‘바 호-’의 협주인데, 현대어 ‘박음질’과 ‘홈질’이 이에 대응되는 것으로 본다.

근래 김정숙·안명숙(2005:110)에는 이와 관련되는 설명이 있어서 참고로 옮겨 둔다.

“가사를 만들 때는 반 당침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 바느질법은 한 땀씩 뒤로 물러가서 다시 뜨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홈질과 같이 보이나 홈질보다는 단단하며 박음질보다는 성근 것이다. 박음질과 같은 이치인데, 바늘을 뒤로 뜰 때 반쯤 돌려서 뜬다.”

여기 ‘당침’이 저 ‘침’의 뜻과 비슷한데, 그에 직접 소급되는 어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4. 말아·옫 [명] 말가웃/말아웃.

¶量 크니 서 마 받고 … 져그닌 말아오 받니〈월석 25:55ㄱ〉

이는 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말+가옫+’로 분석되며, ‘말〔斗〕+가옫/가옷〔半〕’에서 ‘ㄹ’ 아래 ‘ㄱ’ 약화 또는 ‘ㄱ’ 탈락이라는 음운변화를 겪은 합성명사이다. 이는 제 3음절의 모음 교체(ㅗ〉ㅜ)와 종성의 교체(ㄷ.ㅅ)를 거쳐 현대어 ‘말가웃/말아웃’으로 이어진다. 여기 ‘가옫/가옷’은 사전에 실려는 있으나, 중세국어 어형이 아니므로 이것도 이 용례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15. :모·래 󰃌 모자라게.

¶ 迦留陁夷 모미 커 모래 안자 부텻긔 대〈월석 25:56ㄱ〉

¶ 이젯 사미 젹거니 모래 안 주리 이시리여〈월석 25:56ㄱ〉

cf. 모자라다 [동](제) 옛. 모자라다. 〈우리말큰사전 4. 옛말과 이두〉

모라다 󰃰 모자라다. 〈이조어사전, 교학 고어사전〉

종래의 고어사전에 형용사 ‘모라다’는 있으나, 이에서 파생된 부사 ‘모래’(모라-+이)는 이 문헌에 처음 보인다. 이와 같이 모음으로 끝난 어간에 ‘-ㅣ’가 결합된 파생어로는 ‘하-〔多〕+ㅣ(y), 오라-〔久〕+ㅣ’로 이루어진 ‘해, 오래’(부사)가 있다.

이는 새로 표제어에 추가할 것이다.

16. ·므거· 󰃌 무겁게.

¶白衣 므거 니부믈 즐기니라〈월석 25:15ㄱ〉

cf. 丘山티 므거이 너기리로다〈두초 18:13〉

고어사전에 ‘므거’의 변천인 ‘므거이’는 있으나, 이 ‘므거’로 등록된 어형이 없었으므로 ‘므겁-’에서 파생된 이 단어를 표제어로 새로 사전에 실어야 할 것이다.

17. ··리 [명] 맨드리.

¶王이 야 듣고  누겨 善容일 내 리 야 내 宮 안해 드러 류고 즐기게 라〈월석 25:132ㄴ〉

cf. 쳔이 길헤 더니 그 각시 뎌른 리 하고 탁 집 문의 가 러 마 니〈중삼강 열:8〉

이 단어는 종래 ≪삼강행실도≫ 용례가 유일한 것으로 ≪교학 고어사전≫에만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이제는 ‘이 문헌’의 용례를 첫 번째로 올려야 할 것이다.

18. ·바·려·다 · (형) 고달프다.

¶○阿育王의 아 일훔 善容이 山 드러 山行다가 梵志히 옷 밧고 神仙/求노라 야 나못닙도 머그며 과 氣韻을 마시며 예도 누며 가남도 누 種種 苦行호 得호미 업거늘 善容이 보고 무로 예셔 道理 行호 엇던 시르미 잇관 일운 일 업슨다 梵志 닐오 한 사미 조 흘레/거늘 보고  뮈워 몯 치자배라 善容이 念호 梵志히 氣韻이 바려호  婬欲이 잇니 釋子 沙門이 飮食이 됴코 됴 床坐애 이셔 오 時節로 닙고 香花 오 엇뎨 欲이 업스리오 阿育이 듣고 시/름야 내  앗이로 邪見을 내도소니 내 方便으로 惡念을 더루리라 고〈월석 25:130ㄴ~132ㄱ〉

阿育王弟名善容入山遊獵 見諸梵志裸形曝露 以求神仙 或食樹葉或吸風服氣 或臥灰垢或臥荊棘 種種苦行以求梵福 勞形苦體而無所得 王弟見而問曰 在此行道 有何患累而無成辦 梵志報曰 坐有群鹿數共合會 我見心動不能自制 王子聞已尋生惡念 此等梵志服風 氣力羸惙猶有婬欲 過患不除 釋子沙門飮食甘美 在好床坐 衣服隨時 香花自熏 豈得無欲阿育聞弟有此議論 卽懷憂慼 吾唯有一弟 忽生邪見恐永迷沒 我當方宜除其惡念〈석가보 제3, 아육왕제출가조석상기(阿育王弟出家造石像記) 제25, 대정신수대장경 권50, 67쪽 상〉

이는 다음과 같이 고어사전에 실린 것을 먼저 보고 논의를 이어나가기로 한다.

18-1) ·바·려·다 (형) 모자라다.

¶頓乏은  바려 씨라.〈법화 3:193〉 유창돈(1964) ≪이조어사전≫ 연세대학교 출판부.

18-2) 바려-다 〔⁻ ⁻ _ ()〕 (그) (여벗) 〈옛〉 고달프다.

¶頓乏은  바려 씨라.〈법화 3:193〉

한 사미 다 가 導師려 닐오 우리 오 頓乏야 〔頓乏은  바려 씨라〕 이 믈러 도로 가 고져 노다 야〔衆人이 皆疲倦야 而白導師言호 我等이 今頓乏야 於此에 欲退還노다 야…〕〈법화 3:193ㄱ~ㄴ〉(한글학회(1992) ≪우리말큰사전≫(4) -옛말과 이두-어문각.)

18-3) 바·려·다 (동) 모자라다.

¶頓乏은  바려 씨라.〈법화 3:193〉(남광우(1997) 『교학 고어사전』 교학사.)

여기서 문제의 한자인 ‘돈핍(頓乏)’과 위의 ≪월인석보≫ 25에 ‘바려-’로 옮긴 저경의 한자 ‘이철(羸惙)’의 각 글자의 색임과 뜻을 알아보기로 한다.

18-4) * 頓 : 조아릴 돈. 둔할 둔. 1) 조아리다. 2) 넘어지다. 3) 깨지다. 부서지다. 4) 꺾이다. 실패하다. 5) 지치다. 6) 지치다. 피곤하다. .....

* 乏 : 가난할 핍. 1) 가난하다. 모자라다. 없다. 2) 버리다. 폐하다. 3) 고달프다. 쇠하다. 4) 살 가림(화살 막는 기구).

- (≪동아 한한대사전≫, 1982:204, 54)

* 羸 : 여윌 리. 1) 여위다. 2) 약하다. 3) 앓다. 4) 고달프다.

* 惙 : 근싱할 철. 1) 근심하다. 2) 고달프다. 피로하다. 3) 그치다. 4) 마음의 안정을 잃다.

- (≪동아 한한대사전≫1982:1427, 654)

곧, 앞의 ‘돈핍’은 ≪법화경언해≫에서 ‘바려-’로, 뒤의 ‘이철’은 ≪월인석보≫에서 ‘바려-’로 옮긴바, 그 한자어는 위에 보인바와 같이 뜻이 각각 같은 것도 있지만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전자 ‘돈핍’은 후자에 비해서 글자 단위로만 보아서 오늘날도 가끔 접할 수 있지만, 후자는 쓰이는 빈도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시대로 보아서도 ‘돈핍’은 한자의 뜻과 그 문맥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자라다’보다는 ‘고달프다’가 더 알맞은 풀이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종래의 고어사전을 보면,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은 뜻은 ‘모자라다’로 같이 해 보았는데도 전자는 형용사로, 후자는 동사로 품사가 달라졌는데, 대해서 ≪우리말큰사전≫은 뜻을 ‘고달프다’로 하여 앞의 두 사전과 달리 풀이한바, 그 근거는 예문은 같은데도, 위에서처럼, 표제어의 앞뒤를(18-2) 더 인용하여 뜻을 풀이한 데 있으므로. 필자도 중세국어의 ‘바려-’는 현대어로 ‘고달프-’로 보는데 동의한다.

19. 밧:귀머·리 [명] 발뒤꿈치〔踝〕.

¶몸 견주 法은 몬져 옷 로 엇게로셔 밧귀머리 우희 네 가락만 견주어〈월석 25:20ㄴ〉

이는 ‘밧귀머리〈법화 2:14ㄴ〉’로 알려진 것이나, 이 문헌에 나오므로 이 용례를 표제어 다음에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발〔足〕+ㅅ(관형격조사)+머리〔頭〕’의 합성어라고 봄.

20. 변·(邊子) [명] 물건의 둘레에 대는 꾸미개.

¶緣은 옷 변라〈월석 25:26ㄱ〉올리는 것이 바람직함

cf. 치마애 변 도디 아니더시니(裙不加緣)〈내훈 2 上:44〉

쳥셔피로 가 변고(藍斜皮細邊兒)〈두초 상:28〉

≪내훈(內訓)≫은 1475년 간행된 책이므로 ‘이 문헌’의 표기가 그에 앞선다.

21. ··다 [동] 잘게 부수다. 바스러지다.

① 시혹 慈悲衣라 며 시혹 福田衣라 니라 各別 일후믄 나 僧伽衣니 雜碎衣라 혼 마리니〈碎 씨라 條相이 할니라…〉〈월석 25:17ㄱ〉

② 며 凡常 닐 엇뎨 足히  니리오(況凡常之璅璅 何足以之云云)〈영가 하:70〉

③  누  도소니(飛碎雪)〈두초 16:61〉

④ 우리 므른 차 밥 브르 먹고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초 25:11〉

⑤ 翦翦  이오〈남명 상:19〉

cf.⑥  란 비치 초 보노라(淸見光烱碎)〈두중 13:17〉

⑦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瑣細隘俗務)〈두중 2:56〉

이 용례는 동사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어휘의 품사는 종래의 사전에서 동사로 밝혀지기도 하고 형용사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각 용례에 대응되는 한자를 모두 제시한 다음, 종래의 사전 기술 내용을 검토하기로 한다. 각 사전의 용례에 붙인 번호 ①②③…은 아래의 어느 한자와 대응되는가를 나타낸 것이다.

①碎. ②璅璅. ③碎. ④碌碌. ⑤翦翦. ⑥碎. ⑦瑣細.

≪이조어사전≫ 다 󰃰 細小하다.

¶ 누니  도소니(飛碎雪)〈두초 16:61〉 ③

¶翦翦  이오〈남명 상19〉 ⑤

¶우리 무른 차 밥 브로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초 25:11〉 ④

cf. 다 󰃰 細小하다.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瑣細隘俗務)〈두중 2:26〉 ⑦

≪교학 고어사전≫ 다 [동] 바스러지다. 예문 ③.

¶ 누니  도소니(飛碎雪)〈두초 16:61〉 ②

다 󰃰 자질구레하다. 보잘것없다.

¶며 凡常 닐 엇뎨 足히  니리오(況凡常之璅璅何足以之云云)〈영가 하70〉 ④

¶우리 무른 차 밥 브로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杜初 25:11〉 ④

¶翦翦  이오 規規 브즐우즐 양이니〈남명 상19〉 ⑤

cf. 다 [동] 부서지다.

¶ 란 비치 초 보노라(淸見光烱碎)〈두중 13:17〉 ⑥

다 󰃰 자질구레하다. 보잘것없다.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瑣細隘俗務)〈두중 2:26〉 ⑦

≪우리말큰사전 옛말과 이두≫ 다 (그림씨). 자잘하다. 용렬하다. 예문(좀 길어짐)

¶翦翦  이오 規規 브즐우즐 양이니 며 브즐우즐야 名相애 니며 枝末애 니면 큰 道 오로 아디 몯릴〈남명 상19〉 ⑤

¶二乘이 功이 群生애 넘고 닷고미 만 劫을 디내니 며 凡常 닐 엇뎨 足히  니리오(二乘功越群生 脩逾浩劫 況凡常之璅璅 何足以之云云)〈영가 하70〉 ②

¶소리 업시 리 려 디니  누니  도소니(無聲細下飛碎雪)〈두초 16:61〉 ③

¶우리 무른 차 밥 브로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초 25:11〉 ④

cf. 다(그림씨) → 다.

¶버므럿 늘구매 病ㅣ 더으고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牽纏加老病瑣細隘俗務)〈두중 2:56〉 ⑦

위에서 우리는 ≪이조어사전≫과 ≪우리말큰사전≫은 ‘-’를 형용사로 다루었고,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동사와 형용사로 구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①과 ⑤는 협주(夾註)에 나타난 한자 뜻풀이이고, ②, ④, ⑦은 언해문에 대한 원문의 한자어이며, ③과 ⑥은 언해문에 대응되는 한자어이다. 이렇게 되면 ③, ⑥은 같은 한자 ‘쇄(碎)’에 대응되는 것으로, 이 글자의 뜻을 보아도 주로 ‘부수다/잘게 부수다/부서지다/깨뜨리다’ 등 동사로 풀이되며, 문맥으로 보아도 ‘-’를 동사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나머지 ②, ④, ⑤, ⑦은 모두 두 글자로 된 한자어에 대응되어 형용사 ‘-’로 풀이한 것이 된다. 이들 한자어는 각각 다른 단어이지만, 그 뜻은 아래와 같아서 ‘자질구레하-, 평범하-’에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② 쇄쇄(璅璅) : 적은 모양. 무람없는 모양.

④ 녹록(碌碌) : 평범한 모양. 독립심 없이 남을 붙좇는 모양.

⑤ 전전(翦翦) : 슬기가 모자라는 모양. 말을 잘하는 모양, 또는 아첨하는 모양.

⑦ 쇄세(瑣細) : 잚. 작음.

(≪동아 한한대사전≫ 1982, 동아출판사)

이렇게 되면, 동사 ‘-’와 형용사 ‘-’로 나누어 보는 견해에 동조하게 된다. 따라서 ①의 ‘碎 씨라’는 ‘쇄(碎)는 잘게 부스는/바스러지는 것이다.’와 같이 동사로 풀이되며, ‘-’ [동]의 용례가 새로 추가되게 되는 것이다.

22. ·숫·글·다 [동] 곤두서다〔悚〕.

¶터러기 숫그러 커늘〈월석 25:108ㄱ〉

cf. 숫그러 숑 悚〈유합 下:15〉(선조 9년, 1576년)

종래에는 16세기 후반의 ≪유합≫의 예가 실려 있는데, 15세기 중반의 ‘이 문헌’의 용례를 맨 앞에 실어야 할 것이다.

23. ·디우·다 [동] 꺼지게 하다.

¶뎌 宮殿을 디워 큰 모시 외에 야〈월석 25:48ㄱ〉

이 단어는 ‘디-+우+어’로 분석되는바, 종래의 고어사전에 ‘디다’는 실려 있어도 그 사동사인 ‘디우다’는 없다. 따라서 새로운 표제어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24. 우·훔 [명] 웅큼〔掬〕.

¶王舍城 긼  闍耶 精誠이  우훔 供養이러니〈기577앞, 석상 25:62ㄴ〉

종래 고어사전의 용례는 ‘우훔〈법화 4:129ㄴ〉’이나, ‘우후믈〈구급 상:60ㄱ〉’을 표제어 다음에 실었었는데, 이제 이 문헌의 용례를 앞에 놓아야 할 것이다.

25. 자곡 [명] 자국〔跡〕.

¶大海ㅅ 므를  자고개 몯 담 야〈월석 25:113ㄴ〉

cf. 즉자히 돗귀 메오 자괴 바다 가니 버미 마 브르 먹고 누거늘〈삼강 효:32〉

이 ‘자곡’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조어사전』에 이 어휘가 실려 있고, 이와 쌍형으로 보이는 ‘자괴’〈삼강 효32〉도 보인다. 다만, 종래의 사전에 인용 문헌을 밝힘에 있어서 좀 달리 된 것이 있어서 여기서 언급해 둔다. 곧, 『이조어사전』에서는 ‘자고개’〈남명 하:60〉의 용례를 먼저 제시하고, ‘자곡마다’〈월석 21:102〉의 용례를 나중에 제시하였으며, 한글학회의 『옛말과 이두』에서는 ‘자곡마다’〈월석(중) 21:102〉의 용례를 먼저 제시하고, 출전을 ≪월석(중) 21≫이라 하여 중간본임을 분명하게 해 놓았다. ≪옛말과 이두≫가 간행될 당시까지는 ≪월인석보≫ 제21의 초간본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자곡마다’〈월석 21:102〉를 먼저 제시하였으나, ≪이조어사전≫과 더불어 출전 표시가 좀 미흡한 점이 있다. ≪이조어사전≫에서 〈월석〉의 용례를 뒤로 한 것은 짐작컨대 〈월석 21〉이 중간본임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초간본과 중간본이 같이 전하는 것은 〈월석 초〉, 〈월석 중〉과 같이 그 다름을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26. 쟉 [명] 가사의 재질(材質). 가사를 만드는 옷감.

¶몸 견주 法은 먼져 옷 로 엇게로셔 밧귀머리 우희 네 가락만 견주아 쟉 오 녀나 葉相 마 로 라〈월석 25:20ㄴ〉

먼저 이 대문의 저경 문제인데, 이 글 바로 앞에 “律에 닐오 모 견조아 니버 足  만라.”고 ≪律≫이라고만 줄여 썼기에 어느 ≪율≫에 관한 책인지 알 수가 없다. 이와 관련되는 문헌은 ≪사분율(四分律)≫ 60권, ≪미사색부(彌沙塞部) 오분율(五分律)≫ 30권, ≪십송율(十誦律)≫ 61권 등이 있다. 이번에 이 해제를 쓰면서 다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본바, 저경과 같은 글이라고 보이는 다음을 찾을 수 있었다.

… 疏云 從肩下地踝上四指以爲衣身 餘分葉相足可相稱 此謂人身多是長短不定...〈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 권3, 대정신수대장경 제40, 362쪽 중〉

여기 밑줄 친 부분은 앞의 밑줄 친 부분과 같은 대목이라고 보는데, 문제는 ‘쟉’에 해당되는 부분이 ‘의신(衣身)’이라고 돼 있다. 이 ‘의신’을 ≪월인석보≫에서 어떻게 ‘쟉’으로 옮겨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CBETA(中華電子佛典協會) Chinese Electronic Tripitaka Collection, Feb. 2008, Taisho Tripitaka(대정신수대장경)와 Shinsan Zokuzokyo(新纂續藏經)의 검색을 통해 다음을 찾을 수가 있었다.

… 今准薩婆多中 三衣長五肘 廣三肘 若極大者 長六肘廣三肘半 若極小者 長四肘廣二肘半者 並如法 若過若減 成受持 以可截續故 衣身 卽衣體也 葉相 謂條葉相也(≪사분율수기갈마소정원기(四分律隨機羯磨疏正源記)≫ 권7. 신찬대일본속장경(新纂大日本續藏經) 제40, 881쪽 하)

이 대목은 앞의 글과 관련되는 것이기에 ‘의신’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밑줄 친 ‘의체(衣體)’가 참고 된다. 결국 문제의 ‘쟉’은 이 글을 따라서 그 뜻은 ‘옷의 몸, 옷의 몸통’ 혹 ‘옷의 본체’ 정도로 보았다가 뒤늦게 〈망월(望月)불교대사전, 873쪽 하〉 ‘袈裟 kașāya’ 조항의 설명 중에서 ‘가사의 재질(材質)은 이를 의체(衣體), 또는 의재(衣財) 라 이르고....〈875쪽 중〉(日文, 필자 옮김)’라는 대목이 있어서 이것이 뜻풀이에 참고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 문맥의 뜻은 해결되었다 해도 고유어 ‘쟉’의 원 뜻은 여전히 미결인 채 남아 있다.

27. 좃·다 [동] 쪼다. 새기다.

¶銘은 조씨라〈월석 25:51ㄱ〉

cf. 로 조 낸 後에〈구급 하:33〉

종래의 고어사전에는 참고로 보인 ‘조’〈구급 하:33〉가 실려 있는바, ≪구급방≫보다 앞선 ‘이 문헌’의 표기가 나왔으므로 이를 사전에 실어야 할 것이다.

28. 지·즐우·다 [동] 지지르다.

¶惡王 지즐워 주겨든〈월석 25:48ㄱ〉

cf. 세흔 有情을 지즐우며 디여 生애 잇게  젼오(三壓溺有情處生故)〈원각 상1의2:86〉

≪원각경언해≫보다 앞선 시대의 표기로 추가할 것이다.

29. ·젼 [명] 천이나 옷 조각(여기서는 가사를 만들려고 자른/벤 조각).

¶… 뎌긔 닐오 大衣 겨펴 지매 스니미 이제 行샤 그러나 葉下애세 겨비니 엇뎨 올리고 고 짓논 法을 묻거늘 내 오 자바 뵈요 이 葉相 노ᇇ드을 表니 룐 옷 젼을 안해 나가 호오 葉의 𪍿麥만 디 디니 이 條內 바 表고 葉相 渠相 표니【渠 거리라】 엇뎨 올티 아니리오〈월석 25:24ㄱ〉

(…又大衣重作師比行之 然於上葉之下 乃三重也 豈得然耶 卽問其所作 便執余衣 以示之 此葉相者 表於稻田之塍疆也 以割截衣叚 就裏刺之 去葉𪍿麥許 此則條內表田 葉上表渠相 豈不然耶 今則通以布縵 一非割截 二又多重旣非本制 非無著著之失 …)〈律相感通傳, 大正新修大藏經 第45 諸宗部 2, 880쪽 상〉

‘젼’은 문맥으로 보아 가사(袈裟)의 형식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나, 그 분명한 뜻은 자세하지 않다. 참고로 원문으로 보이는 ≪율상감통전(律相感通傳)≫의 해당 부분을 옮겨 놓았다.

이상은 김영배(1998)의 뜻을 ‘미상’으로 했던 근거였는데 이번에, 혹 ≪고려대장경≫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찾아본바, 다음과 같이 문제되는 밑줄 친 부분은 같았다.

¶… 此葉相者表於稻田之▼{月+莖}𡑆也 以割截衣叚 就裏刺之 …

〈고려대장경 32권 도선율사감통록 p.642 하〉*(‘도선율사감통록(道宣律師感通錄), 선율사감천시전(宣律師感天侍傳), 율상감통전(律相感通傳), 감통전(感通傳), 감통록(感通錄)’은 같은 책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전자는 현대의 활자본이고, 후자는 목판본이므로 혹 판각 과정에서 글씨가 달라질 가능성은 있다. 밑줄 부분에서 범위를 좁힌다면 ‘가(叚)’자의 뜻이 문제인데, 이는 대한한사전을 보아도 새김과 음이 ‘빌 가’, ‘성(姓) 하’로 나와 있고, 이 글자가 쓰인 단어의 용례도 나온 것이 없다.

위의 ≪월인석보≫ 용례와 저경으로 보는 밑줄 친 부분의 뜻을 대비해 본다면,

‘룐 : 할절(割截)’

‘옷젼(을) : 의가(衣叚)’

등으로 나뉘는데, 문제는 이 뒷부분이다. 합성어인 ‘옷 +젼’의 뜻을 알 수 없으며, 이에 대응되는 한자어 ‘의가’ 또한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관련되는 자료를 더 찾아낸 것이 다음의 두 예문이다.

今準感通傳天人示法逐相塡之 彼敍天人問云 大衣重作師比行之 然於葉下乃有三重 豈得然也 卽問其所作 便執余衣以示之 此葉相者表於稻田之塍壃也 以割截衣段就裏刺之 去葉𪍿麥已後此則 條內表田葉上表渠相 豈不然也 今則通以布縵 一非割截 二又多重旣非本制 非無著著之失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 대정신수대장경 제40권 율소부/논소부1, 363쪽 중〉

彼云大衣重作 師比行之 然於葉下 乃三重也 豈得然耶 卽問其所作 便執余衣 以示之 此葉相者 表稻田之塍疆也 以割截衣段 就裏刺之 去葉𪍿麥許 此則條內表田葉上表渠相 豈不然耶 今則通以布縵 一非割截 二又多重 旣非本制 非無著著之失...〈≪불제비구육물도(佛制比丘六物圖)≫ 대정신수대장경 제45권 제종부2, 899쪽 상〉

결국 두 글은 거의 같은 내용이며, 앞의 ‘율상감통전’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 문제의 글자가 두 곳 모두 ‘단(段)’자로 나타나므로 ‘옷젼’에 대응되는 한자어는 ‘의가(衣叚)’가 아니라 ‘의단(衣段)’임을 알게 되었고, ‘단(段)’의 뜻은 ‘구분, 부분, 조각, 가지, 방법 층층...’ 등이 있으므로, ‘룐 옷젼’은 여기서는 가사(袈裟)를 만드는 ‘천이나 옷의 조각’ 정도로 풀이하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뜻은 이와 같이 풀이하면 되겠으나, 합성어라면 그 한 부분인 명사 ‘젼’이란 말의 원 뜻은 여전히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

뒤늦게나마 ≪고려대장경 이체자전≫을 찾아본바, ‘단(段)’자의 이체(異体)자로 정리되어 창 수(殳)부의 5획으로 487쪽의 (2884)〔段〕의 8번째 예문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段 表於稻田之▼{月+莖}𡑆也, 以割截衣〇

30. ·치 [명] 추위.

¶ 오시 치 몯 리오〈월석 25:15ㄴ〉

cf. 모 더 치로 셜다가〈석상 9:9ㄴ〉

‘이 문헌’의 처음 보이는 것으로 종래 ‘칩다’에서 파생명사 ‘치’로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치’형이 나타남으로써 오히려 당시의 다른 형용사 파생명사와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곧 ‘형용사 어간 + /의(접미사)’로 이루어진 ‘노, 기릐, 기픠’ 등과 동일한 유형의 파생 명사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석보상절 9:9ㄴ〉의 ‘더’ 역시 ‘더’로도 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종래 고어사전에 없던 표제어를 하나 새로 추가하게 된 것이다.

31. :해자 [명] ①비용. ②소비.

¶黲淡 비치 해자 업고 쉬니라〈월석 25:20ㄴ〉

이 단어는 종래의 사전에 이미 수록되었으나, 성조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해자〈영가 상38〉 〈이조어사전〉

:해자〈법화 7:157〉 〈한글학회 옛말과 이두〉, 〈교학고어사전〉

즉 제1음절이 『이조어사전』에는 거성으로, 〈한글학회 옛말과 이두〉, 〈교학고어사전〉에는 상성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헌’의 예는 분명히 제1음절이 상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법화경언해≫의 용례와 방점이 같으므로 상성 표기를 바른 표제어로 삼음과 아울러 이 용례를 먼저 실어야 할 것이다.

32. (내) ·해 [명] (내) 것.

¶둘흔 迦葉佛 오시오 하나 내 해라〈월석 25:45ㄴ〉

cf. 내 해 본 사니라(我的是元買的)〈번노 하:15〉

이 용례도 『번역노걸대』의 보기보다 앞선 것이므로 사전 예문의 순서로 먼저 실어야 할 것이다.

33. 옺 [명] 홑〔單〕.

¶새 두 겨비오 그닌 네 겨비니 오 말라〈월석 25:56ㄴ〉

cf. 單 오지오 複 겨비라〈능엄 8:15ㄴ〉

이 어휘도 새로운 것은 아니나, 종래의 용례가 ≪능엄경언해≫의 것이어서 새로 보이는 이 문례를 먼저 실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獨 늘구 子息 업서 옷 모민 사미라〈석상 6:13〉

와 같이 ‘옷’의 제2음절 종성이 ‘ㅅ’으로 표기된바, 이는 8종성 표기가 적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34. 왁 [명] 확〔臼〕.

¶比丘ㅣ 勇猛精進야 坐禪야  잔쵸 得道 몯얫더니 닐웨 다니 宮內ㅅ 사미 일 지 兇主 맛뎌늘 와개 디터니 比丘ㅣ 보고 이 모  슬히 너겨 수고쎠 내 몸도 아니 오라 이 리로다〈월석 25:77ㄴ〉

(…時此比丘知將死不久 勇猛精進坐禪息心 不能得道至於七日 時王宮內人 有事送付凶主 將是女人 著臼中以杵擣之 令成碎末 時比丘見是事 極厭惡此身嗚呼苦哉 …)〈釋迦譜 卷5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 第31, 大正新修大藏經 第50 史傳部 77쪽〉

cf. 이 ≪이조어사전≫에는 한자어 표기가 아니나 원본은 한자 표기임. 왁 소배 이셔〈월석 23:78〉 〈이조어사전〉

衆生이 왁 소배 이셔〈월석 23:78〉 〈교학 고어사전〉

衆生이 왁 소배 이셔 모 즈믄 무저긔 싸라 피와 고기왜 너르 듣더니〈월석 중 23:78〉 〈한글학회 옛말과 이두〉

이 ‘왁’도 위에 보인 것처럼 새로운 것은 아니나, 중세국어 어형으로는 ‘이 문헌’이 나타나기 전까지 〈월석 (중) 23:78〉이 유일례였다. 다만, (21)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출전의 초·중간본의 구별이 문제인 것이다. 앞의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은 중간본 표시를 하지 않았고, 한글학회의 『옛말과 이두』는 중간본임을 밝힌 것이 다르다. 이제 초간본 『월인석보 제25』에 이 단어가 나타났으므로 사전의 용례도 초간본에서의 인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새로운 용례는 ‘왁+애’로 분석될 것이며, 사전에 실을 순서로는 이 〈월석 25:77ㄴ〉을 맨 먼저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위의 인용에서 〈월석 23:78〉이란 출전표시는 『이조어사전』(1964)이 간행된 당시로는 초간본의 인용이 아니고, 아마도 『동방학지』6집(1963)에 실린 중간본의 영인 저본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월인석보』초간본 제23(삼성출판박물관 소장)이 1992년 9월에 공개되었으므로 『교학 고어사전』(1997)에서는 가능하였겠으나, 이 사전의 부록 ‘자료도서의 해제’(p.33) ‘월인석보’ 항목을 보면 초간본에는 권23이 없고, 중간본 3권(권21·22·23)에 권23이 들어 있으므로, 중간본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5. -ㅭ뎬/-뎬 (어미) -ㄹ진대.

¶四分 中에 大衣 다쐐예 일우디 몯뎬 尼 提코 僧은 吉리라〈월석 25:25ㄱ〉

이 어미는 표기는 다르지만 이형태로 ‘-ㄹ뗸, -올뗸, -ㄹ뎐,’ 등이 표제어로 나와 있고, ≪우리말큰사전≫에는 표제어 ‘-울뎐’ 항목에 뜻을 적고 예문을 드는 대신 이의 이형태를 다음과 같이 모두 실어 놓았다.

(=-올뎬/ -올뗀/ -올뎐/ -뎬/ -뗸/ -ㄹ뎬/ -ㄹ뗸)〈5294쪽〉

그러나 이 ‘-ㅭ뎬’ 새로운 표제어로 등록되고, 그 용례가 실림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서 여기에 제시하였다.

4. 마무리

4.1. ≪월인석보≫ 권차 확정

1994년 11월, 보림사의 의뢰로 순천대학교 박물관이 가지산 보림사 정밀지표조사 학술조사단을 구성하여, 1995년 1월부터 조사가 시작되며 2월에 들어서 4구(具)의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에서 많은 복장불서가 발굴되었다. 보림사 주지스님은 이 불서의 감정과 정리를 당시 문화재관리국(후의 문화재청) 예능민속연구실장 박상국 선생에게 맡긴바, 여기서 뜻밖에도 문제의 ≪월인석보제25≫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써 학계의 숙제이던 ≪월인석보≫ 전25권의 권차(卷次)가 밝혀지고 아울러 ‘월인천강지곡’의 총곡수도 ‘기 583’이 끝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이는 국어국문학뿐 아니라, 불교학과 서지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큰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4.2. 내용

‘이 문헌’을 ≪석보상절≫제24와 대비한바, 상당한 수정 증보가 이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응된다. 곧, 세존의 열반 후 법장의 결집과 정법의 전지, 율장 관련으로 ‘3의 6물’에 대한 증보 부분이 약 43장, 아육왕의 신앙과 삼보에 대한 공양 등이 약 66장으로 상당부분 증보된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4.3. 희귀어에 대하여

희귀어에서 고찰한 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 종래의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지 않은 것, 곧 ‘이 문헌’의 출현으로 중세국어 자료로 새로 이용할 수 있게 된 어휘 14개가 있다.

4. 누웨〔蠶〕 5. 니르잡다 6. 실〔經絲〕 7. 시실〔緯絲〕 8. 뎌도리〔鴿〕 10. 드러니다 14. 말아옫 15. 모래〔欠〕 16. 므거〔重〕 23. 디우다 26. 쟉 29. 젼 30. 치〔寒〕 35. -뎬

둘째 : 종래에도 고어사전에 실려 있었으나, 그 용례의 출전이 『월인석보』(세조 5, 1459)의 간행연대보다 늦은 문헌이어서 ‘이 문헌’의 용례를 해당 표제어 용례의 맨 앞에 실어야 할 어휘가 21개 있다.

1. 겨피다 2. 너모〔四角〕 3. 논ㅅ드렁 9. 뎌긔 11. 딯다〔搗〕12. 침〔句針〕13. 침〔一列針〕 17. 리 18. 바려다〔疲倦〕 19. 밧귀머리〔踝〕 20. 변(邊子) 21. 다〔碎〕 22. 숫글다〔悚〕 24. 우훔〔掬〕25. 자곡〔跡〕 27. 좃다〔銘〕 28. 지즐우다 31. 해자〔費用〕 32. (내) 해 33. 옺〔單〕 34. 왁〔臼〕

위의 ‘21. 다’는 동사가 아니고, 형용사로 처리한 사전도 있었으나, 필자는 ‘이 문헌’의 용례는 동사에 해당한다고 보아, 그 근거를 밝혔다.

셋째 : 지난 번 글에서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어휘 둘, ‘26. 쟉, 29. 젼’이 있었는데, 이 대문의 저경이라고 보는 것을 CBETA의 검색으로 찾아서 문맥으로 본뜻은 해결이 된 셈이나, 어원적인 뜻은 아직 알 수 없다고 하겠다.

‘이 문헌’의 낙질된 권차(卷次)가 새로 알려질 때마다, 새로운 어휘 자료가 여럿 나타나는 것은 ‘이 문헌’이 국어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한 번 더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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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25 해제* 주001)
<풀이>* 이 역주와 해제 작업의 과정에서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저경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이종찬 교수(동국대학교 명예교수)와 김갑기 교수(동국대학교 국문과)에게서 자주 도움을 받았고, 불교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는 해주 스님(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교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들은 이유기 교수(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와 김지오 양(동국대학교 강사)이 많이 도와주었다. 고마운 뜻을 여기 적어 둔다.

김영배(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1995년 9월은, 당시까지 그 간행 여부조차 미심했던 ≪월인석보 제25≫(세조 5년(1459))가 주002)

<풀이>그 무렵 학계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1992년 11월 7일, 진단학회 제20회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이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는데, 그 주제가 “월인석보의 종합적 검토”였다. 여기서 고 안병희 교수는 ‘월인석보의 편간과 이본’을 발표하면서 그 권수에 대하여, 1992년 10월에 공개된 ‘월인석보 제23’의 원간본(김종규님 소장) 내용과 ‘석보상절 제23·24’의 내용의 연결 관계로 보아 종래의 24권 추정을 재고하게 한다 하고, 그 전체 권수는 25권 또는 그보다 1권이 많거나 적다고 추정했다.〈안병희 1992:2~3, 1993:187~188〉 필자도 여기에 토론자로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필자 나름의 계산으로 중간본 ‘월인석보 제21’처럼 각권의 장수가 200장 이상 늘어나도 ‘월인석보’의 총권수는 ‘석보상절’과 같이 24권으로 끝날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추정은 추정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536년 만에 두 번째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뜻 깊은 달이었다.

이는 국어국문학은 물론 불교학, 서지학 연구에도 큰 낭보(朗報)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 저간의 발굴과정을 관련 자료를 통해 가능한 대로 알아보기로 한다.

이 ≪월인석보 제25≫(이하 ‘이 문헌’으로 부름)는 지금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인 보림사(寶林寺)에 소장돼 있으며, 보물 7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찰은 신라 경덕왕 18년(759)에 개찰(開刹)되어 오랜 세월에 부침(浮沈)을 겪다가, 1951년 3월 11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공비들이 후퇴하면서 절에 불을 질러 천왕문(天王門)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람이 소실되고 말았는데, 현재의 사찰은 1984년 이후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복원되었다(≪가지산 보림사(迦智山寶林寺)≫(1995:20) 참조).

이런 유서 깊은 사찰이어서, 장흥군에서는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1994년 11월에 ‘종합학술조사’를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조사단이 구성되고 1995년 1월부터 9월까지를 기간으로 하여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 대상은 고사찰의 지표(地表) 조사와 시굴(試掘) 조사였다.

이에 앞서 1971년에는 화마(火魔)에서 유일하게 남았던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을 보수하면서 복장(腹藏)의 고서(古書)가 다량 출토되었는데 모두 일실되고 말았다.

1995년 1월, 조사가 시작되어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가람의 배치, 근래 복원된 대적광전에 모신 국보 117호인 철조 비로사나불 좌상(이 불상은 철조(鐵造) 불상이었기에 다행히 1951년 화재에서 보존된 것임.), 복원된 대웅보전을 조사하고, 고건축물로는 유일한 사천왕문을 조사하게 되었다.

사천왕상의 외형적인 형태를 조사하며, 앞에 적은 복장 불서의 일실을 알고 있었으나, 형식으로라도 몸통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어 살펴본바, 예상했던 대로 거기에는 전적류(典籍類)의 찌꺼기와 이물질(異物質)만 있었다. 그런데 사천왕상의 몸통이 아닌 팔굽 위·아래와 다리의 무릎 위·아래 뒷면에 각각 덧붙인 판자가 있어서 그 판자를 뜯어보니, 뜻밖에도 그 속에서 다량의 불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주003)

이때 나온 불서는 모두 48종, 판본은 125종, 책수는 총 203책으로 정리되었음.(송일기 1997: 87~125). 이 복장(腹藏) 불서(佛書)는 위에 적은 대로 팔·다리의 공간에서 나왔으므로, 그 출처를 따른다면 수족장(手足藏)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나, 학계에서는 일괄해서 ‘복장’으로 쓰고 있다. 더구나 현재까지 불상이나 나한상(羅漢像)에서 나온 것은 모두 그 몸통에서 출토된 것이고, 팔과 다리의 공간에서 나온 것은 학계에 보고된 바도 없고 이 사천왕상에서 나온 것이 유일한 것이라 한다.(≪가지산 보림사≫ 19쪽, 42~43쪽).
. 학술조사의 기간은 1995년 1월부터였지만, 이 불서의 발굴은 그해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어서의 일로, 불서 감정을 맡았던 박상국 선생의 기억을 근거로 발견 시기를 앞에 적은 바와 같이, 1995년 9월로 적었다. 다량의 복장 불서가 발굴되자, 당시 보림사 주지 현광(玄光)스님은 이 고문헌의 조사를 문화재관리국 박상국 민속예능실장(후에 문화재 전문위원)에게 의뢰한 바, 그 조사 과정에서 뜻밖에도 ≪월인석보 제25≫를 발견하게 된 것이니, 결국 이 행운의 주인공은 박상국 선생이었다.

이런 사실이 소문으로 알려지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박상국 실장이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보도자료(A4 용지 두 장분)를 각언론사에 배부하고 기자 회견을 하게 되며, 이것이 1995년 12월 16일 도하(都下)의 각 신문에 ‘월인석보 권25 발견’으로 기사화되었다.

이어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이 문헌’을 보물 745-9호로 지정했다. 앞에도 잠간 적은 바와 같이 1971년 사천왕상 보수 시에 발견된 불서가 모두 없어졌는데, 만에 하나 ‘이 문헌’도 당시에 발견되어 나머지 불서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었을 것인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004)

이때 나왔던 사천왕상의 복장불서는 150여점이며, 그 중 38점의 목록이 작성되었다 하나, 현재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이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38점 중의 한 책인 ≪월인석보 제17≫은 다행히 조선대학교 장태진 교수에 의해 조사 보고되고,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장태진(1972) ‘보림사본 ≪월인석보 제17≫에 대하여’(한글 150, 131~132쪽). 장태진 편(1986) ≪月印釋譜 第十七≫(영인본) 교학연구사.

이 발견이 이루어진 지 10년 만에 강순애(2005) 영인본 간행으로 연구에 이용하기 쉽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2. 서지와 내용

2.1. 형태 서지

이 책의 형태 서지는 박상국(1995), 강순애(1998)에 따랐다.

발견 당시 가철본 상태였던 이 문헌은 현재 전통적인 능화판 무늬의 누른 앞·뒤 표지(앞 표지에는 왼편 가장자리 위편에 제첨(題簽)과 오침안정법식 제책)에, 본문의 각 장도 새로 한지로 배접해서 반듯하게 펴져 반반한 지면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이 글을 쓰면서 원본을 실사한다는 관점에서, 2009년 9월 18일 보림사를 방문, 지묵(知黙) 주지스님의 배려로 귀중본 보관 금고에서 이 문헌을 내주셔서 열람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국립국어원의 PDF파일을 내려 받아 이 역주본 부록으로 영인할 수 있는 문제도 쾌히 승낙해 주신 데 대하여 여기 적어 깊은 사의를 표한다.

표지와 본문 1, 2장은 낙장(落張)되었으므로 3장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내제(內題)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라면 1행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제이십오(第二十五)’, 2행에 ‘석보상절(釋譜詳節) 제이십오(第二十五)’가 제명(題名)이 있었을 것이고, 3행부터 내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판십제(版心題) : 月印釋譜 二十五 (*영인본 ‘판심제’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46면 후면의 판심은 장차(張次)와 어미(魚尾)가 확실히 보임.)

규격(規格) : 31.8×21.7cm
지질(紙質) : 저지(楮紙)
판종(版種) : 목판본(木板本)
반곽(半廓) : 22.3×17.0cm
판식(板式) : 4주(周) 쌍변(雙邊), 유계(有界)
판심(版心) : 대흑구(大黑口) 상하(上下) 내향(內向) 흑어미(黑魚尾)
(*영인본으로는 대흑구가 간혹 보임.)
행관(行款) : 월인천강지곡 부분, 7행 14자(큰 글자)
석보상절 부분, 7행 16자(중간 글자)
협주(夾註) : 쌍행(雙行) 16자(작은 글자)
장차(張次) : 3장 전면에서 144장 전면으로 끝남.
훼손 상태 : 1, 2장 낙장. 3장 판심 부분과 왼쪽 아래 일부. 4장 판심 부분. 131장에서 141장까지 각 장의 7행 일부의 부식(腐蝕)한 부분이 장을 거듭할수록 점점 그 크기가 커져서 141장은 후면의 3행 정도가 부식되었으며, 141장에서 144장 전면까지는 부식한 부분이 두 군데로 늘어나고 판심 중심의 위아래도 부식이 심함.

가철본 상태였던 것을, 현재는 앞에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각 장의 배접과, 새 표지로 제본하면서 표지 다음에 한지로 다섯 장을, 뒤표지 앞에는 석 장을 각각 끼워 넣은 상태이었다.

2.2. 내용

필자는 김영배(2006)에서 ≪석보상절 제24≫와 ‘이 문헌’의 내용을 대비한 결과 181면이 수정 증보되었고, 약 10면 정도가 삭제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서로 대응이 되어 ‘이 문헌’이 전25권의 끝 권임을 알게 되었다.

내용은 저경(底經)의 단락에 따라 ⅰ) 본문의 장차(張次), ⅱ) 내용의 개략, ⅲ) 저경(底經)의 출전 등의 차례로 보이기로 한다. 저경은 강순애(2005)와 김기종(2006), 특히 김기종(고려대학교 연구교수)의 ‘저경 자료’에 크게 의존했다. 이밖에 주해에 필요한 것으로 일부(삼의 육물(三衣六物)의 설명 중에서)는 필자가 찾은 것도 있다. ⅲ에서는 먼저 경전명(經典名)을 밝히고, 그 뒤에 ≪대정신수대장경≫에서 해당 저경이 있는 출처(出處)를 밝히는데, 쪽수 다음의 ‘상, 중, 하’는 한 쪽이 3단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저경의 출전과 내용〉

(1-ⅰ) 3ㄱ1(3장 전면 1행) ~9ㄴ1(9장 후면 1행). - *이하 이와 같은 식으로 나타냄.
(1-ⅱ) 세존 열반 후, 유교(遺敎)를 결집하기 위해 가섭존자가 부처님 제자 1천 명을 필발라굴로 모으는데, 아난 말고는 모두 ‘나한’이어서 가섭이 아난을 내치니, 아난이 분발하여 그날 밤으로 득도하여 다시 참여하게 되며, 비니법장의 결집을 위해 교범파제를 불러오려 하나, 그는 ‘상왕(象王)이 가면 상자(象子)도 따라야 한다’면서 스스로 불살라 멸도함.
(1-ⅲ) 경율이상(經律異相) 권13, 가섭결집삼장출척아난사진여루(迦葉結集三藏黜斥阿難使盡餘漏) 3, ‘대지론(大智論)’〈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제53, 사휘부(事彙部) 상, 65쪽〉

(2-ⅰ) 9ㄴ1 ~11ㄱ5
(2-ⅱ) 가섭이 우바리를 청하여 율장(律藏)을, 아난에게는 경장(經藏)을 결집하게 하는데, 아난이 법좌에 올라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하니 모두 의심했다가 그 의심이 풀렸음.
(2-ⅲ)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전부(事傳部) 3, 205~206쪽〉.

(3-ⅰ) 11ㄱ5 ~12ㄱ4
(3-ⅱ) 〔협주〕 ‘아난’은 ‘환희(歡喜)’라는 뜻인데, 출가한 실달태자가 성도(成道)하는 날 태어나서, 정반왕은 경사스러움이 함께 일어났다고 하여 ‘환희’라고 이름지었다.
(3-ⅲ)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권1, 십대제자편(十大弟子篇) 제8, 〈대정신수대장경 제54, 사휘부(事彙部), 교외부(敎外部) 1064쪽〉

(4-ⅰ) 12ㄱ4 ~14ㄱ6
(4-ⅱ) 초조(初祖) 가섭존자가 아난에게 정법을 부촉하며 게를 이르고 계족산에 들어가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림. 〔협주〕는 인도의 28조사(祖師)와 동토〔중국〕의 6대사(大師)
(4-ⅲ) 경덕전등록 권1, 제1조 마하가섭 〈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전부 206쪽〉

(5-ⅰ) 14ㄱ6 ~57ㄱ7
(5-ⅱ) 3의(衣)〔승가리, 울다라승, 안다회)와 발다라〔바루〕, 니사단〔앉을 때 까는 자리〕, 녹수낭〔물 거르는 주머니〕를 합쳐 3의(衣) 6물(物)이라 이르는데, 여기서는 3의의 명칭, 자재, 격식, 짓는 법과 가사의 공덕, 위력 등을 주로 설명하고, 발다라, 니사단, 녹수낭에 대한 설명은 이 단락의 끝 6면으로 간단함.
(5-ⅲ) 법원주림(法苑珠林) 권35 법복편(法服篇) 제30, 공능부(攻能部) 제2, 〔비화경(悲華經)〕, 제난부(濟難部)제4, 위손부(違損部)제4, 감응연(感應緣) 〈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휘부 상, 556~562쪽〉와 ‘발다라, 닛단, 녹수낭’의 저경은 〈십송율(十誦律〉, 〈사분율(四分律)〉, 승기(僧祇)〉, 〈계소(戒疏)〉, 〈초(鈔)〉, 〈오분율(五分律)〉, 〈살바다(薩婆多)〉, 비나야(鼻奈耶)〉 등에서 간단한 인용문이어서 다 옮기기 어려워, 주에 필요한 일부만을 찾는 데 그쳤음.

(6-ⅰ) 57ㄱ7 ~62ㄱ6
(6-ⅱ) 2조 아난존자가 열반하기 전에 아사세왕과 비사리왕의 공양을 받고 두 나라가 다투지 않게 서응을 보이고 상나화수 존자에게 정법을 위촉함.
(6-ⅲ) 경덕전등록 권1, 제2조 아난〈대정신수대장경 제53, 사전부 206쪽〉

(7-ⅰ) 62ㄱ7 ~62ㄴ6
(7-ⅱ) 월인천강지곡 기 577(1곡).
(7-ⅲ) ........

(8-ⅰ) 62ㄴ7 ~64ㄴ5
(8-ⅱ) 왕사성에서 세존이 탁발하던 중에 만난 ‘사야’와 ‘비사야’란 두 동자가 공양하고 발원했는데, 이 공덕으로 후세에 ‘사야’는 파련불읍의 아육왕이 됨.
(8-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시수대장경 제50, 사전부(史傳部) 76쪽〉.

(9-ⅰ) 64ㄴ6 ~66ㄴ3
(9-ⅱ) 세존의 전생인 바사기왕이 한 불상을 채색으로 그려서 화사(畵師)에게 주어 그것을 본으로 8만4천의 불상을 그리게 하여 나라 안에 편 인연으로 세존이 8만4천의 탑보(塔報)를 받게 됨.
(9-ⅲ) 석가보 권5, 석가획8만4천탑숙연기(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 제32 〔賢愚經〕〈대정신수대장경 제50, 사전부 82쪽〉.

(10-ⅰ) 66ㄴ3 ~73ㄴ4
(10-ⅱ) 파련불읍 빈두바라왕의 두 왕자, 무우(無憂)와 이우(離憂) 중에서 여러 곡절 끝에 무우가 아육왕이 됨.
(10-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6쪽〉.

(11-ⅰ) 73ㄴ4 ~88ㄱ5
(11-ⅱ) 아육왕의 명을 거스른다고 그의 500 대신을 죽이는 등 모진 일 끝에 ‘단정(端正)’이라는 비구의 도력(道力)으로 아육왕이 불법에 귀의하게 됨.
(11-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7~78쪽〉.

(12-ⅰ) 88ㄱ5 ~91ㄱ5
(12-ⅱ) 아육왕이 사리탑을 세우려고 용왕에게 가서 사리를 나누어 받아 8만4천 병을 만들어 야사 상좌의 도움으로 염부제에 한 날, 한 시에 8만4천탑을 세우니, 사람들이 경하하여 법아육왕이라 함.
(12-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8쪽〉, 아육왕전 권1 본토시연(本土施緣) 제1〈대정신수대장경 제50, 102쪽〉.

(13-ⅰ) 91ㄱ6 ~92ㄱ4
(13-ⅱ) 월인천강지곡 기578~579(2곡).
(13-ⅲ) .......

(14-ⅰ) 92ㄱ5 ~93ㄱ4
(14-ⅱ) 아육왕이 병중에 정성으로 빌어 8만4천탑이 일일이 곁에 오게 되어 비구들의 도움으로 번(幡)을 달고, 병이 나아 12년을 더 사니, 그 번의 이름을 ‘속명번(續命幡)’이라 함.
(14-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가섭어아난(迦葉語阿難)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9쪽〉

(15-ⅰ) 93ㄱ4 ~105ㄱ3
(15-ⅱ) 아육왕이 탑을 세우고, 부처님 생정에 수기(授記)한 비구인 우바국다존자를 만나, 부처님이 설법한 곳을 시작으로, 6년 고행, 성도(成道), 초전법륜(初傳法輪), 열반 한 곳을 각각 안내 받아 공양하고 사리불탑, 대목건련탑에도 공양함.
(15-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9쪽〉.

(16-ⅰ) 105ㄱ3 ~110ㄱ2
(16-ⅱ) 목련이 사문(沙門)을 없애려는 난타와 우반난타 두 용왕을 위신력으로 항복받아 제자가 되겠다는 두 용왕을 사위성 세존께 데리고 가서 우바새(優婆塞)가 되게 함.
(16-ⅲ)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28 청법품(聽法品) 제36〈대정신수대장경 제2, 아함부 하, 703쪽 중, 하~704쪽 상, 중〉.

(17-ⅰ) 110ㄱ2 ~114ㄱ2
(17-ⅱ) 아육왕이 부처님 대제자의 대목건련탑, 마하가섭탑, 아난탑을 차례로 찾아가서 수많은 진보로 공양했으나, 박구라탑에서는 그가 남을 위해 한 법도 이른 것이 없다고 돈 한 닢으로 공양했는데. 그 한 닢마저 왕에게 돌아와서 다 이르기를 존자가 욕심이 없어 한 닢도 받지 않는다고 찬탄했다.
(17-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79쪽 중, 하〉.

(18-ⅰ) 114ㄱ2 ~130ㄴ5
(18-ⅱ) 세존의 성도한 도량보리수(道場菩提樹)를 왕이 지극히 여기고 공양했는데, 왕의 한 부인이 그 보리수를 시샘하여 더운 젖을 부어 나무를 시들게 하니, 오히려 왕이 까무러쳐서 그 부인이 환심을 사려고 보리수 찬 젖을 부어 살게 하니, 왕은 더욱 많은 보배로 공양했다. 또 빈두로존자와 대중 스님께도 수많은 진보(珍寶)로 공양함.
(18-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80쪽 상, 중, 하〉.

(19-ⅰ) 130ㄴ5 ~135ㄴ1
(19-ⅱ) 아육왕의 아우 성용(善容)이 사견(邪見)에 빠져서, 왕은 방편으로 그로 하여금 구중 기녀들과의 환락을 통해 그 부질없음 깨닫게 하고 출가케 하여 사문이 되고 아라한이 되게 함.
(19-ⅲ) 석가보 권3, 아육와제출가조석가석상기(阿育王弟出家造釋迦石像記) 제25, 〔求離牢獄經〕 〈대정신수대장경 제50, 67쪽 상, 중〉.

(20-ⅰ) 135ㄴ ~136ㄱ5
(20-ⅱ) 월인천강지곡 기580~581(2곡).
(20-ⅲ) .......

(21-ⅰ) 136ㄱ6 ~139ㄱ2
(21-ⅱ) 아육왕이 8만4천탑을 세우고 탑마다 많은 재보로 보시하고, 끝에 가서는 염부제를 삼보(三寶)에 보시한다고 종이에 써 봉(封)하고 명종함.
(21-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81쪽 상, 중〉.

(22-ⅰ) 139ㄱ2 ~140ㄱ3
(22-ⅱ)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나, 아누루타대신이 이의를 냈다. 그 까닭은 아육왕 본래의 서원이 10억만금을 채워 모든 공덕을 지으려던 것인데, 아직 4억만금이 모자라기 때문이라 하니, 신하들이 의논하여 4억금을 절에 보내고서야 법익태자의 아들 삼파제(三波提)태자가 왕이 되었다.
(22-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잡아함경〕〈대정신수대장경 제50, 81쪽 상〉.

(23-ⅰ) 140ㄱ4 ~142ㄴ4
(23-ⅱ) 아육왕의 법익태자가 아주 훌륭해서 후궁 가운데 한 부인이 사통(私通)하려 했으나, 태자가 고사(固辭)하므로 이 일이 탄로 날까봐 계략으로 태자를 변방에 보내고, 모략하여 왕을 꾀어 태자의 눈자위를 빼어오라는 칙서를 보내니, 태자는 왕명을 그대로 따라 하고 성을 나와 걸식하는 신세가 되어 유랑하다가 왕성에 오게 되고, 그 사이에 있던 일이 소문이 나서 왕의 귀에 들려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니, 그들은 바로 태자부부였다. 모든 사실이 드러나 왕이 신령께 빌어 눈을 회복시킨다는 내용임.
(23-ⅲ) 석가보 권5, 아육왕조8만4천탑기 제31 〔법익경〕, 아육왕식법익괴목인연경(阿育王息法益壞目因緣經云〕〈대정신수대장경 제50, 81쪽 중~82쪽 상, 중?〉

(24-ⅰ) 142ㄴ5 ~143ㄱ6
(24-ⅱ) 월인천강지곡 기582~583(2곡).
(24-ⅲ) ........

(25-ⅰ) 143ㄱ7 ~144ㄴ(이하 낙장)
(25-ⅱ) (협주) *여기는 원본의 훼손이 심하나, 저경과 그 언해인 ‘금강경삼가해’가 있어서 참고됨.) ‘석존의 탄생, 출가, 성도, 49년간 300 여회의 설법 끝에 열반에 드셨으나, 2천년이 지난 지금, 부처님이 가시며 오심이 있다 하나, 실은 오셔도 오신바 없으심이 달이 천강(千江)에 비춤과 같고, 가셔도 가신바 없으심이 허공을 여러 나라에서 나눔과 같으며. 자비로운 모습을 얻어 뵈옴이 어렵다 이르지 말라, 기원도량에서 여의지 아니하신 것이다.’가 그 개요인데, 결국 ‘월인천강지곡’ 기582, 583의 부연 설명으로, 이는 ‘월인천강지곡’ 기1, 2의 서사(序詞)에 대응하는 결사(結詞)임을 알게 한다(김기종 2006:114~117).
(25-ⅲ)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설의(金剛般若蜜經五家解說誼) 권상,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언해본) 제1:28ㄴ~29ㄴ〉, ≪역주 금강경삼가해 제1≫ 232~236쪽〉.

3. 희귀어에 대하여

이 글의 성격상 으레 국어학 분야의 표기와 음운, 문법 등에 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나, 어휘 부분 외에는 이미 다른 문헌에도 나타나는 것으로써 특별히 다룰 만한 것이 없어서 줄이고, 희귀어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 글은 필자(2001)에서 논의한 내용을, 고치고 더 보탠 것이다. 먼저 희귀어라고 생각되는 어휘를 가나다순으로 배열하되, 의미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짝을 이루는 것들은 함께 묶어서 제시하고, 품사 또는 기본형 및 의미를 밝힌 다음, 예문과 출처를 보이도록 하며, 방점은 표제어에만 붙이고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나타내지 않기로 한다. 아울러 이 낱말이 종래에 전하는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든가, 또 종래의 문헌에 씌었다 하더라도 활용형이 다르다든가, 또는 사전에 실려 있는 용례가 ‘이 문헌’보다 후에 나온 것이라든가 하는 문제 등을 밝히려 한다.

혹 관견의 소치로 근래 발굴된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새로 소개된 어휘 자료가 여기에 언급되는 것과 중복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1. ·겨피·다 [동] 겹치다.

¶ 重複 겨필씨라〈월석 25:17ㄱ〉

cf. 빗난 돗 겨펴 오〈법언 2:73ㄱ〉

이 어휘는 이미 소개된 것이나, 종래의 사전에는 위의 ≪법화경언해≫ 용례가 표제어로 돼 있으므로 이 단어로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당시 이와 관련되는 명사로 ‘單 오지오 複 ·겨비·라’〈능엄 8:15ㄴ〉와 같은 용례가 있다. 그러므로 ‘겨피-’는 ‘겹-+히’ 혹은 *겹-+이’로 분석될 수밖에 없는데, 전자의 경우 접미사 ‘-히’가 명사에 직접 결합되어 부사가 파생되었다고 하기는 미심한 것이다.

한자를 어근으로 한 경우 다음과 같은 보기 들은 있다.

甚히〈석상 23:42ㄱ〉 便安히〈석상 23:17ㄴ〉

自然히〈석상 24:12ㄱ〉 親히〈석상 24:28ㄴ〉

能히〈석상 23:29ㄴ, 35주〉

위는 모두 ≪석보상절≫ 23, 24에서의 보기이나, 다른 문헌에도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그 어근을 보면, 명사도 있지만 대체로 어근에 ‘-’가 결합되어 형용사가 되고 어간의 모음 ‘’가 줄고 파생 접미사로 ‘-이’가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고작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겨피-’는 ‘*겹-’는 문헌 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이런 용례가 있었다면 모를까 현재까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에 현대어에도 쓰이는 부사 ‘겹겨비’〈법화 2:253ㄱ〉가 있다.

2. :너·모 [명] 네모〔四角〕.

¶  鉤紐 브티 해 너모 반 거슬 브 디니〈월석 25:26ㄱ〉

이 어휘도 종래의 사전에 실려 있기는 하나, 그 용례가 ≪이조어사전≫은 〈두초 16:40〉의 것이고, ≪우리말큰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은 〈번역박통사 상:17〉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용례가 나오기 전까지는 ≪능엄경언해≫의 ‘方器 너모 그르시라.〈능 2:4ㄱ〉’를 맨 앞에 올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월인석보≫의 이 용례가 나왔으므로 이것이 제일 먼저 실려야 할 것이다.

3. 노ᇇ드· [명] 논두렁.

¶ 이 葉相 노ᇇ두을 表니〈월석 25:24ㄱ〉

cf. 埢 논드〈물보 경농〉

종래 고어사전에는 15~6세기 문헌의 쓰임은 보이지 않고 18세기의 〈물보(物譜)〉의 보기만 실렸던바, ‘이 문헌’의 예를 중세국어 어휘로서 새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4. 누·웨 [명] 누에.

¶ 蠶은 누웨라〈월석 25:42ㄱ〉 누웨〈월석 25:43ㄴ〉 누웨〈월석 25:44ㄱ〉

cf. 누에 爲蠶〈훈민 용자례〉

누베 〈경북(이상규 2000:171)〉, 〈함북의 대부분(김태균 1986:137)〉 주005)

사용지점은 두 번에 걸친 조사를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한글(2차 조사)과 한자(1차 조사)로 구별해 놓았다. 성진, 길주, 경성, 부령, 경원, 온성, 종성, 회령; 城津, 鶴上, 鶴中, 鶴西, 吉州, 東海, 下古, 漁浪, 羅津, 富居, 靑岩, 富寧, 雄基, 慶源, 南陽, 穩城, 鍾城, 會寧, 判乙, 花豊, 三社, 延上, 富山.

이 어휘는 ≪훈민정음언해≫에서조차 현대어와 동일한 어형을 보이는데 반하여, 경북방언이나 함북방언의 ‘누베’형은 그보다 더 앞선 시대의 것으로서, 문헌상으로는 ‘*누베〉*누〉누웨〉누에’의 변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고어사전에 새로운 표제어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5. 니르잡·다 [동] 일으켜잡다.

¶ 王이 시드러 幡을 몯 니르자바 커늘 比丘히 王 도 잡더니〈월석 25:92ㄴ〉

이 ‘니르잡-’은 중세국어에서 볼 수 있는, ‘니르-, 니르왇-, 니르위-, 니르-’와 같이 ‘니르-+잡-’으로 분석하여, 이 대목을 ‘… 번을 일으켜잡지 못하거늘 …’로 풀이해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새로 ‘니르잡다’란 동사를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니르-’는 어근 ‘닐-’에 사동 접미사 ‘-으-’가 결합한 것이다.

6. ·:실 [명] 날실〔經絲〕.

¶ 經絲 시리라〈월석 25:42ㄴ〉

7. ·시:실 [명] 씨실〔緯絲〕.

¶ 緯絲 시시리라〈월석 25:42ㄴ〉

cf. 시 히 디 아니고〈번노 하:62〉

≪번역노걸대≫(1515)의 ‘시, ’은 사전에 실려 있었어도 그 합성어인 ‘실, 시실’은 없었으므로 새로운 표제어로 실어야 할 것이다.

8. ·뎌도리 [명] 집비둘기.

¶ 鴿 뎌도리라〈월석 25:54ㄱ〉

이 어휘는 종래의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뎌돌+이라’ 또는 ‘뎌도리+Ø라’로 분석할 수 있겠는데, 당시에 이미 동물 명칭에 접미사 ‘-이’가 나타나는 것이 더 보편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전자보다는 후자를 취하였다. 의미를 ‘집비둘기’로 본 것은 『동아 한한대사전』2162쪽(집비둘기 합)에 따른 것이다.

9. 뎌·긔 [대] 져기, 저곳.

¶ 뎌긔 닐오〈월석 25:24ㄱ〉

cf. 어긔〈두초 11:16〉

종래의 사전에는 『두시언해』의 용례가 실렸으나 ‘이 문헌’의 것이 더 앞선다. 표기도 차이가 난다.

10. ·드·러·니·다 [동] 들어가다.

¶ 그제 龍王히 王 려 龍宮에 드러니거늘 王이 龍게 舍利 求야 供養지라 야〈월석 25:89ㄱ〉

이는 ‘드러니-+거늘’로 분석될 수 있음을 쉬 알 수 있고, 이 ‘드러니-’는 ‘드러가-, 드러오-’와 같이 한 어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러가-, 드러오-’는 중세어의 용례가 있어서 고어사전에 실려 있으나, ‘드러니-’는 아직 그 용례가 없었다. 같은 뜻의 ‘드러가-’는 이 ‘드러니-’보다는 후에 발달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전하는 문헌에서는 ‘이 문헌’의 보기가 늦게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애초에는 ‘드러니-’가 일반적이었으나, 신형인 ‘드러가-’의 출현으로 ‘드러니-’는 후에 사어가 된 것으로 보인다.

11. 딯·다 [동] 찧다〔搗〕.

¶ 宮內ㅅ 사미 일 지 兇主 맛뎌늘 와개 디·터·니 比丘ㅣ 보고,〈월석 25:77ㄴ〉

이는 새로 나온 단어가 아니라, 사전의 예문으로 실은 데 대한 한 의견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조어사전≫에는 예문의 순서가 “...디터니..〈신속 효2:70〉, ...디니...〈두초 7:18〉, ...디며...〈능엄 4:130〉, ...디허...〈월석 17:19〉”로, 간행 연대가 늦은 것이 먼저이고, 오랜 것이 뒤에 놓였고, 이 다음에 “...디호...〈법화 5:155〉, ...디호...〈두초 20:45〉”도 있다. 이 차례는 〈월석〉, 〈능엄〉, 〈법화〉, 〈두초〉로 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말큰사전≫은 용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나, 그 출전의 연대는 〈월석 17:17〉, 〈능엄 4:130〉, 〈두초 7:39〉로 제대로 돼 있다.

≪교학 고어사전≫은 표제어 ‘디타’로 용례는 “...디코〈구급 하:76〉, ...디허...〈두해 7: 37〉, ...디턴..〈두해 9:5〉”로 돼 있다.

앞의 두 사전보다 후에 나온 것이지만, 〈월석〉이나 〈능엄〉 혹은 〈법화〉의 용례를 볼 수 없다. 물론 표제어는 ‘딯다’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헌의 용례를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서, 고어사전 용례를 인용할 경우 그 출전의 연대를 확인 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덧붙여 둔다.

12. 침 [명] 〔句(鉤)針〕. 바느질의 한 가지인 박음질, 한 땀씩 곱짚어 나가며 꿰매어 겉으로는 실밥이 이어지고 뒷면에서는 겹으로 가게 꿰매는 방식. 주006)

<풀이>이 용어의 자문에 응해준 분은, 유희경 박사(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박선영 선생(서울시무형문화재침선장 제11호)으로 여기에 적어 감사함을 표한다.

13. 침 [명] 〔一列針〕 ‘홈질’은 두 천을 겹쳐 S자형으로 꿰매어나가는 수법.

¶ 鼻奈耶애 七條 四日이오 五條 二日이라〕 十誦애 모로매 믈러 호고〔침이라〕 바 호디 말라〔침이라〕 알 緣에셔 으로미〔緣은 옷 변라〕 네 가락애 鉤를 브티고 뒤흔 緣에셔 으로미 여듧 가락애 紐月 브티라  鉤紐 브티 해 너모 반한 거슬 브디니 굳게 논 디어늘/ 壇子ㅣ라 니 외니라〈월석 25:26ㄱ~ㄴ〉

cf. 침 句針〈역 하:6〉

침 一列針〈역 하:6〉

이 부분의 저경은 강순애(2005)나 김기종의 ‘저경 자료’에는 없는 것이기에 ‘알 緣에셔 으로미〔緣은 옷 변라〕 네 가락애 鉤를 브티고’를 한문으로 고쳐서 CBETACBETA(中華電子佛典協會) Chinese Electronic Tripitaka Collection, Feb. 2008, Taisho Tripitaka(대정신수대장경)에서 검색하여 다음 글을 찾았다.

九明作衣法 … 四分中 大衣五日不成 尼提僧吉(準鼻奈耶 七條四日 五條二日) 十誦 須却刺 不得直縫 前去緣施鞙(音絃 鉤也) 後去緣八指施紐 今時垂臂 前八後四 俱顚倒也 又安鉤約處揲以方物 本在助牢 而目云壇子非也〈불제비구육물도(佛制比丘六物圖) 권1, 대정신수대장경 제45 899쪽〉

여기서 ‘침, 침’ 뜻에 해당되는 곳은 ‘須却刺 不得直縫’ 인데, ‘각자(却刺)’는 ‘믈러 호다’에, ‘직봉(直縫)’은 ‘바 호다’에 대응된다. 이 ≪월인석보≫의 용어에서 ≪역어류해≫까지 약 230년, ≪역어류해≫에 인용한 ‘句針 침’, 一列針〔침〕’으로 17세기 말엽까지는 이 용어가 이어지는 셈인데, 이후 현대어까지의 연결이 문제이다.

그래서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문의했으나, 구전되는 용어도 그렇고 문헌도 없어서, 이번엔 현대어에서 이런 바느질 방법을 무엇이라 하느냐를 찾아서 거꾸로 연결해 보기로 했다.

호기 : 두 천을 겹쳐 S자형으로 꿰매어 나감.

박기 : 한 땀씩 곱짚어 나가며 꿰매어 겉으로는 실밥이 이어지고 뒷면에서는 겹으로 가게 꿰매는 방식. 〈이훈종(1992:97) ≪민족생활어사전≫ 한길사〉

이 자료로서 대강 현대어의 이 두 용어가 ‘침, 침’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 이를 국어사전에서 어떻게 설명했는가를, 일제하에서 간행된 본격적인 국어대사전이라 할 수 있는 문세영(1940, 수정증보판) ≪조선어사전≫과 광복후, 6·25전쟁 후에 나온 한글학회의 ≪큰사전≫을 찾아보았다.

홈질 名. -하다 他. 바누질에서 성기게 호는 짓.〈문세영 1940 : 1798쪽〉

박음질 名. -하다 他. 바누질의 한 가지. 이에는 온땀침과 반땀침의 두 가지 법이 있는데 먼젓것은 뒤땀을 뜨되 바눌을 뺀 밑을 다시 뜨는 것이오 나중것은 땀을 반씩 떠서 박는다.〈문세영 1940 : 615쪽〉

홈질 : 바느질의 한 가지. 바늘땀을 위아래 쪽으로 간걸러서 호는 것(호갬질). 〈(한글학회) ≪큰사전≫(1950/1957, 3445쪽) 을유문화사〉

박음질 : 바느질의 한 가지. 실을 곱꿰매는 일. 이에는 온땀침과 반땀침의 두 가지가 있는데, 온땀침은 바늘을 전에 바늘 뽑은 구멍에 다시 들이밀어서 앞으로 한 땀을 비켜서 빼내는 것이고, 반땀침은 전에 바늘을 들이민 구멍과 바늘 빼낸 구멍의 중간에 바늘을 들이밀어서 앞으로 한 땀을 드티어 뜸. 〈(한글학회) ≪큰사전≫(1950/1957, 1202쪽) 을유문화사〉

위의 두 사전은 같은 내용이나, 후자가 좀더 자세하게 설면한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결국, 이훈종(1992)의 ‘호기’를 ‘홈질’로, ‘박기’를 ‘박음질’로 고쳤으나, 내용은 같은 바느질 방식을 설명한 것으로 이훈종(1992)에는 그림이 붙어 있으므로 설명이 간단했고, 큰사전은 말로만의 설명이므로 길어진 것이 다르다 할 것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계보를 그릴 수가 있게 되었다.

믈러 호다(침)〔却刺〕 ⟶ 침〔句針〕 ⟶ 박음질/박기

바 호다(침)〔直縫〕 ⟶ 침〔일렬침〕 ⟶ 홈질/호기

종래에는 이 두 어휘(12, 13)가 같이 쓰인 ≪역어류해≫(1690)의 예가 ≪이조어사전≫과 ≪우리말큰사전≫에 실렸고, ≪교학 고어사전≫에는 표제어로 올려 있지 않았는데, ‘이 문헌’의 용례가 새로 나타나서 중세국어 어휘로 등록되게 되었다. ‘이 문헌’의 ‘침이라’는 ‘믈러 호-’의 협주로 쓰인 것이고, ‘침이라’는 ‘바 호디 말라’에서 ‘바 호-’의 협주인데, 현대어 ‘박음질’과 ‘홈질’이 이에 대응되는 것으로 본다.

근래 김정숙·안명숙(2005:110)에는 이와 관련되는 설명이 있어서 참고로 옮겨 둔다.

“가사를 만들 때는 반 당침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 바느질법은 한 땀씩 뒤로 물러가서 다시 뜨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홈질과 같이 보이나 홈질보다는 단단하며 박음질보다는 성근 것이다. 박음질과 같은 이치인데, 바늘을 뒤로 뜰 때 반쯤 돌려서 뜬다.”

여기 ‘당침’이 저 ‘침’의 뜻과 비슷한데, 그에 직접 소급되는 어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4. 말아·옫 [명] 말가웃/말아웃.

¶ 量 크니 서 마 받고 … 져그닌 말아오 받니〈월석 25:55ㄱ〉

이는 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말+가옫+’로 분석되며, ‘말〔斗〕+가옫/가옷〔半〕’에서 ‘ㄹ’ 아래 ‘ㄱ’ 약화 또는 ‘ㄱ’ 탈락이라는 음운변화를 겪은 합성명사이다. 이는 제 3음절의 모음 교체(ㅗ〉ㅜ)와 종성의 교체(ㄷ.ㅅ)를 거쳐 현대어 ‘말가웃/말아웃’으로 이어진다. 여기 ‘가옫/가옷’은 사전에 실려는 있으나, 중세국어 어형이 아니므로 이것도 이 용례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15. :모·래 󰃌 모자라게.

¶ 迦留陁夷 모미 커 모래 안자 부텻긔 대〈월석 25:56ㄱ〉

¶ 이젯 사미 젹거니 모래 안 주리 이시리여〈월석 25:56ㄱ〉

cf. 모자라다 [동](제) 옛. 모자라다. 〈우리말큰사전 4. 옛말과 이두〉

모라다 󰃰 모자라다. 〈이조어사전, 교학 고어사전〉

종래의 고어사전에 형용사 ‘모라다’는 있으나, 이에서 파생된 부사 ‘모래’(모라-+이)는 이 문헌에 처음 보인다. 이와 같이 모음으로 끝난 어간에 ‘-ㅣ’가 결합된 파생어로는 ‘하-[多〕+ㅣ(y), 오라-[久〕+ㅣ’로 이루어진 ‘해, 오래’(부사)가 있다.

이는 새로 표제어에 추가할 것이다.

16. ·므거· 󰃌 무겁게.

¶ 白衣 므거 니부믈 즐기니라〈월석 25:15ㄱ〉

cf. 丘山티 므거이 너기리로다〈두초 18:13〉

고어사전에 ‘므거’의 변천인 ‘므거이’는 있으나, 이 ‘므거’로 등록된 어형이 없었으므로 ‘므겁-’에서 파생된 이 단어를 표제어로 새로 사전에 실어야 할 것이다.

17. ··리 [명] 맨드리.

¶ 王이 야 듣고  누겨 善容일 내 리 야 내 宮 안해 드러 류고 즐기게 라〈월석 25:132ㄴ〉

cf. 쳔이 길헤 더니 그 각시 뎌른 리 하고 탁 집 문의 가 러 마 니〈중삼강 열:8〉

이 단어는 종래 ≪삼강행실도≫ 용례가 유일한 것으로 ≪교학 고어사전≫에만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이제는 ‘이 문헌’의 용례를 첫 번째로 올려야 할 것이다.

18. ·바·려·다 · (형) 고달프다.

¶ ○阿育王의 아 일훔 善容이 山 드러 山行다가 梵志히 옷 밧고 神仙/求노라 야 나못닙도 머그며 과 氣韻을 마시며 예도 누며 가남도 누 種種 苦行호 得호미 업거늘 善容이 보고 무로 예셔 道理 行호 엇던 시르미 잇관 일운 일 업슨다 梵志 닐오 한 사미 조 흘레/거늘 보고  뮈워 몯 치자배라 善容이 念호 梵志히 氣韻이 바려호  婬欲이 잇니 釋子 沙門이 飮食이 됴코 됴 床坐애 이셔 오 時節로 닙고 香花 오 엇뎨 欲이 업스리오 阿育이 듣고 시/름야 내  앗이로 邪見을 내도소니 내 方便으로 惡念을 더루리라 고〈월석 25:130ㄴ~132ㄱ〉

阿育王弟名善容入山遊獵 見諸梵志裸形曝露 以求神仙 或食樹葉或吸風服氣 或臥灰垢或臥荊棘 種種苦行以求梵福 勞形苦體而無所得 王弟見而問曰 在此行道 有何患累而無成辦 梵志報曰 坐有群鹿數共合會 我見心動不能自制 王子聞已尋生惡念 此等梵志服風 氣力羸惙猶有婬欲 過患不除 釋子沙門飮食甘美 在好床坐 衣服隨時 香花自熏 豈得無欲阿育聞弟有此議論 卽懷憂慼 吾唯有一弟 忽生邪見恐永迷沒 我當方宜除其惡念〈석가보 제3, 아육왕제출가조석상기(阿育王弟出家造石像記) 제25, 대정신수대장경 권50, 67쪽 상〉

이는 다음과 같이 고어사전에 실린 것을 먼저 보고 논의를 이어나가기로 한다.

18-1) ·바·려·다 (형) 모자라다.

¶ 頓乏은  바려 씨라.〈법화 3:193〉 유창돈(1964) ≪이조어사전≫ 연세대학교 출판부.

18-2) 바려-다 〔⁻ ⁻ _ ()〕 (그) (여벗) 〈옛〉 고달프다.

¶ 頓乏은  바려 씨라.〈법화 3:193〉

한 사미 다 가 導師려 닐오 우리 오 頓乏야 〔頓乏은  바려 씨라〕 이 믈러 도로 가 고져 노다 야〔衆人이 皆疲倦야 而白導師言호 我等이 今頓乏야 於此에 欲退還노다 야…〕〈법화 3:193ㄱ~ㄴ〉(한글학회(1992) ≪우리말큰사전≫(4) -옛말과 이두-어문각.)

18-3) 바·려·다 (동) 모자라다.

¶ 頓乏은  바려 씨라.〈법화 3:193〉(남광우(1997) 『교학 고어사전』 교학사.)

여기서 문제의 한자인 ‘돈핍(頓乏)’과 위의 ≪월인석보≫ 25에 ‘바려-’로 옮긴 저경의 한자 ‘이철(羸惙)’의 각 글자의 색임과 뜻을 알아보기로 한다.

18-4) * 頓 : 조아릴 돈. 둔할 둔. 1) 조아리다. 2) 넘어지다. 3) 깨지다. 부서지다. 4) 꺾이다. 실패하다. 5) 지치다. 6) 지치다. 피곤하다. .....

* 乏 : 가난할 핍. 1) 가난하다. 모자라다. 없다. 2) 버리다. 폐하다. 3) 고달프다. 쇠하다. 4) 살 가림(화살 막는 기구).

- (≪동아 한한대사전≫, 1982:204, 54)

* 羸 : 여윌 리. 1) 여위다. 2) 약하다. 3) 앓다. 4) 고달프다.

* 惙 : 근싱할 철. 1) 근심하다. 2) 고달프다. 피로하다. 3) 그치다. 4) 마음의 안정을 잃다.

- (≪동아 한한대사전≫1982:1427, 654)

곧, 앞의 ‘돈핍’은 ≪법화경언해≫에서 ‘바려-’로, 뒤의 ‘이철’은 ≪월인석보≫에서 ‘바려-’로 옮긴바, 그 한자어는 위에 보인바와 같이 뜻이 각각 같은 것도 있지만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전자 ‘돈핍’은 후자에 비해서 글자 단위로만 보아서 오늘날도 가끔 접할 수 있지만, 후자는 쓰이는 빈도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시대로 보아서도 ‘돈핍’은 한자의 뜻과 그 문맥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자라다’보다는 ‘고달프다’가 더 알맞은 풀이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종래의 고어사전을 보면,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은 뜻은 ‘모자라다’로 같이 해 보았는데도 전자는 형용사로, 후자는 동사로 품사가 달라졌는데, 대해서 ≪우리말큰사전≫은 뜻을 ‘고달프다’로 하여 앞의 두 사전과 달리 풀이한바, 그 근거는 예문은 같은데도, 위에서처럼, 표제어의 앞뒤를(18-2) 더 인용하여 뜻을 풀이한 데 있으므로. 필자도 중세국어의 ‘바려-’는 현대어로 ‘고달프-’로 보는데 동의한다.

19. 밧:귀머·리 [명] 발뒤꿈치〔踝〕.

¶ 몸 견주 法은 몬져 옷 로 엇게로셔 밧귀머리 우희 네 가락만 견주어〈월석 25:20ㄴ〉

이는 ‘밧귀머리〈법화 2:14ㄴ〉’로 알려진 것이나, 이 문헌에 나오므로 이 용례를 표제어 다음에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발〔足〕+ㅅ(관형격조사)+머리〔頭〕’의 합성어라고 봄.

20. 변·(邊子) [명] 물건의 둘레에 대는 꾸미개.

¶ 緣은 옷 변라〈월석 25:26ㄱ〉올리는 것이 바람직함

cf. 치마애 변 도디 아니더시니(裙不加緣)〈내훈 2 上:44〉

쳥셔피로 가 변고(藍斜皮細邊兒)〈두초 상:28〉

≪내훈(內訓)≫은 1475년 간행된 책이므로 ‘이 문헌’의 표기가 그에 앞선다.

21. ··다 [동] 잘게 부수다. 바스러지다.

① 시혹 慈悲衣라 며 시혹 福田衣라 니라 各別 일후믄 나 僧伽衣니 雜碎衣라 혼 마리니〈碎 씨라 條相이 할니라…〉〈월석 25:17ㄱ〉

② 며 凡常 닐 엇뎨 足히  니리오(況凡常之璅璅 何足以之云云)〈영가 하:70〉

③  누  도소니(飛碎雪)〈두초 16:61〉

④ 우리 므른 차 밥 브르 먹고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초 25:11〉

⑤ 翦翦  이오〈남명 상:19〉

cf.⑥  란 비치 초 보노라(淸見光烱碎)〈두중 13:17〉

⑦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瑣細隘俗務)〈두중 2:56〉

이 용례는 동사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어휘의 품사는 종래의 사전에서 동사로 밝혀지기도 하고 형용사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각 용례에 대응되는 한자를 모두 제시한 다음, 종래의 사전 기술 내용을 검토하기로 한다. 각 사전의 용례에 붙인 번호 ①②③…은 아래의 어느 한자와 대응되는가를 나타낸 것이다.

①碎. ②璅璅. ③碎. ④碌碌. ⑤翦翦. ⑥碎. ⑦瑣細.

≪이조어사전≫ 다 󰃰 細小하다.

¶  누니  도소니(飛碎雪)〈두초 16:61〉 ③

¶ 翦翦  이오〈남명 상19〉 ⑤

¶ 우리 무른 차 밥 브로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초 25:11〉 ④

cf. 다 󰃰 細小하다.

¶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瑣細隘俗務)〈두중 2:26〉 ⑦

≪교학 고어사전≫ 다 [동] 바스러지다. 예문 ③.

¶  누니  도소니(飛碎雪)〈두초 16:61〉 ②

다 󰃰 자질구레하다. 보잘것없다.

¶ 며 凡常 닐 엇뎨 足히  니리오(況凡常之璅璅何足以之云云)〈영가 하70〉 ④

¶ 우리 무른 차 밥 브로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杜初 25:11〉 ④

¶ 翦翦  이오 規規 브즐우즐 양이니〈남명 상19〉 ⑤

cf. 다 [동] 부서지다.

¶  란 비치 초 보노라(淸見光烱碎)〈두중 13:17〉 ⑥

다 󰃰 자질구레하다. 보잘것없다.

¶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瑣細隘俗務)〈두중 2:26〉 ⑦

≪우리말큰사전 옛말과 이두≫ 다 (그림씨). 자잘하다. 용렬하다. 예문(좀 길어짐)

¶ 翦翦  이오 規規 브즐우즐 양이니 며 브즐우즐야 名相애 니며 枝末애 니면 큰 道 오로 아디 몯릴〈남명 상19〉 ⑤

¶ 二乘이 功이 群生애 넘고 닷고미 만 劫을 디내니 며 凡常 닐 엇뎨 足히  니리오(二乘功越群生 脩逾浩劫 況凡常之璅璅 何足以之云云)〈영가 하70〉 ②

¶ 소리 업시 리 려 디니  누니  도소니(無聲細下飛碎雪)〈두초 16:61〉 ③

¶ 우리 무른 차 밥 브로 먹고셔 니노니(吾輩碌碌飽飯行)〈두초 25:11〉 ④

cf. 다(그림씨) → 다.

¶ 버므럿 늘구매 病ㅣ 더으고  時俗앳 이리 조보왜도다(牽纏加老病瑣細隘俗務)〈두중 2:56〉 ⑦

위에서 우리는 ≪이조어사전≫과 ≪우리말큰사전≫은 ‘-’를 형용사로 다루었고,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동사와 형용사로 구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①과 ⑤는 협주(夾註)에 나타난 한자 뜻풀이이고, ②, ④, ⑦은 언해문에 대한 원문의 한자어이며, ③과 ⑥은 언해문에 대응되는 한자어이다. 이렇게 되면 ③, ⑥은 같은 한자 ‘쇄(碎)’에 대응되는 것으로, 이 글자의 뜻을 보아도 주로 ‘부수다/잘게 부수다/부서지다/깨뜨리다’ 등 동사로 풀이되며, 문맥으로 보아도 ‘-’를 동사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나머지 ②, ④, ⑤, ⑦은 모두 두 글자로 된 한자어에 대응되어 형용사 ‘-’로 풀이한 것이 된다. 이들 한자어는 각각 다른 단어이지만, 그 뜻은 아래와 같아서 ‘자질구레하-, 평범하-’에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② 쇄쇄(璅璅) : 적은 모양. 무람없는 모양.

④ 녹록(碌碌) : 평범한 모양. 독립심 없이 남을 붙좇는 모양.

⑤ 전전(翦翦) : 슬기가 모자라는 모양. 말을 잘하는 모양, 또는 아첨하는 모양.

⑦ 쇄세(瑣細) : 잚. 작음.

(≪동아 한한대사전≫ 1982, 동아출판사)

이렇게 되면, 동사 ‘-’와 형용사 ‘-’로 나누어 보는 견해에 동조하게 된다. 따라서 ①의 ‘碎 씨라’는 ‘쇄(碎)는 잘게 부스는/바스러지는 것이다.’와 같이 동사로 풀이되며, ‘-’ [동]의 용례가 새로 추가되게 되는 것이다.

22. ·숫·글·다 [동] 곤두서다〔悚〕.

¶ 터러기 숫그러 커늘〈월석 25:108ㄱ〉

cf. 숫그러 숑 悚〈유합 下:15〉(선조 9년, 1576년)

종래에는 16세기 후반의 ≪유합≫의 예가 실려 있는데, 15세기 중반의 ‘이 문헌’의 용례를 맨 앞에 실어야 할 것이다.

23. ·디우·다 [동] 꺼지게 하다.

¶ 뎌 宮殿을 디워 큰 모시 외에 야〈월석 25:48ㄱ〉

이 단어는 ‘디-+우+어’로 분석되는바, 종래의 고어사전에 ‘디다’는 실려 있어도 그 사동사인 ‘디우다’는 없다. 따라서 새로운 표제어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24. 우·훔 [명] 웅큼〔掬〕.

¶ 王舍城 긼  闍耶 精誠이  우훔 供養이러니〈기577앞, 석상 25:62ㄴ〉

종래 고어사전의 용례는 ‘우훔〈법화 4:129ㄴ〉’이나, ‘우후믈〈구급 상:60ㄱ〉’을 표제어 다음에 실었었는데, 이제 이 문헌의 용례를 앞에 놓아야 할 것이다.

25. 자곡 [명] 자국〔跡〕.

¶ 大海ㅅ 므를  자고개 몯 담 야〈월석 25:113ㄴ〉

cf. 즉자히 돗귀 메오 자괴 바다 가니 버미 마 브르 먹고 누거늘〈삼강 효:32〉

이 ‘자곡’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조어사전』에 이 어휘가 실려 있고, 이와 쌍형으로 보이는 ‘자괴’〈삼강 효32〉도 보인다. 다만, 종래의 사전에 인용 문헌을 밝힘에 있어서 좀 달리 된 것이 있어서 여기서 언급해 둔다. 곧, 『이조어사전』에서는 ‘자고개’〈남명 하:60〉의 용례를 먼저 제시하고, ‘자곡마다’〈월석 21:102〉의 용례를 나중에 제시하였으며, 한글학회의 『옛말과 이두』에서는 ‘자곡마다’〈월석(중) 21:102〉의 용례를 먼저 제시하고, 출전을 ≪월석(중) 21≫이라 하여 중간본임을 분명하게 해 놓았다. ≪옛말과 이두≫가 간행될 당시까지는 ≪월인석보≫ 제21의 초간본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학 고어사전≫에서는 ‘자곡마다’〈월석 21:102〉를 먼저 제시하였으나, ≪이조어사전≫과 더불어 출전 표시가 좀 미흡한 점이 있다. ≪이조어사전≫에서 〈월석〉의 용례를 뒤로 한 것은 짐작컨대 〈월석 21〉이 중간본임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초간본과 중간본이 같이 전하는 것은 〈월석 초〉, 〈월석 중〉과 같이 그 다름을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26. 쟉 [명] 가사의 재질(材質). 가사를 만드는 옷감.

¶ 몸 견주 法은 먼져 옷 로 엇게로셔 밧귀머리 우희 네 가락만 견주아 쟉 오 녀나 葉相 마 로 라〈월석 25:20ㄴ〉

먼저 이 대문의 저경 문제인데, 이 글 바로 앞에 “律에 닐오 모 견조아 니버 足  만라.”고 ≪律≫이라고만 줄여 썼기에 어느 ≪율≫에 관한 책인지 알 수가 없다. 이와 관련되는 문헌은 ≪사분율(四分律)≫ 60권, ≪미사색부(彌沙塞部) 오분율(五分律)≫ 30권, ≪십송율(十誦律)≫ 61권 등이 있다. 이번에 이 해제를 쓰면서 다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본바, 저경과 같은 글이라고 보이는 다음을 찾을 수 있었다.

… 疏云 從肩下地踝上四指以爲衣身 餘分葉相足可相稱 此謂人身多是長短不定...〈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 권3, 대정신수대장경 제40, 362쪽 중〉

여기 밑줄 친 부분은 앞의 밑줄 친 부분과 같은 대목이라고 보는데, 문제는 ‘쟉’에 해당되는 부분이 ‘의신(衣身)’이라고 돼 있다. 이 ‘의신’을 ≪월인석보≫에서 어떻게 ‘쟉’으로 옮겨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CBETA(中華電子佛典協會) Chinese Electronic Tripitaka Collection, Feb. 2008, Taisho Tripitaka(대정신수대장경)와 Shinsan Zokuzokyo(新纂續藏經)의 검색을 통해 다음을 찾을 수가 있었다.

… 今准薩婆多中 三衣長五肘 廣三肘 若極大者 長六肘廣三肘半 若極小者 長四肘廣二肘半者 並如法 若過若減 成受持 以可截續故 衣身 卽衣體也 葉相 謂條葉相也(≪사분율수기갈마소정원기(四分律隨機羯磨疏正源記)≫ 권7. 신찬대일본속장경(新纂大日本續藏經) 제40, 881쪽 하)

이 대목은 앞의 글과 관련되는 것이기에 ‘의신’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밑줄 친 ‘의체(衣體)’가 참고 된다. 결국 문제의 ‘쟉’은 이 글을 따라서 그 뜻은 ‘옷의 몸, 옷의 몸통’ 혹 ‘옷의 본체’ 정도로 보았다가 뒤늦게 〈망월(望月)불교대사전, 873쪽 하〉 ‘袈裟 kașāya’ 조항의 설명 중에서 ‘가사의 재질(材質)은 이를 의체(衣體), 또는 의재(衣財) 라 이르고....〈875쪽 중〉(日文, 필자 옮김)’라는 대목이 있어서 이것이 뜻풀이에 참고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 문맥의 뜻은 해결되었다 해도 고유어 ‘쟉’의 원 뜻은 여전히 미결인 채 남아 있다.

27. 좃·다 [동] 쪼다. 새기다.

¶ 銘은 조씨라〈월석 25:51ㄱ〉

cf. 로 조 낸 後에〈구급 하:33〉

종래의 고어사전에는 참고로 보인 ‘조’〈구급 하:33〉가 실려 있는바, ≪구급방≫보다 앞선 ‘이 문헌’의 표기가 나왔으므로 이를 사전에 실어야 할 것이다.

28. 지·즐우·다 [동] 지지르다.

¶ 惡王 지즐워 주겨든〈월석 25:48ㄱ〉

cf. 세흔 有情을 지즐우며 디여 生애 잇게  젼오(三壓溺有情處生故)〈원각 상1의2:86〉

≪원각경언해≫보다 앞선 시대의 표기로 추가할 것이다.

29. ·젼 [명] 천이나 옷 조각(여기서는 가사를 만들려고 자른/벤 조각).

¶ … 뎌긔 닐오 大衣 겨펴 지매 스니미 이제 行샤 그러나 葉下애세 겨비니 엇뎨 올리고 고 짓논 法을 묻거늘 내 오 자바 뵈요 이 葉相 노ᇇ드을 表니 룐 옷 젼을 안해 나가 호오 葉의 𪍿麥만 디 디니 이 條內 바 表고 葉相 渠相 표니【渠 거리라】 엇뎨 올티 아니리오〈월석 25:24ㄱ〉

(…又大衣重作師比行之 然於上葉之下 乃三重也 豈得然耶 卽問其所作 便執余衣 以示之 此葉相者 表於稻田之塍疆也 以割截衣叚 就裏刺之 去葉𪍿麥許 此則條內表田 葉上表渠相 豈不然耶 今則通以布縵 一非割截 二又多重旣非本制 非無著著之失 …)〈律相感通傳, 大正新修大藏經 第45 諸宗部 2, 880쪽 상〉

‘젼’은 문맥으로 보아 가사(袈裟)의 형식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나, 그 분명한 뜻은 자세하지 않다. 참고로 원문으로 보이는 ≪율상감통전(律相感通傳)≫의 해당 부분을 옮겨 놓았다.

이상은 김영배(1998)의 뜻을 ‘미상’으로 했던 근거였는데 이번에, 혹 ≪고려대장경≫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찾아본바, 다음과 같이 문제되는 밑줄 친 부분은 같았다.

¶ … 此葉相者表於稻田之▼{月+莖}𡑆也 以割截衣叚 就裏刺之 …

〈고려대장경 32권 도선율사감통록 p.642 하〉*(‘도선율사감통록(道宣律師感通錄), 선율사감천시전(宣律師感天侍傳), 율상감통전(律相感通傳), 감통전(感通傳), 감통록(感通錄)’은 같은 책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전자는 현대의 활자본이고, 후자는 목판본이므로 혹 판각 과정에서 글씨가 달라질 가능성은 있다. 밑줄 부분에서 범위를 좁힌다면 ‘가(叚)’자의 뜻이 문제인데, 이는 대한한사전을 보아도 새김과 음이 ‘빌 가’, ‘성(姓) 하’로 나와 있고, 이 글자가 쓰인 단어의 용례도 나온 것이 없다.

위의 ≪월인석보≫ 용례와 저경으로 보는 밑줄 친 부분의 뜻을 대비해 본다면,

‘룐 : 할절(割截)’

‘옷젼(을) : 의가(衣叚)’

등으로 나뉘는데, 문제는 이 뒷부분이다. 합성어인 ‘옷 +젼’의 뜻을 알 수 없으며, 이에 대응되는 한자어 ‘의가’ 또한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관련되는 자료를 더 찾아낸 것이 다음의 두 예문이다.

今準感通傳天人示法逐相塡之 彼敍天人問云 大衣重作師比行之 然於葉下乃有三重 豈得然也 卽問其所作 便執余衣以示之 此葉相者表於稻田之塍壃也 以割截衣段就裏刺之 去葉𪍿麥已後此則 條內表田葉上表渠相 豈不然也 今則通以布縵 一非割截 二又多重旣非本制 非無著著之失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鈔資持記)≫ 대정신수대장경 제40권 율소부/논소부1, 363쪽 중〉

彼云大衣重作 師比行之 然於葉下 乃三重也 豈得然耶 卽問其所作 便執余衣 以示之 此葉相者 表稻田之塍疆也 以割截衣段 就裏刺之 去葉𪍿麥許 此則條內表田葉上表渠相 豈不然耶 今則通以布縵 一非割截 二又多重 旣非本制 非無著著之失...〈≪불제비구육물도(佛制比丘六物圖)≫ 대정신수대장경 제45권 제종부2, 899쪽 상〉

결국 두 글은 거의 같은 내용이며, 앞의 ‘율상감통전’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 문제의 글자가 두 곳 모두 ‘단(段)’자로 나타나므로 ‘옷젼’에 대응되는 한자어는 ‘의가(衣叚)’가 아니라 ‘의단(衣段)’임을 알게 되었고, ‘단(段)’의 뜻은 ‘구분, 부분, 조각, 가지, 방법 층층...’ 등이 있으므로, ‘룐 옷젼’은 여기서는 가사(袈裟)를 만드는 ‘천이나 옷의 조각’ 정도로 풀이하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뜻은 이와 같이 풀이하면 되겠으나, 합성어라면 그 한 부분인 명사 ‘젼’이란 말의 원 뜻은 여전히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

뒤늦게나마 ≪고려대장경 이체자전≫을 찾아본바, ‘단(段)’자의 이체(異体)자로 정리되어 창 수(殳)부의 5획으로 487쪽의 (2884)〔段〕의 8번째 예문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段 表於稻田之▼{月+莖}𡑆也, 以割截衣〇

30. ·치 [명] 추위.

¶  오시 치 몯 리오〈월석 25:15ㄴ〉

cf. 모 더 치로 셜다가〈석상 9:9ㄴ〉

‘이 문헌’의 처음 보이는 것으로 종래 ‘칩다’에서 파생명사 ‘치’로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치’형이 나타남으로써 오히려 당시의 다른 형용사 파생명사와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곧 ‘형용사 어간 + /의(접미사)’로 이루어진 ‘노, 기릐, 기픠’ 등과 동일한 유형의 파생 명사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석보상절 9:9ㄴ〉의 ‘더’ 역시 ‘더’로도 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종래 고어사전에 없던 표제어를 하나 새로 추가하게 된 것이다.

31. :해자 [명] ①비용. ②소비.

¶ 黲淡 비치 해자 업고 쉬니라〈월석 25:20ㄴ〉

이 단어는 종래의 사전에 이미 수록되었으나, 성조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해자〈영가 상38〉 〈이조어사전〉

:해자〈법화 7:157〉 〈한글학회 옛말과 이두〉, 〈교학고어사전〉

즉 제1음절이 『이조어사전』에는 거성으로, 〈한글학회 옛말과 이두〉, 〈교학고어사전〉에는 상성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헌’의 예는 분명히 제1음절이 상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법화경언해≫의 용례와 방점이 같으므로 상성 표기를 바른 표제어로 삼음과 아울러 이 용례를 먼저 실어야 할 것이다.

32. (내) ·해 [명] (내) 것.

¶ 둘흔 迦葉佛 오시오 하나 내 해라〈월석 25:45ㄴ〉

cf. 내 해 본 사니라(我的是元買的)〈번노 하:15〉

이 용례도 『번역노걸대』의 보기보다 앞선 것이므로 사전 예문의 순서로 먼저 실어야 할 것이다.

33. 옺 [명] 홑〔單〕.

¶ 새 두 겨비오 그닌 네 겨비니 오 말라〈월석 25:56ㄴ〉

cf. 單 오지오 複 겨비라〈능엄 8:15ㄴ〉

이 어휘도 새로운 것은 아니나, 종래의 용례가 ≪능엄경언해≫의 것이어서 새로 보이는 이 문례를 먼저 실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獨 늘구 子息 업서 옷 모민 사미라〈석상 6:13〉

와 같이 ‘옷’의 제2음절 종성이 ‘ㅅ’으로 표기된바, 이는 8종성 표기가 적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34. 왁 [명] 확〔臼〕.

¶ 比丘ㅣ 勇猛精進야 坐禪야  잔쵸 得道 몯얫더니 닐웨 다니 宮內ㅅ 사미 일 지 兇主 맛뎌늘 와개 디터니 比丘ㅣ 보고 이 모  슬히 너겨 수고쎠 내 몸도 아니 오라 이 리로다〈월석 25:77ㄴ〉

(…時此比丘知將死不久 勇猛精進坐禪息心 不能得道至於七日 時王宮內人 有事送付凶主 將是女人 著臼中以杵擣之 令成碎末 時比丘見是事 極厭惡此身嗚呼苦哉 …)〈釋迦譜 卷5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 第31, 大正新修大藏經 第50 史傳部 77쪽〉

cf. 이 주007)

≪이조어사전≫에는 한자어 표기가 아니나 원본은 한자 표기임.
왁 소배 이셔〈월석 23:78〉 〈이조어사전〉

衆生이 왁 소배 이셔〈월석 23:78〉 〈교학 고어사전〉

衆生이 왁 소배 이셔 모 즈믄 무저긔 싸라 피와 고기왜 너르 듣더니〈월석 중 23:78〉 〈한글학회 옛말과 이두〉

이 ‘왁’도 위에 보인 것처럼 새로운 것은 아니나, 중세국어 어형으로는 ‘이 문헌’이 나타나기 전까지 〈월석 (중) 23:78〉이 유일례였다. 다만, (21)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출전의 초·중간본의 구별이 문제인 것이다. 앞의 『이조어사전』과 『교학 고어사전』은 중간본 표시를 하지 않았고, 한글학회의 『옛말과 이두』는 중간본임을 밝힌 것이 다르다. 이제 초간본 『월인석보 제25』에 이 단어가 나타났으므로 사전의 용례도 초간본에서의 인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새로운 용례는 ‘왁+애’로 분석될 것이며, 사전에 실을 순서로는 이 〈월석 25:77ㄴ〉을 맨 먼저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위의 인용에서 〈월석 23:78〉이란 출전표시는 『이조어사전』(1964)이 간행된 당시로는 초간본의 인용이 아니고, 아마도 『동방학지』6집(1963)에 실린 중간본의 영인 저본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월인석보』초간본 제23(삼성출판박물관 소장)이 1992년 9월에 공개되었으므로 『교학 고어사전』(1997)에서는 가능하였겠으나, 이 사전의 부록 ‘자료도서의 해제’(p.33) ‘월인석보’ 항목을 보면 초간본에는 권23이 없고, 중간본 3권(권21·22·23)에 권23이 들어 있으므로, 중간본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5. -ㅭ뎬/-뎬 (어미) -ㄹ진대.

¶ 四分 中에 大衣 다쐐예 일우디 몯뎬 尼 提코 僧은 吉리라〈월석 25:25ㄱ〉

이 어미는 표기는 다르지만 이형태로 ‘-ㄹ뗸, -올뗸, -ㄹ뎐,’ 등이 표제어로 나와 있고, ≪우리말큰사전≫에는 표제어 ‘-울뎐’ 항목에 뜻을 적고 예문을 드는 대신 이의 이형태를 다음과 같이 모두 실어 놓았다.

(=-올뎬/ -올뗀/ -올뎐/ -뎬/ -뗸/ -ㄹ뎬/ -ㄹ뗸)〈5294쪽〉

그러나 이 ‘-ㅭ뎬’ 새로운 표제어로 등록되고, 그 용례가 실림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서 여기에 제시하였다.

4. 마무리

4.1. ≪월인석보≫ 권차 확정

1994년 11월, 보림사의 의뢰로 순천대학교 박물관이 가지산 보림사 정밀지표조사 학술조사단을 구성하여, 1995년 1월부터 조사가 시작되며 2월에 들어서 4구(具)의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에서 많은 복장불서가 발굴되었다. 보림사 주지스님은 이 불서의 감정과 정리를 당시 문화재관리국(후의 문화재청) 예능민속연구실장 박상국 선생에게 맡긴바, 여기서 뜻밖에도 문제의 ≪월인석보제25≫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써 학계의 숙제이던 ≪월인석보≫ 전25권의 권차(卷次)가 밝혀지고 아울러 ‘월인천강지곡’의 총곡수도 ‘기 583’이 끝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이는 국어국문학뿐 아니라, 불교학과 서지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큰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4.2. 내용

‘이 문헌’을 ≪석보상절≫제24와 대비한바, 상당한 수정 증보가 이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응된다. 곧, 세존의 열반 후 법장의 결집과 정법의 전지, 율장 관련으로 ‘3의 6물’에 대한 증보 부분이 약 43장, 아육왕의 신앙과 삼보에 대한 공양 등이 약 66장으로 상당부분 증보된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4.3. 희귀어에 대하여

희귀어에서 고찰한 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 종래의 고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지 않은 것, 곧 ‘이 문헌’의 출현으로 중세국어 자료로 새로 이용할 수 있게 된 어휘 14개가 있다.

4. 누웨〔蠶〕 5. 니르잡다 6. 실〔經絲〕 7. 시실〔緯絲〕 8. 뎌도리〔鴿〕 10. 드러니다14. 말아옫 15. 모래〔欠〕 16. 므거〔重〕 23. 디우다 26. 쟉 29. 젼 30. 치〔寒〕 35. -뎬

둘째 : 종래에도 고어사전에 실려 있었으나, 그 용례의 출전이 『월인석보』(세조 5, 1459)의 간행연대보다 늦은 문헌이어서 ‘이 문헌’의 용례를 해당 표제어 용례의 맨 앞에 실어야 할 어휘가 21개 있다.

1. 겨피다 2. 너모〔四角〕 3. 논ㅅ드렁 9. 뎌긔 11. 딯다〔搗〕 12. 침〔句針〕 13. 침〔一列針〕 17. 리 18. 바려다〔疲倦〕 19. 밧귀머리〔踝〕 20. 변(邊子) 21. 다〔碎〕 22. 숫글다〔悚〕 24. 우훔〔掬〕 25. 자곡〔跡〕 27. 좃다〔銘〕 28. 지즐우다 31. 해자〔費用〕 32. (내) 해 33. 옺〔單〕 34. 왁〔臼〕

위의 ‘21. 다’는 동사가 아니고, 형용사로 처리한 사전도 있었으나, 필자는 ‘이 문헌’의 용례는 동사에 해당한다고 보아, 그 근거를 밝혔다.

셋째 : 지난 번 글에서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어휘 둘, ‘26. 쟉, 29. 젼’이 있었는데, 이 대문의 저경이라고 보는 것을 CBETA의 검색으로 찾아서 문맥으로 본뜻은 해결이 된 셈이나, 어원적인 뜻은 아직 알 수 없다고 하겠다.

‘이 문헌’의 낙질된 권차(卷次)가 새로 알려질 때마다, 새로운 어휘 자료가 여럿 나타나는 것은 ‘이 문헌’이 국어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한 번 더 깨닫게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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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법보단경언해 해제

김무봉(동국대 교수)

Ⅰ. 서론

〈육조법보단경언해〉 주001)

〈육조법보단경언해〉는 언해본 〈육조법보단경〉을 이른다. 국어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언해본의 책명을 쓸 때 한문본 책명 다음에 ‘언해’를 이어 적는 방법을 써 왔다. 이 논의에서도 그 관행을 따를 것이다. 다른 언해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는 당나라 시대에 재세(在世)했던 선종(禪宗)의 6대 조사 혜능선사(惠能禪師 A.D. 638~713)의 어록인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의 본문을 적절히 분단하여 정음으로 구결을 달고, 번역 간행한 3권 3책의 불경언해서이다.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은 혜능선사가 소주(韶州)의 조계산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한 법문(法門)을 문인(門人)이 집록(集錄)하여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002)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의 집록자에 대해서는 ‘法海’, ‘神會’ 등의 인물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 논의의 직접 주제가 아니므로 선행연구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음의 논저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심재열, 「육조단경 강의」, (서울:보련각, 1976).
정성본, ‘육조단경의 성립과 제문제’, 「육조단경의 세계」, (목포:보현총림, 제9회 국제학술회의 발표집,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89).
오늘날 10여 종의 이본이 전하는데 최고본(最古本)은 돈황 석굴 발굴본이다. 주003)
돈황 석굴 발굴본, 이른바 돈황본 〈육조단경〉에 대해서는,
정성본, ‘육조단경의 성립과 제문제’, 「육조단경의 세계」, (목포:보현총림, 제9회 국제학술회의 발표집,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89). 법성, 「육조법보단경해의」, (서울:큰수레, 1995) 참조.
영인과 편역은, 퇴옹성철, 「돈황본 육조단경」, (서울:장경각, 1998) 참조.
흔히 돈황본(敦煌本)으로 불리는 이 책은 천여 년 동안 석굴에 비장되어 있다가 20세기에 발굴·소개되었기 때문에 뒷사람들의 첨삭을 면할 수 있어서 육조대사 당대의 가르침을 가장 잘 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제는 「南宗頓敎 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 六祖惠能大師 於韶州大梵寺 施法壇經一卷」이며, 권말에는 「南宗頓敎 最上大乘壇經法一卷」이라는 권미제가 있다. 이 내제와 권미제로 책의 성격, 설법자, 설법 장소 등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육조법보단경〉은 이본마다 가진 이름이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육조대사법보단경」, 「육조선사법보단경」, 「육조법보단경」 등으로 부른다. 줄인 이름은 「육조단경」, 「법보단경」, 「단경」 등이다. 이 논의의 대상인 언해본 〈육조법보단경〉 상권(원간본)의 맨 앞 ‘德異序’에는 「六祖法寶壇經」, 복각본인 하권의 권말(85장 앞면)에는 「六祖禪師法寶壇經」, 판심서명은 「壇經」이라 되어 있다. 주004)

이 논의에서는 갖은 이름인 경우 〈육조법보단경〉이라 하고, 줄여서 부를 때는 〈단경〉이라 할 것이다.

〈육조법보단경〉은 선종의 종지적(宗旨的) 핵심을 담고 있어서 조계 선종을 표방해 온 한국 불교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던 듯, 고려시대인 13세기 초에 간행된 수선사본(修禪社本 : 1207년 간행. 지눌(知訥)의 발(跋) 첨기) 이래 수 차례에 걸쳐 인간(印刊)된 책과 기록이 전한다.

수선사본 이후에는 원나라 승려 몽산 덕이(蒙山德異) 주005)

몽산 덕이화상에 대해서는 김무봉, ‘몽산화상육도보설 언해본 해제’, 「몽산화상육도보설 언해(영인본)」, (서울: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논문집 제16집, 1993ㄷ) 참조.
에 의해 교정·찬술되어(A.D.1290) 고려에 전래된(A.D.1298) 후, 이를 바탕으로 고려의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 A.D.1249~1319)이 간행(A.D.1300)한 책인 이른바 ‘덕이본’이 만항의 찬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인(重印)된 듯 오늘날 전하는 한문본 「단경」의 대부분은 ‘덕이본’이다. 〈육조법보단경언해〉도 덕이본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현전하는 〈육조법보단경언해〉 중에는 간행과 관련된 기록을 가진 문헌이 없어서 간행 경위 전반에 대해 소상히 알기가 어렵다. 다만 같은 해에 간행된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 주006)

이 책은 〈진언권공언해〉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진언권공언해〉와 〈삼단시식문언해〉의 합본이다. 이를 안병희의 해제(1978)에서는 두 책의 판심제를 합한 「공양시식」, 또는 원전 발문에 쓰인 이름인 「시식권공」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후 국어학계에서는 원전 발문에 쓰인 「시식권공」으로 불러 왔으므로 이 논의에서도 그대로 사용한다. 안병희,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 해제’,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영인본)」, (서울:명지대학교 출판부, 1978) 참조.
의 권말에 붙어 있는 발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육조법보단경언해〉에 관련된 것이어서, 이 발문을 통해 언해본 간행의 전반적인 경위를 짐작할 수 있다. 〈육조법보단경언해〉가 간행되던 당시에는 동일한 발문을 같은 시기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도 사용한 예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식권공언해〉에 있는 발문과 똑같은 발문이 지금은 원간본이 전하지 않는 〈육조법보단경언해〉 하권의 말미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007)
앞의 해제에서는 동일한 사람에 의해 편찬된 책일 경우 같은 발문을 다른 간본에 사용한 예들로 미루어 하권 완본이 발굴되면 그 말미에 같은 종류의 발문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이후 발굴·소개된 하권 1책이 후대에 복각된 중간본이어서 확인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단경〉 언해본의 간행 경위 등을 아는 데는 〈시식권공언해〉의 발문만 가지고도 별 문제가 없다. 〈시식권공언해〉의 발문과 관련된 사항은 후술할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시식권공언해〉의 발문을 통해 언해본 〈육조법보단경〉의 간행 관여자, 발행 부수, 간행 시기, 편찬자 등 간행과 관련된 제반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발문에 의하면 언해본 〈육조법보단경〉은 홍치 9년(연산군 2년, A.D.1496) 5월에 발문을 쓴 승려 주008)
후술하겠지만 당대의 고승인 ‘학조(學祖)’로 추정된다. 앞의 논의인 안병희(1978) 참조.
가 인수대비의 명을 받아 이른바 ‘인경목활자(印經木活字)’ 주009)
천혜봉, ‘연산조의 인경목활자에 대하여’, 「조명기박사 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서울:1965) 참조.
로 300부를 간행하여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육조법보단경〉의 언해본은 상·중·하 3권 3책으로 간행되었으나 오랫동안 하권의 출현이 없어서 그 전모를 알기가 어려웠고, 이로 인해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8년 남권희 교수의 발굴로 하권 1책이 학계에 알려진 바 있다. 그런데 이 책은 현전하는 상·중권과 같은 계통의 것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복각된 중간본으로 앞에서 말한 발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비록 복각본이어서 간행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 하권의 출현으로 우리는 〈육조법보단경언해〉 3권 전체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발굴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이 방면 연구의 진일보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해 〈육조법보단경언해〉는 인경목활자로 조성된 15세기 마지막 불전언해서임이 드러났고, 편찬은 당대의 고승인 ‘학조(學祖)’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주010)

천혜봉, ‘연산조의 인경목활자에 대하여’, 「조명기박사 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서울:1965).
안병희,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 해제’,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영인본)」, (서울:명지대학교 출판부, 1978).
그리고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국어사적 고찰도 웬만큼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주011)
김동소, ‘육조법보단경언해 하권 연구’, 「국어학 35집」, (서울:국어학회, 2000ㄴ).
김양원, ‘육조법보단경언해의 표기법과 음운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울:2000).
이 논의는 이러한 선행연구의 토대 위에서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의 성격, 언해본의 간행 경위 및 서지 사항, 그리고 국어학적 특징을 전반적이고도 깊이 있게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Ⅱ. 한문본 〈육조법보단경〉

〈육조법보단경〉은 선종의 6대 조사 혜능선사가 문인들에게 설법했던 법문을 그의 문하 제자인 법해가 집록한 것이다. 주012)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조법보단경〉의 집록자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현전하는 이본들과 선행연구들을 검토해 보면 혜능의 고족제자(高足弟子)인 ‘법해(法海)’라는 설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심재열, 「육조단경강의」,(서울:보련각, 1976) 25~27쪽 참조.
‘법보(法寶)’는 불타의 진리를 이르고, ‘경전(經典)’은 불타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혜능선사의 단어(壇語) 주013)
‘壇’은 ‘戒壇’을 의미하므로 ‘壇語’는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위해 개설한 ‘菩薩戒壇’에서의 ‘受戒說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성본, ‘육조단경의 성립과 제문제’, 「육조단경의 세계」, (목포:보현총림, 제9회 국제불교학술회의 발표집,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89) 참조.
를 「법보단경」이라 부르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주014)
정병조, 「육조단경」, (서울:한국불교연구원, 1978) 참조.
오히려 ‘법어집’, 또는 ‘어록’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확한 명칭일 것이다. 게다가 이 경전의 찬술이 중국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굳이 성격을 밝히자면 위경(僞經)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록을 오랫동안 「법보단경」이라 부르고 받들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 어록에 실려 전하는 혜능선사의 가르침이 중국 불교 선종의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선사가 천명한 남종 돈교의 선지(禪旨)가 원돈교인 「最上乘般若波羅蜜經」의 뜻과 다름이 없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주015)

법성, 「육조법보단경해의」, (서울:큰수레, 1995) 참조.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이 어록에 담긴 혜능선사의 자서전적 일대기와 강설(講說)한 선의 요체가 그 내용으로 인해 한국·중국·일본 등지에서 경전과 같은 존숭을 받았고, 이러한 선종의 진리를 후인들이 높이 받들어 모신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러 왔던 듯하다. 이는 ‘혜능선사’를 ‘성위(聖位)의 조사(祖師)’로 받들고, 〈법보단경〉을 ‘남종(南宗) 돈교(頓敎)의 종지(宗旨)를 설한 성전(聖典)’으로 예우하는 일단을 보인 것이다. 주016)
정성본, ‘육조단경의 성립과 제문제’, 「육조단경의 세계」, (목포:보현총림, 제9회 국제불교학술회의 발표집,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89) 참조.

〈육조법보단경〉의 요체는 ‘無相戒’와 ‘摩訶般若波羅蜜法’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마음을 찾아 밝힌 자성정(自性定), 자성혜(自性慧)와 그 수행법으로 생각을 여읜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일체의 현상을 초월한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좋고 나쁜 데 집착하지 않는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 주017)

심재열, 「육조단경강의」, (서울:보련각, 1976) 참조.
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르침이 선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까닭에 지금까지 〈육조법보단경〉이 선종의 최고 경전으로 존중되고, 널리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주018)
〈육조법보단경〉의 편찬 경위, 내용, 편찬 인물 등에 대해서는 다음의 문헌들을 참고하였다. 특히 적어서 사의를 표한다.
광덕, 「육조단경」, (서울:불광출판사, 1975).
심재열, 「육조단경강의」, (서울:보련각, 1976).
정병조, 「육조단경」, (서울:한국불교연구원, 1978).
대한전통불교연구원, 「육조단경의 세계」, (목포:보현총림, 제9회 국제불교학술회의 발표집, 1989).
법성, 「육조법보단경해의」, (서울:큰수레, 1995).
청화, 「육조단경」, (서울:광륜출판사, 2003).

〈육조법보단경〉은 최고본인 돈황본을 비롯하여 10여 종의 이본이 현전한다. 하지만 크게는 돈황본 계통, 혜흔본(惠昕本) 계통, 설숭본(契崇本) 계통으로 나뉜다. 각 이본들은 큰 요체에서는 별 차이가 없으나 전승의 계보에 따라 달라진 듯 품의 분단이나 표현 방법, 세부 내용 등에서는 다소의 다름이 보인다.

이본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019)

〈육조법보단경〉의 이본들에 대해서는 주18)에서 제시한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특히 법성(1995)의 설명에 기댄 바 크다. 이본들 간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비교한 것으로는 심재열(1976) 참조.

1) 돈황본(敦煌本)

현전 최고본이다. 8세기 중엽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내제는 앞에서 적은 대로 「남종돈교 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 육조혜능대사 어소주대범사 시법단경 일권」이라 되어 있어서 〈단경〉의 성격과 설법자, 설법 장소 등을 알게 해 준다. 이런 제명은 돈황본에만 있다. 〈단경〉의 초기 형태를 충실하게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제 옆에 나란히 「兼受無相戒 弘法弟子 法海集記」이라 하여 집록자의 이름이 부기되어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돈황본을 계승한 같은 계통의 이본 수종이 전한다.

2) 혜흔본(惠昕本)

원본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흥성사본(興聖寺本)에 붙어 있는 혜흔의 서문에 의해 책의 간행지 및 간행 연대를 알 수 있다. 중국 송나라 건덕 5년(A.D.967) 혜흔이 광서성(廣西省) 나수산(羅秀山) 사영탑원(思迎塔院)에서 간행한 것이다. 〈단경〉 저본을 두 권으로 나누고 내용을 11문으로 분단하여 찬술한 듯하다. 항목을 나눈 대강은 대승사본과 흥성사본으로 이어진다.

2-1) 흥성사본(興聖寺本)

일본 경도의 임제종 사찰인 흥성사에 전해져 있는 일본 최고(最古)의 오산판본(五山版本)이다. 표제 및 내제와 권미제가 모두 「육조단경」이다. 책의 말미에 법해(法海)-지도(志道)-피안(彼岸)-오진(悟眞)-원회(圓會)로 이어지는 〈단경〉 전수의 계보가 적혀 있다.

2-2) 대승사본(大乘寺本)

일본 석천현(石川縣) 금택시(金澤市)의 조동종 사찰인 대승사에 소장된 판본이다. 「도원서대승본(道元書大乘本)」이라고도 한다. 표제는 「韶州曹溪山六祖師壇經」이다. 권말에 ‘도원서(道元書)’라 적힌 것으로 보아 ‘영평도원선사(永平道元禪師)’ 계열 보관본인 듯하다. 혜흔본 계통이지만 ‘서천조통설’ 등에 관해서는 흥성사본과 달리 서천 28조설을 취하고 있다.

3) 설숭본(契崇本)

덕이본과 종보본의 모본이 되는 판본이나 원본은 전하지 않는 듯하다. 송나라 인종 때의 이부시랑 낭간(郞簡)의 「육조법보기서」(A.D.1056)에 의해 알려진 판본이다. 당시의 〈단경〉이 첨삭이 심해서 「단경찬」을 지은 계숭(A.D.1007~1072)에게 정정을 의뢰하니 설숭이 2년만에 「조계고본(曹溪古本)」을 얻어 이를 교정하여 3권으로 간행한 책이다.

3-1) 덕이본(德異本)

고려조 이후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원나라의 고균비구(古筠比丘) 덕이(德異)에 의해 지원 27년(A.D.1290) 교정된 판본이다. 전체를 10장으로 나누었다. 내제는 「六祖大師法寶壇經」이고, 권미제는 「六祖禪師法寶壇經」이다. 책의 맨 앞에 덕이의 서문이 있고, 이어서 법해의 약서(略序)가 나온다. 고려 충숙왕 3년(A.D.1316, 연우 3년) 간행본이 많이 유통되어 흔히 ‘고려연우병진본(高麗延祐丙辰本)’이라고도 부른다. 앞에서 말한 대로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저본이다.

3-2) 종보본(宗寶本)

덕이본과 같은 설숭본 계통이다. 원나라 지원 28년(A.D.1291) 남해 풍번보은광효사(風旛報恩光孝寺)의 종보(宗寶)에 의해 편찬되었다. 표제, 내제, 권미제가 모두 「六祖大師法寶壇經」이다. 10장 1권이지만 장의 이름과 편제가 덕이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위의 여러 판본 중 언해본 〈육조법보단경〉의 저본인 덕이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悟法傳衣 第一 [법을 깨닫고 법의를 받다.]

釋功德淨土 第二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풀어 말하다).]

定慧一體 第三 [정(定)과 혜(慧)는 일체임을 밝히다.]

敎授坐禪 第四 [좌선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다.]

傳香懺悔 第五 [오분향과 참회법을 전하다.]

參請機緣 第六 [제자들의 참청한 기연을 적다.]

南頓北漸 第七 [남돈과 북점의 같고 다른 점을 밝히다.]

唐朝徵詔 第八 [당조에서 초청하다.]

法門對示 第九 [법문을 대(對)로 보이다.]

付囑流通 第十 [유통을 부촉하다.]

Ⅲ. 언해본 〈육조법보단경〉

3.1. 간행 경위

〈육조법보단경언해〉는 연산군 2년(홍치 9년, A.D.1496) 5월에 인수대왕대비의 명을 받은 승려에 의해 이른바 ‘인경목활자(印經木活字)’로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때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시식권공언해〉의 권말 발문에 의해 확인된다. 주020)

동일한 발문을 같은 시기에 간행된 다른 문헌에도 사용한 예에 대해서는 안병희(1978) 참조.
김무봉, ‘15세기 국어사 자료 연구’, 「동악어문론집 34집」,(서울:동악어문학회, 1999)의 부록에는 〈금강경삼가해〉와 〈남명집언해〉의 한계희·강희맹 발문(성화 18년, 성종 13년, 1482), 〈원각경언해〉와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의 김수온 발문(성화 8년, 성종 3년, 1472), 〈선종영가집언해〉·〈반야심경언해〉·〈금강경언해〉의 학조 발문(홍치 8년, 연산군 1년, 1495)을 번역해서 실어 놓았다. 이 발문들을 통해 우리는 동일한 발문이 같은 시기에 같은 절차를 거쳐서 간행된 여러 문헌에 함께 첨부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책에 따라 판식이 다른 경우는 있다.
한편 발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현전하는 문헌과 그 내용에 의해 〈육조법보단경언해〉는 모두 3권 3책으로 간행된 불전언해서임을 알 수 있다. 〈시식권공언해〉 발문의 내용은 대부분 〈육조법보단경언해〉와 관련된 것이고, 정작 〈시식권공언해〉에 대한 내용은 2행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육조법보단경언해〉·〈시식권공언해〉와 직접 관련된 내용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 논의의 맨 뒤에 원문 전체를 그대로 옮기고, 김갑기 교수의 번역문을 실었다. 동학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주021)
어려운 발문의 번역을 흔쾌히 해주신 김갑기(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께 사의를 표한다.

… 若六祖大鑑禪師 言簡理豊 祖席中卓然傑出 故古人稱語錄 爲經者 良有以也 我仁粹大王大妃殿下 … 命僧以國語翻譯六祖壇經 刊造木字 印出三百件 頒施當世 … 且施食勸供 … 詳校得正 印出四百件 頒施中外焉 弘治九年夏 五月日 跋

위와 같이 〈육조법보단경언해〉는 〈시식권공언해〉를 집필하고 편찬했던 바로 그 승려에 의해 300건 주022)

발문에 ‘三百件’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문헌이 3권 3책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질’이라는 단위가 바로 ‘한 건’인 셈이다. 당시에 인간(印刊)된 책들은 어떤 간본이건 자양(字樣)이 큰 편이어서 한 문헌을 여러 책권으로 나누어 인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 건에 해당하는 책권은 단권(〈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부터 25권 〈월인석보〉에 이를 정도로 차이가 컸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계수(計數)의 편의를 위해 ‘한 질’을 ‘한 건’으로 불렀을 것으로 판단한다.
으로 인간(印刊)된 책임을 알 수 있다. 발문의 간기에 나온 대로 인출 시기는 연산군 2년(1496년)이다. 그런데 문제는 발문 작성자, 곧 책 편찬자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중간되어 나온 간경도감 후쇄본 책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결 작성자와 역자 기명행(記名行)의 삭제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바로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연산군 2년은 유신들의 척불(斥佛) 분위기가 가장 고조된 때이다. 주023)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丙辰) 4월 무자조 참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왕대비인 인수왕후 이외의 간행 관련자들의 노출을 가능한 한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한 듯하다. 이런 이유로 발문 작성자가 빠져 있으나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전의 언해, 곧 간경사업에 관여했던 승려 중 연산군 당시까지 생존하여 인수대왕대비, 정현왕대비와 함께 ‘인경목활자’의 조성 등 간경불사 활동을 했던 승려는 ‘학조(學祖)’뿐이다. 실제로 ‘학조’는 〈육조법보단경언해〉 간행 바로 전 해인 연산군 1년에는 선왕인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대비가 내탕(內帑)을 내어 만든, 〈선종영가집언해〉·〈금강경언해〉·〈반야심경언해〉 등 간경도감 후쇄본 인출의 간경불사를 주도하고 ‘인경목활자’로 발문을 쓴 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 〈시식권공언해〉, 〈육조법보단경언해〉의 발문을 작성하고 두 책을 편찬한 승려는 ‘학조’일 수밖에 없다. 주024)
이에 대해서는 천혜봉, ‘연산조의 인경목활자본에 대하여’, 「조명기박사 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서울:1965) 참조. 그리고 안병희(1978) 참조.
이 활자는 1495년(연산군 1년)에 중간된 (간경도감 간행 불전언해본의 후쇄본) 〈선종영가집언해〉 등의 ‘학조발(學祖跋)’이나 〈진언권공언해〉·〈육조법보단경언해〉와 같은 불전의 간행에만 사용되어 ‘인경목활자’로 명명된 것이다.

앞에서 〈육조법보단경언해〉의 활자를 ‘인경목활자’라고 했는데 이 용어는 천혜봉(1965)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이 활자로 만들어진 문헌 중 현전하는 것은 한문본인 〈천지명양수륙잡문(天地冥陽水陸雜文)〉(일본 천리대학 소장)과 언해본인 〈시식권공〉과 〈육조법보단경〉 등이다. 한문본과 언해본의 간행이 모두 같은 해인데, 간기에 의하면 한문본은 3월, 언해본은 5월에 간행되어 한문본이 2개월 정도 앞선다. 이를 안병희(1978)에서는 언해본을 조성하기 위한 한글 목활자의 제작과 언해에 소요된 시간 때문으로 해석한 바 있다. 주025)

안병희(1978) 참조.
‘인경목활자본’은 활자가 미려하고 정교하다. 인쇄된 지면의 상태를 보면 묵색의 착색 정도가 비교적 양호하여 읽기에도 불편함이 덜하다. 곧 가독성이 높다. 다만 같은 글자라도 자획의 크기가 서로 다르고, 인쇄된 묵색의 농담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다. 네 귀퉁이[四隅]에 공극(空隙)이 있어서 활자본임을 짐작하게 하고, 칼로 깎아낸 듯한 흔적이 목활자본임을 확인시켜 준다.

〈육조법보단경언해〉는 모두 3권 3책으로 간행되었으나 최근까지 상권과 중권 두 책만이 전해져서 그 전모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1998년 남권희 교수에 의해 하권 1책이 발굴·소개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원간본 간행 후 55년이 지난 1551년(가정 30년, 명종 6년)에 원간본을 판밑으로 하여 뒤집어 새긴 복각본인 데다 기대했던 발문이 없었다. 이 점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비록 초간의 발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번각본이라고 하더라도, 방점 표기 등 일부 정밀을 요하는 표기를 제외하면 언어 사실은 원간본 그대로여서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2000년에는 남권희 교수가 해제를 쓰고, 김동소 교수가 국어학적인 고찰을 하여 영인본을 내놓았다. 주026)

남권희 교수의 해제와 김동소 교수의 정치한 논의는 하권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육조법보단경언해(하)」(영인본, 서울:홍문각) 2000ㄱ쪽 참조. 김동소 교수는 이 영인본에 함께 실린 해제 ‘국어학적 고찰’을 약간 고쳐서 같은 해 발행된 「국어학」 35집에 재수록하였다. 이 논의에서는 서지 사항과 관련된 논의는 영인본의 ‘국어학적 연구’를, 언어와 관련된 논의는 「국어학」 35집의 논의를 참고하였다. 그 구분은 발행 시기에 따라 전자를 ‘2000ㄱ’으로, 후자를 ‘2000ㄴ’으로 한다.
이로써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전면적인 연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3.2. 서지 사항

〈육조법보단경언해〉는 남아 있는 책이 드문 편이다. 특히 하권은 앞에서 언급한 복각본 1권만이 전해질 뿐이다. 한문본의 조성과 유통이 매우 활발했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해본의 인간과 유통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우리가 텍스트로 하고 있는 ‘인경목활자본’ 외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필사본 1권이 더 있을 뿐 다른 책은 보기 어렵다. 이 책은 1844년에 60장 분량으로 간행되었고, 제명은 「언뉵조대법보단경」이다. 현재는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전하는 책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27)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소장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책들이 참고가 된다.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3」(서울:서울대 도서관, 1979).
김영배·김무봉, ‘세종시대의 언해’, 「세종문화사대계1」(서울: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박종국, 「한글문헌 해제」(서울: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한국어세계화재단, 「100대 한글 문화유산 정비사업」(서울:문화관광부, 2004)

[원간본]

권상 :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사문고(고귀 294.34-H995u) - 103장 뒷면 낙장.

산기문고, 성암고서 박물관, 호암미술관, 고 이동림 님 소장.

권중 : 산기문고, 호암미술관, 이승욱 님, 고 이동림 님 소장.

[중간본]

권중(복각본) : 대구 개인 소장

권하(복각본) : 대구 개인 소장

이미 앞에서 논의한 대로 원간본인 상권과 중권은 〈시식권공언해〉에 첨부되어 있는 발문을 통해 간행과 관련된 사항을 알 수 있고, 중간본(복각본)인 하권은 책 뒤에 있는 간기에 중간 간행 시기, 간행지, 각수(刻手)를 비롯한 간행 관여자 등이 드러난다. 하권의 마지막 면인 91장 뒷면에 ‘嘉靖三十年 辛亥 暮春日 全州府地 淸□山 圓岩寺開板’ 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책이 명종 6년(1551년)에 전주부 원암사에서 복각된 책이라는 사실을 전해준다. 주028)

원암사가 자리잡고 있던 산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영인본에는 해당 글자가 비어 있어서 淸□山인데, 남권희 교수의 해제와 김동소 교수의 국어학적 연구(2000ㄱ)에는 淸溪山이라 되어 있다. 필자는 실책을 보지 못하여 확실한 주장을 펴기가 어려우나, 김양원(2000)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33권, 14장과 관련 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淸凉山’으로 교정하였다. 淸凉山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하여는 김양원, ‘육조법보단경언해의 표기법과 음운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서울: 2000) 참조.

위의 현전본 중 영인·공개되어 연구자들이 이용하고 있는 책은 아래와 같다.

권상(원간본, 일사문고본) : 국어학회편 자료선집Ⅱ, 국어학회편, 일조각(1972).

해제-안병희, 영인내용-法海略序 9-24장, 본문 1-30장.

홍문각(1979), 영인내용-전체, 해제-없음.

권중(원간본, 이겸로 소장본) : 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인하대 출판부(1976).

해제-남광우, 영인내용-전체.

홍문각(1992), 해제-홍윤표, 영인내용-전체.

권하(중간본/복각본, 개인소장본) : 홍문각(2000), 서지 사항-남권희,

국어학적 연구-김동소, 영인내용-전체.

상·중·하 3권의 형태서지는 다음과 같다. 주029)

하권은 실사하지 못하여 영인본과 남권희(2000)을 참고하였다.
상·중권은 고 이동림 님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고, 하권은 현전 유일본인 복각본을 대상으로 한다.

〈상·중권〉

책 크기 : 31.3㎝ × 20.6㎝

제명 : 상권은 서외제와 내제 없이 첫 장의 제1행에 ‘육조법보단경서’라고 되어 있고, 중권은 표지 다음의 첫장 1행에 바로 章名인 ‘정혜일체 제3’이 나온다.

판심제 : 단경(상/중)

반곽 : 24.2㎝ × 15㎝

판식 : 사주단변, 활자본이어서 사우공극(四隅空隙)이 있다.

판심 : 상하 대흑구, 상하 내향흑어미.

행관 : 유계 8행 17자, 언해문 : 16자, 협주 : 작은 글자 쌍행 16자, 정음구결 : 방점 없이 작은 글자 쌍행.

〈하권〉

책 크기 : 26.5㎝ × 20㎝

제명 : 소장자가 최근에 개장한 뒤 서외제를 「壇經下」이라 하고 오른쪽에 묵서로 「가정 30년 신해」이라 써 놓았다.

판심제 : 단경 하

반곽 : 24㎝ × 16㎝

판식 : 사주단변(복각본이어서 四隅에 空隙은 없다.)

판심 : 상하 대흑구, 상하 내향흑어미.

행관 : 유계 8행 17자, 언해문 : 16자, 협주 : 작은 글자 쌍행 16자,

정음구결 : 방점 없이 작은 글자 쌍행 (계선이 있으나 뚜렷하지 않다.).

언해 양식은 경 본문을 분단하여 정음 작은 글자 두 줄로 구결을 달고 언해문을 두었다. 언해문은 한 글자 공란을 두고 시작했다. 원문의 정음 구결은 오른쪽 줄 아래부터 작은 글자 두 줄로 적었으나 방점은 두지 않았다. 언해문의 한자에는 오른쪽 아래에 한자와 같은 크기의 글자로 독음을 달고 방점을 찍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점은 한자의 주음(注音)이 당시까지 관판본 문헌에 주로 쓰이던 이른바 동국정운음이 아니고, 당시에 실제 발음되던 현실 한자음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의 간행 이전에도 단편적으로 현실 한자음이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 문헌에서는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언해문의 중간에 설명이 필요한 한자어나 불교용어가 나올 경우에는 작은 글자 쌍행으로 협주를 두되, 아무런 표시가 없이 삽입했다. 해설 부분과 하권의 수탑사문(守塔沙門) 영도(令韜)의 후기도 작은 글자 쌍행으로 되어 있다.

〈육조법보단경언해〉 상·중·하 3권에 실려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권 : 서문 24장 (1ㄱ-24ㄴ)

고균비구(古筠比丘) 덕이(德異) 서문(序文) 8장(1ㄱ~8ㄱ)

문인(門人) 법해(法海) 약서(略序) 16장(9ㄱ~24ㄴ)

오법전의 제1(悟法傳衣 第一) 83장 (1ㄱ~83ㄴ2행)

석공덕정토 제2(釋功德淨土 第二) 20장 (83ㄴ3행~103ㄱ, 103ㄴ 훼손)

중권 : 정혜일체 제3(定慧一體 第三) 13장 (1ㄱ~-13ㄴ6행)

교수좌선 제4(敎授坐禪 第四) 5장 (13ㄴ7행~18ㄴ6행)

전향참회 제5(傳香懺悔 第五) 30장 (18ㄴ7행~48ㄴ3행)

참청기연 제6(參請機緣 第六) 64장 (48ㄴ4행~111ㄱ, 이하 한두 장 낙장)

하권 : 남돈북점 제7(南頓北漸 第七) 30장 (1ㄱ~30ㄴ4행)

당조징조 제8(唐朝徵詔 第八) 11장 (30ㄴ5행~40ㄴ5행)

법문대시 제9(法門對示 第九) 12장 (40ㄴ6행~52ㄱ7행)

부촉유통 제10(付囑流通 第十) 34장 (52ㄱ8행~85ㄱ, 85ㄴ/ 1면 공백)

후기(後記) 6장 (86ㄱ~91ㄴ3행)

간기(刊記) 및 각수질(刻手秩) 5행 (91ㄴ4행~91ㄴ8행)

Ⅳ. 어학적 고찰

〈육조법보단경언해〉는 훈민정음이 창제·반포되고 정확히 50년 후에 만들어진 불전언해서이다. 이 책은 인수대왕대비의 주도 아래 왕실의 내탕(內帑)으로 간행되어서 관판본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반세기라는 시간의 경과가 반영된 듯, 정음 창제 초기에 간행된 관판 언해본들 주030)

여기서 이르는 ‘정음 창제 초기의 관판 언해본’은 〈석보상절〉 등의 초기 문헌부터 간경도감 간행의 언해본까지를 말한다.
과 비교하면 표기 등 몇몇 예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음운 변화 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표기 원칙 같은 어떤 인위적인 기준의 변화가 더 강하게 작용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초기 문헌에 등장하는 ‘ㅸ, ㆆ’ 등의 문자가 쓰이지 않고, 〈원각경언해〉(1465년) 이후 간행된 다른 정음문헌 주031)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 간행된 문헌 중 순수하게 정음으로만 된 문헌은 없으므로 여기서의 정음문헌은 국한 혼용문을 가리킨다.
에서처럼 각자병서 표기가 이 책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실제로는 〈원각경언해〉 이후에 간행된 문헌인 〈내훈언해〉(1465년), 〈두시언해〉(1481년), 〈불정심다라니경언해〉(1485년), 〈영험약초〉(1485년) 등의 책과 〈육조법보단경언해〉 이후에 간행된 책인 〈개간 법화경언해〉(1500년), 〈속삼강행실도〉(1514년), 〈번역노걸대〉·〈번역박통사〉(1517년 이전) 등의 문헌에는 각자병서 중 ‘ㅆ’이 보이는데, 1496년에 간행된 책인 〈육조법보단경언해〉에는 예외 없이 ‘ㅅ’으로만 나타난다. 합용병서는 앞 시대와 같이 쓰였다.

종성은 8종성에 의한 표기가 대체로 지켜졌으나 ‘ㅿ’이 쓰인 예가 있고, 체언의 음절말 자음 중 유성자음 ‘ㄴ, ㄹ, ㅁ, ᅌ’은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와 통합될 때 〈월인천강지곡〉(1447년)에서처럼 일부에서 분철한 예가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를 보이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언해문에 쓰인 한자의 주음(注音)이 바뀐 점이다.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032)

〈육조법보단경언해〉보다 앞서서 간행된 〈구급간이방언해〉(성종 20년, 1489)는 언해문이 정음으로만 되어 있으나, 이 정음으로 된 언해문에 현실 한자음으로 표기한 예가 있다. 그러나 전면적으로 현실 한자음이 쓰인 문헌은 이 〈육조법보단경언해〉와 〈시식권공언해〉가 처음이다.
정음 창제 후 관판 문헌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던, 개신음인 동국정운에 근거한 한자음 표기가 폐기되고, 그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현실 한자음에 의한 주음 표기가 전면적으로, 그리고 정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정음 초기 문헌에서 보이던 동국정운 한자음 주음 표기원칙에서 현실 한자음 주음 표기로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 책은 ‘법어(法語)’를 언해한 불전언해서이다. 훈민정음 초기에 간행된 대부분의 불전언해서들은 단조로운 문장 구성과 제한된 어휘 사용을 보이는데, 이 책도 그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만 법문을 집록한 ‘법어’라는 문헌의 성격 때문에 이 책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장 구성에 의한 문체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러한 문체적 특성은 저본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이 점 다른 불전언해본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언해본의 문장 구성은 대부분 혜능이 깨우침과 관련하여 주변 사람들이나 문인들에게 묻고 대답하는 문답 형식과 설화자(집록자, 또는 책 편찬자)가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을 가하는 해설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묻는 이는 깨달음을 얻고, 배우기 위해 최대한 예의를 갖춘 공손한 표현을 할 수밖에 없어서 겸양법 선어말어미 ‘--’의 출현이 빈번하다. 또 화자인 혜능이 문인들을 부르고 설법하는 내용이 많아서 ‘선지식(善知識)아 ~’ 운운(云云)의 호칭과 평서형의 설명법 어미 ‘-니라/리라’로 끝을 맺는 종결형식의 문장이 주로 쓰였다. 그런가 하면 설화자(說話者)가 주어 명사인 혜능을 높이는 표현으로 인해 존경법 선어말어미 ‘-으시/으샤-’의 쓰임이 잦고, 역으로 혜능이 청자일 경우 듣는 이를 높이는 공손법 선어말어미 ‘--’가 많이 쓰이는 등 대체로 경어법 문장 사용의 폭이 넓다. 또, 물음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설정한 듯한 문형인 ‘엇뎨 ~-고/오’식의 묻고 그것에 답하는 구성으로 된 의문형 문장도 다수 보이는데, 이는 저본인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에서 ‘何 ~’로 되어 있는 문형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육조법보단경언해〉가 보이는 문체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장에서는 앞에서 열거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육조법보단경언해〉의 표기법, 음운 현상, 문장 구성, 어휘 등을 살필 것이다. 이 책의 언어 사실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는 남광우(1976), 김동소(2000ㄴ), 김양원(2000) 등이 있다. 남광우(1976)는 중권의 해제를 통해 서지 사항과 표기법 등 일부 언어 사실을 고찰한 것이다. 김동소(2000ㄴ)에서는 하권을 대상으로 하여 서지 사항, 표기법, 음운 현상, 어휘 등에 대해 정치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김양원(2000)은 상·중·하 3권을 대상으로 표기법 및 음운 현상을 폭넓게 살핀 것이다. 각각 이 책의 서지 사항, 표기법, 음운 현상 등에 대해 논의한 것인 바, 이 방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주033)

남광우, ‘육조법보단경언해 중권 해제’ 「육조법보단경언해 중권 (영인본)」(인천:인하대학교 출판부, 1976).
김동소, ‘육조법보단경언해 하권 연구’, 「국어학 35집」(서울:국어학회, 2000ㄴ).
김양원, ‘육조법보단경언해의 표기법과 음운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서울: 2000).

4.1. ‘ㅸ’과 ‘ㆆ’

〈육조법보단경언해〉에는 ‘ㅸ’과 ‘ㆆ’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정음 초기 문헌에 보이던 ‘ㅸ’은 이 책에서 예외 없이 ‘ㅇ, 오, 우’로 바뀌었다. 자립형식이나 활용형 모두에서 마찬가지다. ‘ㆆ’은 ‘-ㄹㆆ+전청자’ 표기가 쓰이지 않고, 동국정운 한자음의 폐기로 이 문헌에 쓰인 예가 없다.

(1) ㄱ. 역[礫]〈하: 23ㄱ〉 /  〈능엄5: 72ㄱ〉 주034)

‘ㄱ’과 ‘ㄴ’은 각각 장의 앞 · 뒷면을 가리킨다. 출전의 서명은 〈 〉에 약호로 쓴다. 이하 〈육조법보단경언해〉는 줄여서 〈단경언해〉, 또는 이 책으로 쓸 것이다. 방점 표기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생략한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방점 표기에 관한 한 이 책은 어떤 원칙이 없는 듯 혼란하기 때문이다.

ㄴ. 두려이[圓]〈중: 91ㄴ〉 / 두려 〈월석9: 21ㄱ〉

ㄷ. -와 〈상: 1ㄴ〉 / - 〈석보9: 31ㄴ〉

ㄹ. 더러운[汚]〈중: 76ㄴ〉 / 더러 〈월석2 : 59ㄴ〉

‘ㅸ’은 〈능엄경언해〉(1462년) 등 간경도감 간행 문헌부터 전면적으로 폐기되어 이후 문헌에서는 일부의 예외[〈목우자수심결언해〉(1467) 등]를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몽산법어약록언해〉(?1459) 주035)

이 책의 간행 연도와 ‘’ 등에 대해서는 김무봉,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의 국어사적 고찰’, 「동악어문론집 28집」(서울:동악어문학회, 1993ㄴ) 참조.
와 〈능엄경언해〉에 예외적으로 쓰였던 ‘’이 여기서는 ‘역’으로 실현되고, 이후에 간행된 문헌의 활용형에 단편적으로 쓰였던 ‘ㅸ’은 모두 ‘ㅇ, 오, 우’로 바뀌었다. ‘ㆆ’은 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국어의 초성 표기에 쓰인 적이 없고 사이글자나 동명사어미 ‘-ㄹ’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ㄹㆆ’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문헌에서는 ‘-ㄹ+전청자’형 표기로만 나타나서 ‘ㆆ’의 용례가 없다.

(2) ㄱ. -가 〈상 : 27ㄱ〉

ㄴ. -ㄹ디어다 〈상 : 55ㄴ〉

ㄷ. -ㄹ제 〈상 : 1ㄴ〉

동명사어미 ‘-ㄹ’과 의존명사 ‘’가 통합된 ‘ㄹ’ 등은 ‘-ㄹㆆ’ 같은 형태로 적은 적이 없이 정음 초기 문헌부터 ‘-ㄹ’로만 적혔는데, 이 책에서는 각자병서 폐기로 ‘-ㄹ’ 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3) 그럴 〈상 : 64ㄴ〉, 이실 〈중 : 13ㄱ〉

4.2. 초성 병서

이 책에는 각자병서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각자병서 표기는 〈원각경언해〉(1465) 이래 폐지되었으나, 〈원각경언해〉 이후에 간행된 일부 문헌과 〈단경언해〉 이후에 간행된 일부 문헌에 쓰인 예가 보인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합용병서는 10가지(ㅺ, ㅼ, ㅽ, ㅻ; ㅳ, ㅄ, ㅶ, ㅷ; ㅴ, ㅵ) 중 2가지(ㅻ, ㅷ)가 보이지 않는다. 〈석보상절〉에서 실현되었던 ‘ㅻ’(, 19:14ㄴ)은 이후 문헌에 나타나지 않으며, ‘ㅷ’은 이 문헌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어서 목록에 빈칸이 되었다. 주036)

이에 대해서 김동소(2000ㄴ:8-9)에서는 ‘ㅷ’의 소멸로 보았고, 김양원(2000:15)에서는 이 책보다 1년 늦게 간행된 〈신선태을자금단〉에서의 예[나디 아니신 저긔 (未破之時)〈10ㄱ〉]를 들고 이 책에 ‘ㅷ’이 없는 것을 우연한 공백으로 보았다.

1) 각자병서

〈원각경언해〉 전까지는 각자병서로 적혔으나 이 책에서 단일자로 바뀐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4) ㄱ. 말[言]〈상: 12ㄴ〉, 스니[書]〈상: 26ㄴ〉

ㄴ. 도혀[却]〈중: 4ㄴ〉, 드위혀[翻]〈중: 89ㄴ〉

ㄷ. 害가 〈상: 27ㄱ〉

홀딘댄 〈상: 25ㄱ〉, 마롤디어다 〈상: 55ㄴ〉

入定제 〈중: 104ㄴ〉

이실/그럴 〈중: 13ㄱ〉, 시라 〈상: 3ㄱ〉

각자병서는 정음 초기 문헌에는 8가지(ㄲ, ㄸ, ㅃ, ㅆ, ㅉ, ㆅ, ㆀ, ㅥ)가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는 ‘ㅆ, ㆅ, ㄲ, ㄸ, ㅉ’이 쓰일 수 있는 어휘나 환경에서 모두 단일자형으로 실현되었다. (4ㄱ)은 정음 초기 문헌에서 각각 ‘말’과 ‘쓰니’로, (4ㄴ)은 각각 ‘도’와 ‘드위’로 표기되었었다. (4ㄷ)은 문헌에 따라 ‘-ㄹㆆ가 ~-ㄹ까’, ‘-ㄹㆆ딘댄 ~-ㄹ띤댄’, ‘-ㄹㆆ디어다 ~-ㄹ띠어다’, ‘-ㄹㆆ제 ~-ㄹ쩨’로 실현되고, ‘-ㄹ’는 ‘-ㄹ’로만 나타나던 형태이다.

2) 합용병서

이 문헌에는 합용병서의 사용이 활발한 편이다. 그 목록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5) 〈ㅺ〉 거리[滯]〈상: 75ㄱ〉, 리[尾]〈하: 28ㄴ〉

〈ㅼ〉 [又]〈상: 3ㄴ〉, 해[地]〈중: 54ㄴ〉

〈ㅽ〉 리[速]〈상: 31ㄴ〉, 얼굴[形骸]〈하: 65ㄴ〉

〈ㅻ〉 (없음)

〈ㅳ〉 러듀믈[墮]〈상: 23ㄱ〉, 들[義]〈중: 50ㄱ〉, [茅]〈하: 29ㄱ〉

〈ㅄ〉 디[用]〈상: 12ㄱ〉, [種]〈상: 30ㄱ〉, [米]〈상: 27ㄴ〉

〈ㅶ〉 [隻]〈상: 33ㄱ〉, 논디라[薰]〈중: 23ㄱ〉

〈ㅷ〉 (없음)

〈ㅴ〉 [時]〈상: 58ㄴ〉, 어[貫]〈하: 82ㄴ〉

〈ㅵ〉 라[刺]〈하: 15ㄱ〉

위의 예에서 우리는 초성 합용병서의 경우 정음 초기 문헌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3. 중성 표기

이 책에는 〈훈민정음〉 해례 중성해에 제시된 중성자가 대부분 쓰였으나, 중성 29자 중에서 ‘ㆉ, ㆇ, ㆊ, ㆈ, ㆋ’ 등 5자는 용례가 없다. 이 중 ‘ㆉ([牛] 등)’의 경우는 이 문헌에 해당 어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 외는 주로 한자음 표기에 사용되었던 중성자들이다. 특히 ‘ㆊ, ㆋ’는 16세기 초에 간행된 〈훈몽자회〉(1527년)의 한자음에 실례가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이 책에는 해당 한자가 없기 때문에 빈칸으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주037)

김동소(2000ㄴ:9)에는 ‘ㆊ, ㆋ’가 〈훈몽자회〉(1527년)의 한자음 표기에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고, 김양원(2000:18)에는 ‘ㆋ’의 실제 용례를 제시한 바 있다.
‘ㆌ’는 이 문헌에서 한자음 표기에만 사용되었다.

(6)聚:落락 〈상: 64ㄱ〉, 宗趣: 〈중: 58ㄴ〉, 取:次· 〈하: 25ㄱ〉

4.4. 종성 표기

종성표기는 훈민정음 종성해에 규정한 ‘ㄱ, ᅌ, ㄷ, ㄴ, ㅂ, ㅁ, ㅅ, ㄹ’의 8종성과 ‘ㅿ’이 보인다. 초기 문헌에서 ‘유성후두마찰음’ ‘ㅇ[ɦ]’ 앞에서 ‘ㅅ’과 수의적으로 교체되던 ‘ㅿ’은 ‘워’에서 보인다. 이러한 9종성 외에 합용병서의 ‘(←), , , (←ᆵ)’이 보이고, 사이시옷과 통합 표기된 ‘, ’이 나타난다.

(7) ㄱ. 맛나[逢/遇]〈상: 31ㄴ〉, 긋디[斷]〈중: 3ㄱ〉, 븓디[關]〈중: 50ㄱ〉

ㄴ. 워[獦獠]〈상: 7ㄴ〉, [邊] 업스니 〈중: 27ㄴ〉

cf. [邊] 업스시니 〈용가: 125〉

ㄷ. 고[座]〈하: 5ㄴ〉; 옮디[遷]〈하: 37ㄱ〉;

여듧[八]〈상: 9ㄴ〉, 앏[前]〈중: 51ㄴ〉

ㄹ. 믌결[波浪]〈상: 58ㄱ〉; 간[暫]〈중: 49ㄴ〉, 장[盡心]〈하: 3ㄴ〉

4.5. 한자음 표기

〈단경언해〉는 동국정운 한자음의 사용을 지양하고 당시에 실제 사용했던 현실 한자음, 이른바 전통 한자음에 바탕을 둔 주음방식을 전면적으로 취한 최초의 문헌이다. 김동소(2000ㄴ: 7~14)에서는 이를 ‘전통한자음’이라 규정하고,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전통 한자음 변화 유형을 8가지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한국어 자체의 음운 변화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김양원(2000: 26~28)에서는 〈단경언해〉 상·중·하 3권 모두의 한자를 찾아 이를 김동소(2000ㄴ: 10~11)의 분류기준에 따라 정리하였다. 자세한 논의는 두 선행 연구에 미루고 여기서는 평음의 유기음화와 관련된 한자어 및 불교용어 독음의 표기 변화에 대해서만 논의하고자 한다.

(8) ㄱ. 讚:잔嘆:탄 〈서: 19ㄱ〉 / 讚:찬야 〈중: 53ㄴ〉

ㄴ. 讖:記·긔 〈서: 14ㄴ〉 / 讖:記·긔 〈중: 97ㄱ〉


〈8ㄱ〉은 상·중·하 전권에서 모두 8회 출현하는데 ‘잔’으로 주음된 곳이 7회, ‘찬’으로 주음된 곳이 1회이다. 이로 미루어 이 시기에 유기음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8ㄴ〉의 용례는 많지 않지만 역시 일부 유기음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김동소(2000ㄴ: 12~13) 참조.

불교용어의 한자음은 동국정운음이라고 하더라도 몇 차례 변개가 있었는데, 그 변화의 모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9)[解脫]의 [解]

ㄱ. · 〈석보 23: 9ㄴ〉

ㄴ. :갱 〈월석 17: 48ㄱ〉, 활자본 〈능엄 6: 22ㄱ〉, 목판본 〈능엄 6: 25ㄴ〉

ㄷ. : 〈법화 6: 8ㄴ〉, 〈금강: 131ㄱ〉

ㄹ. :하 〈단경 상: 43ㄱ〉,

cf 涅·녈槃반解: 〈중: 93ㄱ〉, 見:견解: 〈상: 19ㄴ〉

(10)[般若]의 [般]

ㄱ. 반 〈석보 23: 15ㄱ〉, 목판본 〈능엄 1: 20ㄱ〉

ㄴ. · 〈법화 5: 188ㄴ〉, 〈금강서: 9ㄱ〉

ㄷ. 반 〈단경 상: 10ㄴ〉, ·반 〈중: 31ㄱ〉

이러한 변개는 범어로 된 다라니의 유입과 불경언해 작업의 활성화 등으로 범어나 파리어(巴里語)에서 음차(音借)한 불교용어나 한자로 조어한 용어의 한자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의 결과, 보다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고자 노력한 데서 온 것으로 보이나, 이 문헌에 이르러서는 현실의 독음을 수용한 결과로 짐작된다. 주038)

김무봉, ‘금강경언해 해제’, 「금강경언해 주해」, (서울:동악어문학회, 1993ㄱ) 참조.

오늘날 쓰고 있는 불교용어로서 일반 한자어의 독음과 다르게 실현되는 ‘波, 婆, 便, 布’ 등이 현실 한자음이 주음된 최초의 문헌인 이 책에서 이미 일반 한자음과 다르게 주음되어 있어서 주목을 하게 된다. 불교용어의 한자음이 일반 한자음과 다르게 실현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이겠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 주는 문헌으로서 이 책의 한자음 표기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 ㄱ. 波바羅라蜜·밀 〈상: 57ㄴ〉 / 波파浪:랑 〈상: 97ㄱ〉

ㄴ. 婆바舍:샤斯多다 〈하: 71ㄱ〉 / 婆파 〈훈몽 상: 31ㄱ〉

ㄷ. 方便·변 〈하: 23ㄱ〉 / 便편·히 〈서: 24ㄱ〉

ㄹ. 布:보施·시 〈상: 85ㄴ〉 / 流류布포 〈상: 30ㄱ〉


〈11ㄴ〉 ‘婆’의 일반 한자음은 이 책에 용례가 없어서 29년 후에 간행된 책인 〈훈몽자회〉(1527년)에서 가져왔다. 〈11ㄷ〉은 오늘날의 한자음이 [방편]인 점으로 미루어 후에 유기음화하여 ‘편(便)’으로 된 듯하다.

4.6. 방점 표기

〈단경언해〉의 방점표기는 일관성이 없다. 같은 문헌 안에서의 서로 다른 표기는 말할 것도 없고, 초기의 문헌과 비교해도 차이가 많이 난다. 김동소(2000ㄴ: 14~18)과 김양원(2000: 33~35)에서는 같은 문헌 안에서 보이는 차이와 앞 시기에 간행된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서 나타나는 차이를 검증한 바 있다. 이 문헌에서의 방점표기는 어떤 원칙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혼란하다.

4.7. 사이글자

사이글자는 체언이 결합할 때 음성적 환경에 따라 체언 사이에 끼어드는 자음 글자인데, 〈용비어천가〉와 〈훈민정음언해〉에는 각각 ‘ㄱ, ㄷ, ㅂ, ㅅ, ㅿ, ㆆ’과 ‘ㄱ, ㄷ, ㅂ, ㅸ, ㅅ, ㆆ’의 6자가 쓰였으나, 〈석보상절〉에서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문헌에서는 ‘ㅅ’이 주로 쓰였으나 간혹 ‘ㅅ’ 외에 다른 글자가 쓰인 적도 있다. 이 문헌에는 예외 없이 모두 ‘ㅅ’으로 나타난다.

(12) ㄱ. 믌결 〈상: 58ㄱ〉, 오날브터 〈중: 32ㄱ〉, 뎘지블 〈하: 40ㄴ〉

ㄴ,  中을브터 〈상: 69ㄴ〉, 간 〈중: 49ㄴ〉


4.8. 분철 표기

15세기에 간행된 대부분의 정음문헌은 주된 표기 방식이 연철이었다. 다만 〈월인천강지곡〉에는 체언의 말음이 ‘ㄴ, ㄹ, ㅁ, ㅿ’ 등일 때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와 통합하면 분철 표기했다. 용언의 경우에는 어간 말음 ‘ㄴ, ㅁ’이 어미 ‘-아’와 만나면 분철 표기했다. 이 책에서는 체언의 말음이 ‘ㄴ, ㄹ, ㅁ, ᅌ’인 경우에만 조사와의 통합에서 일부 분철 표기한 예가 보인다.

(13) ㄱ. 자음 ‘ㄴ’ 뒤 : 돈 〈상: 3ㄴ〉, 신을 〈상: 27ㄱ〉,

서너번이러라 〈하: 88ㄴ〉, 간이나 〈중: 56ㄴ〉

ㄴ. 자음 ‘ㄹ’ 뒤 : 뎔이라 〈서: 20ㄱ〉

ㄷ. 자음 ‘ㅁ’ 뒤 : ①연철 : 으로 〈서: 3ㄴ〉, 사을 〈상: 68ㄴ〉,

일훔은 〈하: 14ㄴ〉

②분철 : 미 〈하: 74ㄴ〉, 사미 〈상: 16ㄴ〉,

일후미 〈하: 12ㄱ〉

ㄹ. 자음 ‘ᅌ’ 뒤 : 스이로소다 〈상: 38ㄱ〉, 이 〈중: 108ㄱ〉

예 (13ㄱ~ㄹ)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체언의 말음이 ‘ㅁ’인 경우에는 연철된 예와 분철된 예가 각각 절반 정도이다. 이 문헌에 체언의 말음이 무성자음이면서 분철한 특이 한 예가 하나 있는데, 하권의 ‘도을[賊]〈87ㄱ〉’이다. 이는 이 어휘가 한자어 ‘盜賊’에서 온 때문일 것이다. 주039)

김동소(2000ㄴ:29), 김양원(2000:37) 참조.

4.9. 주격과 서술격 표기

이 문헌에서 주격조사는 선행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이, ㅣ, ∅’로 실현되었다. 서술격조사도 ‘이-, ㅣ-, ∅-’로 실현되어 초기의 문헌과 차이가 없다. 구결문과 언해문 모두에서 동일하다. 다만 다음의 예는 예외이다.

(14) ㄱ. 一切般若智ㅣ 다 自性을브터 나논디라 〈상: 55ㄱ〉

(一切般若智ㅣ 皆從自性야) 〈상: 54ㄴ〉

ㄴ. 곧 이 偈ㅣ 本性 보디 몯호 알오 〈상: 22ㄱ〉

(便知此偈ㅣ 未見本性고) 〈상: 21ㄱ〉

여기서 주격조사 ‘ㅣ’는 ‘∅’로 실현되어야 하나 굳이 ‘ㅣ’를 적어 놓았다. 이는 앞문장과 뒷문장 사이에 아무런 표지가 없으면 자칫 해독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 배려로 보인다.

같은 음운론적 조건임에도 서술격의 ‘ㅣ’는 ‘∅’로 실현되었다. 서술격의 위치에서는 ‘∅’로 실현되어도 읽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서도 굳이 격 표지 ‘ㅣ’를 실행한 배려가 짐작이 간다. 주040)

이는 다음의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智ㅣ 能히 一萬  어료 滅니(一智ㅣ 能滅萬年愚滅니) 〈중: 43ㄱ〉
이 卷을 자바(尼ㅣ 乃執卷야) 〈중 : 49ㄴ〉
반기 가미 理ㅣ  덛덛니라(必去ㅣ 亦常然이니라) 〈하 : 65ㄱ〉

(15) ㄱ. 곧 일후미 四智菩提니라 〈중: 73ㄴ〉

(卽名四智菩提니라) 〈중: 72ㄱ)

ㄴ. 곧 일후미 般若智니라 〈상: 57ㄱ〉

(卽名般若智니라) 〈상: 56ㄱ〉

4.10. 모음조화

모음조화는 대체로 혼란한 모습을 보인다. 모음조화에 관한 한 정음 초기 문헌부터 혼란상을 보여 왔다. 이는 기저형의 실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김동소(2000ㄴ)에서는 하권을 대상으로 연결모음 ‘-으/-’, 목적격조사, 관형격조사, 부사격조사, 대조보조사, 선어말어미 ‘-오/우-’, 연결어미 ‘-어/아’, 관형사형어미 ‘-/는’ 등의 경우를 면밀히 살폈다. 비록 하권에 국한한 것이라고 해도 〈단경언해〉의 모음조화 양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4.11. 문장 구성

〈육조법보단경언해〉는 다른 불전 언해본들에 비해 문장 유형이 다양한 편이다. 법어를 저본으로 하고 있는 이 문헌의 성격 때문에 나름의 독특한 문장 구성이 보인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단조로운 문장 구성과 제한된 어휘 사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여타의 불전언해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불전의 원문을 분단한 후 구결을 달아서 언해한 형식, 이른바 ‘대역(對譯)’ 형식의 번역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 문헌이 보이는 문장 구성의 특징을 살피려고 한다.

(16)ㄱ. 大師ㅣ 니샤, “善知識아 다  조히 야 摩訶般若波羅蜜을 念라.” 시고, 大師ㅣ 良久시고(良久 오래 시라), 다시 衆려 니샤, “善知識아 ~알리라.” 〈悟法傳衣 第一, 상: 2ㄴ〉

ㄴ. 이 卷을 자바 字 무른대, 師ㅣ 니샤, “字 곧 아디 몯거니와 드란 곧 請야 무르라.” 이 닐오, “字 오히려 아디 몯거니 엇뎨 能히 들 알리오.” 師ㅣ 니샤, “諸佛妙理 文字애 븓디 아니니라.” 〈參請機緣 第六, 중: 49ㄴ〉

〈16〉은 설법을 청한 것에 대해 답하거나 답하면서 다시 묻는 형식의 문장이다. 이 책의 문장은 대부분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16ㄱ〉은 혜능이 소주(韶州)의 위자사(韋刺史) 일행에게 법문을 하는 내용이고, 〈16ㄴ〉은 혜능이 한 비구니에게 행한 법문인데, 문답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중간에 설화자(집록자, 또는 편찬자)가 끼어들어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혜능이 문인을 부르는 “善知識아 ~”형 문장이 많고, 문인(門人)이 묻는 유형의 문장인 “엇뎨 ~-오/고”식의 구성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저본의 의문문 구성 “何/豈/寧~”으로 되어 있는 문장을 번역한 때문이다.

(17)ㄱ. 秀ㅣ 호, ‘廊下 향야 서 뎌 和尙이 보시게 홈만 디 몯도다.’ 믄득 다가 ‘됴타’ 니거시든, 곧 나 저고 닐오, ‘이 秀의 作이다.’ 고… 〈悟法傳衣 第一, 상: 15ㄱ〉

ㄴ. 祖ㅣ… 무르샤, “偈 이 네 지다? 아니다?” 秀ㅣ 오, “實로 이~간대로 求논디 아니다. 온보시니가? 아니가?” 〈悟法傳衣 第一, 상: 19ㄱ〉

ㄷ. 達이 닐오, “… 엇뎨 宗趣 알리고?” 師ㅣ 니샤, “나~사겨 닐오리라.” 〈參請機緣 第六, 중: 58ㄱ〉

(17) 역시 문답식 문형이다. (17ㄱ)은 신수(神秀)가 오조홍인(五祖弘忍)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게송을 지어서 전할 방법을 생각하는 장면이고, (17ㄴ)은 홍인(弘忍)과 신수(神秀)의 대화 부분이다. 〈17ㄷ〉은 혜능과 문인 법달(法達)의 대화 부분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단경언해〉에는 의문문의 유형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의문문의 문답에 등장하는 청·화자에 따라 화계(話階) 등급이 달라져서 존경법의 ‘-으시/으샤-’, 겸양법의 ‘--’, 공손법의 ‘--’ 등 경어법 선어말어미의 출현이 매우 잦다.

종결형식 중에는 ‘-니라’나 ‘-리라’로 맺음을 하는 평서형 문장이 많이 보인다. ‘-니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중 원칙이나 당위에 해당하는 진술에 나타나고, ‘-리라’는 미래에 대해 예측하거나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등의 진술에서 주로 보인다.

(18) ㄱ. 녜 괴외야 妙用이 恒沙ㅣ리라 〈하: 38ㄴ〉

이 作을 브트면 곧 本宗을 일티 아니리라 〈하: 50ㄴ〉

ㄴ. 다가 正면 十八正을 니르왇니라 〈하: 44ㄱ〉

이브터 서르 쳐 심겨 宗旨 일티 마롤디니라 〈하: 52ㄱ〉

4.12. 어휘

이 문헌에는 15세기에 간행된 여타의 정음문헌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거나, 여기에서만 쓰인 어휘가 몇몇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 ㄱ. -ㄹ뎐 : 作法홀뎐 네 이리 자 리니 〈서: 12ㄴ〉

ㄴ. 워[獦獠] : 獦獠 워라 〈상: 7ㄴ〉

ㄷ. 아닔 아니며[莫非] : 여러 劫ㅅ因이 아닔 아니며(莫非累劫之因이며) 〈상: 47ㄱ〉

ㄹ. 어옛비[矜恤] : 외이 가난닐 어옛비 너교미 일후미 慧香이오 (矜恤孤貧이 名慧香이오 〈중: 21ㄴ〉

ㅁ. 가야[憍] : 가야 소교 믈 드로 닙디 마오(不被誑染고) 〈중: 24ㄴ〉

ㅂ. 지[了然] : 三身을 보아 지 自性을 제 알에 호리니(見三身야 了然自悟自性호리니) 〈중: 35ㄴ〉

ㅅ. 데-[浮游] : 녜 데미 뎌 하 구룸 니라 (常浮游호미 如彼天雲니라 ) 〈중: 38ㄴ〉

ㅇ. [痕] : 돌해 師ㅅ 趺坐신 무룹 과 (石에 於是有師趺坐膝과) 〈중: 51ㄴ〉

ㅈ. 셔히[諦] : 내 이제 너 爲야 니노니 셔히 信고 (吾今에 爲汝說노니 信고) 〈중: 73ㄱ〉

ㅊ. 그리나[然] : 그리나 (이나) 〈하: 2ㄴ〉

ㅋ. 져조니[鞫問] : 져조니 (鞫問니) 〈하: 87ㄱ〉

위의 어휘들은 이 책에만 나오는 유일한 예이거나 다른 문헌에 용례가 드문 것들이다. ‘셔히’는 상·중·하 3권 모두에 용례가 있으나, 15세기 정음문헌 중 이 책에 처음 나오고 이후 문헌에서는 널리 쓰였다.

Ⅴ. 결론

지금까지 조선조 연산군 2년(1496)에 간행된 정음문헌인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저본, 간행 경위, 서지 사항, 국어학적 특징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책의 한문본은 당나라 시대에 있었던 선종의 육대 조사 혜능의 법문을 문인인 법해가 집록하고 뒷사람들이 첨삭·편찬하여 오늘에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이 책의 유통과 간행이 매우 활발했던 듯하다. 특히 원나라 때의 승려 몽산 덕이가 편찬(1290)한 책인 ‘덕이본’이 고려조에 유입(1298)되었고, 이후 고려 승려 만항에 의해 간행(1300)된 덕이본 〈육조법보단경〉이 지속적으로 중간되었다. 언해본 〈육조법보단경〉의 저본도 바로 이 덕이본이다.

〈육조법보단경언해〉는 훈민정음 창제 후 꼭 50년 만에 인수대비의 명을 받은 당대의 고승 학조에 의해 3권 3책으로 인간되었다. 간행 부수는 모두 300질이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이 책이 경전 간행만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인경목활자’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당시까지 간행된 정음문헌의 한자에 주음했던 동국정운 한자음이 전면 폐기되고, 이른바 현실 한자음이 주음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논의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육조법보단경언해〉의 저본, 간행 경위, 서지 사항, 언어 사실 등의 특징을 밝힌 것이다.

제Ⅱ장에서는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의 조성과 현전 이본들에 대해서 살폈다. 한문본 〈육조법보단경〉은 혜능의 고족제자(高足弟子)인 법해에 의해 집록되었고, 이후 계통에 따라 부분적으로 첨삭이 있어서 판본에 따른 품의 분장과 표현 방법 등 일부 내용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최고본인 돈황 석굴 발굴본, 이른바 돈황본은 천 여 년 동안 석굴에 비장되어 있다가 20세기에 발굴·공개되어 육조대사 당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전 판본은 돈황본 계통, 혜흔본 계통, 종보본 계통으로 나뉜다. 혜능의 법어집을 ‘단경(壇經)’이라고 불러온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는 이 어록에 실려 전하는 혜능선사의 가르침이 중국불교 선종의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혜능선사가 강설한 선(禪)의 요체가 경전과 같은 존숭을 받았고, 이러한 진리를 후인들이 높이 받들어 모신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러왔던 것이다.

제Ⅲ장에서는 〈육조법보단경〉의 언해본 간행 경위와 형태서지를 밝혔다. 이 책의 현전본 중에는 간행당시의 간기가 없어서 자세한 간행 경위를 알기 어려우나, 같은 시기에 간행된 책인 〈시식권공언해〉의 발문에는 이 책과 관련된 기사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동일한 발문이 이 책의 원간본 하권에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 발문에 의해 〈육조법보단경언해〉는 인수대왕대비가 내탕으로 간행 경비를 부담하고, 당시의 고승 학조로 하여금 번역·간행케 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문헌에 쓰인 목활자는 경전 간행만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져, 이 책 간행 1년 전인 연산군 1년(1495)에 간경도감 후쇄본으로 간행된 〈선종영가집언해〉 등의 발문에도 사용되었었다. 현전하는 상·중권은 원간본이고, 하권은 명종 6년(1551)에 간행된 복각본이다. 각 책들의 현전 현황과 영인 사항, 그리고 형태서지를 밝혔다.

제Ⅳ장에서는 이 문헌에 실려 있는 언어 사실 중 특기할 만한 내용을 살폈다.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ㅸ, ㆆ’ 등의 문자는 이 문헌에 쓰이지 않았다.

2) 각자병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합용병서는 ‘ㅺ, ㅼ, ㅽ; ㅳ, ㅄ, ㅶ; ㅴ, ㅵ’ 등이 보인다. ‘ㅷ’이 쓰이지 않은 것은 이 문헌에 이 글자가 쓰일 어휘가 없었기 때문이다.

3) 중성 표기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중성글자들이 대부분 쓰였으나 동국정운 한자음의 폐기로 ‘ㆇ, ㆊ, ㆈ, ㆋ’ 등 4자는 용례가 없다. ‘ㆉ’는 다른 문헌에 고유어에도 쓰인 예가 있으나([牛]〈월석1:27ㄱ〉) 이 책에는 해당하는 어휘가 없어서 빈칸이다.

4) 종성표기는 ‘ㄱ, ᅌ, ㄷ, ㄴ, ㅂ, ㅁ, ㅅ, ㄹ’의 8종성 외에 ‘ㅿ(워, 상 : 7ㄴ)’이 쓰였다.

5) 한자음 표기는 정음 창제 후 관판(官版) 문헌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던 개신음(改新音)인 동국정운에 의한 한자음 주음 표기가 폐기되고, 그 당시에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현실 한자음이 주음되어 있다. 평음과 유기음으로 주음되어 있는 ‘讚(잔/찬)’과 ‘讖(잠/참)’을 통해 당시에 이 글자들의 유기음화가 진행 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교용어 중 ‘해탈(解脫)’의 ‘解’ 자와 ‘반야(般若)’의 ‘般’ 자가 정음 초기문헌에서부터 이 문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살폈다. 또 오늘날 쓰고 있는 불교용어로서 일반적인 한자음과 다르게 실현되는 ‘波(바/파)’, ‘婆(바/파)’, ‘便(변/편)’, ‘布(보/포)’ 등이 이 문헌에 이미 다르게 주음되어 있는 사실을 살필 수 있었다.

6) 이 문헌의 방점표기는 매우 혼란하여 같은 문헌 내에서도 서로 다르게 표기된 예가 많고, 정음 초기 문헌과 비교해 보아도 다르게 나타난 예가 상당수 보여서 어떤 원칙을 찾기가 어렵다.

7) 사이글자는 예외 없이 ‘ㅅ’으로 통일되었다.

8) 선행 체언이나 어간의 말음이 자음일 때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와 만나면 대체로 연철했으나, 선행 체언의 말음이 ‘ㄴ, ㄹ, ㅁ, ᅌ’일 경우에는 모음 조사와의 통합에서 일부 분철표기한 예가 보인다.

9) 주격과 서술격표기는 각각 선행 체언 말음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이, ㅣ, ∅’나 ‘이-, ㅣ-, ∅-’로 실현되었다. 언해문과 구결문 모두에서 동일하다. 다만 ‘이’나 ‘ㅣ’ 다음의 주격표기에서 ‘ㅣ’를 실현시킨 예가 있는데(一切般若智ㅣ〈상: 55ㄱ〉/ 곧 이 偈ㅣ〈상: 22ㄱ〉), 이는 앞뒤 문장이 이어질 때 오는 해독의 혼란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0) 이 책에서 모음조화는 혼란한 양상을 띤다.

11) 문장 구성의 유형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다. 이 책의 이러한 문체적 특성은 법어라는 저본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이 점 다른 언해본들과 차이를 보인다. 대부분의 문장은 혜능이 깨우침과 관련하여 주변 사람들이나 문인들에게 묻고 대답하는 문답 형식과 설화자(집록자, 또는 책편찬자)가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의문문의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엇뎨 ~-오/고’형이나 ‘엇뎨 ~-가/고’형 의문문이 많이 보인다. 평서형 문장은 대체로 ‘-니라/리라’형 종결형식이 많다. 경어법 사용이 활발하여 존경법 선어말어미 ‘-으시/으샤-’, 겸양법 선어말어미 ‘--’, 공손법 선어말어미 ‘--’의 쓰임이 잦은 편이다.

12) 이 문헌에는 15세기에 간행된 여타의 정음문헌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거나 여기에서만 쓰인 독특한 형태의 어휘가 몇몇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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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眞言勸供 三壇施食文諺解 跋

〈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 발문

김갑기(金甲起) 역

無私一着 箇箇圓成 迷倒妄計 向外空尋 祖祖間生 指出當人衣中之寶 令直下薦取 其語巧妙 明白簡易 如淸天白日 爭奈時人當面蹉過 若六祖大鑑禪師 言簡理豊 祖席中卓然傑出 故古人稱語錄 爲經者 良有以也 我 仁粹大王大妃殿下 嘆時流之急縛 着名相煩煎 域內 不知世外有淸涼底一段光明 所以 命僧以國語翻譯六祖壇經 刊造木字 印出三百件 頒施當世 流傳諸後 使人人皆得披閱 反省自家廓大之面目 其爲願王 豈文言口議之 所能髣髴者哉 當與法性相爲終始 究竟至於無窮無盡之域者 無疑也歟 且施食勸供 日用常行之法事 或衍或倒 文理不序 學者病之 詳校得正 印出四百件 頒施中外焉

弘治九年 夏五月日 跋

사사로운 한 가지 집착도 없이, 낱낱이 원융한 불도를 이루어 망령된 계책에 기울어 밖에서 부질없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셨다. 여러 조사들이 간간이 나서 그 시대 사람들의 몽매함을 깨우칠 귀중한 가르침을 제시하시고, 하여금 곧장 천거하고 취함에[모두 거둬들여 설법할 때], 그 말씀은 교묘하고, 명백하며, 간결하고 쉬워서 마치 맑은 하늘에 밝은 태양과도 같으나, 당대 사람들의 저지르는 과오를 어쩌랴.

(이를테면) 육조 대감선사는 말이 간결하고, 이치가 넉넉하여 여러 조사들 가운데 탁연히 빼어난 분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어록(語錄)’을 일러 ‘경(經)’이라 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우리 인수대왕대비전하께서 시류의 급박함과, 이름에 얽매여 번뇌하고 안타까워 할 뿐, 역내(域內) 세속의 밖에 청량한 일단의 광명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소승에게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나무에 글자를 새겨서[木活字] 삼백 부를 찍어 당세에 반포하시고, 후세에 전할 것을 명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반성하고, 스스로 확대한[일신한] 면목을 갖게 하셨으나, 그것이 부처님을 위해 어찌 문언(文言)과 구의(口議)가 능히 방불하다고만 할 것인가. 마땅히 법성(法性)과 더불어 서로 끝과 처음을 궁구하면, 끝내 무궁무진한 경계(경지)에 이르러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또 〈시식권공(施食勸供)〉은 일상생활에서 평소 행해지는 법사(法事 : 佛事) 따위들이 혹 빠지거나, 혹 바뀌어서 문장의 결이 순서대로 되지 않아 배우는 자들이 그것을 병통(단점)으로 여겼었는데, 자세히 교정하여 바른 것(바르게 된 것)을 얻어, 사백 권을 찍어 내어 중외(조정과 민간)에 반포하노라.

홍치 9년 여름 오월 일에 발문을 쓰다.

≪이륜행실도≫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Ⅰ. 편찬 및 간행

1. 간행 배경 -≪삼강행실도≫의 간행과 관련하여-

조선 왕조는 유교를 국시로 삼고 숭유억불의 정책을 펴면서 유교 도덕의 정착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적인 배려를 도모하였다. 그 중의 하나로서 윤리도덕의 기본 강령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실천하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에 관한 교화서(敎化書)를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삼강행실도≫(1481)를 비롯하여 ≪속 삼강행실도≫(1514), ≪이륜행실도≫(1518), ≪동국신속 삼강행실도≫(1617), ≪오륜행실도≫(1797) 등의 행실도류(行實圖類)가 연이어 간행되었다. 다시 책에 따라서는 시대를 달리 하여 여러 번 간행이 이루어짐으로써 한 책에 대해 여러 종류의 이본(異本)이 전하기도 한다. 이 5가지 행실도는 그 체제에 있어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이 특징이다. 먼저 각 제목마다 그 내용을 압축해서 보이는 삽화(揷畵)가 앞에 제시되고, 그 다음에 한문으로 된 본문이 나오며 그에 대한 언해문도 함께 싣고 있다는 방식이 곧 공통점이다.

행실도 중에서 최초로 간행된 ≪삼강행실도≫의 초간본은 한문본으로서 세종 16년(1434)에 간행된 3권 3책의 목판본이다. 물론 이 책의 간행 목적은 유교의 윤리 강령을 실천하고 확립하는 데에 있을 테지만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세종 때 있었던 패륜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세종 10년(1428) 9월, 진주에 살고 있는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기의 친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형조(刑曹)에서 그를 엄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되었다. 이 상소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세종은 이 사건에 대하여 그 해 10월의 경연(經筵)에서 신하들과 논의하였다. 여기서 당시 판부사(判府事)였던 변계량(卞季良)은 풍속을 교화하기 위한 ≪효행록≫과 같은 책을 널리 펴서 백성들이 많이 읽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이 취지를 세종이 받아들여 ≪효행록≫의 간행을 명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중국은 물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모든 인물 중에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그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새로운 책을 편찬할 것을 명하였는데 주001)

세종실록, 10년 10월 3일(辛巳) : 御經筵 上嘗聞晋州人金禾弑父之事 矍然失色 乃至自責 遂召群臣 議所以敦孝悌 厚風俗之方 判府事卞季良曰 請廣布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尋常讀誦 使之駸駸然入於孝悌禮義之場 至是 上謂直提學偰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 孝行特異者 亦皆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 循對曰 孝乃百行之原 今撰此書 使人人皆知之 甚善
이것이 ≪삼강행실도≫의 간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삼강행실도≫는 세종 16년(1434)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三綱)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세종 때 편찬한 이 책에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쓴 권채(權採)의 서문이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에 집현전 부제학 신 설순에게 명하여 이 책의 편집을 맡게 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을 비롯해서 우리 동방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실린 것을 전부 수집하여 열람한 결과 효자, 충신, 열녀 중에서 행실이 뛰어나 이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이 각각 110명이 되었다. 앞면에는 내용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이고 뒷면에는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찬양하는 시를 붙였다. 이 시는 효자의 경우 태종 문황제께서 하사하신 효순의 사실을 시를 겸해 기록하고, 또 신의 고조가 되시는 신 보가 지은 효행록 중에 명유 이제현의 찬도 실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보신들에게 분담시켜 글을 지으라 하고, 충신, 열녀에 대한 시도 역시 문신에게 분담시켜 지으라 하였다. 편집을 마치자 ≪삼강행실도≫란 이름을 하사하고 주자소에 명하여 판각을 새겨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다.

(乃命集賢殿副提學臣偰循 掌編摩之事 於是自中國 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得 孝子忠臣烈女之卓然可述者各百有十人 圖形於前 紀實於後 而幷系以詩孝子則謹錄 太宗文皇帝所賜孝順事實之詩 兼取臣高祖臣溥所撰孝行錄中 名儒李齊賢之贊 其餘則令輔臣分撰 忠臣烈女之詩 亦令文臣分製 編訖 賜名三綱行實圖 令鑄字所 鋟榟永傳)

이상에서 ≪삼강행실도≫의 편찬은 집현전에서 맡아 완성해 낸 것을 알 수 있다. 설순이 세종의 명을 받고 국내외의 여러 서적을 통해 행적이 뛰어난 효자, 충신, 열녀 각기 110명씩을 뽑은 다음, 이들에 대한 그림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행적 기사에다 시와 찬(贊)을 붙여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의 3권 3책으로 1434년(세종 16)에 편찬 간행하였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간행된 한문본 ≪삼강행실도≫이다.

이와 같이 ≪삼강행실도≫는 고금의 효자, 충신, 열녀를 집대성한다는 의도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책의 규모가 방대해짐으로써 인출과 배포에는 많은 제한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국민교화서로 활용하려던 애초의 취지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문본의 분량도 줄이고 언해문도 붙인 ≪삼강행실도≫의 간행이 요구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1481년(성종 12)에 나온 언해본 ≪삼강행실도≫이다. 이 책은 한문본 3책의 인물 각 110명을 각각 35명으로 대폭 줄이고 한문 본문에 대한 언해문도 난상(欄上) 여백에 실어 3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언해본은 다른 유교 경전의 언해와는 달리 원문에 일치하지 않은 언해를 제법 볼 수 있는데, 이는 내용에 나타난 행적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백성들이 많이 읽음으로써 충(忠)·효(孝)·열(烈)의 삼강(三綱)이 조선시대 사회 전반의 정신적 기반이 되게 하고자 하였다. 이후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시대를 달리 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그 중에서도 1514년(중종 9)에는 ≪삼강행실도≫에서 누락된 충신, 효자, 열녀를 보충하여 ≪속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2. ≪이륜행실도≫의 간행 경위

≪이륜행실도≫는 1518년(중종 13)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편찬한 책이다. 물론 이 책도 ≪삼강행실도≫와 마찬가지로 윤리 도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목적에서 간행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안국이 ≪이륜행실도≫를 간행할 당시에는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여러 면으로 백성들을 위한 교화 활동을 펴고 있었다. 양민을 위하여 ≪농서(農書)≫, ≪잠서(蠶書)≫, ≪벽온방(辟瘟方)≫, ≪창진방(瘡疹方)≫ 등과 같은 농업서와 의서를 언해하여 보급할 뿐만 아니라, ≪동몽수지(童蒙須知)≫, ≪여씨향약(呂氏鄕約)≫, ≪정속(正俗)≫ 등을 언해 보급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소학(小學)≫의 습득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볼 때 국민 교화서로서의 ≪이륜행실도≫의 편찬은 그에게 있어 필수적인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에는 시대적 배경도 한몫하였다. ≪이륜행실도≫가 간행된 해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이어서 나라 사정은 조광조 중심의 신진 사류들이 개혁을 주도하던 때였다. 그들은 문란해진 정치와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고, 향당(鄕黨)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향약의 시행을 추진하며 백성들의 생활에서 도덕 규범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안국도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려 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백성의 교화를 위한 ≪이륜행실도≫의 간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륜행실도≫의 간행 의지는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정덕 무인년(正德戊寅年, 1518, 중종 13)에 쓴 강혼(姜渾)의 서(序)에 나타난다.

본조의 〈삼강행실〉이란 책은 중앙과 지방에 이미 널리 반포되어 사람마다 알고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우러러보고 감격하고 권장하며 힘써 착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제 경상도관찰사 김공 안국이 일찍이 정원에 있을 때 경연에 입시하여 임금께 청하기를 “〈이륜행실〉을 지어 〈삼강행실〉에 첨부함으로 백성들의 보고 느끼는 자료를 구비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도 그 말이 옳다 하고 예조에 명하여 찬집국을 설치케 하고 〈이륜행실〉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미처 이행되기 전에 공이 남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에 부탁을 받은 전 사역원정 조신이 찬집에 대한 책임을 맡아서 역대의 여러 현인들의 장유, 붕우의 교제하고 행한 사실에서 모범될 만한 것을 약간 뽑아 형제도에는 종족도를 붙이고 붕우도에는 사생도를 붙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형용하며 시로 찬양하고 국문으로 번역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삼강행실〉을 모방한 것이다.

(本朝三綱行實之書 旣廣布中外 人人皆知忠臣孝子烈婦之行 爲可仰也 莫不感激奮礪 以興起其善心 獨於長幼朋友二倫 未之見焉 今慶尙道觀察使 金公諱安國 嘗在政院 入侍 經幄 請撰二倫行實 添續三綱 以備觀感 上可之 下禮曹 令設局 撰進 命未及行而 公 出按于南首 囑前司譯院正 曺伸 撰集歷代諸賢 處長幼交朋友 其行蹟 可爲師法者得若干人 於兄弟圖 附宗族於朋友圖 附師生 紀事圖贊諺譯 悉倣三綱行實)

이 서문에 의하면, ≪이륜행실도≫의 간행을 처음으로 건의한 사람은 당시 승정원의 승지로 있던 김안국으로, 경연의 자리에서 중종에게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마침내 왕명으로 편찬을 시행하게 되었으며 해당 부서인 예조(禮曹)에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편찬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김안국이 건의한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그의 행장(行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 의하면 중종 11년(1516)에 상계(上啓)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건의한 내용은 ≪삼강행실도≫의 인간(印刊)이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큰 성과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나서, 그렇지만 ≪삼강행실도≫는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두 가지 윤리가 빠지는 바람에 교화서로서 충분한 것이 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장유유서의 규범은 종족(宗族) 사회에, 붕우유신의 규범은 향당(鄕黨) 사회와 관료들 사이의 관계에 각각 적용되기 때문에 두 규범은 삼강과 함께 오륜이 되므로 제외할 수 없는 인륜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안국은 장유와 붕우의 윤리 내용을 ≪삼강행실도≫에 보충하여 ≪오륜행실도≫를 편찬 반포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널리 활용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주002)

≪慕齋集≫ 권15. 〈先生行狀〉
今上十一年 丙子 公啓曰 祖宗朝 撰三綱行實 形諸圖畵 播之歌詠 頒諸中外 使民勸習 甚盛意也 然長幼朋友 與三綱兼爲五倫 以長幼推之敦睦宗族 以朋友推之鄕黨僚吏 亦人道所重不可闕也 以臣迂濶之見 當以此二者 補爲五倫行實 擇古人善行 爲圖畵詩章 頒諸中外 敦勵而獎勵之 上深然之

이로써 보면, 김안국은 ≪이륜행실도≫를 별도로 간행하기보다는 ≪삼강행실도≫에다 누락된 이륜의 내용을 첨가하여 ≪오륜행실도≫를 펴내는 것이 당초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안국의 이러한 생각은 중종의 윤허를 얻게 되고 마침내 중종은 예조에 명하여 ‘設局撰進’(설국찬진)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시행되기 전에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어 그 이후 ≪오륜행실도≫나 ≪이륜행실도≫의 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이 없다. 이렇게 해서 국가적인 차원의 〈행실도〉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고, 그 대신 김안국 개인적 차원의 ≪이륜행실도≫ 간행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이 책의 편찬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앞에서 인용한 강혼의 서문에 의하면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갔기 때문에 전 사역원정 조신(曹伸)이 편찬의 책임을 맡아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서문의 뒷부분에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가 공경하며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지로 날마다 어진 사대부와 더불어 경서와 사기를 강론하고 정치하는 도를 토의하여 교화시키는 것을 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삼았다. 공도 능히 임금의 뜻을 본받아서 정치를 시작하는 시초에 부지런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편집 간행하여 고을과 마을에 떳떳한 윤리를 심어줌으로써 백성을 변화시키는 근본을 삼았다.

(恭惟我主上殿下 聖智天縱 日與賢士大夫 討論經史講劘治道 莫不以敎化爲致治之先務 公 能上體聖意 賦政之初 汲汲焉編輯是書 刊行州里 以扶植彝倫 爲化民之本)

위의 기사에는 김안국이 ≪이륜행실도≫를 편집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앞에서의 언급처럼 조신 혼자서 편찬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안국이 승지로 있을 때 어떤 형식이든 이륜의 내용이 포함된 행실도가 필요함을 임금에게 건의한 바 있다. 이로 보아 김안국으로서는 이미 ≪이륜행실도≫의 편찬에 관한 구상과 계획이 거의 다 되어 있는 상태에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임해서는 당시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지금의 경북 김천)에 은거하고 있던 조신에게 편찬의 책임을 맡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편찬의 주역은 책에 대한 구상이 서 있었던 김안국이고, 실무적인 차원을 조신이 맡았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간행은 1518년(중종 13) 조신이 거처하고 있는 금산에서 이루어졌다.

3. ≪이륜행실도≫의 체재와 내용

≪이륜행실도≫는 목판본 1책으로서 권차(卷次)가 없다. 책 첫머리에는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강혼(姜渾)의 〈二倫行實圖序〉(이륜행실도서)가 한문으로 3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장부터는 〈二倫行實圖目錄〉(이륜행실도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목록은 兄弟(형제), 宗族(종족), 朋友(붕우), 師生(사생) 별로 행적 기사(行蹟記事)의 제목들이 각각 제시되어 있다. 그 제목들은 주인공의 행적 내용을 핵심적으로 나타내는 4자의 한자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제목이 형제편에 〈伋壽同死〉(급수동사)외 24편, 종족편에 〈君良斥妻〉(군량척처)외 6편, 붕우편에 〈范張死友〉(범장사우)외 10편, 사생편에 〈云敞自劾〉(운창자핵)외 4편 등 모두 48편의 제목들이 차례대로 나열되고 있다. 이 목록 제시는 3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목록이 끝나면 다음 장부터 본문이 시작되는데, 본문은 목록의 순서에 따라 〈二倫行實兄第圖〉(이륜행실형제도. 1ㄱ~25ㄴ), 〈二倫行實宗族圖〉(이륜행실종족도. 26ㄱ~32ㄴ), 〈二倫行實朋友圖〉(이륜행실붕우도. 33ㄱ~43ㄴ), 〈二倫行實師生圖〉(이륜행실사생도. 44ㄱ~48ㄴ)의 차례로 실려 있다. 본문에 수록된 48편의 행적 기사는 일관되게 각 1장(張)으로 되어 있는데 각장의 앞면에는 주인공의 행적 내용을 압축한 그림이 있고, 그림 위의 난상(欄上) 여백에 언해문이 실려 있다. 제목에 따라 어떤 것은 언해문이 뒷면의 난상에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된 행적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거기에다 그 행적을 찬양하는 7언율시를 덧붙여 놓고 있다. 4자로 된 기사의 제목마다에는 주인공의 나라 이름이 병기(倂記)되어 있다. 이러한 체재는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그대로 본 뜬 것이다. 단, 목록 제시에서 ≪이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강행실도≫는 전체 목록을 서문 다음에 일괄해서 제시하지 않고 효자, 충신, 열녀별로 목록을 분리하여 각각 효자도, 충신도, 열녀도의 본문이 시작되는 맨 첫장마다 수록하고 있는데 비해, ≪이륜행실도≫는 형제, 종족, 붕우, 사생별로 되어 있는 제목들을 따로따로 분리하지 않고 서문 다음에 있는 〈이륜행실도 목록〉에서 일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륜행실도≫의 내용은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가르치기 위해서 중국의 역대 명현(名賢) 중에서 장유와 붕우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 48명을 골라 그 행적을 실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장유와 붕우의 개념을 확대하여 장유유서에는 〈형제도〉에 〈종족도〉를 더하였고, 붕우유신에는 〈붕우도〉에 〈사생도〉를 더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장유(長幼)의 개념을 형제라는 혈연적인 가족 관계에서 동기(同氣) 관계가 아닌 동원분파(同原分派)의 겨레붙이까지 확대한 것이고, 붕우(朋友)의 개념은 상하, 귀천, 존비의 차별을 배제하고 도(道)나 덕(德)을 매개로 맺어진 비혈연적인 대등한 인간관계이지만, 도와 덕 이외에 학문과 교육으로 맺어진 사제(師弟) 관계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오륜에서 형제유서라 하지 않고 장유유서라 한 것도 가족만 아니라 종족이나 향당(鄕黨)의 구성원까지를 고려한 결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붕우유신이라는 규범은 장유유서와 달리 가족주의 윤리와는 거리가 있고 신분 계급적인 이데올로기의 성격에서도 멀어져 있으므로 혈연이나 신분 계급을 벗어난 인간관계를 폭넓게 다루고자 했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륜행실도≫에 등장하는 주인공 48명을 나라별로 보면, 한(漢)나라가 12명으로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당(唐), 송(宋)나라로서 각각 10명, 원(元)나라가 5명, 진(晉)나라가 4명, 그 밖에 1명만 되는 나라는 주(周), 촉(蜀), 수(隋)나라 등 모두 일곱 나라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없다. 이는 ≪삼강행실도≫에 우리나라 사람도 등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제 ≪이륜행실도≫의 〈형제도〉, 〈종족도〉, 〈붕우도〉, 〈사생도〉 별로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형제도〉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란 동기(同氣)간에는 어떤 도덕 규범이 요구되는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25편의 사례들은 한 마디로 형제간에 상부상조하는 우애를 보여 준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형제는 친형제간이지만 그 중에는 이복 형제간도 5편이나 되고 4촌 형제도 1편이 있다. 우애의 유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형제간의 희생적인 사랑이다. 납치나 죽을 죄, 모략 등으로 인하여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아우를 구하기 위해 형이 대신 죽으려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도적에게 붙잡혀 죽게 된 아우를 구하기 위해 형이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 동생과 바꿔 주기를 애원하는 사례도 있다. 주003)

〈형제도〉 ⑫ 王密易弟
이처럼 형제 사이에 최대의 우애는 서로 간에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으로 형제간에 서로 베푸는 사랑을 나타내는 사례가 많다. 재산 분배에서 형이 아우에게 양보하는 예를 비롯해서 형제들의 빚을 갚아 준다든가, 어려운 형제를 끌어들여 한데 살게 한다든지 하는 경우들을 보여 준다. 이 밖에도 아우가 형을 부모처럼 섬기는 예, 병든 형을 끝까지 지키는 예, 이복형제간에서도 돈독한 우애를 보여 주는 예 등,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형제간에 실천되어야 할 도덕 규범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종족도〉는 한 조상으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태어난 자손들이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종족은 동일한 조상을 근거로 한 확대된 형제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숙부는 내 부친과 함께 같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숙부·숙모는 결국 내 부모와 같은 존재이고, 조카·질녀도 모두 나의 형제한테서 난 자녀들이므로 나의 친자녀와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비록 7·8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대(代)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한 사람의 자손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종족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장유유서의 유교적 규범에 형제와 종족을 나란히 놓게 된 것이다. 〈종족도〉에는 모두 7편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7편의 공통된 특징이 여러 대가 한 집에서 10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집안에 따라 4대, 9대, 10대, 13대가 한데 살아온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대가족을 이루어 살면서도 분란이 나지 않고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의 구성원 모두가 똑같이 규율과 예절을 엄격히 지키고, 어느 누구도 가산이나 가재를 사유화하지 않았던 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당나라 장공예(張公藝)의 집은 9대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나라에서는 표창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임금이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임금이 장공예를 불러 집안사람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장공예는 붓과 종이를 달라 해서 종이에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써서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주004)

〈종족도〉 ② 公藝書忍
그리고 송나라 진긍(陳兢)의 집은 13대에 70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한데 살면서도 화목하게 지내며 식사 때는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했다. 그래서 이 집의 개도 100여 마리나 되지만 밥 먹을 때 한 마리라도 오지 않으면 모든 개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주005)
〈종족도〉 ③ 陳氏群食
이로써 볼 때 종족 집단도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것을 권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족 내에 장유유서의 규범이 엄격히 준수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붕우도〉는 형제나 종족과 같은 혈연관계가 아닌 벗과의 관계에서 지녀야 할 윤리도덕을 11편의 구체적인 사례로써 보이고 있다. 사례들을 보면 붕우관계에서도 형제간에서 요구되는 이상의 신의와 상부상조의 덕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례의 내용은 친구와의 약속은 꼭 지키며 친구를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난하고 어려운 친구나 그의 가족은 끝까지 돕고 돌봐 주어야 함이 친구의 도리라는 것, 친구가 죽으면 장례를 잘 치러 주는 것 등이 마땅히 할 일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붕우관계에서는 자기가 연장자라는 것, 자기의 신분이 높다는 것, 자기 집안이 힘 있는 집이라는 것 등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행위 규범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끝으로 〈사생도〉는 제자가 스승을 섬기는 태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제관계도 붕우관계와 마찬가지로 비혈연적인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붕우유신의 실천 강령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설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5편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교훈하는 바도 〈붕우도〉에서와 거의 같다. 즉 제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승을 배신하지 말 것과, 스승이 죽으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 사제관계는 학문과 교육 활동을 통하여 맺어지는 인간관계이므로 연령이나 신분에 상관됨이 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일 때 성립한다. 그런 관계가 아닐 때는 사제관계가 될 수 없다. 〈사생도〉에 이런 사례가 있다. 송나라 사람 채원정(蔡元定)은 아버지에게서 많은 학문을 배우고 또 스스로 공부하여 공자 맹자의 학문에 정통하게 되었다. 산에 올라서도 나물로 요기하면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주희(朱熹)의 이름을 듣고 그를 찾아가 스승을 삼고자 하니, 주희가 원정에게 공부한 것을 물어 보고는 놀라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의 늙은 벗이고, 제자의 부류에는 둘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한 평상에 앉아 글의 깊은 뜻을 토론하며 밤중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주006)

〈사생도〉 ⑤元定對榻
이는 사제관계가 가르침과 배움을 매개로 하여 맺어지는 인간관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륜행실도≫는 형제, 종족, 붕우, 사생 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여 준 주인공들의 모범된 행실을 통해서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도덕 규범을 널리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김훈식(1985)에 의하면, ≪이륜행실도≫의 〈붕우도〉에 편성되어 있는 11편은 영종(英宗) 정통(正統) 12년(1447) 명나라에서 간행한 ≪오륜서(五倫書)≫ 권61에 수록되어 있는 35명의 행적 가운데 11명의 사례를 거의 원문 그대로 전재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오륜서≫는 모두 62권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24권만 소장되어 있어 〈붕우도〉 이외의 것은 ≪오륜서≫와의 대조가 불가능하지만, 나머지 〈형제도〉, 〈종족도〉, 〈사생도〉 역시 그 대부분을 ≪오륜서≫의 것에서 전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이륜행실도≫의 간행에 관여한 사람

이에는 먼저 편찬을 임금에게 건의하고 편찬 간행을 주도했던 김안국(金安國)을 들 수 있고, 다음으로는 직접 실무를 맡아 관여했던 조신(曹伸)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책의 서문을 쓴 강혼(姜渾)이 있다. 여기서는 이 세 사람에 대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3)과 ≪한국인명대사전≫(1986. 신구문화사)에 의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성종 9~중종 38)은 문신, 학자이며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다.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 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연산군 9)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장령, 예조참의,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중종 12) 4월에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음 해 3월까지 있으면서 ≪이륜행실도≫를 편찬 간행하였을 뿐 아니라 ≪농서(農書)≫·≪잠서(蠶書)≫·≪여씨향약(呂氏鄕約)≫·≪정속(正俗)≫·≪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언해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1518년(중종 13) 4월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다시 중앙 관리로 왔으나 그 다음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중종 27)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찬성, 판중추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 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그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중종실록 10년 6월 8일(癸亥)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이조 판서 안당이 아뢰기를, “… 승문원 판교 김안국(金安國)과 같은 자는 본래 부지런하고 삼가는 것으로써 봉직(奉職)하여 있는 곳마다 자기의 직책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이와 같은 사람은 차례를 따지지 않고 탁용(擢用)한다면 거의 인심을 진작시키고 선비의 습속을 격려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마땅히 승지를 임명해야 하는데 의망할 만한 자가 적습니다. 바라건대 김안국도 아울러 의망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김안국은 한갓 승지뿐만 아니라 탁용하기에 가장 합당하다.” 하였다.

(吏曹判書安瑭啓曰 … 如承文院判校金安國 本以勤謹奉公 所在無不盡其職任 如此之人 不易多得 … 如此之人 擢用不次 則庶可以振起人心 而激勵士習也 今日當除承旨 而其可擬望者少 請以金安國幷擬 傳曰 金安國 非徒承旨而已 最合於擢用)

안당(安瑭)은 이렇게 말하면서 승지를 발탁함에 있어 이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다. 서열을 따지지 않고 김안국 같은 인물을 뽑는다면 백성들의 인심이 진작되고 선비들의 습속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종실록 11년 11월 7일(甲申)의 기사에도 김안국의 사람됨을 서술하고 있다.

김안국은 사람됨이 성격과 법도가 상명(詳明)하고 간절하여 나라일 하기를 크나 작으나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충성과 정성에 감복했다. 그러나 더러는 그의 까다롭게 살핌을 흠으로 여겼다.

(安國之爲人 性度詳明懇切 爲國家事 無巨細 一出於至誠 時人服其忠懇 而或病其苛察焉)

이로써 김안국은 자기의 할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수행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천거의 대상이나 물망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도 후에 다시 등용된 것은 그의 책임감과 성실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신(曹伸)은 조선 성종 때의 문인이지만 그의 생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는 숙분(叔奮)이고 호는 적안(適庵)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현감 조계문(曹季文)의 아들이며 위(偉)의 서형(庶兄)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어학에도 능통하여 1479년(성종 10)에 통신사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돌아와서 그를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시험하고 시를 짓게 하였더니 그 글이 매우 훌륭하여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채되었다. 외국어에도 뛰어나 역관(譯官)으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安南國)의 사신과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어 그 이름을 날렸다. 만년에는 은퇴하여 금산(金山)에서 지내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륜행실도≫는 이때에 맡아서 간행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적암시고(適庵詩稿)≫·≪유문쇄록(諛聞瑣錄)≫·≪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실록에는 그에 관한 기사가 모두 성종실록에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식은 조계문의 서자였지만 조선시대에 특별한 배려를 받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벼슬이 정삼품인 사역원정에까지 올랐던 것이라 하였다.

강혼(姜渾, 1464~1519. 세조 9~중종 14)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木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강인범(姜仁範)의 아들로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486년(성종 17)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함으로써 문명을 떨쳤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 뒤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되었다. 1506년 중종 반정을 주도하던 박원종(朴元宗) 등이 죽이려 하였으나 영의정 유순(柳洵)의 주선으로 반정군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대제학, 공조판서를 거쳐 1512년(중종 7)에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어 숭록대부에 올라 우찬성, 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명리(名利)를 지나치게 탐낸 데다 특히 연산군 말년에 애희(愛姬)의 죽음을 슬퍼한 임금을 대신하여 궁인애사(宮人哀詞)와 제문을 지은 뒤 사람들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었고, 반정 후에도 이윤(李胤)으로부터 폐조의 행신(倖臣)이라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저술로 ≪목계집(木溪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륜행실도≫의 서문 끝에 있는 ‘正德戊寅 三月日 晉川 姜渾書 于晉之東皐村舍’(정덕무인 삼월일 진천 강혼서 우진지동고촌사)라는 기록을 통해 서문은 강혼이 1518년(중종 13)에 그의 본관인 진주에 낙향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Ⅱ. ≪이륜행실도≫의 판본

현재까지 전하는 판본에는 원간본으로 알려진 옥산서원본(1518, 중종 13)을 비롯해서 학봉(鶴峯) 내사본(1579, 선조 13)이 전하고 있고, 이후 1727년(영조 3)에 중간된 기영본(箕營本)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기영본을 판하(版下)로 하여 1730년(영조 6)에 각 감영에서 간행된 복각본인 강원감영판, 영영판(嶺營版), 해영판(海營版) 등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순천대, 전남대, 충남대 등의 도서관에도 ≪이륜행실도≫의 이본(異本)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간행 연대를 알 수 없는 서울대의 가람문고본은 홍윤표 교수의 해제를 붙여 강원감영판(1730)과 함께 홍문각에서 1990년 영인한 바 있고, 순천대본에 대해서는 정연정(2008)의 조사 보고가 있다.

1.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의 소장본이다. 옥산서원은 1572년(선조 6)에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李齊閔)이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독락당(獨樂堂) 아래에 서원을 세웠으며,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1574년(선조 8)에 ‘玉山’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이 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거처하던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이 책은 독락당 소장본으로서 목판본 1책인데 책의 크기는 세로 39cm, 가로 22cm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4.2cm, 가로 15.9cm이다. 순서는 서문 3장, 목록 3장, 본문 48장, 열함(列銜) 1장 순으로 모두 55장이며, 강혼의 서문은 유계(有界) 10행, 매행(每行) 18자이고, 목록, 본문, 열함 부분은 모두 유계 13행에 본문의 한문 기사는 매행 22자로 되어 있다. 언해문은 도판(圖版)이나 한문 본문의 광곽(匡廓) 밖의 난상(欄上) 여백에 있으므로 계선(界線)이나 변(邊)은 없이 한 면이 17행, 매행 10자로 되어 있는 가운데 더러는 한 행이 9자~13자로 된 장(張)이 제법 있다. 실제로 본문의 첫 장 〈급수동사(伋壽同死)〉와 둘쨋 장 〈복식분축(卜式分畜)〉의 경우에 언해문의 한 행이 10자인 경우는 없고 9자가 한 행 있으며 그 밖에는 모두 11~13자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흑구(黑口), 어미(魚尾)는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며 어미 사이에 판심제 〈二倫圖(이륜도)〉와 장차(張次)가 있다.

그러면 이제 옥산서원본의 간행 연대는 언제이며, 이 책이 실제로 ≪이륜행실도≫의 초간본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언해문에 방점이 있다든지 ㅿ이 쓰였다든지 하는 국어학적인 검토는 장을 달리 하여 논의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서지적인 검토에 한하려 한다. 먼저, 권두(卷頭)에는 정덕무인년(正德戊寅年, 1518. 중종 13) 3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강혼의 서문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연대가 권말(卷末)에 있는 간기(刊記) ‘正德戊寅春刊板’(정덕무인춘간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간행 연대는 1518년(중종 13)이고 따라서 초간본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거기에다 서문에 나오는 김안국, 조신의 이름이 권말에 있는 열함에도 명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강혼의 서문에 있는 “이것을 금산군에서 간행함에 있어서 나에게 서문을 쓰라 하기에 내가 이 책을 받아 읽었다.”(刊于金山郡 請余爲序 余受而讀之)라는 기록으로 책이 금산군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권말의 간행자 명단에 금산군수 박거린(朴巨鱗)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초간본임을 말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옥산서원본은 이언적의 수택본(手澤本)으로서 맨 앞 장에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내사본이다. ‘宣賜之記’(선사지기)라는 내사인(內賜印)이 있고, “嘉靖十八年八月日 內賜全州府尹李彦迪二倫行實一件 命除[謝恩] 同副承旨臣崔”(가정십팔년팔월일 내사전주부윤이언적이륜행실일건 명제[사은] 동부승지신최)라고 기록된 내사기가 있다. [ ] 부분은 글자가 지워져 있지만 그 글자가 ‘謝恩’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 나타난 내사 연대가 가정(嘉靖) 18년(1539. 중종 34)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간행 연대인 1518년과는 21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간년(刊年)보다 21년 늦게 내사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실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예를 보면, 책의 인출이나 간행이 완료되는 날 대개 임금에게 진상하였고, 이어 그 날로 바로 반사(頒賜)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내사기에 표시된 일자는 통상적으로 그 책의 인출·간행이 완료된 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옥산서원본은 1518년에 갼행된 초간본이 아니고 내사기에 나타난 대로 1539년(중종 34)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옥산서원본을 논의한 보고서가 송종숙(1989)이다.

송종숙(1989)에 의하면, 중종 33년 7월 7일의 실록에는 예조판서로 중용된 김안국이 다시금 ≪이륜행실도≫를 간행하여 반포할 것을 건의하매 중종이 이를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주007)

중종실록 33년 7월 7일(戊寅) : 禮曹判書金安國啓曰 三綱行實則旣已刊行矣 五倫之中 長幼朋友二事 別無擧行 故臣爲慶尙道觀察使時 撰集二倫書 兄弟之類 附親戚 朋友之類 附師生 書成印布 使一道之人 無不知之 臣意以此二倫書 廣印頒布至當 傳曰如啓
, 그 이듬해인 중종 34년(1539) 8월24일의 실록에는 ≪이륜행실도≫를 백관(百官)에게 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주008)
중종실록 34년 8월 24일(戊子) : 命頒賜二倫書于百官
을 볼 때, 옥산서원본의 내사 연대는 실록에 나오는 반사 연대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사 연대인 1539년(중종 34)이 바로 옥산서원본의 간행 연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옥산서원본은 초간본이 아님을 내사기에 의해 알 수 있지만 이때가 초간본 간행 후 불과 20여 년 정도 지났을 때라 초간본의 책판(冊板)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초간본의 서문과 간기가 옥산서원본에도 그대로 실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내사기에 쓴 날짜와 책의 인출·간행 일자가 언제나 일치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서 내사가 뒤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더러 있는 일이다. 그 한 예로 ≪어정인서록(御定人瑞錄)≫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은 1794년(정조 18) 9월 24일에 그 편찬이 끝나고 바로 그 해에 생생자(生生字)라는 목활자로 찍어서 반포한 책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70년 뒤인 1860년(철종11) 4월의 내사기가 있는 책이 고려대 도서관 신암문고(薪菴文庫)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794년에 인출된 책과 내사본을 비교해 본 결과 똑같이 생생자(生生字)로 찍은 동일한 책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이 간년(刊年)과 내사 연대 사이에 많은 차이가 나는 예외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륜행실도≫의 경우도 바로 이 예외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김안국의 주도로 1518년(중종 13)에 간행하였으나 그 이듬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김안국은 파직되고 책판은 사장되는 등의 돌발 사태로 내사가 간년(刊年)보다 20년 이상 뒤늦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옥산서원본은 내사기에도 불구하고 서문과 간기에 명기된 정덕무인(正德戊寅. 1518)에 간행된 초간본이라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고 본다.

이상의 옥산서원본은 안병희 교수의 자세한 해제를 붙여 규장각본과 함께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1978년에 영인하여 냄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와 동일한 판본이 이화여대 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안 교수는 일본 동경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이륜행실도≫를 소개하면서 이 책에는 권말의 간기장(刊記張)이 없고 전체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방점이 사용되었고 표기법이나 언어 현상이 옥산서원본과 일치하므로 초간본으로 다루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번에 역주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이 옥산서원본이다.

2. 학봉(鶴峯) 내사본(內賜本)

이 판본은 교서관(校書館)에서 개간한 것으로 1579년(선조 13)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 내사된 책이며 현재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다른 판본과 마찬가지로 서문 3장, 목록 3장, 본문 48장의 체재이다. 권말 간기는 없고 권두에 “萬曆七年五月日 內賜吏曹正郞金誠一二倫行實圖一件 命除謝恩 右承旨臣申”(만력칠년오월일 내사이조정랑김성일이륜행실도일건 명제사은 우승지신신)이라고 쓴 내사기가 있어 이 책이 만력(萬曆) 7년, 즉 1579년에 간행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언해문은 초간본과는 달리 반엽(半葉)이 18행 11자로 되어 있으며 어미는 상하대흑구 어미 외에 2엽화문 어미와 3엽화문 어미가 섞여 있다. 방점이 전혀 없고 ㅿ도 볼 수가 없으나 ㆁ은 종성에 한해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번역이나 표기, 어휘 사용 등에서 초간본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ㆍ’와 관련한 표기례를 한 가지 들어 본다면, 초간본에는 ‘사’[人]으로 표기한 예가 8회인 반면에 ‘사름’으로 표기한 예가 21회 등장한다. 그러나 학봉 내사본에는 ‘사’이 29회, ‘사름’이 7회로 나타나 ‘사’의 형태를 많이 회복하고 있다. 동사 ‘호-’[分]의 형태도 초간본에는 1회만 쓰였고 ‘논호-’가 11회로 주류를 이루었으나, 학봉 내사본에서는 ‘논호-’가 자취를 감추고 ‘호-’만 11회 나타나고 있다.

3. 규장각본

이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을 말한다. 규장각본에는 기영(箕營)에서 간행된 지방판과 강원도감영판(江原道監營版)이 있다. 기영판(箕營版)은 권말(卷末)에 “丁未四月日 箕營開刊”(정미사월일 기영개간)이라는 간기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영(箕營)은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던 평안도 감영을 말하므로 이 책은 평안도에서 간행된 것이다. 간행 연대가 정미(丁未)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그 연대를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간기를 갖고 있는 판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사기가 있는 책이 발견되어 연대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擁正八年三月二十一日 內賜同知義禁府事梁聖揆 二倫行實一件 命除謝恩 行都承旨趙”(옹정팔년삼월이십일일 내사동지의금부사양성규 이륜행실일건 명제사은 행도승지조)라는 기록에서 내사 연대 옹정(擁正) 8년은 1730년(영조 6)이므로 기영판의 정미년은 1727년(영조 3)임을 알 수 있다. 기영판은 평안도에서 1727년에 간행한 것을 중앙으로 보내어 3년 뒤 인출·내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안병희(1978)에 의하면, 이 책의 크기가 세로 38.3cm, 가로 23cm이며, 판식(板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곽(半郭)의 크기가 세로 24.6cm 가로 16.5cm으로 되어 있다. 책의 체재는 초간본인 옥산서원본과 거의 같아서 맨 첫 장부터 서문 3장, 목록 3장, 본문 48장 순으로 모두 54장이고, 열함이 없는 것이 초간본과 다른 점이다. 강혼의 서문은 초간본과 동일하게 유계(有界) 10행, 매행(每行) 18자이고, 목록과 본문 부분도 똑같이 모두 유계 13행에 본문의 한문 기사는 매행 22자로 되어 있다. 언해문은 이 책에서도 도판(圖版)이나 한문 본문의 광곽(匡廓) 밖의 난상(欄上) 여백에 있으므로 계선(界線)이나 변(邊)은 없이 한 면이 17행으로 되어 있지만, 매행은 초간본과 달리 11자를 일관되게 쓰고 있다. 판심(版心)은 백구(白口)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로 되어 있고 판심제인 〈二倫圖(이륜도)〉와 장차(張次)가 어미 사이에 있다. 초간본의 흑구 흑어미가 이 판본에서는 백구 화문어미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기영판에는 초간본에 쓰였던 방점, ㅿ, ㆁ이 모두 폐기되었고 표기법에서 중철(重綴)이 많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번역에서도 초간본과는 달리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으며, 이는 학봉 내사본의 번역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규장각본의 또다른 판본으로서 강원감영판(江原監營版)이 있다. 맨 끝의 간기에 “庚戌仲夏上旬日 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臣李衡佐奉 敎刊布”(경술중하상순일 통정대부수강원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신이형좌봉 교간포)라고 되어 있어 1730년(경술, 영조 6)에 강원도감영에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판본과 마찬가지로 강혼의 서문, 목록, 본문 순으로 편찬되어 있지만 목록이 다른 판본에서는 3장에 걸쳐 제시되어 있는 것을 강원감영판에는 1장에 모아서 제시한 점이 다르다. 그러나 목록의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기영판은 전체가 54장인 반면에 이 판본은 52장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다른 판본이 모두 사주쌍변인데 비해 이 판본은 사주단변인 점이 약간 다를 뿐 그 밖의 사항은 기영판과 동일하다.

영조실록 6년 8월 6일 임인(壬寅)조를 보면 “≪삼강행실≫과 ≪이륜행실≫을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한원(翰院)에 내려 주라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주009)

영조실록 6년 8월 6일(壬寅) : 命賜三綱行實二倫行實于政院玉堂翰苑
이보다 앞서 영조 5년 8월 27일 기사(己巳)조에는 “교서관에 명하여 ≪삼강행실≫을 인출하여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감영(監營)에서 각인(刻印)하여 널리 배포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주010)
영조실록 5년 8월 27일(己巳) : 命校書館, 印出三綱行實 分送諸道 使監營 刻印廣布
이처럼 영조 5년의 실록에는 교서관에서 ≪삼강행실도≫를 인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륜행실도≫의 인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영조 6년의 실록에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동시에 반사(頒賜)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이륜행실도≫의 경우에 이미 3년 전인 1727년(영조 3)에 간행된 기영판이 있기 때문에 다시 교서관에서 개판(開板)할 필요 없이 각도(各道)에서 기영판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730년에 인출하도록 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1730년(영조 6)에 간행된 ≪이륜행실도≫의 각도 감영판들이 현존하고 있는 것을 보아 ≪삼강행실도≫와 함께 ≪이륜행실도≫의 인출·반사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강원감영판 외에 “庚戌六月 嶺營開刊”(경술유월 영영개간)의 간기가 있는 경상감영판(慶尙監營版)과 “庚戌八月 海營開刊”(경술팔월 해영개간)의 간기를 가진 황해감영판(黃海監營版)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규장각에 소장된 강원감영판은 아래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영판의 복각본(覆刻本)이라 할 정도로 기영판과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경상도·황해도의 감영판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이후로는 1797년(정조 21)에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개정 ·합편하여 ≪오륜행실도≫를 간행함으로써 ≪이륜행실도≫를 단독으로 간행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합편된 ≪오륜행실도≫ 중의 〈이륜〉 부분에는 합편되기 전의 ≪이륜행실도≫보다 1편이 줄어 모두 47편이 실려 있다. 제외된 1편은 형제편의 〈盧操策驢(노조책려)〉이다. 그 밖에 제목이 바뀐 것이 1편, 제목의 배치가 달라진 곳이 2곳 등이 있다.

이제 이상에서 소개한 4종의 판본, 즉 옥산서원본(1518), 학봉내사본(1579), 규장각본 중의 기영판(1727), 규장각본 중의 강원감영판(1730)들 사이에는 그 차이가 어느 정도로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동일한 원문 구절에 대한 언해문의 예를 4종의 판본에서 몇 개 제시해 보인다. 각 예문의 출전 표시는 네 판본명의 첫 글자를 따서 각각 〈옥〉·〈학〉·〈기〉·〈강〉 등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옥 1ㄱ’은 옥산서원본 1장(張)의 앞면을 말하고, ‘학 21ㄴ’은 학봉내사본 21장의 뒷면을 가리킨다.

⑴ 衛 公子壽者 宣公之子

ㄱ. 윗나랏  슈 션의 아리니(옥 1ㄱ)

ㄴ. 윗나라  슈 션이란 님금의 아리니(학 1ㄱ)

ㄷ. 윗나라 공 슈 션공이란 님금의 아리니(기 1ㄱ)

ㄹ. 윗나라 공 슈 션공이란 님금의 아리니(강 1ㄱ)

⑵ 諸婦 遂求分異

ㄱ. 모 며느리들히 논화 닫티 사져 고(옥 7ㄱ)

ㄴ. 모 겨집들히 화 닫 사져 고(학 7ㄱ)

ㄷ. 모 겨집들히 화다가 사져 고(기 7ㄱ)

ㄹ. 모 겨집들히 화다가 사져 고(강 7ㄱ)

⑶ 李光進 事親有至性

ㄱ. 니진니 어버 잘 셤기더니(옥 18ㄱ)

ㄴ. 니진이 어버이 셤교 장 지오로 호미 잇니(학 18ㄱ)

ㄷ. 니광진이 어버이 셤기 장 지셩으로 호미 잇니(기 18ㄱ)

ㄹ. 니광진이 어버이 셤기 장 지셩으로 호미 잇니(강 18ㄱ)

⑷ 逋負 以已儲錢償之

ㄱ. 빋 낸 것도 내 뎌튝 거로 가포려 대(옥 21ㄴ)

ㄴ. 빋 낸 것도 내 톄튝 쳘오로 가푸려 노라 대(학 21ㄴ)

ㄷ. 빗 낸 것도 내 톄튝 쳘량으로 가프려 노라 대(기 21ㄴ)

ㄹ. 빗 낸 것도 내 톄튝 쳘량으로 가프려 노라 대(강 21ㄴ)

⑸ 次年彦霄 一擧登第 鄕人大敬服之

ㄱ. 버근 예 언 급뎨니라(옥 21ㄴ)

ㄴ.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미 크게 고마고 복더라(학 21ㄴ)

ㄷ.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이 크게 공경고 항복더라(기 21ㄴ)

ㄹ.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이 크게 공경고 항복더라(강 21ㄴ)

⑹ 恨不見吾死友范巨卿

ㄱ. 내 죽쟈 사졋 벋 범거을 몯보애라(옥 33ㄱ)

ㄴ. 내 죽쟈 사쟈 사괴 벋 범식을 몯 보애라 고(학 33ㄱ)

ㄷ. 내 죽쟈 사쟈 사괴 벗 범식을 못 보애라 고(기 33ㄱ)

ㄹ. 내 죽쟈 사쟈 사괴 벗 범식을 못 보애라 고(강 33ㄱ)

예문 (1)~(6)을 통해서 각 판본별로 나타난 몇 가지 언어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표기 문자에 있어서 ㅿ과 ㆁ의 사용은 초간본인 옥산서원본에 한해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학봉내사본에서는 ㅿ은 소멸되었지만 ㆁ은 아직 종성에서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후 규장각본에서는 ㅿ, ㆁ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리고 규장각본의 시기는 이미 7종성의 시대이므로 규장각본 이전의 판본에서 쓰였던 ㄷ종성은 규장각본에 와서 모두 ㅅ으로 교체되었다. 무엇보다 옥산서원본 이후에 나타난 뚜렷한 특징은 번역 양식(樣式)의 차이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학봉내사본부터는 한문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예문 (3), (5)가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예문 (5)에서는 옥산서원본의 번역문이 원문의 한 구절을 빼놓고 있다. 그러나 학봉내사본부터는 빼놓은 구절까지 충실히 번역해 놓았다. 이로써 볼 때 옥산서원본 이후의 판본들은 모두 학봉내사본의 번역 태도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5)의 학봉내사본에 쓰인 낱말 ‘고마’는 16세기까지만 존재했다가 그 이후는 ‘공경’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Ⅲ. 국어학적 고찰

1. 표기와 음운

1) 표기 문자

15세기 후반에 이미 ㆆ과 ㅸ은 국어에서 쓰이지 않고 소멸되었기 때문에 16세기 초의 문헌인 ≪이륜행실도≫에는 물론 찾아볼 수 없다. 이 문헌은 언해문에서 한자어도 순 한글로만 표기하고 있어 한자음 표기와 관련해서 간혹 ㆆ이나 ㅸ이 사용될 경우도 여기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반면에 ㆁ과 ㅿ은 이 문헌에서 15세기 국어에서와 같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ㆁ은 종성으로만 쓰였고 초성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상대 높임법의 ‘--’의 경우에만 초성에 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제시하는 모든 문례(文例)는 초간본인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의 것이므로 출전 표시에서 문헌 약호 〈옥〉은 생략하되 특별히 중간본의 예가 필요할 경우에는 규장각본의 기영판을 이용하며 그 약호는 〈기〉로 표시한다.)

(7) ㄱ. 내틸 거시다(8ㄱ)

ㄴ. 그리 거시가(39ㄱ)

ㄷ. 니를 듸 업세라 더다(42ㄴ)

ㄹ. 그듸 어마님 뵈오다(33ㄱ)

cf. 셔 주이다(42ㄴ)

이 문헌에 쓰인 상대 높임법의 문례(文例)는 (7)의 것이 그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셔 주이다’에서는 상대 높임법의 ‘--’가 ‘-이-’로 대체되고 있음을 볼 때 초성에서는 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ㅿ의 사용 실태는 15세기 국어에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일일이 예를 다 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그 일부만 보이기로 한다.

(8) 손(1ㄱ)아(2ㄱ)녀름지(2ㄱ)머리 조(7ㄱ)(8ㄱ)

이제(11ㄴ)마라(17ㄱ)처(18ㄱ)두(19ㄱ)(20ㄱ)

거(21ㄱ)니(22ㄱ)구(28ㄱ)지(30ㄱ)이고(33ㄱ-ㄴ)

이로써 볼 때 ㅿ은 이때(16세기 초)가 되어서도 위축되거나 동요됨이 없이 그 존재가 확고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극히 일부에서 ㅿ이 소실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9) (15ㄱ, 28ㄱ) - 이(8ㄱ, 15ㄱ)

어버(11ㄱ, 15ㄱ, 18ㄱ) - 어버이(3ㄱ)

위에서 보듯이 ㅿ의 소실은 ‘’와 ‘어버’의 두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16세기에 들어서 ㅿ의 소실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실이 일정한 환경에서 시도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유독 i 모음 앞에서 ㅿ 탈락이 먼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ㅿ이 소실되기 시작한 16세기 초의 문헌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일이다. 이들 문헌에서 ㅿ 탈락의 예로 나타나는 낱말들이 주로 ‘이’ ‘어버이’ ‘녀름지이’ 등에 한하고 있음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속삼강행실도≫(1514)에는 ‘어버’는 없고 그 많은 경우에 오직 ‘어버이’로만 나타나는데, 이 낱말에서도 i 모음 앞이 아닐 때는 ㅿ이 엄연히 유지되었던 것을 ‘어버’(효자도 27ㄱ, 35ㄱ)의 예가 보여 주고 있다. ≪속삼강행실도≫에 ‘이’는 사용되지 않아 그 예를 볼 수 없지만, ‘녀름지이’(효자도 1ㄱ)가 또한 ㅿ 탈락의 예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15세기 국어에서 ‘녀름지’였는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ㅿ 탈락의 첫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이로써 ≪이륜행실도≫(1518)는 국어의 경우에 ㅿ이 일정한 환경에서 일부 소실이 나타난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 ㅿ이 15세기와 다름없이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이륜행실도≫(1518)에 ‘이’ 이외에 ‘시’로도 쓰인 예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10) 家人百餘口 無間言

ㄱ. 지븻 사미 일기 나모 싯마리 업더니라(32ㄱ)

ㄴ. 집 사이 일이 나모 이예 말이 업더라(기 32ㄱ)

물론 ㅿ이 ㅅ으로 대체되어 쓰인 예는 ‘시’ 외에도 ‘’[心] ‘우솜’[笑] ‘그슴’[限] 등을 더 들 수 있고, 이들은 대개 16세기 후반의 문헌에서 주로 발견되는 예들이다. ‘시’[間]의 등장도 ≪칠대만법≫(1569)에서가 최초인 것으로 지금까지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10ㄱ)의 예문에 등장하고 있는 ‘싯마리’[間言]를 근거로 ‘시’의 최초 등장 시기는 종전보다 50년 앞당겨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초간본 ≪이륜행실도≫에서는 ‘’ ‘이’ ‘시’의 세 형태가 다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ㅿ은 중세국어에서 유성음 사이에 국한되어 분포하였다. 간혹 어두(語頭)에도 나타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의성어나 중국어 차용어에서였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한자어도 아닌 고유어의 표기에서 어두에 ㅿ이 사용된 예가 아래와 같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표기의 혼란으로 보인다.

(11) ㄱ. 모다 닐우 다샤 이 며(咸曰異哉此子) (11ㄱ-ㄴ)

ㄴ. 그 미 집븨 와 어미 조쳐 구거(致人踵門詬及其母) (17ㄱ)

ㄷ. 아과 희 아  크나 쟈나 다 려록야(錄親戚及閭里知舊自大及小) (29ㄴ)

ㄹ. 쥬희의 일후믈 듣고 가 스 니(聞朱熹名往師之) (48ㄱ)

‘사’[人]을 ‘’으로, ‘삼다’[爲]를 ‘다’로 표기한 것은 ‘’가 ‘시’로 표기된 예와 관련하여 ㅅ과 ㅿ 사이에 서로 역표기가 일어난 결과로 보인다.

15세기 말의 현실 한자음에서 ㅿ 초성을 갖는 한자로 二(), 日(), 人(), 如(), 而(), 任(), 然(), 兒(), 染(), 讓() 등이 있다. 그런데 15세기 문헌은 언해문에 한자어가 나오면 으레 한자로 적고 거기에 한자음을 달고 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오면 한자어라도 한자로 적지 않고 순 한글로만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더라도 한자어는 15세기 말의 현실 한자음에 부합되게 적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열거한 한자들이 포함된 낱말일 경우는 ㅿ이 초성에 나타나는 표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초의 ≪이륜행실도≫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것은 ㅿ 초성의 한자가 쓰인 낱말임에도 한글 표기에 ㅿ이 나타나는 예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유어 표기에서는 ㅿ의 사용이 15세기와 거의 다름이 없지만 한자어 표기에서는 ㅿ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있다.

(12) ㄱ. 두 아 야(4ㄱ) 의게 고(16ㄱ)

cf. 成佛호미 녜  아니 련마(법화경 언해 5:179ㄱ)

ㄴ. 네 몸 닷가 인늬 일 호려 호(7ㄱ)

cf. 현은 을 라고(번역소학 8:2ㄴ)

ㄷ.  일 어든(31ㄱ)

cf.  밥 머글  니르런(육조법보단경 상:40ㄱ)

ㄹ. 인이 다 식글 컨마(12ㄱ)

cf.  마 가(번역박통사 상:67ㄱ)

ㅁ. 이제 모딘 도 뎐염티 몯 줄 알와라(11ㄴ)

cf. 긔 서르 뎐야(분문 온역이해방 1ㄴ)

ㅂ. 지븻 이리 연히 화동리라(27ㄱ-ㄴ)

cf. 긔우니 초 기드리면 히 살리니(구급간이방 1:66ㄱ)

ㅅ. 그 나래 과연히 와 어믜게 절고(33ㄱ)

cf. 그 주구매 미처 과히 그 말와 니(번역소학 8:20ㄴ)

ㅇ. 모도아 이 마 나 러니(31ㄱ)

cf.  번을 고 프리예 리라(구급간이방 6:85ㄴ)

위의 (12) 예문에 등장하는 한자어 ‘(辭讓), 인(聖人), (每常), 인(人情), 뎐염(傳染), 연(自然), 과연(果然), 이(二百)’ 등에서 ‘’과 ‘’을 제외하고는 ≪이륜행실도≫와 거의 같은 시대거나 조금 앞선 문헌에서 모두 ㅿ이 유지된 표기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륜행실도≫에서는 이들 한자어의 한글 표기에서 모두 ㅿ이 소실된 표기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문헌에서는 ㅿ의 소실과 관련하여 고유어와 한자어 사이에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고유어처럼 인식하여 한글 ‘’으로 표기되다가 15세기 말에 이미 ‘’으로 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 종성에 있어서의 ㅅ과 ㄷ의 구별 표기는 혼란됨이 없이 15세기 중엽의 질서대로 잘 지켜지고 있다.

(12) 몯여(1ㄱ) 듣고(7ㄱ) 엳와(14ㄱ) (19ㄱ) 고(20ㄱ)

빋낸(21ㄱ) 이받더니(29ㄱ) 곧 더라(31ㄱ) 묻고(33ㄴ) 벋(34ㄱ)

(37ㄱ) 니고(46ㄱ)

(13) 엇디(7ㄱ) 옷밥(8ㄱ) 닷쇄(12ㄴ) 뉘읏브료(14ㄱ) 다(21ㄱ)

거즛(22ㄱ) 삿기(26ㄱ) 갓가이(29ㄱ) 믈읫(30ㄱ) 밧고(脫. 37ㄱ)

주검곳 잇거든(36ㄴ)  것(43ㄴ)

이제 초성에 쓰인 자음의 병서자(並書字)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각자병서(各自並書)는 ≪원각경 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 자취를 감추어 버려 이 문헌에서도 각자병서는 전혀 볼 수 없다. 한 예로, 이 문헌에 나오는 아래 (14)의 ‘글 서’와 ‘몯’가 각자병서의 폐지 전에는 모두 ‘글 써’와 ‘몯’로 표기되던 낱말들이지만 이때는 각자병서가 없어졌으므로 ‘글 서’와 ‘몯’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4) 글 서 주고(19ㄱ) 아비 위여 글 서(31ㄴ) 벼슬 몯(4ㄱ)

cf. 妃子ㅅ金像 샤 婦德을 쓰시니다(월인천강지곡 상:14ㄱ)

제 몸 닷  고  濟渡 몯(석보상절 13:36ㄱ)

그리고 초성의 합용병서(合用並書)는 15세기 국어의 체계대로 ㅅ계, ㅂ계, ㅄ계의 병서자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15세기의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그동안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ㅅ계의 ㅺ, ㅼ, ㅽ은 경음(硬音)을 나타내기 때문에 경음 체계에 별 변동이 없었던 당시에 ㅅ계의 합용병서는 아무 변동 없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ㅺ : 러(8ㄱ) 돗 라(17ㄱ) 즈름(22ㄱ) 여(22ㄴ)

ㅼ : (1ㄱ) 밤만(22ㄱ) 해(33ㄴ) (40ㄱ)

ㅽ : (22ㄴ) 삼쳔 필 잇거(29ㄴ)

그러나 ㅂ계와 ㅄ계의 병서에서는 약간의 변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ㅴ을 대체한 ㅲ이 새로 등장한 점이다. 그러면 이 문헌에 실제로 등장하는 ㅂ계와 ㅄ계의 병서를 열거해 본다.

ㅲ : 일 어든(31ㄱ)

ㅳ : 러디(11ㄱ) 와(22ㄱ) (26ㄱ) (48ㄱ)

ㅄ : (6ㄱ) 러리니라(10ㄴ) 더라(13ㄱ)

ㅶ : 거슬 도니(27ㄱ)

ㅴ : 아모(33ㄴ)

자료의 제약으로 15세기 국어에서 사용했던 ㅷ과 ㅵ의 예는 이 문헌에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한편으로 ㅂ계나 ㅄ계의 자음군이 자음 아래 연결되었을 때 이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15) ㄱ. 니 죄 니브면 죽도록 몹스리라 대(5ㄱ)

cf. 부텨 供養기 外예 년 듸 몯 리니(석보상절 23:3ㄴ)

ㄴ. 갑시 업서 힘서 질 여(37ㄱ)

cf. 生死 버술 이 힘  求야 리라(월인석보 10:14ㄴ)

ㄷ.  셔울 동가셔 나닐 제(41ㄱ)

cf.  소리내야 (석보상절 9:39ㄴ)

(15ㄱ)에 쓰인 ‘몹스리라’는 원래 ‘몯 리라’였는데, ‘몯 리라’가 한 낱말로 의식되면서 두 자음만이 허용되는 모음 사이에서 세 자음(ㄷ, ㅂ. ㅅ)이 개재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ㄷ이 탈락되고 그 자리에 자음군 ㅄ의 ㅂ이 이동함으로써 ‘몹스리라’가 되었다. 이 말은 오늘날의 ‘몹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5ㄴ)에서 볼 수 있는 ‘힘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원래는 ‘힘 ’이므로 모음 사이의 세 자음(ㅁ, ㅂ, ㅅ)이 역시 문제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양순음이 거듭된 상태여서 양순음 ㅁ 아래의 ㅂ이 탈락하여 ‘힘서’로 변하게 된 것이다. 또한 (15ㄷ)의 ‘’도 ‘’[一時]에서 같은 원리로 변한 것이다. 15세기의 ‘’가 16세기에 들어서 ‘’로 변한 것은 ㅴ의 ㅂ이 그 앞의 ㄴ을 ㅁ으로 순음화시키고 자신은 탈락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ㅴ의 나머지 ㅺ은 경음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음군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의 ㄴ, ㅂ, ㅺ 세 자음이 ㅁ, ㅺ의 두 자음으로 바뀐 결과가 ‘’로 된 것이다. ‘힘서’와 ‘’는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어형이 되었다.

ㅂ계의 합용병서를 논의하는 첫머리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ㅲ에 대해서 약간 덧붙이고자 한다. ㅲ은 본래 15세기에는 없었던 병서자이다. 17세기에 오면서 3자 병서인 ㅴ, ㅵ이 소멸의 길로 들어서자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같은 ㅂ계의 2자 병서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ㅵ은 기존의 ㅳ이 있어 대체가 가능하였지만 ㅴ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ㅴ의 대체자로 ㅲ이 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ㅲ이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 등장한 것이다. 이 문헌에는 ‘’를 제외하고는 ㅴ이 아직 쓰이고 있어 ㅲ의 등장은 시기상조로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 전하는 문헌으로는 초간본 ≪이륜행실도≫가 ㅲ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음절말의 자음군으로는 ㄺ과 ㄻ이 쓰였다. 자음이나 휴지(休止) 앞에서도 음절말의 ㄺ과 ㄻ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6) 늙고(34ㄱ)  지여(45ㄱ) 겨지라(6ㄱ)

국어의 모음 표기에 있어서는 특기할 사항이 없다. 이 문헌에서는 언해문에 한자를 전혀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자음 표기에서 사용되던 희귀한 모음들을 이 문헌에서는 일체 볼 수 없다. ‘ㆍ’ 관련 모음 이외에 현대 국어에 없는 모음이 사용되었다면 ㆉ, ㆌ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말음이 ㅛ, ㅠ인 인명(人名)에 주격 조사 ‘-ㅣ’가 연결되어 형성된 ㆉ, ㆌ가 대부분이다.

(17) 언(彦宵ㅣ)(21ㄱ) 됴(趙孝ㅣ)(6ㄱ) 여(15ㄱ) 덕(德珪ㅣ)(22ㄱ)

언해문의 한 군데에서 한자말이 아닌 고유어에 ᆆ 모음이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18) 그 어미 마니 약 프러 일 머기 커(10ㄱ)

위 (18)의 예문에 등장하는 ‘머기’[食]는 원칙적으로 ‘머교려’로 표기해야 할 어형이다. 그런데 ‘머교려’의 모음 ㅛ는 문법적으로 사동 접미사 ‘-이-’와 의도법 선어말 어미 ‘-오-’가 통합한 것인데 이 ㅛ를 후속되는 의도법 어미 ‘-려’에 변칙적으로 통합하여 ‘’라는 기형적인 표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ᆆ 모음은 당시에 표기 문자로 통용되던 모음은 아니다.

2) 표기법

국어 표기법의 첫 출발은 분철(分綴)하느냐 연철(連綴)하느냐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末音)이 자음일 때, 그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가 오면 그 말음의 자음을 받침으로 올려 적느냐, 아니면 조사나 어미의 두음(頭音)으로 내려 적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옷+이’를 ‘옷이’로 분철하여 적느냐, ‘오시’로 연철하여 적느냐 하는 것을 말한다.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했던 15세기 국어는 연철 방식을 표기의 원칙으로 삼았고,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15세기 문헌 자료에서 연철법은 천하통일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한 대세는 16세기에 들어서도 대체로 이어지는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편에선 분철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분철 표기가 제법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16세기 초기 문헌인 초간본 ≪이륜행실도≫의 표기 실태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기의 다른 문헌과는 달리 분철은 하나도 볼 수 없고 연철과 중철(重綴) 표기만을 보여 주고 있다. 체언의 경우가 되겠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중철 표기가 우세하다. 중철이란 분철할 때처럼 받침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적어 놓고는 또한 연철할 때처럼 그 받침을 다음 음절의 두음에도 다시 적는, 말하자면 받침의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표기 방식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연철과 분철의 두 방식을 절충한 표기이므로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철 표기는 연철에서 벗어나 분철로 지향해 가는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분철의 표기 중간 중간에 가끔씩 등장하는 표기 형태이다. 그 중에는 중철의 예가 상당수 등장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그 문헌에 나타난 분철보다는 훨씬 낮은 비율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초간본 ≪이륜행실도≫는 매우 예외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 문헌은 중철을 그렇게 많이 보이면서도 분철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대신 연철은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언의 경우에 한해서이다. 용언의 활용에서는 여전히 연철 일변도라 할 수 있다. 용언에서도 중철의 예가 전체를 통해 몇 군데서 발견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용언에까지 중철이 확산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용언에서의 중철은 오히려 착오에 의한 돌출로 보이는 것이다. 용언의 활용에서 중철한 예를 전부 보이면 다음의 (19)와 같다.

(19) 죽그시거(12ㄱ) 졈므도록(15ㄱ) 잡바(17ㄱ) 남모(28ㄱ) 흗터(29ㄴ)

심므고(33ㄴ)

cf. 주근(1ㄱ, 18ㄱ) 주그니라(1ㄱ) 주글가(10ㄱ) 주글(14ㄱ, 22ㄱ, 38ㄱ)

주그리라(22ㄱ) 주그라 가(22ㄱ) 주것다가(22ㄴ) 주그니(33ㄴ, 37ㄱ)

주거(33ㄴ, 43ㄱ) 주거셔(37ㄱ, 40ㄱ) 져므도록(15ㄴ) 자바(31ㄱ, 33ㄴ)

나모(32ㄱ)

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용언의 활용에서 중철한 표기는 모두 6개 정도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동사 ‘죽-’[死]의 경우에 전체를 통해 20회 가까이 등장하지만 1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연철 표기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때 중철은 체언의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용언이라도 파생의 경우에는 중철 표기가 꽤 퍼져 있다는 느낌이다. 이는 용언 어근에 부사 접미사 ‘-이’가 통합되어 파생 부사를 형성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래 (20)의 예를 보면 중철과 연철이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 만니(8ㄱ) 지극기(14ㄱ) 각별리(13ㄱ, 28ㄱ) 셤죡(贍足)키(29ㄱ)

티(13ㄱ, 35ㄱ) 어딜리(46ㄱ) 놉피(19ㄱ) 깁피(48ㄱ)

cf. 마니(10ㄱ, 22ㄱ) 머리셔(14ㄱ) 브즈러니(17ㄱ) 노피(29ㄱ) 어디리(44ㄱ)

특히 유기음을 포함한 8종성 이외의 자음을 어근의 말음으로 가진 경우는 8종성 제한 규칙으로 그들 자음을 받침의 자리에 쓸 수 없기 때문에 각각 ‘ㅍ→ㅂ, ㅋ→ㄱ, ㅌ→ㄷ, ㅈ/ㅊ→ㅅ’ 등으로 교체하여 받침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후속하는 초성 자리에는 어근의 원래 말자음(末子音)을 그대로 내려적는다. 그리하여 ‘높+이’ ‘깊+이’를 각각 ‘놉피’ ‘깁피’와 같이 중철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중철 표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체언의 경우를 검토하기로 한다. 체언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된 형태에서 나타난 중철을 살펴보되 체언의 말자음 별로 나누어 표기례를 전부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일한 말자음을 연철한 표기례도 함께 제시한다. 8종성 중에 ㆁ 자음을 제외한 7종성 중심으로 예를 제시한다.

(21) 체언 말음이 ㄱ인 경우

삭(朔)긔(1ㄱ) 삭(朔)기(1ㄱ) 도(盜賊)기(1ㄱ, 3ㄱ, 6ㄱ, 9ㄱ, 23ㄱ, 46ㄱ)

복식(卜式)근(2ㄱ) 복식(卜式)기(2ㄱ) 도(盜賊)(3ㄱ) 도긔게(3ㄱ, 6ㄱ, 12ㄱ)

쇽(風俗)글(7ㄱ) 도글(9ㄱ) 식(糧食)기(12ㄱ) 식(子息)글(12ㄱ)

채확(蔡廓)기(13ㄱ) 손극(孫棘)기(14ㄱ) 극(棘)긔게(14ㄱ) 극(棘)긔(14ㄱ)

목[分]긔(14ㄱ) 음식(飮食)기(15ㄱ) 옥(獄)개(22ㄱ) 그 적[時]긔(23ㄱ)

식(子息)기(23ㄱ, 35ㄱ) 목[頸]글(23ㄱ) 일(一百)기(28ㄱ, 32ㄱ)

원(王元伯)기(32ㄱ) 식(子息)긴 줄(32ㄱ) 원(元伯)기(32ㄱ, 33ㄱ)

션(宣伯)기(32ㄱ) 식기라(32ㄴ) 범식(范式)기(33ㄱ) 범식(范式)긔(33ㄱ)

곽(槨)기(33ㄴ) 곽(槨)글(33ㄴ) 원(元伯)가(33ㄴ) 쳐식(妻子息)기(34ㄱ)

쳐식(妻子息)글(34ㄱ) 덕(德)게(37ㄱ) 니약곡(李若谷)기(41ㄱ) 약곡(若谷)기(41ㄱ)

한억(韓億)기(41ㄱ) 뉵(六百)기(41ㄱ) 한억(韓億)기도(41ㄱ) 일(一百)기나(45ㄱ)

도(道學)글(47ㄱ) 유작(游酢)기와(47ㄱ) 줄(脈)기라(48ㄱ)

cf. 모[分]긔(1ㄱ) 저[時]긔(3ㄱ, 36ㄱ, 39ㄱ) 므스[何]기(14ㄱ) 모[分](23ㄱ)

녀[便]로(31ㄱ) 녀[便]긔(36ㄱ) 과[槨](46ㄱ)

(22) 체언 말음이 ㄴ인 경우

셰간[家財](2ㄱ, 4ㄱ, 21ㄱ, 21ㄴ, 25ㄱ) 여나[十餘]닌(3ㄱ)

원[太守]니(4ㄱ, 14ㄱ-ㄴ, 35ㄱ) 균(鄭均)(5ㄱ) 균(鄭均)니(5ㄱ)

셰간[家財]내(7ㄱ, 16ㄱ, 21ㄱ) 인(聖人)늬(7ㄱ) 문(門)늬(8ㄱ, 14ㄴ)

두 분[人]니(9ㄱ) 유곤(庾袞)니(11ㄱ) 서너  만내(11ㄱ) 진(津)니(15ㄱ)

츈(椿)니(15ㄴ) 얼운[長]늬게(17ㄱ-ㄴ) 니진(李光進)니(18ㄱ) 안(光顔)니(18ㄱ)

안(光顔)늬(18ㄱ) 두연(杜衍)니(19ㄱ) 두연(杜衍)늬(19ㄱ) 존(張存)니(20ㄱ)

언운(彦雲)니(21ㄱ) 셰간[家財]니(21ㄱ) 삼쳔(三千)니(21ㄱ) 효문(孝子門)넷(23ㄴ)

곽젼(郭全)니(24ㄱ) 얼운[長]니(27ㄱ, 30ㄱ) 손(子孫)니(31ㄴ) 오보안(吳保安)는(37ㄱ)

보안(保安)늬(37ㄴ) 니면(李勉)니(38ㄱ) 쥬인(主人)네(38ㄱ) 은(銀)늘(38ㄱ, 43ㄱ)

니면(李勉)닐(38ㄱ) 원[太守]늘(39ㄱ, 43ㄱ) 니이간(李夷簡)니(39ㄱ) 이간(夷簡)니(39ㄱ)

삼만(三萬)(40ㄱ) 돈[錢](40ㄱ) 돈[錢]니(41ㄱ) 반(半)(41ㄱ) 혼인(婚姻)(41ㄱ)

범슌인(范純仁)는(42ㄱ) 슌인(純仁)니(42ㄱ) 신안(申顔)니(43ㄱ) 손[手]로(43ㄱ)

의원(醫員)늬게(43ㄴ) 다닐[他人](44ㄱ) 슌(王舜)니(44ㄱ) 여나믄[十餘]네(46ㄱ)

악은(樂隱)늬게(46ㄱ) 악은(樂隱)니(46ㄱ) 악은(樂隱)늬(46ㄱ) 이쳔(伊川)니(47ㄱ)

셔산(西山)늬(48ㄱ)

cf. 워[太守]니(5ㄱ) 츄(椿)니(15ㄱ) 다  마내(21ㄱ) 도[錢](43ㄴ) 나[餘]닐(2ㄱ)

[病]니도(11ㄱ) 쟈그닐[小事](13ㄱ) 어디니[賢者](29ㄱ) 가난닐[貧者](29ㄱ)

셰니[白頭](31ㄱ)

(23) 체언 말음이 ㄷ인 경우

붇[筆]들(27ㄱ) 벋[友]디오(48ㄱ)

cf. [意]들(26ㄱ, 48ㄱ) [意]덴(27ㄱ) 버[友]디니(34ㄱ)

(24) 체언 말음이 ㄹ인 경우

믈[水]레(1ㄱ) 믈(財物)(2ㄱ) 시졀(時節)리(3ㄱ, 6ㄱ, 26ㄱ) 니블[衾]레(9ㄱ)

수을[酒]를(10ㄴ) 밀(王密)리(12ㄱ) 아[子](12ㄱ) 살(薩)리(14ㄱ)

손발[手足]를(20ㄱ) 시졀(時節)레(21ㄴ) 긔믈(器物)를(24ㄱ) 오달(吳思達)릐(25)

달(思達)리(25ㄱ) 례졀(禮節)리(27ㄱ) 잡말[雜言]리(28ㄱ) 허믈[過]리(30ㄱ)

여궐(余闕)리랏(31ㄴ) 아[子]게(32ㄱ) 아[子]리(32ㄴ) 그 날[日]리(33ㄱ)

믈[水]리(36ㄱ) [女息](40ㄱ) 두 [二個月]리어다(42ㄱ) 오늘[今日]리(47ㄱ)

채발(蔡發)리(48ㄱ)

cf. 아[子]리니(1ㄱ) 주근 주를(1ㄱ) 세 [三倍]리나(4ㄴ) 마[言](5ㄱ)

마[言]리(7ㄱ) 잡마[雜言]리(15ㄴ) 아[子]리(19ㄱ) 섯나[元旦]래(21ㄱ)

브[火]레(21ㄴ) 니브[衾]레(22ㄱ) 이[事](23ㄱ) 이[事]리(27ㄱ) 그[文]를(30ㄱ)

[馬](31ㄴ) [馬]리(31ㄴ) 그 나[日]래(33ㄱ) 므[水]리(36ㄴ) 벼스[官]를(37ㄴ)

아[子]리라(42ㄱ)

(25) 체언 말음이 ㅁ인 경우

주검[屍]믈(1ㄱ) 사름[人]미라(2ㄱ, 5ㄱ) 림(王琳)믜(3ㄱ) 림(王琳)미(3ㄱ)

사름[人]미(6ㄱ, 13ㄱ, 25ㄱ, 26ㄱ, 27ㄱ, 36ㄱ, 38ㄱ, 41ㄱ) 님굼[君]미(6ㄱ, 27ㄱ)

사름미니(9ㄱ) 사[人]미어(9ㄱ) 람(王覽)미(10ㄱ) 도[盜賊]미(17ㄱ)

엄[母]믜게(19ㄱ) [心]로(20ㄱ) 사[人]미니(20ㄱ) 사름[人]믈(20ㄱ)

아[親族]믈(20ㄱ) [心]미(21ㄱ, 36ㄱ) 처[初]믜(21ㄱ) 밤[夜]미면(22ㄱ)

효도홈[孝道]로(23ㄱ) 사름[人]미여(26ㄱ) 아[親族]믜(27ㄱ, 29ㄱ)

범엄(范仲淹)미(29ㄱ) [夢]메(33ㄴ) 짐(負)메(43ㄴ) 사름[人]믜게(47ㄱ)

쇠[鍵](18ㄱ)

cf. 사[人]미(4ㄱ, 32ㄱ) [他](5ㄱ, 11ㄴ, 45ㄱ) 호려 호(7ㄱ)

사로[生]미(8ㄱ, 21ㄱ) 모디로[凶](10ㄱ) 우루[泣](11ㄱ) 머고[食](12ㄴ)

셤교[奉](14ㄱ) 셤교[奉]미(15ㄱ) 아[朝]미어든(15ㄱ) 무례(無禮)호미(17ㄴ)

[愛]호(17ㄴ) [他]게(22ㄱ) 어디[賢]로미(25ㄱ) 사오나오[劣]미(25ㄱ)

호로(27ㄱ) 사[人]미라(33ㄱ) [他]믜(36ㄱ) 사르[人]미라(37ㄱ)

[他]게(39ㄱ) 일후[名]믈(48ㄱ)

(26) 체언 말음이 ㅂ인 경우

급(伋)비(1ㄱ) 급(伋)블(1ㄱ) 옷밥[衣食]블(8ㄱ, 27ㄱ) 겨집[女]블(10ㄱ, 26ㄱ)

겨집[女]비(8ㄱ, 13ㄱ, 15ㄴ, 18ㄱ, 26ㄱ, 34ㄱ) 집[家]블(14ㄱ, 35ㄱ)

겨집[女]비며(14ㄱ, 32ㄱ) 집[家]븨(15ㄱ, 17ㄱ, 21ㄱ, 27ㄱ, 31ㄱ, 40ㄱ)

밥[飯]배(15ㄴ) 집[家]븻(18ㄱ, 21ㄱ, 26ㄱ, 31ㄱ, 45ㄱ) 쳐쳡(妻妾)븐(20ㄱ)

집[家]비며(24ㄱ) 깁[帛]블(26ㄱ, 29ㄴ) 집(家)비(30ㄱ, 31ㄱ) 겨집[女]븨(31ㄴ, 41ㄱ)

집[家]븨셔(38ㄱ, 43ㄱ)

cf. 그(伋)블(1ㄱ) 그(伋)븨(1ㄱ) 지[家]비(8ㄱ) 지[家]븨(11ㄱ, 25ㄱ, 42ㄱ)

지[家]븻(11ㄱ, 13ㄱ, 23ㄱ, 25ㄱ, 27ㄱ, 30ㄱ, 32ㄱ) 지[家]븨다가(20ㄱ)

겨지[女]비(26ㄱ) 지[家]블(43ㄴ)

(27) 체언 말음이 ㅅ인 경우

앗[弟](3ㄱ, 6ㄱ) 앗[弟]라와(3ㄱ) 여슷[六]시(8ㄱ)

cf. 아[弟]오(1ㄱ) 아[弟](2ㄱ, 17ㄱ) 아[弟](2ㄱ, 23ㄱ) ~거시라(4ㄱ, 32ㄴ)

~거슬(4ㄱ) 아[弟](4ㄱ, 17ㄴ, 23ㄱ) ~거시어니와(5ㄱ, 36ㄱ) ~거시니(13ㄱ)

아[弟]게(14ㄱ) ~거로(21ㄴ) 아[弟](22ㄱ) 여스[六]시(25ㄱ)

~거스로(25ㄱ) ~거시가(39ㄴ) ~거시(43ㄴ) ~거슬(48ㄱ)

(28) 그 밖의 경우

받[田]티(16ㄱ)

cf. 기[分]제(4ㄱ) 바[田](16ㄱ) 바[田]티며(24ㄱ) 겨[側]틧(38ㄱ)

지금까지 체언 말음의 자음별로 중철의 예와 연철의 예를 장황하게 열거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는 중철 표기와 관련해서 다른 문헌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 그 실태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중철 표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연철 표기도 그 세력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체언에 동일한 조사(助詞)가 연결된 형태에서 중철과 연철 표기가 공존하고 있음은 지금까지의 연철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는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해 있는 연철법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이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21)~(28)의 예를 통해서 볼 때 말음의 자음에 따라서는 중철과 연철의 비율이 대등하거나 오히려 연철이 우세한 경우도 있다. 먼저, 말음 ㄷ의 경우에는 등장하는 어휘가 ‘붇[筆], 벋[友], [意]’ 정도여서 양 표기법의 실태를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중철 표기는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ㅁ 말음의 경우를 보자. 여기서도 중철의 빈도가 여전히 높다. 그러면서도 연철의 예가 많은 수를 보이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명사형 어미 ‘-옴/움’이 있었던 것이다. 용언의 동명사형 다음에 모음의 조사가 올 때는 일관되게 연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 곳에서 ‘효도홈[孝道]로’와 같은 중철을 볼 수 있을 뿐 그 밖에는 연철로 통일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호려 호, 머고[食], 셤교[奉]미, 어디[賢]로미 … ’ 등. 말음 ㅂ의 경우에는 연철의 예가 ‘집’[家]이라는 낱말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더라도 ‘집’의 경우에 중철과 연철의 비율은 18 : 13으로 중철이 앞서고 있다. ‘겨집’의 경우에도 중철과 연철을 다 보이지만 그 비율은 12 : 1로 일방적이다. 그러나 말음 ㅅ의 경우에는 중철에 적극적이었던 앞에서와는 달리 중철 표기가 활발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이 문헌에서 볼 수 있는 ㅅ 말음의 예라고 해야 ‘여슷, 아, 것’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순수한 중철의 예는 ‘여슷[六]시’가 유일하다. 이는 또 ‘여스시’로 연철한 표기도 나온다. 그리고 ㅅ 말음의 예로서 가장 많이 쓰인 의존 명사 ‘것’은 그 빈번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중철로 나타나는 예는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연철로만 표기되고 있어 중철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제 ㅅ 말음에서 중철 표기한 예로 ‘앗’가 있는데, 이는 좀 특이한 예에 속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예이다. 원래 ‘앗’의 명사 단독형은 중세 국어에서 ‘아’[弟]였다. 중세 국어에서 명사의 끝음절이 ‘/’인 ‘아’[弟], ‘여’[狐] 등은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에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으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가 각각 ‘’ ‘’으로 교체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에 조사 ‘-이, -, -게, -, -’ 등을 연결하면 각각 ‘이, , 게, , ’ 등의 분철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 이들은 연철되어 ‘아, 아, 아게, 아, 아’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문헌에서 ‘아’의 연철 형태가 쓰인 것을 (27)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연철 형태는 다시 중철로 이어져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 중철의 모습은 ㅿ을 이중으로 적은 ‘’ ‘’과 같은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나 ‘’나 ‘’로 되면 8종성 제한 규칙에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8종성법에 따라 종성으로 쓰일 수 없는 ㅿ이 종성의 자리에 오게 되어 허용될 수 없는 표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8종성 이외의 자음을 말음으로 가진 경우는 8종성의 자음으로 교체하여 종성으로 표기하던 원칙에 따라 ㅿ 말음을 ㅅ으로 교체하여 표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 ‘’을 ‘앗’ ‘앗’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5세기 국어의 ‘이’이던 것이 16세기의 중철 표기로는 ‘앗’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27)의 예에는 ‘앗’ ‘앗라와’와 같은 중철 표기보다는 ‘아, 아, 아, 아, 아게, 아오’와 같은 연철 표기가 훨씬 우세하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앗’와 같은 부자연한 표기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졌던 것 같다. 심지어 이 문헌에는 15세기의 분철 표기인 ‘이’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 의도로 보이는 ‘앗이’(2ㄱ)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이 문헌에는 ‘아’ ‘앗이’ ‘앗’의 세 가지 표기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옥산서원본 ≪이륜행실도≫에는 중철과 연철 표기만 있고 분철 표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논의해 왔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도 분철 표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특수한 조건이나 환경에 한해서이다. 연철법이 가장 철저했던 15세기 중엽 때도 분철했던 경우들이다.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도 분철 표기가 이루어졌던 경우로서는 주로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말음이 ㄹ일 때인데, 예를 들면, ㄹ 아래에서 ㄱ이 탈락한 경우, 어간 말음 ㄹ 다음에 사동 접미사 ‘-오/우-, -이-’ 등이 연결될 때, 끝음절이 ‘/르’인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접사가 연결되어 체언이나 용언 어간이 ㄹ말음을 가진 형태로 교체되었을 때의 모든 경우에 말음 ㄹ이 그 다음의 모음 음절로 연철되지 않고 종성의 자리에 ㄹ을 그대로 두는 분철의 형태를 고수한다. 이러한 15세기 표기법의 전통이 이 문헌에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어 이 경우에는 분철의 형태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그 일부의 예를 제시한다.

(29) 말이디[止](1ㄱ) 오[白](8ㄱ) 얼운[長](10ㄱ) 알오[知](10ㄴ)

얼이더라[婚](19ㄴ) 울어[泣](22ㄴ) 닐어[謂](30ㄴ) 머물워[停](33ㄴ)

쟐읫[袋](40ㄱ) 게을이[倦](45ㄱ) 알외니라[告](47ㄱ)

3) 중철 표기에 대한 이후의 표기법

옥산서원본의 ≪이륜행실도≫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중철 표기의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특이한 점은 중철 표기가 본래 연철에서 분철로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표기 방식임에도 분철은 그 싹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더라도 후대에 가면 이러한 중철 표기는 분철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사라질 운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옥산서원본보다 200여 년 뒤에 간행된 규장각본의 기영판(箕營版. 1727)에서는 앞에서 보인 많은 중철 표기들이 모두 어떤 표기로 바뀌었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쉽게 예상이 되는 것은 절대 다수가 기영판에서 분철로 바뀌었으리란 점이다. 그래서 분철로 바뀐 예들은 생략하고, 중철 표기가 기영판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과, 중철 표기가 기영판에서 역(逆)으로 연철 표기로 바뀐 것, 그리고 옥산서원본에서는 연철 표기이던 것이 기영판에 가서 중철로 바뀐 사례들을 차례로 모두 제시해 본다. (각쌍의 앞엣것은 옥산서원본, 뒤엣것은 기영판의 표기례이다. 두 판본의 장차(張次)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낱말마다 일일이 표시하지 않고 뒤쪽에 판본 표시 없이 한 번만 표시한다. 그러나 양자간에 장차가 다를 때는 각각 밝혀 적는다. 그럴 때는 기영판에만 ‘기’를 표시한다.)

(30) 중철(옥산서원본) → 중철(규장각본의 기영판)

복식(卜式)기 - 복식기(2ㄱ) 도(盜賊)긔게 - 도긔게(6ㄱ)

지극(至極)기 - 지극기(14ㄱ) 목[分]긔 - 목긔(14ㄱ) 음식(飮食)기 - 음식기(15ㄱ)

식(子息)기 - 식기(23ㄱ) 목[頸]글 - 목글(23ㄱ) (이상은 ㄱ말음의 체언)

셰간[家財] - 셰간(2ㄱ, 4ㄱ, 21ㄱ, 21ㄴ) 셰간내 - 셰간(7ㄱ)

인(聖人)늬 - 셩인늬(7ㄱ) 만[密]니 - 만니(8ㄱ)

얼운[長]늬게(17ㄱ-ㄴ) - 얼운늬게(기 17ㄱ) 안(光顔)늬 - 광안(18ㄱ)

삼만(三萬) - 삼만(40ㄱ) (이상은 ㄴ말음의 체언)

(心)미 - 디(21ㄱ) (이상은 ㄷ말음의 체언)

믈(財物)를 - 믈를(2ㄱ) 시졀(時節)리 - 시졀리(3ㄱ) 니블[衾]레 - 니블레(9ㄱ)

아[自] - 아(12ㄱ) 각별[特]리 - 각별리(13ㄱ) 례졀(禮節)리 - 례졀리(27ㄱ)

(이상은 ㄹ말음의 체언)

사름(人)미니 - 사미라(9ㄱ) 람(王覽)미 - 왕람미(10ㄱ)

쇠[鍵] - 쇠(18ㄱ) [心]로 - 로(20ㄱ)

아[親族]믈 - 아믈(20ㄱ) 처[初]믜 - 처엄믜(21ㄴ) (이상은 ㅁ말음의 체언)

급(伋)비 - 급비(1ㄱ) 겨집[女]비 -겨집비(8ㄱ, 13ㄱ, 15ㄴ) 겨집블 - 겨집블(10ㄱ)

깁[帛]블 - 깁블(26ㄱ) 옷밥(衣食)블 - 옷밥블(27ㄱ) 겨집븨 - 겨집븨(31ㄴ)

(이상은 ㅂ말음의 체언)

받[田]티 - 밧티(16ㄱ) 놉피 - 놉피(18ㄱ) 깁피[深] - 깁피(48ㄱ) 티 - 티(35ㄱ)

(이상은 유기음 말음의 체언 및 용언 어간)

앞서 열거하였던 (21)~(28)의 중철 표기들이 규장각본의 기영판(1727)에 와서는 많은 부분에서 분철로 바뀌었지만 또한 위의 (30)에서 볼 수 있듯이 옥산서원본(1518)의 중철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표기들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 전부가 (30)의 예이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옥산서원본에서 보였던 ㄷ, ㅅ 말음 체언의 중철 표기는 기영판에 와서 모두 연철 표기로 바뀌는 바람에 ㄷ, ㅅ 말음의 중철 표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21)~(28)의 중철 표기들 중에서 기영판에 와서 연철로 돌아간 예들도 상당 수 있어 전부 들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연철에서 분철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중철이므로 중철은 그 다음 시대에 분철로 바뀌는 것이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중철 표기가 오히려 연철로 돌아간 경우이다.

(31) 중철(옥산서원본) → 연철(규장각본의 기영판)

도(盜賊)기 - 도기(3ㄱ, 6ㄱ, 23ㄱ) 옥(獄)개 - 오개(22ㄱ)

그 적[時]긔 - 그 저긔(23ㄱ)

문(門) - 무(8ㄱ) 서너  만내 - 서너  마내(11ㄱ) 손[手]로 - 소노로(43ㄱ)

다 닐[他人] - 다 니를(44ㄱ)

붇[筆]들 - 브들(27ㄱ)

믈[水]레 - 므레(1ㄱ) 손발[手足] - 손바(20ㄱ) 아[子]리(32ㄴ) - 아리(기 32ㄱ)

아게 - 아게(32ㄱ) [女息] - (40ㄱ) 어딜리 - 어디리(46ㄱ)

주검[屍]믈(1ㄱ-ㄴ) - 주거믈(기 1ㄴ) 사름[人]미라 - 사미라(2ㄱ)

사름미 - 사미(6ㄱ, 26ㄱ) 사[人]미어 - 사미어(9ㄱ)

도미 - 도노미(17ㄱ) 엄[母]믜게 - 어믜게(19ㄱ) 밤[夜]미면 - 바미면(22ㄱ)

효도(孝道)홈로 - 효도호로(23ㄱ) 남[餘]모 - 나모(28ㄱ)

심[植]므고 - 시므고(33ㄴ)

옷밥[衣食]블 - 옷바블(8ㄱ) 집[家]븨 - 지븨(15ㄱ, 17ㄱ, 27ㄱ) 밥[飯]배 - 바배(15ㄴ)

잡[執]바 - 자바(17ㄱ) 집[家]비며 - 지비며(24ㄱ) 집븻 - 지븻(26ㄱ)

겨집[女]비 - 겨지비(26ㄱ) 겨집블 - 겨지블(26ㄱ)

여슷[六]시 - 여스시(8ㄱ)

티 - 티(13ㄱ) 흗[散]터 - 흐터(29ㄴ)

(31)의 예에서 보듯이 중철 표기가 연철로 되돌아간 것도 제법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옥산서원본의 중철 표기는 그 이후의 중간본에 가서는 분철로, 연철로, 중철 그대로의 세 가지 표기 형태로 변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분철로 바뀌어 간 것이 전체적인 대세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일부가 중철 그대로 또는 연철로 표기되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에는 어떤 원칙이나 질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한 예로 ‘겨집’[女]에 모음의 조사가 붙어 중철 표기된 옥산서원본의 형태가 중간본(기영판)에서는 어떤 형태로 표기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각쌍의 앞엣것은 옥산서원본, 뒤엣것은 기영판의 것임)

(32)

겨집비 - 겨집비(8ㄱ. 13ㄱ. 15ㄴ)

겨집비 - 겨집이(18ㄱ)

겨집비 - 겨지비(26ㄱ)

겨집블 - 겨집블(10ㄴ)

겨집블 - 겨지블(26ㄱ)

겨집븨 - 겨집븨(31ㄴ)

겨집븨 - 겨집의(41ㄱ)

겨집비며 - 겨집이며(14ㄱ. 32ㄱ)

(32)의 예를 보면 ‘겨집비’가 중간본에서 ‘겨집비’ ‘겨집이’ ‘겨지비’의 세 가지로 다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 중간본의 표기법은 혼용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옥산서원본에서 연철로 표기되었던 형태가 중간본(기영판)에서 중철로 나타난 예가 일부 있어서 그것을 제시한다. 이는 중철의 불씨가 중간본에서도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3) 연철(옥산서원본) → 중철(규장각본의 기영판)

고 워(員)니 - 고올 원니(5ㄱ) 밥 머글 제 - 밥 먹글 제(15ㄴ)

벼스[官]를 - 벼(15ㄱ) 브[火]레 - 블레(21ㄴ) 그[文]를 - 글(30ㄱ)

[馬] - (31ㄴ) 웃녀[上]로 - 웃녁크로(31ㄱ) 버[友]디니 - 벗디니(34ㄱ)

녀[便]긔 - 녁킈(36ㄱ) 제브터 - 제븟터(43ㄱ) 도[錢] - 돈(43ㄴ)

4) 모음 ‘ㆍ’의 동요(動搖)

우리의 국어사 연구는 어찌 보면 모음 ‘ㆍ’의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만큼 ‘ㆍ’ 모음의 연구는 일찍부터 관심 분야가 되었고 또 오랫동안 국어사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다. 주로 ‘ㆍ’의 음가(音價) 문제를 비롯해서 ‘ㆍ’와 관련한 모음 체계 문제, ‘ㆍ’의 비음운화와 변천사 문제, 그 밖의 관련 문제 등을 중심으로 많은 노력들이 집중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제 거의 결론이 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생각했는데, 근래에 와서 ‘ㆍ’ 모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한 연구 보고가 나와 다시금 ‘ㆍ’의 논의에 불씨를 지피고 있다. 주011)

김동소 (2009).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16세기에 들어와서 ‘ㆍ’ 모음의 음절별 사용 실태는 어떤지, 15세기에 비해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에 대해서 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ㆍ’ 모음의 소실(消失)에 대해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1단계는 제2 음절 이하에서의 소실이고 2단계는 제1 음절에서의 소실이다. 1단계 소실은 제2 음절 이하에서 ‘ㆍ’의 동요가 먼저 일어났는데 이때는 ‘ㆍ’ 모음이 주로 ㅡ 모음으로 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1단계 ‘ㆍ’ 모음의 동요는 15세기에 이미 보이기 시작해서 16세기 후반에는 ‘ㆍ〉ㅡ’의 변화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2단계 ‘ㆍ’ 모음 소실은 1단계에서 제외되었던 어두(語頭) 음절의 ‘ㆍ’ 모음이 주로 ㅏ 모음으로 변한 것이다. 어두 음절에서 ‘ㆍ’ 모음이 동요하는 현상은 17세기 초에 일부 보이나 대체로는 18세기 후반에 와서 ‘ㆍ〉ㅏ’가 완성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이륜행실도≫에 보이는 ‘ㆍ’ 모음의 실태는 어떠한가? 위에서 소개한 결론과는 조금 다르게 2단계에서 일어나는 ‘ㆍ’ 모음의 동요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낱말의 어두 음절에서 ‘ㆍ’ 모음이 유지되고 있는 어형과, ‘ㆍ’ 모음이 다른 모음으로 교체된 어형이 이 문헌 안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4개 낱말의 제1음절에서 ‘ㆍ’의 동요를 볼 수 있는데, 그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제로 나타난 예를 모두 열거하기로 한다.

(34) ㄱ. 마니(10ㄱ. 22ㄱ)/만니(8ㄱ) - 가마니(38ㄱ)

ㄴ. 화(24ㄱ) - 논화(2ㄱ. 4ㄱ. 4ㄱ. 4ㄱ. 7ㄱ. 25ㄱ. 30ㄱ. 35ㄱ)/논호아(21ㄱ)/논호련(21ㄱ), 논혼(21ㄴ)

ㄷ. 올(44ㄱ. 46ㄱ) - 고(5ㄱ. 14ㄱ. 29ㄱ. 41ㄱ)/고올(4ㄱ. 42ㄱ)/고을(16ㄱ)

ㄹ. 외여(38ㄱ. 46ㄱ)/외요(15ㄱ)/외더라(41ㄱ) - 도여(11ㄱ)/도여셔(5ㄱ. 29ㄱ. 30ㄱ)/도어(2ㄱ)/도니(27ㄱ)/도엿니(12ㄱ)/도엿다가(5ㄱ. 25ㄱ)/도연(10ㄱ. 19ㄱ. 29ㄱ)/도니라(5ㄱ. 7ㄱ)/도의여셔(35ㄱ) - 되여셔(33ㄱ)

위에 열거한 예를 보면, 제1음절의 ‘ㆍ’ 모음이 ‘마니’에서는 ㅏ로, ‘호-, 올, 외-’에서는 ㅗ로 각각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제1 음절에서 ‘ㆍ’가 원칙대로 ‘ㆍ〉ㅏ’로 변하지 않고 ㅗ로 바뀐 것은 그 다음의 ㅗ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용 빈도에서 ‘마니’는 ㅏ로 교체된 ‘가마니’가 한 번 나타나지만 ‘호-, 올, 외-’에서는 ‘ㆍ〉ㅗ’의 변화를 입은 어형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등장하고 있다. ‘호-와 논호-’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1:11로 나타나 ‘논호-’의 사용이 절대적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17세기에 나타난다고 하는 2단계 ‘ㆍ’ 모음의 소실이 이 문헌에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ㆍ’ 모음 유지형과 소실형이 빈도의 차이는 있지만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ㆍ’ 모음의 동요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호온자’(11ㄱ. 12ㄱ. 36ㄱ. 39ㄱ. 42ㄱ)는 ‘ㆍ’를 유지한 공존형이 없이 단독으로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낱말이 15세기의 ‘오’에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도 첫째 음절의 ‘ㆍ’ 모음이 ㅗ로 변한 2단계의 ‘ㆍ’ 모음 소실에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제2 음절 이하에서 일어난 ‘ㆍ’ 모음의 1단계 동요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단계로 일어난 ‘ㆍ’ 모음의 동요는 주로 ‘ㆍ〉ㅡ’의 변화였으며 간혹 특수한 환경에서는 ‘ㆍ〉ㅗ’ 또는 ‘ㆍ〉ㅏ’의 변화도 일어났다. 동요의 발단은 이미 15세기 국어에서였으며,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제2 음절 이하의 ‘ㆍ’ 모음은 모두 소실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이륜행실도≫에는 비어두(非語頭) 음절에서의 ‘ㆍ’ 모음 동요가 어느 정도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첫째는, 15세기 국어에서 ‘ㆍ’ 모음으로 표기되던 말이 16세기에 와서는 ‘ㆍ’가 소실된 표기만이 나타나는 예들을 들 수 있다. 이 문헌에서는 다음의 예들이 해당한다.

(35) ㄱ. 아름뎌 아니더라(26ㄱ. 31ㄱ) 아름뎌 간 아니터라(32ㄱ)

cf. 各各 아뎌 受니가(능엄경 언해 8:66ㄱ)

ㄴ. 션뵈와  쥬인네 잇더니  션뵈 여 주글 제(38ㄱ)

cf. 늘근 션 보시고(용비어천가 82장)

太微宮은 션 그레 하 皇帝ㅅ 南녁 宮 일후미라(월인석보 2:48ㄴ-49ㄱ)

ㄷ. 믓결 가온대셔(36ㄱ)

cf. 路中은 긼 가온라(월인석보 1:4ㄱ)

ㄹ. 긔 보야호로 퍼디여(11ㄱ) 뵈야호로 치온 제 하옷옷 닙고(43ㄱ)

cf. 慧學이 보야로 盛고(능엄경언해 1:20ㄱ)

뵈야로 甘露 펴시며(석보상절 23:44ㄴ)

ㅁ. 라도록(4ㄱ) 죽도록(5ㄱ. 34ㄱ) 져므도록(15ㄴ)

cf. 世人이 져므록 이베 般若 念호(육조법보단경 상:49ㄱ)

≪이륜행실도≫에 쓰인 ‘아름뎌’[私]와 ‘션뵈’[士] 그리고 ‘가온대’[中], ‘보/뵈야호로’[方] 는 15세기 문헌에서 제2 음절과 제3 음절에 ‘ㆍ’가 쓰인 ‘아뎌’와 ‘션’ 그리고 ‘가온’, ‘보/뵈야로’였다. 그러나 ‘ㆍ’가 쓰인 형태는 이 문헌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ㆍ’ 자리에 각각 ㅡ와 ㅗ, 그리고 ㅏ가 쓰인 ‘아름뎌’와 ‘션뵈’ 그리고 ‘가온대’, ‘보/뵈야호로’의 형태만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활용 어미 ‘-록’의 ‘ㆍ’는 ㅗ로 고정되다시피 하였다. 특히 ‘-록’은 첫째 음절에 ‘ㆍ’가 있으나 이는 어미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사용되는 일은 없으므로 제2 음절 이하의 ‘ㆍ’에 해당하는 것이다. ‘-록〉-도록’의 변화는 이미 15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여 16세기 문헌에는 ‘-도록’만 쓰이고 ‘-록’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이와 같이 ‘아름뎌’ ‘션뵈’ ‘가온대’ ‘보/뵈야호로’ ‘-도록’의 형태만 이 문헌에서 볼 수 있고 ‘ㆍ’ 모음이 쓰인 15세기의 어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ㆍ’의 동요가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제2음절 이하에서 ‘ㆍ’와 ㅡ 사이에서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형태들이다. 즉 ‘ㆍ’ 모음의 유지형과 ㅡ 모음으로의 교체형이 함께 쓰이고 있는 경우이다. 두 형태 사이의 사용빈도는 낱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주로 많이 사용하는 낱말에서 ‘ㆍ’와 ㅡ의 혼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낱말별로 ‘ㆍ’가 쓰인 어형과 ㅡ가 쓰인 어형을 있는 대로 열거한다.

(36) ㄱ. 사[人](4ㄱ. 9ㄱ. 13ㄱ. 20ㄱ. 32ㄱ. 33ㄱ. 37ㄱ. 42ㄱ. 43ㄱ) - 사름(1ㄱ. 2ㄱ. 5ㄱ. 6ㄱ. 9ㄱ. 11ㄱ. 13ㄱ. 14ㄱ. 20ㄱ. 25ㄱ. 26ㄱ. 26ㄱ. 27ㄱ. 31ㄱ. 36ㄱ. 38ㄱ. 41ㄱ. 47ㄱ. 48ㄴ)

ㄴ. 닐우[謂](4ㄱ. 4ㄱ. 5ㄱ. 6ㄱ. 6ㄱ. 7ㄱ. 8ㄱ. 9ㄱ. 11ㄱ. 11ㄱ. 12ㄱ. 12ㄱ. 17ㄱ. 20ㄱ. 21ㄱ. 21ㄱ. 22ㄱ. 23ㄱ. 23ㄱ. 23ㄴ. 25ㄱ. 25ㄱ. 26ㄱ. 29ㄱ. 32ㄱ. 39ㄱ) - 닐우듸(18ㄱ. 26ㄱ. 33ㄱ. 33ㄱ. 33ㄱ. 33ㄱ. 33ㄱ. 33ㄴ. 33ㄴ. 33ㄴ. 34ㄱ. 36ㄱ. 36ㄱ. 37ㄱ. 38ㄱ. 39ㄱ. 39ㄱ. 41ㄱ. 42ㄱ. 42ㄱ. 42ㄱ. 42ㄴ. 43ㄱ. 43ㄴ. 47ㄱ. 48ㄱ. 48ㄱ) - 닐오듸(36ㄱ)

ㄷ. 아[親族](15ㄴ. 20ㄱ. 27ㄱ. 29ㄱ. 29ㄱ. 29ㄱ. 39ㄱ. 40ㄱ) - 아(4ㄱ. 8ㄱ. 25ㄱ. 29ㄱ)

ㄹ. [同時](25ㄱ. 25ㄱ. 26ㄱ. 26ㄱ. 26ㄱ. 27ㄱ. 28ㄱ. 31ㄱ. 32ㄱ) - 듸(30ㄱ. 34ㄱ. 34ㄱ. 47ㄱ)

ㅁ. (다) [處](19ㄱ) - (다른) 듸(15ㄱ)/(갈) 듸(34ㄱ)/() 듸(13ㄱ)/(니를) 듸(42ㄱ. 42ㄴ)/(먼) 듸(16ㄱ)

ㅂ. 다-[異](1ㄱ. 11ㄱ. 19ㄱ. 33ㄴ. 44ㄱ) - 다르-(10ㄱ. 15ㄱ)

ㅅ. 모-[不知](32ㄱ. 32ㄱ) - 모르-(38ㄱ)

ㅇ. 모[諸](7ㄱ. 28ㄱ. 29ㄱ. 30ㄱ. 30ㄱ. 31ㄱ. 32ㄱ. 32ㄱ) - 모든(32ㄱ)

ㅈ. 여나[十餘](3ㄱ. 25ㄱ) - 여나믄(2ㄱ. 46ㄱ)

ㅊ. 도[-等](23ㄱ)/(11ㄱ)/아(7ㄱ. 11ㄱ)/며리(7ㄱ)/(29ㄴ)/션뵈(38ㄱ)/아(15ㄴ. 40ㄱ)/아(8ㄱ) - 도들(12ㄱ)/들(17ㄱ)/며느리들(32ㄱ)/며리들(31ㄴ)/아들(4ㄱ)/아들(27ㄱ)/자딜들(15ㄴ)

위의 (36ㄱ~ㅊ)에서 든 낱말들은 15세기에 제2 내지 제3 음절에서 모두 ‘ㆍ’ 모음을 가진 어형들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로 오면서 동요가 일어나 ‘ㆍ’에서 ㅡ로 바뀐 어형들이 낱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당수 등장하게 되었다. ‘ㆍ’ 모음의 1단계 소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6ㅁ)의 ‘’는 의존 명사이므로 단독으로 어두에 쓰일 수는 없고, 또한 (36ㅊ)의 ‘-ㅎ’도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므로 이것 역시 어두로 쓰이는 일은 없다. 따라서 ‘’나 ‘-ㅎ’은 제2 음절 이하에서만 나타나는 형태이므로 1단계 ‘ㆍ’ 소실의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36ㄴ)의 ‘닐우’에 쓰인 어미 ‘-’의 ‘ㆍ’도 마찬가지로 제2 음절 이하에 쓰인 ‘ㆍ’에 포함된다.

1단계 ‘ㆍ’ 소실의 대표적인 예가 ‘사’이다. 둘째 음절의 ‘ㆍ’가 ㅡ로 변한 ‘사름’이 더욱 생산적이다. 전부 28개가 등장하는데 그 중의 9개가 ‘사’이고 19개가 ‘사름’이다. ‘사름’이 훨씬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초간본(1518)인 이 문헌에서는 ‘사름’의 형태가 지배적이다시피 되어 있으나 중간본에 가서는 ‘사름’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다시 ‘사’의 형태로 완전히 돌아간 것을 볼 수 있다.

(37) ㄱ. 지븻 사름도 드러오며(11ㄱ) - 지븻 사도 드러오며(기 11ㄱ)

ㄴ. 며 사름미여(26ㄱ) - 며 사름이여(기 26ㄱ)

초간본에서 19회나 등장하는 ‘사름’[人]이 중간본인 기영판(1727)에는 (37ㄴ)에서 보이고 있는 한 군데서만 쓰였고, 그 외에는 (37ㄱ)에서 보이듯이 모두 ‘사’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사람’으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앞 (36ㄴ)의 ‘닐우’에서도 설명법 어미 ‘-’와 ‘-듸’의 형태가 함께 쓰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형태는 동일해도 문법 범주는 서로 다른, 설명법 어미 ‘-’와 의존 명사 ‘’[處]가 ‘ㆍ’ 모음 소실 이후는 서로 다른 형태로 변해 간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미 ‘-’는 ‘-되’로, 의존 명사 ‘’는 ‘듸’를 거쳐 ‘데’로 각각 변천 과정을 경험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어미 ‘-’가 ‘-되’로 되지 않고 ‘ㆍ〉ㅡ’에 따라 ‘-듸’로 변함으로써 (36ㅁ)의 의존 명사 ‘’가 ‘듸’로 변한 것과 결과적으로 같아지게 되었다. 어미 ‘-’가 ‘-듸’의 형태로 변하여 사용된 경우는 16세기에도 다른 문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15세기부터 널리 쓰인 화법동사 ‘닐오’는 관용어처럼 굳어져 근대 국어에까지 변함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닐오’가 이 문헌에서는 ‘닐우듸’로 변하여 빈도상으로도 본래 형태인 ‘닐우’와 동일한 분포를 보일 정도로 ‘닐우듸’는 적극적이 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닐우’와 ‘닐우듸’의 분포 상태이다. (36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닐우’는 문헌 본문의 전체 48장 가운데 처음부터 39장까지만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도 30장 넘어서는 2회밖에 되지 않으므로 총 26회 중 24회는 모두 30장 이전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반면에 ‘닐우듸’는 총 27회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30장 이전에 등장한 것은 2회뿐이고 나머지 25회가 모두 33장~48장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문헌 본문에서 전반부는 ‘닐우’가 쓰였고 후반부는 ‘닐우듸’가 집중적으로 쓰인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편찬할 때 전반부와 후반부의 기사자(記寫者)가 서로 달랐던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설명법 어미 ‘-〉-듸’의 변화는 기이하게도 이 문헌에서 화법동사 ‘니르-’에 한하고 있다. 같은 문헌 안에서도 ‘니르-’를 제외한 모든 동사에 대해서는 설명법 어미로 ‘-듸’를 쓴 예가 하나도 없다. 다음과 같이 모두 ‘-’를 연결해 쓰고 있다.

(38) 오(8ㄱ) 유무호(13ㄱ) 섬교(13ㄱ. 24ㄱ. 35ㄱ) 부쵹호(14ㄱ)

외요(15ㄱ) 사로(15ㄴ. 24ㄱ) 이쇼(19ㄱ) 답호(27ㄱ)

너교(27ㄱ) 쵸(30ㄱ) 마로(31ㄱ) 호(45ㄱ)

이것으로 보아 ‘닐우듸’의 ‘-듸’는 아무리 제2 음절 이하에서 일어난 ‘ㆍ’ 모음의 동요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 문헌에서 ‘-듸’의 채택에 아무리 적극적이었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하여 중간본인 기영판 ≪이륜행실도≫에서는 ‘닐우듸’를 모두 ‘닐오’로 환원시켜 놓고 있다. 한두 예만 들어 본다.

(39) ㄱ. 어미 닐우듸 이 거이로다 거이 와 예 두드리며 닐우듸 니거라(33ㄴ) - 어미 닐오 이 반시 거경이로다 거경이 와 상여 두드리며 닐오 니거라(기 33ㄴ)

ㄴ. 닐우듸 고 사름미 올가 저헤라(41ㄱ) - 닐오 고올 사이 올가 저페라(기 41ㄱ)

(36ㄹ)의 ‘’[同]도 제2 음절의 ‘ㆍ’ 모음 동요로 ‘듸’와 혼용되고 있다. ‘’의 ‘’는 기원적으로 의존 명사 ‘’[處]에 해당하므로 의존 명사 ‘’가 (36ㅁ)에서 ‘듸’로 변하듯이 ‘’도 ‘듸’로 변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 밖에 ‘다-’ ‘모-’ ‘모’ ‘여나’ ‘-ㅎ’ 등도 비어두 음절의 ‘ㆍ’ 모음이 동요를 일으켜 ㅡ로 교체된 형태들과 함께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단계 ‘ㆍ’ 모음의 동요가 이 문헌에서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16세기 문헌에서 ‘ㆍ’ 모음의 1단계 소실이 진행되면서 비어두 음절에서 ‘ㆍ’와 ㅡ 모음 사이에 (36)에서와 같은 혼용이 일어나게 되자 역으로 ‘ㆍ’ 모음과는 관련이 없던 낱말에서도 ‘ㆍ’와 ㅡ 사이에 혼용이 일어나고 있는 예를 이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36)에서와는 달리 비어두 음절의 ㅡ 모음이 도리어 ‘ㆍ’ 모음으로 교체되는 현상이다.

(40) 며느리(7ㄱ. 32ㄱ. 32ㄱ) - 며리(7ㄱ. 31ㄴ)

cf. 夫人이 며느리 어드샤(석보상절 6:7ㄱ) 며느리 부:婦(훈몽자회 상:31ㄴ)

15세기에 ‘며느리’로 표기되었던 낱말이 16세기의 이 문헌에서는 역으로 ‘며리’로 된 것이다. 그리하여 ‘며느리’와 혼용되고 있다. 이러한 역표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2 음절 이하에서 ‘ㆍ’ 음이 거의 소멸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5) 어두의 ㄹ 표기

15세기에는 현대 국어와 달리 어두에 ‘냐, 녀, 뇨, 뉴, 니, 녜’가 올 수 있었고 ㄹ은 어두에 그대로 쓰기도 하고 ㄴ으로 교체하여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에 ㄹ로 시작하는 한자어는 모두 한자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한글 표기에서 어두의 ㄹ을 찾기는 쉽지 않다. 15세기 중엽의 한글 표기에서 어두 ㄹ의 예를 들어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41) ㄱ. 약대어나 라귀어나 외야(석보상절 9:15)

ㄴ. 一切 라온 거시 그 中에 야(법화경언해 5:202)

ㄷ. 鬼神 이바며 즐겨 락닥더라(월인석보 23:73)

ㄹ. 러爲獺(훈민정음 용자례)

ㅁ. 쇠 로새 티오니(월인석보 21:81)

ㅂ. 太子ㅣ 닐오 내 담다라(석보상절 6:24)

(41)에서 보인 ‘라귀’[驢], ‘라온’[樂], ‘락닥’[樂], ‘러’[獺], ‘로새’[騾], ‘담’[弄] 등이 15세기에 쓰인 어두 ㄹ의 낱말들이다. 모두 ㅏ, ㅓ, ㅗ 모음 앞에 쓰인 ㄹ이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나온 이 문헌의 언해문에는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ㄹ로 시작하는 한자어의 한글 표기를 정확히 볼 수 있다. 언해문에 한자를 전혀 쓰지 않은 앞선 문헌으로 ≪구급간이방≫(1489)이 있다. 여기서는 초간본 ≪이륜행실도≫에 나타난, 한글로만 적은 한자어 표기를 통해서 당시의 어두에 ㄹ 사용이 어디까지 이루어졌던가 하는 문제를 밝히고자 한다. 어두음 ㄹ의 실태를 알기 위해 문헌 자료에 등장하는 예를 전부 들어 본다.

(42) 라도(羅道琮, 인명)(36ㄱ) 람(南)녀긔(36ㄱ) (郞廳)(46ㄱ) 식(糧食)(12ㄱ)

려(呂公)(34ㄱ) 려(呂翁)(40ㄱ) 려록[錄](29ㄴ) (令公)(39ㄱ)

례대(禮待)(19ㄱ) 례졀(禮節)(27ㄱ) 로조(盧操, 인명)(17ㄱ) 록(祿)(13ㄱ)

루호(樓護, 인명)(34ㄱ) 류군(劉君良, 인명)(26ㄱ) 륙구쇼(陸九韶, 인명)(30ㄱ)

륙촌(六寸)(16ㄱ. 26ㄱ) 림해(臨賀, 지명)(39ㄱ)

≪이륜행실도≫에 나타난 어두음 ㄹ은 ㅏ, ㅗ, ㅜ, ㅑ, ㅕ, ㅠ, ㅣ 등의 모음 앞에 두루 쓰인 것으로 보아 모음에 따른 제한은 없어 보인다. 현대어에서와 같은 ㄹ 탈락도 없고 ㄴ으로의 교체도 없이 ㄹ이 어두에 자유로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ㄹ 자음이 아닌 한자어 ‘南’에 대해서까지 ‘람’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철저한 어두의 ㄹ 표기에 걸맞게 어두에서 ㄹ음이 실제로 실현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다음의 예가 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43) 짐메 다 돈니 뉵기 잇거(箱中只有錢六百)(41ㄱ)

비록 초간본에서 유일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16세기에 ‘六’의 발음이 ‘뉵’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간본인 기영판 ≪이륜행실도≫(1727)에 가면 현실 발음을 반영하여 (42)의 예들에 쓰인 어두의 ㄹ을 거의 ㄴ으로 바꾼 것을 볼 수 있다.

(44) ㄱ. 라도(36ㄱ) → 나도종(기 36ㄱ) ㄴ. 람녀긔(36ㄱ) → 남녁킈(기 36ㄱ)

ㄷ. (46ㄱ) → 낭텽(기 46ㄱ) ㄹ. 식(12ㄱ) → 냥식(기 12ㄱ)

ㅁ. 려(34ㄱ) → 녀공(기 34ㄱ) ㅂ. 려(40ㄱ) → 녀옹(기 40ㄱ)

ㅅ. 로조(17ㄱ) → 노조(기 17ㄱ) ㅇ. 륙구쇼(30ㄱ) → 뉵구쇼(기 30ㄱ)

ㅈ. 륙촌(16ㄱ) → 뉵촌(기 16ㄱ) cf. 륙촌(26ㄱ) → 륙촌(기 26ㄱ)

ㅊ. 림해(39ㄱ) → 님해(기 39ㄱ)

위에서 보듯이 중간본에 와서는 어두의 ㄹ이 거의 ㄴ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이미 현실적으로 어두에서 사라진 ㄹ음을 ㄴ으로 표기에 반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표기법은 보수적이어서 중간본에서도 ‘록’(祿), ‘려록’[錄], ‘루호’(樓護), ‘류군량’(劉君良) ‘례대’(禮待), ‘례절’(禮節) 등의 한자어는 어두의 ㄹ을 그대로 표기하고 있으며 ‘륙촌’(六寸)의 경우에는 중간본에서 ‘륙촌’과 ‘뉵촌’이 혼용되고 있기도 하다.

6) 한자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륜행실도≫에는 언해문에 한자 표기가 하나도 없다. 한자어가 언해문에 많이 등장하지만 모두가 한자는 없이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다. 물론 이때는 15세기에 철저히 지켜졌던 동국정운의 개신(改新) 한자음이 폐기된 시기여서 당시의 현실 한자음에 바탕하여 한자어를 적고 있다. 그런데 한자어의 표기 중에는 당시 현실 한자음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훈몽자회≫(1527)나 ≪신증 유합≫(1576)에 나타난 한자음과 차이를 보이는 예가 보인다. 이제 그런 항목들을 모두 열거하면서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에서 보이고 있는 새김과 음을 함께 제시하여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45) ㄱ. 비졉(避接)(11ㄱ) cf. 避 피 피(신증유합 하:16ㄱ)

ㄴ. 녜(長利)(21ㄱ) cf. 利 니 니(신증유합 하:57ㄴ)

ㄷ. 예(喪輿)(33ㄴ) cf. 輿 술위 여(훈몽자회 중:13ㄱ)

ㄹ. 나(乃終)(30ㄴ. 32ㄴ) cf. 乃 야사 내(신증유합 상:16ㄴ)

ㅁ. 가솬(家産)(35ㄱ) cf. 産 나 산(훈몽자회 17ㄴ)(신증유합 상:12ㄴ)

ㅂ. 차도(査道, 인명)(40ㄱ) cf. 査 들궐 사(신증유합 하:37ㄱ)

ㅅ. 마(牽馬)(41ㄱ) cf. 牽 잇글 견(신증유합 하:46ㄱ)

ㅇ. 소(殯所)(42ㄱ) cf. 殯 솟 빈(훈몽자회 중:17ㄱ)

ㅈ. 쇽군(蜀郡)(20ㄱ) cf. 蜀國 : 쵹나랏(35ㄱ)

(45ㄱ~ㅈ)에 나타난 한자어의 한글 표기는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의 한자음과 조금씩 차이가 난다. (45ㄱ)만 하더라도 한자어 ‘避接’을 초간본 ≪이륜행실도≫에서는 ‘비졉’으로 적고 있으나 ≪신증 유합≫에서는 ‘避’의 음을 ‘피’라 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졉’이라 하지 않고 ‘비졉’이라 한 것은 당시의 속음(俗音)을 반영한 표기가 아닌가 한다. 초간본이 지방에서 간행된 것임을 감안하면 방언이나 속음이 개입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45ㄱ)의 ‘비졉’이 중간본의 기영판에는 ‘피졉’으로 나타난다. (45)의 다른 예들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45ㄹ)의 ‘나’에 대해서는 같은 문헌에서 ‘내’(36ㄱ. 43ㄱ)으로도 나타나고 있어 두 가지가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45ㅈ)에서는 ‘蜀’을 ‘쇽’으로 적고 있는데 이 한자는 전자의 두 교본에 나와 있지 않아 당시의 정확한 음이 무엇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蜀國’을 같은 문헌의 언해문에서 ‘쵹나랏’으로 표기한 곳이 있어 ‘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45ㄱ~ㅈ)의 예들이 중간본의 기영판에 가서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46) ㄱ. 피졉(避接)(기 11ㄱ)

ㄴ. 댱니(長利)(기 21ㄱ)

ㄷ. 상여(喪輿)(기 33ㄴ)

ㄹ. 내죵(乃終)(기 30ㄱ. 32ㄴ)

ㅁ. 셰간(기 35ㄱ)

ㅂ. 사도(査道)(기 40ㄱ)

ㅅ. 경마(牽馬)(41ㄱ)

ㅇ. 빙소(殯所)(기 42ㄱ)

ㅈ. 쵹이란 고올(蜀郡)(20ㄱ)

이상이 중간본 기영판(1727)의 한자어 표기이다. (46ㄱ~ㅈ)의 표기를 보면 초간본에서와는 달리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의 한자음으로 대부분 돌아간 것을 알 수 있다. 단, (45ㅁ)의 ‘가솬’이 (46ㅁ)에서는 ‘셰간’이란 낱말로 교체가 되는 바람에 ‘家産’ 자체의 중간본 음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중간본에 가서도 ≪훈몽자회≫나 ≪신증 유합≫의 한자음과 상관없이 초간본의 음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46ㅅ, ㅇ)의 ‘경마’(牽馬)와 ‘빙소’(殯所)이다. 아마도 ‘牽馬’나 ‘殯所’의 당시 현실음이 ‘경마’와 ‘빙소’로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훈몽자회≫에서 ‘殯’의 새김과 음을 달면서 ‘솟 빈’이라 하여 한자 교본에서조차 ‘빙소’라 한 것을 보면 ‘빈’은 한낱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음이요, 현실음은 ‘빙’일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의 ‘蜀’에 대해서는 이미 초간본에서도 ‘쵹’이라고 한 곳이 있었고 중간본에서도 ‘쵹’이란 말을 쓰고 있어 ‘蜀’의 당시 음은 ‘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자가 연결되면서 동화 현상이나 탈락 등의 음운 현상이 일어나 이를 표기에 반영함으로써 한자의 본래 음과는 다른 표기를 하고 있는 예들을 모두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47) ㄱ. 불로(忿怒)(7ㄱ)

cf. 忿 노 분(신증유합 하:35ㄱ) 怒 로 로(신증유합 하:3ㄱ)

ㄴ. 쳘리(千里)(43ㄱ)

cf. 千 즈믄 쳔(훈몽자회 하:14ㄴ) 里 마 리(훈몽자회 중:5ㄱ)

(48) ㄱ. 모(繆肜, 인명)(7ㄱ) cf. 목이  불로여(7ㄱ)

ㄴ. (行幸)(27ㄱ) cf. 行 녈 (훈몽자회 하:11ㄴ) (번역박통사 상53ㄴ)

ㄷ. 브듸이(不得已)(21ㄴ)

cf. 不 아닐 블(신증유합 하:13ㄱ) 得 어들 득(신증유합 하:57ㄴ)

(49) ㄱ. 하람(河南)(2ㄱ) cf. 南 앏 남(훈몽자회 중:2ㄴ)

ㄴ. 뉴(風流)(21ㄱ) cf. 流 흐를 류(훈몽자회 하:1ㄱ) 류(석보상절 9:21ㄱ)

위에서 든 (47)~(49)의 한자어 표기들은 모두 음운 현상에 따른 한글 표기이다. (47)에서는 ‘-ㄴㄹ-’이 ‘-ㄹㄹ-’로 동화가 일어난 그대로 적고 있다. 그리하여 ‘분로, 쳔리’를 ‘불로, 쳘리’로 표기한 것이다. (48)은 한자의 연결 과정에서 자음 탈락이 일어난 경우이다. (48ㄱ)의 ‘繆肜’이라는 인명을 ‘목’이라 표기해 놓고 한편에선 ㄱ탈락이 일어난 ‘모’을 같은 장(張)에서 쓰고 있다. 또한 임금의 행차를 뜻하는 ‘’에서 동음생략이 일어난 ‘’이 (48ㄴ)이다. 그리고 (48ㄷ)의 ‘브듸이’는 ‘브득이’(不得已)에서 ‘득’의 말음 ㄱ이 탈락하고 다음의 ㅣ 모음에 영향을 받아 ‘듸’로 된 것으로 보인다. (49ㄱ)은 모음 사이에서 ‘ㄴ〉ㄹ’ 현상이 일어난 것이고, (49ㄴ)은 ㆁ 아래에서 ‘ㄹ〉ㄴ’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나타낸 것이다.

7) ㅎ 탈락

현대 국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ㅎ종성 체언이란 것이 15세기 국어에 있다. 이들 체언의 ㅎ말음은 휴지(休止)나 사이시옷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그 이외 연결되는 형태소에는 그 두음에 ㅎ이 첨가된다. ㅎ종성 체언에는 비록 체언은 아니지만 복수 접미사 ‘-ㅎ’도 ㅎ말음을 갖고 있어 이에 포함해서 다룬다. ㅎ말음은 이미 15세기에서 몇 낱말에 한해 ㅎ탈락형과 ㅎ유지형이 함께 쓰이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은 16세기에도 ㅎ말음이 거의 유지되고 있다. 초간본 ≪이륜행실도≫에도 ㅎ종성 체언의 ㅎ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에서 ㅎ탈락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부분이 접속 조사 앞에 집중되고 있음이 특징이다.

(50) 아들와(27ㄱ) 션뵈와(38ㄱ) 며느리들로(32ㄱ) 와(8ㄱ)

cf. 사콰(석보상절 서:2ㄱ) 너희로(육조법보단경 중:23ㄱ)

하콰(월인석보 1:17ㄱ)

위에서 든 ㅎ탈락 예들을 보면 복수 접미사 ‘-ㅎ’과 명사 ‘ㅎ’이 모두 접속 조사 ‘-과’와 조격 조사 ‘-()로’ 앞에서 ㅎ이 탈락하고 있다. 15세기 국어의 용례를 보면 ㅎ종성 체언 아래에서 접속 조사는 ‘-콰’, 조격 조사는 ‘-로’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문헌에서는 ㅎ이 탈락된 ‘-와’와 ‘-로’의 형태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헌에서도 ‘-ㅎ’과 ‘ㅎ’이 다른 조사 앞에서는 ㅎ이 나타난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51) 아히(40ㄱ) 며느리들흘(31ㄴ) 며느리들히(7ㄱ) 히(29ㄴ)

희(12ㄱ. 29ㄴ) 셔(23ㄱ)

이 밖에, 이 문헌에는 ‘후(後)에’가 축약되어 ‘훼’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자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이 문헌에서도 역시 주된 형태는 ‘후에’임을 (53)에서 알 수 있다.

(52) ㄱ. 그 훼 허뮈 아들 모도고(武乃會宗族)(4ㄱ)

ㄴ. 밀리 훼 죽거(密後亡)(12ㄴ)

ㄷ. 츈니 온 훼  먹더라(椿還然後共食)(15ㄴ)

(53) ㄱ. 후에(11ㄴ. 20ㄱ. 27ㄱ. 32ㄴ. 37ㄱ. 38ㄱ. 47ㄱ)

ㄴ. 후에(11ㄴ. 15ㄴ)

중간본의 기영판에는 (52)의 ‘훼’가 모두 ‘후에’로 바뀌어 나타난다.

2. 형태

1) 문법 형태소의 모음 변동

15세기 국어에 등장하는 용언의 어미 중에는 말음이 ㅑ나 ㅕ로 된 어미가 여러 종류 있다. 대표적인 것이 ‘-’ 용언 어간에 붙는 연결어미 ‘-야’이고, 다음으로 종결 어미인 청유법의 ‘-져’가 있으며, 또한 의도법 연결 어미 ‘-고져’도 있다. 그리고 감탄법의 어미 ‘-ㄹ셔’도 들 수 있고, 이 밖에 의문법의 ‘-녀’ ‘-려’도 자주 볼 수 있는 어미이다. 이들 어미는 ‘-’에 붙는 ‘-야’ 어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ㅕ 말음의 형태가 쓰였다. 그러던 것이 초간본의 ≪이륜행실도≫에서는 이들 어미의 모음에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음이 ㅑ이던 어미는 ㅕ로 바뀌는 반면, ㅕ이던 어미는 ㅑ로 변하는 일련의 변동 현상이다. 이에 따라 모음이 바뀐 형태도 쓰였지만 한편으로 바뀌기 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아직까지 모음의 교체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신형과 구형의 공존 상태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어간 ‘-’에 붙는 연결 어미의 경우만은 ‘-야’에서 ‘-여’로 대세를 석권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여’의 사용이 일방적이다. ‘여’가 거의 통일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 그 많은 사용 빈도 중에 ‘야’는 다음의 (54)가 그 전부이다.

(54) 야(4ㄱ) 부쵹야(14ㄱ) 원(員)야 갈 제(41ㄱ) 금고(禁錮)야(44ㄱ)

입관(入棺)야(44ㄱ)

‘야〉여’의 변화는 시대적으로 16세기에 해당하는 현상은 아니다. 물론 16세기에 오면 일부에서 ‘여’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는 하나 아직은 ‘야’의 시대이다. 이 문헌보다는 훨씬 후대에 가서야 ‘여’가 정착한다. 그런데도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서 ‘여’가 집중적으로 쓰이게 된 점이 특이하다. 그 후 중간본의 기영판(1727)에 가면 초간본의 ‘여’가 대부분 ‘야’로 다시 돌아간 것을 보아 초간본의 ‘여’는 이 문헌에 국한하여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무엇에 기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높임법의 ‘-시-’에 연결 어미 ‘-아/어’가 연결되면 예외 없이 ‘-샤’의 형태로 쓰인다. 그런데 이때의 ‘-샤’가 이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셔’로 나타난 예가 보인다. 이를 제외하고는 ‘-셔’가 쓰인 예를 볼 수 없다.

(55) 예 블려보셔 그 아들와 화 일 무르신대(召見公藝 問其所以能睦族之道)(27ㄱ)

cf. 그 집븨 샤(27ㄱ)

다음으로 청유법의 ‘-져’가 이 문헌에서 ‘-쟈’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의 경우와는 달리 모음 ㅕ가 ㅑ로 변하는 것이다. 이는 문례가 많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ㅑ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56) ㄱ. 닫티 사져 고(7ㄱ) 이리셔 여희져(33ㄴ)

ㄴ. 다티 사쟈 커(24ㄱ)

위의 (56ㄱ)에 쓰인 ‘여희져’는 중간본에서 ‘여쟈’로 바뀌었다. 청유법 ‘-져’와 형태상으로 비슷한 의도법 어미 ‘-고져’에 있어서는 ‘-고쟈’로의 변화를 보여 주지 않고 ‘-고져’의 형태만 나타난다.

(57) 일훔 내오져 여(4ㄱ) 나 해코져 니(22ㄱ) 사 내오져 호(37ㄱ)

의도법 어미도 중간본에서는 ‘일홈 내오쟈 야’(기 4ㄱ)와 ‘나 해코쟈 니’(기 22ㄱ)로 되어 ‘-고져〉-고쟈’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감탄법 어미 ‘-ㄹ셔’에 있어서도 모음 ‘ㅕ〉ㅑ’의 변화를 볼 수 있다.

(58) ㄱ. 이런 어딘 을 둘셔(17ㄱ)

ㄴ. 모다 닐우 다샤(11ㄱ)

‘-ㄹ셔’와 ‘-ㄹ샤’가 함께 쓰이고 있다. 그런데 (58)의 경우에 중간본에서는 서로 반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59) ㄱ. 이런 어딘 형을 둘샤(기 17ㄱ)

ㄴ. 모다 닐오 긔특셔(기 11ㄱ)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음이 ㅑ나 ㅕ인 어미에 있어서 이 문헌은 ‘ㅑ〉ㅕ’ ‘ㅕ〉ㅑ’의 모음 변동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야’는 ‘여’로의 일방적인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밖에 청유법 ‘-져’는 ‘-쟈’로, 감탄법 ‘-ㄹ셔’도 ‘-ㄹ샤’로 각각 변화된 형태들이 이전 형태와 함께 쓰이고 있다. 다만 의도법 어미 ‘-고져’는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어미들이 중간본에서도 ‘야’와 ‘여’, ‘-져’와 ‘-쟈’, ‘-ㄹ셔’와 ‘-ㄹ샤’, 심지어 ‘-고져’와 ‘-고쟈’까지 모두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ㅕ 형태와 ㅑ 형태의 혼용 상태는 오래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대등적 연결 어미 ‘-고’가 ‘-구’로 변이된 형태가 ‘-고’와 함께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구’ 어미가 예외 없이 동사 ‘울-’[泣]에 국한해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서는 ‘-구’의 어미 사용을 볼 수 없다.

(60) ㄱ. 주근 주를 슬허 셜워 울우(1ㄱ) cf. 주근 주 슬허 울고(기 1ㄴ)

ㄴ. 보고 믄득 울우 가 븓안더라(10ㄱ) cf. 보고 믄득 울고 가 븟안더니(기 10ㄱ)

ㄷ. 아도  울우 닐우(23ㄱ) cf. 아도  울고 닐오(기 23ㄱ)

ㄹ. 아 모도아 울우 어미려 닐우(25ㄱ) cf. 아 모도와 울고 어미려 닐오(기 25ㄱ)

(61) ㄱ. 로죄 울오 절여 말오라 대(17ㄱ)

ㄴ. 여 주글 제 울오 닐오듸(36ㄱ)

ㄷ. 서르 잡고  울오 가니(41ㄱ)

ㄹ. 견 울오 말오라 대(46ㄱ)

ㅁ. 션이 죽닷 말 듣고 신위 라 노코 울오(47ㄱ)

위의 (60)과 (61)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울우’와 ‘울오’는 이 문헌에서 비등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울우’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중간본에 가서는 모두 ‘울고’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5세기 국어에서 보조사로 쓰인 ‘-(/으)란’이 이 문헌에서는 모음이 교체된 ‘-(/으)런’으로만 나타난다. 다른 문헌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변이형이다.

(62) ㄱ. 두 아런 사오나온 거슬 주니(4ㄱ) cf. 두 아란 사오나온 거슬 주니(기 4ㄱ)

ㄴ. 아와 아런 두고(12ㄱ) cf. 아와 아을란 두고(기 12ㄱ)

ㄷ. 져믄 아런 각별리 돗 라 안치더라(28ㄱ) cf. 져믄 아흴난 각별이 돗 라 안치더라(기 28ㄱ)

초간본에서 불쑥 나타난 ‘-런’ 보조사는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여 중간본에서는 ‘-런’이 자취를 감추고 다시 ‘-란’으로 복귀한 것을 볼 수 있다.

2) 삽입모음의 동요

이른바 의도법의 선어말 어미라고 하는 삽입모음 ‘-오/우-’는 15세기 국어에서만 볼 수 있는 문법적인 특징이다. 이는 어말 어미에 따라 ‘-오/우-’를 반드시 그 앞에 수반하는 어미와, 때로는 수반하기도 하고 수반하지 않기도 하는 어미로 나뉜다. 이 중에서 명사형 어미 ‘-ㅁ’, 설명법 어미 ‘-’ 의도법의 어말 어미 ‘-려’ 등은 언제나 삽입모음을 그 앞에 수반하고 있다.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는 삽입모음의 첨가가 대체로 15세기에서와 같다. 그런 가운데 전체를 통해 ‘-ㅁ’ 앞에 삽입모음이 수반되지 않고 있는 예를 몇 군데에서 발견하게 된다.

(63) ㄱ. 치운 후에 소남긔 후에 러디 알리라 니(11ㄴ)

ㄴ. 덕 아 거즛 니브 어엿비 너겨(22ㄱ)

ㄷ. 이미 라난 여 리 더욱 히 여(48ㄱ)

15세기 문헌이라면 (63)의 ‘러디, 니브, 리’은 각각 ‘러듀, 니부, 료’ 등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헌에서 일부이지만 이처럼 삽입모음의 수반이 필수적인 환경에서 삽입모음의 소멸을 보인 것은 16세기에 들어서 삽입모음이 동요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3) 변칙적인 문법형태

이 문헌에 나타나는 모든 조사나 어미는 15,6세기 국어에서 쓰이는 형태들이다. 그러면서도 이 문헌에는 다른 어떤 문헌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변칙적인 문법형태의 사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첫째는 감탄법 어미라고 하는 ‘-로다’이다. ‘-로다’는 ‘-도다’가 서술격 조사 ‘-이-’나 미래시상 선어말어미 ‘-리-’ 다음에 연결될 때 쓰이는 교체형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이외에는 ‘-도다’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와 같은 어간에 ‘-도다’가 아닌 ‘-로다’를 직접 연결한 예를 세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도다’나 ‘리로다’를 써야 할 자리에 ‘로다’를 쓰고 있다.

(64) ㄱ. 편안티 몯여 닫티 사라 로다(8ㄱ)

cf. 편안티 몯니 닷티 사라야 리로다(기 8ㄱ)

ㄴ. 뎨의 류에 두디 몯로다(48ㄱ)

cf. 뎨의 뉴에 두디 못리로다(기 48ㄱ)

ㄷ. 내 지블 라도 몯 라로다(43ㄴ)

cf. 내 집을 라도 못 라리로다(기 43ㄴ)

위의 변칙적인 ‘로다’와 ‘몯로다’ ‘라로다’[足]는 중간본에서 모두 ‘리로다’와 ‘못리로다’, ‘라리로다’로 문법적이 되었다.

이기문(2006:182~183)에는 “또 하나 비교를 나타낸 특수조사로 ‘라와’가 있었는데 기원은 확실치 않다. … 이 ‘라와’는 16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라고 하여 조사 ‘-(이)라와’는 15세기에만 존재했던 문법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 ‘-이라와’가 등장함으로써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65) 비로 내 몬져 앗라와 죽거지라 대(3ㄱ)

이로써 보조사 ‘-(이)라와’의 소멸은 16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사이ㅅ으로 인한 자음 탈락

15세기 국어에서 말음이 ㄹ인 명사에 사이ㅅ이 붙게 되면 명사 말음 ㄹ이 수의적으로 탈락하는 현상이 있었다. ‘믈’[水]을 예로 들어 사이ㅅ이 붙었을 때의 15세기 어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66) ㄱ. 믌결이 갈아디거늘(월인천강지곡 상:39ㄱ)

ㄴ. 여러 가짓 믌고기 먹고(구급방언해 하:57ㄴ)

(67) ㄱ. 미 그처도 믓겨리 오히려 솟고(목우자수심결언해 24ㄴ)

ㄴ. 믓고기 먹고 毒 마자(구급방언해 하:57ㄱ)

위의 15세기 자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동일한 문헌의 같은 어휘 항목에서도 사이ㅅ 앞의 명사 말음 ㄹ의 유지형과 탈락형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사이ㅅ 앞의 ㄹ 탈락은 수의적인 현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ㅅ 앞의 ㄹ 탈락 현상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68) ㄱ. 아 믓 머굼도 아니 머고 닷쇄 고(12ㄴ)

cf. 아이 믈 머곰도 아니 머고 닷쇄 고(기 12ㄴ)

ㄴ. 믓결 가온대셔 봄노 거(36ㄱ)

cf. 믈결 가온대셔 노손 거(기 36ㄱ)

ㄷ. 언 아 섯나래 과 아미 여(21ㄱ)

cf. 언 아츤 선날의 형과 아미 쳥야(기 21ㄱ)

cf. 섨날 朝會 마샤매 갠 비치 도다(초간두시언해 20:17ㄱ)

위의 (68ㄱ~ㄷ)에 쓰인 ‘믓, 믓결, 섯나래’는 모두 ‘믌, 믌결, 섨나래’에서 ㅅ 앞의 ㄹ이 탈락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68ㄱ)의 ‘믓’은 휴지(休止) 앞이어서 사이ㅅ이 필요치 않은 ‘믈’이 쓰여야 함에도 ‘믓’이 쓰였다. ‘믓’의 경우에는 중간본에서 모두 본래의 ‘믈’로 돌아갔으나 ‘섯나래’는 중간본에서 ‘설날’로 돌아가지 않고 초간본을 답습하면서 현실 발음을 따라 ‘선날’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사이ㅅ은 ㅂ 받침 명사에 붙어 쓰이기도 하였는데 그 대상은 ‘집’[家]이라는 명사가 유일한 것이었다. ‘집’에 사이ㅅ이 붙으면 ‘짒’이 되어야겠지만 ‘짒’으로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고 ㅂ이 탈락된 ‘짓’으로 15세기부터 꾸준히 쓰이고 있다. 이 문헌에서도 ‘짓’은 여러 군데서 등장한다.

(69) ㄱ.  짓 안해 남진 겨집비 일 귀나 여(15ㄴ)

cf.  집 안해 남진 겨집비 일 귀나야(기 15ㄴ)

ㄴ.  짓  셰간내 사더라(16ㄱ)

cf.  집  셰간의 사더라(기 16ㄱ)

ㄷ. 뎨 손발 고 쳐쳡븐 밧 짓 사미니(20ㄱ)

cf. 형뎨 손과 발 고 안해와 쳡은  집 사이니(기 20ㄱ)

ㄹ. 네 내 짓일 여리더니라(26ㄱ)

cf. 네 내 짓일 여리더니라(기 26ㄱ)

ㅁ.  짓이를 긔걸더라(30ㄱ)

cf.  집이 긔걸야 더라(기 30ㄱ)

중간본에서는 ‘짓’을 거의 청산하고 ‘집’의 형태를 회복하고 있다. 그리고 초간본에서도 ‘짓’ 대신 ‘집’을 선택한 예가 다음처럼 많이 나타난다.

(70) ㄱ. 됴 집 됴 받 됴 을(4ㄱ)

ㄴ. 집 안해  말   잣 깁블(26ㄱ)

ㄷ. 집 안히 싁싁여(31ㄱ)

ㄹ. 집 뎐디 가솬 사 주어(35ㄱ)

3. 어휘

1) 동일어의 상이한 어형

동일한 어휘가 이 문헌 안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등장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말하자면 동일 문헌에서 신형과 종전의 구형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15세기부터 두 형태가 공존해 왔기 때문에 신형과 구형의 구분이 적절치 않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다음의 5개 어휘가 서로 다른 어형으로 함께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71) 졈-[幼少] : 졂-

ㄱ. 져믄 아 잇더니(2ㄱ) 목이 져머셔 아비 업고(27ㄱ)

ㄴ. 세 아 나하 다 졀머든(24ㄱ) 슌인니 나히 졀멋더니(42ㄱ)

(72) 흐러[散] : 흗터

ㄱ. 흐러 도커늘(3ㄱ)

ㄴ. 그 깁블 흗터 죄 주라(29ㄴ)

(73) 구[叱] : 

ㄱ. 어미 조쳐 구거(17ㄱ)

ㄴ. 여 문늬 나가라 대(8ㄱ)

(74) 수을[酒] : 술

ㄱ. 람미 알오 라 가 그 수을를 아대(10ㄱ-ㄴ) 수을 즐겨 먹고(17ㄱ)

ㄴ. 그러면 술 비조리라 … 어믜게 절고 술 머그니(33ㄱ)

(75) -[設] : -

ㄱ. 각별리 돗 라 안치더라(28ㄱ)

ㄴ. 아 위여 돗 라 여든(17ㄱ)

(76) 니르-[讀] : 닑-

ㄱ. 셔산늬 올아 주으려셔  먹고 글 니르더니(48ㄱ)

ㄴ. 세 아 글 닐기라 보낼 제(17ㄱ)

(71)의 ‘졈다’와 ‘졂다’에 있어서는 중세 국어의 ‘어리다’가 ‘愚’(우)의 뜻을 담당하는 이상 ‘幼少’(유소)의 뜻은 ‘졈다’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간 ‘졈-’의 종성에 현대어처럼 ㄹ이 첨가된 ‘졂-’의 형태가 초간본 ≪이륜행실도≫에 등장하여 ‘졈-’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은 16세기의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때에 ㄹ이 현실적으로는 종성에서 실현되었을 것이나 표기상으로는 아직 ‘졈-’의 형태가 버티고 있는 형국에 ‘졂-’의 표기가 등장한 것은 퍽 이례적이다. 초간본에 등장한 (71ㄴ)의 ‘졀머든’과 ‘졀멋더니’가 중간본인 기영판에서 도로 ‘져머 잇늘’과 ‘져멋니’로 되어 이전 형태인 ‘졈-’으로 환원한 것을 볼 때 초간본의 ‘졂-’은 대담한 채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72)의 ‘흗-’과 ‘흩-’은 ‘散’(산)의 뜻으로 쓰이는 동일어이다. 단, ㄷ 말음의 ‘흗다’는 15세기에 ㄷ불규칙 동사로서 어간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연결되면 어간이 ‘흘-’로 교체되는 점이 ‘흩다’와는 다르다. (72ㄴ)의 ‘흗터’는 ‘흐터’의 중철 표기이다. 중세 국어에서 ‘흗-’과 ‘흩-’이 자음 앞에서는 둘다 ‘흗-’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분이 불가능한 대신 모음 어미 앞에서는 ‘흐ㄹ-’과 ‘흐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분이 뚜렷해진다. 그런데 이 두 어형은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나란히 쓰여 경합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이 문헌에까지 이어지며 결국은 ‘흩-’으로 단일화하여 현대어에 이른다. (73)은 15세기의 ‘구’[叱]이 16세기에 와서 경음화로 ‘’이 된 것인데 구형인 ‘구’과 신형인 ‘’이 한 문헌에서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같은 계열의 ‘구짖다’도 15세기에는 경음화하지 않았으나 16세기에는 경음화한 ‘짖다’가 등장하여 함께 쓰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74)의 ‘수을’과 ‘술’도 함께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서부터 사용된 어휘이다. 어형으로 보아서는 ‘수을〉술’의 변천 과정이 예상되나 한글 문헌에 등장하는 시대 배경으로는 동시대의 어형들이다. 그 공존은 이 문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75)는 ‘돗자리를 깔다’ 할 때의 동사가 이 문헌에서 ‘-’로도 나타나고 ‘-’로도 쓰인 것을 말한다. 얼핏 보면 두 어형은 경음화 이전 형과 이후 형이 마치 (73)에서처럼 공존하는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는 훈민정음 이래로 ‘다’[設]란 어형이 이 곳 이외에는 쓰인 용례가 없어 경음화에 의한 ‘다〉다’의 변화를 상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의 동사 ‘-’은 유일례이거나 아니면 동사 ‘-’의 오기 내지 오각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좀더 자세한 검토와 검색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76)에서는 ‘讀書’(독서)를 뜻하는 동사로 ‘닑-’ 외에 특이하게 ‘니르-’가 쓰였다. 이 ‘니르-’[讀]를 두고 안병희(1978)에서는 경상도 방언의 노두(露頭)로 보고 있다. 그것은 이 문헌과 함께 김안국에 의하여 경상도에서 간행된 ≪여씨향약언해≫와 ≪정속언해≫에도 ‘니르/니-’[讀]가 보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간행된 문헌 자료 중에는 이처럼 그 지방의 방언형을 언해문에 섞어 쓴 경우가 있어 ‘니르-’도 방언형으로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닑-’과 함께 ‘니르-’가 쓰였다는 것은 한 문헌 안에 공통 어형과 방언형이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니르-’는 중간본에서 공통 어형인 ‘닑-’으로 교체되었다.

2) 유의어(類義語)

낱말 사이의 유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의미의 세계는 그 경계가 모호하고 분명히 잡히지도 않는 추상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어 직관력이 미치지 않는 중세 국어를 대상으로 낱말 간의 유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초간본에 해당하는 옥산서원본과, 중간본 중의 하나인 규장각본의 기영판을 서로 대조함으로써 양 문헌 사이에 나타난 낱말의 교체 현상을 통해 유의 관계를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는 초간본에서 쓰인 낱말이 중간본에서 그대로 쓰이기도 하고 다른 낱말로 교체되기도 하는 경우와, 반대로 초간본에서는 서로 다른 낱말이던 것이 중간본에 가서는 같은 낱말로 일치를 이루는 경우가 있어 이 두 경우를 통해 유의 관계를 파악하려 한다.

(77) 아/아 : 권당

ㄱ. 허뮈 아들 모도고(4ㄱ) - 허뮈 아음들 모도고(기 4ㄱ)

ㄴ. 아믈 어엿비 너겨(20ㄱ) - 아믈 어엿 너겨(기 20ㄱ)

ㄷ. 아들와 화 일 무르신대(27ㄱ) - 아와 화동 이 무르신대(기 27ㄱ)

ㄹ. 먼 아 다  밥배 먹고(15ㄴ) - 먼 권당히 다  바배 먹고(기 15ㄴ)

ㅁ. 아히 돈 삼만 모도와 주니(40ㄱ) - 권당히 돈 삼만 모도와 주니(기 40ㄱ)

(78) 의식 : 반시

ㄱ. 람미 의식 몬져 맛보니(10ㄴ) - 왕람이 의식 몬져 맛더니(기 10ㄴ)

ㄴ. 의식 쥬가례다히로 더니(31ㄴ) - 의식 쥬가례대로 더니(기 31ㄴ)

ㄷ. 의식 몬져 원의게 조차 질졍이더라(48ㄴ) - 반시 몬져 원뎡의게 조차 질졍더라(기 48ㄱ-ㄴ)

(79) 부쵹- : 려-/쵹-/맛-

ㄱ. 져믄 아 살리 극긔게 부쵹고(14ㄱ) - 져믄 아 손극의게 려시라 고(기 14ㄱ)

ㄴ. 허시도 머리셔 극긔게 부쵹호(14ㄱ) - 허시도 멀니 이셔 극의게 쵹야 닐너 보내요(기 14ㄱ)

ㄷ. 어미 주글 제 그딧게 부쵹야(14ㄱ) - 엄이 죽을 제 그게 맛든(기14ㄱ)

위의 (77)~(79)에서 제시한 초간본의 낱말들은 모두 중간본에서 한 가지 이상의 다른 낱말로 교체되고 있다. (77)의 ‘아/아’은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쓰이는 한편, 일부에서는 한자어인 ‘권당’(眷黨)으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아/아’과 ‘권당’은 유의 관계의 낱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78)의 ‘의식’도 (77)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식’과 ‘반시’도 다같이 ‘必’(필)의 뜻으로 쓰이는 유의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79)의 동사 ‘부쵹-’는 중간본에서 모두 초간본과는 다른 ‘리-’[率], ‘쵹-’[囑], ‘맛-’[委] 등으로 교체되어 있다. 한문 원문을 보면 ‘리-’, ‘쵹-’, ‘맛-’에 대응하는 한자가 모두 똑같은 ‘屬’(속/촉)으로 되어 있어 여기서는 이 세 동사가 ‘부쵹-’와 함께 유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예를 보자.

(80) 값 : 삯

ㄱ. 글 서 주고 갑 바다 먹고 사더라(19ㄱ) - 글 서 주고 갑 바다 먹고 사더라(기 19ㄱ)

ㄴ. 갑시 업서 힘서 질 여(37ㄱ) - 갑시 업서 힘써 흥졍질 여(기 37ㄱ)

ㄷ.  일 고 갑 바다   나니(5ㄱ) -  일 고 삭 바다   나니(기 5ㄱ)

(80)의 ‘값’과 ‘삯’도 유의 관계로 보인다. 초간본의 ‘값’이 중간본에서는 ‘값’으로도 나타나고 ‘삯’으로 교체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 초간본에서는 금전(金錢) 내지 가격이란 뜻과 임금(賃金) 내지 요금이라는 뜻의 의미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값’으로 둘 다를 의미하였지만 중간본에 이르러서는 의미가 분화되어 임금 내지 요금은 ‘값’에서 분화된 ‘삯’이란 말로 나타내게 됨에 따라 품삯에 해당하는 (80ㄷ)의 ‘값’은 중간본에서 ‘삯’으로 교체된 것이다.

이제는 지금까지와 반대로 초간본에서는 서로 다른 낱말로 표현된 항목이 중간본에 가서 그 중의 한 낱말로 통일된 경우이다. 이를 통해서 초간본의 서로 다른 낱말은 유의 관계에 있었던 낱말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81) 말-[掌] : 맛디-

ㄱ. 어미 집븻 이를 맛디니(18ㄱ) - 엄이 집읫 이 다 맛더니(기 18ㄱ)

ㄴ.  여 집븨 이를 말라 시니(18ㄱ) -  어마님이 집의 이 맛 라 시니(기 18ㄱ)

ㄷ. 만 사게 여 더라(13ㄱ) - 맛던 사게 쳥야 더라(기 13ㄱ)

ㄹ. 나 여 마라 (29ㄱ) - 나 야 아라(기 29ㄱ)

(82) 아니완-[惡] : 사오납-

ㄱ. 두 아런 사오나온 거슬 주니(4ㄱ) - 두 아란 사오나온 거슬 주니(기 4ㄱ)

ㄴ. 내 사오나오 벼슬 고(4ㄱ) - 내 사오나오 벼슬 고(기 4ㄱ)

ㄷ. 두 이 아니완히 졉여(19ㄱ) - 두 형이 사오나이 졉야(기 19ㄱ)

(83) 삽지지-[鬪] : 사호-

ㄱ. 세 아 수을 즐겨 먹고 과 사화(17ㄱ) - 세 아이 술 즐겨 먹고 과 싸화(기 17ㄱ)

ㄴ. 새 삿길 자리 밧고아 노하 사화 우지지거(26ㄱ) - 가마괴 삿기 자리 밧고아 노하 사화 우지지거 (기 26ㄱ)

ㄷ. 조 삽지지 마리 잇거(7ㄱ) - 조 사홈 마리 잇(기 7ㄱ)

초간본의 ‘맛디-’와 ‘말-’이 중간본에서는 모두 ‘맛디-’로 통일되어 있다. 물론 ‘알-’을 중간본에서 그대로 답습한 경우도 보이지만 ‘맛디-’와 ‘알-’이 유의 관계임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마찬가지로 (82)의 ‘아니완-’이나 ‘사오납-’도 중간본에서 모두 ‘사오납-’으로 일원화됨으로써 두 낱말 역시 유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3)의 ‘삽지지-’는 중세국어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동사이어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았는데 중간본에서 ‘사홈-’로 교체된 예가 있어 ‘삽지지다’는 ‘사호다’와 유의 관계에 있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3) 미등재 어휘

이 문헌의 언해문에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옛말 사전 주012)

<풀이>옛말 사전은 ≪이조어 사전≫(1964. 연세대 출판부), ≪우리말 큰사전 4 -옛말과 이두-≫(1992. 한글학회), ≪교학 고어 사전≫(교학사. 1997)을 대상으로 하였다.
에 실려 있지 않은 낱말을 여기에 제시하고 그 뜻도 함께 밝혀 보고자 한다.

(84) 자-[炊]

ㄱ. 로조 마라 자여(17ㄱ) - 노조 샹시예 밥 지으라 야(기 17ㄱ)

ㄴ. 네  다티 자여 먹디 아니여(32ㄱ) - 네  다티 밥 지여 먹디 아니야(기 32ㄱ)

(85) (拜封)

후에 님굼미  나 겨시다가(27ㄱ) - 후에 님굼이 봉 나 겨시다가(기 27ㄱ)

(86) [畝]

ㄱ. 받티   나니 잇더니 라 드리고(16ㄱ) - 제 밧 라 드리고(기 16ㄱ)

ㄴ. 됴 받 이삼  사 의을 라(29ㄱ) - 됴 밧 이삼  사 의장을 라(기 29ㄱ)

(87) 즈우리-[趨]

웃녀로 즈우려 나오니(31ㄱ-ㄴ) - 웃녀크로 라나오니(기 31ㄱ)

먼저 (84)의 동사 ‘자-’는 중간본에서 ‘밥 짓-’으로 교체되었고, 또한 한문 원문에서도 대응되는 한자가 ‘炊’(취) 로 되어 있어 이 낱말은 밥을 짓는다는 뜻의 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옛말 사전에 ‘자다’란 동사는 한 군데도 실려 있지 않고 다만 ≪이조어 사전≫과 ≪우리말 큰사전≫에 합성어 형태인 ‘잣어미’가 실려 있으며 이를 ‘부엌의 여자’로 풀이해 놓았다. 다음으로 (85)의 ‘’은 중간본에서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옛말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한문 원문의 ‘封泰山’(봉태산)을 초·중간본에는 모두 ‘ 나 겨시다가’로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런데 ≪오륜행실도≫(1797)에는 ‘封泰山’을 ‘태산에 봉션시고 오시다가’로 번역한 다음, ‘봉션’에 대하여 ‘님군의 공덕을 사겨 명산에 감초는 일이라’고 협주를 달아 놓았다. 이로써 ‘’은 ‘봉션’의 의미인 왕의 공덕을 새겨 명산(名山)에 보존한다는 뜻의 말임을 알 수 있다. (86)의 ‘’도 현재의 옛말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 말이다. 이 낱말은 2회 등장하는데 두 번 다 밭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로 쓰였다. ‘’은 오늘날의 ‘마지기’에 해당하는 말이다. 1마지기라 하면,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대개는 논이 200평, 밭은 300평으로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넓이를 가리킨다. 한문 원문을 보면, ‘무’(畝)를 써서 ‘  → 十畝’로, ‘이삼  → 數千 畝’로 나타내고 있다. 1무(畝)는 30평으로 약 99.17㎡에 해당하는데 ‘ ’을 10무라 하였으니 ‘ ’은 곧 300평의 면적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이는 오늘날의 밭 1마지기에 해당하는 면적이 된다. 따라서 ‘’은 마지기를 뜻하는 옛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7)의 동사 ‘즈우리-’는 안병희(1978:393)에서 중간본에 등장하는 ‘라나오-’의 경상도 방언형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 큰사전≫에만 실려 있고 다른 두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다. ≪우리말 큰사전≫에는 ‘달음질치다’로 풀이해 놓았다.

끝으로 한자어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한어에서는 원칙적으로 한자 하나가 한 낱말이 되지만 국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국어에서도 ‘산(山), 옥(玉), 창(窓), 문(門), 강(江) …’ 등과 같이 한자 하나가 한 낱말이 되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한자는 ‘교(校), 고(高), 석(石), 목(木), 이(耳), 가(家) …’ 등에서처럼 한자 하나로써는 국어의 낱말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혼자서는 낱말이 될 수 없는 한자임에도 엄연히 한 낱말로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이는 현대국어와 많이 다른 점이다.

(88) ㄱ. 두연늬 음(蔭) 니버 벼슬니 여러히리니(19ㄱ)

ㄴ. 갓다가   나마 샤(赦) 나거 올 제(36ㄱ)

ㄷ. 이 죄 지어 폄(貶) 마자 림햇 원늘 가거(39ㄱ)

위의 예문에 쓰인 ‘음(蔭), 샤(赦), 폄(貶)’은 혼자서는 낱말이 될 수 없지만 여기서는 혼자서 낱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옛말 사전에 어휘 항목으로 등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음’(蔭)은 ≪우리말 큰사전≫에 어휘 항목으로 등재되어 ‘음덕’(蔭德)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음’(蔭)에 대해서는 중간본에서도 “두연의 음덕 니버 벼슬니 여러히러라”(기 19ㄱ-ㄴ)와 같이 ‘음’을 자립형식의 ‘음덕’으로 교체하여 안정적인 낱말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샤’(赦)와 ‘폄’(貶)도 자립적인 낱말의 기능을 다하도록 각각 ‘赦免’(사면), ‘貶下’(폄하) 등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4. 번역 양상

≪이륜행실도≫는 다른 언해서와 같이 한문 원문에 언해문을 붙여 간행한 언해서이다. 조선 시대의 불경 언해를 비롯한 각종 언해서들은 대부분 대역(對譯) 체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문장이나 문단 단위로 분절한 한문 원문을 먼저 제시한 다음, 이어서 원문과 같은 방식으로 그에 대한 언해문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륜행실도≫는 이와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48편의 행적 기사는 각편이 일관되게 1장(張)씩으로 되어 있는데 각장의 앞면에는 사주쌍변의 광곽(匡郭) 안에 주인공의 행적 내용을 압축한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한문 원문이 역시 광곽 안에 유계 13행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언해문은 다른 언해서에서처럼 광곽 안에 배열하지 않고, 그림이 있는 앞면과 한문이 있는 뒷면의 난상(欄上) 여백에 배치해 놓았다. 이런 체재는 이미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서 채택했던 방식이다.

그렇다면 번역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를 위해 ≪이륜행실도≫의 언해문을 한문 원문과 대조해 본 결과 양자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흔히 의역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의역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것은 한문 원문을 적게는 한 문장, 많게는 몇 문장을 번역에서 제외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축자적(逐字的)으로 보면 의역의 결과로 인해 양자간에 달라져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런 세밀한 부분은 생략하고, 한문을 번역하면서 제외하였거나 번역이 좀 특이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만 예문을 들어 살펴보려고 한다.

1) 번역의 누락

한문 원문의 일부를 번역하지 않고 건너뛴 번역이 문헌 전체를 통해서 그리 많지는 않으나 다음과 같이 몇 군데에서 발견된다. 누락된 정도는 한 낱말에서부터 한 문장, 나아가 한 문단에 가까울 정도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간본의 기영판에서는 대체로 누락됨이 없이 한문 원문대로 번역하고 있어 해당 부분에 대한 중간본의 언해문을 참고로 덧붙여 두었다. (번역이 누락된 부분을 초간본의 언해문에서는 괄호(……)로 표시하였고, 한문 원문과 중간본의 언해문에서는 밑줄로 표시하였음)

(89) ㄱ.  졧나라해 태 급블 보내오 도 여 길헤 가 태의 긔 가거든 보고 주기라 대 … 공   조차 가다가 … 태 그븨 긔 아 알 셰오 가거 도기 태라 너겨 주기니라(1ㄱ) - 又使伋之齊 將使盜 見載旌 要而殺之 壽止伋 伋曰棄父之命 非子道也 不可 壽又與之偕行 其母不能止 乃戒之 曰壽 無爲前也 壽又竊伋旌 以先行 盜見而殺之(1ㄴ)

cf.  졧나라 태 보내고 도적야 길헤 가 태의 긔 가거 보고 주기라 대  가디 말라 야 태 닐오 아 명을 더디면 식의 되 아니라 대   조차 가더니 그 어미 말리디 몯야 경계야 닐오 앏셔디 말나 더니   태의 긔 아사 알 셰고 가거 도적이 태라 너겨 주기니라(기 1ㄱ-ㄴ)

(89) ㄴ. 이 계과 들헤 나갓다가 도글 맛나 주교려 커 뎨 서르 내 죽거지라 토온대 … 도기 갈 간슈고 닐우 두 분니 어딘 사미어 우리 간대로와 외놋다 고 다 리고 가니라(9ㄱ) - 嘗與季江 適野 遇盜欲殺之 兄弟爭死 肱曰弟年幼 父母所憐愍 又未騁娶 願自殺身濟弟 季江 言兄 年德在前 家之珍寶 國之英俊 乞自受戮以代兄命 盜戢刃 曰二君 賢人 五等不良 妄相侵犯 乃兩釋之(9ㄴ)

cf. 강굉이 계강과 드르헤 나갓가 도을 맛나 주기려 거 형뎨 서르 내 죽거지라 토아 강굉 닐오 아이 졈고 어버이 랑고  댱가를 못 드러시니 내 죽고 아을 살아지라 니 계강 닐오 형이 나토 만코 덕도 만야 나라희 호걸의 사미니 형의 갑새 내 죽거지라 대 도기 칼 간슈고 닐오 두 븐이 어딘 사미어 우리 사오나와 간대로 외놋 고 다 리고 가니라(기 9ㄱ-ㄴ)

(89) ㄷ. 얼운 도연  어미를 간니 그 어미 져기 모디로 그치니라 그 어미 조 … 몯 일로 의 겨집블 브리거든 람믜 겨집도 조차 가 니 그 어미 어려이 너겨 아니더라(10ㄱ) - 至於成童 每諫其母 其母少止凶虐 朱 屢以非理使祥 覽輒與祥俱 又虐使祥妻 覽妻亦趍而共之 朱患之乃止(10ㄴ)

cf. 얼운 되야 양 어미 말니니 그 어미 져기 모디로미 그츠니라 그 어미 조 못 일로 왕샹이 브리거든 왕람이 조차 가 며  못 일로 왕샹의 겨집블 브리거든 왕람믜 겨집도 조차 가 니 그 어미 어려이 너겨셔 아니더라(기 10ㄱ)

(89) ㄹ. 밀리 훼 죽거 아 믓 머굼도 아니 머고 닷쇄 고 …  니브니라(12ㄴ) - 密後亡 儁勺水不入口者五日 雖服喪期年 而心喪六載(12ㄴ)

cf. 왕밀이 후에 죽거 아이 믈 머곰도 아니 머고 닷쇄 고 심상을 여 희 니브니라(기 12ㄱ-ㄴ)

cf. 그 후에 밀이 죽으매 쥰이 닷 몰도 아니 먹고 비록 긔년복을 닙으나 뉵년을 심상니라(오륜행실도 4:22ㄱ)

(89) ㅁ. 버근 예 언 급뎨니라 …(21ㄴ) - 次年彦宵 一擧登第 鄕人大敬服之(21ㄴ)

cf. 버근 예 됴언 급뎨니  사이 크게 공경고 항복더라(기 21ㄴ)

ㅂ. 신안니 식 업서  몯여 … 옷 람 슈 주어 내내 니라(43ㄱ) - 顔 無子不克葬 可 辛勤百營 鬻衣相役 卒葬之(43ㄴ)

cf. 신안이 식 업서 송장 못여 거 후개 슈고며 옷 라 슈공 주어 내죵내 영장니라(기 43ㄱ)

(89) ㅅ. 긔 보야호로 퍼디여 … 아히 다 비졉 나거(11ㄱ) - 癘氣方熾 父母諸弟 皆出次于外 (11ㄴ)

cf. 병이 보야호로 퍼디여 어버이며 아히 다 피졉 나거(기 11ㄱ)

ㅇ. 우리 … 간대로와 외놋다 고(9ㄱ) - 吾等不良 妄相侵犯(9ㄴ)

cf. 우리 사오나와 간대로 외놋다 고(기 9ㄴ)

(89ㄹ)에는 초간본의 언해문에서 번역이 누락된 한 구절을 중간본의 언해문에서도 그대로 생략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을 생략하지 않고 번역한 ≪오륜행실도≫(1797)의 언해문을 추가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볼 때 초간본보다는 중간본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 어순이 도치(倒置)된 번역

낱말이나 구절을 한문의 어순대로 번역하지 않고 어순을 바꾸어 번역한 경우를 들어 본다.

(90) ㄱ.  어믜 난 이 됴며 사오나오미 고디 아니려 코(25ㄱ) - 以一母所生 可使兄弟苦樂不均耶(25ㄴ)

cf.  어믜 난 동이 사오나오며 됴호미 고디 아니타 고(기 25ㄱ)

ㄴ. 버드나모 느릅남기  브터 니 나거(25ㄱ) - 宅後楡柳爲之連理(25ㄴ)

cf. 집 뒤헤 느릅나모와 버드남기  브터 니어 나거(기 25ㄱ)

ㄷ.  삭기 어미와 모여(1ㄱ) - 其母 與朔謀(1ㄴ)

cf. 그 어미 삭이와 야(기 1ㄱ)

ㄹ. 두연니 나히 열 다여신 제 어미 하의 잇 젼시를 어러 가고 할미도 죽고(19ㄱ) - 其母改適河陽錢氏 祖母卒 衍年十五六(19ㄴ)

cf. 제 어미 하양의 잇 젼시를 어러 가고 할미도 죽고 두연이 나히 열 다여신 제(기 19ㄱ)

언해문의 밑줄 친 부분과 한문의 밑줄 친 부분을 서로 대조해 보면 초간본의 언해문은 한문의 어순과 반대로 되어 있다. (90ㄱ)의 예만 하더라도 한문의 ‘苦樂’(고락)을 초간본에서는 ‘됴며 사아나오미’로 번역하여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러나 중간본에서는 ‘사오나오며 됴호미’로 고쳐 한문 ‘苦樂’의 구성 순서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90ㄷ,ㄹ)은 언해문의 통사적 구성이 한문의 배열 순서와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여기서도 초간본에서는 양자간에 불일치를 보이는가 하면 중간본의 언해문에서는 한문과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중간본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유동적인 번역

동일한 한자에 대해서 그때 그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번역한 예를 초간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數’(수)자를 예로 들어 그 번역 실태를 살펴보려 한다.

(91) ㄱ. 均 數諫止不聽(5ㄴ) - 간여 말라 여두 듣디 아니커(5ㄱ)

cf. 아이 조 간야 말라 야도 듣디 아니커(기 5ㄱ)

ㄴ. 覽 年數歲(10ㄴ) - 람미 너덧 설 머근 제(10ㄱ)

cf. 왕람미 두어 설 머근 제(기 10ㄱ)

ㄷ. 不數年(25ㄴ) - 두  후에(25ㄱ)

cf. 두어  못야셔(기 25ㄱ)

ㄹ. 徒衆數百人(45ㄴ) - 뎨 일기나 더라(45ㄱ)

cf. 뎨 이이나 더라(기 45ㄱ)

위의 (91)에 쓰인 한문의 ‘數’에 대해서 초간본의 언해문에는 모두 다르게 번역되었다. (91ㄱ)에서는 번역을 하지 않았고, (91ㄴ)에서는 ‘數’를 ‘너덧’[四~五]으로 번역하였으며, (91ㄷ)에서는 ‘두’[二], (91ㄹ)에서는 ‘일’(一)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일관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유동적인 번역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중간본에서는 초간본을 답습하지 않고 ‘조, 두어, 두어, 이(二)’ 등으로 비교적 일관성 있게 번역하고 있어 대조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이 밖에 수를 가리키는 ‘千’(천)의 번역이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끈다.

(92) 公私逋負 尙千餘緡(21ㄴ) - 환자 녜 삼쳔니 남더니(21ㄱ)

cf. 환자 댱니 먹은 거시 장 만터라(기 21ㄱ)

중간본에서는 ‘千’을 수치로 나타내지 않고 정도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의역을 하고 있는 반면에 초간본에서는 ‘삼쳔’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로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삼쳔’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는 ‘烏’(오)자의 번역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까마귀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런데 이 글자에 대한 번역도 일정하지가 않다.

(93) ㄱ. 乃易置庭樹烏雛(26ㄴ) - 헷 남긧 새 삿길 자리 밧고아 노하(26ㄱ)

cf. 헷 남긔 가마괴 삿기 자리 밧고아 노하(기 26ㄱ)

ㄴ. 烏鵲皆翔集不去(22ㄴ) - 새 가마괴 라와 가디 아니더라(22ㄴ)

cf. 가막가치히 라와 가디 아니더라(기 22ㄴ)

(93ㄱ,ㄴ)의 예문을 보면 초간본에서 ‘烏’를 한 번은 ‘새’로 번역하였고 한 번은 ‘가마괴’로 번역하였다. (93ㄴ)에서 ‘烏鵲’(오작)을 ‘새 가마괴’로 번역한 것은 ‘烏’를 ‘가마괴’로, ‘鵲’을 ‘새’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니 ‘烏’는 번역에서 ‘새’가 되었다가 ‘가마괴’가 되었다가, 그리고 ‘새’라 하면 ‘烏’도 되고 ‘鵲’도 되고 하는 등의 유동적인 번역을 초간본은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중간본은 역시 한자의 본뜻대로 ‘烏’는 ‘가마괴’, ‘鵲’은 ‘가치’로만 고정되게 번역하였다.

4) 인용구문의 대동사(代動詞)

중세 국어에서도 인용구문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쓰였던 인용구문의 문형은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많이 쓰였던 인용구문의 한 형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94)  帝釋이 여듧 王 닐오 “우리 諸天토 舍利 더러 주쇼셔 아니 주시면 싸호미 나리다” 고(석보상절 23:55ㄱ)

위에서 든 인용구문의 구성요소를 보면, 먼저 상위문의 주체-帝釋-와 객체-여듧 王-가 있고 그 다음으로 상위문의 서술어라 할 수 있는 화법 동사-닐오-가 있다. 화법 동사에 이어 인용문이 나오고 그 뒤에 문장을 연결하거나 종결해 주는 대동사 ‘-’가 쓰였다. 대동사 ‘-’는 인용문에 연결되는, 화법 동사 ‘니-’와 의미상으로 동일한 말이지만, 한 문장에서 ‘니-’를 반복해서 사용하기는 어려우므로 ‘니-’를 대신하여 ‘-’가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대동사 ‘-’에는 인용구문 전체에 해당하는 서법과 시제, 높임법 등의 문법 요소가 ‘-’에 통합되어 나타나며, 그러므로 대동사 ‘-’의 존재는 인용구문에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초간본 ≪이륜행실도≫에 등장하는 인용구문에서도 인용문 뒤의 ‘-’ 대동사는 대부분 쓰이고 있지만, 반면에 생략되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상당수 발견된다. 그만큼 중세 국어의 인용구문에서 대동사 ‘-’의 생략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륜행실도≫의 다음 예문에서는 대동사 ‘-’가 어김없이 쓰이고 있다.

(95) ㄱ. 도 듣고 이여 도긔게 가 닐우 “내 아 오래 여 누엇더니 날만 지디 몯니라” 대(6ㄱ)

ㄴ. 도들히 서르 닐우 “아로 아 밧고니  어디도다” 고 다 주어 보내니라(12ㄱ-ㄴ)

ㄷ. 사름미 닐우 “어디로미 감홰라” 더라(25ㄱ)

그러나 다음과 같이 대동사 ‘-’가 생략된 인용구문도 적지 않다. 다음은 한 대문을 옮겨 온 것이다.

(96) 어미 닐우듸 “두  여희여 머리셔 닐운 마 엇디 미드리오” 닐우듸 “거은 유신 사미라 그릇디 아니리라” 어미 닐우듸 “그러면 술 비조리라” 그 나래 과연히 와 어믜게 절고 술 머그니 거은 범식긔 라 후에 원기  되여셔 닐우듸 “내 죽쟈 사졋 벋 범거을 몯 보애라” 이고 주그니 범식기 메 원기 블러 닐우듸 “거아 내 아모 날 주거 아모  니 날 닛디 아니커든 미처 오나라” 범식기 여가니 마 발인여 무들 해 가쇼듸 곽기 아니 가거 그 어미 디퍼 곽글 머믈워 두고 보니   고 우르고 오거 어미 닐우듸 “이 거이로다” 거이 와 예 두드리며 닐우듸 “니거라 원가 길히 다니 이리셔 여희져” 범식기 곽글 자바 니 나 니거늘 이셔 묻고 나모 심므고 가니라(33ㄱ-ㄴ)

cf. 어미 닐오 “두  여희여 멀니셔 닐은 말을 엇디 미드료” 대 원이 닐오 “거경은 유신 사이라 그릇디 아니링이다” 야 어미 닐오 “그러면 술 비즈리라” 그 날애 과연히 와 어믜게 절고 술 머그니 거경은 범식의 라 후에 원이 병 디터셔 닐오 “내 죽쟈 사쟈 사괴 벗 범식을 못 보애라” 고 이윽고 죽으니 범식이 에 원이 블러 닐오 “거경아 내 아모 날 죽어 아몹  송장니 날 닛 아니커든 미처 오나라” 범식이 려가니 셔 발인야 무들 해 가쇼 곽이 아니 가거 그 어미 곽을 지며 머믈러 두고 보니 흰 게 울고 오거 어미 닐오 “이 반시 거경이로다” 거경이 와 상여 두드리며 닐오 “니거라 원아 길히 다니 이리셔 여쟈” 범식이 곽을 자바 의니 곽이 나아 니거 거긔 이셔 뭇고 나무 시므고 가니라(기 33ㄱ-ㄴ)

위에서 보듯이 (96)의 예문에는 직접 인용문이 7회나 나오지만 초간본에서 그 인용문을 문법적으로 담당해 주는 대동사 ‘-’가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중간본에서는 초간본의 생략된 대동사를 세 군데서 복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후대로 내려올수록 대동사 ‘-’의 사용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륜행실도≫에서도 중간본에서 대동사가 복원된 예를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97) ㄱ. 겨집비 만니 니이려 닐우 “가난히 사로미 이러니 편안티 몯여 닫티 사라 로다” 니이 거즛 답호 “수울 비라 와 아 모도고 호리라” 몯거(8ㄱ)

cf. 겨집비 만니 니츙이려 닐오 “가난히 사로미 이러니 편안티 몯니 닷티 사라야 리로다” 대 니츙이 거즛 답호 “술 비즈라 과 아 모도고 호리라” 고 못거(기 8ㄱ)

ㄴ. 존니 … 닐우 "뎨 손발 고 쳐쳡븐 밧 짓 사미니 엇디 밧 사름믈 몬져 코 손발를 후에 리오" 아믈 어엿비 너겨 남진 겨집 얼여 나토 실소 아니케 더라(20ㄱ)

cf. 댱존이 … 닐오 "형뎨 손과 발 고 안해와 쳡은  집 사이니 엇  집 사믈 몬져 고 손바 후에 료" 더라 아믈 어엿 너겨 남진 겨집 얼여 나토 그릇되게 아니더라(기 20ㄱ)

ㄷ. 벋 곽이 와 닐우듸 “내 아비 여 의원늬게 고티라 니 도 만히 달라 니 내 지블 라도 몯 라로다” 후개 어엿비 너겨(43ㄴ)

cf. 벗 곽이 와 닐오 “내 아비 병여 의원의게 고티라 니 돈 만히 달라 니 내 집을 라도 못 라리로다” 대 후개 어엿비 너겨(기 43ㄴ)

그러나 중간본에서도 초간본의 대동사 생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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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속언해≫의 고찰

김문웅(대구교육대학교 교수)

Ⅰ. 편찬 및 간행

1. 간행 배경

≪정속언해(正俗諺解)≫가 간행된 1518년(중종 13)은 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로서 이 시기의 나라 사정은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신진 사류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주도하던 때였다. 그들은 문란해진 정치와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유교 이념으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고, 특히 향당(鄕黨)의 상부상조를 위한 향약(鄕約)의 시행을 추진하며 미풍양속의 확립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김안국(金安國)도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려 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교화서(敎化書)의 간행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김안국이 풍속을 교화할 서책과 의약에 관한 서책을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기를 국왕에게 건의한 내용이 ≪중종실록≫ 권32, 중종 13년(1518, 戊寅) 4월 1일(己巳) 자 기록에 나타나 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그 도의 인심과 풍속을 보니 퇴폐하기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풍속을 변화시킴에 뜻을 두시므로, 신이 그 지극하신 의도를 본받아 완악한 풍속을 변혁하고자 하는데, 가만히 그 방법을 생각해보니 옛 사람의 책 중에서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을 택하여 거기에 언해(諺解)를 붙여 도내에 반포하여 가르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 책들을 수찬하기로 마음먹고 있으나 사무가 번다하여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착오가 필시 많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 별도로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문적(文籍)을 인출하고 있으니, 이 책들을 다시 교정하여 팔도에 반포하게 하면 풍화(風化)를 고취시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이나 ≪정속(正俗)≫ 같은 책은 곧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 책입니다. ≪여씨향약≫이 비록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실려 있으나 주해(註解)가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곧 그 언해를 상세하게 만들어 사람마다 보는 즉시 이해하게 하고, ≪정속≫ 역시 언자(諺字)로 번역하였습니다. 농서(農書)와 잠서(蠶書) 등도 의식(衣食)에 대한 좋은 자료이기 때문에 세종조(世宗朝)에 이어(俚語)로 번역하고 팔도에서 개간(開刊)하였습니다. 지금 역시 농업을 힘쓰는 일에 뜻을 두기 때문에 신 또한 언해를 붙이게 되었고, ≪이륜행실(二倫行實)≫은 신이 전에 승지(承旨)로 있을 때 개간을 청하였습니다. 삼강(三綱)이 중요함은 비록 어리석은 사람들도 모두 알거니와, 붕우 형제(朋友兄弟)의 윤리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신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의하여 유별로 뽑아 엮어서 개간하였습니다. ≪벽온방(辟瘟方)≫ 같은 것은, 온역질(瘟疫疾)은 전염되기 쉽고 사람이 많이들 그로 인해 죽기 때문에, 세종조에서는 생명을 중히 여기고 아끼는 뜻에서 이를 이어(俚語)로 번역하여 경향에 인포(印布)하였는데, 지금은 희귀해졌기로 신이 또한 언해를 붙여 개간하였습니다. ≪창진방(瘡疹方)≫에 대해서는, 이미 번역하여 개간하였으나 경향에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요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병으로 죽기 때문에 신이 경상도로 갈 적에 이를 싸 가지고 가서 본도에서 간행하여 반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구급에 간편한 비방을 널리 반포하던 성종조의 전례를 따라 많이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그 도에 있으면서 학교와 풍속을 변화시키는 일에 전심한다는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또 아울러 이러한 책들을 엮어 가르친다 하는데, 이 책은 모두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이라 찬집청에 보내 개간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同知中樞府事金安國啓曰 “臣爲慶尙道觀察使, 觀其道人心、風俗, 頹弊乃極。今者上方有志於轉移風俗, 故臣欲體至意, 變革頑風, 而竊思其要, 取古人之書, 可以善俗者, 詳加諺解, 頒道內以敎之。此等書冊, 臣有志修撰, 而第緣事務煩劇, 未遑詳悉, 錯誤必多。今方別設撰集廳, 印出文籍, 此等書, 使之更加讎校, 印頒八道, 則於淬勵風化, 庶有小益也。如≪呂氏鄕約≫、≪正俗≫等書, 乃敦厚風俗之書也。≪鄕約≫雖載於≪性理大全≫, 而無註解, 遐方之人, 未易通曉, 故臣乃詳其諺解, 使人接目便解, ≪正俗≫亦飜以諺字。 如農書、蠶書, 乃衣食之大政, 故世宗朝翻以俚語, 開刊八道。今亦頗致意務本之事, 故臣亦加諺解, 如≪二倫行實≫, 臣前爲承旨時, 請開刊。 如三綱之重, 雖愚夫愚婦, 皆知之, 至於朋友、兄弟之倫, 凡常之人, 或有不知, 故臣依≪三綱行實≫, 撰類以刊之。 如≪辟瘟方≫, 則瘟疫之疾, 易於傳染, 人多死傷, 故在世宗朝, 重惜人命, 飜以俚語, 印頒中外, 今則稀罕, 故臣亦加諺解以刊。至如≪瘡疹方≫, 曾已翻譯開刊, 而不頒布于中外, 人之夭札者, 多以此疾, 故臣往慶尙道時賫去, 刊印於本道, 已頒布矣。 願依成宗朝廣頒≪救急簡易方≫例, 多印廣布” 傳曰 “卿在其道, 盡心於學校、轉移風俗之事, 予聞之嘉美。又復撰此等書以敎之。此書皆有關於風敎, 其下撰集廳, 開刊廣布”)

이로써 볼 때,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직접 ≪여씨향약≫과 함께 ≪정속언해≫를 언해하여 반포하였고, 그 후 1518년(중종 13) 4월에 그 언해본을 교정하여 간행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한 결과 이것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향약의 전국적 시행과 풍속의 교화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김안국은 국왕의 통치 이념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와 관련 있는 책이면 무엇이든 간행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1518년 3월, 강혼(姜渾)이 쓴 ≪이륜행실도≫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허여한 성스러움과 지혜로 날마다 현명한 사대부와 더불어 경전과 사기(史記)를 토의하고 논란하며 다스리는 방도를 강습하고 연마하여 교화를, 태평한 정치를 이룩하는 급선무로 삼지 않음이 없으셨다. 공(公)은 위로 성상의 뜻을 잘 체득하여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처음에 서둘러 이 책을 편집하여 주리(州里)에서 간행하게 하여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도리를 도와서 심는 것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을 삼았다. 몸소 솔선하여 스승과 생도를 격려하여 그 덕행과 사업을 상고하게 하고, 곁으로 효행과 정렬(貞烈)이 일반 사람보다 뛰어난 이들을 찾아 임금에게 아뢰어 선행(善行)을 표창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경주·안동 등 다섯 고을에 영(令)을 내려 서적 가운데 다스리는 방도와 관련이 있는 것을 간행한 것이 열한 가지나 되었다. 그것을 열거하면, ≪동몽수지(童蒙須知)≫는 어린이 교육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구결소학(口訣小學)≫은 근본을 북돋우는 것이며, ≪삼강행실(三綱行實)≫과 ≪이륜행실(二倫行實)≫은 인륜을 밝히는 책이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은 정학(正學)을 숭상하는 것이며, ≪언해정속(諺解正俗)≫과 ≪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은 향촌(鄕村)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고, ≪언해농서(諺解農書)≫와 ≪언해잠서(諺解蠶書)≫는 본업(本業)을 돈독히 하는 것이며, ≪언해창진방(諺解瘡疹方)≫과 ≪언해벽온방(諺解辟瘟方)≫은 일찍 죽는 것을 구제하는 책이다. 이것으로 공(公)의 훌륭함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이로 인하여 공의 학문과 포부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恭惟我主上殿下 聖智天縱 日與賢士大夫 討論經史講劘治道 莫不以敎化爲致治之先務 公 能上體聖意 賦政之初 汲汲焉編輯是書 刊行州里 以扶植彝倫 爲化民之本 而躬率 礪師生 以考其德業 旁搜孝行貞烈之卓異者 聞于上而旌表之 又令 慶州 安東 等五邑 刊書籍之有關於治道者 凡十一 其曰 童蒙須知 正蒙養也 曰 口訣小學 培根本也 曰 三綱二倫行實 明人倫也 曰 性理大全 崇正學也 曰 諺解正俗 諺解呂氏鄕約 正鄕俗也 曰 諺解農書 蚕書 敦本業也 曰 諺解瘡疹方 辟瘟方 救夭札也 此雖未足以盡公之善 而然 因此可以見公之學問抱負大有以異於人也)

위의 두 글을 통해서 ≪정속언해≫는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고 순후(淳厚)한 풍속을 정착시키려는 목적에서 간행된 책임을 알 수 있고, 이 교화서(敎化書)의 보급으로 유교적인 향당 윤리(鄕黨倫理)를 촌락 사회에 확산하려는 김안국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2. ≪정속언해≫의 판본 및 체재

앞에서 본 ≪중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정속언해≫는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간행한 판본이 있고, 그 후 그 언해본을 교정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다시 간행·반포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여 간행된 판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의 판본은 고 이원주(李源周) 교수가 소장한 책이고, 후자의 교정본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밖에 간년(刊年)을 알 수 없는 이본(異本)이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이본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판본들이다. 두 종류의 이본에 대해서는 각각 대표되는 소장처를 따라 규장각(奎章閣) 소장본과 일사문고(一蓑文庫) 소장본으로 명명하고 이원주 교수본과 함께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 첫째로,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이원주 교수 소장본을 들 수 있는데, 1권 1책의 목판본(木板本)으로서 이 책에는 서문이나 간기(刊記)가 전혀 없어서 간행에 관련한 사항을 직접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앞에서 본 실록 기사나 ≪이륜행실도≫에 있는 강혼(姜渾)의 서문을 통해서 이 간본(刊本)은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간행된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안국의 재직 기간이 1517년(중종 12) 2월에서 그 이듬해(1518) 3월까지이므로 이원주 교수본은 이 기간에 간행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간년(刊年)을 1518년으로 잡는다. 이 판본은 1984년에 홍윤표(洪允杓) 교수의 해제를 더하여 두 이본과 함께 홍문각에서 영인한 바 있다.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이 판본이 상하 흑어미(上下黑魚尾)의 간격이 고르지 못하다든지 한 행(行)의 글자 수가 일정치 않다든지 각자(刻字)가 조잡하다든지 하는 점들로 미루어 지방에서 개간(開刊)된 판본으로 판단하고, 그 지역도 존경각본(尊經閣本) ≪여씨향약언해≫와 함께 간행했을 경북 선산(善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의해 이 판본은 찬집청에서 교정하여 다시 간행한 책 이전의 원간본으로 보는 것이다. 이번 역주에서 대상으로 삼은 판본도 이원주 교수본으로 하였다. 이제 홍윤표 교수의 조사를 토대로 이 판본의 형태적인 특징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되어 있고 한 면의 광곽 크기가 가로 19.5cm, 세로 28cm이며 한 면은 유계(有界) 10행(十行)이다. 한 행의 글자 수는 한문 원문의 경우에 21자로 매행(每行) 균일하지만 한글의 경우에는 21~26자로서 행에 따라 들쑥날쑥함을 보이고 있다. 주(注)는 소자(小字) 쌍행(雙行)으로 되어 있고 한문 본문의 구절마다 달아놓은 차용 한자(借用漢字)의 구결(口訣)도 소자 쌍행으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에는 흑구상하내향 흑어미(黑口上下內向黑魚尾)에 판심제 〈正俗〉과 장차(張次)가 있다. 이 판본에는 다른 두 이본에 있는 왕지화(王至和)의 서문과, 18개 항목을 나열하고 있는 목록이 없고, 바로 첫 장의 첫 행에 서명(書名) 〈正俗諺解〉를 표기한 다음 둘째 행에서부터 첫 제목 〈孝父母〉가 제시되면서 본문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모두 3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책의 우측 상단을 비롯해서 몇 군데에 글자가 마멸된 부분이 있어 한자나 한글을 붓으로 보사(補寫)한 것으로 보이는 곳이 있다. 그 중에는 오기(誤記)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2ㄱ의 2행에 필사된 ‘시삿다’와 14ㄴ의 6행에 필사된 ‘힌도’이다. 이는 규장각 소장본과의 대조를 통해서 각각 ‘시니’와 ‘인도’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15ㄴ에는 8행의 첫 글자 위에 ‘’ 자를 첨기(添記)하였는데 이것도 필요 없는 글자를 써넣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는, 17세기 후반쯤 중간한 것으로 보이는 규장각 소장본(홍문각 영인)이 있는데, 이 판본은 규장각 이외에도 서울대의 일사문고와 가람문고, 고려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도 간기가 따로 없고, 서문은 있으나 원전인 ≪正俗篇≫에 있는 왕지화(王至和)의 서문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어서 ≪정속언해≫에 관련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 판본에 나타난 표기법의 특징을 통해서 간행 시기를 추정하고자 한다. 이원주 교수본에 있던 방점(傍點)이 사라지고, ㅿ과 ㆁ이 대부분 ㅇ으로 교체된 점, 드물기는 하나 전에 볼 수 없었던 각자병서(各自並書) ㅃ, ㅆ이 어두에 나타난 점, 받침에서 ㅅ과 ㄷ이 혼기(混記)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홍윤표 교수는 17세기 후반에 간행된 책으로 보고 있다. 이 판본은 1984년 홍문각의 영인본이 나오기 전인 1978년에 고 박병채(朴炳采) 교수의 해제를 붙여 ≪여씨향약 언해≫와 한 책으로 묶어 태학사에서 영인한 일이 있고, 이때 영인의 저본(底本)이 되었던 판본은 전 부산대 류탁일(柳鐸一) 교수의 소장본임을 밝히고 있다. 이 판본은 위에서 지적한 표기법의 변화 말고는 체재나 구성에 있어 이원주 교수본과 조금 달라진 것이 없다. 한문 원문과 구결은 물론 언해문의 문장까지 두 판본이 거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다만 글자체가 다르고 행의 글자 수에서 이원주 교수본과 비교하여 한두 자 내지 그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곳이 제법 있다. 그렇다 보니 본문의 마지막 장차(張次)인 30ㄱ에서 이원주 교수본은 5행에서 본문이 끝나고 있는데 비해 규장각 소장본은 7행에서 끝이 나 있다. 따라서 ‘正俗諺解 終’이라는 권말(卷末) 표시가 이원주 교수본은 8행에 있으나 규장각 소장본은 맨 끝 10행에 위치하고 있음이 다르다. 규장각 소장본에는 왕지화의 서문 1장, 목록 1장이 앞에 있어 본문 30장까지 합치면 모두 32장이 된다. 다만 서문의 첫머리에 붙여야 할 〈正俗序〉라는 제목도 없이 첫 행부터 서문의 본문이 시작된 점과, 또한 본문 첫 장 첫 행의 서명(書名) 다음에 둘째 행에서 제시되어야 할 첫 제목 〈孝父母〉도 누락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착오인 듯하다.

끝으로, 나머지 한 판본은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이다. 역시 이 판본에도 왕지화의 서문만 있을 뿐 간기가 없다. 따라서 정확한 간년은 알 수 없다. 홍윤표 교수는 해제에서, 정속 서(正俗序)의 첫 장 우측 아래쪽에 있는 묵서(墨書) ‘위원향교상(渭原鄕校上)’과 배지(褙紙)에 적혀 있는 묵서 중 대자(大字)로 쓴 ‘임자 십이월 일(壬子十二月日)’과 ‘송안사인송(宋安使印送)’ 그리고 두 묵서의 중간에 소자(小字)로 쓴 ‘구랍흑우송상부선우본각자정속편(舊臘黑牛宋相付選于本覺者졍쇽편)’의 기록들을 놓고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 판본은 임자년(壬子年) 12월에 흑우(黑牛)라는 호를 가진 송(宋) 관찰사가 원향교(渭原鄕校)에 보낸 책이라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위원(渭原)은 평안북도 위안군이고 임자년(壬子年)은 1792년(정조 16)임을 밝히면서 일사문고 소장본은 18세기 말에 평안도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결론지었다. 이 판본은 앞의 두 판본과는 판식(版式)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을 보여 주고 있는 이본(異本)이다. 제목, 주제문, 한문 본문과 여기에 삽입된 구결에 있어서만은 앞의 두 판본에 일치하고 있으나 특히 번역에서는 전자의 두 판본과 전혀 다른 언해문을 보이고 있다. 한 행의 글자 수도 앞의 판본들과는 달리 한문 본문과 언해문이 다같이 16자로 배자(排字)되어 있다. 그리하여 서문 2장, 목록 1장, 본문 51장 해서 모두 54장으로 되어 있다. 판심의 어미(魚尾)도 없는 데가 있고, 있어도 서로 다른 모양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 판본에는 앞서 규장각 소장본에 빠져 있던 서문 첫머리의 〈正俗序〉도 기재되어 있고, 본문 첫머리에서도 누락되어 있던 제목 〈孝父母〉가 제자리에 표기되어 있다. 한글 표기에 있어서는 이 시기의 문헌이 대개 그렇듯이 이 판본에서도 심한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분철 표기를 어근에까지 과도하게 적용한 표기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몇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1) 알읫 사(下人, 26ㄱ)며(乾, 31ㄱ)흘(流, 31ㄴ)암(望, 31ㄴ)

덜어이믄(汚, 33ㄱ)부즐어니(勤, 39ㄴ)간안야(貧, 47ㄱ)열어 가지(多, 46ㄱ)

≪정속언해≫는 모두 18개의 항목별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 각 항목은 먼저 3자로 된 한문 제목을 제시하고는, 그 다음 행에서 그 제목에 대한 취지를 밝히는 주제문 성격의 한문 문장을 써 놓고 있다. 이 주제문을 제목보다 한 글자 낮추어 한두 줄로 나타낸 다음 한문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한문 본문은 세 판본 모두 차용 한자로 된 구결(口訣)을 구절마다 달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문의 한문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원주 교수본이나 규장각 소장본은 다 같이 제목과 주제문에 대해서 바로 그 아래에 각각 협주 양식의 소자 쌍행(小字雙行)으로 언해를 붙여 놓았다. 그러나 유독 첫 장에 나오는 첫 항목 〈孝父母〉의 주제문에 붙은 언해문만은 두 판본 모두 소자 쌍행이 아니고 본문과 같은 큰 글자로 표기하면서 이원주 교수본은 한 행으로, 규장각 소장본은 두 행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한문과 언해문으로 된 제목과 주제문 다음에서부터 한문 본문이 이어지고 그 뒤에 한문 본문에 대한 언해가 뒤따르고 있다. 이상이 두 판본의 대략적인 체재이다. 그러나 일사문고 소장본은 이 체재를 따르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한문으로 된 제목과 주제문을 제시하고 바로 그 다음에 한문 본문이 이어진다. 본문이 끝나면 비로소 한글로 된 제목이 나오고 그 다음 행부터 주제문의 언해가 제시되며 그 이후에 본문의 언해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한문 부분이 다 끝나고 나서 한글 표기 부분이 이어지는 체재로 되어 있다.

그러면 제목과 주제문, 그리고 본문, 언해문 등이 세 판본 사이에 실제로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의 (2) 예문은 18개 항목 중 열일곱째의 제목인 〈賑飢荒(진기황)〉 부분을 예로 들어 세 판본에 나타난 체재를 보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원주 교수본, 규장각 소장본, 일사문고 소장본을 각각 ‘이, 규, 일’로 약칭해서 쓰기로 한다.

(2) ㄱ. 賑飢荒 주으려 니 진졔홈

處己待人之道旣備又當力行方便以積其德故以賑飢荒次之 내 몸 가지며  졉홈 다고도  모로미 힘서 됴히 믜게 덕글 만히 지 거실 주으려 니 진졔홈 버거 노라

先儒曰天生五殼<구결자> 正救百姓<구결자> 飢厄<구결자> 天福富家<구결자> 正欲貧富相資<구결자>(본문 이하 생략)

녜 사름미 닐우듸 하히 곡식글 내요 히 의 주우리믈 구호려 코 하히 가면 집블 복 주샤미 히 가난니 가며니 서르 뢰케 시 디니(언해문 이하 생략) 〈이, 26ㄴ~27ㄴ〉

ㄴ. 賑飢荒 주으려 니 진졔홈

處己待人之道旣備又當力行方便以積其德故以賑飢荒次之 내 몸 가지며  뎝홈 다고도  모로미 힘서 됴히  됴히 덕글 만히 지을 배실 주으려 니 진졔홈 버거 노라

先儒曰天生五殼<구결자> 正救百姓<구결자> 飢厄<구결자> 天福富家<구결자> 正欲貧富相資<구결자>(본문 이하 생략)

녜 사름미 닐우듸 하히 곡식글 내요 졍히 셩의 주우리믈 구호려 코 하히 가면 집블 복 주샤미 졍히 가난니 가며니 서르 뢰케 시 디니(언해문 이하 생략) 〈규, 26ㄴ~27ㄴ〉

ㄷ. 賑飢荒

處己待人之道旣備又當力行方便以積其德故以賑飢荒次之

先儒曰天生五殼<구결자> 正救百姓<구결자> 飢厄<구결자> 天福富家<구결자> 正欲貧富相資<구결자>(본문 이하 생략)

진긔황

제몸을 잘 들어 사 졉 되 임의 면  맛당히 열어 가지로 됴 일을 힘 야 그 어딘 덕을 싸흘니 이러모로 주려 흉황을 진휼 일로 버거를 삼노라(주제문의 번역)

녯적 어딘 션옛 사이 닐오되 하히 오곡을 내기 졍히 셩의 줄인 을 구완고 하히 가음연 집을 복 주기 졍히 간안며 가음연 이 서 도아 살게 콰댜 홈이니(본문의 언해문 이하 생략) 〈일, 45ㄴ~46ㄴ〉

위에 나타난 것을 보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원주 교수본과 규장각본은 언해문의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방식이나 언해문의 문장, 그리고 장차(張次)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일사문고본은 제시 방식부터 시작해서 언해문 문장, 표기, 장차에 이르기까지 앞의 두 판본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사문고본은 한문은 한문끼리, 한글은 한글끼리 모아놓고 있다. 그리고 이 판본에서는 제목에 대해 한글로 표기만 했을 뿐 제목에 대한 풀이가 따로 없는데, 이는 주제문 속에 제목이 들어 있어 주제문의 언해 안에 나타나 있으므로 중복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언해문에서 협주를 제시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원주 교수본이나 규장각본 모두 전형적 방식인 소자 쌍행으로 협주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사문고본은 전체를 통해 이러한 방식의 협주문을 전혀 볼 수 없다. 그것은 협주의 내용을 언해문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ㄱ. 녜 후산 션이 글 지 니르샤<원주>【후산 션이 견시 위여 뎡긔를 지니라】 분묘앳 남글 보고 목 삼고져 너기며 섭블 보고 뷔여 딛고져 너기며 무덤믈 보고 겟 거슬 내오져 너기다 니 〈이, 19ㄱ〉

ㄴ. 녜 후산 션이 글 지어 니르샤<원주>【후산 션이 견시 위여 뎡긔를 지으니라】 분묘앳 남글 보고 목 삼고져 너기며 섭블 보고 뷔여 딛고져 너기며 무덤믈 보고 겟 겨슬 내오져 너기다 니 〈규, 19ㄱ〉

ㄷ. 녯 제 후산 션이라 리 견시라  사을 위야 뎡이라  집의 글을 지어 경계야 오되 분묘 남글 보고  목 삼기을 각며 거싀를 아고  블 딧기를 각며 무덤 우희 올나 그 소게 녀흔 보뵈 파 내기를 각리라 니 〈일, 31ㄴ〉

이 교수본과 규장각본에 나타나 있는 협주문 【……】 부분이 일사문고본에서는 (3ㄷ)의 밑줄친 부분과 같이 언해문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 앞의 두 판본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3. ≪정속언해≫의 내용

≪정속언해≫는 위에서 밝힌 대로 1518년(중종 13)에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중국의 ≪正俗篇≫(정속편)을 가져다 언해한 일종의 교화서이다. 원래 ≪정속편≫은 원(元)나라 왕일암(王逸庵)의 저술인데, 1345년 중국 송강부(松江府)에서 지방관으로 있던 왕지화(王至和)가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서문을 더하여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은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효부모(孝父母)〉, 〈우형제(友兄弟)〉, 〈화실가(和室家)〉, 〈훈자손(訓子孫)〉, 〈목종족(睦宗族)〉, 〈후친의(厚親誼)〉, 〈휼인리(恤隣里)〉, 〈신교우(愼交友)〉, 〈대간복(待幹僕)〉, 〈근상제(謹喪祭)〉, 〈중분묘(重墳墓)〉, 〈원음사(遠淫祀)〉, 〈무본업(務本業)〉, 〈수전조(收田租)〉, 〈숭검박(崇儉朴)〉, 〈징분노(懲忿怒)〉, 〈진기황(賑飢荒)〉, 〈적음덕(積陰德)〉 등 18항목에 걸쳐 서술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내용상의 특징은 가족이나 친족 내부의 인간관계에 대한 행위 규범 및 윤리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혈연관계를 넘어서 촌락 사회의 인간관계에까지 적용되는 행위 규범, 즉 향당 윤리(鄕黨倫理)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518년 3월, 강혼(姜渾)이 쓴 ≪이륜행실도≫의 서문에서도 ≪언해정속(諺解正俗)≫과 ≪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은 향촌(鄕村)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라 한 사실이 ≪정속언해≫도 바로 향당 윤리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정속의 18개 항목 중에서 향당 윤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항목은 대개 다음의 것들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휼인리〉는 촌락 사회에서 이웃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부상조를 강조하였고, 〈수전조〉는 농경 사회의 대표적 인간관계인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에서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진기황〉에서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을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도록 독려하고 있으며, 〈적음덕〉은 음덕과 선행을 쌓음으로써 아름다운 사회를 이룩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 밖에 사회를 살아가는 데 요구되는 윤리 규범도 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친구 사귐에 신중할 것을 가르치는 〈신교우〉가 있고, 또한 생업에 힘써야 한다는 〈무본업〉, 검박(儉朴)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숭검박〉, 분노를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징분노〉 등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윤리 규범으로서 제시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정속언해≫에 제시되고 있는 18개 항목을 순서대로 간략히 그 내용을 소개한다.

1) ‘효부모(孝父母)’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이다. 18개 항목 중에서 〈효부모〉가 가장 먼저 할 일이고 나머지 17개 항목은 그 다음으로 할 일이라고 주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만큼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큰 일이라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우선 의식주(衣食住)를 잘 돌보아 드리며, 질병이 있을 때 잘 구원해 드리며, 만일 어버이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어버이에게 효도하게 되면 그 결과로 다시 자식으로부터 그 효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하늘과 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하늘이 내리는 주살(誅殺)과 사람이 내리는 재화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다섯 가지 형벌에 해당하는 범죄가 삼천 가지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불효(不孝)라고 하였다.

2) ‘우형제(友兄弟)’는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이다. 형제는 같은 어버이로부터 태어났으므로 형제는 몸만 다르고 그 기(氣)는 같은 것이어서 그 의리의 관계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형제간의 우애를 저버린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손발을 끊어버리는 것과도 같고 스스로 담장을 헐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 가정에서 형은 형답게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아우답게 형을 공경한 후에야 백성의 교화도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 ‘화실가(和室家)’는 부부가 화목하는 것이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라 부부가 있음으로써 부자(父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화목은 다만 부부만의 행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가정이 바르게 되고, 가정이 바르게 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부모의 마음도 기쁘게 된다. 세상에서 비첩(婢妾)을 사랑하여 정처(正妻)를 소박하는 수가 있는데 정처는 죽을 때까지 달고 쓰고 가난하고 여유 있고 죽고 사는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4) ‘훈자손(訓子孫)’은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손을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엇이 옳은 일이며 무엇이 옳지 못한 일인지를 분별케 하여 옳은 일은 행하고 옳지 못한 일은 행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재산과 권세가 있는 집에서 그 자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아니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교만과 사치와 방종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는 사례가 있고, 그 결과는 몸을 망하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자손을 가르치는 도리를 잘 알지 못하는 까닭임을 강조하고 있다.

5) ‘목종족(睦宗族)’은 친척과 화목하는 것이다. 친척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내려 온 것이며 조상을 높이면 종가(宗家)를 공경하게 되고 종가를 공경하게 되면 친척을 공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친척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어진 친척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차라리 종[奴婢]들에게는 호의호식케 하면서 자기의 가까운 친척은 굶고 헐벗게 내버려 두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은 모두 천리(天理)에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이처럼 천리에 용납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사람은 조상들께서도 노여워하여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6) ‘후친의(厚親誼)’는 어머니편의 친척과 아내편의 친척을 잘 사귀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아내편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기 쉬우나 어머니편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대체로 어머니편의 친척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인친(姻親)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옛날의 성군(聖君)은 동성(同姓)의 친척과 이성(異姓)의 친척을 다 사랑하도록 가르치셨다고 하였다.

7) ‘휼인리(恤隣里)’ 이웃과 마을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나무가 많이 모여 숲을 이루면 비바람을 가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이웃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웃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사귐으로써 화목해지는 풍속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웃이나 마을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나에게도 그들로부터 사랑이 되돌아오게 되고, 그들에게 증오를 베풀게 되면 나에게도 그들로부터 증오가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8) ‘신교우(愼交友)’는 벗 사귀기를 신중하게 하는 것이다. 벗을 사귀는 것은 오륜(五倫)의 하나에 속하는 중요한 것이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벗을 사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벗에는 어진 벗도 있고 어질지 못한 벗도 있으니, 어진 벗은 보고 배운 대로 선한 일을 하고 어질지 못한 벗은 보고 배운 대로 그릇된 일만 하니, 이 벗을 사귈 때는 삼가 사귀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진 사람을 가려서 따르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9) ‘대간복(待幹僕)’은 노복(奴僕)들을 잘 대접하여 부리는 것이다. 이것은 노복을 다루는 하나의 요령에 속하는 것으로 노복이 간사한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할 것과 용서할 만한 일은 너그럽게 처리함으로써 상호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복이 간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주인의 사사로운 일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고 공적 업무를 그르치게 되고 그 결과는 많은 백성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 ‘근상제(謹喪祭)’는 상사(喪事)와 제사(祭祀)를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다. 상사와 제전은 예로부터 성현들이 제정한 의례에 따라 삼년간의 몽상(蒙喪)과 그 밖에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 등으로 행해진다. 세상의 풍속이 장사지냄에 있어 진짜 할 일은 힘써 하지 않고, 겉으로 물자만 풍부하게 쓰고 사치스럽게 하면서 형식적인 절차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번당(幡幢)이 펄렁거리고 징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한 것과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모두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근본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11) ‘중분묘(重墳墓)’는 분묘를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분묘는 어버이와 조상이 묻혀 있는 곳이다. 사람이 살아서는 편안한 집에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죽은 후에도 편안한 무덤에 묻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며 보호하지 않고서 후손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의 근원을 마르게 해 놓고서 길게 흐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자손이 늘 무덤을 보살피기로 마음을 먹으면 조상이 저승에서 편안하게 되어 자손은 이승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12) ‘원음사(遠滛祀)’는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 지내지 말라는 것이다. 제사하는 예법에는 각각 차등(差等)이 있어 서로 혼란됨이 없이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특히 도교(道敎)의 방사(方士)들이나 무교(巫敎)의 무당 등에 의해 정당하지 못한 제사를 행하는 일이 있는데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하면 제사를 지내도 귀신이 흠향(歆饗)하지 아니할 것이고, 진실로 사리에 맞게 하면 빌지 않아도 귀신이 복을 줄 것이라 하였다.

13) ‘무본업(務本業)’은 생업에 힘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생업이라는 것은 학문에 힘쓰는 일과, 농사에 힘쓰는 일과, 공업에 힘쓰는 일과, 장사에 힘쓰는 일을 가리킨다.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그것이다. 사농공상은 예로부터 나라에 필요한 근본적인 직업이고 이러한 근본적인 직업이 없으면 백성이 살기가 어렵고 나라가 부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놓고 즐겨 노는 사람은 처자식 봉양하는 일도 돌아보지 아니하며, 살아갈 일을 잊고 욕심을 따라 차(茶)를 파는 집에 가서 장기와 바둑을 하며, 술집에 가서 놀다가 송사(訟事)를 일으켜 재물을 빼앗기니, 이런 사람은 본업에 힘쓰지 않는 사람으로서 뿌리 없는 나무와 근원이 없는 물과 같다고 하였다.

14) ‘수전조(收田租)’는 공세(貢稅)를 합리적으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주(地主)와 소작인 사이에 공세(貢稅)를 주고받는 일에 관한 것으로 지주가 소작인으로부터 공세를 받지 않으면 지주는 나라에 부역(賦役)을 바칠 수 없고, 지주가 나라에 부역을 바치지 않으면 나라에서는 재정(財政)을 충당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주가 부담하는 부역이 과중하면 소작인이 부담하는 공세도 필연적으로 과중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작인은 수확을 올리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지주도 소작인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도와줌과 동시에 수확의 감소가 예상되면 공세를 경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5) ‘숭검박(崇儉朴)’은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는 것이다. 검박이라는 것은 사치함과 빛나고 고운 것을 삼가는 것이다. 검박한 생활은 모든 소비를 절감하게 되고 모든 소비를 절감하다 보면 자연히 남에게 빚을 지지 않게 되고 차츰 물질적으로 여유 있게 되는 까닭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부자는 넉넉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임금 중에는 궁전이나 의복이나 침실이나 그릇 등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처럼 검소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처럼 검박하게 지낸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여유 있는 사람이라도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16) ‘징분노(懲忿怒)’는 노여운 일을 참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분노하고 또 그 분노를 참지 못하여 남을 비방하거나 말다툼을 벌이거나 심지어는 주먹질을 벌인 탓에 남에게 고소당하여 감옥에 갇히거나 아니면 자신이 남을 고소하여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는 상상하지 못하였던 중대한 결과를 빚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패가망신(敗家亡身)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분노를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17) ‘진기황(賑飢荒)’은 굶주린 사람을 돕는 것이다. 곡식이라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하늘이 낸 것이고 부자(富者)도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이 복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가 굶주리는 사람을 진휼하는 것은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것이며 천리에 순응하면 하늘이 도와서 자손이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18) ‘적음덕(積陰德)’은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을 더욱 훌륭해지도록 도와주고, 어려운 일이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며, 목마른 사람이 목을 축일 수 있게 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편하게 왕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타인과 물질을 거래할 때에 정직하고 공평하게 하는 일, 그리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들이 모두 음덕(陰德)을 쌓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음덕을 쌓으면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되고, 반대로 사람이 음덕을 쌓지 않으면 그 자손이 앙화(殃禍)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18개 항목에 대한 서술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내용 서술에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18개 항목마다 말미에는 빠짐없이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같은 옛 문헌에 있거나 성현이 표현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마무리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문 본문의 맨 마지막 문장의 구결이 2개 항목을 제외하고 대부분 ‘伊羅 爲豆多’(이라 하도다)와 같은 인용 구문의 구결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 간행자 - 김안국(金安國)

여기서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3,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인명대사전≫(1986, 신구문화사)에 의지하여 김안국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하고자 한다.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은 문신, 학자이며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다.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 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연산군 9)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장령, 예조참의,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중종 12) 2월에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3월까지 있으면서 ≪이륜행실도≫를 편찬 간행하였을 뿐 아니라 ≪농서(農書)≫, ≪잠서(蠶書)≫, ≪여씨향약(呂氏鄕約)≫, ≪정속(正俗)≫, ≪벽온방(辟瘟方)≫, ≪창진방(瘡疹方)≫ 등을 언해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1518년(중종 13) 4월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다시 중앙 관리로 왔으나 그 다음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중종 27)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찬성, 판중추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 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중종실록≫에 기록된 그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그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중종실록 10년 6월 8일(癸亥)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이조판서 안당이 아뢰기를, “… 승문원 판교(判校) 김안국(金安國)과 같은 자는 본래 부지런하고 삼가는 것으로써 봉직(奉職)하여 있는 곳마다 자기의 직책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이와 같은 사람은 차례를 따지지 않고 탁용(擢用)한다면 거의 인심을 진작시키고 선비의 습속을 격려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마땅히 승지를 임명해야 하는데 의망할 만한 자가 적습니다. 바라건대 김안국도 아울러 의망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김안국은 한갓 승지뿐만 아니라 탁용하기에 가장 합당하다.”

(吏曹判書安瑭啓曰 … 如承文院判校金安國 本以勤謹奉公 所在無不盡其職任 如此之人 不易多得 … 如此之人 擢用不次 則庶可以振起人心 而激勵士習也 今日當除承旨 而其可擬望者少 請以金安國幷擬 傳曰 金安國 非徒承旨而已 最合於擢用)

위에서 보면, 안당(安瑭)은 승지(承旨)를 발탁함에 있어 이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다. 서열을 따지지 않고 김안국 같은 인물을 뽑는다면 백성들의 인심이 진작되고 선비들의 습속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종실록 11년 11월 7일(甲申)의 기사에도 김안국의 사람됨을 서술하고 있다.

안국은 사람됨이 성격과 법도가 상명(詳明)하고 간절하여 나라일 하기를 크나 작으나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충성과 정성에 감복했다. 그러나 더러는 그의 까다롭게 살핌을 흠으로 여겼다.

(安國之爲人 性度詳明懇切 爲國家事 無巨細 一出於至誠 時人服其忠懇 而或病其苛察焉)

위의 기사를 통해서 김안국은 자기의 할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수행했음을 알 수 있고 그럼으로 해서 천거의 대상이나 물망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도 후에 다시 등용된 것은 그의 책임감과 성실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성품상의 흠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Ⅱ. 국어학적 고찰

1. 표기 문자

≪정속언해≫는 16세기 문헌이므로 ㅸ과 ㆆ은 이미 소실되어 나타나지 않고 ㅿ과 ㆁ은 이때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ㆁ을 초성에서는 볼 수 없고 종성에서만 사용되고 있음을 보는데 주001)

<풀이>홍윤표 교수의 ≪정속언해≫ 해제(1984)에서는 “사미 린 나”(4ㄱ)의 문례를 들어 ㆁ이 초성에 쓰인 용례로 보고 있으나 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이 부분은 “사 일린 나”로 판독되는 구절이다.
, 종성에서도 ㆁ이 ㅇ으로 교체된 곳이 있다. 어떤 부분은 판각(板刻)이 정밀하지 못하여 종성에서 ㆁ과 ㅇ의 판별이 어려운 곳도 있지만 종성에서 ㆁ과 ㅇ의 혼기(混記)가 몇 군데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ㅿ에 있어서도 일부 낱말에서 ㅿ 탈락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15세기에 사용되었던 ㅿ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형별로 그 용례를 제시한다.

(1) ㄱ. 명사

겨 : 겨렌(2ㄱ)

 : (11ㄴ), (27ㄴ)

 : 미(3ㄴ), (6ㄱ), 미(13ㄱ, 17ㄱ), (15ㄴ)

아 : 아(4ㄱ, 8ㄱ), 앗(4ㄱ)

아 : 아미라(4ㄱ), 아(8ㄴ, 9ㄴ), 아들희게(8ㄴ), 아(10ㄴ), 아곳(27ㄴ)

어버 : 어버(1ㄱ, 2ㄱ, 2ㄴ, 4ㄴ, 5ㄱ, 6ㄱ, 6ㄴ, 18ㄴ, 23ㄴ), 어버(4ㄱ), 어버(6ㄱ, 9ㄴ, 22ㄱ), 어버게(18ㄴ, 26ㄱ), 한어버도(10ㄱ), 하나버(18ㄴ), 하나버(19ㄱ)

어름 : 어름메(2ㄱ)

처 : 처믜(4ㄱ), 처믜(4ㄱ), 처믠(9ㄴ), 처미(26ㄴ)

ㄴ. 파생명사

피조(2ㄴ), 녀름지(20ㄴ)

ㄷ. 동사 · 형용사

가멸- : 가며나(6ㄱ), 가멸어나(7ㄴ), 가멸에(8ㄱ), 가면(8ㄱ, 27ㄴ), 가멸오(13ㄱ), 가며닌(25ㄴ), 가며롬(25ㄴ)

나가- : 나가려(13ㄴ), 나갈딘댄(14ㄱ)

ㄹ. 활용형

-[繼] : 니(9ㄴ) cf. 가며니 닛디 말라(不繼富, 28ㄱ)

-[愛] : (17ㄱ)

-[結] : 무(20ㄱ, 20ㄴ)

-[作] : 지(11ㄱ), 지(19ㄴ, 26ㄴ), 지니라(19ㄴ), 지(27ㄱ), 녀름지(23ㄴ), 녀름지리(21ㄴ)

ㅁ. 객체 높임법

-- :  재고(2ㄱ), 뵈오며(2ㄱ)

ㅂ. 부사

몸(11ㄴ), 그기션(27ㄴ)

ㅅ. 강세 보조사

- : 후에(1ㄴ, 8ㄴ), 훼(4ㄴ, 5ㄴ, 8ㄴ), 뎨(3ㄴ), 슬허호미(17ㄴ),

화여(6ㄱ), 도의여(12ㄴ), 야(24ㄱ)

ㅇ. 한자어

네(常人, 14ㄱ), 가(室家, 4ㄴ)

ㅈ. 역표기

므 일를(6ㄴ) cf. 므스 거슬(2ㄱ)

이상은 문헌 내에 사용된 ㅿ 표기를 거의 망라한 셈이다. 그 중에서도 (2)ㅈ에 쓰인 ‘므’는 15세기에 ‘므스’로 표기되던 낱말이어서 ㅿ과는 상관없는 말인데도 ‘므’로 역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많은 용례 가운데 대부분은 여러 번의 등장에도 ㅿ의 표기에 아무런 혼란이 없으나 일부의 경우에 한해서 ㅿ유지형과 ㅿ탈락형이 한 문헌 안에서 공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1) ㄱ~ㅇ의 용례 중에서 ㅿ이 탈락된 어형은 다음과 같다.

(2) ㄱ. 어버이(2ㄱ, 3ㄱ, 8ㄱ, 8ㄴ, 18ㄴ, 21ㄴ), 어버일(17ㄱ)

ㄴ. 녀름지이(20ㄴ), 녀름지이고(8ㄱ)

ㄷ. 처엄믜(26ㄴ)

ㄹ. 연(自然, 2ㄴ), 인니(聖人, 9ㄴ, 17ㄱ), 현인니신(賢人, 12ㄴ), 소임믈(所任, 16ㄱ), 실개(室家ㅣ, 6ㄴ)

(3) 이 : 이예(2ㄴ, 3ㄴ), 이옛(16ㄱ)

위에서 ‘어버이’는 ‘어버’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어버’에서 ㅿ탈락이 가장 적극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예가 많지는 않으나 ‘녀름지이’와 ‘처엄’에서도 ㅿ탈락을 보여 주고 있다. 한자어에서는 ㅿ유지형으로 ‘’이 유일하다 할 정도로 한자어에서의 ㅿ탈락은 거의 완료된 듯한 상태이다. (2)ㄹ에서 보듯이 15세기에 ㅿ을 보이던 낱말들이 이 문헌에서는 모두 ㅿ이 탈락한 표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자어에서 ㅿ 소실이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속언해≫에서 한자어를 한자 없이 한글로만 표기한 데 따른 상승효과가 아닌가 한다. 이런 현상은 역시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기한 ≪이륜행실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다만 (1)ㅇ에서 ‘室家’를 ‘가’로 적은 것은 잘못된 표기라는 것을 (2)ㄷ의 ‘실개’가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3)의 ‘이’는 15세기에 ‘’였으나 ≪정속언해≫에서는 ㅿ이 탈락된 형태만 사용되었다. 특히 ‘이’만은 이미 15세기 국어에서 ㅿ 탈락형을 선보인 일이 있다. 그리하여 이기문(1978:45)은 “음운 ㅿ의 소멸은 15세기 성종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가 그 선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정속언해≫에서도 ‘’가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2), (3)의 ㅿ 탈락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ㅿ 탈락이 일정한 환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2)ㄷ의 ‘처엄’을 제외하고는 고유어 한자어를 막론하고 모두 i, j 앞에서 ㅿ 탈락이 일어나고 있음이다. 이로써 ㅿ의 탈락은 특정한 환경에서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시대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제 초성에 쓰인 자음의 병서자(並書字)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각자병서(各自並書)는 ≪원각경언해≫(1465)에서 폐지된 이후로 자취를 감추어 버려 이 문헌에서도 각자병서는 전혀 볼 수 없다. 한 예로, ≪정속언해≫에 자주 등장하는 활용 어미로서 ‘-ㄹ’가 있는데, 이는 ≪원각경언해≫ 이전까지는 ‘-ㄹ’로 표기되던 형태이나 각자병서의 폐지로 ≪정속언해≫에서도 ‘-ㄹ’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초성의 합용병서(合用並書)는 15세기 국어의 체계대로 ㅅ계, ㅂ계, ㅄ계의 병서자가 이 문헌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15세기의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그동안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ㅅ계의 합용병서는 된소리를 나타내는 표기로서 15세기와 다름없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ㅺ : 리(16ㄱ), 이고(23ㄴ)

ㅼ : (2ㄱ, 8ㄱ, 5ㄴ, 11ㄴ, 16ㄴ), (1ㄴ, 2ㄴ, 5ㄴ, 8ㄱ, 22ㄱ)

ㅽ : (6ㄱ, 8ㄱ, 17ㄴ)

이뿐만 아니라 ㅅ병서자는 어근끼리 결합하면서 개입된 사이시옷을 후행어의 어두에 내려적음으로써 형성된 것도 있다.

ㅅ+ㄱ : 잠(13ㄱ), (15ㄴ), 믈(20ㄱ)

ㅅ+ㄷ : 미쳔커나 에(7ㄴ), 휘로디(16ㄱ)

ㅅ+ㅂ : 별리(星之火, 26ㄴ)

이 밖에 폐쇄음 아래에서 경음화된 자음을 ㅅ병서자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ㅺ : 앗(25ㄱ)

ㅼ : 모로놋(6ㄱ)

그러나 ㅂ계의 합용병서에서는 약간의 변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15세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ㅲ이 새로 등장한 점이다. 그러면 ≪정속 언해≫에 실제로 등장하는 ㅂ계의 합용병서자를 열거해 본다.

ㅲ : 이면(27ㄴ)

ㅳ : 나니(1ㄴ), 들(4ㄱ)

ㅄ : 기오(10ㄱ),  것(16ㄱ, 21ㄴ), (22ㄱ), 며(22ㄱ)

ㅶ : 거슯도(4ㄱ)

ㅴ : 일(9ㄴ) 주002)

<풀이>이원주 교수본 ≪정속언해≫에 어두자음군 ㅴ이 쓰인 용례로서 9ㄴ의 ‘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영인본에는 그 부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일’라고 본 것은 이 판본의 표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후대의 규장각본에서 ‘명일’로 되어 있는 데에 근거하였다.

이 문헌에 와서 위에서 보인 ㅂ병서자의 ㅂ이 [p]음이냐 아니면 된소리를 표기한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예가 있다.

(4) ㄱ. 곡식글 이고(貸穀)(23ㄴ)

ㄴ. 나믄 곡식로 가난 사믈 이면(有餘之粟 貸濟貧之之民)(27ㄴ)

위의 예문에 등장하는 ‘이-’와 ‘이-’는 둘다 ‘貸(대)’의 뜻으로 쓰인 동일한 동사이다. 이는 동일한 낱말의 이표기(異表記)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표기는 다르더라도 발음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ㅺ이나 ㅲ이 똑같이 ㄱ의 된소리 표기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예는 ㅂ병서자가 된소리 표기라는 결론을 망설이게 한다.

(5) ㄱ. 힘(17ㄴ), 힘디(21ㄴ, 22ㄱ)

ㄴ. 힘스면(16ㄱ), 힘스믈(20ㄴ), 힘서(21ㄴ, 22ㄴ, 27ㄱ)

위의 (5)에서도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동일한 낱말, 동일한 발음임에도 표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원래 ‘힘 -’[努力]는 두 낱말의 구성이었는데 이것이 차츰 한 낱말로 의식되면서 ‘힘-’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ㅄ이 ㅆ과 같은 된소리 표기였다면 ‘힘-’ 그대로 써도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ㅄ이 된소리가 아니고 [ps]의 자음군을 나타내는 병서자이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두 자음만이 허용되는 모음 사이에 m, p, s의 세 자음이 개재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 자음 중 하나를 탈락시켜야 하는데, 마침 m, p이 모두 양순음(兩脣音)이어서 동음 생략으로 [p]이 탈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힘-’가 ‘힘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ㅄ이 자음군 [ps]라는 사실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힘스-’라는 표기가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동사가 ‘힘’과 결합하지 않고 단독으로 쓰인 경우도 여러 번 있는데, 이 경우에는 어느 하나도 ‘스-’로 교체된 예가 없다는 점이 또한 ㅄ의 ㅂ이 [p]임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이상에서 볼 때 ㅂ병서자는 자음군에서 된소리로 바뀌는 과도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나 ≪정속언해≫에서는 ‘’[意]과 ‘’의 혼기 현상 같은 ㅅ병서자와 ㅂ병서자의 혼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ㅂ병서자는 아직 자음군의 표기 글자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2. 표기법

여기서 표기법이라 함은 체언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거나 용언 어간에 모음의 어미가 연결되거나 할 때, 체언이나 용언 어간의 받침 글자를 그 아래의 조사나 어미의 두음으로 내려적느냐 내려적지 않느냐 하는 이른바 연철(連綴)이냐 분철(分綴)이냐 하는 문제를 말한다.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되었던 15세기 국어의 표기는 처음부터 연철 방식을 표기의 원칙으로 삼았고,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15세기 한글 문헌에서 연철법은 천하통일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한 대세는 16세기에 들어서도 대체로 이어지는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편에선 분철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분철 표기가 제법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16세기 초기 문헌인 이원주 교수본 ≪정속언해≫의 표기 실태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연철 표기와 중철(重綴) 표기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물론 체언의 경우에 해당하는 현상이고 용언의 경우는 아직도 연철의 대세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연철도 분철도 아닌 중철이란 무엇인가? 이는 분철할 때처럼 받침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적어 놓고는 한편으로 연철할 때처럼 받침 자음을 그 다음 음절의 두음에 다시 적는, 말하자면 받침의 자음을 이중으로 적는 표기 방식이다. 예를 들면 ‘사+’을 ‘사’로 적는 방식이다. 이러한 중철 표기는 연철과 분철의 두 방식을 절충한 표기이므로 이는 연철에서 분철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철 표기는 연철에서 벗어나 분철로 지향해 가는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분철의 표기 중간 중간에 가끔씩 등장하는 표기 형태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교수본≪정속언해≫는 매우 이례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 문헌은 연철과 중철을 그렇게 많이 보이면서도 분철은 가뭄에 콩 나듯 전체를 통해 몇 개의 용례가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의 문헌에서 중철의 대량 등장은 공통된 현상이지만 문헌에 따라 연철 중철의 비율은 조금씩 다르고 분철 표기는 대부분 극소수로 나타나지만 어떤 문헌에서는 분철 표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문헌도 있다. 이제 그 표기례를 체언의 받침별로 나누어 제시한 다음 연철의 예도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같은 용례라도 다른 장에 나타나면 그 출전을 각각 밝히지만 한 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경우는 한 번만 나타내기로 한다.

(6) 체언 말음이 ㄱ인 경우

셕긔(1ㄴ), 식긔(2ㄱ, 8ㄴ), 약글(2ㄱ), 골육긔(3ㄴ), 골육글(4ㄴ), 대개(4ㄴ), 쥬역게(5ㄴ), 식기(1ㄴ, 5ㄴ, 29ㄴ), 쥬역근(5ㄴ), 셕착기(7ㄴ), 셕글(7ㄴ), 쳐식긔(8ㄴ), 녁근(10ㄴ), 족그로(12ㄴ), 쳐셕긔(13ㄱ), 덕기(13ㄴ), 덕글(14ㄱ, 27ㄱ), 셕기며(14ㄴ), 덕게(15ㄱ), 음식글(15ㄴ), 셰쇽기(17ㄴ), 복글(19ㄱ, 20ㄱ, 30ㄱ), 쳐식글(23ㄴ), 곡식글(23ㄴ, 27ㄴ), 옥개(26ㄴ, 29ㄴ), 곡식로(27ㄴ), 원억겟(29ㄴ), 쟉긔(29ㄴ)

cf. 저긔(3ㄴ, 28ㄱ, 29ㄱ), 셔기며(8ㄱ), 셔글(8ㄴ), 시글(9ㄴ), 골유글(9ㄴ), 저긘(9ㄴ), 쇼기(10ㄱ), 어믜녀글(11ㄴ), 셰쇼개(20ㄱ), 글(20ㄱ), 곡셔글(21ㄴ), 도기(22ㄱ)

(7) 체언 말음이 ㄴ인 경우

인니신(1ㄴ), 덕분늘(2ㄱ), 직분네(2ㄱ), 손니(2ㄴ, 7ㄴ, 18ㄴ, 19ㄱ, 30ㄱ), 긔운니(3ㄴ, 13ㄱ, 23ㄴ), 근원니니(5ㄴ), 편로(5ㄴ), 남진니(6ㄴ), 손(8ㄱ, 17ㄴ, 18ㄴ), 근원노로셔(9ㄴ), 인니(9ㄴ, 17ㄱ), 사돈(11ㄴ), 현인니신(12ㄴ), 인륜니(14ㄴ), 남진니며(14ㄴ), 얼운니며(14ㄴ), 졔뎐(16ㄴ), 삼 년(17ㄱ), 니 아니라(17ㄴ), 셰간(17ㄴ), 근원(19ㄱ), 귀신니며(20ㄱ), 신션(20ㄱ), 근본(22ㄱ, 22ㄴ), 근본니오(24ㄱ), 근본닐(24ㄱ), 니오(25ㄱ), 가난(25ㄴ)

cf. 소니(5ㄴ), 니(8ㄱ), 사도게(11ㄱ), 혼이(11ㄴ), 바니(20ㄴ), 근보(21ㄴ), 니니(23ㄴ), 셰가니(25ㄱ), 니오(25ㄱ), 민가니(28ㄱ), 소니(28ㄱ, 30ㄱ)

(8) 체언 말음이 ㄷ인 경우

벋디란(14ㄱ), 벋들(14ㄱ), 벋디(14ㄱ, 14ㄴ), 벋듸게(15ㄱ), 벋디오(27ㄴ)

cf. 들(4ㄱ), 고디(8ㄴ), 버들(13ㄴ, 14ㄴ), 버듸게(13ㄴ), 버디(14ㄱ), 버든(14ㄴ)

(9) 체언 말음이 ㄹ인 경우

허믈리(2ㄱ), 벌(2ㄴ), 벌리라(2ㄴ), 손발(4ㄴ), 긔결리란(5ㄴ), 벼슬를(6ㄱ), 일를(6ㄴ, 14ㄱ, 14ㄴ, 26ㄴ), 왼 일레(7ㄴ), 긔질리(7ㄴ), 벌를(11ㄴ), 시졀리(14ㄴ), 일리라(14ㄴ, 29ㄴ), 말리(20ㄱ), 일(21ㄴ), 시절를(24ㄱ), 줄리(27ㄴ), 일리오(28ㄱ), 믈블레(29ㄴ), 믈레(29ㄴ), 옥구슬를(29ㄴ), 얼리(30ㄱ)

cf. 이리라(2ㄱ, 21ㄴ), 이리(2ㄴ, 16ㄱ, 20ㄴ, 25ㄴ), 이를(8ㄴ, 14ㄴ, 17ㄴ, 20ㄴ, 22ㄱ), 글워레(8ㄴ, 12ㄴ), 허므리(10ㄱ), 수프리(12ㄴ), 주를(13ㄱ), 마레(16ㄱ), 므리(22ㄱ, 26ㄴ), 시저리(22ㄱ), 귀시리(23ㄱ), 이른(28ㄱ), 므레(29ㄴ)

(10) 체언 말음이 ㅁ인 경우

품믈(1ㄴ), 일홈미라(2ㄱ, 5ㄴ, 10ㄱ), 녀름멘(2ㄱ), 사미(2ㄴ, 4ㄱ, 8ㄱ, 11ㄱ, 15ㄴ, 22ㄱ, 26ㄴ), 사름믜(1ㄱ, 2ㄴ, 5ㄴ, 16ㄴ, 29ㄱ, 29ㄴ, 30ㄱ), 몸매(2ㄴ), 몸(3ㄴ), 미(3ㄴ), 사(4ㄱ), 처믜(4ㄱ, 26ㄴ), 아미라(4ㄱ), 아믜(4ㄴ), 사름믜게(4ㄴ, 17ㄴ), 사름미(4ㄴ, 23ㄴ, 26ㄴ, 27ㄴ, 28ㄴ, 29ㄴ), 몸미(5ㄴ), (6ㄱ, 27ㄴ), 가춈(6ㄴ), 사름미라(7ㄴ), 아미오(10ㄴ), 아미니(10ㄴ), 홈믈(10ㄴ), 홈(11ㄴ, 19ㄴ, 24ㄱ, 27ㄱ), 사괴욤(13ㄴ), 님굼므로(14ㄱ), 그러홈모로(14ㄴ), 사름(14ㄴ, 30ㄱ), 모로(16ㄱ), 사름믈(16ㄱ, 28ㄱ), 소임믈(16ㄱ), 아니홈로(30ㄱ), 시름믈(17ㄴ, 23ㄴ), 무덤믈(19ㄱ), 사(22ㄱ), 모도옴미(23ㄴ), 사(25ㄱ), 사게(25ㄴ), (25ㄴ), 아(26ㄱ), 몸(26ㄱ), 처미(26ㄴ), (26ㄴ), 처엄믜(26ㄴ), 히믈(27ㄴ), 사믈(27ㄴ), 사름믄(28ㄱ), 메(28ㄱ)

cf. 호미(2ㄴ, 3ㄴ, 4ㄱ, 4ㄴ, 6ㄱ, 17ㄴ, 18ㄱ, 22ㄱ, 23ㄱ, 26ㄱ, 29ㄱ), 셤교(2ㄱ), 이쇼(2ㄴ, 16ㄱ, 18ㄴ), 사괴요(3ㄱ, 11ㄴ), 호(4ㄱ, 24ㄴ), 처믜(4ㄱ, 26ㄴ), 호(4ㄴ, 17ㄴ, 18ㄱ, 28ㄱ, 29ㄴ), 일후미라(4ㄱ), 사(4ㄴ), 닷고모로(5ㄴ), 사미(6ㄱ, 10ㄱ, 11ㄱ, 17ㄴ, 20ㄱ, 28ㄱ), 호모로브터(8ㄱ), 모매(8ㄴ), 모미(8ㄴ, 17ㄱ), 아(8ㄴ, 9ㄴ, 11ㄱ), 처믠(9ㄴ), 모미라(9ㄴ), 사(9ㄴ, 23ㄱ), 녀교미(9ㄴ), 녀교미라(9ㄴ), 아미(10ㄱ), 아미여(10ㄱ), 아(10ㄱ), 님구미(11ㄴ, 24ㄴ-25ㄱ), 이쇼로(11ㄴ), 님고미(11ㄴ), 이쇼미(12ㄴ), 보(12ㄴ, 17ㄴ), 힐호모로(13ㄱ), 님구미시며(14ㄴ), 업스모로(14ㄴ), 호매(16ㄱ, 29ㄴ), 미(17ㄱ), 외요(17ㄴ), 샤미라(17ㄴ), 호론(17ㄴ), 호미(17ㄴ), 호모로(19ㄱ, 25ㄴ), 미츄미(20ㄱ), 모(20ㄴ, 22ㄱ), 주그믈(21ㄴ), (22ㄱ), 욕시믈(22ㄱ), 사(22ㄱ), 사로미(23ㄴ), 호믈(24ㄱ), 호미오(24ㄴ), 귀호미 님구미시며(25ㄱ), 가며로미(25ㄱ), 게(25ㄱ-ㄴ), 몰(25ㄴ), 믜게(27ㄱ), 믜(27ㄴ), 사미라(28ㄱ), 호미라(29ㄴ), 주미(29ㄴ), 가포미라(30ㄱ)

(11) 체언 말음이 ㅂ인 경우

집븨셔(3ㄴ, 4ㄱ), 집븨(4ㄴ, 6ㄱ), 겨집븨(4ㄴ, 5ㄴ, 6ㄱ), 겨집븐(5ㄴ, 6ㄱ), 겨집비(5ㄴ), 집블(5ㄴ, 15ㄴ, 27ㄴ), 쳡블(6ㄱ), 집비(6ㄴ), 법블(9ㄴ), 겨집비며(14ㄴ), 집븻(15ㄱ, 16ㄱ), 례법로(16ㄱ), 섭블(19ㄱ), 거붑블(29ㄴ), 거붑비러라(30ㄱ), 집븐(30ㄱ)

cf. 겨지븨게(6ㄴ), 지븨셔(8ㄱ), 지블(8ㄴ), 지븨셔(8ㄴ), 겨지븨(11ㄱ), 지브로(12ㄴ), 지븨(16ㄱ, 22ㄱ, 25ㄴ), 바(21ㄴ), 지비(24ㄱ, 25ㄱ), 지블(25ㄱ), 바비(25ㄱ)

(12) 체언 말음이 ㅅ인 경우

것시(15ㄴ), 것(16ㄱ)

cf. 거슬(2ㄱ, 13ㄱ, 21ㄴ, 29ㄴ), 거시로다(4ㄱ), 거시라(4ㄴ, 6ㄱ, 7ㄴ, 15ㄱ, 20ㄱ, 25ㄴ), 거슨(8ㄱ), 그르세(8ㄴ), 거싀게(15ㄴ), 거시(16ㄱ), 거슨(16ㄱ), 거싀(16ㄱ), 거로(16ㄱ), 귓거시라(20ㄱ), 타시라(21ㄴ, 22ㄱ), 거실(22ㄴ, 27ㄱ), 거시니(23ㄱ), 오(25ㄱ), 그르슬(25ㄱ), 딜어스로(25ㄱ), 거시(25ㄱ)

지금까지 체언 말음의 자음별로 중철의 예와 연철의 예를 망라하여 열거하였다. 전체적으로 중철 표기가 적극적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연철 표기 또한 그 세력이 유지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체언에 동일한 조사(助詞)가 연결된 형태에서 중철과 연철 표기가 공존하고 있음은 지금까지의 연철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는 움직임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해 있는 연철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음을 드러내 주는 이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6)~(12)의 예를 통해서 볼 때, 체언의 말음에 따라 중철과 연철의 비중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음을 보여 준다. 말음이 ㄱ, ㄴ, ㄹ, ㅂ인 경우처럼 중철 표기가 우세한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ㅁ, ㅅ의 경우처럼 연철 표기가 우세한 쪽이 있고, ㄷ의 경우처럼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운 곳도 있다. ㄷ말음의 경우는 ‘벋’[友]이라는 하나의 낱말에 국한되다시피 되어 있고 연철과 중철 표기의 분포에서도 ‘벋’은 거의 같이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ㅁ말음의 경우를 보자. 여기서는 연철의 빈도가 높게 나타났다. 그 배경에는 명사형 어미 ‘-옴/움’이 있었던 것이다. 용언의 명사형 다음에 모음의 조사가 올 때는 대부분 연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ㅁ말음의 경우에는 연철 표기가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말음 ㅂ의 경우에는 ‘집’[家]과 ‘겨집’[女]이라는 낱말에 집중되어 있다. ‘집’의 경우에는 중철과 연철의 비율이 거의 대등하나 ‘겨집’의 경우에는 중철 표기가 단연 앞선다. 끝으로 말음 ㅅ의 경우는 지금까지와는 그 사정이 판이하다. 여기서는 중철 표기가 단 2개만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마치 착오에 의한 돌출로 생각될 정도로 ㅅ말음에서 중철 표기는 불모지나 다름없어 보인다. 중철 표기로 ‘것시’와 ‘것’만이 등장하는데 ‘것’의 경우에도 연철 표기가 훨씬 많다. 그리고 ㅅ 말음의 예로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낱말이 의존 명사 ‘것’인데, 그 빈번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중철로 나타나는 예는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연철로만 표기되고 있어 중철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 밖에 중철 표기는 파생부사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13) 서늘리(2ㄱ), 지극기(3ㄴ), 급피(20ㄱ)

cf. 머리(遠, 14ㄴ-15ㄱ), 브즈러니(20ㄴ)

그리고 관형사형 어미 ‘-ㄴ, -ㄹ’ 다음에 의존 명사 ‘이’가 연결되는 경우에도 중철 표기가 나타나지만 연철 표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14) 잇 니(6ㄱ), 어딘 니(10ㄱ), 신 니(14ㄴ), 어딘 니란(14ㄴ), 내 닌(19ㄱ),  니(25ㄱ)

cf. 더 리(4ㄱ), 소박 리(6ㄱ),  니도(7ㄴ), 친 니 머 니(9ㄴ, 17ㄴ), 어디디 아니 니란(14ㄴ), 고디식 니 유신 니(15ㄱ),  리도(25ㄱ), 지 리도(25ㄱ), 시 리(25ㄱ), 가난 니(25ㄴ), 되 리(25ㄴ), 가난 니 가며 니(27ㄴ), 가난 (27ㄴ), 가며 니(28ㄱ),  니(29ㄴ)

유기음을 말음으로 갖고 있는 체언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될 때도 연철과 함께 중철 표기가 나타난다. 이 경우에는 용언 어간에 어미가 연결될 때도 중철 표기가 등장한다. 이때의 중철 표기는 유기음 자체를 두 번 반복해서 표기할 수는 없으므로 받침의 위치에는 8종성 중의 자음으로 교체하여 적고 있다.

(15) 받(22ㄴ, 24ㄱ), 받(23ㄴ), 갑포려(2ㄱ), 티(2ㄱ), 니(3ㄴ, 12ㄴ, 18ㄴ, 19ㄱ), 갑리오(17ㄱ), 여(22ㄱ)

cf. 바(12ㄴ, 24ㄱ), 무틔(29ㄴ), 니(1ㄴ), 티(5ㄴ), 가포미라(30ㄱ)

중철의 범주에 포함되는 표기로 다음의 예를 더 들 수 있다.

(16) 앗(弟, 4ㄱ), 빗(飾, 22ㄱ)

cf. 아(4ㄱ, 8ㄱ), 앗의(4ㄴ)

중철 표기의 예라 할 수 있는 ‘앗’는 좀 특이한 예에 속한다. 이 문헌과 같은 시대인 ≪이륜행실도≫에서도 볼 수 있는 예이다. 원래 ‘앗’의 명사 단독형은 중세 국어에서 ‘아’[弟]였다. 중세 국어에서 명사의 끝음절이 ‘/’인 ‘아’[弟], ‘여’[狐] 등은 휴지(休止)나 자음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에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으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는 명사의 형태가 각각 ‘’ ‘’으로 교체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에 조사 ‘-이, -, -,’ 등을 연결하면 각각 ‘이, , ,’ 등의 분철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 이들은 연철되어 ‘아, 아, 아’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16)에서도 ‘아’의 연철 형태인 ‘아’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이들 연철 형태는 다시 중철로 이어져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 중철의 모습은 ㅿ을 이중으로 적은 ‘’ ‘’과 같은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되면, 8종성법에 따라 종성으로 쓰일 수 없는 ㅿ이 받침의 자리에 오게 되어 8종성법의 제한을 어기는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ㅿ말음을 8종성 중의 ㅅ으로 교체하여 표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즉 ‘’ ‘’을 ‘앗’ ‘앗’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5세기 국어에 ‘이’이던 것이 16세기의 중철 표기로는 ‘앗’가 된 것이다. 한편 15세기의 분철 표기인 ‘의’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 의도로 보이는 ‘앗의’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문헌에는 ‘아’ ‘앗이’ ‘앗’의 세 가지 표기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 밖에 동사의 활용형 ‘빗’도 위와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문헌에 분철 표기는 없는가? 같은 시대 문헌인 ≪이륜행실도≫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일반적인 표기에서 중철과 연철 표기만 나타날 뿐, 분철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교수본≪정속 언해≫에는 분철이 등장하고 있다. 중철, 연철에는 미치지 못하나 분철은 분명하게 그 존재를 보여 주고 있다. 전체의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17) 긔의(氣脈, 4ㄱ), 사의(7ㄴ), 금을(金, 8ㄴ), 사애(10ㄱ), 밥을(10ㄱ), 깁을(絹, 10ㄱ), 식을(10ㄱ), 족을(族, 12ㄴ), 을(19ㄱ), 쥬역에(周易, 20ㄴ, 30ㄱ), 음덕으로(28ㄱ), 사름이(29ㄴ)

분철의 예로 든 낱말의 절반 이상이 이미 앞에서 보인 중철과 연철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사/사름’의 경우는 전체를 통해 수십 번 등장하는 낱말이다. 그 빈번한 사용은 모두 중철과 연철로 일관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17)에서 보듯이 세 번이나 분철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철 시대의 예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종성에서의 ㅅ과 ㄷ은 혼기(混記)함이 없이 잘 구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훈민정음 때의 질서가 이 문헌에서도 잘 지켜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意]을 ‘’으로 적거나 ‘옷’[衣]을 ‘옫’으로 적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예가 한 군데서 나타나고 있다.

(18) 벋디란 거슨 그 덕글 벗 삼니(友也者 友其德也)(14ㄱ)

위의 예문을 보면 한 문장 안에서 ‘벋’[友]을 ‘벗’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연한 질서를 허무는 표기임은 분명하나 이것이 착오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혼기의 발단을 보이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직 같은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종성의 ㄷ, ㅅ이 혼기되는 현상은 잘 볼 수 없다.

3. 모음 ‘ㆍ’의 혼란

‘ㆍ’ 모음의 소실(消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1단계는 제2음절 이하에서의 소실이고 2단계는 제1음절에서의 소실이다. 1단계 소실은 비어두(非語頭) 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일어난 것인데 이때는 ‘ㆍ’ 모음이 주로 ㅡ 모음으로 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1단계 ‘ㆍ’ 모음의 동요는 15세기에 이미 보이기 시작해서 16세기 후반에는 ‘ㆍ〉ㅡ’의 변화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2단계 ‘ㆍ’ 모음 소실은 1단계에서 제외되었던 어두(語頭) 음절의 ‘ㆍ’ 모음이 주로 ㅏ 모음으로 변한 것이다. 어두 음절에서 ‘ㆍ’ 모음이 동요하는 현상은 17세기 초에 일부 보이나 대체로는 18세기 후반에 와서 ‘ㆍ〉ㅏ’가 완성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정속 언해≫의 실태는 어떠한가? 위에서 소개한 결론에 의하면, 2단계인 어두에서의 ‘ㆍ’ 모음의 변화는 시기적으로 ≪정속 언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실제로 어두에서 ‘ㆍ’ 모음이 소실되었다는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5세기 국어에서 어두에 ‘ㆍ’ 모음을 갖고 있던 낱말이 이 문헌에 와서 ㅗ 모음으로 바뀐 사례가 발견된다.

(19) ㄱ. 논회여(9ㄴ), 논화(16ㄱ, 29ㄴ), cf. 호아(석보상절 19:6ㄱ)

ㄴ. 고(27ㄴ), cf. 올(법화경 언해 2:236ㄴ)

ㄷ. 호온자(13ㄴ), cf. 오(능엄경 언해 7:10ㄴ)

ㄹ. 도외면(6ㄴ), 도의여(8ㄱ), 도(18ㄴ), 되 리(25ㄴ), cf. 외리라(29ㄴ)

위의 4가지 경우는 어두에 쓰였던 ‘ㆍ’ 모음이 모두 ㅗ 모음으로 바뀐 형태만을 보여 주고 있으나 (19)ㄹ에서만은 ‘ㆍ’를 유지하고 있는 15세기의 형태가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19)의 사례만을 가지고 ‘ㆍ’가 어두에서 소실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것도 어두에서는 ‘ㆍ〉ㅏ’의 변화가 보편적인 현상인데 이에 해당하는 예는 하나도 없고 특이하게 ‘ㆍ〉ㅗ’의 변화만을 보여 주고 있는 상태에서 ‘ㆍ’ 모음의 소실을 언급하기는 어렵다. ‘ㆍ〉ㅗ’의 변화는 ‘ㆍ’ 다음의 ㅗ 모음에 동화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비어두 음절에서의 ‘ㆍ’ 모음은 ㅡ 모음으로의 변화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15세기에 제2음절 이하에서 ‘ㆍ’ 모음을 가지고 있던 낱말 중에 ‘ㆍ〉ㅡ’의 변화를 보여 주는 낱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낱말에서 ‘ㆍ’ 모음 유지형과 ㅡ 모음으로의 교체형이 대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일부에 국한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그것도 ‘사’[人]이라는 낱말에 집중되고 있다. 여기서 제2음절 이하에서의 ‘ㆍ’와 ㅡ의 혼란이라 하더라도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붙는 문법 형태에 개입된 매개 모음 ‘-/으-’는 제외한다. 한 예로 ‘녀름지리’(21ㄴ)와 ‘녀름지리’(21ㄴ)와 같은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20) ㄱ. 사(20ㄱ), 사미(2ㄴ, 4ㄱ, 8ㄱ, 11ㄱ, 15ㄴ, 15ㄴ, 22ㄱ, 26ㄴ), 사(4ㄱ), 사(22ㄱ), 사게(25ㄴ), 사(27ㄴ), 사(4ㄴ), 사미(6ㄱ, 10ㄱ, 11ㄱ, 17ㄴ, 20ㄱ, 27ㄴ, 28ㄱ), 사(9ㄴ, 23ㄱ), 사(22ㄱ), 사미라(28ㄱ), 사의(7ㄴ), 사애(10ㄱ)

cf. 사름(14ㄴ, 14ㄴ, 14ㄴ, 14ㄴ, 14ㄴ, 14ㄴ, 29ㄴ), 사름믜(1ㄱ, 2ㄴ, 5ㄴ, 16ㄴ, 29ㄱ, 29ㄱ, 29ㄴ, 29ㄴ, 29ㄴ, 29ㄴ, 29ㄴ), 사름미(4ㄴ, 23ㄴ, 26ㄴ, 27ㄴ, 28ㄴ, 29ㄱ, 29ㄱ, 29ㄱ, 29ㄴ, 29ㄴ), 사름믜게(4ㄴ, 17ㄴ), 사름미라(7ㄴ), 사름(14ㄴ, 30ㄱ), 사름믈(16ㄱ, 28ㄱ), 사름믄(28ㄱ)

ㄴ. 아와(8ㄴ), 이웃히(13ㄱ), 이웃히니(27ㄴ)

cf. 실들히(2ㄴ), 쳡들흔(6ㄱ), 손들(6ㄴ), 일들흘(8ㄱ), 들히(8ㄱ), 아들희게(8ㄴ), 들(15ㄱ), 손들히(28ㄱ)

ㄷ. 모(2ㄴ), 모라(8ㄴ), 모니(13ㄱ), 모(17ㄴ)

cf. 모로놋(6ㄱ), 모롤(28ㄱ)

위에서 보다시피 제2음절 이하에서 ‘ㆍ’가 동요를 일으킨 예는 ‘사/사름’과 복수 접미사 ‘-ㅎ/들ㅎ’ 그리고 동사 ‘모-/모로-’에 한한다. 모두 15세기에는 비어두에서 ‘ㆍ’ 모음으로만 쓰이던 말이 이때에 와서 ‘ㆍ’가 ㅡ나 ㅗ로 교체되는 동요 현상이 부쩍 늘게 되었다. 이 밖에 ‘니샤’(1ㄴ)와 ‘니르샤’(2ㄴ)가 혼용되고 있으나 이는 최초 한글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부터 쌍형으로 공존하였기에 ‘ㆍ〉ㅡ’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문법 범주는 서로 다르지만 양자 모두 ‘〉듸’의 변화를 보이고 있어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

(21) ㄱ. 닐오(3ㄴ, 4ㄱ, 6ㄴ, 7ㄴ, 8ㄴ, 13ㄱ-ㄴ, 15ㄱ, 19ㄱ, 30ㄱ), 닐우(8ㄴ, 10ㄱ, 11ㄴ, 20ㄱ, 20ㄴ, 29ㄴ)

cf. 닐우듸(4ㄴ, 27ㄴ, 28ㄱ)

ㄴ.  셔(3ㄱ)  (4ㄱ)

cf. 난 듸(3ㄱ) 긴 듸(14ㄴ) 됴 듸(18ㄱ) 가 듸(18ㄴ) 무들 듸(19ㄴ)

(21)ㄱ은 설명법 어미로서 15세기에는 ‘-’로만 나타났는데 이때에 와서 ‘-듸’로 교체된 형태가 등장하면서 두 형태가 함께 쓰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형태는 동일해도 문법 범주는 서로 다른, (21)ㄴ은 의존 명사 ‘’[處]인데 이것 역시 ‘듸’로 교체된 형태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어두에서 ‘ㆍ’ 모음 소실 이후로 설명법 어미 ‘-’는 ‘-되’로, 의존 명사 ‘’는 ‘듸’를 거쳐 ‘데’로 각각 변천 과정을 경험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는 어미 ‘-’가 ‘-되’로 되지 않고 ‘ㆍ〉ㅡ’에 따라 ‘-듸’로 변함으로써 의존 명사 ‘’가 ‘듸’로 변한 것과 결과적으로 같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미 ‘-’가 ‘-듸’의 형태로 교체되어 사용된 경우는 화법동사 ‘닐우듸’에 한하고 있음이 또한 특이한 점이다. 이 문헌에 ‘니샤/니르샤’가 무려 10회 이상 등장함에도 여기에는 ‘-〉듸’의 교체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동사에서도 어미 ‘-〉듸’의 교체는 볼 수 없다.

4. ㅎ종성의 소실

현대 국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ㅎ종성 체언이란 형태가 15세기 국어에 있다. 이들 체언은 ㅎ종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뒤에 조사가 연결되면 그 조사에 ㅎ이 첨가된다. 단, 휴지(休止)나 사이시옷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ㅎ종성 체언에는 비록 체언은 아니지만 복수 접미사 ‘-ㅎ’도 ㅎ말음을 갖고 있어 이에 포함해서 다룬다. ㅎ종성은 이미 15세기에 일부 낱말에서 탈락형이 등장하여 유지형과 함께 쓰인 일이 있으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은 16세기에도 ㅎ종성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 ≪정속 언해≫에도 ㅎ종성 체언의 ㅎ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15세기에 이미 ㅎ탈락을 보였던 ‘하ㅎ’에서 ㅎ탈락형이 ㅎ유지형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22) 하와(1ㄴ), 하래(4ㄱ), 하리(20ㄴ, 27ㄴ), 하와 로(5ㄴ), 아와(8ㄴ)

cf. 하히(2ㄴ, 10ㄱ, 27ㄴ), 하희(4ㄱ), 하해(26ㄱ), (8ㄱ), 쳡들흔(6ㄱ), 이웃히니(27ㄴ), 일들흘(8ㄱ), 들히(8ㄱ), 손들히(28ㄱ), 안히(5ㄴ), 들헤(12ㄴ), (27ㄴ), 한나해(14ㄴ), 님자(22ㄴ), 나라히(19ㄱ), 우흐로(23ㄴ), 모밀히(28ㄱ)

위에서 든 ㅎ탈락의 예 중에 ‘하와 로’는 ‘하’과 ‘’ 모두 ㅎ종성 체언인데도 둘 다 ㅎ이 탈락된 표기를 하고 있다. ㅎ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하와 로’는 ‘하콰 로’와 같이 표기되었을 것이다.

5. 자음 동화의 표기

자음이 연접될 때 일어나는 동화 현상은 일반적으로 표기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몇 군데에서 자음 동화가 일어난 대로 표기한 예들이 발견된다.

(23) ㄱ. 니기를 브즈러니 면(21ㄴ),

cf. 거즛 괴이 말리 만히 나니며(20ㄱ)

ㄴ. 벼슬 로픈 지븨셔(8ㄴ), cf. 손들히 노픈 급뎨 호미라(28ㄱ)

ㄷ. 쳐셕긔 입힐호모로 불로여(因妻子脣吻而至忿爭)(13ㄱ)

아 불로호매(一朝之忿)(26ㄱ)

불로의 니러나미(忿爭之起)(26ㄱ-ㄴ)

즉재 불로 내며(卽生忿恨)(26ㄴ)

cf. 忿 노 분(신증 유합 하:35ㄱ), 怒 로 로(신증 유합 하:3ㄱ)

ㄹ. 실들히 돕디 아니여(神明所不祐)(2ㄴ)

cf. 靈 : 신(神靈) (훈몽자회, 중:17ㄱ)

ㅁ. 어버이 빗 내요미 다 글 호모로브터 터 잠 거시니(以顯父母 皆由學以基之也)(8ㄱ)

(23)ㄱ에 나타난 ‘니-’는 ‘니-’의 ㄷ받침이 ㄴ 앞에서 ㄴ으로 동화된 것을 표기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화 작용을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니-’의 예도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니-’의 표기는 이미 15세기 문헌에서 ‘니-’와 함께 혼용되었고, 이와 같이 15세기에 혼용된 예로 ‘걷너-’와 ‘건너-’가 또 있다. (23)ㄴ의 경우는 ‘노픈’[高]의 두음 ㄴ이 ‘벼슬’의 말음 ㄹ에 동화되어 ㄹ로 소리 나는 것을 그대로 나타낸 표기가 ‘벼슬 로픈’이다. (23)ㄷ의 ‘불로’도 ‘ㄴ〉ㄹ’의 동화 작용을 반영한 표기이다. ≪정속 언해≫의 언해문에는 한자어라도 한자를 전연 병기(倂記)하지 않고 한글로만 기록하고 있는데 ‘불로’는 ‘忿怒’의 표기로 보인다. ≪신증 유합≫(1576)에 의하면 ‘忿怒’의 독음은 ‘분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헌에 ‘분로’로 표기된 곳은 하나도 없고, 모두 ‘ㄴ〉ㄹ’의 동화 현상을 반영한 ‘불로’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불로’도 앞의 ‘벼슬 노픈’에서와 같이 ㄹ의 영향으로 ㄴ이 ㄹ로 동화된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지만 ‘벼슬 로픈’ 의 동화 현상은 순행동화이고 ‘불로’에 나타난 동화는 역행동화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3)ㄹ의 ‘실’도 ‘불로’에서와 마찬가지다. 한자어 ‘神靈’을 ≪훈몽자회≫(1527)에 나타난 대로 ‘신’으로 적지 않고, ㄴ이 바로 뒤의 ㄹ에 동화되어 ‘ㄴ〉ㄹ’로 된 것을 그대로 반영하여 ‘실’으로 표기한 것이다. 끝으로 (23)ㅁ의 ‘잠’도 ‘잡’의 동화 작용에 의한 표기이다. ㅂ이 ㄴ 앞에서 ㅁ으로 비음화한 현상을 이처럼 표기에 나타낸 예는 좀처럼 볼 수 없는데 여기서 드물게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홍윤표 교수는 ‘삼’의 오기(誤記)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주003)

홍윤표. ≪정속언해≫ 해제(1984) 7쪽. 홍문각.

6. 그 밖의 혼용 현상

이 교수본 ≪정속 언해≫에는 같은 낱말이면서도 어형이 서로 다른 것이 공존하는 경우들을 제법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신구(新舊)형이 함께 쓰임으로써 그렇게 된 것도 있고, 더러는 음운 규칙의 수의적인 적용에 따라 이표기(異表記)가 형성된 것도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예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로, 신구형이 공존하는 예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24) ㄱ.  집븨셔 칼 가지고 사화(4ㄱ-ㄴ), cf. 갈  갓고로 자밧고(16ㄱ)

ㄴ. 어엿비 녀겨 리 져그니라(11ㄱ)

지븨 편안히 이쇼 됴히 녀기면(16ㄱ)

cf. 새 아므런 히 너겨 호(11ㄱ)

어엿비 너긴  가져셔(27ㄴ)

어두 자음의 유기음화가 낱말에 따라서는 15세기에 일어난 것도 있고 16세기에 들어서 경험하는 낱말도 있다. (24)ㄱ을 보면 유기음화한 ‘칼’이 등장하는가 하면 유기음화 이전의 ‘갈’도 함께 쓰이고 있다. 유기음화한 신형과 함께 유기음화 이전의 구형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하여 동일한 낱말이 한 문헌 안에서 상이한 표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기음화에 관련된 낱말을 이 문헌에서 더 찾아보면 ‘고’[鼻](2ㄴ)가 유기음화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고, 15세기의 ‘닷’[由]은 2회 등장하는데 모두 유기음화한 ‘탓’(21ㄴ, 22ㄱ)으로만 나타난다. 다음으로 (24)ㄴ의 동사 ‘녀기-’도 15세기에는 ‘너기-’로만 등장한다. ‘너기-’는 16세기 이후 선행 음절의 모음 ə에 반모음 j가 첨가되어 이중 모음 jə가 됨으로써 ‘녀기-’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녀기-’로 쓰이다가 두음 규칙에 따라 현대 국어의 ‘여기-’가 되었다. 그런데 (24)ㄴ에는 j가 첨가된 신형 ‘녀기-’도 쓰였지만 j 첨가 이전의 ‘너기-’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어 신구 공존으로 인한 혼용이 드러나고 있다. 이 문헌에는 신형 ‘녀기-’보다 구형인 ‘너기-’가 더 우세한 편이다.

둘째는 동일한 낱말임에도 음운 규칙을 적용하고 안 하고에 따라 상이한 어형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25) ㄱ. 올 훼 나랏 사 칠 거시니(4ㄴ)

남진겨집비 이신 훼 어버 식기 이시리니(5ㄴ)

처믜 면 디난 훼  환니라(26ㄴ)

cf. 세  후에 어버 품물 나니(1ㄴ)

지블 업게  후에 말며(8ㄴ)

ㄴ. 어버이 편안티 아니면 손니 사오내 도(18ㄴ)

cf. 오 사오나이 리도 겨시며(25ㄱ)

ㄷ. 버들 삼가아 사괴라(13ㄴ),

 예 어든 거시 수이 라아(25ㄱ)

cf. 이 버들 삼가 사괼 일리라(14ㄴ)

모 삼가 존졀야  부모 효양호미(22ㄱ)

ㄹ. 제 짓 울흘(4ㄴ)

 짓 안히(5ㄴ)

 짓 홀 이리(25ㄱ)

cf. 집 아븨게(6ㄴ)

ㅁ. 에 서르 에엿비 너기며(4ㄱ)

cf. 어믜녁 아란 어엿비 녀겨(11ㄱ)

어엿비 너긴  가져셔(27ㄴ)

위의 (25)ㄱ에서는 ‘후에’를 축약하여 ‘훼’로 나타내기도 하고 축약하지 않은 ‘후에’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축약을 적용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함에 따라 ‘훼’와 ‘후에’로 달라진 것이다. 그 다음에 있는 (25)ㄴ의 ‘사오내’도 ‘훼’와 똑같은 경우이다. ‘사오납-’의 파생 부사인 ‘사오나이’의 축약형이 ‘사오내’이기 때문이다. 축약하면 ‘사오내’의 형태가 되고 축약하지 않으면 ‘사오나이’인 것이다. 축약 여부에 따라 ‘사오내’가 되었다가 ‘사오나이’로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사오내’의 형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어형이다. (25)ㄷ은 용언의 어간 말음이 ㅏ/ㅓ 모음일 경우에 연결 어미 ‘-아/어’가 연결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때는 연결 어미 ‘-아/어’가 생략된다. 그럼에도 (25)ㄷ의 용언 ‘삼가-’와 ‘라-’는 어간 말음이 ㅏ 모음임에도 그 뒤에 연결 어미 ‘-아’를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연결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어미 ‘-아’가 생략된 형태도 함께 사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동일한 용언의 활용형이 ‘삼가아’와 ‘삼가’의 두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사이ㅅ은 ㅂ 받침 명사에 붙어 쓰이기도 하였는데 그 대상은 ‘집’[家]이라는 명사가 유일한 것이었다. ‘집’ 다음에 명사가 연결되어 사이ㅅ이 붙으면 ‘짒’이 되어야겠지만 ‘짒’으로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고 ㅂ이 탈락된 ‘짓’으로 15세기부터 꾸준히 쓰이고 있다. 이 문헌에서도 ‘짓’은 (25)ㄹ에서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집 아븨게’와 같이 사이ㅅ으로 인한 ㅂ탈락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어 ‘집’과 ‘짓’의 서로 다른 형태가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25)ㅁ의 ‘어엿비’는 15세기부터 사용되던 형태이다. 그러다가 둘째 음절의 모음 jə에 영향을 입어 첫 음절의 모음 ə가 əj로 동화됨으로 인해 ‘에엿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어엿비’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 (25)에서 논의한 것 중에 ‘훼’와 ‘후에’, ‘짓’과 ‘집’, ‘에엿비’와 ‘어엿비’ 등에서 전자의 변이형들은 이 교수본 ≪정속언해≫와 같은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예들이다.

셋째는 음운 현상과는 별 관계 없어 보이는 이형(異形)들이 이 문헌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경우들이다.

(26) ㄱ. 질박니런 녀름지이고 혬 잘리런 이고 교 잇니런 을 욜디니(8ㄱ)

그위런 여위우고 아름뎌런 지우미(16ㄱ)

cf. 겨지븨 녁 새 아므런 히 너겨 호 어믜 녁 아란 어엿비 너겨(11ㄱ)

ㄴ. 시혹 보로 서르 섯거셔 사화 그위며(13ㄱ)

내애 그위여 옥개 드러 셰간 배아고(26ㄴ)

cf. 술지븨 가 노녀 구의 닐와다 믈 후려(22ㄱ)

ㄷ. 셕긔(1ㄴ), 셕글(7ㄴ), 셔기며(8ㄱ), 셔글(8ㄴ), 셕기며(14ㄴ)

쳐셕긔(13ㄱ)

cf. 식기(1ㄴ, 5ㄴ, 29ㄴ), 식긔(2ㄱ, 8ㄴ), 식(6ㄴ), 시글(9ㄴ), 쳐식긔(8ㄴ), 쳐식 (22ㄱ), 쳐식글(23ㄴ)

ㄹ. 곡셔글(21ㄴ)

cf. 곡식글(23ㄴ, 27ㄴ), 곡식로(27ㄴ)

ㅁ. 굴애 업드러 잇니(顚擠溝壑者)(29ㄴ)

cf. 굴에 구으럼 죽니(轉死於溝壑)(22ㄱ)

ㅂ. 올 슈귀(今年之苦)(23ㄴ)

어우리의 슈구 혜여(亦當佃之勤勞)(23ㄴ)

  슈구여 뷔욘 벼로(終歲之勤勞刈穫之稻禾)(23ㄴ)

cf. 됴 이려 슈고로온 이려(甘苦)(6ㄱ)

ㅅ. 거쳔여 태웃 벼슬를 이니라(擧於下軍大夫)(6ㄱ)

cf. 내 두로 닐어 쳔거호미(我則揄揚而薦擧之)(29ㄱ)

15세기 국어에서 보조사로 쓰인 ‘-()란’이 (26)ㄱ에서는 모음이 교체된 ‘-(으)런’으로 나타난다. ‘-런’은 15세기 때 ≪두시 언해≫에 한 번 나올 정도로 드물게 쓰이는 것이나 16세기 초 문헌에선 제법 등장하는 형태인데 이 문헌에서도 (26)ㄱ에서와 같이 쓰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의 ‘-()란’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 (26)ㄴ의 ‘그위’은 송사(訟事)를 뜻하는 말인데, 이와는 좀 다른 ‘구의’의 형태가 같은 문헌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위’와 ‘구의’는 ㅡ모음과 ㅜ모음 사이에 음운도치가 일어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6)ㄷ,ㄹ에 나오는 ‘셕’과 ‘곡셕’은 ‘식’과 ‘곡식’의 변이형들이다. 이 변이형들이 어떻게 해서 쓰이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셕, 곡셕’은 짐작건대 경상도 지역의 방언형이 간섭하게 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셕’은 위에 나타난 대로 ‘식’과 거의 대등하게 쓰이고 있다. (26)ㅁ은 15세기에 쓰인 ‘굴’형이 이 문헌에 존속하면서 한 쪽에선 ‘굴’의 변이형이 등장하였다. ㅏ ㅓ의 대립 모음 사이에 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예가 (26)ㅂ의 ‘슈구’와 ‘슈고’이다. 이것 역시 ㅗ와 ㅜ의 대립 모음 사이에 교체가 일어난 경우이다. 이는 15세기에 ‘受苦’로 표기되다가 주004)

15세기에도 한글로 ‘슈고’라고 표기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슬픈  머거셔 슈고로이 뇨 니노라”(含悽話苦辛)(초간 두시언해, 20:27ㄴ)
16세기에 한글 표기가 되면서 ‘슈고’와 ‘슈구’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에선 ‘슈구’형이 우세하다. (26)ㅅ의 예는 좀 특이하다. 한자어에서 나타난 음절도치의 예이다. 옛글에서도 우리에게 익어 있는 낱말은 ‘쳔거’(薦擧)이다. 그런데 ‘쳔거’와 함께 도치형인 ‘거쳔’(擧薦)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 형태 사이에 뜻이나 용법의 차이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7. 삽입 모음 ‘-오/우-’의 동요

근대 국어나 현대 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중세 국어의 특징으로서 어말 어미 앞에 첨가되는 삽입 모음 ‘-오/우-’가 있다. 문법적으로는 의도법의 선어말 어미라고 하는데 그 기능은 화자의 강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삽입 모음이 관형사형 어미와 결합하면 그 뒤에 오는 낱말이 관형사형으로 쓰인 동사의 목적어임을 나타내고, 그 밖의 어미와 결합하면 1인칭 주어에 호응됨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어말 어미 중에는 이 삽입 모음을 반드시 그 앞에 수반하는 어미가 있고, 때로는 수반하기도 하고 수반하지 않기도 하는 어미가 있다. 어미 중에서 명사형 어미 ‘-ㅁ’, 설명법 어미 ‘-’ 의도법의 어미 ‘-려’ 등은 언제나 삽입모음을 그 앞에 수반하고 있으며 이 밖의 어미들은 삽입 모음의 첨가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삽입 모음은 근대 국어에까지 그 자취가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동요의 시작은 이미 15세기부터였다. 그러면 16세기 초의 이 문헌에는 삽입모음의 실태가 어떤가 하는 것을 삽입 모음 첨가가 필수적인 설명법 어미 ‘-’와 명사형 어미 ‘-ㅁ’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체적으로는 삽입 모음의 첨가에 큰 변동은 없어 보인다. 다만 몇 군데에서 삽입 모음이 삭제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전체를 통해 설명법 어미에서는 한 곳이지만 명사형 어미에서는 열 곳에서 삽입 모음이 첨가되지 않고 있다.

(27) ㄱ. 그믈 앗 아니 지리도 겨시며(25ㄱ)

ㄴ. 뎨예 올면 어버 깃거밀(4ㄴ)

갓 치모로 좃디 아니가 샤(11ㄴ)

다 귀신들 아여 손 이바 간댄 거시라(19ㄴ)

사오나온 예도 주그믈 면니(21ㄴ)

사미 어버 치 좃디 아니고(22ㄱ)

쳐식 치 도라보디 아니여(22ㄱ)

조려  몸 가죨 근본닐(24ㄱ)

노호 이를 (25ㄴ)

노 몰 버거 노라(25ㄴ)

의 주우리믈 구호려 코(27ㄴ)

cf. 식 손들 춈(6ㄴ)

엇뎨 처엄믜 져근덛 몸만 리오(26ㄴ)

위에서 볼 때 설명법 어미에서보다는 명사형 어미에서 동요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7)ㄱ,ㄴ에 쓰인 명사형 어미에 삽입 모음이 첨가되었다면 다음의 오른쪽에 있는 어형이 되었을 것이다.

(28) ㄱ. 앗 → 앗

ㄴ. 깃거밀 → 깃거호밀

치모로 → 쵸모로

이바 → 이바도

주그믈 → 주구믈

치 → 쵸

치 → 쵸

 → 

 → 몸

몰 → 모몰

주우리믈 → 주우류믈

8. 구결(口訣)

≪정속언해≫에는 한문 원문의 구절마다 차자 표기(借字表記)로 된 구결을 달아놓았다. 차자 표기라 함은 한문 구절마다 기입해 넣은 우리말의 토(吐), 즉 구결(입겾)을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한자의 음(音)과 석(釋)을 차용해다가 표기하던 방식이다. 한 예로 ‘爲古’로 표기된 구결이 있는데, 이는 우리말의 ‘고’를 표기한 것이다. 그것은 ‘爲’를 이 한자의 석(釋)으로 읽어 ‘’가 된 것이고, ‘古’는 이 한자의 음(音)으로 읽어 ‘고’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爲’는 석독자(釋讀字)로 차용된 한자이고 ‘古’는 음독자(音讀字)로 차용된 한자이다. 이 문헌에서는 구결로 쓰인 한자를 모두 정자(正字)로 표기하였지만 과거 한글 창제 이전의 문헌에 기입된 구결은 모두 약체자(略體字)로 표기하였다. ‘爲古’를 과거의 약체자로 쓰면 ‘’와 같이 표기하였다. 그러나 이 차자 방식은 한글 창제 이후로는 한글로 구결을 다는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선 이 차자 표기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한글 문헌에서도 차자 표기로 된 구결을 달고 있는 문헌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문헌으로 ≪여씨향약 언해≫(1518), ≪정속 언해≫, ≪경민편≫(151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문헌에는 한문의 구절마다 차자 표기의 구결이 달려 있다. 이제 ≪정속 언해≫에 나타난 구결의 차자 표기를 제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29) 古 : 고/인고 隱 : 은/는 巨伊爲時尼 : 게 시니 尼 : 니/이니

尼羅 :니라/이니라 羅 : 라/이라 羅爲古 : 라 고 羅沙 : 라/이라

奴 : 로/으로 奴隱 : 론/로는 奴多 : 로다/이로다 奴代 : 로/이로

里五 : 리오/이리오 里奴多 : 리로다 面 : 면/이면 里尼 : 리니/이리니

舍叱多 : 셔터 阿 : 아 阿爲時尼 : 아 시니 於乙 : 어늘

於尼臥 : 어니와 厓 : 에 於時等 : 어시든 厓隱 : 에는

厓沙 : 에 余伊 : 예 五 : 오/이오 臥/果 : 와/과

乙 : 을/를 乙奴 : 으로 乙可爲舍 : ㄹ 샤 矣 : 의

亦 : 이 伊 : 이 伊羅 : 이라 伊羅豆 : 이라도

伊溫 : 이온 伊隱大 : 인대 伊於等 : 이어든 伊於時等: 이어시든

伊舍豆 : 이샤도 伊那 : 이나 伊面 : 이면 伊㫆 : 이며

伊里羅 : 이리라 伊尼 : 이니 伊羅爲時古 : 이라 시고

伊羅爲古 : 이라 고 伊羅爲尼 : 이라 니 伊羅爲豆多 : 이라 도다

伊羅爲時尼羅 : 이라 시니라 伊羅爲時多 : 이라 시다 伊羅爲多 : 이라 다

伊五 : 이오 伊於尼臥 : 이어니와 伊五隱 : 이온 伊舍多爲尼 : 이샷다 니

底爲時尼 : 져 시니 爲時古 : 시고 爲古 : 고 爲尼 : 니 爲時尼 : 시니

爲㫆 : 며 爲時旀 : 시며 爲面 : 면 爲也 : 야

爲尼羅 : 니라 爲里尼: 리니 爲里羅 : 리라 爲時飛尼: 시나니

爲飛尼 : 나니 爲舍 : 샤 爲隱地 : 디 乎尼 : 호니

乎里尼 : 호리니 乎大 : 호 乎隱代 : 혼대 乎未 : 호미

위에서 석독자로 쓰인 한자는 爲[], 飛[나]의 두 자뿐이고 그 외에는 모두 음독자로 쓰였다.

그리고 이 문헌에는 언해문에 방점이 일일이 붙어 있다. 그러나 영인본을 가지고는 방점의 실태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제한이 있어 방점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9. 어휘

이원주 교수본 ≪정속 언해≫에는 현재까지 간행된 옛말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어휘가 제법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런 어휘를 제시하려 한다. 그 의미도 함께 제시하려 하지만 이들 어휘에 대한 다른 용례가 없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서 한문 원문과 문맥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한 그 의미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헌의 언해문에는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생소한 한자어도 그대로 한글로만 표기함으로써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문헌 20ㄱ에 ‘식니’라는 낱말이 등장하지만 옛말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고 하여 의미 파악이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한문 원문과 중간본을 바탕으로 검토한 결과 ‘識理’를 표기한 낱말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15ㄴ에 ‘간쇄’라는 낱말이 나타나는데 이 낱말도 ‘奸邪’의 한글 표기임을 중간본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자어기 많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비록 옛말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더라도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단, 본래의 한자음과 현저히 달라져 있다고 판단되는 한자어는 대상에 넣어 다룰 것이다.

ㄱ. 그치왇-

아미 어딘니 잇거든 그치와다 믜여며(族有善良則摧抑而疾瘧之)(10ㄱ)

cf. 권당이 착고 어딘 일 이신즉 것디러 눌오며 무이 녀겨 보채고(族有善良則摧抑而疾瘧之)(일사본, 16ㄴ)

‘그치왇-’은 ‘그치-’[斷]라는 동사 어간에, 강세 접미사 ‘--’에 기원하는 ‘-왇-’이 연결된 동사이다. 한문 원문에 ‘摧抑’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치왇-’의 뜻은 상대편의 힘을 꺾어서 누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사본〉의 언해문을 보면 ‘摧抑’의 뜻 그대로 번역을 하고 있다

ㄴ. 기리

기리 쟈기 바며(貸穀以輕其息)(23ㄴ)

cf. 그 니식을 젹게 고(貸穀以輕其息)(일사본, 39ㄱ-ㄴ)

여기서 ‘기리’는 한문 원문과 〈일사본〉의 언해문을 통해서 이식(利息)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ㄷ. 날독

바 셰 날독 바돔(收田租)(22ㄱ)

받 셰 바도(收田租)(22ㄴ)

cf. 밧 소츌 거도기(收田租)(일사본, 38ㄴ)

受田租(수전조)를 “바 셰 날독 바돔”으로 번역하여 ‘날독’이란 낱말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주제 설명 중에 쓰인 收田租에 대해서는 “받 셰 바돔”으로 번역하여 ‘날독’이 빠져 있다. 그리고 〈일사본〉에서는 收田租를 두고 번역하기를 “밧 소츌 거도기”라고 하여 역시 ‘날독’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날독’에 특별한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나 ‘날독’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밝혀 둔다.

ㄹ. 납-

 지븨 부히 도외요미 일로 니러나리니 엇디 납디 아니료(一家之泰由此而興矣)(25ㄴ)

cf.  집 편안코 크기 일로븟터 니러나리니 엇디 즐겁디 아니리오(一家之泰由此而興矣)(일사본, 43ㄱ)

그 의미는 한문 원문에 ‘樂’(낙)으로 되어 있는데다 〈일사본〉에서 ‘즐겁디’로 번역하고 있어 이에 근거하여 ‘즐겁-’으로 풀이하였다. 혹시 ‘낙-’[樂]의 오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ㅁ. 녁셔-

뎨 집븨셔 사호고도 밧긔 간 녁셔니라(兄弟䦧于墻 外禦其侮)(3ㄴ)

cf. 형과 아이 담 안셔 화 사오나이 구나 밧그로 그 환을 동심야 막다 야시니(兄弟䦧于墻 外禦其侮)(일사본, 3ㄴ)

‘녁셔-’는 ‘녁’[便]이라는 명사에 동사 ‘셔-’[立]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그 뜻도 ‘한 쪽 편에 서다’란 뜻이 될 것이다. 후대의 것이긴 하지마는 ‘녁셔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녁들다’가 있어 참고가 된다. “뎌를 녁드다, 向他”(역어유해 하:43).

ㅂ. 님신

쇽졀업슨 님신 이바디 말라(遠滛祀)(19ㄱ)

님신 이받노라(迎神)(20ㄴ)

cf. 귀신을 맛노라(迎神)(일사본, 35ㄴ)

〈이 교수본〉에서는 ‘神’을 ‘님신’이라 하였고, 〈일사본〉에서는 ‘귀신’으로 번역하였다. 이로써 ‘님신’은 ‘귀신’과 같은 뜻의 말임을 알 수 있으나 ‘님신’의 ‘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ㅅ. 마되

볘 닉거든 마되 히 여(禾旣熟也 平斛)(23ㄴ)

cf. 나디 임의 니그매 말을 공평히 되야(禾旣熟也 平斛)(일사본, 39ㄴ)

이는 말[斗]과 되[升]의 합성어이다. 합성어가 되면서 ‘말’의 받침 ㄹ이 ㄷ 앞에서 탈락하는 규칙에 따라 ‘말되’가 ‘마되’로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로 ‘날’[日]과 ‘’[月]이 결합하여 된 합성어 ‘나’을 들 수 있다. “나리 길어다”(日月長) (초간 두시 언해 15:23ㄱ)

ㅇ. -

도 무(結會社)(20ㄱ)

도 무(結社)(20ㄴ)

cf. 모히 샤단을 글아(結會社)(일사본, 33ㄴ)

샤단을 자(結社)(일사본, 35ㄴ)

동사 ‘-’은 ‘結’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일사본〉에서 ‘글-’과 ‘-’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은 ‘조직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임이 분명하다.

ㅈ. 브리-

하리 도오시니 됴코 브리 이리 업도다(自天佑之 吉無不利)(20ㄴ)

cf. 하로붓터 돕디라 길야 니티 아님이 업다 도다(自天佑之 吉無不利)(일사본, 34ㄱ)

그 죄 브효만 크니 업스니라(而罪莫大於不孝也)(2ㄴ)

그 어미를 브효디오(不孝其母)(11ㄴ)

‘브리’는 한자어 ‘不利’를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不’은 당시의 음이 ‘블’인데도 한자어에서는 ‘브’로 나타내고 있다.≪이륜행실도≫에서는 ‘不得已’를 ‘브듸이’(21ㄴ)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때는 ‘블’의 ㄹ을 탈락시킨 표기가 맞다. 그러나 ≪정속 언해≫에는 음운적으로 ㄹ탈락이 일어날 경우가 아님에도 ‘브’로 표기한 예로서 ‘브리’ 외에도 ‘브효’(不孝)를 더 들 수 있다.

ㅊ. 빈잔히

사름 손니 오래 빈잔히 도요미(人家子孫 所以長受貧賤者)(30ㄱ)

cf. 사의 집 손이  기리 간난고 쳔기 맛 밧 쟈(人家子孫 所以長受貧賤者)(일사본, 51ㄱ)

한자어 ‘貧賤’의 한글 표기가 ‘빈쳔’이 아니고 ‘빈잔’으로 나타나 있다. 혹시 ‘賤’자를 ‘殘’자로 잘못 보고 ‘빈잔’으로 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ㅋ. 슈반

제 겨집비 슈반 머교(其妻饁之)(5ㄴ)

cf. 제 지어미 가 밥 먹이되(其妻饁之)(일사본, 9ㄱ)

〈이 교수본〉은 5ㄴ의 10행 상단 부분이 분명치 않아 이 구절을 판독하기가 어려웠으나 이 판본과 거의 같은 류탁일(柳鐸一) 교수의 소장본(태학사 영인본)을 참고하여 이 구절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면 ‘슈반’은 무슨 뜻인가? ‘슈반’을 나타내는 한자가 원문에 ‘饁’(엽 : 들점심 먹이다)자로 되어 있는 데다 〈일사본〉에서는 ‘슈반’ 대신 ‘밥’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식사에 해당하는 말로 보인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남편이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데 점심 때가 되므로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해서 남편에게 가져 간 장면이다. 그러므로 ‘슈반’은 들에서 먹는 점심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쇼반’(小盤)하고 관련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ㅌ. 엿굽-

미 가 엿구워(以致情意乖離)(13ㄱ)

cf.  디 의여 벙을며(以致情意乖離)(일사본, 21ㄴ-22ㄱ)

한문 원문에는 ‘엿구워’를 ‘乖離’(괴리)로 나타내고 있고, 일사본에서는 “어긔여 벙을며”로 번역하고 있어 ‘엿구워’의 뜻이 어그러져서 동떨어짐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ㅍ. 지여

지여  집븨셔 칼 가지고 사화 골육글 소박니(至有同室操戈 疎薄骨肉)(4ㄱ~ㄴ)

cf.  집안 장기를 잡고 서 화 골육이 성긔여 사오나오미 잇기예 니리니(至有同室操戈 疎薄骨肉)(일사본, 6ㄴ)

한문 원문의 ‘至’를 ‘지여’로 번역한 데 비해 〈일사본〉에서는 ‘니리니’로 번역하였다. ‘지여’는 한자어 ‘至於’를 말하는데 이는 ‘甚至於’(심지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지여’는 ‘심지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ㅎ. 히

셰가니 그츨 주리 잇곤 히 샤치야 흣이를 혜디 아니려(財産有窮盡而可以僭肆侈靡 不顧其後也哉)(25ㄱ)

cf. 믈과 셰 궁진홈이 잇거든 가히  남히 샤치와 곱기를 지 야 그 후일을 두러보디 아니야(財産有窮盡而可以僭肆侈靡 不顧其後也哉)(일사본, 42ㄱ)

한문 원문의 ‘僭’(참)을 ‘히’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면 ‘히’는 무슨 뜻으로 쓰인 말인가? 이는 〈일사본〉의 번역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일사본〉에는 ‘남히’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현대어의 ‘참람(僭濫)히’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참람히’는 ‘참람하다’의 파생 부사로서,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게’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ㅏ. 도

도 무(結會社)(20ㄱ)

도 무(結社)(20ㄴ)

cf. 모히 샤단을 글아(結會社)(일사본, 33ㄴ)

샤단을 자(結社)(일사본, 35ㄴ)

한문 원문에 나오는 “結會社”와 “結社”를 모두 “도 무”로 언해하고 있는데 여기에 쓰인 동사 ‘-’에 대해서는 앞의 ㅇ항에서 이미 다룬 바 있기에 이제 그 앞의 명사 ‘도’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일사본〉에는 “結會社”와 “結社”를 각각 “모히 샤단을 글아”와 “샤단을 자”로 번역하여 이전 판본의 ‘도’를 모두 ‘샤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나 ‘샤단’ 모두 社(사)를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結社(결사)라 하면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말하므로 ‘도’도 무리들로 이루어진 조직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참고 문헌〉

김동소(2007). ≪한국어의 역사≫. 정림사.

김훈식(1985). 16세기 「이륜행실도」보급의 사회사적 고찰. ≪역사학보≫107집. 역사학회.

서재극(1976). ≪정속언해≫의 어휘. ≪한국어문논총≫(우촌 강복수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형설출판사.

송순미(2000). ≪정속언해≫의 조어법 연구.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 석사 논문.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지성사.

이기문(1978). ≪16세기 국어의 연구≫. 탑출판사.

홍윤표(1984). ≪정속언해≫ 해제. ≪정속언해≫(영인본). 홍문각.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에 대하여

김정수(한양대학교 교수)

이 책은 경기도박물관 소장본(보물 제1053호)과 같이 인출된 책으로, 덕종비(德宗妃)인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가 고승(高僧) 학조(學祖)에게 시식권공(施食勸供)과 일월상행(日月常行)의 법사(法事)를 상교 국역(詳校國譯)시켜 연산군 2년(1496) 5월에 간행한 활자본(인경목활자본)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이고, 유계(有界), 반엽(半葉) 8행(行) 17자(字), 주쌍행(註雙行), 흑구(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의 형태이다.

이 책은 절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여러 가지 의식에서 외울 진언 곧 범어 주문과 한문 불경과 그 언해문 및 협주를 엮은 〈진언권공〉과 〈삼단시식문〉 두 권을 한데 묶은 것으로 1496(연산군 2)년에 간행되었다. 발문에 따르면 인수 대비가 어느 중을 시켜서 〈육조 대사 법보단경〉과 함께 번역하고 왕실 비용으로 아주 좋은 나무 활자를 써서 400 벌을 찍어 널리 보급한 것이다. 안병희(1978)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학조(學祖) 스님이 이 일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여기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간수된 원본을 명지대학교에서 국학 자료 총서 제2집으로 영인한 책을 이용했는데, 편집이 잘못 되어 네 쪽이 서로 바뀌어 있다. 곧 〈삼단시식문〉의 29뒤와 30앞 두 쪽이 30뒤와 31앞 두 쪽과 맞바뀌어야 한다. 경기도 박물관에도 다른 원본(보물 1053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모든 제목과 아울러 모든 진언이나 불경의 원문을 반드시 한글로 먼저 적고 한자로 줄을 바꾸어 받쳐 적은 점이 특이하다. 안병희(1978)의 해제에 따르면 이와 같이 한글을 앞세우고 한자를 받친 책은 16세기에 나온 〈육자신주(六字神呪)〉와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의 게송 부분 뿐이라 한다. 아마 의식을 행할 때 진언이나 불경을 여러 사람이 암송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와 아울러 한글 창제 직후에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서 한자음을 한글로 크게 적고 한자를 작게 받쳐 적은 경우와 같이 한글의 위상을 존중하고 높이려는 의지도 있었음이 확실히 느껴 진다. 원본의 편집상 특이한 점 하나는 〈삼단시식문〉 34앞 쪽 네째 줄부터 35앞 쪽 첫째 줄에 걸친 원문이 35뒤 쪽 이하의 언해문에서는 협주의 모양으로 인쇄된 점이다. 열 두 가지 인연을 풀이하는 내용으로는 협주로 처리할 만 한데, 원문은 본문의 일부로 적으면서 언해문은 협주로 보이게 한 것이 어색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안병희(1978):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 해제.” 명지대학 국어국문학과 국학자료 간행위원회, 국학 자료 총서 제2집 〈진언권공·삼단시식문 언해〉. 명지대학 출판부.

『칠대만법』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칠대만법(七大萬法)』은 조선조 선조 2년(1569)에 소백산(小伯山) 희방사(喜方寺)에서 간행된 불교 관련 한글 문헌이다. 경전은 아니지만 불서(佛書)이면서 국어사 자료이다. 그런데 이 책은 당시에 조성되었던 여타의 불서들과는 간행 형식에 다른 점이 있다. 15·16세기 무렵에 간행된 대부분의 한글 불서들은 경(經)의 원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아서 구결문을 만든 후 이를 번역한, 이른바 언해 형식의 한글 문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원문을 따로 두지 아니했다. 구결문이 없이 국한문을 함께 써서 만든 이른바 국한 혼용의 책이다. 한글과 한자의 활자 크기도 동일하게 했다. 한자에는 독음(讀音)을 달지 않았다. 16세기 중·후반 문헌임에도 방점(傍點)은 찍지 않았다.

1권 1책의 목판본(木版本)으로 간기(刊記)와 시주질(施主秩)이 있는 맨 뒷장까지를 포함하여 모두 23장에 지나지 않는다. 시주질(施主秩)에 시주들이 12명이나 주001)

12명에 달하는 시주(施主)들은 모두 부부(夫婦)가 함께 참여하여 이름 밑에 양주(兩主)라는 표현이 들어가서 정확히는 24명이 되는 셈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에 사찰에서 관행적으로 ‘양주(兩主)’라는 표현을 썼으므로 12명이라고 한 것이다.
될 정도로 다수가 동참한 것으로 보아 법보시(法布施)에 의한 저술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작자 및 편찬자에 대한 정보는 없어서 미상이다. 다만 앞에서의 지적대로 구결문이 없이 본문만으로 이루어져서 장(張) 수가 적은 책임에 비해 전하는 내용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칠대’는 모든 법(法)의 체성(體性)을 일곱 종류로 나눈 것이다. 곧 만유(萬有) 생성의 요소인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 공대(空大), 견대(見大), 식대(識大) 등 7종(種)을 이른다. ‘만법(萬法)’은 우주 사이에 있는 유상, 무상의 온갖 사물, 곧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의 것을 이른다. 따라서 ‘칠대만법’은 ‘칠대(七大)’가 우주의 모든 것을 형성하는 근본 요소임을 설명하고 있다. 곧 이들의 조화(造化)로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임을 설명한 책이다. 이의 설명을 위해 전체를 크게 세 장(章)으로 나누어 구성(構成)했다. 「진여세계(眞如世界)」, 「삼신여래(三身如來)」, 「성적등지(惺寂等持)」 등이다.

이 책은 동일한 판목에서 후쇄(後刷)한 책들이 몇 권 전한다. 알려진 대로 한국동란 때 『월인석보』 권 1의 판목과 함께 이 책의 판목도 소실(燒失)되었다. 소실되기 전까지 보관되어 있던 판목에서 쇄출한 후쇄본들 책들이 지금에 전하는 판본인 것이다. 주002)

현전하는 책으로는 동국대 도서관 소장본, 서울대 일사문고 소장본 1본 및 다른 1본, 영남대 도서관 소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본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외에 『칠대만법(七大萬法)』의 이본(異本)에 대해서는 남경란(2005 : 371~373) 참조.
현재는 주로 1900년대에 쇄출된 책들이 유통되고 있다. 동일 판본의 책이어서 현전하는 책들의 내용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 그런데 판을 거듭하면서 완결(刓缺)과 마멸(磨滅)로 인한 탈각(脫刻)과 탈획(脫劃)된 글자가 늘어난 듯 인쇄 상태가 양호하지 않다. 처음부터의 오각(誤刻)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주003)
역주 작업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부분이다. 잘못 표기된 글자에 대해서는 (→) 표시를 해서 바로 잡았다. 화살표의 오른쪽이 교정(校訂)된 표기이다. 탈자(脫字)가 있는 경우에는 탈자 위치에 ( )를 하고 삽입을 했다.
아울러 한자를 독음(讀音)만으로 적은 것도 있고, 간행지의 방언형으로 보이는 어휘들이 다수 보여서 전체적으로 해독(解讀)이 어려운 편이다. 한편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어(稀貴語) 및 난해어(難解語)들이 매우 많아서 해독이 어렵기는 하지만, 고유어 어휘와 방언형에 대한 풍성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러한 어휘들로 인해 불교학 및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큰 책이다. 아래에서 형태 서지 및 어학적 특성 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Ⅱ. 형태 서지 및 수록 내용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칠대만법(七大萬法)』은 동일한 판목에서 쇄출한 책들이 몇몇 전한다. 이 책들은 쇄출의 시기만 다를 뿐이어서 어떤 책이든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는 큰 차이가 없다. 책의 형태 서지 역시 대부분 비슷하다.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책은 크기가 세로 29.6㎝×가로 19.4㎝이고, 사주(四周)는 단변(單邊)이다. 반엽의 광곽(廣郭)은 세로 20.3㎝×가로 16.2㎝이다. 매면은 유계 9행이고 1행에 한 줄씩 썼다. 1행 당 글자 수는 행별(行別)로 차이가 있어서 대체로 17~20자 정도이다. 방점은 찍지 않았고, 한자에 독음도 달지 않았다. 글자의 크기는 한글과 한자 모두 같은 크기이다. 권두서명을 따로 두지 않고 바로 맨 앞의 장(章) 이름을 썼다. 다만, 권말에는 ‘七大萬法終章’이라고 하여 권말서명을 대신하는 표현을 둔 셈이다. 판심(版心)은 흑구(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고, 판심서명은 ‘七大’이다. 아래쪽 흑어미 바로 위에 장차를 두었다.

내용의 구성은 모두 3개의 장(章)으로 나누어져 있다. 「진여세계(眞如世界)」, 「삼신여래(三身如來)」, 「성적등지(惺寂等持)」 등이다. 남경란(2005:369~395)에 의하면 내용들의 출전은 『능엄경(楞嚴經)』, 『화엄경(華嚴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이라고 한다. 편장(編章)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가) 「진여세계(眞如世界)」1장 앞면 1행 ~11장 앞면 2행

(나) 「삼신여래(三身如來)」11장 앞면 3행 ~18장 뒷면 2행

(다) 「성적등지(惺寂等持)」18장 뒷면 3행 ~23장 앞면 1행

각 장(章)마다 이름과 수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진여세계

‘진여(眞如)’는 범어로 ‘Tathātā’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이상(理想) 개념 중 하나이다. 곧 우주 만유에 보편(普遍)한 상주(常住) 불변의 본체로 우리의 사상 개념으로는 미칠 수 없는 진실한 경계를 이른다. 따라서 오직 성품을 증득(證得)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뜻과 변천하지 않고 여상(如常)하다는 뜻에서 진여(眞如)라고 한다. 세계(世界)는 범어로 ‘Lokadhātu’라고 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심리적 경역(境域)으로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범위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진여세계(眞如世界)’는 진실(眞實)하고 여상(如常)한 경역(境域)을 이르는 말이다.

이 장(章)에서는 법성(法性)의 세계와 진여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진여세계를 이루고 있는 칠대(七大)에 대한 설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진여세계를 형성하는 일곱 가지 요소, 곧 지대(地大)·수대(水大)·화대(火大)·풍대(風대)·공대(空大)·견대(見大)·식대(識大) 등 칠대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자세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칠대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임에 대해 밝힌 것이다.

2. 삼신여래

‘삼신여래(三身如來)’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등을 이른다. ‘법신(法身)’은 범어로 ‘Dharma-kāya’라고 한다. 법계(法界)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의 진신(眞身)이다. 곧 빛깔도 형상도 없는 본체신(本體身)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원한 불(佛)의 본체나 부처의 교법을 이르기도 한다. ‘보신(報身)’은 인위(因位)에서 지은 한이 없는 원(願)과 행(行)의 과보로 나타나서 만덕(萬德)이 원만(圓滿)한 불신을 이른다. 흔히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과 타수용보신(他受用報身)의 2종으로 나눈다. ‘응신(應身)’은 중생을 교화(敎化)하려고 하는 부처가 중생과 같은 몸을 나타낸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이 장의 내용은 법신, 보신, 응신 등의 삼신여래에 관한 설명으로 되어 있다. 법신은 진여의 몸으로 우주에 편재(遍在)하며 구체적인 것이라는 설명이다. 보신은 법신에 의한 과보로 나타난 색신(色身)이며, 응신은 법신을 기반으로 하여 신통자재하게 나타난 화현(化現)의 몸이라는 것이다.

3. 성적등지

‘성적등지(惺寂等持)’에서 성(惺)은 깨닫는 뜻이고, 적(寂)은 고요하다는 뜻이다. ‘등지(等持)’는 범어로 ‘Samādhi’라고 한다. 정(定)을 닦으면 마음이 한 경계(境界)에 머물러 산란하지 않게 된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또한 평등(平等)하게 유지된다고 하여 등지(等持)라고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깨달음의 두 가지 조건인 성(惺)과 적(寂)이 평등(平等)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어지러운 잡념(雜念)과 미혹한 무기(無記)의 두 가지 병폐(病弊)가 없어져 성성적적(惺惺寂寂)하며, 적적성성(寂寂惺惺)하여 아무데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설득이다.

책의 간행에 관련된 기사는 맨 뒷장인 23장 뒷면의 간기(刊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선조 2년(융경 3, 1569) 기사(己巳) 5월에 경상도 풍기 소백산 희방사에서 찍어내다[隆慶三年己巳五月日慶尙道豊基小伯山池叱方寺開板].’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책 간행지 이름을 ‘喜方寺’가 아니라 ‘池叱方寺’라 쓴 점이다. 이는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절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연세든 어른들은 얼마 전까지도 ‘喜方寺’라는 이름보다는 ‘짓방사’라는 이름을 더 즐겨 불렀다. ‘짓방사’는 ‘깃방사’의 구개음화 반영형이다. ‘깃-’은 한자 ‘喜’ 자(字)의 우리말 표현이다. ‘喜方寺’는 고유어 이름으로 ‘짓방사’이고, 이를 향찰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언제부터 이 이름으로 불렀는지 확인이 쉽지 않지만, [ㄱ] 구개음화와 관련하여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다.

Ⅲ. 어학적 특성

『칠대만법(七大萬法)』은 16세기 중·후반에 간행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점은 찍혀 있지 않다. 15세기 문헌에서 볼 수 있었던 표기나 음운현상이 그대로 유지되기도 하고 일부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한자에는 독음(讀音)을 달지 않았으나 일부 한자 어휘는 한글로 적어서 해독에 어려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체언과 조사의 통합 등 형태소 경계 표기에는 혼란의 양상이 나타난다. 어간 말음을 거듭 적는 이른바 중철 표기의 예가 상당 수 보인다. 특히 15세기 문헌에서 철저하게 지켜졌던 한자로 표기된 단어와 우리말 조사가 통합될 경우의 분철 표기가 문란해져서 한자로 적힌 한자어 다음에 선행 한자어 체언의 말음을 거듭 적는 표기가 매우 많이 보인다. 대표적인 형태가 자주 등장하는 어휘인 ‘만물(萬物)’이다. ‘萬物리’ 또는 ‘萬物를’ 같은 표기를 흔히 볼 수 있다. 어두자음군은 15세기에 보였던 ‘ㅅ’계, ‘ㅂ’계, ‘ㅄ’계의 글자들이 대부분 그대로 쓰였다. ‘ㅸ’의 사용은 ‘하 受苦 이리 업서〈16ㄱ〉’과 같은 구절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다. ‘ㅿ’과 ‘ㆁ’이 쓰이고 있으나, 앞선 시기에 ‘ㅿ’으로 쓰이던 글자가 ‘ㅅ’으로 바뀌어 표기된 예도 상당히 보인다. 이 책의 간행지인 경상 방언형이 반영된 것이다. ‘ㆁ’과 ‘ㅇ’은 구별해서 표기했으나 ‘ㆁ’이 들어가 있는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ㆁ’ 자를 음절 말에 두기도 하고, 음절 초에 두기도 하는 등 혼란한 양상을 보인다. 더〈19ㄱ〉~이〈22ㄴ〉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이 책의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희귀어어와 난해어들이다. 아울러 자주 접하지 못했던 고유어들도 상당하다. ‘온고〈옹구, 13ㄱ〉, 갓어리〈계집질, 21ㄴ〉, 간완〈간들간들하는, 3ㄴ〉’ 등 적지 않은 수의 새로운 단어들이 보인다. 역주에서는 이러한 어휘들을 모두 찾아서 일일이 정리했다. 아울러 경상도 방언형으로 짐작되는 형태 및 어휘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어학적 특성은 그동안의 선행 연구들에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어서 그 논의에 미룬다. 구체적인 내용은 역주에서 정리했다. 선행연구로는 홍윤표(1984: 1~2), 김영신(1985: 83~116), 정성미(1996: 77~104), 남경란(2005: 369~395), 이옥희(2011: 69~93) 등이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칠대만법』의 형태 서지, 책의 내용, 어학적 특성 등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 책은 조선 중기에 간행된 한글 문헌 중에서 특별한 출판 형태를 보이는 문헌이다. 불서이지만 언해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국한 혼용의 문장을 구사한 것이다. 또한 16세기 중·후반에 간행된 책이면서도 방점을 표기하지 않은 점과 간행지의 언어가 반영되어 있는 점 등 15세기에 간행되었던 책들과는 많은 차이가 크다. 어휘 등에서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는 희귀어나 난해어들을 상당수 접할 수 있었다. ‘칠대만법’의 내용 설명을 위해 비유를 자주 사용했는데, 비유에 당시의 일상이나 간행지 인근 마을의 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있어서 새로운 어휘들이 많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소중한 문헌이다. 불교학적 연구는 물론, 국어사 자료, 또 방언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내용과 관련된 부분과 구체적인 언어 사실들은 역주에 자세하게 정리했다.

〈참고문헌〉

김영신(1985), 「칠대만법(七大萬法) 연구-어휘·그밖」, 『수련어문논집』 12, 수련어문학회, 83~116쪽.

남경란(2005), 「칠대만법의 저본과 국어학적 특성」, 『국학연구』 제7집, 한국국학진흥원, 369~395쪽.

김영배(1996) 외,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 동악어문학회.

안병희(1979),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 고찰」, 『규장각』 3, 서울대 도서관, 143~144쪽. 『국어사 자료 연구』(1992)에 재수록, 문학과지성사, 547쪽.

이옥희(2011), 「칠대만법에 실현된 16세기 후기 동남방언의 표기 및 음운적 특징」, 『우리말연구』 29집, 우리말연구회, 69~93쪽.

정성미(1996), 「칠대만법의 문법 자료에 대한 연구」, 『어학연구』 3집, 강원대학교 어학교육원, 77~104쪽.

홍윤표(1984), 「칠대만법 해제」, 『칠대만법·영험약초·권념요록』(영인본), 홍문각, 1~2쪽.

〈영인본〉

홍문각(1984), 『칠대만법·영험약초·권념요록』(영인본).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과 조선초기의 의약 주001)
이 해제는 내가 쓴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을 비롯한 다음 글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醫方類聚)≫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이경록(한독의약박물관 관장)

차례

1. 머리말

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

1)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적 배경

2) ≪향약제생집성방≫의 판본 소개와 복원

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의학론

1) 인용 의서의 분석

2) 처방과 약재의 특성

3) 한계와 과제

4. 맺음말

1. 머리말

건국 직후 조선이 당면한 의료부문의 과제는 붕괴된 의료제도를 개편하는 것과 토산약물의 사용에 급급했던 고려시대 향약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앞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의료관이 침착되면서 중앙집권적 의료제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특히 국초부터 조선에서는 대민의료를 강조하면서 지방의료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뒤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약재 생산의 확대를 비롯하여 처방의 독자화와 의학지식의 집대성이 추구되었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 등의 편찬에서 드러나듯이 강력한 국가 주도의 의학 발전이었다.

고려 의학의 정점에 해당하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과 ≪비예백요방(備預百要方)≫에서는 모든 산출물이 약효를 지닌다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모든 산출물의 약효에 대한 긍정은 고려가 당면한 약재의 부족 현상과 의학 이론의 일천함을 반영한 인식이기도 하였다. 즉 고려의 의술은 약재와 처방 모두 여의치 못했다. 약재의 측면에서는 토산약재가 부족하다는 것이, 처방의 측면에서는 고려의 질병에 부합하는 치료법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실정으로 인해 ≪향약구급방≫과 ≪비예백요방≫에서 제시된 향약론은 만물위약론(萬物爲藥論)과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이었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출물을 약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며, 하나의 질병에 하나의 약물이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주002)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28~330쪽.

만물위약론과 일병소약론은 고려 의학의 성취인 동시에 그 한계를 보여주는 논리이기도 하다. 여말선초 의료의 발전 단계와 성격이 고려 의료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규정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역시 약재와 처방의 두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전자는 믿을 수 있는 토산약재를 증가시켜 치료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요구였고, 후자는 처방의 독자화를 통해 향약을 점차 이론화하려는 의지였다. 한마디로 중국 의학의 처방(處方)과 당재(唐材, 외국산 약재)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의료의 자주화를 추구해나가는 여정이었다.

앞서 거론한 ‘향약(鄕藥)’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몇 종류의 의서들은 조선에서 약재 생산의 확대, 나아가 처방의 독자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가운데 ≪향약제생집성방≫은 태조 7년(1398)에 편찬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종 원년(1399)에 간행되었다. 편찬 작업이 조선 건국 7년째에 시작되었으므로 이 책은 고려 말과 조선 건국 직후의 의료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의서인 셈이다. 무엇보다 ≪향약제생집성방≫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비예백요방≫ 등의 고유 의서들이 인용되어 있어서, 고려시대 의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한국 의료사에서 지니는 가치는 막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은 현재 3권 2책이 남아 있으며, 2책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공개된 것이 최근 20년 전후밖에 되지 않아서,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일서(佚書)’로 간주되어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 물론 그 중요성까지 망각된 것은 아니었지만, 원문을 열람하지 못한 기존 연구에서는 짧게 언급되는데 그쳤다. ≪양촌집(陽村集)≫ 등에 수록된 권근의 서문과 발문을 근거로 주003)

권근의 서문과 발문은 ≪양촌집≫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동문선(東文選)≫ 권91 〈서(序)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동문선(東文選)≫ 권103 〈발(跋)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권근의 서문이 초략되어 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6 예문고(藝文考) 5 〈의가류(醫家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향약제생집성방≫은 고려 말 향약 의서와 조선 세종대 ≪향약집성방≫을 잇는 저작으로 설명되었으며, 주004)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 출판(自家 出版), 1963, 114쪽; 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12~14쪽; 김두종(金斗鍾),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 1966, 201~202쪽. 이외에도 ≪향약제생집성방≫을 단편적이나마 소개하거나 언급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김신근(金信根) 편저, ≪한의약서고(韓醫藥書攷)≫,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손홍열(孫弘烈), 〈여말·선초(麗末鮮初) 의서(醫書)의 편찬(編纂)과 간행(刊行)〉, ≪한국과학사학회지≫ 11권 1호, 1989; 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서지학적인 연구가 일부 진행되었을 뿐이다. 주005)
김성수(金聖洙), 〈한국의 옛 의서(醫書)〉, ≪고서연구(古書硏究)≫ 13호, 1996; 김중권(金重權), 〈조선초(朝鮮初) 향약의서(鄕藥醫書)에 관한 고찰(考察)〉,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 16집, 1998.
기존 연구를 염두에 두면서도 ≪향약제생집성방≫의 내용과 의의를 본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의학적 측면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배경을 정리한 후,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판본을 소개하고, 본문 일부에 섞인 착오를 바로잡음으로써 원래의 형태를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복원을 토대로 ≪향약제생집성방≫의 연원을 추적하기 위해 인용 의서를 분석함으로써 의서들간의 계승관계를 정리한다. 아울러 ≪향약제생집성방≫의 모든 처방을 약재별 통계로 가공하여 다른 의서와 비교함으로써 여말선초 의술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론을 고려시대의 의학론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향약제생집성방≫의 역사적 의의까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

1)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적 배경

고려시대 의술의 실태는 의서(醫書)에 집약되어 있다. 널리 알려진 고려의 주요 의서로는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비롯하여 ≪신집어의촬요방≫, ≪향약구급방≫, ≪비예백요방≫ 등을 꼽을 수 있다.

≪제중입효방≫의 처방으로는 하나밖에 전해지지 않지만, 토산약재로 치료하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고종(高宗)대에 최종준(崔宗峻)이 편찬한 ≪신집어의촬요방≫은 관찬의서로서, 송(宋) 의학(醫學)을 전범으로 삼아 병인론(病因論)과 처방을 구성하는 점이 특색이었다. 이 책은 1개 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8.7개에 이를 정도로 복방(複方) 중심이었다. 또한 약재가 당재(唐材) 위주인 데다 고가(高價)인 것까지 감안하면 소수 지배층 중심의 의서에 해당하였다.

반면 ≪향약구급방≫은 ≪신집어의촬요방≫과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우선 1개 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1.37개에 불과할 정도여서 단방(單方) 위주의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사용 약재를 들여다보면 요즘식의 ‘약재(藥材)’ 외에도 식초, 꿀, 쑥, 마늘 등이 빈번하게 처방되었다. 일상 사물을 주된 약재로 활용하는 이유는 약재 생산이 쉽지 않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루는 질병의 종류를 살펴보더라도 이 책은 ≪신집어의촬요방≫과 달리 일반 백성들을 치료 대상으로 삼는 구급의서였다.

그런데 ≪향약구급방≫은 고려에서 ‘향약(鄕藥)’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가장 오래된 자료이기도 하다. ≪향약구급방≫ 본문에서도 고려의 토산약재(土産藥材)에 대해서는 ‘당명(唐名)’에 상응하는 ‘향명(鄕名)’까지 병기하였다. 이것은 ‘향약(鄕藥)’을 중국 의학의 처방에 활용하는 약재로 공인(公認)한다는 뜻이었다. 즉 토산약재에 대해 ‘향명’을 부여함으로써 고려에서는 중국 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고려 의료의 내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향약구급방≫ 계열의 의서인 ≪비예백요방≫에서는 편집 체재 외에 치료술, 병증, 병인론 등에서도 이전 의서들보다 훨씬 앞서나갔다. 고려시대 의료의 발전 단계 역시 ≪비예백요방≫의 의학론(醫學論)에 온축되어 있었다. 즉 ‘풍토(風土)’와 ‘질병(疾病)’과 ‘약재(藥材)’는 하나로 묶여 있으므로 고려의 질병은 고려에서 산출되는 향재(鄕材)로 치료할 수 있다는 의토성(宜土性)이 고려 의학의 기본 전제였다. 그리고 모든 산출물이 치료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만물위약론과 적은 약재로도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이 고려시대 의학론의 핵심이었다. 주006)

본문에서 다루는 고려의 의서들에 대한 논의는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V장 참고.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약재 생산이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주007)

여말선초 약재 증가의 구체적인 양상은 본문 3절에서 다루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약재 목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기록상으로 보아도 민간의 ‘약포(藥圃)’에서 약재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원천석(元天錫, 1330~?)의 문집에서는 ‘약포’와 ‘채약(採藥)’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보인다. 주008)
≪운곡행록(耘谷行錄)≫ 권1 〈제조목감유거(題趙牧監幽居)〉. “常尋藥圃雨中鋤”; 〈기제춘주신대학교거(寄題春州辛大學郊居)〉. “採藥晴登屋上山”; 〈선옹견화부차운(禪翁見和復次韻)〉. “茶軒煙羃羃, 藥圃雨絲絲.”
조선에 들어서 지방마다 배치된 ‘심약(審藥)’과 ‘약부(藥夫)’는 약초의 증가를 전제로 운영될 수 있었다. 주009)
손홍열, ≪한국중세(韓國中世)의 의료제도연구(醫療制度硏究)≫, 수서원(修書院), 1988, 194~197쪽.
그 결과 인삼(人蔘), 복령(茯苓), 백출(白朮) 등이 민간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주010)
≪목은시고(牧隱詩藁)≫ 권8 〈시(詩) 자영(自詠)〉. “身世祗今誰得管, 參苓白朮幸相扶”; 권9 〈시(詩) 안기행이수(晏起行二首)〉. “晚年臥病不出戶, 參苓白朮香滿家”; 권28 〈시(詩) 문보법노승소신삼수(聞報法老僧燒身三首)〉. “病裏靑春幾度新, 蔘苓浹髓文熏身”; 권33 〈시(詩) 즉사(卽事)〉. “病以蔘苓扶我寧”; 권34 〈시(詩) 전장자소[<원주>병서](田莊自笑[<원주>幷序])〉. “中爲病侵苦未痊, 蔘苓白朮徒烹煎”;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권2 〈시(詩) 제곤슬산승사(題昆瑟山僧舍)〉. “一匊煮蔘苓.” 이외에도 권근(權近)은 오가피(五加皮)가 노인의 치아와 모발에 효능이 있고, 오미자(五味子)는 약재로 채취되어 보관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출처>(≪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0 〈시(詩) 오가피(五加皮)〉; 〈오미자(五味子)〉).

하지만 향재(鄕材)나 당재(唐材)가 구득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011)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吾東方遠中國. 藥物之不産玆土者, 人固患得之之難也.”
널리 알려진 대로 혜민국(惠民局)은 약재를 판매하는 곳이어서 약재 유통에서 빠질 수 없었다. 혜민국에서는 당재까지 수입하여 민간에서 활용하도록 뒷받침하고 있었지만 그 운영은 수월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약재가 우리 땅[本土]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에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을 설치하고, 약가(藥價) 오승포(五升布) 6천 필을 지급하여 약물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모든 환자가 곡식 몇 말이나 베 몇 필을 혜민전약국에 가져가서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관부에서는 백성에게 약가를 철저히 징수하는 반면, 권세가들은 약물을 강제로 싼 값에 사들이므로 결국 약가가 축난다. 이에 빈민은 자활할 수가 없으니, 어찌 몹시 인자스럽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012)

≪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부전(賦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産,… 於是, 置惠民典藥局, 官給藥價五升布六千疋, 修備藥物. 凡有疾病者, 持斗米疋布至, 則隨所求而得之.… 不幸有官府之責取, 權勢之抑買, 而藥價耗損. 貧民無以自活, 豈非不仁之甚者也.”

모든 계층이 의료 혜택을 누리는 게 혜민국의 설립 목적이었지만, 실상 백성에게는 약가를 철저하게 징수하고 지배층은 약재를 싸게 억매(抑買)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李穡)은 병든 노비를 위해 혜민국에서 약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쉽게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주013)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0 〈시(詩) 종혜민국중관색약 위노병야(從惠民局衆官索藥 爲奴病也)〉. “先王念民病, 設局散還丹, 邪氣如氷釋, 恩波似海寬, 長鬚方苦痛, 老眼亦艱難, 書札無由惜, 哀矜在衆官.”
이색이 자신의 향재(鄕材)를 다른 이의 치료에 사용하도록 베풀었던 배경이었다. 주014)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5 〈시(詩) 오소윤내방 여이향약일상부지 서기산지민간질병 개종신행서지일단 족이자비 가이자관(吳少尹來訪 予以鄕藥一箱付之 庶其散之民間疾病 盖終身行恕之一端 足以自悲 歌以自寬)〉.
전반적으로 약재 구득이 어려운 데다 그 사용마저 지배층에게 독점되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약재가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윤소종(尹紹宗)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를 구하러 다녔다. 주015)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6 〈시(詩) 윤장원래 면유주색 좌이갑수 진솔가애 연어사장지례초실지 고록위단가 친지야 부설지교야(尹壯元來 面有酒色 坐而瞌睡 眞率可愛 然於事長之禮稍失之 故錄爲短歌 親之也 不屑之敎也)〉. “自言父母病在躬, 收拾藥材走西東, 似謝來遲言未終, 起而辭去如飄蓬.”
또한 이숭인(李崇仁)이 병들자 그 아들은 곽향(藿香)을 구하러 이색을 방문하였는데 이색이 약재 대신 정신 수양을 치료법으로 제시할 정도로 주016)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5 〈시(詩) 이자안병이월여의 인한상당요 동왕문후 방시지지 회복역병발 미능상마 자래구곽향 인유소감 가이자관(李子安病已月餘矣 因韓上黨邀 同往問候 方始知之 會僕亦病發 未能上馬 子來求藿香 因有所感 歌以自寬)〉. “君其安心善自保, 藥餌無如自頤養.”
곽향은 부족했다. 이색 역시 병들었을 때 부자(附子)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였다. 주017)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7 〈시(詩) 사나연송용호단(謝那演送龍虎丹)〉. “病夫深有感, 附子近來難.”

약재 확보가 여의치 않았던 여말선초는 역설적으로 향약을 활용한 경험방(經驗方)이 적잖이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우선 이색은 옴병[疥]에 걸리자 뽕나무 잿물로 닦는 치료를 받는데, 이 민간 처방은 침(鍼)보다 효과가 좋았다. 주018)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5 〈시(詩) 환개심불안 수일불음(患疥心不安 數日不吟)〉.
“疥發相攻擾我心, 苦哉連日輟長吟, 三郞特浸桑灰洗, 絶勝仙人頂上針.”
그리고 다년간 질병에 시달리며 약으로 치료하던 이색은 찬음료[氷漿]로 효과를 보자 구급방 속에 기록해야겠다고 적었다. 주019)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8 〈시(詩) 유동남대가 시장수고과 유이음악 가동주보 가이기지(柳洞南大街 施漿水苽果 侑以音樂 家童走報 歌以紀之)〉. “我病多年近藥物, 攻邪補虛相甲乙, 炎天氷漿立有效, 備急方中當續筆.”
문학적인 수사일 수도 있지만 기존 처방의 효과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는 경험칙에 근거한 치유가 더욱 신뢰를 줄 수도 있었다.

여말선초 경험방에 대해서는 권근(權近)도 두 가지 사례를 흥미 있게 서술하였다. 주020)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1 〈설류(說類) 김공경험설(金公經驗說)〉.
전(前) 판사(判事) 김공(金公)은 박주(博州) 지방관으로 있을 무렵 독충에 물린 지 1년이 지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자, 소주(燒酒) 두 잔을 억지로 마시게 하여 생충(生蟲)과 사충(死蟲)을 모두 토한 후 낫게 만들었다. ‘소주는 가슴의 체기를 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풍으로 외신(外腎)이 뱃속으로 들어간 가노(家奴)에게는 ‘기운을 아래로 밀면 외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피마자를 담근 소금물 구유통에 가노(家奴)를 누워 있게 하여 치료하였다고 한다. 이 두 치료법은 예전에 들은 것이 아니라 김공이 짐작해서 조치한 것이었다. 김공은 매우 쉬운 데다 효과가 신속한 이 경험방들을 권근에게 글로 널리 알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김공의 사례는 경험방의 축적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에서는 ≪향약구급방≫이나 ≪비예백요방≫ 등의 향약 의서가 간행되었다. 향약으로 질병을 치료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이 의서들의 의학론은 만물위약론과 일병소약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같은 의학론은 약재가 부족한 데서 기인한 논리이기도 하므로, 약재 생산이 증가하고 치료가 활성화되면 그 의학론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조선이 건국될 무렵까지 약재 생산은 점증하는 한편 새로운 경험방들도 축적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민의료에 관심이 컸던 조선으로서는 고려 의료를 계승하되 변화된 의료 여건을 반영하는 새 의서의 편찬이 필요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간행되는 의학적 배경이었다.

2) ≪향약제생집성방≫의 판본 소개와 복원

정종 원년(1399)에 출간된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자는 권중화(權仲和)이다. 주021)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醴泉之精博, 纂其書.” 예천(醴泉)은 예천백(醴泉伯)인 권중화를 가리킨다.
하지만 권중화가 관약국(官藥局) 관리들을 거느리고 작업했다는 기록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주022)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이 책은 개인 저작이 아니라 국왕의 의지에 따라 간행된 관찬의서(官撰醫書)에 속한다. 권근은 ≪향약제생집성방≫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찍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있었지만 자못 간요(簡要)해서 아는 사람[論者]들은 그 간략함을 아쉬워하였다. 예전에, 현 판문하(判門下)인 권중화(權仲和) 공이 서찬(徐贊)에게 처방을 더욱 수집하여 ≪간이방(簡易方)≫(≪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인용자)을 짓도록 하였으나, 이 책은 미처 세상에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좌정승(左政丞)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 공, 우정승(右政丞)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공이… 또한 처방이 미흡할까 걱정하여, 권공(권중화-인용자)에게 특별히 관약국(官藥局) 의관을 시켜 여러 처방을 다시 살피고 동인(東人)의 경험방을 수집하여 병문(病門)을 나누고 갈래를 잡아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 이름 짓고 우마(牛馬) 치료법을 덧붙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중추(김희선-인용자)는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공인(工人)을 모아 목판에 새겨 널리 퍼뜨렸다. 주023)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甞有三和子鄕藥方, 頗爲簡要, 論者猶病其畧. 曩日今判門下權公[<원주>仲和], 命徐贊者尤加蒐輯, 著簡易方, 其書尙未盛行于世.… 左政丞平壤伯趙公[<원주>浚], 右政丞上洛伯金公[<원주>士衡]… 又患其方有所未備,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又採東人經驗者, 分門類編, 名之曰鄕藥濟生集成方, 附以牛馬醫方. 而金中樞觀察江原, 募工鋟梓, 以廣其傳.”

당시에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은 제생원(濟生院)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각도(各道)에는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하고 교수(敎授)를 파견하여 치료하였다. 하지만 치료가 미비할까 염려되면서 대중용 의서가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주024)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左政丞平壤伯趙公[<원주>浚], 右政丞上洛伯金公[<원주>士衡]上體聖心, 請於中國置濟生院, 給之奴婢, 採取鄕藥, 劑和廣施, 以便於民.… 諸道亦置醫學院, 分遣敎授, 施藥如之, 俾其永賴. 又患其方有所未備”;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右濟生院鄕藥集成方, 爲惠斯民作者也.”
그런데 이 책은 강원도 관찰사 김희선에 의해 인쇄되었으며, 한상경(韓尙敬)ㆍ안경량(安敬良)ㆍ김원경(金元囧)ㆍ허형(許衡)ㆍ이종(李悰)ㆍ방사량(房士良)도 공로가 있었다. 주025)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吁, 以平壤上洛之仁厚, 緫其事, 醴泉之精博, 纂其書, 而金公又能勉力, 終始其功, 四公所以嘉惠東民者, 當與此書並流萬世, 而無窮期矣. 幹是院事者, 西原君韓公[<원주>尙敬], 順興君安公[<원주>敬良], 金君[<원주>元冏], 許君[<원주>衡], 李君[<원주>悰], 房君[<원주>士良]皆有勞於此者也.”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편찬에 관여했으므로 누가 편찬자인지는 기록별로 설명이 분분하였다. 주026)
미키 사카에는 이 책을 권중화·김희선·조준·김사형 등의 공통 편찬이라고 정리하였다(미키 사카에[三木榮], ≪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學術圖書刊行會, 1973, 12쪽).

김휴(金烋)가 인조 14년(1636)에 저술한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는 ≪향약제생집성방≫ 해제가 들어 있다. 김휴는 ≪향약제생집성방≫ 서문과 ≪향약집성방≫ 서문을 주로 인용하면서 조준이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했다고 썼다. 주027)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학문각(學文閣) 영인, 1969). ≪해동문헌총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권근이 쓴 것으로 알려진 ≪향약제생집성방≫의 서문을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표현한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서문 작성일은 태조 7년(1398) 6월 하순, 정도전이 처형당한 ‘왕자의 난’ 발발은 두 달 뒤인 8월 26일 기사일(己巳日), 발문 작성일은 이듬해인 정종 원년(1399) 5월 상순이다. 서문과 발문을 살펴보면 편찬경위에 대한 설명이 겹치는데, 권근이 동일한 이야기를 서문과 발문에서 되풀이한 점은 이상하다. 혹시 정도전이 ≪향약제생집성방≫ 서문을 쓰고 곧바로 처형을 당하자, 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에 권근이 서문까지 쓴 것으로 처리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준은 관직이 가장 높은 관료인 탓에 서문 첫머리에 거론된 것이므로, 조준을 ≪향약제생집성방≫의 실제 편찬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은 30권으로, 중추인 김희선이 편찬하였다.”라고 하였다. 주028)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6 〈예문고(藝文考)5 의가류(醫家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鄕藥濟生集成方三十卷, 中樞金希善撰.” 이 내용은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朝鮮古書刊行會,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 朝鮮雜誌社, 1911(아세아문화사 영인, 1972), 90쪽. “鄕藥濟生集成方三十卷, 金希善撰.”
아마도 강원도에서 실제로 간행한 사실에 주목하여 김희선을 편찬자로 간주한 듯하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는 권중화가 편찬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향약제생집성방≫은 그 서문과 발문에 나와 있듯이 ≪간이방≫(≪향약간이방≫)을 찬술했던 권중화가 자신의 작업을 토대로 방문(方文)들을 다시 상고(詳考)하고 조선의 경험방을 채집하여 완성한 의서였다. 주029)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乃與權公特命官藥局官更考諸方, 又採東人經驗者, 分門類編, 名之曰鄕藥濟生集成方”;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又與醴泉伯權相[<원주>仲和]將其甞所撰著鄕藥之方, 更加裒集, 勒成全書.”

그동안 ≪향약제생집성방≫은 이름만 전해지다가 최근에 권4, 권5, 권6 등 3권 2책이 공개되었다. 2책은 각각 한독의약박물관 소장본(1996년 보물 제1235호로 지정, 이하 ‘한독본’)과 가천박물관 소장본(1993년 보물 제1178호로 지정, 이하 ‘가천본’)이다. 주030)

가천박물관 소장 ≪향약제생집성방≫은 CD-Rom 형태로 제작된 ≪가천 길재단 50주년 기념 가천박물관 소장 국보·보물전≫(가천문화재단, 2008)을 통해 열람이 가능하다. 여기에 수록된 ≪향약제생집성방≫의 이미지 파일은 문화재청에서 작업한 것인데, 두 군데 오류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는 권6 앞부분의 낙장 부분을 판심 6쪽이라고 기록한 것인데, 원문의 기사를 살펴보면 낙장은 판심 7쪽이다. 둘째는 ‘30쪽 후면과 31쪽 전면’이 탈락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치간출혈(齒間出血)’ 항목 2쪽을 뒷부분(이미지 90~91쪽)에 배치한 것인데, 가천박물관의 원본을 확인해보면 ‘치간출혈’ 항목 2쪽이 ‘30쪽 후면과 31쪽 전면’의 제 위치에 있다.
한독본은 1996년 서울 인사동의 고서 상인에게 구입하였으며, 가천본은 대구의 어느 상인이 수집하였다가 다른 상인을 거쳐 가천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031)
가천본을 발굴한 분에 따르면, 이 자료는 1989년경에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던 청송의 한 고택에서 수집한 것이다. 발견 당시 이 책은 재래식 화장실 바닥의 농약박스에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분이 현재 보관하고 있는 복사본과 가천본을 비교해보면, 광곽 밖의 메모들이 일치하고 있어서 동일한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한독본(왼쪽)과 가천본(오른쪽)의 비교

우선 두 소장본의 형태부터 살펴보자. 두 의서 모두 목판본(木版本)으로서 광곽(匡郭)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행관(行款)은 12행(行) 24자(字)이며 주(註)는 소자쌍행(小字雙行)이다. 판심(版心)을 살펴보면 중봉(中縫)만 있고 어미(魚尾)는 없다. 한독본은 반곽(半郭) 크기가 대략 14cm☓21.8cm, 종이 크기가 16.8cm☓29.5cm인데 반해, 가천본은 반곽 크기가 대략 14cm☓21.8cm, 종이 크기가 16cm☓25.5cm이다. 인쇄가 된 반곽 크기는 두 소장본이 일치하지만, 한독본의 종이가 확연하게 큰 것이다. 여기에서 ‘대략’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목판본이어서 각 인쇄면마다 반곽 크기가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 1〉은 한독본과 가천본의 ≪향약제생집성방≫ 권5 이롱(耳聾) 기사를 비교한 것이다. 한눈에 보더라도 한독본과 가천본 사이에는 종이 크기가 상당히 차이 난다. 자세히 보면 한독본과 가천본 사이에 반곽 크기도 약간 다르다. 이것은 두 판본이 별도의 목판으로 인쇄했다는 뜻이다. 〈그림 1〉에서 네모로 표시한 ‘지물(之勿)’을 자세히 대조해보면, 한독본과 가천본의 글씨체가 완연하게 다르다. 목판이 다른 탓이다.

하지만 한독본과 가천본 사이에서 반곽의 크기를 비롯하여 서지사항들이 대체로 일치하는 데다, 글자들의 위치도 두 소장본의 모든 쪽에 걸쳐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어느 한 판본을 인쇄한 뒤, 이 판본에서 인출(印出)한 종이를 모본 삼아 새로운 목판을 제작했음[飜刻]을 의미한다. 한독본과 가천본 가운데 어느 판본이 먼저 판각되었는지는 〈그림 1〉의 동그라미 부분을 비교하면 된다.

〈그림 1〉의 동그라미에서 한독본에는 ‘첨(尖)’과 ‘병(餠)’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가천본에는 이 글자들이 아예 인쇄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한독본을 몇 십 내지 몇 백 부 인쇄하는 과정에서 ‘첨(尖)’과 ‘병(餠)’ 같은 목판의 몇몇 글자가 깨졌는데, 이 몇 글자 빠진 종이를 새로운 목판에 대고 새긴 번각본(飜刻本)이 바로 가천본이라는 의미이다. 현존하는 한독본은 목판 상태가 비교적 온전했을 때 인쇄하여 글자들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이다. 한독본과 가천본의 인쇄 상태를 비교해보더라도, 일부에서는 가천본의 인쇄 상태가 선명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한독본이 가천본보다 양호하다. 또한 지질(紙質)을 비교해봐도 가천본은 약간 바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나는 종이로서 한독본보다 품질이 떨어진다.

이상의 검토로 미루어 한독본과 가천본은 별도의 목판(木版)으로 인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판각된 목판을 활용하여 좋은 종이로 인출한 것이 한독본이다. 그리고 한독본의 목판으로 인출한 것 가운데 약간 상태가 좋지 않은 종이로 번각하여 새로 찍어낸 것이 가천본이다. 별도의 목판으로 나중에 인쇄한 가천본은 조금 작고 거친 종이를 사용하였다. 주032)

내가 예전에 쓴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에서는 한독본과 가천본이 동일한 판본을 이용하되 인출한 종이만 달랐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두 소장본은 별도의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바로잡는다.

그 동안에는 한독본이 권4~권5, 가천본이 권6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즉 한독본 권4는 음산(陰疝)을 비롯한 23개 병증(病症)으로, 권5는 두풍(頭風)을 비롯한 45개 병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가천본 권6은 장풍(腸風)을 비롯한 43개 병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4(한독본) : 陰疝(‘陰疝’이라는 병증명은 추측임), 積聚心腹脹滿, 心腹痛, 胷痺, 心顚, 咳嗽論, 上喘中滿, 咳逆, 咳嗽短氣, 一切涎嗽, 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咯血膿血, 翻胃 附嘔吐五噎五膈, 吐血, 嘔血, 唾血, 吐血後虛熱胷中痞口燥, 血汗, 鼻衄, 久衄, 大衄, 衄衊, 蠱毒

권5(한독본) : 頭風, 頭風白屑, 目赤爛, 目積年赤, 目飛血赤脉, 目血灌瞳入, 目珠子突出, 白睛腫脹, 目暴腫, 目風腫, 目睛疼痛, 目澁痛, 目痒急及赤痛, 五藏風熱眼, 目偏視風牽, 目風眼寒, 目赤腫痛, 目風淚出, 丹石毒上攻目, 時氣後患目, 目暈, 目昏暗, 目䀮䀮, 眼眉骨及頭痛, 目眵䁾, 眯目, 鍼眼, 熨烙, 熨烙法, 耳聾, 鼻病, 口病, 舌脣, 齒間出血, 齒齗宣露, 牙齒動搖, 牙齒黃黑, 牙齒不生, 牙齒挺生, 揩齒, 喉中生穀賊, 咽喉閉塞不通, 喉痺, 馬喉痺, 咽喉

권6(가천본) : 腸風, 諸痢論, 泄瀉痢, 熱痢, 冷熱痢, 疳痢, 氣痢, 休息痢, 蠱痢, 丹石毒上攻目, 時氣後患目, 目暈, 目昏暗, 目䀮䀮, 目眵䁾, 眯目, 鍼眼, 熨烙, 熨烙法, 耳聾, 鼻病, 口病, 舌脣, 齒間出血, 齒齗宣露, 齒齲, 牙齒動搖, 牙齒黃黑, 牙齒不生, 牙齒挺生, 揩齒, 喉中生穀賊, 咽喉閉塞不通, 喉痺, 馬喉痺, 咽喉, 咽喉腫痛語聲不出, 咽喉卒腫痛, 咽喉生癰, 懸癰腫, 尸咽喉, 狗咽, 咽喉中如有物妨悶

그런데 권별 병증을 위와 같이 목차로 만들어보면 두 소장본 모두 착오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밑줄로 표시한 병증들은 두 소장본 사이에 일치한다. 병증의 명칭으로 보아 가천본 권6에는 권5 내용이 상당부분 섞여 있는데, 두 소장본의 해당 본문을 대조해 봐도 그 내용이 동일하다. 따라서 두 소장본을 비교하는 동시에 판심(版心)을 확인해서 원형을 복원할 필요가 생긴다.

≪향약제생집성방≫ 판심에는 책 이름[版心題], 권수[卷次], 쪽수[張次]가 나란히 적혀 있다. 예를 들어 ≪향약제생집성방≫ 권4 15쪽인 경우에는 ‘향방(鄕方) 사(四) 십오(十五)’라는 식이다. 권4를 살펴보면 판심 쪽수가 ‘십(十) 뒷면’부터 ‘사십사(四十四)’까지 남아 있고, ‘사십사(四十四)’의 본문 말미에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지사(卷之四)’라는 맺음말이 적혀 있다. 권4의 경우에 1쪽~10쪽 앞면까지는 낙장이고, 10쪽 뒷면~44쪽까지는 완전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권5 판심을 조사해보면 1쪽부터 44쪽까지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한독본 권5에는 판심 1쪽~31쪽, 33쪽~41쪽 앞면까지 남아 있고, 가천본에는 권5 13쪽~44쪽이 남아 있다. 한독본에 없는 판심 32쪽이 가천본에 들어 있는 ‘치우(齒齲)’ 부분이다. 한편 권5 44쪽 이후는 낙장인 상태이지만 낙장 분량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의 권별 분량은 비슷할 것으로 추측되는데, 권4에서는 판심이 44쪽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권6 판심을 살펴보면 권6 1쪽~6쪽, 8쪽~12쪽이 남아 있어서 7쪽은 낙장인 상태이다. 그리고 권6 12쪽 다음에는, 앞서 말한 권5 13쪽~44쪽이 곧바로 잇대어 있다. 즉 가천본을 편철하면서 판심의 쪽수만 맞추느라 권5와 권6의 권수를 착각한 것이다. 주033)

가천본은 권5와 권6이 판심 13쪽을 중심으로 뒤섞여 있는데, 본문의 오염 상태가 권5의 판심 13쪽에서 갑자기 심해진다. 한동안 권5와 권6의 순서로 제대로 편철되어 있다가 나중에 현재 모습으로 재편철되면서 오염 정도가 급격히 달라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가천본을 수집한 분의 증언과 복사본에 의하더라도 가천본은 원래 권5, 권6의 순서대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권6은 13쪽 이후가 낙장이다. 이상의 검토를 토대로 ≪향약제생집성방≫을 원래 순서대로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다.

〈표 1〉 ≪향약제생집성방≫의 목차 주034)

이 국역본의 내용 역시 이 표의 목차에 따라 편차가 구성되었다.

번호권4권5권6비고
1陰疝頭風腸風권4 앞부분은 낙장이며 ‘陰疝’은 추측임
2積聚心腹脹滿頭風白屑諸痢論
3心腹痛目赤爛泄瀉痢
4胷痺目積年赤熱痢권6 ‘熱痢’에 낙장이 있음
5心顚目飛血赤脉冷熱痢
6咳嗽論目血灌瞳入疳痢
7上喘中滿目珠子突出氣痢
8咳逆白睛腫脹休息痢
9咳嗽短氣目暴腫蠱痢
10一切涎嗽目風腫
11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目睛疼痛
12咯血膿血目澁痛
13翻胃
附嘔吐五噎五膈
目痒急及赤痛
14吐血五藏風熱眼
15嘔血目偏視風牽
16唾血目風眼寒
17吐血後虛熱胷中痞口燥目赤腫痛
18血汗目風淚出
19鼻衄丹石毒上攻目
20久衄時氣後患目
21大衄目暈
22衄衊目昏暗
23蠱毒目䀮䀮
24眼眉骨及頭痛
25目眵䁾
26眯目
27鍼眼
28熨烙
29熨烙法
30耳聾
31鼻病
32口病
33舌脣
34齒間出血
35齒齗宣露
36齒齲권5 ‘齒齲’는 가천본에 수록됨
37牙齒動搖
38牙齒黃黑
39牙齒不生
40牙齒挺生
41揩齒
42喉中生穀賊
43咽喉閉塞不通
44喉痺
45馬喉痺
46咽喉
47咽喉腫痛語聲不出권5 ‘咽喉腫痛語聲不出’은 가천본에 수록됨
48咽喉卒腫痛권5 ‘咽喉卒腫痛’은 가천본에 수록됨
49咽喉生癰권5 ‘咽喉生癰’은 가천본에 수록됨
50懸癰腫권5 ‘懸癰腫’은 가천본에 수록됨
51尸咽喉권5 ‘尸咽喉’는 가천본에 수록됨
52狗咽권5 ‘狗咽’은 가천본에 수록됨
53咽喉中如有物妨悶권5 ‘咽喉中如有物妨悶’은 가천본에 수록됨
판심10쪽 뒷면~44쪽(권4 완결)1쪽~44쪽(이후 낙장)1쪽~6쪽, 8쪽~12쪽(이후 낙장)

바로잡은 위 목차에 따르면 ≪향약제생집성방≫은 권4~권6에 걸쳐 85개 병증이 남아 있다. 참고로 권채(權採)는 ≪향약제생집성방≫이 338개 병증에 2,803개 처방으로 이루어졌다고 썼다. 주035)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김신근(金信根) 주편(主編), ≪한국의학대계(韓國醫學大系)≫3,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1992). “舊證三百三十八, 而今爲九百五十九. 舊方二千八百三, 而今爲一萬七百六.”
위 표에 보이는 ≪향약제생집성방≫의 병증 구성은 세종대에 편찬되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아주 흡사하다. ≪향약집성방≫의 57개 병문(病門)은 … 21) 제산문(諸疝門), 22) 적취문(積聚門), 23) 심통문(心痛門), 24) 제해문(諸咳門), 25) 제기문(諸氣門), 26) 담음문(痰飮門), 27) 구토문(嘔吐門), 28) 열격문(噎膈門), 29) 비위문(脾胃門), 30) 고독문(蠱毒門), 31) 비뉵문(鼻衄門), 32) 두문(頭門), 33) 안문(眼門), 34) 이문(耳門), 35) 비문(鼻門), 36) 구설문(口舌門), 37) 치아문(齒牙門), 38) 인후문(咽喉門), 39) 제리문(諸痢門), 40) 치루문(痔漏門) … 등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집성방≫으로 계승되고 있음은 체재 비교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셈이다. 달리 표현하면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집성방≫처럼 종합의서로 편찬된 의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036)
심지어 ≪향약제생집성방≫ 말미에는 우마의방(牛馬醫方)까지 덧붙여 있었다(≪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쇄나 편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권4 서두에 보이는 ‘내적(內積)’은 ‘육적(肉積)’을 잘못 새긴 것이고, 적취심복창만(積聚心腹脹滿)의 병론(病論) 2개는 앞의 병증의 말미에 잘못 놓여 있다. 이 책 편찬의 계기가 된 제생원(濟生院)은 태조 6년(1397) 8월에 설치되었는데, 주037)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2 태조 6년 8월 23일(임인).
이 책의 서문은 태조 7년(1398) 6월에, 발문은 정종 원년(1399) 5월에 집필되었다. 주038)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아마도 1년 남짓한 기간에 편찬과 인쇄를 서둘러 마치느라 일부 착오가 생겼을 것이다.

인쇄만이 아니라 ≪향약제생집성방≫ 체재에서도 ≪향약집성방≫과 비교하면 미진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우선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병문(病門) 표시 없이 병증만을 나열하면서, 병증 아래에 세부 병증들을 배치하였다. 인용되는 동일한 의서는 한 병증 내에서도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있고, 주039)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심복통(心腹痛)〉; 권5 〈미목(眯目)〉; 〈이롱(耳聾)〉; 〈설순(舌脣)〉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탕제 치료와 침(鍼)·뜸[灸] 등의 기타 치료가 의서별로 한데 묶여 있기도 하다. 주040)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음산(陰疝)〉; 〈심전(心顚)〉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뜸 치료 역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크게 강조되면서 빈번히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뜸 치료법[灸法]을 고정된 치료 항목으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향약집성방≫에서는 병증을 묶어 57개 병문으로 편차를 갈무리하였고 병증 자체도 세분하였다. 인용 의서의 배치와 침구법도 ≪향약집성방≫에서는 병증별로 가지런하게 정리하였다. 주041)

흉비(胸痺)를 예로 들자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흉비(胸痺)〉에서는 ≪이간방(易簡方)≫ 처방을 세 군데로 나누어 인용한데 반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3 〈심통문(心痛門) 흉비(胸痺)〉에서는 ≪이간방≫을 하나로 묶어서 인용함으로써 깔끔히 정리하였다.
게다가 ≪향약집성방≫에서는 별도로 ‘보유(補遺)’를 붙였으며 ‘향약본초(鄕藥本草)’를 뒤에 추가하였다. 이처럼 ≪향약집성방≫의 편제와 서술 방식이 정교해진 이유는, ≪향약집성방≫이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경험을 계승하면서 그 병증 구성까지 좇아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향약제생집성방≫ 본문을 살펴보면, 제목에 해당하는 병증 아래에 ‘논왈(論曰)’로 시작하는 병론(病論)을 첫머리에 두고 있다. 이어서 치료 처방을 여러 의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적종통(目赤腫痛) 병증(病症)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목적종통(目赤腫痛).

〈≪성제총록≫에서〉 논하기를, “목적종통(目赤腫痛)은 심장[心]과 폐(肺)의 기운이 막혀 쌓인 열(熱)이 흩어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풍사(風邪)의 독기(毒氣)가 족궐음경(足厥陰經 <세주>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을 침범하면서 풍사와 열이 교대로 일어나 위로 눈·미간을 공격함에 따라, 그 〈눈의〉 색깔이 붉어지면서 붓고 아픈 것이다. 마땅히 풍사(風邪)를 제거하고 열기(熱氣)를 덜어내며, 막힌 것을 소통시켜야 한다.” 주042)

이상의 병론은 ≪성제총록(聖濟總錄)≫ 권103 〈안목문(眼目門) 목적종통(目赤腫痛)〉에 나오는 문장이다.
라고 하였다.

≪본조경험(本朝經驗) <세주>본조경험방(本朝經驗方)≫. 눈이 붉고 짓무르며 아픈 증상을 치료한다.

피마(蓖麻) 잎으로 발바닥 한가운데[足心]를 싸면 즉시 효과가 있다. 효과를 보면 잎을 떼낸다. 주04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적종통(目赤腫痛)〉. “目赤腫痛. 論曰, 目赤腫痛者, 以心肺壅滯, 積熱不散, 風邪毒氣, 干於足厥陰之經, 風熱交作, 上攻於目及兩瞼間, 故其色赤腫痛. 宜祛風邪, 蠲熱氣, 䟽瀹壅滯. 本朝經驗. 治眼赤爛痛. 用蓖麻葉, 足心褁之, 卽差. 差則去葉.”

병론(病論)에서는 생리(生理)·병인(病因)을 포함하여 질병의 발현 양상, 진단법 등 질병의 기전과 치료원리를 다룬다. 대부분의 병론은 중국 의서, 특히 ≪성제총록(聖濟總錄)≫을 인용하였다. 병론에서 하나의 의서만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감리(疳痢)의 병론에서는 ≪성제총록≫, 장종정(張從正), 왕빙(王氷)을 연달아 인용하기도 한다. 주044)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6 〈감리(疳痢)〉. 여기에 나오는 장 자화(張子和)는 장종정(張從正)이며, 계현자(啓玄子)는 왕빙(王氷)이다.

질병 원인[病因]으로 ≪향약제생집성방≫ 권4 심전(心顚)에서는 사기(邪氣)의 일종인 풍사(風邪, 삿된 바람기운)를 꼽는다. 풍사는 심전(心顚) 외에도 두풍(頭風), 목편시풍견(目偏視風牽), 목훈(目暈), 아치동요(牙齒動搖) 등에서도 병인으로 거론된다. 그리고 해수론(咳嗽論)에서는 한사(寒邪, 몸 밖의 해로운 찬 기운)를 병인으로 언급하며, 해역(咳逆)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에서는 병증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육기(六氣) 개념 즉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라는 6가지 외부 환경요인을 병인으로 제시한다. 주045)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그리고 이롱(耳聾), 아치동요(牙齒動搖), 고리(蠱痢)에서는 ≪성제총록≫ 등을 인용하면서 경락(經絡) 개념으로 질병을 설명한다.

요컨대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제에서는 ≪향약집성방≫으로의 계승 관계와 함께 중국 의학에의 경도가 확인된다. 따라서 중국 의학과 향약이 ≪향약제생집성방≫에 미친 영향력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3.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의학론

1) 인용 의서의 분석

≪향약제생집성방≫은 병론이든 처방이든 다른 의서들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인용을 통한 저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향약제생집성방≫ 전체가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권4~권6에서 인용한 의서는 51종이다.

51종의 인용 횟수를 분석해보면 ≪향약제생집성방≫의 성격과 특징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성혜방(聖惠方)≫은 세종대의 ≪향약집성방≫에는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의서이지만,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다른 의서를 압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성혜방≫은 ≪향약제생집성방≫의 핵심인 병론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주046)

예외적으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심전(心轉)〉; 권5 〈두풍(頭風)〉에서는 ≪성혜방≫을 병론으로 인용한다.
≪성혜방≫이 ≪향약제생집성방≫ 권5의 두풍(頭風)에서는 6회나 인용된 반면 권6에서는 전혀 인용되지 않은 점도 주목된다. ≪성혜방≫이 두풍(頭風)에는 유용하지만, 병론(病論)이나 권6의 여러 이질(痢疾)에는 무용하다고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자들이 판단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향약제생집성방≫에 인용된 의서의 분포를 통해 조선초기 의학자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표 2〉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 일람표 주047)

나는 예전에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와 약재를 분석하여 본문 〈표 2〉, 〈표 3〉과 동일한 형식의 표를 작성한 적이 있다.(이경록, 〈조선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과 향약의 발전〉, ≪동방학지(東方學志)≫ 149집, 2010, 346~348쪽; 356~359쪽.) 예전의 분석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재인용하는 의서를 별개 인용 의서로 처리하거나, 전거가 표시되지 않은 병론의 출전을 통계에서 누락하는 등의 오류가 있었다. 그리고 ≪향약제생집성방≫ 수록 약재의 정리에서도 일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이 국역문의 내용을 토대로 〈표 2〉와 〈표 3〉을 다시 작성한다. 〈표 2〉에서 인용 횟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병론과 처방을 모두 포함하여 계산하였다. 동일한 의서에서 몇 개의 처방이 ‘우방(又方)’, ‘우치(又治)’라고 하여 잇달아 소개되는 경우에는 별개의 인용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동일한 저서의 약칭이나 이칭은 하나의 의서로 처리하였다. ≪경험(經驗)≫, ≪경험방(經驗方)≫, ≪경험양방(經驗良方)≫, ≪경험비방(經驗秘方)≫처럼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일부 있으나, 〈표 2〉를 통해 ≪향약제생집성방≫의 주요 전거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번호의서인용 횟수비고번호의서인용 횟수비고
1聖濟總錄304중국의서27王氏簡易方2중국의서(649회)
2世醫得效方6528瑞竹堂經驗方2
3經驗良方5129本草集方2
4千金要方3230濟生續方1
5仁齋直指方2831衛生方1
6聖惠方1832御藥院方1
7肘後備急方1733楊氏産乳方1
8簡易方1534楊氏家藏方1
9儒門事親1135楊文蔚1
10和劑局方10 36食療方1
11山居四要1037宣明論方1
12千金翼方938本草1
13百一選方839兵部手集方1
14外臺秘要740范汪方1
15簡易方541類證普濟本事方1
16濟生方442斗門方1
17衍義本草443醫方大成1
18梅師方444廣利方1
19經驗秘方445婦人大全良方1
20醫方集成446廣南衛生1
21日華子347本朝經驗方36향약의서(69회)
22食醫心鑑348鄕藥救急方10
23經驗方349御醫撮要方8
24簡要濟衆方350鄕藥古方8
25必效方251備預百要方7
26諸病源候論2

위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51종의 의서에서 총 718회가 인용되었다. ≪성제총록≫을 비롯한 중국 의서가 46종 649회이고 ≪본조경험방≫을 비롯한 향약 의서가 5종 69회이다. 인용 의서 가운데 ≪성제총록≫이 304회로 가장 많고 ≪세의득효방≫ 65회, ≪경험양방≫ 51회, ≪본조경험방≫ 36회, ≪천금요방≫ 32회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중국 의서의 직접적인 인용이 90% 가량으로 압도적이라는 점이 한눈에 확인되지만, 향약 의서인 ≪본조경험방≫이 인용 빈도 4위라는 점도 흥미롭다. 주048)

≪본조경험방≫은 조선의 의서로 판단된다.(김호(金澔), 〈여말선초 ‘향약론(鄕藥論)’의 형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진단학보(震檀學報)≫ 87집, 1999 참고.)
향약 의서와의 연관성은 조금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중국 의서의 인용에서 드러나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의학적 특징을 꼽자면 세 가지이다.

먼저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중국 왕조 가운데 송(宋)의 의서(醫書)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고려 의학에 미친 중국 의학의 영향을 살펴보면, ≪신집어의촬요방≫에서는 송 의학에의 경도(傾倒)가 분명하지만 ≪향약구급방≫에서는 단방(單方)이나 일상 사물로 주로 치료하는 당(唐)의 의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주049)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21쪽.
그런데 위 표에서 보이듯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되는 송 의서로는 ≪성제총록≫ 외에도 ≪인재직지방≫, ≪성혜방≫, ≪화제국방≫, ≪제생방≫, ≪제생속방≫, ≪간요제중방≫, ≪양씨가장방≫, ≪유증보제본사방≫, ≪부인대전양방≫ 등이 집중되어 있다.

≪성제총록≫은 처방(處方)만이 아니라 병론(病論)에서도 ≪향약제생집성방≫이 가장 크게 의지하는 의서였다. 대표적으로 ≪향약제생집성방≫ 권4 흉비(胸痺)의 병론은 ≪성제총록≫ 중 흉비열색(胷痺噎塞), 흉비심하견비결(胷痺心下堅痞結), 흉비(胷痺) 항목의 내용을 각각 인용한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자들은 ≪성제총록≫에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했던 것이다. 또한 이 국역본 본문에서 쉽게 확인되듯이 ≪향약제생집성방≫의 병론 중 출전을 표기하지 않은 것들 대부분은 ≪성제총록≫을 인용한 것이다.

반면 ≪향약집성방≫에 이르면 ≪성제총록≫ 외에도 ≪성혜방≫이 자주 활용됨으로써 인용 의서의 비중이 변동된다. 주050)

≪향약집성방≫에 이르러서는 ≪성혜방≫의 영향력이 상당히 커진다.(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242~247쪽 참고.) 본문의 흉비 병론을 계속 사례로 들자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흉비(胸痺)〉에서는 ≪성제총록≫을 인용하였지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권23 〈심통문(心痛門) 흉비(胸痺)〉에서는 ≪성혜방≫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향약제생집성방≫이 발간된 정종대에서 ≪향약집성방≫이 발간된 세종대 사이에 중국 의학에 대한 검토가 의서별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송 의학의 지속적인 수용은 이처럼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진행 중이었다.

다음으로 ≪세의득효방≫이 65회로 두 번째 인용 빈도를 자랑하는데, 이것은 원(元) 의학(醫學)의 유입이 여말선초에야 본격화됨을 시사한다. ≪세의득효방≫ 외에 원 의서로는 ≪산거사요≫, ≪서죽당경험방≫, ≪어약원방≫이 ≪향약제생집성방≫에 인용되었다. 원래 고려에서는 원(元)과의 의학교류가 아주 제한적이어서 의관(醫官)이나 의서(醫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일이 드물었다. 주051)

고려의 의료제도에 새겨진 원(元) 의학의 흔적은 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이다. 충렬왕 15년(1289)에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가 설치되었는데, 의학제거사도 이때 설치는 된 듯하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6 공민왕 5년 10월.) 아마도 고려의 의인(醫人)들을 시험하여 원의 의관(醫官)으로 임용하려는 의도였을 터이나, 실제 기록이 미미한 것으로 보아 그 활동은 미약하였다. 한편 이능화는 대원의료(對元醫療)가 활발하였다고 이해한다.(이능화(李能和), 〈조선의약발달사 3(朝鮮醫藥發達史 三)〉 3장 6절, ≪조선(朝鮮)≫ 1931년 6월호~12월호, 1931 참고.)
고려에서 송 의학 수입에 적극적이었던 점과는 대비되는 특징인데, 고려 말로 가면서 조금씩 늘어나던 원 의학의 유입이 조선 초의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 빈도로 현상하고 있다. 특히 유완소(劉完素)·장종정(張從正)·이고(李杲)·주진형(朱震亨)의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와 관련해서는, 유완소의 ≪선명론방(宣明論方)≫이나 장종정의 ≪유문사친(儒門事親)≫ 등이 직접 인용되어 있어서 주052)
유완소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6 〈설사리(泄瀉痢)〉에 인용되어 있고, 장종정은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상천중만(上喘中滿)〉; 〈일체연수(一切涎嗽)〉;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등에 인용되어 있다.
조선 초에는 금원사대가의 영향력이 의서에 반영될 정도로 커졌음을 엿볼 수 있다. 주053)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252~253쪽;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479~481쪽 참고.

마지막으로 당의 대표적인 의서인 ≪천금요방≫이 32회로 적지 않게 인용되어 손사막(孫思邈)의 의학론이 여전히 호평을 받고 있다. 손사막의 또 다른 저작인 ≪천금익방≫이 9회 인용된 것을 합치면, 손사막의 인용 빈도는 41회로 늘어난다. 그리고 4세기 초에 갈홍(葛洪)이 쓴 ≪주후비급방≫도 17회나 인용되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향약제생집성방≫과 다른 향약 의서들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향약 의서 5종의 69회 인용 가운데 ≪본조경험방≫은 36회를 차지하고 있어서, 여말선초의 향약 경험방들이 ≪본조경험방≫을 거쳐 ≪향약제생집성방≫으로 직접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편찬될 무렵까지의 의술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본조경험방≫의 처방을 살펴보면, 치료법에 관한 이론적 설명은 없으나 다양한 경험의 축적이 엿보인다. 탕제 외에도 뜸을 비롯하여 훈증, 찬물을 목 뒤에 붓기, 피마 잎으로 발바닥 싸기, 귓가에 칼을 부딪히는 소리를 내어 귓속 벌레를 내쫓기, 피마 뿌리로 양치하기 등의 치료법들이 동원된다. 찹쌀, 막 길어온 물, 참나무 등도 사용되지만, 약물보다는 ‘약재(藥材)’라고 할 만한 백부자(白附子), 대극(大戟), 고삼(苦蔘), 용담(龍膽), 남칠(藍漆), 호국(好麴), 추실(楸實), 상피(桑皮) 등이 처방되는데 대체로 채취가 쉬운 것들이다. 그리고 ≪본조경험방≫에서는 단방(單方)이 절반 이상이지만, 약재 2~3개 정도의 복방(複方)도 존재하며 주054)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상천중만(上喘中滿)〉;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권5 〈아치동요(牙齒動搖)〉; 권6 〈설사리(泄瀉痢)〉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4개의 약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발견된다. 주055)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적란(目赤爛)〉; 〈목혼암(目昏暗)〉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약재를 배합하여 치료하는 여말선초 복방화(複方化)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의학의 영향은 ≪신집어의촬요방≫, ≪향약구급방≫, ≪비예백요방≫의 인용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향약구급방≫에서는 목구멍이 막힐 때에 환자의 양쪽 귀를 불어서 음식물이 내려가도록 처방하며, 진자(榛子)를 씹거나 마늘을 콧구멍에 넣도록 처방하기도 한다. 주056)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상권(上卷). “食噎方. 喉塞也. 食噎, 使兩人提耳, 吹兩耳, 卽下. 又嚼下榛子[<원주>以榛子開月, 甚驗故也]. 又削大蒜, 內鼻中, 卽下.”
이 처방은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세주까지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주057)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번위(翻胃)[<원주>부구토오열오격(附嘔吐五噎五膈)]〉. “鄕藥救急. 治食噎, 嚼下榛子[<원주>以榛子開胃, 甚驗故也]. 又方. 削大蒜, 納鼻中, 卽下.”
하지만 ≪향약제생집성방≫이 ≪향약구급방≫을 완전히 추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과 마찬가지로 종합의서를 지향한 반면 고려의 ≪향약구급방≫은 ‘구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병’만을 다루는 차이가 있었다. 주058)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하권(下卷) 〈고전록험방(古傳錄驗方)〉. “右摠五十三部, 皆倉卒易得之藥. 又不更尋表裏冷熱, 其病皆在易曉者錄之. 雖單方效藥, 審其表裏冷熱, 然后用者, 亦不錄焉. 恐其誤用致害也.”

≪향약구급방≫과는 계통이 다른 ≪신집어의촬요방≫까지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용되는 점도 주목된다. 인삼, 사향 등 고가의 희귀 약재를 처방하는 ≪신집어의촬요방≫은 약재 수급이 어려웠던 고려에서는 소수 지배층에게 어울렸다. 조선에 들어 ≪신집어의촬요방≫ 처방이 ≪향약제생집성방≫에 수록되어 대중용으로 활용된다는 것은 그동안 약재 생산이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인삼환(人蔘丸), 인삼탕(人蔘湯), 인삼측백산(人蔘側栢散) 등 인삼이 많이 처방되고 있었다. 주059)

‘〈표 4〉 ≪향약구급방≫, ≪신집어의촬요방≫,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약재표’에서 보이듯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인삼은 처방빈도가 4위에 이를 정도로 널리 사용된다.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 인삼 사용을 억제하여 한 번도 처방하지 않은 것을 상기하면, 주060)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03~304쪽.
고려후기 이래 인삼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정도로 공급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약의 발전 상황은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제생집성방≫에 보이는 동일한 명칭의 처방을 비교해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눈이 어두운 증상을 치료하는 주경환(駐景丸) 처방은 두 의서에 모두 실려 있다. ≪신집어의촬요방≫의 주경환은 토사자(兔絲子), 차전자(車前子), 숙건지황(熟乾地黃)을 졸인 꿀로 반죽하여 환약으로 만들도록 처방하였다. 주061)

≪의방유취≫ 권66 〈안문(眼門)3 성혜방(聖惠方)2 치안혼암제방(治眼昏暗諸方)〉.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의 주경환에서는 토사자(兔絲子), 차전자(車前子), 결명자(決明子), 영양각(羚羊角), 방풍(防風)을 졸인 꿀로 반죽하여 환약으로 만들도록 처방하였다. 주06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목황황(目䀮䀮)〉.
두 의서의 효능과 제조 방법은 비슷하지만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약재 수가 증가한 사례였다.

한편 ≪향약제생집성방≫에 여말선초의 대표적인 향약 의서인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과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이 인용되어 있지 않은 점은 의외이다. 그동안에는 이 두 의서가 ≪향약제생집성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향약제생집성방≫이 권4~권6만 남아 있을 뿐이므로 다른 권에서는 ≪삼화자향약방≫과 ≪향약간이방≫이 자주 인용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권근은 ≪삼화자향약방≫이 소략하고 ≪향약간이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썼다. 주063)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甞有三和子鄕藥方, 頗爲簡要, 論者猶病其畧. 曩日今判門下權公[<원주>仲和], 命徐贊者尤加蒐輯, 著簡易方, 其書尙未盛行于世.”
≪삼화자향약방≫은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주064)
≪향약집성방≫에서는 ≪삼화자향약방≫이 향약 의서들 가운데 인용 빈도가 1위일 정도로 중시되었다. 따라서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삼화자향약방≫이 전혀 인용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향약간이방≫은 ≪향약제생집성방≫의 저본이었으므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향약간이방≫이라는 인용 표시를 추가할 필요가 없었다고 추측된다.

이상에서 다룬 바와 같이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는 다수의 중국 의서와 향약 의서를 인용하고 있다. 중국 의서의 인용 분포를 통해서는 송(宋) 의학에의 몰입과 원(元) 의학을 포함한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영향력 확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인용된 향약 의서들에서는 약재의 다양화에 못지않게 치료법의 발전상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고려에서는 다른 계열이었던 ≪향약구급방≫과 ≪신집어의촬요방≫이 조선에 들어서는 ≪향약제생집성방≫으로 수렴되었다. 이러한 향약 의서의 계승과 처방의 변화는 고려후기에서 조선 초를 거치면서 약재 종류가 다양화하고 생산이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말선초의 약재 증가와 의술 수준의 실상은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과 약재에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2) 처방과 약재의 특성

≪향약제생집성방≫ 서문에 의하면 지역에 따라 기질, 풍속, 음식에 차이가 있듯이 처방도 달라야 했다. 처방이 구차하게 중국(中國)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향약이 당재의 대체수단이 아니라 올바른 치료 수단이며, 향약을 사용하는 독자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신선해서 약기운이 완전하게 살아 있는 향약의 약효가 약기운이 증발된 고가의 당재보다 뛰어나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세상[五方]에는 각각 토성(土性)이 있어서 10리(里) 거리면 풍토(風土)가 달라진다. 평소 생활의 음식(食飮), 감정[嗜慾], 맛[酸醎], 기온[寒暖]의 차이에 맞춰 치료 약물도 상이한 약제가 필요하므로, 반드시 중국과 동일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먼 땅의 약물은 구하다가 얻기도 전에 병이 심해지기도 하고, 가격을 치르고 구하였지만 썩고 좀먹어서 약기운이 이미 새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약기운이 완전하여 귀중한 토산 약물[土物]만 못한 것이다. 따라서 향약(鄕藥)으로 치료하는 것이 반드시 힘은 절약되고 효과는 신속할 것이다. 이 방서의 편찬이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됨이 얼마나 큰가. 주065)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且五方皆有性, 十里不同風. 平居之時, 食飮嗜慾酸醎寒暖之異宜, 則對病之藥, 亦應異劑, 不必苟同於中國也. 况遠土之物, 求之未得而病已深, 或用價而得之, 陳腐蠧敗, 其氣已泄. 不若土物氣完而可貴也. 故用鄕藥而治病, 必力省而效速矣. 此方之成, 其惠斯民爲如何哉.”

조선에는 조선의 질병에 적합한 약재가 산출되고 있으며, 조선의 약재를 통해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토성(宜土性)에 대한 자각은 고려 이래 향약론의 공통된 전제인데 ≪향약제생집성방≫에서도 동일한 인식이 발견되는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 보이는 “어느 곳이든 약이 있으며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隨處而有藥, 隨病而可醫]”는 주066)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지적도 의토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의토성을 전제로 삼으면서 권근은 모든 질병에 약재 하나 즉 단방(單方)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주067)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自唐以來其方世增, 方愈多而術益踈. 盖古之上醫, 唯用一物以攻一疾, 後世之醫, 多其物以幸有功. 故唐之名醫許胤宗有獵不知兔, 廣絡原野之譏, 眞善喩也.”
중국에서도 당(唐) 이래 그 방문(方文)이 시대마다 증가되었지만, 방문이 많아질수록 의술은 더욱 소루해졌다는 것이다. 옛적에 용한 의원은 한 가지 약재만으로도 병을 고쳤는데, 후대에 처방 약재가 늘어나는 것은 ‘사냥하는데 토끼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온 들판에다 널리 그물을 치는 격이다’라는 비유였다. 이를테면 권근은 일병소약론이 치료의 원칙이라고 생각하였다.

권근은 일병소약론이 조선에도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끔 한 가지 향약으로 한 가지 질병을 치료하되 그 효험이 매우 신통했다고 적었다. 주068)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國俗往往能以一草而療一病, 其效甚驗.”
권근은 ≪향약제생집성방≫의 특징도 마찬가지라고 서술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에 실린 내용은〉 모두 구하기 쉬운 약물에 이미 효과를 본 치료술들이다. 만약 여기에 정통하게 된다면 한 가지 질병에 한 가지 약물만 사용해도 되니, 굳이 산출되지 않아서 얻기 어려운 것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069)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7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서(鄕藥濟生集成方序)〉. “皆易得之物, 已驗之術也. 苟精於此, 則可能一病用一物, 何待夫不産而難得者哉.”

즉 권근에 따르면 ≪향약제생집성방≫은 의토성을 전제로 삼으면서, 두 가지의 편찬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하나의 질병을 하나의 약재로 치료하자는 일병일약(一病一藥)의 원칙으로서, 이것은 고려의 ≪향약구급방≫이나 ≪비예백요방≫처럼 일병소약론의 입장에서 질병에 대응하려는 논리였다. 둘째, 비싸고 약기운이 증발된 중국약재 대신 토산약재를 주로 사용하자는 향재 우선의 치료 원칙이었다. 하지만 고려 의서들과 ≪향약제생집성방≫ 사이에는 처방 약재에 대한 입장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권근의 주장이 여말선초 의료의 실상을 반영한 것인지는 이제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을 분석하면 확인된다.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는 85병증에 676처방이 수록되어 있으며 약재 1,635개가 사용되었다. 병증에 따라 약재 통계를 〈표 3〉과 같이 작성하면 ≪향약제생집성방≫ 처방의 특징이 일목요연해진다. 이 표에서는 조제에 필요한 약재를 모두 수록하였으며, 제조 과정에서 효능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첨가된다면 꿀, 소금, 식초, 물 등도 약재에 포함하였다. 하지만 병증 첫머리의 병론(病論)에는 처방이 없으므로 제외하였고, 약을 복용시에 함께 먹는 술, 물, 밥, 미음 등은 의례적인 음식으로 간주하여 통계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치료법 간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탕제 처방과 기타 처방으로도 세분하였으며, 향약 처방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향약 의서 5종의 처방을 별도로 표시하였다.

〈표 3〉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별 약재 통계표

번호권별 병증약재/처방수(탕제처방 약재/처방수, 기타치료 약재/처방수)처방당 약재수(탕제처방당 약재수, 기타 치료 처방당 약재수)향약 의서 약재/처방수향약 의서 처방당 약재수
1권4 陰疝15/9(12/6, 3/3)1.7(2.0, 1.0)--
2권4 積聚心腹脹滿56/23(55/22, 1/1)2.4(2.5, 1.0)2/12.0
3권4 心腹痛37/23(35/21, 2/2)1.6(1.7, 1.0)11/52.2
4권4 胷痺30/12(30/12, -)2.5(2.5, -)2/12.0
5권4 心顚15/13(9/7, 6/6)1.6(1.3, 1.0)3/21.5
6권4 咳嗽論----
7권4 上喘中滿130/29(130/29, -)4.5(4.5, -)8/42.0
8권4 咳逆25/9(22/6, 3/3)2.8(3.7, 1.0)--
9권4 咳嗽短氣16/5(16/5, -)3.2(3.2, -)--
10권4 一切涎嗽54/11(54/11, -)4.9(4.9, -)--
11권4 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107/26(106/25, 1/1)4.1(4.2, 1.0)17/53.4
12권4 咯血膿血13/4(13/4, -)3.3(3.3, -)--
13권4 翻胃[附嘔吐五噎五膈]38/24(33/19, 5/5)1.6(1.7, 1.0)3/40.8
14권4 吐血30/19(29/18, 1/1)1.6(1.6, 1.0)--
15권4 嘔血7/3(7/3, -)2.3(2.3, -)--
16권4 唾血6/3(6/3, -)2.0(2.0, -)--
17권4 吐血後虛熱胸中痞口燥8/3(8/3, -)2.7(2.7, -)--
18권4 血汗3/2(2/1, 1/1)1.5(2.0, 1.0)--
19권4 鼻衄16/13(13/10, 3/3)1.2(1.3, 1.0)2/21.0
20권4 久衄2/2(1/1, 1/1)1.0(1.0, 1.0)--
21권4 大衄6/3(6/3, -)2.0(2.0, -)--
22권4 衄衊7/4(6/3, 1/1)1.8(2.0, 1.0)--
23권4 蠱毒20/14(19/13, 1/1)1.4(1.5, 1.0)--
24권5 頭風37/19(27/10, 10/9)1.9(2.7, 1.1)1/11.0
25권5 頭風白屑8/2(4/1, 4/1)4.0(4.0, 4.0)--
26권5 目赤爛30/15(15/7, 15/8)2.0(2.1, 1.9)8/42.0
27권5 目積年赤8/1(8/1, -)8.0(8.0, -)--
28권5 目飛血赤脉3/1(-, 3/1)3.0(-, 3.0)--
29권5 目血灌瞳入6/1(6/1, -)6.0(6.0, -)--
30권5 目珠子突出9/2(8/1, 1/1)4.5(8.0, 1.0)--
31권5 白睛腫脹3/1(3/1, -)3.0(3.0, -)--
32권5 目暴腫6/3(1/1, 5/2)2.0(1.0, 2.5)--
33권5 目風腫5/2(5/2, -)2.5(2.5, -)--
34권5 目睛疼痛26/4(26/4, -)6.5(6.5, -)--
35권5 目澁痛8/1(8/1, -)8.0(8.0, -)--
36권5 目痒急及赤痛1/1(-, 1/1)1.0(-, 1.0)--
37권5 五藏風熱眼35/6(32/5, 3/1)5.8(6.4, 3.0)--
38권5 目偏視風牽11/2(11/2, -)5.5(5.5, -)--
39권5 目風眼寒20/4(16/3, 4/1)5.0(5.3, 4.0)4/14.0
40권5 目赤腫痛1/1(-, 1/1)1.0(-, 1.0)1/11.0
41권5 目風淚出11/3(9/1, 2/2)3.7(9.0, 1.0)1/11.0
42권5 丹石毒上攻目5/2(4/1, 1/1)2.5(4.0, 1.0)--
43권5 時氣後患目26/11(16/3, 10/8)2.4(5.3, 1.3)4/41.0
44권5 目暈9/2(9/2, -)4.5(4.5, -)--
45권5 目昏暗16/7(15/4, 1/3)2.3(3.8, 0.3)5/15.0
46권5 目䀮䀮17/2(17/2, -)8.5(8.5, -)--
47권5 眼眉骨及頭痛10/1(10/1, -)10.0(10.0, -)--
48권5 目眵䁾11/1(11/1, -)11.0(11.0, -)--
49권5 眯目31/22(17/7, 14/15)1.4(2.4, 0.9)6/51.2
50권5 鍼眼13/2(13/2, -)6.5(6.5, -)--
51권5 熨烙----
52권5 熨烙法6/4(-, 6/4)1.5(-, 1.5)--
53권5 耳聾81/49(7/3, 74/46)1.7(2.3, 1.6)0/10.0
54권5 鼻病34/24(9/6, 25/18)1.4(1.5, 1.4)--
55권5 口病17/8(6/3, 11/5)2.1(2.0, 2.2)--
56권5 舌脣40/28(9/6, 31/22)1.4(1.5, 1.4)4/22.0
57권5 齒間出血13/6(2/1, 11/5)2.2(2.0, 2.2)--
58권5 齒齗宣露7/3(-, 7/3)2.3(-, 2.3)--
59권5 齒齲21/12(4/1, 17/11)1.8(4.0, 1.5)1/11.0
60권5 牙齒動搖44/20(10/2, 34/18)2.2(5.0, 1.9)9/51.8
61권5 牙齒黃黑8/2(-, 8/2)4.0(-, 4.0)--
62권5 牙齒不生10/3(-, 10/3)3.3(-, 3.3)--
63권5 牙齒挺生14/3(-, 14/3)4.7(-, 4.7)--
64권5 揩齒7/1(-, 7/1)7.0(-, 7.0)--
65권5 喉中生穀賊2/2(1/1, 1/1)1.0(1.0, 1.0)--
66권5 咽喉閉塞不通21/13(15/8, 6/5)1.6(1.9, 1.2)--
67권5 喉痺25/16(13/7, 12/9)1.6(1.9, 1.3)13/71.9
68권5 馬喉痺3/2(3/2, -)1.5(1.5, -)--
69권5 咽喉9/4(7/3, 2/1)2.3(2.3, 2.0)--
70권5 咽喉腫痛語聲不出5/3(5/3, -)1.7(1.7, -)--
71권5 咽喉卒腫痛6/5(3/3, 3/2)1.2(1.0, 1.5)--
72권5 咽喉生癰15/2(15/2, -)7.5(7.5, -)--
73권5 懸癰腫12/7(-, 12/7)1.7(-, 1.7)--
74권5 尸咽喉4/4(4/4, -)1.0(1.0, -)--
75권5 狗咽5/3(4/2, 1/1)1.7(2.0, 1.0)--
76권5 咽喉中如有物妨悶11/3(11/3, -)3.7(3.7, -)--
77권6 腸風48/15(47/14, 1/1)3.2(3.4, 1.0)6/41.5
78권6 諸痢論----
79권6 泄瀉痢32/15(30/13, 2/2)2.1(2.3, 1.0)2/12.0
80권6 熱痢41/15(41/15, -)2.7(2.7, -)11/33.7
81권6 冷熱痢48/21(46/20, 2/1)2.3(2.3, 2.0)11/33.7
82권6 疳痢21/5(21/5, -)4.2(4.2, -)--
83권6 氣痢4/1(4/1, -)4.0(4.0, -)--
84권6 休息痢12/3(12/3, -)4.0(4.0, -)--
85권6 蠱痢2/1(2/1, -)2.0(2.0, -)--
총계85병증1635/676(1234/421, 401/255)2.42(2.93, 1.57)135/691.96

전체 처방 676개 가운데 탕제 처방은 421개로서 1,234개의 약재가 사용되었고 기타 처방 255개에는 401개의 약재가 사용되었다. 탕제 처방 421개는 전체 처방의 62.3%로서 절대 다수이지만, 침[鍼], 뜸[灸], 찜질[熨], 도포[塗], 점안[點眼], 양치[漱], 목욕[沐], 세안[灌] 등등의 기타 처방 37.7% 역시 작은 비중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면 치아 통증을 치료하는 세신산(細辛散) 처방에서는 노봉방(露蜂房)·형개(荊芥)·세신(細辛)을 가루 내어, 일부는 콧속에 넣거나 치아의 통증 부위를 문지르도록 처방하고 있다. 주070)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아치동요(牙齒動搖)〉.
드물지만 평두침(平頭鍼, 끝이 뭉툭한 침)을 이용한 외과 처치도 제시된다. 주071)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5 〈위락법(熨烙法)〉.
이처럼 여말선초에는 탕제 대신 뜸이나 침도 널리 사용하였다. 원천석(元天錫)은 “눈썹에 뜸을 뜨는 것을 피할 수 없겠구나.”라고 하여 뜸으로 치료하였다. 주072)
≪운곡행록(耘谷行錄)≫ 권1 〈목백견화부차운삼수(牧伯見和復次韻三首)〉. “刺舌猶難兔灸眉.”

그리고 질병에 따라 치료법도 달라지는 점이 위 표에서 확인된다. 치아 질환을 다루는 권5 치간출혈(齒間出血)~개치(揩齒)에서는 탕제 치료를 거의 처방하지 않았다. 50개의 처방 가운데 탕제 처방은 4개에 불과하며 46개는 기타 처방이었다. 반면 이질(痢疾) 치료를 수록한 권6 제리론(諸痢論)~고리(蠱痢)에서는 탕제 치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질을 치료하는 61개 처방 가운데 탕제 처방이 58개이고 기타 처방은 3개에 불과하다.

위 표에서 1처방당 평균 약재수는 2.42개이다. 자세히 살피면 탕제 처방의 평균 약재수는 2.93개이며, 기타 처방의 평균 약재수는 1.57개로서 큰 차이를 보인다. 기타 처방일 경우에는 단방(單方)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는 반면, 탕제 처방은 3개에 육박하는 약재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는 1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1.37개였으며, 약재가 없는 처방을 빼고 계산하더라도 1.43개에 불과하였다. 주073)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67~371쪽.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고려에 비해 1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증가하는 복방화(複方化) 경향이 뚜렷한 것이다.

복방화는 ≪향약제생집성방≫에 수록된 다른 향약 의서들의 평균 약재수와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진다. 위 표에 나온 바와 같이 676개의 처방에는 향약 의서의 69개 처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69개 처방에는 135개의 약재가 사용되었으므로, 1처방당 평균 1.96개의 약재가 사용되었다. 향약 의서 5종에 이미 수록되었던 처방들이므로, 이 1.96이라는 수치는 고려시대부터 ≪향약제생집성방≫ 편찬 무렵까지의 향약 처방의 수준이다. 그런데 ≪향약제생집성방≫ 전체에서는 1처방당 평균 2.42개의 약재가 사용되었으므로 이즈음에 평균 약재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향약제생집성방≫의 탕제 처방으로만 한정한다면 1처방당 평균 2.93개이므로, 처방 약재의 증가폭을 짐작할 수 있다. 권근은 일병일약(一病一藥)을 주장했지만, 실상 조선초기에 처방 약재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실제로 원천석은 단방(單方)이 효과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주074)

≪운곡행록(耘谷行錄)≫ 권5 〈시(詩) 병중음삼수(病中吟三首)〉. “早與錢兄久絶交, 病無良藥守寒巢, 有神妙術從何得, 無效單方可以拋.”

요컨대 1처방당 평균 약재수가 고려의 ≪향약구급방≫에서는 1.37개였고 고려~조선 초까지는 1.96개로 증가했는데,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2.42개에 달했다. 고려 향약의 일병소약론이 ≪향약제생집성방≫ 단계에 들어 일병다약론(一病多藥論)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 의서의 처방 약재와 비교했을 때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약(藥)’의 종류에서도 의미깊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에 앞서 서울에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향약(鄕藥)을 채취하여 백성을 치료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서는 모든 산출물이 약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는데,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처방 약재가 ‘채취하는 약재’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점차 향약의 범위가 ‘광의의 약물(藥物)’에서 ‘협의의 약재(藥材)’로 엄밀해지는 기미였다. 이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의 모든 처방 약재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향약제생집성방≫의 수록 횟수이며, 숫자가 없는 것은 1회 등장한 것이다.

蜜(73), 生薑(58), 鹽(42), 人蔘(36), 杏仁(35), 酒(34), 半夏(28), 細辛(24), 皂莢(23), 橘皮(22), 防風(22), 黃蘗(22), 乾薑(20), 生地黃(20), 桑皮(19), 葶藶子(19), 棗(19), 桔梗(18), 茯苓(18), 荊芥(18), 艾(17), 麩(16), 大黃(15), 川芎(15), 醋(15), 黃芩(15), 當歸(13), 枳殼(13), 升麻(12), 豉(12), 紫蘇(12), 車前子(12), 糯米(11), 烏梅(11), 厚朴(11), 白芷(10), 五味子(10), 枳實(10), 麪(9), 白麪(9), 吳茱萸(9), 赤茯苓(9), 天南星(9), 葱(9), 梔子(9), 墨(8), 白礬(8), 酥(8), 赤芍藥(8), 地骨皮(8), 玄蔘(8), 瓜蔕(7), 桃仁(7), 麵糊(7), 白芍藥(7), 百草霜(7), 白朮(7), 蒜(7), 山芋(7), 柴胡(7), 郁李仁(7), 紫莞(7), 蒲黃(7), 香附子(7), 胡桃(7), 黃連(7), 乾地黃(6), 苦蔘(6), 栝樓(6), 麴(6), 蘿蔔(6), 麥門冬(6), 米泔水(6), 米醋(6), 萞麻(6), 射干(6), 阿膠(6), 罌粟殼(6), 牛膝(6), 漿水(6), 竹葉(6), 菖蒲(6), 天麻(6), 酢糊(6), 側栢葉(6), 薤(6), 決明子(5), 粳米(5), 伏龍肝(5), 麝香(5), 五倍子(5), 樗白皮(5), 猪脂(5), 地楡(5), 川椒(5), 靑黛(5), 鶴蝨(5), 槐花(4), 枸杞子(4), 亂髮(4), 冷水(4), 露蜂房(4), 大豆(4), 桃皮(4), 獨活(4), 麻(4), 麻油(4), 馬齒莧(4), 蔓菁子(4), 蔓荊實(4), 薄荷(4), 虵蛻(4), 生油(4), 熟地黃(4), 惡實(4), 柳枝(4), 楮葉(4), 蒺藜子(4), 蒼朮(4), 草烏(4), 茺蔚子(4), 兎絲子(4), 黑豆(4), 牽牛子(3), 京三稜(3), 藁本(3), 槐皮(3), 菊花(3), 藍葉(3), 藍漆(3), 䗶(3), 大戟(3), 童子小便(3), 馬兜零(3), 馬藺(3), 木通(3), 白附子(3), 小豆(3), 粟米(3), 水(3), 羚羊角(3), 薏苡仁(3), 人尿(3), 磁石(3), 楮樹皮(3), 知母(3), 糠(2), 芥子(2), 乾柿(2), 槐子(2), 臘茶(2), 大麥(2), 桃葉(2), 燈草(2), 牡蠣(2), 木香(2), 防己(2), 法醋(2), 覆盆子(2), 釜底黑(2), 石決明(2), 石膏(2), 石斛(2), 新汲水(2), 羊蹄草(2), 羊脂(2), 蘘荷(2), 蠶砂(2), 蠶退紙(2), 楮實(2), 豬肉(2), 前胡(2), 酒糊(2), 秦艽(2), 蒼耳子(2), 靑布(2), 楓葉(2), 荷葉(2), 香油(2), 糊(2), 黃蠟(2), 茄蔕, 葛根, 葛根粉, 甘菊花, 甘草, 建茶, 乾漆, 雞蘇苗, 雞翅, 雞屎, 雞屎白, 雞血, 古銅錢, 羖羊角, 羖羊角屑, 古靑布, 古鞋, 苦瓠, 瓜根, 括樓根, 槐葉, 槐枝, 膠, 膠飴, 韮, 瞿麥, 男哺乳, 蠟紙, 莨菪子, 鹿角, 鹿角膠, 丹蔘, 稻稈灰, 桃枝, 冬瓜, 冬葵子, 童子乳汁, 銅錢, 頭垢, 頭髮, 馬屎, 馬踏板, 馬糞, 麻繩, 馬新屎汁, 麻油紙, 馬啣鐵, 麻鞋𩍥, 蔓菁花, 芒硝, 梅, 麪粥, 木賊, 米, 蜜糊, 飯, 白犬兒乳汁, 白斂, 白馬尿, 白石英, 白鮮皮, 白屑, 栢實, 白楊, 白楊皮, 白布, 百合, 鼈, 補骨脂, 茯神, 北前胡, 蒜糊, 酸石榴皮, 山茱萸, 桑上白茸, 橡實, 桑椹, 桑枝, 桑灰汁, 生椒, 石蓮子, 石蠏, 石灰, 蟬殼, 旋復花, 消蠟, 小兒乳汁, 松葉, 松脂, 松花, 水糊, 茱萸, 醇酒, 豉湯, 柿, 食茱萸, 神麴, 新筆, 羊肝, 羊屎, 羊肉, 羊蹄根, 釅醋, 藜蘆, 軟石膏, 鷰屎, 蓮子心, 臙脂, 烏麻油, 烏賊骨, 龍膽, 牛膽, 牛脂, 郁李根, 雄雞屎, 熊膽, 雄雀屎, 遠志, 葳靈仙, 蝟皮, 油, 乳, 乳汁, 六畜, 栗殼, 李根白皮, 益母草, 人屎灰, 人莧子, 雌雞屎, 薔薇, 杵頭糠, 苧麻, 楮皮, 赤松皮, 井花水, 虀, 薺苨, 竈中心土, 早禾稿, 鍾乳, 竹茹, 紙, 地膚子, 眞木, 眞蚌粉, 榛子, 秦椒, 秦皮, 茶, 蒼米, 天門冬, 天仙子, 茜草, 鐵, 鐵沙, 鐵鐶, 靑柳枝, 靑魚, 靑蒿花, 椒, 楸實, 唾, 炭灰, 澤瀉, 破鼓皮, 蒲萄根, 玄胡索, 胡荽, 紅米, 紅花, 滑石, 黃瓜根, 黃耆, 黃牛乳, 烸炲, 黑牛尿. 주075)

이 목록에 대해서는 애매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예컨대 냉수(冷水), 수(水), 신급수(新汲水), 정화수(井花水)가 실제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물[水]을 치료용 약물로 판단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목록은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 처방을 직접 구성하는 약물을 대상으로 삼아 작성되었으므로, 조선초기의 약재 활용 실태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앞서 여말선초의 약재 증가와 유통 확대 경향을 서술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실상은 위의 목록과 같다. 물론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처방 약재로 수록된다는 점이 조선초기에 실제로 그만큼 사용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서상의 처방과 실제 활용 사이의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위의 처방 약재들이 바로 고려와 조선초기에 향약으로 이용하던 약재의 목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향약제생집성방≫ 약재의 특징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고려 의서들의 처방 약재까지 포함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자.

〈표 4〉 ≪향약구급방≫, ≪신집어의촬요방≫,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약재표 주076)

≪향약구급방≫은 ≪한국의학대계(韓國醫學大系)≫1(김신근(金信根) 주편(主編),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1992)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신집어의촬요방≫은 ≪어의촬요연구≫(안상우·최환수, 한국한의학연구원, 2000)에 ≪향약제생집성방≫의 기록을 보완하여 작성하였다.

순위≪향약구급방≫(처방수)≪신집어의촬요방≫(처방수)≪향약제생집성방≫(처방수)
1醋(27)蜜(53)蜜(73)
2蜜(22)甘草(42)生薑(58)
3鹽(21)人蔘(30)鹽(42)
4當歸(15)乾薑(27)人蔘(36)
5艾(15)肉桂(23)杏仁(35)
6生地黃(12)當歸(22)酒(34)
7蒜(12)茯苓(19)半夏(28)
8油(12)麝香(17)細辛(24)
9甘草(11)附子(15)皂莢(23)
10藍漆(11)川芎(15)橘皮(22)
11猪脂(11)龍腦(14)防風(22)
12雞子(10)防風(14)黃蘗(22)
13皂莢(10)白朮(14)乾薑(20)
14人乳(9)巴豆(14)生地黃(20)
15麵(9)木香(13)桑皮(19)
16大豆(8)檳榔(13)葶藶子(19)
17石灰(8)生薑(13)棗(19)
18葱(8)大黃(12)桔梗(18)
19蒲黃(8)鹽(11)茯苓(18)
20黃蘗(8)黃芩(11)荊芥(18)
21薤(7)黃連(10)艾(17)
22葵子(7)朱砂(10)麩(16)
23栝樓(7)杏仁(10)大黃(15)
24麻子(7)皂莢(10)川芎(15)
25棗(6)芍藥(9)醋(15)
26桑皮(6)黃耆(9)黃芩(15)
27小便(6)山藥(8)當歸(13)
28白芍藥(6)犀角(8)枳殼(13)
29生薑(6)細辛(8)升麻(12)
30小豆(6)雄黃(8)豉(12)

≪향약제생집성방≫에서 꿀[蜜], 소금[鹽], 술[酒] 등 일상 음식들이 처방 약재로 활용된 점은 ≪향약구급방≫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향약구급방≫과 달리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생강(生薑), 인삼(人蔘), 행인(杏仁), 반하(半夏), 세신(細辛), 조협(皂莢), 귤피(橘皮), 방풍(防風) 같은 ‘약재(藥材)’의 비중이 훨씬 높다. 의서간의 약재를 비교해보면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제생집성방≫의 주요 약재들은 순위가 다를 뿐이지 상당한 부분이 겹친다. ≪향약제생집성방≫이 고려의 ≪향약구급방≫과 ≪신집어의촬요방≫을 종합하고 있음은 처방과 약재를 분석한 〈표 3〉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감초(甘草), 용뇌(龍腦), 파두(巴豆), 빈랑(檳榔) 등이 ≪신집어의촬요방≫에서는 자주 처방되었지만 ≪향약제생집성방≫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수입 약재에 해당하는 감초, 용뇌, 파두, 빈랑 등이 빠지면서, 향재(鄕材) 활용이 더욱 강화된다는 뜻이다. 조선초기 처방 약재의 이러한 변화가 보여주는 특징은 만물(萬物)을 약물(藥物)로 활용하려는 데서 탈피하여, 제생원 등에서 확보한 ‘재배(栽培) 향재(鄕材)’로 치료하려는 경향이었다. 앞서 살핀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원칙 가운데, 비싸고 약기운이 증발된 중국약재 대신 토산약재를 주로 사용하자는 향재 우선의 치료 원칙은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요컨대 처방 약재의 분포로 미루어보아, ≪향약제생집성방≫ 단계에 들어 기존의 만물위약론은 약재위약론(藥材爲藥論)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의토성(宜土性)’에 대한 자각을 배경으로 당재(唐材)에 대한 향약(鄕藥)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의토성의 강조는 고려와 조선에서 공통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여말선초에 의료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의술 수준은 달라지고 있었다.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질병마다 평균 2~3개의 약재를 처방하고 있었으며, 치료 약재에서도 재배 약재를 주로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향약제생집성방≫에 보이는 일병다약론(一病多藥論)과 약재위약론(藥材爲藥論)은 고려 의술의 단계였던 일병소약론과 만물위약론을 극복한 향약론이었다.

3) 한계와 과제

간행 이후 ≪향약제생집성방≫은 조선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 발문에서 ‘제생원(濟生院)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고 적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주077)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22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발(鄕藥濟生集成方跋)〉.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은 일반 백성들의 치료를 위한 대민 사업의 일환이었다. 실제로도 ≪향약제생집성방≫은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쉬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078)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 “自是藥易求而病易治, 人皆便之.”

흔히 조선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이라고 약칭되었다. 예컨대 세종 12년(1430) 3월에 의학의 취재(取才) 의서로 거론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주079)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7 세종 12년 3월 18일(무오). “詳定所啓諸學取才經書諸藝數目. … 醫學, 直指脉, 纂圖脉, 直指方, 和劑方, 傷寒類書, 和劑指南, 醫方集成, 御藥院方, 濟生方, 濟生拔粹方, 雙鍾處士活人書衍義, 本草, 鄕藥集成方, 針灸經, 補註銅人經, 難經, 素問括, 聖濟摠錄, 危氏得效方, 竇氏全嬰, 婦人大全, 瑞竹堂方, 百一選方, 千金翼方, 牛馬醫方.”
≪향약제생집성방≫을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향약집성방≫은 1년이 지난 세종 13년(1431) 가을에야 편찬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해동문헌총록≫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을 ‘조준이 편찬한 ≪향약집성방≫’이라고 설명한 것도 동일한 이해였다. 주080)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我廟以權仲和所著鄕藥簡易方及趙浚所撰鄕藥集成方, 治法藥名猶有未備者.”

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종 15년(1433)의 ≪향약집성방≫을 ≪해동문헌총록≫에서는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즉 ‘새로 증보한 ≪향약집성방≫’이라고 표기하면서 ‘신증집성방(新增集成方)’으로도 줄여 불렀다. 주081)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權採新增集成方序”;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의약류(醫藥類)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 “新增鄕藥集成方[<원주>七十五卷, 補遺十卷].”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239쪽 참고.
조선시대 의학에서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으로 연결되는 가교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은 이상과 같은 의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약재를 조금 더 거론하자면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감초(甘草)가 2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주082)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권4 〈일체해수 수분육기무구이한(一切咳嗽 嗽分六氣毋拘以寒)〉; 권6 〈냉열리(冷熱痢)〉.
그나마 처방을 보완 설명하거나 중국 의서를 인용하는 정도이며 중요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초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적극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감초가 아직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초가 조선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주083)
≪성종실록(成宗實錄)≫ 권178 성종 16년 윤4월 29일(기유).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 307~312쪽 참고.
또한 ≪향약제생집성방≫에서는 곽향(藿香)이나 부자(附子)도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숭인이나 이색이 곽향과 부자를 구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심지어 조선에서는 약재가 생산되지 않아서 질병을 얻게 되면 약재를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다가 약은 얻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진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주084)
≪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부전(賦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國家以爲藥材非本土之所産, 如有疾病, 其孝子慈孫傍求奔走, 藥未之得而病已深, 有不及救治之患.”
따라서 향약 생산은 더욱 확대되고 그 종류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었다. 주085)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26집, 2010 참고.

그리고 고려 이래 당재에 대한 향약의 우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재 약효가 당재와 동일하거나 뛰어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었다. 향재의 치유를 통해 경험방을 축적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때문에 여말선초에 국왕은 향재가 아닌 당재로 치료받고 있었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과 23년(1374)에는 약재(藥材)와 약방(藥方)을 하사해 준 것을 명(明)에 감사하였다. 주086)

≪고려사(高麗史)≫ 권43 세가(世家)43 공민왕 21년 11월;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44 공민왕 23년 2월.
정총(鄭摠, 1358~1397)은 〈사약재표(謝藥材表)〉에서 약재를 중국에 요청하였는데, 주087)
≪복재선생집(復齋先生集)≫ 하(下) 〈표전(表箋) 사약재표(謝藥材表)〉. “惟良藥不產於小邦, 致陪臣爲求於上國.”
양약(良藥)은 중국에서 산출된다고 인식한 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태조의 치료를 위해 태종은 용뇌(龍腦), 침향(沈香), 소합(蘇合), 향유(香油) 등 18종의 약재를 명(明)에서 구하였다. 주088)
≪태종실록(太宗實錄)≫ 권5 태종 3년 6월 18일(갑자); ≪명사(明史)≫ 권320 열전(列傳)208 외국(外國)1 조선(朝鮮).
≪향약제생집성방≫ 약재의 한계에 대해서는 권채(權採)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과는 다른 약재명이 꽤 많아서 의술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약재 부족을 한탄하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089)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서(鄕藥集成方序)〉. “藥名之異於中國者頗多, 故業其術者, 未免有不備之嘆.”

조선과 중국의 약재명이 다른 탓에 약재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인식이었다. 약재위약론에도 불구하고 향약의 약성, 채취법, 포제법은 확립되지 않았으며 약재의 지리적 분포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으로서는 필요한 약재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향약의 생산 실태와 그 약효를 파악해야 했다. 주요 토산약재의 종류와 약성을 확정하는 작업이 바로 세종대의 ≪향약채취월령≫ 편찬이며, 모든 토산약재를 지속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수취에 대비하려는 것이 ≪팔도지리지≫를 비롯한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물 항목의 작성 배경이었다. 전자가 162가지 주요 향재를 정리한 것이라면, 후자는 전국의 모든 향재로 정리 범위를 확장한 사업에 해당한다.

한편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 90% 가량이 중국 의서에 의존하고 있었음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중국 처방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중국 의학에의 의존성이 심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며, 동시에 조선 약재로 중국 처방을 보다 자유로이 활용할 정도로 조선 의학의 수준이 올라섰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의 질병은 조선의 약재로 치료할 수 있다는 의토성의 논리에 비추어 볼 때, 조선의 풍토로 인한 질병을 중국 의서에 의지해서는 모두 치료할 수 없었다. 중국의 질병을 토대로 저작된 중국 의서의 처방이 조선의 질병과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는 탓이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만의 독특한 처방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의학은 이제 약재의 측면을 넘어 고유 처방의 조사와 수렴 작업으로 본격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조선에서 통용될 처방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조선의 질병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인식을 요구하였다. 어떤 증상을 질병이라고 규정할 것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체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 의료가 동아시아의료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의미였다. ≪향약제생집성방≫ 단계의 이같은 의학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곧이어 세종대에 편찬되는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이다. 주090)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경록, 〈≪향약집성방≫의 편찬과 중국 의료의 조선화〉, ≪의사학(醫史學)≫ 20권 2호, 2011; 이경록, 〈향약(鄕藥)에서 동의(東醫)로 : ≪향약집성방≫의 의학이론과 고유 의술〉, ≪역사학보(歷史學報)≫ 212집, 2011;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참고.
요컨대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찬 이후에 조선 의학계에는 향약 생산의 확대 외에도 향재를 정리하고 처방을 이론화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4. 맺음말

이 글에서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의학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판본을 정리하면서 원래의 형태를 복원하였다. 아울러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를 제시하고, 수록 처방과 약재들의 특성을 검토함으로써 여말선초 의료의 발전 단계를 논의하였다.

고려의 향약은 ‘풍토(風土)’와 ‘질병(疾病)’과 ‘약재(藥材)’를 한데 묶는 의토성(宜土性)의 토대 위에서 성립하였다. 크게 보아 ≪비예백요방≫ 등에 나타나는 고려의 향약론은 만물위약론(萬物爲藥論)과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이었다. 고려의 모든 산출물이 약물로 활용될 수 있으며, 하나의 질병을 하나의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고려의 향약론은 약재 생산의 증가와 치료의 활성화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약재 점증과 경험방 축적에 대응하여 편찬된 의서가 바로 ≪향약제생집성방≫이었다. 권중화(權仲和)가 정종 원년(1399)에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은 제목에 그 뜻이 담겨 있듯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종 처방들을 종합한 관찬의서였다.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 권4~권6에서는 85개 병증별로 병론과 처방들이 배치되었다. 치료법으로는 탕제 처방이 다수이지만 침, 뜸, 찜질 등등의 다양한 처방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향약제생집성방≫의 인용 의서로는 중국 의서 49종과 향약 의서 5종이 활용되었다. 인용된 중국 의서의 분석을 통해 여말선초에 송(宋) 의학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원(元) 의학을 비롯한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영향력도 증대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향약제생집성방≫이 이전 시기의 향약을 계승하고 있음은 5종의 향약 의서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계통이 달랐던 ≪향약구급방≫과 ≪신집어의촬요방≫이 조선에 들어 ≪향약제생집성방≫으로 종합된 것은 의서의 계승관계에서 주목할 만하다.

≪향약제생집성방≫의 처방을 분석한 결과 1처방당 평균 약재수는 2.39개여서 복방화(複方化)의 경향이 뚜렷하였다. 아울러 ≪향약제생집성방≫에서 처방되는 약재는 고려처럼 ‘모든 산출물’이 아니라 ‘재배(栽培) 약재(藥材)’가 상당수였다. 따라서 ≪향약제생집성방≫의 향약론은 하나의 질병에 많은 약재를 사용하며[一病多藥論], 재배 약재 위주로 치료한다[藥材爲藥論]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향약의 일병소약론과 만물위약론을 극복한 논리였다.

하지만 명(明)의 약재 하사에 감사하는 표문에서 드러나듯이 향약에 대한 신뢰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당재와 중국식 처방에 경도된 지배층이 일반 백성들에게 향약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재 정책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중국 의학에 대한 깊은 의존을 극복하는 것이 조선 의학의 과제였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약재 생산이 아직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산 약재의 종류 및 약성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고, 처방도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향재의 시기적, 공간적 분포를 명확히 파악하는 작업과 함께 조선의 질병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과 치료법의 총합이 진행되어야 했다. 전자가 세종대에 진행되는 ≪향약채취월령≫·≪세종실록 지리지≫의 편찬 작업이라면, 후자는 ≪향약집성방≫·≪의방유취≫의 편찬 배경이었다. 약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질병체계 및 처방에 대한 집대성이 진행되면서 조선 의학은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할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의학을 계승하면서 조선전기 의학의 발전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의 역사적 의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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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명사(明史)≫

≪목은문고(牧隱文藁)≫ ≪목은시고(牧隱詩藁)≫ ≪운곡행록(耘谷行錄)≫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삼봉집(三峰集)≫ ≪복재선생집(復齋先生集)≫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동문선(東文選)≫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고서목록(朝鮮古書目錄)≫(朝鮮古書刊行會, 朝鮮雜誌社, 1911)

2. 연구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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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언해』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들머리

어버이는 생명의 숲이요 흙이다. 그 숲 속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이 흘러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그 흙에서 씨알이 움터 자라 더러는 작은 새들이 노래하는 나무숲을 이루거나 아니면 덩치 큰 짐승들이 깃드는 원시림이 되기도 한다. 잎이 지면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무수한 나뭇가지마다 철따라 잎이 나면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다시 땅에 떨어져 생명의 보금자리를 튼다. 흔히 까마귀 새끼들이 자라면 늙고 병든 어미 까마귀를 먹여 살린다 하여 이를 반포(反哺)의 효라고 이른다. 그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이 숲과 흙의 향으로 가득차고, 그 향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길러준다.

효행을 힘쓰는 이 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마지막 부분에 효선편이 마련된 것도 우연한 배열은 아닐 것이다. 우리 겨레를 한마디로 드러내 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고맙다’라고 생각한다. 더러 문화기호론이라 하여 말속에는 그 말을 쓰는 겨레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이 정신세계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를 일러 언어의 문화기호라고 한다. 그러면 ‘고맙다’에는 우리들의 어떤 문화와 역사며 정신세계가 깃들여 있을까.

‘고맙다’의 ‘고마(용가 3:15)’는 곰의 옛말이며, 이는 ‘경건하게 흠모해야 할 대상(신증유합)’임을 이르고 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공주(公州)를 ‘고마’라고 하였다. 고마를 곰 곧 웅(熊)이라 하였다. 거기에 ‘같다’는 뜻의 ‘-ㅂ다’가 붙었으니 이는 ‘당신의 은혜가 나의 어머니와 같고, 나의 조상신의 은혜와 같고, 나의 하느님의 은혜와 같다’는 문화기호론적인 풀이를 할 수 있다. ‘고맙다’의 뜻을 우리의 역사와 함께 고려하면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熊女)로 나오니 그렇게 상정한 것이다. 당시는 모계사회 중심이었음을 떠올리면 어머니-고마(곰)는 어버이의 얼굴이라고 보아야 한다.

백두산을 달리 웅신산(熊神山)으로도 부른다. 백두산의 백(白)은 곰(고마)을 뜻하는 맥(貊)으로도 읽는다. 하나의 한자를 몇 개의 소리로 읽는 것을 복성모라 한다. 예맥의 맥이 바로 곰의 다른 형태다. 일본의 자료를 보면 고구려나 고려를 모두 고마라 이른다. 흔히 백제(百濟)라 하지만 복성모 이론으로 보면 이 또한 맥제라 읽어야 옳다고 본다. 말하자면 ‘백제-맥제-고마의 나라’란 말이 된다.

이러한 고마 곧 어머니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우리 겨레의 민족 정서 가운데 하나의 샘이 되고 숲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어머니라 함도 단군시대의 어머니였던 고마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러하다. ‘고물고물-호물호물-오물오물’에서처럼 기역이 약화 탈락하면 ‘ㄱ-ㅎ-ㅇ’의 과정을 거쳐 소리값이 달라진다. 그럼 ‘고마(곰)-호마(홈)-오마(옴)’가 된다. ‘오마’는 방언으로 어머니를 뜻한다. 모음의 소리가 조금씩 다르게 쓰이면서 오늘날의 어머니(엄마)로 굳어져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전래해 오던 우리의 효행에 뿌리 깊은 문화소에 불교가, 유교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질서로, 다시 유교적인 질서로 재구성된다. 『삼국사기』의 효녀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 효선편에 나오는 ‘빈녀양모’를 비롯한 몇몇의 효행 사례를 통하여 그 절절한 효심의 속내를 체험할 수 있다. 적어도 4세기 이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전래해 오던 우리의 효행 설화들은 불교적인 통섭 과정을 통하여 불교적인 질서의 옷을 입게 된다. 그 얼굴에 값하는 설화가 ‘심청’의 이야기다. 효녀 하면 심청이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효도 하면 심청을 떠올린다. 심청 하면 곧 효행의 거울이고 상징처럼 각인되어 있다. 효행으로 하여금 심청이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여 왕후가 되고 맹인잔치를 통하여 아버지를 찾고 심 봉사는 깜깜했던 눈을 뜨게 된다. 왕궁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기쁨과 환희에 찬 대축제를 올린다. 효행의 승리며 예찬이 아닐 수 없다.

차츰 이야기는 다듬어져 〈심청전〉이라는 방각본들이 판을 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밤잠을 설쳐 가며 돌려 읽고 하는 가운데 효행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힘을 입어 효심이 부처님을 감동시키고 하늘이 움직인 결과였다. 효행의 열매란 끝이 없어 가는 곳마다 효행의 숲속에는 효자와 효녀, 효부와 열녀 충신의 정려들이 생겨나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화가 이루어졌다. 임금으로써 효행을 말하자면 조선 왕조 때 정조 대왕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비운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수원화성을 쌓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린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세계문화유산이 된 당시의 세종시라 할 화성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효행의 열매이고 문화의 얼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능묘를 융릉이라 하여 자신의 능침인 건릉 못지않게 좋은 자리에 모시고 장조(莊祖)라는 시호도 바치게 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불교에서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가경(假經)이라고도 함)이라 하여 하늘같은 어버이의 은공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이러다가 점차로 효행 곧 효도란 정치의 지배이념으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국가 수준의 효치(孝治)로서 통치 수단시 된다. 효치는 나아가 충치(忠治)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그러다 나라의 지배이념으로 표방된 효치는 삼국시대와 고려는 물론, 조선 왕조로 들어오면서 더욱 강화된다. 마침내 인재등용의 길목이라 할 과거시험의 과목으로도 특정된다. 흔히 군사부 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한다. 효행에서 어버이를 섬김은 스승이나 임금을 섬김과 같은 등가 행위로 본다. 어버이 모시는 효행이 자연발생적인 자연스러운 삶의 길이라면, 스승이나 군왕을 섬기는 것은 극히 인위적이요, 사회적인 틀에 버금하는 것이다. 일종의 효치의 한 갈래에 든다고 할 것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수로서 『효경』을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과거시험을 보아야 한다. 청운에 뜻을 품은 이는 모름지기 다른 과목과 함께 이 잡듯이 『효경』을 학습하게 되었다. 임금에서부터 글 모르는 촌부에 이르기까지 효도 하면 더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효도 지상주의를 심어 이로써 통치 이념의 바탕을 삼았다.

이제 이 『효경언해』 글에서는 먼저 이러한 효행문화가 나라의 통치이념이 되기까지 떠오른 과정에서 『효경』 관련 판본들에 대한 이해와 시대적인 흐름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에서는 『효경언해』의 원전이라 할 『고문효경』을 바탕으로 하여 『효경언해』를 역주하기로 하였다. 물론 『효경대의』를 번역한 것이 『효경언해』이고 『효경언해』는 주희의 『효경간오』를 저본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나 모두가 『고문효경』에 기반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한 강문식(2012)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아울러 판본들의 서지형태적인 옥영정(2012)의 연구를 참고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토대로 한 『효경언해』에 나타난 국어학적인 주석을 통하여 음운과 형태와 어휘에 대한 두드러진 점을 주목하고자 하였다.

Ⅱ. 효 사상의 변천

효(孝)란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뜻하는 유교의 가장 큰 덕목 가운데 하나다. 은나라 때 복사(卜辭)나 금문(金文) 등을 보면 『시경』·『서경』 등의 자료에도 효에 관한 속내들이 상당 부분 나온다. 주나라 자료에 나타난 효의 내용은 살아 있는 어버이에 대한 봉양·존경·복종과 돌아가신 어버이나 조상에 대한 추모로 나누어진다. 특히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조상숭배의 새로운 형식으로 정립되었다. 산 어버이를 모시는 일이나 돌아간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같다고 보기에 그러하다.

효에 대한 논리적 담론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을 인(仁)이라고 하였다. 인의 주된 내용으로 제(悌)와 효를 들었다. 그리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효의 실천 방안도 내놓았다. 이후 맹자는 요순의 도를 효제(孝悌)로 인식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제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알맹이라고 했다.

공자와 맹자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심이 효의 디딤돌이지만 애틋함과 도덕적 의무를 명확히 구별하여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역설했다. 물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적 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에 보이는 오륜(五倫)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했고, 이는 『논어』의 부부자자(父父子子), 『예기』의 부자자효(父慈子孝)와 함께 어버이와 자식 상호간에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맹자의 시대부터 이미 유교의 부자 윤리에서는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거의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자식의 효도는 어버이의 자애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의 효도와 어버이의 자애가 동일한 가치 또는 중요성을 갖는 도덕적 의무는 결코 아니었다.

유교사상에서 강조하는 효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어버이를 모시는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그 가운데 어버이에 대한 물질적 이바지보다는 공손한 정신적 자세를 중시했다. 어버이를 섬긴다는 것은 어버이의 명을 받들어 어버이를 위해 힘쓴다는 것을, 또는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경과 예의를 다해 모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어버이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효의 표현으로 보고 특수한 유교적 상례로서 어버이의 3년상을 제안했다. 거의 사회적 관계 설정의 성격이 강했다.

효에 관한 이러한 유교적 설명은 한(漢) 대에 이르러 『효경』으로 동아리 되었다. 『효경』은 효에 관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효경』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다른 모든 덕행을 효에 버금가는 가치로 설정한다. 공자와 맹자는 인의 근본으로 또는 요순의 도로써 효와 함께 제를 들었으나, 『효경』에서는 효만을 덕의 근본으로 강조했고 사람의 모든 덕행은 궁극적으로 효에서 비롯한다고 풀이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족제도가 무너지고 가부장제가 사회 구성의 기본단위로 확립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효경』에 보이는 효의 또 다른 특징은 정치적 지위에 따른 신분적 차이에 의해 실천하는 효의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효의 가치도 다르다고 본 것이다. 천자(天子)·제후(諸侯)·경대부(卿大夫)·사(士)·서(庶)와 같은 신분적 차이에 따라 효를 차별화하고 있다. 따라서 천자가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효를 행할 수 있으며, 천자의 효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즉 천자는 자신이 효를 실천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며, 동시에 천하가 효를 행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효란 통치 이념이다. 또 『효경』은 사람의 도리인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천지의 이법에 따른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와 같이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도리로 파악하는 것은 효를 존중하여 효를 움직일 수 없고 어길 수 없는 도덕률로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효 사상을 담고 있는 『효경』은 한대 이후에 중국 역대 왕조의 교육제도에서 가장 기초적인 필수과목으로 정함으로써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인 것은 『효경』이 과거시험의 과목이 되면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경전해석학을 통하여 사라졌던 경전들의 복원과정에서 엄청난 토론과정을 통하여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이라는 웃지 못할 쌍곡선을 그리면서 끝없는 논쟁의 불씨를 지핀다.

조선조에서 효치의 경전으로서 채택된 것은 〈금문효경〉으로 보이며, 이에 주석을 붙인 동정의 『효경대의』를 언해한 것으로 정본을 삼았다. 그러나 기원적으로 보다 원전에 가깝게 보이는 공안국의 전(傳)이 붙은 〈고문효경〉을 저본으로 하여 같고 다름을 함께 섭렵할 수 있는 고찰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효 사상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효의 규범을 광범한 계층에까지 가르치기 위한 방법인 효행 설화의 유통과 불교적 효 사상을 보여주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유통을 들 수 있다. 『효경』이 효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위주로 한 것이라면 효행 설화는 뛰어난 효행을 보여준 인물들의 행실을 거울삼아 이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효 윤리를 널리 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서(晉書)』의 효우편(孝友篇) 이래 사서(史書)에 실린 효자들의 전기도 효행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별단의 효행 설화로 엮은 가장 대표적인 책은 남송대 조맹견(趙孟堅)의 『조자고이십사효서화합벽(趙子固二十四孝書畵合壁)』이다. 이 책은 대표적인 24명의 효행을 조맹견이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엮은 것이다. 이와 같이 『효경』이나 효행 설화에 따라 효 윤리가 퍼지고, 또 나라는 제도나 형률을 통해 효 윤리의 실천을 권장하거나 강제하고 보호함으로써 효는 중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도덕규범으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중국 사회에서 효 윤리가 갖는 영향력은 불교적 효 사상을 성립시킨 사실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효치(孝治)의 기반은 날이 갈수록 굳어졌다. 그럼 불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원래 불교는 세간과 초세간(超世間)을 구별하여 초세간을 참된 세계로 보며, 그러한 출세간(出世間)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출세간의 종교적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를 비롯한 세간의 윤리도덕은 불교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효 윤리가 지배하는 중국사회에 불교를 펴고, 나아가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효 윤리를 불교의 관점에서 풀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부모은중경』이라는 경전의 필요를 낳았다. 이 경전은 유교의 세속적인 효행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효행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더욱 가치 있는 효행은 불교적 신앙생활을 통해 어버이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유교의 효 윤리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불교적인 신앙생활 속에 품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불교적 효 윤리의 실천은 주로 불교식 상-제례를 통해 어버이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송(宋) 시대의 성리학은 이전의 유교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명확히 했다. 성리학이 불교적 효행을 부정하고 유교적 효행을 강조하기 위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유교적 가례의 정비와 실천이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주자가례(朱子家禮)』로 불리는 예서의 편찬이다. 『주자가례』에서 관혼상제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家廟)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의도는 바로 불교적 효행을 유교적 효행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한국은 삼국시대에 국학이 세워지고 유학교육이 이루어질 무렵 이미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이 제시한 세속 5계 가운데 둘째 항목이 사친이효(事親以孝)였다. 이것은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도덕적 의무를 효라는 덕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국학에서는 『논어』와 함께 『효경』을 인재 교육의 필수적 교과목으로 설정함으로써 유교적 효 사상은 지식인들의 기본교양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가족제도는 중국의 가족제도와 다르고, 전통적인 조상숭배 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윤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지식이 곧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시대까지 가족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특히 고려는 유교교육을 강화하고, 효자의 정문을 세우는 정표정책(旌表政策)을 통해 효자들을 표창함으로써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권장했다. 서민들은 물론이고 지배층에서도 일반적으로 불교식 상-제례를 행했다. 그러나 고려 성종 무렵에 유교 정치사상이 지배적 정치이념으로 확립되고 그 정치이념에 『효경』의 사상이 그대로 채택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유교적 효 사상은 정치이념의 성격을 갖는 것이고, 불교적 효 사상은 가족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 말기부터 성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식인들은 유교적 효 사상을 정치이념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에서도 실천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유교적 효 사상을 담은 효행 설화를 엮고 『주자가례』를 소통했다. 즉 고려 말엽 권부(權溥)가 『효행록』을 엮었으며, 조선시대에도 『효행록』이 몇 차례 간행되고, 수정 간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효행 설화를 그림과 함께 동아리하여 엮은 것이 세종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가운데 〈효자도〉였다. 그리고 효행 설화의 엮음과 『주자가례』의 유통을 통해 불교적 상-제례가 유교적 상-제례로 바뀌었다. 이는 유교적 효 사상이 가정생활에까지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효자도〉에는 한국과 중국 사람을 합해 모두 110명에 달하는 효자들의 효행 사례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크게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과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효행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각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의 효행으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버이를 극진히 이바지한 사례, 어버이가 병이 났을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한 사례, 어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어버이를 구한 사례들을 들고 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효행으로는 어버이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거나 항거하는 사례, 어버이의 유해를 마치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스럽게 모신 사례,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애틋하게 사모하거나 행동을 근신하는 사례들이다. 〈효자도〉 가운데는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태도로써 원각경부(元覺警父)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원각이 아버지의 잘못을 깨우쳐 올바른 행실로 이끈 이야기다. 이와 같은 효행 사례들을 통해 조선시대의 효 사상을 살펴보면, 효 윤리는 자식이 항상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어버이를 섬겨야 하고, 어버이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하며, 또 어버이를 위해서라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행은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뿐만 아니라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며, 이 경우 효행은 상-제례, 특히 『주자가례』에 따른 예제의 실천이 가장 으뜸 내용이었다.

Ⅲ. 효행 관련 자료

1. 『삼국유사』 효선편

왕력(王曆)으로 시작하여 효선(孝善)으로 끝나는 『삼국유사』는 매우 인상적이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 빈녀양모(貧女養母), 향득할고(向得割股), 손순매아(孫順埋兒)’의 다섯 가지 실례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90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 이씨 부인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2. 『고문효경』

신라 신문왕 2년(682)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할 목적으로 세웠던 설총이 중심에 섰던 국학(國學)의 교과서로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 등이 있었다. 이를 석독 구결을 활용하여 학습의 새로운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교육 효과를 올림은 물론, 귀족 자제들만의 인습적인 등용을 차단하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이른바 서라벌 중심의 이두를 교육의 도구로 삼았으니 아주 획기적인 교육 혁신이었다.

한당 유학과 함께 새로운 교육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귀족 중심의 정국 운영을 왕권 중심으로 새판을 짜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중국의 큰 학자라도 신라의 이두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이두로써 효경을 학습하자면 얼마나 힘겹게 공부를 하며 정력을 쏟았을까. 효치의 질서는 곧바로 충치로 이어지니까 왕권의 강화가 지상의 과제였던 신문왕 이후 군왕들로서는 교육을 통한 효치를 강조하고 유교 경전을 통한 충치의 질서를 강조함은 아주 자연스러운 통치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시험과목 가운데 오경, 삼사,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 및 제자백가서 등을 주교재로 하여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실려 전한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어떠했던가.

고려 광종 10년(959)에는 주나라에 사신을 보내 ‘별서효경(別序孝經) 1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8권, 황령효경(皇靈孝經) 1권,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3권’ 등을 구해 왔다. 고려 문종 10년(1056)에는 비각 소장의 구경(九經), 한서(漢書), 진서(晉書), 당서(唐書), 논어(論語), 효경(孝經), 자사제가문집(子史諸家文集), 의(醫), 복(卜), 지리(地理), 율산(律算) 등의 여러 서적을 여러 학원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유사에 명하여 각각 1본을 간행하여 왕실에 보내게 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으로는 기록상의 제약으로 그 당시의 효경이 어떻게 유통과 교육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 나온 효경으로 국내에 알려진 판본은 홍무 6년(1373)의 발문이 있는 목판본 효경이었다. 이 판본은 이재영이 처음 소개하였다. 현전하는 판본 가운데 간행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원본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재영의 서지적 분석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책의 글머리는 『효경』, 글꼬리는 효경찬주(孝經纂註)로 되어 있다. 찬주를 한 이는 임화보(林華甫)이고, 앞부분에는 연우 3년(1216) 임화보의 자서(自序)와 연우 4년(1217)의 조씨진덕재(曹氏進德齋)의 서문이 있다. 그 뒤 당 현종의 서문이 확인된다. 이어 공자에서 현종에 이르는 효경류 저자의 계보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다음에는 금문효경을 바탕으로 한 여러 주석서의 지은이와 수결을 적고 있으며,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의 구성 차이를 비교하고 있다. 이어서 본문이 시작되는데 각 장의 단락별 글제 다음에 그 장에 해당하는 효경정의(孝經正義)의 내용을 짧게 풀이하고 있다. 『효경』의 각 구절을 쓴 뒤 작은 글자로 두 줄씩 두주를 달아 두었다. 뒷부분에 이천선생장설병도(伊川先生葬說幷圖)와 한위공참용고금가제식(韓魏公參用古今家祭式)이 함께 엮여 있다. 책 끝에는 공민왕 22년(1373)에 쓴 영해군수 한충호의 발문이 있다. 발문에 간행 경과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백소란 사람이 효경을 13장까지만 갖고 있었다. 전부령이었던 김거기에게 나머지 5장을 마련하여 합쳐 좌랑 남영신의 제식을 부록으로 붙여 간행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이 책의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간기가 보인다. 책판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고 이지러진 부분이 많은 후쇄본이긴 하나 고려 말엽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이후 사라졌던 경서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고문효경이냐 금문효경이냐 서로가 위서라고 할 만큼 뜨거운 감자였고 마침내 당나라의 현종이 이 둘을 통합하는 『어주효경』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전효경(孔傳孝經)으로 알려진 『고문효경』은 당나라 말엽에 사라졌다가 다행하게도 일본에 고판본이 남아 전해오므로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최고본은 『인치본 고문효경(仁治本古文孝經)』(1241)이다. 일본의 국보로 소장, 보존되고 있다. 김용옥(2009)이 인치본을 역주의 텍스트로 활용한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 1981)와 쿠리하라 케이스케(栗原圭介)(2004)의 『효경』을 참고로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공안국전 『고문효경』이 정본에 가장 가깝다. 인치본을 옮긴 고본이다.

이 글에서 『효경언해』의 원전으로 함께 올린 것은 인치본의 『고문효경』임을 밝혀 둔다. 글의 서문을 보면 『고문효경』이 왜 원전인가에 대한 답을 줄 것이다.

3. 『효경언해(孝經諺解)』

『효경언해』는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孝經大義)』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 소장본으로서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 가르침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董鼎)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 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崔世珍)이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董鼎)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德興)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요‚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黃榦)과 동주(董銖)를 비롯하여 개헌(介軒)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胡一桂)와 동진경(董眞卿)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와 함께 『고문효경』을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삼강행실도』류

먼저 『삼강행실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이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효자·충신·열녀의 효행과 충절이 남다른 사람을 뽑아 앞면에 그림을 그려 넣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설명 및 시(詩)와 찬(贊)을 붙인 뒤, 그림의 각 장 머리에 한글로 번역을 달아 펴낸 책이다. 세종 16년(1434)에 처음 간행되었는바, 한글 번역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 언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종 12년(1481)에야 언해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김화(金禾)가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많은 이들의 교육 학습용으로 효치와 충치를 하려는 국가사업으로 만든 인성 관련 서책이다. 조선은 성리학적 이념에 기초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시기에 걸쳐 『삼강행실도』가 매우 여러 차례 간행이 되었으며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의 문헌이 간행되었다. 따라서 매우 많은 이본이 남아 있으나 세종 때 간행된 책은 매우 드물며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이 대부분이다.

『삼강행실도』는 15세기의 언어 사용을 보여 주는 매우 귀한 자료의 하나로서 그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 연구, 판화 및 회화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 『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성종 때 언해본)에서 빠진 이들을 더 기워서 낸 자료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에 따라서 유근(柳根) 등이 편찬한, 충신과 효자와 열녀에 대한 행실을 그림과 함께 적어놓은 책이다. 주로 임진왜란 때 일어났던 효행과 열행, 그리고 충신에 대한 사적들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광해군 6년(1614)에 유근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신속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의 성격으로 간행되었는바, 충신, 효자, 열녀 등 충효열의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무려 1,587인(신속 1,515인, 속부 72인)이나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행실도류의 얼굴인 『삼강행실도』의 언해는 비교적 원문에 기대지 않고 원문 내용의 의역과 우리 말글의 표현미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간본의 경우 다소 원문에 가까워지려는 흐름이지만 원문이 줄거나 원문에 없는 사연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원문에 가까운 직역으로 역어체의 문체적인 보람을 보이고 있다. 축자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직역체의 언해가 이루어진 것은 직역체의 거울인 경서언해 작업을 하였던 역자들이 언해를 함으로써 기왕의 행실도류들과는 다른 번역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주로 장유와 붕우에 대한 도리를 그림과 함께 그 사례를 중심으로 펴낸 자료다. 이와 함께 『오륜행실도』는 정조 21년(1797)에 심상규 등이 왕의 명을 따라서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합하고 손을 보아 간행한 책이다. 5권 4책의 활자본으로,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새긴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한다. 중간에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역대 자료에서 오륜의 행실이 남달라 본이 될 만한 이들을 가려 뽑아 그네들의 사적을 시(詩)나 찬(贊)으로 엮은 일종의 도덕 교본이다. 한국에서 17사례, 중국에서 133사례 모두 150사례를 통하여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갈래로 5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시각적인 효과를 위하여 사례마다 해당 사연을 간추린 판화 같은 그림을 앞에 실었다. 해서 책의 이름에 ‘-도(圖)’가 들어갔다. 이 같은 행실도류 자료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다른 어느 자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생활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이다.

5.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 전하는 것은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인 것도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해졌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삽화를 두었는데,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佛岬寺)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441)에다가 후대에 필서(筆書)로 기입된 차자(借字)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이 언해본은 김영배(2011)의 해제에 따르면, 국어사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〇 ‘이 문헌’은 언해본이면서도 한자 표기는 전혀 없이 정음으로만 이루어진 문장인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현재까지는 최초의 정음체 문장은 『이륜행실도(1518)』로 보고 있는데, ‘이 문헌’은 그보다는 뒤지지만 그나름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〇 16세기 중엽의 전주・완주 지역의 언어사실을 그런대로(방언 포함)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정음 창제 후 100년이 지났으면서도, 중세국어 문법의 전통적인 용법을, 음운적인 변천을 고려해도 그런대로 계승해온 것도 무시할 수 없다.

〇 ‘방점 표기’에 대해서는 ‘이 문헌’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나타나며, 고유어는 대체로 한 어절에 한 음절에만 표기되나, 한자어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곡용과 활용형에서는 어간에만 표기되고, 말음절에는 표기하지 않은 것이 대세이며, 전체적으로 표기는 매우 불규칙하며, 거성과 상성의 혼란, 15·16세기 중앙의 관판 문헌과 일치하지 않음이 많다.

〇 어휘 면에 있어도 약 30단어 정도가 ‘이 문헌’에 새롭게 나타난다.

6. 심청전(沈淸傳)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의 하나가 바로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人身供犧說話)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배어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Ⅳ. 『효경』의 위상과 서지

1. 『효경』의 형태 서지

『효경』은 고유한 책의 이름이면서 『효경간오』와 『효경언해』, 그리고 『효경대의』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공자가 증자와 함께 묻고 답한 것 가운데 효도에 관한 이른바 〈송본효경〉이라고 불리는 사마광의 〈고문효경지해(古文孝經指解)〉를 저본으로 하여, 송나라 주희(朱熹)가 바르게 잡은 것이 『효경간오(孝經刊誤)』다. 사마광은 〈고문효경지해〉를 고문에 따라서 지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금문인 정주(鄭注)와 어주(御注)의 본문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기에 확고하게 고문을 중심으로 했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욱이 주희의 『효경간오』를 원나라 동정(董鼎)이 주석하였는데, 이것을 명나라 서관(徐貫)이 간행한 판본을 『효경대의』라 일컫는다.

처음 『효경』은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이 있었다. 고문은 22장으로 구성되었으며 노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 벽에서 찾아낸 것이다. 한편 금문은 18장으로 구성되었고 안지(顔芝)가 보관하다가, 그의 아들 안정(顔貞)이 나라에 바친 것이다. 주희는 『고문효경』 22장을 경문(經文) 1장과 전문(傳文) 14장으로 구성하면서 223자를 없애고 『효경간오』를 지었다. 주자는 공자와 증자의 문답 내용을 여러 책에서 인용된 것이 뒤섞여 있음에도 인용된 부분까지 공자의 말이라고 믿는 당시 상황을 비판하고, 『효경』이 다 성인의 말씀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경 1장과 전 14장의 체제로 다시 구성하였다.

이제까지 간행된 몇 가지 판본을 대상으로 한 형태서지학적 특징을 동아리 하기로 한다(옥영정(2012) 참조).

조선시대 들어와서 원나라 웅화(熊禾)의 서(序)와, 명나라 서관(徐貫)의 발(跋)이 있는 판본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말하자면 동정의 『효경대의』가 유통되었다. 효경 하면 곧 『효경대의』를 가리킴이 그 동안 효경에 대한 서지적인 통념이었다. 사실상 『효경대의』에도 판본이 여럿이 남아 전하는데, 특히 한글자료로 남은 왕실 교육용 서책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서지 사항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이 해제에서는 『효경』과 그 언해본의 국내 간본과 계통에 관하여 서지학적인 내용을 갈래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효경간오』와 『효경대의』의 간행본

(1) 전주본 『효경간오』 계통과 간본

조선시대에 들어와 『효경』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세종 5년(1423)에 서책의 수가 적어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직접 베껴 쓰므로 주자소에 『노걸대』나 『박통사』, 『직해효경』 등을 박게 하였다. 세종 11년(1429)에는 『효경』의 판본이 많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경연에서 『구해효경(句解孝經)』을 내매 주자소에 250질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안타깝게도 『직해효경』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요즘 중국에서 발간된 〈원대한어자료집〉에 『직해효경』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유일한 원나라 간본으로 알려진 것이 일본의 개인소장본으로 남아 있다. 『직해효경』은 주로 사역원의 교수-학습용 교재로 쓰였을 것이다.

『효경』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경우, 『효경간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조선 후기에 오면 『효경대의』가 효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간행은 세종 11년(1429) 3월 판부사 허조(許稠)의 계청으로 주자소로 하여금 250질을 인쇄, 반포하도록 하여 5월에 보급한 기록이 있으나 그 현전하는 판본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효경』의 현존하는 판본으로 가장 이른 것은 성종 6년(1475) 전주부윤 윤효손(尹孝孫)이 전주에서 간행한 것이 있다. 책 마지막 장에 “성화십일년을미오월일전주부개간(成化十一年乙未五月日全州府開刊)”이라는 간기가 보인다. 윤효손이 간행한 전주 간본은 이후 다시 남원부에서 중간되었다. 남원 간본에는 “세재경인십이월일남원부중간(歲在庚寅十二月日南原府重刊)”이라는 간기와 함께 저본이 되었던 전주 간본에 수록된 윤효손의 발문과 간기가 판각되어 있다. 경인년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책의 판식은 사주단변, 반곽 24.8×15.5cm, 유계, 4행 8자, 상하 내향 2엽 또는 3엽 화문 어미로 구성된다.

한편, 경상도 흥해에서 간행되어 개인 소장으로 전하는 선조 36년(1603)의 간본도 있다. 아울러 성종 8년(1477) 경상도 선산에서 간행된바, 김종직의 발문이 있는데, 현전하는 판본이 없고 전주판과 큰 차이 없는 판식과 내용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순조 1년(1801)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도 판각이 이루어졌다. 저본의 윤효손, 김종직의 발문과 이헌경의 발문이 실려 전한다. 이번엔 경주에서 권종락 등이 이를 간행하고자 하여 발문을 부탁받았음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효경』의 권수제 아래에 ‘회암선생간오(晦菴先生刊誤)’라는 일종의 부제를 붙이고 있다. 이는 동일한 판각으로 보아 기존의 『효경』이 『효경간오』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다른 판본으로 『효경』에 한문 구결이 함께 판각된 것도 있다.

조선 후기로 오면 책 목록에 주로 원나라 동정이 주석을 더한 『효경대의』라는 서명으로 실려 있다. 이는 주희의 『효경간오』가 16세기 말엽 『효경대의』 간행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효경대의』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2) 『효경대의』 판본 계열의 갈래

조선시대 들어와서 주자의 『효경간오』와 함께 동정이 주를 덧붙인 『효경대의』가 함께 활용되었다. 간본의 형태로 보면 『효경대의』의 본문 글자가 대자인 것과 중자인 경우의 두 갈래가 있다. 이름하여 효경대자본과 훈련도감자본, 정유자본 등으로 가를 수 있다. 내용은 비슷하나 판식이 각 활자마다 달라서 중자로 인쇄한 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1) 효경대자본(孝經大字本) 계열

『효경대의』는 동정이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원의 학사 웅화의 서와 명의 학사 서관의 발, 그리고 선조 때 유성룡의 발이 있는 판본이다. 선조 23년(1590) 효경대자(孝經大字)와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로 이를 다시 판각한 목판본이 이어서 간행되었다. 효경대자는 윤병태에 의해서 처음 이름 붙여진 목활자로 『효경대의』의 권수제와 경의 본문에만 쓰인 것이다. 함께 쓰인 을해자체 경서자는 선조 이후 국역 경서의 교정을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경서 언해를 찍는 데 활용한 금속활자다.

선조 23년(1590)의 『효경언해』와 합하여 사헌부 장령 장운익에게 하사하였다. 한문본과 한글본을 동시에 1책으로 간행하였다. 일본 존경각문고에 한 부 남아 있다. 국내에는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본이 있는데 그 글눈은 다음과 같다.

孝經大義(1256)
朱熹(宋)訂,董鼎(元) 註. 中字再鑄甲寅字版. 宣祖 23(1590) 刊.
1冊(56장) 四周雙邊,半郭 24.7×17.1cm. 有界. 半葉 10行 19字. 註雙行.
內向3葉花紋魚尾. 36.1×23.1cm. 線裝.
序: 歲在乙已(1305) 陽復之月前進士武夷熊禾序時大德之九年也.
跋: 成化二十二年(1486) 歲次丙午秋九月甲子 […] 淳安徐貫謹識.
印記: 宣賜之記.
內陽記: 萬曆十八(1590) 九月日 內賜行副護軍朴世賢孝經大義諺解合部一件命除謝恩.
紙質: 楮紙.
備考: 朱文公作孝經刊誤以古文定為經一章,傳十四章,合一千七百八十字內刪去
二百二十三字.

이상 목록에서 판본사항 가운데 중자 재주 갑인자판(中字再鑄甲寅字版)이라 적혀 있지만 실은 을해자체 경서자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75년 9월 발행한 이 목록을 작성할 때는 경서자의 명칭이 확정되지 않았고, 당시 이 활자인본을 재주갑인자 인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에 그러하다. 임금이 부호군에 내린 날짜와 내사기의 형식이 장운익에게 내린 기록과 같고 서책의 형태적 특징도 거의 같다. 목록 가운데 형태 부분에 있어 행자수 10행 19자가 나온다. 이는 존경각문고본 10행 18자와 다른데, 이는 존경각문고본 목록 작성 시의 단순한 오기로 볼 수 있다. 존경각문고본 영인 자료에는 모두 10행 19자임이 확인된다. 동시에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본이 1책 56장만 남아 있고 이는 한문본만 남아 있어서 실물 확인을 해야 한다. 이 책은 이후에도 이어서 간행, 동일한 계통으로 영조 13년(1737)에 시강원에 내려준 것과, 순조 3년(1803) 태인에서 전이채(田以采) 등이 판각된 것이 대표적이다. 태인본은 민간에 판매용으로 찍은 방각본으로 널리 보급된 판본이다. 권말에는 ‘숭정 기원후 계해 십월일 태인 전이채 박치유재(崇禎紀元後癸亥十月日泰仁田以采朴致維梓)’의 간기가 있다.

2) 훈련도감자본 계열

훈련도감자본 계열의 『효경대의』는 경문이 대자본과는 달리 중자로 간행되었으며 행자수가 10행 16자다. 가장 오래된 것은 17세기 초엽 경오자체 훈련도감자로도 간행된 것이다. 그 이후 이를 바탕으로 번각본도 나왔다. 번각본 제작 당시의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이 내린 승정원의 답으로 나라에서 쓸 『효경대의』 2백 건은 전국에 나누어 보냈으며 4백 건은 이를 펴주라고 전교한 글을 볼 수 있다. 이 때 나누어준 책으로 현전하는 것이 인조 9년(1631) 10월에 태백산과 오대산 사고, 강화 등에 내린 책으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남아 있고 이는 모두 경오자체 훈련도감자를 번각한 목판본이다.

한편 중자본 계열 판본 가운데 개인이 소장한 목활자 본으로 남은 것도 있다. 전체적으로 덧칠되어 있으므로 판본 확인이 어렵다. 판식은 사주 쌍변, 반곽 23.5*157.2cm, 유계, 10행 17자, 주쌍행, 상하내향흑어미로 훈련도감자본과는 다르다. 선조 37년(1604)에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의 15건을 활자로 간행한 기록이 있는바, 이 책이 그 간본일 가능성이 있다.

3) 정유자본(丁酉字本) 계열

중자로 인쇄한 세 가지 가운데 정유자본 『효경대의』는 정조 무렵 제작된 금속활자인 정유자로 간행되었다. 이를 밑글로 고종 11년(1874) 원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보양청(輔養廳)에서, 다시 고종 16년(1879)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시강원(侍講院)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10행 18자의 판식을 보이고 있다.

언해를 필사하여 덧붙인 『효경대의』는 이 판본을 밑글로 하고 있다. 책의 아래 부분에 언해를 필사해서 덧붙인 자료는 규장각 소장본과 국립도서관 일산문고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산문고본은 일산 김두종의 문고로 구한말 이후 궁인 출신으로 유명한 서화수집가였던 이병직의 소장인이 찍혀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본문 속에 약체구결을 필사하고 더하여 경의 정문(正文)에 필사한 언해를 덧붙여놓은 것이다.

특히 나이 어린 세자에게는 기초 언어 교육과 함께 『효경』과 같은 가치 교육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경종·진종·장조·익종·헌종은 열 살 미만에 세자로 책봉되었기에 『효경』과 같은 경문을 학습용으로 쓰였다.

춘방장 판본은 편식으로 보아 정유자본과 같은 10행 18자본이다. ‘기묘신간 춘방장판(己卯新刊春坊藏板)’이란 간기를 새겼는데, 고종 17년(1880) 7월 10일 시강원책역소일기(侍講院冊役所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 所用되는 初·再·三紙와 千字文, 童蒙先習, 通鑑, 史略, 續史畧, 七書, 孝經, 小學, 禮記, 春秋, 綱目, 全韻玉篇 합쳐 5,125冊의 冊面張 세 곳에 官印을 찍을 때에 所用되는 印靑, 唐靑花墨 등의 物力을 정히 헤아려서 마련하여 급히 輸送해 오는 것이 마땅히 할 일이다. …”

이 기록으로 세자궁에 들일 책자와 그 장수, 그리고 목판의 보존을 위하여 소금물에 찌는 과정 및 관인을 날인한 내용까지 살필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8월 15일에도 하교하기를, “세자가 볼 새로 만든 효경과 구건(舊件) 효경을 모두 들이라. 신건(新件) 효경 1책과 구건 효경 10책을 안으로 들이라.” 하고 또, “신건 효경 대주(大註)가 토(吐)가 없으니 속히 토를 달아 들이라.”고 하여 토를 달지 않은 새로 편찬한 효경에 토를 달게 하여 세자의 학습용으로 썼음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효경언해』 1종, 『효경대의』 2종의 책판 실물이 소장되어 있다. 『효경언해』는 간지 미상이나 1879년의 춘방장 판본의 책판으로 추정된다. 『효경대의』는 1874년 보양청, 1879년 시강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4) 대구방각본 및 그 밖

일제 강점기 대구의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에서 간행한 『효경대의』와 『효경언해』, 또한 서울의 천일서관 간본이 전통 인쇄방식으로는 거의 끝 무렵에 인쇄된 책으로 보인다. 재전당본은 태인 방각본을 가져다가 다시 간행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 판각한 것도 드러난다. 재전당서포 외에도 방각본으로 『효경대의』 등을 유통한 출판사로는 박문서관(1917), 천일서관(1919) 등을 들 수 있다.

5) 목판본 반사본(頒賜本)

조선 현종 7년(1666) 10월 23일에 임금이 내려 편 목판본으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가운데는 정태화, 송준길에게 반사한 책이 남아 있다. 사주 쌍변, 10행 19자, 상하 내향 혼입화문어미의 판식을 가진 이 책은 같은 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에게 반사한 책도 전해진다(계명대 소장).

현재 국내에 소장된 『효경언해』들은 활자본의 저본으로 방점 표기는 물론 ‘△’이나 ‘ㆁ’의 표기가 상당 부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언해문의 순수국어뿐만 아니라 한자의 주음(註音)의 경우도 같다. 따라서 이들은 근대국어 시기에 간행된 것이라 하겠다.

3. 『효경간오』와 『효경대의』의 구성과 체재

『효경간오』의 구성체재가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앞선 연구에서 상당 부분이 밝혀졌다. 현전하는 간본으로서 후대에 지속적으로 간행된 전주판 『효경간오』를 들 수 있다. 초기 인본의 구성은 경(經)과 전(傳)으로 엮여졌고 『고문효경』의 19장은 규문장(閨門章)으로, 효경정의에 없었던 글이다. 『효경간오』의 전 12장은 『효경대의』의 전 12장과 같다.

전주판 『효경간오』는 『금문효경』에 비하여 몇 개의 한자가 더하기는 하였으나, 『금문효경』에 있던 『시경』, 『서경』에서 인용된 구절을 줄이고 그 양의 차이가 큰 편이다. 전주판 『효경간오』의 본문은 『효경대의』의 본문이나 『주자대전』가운데 있는 『효경간오』와 이렇다 할 차이가 없다.

판본상으로 보면 경서자본 『효경대의』 이후로는 동정의 주로 주석본이 쓰였다. 그 이전에는 주자의 『효경간오』가 활용되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전주판 『효경간오』, 주자대전 가운데 『효경간오』, 『효경대의』 등 세 가지 간본의 본문 내용을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글자가 다름의 경우, 전주판 『효경간오』 제1장에 ‘女’가 『주자대전』 안의 『효경간오』나 『효경대의』에서는 ‘汝’로 드러난다. 『효경대의』의 ‘辟’은 다른 간본에서 ‘避’로 나타난다. 문장의 종결조사인 ‘也’가 주자대전의 『효경간오』나 『효경대의』에는 보이나, 전주판 『효경간오』본에는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다른 글에서도 비슷한 실례가 많다. 또한 전주판 『효경간오』의 ‘言’이 다른 판본에서는 ‘道’로 드러나고 전주판 『효경간오』의 ‘以下’가 다른 판본에서는 ‘已下’로, ‘於’가 ‘于’로 나타난다. 한문 표기의 표준화가 필요하였다. 전의 머릿장과 전 2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의 ‘弟’가 다른 판본에서는 ‘悌’로 나타난다. 전 4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의 ‘侮’가 다른 판본에서는 ‘失’로 글자가 바뀌어 실렸다. 전 6장은 『고문효경』에서 부모생속장(父母生續章), 효우열장(孝優劣章)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한 장으로 합친 문장이다. 이 때 전주판 『효경간오』는 접속부사로 ‘故’를, 『주자대전』은 ‘子曰’을 사용하였다. 『효경대의』는 접속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 7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와 『주자대전』에 쓰여진 ‘此’가 『효경간오』에서는 빠졌다. 전 9장에서는 전주판 『효경간오』에 쓰인 ‘也’가 다른 판본에는 없어지기도 하고 전주판 『효경간오』의 ‘云’이 다른 판본에서는 ‘曰’로 기재되었다. 전 10장에서는 『주자대전』의 ‘至’가 다른 판본에서는 ‘致’로, 전주판 『효경간오』의 ‘親’이 다른 책에서는 ‘先’으로, ‘弟’가 ‘悌’로, ‘於’가 ‘于’로 바뀌어 나타난다. 전 11장에서는 전 2장과 마찬가지로 전주판 『효경간오』의 ‘弟’가 다른 책에서는 ‘悌’로 나타난다. 전주판 『효경간오』와 『주자대전』의 ‘是故’가 『효경간오』에서 ‘是以’로 나타난다. 전 12장 전주판 『효경간오』의 ‘已乎’가 다른 판본에서는 ‘矣乎’로 나타난다. 전 13장 전주판 『효경간오』에는 다른 판본에서 나타나지 않는 ‘言之不通也’의 5글자가 더 실려 있다. 또한 전주판 『효경간오』와 『주자대전』의 ‘弗’이 『효경간오』에는 ‘不’로 바뀌어 있고 전주판 『효경간오』에는 ‘又’가 빠져 있으나, 『주자대전』과 『효경간오』에는 실려 있다.

전 5장, 전 8장, 전 14장에는 달리 실린 글자가 없다. 『주자대전』 가운데 『효경간오』에서 밑줄로 표시한 것은 『주자대전』의 주석에서도 보이듯 문맥에 맞지 않아 없이 하려던 부분이다. 마침내 『효경간오』에서는 이를 고려해 빼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을해자체 경서자 한문본 『효경대의』와 한글본 『효경언해』는 합본하여 간행되었지만 별도의 책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이는 이 책이 처음 소개될 때, 한글자료를 중심으로 영인하면서 사기, 서문, 지문(識文), 언해본문, 발문 등의 내용만 소개하였고, 이후에도 이 영인 자료가 다시 영인 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효경언해』 판본상의 특징

체재는 먼저 원문을 썼는데 한자는 각 자마다 주음을 하고 구결을 달았으며 언해는 한 자씩 낮추어 쓰고 인명이나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작은 글자를 두 줄 종서로 하여 협주(夾註)를 달았다.

목판본 중에는 난외(欄外)에 ‘宗祀之宗從註疏釋(14ㄱ), 親生之親從註疏釋(14ㄴ), 遐不謂 矣從詩傳釋(19ㄱ)’과 같이 언해 상 참고해야 할 부분에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각각의 장구 끝에 ‘右() 經一章이라’와 같은 후렴으로 밝혀 놓고 ‘右(올() 겨티니 웃 그를 닐은 말이라)() 經 () 章이라’와 같이 협주와 언해를 붙였다.

원간본인 활자본과 중간본인 목판본에서 보이는 언어상 차이로는 먼저 구결에서의 차이다. ‘刑于四海니/리니(3ㄱ), 右 ··· 釋至德以順天下하니라/다(8ㄱ)’ 등이다. 또한 목판본은 번역체로 보아 활자본보다 직역체에 가깝다. 활자본에서의 고유어가 목판본에서는 한자어로 바뀌거나, 활자본에서의 동사적 표현은 목판본에서는 명사적 표현으로 바뀐다. ‘어딘 침이/德敎ㅣ(3ㄱ), 홀아비와 홀어미/鰥이며 寡(11ㄴ), 병잠개예 해이니/兵니(17ㄱ)’ 등.

다음으로 어휘의 변화다. 말하자면, ‘아븨 令(〉긔걸, 22ㄴ), 벼슬의(〉구위예, 21ㄴ), 伯과 子과 男가(〉에여, 11ㄱ)’ 등의 보기를 들 수 있다.

『효경언해』 원간본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가 소장하고 있다. 후대의 목판본들도 대체로 초간본의 언어와 비슷하다. 간년이 확실한 목판본으로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현종 7년(1666)의 내사기를 가진 책이 가장 오래다.

5. 시대별 『효경』의 위상

춘추전국의 말엽, 전한(前漢) 초에 지은 『효경』은 유교 윤리 사상의 알맹이라 할 효(孝)의 원칙과 규범을 실은 책이라는 점에서 유자들의 전범이 되었다. 황제 같은 통치자들에게 『효경』은 효치가 곧 충치로 이어지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구실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정 윤리에도 부합하는 절묘한 길이었다. 『효경』이야말로 엄청난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전이었다.

이 같은 효치란 한당대(漢唐代) 정치·사회를 이끌어감에 있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주희(朱熹)는 생각이 달랐다. 본디 『효경』이 갖고 있던 존엄성과 『효경』의 정치이념인 효치론(孝治論)을 단호히 부정하고, 이를 쇄신하고자 『효경간오』를 재구성했으며, 『효경간오』는 그 뒤 동정(董鼎)의 주석을 통하여 『효경대의』로 그 명맥을 더욱 튼실하게 다져 갔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설총이 앞장서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도입한 『효경』을,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은 물론 그 뒤로 조선시대까지 유학 교육의 주요 경서 중 하나로서 중시되었다. 특히 왕세자들의 교육의 디딤돌이 되었으니 교육적인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별 유학의 주류적 흐름은 한당 유학에서 북송 유학으로, 다시 주자의 성리학 등으로 계속 그 성격이 바뀌면서 영향관계가 달라졌다.

사대부들의 필수 경전이었던 『효경』은 삼국시대 처음으로 도입된 이래로 조선 전기까지 계속 변화하다가, 16세기 후반에 들어서 실용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효경대의』가 들어온 뒤로는 『효경대의』로 정착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시기에 따라서 유학의 성격 규정과 경전의 변모는 당대인들이 『효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관점에 상당한 변모를 가져왔다. 따라서 각 시기별로 『효경』을 이해하는 양상이나 경전이 갖는 학문과 사회적인 자리매김도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 글에서는 『효경』 텍스트가 『효경대의』로 고쳐지는 16~17세기 초엽까지로 한정하여 조선 전기의 『효경』의 자리매김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의 『효경』에 대한 인식론적인 면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대와 고려의 『효경』 학습에 이어 조선 전기의 『효경』 학습을 대조해 가면서 각 시기별 『효경』의 자리매김의 차이와 그 배경을 동아리하였다. 이어서 조선 전기에 『효경』 텍스트에 대한 변화 과정과 그에 따른 조선조 학자들의 『효경』에 대한 인식의 면모를 살펴보고, 이어 조선시대 『효경』 교육의 한 보기로써 세자 교육에 『효경』 교육과 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한다(강문식(2012) 참조).

5.1. 고대-조선 전기 『효경』의 영향

(1) 국학(國學)의 필수 교과

고대 시기의 『효경』에 관련한 기록은 거의 영성하다. 해서 당시의 『효경』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백제의 석학이었던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이 『논어』와 『효경』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태자를 가르쳤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이른 시기에 『효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효경』의 사회 교육적인 비중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다. 경덕왕 2년(743) 당나라 현종이 주석을 한 『어주효경(御注孝經)』 한 부가 당으로부터 들어왔다. 이어 경덕왕 6년(747)에는 국학 교육과정에 세 가지를 강좌를 설치하여 국학의 학생들을 교육했는데, 이때 『효경』이 『논어』와 함께 교육의 대들보라 할 필수 과목으로 교습되었다.

다시 원성왕 4년(788)에 설립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서도 『효경』은 상·중·하품의 모든 과거시험 과정에서 변함없는 필수 과목으로 학습을 요구하였다. 국학과 독서삼품과의 운영 내용을 볼 때, 『효경』은 통일신라의 국정 교육 과정과 인재 등용 과정에서 『논어』와 함께 가장 근간이 되는 필수교재였고, 따라서 통일신라 유학의 중심 경전 중 하나였다.

국학의 중심 교과인 『효경』의 자리매김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고려 초엽 『효경』 교육의 실상을 보여주는 실증 자료가 없다. 그런데 문종 10년(1056) 서경 유수가 진사과나 명경과를 준비하기 위하여 서경 안에 자리한 여러 학교에 마련해 주기를 요구한 서책에 『효경』이 들어 있다. 『효경』이 국자감 교육과 인재 등용의 주요 과목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또 고려 인종 무렵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는 국학을 동아리하여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3학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은 학식을 제정 공포하였다.

경전은 주역(周易)과 상서(尙書), 주례(周禮)와 예기(禮記), 모시(毛詩)와 춘추(春秋)의 좌씨전(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을 각각 1경(經)으로 삼았으며 『효경』과 『논어』는 반드시 배우도록 하였다. 학생들의 수업 연한은, 『효경』과 『논어』 두 교과는 1년을 기한으로 한다. 많은 교과가 있으나 모든 학생은 먼저 『효경』과 『논어』를 읽고, 다음에 다른 경서와 함께 산(算)을 읽고 시무책(時務策)을 배운다. 여가가 있으면 반드시 서(書)를 겸하여 익히는데 하루에 한 장씩 하도록 한다.

마침내 『효경』은 3학 모두에서 『논어』와 함께 국학의 생도들이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하는 기초 필수 과목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한편 『고려사절요』의 고종 때 기록을 살피면, 국자감에서 매 4계월(季月)에 학습생들에게 『논어』와 『효경』의 시험으로 인재를 뽑아 이부에 보고하면, 이부에서는 이들에게 공직을 주었다. 이는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여 약식으로 보는 시험인바, 이 경우에서도 『논어』와 『효경』이 취재 시험 과목으로 특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조에서도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효경』이 『논어』와 함께 국학 교육과 인재 선발의 저울이 되었다. 해서 고려의 학자들은 『효경』을 여러 경서 중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할 교과로 인정했으며, 이는 고려 후기까지도 이어졌다. 이규보가 자제들에게, “백가와 천사를 모두 연구해야 하지만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을 깊이 알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충목왕에게 『효경』과 사서(四書), 그리고 오경(五經)의 순서로 학문의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을 촉구한 것으로 보아 『효경』을 학문 수련의 첫 번째 길목으로 인식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곡·이색으로 대표되는 고려 후기 학자들이 『효경』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효경』은 당시 학자들의 학습의 터전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효경』이 국학 교육과 인재 등용의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중시되었던 근본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일신라와 고려 모두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왕 중심의 관료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던 시기와 국학에서 『효경』 교육이 강화된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통일신라에서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후반까지의 신문왕대를 거치면서 국학 설치와 유교 교육 강화, 지방행정체제 확립, 중앙관제 및 군제 개혁, 관료전 지급과 동시에 녹읍 폐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귀족을 억제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또 고려에서도 예종·인종 대에 왕권의 회복과 정치기강의 확립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학제와 과거제 개혁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들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한당대의 『효경』은 가정을 천하의 기본으로 보는 가천하적(家天下的) 정치론과 효치론(孝治論)을 통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황권 강화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에서 주로 읽혔던 『효경』 교과는 대부분 한당대에 유행했던 『금문효경』이었다. 말하자면 통일신라 및 고려의 『효경』의 자리매김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당대 『효경』 이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의 학자들은 중국 왕조와의 학술 교류를 통해 한당대에 유행했던 『효경』을 받아들였고, 『효경』을 통해 황권 강화라는 지상의 가치를 이끌어 내려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효치론은 곧 충치론이라는 이론적인 틀을 신라와 고려의 정치 개혁에 적용하기 위해 국학 교육과 인재 등용에서 『효경』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2) 아동의 기초 학습 교과, 『효경』

여말선초의 성리학자 권근(權近)은 『효행록후서(孝行錄後序)』에서 『효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 부여를 하였다.

“예전에 공자가 『효경』에서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에 털끝 하나 살 한 점 상하지 않음에서 시작, 마지막 산소에 편안히 안장하는 데까지 빠뜨리지 않고 모두 말하여 만세를 훈계했으니,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권근은 이 글에서 『효경』이 공자의 저술이며, 『효경』안에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확연히 하였다. 또 권근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첨(李詹)도, “『효경』의 전질을 익힌 뒤라야 어버이를 섬기는 처음과 끝이 갖추어졌다.”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효경』 학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여말 선초의 학자들은 『효경』을 ‘어버이 섬김의 도리가 담긴 경서’로 인식하였다. 마침내 『효경』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 내내 이어졌다.

『효경』이 학습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익혀야 할 필수 교재로 인식된 것은 외형적으로는 고려와 조선 전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효경』의 자리매김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제까지 선비들이 공직에 나아가려면 『효경』을 반드시 학습해야 했다. 조선 전기로 오면 『효경』은 공직 진출을 위한 학습이 아니고 이제 막 글을 익히기 시작한 아동이나 초학자들이었다. 즉, 조선에 들어서면서 『효경』을 공부해야 하는 목적에 변모가 나타난다. 김종직(金宗直)도 여섯 살 때부터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배울 때, 먼저 동몽수지(童蒙須知)와 유학자설(幼學字說), 그리고 정속편(正俗篇)을 공부하고 이어서 소학(小學)과 『효경』을 익혔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16세기의 문집을 보면 당시 학자들은 대체로 어릴 때 학습을 처음 시작할 무렵 거의 대부분이 『효경』을 배웠다. 15세기 무렵에 지어진 묘지명을 보면,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효경』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왕왕 나타난다. 또한 집에서 아이들에게 『효경』을 가르친 주체가 주로 어머니였음을 알 수가 있다. 『효경』은 여성들에게도 필수 학습 교재였다. 조선 전기에 들어와서 『효경』은 아동의 학습의 필수 교과라는 자리매김을 갖게 되었다.

조선 중기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퇴계선생언행록』에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자손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효경』과 『소학』 등을 먼저 가르쳤고, 어느 정도 문리가 통한 다음 사서를 가르쳤으며 단계를 뛰어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효경』을 깊이 연구해야 할 경전은 아니고,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문리를 얻게 하기 위해 가르치는 기초 교재 정도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은 조선 전기 『효경』의 위상은 신라-고려시대에 비교해볼 때 크게 낮아졌다. 조선 전기에 『효경』의 위상이 낮아진 직접원인은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사회 운영의 사상적 기반으로 대학을 중요한 경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그에 따라 한당대의 정치론을 대변하던 『효경』이 조선에서 국정 운영 방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여지는 『대학』에 비해 훨씬 좁아졌다. 마침내 『효경』은 국학의 필수 교과에서 초학자나 아동의 학습의 교과로 남게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효경』의 자리매김이 인재 등용의 과거 과목에서 빠짐으로써 그런 변화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세종 때 판부사였던 허조는 『효경』이 중시되지 못하는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판부사 허조가 장계를 올렸다.

“『효경』과 『소학』은 모두 처음 배우는 자가 마땅히 먼저 탐독할 서책입니다. 하지만 『소학』은 과거를 볼 때 필요하기 때문에 선비들이 열성으로 『소학』을 읽지만, 『효경』은 세상의 초학자들이 전혀 읽지 않습니다. 청컨대, 경연에서 자구를 풀이한 『효경』을 간행하여 초학들을 가르치게 하소서.”

여기에서 허조는 『효경』의 자리매김이 낮아진 중요한 연유로 『효경』이 과거의 시험과목에서 제외된 점을 들고 있다. 다만 유학의 기초 학습서라는 점에서 『효경』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소학』은 과거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학자들이 좋든 싫든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조도 그의 장계에서 『효경』 경시에 대한 대책으로 『효경』의 간행과 보급 및 교육의 강화를 주장했을 뿐이다. 허조의 장계 이후에도 『효경』의 자리매김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이러한 『효경』의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 본질적인 비판을 한 사람은 백운동서원을 세운 학자 주세붕(周世鵬)이었다. 주세붕은 송인수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당시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효경』을 가장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소-대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마침내 『효경』을 소아지서(小兒之書)라 하여 소홀히 하게 되었고 심지어 경연에서도 『효경』을 중시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시 주세붕은 공자가 엮고 정리한 6경 가운데,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책은 『효경』이 유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효경』이 공자의 저작이며 6경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서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현실의 『효경』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6경이나 사서와 나란히 서지 못함으로써 『효경』의 지덕(至德)·요도(要道)는 사대부들이 존숭하는 바가 되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이상과 같은 주세붕의 비판은 당시 사람들의 『효경』 인식에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세붕은 『효경』의 핵심어를 효제(孝悌)로 규정하였다. 효제는 화목의 근본이 되며 이 도의를 실천한다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듦은 손쉬운 일임을 강변하였다. 주세붕이 제기했던 『효경』에 대한 인식 전환의 방향은 『효경』을 나라 다스림의 경서로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세붕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효경』의 위상은 더 이상 이전 시대와 같은 정치사회적 중요성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5.2. 『효경』의 교육 기능

(1) 『효경』 판본의 변화

경서의 학습에서 『효경』은 어떤 텍스트로 사용되었을까. 텍스트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따라 학습과 연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유행했던 『효경』 판본은 한당 대를 휩쓸었던 『금문효경』에 기반한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통일신라의 국학에서 『효경』 교육이 강화되기 이전에 벌써 당으로부터 『어주효경』이 들어왔었다. 이 책은 『금문효경』을 바탕으로 하면서 『고문효경』의 미덕을 부분적으로 기워 엮은 판본이다. 고려의 경우, 광종 10년(959)에 고려에서 사신을 통해 후주(後周)에 별서효경(別序孝經),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황령효경(皇靈孝經),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등을 보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정현은 『금문효경』을 탐구한 대표적인 학자이고, 『효경정의』 역시 금문 계열인 『어주효경』에 기반하고 있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적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고려 말엽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들어와 학습과 연구에 활용되었다. 『효경』의 성리학적 텍스트로는 주희가 『고문효경』의 장점만을 골라 엮은 『효경간오』와 원나라의 동정이 『효경간오』를 바탕으로 주석을 덧붙인 『효경대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경서들의 성리학적 텍스트들이 고려 말부터 들어와 간행되어 유통되었던 것과는 달리, 『효경간오』와 『효경대의』의 도입과 간행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효경』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면, 김인후의 『효경간오발』(1546) 이전에는 『효경간오』나 『효경대의』에 대한 의견이 보이지 않는다. 또 앞에서 검토했던 주세붕의 『여송참판미수(與宋參判眉叟)』 가운데에는, “내가 『효경』 18장을 보니 그 말이 다함이 없다.”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18장은 『금문효경』을 뜻한다.

고려 말엽과 조선 전기에 간행된 『효경』 텍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는 첫번째 자료는 여말선초의 학자 이첨이 지은 『신간효경발』이다. 이 글에 따르면, 이첨은 당초 남굴보의 『상제도식(喪祭圖式)』을 간행하고자 했다. 『신간효경발』에서 이첨은 김거두가 보내온 『효경』을 보았다. “과연 삼산이 주석한 바다.[果三山所註也]”라고 설파한다.

『신간효경발』에는 이 삼산 임씨가 누구인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최근 이재영(2007)이 처음으로 밝힌 고려본 『효경』에서 삼산 임씨에 대한 실마리를 알아냈다. 고려본 『효경』은 현재 나라 안에 남아 있는 『효경』 판본 가운데 간행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머리에 충숙왕 3년(1316) 임화보(林華甫)가 지은 자서(自序)가 실려 있고, 본문 첫머리에도 ‘삼산 후학 임화보 찬주(三山後學林華甫纂註)’라고 주석한 이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이는 이 첨이 확보한 『효경』의 서문과 주석을 지은 이가 삼산 임씨라는 점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첨이 기술한 삼산 임씨는 임화보임을 가늠할 수 있다. 다만 임화보는 원의 학자라는 것만 확인될 뿐, 그 밖의 이력은 알 수가 없다.

고려본 『효경』에는 이첨의 발문이 없다. 달리 공민왕 22년(1373) 영해군수 한충호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이첨이 간행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삼산 임씨의 주석을 저본으로 한 점, 상례·제례에 관한 그림이 부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본 『효경』과 이첨의 간행본은 다르지 않다. 특히 한충호의 발문을 보면, 고려본 『효경』의 저본도 처음부터 완질이 아니고 세 집에서 나온 낙질을 모아 완질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이첨의 발문에서 다룬바, 『효경』 완질본의 형성 과정과 같다. 또한 낙질이 나온 세 집의 성씨나 각각의 낙질에 실린 범위도 이첨의 발문 내용과 같다. 마침내 이첨이 간행한 『효경』과 현전하는 고려본 『효경』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첨은 여러 경로를 통해 마련한 『효경』 완질을 저본으로 하여 『효경』을 새로 간행하였다. 그는 또 『신간효경발』의 마무리에 당시 『효경』 간행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아, 하나의 책이 세 집에서 뒤섞여 나왔으매 이제 다시 합해져 하나가 되었다. 물(物)은 끝내 헤어지지 않으니,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학자들이 (이 책을) 쉽게 배우기만 한다면 이 책을 간행하는 데 이와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에 그 일의 처음과 끝을 갖추어 새로 간행한 서책의 뒤에 실어놓는다.”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첨 조차도 『효경』 완질을 구하기 어려웠다면, 다른 학자들은 『효경』의 완본을 구함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효경』 판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계기는 주희의 『효경간오』가 들어온 뒤라고 볼 수 있다. 『효경간오』에서 주희는 이른바 효치론(孝治論)으로 일컬어지는 한당의 『효경』을 비판하고 나서 『효경』의 원문을 빼고 정리하여 경 1장 전 14장 체재로 재구성하였다. 성리학 성격의 『효경』 인식의 중심에 서는 판본이다. 김인후는 명종 1년(1546) 『효경간오』를 간행하면서 그 발문을 지었다. 발문에 따르면, 김인후는 옥과(玉果) 현감으로 있을 무렵 『효경』을 간행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언관에서 물러나 낙향하던 유희춘이 옥과에 들렀다가 『효경간오』 진강본(進講本) 한 질을 줌으로써 이를 저본으로 간행했다.

특히 유희춘이 김인후에게 준 『효경간오』는 진강본, 즉 경연이나 서연에서 진강되던 책이었다. 이로 보면 명종 원년 이전에 벌써 『효경간오』가 들어와서 왕실교육용으로 활용되었음을 알겠다. 이 판본은 왕실은 물론 사대부가와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효경간오』 발문에서 김인후는 우선 『효경』이 공자 문중에서 전해온 책이며, 선비들이 초학을 가르칠 때 『논어』와 함께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던 경서였다는 것, 한대 이후 본의가 흐려지고 체재가 흐트러진 『효경』을 주희가 손을 보아 『효경간오』를 엮은 사실 등을 책의 발문에서 밝혔다.

“송나라 주자에 이르러 비로소 그 잘못된 것을 줄이거나 다시 정리하였다. 또 주자가 일찍이 그에 대한 외전(外傳)을 지으려 했다가 결국에는 전을 세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뜻이 있는 듯하다. (중략) 경신(敬身)은 어버이를 공경함이니 『효경』에서 말하는 ‘효지시(孝之始)’가 이것이다.”

여기에서 김인후는 『소학』의 글 차례가 『효경』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 『효경』의 중심 내용들이 『소학』에서 원용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말하자면 김인후는 주희가 『소학』을 엮을 때 『효경』을 머리에 두고 그 본의를 좀더 밝히는 흐름으로 『소학』을 엮었다고 본 것이다. 해서 주희가 『효경간오』를 엮은 뒤 별도의 외전을 지어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김인후는 『효경』을 읽는 사람은 모름지기 『소학』을 언덕 삼아 하늘 섬김의 지극한 공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효경』은 『소학』과의 관련 속에서 『효경』의 참된 뜻을 탐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효경』의 의미를 『소학』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함은 김인후 혼자만의 견해는 아니다.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이(李珥)의 『성학집요』다. 『성학집요』는 통설(通說) · 수기(修己) · 정가(正家) · 위정(爲政) · 성현도통(聖賢道統)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정가 제2장에 『효경』이 많이 인용된다. 『성학집요』의 『효경』의 인용 사례를 들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우리 몸의 살과 터럭은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이매 감히 상하게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효도의 비롯됨이다. 세상에 나아가 출세를 하고 사람의 도리를 행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김으로써 그 어버이를 드러냄은 효도의 마침이 된다. 무릇 효라 함은 어버이 섬김에서 시작하고 임금을 섬김을 가운데로 하며 도덕적인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완성함을 마침으로 한다. -효경(하)와 같다. 오씨가 말하였다. 사람이 되어 어버이가 낳아주신 몸을 스스로 아끼매 감히 일그러지게 하랴. 이는 효도의 비롯됨이 되기에 때문이다. 능히 출세를 하고 도리를 행하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야 한다. 이는 효도의 마침이 되기에 그러하다.[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孝經』同 吳氏曰 人子之身 父母之所遺 自愛而不敢虧 所以爲孝之始也 能立身行道則己之名揚於後世 而父母之名 亦顯矣 所以爲孝之終也]”

보기에서와 같이 율곡은 『효경』의 원문을 먼저 기록하고 끝에 세주로 ‘효경’이라고 써서 인용의 출전을 밝혔다. 그 다음에 줄을 바꾸어 해당 구절에 대한 주석을 함께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위 인용문 가운데 나오는 오씨(吳氏) 주석이 『효경』 관련 주석서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다. 『소학집주』에 실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성학집요』에 원용된 모든 『효경』 구절에서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는 율곡이 『효경』의 속내를 『소학』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앞서 본 김인후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이렇게 볼 때, 비록 두 가지 사례만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김인후와 율곡이 16세기 조선 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학자들이었음을 고려하면, 『효경』을 『소학』과의 연계 속에서 접근하려는 관점은 상당 부분 보편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효경』 판본은 『효경대의』가 들어옴으로써 그 자리매김에 변화가 왔다. 『효경대의』는 원대의 학자 동정이 주희의 『효경간오』에 바탕을 두고 주석을 덧붙인 책이다. 『효경대의』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보급된 『효경』 판본이라 하여 지나침이 없다.

〈효경대의 발〉에서 서애 유성룡은 공자가 6경을 풀이한 뒤 다시 『효경』을 지어 6경 모두를 아우르게 함으로써 6경의 뿌리가 효에 있음을 밝혔다고 한 『수서』 경적지(經籍志)의 내용을 인용하고, 이를 인정한 뒤 효에 마음을 다하면 6경의 도(道)는 그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주희의 『효경간오』와 동정의 『효경대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부여하였다.

“진(秦)나라가 전적을 불사른 뒤 남은 경전이 더러 세상에 알려져 고문인 벽서(壁書)와 금문(今文)이 뒤섞여 유통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어 경전의 굴욕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데 송대에 와서 주자가 비로소 간오(刊誤)를 지어 경전의 차례를 정함으로써 공자의 옛글이 회복되었고, 그 뒤를 이어 파양(鄱陽)의 동정이 주석을 지어 그 귀취를 간절하게 서술한 뒤에야 한 경서의 조리가 환하게 밝아졌으니, 성문(聖門)에 끼친 공이 매우 크다.”

여기에서 유성룡은 송대 이전의 『효경』, 곧 한당 시대에 유통된 고문·금문의 『효경』 판본은 공자가 지은 『효경』의 원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마침내 주희가 『효경간오』를 엮음으로써 공자가 지은 『효경』의 본래 모습이 회복되었고, 『효경간오』에 따라서 주석을 붙인 동정의 『효경대의』는 『효경』의 원의를 가장 잘 풀이한 주석서로 인식되었다.

김인후와 유성룡은 모두 주희가 『효경』의 잘못된 것을 첨삭함으로써 『효경』의 참모습을 밝혔다고 하여 『효경간오』의 경전으로서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주희는 한당대의 ‘효치론’에 기초한 『효경』에 대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독자적인 정치론을 기반으로 『효경』을 줄이거나 새로이 엮어서 『효경간오』를 엮었다. 안타깝게도 김인후와 유성룡의 발문에는 주희가 가졌던 문제의식, 곧 한당대의 효치론에 대한 비판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김인후·유성룡 등이 주희의 『효경간오』를 『효경』의 원형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정작 주희가 지녔던 『효경』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조선 전기의 『효경』은 학자들이 깊이 있게 살펴볼 경학의 대상이 아니고 초학자나 아동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기초 학습의 교재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리 하건대, 조선 전기의 『효경』 판본은 『금문효경』에서 『효경간오』로 다시 『효경대의』로 성리학적인 교본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위와 같은 『효경』 교본의 변화가 본질적인 『효경』 파악에는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2) 왕실 교재로서 『효경』

『효경』에 대한 소극적인 인식의 상황에서 부분으로나마 조선 전기 『효경』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왕실에서의 『효경』 학습 기록이다. 이에 이 절에서는 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왕실 교육에서의 『효경』 인식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효경』이 아동들의 기초 학습서로 사용되기는 왕실 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부터 왕실 교육의 중요한 교본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왕실에서 『효경』 교육은 주로 세자를 비롯한 대군이나 공주 등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더러 국왕을 대상으로 하는 경연에서 『효경』이 강론되기도 하였다.

서연에서 원자나 세자에게 『효경』을 강론해야 한다는 제의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태종 2년(1402) 6월 사간원에서는 당시의 시무(時務)를 정리해서 태종에게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자의 입학에 관한 안이었다. 사간원에서는 원자가 제2의 임금이므로 어릴 때부터 학문을 통해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학덕이 높은 학자를 가려서 시학(侍學)의 책무를 맡기고 날마다 서연을 열어 『효경』을 강습할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세조 3년(1457) 9월에 왕세자가 돌아가자, 의정부는 같은 해 11월에 뒤에 예종이 되는 해양대군(海陽大君)의 왕세자 책봉을 청원하는 사신을 명나라 에 보낸 다음 해양대군에게 본격적인 왕세자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그때 우선하여 학습한 교본이 바로 『효경』이었다. 그 밖에도 성종이나 명종 대의 원자나 세자 교육에 『효경』을 통하여 왕실의 효도에 관한 학습을 시켰음을 알 수가 있다.

Ⅴ. 『효경언해』의 국어학적 특징

『효경언해』의 구성은 먼저 원문에 정음 구결이 있고 그 뒤로 언해문이 자리한다. 동시에 구결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읽기를 위한 독음이 달려 있다. 선조 23년(1590)에 간행된바, 그 영인본으로 존경각문고본이 있고, 철종 무렵에 다시 중간하여 유통된 홍문각의 영인본이 있다. 이 두 판본을 살펴보면 번역문으로서의 특징은 물론이고 같은 원문인데도 쓰인 어휘나 한자의 표기, 어미나 조사, 덧붙여진 구결, 동사 표지로서 ‘-다’류 구결이나 명사 표지로서 ‘-이다’류 구결의 이본간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여찬영(2003) 참조).

1. 표기상의 특징

존경각문고본(이후 ‘존경’)과 홍문각본(이후 ‘홍문’)에서 드러난 음운 표기상의 차이는 반치음(ㅿ)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1) ㅿ의 표기

가.(존경) 汝(1ㄱ) 日(7ㄱ) 二(9ㄴ) 人(3ㄱ, 3ㄴ, 6ㄴ, 7ㄱ, 9ㄱ, 12ㄱ, 13ㄱ, 14ㄱ) 而(3ㄱ, 3ㄴ, 5ㄴ) -에(3ㄴ, 4ㄱ, 5ㄱ, 6ㄱ, 16ㄴ)

나.(존경) 聖셩人之지德덕이(13ㄱ)

셩인이 신 글월을 經경이라 니라(1ㄱ)

보기에서와 같이 한자음 표기에 ㅿ이 8번 나타나며 언해문에서는 조사에 쓰일 뿐 그 밖에는 쓰이지 않았다. 가장 많은 빈도가 보이는 것은 ‘而’인데 홍문각의 중간본에는 모두 반치음이 이응으로 표기되었다. 보기 (1나)에서 한자음의 독음 표기는 구결문에서 ‘聖셩人’으로 반치음이 보이나 언해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홍문각의 중간본에서는 반치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한자를 나란히 독음을 달아주는 병기(존경)의 경우는 어떠한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2) 한자의 병기

가. 民민用용和화睦목야(1ㄱ)

加가於어百姓셩의게더어(3ㄱ)

나. 셩이화동며친야(1ㄱ)

셩의게더어(3ㄱ)

보기 (2가-나)에서 구결문의 경우, ‘百姓셩’이 ‘셩’이나 ‘民민’의 경우가 ‘百姓셩’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언해류에서도 보이는 바, 언해하는 이에 따라서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는 없고 이표기처럼 적힌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구결문과 언해문의 한자음을 적을 때 서로간의 차이가 보이기도 함은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다.

(3) 언해본에서의 한자음(존경)

가. 卿경大대夫부之지孝효也ㅣ라(4ㄴ)

나. 卿경大태夫우之지孝효也ㅣ라(5ㄱ)

구결문에서는 ‘대부’인데 언해문에서는 ‘태우’로 적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언해하는 이들이 원어인 중국어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적는다고 한 결과로 보인다. 추정하건대 당시의 발음으로는 ‘태우’에 가까운 소리로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홍문각의 중간본에서는 오탈자의 보기들이 눈에 뜨인다.

(4) 중간본의 오탈자

가. 禮예란 거슨 고경 이라 고로 그 아비 공경면(홍문 9ㄱ)

나. 於어臣신妾쳠이니 : 臣신과 妾쳡의게도(홍문 11ㄴ)

다. 移이於어官광이니 : 벼슬의 옴기니(홍문 21ㄱ)

위와 같이 잘못된 글자나 한자의 병기음이 달려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중간본의 오탈자들은 이본으로서의 무게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아래 괄호의 번호는 본 역주본의 것임).

이와 함께 표기상의 특징으로 분철표기를 들 수 있다(아님이 孝효의 비로솜이오(2ㄴ), 兄형셤김이(21ㄴ), 귀신으로 享향며(26ㄱ)). ‘ㅂ’계 합용병서로는 ‘ 라(3ㄱ), 내디 아니(4ㄱ), 나디 아니고(24ㄱ)’, ‘ㅅ’계 합용병서로는 ‘이라(9ㄱ), 희(10ㄱ), 디디(24ㄴ)’ 등이 보인다. 각자병서로는 ‘욕까(20ㄴ)’가 유일 예로 보인다. 어말 ㄷ 받침을 보이는 예로는 ‘니라(2ㄴ), 잗뎌(22ㄱ), 벋을 두면(24ㄱ), 몯거시라(24ㄱ), 이니라(6ㄱ)’ 등이 있다. 언해문에는 ‘근본이라(2ㄱ), 예법이 되리니(3ㄱ), 법도 삼가면(23ㄴ), 실이(2ㄴ) 등에서처럼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도 많이 보인다.

2. 어휘와 문법

『효경언해』의 언해문에서 존경각본과 홍문각본의 사이에서 보이는 어휘의 상이함을 알 수가 있다. 같은 원문에 대하여 언해하는 이들의 자의적이고 자신들이 즐겨 쓰는 낱말을 골라서 썼던 것으로 보인다.

(5) 어휘상의 차이

가.(존경) 민달티몯니(1ㄴ),아쳐기(3ㄱ),어딘이(3ㄱ),법다온오시(4ㄴ), 요니(8ㄴ)

나.(홍문) 敏민티못거니와, 惡오티아니고, 德덕敎교, 法법의오시ㅣ, 善션니

이상의 보기를 통하여 존경각본에서는 언해문의 경우, 모두가 정음으로 적었다. 그러나 홍문각본에서는 원문을 중심으로 한자를 병기하고 있다. 홍문각본에서는 한자어 뒤에 ‘다’류의 동사화 접사가 붙어서 동작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와 함께 원문의 언해에서 존경각본과 홍문각본의 용언류의 어미 부분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주로 어말어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분포를 보인다.

(6) 어미의 분포

가. (존경) 근본이니(2ㄱ), 나배라(2ㄱ), 이라(2ㄴ), 되니(3ㄱ), 딕회니(5ㄱ)

나. (홍문) 근본이라, 나배라, 이니, 되니, 딕회리니

어미의 분포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구결문의 구결에 좌우되기에 그러하다. 언해하는 이의 해석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언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사의 경우는 어떠한가. 같은 원문인데 두 이본 사이의 다름은 언해자들의 해석의 차이일 뿐 아니라 문체의 차이에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보기를 들어보도록 한다.

(7) 조사의 분포

가. (존경) 天텬하(1ㄴ), (2ㄴ), 어버이(3ㄱ), 웃그(7ㄱ), 孝효에셔(8ㄴ)

나. (홍문) 天텬하를, 은, 어버이를, 웃그를, 孝효만

주로 목적격 조사의 경우인데 ‘-/를’의 아래아(ㆍ)가 홍문각본으로 올수록 줄어드는데 이는 철종 때의 아래아에 대한 음운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아래아의 쓰임이 상당한 혼란상을 보이고 그 소리도 없어져 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명사형의 선어말어미로 ‘-오/우-’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음’ 명사형이 쓰인다(아님(21ㄴ), 셤김(21ㄴ)). 하지만 선어말어미 ‘-오/우-’가 드러난 형태도 작은 분포로 보인다. ‘공슌홈(26ㄱ), 親요미(14ㄴ), 이숌(25ㄱ)’과 같은 보기들이 소수 보인다.

더러 ‘셤기기(5ㄴ), 밧고기(8ㄴ), 랑기(22ㄴ)’에서처럼 습관을 드러내는 명사형 선어말어미 ‘-기’도 보인다. 객체존대 선어말어미 ‘--, --’은 여전히 보인다. 선어말어미가 ‘밧온거시라(2ㄴ), 묻좁노니(22ㄴ), 듣왓거니와(22ㄴ)’에서 보인다. 이러한 표기들은 16세기 중세어 자료를 중간하였기 때문이다.

3. 구결문의 상이

두 이본 사이에 다르게 드러나는 경우는 주로 구결문의 외현류와 조사류, 그리고 다류와 이다류로 갈래지을 수 있다. 먼저 외현류 구결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한다. 존경각본에는 드러나지 않은 구결이 홍문각본에서는 드러나는 경우를 이른다. 홍문각본에만 드러나는 구결의 분포는 21군데인데 반하여 존경각본에는 한 군데 정도가 있을 뿐이다.

홍문각본의 경우, 구결문이 더 많다는 것은 그만큼 언해하는 이가 원문을 좀 더 서술하여 알기 쉽게 풀어 썼다는 풀이 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언해자의 언어가 훨씬 더 많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례를 들어 알아보도록 한다.

(8) 외현류 구결

가. (존경) 敬其父則子悅(9ㄱ) : (홍문)敬其父면 則子悅

나. (존경) 當不義則子(23ㄴ) : (홍문)當不義얀 則子

다. (존경) 事父ㅣ孝고로(19ㄴ) : (홍문)事父ㅣ孝ㅣ라 故로

라. (존경) 敬一人而 ( 9ㄱ) : (홍문)敬一人에而

마. (존경) 嚴父嚴兄(22ㄱ) : (홍문)嚴父와 嚴兄

바. (존경) 昔者에 明王(10ㄴ) : (홍문)昔者明王

원문을 우리말의 어순과 정서에 맞도록 표현하려면 그만큼 어미나 조사가 덧붙음으로써 국어 문장에 가깝게 된다. 홍문각본의 경우는 원문에 있는 내용들을 외현화시킨 것이다. 반대로 원문에 가까운 존경각본의 문장들은 내현화된 문장의 구성체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8바)의 경우는 위와는 반대로 존경각본에만 정음구결이 붙어있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위의 보기에서 ‘-’가 붙어 용언화된 것과, ‘이-’가 붙어 체언을 서술어로 만드는 연금술 같은 형태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체언류에는 ‘이다’와 그의 활용형들이, 용언의 어간 혹은 명사에 동작성을 드러내는 ‘다’가 붙어서 우리말의 화행적인 특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었다. (8라-마)에서 체언구에 주격조사와 접속조사가 붙은 경우다. 그런데 존경각본에서는 이들 표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내현 주어요, 서술어이다.

존경각본과 홍문각본의 구결문 조사에 값하는 조사가 서로 달리 나는 곳이 18군데나 된다. 이제 조사류 구결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본다.

(9) 조사류 구결

가. (존경) 富貴(3ㄴ) : (홍문) 富貴를

나. (존경) 愛他人者를(15ㄴ) : (홍문) 愛他人者

다. (존경) 閨門之內예(22ㄱ) : (홍문) 閨門之內에

라. (존경) 子男子여(11ㄱ) : (홍문) 子男子아

마. (존경) 兼之者(5ㄴ) : (홍문) 兼之者ㅣ

바. (존경) 然後에(4ㄴ) : (홍문) 然後에사

원문을 언해하는 이가 같은 체언이라도 주어인가, 주제어인가로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격조사로 구결을 붙일 수가 있다. 모음조화가 일률적이지 않고 조사의 형태를 자신의 습관과 입맛에 맞게 조사를 붙여 쓴 보기들이다.

이어서 한자 혹은 한문의 용언화 표지라 할 ‘-’가 붙는 경우와 ‘이-’가 붙어 용언화하는 표지를 붙이는 경우로 갈라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다와 이다류는 용언화소다. 언해하는 이가 같은 한자라도 동작상이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를 가려서 쓰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느 쪽이 더 선호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다’류가 붙어 용언화되는 보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10) 다류의 분포

가. (존경) 不敏니(1ㄴ) : (홍문) 不敏이어니

나. (존경) 如此니(12ㄱ) : (홍문) 여차ㅣ라

다. (존경) 不陷於不義니(23ㄴ) : (홍문) 不陷不義니

라. (존경) 不敢行니(23ㄴ) : (홍문) 不敢行이니

마. (존경) 有爭臣七人면(23ㄱ) : (홍문)有爭臣七人이면

위의 보기들을 보자면 같은 원문을 언해한 것인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류와 ‘이-’류가 결정되는가에 대한 흐름을 단언하기가 어렵다. 같은 뜻이면서도 언해하는 이의 원문에 대한 의미망이 다를 수 있기에 그러하다.

우리말의 문법소들이 원문에는 외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문이 응집성이 강하고 우리말로 하면 훨씬 더 길어지면서 응집성은 약하나 서술성이 강해지기에 언해자의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언해문에서 아주 높다고 본다. 용언화 표지로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가 ‘-’류와 함께 ‘이-’류가 있다. 이제 그 보기를 들어가면서 살펴보도록 한다. 홍문각본에서는 문장이 종결어미로 끝을 마감한 것이다.

(11) 용언화 표지 ‘이-’류의 분포

가. (존경) 無怨惡ㅣ니(4ㄴ) : (홍문) 無怨惡니

나. (존경) 德之本也ㅣ니(2ㄱ) : (홍문) 德之本也ㅣ라

다. (존경) 神明이彰矣니라(20ㄱ) : (홍문) 神明이彰矣라

라. (존경) 雖無道ㅣ라도(23ㄱ) : (홍문) 雖無道ㅣ나

존경각문고본과 홍문각본의 구결에서 같은 ‘이-’류의 서술조사가 통합되긴 했어도 존경각문고본과 홍문각본이 어말어미가 서로 다르다. 이는 언해하는 이들의 선호하는 문체가 조금씩 다르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덕지본야ㅣ니(존경 2ㄱ)’의 연결어미가 홍문각본에서는 종결어미인 ‘-ㅣ라’로 끝이 난다. 말하자면 존경각문고본의 언해자의 문체는 연결어미에 따른 접속을 선호하였으나 홍문각본의 언해한 이는 종결어미를 선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