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잘 셤김을 孝효ㅣ라 고
셩인이 신 주002) 셩인이 신: 성인이 지으신. ‘신’의 기본형은 ‘갈다’이고, 여기에 매개모음 ‘--’와 주체존대 선어말어미 ‘-시-’가 통합된 형태다. ‘성인’으로 굳어져 쓰인다. 일종의 발음 용이화에 따른 음운의 변동이다.
글월을 經경이라 니라
Ⓒ 역자 | 홍문관 / 1589년(선조 22)
효경언해
어버이를 잘 섬기는 것을 효(孝)라 하고, 성인이 지으신 글을 경(經)이라 한다.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復복야 안라 내 너려 닐오리라 몸과
體톄【四體톄니 손발을 닐음이라】과 주008) 체(體)과: 몸과. 사체(四體)와. 사지(四肢)와. 손발과.
주009) 사체(四體)니 손발을 닐음이라: 사체를 가리키니 손발을 이르는 말이다. ‘-이라’는 서술격조사로서 체언을 용언으로 만드는 접사로 볼 수 있다. 서술격 조사 ‘이다’는 활용이라는 형태적 특성보다 동사나 형용사가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는 반면 서술격 조사는 조사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기능적 특성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보기로써, ‘선생이다, 선생이므로, 선생이니까, 선생이라, 선생이니, 선생이로소이다’에서처럼 ‘이다’는 용언처럼 활용을 한다. 이는 다른 조사와는 다른 형태적 특성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 ‘이다’를 다른 문법범주로 재해석하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 것은 결론부분에 가서 언급할 것이지만 미리 말하자면 ‘이다’를 ‘지정사’로 지정해 별개의 문법범주로 보자는 것이다. 조사의 특수한 형태로 보는 현행 ‘서술격조사’이론도 타당한 면이 있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지정사론을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논의되어 온 ‘이다’ 논쟁에 대한 합리적인 체계 설정이 절실하다.
머리터럭과 은 父부母모 밧온 거시라
敢감히 헐우며 여리디 아님이 주010) 감(敢)히 헐우며 여리디 아님이: 감히 헐며 상하지 않게 함이. ‘여리디’의 기본형은 ‘야리다’인데 여기에 부사형 어말어미 ‘-디’가 통합된 형임. 구개음화를 거쳐서 ‘-디〉-지’로 소리가 변동하였다. 구개음화 현상은 국어사로 볼 때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어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북부지역어로 번져 나아간 발음경제에 따른 소리의 달라짐이다.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에서는 ‘ㄷ(ㅌ)’음의 보기를 들고 있다. 댜(탸)가 쟈(챠)보다 훨씬 소리 내기가 어려워 입천장소리되기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스승이었던 정동유(鄭東愈)의 고조 형제의 이름 가운데 디화(知和)가 있고 지화(至和)가 있었다고 함을 예로 든 것을 보면 적어도 유희 이전의 시기에는 구개음화가 널리 쓰이지 않고 있음을 미루어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평안도 같은 관서지방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북한 지역어에서는 전기불을 ‘뎐기불’로 발음하여 흔히 ‘뎡거쟝에 뎐기불이 번뎍번뎍 하더라’는 다소 희화적인 예를 들기도 한다. 국어에서 본디 구개음이 아닌 ‘ㄷ, ㅌ’이 ‘ㅣ’앞에서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음운현상을 구개음화라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나, 사실은 복잡한 음운론적 층위로 구성되어 그 위상을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음운과정이다. 구개음화라는 음운현상에 대하여 통시론적 접근을 통하여 국어사에서의 구개음화의 시기와 공간의 자리매김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어사에서 구개음화의 등장 시기는 크게 두 가설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인 견해로 구개음화 하면 근대국어의 음운현상이라는 것이다(이기문). 그는 근대국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음운변화의 하나가 구개음화라는 주장을 앞서 밝힌 유희의 『언문지』와 문헌자료를 토대로 밝히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자료에서 구개음화의 예는 18세기 초의 『왜어유해』에 처음 보이며, 『동문유해』의 예들은 그 완성을 가늠하게 것으로 풀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개음화의 시기를 17세기와 18세기의 교체시기로 상정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구개음화의 시기를 훨씬 앞당겨 잡은 주장이 있다(박병채). 고대 삼국어의 지명 자료에서 일본어나 몽고어와의 음운대응으로 미루어 고구려어의 일부가 어중에서 ㄷ구개음화를 경험하였고, 신라어는 어두에서도 구개음화를 겪었는데, 그에 비해 백제어는 표기 체계의 뒤섞임으로 미루어 볼 때 병존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앞의 두 가설은 구개음화의 시기 설정에서 고대국어와 근대국어라는 커다란 거리를 보인다. 이는 방언적인 차이로 보아 이미 고대국어시기에서도 일부 지역어에서는 구개음화를 겪은 소리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쉬문을 다가 다 다딜어 여리고[把水門都衝壞了]〈박통사번 상:9〉.
孝효의 비로솜이오 몸을 셰워 道도를 行야 일홈을 後후世셰예 베퍼 父부母모를 나타나게 홈이 孝효의 이니
孝효 어버이 셤김애 비릇고 주011) 효(孝) 어버이 셤김애 비릇고: 효란 어버이를 섬김에서부터 비롯되고. 『삼국유사』 효선편에 보면. 손순(孫順)이 노모를 지성으로 모시어 마침내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고 마을 이름도 효양리라 하여 어버이의 이름을 드높이는 효행의 보기를 들고 있다. 그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손순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다가 어렵지만 정성껏 늙은 어머니를 이바지했다. 어머니는 이름을 운오(運烏)라 했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으니 매양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은 이를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의논하였다.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소. 이제 아이가 저렇게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차라리 이 아이를 땅에 묻어 버려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 드리는 것이 좋겠소.” 손순은 마침내 아이를 들쳐 업고 취산(醉山) 북쪽들로 가서 땅을 팠다. 그곳에서 문득 기이한 돌종이 나왔다. 손순 내외는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그 종을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돌종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이니 도로 데리고 갑시다.” 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했다. 부부는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마침 궐에서 흥덕왕이 그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더없이 맑고 멀리 들리니 속히 조사해보라.” 했다. 임금의 궁리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옛날 중국의 곽거(郭巨)는 효행으로 아들을 파묻을 때 하늘이 감동하여 금 솥을 내렸다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똑같은 본보기로다.” 하면서, 집과 해마다 곡식 50석을 주어 그 지극한 효성을 표창했다(삼국유사 권5, 손순매아(孫順埋兒) 참조)
님금 셤김애 가온대오 몸 셰옴애 니라
Ⓒ 역자 | 홍문관 / 1589년(선조 22)
다시 자리로 앉아라. 내가 너에게 말해 주마. 몸과 체(體)【사체(四體)이니 손발을 이르는 것이다.】와 머리터럭과 살은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이매 감히 이를 헐어 상하지 않게 함이 효도의 비롯됨이요, 출세를 하고 도리를 행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냄이 효도의 마침이다. 효란 어버이 섬김에서부터 비롯하고, 임금을 섬김이 가운데요, 몸 세움[立身]에서 마무리된다.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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