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효경언해

  • 역주 효경언해
  • 〈붙임Ⅴ〉 고문효경(古文孝經)
  • 제4장 경대부(卿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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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경대부(卿大夫)


5ㄴ

卿大夫 章第四
子曰 非先王之法服 不敢服 非先王之法言 弗敢噵

6ㄱ

非先王之德行 不敢行 是故 非法不言 非道不行 주001)
비도불행(非道不行):
도리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 도(道)란 동아시아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동아시아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도교와 유교와 불교는 각기 길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모두 도를 그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는 측면에서는 같은 길을 걸었다. 노자(老子)는 그 당시의 인격적 주재자의 실재성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우주 만물의 존재 근원인 도를 제시함으로써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역동적 과정을 이전보다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노자가 도와 제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노자』 4장에 도에 대하여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도는 텅 비어 있으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 듯하다. 아, 깊구나. 만물의 근원 같도다. … 그윽하도다. 있는 것 같구나. 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노니, 아마도 상제보다 앞서는 듯하다.” 한편 장자(莊子)는 어떠한가.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의 모순과 역설의 특성에 주목하여 도를 형체 아닌 형체[不形之形]를 지닌 것으로 정의한다. 장자는 대종사에서 도와 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무릇 도는 실정이 있고 미더움이 있으나 행함이 없고 형체가 없으니,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밑동이 되고 뿌리가 되어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장자』에서 도란 인간을 포괄하는 우주만물의 궁극적 존재다. 도란 우주 만물뿐만 아니라 귀신과 천제의 존재이기도 하다. 귀신과 천제도 도의 통일적 작용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장자는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하는 존재로 제(帝)와 제가 머무는 곳인 제향(帝鄕), 곧 존재들의 본향을 암시한다.

제4장 경대부(卿大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 선왕의 법도에 맞는 말씀이 아니어든 감히 말하지 아니한다.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 이런 고로 법도에 맞지 아니하면 말하지 말며 도리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아니한다.

口無擇言 身無擇行 言滿天下亡口過 行滿天下亡怨惡

6ㄴ

三者備矣 然後能保其祿位 而守其宗廟 주002)
이수기종묘(而守其宗廟):
종묘와 사직을 지킬 수 있으니. 종묘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 제례를 모시는 사당. 한국의 경우,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실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을 이른다. 국보 제227호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태묘(太廟)라고도 이른다. 종묘 정전, 별묘인 영녕전과 공신당· 칠사당· 재궁· 전사청· 향관청· 제문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종묘의 유래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 고국양왕 9년(392)에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인다. 그밖에 시조묘·동명묘·국모묘도 모두 종묘에 해당하므로 삼국시대부터 이런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종묘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비되었다. 고려의 종묘는 9실로 되어 있었으나 때로는 5실로 하고 동서에 협실을 두기도 했으며 종묘 정전 이외에 별묘를 두기도 했다. 조선왕조가 선 뒤 고려의 종묘를 없애고 새로 지어 새로운 종묘가 완성되기까지는 태조의 4대 조상 신위를 임시로 효사관에 모셨다. 종묘가 완성된 것은 공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태조 4년(1935) 9월이며, 그 자리는 한성부 동부 연화방으로 지금 종묘가 있는 곳이다. 이때 종묘의 규모는 태실(太室,정전) 7칸, 좌우 익실(翼室)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으로 모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 밖에는 행랑과 재궁을 비롯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종묘가 준공된 이후에도 각종 보완공사가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선조 26년(1593) 10월에 환도해서는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았다. 광해군 즉위년(1608) 5월에 종묘를 다시 지었다. 그 규모는 병화로 소실되기 직전의 그것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종묘의 신위를 강화도로 옮겨갔으나 다시 서울의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기고 29신위를 모두 개조, 태묘와 영녕전에 모셨고 파손된 신위는 종묘 뒤에 묻어 모셨다. 고종 7년(1870) 1월에 종묘와 영녕전의 신위를 창덕궁으로 옮겨 모시고, 개수공사에 착수해 그해 3월 공사를 완료한 다음 신위를 본처에 모셨다. 지금의 종묘 태실 19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종묘 안의 딸린 건물로는 태실 서쪽에 지어진 영녕전과 역대 왕의 공신을 배향한 공신당, 그밖에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蓋卿大夫之孝也

입으로는 가릴 말이 없으며 처신에는 가릴 행실이 없다. 말이 천하에 가득하여도 말에 허물이 없고, 행실이 세상에 가득할 정도로 많이 해도 원망과 미움을 살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세 가지가 갖추어진 뒤라야 능히 그 녹봉과 자리를 보존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지키리니 〈이것이〉 대개 경대부가 효도하는 길이다.

詩云 夙夜匪懈 以事一人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시경』 〈대아 증민편〉에 이르기를,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한 사람을 섬긴다.’라고 하였다.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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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비도불행(非道不行):도리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 도(道)란 동아시아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동아시아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도교와 유교와 불교는 각기 길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모두 도를 그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는 측면에서는 같은 길을 걸었다. 노자(老子)는 그 당시의 인격적 주재자의 실재성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우주 만물의 존재 근원인 도를 제시함으로써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역동적 과정을 이전보다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노자가 도와 제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노자』 4장에 도에 대하여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도는 텅 비어 있으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 듯하다. 아, 깊구나. 만물의 근원 같도다. … 그윽하도다. 있는 것 같구나. 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노니, 아마도 상제보다 앞서는 듯하다.” 한편 장자(莊子)는 어떠한가.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의 모순과 역설의 특성에 주목하여 도를 형체 아닌 형체[不形之形]를 지닌 것으로 정의한다. 장자는 대종사에서 도와 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무릇 도는 실정이 있고 미더움이 있으나 행함이 없고 형체가 없으니,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밑동이 되고 뿌리가 되어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장자』에서 도란 인간을 포괄하는 우주만물의 궁극적 존재다. 도란 우주 만물뿐만 아니라 귀신과 천제의 존재이기도 하다. 귀신과 천제도 도의 통일적 작용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장자는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하는 존재로 제(帝)와 제가 머무는 곳인 제향(帝鄕), 곧 존재들의 본향을 암시한다.
주002)
이수기종묘(而守其宗廟):종묘와 사직을 지킬 수 있으니. 종묘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 제례를 모시는 사당. 한국의 경우,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실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을 이른다. 국보 제227호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태묘(太廟)라고도 이른다. 종묘 정전, 별묘인 영녕전과 공신당· 칠사당· 재궁· 전사청· 향관청· 제문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종묘의 유래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 고국양왕 9년(392)에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인다. 그밖에 시조묘·동명묘·국모묘도 모두 종묘에 해당하므로 삼국시대부터 이런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종묘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비되었다. 고려의 종묘는 9실로 되어 있었으나 때로는 5실로 하고 동서에 협실을 두기도 했으며 종묘 정전 이외에 별묘를 두기도 했다. 조선왕조가 선 뒤 고려의 종묘를 없애고 새로 지어 새로운 종묘가 완성되기까지는 태조의 4대 조상 신위를 임시로 효사관에 모셨다. 종묘가 완성된 것은 공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태조 4년(1935) 9월이며, 그 자리는 한성부 동부 연화방으로 지금 종묘가 있는 곳이다. 이때 종묘의 규모는 태실(太室,정전) 7칸, 좌우 익실(翼室)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으로 모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 밖에는 행랑과 재궁을 비롯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종묘가 준공된 이후에도 각종 보완공사가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선조 26년(1593) 10월에 환도해서는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았다. 광해군 즉위년(1608) 5월에 종묘를 다시 지었다. 그 규모는 병화로 소실되기 직전의 그것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종묘의 신위를 강화도로 옮겨갔으나 다시 서울의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기고 29신위를 모두 개조, 태묘와 영녕전에 모셨고 파손된 신위는 종묘 뒤에 묻어 모셨다. 고종 7년(1870) 1월에 종묘와 영녕전의 신위를 창덕궁으로 옮겨 모시고, 개수공사에 착수해 그해 3월 공사를 완료한 다음 신위를 본처에 모셨다. 지금의 종묘 태실 19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종묘 안의 딸린 건물로는 태실 서쪽에 지어진 영녕전과 역대 왕의 공신을 배향한 공신당, 그밖에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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