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효경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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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붙임Ⅴ〉 고문효경(古文孝經)
  • 제3장 제후(諸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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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제후(諸侯)


4ㄴ

諸侯 章第三
子曰 居上不驕 高而不危 制節 주001)
제절(制節):
제도에 맞게 근검절약 함.
謹度 滿而不溢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 滿而不溢 所以長守富也

5ㄱ

富貴不離其身然後 能保其社稷 주002)
사직(社稷):
나라. 본디 사(社)는 토지 신, 직(稷)은 곡식 신을 이른다.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단을 사직단(社稷壇)이라 한다. 한국의 사직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와 『문헌비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 고국양왕 9년(392)에 국사(國社)를 세웠고, 신라에서는 선덕왕 4년(783)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고려사』를 통하여 성종 10년(991) 처음으로 서울인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으며 그 뒤 사직단을 고치거나 사직단에서 행한 제례를 손질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전하여졌다. 서울 종로의 사직동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사직단은, 『주례』에 종묘는 서울의 동쪽에, 사직은 서울의 서쪽에 둔다는 기준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사직단은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나서 종묘와 함께 가장 먼저 세운 것이다. 태조 4년(1395) 정월에 터파기를 시작하여 4월에 마쳤다. 태종 6년(1406) 6월에는 주변 지형에 어울리게 사직단을 고쳤고, 이를 관리 운영하는 관원을 두었고, 각 고을에도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서울 사직단은 동서쪽에 두 개를 나란히 만들어 동쪽에는 토지 신[社]에게 제사지내는 사단(社壇)을, 서쪽에는 곡식 신[稷]에게 제사지내는 직단(稷壇)을 설치하였다. 전통지리로 보면, 사직단은 한양 서쪽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한 줄기가 내려온 지형과 조화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북을 향하지 않고 약간 동남쪽으로 틀어져 있다. 이는 사직단이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엄정하게 남북 방위를 지키며 만드는 중국의 것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태종 14년(1414) 4월 사직단 주위에 담을 둘러쳤다. 담 안으로는 신실(神室)과 신문을 세웠다. 사직단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는 세종 8년(1426) 6월에 담장 밖 북쪽에 세웠다. 사직단의 사직제는 매년 중춘(2월)·중추(8월)·납일(臘日, 12월)에 세 차례 올렸다. 그 밖에도 가뭄 때에는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등 각종 고제(告祭)가 행하여졌다. 나라의 행사에 의궤를 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사직단도(社稷壇圖)를 근거로 사직단의 자리 배치를 살펴보면, 가장 중심에 사단과 직단이 있고, 이 단을 낮게 둘러싸고 유(壝)라고 하는 담이 있다. 그 밖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둘레 담이 있다. 유와 둘레 담에는 각각 사방의 중앙에 홍살문이 있고, 둘레 담의 북문만 세 문으로 이루어졌다. 유에 낸 문은 유문(壝門)이라고 한다. 기와를 얹은 맞담인 유는 한 변의 길이가 25보, 곧 150척이나 된다. 북유문과 북신문 사이에는 판위가 있고, 판위에서 서쪽 홍살문을 거쳐 북신문 사이에는 넓은 터와 길이 나 있다. 이곳은 제의에 참여하는 관계 관원이 반차도에 따라서 자리하는 곳으로 왕과 왕세자 및 제관의 대기 장소로 쓰이며, 임금의 친제 때에는 이 사이의 길을 신도로 사용하였다. 이 길은 아무나 함부로 다닐 수 없도록 통제한다.
而和其民人 蓋諸侯之孝也

제3장 제후(諸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아니하면 〈벼슬이〉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마디(재물 씀씀이)를 절제하고 삼가 법도를 지키면 가득하여도 넘치지 않는다. 〈벼슬이〉 높아도 위태롭지 않음은 오래도록 존귀함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요, 〈재물이〉 많아도 넘치지 않음은 오래도록 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부귀가 그 몸에서 떠나지 않은 뒤라야 능히 그 나라의 사직을 보전하며 그 백성을 화평하게 하리니 〈이것이〉 대략 제후가 효도하는 길이다.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詩云 주003)
시운(詩云):
『시경』에 일렀으되, 여기서는 「소아」편 ‘소민’ 시를 말함. 시경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이는 초사와 함께 중국의 가장 전통적인 노래 가운데 하나다. 일본의 화가나 배구가 있고 한국의 시조와 같은 문학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전551~전479)가 엮었다고 전한다. 공자는 이를 문학 표현의 본이라고 했다. 많은 화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이 ‘즐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슬프지 않기[樂而不淫 哀而不傷]’ 때문이다.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 초엽부터 춘추시대 중기까지의 옛 시가 305편을 모았으므로 ‘시삼백(詩三百)’이라고도 한다.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시경』 〈소아 소민편〉에 이르기를, “두려워하는 양 깊은 못가에 가까이 가듯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 조심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 역자 | 정호완 / 201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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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제절(制節):제도에 맞게 근검절약 함.
주002)
사직(社稷):나라. 본디 사(社)는 토지 신, 직(稷)은 곡식 신을 이른다.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단을 사직단(社稷壇)이라 한다. 한국의 사직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와 『문헌비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 고국양왕 9년(392)에 국사(國社)를 세웠고, 신라에서는 선덕왕 4년(783)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고려사』를 통하여 성종 10년(991) 처음으로 서울인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으며 그 뒤 사직단을 고치거나 사직단에서 행한 제례를 손질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전하여졌다. 서울 종로의 사직동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사직단은, 『주례』에 종묘는 서울의 동쪽에, 사직은 서울의 서쪽에 둔다는 기준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사직단은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나서 종묘와 함께 가장 먼저 세운 것이다. 태조 4년(1395) 정월에 터파기를 시작하여 4월에 마쳤다. 태종 6년(1406) 6월에는 주변 지형에 어울리게 사직단을 고쳤고, 이를 관리 운영하는 관원을 두었고, 각 고을에도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서울 사직단은 동서쪽에 두 개를 나란히 만들어 동쪽에는 토지 신[社]에게 제사지내는 사단(社壇)을, 서쪽에는 곡식 신[稷]에게 제사지내는 직단(稷壇)을 설치하였다. 전통지리로 보면, 사직단은 한양 서쪽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한 줄기가 내려온 지형과 조화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북을 향하지 않고 약간 동남쪽으로 틀어져 있다. 이는 사직단이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엄정하게 남북 방위를 지키며 만드는 중국의 것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태종 14년(1414) 4월 사직단 주위에 담을 둘러쳤다. 담 안으로는 신실(神室)과 신문을 세웠다. 사직단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는 세종 8년(1426) 6월에 담장 밖 북쪽에 세웠다. 사직단의 사직제는 매년 중춘(2월)·중추(8월)·납일(臘日, 12월)에 세 차례 올렸다. 그 밖에도 가뭄 때에는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등 각종 고제(告祭)가 행하여졌다. 나라의 행사에 의궤를 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사직단도(社稷壇圖)를 근거로 사직단의 자리 배치를 살펴보면, 가장 중심에 사단과 직단이 있고, 이 단을 낮게 둘러싸고 유(壝)라고 하는 담이 있다. 그 밖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둘레 담이 있다. 유와 둘레 담에는 각각 사방의 중앙에 홍살문이 있고, 둘레 담의 북문만 세 문으로 이루어졌다. 유에 낸 문은 유문(壝門)이라고 한다. 기와를 얹은 맞담인 유는 한 변의 길이가 25보, 곧 150척이나 된다. 북유문과 북신문 사이에는 판위가 있고, 판위에서 서쪽 홍살문을 거쳐 북신문 사이에는 넓은 터와 길이 나 있다. 이곳은 제의에 참여하는 관계 관원이 반차도에 따라서 자리하는 곳으로 왕과 왕세자 및 제관의 대기 장소로 쓰이며, 임금의 친제 때에는 이 사이의 길을 신도로 사용하였다. 이 길은 아무나 함부로 다닐 수 없도록 통제한다.
주003)
시운(詩云):『시경』에 일렀으되, 여기서는 「소아」편 ‘소민’ 시를 말함. 시경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이는 초사와 함께 중국의 가장 전통적인 노래 가운데 하나다. 일본의 화가나 배구가 있고 한국의 시조와 같은 문학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전551~전479)가 엮었다고 전한다. 공자는 이를 문학 표현의 본이라고 했다. 많은 화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이 ‘즐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슬프지 않기[樂而不淫 哀而不傷]’ 때문이다.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 초엽부터 춘추시대 중기까지의 옛 시가 305편을 모았으므로 ‘시삼백(詩三百)’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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