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7권
  • 외편(外篇)○제5편 가언(嘉言)○광명륜(廣明倫)
  • 혼인(婚姻) 2-왕통(王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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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婚姻) 2-왕통(王通)


文문中子ㅣ 曰왈 婚혼娶而論론財 夷이虜로之지道도也야ㅣ니 君군子ㅣ 不블入입其기鄕니라 古고者쟈애 男남女녀之지族족이 各각擇德덕焉언이오 不블以이財

번역소학 권7:31ㄱ

로 爲위禮례니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文문中子 주001)
문중자(文中子):
왕통(王通, 584~617) 중국 수대(隋代)의 철학가. 자는 중엄(仲淹). 제자들이 문중자라는 시호를 붙였다. 강주(絳州) 용문(龍門 :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허진[河津]) 사람이다. 20세 때 경세(經世)의 뜻을 가지고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가서 수나라 문제(文帝)를 친견했다. 이 때 12조의 태평책(太平策)을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향인 용문현으로 돌아가 저술에 전념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는 천 명을 넘었으며 그 중에는 당나라의 문무대관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하분문하(河汾門下)라고 불렀다. 유·불·도 3교의 합일을 주장했으며, 기본 바탕은 유학에 두었다. 저작으로는 〈중설(中說)〉이 있다. 〈중설〉은 그가 문인들과 나눈 대화를 분류·정리한 책으로, 왕도(王道)·천지(天地)·사군(事君)·주공(周公)·문역(問易)·예악(禮樂)·술사(述史)·위상(魏相)·입명(立命)·관랑(關朗) 각 편을 각각 1권으로 하여,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음.
ㅣ 닐오 혼인기예 쳔 하며 져고믈 주002)
쳔 하며 져고믈:
재산[錢糧]의 많고 적음을. ‘하며’의 기본형은 ‘하다’이고 많다는 뜻인데 뒤로 오면서 ‘다’와 같은 형태로 쓰이면서 ‘많다’는 말로 갈라짐.
의론호 되의 이리니 주003)
되의 이리니:
오랑캐의 일이니.
어딘 사미 그  드러가디 아니니라. 녜 남진 겨지븨 족친이 각각 어딘 덕을 오 쳔으로 례를 디 아니더니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문중자가 이르되, 혼인을 함에 있어 재산의 많고 적음을 의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일이다. 어진 사람이 그 마을에 들어가지 아니한다. 옛날의 남편과 아내의 집안 친척이 각각 어진 덕을 가리고 재물로 예를 하지 않더라.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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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문중자(文中子):왕통(王通, 584~617) 중국 수대(隋代)의 철학가. 자는 중엄(仲淹). 제자들이 문중자라는 시호를 붙였다. 강주(絳州) 용문(龍門 :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허진[河津]) 사람이다. 20세 때 경세(經世)의 뜻을 가지고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가서 수나라 문제(文帝)를 친견했다. 이 때 12조의 태평책(太平策)을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향인 용문현으로 돌아가 저술에 전념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는 천 명을 넘었으며 그 중에는 당나라의 문무대관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하분문하(河汾門下)라고 불렀다. 유·불·도 3교의 합일을 주장했으며, 기본 바탕은 유학에 두었다. 저작으로는 〈중설(中說)〉이 있다. 〈중설〉은 그가 문인들과 나눈 대화를 분류·정리한 책으로, 왕도(王道)·천지(天地)·사군(事君)·주공(周公)·문역(問易)·예악(禮樂)·술사(述史)·위상(魏相)·입명(立命)·관랑(關朗) 각 편을 각각 1권으로 하여,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음.
주002)
쳔 하며 져고믈:재산[錢糧]의 많고 적음을. ‘하며’의 기본형은 ‘하다’이고 많다는 뜻인데 뒤로 오면서 ‘다’와 같은 형태로 쓰이면서 ‘많다’는 말로 갈라짐.
주003)
되의 이리니:오랑캐의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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