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9권
  • 외편(外篇)○제6편 선행(善行)○실명륜(實明倫)
  • 도연명(陶淵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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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


陶도淵연明명이 爲위彭澤令령야 不블以이家가累류로 自隨슈ㅣ러니 送송一일力력

번역소학 권9:92ㄱ

야 給급其기子고 書셔曰왈汝여ㅣ旦됴[단]夕셕之지費비예 自給급이 爲위難난 今금遣견此亦역야 助조汝여薪신水수之지勞로노니 此亦역人子也ㅣ니 可가善션遇우之지니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陶도淵연明명 주001)
도연명(陶淵明):
중국 동진(東晋)·송(宋)나라 때의 시인(365~427). 자(字)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대장군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이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은거하였다. 이때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유명하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 영접을 거부,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 고향 땅 전원에 은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으며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듯이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았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평민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우러나온 영혼의 소리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 생활에서 풍겨 나온 여유 있는 여흥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생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對句的) 기교나 고사 전거적인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謝靈運)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梁) 나라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서는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애송되고 있다. 시문 밖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 彭澤 올 원이 되어셔 쳐식을 조쳐 리디 아녓더니 주002)
쳐식을 조쳐 리디 아녓더니:
가족을 데리고 다니지 아니하였더니. ‘리디’의 기본형은 ‘리다’이고 부사형 어미 ‘-디’가 통합된 형임.
 죵을 보내여 제 아 주고 유무여 닐오 주003)
유무여 닐오:
안부를 일렀다.
네 아 나죄 머굴 이레 주004)
머굴 이레:
먹을 일에. 먹고 살 일에.
몸 뉴미 어려울 이제 이 죵

번역소학 권9:92ㄴ

을 보내여 네 나모며 믈 기로매 잇부 돕노니 주005)
잇부 돕노니:
수고로움을 돕느니. ‘잇부믈’의 기본형은 ‘잇브다’이고 명사형 어미와 목적격 조사 ‘-을’이 통합된 형임.
이도  사의 식이니 됴히 대졉호미 맛당니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도연명팽택의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가족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한 일꾼을 아들에게 보내며 편지로 안부를 말하였다. 네가 아침 저녁으로 먹고 사는 일에 몸소 다니는 일이 어려울 것 같아, 이제 이 일꾼을 보내 땔나무 하고 물 긷는 수고를 돕고자 한다. 이 사람도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접함이 마땅하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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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도연명(陶淵明):중국 동진(東晋)·송(宋)나라 때의 시인(365~427). 자(字)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대장군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이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은거하였다. 이때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유명하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 영접을 거부,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 고향 땅 전원에 은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으며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듯이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았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평민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우러나온 영혼의 소리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 생활에서 풍겨 나온 여유 있는 여흥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생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對句的) 기교나 고사 전거적인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謝靈運)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梁) 나라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서는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애송되고 있다. 시문 밖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널리 알려졌다.
주002)
쳐식을 조쳐 리디 아녓더니:가족을 데리고 다니지 아니하였더니. ‘리디’의 기본형은 ‘리다’이고 부사형 어미 ‘-디’가 통합된 형임.
주003)
유무여 닐오:안부를 일렀다.
주004)
머굴 이레:먹을 일에. 먹고 살 일에.
주005)
잇부 돕노니:수고로움을 돕느니. ‘잇부믈’의 기본형은 ‘잇브다’이고 명사형 어미와 목적격 조사 ‘-을’이 통합된 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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