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역주 번역소학 권6·7·8·9·10
  • 번역소학 제9권
  • 외편(外篇)○제6편 선행(善行)○실명륜(實明倫)
  • 한유(韓愈)의 동생행(董生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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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韓愈)의 동생행(董生行)


韓한文문公공이 作작董동生行야 曰왈 淮회水슈ㅣ 出츌桐동栢山산야 東동馳치遙요遙요야 千쳔里리不블能릉休휴ㅣ어든 淝비水슈ㅣ 出츌其기側측하야 不블能능千쳔里리야 百里리入입淮회流류니라 壽슈州쥬屬쇽縣현이 有유安안豊풍니 唐당貞뎡元원年년時시예 縣현人董동生召쇼南남이 隱은居거行義의於어其기中듕더니 刺史ㅣ 不블能릉薦

번역소학 권9:98ㄱ

쳔일 天텬子ㅣ 不블聞문名명聲셩이라 爵작祿록ㅣ 不블及급門문고 門문外외예 惟유有유吏리ㅣ 日일來徵딩租조며 更索錢젼놋다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韓한文문公공 주001)
한문공(韓文公):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사후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주역(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원도(原道)〉·〈원성(原性)〉등은 중국 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董동生行이란 그를 지 닐오 淮회水슈ㅅ므리 桐동栢山산의셔 나 동녘고로 아라히 흘러 가 주002)
아라히 흘러가:
아득하게 흘러 가. ‘아라히’는 ‘아라다’에서 갈라져 나온 파생부사로 접미사 ‘-히’가 통합된 형임.
千쳔里리예 릉히 쉬디 몯 하거든 淝비水슈ㅅ므리 그 겨틔셔 나 千쳔里리를 몯 여셔 百里리예 淮회水슈 흘러 가 로 드니라 壽슈州쥬ㅣ

번역소학 권9:98ㄴ

의 쇽 安안豊풍이란 縣현이 이시니 唐당 貞뎡元원 시절의 縣현 사 董동召쇼南남이란 소니 벼슬 아니코 이셔 어딘 이 그 가온대셔 더니 원이 릉히 쳔거티 몯  天텬子ㅣ 일후믈 듣디 몯 신 디라 주003)
일후믈 듣디 몯신 디라:
이름을 듣지 못하신지라. ‘듣디’의 기본형은 ‘듣다’이고 부사형 어미 ‘-디’가 통합된 형임.
벼슬와 록괘 문의 미처오디 몯 고 문밧긔 오직 구읫  주004)
구읫 :
관청의 관원이.
나날 와 곡식을 물이며  돈을 내라 놋다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한문공(韓文公)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어 말하였다. 회수(淮水)의 물은 동백산(桐栢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멀리 흘러 천리를 쉬지 않네. 비수(淝水) 물이 그 곁에서 나와 천리를 흐르지 못하고 백 리쯤 가다가는 회수로 접어드네. 수주(壽州)의 고을에 속한 안풍(安豊)이 있다. 당나라 정원(貞元) 시절 고을 사람 동소남(董召南)이 벼슬을 아니하고 그곳에 숨어 살며 어진 일을 하였다. 자사(刺史)가 천거하지 못하니 천자가 그의 명성을 듣지 못하네. 벼슬과 봉록은 문 앞에 이르지 않고 문 밖에는 오로지 관원이 날마다 찾아와 곡식을 물리며 또 돈까지 내라고 하는구나.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嗟차哉라 董동生이여 朝됴出츌耕경고 夜야歸귀讀독古고人書셔며 盡진日일不블得득

번역소학 권9:99ㄱ

息식야 或혹 山산而樵쵸며 或혹 水슈而漁어며 入입廚듀具구甘감旨지고 上샹堂당問문起긔居거니 父부母모ㅣ 不블慽쳑慽쳑며 妻쳐子ㅣ 不브咨咨놋다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슯프다 董동生이여 아믜 나 받 갈오 밤의 도라와 녯 사의 글월을 닐그며 나리 다도록 쉬 몯 야 혹 뫼헤 가 나모 뷔며 주005)
뫼헤가 나모 뷔며:
산에 가서 나무를 베며. ‘나모’는 모음이화를 따라서 ‘나모〉나무’로 굳어졌다. 기역 종성체언으로 방언에서는 아직도 ‘낭구’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혹 므레 가 고기 자바 브세 드러 주006)
브세 드러:
부엌에 들어가. ‘브세’의 단독형은 ‘븟’으로 부사격 조사 ‘-에’와 통합된 형임.
차반을 맛나게 오 텽의 올아 부못 문안니 부뫼 시름 아니며

번역소학 권9:99ㄴ

쳐식이 원탄티 아니놋다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슬프다. 동생(董生)이여, 아침에 일어나 밭 갈고 밤에 돌아와 옛 사람의 글을 읽어 종일토록 쉬지 않네. 산에 가서 땔나무하고,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맛있게 만들고 마루에 올라가 어버이께 문안드리니 부모님 근심하지 않으며 처자는 원망하지 않누나.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嗟차哉라 董동生이여 孝효且챠慈 人인不블識식고 唯유有유天텬翁옹이 知디야 生詳상下하瑞셔無무休휴期기놋다 家가有유狗구乳유로ㅣ 出츌求구食식이어늘 雞계來哺보其기兒 啄탁啄탁庭뎡中듕拾습蟲충蟻의야 哺보之지不블食식鳴명聲성悲비커늘 彷방徨황躑텩躅튝久구不하去거야 以이翼익來래覆부[복]待대狗구歸뢰더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번역소학 권9:100ㄱ

슯프다 董동生이여 효도롭고 인로오믈 사 아디 몯 고 오직 하히 아라 뎡샹왼 일 내요 그칠 적 업시 주007)
뎡샹왼일 내요 그칠 적 업시:
기쁘고 상서로운 일을 끊임없이 내려 준다.
놋다 집의 가히 삿기 나코 주008)
가히 삿기 나코:
개가 새끼 낳고. ‘가히’는 히읗 소리가 떨어지고 사잇소리가 되면서 ‘가히〉가이〉개’로 굳어졌다.
밥 어더 먹으라 나갓거늘 기 와 그 개 삿기를 머규 흘 딕조 벌에며 개야미를 주 머기니 먹디 아니고 우 소 슯프거 그 기 두루 거르며 오래 나디 아니고 개로 와 두퍼셔 가히 도라오 기들으더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슬프다. 동생이여, 효성스럽고 인자하건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오직 하늘만이 알아, 기쁘고 좋은 일을 때때로 내려 주시는구나. 집에 개가 새끼를 낳고 밥 얻어먹으러 나가자 닭이 와서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먹이는구나. 뜰의 벌레와 개미를 쪼아서 먹이려 하나 먹지 않고 강아지 우는 소리가 애처로우니, 닭이 방황하고 머뭇거리며 오랫동안 떠나지 아니하고 날개로 덮어주고 어미 개 돌아옴을 기다리누나.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嗟차哉라 董동生이여 誰슈將쟝與여儔듀오

번역소학 권9:100ㄴ

時시之지人인 夫부妻처ㅣ 相샹虐학며 兄형弟뎨爲위讐슈야 食식君군之지祿록이 令령父부母모愁수니 亦역獨독何하心심고 嗟차哉董동生이여 無무與여儔듀로다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슯프다 董동生이여 쟝 뉘 기 욀고 주009)
쟝 뉘 기 욀고:
장차 누구의 짝이 될 것인가. ‘’에서 어두자음군을 피하는 현상을 거치면서 ‘〉짝’으로 굳어졌다. ‘욀고’의 기본형은 ‘외다’이고 의문형 어미 ‘-ㄹ고’와 통합된 형임.
이젯 사이 부쳬 서르 모디리 며 형뎨 원슈 되어 님금 녹을 먹고 부모로 여곰 시름케 니  홀로 엇던 고 슯프다 董동生이여 다 기 업도다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슬프다. 동생이여. 앞으로 누가 그대의 상대가 될 수 있으리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를 모질게 하고 형제간도 원수가 되며, 임금의 녹봉을 먹으면서도 부모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니 또한 홀로 무슨 마음인가. 슬프다. 동생이여, 더불어 견줄 이가 없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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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한문공(韓文公):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사후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주역(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원도(原道)〉·〈원성(原性)〉등은 중국 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주002)
아라히 흘러가:아득하게 흘러 가. ‘아라히’는 ‘아라다’에서 갈라져 나온 파생부사로 접미사 ‘-히’가 통합된 형임.
주003)
일후믈 듣디 몯신 디라:이름을 듣지 못하신지라. ‘듣디’의 기본형은 ‘듣다’이고 부사형 어미 ‘-디’가 통합된 형임.
주004)
구읫 :관청의 관원이.
주005)
뫼헤가 나모 뷔며:산에 가서 나무를 베며. ‘나모’는 모음이화를 따라서 ‘나모〉나무’로 굳어졌다. 기역 종성체언으로 방언에서는 아직도 ‘낭구’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주006)
브세 드러:부엌에 들어가. ‘브세’의 단독형은 ‘븟’으로 부사격 조사 ‘-에’와 통합된 형임.
주007)
뎡샹왼일 내요 그칠 적 업시:기쁘고 상서로운 일을 끊임없이 내려 준다.
주008)
가히 삿기 나코:개가 새끼 낳고. ‘가히’는 히읗 소리가 떨어지고 사잇소리가 되면서 ‘가히〉가이〉개’로 굳어졌다.
주009)
쟝 뉘 기 욀고:장차 누구의 짝이 될 것인가. ‘’에서 어두자음군을 피하는 현상을 거치면서 ‘〉짝’으로 굳어졌다. ‘욀고’의 기본형은 ‘외다’이고 의문형 어미 ‘-ㄹ고’와 통합된 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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