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안定뎡先션生 胡호瑗완의 字
翼익之지니 患환隋수唐당以이來로 仕進진
번역소학 권9:8ㄴ
尙샹文문辭而遺유經경業업야 苟구趨추祿록利리더니 及급爲위蘇소湖호二이州주敎교授슈야 嚴엄條됴約약야 以이身신先션之지야 雖슈大대暑셔ㅣ라두 必필公공服복終죵日일야 以이見견諸졔生야 嚴엄師弟뎨子之지禮례며 解經경 至지有유要요義의야 懇간懇간爲위諸졔生야 言언其기所소以이治티己기以이後후에 治티乎호人인者쟈더라 學徒도ㅣ 千쳔數수ㅣ러니 日일月월刮괄劘
번역소학 권9:9ㄱ
마야 爲위文문章쟝호 皆傅부經경義의야 必필以이理리勝승며 信신其기師說셜야 敦돈尙샹行實실더니 後후爲위太태學야 四方방이 歸귀之지니 庠샹舍샤ㅣ 不블能능容용더라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安안定뎡先션生의 일호
胡호瑗완이오 字
翼익之지니 隋슈나라 唐당나라브터 오모로 벼슬 사미
글지만 숭샹고 주001) 실을 려 안작(자) 祿녹 머그며 利니 이레 나
번역소학 권9:9ㄴ
가 주를
분별하더니 주002) 蘇소州쥬ㅣ 湖호州 주 두 고 敎교授슈ㅅ 벼슬 여셔 法법條됴와 긔약을 엄졍히 야
자내 몸으로 주003) 몬져 야 비록 장 더온 제라도 모로매 져므도록 관야 모 션뷔 보와
스승 자내 몸으로 주004) 엄졍히 며 그를 사길 제 요광(강)
도인 앗 주005) 다라 졀히 션 위여 내 몸을 다린 후에 다릴 주 니더라 션히 일쳔이나 하더니 날마다 마다
다번역소학 권9:10ㄱ
마 文문章장호 주006) 다 성인의 글에 맛게야 모로매 理니
이긔에 며 주007) 이긔에 며: 이기게 하며. ‘이긔게〉이긔에’에서 모음 아래 ‘-게’의 기역이 떨어져 나갔다.
그 스승의 마 미더 실 돈독히 슝샹더니 후에 태학관 벼슬 여늘 사방 션히
모다가니 주008) 모다가니: 모여들어. 기본형은 ‘모여들다’이며 설명형 어미인 ‘-니’가 통합된 형임.
館관 지비 뵈여 주009) 드디 몯더라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안정(安定) 선생 호원(胡瑗)의 자는 익지다.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벼슬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글짓기만 힘쓰고 좋아하였다. 진실한 학문은 버려두며, 벼슬의 봉급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근심하였다. 소주(蘇州)와 호주(湖州) 두 고을의 교수가 되어서는 규율과 약속을 엄격하게 지켜 자신이 먼저 본을 보였다. 선생은 가장 더운 날씨에도 반드시 관복을 입고 온종일 제자들을 만났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절을 엄격하게 지켰다. 또 글을 풀이할 때 중요한 뜻이 있는 곳에 이르면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린 다음에 남을 다스려야 하는 까닭을 간곡하게 설명하였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배우는 학생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날마다 달마다 마음의 때를 벗겨내고 몸을 닦았으며, 문장을 지을 때도 모두 성인의 글 뜻에 맞게 하여 반드시 이치를 밝혔다. 그들은 선생의 말을 믿었으며 행실을 돈독하게 닦았다. 선생이 후에 태학(太學)의 교수가 되었을 때는, 배우려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교실이 좁아 모두 들일 수가 없었다.
Ⓒ 역자 | 정호완 / 201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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