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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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4집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4집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임진왜란 발발 후 효자, 충신, 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 책 이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에 국한되면서[東國] 무려 총 1,587인을 수록하여 권질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수록된 사람들이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내노(內奴)·관노(館奴)·사노(私奴)·관노(官奴)·시노(寺奴) 같은 천인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이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통하여 얻은 겨레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백성을 위로하고 도덕 의식을 높이려는 광해군의 의지가 녹아 있다. 그림과 언해가 나란히 편집되어 중세 미술과 국어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당시의 풍속, 사상, 관습 등을 엿볼 수도 있는 문헌이다.

이상규 교수

1953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대학 대학원을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언조사연구원 및 울산대학교 조교수
제7대 국립국어원장 역임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도쿄대학교 대학원 객원 연구교수
중국해양대학교 고문교수
남북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동 이사.

〈저서〉

『훈민정음통사』(주해)
『한국어방언학』
『경북방언사전』(학술원우수도서)
『언어지도의 미래』(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
『한글고문서연구』(학술원우수도서)
『조선어학회 33인 열전』등.

〈논문〉

「『훈민정음』영인 이본의 권점 분석」(2009)
「디지털 시대에 한글의 미래」(2009)
「잔본 상주본」『훈민정음』(2012)
「Hangeul, The Greatest Letters」(2007) 등.

〈수상〉

일석학술장려상(1986)
외솔학술상(2011)
봉운학술상(2012)
대통령표창(2004).

역주위원

  • 동국신속삼강행실 열녀도 권1・2・3・4 : 이상규

  • 교열·윤문·색인위원

  • 동국신속삼강행실 열녀도 권1・2・3・4 : 성낙수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리의도 박병천
  • 박충순 성낙수 심우섭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 정태섭 조오현 차재경
  • 최홍식 한무희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내면서

우리 회는 1956년 10월 9일 창립 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 전당인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 세종문화진열실과 연구실을 마련 운영 관리하며, 세종성왕의 정신과 위업의 연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한글 전용과 국학 진흥을 위하여 「한문고전국역사업」과 「한글고전역주사업」을 1967년에 기획하여 1968년부터 계속 수행하고 있다.

「한문고전국역사업」은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을 국역 간행하기 시작하여 실록의 한문 원문 901권을 완역 발간하였고, 일반 한문고전으로 『증보문헌비고』, 『매월당집』, 『국조인물고』, 『동국통감』, 『승정원일기』(순종), 『육일재총서』 등 수많은 국학자료를 국역 발간하였으며, 계속하여 『치평요람』, 『각사등록』, 『연행록』 등 문헌의 국역 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한글고전역주사업」은 1990년 6월에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 9, 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바, 2014년 12월까지 역주 발행한 문헌은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훈민정음언해본 포함)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금강경삼가해』 5책, 『구급방언해』 2책, 『삼강행실도』 1책, 『두시언해』 5책, 『소학언해』 4책, 『사서언해』(논어, 대학, 중용, 맹자) 6책, 『이륜행실도』 1책 등 109책을 발간하였고, 2015년인 금년에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두시언해』(초간본) 등 15책을 역주 간행할 예정이다.

우리 회 창립 59돌의 해이자 광복 70돌이 되는 올해는 우리 회가 「한문고전국역사업」을 착수한 지 48돌이 되었고, 「한글고전역주사업」을 추진한지 25돌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 회가 낸 700여 책의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이래 최고의 한글 국역,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그 결과 고전의 대중화를 통한 지식 개발 사회의 문화 자본 구축과 역사 의식 및 한국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는 물론, 새 겨레 문화 창조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회가 이번에 세종날을 기하여 역주한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이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임금이 되어 홍문관 부제학 이 성(李惺) 등에게 명하여 간행한 책인바, 우리나라(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의 뛰어난 효자, 충신, 열녀를 가려 뽑아 행적과 그림과 한문으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한글로 번역하여 실어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동왕 9년(1617) 봄에 간행한 수신서이다.

이 책의 원전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자아 의식과, 도덕 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 충신, 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 책 이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에 국한되면서[東國] 무려 총 1,587인을 수록하여 권질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수록된 사람들이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내노(內奴)·관노(館奴)·사노(私奴)·관노(官奴)·시노(寺奴) 같은 천인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이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국어사적인 특징으로는 국어 표기로 볼 때, 반치음 ‘ㅿ’이 쓰인 예가 몇 개 있고, 종성에 ‘ㆁ’과 ‘ㅇ’이 같이 쓰이고 있으며, 합용병서의 ㅅ계, ㅂ계, ㅄ계의 공존과 ‘’의 출현을 볼 수 있고, 각자병서 표기는 ‘ㅃ, ㅆ’ 만이 쓰였으며, 성씨를 말할 때 ‘시’와 ‘씨’가 공존하고, 어두 음절에 ‘ㆍ’의 동요도 나타난다. 끝소리에 있어서 ‘ㅅ’, ‘ㄷ’의 혼기는 16세기 말엽의 『소학언해』나 『사서언해』에서 보이던 것과 같이 ‘ㅅ→ㄷ’의 혼기 뿐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통하여 얻은 겨레 자아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국민 도덕 정신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여 편찬된 점으로 보아 오늘날 진실한 도덕 생활에로 이끌려는 정부 시책에 이바지함은 물론, 도해와 언해가 첨부되어 있어 미술과 근대 국어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 국어와의 교량적 구실을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풍속, 사상 습관을 엿보는데 있어서도 아주 귀중한 문헌이다.

이번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규장각 소장 영인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하여 주신 대구대학교 정호완 명예교수님과, 이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 역주 발간에 여러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5년 5월 1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 등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저본으로는, 대제각에서 1988년에 초간본을 축쇄 영인한 규장각 소장본을 사용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언해 원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권(卷)・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1권 1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 : 1ㄱ孫順得鍾

제1권 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 : 3ㄴ向德新羅人居

(3) 현대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어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충한 말은 〈 〉 안에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ㅱ ㅂ ㅲ ㅳ ㅃ ㅄ ㅴ ㅵ ㅷ ㅸ ㅅ ㅺ ㅻ ㅼ ㅽ ㅆ ㅾ ㅿ ㅇ ㆀㆁ ㆆ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ㅀ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해제

이상규(경북대학교 교수)

1. 개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하여, 찬집청(撰集廳)에서 주관하고, 지방 5도(전 국가적 사업이었음)에 분산해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을 각각 분담하여, 목판본으로 1617년에 완성되었다.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곧 이 책의 원고는 1615년에 편찬이 되었으나 이를 판각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된 셈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 대상자의 폭을 대량으로 확대하여, 간행한 것이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지나 민속이 지극히 피폐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의 효행과 열녀, 충신을 가려내어, 그들의 행실을 그림과 함께 언해하여 보급하기 위해서, 이 책의 간행이 추진된 것이다. 특히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중인·양인을 비롯한 노비 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선택하였다. 조선조 광해군 대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에 흐트러진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정표(旌表)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002)
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를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바쳤다. 조정에서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 지방의 보고 자료 가운데 선택하여, 도화(圖畫)와 언해(諺解)를 붙여 「효자도(孝子圖)」 8권 8책, 「충신도(忠臣圖)」 1권 1책, 「열여도(烈女圖)」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그 거질로 된 이 책의 편찬을 완성시켰다.

이 『신증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국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것 가운데 일부를 발취한 것도 있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때 새로 그 대상 범위의 폭을 확대하여, 새롭게 편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 그리고 이후의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그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효자도」 8권 8책, 「충신도」 1권 1책, 「열녀도」 8권 8책, 모두 17권 1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기록한 다음 언해한 것으로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홍윤표 교수(1997)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그리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 간에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자도 翰林學士崔婁伯
金自強
俞石珍
尹殷保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婁伯捕虎
自強伏塚
石珍斷指
殷保感烏
충신도 樸堤上
丕寧子
司議鄭樞 正言李存吾
侍中鄭夢周
注書吉再
萬戶金原桂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堤上忠烈
丕寧突陳
鄭李上疏
夢周隕命
吉再抗節
原桂陷陳
열녀도 都彌妻
戶長鄭滿妻崔氏
李東郊妻裵氏
郡事崔克孚妻林氏
散員俞天桂妻金氏
李橿妻金氏
彌妻啖草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彌妻偕逃
崔氏奮罵
烈婦入江
林氏斷足
金氏撲虎
金氏同窆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효자도 尹仁厚
姜廉
郡守金德崇
生員韓述
安正命
樸延守
金克一
梁郁
別侍衛黃信之
金邦啓
鄭玉良
今之
田漢老
李祿連
金乙時
樸云 云山
金思用
金龜孫
崔叔咸
卜閏文
奉事金得仁
同知中樞府事河友明
縣監慶延
驛吏趙錦
徐萬
生員姜應貞
鄉吏玉從孫
進士權得平
承旨鄭誠謹
李自華
正兵羅有文
金淑孫
鄭繼周
仁厚廬墓
姜廉鑿永
德崇至孝
韓述疏食
正命分蝨
延守劫虎
克一馴虎
梁郁感虎
信之號天
邦啓守喪
玉良白棗
今之撲虎
漢老嘗痢
祿連療父
乙時負父
二樸追虎
思用擔土
龜孫吮癰
叔咸侍藥
閏文圖形
得仁感倭
友明純孝
慶延得鯉
趙錦獲鹿
徐萬得魚
應貞禱天
從孫斷指
得平居廬
鄭門世孝
自華盡孝
有文服喪
淑孫立祠
繼周誠孝
충신도 軍云革
私奴金同
宗室朱溪君深源
云革討賊
金同活主
열녀도 藥哥
鄭希眾妻宋氏
韓約妻崔氏
都雲峯妻徐氏
鄉吏植培妻石今
曹敏妻仇氏
李陽妻金氏
仇音方
安近妻孫氏
具吉生妻梁氏
宋孝從妻權氏
金氏
府使許厚同妻性伊
金惟貞妻禹氏
崔自江妻姜氏
召史
玉今
鄉吏李順命妻玉今
權達手妻鄭氏
鄭季享妻李氏
藥哥貞信
宋氏誓死
崔氏守節
徐氏抱竹
石金捐生
仇氏寫真
金氏自經
仇音方逃野
孫氏守志
梁氏抱棺
權氏負土
金氏衣白
性伊佩刀
禹氏負姑
姜氏抱屍
召史自誓
玉今不污
玉今自縊
鄭氏不食
李氏守信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인물의 행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후,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판화 그림의 구도는 산, 구름, 정문 등을 주변에 배치한 후, 인물의 행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문헌으로는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와 중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가 있으나, 이들 책은 중국 인물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의 사례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행실이 모범적인 실제 인물을 선택하고, 또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의 인심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사대부와 하층인 간의 사회 계층이 뒤흔들려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의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 도덕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 연구에서,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모습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은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급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헌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국어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지만, 이 문헌에 나타나는 국어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분사에서 간행된 이유로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서지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617년에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충신,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쓰였다. 한문으로 쓰고 한글 풀이를 달았으며, 판화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한 책. 18권 18책. 목판본이다. 원래 1615년에 그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각 도의 경제력에 비례하여 전라도 6책, 경상도 4책, 공홍도(公洪道 : 충청도) 4책, 황해도 3책, 평안도 1책씩 분담하여, 1617년에 그 간행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평안도 감영에서 간행된『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한글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삽도(揷圖)가 있으며, 사주쌍변 반곽 27.0×20.5cm이며, 유계, 16행26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판 크기는 38.0×25. 1cm이다. 권말에는 “萬曆四十三年 柳夢寅 圖, 跋. 奉敎修(諸臣銜名)”의 기록이 있으며 권수(卷首)에는 “萬曆四十三年 乙卯...尹根壽 序, 萬曆四十三年奇自獻進箋”의 기록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내사기로 “萬曆四十六年正月日內賜新讀三綱行實 一伴太白山上”이 남아 있다. 현재 광해군 판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낙장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여러 차례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3. 「열녀편」의 내용 분석

유교를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국가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의 보급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행실도류의 간행과 언해를 통한 보급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열녀(烈女)와 효녀(孝女)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표(旌表)를 주어서 그 선행을 칭송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알린다. 특히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가 살던 동네 입구에 정문(旌門)이나 비각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 윤리의 확산을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하게 하여, 정문(旌門)·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읍지류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중종조의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광해조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삼강오륜에 관한 사적들과 정문·정려 등의 유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세종 14년(1432) 6월에 완성되어 서명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하여, 한문본으로 간행된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종 20년(1489) 6월 개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도 관찰사 박숭현의 계를 올려 말하기를, 지방의 풍속과 인심을 개정케 하기 위해서는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적당한데, 이 책이 한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편람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 중에서 절행 특이자만 뽑아 간략히 줄여서, 그것을 간행하여 촌야에 반포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간행되게 되었다. 명종은 이를 중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과 연산군 5년(1499)에 수교를 거치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를 하여, 중종 26년(1531)에 완성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참조하면, ‘정문’은 삼강의 근본을 표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자 324명, 효녀 16명, 열녀 167명으로 모두 507명이다. 효행 사례를 전체적으로 보건대 일반적으로 생시에는 부모를 열심히 봉양하고, 병이 들면 단지·할고·상분 등으로 정성껏 치유하고, 호환·수화재·왜구 등의 위기에서 구하거나 원수를 갚으며, 사후에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고 여묘(廬墓)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생시보다 부모 사후에 주자가례에 의해 상례를 치르고 여묘하며, 조석전을 잘한 사례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열녀는 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몸을 지키며, 수절한 경우의 사례가 가장 많다. 여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수절의 정절이 요구되었다.

열녀에 대한 포상내용은 대체로 정문·정려, 정문 복호, 복호(호의 요역 감면), 상물(미, 포, 전, 댁 등), 상직(서용, 가자 등), 신분의 상승(면천), 비석을 세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이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삼도가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열녀편」 권1을 대상으로 지역별 포상자 분포는 다음과 같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제주 황해 평안 함경
6 2 14 26 21 1 9 6 2 5

총 93명 가운데 경상과 전라, 충청이 61명이어서 전체 66%를 차지하고 있다. 정문과 정려의 포상자 가운데 하삼도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교적 인구가 많고, 양반 세력이 강력한 삼남지방이 많은 정표자수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에 비교적 유화가 늦게 이루어진 서북, 동북 지방에는 적은 수의 정표자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의 행적에 대한 사례로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례, 불식종사 사례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구한 사례, 왜적으로 인해 욕을 보지 않으려 하다 목숨을 잃은 사례, 단지(斷指)로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한 사례, 남편과 사별한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여, 3년간 남편의 묘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들거나,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부모가 죽은 뒤에도 그 제사를 친어버이의 것처럼 잘 받들었다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가장 많다.

또한 열녀·효녀의 신분을 보면, 남편의 신분이 분명한 문무 유직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제·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유학이 전체에 약 32%, 향리·서리·사관·역리 등이 10%, 군인이 3%, 평민이 4%, 천민이 5% 등이다. 특히 열녀 효녀의 정려 대상자는 사대부가가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중인층(조이, 군인)이나 하인(공천·백정·신백정·관노·사노·사비)층도 포함되어 있다. 정표된 열녀·효녀의 신빈은 사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녀·효녀에게 주어진 포상내용을 나열해 보면 정문, 정표, 복호, 정문 복호, 서용, 정문서용, 사관직 서용, 상직, 수재 서용, 상물, 면기자손향역, 견호역, 공납 면제, 녹용, 면천, 사미유차, 사미숙, 급의량, 급미두, 승자 녹용, 급면포 등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문, 정표, 복호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는 총 724명의 열녀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권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신라-4
고려- 22
조선-67
조선-89 조선-94 조선-89 조선-91 조선-100 조선-95 조선-90
76명 89인 94인 89인 91인 100인 95명 90명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실린 열녀의 사례는 이전의 사적 기록에 실린 숫자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빠져있는 충신·열녀들에 대한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는데, 원간본에는 효자 36인, 충신 5인, 열녀 28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에는 충신이 1명 추가되어 6인으로 되어 있다. 『속삼강행실도』에는, 총 70인의 기사 내용은 주로 조선과 명나라 개국 이후에 발생한 효·충·열의 사적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뛰어난 효자 ·충신·열녀가 56인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그 대상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다.

4. 국어학적 특징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17세기 국어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국어 초기의 상황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 문헌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헌 자료는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며, 팔도 중 경기도·강원도·함경도를 제외한 5도에서 분산해서 간행했기 때문에 표기법이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언형이 반영되어 있다. 곧 이 문헌에는 중앙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각 방언까지도 반영하고 있어, 자료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특히 이 시기는 방점(傍點)이 소멸되었고, 모음조화 표기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분절표기와 연철표기의 과도기적 표기법인 이중(중철) 표기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을 편찬하기 위하여 찬집청을 만들고, 이 찬집청에서 각 지방의 효자·열녀·충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조사하고, 이를 한문으로 지어 성책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찬집청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언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의 저본도 찬집청에서 마련하여 주었고, 각도에서는 이를 단지 간행하였을 뿐이다. 우선 이 문헌에 보이는 한자와 한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글자를 쓴 사람들이 일제히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승문원에서 사자관을 임시로 차출하여 이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啓下中 草寫出人各司書書寫書吏中 能書任招致 使之書寫板件則 承文院寫字官臨時招致出寫何如”(『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갑인 12월 18일조)

이 문헌에 보이는 방언형들은 언해한 낭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낭청이 어느 부분을 언해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 어느 부분이 어느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보이는 국어사적인 거시적 특징으로는 표기상 ‘ㅿ’자의 쓰임(, , 아)이 보인다. 그러나 이 ‘ㅿ’은 중세국어의 표기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오각도 보인다. 합용병서(合用並書)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을 들 수 있다. 17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표기법 현상과 마찬가지로 어두 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와 3자 합용병서인 ㅴ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ㅴ은 ㅲ이나 ㅺ으로, ㅵ은 ㅳ이나 ㅼ으로 표기가 혼기되면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러한 합용병서 표기의 유동은 중세국어의 어두자음군이 어두 된소리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초는 어두자음군의 된소리화가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 된소리화는 ㅅ계와 ㅂ계가 그 시기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ㅂ계 3자 합용병서가 ㅂ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며, 동시에 ㅅ계 2자 합용병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기법으로는, 체언형은 대체로 분철을, 용언형에서는 연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중 표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간말이 ‘ㄹ’인 경우 분할 표기로 인한 이중 표기형도 나타나고 있다. 어말자음군의 ‘ㄺ’과 ‘ㄼ’이 ‘ㄱㄹ’, ‘ㅂㄹ’로도 표기되어 ㄱ과 ㅂ으로 발음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절말 ‘ㅅ’과 ‘ㄷ’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어 있으며, 어간말 자음의 이중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강세첨사(强勢添辭)의 경우 문헌의 특징에 따라 ‘-사’로 되어 있고, ‘프서리, 손소’와 같은 용례도 보인다. ‘ㄴ’과 ‘ㄹ’의 교체는 문법형태소에서부터 어두 어중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문법형태소에서 “구짇기(열4 : 3), 구짇기(열5 : 5), 나늘(열7 : 2), 나(효8 : 21), 너(열8 : 3), 너(열4 : 5), 닙기(열7 : 1), 닙기(열7 : 3), 듀야(열2 : 8), 두야를(열4 : 7), 머리(열7 : 8), 머리(열4 : 60)”에처럼 대격조사 ‘-’이 ‘-’로 표기된 예가 상당 수 나타난다. 또 “나거(열1 : 70), 나거(효1 : 40), 니거(열5 : 8), 니거(효6 : 5), 되어(열8 : 1), 되여(효8 : 5), 병드럳거(효4 : 8), 병드럳거(열4 : 5)”의 예처럼 어미 ‘’이 ‘’로 표기된 예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ㄴ’이 ‘ㄹ’로 표기된 예[늘거(열1 : ), 릴오(열3 : 1)]와 한자어 단어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계왜난의(열5 : 5), 계왜란의(열5 : 2), 관노(열1 : 7), 관로(열2 : 5), 대노여(열7 : 4), 대로야(열4 : )] 들이 나타난다.

어근형태소 내부에서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딜러(열6 : 1), 딜러(열4 : )]도 나타난다. 어두음절에서 ‘ㆍ’의 동요가 보인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초기의 문헌에서는 ‘만>가만’, ‘매>소매’와 ‘>흙’이 보인다. 그리고 비어두음절에서는 무수히 나타난다. “머무러 두어(열4 : 2), 문 닫고 듀야 슬허 셜워야(열2 : 80)”의 예처럼 원순모음화 현상도 표기상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믄의 나와 보니(열3 : 6)”에서처럼 원순모음화의 역표기도 보인다.

16세기부터 나타나는 모음간의 유기음이나 경음으로는 ‘겯’, ‘읍프되’, ‘잇니’, ‘잇’ 등이 있으며, 어두경음화 현상의 용례는 ‘짇고’, ‘싸라’, ‘어’ 등이 있다.

움라우트(Umlaut) 현상은 “나히 열닐곱의 지아비 죽거(열2 : 5)/지아비 사오나온 병 어덧거(열1 : 9), 지아비 므릐 죽거(열1 : 8)”에서처럼 나타나지만, 수의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자음동화작용도 간혹 표기상에 반영되어 있다. “분로야(열3 : 9, 열7 : 60, 열3 : 7), 집 뒨 뫼(열6 : 1), cf. 집 뒫 뫼기슬게(열6 : 8)”의 예에서처럼 다른 문헌에서는 동화작용의 표기가 완전동화의 예만 표기상에 나타나지만, 이 문헌에서는 완전동화와 부분동화가 동시에 표기상에 나타나고 있다.

ㄷ-구개음화 현상도 “건져내여(열4 : 1), 건뎌내여(열8 : 1), 고쳗더라(열4 : 2), 시졀의(열5 : 20, 열2 : 44, 열7 : 36, 열6 : 1)”의 예에서처럼 나타난다.

어두격음화현상의 예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것들이며, 어간 내에서 보인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사주격의 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방언 어휘로서는 ‘가차이’, ‘게얼리’, ‘아젹에’, ‘애래셔[下]’, ‘크기(크게)’, ‘초개집’, ‘지애비’, ‘외히려’, ‘제혀(저히어)’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계열로 ‘-가히’, ‘-개’, ‘-동’, ‘-동이’, ‘-셰’, ‘-진’, ‘-합’ 등이 쓰였고, 남자이름에만 특히 ‘-쇠’, ‘-산’을 썼고, 여자이름에는 ‘-덕이’, ‘-비’, ‘-금’, ‘-무’, ‘-종’ 등을 사용하였다. 희귀한 어휘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홍윤표(1997)가 지적한 교체형들을 참고로 다시 소개해 둔다. ‘막대 : 막대디’, ‘뫼오- : 뫼호-’, ‘므섯 : 므엇’, ‘버히- : 베히-’, ‘병잠기 : 병잠개’, ‘보도롯 : 보돌옺’, ‘비 : 비ㅎ’, ‘빈소(ㅎ-) : 빙소(-)’, ‘사 : 사롬’, ‘셔올 : 셔울’, ‘손가락 : 손락 : 손락 : 손락 : 손고락’, ‘손소 : 손조’, ‘아래 : 애래’, ‘언덕 : 언턱’, ‘오히려 : 외히려’, ‘ㅎ : 을’, ‘자우 : 좌우’, ‘퓌오- : 퓌우- : 픠우- : 픠오-’, ‘두어 : 두워’, ‘모욕 : 뫼욕 : 목욕’, ‘야흐로 : 야로’, ‘다히- : 대히- : 대히-’, ‘ : ’, ‘여슌 : 예슌’ 등이 있다.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 국어 초기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임은 여기서 새삼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그리고 『속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 연구함으로써,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신, 「동국신속삼강행실의 국어학적 연구」 『부산여자대학논문집』 9, 1980

신성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규범성, 국어문학회, 국어문학회 학술발표대회, 2009

이병도, 『동국신속삼강행실』-해제-국립중앙도서관, 1995

이숭녕, 「동국신속삼강행실에 대한 어휘론적 고찰」 『국어국문학』 55·57 합병호, 국어국문학회, 1997

전재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색인」 『동양문화연구』 2, 경북대학교동양문화연구소, 1997

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진단학회, 진단학보 8, 1998, 185-227.

정복순, 「동국신속삼강행실도(건)의 조어법」 『수련어문논집』, 부산여자대학, 1997

주001)
“啓曰 東國新續三鋼行實令外方分刊印出事 傅教矣 八道中 京畿道 江原道 咸鏡道 則物力板蕩勢難開刊 其餘慶尚道四卷 全羅道六卷 公洪道四卷 黃海道三卷 平安道一卷 共十八卷 分送 各其道所刻卷四百件式引出收合粧䌙上送刊印處 亦令校書館擇事 知唱淮分送 刻日督役唱淮下送時各道監司處各別有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병진 3월 초3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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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5월 21일 왕의 비망록(備忘記)에 잘 나타나 있다. “壬辰以後 孝子·忠臣·烈女等實行 速爲勘定頒布事 曾已累教矣 尚未擧行 莫知其故也 當此人心貿貿 義理晦塞之日 褒崇忠節 激勵頹俗 豈非莫大至急務也 此意該曹 着令急速議勵施行”(『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임자 5월 21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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