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탕개(尼蕩介)의 난을 가리키는 말. 선조 16년(1583) 계미년 여진인(女眞人) 추장 이탕개를 주동 인물로 하여 일어난 여진인의 반란이다. 이탕개는 여진족의 우두머리로서, 선조 초기부터 함경도의 6진에 출입하면서 조선 조정을 받들고 순종할 것을 표시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다. 그러던 중에 만주와 조선의 국경지대인 경원성(慶源城)에 사는 여진인들이 전(前) 진장(鎭將)을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이탕개는 그들과 합세하여 조선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이 발생하였을 초기에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가 여진군에게 패퇴하자, 그들은 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경원부 내의 모든 진(鎭)과 보(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웃 고을인 온성(穩城)의 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일어나 여진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두만강 너머로까지 추격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였다.(두산백과 참조)
도적의 진영에 달려 들어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딘〉진’으로 소리가 변동하였다. 구개음화란 구개음이 아닌 것이 이 모음의 영향을 받아 조음점이 소리가 나기 쉬운 조음 자리로 변함으로써 발음을 쉽게 내려는 발음 용이화의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도 북녘에서는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소리로 표준으로 삼고 있다.
어버 나 구안여 살우다 쇼경대왕됴애 졍문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한양활부 - 한양이 아버지를 구하다
정노위 한양은 종성부 사람이다. 아비 한삼계는 계미년 오랑캐 난리에 화살을 맞아 땅에 엎어졌거늘 한양이 도적의 진영으로 달려들어가 업고 나와 구하여 살렸다. 소경대왕 선조 때 정문을 내렸다.
계미호란(癸未胡亂):이탕개(尼蕩介)의 난을 가리키는 말. 선조 16년(1583) 계미년 여진인(女眞人) 추장 이탕개를 주동 인물로 하여 일어난 여진인의 반란이다. 이탕개는 여진족의 우두머리로서, 선조 초기부터 함경도의 6진에 출입하면서 조선 조정을 받들고 순종할 것을 표시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다. 그러던 중에 만주와 조선의 국경지대인 경원성(慶源城)에 사는 여진인들이 전(前) 진장(鎭將)을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이탕개는 그들과 합세하여 조선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이 발생하였을 초기에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가 여진군에게 패퇴하자, 그들은 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경원부 내의 모든 진(鎭)과 보(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웃 고을인 온성(穩城)의 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일어나 여진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두만강 너머로까지 추격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였다.(두산백과 참조)
도적의 딘의 라드러:도적의 진영에 달려 들어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딘〉진’으로 소리가 변동하였다. 구개음화란 구개음이 아닌 것이 이 모음의 영향을 받아 조음점이 소리가 나기 쉬운 조음 자리로 변함으로써 발음을 쉽게 내려는 발음 용이화의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도 북녘에서는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소리로 표준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