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許浚):1546~1615.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 호는 구암(龜巖)이다. 1546년 허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손씨는 노비였기에 법에 따라 선생도 노비의 신분이었으나, 아들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아버지의 도움으로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나 중인이 되었다. 그러나 서자라는 꼬리표는 가는 데마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결국 대부분의 서자들이 택했던 양반 아래의 중인, 즉 기술관의 길을 걷고자 다짐했다. 특히 기술관 가운데서도 어려운 한문 실력을 겸비해야 했던 의관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고향집을 떠나 산청의 명의였던 유의태의 문하에서 의술을 배웠다.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신분이라면 차라리 의술을 배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병을 고쳐줘야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아래 가리지 않고 모두 친절하게 치료해 주었다. 그러자 고을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상록수가 아닌가. 그는 어려서부터 전라도 지역에서 궁중에서 쓰는 약재를 검사하는 종 9품의 심약(審藥)직을 수행하는 한편 의술 공부에 전념하여 맡은 바 의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선생은 이미 10대에 그의 의술이 전라도 지역에서는 내로라하던 의관들도 모두 칭찬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특히 큰어머니의 삼촌이었던 김시흡은 그의 의술을 보다 드높이기 위해 서울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전라도 출신 고관이었던 유희춘에게 허준을 소개했다. 유희춘을 만난 것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선생은 일생일대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나이 22세(1568) 때 허준은 드디어 서울로 가서 유희춘을 찾아갔다. 이미 전라도 지역에서 의술로 이름을 날리던 허준이라 유희춘은 서울에서도 그의 의학적 포부를 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젠가 서울에 올라오면 반드시 자신을 찾으라고 했던 터였으니. 허준과 유희춘은 모든 것을 떠나 지기가 되었다. 선생은 유희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정도였다. 전라도의 먼 곳까지 가서 유희춘의 친지들을 치료해주었다. 또 유희춘이 관직을 제수 받아 시골의 수령으로 갔다가 서울에 올라오거나, 낙향해 담양이나 해남으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또한 유씨 집안의 병치레는 허준이 도맡아 치료할 만큼 주치의로서의 구실도 했다. 이듬해인 1569년 윤6월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의 내의원직(內醫院職) 천거를 제안했다. 허준의 첫번째 내의원 출사였다. 그 동안 그의 의술이 서울의 양반들에게 매우 훌륭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어떤 자리를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제 비록 말단이기는 하지만 모든 의원들의 선망의 대상인 내의원에 출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희춘은 당대의 최고 명의였던 양예수에게 허준을 천거한다. 조선시대 서울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었던 것은 예와 오늘이 따로 없다. 의술의 경우 최고 수준인 내의원 의원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서울에 산다는 사실은 이 같은 높은 의학 수준에 접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당시 내의원 의관 중에서도 최고의 의원은 임금의 치료를 맡았던 어의(御醫) 양예수였다. 유희춘은 당대 최고의 의관 양예수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양예수 역시 유희춘이 서울에 거주하면 매번 문안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관계였다. 1570년 6월 양예수는 유희춘을 찾아가 임금의 보약을 의논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1573년 양예수는 유희춘의 부인이 질병으로 고생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유희춘의 집에 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병문안 부탁도 들어주는 정도였다. 유희춘이 서울에 사는 동안 양예수는 거의 매달 그를 문안했다. 1570년 8월에는 양예수와 허준이 모두 유희춘을 방문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유희춘을 매개로 자연히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허준의 내의원 입사 후에는 더욱 친밀해졌다. 당시 양예수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였다. 그러니 20대 전반의 젊은이에 불과했던 허준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양예수의 의술은 단연 당대 최고였다. 그가 지은 〈의림촬요(醫林撮要)〉는 후일 〈동의보감(東醫寶鑑)〉의 기초가 됐던 점을 생각한다면 양예수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에 선생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미 내의원 의원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지닌 양예수와 함께 근무하게 된 것만으로도 선생은 양예수의 의술을 전수받을 황금의 기회였다.
〈허준 연표〉
1546 명종 원년 1세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출생.
1575 선조 8년 30세 명의 안광익과 함께 왕의 병 진찰.
1581 선조 14년 36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4권 4책 교정 개편.
1590 선조 23년 45세 왕자의 병 고침. 당상관에 오름.
1592 선조 25년 47세 임진왜란 발발, 임금의 의주 파천에 함께 따라감.
1596 선조 29년 51세 왕이 의서의 총정리 편찬 명령.
1604 선조 37년 59세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책봉, 양평군에 봉해짐.
1607 선조 40년 62세 언해구급방 상하 2권 2책 개편.
1608 선조 41년 63세 선조의 별세에 따라 어의로서 책임 묻는 요청이 잇따랐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음. 언해태산집요 찬술, 언해두창집요 개편.
1610 광해군 2년 65세 14년만에 동의보감 완성.
1615 광해군 7년 70세 8월에 영면.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됨.
딴은 양예수에게도 허준과의 만남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이 시기 내의원에 양예수의 의학적 맞수라 할 만한 어의 안덕수(安德壽)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처방을 고수했다. 양예수는 강한 약재를 사용해 빠른 효과를 기대하는 준한제(峻寒劑) 처방을 선호했다. 안덕수는 이를 비판해 강한 약재보다 지속적이고도 꾸준한 효과의 처방을 선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예수에게 허준과 같은 젊고 능력 있는 제자를 키워 자신의 의술을 전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역사는 양예수의 편이었다. 허준이 양예수의 의술을 이음으로써 조선의학의 학통을 이어갔다. 물론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피․부자․인삼 등 강하고 효과가 빠른 약만 찾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양예수는 허준을 통해 자신의 의학의 대통을 이어가도록 한 것이다.
어쨌든 허준에게 양예수와의 돈독한 친분은 의학이론의 전수와 함께 임금 선조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당대 최고의 의사 양예수는 허준에게 스승이었지만 동시에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또 신분적 제약을 넘어설 길을 열어 준 은인이었다. 선조 7년 나라에서 의원을 뽑는 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때부터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어의로서 왕을 의주까지 수행한 공으로 호성공신 3등에 올랐고, 선조 39년(1606) 양평군에 봉해지며 숭록대부에 가자되어 의인으로는 당대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중인 출신에게 품계를 주는 것은 잘못이라는 대간의 반대로 작위는 취소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유배를 갔다가 광해군 원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그 동안 계속해서 의학서적을 써오고 있었다. 광해군 2년(1610) 마침내 16년간의 연구 끝에 25권의 역사에 빛나는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사람의 체질에 맞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치료법과 우리나라 땅에서 나는 약초 등을 연구하며 조선 한방 의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니 조선의학의 쾌거였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본과 청나라에도 간행될 만큼 의학적 가치가 뛰어나 조선의학 내지 동양의학의 성전이 되었다. 마침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요, 의학자다. 한의학 주아홍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醫聖)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별세 후 숭록대부에 추록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