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초해』 해제
김무봉(동국대학교 교수)
『백련초해(百聯抄解)』는 중국(당·송)과 우리나라(신라·고려)에서 지은 칠언(七言)의 고시(古詩)와 절구(絶句) 중에서 연구(聯句) 100수를 가려 뽑아 한글로 풀이를 한 책이다. 편찬 목적은 초학자(初學者)들에게 한시(漢詩)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현재 십여 종의 이본(異本)이 전한다. 서울대 규장각에만 5책이 있을 정도이다.
:뒤의 논의에서 밝히겠지만 서울대 규장각에는 모두 5권의 『백련초해』가 있다. 이 중 ‘일사문고’에는 3본이 전해지는데 앞으로의 논의에서 목판본 중 선본(善本)에 가까운 1책을 ‘규장각 A본’이라 하고, 필사본은 ‘규장각 B본’이라 하여 구분할 것이다. 목판본 중 하나는 ‘규장각 A본’과 같은 계통의 책인데, 14장만 남아 있는 낙장본이다. ‘규장각 C본’으로 부를 것이다. 이 책이 ‘규장각 A본’보다 먼저 간행된 저본(底本)으로 보이지만 온전하지 않은 낙장본이어서 논의의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런가 하면 도서번호 ‘고 811.5-B146’인 책 한 권이 더 있다. 이 역시 ‘규장각 A본’과 같은 계통인데, 낙장본으로 현재는 18장만 전한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규장각 D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외에도 ‘가람문고’에는 25장 1책으로 되어 있는 ‘규장각 E본’ 1권이 더 있다.
모두 1권 1책으로 되어 있다. 서명(書名)에는 ‘100수의 연구를 가려 뽑아서 풀이한 책’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정확하게 연구 100수를 수록한 책도 있고, 100수가 넘거나 못 미치는 책도 있는 등 :필사로 되어 있는 ‘규장각 B본’에는 오언고시가 60수, 칠언고시가 79수로 모두 139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송광사본에는 90수, 필암서원본과 규장각 E본에는 99수, 역시 필사본인 장석련본에는 79수가 수록되어 있다.
책마다 수록 연구의 수가 일정하지 않다.:이를 석주연(1999)에서는 『백련초해』의 성격 및 역할과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 곧 이 책은 한시 학습의 전범적(典範的) 성격을 가지는데, 시대와 유행에 따라 전범적 성격을 지니는 시구(詩句)의 종류가 달라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본들의 편찬 및 간행 연대 역시 명확하지 않다. 동경대본이나, 애스턴 구장본 등은 16세기말 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마저도 확연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 밖의 판본들도 편찬이나 간행 관련 기록이 없어서 연대 추정이 쉽지 않다.
여러 이본들은 판식(板式) 등 편찬 체제에서 얼마간 차이가 나고, 연구들의 수록 순서도 책에 따라 다르게 된 부분이 있다.
:신춘자(1980:9~11)에는 4종류의 이본을 대상으로 하여 편집 순서의 차이를 비교한 표가 있어서 이용에 도움이 된다. 기준을 필암서원본으로 하고, 동경대본을 포함한 4본을 수록되어 있는 편연(編聯) 차례대로 비교한 것이다.
수록된 시들은 주로 칠언고시이지만:동경대본을 대상으로 했을 경우 수록된 시의 대부분은 칠언고시이지만 제42연처럼 칠언절구(絶句)에서 가져온 시도 있다.
예외적으로 오언고시가 60수 정도 포함된 책도 있다. 판본의 형태는 대부분 목판본이다. 필사본과 활자본도 있다. 필사본은 규장각 B본, 장석련본, 양대연본,:이 책은 수송(秀松) 양대연(梁大淵)님의 선친인 양종희(梁宗熙)님이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신춘자(1980:9) 참조.
심재완본, 최범훈본 등이다. 일본에 있는 책 중 근위본(近衛本)은 유일한 활자본이다.
현전하는 책들을 번역 여부를 기준으로 해서 분류하면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한 종류는 한글 번역 없이 한시만을 수록한 책이고,
주007) 주로 일본에 있는 책들이 그러하다. 일본에 전해지는 것으로 보고된 4책 중 동경대 소장본을 제외한 3책의 경우에는 번역 부분이 없다. 번역이 없으면 책명을 『百聯抄』로 해야 할 것이나 어떤 책은 책명이 『百聯抄解』인 점으로 미루어 한글 번역문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독자들을 고려하여 애초에 있던 한글 번역 부분을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책 중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은 서명이 ‘百聯抄’이지만, 근위본(近衛本)과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은 ‘百聯抄解’이어서 후자의 경우에는 한글 풀이가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심재완(1965), 장석련(1979), 최범훈(1983) 참조. 장석련(1979:13)에서는 근위본(近衛本)의 끝에 첨부된 굴정수(堀正修)의 부기(附記)를 근거로 하여 일본 소재 책들에 대해 앞에서의 추정이 사실일 것이라는 시사를 전하고 있다.
다른 한 종류는 한시와 함께 한글로 번역이 이루어진 책이다. 한글 번역서도 다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동경대 소장본은
주008) 앞으로 이 글에서는 책의 구분을 소장처나 소장자 중심으로 표현하여 ‘00본’이라 부를 것이다. 여러 이본이 전해지는 현실에서 간행 연도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편찬자에 대한 정보 역시 불분명하여 현재 책이 소장되어 있는 곳을 판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온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연구에 들어 있는 모든 한자 밑에 『천자문』과 같이 한글로 새김과 독음을 달았다. 그리고 구(句)가 끝나면 행을 바꾸어서 한글로 그 연구에 해당하는 번역을 두었다. 그 외 대부분의 목판본 번역서들은 연구의 한자 밑에 새김을 두지 않고 독음만을 단 후, 역시 행을 바꾸어서 한글로 풀이를 했다. 필사본 중 일부에서는 한시의 한글 독음 뒤에 한글로 구결을 달아 송습(誦習)을 도운 것도 있다.
주009)
기록에 의하면 간행지는 평양, 장흥, 경주 등 세 곳으로 보인다.
주010) 편찬자에 대해서는 김시습(金時習), 또는 명종 때의 문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라는 견해가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이본이 많고, 간행지가 서로 같지 않은 데에다 현전하는 책에는 간기(刊記)가 부기(附記)되어 있지 않거나 부기된 내용도 그 시기 등과 관련하여 규명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각 이본들의 편찬자, 간행 장소, 간행 시기 등에 대해서는 더욱 정치한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익섭(1987, 1992), 김용숙(2003) 등의 선행 연구에 의해 필암서원(筆巖書院)본만은 하서 김인후가 편찬하여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에서 간행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날에는 물론 근자에 이르러서도 『백련초해』에 대한 관심은 꽤 높은 듯하다. 최근까지도 주석서가 나오는 등 역주 및 주석서 여러 책이 간행된 바 있다.
주011) 박은용(1960), 안병희(1979), 신춘자(1980), 최범훈(1983), 정익섭(1987), 손희하(1989), 박병철(1995, 1997, 2001), 석주연(1999), 김용숙(2003), 조기영(2008) 등 참조. 이 글은 전적으로 위의 논저들에 의해 가능했다. 여기에 적어서 특별히 사의를 표한다.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과 순천의 송광사에는 아직도 책판(冊版)이 보관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한시 학습자들에게 이용 가치가 높았다는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 이는 책의 편찬 목적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이 책이 초학자들의 한시 학습을 돕기 위한 입문서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주012) 이 점은 특히 동경대 소장본에서 두드러진다. 모든 한자마다 그 밑에 새김과 음을 달아 놓은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의 번역본에서도 연구의 한자 밑에 독음을 달아 놓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필사본의 경우에는 한글 독음 뒤에 한글로 구결을 달아 송습(誦習)을 도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조창록(2004:355)에서는 『백련초해』가 과시(科時) 학습용이었다는 의견을 보인 바 있다. 책의 수요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이렇듯 『백련초해』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선행연구와 역주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이를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전하는 이본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각 이본들의 계통과 이본들 간의 두드러진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백련초해』에 실려 전하는 연구(聯句) 100수 중 전거(典據)나 출처(出處)가 밝혀진 시구의 수는 아직까지 그리 많지 않다. 나머지 연구들의 출처 문제 역시 밝혀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편찬자가 누구이며, 편찬한 이와 번역한 이가 동일인인가, 또는 다른 이인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한문본과 번역본의 차이에 대한 문제도 있다.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의 번역본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한문본으로 조성되었다가 뒤에 번역을 더한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넷째, 이본들 중 번역이 이루어진 책들은 책마다 간행 시기, 간행 장소, 번역 체제, 판식 등에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데, 선행 연구에 의해 이본들 중 가장 먼저 간행되었다고 밝혀진 동경대 소장본의 조성 시기와 어학적 특성 등이다.
우리의 이 논의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하여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동경대 소장본 등 대부분의 책은 실사가 어려워서 영인본은 물론, 이미 이루어진 수많은 선행 연구의 바탕 위에서 진행할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백련초해』의 현전하는 이본(異本)은 십여 종에 달한다.
주013) 동일한 판본의 책이 같은 소장처에 선본(善本)과 낙장본(落張本)의 형태로 있을 경우, 특별히 다루어야 할 내용이 없으면 이본들의 분류에서 선본(善本)인 책을 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그 외는 한 종류의 책으로 처리할 것이다.
이 책들은 한국, 일본, 러시아 등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주014) 신춘자(1980:9)에는 이능우 선생이 프랑스 유학 시에 복사해 온 것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에도 책이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을 하지 못했다.
다른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래본이 많은 편이다. 판본의 형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 목판본이고, 몇 종류만 필사본이다. 활자본도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책들은 몇몇 필사본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시와 이를 한글로 풀이한 번역본인데 비해,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책들은 한글 번역 없이 한시만으로 되어 있다. 한글 번역이 있는 책 중에는 동경대 소장본처럼 한자 한 글자마다 새김과 독음을 두고 내용을 풀이한 책이 있는가 하면, 그 외의 책들은 새김 없이 독음을 단 후 풀이를 하여 차이가 난다. 책에 따라서는 수록된 한시의 종류가 100연이 넘거나 모자라기도 하고, 칠언고시만을 수록한 책이 대부분이지만 오언고시가 함께 실린 책도 있다. 당연히 수록된 연구들의 편집 순서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서 책마다 수록 순서가 다르다. 이렇듯 각 책들의 형태에서 크고 작은 차이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십여 본(本)에 달하는 이본들의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백련초해』의 여러 이본들 중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당시 효성여대 국어국문학연구실에서 간행했던 『국어국문학연구』 4집에 영인·소개되었다. 이 영인에 의해 『백련초해』가 학계에 널리 알려졌고, 이 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이 영인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주015) 안병희(1979:143~144)에 의하면 소창진평(小倉進平 1940:297~298)과 견백오리(筧百五里 1929: 95~130)에도 동경대 소장본 중 일부의 서영(書影)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동경대에 소장되어 있어서 동경대본이라 불린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본문은 모두 17장(張)이다. 반엽의 광곽은 세로 26.0㎝, 가로 20.2㎝이다. 매면 유계 9행이고, 변란은 사주단변이다. 판심은 흑구인데, 판심의 상하내향 흑어미 안에 서명인 ‘百聯抄解’와 장차(張次)를 두었다. 칠언고시의 모든 한자 바로 밑에 한글 새김인 이른바 자석(字釋)과 독음(讀音)을 적고, 행을 바꾸어 한 칸을 내려서 한글로 시 전체를 풀이하였다. 한자는 큰 글자로 되어 있고, 글자의 새김과 독음, 그리고 풀이는 작은 글자로 적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책에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한자의 새김과 독음을 달아서 책을 이용하는 이들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첫 장과 마지막 장에 권두서명과 권말서명이 쓰여 있다. 두 행에 걸쳐 한자 큰 글자로 ‘百聯抄解’라 적었다. 그런데 권두서명에는 네 글자의 서명 밑에 글자마다 새김과 독음이 적혀 있으나 권말서명에는 없다. 1장 앞면과 맨 뒷장인 17장의 뒷면에는 권두서명과 권말서명이 있어서 각각 2연씩만 수록되어 있고, 나머지 16장의 앞뒷면에는 각각 3연씩 수록되어 모두 100연이 실려 있다.
한자 독음과 한글 모두에 방점(傍點)은 찍혀 있지 않다. 근대국어 시기에 쓰이지 않은 ‘ㅿ’ 및 ‘ㆁ’이 사용되었으나 ‘ㅿ’의 쓰임에서는 혼란상을 보인다. 간행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판단자료가 될 것이다.
책 뒤에 간행과 관련된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편찬자 및 간행지 등은 알 수 없다. 간행 시기와 간행 장소에 대해, 안병희(1979)에서는 1576(선조 9년)에 간행된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책판목록』에 평양과 장흥에 『백련초해』의 책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16세기 중엽 이후 전라도 장흥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편찬자에 대해서는 한자의 새김 중 일부가 광주판 『천자문』(선조 8년, 1575)과 크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장성 출신의 김인후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석주연(1999:72)는 이에 대해 1585년(선조 18년) 간행의 『고사촬요』에 수록된 내용을 1576년(선조 9년)에 간행된 『고사촬요』로 오인한 결과로 보았다. 간행지는 동경대 소장본에 전라방언적 요소가 많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장흥에서 간행된 것으로 판단했다.
2.2. 애스턴 구장본(舊藏本)
주016) 이 책에 대한 내용은 모두 석주연(1999)의 소개를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옛 소련과학원의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 동방학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석주연(1999:71)에 의하면 1960년 모스크바 동방학연구소에서 간행된 ‘동양 제 민족 고서적 소총서 원문’에 영인된 사본이 실려 있고, 엘리세예브에 의한 ‘동방학연구서’에 간략히 서지에 대한 설명과 해설이 있다고 한다. 국내에는 석주연(1999)에 의해 책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의 진척은 달리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스턴 구장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원래의 표지가 떨어져 나간 책의 첫 장에 찍혀 있는 주인(朱印) 때문이라고 한다. 두 개의 도장 중 하나가 애스턴(W. G. Aston)의 총서였음을 보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주017) 석주연(1999:71)에 의하면 W. G. Aston은 1873년부터 1883년 사이에 일본 주재 영국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학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 연구(A Comparative Study of the Japanese and Corean Language)」라는 논문을 단독으로 썼고, 역시 같은 영국인으로 주일 외교관이던 E. Satow와 함께 『한국 지명에 관한 편람(A Manual of Corean Geographical and Other Proper Names)』(1883)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경력으로 미루어 그가 『백련초해』를 일본에 있을 때 구득하였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그 책이 옛 소련의 ‘동방학연구소’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이유로 석주연(1999:70)에서 ‘애스턴 구장본’이라 이름한 것을 필자도 그대로 따른다. 다만, 이는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향후 현재의 소장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명칭에 대한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25.5㎝, 가로 17.0㎝이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모두 26장이다. 반엽의 광곽은 세로 24.5㎝, 가로 14.5㎝이고, 사주단변에 매면(每面)은 유계 6행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판심은 상하내향 이엽(또는 삼엽)화문어미이고,
주018) 이 부분은 논자가 복사물로 책을 보았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는 설명이 원 논문에 달려 있다.
판심서명은 ‘百’이다. 권두서명은 2행에 걸쳐 ‘百聯抄解’라 쓰여 있고, 한자에는 새김 없이 독음만을 둔 후, 역시 행을 바꾸어 한글로 풀이를 했다고 한다. 방점은 찍혀 있지 않다. 판식은 뒤에서 논의할 규장각 A본과 흡사하고, 수록된 한시의 종류가 100수로 동경대본과 같다. 이렇듯 수록 한시의 종류와 편집 순서는 동경대본과 가장 근사하다고 한다.
주019) 석주연(1999:72)에는 동경대본과 애스턴 구장본의 수록 순서에서 차이가 나는 내용에 대한 보고가 있다. 두 책에서 수록 순서가 서로 다르게 편연(編聯)된 연구들의 대응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동경대본의 89번째 연부터 91번째 연까지, 그리고 96번째 연부터 99번째 연까지 모두 7연의 순서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89:97, 90:98, 91:99, 96:88, 97:89, 98:90, 99:91 등인데, 앞은 동경대본의 수록 순서이고 뒤는 애스턴 구장본의 수록 순서이다.
그 글에서는 동경대본과 애스턴 구장본의 국어학적 특성을 상세히 밝혀서 두 책의 비교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석주연(1999)에서는 이 책이 남부 방언적 특성을 전혀 보이지 않는 점과 동경대본과 연대 상으로 매우 근접해 보인다는 점에서 16세기 말에 간행된 평양판일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 그리고 한자의 새김이 달리지 않은 판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하고, 권두서명의 언해 양상 등에 비추어 이 형식이 뒤에 논의할 규장각 A본과 규장각 E본에 이어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16세기 이후에 간행된 책들의 시원으로 해석한 것은 온당해 보인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소재의 필암서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짐작되는 일군의 책들을 이른다. 서원에는 지금도 당시의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판목에서 쇄출(刷出)된 책으로 추정한다. 같은 판식을 보이는 규장각 E본도 이 계열의 책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책들을 ‘필암서원본(筆巖書院本) 계통’이라고 부를 것이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간행된 책이라고 하여 이 이름으로 부른다. 다음에 논의할 규장각 E본과 같은 계통의 책이다. 동일한 판목(板木)에서 쇄출(刷出)된 듯 형태서지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모두 25장이다. 장성의 필암서원에는 지금도 이 책의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책의 크기는 세로 27.0㎝, 가로 16.0㎝이다. 변란은 사주단변이고, 반엽의 광곽은 세로 19.5㎝, 가로 14.7㎝이다. 판심은 상하내향 삼엽화문어미이고, 판심서명 없이 위쪽 화문어미 바로 아래에 장차를 두었다. 수록된 연구의 수가 모두 99수여서 동경대본이나 규장각 A본 등과 차이를 보인다.
주020) 이를 최범훈(1983:12)에서는 이 책의 편집 특징 때문으로 설명한 바 있다. 1장 앞면의 1, 2행에 책 권두서명과 이 서명에 대한 풀이를 두면서 제1연을 1장 앞면의 3행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밀려 나가다가 마지막 25장 뒷면에 가서는 2행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100연을 다 채우려고 하면 2행이 부족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았다.
이 책이 다른 판본들과 형태를 달리 하는 것은 유계 8행인 각 면(面)에서 한시를 한글로 옮긴 번역문까지도 한 행에 한 줄을 썼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한시와 그 독음이 있는 행은 물론이거니와 번역문에서 마찬가지다. 동경대본이나 규장각 A본 등에서는 한글 번역문의 경우, 1행에 2줄씩을 써서 해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1행에 1줄을 쓰게 되면서 한글 번역문의 글자 크기가 커져서 한시 원문에 독음을 단 한글 글자와 크기가 거의 같아진 것이다. 가독성(可讀性)을 높이기 위한 배려로 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백련초해』의 영인본(影印本)은 물론, 번역서나 역주서의 저본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이 책의 한시에는 측성자(仄聲字)의 경우, 오른쪽 어깨[右肩]에 원권(圓圈)을 두어 표시를 했다. 다만, 89연부터 96연까지 8수의 연구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이러한 점은 규장각 E본도 마찬가지다. 같은 판본에서 간행된 책(冊)임을 확연하게 보여 주는 내용이다. 우연히 그리 된 것인지, 아니면 판목의 완결(刓缺)이 심해졌거나 일실(逸失)로 인해 일부를 보각(補刻)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도서번호는 ‘가람고 811.03-G42b’이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모두 25장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27.8㎝, 가로 17.7㎝이다. 변란은 사주단변이고, 반엽의 광곽은 세로 19.6㎝, 가로 14.7㎝이다. 매면은 유계 8행인데, 한시와 한시에 독음을 단 행은 물론, 한시의 한글 번역문도 한 행에 한 줄씩을 써서 다른 판본들과 차이를 보인다. 한시가 있는 앞쪽 두 행은 한자 바로 밑에 조금 작은 크기의 한글 글자로 독음을 두고 있어서 시가 있는 행의 한 행당 글자 수는 14자씩이다.
판심은 상하내향 삼엽화문어미이고, 판심서명 없이 위쪽 화문어미 바로 아래에 장차를 두었다. 표지에는 서외제인 ‘百聯抄 單’이라 쓰여 있다. 수록된 한시 연구의 수가 모두 99연이어서 동경대본과 차이를 보인다. 위의 필암서원본과는 형태서지가 완전히 일치해서 동일한 판목에서 쇄출된 책으로 본다.
이 책 역시 필암서원본과 동일하게 한시의 측성자(仄聲字)에는 오른쪽 어깨[右肩]에 원권(圓圈)을 두어 표시를 했다. 89연부터 96연까지 8연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점까지 똑같다. 이렇듯 필암서원본과는 판식 등에서 완전히 일치하여 동일 판본임은 짐작이 어렵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쇄출된 책인지, 아니면 동일한 판목이지만 시차를 두고 간행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서영(書影)으로 접한 모습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지만 맨 뒷장인 25장 7, 8행에 필사로 묵서한 다음 기록이다.
‘此河西金先生選集古詩聯句百首而爲之註解者也板刻所書卽先生手筆而板本在筆巖書院’
『백련초해』의 저자로 하서 김인후설을 유력하게 제기하게 했던 바로 그 내용이다.
2.4. 규장각 A본(一簑本)
주021) 여기서 ‘규장각 A~C본’을 나눈 것은 필자가 정리의 편의를 위해 책의 형태서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앞의 주1)에서 밝힌 대로 서울대 규장각에는 ‘일사고’라는 도서번호를 가진 『백련초해』가 모두 3책이 있고, 그 외에도 ‘고’로 시작하는 『백련초해』 1책과 규장각 E본 1책이 더 있다. 각각 도서번호 ‘일사고 811.03-G42b’, ‘일사고 811.03-G42ba’, ‘일사고 811.03-G42bb’ 등이다. 이 중 맨 앞에 있는 목판본 25장인 책을 ‘규장각 A본’이라 하고, 필사본 21장으로 되어 있는 두 번째 책을 ‘규장각 B본’이라고 했다. 그리고 맨 뒤에 있는 책은 ‘규장각 A본’과 같은 계통의 목판본인데, 현재 14장만 남은 낙장본으로 ‘규장각 C본’이라 불렀다. 규장각에는 이 이외에도 두 책이 더 있다. 한 책은 도서번호 ‘고811.5-B146’인 『백련초해』인데 이 글에서 ‘규장각 D본’이라 하고 후자는 도서번호 ‘가람고 811.03-G42b’인데 이 글에서 ‘규장각 E본’이라 한다.
계통
서울대 규장각에는 같은 판식을 가진 책 4권이 있다. 일사문고에 있어서 도서번호가 ‘일사고 ~ ’로 시작하는 책이 3권이고, 단순히 ‘고 ~’로 시작하는 책이 1권이다. 1960년에 영인·소개된 박은용 교수 소장의 책도 같은 판식을 가지고 있어서 ‘규장각 A본 계통’이라고 하고, 여기서 함께 다룬다.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모두 25장이다. 도서번호는 ‘일사고 811.03-G42b’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16.8㎝이다. 사주단변이고 반엽의 광곽은 세로 17.4㎝, 가로 13.3㎝이다. 매면은 유계 6행인데, 권두서명과 권말서명이 있는 첫 면과 맨 뒷면은 유계 7행이다. 서명은 권두서명과 권말서명 모두 ‘百聯抄解’인데, 권두서명에만 한자 밑에 한글로 독음을 달았다.
주022) 석주연(1999:86)에서는 권두서명의 둘째 글자 ‘聯’을 ‘년’으로 적은 점이 다른 책들과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조금 사이를 둔 아래쪽에 서명의 한글 풀이를 두었다. 한자만으로 쓰여진 권말서명 밑에는 작은 글자로 ‘終’이라 적었다. 이런 이유로 1면과 끝면의 행수가 1행씩 늘어난 것이다. 판심은 백구 상하내향 이엽화문어미, 또는 상하내향 흑어미이다. 판심서명은 ‘百’인데 부분적으로 빠진 장이 있다. 판심서명 밑에 장차를 두었다. 이 책에는 전라도 지역의 방언형이 많이 보인다는 석주연(1999:85~87)의 보고가 있다. 간행 지역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권말표지에 ‘擁正元年癸卯’라는 묵서(墨書)가 있어서
주023) 이러한 내용은 장석련(1979:12)에 보인다. ‘일사문고본’ 책 중 어느 책인지 특정하지 않았으나 소개한 형태서지에 의해 이 책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춘자(1980:7)에는 이 책에서 기록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언급이 있다. 장석련(1979:12)에 의하면 ‘이희승본’이 있다는 전제 하에 방종현본과 이희승본의 형태서지를 동일한 것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이 묵서(墨書)도 두 책 모두에 있는 것처럼 기술해 놓았다. 간행과 관련해서 규명이 필요한 내용이다.
경종(景宗) 3년(1723)에 간행된 책임을 짐작하게 한다.
수록되어 있는 100연의 연구들을 보면 ‘규장각 A본’같은 판목에서 쇄출(刷出)한 책임을 알 수 있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모두 25장이다. 각 장(張)마다 4연씩을 실었다. 사주단변이고, 매면은 유계 6행인데, 권두서명과 권말서명이 있는 첫 면과 맨 뒷면은 유계 7행이다. 권두서명과 권말서명 모두 ‘百聯抄解’이다. 그 외 모든 형태서지가 ‘규장각 A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판심서명은 ‘百’, 또는 ‘百聯’인데 부분적으로 빠진 장이 있다. 판심서명 밑에 장차를 두었다. 한자에는 새김 없이 독음만을 달았다. 번역문은 1행에 두 줄씩 한글만으로 썼다. 규장각 A본과 차이가 나는 것은 신춘자(1980:7~8)에서의 지적대로 후구[對句]의 두 글자가 다르게 되어 있는 점이다.
주024) ‘규장각 A본’의 제2연 후구[後句/對句] ‘人非迎老老長來’가 박은용본에서는 ‘人非迎月月長來’로 바뀌어 있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신춘자(1980:7~8)에서는 전구[前句, 出句]에 나오는 ‘春春’의 대구로 상성(上聲)인 ‘老’나 입성(入聲)인 ‘月’ 둘 다 맞는데, ‘규장각 A본’이 먼저 판각(板刻)되어 전해 오다가 제2연이 너무 낡아서 누군가가 보각(補刻)하면서 ‘春’의 대구로 ‘老’보다는 ‘月’이 좋다고 생각하여 ‘月月’로 바꾼 것으로 보았다.
규장각에는 ‘규장각 A본’ 『백련초해』외에도 같은 계통의 낙장본 2책이 더 있다. 하나는 ‘규장각 C본’으로 불리는 책으로 도서번호는 ‘일사고 811.03-G42bb’이다. 1권 1책의 목판본인데, 앞뒤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14장만이 현전한다. 책의 크기는 세로 27.4㎝, 가로 17.7㎝이다. 사주단변으로 반엽의 광곽은 세로 19.8㎝, 가로 13.3㎝이다.
또 하나는 ‘규장각 D본’에 해당하는 책으로 규장각 도서번호는 ‘고 811.5-B146’이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18장만 전하는 낙장본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22.1㎝, 가로 17.1㎝이다. 사주단변으로 반엽의 광곽은 세로 17.4㎝, 가로 13.3㎝이다.
주025) 필자는 이 책(규장각 도서번호, 고 811.5-B146)을 ‘규장각 D본’이라 하고 있는데, 앞에서의 언급처럼 장석련(1979:12)에서 ‘규장각 A본’과 함께 다루었던 ‘이희승본’이 이 책을 가리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논의에서 소개하는 형태서지와 ‘규장각 D본’이 매우 근사(近似)하고, 현재는 ‘이희승본’에 대한 정보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규장각 A, C본’과 ‘규장각 D본’의 관계에 대해 석주연(1999:85)에서는 세 책이 자획(字劃)의 굵기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저본(底本)과 복각본(覆刻本)의 관계로 보았다. 낙장본이면서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한 ‘규장각 C본’이 저본이고, ‘규장각 A본’과 ‘규장각 D본’은 ‘규장각 C본’의 복각본으로 추정한 것이다.
책의 체제 특징보다 판본의 성격에 비중을 두어 이렇게 분류한다. 목판본이 판본의 성격상 이본이 많을 수밖에 없는 데 비해 필사본은 개별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필사본은 번역본과 한문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번역본 2책에 실려 있는 한시 중 칠언고시는 똑같이 79연씩이다. 또 시의 한글 독음 뒤에 같은 형태의 구결을 둔 점 등 공통으로 다룰 만한 내용이 꽤 있다. 이를 묶어서 ‘규장각 B본 계통’이라 부를 것이다. 필사본으로 알려진 이른바 수송본(秀松本)은 책을 보지 못하여 그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지만 필사본이어서 함께 다룬다.
필사본 중 한글 풀이가 있는 책들을 이른다. 필사 번역본이라 부르기로 한다. 국내에 있는 책 중에는 규장각의 일사문고에 있는 1책과 장석련본이 해당된다. 수록되어 있는 연구가 수가 다른 책들과 차이가 있다.
1권 1책의 필사본(筆寫本)으로 모두 21장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32.0㎝, 가로 23.3㎝이다. 광곽(匡郭)은 물론이거니와 계선(界線) 및 판심(版心)이 없다. 규장각 도서번호는 ‘일사고 811.03-G42ba’이다. 표지의 만자(卍字) 능화판(菱花版) 위에 서외제로 ‘百聯抄’가 쓰여 있다. 그런데 이 책의 판식은 다른 판본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각 면을 상하 2단(二段)으로 나누어 위쪽 단(段)에 한시의 독음과 풀이를 한글로 필사했다. 한글로 된 전구(前句)의 끝에는 ‘~이오’라는 한글 구결이 달렸고, 후구(後句)의 끝에는 ‘~이라’라는 한글 구결이 달렸다.
주026) 이 글에서 한 연구(聯句)의 앞쪽 시구(詩句)를 ‘전구(前句)’라 하고, 뒤에 오는 시구를 ‘후구(後句)’라 하고 있으나, 이는 이해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用語)로는 전자를 ‘출구(出口)’, 후자를 ‘대구(對句)’라고 한다.
그 다음에 한글 풀이를 필사해 둔 것이다. 아래쪽 단(段)에는 한시 원문이 필사되어 있다. 수록된 연구는 오언고시 60연, 칠언고시 79연 등 모두 139연이다.
필사본으로는 이 외에도 장석련(張錫連)본이 있는데, 칠언고시만 79수가 수록되어 있는 점이 ‘규장각 B본’과는 다르다. 장석련(1979)에 의하면 이 책은 모두 20장인데, 앞표지에는 ‘聯珠 七十九首 單’이라는 서외제가 묵서(墨書)로 적혀 있고, 뒤표지에는 ‘百聯抄解 單’이라 역시 묵서로 적혀 있다고 한다. 위의 ‘규장각 B본’과는 달리 광곽이 있다. 사주단변으로 반엽의 광곽은 세로 18.0㎝, 가로 14.5㎝이다. 판심은 백구 화문어미이다. 판식은 ‘규장각 B본’과 같이 상하로 나누어 상란에 한시의 한글 독음과 풀이를 두었는데, 5행씩 묶어서 계선을 그었다. 모두 20행이다. 아래쪽에는 계선은 없지만 8행에 걸쳐 한시 연구를 두었다. ‘규장각 B본’처럼 위쪽 전구(前句)의 한글 독음 끝에는 구결 ‘~이오’, 후구(後句)의 한글 독음 끝에는 구결 ‘~이라’를 달아서 역시 송습(誦習)이 편리하게 했다. 그 밑에 한글 풀이를 두었다.
필사본 중에는 한글 풀이가 없는 책이 있다. 필사 한문본이라 부르기로 한다. 일본에 있는 책 중 동경대본을 제외한 3책도 역시 한문만으로 되어 있어서 한문본이다. 국내에 있는 책 중에는 심재완본과 최범훈본이 그러하다.
서명은 ‘百聯抄’이다. 번역문 없이 한시만으로 되어 있는 책(冊)임을 서명으로도 알 수 있다.「백련초」와 「당률(唐律)」의 합본(合本)으로 되어 있다. 「백련초」에는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의 연구가 각각 100수씩 수록되어 있다. ‘칠언(七言)’의 경우 동경대본을 기준으로 하면 제69연과 제85연이 없다. 대신 다른 두 연이 들어가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칠언고시 100연이 실려 있는 셈이다.
최범훈(1983)에 의하면 책명이 『前集卷之二合部』인데, 앞 부분에는 ‘사변(思邊), 오야제(烏夜啼), 희화답금어(戱和答禽語)’ 등이 있고, 27장의 뒤에 「百聯草」라 하여 5장에 걸쳐 한글 풀이 없이 연구 84연이 실려 있다. 책의 끝에는 ‘百聯草合部卷之單/丁未秊四月二十日終篇升斗谷新’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주027) 최범훈(1983:14)에서는 이때의 ‘丁未秊’을 1847년, 또는 1907년으로 보았다.
신춘자(1980:9)에서는 수송(秀松) 양대연(梁大淵)의 선친 양종희(梁宗熙)님이 필사했다고 하는 이른바 수송 소장본을 소개하고 있으나 확인을 하지 못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서 간행된 책이다. 1957년 당시 대구의 청구대학에서 국어국문학 연구자료집 제4집으로 『선가귀감언해』와 함께 영인·간행한 바 있다. 1권 1책의 목판본으로 모두 23장이다. 반엽의 광곽은 장마다 일정치 않지만 대체로 세로 16.5~17.5㎝, 가로 13.5~14.5㎝이다. 변란은 사주단변이고 매면은 유계 6행이다. 판심은 상하백구 이엽화문어미이다. 신춘자(1980), 최범훈(1983) 등에 의하면 판각의 상태가 불량하여 판이 고르지 못한 면(面)이 꽤 있다고 한다. 모두 90연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순서는 다른 판본들과 차이가 많다. 동경대본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했을 때 2, 12, 13, 65, 90, 91, 92, 93, 94, 95연 등 모두 10수가 없다.
주028) 그런가 하면 제79연 후구에 대한 번역은 빠졌다. 권두서명의 한자에는 독음과 한글 번역이 없다. 책 끝에는 ‘己丑季夏日松廣寺開刊’이라고 적혀 있다. 어느 때의 기축년(己丑年)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주029) 동국대 중앙도서관에는 송광사본 『백련초해』 1권이 있다. 도서번호는 ‘고서 418.9 김69ㅂ’이고, 등록번호는 ‘D18958’이다. 간기(刊記)의 ‘기축(己丑)’을 ‘숙종 35년(1709?)’이라고 추정해 놓았다. 판식 등은 청구대학 영인의 책과 다소 차이가 있다.
송광사에 현재도 판목 12매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백련초해』 중 일본에 있다고 알려진 책은 4본 정도이다. 이 중 앞에서의 언급대로 한글 번역이 있는 동경대본을 제외하면 근위본(近衛本),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 등 3책을 들 수 있다. 모두 음역과 번역문이 없는 한문본이다. 처음에는 한글 번역문이 포함되어 있던 번역본이었지만 굳이 번역이 필요치 않다고 해서 모두 삭제한 것으로 본 의견도 있다.
주030) 장석련(1979:13), 최범훈(1983) 등을 참고하였다. 전자에서는 근위본(近衛本)의 끝에 첨부된 굴정수(堀正修)의 부기(附記)를 근거로 하여 일본 소재 책들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전하고 있다. 곧 ‘百聯抄’가 일본에 유입된 후 일인의 번역으로 ‘百聯抄解’가 된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편찬된 한글 번역본이 일본에 유입되어 다시 편찬의 과정을 거칠 때 한글 번역은 삭제했지만 서명은 그대로 두어서 한문본 ‘백련초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근위본은 1권 1책의 활자본(活字本)이다. 『백련초해』 중 활자본으로는 유일한 책이다. 모두 14장이지만 연구가 수록되어 있는 부분은 이 중 11장이다. 칠언고시의 연구 100수가 실려 있다. 수록 순서는 동경대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주031) 한시의 독음이나 한글 번역문이 없는 한문본이다. 변란은 사주단변인데 계선은 없다. 상하흑어미이고, 판심에 장차가 적혀 있다. 반엽의 광곽은 세로 21.1㎝ 가로 17.0㎝이다. 서명이 ‘百聯抄解’인 점으로 미루어 번역 부분이 삭제된 책(冊)임을 알 수 있다. 경도대학(京都大學)에 기탁했다고 한다.
주032)
견오백리본은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모두 27장이지만 연구가 실려 있는 부분은 이 중 25장이다. 이 책 역시 한시의 독음이나 한글 번역문이 없는 한문본이다. 칠언고시의 연구 100수가 실려 있다. 수록 순서는 이 책 역시 동경대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엽의 광곽은 세로 26.0㎝, 가로 20.9㎝이다. 법첩(法帖)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매면은 무계 4행이다. 서명은 ‘百聯抄解’이다. 인쇄는 흑판(黑板)에 행서체(行書體)의 백자(白字)로 음각(陰刻)을 한 것이다. 책의 끝에 ‘百聯抄終 嘉靖癸亥 善山府上 右百聯抄 盖朝鮮國邨學冊子也...’ 운운의 글이 부기(附記)되어 있어서
주033) 박은용(1960:29~30), 장석련(1979:13) 참조. 이러한 내용은 소창진평(小倉進平)의 『증정 조선어학사(增訂 朝鮮語學史)』(1940:296) 이후 널리 알려졌다.
일부에서 동경대본의 간행지(경북 선산) 및 간행 연대(1563)를 추정하는 단서로 오인(誤認)되기도 했다. 이 내용은 아래(2.7.3)의 책에도 부기되어 있다고 한다.
석전원계본은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한시의 독음이나 한글 번역문이 없는 한문본으로 모두 15장이다. 앞의 책과 같이 흑판에 행서체의 백자(白字)로 음각한 판본이다. 계선 없이 법첩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명은 ‘百聯抄’이다. 수록된 연구의 수는 모두 52수이다. 동경대본을 기준으로 하면 29연부터 68연까지의 40연, 73연부터 80연까지의 8연이 누락된 결과이다.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책들 중 동경대본을 제외하면 모두 한문본이지만 수록된 연구들의 편연(編聯) 순서는 동경대본과 일치한다. 그리고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을 뺀 다른 두 책은 서명이 ‘百聯抄解’로 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는 『백련초해』가 일본에 전해진 후 번역 부분이 필요치 않아서 삭제된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역시 추측에 그칠 뿐이다. 처음부터 한문본을 입수해서 연구의 수록 순서만을 동경대본에 맞추었을 수도 있다. 어떻든 수록된 시들의 편집 순서가 동경대본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동경대본이 일본에서 『백련초해』의 조본(祖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
지금까지 현전하는 『백련초해』의 이본들을 살펴보았다. 다만, 신춘자(1980: 9)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이능우 선생 소유의 프랑스 소장 복사본에 대해서는 살피지 못했다. 이후 더 진행된 내용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많은 선행 연구들에 의해 대부분의 이본을 접하고 어느 정도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 분류와 계통 정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간행의 형태로는 목판본, 필사본, 활자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목판본에는 동경대본이나 애스턴 구장본, 필암서원본 계통의 책, 규장각 A본 계통의 책, 그리고 한문본이지만, 일본에 있는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과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필사본은 규장각 B본, 장석련본, 수송본, 심재완본, 최범훈본 등이 해당된다. 활자본으로는 일본에 있는 근위본(近衛本)이 유일하다.
둘째, 한글 번역문의 유무에 따라 분류하면 번역본과 한문본으로 나눌 수 있다.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목판본과 동경대본, 애스턴 구장본 등은 한글 번역문이 있는 번역본이다. 필사본인 심재완본, 최범훈본과 일본에 있는 책 중 목판본인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과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 활자본인 근위본(近衛本) 등은 한문본이다.
번역본 중에는 한시의 모든 글자마다 새김과 독음을 달고, 풀이를 둔 책이 있는가 하면, 새김 없이 독음과 풀이만을 둔 책도 있다. 전자에는 동경대본이 유일하다. 초학자들을 위해 『훈몽자회』(중종 22년, 1527)나 『천자문』과 같은 학습 효과를 동시에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자에는 애스턴 구장본, 필암서원본 계통의 책, 규장각 A본 계통의 책이 해당된다. 이 중 필암서원본 계통의 책에는 가독성을 고려한 변화가 두드러진다. 한시의 측성에는 우견(右肩)에 원권(圓圈)을 두어 학습자를 배려했다. 아울러 다른 책들이 번역문을 1행에 2줄씩 배치한 것과 달리 한글 번역문도 1행에 1줄씩 배치하여 읽기 쉽게 했다. 필사본 중 규장각 B본과 장석련본에는 한시문에 한자 표기 없이 한글 독음만으로 시문을 적고 뒤에 한글구결을 두어 송습(誦習)을 돕기 위한 흔적이 보인다.
셋째, 수록하고 있는 연구의 수가 대체로 칠언고시 100연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동경대본과 애스턴 구장본, 규장각 A본 계통의 책들은 100연이고, 필암서원본 계통의 책들은 한 연이 모자라는 99연이다. 송광사본에는 90연이 실렸다. 필사본인 규장각 B본에는 139연이 실렸는데 이 중 79연은 칠언고시이고, 60연은 오언고시이다. 오언고시는 유일하게 이 책에서만 보인다. 역시 필사본인 장석련본에는 칠언고시 79연이 실렸다. 한문 필사본인 심재완본에는 100연,
주034) 한문 필사본인 심재완 소장본에는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의 연구가 각각 100수씩 수록되어 있다. ‘칠언(七言)’의 경우 동경대본을 기준으로 하면 제69연과 제85연이 누락이어서 98연이다. 대신 다른 두 연이 들어가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100연이 실려 있는 셈이다.
최범훈본에는 84연이 실렸다. 일본에 있는 한문본 중 근위본(近衛本)과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에는 100연이 실렸고,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에는 52연이 실렸다.
넷째, 현전하는 『백련초해』에는 대부분 간기(刊記)가 없다. 일부 책에 연기(年記)가 간지(干支)로 기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연호가 없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기에는 부족하다. 간혹 나중에 적어 넣은 것으로 보이는 부기(附記) 등이 있기도 하지만 책의 편찬 연대나 편찬자에 대한 정보를 아는 데는 역시 많이 부족하다. 이본이 많고, 간행지가 서로 같지 않은 데에다 부기된 내용도 그 시기 등과 관련하여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앞으로 보다 치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여러 이본들 중 간행 연대가 명확하게 드러난 책은 거의 없다. 앞으로 논의할 표기법 등의 어학적 고찰에서 밝혀지겠지만 동경대본과 애스턴 구장본은 임진란 이전에 간행된 16세기 말 간본으로 추정한다. 필암서원본은 17세기 초 간본이고, 그 외 대부분의 책들은 근대국어 시기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필암서원본은 선행연구에서 하서 김인후에 의해 편찬되었음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대부분은 간행 연대가 미상이다.
다섯째,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는 ‘백련초해’가 어느 시기에 처음으로 편찬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또 하나는 처음부터 한글 번역문이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한문본으로 유통되다가 나중에 한글 번역이 가해진 것일까 하는 점이다. 처음의 편찬자, 편찬 시기, 간행 장소 등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다.
『백련초해』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의 소재는 대체로 ‘꽃[花], 달[月], 산(山), 봄[春], 대나무[竹], 바람[風], 소나무[松], 나뭇잎[葉], 버들[柳], 구름[雲], 물[水], 꾀꼬리[鶯], 비[雨], 강(江), 연못[池], 내[煙], 반디[螢]’ 등이다. 자연물, 자연 현상, 계절 등이 주된 소재였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즐겨 쓰던 제재(題材)들이다. 이 제재들을 대상으로 하여 순차를 정해 편연(編聯)을 한 것으로 보인다. 판본에 따라서는 ‘백(白), 청(靑), 홍(紅)’ 등 색채별로 나누어 실은 것도 있다.
책에 실려 있는 시의 소재별(素材別) 분류는 자석(字釋)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주035) 박병철(2001)은 이 책을 비롯하여 『훈몽자회』, 『천자문』 등 8개의 문헌에 나오는 한자 자석에 대한 비교 연구이지만 『백련초해』(동경대본)에 나오는 한자 및 어휘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박병철(2001:285)에 의하면 동경대본에 쓰인 한자는 1연에 14자씩 모두 1,400자이다. 이 중 단 한 차례만 쓰인 한자의 글자 수는 278자, 2회 이상 중복으로 쓰인 한자의 글자 수는 259자여서 『백련초해』100수에 들어 있는 한자의 글자 수는 모두 537자이다. 중복으로 쓰인 259자 중 출현빈도가 가장 높은 글자는 33회가 쓰인 ‘花’ 자이고, 그 다음이 31회의 ‘月’ 자와 28회의 ‘山’ 자 등의 순(順)이다. 10회 이상 쓰인 글자만 해도 모두 22자나 된다.
주036) 박병철(2001:285)에서 밝힌 출현 한자들의 빈도수별 분포는 다음과 같다. 10회 이상 출현해서 빈도수가 높은 글자 순이다. 花 : 33회, 月 : 31회, 山 : 28회, 春 : 18회, 竹 : 17회, 風 : 16회, 白 : 15회, 紅 : 14회, 松 : 13회, 葉 : 13회, 人 : 13회, 柳 : 12회, 無 : 12회, 雲 : 12회, 前 : 12회, 上 : 11회, 水 : 11회, 鶯 : 11회, 雨 : 11회, 落 : 10회, 色 : 10회, 靑 : 10회 등 모두 22자가 333회 쓰였다.
쓰인 빈도수가 높은 글자들은 대부분 자연물을 가리키는 글자들이고, ‘春’이나 ‘風’과 같이 계절이나 자연현상을 가리키는 글자도 있다.
한편으로는 자연물의 조락(凋落)을 표현한 ‘落’ 자의 쓰임도 빈번한 편이다. 그리고 자연물들의 색채를 표현하는 ‘白, 紅, 靑’ 자와 이를 포괄하는 ‘色’ 자가 많이 쓰여서 자연물을 주로 3가지 색채로 형용(形容)했음을 알게 해 준다. 3가지 색채로 이루어진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여 창작된 시(詩)가 선정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을 벗하여 살아가는 주체이면서 객체인 ‘사람’, 곧 ‘人’ 자도 자주 등장한다. ‘無’ 자는 주로 부정의 서술어로 쓰였고, ‘上’ 자는 방향의 ‘위쪽’과 ‘오르다’라는 뜻의 서술어로 쓰였다. ‘前’ 자는 자연물을 기준으로 해서 공간이나 시간상으로 자연물의 앞쪽과 선행(先行)에 있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 주로 ‘난간 앞[檻前], 뜰 앞[庭前], 꽃 앞[花前]’ 등의 형태이다.
『백련초해』에 수록되어 있는 연구(聯句)들 중 일부는 중국 당·송대에 활동했던 유명 시인들의 작품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신라·고려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의 작품도 있다. 이 연구들은 칠언고시 중 함연(頷聯)과 경연(頸聯)에서 발췌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더러는 수련(首聯)에서 가져온 것도 보인다. 또 수록 연구들은 칠언고시에서 발췌해 온 것이 대부분이지만 칠언절구(絶句)의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100수의 연구 중에는 출처(出處)나 전거(典據)가 밝혀지지 않은 시들이 여전히 상당수에 이른다. 현재까지 출처가 밝혀진 연구들을 동경대본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037) 최범훈(1983:10), 안봄(2001), 조기영(2008) 등을 참조해서 정리했다. 조기영(2008)에는 출처는 물론, 전거(典據)를 들어 둔 내용이 있어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중국과 우리나라 한시들의 사례를 다수 들어 둔 점도 그러하다.
수록 차례, 지은이, 시의 제목, 발췌 대상 연(聯)이나 구(句), 시가 실려 있는 문헌명[전거나 출전]과 권차 등의 순서로 기술한다.
편연 순차 | 지은이, 시의 제목, 발췌 대상 연(구), 출전 및 권차 등 |
제 1 연 | 작자 미상, 『파한집(破閑集)』 권하, 『매월당집(梅月堂集)』 권21 등 |
제 2 연 | 당(唐) 백낙천(白樂天)의 시, 「서성대화 억충주동파 신화수인기제동루(西省對花 憶忠州東坡 新花樹因寄題東樓)」의 경연(頸聯),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권19 |
제 4 연 | 송(宋) 진저(陳著)의 시, 「속질부상도미권주(續姪溥賞酴醾勸酒)」의 수련(首聯)에 해당, 『본당집(本堂集)』 권1 주038) 조기영(2008:26)에 의하면 이 시는 애초 ‘오언고시’였는데 ‘칠언고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후구(後句)의 끝 글자도 바뀌었다. 오언고시의 수련(首聯)이 ‘花有重開日 人無再少年’인 점으로 미루어 책의 편찬 과정에서 변개된 것으로 추정한다. 전구(前句)의 ‘花’ 자와 ‘有’ 자 사이에 ‘衰必’이 새로 들어갔고 후구(後句)의 ‘人’ 자와 ‘無’ 자 사이에 ‘老曾’이 새로 들어갔다. 후구의 ‘再’ 자는 ‘更’ 자로 바뀌었다. |
제 5 연 | 작자 미상, 『사재집(思齋集, 金正國)』 권4, 「척언(摭言)」 소수(所收) 주039) |
제 14 연 | 당(唐) 백낙천(白樂天)의 시, 「강루석망초객(江樓夕望招客)」의 경연(頸聯),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권20 |
제 15 연 | 당(唐) 두순학(杜荀鶴)의 시, 「여중와병(旅中臥病)」의 함연(頷聯), 『당풍집(唐風集)』 권2 |
제 16 연 | 신라(新羅) 박인범(朴仁範) 시, 「강행정장준수재(江行呈張峻秀才)」의 경연(頸聯), 『동문선(東文選)』 권12 |
제 28 연 | 송(宋) 승려(僧侶) 보제(普濟)의 「운문언선사법사(雲門偃禪師法嗣)」에 나오는 구절(古人道, 白鷺下田千點雪, 黃鶯上樹一枝花)과 후구의 끝 글자(花→金) 한 자만 다르다.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5 |
제 29 연 | 당(唐) 주장문(朱長文)의 시, 「망중유억(望中有憶)」 소수(所收), 『어정연감유함(御定淵鑑類函)』 권308, 『당시기사(唐詩紀事)』 권28, 주장문(朱長文),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5 「피운적선사법사(披雲寂禪師法嗣)」 소수(所收)의 글 등 |
제 30 연 | 고려(高麗) 최집균(崔集均)의 「집구시(集句詩)」 중 수련(首聯), 『익재집(益齋集)』의 「역옹패설(櫟翁稗說)」 후집(後集) 2. |
제 33 연 | 작자 미상, 『농암집(聾巖集, 李賢輔)』의 권3, 가사(歌詞) ‘어부가(漁父歌)’ 중 |
제 34 연 |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시, 「보장삼십리터득남계척촉화마상춘풍 의희인적우전차(步障三十里攄得南溪躑躅花馬上春風 依稀人摘雨前茶)」의 기구(起句)와 승구(承句), 『산곡외집(山谷外集)』 권13 |
제 36 연 | 송(宋) 승려(僧侶) 보제(普濟)의 「법운본선사법사(法雲本禪師法嗣)」에 나오는 내용(竹影掃塏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과 흡사,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6 주040) |
제 37 연 | 송(宋) 조하(趙嘏)의 시, 「장안추망(長安秋望)」의 함연(頷聯), 『삼체당시(三體唐詩)』 권4 |
제 38 연 | 당(唐) 유창(劉滄)의 시, 「함양회고(咸陽懷古)」의 경연(頸聯), 『당백가시선(唐百家詩選, 王安石)』 권19 |
제 42 연 | 당(唐) 두보(杜甫)의 시, 절구만흥 구수(絶句漫興九首) 중 기칠(其七)의 기구(起句)와 승구(承句), 『두시상주(杜詩詳註)』 권9 |
제 48 연 | 당(唐) 두보(杜甫)의 시, 「등왕정자(騰王亭子)」의 함연(頷聯), 『두시상주(杜詩詳註)』 권13 |
제 54 연 | 당(唐) 두목(杜牧)의 시, 「제선주개원사수각각하완계래계거인(題宣州開元寺水閣閣下宛溪來溪居人)」의 함연(頷聯), 『삼체당시(三體唐詩), 周弼』 권4 |
제 59 연 | 송(宋) 소식(蘇軾)의 시, 「병중유조탑원(病中游祖塔院)」의 함연(頷聯), 『동파전집(東坡全集)』 권5 |
제 76 연 | 고려(高麗) 이규보(李奎報)의 시, 「우거천룡사유작(寓居天龍寺有作)」의 경연(頸聯),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9, 『동문선(東文選)』 권14 |
제 84 연 | 당(唐) 두보(杜甫)의 시, 「초당시화변두시(草堂詩話辯杜詩)」의 함연(頷聯), 『두시보주(杜詩補註, 仇兆鰲)』 권상, 또는 하문(河汶)의 『죽장시화(竹莊詩話)』 권24, 「경구(警句)」 하, ‘칠언(七言)’ 소수(所收)의 고시(古詩) 주041) |
제 85 연 | 당(唐) 허혼(許渾)의 시, 「만자조대진 지위은거교원(晩自朝臺津 至韋隱居郊園)」의 함연(頷聯), 『당백가시선(唐百家詩選, 王安石)』 권16 |
제 86 연 | 송(宋) 왕안석(王安石)의 시, 「차운평보금산회숙기친우(次韻平甫金山會宿寄親友)」의 경연(頸聯), 『임천문집(臨川文集)』 권22 주042) 조기영(2008:193)에 의하면 시 제목을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宋 祝穆)』 권35에서는 ‘금산사(金山寺)’라 하였고, 『시림광기(詩林廣記, 宋 蔡正孫)』 후집(後集) 권2에서는 ‘유금산(遊金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
제 87 연 | 고려(高麗) 이규보(李奎報)의 시, 「방족암령수좌(訪足庵聆首座)」의 함연(頷聯),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 ‘고율시(古律詩)’ 소수(所收) |
제 88 연 | 송(宋) 위야(魏野)가 지은 오언고시 「서일인유태중옥벽(書逸人兪太中屋壁)」의 함연(頷聯)인 ‘洗硯魚呑墨 烹茶鶴避煙’의 전구와 후구 앞에 각각 두 글자씩을 더해 칠언고시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동관집』 권6 |
제 89 연 | 당(唐) 백낙천(白樂天)의 시, 「강루만조경물선기 음완성편 기수부장원외(强樓晩眺景物鮮奇 吟翫成篇 寄水部張員外)」의 경연(頸聯),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권20 |
제 90 연 | 당(唐) 허혼(許渾)의 시, 「제최처사산거(題崔處士山居)」의 경연(頸聯), 『정묘시집(丁卯詩集)』 권상 |
제 93 연 | 송(宋) 위야(魏野)의 시, 「추제초당한망(秋霽草堂閒望)」의 함연(頷聯), 『동관집(東觀集)』 권3 |
제 95 연 | 송(宋) 위경지(魏慶之)의 시, 풍소구법(風騷句法) 중 「산요수문(散耀垂文)·쌍구가관(雙句可觀)」 소수(所收), 『시인옥설(詩人玉屑)』 권4 |
제 96 연 | 송(宋) 호숙(胡宿)의 시, 「차운화주황우중지십(次韻和朱況雨中之什)」의 함연(頷聯), 『문공집(文恭集)』 권4 |
위에서 살펴본 대로 동경대본 『백련초해』에 수록되어 있는 연구 100수 중 출처나 전거를 알 수 있는 시는 30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를 알 수 있는 시들은 주로 중국 당·송대 대가들의 작품이다. 신라·고려조에 지은 시도 소수이지만 들어 있다.
한편 제4연처럼 원시(原詩)에 두세 글자를 보태어 내용의 변개(變改)를 가져온 것이 있다. 이는 한시 학습자를 위해 편찬 당시에 일부 변개와 모작(模作)이 가해졌던 것으로 짐작되는 내용이다. 『백련초해』보다 늦게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추구(推句)』에는 오언고시 134연이 수록되어 있는데, 오언과 칠언의 차이만 있을 뿐 상당수의 시들에서 『백련초해』에 수록된 시들과 내용의 근사(近似)함이 보인다.
주043) 『추구(推句)』는 편찬 연대와 편찬자가 모두 미상이다. 이 책 역시 한시 학습용 교재로 편찬된 듯하다. 그 책에는 2연, 또는 4연이 한 짝인 오언고시 134연 268구가 수록되어 있다. 글자 수는 비록 칠언에서 오언으로 줄었지만 이 중 상당수의 시에서 『백련초해』와 내용이 흡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경대본의 제1연이 『추구(推句)』에는 제21연, 위에서 언급한 제4연이 『추구』에는 제13연으로 각각 2자씩이 빠진 채 수록되어 있는 등이다. 안봄(2001:90-92)에서는 9수의 시가 일치한다고 했으나 좀 더 많다.
이를 통해서도 입증되는 바와 같이 『백련초해』의 편찬자는 책 조성 과정에서 변개 및 모작의 역할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8연, 제36연, 제88연 등은 원시(原詩)를 조금씩 변개하여 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전거나 출처가 없는 시들의 상당수는 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편찬자에 의해 재구성 및 재편집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책 『백련초해』가 초학자들의 한시 학습용으로 만들어졌던 것임은 두루 아는 바다. 따라서 텍스트의 성격에 맞게 어떤 시들은 변개가 불가피했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모작을 해서라도 수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당연히 그러한 변개 및 모작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근거하면 『백련초해』는 어느 한 사람의 소작이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시 학습용 책으로 여러 사람의 생각이 보이지 않게 모아지고, 그 결과로 첨삭 등 편찬의 과정을 거쳐 조성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편찬자에 대한 정보가 지금껏 소개된 책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 칠언고시들을 모아 한시 학습용으로 편찬했고, 한자 구결을 달아서 읽다가 한글이 보급되면서 자연스럽게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글 번역이 이루어질 때 시의 특성상 비교적 단조로운 구조일 수밖에 없는 구결을 제외하고, 대신 한시에 한자의 새김을 달아서 초학자(初學者)들을 배려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책의 편찬이 어느 시대에 처음 이루어졌을까 하는 점이 과제로 대두된다. 현전하는 이본들 중 가장 오래된 책으로는 동경대본 『백련초해』를 들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대로 이 책에 방점이 찍혀 있지는 않지만 ‘ㅿ’과 ‘ㆁ’ 등이 쓰인 점으로 미루어 임진란 이전에 간행된 책인 것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책의 간행과 관련해서는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지만 여전히 확정된 내용이 없다.
「숭남책록(嵩南冊錄) 경주조(慶州條)」의 ‘百聯抄解 金時習著 白紙十五張 刓不用’
주044) ‘백련초해’는 김시습이 지은 것으로 백지 15장인데, 낡아서 못 쓰게 되었다.
및 『매월당집(梅月堂集)』 문집(文集)에 실려 있는 김시습 관련 일화는 한때 『백련초해』 김시습 편찬설의 유력한 근거였다. 김시습(1435~1493)이 두 살 때인 병진년(丙辰年, 1436)에 한시를 배웠는데, 그 내용을 곧잘 이해했다는 근거로
주045) 병진년 봄에 외조부가 가려 뽑은 시구를 가르쳤는데, 이때는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였다. 외조부가 가르쳐 이르되, ‘꽃이 난간 앞에서 웃는데 소리를 듣지 못한다.’라고 하니 (내가) 병풍 속의 꽃을 가리키며 ‘아아’라 하였고, 또 가르쳐서 이르되, ‘새가 수풀 아래서 우는데, 눈물을 보기 어렵다.’고 하니 병풍 속의 새를 가리키며 ‘아아’라고 하였다. 외조부는 (내가) 그 시에 능히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해에 초구(抄句) 100여 수와 당·송 현인들의 시초(詩抄)를 다 읽었다.[丙辰春外祖敎抄句 當時猶不能言 外祖誨曰花笑檻前聲未聽 指屛畵花而啞啞 又誨曰鳥啼林下淚難看 指屛花鳥而啞啞 外祖知其能通也 故其歲抄句百餘首 唐賢宋賢詩抄畢讀]〈『매월당집(梅月堂集)』 문집 권21,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소수(所收)〉.
제시된 시가 바로 동경대본 등 『백련초해』 책들의 첫 연구(聯句)
주046) 동경대본 등 대부분의 『백련초해』에 첫 번째 시로 수록되어 있는 연구인 ‘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꽃은 난간 앞에서 웃는데 소리를 듣지 못하겠고, 새는 수풀 아래서 우는데 눈물 보기가 어렵구나.)’을 이른다.
와 일치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김시습 생존 연대인 세조조에 이미 『백련초해』가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해 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백련초해』의 편찬자가 김시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反證)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047) 정익섭(1992:963)는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백련초해』를 가르쳤다는 사실이 김시습의 편저가 아님을 말해 준다고 하였다.
그것은 어떻든 현전하는 『백련초해』 번역본 중에서 간행 연도를 15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책은 없다. 따라서 이때의 책은 한문본일 가능성이 높다. 15세기에 언해된 시집 가운데 현전하는 책으로는 『두시언해』(성종 12년, 1481년 간행)가 있고, 현재는 부전(不傳) 문헌이지만 서명(書名)이 전해지는 책으로는 성종 14년 때의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諺解)』(1483년 간행)와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1483년 간행)가 있다. 당시의 기록 중 어디에도 이른바 언해본 『백련초해』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이때의 『백련초해』는 한문본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주048) 김시습이 외조부(外祖父)와의 대화에서 시를 이해했다는 시기인 병진년(丙辰年, 1436)에는 아직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백련초해』는 처음에 한문본의 형태인 『백련초』로 전해지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백련초해』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책이 처음 조성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재 소급할 수 있는 상한은 세조대, 또는 그 이전이고, 김시습 저작 운운의 책을 『백련초해』라고 한 점으로 보면 이때의 『백련초해』는 한자 구결이 현토된 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정을 해 본다. 우리 글자로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해도 당시 한문으로 된 문장을 국어로 읽기 위한 방안으로 구결이 쓰였다는 것은 웬만큼 알려진 사실이다. 많이 후대에 만들어진 책이기는 하지만 필사본의 시문 전구(前句) 뒤에는 ‘~이오’라는 한글 구결이 달려 있고, 후구(後句) 뒤에는 ‘~이라’라는 한문 구결이 달려 있는 점도 이러한 구결 현토 관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049) 박병철(2001:111)은 당시 언해본들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한글 구결이 『백련초해』의 원문인 한시 뒤에 현토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밝혀서 주목할 만하다. 한시가 지닌 문장의 구조에 일차적인 관심을 둔 것이라기보다 개별 한자의 학습을 우선시한 편찬 태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다만 칠언의 시들만으로 되어 있는 책의 성격상 구결의 형태가 매우 단조로웠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한글 번역본에서는 구결을 현토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대신 박병철(2001:111)의 지적처럼 동경대본에서는 문장의 구조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별 한자의 학습을 우선시한 편찬 태도가 반영되어 한자의 음(音)과 석(釋)을 익히게 하는 데에 비중을 둔 형태로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 풀어야 할 과제는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 및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의 권말에 있다는 ‘百聯抄解 嘉靖癸亥 善山府上 右百聯抄 盖朝鮮國邨學冊子也’에 관한 것이다. 명종 18년(1563)에 선산부(善山府)에서 간행되었음을 보인 이 기록은 현재 어떠한 이본(異本)에서도 볼 수가 없어서 부전(不傳)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있는 책에서만 이러한 기록이 있어서 연구에 더 이상의 진척이 없다. 따라서 실책이 보이지 않는 현재로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규장각 E본의 끝에 부기된 ‘하서 김인후’ 편찬설에 대한 해명의 문제이다.
주050) ‘此河西金先生選集古詩聯句百首而爲之註解者也板刻所書卽先生手筆而板本在筆巖書院(이는 하서 김선생의 선집으로 고시 연구 100수에 주해를 붙여서 만든 것이다, 판각의 글씨는 선생이 직접 쓴 것인데 판본은 필암서원에 있다.)’ 정익섭(1992:965)에서 인용.
이에 대해서는 신춘자(1980), 정익섭(1987, 1992), 김용숙(2003) 등의 의견이 비교적 온당에 보인다. 1610년경에 나주(羅州) 목사(牧使) 박동설(朴東說)이 판각(板刻)하여 널리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명종(明宗) 때의 문인인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주해(註解)를 하여서 만든 내용이 어떻게 사후 50년 뒤에 간행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원고본으로 보관되어 있다가 그 때에 가서 간행된 것인지, 아니면 판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다시 간행한 것인지 등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있다. 필암서원본에 기재된 언어 형태는 16세기로 소급될 수 없다.
앞에서 살핀 대로 『백련초해』는 조선조 후기에도 다수의 이본들이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에 간행된 책들은 수록된 연구의 수가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연구의 종류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이본마다 수록된 연구의 차례와 수가 다른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본다. 각 책들이 간행될 무렵 어떤 형태로든 한시 학습서에 대한 변화의 요구가 있었고, 이러한 내용이 책에 반영된 것으로 본다. 한시 학습용 교재 및 내용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각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출되었고, 이를 수용하는 등의 노력에 의해 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시 학습서로서 『백련초해』가 텍스트의 역할을 했다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가르쳐야 하거나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한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창록(2004:355)의 과시(科時) 학습을 위한 교재라는 주장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051) 조창록(2004)는 『백련초해』가 과시(科試) 학습을 위한 근체시 교재라고 하면서, 『백련초해』에 수록된 시가 ‘고시(古詩)’라고 한 기존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백련초해』가 연구로 되어 있는 것은 초학의 아동들이 7언의 율시를 바로 짓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일단 2구로 된 짧은 연시(聯詩)를 외우게 하여 대우(對偶), 평측(平仄), 압운(押韻) 등 작시(作詩)의 중요한 기법을 비교적 쉽게 익히도록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백련초해』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의 형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다. 다만, 『백련초해』가 과시 학습용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었다면 수록된 시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첨삭은 불가피했을 것이고, 일부의 순서나 내용이 바뀔 수밖에 없었던 타당한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결과가 이본(異本)마다 수록된 연구들의 순서 차이나 연구 수의 차이로 실현된 것으로 본다.
위에서와 같은 이유로 『백련초해』각 이본들의 편찬 연대와 번역 연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전 번역본 중에서는 동경대본이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책이라고 판단한다. 이 책은 『고사촬요(攷事撮要)』(선조 18, 1585)의 「책판목록(冊板目錄)」에서 평양과 장흥에 있었다고 한 『백련초해』책판에 의해 간행된 책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책에 있는 언어들의 방언적 요소에 의해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간행된 판본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책에 방점은 표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언어사실로 보아 현전하는 책 중에서 간행 시기가 가장 이른 임진란 이전의 간본으로 본다. 석주연(1999:72)에 의하면, 나중에 만들어진 사본(寫本)이기는 하지만 이병기 구장의 『경상도책판(慶尙道冊版)』(1730년경 간행)과 역시 사본인 운향(雲香) 구장의 『책판치부책(冊版置簿冊)』(1740년경 간행)에서 경주판(慶州板) 『백련초해』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평양판(平壤板), 장흥판(長興板), 경주판(慶州板) 등 세 계열의 『백련초해』가 있었을 가능성을 전제한 다음 애스턴 구장본은 평양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필암서원본을 제외한 어떤 책도 편찬자 및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미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동경대본 『백련초해』는 우리가 보아 왔던 다른 언해본들과는 언해 체제 등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권수제와 시문의 한자마다 조금 큰 글자의 한자 바로 밑에 해당 글자의 새김인 이른바 자석(字釋)과 독음(讀音)을 한글 작은 글자로 달아 두었다. 권수제는 한 행, 한시는 일곱 자씩 두 행에 걸쳐서 시문(詩文) 글자에 대한 풀이인 새김을 둔 것이다. 한글이 현토된 이른바 정음구결문은 없다. 두 행에 걸친 시문 및 글자 풀이 다음 행에 시문보다 한 글자 내려서 한 행에 작은 글자 두 줄로 한글 번역문을 두었다. 당시에 간행되었던 대부분의 언해본들이 앞에 구결문을 두고, 뒤에 번역문을 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다.
또 하나 지적해 둘 것은 시문(詩文)의 한글 번역문에는 한자가 병기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15, 16세기에 간행된 문헌들 중에 이렇게 한글만으로 번역문을 둔 책은 없다. 한자 글자마다 새김을 둔 이 책의 한자 표기 형태와 함께 특별한 번역 양상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다. 한시 학습서이면서 한시 초학자들을 주된 독서층으로 하고 있는 책의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또 하나는 16세기 후기에 간행된 책으로 추정하지만 한자음이나 한글 모두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은 점이다.
『백련초해』에 대한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 중 어학적 고찰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시문의 한자 새김[字釋]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을 중심으로 한 시문 번역문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의해 어학적 성격은 웬만큼 밝혀졌다고 본다. 여기서는 동경대본의 표기, 음운, 문법, 어휘 중 몇몇 특성에 대해서만 살피고자 한다.
동경대본 『백련초해』가 임진란 이전의 간본임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 중 하나는 ‘ㅿ’ 및 ‘ㆁ’이 쓰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ㅿ’은 시문의 한자 풀이인 새김과 한자의 독음 표기에 쓰인 예가 상당수 보이고, 새김의 어휘가 번역문에 옮겨져 번역문에도 용례가 많이 보인다. 하지만 동일한 어휘가 시문의 새김과 번역문에서 서로 다르게 표기된 이형(異形) 표기의 예도 있다. 오랜 전통성을 가진 한자 새김과 시문의 번역이라는 특수한 번역 환경에 의한 것이거나 표기의 동요(動搖)에 의한 혼란상의 반영으로 본다. 고유어 어휘 표기에 쓰인 ‘ㅿ’의 예는 다음과 같다.
(1) 가. 이/〈間, 2ㄱ, 7연〉,
주052) 14장 뒷면(83연), 16장 앞면(91연)에는 한자의 새김과 번역문 모두에서 ‘이[間]로 표기되어 있다.
이/시〈間, 2ㄱ, 8연〉, 〈間, 9ㄱ〉, 〈心, 5ㄱ〉, 〈村, 7ㄱ, 11ㄱ, 15ㄱ〉/〈里, 5ㄱ, 11ㄱ〉, 〈秋, 7ㄴ, 9ㄱ, 14ㄱ, 16ㄱ〉, 선〈仙, 9ㄱ〉
나. 우/웃-〈笑, 11ㄴ〉, 우/욷-〈笑, 14ㄱ〉, 우숨/우〈笑, 6ㄱ〉, 우움/우-〈笑, 1ㄱ〉, /〈涯, 3ㄴ〉, 〈涯, 5ㄴ〉, /〈塞, 7ㄱ, 37연, 38연〉,
주053) 7장 앞면에 있는 38연의 시문에는 ‘塞’ 자와 ‘邊’ 자가 함께 나오는데, 두 글자의 새김은 똑같이 ‘’이다. 그런데 두 글자에 대한 시문에서의 표기와 번역문에서의 표기는 ‘’과 ‘’으로 다르게 되어 있다. 시문에서는 두 글자 공히 ‘[塞, 邊]’으로 표기하였으나 번역문에서는 ‘[塞, 邊]’으로 바뀐 것이다.
/〈邊, 6ㄴ, 7ㄱ, 15ㄴ〉, /〈畔, 12ㄴ, 14ㄱ〉
다. -〈酌, 2ㄴ〉, 지-〈3ㄴ〉, -/나-〈作, 6ㄴ〉, -/지어-〈作, 8ㄴ〉, -/되-〈作,13ㄴ, 16ㄴ〉, 글스-/글지-[題, 17ㄱ〉,
주054) 17장 앞면의 98연이다. 시문에서는 ‘題’에 대해 ‘글 스-’로 새김을 달았으나, 번역문에서는 ‘글 지어’로 옮겼다.
-/양[每, 8ㄱ〉, -/〈照, 16ㄱ〉, -〈暎, 17ㄱ〉
라. 처/처엄〈初, 11ㄱ, 16ㄴ〉/쳐엄/〈初, 6ㄴ〉
마. 골〈洞口, 4ㄴ〉, 댓엄〈竹芽, 6ㄴ〉, -/-〈詠, 12ㄱ〉
바. 쟈〈幕, 16ㄴ〉
(1가)는 체언류로 분류되는 어휘들이다. 시문의 새김과 번역문의 문장 모두에서 동일한 형태를 보인 예도 있고, 서로 다르게 표기된 경우도 있다. 용례에서 단일형(單一形)으로 보이는 것은 시문에서의 새김과 번역문의 표기가 동일한 경우이다. 동일하지 않은 것은 빗금으로 구분했다. 빗금의 앞쪽이 시문에서의 표기 예이고, 뒤쪽이 번역문에서의 표기 예이다. ‘村’과 ‘里’의 한글 표기가 각각 ‘[村]’과 ‘[里]’로 다르게 되어 있다. (1나)의 ‘笑’ 자는 4가지 형태로 쓰여서 표기의 동요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14장 앞면 79연의 번역문에 보이는 ‘욷-’은 종성의 동요라기보다는 후접하는 자음(‘-놋’) 앞에서의 내파화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시문의 ‘塞, 邊, 畔, 涯’ 등은 한자 표기가 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한글 표기는 모두 ‘//’으로 되어 있다.
주055) 동경대본 『백련초해』에는 시문(詩文)의 한자는 다르지만 새김이 같은 글자가 몇 자 있다. 새김이 ‘글월’로 되어 있는 글자는 ‘字〈6ㄴ〉, 詩〈7ㄴ〉, 書〈8ㄴ〉’ 등 3자이고, 새김이 ‘집’인 글자는 ‘院〈2ㄴ〉, 屋〈3ㄴ〉, 殿〈4ㄱ〉, 室〈8ㄴ〉, 家〈9ㄱ〉, 閣〈12ㄱ〉, 房〈16ㄴ〉’ 등 7자로 많은 편이다. 새김이 ‘묏부리’인 글자는 ‘岫〈4ㄴ〉, 峯〈10ㄴ〉, 岳〈11ㄱ〉, 嶠〈11ㄴ〉’ 등 4글자이다. 이러한 현상은 새김의 전통성과 유구(悠久)함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표현의 정밀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한자 전래 당시 어휘가 세분화되지 않았던 데서 기인한 현상이다.
(1다)는 동사류로 분류되는 어휘들의 예이다. ‘-[作]’을 비롯하여 동사류의 경우에는 번역문에서 시문과 다르게 표현된 예가 많다. ‘-[照/暎]’는 사용례가 드문 이른바 희귀어(稀貴語)이다. 두 번째에 있는 〈3ㄴ〉의 ‘지-’는 16연의 번역문에만 보이는 어휘인데 ‘~群飛雁’에 대한 풀이에서 대응 한자 없이 언해된 ‘물지기러기~(무리 지어 나는 기러기...)’에 의해 실현된 구절이다. (1라)는 부사류에서의 예인데, 시문에서의 표기와 번역문에서의 표기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1마)의 ‘골[洞口]’은 ‘골입’의 오기(誤記)인데, 이는 의미가 근사(近似)한 한자 ‘入’ 자의 음인 ‘’에 견인된 결과일 것이다. 현대어 ‘읊다’의 의미인 ‘-[詠]’은 ‘잎-/입-’의 오기이다. 이 역시 한자음에 견인된 표기이다. ‘댓엄[竹芽]’의 ‘’는 ‘이’의 오각(誤刻)에 의한 것이거나 전라방언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바)는 한자어 차일(遮日)을 한글로 표기한 말인데, 『훈몽자회』에서도 ‘幕’에 대한 새김은 이와 동일하다.
‘ㅿ’이 한자어의 독음 표기에 쓰인 예는 다음과 같다.
(2) 가. 兒 : 아 〈4ㄱ, 6ㄴ, 14ㄴ〉, 人 : 사 〈3ㄱ, 4ㄴ(2회), 7ㄱ, 7ㄴ, 10ㄱ(2회), 11ㄴ, 12ㄱ, 12ㄴ〉/사 인〈1ㄱ, 1ㄴ, 2ㄱ〉, 饒 : 만 〈7ㄴ〉, 日 : 나 〈9ㄱ, 10ㄴ, 13ㄱ, 17ㄱ〉, 纓 : 긴 〈9ㄴ〉, 入 : 들 〈12ㄱ, 12ㄴ, 15ㄱ〉, 乳 : 젓 〈12ㄴ〉, 柴 : 셥 〈15ㄱ〉, 惹 : 버물 〈17ㄱ〉
나. 軟 : 보라울 연〈3ㄱ〉, 如 : 여〈6ㄴ〉, 遶 : 두를 요〈15ㄱ, 15ㄴ〉, 潤 : 저즐 윤〈17ㄱ〉
(2가)의 예에서 보듯 ‘兒’ 자 표기에는 모두 ‘ㅿ’가 쓰였다. ‘人’ 자는 이 책에 모두 13회나 등장하는데 ‘’은 물론, ‘인’으로 표기된 예가 있는 등 다소 혼란상을 보인다. 책 앞쪽의 두 쪽에서는 ‘인’으로 표기했고, 그 외는 전부 ‘’으로 표기하였다. ‘(日)’ 자의 자석 ‘날’은 ‘ㅿ’ 앞에서 [ㄹ] 탈락형으로 나타난다. 앞선 시기의 독음 표기에서 ‘ㅿ’ 초성이었던 (2나)의 어휘들은 이 책에서 모두 ‘ㅿ’ 탈락형으로 쓰였다.
동경대본 『백련초해』에는 음절 말에 ‘ㆁ’이 표기된 예가 상당수 보인다. 주로 시문의 한자어 독음 표기에 보이고, 새김에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번역문에도 일부 보이는데 반드시 분철표기하여 음절초인 초성에는 ‘ㆁ’이 쓰인 예가 없다. 같은 글자가 중복 출현했을 경우, 연구에 따라 ‘ㆁ’, 또는 ‘ㅇ’이 혼용되어 일관성이 없다. 하지만 책 전체로 보면 음절말 위치에서 ‘ㆁ’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3) 가. 紅 : 불글 〈1ㄴ〉/홍〈2ㄴ〉, 風 : 〈1ㄴ〉/풍〈10ㄴ〉, 能 : 〈2ㄱ〉, 上 : 마 〈2ㄱ, 4ㄱ〉/마 상〈3ㄴ〉, 窓 : 〈2ㄴ〉/창 창〈9ㄴ〉, 光 : 빗 〈2ㄴ〉/광〈12ㄱ〉, 黃 : 누를 〈2ㄴ〉/황〈14ㄴ〉, 蜂 : 벌 〈2ㄴ〉, 長 : 긴 〈2ㄴ〉/댱〈9ㄱ〉, 燈 : 현블 〈3ㄴ, 8ㄴ〉, 驚 : 놀날 〈3ㄴ, 4ㄱ〉, 梁 : 〈4ㄱ〉, 映 : 비칠 〈4ㄱ〉/ 영〈17ㄱ〉, 楊 : 버들 〈4ㄱ, 8ㄱ, 14ㄴ〉, 當 : 반 〈13ㄴ〉/당〈12ㄴ〉, 虫 : 벌에 〈14ㄴ〉
나. 堤 : 튝/방튝〈2ㄴ〉
다. 갈이〈鉤, 3ㄴ, 4ㄱ〉, 〈煙帳, 3ㄴ〉 샹〈長, 8ㄴ〉, 의〈龍, 13ㄴ〉, 〈窓, 13ㄴ〉, 의〈鳳, 13ㄴ〉, 은〈僧, 13ㄴ〉, 이〈情, 14ㄴ〉, 녀리로다〈行列, 15ㄴ〉
(3가)는 시문의 한자 독음 표기에 ‘ㆁ’이 쓰인 예이다. 빗금의 앞쪽은 ‘ㆁ’이 실현된 예이고, 뒤쪽은 그렇지 않은 예이다. 같은 책(冊)임에도 연구마다 ‘ㆁ’의 실현 여부가 다르다. 그만큼 당시에 동요(動搖)가 심했다는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 (3나)는 새김의 예인데 새김에는 ‘ㆁ’ 표기가 매우 드물게 보인다. (3다)는 번역문에 쓰인 예이다. 한자어의 음을 표기한 예와 고유어 표기의 예가 두루 보인다.
어두 자음군으로는 훈민정음 창제 이래 ‘ㅅ’계열, ‘ㅂ’계열, ‘ㅄ’계열의 글자들이 쓰였는데, 이 책에는 3계열의 글자들 대부분이 보인다. ‘ㅅ’계열은 ‘ㅺ, ㅼ, ㅽ’의 예가 모두 보이고, ‘ㅂ’계열은 ‘ㅳ, ㅄ, ㅶ, ㅷ’ 중 ‘ㅶ’의 예가 보이지 않는다. ‘ㅄ’계열의 글자 중에는 ‘ㅵ’은 보이지 않고 ‘ㅴ’만 보이는데, 일부는 ‘ㅺ’이나 ‘ㅲ’으로 바뀌기도 했다. 앞 시기에 ‘ㅵ’으로 표기되던 ‘時[]’ 자가 이 책에 한 용례가 있는데, ‘’로 표기되어 ‘ㅳ’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마저도 ‘니’나 ‘니’의 오기로 보인다.
(4) 가. ㅅ계열
[ㅺ] : 〈夢, 3ㄴ, 5ㄱ, 10ㄴ〉, 〈花, 8ㄱ〉, 〈端, 9ㄱ〉, 리〈尾, 13ㄴ〉/
주056) 각 항목의 중간에 보이는 빗금의 앞쪽은 체언류의 예이고, 뒤쪽은 동사류의 예이다. 앞으로의 논의에서도 이 방식을 적용한다.
디-(〈디-)〈滅, 3ㄴ〉,
우-(〈유)〈鬟, 7ㄴ〉, 주057) 이 어휘 ‘우-’는 ‘쪽진 머리’를 가리키는 말인 ‘유-[鬟]’의 오기이다.
-〈鋪, 8ㄱ〉, 미-〈粧, 13ㄱ〉, -〈拖, 14ㄴ〉
[ㅼ] : 〈地, 12ㄱ, 13ㄴ〉, 〈帶, 6ㄱ, 8ㄴ, 10ㄱ〉/-〈帶, 6ㄱ〉, -〈帶, 8ㄴ, 10ㄴ〉
[ㅽ] : 〈角, 6ㄴ〉/-〈抄, 1ㄱ〉, -〈噴, 4ㄴ, 10ㄴ〉
나. ㅂ계열
[ㅲ] : 체언류 없음, -〈貫, 6ㄴ〉
주058) 어두자음군 ‘ㅲ’은 15세기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 15세기 문헌에 보이던 ‘ㅄ계열’의 어두자음군인 ‘-[貫]’가 이 책에서는 시문의 새김과 번역문 모두에서 ‘ㅂ’계열’의 ‘ㅲ’로 바뀐 것이다.
[ㅳ] : 〈意, 1ㄱ, 14ㄴ〉, 〈情, 1ㄱ〉, 〈庭, 2ㄴ, 8ㄴ, 14ㄱ, 17ㄱ〉, 〈院, 2ㄴ, 13ㄱ〉, 〈輪, 4ㄴ〉,
니(〈)〈時, 5ㄴ〉 주059) 이 글자 ‘時’는 새김에 ‘니 시’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자석류에 ‘時:니 시’〈광주판 『천자문』〉, ‘時:시졀 시’〈『석봉천자문』〉, 〈칠장사판 『천자문』〉, 〈송광사판 『천자문』〉, 〈영장사판 『천자문』〉, ‘時:니 시’〈훈몽자회〉, ‘時:시졀 시’〈신증유합〉 등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책에서의 ‘니’는 ‘니’, 또는 ‘니’의 오자(誤字)로 보인다.
/티-〈分, 1ㄱ〉, -〈浮11ㄱ〉, -〈泛, 16ㄱ〉, 오-〈趂, 14ㄴ〉, 러디-〈零, 14ㄱ〉, 듣-〈滴, 15ㄴ〉
[ㅄ] : 체언류 없음/-〈射, 3ㄴ〉, -〈掃, 2ㄴ, 7ㄱ, 12ㄱ, 13ㄱ〉, -〈拂, 15ㄱ〉
[ㅶ] : 해당 어휘 없음
[ㅷ] : 체언류 없음/-〈彈, 17ㄱ〉
다. ㅄ계열
[ㅴ] : 체언류 없음/-〈聯, 1ㄱ〉, -〈滅, 3ㄴ〉, -〈俠, 4ㄱ〉
[ㅵ] : 해당 어휘 없음
동경대본 『백련초해』에 보이는 어두자음군 표기는 15세기에 견주어 큰 변화가 없다. 대체로 15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ㅄ’계열의 ‘-[滅]’는 시문의 새김에서는 본래의 형태 그대로 쓰였으나 번역문에서는 ‘디-’로 바뀌어 ‘ㅅ’계열로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또 ‘-[貫]’는 이때 이미 ‘ㅂ’계열의 ‘-’로 바뀌어 표기되었다. 시문의 새김과 번역문 모두에서 마찬가지다. (1가)의 ‘[花]’과 ‘[端]’은 15세기에는 ‘곳(곶)’과 ‘귿(긑)’으로 표기되었던 어휘들이다. 이러한 변화로 보아 이 어휘들의 어두음이 당시에 된소리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받침이 있는 체언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통합될 때와 받침이 있는 용언 어간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통합될 때 대부분 연철표기를 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분철 표기를 하거나 중철표기를 한 경우도 있다.
가. 분철표기의 예
(5) 봄을/보미〈春, 3ㄱ〉, 섬을〈階, 7ㄱ〉, 시졀의〈時, 5ㄴ〉, 뎜의〈點, 7ㄱ〉, 옥으로〈玉, 7ㄴ〉, 구으로〈雲, 12ㄱ〉
주060) 성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15세기 이래 쓰이던 특수한 곡용어 ‘사향놀이〈麝, 16ㄱ〉’가 쓰인 예도 있고, [ㄹ] 다음에서 [ㄱ] 약화를 반영한 표기인 몰애〈沙, 11ㄱ〉, 놀애〈歌, 11ㄴ〉 등은 이 문헌에 그대로 쓰였다./닐오〈起, 6ㄴ〉, 오〈拂, 15ㄱ〉, 울오〈囀, 7ㄴ〉, 셜온〈痛, 14ㄴ〉, 오-〈踏, 15ㄱ〉, 일우-〈成, 3ㄴ〉
나. 중철표기의 예
(6) 사믜〈人, 1ㄱ〉, 준네〈樽, 2ㄱ〉, 금미로다〈金, 2ㄱ〉, 조오미〈眠, 2ㄴ〉, 옥기〈玉, 3ㄱ〉, 골베〈洞口, 4ㄴ〉, 댓슌니〈竹筍, 6ㄴ〉, 사미〈人, 7ㄱ〉, 〈泉, 10ㄴ〉, 문〈門, 12ㄱ〉, 닙피〈葉, 13ㄴ〉, 앏픠셔〈前, 14ㄴ〉, 힘미〈力, 17ㄱ〉/블로〈唱, 8ㄱ〉
동경대본 『백련초해』에서 받침이 있는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오면 대부분 연철표기를 하여 표기의 큰 원칙은 15세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부분적으로 분철하거나 중철표기를 한 형태가 보인다. 체언류 분철표기의 경우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에서처럼 유성자음 다음에 모음이 오면 분철하는 경향을 보인다. 동사류의 분철은 15세기의 경우와 같이 사동접미사 앞, 어간말 자음 [ㄹ] 다음에서 [ㄱ] 약화를 반영한 표기, 또는 ㅂ불규칙 변화를 반영한 표기 등에서 그렇게 했다.
이 책은 15세기의 표기 원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음소적 표기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중철표기도 그 예가 많은 것은 아니다. 번역문의 체언류에서 몇몇 예를 볼 수 있다. 동사류의 경우에는 그 예가 매우 드문 편이다.
중철표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수사(數詞) ‘나’를 ‘나〈一, 5ㄴ〉’로 표기한 예도 있고, ‘〈庭畔, 12ㄴ〉’의 경우처럼 합성어 사이에 사이글자를 거듭해서 적거나 ‘머므럿다〈留, 9ㄱ〉’와 같이 부동사어미와 통합된 존재동사 ‘잇-’의 복합형 ‘-엇-’의 받침 ‘ㅅ’을 겹쳐 쓴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깃기놋〈慰, 14ㄱ〉’처럼 감동법 선어말어미 ‘-옷-’의 받침 ‘-ㅅ-’을 겹쳐 쓴 예도 있다.
주061) 이 책에는 이러한 표현이 다수 보인다. 시 후구의 문장종결형에 실현된 표현이다. ‘얏다, 짓혓다, 텹햇다, 머므럿다, 브텻다, 엿다, 되엿다’ 등으로 부동사 어미 ‘-어’와 존재동사 ‘잇-’의 복합형인 ‘-엇-’에 후행하여 감동법 선어말어미 ‘-도-’와 통합된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또 다른 형태는 ‘놋다, 오놋다/든다, 피다’ 등의 표현에 보이는데, 이 중 ‘놋다, 오놋다’는 감동법 선어말어미 ‘-옷-’에 후접하여 역시 감동법 선어말어미 ‘-도-’와 통합된 형태를 보인다. ‘든다, 피다’에는 감동법 선어말어미 ‘-ㅅ-’의 실현이 없이 ‘-도-’에 ‘ㅅ’이 통합된 형태로 되었는데, 이는 표기상의 문제로 본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무렵에 간행된 문헌들의 표기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구개음화가 반영된 형태는 고유어나 한자어 모두에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는 일부 볼 수 있다. 17연 후구의 끝 구절 ‘~새 그므린가 젼놋디[~鳥畏羅]〈3ㄴ〉’의 ‘젼놋디’는 끝음절 ‘다’의 획이 탈각된 것이다. ‘젼놋-’은 ‘젛놋-’에서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임을 알 수 있다. 41연 전구의 맨 앞 부분인 ‘드리언 버드리~[垂柳~]〈7ㄴ〉’에서 ‘드리언’
주062) 이 책의 60연에는 〈3ㄴ〉과 동일한 시어에 대한 번역이 있는데 번역문의 어순을 달리한 것은 물론 표기에서도 17연에 실현되었던 자음동화를 반영하지 않았다. ‘垂柳~(버들 드리엇~)〈11ㄱ〉’. 역시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이다. 설측음화를 반영한 것으로는 ‘천리’를 ‘쳘리〈千里, 5ㄱ〉’로 표기한 예가 있다. 한편 시문의 새김에서는 ‘어엿-[憐]’로 쓰였는데 번역문에서 ‘에엿브-’로 ‘ㅣ’모음 역행동화를 반영한 표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원순모음화를 반영한 표기인 ‘기푸믄〈深, 1ㄴ〉, 불거시니〈紅, 2ㄴ〉’ 등의 예도 보인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15세기 문헌에 ‘-〉외-’로 표기되었던 ‘爲/作’이 번역문에서 ‘되-’로 바뀐 것이다. 이 형태가 이때 이미 정착이 된 듯 여기서는 ‘ㅣ모음 순행동화’가 반영된 ‘되여-/되엿-’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주063) 물론 다른 장에는 진행 과정의 과도기적 혼란상을 보여주는 듯한 표기인 ‘도엿도다[爲]’〈8ㄴ, 46연〉가 보인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이 시문에 쓰인 ‘爲’ 자의 새김이 ‘하 위’라는 점이다. 만일 다른 이에 의해 나중에 가필(加筆)된 것이 아니라면 [ㆍ]의 소실과 관련하여 중요한 실마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문에서 ‘檻’의 새김을 ‘란간〈1ㄱ〉’이라고 적고 번역문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르는 등 어두에서도 유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새김과 번역문 모두에서 동일하다.
안병희(1979), 석주연(1999:76)의 지적대로 이 책에는 시문의 새김에서 주목할 만한 어휘가 몇몇 보인다. 그 중 하나가 ‘上’ 자이다. 14장 뒷면에 실려 있는 82연에서는 ‘上’의 새김을 ‘마 향’이라 하고 바로 다음의 83연에서는 ‘마 샹’이라고 했는데, ‘마 향’이 광주본 『천자문』(선조 8년, 1575)에서 보인 ‘上’ 자의 새김과 동일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를 석주연(1999:76)은 16세기 말엽에 이미 전라방언에서 완성되었던 h-구개음화 연원의 과도교정 표기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하여 이 책의 간행지가 전라지역이라는 설에 힘을 실어 준다고 본 것이다.
동경대본 『백련초해』의 한자 새김 및 어휘에 대해서는 그동안 서재극(1973), 최범훈(1983), 손희하(1989), 박병철(1995, 1997, 2001) 등에서 괄목할 만한 논의가 있었고, 책에 수록되어 있는 어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시문 한자에 대한 새김과 번역문에 실현된 어휘간의 대응 관계를 다룬 논의, 연구와 연구 간 어휘 선택과 변화의 문제, 시문과 번역문의 어휘에 대한 비교 연구 등은 어휘사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아울러 이 책에 나오는 희귀어(稀貴語) 및 난해어(難解語)에 대한 연구 역시 많은 진척이 있었다. 한자 새김 등에 대한 연구는 그 논의에 미루고, 여기서는 번역문에 나오는 어휘들 중 여전히 풀리지 않은 몇몇 어휘에 대해서만 해명을 하고자 한다.
그동안의 논의에서 다루어진 희귀어 및 난해어 목록은 다음과 같다.
(7) 가. 아 미〈未, 1ㄱ, 1연〉, 짐즉 점〈漸, 1ㄴ, 3연〉, 안득 불〈不, 2ㄱ, 6연〉, 마 〈上, 2ㄱ, 7연〉, 여막 편〈片, 2ㄱ, 7연〉, 모 라〈羅, 3ㄱ, 12연〉, 긴더올 량〈凉, 6ㄴ, 33연〉, 두에 개〈盖, 8ㄴ, 46연〉/둑 개〈盖, 5ㄱ, 25연〉 녹녹 눈〈嫩, 11ㄴ, 63연〉, 반 [當]〈13ㄴ, 76연〉, 구홧 국〈菊花, 14ㄱ, 78연〉, 쟈 막〈幕, 16ㄴ, 94연〉
위에 있는 단어들은 15세기는 물론 16세기 문헌에서도 그 용례가 매우 드문 어휘들이다. 이미 선행 연구에서 많은 내용들이 밝혀졌으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아[未], 안득[不], 마[上]’ 등은 광주본 『천자문』(선조 8년, 1575 A.D.)과 새김이 같아서 동경대본 『백련초해』가 장흥판임을 추정하게 해 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 ‘오래 문〈門, 2ㄱ〉, 새 〈鳳, 13ㄴ〉, 오힐 유〈猶, 16ㄱ〉 등도 그러하다.
주064) 『훈몽자회』(중종 22년, 1527), 광주판 『천자문』(선조 8년, 1575) 등의 자석(字釋)과 동경대본 『백련초해』의 자석(字釋) 및 문석(文釋)의 일치 여부에 대해서는 박병철(1997:294~307)에 자세한 논의가 있다.
아래에서는 새김이 독특한 어휘, 또는 이 책에 처음 등장하거나 드물게 쓰이는 어휘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의미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잘못 쓰인 어휘의 교정도 겸할 것이다.
1) 골[洞口, 4ㄴ, 21연] → 골입(골짜기 입구)
‘골[洞]’과 그 입구를 가리키는 말인 ‘입[口]’의 합성어인데, ‘입구(入口)’ 중 ‘入’ 자의 한자음인 ‘’에 견인되어 이렇게 잘못 적힌 것이다. 곧 ‘골입[洞口]’의 오기(誤記)이다. 그런데 ‘골’의 한자가 ‘洞’이어서 ‘마을 앞 동구’로 이해한 경우도 있으나, ‘洞’의 새김에 ‘골, 구렁[幽壑]’의 의미가 있고, 출구(出句)의 내용 ‘산두(山頭)’와의 호응 관계로 보면 여기서의 ‘洞口’는 ‘골짜기 입구’가 온당할 것이다.
2) 조막[片, 4ㄴ, 21연] → 조각
시문의 새김에서는 ‘片’ 자를 ‘여막 편’이라고 하였으나, 번역문에서는 ‘조막’이라고 풀었다. 다른 이본들에서 이를 ‘조각’으로 옮겼고, 이 부분의 원문이 ‘噴一片雲’이고, 번역문이 ‘ 조막구루믈 놋다’인 점으로 보아 ‘조각’의 의미를 가진 어휘임을 알 수 있다. 전라방언형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새김인 ‘여막’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에서 상당한 진척이 있어서 따로 다루지 않는다.
3) 줄[菰] : 프른 줄 닙 우희 간다온 브()미 닐오(靑菰葉上凉風起)〈6ㄴ, 33연〉
‘줄’은 벼과의 다년초(多年草) 식물이다. 이 책 이후에 간행된 책에 간혹 보이고, 지금은 사전에도 등재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문헌에는 그 용례가 매우 드문 이른바 희귀어이다. 번역문의 세 번째, 네 번째 글자인 ‘줄’과 ‘닙’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동안의 역주에서는 다소 혼란이 있었던 부분이다.
4) 긴덥-(〈건-)[凉, 6ㄴ, 33연] : 긴덥-[凉] → 건덥-/간답-
‘凉’ 자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시문의 새김에는 ‘긴더올 량’으로 되어 있는데, 번역문에서는 ‘간다온’으로 모음교체가 일어났다. 이 어휘는 좀 드물기는 하지만 『월인석보』권1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 등으로 보아 ‘간답-’의 모음교체형인 ‘건덥-’으로 표기해야 한다. ‘긴덥-’은 ‘건덥-’의 오기로 보인다. 따라서 새김을 ‘건덥-’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광주본 『천자문』〈38ㄱ〉에는 ‘凉’ 자의 새김이 ‘간다올 량’이다.
(8) 자본 이 고 간다 道理로 衆生 濟度야〈월석 1:18ㄱ〉
地獄앳 모딘 브리 간 미 외야〈월석 8:73ㄱ〉
5) 짓혓-[倚, 7ㄱ, 37연] → 지혓다 → 기댔도다, 기댔구나
사전에 실려 있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이는 표기상의 문제 때문이다. 시문에서 ‘倚’의 새김은 ‘비길 의’이다. ‘倚’ 자는 중세국어 문헌에서 ‘기대다’ 또는 ‘의지하다’의 의미로 쓰였고, 이에 대응하는 당시의 어휘로는 ‘지혀다’ 또는 ‘지다’가 있다. 이를 근거로 하면 ‘짓혓다’는 ‘지혓다’의 다른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짓혓-’은 ‘지혀/짓혀-[倚]+어(부동사 어미)#잇-[在]’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미 누의 짓혓다[~人倚褸]’는 ‘~사람이 난간에 기댔구나.’로 옮겨야 할 것이다.
(9) 녁 발 이쳐 드듸며 지혀며 빗기 보 말며(不跛倚睇視)〈내훈 1:50ㄱ〉
내 門을 지혀서 라고(吾倚門而望)〈소학언해 4:33ㄱ〉
6) 텸햇다[疊, 8ㄱ, 42연] → 텹햇다 → 첩(疊)했도다(쌓았구나/겹쳤구나)
시문의 새김에는 ‘텹 텹(疊)’으로 되어 있으나 번역문에는 ‘텸햇다’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오각에 의한 오기로 보인다. ‘텹햇-’은 ‘텹-+아#잇-[在]’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텹(疊)-’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쌓-’ 또는 ‘겹치-’의 의미이다.
7) 누흐럽-[嫩, 11ㄴ, 63연] → 부드럽다, 느른하다, 곱다
시문에서 ‘嫩’의 새김은 ‘녹녹 눈’인데 번역문에 ‘누흐럽-’으로 되어 있다. 이 책 외에는 거의 용례가 없다. 해당 구절은 ‘비 바랏 뫼해 개니 도라오 구루미 누흐럽고[雨晴海嶠歸雲嫩]’이다. 현대어로 옮기면 ‘비가 바다의 산에서 개니 구름이 부드럽고(곱고),’ 정도가 될 것이므로 ‘누흐럽-’의 의미는 ‘부드럽다’ 또는 ‘곱다’의 뜻이다.
8) 읿-(〈얿-)[嬌, 11ㄴ, 63연] → 얿도다 → 사랑스럽구나, 예쁘구나
시문에서 ‘嬌’의 새김을 ‘얼울 교’라 했고, 번역문에는 ‘얿도다’로 옮겼다. 해당 구절은 ‘미 묏 시내예 어즈러오니 디 니피 읿(얿)도다[風亂山溪落葉嬌]’이다. 현대어로 옮기면 ‘바람이 산의 계곡물에 어지럽게 날리니 떨어지는 나뭇잎이 예쁘구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동안 서술어로 쓰인 ‘嬌’의 표기가 ‘읿-’이어서 해독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탈각에 의한 오자(誤字)로 이를 ‘얿-/얼우-’로 바로 잡는다. ‘얿-/얼우-’의 의미는 ‘사랑스럽다’ 또는 ‘예쁘다’이다. ‘嬌’ 자의 새김은 『훈몽자회』〈하 : 33〉에도 ‘얼울 교’라 하였다.
9) [痕, 12ㄴ, 70연] → 자국, 자취, 궤적
시문에서 ‘痕’ 자의 새김은 ‘허물 흔’이다. 번역문에는 ‘’으로 되어 있다. 용례가 매우 드문 어휘이지만 의미는 ‘자국, 궤적, 자취’ 등이다. 나중에 ‘, 그’으로 쓰이기도 했다. 해당 구절은 ‘문 앏 버드른 서릿 엿다[門前細柳帶霜痕]’이다.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문 앞의 가는 버들은 서리의 흔적을 띠었구나.’이다.
10) 발아이시니[當, 13ㄴ, 76연] → 맞닿아 있으니
‘발아이시니’에 대한 형태 분석 문제로 해석이 쉽지 않았던 어휘이다. 이는 ‘바-[當]+아#이시-[在]+니’로 분석된다. ‘바-’의 의미는 ‘바르다, 곧다’이므로 ‘발아이시니’는 ‘무엇에 상당하니’, 또는 ‘닿아 있으니’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의역이 가능하다. 따라서 ‘當窓’을 번역한 ‘창 발아이시니’의 의미는 ‘창에 맞닿아 있으니’ 정도로 옮겨야 할 것이다.
11) -[暎, 17ㄱ, 97연] → 비치니, 눈이 부시니
‘-[暎]’는 중세 국어 문헌에서 그 용례가 매우 드문 어휘이다. 15세기에는 『남명집언해』(1482년 간행)에 한 예가 보일 정도로 희귀어에 속했으나,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에 ‘照, 曜’ 자와 함께 ‘暎’ 자의 새김으로 쓰이고, 『신증유합』(1576년 간행)에 ‘照’ 자의 새김으로 쓰였다. 이 책에는 널리 쓰여서 용례가 많다. ‘照’ 자의 새김으로 4회, 그리고 ‘暎’ 자의 새김으로 1회 등 모두 5회가 보인다.
4.1.8. 문장의 구성
『백련초해』는 한시의 한자와 시문의 내용을 모두 한글로 옮겨서 책으로 펴낸 학습서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언해 체제가 매우 독특하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특히 동경대본 『백련초해』는 시문의 한자에 대한 새김을 따로 두어서 더욱 그렇다. 문장구성이 단조로우면서도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연구(聯句)들은 연구 내에서 출구(出句)와 대구(對句)가 대를 이루어 이를 한글로 옮긴 번역문 또한 대우(對偶) 형식으로 되어 있다.
(10) 가. 〈7ㄱ, 36연〉
댓 그름제 섬을 로 듣그리 니디 아니고(竹影掃階塵不動)
바라 치쇼 믈리 허믈 업도다(月輪穿海浪無痕)
나. 〈14ㄴ, 82연〉
프른 버드른 디 이셔 발 앏픠셔 춤 츠고(綠楊有意簾前舞)
이 만야 바랏 우호로셔 오놋(明月多情海上來)
(10가)에서 보는 것처럼 『백련초해』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시들은 전구[出句]와 후구[對句]가 대를 이루고 있다. 이를 한글로 옮긴 번역문에서 전구는 대부분 대등적 연결어미 ‘-고/오’로 대를 놓아 후구로 연결하고, 후구의 문장 종결은 감동법 선어말어미 ‘-도-’ 및 ‘-옷-’에 종결어미 ‘-다’가 통합된 감탄형 종결로 영탄의 구성을 만들었다. 곧 감탄 종결형인 ‘-도다/로다/다’, 또는 ‘-놋다/놋’형의 어미로 마무리하는 형식이다. 드물지만 ‘-놋다’형 종결도 보인다. 한두 곳을 제외하면 예외가 별로 없다.
주065)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전구인 연결형에서는 ‘-업소’〈1ㄱ, 2연〉 및 ‘-거니와’〈1ㄴ, 4연〉가 있고, 표기만 다를 뿐인 ‘-’〈, 61연〉 정도가 있을 뿐이다. 후구인 종결형에서의 예외는 ‘-노라’〈, 61연〉와 표기만 다른 형태인 ‘-두다’〈2ㄴ, 9연〉 정도가 있을 뿐이다. 어떻든 이런 이유로 문장 구성은 100수 모두에서 큰 차이가 없다.
지금까지 『백련초해』의 이본 십 여종을 대상으로 각 책들의 언해 체제를 비롯한 형태서지적 특징, 수록된 연구의 성격과 간행 연대, 어학적 특성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본들마다 수록된 연구의 수(數)와 편연(編聯) 순서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이본들 중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추정되는 동경대본을 논의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책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많은 선행 연구 및 역주들이 이어져서 괄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해결로 남겨진 과제들이 있다. 이 논의는 그러한 숙제들을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오랫동안 단편적으로만 논의되어 왔던 여러 이본들의 규모와 성격을 밝혔다. 그리고 각 책들의 형태서지, 번역 여부 및 번역의 형식, 수록 연구(聯句)의 규모 및 내용 등 책의 특성을 중심으로 해서 계통을 세운 후 이본들 간의 차이에 대해 정리했다. 간행의 형태별로 분류해 본 결과 10여 종의 이본들은 목판본, 필사본, 활자본 등으로 간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동경대본, 애스턴 구장본, 필암서원본 계통, 규장각 A본 계통 등을 비롯한 대부분이 목판본이고, 규장각 B본, 장석련본 등 일부는 필사본이다. 활자본은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근위본(近衛本)이 유일하다. 둘째, 한글 번역문의 유무에 따라 번역본과 한문본으로 분류하였다. 번역본은 다시 시문의 한자에 대한 새김 여부에 따라 나누었다. 동경대본은 유일하게 한자에 일일이 새김과 음을 단 후 구결문 없이 번역을 했고, 그 외의 목판 번역본은 모두 한자 새김 없이 독음만 단 후 구결문 없이 번역을 하였다. 필암서원본 계통의 책에는 측성(仄聲)인 한자의 우견(右肩)에 원권(圓圈)을 두어 학습용 교재로서 초학자들의 이용을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필사본인 규장각 B본과 장석련본은 판식에서 다른 책들과 큰 차이가 있다. 상란과 하란으로 구분하여 상란에는 한자 없이 ‘-이고’, ‘-이라’로 끝나는 독음만으로 된 한글 구결문과 번역문을 두고, 하란에는 한시 연구(聯句)만 두었다. 이렇듯 한글 구결문의 문장 끝에 ‘-이고’, ‘-이라’라는 구결을 둔 것은 학습자들의 송습(誦習) 및 암송(暗誦)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문본은 심재완본, 최범훈본, 수송본,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근위본(近衛本), 견오백리본(筧五百里本), 석전원계본(石田元季本) 등이다. 일본에 있는 한문본 책들은 번역본의 한글을 삭제한 후 다시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사실 여부와 계열 관계 등에 대한 연구(硏究)가 필요할 것이다. 셋째, 책의 이름이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동경대본 등에서는 100수가 수록되어 있으나 이본들마다 수록 연구의 종류와 수에 일부 차이가 있다. 한시 초학자용 학습서라는 책의 성격으로 인해 시대에 따라 내용에 대한 수요가 달라서 이를 반영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대부분 칠언고시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일부 칠언절구도 보이고, 규장각 B본과 심재완본에서처럼 책에 따라서는 ‘오언고시’를 수록하기도 했다.
[2] 동경대본 『백련초해』에는 모두 1,400자의 한자가 사용되었다. 이 중 2회 이상 중복으로 쓰인 글자 수가 259자, 단 한 차례 쓰인 글자 수가 278자로 실제 사용된 글자 수는 537자이다. 사용 빈도수가 높은 글자 순으로 보면, 꽃[花], 달[月], 산[山], 봄[春], 대나무[竹], 바람[風] 등의 순이다. 이는 그대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의 소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물, 자연 현상, 계절 등이 주된 소재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랫동안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즐겨 쓰던 제재(題材)들이었다. 수록된 시들은 대체로 이 제재들을 대상으로 순차를 정해 편연(編聯)한 것이다. 판본에 따라서는 ‘백(白), 청(靑), 홍(紅)’ 등 색채별로 나누어 실은 것도 있다.
[3] 수록되어 있는 연구 100수의 출처(出處)나 전거(典據)를 살핀 결과 30수 정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시들을 지은이, 시의 제목, 발췌 대상 연(聯)이나 구(句), 시가 실려 있는 전거나 출전, 권차 등의 순서로 정리했다. 출처를 알 수 있는 시들은 주로 중국 당·송대 대가들의 작품이었다. 매우 소수이지만 신라·고려조 문인이 지은 시도 있다. 시들 중에는 원시(原詩)에 두세 글자를 고치거나 보태어 내용의 변개(變改)를 가져온 것이 있다. 이는 한시 학습자를 위해 편찬 당시에 일부 변개가 가해졌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이를 근거로 전거나 출처가 없는 시들의 상당수는 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편찬자에 의해 재구성 및 재편집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했다. 이 책이 초학자들의 한시 학습용 교재였기 때문에 텍스트의 성격에 맞게 변개가 불가피했을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는 첨삭과 모작을 해서라도 수록의 필요성이 있어서 그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백련초해』는 어느 한 사람의 소작이 아닐 수 있다. 처음에 칠언고시들을 모아 학습용으로 편찬했고, 한자 구결을 달아서 읽다가 한글이 보급되면서 자연스럽게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다만 한글 번역이 이루어질 때 시(詩)라는 특성으로 인해 비교적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구결을 제외하고, 대신 한시에 한자의 새김인 자석(字釋)을 달아서 초학자(初學者)들을 배려한 것으로 본다.
선행연구에서도 『백련초해』의 편찬자 또는 간행자 등의 사항은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했지만, 간행지는 『고사촬요』의 「책판목록」 등과 현전하는 판목 등에 의해 평양, 장흥, 경주, 장성 등으로 알려져 있다.
[4] 동경대본 『백련초해』는 15, 16세기에 간행된 다른 언해본들과 언해 체제 등에서 뚜렷하게 다른 보습을 보인다. 시문의 한자 바로 밑에 해당 글자의 새김인 이른바 자석(字釋)과 독음(讀音)을 두고, 정음 구결문 없이 바로 번역을 한 것이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한글 번역문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고 오로지 한글만으로 번역문을 만든 것이다. 15, 16세기에 간행된 문헌들 중에 이렇게 한글만으로 번역문을 구성한 책은 없다. 또 하나는 16세기 후기에 간행된 책으로 추정하지만 한자음이나 한글 모두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은 점이다. 표기의 특징으로는 ‘ㅿ’이 한자 독음(讀音)과 고유어 모두에서 보이고, 음절말에 ‘ㆁ’을 쓰고 있는 점이다. 어두자음군은 15세기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ㅵ’ 자와 ‘ㅴ’ 자로 쓰였던 일부의 글자가 ‘ㅺ’이나 ‘ㅲ’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한편 어두음 중에는 앞 시기에 예사소리였던 ‘곶[花]’이 ‘’으로, ‘긑[端]’이 ‘’으로 된소리 변화를 반영한 예도 있다.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과 용언 어간의 형태소 경계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가 올 경우의 표기에서는 대체로 앞선 시기의 표기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때에는 대부분 연철표기를 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분철표기를 하거나 중철표기를 한 경우도 있다. 음운현상 중 특기할 만한 내용으로는 구개음화가 반영된 형태는 고유어나 한자어 모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는 일부 볼 수 있다. 설측음화를 반영한 표기, ‘ㅣ’모음 역행동화를 반영한 표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원순모음화를 반영한 표기의 예도 보인다.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15세기 문헌에 ‘-〉외-’로 표기되었던 ‘爲/作’의 한글 옮김이 번역문에서 ‘되-’로 바뀐 것이다.
[5] 이 책은 시문의 한자마다 한자의 새김인 이른바 자석(字釋)이 있어서 당시의 어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미 선행 연구들에서 상당한 성과도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어휘의 성격 규명을 통해 이 책의 새김 어휘 중에 광주본 『천자문』과 일치하는 요소가 많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는 동경대본 『백련초해』에 전라방언형이 반영되어 있고, 이는 곧 이 책의 간행지가 장흥임을 유력하게 해 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는 한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이른바, 희귀어(稀貴語) 및 난해어(難解語)가 적지 않다. 그동안 규명이 쉽지 않았던 ‘짓혓다[倚, 7ㄱ, 37연]’, ‘발아이시니[當, 13ㄴ, 76연]’ 등 11개의 어휘를 대상으로 그 의미를 밝혔다. 아울러 번역문 구성의 특징을 밝혔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시들은 대부분 칠언고시의 함연(頷聯)과 경연(頸聯)에서 발췌한 것들인데, 연구 안에서 다시 전구(前句)와 후구(後句)가 대(對)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전구는 대등적 연결어미 ‘-고/오’로 끝나고, 후구는 감동법 선어말어미 ‘-도-’ 및 ‘-옷-’에 종결어미 ‘-다’가 통합된 감탄형 종결 구성이다. 후구의 종결은 ‘-도다/로다/다’ 또는 ‘-놋다/놋’형 어미로 마무리되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는 이 책이 언제 처음 편찬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글 번역문이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한문본으로 유통되다가 나중에 한글 번역이 가해진 것일까 하는 점이다. 대다수 『백련초해』에는 간행 관련 기록이 없어서 간행의 시기, 장소, 간행자 등에 대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 한시 초학자들을 위한 교재로서의 성격상 한 개인의 편찬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의 사정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으로 본다. 처음의 편찬자 및 주요 이본들의 편찬자, 편찬 시기, 간행 장소 등과 함께 향후 풀어야 할 과제이다.
김경숙(1973), 「백련초해 해제」, 『국문학연구』 4, 효성여대 국어국문학연구실, 121-124쪽.
김용숙(2003), 『백련초해』, 필암서원.
박병철(1995), 「백련초해 자석과 문석의 대비적 연구 1」, 『개신어문연구』 12, 개신어문학회, 109-130쪽.
박병철(1997), 「자석과 문석이 일치하는 『백련초해』의 석에 관한 연구」, 『구결연구』 2, 구결학회. 291-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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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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