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신전자취염소방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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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신전자취염소방언해
역주 신전자취염소방언해

인조 13년(1635)에 이서가 당시 사용된 각종 화포와 화약 사용법을 한데 모아 한글로 번역한 병서로, 숙종 11년(1685)에 중간되었다. 『화포식언해』의 후반부에 『신전자취염소방언해』가 함께 묶여 전한다. 최명길의 발문(跋文)에 두 책의 간행하게 된 과정이 함께 다루어진 점으로 보아 이 책과 『신전자취염소방언해』는 애초 함께 짝이 되어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호완(鄭鎬完)
문학박사 시조시인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삼국유사사업위원회 대표
삼국유사문인협회 대표
한국문인협회
민조시 천료
문학세계 신인상
시조문학 작가상
경상북도 문화상
『우리말의 상상력』 외 40여 권.
「후기 중세어 의존명사의 문법기능」,
「단군왕검의 형태론적 연구」 외 100여 편.
  •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 : 정호완
  • 교열·윤문·색인위원
  •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 : 박종국, 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노원복 리의도
  • 박병천 성낙수 오명준
  • 이창림 이해철 임홍빈
  • 전상운 정태섭 조오현
  • 차재경 최홍식 한무희
  • 홍민표
『역주 화포식언해·신전자취염소방언해』를 내면서
우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국역하기 시작하여 447책을 펴내 전체 실록을 완역하였고, 『증보문헌비고』 40책 완간 등 수많은 국학 자료의 번역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아울러 1990년 6월부터는 “한글고전 역주 사업”의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9․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그 성과물을 간행하여 왔다. 이제 우리 회는 올해로써 한글고전 역주 사업을 추진한 지 23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게 되었고, 600책이 넘는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국역‧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국역 사업을 벌이는 뜻은 바로 백성과의 소통을 통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역주하여 간행한 문헌과 책 수는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남명집언해』 2책,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1책, 『구급방언해』 2책, 『금강경삼가해』 5책, 『선종영가집언해』 2책, 『육조법보단경언해』 3책, 『구급간이방언해』 5책, 『진언권공, 삼단시식문언해』 1책, 『불설아미타경언해, 불정심다라니경언해』 1책, 『반야심경언해』 1책, 『목우자수심결․사법어 언해』 1책, 『신선태을자금단․간이벽온방․벽온신방』 1책, 『분문온역이해방․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1책, 『언해두창집요』 1책, 『언해태산집요』 1책, 『삼강행실도』 1책, 『이륜행실도』 1책, 『정속언해‧경민편』 1책, 『상원사중창권선문‧영험약초‧오대진언』 1책,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책, 『두시언해』(권10, 11) 2책, 『여씨향약언해』 1책, 『번역소학』(권6ㆍ7ㆍ8ㆍ9ㆍ10) 1책, 『소학언해』 4책, 『논어언해』 2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권1ㆍ2ㆍ3ㆍ4ㆍ5) 1책, 『연병지남』 1책 등 모두 90책이다.
이제 우리가 추진한 “한글고전 역주 사업”은 15세기 문헌을 대부분 역주하고 16세기 이후 문헌까지 역주하는 데 이르렀다. 올해는 그 가운데 『병학지남』, 『화포식언해』 등 지난 해에 이어 16세기와 17세기 문헌을 중점적으로 역주할 예정이다.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는 인조 13년(1635)에 이서(李曙)가 당시 사용된 각종 화포와 화약 사용법을 한데 모아 한글로 옮겨 언해한 병서다. 숙종 11년(1685)에 중간되었는데, 2권 1책이다. 책의 후반부에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가 함께 묶여 전하는데 묶인 책의 말미에 최명길(崔鳴吉)이 쓴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발문의 내용에 두 책의 간행 경위가 함께 소개된 점으로 보아 이 두 책은 애초 함께 짝이 되어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번에 우리 회가 펴내는 역주본은, 『화포식언해』의 저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본(황해병영판)을 사용하였는데, 뒤에 붙어 있던 『신전자취염소방언해』가 없으므로 이 부분은 서강대본(중간본)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의 군사 훈련 지침서로서 제일 먼저 나온 책이라 할 수 있는 『연병지남(練兵指南)』(1612)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 중기 화약무기에 대해 가장 폭넓게 수집 설명하고 있는 군사 자료인 이 두 언해본은 매우 귀중한 군사 사료이다. 『화포식언해』에서 설명하는 화약무기는 무려 43종이나 되며, 특히 세종 때부터 만들어졌던 신기전(神機箭) 등 여러 화포에 대한 설명은 우리나라의 로켓 발명이 세계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해 주신 대구대학교 정호완 명예교수님과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에 여러 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2013년 7월 1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과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15, 16세기의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의 저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본(황해병영판)인데 뒤에 붙어있던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가 없으므로 이 부분은 서강대본(중간본)으로 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자 원문·언해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으며,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장(張), 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2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火화藥약을 녀호 살  적이2ㄱ어든
제2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2ㄴ天텬字銃츙筒통애 中듕藥약線션 …
(3) 현대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다만, 현대말 풀이에서, 옛글의 구문(構文)과 다른 곳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 〉 안에 보충하는 말을 넣었다.
(4) 띄어쓰기는, 한자와 한글 혼용한 한자 원문은 토를 붙인 데만 띄었고, 언해문은 현대문법에 따라 띄어 썼다.
(5) 이 책의 언해문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는데 한자의 한글 표기가 당시의 발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원문대로 표기하였다. 다만 이에 대한 현대문 주석의 올림말은 현대 발음대로 하고, 말밑 한자를 괄호에 넣었다.
(6) 한자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문 풀이·주석과 구별하였고, 원문이나 언해문 가운데 작은 글씨 2행의 협주는 편의상 <원주>【 】 표시로 묶어 나타내었으며, 이에 대한 현대문도 같게 하였다.
(7) 찾아보기는 언해문의 낱말을 전수 조사 방식으로 모두 찾을 수 있도록 하되, 한자 병용과 순 옛말 표기를 구분하여 배열하였고, 아울러 한자 용어 주석도 구분하여 배열하였다. 배열순서는 우리말 큰 사전의 순서를 따랐다.
『화포식언해』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사람의 모든 일이란 항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물며 전쟁 상황에서 적군이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화포를 쓰는데 이를 막아낼 길이 없다면, 결론은 뻔하다.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임진왜란의 경우다. 왜군은 조총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신식 총포를 갖고 쏘아대는 데 거기다 대고 활로 쏴 보았자 별도리 없다. 결과는 밤에 불을 봄과 같다.
일찍이 관원들은 전투에서의 화공(火攻)의 효과를 크게 인식하여 방화의 목적으로 가연성 물질을 전투 목적에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왔다. 견고한 적의 요새, 또는 집결된 적의 진영에 풍향을 이용하여 화공하는 방법은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화살 끝에 가연성 물질을 부착하여 적진에 날려 보내는 화공법도 흔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화공법은 단순한 연소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뿐 파괴 효과는 적었기 때문에, 연소 효과와 더불어 파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무기 개발은 위정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비행 무기인 돌의 경우에도, 돌이 가하는 단순한 충격 효과보다는 파괴력이 수반되는 좀더 강력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탐구가 지속되어 온 것이다. 폭발력과 가연성을 지니며 폭발력을 이용하여 공격적 물질을 보다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물질 즉, 화약의 제조에 인류는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중국의 송나라 때에는 기원 10세기에서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쳐 화약을 제조하여 이를 이용한 화기를 실용의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초기 화약의 제조와 화기의 사용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화약 중에서도 주요 성분인 염초(焰硝)의 제조는 폭발의 위험을 극복해야 하는 기술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때까지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화기 주조술은 화약의 폭발력을 견뎌낼 만큼 견고한 화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포신은 자주 파열되었으며 사용자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기의 음향 효과, 다시 말해 화약이 폭발할 때의 굉음이 적에게 주는 충격이 컸고, 또 인력에 의존하던 재래의 무기에 비해 살상 효과가 매우 컸기 때문에, 이 화포의 발사 때에 일어나는 위험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꾸준히 모색되었다.
화기의 사용은 화약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 14세기 중엽에 와서야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물론 고려 숙종 9년(1104)에 고려가 북쪽의 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였는데, 이 때 발화대라는 특수부대가 편성 운용되었다. 여기 발화대가 재래식 화공 부대인지, 혹은 화기를 장비한 부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몽고군이 이미 화기를 사용하였으며, 이들 몽고군과의 교섭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인들은 적어도 화기에 대한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공민왕 5년(1356) 9월 고려의 중신들은 서북면 방어군을 사열하고, 총통(銃筒) 즉 화기를 이용하여 화살로 사격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늦어도 14세기 후반부터는 화기를 제작하여 실전에 사용했다. 그러나 화기의 사용이 곧 화약의 자체 생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수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양권은 이미 금속활자 문화의 단계에 있었으므로 화기의 주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화약의 제조였다. 화기의 효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화약의 제조법을 극비에 붙여 제조 기술의 국외 유출을 엄격하게 막았다. 이는 중국이 주변 국가보다도 우세한 무기체계를 유지하려는 데서 비롯한다. 화약의 성분인 유황, 목탄, 염초의 세 가지 중 유황과 목탄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염초 제조가 문제였다. 실로 화약의 제조는 이 염초의 제조 여하에 그 열쇠가 달려 있었다.
흔히 화약이란, 공업용이나 군사용에 쓰는 폭발성 물질 또는 혼합물을 말한다. 학술적으로는 화약과 폭약을 총칭하여 화약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화약류를 그대로 화약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12세기 북송시대에 싸움터에서 사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 화약의 폭발력이 알려져 중요한 무기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공민왕 이전으로 상정되고 있다. 고려 말에 자주 있었던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화약과 화포는 당시 최무선(崔茂宣)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개발되었다.
한편, 새로운 조선 왕조의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조선 태조와 세조에 의하여 이를 위험시하여 화약류의 개발을 억압하기도 하였다.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아냄에 있어 화약류는 필수적인 것이었고, 정책적으로 이를 위한 개발을 힘썼다. 태종·세종 및 문종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화약 제조에 앞서 중요한 과제는 기본적으로 화약의 원료인 염초(焰硝)의 제조법이었다. 아주 비밀스럽게 다루어졌으므로 민간에서는 개발하지 못하였고, 나라에서도 제한적으로 밖에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여말 최무선이 저술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15세기 전반의 『총통등록(銃筒謄錄)』의 경우, 그 이름은 전하여 오나,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행하게도 16세기 초엽의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와 16세기 말엽의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에 전하는 과학기술들은 앞선 선인들의 지식과 경험에 힘입는다. 이야말로 기술인 각자의 힘겨운 내공으로 얻어낸 방법이며 열매들이었다.
2. 화약 제조의 발자취
2.1. 화약 제조의 새벽
고려 시기만 해도 화약의 제조법은 어두운 그믐밤이었다. 그러다 공민왕 22년(1373)에 명나라에 화약(火藥)을 요청하였다. 다음 해 5월 명나라 태조는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그 밖에 필요한 물품을 주었다. 이것이 화약에 대한 대외적인 첫 신호음이었다. 명나라에서 화약의 재료를 들여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만드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최무선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중국인 이원(李元)으로부터 염초를 흙에서 뽑아내는 방법과 기술을 배우고, 마침내 우왕 3년(1377)에는 국가 수준에서 화약 제조 기관으로서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게 된다.
화약 및 여러 가지 화기의 제조는 화통도감의 설치와 함께 활성화되었다. 우왕 4년(1378)에는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서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편성되기에 이른다. 최무선은 누구인가. 최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 지금의 영천)이며 아버지는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사용했던 한국 화약의 선구자이다.
그는 과학 기술에 밝고 병법을 좋아했다. 당시 호시탐탐 기승을 부리던 왜구를 무찌르는 데는 화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 화약 제조법 탐구에 정진했다. 우리나라에는 늦어도 14세기 전반까지는 화약과 화포(火砲)가 전래되어 있었다. 화약의 제조에 있어서 가장 선결되어야 할 과제는 염초(焰硝)를 만드는 문제였다. 곧 흙에서 염초를 구워 내는 방법-자취법(煮取法)이 화약 제조 및 화기 발달의 열쇠였다. 하지만 원나라나 명나라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기에 고려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에 중국 상인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碧瀾島)에 가서, 중국에서 오는 상인들에게 그 방법을 물으며 찾던 가운데, 중국 강남(江南)의 상인 이원(李元)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염초자취법을 배우게 된다. 전하기로는 최무선이 원나라에 직접 가서 배워왔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너무도 어렵게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최무선은 그 뒤 조정에 여러 번 건의하여 마침내 우왕 3년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되고, 그 책임자인 제조(提調)로 임명되면서부터 한국은 화약 기술에 매우 빠르게 눈을 뜨게 된다. 화약 외에도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 등의 총포와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 등의 발사물, 그밖에 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 갖가지 화기와 이런 화기를 실을 수 있는 전함이 만들어졌다. 또 화기 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군사 조직으로 도입되었다.
고려 우왕 6년(1380) 왜선 500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느닷없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해댄다. 최무선 장군은 부원수(副元首)로서, 도원수(都元首) 심덕부(沈德符), 상원수(上元首) 나세(羅世)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가서 처음으로 화통·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선을 유감없이 쳐부순다. 그 뒤 우왕 9년(1383)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데도 화기를 사용했다. 여기 관음포는 충무공이 임진왜란을 맞아 왜군과 교전하던 가운데 마지막으로 전사한 뼈아픈 역사의 발자취가 남은 곳이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었을 정도로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구 격퇴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신흥세력은 화약 병기의 발달에 오히려 소극적이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李成桂) 등 신흥세력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인 고려 창왕 원년(1389) 난신적자들 손에 화약술이 들어가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조준(趙浚) 등의 주장으로 화통도감이 없어지면서 군기시(軍器寺)에 부속되기에 이른다.
조선 초기에는 화약을 제조하고 이를 국방에 사용, 나라를 지켰던 최무선의 공적은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했다. 조선조 태조 원년(1392) 조선이 건국되면서 영향력 있는 벼슬은 받지 못하였고, 그냥 작위만 정헌대부 검교참찬문하부사(正憲大夫檢校參贊門下府事) 겸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가 되었다. 죽은 뒤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화통도감을 없앤 뒤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화포법(火砲法)』 등을 저술했다. 현재 전하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태종대에 그의 기술을 이은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등용되면서 다시 화기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발달한 화약 병기는 고려 말 30년간의 왜구의 외침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화통도감이 설치된 지 10여년 만인 1389년에 군기시(軍器寺)에 속하게 되면서 약화일로를 걷게 된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성계(李成桂)는 권력 집중을 위한 수단으로서 화기 제조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화약은 정월 설 놀이의 하나였던 불꽃놀이[火戱]에만 쓰였을 정도였으니 한심스러운 지경이었다.
태조와는 달리 태종은 왕위에 오른 첫해에 최해산(崔海山)을 등용, 조선 화기발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태종 4년(1404)에는 군기감별군(軍器監別軍)이 이루어지고 화통군(火筒軍)에 군사를 더욱 늘여 나갔다. 그 뒤 화약장(火藥匠) 33명이 군기감에서 화약을 만들게 하였다. 태종 15년(1415)에는 화약감조청이 완공, 한국 화약사상 화약 보유량이 처음 6근 4냥에 불과하던 것이 태종 17년(1417)경에는 약 7천 근으로 늘어났다.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 받는 세종 때에 이르자 6진을 포괄하는 서북 방면의 개척이 활성화되면서, 화약의 수요량이 약 8천 근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약 3천 근은 여러 지역에서 생산하였는데, 감독관을 보내서 철저한 관리를 하게 하였다. 이르자면, 평안·황해·강원도의 상삼도(上三道)에서는 염초를 점차 특산품으로 바치게 하였다. 경상·전라·충청도의 하삼도(下三道)에서는 계속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철저한 감독 아래 바닷가에서 먼 곳을 골라서 만들게 하였다.
정책적으로 화약에 대한 지방에서의 생산을 확대하지 못하고 가급적 해안지방을 피한 것은, 화약의 자취 기술이 혹시 왜인에게 옮겨질까를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이 모자라서 화포의 발사 등 군사훈련도 제한되었고, 세종 15년(1433)부터는 불꽃놀이에 쓰는 염초량을 종전의 1천 근에서 30근으로 대폭 줄였다. 세종 27년(1445) 대궐 안의 내사복사(內司僕司) 남쪽 편에서 남모르게 사표국을 설치하고 거기서 염초를 달이게 하였다. 사표국의 설치는 세종보다도 문종의 뜻에서 우러난 것이었기 때문에 문종 때에는 더욱 성하였으나 단종 3년(1455)에 사표국을 없애면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화약 제조는 공공연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간추리건대, 세종의 자주국방을 표방한 화약과 화기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세종은 용상에 오르면서부터 자주국방을 가장 중요한 현안의 과제로 내세워 화기 개발, 전함 제조 등 다방면의 국방 계획을 진행시켰다. 중국과 일본, 여진족으로 둘러싸인 반도라는 나라의 지정학적인 약점을 자력으로 극복하자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세종은 먼저 화력 증강에 국가 차원의 행정-재정적인 후원을 결정, 궁 안에 사표국을 설치, 왕명으로 비밀리에 화약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대포 제작에는 자신의 아들까지 대거 참여하도록 해서 그 위상을 높였고 화약 장인들에게는 다른 일은 시키지 않고 오로지 연구, 개발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했다. 말하자면 제1, 제2의 장영실을 키워내고자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과감한 조직 개편과 인사, 지방 요충지에 화포 주조소 설치 등도 직접 진두지휘했다. 중국의 철제 화포 제조의 수준을 앞서기 위해 기술 개발과 조직 개편,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세종 15년(1433)을 즈음해 백한 화포, 세총통, 일발다전포, 신기전 등 현대의 기관총과 로켓포 등의 원리와 같은 첨단 병기들을 대량 개발했다.
화약 무기 개발과 더불어 총통군이란 군대를 따로 조직했다. 총통군은 5인을 1조로 4명은 총을 쏘고 1명은 화약을 장전하는 구성이다. 사격조와 장전조가 나뉘어 작전을 수행하는 현대식 군대 체계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또 일본 선박의 빠르기와 경쾌함을 따라잡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를 귀화시켜 호군이라는 정 4품의 벼슬을 주고 전함을 만들게 했으며 사수감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함의 수리와 운수, 건조, 자재 조달까지 유기적인 조직과 체계로 추진해 나아갔다.
세종의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은 조선의 화기 기술과 국방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밑거름이 됐다. 이는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을 파병해 여진족을 제압하고 4군 6진 설치 등 영토 확장에도 디딤돌이 됐다. 우리나라의 자주국방은 예 오늘에 가림이 없이 최우선의 화두가 되고 있다.
화약의 필요성과 그 제조를 위한 염초자취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문종은 전국에 25개의 도회소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라의 인가를 받은 특정한 사람만이 염초를 제조하여 전량을 국가에 바쳐 그 비밀이 왜구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하지만 도회소가 설치되어 화약제조를 장려하니 과잉생산이 걱정거리였다. 이어지는 과잉공급을 막기 위하여 문종 1년(1451)에는 각도에서 생산할 염초의 양을 정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각 관아에 생산량을 정하여 진상품으로 상납하도록 하였다.
2.2. 화약 제조의 선구자들
우리나라 화약 제조의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다. 화약의 불모지라 할 우리 땅에서 어렵사리 중국의 송나라 혹은 명나라 사람들의 선진기술을 익혀서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나름의 창의성을 더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화약을 제조하였음은 참으로 기억될 만한 일이다. 먼저 시대 순으로 보면, 여말 선초에 살았던 최무선(崔茂宣)과, 조선왕조 때의 박강(朴薑), 이서(李曙), 김지남(金指南)과 성근(成根)으로 그 맥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1) 최무선(崔茂宣, 고려 말~1395)
최무선 장군은 광흥부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엽, 왜구가 쳐들어와 백성들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많아지자, 최무선은 화약 무기를 만들어 이들을 물리칠 결심을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국에서 선진기술을 배워야 했다. 최무선은 중국 상인이 많이 드나드는 항구-벽란도로 가서 중국인 이원을 만나 마침내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웠다.
화약과 무기를 만들기 위해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건의해 우왕 3년(1377) 화통도감이 세워졌다. 이후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일하며 질 좋은 화약을 만들고, 대장군전, 이장군전, 삼장군전, 석포, 화포, 신포, 화전, 철령전 등 각종 신무기를 만들었다. 또 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배도 만들었다. 이런 화약 무기는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이었다.
우왕 6년(1380) 왜구가 오백여 척의 배를 이끌고 진포로 쳐들어오자, 그 동안 만든 화포와 화통 등 화약 무기를 가지고 적과 맞서 싸웠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들은 먼 곳까지 날아가 왜구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며, 결국 왜구를 크게 무찌를 수 있는 결정타를 날렸다. 그 공으로 최무선은 영성군이 되었으며, 우왕 9년(1383)에는 남해의 관음포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르기도 했다. 창왕 1년(1389) 화통도감이 없어지자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와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을 지어 아들 최해산에게 화약과 무기 제조법을 가르쳤으며, 조선 태조 4년(1395) 별세했다. 공민왕 19년(1370) 무렵만 해도 세계에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었다. 광흥 창사였던 아버지를 통해 왜구의 노략질에 의한 피해를 줄이고자 했다.
ㄱ) 최무선의 흑색 화약 제조
*초석의 원재료를 구하는 과정(취토와 취회)
취토법 : 초석의 원재료인 흙을 구하는 과정.
취회법 : 또 다른 원재료인 회(재 또는 목탄)를 구하는 과정.
*초석을 추출해 내는 과정(사수-예초-자초)
사수 : 초석의 원재료인 흙과 재를 섞어서 물에 녹인다.
예초 : 정련이 덜 된 초석(모초)을 얻는다.
자초 : 모초를 정련해서 순수한 초석인 정초를 얻는다. 재련이라고도 함.
*정련한 초석, 유황, 목탄을 섞는 과정(도침)
도침 : 초석과 재, 유황을 섞어 실제로 화약을 만든다.
이 때의 비율은 질산칼륨 70%, 황 20%, 목탄 10%이다.
ㄴ) 최무선의 업적
화통도감 설치 : 화약무기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국가기관
화약무기 제조 : 주화, 대장군포 등
전포대첩 : 세계 최초의 함포대첩, 100여척의 배로 500척의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둠.
ㄷ)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화포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화포를 시험해 보는 날,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모였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꿈을 나이 50세가 넘어 이루게 된 최무선은 벅찬 감동에 손끝이 떨렸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을 들어 발사 명령을 내렸다. 그 자리에 있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최무선에게 눈길을 보내며 긴장하고 있었다. 최무선의 명령에 이어 조금 후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쾅쾅, 우르르 쾅”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덩어리들이 휙휙 날아갔다.
“우와, 저것 보시오.”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리고 최무선의 공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최무선이라 했던가. 참으로 훌륭하도다.”
“전하, 이제는 저 화약과 무기로 왜구를 무찔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 말대로 나중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무기로 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2) 박강(朴薑, 1406~1460)
박강의 아버지는 조선 초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의 둘째 아들로 태종 6년(1406) 하남에서 출생하였다. 시호는 세양(世襄)이다. 실록에는 성품이 정교하고 기술과 재능이 많았으며, 젊었을 때 호협하고 얼굴 가꾸기를 잘하여 여성들, 특히 기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군기감정 이후 세종 31년(1449)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세조 옹립에 공을 세웠다.
박강은 세종 29년(1447) 12월 평안도에 파견 나가 오늘날의 로켓인 주화(走火) 9천 개를 제조하였는데, 로켓 화기는 구조와 제작 방법이 복잡해서 로켓 전문기술자이어야 제조를 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1월 22일, 주화는 말을 타고 달리며 혼자서 발사할 수 있고, 비행할 때 나오는 화염과 소리 때문에 적이 스스로 항복하고 겁에 질리게 한다는 장점을 풀이하면서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물리침에 주화가 주효할 것이라 하여 3차례에 걸쳐서 약 1만 1,390개의 주화를 보내면서, 더 필요한 양을 요청하라고 전한다.
같은 해 12월 2일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요청한 주화의 수효가 너무 많았는지, 박강을 평안도에 임시로 파견 보내 한양에서 보내온 재료를 이용하여 중주화 2천 개, 소주화 7천 개를 규격과 제조 방식대로 만든다. 그리고 함길도에는 박강과 함께 군기감에서 같이 일했던 원익수(元益壽)를 감련관으로 보내 중주화 1,040개, 소주화 3,500개를 현지에서 만든다.
군기감에서 파직당한 6개월 뒤 군기감 소속이 아니면서도 박강이 현지에서 중주화와 소주화를 제조하는 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군기감에서 파직되기 전까지 2년 3개월간 근무할 때 주화의 개량 및 연구 개발을 주도하면서 본인이 직접 주화를 제작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기전(神機箭)을 복원하여 발사시험을 해보니 제작 방법과 구조가 복잡해서 본인이 직접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잘 제작할 수도, 잘 제작하였는지를 감독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기전의 전신인 주화가 본격적으로 사용 되는 세종 29년(1447) 11월, 직전에 대주화의 연구 개발기간으로 보이는 2년 3개월 동안 세종시대의 화약무기를 연구 개발 및 제작을 담당해 온 군기감의 최고 책임자인 군기감 정(軍器監正)이 되었다.
고려 때 최무선에 의해 개발되어 몇 개씩 사용되는 기록이 보이던 주화가 세종 29년 가을에 이르러 갑자기 1만 1,390개(소주화 6,500, 중주화 4,800, 대주화 90)를 만들어 북방으로 보낸 기록이 나타나므로 이 이전에 충분한 개발기간이 필요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대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시험 해본 결과,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대신기전의 개발에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박강은 창의성이 뛰어 난 사람이었다. 그가 개발한 대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며 세계 최대의 종이약통 로켓화기인 대주화는 무게가 4.5~5kg에 달한다. 소발화가 달린 중주화의 무게는 200g, 소주화의 무게는 100g 정도다. 따라서 대주화는 중주화보다도 23~25배 더 무거운 대형 로켓화기였다. 이렇게 큰 로켓의 연구개발에는 창의력과 솜씨를 갖춘 뛰어난 과학기술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세종 27년(1445) 3월 30일, 세종은 의정부에 전지하여 그 동안의 화약무기 개발의 결과를 주목하면서 당시에 군기감에 종사하던 화약기술자로는 더 이상 획기적인 화약무기를 개발하기 힘드니 창의력과 솜씨가 뛰어난 새로운 인물을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골라 아뢰라 하니, 의정부에서 대호군 박강을 천거하니, 박강을 군자감 정으로 임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박강은 성품이 꼼꼼하며 솜씨가 많아서 처음에 벼슬을 하면서부터 군기감을 맡아 잘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박강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새로운 로켓화기인 중주화와 대형 로켓화기인 대주화를 개발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춘 과학기술자로 추정된다.
박강은 군기감에 책임자로 있을 때 기술자가 죄를 짓고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판결하는 과정에서 불명예스럽게도 세종 29년(1447) 6월 2일 파직 당했다. 그러나 세종 31년(1449) 2월에는 공조참의로, 문종 즉위년(1450) 8월에 황해도 도절제사로, 그리고 문종 원년(1451) 3월에는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 판해주목사로 계속해서 승진하는 점도, 4군 6진에서 성공적으로 여진족을 무찌르는 데 사용된 주요 신무기인 주화 종류의 개발을 군기감에서 성공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강과 함께 군기감에서 같이 파직 당했던 원익수도 문종 원년 5월경 군기감정으로 다시 복직한다. 위와 같은 점을 종합해 볼 때 박강이 주화를 개량하여 만든 중주화(일명 중신기전) 및 대주화(일명 대신기전, 산화신기전)의 개발 책임자로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박강이 세계 최초 2단형 로켓이자, 세계 최대의 고체연료 추진 로켓무기인 대신기전(大神機箭)의 연구개발 책임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그의 나이 39살 때였다. 조선시대 군기감이란 오늘날의 국방과학연구소와 같은 곳이다. 채연석 박사(전 항우연 원장)가 『국조오례의』 군례에 나오는 『병기도설』 등 여러 가지 사료 연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을 보면 박강이 세종 27년(1445) 3월 39세의 나이에 군기감정을 맡아 고려 최무선 때부터 사용해 오던 로켓 무기인 주화(走火)의 성능 검증 작업을 실시했다. 채연석 박사는 1993년 대전 유성의 갑천 가에서 국제 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신기전과 중신기전, 그리고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을 싣고 이동할 수 있는 화차(火車)를 재구성 복원하여 실험에 성공하였다. 특히 산화신기전은 한 번에 수십 발에서 수백 발을 발사할 수 있는 엄청난 화력을 지닌 과학병기였다. 이러한 신기전은 우리나라 과학병기 발전에 신기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세계 로켓 역사에서 그 보기를 찾기 힘든 세계적인 민족문화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럼 신기전 같은 조선 세종 시대 로켓형 과학병기가 무슨 이유로 좀 더 발전하지 못하였을까? 이는 신기전이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의 전공을 올리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꽃피우지 못했음은 그 이후의 시대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조 13년(1467)에 일어났던 이시애의 난 때 이 신기전의 공격으로 정부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로 하여 신기전 개발에 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어 이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는 당시 유교 지상주의를 표방하였던 사대부들이 과학기술을 소홀하게 다루었던 정치사상과 과학기술에 큰 상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이서(李曙, 1580~1637)
남한산성 하면 이서 장군을 떠 올린다. 그의 자는 인숙(寅叔)이고, 호는 월봉(月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제주목사였고, 죽은 뒤 영의정을 추서 받은 완녕부원군 이경록(李慶祿)의 아들이다. 선조 36년(1603) 무과에 올라 선전관을 시작으로 남포·장연 현감을 거쳐 곡산·진도 군수를 지내고, 광해군 14년(1622)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로 봉직하면서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공신 1등에 올라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에 봉해지고, 호조판서를 지냈다. 인조 2년(1624) 경기도 관찰사·총융사(摠戎使), 다음 해엔 훈련도감에 임용되면서 느슨해진 군의 기강을 굳건하게 하였다. 군량미를 미리 마련하며 군사들의 군량미를 위한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인조 4년(1626) 수어사(守禦使)로 남한산성을 고쳐 다시 쌓고, 성 안에 무기와 군량미를 마련했다. 인조 6년(1628) 병조판서에 오르고 이어서 판의금부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어영대장으로 북문을 지켰으며, 이듬해 정월 병든 몸을 이끌고 적과 싸우다가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죽기 전에 그 사위 채유후(蔡有後)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후회하는 바가 없으나 오직 능히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회계(會稽)의 부끄러움이다.”
라고 하였다. 수리에 밝았고, 독서를 즐겨 장서가 많았으며,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 그의 저서로는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와 『마경언해(馬經諺解)』를 남겼고 글씨도 명필이었다.
이제 역주하는 이 『화포식언해』는 여러 가지의 총을 쏘는 방법과 화약 굽는 방법을 기술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된 화약 병기의 종류와 화약을 쓰는 용약법(用藥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다. 아울러 이는 17세기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밖에 말의 여러 가지 병과 그 치료에 대해 기록한 『마경언해』가 있다.
남한산성의 온조왕(溫祚王) 사당(현 숭열전(崇烈殿))에 모시어, 인조와 함께 제향을 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에 자리하며, 그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는 오도일이 지었다.
『화포식언해』는 2권 1책의 목판본으로 책 마무리 부분에 최명길(崔鳴吉)의 발문이 실려 있음은 물론, 책 후반부에 화약제조법을 담은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가 함께 실려 전한다. 당시 청나라의 위협이 날로 점차 커지면서 이에 맞서기 위하여 각종 화기의 제조와 새로운 화약 제조법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편찬된 화기, 화약 관련 서적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먼저 모든 총통(銃筒)에 쓰는 일반적인 화약을 넣는 방법을 풀이한 것을 머리로 하여, 천자총(天字銃)·지자총(地字銃)·현자총(玄字銃), 황자총(黃字銃)·대완구(大碗口) 등 각종 완구 · 비진천뢰(飛震天雷)·철신포(鐵信砲)·불랑기(佛狼機)·벽력포(霹靂砲)·호준포(虎蹲砲)·백자총(百子銃)·승자총통(勝字銃筒)·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삼안총(三眼銃)·화차(火車)·우자총통(宇字銃筒)·대발화(大發火)·중발화(中發火)·중신기통(中神機筒)·주화통(走火筒)·지화(地火)·명화(明火) 등 50여 종의 각종 화약 병기의 용약법과 발사에 관한 속내를 풀이하고 있다. 또한 총통의 장단에 따라 심지인 약선(藥線)의 제조 방법을 각각 다르게 풀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화약을 제작하는 제약법(劑藥法)에 대한 내용이 덧붙어 있다.
4) 성근(成根, 생몰년 미상)
조선 중엽 인조 때에 별장(別將)을 지낸 무관이며, 화약 제조에 기초가 되는 기술을 익힌 국방 과학기술자였다. 화약의 가장 알맹이라 할 염초(焰硝) 달이는 방법을 무사독학으로 연구하고, 실험하여 성공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하고 중국에서 사들여왔다. 말하자면 화약의 수입국이었다. 제때 필요한 공급물량이 충분하거나 일정하지 못하였다. 이는 중국 조정이 때때로 화약의 수출입을 엄하게 금하는 정책 때문에 염초 달이는 방법을 비밀로 다루었다.
그러니까 국방에 꼭 필요한 화약이 이렇게 모자랐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를 염려한 성근은, 포로들이나 다른 중국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연구하여 무기고에서 실험한 결과, 마침내 엄청난 국익을 안겨 주었다. 돈과 노력은 앞서보다 반도 안 들이고, 소득은 백 배나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성근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만한 자료가 없다. 다만, 숙종 24년(1698)에 간행된 역관 김지남(金指南)의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에 실려 있는 간행 기록에서 성근은 관서 사람이라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염초 달이는 방법은 인조 13년(1635)에 완풍부원군 이서(李曙)가 받아들여 공조에 명하여 실험하게 하고 15절(節)로 나누어 책을 간행하였으니 이것이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이다.
훈국(訓局)의 무기고를 맡으면서 이서가 편찬한 화포(火砲) 만드는 방법과 성능에 대한 책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와 같이 합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숙종 11년(1685)에 다시 중간되었다. 성근의 이러한 방법은 조선시대의 화약제조 기술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김지남의 자초방(煮硝方)도 성근의 것에서 비롯하였다. 『신전자취염소방언해』에 서술된 성근의 자초법과 『신전자초방』에 서술된 김지남의 자초법은 현재까지 문헌에 내려오고 있는 유일한 전통적 화약제조법들로서, 한국 화약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라 할 수 있다.
5) 김지남(金指南, 1654~미상)
조선 중기 및 후기의 역관(譯官)이며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명(季明), 호는 광천(廣川)이다. 현종 12년(1671) 역과에 올라 숙종 8년(1682)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숙종 18년(1692) 부사로 북경(당시 연경)에 가는 사신 민취도(閔就道)의 역관으로 따라 갔다. 그의 권유로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자초법(煮硝法)을 알아내기 위해 랴오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들어가 사례금을 주고 그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그 주인이 죽어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국법으로 단속하였던 자초법을 알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척 어려운 과제였다.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다. 그 뒤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물어 마침내 그 화약제조의 바탕인 자초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숙종 20년(1694) 이를 실험한 결과 성공하였으나, 그를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옮겨 가면서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했다.
숙종 24년(1698) 병기창의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의 지시를 받아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으며, 그 성과가 매우 크자 숙종의 윤허를 얻어 그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지어 군기시에서 간행, 널리 폈다. 정조 20년(1796) 정조의 명령에 따라서 자초법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극찬을 받았다.
국방에 대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면서 숙종이 병조판서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반대에 부딪쳤다. 이유는 역관 출신에게 동서반들만이 받는 벼슬을 줌은 부당하다는 강변이었다. 양사(兩司)의 반대로 문성첨사(文城僉使)의 외직에 임명되는 데 그쳤다.
이어 숙종 38년(1712)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하기 위해 양국 대표가 만남을 약속하였다. 그는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수행하여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외교문서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숙종 40년(1714)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 특히 그의 저서인 『신전자초방』은 당시 최고 수준의 외국문물을 몰랐다면 이룰 수 없는 쾌거였다.
『통문관지』는 당시 외교업무를 보던 나라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 및 사서전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필수서가 되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우리나라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으니 눈여겨 볼 일이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저서로 화약에 관한 『신전자초방』과 『동사록(東槎錄)』이 있고, 엮은 책으로는 『통문관지』가 전한다.
3. 화약 관련 자료와 군례(軍禮)
3.1. 조선 왕조의 초엽 태종·세종·문종 시대를 거치면서 화기와 화약의 제조기술은 발전을 거듭하여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고, 이를 군사훈련에 활용하였다. 하지만 자료가 없어 당시의 정확한 화약 제조기술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동의보감』에 따르면, 『의학입문』에 끌어다 쓴 염초의 제조법이 있다. 『천공개물(天工開物)』에 등장하는 겉흙의 표면을 정화시키는 단순한 방법과 같다.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화약 제조 공정에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이 방법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인조 13년(1635)에 간행된 이서(李曙)의 『신전자취염소방언해』와 숙종 24년(1698)에 김지남이 지은 『신전자초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전자취염소방언해』는 성근(成根)이 중국에서 배우고 스스로 연구하여 완성한 화약 제조 방법을 이서가 엮어서, 국문으로 번역하여 펴낸 책이다. 성근의 염초 달이는 과정은 적당한 종류의 흙을 모으는 일, 즉 취토(取土)로부터 시작된다. 오래된 집안의 부엌 바닥, 마루 아래, 담벼락 아래와 온돌 밑의 흙을 가볍게 조심스럽게 위의 흙만 긁어 취한다. 혀로 핥아 그 맛을 맡아 보면, 짜고[鹹], 시고[酸], 달고[甘], 또는 매운[辛] 것이 좋다고 했다. 이러한 흙에 가마솥 아래에 있는 여러 갈래의 재와 사람의 오줌을 잘 섞어서 한 곳에 높이 쌓아두고 비를 맞지 않게 하는 극히 초보적인 단계의 제조 기술이다. 그 뒤 말똥을 말려서 쌓아놓은 흙 위를 덮고, 불로 태워서 불기가 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습하고 더운 김에 의하여 띄워져 흰 이끼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4~5개월 뒤에 쓰는데, 오래 두면 둘수록 좋다. 이렇게 혼합된 원료에서 입부리가 달린 나무통들을 활용하여 체로 필요한 물질을 걸러 내고, 세 번 끓여 식히면 초석을 얻게 된다. 이 방법의 효율을 살펴보면, 3일간 처음으로 졸여 약 180근을 얻고, 이것을 정식으로 졸이면 약 95근 정도의 염초가 된다. 한 달이면 약 1천 근 가량의 정제된 염초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인력은 기술자 3명과 일꾼 7명이면 넉넉하다.
여기에 필요한 준비물을 책 끝에 적으면서, 없으면 단 하나의 가마솥과 하나의 나무통으로라도 염초를 달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을 하다가 정지하게 되면 쓰고 남은 본수와 같은 원료들을 몇 년이라도 땅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쓰면 된다고 했다. 섞인 함토(鹹土)에서 필요한 성분을 뽑아내고, 남은 찌꺼기 흙을 다시 오줌과 말똥과 잡회와 섞고, 새로운 찰흙과 같이 버무려 짓이겨서 벽돌이나 담으로 쌓아 비를 맞지 않게 하고, 3년을 기다려서 사용하면 새로 갠 흙보다 품질이 훨씬 더욱 좋다.
『신전자초방』은 김지남이 숙종 때 북경에서 배워 와서 연구한 화약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기록하고, 그 방법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풀이한 서책이다. 이 책은 숙종 24년(1698)에 간행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거듭 중간되었다. 10조로 나누어 설명된 방법은 각 조마다 국문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화약 달이는 방법은 대체로 종전의 방법들과 비슷하나 몇 가지의 중요한 새로운 과정을 밝힘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성능을 좋게 하였다.
먼저 흙을 모으고[取土], 재를 받아서[取灰], 같은 부피의 비율로 섞는다[交合]. 섞은 원료를 항아리 안에 펴고서 물을 위에 부어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篩水] 가마에 넣고 달인다[熬水]. 이러한 취토·취회·교합·사수·오수, 재련·삼련·합제의 여덟 가지 공정과, 물을 달이고 재를 만들기 위하여 쓰는 풀을 깎는 일과, 재련 때에 쓰는 아교물에 대한 항목들이, 이 책의 본문을 이루고 있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얻은 염초는 품질과 효력이 좋아서 땅굴에 묻어두면 10년 장마를 지내도 습기가 차지 않는다. 정초 1근에 버드나무 재 3냥과 유황가루 1냥 3전을 섞어서 화약으로 만든다. 이 제조 방법은 흑색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이다. 원료들의 비율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질산칼륨 40~80, 황 3~30, 목회 10~40의 배합 범위에 들어 있다.
이러한 화약 제조기술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왜인은 우리나라의 화약병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마침내 명종 말년 경에는 왜인들이 이 기술을 습득하게 되면서 외국 사신들에게 보여주는 불꽃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 올라 있는 기록의 단면을 돌이켜 보도록 한다.
○ 『세종실록』 관련 내용
세종 30년(1448) 2월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생원 김유손(金宥孫)이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 사연인즉 다음과 같다.
“이번 2월 24일에 염초 약장이 흙을 판다고 핑계를 대고 문묘에 들어와 눈을 부라리고 팔뚝을 걷고서 관노를 때리므로, 신 등이 대의로써 몇 번이나 잘 타일러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서리(書吏)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섬돌 위에 걸터앉아 여러 생도들을 거만스럽게 꾸짖으니, 그 방자하고 독살스러움을 가히 말할 수 없어서 신 등이 깊이 유감스럽습니다. 어찌 장인(匠人)의 천한 신분으로 감히 함부로 그런 행동을 한단 말입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법대로 엄히 다스리소서.”
염초를 만드는 염초 약장이 염초토를 마련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행패를 부린 사실을 낱낱이 알리는 상소문이다. 민가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관아 및 정부 건물에서만 염초토를 채취하라는 명을 내린 이후 나타난 또 다른 부작용 사례에 값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일개 장인이 양반 앞에서 행패를 부릴 만큼 당시 염초토 채취는 아주 중요한 나라의 업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의 적극적 관심과 후원으로 1444~1445년에 걸쳐 조선의 화약무기는 새롭게 거듭나서 한 단계 도약을 하게 된다. 이때 화약무기 성능이 향상됐을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가지의 규격으로 표준화되기에 이른다. 세종대왕은 새로 개발된 화포 규격과 장전·사격법을 책으로 정리해 〈총통등록(銃筒謄錄)〉이란 자료를 펴낸다. 이 자료는 정보 유출 방지 차원에서 배포·소지·열람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화약무기의 성능·제원·사격법 등은 민감한 군사기밀이었기에 외부에 알려질 가능성을 막으려 한 것이다. 한때는 민간에까지 배포되었던 〈총통등록〉을 모두 거두어 들여 무기를 만들던 기관인 군기감과 역사기록기관인 춘추관에만 보관하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총통등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나아가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책 중에서 화약무기 관련 전문서적 자체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조선 초엽의 화약무기의 그림과 규격을 담고 있는 〈병기도설(兵器圖說)〉의 가치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병기도설〉은 성종 5년(1474)에 펴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일부다. 이 책은 성리학적 관점에 바탕, 왕실의 의식 절차와 의례를 규정한 책이다. 그 가운데 군례의 자료 가운데 총통에 대한 자료가 실려 전함은 아주 값진 것이다.
『국조오례의』는 상례 등 일반적인 의식 행사뿐만 아니라 열병식 등 군례, 다시 말해 군사의식도 설명하고 있다. 『국조오례의』는 군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각종 무기와 갑옷의 규격·형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별도의 항목을 두었다. 그것이 바로 〈병기도설〉이다.
〈병기도설〉에는 총통완구 등 11종의 화포류·대신기전 등 로켓형 화약 무기 3종, 대발화통·화차 등 기타 화약무기 5종, 방패·창 등 12종의 병기, 수은갑 등 조선시대 갑옷 5종, 투구 2종 등 40여 종에 달하는 조선 초기 무기류의 재료, 간단한 제조 방법과 구체적 규격, 그림이 실려 있다.
〈총통등록〉처럼 〈병기도설〉도 군사 기밀인지 여부가 논란이 된 일이 있다. 성종 9년(1478) 공조판서 양성지는 〈병기도설〉도 군사 기밀을 담고 있다며 삭제한 후 『국조오례의』를 다시 간행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이 단순한 화약무기 규격만 나올 뿐 사격법이나 장전법이 나오지 않으므로 군사기밀이 아니라고 반박한 덕에 〈병기도설〉이 포함된 『국조오례의』가 배포될 수 있었다.
〈병기도설〉은 화약무기뿐만 아니라 갑옷이나 일반 무기에 관해서도 풀이하고 있어 한국 전통무기 발달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다. 〈병기도설〉에 앞서 문종 원년(1451) 편찬된 『세종실록』 〈오례의〉에도 유사한 기록과 그림이 남아 있으나 〈병기도설〉이 좀 더 완전하고 체계적이다.
1979년 조선 초기의 화약무기를 최초로 재구성하여 복원한 채연석 박사가 기본 자료로 활용한 것도 바로 〈병기도설〉이었다. 채 원장은, “실제 발사가 가능할 정도로 정밀하게 세종 시대의 화약무기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병기도설〉에 힘입음”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길이 단위는 자(尺)·치(寸) 정도만 사용됐다. 하지만 〈병기도설〉은 높은 정밀도가 필요한 화약무기의 규격임을 고려, 푼(分)·리(釐) 단위까지 사용해 크기를 정확하게 적고 있다. 〈병기도설〉의 자 단위가 영조척인지 주척인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1리(釐)라 함은 0.2~0.3mm의 정밀한 단위가 된다.
○ 『문종실록』 관련 내용
염초토를 채취하던 장인의 위세는 뇌물을 받아 챙기는 불공정한 짓거리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문종 즉위년(1450) 10월 10일 『문종실록』의 자료를 보면, 문경현감 조추(趙秋)가 염토 약장의 부정부패 사례에 대해 상소문을 올린 속내가 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장인이 뇌물을 받은 지역에서는 염초토가 있어도 없다고 하며 조금만 채취하고, 뇌물을 주지 않는 곳에서는 염초토가 없어도 있다고 하면서 잡토까지 파내 주민들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은 있었지만 조정의 염초 확보에 대한 집념으로 조선의 화약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에서 온 사신들의 반응을 보면, 조선의 화약기술 수준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정종 원년(1399) 일본국의 사신들에게 군기감에서 불꽃놀이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자 사신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약의 종주국으로 자부하는 중국 사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 원년(1419) 1월 21일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중국에서 온 유천과 황엄이라는 사신을 수강궁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유천은 만약 상왕께서 나를 보시려면 자신의 처소로 오심이 좋겠다고 이른다.
하여 상왕 태종은 중국 사신들의 숙소인 태평관에 나아가 위로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중국 사신들은 화포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막상 태종과 함께 화붕에서 터지는 불꽃을 구경한 사신들의 반응이 매우 흥미로웠다. 유천은 재미있게 보다가 놀라서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를 두 번이나 했고, 황엄은 놀라지 않는 체하나 낯빛이 약간 흔들렸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불꽃놀이가 끝난 후 태종이 사신에게 안장을 갖춘 말을 선사하자 황엄은 받았지만 유천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12년 후 조선은 중국 사신에게 화붕 놀이를 아예 보여주지 않을 만큼 중국보다 강력한 화약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다.
세종 13년(1431) 중국 사신이 오자 조정은 이번에도 화붕 놀이를 보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때 허 조가 앞에 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약이 한정이 있는데 한 번의 불꽃놀이에 사라지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더구나 본국의 불을 쏘는 것의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나으니 사신에게 이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비록 청하여도 마땅히 이를 보이지 않으심이 옳을 것입니다.”
○ 『선조실록』 관련 내용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바닷물을 졸여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중국에서 배워오라는 어명을 내렸다. 화약기술의 유출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특히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곤 했다. 세종 8년(1426) 병조에서 올라온 장계 글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바치는 염초는 영동 연해의 각 고을에서 구워 만드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그 기술을 전해 배웠는데, 만약 간사한 백성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들이 울릉도나 대마도 등지로 도망가서 화약 만드는 기술을 왜인들에게 가르치지나 않을지 심히 염려 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세종은 그 때 이후로 연해의 각 수령들로 하여금 화약을 구워 만들지 못하게 했다. 성종 때에는 화약기술의 유출에 대한 우려로 염초 약장을 일본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모습도 보인다. 일본통신사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성종이 화약을 합성할 줄 아는 염초 약장을 데려가게 하자, 강희맹이 나서서 염초 약장이 일본에 가서 화약 제조기술을 혹시 누설할지도 모르니 보내지 말 것을 간청한다. 그러자 성종은 총통군 중에서 화약을 모르는 자를 대신해 보내라고 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얻은 화약을 속이 갑자기 아플 때 먹는 약쯤으로 여길 만큼 화약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선의 화약 제조 기술은 중종 말기 무렵 일본에 흘러들어 가고 말았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이 대거 침략해온 임진왜란 때에는 이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양의 화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화약의 주재료인 염초토의 채취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화약의 증산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바닷물을 졸여서 염초를 만든다는 말을 들은 선조가, 그 비법을 배워 오는 사람에게 큰 포상을 내린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동이 났고 무역을 하기도 어려워 염초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선조는 매번 바닷물을 달여서 염초 만드는 법을 배워 올 것을 권했다. 선조 28년(1595) 5월 마침내 낭보가 날아들었다.
『선조실록』 63권, 28년 5월 25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바다 흙으로 염초(焰硝)를 구워내는 일을 도감에서 매번 중국 사람들과 시도해 보려 하였으나 아직 실효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천(舒川)의 군보(軍保) 임몽(林夢)이라 하는 자가 염초를 구워내는 일을 여러 가지 꾀를 내 시험하여 성공을 거두고서 도감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어떤 곳에 가서 구워보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즉시 감관 조효남(趙孝南)을 시켜 남양(南陽) 지역의 바닷가로 데리고 가 굽도록 하였더니 5일 사이에 바다 흙으로 구운 염초 1근과 함토(醎土) 2분(分), 바다 흙 1분을 합하여 구운 염초 3근을 가지고 왔습니다. 약제들을 합쳐 시험삼아 쏘아 보았더니 성능이 뛰어나 쓸 만하였으므로 두 가지 약제를 각기 담아 올립니다. 필요한 바다 흙은 반드시 사람과 말들이 밟고 다닌 염전(鹽田)에서 취하고 바닷가의 숲이 많은 지역을 찾아서 많은 양을 구워낸다면 힘도 덜고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우선 임몽으로 하여금 염초를 굽는 각소(各所)에서 기술을 익히는 장인(匠人) 중에 그 방법을 대강 터득한 자를 뽑아 거느리고 다시 남양 등지로 가서 그 굽는 방법을 모두 전수케 한 다음 논의하여 권장한 후에, 충청 어사 이시발(李時發)에게 내려보내어 남포(藍浦) 등지의 소금을 구워내는 곳 중 숲이 있는 지역에서 많은 양을 굽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서쪽으로 피난갔을 때에 바다 흙으로 염초를 굽는다는 말을 익히 듣고 내심 기뻐하며 만일 이 방법만 얻게 되면 무궁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 여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전(承傳)을 내려 ‘이 방법을 터득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높은 벼슬을 주어 포상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한 사람도 터득한 사람이 없고 중국 사람에게도 여러 차례 물었으나 그 방법을 얻지 못하여 마음에 늘 탄식해 왔는데 뜻밖에 오늘날 이처럼 능히 이뤄냈으니 축하할 만한 일이다. 다만 그에 드는 힘이 얼마나 어려운지와 얼마만큼의 염초가 얻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의당 조예가 있는 낭청(郞廳)을 보내 임몽과 다른 염초장 몇 사람을 데리고 다시 남양 지방으로 가, 눈 앞에서 직접 구워내게 해서 허실을 자세히 알게 된 뒤 크게 논상하겠다.” 하였다.
임몽이 다른 염초장과 더불어 염초를 계속 만들어내자, 1개월 후 선조는 군보<세주>(軍保 ; 현역으로 복무하는 대신 농사를 짓거나 군포를 바치며 군역 의무를 하던 사람)였던 임몽에게 문관 6품의 벼슬을 내렸다.
○ 『숙종실록』 관련 내용
『숙종실록』 1712년 5월 15일조에, 김지남의 이야기가 나온다.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역관(김지남)이 백산 지도 1건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백산(白山)은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 『숙종실록』은 김지남이 쓴 『북정록(北征錄)』에 나타난 사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역관 김지남이 청나라 관리와 대화한 사실을 접반사 박권에게 보고했고, 접반사 박권이 조정에 글을 올린 것이다.
『북정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김지남)는 태연스레 나아가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
“소관이 절실히 우러러 청할 것이 있으나, 황송하여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자네가 나(목극등)에게 무슨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소관은 조선의 백성이요, 백두산 또한 조선의 땅인데, 우리나라의 명산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므로, 원컨대 한 번 올라가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길이 너무 멀어 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대인(목극등)께서는 반드시 유윤길 화사원으로 하여금 산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한 폭을 내려주신다면, 소관의 평생 소원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대인의 은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만약에 그것이 대국의 산이라면 어찌 감히 부탁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잘 알았네.”
나는 너무나 기쁘고 다행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물러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두 사또에게 나아가 보고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총관(목극등)을 만나 주고받은 말을 하자,
“조정에서 염려하던 것이 오로지 그것이었는데, 총관이 ‘백두산은 그대들의 땅’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계책을 써서 그들의 뜻을 탐색하고, 겉과 속을 꿰뚫어보니 참으로 일을 잘 하였네.”
즉시 이상의 내용으로써 장계를 지어 조정에 보내고, 집에도 편지를 부쳤다. 여기에서 두 사또는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다. 접반사는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조정의 관리 대표이니 사실상 정계비 획정의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박권이 올린 장계는 조정에 도착한다.
『숙종실록』에서도 백두산은 우리나라 땅이라고 청나라 관리가 인정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김지남은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의 말미에 득초법시말(得硝法始末)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다시 풀어보이면 다음과 같다.
김지남은 초조하게 유리창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벌써 3시가 지났다.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너무도 소중한 약속이라 지금껏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진을 더 기다리다 김지남은 힘없이 숙소로 돌아온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버린 걸까?
김지남은 연경에 온 조선 사신 일행의 역관이다. 그는 2년 전에 진하사절의 일행으로 연경에 왔다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焰硝)의 제조방법을 알아내려고 염초제작자와 몰래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연경에서 본 화약의 위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이번 사신 행렬에 김지남이 다시 끼게 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염초의 위력을 알게 된 김지남은 남구만(南九萬)에게 이것을 고하고 이번 사행 길엔 반드시 염초제조법을 알아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러나 염초는 무기와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염초와 제조 방법 등은 청나라에서 엄중한 특별 관리를 하고 있었다. 염초와 염초 제조의 비밀을 국외로 밀반출하는 자는 신분 지위 고하를 가림 없이 처형시키고 있었다. 김지남은 그것을 알고도 2년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염초 제조 방법을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이 들통이 났더라면 김지남의 고혼은 이미 청국의 하늘을 외로이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신 일행이 연경에 도착하는 즉시 김지남은 지난번에 염초 제조 방법을 알아내려던 자의 친구를 만나 부탁을 했었다. 만나기로 한 자는 염초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자다. 그런데 그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김지남은 자신과 약속한 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김지남은 그 사람의 집에 다다랐을 때 급히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 사람의 집안에 청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뒤지고 그 사람을 묶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김지남은 그 사람이 염초를 제조한다는 것이 발각되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김지남은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염초 제조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김지남이 염초 제조 방법을 알아내려고 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김지남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김지남은 그 사람에게 예약조로 돈을 지불했고, 만약 염초 제조 방법을 알려주면 그 자가 평생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러니 쉽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만에 하나 그가 고문에 못 이겨 김지남의 이름을 말한다면 김지남 개인의 목숨뿐만 아니라 사신 일행에도 피해가 돌아가고 나라에도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군사들이 돌아갈 때까지 숨어있던 김지남은 군사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염초판매업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김지남을 알아본 그의 아내가 김지남에게 빨리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행여 김지남이 피해를 볼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면서 지남에게 남편이 가면서 김지남에게 유리창 중 한 곳에 단서가 있다는 말을 전해 주라고 했다고 한다. 김지남은 밤을 꼬박 새우며 그 자의 말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도대체 알 수가 없지만 염초 제조 방법이 적힌 책자나 단서가 유리창 내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나 수만, 아니 수십만 권의 서책들 사이에서 어떻게 단서를 찾는단 말인가. 말 그대로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격이다. 김지남은 다음날부터 하루 종일 유리창 내의 한 책방에 머물며 서책들을 살펴본다. 그렇게 해서 사흘째 되는 날에야 겨우 염초 제조 방법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그 책자는 세 권으로 나뉘어 겉표지에 제목도 없이 세 곳으로 나뉘어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을 김지남이 구할 수 없자 매일 출근해서 다른 책자를 훑어보는 척 하며 외우기 시작한다. 원래 외우는 것에는 김지남을 따라 올 자가 없었다. 역관 시험도 배강과 배송 등의 외우는 시험이 주를 이뤘었는데, 오늘날의 외무고시인 역과(譯科) 시험 때 김지남이 배강
(背講 : 책을 덮고 돌아 앉아 책을 외우는 일, 일명 배독(背讀) 혹은 배송(背誦))
에서는 최고 점수로 합격을 했었다. 김지남은 사흘 동안 책자를 다 외우게 된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와서는 외운 것을 잊어먹을까 싶어 외운 내용을 꼭 한 번씩 써보고는 쓴 종이를 불살라 버리곤 했다.
김지남은 돌아갈 기간이 되자 다시 염초를 판 사람의 집으로 간다. 그 사이 염초판매자는 처형이 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어렵게 살고 있었다. 김지남은 그의 아내에게 원래 약속했던 돈을 건네고는 귀환 길에 오른다. 귀환 도중 책문에서 청의 군사들이 사신 행렬의 짐을 뒤지며 염초와 염초 제조에 관한 책자를 찾는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청의 관리들의 귀에 이번 조선 사신 행렬 중에 염초 제조 방법이 적힌 책자가 있다는 말이 들어간 것이다. 짐과 함께 책자란 책자는 모두 검색하지만 그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김지남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머릿속에 다 암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신 행렬은 무사하게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그때부터 김지남은 행렬이 숙소에 머물 때마다 매일 밤 외웠던 염초 제조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한양에 무사히 돌아온 지남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염초 제조 방법을 적은 책자를 보면서 직접 염초 만들기에 몰입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책자의 내용대로 하지만 최상의 염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김지남은 직접 실험을 해 가며 그 결과를 적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2년이 지나자 결국 최상의 염초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김지남은 그 시행착오를 적은 서책의 이름을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이라 정하고 숙종 임금에게 올린다. 숙종은 『신전자초방』을 간행하여 서울과 지방 곳곳에 배포하여 각 군영에서 양질의 화약을 제조하도록 명한다. 이 일로 김지남에게 벼슬을 내리려고 하자, 문신들이 통역하는 역관에게 동서반의 벼슬은 불가하다고 반대하고 나서서, 결국 문성첨사라는 외직을 제수한다. 시간이 흘러 얼마 뒤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도 역관이 된다.
그 뒤 김지남과 그의 아들은 숙종 38년(1712)엔 백두산에 함께 올라 청나라의 관리 목극동과 치열한 설전을 벌인 끝에 조선과 청의 경계를 정하는 담판의 자리에서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다. 제2의 서희(徐熙) 담판을 한 것이다. 그는 또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사역원에 관한 책자를 쓰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서희의 혼령이 살아나서 조선조의 백두산을 지켜낸 것이라고나 할까. 통쾌한 영토 관련 외교상의 쾌거다. 요즘 독도 문제가 잠들지 않는 우리들의 현안 문제를 푸는데 또 다른 김지남의 지혜는 없을까.
3.2. 조선 초기 화기 사용의 실태
조선 초기에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군인의 비중은 매우 높지 않았다. 부대 조직 또한 전근대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군비가 잘 갖추어져 있던 시기인 세종 20년(1438)에도 북방의 각 진읍(鎭邑)에 배치된 화포군의 정식 비율은 그 진읍의 전체 보병 중 30~50%, 기병을 포함한 전체 주둔군에서도 그 비율은 10%에 달한다. 말하자면, 절대 수치에서는 전체 주둔군의 10분의 1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16세기 평화 시의 화약 생산량 및 재고량은 턱없이 모자랐다. 따라서 화약 무기를 다루는 병사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각 군부대는 칼과 창, 방패, 활과 화살, 그리고 화기 등 다양한 무기를 지닌 병사들이 함께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화포군은 상위 부대에 하위 부대로서 소속되어 극히 소규모로 흩어져 소속되었다.
게다가 조선군 최고의 화력을 지닌 정예 화포군은 정식으로 훈련받은 이들이 아니고 직접 화약과 화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었다. 마침내 화기 부대의 증설이 필요할 경우, 화기 제작자이면서 동시에 화기 교관인 이들을 지방으로 보내서 그 지방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 교습을 담당하게 하였다. 더욱이 당시 조선 정부는 화기 제작 기술이 국외로 유출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화기 장인들로 하여금 반드시 서울의 한정된 관청에서만 그 제작에 임하도록 하였으며, 설령 외적의 침입이 있다 해도 이들을 파견하는 것을 매우 피했다.
그러니까 외침의 우려가 높은 북방과 해안 지방 등 국경선의 요새에만 화기 교육과 훈련을 위해 수도에서 파견된 소수의 화포군 및 그들이 양성한 소규모 화기 부대가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으니 그 외의 지방에는 화포군과 화약, 화기 등은 거의 배치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따라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서울에서 만든 화기와 화약 등 제반 군사 장비와 함께 소수의 화기 장인들이 파진군(破陣軍)이란 이름으로 해당 지역으로 파견되어야 했다. 그로 인해 막상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조선군의 연전연패, 그리고 그로 인한 엄청난 혼란과 함께 사기가 떨어져 정부로서도 남쪽 지방으로 화약과 화기 등을 보낼 그 어떤 방책도 펴지 못했다.
바다에서와는 달리 육지에서는 각 지방에 배치된 대·소형 화기 역시 화약 부족으로 인해 한동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화약이 저장된 군기시(軍器寺)를 불태웠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은 각 지방 관아의 무기고에서도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비무환이라 했다. 개개의 군인이 소형화기를 사용하는 방식도 일본에 비교하면 조선이 많이 뒤떨어졌다. 사실상 조선의 화포 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화기 제도의 혁신이 이루어진 세종 말엽 15세기 중반이었다. 그 뒤 150여 년 뒤인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의 군제가 전근대적이었다. 파죽지세로 일본군은 밀고 들어왔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준비 없는 이의 황당함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론 세종 치하의 제도 개혁이 있었다. 여러 갈래의 소형 화기의 개발 및 그 성능 개량 사업은 당시 권총 수준의 성능이었던 조선의 소형화기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의 과정이었다.
세종 15년(1433) 1월에 처음 제안되어 23년(1441) 6월에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화기 사용 제도는, 소형화기 사수와 그를 지원하는 이를 2인 1조로 묶어서, 사수가 사격에 전념하는 동안 나머지 한 명은 여러 개의 화기와 화약, 포탄 등을 말에 싣고 다니면서 화기를 장전하여 그것을 사수에게 연속적으로 보급하는 구실을 맡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세종 29년(1447) 11월에 이 제도는 더욱 개선되어, 같은 종류의 소형화기를 사용하는 사수 4명과 이들을 지원하는 병사 1명 총 5명을 총통군(銃筒軍)의 기본 단위인 1오(伍)로 편성하여, 후자가 화기 등을 말에 실어서 사수들에게 보급하고 사수들은 사격에 힘쓰면서 동시에 활과 화살, 검 등을 들고 다니도록 하여 서로 협조하도록 하였다.
첫 번째 제도의 경우, 역시 한 명의 전투원마다 한 명의 비전투원을 필요로 한다. 부대 인원의 수를 지나치게 늘린 단점이 있었다. 두 번째 제도 역시 정도는 다르지만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를 다수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소형 화기의 수준이 낮았음을 반증한다. 즉 당시의 소형화기는 대형화기와 마찬가지로 뇌관 나무인 격목(檄木), 심지라 할 약선 등을 사용하여 장전하였기에 장전 과정이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속 장비를 많이 필요로 했기에 별도의 비전투원을 필요로 하였다. 그 때문에 화기 성능의 획기적 개선이 이루어진 세종 27년(1445) 이후에도, 화기가 활에 비해 발사 효율이 뒤떨어져 비효율적이라는 반론이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승자총통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도입되어 임진왜란 당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정한 1인용 소형화기로서 기본 장비를 갖추는 것에서부터 장전, 발사까지 완전히 혼자서 가능한 조총의 제도에 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맞붙어 싸우면 그 결과는 밤에 불을 보는 듯하였다. 아군은 싸웠다 하면 질 수밖에 없었다.
3.3. 『국조오례의』 군례(軍禮)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려 전하는 군례는 군례 서례(軍禮序例)와 군례 의식(軍禮儀式)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례 서례에서는 병기(兵器), 사기(射器), 집사관(執事官)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례 의식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 - 사단(射壇)에서 활 쏘는 의식으로 오례를 정리 해놓은 춘관통고(春館通考)에 따르면, 약 23종의 의례가 있다.
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壇儀) - 사단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는 의식으로 일종의 병사들이 훈련하는 결과를 확인하는 열병의 성격으로 치러졌다.
대열의(大閱儀) - 해마다 9월, 10월 중에 도성 밖에서 대사열을 하는데 이 열병식을 진행하는 절차 및 의식이다.
강무의(講武儀) - 왕실의 사냥하는 의식. 군사훈련의 성격으로 사냥을 한다.
취각령(吹角令) - 왕권 체제 아래서 비상시에 정해 놓은 신호에 따라서 서울에 있는 모든 군사(중앙군과 관원)들을 일정한 체계 아래 집합시키던 제도를 이른다. 이 때 소집 신호로 나발의 일종인 각(角)을 불기 때문에 취각령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각(大角)과 소각(小角)을 사용했다. 대각은 나무 또는 은으로 만들어 붉은색이나 검은색을 칠했으며, 소각은 황동에 단금(鍛金)을 하거나 소뿔로 나발 부분을 만들고 나무로 자루를 달아 붉은색을 칠했다. 이 군제는 정치적 돌발 상황에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건국 초에 왕자의 난 등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집권한 태종은 치밀한 보안책을 마련하고자 했고, 이것이 금군(禁軍)의 강화 및 취각령을 왕명으로 정하게 되었다.
구일식의(救日蝕儀) - 일식을 구제하는 의식. 조선과 중국에서는 일식을 중시했다. 일식이 생기면 해를 구하는 의식을 하는데 당시의 천문관서에서 일식을 미리 예측을 하여 몇 월 몇 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식이 있다고 예고를 한다. 이 때 임금이 보이지 않는 해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의식인 구일식의(救日蝕儀)를 행한다. 일종의 임금이 행하는 천문 관련의 의례다. 세종이 준비하고 기다려도 일식이 안 일어나기를 몇 차례 해서 역법을 손질하게 되었다.
계동 대나의(季冬大儺儀) - 입춘절에 행하는 일종의 봄맞이 의례다. 입춘은 새해가 새봄이 되는 첫 절기이기에 궁중과 지방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례를 베푼다. 또한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을 치렀다. 기록에 나오는 몇 가지 갈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① 입춘하례(立春賀禮) :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입춘하의(立春賀儀)에 따르면, “인일(人日)의 축하 예식과 같으나 다만 입춘에는 춘번자(春幡子)를 받는다.”고 하였다. 입춘날에 백관이 대전에 가서 입춘절을 축하하면 임금이 그들에게 춘번자를 주고, 이 날 하루 관원에게는 말미를 주기도 한다. 춘번자라 함은 머리에 꽂는 깃발 모양으로 된 장식물을 이른다.
② 토우를 내는 일[出土牛事] : 『예기(禮記)』에 따르면, 섣달에 궁중의 병을 일으키는 역귀를 쫓는 행사인 대나의(大儺儀) 때 “토우를 만들어 문 밖에 내놓아 겨울의 추운 기운을 보낸다.”고 하였는데, 고려 때는 주로 입춘절이 되면 흙으로 만든 토우를 사용하는 일이 주로 행해졌다.
③ 목우(木牛) : 함경도 지방에서는 입춘이 되면, 나무소를 관아로부터 민가의 마을까지 끌고 나와 돌아다니는 의례를 갖는다. 이는 흙으로 소를 만들어 겨울의 추운 기운을 내보내는 중국의 옛 제도를 본뜨고 한 해의 풍년이 들기를 비는 뜻으로 치러졌다.
④ 입춘굿 : 제주도 지방에서는 입춘 날이 되면, 굿 놀이를 행한다. 이 놀이는 농경의례에 속한다. 해마다 입춘 전날에 무당들이 관아인 주사(州司)에 모여 나무로 만든 소에게 제사를 지낸다. 입춘 날 아침에는 머리에 월계수 꽃을 꽂고 흑단령 의복을 차려 입은 호장(戶長)이 나무 소에 농기구를 갖춘다. 이들은 이어 나와 무당들로 하여금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앞장서게 하고 굿놀이의 줄을 이끌게 하며 큰 징과 북을 치며 걸어가며 관덕정 앞마당에 이르면 호장은 무당들을 나누어 일반 민가에 들어가서 쌓아둔 보릿단을 뽑아오게 한다. 뽑아온 보릿단으로 그 상태를 가려서 새해의 풍흉에 대한 점을 치기도 한다.
⑤ 향사의(鄕射儀) - 해마다 봄이면, 3월 3일(가을이면 9월 9일) 개성부와 여러 도, 주, 부, 군, 현에서 활쏘기를 하는 의례를 행하는 풍속이 있다.
4. 신기전(神機箭)의 출현
오늘날에 와서 산업용 화약은 거의가 발파용이다. 남산터널 같은 굴을 판다든지, 광물자원을 굴에서 캐낸다든지, 지하발전소의 건설 등에 쓰인다. 그리고 항만·해협·하천·호수 중에서 암초 등의 장애물을 제거한다든지, 최근에는 건물이나 다리를 철거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군사용으로는 총포용 발사재로 사용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로켓추진용의 고성능 특수화약이 제조되고 있다.
또 물건을 자른다든지, 구멍을 뚫는다든지, 압력을 이용한 용접을 한다든지 하는 것도 화약의 힘에 의지한다. 그 밖에 화약을 사용한 물건으로는 불꽃·발광제품·성냥 등이 있다. 화약은 염료·의약품과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의 비밀 병기 신기전(神機箭)이란 어떤 것인가? 이야말로 고흥반도에서 우여곡절 끝에 쏘아 올린 나로호의 원조인 셈이다. 로켓을 날린 것이다. 우리는 나로 호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한국 과학의 자긍심을 온 누리에 펼치는 감격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참으로 가슴 벅찬 순간들이었다.
세종 30년(1448), 고려 말엽에 최무선이 화약국에서 만든 로켓형 화기인 주화(走火)를 다시 손질하여 만든 것이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 등이다.
『국조오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기록된 신기전에 관한 내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병기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기전은 길이 약 52센티 정도의 대나무로 만들어진 화살대의 윗부분에 길이는 695밀리, 외경 95.5밀리, 내경 63.1밀리며, 두께 17.8밀리인 종이로 만들어진 약통, 말하자면 화살에 로켓엔진을 붙인 것이다. 폭탄에 해당되는 방화통을 약통 위에 올려놓고 도화선을 약통과 연결하여 신기전이 목표지점에 가까워지면 자동으로 폭발하도록 만들어졌다. 약통에는 화약을 채우고 바닥에 지름 37.5밀리 크기의 구멍을 뚫어 화약이 타들어가면서 가스를 분출시켜 로켓이 날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정거리는 1천 미터 이상이었다. 세종 때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다.
산화신기전은 대신기전과 크기가 거의 같으나 발화통을 변형하여 윗부분이 지화(地火)와 발화(發火)를 함께 넣어 적을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신기전은 길이 1,455밀리, 화살직경 4.7밀리, 아래직경 8밀리며 약통길이 200밀리, 외경 28밀리, 내경 16.6밀리이며, 두께 6.2밀리 크기의 종이로 만들었다. 약통과 발화통의 구조는 대신기전과 대동소이하게 만들었다.
소신기전은 길이 1,103밀리이고, 직경은 중신기전과 같다. 약통은 길이 147밀리, 외경 20밀리, 내경 11.6밀리이며, 두께 5.0밀리로서 제일 작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대신기전 ·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장착되어 있지 않다.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150미터, 소신기전이 100미터 가량으로 추정된다. 중 ·소신기전의 발사는 한 개씩 빈 화살통 같은 곳에 꽂아 발사했으나 문종 원년(1451) 화차가 제작된 이후로는 화차의 신기전기(神機箭機)에서 주로 발사하였다. 이르자면 포대를 신기전기라 한 것이다.
〈병기도설〉에 따르면, 신기전기는 직경 46밀리의 둥근 나무통 100개를 나무상자 속에 7층으로 쌓은 것으로, 이 나무 구멍에 중 ·소신기전 100개를 꽂고 화차의 발사 각도를 조율한 뒤 각줄의 신기전 점화선을 모아 불을 붙이면 한꺼번에 15발씩 차례로 100발이 발사되었다.
최근 영화 〈신기전〉이 우리 민족의 과학기술적 창의력이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민족임을 잘 알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그리고 청소년들에겐 미래의 꿈을 심어주는 동기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귀신같이 빠르고 정확한 화살’이란 말이다.
설계도가 전하는 바, 세계 최초의 로켓이 신기전이다. 최장 발포 길이가 2킬로의 엄청난 위력의 전쟁 병기다. 설계도가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로켓이자 대륙을 호령했던 조선의 비밀병기인 신기전은 소, 중, 대, 산화 신기전으로 나뉘어 다양한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대신기전은 한번 발사하면 화살이 1~2킬로 밖까지 날아가 적군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끌차의 구실을 했다. 화약의 자체 개발 이후 본격화된 화약전 속에서 신기전은 조선조 가장 태평성대를 이뤘던 세종 30년(1448)에 완성되어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확장시켰던, 세종대왕의 4군 6진 영토 회복 작전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것이다.
이르자면 행주대첩의 일등공신은 신기전이다. 선조 26년(1593) 2월 12일 새벽 6시. 고작 2천 8백 명이 지키고 있던 행주산성을 첨단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3만 명의 왜군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성벽도 없는 토성이었던 행주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12시간, 아홉 번의 공격 끝에 왜군은 1만 명의 사상자만을 남기고 물러서고 만다. 이 전투로 왜군은 회복하기 힘든 큰 타격을 입고 조선은 임진왜란 역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역사는 이 전투를 자랑삼아 행주대첩이라 했다. 과연 이 행주대첩의 승리의 원인이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로 나른 돌 때문은 아니었다. 권율 장군에게는 사정거리 50~100미터를 자랑하는, 왜군의 조총을 훨씬 능가하는 비밀 병기 신기전이 있었다.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세계 최고의 병기가 신기전이었다. 원나라에 이어 새로이 대륙을 장악한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면서 2킬로미터에 이르는 사정거리를 자랑하며 오랑캐와 왜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신기전은, 이후 영조 4년(1728) 안성에서 반군을 진압하는 데 사용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끝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만다. 명의 압력에 굴복하고, 과학 기술을 경시한 결과, 기술 개발은커녕 전의를 잃어버린 조선은 대륙 진출의 마지막 가능성과 가장 뛰어났던 과학 기술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팽개친 것이다. 참으로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한 과학자의 끈질긴 집념으로 신기전이 부활하였다. 신기전 완성의 비밀이 담긴 설계도는 드라마틱하게도 조선의 예절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발견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과학기술의 산물이 왜 공식적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예절서에 숨겨져 내려왔는지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신기전의 존재와 설계도는 1975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채연석 박사에 의해 비로소 다시 재조명된다. 신기전의 설계도는 세계우주항공학회(IAF)로부터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로켓설계도임이 공인되었다.
최근 들어 『국조오례의』에 실려 전하는 〈병기도설(兵器圖說)〉에 터하여 당시의 로켓형 총통인 신기전을 복원하였다. 2007년 12월 허환일 교수(충남대 항공우주공학) 팀은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대신기전 복원연구사업’ 과제에 착수, 지난해 12월 복원 후 두 차례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날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09 국제우주대회에서 복원 과정과 성능을 참가자들의 놀라움 속에서 공개했다.
허 교수팀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로켓은 중국의 비화창(飛火槍)(1232)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은 고려 우왕 3년(1377) 화통도감(火筒都監)에서 최무선이 만든 주화(走火)다.(주화란 ‘달리는 불’이란 뜻이다.) 로켓 무기였던 주화는 세종 30년(1448)에 신기전(神機箭)으로 발달했으며, 신기전의 한 종류인 대신기전은 길이 5.6미터, 무게 4-5킬로, 비행거리가 약 1킬로미터에 달하는 15세기 최대의 로켓무기였음이 밝혀진 셈이다.
당시 제작된 신기전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자세한 설계 기록이 『국조오례의』(1474)의 〈병기도설〉에 남아 있다. 15세기 이전의 로켓 제작 설계도는 세계적으로 신기전이 유일하며, 세종 때 이미 90개가 제조돼 의주성에서 사용했던 기록도 남아 있다.
허 교수팀은 신기전 설계도에 따라 일절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원했으며, 가장 어려운 종이로 된 약통을 만들려고 전통 한지로 된 40개 이상의 약통을 만들어 인장 강도 실험, 내압 실험, 연소 실험 등을 수행했다. 로켓 연료로는 19세기까지 사용된 흑색화약을 썼다. 신기전의 한 종류인 소·중 신기전은 대전엑스포 개최를 기념해 1993년 채연석(전 항공우주연구원장) 박사에 의해 복원됐지만, 대신기전은 기술적 문제 등으로 부분적으로만 복원됐다. 허 교수는 “전 세계 우주인과 우주과학이 집결한 대전 우주대회에서 대신기전의 발사 성공을 세계 학계에 보고하는 것은 귀중한 의미가 있으며, 외국 참가자들로부터 놀라움과 찬사를 받았다.”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5. 화포 관련 병서
5.1.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1권 1책. 초간은 인조 13년(1635)에 이서가 당시 사용된 각종 화포와 화약 사용법을 한데 모아 한글로 옮겨 언해한 병서다. 숙종 11년(1685)에 황해 병영에서 목판으로 중간되었다. 이 중간본에는 서문 없이 바로 본문이 시작된다. 책의 후반부에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가 함께 묶여 전하는데 묶인 책의 말미에 최명길이 쓴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발문의 내용에 두 책의 간행 경위가 함께 소개된 점으로 보아 이 책과 『신전자취염소방언해』는 애초 함께 짝이 되어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황해 병영판본의 짜임은 서문 없이 바로 본문부터 들어간다. 속내는 먼저 화포의 일반적인 화약 사용법을 소개한 뒤 각종 화포의 개별 사용법과 발사물을 차례로 풀이하였다. 풀이하는 화포별로 본문의 내용을 총 50조(條)로 나누어 각 조마다 한문 원문을 먼저 싣고 이에 대한 언해문을 뒤이어 실었다. 한문 원문에는 한글로 구결(입겾)을 달았으며, 원문의 각 한자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달아, 가르치고 배우는 데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국한혼용 방식은 경서나 기술서의 언해에 공통된 점이다.
이 책은 당시의 화약에 관한 몇 안 되는 문헌정보라는 점에 가치가 있다. 아울러 이 책의 언해문은 17세기 국어를 반영하여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더욱이 이 책의 이본들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표기적인 이형을 보임으로써 17세기 국어의 표기와 그 변천을 살피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현전하는 자료로서는 6종이 있다. 그 가운데 3종은 한국중앙학연구원에 있고, 나머지 3종은 국립중앙도서관, 서강대, 계명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 이 글에서 다루는 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본(황해 병영판)인데 뒤에 붙어있던 『신전자취염소방언해』가 없으므로 이 부분은 서강대본을 고려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물질적 토대는 화약 병기와 판옥선이었다. 그 화약 무기의 속내를 알게 해주는 책이 『화포식언해』다. 이 책은 임진왜란(1592~98)을 어름한 시기의 조선군 화약무기에 대해 가장 폭넓게 풀이하는 자료다. 『화포식언해』에 등장하는 화약무기는 천자총통·대완구·비진천뢰(비격진천뢰)·불랑기·화차 등 모두 43종이다. 조총을 제외하고 당시 사용된 화약무기는 거의 모두 걸치고 있는 셈이다.
이 언해글은 〈병기도설〉, 〈신기비결〉과 함께 한국의 전통 화약무기에 관한 3대 기본 자료 중 하나다. 〈신기비결〉은 실린 화약무기의 종류가 적고 발사 방법과 순서 위주로만 풀이했다는 점에서 『화포식언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병기도설〉은 조선 초기, 특히 세종(1418~1450) 시대의 화약무기를 다룬 서책이라는 점에서 역시 준별된다. 이순신 장군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무기는 조선 초기의 화약무기에 비해 전반적으로 크기가 크고 위력도 더 세다. 또 비진천뢰 같은 신형 화약무기나 중국풍의 새로운 화약무기도 이 시기에 새롭게 제작되거나 들여왔다. 이런 임진란 당시의 화약 병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이 『화포식언해』라 하겠다.
『화포식언해』는 임란이 끝난 뒤 30여 년이 지난 인조13년(1635), 이서(李曙,1580~1637)가 이 책을 간행했다. 그 편찬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경기방어사·총융사·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군사에 정통했던 이서의 주도 하에 발행됐다는 점에서 내용의 진정성은 높다. 『화포식언해』는 각 화약무기별로 화약 사용량, 탄환이나 화살 등 피사체의 규격과 수량, 사정거리를 일목요연하게 풀이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 등장한 혁신적 신무기인 비진천뢰(비격진천뢰)의 구조에 대해서 알기 쉽게 풀이한 점도 이 자료의 장점이다.
화포 발사에 반드시 필요한 심지인 약선(藥線)의 제작법과 한중일 3국 화약의 성분 차이를 구체적으로 비교한 것도 장점이다. 한 가지 아쉬운 바는 천자총통 등 주요 화약무기의 구경이나 무게·길이 등 기본적인 제원이 빠져 있다. 『화포식언해』는 언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글로 쓰인 책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당시 우리의 중요한 화약무기를 복원, 발사 시험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화포식언해』에 힘입었다.
『화포식언해』는 인조 13년(1635) 최초 간행 이후, 숙종 11년(1685)에 황해 병영에서 재간행을 했으며,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도 몇 종이 현존한다. 그만큼 조선 후기에 널리 보급된 책이라는 이야기다. 그 덕에 장서각·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곳에서 『화포식언해』의 조선시대 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5.2.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
이 책은 인조 13년(1635)에 이서가 당시 사용된 각종 화포와 화약 사용법을 한데 모아 한글로 번역한 병서로, 숙종 11년(1685)에 중간되었다. 『화포식언해』의 후반부에 『신전자취염소방언해』가 함께 묶여 전한다. 묶인 책의 끝 부분에 최명길이 지은 발문(跋文)이 실려 있어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발문의 내용에 두 책의 간행하게 된 과정이 함께 다루어진 점으로 보아 이 책과 『신전자취염소방언해』는 애초 함께 짝이 되어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뒤에 김지남의 『신전자초방』의 저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머리말이 없다. 막바로 몸글부터 시작한다. 내용은, 취토(取土, 흙 취하는 법), 화합(和合, 섞어 버무리는 법), 증백(蒸白, 띄워 부옇게 하는 법), 재토(滓土, 찌꺼기흙 다시 쓰는 법), 본수(本水, 밑물 하는 법), 작회(作灰, 재 만드는 법), 안부(安釜, 가마 앉히는 법), 열조(列槽, 구유 벌이는 법), 재토(載土, 흙 싣는 법), 재수(載水, 물 싣는 법), 기화(起火, 불 일으키는 법), 초련(初煉, 처음 달이는 법), 재련(再煉, 두 번 달이는 법), 삼련(三煉, 세 번 달이는 법), 총식(摠式, 다 모으는 법), 빗물(備物, 쓸것들 장만함) 등 16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문 원문에는 한글로 구결(口訣, 입겾)을 달아 숙종 당시의 한글 구결 연구 더 나아가 17세기 근대국어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5.3.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김지남(金指南, 1654~?)이 지은 병서. 정조 20년(1796) 목판본. 1권 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 중엽의 역관(譯官)인 김지남이 북경에서 배워 온 바의 새로운 자초법(煮硝法)을 한글로 옮긴 언해 글을 싣고, 그 방법을 알게 된 과정을 책으로 간행하기까지 경과를 덧붙여 엮은 병서다. 숙종 24년(1698) 군기시(軍器寺)에서 초간 된 듯하나 전하지 않고, 정조 20년(1796) 군기시에서 중간된 목판본만이 전한다.
이 책은 머리글이 없이 바로 자초법에 대한 몸글부터 시작한다. 몸글은 취토(取土, 흙 모으기), 취회(取灰, 재 받기), 교합(交合, 섞기), 사수(篩水, 물 거르기), 오수(熬水, 물 달이기), 재련(再煉), 삼련(三煉), 예초(刈草, 풀베기), 교수(膠水, 아교 넣기), 합제(合製, 섞어 찧기)의 10절로 나누어 각 절마다 한문 원문을 먼저 싣고 이에 대한 언해 글을 바로 이어 실었다. 몸글 다음에는 득초법시말(得硝法始末)이라는 제목 아래 새로운 자초방법을 알기까지 과정을 소개하고 뒤이어 책의 간행 동기와 경위를 알려 주는 기록을 실었다. 앞의 것은 자초법을 전수받은 김지남 자신이 기록한 내용이고, 뒤의 것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서 초간본, 중간본의 간행과 관련된 사실을 뽑아서 실어놓은 것이다. 이들에는 언해 글이 실려 있지 않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화약 제조 기술을 자세히 보여 주고 있다. 한편 현재 전하는 중간본(1796)은 근대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원이 된다. 중간본의 언해문은 간행 경위와 표기 특징 등으로 볼 때 중간 당시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18세기말의 근대 국어의 변천을 살필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
5.4. 『신기비결(神器秘訣)』
조선조 선조 때의 함경도 도순찰사였던 한효순(韓孝純, 1543~1621)이 지은 각종 화약병기의 제작 및 사용법과 고금에 걸친 여러 병가(兵家)의 용어를 싣고 풀이한 병서다. 이는 1권 1책으로 고활자본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포진과 행군에 대한 진설(陳說)이 편찬되고 진법과 화약무기가 중요시됨에 따라 선조 36년(1603)에 간행되었다. 이 책의 머리 부분에 대포의 부속품 14종의 이름과 용량, 조총 1자루의 부속물 8건의 명칭과 그 요구량 등을 적어놓았다. 본문에서는 우선 천자총·지자총·현자총·황자총 등 포류와 조총·쌍안총·백자총·대승총 등 각 총류의 사용 때에 필요한 화약이며 약선, 그리고 탄약 등의 구분과 제원, 용량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총가(銃歌)에서는 세총(洗銃)을 비롯하여 화약선의 삽입, 화약, 송자(送子), 연자(鉛子) 등 10여 단계의 장전 과정을 설명했다. 그 뒤에는 대포습법(大砲習法)·불랑기습법(佛狼機習法)·조총습법(鳥銃習法) 등 총포의 사용법을 적어 놓았다. 또 신기해(神器解)·조총해(鳥銃解)·단기장용해(短器長用解)·수화기(收火器)·찰유실(察遺失) 등의 부분에서는 총포의 장단점 및 사용상의 제문제와 보관법 등을 설명했다. 부록으로는 병가요어(兵家要語)를 두어 황태공(黃太公)·손자(孫子)·척계광(戚繼光) 등의 용어 103장을 수집, 항목별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책 뒤에는 한효순이 쓴 발문이 실려 있다. 전쟁사·군제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 보관되어 있다.
6. 조선 전기의 총포의 갈래
6.1. 세종 때 총포의 갈래
최무선 이후로, 조선에 들어와 화포 개발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27년(1445) 3월 30일 기록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세종 때 총포의 종류가 여럿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의정부에 전지하기를, “태종께서 자주 문밖에 거둥하시어 화포 쏘는 것을 구경하시매, 이숙번(李叔蕃)·최해산(崔海山) 등이 그 일을 맡아 보는데, 마음쓰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아니나, 지자화포(地字火砲)·현자화포(玄字火砲)는 화약만 많이 들고 화살은 5백 보를 넘지 못하고, 한번에 화살 여러 개 쏘는 기술을 힘껏 연구하여도 끝내 성공하지 못한지라, 태종께서 일찍이 낙천정에 거둥하시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화포는 군국(軍國)의 중한 일이다. 유은지(柳殷之)가 총명하고 슬기로와서 기술의 소질이 있으니, 제조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시었다. 유은지가 제조가 되어서 태종께 아뢰기를, ‘신이 화포 쏘는 것을 보오니, 현자화포는 힘이 센 사람이라야 쏠 수가 있삽고, 힘이 적은 자는 두세 방(放)을 넘지 못하여 어깨와 팔이 아파서 쓰지를 못합니다.’ 하기에, 나도 아뢰기를, ‘조금 그 제도를 작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유은지도 내 말을 옳게 여기므로,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시험삼아 해 보라.’ 하시고, 만든 뒤에 태종께서 친히 납시어 보신즉 화살이 지자화포·현자화포보다 백여 보나 미치지 못한지라,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힘이 약해서 쏠 수가 없다.’ 하시고, 깨뜨려버리게 하시었다. 뒤에 중국 화포를 얻어서 보니 그 제도가 현자포보다 작고 부리[觜]가 긴데, 군기감으로 하여금 그 제도대로 만들게 하여 지자화포·현자화포에 비하매, 화약은 적게 들고 화살은 멀리 가니, 이른바 황자포(黃字砲)가 이것이다. 임자년(1432)에 처음으로 쌍전화포(雙箭火砲)를 만드니 화살이 2백 보까지 가는데, 정부와 육조가 모여서 구경하고 말하기를, ‘좋다.’ 하였고, 파저강 토벌 때에 크게 이익을 보았다. 뒤에 또 사전화포(四箭火砲)를 만들었다가 화살 나가는 힘이 약하여서 즉시 헐어버렸고, 또 가자화포(架子火砲)를 만들었더니 변장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단히 좋다.’ 하였고, 또 세화포(細火砲)도 만들었다. 작년 가을에 다시 화포의 제도를 의논하고, 군기감을 시켜서 여러 화포들을 시험하여 보니, 황자포는 화살이 4,5백 보에 미치고, 지자·현자포는 화약을 많이 써도 그만 못하고, 가자포는 혹은 2,3백 보에 미치나, 2백 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고, 세화포는 모두 2백 보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순몽이 말하기를, ‘지자·현자포는 무겁고 화약이 많이 들어서 도리어 황자포에 따르지 못하니, 마땅히 다 깨뜨려 버리자.’ 하매, 이천(李蕆)이 말하기를, ‘현자화포는 수가 많아서 경내에 퍼져 있는 것이 1만 가량이나 되니, 이제부터는 더 만들지 말면 그만이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깨뜨려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이순몽이 말하기를, ‘세화포는 한 사람이 가히 3,40개를 가질 수 있고, 비록 부인들이라도 쏠 수가 있어서, 그 이익됨이 가장 크다.’ 하매, 이천이 말하기를, ‘편전(片箭)은 비록 약한 활이라도 가히 3백 보를 갈 수 있으되, 세화포는 2백 보도 가지 못하니, 무슨 이익됨이 있는가. 마땅히 깨뜨려 버려야 한다.’ 하기에, 내 말하기를, ‘지자·현자화포는 화약은 많이 들어도 마땅히 황자화포보다 멀리 가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화살의 가볍고 무거움이 적당하지 못한 까닭이니, 마땅히 다시 연구하게 할 것이고, 가자화포와 세화포는 2백 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아서 이것이 유감이니, 역시 마땅히 화살 제도를 고쳐 정하여 시험해 보게 하라.’ 하였는데, 군기감에서 여러 달을 두고 연구하여도 마침내 기술을 얻지 못하였고, 이순몽이 말하기를, ‘양편 군사가 마주 싸울 때 사이가 백 보 더되지 아니하면 지금 말한 그런 화포들이 비록 2백 보 이상 가지 않더라도 그 이익됨이 클 것입니다.’ 하기에, 내 말하기를, ‘말탄 군사가 활을 잡고 화살을 띠고서 달리면서 내리 쏘기를 비 퍼붓 듯하여, 활과 살의 이용 가치가 극치에 달하는 것인데, 화전(火箭)은 한 사람이 가지는 것이 열 개에 지나지 못하며, 한 번 쏘면 맞붙어 싸울 때는 다시 쓸 수가 없으니, 만일 다시 쓰려면 먼저 화약을 재이고 다음에 방아쇠를 걸고, 그 다음에 받침목을 넣고 마지막으로 화살을 꽂아야 쏠 수가 있게 되어서 그 쓰기가 이렇게 어렵지마는, 그러나, 화살의 힘이 맹렬하여서 만일 여러 군사들 속으로 쏘면 화살 하나가 3,4인을 죽일 수 있으므로 적군이 무서워하니, 공격하는 싸움에 유리하기는 천하에 화포와 같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이제 〈이순몽이〉 이르기를, ‘마주 싸울 때 백여 보 더 되지 아니하면 세화포가 비록 화살이 약하더라도 쓸 수 있다.’ 하나, 그렇다면 편전으로도 족할 것인데 어찌 꼭 화포를 쓸 필요가 있는가? 내가 즉시 군기감에 명하여 대장간을 행궁(行宮) 옆에다 설치하고 화포를 다시 만들어서 멀리 쏘는 기술을 연구하게 하였더니, 전의 천자화포(天字火砲)는 4,5백 보를 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만든 것은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은 1천 3백여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1천 보까지 가며, 전의 지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9백 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6,7백 보를 가며, 전의 황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백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5백 보에 이르며, 전의 가자화포는 2,3백 보도 못갔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6백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4백 보를 가며, 전의 세화포는 2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5백 보에 미치게 되었으며, 전의 여러 화포들은 화살이 빗나가서 수십 보 안에서 떨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는데, 이번 것들은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다. 이번 것들이 비록 이러하지마는, 더욱 정밀함을 구하느라고 지금은 아직 제도를 정하지 못하였다. 내 이제 왕위에 있은지 28년 동안에 화포에 관심을 두고 자주 강론하고 연구하여 제도를 많이 고쳤더니, 여러 신하들이 볼 때마다 잘된 양으로 칭찬한다. 오늘날의 만듦새로 보면 전의 화포들은 모두 못쓸 것이 되니 곧 깨뜨려 버림이 마땅하다. 전에는 이러한 새 제도를 모르고서 그때 만든 것을 완전히 잘된 것으로 여겼었으나, 이제는 그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뒷날에 오늘 것을 볼 때 오늘날에 전날 것을 보는 것과 같게 될까 싶기도 하다. 최해산은 그 아비(최무선)가 국가에 공이 있고, 또 그 사람됨이 부지런하여 태만하지 않으므로 태종께서 이 일을 맡기시었고, 그 아들 최공손(崔功孫)도 조부(祖父)로 인한 음직(蔭職)으로 역시 이 일을 맡고 있으나, 내 들은즉 그 사람은 여느 사람들과 별다름이 없다 하고, 요사이 제조(提調)들이 모두 늙어 근력이 쇠잔하여서 필시 부지런히 힘써 일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므로, 정3품이나 종3품 중에서 나이 40세 미만인 자로 한 사람을 구해서 당상관을 삼아 군기감 제조로 임명하여 외직으로 내보내지 말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자리에 종신(終身)할 것을 알게 하면, 군기감 일을 계획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크게 유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러한 인재를 얻으면 좋을 것이고, 만약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공연히 벼슬자리만 가볍게 사용함이 될 뿐일 것이다. 최공손은 그 조부의 업(業)을 이어서 마음 쓰는 것이 필시 남보다 나을 것이니, 역시 약간 그 벼슬을 올려서 자기로서 여기에 종신할 것을 알게 하면, 반드시 유익함이 될 것이다. 이제 제조가 될 만한 사람을 구하되 얻지 못하였으니, 경들이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너댓 사람을 골라서 아뢰라.” 하매, 정부(政府)에서 대호군 박강(朴薑)을 천거하니, 드디어 박강으로 군기감 정을 시키고, 특별히 통훈 대부로 한 계급 올렸다.
여기서 『세종실록』 오례/군례(서례)/병기/총통편에 실린 여러 그림 자료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일총통〉

〈이총통〉

〈삼총통〉

〈세전총통〉

〈사전총통〉

〈팔전총통〉

〈대완구〉

〈소완구〉

〈발화〉

6.2. 장군화통(將軍火筒)
장군화통은 성종 5년(1474)에 반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병기도설〉에 실려 전하는 화기 가운데 하나다. 〈병기도설〉에만 나올 뿐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기록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개발과정과 성능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세종 27년(1445) 3월에 완성된 천자화포가 장군화통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채연석 등). 이 성능 개량형 천자화포는 사거리가 1,300보에 달했는데, 이 성능 개량형 천자화포도 장군화통처럼 대전(大箭)을 사용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포 갈래의 하나인 완구(碗口) 류를 제외한 일반적인 조선 초기의 총통 중에는 최대급의 총통이므로, 조선 중기 이후의 천자총통과 비교할 수 있는데, 천자총통보다는 작은 총통이다.
전하여 오는 실물도 없고, 실전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복원품이 항공우주연구소와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운반 손잡이가 다른 총통과 달리 둥그런 구멍이 난 관환철(貫環鐵)로 되어 있다. 이는 조선 전기의 총통 가운데 가장 크다.
6.3. 일총통(一銃筒)
일총통은 병기도설에 등장하는 총통 중에 하나다. 명확한 개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세종실록』 세종 30년(1448) 기록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관련 학자들은 세종 27년(1445)에 완성된 개량형 지자화포가 일총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일총통의 경우, 차대전이나 중전 1발을 발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신형 지자화포는 사거리가 8백~9백 보 정도였다. 이것이 차대전을 발사했을 때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전기록은 없다.
실물 유물 중에 확실하게 일총통으로 밝혀진 것은 없으나, 채연석 박사는 1978년 2월10일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저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황자총통이 황자총통이 아니라 일총통이라고 주장한다. 복원품은 채연석 박사가 복원한 것이 행주산성 유물전시관, 항공우주연구소, 전쟁기념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기에 비교의 잣대가 된다.
6.4. 이총통(二銃筒, 宇字銃筒)
말하자면, 장군화통과 일총통, 삼총통이 대포에 가깝다면 이총통은 소총에 가깝다. 제작 시기는 분명하지 않고, 세종 29년(1447)의 기록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만약 개량형 현자화포와 동일한 무기일 경우 세종 27년(1445) 무렵 완성된 것이 된다. 발사체는 소전을 쏠 경우, 1발식 쏘지만 세장전이나 차세장전으로 쏠 경우, 각각 6발, 9발씩 사격한다.
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총통 명문에 이총통이라고 적힌 총통이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주박물관의 이총통은 〈병기도설〉의 이총통과는 조금 다르다. 총부리가 분명 원형은 아니고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오례서례 총통도〉(『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과 다른 자료임)에는 경주박물관의 이총통과 유사하게 부리 모양이 삼각형으로 된 총통그림이 실려 있다. 실물이 거의 없으므로, 이어진 무기로 추정되는 사전장 총통이 만들어진 뒤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6.5. 삼총통(三銃筒, 宙字銃筒)
삼총통은 이총통보다 길이와 구경이 작지만 이총통보다 대형의 발사체를 사용한다. 즉, 이총통이 소전, 세장전, 차세장전 같은 작은 화살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삼총통은 50.14센티에 달하는 차중전을 사용한다. 채연석 박사는 『병기도설』의 삼총통이 세종 27년에 개량된 황자화포에 해당한다고 추정한다. 태종-세종대의 황자화포는 중국식 화포를 고려해서 만든 총통이다. 다른 총통과는 달리 세종 27년(1445)의 성능개량 전에도 비교적 우수한 성능으로 호평을 받던 총통이었다.
삼총통은 어떤 총통보다 실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71문이 남아있다. 특히,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574번지에서는 한 곳에서 무려 52문에 달하는 삼총통이 발굴된 적도 있다. 남아있는 실물 수량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전총통 다음으로 주력 총통으로 사용된 총통인 듯하다.
6.6. 팔전총통 (八箭銃筒, 洪字銃筒)
팔전총통의 길이는 삼총통에 가깝고 구경은 이총통과 비슷하다. 비슷한 크기의 삼총통에 비해서 구경이 큰 편이며, 격목통 길이는 길고, 약통 길이는 짧은 편이다. 삼총통이 대형 화살 한 발을 발사함에 적절하도록 구조화되었다. 반면에 팔전총통은 소형 화살 여러 발을 동시 사격하는데 적절하도록 특성화되었다. 비유하자면, 한꺼번에 여러 발을 사격하는 대신 사거리는 다소 짧다는 점에서 기관총에 비유할 수 있다. 팔전총통은 세종 28년(1446) 1월에 최초로 기록에 보이며, 개발 시기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팔전총통은 세종 28년 이전에 그 선행무기체계가 전혀 없다.
실물은 경남 하동에서 2문이 흙속에서 나와 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토된 팔전총통에 새겨진 글자로는, “八箭銃筒 洪字二樣銃桶 戊辰 八月 泗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경남 사천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채연석 박사는 명문의 무진년을 세종 30년(1448)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명문 중에 홍자 이양(二樣)이란 표현에서 홍자 일양(一樣) 양식의 팔전총통도 존재할 수 있음을 상정할 수는 있다.
6.7. 사전총통(四箭銃筒, 荒字銃筒)
사전총통이라 함은 팔전총통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조금 더 작은 총통이다. 화차(火車)의 총통기에 설치되는 총통도 바로 이 사전총통이다. 조선 전기의 각종 화약무기 훈련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한 주력 총통이다.
기록으로 보면, 사전총통은 세종 28년(1446) 처음으로 보인다. 채연석은 세종 시대 쌍전화포 〉사전화포 〉가자화포 〉개량형 가자화포 〉사전총통 순서로 발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쌍전화포와 사전화포의 경우, 명칭에서 2발, 4발식을 동시에 쏠 수 있는 화포임을 알 수 있고, 가자화포의 가자(架子)는 시렁 같은 틀이나 받침을 의미한다. 이는 의미상 화차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이들이 모두 사전총통과 관련이 있다. 사전총통의 사거리는 분명하지 않으나 만약 개량형 가자화포가 사전총통의 전신이 맞는다면, 개량형 가자화포의 사거리를 토대로 사전총통의 사거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개량형 가자화포는 한 발 사격할 때 600보, 4발 사격할 때, 400보 정도였다. 다시 재구한 복원품의 경우라면, 이런 기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20~180미터 정도 날아간다. 이는 1981년 채연석이 실험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실물은 현재 10문이 남아있다. 하동에서 발견된 3문의 사전총통은 진주박물관에 보관중이며 건국대, 서울대 박물관도 각 1문을, 동아대박물관은 2문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역수군사(朝鮮役水軍史)』라는 책으로 명성이 높은 구 일본 해군대좌(대령) 아리마세호(有馬成甫)도 1문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소장품의 경우, 새겨진 명문에 황자(荒字)라고 적혀 있음이 두드러진 점이다.
6.8. 사전장총통(四箭長銃筒, 日字銃筒)
사전장총통이라 함은 글자만으로 보자면, 사전총통을 길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태면에서 사전장 총통은 오히려 이총통과 유사하다. 사전장총통과 이총통을 비교하면 사전장총통이 이총통보다 조금 작을 뿐 전반적인 규격이 거의 비슷하다.
이총통의 경우 소전 1발, 세장전 6발, 차세장전 9발을 사격하며, 사전장총통의 경우 차소전 1발, 세장전 4발, 차세장전 6발을 사격한다. 규격 기준 상 사전장총통의 구경이 이총통보다 조금 작아서 화살 수를 적게 장전 할 뿐 발사체도 거의 동일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전장총통은 오히려 이총통을 개조한 무기라고 본다. 개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1448) 12월조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전장총통 실물은 1점만 전해오고 있고, 경희대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따라서,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이 사전장총통은 복제품으로 추정된다.
경희대 박물관은 희귀한 고총통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1967년 이래 경기도 용인 지역 일대에서 모 도굴단 일당들이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하여 고총통을 다수 발굴한 적이 있다. 이 도굴단 일당들이 도굴한 것을 골동품 판매상인 박고당(博古堂)이 구입하였고, 박고당에서 수집한 고총통을 경희대 박물관이 다시 구입한 것이다. 타 대학 박물관 소장품은 조선 후기의 전래품을 구입한 것이 많으나, 경희대 박물관 소장품은 땅에서 파낸 조선 전기의 출토품이 많다. 이 때문에 경희대 박물관 소장 총통들은 상대적으로 오래되고 희귀한 종류들이 많은 편이다.
6.9. 세총통(細銃筒; 月字銃筒)
세총통이라 함은 조선조 시대의 각종 총통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다. 다른 총통과는 달리 자루를 끼워서 드는 것이 아니라, 쇠 집게로 들어 사격을 한다. 어떤 점에서는 권총을 연상시키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발사체는 차세전 1발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1445)의 기록에 따르면, 세화포로 나오는데 세총통의 이칭으로 생각된다. 세종 27년의 성능 개량 이전에는 사거리가 200보를 넘기지 못했으나, 성능개량 후에는 500보까지 사격할 수 있게 발전되었다. 가장 작은 총통이어서 아녀자들도 사격할 수 있는 총통으로 가늠되기도 했고, 말위에서도 쉽게 갖고 다닐 수 있다는 기록도 남아 보인다.
6.10. 총통완구(銃筒碗口)
조선 초기의 각종 총통이라 함은 원칙적으로 화살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총통완구는 처음부터 돌 탄알-석환(石丸)을 썼다. 또한, 전체적인 구조에서 길이가 짧은데 반하여 구경이 두드러지게 크다는 점에서 다른 총통과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이런 형태의 화기를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완구(碗口)라고 불렀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 중에 육화석포(六花石砲)가 이런 완구의 일종이라고 본다. 기록상 가장 처음으로 완구가 보이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기시의 화약고기(火藥庫記)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태종 14년(1414) 6월경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이 중국제 완구를 참조하여 대·중·소 완구 3종류를 만들었다. 세종 즉위년(1418) 8월에는 대마도를 통해 중국제 무쇠로 만든 완구를 입수하여 완구 제작에 참조한 바 있다. 세종 19년(1437)에는 너무 큰 대완구보다는 작고, 소완구보다는 큰 중완구를 기본으로 하여, 이동이 쉬운 새로운 완구를 만들었다. 채연석 박사는 〈병기도설〉의 총통완구는 바로 이 세종 19년의 개량형 완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병기도설〉의 총통완구의 가장 큰 특징은 2개의 부품으로 분해-조립이 가능하다. 세종 19년의 기록과 일치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물이 한 점 발견된 적이 있다. 귀선별 황자총통을 흉내 낸 사람의 또 다른 날조품으로 의심받고 있다. 따라서 실물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할 수 있고, 채연석 박사가 재구성한 복원품만 몇 군데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6.11. 철신포(鐵信砲)
철신포는 신호용 기구로 사용하는 화포로 실탄을 발사하지는 않는다. 철신포는 일반적인 총통과는 달리 격목통의 아래 부분 지름이 약통 윗부분 지름보다 작다. 채연석은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이렇게 설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약통에서 폭발한 연소가스가 격목통과 부리를 통과해 바깥으로 밀어내게 되므로, 격목통의 좁은 부분은 일종의 노즐 구실을 하게 되어, 소리가 커지게 된다고 한다.
최무선의 자료에 이미 신포(信砲)가 보이며, 세종 10년, 세종 14년, 18년, 19년, 21년, 22년, 24년, 29년에도 신포의 실제 사용과 관련된 기록이 이어 나타나고 있다. 세종 10년(1428) 무렵, 전국 각지에 신포를 배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봉수제도 못하지 않게 신포(信砲)를 이용한 신호체계도 매우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포를 설치한 곳을 신포소라고 불렀다.
특히 신포는 국경 지역에서 연접한 지역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데 많이 사용했다. 압록강-두만강 국경 지역 백성들에게 여진족의 침입을 알릴 때 철신포 2회 발사하면 여진족의 침입을 의미하는 포로 활용한 경우도 많았다. 철신포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문종 즉위년(1450)의 기록에 최초로 보이지만, 주철신포란 표현은 세종 24년(1442)의 기록에도 이미 드러나 보인다.
6.12. 신제총통 (新制銃筒, 盈字銃筒)
조선 초엽의 대부분의 화약 병기는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신제총통은 세조대에 만든 총통으로 상정하고 있다. 최초로 기록에 보이는 것은 세조 13년(1467) 7월의 기록이다. 신제총통은 크기에서 사전총통보다는 작고 세총통보다는 크다. 세총통은 나무자루를 끼워서 드는 것이 아니라, 쇠 집게를 사용해서 고정하는데 반하여, 이 신제총통은 사전총통과 마찬가지로 나무자루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실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는 걸로 보아 흔히 많이 썼던 총통으로 보인다.
7. 국어학적인 특징
7.1. 서지적인 양상
『화포식언해』의 일반적인 서지 사항은 아래와 같다. 여섯 가지의 이본이 전하며, 따로 나눌 수 없는 불분권 1책으로 된 목판본의 병서다. 초간본의 경우, 인조 13년(1635)에 당시 병조판서를 지냈던 이서(李曙, 1580~1637)가 지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책이다. 『화포식언해』의 끝 부분에 실린 간기를 보면, 숭정 8년 8월로 되어 있다. 서문은 없고 바로 몸글로 시작한다. 1책 52장이며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발문으로 마무리를 한다. 뒷부분에 『신전자취염소방언해』 23장을 포괄한다. 책의 안에 적은 내제는 『화포식언해』, 『신전자취염소방언해』이고, 판심에는 ‘화포식’과 ‘자소방’으로 되어 있다. 책의 넓이는 28.8×21.6센티며, 사주단변이고 유계, 10줄 20자, 주상행이며 어미는 상하 내향 이엽 화문이다. 저자인 이서와 발문을 적은 최명길의 생몰을 보고, 숭정 8년(1635)으로 보더라도 초간본을 이 무렵쯤으로 봄이 온당하다(정윤자(2008) 「‘화포식언해’의 국어학적 연구」 참조).
7.2. 먼저 『화포식언해』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의 표기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대국어의 음운론적인 특징을 고려하면서 동아리 짓기로 한다. 17세기 국어의 일반적인 특징을 볼 때 표기상으로는 좀 특이하다. ㅅ-계나 ㅂ-계 합용병서에서 ㅄ-계가 널리 쓰인 것을 미루어 보아 17세기 초기의 자료로 봄이 타당하다. ㅂ-계 합용병서는 17세기 초엽에 거의가 된소리로 바뀌어 갔다. 17세기 중엽에 가면 어두자음군은 거의 소멸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화포식언해』에는 ㅅ-계나 ㅂ-계 합용병서에서 ㅄ-계가 모두 쓰이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손꼽을 수가 있다.
*중세어에서 소리 중심의 연철에서 근대어로 오면, 뜻 중심의 분철로 가는 경향이 짙다. 그런가 하면 과도기적으로 일부 분철과 연철이 함께 공존하던 혼철 표기가 눈에 뜨인다. 예) 됴흐니라(화포 4ㄱ), 녀코(화포 9ㄱ), 얼굴티(신전자 8ㄱ), 싸흔(화포 4ㄱ), (화포 4ㄱ) 등〈연철〉/곧 초고(신전자 9ㄱ),  적이어든(화포 27ㄴ),디 (자초방 1ㄴ) 등〈분철〉.
*어말의 받침 자리에서 ㅅ과 ㄷ이 넘나들어 쓰이다가 ㅅ〉ㄷ으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다 후기로 갈수록 ㅅ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 온고(신전자 7ㄴ)  고(신전자 9ㄱ)/구디(화포 6ㄴ), 됴흔 곧애(신전자 17ㄱ)
*어두 합용병서의 넘나드는 표기를 들 수 있다. ㅂ(ㅅ)-계 합용병서의 경우, 중세어 자료에 이어서 폭 넓게 드러나며 흔히 볼 수 없는 표기도 드러난다. 17세기 국어에서 ㅴ이나 ㅵ 같은 보기들이 찾기 어려우나 『화포식언해』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ㅵ, ᄦ, ᄥ계의 보기는 중세어 자료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예들이다. 마침내 된소리 표기에 혼란상을 초래한다.
(ㅂ-계) 두에쇠  여(화포 7ㄱ), 굼글 둛고(화포 21ㄱ), 절로 디면(화포 9ㄴ)
(ㅄ-계) ㅄㅌ- 버므려(신전자 8ㄱ), 이고(화포2ㄱ), ᄦ- 마시(신전자 12ㄱ), ᄥ- 여(신전자 7ㄴ), ㅵ- 이고(화포 2ㄱ), 워(신전자 7ㄴ)  성에(신전자 15ㄱ), ㅴ- 여(화포 9ㄱ), ㅄ- 라(화포 3ㄴ), ㅷ - 지면(화포 12ㄱ), ㅶ-고(신전자 11ㄴ)
(ㅼ-계)  筒통의(화포 2ㄱ) 이고(화포 2ㄱ) 혀(신전자 11ㄴ) ㅼ-라(신전자 19ㄱ)
*이두식 적기의 보기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가령 『신전자취염소방언해』에서 집의 마루를 뜻하는 ‘抹말樓루’(신전자 2ㄴ)의 경우, 한자로 적었지만 기실은 우리말의 소리를 한자의 소리로 대응시켜 이두식으로 적고 있다. 이러한 보기는 소리를 적는 음독(音讀)의 경우이나 한자를 적고 뒤에 괄호 안에 속명이란 풀이를 달아 우리말을 적는 훈독(訓讀)식 적기의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
예) 靑櫟(俗名 풋갈)(신전자 7ㄱ)/馬마通통과(신전자 4ㄱ)-과.
7.3. 음운상의 특징
17세기 초기의 일반적인 음운상의 특징을 고려하면서 『화포식언해』에 나타난 두드러진 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구개음화 현상이 흔하지 않다. 이는 『화포식언해』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의 저자인 이서(李曙)가 경상도나 전라도 같은 남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구개음화의 영향이 비교적 늦게 나타났을 것이다. 예) 됴흐니라(신전자 4ㄴ), 디면(화포 12ㄱ), 얼굴 티(신전자 8ㄱ)
*원순모음화가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예) 므릇(화포 1ㄴ), 므긔(화포 2ㄴ), 스므냥이오(화포 3ㄱ~ㄴ), 블을 브티라(화포 2ㄱ) 등
*전설모음화 현상이 활성화 되지 않았다. 예) 즈의(신전4ㄱ)
*제2음절에서도 아(ㆍ)가 보수적인 분포를 보인다. 예) 론히(신전자 16ㄴ), 니니(신전자 14ㄴ), 죠(화포 2ㄱ), 가니라(화포 3ㄱ) 등
*단모음화가 아직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예) 됴흐니라(신전자 3ㄴ), 條됴ㅣ오(화포 22ㄱ), 여곰(신전자 3ㄴ), 텨 믌긔(신전자 15ㄱ), 슈슈(신전자 7ㄴ) 등
*관형형어미와 통합되는 의존명사의 표기에서 어중 경음화의 경향이 보인다. 예) 리디 안일시니(신전자 19ㄱ), 넘을 니(신전자 19ㄱ), 足죡라(신전자 19ㄱ), 고을 시니(신전자 19ㄱ)
*모음조화가 잘 지켜지지 않는 보기들이 상당수 분포한다. 특히 처격 조사들과 체언이 통합되는 경우, 모음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보기들이 널리 분포한다. 예) (양+음)글고(화포 16ㄱ), 노흐라(화포 5ㄱ, 6ㄴ), 남글(화포 8ㄱ)/(음+양)여(화포 14ㄴ), 드 대로(화포 22ㄴ)/(중+양)비(신전자 3ㄴ)
7.4. 문법적인 특징
*기본형 ‘다’의 활용형이 대용언인 대동사(代動詞)로 쓰인 보기들이 널리 쓰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대용언의 대용(代用)이란 글이나 담화에서 이미 앞이나 뒤에서 쓰인 언어 요소를 대용어로 바꿈으로써 되풀이에서 오는 표현의 단순함을 피하고, 표현을 쉽고 감칠 맛있게 옮기려는 언어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용 표현은 어느 나라 말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언어경제를 위하여 쓰이는 표현들이다. 언어학에서는 조응(照應)과 지시(指示)라는 질서를 부여하여 담론화하기도 한다. 단적으로 ‘다’는 송강의 속미인곡(續美人曲)에서 ‘사은 니와 새도 그쳐 잇다’에서와 같이 ‘그쳐있음’을 대신하는 의미론상의 조응됨이 대용작용하고 있다. 예) 物믈力력을 촌 後후에 이에 可가히 베퍼 리라 니(신전자 19ㄱ)
*체언에 붙어 체언의 용언화를 가속화 시키는 ‘-이다’ 서술격 조사가 널리 쓰인 분포를 확인할 수 있다. 『화포식언해』는 근대국어 초기인데도 벌써 서술격 조사 ‘-이다’의 활용형들이 눈에 뜨인다. 서술격 조사 ‘-이다’는 용언과 마찬가지로 활용을 한다. 하지만 학교문법에서는 용언이 아니라 서술격 조사로 갈래를 나눈다. 이는 활용이라는 형태적 특성보다 동사나 형용사가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는 반면 서술격 조사는 조사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기능적 특성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보기로서, ‘학생이다, 학생이므로, 학생이니까, 학생이라, 학생이니, 학생이로소이다’에서처럼 ‘이다’는 용언처럼 활용을 한다. 이는 다른 조사와는 다른 형태적 특성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 ‘이다’를 다른 문법범주로 재해석하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말하자면 ‘이다’를 ‘지정사(잡음씨)’로 설정해 별개의 문법범주로 보자는 것이다. 조사의 특수한 형태로 보는 현행 ‘서술격조사’ 이론도 타당한 면이 있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지정사론을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논의되어 온 ‘이다’ 문법에 대한 재정립이 절실하다.
통사적인 구성의 경우, 문장의 종결 표현에서 ‘-이다’ 서술격조사가 통합되어 쓰인 보기들이 폭넓은 분포를 보임은, 18세기 들어오면서 서술격조사의 쓰임에서다. 예) 라(신전자 19ㄱ), 니(신전자 19ㄱ), 밋믈이라(신전자 4ㄴ), 법이라(신전자 3ㄴ), 서 돈 다 分분이오(화포 29ㄴ),  적이면(화포 22ㄱ),  적이거든(화포 22ㄱ), 다 分분이니(화포 26ㄴ), 오리라(화포 22ㄴ) 등
*비자동적인 교체를 하는 형태 : 구무(굼게)(화포 1ㄴ), 굼글(화포 21ㄱ), 굼긔(화포 20ㄱ), 궁긔(화포 22ㄴ), 구무(화포 1ㄴ)와 같이 단독형으로도 쓰이지만 ㄱ곡용형으로도 쓰인다. 그 밖에도 ‘나모’와 같은 형도 있으며 시옷으로 끝나는 명사들의 경우, 거의가 ㄱ곡용으로 하는 특수 체언들이 분포한다. 아울러 ‘, , ’와 같이 이러한 단독형들이 ‘, , ’의 곡용형으로 쓰인다.
* 근대국어의 일반적인 활용의 특성으로 의도법 선어말어미 ‘-오/우-’의 쇠퇴와 ‘이시-’, ‘잇-’의 쌍형어간에서 ‘잇-’으로의 단일화, 겸양법 선어말어미 ‘--’계의 화자겸양법과 공손법 선어말어미 ‘-이-’의, ‘-소’의 ‘-오’ 등의 새로운 어말어미의 출현, 또 이를 통한 경어법 체계의 재편, ‘-겟-’, ‘-앗-’ 등의 새로운 선어말어미의 출현 등이 있다. 또한 ‘-다’의 ‘-ㄴ다’와 ‘-다’로의 변화, ‘-ㄴ다’계 어미의 소멸이 특징이며 ‘-리-’가 통합되어 있는 어미구조체 ‘-리로다’와 ‘-리러-’ 등이 각각 ‘-ㄹ로다’, ‘-로다’, ‘-ㄹ다’와 ‘-ㄹ러-’로 바뀐 형태변화 등이 두드러진다. 『화포식언해』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에 드러난 국어학적인 특징은 중세후기 국어와 근대국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경향을 보여준다.
7.5. 『화포식언해』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에 드러난 어휘상의 특징은 수량을 드러내는 의존명사 곧 분류사가 널리 쓰인다는 것이다. 양사의 경우를 들어본다. 예) 〈근〉 근(화포 12ㄱ), 아흔닷 근이오(신전자 18ㄱ), 千쳔 斤근에(신전자 19ㄱ)/ 〈냥〉스므 냥과(화포 3ㄱ), 석 兩냥으로(신전자 16ㄴ)/ 〈〉 에(신전자 19ㄱ), 열 을(신전자 19ㄱ),  이면(신전자 18ㄴ)/ 〈돈〉두 돈이라(화포 17ㄱ), 다 돈이라(화포 32ㄴ)/〈되〉닷 되(화포 37ㄱ), 닷 되식(신전자 15ㄱ)/ 〈釐리〉(화포 34ㄴ)/ 〈말〉(신전자 20ㄴ)/ 〈명〉(신전자 18ㄴ, 신전자 19ㄱ)/ 〈번〉(신전자 17ㄱ)/ 〈步〉(화포 6ㄱ)/ 〈분, 푼〉(화포 5ㄱ)/ 〈〉(화포 21ㄴ)/ 〈사리〉(화포 19ㄴ, 20ㄴ)/ 〈셤〉(신전자 18ㄴ)/ 〈오리(올)〉(화포 23ㄱ)/ 〈자ㅎ〉(화포 30ㄱ)/ 〈張〉(화포 30ㄱ, 화포 22ㄴ, 화포 26ㄱ)/ 〈劑〉(화포 36ㄴ)/ 〈치〉(화포 34ㄱ)/ 〈환〉(화포 13ㄴ)/ 〈〉(신전자 6ㄱ) 등
*수사로는 ‘일(화포 34ㄱ), 이(화포 34ㄱ), 삼(화포 34ㄱ), 사(화포 32ㄴ), 오(화포 34ㄴ), 육(화포 32ㄴ), 칠(화포 24ㄱ), 팔(화포 7ㄱ), 구(신전자 14ㄴ) 등이 있다. 합성하여 쓰이는 수사로는 두어(신전자 16ㄴ), 둘세(신전자 20ㄱ), 네다(화포 21ㄴ), 다엿쇄(신전자 5ㄴ), 예닐곱(신전자 9ㄴ), 엿아홉(신전자 8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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