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구득신방명공시자응수성소(李公購得新方命工試煮應手成焇):이공이 새로운 비방을 마련하여 공원들에게 염소를 만들도록 시험하니 공원들이 비방대로 하여 염초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다. 이와 관련하여 김지남이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에서 책 마지막 부분에 득초법시말(得硝法始末)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자초 방법을 알기까지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득초법시말(得硝法始末) : 김지남이 『신전자초방』의 말미에 자초법의 시작과 끝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적은 글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염초를 굽는 기술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 오고자 하여도 그것을 사오지 못할까 늘 걱정을 했다. 인조(仁祖) 때에 관서의 성근(成根)이라는 사람이 염초 굽는 기술을 얻고자 무기 곳간에서 염초 굽는 것을 시험하여 그 비방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완풍부원군 이서가 자료를 모아 편찬하고, 완성군 상국 최명길(崔鳴吉)이 발문을 적은 것이 이 글이다. 뒷날 한세룡(韓世龍)이라는 사람이 왜인에게서 배워 여러 가지를 비교 연구하다가 성근의 기술을 조금 썼던 바 얻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제 성근의 기술을 마침내는 버리기로 하고서 한세룡의 방법을 사용하여 전해왔다. 이제 와서는 그것도 못 쓰게 되어 그 품질이 몹시 정련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에서 일찍이 이 일에 통탄하였다. 임신년에 이르러 병조판서 민취도(閔就道)가 사신의 부개(副介, 부관)로서 연경에 사신으로 가는데, 김지남이 역관으로 따라갔다. 민취도가 가는 도중에 김지남에게 말하기를, “염초(焰硝)를 굽는 한 가지 방법은 태조 때부터 그 묘법을 알고자 했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다. 그대가 만약 구하기만 하면 임금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됨이 막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지남은 그 곳에서 물건을 주고 사서라도 그 방법을 구하려고 해도 쓰이는 곳이 지극히 없으니, 아무데서도 찾을 곳이 없었다.
다시 찾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양에 다달아 시골집에 몰래 들어가 한 가지를 얻었다. 사람과 말이 남긴 것이 금과 같이 중요하다고 하므로, 처음으로 물으며 염초 기술을 얻으려고 하룻밤을 바쁘게 보냈으나, 다 적을 수가 없었다. 민취도가 돌아와 임금과 신하가 모여 문답하는 연석에 김지남을 계유년에 세사로 특별히 파견할 것을 주청했다. 온갖 지혜를 다 짜냈으나 중국에서 염초 기술을 엄정한 법으로써 워낙 무겁게 다스렸으므로, 사람들이 역시 두려워하며, 이를 비밀히 하여 전후 방문할 적에 방문자가 종종 죽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여 얻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 가지 생각을 바로 잡았다. 다시 다녀와서 그 방법을 다 전해 받고 돌아와 내가 하는 대로 따라 시험하니, 곧 참으로 오묘한 방법을 이루었다. 앞으로 이 방법을 쓰려면, 그대(김지남)에게서 그 전하는 바를 널리 펴겠지만, 민취도는 그 일을 북쪽으로 옮겨 잠을 자지 않고 옥을 가졌으되 감히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고 혹 아주 없어지거나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얻지 못해도 적을 죽여 없애는 데 신비롭게만 쓰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제조는 무기고에서 한 일을 듣고 잘 되었다고 하면서, 사신의 임무를 주어 두 해 동안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제 무기고에서는 속속들이 알았으니, 여러 군문 밖이나 병영·수영과 산속에 있는 마을·들 가운데 있는 고을까지도 이 법을 쓰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그 편리함이 두루 퍼져 적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전일에 소장한 역은 날이 궂으면 습기가 차고, 장마를 만나면 반드시 없어지고 낭비만 더했다. 다시 찧는 힘이 쓸 데 없이 될 지라도 비로소 쓰이게 되었다. 이제 이에 새로 구운 염초가 성질이 조급하고 비록 힘은 둘 땅에 움판 지 10년이 지났어도 장마가 끝나도 물에 젖을 염려가 없어졌으니 이것이 떳떳한 것이다. 그러나 하물며 이즈음에 와서 백성이 날로 번영하여 산의 나무가 다하니, 어렸을 적에 일년생 풀로써 대신해도 되니 이것이 첫 번째로 이롭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도로에서 흙을 모으면 다시 침범하지 않고, 사람 사는 집에까지 미치게 되어 이것이 둘째로 이롭다. 사립을 불살라서 그 재를 쓴다. 또 흙을 삼분의 일로 줄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로 이롭다. 또 무릇 행군하는데 적을 만나면 한 해 살이 풀과 길 위에 있는 흙을 따르면 쓸 만할 것이 그리 흔치 않다. 하루에 염초를 만들면 이것을 전쟁에 더욱 편리하고 유익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사서 모아도 그 방법을 알지 못했는데, 바야흐로 오늘에 이르러 큰 덕행이 후세에게 무궁한 이로움이 되니, 비록 이 몸으로 하여금 갑자기 구렁을 메울지라도 감추지 못할 것이 없다. 통훈대부 전 사역원정 김지남(金指南)이 적다.
숙종 24년(1698) 4월 25일 대신 비변사 당상이 데려가 뵙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알현할 때,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장계한 내용에, 우리나라의 염초 굽는 법은 매우 소홀하여 전부터 배우고자 할 때마다 중원과 왜국에서 얻어서라도 큰 상을 주겠다고 큰 현상금을 걸기도 하며 명령을 내려도 타국 사람에게는 비밀이 되어 전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성실한 마음이 없어 반드시 배워서 얻고자 하는 사람이 겨우 지금에야 이르렀다.
전 사역원정 김지남이 요사이 북경에 들러 갔다 올 때에 개인적으로 많은 돈을 들여서 그 방법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은 임금에게 지지난해 겨울 김지남 감자군기시로 하여금 염초를 굽게 하였는데, 염초를 구울 때에 재를 쓰고, 아교를 쓰니, 이것이 곧 새로운 기술이다. 나무를 태워 1년 된 잡초를 쓰는 것은 매우 쉬우므로 공역(토목 공사 부역)이 자못 줄여졌어도 염초를 몇 배나 얻었고, 또 염초의 정밀도도 전보다 좋았으니, 김지남을 이를 크게 만들어 배운바, 오히려 그 방법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어, 요청하여 다시 시험한 것이 1년이 되었다. 지난해 조정이 마름질하여 줄여서 군기시에는 주지 않고, 염초를 굽는 값이 알맞았으나, 이 군기시에는 달이었다.
지난해 임금님의 재가를 받아 조선의 방법을 얻은 바, 마른 소나무는 100년이 지나도 쓰이고도 남았다. 이에 그 마른 소나무로써 팔아 돈 수백 냥을 만들어 김지남에게 주었더니, 그 돈으로써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이 쉴 새 없이 빨리하여 예년에 하던 대로 몇 번이나 염초를 천근씩 구워서 바쳤다. 또 나머지 돈을 도로 바치고 그 비용이 절감됐으니, 염초의 품질을 알만하다.
그리고 더욱이 지난해 이어 또 올해도 산림이 민둥민둥하게 나무를 드러내어 더욱 귀하게 되었다. 여러 군문에서 염초를 굽는 것이 외방에까지 점점 어렵게 되니, 들의 고을에서는 나무를 드러내는 곳이 없으면 비록 염초를 굽고자 하여도 또한 이를 얻지 못했다. 이제 이것은 김지남이 배운 법을 새롭게 하여도 드러낸 나무를 쓰지 않고 염초를 얻는 것이 이미 정밀하고도 많아서 가히 전습이 오래도록 이익이 되게 하였다. 비단 이태 동안 감동(부역을 감시하는 벼슬)의 부역을 감시하는 노고뿐이고, 각 군문의 장교들과 더불어 활을 만들고 총을 만드는 것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마땅히 별다르게 공로를 갚을 길이 있으나, 이런 것들은 차례로 상을 주어도 역관에게 가자(加資, 정 3품 이상으로 품계를 높이는 것)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것으로서 품계를 높이는 것은 이 사역원에서 막힘을 보고, 번역하는 임무가 도당에 있으니, 도리어 실망하고 탄식하였다.
역관들은 앞에도 있었고, 동반·서반의 벼슬을 제수 받은 자가 있어도 희소한 책은 가벼이 베풀기가 어렵고, 혹은 서북변장에게 제수하여, 새벽에 염초 굽는 곳에서 다시 그 방법을 시험하여 이를 사용하면, 전습이 마치 공이 있는 것과 같다. 실효가 있으면 차츰 조정하여 쓰면 우러러 품달함에 감히 견줄 만하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역관들에게 다른 일로써 품계를 높이게 되면 도리어 그 앞날을 막아 공로를 갚는 것이 되지 않는다. 어지간한 변방의 장수에게 제수하는 일을 병조판서에게 분부하는 것이 옳다. 또 장계한 바, 김지남이 염초 굽는 법을 배운 바, 만약 글로써 지었다면 모름지기 문신으로 전국에 보이면 가히 그 학습을 넓히는 것도 오래도록 전할 수 있다. 김지남으로 하여금 글로 지어서 그 기술을 갖추어 적고, 군기시로 하여금 전국에 간행·배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영조12년(1736) 5월 12일 대신이 비변사에서 품계할 일로 당상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할 때 우의정 윤기동이 장계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염초 굽는 법은 본디부터 소략하여 비용만 많이 들이고 염초는 적게 얻었습니다. 찧어서 약을 만들어도 화약의 힘이 세지 않았습니다. 날이 궂으면 습기가 차고, 장마가 들면 없어져 반드시 새로 넣어 다시 찧은 뒤에라야 쓸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숙종 조 무렵, 인조 16년(1638)에 남구만이 건의하여 역관 김지남이 북경에 갔다 올 때, 전해들은 바 염초 굽는 새로운 방법을 얻어서 무기고로 하여금 세상에 펴내게 하였다. 그 전 법대로 견주어보면, 공역이 매우 줄어들어 염초를 몇 갑절이나 얻어도 그 품질은 훌륭하였다. 비록 둘 땅에 움을 파서 10년을 지내고 장마에 끊어지지 않고 습기에 차는 근심이 없었다. 흙을 길 위에서 모아서 땔감으로 불살랐다. 이것을 그대로 재를 써서 이렇게 하면 간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그 첫째 장점이다. 다만 서울 밖으로 널리 펴는 것은 임금의 침각(針刻, 침으로 새김. 임금의 간절한 뜻)을 따르게 하여도 염초를 굽는 기술이 이어지지 못하고 전해 오지 못함은 애석하다. 만약 화성의 군기의 비품을 둘 때에 이로써 바야흐로 염초를 굽되, 널리 쌓아 두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대로 신칙하여 반포하면 따를 힘이 있어 염초 굽는 곳마다 효험을 더해 가고 있으니, 어찌 비단 일시에 그만 두어 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이겠는가. 신은 지난 사람들을 따라 이미 염초를 굽는 자에게 숙지케 하여 기필코 행할 수 있게 하니, 이 법의 밑자리에서 강개하고 탄식하여 쓰지 않았다.
이제 매월 행사로 말미암아 말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감히 이것을 우러러 청원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숙종 때에 염초 굽는 법을 인쇄·반포한 것이 실로 오래 되었다. 이를 그대로 따라 김석·성헌과 나도 이 책을 그 위에 받들어 두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염초 굽는 법을 알지 못하여 중국에서 사들여 왔다. 완풍부원군과 여러 사람이 책을 엮고, 평안도 사람 성근은 염초 굽는 법을 찾아서 바친 뒤에 비로소 그 만드는 법을 대략 알고 나니, 그 품질은 오히려 좋지 못하였다. 부사 민취도는 역관 김지남으로 하여금 연경에서 물건을 주고 사서라도 얻으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영의정 남구만은 제조로서 앞장을 섰다. 보람이 크게 나타났다. 하나는 일년초를 씀으로써 산의 나무는 넉넉하였고, 하나는 길에서 흙을 취함으로써 사람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또 하나는 땔감을 불살라 그 재를 사용했다. 또 흙을 삼분의 일로 줄이게 되었다. 이로써 김지남에게 포상을 하도록 임금에게 청원하였다.
이것이 곧 염초 만드는 법을 알게 된 실마리다. 김지남이 이러한 방법을 임금에게 청원하여 마침내 임금이 그 실행을 분부하니 효과도 있었고, 또 무기고로 하여금 인쇄·반포할 수 있었다. 『신전자초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