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4 이동
내려받기 인쇄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확대 축소 전체보기
신속효자도 4:22ㄴ
확대 표준 축소 내려받기 인쇄 의견제시

4 : 22ㄱ

石堅廬墓

4 : 22ㄴ

玉石堅昌原府人早孤家貧事母以誠得異味輒懷以獻及歿哀毁踰禮時短喪法嚴獨廬墓不脫衰絰喪畢後三年猶不廢朝夕奠 恭僖大王朝 㫌閭
옥셕견은 챵원부 사이라 어버이 일 여희고 지비 가난터니 어미 셤기 졍셩으로 주001)
졍셩으로:
정성으로. 단모음화를 거치면서 ‘졍셩〉정성’으로 단순화되었다.
야 긔이 마 어드면 믄득 푸머다가  드리더니 주그매 미처 셜워 여위 녜예 넘게 더라 그 저긔 단상법이 엄 주002)
단상법이 엄:
단상법(短喪法)이 엄하되. 단상법이란 삼년상을 일 년으로 하여 의례를 간소하게 하는바, 연산군 때 시행하던 의례간소화법이다.
홀로 녀묘야 최딜을 벋디 아니코 주003)
최딜을 벋디 아니코: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최딜〉최질’이 되었다. 최질은 상중에 입는 삼베옷을 이른다.
상  후의 삼년을 오히려 됴셕뎐을 폐티 아니니라 공희대왕됴애 졍녀시니라
석견여묘 - 옥석견이 여묘를 지키다
옥석견은 창원부 사람이다. 어버이 일찍이 돌아가고 집이 가난하더니, 어미 섬김을 정성으로 하여 좋은 음식이 있으면 얼핏 품어다가 드리더니 돌아가매 이어 서러워 여윔을 상례에 넘게 하였더라. 그때 단상법이 엄하였으나 홀로 시묘하여 상복을 벋지 아니하고 상례를 마친 뒤에도 삼 년이나 조석의 제사를 끊이지 않았다. 공희대왕 중종 때 정려를 내렸다.
이전 다음
목록열기목록 목록닫기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