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辛禑): 고려 우왕의 이름. 고려 제32대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우왕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다. 『고려사절요』에는 신돈의 첩실인 반야(般若)의 아들로 적혀 있지만, 그의 출생에 대하여 많은 이설이 있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실각하고 귀양을 가자 당시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언젠가 신돈의 집에 갔다가 한 여인과 정분을 나눠 낳은 아들이 있다고 하여 공민왕의 아들이라 하였다. 신돈이 죽게 되자 궁으로 들어가 새로 우(禑)란 이름으로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23년(1374) 9월, 돌아간 궁녀 한씨의 아들로 발표되었다. 같은 달 공민왕이 암살되자 명덕태후와 시중 경복흥은 종친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지만, 이인임의 강력한 지지로 10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초 북원과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로 갈등을 빚었다. 말하자면 양다리 외교가 말썽이었다. 거기다 왜구까지 침노하매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성정이 어질고 명민하여 처음에는 백성들의 믿음을 샀다. 차츰 정사는 뒷전이고 환관이나 한량들과 어울려 사냥이나 주색에 빠졌다. 게다가 국부로 존호를 올렸던 이인임까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원지부처 되어 정치적 지지기반도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우왕 14년(1388) 명 나라 주원장이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해오자 이성계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을 따라서 요동정벌을 단행했다가 이성계의 사불가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은 귀양가고 임금은 가짜 임금이라는 명분으로 폐위되어 강화도에 버려진다. 임금은 그 뒤 다시 여흥군 곧 여주로 옮겨졌다가 공양왕 원년(1389) 11월에 김저와 모의, 이성계를 숙청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 달 그곳에서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인물이 포은 정몽주이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동문수학하였던 정몽주였다. 드디어 이방원과 조영규 일파에 의하여 선죽교 다리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이성계는 임금은 적통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조선에 편찬된 『고려사』는 우왕의 세계를 열전 반역전의 신우전(辛禑傳)에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