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됴의 졍녀시니라: 공양왕 때 정려를 받았다. 공양왕은 창왕 2년(1389)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창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즉위 후 바로 이성계 일파의 종용으로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왕명으로 죽였다. 재위 3년 동안 모든 분야에 걸쳐 몇 차례의 제도개편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혁은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의 자기 세력의 정착을 위한 개혁이다. 아울러 불교를 멀리하고 주자가례를 시행해 집집마다 가묘를 세워 고유 신앙을 없앴다. 절로 출가자한 이들을 다시 군대로 보완하거나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교의 오교 양종을 없애고, 절간의 재산을 몰수해 각 관아에 나눠 먹기를 하였다. 조준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해 녹제와 전제를 개혁하였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같은 해 이성계 일파에 맞섰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자, 정세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에 조준·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새로운 시대의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공양왕은 선위형식으로 물러나면서 고려는 5백년의 왕조를 마감하고 말았다. 공양왕 4년(1392) 조선이 들어서자 공양왕은 원주로, 다시 간성으로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조선 태조 3년(1394) 삼척으로 옮겨졌다 사사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