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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忠作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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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忠未詳世係事母至孝居五冠山靈通寺洞去京都三十里爲養祿仕朝出夕返告面定省不少衰嘆其母老作木鷄歌名曰五冠山曲傳于樂譜
문튱은 셰계 셰티 몯니 어미 셤김을 지극 러라 오관산 녕통 골의 사더니 셔울 샹게 삼십리라 치기 위야 녹 벼을 야 아젹긔 나가 나죄 도라와 뵈기와 문안을 죠곰도 쇠티 아니코 그 어미 늘곰을 탄야 목계가 지어 주001)
그 어미 늘곰을 탄야 목계가 지어:
그의 어머니가 늙음을 탄식하여 목계가를 지어. 목계가는 문충이 홀로 계신 어머니의 늙으심을 탄식하여 부른 효도의 노래로 ‘정석가’와 함께 흔히 불렀던 민요다. 흔히 문충이 살았던 곳을 붙여 ‘오관산곡’이라고도 이른다. 『고려사』에 그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노래를 이제현(李齊賢)이 한시로 엮어 그의 『익재집(益齋集)』에 전한다. 그 가사(歌詞)는 이렇다. “나무로 아로새긴 작은 닭 한 마리, 벽 위에 가져다 붙여 놓았네. 그 닭이 꼬끼요 홰치며 울 때까지 어머님 길이길이 사시옵소서[木頭調作小唐鷄 邸子拈來壁上棲 此鳥膠膠報時節 慈顔始似日平西].” 이 노래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의성으로 적어 ‘교교(膠膠)’라고 하여 ‘꼬끼오’를 그렇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일홈을 오관산곡이라 니 악보의 뎐니라
문충작가 - 문충이 노래를 짓다
문충은 그 세계(족보)를 자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그는 어미 섬김을 극진하게 하였다. 오관산 영통사 골에 살았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삼십 리 떨어졌다. 어미 섬기기를 위하여 녹 벼슬을 했는데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와서 뵙고 문안드리기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어미 늙음을 개탄하여 목계가(木鷄歌)를 지어 이름을 오관산곡(五冠山曲)이라고 하니, 악보로 전하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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