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여묘 - 하광신이 여묘를 지키다
하광신은 대구부 사람이다. 어머니를 섬기되 지극한 효도로 하고, 〈돌아간 뒤〉 삼 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고려 명종조에
정문 주002) 정문(㫌門): 옛날 효자·충신·열녀들이 살던 마을 어귀나 살던 집 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붉은 문을 말한다. 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한다. ‘정(㫌)’은 ‘정(㫌)’을 달리 표기한 자임. 그들의 행실을 널리 알리고 표창하는 것을 정표(㫌表), 그 일을 정려(㫌閭)라고 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하여 유교가치관을 확산시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교적 가치규범에 따른 효선을 권장하는 일이었다. 이 규범에 적합한 인물, 곧 효자·열녀 등을 가려 뽑아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고, 정문·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로 내려 주었다. 때로는 노예를 면하게 하는 면천(免賤)을 통한 신분 상승의 계기로 활용되었다. 조선의 정표정책은 고려의 것을 계승하여 태조부터 순종 때까지 이어졌다. 군주가 즉위하면 충신·효자·열녀를 조사하여 각 지방의 관아에서 보고하도록 했다. 세종 때에는 효자에게 벼슬을 내릴 때 벼슬이 없던 사람이면 종9품, 원래 벼슬이 있던 사람이면 한 직급을 올려주는 법령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이 있어도 관찰사나 수령이 이 업무를 충실하게 거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업무를 게을리 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도 마련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체적인 법령은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을 세웠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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