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박연은. 단모음화와 모음변이를 거치면서 ‘대뎨〉대제학’으로 소리가 단순화하였다. 박연(朴堧)의 아명은 연(然)이고,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나 81세로 고향의 고당리에서 돌아갔다. 아버지 박천석(朴天錫)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 김오의 따님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여산 송씨이다. 막내 아들의 행실로 박연도 화를 입을 뻔하였으나 세 임금에 걸쳐서 봉직한 공으로 연좌의 화를 면했다. 생원 진사를 거쳐 그 뒤 집현전교리, 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 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위로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아래로는 박연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었으며, 더욱이 해주에서는 검은 기장이 나고 남양에서는 경돌이 나는 등 운이 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박연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 상황과도 적지 않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律管)을 제작하기 위하여 여러 차에 걸쳐서 시험 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 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 청제율관소(請制律管疏)를 비롯하여 무려 39편에 이르는 상소문이 『난계유고』에 실려 있다. 시호는 문헌이다. 영동에서는 매년 난계음악축제를 열어 그 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과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음율이라는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보면 아-설-순-치-후-반설-반치의 7음이 모두가 음악의 악리에 맞게 설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아-각(角), 설-치(徵), 순-궁(宮), 치-상(商), 후-우(羽)로 대응되어 율려(律呂)에 맞게 음률을 맞추고 소리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에 따라서 문자의 운용을 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박연은 단순한 대제학이 아니고 음률과 훈민정음에 정통한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뎨 박연은:대제학 박연은. 단모음화와 모음변이를 거치면서 ‘대뎨〉대제학’으로 소리가 단순화하였다. 박연(朴堧)의 아명은 연(然)이고,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나 81세로 고향의 고당리에서 돌아갔다. 아버지 박천석(朴天錫)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 김오의 따님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여산 송씨이다. 막내 아들의 행실로 박연도 화를 입을 뻔하였으나 세 임금에 걸쳐서 봉직한 공으로 연좌의 화를 면했다. 생원 진사를 거쳐 그 뒤 집현전교리, 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 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위로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아래로는 박연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었으며, 더욱이 해주에서는 검은 기장이 나고 남양에서는 경돌이 나는 등 운이 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박연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 상황과도 적지 않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律管)을 제작하기 위하여 여러 차에 걸쳐서 시험 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 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 청제율관소(請制律管疏)를 비롯하여 무려 39편에 이르는 상소문이 『난계유고』에 실려 있다. 시호는 문헌이다. 영동에서는 매년 난계음악축제를 열어 그 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과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음율이라는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보면 아-설-순-치-후-반설-반치의 7음이 모두가 음악의 악리에 맞게 설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아-각(角), 설-치(徵), 순-궁(宮), 치-상(商), 후-우(羽)로 대응되어 율려(律呂)에 맞게 음률을 맞추고 소리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에 따라서 문자의 운용을 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박연은 단순한 대제학이 아니고 음률과 훈민정음에 정통한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