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신속삼강행실도 서문
하늘이 천부적으로 내린 품성[秉彛]이란 사람들이 누구나 타고난 것인바, 이로써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은 진심(심성, 곧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에 갖춰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천성을 따라서 그 행실을 절제함으로써 지극함에 이른다면,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도 감동시킬 수 있으니, 옛말에 이른바, ‘사람은 작으나 그 바탕은 하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시대에 임금으로서 백성의 스승된 사람이 능히 장려하고 이끌어내는 방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비록 행실에 옮기려고 하여도 막히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됨으로써 항상 고통을 호소하는 북을 울리나 펴지 못하니, 어찌 세도(世道)를 경영하려는 자가 크게 탄식하지 않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장헌대왕(세종)께서 부제학 설순에게 명을 내려 비로소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행적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 일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아서 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그림과 찬(贊)을 넣어 목판에 새김으로써 널리 반포하였으니 실로 선덕 연간(명나라 선종 때, 1426~1435)에 만들어진 것이다.
주001) 세종 16년(1434) 11월에 세종의 명으로 한문본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사실을 말함.
아, 우리
해동성인(세종)께서 예악(禮樂)을 지으신 뒤, 성상의 마음 속에 가장 먼저 생각하신 것이 이 일이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해야 할 바였다.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받들어 봉행함에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찬양하여 성상의 뜻을 우러러 도움을 준 것이 있었겠는가? 엄숙하게 한 가지 업무를 명령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되어, 그 빠르기가 ‘북채와 북’과 같았으니,
주002) 『한비자』에 나오는 말로, ‘임금의 걱정은 응하는 자가 없는 데 있으니, 한 손으로 쳐서는 아무리 빨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신하의 근심은 하나를 얻지 못하는 데 있으니,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고 왼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면 양쪽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군주가 북채와 같다면 신하는 북과 같고, 기예가 수레와 같다면 일함은 말과 같은 것이다.[人主之患在莫之應 故曰 一手獨拍 雖疾無聲 人臣之憂在不得一 故曰 右手畫圓 左手畫方 不能兩成 故曰 至治之國 君若桴 臣 若鼓 技若車 事若馬]’
이는 〈세종께서〉 몸소 실천한 것의 효험이 이루어진 것이며, 성덕을 베푸심이 밝게 드러난 것이다. 이 책 『삼강행실도』 한 권을 반포하니 천리만리까지 메아리쳐 화답함이 아! 그 가득참이여. 지난 옛문헌을 살펴보건대, 진·한(秦漢) 이전엔 오교(五敎), 삼물(三物)을 좌우로 나란히 세워, 먼저 힘써야 할 일을 갖추고, 그것을 진작시키는 도리에 대하여 번갈아 서로 주고받기를 애씀으로써 마침내 찬란한 전대(前代)의 풍속과 같게 되었다. 대개 상고할 문헌이 있으면 바로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따를 수 있으며, 후세 태평성대를 맞이할 때 모두 그것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후세 사람이 이 책을 참고하여 본을 삼아서 퇴락하여 가는 풍속과 성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이끌어 간다면, 이 책은 백성을 깨닫게 하여 풍속을 교화함에 비록 어느 정도의 깊고 낮음은 같지 않더라도, 오직 이를 거울삼아서 지키고 따르게 한다면, 제왕(帝王)의 치세로서 백성을 도리의 범주 안에 들어오도록 함은 결코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종 장헌대왕께서는 단지 다시 밝혀 확충하였을 뿐인데, 그 당시 저잣거리 마을에서 이 책을 보며 감동하여 흥분하던 〈백성들의〉 모습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이후
성종 강정왕조에 이르러 언해를 더하여 다시 널리 반포하였고,
중종 공희왕조에는 증보 속간하여 찬술을 이어갔다. 왕위를 계승하신 임금들이 항상 이 일에 정성을 쏟았으니, 앞선 임금과 뒤를 이은 임금께서 지은 것이 진실로 한결같은 법도요, 간극이 없음이라.
주003) 성종 21년(1490) 4월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간행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이어서 중종 9년(1514)에는 증보 언해하여 『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한 사실도 말하고 있다. 또한 명종, 선조, 영조 때에 계속해서 『삼강행실도』(언해본)를 복간한 바도 말하고 있다.
그런즉 기자가 조선을 배양하고 공자가 이곳에 살고자 하였던 바는 아마도 어질고 현철한 교화가 여전히 남아있어 중화(中華)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런즉 기자는 곧 우리 나라의 공자라. 이 책은 삼국에서 조선조에 이르도록 드러내 표창할 만한 행적을 가진 사람의 수가 가까스로 이와 같으니, 진실로 옛 어른들이 이른바 ‘엄정하게 가려내다’라는 뜻에 맞는 것이다. 만력 연간의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이 있은 후에 몇 번의 해가 바뀌어 계축년(광해군 5년, 1613) 겨울에 이르러서, 부제학 이성(李惺)과 부응교 한찬남(韓纘男), 교리 박정길(朴鼎吉)과 수찬 정광경(鄭廣敬) 등이 일을 함께 했다. 이는 다만 홍문관으로부터 왕명을 받아 수집하였으니, 별도로 편집국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거기서 찬정한 것은 임진란 이후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정표를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세 권으로 만들었다. 또 갑인년(광해군 6년, 1614) 가을에 전하께서 다시 윤음을 내려 열성조의 큰 뜻을 본받아 특별하게 속편을 만들기 위한 찬집청을 설치하셨다. 진원부원군 유근(柳根) 이하 제신들이 교열하라는 명을 받들어 총 다섯 달만에 작업이 끝났으니, 충신 1권, 효자 8권, 열녀 8권까지 모두 17권으로 정리하여 올렸다. 왜란은 몇 해가 되도록 이어져 적당들이 물러나지 않았으므로, 보통 사람들이 저들의 협박을 당하여 갑자기 목숨을 버리거나 자진하였으니 그 사람들이 평시에 비해 어찌 갑절뿐이랴. 듣고 본 대로 상세하게 적었기에 저절로 많아진 것이니 사실이 그러한 것뿐이다.
또한 옛날에는 충신과 효자가 각기 그 미덕을 발휘하였고, 역사를 기술하는 사신은 난초와 계수가 성격은 다르지만 나란히 그 꽃다운 이름을 찬양하여 감히 우열을 논하지 않았다. 이 채록 중에 실린 사람이 군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들은 대개 또한 그 흔들리지 않음을 헤아려 그 행동이 이런 규범에 합당하면 가히 수록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감히 채록됨이 없었다.
전대 성현은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뜻을 중시하였으니, 이제 행실도에 오른 사람의 수효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모두가 다 실제의 행실에 근거한 것이다. 기왕에 다시 살펴보고 거듭 상세하게 살펴서 티가 없도록 한즉, 다시는 유감스런 일이 없게 된다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광해군 7년(1615, 만력 43년) 을묘년 12월 21일. 수충 공성 익모 수기 광국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경연사 신 윤근수(尹根壽)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서문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