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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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임진왜란 발발 후 효자, 충신, 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 책 이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에 국한되면서[東國] 무려 총 1,587인을 수록하여 권질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수록된 사람들이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내노(內奴)·관노(館奴)·사노(私奴)·관노(官奴)·시노(寺奴) 같은 천인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이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통하여 얻은 겨레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백성을 위로하고 도덕 의식을 높이려는 광해군의 의지가 녹아 있다. 그림과 언해가 나란히 편집되어 중세 미술과 국어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당시의 풍속, 사상, 관습 등을 엿볼 수도 있는 문헌이다.

정호완 교수

문학박사 시조인.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삼국유사문화학교 대표.
삼성현연구소 대표.
삼국유사문인협회대표.
한국문인협회.
민조시 천료.
문학세계 신인상.
시조문학 작가상.
경상북도 문화상.

〈저서〉

『우리말의 상상력』 외 40여 권

역주위원

  •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권1・2・3・4 : 정호완

  • 교열·윤문·색인위원

  •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권1・2・3・4 : 박종국·홍현보
  • 편집위원

  • 위원장 : 박종국
  • 위원 : 강병식 김구진 김무봉
  • 김석득 김승곤 김영배
  • 나일성 리의도 박병천
  • 성낙수 오명준 이창림
  • 이해철 임홍빈 전상운
  • 정태섭 조오현 차재경
  • 최홍식 한무희 홍민표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내면서

우리 회는 1956년 10월 9일 창립 후 세종대왕기념사업의 중심 전당인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 세종문화진열실과 연구실을 마련 운영 관리하며, 세종성왕의 정신과 위업의 연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한글 전용과 국학 진흥을 위하여 「한문고전국역사업」과 「한글고전역주사업」을 1967년에 기획하여 1968년부터 계속 수행하고 있다.

「한문고전국역사업」은 1968년 1월부터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을 국역 간행하기 시작하여 실록의 한문 원문 901권을 완역 발간하였고, 일반 한문고전으로 『증보문헌비고』, 『매월당집』, 『국조인물고』, 『동국통감』, 『승정원일기』(순종), 『육일재총서』 등 수많은 국학자료를 국역 발간하였으며, 계속하여 『치평요람』, 『각사등록』, 『연행록』 등 문헌의 국역 사업을 벌여 오고 있다.

「한글고전역주사업」은 1990년 6월에 첫발을 내디디어, 『석보상절』 권6, 9, 11의 역주에 착수, 지금까지 매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바, 2014년 12월까지 역주 발행한 문헌은 『석보상절』 4책, 『월인석보』(훈민정음언해본 포함) 17책, 『능엄경언해』 5책, 『법화경언해』 7책, 『원각경언해』 10책, 『금강경삼가해』 5책, 『구급방언해』 2책, 『삼강행실도』 1책, 『두시언해』 5책, 『소학언해』 4책, 『사서언해』(논어, 대학, 중용, 맹자) 6책, 『이륜행실도』 1책 등 109책을 발간하였고, 2015년인 금년에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두시언해』(초간본) 등 15책을 역주 간행할 예정이다.

우리 회 창립 59돌의 해이자 광복 70돌이 되는 올해는 우리 회가 「한문고전국역사업」을 착수한 지 48돌이 되었고, 「한글고전역주사업」을 추진한지 25돌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 회가 낸 700여 책의 국역 학술 간행물이 말해 주듯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이래 최고의 한글 국역, 역주 간행 기관임을 자부하는 바이다. 우리 고전의 현대화는 전문 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매우 유용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 회가 이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그 결과 고전의 대중화를 통한 지식 개발 사회의 문화 자본 구축과 역사 의식 및 한국학 연구 활성화에 기여는 물론, 새 겨레 문화 창조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이 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회가 이번에 세종날을 기하여 역주한 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이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임금이 되어 홍문관 부제학 이 성(李惺) 등에게 명하여 간행한 책인바, 우리나라(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의 뛰어난 효자, 충신, 열녀를 가려 뽑아 행적과 그림과 한문으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한글로 번역하여 실어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동왕 9년(1617) 봄에 간행한 수신서이다.

이 책의 원전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자아 의식과, 도덕 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 충신, 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 책 이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에 국한되면서[東國] 무려 총 1,587인을 수록하여 권질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수록된 사람들이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내노(內奴)·관노(館奴)·사노(私奴)·관노(官奴)·시노(寺奴) 같은 천인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이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국어사적인 특징으로는 국어 표기로 볼 때, 반치음 ‘ㅿ’이 쓰인 예가 몇 개 있고, 종성에 ‘ㆁ’과 ‘ㅇ’이 같이 쓰이고 있으며, 합용병서의 ㅅ계, ㅂ계, ㅄ계의 공존과 ‘’의 출현을 볼 수 있고, 각자병서 표기는 ‘ㅃ, ㅆ’ 만이 쓰였으며, 성씨를 말할 때 ‘시’와 ‘씨’가 공존하고, 어두 음절에 ‘ㆍ’의 동요도 나타난다. 끝소리에 있어서 ‘ㅅ’, ‘ㄷ’의 혼기는 16세기 말엽의 『소학언해』나 『사서언해』에서 보이던 것과 같이 ‘ㅅ→ㄷ’의 혼기 뿐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통하여 얻은 겨레 자아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국민 도덕 정신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여 편찬된 점으로 보아 오늘날 진실한 도덕 생활에로 이끌려는 정부 시책에 이바지함은 물론, 도해와 언해가 첨부되어 있어 미술과 근대 국어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 국어와의 교량적 구실을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풍속, 사상 습관을 엿보는데 있어서도 아주 귀중한 문헌이다.

이번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역주함에 있어서, 그 저본으로는 규장각 소장 영인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우리 회에서 이 책을 역주 간행함에 있어, 역주하여 주신 대구대학교 정호완 명예교수님과, 이 역주 사업을 위하여 지원해 준 교육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 역주 발간에 여러모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5년 10월 15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최홍식

일러두기

1. 역주 목적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언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말글로 기록된 다수의 언해류 고전 등 한글 관계 문헌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이외의 다른 분야 학자나 일반인들이 이를 읽어 해독하기란 여간 어려운 실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어로 풀이와 주석을 곁들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방면의 지식을 쌓으려는 일반인들에게 필독서가 되게 함은 물론, 우리 겨레의 얼이 스며 있는 옛 문헌의 접근을 꺼리는 젊은 학도들에게 중세국어 국문학 연구 및 우리말 발달사 연구 등에 더욱 관심을 두게 하며, 나아가 주체성 있는 겨레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에 역주의 목적이 있다.

2. 편찬 방침

(1) 이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저본으로는, 대제각에서 1988년에 초간본을 축쇄 영인한 규장각 소장본을 사용하였다.

(2) 이 책의 편집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한문 원문・언해 원문・현대어 풀이・옛말과 용어 주해’의 차례로 조판하였다. 원전과 비교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원문의 권(卷)・장(張)・앞[ㄱ]・뒤[ㄴ] 쪽 표시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보기〉

제1권 1장 앞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 : 1ㄱ孫順得鍾

제1권 3장 뒤쪽이 시작되는 글자 앞에 : 1 : 3ㄴ向德新羅人居

(3) 현대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옛글과 ‘문법적으로 같은 값어치’의 글이 되도록 하는 데 기준을 두었다.

(4) 원문 내용(한문 원문과 언해문)은 네모틀에 넣어서 현대 풀이문·주석과 구별하였으며, 원문 가운데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

(5) 현대어 풀이에서, 원문이나 언해문의 문장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이해를 돕기 위하여 〈 〉 안에 보충하는 말을 넣었다.

(6) 찾아보기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초성순 : ㄱ ㄲ ㄴ ㅥ ㄷ ㄸ ㄹ ㅁ ㅱ ㅂ ㅲ ㅳ ㅃ ㅄ ㅴ ㅵ ㅷ ㅸ ㅅ ㅺ ㅻ ㅼ ㅽ ㅆ ㅾ ㅿ ㅇ ㆀㆁ ㆆ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ㆅ

② 중성순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

③ 종성순 : ㄱ ㄴ ㄴㅅ ㄴㅈ ㄴㅎ ㄷ ㄹ ㄹㄱ ㄹㄷ ㄹㅁ ㄹㅂ ㄹㅅ ㅀ ㅁ ㅁㄱ ㅯ ㅰ ㅂ ㅄ ㅅ ㅺ ㅼ ㅿ ㆁ ㅈ ㅊ ㅋ ㅌ ㅍ ㅎ

『동국신속심강행실도』 해적이

정호완(대구대학교 명예교수)

Ⅰ. 임진왜란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쓸고 간 조선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이었다. 겨울 언덕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나라의 기강이며 백성들의 쓰리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분조(分朝) 정책의 일환으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평안도를 돌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는 등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재위 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권에 맞서려는 정적이나 그러한 무리들을 여러 차례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한편, 중국과는 외교 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양다리 걸치는 정치적 표방은 마침내 인조반정이라는 복병에 발목을 잡혀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잠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20만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임진왜란 곧 용사의 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대는 파죽지세로 연전연패의 행진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성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어지는 성웅 이순신 승전보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거기에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여 이 땅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에 못지않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통한 의병의 선무 활동과 군량미 확보 등 솔선 수범의 횃불이었다. 분조는 임진란 당시 의주와 평양 등지에 머물렀던 무력한 선조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동분서주하였던 조정을 이른다. 선조에게는 임란 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임명해야만 했다. 단적인 사실로 정철(鄭澈) 등이 제기한 건저의(健儲議)가 바로 세자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불타오른 전쟁의 화마의 와중에서 선택은 없었다. 마침내 파천을 반대하고 도성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광해에게 분조의 전권을 주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념으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 속으로 들어간 광해의 언행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불세출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쟁의 파고는 점차 높아졌다. 그 중심에 선조와 의인왕비의 후비로 들어온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있었다. 영창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와 이이첨 같은 광해 중심의 대북파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더욱이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병석에 있던 선조의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바위에 늙은 왕대[王竹],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악죽(悪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었다. 왕죽은 선조, 악죽은 광해군,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하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유영경 등은 임금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더러는 선조가 승하 직전 세자 광해가 문안하는 자리에서,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드디어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파란의 빨간불이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본인은 대군이 아니고 왕자에서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해군 5년( 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과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모사를 꾸미려고 자금 확보를 위해 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칠서지옥(七庶之獄)이다.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된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원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인륜적 검은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임진란에 말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이들의 원혼도 달래고 백성들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패륜적 만행을 덮으려는 전략적인 방안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이며 이로써 많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약 1,600명에 달하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도 많은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에 대한 경과나 절차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궤』였다. 이에 대한 얼개를 살펴봄으로써 개관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함은, 역대 제왕들이 통치의 한 방편으로써 내세웠던 이른바 효치(孝治)의 거멀못이었다.

Ⅱ.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과 의궤

1. 『삼강행실도』 간행의 지속과 변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우리나라 역대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실어놓은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전담했던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부터 광해군 8년(1616) 5월 3일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의궤는 113장의 1책, 45.2cm×34.6cm의 크기이며 표지 서명과 권두 서명은 모두 만력 44년 3월 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이다.

이 책 표지에 드러나는 장서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규장각에 소장된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의정부분상본과 장서각에 소장된 적상산사고본 등 총 4건이 잘 남아있다. 의궤 자체에는 의궤사목 같은 의궤 제작에 상응하는 내용이 없어, 총 몇 건이 만들어졌고 어디에 분상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본을 볼 때 4대 사고 중 정족산성이 빠져 있고 통상 4대 사고 분상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때, 정족산본 한 본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에 분상된 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오른 정문·포상된 인물들을 결정하는 것이 의정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의궤가 언제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의궤의 마지막 기사는 전체 찬집 과정의 결과물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400건 간행하자는 광해군 8년 5월 3일의 기사인데, 실제로 『광해군일기』에서는 동왕 9년(1617) 3월 11일에 50건 간행하여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볼 때,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이 종료된 이후 간행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찬집청을 해산하고, 광해군 8년 5월부터 9년 3월 사이에 결과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중종대의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정조대의 『오륜행실도』등 역대 행실도의 경우 간행 및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그 편찬 과정이 의궤로 전해 와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의궤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에 과정 전체를 살펴봄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먼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살펴봄으로써 이 의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생성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앞서 나온 것 가운데 가장 많은 1,590명의 행실도를 싣고 있다. 이와 함께 언해를 실은 것 가운데 『오륜행실도』의 약 150명의 행실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많은 인물을 싣고 있고, 『삼강행실도』 한문본의 330인과 비교해도 약 5배에 가까운 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전란을 치르고 난 이후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와 포상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행실도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성에 대한 군왕의 배려라는 점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계축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효과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의 총 18권 18책의 큰 책이 되어 초간임에도 불구하고 총 50건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이는 8도에 각기 5~6권 밖에 나누어주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도 폐위 당한 군왕의 치적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이후 제대로 자리매김을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의 소장본이 알려진 바의 유일한 완질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러 면에서 앞선 행실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우선 책의 이름에서 신속(新續)이란 용어가 그렇다.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행실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짜임에서도 앞선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갈래를 그대로 따랐다.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함께 실음으로써 역대 행실도류를 아우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앞선 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사례는 거의 빼고, 새로 실리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강조하였다.

편집체제에서도 지속과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행실도의 편집체제는 최초의 행실도인 『삼강행실도』에서 그 준거를 삼고 있다. 한 장의 판목에 한사람씩 기사를 실어 인쇄하였을 경우, 앞면에는 한 면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뒷면에는 인물의 행적기사와 인물의 행적을 기리는 시나 찬을 기록하는 전도 후설(前圖後說)의 체제를 취하고 있다. 전도 후설의 짜임은 그림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에서 일반적인 상도 하문(上圖下文)의 체제가 그림과 글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그림과 글을 한꺼번에 같이 볼 수 없는 얼개로 되어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나왔기에 언해는 어렵고 한문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먼저 놓고 본문을 뒤에 놓는 다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백성으로서는 속내를 스스로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을 전면에 앞에 놓음으로써 이른바 이미지 언어로써만 교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이 한 면 전체를 사용하면서 한 면에다 행실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상황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함으로써 그림만으로도 행실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항상 가르치고 지도하여 일깨워 주며, 장려 권면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알아서 그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한 것처럼 『삼강행실도』는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이 책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성종 21년(1490)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언해본』에는, 언해를 덧붙이면서 세종본의 판본 그대로를 가지고 제작하였기에, 행실에 대한 언해문 기사를 앞면 상단에 놓은 것도 같은 흐름임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기사, 언해, 삽화의 3대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도 후설(前圖後說) 체제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언뜻 선대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언해가 후면의 기사 뒤로 배치되고 시찬(詩讚)이 없으며 그림도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장면 분할이 적어진 모습이다. 그림의 변화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한글 창제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편찬되었기에 『삼강행실도』에 비하면 언해 비중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이미지 언어 곧 그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찬의 줄임은 작업량을 줄이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의 얼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후대의 의궤(儀軌)로 가면 좌목과 사목, 사실과 이문, 그리고 내관 등 문서를 갈래별로 정리한 것과는 달리 의궤 기록에 일정한 체계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다. 임금의 전교나 비망기는 물론, 찬집청과 기타 기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를 그냥 날짜순으로 배열하였다. 의궤 서두에 책 전체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록도 없다. 전체적으로 날짜순으로 열거한 문서들로 구성된 본문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사람의 이름을 실은 부록, 좌목, 수결 등의 얼개로 구분할 수 있다.

본문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교, 비망기, 감결(甘結), 단자(單子) 등을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문서를 나열하고 있다. 다만 날짜 아래에 감결이나 이조단자 등으로 표기하여 문서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하급관아에 보내는 공문의 일종인 감결의 수신 기관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적어 놓았다. 시기적으로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반포할 것에 대해 하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비망기부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판각·간행 독려와 관련한 광해군 8년(1616) 5월 3일 찬집청 계문까지의 문서를 실었다. 의궤 내용은 광해군 4년(임자) 5월 21일의 비망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로 찬집청이 설치된 것은 만 2년이 넘게 지난 광해군 6년(1614) 7월 5일이다. 찬집청 설국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문서는 제대로 남아 있으나, 이전 2년간의 문서는 중요한 것 몇 개만이 수록되었을 뿐이고, 비망기 이전 행실도의 간행·반포와 관련한 문서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본문 뒤에는 부록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람의 총목록을 기록하였는바, 전체 의궤 분량의 4분의 1이 넘는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목록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어 각 권별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신분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부록 다음은 찬집청의 관원 명단과 찬집청에서 활동한 사자관, 화원 등의 명단으로 좌목에 값한다. 찬집청 관원으로 도제조에는 영의정 기자헌, 좌의정 정인홍, 우의정 정창연 등 3명, 제조에는 진원부원군 류근, 예조판서 이이첨, 의령군 송순, 이조판서 이성 등 4명, 부제조에는 우승지 한찬남 1명, 도청에는 사복시정 류희량, 의정부사인 정호선, 이조정랑 박정길 등 3명, 낭청에는 통례원상례 양극선, 세자시강원필선 홍방, 호조정랑 신의립, 예조정랑 정준, 병조정랑 고용후, 병조정랑 류효립, 병조정랑 이용진, 형조정랑 금개, 세자시강원문학 류역, 용양위사직 한명욱, 충무위사직 한영, 충무위사직 김중청, 예조좌랑 이정, 홍문관수찬 류여각, 세자시강원사서 윤지양, 충무위사과 이경여, 호분위사과 이창정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에 교체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여 찬집청에서 근무한 모든 관원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계의 인물이며 인조반정 이후 숙청되었다. 이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편찬 ·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역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하였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인조 반정 세력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으니 편찬 담당자의 정치적 위상과 행실도의 위상이 그 부침의 궤를 함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수결로서 부제조 도승지 한찬남, 도청 의정부사인 박정길, 낭청 형조정랑 신의립이 의궤 담당으로 나오며 편찬이 끝난 뒤 확인한다는 서명을 하고 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과정

앞에서 살펴본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문서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갈래짓지 않고 날짜순으로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 과정을 한 눈에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궤의 본문 내용을 크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찬집 과정, 찬집청 관원의 운용으로 나눠 살펴보도록 한다.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의 경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4년(1612) 5월 21일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비망기에서 ‘임진년 이후로 효자·충신·열녀 등의 실행을 속히 심사 결정하여 반포할 일에 대하여 일찍이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라고 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 즉위 초부터 효자·충신·열녀에 대한 행적을 간행하는 데 대한 논의가 간간히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 3년(1611)에는 임진년 이후에 충신·효자·의사·열사의 행적이 적지 않았다. 옥당의 일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마감하지 않은 것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사적은 더욱더 사라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속히 계하에 따라 간행 반포하여 권려할 것이라고 전교하여, 충신·효자 등을 간행 반포함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 선조 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란 초기에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고받고 감정한 기관은 비변사에서 곧 의정부로 바뀌었으나, 감정 과정에서 한동안 적체되었던 것을 광해군 4년 2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처리하였다. 정문이나 포상한 인물들에 대하여 도찬(圖讚)을 마련함은 홍문관에서 맡았다. 행실도 편찬을 독촉하는 광해군의 전교에 홍문관에서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자헌 등의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하여 찬집청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대신들이 별도 기구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전례가 없다는 것과, 인물들의 행적을 찬찬히 조사해야지 기한에 맞추어 급히 완성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인지 1년 반 동안 기록이 없다가 광해군 6년(1614) 정월 27일에서야 예조 계목(啓目)이 나온다. 예조 계목에서는 홍문관의 계사를 인용하였는데, 포상하거나 포상할 만한 인물들의 행적을 상·중·하 셋으로 정서하도록 하였으며, 이전의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서 역대 행실도를 편찬하였을 때 모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후에도 약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다가, 5월초 광해군의 독려에 따라서 결국 6월초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초 찬집청을 태평관에 둔다는 등의 항목을 만들고 이조에서 가려 뽑은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찬집청 설치 후 광해군 6년 7월에는 찬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수록 범위고, 두 번째는 편집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록 범위의 기본이 되었던 대상은 홍문관에서 상·중·하 3편으로 작성한 것이었고, 이 가운데 상편에 수록된 인물들은 이미 정문(㫌門)이 되었으나, 중편과 하편은 미처 정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중·하 3편을 다 수록하고자 하면 총 1,123명이 되어 한 권에 100장으로 한다고 해도 12권이 되므로 너무 많다 하여, 3편 모두를 편찬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논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편을 주된 대상으로 하되, 정문이 되지 못한 중, 하편의 수록 인물들은 빨리 정문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편집 형식의 문제는 시찬을 붙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1장에 1명의 인물을 실을 경우, 너무 방대해질 양을 고려하여, 시찬을 빼고 1장에 두 명의 인물, 즉 한 면에 1명의 인물을 수록하여 책의 권질을 줄이고 공역을 빨리 마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시찬 부분에 대해서는 전대에서도 시와 찬을 모두 갖춘 것은 드물었으며, 새로이 시찬을 제진하기 보다는 이전에 있었던 고명한 선비 등의 시찬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여 취하지 않았다. 시찬을 빼고 난 후의 구성은 매 장의 전후면 제 1행에 성명을 쓰고, 2단으로 나누어 언해와 행실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7월의 논의를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면 빨리 마무리 했을 것이다. 8월에 명나라에서 책사가 오는 관계로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책사가 올 당시 설치, 운영되고 있었던 여러 도감 중에서 훈련도감과 실록청 외에 찬집청, 화기도감, 흠경각 등 긴요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유보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대사헌 송순의 장계로 인하여 찬집청 역시 정파될 뻔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듯, 11월이 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 4명의 당상이 각각 2명의 낭청을 데리고 하루에 50전 씩 언해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숙고하지 않아서, 10월 초5일부터 하루 30전 씩 교정하도록 일정을 수정하였음에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책사 접대가 마무리된 이 즈음에 줄였던 인원을 다시 보충하고 장악원으로 다시 이설하였으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8일 경에 이르면, 표 1과 같은 진행 상황을 보이게 되었다. 편찬 당시(1614)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동원된 인원의 전별 분포는 충신전이 35 꼭지, 효자전이 177 꼭지, 열녀전이 552 꼭지로 열녀전이 가장 많다. 한편 열녀전은 미완료 상태로 된 것이 가장 많고, 충신전은 완료되고 언해의 경우도 열녀전과 효자전이 미완료로 남겨 둔 것이 더 많은 편이다(이광렬, 2004 참조).

이듬해인 광해군 7년(1615) 정월에 이르면, 초고는 대체로 완료되고, 2월에 중초 작업에 들어갔으며, 3월에는 어람건 제작에 들어가 4월 초순경에 입계하고자 하였으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것으로 난후 인물들은 정려하고 전을 지었으나,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인물들을 수록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울 각 방과 팔도에 통문을 하여 보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남은 한 가지는 광해군이 제기한 것으로 그림이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하문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찬집청에서 발의한 대로 평시에 실행이 있었던 효자, 충신, 열녀, 절부 등에 대해서 ‘모사로 모조 모년에 정표되었다’라는 양식으로 서울 각 방과 팔도에서 일일이 방문하여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전에 홍문관에서 찬했던 중편에서 일부를 뽑고 광해군이 새로이 수록하도록 전교한 인물들 약간을 더 포함하도록 결정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사실상 이전의 작업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전년의 논의에서 시찬만이 문제가 되고, 도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집청의 최종 계문을 따르자면 한 장에 두 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실기만을 포함하여 그림은 빠져 있었다. 그림 부분은 이후 언급이 없어 찬집청에서는 한 장에 두 명씩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임금이 볼 어람건까지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해군이 새삼스레 도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찬집청에서는 당시 화사의 솜씨가 졸렬하며,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양과 공역 기간에 비해 이 공역이 많음을 들어 그때까지 완성된 상태로 일단 간인, 반포하고 도화는 뒤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전교로 이러한 반대는 접게 되었다. 결국 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각 관아에서 수록될 만한 인물들을 보고하는 것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서사, 도화 작업은 지체되어 두 달이 지난 6월 23일까지도 도화 작업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도화 작업에 진척이 없었던 원인은 당시 존재하였던 여러 도감 등의 공역이 중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화원이 여러 도감에 불려 다녀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드디어 총 4개월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필역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이어 전문(箋文)과 발문 등을 제진할 인물을 추천하고, 반포할 부수 등을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구서 곧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바를 여기에 싣지 않는다면, 동방 충·효·열 전문이 아닌 듯하다. 청컨대, 『삼강행실』과 『속삼강행실』에 실린 동방 72인도 뽑아내어 별도로 1권을 만들어 신찬의 뒤에 붙이면 성대의 전서가 됨이 마땅할 듯하다’라는 찬집청의 계에 따라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구찬 1권, 신찬 17권 총 18권으로 현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묘호, 시호, 존호 등을 표기하는 문제로 해를 넘긴 광해군 8년(1616) 정월과 2월 초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전의 행실도에서 대체로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으로 유출되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 보고 이때에도 묘호는 쓰지 않고 시호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존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사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전문의 경우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존호는 그대로 쓰기로 결하였다.

이후 바로 간행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총 400건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하삼도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해도 3권, 평안도 1권 등 총 18권을 분정하여 인간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을 뽑아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사 이응복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공홍도에서 흉년 등을 이유로 공역을 감당하기 힘드니 연기해달라는 서장에 이어 순서대로 차근차근하면 가을 즈음에 완성될 것이라는 5월 3일의 찬집청 계사로 의궤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후의 간인 및 반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의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 부분의 공역은 교서관으로 담당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에서 햇수로 5년에 걸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의궤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편찬 과정에서 필요한 인원 수급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 찬집청의 인적 구성

처음 찬집청을 설치하고 인원을 뽑던 광해군 6년(1614) 6월 5일에 광해군은, “이때 직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차출할 것이요, 전직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지 말라”고 하여, 유신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그 결과 전날 올린 이조 단자에서 낭청으로 망에 올랐던 인물들 중 전직 관원이었던 정운호와 조찬한이 이틀 후인 7일에 바로 부사과 이경여와 세자시강원사서 조정립으로 교체되었다. 이 원칙이 이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전판관 신의립이나 전찰방 한영, 전현감 이정 등은 전직으로 낭청에 임명되었고 군직에 준하여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 10월 5일 전정 이함일을 낭청으로 임명하고자 찬집청에서 단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위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개차할 것을 지시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직 문관으로만 낭청을 채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므로 전직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나, 기본적으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 광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함일의 경우에는 특히 파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차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찬집청에서 인원 수급에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은 서리 이하 원역들과 화원 문제였다. 당시는 찬집청 외에도 실록청, 공성왕후 부묘도감,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각종 도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책사 접대 역시 비중이 큰 것이었다.

인원의 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의 두서를 잘 아는 사람이 계속 작업을 맡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이를 두고 도감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리 황천부를 두고 선수도감과 찬집청 사이에 벌어진 논란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무엇보다도 기관 사이에 가장 큰 쟁탈이 벌어진 것은 필수 요원인 화원이었다. 찬집청에서 도화역을 시작한 광해군 7년 4월 이후는 여러 기관과 찬집청 사이에서 화원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이 벌어진다. 화원 8명 중에서도 문제가 된 사람은 김수운, 이신흠, 이징이었다. 이 중 이신흠은 7월에 부묘 때 사용할 잡상 등의 일로 의금부 나례청에서 데려다 쓰고자 하여 찬집청과 잠시 갈등을 빚었으나, 나례청의 역사가 열흘에서 보름이면 완료되는 것이라 하여 그곳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또한 7월 20일에 선수도감에서 도형을 하는 일로 하루 역사하기도 하였다.

찬집청과 가장 큰 갈등을 빚은 것은 흠경각도감이었다. 7월 23일에 산형소질이 이미 완성되어 이제 장차 칠을 할 것인데 졸렬한 솜씨의 화원배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평시의 일을 맡은 김수운 및 선수 이징, 이신흠이 비록 지금 찬집청에서 부역하고 있으나 왕래하여 지휘하게 하여 급속히 칠을 해서 완성하겠다고 건의하여 임금의 허가를 받은 흠경각도감에서 이들 화원을 보내 줄 것을 찬집청에 요구하였다. 마침내 찬집청에서는 7월 29일에 직접 제안하여 김수운 한 명만을 흠경각도감에 보내고, 이징과 이신흠, 김신호 등 솜씨가 좋은 화원들을 장악하여 다른 기관에 보내지 않도록 할 것을 윤허를 받았다. 이후에는 8월 초6일에 흠경각도감에서 요긴한 곳에 채색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 하여 하루 동안 이징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관 사이에 화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합은 끝이 났다.

4. 의궤의 사적 의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찬집청의궤』는 의궤 자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에는 정리, 기재, 편찬 방식 등에서 체제가 거의 잡히지 않은 매우 초기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앞선 행실도는 물론, 정조 대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조차도 그 간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궤로서 제작, 보전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의궤는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일반 대중에 보급하는 민본을 목적으로 한 도서의 편찬에 관한 유일한 의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자료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이 의궤는 광해군대 제작된 여러 의궤 중 한 종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화기도감, 흠경각도감, 선수도감 등 여러 도감이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관간에 인원 수급을 둘러싼 생생한 갈등과 그 속에서 관여한 원역이나 화원들의 작업 내용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5. 『삼강행실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양지가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른다. 도덕적인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조선 왕조가 효치(孝治)를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엮어가던 디딤돌이 바로 『삼강행실도』 류의 효행 교육이었다. 역대 여러 임금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삼강행실에 대한 교화를 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행실도류의 간행에 엄청난 나라의 힘을 기울여 가면서 『삼강행실도』를 거듭하여 간행하고 이를 다시 첨삭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이어 온 게 사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효행과 열행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음을 하나의 본으로써 보여주고 이를 잘한다고 하여 정려를 내려 그네들이 죽은 뒤에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을 면해주며 대대로 명예를 이어가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를 적극 장려하였다.

효자와 충신, 그리고 열녀가 나면 같은 이웃과 인근의 유림들은 공의라고 하여 해당 지방관에 표창을 원하는 정문(呈文)을 올리고, 해당 지방관은 도에 다시 공문을 올렸고, 도에서는 예조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행과 열행을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정문을 내리고 복호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효행과 열행의 권면이 과연 합리적이며, 그 속내는 어떤지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 때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표방을 걸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산은 효자론과 열부론, 그리고 충신론 세 편의 논설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효, 열, 충을 혹평하고 있다. 효자론에서 선생은 백성들이 효행의 실증이라며 보여주는 단지·할고·상분의 도를 넘는 잔혹성과, 죽순·꿩고기·잉어·자라·노루 등 어려운 물건(약) 구하기의 비적절성을 반박한다. 말하자면, 이는 『삼강행실도』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잔혹 행위와 비합리적 기적의 실례들은 모두 『삼강행실도』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들은 순임금이나 문왕, 무왕이나 증삼 등 효성으로 이름난 성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효행을 널리 알리고 선양하는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각 지방 사람들과 수령·감사·예조에 임명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예에 맞지 않음을 모를 수가 없다.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자니, 마음이 주눅 들고 겁이 나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명분이 효인데, 남의 효도를 듣고서 감히 비난하는 담론을 제기하였다가는 틀림없이 십중팔구 강상을 어겼다는 죄명을 받을 것이 뻔하다. 남의 일에 대해 거짓이라고 억측하는 것은 자신을 슬기롭지 못한 데로 빠뜨리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야, 비상한 효행이야” 라면서 문서에 서명을 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는 거짓이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실로 뛰어난 효행이다” 하면서 드높인다. 아랫사람은 거짓으로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은 거짓으로 아랫사람을 농락하면서 서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뚝 떼고 구차스럽게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 지경인데도 예에 의거하여 이것이 거짓임을 제기하여 그 비열함을 밝힘으로써 그릇된 풍속을 바루려는 군자가 없으니, 이는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그것은 상하 모두가 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더 많기에 그러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효행이 얼마큼 꾸민 것임은 그 고장 사람들도 관청에서도 다 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효를 부정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왜 거짓은 인정되고 통용되는가. 다산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두가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효행의 표창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효자란 명예스러운 칭호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한편 집권층에서는 유교적 윤리의 확산이야말로 체제의 안정과 견고한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표창을 하고 권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임금이 광해군처럼 불효를 하더라도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다는 덮어씌우기의 우산이 되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효자란 사람들이 어버이의 죽음을 앞세워 세상을 놀라게 할 명예를 도둑질하는 사람”이거나 “어버이를 앞세워 명예를 훔쳐 부역을 도피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열부론은 어떠한가. 다산은 오로지 여성만이 남편 따라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열부가 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다산은 천하의 일 중에서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자살에는 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효도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란 극한상황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경우, 그런 행위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죽는 것을 열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열(烈)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일 뿐이다. 다산이 들고 있는 경우는 네 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가) 남편이 짐승이나 도적에 핍박당해 죽었을 때 아내도 이를 지키려다 따라서 죽는다.

(나)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굴하지 않고 죽는다.

(다) 일찍이 홀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했을 때 저항하다가 힘에 부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맞서 죽는다.

(라) 남편이 원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진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어 함께 형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런 경우는 열부가 된다. 다산은 그 흔하디흔한 열부는 열부가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의 개념으로는, 열부의 죽음에는 불가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가피성이 없음에도 죽는다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그 대신에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을 반듯한 사람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다산이 생각한 정의란 매우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열행이란 명분으로 개죽음이 권장되고 선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산의 답은 이렇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사라고 본다. 따라서 이미 의리에 적합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임에도 고을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부역을 경감해 주는 헛짓들을 하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열행의 밑그림은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부역의 감면이란 달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혜택을 누린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극한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인명 경시의 반윤리적 일임에도 정략적인 체제의 안정과 존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로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효행과 열행의 허구성을 과감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산의 책 속에 말일 뿐이었다. 다산 이후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허다한 효자와 열부가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성차별을 공공연하게 정당화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사회적 병리였다.

어떻게 보면 『삼강행실도』의 숨은 의도는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권장하는 도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효와 열의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며, 엄동에 죽순과 얼음 속의 잉어를 가져 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겉으로는 강요하지는 않으나 효행의 지표로 권장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드러나는 대로 행하면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효자와 열녀라는 대의명분 있게 명함을 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폭거에 다름이 없다(강명관 2012 참조).

Ⅲ. 행실도 및 효행 관련 자료

1. 행실도 류

행실도란 문자 언어로써 글 내용과 이에 상응하는 그림을 함께 올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만 보면 무슨 속내인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더러는 그림을 보며 풀이하는 사람이 이야기 거리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효자와 충신과 열녀에 대한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아가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행실도의 얼굴에 값하는 것이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가 가장 먼저 나온 문헌이다. 뒤에 줄을 이어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정조 때 이르러서는 『오륜행실도』라 하여 끊임없이 효치(孝治)의 교과서로 유형 무형의 교화 정책의 디딤돌로 쓰인 것이다. 각 문헌에 대한 줄거리를 간추려 살펴보도록 한다.

1) 『삼강행실도』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부자·군신·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 후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이는 화법의 하나인데 단청을 할 때 먼저 채색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빛깔과 빛깔의 구별이 뚜렷하게 먹으로 줄을 그리는 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 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효·충·열의 삼강이 조선 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바탕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써 각인의 효과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다.

『삼강행실도』 그림은 조선 시대 판화의 큰 흐름을 이루는 삼강 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첫 삽이라는 점에서 판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복각한 판화가 만들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인물화와 풍속화가 드문 조선 전기의 상황으로 볼 때 판화로나마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본문 끝에는 본문을 마무리하는 시구로 명을 달았으며, 그 가운데 몇 편에는 시구에 이어 시찬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1982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초기 간본(복각본)을 대본으로 하고 여기에 국역과 해제를 붙인 영인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전기 중세국어 연구 및 전통 회화의 복원과 연구를 위하여서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2) 언해본 『삼강행실도』

성종 20년(1489) 6월에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종 때에 『삼강행실도』를 중외에 반포하여 민심을 선도하였던바, 이제 그 책이 귀해져서 관청에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여 일반 백성이 일기 힘드니, 이것을 선록(選錄)하여 내용을 줄이되, 묵판으로 인쇄함은 매우 어려우니 활자(活字)로 인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여 산정본(刪定本) 1책으로 간행하라 명하였다. 이때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21년(1490) 4월에 인출 반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중종 5년(1510)에 산정본 그대로를 재간행하였던 것이 지금까지 영국국립도서관에 전한다.

이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한문본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35명, 충신 35명, 열녀 35명만을 뽑아 모두 105인을 모아 1책으로 간행하였다.

3) 『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종 9년(1514) 무렵, 신용개 등이 중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에 빠져 있는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행적을 싣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여 1책의 목판본으로 내놓은 행실도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행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풀이하고 찬시를 붙인 뒤 본문 위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엽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이끌린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효행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다시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먼저 선조 14년(1581)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인다. 이후 『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권1에 대부분 다시 실림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영조 3년(1727)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18세기 초엽 근대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근대국어의 한 특징인 구개음화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삼강행실도』는 당시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이영경, 2009 참조).

3) 『이륜행실도』

조선 중종 13년(1518)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 가운데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이륜을 백성에게 널리 가르칠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간행한 책이 『이륜행실도』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간행할 것을 청원하여 왕명을 따라서 그 편찬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명이 채 시행되기 전인 중종 12년(1517) 김안국이 경상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대신에 전 사역원정이었던 조신(曺伸)에게 편찬을 맡겨 이듬해인 중종 13년 당시 금산이었던 김천에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중국의 역대 문헌에서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아 그 인물의 행적을 시문과 함께 엮었다. 모두 48건의 행적을 형제도(25), 종족도(7), 붕우도(11), 사생도(5)에 나누어 실었다. 이들 행적은 모두 중국 사람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행적은 없다. 백성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행적마다 언해를 붙이고 행적 내용을 간추린 그림을 본문 앞에 실음으로써 쉽게 속내를 알도록 하였다.

이 책은 경상도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각처에서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어 오늘날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때문에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한문 원문에 대한 언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해를 대비 분석함으로써 표기, 음운, 어휘 등에 일어난 시대적 변화 및 지역적 변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도덕사 및 미술사에서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학 사상 및 윤리관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도판들은 조선 시대 판화의 변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시대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따라서 엮은 것으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삼강행실도』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훈민정음으로 언해를 붙였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의 맨 앞에 동국(東國)을 붙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중심의 행실도임을 드러내는 핵심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중세어와 근대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충신·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의 세 편으로 엮어진 『신속삼강행실도』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 선택하여 1,500여 사람의 간추린 전기를 적은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한 장의 그림을 붙이고 한문 다음에 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 속부에서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 정신의 바탕 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 널리 펴서 민심을 격려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데 그 의미가 컸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속내가 동국, 즉 조선에 국한되면서 그 분량이 많다는 특징뿐 아니라, 실린 사람의 신분이나 성의 차별 없이 천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평등하게 실었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금 전하기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였으며, 1978년 대제각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여 보급한 바 있다.

5)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에 왕명을 따라서 심상규 등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아우르고 보완하여 펴낸 행실도로서 5권 4책의 활자본이다. 철종 10년(1859) 교서관에서 새로 펴낸 5권 5책의 목판본도 전하는바, 중간 서문이 더 들어갔을 뿐 초간본과 내용에는 큰 차이는 없다. 『오륜행실도』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뽑아 해당 인물의 사적을 시와 찬과 더불어 엮은 일종의 효행 교화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효행을 133건, 우리나라에서 17건, 모두 150건의 행적을 효자・충신・열녀・형제・붕우의 다섯 권에 나누어 실었다. 교화의 목적상 행적마다 사적 내용이 요약된 그림을 앞에 실었는데 이로 하여 ‘-도(圖)’가 붙어 책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행실도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일찍이 훈민정음 창제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종 때 나온 한문본 『삼강행실도』(1434)가 그것으로 여기서는 언해가 붙지 않았을 뿐, 『오륜행실도』에 보이는 도판에 행적을, 거기에 시찬을 붙이는 체재를 같은 모양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문본은 표기가 한문으로 된 데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백성 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성종 때에는 올린 행적의 수를 삼분의 일로 크게 줄이고 언해를 덧붙여 언해본 『삼강행실도』를 내놓게 된다. 이 언해본의 간행 이후로 행실도류 문헌은 정책적으로 효치의 알맹이 교화서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중간과 개간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행실도로 개편, 간행되었다. 이 같은 행실도류 서책에서 『오륜행실도』는 종합, 수정판의 성격을 갖는다. 기존의 행실도를 합하여 간행한 점에서는 종합판이지만, 기왕의 체재나 내용에 적잖은 첨삭을 가한 점에서는 개정판이기도 한 것이다. 개정판의 성격상 『오륜행실도』는 다른 어느 문헌보다도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장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행실도와 비교 기반이 확고할 뿐 아니라 간행 시기나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비교 분석하여 살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책은 국어사, 미술사, 윤리사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도판은 당시 도화서를 중심으로 유행한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보여 주는데 기존 행실도의 도판과 함께 조선 시대의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 된다. 말하자면 단원 화풍의 진면목을 간추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국유사』 효선편

『삼국유사』는 왕력으로 시작하여 효선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 진정사효선쌍미, 빈녀양모, 향득할고, 손순매아’의 다섯 가지 보기를 들어 효행과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그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써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 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행록을 통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모든 행실의 근원이 어버이 섬김이라는 화두를 모두에게,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효경언해』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내사기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존경각문고 소장본 가운데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쓰던 옥쇄인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의 인장과 만력 18년(1590) 구월일 내사 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 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 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이 『 소학언해』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 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효경대의』는 송나라 말엽의 학자였던 동정이 주자의 『효경간오』에 자신의 풀이 글을 더하여 마무리한 책이다. 동정은 경학자로 오늘날의 강서성 덕흥 사람이다. 자는 계형(季亨)이고‚ 호는 심산(深山)이다. 그는 황간과 동주를 비롯하여 개헌과 함께 주자의 후계자였다. 『효경대의』는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새롭게 고치고 엮은 『효경』의 경문을 받아들이되 주자가 분명히 밝히지 못한 『효경』의 대의를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더하여 엮은 책이다. 본디 주자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에서 잘못된 장절 나누기를 경 1장 전 14장으로 바로잡고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223자를 빼버렸다. 『효경』 본문을 재정리하였으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은 『효경』의 본뜻을 주자의 학설에 따라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웅화(熊禾)의 서문을 보면‚ 공자에서 시작되는 유가의 전통을 이은 증자는 각각 학문과 덕행의 디딤돌이 되는 『효경』과 『대학』을 지었다. 가족을 화목하게 하고 나아가 민초들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안을 효도에서 찾는 이른바 효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효경간오』 발문에서 다른 책과 효경의 주석에 해당하는 것을 합하여 『효경외전』을 짓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하여 주자의 학문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줄거리를 세울 수 있도록 『효경』의 대의를 풀이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효경대의』는 웅화의 서문과 서관(徐貫)의 발문을 포함하는 명나라 서관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국가 수준에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웅화의 서문에 따르면‚ 호일계와 동진경이 동정의 『효경대의』를 갖고 웅화를 찾아 왔으며‚ 그의 집안 형인 명중(明仲)이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다는 것이다.

규장각 소장본 가운데 『효경대의』는 선조 23년(1590)에 만들어진 효경을 대자의 활자로 찍은 책이어서 흔히 효경대자본이라고 한다.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이 붙인 발문에 따르면‚ 선조의 명으로 홍문관에서 『효경언해』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선조 23년에 마무리되었다. 유성룡의 발문을 통해‚ 주자가 『효경간오』를 통해 공자의 『고문효경』을 되살리고 그 경문에 동정이 자세한 주석을 달아서 올바른 논리를 세웠다고 함으로써 『효경대의』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기본적 시각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선조 23년의 활자본은 『조선학보』 제27집(1963)에 영인되었고, 간년 미상의 목판본이 홍문각에서 영인된 바 있다. 이 글에서도 『효경언해』의 저본으로 『고문효경』이라 보고 부록으로 붙여 역주를 하였다.

4.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른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한문본은 고려 때부터 많이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부모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오래된 언해본으로 알려진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는 발문에 따르면, 호남의 완주 지방에 살던 선비 오응성(吳應星)이 한문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발문을 써서 인종 1년(1545)에 간행하였다.

이 문헌은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처럼 언해문 아래에 그 내용에 관한 그림을 실었다. 여기서는 불교 경전에 쓰는 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가 들어 있다. 곧 1면은 10행으로, 한문 원문의 대문이 끝나면 한 글자를 낮추어 언해문이 시작되는데, 『삼강행실도』와 같은 판식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불갑사 소장 한문본 화암사판(花岩寺版) 『부모은중경』(1441)에다가 후대에 붓으로 쓴 차자 구결(口訣)과 한글 번역문이 있는데, 여기 번역문이 오응성 발문의 초역본(初譯本)의 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역주본 해제, 김영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1)

5. 『심청전』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들라면 단연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 하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음악가 윤이상이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심청전을 소재로 작곡을 발표했을 때 눈을 뜨는 장면에서 청중 모두가 놀라 일어서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네 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통과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심청전의 원형은 『삼국사기』의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의 ‘빈녀양모’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전남 곡성의 관음사에서 발견된 『관음사사적기』는 영조 5년(1729) 송광사의 백매 선사가 관음사의 장로인 덕한 선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인데, 원홍장이라는 처녀와 그의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원형 설화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들어 곡성에서는 심청을 소재로 하는 축제를 감칠 맛 있게 볼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Ⅳ.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국어사적 위상

1. 이 자료에서 적힌 언해의 계층별 분포를 보면, 중앙어와 지역 방언이 섞여 드러난다. 중앙어가 반영된 부분을 찾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나타난 찬집 대상의 확대와, 의궤에 나타난 그 언해 과정을 기록한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찬집 대상의 확대가 모두 4번에 걸쳐 있었다. 언해 과정에서 당상이 낭청 2명을 거느리고 언해를 하며, 도청은 이미 언해한 것을 교정하고, 도제조가 그 일을 교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와 의궤에는 충신도에 대한 대상 확대에 대해 각 충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언해에 참여했던 35명을 중심으로 기존의 논의에서 밝힌 바 방언적 요소를 알 수 있었다.

2.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보이는 국어사적인 특징은 아래와 같다. 표기상 ㅿ자의 쓰임, 합용병서의 ㅄ-계, ㅂ-계, ㅅ-계의 공존과 각자병서의 표기로 ㅃ- 등을 들 수 있다. 합용병서의 각자병서로의 통합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1) (동신효 6), 아(동신효 6), 으로(동신열 1).

2) 버혀(동신효 1 : 73ㄴ), 은와 은이(동신효 1 : 61ㄴ), 구긔(동신효 2 : 4ㄴ), 사의 며(동신효 2 : 16ㄴ), 어이 뎌 뎌 죽디 아녀셔(동신효 3 : 43ㄴ), 광텰리 몸을 빠여[光哲挺身](동신효 8 : 5).

3) 김개믈의 리라(동신효 1 : 47ㄴ),  맛보아(동신효 2 : 55ㄴ), 인의  가히 고티리라(동신효 3 : 17ㄴ), 아비 븍진의 뎌 죽거(동신효 1 : 15ㄴ).

음절 말의 ㅅ과 ㄷ의 표기가 넘나들어 쓰였다. 근대국어로 오면서 ㅅ으로 통일되었다가 현대국어로 오면서 다시 두 개의 음소로 분리 독립되어 뜻을 분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어간 말 자음의 중복 표기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분철과 연철이 혼합된 형으로 차츰 어원을 밝혀 적으려는 형태주의 표기로 가는 과도기적인 표기라고 할 수 있다(예 : 약글, 집비, 남마다, 눈니라도). 한편, 강세첨사의 경우, 문헌에 따라서는 ‘-사’로 드러난다(예 : 후에사, 말아사).

3. 아래아의 경우, ‘ㆍ〉ㅏ’와 ‘ㆍ〉ㅡ ’의 서로 다른 표기를 볼 수 있었다. 이 변화의 경우에는 비록 ‘〉흙, 가온〉가온대’ 등과 같은 낱말에서만 나타나지만, 해당 낱말에서는 벌써 중앙 방언의 성격이 확연하다.

하지만 ㅣ모음 역행동화의 용례로 보이는 ‘제기’(동신충 1 : 24ㄴ)는 맨 앞의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의 것으로, 3차에 추가된바, 중앙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현상의 보기인 ‘애’(동신효 4 : 5ㄴ), ‘지애비’(동신열 2 : 5ㄴ)도 각각 중종 대에 있었던 모친의 3년상에 대한 것과 『삼강행실도』에 실렸던 것으로, ‘애’는 3차에, ‘지애비’는 4차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중앙 방언이 반영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움라우트 현상도 보인다(예 : 일즙 우디 아닐 제기 업더라). 자음접변도 더러 보인다(예 : 괄로(官奴)). 강음화현상의 하나로 어두격음화현상의 보기로는, ‘칼, 흘, 코’ 등이 있는데, 이러한 보기들은 이미 16세기에 나타난 형태들이다. 어간 내에서 보이는 보기로서는, ‘치며, 속켜, 언턱’ 등은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잘 쓰이지 않는 낱말로서는, ‘구리틴대[倒之], 맛갓나게[具甘旨], 덥두드려[撲之], 비졉나고[避], 초어을메[初昏], 와이[酣], 칼그치[劒痕]’ 등이 있다.

4. 이 밖에도 명사문에서 서술문으로 바뀌는 등 통사론적인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의미의 변화를 보여주는 낱말도 상당수 분포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근대국어와 중세국어의 분수령에 값하는 자료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시대 구분의 소중한 귀중한 문헌이며, 동시에 중세국어와의 무지개 같은 다리의 구실을 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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