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효자도 권1,2,3,4)
  •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제3권 주해
  • 효자도 제3권
  • 우척수묘(禹滌守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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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척수묘(禹滌守墓)


3 : 46ㄱ

禹滌守墓

3 : 46ㄴ

生員禹滌金溝縣人親歿居墓側不脫衰絰 주001)
최질(衰絰):
상중에 입는 삼베옷. 곧 상복을 말함. 상복을 엄정하고 정중하게 입는 것은 인간, 그것도 조상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아 계실 때 모시는 예로써 모시는 사람들의 예절이다. 상복을 입는 것을 성복(成服)한다고 한다. 초종(初終)·습(襲)·소렴(小殮)·대렴(大殮)이 끝나고 그 다음날 성복한다. 상복을 입어야 할 복친들이 각자 해당되는 상복을 입음으로써, 죽은 사람에 대한 유복자들의 친소와 존비의 질서에 따라서 참최(斬衰)·재최(齊衰)·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 등 다섯 가지 상복, 즉 오복을 가려서 입는다. 옛날 우리나라의 상복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 고려조와 『수서』 백제조와 신라조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의 보급은 조상숭배 사상을 중시하고 불교의 화장법에서 다시 매장법으로 옮겨갔다. 고려 성종 때 관원에게 복상 기한의 시행 등을 규정한 법이 있었고, 공양왕 3년(1391)에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본따 복제를 정비하였다. 민간에게 상제(喪祭)의 예가 보급된 것은 고려 말기 주희의 『가례』가 들어온 이후다.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에도 오복제도를 규정하고 중종 이후 상제에 대한 예법은 사대부에게 철저히 시행되었고, 서민들에게도 삼 년 상이 일반적인 장례로 권장되었다.
口不言家事終三年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원 우텩은 금구현 사이라 주002)
원 우텩은 금구현 사이라:
생원 우척은 금구현 사람이다. 단모음화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우텩〉우쳑〉우척’이 되었다. 구개음화 현상은 국어사로 볼 때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어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북부지역어로 번져 나아간 발음경제에 따른 소리의 달라짐이다.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에서는 ㄷ(ㅌ)음의 보기를 들고 있다. 댜(탸)가 쟈(챠)보다 훨씬 소리 내기가 어려워 입천장소리되기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스승이었던 정동유(鄭東愈)의 고조 형제의 이름 가운데 디화(知和)가 있고 지화(至和)가 있었다고 함을 예로 든 것을 보면 적어도 유희 이전의 시기에는 구개음화가 널리 쓰이지 않고 있음을 미루어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평안도 같은 관서지방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북한 지역어에서는 전기불을 ‘뎐기불’로 발음하여 흔히 ‘뎡거쟝에 뎐기불이 번뎍번뎍 하더라’는 다소 희화적인 예를 들기도 한다. 국어에서 본디 구개음이 아닌 ‘ㄷ, ㅌ’이 ‘ㅣ’앞에서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을 구개음화라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나, 사실은 복잡한 음운론적 층위로 구성되어 그 위상을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음운과정이다. 구개음화라는 음운 현상에 대하여 통시론적 접근을 통하여 국어사에서의 구개음화의 시기와 공간의 자리매김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어사에서 구개음화의 등장 시기는 크게 두 가설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견해로 구개음화 하면 근대국어의 음운현상이라는 것이고(이기문), 이와는 달리 구개음화의 시기를 훨씬 앞당겨 잡은 주장도 있다(박병채). 고대 삼국어의 지명 자료에서 일본어나 몽고어와의 음운대응으로 미루어 고구려어의 일부가 어중에서 ㄷ구개음화를 경험하였고, 신라어는 어두에서도 구개음화를 겪었는데, 그에 비해 백제어는 표기 체계의 뒤섞임으로 미루어 볼 때 병존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쉬문을 다가 다 다딜어 여리고[把水門都衝壞了]〈박통사번 상 : 9〉.
어버이 죽거 무덤 겨 사라 최딜을 벋디 아니고 주003)
최딜을 벋디 아니고:
상복을 벗지 않고.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최딜〉최질’이 되었다.
입의 집이 니디 아니야 삼년을 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우척수묘 - 우척이 무덤을 지키다
생원 우척은 금구현 사람이다. 어버이 돌아가매 무덤 곁에 살되 상복을 벗지 않았다. 입에 집일을 말하지 않고 삼 년 상을 마쳤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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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최질(衰絰):상중에 입는 삼베옷. 곧 상복을 말함. 상복을 엄정하고 정중하게 입는 것은 인간, 그것도 조상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아 계실 때 모시는 예로써 모시는 사람들의 예절이다. 상복을 입는 것을 성복(成服)한다고 한다. 초종(初終)·습(襲)·소렴(小殮)·대렴(大殮)이 끝나고 그 다음날 성복한다. 상복을 입어야 할 복친들이 각자 해당되는 상복을 입음으로써, 죽은 사람에 대한 유복자들의 친소와 존비의 질서에 따라서 참최(斬衰)·재최(齊衰)·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 등 다섯 가지 상복, 즉 오복을 가려서 입는다. 옛날 우리나라의 상복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 고려조와 『수서』 백제조와 신라조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의 보급은 조상숭배 사상을 중시하고 불교의 화장법에서 다시 매장법으로 옮겨갔다. 고려 성종 때 관원에게 복상 기한의 시행 등을 규정한 법이 있었고, 공양왕 3년(1391)에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본따 복제를 정비하였다. 민간에게 상제(喪祭)의 예가 보급된 것은 고려 말기 주희의 『가례』가 들어온 이후다.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에도 오복제도를 규정하고 중종 이후 상제에 대한 예법은 사대부에게 철저히 시행되었고, 서민들에게도 삼 년 상이 일반적인 장례로 권장되었다.
주002)
원 우텩은 금구현 사이라:생원 우척은 금구현 사람이다. 단모음화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우텩〉우쳑〉우척’이 되었다. 구개음화 현상은 국어사로 볼 때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어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북부지역어로 번져 나아간 발음경제에 따른 소리의 달라짐이다.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에서는 ㄷ(ㅌ)음의 보기를 들고 있다. 댜(탸)가 쟈(챠)보다 훨씬 소리 내기가 어려워 입천장소리되기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스승이었던 정동유(鄭東愈)의 고조 형제의 이름 가운데 디화(知和)가 있고 지화(至和)가 있었다고 함을 예로 든 것을 보면 적어도 유희 이전의 시기에는 구개음화가 널리 쓰이지 않고 있음을 미루어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평안도 같은 관서지방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북한 지역어에서는 전기불을 ‘뎐기불’로 발음하여 흔히 ‘뎡거쟝에 뎐기불이 번뎍번뎍 하더라’는 다소 희화적인 예를 들기도 한다. 국어에서 본디 구개음이 아닌 ‘ㄷ, ㅌ’이 ‘ㅣ’앞에서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을 구개음화라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나, 사실은 복잡한 음운론적 층위로 구성되어 그 위상을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음운과정이다. 구개음화라는 음운 현상에 대하여 통시론적 접근을 통하여 국어사에서의 구개음화의 시기와 공간의 자리매김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어사에서 구개음화의 등장 시기는 크게 두 가설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견해로 구개음화 하면 근대국어의 음운현상이라는 것이고(이기문), 이와는 달리 구개음화의 시기를 훨씬 앞당겨 잡은 주장도 있다(박병채). 고대 삼국어의 지명 자료에서 일본어나 몽고어와의 음운대응으로 미루어 고구려어의 일부가 어중에서 ㄷ구개음화를 경험하였고, 신라어는 어두에서도 구개음화를 겪었는데, 그에 비해 백제어는 표기 체계의 뒤섞임으로 미루어 볼 때 병존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쉬문을 다가 다 다딜어 여리고[把水門都衝壞了]〈박통사번 상 : 9〉.
주003)
최딜을 벋디 아니고:상복을 벗지 않고.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최딜〉최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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