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효자도 권1,2,3,4)
  •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제3권 주해
  • 효자도 제3권
  • 익점감구(益漸感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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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점감구(益漸感寇)


3 : 35ㄱ

益漸感寇

3 : 35ㄴ

江城君文益漸丹城縣人丁母憂伏殯側海寇入不避寇感之不害雞狗 㫌門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강셩군 문익졈은 단셩현 사이니 주001)
강셩군 문익졈은 단셩현 사이니: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은 단성 사람이니. 단모음화를 거치면서 ‘문익졈〉문익점’으로 소리가 단순화되었다.
어믜 상 맏나 빙소 겯 업더여셔 바다 도적이 라드로 피티 아니니 도적기 감동야  개도 해티 아니니라 졍문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익점감구 - 문익점이 왜적을 감동시키다
강성군 문익점 주002)
문익점(文益漸):
고려 말기의 문신(1329~1398).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첫 이름은 익첨(益瞻)으로, 자는 일신(日新)이다. 호는 삼우당(三憂堂)으로 지금의 산청인 당시 강성현(江城縣)에서 숙선(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당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머물면서 때를 보던 덕흥군을 추종하였으나 덕흥군이 패하자 고려로 돌아왔다.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그는 수하인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목화씨를 어떻게 발라내고 실을 어떻게 뽑는지를 모르던 중 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의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씨아란 말도 씨를 빼앗는 틀이란 뜻이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 섬유를 이용한 의료 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남명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고 시를 지어 그의 공을 높이 기렸다.
은 단성현 사람이다. 어미 상을 당하여 빈소 곁에 엎드려서 애통하였다. 왜적이 쳐들어와도 피하지 않았으니 도적이 감동하여 닭과 개도 해치지 않았다. 정문을 세웠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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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강셩군 문익졈은 단셩현 사이니: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은 단성 사람이니. 단모음화를 거치면서 ‘문익졈〉문익점’으로 소리가 단순화되었다.
주002)
문익점(文益漸):고려 말기의 문신(1329~1398).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첫 이름은 익첨(益瞻)으로, 자는 일신(日新)이다. 호는 삼우당(三憂堂)으로 지금의 산청인 당시 강성현(江城縣)에서 숙선(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당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머물면서 때를 보던 덕흥군을 추종하였으나 덕흥군이 패하자 고려로 돌아왔다.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그는 수하인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목화씨를 어떻게 발라내고 실을 어떻게 뽑는지를 모르던 중 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의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씨아란 말도 씨를 빼앗는 틀이란 뜻이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 섬유를 이용한 의료 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남명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고 시를 지어 그의 공을 높이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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