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창(痘瘡):위험한 전염병인 마마를 고치고 예방하는 데 대한 처방은 허준의 ‘언해두창집요’와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이 큰 산맥을 이룬다. 허준 외에도 박진희의 두창경험방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히 왕실과 관련한 기록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 ‘역사 인물 초상화 대사전’에 200여 명의 초상화가 실렸다. 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 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 5일 실록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 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 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돌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 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 의원인 유상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올림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 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痘醫)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 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 같이 십여 일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 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 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 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 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 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 17일에 종묘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 4일에 유상을 종 4품 서산 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 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추어 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 “이 아이는 곪은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원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 두창은 귀신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癘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癘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넋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 배송 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 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다.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의원이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 배우기를 아직 미치지 못한 것 같이 하라.
조선 숙종 때 명의 유상(柳常)은 특히 마마를 잘 고쳐 많은 어린아이들을 살렸다. 하루는 임금에게 천연두 기가 있다며 대궐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입궐하였다. 임금의 증세는 위중하여 돼지 꼬리로 만든 저미고(猪尾膏)를 쓰고자 하니 대비가 크게 격노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신을 가진 그는 저미고를 몰래 쓴 결과, 마침내 병세가 호전되고 그 공로로 풍덕부사가 되었다.
○ 늙은 할미에게 길을 배우다
한번은 숙종이 연포탕(軟泡湯 무, 두부, 고기 국)을 먹다가 체하여 위급하게 되자 그를 대궐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서대문에 이르렀으나 성문을 아직 열지 않아서 잠시 길가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 집 늙은 할미가 방안에 있는 딸에게, ‘아까 쌀뜨물을 어디다 두었느냐, 두부에 붓지는 않았겠지.’ 하는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할미에게 물으니 쌀뜨물을 두부에 부으면 즉시 두부가 녹아내린다고 하였다. 그는 대궐로 들어가서 쌀뜨물을 임금께 올리니 체증이 바로 풀렸습니다. 지식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진정한 지식이다. 옛말에 쇠뿔에 앉은 개미는 소의 머리가 흔들리는 것을 자기 탓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배우며 익혀 나가야 할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는 배우기를 아직 미치지 못한 것 같이 하고 오직 배운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