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해두창집요 해제
정호완(대구대학교 교수)
조선왕조 선조 41년(1608)에 어의 허준(許浚)이 선조 임금의 명을 받아 마마의 치료를 목적으로 명(明) 나라의 방문(方文)을 당시의 우리말로 번역하여 내의원(內醫院)에서 간행한 책이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이다.
이 책은 선조 임금의 명령에 따라서 간행된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은 세조 때 내의 임원준(任元濬)이 지은 것을 다시 고쳐서 우리말로 언해하였다. 임원준은 세종 28년(1446) 부사정(副司正)으로 의학에 관한 서책의 간행과 보급을 다루는 찬집관이 되어 성종 때까지 내의원을 관장하던 벼슬인 제조(提調)를 지냈다. 이 무렵 〈신찬구급간이방(新撰救急簡易方)〉을 맡아서 간행, 보급하여 병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본디 천연두(天然痘) 곧 마마를 다루던 의학 서적으로는 이 〈두창집(痘瘡集)〉이 널리 알려졌다. 의원의 과거 시험 때에도 교과서로 쓰이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허준의 언해본이 나오면서 더욱 전문적인 의료 방문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중종 무렵 김정국(金正國)이 엮은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에도 소아두창방(小兒痘瘡方)이 실려 있긴 하다. 두창방(痘瘡方)이 우리말로 언해된 것은 중종 13년(1518)에 김안국(金安國)이 다른 책들과 함께 간행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류의 역사란, 병마와 싸운 결과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하고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질병은 아마도 마마 곧 천연두일 것이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지난 1967년만 해도 지구상에서 천만 명이 발병, 2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4만3천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1만여 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마는 오늘날의 에이즈보다 훨씬 무서운 병이었다. 역자의 경우도 여덟 남매 가운데 마마 병으로 다 죽고 두 남매만 살아남았다.
마마 병은 호흡기를 통해 옮겨지는 병으로 전염성이 아주 높을뿐더러 죽음에 이르는 치사율도 높은 위험한 급성 전염병이다. 특히 면역력이 없는 연령이나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9할에 이른다. 그러니까 열 명 가운데 아홉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다.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이야기다. 행여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 경우가 많고, 실명, 지체부자유 등 무서운 후유증도 남긴다. 마마를 앓고 곰보가 많아서인지 아이들을 놀릴 때 곰보딱지라 함도 마마 병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마마는 콩알 같은 헌데를 만든다 하여 두창(痘瘡)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하권 ‘소아잡방’ 중에도 두창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걸린다고 하여 백세창(百世瘡)이라 부르거나 인위적인 종두(種痘)에 견주어서 시두(時痘)라는 말을 써오기도 하였다. 일제 때에는 마마, 손님, 두창, 시두라 불렸는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일본식 병명인 천연두로 통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식으로 ‘마마’라 하기로 한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과 다른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은 5억만 명이 이 마마로 목숨을 잃었다. 다행스럽게 약 2백년 전 영국의 의사였던 에드워드 제너에 의해 마마의 예방접종법이 처음으로 선을 보여, 1966년 세계보건기구에서 마마의 퇴치 운동을 범세계적으로 편 뒤 지금은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세계에서 마마로 판명된 첫 번째 사례는 기원전 1,100년 무렵,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가 마마로 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그 이전부터 마마의 신을 모시는 사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마마의 역사는 더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16세기 초엽 남아메리카로 쳐 들어갔던 스페인의 군대에서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사이가 벌어져 사령관은 부사령관만 남겨놓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오갈 데가 없어진 부사령관 코르테즈는 6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법으로 아즈텍 문명으로 쳐들어갔다. 30배 이상의 병력과 현지의 지형지물에 정통한 아즈텍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대안이 없었지만 2차 전투를 시작했는데 아즈텍 군대가 사기저하로 싸움을 할 수가 없었던 바람에 스페인 군대는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아즈텍 군대가 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스페인 군대에서 옮겨온 마마 때문이었다. 스페인 군대의 노예 한 명이 마마에 걸렸다는 이야기다. 병에 강한 스페인들은 이미 면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즈텍인들은 면역이 없었기에 엄청난 피해만 키웠다.
끔찍한 참극은 151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531년까지 13년 동안 원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마마로 죽게 된다. 원주민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절망 그 자체였다. 무서운 병이 도는데도 신은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고, 한편 침략자 스페인 사람들은 끄떡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원주민들은 저항의지를 상실했다. 찬란하고 평화로웠던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은 마마로 강물에 모래 쓸리듯 흩어지고 말았다.
영국 왕이 가톨릭을 국교로 한다는데 반기를 든 일부 신교도들이 돈을 모아 배를 사서 미국땅에 옮겨 닻을 내린 곳이 얼마 전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미국의 보스톤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왐파노악’이라는 인디언이, 영국의 신교도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내고, 이들에게 농사짓는 법, 숲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쳐 정착하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미국을 가능케 한 길목에는 인디언들의 도움이 있었다.
초기 영국 이주민들이 차지한 땅은 주인 없는 빈 땅이 아니고 바로 인디언이 살던 원주민의 땅이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들의 세력이 커감에 따라 더욱 많은 땅을 원하게 되었고, 이 지역을 지배하고자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몰아내게 된다.
어떤 영국인 지휘관들은 용맹한 ‘이로코이’ 인디언들과의 싸움이 어려워지자 의도적으로 이들에게 마마를 걸리게 하여 면역능력이 전혀 없던 인디언들을 쉽사리 멸망시켰다. 서부영화에 자주 나오는 샤이안족, 아파치족들도 대개는 이렇게 해서 하나둘 없어져 갔다. 미국의 역사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인디언들이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르자면 생물학전으로 원주민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그 밖에도 1764년 스웨덴 인구의 약 1할이 마마로 죽었다.
마마 재발의 가능성을 세 가지 면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북한, 이라크, 제3세계의 바이오테러 가능성, 둘째는 생화학 무기 공장의 사고 가능성, 셋째는 마마 변종 바이러스의 등장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일단 천연두에 걸리면 정말 어렵다. 아직도 확실한 치료법을 모르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방 주사만이 유일한 대비책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79년 이후 마마 예방 접종이 사라졌다. 어떤 경로로든 천연두가 재발하면 곧 바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집중적으로 죽게 되는 무서운 생물학 무기로 돌변할 수 있다. 면역력이 없는 20세 이하에선 절반 정도는 죽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선진국에선 새로운 전쟁무기로 생화학무기를 만든 일이 있다. 그러나 곧 세계는 이 생화학 무기가 인류를 전멸시킬 수도 있는, 아니 인간 스스로 자멸을 부르는 치명적인 무기임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72년 미, 영, 소 등 145개국은 생화학무기 개발과 사용을 금지하자는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소련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구소련은 마마와 마르부르크 등 생물학무기를 개발하여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지금도 러시아엔 마마를 연구해서 생화학무기로 적용하려는 군사과학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의 마루타 부대(731)를 연상케 한다. 마마 같은 세균으로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가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 역자가 하얼빈에 갔을 때 그 부대를 방문해서 생체실험의 현장을 본 적이 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악의 축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에 경종을 울린 사람이 1992년 미국으로 망명한 캔 알리백이다. 그는 구소련의 미생물학자이자 당시 세균전 프로그램 최고책임자였다. 자신이 일했던 서부 시베리아의 연구소에서 지난 1990년 이미 생화학무기가 개발됐으며, 그 무기는 다름 아닌 전세계가 하나가 되어 지난 1980년에 근절시켰던 마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마 바이러스의 게놈을 변형시켜 종래의 마마보다 사망률이 아주 높은 마마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는 바이러스 무기, 마마탄의 존재와 생물학 무기는 상상이 아닌 현실적인 위협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마마탄은 전략 미사일이나 항공 폭탄에 장착될 수 있으며, 이 무기의 파괴력은 매우 커서 천연두탄 3∼5킬로이면 상당한 크기의 도시를 궤멸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련의 해체 이후 일자리를 잃은 과학자들이 그 기술을 제3세계로 유출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1999년 6월 12일자 뉴욕타임스는 북한이 군사 목적으로 마마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 이는 러시아에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지구상에 공식적으로 마마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애틀란타시의 질병통제예방센터와 러시아 시베리아의 바이러스-생명공학 연구센터 두 곳뿐이다. 오래 전부터 북한과 이라크가 마마 바이러스 배양시설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라고 한다.
이보다 앞선 1994년 5월 미 국방부의 한 보고서에도 80 년대 말에서 90 년대 초 러시아 마마 바이러스의 일부가 이라크와 북한에 보내졌다는 것. 또 지난 93년 2월에는 존 글렌 당시 상원의원이 북한이 마마 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러시아 해외정보국의 90 년대 초 보고서를 입수해 공개한 바 있다. 이라크의 경우 이란-이라크 전쟁이 진행 중이던 지난 85∼86년 이라크 군인들이 마마 면역 접종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귀순한 북한군의 혈액에서도 마마 예방접종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항체가 발견되었다. 병사들에게 천연두 예방접종을 했다는 것은 마마 균을 군사상 목적으로 숨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교통과 항공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한 지금 언제 어디서 바이오테러가, 혹은 생화학탄 무기 공장이나 실험실에서의 사고로 바이러스가 누출될 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 사례가 있다. 2000년 6월 19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린아이들이 버려진 마마의 백신을 가지고 놀다가 8명이 가벼운 마마 증상을 보였다. 처음에는 고열과 피부에 발진을 일으켜 의사들도 병명을 알아내지 못했으나, 나중에서야 마마 백신을 가지고 논 사실을 확인하고 마마임을 알았다.
또한 기존 천연두 바이러스의 변종 가능성도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에이즈와 에볼라에 이어 마마의 친척 벌에 해당하는 제3의 아프리카산 바이러스가 세계 의학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중앙아프리카 밀림지대인 콩고에서 처음 나타나 아프리카 전역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는 ‘원숭이 두창’이 바로 그것이다. 원숭이나 다람쥐에서 병을 일으켰던 이 바이러스는 최근 인간에게도 옮겨지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인체 내 감염 경로가 안개 속에 싸여 있어 당분간 불치의 역병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원숭이 두창은 58년 원숭이의 몸에서 처음 발견됐다. 70년 콩고의 오지마을에 사는 주민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나 당시에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말라리아, 결핵, 수면병 등에 비해 증상이 약했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이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된 사실이 확인돼 과학자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원숭이 두창이 인간에게 감염되면 마마와 비슷한 증상을 일으킨다. 환자들은 고열과 발진에 시달리며 피부에 부스럼이 생기고 폐출혈을 일으켜 심한 경우 죽는다. 96년부터 3년 동안 원숭이 두창 환자는 511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이는 81년부터 5년 동안 338명의 환자가 발생한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이들 환자는 10명 중 1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생물학자들은 이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에는 전체 환자의 4분의 1정도가 원숭이에 의해 병이 옮겨졌으나 지금은 3분의 2가 사람에 의해 전염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원숭이두창은 독성과 전염성이 둘 다 강해 에볼라나 한타 바이러스보다 위험하다. 지금은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머물고 있지만 문명권으로 나올 경우 전염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요즈음은 비행기를 타면 단 몇 시간 만에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 있다. 때문에 오늘 아프리카에서 감염된 사람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내일은 런던이나 뉴욕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비행기 내에 있는 감염자의 재채기 한번이면, 질병은 아주 쉽고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고 만다.
마마와 원숭이두창의 염색사 염기서열을 분석에 참여한 세르게이 스챌쿠노프는 “마마 바이러스가 수천 년 전 원숭이두창의 조상에서 분리된 것을 확인했으며 따라서 현존하는 원숭이두창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병원성이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원숭이두창의 백신 개발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미생물학자들은 인류가 20년 전 박멸된 천연두의 친척에 다시 시달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1996년 세계보건기구(WHO)의 190개 회원국 대표들은 미국과 러시아 두 곳에 보관중인 마마균을 99년 6월 30일까지 파기하도록 권고한 바 있었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1999년 12월 31일에도 동시에 없애기로 결정했지만 이때는 미국의 반대로 마마 균은 아직도 인류와 공존하고 있다.
미행정부의 반대 이유는 오히려 마마 바이러스가 생물 테러 위협수단으로 이용될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1999년 4월 22일 클린턴 대통령이 마마균 폐기를 철회한데는 이런 정보 분석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1996년 이후 미국과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천연두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복제, 연구에 적절한 바이러스로 만들어 여러 차례에 걸쳐 실험하였다. 미국에서는 2005년까지 실험, 개발이 계속될 예정인 백신 개발 프로그램이 미 정부의 이런 발표로 향후 가속화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래에 희망은 없는 것인가.
최근 한국방송공사 「뉴스광장」 텔레비전 방송에서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호주의 어느 유전과학연구소에서 과학자들이 유해동물 증식을 막기 위해 피임백신을 연구하던 중 면역체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치사율 100퍼센트의 ‘죽음의 바이러스’를 우연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서둘러 호주 국방부와 생물학회 등에 연구 결과의 위험성을 알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국제기구 유엔 생물학 무기 조사팀의 던컨씨는 “만일 이 기술이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라고 즉각 연구 결과의 악용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뉴사이언티스트」는 호주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이 생명공학자들이 치료 방법도 효과적인 백신도 없는 살인적인 바이러스를 얼마나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바이러스가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인류가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인류는 21세기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해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인류가 생태계의 균형을 깨거나 무분별한 전쟁을 일으킬 때, 혹은 인류사의 대전환이 필요할 때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반드시 출현한다는 것이다.
마마란 병은 당시에 고치기가 아주 어려웠던 병이다. 게다가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앓아야 하는 병이었으니까 더욱 그러하다. 오죽하면 병을 마마라고까지 부르게 되었을까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역대 임금들이 이 병의 치료를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처용가(處容歌)의 역신(疫神)이 다름 아닌 마마의 귀신이었다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보면 역신이 처용의 아내 곧 집안 가족을 잡아감을, 잠자리에 비유하였다고 본다. 전염성이 강하고 죽음에 이르는 치사율이 높은 무서운 괴질이었다. 세종 때에도 이 마마에 관한 책이 간행되었다고는 하나 전하지 않는다.
처용과 역신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우리 문헌에 나타남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의 기이조의 처용가와 망해사(望海寺) 부분이다. 노래의 배경이 되는 설화의 속내를 더듬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때는 신라의 49대 헌강왕 시절이다. 오늘날의 경주인 서라벌에는 온 나라가 집과 담이 잇대어 있으되 초가집이 없었다. 노래와 피리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시절도 좋아 비와 바람이 순조로웠다.
나들이로 임금은 지금의 울산지역인 개운포(開雲浦)로 놀러 갔다가 쉬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너무도 이상하여 임금은 신하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일기와 하늘의 일을 도맡아 보는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동해용왕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그의 소원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마침내 임금은 가까운 곳에 용을 위한 절을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윽고 구름과 안개는 걷히고 가던 길을 순조롭게 하였다. 해서 이곳을 구름이 걷혔다고 하여 ‘개운포’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절 이름을 망해사라 불렀다.
동해의 용왕은 기쁜 나머지 일곱 아들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임금의 덕을 기렸다. 용의 일곱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 서라벌로 와서 나라의 일을 돕게 되었으니, 그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임금은 그를 오랫동안 임금 옆에 있게 하려고 급간이라는 벼슬을 삼고 그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처용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인가 마마를 일으키는 역신이 여인을 그리워 해 처용이 없는 틈을 타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잠자리를 하고 있었다. 달 밝은 밤에 나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처용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다시 집을 나왔다. 그 노래가 바로 처용가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이 깊도록 놀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또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 하리오.
그 때였다. 마마신이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내가 당신의 아내를 범하였으나 나를 보고도 아무 말도 않고 화도 내지 않으니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당신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 뒤로 나라 안의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 그림을 대문에 붙이니 마마 귀신이 물러나 사람들은 좋은 일이라며 기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춤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용왕이 임금 앞에서 추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용이 아내의 간통 현장을 보고서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추었던 춤이다. 그러니까 처용의 춤은 마마의 귀신을 감복시켜 쫓아내고 경사로움을 맞아들이려는 춤이었다. 이는 마치 무당들이 춤을 추면서 “잡귀야, 물렀거라.”며 호통을 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해준다. 어떤 학자들은, 처용의 이야기는 이미 그 이전에 있어왔던 마마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탈을 쓰고 벌여 왔던 가면무가 있었다고 풀이한다. 말하자면 악귀나 마마신 같은 나쁜 귀신을 막기 위하여 구나무(驅儺舞)가 있었는데 신라로 들어와서 나라를 지키려는 용 사상과 습합이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 처용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다. 처용의 ‘용(容)’이나 용신의 ‘용(龍)’의 소리가 거의 같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발음이 같다.
연구자들은 처용의 이름이 향가에 처음으로 나오고 있음에도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구나무’에서 찾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처용무는 고려 시대에 있었다. 설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로 하여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얼굴을 그린 부적을 문에 붙이고,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로움을 맞아들였다.”의 속내를 나례(儺禮)의 구나면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나례’가 무엇인가. 못된 병을 일으키는 귀신, 특히 마마 같은 귀신을 쫓아내는 의례를 이른다.
이들은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 가면 탈이 있었고, 이것이 나례에 쓰이면서 처용이라는 인격신으로 둔갑을 하게 되니 신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너무 클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이를 풀이하기 위하여 생긴 것이 바로 처용의 설화라고 본 것이다.
처용의 모습은 어떠한가. 네 개의 눈으로 된 중국의 방상(方相)씨 탈이나 신라 호우총에서 나온 나무로 된 목심칠면(木心漆面)과 같이, 눈을 부릅뜨고 금세 잡아먹을 듯이 이를 드러낸 모습이다. 마마 신을 몰아내는 단순 소박한 가면무에서 처용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푸닥거리를 하는 굿으로 발전하여 갔다고 본다. 그러니 “유덕하신 처용 아바”가 나오고 기와로 처용의 얼굴을 그린 옹면(甕面)으로까지 변모하기에 이른다.
처용으로 문을 지키게 하는 문신으로 삼았던 일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는 기록이 뒷받침 해준다. 고려 말엽 이곡(李穀)의 문집이었던 〈가정집(稼亭集)〉을 잠시 보도록 한다.
“경치 좋은 곳에 놀러 왔다가 구름이 짙게 끼자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네. 아련하게 신라 시대의 두 신선 노인이 춤을 추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달밤에 너울거리고 하얗게 비추는 모습이라니. 머리에 꽂은 꽃은 붉은 빛으로 선연하다네.”
이로 보면 처용무는 두 사람이 추는 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도 그림 속에서라 하였으니 문에 그린 그림이 분명할 터. 대문의 두 문 짝에 그려 붙였을 것이니 쌍화(雙畵)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 중기에 나온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잡처용(雜處容) 가사에도 나온다. “중문 안해 셔계신 쌍처용 아바”가 그런 속내다. 처용의 풀이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러 곳에 붙인 얼굴로서의 ‘처용’이란 풀이가 설득력이 있다.
고려 시대 궁중에서 행해지던 궁중나례에 처용의 춤이 나옴은 무슨 연유인가.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의 구나행(驅儺行)을 살펴보자. 먼저 구나행의 나례가 있은 다음 이어 잡희(雜戱)가 뒤를 따르는데 이 때 처용무가 등장한다. 글에서 이르기를, “천지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지만 선악이 있으므로 하여 섞여 흐르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나례가 행하여진 유래를 풀이한다. 그러고 나서 마마 같은 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쫓아내는 구나 의식이 행해진다. 잡극을 하는 배우 곧 영관(伶官)들이 나오면서 온갖 잡희를 연출한다.
“오방 귀신이 춤을 추며 신화 속의 짐승인 백택(白澤)이 뛰논다. 불의 신인 회록(回祿)이 전설적인 칼인 청평(淸萍)을 집어삼킨다. 서쪽 하늘의 정기를 타고난 서역 사람이 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랗기도 하다네. 그 가운데 나이 들어 허리 굽고 키 큰 사내, 여러 사람들은 그가 남극성이 아닌가 의심한다네. 강남의 상인은 서역 말을 지껄이는 모습이 개똥벌레처럼 빠르고 가볍다네. 칠보를 두른 신라의 처용의 머리에 꽂은 꽃가지에서 향기로운 이슬이 떨어진다네. 누렁이가 방아를 찧고 용은 구슬을 다투고. 요 임금의 궁정이로세.”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떠올려 볼 것이 하나 있다. 말하자면 “언해두창집요”의 앞 부분에 마마 같은 나쁜 병이 주나라 말엽이나 진 나라 초엽에 발생하였다는 기록을 눈여겨보면,
마마 병이 돌아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 나라의 큰 재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미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하면 이러한 못된 마마 같은 병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임금에서 벼슬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 마음으로 마마를 걱정하였을 것이다.
처용의 머리에 꽂은 꽃나무는 어떤 것인가.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처용 사모(紗帽)에는 모란꽃과 복숭아꽃이 나온다. 복숭아나무는 전통적으로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문을 지키는 신이었던 신다와 울루가 복숭아나무에서 살았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색의 〈목은집〉에서 산대잡극(山臺雜劇)의 부분에서 처용 관련 부분을 떠올려 보자.
“산대를 매어 묶은 것이 봉래산 같고
신선이 바다로 와서 과일을 받친다네.
북과 징소리가 잡객이 서 있는 지축을 울리고,
처용의 옷소매는 바람을 일으키며 빙빙 도네.
긴 장대에 기댄 사나이가 평지에서 노는 듯하고
폭죽은 벼락 치듯 하늘을 울리며 터진다네.”
연유야 어떠하든 우리는 여기서 처용이 마마 귀신과 같은 나쁜 병을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얼굴이었으니 대대로 마마가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이었던가를 알게 해준다.
처용은 단순하게 문이나 지키는 그러한 보통의 신이 아니다. 못된 사악함을 물리치고 귀신을 베어 없애는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로 각인되어 왔다. 온 나라가 오래 동안 마마로 하여 시달림을 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이런 강력한 처용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처용이라면 당나라 때의 종규(鐘馗)를 들 수가 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종규는 당나라의 이름 난 화가였던 오도자(吳道子)가 만들어 낸 그림이라고 한다. 북송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가운데 오도자의 그림에 당시의 어떤 선비가 써넣은 글이 있다고 한다. 글의 속내는 이러하다.
“당 현종의 병이 깊어 오래 되었으나 잘 낫지 않았다. 꿈에 한 작은 귀신이 나타나 양 귀비의 붉은 향주머니와 임금의 옥피리를 훔쳐갔다. 구멍 뚫린 적삼을 걸치고 붉은 다리를 지닌 한 큰 귀신이 갈대로 작은 귀신을 잡아다 눈을 후벼 파고서는 삼켜 버렸다. 큰 귀신은 자신을 종규라 일렀다. ‘힘은 있을지라도 선비에게는 싸움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다짐하건대 마마와 더불어 못된 귀신을 없애버릴 것입니다.’ 임금은 꿈에서 깬 뒤에 병이 나아버렸다.”
일종의 꿈 치료인 셈이다. 현종은 오도자를 불러 대귀를 그려서 세상에 널리 펴게 하였다. 처용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림을 그려 붙임으로써 마마 귀신을 막겠다는 것이다. 처용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예방적 기능이 있다. 사람들은 처용의 그림만 보아도 마음을 놓을 뿐더러 병을 조심하고 미리 예방을 하기 위하여 손을 씻는다든가 음식을 조심하고 몸 조심을 하게 되는 그러한 예방의학적인 효과가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궁성 안이나 가정 집안에서도, 한 마을에서도 처용 곧 용이 살 수 있는 곳은 우물이다. 정화수를 떠다 놓고 비는 어른들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용왕님 곧 처용님께 마마신과 같은 무서운 병마를 물리칠 수 있는 기원을 드리고, 이에 대한 믿음을 갖고 힘차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사해용왕이 세상을 돌아보는 공간이 우물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였던 알영이 태어났던 곳이 알영정(閼英井) 곧 알영 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계룡이 나타났고 용의 허리에서 알영이 태어났다. 태어난 여자 아기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아이를 서라벌의 북천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시키니 그 부리가 없어졌다. 태어난 우물의 이름을 따서 여자 아이의 이름을 알영이라고 불렀다. 설화는 알지와 이어져 닭 토템을 가진 토착세력인 김씨 부족을 나타낸 것으로도 풀이한다.
아울러 알영 이야기는 용 토템에 가까우며 김씨 세력과는 상관이 없고, 혁거세와 같은 시기에 옮겨 온 겨레로 보는 주장도 있다. 알영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혁거세를 돕는 왕비가 되었다. 나라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일러 두 성인이라고 하였다. 알영이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마치 석가모니의 탄생을 연상시켜 불교의 영향으로 인한 후대의 윤색이 아닌가 한다.
마마를 강력한 용 신앙으로 물리치고자 하였던 처용가의 노래와 춤은 바로 음악과 춤으로 마마의 귀신을 즐겁게 함으로써 세상을 편하게 하려는 정치이념적인 놀이요, 고유 신앙이었을 것이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인사부 질병 부분을 보면, 서역의 병이 중국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적고 있다.
“격치총서(格致叢書)에 말하기를, 마마란 병은 한 나라 광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마원(馬援)이 남정을 하였을 때, 오랑캐들이 마마에 옮았다. 우리나라의 의방(醫方)에는 천포창(天疱瘡) 곧 마마는 정덕(正德) 이후에 처음으로 중국에서 들어 왔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역시 옛날에는 이런 병이 없었으니 서역에서 온 병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이수광의 같은 책 식물부 약(藥)의 기록을 잠시 보도록 한다.
“저미고(猪尾膏)는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살린다. 이는 마마를 고치는 성약(聖藥)이다. 옛 풍속에 어린 아이의 마마는 약 쓰는 것을 금하고,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것을 선왕조 때 어의 허준(許浚)이 비로소 이 약을 써서 살아난 사람이 자못 많았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어려서 죽는 것을 면하는 자가 많았다.”
그 동안의 일들을 동아리하면, 처용가가 이미 신라 때 있었던 걸로 보아 마마는 적어도 신라 때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고려 때에 이르러 그 피해가 심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여기서 호구별성이라 함은 ‘마마, 호구마마, 손님 마마, 역신 마마, 별성 마마, 천연두, 두신(痘神)’ 따위의 많은 별명을 가진 마마 곧 천연두를 이른다. 이 가운데에서도 호남 호서 호구별성은 호남과 호서 지방을 지나는 호구 별성을 피하고자 붙인 이름이다.
호구 별성은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엽 난곡(蘭谷)이 그린 ‘무당내력(巫堂來歷)’에도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신좌모(申佐模)의 ‘송두신문(送痘神文)’이나 일제 강점기 대한매일신보의 ‘대토음부(大討淫婦)’를 종합하면 여신만은 아니다. 일본인 적송(赤松)의 ‘조선무속의 연구’(1938)에 호귀로정기(胡鬼路程記)를 보면 흥미롭다. 말하자면 마마를 무당의 힘으로 고치기 위하여 귀신들의 내력과 활동을 따라 나선 무당의 활동을 여행으로 비유하여 쓴 것이다.
강남의 별성은 홍씨이고 조선은 이씨인데 모두 53분이다. 소국이 좋다는 말을 듣고 50 분은 돌아가고 단 3분만이 나온다. 글 잘 하는 문신 손님, 활 잘 하는 호반 손님, 예의 바르고 돈 많은 부인 손님이 그들이다. 앞 바다와 뒷 바다를 지나 24 개의 강에 다다랐으나 건널 배가 없었다. 별성마마의 영험술로 순식간에 건너 버렸다.
그 길목은 요동 칠백리와 의주(부윤), 위연과 벽동, 순안과 숙천, 평양(감사), 해주(감영), 송도(유수), 패주와 장단, 고양과 구파발, 무악재 따위를 거쳐 모화관 대청에 전좌(殿座)했다.
“사대문에 방 붙이고 오부에 행회(行會) 놓고
팔도에 관교(官敎) 놓고 꽃 전대 해수 불러 들여
밤이면 청일산(淸日傘), 낮이면 홍일산(紅日傘)
청둑에 홍둑, 청기 홍기 오방기 받으시고
예 바른 부인 호구, 수팔연 받으시고....”
마지막으로 식문(式文)을 늘어놓는다. 상청(上淸)과 하청(下淸), 총과 불, 창(槍), 활, 칼, 선생, 후생과 백정, 거지와 벙어리, 맹인과 99도(刀), 이 별성마마의 말을 따라서 오던 길로 되돌아서라는 애원을 하면서 여행의 기록인 노정기는 끝이 난다.
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호구별성은 아직 호남이나 호서에 다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호구별성은 온 나라를 휩쓸고 죽어서라도 한 번은 들리니 마침내 모든 사람들은 마마를 앓게 된다. 그러니 어찌 그러한 기원이 없을까.
이런 정도로 마마를 치료하기 위하여 무당이 온갖 신을 다 동원하여 죽은 사람의 원혼을 달래는 과정이 실려 있음을 보아 참으로 마마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불행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르자면 호구마다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마마를 앓게 하는 여신이 호구별성이라 하여 마음은 없더라도 마마가 무서워 좋도록 구슬려 보낸다는 속담이 생겼을 정도였다. 이르자면 “별성마마 별송(別送) 내듯” 한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여기 별성(別星)이라 함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외국으로 가는 사신을 이른다. 비유적으로 마마 신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 나라로 이끌고 가는 사신이었던 것이다. ‘구슬리다’의 ‘구슬’도 마마로 맺힌 물방울 같은 것을 미화하여 얼버무리는 뜻이 밑바탕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마마라는 부름말은 잘 못하면 죽으니까 살려달라는 애원이 서린, 살려달라는 기원이 드러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근현대로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마마를 예방하기 위하여 선구적으로 예방법 곧 종두법을 실시한 분이 있었으니, 그가 지석영(1855~1935) 선생이다. 의사이면서 주시경과 함께 국어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선생은 본관이 충주로 철종 6년(1855) 5월 15일 지금의 서울 종로의 낙원동, 당시의 원동에서 의원을 운영하던 지익룡(池翼龍)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지석영의 자는 공윤이고, 호는 송촌(松村)이다.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자 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을 읽고 또 읽었다. ‘유길준전’에는 그 사이의 사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강위(姜瑋)는 지석영의 아버지 지익룡(池翼龍)과 친절한 사이였으므로 원동(園洞) 그의 집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지익룡은 시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의술이 또한 고명했다. 그러나 그는 남이 업신여긴다 하여 약방을 차리지 않았다. 고고한 선비의 품격을 지킨 그의 사랑에서 강위의 이야기를 듣던 젊은이는, 지익룡의 두 아들 운영(運永)과 석영(錫永)을 비롯하여 그 친구들인 여규형(呂圭亨)과 정만조(鄭萬朝) 등이 모두 당당한 선비들이다.”
이렇게 선생은 서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그의 스승이었던 박영선을 통해 〈종두귀감(種痘龜鑑)〉이라는 책을 전해 받고, 종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생 의원에서 마마의 예방법인 종두법을 배우고,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수구파들에 의하여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몰려 신지도로 유배를 당했던 것이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송곡리 404번지로 밝혀진바, 이곳이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선생이 유배를 당하였을 때는 당시는 네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오늘날에는 현대식 건물로 고쳐지었다. 여기가 옛날 해군기지였던 만호진의 만호(萬戶)가 공무를 보던 동헌 자리였다. 이 지역은 청일 전쟁 당시 장진포 포구로서 수십 척의 일본군함이 드나들 만큼의 규모가 큰 항구였다.
본디 신지도는 예전에 강진군에 속해 있었고, 수군 만호진이 들어선 큰 포구였던 사실로 미루어 지석영 선생이 유배될 때만 해도 현재 강진군 마량진에서 이곳 송곡리 포구까지 곧바로 배가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서학을 익히고자 하여 나름대로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을 구하여 정독했다. 그때부터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소로부터 채집한 우두를 인체에 접종시켜 천연두를 예방한 영국인 제너의 종두법에 관한 책이었다.
고종 13년(1876)에 들어서자 일본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해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보냈다. 이 때 지석영은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신사 일행에 포함되어 있던 자신의 스승인 박영선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에 대해 알아다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에 박영선은 일본인 오다키에게 종두법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히 옛집의 〈종두귀감〉이라는 책까지 얻어서 지석영에게 전해주었다. 그 즈음 선생은 자신의 생애를 종두 연구에 바치게 될 큰 전기를 마련한다.
송촌의 나이 24살 되던 해 그의 어린 조카가 천연두를 앓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조카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가족이나 일가친척의 차원을 뛰어넘어 전체 동포들을 천연두에서 구할 결심을 했다. 보다 큰 뜻을 위하여 심혈을 쏟아 붓게 된다.
1879년 일본 해군은 부산에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세웠다. 이 때 선생은 몸소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관 도즈카를 찾아가 그들에게 약 2개월 동안 종두법을 배웠다. 교육을 마친 그는 종두약인 두묘와 종두침 2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중 장인을 설득하여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명에게 종두를 놓아주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종두법을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한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880년 서울로 돌아온 지석영은 종두를 실시하여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은 받았지만 우두의 기초인 두묘의 공급 부족으로 뜻한 만큼의 열매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 그 해, 조정은 일본으로 제2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이 때 다행히도 송촌은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갈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선생은 일본의 위생국 우두종계소장인 기쿠치에게서 종두 기술을 익혔다. 또한 두묘의 제조, 저장법을 비롯하여 송아지 사육법과 채장법을 두루 배운 뒤 두묘(痘苗) 50병까지 얻어 돌아왔다. 이르자면 종두에 대한 원천기술을 배워 익히고 온 것이다. 그런데 2년 뒤인 1882년 선생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그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선생에게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 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을 내린 것이다.
다행히 재빨리 몸을 숨겨 체포는 면했지만 이 일은 뒷날 그가 유배를 당하게 된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그 해 9월, 다시 상황이 바뀌자 그는 당시 전라도 어사로 있던 박영교의 부탁으로 전주성 안에 ‘우두국’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종두에 대한 제도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편, 1905년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여 주시경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를 냈으나, 국권 침탈로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 요청이 있었지만, 야인의 몸으로 묻혀 살다가 81세를 일기로 선각자의 삶을 마쳤다. 참고로 윤효정(尹孝定)의 〈한말비사(韓末秘史)〉에 송촌의 활동에 대한 부분을 더듬어 보면 좋을 듯하여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 동인들 가운데 지석영은 중대한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순한문이 아니라 국한혼용으로 방향을 잡자면, 한자부터 손쉽게 찾아볼 자전(字典)을 내야겠는데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그걸 해낼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그러자니 힘이 여간 드는 게 아니다.”
필자가 본 바로 서당에 있는 자전이라는 게 음만 한글로 달았지 나머지는 몽땅 한자라 초보자가 활용하기에는 걸맞지 않았다. 〈전운옥편(全韻玉篇)〉 이것은 글자의 고저를 맞춰가며 한시를 짓는 이에게나 소용되지, 그저 한문을 공부해 익히려는 이에게는 한낱 ‘그림의 떡’일 뿐이다. 광무 9년(1905), 지석영은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제의하였고, 그것은 학부의 재가를 거쳐서 발표되었다. 물론 정치적 상황으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의학자 가문에서 나온 신진으로만 알았지 이렇게 실천하기에 앞장서기는 참으로 뜻밖이다. 종두법을 함쓰는 한편, 자전편찬이라는 힘겨운 사업을 남 모르게 추진해 나아갔다. 자신이 제안한 대로의 국자 정책이 일반으로 보급되었을 경우, 그들의 손으로 찾아 볼 수 있는, 즉 우리 말글로 찾아볼 수 있는 자전 편찬을 계획대로 진행하여 융희 3년(1909)에 출간하였으니 대단한 속도다. 그런데 여기 일화가 있다.
당시 시정에 사자관(寫字官)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쉽게 말해 삯을 받고 글씨를 써서 대는데, 주로 부유층에서 귀한 책을 보고 그것을 꼭 한 권 갖고 싶은데, 인쇄술이 보급되기 전이라 마련할 도리가 없다. 그래 남의 사랑으로 다니며 글씨 써주는 고라리샌님에게 부탁하면 주옥같은 글씨로 일정 기한 내에 써서 준다. 물론 수고비야 글씨의 교졸과 쓰는 이의 수준에 달렸다.
지석영은 일문이 모두 명필이다. 그런 대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사자관들은 초고를 열심히 베껴 썼다. 그리하여 작성된 원고는 중국으로 보내져 그곳의 발달된 석판(石版) 기술로 인쇄돼 가져왔고, 국내에서 제본해 세상에 선보인 것이 초판 〈자전석요〉의 생겨난 내력이다. 당시 동양이 일로전쟁의 소용돌이 중에서 소리 없이 이뤄낸 것이 이 책이라 국내의 인기를 모아 오래도록 자전계에 군림하였다.
우리 글자에 대한 문화 사랑이 남달라 〈자전석요〉와 〈신정국문〉을 제안하여 많은 사람들의 문자 생활에 복음을 전한 업적은 종두법과 함께 선생이 우리 역사에 남긴 금자탑이라 할 것이다.
당시의 우리말로 언해를 하였으므로 치료 방문에 대한 낱말과 한자음 표기가 우리말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앞서 간행되었던 또 다른 두창에 관한 자료를 비교 연구함은 이 두창집의 언해본이 지니는 가치를 두드러지게 할 것이다. 중세국어와 근대국어 사이에 일어나는 언어현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