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소학

  • 역주 번역소학 권4
  • 번역소학 제4권
  • 내편(內篇)○제3편 경신(敬身)○명심술지요(明心術之要)
  • 명심술지요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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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술지요 001


言언忠信신며 行篤독敬이면 雖슈蠻만貊之지邦이라두 行矣의어니와 言언不블忠

번역소학 권4:5ㄴ

信신며 行不블篤독敬이면 雖슈州쥬里리나 行乎호哉아
Ⓒ 구결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말 주001)
말ᄉᆞᄆᆞᆯ:
말을. 말ᄉᆞᆷ[辭]+ᄋᆞᆯ. 중세 국어와 근대 국어의 ‘말, 말ᄊᆞᆷ(말ᄉᆞᆷ)’은 모두 [+높임]과 [-높임] 및 [+겸양]과 [-겸양]의 상황에 두루 쓰였다.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는 각자병서가 쓰인 ‘말’으로 나타난다. ¶①語는 말미라〈훈민정음언해 1ㄱ〉 ②이 말 眞實야 決定히 虛티 아니니라〈월인석보 10:122ㄴ〉 ③다시 말 펴 다시 觀體 標호〈선종영가집언해 하 31ㄱ〉 ④阿難이 비록  이 말 듣와〈능엄경언해 1:102ㄴ〉 ⑤桃源ㅅ 나그내 더브러 말 傳라〈두시언해 초간본 8:61ㄱ〉.
졍외오 주002)
졍셔ᇰᄃᆞ외오:
정성스럽고. 졍셔ᇰ(精誠)+ᄃᆞ외(형용사 파생 접미사)+고(연결 어미). ‘-고’의 ‘ㄱ’이 이중 모음의 음절 부음 [j] 뒤에서 유성 성문 마찰음 [ɦ]으로 약화된 것을 ‘ㅇ’으로 표기한 것이다. ‘졍셔ᇰ’ 중 ‘셔ᇰ’에는 ‘ㆁ’이 쓰였으나, ‘졍’에는 ‘ㅇ’이 쓰였다. 바로 앞 면(4:5ㄱ)의 ‘공경, 졍셩’에도 ‘ㅇ’이 쓰였다. ‘-ᄃᆞ외-’에 대하여는 앞 면(4:5ㄱ)의 ‘졍셩도이’를 참조할 것. ‘말ᄉᆞᄆᆞᆯ 졍셔ᇰᄃᆞ외오 믿비 ᄒᆞ며’가 『소학언해』(3:5ㄱ)에서는 ‘말ᄉᆞᆷ이 듀ᇰ후코 믿브며’로 바뀌었다.
믿비 주003)
믿비:
미쁘게. 미덥게. 믿-[信]+브(형용사 파생 접미사)+이(부사형 어미).
며 뎍 주004)
ᄒᆡᇰ뎍:
‘行蹟(행적)’으로 보인다. ‘ᄒᆡᇰ뎍을 두터이 ᄒᆞ며’가 『소학언해』(3:5ㄱ)에서는 ‘ᄒᆡᇰ실이 두텁고’로 바뀌었다.
두터이 주005)
두터이:
도탑게. 두텁-[厚]+이(부사형 어미). ‘두터비[蟾], 두ᄐᆡ/두틔(=두께)’ 등으로 보아 어간 ‘둩-[厚]’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둗겁다’와 ‘두텁다’는 동의어였다. 바로 아래에서 ‘厚’를 ‘둗거이’로 번역한 예가 나온다.
고 공경 주006)
공경:
공경(恭敬). 두 글자의 받침이 ‘ㆁ’이 아니라 ‘ㅇ’으로 적혀 있다.
면 비록 되나라히라도 주007)
되나라히라도:
오랑캐 나라이라도. 되[蠻貊]+나라ㅎ[國]+이라도(보조사). ‘이라도’의 기원적 구조는 ‘이-(서술격 조사 어간)+아(연결 어미)+도(보조사)’이다. 서술격 조사 어간 ‘이-’ 뒤에서 연결 어미 ‘-아’는 ‘-라’로 교체되는데, 이 현상은 ‘이-’의 기원이 ‘일-’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비록 되나라히라도’의 원문은 ‘雖蠻貊之邦이라두’인데, 보조사 ‘도’ 대신 ‘두’가 쓰인 것이 특이하다. ‘ㅗ’ 대신 ‘ㅜ’가 쓰인 것인데, 현대 경기도 방언의 특징이 이 시기 문헌에서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①雖婢妾이라두 衣服飮食을 必後長者ㅣ니라〈번역소학 3:17ㄴ〉 ②雖之夷狄이라두〈번역소학 4:5ㄱ〉 ③비록 바미라두 모로매 니러 옷 닙고〈번역소학 4:18ㄱ〉. ‘비록 되나라히라도’는 『소학언해』(3:5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니려니와 주008)
ᄃᆞᆫ니려니와:
다니려니와. ᄃᆞᆫ니-[行]+려니와(연결 어미). ‘-려니와’는 ‘리(선어말 어미)+거/어(확정법 선어말 어미)+니와(연결 어미)’가 어미로 굳어진 것이다. ‘-니’와 ‘와’가 결합한 것이 구조적으로 특이한데, 연결 어미 뒤에 조사가 결합한 것은 ‘이실ᄉᆡ니’에서도 보인다. ‘ᄃᆞᆫ니려니와’는 ‘行’을 번역한 것이다. 『소학언해』(3:5ㄱ)에도 ‘ᄃᆞᆫ니려니와’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의 ‘行’은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의 원문의 첫머리가 ‘言忠信’으로 시작하지만, 원전인 『논어』에는 이 앞에 본래 ‘子張問行 子曰’이 적혀 있다. ‘子張問行’은 ‘자장(子張)이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여쭈었다.’란 의미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달(達)함을 묻는 뜻과 같다. 자장(子張)의 뜻은 바깥에서 (도가) 행해짐을 얻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니, …(猶問達之意也 子張意在得行於外 故夫子反於身而言之 …)” 여기서 ‘行’을 ‘達’과 같은 것으로 본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行’은 ‘다님’이 아니라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짐(다스려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行’을 ‘ᄃᆞᆫ니-’로 번역한 것이 오역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번역자가 ‘行’의 뜻을 알면서도 ‘行’의 대표훈(代表訓)을 번역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 졍셩도며 주009)
졍셩도ᄋᆡ며:
정성스러우며. 졍셩(精誠)+도ᄋᆡ(형용사 파생 접미사)+며(연결 어미). ‘-도ᄋᆡ-’는 형용사 파생 접미사 ‘-ᄃᆞ외-’의 이표기이다.
믿비 아니고 뎍을 둗거이 주010)
둗거이:
도탑게. 둗겁-[厚]+이(부사형 어미). 동일한 ‘厚’를 ‘두터이’로 번역한 바로 앞의 예와 대조적이다. 두 낱말이 의미가 같음을 보여 준다.
며 공경히 아니면 비록 주011)
내:
자기의. 나[我]+ㅣ(관형격 조사). 중세 국어에서는 ‘·내(거성)’는 주격 형태이고 ‘내(평성)’는 관형격 형태였다. ‘내’가 이 책에서도 평성으로 나타나고 『소학언해』(2:44ㄱ)에서도 평성으로 나타난다. 한편 1인칭 겸칭의 ‘저’는 19세기 후반기에 출현한다. 이두(吏讀)에서는 ‘矣身’이 ‘나’의 겸칭으로 쓰였다. 여기의 ‘내’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내 ᄀᆞ올와 ᄆᆞᅀᆞᆯ힌ᄃᆞᆯ ᄃᆞᆫ니리아’가 『소학언해』(2:59ㄱ)에서는 ‘내’가 없는 ‘비록 ᄆᆞᄋᆞᆯ히나 ᄃᆞᆫ니랴’로 바뀌었다. ‘내’가 아닌 ‘제(=자기의)’가 쓰일 수도 있는 위치이다.
올와 주012)
ᄀᆞ올와:
고을과. ᄀᆞ올[州]+과(접속 조사). ‘과’의 ‘ㄱ’이 ‘ㄹ’ 뒤에서 약화되어 유성 성문 마찰음 [ɦ]으로 실현된 것을 ‘ㅇ’으로 표기한 것이다. ᄀᆞᄫᆞᆯ〉ᄀᆞ올〉고을. 그런데 중세 국어의 ‘ᄀᆞ올ㅎ’은 ㅎ말음체언이었다. ¶①邑은 올히오 聚落 히라〈월인석보 12:20ㄱ〉 ②鄕 올히오 黨 서르 사괴 무리라〈금강경삼가해 4:22ㄴ〉 ③ 額牓혼 즈믄 집 올히오〈두시언해 중간본 13:5ㄱ〉. 다음 예문에서 ‘ᄀᆞ올콰’가 확인된다. ¶도 자바 나가 믈 기러 겨지븨 道 닷니 올콰 나라쾌 일더라〈내훈 2:124ㄱ〉. 그렇다면 이 책의 ‘ᄀᆞ올와’는 일반적인 표기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책의 ‘비록 내 ᄀᆞ올와 ᄆᆞᅀᆞᆯ힌들’이 『소학언해』(3:5ㄱ)에서는 ‘비록 ᄆᆞᄋᆞᆯ히나’로 적혀 있다. 다음 예에서는 ‘ᄀᆞ올’의 발달형인 ‘고을’이 보인다. ¶①州 큰 고을 쥬〈유합 상 19ㄱ〉 ②州 고을 ᄌᆔ〈광주 천자문 26ㄴ〉. 한편 중세 국어의 ‘올ㅎ’은 ‘谷’을 뜻하는 ‘골’과 구별된다.
힌 주013)
ᄆᆞᅀᆞᆯ힌ᄃᆞᆯ:
마을인들. ᄆᆞᅀᆞᆯㅎ[里](ㅎ말음체언)+인ᄃᆞᆯ(보조사). ‘인ᄃᆞᆯ’은 ‘이-(서술격 조사 어간)+ㄴᄃᆞᆯ(연결 어미)’이 서술 기능을 상실하고 조사로 굳어진 것이다.
니리아 주014)
ᄃᆞᆫ니리아:
다니겠는가. ᄃᆞᆫ니-[行]+리(추측 선어말 어미)+가(의문 종결 어미). ‘-가’의 ‘ㄱ’이 ‘-리-’ 뒤에서 약화하여 유성 성문 마찰음 [ɦ]으로 실현된 것을 ‘ㅇ’으로 표기한 것이다. ‘ㄱ’은 서술격 조사 어간 ‘이-’ 뒤에서 약화되는데, ‘-리-’의 기원적 구조가 ‘ㄹ(관형사형 어미)+이(의존 명사)+이-(서술격 조사 어간)’이다. ‘ᄃᆞᆫ니리아’는 『소학언해』(3:5ㄱ)에 ‘ᄃᆞᆫ니랴’로 적혀 있다. 이 ‘ᄃᆞᆫ니-’의 의미에 대하여는 바로 앞의 ‘ᄃᆞᆫ니려니와’ 항을 참조할 것.
Ⓒ 언해 | 찬집청 / 1518년(중종 13) 월 일

말을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며 행실을 도탑게 하고 공경하면, 비록 오랑캐 나라라 하더라도 도가 행해질 수 있겠지만, 말을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지 않고 행실을 도탑게 하고 공경스럽게 하지 않으면, 비록 자기가 사는 고을과 나라인들 도가 행해지겠는가?
〈해설〉 출전 : 논어 위령공(衛靈公). 주석(소학집설) : 진씨(陳氏)가 말하였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함을 충(忠)이라 하고, 진실되게 함을 신(信)이라 한다. 독(篤)은 후(厚)함이다. 만(蠻)은 남만(南蠻)이고 맥(貊)은 북적(北狄)이다. 25가호를 리(里)라 한다.”(陳氏曰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 篤厚也 蠻南蠻 貊北狄 二千五家爲里). 진씨(陳氏)는 『소학증주(小學增註)』를 저술한 진선(陳選)으로 보인다.
Ⓒ 역자 | 이유기 / 2020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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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말ᄉᆞᄆᆞᆯ:말을. 말ᄉᆞᆷ[辭]+ᄋᆞᆯ. 중세 국어와 근대 국어의 ‘말, 말ᄊᆞᆷ(말ᄉᆞᆷ)’은 모두 [+높임]과 [-높임] 및 [+겸양]과 [-겸양]의 상황에 두루 쓰였다.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는 각자병서가 쓰인 ‘말’으로 나타난다. ¶①語는 말미라〈훈민정음언해 1ㄱ〉 ②이 말 眞實야 決定히 虛티 아니니라〈월인석보 10:122ㄴ〉 ③다시 말 펴 다시 觀體 標호〈선종영가집언해 하 31ㄱ〉 ④阿難이 비록  이 말 듣와〈능엄경언해 1:102ㄴ〉 ⑤桃源ㅅ 나그내 더브러 말 傳라〈두시언해 초간본 8:61ㄱ〉.
주002)
졍셔ᇰᄃᆞ외오:정성스럽고. 졍셔ᇰ(精誠)+ᄃᆞ외(형용사 파생 접미사)+고(연결 어미). ‘-고’의 ‘ㄱ’이 이중 모음의 음절 부음 [j] 뒤에서 유성 성문 마찰음 [ɦ]으로 약화된 것을 ‘ㅇ’으로 표기한 것이다. ‘졍셔ᇰ’ 중 ‘셔ᇰ’에는 ‘ㆁ’이 쓰였으나, ‘졍’에는 ‘ㅇ’이 쓰였다. 바로 앞 면(4:5ㄱ)의 ‘공경, 졍셩’에도 ‘ㅇ’이 쓰였다. ‘-ᄃᆞ외-’에 대하여는 앞 면(4:5ㄱ)의 ‘졍셩도이’를 참조할 것. ‘말ᄉᆞᄆᆞᆯ 졍셔ᇰᄃᆞ외오 믿비 ᄒᆞ며’가 『소학언해』(3:5ㄱ)에서는 ‘말ᄉᆞᆷ이 듀ᇰ후코 믿브며’로 바뀌었다.
주003)
믿비:미쁘게. 미덥게. 믿-[信]+브(형용사 파생 접미사)+이(부사형 어미).
주004)
ᄒᆡᇰ뎍:‘行蹟(행적)’으로 보인다. ‘ᄒᆡᇰ뎍을 두터이 ᄒᆞ며’가 『소학언해』(3:5ㄱ)에서는 ‘ᄒᆡᇰ실이 두텁고’로 바뀌었다.
주005)
두터이:도탑게. 두텁-[厚]+이(부사형 어미). ‘두터비[蟾], 두ᄐᆡ/두틔(=두께)’ 등으로 보아 어간 ‘둩-[厚]’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둗겁다’와 ‘두텁다’는 동의어였다. 바로 아래에서 ‘厚’를 ‘둗거이’로 번역한 예가 나온다.
주006)
공경:공경(恭敬). 두 글자의 받침이 ‘ㆁ’이 아니라 ‘ㅇ’으로 적혀 있다.
주007)
되나라히라도:오랑캐 나라이라도. 되[蠻貊]+나라ㅎ[國]+이라도(보조사). ‘이라도’의 기원적 구조는 ‘이-(서술격 조사 어간)+아(연결 어미)+도(보조사)’이다. 서술격 조사 어간 ‘이-’ 뒤에서 연결 어미 ‘-아’는 ‘-라’로 교체되는데, 이 현상은 ‘이-’의 기원이 ‘일-’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비록 되나라히라도’의 원문은 ‘雖蠻貊之邦이라두’인데, 보조사 ‘도’ 대신 ‘두’가 쓰인 것이 특이하다. ‘ㅗ’ 대신 ‘ㅜ’가 쓰인 것인데, 현대 경기도 방언의 특징이 이 시기 문헌에서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①雖婢妾이라두 衣服飮食을 必後長者ㅣ니라〈번역소학 3:17ㄴ〉 ②雖之夷狄이라두〈번역소학 4:5ㄱ〉 ③비록 바미라두 모로매 니러 옷 닙고〈번역소학 4:18ㄱ〉. ‘비록 되나라히라도’는 『소학언해』(3:5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주008)
ᄃᆞᆫ니려니와:다니려니와. ᄃᆞᆫ니-[行]+려니와(연결 어미). ‘-려니와’는 ‘리(선어말 어미)+거/어(확정법 선어말 어미)+니와(연결 어미)’가 어미로 굳어진 것이다. ‘-니’와 ‘와’가 결합한 것이 구조적으로 특이한데, 연결 어미 뒤에 조사가 결합한 것은 ‘이실ᄉᆡ니’에서도 보인다. ‘ᄃᆞᆫ니려니와’는 ‘行’을 번역한 것이다. 『소학언해』(3:5ㄱ)에도 ‘ᄃᆞᆫ니려니와’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의 ‘行’은 ‘도(道)’가 행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의 원문의 첫머리가 ‘言忠信’으로 시작하지만, 원전인 『논어』에는 이 앞에 본래 ‘子張問行 子曰’이 적혀 있다. ‘子張問行’은 ‘자장(子張)이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여쭈었다.’란 의미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이 대목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달(達)함을 묻는 뜻과 같다. 자장(子張)의 뜻은 바깥에서 (도가) 행해짐을 얻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니, …(猶問達之意也 子張意在得行於外 故夫子反於身而言之 …)” 여기서 ‘行’을 ‘達’과 같은 것으로 본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行’은 ‘다님’이 아니라 ‘치자(治者)의 포부가 행해짐(다스려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行’을 ‘ᄃᆞᆫ니-’로 번역한 것이 오역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번역자가 ‘行’의 뜻을 알면서도 ‘行’의 대표훈(代表訓)을 번역에 반영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009)
졍셩도ᄋᆡ며:정성스러우며. 졍셩(精誠)+도ᄋᆡ(형용사 파생 접미사)+며(연결 어미). ‘-도ᄋᆡ-’는 형용사 파생 접미사 ‘-ᄃᆞ외-’의 이표기이다.
주010)
둗거이:도탑게. 둗겁-[厚]+이(부사형 어미). 동일한 ‘厚’를 ‘두터이’로 번역한 바로 앞의 예와 대조적이다. 두 낱말이 의미가 같음을 보여 준다.
주011)
내:자기의. 나[我]+ㅣ(관형격 조사). 중세 국어에서는 ‘·내(거성)’는 주격 형태이고 ‘내(평성)’는 관형격 형태였다. ‘내’가 이 책에서도 평성으로 나타나고 『소학언해』(2:44ㄱ)에서도 평성으로 나타난다. 한편 1인칭 겸칭의 ‘저’는 19세기 후반기에 출현한다. 이두(吏讀)에서는 ‘矣身’이 ‘나’의 겸칭으로 쓰였다. 여기의 ‘내’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내 ᄀᆞ올와 ᄆᆞᅀᆞᆯ힌ᄃᆞᆯ ᄃᆞᆫ니리아’가 『소학언해』(2:59ㄱ)에서는 ‘내’가 없는 ‘비록 ᄆᆞᄋᆞᆯ히나 ᄃᆞᆫ니랴’로 바뀌었다. ‘내’가 아닌 ‘제(=자기의)’가 쓰일 수도 있는 위치이다.
주012)
ᄀᆞ올와:고을과. ᄀᆞ올[州]+과(접속 조사). ‘과’의 ‘ㄱ’이 ‘ㄹ’ 뒤에서 약화되어 유성 성문 마찰음 [ɦ]으로 실현된 것을 ‘ㅇ’으로 표기한 것이다. ᄀᆞᄫᆞᆯ〉ᄀᆞ올〉고을. 그런데 중세 국어의 ‘ᄀᆞ올ㅎ’은 ㅎ말음체언이었다. ¶①邑은 올히오 聚落 히라〈월인석보 12:20ㄱ〉 ②鄕 올히오 黨 서르 사괴 무리라〈금강경삼가해 4:22ㄴ〉 ③ 額牓혼 즈믄 집 올히오〈두시언해 중간본 13:5ㄱ〉. 다음 예문에서 ‘ᄀᆞ올콰’가 확인된다. ¶도 자바 나가 믈 기러 겨지븨 道 닷니 올콰 나라쾌 일더라〈내훈 2:124ㄱ〉. 그렇다면 이 책의 ‘ᄀᆞ올와’는 일반적인 표기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책의 ‘비록 내 ᄀᆞ올와 ᄆᆞᅀᆞᆯ힌들’이 『소학언해』(3:5ㄱ)에서는 ‘비록 ᄆᆞᄋᆞᆯ히나’로 적혀 있다. 다음 예에서는 ‘ᄀᆞ올’의 발달형인 ‘고을’이 보인다. ¶①州 큰 고을 쥬〈유합 상 19ㄱ〉 ②州 고을 ᄌᆔ〈광주 천자문 26ㄴ〉. 한편 중세 국어의 ‘올ㅎ’은 ‘谷’을 뜻하는 ‘골’과 구별된다.
주013)
ᄆᆞᅀᆞᆯ힌ᄃᆞᆯ:마을인들. ᄆᆞᅀᆞᆯㅎ[里](ㅎ말음체언)+인ᄃᆞᆯ(보조사). ‘인ᄃᆞᆯ’은 ‘이-(서술격 조사 어간)+ㄴᄃᆞᆯ(연결 어미)’이 서술 기능을 상실하고 조사로 굳어진 것이다.
주014)
ᄃᆞᆫ니리아:다니겠는가. ᄃᆞᆫ니-[行]+리(추측 선어말 어미)+가(의문 종결 어미). ‘-가’의 ‘ㄱ’이 ‘-리-’ 뒤에서 약화하여 유성 성문 마찰음 [ɦ]으로 실현된 것을 ‘ㅇ’으로 표기한 것이다. ‘ㄱ’은 서술격 조사 어간 ‘이-’ 뒤에서 약화되는데, ‘-리-’의 기원적 구조가 ‘ㄹ(관형사형 어미)+이(의존 명사)+이-(서술격 조사 어간)’이다. ‘ᄃᆞᆫ니리아’는 『소학언해』(3:5ㄱ)에 ‘ᄃᆞᆫ니랴’로 적혀 있다. 이 ‘ᄃᆞᆫ니-’의 의미에 대하여는 바로 앞의 ‘ᄃᆞᆫ니려니와’ 항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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