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충신도 권1)
  •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제1권 주해
  • 충신도 제1권
  • 여물부수(汝岉赴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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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부수(汝岉赴水)


1:42ㄱ

汝岉赴水

1:42ㄴ

牧使金汝岉 주001)
김여물(金汝岉):
(1548~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사수(士秀)이며, 호는 피구자(披裘子)ㆍ외암(畏菴)이다. 시호는 장의(壯毅)인데 평산 출생이다. 1567년(명종 22) 20세로 진사(進士)가 되고, 1577년(선조 10)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병조낭관(兵曹郞官)ㆍ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1591년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특명으로 신립(申砬)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 새재[鳥嶺]의 지세를 이용하여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신립이 이를 듣지 않고, 충주 달천(達川)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쳤다가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彈琴臺)에서 신립과 함께 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京都人倜儻有才勇壬辰倭亂從申砬背㺚川而陣汝岉知必敗爲書附其子瑬曰我則已許死國一家宜赴 行在及賊迫之㺚川我軍奔潰申砬回馬呼汝岉曰令公 주002)
영공(令公):
영감(令監). 대화문에서는 2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求免乎汝岉笑曰我豈惜死之人乎馳至彈琴臺與砬殺賊數十俱赴水而死今 上朝旌門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목 김여믈은 셔울 사이니 훤츨고 주003)
훤츨고:
인물이 뛰어나고.
죄며 주004)
죄며:
조[才] + -ㅣ며(접속 조사). 재주와.
주005)
(勇 ):
용기(勇氣).
이 잇더라 임진왜난의 신립 주006)
신립(申砬):
(1546(명종 1)~1592(선조 25)) 조선 중기 때 장군.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22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ㆍ도총(都摠)ㆍ도사(都事)ㆍ경력(經歷)을 거쳐 진주 판관(判官)이 되었다. 그 후 몇 가지 벼슬을 거쳐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여진의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는데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그가 몸소 나가서 그들을 도와 싸우니, 그 위세에 적은 도처에서 패전하고 도망갔다. 그는 즉시 두만강을 건너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 전승의 보고가 조정에 들어오자 함경 북병사(咸鏡北兵使)에 승진되었다. 이어서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都巡邊使)에 임명되었다.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岉)을 데리고 갔다. 그는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워서 몸소 두 번이나 적진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적이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수십여 인을 죽이고, 두 사람이 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申砬’을 한글로 표기하면서 같은 대문 안에서 ‘신립’으로도 적고 ‘실닙’으로도 적고 있다. 그 중에서 ‘신립’은 한자음대로 적은 것이고, ‘실닙’은 발음을 따라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을 조차 달내 주007)
달내[㺚川]:
충주에 흐르는 내. 이 대문의 뒤에는 ‘달내’를 ‘달래’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모음 사이에서 ㄹㄹ과 ㄹㄴ이 혼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져 딘 텻니 주008)
딘 텻니:
진(陣)을 쳤더니.
여믈이 일 주009)
일:
반드시. 필연코.
패 줄 알고 유무 주010)
유무:
편지[書信].
야 그 아 뉴의게 브텨 주011)
브텨[附]:
〈글이나 물건을〉 부쳐.
닐오 나 셔 주012)
셔:
이미. 벌써. 이는 원래 ‘쎠’로 출발하였으나 15세기의 『능엄경 언해』(1462)에서 이미 ‘쎠’와 ‘셔’가 나란히 쓰이고 있다.
나라 죽기 허야시니 주013)
허야시니[許]:
기약하였으니.
일가 주014)
일가(一家):
가족. 식솔(食率).
감 주015)
상감(上監):
임금의 높임말.
가시  가라 얏더라 밋 도적이 달래예 다니 우리 나라 군이 라나 궤산 주016)
궤산(潰散):
군대가 싸움에 져서 흩어져 도망함.
거 실닙이  두혀 주017)
두혀:
두혀-[回] + -어(연결 어미). 돌이켜.
여믈을 블러 닐러 오 이 면려 다 주018)
다:
-[爲] + -다(주어가 2인칭 대명사일 때 쓰이는 의문법 어미). 하는가?
여믈이 웃고 로 내 엇디 죽기 앗길 주019)
앗길:
아낄[惜].
사이리오 고 탄금 주020)
탄금대(彈琴臺):
충북 충주시 북서쪽 4km 지점에 있는 명승지. 우륵이 즐겨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고 전하여진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왜장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싸워 전사한 전쟁터이다.
예 려가 닙과 더브러 도적을 스므나믄을 주기고  믈에 라드러 죽다 금 됴애 문 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여물부수 - 김여물이 물에 뛰어들다
목사(牧使)인 김여물(金汝岉)은 서울 사람인데, 인물이 뛰어나고 재주와 용기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을 따라 달천(㺚川)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지만, 김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편지를 써서 그의 아들 김유(金瑬) 주021)
김류(金瑬):
(1571~1648) 조선 중기의 문신. 김여물(金汝岉)의 아들이다. 인조 반정 때 정사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ㆍ좌의정ㆍ도체찰사ㆍ영의정 등을 역임하면서 인조 초ㆍ중반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에게 부쳤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으니, 가족은 〈난리에 도망 가지 말고〉 임금께서 가시는 곳[行在所]으로 가거라”고 하였다. 뒤미쳐 왜적이 달천(㺚川)에 다다르니, 우리 나라 군대는 흩어져 도망하므로 신립 장군은 말을 돌이켜 김여물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이곳을 벗어나려 하는가?”라고 하자, 김여물이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어찌 목숨을 아낄 사람이겠습니까?” 하고, 탄금대로 달려가 신립과 더불어 왜적 20여 명을 죽인 다음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지금의 임금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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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김여물(金汝岉):(1548~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사수(士秀)이며, 호는 피구자(披裘子)ㆍ외암(畏菴)이다. 시호는 장의(壯毅)인데 평산 출생이다. 1567년(명종 22) 20세로 진사(進士)가 되고, 1577년(선조 10)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병조낭관(兵曹郞官)ㆍ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1591년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특명으로 신립(申砬)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 새재[鳥嶺]의 지세를 이용하여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신립이 이를 듣지 않고, 충주 달천(達川)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쳤다가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彈琴臺)에서 신립과 함께 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002)
영공(令公):영감(令監). 대화문에서는 2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주003)
훤츨고:인물이 뛰어나고.
주004)
죄며:조[才] + -ㅣ며(접속 조사). 재주와.
주005)
(勇 ):용기(勇氣).
주006)
신립(申砬):(1546(명종 1)~1592(선조 25)) 조선 중기 때 장군.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22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ㆍ도총(都摠)ㆍ도사(都事)ㆍ경력(經歷)을 거쳐 진주 판관(判官)이 되었다. 그 후 몇 가지 벼슬을 거쳐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여진의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는데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그가 몸소 나가서 그들을 도와 싸우니, 그 위세에 적은 도처에서 패전하고 도망갔다. 그는 즉시 두만강을 건너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 전승의 보고가 조정에 들어오자 함경 북병사(咸鏡北兵使)에 승진되었다. 이어서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都巡邊使)에 임명되었다.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岉)을 데리고 갔다. 그는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워서 몸소 두 번이나 적진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적이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수십여 인을 죽이고, 두 사람이 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申砬’을 한글로 표기하면서 같은 대문 안에서 ‘신립’으로도 적고 ‘실닙’으로도 적고 있다. 그 중에서 ‘신립’은 한자음대로 적은 것이고, ‘실닙’은 발음을 따라 적은 것으로 보인다.
주007)
달내[㺚川]:충주에 흐르는 내. 이 대문의 뒤에는 ‘달내’를 ‘달래’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모음 사이에서 ㄹㄹ과 ㄹㄴ이 혼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주008)
딘 텻니:진(陣)을 쳤더니.
주009)
일:반드시. 필연코.
주010)
유무:편지[書信].
주011)
브텨[附]:〈글이나 물건을〉 부쳐.
주012)
셔:이미. 벌써. 이는 원래 ‘쎠’로 출발하였으나 15세기의 『능엄경 언해』(1462)에서 이미 ‘쎠’와 ‘셔’가 나란히 쓰이고 있다.
주013)
허야시니[許]:기약하였으니.
주014)
일가(一家):가족. 식솔(食率).
주015)
상감(上監):임금의 높임말.
주016)
궤산(潰散):군대가 싸움에 져서 흩어져 도망함.
주017)
두혀:두혀-[回] + -어(연결 어미). 돌이켜.
주018)
다:-[爲] + -다(주어가 2인칭 대명사일 때 쓰이는 의문법 어미). 하는가?
주019)
앗길:아낄[惜].
주020)
탄금대(彈琴臺):충북 충주시 북서쪽 4km 지점에 있는 명승지. 우륵이 즐겨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고 전하여진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왜장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싸워 전사한 전쟁터이다.
주021)
김류(金瑬):(1571~1648) 조선 중기의 문신. 김여물(金汝岉)의 아들이다. 인조 반정 때 정사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ㆍ좌의정ㆍ도체찰사ㆍ영의정 등을 역임하면서 인조 초ㆍ중반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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