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충렬 - 조헌의 충성과 절의
첨정 조헌(趙憲)은 김포현의 사람인데, 학식이 넓고 행실에 신의가 있으며, 몸소 경작(耕作)하여 부모를 봉양하니, 평생에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굳은 절개는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가 왔을 때 〈이들은 군대를 크게 출병하여 명나라를 쳐들어가겠다고 떠벌이니, 상하(上下)가 어찌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조헌이 옥천에서 백의(白衣)로 대궐에 나아가 왜노(倭奴)의 사신을 목 베어 죽이라고 청하였다〉 목을 베어 천자의 조정에 여쭙기를 요청하였다. 임진왜란에 미쳐서는 의병을 앞장서서 일으켜 청주의 왜적을 물리치고, 인하여 승장(僧將) 영규(靈珪)대사와 더불어 금산의 왜적을 물리치다가 군대가 패배하니, 종자(從者)가 달아나 피하라고 권하였지만, 조헌은 이르기를, “같이 싸우던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어찌 차마 내 혼자 살겠는가? 여기서 죽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하고, 웃고 앉아서 그의 아들
조완기(趙完基) 주036) 조완기(趙完基): (1570~1592) 의병장 조헌(趙憲)의 아들. 본관은 백천(白川)이고, 자는 덕공(德恭)이며, 호는 도곡(道谷)이다. 김포(金浦) 출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여 청주(淸州)에서 승장(僧將) 영규(靈圭)의 군사와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금산(錦山)의 적을 공격하다가 역습(逆襲)을 받아 순사(殉死)하였다. 적에게 주장(主將)으로 오인되어 그 시체도 거두지 못하였다고 한다.
와 부하의 선비들과 더불어 한 곳에서 함께 죽으니 호서(충청도) 사람으로서 울지 않는 이가 없고, 상복(喪服)을 입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 임금께서 이조참판을 추증하시고, 지금의 임금(광해군)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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