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서중 - 온달이 무리들에게 맹세하다
온달(溫達)은 평양부(平壤府) 사람이다. 고구려 25대
평강왕 주031) 평강왕(平岡王): 고구려 제26대 영양왕의 잘못.
(平岡王. 은 평강왕의 잘못)
의 작은 딸이 〈궁중에서 나와〉 스스로 짝을 찾아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북주(北周. 후주는 북주의 잘못)
의 무제(武帝) 주032) 북주(北周)ㆍ무제(武帝): 중국 북조(北朝)의 왕조(557~581). 서위(西魏)의 실권가인 우문태(宇文泰)가 죽고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뒤를 이었을 때, 그를 보좌한 우문각의 사촌 우문호가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이 왕조를 세웠다. 서위(西魏) 시대부터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 주의, 문벌(文閥) 주의를 배척하고 북족 존중(北族尊重)주의를 취하였으며, 소박(素朴) 주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제3대 무제(武帝) 때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화북(華北) 통일을 실현하고, 불교를 폐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하였다.
가 요동(遼東)에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분발해서 공격함으로 크게 이기니, 왕이
대형(大兄) 주033) 대형(大兄): 고구려 관명의 하나. 일명 ‘힐지(虺支)’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초기 관제에는 보이지 않으나 3세기말의 사서에서부터 나타나 후기의 관제에는 14관등 중 제7위를 점하고 있다. 대형은 태대형·조의두대형·소형·제형 등과 함께 ‘형(兄)’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형은 본래 연장자 또는 족장의 뜻을 지닌 말인데, 고구려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관직 체계 안에 편입되면서 그 지위에 따라 이와 같이 다양하게 분화,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대형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만이 고구려의 단위부대장인 말객(末客)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벼슬을 주었다. 뒤미처 26대
영양왕 주034) 영양왕(嬰陽王): (?~618) 고구려 제26대 임금. 25대 평강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그는 566년 태자로 책봉되어 25년 동안을 태자로 생활하다가, 590년 왕위에 올라 618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586년 수도를 평양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많은 변동이 있었다.
(嬰陽王. 평왕은 영양왕의 잘못)
이 즉위하니 온달이 여쭈어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의 한강(漢江) 이북 땅을 잘라서 자기들의 군ㆍ현(郡縣)으로 삼았으니, 원하건대 대왕께서 저를 불초하다고 보지 마시고 병사를 주어 쳐들어가게 하신다면 반드시 우리의 땅을 다시 가져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셨다. 온달이 길을 출발할 때
맹세 주035) 맹세(盟誓): 바로 앞 장에서는 ‘셔’로 표기되었다.
하여 이르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 하고는 드디어 신라군과 더불어
아조성(阿朝城) 주036) 아조성(阿朝城): 한문 원문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삼국사기』백제본기 책계왕(責稽王)에는 ‘아차성(阿且城)’으로 나온다.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은 바 되어 전사하였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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