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충신도 권1)
  •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제1권 주해
  • 충신도 제1권
  • 춘명전성(椿命全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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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명전성(椿命全城)


1:25ㄱ

椿命全城

1:25ㄴ

崔椿命 주001)
최춘명(崔椿命):
(?~1250) 고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후손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온화하며 절조가 있었다. 고종 18년(1231) 자주 부사(慈州副使)로 있을 때, 몽고 군사가 고을을 포위하자 향리와 백성들을 지휘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 원수 살리타이[撒禮塔]가 힐책하자 나라에서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항복을 설득하였지만 성문을 닫은 채 응대하지 않았다.
慈山郡 주002)
자산군(慈山郡):
본래 고려의 문성군(文城郡)이었는데, 939년(태조 22)에 태안주(太安州)로 고치고, 983년(성종 2)에 자주방어사(慈州防禦使)를 두었다가, 1278년(충렬왕 4) 지군사(知郡事)로 강등하였다. 그 뒤 1413년(태종 13) 자산군이 되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이 고을 사람이 내시(內侍) 김계경(金季敬)을 죽였으므로 군(郡)을 폐하고 이웃 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1) 다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자산군이 되었다가, 1908년 평안남도 순천군에 병합되어 자산면이 되었다. 고려 때에 이곳은 거란과 몽고병 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人爲副使 주003)
부사(副使):
고려 시대의 관직. 사(使)의 부직(副職)이다. 경직(京職)과 외직(外職) 등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있었다. 품계와 정원, 연혁 등은 일정하지 않고 관서에 따라 다르다.
蒙古兵圍州固守不下王患蒙帥詰責 주004)
힐책(詰責):
잘못된 점을 따져 나무람.
遣人諭降椿命閉門不對淮安公 주005)
회안공(淮安公):
(?~1234(고종 21)) 고려 후기의 왕족. 이름은 정(侹)이다. 개성 왕씨(開城王氏)로 아버지는 영인후 진(寧仁侯 稹)이며, 어머니는 명종의 딸인 연희궁주(延禧宮主)이다. 신종의 딸 경녕궁주(敬寧宮主)와 혼인하고 회안공에 봉하여졌다.
侹遣大集成 주006)
대집성(大集成):
(?~1236년(고종 23)) 태집성(太集成)이라고도 하며, 고려로 귀화한 발해(渤海) 왕족의 후손으로 영순 태씨(永順太氏)의 시조이다. 고종 때 대장군,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사위는 무신 집권자 최이(崔怡)와 고종 때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주숙(周肅)이다. 최이가 고종에게 바친 어련(御輦 : 국왕의 수레)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고, 강화천도를 반대하는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冲)의 처단을 건의하는 등 최이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였다.
諭降椿命使左右射之集成譖於崔怡怡遣李百全 주007)
이백전(李百全):
고려 고종 21년(1234) 7월에 고종의 어의(御衣)를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의 가궐(假闕)에 봉안(奉安)한 내시(內侍)이다.
將斬之蒙人問是何人百全曰慈州守也蒙人曰此人於我雖逆命在爾爲忠臣 주008)
충신(忠臣):
충성을 다하는 신하.
我且不殺爾殺全城 주009)
전성(全城):
성을 보전(保全)함.
忠臣可乎固請釋之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최츈명은 산군 사이라 부 되엿더니 몽고병이 고을  주010)
:
-[圍] + -아(종속적 연결 어미). 둘러싸므로. 포위하므로.
구디 주011)
구디:
굳-[固] + -이(부사 접미사). 굳이. 단단히.
디킈여 항복 아니더니 왕이 몽쟝 주012)
몽쟝:
몽고군의 장수. 한문 원문에 ‘蒙帥(몽수)’로 기록된 것을 보아 몽고의 으뜸 장수를 가리킨다.
의 힐호믈 시름야 사 보내야 항라 니대 츈명이 문 닫고 답 아니터니 회안공 뎡이 대집셩을 보내야 항라 주013)
항라:
항복(降伏)하라.
니대 츈명이 좌우로 여곰 니 주014)
니:
쏘니[射].
집셩이 최이 주015)
최이(崔怡):
(?~1249(고종 36)) 고려 무신 정권기의 실권자. 충헌의 아들로서 1219년(고종 6) 추밀원 부사였을 때 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집권했다. 집권 후 우선 동생 향(珦)과 그 추종 세력 등 반대파를 제거해 자신의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아버지가 축적한 보화를 왕께 바치고 점탈한 공사전민(公私田民)은 주인에게 되돌려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는 대신 깨끗한 선비를 많이 등용해 인망을 얻기에도 노력했다. 무력정치의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1249년 최이가 죽자 아들 항(抗)이 3대 집정을 세습했다. 시호는 광렬(匡烈)이다.
의게 소야 이 니젼을 보내야 쟝 목 버히려 거 몽사 주016)
몽사[蒙人]:
몽고 사람.
무되 주017)
무되:
묻-[問] + -되(설명법 어미). 묻되. 묻기를.
이 엇던 사고 젼이 오 이 고을 원니라 주018)
원니라:
원(員) + -이라(서술격 조사). 〈고을의〉 수령(守令)이다. ‘원니라’는 ‘원이라’의 중철 표기이다.
니 몽인이 오 이 사이 내게 비록 역명 주019)
역명(逆命):
명령을 어김.
나 네게 이셔 주020)
이셔:
이시-[有] + -어(연결 어미) + -(보조사). 있어서는.
튱신이 되여시니 나도  아니 주기거 네 젼셩 튱신을 주기미 가냐 코 구디 쳥야 노니라 주021)
노니라:
놓-[放] + -니라(평서법 어미). 놓아주었다. 석방하였다.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춘명전성 - 최춘명이 성을 온전히 지키다
최춘명(崔椿命)은 평안남도 자산군(慈山郡) 사람이다. 부사(副使)의 관직에 있을 때 몽고 군대가 고을을 포위하였으나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몽고의 원수(元帥)가 힐책한 것을 걱정하다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최춘명에게〉 설득하였지만 최춘명은 성문을 닫은 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이 대집성(大集成)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설득하였으나 최춘명은 도리어 좌우 부하들로 하여금 그를 쏘게 하니, 대집성은 최이(崔怡)를 찾아가 〈최춘명을 죽일 것을〉 참소 주022)
참소(讒訴):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하므로 최이는 내시(內侍) 이백전(李百全)을 보내어 장차 최춘명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러자 몽고인 관리가 “이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이백전이 이르기를, “이 고을의 수령입니다.”라고 하니, 몽고인 관리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비록 우리에게는 명령을 거역한 사람이지만 너희들에게 있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나 또한 죽이지 않을 것이거든, 너희들이 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고, 굳이 요청하여 석방하였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원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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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최춘명(崔椿命):(?~1250) 고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후손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온화하며 절조가 있었다. 고종 18년(1231) 자주 부사(慈州副使)로 있을 때, 몽고 군사가 고을을 포위하자 향리와 백성들을 지휘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 원수 살리타이[撒禮塔]가 힐책하자 나라에서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항복을 설득하였지만 성문을 닫은 채 응대하지 않았다.
주002)
자산군(慈山郡):본래 고려의 문성군(文城郡)이었는데, 939년(태조 22)에 태안주(太安州)로 고치고, 983년(성종 2)에 자주방어사(慈州防禦使)를 두었다가, 1278년(충렬왕 4) 지군사(知郡事)로 강등하였다. 그 뒤 1413년(태종 13) 자산군이 되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이 고을 사람이 내시(內侍) 김계경(金季敬)을 죽였으므로 군(郡)을 폐하고 이웃 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1) 다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자산군이 되었다가, 1908년 평안남도 순천군에 병합되어 자산면이 되었다. 고려 때에 이곳은 거란과 몽고병 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주003)
부사(副使):고려 시대의 관직. 사(使)의 부직(副職)이다. 경직(京職)과 외직(外職) 등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있었다. 품계와 정원, 연혁 등은 일정하지 않고 관서에 따라 다르다.
주004)
힐책(詰責):잘못된 점을 따져 나무람.
주005)
회안공(淮安公):(?~1234(고종 21)) 고려 후기의 왕족. 이름은 정(侹)이다. 개성 왕씨(開城王氏)로 아버지는 영인후 진(寧仁侯 稹)이며, 어머니는 명종의 딸인 연희궁주(延禧宮主)이다. 신종의 딸 경녕궁주(敬寧宮主)와 혼인하고 회안공에 봉하여졌다.
주006)
대집성(大集成):(?~1236년(고종 23)) 태집성(太集成)이라고도 하며, 고려로 귀화한 발해(渤海) 왕족의 후손으로 영순 태씨(永順太氏)의 시조이다. 고종 때 대장군, 어사대부(御史大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사위는 무신 집권자 최이(崔怡)와 고종 때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주숙(周肅)이다. 최이가 고종에게 바친 어련(御輦 : 국왕의 수레)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고, 강화천도를 반대하는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冲)의 처단을 건의하는 등 최이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주007)
이백전(李百全):고려 고종 21년(1234) 7월에 고종의 어의(御衣)를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의 가궐(假闕)에 봉안(奉安)한 내시(內侍)이다.
주008)
충신(忠臣):충성을 다하는 신하.
주009)
전성(全城):성을 보전(保全)함.
주010)
:-[圍] + -아(종속적 연결 어미). 둘러싸므로. 포위하므로.
주011)
구디:굳-[固] + -이(부사 접미사). 굳이. 단단히.
주012)
몽쟝:몽고군의 장수. 한문 원문에 ‘蒙帥(몽수)’로 기록된 것을 보아 몽고의 으뜸 장수를 가리킨다.
주013)
항라:항복(降伏)하라.
주014)
니:쏘니[射].
주015)
최이(崔怡):(?~1249(고종 36)) 고려 무신 정권기의 실권자. 충헌의 아들로서 1219년(고종 6) 추밀원 부사였을 때 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집권했다. 집권 후 우선 동생 향(珦)과 그 추종 세력 등 반대파를 제거해 자신의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아버지가 축적한 보화를 왕께 바치고 점탈한 공사전민(公私田民)은 주인에게 되돌려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는 대신 깨끗한 선비를 많이 등용해 인망을 얻기에도 노력했다. 무력정치의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1249년 최이가 죽자 아들 항(抗)이 3대 집정을 세습했다. 시호는 광렬(匡烈)이다.
주016)
몽사[蒙人]:몽고 사람.
주017)
무되:묻-[問] + -되(설명법 어미). 묻되. 묻기를.
주018)
원니라:원(員) + -이라(서술격 조사). 〈고을의〉 수령(守令)이다. ‘원니라’는 ‘원이라’의 중철 표기이다.
주019)
역명(逆命):명령을 어김.
주020)
이셔:이시-[有] + -어(연결 어미) + -(보조사). 있어서는.
주021)
노니라:놓-[放] + -니라(평서법 어미). 놓아주었다. 석방하였다.
주022)
참소(讒訴):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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