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충렬 - 고경명의 충성과 절의
참의(叅議)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 있는 왜적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아들
고인후(高因厚) 주028) 고인후(高因厚): 1561년(명종 16)~1592년(선조 2). 조선의 의병(義兵). 자는 선건(善健)이고, 호는 학봉(鶴峰)이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며, 고종후(高從厚)의 동생이다. 1577년(선조 10) 진사가 되고, 1589년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역임. 1592년 임진왜란 때 광주(光州)에 있다가 아버지가 군사를 모으자 종군, 수원에서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담양(潭陽)에 집결하여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선두에서 싸우다가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 사후(死後)에 예조 참의(禮曹参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와 고경명의 부하인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과 한가지로 순절하였다. 장남인
고종후(高從厚) 주029) 고종후(高從厚): (1554~1593)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도충(道冲)이며. 호는 준봉(準峰)이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경명(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싸웠고, 위급해진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성이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3부자(三父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는 원수를 갚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진주에 갔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처음에는 고경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산(錦山)의 산중에 몰래 매장해 두었다가 40여일 만에 처음으로 염습하였는데, 그 〈시신의〉 얼굴빛이 살아있는 듯하였다. 안장(安葬)하고 나니 긴 무지개가 무덤 옆에서 일어나 그 광채가 보통 때와는 다르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충분(忠憤)의 마음이 감동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명하시기를 정문을 세우게 하시고, 광주에다 단독의 사당을 세우게 하셔서 집 이름을 포충(褒忠)이라 내리셨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시고, 좌찬성을 추증하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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