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충신도 권1)
  •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제1권 주해
  • 충신도 제1권
  • 경명충렬(敬命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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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충렬(敬命忠烈)


1:37ㄱ

敬命忠烈

1:37ㄴ

叅議高敬命光州 주001)
광주(光州):
현 광주 광역시.
人壬辰倭亂首倡義兵擊錦山賊兵敗與子因厚幕下士柳彭老 주002)
유팽로(柳彭老):
(?~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고경명의 종사관으로 금산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安瑛同死長子 주003)
장자(長子):
맏아들.
從厚復讎起兵死於晉州 주004)
진주(晉州):
현 경상남도 진주시.
初收敬命屍潛瘞錦山山中四十餘日始歛[殮]顔色如生及葬長虹起於墓左光彩異常人謂忠憤 주005)
충분(忠憤):
충의(忠義)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한 마음.
所感 昭敬大王命旌閭 주006)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집이나 동네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던 일.
建專祀光州 賜額褒忠遣官致祭 贈左贊成 주007)
좌찬성(左贊成):
조선 시대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우찬성ㆍ좌참찬ㆍ우참찬과 함께 3의정을 보좌하면서 대소 국정에 참여하였다.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참의 주008)
참의(叅議):
조선 시대 육조(六曹)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직. 처음에는 각 조(이·호·예·병·형·공조)에 각 1명씩, 총 6명을 두었다. 1405년(태종 5) 각 조에 좌ㆍ우참의 2명씩 총 12명으로 증원하였다. 그러나 1434년(세종 16) 무신들을 배려하여 첨지중추부사 4명을 증치하는 대신 좌ㆍ우참의를 참의로 바꾸고, 정원은 1명으로 감원하였다. 지금의 차관보에 해당하며 각 조의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면서도 판서와 대등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고경명 주009)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의병장임.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霽峯)·태헌(笞軒)이며,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장흥이다.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1558년 문과에서도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이어 형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1560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추성관에서 창의하여 7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였으며, 금산에 모인 적을 공격하다 교전 중에 순절하였다.
은 광 사이니 임진왜난의 의병을 슈챵야 금산 도적글 티다가 패여 아 인후와 막하 주010)
막하(幕下):
지휘관이나 책임자가 거느리는 사람. 부하.
사 뉴노 안영 주011)
안영(安瑛):
(?~1592) 조선 시대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며. 남원(南原) 출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서울에 있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가는 길에 고경명(高敬命) 휘하의 의병에 가담, 활약하다가 금산 싸움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장악원 첨정에 추증되었다.
으로 가지로 죽다 댱 죵휘 원슈 주012)
원수(怨讐):
자기에게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갑려 주013)
갑려:
갚-[報] + -려(의도법 어미). 갚으려. ‘갑려’는 ‘갚려’의 중철 표기이다.
군을 닐와다 주014)
닐와다:
닐-[起] + -왇-(강세 접미사) + -아(연결 어미). 일으켜. 파생 동사 ‘닐왇-’이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는 ‘니르-’ 과 ‘니르왇-’의 두 가지 표기로 나타난다. ¶四兵 니르다 와 香姓엣 婆羅門 拘尸城에 브려(석보상절 23 : 53ㄱ). 平等  니르와다 류와 놀애로 讚嘆(석보상절 9 : 23ㄱ).
진 가 죽다 처엄의 경명의 주검을 거두워 금산 묏가온대 주015)
묏가온대:
뫼ㅎ[山] + ㅅ(사이시옷) + 가온대[中]. 산 가운데. ‘뫼ㅎ’은 ㅎ종성 체언이다. 사이시옷 앞에서 ㅎ종성이 소실되었다.
가만이 무덧더니 주016)
무덧더니:
묻었는데. 매장하였는데.
마 날 밧긔 주017)
마 날 밧긔:
사십 여일(四十餘日) 만에.
처엄으로 념습 주018)
염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
니 비치 주019)
비치:
[顔] + 빛[色] + -이(주격 조사). 얼굴빛이.
산 더라 영장 주020)
영장(永葬):
안장(安葬).
호매 긴 므지게 주021)
므지게:
무지개[虹].
무뎀 주022)
무뎀:
무덤. ‘무뎀’은 ‘무덤’의 오각으로 보인다. 이 문헌 전체에 빈번한 등장에도 ‘무뎀’으로 표기된 예는 여기가 유일하다.
녑픠셔 주023)
녑픠셔:
녚[側] + -의셔(처격 조사). 옆에서. ‘녑픠셔’는 중철 표기이다.
니러나 비치 슈샹니 주024)
슈샹니:
보통과 다르니. 기이하니.
사이 니로 튱분의 감동 배라 더라 쇼경대왕이 명샤 졍녀 시고 광다가 졔 주025)
졔:
졔-[祭] + -ㄹ(관형사형 어미). 제사지낼.
집을 셰시고 주026)
셰시고:
세우시고[建].
일홈 주027)
일홈:
이름[名].
을 포튱이라 시고 관원 보내샤 졔시고 증 좌찬셩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경명충렬 - 고경명의 충성과 절의
참의(叅議)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 있는 왜적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아들 고인후(高因厚) 주028)
고인후(高因厚):
1561년(명종 16)~1592년(선조 2). 조선의 의병(義兵). 자는 선건(善健)이고, 호는 학봉(鶴峰)이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며, 고종후(高從厚)의 동생이다. 1577년(선조 10) 진사가 되고, 1589년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역임. 1592년 임진왜란 때 광주(光州)에 있다가 아버지가 군사를 모으자 종군, 수원에서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담양(潭陽)에 집결하여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선두에서 싸우다가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 사후(死後)에 예조 참의(禮曹参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와 고경명의 부하인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과 한가지로 순절하였다. 장남인 고종후(高從厚) 주029)
고종후(高從厚):
(1554~1593)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도충(道冲)이며. 호는 준봉(準峰)이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경명(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싸웠고, 위급해진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성이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3부자(三父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는 원수를 갚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진주에 갔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처음에는 고경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산(錦山)의 산중에 몰래 매장해 두었다가 40여일 만에 처음으로 염습하였는데, 그 〈시신의〉 얼굴빛이 살아있는 듯하였다. 안장(安葬)하고 나니 긴 무지개가 무덤 옆에서 일어나 그 광채가 보통 때와는 다르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충분(忠憤)의 마음이 감동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명하시기를 정문을 세우게 하시고, 광주에다 단독의 사당을 세우게 하셔서 집 이름을 포충(褒忠)이라 내리셨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시고, 좌찬성을 추증하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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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광주(光州):현 광주 광역시.
주002)
유팽로(柳彭老):(?~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고경명의 종사관으로 금산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주003)
장자(長子):맏아들.
주004)
진주(晉州):현 경상남도 진주시.
주005)
충분(忠憤):충의(忠義)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한 마음.
주006)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집이나 동네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던 일.
주007)
좌찬성(左贊成):조선 시대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우찬성ㆍ좌참찬ㆍ우참찬과 함께 3의정을 보좌하면서 대소 국정에 참여하였다.
주008)
참의(叅議):조선 시대 육조(六曹)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직. 처음에는 각 조(이·호·예·병·형·공조)에 각 1명씩, 총 6명을 두었다. 1405년(태종 5) 각 조에 좌ㆍ우참의 2명씩 총 12명으로 증원하였다. 그러나 1434년(세종 16) 무신들을 배려하여 첨지중추부사 4명을 증치하는 대신 좌ㆍ우참의를 참의로 바꾸고, 정원은 1명으로 감원하였다. 지금의 차관보에 해당하며 각 조의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면서도 판서와 대등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주009)
고경명(高敬命):(1533~1592)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의병장임.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霽峯)·태헌(笞軒)이며,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장흥이다.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1558년 문과에서도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이어 형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1560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추성관에서 창의하여 7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였으며, 금산에 모인 적을 공격하다 교전 중에 순절하였다.
주010)
막하(幕下):지휘관이나 책임자가 거느리는 사람. 부하.
주011)
안영(安瑛):(?~1592) 조선 시대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며. 남원(南原) 출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서울에 있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가는 길에 고경명(高敬命) 휘하의 의병에 가담, 활약하다가 금산 싸움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장악원 첨정에 추증되었다.
주012)
원수(怨讐):자기에게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주013)
갑려:갚-[報] + -려(의도법 어미). 갚으려. ‘갑려’는 ‘갚려’의 중철 표기이다.
주014)
닐와다:닐-[起] + -왇-(강세 접미사) + -아(연결 어미). 일으켜. 파생 동사 ‘닐왇-’이 훈민정음 초기 문헌에는 ‘니르-’ 과 ‘니르왇-’의 두 가지 표기로 나타난다. ¶四兵 니르다 와 香姓엣 婆羅門 拘尸城에 브려(석보상절 23 : 53ㄱ). 平等  니르와다 류와 놀애로 讚嘆(석보상절 9 : 23ㄱ).
주015)
묏가온대:뫼ㅎ[山] + ㅅ(사이시옷) + 가온대[中]. 산 가운데. ‘뫼ㅎ’은 ㅎ종성 체언이다. 사이시옷 앞에서 ㅎ종성이 소실되었다.
주016)
무덧더니:묻었는데. 매장하였는데.
주017)
마 날 밧긔:사십 여일(四十餘日) 만에.
주018)
염습(殮襲):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
주019)
비치:[顔] + 빛[色] + -이(주격 조사). 얼굴빛이.
주020)
영장(永葬):안장(安葬).
주021)
므지게:무지개[虹].
주022)
무뎀:무덤. ‘무뎀’은 ‘무덤’의 오각으로 보인다. 이 문헌 전체에 빈번한 등장에도 ‘무뎀’으로 표기된 예는 여기가 유일하다.
주023)
녑픠셔:녚[側] + -의셔(처격 조사). 옆에서. ‘녑픠셔’는 중철 표기이다.
주024)
슈샹니:보통과 다르니. 기이하니.
주025)
졔:졔-[祭] + -ㄹ(관형사형 어미). 제사지낼.
주026)
셰시고:세우시고[建].
주027)
일홈:이름[名].
주028)
고인후(高因厚):1561년(명종 16)~1592년(선조 2). 조선의 의병(義兵). 자는 선건(善健)이고, 호는 학봉(鶴峰)이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며, 고종후(高從厚)의 동생이다. 1577년(선조 10) 진사가 되고, 1589년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역임. 1592년 임진왜란 때 광주(光州)에 있다가 아버지가 군사를 모으자 종군, 수원에서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담양(潭陽)에 집결하여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선두에서 싸우다가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 사후(死後)에 예조 참의(禮曹参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주029)
고종후(高從厚):(1554~1593)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도충(道冲)이며. 호는 준봉(準峰)이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경명(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싸웠고, 위급해진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성이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3부자(三父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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