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충신도 권1)
  •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제1권 주해
  • 충신도 제1권
  • 기원사의(期遠死義)
메뉴닫기 메뉴열기

기원사의(期遠死義)


1:87ㄱ

期遠死義

1:87ㄴ

行護軍 주001)
행호군(行護軍):
호군(護軍)의 벼슬을 말함. 앞에 붙은 ‘행(行)’은 조선 시대에, 관계(官階)는 높고 관직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쓰던 말이다. 호군(護軍)은 조선 시대 5위(五衛)에 속하는 정4품의 무관직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장군(將軍)을 호군(護軍)으로 개칭하였으나, 조선 건국 초에는 영(領)의 지휘관을 장군이라 하였다. 그 뒤 장군을 사마(司馬)라 칭하더니, 태종 3년(1403)에 호군(護軍)으로 다시 개칭되어 그대로 고정되었다.
鄭期遠 주002)
정기원(鄭期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사중(士重)이며, 호는 현산(見山)이다. 아버지는 별좌(別坐) 정상신(鄭象信)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예조 참판으로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남원에 갔다. 양원은 왜적이 성 가까이 근접하자 승전이 어렵다고 판단해 피신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서숙(庶叔) 정기생(鄭己生)에게 “도적이 이미 남원 십리 밖을 침범했으니 머지않아 포위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소자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비장한 편지를 어머니에게 올린 뒤, 왜군과 항쟁하다가 제장(諸將)과 함께 전사하였다. 양원이 조정에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전하자 선조는 예조 판서를 증직했고,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를 더하였다.
京都人丁酉秋爲楊總兵元接伴使 주003)
졉반사(接伴使):
예전에 외국의 사신(使臣)을 맞아 접대하는 관원을 이르던 말.
隨元入南原城中時倭賊充斥結陣 주004)
결진(結陣):
전투에서 진을 침.
城外巡察使 주005)
순찰사(巡察使):
조선 시대의 무관직. 전시에 두었던 임시직으로 대개 지방의 병권(兵權)을 가졌던 행정관이 이를 겸직하였다. 그 예로 임진왜란 때 정3품의 문관으로 광주 목사(光川牧使)였던 권율(權慄)이 전라도 순찰사를 겸직하여 왜군과 싸운 일을 들 수 있다. 이들 순찰사를 지휘하는 벼슬은 도순찰사(都巡察使)라 해서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한편, 각 도(道)의 군비 태세를 살피던 직책을 순찰사라고도 하였다. 이때에는 지방의 병권을 장악하였던 종2품의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겸직하였다.
調度使 주006)
조도사(調度使):
관직 이름. 임진왜란 때 어려워진 국가 재정이나 군량미를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조도관(調度官) 및 조도사(調度使) 등의 임시 직명(職名)을 두어 운영하였는데, 민간으로부터 부당하게 물자를 징발하는 등 폐해가 많았다.
皆出走元勸期遠避賊不聽乃修書付孼叔鄭己生 주007)
정기생(鄭己生):
정기원(鄭期遠)의 서숙(庶叔).
使傅于老母曰子爲國已許一死諸弟多矣願勿念子及城陷元突圍而出期遠爲賊所害今 上朝旌門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호군 뎡긔원은 셔울 사이니 뎡유  주008)
뎡유 :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가을에.
양총병 원 주009)
양총병원(楊總兵元):
총병의 직을 갖고 있는 양원(楊元)이라는 사람. 다음 장에서는 ‘총병 양원’으로 나온다.
의 접반 되여 원이 조차 남원셩듕의 드럳더니 주010)
드럳더니[入]:
들었더니. 받침에서 ㅅ, ㄷ의 혼기(混記)가 일어나 ‘드럿더니’를 ‘드럳더니’로 표기하고 있다.
시예 주011)
시예:
시(時) + -예(처격 조사). 그때에.
예 도적기 야 셩 받긔 주012)
받긔:
[外] + -의(처격 조사). 밖에. ‘밧긔’를 ‘받긔’로 적고 있다.
결딘니 슌찰 됴도 다 나 라나거 원이 긔원이 권야 도적글 피라 호 듣디 아니고 이에 글을 닫가 주013)
닫가:
-[修] + -아(연결 어미). 닦아. ‘닷가’를 ‘닫가’로 적고 있다.
주014)
글을 닫가:
이 구절은 한문 원문의 ‘수서(修書)’를 직역한 것인데, ‘수서’는 ‘편지 씀’을 뜻하는 말이다.
얼아자비 주015)
얼아자비:
할아버지의 서자(庶子)를 숙부(叔父)로서 이르는 말. 서숙(庶叔). 원문의 ‘얼숙(孼叔)’을 언해한 말이다.
뎡긔이 맏뎌 주016)
맏뎌:
-[付] + -이-(사동 접미사) + -어(연결 어미). 맡겨. 받침 ㅅ, ㄷ의 혼기로 ‘맛뎌’가 ‘맏뎌’로 표기되었다.
여곰 늘근 주017)
늘근[老]:
늙은.
어마님 뎐야 오  주018)
:
(子) + -(보조사). 소자(小子. 자기를 낮춘 1인칭 대명사)는.
나라흘 위야 이믜  번 죽기 허여시니 주019)
허야시니:
허-[許] + -야시-(완료 시상 선어말 어미) + -니(종속적 연결 어미). 허락하였으니.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하였으니.
모 아이 주020)
아이:
아[弟] + -ㅣ(주격 조사). 아우가. 15세기에 ‘제(弟)’를 가리키는 명사는 ‘아’였는데, 이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면 ‘아’는 ‘’으로 교체되었다. 따라서 ‘아’의 주격 형태는 ‘이’였으며, ㅿ의 소실로 ‘이’는 ‘아이’로 변하였다.
만니 주021)
만니:
만-[多] + -니(종속적 연결 어미). 많으니.
원컨대  렴 주022)
사념(思念):
근심하고 염려하는 등의 여러 가지 생각.
티 마쇼셔 믿 셩이 함호매 원이 인 주023)
인[圍]:
둘러싸인.
거 헤티고 주024)
헤티고:
헤치고. 깨뜨리고. ¶헤틸 파 : 破(신증 유합 하 : 59ㄱ).
나고 긔원이 도적긔 해 배 주025)
해 배:
해를 입는 바가. 죽는 바가.
되니라 금 샹됴애 졍문 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기원사의 - 정기원이 의를 위하여 죽다
행호군(行護軍)인 정기원(鄭期遠)은 서울 사람인데, 정기원은 정유년 가을에 명나라 총병(總兵) 주026)
총병(總兵):
명청(明淸) 시대, 군대를 통솔하고 한 지방을 지키던 벼슬. 오늘날의 군단장 급에 해당한다.
양원(楊元) 주027)
양원(楊元):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1597년 5월 8일 요동기병 3,000인을 이끌고 조선에 다시 응원군으로 참전, 총병 마귀의 휘하에 들어가 6월 18일부터 전라도 남원성에 부임해 성의 방비 강화에 힘썼다. 8월 13일부터 남원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 좌군의 공격으로 고립무원 속에서 농성전을 버텼으나 8월 15일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양원은 남원성을 겨우 탈출하였으나 패전의 죄를 추궁 당해 명군의 의해 처형당했다.
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양원을 따라 남원성(南原城)에 들어갔다. 그때에 많은 수의 왜적이 성 밖에 진을 치니 순찰사와 조도사가 모두 나가 달아나므로 양원이 정기원을 권하여 왜적을 피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편지를 써서 서숙(庶叔) 정기생(鄭己生)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노모(老母)께 전하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소자(小子)는 나라를 위하여 이미 한 번 죽기를 각오하였으며 아우가 모두 많으니, 원하옵기는 소자를 염려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곧 성이 함락되자 양원은 포위망을 헤쳐 나오고 정기원은 왜적에게 해(害)를 입어 죽었다. 지금의 임금께서는 정문을 내리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원본이미지
이 기사는 전체 2개의 원본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석
주001)
행호군(行護軍):호군(護軍)의 벼슬을 말함. 앞에 붙은 ‘행(行)’은 조선 시대에, 관계(官階)는 높고 관직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쓰던 말이다. 호군(護軍)은 조선 시대 5위(五衛)에 속하는 정4품의 무관직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장군(將軍)을 호군(護軍)으로 개칭하였으나, 조선 건국 초에는 영(領)의 지휘관을 장군이라 하였다. 그 뒤 장군을 사마(司馬)라 칭하더니, 태종 3년(1403)에 호군(護軍)으로 다시 개칭되어 그대로 고정되었다.
주002)
정기원(鄭期遠):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사중(士重)이며, 호는 현산(見山)이다. 아버지는 별좌(別坐) 정상신(鄭象信)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예조 참판으로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남원에 갔다. 양원은 왜적이 성 가까이 근접하자 승전이 어렵다고 판단해 피신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서숙(庶叔) 정기생(鄭己生)에게 “도적이 이미 남원 십리 밖을 침범했으니 머지않아 포위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소자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비장한 편지를 어머니에게 올린 뒤, 왜군과 항쟁하다가 제장(諸將)과 함께 전사하였다. 양원이 조정에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전하자 선조는 예조 판서를 증직했고,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를 더하였다.
주003)
졉반사(接伴使):예전에 외국의 사신(使臣)을 맞아 접대하는 관원을 이르던 말.
주004)
결진(結陣):전투에서 진을 침.
주005)
순찰사(巡察使):조선 시대의 무관직. 전시에 두었던 임시직으로 대개 지방의 병권(兵權)을 가졌던 행정관이 이를 겸직하였다. 그 예로 임진왜란 때 정3품의 문관으로 광주 목사(光川牧使)였던 권율(權慄)이 전라도 순찰사를 겸직하여 왜군과 싸운 일을 들 수 있다. 이들 순찰사를 지휘하는 벼슬은 도순찰사(都巡察使)라 해서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한편, 각 도(道)의 군비 태세를 살피던 직책을 순찰사라고도 하였다. 이때에는 지방의 병권을 장악하였던 종2품의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겸직하였다.
주006)
조도사(調度使):관직 이름. 임진왜란 때 어려워진 국가 재정이나 군량미를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조도관(調度官) 및 조도사(調度使) 등의 임시 직명(職名)을 두어 운영하였는데, 민간으로부터 부당하게 물자를 징발하는 등 폐해가 많았다.
주007)
정기생(鄭己生):정기원(鄭期遠)의 서숙(庶叔).
주008)
뎡유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가을에.
주009)
양총병원(楊總兵元):총병의 직을 갖고 있는 양원(楊元)이라는 사람. 다음 장에서는 ‘총병 양원’으로 나온다.
주010)
드럳더니[入]:들었더니. 받침에서 ㅅ, ㄷ의 혼기(混記)가 일어나 ‘드럿더니’를 ‘드럳더니’로 표기하고 있다.
주011)
시예:시(時) + -예(처격 조사). 그때에.
주012)
받긔:[外] + -의(처격 조사). 밖에. ‘밧긔’를 ‘받긔’로 적고 있다.
주013)
닫가:-[修] + -아(연결 어미). 닦아. ‘닷가’를 ‘닫가’로 적고 있다.
주014)
글을 닫가:이 구절은 한문 원문의 ‘수서(修書)’를 직역한 것인데, ‘수서’는 ‘편지 씀’을 뜻하는 말이다.
주015)
얼아자비:할아버지의 서자(庶子)를 숙부(叔父)로서 이르는 말. 서숙(庶叔). 원문의 ‘얼숙(孼叔)’을 언해한 말이다.
주016)
맏뎌:-[付] + -이-(사동 접미사) + -어(연결 어미). 맡겨. 받침 ㅅ, ㄷ의 혼기로 ‘맛뎌’가 ‘맏뎌’로 표기되었다.
주017)
늘근[老]:늙은.
주018)
:(子) + -(보조사). 소자(小子. 자기를 낮춘 1인칭 대명사)는.
주019)
허야시니:허-[許] + -야시-(완료 시상 선어말 어미) + -니(종속적 연결 어미). 허락하였으니.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하였으니.
주020)
아이:아[弟] + -ㅣ(주격 조사). 아우가. 15세기에 ‘제(弟)’를 가리키는 명사는 ‘아’였는데, 이에 모음의 조사가 연결되면 ‘아’는 ‘’으로 교체되었다. 따라서 ‘아’의 주격 형태는 ‘이’였으며, ㅿ의 소실로 ‘이’는 ‘아이’로 변하였다.
주021)
만니:만-[多] + -니(종속적 연결 어미). 많으니.
주022)
사념(思念):근심하고 염려하는 등의 여러 가지 생각.
주023)
인[圍]:둘러싸인.
주024)
헤티고:헤치고. 깨뜨리고. ¶헤틸 파 : 破(신증 유합 하 : 59ㄱ).
주025)
해 배:해를 입는 바가. 죽는 바가.
주026)
총병(總兵):명청(明淸) 시대, 군대를 통솔하고 한 지방을 지키던 벼슬. 오늘날의 군단장 급에 해당한다.
주027)
양원(楊元):명나라 장수.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1597년 5월 8일 요동기병 3,000인을 이끌고 조선에 다시 응원군으로 참전, 총병 마귀의 휘하에 들어가 6월 18일부터 전라도 남원성에 부임해 성의 방비 강화에 힘썼다. 8월 13일부터 남원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 좌군의 공격으로 고립무원 속에서 농성전을 버텼으나 8월 15일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양원은 남원성을 겨우 탈출하였으나 패전의 죄를 추궁 당해 명군의 의해 처형당했다.
책목차이전페이지다음페이지페이지상단이동글자확대글자축소다운로드의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