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충신도 권1)
  •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제1권 주해
  • 충신도 제1권
  • 상현충렬(象賢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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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충렬(象賢忠烈)


1:35ㄱ

象賢忠烈

1:35ㄴ

府使 주001)
부사(府使):
지방 행정 구역인 부(府)의 장관. 5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정원은 1명이다. 도호부사(都護府使)의 줄임말이기도 하지만 도호부는 부와는 다른 행정 구역이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사부(知事府)의 장관이다. 특히 조선 시대의 도호부사는 부사로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것도 역시 도호부의 사(使)로 보아야 할 것이다.
宋象賢 주002)
송상현(宋象賢):
(1551~1592) 본관 여산(礪山). 자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1570년(선조 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뒤 호조ㆍ예조ㆍ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발(鄭撥) 장군이 지키던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왜적이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 왜적들은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비켜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쓴 팻말을 동래성문 앞에 세우자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는 글을 내걸었다. 군관민이 합심하여 항전했으나 동래성이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충절에 탄복한 적장(敵將)은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이조판서ㆍ찬성이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京都人壬辰倭亂 주003)
임진왜란(壬辰倭亂):
조선 선조 25년(1592)부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東萊 주004)
동래(東萊):
부산광역시 동래 지역의 옛 지명.
府使守城力不能支手書數字於所把扇使從者傳於其父曰月暈孤城禦敵無策當此之時父子恩輕君臣義重云云城陷象賢整朝衣冠北望再拜 주005)
재배(再拜):
두 번 절함.
堅坐而死其妾亦死節 주006)
사절(死節):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죽기로써 절조를 지킴.
賊酋感其義收兩屍合葬而立標 주007)
입표(立標):
나무, 돌, 기 따위로 표를 세움.
時密陽人盧盖邦爲府敎授奉 聖廟 주008)
성묘(聖廟):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를 말함.
位版入城同死 昭敬大王贈吏曹判書 주009)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선 시대 육판서(六判書) 중의 하나이고,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로 정2품 관직이다. 아래로 이조참판(吏曹參判 : 從二品), 이조참의(吏曹參議 : 正三品 堂上)가 있다. 이조(吏曹)는 문관의 선임과 공훈 봉작(封爵), 관인(官人)의 성적 고사(考査), 포폄(褒貶)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이다.
今 上朝旌門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부 송샹현은 셔울 주010)
셔울:
서울[京]. 『용비어천가』에서만 ‘셔’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이니 임진왜난의 동 부 야 을 딕킈여 힘이 지당 주011)
지당:
감당. 지탱.
몯여 손조 주012)
손조:
손수. 15세기에는 ‘손’로 사용되다가 ㅿ의 소멸로 그 이후에는 ‘손조’와 ‘손소’가 공존하였고, 이 문헌에서도 두 형태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두어  주013)
두어 자:
두세 글자를.
쥐엿던 주014)
쥐엿던:
쥐-[握] + -엿-(완료 시상 선어말 어미) + -던(과거 시제 관형사형 어미). 〈손에〉 쥐었던.
부체예 주015)
부체예:
부채[扇]에.
조 사 주016)
조 사:
종자(從者).
으로 여곰 제 아븨게 주017)
아븨게:
아비[父] + -의게(여격 조사). 아버지에게. 명사 ‘아비’의 말음 ㅣ가 여격 조사 ‘-의게’ 앞에서 탈락하였다.
뎐여 닐오 모로 주018)
모로:
달무리[月暈].
티 인 외로온 셩의 도적 마글 주019)
마글:
막을[禦]. 방어할.
모 주020)
모책(謀策):
어떤 일을 처리하거나 모면하기 위하여 계책을 꾸밈.
이 업니 이 시졀의 당여 부의 은 고 주021)
부의 은 고:
부모 자식간의 은혜는 가볍고.
군신의 의 다 주022)
군신의 의 다:
임금과 신하간의 의리는 중(重)하다.
다 함 주023)
함성(陷城):
성을 함락함.
호매 샹현이 관 주024)
관대(冠帶):
관복(官服).
졍졔 주025)
정제(整齊):
정돈하여 가지런히 함.
고 븍녁흐로 주026)
븍녁흐로:
븍녘[北] + -으로(조격 조사). 북녘으로. 북쪽으로. ‘븍녘’의 말음 ㅋ을 ㄱ과 ㅎ으로 재음소화하여 표기하고 있다.
라며 고 구디 안자셔 주근대 그 주027)
쳡:
첩(妾).
이  졀여 도적의 쟝 주028)
쟝:
쟝슈(將帥) + -ㅣ(주격 조사). 장수(군사를 거느리고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그 의 감격여 두 주검을 거두워 합장 주029)
합장(合葬):
남편과 아내를 한 무덤에 묻는 경우를 말함.
고 닙표니라 그 저긔 밀양 사 노개방 주030)
노개방(盧盖邦):
동래 교수(東萊敎授)인 노개방은 동래 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밀양에 계시는 노모를 뵈러 갔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동래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동래로 돌아와 향교로 갔으나 이미 선성(先聖)의 위패를 동래성 안의 정원루(靖遠樓)로 옮겼으므로 통곡하고 동래성을 찾아갔다. 성문이 열리자 노개방은 곧장 위패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리고 위패를 모셔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져 왜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오매 노개방은 마침내 정원루에서 유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 고을 교 주031)
교:
교슈(敎授) + -ㅣ(주격 조사). 교수가. ‘교수(敎授)’는 조선 시대에 한성(漢城)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鄕校)에 파견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치던 종6품(從六品)의 관직. 사학에는 각각 2인의 교수를 정원으로 두었는데, 모두 13인으로 이루어진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들이 겸직(兼職)하였다.
되여 묘 위판 주032)
위판(位版):
위패(位牌. 신주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뫼와 주033)
뫼와:
뫼오-[陪] + -아(연결 어미). 모시어. 이 동사는 15세기에 ‘뫼시다’, ‘뫼다’의 두 형태로 사용되었다.
의 드러 가지로 주그니라 쇼대이  니조판셔시고 금 샹됴애 졍문 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상현충렬 - 송상현의 충성과 절의
부사(府使)인 송상현(宋象賢)은 서울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가 되어 성을 지켰으나 힘을 지탱하지 못하여, 자신이 쥐고 있던 부채에 손수 몇 자를 써서 종자(從者)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께 전하게 하니, 이르기를, “달무리같이 에워싼 외로운 성에 적군을 막을 대책이 없으니, 이런 때를 당해서 부자(父子)의 은혜는 가볍고, 군신(君臣)의 의리는 중합니다.”라고 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송상현은 관복을 바르게 갖추어 입고 북쪽을 향해 바라보며 두 번 절하고 나서 꼿꼿하게 앉은 채로 죽음을 당했다. 또한 송상현의 첩도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키니, 적의 장수가 그 의에 감격하여 송상현과 그 첩의 두 시신을 수습하여 합장(合葬)하고, 표(標)를 세워 표시하였다. 그때에 밀양 사람 노개방(盧盖邦)도 동래 고을의 교수(敎授)가 되어 문묘의 위패를 모시고 성에 들어가 한가지로 죽었다. 선조 임금께서 송상현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시고, 지금의 임금(광해군)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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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부사(府使):지방 행정 구역인 부(府)의 장관. 5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정원은 1명이다. 도호부사(都護府使)의 줄임말이기도 하지만 도호부는 부와는 다른 행정 구역이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사부(知事府)의 장관이다. 특히 조선 시대의 도호부사는 부사로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것도 역시 도호부의 사(使)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002)
송상현(宋象賢):(1551~1592) 본관 여산(礪山). 자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1570년(선조 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뒤 호조ㆍ예조ㆍ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발(鄭撥) 장군이 지키던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왜적이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 왜적들은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비켜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쓴 팻말을 동래성문 앞에 세우자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는 글을 내걸었다. 군관민이 합심하여 항전했으나 동래성이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충절에 탄복한 적장(敵將)은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이조판서ㆍ찬성이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주003)
임진왜란(壬辰倭亂):조선 선조 25년(1592)부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주004)
동래(東萊):부산광역시 동래 지역의 옛 지명.
주005)
재배(再拜):두 번 절함.
주006)
사절(死節):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죽기로써 절조를 지킴.
주007)
입표(立標):나무, 돌, 기 따위로 표를 세움.
주008)
성묘(聖廟):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를 말함.
주009)
이조판서(吏曹判書):조선 시대 육판서(六判書) 중의 하나이고,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로 정2품 관직이다. 아래로 이조참판(吏曹參判 : 從二品), 이조참의(吏曹參議 : 正三品 堂上)가 있다. 이조(吏曹)는 문관의 선임과 공훈 봉작(封爵), 관인(官人)의 성적 고사(考査), 포폄(褒貶)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이다.
주010)
셔울:서울[京]. 『용비어천가』에서만 ‘셔’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주011)
지당:감당. 지탱.
주012)
손조:손수. 15세기에는 ‘손’로 사용되다가 ㅿ의 소멸로 그 이후에는 ‘손조’와 ‘손소’가 공존하였고, 이 문헌에서도 두 형태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주013)
두어 자:두세 글자를.
주014)
쥐엿던:쥐-[握] + -엿-(완료 시상 선어말 어미) + -던(과거 시제 관형사형 어미). 〈손에〉 쥐었던.
주015)
부체예:부채[扇]에.
주016)
조 사:종자(從者).
주017)
아븨게:아비[父] + -의게(여격 조사). 아버지에게. 명사 ‘아비’의 말음 ㅣ가 여격 조사 ‘-의게’ 앞에서 탈락하였다.
주018)
모로:달무리[月暈].
주019)
마글:막을[禦]. 방어할.
주020)
모책(謀策):어떤 일을 처리하거나 모면하기 위하여 계책을 꾸밈.
주021)
부의 은 고:부모 자식간의 은혜는 가볍고.
주022)
군신의 의 다:임금과 신하간의 의리는 중(重)하다.
주023)
함성(陷城):성을 함락함.
주024)
관대(冠帶):관복(官服).
주025)
정제(整齊):정돈하여 가지런히 함.
주026)
븍녁흐로:븍녘[北] + -으로(조격 조사). 북녘으로. 북쪽으로. ‘븍녘’의 말음 ㅋ을 ㄱ과 ㅎ으로 재음소화하여 표기하고 있다.
주027)
쳡:첩(妾).
주028)
쟝:쟝슈(將帥) + -ㅣ(주격 조사). 장수(군사를 거느리고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주029)
합장(合葬):남편과 아내를 한 무덤에 묻는 경우를 말함.
주030)
노개방(盧盖邦):동래 교수(東萊敎授)인 노개방은 동래 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밀양에 계시는 노모를 뵈러 갔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동래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동래로 돌아와 향교로 갔으나 이미 선성(先聖)의 위패를 동래성 안의 정원루(靖遠樓)로 옮겼으므로 통곡하고 동래성을 찾아갔다. 성문이 열리자 노개방은 곧장 위패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리고 위패를 모셔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져 왜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오매 노개방은 마침내 정원루에서 유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주031)
교:교슈(敎授) + -ㅣ(주격 조사). 교수가. ‘교수(敎授)’는 조선 시대에 한성(漢城)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鄕校)에 파견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치던 종6품(從六品)의 관직. 사학에는 각각 2인의 교수를 정원으로 두었는데, 모두 13인으로 이루어진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들이 겸직(兼職)하였다.
주032)
위판(位版):위패(位牌. 신주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주033)
뫼와:뫼오-[陪] + -아(연결 어미). 모시어. 이 동사는 15세기에 ‘뫼시다’, ‘뫼다’의 두 형태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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