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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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기(刊記)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42ㄴ

隆慶元年 주001)
융경원년(隆慶元年):
위의 내용은 이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를 간행한 연대와 장소, 간행 주체를 기록한 간기(刊記)이다. 그 중 ‘융경원년’에서 ‘융경’은 명나라 융경제(隆慶帝)의 연호로서, 융경 원년은 서기 1567년, 조선은 선조 즉위년(7월 4일 즉위)에 해당한다. 명나라 제12대 융경제(재위 : 1567년~1572년)의 이름은 주재후(朱載垕)이고, 묘호는 목종(穆宗)이다. 제11대 가정제(嘉靖帝 : 재위 1521년~1567년)의 셋째 아들이며, 제13대 만력제(萬曆帝 : 재위 1572년~1620년)의 아버지이다. 당시 동양에서 중국 황제의 연호는 오늘날의 서기(西紀)와 같이 세계력(世界曆)이라 할 수 있다.
夘丁 주002)
묘정(夘丁):
정묘년(丁卯年). ‘丁夘=丁卯’의 오기. 중국 황제의 연호인 ‘隆慶元年(융경원년)’과 함께 이 책의 간행연도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문헌 자료에는 일반적으로 60갑자에 따라 연도를 기록한 것이 많은데, 사실 언해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것만으로는 막연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원전에는 횡서로 ‘丁夘’(정묘)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문헌의 표기에 대한 당시 독법은 ‘오른쪽[右]→왼쪽[左]’으로 쓰고 읽는 것이 원칙이므로 ‘夘丁’(묘정)이 된다. 이는 60갑자에 없으며 ‘정묘(丁夘=丁卯)’의 오기로 고쳐 이해한다. 여기 ‘夘’ 자는 한국 고전에서 ① ‘卯’와 ② ‘卵’의 이체자(異體字)로 사용되어 왔다. 여기서는 ‘卯’ 자의 이체자로 사용된 것이다. 이 책의 구결문에도 이와 같이 표기하는 원칙을 어긴 것이 적기는 하지만 나타나며, 표기자의 부주의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秋日全羅道淳昌地鷲岩寺 주003)
취암사(鷲岩寺):
간행 장소와 간행 주체 중에서 언해자 정보는 없으나, 간행한 주체(기관)가 ‘취암사’라는 사실은 이것으로써 확인된다. ‘취암사’는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내령리에 있었다는 사찰로, 현재 이 사찰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역대 불교계 중요인물들의 행적을 통해서 규모 있는 사찰이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조선 후기 불서 간행의 업적이 큰 승려 중에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 있다. 그는 남원사람으로 13세에 순창 취암사(鷲岩寺)에서 출가해 16세에 법계를 받았다 한다. 후에 숙종 21년(1695) 500판으로 불교경전을 판각·완성한 것을 계기로, 사방의 학자들이 그를 존경해 “이는 일대(一代) 불법홍통(佛法弘通)의 종사(宗師)”라고 추앙하였으며 “동방제일홍법지공(東方第一弘法之功)”이라고 칭송받았다. 저서로 백암집(栢庵集), 정토보서(淨土寶書), 사경지험기(四經持驗記), 치문경훈주(緇門經訓註) 등을 남겼다.
〈* 이하 시주질(施主秩)이 있으며 90여 명의 인명이 적혀 있다.〉

선조 즉위년(1567, 융경 원년) 정묘년 가을, 전라도 순창 취암사에서 간행함.
Ⓒ 역자 | 정우영 / 2013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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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융경원년(隆慶元年):위의 내용은 이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를 간행한 연대와 장소, 간행 주체를 기록한 간기(刊記)이다. 그 중 ‘융경원년’에서 ‘융경’은 명나라 융경제(隆慶帝)의 연호로서, 융경 원년은 서기 1567년, 조선은 선조 즉위년(7월 4일 즉위)에 해당한다. 명나라 제12대 융경제(재위 : 1567년~1572년)의 이름은 주재후(朱載垕)이고, 묘호는 목종(穆宗)이다. 제11대 가정제(嘉靖帝 : 재위 1521년~1567년)의 셋째 아들이며, 제13대 만력제(萬曆帝 : 재위 1572년~1620년)의 아버지이다. 당시 동양에서 중국 황제의 연호는 오늘날의 서기(西紀)와 같이 세계력(世界曆)이라 할 수 있다.
주002)
묘정(夘丁):정묘년(丁卯年). ‘丁夘=丁卯’의 오기. 중국 황제의 연호인 ‘隆慶元年(융경원년)’과 함께 이 책의 간행연도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문헌 자료에는 일반적으로 60갑자에 따라 연도를 기록한 것이 많은데, 사실 언해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것만으로는 막연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원전에는 횡서로 ‘丁夘’(정묘)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문헌의 표기에 대한 당시 독법은 ‘오른쪽[右]→왼쪽[左]’으로 쓰고 읽는 것이 원칙이므로 ‘夘丁’(묘정)이 된다. 이는 60갑자에 없으며 ‘정묘(丁夘=丁卯)’의 오기로 고쳐 이해한다. 여기 ‘夘’ 자는 한국 고전에서 ① ‘卯’와 ② ‘卵’의 이체자(異體字)로 사용되어 왔다. 여기서는 ‘卯’ 자의 이체자로 사용된 것이다. 이 책의 구결문에도 이와 같이 표기하는 원칙을 어긴 것이 적기는 하지만 나타나며, 표기자의 부주의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주003)
취암사(鷲岩寺):간행 장소와 간행 주체 중에서 언해자 정보는 없으나, 간행한 주체(기관)가 ‘취암사’라는 사실은 이것으로써 확인된다. ‘취암사’는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내령리에 있었다는 사찰로, 현재 이 사찰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역대 불교계 중요인물들의 행적을 통해서 규모 있는 사찰이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조선 후기 불서 간행의 업적이 큰 승려 중에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 있다. 그는 남원사람으로 13세에 순창 취암사(鷲岩寺)에서 출가해 16세에 법계를 받았다 한다. 후에 숙종 21년(1695) 500판으로 불교경전을 판각·완성한 것을 계기로, 사방의 학자들이 그를 존경해 “이는 일대(一代) 불법홍통(佛法弘通)의 종사(宗師)”라고 추앙하였으며 “동방제일홍법지공(東方第一弘法之功)”이라고 칭송받았다. 저서로 백암집(栢庵集), 정토보서(淨土寶書), 사경지험기(四經持驗記), 치문경훈주(緇門經訓註)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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