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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록2] 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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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


見性庵靈應記 주001)
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
김수온(金守溫)의 유저(遺著)인 『식우집(拭疣集)』 권2에 실려 있는 글.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부인 신씨(申氏)가 남편의 영혼의 극락영생을 위해 원당으로 견성암을 중창하면서 사리(舍利)를 얻게 된 영험한 일을 기록한 글이다. 광평의 묘소는 원래 삼성동 성종의 능인 선릉 자리에 있었는데, 선릉을 모시기 위해 대군의 시신을 서울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大母山) 기슭으로 옮겨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능 가까이에 있었던 견성암은 바로 지금의 봉은사(奉恩寺)이다. 광평대군이 죽은 후 이 영응기의 내용처럼 세조 10년(1464) 견성암을 묘사(墓寺)로 삼은 신씨는 세조 12년(1466) 견성암을 중창해 견성사를 세웠다. 하지만 성종 능인 선릉이 들어서면서 광평대군 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니, 연산군 즉위 이후 선릉 안에 위치한 견성사를 철폐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게 되었고, 당시 대비였던 정현왕후가 견성사를 능역 밖으로 옮겨 마침내 봉은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廣平大君 주002)
광평대군(廣平大君):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이고,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로 무안대군 방번(芳蕃)의 양자다. 세종 14년(1432)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세종 18년(1436)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세종 20년(1438) 처음으로 설치된 함경도 종성(鐘城)의 경재소(京在所)를 맡아, 북변의 국방 강화와 풍속 교화에 힘썼다. 부왕 못지않게 학문에 힘써 『효경』, 『소학』, 『좌전』 및 사서삼경 등에 능통하였고,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가 풍미하여 총명 효제하고, 서예와 격구에도 능하였다. 세종 19년(1437) 무안대군에게 입양되어 세종 26년(1444) 20세에 요절하였으나, 그 외아들 영순군(永順君)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다.
迺世宗第五子 而我主上殿下同母弟也 年旣冠 不幸早世 夫人永嘉申氏 哀悼罔極 及旣葬則益無所依歸 就塋域之側 大建伽藍 歲寓僧三四百指 晨夕薦廣平君之靈 以願生於淨土 此見性菴之所由作也 天順八年甲申夏四月十四日乙卯 夫人爲世宗大王 昭憲王后 超昇極樂 先母夫人王氏 廣平大君 皆得涅槃之願 邀苾蒭五十員爲上堂 請圓通智大師爲講主 設法華道場於是寺 于時大檀越 則有若貞懿公主 有若臨瀛大君及夫人 有若永膺大君及夫人 各以輿衛僕從而來詣 其信善四衆 又無慮千有餘人 先是天旱 及開筵作法之夕 雷雨大至 四郊澤洽 祥飆襲人 和氣普暢 至于修會之日 或晴或雨 氣象變遷 皆以爲夫人誠意之感 佛天歆格之應也
Ⓒ 저자 | 김수온 / 1465년 9월 일

견성암 영응기
광평대군은 세종의 다섯째 아드님이고, 우리 주상전하와 같은 어머니의 아우이다. 나이 이미 성년이 되어 불행히 일찍 하세를 하였다. 부인 영가 신씨는 애통하기 그지없어 이미 장례를 치르고 나니 더욱 의지할 바가 없었다. 묘소의 곁에다 크게 절을 짓고 해마다 머무는 승려가 3, 4백 명이 되었다. 조석으로 광평대군의 영가를 천도하여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으니, 이것이 견성암이 지어진 연유이다. 세조 10년(1464) 4월 14일 을묘(乙卯)에 부인이, 세종대왕소헌왕후가 극락세계에 오르시고, 어머니 왕씨(王氏)광평대군이 모두 열반을 얻으시라는 소원으로 비구스님 50인을 초청하여 불당에 오르게 하고, 원통지(圓通智) 대사를 강주로 청하여 이 절에서 법화도량을 베풀었다.
이때의 큰 시주라면 정의공주, 임영대군과 부인, 영응대군과 부인 들이 수레를 끄는 시종들과 왔으니, 신도로서의 사부대중이 무려 1천여 명이었다. 이에 앞서서는 날씨가 가물더니 연회를 열어 법석을 편 저녁에는 번개 비가 크게 내려 사방의 들에 윤기가 흡족하여, 상서로운 바람이 사람을 엄습하며 화창한 기운이 널리 퍼졌다. 법회를 수행하는 날에는 맑았다 흐렸다 하여 기상이 자주 변하니 모두가 부인의 지성이 감동되어 부처님 하늘이 즐거이 납신 감응이라 하더라.

是日午 供養 梵唄旣作 四衆翹誠頭而敬禮 忽於佛前卓上輝光 燦爛四射於外 大衆輟行道 就視之 則舍利已分身五十八粒 香水灌洒 拾而盛之于盤上 玲瓏透徹 光明皎潔 照燭於人 無有其比 在會之人 奔走驚駭 嘆未曾有 懽呼祝釐之聲 振動山谷 或有焚頂燃指 以懺旣往之愆 或有捐衣解佩 以結當來之果 流聞京師 男女老少 來者往者 絡繹於道 數日未已

이날 정오 공양에 범패가 실행되어 사부대중이 정성을 기울여 경례하니, 홀연 부처님 앞 탁자 위에 광채가 휘날리며 찬란하게 사방으로 피어올랐고, 대중들이 길을 비키며 쫓아가 보니 사리가 이미 나뉘어 58잎이었다. 향수를 뿌리고 수습하여 소반에 담으니 영롱한 빛이 투철하고 광명이 밝아 사람들을 비추어 견줄 데가 없었다. 법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날뛰며 놀라 일찍이 없었던 일에 감탄하여 축원하는 소리가 산골까지 진동하였다. 어떤 이는 정수리를 태우고 손가락을 지져 기왕의 허물을 참회하고, 어떤 이는 옷을 풀어헤치고 패물을 풀어 지금의 결과를 바라기도 하였다. 소문이 장안에 퍼져 남녀노소 오고 가는 이가 길에 끊이지 않고 여러 날 계속되었다.
Ⓒ 역자 | 이종찬 / 2013년 10월 20일

及旣罷會 仍坐三七員結夏 且禪且誦 至七月十五日俗號百終 是十方菩薩遊行散處 求訪大德 咨決心疑之約也 大開盂欄盆齋 又於佛卓前舍利又分身干有餘粒 夫人手自封緘 俱迹其異以啓 於分上 上加欣慶 供養於含元殿 還遣本寺安邀

법회가 파함에 미쳐 바로 3·7의 여름 결제로 이어 앉아 참선하거나 독경하거나 하였다. 7월 15일을 통속적으로 백종(百終)이라 하니 이는 시방의 보살들이 노닐어 흩어져 대덕을 방문하여 의문을 푸는 약속을 자문하는 것이다. 크게 우란분재를 여니 또 부처님 탁자 앞에 사리가 약간 잎이 나뉘었다. 부인이 손수 봉함하여 사실을 갖추어 나눈 분신을 올리니 성상께서 기뻐 경사로이 여겨 함원전에서 공양하고 본사로 돌려 평안히 맞이하게 하였다.
Ⓒ 역자 | 이종찬 / 2013년 10월 20일

舍利 或云寶利羅 或云設利羅 皆其梵語 而唐譯之則曰靈骨 又曰靈身 卽佛如來所遺骨分之謂也 如來嘗曰 我有眞心空寂靈知者 是我有眞身廣大圓滿者 是夫法身之體 等於虛空 旣無生滅之相 安有去來之迹哉 比之於月 水淸則月現 月有不明 非月之過 衆生之水濁也 方之於鍾 扣之則鳴 鍾有不鳴 非鍾之咎 衆生之莛小也 今申夫人所以祝釐於兩聖及與追慕於先王先后及與廣平君先母夫人王氏之者 誠之至 故感之深 感之深 故格之易 是蓋不疾而自速 不期而自至 亦佛神通妙用不可思議之道 欲知夫人之誠敬 當觀靈異之降 欲知諸佛之變化 當觀設利之妙 豈至誠之德 足以通天地 而如來空寂之體 充於法界者乎 是不可以無記 創寺始終 與夫前時作法之盛 我主上殿下潛邸時 親幸是寺 敷爲一章奎璧之彩 皎皎然照耀於殿楣之間 又實玆寺千百年無窮之慶也 蒼龍旃蒙噩作律中無射之月 謹記

살피건대, 사리란 혹은 사리라(舍利羅)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설리라(設利羅)라 하기도 하는데 모두 범어이니, 한역하면 영골(靈骨), 또는 영신(靈身)이라 하여 곧 부처 여래가 남기신 뼈를 이르는 것이다. 여래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나는 참 마음 비고 고요하고 영험의 앎이 있으니, 이것이 나에게 있는 참 몸이 광대하고 원만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법신의 몸체가 허공과 같아서 이미 나고 죽음의 모습이 없으니, 어찌 가고 오는 자취가 있겠는가? 달에다 견주면, 물이 맑으면 달이 드러나는데 달이 밝지 않음은 달의 잘못이 아니라 중생의 물이 흐린 것이다. 종에다 견주면, 치면 울리는데 종이 울림이 없다면 종의 잘못이 아니라 중생의 종채가 적기 때문이다.
지금 신씨 부인이 두 성상에게 축원하며 선왕, 선왕후광평대군과 어머니 왕씨를 추모하는 정성이 지극하기에, 감응이 깊고 깊기 때문에 쉽게 오셨으니, 이는 대체로 빠르지 않아도 빠르고, 기약이 없어도 스스로 이르니, 역시 부처님의 신통 묘용함이 불가사의한 도리이다. 부인의 정성 공경을 알려고 한다면 의당히 신령 경이로운 강림을 볼 것이고, 모든 부처님의 변화를 보려 하면 의당히 사리의 오묘함을 보아야 하니, 어쩌면 지극한 정성의 덕이 천지를 감동하기에 알맞아 여래의 공적한 법체가 법계에 충만한 것이었던가? 이것이 바로 이 기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절을 지은 전말과 지난 날 법회를 열었던 성대함은 우리 주상전하가 동궁시절 이 절에 친히 오시어 쓰신 한 편의 시가 전각 기둥 사이에 밝히 빛나고 있음이, 또 실로 이 절 백년 무궁한 경사이리라.
세조 11년(을유년, 1465) 9월 삼가 쓰다.
Ⓒ 역자 | 이종찬 / 2013년 10월 20일

주석
주001)
견성암영응기(見性庵靈應記):김수온(金守溫)의 유저(遺著)인 『식우집(拭疣集)』 권2에 실려 있는 글.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부인 신씨(申氏)가 남편의 영혼의 극락영생을 위해 원당으로 견성암을 중창하면서 사리(舍利)를 얻게 된 영험한 일을 기록한 글이다. 광평의 묘소는 원래 삼성동 성종의 능인 선릉 자리에 있었는데, 선릉을 모시기 위해 대군의 시신을 서울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大母山) 기슭으로 옮겨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능 가까이에 있었던 견성암은 바로 지금의 봉은사(奉恩寺)이다. 광평대군이 죽은 후 이 영응기의 내용처럼 세조 10년(1464) 견성암을 묘사(墓寺)로 삼은 신씨는 세조 12년(1466) 견성암을 중창해 견성사를 세웠다. 하지만 성종 능인 선릉이 들어서면서 광평대군 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니, 연산군 즉위 이후 선릉 안에 위치한 견성사를 철폐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게 되었고, 당시 대비였던 정현왕후가 견성사를 능역 밖으로 옮겨 마침내 봉은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주002)
광평대군(廣平大君):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이고,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로 무안대군 방번(芳蕃)의 양자다. 세종 14년(1432)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세종 18년(1436)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세종 20년(1438) 처음으로 설치된 함경도 종성(鐘城)의 경재소(京在所)를 맡아, 북변의 국방 강화와 풍속 교화에 힘썼다. 부왕 못지않게 학문에 힘써 『효경』, 『소학』, 『좌전』 및 사서삼경 등에 능통하였고,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가 풍미하여 총명 효제하고, 서예와 격구에도 능하였다. 세종 19년(1437) 무안대군에게 입양되어 세종 26년(1444) 20세에 요절하였으나, 그 외아들 영순군(永順君)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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