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사리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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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재계를 시작


乃扵 주001)
내어(乃扵):
이에 ~에. ‘어(扵)’는 ‘어(於)’의 고자로서 어조사이다.
十一月 二十八日庚戌 闕內 주002)
궐내(闕內):
대궐 안. 궁전 안.
齋戒 주003)
재계(齋戒):
범어 uposadha. 넓은 의미로는 심신을 맑게 하여 몸과 마음의 게으름을 삼가 예방하는 것. 범어를 음역하여 오포사타(烏逋沙他), 포살타파(布薩陀婆)라 하고, 약칭하여 포살(布薩)이라 한다. 원래 옛 인도의 제법(祭法)으로 매양 보름날에 일차 집회를 행하여 각자가 죄과를 참회하고 심신을 청정하게 한다. 이날에 제주는 단식을 병행하며 청정의 계율을 지킨다.
十二月 初二日 甲寅 百官禁刑戮 주004)
형륙(刑戮):
범죄의 형벌이나 중형의 살인형.
屠殺 주005)
도살(屠殺):
짐승을 죽임. 식용으로 짐승을 잡음.
是日 信眉 주006)
신미(信眉):
조선 전기의 승려. 호가 혜각존자(慧覺尊者). 김수온(金守溫)의 형. 도가 높아 세조(世祖)가 스승의 대접을 했다. 간경도감의 언해 사업에 많은 공헌이 있음.
判禪宗事 주007)
판선종사(判禪宗事):
선종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의 직책.
坦珠 判敎宗事 주008)
판교종사(判敎宗事):
교종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의 직책.
希忍 禪德 주009)
선덕(禪德):
훌륭한 선 수행자. 또는 선승(禪僧)에 대한 경칭.
洪濬大慈庵 주010)
대자암(大慈庵):
절 이름.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 대자리 대자산에 있는 절. 조선 태종 18년(1418)에 넷째 아들의 묘를 위해 지은 절.
住持 주011)
주지(住持):
절에 살며 법을 호지(護持)한다는 의미로 하나의 절을 주관하는 승려.
智海 禪德 臣信能性均 前開慶寺住持 臣敬田

사리영응기:11ㄱ

開慶寺 주012)
개경사(開慶寺):
절 이름.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檢巖山)에 있다.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乾元陵)의 재궁(齋宮)이 있었다.
住持 臣守眉 津寬寺 주013)
진관사(津寬寺):
절 이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리에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가 고려 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住持 臣心明 大禪師 주014)
대선사(大禪師):
선종(禪宗)의 가장 높은 법계.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승려로 법랍이 20하(夏) 이상이 된 승려로 승과에 합격하면 받는 최고의 법계.
信柔 入選 臣性寒 禪德 臣法藏 大禪師 臣智牛 禪德 臣道膺 中德 주015)
중덕(中德):
승려 법계의 하나. 조선시대 승과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 되고 대선에서 1급이 오르면 중덕이 된다.
海祐 禪德 臣義全學悅 前僧伽寺住持 臣信敬 中德 臣雪徽 大選 주016)
대선(大選):
승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받는 법계(法階).
義琳 禪德 臣敬義尙濟仁丕海祥一中 大選 臣道傳 禪德 臣信觀洪戒省丕學觀智禪義玄洪正惠哲一誾景行祖明普門

사리영응기:11ㄴ

尙惠性宗佛川克虛卓峰七淨義倫法融信正水精克馴 臣省正等 五十一比丘 주017)
비구(比丘):
범어 bhiksu. 필추(苾芻), 필추(苾蒭). 비호(比呼). ‘구걸하는 선비[乞士], 번뇌를 깨치다. 기근을 없애다’의 의미. 속가를 벗어나 도를 터득하고 구족계를 받은 남자. 비구라는 말 뜻에 5가지가 있으니, (1)걸서(乞士). (2)파번뇌(破煩惱). (3)출가인(出家人). (4)정지계(淨持戒). (5)포마(怖魔)이다.
會扵新寺 命 주018)
유(瑈):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이름. 뒷날의 세조(世祖).
주019)
용(瑢):
1418~1453. 안평대군의 이름.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이름은 용(瑢), 자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대군은 왕자의 봉호로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임.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세종 10년(1428) 안평대군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좌부대언(左副代言)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 세종 12년(1430)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세종 20년(1438) 함경도에 진(鎭)을 설정하자, 왕자들과 함께 북변의 경계 임무를 맡아 야인(野人)들을 토벌하였다. 차츰 조정에서 배후의 실력자로 등장, 문신들을 포섭하여 권신 황보인(黃甫仁), 김종서(金宗瑞)와 제휴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標政事)를 장악,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혔다. 1452년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외교권을 빼앗겼으나, 그 동안 이징옥(李澄玉)을 시켜 경성(鏡城)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는 한 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건립하여 장사들을 모아 무력을 양성하였으나, 귀국한 수양대군에 의해 황표정사가 폐지되어 실권을 상실했다. 이듬해 9월 다시 황표정사를 실시케 하는 등 실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다음달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후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洞)으로 옮겨 사사되었다. 시문에 뛰어났고 당대의 명필로 문종(文宗) 2년(1452)의 경자자(庚子字)를 개주(改鑄)한 임자자(壬子字)의 자모(字母)를 썼다.
往會 與 주020)
분(苯):
정분(鄭苯). ?~1454. 자는 자의(子畏), 호는 면재(勉齋), 애일당(愛日堂), 본관은 진주이다. 판중추부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 태종 16년(1416년) 정시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세종 3년(1421)에 이조좌랑(吏曹佐郞), 1425년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세종 10년(1428)에 사인(舍人)으로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을 구호했다. 세종 12년(1430)에 집의(執義)로 성개(成槩)의 노비 사건을 논하지 않아 유배되었다. 세종 14년(1432)에 풀려나 우승지(右承旨),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28년(1447)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을 감독했다. 문종 1년(1451)에 좌찬성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겸인하고 다음해 문종이 승하할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어린 세자(단종)의 보호를 부탁받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낙안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뒤에 신원(伸寃)되어 장흥(長興)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주021)
신(伸):
민신(閔伸). ?~1453. 호 둔암(遯庵), 본관 여흥. 문종 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부사로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단종(端宗) 1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현릉(顯陵) 비역(碑役)을 감독하고 있던 중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게 김종서(金宗瑞)의 일파라 하여 참살을 당하였다.
주022)
연(堧):
박연(朴堧). 1378~1458. 음악가.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본관 밀양.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세종에 의해 악학별좌(樂學別坐)가 되어 악기의 조율과 악보의 찬집을 했다. 조정에서 속악을 금하고 아악을 정립하였다. 중추원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아들이 처형되었으나, 본인은 3조(朝)에 봉사한 공으로 사면되었다.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우리나라 3대악성이라 한다.
判內侍府事 臣巖自治 行左承直安璐 行同判內侍府事印平 都承旨李思哲 주023)
이사철(李思哲):
1405~1456. 자 성지. 본관 전주. 단종 즉위년(1452) 사은사인 수양대군의 부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정난공신 1등이 되었다.
行同知內侍府事 臣李貴畇 少尹鄭孝康 行內侍府謁者李芸 大海 命敏 注書成任 주024)
성임(成任):
1421~1484. 자 중경(重卿). 호 일재(逸齋). 본관 창녕(昌寧).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고 형조, 이조, 공조의 판사를 역임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찬술에 참여했다.
及臣守溫 주025)
수온(守溫):
김수온(金守溫). 1409~1481. 자는 문량(文量), 호는 괴애(乖崖), 식우(拭疣)이다. 본관은 영동, 승려인 신미(信眉)의 아우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세종의 특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승정원교리로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을 3년에 걸쳐 편찬하였고, 다음 해에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였다. 세조 3년(1457)에 문과중시에 합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정조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한성부윤, 공조판서를 거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 4등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을 나란히 하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도왔다. 불교에 조예가 깊어 세종과 세조의 불교 신봉에 일조하여 불경의 국역에도 공이 컸다. 유저로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아버지의 불충스러웠던 일로 물의가 되기도 하였고, 형이 이름난 승려로 왕족과 가깝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본 『사리영응기』를 쓰게 되는 것도 이러한 불교적 조예를 가질 수 있었던 가계와 주변의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等 布置

사리영응기:12ㄱ

諸務

이에 11월 28일 경술일에 대궐 안에서 재계를 시작하고, 12월 초2일 갑인일에 모든 관원에게 형벌, 살인, 도살을 금지시키었다. 이날에, 신미(信眉) 및 판선종사 신 탄주(坦珠), 판교종사 신 희인(希忍), 선덕(禪德)홍준(洪濬), 전 대자암주지 신 지해(智海), 선덕 신 신능(信能), 신 성균(性均), 전 개경사주지 신 경전(敬田), 개경사주지 신 수미(守眉), 진관사주지 신 심명(心明), 대선사 신 신유(信柔), 입선 신 성한(性寒), 선덕 신 법장(法藏), 대선사 신 지우(智牛), 선덕 신 도응(道膺), 중덕(中德)해우(海祐), 선덕 신 의전(義全), 신 학열(學悅), 전 승가사주지 신 신경(信敬), 중덕 신 설휘(雪徽), 대선(大選)의림(義琳), 선덕 신 경의(敬義), 신 상제(尙濟), 신 인비(仁丕), 신 해상(海祥), 신 일중(一中), 대선 신 도전(道傳), 선덕 신 신관(信觀), 신 홍계(洪戒), 신 성비(省丕), 신 학관(學觀), 신 지선(智禪), 신 의현(義玄), 신 홍정(洪正), 신 혜철(惠哲), 신 일은(一誾), 신 경행(景行), 신 조명(祖明), 신 보문(普門), 신 상혜(尙惠), 신 성종(性宗), 신 불천(佛川), 신 극허(克虛), 신 탁봉(卓峰), 신 칠정(七淨), 신 의륜(義倫), 신 법융(法融), 신 신정(信正), 신 수정(水精), 신 극순(克馴), 신 성정(省正) 등 51비구가 새 절에 모였는데, 이유, 이용에게 명하여, 가서 모여 정분(鄭苯), 민신(閔伸), 박연(朴堧), 판내시부사 신 엄자치(巖自治), 최습(崔濕), 행좌승직 신 안로(安璐), 한홍(韓洪), 행동판내시부사 신 인평(印平), 도승지 신 이사철(李思哲), 행동지내시부사 신 이귀균(李貴畇), 소윤 신 정효강(鄭孝康), 임동(林童), 행내시부알자 신 이운(李芸), 권환(權懽), 최읍(崔浥), 변대해(邊大海), 이명민(李命敏), 주서 신 성임(成任) 및 신 김수온(金守溫) 등과 함께 여러 업무에 배치하게 하시다.
* 이밖의 인명(人名)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어 생략한다.
Ⓒ 역자 | 이종찬 / 2013년 10월 20일

원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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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
내어(乃扵):이에 ~에. ‘어(扵)’는 ‘어(於)’의 고자로서 어조사이다.
주002)
궐내(闕內):대궐 안. 궁전 안.
주003)
재계(齋戒):범어 uposadha. 넓은 의미로는 심신을 맑게 하여 몸과 마음의 게으름을 삼가 예방하는 것. 범어를 음역하여 오포사타(烏逋沙他), 포살타파(布薩陀婆)라 하고, 약칭하여 포살(布薩)이라 한다. 원래 옛 인도의 제법(祭法)으로 매양 보름날에 일차 집회를 행하여 각자가 죄과를 참회하고 심신을 청정하게 한다. 이날에 제주는 단식을 병행하며 청정의 계율을 지킨다.
주004)
형륙(刑戮):범죄의 형벌이나 중형의 살인형.
주005)
도살(屠殺):짐승을 죽임. 식용으로 짐승을 잡음.
주006)
신미(信眉):조선 전기의 승려. 호가 혜각존자(慧覺尊者). 김수온(金守溫)의 형. 도가 높아 세조(世祖)가 스승의 대접을 했다. 간경도감의 언해 사업에 많은 공헌이 있음.
주007)
판선종사(判禪宗事):선종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의 직책.
주008)
판교종사(判敎宗事):교종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의 직책.
주009)
선덕(禪德):훌륭한 선 수행자. 또는 선승(禪僧)에 대한 경칭.
주010)
대자암(大慈庵):절 이름.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 대자리 대자산에 있는 절. 조선 태종 18년(1418)에 넷째 아들의 묘를 위해 지은 절.
주011)
주지(住持):절에 살며 법을 호지(護持)한다는 의미로 하나의 절을 주관하는 승려.
주012)
개경사(開慶寺):절 이름.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檢巖山)에 있다.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乾元陵)의 재궁(齋宮)이 있었다.
주013)
진관사(津寬寺):절 이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리에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가 고려 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주014)
대선사(大禪師):선종(禪宗)의 가장 높은 법계.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승려로 법랍이 20하(夏) 이상이 된 승려로 승과에 합격하면 받는 최고의 법계.
주015)
중덕(中德):승려 법계의 하나. 조선시대 승과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 되고 대선에서 1급이 오르면 중덕이 된다.
주016)
대선(大選):승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받는 법계(法階).
주017)
비구(比丘):범어 bhiksu. 필추(苾芻), 필추(苾蒭). 비호(比呼). ‘구걸하는 선비[乞士], 번뇌를 깨치다. 기근을 없애다’의 의미. 속가를 벗어나 도를 터득하고 구족계를 받은 남자. 비구라는 말 뜻에 5가지가 있으니, (1)걸서(乞士). (2)파번뇌(破煩惱). (3)출가인(出家人). (4)정지계(淨持戒). (5)포마(怖魔)이다.
주018)
유(瑈):수양대군(首陽大君)의 이름. 뒷날의 세조(世祖).
주019)
용(瑢):1418~1453. 안평대군의 이름.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이름은 용(瑢), 자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대군은 왕자의 봉호로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임.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세종 10년(1428) 안평대군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좌부대언(左副代言)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 세종 12년(1430)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세종 20년(1438) 함경도에 진(鎭)을 설정하자, 왕자들과 함께 북변의 경계 임무를 맡아 야인(野人)들을 토벌하였다. 차츰 조정에서 배후의 실력자로 등장, 문신들을 포섭하여 권신 황보인(黃甫仁), 김종서(金宗瑞)와 제휴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標政事)를 장악,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혔다. 1452년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외교권을 빼앗겼으나, 그 동안 이징옥(李澄玉)을 시켜 경성(鏡城)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는 한 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건립하여 장사들을 모아 무력을 양성하였으나, 귀국한 수양대군에 의해 황표정사가 폐지되어 실권을 상실했다. 이듬해 9월 다시 황표정사를 실시케 하는 등 실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다음달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후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洞)으로 옮겨 사사되었다. 시문에 뛰어났고 당대의 명필로 문종(文宗) 2년(1452)의 경자자(庚子字)를 개주(改鑄)한 임자자(壬子字)의 자모(字母)를 썼다.
주020)
분(苯):정분(鄭苯). ?~1454. 자는 자의(子畏), 호는 면재(勉齋), 애일당(愛日堂), 본관은 진주이다. 판중추부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 태종 16년(1416년) 정시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세종 3년(1421)에 이조좌랑(吏曹佐郞), 1425년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세종 10년(1428)에 사인(舍人)으로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을 구호했다. 세종 12년(1430)에 집의(執義)로 성개(成槩)의 노비 사건을 논하지 않아 유배되었다. 세종 14년(1432)에 풀려나 우승지(右承旨),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28년(1447)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을 감독했다. 문종 1년(1451)에 좌찬성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겸인하고 다음해 문종이 승하할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어린 세자(단종)의 보호를 부탁받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낙안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뒤에 신원(伸寃)되어 장흥(長興)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주021)
신(伸):민신(閔伸). ?~1453. 호 둔암(遯庵), 본관 여흥. 문종 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부사로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단종(端宗) 1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현릉(顯陵) 비역(碑役)을 감독하고 있던 중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게 김종서(金宗瑞)의 일파라 하여 참살을 당하였다.
주022)
연(堧):박연(朴堧). 1378~1458. 음악가.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본관 밀양.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세종에 의해 악학별좌(樂學別坐)가 되어 악기의 조율과 악보의 찬집을 했다. 조정에서 속악을 금하고 아악을 정립하였다. 중추원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아들이 처형되었으나, 본인은 3조(朝)에 봉사한 공으로 사면되었다.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우리나라 3대악성이라 한다.
주023)
이사철(李思哲):1405~1456. 자 성지. 본관 전주. 단종 즉위년(1452) 사은사인 수양대군의 부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정난공신 1등이 되었다.
주024)
성임(成任):1421~1484. 자 중경(重卿). 호 일재(逸齋). 본관 창녕(昌寧).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고 형조, 이조, 공조의 판사를 역임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찬술에 참여했다.
주025)
수온(守溫):김수온(金守溫). 1409~1481. 자는 문량(文量), 호는 괴애(乖崖), 식우(拭疣)이다. 본관은 영동, 승려인 신미(信眉)의 아우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세종의 특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승정원교리로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을 3년에 걸쳐 편찬하였고, 다음 해에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였다. 세조 3년(1457)에 문과중시에 합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정조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한성부윤, 공조판서를 거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 4등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을 나란히 하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도왔다. 불교에 조예가 깊어 세종과 세조의 불교 신봉에 일조하여 불경의 국역에도 공이 컸다. 유저로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아버지의 불충스러웠던 일로 물의가 되기도 하였고, 형이 이름난 승려로 왕족과 가깝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본 『사리영응기』를 쓰게 되는 것도 이러한 불교적 조예를 가질 수 있었던 가계와 주변의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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