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화포식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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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자총통(月字銃筒)


月월字銃츙筒통애 小쇼小쇼藥약線션半반半반條됴이오 火화藥약五오分분이오 鐵텰丸환 一일箇개니 鐵텰欠흠子로 執집放방라
Ⓒ 구결 | 이서 / 1635년(인조 13)

화포식언해 30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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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자총통(月字銃筒):
세총통(細銃筒)이라고도 함. 그림을 보면 마치 달 월(月) 자처럼 보인다. 조선시대의 총통은 대부분 땅에 설치한 상태에서 사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세총통은 길이와 구경이 작아 다른 총통과 달리 땅에 거치하지 않고 손으로 들고 사격할 수 있는 휴대총통이란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세총통은 전체 길이가 14cm, 구경이 9밀리에 지나지 않아 국내에서 만들어진 총통류 가운데서 가장 작은 총통이다. 세총통을 사격할 경우, 손으로 직접 잡지 않고 철흠자(鐵欠子)라고 불리는 쇠 집게를 이용한다.

〈월자총통-쇠집게〉


세총통은 휴대방식이나 크기로 본다면 일종의 원시적인 권총이다. 조선 중기에는 세총통을 흔히 월자총통이라고 불렀다. 세총통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절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개발한 화약무기 가운데의 하나다. 개발 초기에는 적진에 적 몰래 들어가는 정찰병이 쉽게 휴대하는 무기를 목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개발 후에는 기병의 보조무기로 사용됐으며 여자나 어린이도 사용할 수 있는 간편한 무기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9년(1438) 6월조를 보면, “정찰병은 비록 크기가 작은 총통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갑자기 쉽게 쏘지 못하니 정찰병으로 따로 총통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으로 시험하니 휴대하고 쏘기에 모두 편리했다. 비록 정찰병이 쓰기에 적당하지 못할지라도 적과 싸울 때에는 말 위에서 많이 가지고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리하다. 전황이 위급할 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총통·철흠자의 설계도와 제원은 성종 5년(1474) 만들어진 책인 〈병기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체적인 사격방식에 대한 설명은 『화포식언해』에 남아 있다. 세총통에서는 소형 화살과 철환을 모두 발사할 수 있다. 화살을 사용할 경우 전체 길이 19.68cm의 차세전(次細箭)을 이용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화살 대신 철환을 주로 사용했다. 현재 세총통 실물의 유물은 1965년 한 수집가가 육군박물관에 기증한 것이 유일하다. 이 세총통은 조선 전기 화약무기의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화기발달사 규명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돼 1986년 보물 854호로 지정됐다. 쇠집게인 철흠자의 실물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병기도설〉의 설계도를 기초로 채연석 전 국립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이 1980년 재구성하여 복원한 바 있다. 채원장은 세총통에 대해 “집게를 활용해 총을 집어 사용한 것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애 小쇼小쇼藥약線션이 半반半반 오리오 火화藥약이 다 分분이오 鐵텰丸환이  낫이니 쇠집게로 잡고 노흐라
Ⓒ 언해 | 이서 / 1635년(인조 13)

월자총통에는 작은 심지는 반의 반 오리요, 화약은 다섯 푼이요, 쇠탄알 한 개이니 쇠집게로 잡고 쏘아라.
Ⓒ 역자 | 정호완 / 2013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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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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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자총통(月字銃筒):세총통(細銃筒)이라고도 함. 그림을 보면 마치 달 월(月) 자처럼 보인다. 조선시대의 총통은 대부분 땅에 설치한 상태에서 사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세총통은 길이와 구경이 작아 다른 총통과 달리 땅에 거치하지 않고 손으로 들고 사격할 수 있는 휴대총통이란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세총통은 전체 길이가 14cm, 구경이 9밀리에 지나지 않아 국내에서 만들어진 총통류 가운데서 가장 작은 총통이다. 세총통을 사격할 경우, 손으로 직접 잡지 않고 철흠자(鐵欠子)라고 불리는 쇠 집게를 이용한다.
〈월자총통-쇠집게〉
세총통은 휴대방식이나 크기로 본다면 일종의 원시적인 권총이다. 조선 중기에는 세총통을 흔히 월자총통이라고 불렀다. 세총통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절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개발한 화약무기 가운데의 하나다. 개발 초기에는 적진에 적 몰래 들어가는 정찰병이 쉽게 휴대하는 무기를 목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개발 후에는 기병의 보조무기로 사용됐으며 여자나 어린이도 사용할 수 있는 간편한 무기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9년(1438) 6월조를 보면, “정찰병은 비록 크기가 작은 총통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갑자기 쉽게 쏘지 못하니 정찰병으로 따로 총통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으로 시험하니 휴대하고 쏘기에 모두 편리했다. 비록 정찰병이 쓰기에 적당하지 못할지라도 적과 싸울 때에는 말 위에서 많이 가지고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리하다. 전황이 위급할 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총통·철흠자의 설계도와 제원은 성종 5년(1474) 만들어진 책인 〈병기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체적인 사격방식에 대한 설명은 『화포식언해』에 남아 있다. 세총통에서는 소형 화살과 철환을 모두 발사할 수 있다. 화살을 사용할 경우 전체 길이 19.68cm의 차세전(次細箭)을 이용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화살 대신 철환을 주로 사용했다. 현재 세총통 실물의 유물은 1965년 한 수집가가 육군박물관에 기증한 것이 유일하다. 이 세총통은 조선 전기 화약무기의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화기발달사 규명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돼 1986년 보물 854호로 지정됐다. 쇠집게인 철흠자의 실물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병기도설〉의 설계도를 기초로 채연석 전 국립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이 1980년 재구성하여 복원한 바 있다. 채원장은 세총통에 대해 “집게를 활용해 총을 집어 사용한 것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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