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완구, 중완구에 비하여 너무 적어 쓸모가 없으니 중완구와 소완구 중간 정도로 만들기를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면, 전략 개념에 부응코자 한 흔적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 뒤 성종 5년(1474)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군례조(軍禮條)에 따르면, 총통 완구를 맨 머리에 싣고 그 제원 설명에서 포는 돌을 사용하여 만들고, 둘레는 3척(尺) 3촌(寸) 7분(分)이며, 무게는 74근(斤)인데 완(碗)은 포석(砲石)을 받는다. 이는 바닥이 없고 구리로 만든다. 이때에는 포석을 사용하였지만 선조에 이르러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만든 이후로부터는 단석과 더불어 쓰게 되었다. 이는 『화포식언해』의 내용과 순조 때 간행된 『융원필비(戎垣必備)』의 해설을 비교하여 그의 발전상을 살펴 엿볼 수 있다.
소완구(小碗口):대완구, 중완구에 비하여 너무 적어 쓸모가 없으니 중완구와 소완구 중간 정도로 만들기를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면, 전략 개념에 부응코자 한 흔적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 뒤 성종 5년(1474)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군례조(軍禮條)에 따르면, 총통 완구를 맨 머리에 싣고 그 제원 설명에서 포는 돌을 사용하여 만들고, 둘레는 3척(尺) 3촌(寸) 7분(分)이며, 무게는 74근(斤)인데 완(碗)은 포석(砲石)을 받는다. 이는 바닥이 없고 구리로 만든다. 이때에는 포석을 사용하였지만 선조에 이르러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만든 이후로부터는 단석과 더불어 쓰게 되었다. 이는 『화포식언해』의 내용과 순조 때 간행된 『융원필비(戎垣必備)』의 해설을 비교하여 그의 발전상을 살펴 엿볼 수 있다.